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26. 뒤틀린 세상
사흘 뒤,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는 왕도 드룬타로 귀환했다.
마검 마레다는 유스틸 왕국을 흔들었던 많은 어둠 관련 사건 중에서도 특히나 큰 피해를 낳았다. 이를 처리했으니 왕실에서도 이들의 공로를 크게 치하했다.
대장인 지켄과 부대장 트리브의 명성 역시 왕국 전역에 퍼졌다.
다만, 카르나크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러 감춘 탓이었다.
***
드룬타로 복귀하기 하루 전.
"마검 마레다를 처리한 걸 나로 하자고? 자네들 이야기는 쏙 빼고?"
"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지막에 검의 악령을 퇴치한 건 카르나크, 그대가 아닌가?"
제안을 들었을 때만 해도 지켄은 극구 반대했다.
"일부러 내게 공을 돌릴 필요는 없네. 내가 그런 걸로 시기할 만큼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이나?"
"그런 게 아닙니다."
카르나크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마검 마레다를 해치운 건 엄연히 지켄 대장이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마검을 마지막으로 제압한 건 분명히 지켄이었다. 이후에 날뛴 건 마검이 아니라 라피셀이었지.
"저희는 그저 마무리를 했을 뿐이고요."
이 역시 지켄이며 트리브 등이 대부분의 힘을 꺾어 놓았기에 가능했던 것.
"대장은 응당 누려야 할 명예를 얻는 것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명예를 함께 나누어야지, 왜 자네만 빠진단 말인가?"
카르나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킹스 오더 모두가 대장처럼 대범하진 않으니까요."
그제야 지켄도 상황을 이해했다.
안 그래도 카르나크는 단기간에 너무 많은 성과를 올렸다.
여기서 최고참 중 1명인 지켄마저 누를 정도의 공을 또 세우면 다른 대대장들의 심기가 꽤나 불편해지는 것이다.
"시골 출신 주제에 중앙까지 올라온 탓에 안 그래도 정신이 없습니다. 여기서 더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진 않군요."
"하긴, 자네는 경력에 비해 너무 빨리 승진했지. 어느 정도 자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괜찮겠어. 하지만 보고서를 조작하는 건 좀...."
지켄은 난처해했다.
카르나크의 말대로 하자면 검의 악령이 인간 숙주로 옮겨 간 일 자체를 없던 일로 해야 한다. 거짓말을 해야 한단 소리다.
"당연히 에란텔 단장님껜 사실대로 보고해야죠. 하지만 킹스 오더의 실수를 굳이 문서로 남길 필요가 있습니까?"
킹스 오더 내에서야 사교도들의 수법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차후 대처할 수 있으니 절대 감추어선 안 된다.
하지만 외부에까지 굳이 실수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솔직하게 알려 봐야 트집만 잡을 것 아닙니까? 오히려 앞으로의 활동에 방해만 되겠죠."
같은 이유로, 마검의 소녀가 카르나크며 7대대 관련해 이상하게 행동했던 부분도 누락시키는 쪽이 좋다.
저걸 솔직히 보고할 경우 그 이유도 첨부해야 하는데, 그 점은 여전히 파악을 못했으니까. 마찬가지로 트집 잡힐 일이다.
"그냥 지켄 대장과 트리브 부대장이 따로 해치웠다고 하는 쪽이 여러모로 깔끔할 겁니다."
납득한 지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우리가 공을 차지하지."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카르나크를 바라보았다.
"자네에겐 빚을 지게 되었군. 언제든 이 빚을 갚겠네."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빚을 지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아쉬울 때 등 비빌 곳이 생겼다는 건 기쁜 일이군요."
지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날 찾게."
***
절대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로스가 물었다.
"진짜 이유는 뭡니까?"
"왜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도련님이 자중하는 모습을 보인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과연 다른 이유가 있었다.
"라피셀 때문이지, 뭐."
킹스 오더는 라피셀이 검의 악령에게 잠시 빙의되어 마지막으로 발악한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다들 저 사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악령이 빙의 장소를 옮겨 다니는 건 흔한 일이니까.
"하지만 7여신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거든."
현재 7여신교는 꽤나 집요하게 사령술의 흔적을 뒤쫓고 있다. 또한 아주 사소한 문제마저 짚고 넘어가려는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이들도 꽤나 많다.
당장 알리우스 신관만 해도 그런 타입이라 만나게 된 것이고.
훌륭한 신관들이 많은 거야 좋은 일이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 겁난다.
자칫 대신전에서 라피셀을 조사하겠다고 나서면? 그러다 신성력의 영향으로 기억 일부가 돌아오기라도 하면?
"아예 처음부터 시선 끌 일 자체를 안 만드는 게 낫지."
마검의 소녀가 7대대 상대로 이상하게 행동한 이유도 결국 카르나크가 원인이다. 누군가 그 부분을 파고들면 귀찮아지는 것이다.
그럴 바엔 지켄이며 트리브에게 공을 돌리고 안전하게 넘어가는 쪽이 백배 낫다.
"덕분에 좋은 분위기로 잘 끝났잖아?"
카르나크는 싱글벙글 웃었다.
라피셀로부터 세간의 시선을 돌렸고, 덤으로 지켄과의 친분도 쌓아 두었다.
"이 정도면 나도 사회성 꽤나 좋아진 것 같지 않냐, 바로스?"
"그러게요. 예전에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죄다 적으로 돌변했었는데."
"그땐 왜 그랬지, 나?"
"글쎄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없어하며 세라티가 툭 던지듯 말했다.
"본인이 너무 잘나서 남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아니었을까요?"
그냥 해 본 소리인데 두 사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사회성은 아쉬운 게 많아야 생기는 건가?"
"하긴, 저도 요즘은 주변 사람들이랑 더 잘 지내는 것 같긴 해요."
세라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뭔가 어긋난 것 같기도 하고, 진실을 꿰뚫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저 두 사람이 남들 시선을 신경 쓰기 시작한 건 좋은 징조네.'
***
미리 이야기를 맞춘 덕에 카르나크의 이름은 세인들 사이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소하게 화제가 되는 이름이 있긴 했다.
바로스였다.
"축하드리오, 바로스 경!"
"드디어 오러 유저가 되셨군!"
바로스가 오러 유저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워낙 무술의 달인이었으니까.
"저 친구가 여태 오러 각성을 못 한 게 더 이상하긴 했지."
킹스 오더 내부엔 투기검을 쓰지 못하는 그와 대련해 패배한 오러 유저도 제법 된다.
다들 조만간 오러 유저 되겠거니 하고 있었다.
귀족들 중 몇몇은 신기한 듯 지켜보기도 했다.
"오러 유저가 둘에 영주 본인도 6서클의 마법사라?"
"제스트라드 가문이 생각보다 위세가 높군."
"뒤에 로이드 왕자님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렇다 하여 유심히 신경을 쓰거나 하는 것까진 아니었다.
이제 갓 오러 유저가 된 정도로는 크게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다.
왕도 드룬타에서 적색급, 레드 나이트의 경지는 그리 드물지 않으니까.
일개 지방 가문이 조금 더 세졌다고 중앙에서 경계하거나 할 이유까진 없다.
적당한 세간의 인정과 적당한 세인들의 무관심.
딱 카르나크가 바라던 위치였다.
"좋아, 외적인 문제를 해결했으니 개인적인 부분을 해결할 차례군."
내내 머무르던 여관을 떠나 카르나크는 드룬타 남부 거리에 집을 한 채 구했다.
라피셀의 합류로 일행 숫자도 많아졌고,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머무르기엔 아무래도 여관이 편한 장소가 아닌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라피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 불특정 다수와 계속 접촉시키고 싶지 않아."
"와, 어린 여자애를 집 안에 가두고 입맛대로 키우겠다는 소리 같네요, 그거."
"어라? 이거 혹시 나쁜 짓이야, 세라티?"
"그냥 농담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다행이군."
라피셀은 예정대로 세라티 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꽤나 찜찜한 상황이었다.
'너무 추락한 거 아닌가? 원래 그녀의 스승은 무왕 벨티아일 텐데.'
하지만 그냥 보내 줄 수도 없었다.
라피셀이 기억을 되찾으면 큰일 날 사람은 왕년의 사령왕과 데스 나이트 로드뿐만이 아니다. 추악한 사령왕의 권속도 절대 가만 놔두지 않겠지.
'그래, 이제부터라도 잘 대해 주면 되는 거잖아?'
맛난 것도 사 주고 몸도 깨끗이 씻기고 머리도 빗기고 좋은 옷을 입혔다.
더러운 시골 아이에서 활발하고 귀여운 도시 소녀로 재탄생한 라피셀을 앞에 앉히고 진지하게 말을 건다.
"이제부터 내 종자로 지내게 될 거야, 라피셀."
"네, 마스터!"
"마스터라...."
세라티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종자를 둘 자격은 충분하다.
하지만 미래의 무왕에게 마스터라 불리는 건 역시 민망하지?
"...그냥 언니라고 불러."
뭐, 라피셀이야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시키는 대로 착실히 따른다.
"네, 세라티 언니!"
종자라면 자질구레한 잡일도 익숙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일단 단순한 집안일부터 시켰다.
기억이 봉인된 라피셀은 실로 착하고 성실한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증오와 분노는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신기할 정도로 카르나크와 바로스를 따르기까지 했다.
"카르나크 님! 청소 다 했어요!"
"바로스 님! 물 길어 왔어요!"
"카르나크 님! 바느질 다 했어요!"
"바로스 님! 식사 준비 도와드릴까요?"
그때마다 두 사람은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아, 그, 그래...."
"자, 잘했어, 고맙다...."
너무 방긋방긋 웃고 있어서 똑바로 보기 힘들달까?
[크윽!]
[죄, 죄책감이....]
지켜보던 세라티가 실소를 흘렸다.
[웬일이래요? 그토록 뻔뻔하던 양반들이.]
하기야, 저 두꺼운 낯짝으로도 버티기 힘들 만큼 지은 죄가 크긴 했다.
하여튼 라피셀은 자연스럽게 일행 속에 녹아들었다. 카르나크도 옆에서 천천히 그녀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기억 봉인은 제대로 된 것 같고...."
이제 어떻게 그녀가 이 시간대로 시공 회귀했는지를 알아낼 차례다.
하지만 기껏 봉인한 기억을 함부로 들쑤시는 건 역시 위험하다.
"에휴, 겨우 단서가 발견되었는데 확인할 수가 없군."
"단서라뇨, 도련님?"
"그동안 계속 의심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거든. 그런데 라피셀 덕분에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어."
내내 궁금했다.
대체 제스트라드 가문은 왜 갑자기 그런 부자가 되었나?
있지도 않던 구리 광산은 대체 왜 생긴 것인가?
카르나크의 권능, 종말의 어둠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보다도 앞선 시간대부터 세상에 뿌려지고 있었나?
"이 모든 일이 대략 우리가 돌아오기 4년 전에 생겼던 일이지."
그렇다면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갑자기 카르나크가 화제를 바꿨다.
"그거 알아, 바로스? 시공에 관련된 마법은 순전히 가설밖에 없어. 실제로 검증된 경우가 없으니까."
바로스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지금 카르나크는 그에게 대답을 구하는 게 아니다.
질문이란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 뿐.
"과연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시간 속의 모순은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는 마법사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혹자는 평행 세계의 존재를 주장하고, 혹자는 시공 연속체는 불변이니 시공을 다루는 마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시공의 연속 면에 고정된 특이점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사고실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실제로 시공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나만이 가능했지."
카르나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선 내게 답을 주지 못했고."
이제까지는 이 세계가 일종의 평행 세계 같은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역사가 바뀔 수 있더라고."
카르나크 말고도 누군가가 이 시간대로 돌아왔다면? 그것도 카르나크보다 먼저 돌아왔다면? 그래서 과거에 영향을 끼쳤다면?
"세상이 이렇게 뒤틀린 것도 말이 되지."
#101화. 26. 뒤틀린 세상 (2)
"누군가가 우리보다 몇 년 일찍 이 시대로 왔다라...."
바로스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가설은 한 가지 전제를 필요로 한다.
"도련님 말고도 시공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요?"
궁극의 사령술사 카르나크마저도 수없이 실패를 거듭한 시공 회귀 주문이었다.
신에 비견되는 존재라는 아스트라 슈나프가 되고도 무려 수십 년을 고생한 끝에야 겨우 성공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나 사령술사가 존재했다면, 애초에 우리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인류 최강이었던 3인의 대마법사도 시공을 다루는 영역엔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저들이 그 정도로 높은 경지였다면 처음부터 카르나크에게 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4대 무왕이야 오러 유저니까 애당초 열외.
세계의 수호자였던 용황제 그라테리아가 멀쩡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멀쩡하지 않다는 건 우리가 더 잘 알고요."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처럼 처음부터 시공 회귀 주문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겠지."
하지만 남이 만든 걸 조작하는 경우라면?
"기억하지? 시공 초월의 비석."
"에, 우리가 이 시대 올 때 썼던 피 색깔 판때기요?"
"그래, 그거."
카르나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난 시공 초월비를 사용한 후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과거로 돌아오며 모든 미래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가 저지른 모든 건 없던 일이 되고, 모든 역사도 무(無)로 변하며, 새로운 역사가 써지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이 시간대로 떠난 후에도, 그 미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면?
"시공 초월비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소리지."
동시에, 사령왕이 지배하던 네크로피아의 언데드들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룡 그라테리아와 3인의 대마법사, 4대 무왕을 위시한 그 수많은 괴물들이.
카르나크의 지배력이 사라지면 저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라테리아는 완전히 이성을 지워 버렸다. 지배력이 사라져도 지성 없는 짐승이 될 뿐이다.
천하의 카르나크도 저 무서운 용황제를, 이성을 남긴 채 사룡으로 부릴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3인의 대마법사며 라피셀을 제외한 다른 무왕들은 지성을 남겨 놓았다.
충성심을 각인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법이나 오러의 특성상 지성이 사라지면 별 쓸모가 없기도 하고.
그런 저들이 자아를 되찾았다면?
그리고 텅 빈 옥좌 뒤에 홀로 남은 시공 초월의 비석을 발견했다면?
"10서클의 추구자라면 남은 비석을 연구해 시공 회귀 주문을 터득할 가능성도 없진 않지...."
심각해진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더욱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결국 또 도련님 탓이네요?"
"시끄러."
입을 삐죽이며 카르나크는 생각에 잠겼다.
이 가설이라면 많은 것이 설명된다.
라피셀 역시 누군가가 이 시간대로 넘어오기 전에 실험 삼아 먼저 보낸 것이라 하면 얼추 앞뒤가 맞는다.
"문제는... 이걸 무슨 수로 확인하느냐로군."
***
마검 마레다 사건 이후 카르나크 일행은 또 한차례의 휴가를 받았다.
휴가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그동안 안 쓴 휴가 일수가 워낙 많았다.
