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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90-100

#90화. 23. 피를 마시는 검 (4)

공방이 이어지며 사방에 오러의 파문이 퍼져 나간다.

전투를 틈타 프로스는 계속 뒤로 물러났다. 해리스와 세라티도 천천히 전장을 옮겼다.

목표물도, 방해물도 같은 방향으로 향하니 당연히 마검도 그 뒤를 따랐다.

2차 방어선의 목적은 1차와는 조금 다르다.

마검의 힘을 갉아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놈을 원하는 장소로 확실하게 인도하는 것 역시 목표.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전장은 착실히 이동하고 있었다.

어느새 야영지를 벗어나 작은 협곡 입구까지 도달했다.

안으로 움푹 파인, 지름이 100여 미터쯤 되는 분지 형태의 협곡이다.

'좋아!'

프로스가 미리 마련해 둔 마법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지자 마검의 소녀가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당황은 길지 않았다.

또 다른 목표물이 협곡 안쪽에서 느껴진 것이다.

방금까지 쫓았던 인간이 아닌, 더 '우선순위'가 높은 목표물이.

때마침 해리스와 세라티도 마검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다. 목표물을 처리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없는 셈이었다.

"꺄하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마검의 소녀는 일직선으로 협곡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해리스가 어이없어했다.

"정말 예측에서 벗어나질 않는군요."

"그건 다행이긴 하지만...."

천천히 뒤를 쫓으며 세라티는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

분지 안쪽에는 지켄과 트리브, 그리고 막 마법진에서 나온 레판이 대기하고 있었다.

협곡을 통해 분지로 들어선 마검의 소녀는 우선 레판부터 노려보았다.

"...."

그러나 바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지켄과 트리브의 존재감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었다.

양쪽 모두 강렬한 마나와 오러를 드러내고 있다.

저 둘을 먼저 처리해야 비로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아하하하!"

웃음과 함께 소녀가 몸을 날렸다.

트리브도 푸른 투기검을 휘두르며 맞섰다.

마검의 칼날이 채찍처럼 긴 혈기의 오러를 뿌린다. 검붉은 검광과 푸른 투기가 맞붙어 어지러이 얽힌다.

풀잎이 날리고 대기가 찢어져 굉음을 떨쳐 댔다.

파앙! 파아아앗!

지켄도 차분히 마법으로 보조했다. 각종 화염과 전격 주문이 마검의 배후를 노렸다.

무려 7서클 마법사와 청색급 오러 유저의 합공이었다.

게다가 지켄과 트리브 둘 다 킹스 오더에서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베테랑들.

둘의 협공에 마검의 소녀가 점점 수세로 몰렸다.

그럼에도 쓰러지지는 않는다. 몰릴수록 더더욱 어둠의 기운을 높이며 사방으로 광기의 참격을 뿌려 댄다.

"꺄하하하하!"

공세가 강해질수록 광소도 점점 더 높아졌다.

"맙소사, 아직도 이 정도로 힘이 남았나?"

혀를 차는 트리브를 향해 지켄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힘 많이 빠진 게 맞지. 애초에 우리 둘이서 무슨 수로 자색급을 상대하겠나?"

"그건 그렇군."

한편 레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겨누며 전장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언제 마검이 그를 노릴지 모르니 방심할 순 없다. 하지만 괜히 끼어들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빙빙 돌고만 있어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놈의 우선순위를 흔들어 놓을 수 있고, 트리브와 지켄이 한숨 돌릴 여유도 생긴다.

덕분에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 거리를 두고 쫓아온 해리스와 세라티마저 마검의 배후를 잡았다.

마검의 광소가 멎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당히 위험해진 상황이다. 후퇴를 하는 쪽이 옳다.

판단을 내린 마검의 소녀가 대뜸 뒤로 뛰었다. 트리브가 인상을 썼다.

"역시 도망가나?"

마법의 완드를 움켜쥔 채 지켄이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더 붙잡아 놔!"

해리스와 세라티가 앞을 막았다.

하지만 마검의 신체 능력은 자색급 오러 유저에 필적한다. 일단 도망치기로 작정하면 막기가 쉽지 않다.

과연, 아주 약간의 틈이 생겼다.

해리스의 투기검을 튕겨 내며 소녀가 좌측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포위망을 벗어났다.

'아차!'

당황한 해리스를 뒤로한 채 소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지를 질주했다.

유일한 탈출구, 협곡 입구를 향해서였다.

그때였다.

"어딜 도망가시나?"

바위틈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레판과 마찬가지로 마법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카르나크였다.

그를 보자마자 마검의 소녀가 날카로운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아아악!"

실로 끔찍한 존재를 본 것처럼 기겁하며 반대쪽으로 도망간다.

유일한 탈출구의 반대편이라면 어디겠는가? 도로 포위망 안쪽으로 돌아왔다는 소리다.

"혹시나 해서 보험을 들어 놓길 잘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지켄이 마법의 완드를 치켜들었다.

"흐르는 수정의 광휘여, 내 적을 감싸는 감옥이 되어라!"

