사령왕 카르나크
#1화. 0. 프롤로그
나는 죽음을 지배하는 자였다.
100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저딴 거 지배하면 안 된다는 것을.
***
웅장하고 화려한 궁성이었다.
끝없이 도열한 황금 기둥들과 그 아래 펼쳐진 대리석의 홀, 벽마다 걸려 있는 우아한 그림과 장식, 정교하게 세공된 조각상까지.
그러나 이곳엔 응당 있어야 할 사람들이 없었다.
왕도, 왕비도, 왕자도, 공주도, 심지어 신하나 시종 1명조차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은 있다. 신하와 시종도 있다.
그저, 그들이 사람이 아니었을 뿐.
흐릿한 달빛이 비추는 커다란 황금 왕좌.
그곳에 검은 로브를 걸친 해골 하나가 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한마디 툭 내뱉고 깊은 한숨.
"하아,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허무한 미소를 짓는다.
인간의 그것이 아닌 해골의 미소.
"아니, 왜 그랬는지 모르는 건 아니야. 어쩔 수 없긴 했지."
듣는 이 하나 없건만 연신 혼잣말을 이어 가며 해골, 사령왕 카르나크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들어 보았다.
"에휴...."
앙상한 뼈다귀 위로 푸른 기운이 맺혀 인간의 손 형상을 갖춘다.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떨쳐 울릴 권능이 담긴 손.
두개골 위로도 인간의 형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창백한 푸른 인간의 얼굴이 탄식을 내뱉는다.
"이런 몸이 된 지도 벌써 70년째인가? 와, 시간 진짜 빨리 가네."
왕좌에 몸을 기댄 채 사령왕 카르나크는 허무한 미소를 이었다.
"더럽게 느리게 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야."
***
카르나크가 금기 중의 금기인 사령술을 처음 접한 것은 대략 1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몰락한 귀족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괄시받으며 자란 그였다.
살아남기 위해 금기에 손을 뻗었고, 운이 따라 힘을 얻었다. 행운인지 불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대가로 인간의 길을 벗어났다.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과 맞서 싸우고, 때론 먼저 치고,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또 죽이며 사악한 사령술사의 삶을 살아갔다.
악마가 된 그를 세상은 더더욱 증오했다.
중앙의 라케아니아 제국, 서쪽의 7왕국 연합과 동쪽의 베루스 연방, 위대한 일곱 여신을 섬기는 7여신교까지.
대륙 전체가 그의 적이었다.
온 세상을 상대하면서도 카르나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강대한 죽음의 권능을 이용해 덤벼 오는 적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수하로 삼아 더더욱 권세를 넓혔다.
전쟁은 점점 커져만 갔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세계를 걷는 생지옥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어느덧 그는 사령왕이라 불리는 존재가 되었다. 인류가 용납할 수 없는 절대악이었다.
마침내 인류의 마지막 보루마저 무너졌다.
인세의 최강자인 4대 무왕(武王)과 그 권세가 하늘에 닿았다는 3인의 대마법사마저 패배해 사령왕의 권속이 된 것이다.
결국 세상의 수호자, 용황제 그라테리아까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과연 용황제는 강했다.
금기란 금기는 모조리 저지른 카르나크조차도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잘나신 용족 중에서도 제일 잘나신 용황제를 상대로, 편법만 죽어라 쓰던 하찮은 인간이 뭘 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마지막까지 미뤄 왔던 최악의 비술을 시행했다.
최강의 언데드인 데스 나이트나 아크 리치조차 능가하는 궁극의 초월체 '아스트라 슈나프'로 스스로를 바꾼 것이다.
그렇게 카르나크는 완벽하게 인간을 버렸다.
잃은 것이 큰 만큼 대가도 컸다.
사흘의 전투 끝에 그라테리아는 용황제의 격을 잃었다. 대신 사룡 그라테리아가 되어 사령왕의 충실한 노예가 되었다.
하급 귀족 출신이란 것 외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던 카르나크.
영웅의 혈통이나 신의 힘을 타고나지도 않은 한낱 인간이, 특별한 영웅과 신의 힘을 이겨 내고 지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세상은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되었다.
"그래, 다 좋아. 해피엔딩이지. 다 좋은데...."
재차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뼈만 남은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다고?"
금은보화, 우아한 미녀, 미주 가효,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치와 쾌락.
전부 의미가 없어졌다.
죽어 버린 이 육체엔 인간적인 감각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니까.
"느끼고 싶어...."
맛을 느끼고 싶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가볍게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느끼고 싶다.
아니, 차라리 고통이라도 느꼈으면 좋겠다.
칼날이 파고들어 끔찍한 통증을 안겨 주는 연약한 피부조차도 이 무미건조한 뼈다귀보단 나으리.
"...에이, 솔직히 그건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고통보단 무감각이 낫지. 뭔 곱게 자란 귀족의 헛소리 같은 걸 하고 있냐, 나."
재빨리 말을 바꾸며 카르나크는 피식 웃었다.
어쨌거나 감각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이게 참, 있을 땐 별로 소중한 줄 모르고 지나쳤는데 막상 잃고 나니 진짜 몸서리쳐지게 아쉽다.
"이래서 남들이 하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어쩐지 다들 사령술을 금단이니 금기니 하면서 멸시하더라니."
사는 즐거움이 없다.
삶을 이어 갈 원동력이 없다.
그렇다고 자살을 하자니 그건 또 싫다.
"죽는 건 여전히 무서워."
무감각해지면 죽음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살아서 즐겁고 싶은 것이지 죽어서 괴로움을 잊고 싶은 건 아니다.
그저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거라곤 저것뿐인가?"
카르나크는 힐끔 왕좌 뒤를 돌아보았다.
우뚝 선 커다란 핏빛 비석이 기이한 빛을 명멸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빛냈다.
"저게 성공한다면...."
정확히 말하면 눈을 빛낸 건 아니다. 이미 눈깔 따윈 썩어 사라진 지 오래니까.
그냥 뻥 뚫린 해골 구멍 사이로 영기로 만든 눈동자가 번뜩였단 소리지.
"...희망이 있겠지."
***
햇살이 비치지 않아 음침한 어둠이 깔린 긴 회랑.
신장이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기사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얼핏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아니다.
두꺼운 근육을 덮은 창백한 피부에 온기 따윈 없다. 호흡 또한 불필요하며 눈조차 깜박이지 않는다.
그가 산 자가 아님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죽은 자들의 제국, 네크로피아의 2인자.
4인의 무왕 중 무려 3인을 꺾고 지상 최강의 자리에 올라선 무인이자 죽음의 군단 총사령관.
카르나크가 아직 인간이었던, 심지어 사령술을 접하기도 전부터 충실한 시종이었던 사령왕의 최고 심복.
데스 나이트 로드, 바로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건장한, 그러나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말라 보이는 또 1명의 데스 나이트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스가 물었다.
"그 양반이 뜬금없이 왜 날 불렀대요, 레번 경?"
데스 나이트 레번이 정중히 대꾸했다.
"그분의 깊으신 뜻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로드 바로스."
바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비슷한 대사로군요. 역시 당신은 살아 있었을 때가 좋았는데."
과거 4인의 무왕 중 1인이자 모든 검사들의 정점이었던 레번 스트라우스는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하긴, 이미 예전의 당신이 아니니 어쩔 수 없겠죠."
바로스는 레번을 뒤로한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의 발길이 거대한 홀의 입구에 닿았다.
홀 안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으며 바로스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
"모든 죽은 자들의 군주, 생과 사의 지배자, 대륙의 정복자, 위대하신 사령왕 카르나크 폐하를 뵈옵...."
왕좌의 해골이 바로 손사래를 쳤다.
"아, 됐어."
"엥? 예의 차리지 마요?"
의아해하며 바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카르나크가 턱을 괸 채 투덜댔다.
"차려서 뭐 하게? 안 차리면 누가 나 우습게 본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자는 예의범절에 둔감한 법이다.
굳이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석에서 예절을 주입시켜 줄 수 있거든.
그럼에도 바로스가 격식을 차린 이유는, 아무리 카르나크에게 복종하는 네크로피아의 언데드들이라도 어느 정도는 생전의 관습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즉석에서 예절을 주입시켜 줄 힘이 있다곤 해도 아예 그럴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 이상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더 이상 언데드들을 지배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다.
"어, 설마?"
바로스는 평소의, 그러니까 인간이던 시절부터 카르나크를 불러 왔던 오랜 호칭을 꺼내 들었다.
"성공한 겁니까, 도련님?"
카르나크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된 것 같다."
"맙소사."
바로스의 시선이 왕좌 뒤쪽으로 옮겨졌다.
커다란 핏빛 비석을 보며 그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진짜 제대로 작동하는 거 맞아요? 내내 실패하셨잖아요."
***
처음부터 카르나크가 잃어버린 생육신에 대해 아쉬워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정복, 세상 만물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는 것.
그 지배자로서의 쾌감은 상당히 컸다.
문제는 그게 몇 년 못 갔다는 점이지.
기껏 절대적인 힘으로 세상을 손에 넣어 봤자 쾌락을 향유할 수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리치 같은 고위 언데드는 극도로 가학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타인을 학대하고 고문하며 그들의 고통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는 것이다.
아쉽게도(?) 카르나크에겐 그런 사디즘적인 성품이 없었다.
"남이 아픈 건 그냥 남이 아픈 거지 그게 왜 내가 즐거울 일이야? 내가 무슨 반사회적 공감 장애자도 아니고."
바로스가 초를 쳤다.
"아니시라고요? 그런 것치곤 그동안 하신 짓이...."
"아, 그냥 살려고 버둥대다 보니 그랬다니까?"
"그간 도련님에게 죽어 간 자들이 그 소리 들으면 참 마음의 위안이 되겠네요."
"...시끄러."
어쨌든 저런 이유로 카르나크도 이런저런 수법을 시도해 보았다.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빙의였다.
솔직히 하루 종일 생육신으로 살 필요는 없다.
그냥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감각을 느낄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 노예들을 잔뜩 잡아다 그들의 영혼을 지우고 육체를 대신 차지하는 시도를 해 보았다.
"...그러고도 반사회적 공감 장애자가 아니시란 겁니까?"
"넌 좀 닥쳐라, 바로스."
슬프게도 시도는 실패했다.
궁극의 초월체,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카르나크의 영적 기운은 커도 너무 컸다.
빙의는 고사하고 영혼의 손가락 끝만 들어가도 그냥 육신이 박살 나 버렸다.
'역시 임시로 타인의 육체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한가?'
그래서 이번엔 아예 환생을 노려 보았다.
처음부터 엄선된 아기들을 모아 자신의 영혼에 가장 걸맞은 육체를 고른 뒤 그 속에 깃드는 것.
빙의보다는 결과가 좋았다. 적어도 다리 한 짝 정도까진 들어갔다. 손가락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그것이 한계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외에도 여러 시도를 해 보았다.
타인의 감각을 훔친다거나 언데드로서 쾌락을 추구할 여러 방법을 찾았다.
소용없었다.
영혼을 흡수하며 쾌락을 느끼는 레이스, 흡혈을 통해 쾌감을 얻는 뱀파이어.
이런 언데드들의 공통점은 저 쾌락이 곧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모자란 부분이 있기에 그 부분을 메우는 과정에서 쾌락을 얻는 것이다.
궁극의 초월체가 된 카르나크에겐 그 모자란 부분이 없었다.
모자란 부분이 없으니 메울 것도 없다.
메울 것이 없으니 쾌락도 없다.
그는 절망했다.
이대로 죽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걸까?
사는 것에 아무 재미도 없는데?
그렇게 허송세월만 보내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가 인간의 쾌락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이 아닌 이유는 궁극의 초월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더 이상 아스트라 슈나프가 아니면 되는 거잖아?'
지닌 힘을 잃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답을 찾았다.
'인간이던 시절로 돌아가면 된다.'
인간이던 시절.
세상의 적이자 모든 산 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아니던 시절.
그저 세상에 대한 막연한 원망만 가지고 있던, 하급 귀족의 사생아이던 바로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겠다!'
그 결과가 왕좌 뒤의 저 핏빛 비석, 시공을 초월하는 어둠의 발현체.
카르나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사령술사가 그 누구보다 간절한 염원을 지닌 채 연구에 매진했다. 이러고도 실패한다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기다렸다는 듯 바로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 제대로 된 사령술사가 도련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비교 대상이 있어야 최강이고 나발이고...."
사령술은 선사시대, 즉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기도 전에 존재했던 정체불명의 고대 종족이 남긴 비술이다.
이후 금기 중의 금기로 여겨져 아무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다. 어설프게 힘을 추구하다 목 잘린 삼류들만 있었을 뿐.
당연히 인류 역사상으론 카르나크가 최강이겠지.
"아,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왕좌에 앉은 해골이 턱관절을 딱딱거렸다.
"바로스, 네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심복이 아니었으면 진작 목을 쳤을 거야."
"그걸 아니까 저도 이렇게 막 대드는 거죠. 제 목 치면 도련님은 뭐 속 편할 것 같습니까?"
"에잉, 입만 살아선."
카르나크는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핏빛 비석으로 다가가며 중얼거린다.
"어쨌거나 가자, 바로스."
바로스 역시 비석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검붉은 표면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이거, 성공하면 언제로 돌아가는 겁니까? 설마 아기 때부터 다시 시작하나요?"
"그렇게는 안 돼. 최소한의 공통점은 있어야 하거든."
어둠의 마력으로 시공을 뒤트는 것이니만큼, 도달할 시공에도 동일한 접점이 있어야 한다.
그리운 듯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사령술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때. 최초로 어둠의 마력을 취한 바로 그 순간이 되겠지."
"그럼 전 데스 나이트가 된 그 순간으로 돌아갑니까? 시간대가 안 맞을 텐데요?"
"넌 그냥 나한테 편승하는 거잖아? 같은 시간대로 돌아갈 거다."
"아, 그렇군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바로스는 연신 비석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소멸하겠지."
"소멸이란 게 남 이야기 하듯 쉽게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지금 삶에 미련 있냐?"
바로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의 2인자.
초인적인 권능을 지닌 불사의 육체.
이 모든 것에 미련이 있냐고?
"없네요."
그랬다. 삶에 아무런 쾌락이 없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밑져야 본전, 손해 볼 게 없군요."
편안한 얼굴로 바로스가 비석에 손을 얹었다.
"갑시다, 도련님."