그렇게 여유 시간을 얻자 바로스는 착실하게 오러 수행부터 들어갔다.
사실 그가 투기에 대한 걸 추가로 배울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딱 하나, 오러양을 늘리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할 줄 안다.
그럼에도 차근차근 기본기부터 다져 갔다.
"복습 중요하지, 복습."
게다가 자신만의 투기를 다루는 것은 처음이다. 예상 못 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헛! 으랏차! 허야!"
새로 얻은 집 뒷마당에서 매일같이 검을 휘두르며 감각을 조정하느라 열심이었다.
라피셀은 세라티 밑에서 검술의 기초부터 닦기 시작했다.
일부러 실전용 검술이 아니라 신체 전반을 단련하는 검술부터 가르친 것이다.
"아직 성장기도 오지 않았는데 너무 과한 동작 시키면 오히려 다쳐요."
과연 재능이 있어, 그녀는 시키는 걸 곧잘 해냈다.
하지만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검의 정혈이 전부 빠진 지금의 라피셀은 평범한 어린애일 뿐이다.
바로스의 사례도 있듯, 아무리 미래의 무왕이라도 육체가 받쳐 주지 않으면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
덕분에 세라티가 눈앞에서 간단한 내려 베기 하나만 시연해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하기 일쑤였다.
"우와!"
"굉장해요, 언니!"
"전 언제쯤 언니처럼 검을 휘두를 수 있을까요?"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이 워낙 귀여워 세라티도 라피셀을 예뻐하고 있었다.
가끔 섬뜩한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세라티 언니!"
"응?"
"시키는 대로 허공에서 나뭇잎을 반으로 베어 냈어요!"
멀쩡한 나뭇잎 두 장을 보며 세라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베었다는 거니?"
"둘로 베라면서요?"
그제야 깨달았다, 두 장의 나뭇잎이 유독 얇다는 것을.
'이거 원래 나뭇잎 한 장이었어?'
두 동강 낸 것이 아니라 박피 뜨듯 양면을 얇게 갈라 버린 것이다! 그것도 허공에서!
'와, 이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세라티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신기였다.
"차, 참 잘했어요."
"에헤헤!"
칭찬받은 라피셀이 기쁜 듯 웃었다.
세라티처럼 훌륭한 스승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충만한 미소였다.
"저도 어서 언니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그제야 세라티도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윽! 죄, 죄책감이....'
***
2층에 위치한 세라티의 침실.
오늘도 그녀는 카르나크에게 영혼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게헤나의 갑주를 사용하며 세라티의 영혼은 꽤나 오염되었다. 이를 다시 씻어 내야 하는 것이다.
"오염이라기엔, 솔직히 아무 느낌도 없던데요."
"내 권속이니까 그렇지."
사령술사의 권속 입장에서는 오염보단 오히려 적응에 가까운 개념이다.
문제는 무엇에 적응을 하냐는 것이지.
"지옥의 공기에 적응하고 싶은 건 아니지?"
"최대한 빨리 씻어 내 주세요."
실소하며 카르나크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사령술이 아니라 혼돈마법 쪽이라 은밀할 필요까진 없다. 그냥 자기 집에서 대놓고 저질러도 된다.
술식을 펼친 뒤 카르나크가 손짓했다.
"자, 얌전히 앉아 있어."
"얼마나요?"
"10분쯤?"
마법진 가운데 들어가 세라티가 가부좌를 틀었다. 카르나크도 테이블 의자를 꺼내 걸터앉았다.
마냥 앉아만 있으려니 심심하다.
카르나크는 창밖을 힐끔거렸다. 뒤뜰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잿빛 머리의 작은 소녀가 보였다.
"라피셀은 어때?"
세라티가 한숨을 쉬었다.
"죄짓고 있는 기분이에요."
라피셀은 원래 무왕 벨티아의 제자가 되었어야 한다.
"그녀의 앞길을 제가 멋대로 막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라피셀이라면 어차피 무왕이 될걸."
그녀는 '미래의 무왕' 본인이다. 미래에 무왕이 될 운명이 아니라.
배운 걸 잊은 것뿐이지, 배우지 못한 게 아니란 소리다.
"칭호만 바뀌겠지. 시프라스의 무왕이 아니라 제스트라드의 무왕으로."
"모르죠, 벨티아 밑에서 다른 시프라스의 무왕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럼 4대 무왕이 5대 무왕 되는 것뿐이고."
무왕이니 대마법사니 하는 칭호는 등수 매겨서 얻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강부터 2등, 3등, 4등까지 4대 무왕으로 칭하고 5등부턴 그냥 일반 검사, 뭐 이런 식이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은 항상 제자리를 유지하지 않는다. 더 강해질 수도, 더 약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등수를 매번 매기겠나?
대마법사와 무왕은 저들이 오른 경지에 대한 찬사를 담은 칭호였다.
궁극의 투기, 황금의 오러를 얻은 이들은 무왕으로 불리고 마스터 오브 마스터, 10서클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대마법사라 불리는 것이다.
자연히 무왕과 대마법사의 숫자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명의 대마법사에 3대 무왕일 때도 있었고, 2인의 대마법사에 6대 무왕일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 무왕이나 대마법사가 단 1명도 없는 시대도 있었다.
"실제로 아주 잠시긴 하지만 5대 무왕이었던 시절도 있었지."
"그게 언젠데요?"
"지금으로부터 한, 20여 년쯤 뒤?"
과거형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제론 미래의 일이다.
벨티아 밑에서 수행을 쌓고 세상에 나온 라피셀이 결국 황금의 오러를 터득해 새로운 무왕이 되고, 그럼에도 아직 벨티아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금방 도로 4대 무왕 됐지만."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제아무리 강력한 육체와 정신도 결국 나이 먹으면 쇠하는 법이다.
아무리 무의 극한에 도달한 자라도 60~70세쯤 되면 은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시대의 4대 무왕은 갤러드와 벨티아, 드렐타인과 바탈록.
갤러드와 벨티아는 각자 레번과 라피셀이라는 후계자를 새로운 무왕으로 키워 내고 은퇴했다.
"드렐타인은 그때도 아직 현역이었고."
바탈록은 제자 농사 실패한 케이스였다.
본인은 천재였지만 가르치는 재능은 없었는지, 제자를 꽤 두었는데도 무왕은 물론이고 실버 나이트조차 배출하지 못했다.
"어머, 그럼 새 무왕은 바탈록과는 상관이 없었나 보죠?"
"응."
새로운 4대 무왕의 일원, 말리칸 툰은 개천에서 용 난 경우였다.
스승은 퍼플 나이트에 불과했지만 본인은 극도의 노력 끝에 금검기의 경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까.
"뭐, 그래 봤자 다들 바로스에게 패했지만 말이지."
경험 많은 노검사인 드렐타인만이 데스 나이트 로드를 능가했지만, 그마저도 사령왕의 권능 앞에선 결국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렇군요...."
세라티는 홀린 듯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미래의 일을 안다는 건 누구나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괜히 점쟁이들이 그토록 성황이겠는가?
물론 카르나크가 아는 미래는 이미 꼬여 버렸으니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일개 점쟁이보단 적중률이 높지 않겠나?
"그럼 3인의 대마법사는요? 그들 중에도 새로운 대마법사가 나왔나요?"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쪽은 그대로야."
오러 유저와 달리 마법사는 전성기가 비교적 길다.
마법은 정신의 영역, 나이를 먹는다 해도 오러 유저처럼 급격하게 쇠퇴하지는 않는 것이다.
대마법사쯤 되면 강대한 마력으로 어느 정도 젊음을 붙잡아 둘 수도 있었다.
대신 10서클에 도달하는 마법사의 숫자 자체가 월등히 적다.
대마법사가 3명이나 나온 것도 거의 수백 년 만의 일, 원래는 1~2명도 많았다.
"나 때나 지금이나 3인의 대마법사는 변함이 없어."
여명탑주 디오그레스 콜론.
요정족의 총수호자, 기옌 렌.
제국 황실 마법사, 엘레자르 데 리플라시온.
이 시대의 대마법사들이며, 수십 년 뒤 사령왕의 휘하로 들어오는 이들이기도 하다.
세라티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카르나크 님처럼 이 시대로 돌아와 이런 사태를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그렇지. 한 놈만 왔을지, 아니면 더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추측이 사실이라면 돌아온 이는 정황상 검은 신의 교단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다행인 점은 이제 우리도 단서를 얻었다는 거지."
암흑 추기경 휴델 그렌탈. 여태 파악한 사교단의 일원 중 가장 거물이다.
"그동안은 워낙 잘 숨어 있어 휘둘리며 뒤쫓기만 했지만...."
카르나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엔 이쪽에서 치고 올라갈 차례다."
#102화. 26. 뒤틀린 세상 (3)
대륙 최대 최강의 국가, 라케아니아 제국.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수도는 당연히 지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테아 크라한은 그야말로 황제의 도시였다.
지평선까지 늘어선 무수한 건물들 사이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이 무수히 늘어져 있다. 마치 거인의 모세혈관 같은 광경.
하지만 대로로 나서면 이야기가 다르다. 철저히 규격에 맞춘 네모반듯한 도로들이 각 구획을 바둑판처럼 나누며 제도의 혈관이 되어 무수한 시민들을 옮긴다.
단순히 규모만이 전부가 아니다. 화려함 역시 다른 도시를 압도한다.
다른 곳이었다면 한 도시의 상징이 족히 되고도 남을 거대한 탑과 저택마저 이곳에선 일개 건물일 뿐이다.
걸음걸음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탑들이 줄을 서 있고 곳곳에 예술품처럼 빛나는 저택들이 도시를 장식한다.
그런 제도의 동쪽에 탑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화려한 황궁이나 귀족가 저택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정갈한, 일견 수수하기까지 한 흰색 탑이었다.
하나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조차도 이 탑의 주인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이곳은 3인의 대마법사 중 1인이자 제국 최강의 마법사, 엘레자르 데 리플라시온의 마탑이었으니까.
***
마탑 내부에 위치한, 온갖 들새들이 정교하게 그려진 한 응접실.
풍성한 금발을 곱게 묶은 갈색 피부의 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됐니, 휴델?"
미녀 앞에 선 20대의 금발 청년이 공손히 보고를 올렸다.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찾았습니다, 엘레자르 님."
"흐음...."
엘레자르는 휴델이 제출한 서류를 훑어보았다.
40대 중반의 마른 사내와, 역시나 비슷한 나이대의 검사의 초상화가 그려진 서류였다.
유스틸 왕국 킹스 오더의 1대대장인 7서클의 마법사, 지켄 에스페로드.
마찬가지로 1대대의 부대장인 청색급 오러 유저, 트리브 라킨스.
서류를 살피던 그녀가 물었다.
"왜 이자들을 의심한 거니?"
"저희가 준비한 마검을 쓰러뜨린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처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양의 사기와 탁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킹스 오더야 저걸 마검이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휴델은 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저희는 아니란 걸 명확히 알지요."
전투가 벌어졌고, 마검의 것이 아닌 사기와 탁기가 남았다.
그럼 그 흔적은 마검을 상대한 자의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심지어, 킹스 오더의 보고서를 빼돌려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저들이 마검을 처리할 당시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남몰래 사령술을 쓰기 위해 행동한 듯한 양상으로 보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강력한 마법사이자 오러 유저라는 점이었다.
사령술을 사용한 정황이 있음에도 마법과 투기를 여전히 구사하고 있다. 마치 검은 신의 교단처럼.
엘레자르가 요구한 '우리가 한 짓이 아닌데 우리가 저지른 짓처럼 보이는 일들'에 딱 맞아떨어진다.
"보다 자세히 조사해야 알 수 있겠지만, 결코 무관한 이들은 아닐 겁니다."
"그렇구나."
엘레자르는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넘겼다.
휴델은 꽤나 만족스럽게 일을 처리했지만, 역시 그녀가 원하는 대답까지 가져오진 못했다.
이들이 과연 성역을 침범한 자들일까?
'그렇다기엔 느낌이 좀....'
어쨌건 단서가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
"이제 어쩔 셈이니?"
"둘 다 제법 거물입니다. 함부로 움직이기엔 위험성이 높지요. 한동안은 뒤를 캐 볼 생각입니다만."
"맡길게."
"예, 엘레자르 님."
그녀는 계속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델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과연 본단에서 내려 주신 마검의 힘은 굉장하더군요."
"응?"
"그 검 한 자루로 수백에 달하는 이교도들에게 올바른 신의 가르침을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알고 있던 마검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엘레자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검은 신의 교단에서 말하는 '올바른 신의 가르침'이란 건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
'...수백 명을 죽였다고?'
서류의 앞부분이 아닌 뒷부분을 넘겼다. 마검이 유스틸 왕국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보고한 부분이었다.
잠시 후 그녀의 안색이 굳었다.
'어머, 진짜네?'
교단에서 휴델에게 내준 마검은 물론 뛰어난 기물이었다. 마검치고는 꽤나 강력한 축에 속하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마검치곤.
이렇게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이상하네. 이렇게 강력한 마검은 있을 수가 없는데.'
의아해하며 엘레자르가 물었다.
"이 마검, 어떤 식으로 운용했지?"
의외의 질문에 휴델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냥 평범하게 운용했습니다만?"
중요한 건 마검이지 숙주가 아니다. 그래서 적당히 고아 소녀 하나 납치해 마검 쥐여 주고 세상에 던졌다. 그게 전부다.
"혹시 마검에 깃들인 영혼이 뭔가 특별했니?"
"그건 제 안목으론 알아볼 수가 없어서...."
한참 고민하던 엘레자르가 명령을 내렸다.
"이거, 도로 챙겨 오렴."
휴델이 난처한 반응을 보였다.
"이미 검의 악령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와서 뭔가 알아낼 순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그래도 수거해. 왠지 감이 안 좋아."
***
드룬타에 돌아온 뒤 카르나크는 킹스 오더 정보부에 암흑 추기경 휴델에 대한 탐색을 맡겼다.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으니, 고작 이름 몇 자만으로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인상착의와 출신지까지 파악하고 있다면 난이도는 확 낮아지는 것이다.
보름 뒤, 카르나크는 원하던 정보를 받았다.
"라케아니아 제국 귀족, 휴델 그렌탈. 성별 남(男). 나이 28세. 유스틸 왕국 서부 국경과 인접한 그렌탈 백작가의 가주라...."
서류를 마저 살피며 카르나크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웃긴 놈이네."
원래 휴델은 영주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위로 형이 무려 셋이나 있었고, 전 영주였던 아버지 역시 60대이긴 했지만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종말의 어둠이 뿌려진 이후.
정체불명의 사령술사가 나타나 그렌탈 영지를 공격했다.
그 와중에 전 영주가 죽고, 세 형들마저 모두 저주에 걸려 앓다 죽었다.
망조가 든 영지를 구한 것이 바로 휴델이었다.
