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18. 심야의 사투 (2)
스산한 안개 사이로 유령 병사들이 움직인다.
섬뜩한 신음을 흘리며, 기괴한 어둠을 뿌리며 밤의 슬럼가를 미끄러진다.
"으어어어...."
"으으으...."
그럼에도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이곳에 사는 주민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여신이시여...."
"이게 대체 무슨...."
"얘! 창문 근처로 가지 마!"
다들 집 안 깊은 곳에 숨어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웬 음침한 로브 차림의 사내 두 놈이 땅바닥에 허연 안개 죽죽 깔면서 유령 군대를 잔뜩 거느린 채 살벌하게 걸어오고 있는데, 그 광경을 보고도 밖으로 나갈 마음이 들겠냐?
그 정도로 용맹한 전사의 심장을 가진 이는 애초에 이런 슬럼가에 살지도 않는다.
덕분에 케일과 올트는 아무 제지 없이 슬럼가 깊이 들어올 수 있었다.
주위를 살피며 올트가 물었다.
"저쪽은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이 정도로 일을 벌였으니 사령술사라면 당연히 사태를 감지했을 터였다.
"놈의 특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홍염단의 보고에 따르면, 로이드 왕자 측 사령술사는 악령을 부르기 앞서 좀비 무리를 내세워 압박하는 방식부터 썼다고 했다.
"일단 전형적인 술법이긴 한데...."
미심쩍다는 듯 케일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환각에 걸렸을 가능성이 크지?"
사령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좀비를 다루는 수법이다.
시체를 일으켜 새로운 죽음을 낳는 그 추악한 광경이야말로 사령술사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
딱히 편견도 아닌 것이, 실제로 워낙 쉬운 술법이기도 했다.
시체를 일으켜 조종하는 건 진짜 최하급 사령술사라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령술의 지식 없이 어둠의 힘만 지닌 이들이라도 간혹 '절실히 바라는 것'만으로 가능할 지경인 것이다.
몰라도 할 수 있고, 알면 더 편하게 할 수 있고, 힘은 별로 안 드는데 효율은 최고.
문제는 이 술법에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케일은 정확히 그 점을 짚었다.
"수도에서 그 정도 숫자의 시체를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어."
좀비 조작술은 있는 시체를 일으켜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없는 시체를 만드는 수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항상 시체를 휴대하고 다닐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공동묘지나 전쟁터 같은 특정 장소가 아닌 한 좀비 조작술은 크게 유용한 수단이 되질 못한다.
"아마도 실제 주특기는 악령을 다루는 강령술 쪽이겠지?"
"환각까지 덧붙인 걸 보면 그리 강한 술사는 아니야. 정면으로 붙으면 우리 상대는 아닐 터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어 기습을 노리겠군?"
"그게 바람직한 사령술사의 모습이긴 하지."
히죽거리며 케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퍼런 혼령불에 휘감긴 수십의 유령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다.
"가라, 나의 하수인들아...."
손짓에 따라 유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둠의 명에 따라 네 주인의 적을 찾아라!"
***
무수한 망령들이 밤거리를 가르며 곳곳을 누벼 간다.
애초에 영혼. 벽이나 지붕 따위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벽을 뚫고 바닥에서 솟구치고 천장에서 흘러내리며 거리낌 없이 집과 집 사이를 통과해 지나간다.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건 아니고 그냥 살펴보며 지나칠 뿐이지만 숨어 있던 주민들에겐 실로 공포의 광경이리라.
유령 병사들이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억지로 입을 틀어막으며 벌벌 떨었다.
"...!"
"흐윽...."
모습을 숨긴 채 거리 한편에서 상황을 살피던 세라티가 인상을 썼다.
"악랄한 놈들, 상관없는 주민들까지 휘말리게 하다니...."
반면 바로스는 감탄하고 있었다.
"사령술사치곤 상당히 착하네요!"
"착하다고요?"
"주민들은 무시하고 지나치잖아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주민들은 적도 아닌데, 해칠 필요가 없잖아요?"
"필요는 있죠, 사실."
바로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1명 죽일 때마다 써먹을 시체가 하나씩 생기잖아요."
"...."
세라티는 말문을 잃었다.
저런 식으로는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사령술사란 족속들은 원래 다들 그런 식인 거예요?"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도련님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저 사교도들이 착해서라기보다는,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긴 쉽지 않은 것이다.
그건 진짜 어지간히 썩어 빠진 악당이어야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그런데 그 썩어 빠진 악당이 내 영혼의 주인이네. 아이고, 내 팔자야....'
세라티의 표정에서 내심을 읽었는지 바로스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다.
"요샌 도련님도 많이 개과천선하셨잖아요."
"개과천선해서 그 정도라는 게 문제거든요!"
그러는 동안에도 유령들은 계속 슬럼가를 파헤치고 있었다.
점점 놈들이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곳에 가까워진다.
"슬슬 때가 됐군요."
대걸레를 고쳐 쥐며 바로스가 눈을 빛냈다.
"계획대로 움직입시다."
***
문득 케일이 고개를 들었다.
랜턴 속에서 푸르게 타오르던 혼령불이 일순 흔들린 탓이었다.
"망혼 하나가 당했다."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긴장하며 올트가 물었다.
"어디지?"
"저쪽이군."
방향을 확인한 케일이 모든 유령 병사들을 그곳으로 집결시켰다.
'가라, 나의 하수인들아!'
그렇게 망혼들을 먼저 보낸 뒤 두 사람도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유령 병사들이 가득 모인 광경이 보였다.
슬럼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공터였다.
도착해 보니 이미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헙!"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은 머리의 사내가 검을 뻗어 간다.
덤벼들던 유령 병사 하나가 일격에 흩어지며 귀곡성을 터트린다.
"끼아아아악!"
소멸하는 유령 뒤로 다른 놈들이 몰려와 검을 휘둘러 댔다.
반투명한 영적 칼날이 막 사내를 노리려는 찰나, 붉은 머리의 여인이 빠르게 막아 냈다.
"흥!"
코웃음과 함께 장검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유령의 칼날을 부수고 지나간다.
그때마다 유령들이 연신 귀곡성을 내지른다.
"아아아악!"
사방에서 몰려오는 유령 병사들을 상대하면서도 둘 다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전혀 몰리는 기색 없이, 실로 효율적인 동작만으로 영체인 유령 병사들을 연신 베어 갈 뿐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저들의 장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어둠의 기운 때문.
상황을 살피던 케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로이드 왕자 쪽 사령술사인가?"
올트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군."
일단 겉보기엔 평범한 검사 같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검은 로브 뒤집어쓰고 다녀야 한다고 누가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복장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물론 케일과 올트는 검은 로브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이는 온갖 사령술용 촉매를 잔뜩 챙겨 다녀야 하는 직업적 특성상 로브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굳이 검은색인 이유는 어둠과 죽음의 기운이 시꺼멓다 보니 그냥 색깔 맞춘 것이고.
지나치게 검술이 뛰어난 점 역시 납득할 수 있는 범주다.
사령술사 중엔 스스로를 강화해 근접전을 펼치는 무투파도 있으니까.
"어둠의 힘을 쓰고 있으니 사령술사인 것 같긴 한데...."
단지, 굉장히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케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대체 뭐지?"
유령을 베어 가는 사내의 다른 쪽 손에 웬 대걸레가 한 자루 쥐여 있었다.
"저건 또 뭐고?"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아하게, 한손 검술을 열심히 피력하고 있는데 반대쪽 손에 프라이팬 하나를 덜렁 들고 있다.
올트가 눈을 깜빡였다.
"...사령술의 일종인가?"
"그, 글쎄."
사령술이라면 뭔가 사기나 탁기가 흘러나와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봐도 그냥 대걸레고, 그냥 프라이팬이었다.
심지어 저걸 무기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들고만 있다.
그 탓에 괜히 한 손을 못 써 불리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왜?'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군.'
그러는 동안에도 유령 병사들은 계속 쓰러지고 있었다.
둘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지!"
이미 다수의 유령 병사들을 이용해 상대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사역마를 추가로 투입할 필요는 없다.
케일이 양팔을 펼치며 사령력을 끌어 올렸다.
"망자여, 눈을 떠 혼돈의 손을 뻗어라!"
핏빛 어둠이 넘실대며 케일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바닥에서 섬뜩한 형상의 손들이 솟구쳤다.
무수한 지옥의 손길을 불러내는 사령결계, '가라앉는 망자의 늪'이었다.
'어?'
느긋하던 바로스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
'이걸 펼칠 정도면 진짜 수준급인데?'
그동안 만났던 사교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하긴, 일국의 왕족에게 접근할 정도면 교단 내에서도 상당히 고위급이겠지.'
뭐, 그렇다고 긴장해야 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이 역시 그에겐 충분히 익숙한 수법이었다.
'오랜만에 스텝이나 좀 밟아 봐야겠네.'
일단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후우우...."
괴상한 기합과 함께 바로스의 움직임이 변했다.
"헛! 홋! 호잇!"
좀 전까지 진중하게 중심을 잡고 검을 휘두르다가, 돌연 마치 춤을 추듯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케일과 올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엥?'
마치 아리따운 무용수 흉내를 내는 것 같달까?
우락부락한 사내놈이 망자의 손길 사이를 사뿐사뿐 이동하는데 참으로 눈 뜨고 못 볼 꼴이다.
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망자의 손길 사이로 비껴 걸어가며 다시 유령 병사들을 베어 낸다.
"끄아아아아!"
귀청 가득 울리는 처절한 귀곡성에 케일의 안색이 더욱 일그러졌다.
'맙소사, 가라앉는 망자의 늪이 저렇게 쉽게 파해할 수 있는 거였어?'
붉은 장발의 여인, 세라티 쪽도 통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허어업!"
우렁찬 기합을 토하며 바닥을 질끈 밟아 간다. 그때마다 망자의 손길이 박살 나 흩어진다.
바로스처럼 우아하게(?)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식하게 밟아 으깨 버리는 것이다.
쾅! 쾅! 콰쾅!
올트가 혀를 찼다.
"남녀가 바뀐 듯한 광경이군...."
곰도 맨손으로 때려잡게 생긴 놈은 스치면 다칠세라 죽어라 피하기만 하고 있는데, 톡 치면 쓰러질 것 같은 가녀린 미녀는 두더지 잡기 하듯 망자의 손을 하나하나 때려잡고 있다니?
그렇다 해도 워낙 사령결계의 범위가 광범위하다 보니 점점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연신 후퇴하던 바로스와 세라티가 결국 등을 맞댔다.
'휴우....'
'이제야 붙잡았나?'
막 케일과 올트가 한시름 놓으려던 차였다.
갑자기 바로스와 세라티가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우렁찬 기합을 터트리며 손에 쥔 대걸레와 프라이팬을 하늘 높이 던진다!
"헙!"
"타앗!"
그리고 곧바로 장검을 바닥에 꽂는다.
간헐천이라도 터진 듯 어둠이 솟구치며 거대한 파도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아앗!
방대한 어둠의 파도 앞에 핏빛 늪은 깔끔히 씻겨 나갔다.
위험에서 벗어난 바로스와 세라티가 도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던졌던 대걸레와 프라이팬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손에 도로 잡혔다.
대걸레를 빙빙 돌리며 바로스가 조롱을 건넸다.
"이 정도 수법으로 우릴 어쩔 수는 없을걸."
케일의 안색이 더욱 굳었다.
나름 자신 있던 술법이었는데 너무 쉽게 박살 나 버렸다.
특히나 문제인 점은,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다.
'무슨 수법인지 전혀 짐작이 안 가!'
그간 배워 온 사령술의 지식을 총동원해도, 저 대걸레와 프라이팬이 대체 사령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케일 대신 올트가 나섰다.
로브를 벗어 던지며 사령력을 끌어 올린다.
"내가 처리하지!"
팔다리에서 뿔과 촉수가 돋아나며 올트의 덩치가 3배 이상 커졌다.
"지옥의 힘이여, 내게 임해 혼돈의 권능이 되어라!"
악마의 형상이 된 그의 입에서 괴물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71화. 18. 심야의 사투 (3)
악마의 형상이 된 올트를 보며 바로스는 혀를 찼다.
'저거 꽤 어려운 건데. 저놈도 수준이 높구만.'
악마화 술법은 어지간한 사령술사라면 다들 할 수 있다.
악마화 자체는 꽤나 쉬운 편에 속한다. 어려운 건 도로 인간화되는 쪽이지.
악마화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이유가 이것이다.
악마로 변한 사령술사 대부분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결국 미쳐 날뛰게 되는 것이다.
반면 올트가 시전한 것은 악마화 술법 중에서도 최고위에 달하는 사령술, 데모닉 메타몰포제였다.
술자의 정신은 유지한 채 악마의 힘만 강신시키는 고난이도의 수법이다.
"크아아아!"
포효를 울리며 올트가 바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더라도 아직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바로스에겐 꽤나 버거운 상대.
그가 재빨리 세라티에게 눈짓을 했다.
[얘 좀 맡아요!]
[네!]
그녀가 잽싸게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역시 마법 전언 체계가 있으니 손발 맞춰 싸우기 편했다.
"당신 상대는 나야!"
어둠이 깃든 칼날이 올트의 눈앞을 베어 갔다.
재빨리 고개를 틀어 피한 뒤 올트가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 정도 육체 강화로 이 몸의 상대가 될 것 같으냐?"
그의 자신감엔 근거가 있었다.
괜히 예전에 카르나크가 '멀쩡하게 생긴 사령술사가 강할 리가 없잖아?'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령력으로 육체를 강화할수록 술자는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게 된다.
"진정한 어둠의 힘을 보여 주마!"
양손의 손톱을 칼처럼 세운 뒤 올트가 폭풍 같은 기세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그런데, 의외로 세라티는 잘도 받아치고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자잘한 공세는 튕겨 내고 위력이 실린 일격은 흘려 낸다. 그러면서 연신 올트의 주위를 돌며 검격을 펼치는데, 실로 백중지세다.
올트로선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왜, 왜 이렇게 힘이 세지?"
세라티의 겉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즉, 육체 강화를 해 봤자 별 볼 일 없다는 증거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괴력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웃었다.
'그야, 사령력으로 강화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사령술사로 위장하기 위해 세라티는 일부러 오러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체내에서만 순환시키며 신체 능력을 강화할 뿐이니 실제론 원래 실력의 반의반도 쓰지 못하는 상태.
하지만 그조차도 사령력으로 육체 강화한 것에 비하면 월등히 효율이 좋은 것이다.
공세를 주고받으며 미녀와 악마는 치열하게 전투를 이었다.
연신 폭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쾅! 콰쾅! 쾅!
답답해진 올트가 다시 한번 사령력을 끌어 올렸다.
"건방진 년! 일격에 소멸시켜 주마!"
끌어 올린 어둠의 힘이 악마의 입을 통해 번개처럼 쏘아졌다.
세라티의 안색도 살짝 굳었다.
'이건 못 피하겠네.'
오러를 드러내면 막을 수 있겠지만, 그럼 정체가 들키지.
그러니 비장의 무기를 쓴다!
"흥!"
코웃음을 치며 세라티가 프라이팬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크게 한 번 돌리더니!
"타아앗!"
우렁찬 기합과 함께, 프라이팬은 도로 내리고 그냥 검으로 푹 찔러 갔다.
순간 칼날에서 검붉은 혈기가 피어올라 올트의 공세와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거리 전체가 흔들리며 올트의 공세가 깔끔히 소멸되었다.