천장과 벽, 기둥까지 모두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수정 감옥이 사방 수십 미터를 감쌌다.

7서클 감금 마법진, 크리스털 라비린스.

사전 준비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발동만 하면 블루 나이트까지도 가둘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당황한 듯 소녀가 검을 고쳐 쥐었다.

"...."

물론 자색급 오러 유저에 필적하는 마검 마레다라면 이 결계마저도 부술 수 있다. 아마도 두세 번만 두들겨도 깨질 것이다.

실제로 마검의 소녀도 부수려는 시도는 했다.

검을 높이 들어 모든 기운을 한 점에 모아 빛의 벽을 내려친다!

콰아앙!

단 일격에 빛의 장막이 흔들리며 금이 갔다.

하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두세 번만 두들겨도 깨진단 소리는, 한두 번까진 막을 수 있다는 소리도 되는 것이다.

트리브와 해리스, 세라티가 훼방을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놓칠 것 같아?"

방해를 받은 소녀가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멀리서 카르나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으으...."

처음으로 소녀의 입에서 색다른 소리가 나왔다.

광소도 비명도 아닌, 신음이었다.

"으어어어...."

***

더 이상 마검의 소녀는 레판을 노리지 않았다. 카르나크를 보며 비명을 지르지도, 어떻게든 도주하려 하지도 않았다.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연신 훑어볼 뿐이었다.

"으으으...."

사방에서 킹스 오더의 포위망이 좁혀져 온다. 그 너머로는 견고한 수정 감옥이 모든 퇴로를 차단하고 있다.

싸우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판단이 선 것일까?

소녀가 마검의 검날을 크게 훑었다. 검은 불길이 칼날을 타고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동시에 허공에 몸을 날린다!

"끼야아아악!"

비명과 동시에 사방으로 참격이 흩뿌려졌다.

얼핏 마구잡이처럼 보이는, 하지만 의외로 정확하게 상대를 노리고 날아드는 연격이었다.

푸른 투기검으로 공격을 흘려 내며 트리브가 외쳤다.

"다들 조심하게!"

강렬한 연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해리스도 세라티도 무리하지 않고 차분히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켄과 카르나크 역시 마나 실드를 펼쳐 공세를 막는 데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

기껏 여기까지 몰아넣었다.

굳이 서둘러서 일을 그르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계획대로!'

'마검과 소녀를 떼어 놓는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트리브와 해리스는 좌우의 협공을 이어 갔다.

청색과 적색의 투기 두 줄기가 연신 검은 불길을 두들긴다. 그때마다 불길이 확실히 약화되며 기세도 사그라진다.

최대한 소녀에 대한 공격은 피하며 마검 자체만 부수는 것이다.

어차피 본체는 마검 쪽이니 무기 파괴가 곧 승리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검은 버티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여전히 위협적인 반격을 날린다.

계속해 검은 불길을 쳐 내며 트리브가 곁눈질을 했다.

'카르나크 경은 아직인가?'

지켄은 수정 감옥을 유지 중이니 이 자리의 마법사는 카르나크뿐.

때마침 카르나크가 마법을 완성시켰다.

완드를 대지에 내리치며 혼돈마력을 가득 피워 낸다!

"나, 옥죄고 얽매는 힘의 사슬을 부른다! 체인 오브 아케인 포스!"

다섯 줄기의 붉은 사슬이 땅에서 솟구쳐 마검과 소녀를 휘감았다.

마검의 칼날에 셋, 소녀의 다리에 각자 하나씩 사슬이 묶였다.

세라티가 반색을 했다.

"잡았나?"

아직 좋아하긴 이른 듯했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린 것이다.

"꺄아아악!"

대지에 박힌 사슬이 일제히 뽑혀 허공에 나부낀다.

쾅! 콰콰콰쾅!

권능의 사슬 자체는 튼튼한데 그걸 지탱하는 대지가 견고하지 못했다.

붉은 사슬이 채찍처럼 사방으로 날려 오히려 킹스 오더를 공격해 갔다.

"윽!"

"카르나크 경!"

마법 실패했으니 어서 다음 수법을 준비하라는 의미의 외침이었다.

하지만 카르나크는 태연했다.

'실패한 거 아니거든?'

애초에 여기까지 염두에 둔 수법이었다.

카르나크가 바로 다음 마법을 발동했다.

"일어나라, 대지의 혼이여!"

쿠쿠쿠쿠쿵!

땅에서 흙더미가 솟구쳐 다섯 개의 흙거인으로 변했다.

한 번에 무려 5기나 되는 골렘을 소환한 것이다.

트리브와 해리스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세상에, 골렘 5기를 동시에 소환했어?'

'지켄 대장도 2기가 한계 아니었나?'

지켄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유스틸 왕국에 대마법사가 될 천재가 나타났다더니....'

저건 마력이나 마법의 경지, 서클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그냥 본인의 마력 운용과 연산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증거다.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사실은 그냥 연산력이 크게 필요 없어서일 뿐이지만.