그는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뛰어난 지도력으로 영지 기사들을 부려 사령술사를 쫓았고, 결국 범인을 색출해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가신과 영지민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그렌탈 백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고 한다.
"어째 인생 역정이 누구랑 굉장히 비슷하잖아?"
바로스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도련님이랑 판박이인데요, 이거?"
정체불명의 사령술사 때문에 부모가 죽고, 가문 물려받을 형들도 다 죽고, 홀로 남아 영지를 꿀꺽 삼켰다?
휴델이 암흑교단의 추기경이란 걸 생각하면 저 '정체불명의 사령술사'가 누구였는지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이거야말로 시공 회귀 전 젊은 카르나크가 세웠던 계획이 아닌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의 카르나크는 결국 정체가 들통 나 쫓겨 다녔지만, 휴델은 성공적으로 가문을 차지했다는 것뿐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좀 신기하네요. 두 사람의 운명이 이토록 비슷하다니...."
세라티의 말에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하나도 신기할 거 없거든."
"사령술 익힌 놈들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라서 그래요."
"차라리 필연의 일치라 해야겠지. 이게 문법에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참고로 현 시각은 깊은 밤.
착한 아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세라티의 조언에 따라 라피셀은 일찌감치 침대 들어가서 도롱도롱 잠들어 있다.
안심하고 속사정 아는 이들끼리만 떠들 수 있는 것이다.
뭐, 그래도 혹시 몰라 음파 차단 결계 정도는 펼쳐 놓았지만.
"어쨌거나, 이놈을 잡으면 된다 이거죠?"
바로스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얼마나 셀까요?"
휴델 그렌탈은 오러 유저나 마법사가 아니다. 기사 수업 정도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행정이 주 업무인 전형적인 지방 영주다.
하지만 그의 진짜 정체를 감안하면 상당히 강력한 사령술사일 수밖에 없으리라.
"적어도 데츠라스보단 위겠지?"
대꾸하며 카르나크가 서류를 툭툭 쳤다.
"문제는 이놈이 세고 약하고가 아니야."
라케아니아 제국이 남의 나라라는 게 문제였다.
국경을 초월해 전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는 7여신교와 달리, 킹스 오더는 엄연히 유스틸 왕국의 특무기관이다. 제국에선 아무런 권한이 없다.
"타국 놈들이 자기 나라 귀족 잡으려 드는데 그걸 그냥 놔둘 리가 없잖아."
조용히 듣고 있던 세라티가 질문을 던졌다.
"제국 쪽에 미리 알리는 건요?"
라케아니아 제국에도 킹스 오더 같은 조직이 존재한다.
파사(破邪)의 여단.
실버 나이트 클리프 폰 산드레아스가 여단장으로 있는 황제 직속의 대(對)사교도 전문 기관이었다.
"그쪽이랑 몰래 접촉해서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요?"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킹스 오더 역시 비슷한 생각은 이미 한 모양이었다.
"첩자로 의심이나 안 받으면 다행일 거라더라."
라케아니아 제국과 유스틸 왕국이 속한 7왕국 연합은 오랜 앙숙이다.
게다가 킹스 오더나 파사의 여단 같은 특수 임무를 띤 조직은 그 특성상 자국의 타 기관과도 협조성이 떨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적국의 조직끼리 협력을? 잘도 그러겠다.
"게다가 파사의 여단을 믿을 수도 없고 말이지. 여단 내에 사교도에 매수된 놈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완전히 똑같은 이유로, 파사의 여단도 킹스 오더를 믿을 수 없다.
"과연, 킹스 오더로는 움직일 수 없단 소리네요."
잠시 고민한 세라티가 다시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7여신교의 어둠사냥꾼 신분이라면 어때요? 흔쾌히 도와줄 사람을 알고 있잖아요, 우리."
이해한 카르나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 친구 말이지?"
***
유스틸 왕국 북부, 데라트 시티의 하토바 신전.
"...제국의 영토에 잠입해 사교단의 핵심 멤버를 붙잡는다고요?"
과연 알리우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당연히 해야죠! 저 빼놓으시면 서운했을 겁니다!"
카르나크 일행과 헤어진 후에도 그는 꾸준히 어둠사냥꾼의 협력하에 많은 사령술사들을 처리하고 다녔다.
그 공을 인정받아, 이젠 데라트 시티를 넘어 유스틸 왕국 북부 전역의 하토바 교단 심문관들을 관리하는 주교의 위치까지 오른 상태였다.
아직 20대라는 걸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출세다.
"덕분에 요샌 외부 활동보다 신전 내에서 서류 작업하는 일이 더 많아요.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입니다."
안락한 신전 대신 고생스러운 현장으로 향하게 되었음에도, 알리우스는 실로 기쁜 듯 웃고 있었다.
"세상이 날로 혼탁해져 수많은 신민들이 고통받는데 내 한 몸 편하겠다고 신전에 처박혀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런 놈은 인간쓰레기죠!"
세상이 엿 되건 말건 영지에 처박혀 안빈낙도하려던 두 놈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아, 어, 그, 그런가?"
"그, 그렇죠, 네, 음...."
"왜들 그러십니까, 두 분?"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카르나크 일행은 하토바 교단의 어둠사냥꾼으로 돌아왔다.
서류 작업하기는 쉬웠다.
애초에 알리우스의 협력자들이었다. 처박아 두었던 옛 서류 도로 꺼내 그냥 사인만 받으면 끝이었다.
다른 준비도 전부 알리우스가 맡았다.
제국까지의 여정을 짜고,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튼튼한 준마도 마련했다. 카르나크 일행이 한 것이라곤 그냥 경비를 댄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짜는 아니군요?"
"신도들의 소중한 헌금입니다, 카르나크 공.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쓸 수 없지요."
"이쪽도 공무원의 소중한 월급입니다만?"
"집안 잘사시는 거 알거든요?"
하토바 교단이 전폭적으로 밀어주니 준비는 금방 끝났다.
바로 다음 날, 카르나크 일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데라트 시티의 동부 관문에 서 있었다.
말고삐를 쥔 채 알리우스가 유쾌하게 외쳤다.
"갑시다, 제국으로!"
뒤를 따르며 헛웃음을 흘리는 바로스였다.
"우리보다 더 신났네요, 저 양반."
#103화. 27. 마녀의 숲
대륙 중서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지의 척추, 바라칸트 산맥.
제스트라드 영지와 인접한 제덴 산맥의 본류이자, 라케아니아 제국과 유스틸 왕국의 국경이기도 한 드넓은 지역이다.
그 바라칸트 산맥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잘 무장한 20명의 전력이 산등성이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제국과 왕국의 관문인 스윈들러 성채를 지키는 국경 수비대였다.
좌우로 펼쳐진 가파른 골짜기 사면을 내려다보며 수비대장이 물었다.
"추적은 잘되고 있나, 펠릭스?"
앞장서서 사방을 살피던 법복 차림의 30대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문제없습니다."
바람과 하늘의 여신, 사이샤의 성직자이자 2급 심문관의 위계를 가진 그에게 이 정도로 노골적인 어둠의 흔적은 명확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아예 흔적을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군요."
"어둠의 기운이 강렬하다는 의미인가?"
"아뇨, 약합니다. 그냥 질질 흘리고 다닐 뿐인 거죠."
"즉, 약한 데다 부실하기까지 하단 소리군?"
"적어도 고위 사령술사가 아닌 건 틀림없습니다."
둘의 대화에, 뒤를 따르던 수비대원들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구만."
"기껏해야 좀도둑일 뿐이었나 본데?"
"그래도 어둠의 힘을 다루니까 마녀인 건 맞지."
수비대장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너무 긴장을 풀지는 말게. 피해가 제법 큰 것은 사실이니."
***
스윈들러 성채에 물자를 공급하는 인근 산촌 에스크.
한 달여 전부터 이 마을에서 묘한 사건이 터지고 있었다.
기이하다면 기이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건이었다.
'마녀가 계란을 훔쳐 갔습니다요!'
'마녀가 닭을 훔쳐 갔습니다요!'
'마녀가 개를 훔쳐 갔습니다요!'
웬 정체불명의 노파가 밤마다 출몰해 좀도둑질을 시작한 것이다.
국경 수비대가 처음부터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주민들끼리 자체적으로 도둑놈 잡으려 움직일 뿐이었으니.
마녀란 표현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상대는 늙은 노파였고, 요샌 뭔 일만 터지면 죄다 종말의 어둠 탓하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상황이 이상해졌다.
'마녀가 돼지를 훔쳐 갔습니다!'
'마녀가 우리 집 소를! 아이고!'
어째 스케일이 자꾸 커져만 갔다.
마을 주민들만으론 어찌할 수 없어 스윈들러 성채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국경 수비대에서 정식으로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당황했다.
마녀가 소와 돼지를 훔쳐 간 방식이 영 심상치 않았다.
왜냐고? 계란과 닭을 훔친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거든.
"들고 갔습니다!"
"응? 들고 가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손으로 들고 날랐다니까요!"
촌로의 증언에 수비대장은 그저 눈만 껌뻑거려야 했다.
"...그 큰 소와 돼지를? 노파 혼자서?"
"예!"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어깨에 소를 짊어지고 담벼락을 넘던, 어둠 속에서 피처럼 시뻘건 눈동자를 빛내며 광소를 터트리던 무시무시한 할매의 모습이!
-케헬헬헬! 이 녀석은 이 몸이 챙겨 가 든든하게 몸보신을 해야 쓰겄다!
"...라던데요?"
"...."
수비대장은 침묵했다.
노인이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절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나리!"
"어, 나도 그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소."
단지 촌로가 요새 몸이 허하진 않은지, 혹은 기억이 깜빡거리는 증상이 있진 않은지 의심했을 뿐이다.
"사악한 마녀의 악행이라기엔 어째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나?"
"남의 집 소 들고 나른 것보다 더 사악한 짓거리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그렇긴 한데...."
어쨌든 피해가 생긴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소와 돼지가 사라진 자리에 사기와 탁기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비대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겠네.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지."
***
걸음을 옮기던 수비대원 1명이 실소를 흘렸다.
"이거, 따지고 보면 우리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엄연히 국경 수비대인데요."
종말의 어둠 건이니 7여신교에 연락해 어둠사냥꾼을 보내 달라고 해야 하지 않냐는 소리였다.
펠릭스 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연락은 취했습니다만, 아마 지원 병력이 올 가능성은 적을 겁니다."
어둠 관련 사건은 여전히 너무나 많고, 이를 담당해야 할 인원은 항상 부족하다.
이런 산골 마을의 이상한 마녀 이야기는 신전 입장에선 그리 우선순위가 높지 않으리라.
다른 수비대원들이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여긴 시골이라 무시한다는 소리잖소?"
"하여튼 만날 화려한 도시만 신경 쓰고,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은 뒤로 밀린다니까?"
펠릭스가 수비대원들을 달랬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신님의 은총은 온 누리에 공평하게 내리십니다."
"그럼 왜 우리에겐 아무도 안 보내 주는 건데요?"
"보내셨습니다."
"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2급 심문관인 펠릭스가 스윈들러 성채에 상주하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그냥 만날 얼굴 보고 살다 보니 그 자리에 있는 걸 당연하게 느꼈을 뿐.
"그, 그렇구려...."
"신관님께 실례를 범했구만. 미안하오."
그렇게 계속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간다.
문득 펠릭스 신관이 능선 저편을 가리켰다.
"발견했습니다, 대장님."
어둠이 깔린 산비탈의 초지, 흔들리는 들풀 사이로 왜소한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허름한 앞치마를 두른, 전형적인 농민 복장의 노파였다.
그녀를 본 수비대장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마녀로군."
다른 수비대원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와, 마녀다."
"진짜 마녀네."
"너무 마녀인데?"
뭔가 괴상한 표현들을 읊고 있지만, 그럴 이유가 있었다.
헝클어진 백발에 늙고 주름진 얼굴, 사마귀가 돋은 매부리코와 주걱턱에 작고 깡마른 체구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마귀할멈 그 자체였다.
일부러 마녀 역할 시키려고 분장해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수비대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쯤 되니 오히려 미심쩍은데요?"
"아무리 마녀라지만 저렇게까지 전형적으로 생길 수가 있나?"
"실은 그냥 인상 안 좋은 할머니일지도?"
펠릭스도 애매한 표정이었다.
"일단 어둠의 흔적을 쫓아온 거긴 합니다만...."
국경 수비대를 빤히 보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총각들은 대체 어쩐 일로 이런 곳에 오셨수?"
수비대원 중 1명이 일단 운을 떼어 봤다.
"할멈, 이 근처에서 뭔가 이상한 일을 본 적이 없소?"
"이상한 일? 모르겠는디?"
태연히 대꾸하며 노파가 잠시 품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과자라도 하나 드시려오?"
번들거리는 생물체의 안구였다.
그것도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혈관이며 신경까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노파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나기 시작했다.
"맛있을낀디."
화들짝 놀란 국경 수비대원들이 뒤로 물러섰다.
"헉!"
"으익!"
"젠장! 마녀 맞잖아!"
검을 뽑아 들며 수비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전원, 전투태세로!"
***
바라칸트 산맥이 유스틸 왕국과 라케아니아 제국의 국경이라지만, 엄밀히 말하면 산맥의 대부분은 제국의 소유다. 왕국의 영역은 산맥 초입에서 끝이란 소리다.
제국 서부 관문 중 하나인 스윈들러 성채도 그 바라칸트 산맥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성채 입구로 말을 몰고 가며 바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우, 사람 많네요."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날씨가 상당히 쌀쌀하다.
성채 입구에는 두꺼운 털옷을 거친 여행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제국과 왕국을 오가는 행상들이었다.
오랜 앙숙인 라케아니아 제국과 7왕국 연합, 이들은 시대에 따라 때론 전쟁을 벌이고 때론 평화를 유지하는 관계였다.
현재는 국가적 교류까진 하지 않아도 민간의 교역은 허락한 상황이라 행상의 줄이 꽤나 길었다.
망토를 여미며 카르나크가 투덜거렸다.
"우리도 줄 서야 하나? 추운데."
"괜찮습니다."
알리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신의 종들에겐 소소한 특권이 있으니까요."
7여신교는 국경을 초월해 전 대륙에 퍼져 있으니, 대부분의 국가가 성직자들이 국경을 넘을 때에는 우선적으로 편의를 봐주곤 한다.
하물며 현재는 온 세상에 어둠의 세력이 창궐하는 시대.
성직자가 와 준다는 건 그만큼 어둠의 세력이 약화된다는 걸 의미한다.
알리우스 같은 강력한 신관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인 것이다.
알리우스는 태연하게 줄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새치기한다고 투덜대는 이들은 없었다. 병사들도 당연하다는 듯 그부터 접수해 주었다.
"하토바 교단의 1급 심문관, 알리우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교단의 협력자인 어둠사냥꾼들이고요."
관문 병사들이 서류를 잠시 관찰했다.
딱히 문제는 없었다. 이들의 신분은 전부 하토바 교단이 증명하고 있었다.