"그래."
카르나크 역시 앙상한 손바닥을 비석 위로 올렸다.
핏빛 비석이 거대한 어둠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돌아가자고. 사람답게 살던 그 시절로."
#2화. 1. 뭔가 이상하다
눈을 뜨자 제일 처음 본 것은 어수룩한 인상의 20대 금발 청년이었다.
'...누구더라? 어쩐지 낯은 익은데.'
고민하는 카르나크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혹시 도련님이십니까?"
누군지 기억났다.
"바로스였구만."
눈앞의 이 청년은 데스 나이트가 되기 전, 아직 젊었던 그의 심복이었다.
"뭔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요."
눈을 껌벅거리며 바로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현세의 나... 이제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막 정신 흐려지고... 대충 이럴 줄 알았는데."
카르나크는 굳이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어, 실은 나도 그럴 줄 알았어."
설마 눈 감았다 뜨자마자 모든 게 싹 변해 버릴 줄이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울이나 좀 가져와. 내 모습도 확인하게."
"거울 같은 소리 하시네. 그렇게 비싼 물건을 이 시점의 우리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전 세계를 지배한 사령왕 카르나크라면 거울 따위 흔해 빠진 싸구려 물건이겠지만 지방 귀족의 사생아인 지금은 감히 손에 넣기 힘든 사치품이다.
대신 바로스가 그의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
"걱정 마십쇼. 딱 20살의 도련님이십니다. 깡마른 체구에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시건방진 표정까지 그대로시네요."
"...내 인상이 그렇게 안 좋아?"
"그러게 표정 좀 곱게 지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얌전히 있으면 잘생긴 주제에 만날 세상만사 불평불만이란 인상이었으니, 쯧쯧."
카르나크는 흐뭇하게 웃었다.
"적어도 한 가지 변하지 않은 부분은 있구나."
과거로 돌아온 후에도 바로스는 과연 바로스였다.
"여전히 싸가지가 없어."
그리고 자신은 저 싸가지없는 심복을 무려 100여 년이나 옆에 두고 있었지.
이제 와서 발끈하기엔 너무 익숙해졌다.
"그래, 어릴 적 내가 좀 세상 불만이 많긴 했지."
카르나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한 어두침침한 동굴이었다.
벽 한쪽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다. 광원이라곤 오직 흔들리는 작은 촛불뿐이다.
마치 낙서장처럼 보이는 그 서적을 집어 든 뒤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여기 있군, 모든 것의 시작."
가문의 창고 깊숙한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서, 말이 좋아 고서적이지 실은 제대로 된 책도 아니었다.
제목조차 없이 난잡한 필체로 필사된 조잡한 노트.
제대로 출간된 책이 아닌,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끄적거린 물건이란 의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인해 최초로 사령술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
"어디 시험해 볼까...."
읊조리며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튀겼다.
손톱만 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오래된 서적을 불태우며 커져 갔다.
화르륵!
화염은 순식간에 서적을 재로 바꾸고 사그라졌다.
"현시점의 사령력은 이 정도로군."
카르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예상했던 대로네. 막 사령술 입문했을 시기니 당연하겠지."
지켜보던 바로스가 흠칫 놀라 물었다.
"엑! 그거 불태워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내용은 머릿속에 다 있는데, 뭘."
이 책 자체가 무슨 특별한 어둠의 마력을 내재하고 있다거나 하진 않다. 그냥 지식을 적어 놓은 평범한 책일 뿐.
"딱히 수준 높은 지식도 아니고. 그냥 사령술의 기초 수준이야."
그가 지상 최강의 사령술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속적으로 고대의 지식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이 책 한 권으로 갑자기 초절정 사령술사가 떡하니 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태워야 돼. 어쨌건 이 책 덕분에 사령술에 입문할 수 있었잖아, 나."
카르나크가 입문할 수 있었다면 다른 엉뚱한 놈도 입문할 수 있다는 의미.
게다가 이 서적을 지니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들키면 운 좋아야 교수형이고 재수 없으면 화형이다.
"이제 와서는 필요하지도 않은데 괜히 화근을 남길 필요는 없지."
재를 털어 낸 뒤 그는 동굴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편에 아릿하게까지 느껴지는 빛이 보였다.
"일단 밖으로 나가 볼까?"
***
카르나크는 비명을 터트렸다.
"우악!"
바로스도 기겁했다.
"이, 이거 뭐야?"
어마어마한 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세상 전체를 불태울 것만 같은 끔찍한 광량!
바로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이거 그거네요."
"응?"
"햇빛요."
"그러고 보니 태양이란 거, 원래는 이랬지?"
주위를 둘러보며 두 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시야가 적응되어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더 이상 언데드도 아니고 멀쩡한 인간인데 햇살이 무슨 지옥의 겁화처럼 느껴질 리가?
실은 그냥 몇 초 정도 눈 좀 부시고 끝이었다. 호들갑을 떤 이유는 어디까지나 기분상의 문제랄까?
호들갑 떨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오오!"
"햇살이 따듯해요, 도련님!"
"풀 냄새! 풀 냄새가 난다!"
"흙냄새도 나요!"
온 세상의 모든 인간이 누구나 당연히 느끼는, 그리고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이 둘의 감각을 강타한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이거 봐, 바로스! 눈물이다! 눈물이 나와!"
"전 무려 콧물도 나옵니다!"
"난 침도 나온다!"
"이대로라면 오줌도 쌀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당연히 쌀 수 있지! 인간으로 돌아왔는데!"
"...더러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우리."
어쨌거나 되찾았다.
감각을, 감정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육체를.
그 대가로 잃은 것은 절대의 권능.
더 이상 인류 역사상 최강의 사령술사도, 최강의 데스 나이트도 아니다.
"아, 필요 없다고, 그딴 거!"
"그럼요, 그딴 거 된다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오랜 종복을 향해 카르나크는 외쳤다.
"이번엔 진짜 사람답게 좀 살아 보자!"
***
나지막한 야산의 한 숲속, 푸른 수목 사이로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숲길을 두 남자가 걷고 있었다.
둘 다 평범한, 살짝 허름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행복 차림이었다.
푸석푸석한 금발을 지닌 청년이 문득 이마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 좋네요."
매끄러운 흑발의 잘생긴 청년이 멍하니 대꾸했다.
"그러게. 날씨 정말 좋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확실히 싱그럽고 따사로운 날씨였다.
"...이거 너무 더운데?"
"땀나니까 짜증도 나고요."
"그러게. 묘하게 신경 거슬리네, 이 감각이란 거."
흑발 청년, 카르나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살아 있는 육체란 게 이렇게 귀찮은 거였지."
짐 대충 챙겨 동굴을 떠나 길을 나선 지 반나절째.
더워서 짜증 나고, 배고파서 짜증 나고, 목말라서 짜증 난다.
감동은 잠시뿐이고 시간 좀 지나니 도로 과거의 권능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이래서 사람 마음 간사하다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으니 익숙해져야지요, 뭐."
투덜대며 바로스는 지도를 펼쳤다.
"슬슬 다르하 마을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지도와 근처 지형을 비교하며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무 옛날 일이라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뎁쇼."
자그마치 100여 년 전으로 돌아온 셈이다. 기억이 나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래도 거기 가면 식당이 있겠죠? 길목 마을이니."
"있으니까 예전의 내가 여길 골랐지."
현 시간대는 카르나크가 최초로 사령술을 터득하기 위해 몰래 가문을 빠져나왔을 시기.
타인의 눈을 피해 인적 없는 숲속의 동굴에서 서너 달을 머물며 어둠의 마력에 입문했던 바로 그때다.
"마력량을 보니 대충 처음 사령력을 얻고 두어 달쯤 지난 것 같은데."
"정확하게 처음 사령력을 느낀 바로 그 시점은 아니네요?"
"100여 년을 거스르는 건데 그 정도 오차야 당연히 생기지."
사령술을 터득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외부인이 거의 오가지 않는 오지에서 저런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일부러 다르하 마을 인근 야산을 골랐다.
다르하 마을은 유스틸 왕국의 중앙 교역로에 위치한 길목.
행상을 위한 여관이나 식당, 상점 등이 위치한 교역 마을이니 수시로 바로스를 보내 생필품을 사 오게 시켰었다.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던 바로스가 순간 눈을 빛냈다.
"잠깐, 그럼 이제 우리도 진한 포도주에 육즙이 좔좔 흐르는 쇠고기를 뜯을 수 있는 겁니까?"
별처럼 초롱초롱 빛나는 심복의 눈동자를 애써 무시하며 카르나크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르하 마을에 그런 수준 높은 식당이 있을 리 없잖아."
실은 식당이 있어도 어차피 못 사 먹는다.
"돈도 없고."
"하긴, 우리 가난했죠?"
바로스는 허리춤의 경비 주머니를 슬쩍 들었다.
"제법 묵직하군요. 죄다 동전이라 그렇지."
이 시대의 카르나크는 은화 같은 고품격 화폐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금화? 그런 귀하신 분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몇 번 해 봤다.
카르나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이 귀족 가문이면 뭘 하냐? 쫄딱 망했는데."
그 쫄딱 망한 집안의 천덕꾸러기 사생아이기까지 하다.
덕분에 이 비밀스러운 여행을 위해 죽어라 잔돈푼 모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100여 년 전인데도 이 기억만큼은 생생할 정도로.
"이래서 내가 사령술이라도 익히겠다고 난리 친 거였지? 이제야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네."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는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도로 부모님이랑 두 형을 봐야 하는 건가? 싫은데, 그건."
"우엑, 그건 저도 싫군요."
바로스가 안면을 구겼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워낙 망해 버린 가문이다 보니 가족들은 유독 카르나크에게 가혹했다.
애초에 분란의 소지가 되는 것이 사생아란 존재다.
그나마 본인들이 여유가 있다면 어느 정도 관대한 면을 보였겠지만, 두 형들도 자기 앞가림이 벅찬 처지였다. 당연히 카르나크를 대할 때마다 온갖 구박을 일삼았다.
물론 당시 카르나크도 그들을 대하며 이를 득득 갈았고.
과연 형들을 다시 만나고도 태연할 수 있을까?
과거를 떠올리며 바로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굴 보자마자 들이받는 거 아니에요, 도련님?"
"에이, 이제 와서 무슨. 그냥 비위 좀 맞춰 주고 알랑방귀 좀 뀌어 주면 되지."
"그럴 수 없어서 그 상황까지 갔던 것 아닙니까?"
가문 몰락시키고, 두 형 죽이고, 온갖 패악질을 저질렀던 과거를 떠올리며 카르나크는 피식 웃었다.
"이젠 할 수 있어. 나도 나이를 먹었잖아? 더 이상 20살의 애송이가 아니라고."
"지금의 도련님은 정확하게 그 20살의 애송이이십니다만."
"내용물은 100년 묵었는데, 뭘."
그땐 무시당하는 걸 참지 못해 젊은 혈기로 열심히도 들이받았지만 이젠 적당히 넘어갈 자신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아니지."
당시엔 세상 불행 자기 혼자 다 짊어진 줄 알았지만, 온갖 일 다 겪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두 형들 역시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자신들이 괴로우니 그 괴로움을 카르나크에게 쏟아 냈을 뿐이라는 걸.
"가만, 그런데 남들이랑 비교해도 좀 심하긴 했네? 어, 생각해 보니 열 받네?"
"거봐요, 성격 어디 안 간다니까요?"
"농담이다, 농담."
손사래를 치며 카르나크는 계속 산길을 걸었다.
어쨌건 지금 당면한 문제는 머나먼 본가가 아니라 당장의 한 끼 식사.
"그나저나 돈은 어쩌지? 적당히 길 가는 사람 좀 털까?"
"사람답게 살자면서요?"
"그랬지, 습관이 되어 놔서 무심코...."
"강도질이 습관입니까?"
"남 이야기처럼 말하기냐? 직접 죽인 사람 숫자는 나보다 네 녀석이 더 많아!"
"그래서 죽이고 도로 살렸잖아요?"
"되살린 건 나지. 넌 죽이기만 했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한 대화를 나누며 계속 걷다 보니 슬슬 숲이 끝나고 들판이 나왔다.
저 너머에 다르하 마을이 어슴푸레 보인다.
"어쨌거나 뭐 좀 먹자. 먹고 생각하자, 일단."
카르나크의 제안에 바로스가 화색을 띠었다.
집으로 돌아갈 경비는 남겨 놔야겠지만 그래도 밥 한 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도련님!"
#3화. 1. 뭔가 이상하다 (2)
다르하 마을 어귀의 한 작은 여관.
숙식을 겸한 이곳 1층에서 몇몇 행상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식사에만 집중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손님 중 이상한 놈들이 둘 있는 탓이었다.
"오옷! 오오오옷!"
"마, 맛있어!"
"크윽, 이것이 '맛'이라는 건가!"
"그래, 이게 바로 '끓인다'라는 거였죠!"
성인 남자 둘이서 고작해야 보리 빵 두 덩이에 잡탕 스튜 한 그릇 시켜 놓고 무슨 의식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경건하게 바라보더니 한입 먹을 때마다 저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이들 눈에는 정신에 상당한 하자가 있는 것들로 보일 수밖에.
'뭐야, 저놈들?'
'왜 저 난리야?'
'사흘쯤 굶었나 보지?'
'그 정도 굶었으면 정신없이 퍼먹어야지 왜 한입씩 먹으면서 저런 쇼를 하는데?'
다른 손님들이 숙덕거리는 와중에도 두 청년의 기행은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 여관 아주머니가 에일 두 잔을 가져오자 아예 눈물까지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허억! 도련님, 이거!"
"술이다!"
"크윽!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것 같은데요?"
무슨 전설의 명주가 아니다. 그냥 마을 주조소에서 빚은 에일일 뿐이다.
심지어 질 좋은 건 이미 영주님께 납품하고 남은 하급품.
그걸 들이켠 이후의 반응이 실로 가관이었다.
"크아아아!"
"아, 이 한 잔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걸었잖습니까, 도련님?"
고작 에일 한 모금씩 마시고 바들바들 떠는 둘을 보며 손님들은 결론을 내렸다.
'처량하게 미친 놈들이구나.'
'신경 끄자.'
주변 반응이야 어찌 되었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마냥 행복했다.
수십 년 만에 맛본 음식인 것이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지고의 쾌락이 엄습하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자, 요리 나왔수다!"