당황한 그의 시선이 자연히 세라티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저걸로 대체 뭘 하는 거냐고!'
***
바로스는 계속해 케일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확하게 세라티와 정반대였다.
케일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령술을 구사하는 자.
멀리서 악령으로 자신을 지키며 망혼의 호롱을 이용해 유령 병사들을 보낸다. 자신은 안전한 곳에서 적만 해치우려는 것이다.
워낙 숫자 차이가 크다 보니 바로스는 계속 망혼의 공세에 밀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엽편주, 폭풍 만난 가랑잎 같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딱히 불리해진 것도 아니었다.
'폭풍이 아무리 세다 한들 가랑잎을 찢을 순 없지.'
밀리고 흘리고, 또 밀리고 흘린다.
흐름을 타고 유려하게 움직이며 오로지 적과 자신의 사각으로 빠지는 데만 전력을 다한다.
만약 무에 뜻을 둔 자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그 드높은 경지에 절로 경탄을 토해 냈으리라.
물론 무술 따위 관심 없는 케일에겐 그저 혈압 올라가는 광경일 뿐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이 요리조리 도망만 다니는구나!"
"그 쥐새끼 하나 못 잡는 네놈이 더 문제 아니냐?"
비아냥거림으로 화답하며 바로스는 주위의 유령 병사들을 살폈다.
말은 저렇게 했어도, 그 역시 계속 도망만 다닐 생각은 없었다.
'틈틈이 체력 보존은 해야지.'
기회를 틈타 바로스가 대걸레를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바로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칼날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와 망혼들을 덮쳤다.
장막에 휩싸인 유령 병사들이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캬아아악!"
마치 염산이라도 뒤집어쓴 듯 유령들이 빠르게 녹아내린다.
케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또 저거냐?"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유령 병사들로 몰아붙이다 보면 저 정체불명의 사령술을 펑 터트려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다시 도망, 도망, 도망.
그래서 케일도 계속 상대의 수법을 파악하려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지만 영 성과가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어!'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대걸레였다.
사기나 탁기 따위 없다. 아무런 어둠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전조를 읽을 수도 없고, 힘의 흐름도 파악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뭔가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저 술법은 정체가 뭐란 말이냐!'
***
공터에서 한 블록 떨어진 슬럼가의 허름한 건물 옥상.
"모르겠지?"
원견 주문을 통해 상황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무렴, 몰라야 정상이지."
좋은 거짓말에는 두 종류가 있다.
누가 봐도 그럴듯해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거짓말.
또 하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설마 저렇게까지 하진 않겠지 싶은 뻔뻔한 거짓말이다.
이번 거짓말은 후자 쪽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모르겠다고? 전조조차 읽을 수 없다고?
당연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진짜로 평범한 대걸레이고 프라이팬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좋은 것이지만.'
전투 내내 카르나크는 몸을 숨긴 채 사령술로 바로스와 세라티를 보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도 사령술사이니만큼, 잠깐은 속을지 몰라도 결국은 사기며 탁기의 흐름 등으로 금방 상황을 눈치챌 터였다.
그러니 주의를 돌려줘야 한다.
미스디렉션이야말로 사령술사의 필수 교양.
대걸레와 프라이팬은 실로 훌륭한 시선 집중용 도구였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아무리 봐도 정체를 모르겠으니, 더더욱 시선이 그쪽으로만 쏠리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순진한 애들만 걸리면 세상 참 편하게 살 텐데 말이야.'
그렇다 해도 이게 영원히 통할 리는 없다.
상황을 지켜보며 카르나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슬슬 눈치챌 때가 됐는데?'
***
먼저 눈치챈 쪽은 케일이었다.
"알았다!"
근접전을 펼친 채 세라티와 정신없이 치고받는 올트와 달리, 케일은 거리를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야가 상대적으로 넓으니 상황 파악도 상대적으로 빠르다.
"속지 마라, 올트!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막 세라티의 일검을 피해 낸 올트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도 저 프라이팬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래, 그냥 우리 신경을 돌리려는 수작이다!"
올트 역시 사령술사, 미스디렉션의 중요성은 익히 알고 있다.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 거였군! 영악한 놈들!"
이놈들은 그저 주구일 뿐이다. 어딘가에 진짜 사령술사가 따로 있다.
'처음부터 전제가 잘못되었으니 수법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거리를 벌리며 올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케일도 바로스가 아닌 공터 전체의 사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태도가 변한 걸 느낀 바로스와 세라티가 전언을 나눴다.
[어라, 눈치챘나?]
[서둘러야겠네요.]
바로스가 대걸레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화려하게 휘두르며 무한의 궤도를 그린 뒤 진각을 밟으며 하늘을 곧게 찔렀다.
"헛!"
세라티 역시 프라이팬 손잡이를 손아귀 안쪽에서 돌리며 보란 듯이 휘둘러 댔다.
"에잇!"
일견 거창한, 그럴듯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케일과 올트도 더 이상은 현혹되지 않았다.
"이미 파악했다!"
"이제 와서 속을 것 같으냐!"
눈앞의 대걸레며 프라이팬 따위 깔끔히 무시하고 오직 어둠의 흐름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고 나니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터 저편에서 도적처럼 은밀하게 스며드는 진정한 사령력을!
"테스라낙이여!"
어둠의 신을 부르짖으며 둘은 방대한 어둠을 토해 냈다.
발동하려던 사령결계가 박살이 나며 폭음이 일었다.
콰아아앙!
"훗! 어떠냐!"
하지만 케일도 올트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정확하게 여기까지가 카르나크가 노렸던 시나리오라는 것을.
"정답 발견해서 신났죠? 눈에 그거밖에 안 보이죠?"
한 블록 떨어진 장소에 서서 카르나크는 실실 웃었다.
대걸레를 휘둘러 대는데 그걸 그냥 무시한다고?
"아니, 그래서 평범한 대걸레는 뭐, 맞으면 안 아프대냐?"
대걸레를 쥔 채 바로스가 케일의 등 뒤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케일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카르나크의 사령술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틈을 노려 대걸레 자루를 케일의 뒤통수에 작렬!
빡!
인간의 의식을 끊는 데 엄청나게 강력한 위력까진 필요 없다.
그저 의식의 바깥에서, 전혀 예상 못 한 한 방을 날려 주기만 하면 된다.
단 일격에 케일의 전신이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끄어어어...."
올트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세라티의 프라이팬이 그의 두개골을 절묘하게 노렸다.
물론 올트는 악마화 상태이니 방어력도 그만큼 높다. 그냥 쇳덩이 휘두른다고 기절하진 않는다.
그러니 반짝반짝 예쁘게 붉은 오러를 덧씌운다!
깡~!
맑고 고운 타격음이 밤하늘 높이 영롱하게 울려 퍼졌다.
***
'끝났네.'
카르나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왕자님."
"놈들을 심문하는 것인가? 그럼 나도 가겠다."
막 뒤따르려는 로이드를 카르나크가 만류했다.
"왕자님은 여기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른 사령술사가 숨어 있다가 왕자님을 노릴 수도 있으니까요,"
진짜 이유는 심문하는 모습을 왕자에게 보일 수 없어서이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저런 경우는 은근히 흔하다.
왕자도 바로 납득했다.
"그렇겠군. 그럼 난 계속 몸을 숨기고 있겠네."
건물을 나와 카르나크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터에 도착하니 칠흑의 기운에 꽁꽁 묶인 케일과 올트가 보였다.
둘 다 얼마나 호되게 맞았는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깨울까요, 도련님?"
"응."
바로스가 케일과 올트의 뺨을 연달아 후려갈겼다.
이내 정신이 든 두 사령술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카르나크를 보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진짜 사령술사야!'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사악한 기운이 풀풀 풍겨 나온다.
사령술사인 두 사람에겐 특히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운이다.
케일과 올트가 눈빛을 교환했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붙잡힐 순 없었다. 죽으면 죽었지 교단에 누를 끼칠 순 없는 것이다.
각오를 다진 두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테스라낙이시여!"
"당신의 품으로 귀의하옵니다!"
순간 두 사내가 피를 사발로 토하며 풀썩 쓰러졌다.
검은 신의 교단 특유의 자살용 술법, 심장 폭발이었다.
뭐, 아무도 놀라진 않았다. 그저 어이없어했을 뿐.
"얘들이 제정신인가? 자기들도 사령술사면서 비밀을 지키겠다고 자살을 해?"
혀를 차며 카르나크가 오른손을 들었다.
어둠의 손이 바닥에서 솟구치며 이내 허공에 두 사내의 영혼이 드러났다.
칠흑의 손이 영혼의 볼따구를 하나씩 쥐고 질질 끌어오기 시작한다.
"컥!"
"으억!"
그대로 두 영혼을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며 카르나크는 히죽 웃었다.
"자, 우리 나눌 이야기가 좀 많지?"
두 영혼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72화. 19. 마법의 사령술사
붙잡힌 케일과 올트의 영혼이 통째로 어둠 속에 흡수된다.
그렇게 두 영혼을 갈무리하는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가 물었다.
"이 시체들은 어쩔까요, 도련님?"
영혼이 빠져나갔어도 사령력 자체는 여전히 시체에 남아 있다.
"평소처럼 사령력 빼먹고 불태웁니까?"
"그게 제일 무난하긴 하겠지만...."
잠시 고민하던 카르나크가 결정을 내렸다.
"일단 챙겨 가자."
사령술사에게 시체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법이다. 특히나 사기가 충만한 시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직 적이 1명 남아 있으니까."
로이드 왕자의 말에 따르면 알포드 측 사교도는 총 3명이었다.
40대 사내 둘과 50대 중반 1명.
개중 저 50대 중년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나 마나 이놈들을 미끼로 던져 놓은 뒤 상황을 살피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주위를 힐끔거리며 세라티가 대꾸했다.
"끼어들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닐까요?"
이미 전투는 끝나 버렸다. 이제 와서 기습해 봐야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기다렸다가 이쪽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습격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입장이 반대였다면 저라도 그렇게 했겠죠."
카르나크가 공터 저편으로 턱짓을 했다.
"자리를 옮기자고. 심문도 하고, 손님맞이 준비도 해 둬야 하니."
지시가 떨어지자 바로스와 세라티가 각자 시체를 1구씩 짊어졌다.
덤으로 망혼의 호롱도 챙겼다.
랜턴을 내려다보며 바로스가 피식 웃었다.
"킹스 오더에 제출할 증거물로 딱이구만요."
***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한 건물의 옥상.
"이런...."
데츠라스는 어둠 속에 쪼그려 앉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저렇게까지 순식간에 두 놈 다 쓰러질 줄 알았나."
뒤늦게라도 상대의 수법을 파악하고 반격하기에, 이제야 기회가 왔구나 싶어 타이밍을 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퍽퍽 처맞더니 그냥 상황 종료된 것이다.
뭘 해 볼 틈도 없었다.
물론 그 전에도 개입할 시간적 여유는 제법 있었다. 하지만 내내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역시 대걸레와 프라이팬에 현혹되어 있었던 것이다.
'쯧, 아무리 사령술사라지만 저렇게 저열한 수작을 부리다니.'
저 멀리 카르나크 일행이 부하들의 시체를 챙겨 공터를 떠나는 모습이 보인다.
데츠라스는 고민에 잠겼다.
'이제 어쩐다?'
상대가 약하다면 딱히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라도 공격해서 해치워 버리면 되니까.
상대가 강하다 해도 마찬가지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땐 미련 없이 도망가야지.
아무리 교단의 명이 지엄해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저놈은 약한 건지 강한 건지 도통 모르겠군.'
뭘 제대로 보여 준 게 없다. 그저 심리전만으로 케일과 올트를 제압했으니 판단할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어쨌거나 이대로 놓칠 순 없지.'
데츠라스가 천천히 어둠 속을 미끄러져 갔다.
***
카르나크 일행이 시체를 끌고 온 곳은 슬럼가 건물의 한 낡은 홀.
로이드 왕자가 숨어 있는 장소에서 한참 떨어진 또 다른 은신처였다.
홀 안에 시체를 내려놓으며 바로스가 물었다.
"왕자님을 혼자 놔둬도 될까요?"
"할 수 없잖아. 왕자가 보는 앞에서 사령술 쓸 수도 없고."
"그러다 저쪽이 왕자님을 노리면 어쩌시려고요?"
아직 사교도 중 1명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지적한 바로스의 말에 카르나크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괜찮아. 실은 그 용도로 혼자 남긴 것이기도 하니까."
말하자면 계획대로 안 될 경우를 대비한 예비용 미끼란 소리.
"어쨌든 우린 우리대로 할 일을 해야지."
카르나크가 어둠을 피우자 이내 케일과 올트의 영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생전의 형태를 완전하게 취한 두 유령을 보며 세라티가 중얼거렸다.
"꽤나 건강해 보이네요. 유령이 건강해 보인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뭐, 상태가 좋은 건 사실이니까."
죽자마자 바로 제압해 영혼을 보존했으니 기억이 흐려지거나 할 일도 없으리라.
사기를 천천히 흘리며 카르나크가 음산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 일단 신상명세부터 싹 좀 읊어 봐라."
참으로 대충인 명령이었다.
그래도 워낙 강령술에 도통해 있으니 즉각 반응이 나온다.
"제 이름은 케일 바오슨, 데츠라스 주교 직속으로...."
"저는 올트 겔파란트, 휴델 예하의 명을 받아...."
덕분에 유스틸 왕국에 잠입한 검은 신의 교단에 대해 제법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유스틸 왕국 담당자는 휴델 그렌탈 추기경이며, 이번 사건에 개입한 이는 그 직속 수하인 데츠라스 주교.
데츠라스는 점조직으로 이루어진 사교도 중에서 상부와 연이 닿을 정도로 높은 지위였다. 그만큼 사령술사로서의 능력 또한 강대하며....
"마법사이기도 했단 말이지?"
일개 농민이었다가 사령술사가 된 케일, 올트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보니 금방 높은 지위에 오른 모양이었다.
"마법과 사령술을 함께 쓴다라, 어떤 방식인지 궁금하군."
카르나크 자신도 혼돈마력을 이용해 마법과 사령술을 함께 구사하고 있다.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그래도 지금은 더 궁금한 것부터 해결해야지."
보통은 이런 경우, 적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세력은 얼마나 되는지가 가장 중요한 안건일 터다.
그러나 카르나크에겐 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문제가 있었다.
"말해라."
제압한 영혼에 사기를 부여하며 그는 눈을 빛냈다.
"대체 무슨 수로 두 왕자의 영혼을 바꾼 거지?"
소울 체인질링 자체는 카르나크도 익히 아는 사령술이다.
너무 잘 아는 나머지, 지금 이 자리에서 20개도 넘게 다른 방식의 술법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체 무슨 수로 왕실 깊숙한 곳에서 보호받고 있는 로이드 왕자에게 저주를 건 거야?"
로이드와 알포드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영혼을 바꾸는 건 쉽다. 당장 현재의 카르나크도 바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원거리에서, 그것도 마법과 신성술로 보호받고 있는 상대의 영혼을 뽑아내는 건 사령왕 시절의 카르나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능하긴 하지. 그냥 보호 결계 다 박살 내고 저주 때려 박으면 되니까."
검은 신의 교단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아무런 흔적 없이, 은밀하게 두 왕자의 영혼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
사령왕조차 모르는 사령술을 구사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음, 말하고 보니 어째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이거?"
예전 슈트라프 주교와 싸울 때 비슷한 소릴 한 기억이 있다.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나크는 대답을 종용했다.