"다들 뛰어난 어둠사냥꾼분들이시군요."
다만,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런데...."
병사 중 1명이 일행 중 1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저 아이도 어둠사냥꾼입니까?"
세라티 뒤에 서서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잿빛 머리 소녀, 라피셀이었다.
현재 그녀는 세라티의 제자 신분으로 일행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알리우스도 처음엔 기겁을 하며 반대했다.
-저 아이도 제국에 함께 간다고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상식을 지닌 어른이 할 소리가 아닌 것이다.
사실 카르나크도 저 의견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아직은 라피셀을 눈 밖에 둘 수 없었다. 혹시 기억 봉인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좀 더 살펴봐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이걸 대놓고 말할 순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세라티 경이 그 아이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제자 육성 방침은 스승의 몫, 외인인 알리우스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사들 중엔 어릴 때부터 종자를 데리고 다니며 현장을 익히게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일찌감치 전장을 겪어야 빠르게 강해진다는 이유다.
제국의 관문 병사들 역시 저런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저 안쓰러운 듯 라피셀을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칸트 산맥은 저런 아이가 넘기엔 많이 험할 텐데...."
"어휴, 유스틸 왕국은 제자를 무섭게 굴리는구먼."
스윈들러 성채는 방어 요새이자 교역 마을.
관문을 통과해 두꺼운 성벽 밑을 벗어나 조금 걸으니 성채 마을이 나왔다.
중앙의 작은 연못 주위로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관과 술집, 잡화점 등이 있고 그 주변으로 민가가 좀 보였다.
막 여관을 찾아 마저 말을 몰고 가는데,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왔다.
'음?'
'무슨 일이지?'
그들을 이끄는 이는 제국의 제식 갑옷을 입은 중년 기사였다.
그가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하토바 교단의 알리우스 신관님이신가?"
"그렇습니다."
"1급 심문관이라 들었네. 맞나?"
알리우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꽤나 오만한 말투였다.
"...그렇습니다만?"
고압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파사의 여단의 레오콜트라고 한다."
흠칫 놀란 바로스와 세라티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파사의 여단?]
[그, 제국 버전 킹스 오더라는?]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였다.
알리우스는 잠시 분위기를 살폈다.
기사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표정이 하나같이 딱딱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렇다."
중년 기사, 레오콜트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가 나타났다."
#104화. 27. 마녀의 숲 (2)
아무리 다급해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중대한 이야기를 나눌 순 없는 법이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손가락을 까닥거린 뒤 레오콜트가 쌩하니 몸을 돌려 먼저 걸어갔다. 이쪽이 따라가겠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움직인 것이다.
제국에 처음 와 본 세라티가 황당해하며 속삭였다.
[뭐죠? 이쪽을 무슨 부하 취급하네요?]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전생 때 라케아니아 제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둘 다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원래 제국민들은 7왕국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
[그나마 알리우스 씨가 고위 성직자라 나름대로는 예의를 차린 걸 거예요, 저게,]
아직 젊은 알리우스 역시 제국에 가 본 경험 따위 없었다. 당황한 그가 카르나크 일행의 눈치를 보았다.
"어쩝니까?"
"사정을 듣는 것 정도야 문제가 되겠습니까?"
카르나크 일행은 일단 레오콜트의 뒤를 따랐다.
저들은 스윈들러 성채 외곽의 병영 하나를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테이블이 마련되고, 조촐한 허브 차가 일행 앞에 놓였다.
"드시게."
"아, 예, 감사합니다."
차 대접을 받은 이는 알리우스 1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아예 존재하는 사람 취급도 안 한다.
그 광경에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추억에 잠겼다.
[모범적인 제국 귀족이네, 아주.]
[옛날 생각나네요. 예전에도 제국 놈들은 이 모양이었는데.]
보아하니 오래 있어 좋은 꼴을 볼 것 같지 않았다.
대충 이야기만 듣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알리우스가 차를 홀짝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십니까?"
레오콜트가 입을 열었다.
"며칠 전의 일일세...."
***
마녀가 나타났다.
좋았던 옛 시절에 누군가 이렇게 떠들고 다니면 다들 비웃었을 것이다.
-이보게, 애들 동화를 너무 열심히 읽은 것 아닌가?
지금은 다르다.
-진짜 마녀란 소리인가, 아니면 또 흔해 빠진 헛소리인가?
종말의 어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둠의 힘으로 타락한 나이 든 여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마녀는 이제 실존하는 공포가 되었다.
하지만 유언비어도 장난 아니게 퍼지고 있었다.
시골의 무지렁이들 중엔 죄 없는 여성들을 마녀라 부르며 관용구 그대로 '마녀사냥'을 하는 자들도 허다했다.
물론 이런 경우엔 신전에서 엄격하게 징벌을 내리니 실제 피해자가 나오는 일은 많지 않지만.
진짜 심각한 사건일 수도 있고, 반대로 굉장히 별것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신의 교단이 직접 나서긴 애매한,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스윈들러 국경 수비대에서 확인에 들어갔지."
국경을 수비한다는 건 국경을 침탈하려는 모든 공격에 대비한다는 것.
마녀가 국경 인근 마을을 공격했으니 이 역시 조금 억지를 부리면 국경 수비대의 업무라는 이유였다.
뭐, 진짜 이유는 친하게 지내는 마을 어르신들 근심 걱정 좀 덜어 드리겠다는 쪽이고.
수비대장이 베테랑 병사 20명을 이끌고 마녀를 찾아 나섰다.
스윈들러 국경 수비대가 무슨 엄청난 최정예 병력이라 할 순 없다. 오러 유저나 상급 마법사가 속해 있지도 않다.
그래도 국경을 지키는 이들인 만큼 실력은 제법 있는 편이었고,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사안을 심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문제가 된 건 사흘 뒤였다.
"전원, 돌아오지 않았다."
레오콜트의 말에 알리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돌아오지 않다니요?"
"말 그대로다. 실종되어 버렸다."
"죽었거나 한 게 아니라요?"
"그렇다. 생사도 알 수 없다."
세라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한 마녀 이야기 같네?'
한번 들어간 이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저주받은 마녀의 숲.
저잣거리 아이들 동화의 단골 소재다.
[저런 식의 사령술도 있나요, 카르나크 님?]
[병사 20명을 사라지게 만드는 술법? 너무 많아서 하나를 콕 집을 수도 없을 정도인데.]
하여튼 수비대원들이 행방불명이 되니 그제야 난리가 났다.
스윈들러 성채의 군장, 드메타스 준남작도 고민에 빠졌다.
수색대를 꾸리자니 또 마녀에게 당할까 두려웠다.
인근 대신전에 협력을 요청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연락을 받은 교단이 조치를 취하려면 족히 보름은 걸릴 터였다. 사라진 이들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데 보름씩이나 지체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때마침 성채에 머무르고 있던 파사의 여단이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르나크가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파사의 여단에서 나선 겁니까? 여단은 사교단들만 상대하지 않나요?"
레오콜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이야기에 끼어드는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해 주었다.
"여단의 본임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제국을 위한 사적인 봉사일 뿐이지."
그렇게 안 보이긴 하지만, 레오콜트 나름대로는 열심히 카르나크 일행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 아쉬운 건 그쪽이었으니까.
알고 보니 주위의 병사들 전원이 파사의 여단인 것은 아니었다.
여단 소속은 레오콜트와 또 1명의 30대 기사 레스테인, 그리고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사내 스트로노프뿐. 나머지는 기존의 스윈들러 국경 수비대원들이다.
"우린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이곳 역시 제도로 복귀하는 길에 잠시 들른 것에 지나지 않지."
그때 마침 마녀 사건이 터졌고 레오콜트와 친분이 있던 드메타스 준남작이 도움을 요청했다.
귀족답게 오만한 레오콜트였지만, 동시에 귀족답게 자신에게 '아랫것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바로 승낙했다.
"시급한 사안이고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여단의 본업에 비하면 쉬운 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어둠 관련 사건은 주위에 남은 사기와 탁기로 대략적인 위험도를 유추할 수 있는 법이다.
마녀가 남긴 어둠의 흔적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국경 수비대 수준에선 제법 벅차겠지만...
"우리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대사령술 전문가인 파사의 여단 출신 적색급 오러 유저가 2명에 6서클 마법사 1명, 여기에 노련한 국경 수비대원 10명이 붙었다.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성직자가 없더군."
정확히는, 어둠에 맞설 줄 아는 심문관 훈련을 받은 성직자가 없었다.
아무리 마녀를 해치우기 충분한 전력이라 해도 일단은 목표를 찾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동네 신전의 삼류 신관들은 마녀 추적에 별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런데 하필 이 일대의 유일한 심문관인 펠릭스가 수비대장과 함께 행방불명된 것이다.
"그렇다고 새 심문관이 오길 기다리기엔, 아까도 말했듯 시간이 없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는데 마침 관문에서 1급 심문관이 제국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혹시나 길이 엇갈리면 어쩌나 초조해하며 급하게 달려온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대의 협력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군요...."
알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협력하고 싶다. 하지만 동료가 있으니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결정할 순 없다.
"알겠습니다, 일행과 의논해 보지요."
레오콜트가 살짝 안색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군. 난 알리우스 심문관, 그대의 협력을 원한다고 했다."
싸늘한 시선이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를 스쳐 지나간다.
"저들이 아니라."
"네? 이분들도 강력한 어둠사냥꾼들입니다만."
"나도 눈이 있으니 이들이 오러 유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오러 유저는 다른 오러 유저를 알아볼 수 있다. 작정하고 감추려 들지 않는다면.
"하지만 저들은 제국민이 아니지."
엄격한 목소리로 레오콜트가 선언하듯 말했다.
"제국의 백성은 제국의 손으로 지킨다."
황당해하며 알리우스가 물었다.
"저도 유스틸 왕국인인데요."
"여신의 종은 국가를 초월하는 이들이 아닌가?"
당당하게 대꾸하는 그를 보며 세라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래요, 이 인간? 도와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필요하니 없다느니.]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말했잖아, 제국 귀족들 분위기가 저렇다고.]
[아주 7왕국인 무시하는 게 무의식 속에 깔려 있어요.]
표정을 관리하며 알리우스가 대꾸했다.
"어쨌든 잠시 의논은 하겠습니다. 저 혼자 협력한다 해도 저 때문에 모두의 일정이 늦춰지니까요."
"그러시게나. 시간이 넉넉지 않긴 하지만 몇 분도 할애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니."
잠시 레오콜트가 자리를 비우고 카르나크 일행만 남게 되었다.
"거참, 제국에 발을 디디자마자 바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머리를 긁으며 알리우스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혼자만 다녀와도 될까요?"
세라티는 아무 문제 없지 않겠냐는 반응이었다.
"좋은 일 하는 거잖아요? 반대할 이유가 없지 싶은데요."
바로스 역시 마찬가지.
"크게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파사의 여단이라면 킹스 오더를 능가하는 제국의 강력한 특무기관이다. 저들은 여단 내에선 말단으로 보인다만, 어쨌든 뛰어난 오러 유저이자 마법사임에 틀림없다.
지금 전력만으로도 킹스 오더의 대대급에 필적하니 어지간해선 위기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
카르나크도 썩 내키진 않지만 찬성했다.
"일정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어차피 휴델을 포획하는 건 신중하게 접근할 일이었다.
미룰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일도 아니다. 며칠 늦어진다고 별일 생기진 않는단 소리다.
"무엇보다 제국의 영토에서, 제국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지요."
그가 내키지 않았던 부분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빼고' 마녀사냥을 한다는 점이지, 마녀사냥 자체가 아니었다.
파사의 여단에 인맥을 만들어 둔다는 면에서 볼 땐 나쁘지 않은 선택지다.
"마음 편히 다녀오시죠. 우린 느긋하게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스윈들러 성채는 교역로를 겸하는 곳답게 여관이 제법 많았다.
애초에 이런 산골에서 제대로 농사를 짓거나 하긴 힘들고, 사냥이나 목축도 한계가 있다. 길 넘어가는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관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세라티가 물었다.
"어디에서 묵나요?"
간판들을 살피며 바로스가 대꾸했다.
"알리우스 씨가 추천한 곳이 있었는데... 아, 저기다."
바로스가 가리킨 곳은 『팔파토의 노래』라는 여관이었다.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 2층 건물이었는데, 적당히 크고 적당히 허름한 느낌이다.
세라티가 의아해하며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웬일이세요? 항상 고급스러운 여관만 찾으시더니."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여기가 음식을 제일 잘한대!"
"여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지요!"
알리우스의 추천은 틀리지 않았다.
잘 구워진 빵과 산채 수프, 치즈를 발라 으깬 감자와 볶은 꿩 요리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게걸스레 음식을 입에 넣었다.
"오옷! 이거 맛있다!"
"이것도 맛있는데요?"
"좋구나, 세상 싸돌아다니는 맛이 난다."
"예전에도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도 싸돌아다니긴 마찬가지였는데."
그리고 그 옆에서 우아하게 식사 중인 붉은 머리의 미녀.
"어휴, 저 걸신들린 인간들."
눈살을 찌푸리며 세라티가 고개를 돌릴 때였다.
"라피셀, 너는 저렇게 되지 말...."
순간 그녀의 말문이 막혔다.
잿빛 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양 볼이 미어터져라 음식을 욱여넣고 마구 씹어 삼키고 있었다.
우걱! 우걱! 음냠냠!
"맛있어요, 카르나크 님!"
"라피셀, 너도니?"
그럴 수 있다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전언을 나눴다.
[생각해 보니 라피셀도 우리 계열이겠네.]
[쟤도 언데드 된 지 70년쯤 지났었죠?]
[제대로 된 음식 먹어 본 지도 70년쯤 지났단 소리지.]
집에 있을 땐 사람들 눈치 보느라 비교적 얌전하게 먹었는데, 슬슬 낯가림도 사라졌겠다 본격적으로 본능에 몸을 맡기는 듯했다.
[에휴, 불쌍한 라피셀....]
새삼 잘 대해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세라티였다.
그렇게 다들 배불리 저녁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도 푹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어째 아침부터 동네가 시끌시끌했다.
평범한 소란이 아닌, 뭔가 경악과 공포가 맴도는 소란이었다.
궁금해진 바로스가 지나가던 이를 붙잡고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아직 소식을 못 들었단 말이오?"
행인이 두려움에 덜덜 떨며 대꾸했다.
"마녀사냥에 나섰던 파사의 여단이 실종되었다오!"
#105화. 27. 마녀의 숲 (3)
소식을 들었을 때 카르나크가 처음 가진 의문은 '어떻게 적색급 오러 유저 둘에 6서클의 상급 마법사와 1급 심문관까지 있는 파사의 여단이 패할 수 있는가?' 혹은 '대체 알리우스에게 무슨 일이 닥친 것인가?' 등이 아니었다.
"걔들 어제 오후에 출발하지 않았냐, 바로스?"