바로 옆자리 테이블에 기막힌 향기를 풍기는 닭볶음 요리가 놓이는 것이 아닌가!
"헉! 여기 닭 요리도 돼?"
"고급 식당이었네요?"
아무리 교역이 활발한 길목 마을이라 해도 소나 돼지 같은 귀한 육류는 축제 때나 구경할 수 있는 것, 평소엔 돈이 있어도 못 사 먹는다.
반면 닭은 그럭저럭 허용 범위 안이다. 뒤뜰에 키우며 정기적으로 모가지 비틀면 되니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을 만큼 싼 음식도 아니다.
돈을 내면 닭고기가 나온다는 것부터가 이 마을이 상당히 풍족하며 오가는 인구도 많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 돈만 내면 말이지....
두 사람이 귓속말을 시작했다.
'저런 닭 요리를 안주로 에일을 마시면 끝내줄 거야!'
'얼마일까요, 저거?'
적어도 동전푼 정도로 살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아마도 저 손님들은 꽤나 신분이 높은 여행객들이리라. 실제로 입고 있는 옷도 범상치 않아 보이고.
순간 카르나크의 눈이 휙 돌아갔다.
'싹 다 죽이고 갈취해 버려?'
'사람답게! 사람답게, 도련님.'
실은 사람답게 살자는 각오를 포기해도 어차피 불가능하다.
바로스가 냉정하게 그 점을 지적했다.
'지금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 인원을 다 죽여요? 오히려 맞아 죽을걸요!'
'그, 그렇지, 참.'
이들은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던 사령왕도, 최강의 데스 나이트도 아닌 것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바로스는 경비 주머니를 열었다. 지금까지 먹은 식대를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에휴, 돈만 있었으면....'
바로 그때.
"엥?"
갑자기 바로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왜 그래?"
"도련님,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더니 바로스가 슬쩍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이제 카르나크의 두 눈도 보름달이 되었다.
"으잉?"
웬 은화 한 닢이 시종의 손가락 사이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게 왜 그 안에 있냐?"
재빨리 은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바로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안 보이게 주머니 안쪽을 카르나크에게 보여 줬다.
'동전보다 은화가 많아요.'
'그럴 리가?'
어이없어하며 카르나크도 주머니 안을 살폈다.
사실이었다.
동전도 많이 있긴 했지만, 절반 이상이 은화다.
'아니, 주머니 내용물 바뀐 걸 이제 알았어? 오면서 한 번도 안 열어 봤냐?'
'안에 든 게 뭔지 뻔한데 뭐 하러 확인을 했겠어요, 제가?'
'시종이면 그 정도 확인은 해야지!'
'전 오늘 아침까지 네크로피아의 2인자였거든요? 100년 전에나 시종이었지.'
혹시 주머니 자체가 바뀐 것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엄연히 주머니 입구에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다. 단지 내용물이 기억과 다를 뿐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둘은 연신 귓속말을 교환했다.
'이때 우리가 경비를 정확히 얼마 챙겼었지?'
'100년도 넘은 옛날인데 기억이 날 리가 있겠어요?'
'워낙 궁핍해서 엄청 아껴 썼다는 기억 정도는 확실히 있어.'
없이 산 기억은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우리가 이 정도로 돈이 많았을 리가 없는데?'
'열심히 절약하긴 했는뎁쇼.'
'...절약의 문제가 아니잖냐.'
아무리 절약한다고 해도, 동전이 서로 합체해서 은화가 되지는 않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주머니 가득한 은화들을 보며 카르나크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단순히 돈 많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내가 뭘 실수한 거지?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시공 마법이 제대로 먹히긴 한 건가?'
상념은 바로스의 이어진 질문에 바로 끊겼다.
"저기, 도련님?"
"왜?"
"이제 우리, 닭 먹을 수 있는 겁니까?"
눈앞의 치킨과 미지의 공포.
저울추는 간단히도 기울어졌다.
'에라, 일단 먹고 생각하자!'
카르나크가 우렁차게 외쳤다.
"여기 주문 받으쇼!"
***
기름진 닭고기를 한입 베어 문다.
"우하하!"
그리고 바로 에일을 들이켠다.
"으히히!"
먹고 마시고, 또 먹고 마신다.
"우히히하하!"
정신없이 접시를 비우며 두 사람은 황홀감을 만끽했다.
겨우 식사가 끝나자 바로스가 동면 앞둔 곰처럼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와,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요."
"동감이다. 고기 맛이란 게 이 정도였나? 마약을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실제로 해 봤는데 별 느낌 없었잖아요?"
"그땐 우리 둘 다 죽은 몸이었으니까 그렇고."
언데드가 뽕 맞고 해롱거리는 경우는 대륙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존재치 않는다.
"하여튼 좋구나...."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카르나크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죽인다.
끝내준다.
행복해 미치겠다.
그 모든 권세와 권능과 영화를 포기할 가치가 있는 쾌락이었다.
하지만 마냥 이러고만 있을 순 없지.
"자, 그럼 정신 좀 차리고 생각해 보자."
자세를 고치며 그는 경비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바로스도 진지해졌다.
"우리 기억이 잘못된 걸까요?"
"동전 9개를 동전 10개로 잘못 기억할 수야 있지. 그런데 은화 10개를 동전 10개로 잘못 기억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
"그럼 도련님의 마법이 잘못된 걸까요?"
"시공 회귀 마법이 대체 어떻게 잘못되어야 동전이 은화로 바뀔 수가 있는데?"
"...시공이 뒤틀리면서 동전을 쏙 가져가고 은화를 채워 넣었다?"
더없이 한심한 놈이라는 듯 카르나크가 물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더욱 한심한 놈이라는 듯 바로스가 받아쳤다.
"그건 도련님이 생각하실 문제죠. 무식한 칼잡이한테 뭘 바라십니까?"
너무나 정론이었다. 찍소리 못 하고 카르나크는 입을 다물었다.
바로스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일단 본가로 돌아가시죠. 그 후에 상황을 파악해도 늦지는 않잖습니까?"
"그건 그렇군."
카르나크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막상 돌아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이곳 다르하 마을에서 본가인 제스트라드 저택까진 족히 사흘은 넘게 걸리는 것이다.
"피곤한 여정이 되겠군, 아이고, 언제 그 먼 거리를 걸어가나...."
카르나크의 넋두리에 바로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왜 또?"
"생각해 보니 우리, 굳이 걸어서 돌아갈 필요 없지 않아요? 여긴 역참 마을이기도 한데요. 말 빌립시다, 말."
역참 마을끼리는 전령이나 시간이 급한 행상들을 위해 돈 받고 준마를 대여해 준다. 말 자체를 구입하려면 규모가 있는 마시장을 찾아야 하지만 빌리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역참에서 역참까지만 사용할 수 있고 금액도 상당하지만....
"뭐가 문제입니까? 돈이 이렇게 많은데!"
한심해하며 카르나크가 타박을 던졌다.
"그 돈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냐?"
고개를 저으며 바로스가 반문했다.
"이 돈 안 쓴다고 고민이 사라집니까?"
"그건 아니지...."
"그럼 쓰면서 고민하시죠! 몸이라도 편할 거 아닙니까?"
카르나크는 눈을 껌벅였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고민도 잘 풀리는 법이죠!"
마냥 한심하다고만 여겼는데 듣고 있자니 논리가 그럴듯했다.
"거, 의외로 설득력이 있네?"
***
황홀한 식사를 마치고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다르하 마을 서쪽의 역참으로 향했다.
다르하 역참은 2층짜리 목조건물에 커다란 마구간까지 딸린, 제법 규모가 있는 시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중년 사내 1명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아마도 역참 관리자인 듯했다.
"아이고, 돌아오셨군요!"
순간 두 사람은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돌아와?'
'우리가요?'
돌아왔다는 말은, 예전에 이곳을 들렀다는 의미.
사내가 굽신거리며 말을 이었다.
"두 분이 맡겨 놓으신 말들은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요."
'말을 맡겼다고?'
'우리가요?'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둘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중년 사내가 둘을 마구간 쪽으로 안내했다.
십여 필의 말들이 묶여 있었는데, 개중 갈색 준마 두 마리가 두 사람을 보더니 투레질을 하기 시작한다.
히힝!
히히힝!
흐뭇하게 웃으며 사내가 말들을 달랬다.
"이 녀석들도 주인을 다시 보고 반가워하는군요."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구면임이 틀림없었다.
'우린 초면인데 말이지.'
'너무 반가워하니까 부담스러울 지경인데요.'
말고삐를 건네며 사내가 친절한 목소리를 이어 갔다.
"시키신 대로 질 좋은 여물에 콩을 섞어 먹였습니다. 두 놈 다 힘이 남아돌 겁니다."
시종일관 친절한, 일견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
딱 봐도 뭔가 기대하는 눈치라 바로스가 눈짓을 했다.
'이거, 그거죠?'
카르나크도 알아챘다.
'그거네.'
'해도 될까요?'
'해 봐, 반응을 볼 수 있을 테니.'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스가 짐짓 거만한 태도로 은화 하나를 꺼내 건넸다.
"수고 많았소. 이건 약소하나 우리 도련님의 사례라오."
은화를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들며 고개를 푹 숙인다.
"번번이 감사합니다! 그럼 맡겨 놓으신 마구들도 바로 챙겨 오겠습니다요!"
역참 건물로 뛰어가는 중년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번번이?"
"예전에도 이 정도는 썼다는 소리네요?"
"그것도 은화를 말이지."
"우리가요?"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건 돈만 많고 세상 물정은 모르는 졸부 귀족 도련님의 행태가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쯤 되니 아무리 바로스라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어휴, 내가 누누이 말했는데 이제야 이해한 거냐?"
카르나크는 고민에 빠졌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인가?
그건 맞는 것 같다. 대체로 기억과 일치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맞지 않는 부분도 상당한 것이다.
'어서 집에 돌아가야겠어. 일단은 그게 최우선이다.'
한편, 바로스도 고민 중이었다.
"얘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지? 야, 너희 대체 이름이 뭐냐?"
히힝!
히히히힝!
"...말한테 말을 건 내가 바보지."
#4화. 1. 뭔가 이상하다 (3)
카르나크의 본가인 제스트라드 남작가는 유스틸 왕국의 하급 귀족가 중 하나였다.
대략 100여 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흥 귀족가라 할 정도도 아닌 무난한 지방 귀족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카르나크가 그리운 듯 말했다.
"참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지."
딱히 척박하지도 비옥하지도 않은,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소출은 나오는 곳이었다.
풍년일 땐 잔치 벌이고 흉년 들면 밥상 빈약해지는, 사치는 꿈도 못 꾸지만 귀족다운 품위는 지킬 정도의 수준.
정말이지 흔해 빠진 지방 귀족 가문이었다.
카르나크의 할아버지였던 그렐리드 남작은 항상 이 점이 불만스러웠다.
'언제까지 이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가? 사내라면 응당 큰 뜻을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큰 뜻을 품겠답시고 영지를 담보로 이런저런 사업을 시도했다.
결과는 대실패.
사업은 연달아 망하고, 몇 안 되는 영지의 비옥한 땅도 잃고, 화병으로 죽어 버렸다.
큰 뜻으로 시작해 큰 빚만 남은 것이다.
뒤이어 가주가 된 카르나크의 아버지, 크라푸트 남작은 척박한 영지와 다 허물어져 가는 저택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노력했다.
물론 쉽진 않았다.
그냥도 일어나기 힘든 처지인데 빚까지 잔뜩 있었으니까.
그래도 첫째 아들이 제법 영특하여 후계자로 잘 크고 있고, 둘째 아들도 무술에 재능을 보여 훌륭한 기사가 되었기에 나름대로 가문은 굴러갔지만....
"솔직히 말하면 영특이니 훌륭이니 하는 건 아버지만의 평가였지, 뭘."
세간의 기준으론 두 아들들 역시 평범한 수준이었다. 아무나 데려다가 똑같은 교육을 시켜도 저쯤은 할 법한 정도?
여전히 몰락한 시골 영지였지만 그 와중에 할 짓은 다 하던 크라푸트 남작이었다.
그 와중에도 '귀족'답게 즐길 건 즐기겠다며 따로 애인까지 만든 것이다.
애인이 덜컥 애를 가지자 책임지겠다며 가문으로 들인 걸 보면 어느 정도 책임감도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가문으로 들인 뒤 방치했다는 점.
애인이었던 카르나크의 어머니는 남작 부인에게 내내 시달리다 병에 걸려 죽었고, 사생아였던 그는 온갖 눈칫밥을 먹으며 비굴하게 자라야만 했다.
"아, 생각하니 또 화나네...."
고개를 저으며 카르나크는 애써 상념을 떨쳤다. 그리고 품에서 은화 한 닢을 꺼내 들었다.
"어쨌거나 그게 현재 우리 가문의 처지일 텐데...."
손가락 사이로 은화를 굴린다.
"그럼 대체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냔 말이지?"
***
말을 타고 이동한 덕분에, 걸어서 사흘 걸릴 거리인 다르하 마을에서 제스트라드 가문까지의 여정은 이틀로 단축되었다.
"기대했던 것만큼은 시간 절약을 못 했는데요?"
투덜대며 바로스가 타고 있던 갈색 말을 흘겨보았다.
"잘 먹였다며? 그런데 이놈들 왜 이렇게 금방 지치지?"
어이없어하며 카르나크가 흰소리를 던졌다.
"이 정도면 살아 있는 말치고는 튼튼한 거거든!"
"제가 언제 그런 걸 타 봤어야 말이죠."
참고로 왕년 바로스가 타고 다니던 건 좀비 말, 해골 말, 유령 말 등이었다.
"지치지 않지, 먹이 들고 다닐 필요도 없지, 똥도 안 싸지. 장점밖에 없잖아요?"
단지 저런 사령마를 타고 다니면 사기(邪氣)에 물들어 본인도 시름시름 죽어 간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한데....
"어차피 죽은 몸이었으니 상관없죠."
열심히 말 타고 달린 덕에 슬슬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주변 풍경을 살피던 바로스가 언덕 너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영지가 보입니다, 도련님."
"거참, 사람 심리란 게 웃기는구나."
푸른 보리로 뒤덮인 들판을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인데, 그래도 고향이라고 다시 보니 그리운 기분이야."
"전 여전히 짜증만 나는뎁쇼."
바로스가 인상을 팍 썼다.
"저도 미움받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는 영지의 고아 출신이었다.