"말해라. 무슨 수법을 쓴 거냐?"
케일이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왕자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건 알아. 무슨 저주이기에 그렇게 먼 거리에서 성공한 거냐고."
올트가 넋 나간 눈빛으로 대답을 이었다.
"원거리에서 저주를 걸지 않았습니다. 우린 왕자를 정해진 결계 안에 앉힌 뒤 촉매를 통해 저주를 걸었습니다."
"...로이드 왕자를 납치했었다고? 그런 말은 없었는데."
의아해하는 카르나크를 향해 케일과 올트가 말을 이었다.
"로이드 왕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저주를 건 대상은 알포드 왕자였습니다."
알고 보니 이런 식이었다.
이들이 시전한 술법은 '가장 가까운 혈통과 영혼이 바뀌는 저주'.
이를 알포드 왕자에게 건 것이다.
말하자면 알포드가 저주의 피해자 역할인 셈이다.
그리고 저주는 그 특성상 피해자에게 온갖 복잡한 결계와 촉매, 술법을 걸어야 한다.
반면 로이드 왕자는 저주의 수혜자.
저주를 거는 대상이니만큼 아무래도 피해자보다는 상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 적다.
"원 참, 그런 식으로 조건을 맞춘 거였어?"
이해한 카르나크가 혀를 찼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허약한 육체의 소유자, 항상 알포드 왕자의 건강한 육체를 부러워한 로이드는 저주의 수혜자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왕자 본인을 납치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로이드 왕자의 피를 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지요."
바로스가 의아해했다.
"왕자의 피 역시 그리 쉽게 구하진 못했을 텐데요? 왕궁으로 잠입해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분명 평범한 왕족이라면 그의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 왕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조금만 과격하게 움직여도 코피를 쏟는 허약 체질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피 묻은 손수건이며 옷가지가 매일 나오더군요."
"너무 흔한 일이다 보니 왕궁에서도 관리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설명을 듣던 카르나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말은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
"저주의 수혜자라도 최소한 본인의 의사가 저주에 반영이 되어야 해. 하지만 로이드 왕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케일과 올트가 번갈아 대답했다.
"데츠라스의 마법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는 마법과 사령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자."
"마법의 거울로 로이드 왕자를 투영한 뒤 저주 당사자와 소울 링크 상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알포드 왕자에게 저주를 걸었지요. 마치 로이드 왕자 본인의 의사인 것처럼 가짜 인격을 만들어서."
카르나크는 눈을 깜박였다.
"마법?"
생각해 보니 앞뒤가 맞았다.
사령술로는 불가능한 것이라도 마법으로는 가능하다. 그리고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사령술로는 가능하지.
그러니 사령술과 마법이 서로의 빈틈을 메워 주는 식으로 저주를 완성한다면....
"어? 말이 되네?"
일단 발상을 듣고 나니 당장 카르나크 자신도 가능한 수법이었다.
그 역시 혼돈마력으로 마법과 사령술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지 않은가? 미처 생각만 못 했을 뿐이다.
"과연, 마법과 사령술이 공존하면 이런 비상식적인 짓도 할 수 있군."
듣고 나니 왜 굳이 왕자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고 사실 확인을 시켰는지도 알겠다.
"로이드 왕자가 저주의 주체인 셈이니, 의식을 완성시키는 것도 왕자 본인이 되어야겠지. 그래, 이해가 간다."
궁금증을 해결한 카르나크가 턱을 매만졌다.
저런 편법적인 저주가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마법과의 융합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평소에도 로이드가 알포드 왕자의 육체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왕자답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육체를 바꾸고 싶다는 사념이 항상 깔려 있었기에 가능했던 저주다.
그만큼 둘의 육체가 바뀔 경우 로이드에게만 이득이 되니까.
실제로 비슷한 이야기를 왕자와 하기도 했다.
***
"범인이 로이드 왕자님이었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겁니다."
카르나크의 푸념에 로이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네. 실은 나도 별로 피해자란 느낌이 들지 않고 있거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왕자는 말을 이었다.
"알포드가 내 몸을 빼앗은 뒤 왕위를 대신 차지해? 그 고물 같은 몸으로? 무엇 하러?"
알포드 왕자가 왕위에서 거리가 먼,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라면 혹여 그럴 수도 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때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법이고,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크게 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정말 그런 거라면 알포드 녀석, 지금쯤 크게 후회하고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로이드는 선을 그었다.
"그냥 나를 죽이면 알포드는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어. 타고난 건강한 육체를 포기하지 않고도 말이지."
***
'확실히 알포드 왕자는 로이드 왕자와 육체를 바꿀 이유가 전혀 없지.'
오죽하면, 반대로 행했는데도 저주가 성립될 정도가 아닌가?
그만큼 둘 사이의 격차는 크다.
'그런데도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 이거지?'
첫 번째 호기심을 해결했으니 이제 두 번째 문제.
"말해라."
카르나크는 재차 심문을 이어 갔다.
"그럼 알포드 왕자는 왜 로이드 왕자와 육체를 바꾼 거냐?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때였다.
갑자기 홀 한쪽이 무너져 내리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73화. 19. 마법의 사령술사 (2)
무너진 벽을 통해 지독한 사기와 한기가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검은 기류로 몸을 감싼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을 노려보며 사령술사, 데츠라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지?"
홀 반대쪽에 바로스와 세라티, 카르나크가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토록 큰 폭발이었는데 티끌만큼의 상처도 없다. 확실하게 몸을 날려 피한 것이다.
미리 예측하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강령술을 구사하고 있었거늘...."
강령술을 쓰는 동안엔 술사의 감지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일부러 심문이 시작된 뒤를 노렸는데, 이렇게 쉽게 알아챘다고?
카르나크가 빙그레 웃었다.
"타이밍은 잘 잡은 거 맞아."
실제로 심문 도중이라 감지 능력이 크게 떨어지긴 했다.
문제는 그 '크게' 떨어진 감지 능력조차도 최대한 집중한 다른 사령술사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이다. 명색이 왕년의 사령왕 아닌가?
홀 저편에서 사령력 모이는 걸 눈으로 뻔히 보듯 감지했으니, 대비하고 피하는 건 일도 아니지.
물론 이런 것까지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다.
"내가 감이 좀 좋은 편이라서."
얼버무리며 카르나크가 손짓을 했다.
바로스와 세라티가 검을 뽑아 들며 나섰다.
문득 그녀가 무너진 홀 쪽을 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왕이면 심문 끝난 뒤였으면 좋았을 텐데요."
카르나크가 의아해했다.
"왜?"
"왜라뇨? 아직 정황을 전부 알아내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왜 문제냐고."
그의 시선이 무너진 파편 쪽으로 향했다.
"유령이 저런 것에 깔려서 죽기라도 한대?"
"...아, 그렇구나."
무심코 평소 심문하는 것처럼 생각했는데, 사령술 심문은 일반적인 심문과 다르다.
도중에 끊겨도 별지장이 없는 것이다.
그냥 상대를 해치우고 느긋하게 마저 이어 가면 그만이다.
"게다가, 저 친구는 더 많이 알 것 아냐?"
데츠라스를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심문할 유령이 더 늘어났으니 좋으면 좋지, 나쁠 건 없다는 말투였다.
물론 이건 상대를 '유령'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소리.
"허, 나 원 참...."
데츠라스의 눈에 노기가 떠올랐다.
"어린놈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그런데 어째 카르나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어린놈?"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더니, 갑자기 활짝 웃는다.
"크, 그렇지! 우리 이제 어리지?"
"그럼요! 훌륭한 애송이죠."
심지어 옆에 붙은 덩치 큰 검사 놈도 비슷한 반응.
"아, 고생한 보람이 새삼 느껴지는구만."
"그러게 말입니다요, 도련님."
당혹스럽다.
애송이 취급을 냉정하게 넘기는 놈들은 간혹 봤어도, 오히려 좋아하는 놈들은 처음이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이해가 안 가는군."
이쯤 되니 차라리 경각심이 생긴다.
신중해진 데츠라스가 양손을 들었다. 방대한 사령력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혹한의 그림자여! 이곳에 드리워 아케론의 밤을 열어라!"
***
새하얀 안개가 바닥에 깔려 흐른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날카로운 얼음 톱니와 고드름이 시야를 전부 뒤덮어 간다.
불어닥치는, 살이 에는 듯한 북풍 사이로 괴음을 흘리며 뭔가가 일어서고 있었다.
"크르르...."
"하아아아...."
어둠과 피와 얼음이 뒤섞인 흉측한 형태의 마수들이었다.
놈들이 전신에 냉기와 사기를 흘리며 일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며 세라티는 긴장했다.
'이건....'
평범한 슬럼가의 일부였던 곳이 무슨 얼음 지옥처럼 변해 버린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랑 비슷해.'
공간 자체를 변화시켜 버리는 강대한 사령술.
그녀가 만났던 사령술사 중 가장 강력했던 이, 슈트라프 주교가 보였던 이적이었다.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딱히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야 이 정도는 하겠죠. 그 슈 어쩌구 하는 주교랑 비슷한 지위잖아요?"
"확실히 그때랑 비슷하긴 하네."
사방을 뒤덮은 사령결계를 살피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마나과 사령력이 잘도 뒤섞여 있었다. 신성력과 사령력이 융합되어 있던 슈트라프처럼.
"뻔히 보이는데 손을 쓸 수 없다는 점도 같고."
세라티의 안색이 굳었다.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요?"
그녀에게 있어 그날의 전투는 지금도 간혹 악몽을 꿀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었다.
당장 카르나크와 엮인 이유부터가, 그날 슈트라프에게 두 팔을 잃었기 때문이 아닌가?
"딱히?"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가볍게 튀겼다.
"그때도 별문제 없었는데, 뭘."
딱!
동시에 주위의 한기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음이 사라지고, 마수들이 도로 녹아내리며, 사방을 뒤덮고 있던 공간의 변화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원상 복구된다.
몇 초 지나지도 않아 데츠라스가 서 있던 장소는 도로 부서진 홀로 돌아왔다.
경악한 데츠라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무슨...."
사령결계가 저절로 해제됐다!
"뭐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친구도 수박 껍질 애호가였구만요."
'수박? 껍질?'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데츠라스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슈트라프의 달리 그는 진작부터 카르나크를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군. 하지만!"
재차 사령력을 끌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한다.
"테스라낙께서 내려 주신 힘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또다시 강대한 사령결계가 펼쳐졌다.
이번엔 사방이 흉측한 고깃덩이로 뒤덮이고 촉수가 춤을 추는 기괴한 공간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지만.
딱!
"제, 젠장! 아직 내겐 술법이 남아 있...."
딱!
"아직이다! 이번에야말로...."
딱!
온갖 사령결계가 펼쳐지고, 곧바로 무너져 내린다.
워낙 무너지는 게 빠르다 보니 서로 짜고 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데츠라스는 이를 갈았다.
"뭐냐? 왜 손가락만 튀기는데 사령결계가 모조리 박살 나는 거야?"
사실 손가락 튀기는 건 그냥 눈속임이고 발바닥을 통해 열심히 초보용 결계를 덧씌우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알려 줄 이유는 없지.
최대한 오만한 표정으로 카르나크가 데츠라스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밑천 다 떨어졌나?"
긴장하며 데츠라스는 머리를 굴렸다.
보아하니 놈은 사령결계를 파해하는 특수한 술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당황할 이유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면 돼.'
결계술 대신 사법의 영역에 손을 뻗어 간다.
사령력을 최대한 불어 넣으며 떠도는 망령들을 인식의 그늘 아래 집어넣는다.
"유부를 떠도는 망령들아, 주인 된 어둠을 따르라!"
굉음이 터지며 바닥이 갈라지고 검은 악령들이 우후죽순 솟구치기 시작했다.
술식은 단순하지만 확실한 위력을 지닌 강령술로 방식을 바꾼 것이다.
우오오오오!
귀곡성이 울리며 망령들이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통하니까 하는 짓도 그 양반이랑 똑같네요."
문제는 저건 카르나크도 파해할 수 없다는 점.
"자, 이제 도망갈까요?"
검을 든 채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와 상황이 같으니 대처법도 같지 않냐는 의미였다.
카르나크가 눈을 치켜떴다.
"왜?"
"왜라뇨? 그때랑 똑같다면서요?"
"아주 똑같진 않지."
순간 카르나크의 등 뒤로 수십 개의 마력탄이 떠올랐다.
백열하는 마탄이 허공에서 잠시 빛을 발하더니 이내 망령들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콰쾅!
폭발과 함께 망령들이 일제히 뒤로 밀려났다.
6서클의 파괴 마법, 작렬의 마탄이었다.
카르나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가 그때랑 다르잖냐?"
***
슈트라프 주교와 싸울 때의 카르나크는 고작해야 4서클의 마법사였다. 심지어 사령력도 극히 빈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작렬의 마탄!"
수십 줄기의 마력탄이 밀려오는 망령들을 직격한다. 그때마다 망령들이 펑펑 터져 나간다.
지금의 그는 6서클, 당당한 상급 마법사인 것이다.
4서클일 때에 비해 쓸 수 있는 마법의 위력이 월등히 높다.
게다가 달라진 점은 마법뿐만이 아니다.
"와라, 네메시스 고스트. 네 주인의 명에 따라 그 적을 섬멸하라."
나직한 읊조림과 함께 카르나크 주위로 희뿌연 유령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데츠라스가 부른 망령들과 동급의 사령들이었다.
검은 망령과 백색의 사령들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엉겨 붙었다.
꺄아아아악!
크아아아아!
연신 충격파가 터지고 귀곡성이 울려 퍼진다.
서로의 기세는 백중지세, 데츠라스의 방대한 어둠이 실린 망령들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사령력 역시 그때에 비해 많이 늘었거든?"
그동안 열심히 무리해 가면서 사령력도 늘린 카르나크였다. 수치로만 치면 거의 20배 이상 늘었을 것이다.
"이젠 길 가다가 종말의 어둠 주워 먹은 뜨내기 정도는 된다 이거지!"
물론 데츠라스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다.
아니, 방금 붙잡은 케일이나 올트와 비교해도 한참 아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사령술은 월등히 강력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해도와 운용, 효율성에서 압도적으로 격차가 있으니까.
"더구나 그때랑 달리 아군도 1명 더 있고."
카르나크는 힐끔 옆을 보았다.
붉은 머리의 미녀가 그를 보호하며, 다가오는 망령들을 열심히 견제하는 중이었다.
"타앗!"
카르나크가 칼날에 사령술을 걸어 주었기에 검만으로도 망령들을 벨 수 있지만 위력이 그리 크진 않아 흩어진 망령들이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세라티."
"네?"
"더 이상 실력 감출 필요 없어. 저 친구도 튀어나왔잖아?"
그녀가 실력을 숨긴 건 어디까지나 데츠라스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서였을 뿐.
"네!"
기다렸다는 듯 세라티가 힘을 떨쳤다.
굉음이 울리며 붉은 투기검이 어둠을 가르고 뻗어 갔다.
우우우웅!
"오, 오러 유저?"
경악한 데츠라스가 멍한 소리를 흘렸다.
"아니, 오러 유저가 왜 사령술사 밑에서 일한단 말인가?"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사악한 사령술사가 아니라 상식적인 마법사의 관점으로 잠시 돌아왔달까?
"자기도 마법사였다가 사령술사 된 주제에 무슨."
피식거리며 세라티는 마음껏 날뛰기 시작했다.