"그렇죠."
"하룻밤밖에 안 지났는데 파사의 여단이 실종된 줄은 어떻게 알았대?"
마녀의 숲 자체야 스윈들러 성채에서 한나절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마녀 수색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이삼일 정도 연락이 되지 않는 건 자연스럽단 이야기다.
"고작 하루 만에 실종되었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이번엔 간신히 도망친 생존자가 둘 있다더라고요."
다만 생존자들이 반쯤 미쳐 버려서 상황 파악이 힘들다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물어봐도 답변이 이런 식이라는 것이다.
-마, 마녀다! 으아아아!
-모두 당했소! 모두 쓰러졌단 말이오!
-모조리 마녀에게 끌려가 버렸어!
정황상 마녀에게 당했다는 것까진 알겠는데, 그 이상의 자세한 사항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시체가 전혀 남지 않았고, 생존자도 끌려갔다는 표현을 반복하는 걸로 보아 일단 사망이 아닌 실종 상태라 짐작할 뿐이다.
"으음...."
잠시 고민한 카르나크가 다시 물었다.
"생존자가 알리우스는 아니지?"
"네."
다른 사람들이야 죽건 말건 알 바 아니지만 알리우스는 다르다.
"일단 이 동네 수장을 만나 봐야겠군."
***
뜨내기, 심지어 제국민도 아닌 유스틸 왕국인이 한 성채의 수장을 만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지금같이 혼란한 상황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드메타스 준남작은 흔쾌히 카르나크 일행을 맞이했다.
"알리우스 신관의 동료들이라고?"
일행의 신분이 확실해서였다.
바로스와 세라티의 검에서 빛나는 찬란한 붉은 오러는 그 어떤 신분증명서보다 효력이 좋았다.
"알리우스 신관을 찾을 생각이겠지? 우리도 최대한 돕겠네!"
무려 오러 유저이자 경험 많은 어둠사냥꾼이기도 하다. 파사의 여단마저 잃은 국경 수비대엔 이들이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인 것이다.
저들이 동료를 찾아야 실종된 국경 수비대를 찾을 확률도 올라간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들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
덕분에 이야기는 술술 풀렸다.
"그럼, 생존자들을 좀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일세. 바로 준비하지."
제국 귀족다운 오만함을 내비치지도 못할 정도로 드메타스 준남작은 다급한 처지였다. 바로 시종을 불러 명을 내렸다.
"이분들을 안내해 드리게!"
생존자들은 성채 외곽의 작은 탑에 격리되어 있었다.
중상을 입은 사내 2명이 허름한 침상에 누워 멍한 표정을 짓고 있고 의무병 하나가 그들을 돌보는 중이었다.
"이들입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지라 증언을 기대하긴 힘들 겁니다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지."
카르나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내 말이 들리오?"
몇 번이나 말을 걸어 봤지만 생존자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쪽이 뭐라 하건 헛소리만 늘어놓는다.
"괴물, 괴물이다!"
"아아, 여신이시여, 저를 보우하소서...."
세라티가 혀를 찼다.
"전혀 대화가 안 되네요. 어떤 사악한 술법이기에...."
갑자기 생존자들이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술법?"
"저주 같은 하찮은 게 아니었어!"
"마녀는 사람을 찢어!"
"무쇠 팔, 무쇠 다리, 무쇠 솥뚜껑...."
바로스가 눈을 깜빡였다.
미친 사람 많이 봐 온 그조차도 이들의 말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는 걸까요, 이거?"
잠시 고민하던 카르나크가 검지를 슬쩍 들었다.
"에라, 그냥 편하게 가자."
그리고 의무병을 슥 가리킨다.
"드르렁!"
병사의 다리가 슥 풀리며 제자리에 주저앉더니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수면 마법으로 재운 것이다.
검지의 방향이 생존자들에게로 옮겨졌다.
두 사내의 눈동자가 까뒤집어지며 흰자위를 드러냈다.
"꾸룩!"
"끄어어...."
그러더니 게거품을 물며 침대에 풀썩 엎어져 버린다.
카르나크가 피식 웃었다.
"그냥 기억을 직접 들여다보는 게 속 편하지."
쓰러진 의무병과 생존자들을 번갈아 보며 세라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도 돼요?"
"뭐, 크게 탈나진 않을 거야."
"작게는 탈이 난단 소리잖아요, 그거...."
***
안개가 자욱하게 낀 깊은 숲속.
스윈들러 국경 수비대원 챈들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눈앞의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마귀할멈이네...."
그야말로 동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마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다.
레오콜트가 손짓을 했다.
"포위망을 펼쳐라."
병사들이 원을 그리며 상대를 둘러싸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전히 노파는 움직이지 않았다. 양팔을 늘어뜨린 채 허수아비처럼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왜 반응이 없지?'
의아해하면서도 레오콜트 일행은 계획대로 움직였다.
포위망 구축이 끝남과 동시에 마법사인 스트로노프와 신관인 알리우스가 전후에 위치해 마녀의 퇴로를 차단한다. 이후 오러 유저인 두 사람이 앞장선다.
검을 뽑아 들며 레오콜트가 뇌까렸다.
"무슨 사악한 술법을 펼칠지 모르니 조심하게."
아무래도 마녀라면 보이지 않는 저주를 걸 가능성이 높다. 대놓고 날아드는 칼날보다 훨씬 두려운 공격이다.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오러 실드에 한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테인도 오러를 끌어냈다.
우우웅!
공기가 떨리며 두 줄기 붉은 섬광이 밤의 어둠을 밝혔다.
그때였다.
"케헬헬헬...."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마녀가 고개를 든다.
피가 엉겨 붙은 잿빛 머리칼 사이로 시뻘건 안광이 번득인다.
"정말 예쁘게 생긴 아이들이로구나!"
동시에 메뚜기처럼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당황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헉!'
'빠르다!'
순식간에 둘의 코앞까지 쇄도하며 마녀가 공세를 펼쳤다.
굽은 등허리가 주욱 펴지며 양팔로 연타를 날린다. 깡마른 팔뚝에서 연달아 정권이 뻗어 나와 유성처럼 날아든다.
지켜보던 다른 병사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상상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다르다?
"엥?"
"마녀가, 주먹질?"
허겁지겁 투기검을 휘두르며 레오콜트가 방어에 나섰다.
"큭! 이 미친 마녀가!"
깡마른 주먹이 오러의 칼날을 연거푸 두들겼다. 레오콜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쪽은 맨주먹이고 이쪽은 바위도 자른다는 투기검인데, 오히려 투기검이 흔들리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쾅! 콰쾅!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숲을 뒤흔들었다.
황급히 레스테인도 원호에 나섰다.
"레오콜트 경!"
두 오러 유저와 늙은 마녀가 어지럽게 얽히며 공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연신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대지가 뒤흔들렸다.
"윽!"
"크, 크윽!"
2 대 1임에도 불구하고 밀리는 쪽은 오히려 오러 유저들이었다.
끼어들 틈을 노리던 수비대원들이 경악해 중얼거렸다.
"...너무 강한데?"
강한 것도 강한 것이지만, 그보단 강함의 종류가 너무 예상 밖이다.
"왜 마녀가 육탄전을 벌여?"
"그것도 저렇게 무식하게?"
이들이 아는 마녀는 몰래 독을 먹이거나 뼈다귀를 던져 저주를 걸거나 하는 존재였다.
절대 저렇게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으며 560도 턴킥을 차는 괴수가 아니다!
뭐, 저 마녀도 뼈다귀를 던지긴 던졌다.
"이 할미는 포동포동 살찐 아이를 잡아먹는 걸 좋아한단다!"
기괴한 음성을 흘리며 노파가 품에서 뼈다귀 몇 개를 꺼냈다. 그러곤 그걸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그대로 튕겨 냈다.
어이없게도, 손가락으로 뼈다귀를 튕겼는데 폭발음이 울렸다.
퍼엉!
동시에 뼈다귀가 화살보다 빠르게 레오콜트에게 날아든다!
"윽!"
간신히 레오콜트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빗나간 뼈다귀가 숲 저편에 처박혔다.
콰콰콰쾅!
뼛조각이 아름드리 거목을 뚫고 바위를 부수고 대지를 파헤쳐 흙먼지를 피워 올렸다.
알리우스가 멍한 음성을 흘렸다.
"...저것도 저주로 봐야 하나?"
저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맞으면 즉사는 할 것 같았다.
"내가 틈을 만들겠다!"
마법사 스트로노프가 지팡이를 들었다.
그의 전신을 통해 방대한 전격의 망이 펼쳐졌다.
우르릉!
천둥이 울리며 벼락이 뱀처럼 땅을 타고 기어가 마녀의 사방을 덮쳤다.
노파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물론 아주 잠시일 뿐이고 바로 전격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기회를 얻은 알리우스가 목청을 높였다.
"하토바의 빛이여! 내 지팡이에 머무소서!"
마녀의 머리 위로 성광이 드리워진다.
신성한 힘이 마녀를 짓누른다. 노파의 움직임이 더욱 둔화되어 간다.
그 틈을 타 레오콜트가 투기검으로 마녀를 찍어 눌렀다. 마녀도 두 팔을 들어 투기검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잠시 대치 상태가 되었을 때였다.
"이틈에 목을!"
레스테인이 움직였다.
섬세한 몸놀림으로 마녀에게 파고들어, 정교한 참격을 가한다!
타앙!
쇳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레스테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 그는 마녀의 목을 정확히 가격했다. 사람의 피육을 베었단 소리다.
'그런데 이 느낌은 대체?'
투기검은 그녀의 목을 가르지 못했다. 그저 피부에 맞닿아 있었을 뿐.
"케헬헬헬!"
흉측하게 웃으며 마녀가 두 눈을 치켜떴다. 시뻘건 안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손을 내밀어 보렴! 살이 얼마나 쪘는지 보게!"
순식간에 레스테인의 코앞까지 쇄도해 오른팔을 덥석 붙잡는다. 그리고 그대로 크게 휘둘러 패대기!
"커어억!"
단 한 방에 레스테인의 의식이 날아가 버렸다.
포위 중이던 수비대원들이 놀라 입을 벌렸다.
"레스테인 경!"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마녀가 레오콜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대놓고 미들킥을 날렸다.
"오홍홍홍!"
레오콜트가 허겁지겁 투기검을 들어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예리하게 벼리어진 오러의 칼날을, 노파의 앙상한 오른 다리가 박살 내며 옆구리를 깊숙이 강타했다.
콰아앙!
보이지 않는 저주가 대놓고 날아드는 공격보다 훨씬 두렵다고?
그건 그냥, 대놓고 날아드는 공격의 위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레오콜트 역시 한 방에 기절해 버렸다.
"끄으으...."
다들 경악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 2명을 저렇게 쉽게 쓰러뜨리다니?
"아이고, 둘 다 말라깽이로구나!"
마녀의 시선이 알리우스와 스트로노프에게로 향했다.
늙고 병든 노파의 육체가 섬전으로 변해 두 사람에게 날아들었다.
"케헬헬헬!"
반격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뭘 해 보기도 전에 마법이 박살 나고 신성 주문이 깨져 나갔다.
그리고 날렵한 수도가 두 사람의 목을 강타!
"컥!"
"으윽!"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알리우스는 이를 갈았다.
'뭐 저런 괴물이....'
전멸만은 막아야 한다.
그가 애써 최후의 외침을 터트렸다.
"저, 전원 후퇴하시오!"
소용없었다.
수비대원들이 도망치기도 전에 마녀가 먼저 몸을 날렸다.
무자비한 펀치와 킥의 폭격이 대원들에게 쏟아졌다.
"컥!"
"크아아악!"
"아아악!"
동료들이 모조리 쓰러지는 데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마녀가 품에서 시꺼먼 밧줄을 꺼냈다.
그걸 올올이 풀어 헤치더니 쓰러진 병사들을 하나하나 엮기 시작한다.
오러 유저도 묶고, 마법사도 묶고, 신관도 묶고, 10명이 넘는 병사들도 알뜰하게 묶는다.
"너무들 야위었어, 그치?"
그리고 이제 챈들러에게도 다가온다.
절망 속에서 챈들러가 기도를 올릴 때였다.
'아아, 여신이시여.'
그를 본 마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그, 이놈은 간이 썩었구먼. 술을 얼마나 마신 게야?"
어, 일단 챈들러가 워낙 술을 많이 마시는 건 사실이었다.
"이놈도 똑같고."
밀러드. 챈들러와 가장 친한 술친구이자 주량 라이벌이다.
"에잉, 이 두 놈은 너무 상해서 못 먹겠구나."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다른 의미로 겁이 덜컥 났다.
대체 자신들의 간이 얼마나 망가졌기에 저런 마녀마저 쓸모없다고 무시한단 말인가?
두 사람을 뺀 나머지를 겨울 청어처럼 잘 엮은 뒤, 노파는 인간 꾸러미를 숲속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묶인 채 기절한 사내들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기분 나쁜 광소가 나뭇가지 사이로 가득 울렸다.
"케헬헬헬! 이 녀석들도 이 몸이 챙겨 가 든든하게 몸보신을 해야 쓰겄다!"
***
기억 투영이 끝났다. 카르나크는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106화. 27. 마녀의 숲 (4)
바로스와 세라티가 묻는다.
"기억은 다 들여다보셨습니까, 도련님?"
"어떻게 된 건가요?"
카르나크는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웬 미친 할매가 멀쩡한 인간 수십 명을 생선 꾸러미처럼 두루두루 엮어서 보쌈해 가더라고?
"어, 그게, 음...."
카르나크가 머뭇거리자 두 사람이 타박을 던졌다.
"무슨 수법을 주로 씁니까? 흑마술? 아니면 강령술이나 초혼술? 어느 쪽 계열이에요?"
"설명을 해 주셔야 알 것 아니에요?"
애매한 어조로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그냥 두들겨 패던데."
"네?"
"그냥 손발로 두들겨 팼어."
바로스와 세라티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오러 유저에, 상급 마법사에, 1급 심문관까지 있는데 전부 맨손으로?"
"강력한 무투가인가요?"
"무투가라고 하기에도 좀...."
카르나크는 설명을 포기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오해 없이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에이, 둘 다 그냥 자기 눈으로 봐."
혼돈마법으로 기억 투영 영상을 띄워 주었다.
잠시 후 두 사람도 카르나크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가 지금 뭘 본 겁니까?"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카르나크가 웃었다.
"역시 백 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낫다니까."
***
마녀는 결코 고수나 달인이 아니었다.
그 어떤 무술적인 동작도 보여 주지 못했고, 손발의 움직임은 극히 조잡했으며 전신은 허점투성이였다.
아무것도 익히지 않은 무지렁이가 막무가내로 발버둥을 칠 때,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무식하게 강했다.
상대가 공격을 하건 말건 죄다 몸으로 때우고, 상대가 피하건 말건 죽자고 쫓아가 멱살을 붙잡고, 상대가 반격을 하건 말건 두들겨 팬다.