제스트라드 영지는 워낙 척박한 북쪽에 있다 보니 마물의 침입이 잦은 곳이었다. 그러니 고아의 존재도 그리 드문 것만은 아니었고, 딱히 배척받거나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로스는 상황이 좀 달랐다.
부모가 주변 사람들에게 사기 쳐서 돈 뜯어낸 뒤 야반도주해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애는 또 버리고 갔고.
인간 말종을 부모로 둔 게 왜 아이의 잘못이겠냐마는 원래 사람은 말종의 핏줄은 말종일 거란 편견을 가지게 마련이다.
아무도 그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아원 같은 복지시설을 둘 만큼 넉넉한 영지도 아니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 바로 카르나크.
소심하던 평소와 달리, 어린 카르나크는 바로스를 자신의 시종으로 삼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아무리 구박받는 사생아라도 귀족은 귀족, 체면 때문에라도 시종 정도는 붙여 줄 필요가 있었다. 마침 바로스의 처분도 곤란했던 터라 쓰레기 치우는 셈치고 크라푸트 남작도 허락해 주었다.
"그래도 너 챙겨 주는 건 나밖에 없었지?"
"도련님 챙겨 주는 것도 저밖에 없었거든요? 뭘 이제 와서 생색을 내시나."
두 사람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말들은 열심히 제 갈 길을 간다.
들판 사이로 들어서고 농민들의 모습도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바빠 보이네."
"잡초 뽑을 시기일 테니까요."
"후딱 지나가는 게 좋겠지?"
"그렇겠죠."
영지인들 사이에서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인식은 그저 망나니 막내 도련님과 망나니짓 부추기는 개망나니 시종이다.
만나 봐야 좋은 반응 나올 리 없으니 후다닥 지나가려던 차였는데....
"앗! 카르나크 님!"
"돌아오셨군요!"
둘을 발견한 영민들이 반색을 하며 멀리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몇몇은 눈시울까지 붉힌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요!"
"아이고,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기억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카르나크는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내가 뭘 했다고 고생 타령이야?'
하지만 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는데 거기 대고 '왜 날 반가워해요?'라고 되물을 수도 없다.
대충 손 인사를 건네며 둘은 빠르게 말을 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를 힐끔거리며 바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기분인데요."
"나도다. 어서 집으로 가 봐야겠어."
***
커다란 돌담 앞에 서서 바로스가 중얼거렸다.
"도련님? 이게 대체 뭡니까?"
오만상을 찌푸리며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나한테 묻지 마라. 난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눈앞에 근사한 저택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질 좋은 벽돌을 높게 쌓아 올려 좌우로 이어진 담장, 그 너머로 아스라이 비치는 우아한 정원, 그 사이에 우뚝 선 눈부신 2층 저택과 태양 아래 반짝이는 테라스며 각종 조각상까지.
"이거, 분명히 제스트라드 저택 맞죠?"
"응."
카르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기억 속의 집이고 건물이었다.
어디까지나 기본 골조만큼은.
"담벼락 사이즈도 그대로고, 정원 크기도 그대로고, 건물도 여전한데...."
"저택이 왜 이렇게 깔끔해요?"
"그러게. 완전히 새롭게 단장했잖아?"
기존의 제스트라드 남작가는 100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저택.
말만 고풍이지, 솔직히 말하면 그냥 낡을 대로 낡아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빈약한 지갑 사정 탓에 제대로 된 유지 보수조차 못 한 지 거의 수십 년이 넘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저택 구석구석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다.
고풍스럽고도 우아하며 품위 있는, 그야말로 세인들이 상상하는 귀족가 저택의 모범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 어디예요? 우리 대체 어딜 온 겁니까?"
바로스의 질문을 카르나크도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히 저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자체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그, 글쎄다. 일단 들어가고 보자."
"나 원 참, 이런 귀한 곳에 우리 같은 누추한 분들이 들어가도 되나?"
눈치를 보며 둘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지기 중 1명이 그들을 발견하더니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앗! 카르나크 님!"
대략 40대 중반의 사내로, 기억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왔어요, 카타일."
카타일이 다른 문지기를 재촉했다.
"어서 집사님께 알리게! 도련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속의 저택에서, 기억 속의 인물이 달려와 그를 맞이한다. 일단 전체적인 상황은 분명 기억 그대로다.
그런데 때깔이 전혀 달랐다.
저택도 번쩍번쩍하고 하인의 옷도 깨끗하다. 빨래도 은근 돈 많이 드는 작업이라 저렇게 깔끔한 옷 입힌 기억이 없다.
거기에 이리도 환대하는 모습이라니?
저들이 자신을 이렇게 호의적으로 대한 기억은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경멸과 냉대의 시선이란 건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 버릴 것 같군, 정말.'
바로스가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도련님.'
'왜?'
'이젠 뭐가 나와도 더 놀라진 않을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이들의 예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이어 저택에서 단정한 인상의 노인이 달려 나온 것이다.
'타펠 할아버지?'
'맞다, 저 양반 아직 살아 있을 때구나, 지금.'
타펠 플라이드, 무려 카르나크의 선대부터 일해 온 노집사였다.
"집사님, 도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요!"
문지기의 외침에 집사 타펠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매서운 어조로 그를 꾸짖었다.
"주의하도록 하게, 카타일 군. 언제까지 도련님이라 부를 셈인가?"
그리고, 기억에 전혀 없는 온화한 얼굴로 카르나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둘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도련님이 영주라고요?'
'내가?'
***
우아한 그림과 장식이 놓여 있는 화려한 응접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찻잔을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니....'
이 시대의 그는 이런 고급 기호품 따위 입에 대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눈치 보니 옆에 서 있는 바로스도 당황한 티를 애써 숨기려 하고 있었다.
노집사 타펠이 카르나크를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를 건넸다.
"카르나크 님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신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군요...."
눈치 보니까 대충 20살,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바로 남작가를 물려받은 듯했다.
"목적하신 바는 이루셨습니까?"
"목적?"
무심코 카르나크가 반문했다.
잠깐 의아해하더니 노집사가 다시 물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여행까지 가셨잖습니까?"
아차 싶어 카르나크는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럭저럭...."
다행히 노집사는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행입니다, 돌아가신 전 영주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엥? 아버지가 죽었다고?'
당황한 카르나크의 귀에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자벨라 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뿌듯해하셨을지...."
이자벨라라면 크라푸트 남작의 정실, 즉 카르나크의 계모 되겠다.
'맙소사, 그 여자도 죽었고?'
"테실 님마저 돌아가셨을 땐 어찌해야 하나 앞이 캄캄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심지어 큰형도 죽었어?'
이쯤 되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파랄트 형은? 그 썩을 인간은 어떻게 된 건데?'
일단 무사하지 않다는 건 알겠다.
둘째 형이 건재했다면 카르나크에게까지 영주의 자리가 내려왔을 리 없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답답해 죽겠는데 물어볼 수가 없군.'
목적이란 게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다.
'이 시기의 내가 여행을 한 목적이라면 뻔한데?'
우연히 손에 넣은 힘, 사령술을 남몰래 터득하기 위해서.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분명 지금의 그는 사령술을 익히고 있다.
'그렇다고 저 이유를 솔직히 밝혔을 리도 없고.'
저 사실이 밝혀지면 따스한 미소 대신 따스한 화형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대체 무슨 목적이라고 알고 있는 거야, 타펠 영감님은?'
의문은 또 있었다.
원래 카르나크가 사령술을 익혔던 이유는 힘을 얻어 집안과 가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현 상황을 보니 복수고 뭐고 다 끝난 눈치가 아닌가?
영주가 됐고, 주변의 인정도 받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속 편하게 사는데 왜 사령술을 익힌 거야, 나란 놈은?'
모르겠다.
짐작도 안 간다.
'내 힘이 건재하다면 정신 제압 걸고 정보를 캐내겠지만 지금은 그럴 처지도 아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카르나크가 슬쩍 바로스에게 눈짓을 했다.
'어떻게 좀 해 봐!'
눈빛만으로 의사를 전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짓거리를 100년도 넘게 해 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바로 눈치채고 바로스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타펠 집사님."
"왜 그러나, 바로스 군?"
"카르나크 님은 오랜 여행으로 피곤하십니다. 내일 마저 말씀을 나누심이 어떨까요?"
"아차, 내가 실수했구먼."
노집사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제 불찰입니다. 일단 쉬시지요."
"그러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던 카르나크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스를 재촉했다.
'어서 이 자리부터 피하자, 빨리.'
'전적으로 동감입니다요, 도련님.'
#5화. 1. 뭔가 이상하다 (4)
밤이 깊었다.
하지만 침상에 몸을 누인 카르나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화려한 벽지가 발린 침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저건 또 얼마짜리야? 저런 게 왜 내 방 천장에 있는 거고?"
벽지뿐만이 아니다. 가구와 침상, 무려 양초조차도 고급품이다.
너무 호사스러워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소린 아니었다. 사령왕일 땐 이보다 훨씬 사치스러운 물건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침실과는 지나치게 차이가 크다.
"원래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사령왕의 권능에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렇다고 무능한 상태로 살아갈 생각도 없다.
이론상이긴 하지만 사령술의 부작용을 지우며 힘을 키울 방도를 마련해 놓았다.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다른 계획도 세웠다.
예전의 치기 어린 나이가 아니니 부모 형제들과 적당히 비위 맞춰 주며 사이좋게 지낸다. 아무리 그를 미워하던 가족이라도 돈 잔뜩 안겨 주면 분명히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 돈은 어떻게 버냐고?
이 역시 준비해 놓았다.
언제 어디서 어느 나라에 전쟁이 나는지, 언제 가뭄과 흉년이 드는지, 어디서 보물이 발견되는지 등등, 온갖 사료들을 싹싹 긁어모은 것이다.
그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어떻게 투자하고 어떻게 재산을 불려야 할지도 계획해 뒀다.
목표는 튀지 않으면서 무시당하지도 않을 만큼, 적당히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 있는 삶.
"딱 이 정도 집에서, 딱 이 정도 지위를 지닌 삶 말이지."
자신의 것이 된 가문, 자신의 것이 된 저택을 살펴보며 카르나크는 허탈해했다.
"그런데 이미 그렇게 살고 있네?"
그저 과거로 돌아왔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삶의 목표가 달성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속 편하게 '와, 인생 거저먹었다!'며 좋아할 정도로 그는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역시 상황부터 파악해야 하는데...."
침대 위를 뒹굴며 카르나크가 투덜거렸다.
"바로스 이놈은 왜 이리 안 와? 설마 자나?"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도련님."
반색을 하며 카르나크는 소리를 낮춰 시종을 불렀다.
"들어와."
방문이 조용히 열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로스가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다들 자냐?"
"네."
"이제야 좀 움직일 수 있겠군."
"집사 영감님한테 정신 탐색 걸 거죠?"
"그래야지. 하지만 지금 내 능력으론 바로 정신 탐색을 걸기가 힘들어."
촉매가 필요하다. 또한 대상의 정신력을 깎아 낼 수 있는 약물도 있어야 한다.
확실히 재워 놓고 수면 중 탐색을 걸어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먼저 준비할 게 있다. 델라스 꽃잎, 제스초, 팔렐 진액, 라파트 풀. 전부 정원에서 자생하는 잡초들이니 쉽게 구할 수 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스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여기요."
주머니 안에는 이미 요구한 잡초들이 들어 있었다.
"엥? 알아서 준비했냐?"
"제가 도련님이랑 같이 다닌 게 100년이 넘어요. 이 정도 눈치쯤 없겠습니까?"
바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모아 오느라 늦은 겁니다. 정원 관리를 너무 잘해 놔서 찾기 힘들더라고요."
"그렇군. 예전엔 정원 그냥 놔뒀으니 잡초가 무성했지?"
하지만 지금은 죄다 뽑아 버렸을 테니 오히려 구하기 힘들었으리라.
"이제 와서 찾으러 돌아다녔으면 오늘 밤은 그냥 날렸겠네. 잘했어."
방을 나서며 카르나크가 손짓을 했다.
"움직이자."
"하인들한테 들키면 어쩌죠?"
"잠 안 와서 산책한다고 하면 되지. 분위기 보니까 내 멋대로 군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는 것 같더라."
"하긴, 이젠 영주님이시죠?"
"그래."
어이가 없다는 듯 카르나크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영주라고? 사생아에 천덕꾸러기였던 내가?"
***
델라스 꽃잎, 제스초, 팔렐 진액, 라파트 풀을 사발에 넣고 으깨 섞는다. 그리고 사령술을 이용해 불을 붙인다.
화르륵!
불길은 잠시 타오르다 바로 꺼졌다.
남은 것은 길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뿐.
연기는 마치 생물체처럼 움직여 허공을 흘러갔다. 카르나크가 마력을 이용해 조종하는 것이었다.
검은 연기가 침대 위에 누운 노인의 콧구멍으로 스르륵 스며들어 간다.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노집사가 눈을 까뒤집으며 흰자위를 드러낸다.
"좋아, 완벽하게 잠재웠다."
집사의 상태를 확인한 뒤 카르나크가 명령을 내렸다.
"일어나라, 나의 종이여."
목소리에 담긴 언령이 힘을 발해, 곧바로 노인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예, 주인님."
이제 노집사는 무엇을 묻든 솔직하게 답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카르나크는 잠시 머뭇거렸다.
'너무 질문할 게 많아서 오히려 정리가 안 되네.'
일단 제일 궁금한 것부터 확인해야겠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지?"
대답은 바로 나왔다.
"3년 전, 그 간악한 란돌프 경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란돌프? 그게 누구야?"
"혹시 데벤토르의 기사 아니에요? 왜 그, 옆 영지의...."
앞뒤 상황 다 잘라먹고 결론만 들으니 통 이해가 안 간다.
"그럼 이자벨라 남작 부인은?"
"남작님과 첫째 도련님을 잃은 슬픔으로 앓아누우셨습니다. 그러다 결국 일어나지 못하시고...."
"아, 죽은 순서가 그렇게 되나?"
카르나크는 질문을 이었다.
"그럼 테실 형은 어떻게 된 거지?"
"첫째 도련님은...."
***
연거푸 질문을 던지고 던졌다.
그때마다 노집사 타펠은 넋이 나간 채 착실히 대답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내가 16살이 될 때까진 별다른 게 없군."
영지가 망하기 직전인 것도, 사생아인 카르나크를 가족들이 멸시한 일도, 망나니였던 그가 사람들에게 백안시되었던 것도 과거 그대로.