"타아앗!"
본격적으로 오러를 쓰는 그녀의 무력은 과연 무시무시했다.
투기검이 스칠 때마다 망령들이 연신 박살 나 흩어진다.
아까까진 베여도 도로 회복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붉은 파문이 퍼져 나가며 망령의 어둠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다.
꺄아아악!
크아아아!
아아악!
카르나크 역시 놀고만 있진 않았다.
"울어라, 천둥의 포효."
뇌격의 채찍이 사방으로 휘몰아친다.
"내리쳐라, 권능의 일격."
작렬의 마탄이 쉴 새 없이 망령들을 꿰뚫고 부순다.
그렇게 부서진 어둠의 망령들이 카르나크의 사령술로 재조립되니....
"일어나라, 나의 종이여. 새로운 주인의 명을 받들라!"
어둠의 사역마가 되어 귀곡성을 터트리며 다른 망령들에게 덤벼든다.
꺄아아아악!
세라티도 카르나크도 무리 없이 데츠라스의 사령술을 상대하고 있었다.
슈트라프를 상대하던 때에 비하면 다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 바로스 빼고.
"헛! 차앗! 타앗! 이얍!"
열심히 칼 들고 날뛰는 덩치 큰 기사를 보며 카르나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랑 달라진 게 없는 부분도 있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바로스.
여전히 궁극의 경험치를 지닌 일개 검사다. 더 나아진 것도 못해진 것도 없다.
"너, 대체 언제쯤 오러 익힐래?"
"누군 뭐 익히기 싫어서 안 익힌답니까? 노력해도 안되는 걸 어쩌라고."
뭐, 바로스는 당시에도 잘만 싸우던 작자였다. 당연히 지금도 별문제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데츠라스의 군세는 더더욱 밀리고 있었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데츠라스는 카르나크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놈은 정체가 뭐란 말이냐?'
#74화. 19. 마법의 사령술사 (3)
저 젊은 사내, 카르나크의 사령술은 실로 엄청나다.
미천하다 할 정도로 빈약한 사령력, 그것만으로도 데츠라스와 필적하는 강력한 술법을 연신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데츠라스가 경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건 이해할 수 있어.'
그는 원래 마법사였다. 사실 사령술에 입문한 지는 채 몇 년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소심한 성격이기도 했다. 강력한 사령술사가 된 후에도 상대의 실력을 모른다는 이유로 수하들을 먼저 미끼로 내보낼 정도로.
그렇기에 데츠라스는 스스로를 꽤나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사령술을 배우고 방대한 사령력을 얻어 강해진 건 틀림없다. 그러나 사령술사로서의 수준 자체가 높은 건 아니다.
그러니 '전통적인 사령술사'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 해도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저자는 분명 전통적인 사령술사였다. 저토록 효율적이고 강력한 사령술을 구사하는 걸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6서클 주문을 쓰다니?
'어떻게 사령술과 마법을 같이 쓸 수 있는 거지?'
데츠라스 자신도 마법과 사령술을 같이 쓰면서 뭘 그 정도로 놀라나 싶겠지만, 이는 사실 검은 신의 교단의 근간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다.
'저건 오직 테스라낙 님의 축복으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마법과 사령술을 함께 구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해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러, 신성력, 마나, 사령술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이 일곱 여신이 정한 정명한 세상의 이치.
그런데 그 신의 이치를 깬다?
이는 테스라낙이 진정한 죽음의 신이자 초월적인 존재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검은 신의 교단에 몸을 의탁했다.
단순히 힘이 더 생겨서, 새로운 권능이 늘어서가 아니었다. 저 사실이 곧 교리의 진실성을 증명하기에, 새로운 세상이 열림을 진심으로 믿고 교단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런데 교단과 아무 상관도 없는 자가 마법과 사령술을 함께 구사하다니....'
테스라낙의 가르침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다.
저걸 인정하는 순간 검은 신의 교단은 교리의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
'속임수에 불과하다.'
마법과 사령술, 둘 중 하나는 가짜일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후, 하마터면 현혹될 뻔했군."
침착하게 데츠라스는 양손을 들었다.
저 가짜와 달리 그는 테스라낙의 축복을 받은 몸.
진실로 마법과 사령술을 동시에 구사하는, 죽음의 신이 허락한 세상의 이치를 깨는 자였다.
"속을 것 같으냐, 어리석은 불신자!"
그의 양손에서 마나와 사령력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진정한 신의 가르침을 보여 주마!"
***
바로스는 계속해 망령들을 베어 갔다.
"허업! 타앗! 타아앗!"
하나하나가 일류 모험가에 필적하는 망령들임에도 그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절묘하게 빈틈을 찌르고, 정확하게 물러서고, 필요한 만큼만 휘두르며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치고 빠진다.
실로 육체의 힘만으로 보일 수 있는 극한의 퍼포먼스였다.
지켜보던 세라티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 나도 저렇게 움직이고 싶다...."
그녀에게 눈을 흘기며 바로스가 투덜거렸다.
"내가 할 소리거든요?"
세라티 역시 망령들을 상대하고 있긴 마찬가지, 그러나 그 양상은 바로스와 크게 달랐다.
다가오면 찌른다. 혹은 벤다. 혹은 팬다.
이걸로 끝!
무슨 엄청난 기교나 기술 따위 필요 없다.
오러 유저답게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너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서 망령들이 뭘 어쩔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게다가 검에 맺힌 붉은 오러는 워낙 파괴력이 높아 스치기만 해도 망령들을 펑펑 터트려 버린다.
쾅! 쾅! 콰콰쾅!
"아, 진짜 서러워서 빨리 오러 익혀야지, 원."
상성의 문제였다.
강력한 적 하나라면 오히려 바로스가 유리하겠지만, 만만한 적들이 여럿 몰려온다면 오러 유저인 세라티를 감히 따라잡을 수 없다.
덕분에 데츠라스의 망령 군단은 무서운 속도로 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상황을 살피던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저쪽 사령력도 많이 깎았고...."
슬슬 본체를 처리해도 될 듯하다.
그가 막 다음 술법을 준비하려던 차였다.
데츠라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하며 인상을 팍 썼다.
"속을 것 같으냐, 어리석은 불신자!"
"응?"
"진정한 신의 가르침을 보여 주마!"
"...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풍기는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데츠라스의 전신에서 강렬한 마나와 사령력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야겠다.'
카르나크가 방어결계를 펼쳤다.
10여 개의 시꺼먼 형상이 카르나크 일행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림자를 이용해 암흑의 방패를 만드는 사령술이었다.
동시에 데츠라스의 마법이 발동했다.
"일어나라! 대지의 혼이여!"
쿠우우웅!
바닥의 흙과 바위가 뭉치며 솟구치더니 이내 2미터에 달하는 흙인형이 되었다.
바로스와 세라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저건...."
당장 얼마 전에도 본 적이 있다.
킹스 오더의 마법사 타르만이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 구사한 그 마법이다.
"골렘 소환 주문?"
카르나크도 의아한 눈치였다.
'굳이 저 마법을?'
골렘 소환술은 분명 5서클 중에선 최상급에 속하는 강력한 마법이다. 위력도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카르나크에겐 그다지 어려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법도 6서클에 올랐고 제법 강력한 사령술도 구사하게 되었다. 골렘 1기쯤은 충분히 부술 힘이 있다.
'바로스 잡으려고 꺼냈나?'
과연 바로스가 안색을 굳히며 뒤로 물러섰다.
"저건 좀 무리네요."
마법의 흙인형, 골렘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돌덩이다. 그저 단단하고 힘 센 게 전부라서 기교로 파고들 틈이 전혀 없다.
반면 세라티는 오히려 화색이 되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돌처럼 단단하다고? 그럼 투기검으로 바위 자르듯 슥삭 잘라 버리면 그만이다.
워낙 튼튼하니 일격에 부수기야 힘들겠지만 골렘은 워낙 움직임이 느리다. 그냥 사과 깎듯이 느긋하게 외부부터 두들기면 쉽게 부술 수 있다.
"골렘쯤이야 뭐...."
투기검을 고쳐 쥐며 그녀가 막 나설 때였다.
데츠라스가 재차 주문을 이어 갔다.
"네 주인이 명한다! 강림하라, 통곡하는 흑암의 갑주여!"
휘이이잉!
대기가 휘몰아치며 어둠이 허공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내 거대한 갑옷이 대검을 쥔 채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로 움직이는 어둠의 갑주, 리빙 아머 중에서도 최상위급 언데드인 데스 아머였다.
이번엔 세라티의 안색이 굳었다.
"윽, 저건 까다로운데...."
데스 아머는 무인의 잔존 사념이 깃들여 움직이는 어둠의 마물이다.
검사의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니 강도는 골렘만 못할지 몰라도 검술을 제대로 구사한다.
게다가 본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선 훨씬 헷갈리고 까다롭다.
검술이란 건 기본적으로 사람 죽이라고 만든 것이지, 갑옷 부수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그때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괜찮아, 세라티."
"네?"
"데스 아머는 내가 상대할 수 있어."
데스 아머가 골렘보다 훨씬 강력한 소환체이긴 하지만, 어차피 그의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다. 약점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
골렘을 세라티에게 맡기고 본인이 데스 아머를 상대하면 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네요, 분위기가 심상찮기에 엄청난 짓 하는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었나?"
막 안심하려던 세라티는 문득 의아해했다.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었다.
"왜 그러세요, 둘 다?"
그녀의 질문에 두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를 흘렸다.
"뭔가 좀...."
"이상하죠, 도련님?"
세라티의 말대로, 확실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저 술법을 펼친 데츠라스의 얼굴엔 분명 비장의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바로스가 뇌까렸다.
"고작 저 정도로 그런 표정을 짓는다고요?"
***
데츠라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골렘 소환술은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었다.
데스 아머 역시 사령술로 부를 수 있는 최강의 마물.
하지만 이 정도로 눈앞의 불신자들을 이길 수는 없다. 그만큼 저들은 강하고, 또 사령술에 능숙하다.
그러니, 여기서 교단이 내려 준 최후의 수단을 쓴다!
"크, 크윽!"
전신에서 마나와 사령력이 뒤섞여 소용돌이친다.
조금이라도 제어에서 벗어나면 이 소용돌이가 그의 영혼을 박살 내 산산이 흩어 버리겠지.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저 거짓된 불신자들에게 진정한 신의 위업을 보여 줘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섬기는 이의 의무다.
"위대한 테스라낙이시여...."
목숨을 도외시한 채 데츠라스는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신실한 종에게 당신의 축복을 내리소서!"
골렘의 전신에서 마나의 광채가 솟아난다.
데스 아머로부터 어둠이 짙게 뻗어 나온다.
'또 뭐야?'
카르나크가 경계하며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2미터에 달하는 바위 거인이 갑자기 두 팔을 허공으로 활짝 펼쳤다. 동시에 데스 아머가 허공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분해된 어둠의 갑주가 일제히 골렘에게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척척 각 부위에 착용된다!
철컹! 철컹! 철컹철컹!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2미터에 달하는 바위 거인이 육중한 데스 아머를 걸친다.
살아 있는 갑주의 어둠이 흙인형에게 스며들어 신체 전체를 강화시키며 점점 거대해진다.
이제 그곳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골렘도, 데스 아머도 아니었다. 마법과 사령술이 융합해 탄생한 새로운 존재, 골렘 나이트였다.
칠흑의 검을 치켜들며 골렘 나이트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아아!
방대한 사기와 마나가 충격파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카르나크의 방어결계를 일순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윽!"
"뭐예요, 저건?"
바로스와 세라티가 당황하며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으하하하하!"
통쾌하다는 듯 데츠라스가 광소를 내질렀다.
"보아라! 이것이 진정한 신의 위용이다!"
***
시야를 가득 메운 2.3미터의 거체를 노려보며 바로스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골렘에 데스 아머를 입혔다고?'
글쎄, 골렘이란 건 기본적으로 갑옷을 입힐 필요가 없다.
애초에 골렘의 장점은 강도와 괴력인데?
원래 탄탄한 몸에 갑주 덧붙여 봐야 더욱 무겁고 느려지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런데 저건 일반 갑주가 아니라 데스 아머, 스스로 움직이는 갑옷이다.
"저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도련님?"
"어떻게 되냐라...."
골렘은 무지막지한 방어력과 괴력이 장점. 대신 너무 느리고 동작이 단순하다.
리빙 아머는 가공할 스피드가 장점, 왜냐면 갑옷만으로 움직이니까. 게다가 갑옷에 깃든 영혼의 무위에 따라 위력적인 검술 또한 쓸 수 있다.
반면 내구도는 아무래도 낮다.
속이 꽉 찬 돌덩이와 속이 텅 빈 깡통, 둘 중 어느 쪽이 더 잘 찌그러지겠는가?
'그런데 둘이 합쳐졌다면....'
무지막지한 방어력과 괴력을 지닌 골렘이, 데스 아머처럼 날래게 움직이며 위력적인 검술을 보인다? 심지어 어둠의 기운까지 쓰고?
"어, 저거 만만치 않겠는데?"
카르나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골렘 나이트가 움직였다.
크오오오!
포효를 흘리며 무서운 속도로 대지를 짓밟으며 돌진해 칠흑의 검을 휘두른다!
'헉?'
'빠르다!'
놀란 세라티와 바로스가 허겁지겁 카르나크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스가 카르나크를 피신시키고 그 틈에 세라티가 투기검으로 반격에 나선다.
"타앗!"
어둠의 힘이 뻗어 나와 붉은 오러와 충돌했다.
파공음이 울리며 충격파가 그녀의 전신을 날려 버렸다.
"크윽!"
간신히 자세를 되돌리며 세라티는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거 어지간한 고위 악마 이상이잖아?'
따로 놓고 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데, 둘을 합쳐 놓으니 슈트라프가 소환했던 마즈눈조차 능가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작렬의 마탄!"
카르나크의 마법탄이 골렘 나이트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데스 아머의 마법 저항력이 워낙 높아 6서클 마법조차 튕겨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데스 아머 쪽을 파해하자니 마나와 사령력이 섞여 있어서 간섭할 수가 없다.
긴장한 얼굴로 바로스가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쩝니까, 도련님?"
마즈눈은 그래도 상대하는 법은 알고 있었다. 그냥 원체 센 놈이어서 문제였지.
그런데 저 골렘 나이트는 마법과 사령술의 괴상한 조합이라 기존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때려 부수는 방법밖에 없겠는데요?"
시큰둥한 대꾸가 돌아왔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또요?"
바로스의 안면이 팍 구겨졌다.
예상 못 했단 소리가 대체 몇 번째야, 이거?
그러던 중이었다.
'어라?'
카르나크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예상 못 한 사태를 맞이했을 때의 전형적인 반응, 당황이나 두려움 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뭐지? 이번엔 왜 저리 태연하시대?'
#75화. 19. 마법의 사령술사 (4)
육중한 일격이 허공을 가른다.
어둠의 검이 뻗어 와 바닥과 천장을 뚫고 건물 전체를 통째로 베어 간다.
그 가공할 거력 앞에 2층짜리 목조건물은 수수깡만도 못했다.
콰콰쾅!
피어오르는 폭연과 무너지는 파편 사이로 세 그림자가 날쌔게 빠져나왔다.
투기검을 쥔 세라티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벌써 몇 번이나 골렘 나이트를 두들겼지만 흠집 조금 난 것이 전부였다.
정확하게 때려도 부수기 힘들 정도로 강도가 높은데, 심지어 제대로 맞아 주지도 않는다.