바로스가 어이없어하며 뇌까렸다.
"순전히 육체 능력이 전부네요, 이거."
단지 그것 하나가 너무 절대적이라 오러나 마법으로도 파고들지 못한다.
오죽하면 성직자의 신성 주문마저도 그냥 몸으로 때울 정도다.
세라티가 물었다.
"저런 식으로 신체 능력을 증폭시켜 주는 사령술이 있나요, 카르나크 님?"
"있기는 있지."
당장 마검 마레다에 걸려 있던 술법이 저런 식이다.
숙주의 몸에 인간의 정혈을 주입해 숙주를 강화한 뒤 미친 듯이 날뛰게 만들어 더 많은 정혈을 흡수하는 방식이니까.
"저렇게까지 강하게 만들 순 없지만."
저 마녀 역시 같은 이유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세. 사령술만으로는 저렇게까진 못 한다."
카르나크의 답변에 세라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검 마레다의 경우는 숙주였던 라피셀이 워낙 괴물이라 그런 엄청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할머니도 실은 무왕이실지도?"
눈을 빛내며 그녀가 의견을 냈다.
"라피셀의 스승님도 시공 회귀하신 게 아닐까요?"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벨티아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현재의 벨티아는 끽해야 40살이다.
미래의 영혼이 현재의 육체를 차지해서 미쳐 버렸다 해도 일단 외모는 40대여야 했다.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딱히 짐작이 가는 이가 없고요."
어지간한 미래의 강자들은 전부 파악하고 있다. 죄다 잡아 죽이거나 언데드로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단언할 수 있었다.
"저 노파처럼 독보적으로 개성 있게 생긴 이는 단 1명도 없었어요."
하긴, 저렇게 생겨서 세상을 활보했다면 유명해지지 않기가 더 힘들 것이다.
세라티가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럼 본인이 아니라 다른 육체로 돌아오는 건요?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카르나크가 뺨을 긁었다.
"실은 나도 그쪽을 의심하고 있긴 한데...."
일단 미래의 영혼은 기본적으로 과거 본인의 육체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본인의 육체라는 시공의 닻이 있어야 좌표를 지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예외적인 상황이 절대 생기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거든."
시공 회귀술은 카르나크 역시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저질러 버린 수법이다. 그리고 사령술에는 서로의 영혼을 바꾼다거나 타인의 육체에 빙의하는 술법이 흔하다.
세라티의 의견도 아주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그래도 이번엔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지만."
"왜요?"
"음, 그게...."
애매한 얼굴로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감이야."
"그게 전부예요?"
"응."
바로스가 옆에서 빙그레 웃었다.
"오, 그럼 이번엔 맞겠네요."
"네?"
"도련님이 감만으로 때려 맞힐 땐 적중률이 꽤 높거든요. 괜히 아는 척하면서 머리 굴릴 땐 은근히 자주 틀리시고."
"...."
세라티는 고민했다. 저게 지금 칭찬인가, 욕인가?
하여튼 카르나크는 진지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괴상한 상황이긴 하네."
강한 건 확실한데, 왜 강한지를 모르겠다.
남긴 사기나 탁기는 너무 옅고, 실제로 싸우는 걸 보면 딱히 어둠의 권능을 휘두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파 본인의 능력이라기엔 말도 안 되는 수준이고.
"직접 봐야 알겠군."
어차피 알리우스 때문에라도 마녀를 찾긴 찾아야 한다.
"알리우스 씨는 괜찮으실까요? 죽었으면 어쩌죠?"
걱정스러운 세라티의 말에 바로스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일단 구하긴 해야죠. 그래야 살았나 죽었나 확인이라도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투덜거리는 카르나크였다.
"자기가 무슨 탑 속의 공주냐? 왜 자꾸 구하러 가게 만들어?"
***
볼일을 마친 카르나크는 잠든 의무병과 생존자들을 도로 깨웠다.
워낙 깔끔하게 재우고 깨웠는지라 다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몰랐다.
"이들입니다. 둘 다 제정신이 아닌지라 증언을 기대하긴 힘들 겁니다만...."
"그런 것 같군요."
자연스럽게 기억을 이어 놓았기에 의무병은 자신이 내내 깨어 있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기억이 10여 분 정도 사라지긴 했지만, 방에 따로 시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도 알아차릴 일은 없으리라.
"그럼 저흰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방을 나온 카르나크 일행을 드메타스 준남작이 다시 찾았다.
"동료를 찾을 생각이겠지?"
"그래야지요."
"대신전에서 최대한 빨리 심문관을 파견해 준다 하였네. 또한 파사의 여단에서도 인원을 보내 준다고 했지."
카르나크 일행과 달리 드메타스 준남작은 생존자로부터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당연히 마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일반 병사로 이루어진 국경 수비대가 실종되었을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오러 유저 2명에 상급 마법사까지 당해 버렸으니, 이건 이제 특급 어둠 관련 재해가 되어 버렸다.
"병력은 곧 모일 걸세, 나흘만 기다려 주게."
어차피 성직자, 그것도 훈련을 받은 심문관의 도움이 없으면 마녀의 흔적을 뒤쫓을 수 없다.
당연히 준남작은 카르나크 일행도 그때까지 성채에서 기다릴 거라 여기고 있었다.
"심문관이 도착하면 바로 수색대를 꾸릴 생각이네. 그대들도 도와주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남 일이 아닌데요."
대화를 마친 뒤 일행은 본성 밖으로 나왔다.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어지자 세라티가 대뜸 물었다.
"정말로 기다릴 건 아니죠?"
"당연하지."
카르나크는 사령술의 흔적을 성직자보다도 월등히 쉽게 찾을 수 있다. 굳이 심문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마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는 눈이 없는 쪽이 훨씬 움직이기 편하시겠죠."
"뭐, 슬슬 보는 눈이 있어도 별 상관 없어지긴 했다만...."
로이드 왕자 사건 이후, 카르나크는 시간만 나면 마법과 사령술의 혼용법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흘씩이나 기다릴 순 없어. 알리우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일행은 걸음을 바삐 놀렸다. 어서 여관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 수색할 준비를 갖춰야 했다.
바로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런데 라피셀은 어쩌죠?"
평범한 상황이면 그냥 데리고 갔겠는데, 상황이 꽤 위험해 보였다.
비전투원을 보호하면서 싸울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그리고 기억 봉인 상태인 라피셀은 아직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론 기억 봉인이 풀리면 매우 큰 힘이 되겠지만, 그 힘으로 카르나크 일행을 공격할 테니 마찬가지로 곤란하고.
"여관에 혼자 놔둬도 되려나?"
세라티가 어깨를 으쓱였다.
"별일 없을 것 같은데요."
아무리 라피셀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일반인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다.
여관에 도착한 뒤 그녀를 앉혀 놓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네, 언니!"
"모르는 사람이 나쁜 짓 하면 어떻게 하라고?"
"나뭇잎처럼 만들어 주면 돼요!"
바로스와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뭇잎? 무슨 소리래요?"
"나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수색 준비를 마친 뒤 다시 여관을 나섰다.
주위를 둘러보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그래, 마녀의 숲이 어디랬지?"
***
마녀의 숲 자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원래는 스윈들러 성채 인근의 평범한 숲일 뿐이었다.
마녀가 나타난 다음에나 마녀의 숲이라 불리게 된 것이니,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문제는 이 드넓은 숲의 어디에 마녀가 있냐는 것이다.
"이거, 흔적이 너무 옅은데?"
울창한 침엽수림 속에 서서 카르나크는 인상을 썼다.
"흔적만 보면 어둠의 군주 절반 수준이니, 원."
이젠 세라티도 저 괴상한 표현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사령술 기초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반푼이란 소리죠?"
"어디까지나 흔적만 보면."
애초에 국경 수비대나 여단 소속의 레오콜트가 자신만만하게 마녀를 잡으러 간 이유가 이것이었다.
남긴 흔적만 보면 정말 하찮은 수준이다. 무식한 건달 놈이 우연히 종말의 어둠 조금 먹고 난리친 것에 불과할 정도로.
"그런데 실제로는 엄청 강하잖아요?"
"그러니까 이상하지."
그나마 카르나크쯤 되니까 추적이라도 하지, 어지간한 심문관이라도 흔적을 못 찾을 것 같았다.
바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데도 알리우스 씨는 용케 마녀를 추적했구만요?"
"정황을 보면 대충 짐작은 가."
알리우스는 그렇다 치고, 국경 수비대와 움직인 펠릭스 신관은 고작해야 2급 심문관이었다.
카르나크도 어려워하는 어둠의 흔적을 2급 심문관 수준으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마녀가 그들을 찾았겠지. 그들이 마녀를 찾은 게 아니라."
하여튼 흔적이 너무 옅고 흐리다. 이대로라면 며칠이 걸려도 마녀를 뒤쫓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카르나크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음?"
뭔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풀숲 사이, 덤불 위로 희미한 기운이 점점이 느껴지는 것이다.
어둠의 기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사령술사들이라면 민감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기운이기도 했다.
"...신성력이잖아?"
뭔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손톱만큼 쪼개진 신성은의 파편이었다.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우스 씨로군요."
알리우스는 순순히 끌려가지 않았다.
잡혀가는 와중에도 하토바의 성물인 심문관의 증표를 조금씩 갉아 내 성력을 부여한 다음 바닥에 뿌린 것이다. 누군가 이 흔적을 보고 자신들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워낙 희미한 기운이라 마녀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안도하며 세라티가 미소를 지었다.
"이 시점까진 알리우스 씨가 살아 있었다는 소리군요."
카르나크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따라가 보자."
#107화. 28. 고기의 집
새하얀 설탕이 뿌려진 케이크 대들보와 줄지어 세워진 거대한 초콜릿 기둥.
문은 잘 구운 쿠키로 만들어져 있고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반짝이는 얼음사탕이다.
맛있어 보이는 빵과 과자가 벽돌처럼 쌓여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벽을 이룬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과자의 집이었다.
아니, 이쯤 되면 과자의 성이나 저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홀의 허공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수십 개의 새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정말 기괴한 광경이군.'
새장 중 하나에 갇힌 채 알리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사령술사들이 온갖 기이한 짓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알리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굳이 애들 동화 같은 괴상한 장소를 만들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나마 실종된 사람들이 무사한 것은 다행인가....'
알리우스는 다른 새장 쪽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새장마다 사람들이 1명씩 갇혀 있었다.
대부분 실종되었던 스윈들러 국경 수비대원들이었다.
조금 떨어진 새장엔 파사의 여단 소속인 레오콜트와 레스테인, 스트로노프도 갇혀 있었다. 먼저 실종되었다는 사이샤의 심문관, 펠릭스 역시 무사했다.
신기할 정도로 단 1명도 죽지 않은 것이다.
어찌 보면 천운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었다.
마녀가 왜 자신들을 살려 두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붙잡아 온 사람들을 일일이 새장에 가둔 뒤 마녀는 온갖 먹거리들을 잔뜩 넣어 주었다. 사탕과 쿠키, 비스킷, 달콤한 크림과 설탕으로 만든 다양한 과자들이었다.
그리고 웃으며 외친 것이다.
"케헬헬헬, 포동포동 살찌워 잡아먹어 주마!"
당연히 알리우스는 먹지 않았다. 저런 소릴 듣고 누가 먹겠나?
사실 저런 소릴 안 했어도 감히 음식을 건드릴 엄두는 나지 않았겠지만.
과자의 집이란 게 아이들의 동화에서 나올 땐 어째 맛있어 보이는 느낌이지만, 실제로 눈앞에 닥치면 공포밖에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다만 이는 잡힌 지 하루밖에 안 지난 2차 수색대의 경우였다.
이미 1주일 가까이 붙잡혀 있던 이들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또다시 식사 시간이 다가온다.
초콜릿 문이 열리고, 두 발로 걷는 장화 신은 고양이들이 쟁반 가득 과자와 과일 주스 등을 담아 온다.
"냐옹!"
"냐옹냐옹!"
장화 신은 뒷발로 허공의 새장을 잘도 폴짝 뛰어오른다. 그리고 용케 앞발로 과자를 새장 안에 밀어 넣는다.
일견 귀여운 모습이지만 감히 웃을 수 없었다.
귀여워선 안 될 것이 귀여우면, 그건 오히려 더한 두려움일 뿐이었다.
"우우...."
"으어어...."
먼저 붙잡힌 수비대장이며 펠릭스 신관, 국경 수비대원들이 몽롱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과자를 입에 처넣기 시작했다.
우걱! 우걱우걱우걱!
옆에서 먹지 말라고 악을 써도 소용없었다.
새장 속에서 아무리 외쳐 봐야 전해지지 않았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속에서 그저 먹고 마신다.
이미 며칠째 저러고 살았는지 다들 살이 오동통 올라 있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대체 저 과자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1주일도 안 되어 저렇게 살이 찐단 말인가?
'절대 먹어선 안 돼.'
하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지금이야 허기도 갈증도 그리 심하지 않다. 잡힌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과연 저들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저만치 떨어진, 다른 새장에 갇힌 레오콜트가 뭔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
소리가 전해지지 않아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손에 붉은 오러를 둘러 새장을 후려갈기는 건 똑똑히 보인다.
알리우스는 혀를 찼다.
'쓸데없는 체력 소모는 피하는 쪽이 좋을 텐데....'
과연 레오콜트의 투기는 새장에 어떤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이었다.
투기뿐만 아니라 스트로노프의 마법도, 알리우스의 신성 주문도 효과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외부에서만 파괴할 수 있는 식이겠지, 역시?'
그렇다면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해 주러 오는 것뿐.
다행히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두었다. 성표를 조금씩 부수어 길 안내를 해 두었으니까.
'카르나크 씨라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사실 레오콜트 일행이나 카르나크 일행이나 크게 전력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양쪽 모두 6서클의 상급 마법사에 적색급 오러 유저일 뿐이 아닌가?
그럼에도 신기하게 카르나크나 바로스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시간.'
그가 남긴 흔적은 마법이나 오러로는 찾을 수 없다. 오직 성직자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은밀하게 남기는 것도 가능했지만.
즉, 인근 신전에서 고위 심문관을 보내 줘야 자신들을 찾을 수 있다는 소리다.
'적어도 사나흘 안에는 무리겠지.'
그동안은 아무리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한다.
알리우스는 눈앞에 놓인 쟁반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절대 안 먹어! 절대!"
과자며 주스가 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새장 밑에서 장화 신은 고양이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치우며 성질을 냈다.
"냐옹!"
"냐오오옹!"
***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속, 걸음을 옮기다 말고 세라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안개,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네요."
오러 유저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대략적인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안개에 들어선 후론 내내 공간 감각이 뒤죽박죽이 되어 제대로 구분이 되지를 않는 것이다.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소리지."
그렇게 30여 분쯤 더 흔적을 쫓았다. 안개 저편에 희끄무레한 오두막의 형체가 보였다.