변화가 생긴 건 유스틸 왕국력 683년,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었다.
평소 산을 오가며 무술 수행을 하던 둘째 형 파랄트가 우연히 북쪽의 한 동굴에서 대규모 구리 광맥을 발견한 것이다.
"구리 광맥이라고?"
카르나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영지에 구리 광산이 있었다는 소리 따윈 들은 기억이 없는데."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엔 미처 몰랐을 수도 있죠. 우연히 발견되었다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작위적인 이야기잖아."
영지에서 광산이 발견되는 것은 모든 지방 귀족들이 꿈꾸는 흔한 망상 중 하나다.
물론 현실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광맥이란 게 그리 흔했다면 애초에 대박이 되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어느 귀족 가문이 광산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면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저놈들, 뭔가 떳떳치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고 광산 핑계를 대는구나!
"그런데 이번엔 진짜란 말이지?"
이 놀라운 행운에, 제스트라드 가문은 서둘러 광산을 개발했다.
굉장히 질이 좋은 구리 광맥이어서 1년 만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자체적으로 개발한 건 아니다.
광산 개발은 고도의 채굴 기술과 토목 기술이 필요한 사업이다. 땅 판다고 구리 주괴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니, 광물에서 구리를 분리해 정제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농사만 짓던 제스트라드 남작가가 고작 1년 만에 자체적으로 구리 광산을 개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기술과 인력을 지닌 유스틸 왕국 최대의 상단, 테카스 상회에 광산 사업을 맡기고 이득을 나누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항상 제스트라드 가문을 견제하던 옆 영지, 데벤토르 자작가가 시비를 걸어온 것이다.
내용은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원래 그 구리 광맥은 데벤토르 자작가가 발견한 곳이다.
또한 구리 광산이 위치한 장소 역시 양 가문이 인접한 중립 지역.
하나 관대한 데벤토르 자작께서는 양 가문이 공동으로 광산을 개발해 소유하자는 제안을 하셨으니, 제스트라드 남작가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광맥의 규모를 파악한 남작가가 비열하게 계약을 파기하고 말을 바꿨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이 발견한 것처럼 진실을 호도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피를 흘려서라도 우리의 권리를 되찾겠다!』
바로스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와, 뻔뻔하네요. 하긴 원래 뻔뻔한 놈들이었지?"
"그런데 말이다...."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주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기도 해."
구리 광산은 영지 북쪽, 제덴 산맥의 지류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만 보면 분명 제스트라드 영지에 속한다.
하지만 원래 영지라는 건, 산악을 끼고 있을 경우 칼로 딱 자른 듯 네 땅 내 땅 갈라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손이 닿은 농경지야 확실하게 소유권이 확보되어 있겠지만 숲이나 산은?
서로 적당히 자기 지도에 애매하게 기입만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보통이다.
별 쓸모없는 땅이니만큼 굳이 돈 들여서 측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분명 우리 영지 근처인 건 맞는데, 동시에 우리 손이 타지 않은 곳인 것도 사실이지."
데벤토르 가문이 구리 광산을 먼저 발견했다면, 소유권 주장까진 힘들어도 공동관리 자격은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을 위치였다.
"정말로 저쪽이 광산을 먼저 발견했다면 말이지만."
"진짜일 가능성이 있나요, 도련님?"
"아주 없다곤 못 하겠는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카르나크는 머리를 긁었다.
"솔직히 가능성이 높진 않을걸."
"왜요?"
"데벤토르가 우리보다 훨씬 세니까."
망해 가던 제스트라드 남작가와 달리 데벤토르 자작가는 선대부터 착실하게 전력을 쌓아 왔다.
무력도 재력도 남작가를 훨씬 상회한다.
"처음부터 공동으로 개발하기로 했다면, 제정신 박힌 사람인 이상 이런 위험한 다리를 건너진 않겠지?"
덕분에 양 가문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말로 안되면 주먹이 오가고, 주먹으로 안되면 칼이 오가는 게 인지상정인 법.
필연적으로 양 가문은 영지전에 돌입했다.
수차례의 피 튀기는 전투가 있었고, 대부분 제스트라드 가문의 패배였다.
역시 선대부터 착실히 힘을 키운 데벤토르 가문의 저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1년 뒤, 결국 가주인 크라푸트 남작이 데벤토르의 최강 기사 란돌프 경에 의해 목숨을 잃는 참사마저 벌어졌다.
병사들을 후퇴시키는 와중에 후계자인 테실 공자마저 란돌프가 쏜 화살에 맞아 명을 달리했으니, 제스트라드 남작가는 한 번에 가주와 후계자를 모두 잃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이자벨라 남작 부인은 몸져누웠고, 둘째인 파랄트 공자가 가주가 되었다.
파랄트가 애써 남은 병력을 수습해 자작가에 대항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돌이킬 순 없었다.
다음 해, 결국 그마저 데벤토르 자작가의 희생양이 되었다. 재차 격돌한 전투에서 란돌프에 의해 두 다리를 잃은 것이다.
평소의 단련 덕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불구가 되었으니 더 이상 기사로 활동할 수 없었다. 불구가 된 충격으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다 보니 건강도 심하게 축났다.
결국 파랄트마저 화병으로 사망, 시름시름 앓던 이자벨라 남작 부인이 숨을 거둔 것도 그때쯤이었다.
"와, 이 란돌프란 놈 하나에 우리 가문이 아주 씨 몰살을 당했구만? 이 정도의 강자가 우리 옆 영지에 있었나?"
"란돌프가 강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 가문이 너무 약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대체 이 란돌프가 누구냐고."
"저도 이름만 간신히 기억나는 정도라...."
"하긴, 이런 시골에서 이름 날려 봤자지."
4대 무왕, 3인의 대마법사, 전설의 용황제 등과 싸워 왔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이런 시골 촌 동네 기사를 기억할 리가 있나?
대충 넘어가며 카르나크는 계속 노집사를 심문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이제 남작가의 남은 핏줄은 사생아인 카르나크뿐.
그에게 후계자의 자리가 넘어갔다. 성인인 20살이 되는 해에 정식으로 가주 위에 오른다는 결정도 내려졌다.
그러자 데벤토르 가문은 잠시 전쟁을 멈추고 카르나크가 영주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선포했다.
실로 귀족다운 품위 있는 대응이었다.
"물론 명분만 저렇고, 사실은 거래 대상자가 생길 때까지 기다린 거겠지만."
데벤토르 가문의 목적은 제스트라드 남작가를 멸문시키고 영지를 통째로 삼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구리 광산을 차지하고 전쟁 보상금만 받아 내면 된다.
"그러려면 계약서에 정식으로 사인할 놈은 필요할 테니까 말이지."
당시만 해도 망나니였던 카르나크가 영주가 되는 것에 대해 반발도 많았다.
하지만 2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가주가 되었을 즈음엔 모두가 그를 인정하고 존경을 보냈다고 한다.
"날 존경했다고? 왜?"
카르나크의 질문에 갑자기 노집사가 눈시울을 붉혔다.
"목숨을 걸고 영지를 지키시려는 영주님을 그 누가 존경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얼씨구? 정신 제압을 당한 와중에도 눈물을 글썽여? 얼마나 진심인 거야?'
황당해하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던 차였다.
"잠깐, 목숨?"
카르나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뭔 소리야? 내가 왜 목숨을 걸어?"
#6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다음 날 아침.
카르나크는 집무실 소파에 누워 오늘 아침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맛있었다."
말랑말랑한 오믈렛에 달콤한 잼을 바른 향기로운 흰 빵, 짭짤한 소시지와 잘 구운 당근까지.
역시 부자가 되니 좋긴 좋았다.
아침부터 저런 고급스러운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니?
"원래는 회귀해도 한동안 투박한 식사로 때울 줄 알았는데."
집무실 소파에 누운 채 그렇게 데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로스입니다, 도련님."
"들어와."
이내 건장한 금발 청년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카르나크가 누운 채 한 소리 했다.
"계속 도련님이라고 불러도 되냐? 나 이제 영주잖아. 수상해 보이지 않을라나?"
"괜찮을걸요. 제가 원래 이런 실수를 자주 한 모양이더라고요."
듣자 하니, 노집사에게 그렇게 혼이 나고도 습관을 못 버려서 반쯤 포기했다는 듯했다.
"오히려 이쪽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겁니다."
"그럼 됐고. 밥은 먹었냐?"
"먹었죠. 잘 나오던데요."
"하인들한테도 좋은 밥을 줘?"
"네, 진짜 부자 된 모양입디다."
바로스는 집무실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그렇게 놀고만 있어도 돼요? 가주 됐으니 할 일도 많아졌다면서요?"
"아, 저거?"
영지 경영에 대한 보고서를 힐끔거리며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작 다 했지."
"벌써요?"
"이제 와서 내가 저 정도 가지고 끙끙대겠냐?"
갓 가주가 된 20살의 카르나크에겐 오전 내내 달라붙어야 할 업무량이겠지만, 세상을 전부 정복했던 사령왕에겐 소일거리도 못 되는 것이다.
"식후 디저트 먹는 동안 끝냈다."
"헉! 디저트! 좋겠다! 난 그런 거 없었는데!"
엉뚱한 포인트에 관심을 보내는 시종을 보며 카르나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디저트가 중요하냐?"
"중요하죠! 그것 때문에 부귀영화 다 버렸는데요?"
"하긴 그러네. 나중에 몰래 챙겨 줄게. 지금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잖냐."
"아, 그렇지요."
바로스가 안색을 고치며 카르나크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결투 재판 건요."
***
카르나크가 정식으로 가주가 되자 데벤토르 자작가도 다시 움직였다.
낌새를 눈치챈 제스트라드 남작가는 긴장했다.
솔직히 남작가의 전력으로 데벤토르를 상대할 방법은 전무했다.
9명이나 있던 기사들은 5명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2명은 부상으로 요양 중, 100여 명의 영지 병사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구리 광산을 넘겨주고 거액의 전쟁 보상금을 지불하는 방법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기껏 얻은 부를 모두 잃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가난해지겠지.
영민들 역시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문을 구원한 이가 바로 새로운 영주, 카르나크였다.
모두의 앞에서 그는 당당히 선언했다.
"달과 정의의 여신 알리움의 이름으로, 데벤토르 자작가에 결투 재판을 신청하겠다!"
달의 교단 교리에 따르면 알리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결투는 여신께서 올바른 이에게 승리를 안겨 주게 된다.
이 가르침에서 나온 제도가 바로 결투 재판이었다.
알리움 신관의 입회하에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다.
얼핏 힘센 놈이 모든 걸 차지하는 무식한 방법처럼 보이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일단 양쪽 모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결투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골적으로 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페널티 적용도 인정되며 대전사를 통해 대신 결투에 임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그냥 힘센 놈이 다 차지하라는 건데...."
바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 거 아니에요?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짓을 저질렀대요?"
이는 절대 카르나크가 제안해선 안 될 일인 것이다.
힘 차이도 노골적이고 딱히 대전사로 내세울 이도 없으며 그렇다고 20살의 카르나크가 무슨 엄청난 강자도 아니다. 상대가 제안해도 극구 반대해야 할 입장이다.
"그런데 먼저 무덤을 파시다니...."
신성한 결투 재판의 판결은 오로지 한쪽의 죽음으로만 내려지는 법.
성립된 시점에서 항복 따윈 없다.
이제 와서 결투를 피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그랬다간 알리움 교단이 카르나크의 목을 칠 것이다.
카르나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덕분에 왜 집사 영감이나 다른 영민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그토록 달라졌는지는 알아냈잖아."
사실 이는 제스트라드 가문 입장에서만 보면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이대로 영지전을 계속하면 구리 광산도 빼앗기고 거액의 전쟁 보상금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결투 재판으로 끌고 간다면?
이길 가능성은 물론 없다. 하지만 패배한다 해도 결투의 원인인 광산만 건네주면 끝인 것이다.
판결이 난 시점에서 알리움의 이름으로 모든 원한이 종결되니 거액의 보상금까지 물어줄 필요는 없게 된다. 적어도 영민들이 굶주리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
"전 오히려 데벤토르 자작이 이 결투를 승낙한 게 이해가 안 가네요. 그냥 싸우면 보상금도 잔뜩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요?"
"평판을 신경 써야 할 테니까. 약자를 너무 핍박하는 것도 좋게 보이진 않잖아?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구설수도 나돌 것이고."
애초에 데벤토르 가문은 그리 궁핍하지 않다.
"결투 재판을 통해 깔끔하게 구리 광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 보상금 정도는 포기한다는 거지. 저쪽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그렇게 데벤토르의 최강 기사 란돌프 경과 제스트라드의 새로운 영주, 카르나크 남작의 결투 재판이 결정된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건 젊은 영주님을 누가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젠장, 어쩐지 날 보는 눈망울이 다들 초롱초롱하더라니...."
이를 가는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왜 직접 나서신 겁니까? 대전사라도 내세우시지."
"야! 내가 나섰냐? 이 빌어먹을 20살짜리 애송이 카르나크가 나섰지!"
발끈하던 카르나크는 애써 호흡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은근슬쩍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바로스 네가 대전사로 나서면 안 되겠냐?"
물론 바로스는 더 이상 데스 나이트가 아니다. 연약한 인간, 심지어 제대로 단련하지도 않은 육신의 소유자일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시골 기사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아, 그래서 저를 부르셨구만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무리지 싶은데요?"
"엥? 왜? 네 경력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못해?"
그가 카르나크 옆에서 싸운 기간만도 어언 100년 가까이 된다. 아무리 연약한 인간의 육체로 돌아왔다 해도 쌓인 경험이 어마어마하다.
"무려 네크로피아의 2인자였잖아! 4대 무왕 중 셋도 네가 잡았고."
"그거 다 도련님이 내려 주신 힘 덕분에 가능했던 거였잖습니까?"
"받은 힘을 다룬 건 엄연히 너잖아?"
"그게 말이죠, 무술 제대로 안 익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인데요...."
바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몸이 바뀌어도 경험이 풍부하다면 삼류 기사쯤은 제압할 수 있다? 여기에 좀 오해가 있거든요?"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지니고 있어도 팔이 없으면 쓸 수 없고, 아무리 뛰어난 각법을 익혔어도 앉은뱅이가 되면 쓸 수 없다.
이런 개념의 연장선상인 것이다.