데스 아머에 깃든 무인의 검술이 그녀의 공세를 죄다 막거나 흘려 버리는 것이다.
'도저히 답이 안 보여!'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단단하고 빠른데 기술적인 면에서도 오히려 우위.
모든 면에서 세라티가 우세한 부분이 없었다.
월등히 수준이 높은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으하하하!"
데츠라스가 통쾌한 듯 외쳤다.
"진정한 신의 권능을 보았느냐?"
정신없이 골렘 나이트의 공세를 피하며 세라티는 이를 갈았다.
"이 정도에 뭔 신의 권능씩이나 갖다 붙여? 그냥 좀 센 퍼플급 오러 유저 수준이잖아!"
솔직히 저 골렘 나이트가 세긴 하지만, 그래도 각 왕국의 기사단장급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정도 가지고 신의 권능이니 어쩌니 하고 있으니 보는 쪽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데츠라스는 당당했다.
"과연 어리석은 눈먼 자들이로다. 진실을 목전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사실 성직자나 마법사가 보면 경악할 일이 맞았다.
골렘 나이트의 전투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마법과 사령술이 융합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 여신의 이치를 초월하는 사악한 기적이다.
신의 권능이라 칭해도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세라티가 거기까지 알 리가 없지.
"자기만 아는 걸 가지고 뭘 저렇게 열심히 잘난 척이래?"
투덜대며 그녀가 바로스에게 마법 전언을 날렸다.
[어떻게 해요, 이제?]
[그, 글쎄요?]
바로스는 맞은편에서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의 검으론 골렘 나이트를 어쩔 수 없다.
골렘 나이트가 작동 정지된 채 서 있고, 그 상태로 죽어라 두들겨도 팔 하나 자르는 데 몇십 분은 걸릴 테니까.
그래서 아까부터 데츠라스를 노리는 중이었다.
원래 소환수가 상대라면 술사 본인을 노리는 게 상식인 법이다.
문제는 술사 입장에서도 자기 몸 지키는 건 상식이란 점이지.
'도통 기회가 안 오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몰래 데츠라스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마다 골렘 나이트가 칼같이 어둠의 대검을 날려 바로스를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허점을 드러내 세라티의 일격을 허용한다는 약점이 생기지만....
타앙!
기껏 생긴 허점에 정확히 투기검을 날려도 동체 자체가 워낙 단단하니 별문제가 안 된다.
'제기랄!'
'이제 어쩌지?'
그야말로 앞뒤 양옆 다 막힌 형국이었다.
자연스레 둘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왕년의 위대한 사령왕, 카르나크뿐.
[도련님?]
[카르나크 님?]
카르나크는 아까부터 영 싸울 생각 없이 마냥 구경 중이었다.
"와, 저게 되네."
"와, 저런 것도 되네."
"누가 저런 술식을 짠 거지? 마법적인 조예가 엄청나게 깊어야 할 텐데."
연신 중얼중얼하면서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데, 목숨 걸고 뛰어다니는 입장에선 참으로 울화통 터지는 모습이었다.
'저 인간,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발끈한 세라티가 언성을 높였다.
[비장의 한 수가 있다면 우리 죽기 전에 써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나 싶어 바로스도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설마 플랜 P 믿고 계시는 거면 생각 바꾸십쇼! 저건 제가 세라티 경 육체 좀 차지한다고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카르나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좀 더 보고 싶긴 하다만, 일단은 처리해야겠군. 나머지는 직접 물어봐야지."
아까부터 태연한 그를 보며 바로스는 의아해했다.
아무리 봐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그게 뭔지 짐작이 영 가질 않았다.
특성상 저 골렘 나이트는 기교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강력한 물리력이나 마법, 혹은 사령력이 필수로 받쳐 주어야 한다.
방패를 든 전사를 쓰러뜨리는 건 기술만으로도 되지만, 방패 자체를 부수는 건 순수한 힘이 필요한 것과 같다.
현재의 카르나크에게 그 정도 힘이 없다는 건 바로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뭘 믿고 그리 태연하신 겁니까? 예상 못 한 상황이라면서요?]
[응, 예상 못 했어.]
자신만만하게 카르나크가 양손을 들었다.
[하지만 대충 이런 상황은 올 것 같았거든. 나도 학습이란 걸 하잖니?]
말인즉슨, '예상 못 할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예상은 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이번엔 든든하게 대비를 해 뒀지. 뭔 일이 터져도 어떻게든 되게.]
[그게 뭔데요?]
카르나크가 들어 올린 양손을 내렸다.
손끝에서 어둠이 흘러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얘네들.]
대지를 타고 흐르는 어둠의 흐름, 그 끝에서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우뚝 선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메마른 목구멍 사이로 새어 나온다.
"나의 주인이시여...."
"명을 내리소서...."
싱글벙글 웃으며 카르나크가 손가락질을 했다.
"나야 사령력이 미천하지만."
새까만 로브를 걸친, 방대한 어둠을 사방으로 흘려 대는 2구의 시체를.
"이분들은 넘쳐 나시잖냐?"
데츠라스의 안색이 굳었다.
"...케일? 올트?"
저 미친놈이, 방금 죽은 그의 부하들을 언데드로 일으켜 버렸다!
***
청색의 피부 위로 허옇게 표백된 죽은 눈동자가 드러난다.
2구의 시체에서 짙은 어둠이 연신 흘러나온다.
뭐, 딱히 신기할 것은 없었다.
원래 시체를 좀비로 일으키면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죽은 자가 사기에 찌든 사령술사였으니 새어 나오는 것도 당연히 많겠지.
하지만 이어진 일은 분명 데츠라스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케일의 손에 어느새 작은 랜턴 하나가 들려 있다. 아까 카르나크가 챙겨 두었던 귀물, 망혼의 호롱이다.
"일어나라, 저주받은 전사의 혼들이여...."
푸른 호롱불이 피어나며 무수한 망령의 군세가 사방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으아아아아...."
올트 역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하며 덩치가 부풀어 오른다. 특기인 악마화 술법이다.
"지옥의 힘이여, 내게 임해 혼돈의 권능이 되어라!"
데츠라스는 눈을 의심했다.
둘 다 생전 자신의 주특기를 정확하게 구사한 것이다.
'맙소사!'
그 역시 나름 고위 사령술사다. 저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잘 안다.
'사령술로 죽은 사령술사의 사령력을 조종해서 사령술을 쓰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혀를 깨물 것 같다.
인간이 저렇게까지 복잡한 술식을 구사하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가?
하지만 분명 눈앞에서 그런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가라, 나의 하수인들아...."
좀비가 된 케일이 음침한 음성을 토했다.
"어둠의 명에 따라 네 주인의 적을 쳐라...."
유령 병사들이 우르르 골렘 나이트에게 밀려들었다.
동시에 악마화된 올트도 포효를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크아아아아!"
황급히 정신을 차린 데츠라스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저놈들도 물리쳐라!'
어둠의 검을 휘두르며 골렘 나이트가 거구를 움직였다.
우오오오!
검의 궤적마다 유령 병사들이 산산이 흩어져 박살 난다.
거대한 악마가 골렘의 거력에 눌려 오히려 뒤로 튕겨 난다.
쾅! 콰콰쾅!
연신 폭음이 울리며 검은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악마의 목을 잡아 대지로 처박는 골렘 나이트를 보며 데츠라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살아생전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자신보다 약했다. 그런데 죽은 후라고 더욱 강해질 리가 없잖아?
카르나크가 연달아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뭐 엄청나게 강력한 수법까진 아닌 것이다.
그냥 신기한 일일 뿐이지.
"어차피 둘 다 내 상대는 아니니!"
의외로 카르나크는 쉽게 수긍했다.
"아, 물론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날아든 작렬의 마탄이 골렘 나이트의 뒤통수를 강렬하게 두들겨 댔다.
쾅! 콰콰쾅!
덕분에 유령 병사들이 다시 대열을 갖춘다. 위기 상황이었던 악마화된 올트도 도로 몸을 일으킨다.
워낙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공격인 탓이었다.
"여기 쟤들만 있냐?"
그렇다. 저들이 가세했다고 카르나크 일행이 손 놓고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새 숨을 돌린 바로스와 세라티가 기세등등하게 몸을 날렸다.
"이제 좀!"
"상황이 편하게 굴러가네요!"
두 사람까지 가세하니 전황은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케일의 유령 병사들이 매우 효용도가 높았다.
카르나크가 케일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걸 케일이 그대로 망혼의 호롱에 지시한다.
"나의 종이여, 저자를 노려라!"
카르나크의 의도대로, 유령 병사들은 골렘 나이트를 무시한 채 데츠라스 본인을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물론 데츠라스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큭! 네 주인을 지켜라!"
골렘 나이트를 조종해 접근하는 유령 병사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다.
워낙 어둠의 검이 강력하다 보니 스치는 건 물론이고, 그 여파만으로도 망혼들이 수십 단위로 날아간다.
펑! 펑! 퍼퍼펑!
그러고 그때마다 아까처럼 골렘 나이트 쪽에 허점이 드러나는데....
"타앗!"
기합을 터트리며 세라티가 투기검으로 골렘 나이트의 갑주를 길게 베어 냈다.
파지지직!
물론 이번에도 갑주에 금이 조금 생길 뿐이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데스 아머를 한 방에 부술 정도의 위력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다르거든?"
여기에 추가로 악마화된 올트의 손톱이 강타!
콰아앙!
때린 데 또 때리니 데스 아머의 갑주조차도 결국 부서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데츠라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골렘 나이트에게만 방어를 맡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재빨리 다른 수를 준비했다.
"망자여, 눈을 떠 혼돈의 손을 뻗어라!"
사령결계, 가라앉는 망자의 늪이었다.
이내 핏빛 어둠이 깔리며 무수한 지옥의 손길이 솟아 나왔다.
하지만, 여태 그가 사령결계를 펼치지 않은 이유가 뭐였던가?
딱!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튀기자마자 내밀었던 손들이 쏘옥 들어가 버린다.
'아차! 저놈은 저런 능력이 있지?'
그래서 여태 사령결계를 안 썼던 건데, 너무 급하다 보니 잠시 잊었다.
자신의 불찰을 후회하며 데츠라스는 도로 골렘 나이트 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믿을 수 있는 건 이 술법뿐이라는 거군.'
그동안에도 골렘 나이트의 갑주는 계속 부서지고 있었다.
아까는 세라티 혼자였지만 지금은 악마화된 올트도 가세했다.
둘이서 같이 두들겨 대니 단순하게 봐도 공격력이 2배다.
게다가, 공격 기회도 아까보다 훨씬 많아졌다.
"오, 저쪽이 잘하고 있구만. 그럼 나도...."
눈치를 보며 바로스는 지속적으로 데츠라스 주위를 맴돌았다.
케일의 유령 병사들 사이에 끼어들어 절묘하게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그때마다 제 목숨 귀한 데츠라스가 무조건 골렘 나이트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게 한다.
"날 지켜라!"
그럼 세라티와 올트 쪽으로 순서가 넘어가지.
"기회다! 골렘 때려!"
어쩔 수 없이 데츠라스는 또 골렘 나이트를 보호해야 하고....
"저, 저쪽부터 처리해라!"
그러면 또 치사하게 데츠라스를 노린다.
"기회다! 저놈 때려!"
"나, 날 지켜라!"
"기회다! 골렘 때려!"
"으아아아! 저 빌어먹을 놈드으을!"
그야말로 기사도와는 담을 쌓은, 차륜전의 극치라 하겠다.
세라티가 문득 혀를 찼다.
'어휴, 누가 보면 우리가 악당인 줄 알겠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사령술 펑펑 쓰면서, 시체와 망령을 조종해, 다수의 힘으로 1명을 핍박하고 있는데, 이게 악당이 아니면 뭐가 악당인가?
"제, 제기랄!"
치를 떨며 데츠라스는 계속 마나와 사령력을 끌어 올렸다.
"이, 이 정도로!"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을 이겨 내며 골렘 나이트에 마나와 사령력을 주입하고 또 주입한다.
"테스라낙께서 내리신 권능이 깨질 것 같으냐!"
그 발악에 가까운 활약 덕분인지, 골렘 나이트는 너덜너덜해지면서도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카르나크가 혀를 찼다.
"아, 저거 진짜 단단하네."
바로스가 슬쩍 전언을 날렸다.
[어쩌죠? 아직도 파괴력이 많이 부족한데요.]
[파괴력이 모자라다면....]
카르나크는 방긋 웃었다.
지금 수준으로도 강력한 파괴력을 낳을 수 있는 수법이 있었다.
[이러면 되지.]
그가 정신파로 명령을 보냈다.
"가라, 나의 종들이여."
케일과 올트가 갑자기 골렘 나이트를 향해 달려 나간다. 그리고 대뜸 몸을 던진다.
당연하게도 골렘 나이트가 어둠의 칼날을 내뿜어 두 사령술사들을 꿰뚫어 버리는 바로 그 순간.
"시체 폭발."
무지막지한 폭음이 슬럼가 전역을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76화. 19. 마법의 사령술사 (5)
검붉은 안개가 사방에 피어올라 시야를 가득 메운다. 죽은 이의 체액이 끈적거리는 소나기가 되어 거리를 뒤덮어 간다.
데츠라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인간이 저렇게까지 깔끔하게 터져 버리는 일은 흔치 않은 것이다.
끔찍함이 도를 지나쳐서 오히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였다.
물론 뒤이어 우박처럼 떨어지는 살점과 뼛조각, 뱀처럼 춤추는 내장의 파편들, 알사탕처럼 데굴거리는 안구 등은 그를 현실로 끌어내리기에 충분했다.
"으아아악!"
기겁하며 데츠라스가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사악한 사령술사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그조차도 상상 못 한 지옥의 풍경이었다.
"아, 악마 같은 놈!"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이들이 아닌가?
아무리 사령술사라지만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저렇게까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렇게 못 할 짓을 했나?"
욕먹는다고 딱히 기분 나쁠 것까진 없었다. 그 정도 비난이야 평생 받고 살았다.
하지만 같은 업계인(?)에게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은 미처 몰랐다.
"고작 시체 좀 박살 낸 것뿐인데 왜 저리 난리야? 자기도 사령술사면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라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엄청나게 끔찍한 짓 맞거든요, 카르나크 님? 남들이 보면 무조건 우리부터 척살하려고 할 거예요."
"그 정도야?"
"예."
세라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확실하게 짚어 놔야 추후에 카르나크가 그나마 조심을 할 것 같았다.
과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반성의 빛을 보였다.
"욕먹을 짓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
이어진 반응이 상식 밖이라 문제지만.
"앞으로 시체 폭발 쓸 땐 보는 사람 다 죽여야겠다."
"쓰고 나서 청소도 더욱 신경을 쓰고요."
어이가 없어 세라티가 물었다.
"...그 수법을 안 쓴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두 사내가 동시에 눈을 깜빡였다.
"왜?"
"왜 쓰지 마요?"
그녀는 한탄했다.
'아, 진짜 모르는구나, 둘 다.'
보통은 이런 경우 나름대로 변명을 하기 마련이다.
목숨이 걸렸는데 왜 수단 방법을 가리느냐, 혹은 하찮은 세간의 시선을 왜 신경 쓰냐 하는 식으로.
저들은 다르다.
칼 쓰지 말라는 소리 들은 검사, 혹은 마법 쓰지 말라는 소리 들은 마법사 같은 표정이었다.