바로스가 반가운 듯 뇌까렸다.
"오, 찾았다."
걸음을 빨리하니 오두막이 자세한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래, 분명히 오두막은 오두막인데....
"뭐야, 저거?"
"제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겁니까? 왜 저런 게 있어요?"
그것은 아담한 과자의 집이었다.
크림을 얹은 지붕과 사탕을 키운 창문, 빵과 과자로 만든 벽과 기둥, 케이크 굴뚝까지.
예쁘고 아기자기하지만 비현실의 극치였다.
"과자의 집...."
어이없어하며 세라티가 말했다.
"진짜 동화 속 풍경 같네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걸 알아, 세라티?"
"저런 게 나오는 동화도 있어요?"
오히려 세라티가 더 놀랐다.
"어머, 두 분은 몰라요?"
과자의 집에 사는 마녀 이야기는 대륙 전역에 퍼진 흔하디흔한 동화인 것이다.
"어릴 때 부모님이 들려주셨을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부모한테 사랑받고 큰 적이 없거든."
"도련님 옆에서 같이 구박받으면서 큰 게 접니다."
"심지어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였지?"
"저도 옆에서 거들었고요."
순간 세라티의 말문이 막혔다.
별 뜻 없이 한 소린데 저런 우울한 이야기가 돌아오다니?
"아, 저는, 그게 그런 의미는 아니고...."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실실 웃으며 그녀를 지나쳤다.
"세라티도 마찬가지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황하더라고."
"무왕들 상대할 때 심리 흔들기 좋았죠."
고개를 저으며 세라티가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이었어요?"
"구박받으면서 자란 건 사실."
"그래서 진짜로 이게 뭔지는 몰라요."
일행은 조심스럽게 과자의 집으로 다가갔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적당한 사냥꾼의 오두막 정도.
적어도 수십 명에 달하는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는 절대 아니었다.
주위를 살피며 바로스가 물었다.
"알리우스 씨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요?"
"글쎄...."
한참 과자의 집을 살피던 카르나크가 갑자기 물었다.
"세라티, 그 과자 마녀 동화? 하여튼 그거 유명한 동화야?"
"에, 7왕국의 아이들이라면 대부분 알지 않을까요?"
"제국은?"
"원래는 제국에서 넘어온 동화라니까, 제국 아이들도 대부분 알겠죠?"
"대륙 전역에 보편적으로 퍼진 동화라 이거지?"
"그렇긴 한데... 그게 왜요?"
과자의 집을 가리키며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 동화 속 내용과 이미지가 비슷한 거지?"
이해가 안 간다며 세라티가 반문했다.
"원래 사령술은 이런 거 아니에요?"
그녀가 여태 봐 온 사령술은 죄다 기괴하고 이상했다. 이제 와서 과자의 집 같은 것이 나타난다고 딱히 괴상할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다.
마녀도 나오는데 과자의 집이 없을 이유는 또 뭔가?
그러나 카르나크 입장에선 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령술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 단지 세간의 상식과 어긋날 뿐인 거지. 그 슈트라프란 놈이 불러냈던 사령결계 기억해?"
세라티가 헛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 결계 때문에 소중한 두 팔을 잃었고, 그거 되찾겠다고 지금 이런 인간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그녀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나 다름없다.
"그 촉수 하며, 고기 벽 하며, 죄다 흉측한... 어휴."
"그래, 흉측하지."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술사라고 그런 징그러운 촉수나 고깃덩이가 예뻐서 소환하는 건 아니야."
자주 보면 정든다고 사령술 오래 구사하다 보면 저런 것도 예뻐 보이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보편적으로는 그렇다.
"단지 그게 권능을 머금고 있는 지옥의 일부일 뿐인 거지."
사령술에 사악하고 기괴한 술법이 많은 이유는, 그런 술법이 펼치기 쉽고 위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사악하고 기괴하기 때문에 그 술법을 쓰는 게 아니란 소리다.
"사령술사가 소환하는 악마가 대부분 추악하게 생긴 이유도 똑같아."
그게 더 세고, 소환도 더 쉬우니까.
"미녀 악마가 강력하면서 소환까지 쉽다면 다들 그것만 부를걸."
카르나크가 팔을 펼쳐 과자의 집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동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하는 게 목적인가? 대체 이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일부러 권능의 일부를 할애하면서까지?"
사령술사의 눈으로 보면 이 과자의 집은 쓸데없는 불합리 덩어리인 것이다.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때였다. 과자의 집 문이 스르륵 열렸다.
"...!"
흠칫 놀라 세라티가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내 풀렸다.
열린 문을 통해 나온 것은 두 마리의 검은 고양이였다. 세라티가 반색을 하며 웃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귀여워?"
"아닐 텐데요."
"네?"
갑자기 두 고양이의 전신이 폭발하듯 급속도로 커져 간다!
"끼야아아악!"
"크캬캬캬캬!"
귀여운 고양이들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2미터에 달하는 징그러운 점액질 괴물 두 마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기겁하며 세라티가 도로 검을 뽑았다.
"꺅! 뭐야, 이거?"
피식거리며 바로스가 손을 뻗었다.
"뭐긴 뭐예요, 흔해 빠진 문지기 마물이지."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양손에 붉은 오러를 두른 뒤 점액질 괴물들을 동시에 찔러 간다.
괴물의 전신이 부풀어 오르며 수십 줄기의 빛이 놈들을 뚫고 나온다.
그리고 이내 폭발!
퍼어어엉!
손을 털고 물러나며 바로스가 히죽 웃었다.
"아, 역시 오러 각성하고 나니 좋긴 좋네."
세라티는 눈을 깜빡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바로스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양손을 통해 오러를 찔러 넣고 복어처럼 부풀린 다음에 고슴도치처럼 바늘 모양으로 세워서 사방으로 날린 것뿐이에요. 나중에 가르쳐 줄까요?"
"...."
오러를 찰떡처럼 주무르는 시점에서 이미 그녀의 능력은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뭐? 바늘로 바꿔서 사방으로 날리라고?
심지어 더 대단한 건, 그 와중에도 박살 난 괴물들의 파편이 카르나크 일행에겐 전혀 튀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발의 위력과 방향을 정확하게 조절해 안 튀는 위치로만 터트린 것이다.
'그래, 이 인간도 실은 괴물 중의 괴물이었지?'
그동안 오러 못 쓰고 내내 비실거리는 모습만 봐서 잠깐 잊었을 뿐이다.
"...전 그냥 하던 거나 열심히 연습할게요."
급격히 말투가 공손해지는 세라티였다.
#108화. 28. 고기의 집 (2)
박살 난 마물들의 시체를 뒤로한 채 카르나크는 과자의 집 앞에 섰다.
"일단 들어가 봐야 뭐가 되어도 되겠지?"
세라티가 반쯤 열린 문을 살피며 물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볼까요?"
"아니, 거기 말고."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튀긴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벽 한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멀쩡한 문 놔두고 일부러 벽에 구멍을 낸 것이다.
뚫린 통로를 통해 집 내부를 바라보며 카르나크가 빙그레 웃었다.
"자고로 사령술을 상대할 때는, 비상식이 상식인 법이거든."
안으로 들어가니 긴 복도가 나왔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한 과자의 복도였다. 천장에 매달린 등불 모양 사탕에서 불빛이 나와 꽤나 밝은 공간이었다.
얼핏 보기엔 그리 이상할 것 없는 풍경.
하지만 세라티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그렇다.
'긴' 복도였다.
기껏해야 사냥꾼 오두막만 한 작은 과자의 집이다. 그 내부에 어찌 이런 기나긴 복도가 있단 말인가?
심지어 크기도 어지간한 성의 회랑에 육박한다. 높이도 수 미터에, 좌우 폭은 과자의 집 본체보다 넓을 지경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작은 집 안쪽이 이렇게나 클 수가...."
덜덜 떠는 세라티와 달리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시큰둥했다.
"뭘 놀라고 그래?"
"흔해 빠진 공간 왜곡이잖아요."
두 사람이 워낙 태연하니 세라티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녀가 눈을 흘겼다.
"...두 분한테는 흔할지 몰라도 저한텐 난생처음 보는 괴사거든요?"
"알고 보면 신기할 것도 없어."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가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가 본 과자의 집 내부에 이 복도가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
과자의 집은 어디까지나 입구일 뿐이다.
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차원문을 통과했다는 소리다.
이 복도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과자의 집과는 별개의 공간에 서게 된 것이다.
"여긴 그럼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건가요?"
"응. 그냥 평범한 지옥의 일부일 뿐이야."
"아, 예."
세라티는 잠시 생각했다.
'...지옥인 시점에서 이미 평범하진 않은 것 아닌가?'
의외로 자신이 지옥에 왔다는 사실은 크게 놀랍지 않았다.
지옥 풍경 비추는 창문(?)도 봤고, 지옥 출신 악마도 만났고 지옥산 갑옷도 입어 봤다. 지옥 타령 정도는 충분히 적응한 느낌이랄까?
'아, 이런 건 적응하고 싶진 않았는데.'
한편 카르나크는 재미있다는 듯 연신 복도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어째 감지되는 기운이 좀 익숙한데...."
온갖 지옥들을 다양하게 들락거린 그였다. 아무리 과자로 치장되어 있다 해도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마기(魔氣)를 놓치진 않는다.
"여기가 원래는 어디일 것 같냐, 바로스?"
옆에서 함께 지옥 들락거린 바로스가 추리를 펼쳤다.
"게헤나나 타르타로스 같은 메이저 지옥은 아닌 것 같은데요? 거긴 여기보다 마기가 좀 더 진득하죠."
"여긴 좀 더 텁텁하고 부산스러운 느낌이니까, 대충 파르파스랑 질롱가 사이? 그 근처를 누가 지배했더라?"
"악마백작 로타-부둔의 영역일걸요."
"걘 죽었잖아."
"이 시간대엔 아직 살아 있겠죠. 한창 사령왕 된 도련님이 강제로 부려 먹던 시절에 레번 경이 죽였으니까."
"아, 그랬지, 참."
그렇게 계속 주변을 살피며 복도를 조금 더 걸었을 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희미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수십 마리의 새들이 날아오는 듯한 소리였다.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이윽고 꺾인 복도 너머로 한 무리의 그림자가 괴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끼이이익!"
"이히이익!"
바로스가 눈을 깜빡였다.
"엥? 원숭이네?"
수십 마리의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 복도를 날아오고 있었다.
검을 뽑아 들며 세라티가 물었다.
"지옥에는 저런 마물도 있나요?"
역시나 전투준비를 하며 바로스가 대꾸했다.
"가고일이 좀 비슷하게 생기긴 했는데, 저런 식은 아니에요."
날개만 빼면 그냥 평범한 원숭이였다.
손에 긴 창을 들고 있고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어 포악해 보이긴 해도, 일단 생긴 건 보편적인 원숭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날개 달린 원숭이라...."
놈들을 노려보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혹시 저런 동화도 있어, 세라티?"
"아, 예, 비슷한 건 들어 봤어요."
"보편적인 이야기야?"
"보편적? 제법 흔한 동화이긴 한데요."
"...흥미롭군."
카르나크의 눈가에 옅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매우 흥미로워."
원숭이들이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온다. 바로스도 투기검을 뽑아 들었다.
부우우웅!
"어쩔깝쇼, 도련님?"
"일단 썰어."
기다렸다는 듯 바로스가 몸을 날렸다.
"넵!"
***
원숭이들은 빨랐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무식한 놈들!"
"문으로 들어와야지!"
"왜 벽을 부숴!"
"내내 기다리고 있었잖아!"
"돌아오느라 한참 걸렸네!"
원숭이치곤 의외의 달변이다.
듣자 하니 카르나크 일행이 벽 부수며 돌입한 탓에 자신들이 매우 고생을 했다는 듯했다.
"과연."
세라티는 납득했다.
"이래서 카르나크 님이 굳이 벽을 부수고 돌입한 거였구나."
바로스가 투기검을 휘두르며 원숭이 떼 사이로 뛰어들었다.
세라티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붉은 오러가 수십 번이나 번뜩이며 피를 튀겼다.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 태풍에 휘말린 비둘기처럼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끼이익!"
"께에엑!"
수십 마리나 되는 날개 달린 원숭이들을 모조리 참살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카르나크까지 나설 것도 없었다. 바로스와 세라티 선에서 그냥 정리가 되었다.
단순히 두 사람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날개 달린 놈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문제다. 날아다닌다는 이점을 거의 못 살리는 것이다.
일반 병사라면 모를까, 오러 유저에겐 전혀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이놈들, 너무 약한데요?"
"이 정도에 파사의 여단이 당했을 리는 없을 것 같아요."
반대쪽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카르나크가 손짓을 했다.
"또 온다, 바로스."
이번에 나타난 놈들은 어린아이만 한 크기의 두꺼비들이었다.
징그럽게 생긴 두꺼비 수십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오며 울어 댄다.
"두껍!"
"두껍두껍!"
세라티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기, 원래 두꺼비 울음소리는 저게 아니지 않나...."
다가온 두꺼비들이 일제히 점액질의 괴물로 변했다.
과자의 집 밖에서 만난 그 괴물들이었다.
"크아아아!"
"카아!"
이번에도 카르나크 일행은 괴물들을 문제없이 무찔렀다.
싹 쓸어버리고 한숨 돌리려는데 또 복도 저편에서 뭔가가 우르르 몰려온다.
수십 마리의 검은 고양이들이었다.
이젠 세라티도 귀엽니 어쩌니 하지 않았다. 저 귀여운 고양이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이미 봤다.
그저 울음소리만 좀 신경 쓰일 뿐이었다.
"고양!"
"고양고양!"
어처구니가 없어 세라티가 바로스를 돌아보았다.
"...지옥은 원래 다 이따위예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지옥이라도 원래 이렇진 않아요."
어차피 변신하고 나면 똑같은 점액질의 괴물들이다. 당연히 이 고양이 떼도 아까 나타난 두꺼비 떼와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
똑같이 싹 쓸어버렸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또 나타날 것 같죠?"
바로스의 예상대로였다.
이번엔 수십 마리의 토끼들이 폴짝거리며 복도를 뛰어오기 시작했다.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대충 법칙이 짐작이 가는군."
고양이와 두꺼비, 거기에 토끼까지? 전승에서 전해지는 전형적인 마녀의 수하가 아닌가?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야."
다만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긴 했다.
이번에 나타난 토끼들은 앞발에 알록달록한 계란을 들고 있었다.
"계란이랑 토끼랑 무슨 상관이지, 세라티?"
"이건 저도 모르겠는데요."
몰려든 토끼 무리가 카르나크 일행을 노려보며 울기 시작했다.
"토토!"
"토토토토토토!"
배신당한 기분이 들어 세라티가 항변했다.
"야! 끼 어디 갔어, 끼?"
"뭔 이상한 트집을 잡고 있어요?"
한마디 던지는 바로스의 표정도 좋진 않았다.