적어도 '지닌 경험을 펼칠 수 있을 정도의 육체'는 만들어야 한다. 이게 최소한의 조건이다.
"제가 다르하 마을에서 도련님 말린 거 기억 안 나요? 엄살 피운 게 아니라, 그때 싸움 일어났으면 정말로 저 혼자선 대책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무술이라도 수련한 어린애의 육체가 아무 수련도 안 한 덩치만 큰 지금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것이 바로스의 설명이었다.
"물론 지금의 저라도 어린애랑 싸우면 이기겠지만 지닌 경험을 써먹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카르나크가 인상을 썼다.
"끄응, 100년 넘게 전투 경험을 쌓은 놈이 너무 약한 모습 보이는 거 아냐?"
"100년 넘게 싸운 놈이니까 정확하게 주제 파악을 하는 거예요. 물론 단련 시작하면 남들에 비해 진도가 빠르긴 하겠죠. 시행착오를 할 일이 없을 테니."
잠깐 뭔가를 계산하더니 바로스가 말을 이었다.
"한 반년? 그쯤 마음먹고 수련하면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잡을 수 있겠네요."
검도 제대로 잡아 보지 않은 일개 시종이 고작 반년 만에 정규 기사를 능가한다?
오만하다 못해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역시 경험은 무시 못 할 자산인 것이다.
문제는....
"결투 재판은 한 달 뒤거든? 시간이 없어."
"그럼 뭐, 대책 없죠."
"빌어먹을...."
의아해하며 바로스가 물었다.
"도련님답지 않네요. 이 시기의 저야 일개 시종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기사들은 내세울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직접 목숨을 걸었다고요? 그렇게 대견한 인간 아니었잖아요?"
주인에 대한 경의 따윈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시종의 말투에도 카르나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말투를 100년 넘게 듣고 살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대신 진지하게 대꾸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왜 이렇게 된 건지 알겠더라."
어차피 현 제스트라드 남작가에 대전사로 나설 기사 따윈 없었다.
"가문 최강의 기사가 파랄트 형이었는데 그 인간도 죽었다며."
이 시점에서 남은 기사들이 란돌프 경을 이길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
"이기지도 못할 대전사 따위 내세워 보았자 의미 없지."
결투 재판은 여신의 이름으로 치르는 것이라 대전사의 패배 역시 결투 당사자의 패배로 간주된다.
즉, 대전사가 지면 카르나크 또한 자결해야 한다.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라서 이 시기의 내가 직접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대략 두어 달 전쯤 카르나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나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고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어제 돌아온 것이다.
"자, 나란 놈이 뭔 생각을 했을지는 뻔하지?"
바로스는 고소를 머금었다.
정말 뻔했다.
과거에도 그의 주인은 비슷한 짓을 했었으니까.
"사령술이군요."
***
과연 이 시기의 카르나크가 무슨 배짱으로 저런 미친 짓을 했을까?
이건 노집사의 기억을 뒤진다고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의 그 역시 사령술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어."
카르나크가 사령술 서적을 발견한 것은 그의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힘든 일이 생기면 가문의 오래된 창고로 도피하곤 했다. 사람 없는 어두운 곳에서 창고를 뒤적거리는 행위가 심적 안정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 되게 음침한 꼬맹이였네?"
"나이 드신 후에도 음침한 어른이셨는데요, 뭘 새삼스레?"
"그,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았냐?"
"사회성 밝은 어른이 뼈다귀만 남아서 손끝으로 사람을 죽인댑니까?"
"시끄러...."
아마 이 시간대의 카르나크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을 것이다.
영주가 되고 점점 상황이 몰리자 도피하는 기분으로 창고에 처박혔다가 사령술 책자를 발견했겠지.
영지 근처에서 사령술 익혔다간 바로 들통이 날 테니 먼 다르하 마을까지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다르하 마을을 고른 이유도 명확하다.
영지에서는 충분히 떨어져 있고 인적이 드문 깊은 곳이되 물자를 조달하기는 쉬운 장소라는 게 그리 흔하지 않다.
"상황만 조금 다를 뿐 똑같은 20살의 나인데 당연히 결론도 비슷하게 내렸겠지."
다른 점은, 전생 때는 가족 몰래 바로스만 데리고 가출해서 사령술을 익혔는데 지금은 당당히 떠난다고 밝힌 정도?
"이제 좀 납득이 가는구만요."
바로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쉬울 거 없는 지금의 도련님이 왜 굳이 사령술을 익혔나 했더니...."
그러더니 문득 물었다.
"그런데 고작 석 달 사령술 익힌 걸로 정규 기사를 이길 수 있어요?"
상대는 란돌프 경, 데벤토르 영지의 최강 기사였다.
물론 명성 높은 왕국 중앙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겠지만 그래도 일반인은 감히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무리 사령술이 사기적으로 강해지는 금단의 비술이라지만 기간이 너무 짧은 것 같은데요."
그러자 카르나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로스를 바라보았다.
"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소릴 하냐?"
"제가 뭘요?"
"내가 왕년에 어땠는지 옆에서 죽 봐 왔잖아?"
"거 100년 전 일이라니까요? 전 도련님 뼈에 살점 붙어 있던 시절 기억도 별로 없어요, 이제."
"사, 살점이냐...."
졸지에 강아지용 간식 취급당한 카르나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니....
"솔직히 이길 수는 있어."
그가 화제를 돌렸다.
"애초에 사령술은 금기 중의 금기잖아. 사용한 흔적 조금만 보여도 대륙의 모든 교단에서 전력으로 박멸하려 하고. 저 정도로 리스크가 큰데도 사령술사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뭐겠어?"
사령술은 너무나 쉽게 강해질 수 있다.
단기간에, 노력을 안 해도, 재능이 없어도.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작정하고 익히기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이길 방법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 이길 방법은 있다."
카르나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사령술사지, 마법사가 아니었다. 오직 사령술밖에 모른다는 소리다.
"들키지 않을 방법이 없어."
#7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2)
어둠이 짙게 깔린 산속.
횃불을 든 수십 명의 추격대가 산 여기저기를 헤집고 있었다.
"이쪽이다!"
"흔적을 찾았다!"
"절대 놓치지 마라! 저 악마를 붙잡는 자에게 알리움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
반대편 능선에서 두 청년이 정신없이 산길을 질주하는 중이었다.
"헉, 헉헉!"
"도련님! 좀 더 빨리 뛰십쇼!"
바로스의 재촉에 카르나크는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데스 스티드 소환술부터 익혀 둘걸!"
평소 운동과 담을 쌓은 몸이다 보니 산속을 조금만 달려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사령마를 소환해 타고 달리면 훨씬 편했을 텐데, 당장 필요 없다고 뒤로 미룬 것이 화근이었다.
'이렇게 도망 다닐 일이 생길 줄 알았나, 어디.'
하지만 힘들다고 주저앉았다간 곧바로 화형대로 직행할 상황, 애써 무거운 두 발을 옮기며 그는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확실하게 모든 흔적을 지웠는데, 분명히!'
아버지를, 계모를, 두 형을 처리할 때만 해도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그의 사령술은 경지에 이르렀고, 덕분에 그 누구도 제스트라드 가문을 덮친 악몽의 원인이 카르나크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가문을 차지하고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는 것뿐이라 여겼는데....'
갑자기 알리움의 신관들이 나타나 그를 사령술사로 지목한 것이다.
오해라며 발뺌할 틈조차 없었다.
'그들은 분명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
역시 카르나크의 발이 너무 느린 탓이었을까?
어느새 접근한 한 무리의 추격대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다들 중무장한 건장한 전사들, 신관들이 데리고 온 정예병들이었다.
검을 뽑아 들며 병사들이 호통을 터트렸다.
"이 악마 놈!"
"더 이상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순순히 죗값을 받아라!"
바로스가 겁에 질려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도, 도련님!"
"흥!"
콧방귀를 뀌며 카르나크는 양손을 좌우로 펼쳤다. 넓은 옷소매가 거칠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알리움의 신관들이면 모를까, 고작 일개 병사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사이한 암흑이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왔다. 음울한 중얼거림이 밤의 어둠을 흘러내렸다.
"오라, 떠도는 원혼들이여.... 심연의 빛으로 산 자의 운명을 지워라...."
어둠이 이내 너울거리는 악령의 형상으로 화했다.
어둠의 베일을 뒤집어쓴 채 생명을 거두어 가는 원혼령, 레이스(wraith)였다.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령술이다!"
"놈이 악령을 부린다!"
"다들 수호부를!"
병사들이 허겁지겁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서로 길이가 다른 육각형의 청동판에 천칭이 새겨진 청동 조형물, 사이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달의 여신 알리움의 수호부였다.
허겁지겁 병사들이 수호부를 내밀 때였다.
새애애애액!
섬뜩한 소리와 함께 레이스가 허공을 미끄러졌다.
펑! 펑펑!
레이스의 기운에 닿은 순간 모든 수호부가 박살이 나 흩어졌다.
"뭐, 뭐야?"
"여신의 가호가 통하지 않아?"
이내 악령이 병사들을 덮쳐 갔다.
방패로 막고 검을 휘둘러 봤지만 무용이었다. 레이스는 마치 환영처럼 병사들을 통과해 그들의 생을 거두어 갔다.
"아악!"
"으아악!"
10명이 넘는 전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데 채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카르나크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걸로 추가 전력이 생겼군."
그가 양 손가락을 기괴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죽은 자여. 되살아나 대지를 걸어라."
갓 죽은 이들이 눈깔을 까뒤집은 채 저마다 몸을 일으킨다.
눈, 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비틀비틀 몸을 돌려 달려온 길을 거꾸로 돌아간다.
"크르르."
"크으으으...."
멀어지는 좀비 병사들을 보며 바로스가 물었다.
"이제 안전해진 겁니까, 도련님?"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급하게 만든 놈들이라 제 위력이 안 나와."
저 수준의 좀비라면 고작해야 생전 전력의 십분지 일이나 될까?
기껏해야 시간 벌이 정도에 불과, 그러니 서둘러 이 일대를 벗어나야 한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다시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두 발을 놀리며 카르나크는 다시 한번 이를 갈았다.
"겨우 복수를 했는데! 겨우 가문을 손에 넣었는데!"
이게 다, 그 사령술 책자를 쓴 정체불명의 작자 탓이다.
"그 사기꾼 새끼! 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신관들은 죄다 알아챘잖아!"
다급한 와중에도 바로스가 초를 쳤다.
"일반인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했었죠. 성직자는 일반인이 아니잖습니까?"
"그 작자가 처음부터 헷갈리게 써 놓았단 말이야!"
정확히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수법이라면 일반인은 결코 사령술의 흔적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투기를 익힌 기사나 마나의 사역자인 마법사들이라도 알아차릴 수 없다.』
"거봐요, 성직자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소린 없네."
"그럼 따로 주의 사항을 적어 놓았어야지! 상식이잖아!"
"상식적인 인간이면 애초에 사령술을 안 익혔겠죠?"
목숨이 걸린 와중에도 죽어라 딴죽을 거는 걸 보면 진짜 천성인 모양이었다.
카르나크가 신경질적인 외침을 터트렸다.
"닥치고 빨리 튀기나 하자고!"
***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며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땐 진짜 고생했었는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딱 걸려서 주야장천 쫓겨 다녔죠?"
"사령왕 카르나크의 전설이 시작된 때였지."
"에이, 그건 아니죠. 전설이 시작된 건 훨씬 나중이고, 그땐 그냥 추악한 삼류 사령술사가 부질없는 목숨 부지하려고 바퀴벌레처럼 도망 다닌 것에 불과...."
"바로스, 너도 같이 도망 다녔잖아! 뭘 남 일처럼 말하고 그러냐?"
하여튼, 과거의 카르나크는 자신이 익힌 사령술을 과신하고 있었다.
은밀히 움직이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딱히 어리석다고 탓할 수만도 없긴 했다. 저 시기의 그가 지닌 지식수준으로는 딱 저 정도까지 예상하는 게 한계인 것이다.
힐끔 거울을 보며 카르나크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저놈이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도 짐작이 간다."
거울 속의 자신을 타인처럼 칭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은밀하게 사령술을 구사하면 란돌프 정도는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실제로 그 정도 위력은 있고."
겉으로는 평범한 전투를 벌이는 척하다가 몰래 저주를 걸어 슥삭!
이것이 대부분의 사령술사들이 공개적으로 전투에 임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러면 일반인의 눈에는 평범한 전투로만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또 과거의 재탕이 되어 버리지."
일반인은 속여도 신관은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들은 사령력의 자취에 특히나 민감하다. 아무리 몰래 사령술을 써도 흔적을 쫓아 끝끝내 추적해 오기 마련이다.
과거의 카르나크도 그랬다.
제스트라드 가문의 저주를 수상히 여긴 알리움의 신관들에게 결국 정체를 들켜, 쫓기고 또 쫓기며 악명을 쌓아 가다가 마침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기껏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시간까지 되돌렸는데 그럴 순 없잖아."
정체를 들키지 않고 사령술을 쓰려면 정말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흔적을 지워야 한다.
아주 사소한 사기만 흘려도 7여신교에서 사냥개처럼 추적해 올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신관들 앞에선 절대 사령술 쓰면 안 된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이거, 결투 재판이죠?"
"그렇지."
"그럼 심판을 신관들이 보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도련님은 뭔 배짱으로 결투 재판에 나서겠다고 한 거래요?"
"당시의 나는 저 사실을 몰랐다니까?"
"끄응...."
바로스는 신음을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눈을 빛냈다.
"혹시 결투를 반년 뒤로 미루진 못합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든 몸 만들어서 붙어 볼게요."
즉답이 돌아왔다.
"못 미뤄."
지나치게 대답이 빠른 걸 보면 아마 카르나크도 미뤄 볼 생각 정도는 한 듯했다.
"결투 당사자에게 뭔 일이 생겨도 안 돼요? 도련님이 부상을 입었다거나 해서...."
은근한 눈빛으로 바로스가 카르나크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다리뼈 박살 내면 도로 붙는 데 반년은 족히 걸릴 것 같은데요. 아니면 병에 걸려서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거나요."
카르나크가 코웃음을 쳤다.
"신관들이 주관하는 결투잖아. 그걸 두고 보겠냐?"
교단의 신관들에겐 여신이 내린 치유의 힘이 있는 것이다.
"아프다고 엄살떨어 봤자 신성력으로 바로 일으켜 세울걸."