변명도 어느 정도 자기가 잘못한 줄 알 때나 하는 행위인 것이다.
"에휴, 됐어요."
한숨을 쉬며 세라티는 골렘 나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거대한 바위 거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돌로 된 발 2개만 덜렁 남아 있었다.
그렇게 두들겨 대도 버티던 골렘 나이트가 한 방에 박살 난 것이다.
과연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사령력이 가득했던 시체를 2구나 일시에 폭발시켰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카르나크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데츠라스를 노려보았다.
"자, 이제 뭐 더 꺼낼 밑천도 없지?"
데츠라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다. 골렘 나이트가 박살 나며 마나도 사령력도 모조리 고갈되어 버렸다.
"크, 크크큭...."
허탈한 웃음이 폐부를 통해 흘러나왔다.
"강하구나, 불신자여. 정말 강해...."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
'이대로 교단의 비밀을 누설하기 전에 자살할 수밖에....'
주르륵....
데츠라스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케일과 올트가 사용했던 자결용 술법, 심장 폭발의 결과였다.
물론 카르나크는 어이없어했다.
"얘도 바보네. 사령술사 앞에서는 자살해 봤자라니까?"
바로 어둠의 손을 꺼냈다. 평소처럼 데츠라스의 영혼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두 부하와는 달랐던 모양이다.
"테스라낙이시여... 부디 제 영혼을 거둬 주소서...."
죽어 가며 마지막 음성을 토한다. 동시에 전신에서 검은 빛의 기둥이 솟구친다.
파아아앗!
카르나크가 뻗은 어둠의 손이 솟구친 검은 기둥과 충돌해 도로 튕겨 나왔다.
"아차!"
당황한 카르나크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검은 기둥의 정체가 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사전 계약식 영혼 전이술!'
미리 영혼에 낙인을 찍고 사망 시 거두어 가는 방식의 사령술이었다.
이대로라면 검은 신의 교단이 데츠라스의 영혼을 회수하게 되리라.
"젠장, 너무 얕봤나?"
카르나크가 허겁지겁 파해하려 했지만 검은 기둥이 더 빨랐다.
어둠이 더욱 진해지며 데츠라스의 시신을 뒤덮어 간다.
이내 영혼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런...."
눈 뜨고 놓치게 된 카르나크가 허탈해할 때였다.
발치에서 유령 하나가 뿅 하고 머리를 내밀었다. 방금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데츠라스의 영혼이었다.
황당한 얼굴로 카르나크가 유령을 내려다보았다.
"...?"
유령도 황당한 얼굴로 카르나크를 올려다보았다.
"...?"
순간 둘 다 잠시 굳었다. 머릿속이 혼란한 탓이었다.
'테스라낙한테 간다던 양반이 왜 여기에?'
'테스라낙께서 계실 자리에 왜 저놈이?'
물론 정적은 길지 않았다.
"쯧쯧, 술법 꼬였나 보네요."
바로스의 비웃음에 카르나크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사령술 쓰다 꼬이는 게 뭐 한두 번이던가?
"그러게 기초부터 탄탄하게 익혔어야지."
피식거리며 그는 어둠의 손을 뻗었다.
이내 검은 손가락이 유령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왔다.
"으, 으아아아!"
절규를 터트리는 데츠라스의 영혼을 보며 카르나크가 싱글벙글 웃었다.
"자, 우리도 나눌 이야기가 좀 많지?"
***
데츠라스의 시체와 영혼을 챙긴 뒤, 카르나크 일행은 일단 자리부터 옮겼다.
원래 강령술을 구사하던 건물은 박살 날 대로 박살 났으니 다른 은밀한 곳이 필요한 것이다.
슬럼가에서 그런 장소를 찾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적당히 무너진 폐허 하나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스가 짊어지고 온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르나크가 강령술 준비에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시간 좀 걸리겠네. 알아내야 할 것이 제법 많아."
주위를 경계하던 세라티가 문득 물었다.
"그럼 로이드 왕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거 아닐까요?"
별거 아니란 듯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그래도 기다리게 해야지, 어쩌겠어? 그 인간 앞에서 사령술 쓸 수도 없는데."
"혹시 의심하지 않을까 해서요."
"의심하면 하는 거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서야 사령술사 해 먹겠냐?"
참으로 당당한 그 대답에 세라티는 내심 납득했다.
'과연....'
그렇게 거짓말 잘하는 사령술사들이 결국 들켜서 목 잘리는 이유가 아마도 저런 성격 탓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러는 동안 카르나크는 진지한 얼굴로 데츠라스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좀 집중해야겠군."
평소와 태도가 달라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어머, 왜요?"
대답은 바로스가 대신해 주었다.
"그동안 도련님이 워낙 쉽게 유령들 제압해서 정보 쏙쏙 빼먹은 탓에 이게 마냥 편한 수법으로만 보이겠지만, 사실은 꽤나 위험하거든요?"
강령술로 불러낸 유령의 고통과 광기는 술자에게도 영향을 주는 법.
공감 능력이 높은 자라면 저 행위만으로도 죽음을 실감하며 심장이 멎게 된다.
평범한 인간이라 해도 사기와 탁기에 물들어 결국엔 미쳐 버리기 마련이고.
"원래는 사령술사라 해도 함부로 펼치는 수법이 아니에요, 이거."
그냥 산 사람 인두로 지지면 안전하게 정보 빼낼 수 있는데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는 없다.
"그럼 카르나크 님은요?"
"나야 워낙 뛰어난 사령술사니까."
"그보다는, 애초에 도련님께 멀쩡한 공감 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여태 편하게 해 드신 거죠."
"틀린 말은 아닌데, 듣다 보니 기분이 좀 그렇다?"
투덜대며 카르나크가 양손을 모았다.
"이 인간은 실력이 제법 되니 아마 강령술 대비도 해 놨을 거야."
경지에 이른 사령술사라면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기 마련.
조심스레 데츠라스의 영혼을 불러낸다.
"와라, 나의 종이여.... 네 주인의 명에 복종하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주위에서 칠흑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캬아아아아!
섬뜩한 귀곡성과 함께 검은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 세라티가 뒤로 물러섰다.
"윽! 뭐죠?"
경계하며 바로스가 말했다.
"역시 광기의 악령이 수호하고 있었군요."
마주하는 자의 영혼을 함정에 빠트리는 사령술 중 하나였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는 말이 있다.
상대의 영혼을 침탈하려는 순간 광기의 악령에 의해 미쳐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 이어진 상황이 예상과 좀 달랐다.
광기의 악령이 카르나크를 정면으로 마주하더니 괴성을 터트린다.
크악! 아아악!
그러더니 검은 그림자가 부들부들 떨며 제자리에서 수축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못 볼 거 본 듯한 반응이었다.
'뭐야? 들여다보는 놈을 미치게 만든다며?'
세라티가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왜 저게 미쳐서 날뛰고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스가 턱을 주억거렸다.
"말했잖아요?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상대를 들여다본다고."
"...내 쪽이 심연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르나크는 광기의 악령을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그대로 사라져 간다.
정말이지, 어지간히 무섭고 흉악하고 추악한 뭔가에게 짓눌린 듯한 광경이다.
억울한 듯 카르나크가 투덜댔다.
"내 영혼이 그렇게나 끔찍하다고?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
어이없다는 듯 바로스가 물었다.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많이 착해지지 않았어? 이래 봬도 회귀 후엔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회귀한 다음부턴 그러셨죠. 그렇다고 100년 동안 쌓인 때가 1년 만에 빠지겠어요?"
"그런가?"
듣고 보니 또 납득이 간다.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열심히 사람답게 살아야겠구만."
둘의 대화에 세라티는 그저 침묵만 지켰다.
"...."
분명 그녀가 본 카르나크는 악당까진 아니었다. 열심히, 나쁜 짓 안 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건 인정한다.
그래서 지금은 착하게 사냐고? 그것도 절대 아닌 것 같거든?
'아니, 그보다 왜 바로스 경은 자기는 멀쩡한 줄 아는 거야? 비교 대상이 카르나크 님이라서 그런가?'
어쨌거나, 광기의 악령은 사라졌다. 데츠라스의 영혼이 모든 것을 토설할 준비가 갖춰진 셈이다.
"다시 물어봐야지."
아까 이 작자 때문에 끊겼던 질문을 이어 갈 필요가 있다.
"답해라."
흐느적대는 유령을 앞에 두고 카르나크가 물었다.
"알포드 왕자는 왜 로이드 왕자와 육체를 바꾼 거냐?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
슬럼가 구석의 허름한 오두막.
로이드 왕자는 내내 오두막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카르나크 경은 언제 오는 거지?'
아까부터 슬럼가 전체가 요동을 치며 어마어마한 폭음이 연신 울려 대니 감히 모습을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카르나크 일행이 돌아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폭음이 멎고, 사방이 조용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기다리던 이들이 돌아왔다.
"오, 돌아왔나? 어떻게 되었지?"
카르나크가 차분히 보고를 올렸다.
"적들을 물리치고, 사령술사들의 심문도 끝냈습니다. 알포드 왕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아낸 것 같군요."
"그러한가!"
저것이야말로 로이드 왕자가 내내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그가 다급히 물었다.
"대체 이유가 뭐였나? 왜 알포드가 내 육체를 노린 거지?"
"...그게 말입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나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왕자님의 육체를 탐낼 생각 따위, 전혀 없었던데요."
#77화. 20. 왕자의 계략
"그게 무슨 소린가?"
로이드는 의아해했다.
"내 육체를 노린 게 아니라니? 그럼 알포드도 피해자란 말인가?"
"제가 살짝 오해를 사게 말씀드렸군요."
카르나크가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
"왕자님의 육체를 노린 건 맞습니다. 탐낸 게 아니란 거죠."
데츠라스 등을 통해 알아낸 알포드 왕자의 계획은 이것이었다.
일단 사령술의 힘을 빌려 두 왕자의 육체를 바꾼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애초에 영구적으로 바꿀 생각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육체가 바뀐 로이드를 곱게 가둬 놓은 것이었다.
"시간 지나면 도로 자기 몸이 될 테니 당연히 잘 모셔 놓아야겠죠."
다시 육체를 바꿀 방법도 알아냈다.
"사령술사가 아니어도 가능하더군요."
품에서 검은 보석이 박힌 작은 브로치 하나를 꺼내 보이며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망자의 혼이라 불리는 저주받은 보석입니다. 소울 체인질링의 매개체로 쓴 물건이죠."
보름달이 떴을 때, 이 보석을 달빛 아래 배치한 뒤 알포드 왕자의 갓 흘린 피를 붓는 것이 저주 해제 방법이었다.
"꼭 이 육체여야 하나? 내 원래 몸의 피로는 안 되는 건가?"
"저주의 수혜자는 어디까지나 로이드 왕자님이니까요. 그래서 저주의 주체도 이쪽 육체인 겁니다."
"알포드 혼자서 임의로 해제할 순 없단 말이지? 그래서 그토록 날 잡으려고 난리였던 거군."
납득한 로이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령술사가 아니어도 저주 해제가 가능하다니, 그 점은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미심쩍은 얼굴로 바로스가 몰래 물었다.
[...진짜예요?]
[왜 의심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번엔 진짜야.]
하여튼, 만월의 밤이 되면 두 왕자의 육체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그래서 알포드 왕자는 보름달이 뜨는 저녁을 기점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위스콧 1세 암살 계획이었다.
"아버님을 노린다고?"
"예. 국왕 폐하께 알현을 청한 뒤 틈을 봐서 품에 숨긴 단도로 푹 찌르는 거죠."
어이없다는 듯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리 국왕 폐하라 할지라도 친아들까지 경계를 하진 않겠지요. 몸수색을 따로 할 리도 없고요. 충분히 기회를 엿볼 수 있다고 봅니다만?"
"아니, 그 소리가 아니라...."
왕자가 혀를 찼다.
"아버님을 암살한다고? 내 몸으로?"
유스틸 왕국 국왕, 위스콧 1세는 젊은 시절 무투파로 이름난 기사였다. 나이 든 지금도 정정하기 그지없어 종종 사냥을 나가며 무예를 연마하곤 한다.
그런 국왕을 로이드 왕자가 기습해?
"알포드 그 녀석, 내 몸이 얼마나 허약한지 모르는 건가?"
알포드 왕자 역시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암살을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요."
차분한 목소리로 카르나크가 설명을 이었다.
"그냥 시도만 해도 계획은 성공입니다."
국왕 암살에 성공한다?
그럼 로이드 왕자는 정신이 나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된다. 당연히 호위병들에 의해 붙잡혀 감옥에 갇힐 것이다.
국왕 암살에 실패한다?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를 죽이려 한 반역자인 건 마찬가지다. 호위병에 의해 붙잡히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 상태에서 다시 육체를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제야 로이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원래 육체로 돌아온 그가 아무리 변명을 해 봐야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재수 없으면 사형, 운이 좋아도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며 평생 갇혀 살 뿐이다.
국왕이 죽건 살건, 제2왕자 알포드는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가 된다.
"어차피 살려 둘 생각도 없겠지만요. 감옥에 갇힌 로이드 왕자님은 광기에 휩싸여 이내 자살해 버리실 테니 말입니다."
"내가 자살을 한다고?"
"예."
"누구 마음대로?"
"사령술사는 원래 남들 자살시키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습니다, 왕자님."
"...으음."
로이드 왕자는 신음을 흘렸다.
동생이 야심이 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생각해 보니 충분히 하고도 남을 놈이긴 하군."
그래도 다행인 점은 사전에 모든 계획을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부 카르나크 덕분이었다.
"정말이지, 그대를 만난 것은 내 일생 최고의 복인 것 같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야. 자네처럼 지혜로운 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나?"
바로스와 세라티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최고의 복?'
'지혜로운 자?'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는데....'
'맞는 말이라고 하기도 좀....'
어쨌거나 상대의 음모를 파악했으니 이제 해결책을 모색할 차례.
"저주 해제의 조건은 만월의 빛과 갓 흘린 이 육체의 피라고 했지, 카르나크 경?"
"예, 왕자님."
"확실하게 갓 흘린 피인가? 알포드 녀석의, 그러니까 이 육체의 피를 미리 뽑아 놓았다가 붓거나 하는 건 소용없냐는 소리다."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로이드 왕자님을 확보하려고 저 난리를 친 것 아니겠습니까?"
미리 뽑아 놓은 피로도 저주가 해제된다면, 로이드가 도망치건 말건 신경 끄고 그냥 계획된 날짜에 해주를 해 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긴 그렇군."
턱을 매만지며 로이드는 고민에 잠겼다.
"그럼 선택권이 내게 있으니...."
만월이라는 조건이 있으니 해제 시기는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 육체를 다시 바꿀지 말지는 이제 전적으로 로이드 마음대로다.
"이렇게 된 이상 알포드도 함부로 계획을 진행시킬 수 없겠군."
저 계획은 둘의 육체를 도로 바꿀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다.
지금의 상황에선 알포드 왕자도 외통수로 몰린 셈이다.
괜히 사고 쳤다가 자기 몸을 되찾지 못하면 그냥 로이드인 채로 죽게 될 테니까.
"일단 부왕께선 안전하시다고 봐야 하나?"
살짝 안도하며 로이드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정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겠는데.... 하지만 함부로 왕궁으로 돌아갔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원래 자신의 수하도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알포드 왕자로 행세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래서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내내 숨어 지낸 것 아닌가?
그때 카르나크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 점은 괜찮을 겁니다, 왕자님."