진지하지 않은 것도 정도껏이지, 맥이 탁탁 빠진다.
"그래도 무시할 순 없으니...."
"싸우긴 싸워야죠, 네."
점액질의 괴물로 변한 토끼 떼를 바로스와 세라티가 마구 썰어 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얼핏 지옥답지 않아 보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매우 지옥답다. 현실이 뒤틀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건 왜, 그리고 어떻게 뒤틀렸냐는 건데....'
이번에도 괴물들은 쉽사리 쓸렸다. 하지만 아까보단 두 사람의 안색이 편해 보이지 않았다.
"별것 없는 놈들이긴 한데...."
"계속 이렇게 나오면 피곤하겠는데요, 도련님?"
"그럼 좀 쉬자."
"어디에서요? 쉴 만한 장소가 없잖아요."
세라티의 의문에 카르나크가 양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어둠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만들 거야."
***
이곳의 구조는 대충 파악했다.
"무한의 회랑의 변형판이지."
다만 고도의 사령술이 개입된 건 아니다.
사령술식으로 결계를 펼친 것이 아니라, 그냥 막대한 권능으로 무식하게 차원에 구멍을 뚫어 지옥의 일부와 강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파악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고난이도의 술식일수록 파해하기 어렵다지만, 사령왕이었던 카르나크에게 어차피 대부분의 술식은 고난이도가 아니다.
차라리 이런 단순 무식한 방식이 파악하긴 더 어렵다.
술식이 아니라 공간 자체의 흐름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니까.
술식을 펼치며 카르나크는 양손을 복잡하게 움직였다.
"거짓된 뒤틀림을 지우고 진정한 왜곡으로 되돌리노라...."
열 손가락이 허공을 연주하듯 톡톡 두들긴다.
"악은 악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그때마다 어둠의 파동이 퍼져 나가 중첩되며 공간을 흔든다. 천장이, 바닥이, 벽이 바르르 떨린다.
"죽음에도 순리가 있으니 그릇된 지옥이여, 정해진 이치를 따를지어다."
과자의 복도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라티의 안색이 굳었다.
'헉!'
초콜릿으로 마감한 천장의 문양이 사라지고 핏줄이 감긴 뼈다귀가 나타났다.
빵으로 쌓아 올린 벽이 꿈틀대는 고깃덩이로 변했다.
반짝이는 사탕 촛대 대신 푸르게 불타는 촉수 덩이가 기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바닥조차도 수백의 인골이 가득 얽혀 카펫처럼 펼쳐진 상태.
"으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 예쁘던 과자의 집이 시뻘건 고기의 집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엄청나게 흉측하고, 섬뜩하며, 기괴하다.
"이, 이게 뭐예요?"
별것 아니란 듯 두 사람이 대꾸했다.
"뭐긴."
"여기 진짜 모습이죠."
둘 다 원래 이런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는 내심 납득했다.
'어쩐지, 단거라면 환장하는 저 인간들이 눈길도 안 주더라니....'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적당히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럼 좀 쉬자."
인상을 쓰며 세라티가 복도 저편을 돌아보았다.
"정말 쉬어도 되는 거예요?"
또다시 날개 달린 원숭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길어 봐야 몇 초면 이곳에 도달할 거리였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카르나크는 원숭이들을 가리켰다.
놈들은 전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나 날갯짓하며 날고 또 나는데도, 제자리를 벗어나질 못한다.
"저기서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달은 걸릴걸."
#109화. 28. 고기의 집 (3)
끝없이 펼쳐진 악몽의 공간.
고기의 벽이 꿈틀대며 좌우로 밀어닥친다. 천장이 무너지며 검붉은 촉수를 내뻗는다. 내뻗은 촉수가 날카로운 창칼이 되어 전신을 꿰뚫는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이대로 나아가면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
도망친다. 무너지는 세상을 등진 채 미친 듯이 달린다.
소용없다. 세상이 무너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으아아아악!"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그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주위의 동료들이 죽어 간다.
수많은 촉수들이 목을 조르고 팔다리를 잡아 뽑아낸다. 바닥과 천장이 달라붙어 전신을 으깨 버린다. 체액이 방울져 떠올라 사방으로 튄다. 모든 것이 찌그러지고 뭉개지고 터져 나간다.
아무리 도망쳐도 악몽은 멀어지지 않았다.
천장이 바닥이 되고 벽이 창문이 된다. 구멍 뚫린 벽 너머로 또 다른 복도가 펼쳐진다. 피의 바다가 넘쳐 나 모두를 집어삼킨다.
이 모든 악몽의 너머에 저들이 있다.
차가운 눈동자, 한 치의 자비조차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현실에 지옥을 펼쳐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자들이.
그저 비명을 내지른다.
"아아아악!"
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였다.
"아아아아악!"
***
"...왜 우리가 악당이 된 기분이죠, 이거?"
복도 저편을 바라보며 세라티가 혀를 찼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기분 탓이야."
"저건 그냥 지옥의 잔존 사념 같은 겁니다. 비명 지른다고 전부 생명체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렇다.
날개 달린 원숭이며 점액질 괴물들이 미친 듯이 카르나크 일행을 쫓아온다. 그리고 이내 밀려드는 고기의 벽이며 날뛰는 촉수 무리에 휘말려 박살 나 버린다.
"끼야아아악!"
"아아아악!"
"카아악!"
이 일대는 완전히 카르나크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얼마든지 공간을 조작해 괴물들을 난도질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바로스와 세라티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냥 카르나크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경계만 하면 되었다.
느긋하게 해골 바닥을 걸어가며 카르나크는 주위를 감상했다.
알록달록한 과자의 복도를 걸을 때와 달리 한껏 평온한 표정이었다.
"과자의 집 같은 것보다 이쪽이 훨씬 익숙하고 정감 있지, 역시."
세라티가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 우습네요."
알록달록 예쁜 과자에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 흉측한 뼈와 고기로 가득한 이 풍경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딱히 이런 풍경이 보기 좋아서가 아니라, 적어도 아까 느꼈던 기분 나쁜 이질감이나 괴리감은 없는 것이다.
계속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나저나 알리우스는 어디 있으려나?"
그의 지배력은 견고하지만 넓지는 않았다. 결계 강탈 술식은 완벽하게 펼칠 수 있어도 사령력에 제한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이동하며 찾아야 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계속 괴물들은 조져야 했고.
"아아아악!"
"크아악!"
"크아아아아!"
쉴 새 없이 울리는 괴물들의 비명을 뒤로한 채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아, 여긴가?"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회오리치더니 이내 거대한 입구가 열렸다.
입구 너머로 펼쳐진 것은 예쁘게 치장된 웅장한 과자의 홀이었다.
쟁반을 들고 다니던 장화 신은 고양이들이 카르나크 일행을 보더니 경계의 울음을 터트렸다.
"냐옹!"
"냐옹냐옹!"
"어머, 저 고양이들은 왜 멀쩡하게 울죠?"
세라티의 의문에 별거 아니란 듯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뒤틀림이 과해서 그래."
더욱 이해가 안 가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과한데 왜 도로 멀쩡해져요?"
"저게 현실의 멀쩡함이냐? 동화 속 멀쩡함이지."
과연, 저 장화 신은 고양이들은 점액질 괴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쟁반을 든 채 사방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것도 두 발로.
하는 짓만 보면 정말 동화 속 고양이 같긴 하다.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애매해하며 세라티가 막 고개를 들던 중이었다.
"앗!"
홀 허공에 수십 개의 새장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고양이에 정신이 팔려 이제 발견한 것이다.
각 새장마다 실종되었던 사람들이 갇힌 채 아우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
"...?"
물론 소리가 차단되어 있으니 카르나크 일행 눈에는 그냥 입을 뻐금거리는 걸로만 보인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오, 살아 있었구만."
"심지어 죄다 살아 있는데요?"
"왜 이렇게 많이 살아 있지?"
"왜 두 분 다 보고만 있는 거예요? 빨리 구해야...."
막 세라티가 새장 쪽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잠깐만요."
바로스가 그녀를 말린 뒤 주위를 가리켰다.
"여긴 왜 아직도 과자투성이입니까, 도련님?"
그제야 세라티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여전히 사방이 과자로 뒤덮여 있었다. 카르나크가 왔으니 흉측한 고기의 홀로 변해야 하는데도.
"말했잖아, 뒤틀림이 과하다고."
더 이상 그의 지배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홀에 드리워진 뒤틀린 이미지가 그만큼 진하다는 의미다.
이 영역의 주체에 가깝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차가운 눈으로 카르나크는 홀 저편을 노려보았다.
"마녀가 가까이 있다."
수십 개의 새장들 너머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케헬헬헬...."
섬뜩한 노파의 음성이었다.
"정말 예쁘게 생긴 아이들이로구나."
***
참으로 흉측하게 생긴 마귀할멈이었다.
얼마나 나이가 든 건지 짐작도 안 가는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 매부리코, 복장은 넓은 챙이 달린 고깔모자에 허름한 로브 차림이고 한 손엔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마녀를 노려보며 카르나크는 생각했다.
'기억 투영에서 본 그대로구만.'
대륙에서 칭하는 마녀의 정확한 정의는 이것이다.
어둠과 죽음의 권능을 구사하는 여성 사령술사.
단순히 마법을 쓰는 여성을 마녀라 하진 않는 것이다.
3인의 대마법사 중 1인인 엘레자르를 마녀라 칭하지는 않는 것처럼.
상대는 꼬부랑 노파였고, 고도의 사령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마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낌이 아닌 것 같은지 모르겠단 말이지?'
마녀가 카르나크 일행을 향해 다가온다.
슬그머니 지팡이를 꺼내 겨누며 카르나크가 소리를 질렀다.
"어이, 할멈! 당신 진짜 마녀요?"
마녀가 인상을 썼다.
"에그, 다들 너무 야위었구나."
"이 사람들은 왜 잡아 온 거요? 먹으려고?"
"이 할미는 포동포동 살찐 아이를 잡아먹는 걸 좋아한단다!"
참으로 모범적인 횡설수설이었다.
세라티가 전언을 보냈다.
[...라피셀 처음 만났을 때랑 너무 똑같은데요?]
이쪽이 뭐라 하건 들은 체 만 체에, 했던 말 또 하는 것까지 흡사하다.
[이렇게까지 비슷한데, 또 누가 건너온 건 아니라는 건가요?]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긴 해.]
상황만 보면 세라티의 추측은 매우 합당하다. 카르나크도 머리로는 동의하고 있었다.
[느낌은 절대 아니라고 부르짖고 있지만 말이지.]
어차피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냥 반응 자체를 보려고 한 짓이다.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군.'
예나 지금이나, 호기심을 해결하는 그의 방식은 항상 같았다.
폭력이다.
"바로스!"
기다렸다는 듯 금발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넵!"
마녀도 몸을 날렸다.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마치 유령처럼 바로스의 코앞까지 들이닥친다.
예상 이상의 스피드라 그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진짜 빠른데?'
마녀가 빗자루를 내리쳤다. 바로스도 투기검을 들어 막았다.
막대기와 검이 충돌하며 파문이 일었다.
콰아앙!
파문이 사방의 과자 바닥을 부수며 사방으로 파편을 날렸다.
매달린 새장들이 일제히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충격파였다.
그럼에도 바로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정도로 밀리진 않지, 내가.'
밀려오는 충격을 살짝 무릎을 구부려 대지로 흘린 것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어지간한 오러 유저는 꿈도 못 꾸는 고도의 흘리기 수법이었다.
마녀 역시 물러서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케헬헬, 말을 듣지 않는 아이로구나!"
다만 그 이유는 바로스와 전혀 달랐다.
그냥 맨몸으로 버텼다. 힘을 흘리는 기술 같은 건 전혀 없이.
그래서 바로스는 의아했다.
'몸이 멀쩡한 거야 튼튼해서 그렇다 치고, 왜 밀리지도 않지?'
딱히 체중이 무거운 것도 아니고 땅에 박혀 있는 것도 아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
곧바로 세라티도 몸을 날렸다.
[저도 가세할게요!]
투기검을 뽑아 들고 마녀의 배후에 선다. 그리고 노파심에 카르나크에게 한마디 던진다.
[지옥 갑옷은 주지 마세요! 제 힘만으로 싸울 테니까!]
라피셀과 싸울 때 입었던 지옥산 갑주는 물론 굉장한 위력이었지만, 그만큼 영혼을 오염시키는 물건이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기 전엔 되도록 걸치고 싶지 않았다.
뭐, 카르나크도 애초에 줄 생각 없었지만.
[달라고 해도 안 줘.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설마 주겠냐?]
새장에 갇혀 이 전투를 지켜보는 사람이 무려 수십 명이다. 저들은 소리가 차단된 것이지 시야가 차단된 것이 아니다.
[아, 하긴.]
바로스와 세라티가 마녀를 앞뒤로 포위하며 투기검을 겨눴다.
마녀가 빗자루를 내던졌다. 그리고 세라티에게 달려들었다.
손톱이 길게 난 양손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케헬헬헬!"
오러 유저라면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빤한 공격이었다.
물론 세라티는 바보가 아니니 두 눈 잘 뜨고 신중하게 피했다.
동시에 마녀의 어깨에 투기검 일격!
타앙!
오러의 칼날이 허우적대는 로브 자락을 뚫지 못하고 튕겼다.
세라티가 혀를 찼다.
'역시 이 정도론 안 통하나?'
별로 놀랍진 않았다.
이미 기억 투영 영상을 통해 레오콜트와 레스테인의 전투를 봤다. 그들 역시 그녀와 동급의 레드 나이트지만 전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추가로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디....'
세라티가 마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렇게....'
그동안 지겹게 봐 온 바로스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칼날을 교묘히 놀린다.
"타앗!"
마녀의 공격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동시에 그녀의 투기검이 다시 한번 상대의 어깨를 찌른다.
파아앗!
이번엔 로브가 뻥 뚫리며 시꺼먼 연기가 피처럼 흘러내렸다.
마녀가 달려드는 힘을 이용해 정확히 카운터를 노린 것이다.
투기검으로 어깨를 뚫은 게 아니라, 마녀가 자기 어깨로 칼끝을 때린 형국이다.
"이건 통하네."
뿌듯해하며 세라티는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번엔 좀 잘했다.
바로스도 꽤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오, 방금 건 꽤 좋았어요, 세라티 경.]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녀가 분노를 터트렸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로구나!"
***
알리우스는 새장 속에서 갇힌 채 카르나크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저들이라면 우리를 찾을 줄 알았어.'
그의 신뢰는 기대 이상으로 보답받았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구하러 와 주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현재 카르나크 일행은 도와줄 심문관을 대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길 찾은 거지?'
그가 남긴 신성력은 너무 희미해 오러 유저나 마법사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감지가 가능한 경우는 둘뿐이다.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심문관이거나 혹은....
'사령술사라면 모를까....'
#110화. 28. 고기의 집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