"아, 치유 마법이 있었죠? 데스 나이트로 지내다 보니 살아 있는 사람은 신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잊었네."
물론 신관의 치유 마법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강력한 성직자의 치유술은 그만큼 비용도 비싸다. 어지간한 부자라도 쉽게 낼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니,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술의 힘을 빌리고 있다.
"하지만 구리 광산을 지닌 부자 가문이 되었는데 그거 못 내서 재판 미루겠다면 누가 믿겠어?"
또한 치유 마법으로도 잃은 육체까지 재생하진 못한다. 파랄트처럼 아예 사지의 일부를 잃었다면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결투 재판 좀 미루겠다며 다리를 통째로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바로스가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랐다.
"결투 전에 란돌프 다리를 잘라 버리는 건요?"
카르나크의 다리를 자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러나 란돌프 다리야, 자르건 말건 아까울 일이 없지 않은가?
"결투 재판만 무마시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건 가능할 것 같은데."
카르나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의 시종을 바라보았다.
"그걸 누가 할 건데? 넌 아직 상대가 안 된다며?"
"예? 그야 도련님이 저주 좀 걸어서 처리하면 되잖아요. 아니면 아예 죽여 버리시든가. 예전에도 그렇게 부모 형제 다 죽여 놓고서 뭘...."
"이후에 죽어라 쫓겨 다녔지, 우리?"
"맞다, 어차피 들키는구나?"
진퇴양난이었다.
이 시기의 카르나크야 좋은 생각이라며 신이 나서 사령술 익히러 달려갔을지 몰라도, 막상 회귀한 입장에서 보니 바보짓도 이런 바보짓이 없다.
"아으, 차라리 영지전을 벌일 것이지. 그럼 몰래 사령술을 써서 어떻게든... 아니, 그래도 나중에 걸리기는 마찬가지겠군."
"칼날에 몰래 독이라도 발라 볼까요?"
"신관들에겐 해독 마법이란 게 있단다, 바로스."
"아, 그것도 소용없겠네요. 독 썼다가 걸리면 바로 반칙패죠?"
아무리 생각해도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도망쳐야 하나?"
알리움의 이름으로 결투 재판을 걸었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순 없다. 그랬다간 여신을 우롱한 죄로 처형당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패물이며 돈 챙겨서 도주한다. 그리고 신분을 버리고 정체를 감춘 채 일개 모험가로 살아간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미래의 사건들을 알고 있으니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시 힘을 키울 시간적 여유도 생길 것이고."
"포기하기엔 현 상황이 너무 좋잖아."
꼴 보기 싫은 가족들은 알아서 처리가 되었고, 부자가 된 가문의 주인이 되었다. 전생과 달리 영민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과거 그가 원했던 것이 모두 이루어진 상황인 것이다.
"이걸 포기하긴 싫은데...."
"죽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나마 유일한 해결책이 저를 대전사로 내세운다였는데, 그 길도 물 건너갔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도련님이 하자는 대로 할 뿐이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집사 영감님이 시킨 일이 있어서요. 결정하시면 알려 주십쇼."
방을 나서는 시종을 보며 카르나크는 마냥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끄응, 어쩐다...."
***
카르나크가 바로스를 다시 부른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왜 또 부르셨습니까? 저 빨래 중이었는데."
젖은 손을 대충 닦으며 바로스가 퉁명스레 질문할 때였다.
퀭한 눈으로 카르나크가 말했다.
"결정을 내렸다."
"오! 짐 쌀까요? 패물이랑 영지 운영금을 어디에 보관하는지는 이미 봐 뒀습니다."
"...내가 언제 야반도주한다던?"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방법이 떠올랐어."
카르나크가 각오 서린 미소를 지었다.
"위험을 좀 감수해야 하겠지만."
#8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3)
유스틸 왕국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제덴 산맥.
온갖 마물들이 들끓는 이 험지는 인간의 왕국과 몬스터의 영역인 카오틱 노스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했다.
저 마물들이 수시로 인간의 영역을 침범해 왔으니, 데벤토르 자작가는 제스트라드 남작가와 함께 왕국 북부를 지키는 첨병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대략 20여 년 전까지는.
제스트라드 가문이 몰락한 이후엔 오직 데벤토르만이 왕국 수호 임무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데벤토르 북부 성채에서는 오늘도 한 무리의 기사들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타앗!"
기합과 함께 건장한 기사들이 서로 공방을 나눈다.
검을 내려치고 방패로 밀어붙이며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땀을 흘리고 또 흘린다.
"헙!"
"으아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의 기사가 고함을 내질렀다.
"결코 단련을 게을리하지 마라! 이 땅의 진정한 수호자는 우리뿐이다!"
이곳의 지휘관인 브라이트 경이었다.
"제스트라드의 쓸모없는 쓰레기들에겐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으니!"
제스트라드 남작가,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한 놈들이었다.
주어진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구리 광산이라는 과분한 행운을 얻은 주제에 감히 데벤토르를 배신하고 욕심만 채우려 하다니?
"그것도 이제 곧 깔끔하게 해결이 되겠지."
기사들의 상태를 파악한 뒤 브라이트가 휴식을 선언했다.
"여기까지! 좀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겠다!"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온 기사들이 저마다 호흡을 고르며 헐떡인다.
그 와중에 전혀 지치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거구의 기사가 1명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며 브라이트가 물었다.
"결투 재판 준비는 잘되어 가나, 란돌프 경?"
"딱히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습니다만...."
헛웃음을 흘리며 기사가 갈색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제가 대체 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겁니까? 고작 골방 샌님을 상대로."
"물론 그렇긴 하지."
너털웃음을 흘리며 브라이트는 란돌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일세.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짓이잖나? 뭔가 믿는 것이 있지 않고서야...."
제스트라드의 새 영주, 카르나크의 결투 재판 제안은 지나치게 결과가 빤한 것이었다.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자기 목숨을 그리 쉽게 버릴까?"
"물론 저도 방심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란돌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듣자 하니 제스트라드의 새 영주는 원래 제대로 된 후계자도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진정한 기사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냥 일반 병사들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여기고 있을 수도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도령이 바보짓 하는 거야 흔한 일 아닙니까?"
브라이트는 피식 웃었다.
"흔한 일이긴 하지."
살다 보면, 너무 멍청해 보여서 실은 뭔가 속셈이 있지 않을까 의심되는 경우가 꽤 있다.
대부분은 정말로 멍청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만.
란돌프가 다시 검을 들었다.
"물론 단련은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지요."
휴식 시간이 끝났으니 다시 수행에 매진해야 한다.
"결투 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과 사람들을 수호하기 위해서!"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성채 연무장 곳곳에서 다시금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허업!"
"타아앗!"
든든한 눈으로 브라이트는 수련에 임한 란돌프를 바라보았다.
호쾌한 검격이 연신 이어진다. 방패로 막고 갑옷으로 버텨도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나 상대는 결국 목숨을 내주고 마는, 란돌프 특유의 패도적인 검술이다.
'역시 강하군.'
이대로 성장한다면 기사들의 꿈이라는 투기(battle aura)를 익혀 진정한 일류가 될지도 모를 재목이었다.
'단지 걱정이라면 성정이 거칠고 적을 얕보는 습관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않은 20살짜리 애송이에게 패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거참,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주제에 뭘 믿고 결투를 걸었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브라이트는 연무장 너머를 바라보았다.
'음?'
누군가가 자신들을 살피는 듯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뭔가 싶어서 유심히 보니 내성 앞뜰 울타리 저편에서 웬 행상 1명이 여인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잡화들을 팔고 있었다.
딱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 저런 행상들은 종종 오곤 했다.
본가라면 모를까, 북쪽 성채는 규모가 작다. 앞뜰이 때론 연무장도 되고 빨래터도 되며 잡상인이 물건을 파는 장소도 된다.
한쪽에서는 기사들이 수련에 임하고 반대편에선 여인들이 이불을 말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저 행상 청년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저놈이?'
순간, 제스트라드에서 이쪽 전력을 염탐하려 보낸 첩자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브라이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지.'
어차피 지금은 체력 단련 시간이었다.
딱히 남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특유의 비기나 전법 등을 연습하는 시간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수련은 아무리 성채 규모가 작다 해도 사람들 눈을 피해 따로 수련한다.
물론 사소한 움직임이나 버릇만으로 상대의 전력을 읽어 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족히 수십 년을 전투에만 매진한 달인에게나 가능한 짓이고.'
그 정도로 엄청난 강자가 고작 행상 노릇이나 하며 이쪽을 염탐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본인이 결투 재판의 대전사로 나서면 될 텐데?
게다가 평민들이 기사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건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상념을 지우며 브라이트는 다시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렁찬 고함이 땀 흘리는 기사들의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계속 움직여라! 그대들이 흘린 땀이 이 땅을 지키는 거름이 될 것이다!"
***
바닥에 펼쳐 놓은 돗자리 위에 늘어놓은 온갖 잡화들.
한 무리의 여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열심히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들 북쪽 성채에 주둔하는 기사와 병사의 가족들이었다.
중년 부인이 손수건을 매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어머나, 부드러워라. 무슨 천을 쓴 걸까?"
"이거 얼마인가요?"
"한 벌에 30켈린만 주십쇼!"
"세상에, 그렇게 싸요? 아, 그럼 저도...."
여인들을 상대로 열심히 흥정을 이어 가며 행상, 정확히는 행상으로 위장 중인 바로스는 내심 웃었다.
'장사 잘되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잡화들은 이날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왕국 중부의 제품들이었다. 이런 척박한 성채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품인 것이다.
하물며 그걸 마진도 하나 안 남기고 구입한 가격 그대로 판매 중이다.
'다들 당장이라도 써 보고 싶어 안달이 날 수밖에 없지, 후후.'
덕분에 대성황, 인파의 장막 속에서 느긋하게 기사들의 훈련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란돌프의 전투 방식을.
'대충 알겠다.'
아무리 기초적인 기술만을 사용하는 체력 단련이라 해도 평소 습관은 묻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네크로피아의 2인자이자 한때 세계 최강의 전사이기도 했던 바로스의 '대충'은 일반 기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살펴본 것만으로도 란돌프의 전력을 낱낱이 파헤쳐 버린 것이다.
어떤 성격인지, 어떤 식으로 싸울지, 속도와 타이밍은 어느 정도일지.
'저 수준이면 준비에 반년씩이나 필요하지도 않았겠는데?'
란돌프는 전형적인 중검술 타입의 기사였다.
좋게 말하면 강렬하고 효율적이며 담백한 검술, 나쁘게 말하면 그냥 단순 무식한 타입.
여러모로 움직임을 예측하기 편한 상대다.
한 서너 달 정도만 몸 만들고 덤벼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 붙으면 금방 목 잘리겠지만.'
그러니 지금은 카르나크의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란돌프를 염탐하고 있는데 모인 여인 중 1명이 바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저희 오라버니를 알고 계신가요?"
"앗! 란돌프 경의 가족이셨군요."
잽싸게 표정을 관리하며 바로스가 태연스레 말했다.
"북부 최강의 기사, 란돌프 경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촌뜨기다 보니 신기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는군요."
실은 데벤토르 최강의 기사일 뿐이지만 은근슬쩍 높여 주는 바로스였다.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사죄의 뜻으로 내의 한 장 더 드리죠. 제가 가진 게 이런 것뿐이라."
공짜로 더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 없다. 여인이 까르르 웃으며 속옷을 받아 챙겼다.
"어머나, 고마우셔라. 호호호."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며 바로스는 다시 란돌프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도련님이 시킨 건 다 했지?'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그 양반을 어떻게 굴릴지 대충 윤곽이 나오는구만, 후후후후.'
***
제스트라드 저택 한편에 은밀하게 세워진 개인 연무장.
각 가문의 비기는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에 제스트라드 가문뿐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가에선 갖추고 있는 시설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서며 카르나크는 의아해했다.
"솔직히 우리 가문 검술은 남들에게 감춰야 할 만큼 대단하지도 않지 않나? 왜 굳이 이런 시설을 만든 거야?"
바로스가 꼭 그렇지도 않다며 손을 저었다.
"삼류들끼리 싸울 땐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불리해지니까요. 당연히 만들어야죠."
삼류라 칭할 정도로 제스트라드 가문의 가전 검술이 하찮지는 않다. 하지만 둘 다 놀던 물이 다르다 보니 삼류의 기준도 높은 것이다.
연무장 문을 걸어 잠그며 카르나크가 너스레를 떨었다.
"덕분에 우리야 편하게 됐지만."
바로스가 돌아오자 카르나크는 곧바로 결투에 대비해 특훈에 들어가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바로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연무장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영지의 운명이 걸린 만큼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바로스야 원래부터 카르나크의 심복이었으니 함께 움직이는 것이 당연했고.
"이걸로 바로스, 네가 갑자기 강해져도 딱히 의심받진 않겠지?"
이 시점의 바로스는 일개 시종일 뿐이다. 그런 그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류 기사로 탈바꿈하는 건 역시 수상하다.
이런 식으로 '카르나크를 보필하며 어깨너머로 무술을 익히다가 숨겨진 재능이 눈을 떴다!'라는 시나리오가 필요한 것이다.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합시다."
중얼거리며 바로스가 한 벌의 플레이트 메일을 카르나크 앞에 내려놓았다.
"걸치십쇼."
갑옷 가슴 부위를 들고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어떻게 입는 거야?"
평생 갑옷 따위 걸쳐 본 일이 없는 탓이었다.
사령술사일 때야 갑옷은 방해가 될 뿐이니 입을 일이 없었고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후엔 갑옷보다 자신의 육체가 월등히 강하니 더욱 필요가 없었다.
"도와드릴게요."
건틀렛도 끼워 주고 매듭도 조여 주며 바로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르나크에게 갑옷을 입혔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선 뒤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위풍당당하십니다."
"...놀리는 거지?"
"당연히 놀리는 거죠. 설마 진심이겠습니까?"
깡마른 체구의 카르나크에게 갑옷을 입혀 놓으니 이건 중무장한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었다.
갑옷 틈새로 공간이 너무 남아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카르나크가 눈을 흘겼다.
"역시 네놈은 그냥 좀비나 구울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해 보시든가요. 저 없으면 도련님은 누구랑 노시게요?"
"쳇."
하여튼 카르나크는 갑옷 차림으로 앞뒤로 걸어 보았다.