"어째서?"
"이번에 좋은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데츠라스는 이번 일에 가담한 사교도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였다. 덕분에 케일이나 올트는 모르는 기밀도 알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해 누가 알고, 누가 모르는지에 대한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오오! 사실인가?"
로이드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렇다면 이제 알포드인 척 행세할 수 있겠구나!"
이제까진 알포드의 심복 중 누가 이 계획에 발을 담갔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를 경계하며 내내 몸을 숨겨 왔다.
하지만 저 명단이 있으면 이제 누굴 피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그들만 피해 다른 알포드의 부하와 접촉하면, 별문제 없이 2왕자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딱히 오래갈 필요도 없겠지."
만월의 밤까지만 경계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알포드인 척 왕성으로 돌아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다가, 때가 되면 다시 원래 육체로 돌아가면 깔끔하게 원상 복구다.
"이런 사고를 친 알포드 녀석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는 건 좀 기분이 나쁘지만 말이지."
사람 좋아 보이던 로이드의 표정에 문득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지,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군. 원래 육체로 돌아가기 전에 효과가 늦게 오는 독약을 미리 마셔 둘까? 아니면 다리 한 짝쯤 미리 잘라 놓거나."
카르나크가 만류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소울 체인질링을 되돌리려면 최대한 서로의 몸에 손상이 없어야 한다. 괜히 육신에 부상 입혔다가 저주 해제가 안 될 수도 있단 소리다.
"아니라면 굳이 알포드 왕자도 국왕 폐하를 노릴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냥 자해한 다음 육체를 되돌리면 끝인데요."
아쉬워하며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군."
그 모습에 바로스는 내심 감탄했다.
'제법인데? 마냥 순진한 양반은 아니었군.'
제1왕자 로이드는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품의 소유자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그가 직접 본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명색이 친동생인데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겠단 소리를 자연스럽게 한다.
'뭐, 10년 넘게 서로 못 죽여 안달인 사이였으니 그럴 법도 하겠지만.'
한편 카르나크는 다른 문제를 짚고 있었다.
"단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로이드 왕자님의 추측은 전부 알포드 왕자가 계획이 헝클어졌다는 걸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하신 말씀이지요?"
"왜? 뭔가 문제가 있나?"
"그게 말입니다, 어쩌면 알포드 왕자는 로이드 왕자님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이드 왕자의 몸에 들어간 알포드는, 당연하겠지만 원래 자기 부하들과는 접촉하기가 힘들어진다. 사는 공간도 다르고 접점도 거의 없으니까.
그렇다고 내내 연락 하나 없이 계획대로만 진행할 수도 없다.
만일의 사태란 게 있지 않나? 혹여 일 꼬이면 당연히 계획을 멈추거나 수정해야 한다.
"그래서 알포드 왕자는 미리 세바스티안 등의 심복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을 비밀 수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쯤은 기본이니까."
"문제는 그 연락 수단입니다."
사령술을 이용한 육체 교환, 이건 정말 금기 중의 금기라 설령 자기 사람이라 해도 함부로 알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적은 물론이고, 아군에게도 비밀로 연락을 취해야 한다는 소리다.
즉, 로이드 측에게도 알포드 측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수단이 필요하다.
관련 없는 이의 관련 없는 수법.
"사교도들의 사령술이 딱 적격이지요. 그래서 알포드 왕자는 내내 사령술을 이용해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교도들이 방금 카르나크 일행에 의해 죄다 황천길 건너가지 않았던가?
실제론 못 건너고 여전히 카르나크가 영혼 확보하고 있지만, 관용구적으로는 그렇단 소리다.
설명을 듣던 로이드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잠깐, 알포드에게 붙은 사교도가 그 3명이 전부란 말인가?"
"예."
"그게 말이 되는가?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은 자가 멋대로 움직였다고? 만일을 대비해 1명은 남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
카르나크가 실소를 흘렸다.
"그건 섬김받는 데 익숙한 입장의 생각이고요."
아랫사람이 척 하면 착 하고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윗사람들의 안 좋은 사고방식이다.
상대는 내 밑에 있으니. 자발적으로 나의 사정이며 속마음까지 파악해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믿을 만한 부하 하나를 만들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드는데?
심지어 사교도들은 원래 알포드의 부하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교단의 명에 따라 협조하러 왔을 뿐이다.
"사령력을 늘릴 좋은 기회가 왔고, 남에게 뺏기기도 싫었겠지요. 그런데 왜 알포드 왕자의 사정까지 생각해 주겠습니까? 왕자가 뭘 해 줬다고."
"그, 그렇구만."
로이드는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눈으로 카르나크를 바라보았다.
"자네, 은근히 할 말 다 하는 성격이군? 보통은 왕자 앞에서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하지는 않거든."
"그렇습니까?"
카르나크는 내심 뜨끔해했다.
너무 오랫동안 절대자로 살았더니, 나름 신경을 썼는데도 무심코 버릇이 튀어나왔나 보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시골 출신이어서 예의에 약한지라...."
"신경 쓸 것 없네. 자네가 해 준 일이 이리 큰데 어찌 화를 내겠나? 게다가 날 생각해 말해 준 직언 아닌가?"
의외로 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화가 난 게 아니라 정말로 흥미로웠을 뿐인 듯했다.
"자, 그러니까 알포드 녀석의 연락책이 그 사교도들이었고, 다 처리되었다는 소리지?"
"예. 그래서 애매해진 겁니다."
물론 알포드가 준비한 연락 수단이 사교도 말고 또 있을 수도 있다.
아무리 강령술로 영혼을 심문하더라도, 본인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으면 진위를 가리기 힘든 법.
"데츠라스는 분명 연락책이 자기들뿐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알포드 왕자가 다른 수단을 몰래 준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요."
이 경우엔 로이드 왕자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갈 터였다.
"하지만 정말 연락이 끊겼다면 어떻게 될까요?"
카르나크의 질문에 로이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알포드가 어떻게 나올 것이냐라...."
연락이 없으니 계획을 미룰까?
아니면 연락이 되건 말건 계획대로 진행해 버릴까?
"상식적으론 미루는 게 정상이다만...."
과연 알포드 왕자가 상식적인 인간일까?
이 부분이 정말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상식적인 인간이었다면 사령술로 육체를 바꾸는 위험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겠지.
"곤란하군. 그럼 만월의 밤이 오기 전에 부왕께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건가?"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씀드리려고요? 사실을 전부 이해시키긴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영혼이 서로 바뀌었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걸 이해시키려면 꽤나 설득력 있는 증거를 들고 가야 한다.
"혹시 폐하를 납득시킬 만한 비밀을 공유하고 계십니까?"
로이드 왕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쉽게도 없군. 우리 형제가 부왕과 그렇게나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거든."
애당초 형제끼리 싸워서 살아남는 놈 왕 하라고 한 아버지였다. 아들들이 좋아할 만한 아버지상은 아니다.
문득 짜증이 났는지 로이드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말하다 보니 부왕이 죽건 말건 그냥 내버려 두고 싶다는 생각마저 드는군. 감히 그럴 수야 없겠지만."
자식 된 도리를 떠나서, 현실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정말 알포드가 계획을 실행해 버리면 기껏 원래 육체로 돌아간다 해도 반역자가 될 뿐이다.
"내 몸을 되찾지 못하는 건 곤란하지."
심각한 로이드를 지켜보던 세라티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기, 왕자님?"
"왜 그러는가, 세라티 경?"
"이건 어디까지나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란 걸 알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말을 고르며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굳이 원래 몸을 되찾으실 필요가 있나요?"
#78화. 20. 왕자의 계략 (2)
타인의 육체를 강탈하는 것은 분명 사악한 일이다. 결코 윤리적으로 옹호받을 수 없다.
하지만, 현 상황이 로이드가 알포드의 몸을 빼앗은 것이던가?
"알포드 왕자의 자업자득이잖아요?"
세라티가 보기엔, 그냥 이대로 알포드로 살아도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도 그렇다.
로이드 왕자와 알포드 왕자 중 누가 더 국왕에 어울리는지는 명확하다.
성품이나 인격 면에서 분명 로이드가 낫다. 그저 너무 허약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그런 로이드의 정신에 알포드의 육체라니? 완벽한 군주의 재목이 아닌가?
"물론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시겠지만요."
육체가 바뀌면 친모도, 외가도, 뒤를 받쳐 주던 세력도 모두 바뀐다. 옷 갈아입듯이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얻는 것에 비하면 잃는 것이 그리 크지는 않다.
일단, 그토록 갈구하던 건강한 신체를 얻게 된다.
게다가 이대로 로이드 몸속에 들어간 알포드를 실각시키기까지 한다면?
오히려 양쪽 세력을 모두 규합해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일단 자리 잡고 안전을 도모한 뒤에 1명 1명 따로 만나 잘 구슬릴 수 있지 않을까?
"국왕 폐하랑 안 친했던 거지, 심복들이랑은 친하셨을 것 아니에요? 어느 정도 비밀은 공유하고 있으시죠?"
"그렇기야 하네만."
원래 자기 부하들이었으니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 것이고, 끝까지 적대하는 이들은 슬쩍 본인이 실은 로이드 왕자임을 알려 다시 아군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왕자의 친모에겐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고 그 외에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겠지만...
"무조건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고 하시기보다는, 이쪽 선택도 고려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해서요."
조심스레 말을 잇는 세라티를 보며 로이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리고 불쑥 물었다.
"혹시 왕가 로맨스 이야기 같은 것 좋아하나, 세라티 경?"
세라티는 얼굴을 붉혔다.
"아, 그게, 저...."
사실 그런 것 맞았다. 예전에 본 이야기 중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한 소리였다.
"솔직히 말하겠네."
빙그레 웃으며 로이드가 반문했다.
"그 생각을 내가 안 해 봤을 것 같나? 남는 게 시간이었는데."
몇 번이나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알포드의 몸을 차지한 채 어디론가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잃는 것은 왕족의 지위, 가족 그리고 심복들.
얻는 것은 평생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고통 없는 삶.
"아니, 고통이 없는 정도가 아니지."
일반인과 비교해도 월등하게 강건하고 활기가 넘치는 젊은 육신이었다. 그야말로 로이드가 항상 바랐던 꿈 그 자체.
심지어 세라티 말대로 이 사태를 저지른 것은 알포드 쪽이다. 로이드가 죄책감을 느끼거나 할 이유도 없다.
"이 육체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왕위 따윈 알포드에게 줘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게 내 본심일세."
물론 알포드는 매우 아까울 것이라며 로이드는 키득거렸다.
"그 녀석, 지금쯤 내 허약한 육신에 이를 득득 갈며 실행 일자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걸. 매일 열나고 두통에 시달리고 콧물 흐르는 게 얼마나 고달픈데."
그러던 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조건이 너무 매력적이라 오히려 의문이 들더군."
순간 로이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사령술이라면 같은 혈통끼리 육체를 바꿀 수 있다고 했지, 카르나크 경?"
"예."
"그렇다면 어째서 역대 폭군들 중에 자신의 혈육과 육체를 바꾼 왕이 없는 건가?"
폭군이라 불리는 왕, 혹은 황제가 있다 치자. 그리고 그가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 치자.
"내가 저 입장이라면 금기고 뭐고 간에 아들이나 손자와 바로 육체를 바꿔 버릴 것 같거든. 애초에 육체 교환 대상자를 왕위 계승권자로 임명해 놓으면 권력도 잃지 않을 테고."
혹시 사령술사들이 워낙 은밀하게 숨어 있어 아무도 저 방법을 몰랐던 걸까?
이건 납득이 가지 않는 소리다.
대륙 역사 속에 폭군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많은 폭군 중 단 1명도 사령술사를 못 찾았을 리가 있나?
아니, 설령 못 찾았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다.
"저게 가능하다면, 죽어 가는 왕에게 은밀히 접근해 유혹하는 사령술사들이 없었을 리가 없지."
하지만 현실에서 역대 폭군들은 대대로 그냥 죽어 갔을 뿐이다.
"이는 저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말하다 말고 문득 로이드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사실은 그런 짓들을 많이 저질러 왔는데 내가 모를 뿐인 건가? 실은 초대 제국 황제가 대대로 자손의 육체를 빼앗으며 살아왔다거나...."
카르나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말리려고 했는데 먼저 알아채셨군요."
그리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빙의는 오래가질 못합니다. 육체와 영혼이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빙의 현상은 길어 봐야 하루 이틀 정도다. 그 이상 지속하면 육체는 붕괴하고 영혼은 미쳐 버린다.
"육체끼리 성향이 비슷하면 저 기간이 늘지요. 신체 조건이 비슷하거나, 나이가 비슷하거나, 같은 성별이거나 할수록 유지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봤자 몇 달 정도가 한계라는 게 카르나크의 설명이었다.
"거의 동일한 육체를 지닌 일란성쌍둥이조차도, 서로 영혼을 교환할 경우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년 남짓 정도입니다."
"그럼 내 경우는?"
"매우 가까운 혈통이긴 합니다만, 두 왕자님은 이복형제시죠. 게다가 육체적으로 차이가 너무 큽니다. 길어 봐야 석 달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당황하며 로이드가 언성을 높였다.
"그럼 이번 만월의 밤을 놓치면 내겐 기회가 한두 번밖에 없단 소리인가?"
"예."
"이런...."
로이드는 혀를 찼다.
뭔가 함정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여유가 없을 줄은 몰랐다.
"알포드 녀석은 대체 뭘 믿고 이런 위험한 짓을 저지른 거지?"
카르나크가 피식 웃었다.
"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르고 있었다니?"
"사교도들을 심문해 알아낸 사실입니다만...."
데츠라스 일당은 알포드 왕자에게 사실대로 알려 주지 않았다.
빙의의 유통기한 이야기는 쏙 빼고, 그냥 육체를 바꿀 수 있다고만 한 것이다.
혹여 일이 꼬이더라도 나중에 돌이킬 기회는 있다. 하지만 로이드 왕자님의 몸으로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이니 위험부담은 감수해야 한다.
"이런 식이었던 듯합니다."
"...그 녀석, 설마 그 말을 믿었단 말인가?"
"믿었으니 그런 짓을 했겠죠?"
"하하...."
헛웃음을 흘리며 로이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나로선 이번 만월 때 무조건 원래 몸을 되찾는 게 최우선이겠군?"
"그렇습니다."
"동시에 내 평판이나 안위도 신경을 써야 할 테고."
"그렇지요."
로이드의 몸을 차지한 알포드 왕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하지만 본인이 스스로를 망치겠다는데 이를 막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몰래 알포드와 접촉해야겠군."
탐탁잖다는 듯 로이드가 중얼거렸다.
"거래를 하는 수밖에 없겠어. 서로의 육체나 평판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일을 원래대로 되돌리자는 식으로."
마음 같아선 동생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그러다 로이드 자신까지 피해를 보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이 정도가 지금으로는 최선인 듯하군."
그런 왕자를 보며 카르나크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그는 로이드가 원래 몸을 찾건 말건 크게 관심이 없었다.
원래 목적은 고위 사교도를 붙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츠라스 일당의 영혼을 손에 넣음으로써 목표는 이미 이루었다.
로이드 왕자의 사정 따위, 어찌 되건 별 상관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친구 성격이 괜찮단 말이지?'
큰 사건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다짐은 이미 깨졌다. 그렇다면 일국의 왕자와 인맥 쌓아 두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이왕 그럴 것이면 그 인맥이 권력자일수록 편하겠지.'
최대한 온화하고 신뢰 가득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며 카르나크가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한 방 먹여 주고 싶으신 겁니까, 왕자님?"
갑자기 상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자 로이드가 긴장하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유스틸 왕궁 서쪽에 위치한 로이드 왕자의 거처, 은빛 칼라 궁.
그곳의 한 침실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아으, 아으으...."
해가 중천에 뜨다 못해 이미 오후로 접어든 시각이지만 여전히 로이드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정확히는, 로이드 몸속에 들어간 알포드이지만.
'이 빌어먹을 몸뚱이!'
침대에 누운 채 알포드는 이를 갈았다.
어제는 그나마 좀 컨디션이 괜찮았는데, 오늘은 눈뜨자마자 고열에 두통에 전신이 말이 아니었다.
'로이드 녀석은 대체 이딴 몸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거지?'
어쩌다 하루 아픈 날이 아니다. 그냥 매일이 이 모양이다.
어쩌다 하루 '안 아픈' 날을 찾는 게 더 빠르다.
그만큼 로이드의 육체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허약한 병신이 국왕이 되면 유스틸 왕국은 망한다.
'역시 이 나라의 왕이 될 자는 나밖에 없어.'
애써 숨을 고르며 알포드는 침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나저나, 드디어 이날이 왔다.'
거사 당일이었다. 이제 저 태양이 저물면 만월이 떠오르리라. 그리고....
'이 저주받을 몸뚱이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사실 좀 불안하긴 하다.
어째 며칠째 사교도들과 연락이 되질 않는 것이다.
벌써 몇 번이나 촉매를 통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묵묵부답이다.
하지만 계획을 미룰 순 없었다.
'이 몸으로 한 달을 더 살아가라고? 미쳤어?'
알포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그래도 기력이 조금은 돌아온 듯했다.
'이 정도면 저녁때, 부왕과의 식사 약속 정도는 참석할 수 있겠지.'
일국의 왕족쯤 되면 평범한 가족처럼 저녁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 따윈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을 골라 특별히 용건이 있다며 부왕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청했고, 승낙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회를 봐서 품에 숨긴 단검으로 암습하는 것뿐.
'이 몸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말이지.'
확실하게 부왕을 죽이기 위해 단검에 독을 바를까 싶기도 했지만 그 점은 포기했다.
어차피 국왕쯤 되면 항시 주위에 강력한 성직자를 대동하고 있는 데다, 본인도 의복 곳곳에 호신용 부적을 상비하기 마련이다. 당장 왕자인 알포드 자신도 그랬으니까.
'괜히 그 독 바른 단검에 실수로 내가 베이는 쪽이 더 곤란해.'
어디까지나 살의를, 반역의 의지를 확실하게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적당히 난동을 피우며 미친놈처럼 군다. 그리고 이 몸이 부상을 입지 않게 바로 단검을 버리고 항복한다. 그걸로 만사 해결이다.
계획을 점검하며 알포드는 한 번 더 창밖을 내다보았다.
'자, 이제 해만 저물면....'
그때였다.
"왕자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시종이며 호위병들이 우르르 침실로 들이닥쳤다.
당황한 알포드가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일이냐?"
덩치 좋은 하녀장이 허겁지겁 알포드를 안아 들며 외쳤다.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워낙 로이드의 신체가 작고 연약하다 보니 여성의 힘으로도 번쩍 들린다.
짐짝처럼 들려 나가는 알포드의 귀로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알포드 왕자가 정신이 나가 검을 휘두르며 왕자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알포드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뭔 소리야? 내가 나를 노리고 있다니?'
그리고 이내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로이드의 몸속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저들이 말하는 알포드 왕자는....
'...로이드?'
***
은빛 칼라 궁의 복도.
건장한 기사 1명이 수십의 병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놈들! 미래의 왕 앞에 무릎 꿇을지어다!"
병사들이 어이없어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알포드 왕자님!"
"폐하께서 이런 무도한 짓을 좌시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 굳이 국왕의 권위를 들먹일 상황까지도 아니었다. 지금 칼라 궁으로 쳐들어온 것은 알포드 1명뿐이었으니까.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아무리 왕자라 한들...."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이해를 못 해 수군대는 병사들을 지켜보며 로이드는 내심 웃었다.
'당연히 나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지.'
그래서 좋은 것이다.
'알포드, 이 어리석은 동생아....'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으니 이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겠지. 그리고 '알포드 왕자'가 미쳤다는 사실이 전국에 퍼져 나가리라.
'네가 날 엿 먹일 수 있다면, 나도 널 엿 먹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79화. 20. 왕자의 계략 (3)
로이드 왕자의 침실로 향하는 칼라 궁의 긴 복도.
알포드 왕자를 포위한 병사들이 고함을 터트리고 있었다.
"역도를 붙잡아라!"
주위를 둘러보며 왕자도 맞받아쳤다.
"감히 누구에게 반역자라 하는 것이냐! 나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왕이거늘!"
이내 창칼이 충돌한다.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전투가 이어진다.
탕! 타탕!
포위한 병사들을 향해 알포드 왕자가 한 번 더 소리를 내질렀다.
"썩 물러나라! 내가 원하는 건 저 허약해 빠진 로이드뿐이다!"
칼라 궁의 수비대장, 젤리어드 경은 안색을 굳혔다.
분위기와 달리 전투 자체는 딱히 과격하지 않았다. 서로 치명상이 되지 않을 거리에서 위협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째 병사들을 해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군.'
평소의 알포드답지 않지만,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애당초 평소의 왕자였다면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미친놈이 평소 같지 않다고 의아해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 덕분에 이쪽도 강하게 나가기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적대하는 사이라 해도, 어쨌든 상대는 왕자다.
죽일 생각으로 밀어붙일 순 없다.
그랬다간 후환을 감당키 어렵다.
'적당히 부상만 입힌 채 제압할 수밖에 없는데....'
부상도 마음대로 입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수비대장이라 해도 상대가 왕자인 이상 피를 보려면 핑계가 필요하다.
상대가 너무 난폭하게 날뛰어 피를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제압이 불가능했다는 핑계가.
그런데 어째 알포드 왕자가 점잖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러나라!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어차피 그대들도 종국엔 내 사람이 될 것 아니냐?"
젤리어드 입장에선 살짝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병사들 안위 챙겨 줬다고 저런 소리를?
하지만 상대가 저리 나오는 이상, 이쪽도 부상 없이 제압해야 한다.
"알포드 왕자님께서 많이 혼란스러우신 모양이다! 몸성히 모셔라!"
수비대장의 명에 따라 병사들은 계속 왕자를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예상보다 상대의 솜씨가 뛰어났다. 절묘하게 치고 빠지며 간격을 재는데, 상상 이상으로 실력이 좋았다.
경험 많은 일류 기사인 젤리어드 경조차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알포드 왕자의 검술이 저 정도로 뛰어났나?'
감탄하는 건 젤리어드뿐만이 아니었다. 알포드 속의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 진짜 끝내주네. 이렇게 잘 움직여?'
이 좋은 몸을 포기하고 도로 원래 육신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참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좋은 몸이라도 반년도 못 살고 죽을 순 없지!'
그렇게 계속 시간을 끌며 복도 저편을 힐끔거렸다. 슬슬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인가?'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한 줄기 백색 섬광이 복도를 관통해 왕자와 병사들 사이에 작렬했다.
콰아아앙!
강력한 마법의 빛이었다.
젤리어드가 흠칫 놀라 섬광이 날아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설마 왕자의 지원군?'
왕자의 지원군인 건 맞는데, 알포드 쪽이 아니었다.
"젤리어드 경!"
복도 저편에서 3명의 남녀가 달려오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기사와 붉은 머리의 미녀, 그리고 흑발의 마법사 청년이었다.
"그대는?"
"로이드 왕자님의 명을 받고 온 킹스 오더의 카르나크라 합니다!"
포위망에 합류하며 카르나크가 재빨리 젤리어드에게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받아 들어 보니, 카르나크 일행의 신분을 증명하는 로이드 왕자의 친서였다.
수비대장답게 젤리어드도 왕자의 필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틀림없는 친필이었다.
"그렇군. 왕자님께서 따로 생각이 있으셨나?"
"그럼 알포드 왕자를 제압하겠습니다."
젤리어드는 바로 물러섰다.
안 그래도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던 차였다. 대신 책임져 줄 인간이 나타났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명심하게. 함부로 피를 보아선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세라티 경!"
"예."
카르나크의 말에 적발의 미녀가 검을 든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부우우웅!
붉은 섬광이 칼날을 타고 흐르며 찬란한 빛을 발했다.
병사들이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오오!"
"오러 유저!"
세라티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잠깐 검광이 번쩍번쩍하더니 이내 '알포드 왕자'가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컥! 크윽!"
난리를 친 것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끝났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아무리 알포드 왕자가 무술적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오러 유저와 비견될 수준은 절대 아니니까.
쓰러진 왕자를 향해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제압하겠습니다. 홀드 퍼슨."
빛의 밧줄이 알포드의 전신을 칭칭 휘감았다.
"윽! 가, 감히 이 몸을!"
왕자는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완전히 묶인 그를 보며 젤리어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큰일 날 뻔했구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
난리가 수습되자, 피신했던 로이드 왕자도 다시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로이드 왕자 몸속에 있는 알포드가 돌아간 것이지만.
"알포드가 난리를 피우다 붙잡혀서 현재 왕궁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건가?"
그의 질문에 시녀장이 정중히 대답했다.
"예. 카르나크 경이 감시 중입니다."
알포드는 당황했다.
'카르나크? 그건 대체 누구야?'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보아하니 로이드가 아는 게 당연하다는 말투라 함부로 모른 척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지.'
아차 싶어 알포드가 황급히 물었다.
"그럼 오늘 저녁 약속은 어찌 되었나?"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시녀장이 답했다.
"취소되었습니다. 왕자님의 안위가 최우선이니까요."
'알포드 왕자'의 계략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상식적이고 올바른 대응이었다.
어디까지나, '로이드 왕자'의 심복으로서는 말이지.
그 안에 들어앉은 알포드로서는 속이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이 허약한 로이드의 몸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침실에 반쯤 감금된 채 멍하니 침대에 주저앉아 있을 뿐.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귀하신 왕자님 밥 굶으면 안 되니 하녀가 저녁 식사를 침실로 가져왔다.
그걸 보며 알포드는 이를 갈았다.
'젠장! 이 맛대가리없는 밥도 오늘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몸에 좋은 식재료만 써서 정갈하게 만든 음식이라 했던가?
문제는 이 식사가 '혀의 즐거움'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맛이 없었다. 오죽하면 귀족들이 기르는 애완견용 사료가 더 나을 지경이다.
'원래대로라면 부왕과 마주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투덜대던 중이었다. 문득 알포드의 안색이 변했다.
'...저녁 식사?'
저녁 식사는 저녁에 먹는 식사다. 즉, 지금은 저녁이란 소리다.
그리고 저녁은 보통 해가 저문 다음을 의미하는 법이지.
'가만! 그러면?'
알포드는 허겁지겁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 반짝이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만월의 빛....'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변했다.
***
알포드는 눈을 껌벅였다.
"...어?"
기이한 기분이었다.
놀랍도록 몸이 편하면서 동시에 불편하다.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과 익숙한 기분이 함께 든다.
왜 그런지는 곧 깨달았다.
그는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어색하고 불편하지.
그럼에도 편하고 익숙한 이유는?
'내 몸이잖아?'
황급히 알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을 에워싼 회색의 돌벽, 그리고 눈앞에 놓인 두꺼운 쇠창살.
왕궁 지하 감옥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아니, 당연히 여기에 있겠지.
'알포드 왕자'가 미쳐 날뛰는 바람에 가둬 놓았다지 않았나?
"로이드, 이 자식!"
무슨 일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알포드 자신이 세웠던 계획 아닌가?
'당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쇠창살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알포드 왕자님."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흑발의 청년이, 기사로 보이는 남녀를 동반한 채 감옥 밖에 서 있었다.
눈을 부라리며 알포드가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엉뚱한 반문이 돌아왔다.
"저를 모르시지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니, 모르니까 물어봤지, 그럼 알면서 물어봤겠냐?'
그럼에도 알포드는 상대를 비웃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불길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청년이 그에게 다가오며 손가락을 들었다. 뾰족한 빛의 바늘이 손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청년의 시선이 알포드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앞으로도 계속 모르실 겁니다."
***
알포드 왕자의 이해할 수 없는 난동이 있고 나흘 뒤.
카르나크 일행은 칼라 궁의 서재에서 한 청년을 마주하고 있었다.
옅은 회색빛의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 살짝 금빛이 도는 푸른 눈동자에 곱상한 얼굴.
얼핏 10대 소녀처럼도 보이는, 하지만 실은 올해로 20살이 된 유스틸 왕국의 제1왕자 로이드였다.
난리가 어느 정도 수습되어 다시 외부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몸을 되찾은 로이드를 보며 바로스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해야 합니까요?"
로이드가 피식거리며 답했다.
"이것 참 기묘한 상황이긴 하군."
벌써 며칠째 알고 지낸, 심지어 로이드 입장에선 목숨까지 의탁했던 사이였다. 하지만 정작 진짜 얼굴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다.
"이 몸으로 다시 한번 인사를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이드 왕자가 정식으로 사의를 건넸다.
"감사하는 바다.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
예법에 따라 카르나크도 겸양을 표했다.
"귀족의 도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로이드가 아쉬워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 것은 그대들의 노고에 제대로 된 보상을 해 주질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물론이고 부왕의 목숨, 나아가 이 나라를 구해 준 것이나 다름없거늘."
로이드와 알포드의 육체가 서로 바뀌었었다는 사실은 외부로 공표되지 않았다.
워낙 사안이 큰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벌어질 후폭풍이 짐작이 가지 않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카르나크 일행의 공도 크게 깎였다.
실제론 로이드를 물심양면으로 보필했지만 이는 기밀 사항, 그러니 대외적인 공로는 그냥 쳐들어온 알포드를 제압한 것이 전부다.
"천만의 말씀을요."
미안해하는 로이드와 달리 카르나크는 태연했다.
"전 사교도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왕자님."
진심이었다.
애초에 거물 사교도 잡겠다고 끼어든 일이고, 목표했던 대로 거물 사교도를 잡았다.
이미 충분히 목표 달성을 했으니 진심으로 보상 따위에 관심이 없을 수밖에.
무릇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다.
'정말 욕심이 없는 자로군.'
앞으로도 검은 신의 교단과는 충돌할 일이 많을 것이다.
일국의 왕자에게까지 손을 뻗은 놈들이 이대로 물러서진 않을 테니까.
'이런 인재를 묻어 둘 순 없지. 차후에 에란텔 단장과 따로 상의를 해 봐야겠어.'
그렇게 왕자가 머리를 굴릴 때였다.
문득 바로스가 물었다.
"알포드 왕자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기밀 사항이긴 하다만 그대들은 알고 있는 게 좋겠군."
잠시 고민한 로이드가 뭔가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알포드는 자살했다. 스스로 목을 매었지. 어젯밤의 일이다."
그리고 안색을 굳히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실제론 자살당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겠지만."
일국의 왕자가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냥 대충 관에 넣고 묻을 리가 없다. 당연히 성직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다.
은밀하게 숨겨진 종말의 어둠의 흔적을.
"카르나크 경, 자네 말대로더군."
혀를 내두르며 로이드 왕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사령술사들은 사람을 자살시키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
#80화. 20. 왕자의 계략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