팔도 들고 다리도 들어 본다. 허리춤의 칼도 뽑아서 가볍게 휘두른다.
"뭐야? 생각보다 무겁진 않네?"
그가 만난 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자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놈들, 죄다 허풍이었나?"
당연하다며 바로스가 대꾸했다.
"지금이야 그렇죠."
아무리 철제 갑옷이 무겁다 해도 걸친 것만으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엄연히 사람 입으라고 만들어 놓은 물건인데?
"그 차림으로 딱 5분만 쉬지 않고 달려 보십쇼. 그럼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카르나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5분이나 달려야 돼? 난 맨몸으로도 그렇게 오래는 못 달려!"
바로스의 안색도 굳었다.
"엥? 고작 5분인데요? 사지 멀쩡한 20살 청년이 5분도 쉬지 않고 못 달려요?"
100년 넘게 머리만 쓴 놈과 100년 넘게 몸만 쓴 놈의 거리감은 생각보다 더 컸다.
"이상하다? 예전에 도망칠 땐 잘 달리셨던 것 같은데?"
"그땐 사령력의 힘을 빌렸잖아."
"고작 산길 좀 뛰는 걸 가지고 사령술까지 썼던 거였어요?"
"사령술이라 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사령력으로 육체를 좀 강화한 수준?"
"...."
말문을 잃은 바로스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터트렸다.
"하이고, 갈 길이 멀겠네요...."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자, 그럼 기사 수행을 시작합시다!"
"말은 바로 해. 기사 수행이 아니야."
카르나크가 진지한 어조로 말을 바꿨다.
"어디까지나 기사 행세 수행이다."
#9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4)
갑옷을 걸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 첫 번째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체력 키우기죠."
몸이 받쳐 주지 않으면 절세의 비기를 익히고 있어도 아무 소용 없다. 아니, 애초에 익히지도 못한다.
"뛰십쇼, 연무장 가장자리 따라서."
"그 정도쯤이야...."
실내 연무장이다 보니 그다지 큰 공간은 아니었다.
한 20초? 그 정도 만에 한 바퀴를 돌 수 있었다.
갑옷 차림이라 확실히 발이 느리긴 느렸다.
"헉, 헉헉, 됐지? 그럼 다음은?"
헐떡대는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가 너 지금 뭐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49바퀴 더 도셔야 되는데요?"
"잠깐! 50바퀴를 돌라고?"
"설마 1바퀴 돌고 끝인 줄 아셨어요?"
"사람이 어떻게 50바퀴를 쉬지도 않고 돌아?"
"거 잡소리 참 많으시네. 마저 뛰기나 하십쇼."
"크으...."
울상을 한 채 카르나크는 다시 뛰었다.
한 3바퀴까진 그래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대신 뜀박질이 점점 느려졌다.
5바퀴쯤 되니 눈앞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슬슬 달리기보다 걷기에 가까운 동작이 되었다.
10바퀴째, 노랗던 눈앞이 캄캄해졌다.
"켁...."
다리가 꼬여 카르나크가 바닥에 훌렁 엎어졌다. 요란한 갑옷 소리가 연무장을 울려 퍼졌다.
우당탕!
"아이고...."
바로스는 얼굴을 감쌌다. 좌절감이 그를 덮치고 있었다.
"도련님이 체력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가 생겼다.
"근력 단련은 좀 미뤄야겠군요. 우선은 일반인 수준의 체력이라도 갖춰야 합니다."
바로스가 그를 강제로 일으켰다.
"자, 일어나서! 마저 뛰십쇼!"
"저, 정말 못 뛰겠는데?"
"포기하시게요? 지금이라도 야반도주 준비할까요?"
"아으...."
신음을 흘리며 카르나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로스의 말이 옳았다.
이 정도로 포기하기엔 현 상황이 너무 좋다.
"그래! 뛴다! 뛰어!"
***
열흘 뒤, 카르나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다, 다 돌았다!"
드디어 연무장 50바퀴를 쉬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실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바로스는 칼같이 초를 쳤지만.
"쉬지 않고 달린 거 아니잖아요? 후반 10바퀴 정도는 걷는 거나 다름없었으면서."
"그래도 쉬진 않았어!"
"뭐, 잘하셨어요."
바로스도 굳이 잔소리를 더 늘어놓지는 않았다.
사실 이 정도면 카르나크는 진심으로 수련에 임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운동과 담쌓은 육체에 고작 열흘 만에 이 정도로 체력이 붙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카르나크 본인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보단 부자가 된 덕에 영양 공급이 충실했다는 점이 컸다.
"역시 고기 잔뜩 먹이고 푹 재우면 체력은 잘 붙네요. 이래서 돈 많은 기사들이 그렇게 강했구만?"
"나도 좀 신기하더라. 나 원래 입 짧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우리야, 모든 밥이 다 맛있죠."
원래 몸을 단기간에 혹사시키면 입맛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혼까지 깃든 카르나크의 식탐은 육체의 한계마저 돌파한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속 더부룩하면 소화제까지 챙겨 가며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었다.
영양 공급이라는 측면에선 모범적일 정도로 충실하게 수행한 나날이었다.
덕분에 몸도 꽤 좋아져, 이젠 그냥 허수아비에서 '짚을 좀 채워 넣은 허수아비' 수준까진 변한 상태다.
카르나크를 위아래로 살피며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사람 구실은 하게 됐군요. 이제 체력 단련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순간 카르나크의 표정이 묘해졌다. 체력 단련이라니?
"내가 지금까지 한 건 뭔데?"
"재활요."
"...."
"적어도 갑옷 입고 5분은 전력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죠."
"나 지금 그렇게 한 것 같은데?"
분명히 갑옷 입고 5분이 훨씬 넘도록 쉬지 않고 달린(?) 카르나크였다.
"눈앞에서 칼날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랑 멍하니 달리는 거랑 같은 줄 알아요? 지금 수준이면 30초도 안 돼서 다리 풀릴 겁니다."
도로 암담해지는 걸 느끼며 카르나크가 따져 댔다.
"아니, 그럼 검술은 언제 익혀? 시간도 없는데."
이미 결투 날짜는 이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서두르셔야죠."
열심히 주인을 달래며, 충실한 시종은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본격적인 체력 단련을 시작합시다!"
***
카르나크의 일과는 단순했다.
일단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바로 연무장으로 직행해 팔굽혀펴기, 무거운 쇠막대 쥐고 휘두르기, 앉았다 일어나기 등등을 죽어라 시행.
이후 휴식을 취하다 점심 먹고 또 연무장으로 향한다.
밥, 휴식, 단련, 밥, 휴식, 단련밖에 없는 일상이었다.
"헉, 헉헉...."
오늘도 죽어라 쇠막대를 휘두르다 말고 카르나크는 문득 옆을 보았다.
무거운 중갑을 걸친 금발 청년이 대검을 휘두르며 똑같은 자세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로스 역시 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같은 처지라 카르나크를 단련시키며 본인도 수행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야, 바로스."
"네, 도련님."
"기사들은 다들 이렇게 무식한 훈련을 하고 사냐?"
바로스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그거, 기사 훈련 아닌데요."
"아니라고?"
그럼 자신만 이렇게 무식하게 굴렸단 말인가?
카르나크가 발끈하려던 차였다.
"그건 그냥 일반 병사용 훈련 코스인뎁쇼. 기사들이 그렇게 말랑하게 훈련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헉...."
기가 죽어 카르나크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생각해 보니 그는 세계를 정복한 사령왕임에도 휘하 기사나 병사가 훈련하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죄다 해골이거나, 썩다 만 시체거나, 아예 악령이거나, 데스 나이트였는데?
반면 바로스는 언데드가 되기 전부터 살아 있는 몸으로 카르나크와 함께 싸워 왔다. 기본적인 몸 만드는 법쯤은 숙지하고 있다.
"제가 하는 게 기사 훈련이죠."
카르나크 이상으로 현재 바로스의 육체는 변해 있었다.
카르나크가 먹는 양의 2배를 처먹으며 꾸역꾸역 몸을 만들고 있는데, 팔뚝 두께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부럽다는 듯 카르나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몸 금방 두꺼워진다? 왜 난 그렇게 안 되지?"
"이거 아직은 그냥 다 살이에요. 고작 며칠 만에 근육이 제대로 붙을 리가 없잖아요? 여기서 꾸준히 단련을 해야 근육으로 바뀌지."
"내가 보기엔 지금도 무식하게 두꺼워. 역시 저 정도 하니까 기사들이 다들 그리 우락부락한 건가?"
"이것도 정규 기사들에 비하면 강도 약한 건데요. 종자 시절 하는 수준이에요."
"...기사란 놈들은 다들 괴물이냐?"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로스가 반박했다.
"해골 움직여서 사람 목 따는 양반이 누굴 괴물이라고 하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몸 만들고 기술 익혀도 진정한 강자들에게는 사정없이 밀리기만 한 바로스였다. 차후에 카르나크의 힘으로 데스 나이트가 된 후에나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쳤지.
"딴청 피우면서 쉴 생각 마시고 계속 움직이십쇼! 휴식은 제가 허락할 때만 취하는 겁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시종인지 모르겠네."
투덜대면서도 카르나크는 열심히 바로스의 지시에 따랐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지났다. 카르나크 역시 갑옷을 입고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만큼의 체력은 붙었다.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검투 수련에 들어갈 시기군요."
결투 날짜까지 보름 남은 시점이었다.
***
드디어 검을 뽑는 것을 허락받았다.
살짝 들뜬 기분으로 카르나크는 훈련용 장검을 허리춤에서 길게 뽑아 들었다.
"이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거냐?"
"아직은 아닙니다."
검을 든 카르나크의 당면 과제는 이거였다.
"많은 거 안 바랍니다. 똑바로, 제대로 서 있기만 하십쇼."
"고작 그거?"
의아해하면서도 카르나크는 검을 들어 적을 겨누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작'이 아님을 깨달았다.
별거 아닌 줄 알았던 그 단순한 자세조차도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것이다.
"팔 흔들립니다요."
"무릎 더 구부리시고요."
"체중은 뒷발로."
"시선은 적 중심에."
"어깨에 힘 빼세요."
"검 쥔 팔에는 힘 더 넣으시고."
낑낑대던 카르나크가 발끈했다.
"어떻게 팔엔 힘을 주고 어깨엔 힘을 빼? 넌 팔이랑 어깨랑 따로 붙어 있냐?"
"...아오,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반나절을 투자하고서야 간신히 자세가 나왔다. 그나마도 조금만 신경 끄면 바로 흐트러지는 자세였다.
이대로라면 결코 제대로 된 위력의 참격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스는 일단 넘어갔다.
"지금 도련님 수준에선 올바른 자세로 검을 휘둘러 봐야 썰려 죽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어차피 이 훈련의 목적은 란돌프 경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일격에 목 날아가진 않을 겁니다."
바로스가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하나 들더니 카르나크를 겨눴다.
"제가 공격을 하겠습니다. 대비하세요."
눈을 빛내며 카르나크가 검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반격하라고?"
"반격이라...."
가소롭다는 듯 바로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일단 겪어 보셔야 이해가 되시겠네요."
순간 복부에 육중한 통증이 닥쳐왔다. 바로스가 대뜸 몽둥이를 찔러 넣은 것이다.
"컥!"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충격이 뚫고 들어와 내장을 뒤흔든다.
신음하며, 카르나크는 양팔로 배를 감쌌다.
"아프시죠?"
"그래!"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안 되죠. 어서 자세 다시 취하십쇼."
이를 갈며 카르나크가 재차 검을 겨눴다. 그리고 눈에 독기를 품었다.
'이번에는 몽둥이가 날아드는 틈을 노려 한 방 먹여 줘야지!'
그럴 틈 따위 없었다.
퍽!
"케엑!"
어깨에 일격을 허용한 카르나크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바로스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자세 취하시라니까요, 자세."
계속 매타작이 이어졌다.
바로스는 정말 사정없이 카르나크를 두들겼고, 카르나크는 그저 맞고 또 맞기만 했다.
반격?
어림도 없었다.
뭘 해 보기도 전에 후속타가 이어져 반격을 모조리 사전에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모든 공격이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어깨며 허리, 무릎 등을 툭툭 쳐서 끊어 버리는데, 당하는 입장에선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기사가 일반인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유가 이거예요. 기사라고 무슨 엄청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만으로 모든 공격을 다 막거나 피하는 건 아니거든요."
물론 저런 면도 있긴 하지만, 100퍼센트는 아니다.
"아예 공격도 못 하게 만들거나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격을 유도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가지고 노는 양상이 나오는 겁니다. 상대가 전투에 문외한일수록 더 쉽죠."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공격을 당해 자세가 흐트러져도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적어도 후속타가 들어오는 건 피할 수 있으니까요. 분명 란돌프 경과의 결투도 이 양상으로 진행될 겁니다."
"그렇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나크가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후속타에 대비하려던 찰나!
퍽!
또 처맞았다....
"야! 자세 취해도 후속타 못 막겠는데?"
"지금 도련님 수준에선 그렇겠죠."
"내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란돌프 놈도 내 목 못 딴다며?"
"그럴 리가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벨 수 있겠죠."
"그럼 대체 이 훈련은 왜 하는 거야?"
바로스는 씨익 웃었다.
"그 마음을 안 먹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파악한 란돌프는 자기과시가 강한 성격이었다.
상대를 충분히 가지고 놀 만한 실력인데, 게다가 구경꾼도 잔뜩 있는데 대뜸 목을 베진 않을 것이다.
"믿을 만한 근거도 있어요."
두 다리 잘린 파랄트가 그 증거였다.
충분히 목을 벨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자르기도 힘든 다리를, 그것도 둘 다 자른 걸 보면 란돌프의 성격을 익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이 전의를 상실해 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포기한 상대를 계속 가지고 노는 건 약자를 핍박하는 모양새가 된다.
"파랄트 도련님보다 훨씬 약한 전 가주님이 한 방에 목 잘린 이유가 이겁니다."
전 가주, 크라푸트 남작은 검술에 별로 소양이 없었다. 그 탓에 란돌프와 맞붙자마자 이내 전의를 상실했다고 들었다.
"그런 상대까지 가지고 놀면 오히려 자신의 명성이 깎일 테니 명예롭게 한 방에 보내 드린 거죠."
그러니 현재 카르나크의 훈련 목표는 이것이다.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상대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한 방에 죽이지 않을 테니까요."
#10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