'아이고, 남들은 내가 되게 천재인 줄 알겠구만.'

사령술 용법을 응용했을 뿐인지라 눈빛이 좀 부담스럽긴 하다.

'그래도 여기서 티를 낼 순 없지.'

뻔뻔한 얼굴로 카르나크가 명령어를 외쳤다.

"적을 제압하라! 나의 종들아!"

흙거인들이 일제히 붉은 사슬을 움켜쥐고 강하게 당긴다.

골렘이라면 동작은 느려도 괴력 하나는 일품인 소환체다.

마검과 소녀 모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끼야아악!"

비명을 지르며 소녀가 발버둥을 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한번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니 디딤발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지금이다! 쳐!"

카르나크의 신호에 맞춰 세 오러 유저가 움직였다.

세라티가 소녀를 등 뒤에서 붙잡아 고정시킨다. 그틈에 해리스가 마검에 일격을 가한다. 충격으로 인해 소녀가 검을 놓친다.

타앙!

하지만 아직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소녀와 마검 마레다 사이엔 여전히 이글거리는 검은 불길이 이어져 있다.

저 불길이 연결되어 있는 한, 소녀는 여전히 마검의 숙주였다.

트리브가 검을 머리 위로 곧게 쳐들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가공할 기세로 내리쳤다.

"타아아앗!"

랜드 스매시.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필살의 일격이 연결된 불길을 강타했다.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다.

콰아아아앙!

소녀의 몸이 물수제비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드디어 마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세라티가 재빨리 소녀를 안고 뒤로 빠졌다.

"구출했어요!"

홀로 남은 마검이 허공에서 미친 듯이 검명을 떨쳐 댔다.

웅웅웅웅웅웅!

하지만 때늦은 발악이었다.

카르나크의 사슬들이 마저 마검의 칼날을 휘감았다. 지켄이 펼친 마법의 수정 감옥에서도 빛이 내리꽂혀 놈을 짓눌렀다.

결국 검은 불길이 사그라지며 검의 울음도 그쳐 갔다.

"좋아!"

지켄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잡았다!"

#91화. 23. 피를 마시는 검 (5)

지켄은 하늘로 불꽃 마법을 쏘아 올렸다.

피이이잉! 펑!

마검 포획 작전 끝났으니 퇴근(?)한 킹스 오더들 도로 복귀하라는 신호였다.

그동안 카르나크는 마검을 마력 사슬로 휘감고 있었다. 열심히 마력을 주입하며 그가 지켄을 불렀다.

"끝났으면 여기 좀 도와주시죠."

"알았네."

수정 감옥 마법을 거둔 뒤 지켄도 마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카르나크의 사슬에 마나를 보탰다.

일단 이렇게 임시로 마검의 힘을 억눌러 놓고 메이리와 밀리아를 기다린다. 그럼 두 성직자가 신성 주문으로 확실히 마검을 봉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법사 둘이서 마검을 맡는 동안, 트리브와 해리스는 세라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는 구해 낸 잿빛 머리칼의 소녀를 땅에 눕힌 뒤 이리저리 살피는 중이었다.

"이 아이는 어쩌죠?"

세라티의 질문에 트리브가 차분히 대꾸했다.

"메이리 신관이 오면 맡겨야겠지."

그리고 안쓰러운 듯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쯧쯧, 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런 일을 당했으니...."

해리스도 안타까워하며 소녀를 살폈다.

"무사히 깨어날 수 있을까요? 몸이 많이 상했을 텐데."

그러던 중이었다.

문득 해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하네요."

"왜 그러나?"

"당연히 몸이 많이 상했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트리브도 이내 해리스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군. 이상해."

오러 유저쯤 되면 대충 보기만 해도 상대의 신체 상태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 이 잿빛 머리칼의 소녀는 전혀 몸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워낙 더러워서 때가 잔뜩 껴 있기는 한데, 신체 자체는 건강하기 그지없었다.

"마검의 지배에 의외로 몸에 좋은 효과가 있나?"

"무슨 보약도 아닌데 그럴 리가요."

황당해하며 세 사람이 소녀를 내려다볼 때였다.

소녀의 전신에서 희미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흠칫 놀라며 세라티가 털을 곤두세웠다.

'이건?'

꽤나 강렬한, 일개 평범한 소녀는 절대 지닐 수 없는 기운이었다.

놀란 트리브가 마검 마레다 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나?"

아니다. 마검과 소녀 사이엔 여전히 어떠한 연결점도 없다.

그럼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심지어 사령술 계열도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소녀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세 오러 유저가 놀란 고양이처럼 허공으로 튀었다.

"헉!"

"으억!"

"꺄악!"

무슨 살기 같은 것 때문에 놀라서가 아니다.

워낙 압도적인 감각이 덮친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나온 반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명색이 오러 유저, 심지어 청색급인 트리브마저 선불 맞은 망아지처럼 뒤로 뛰게 만들다니?

'뭐야, 대체?'

기겁한 세 사람의 눈앞에서 잿빛 머리칼의 소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평범하다. 그저 평범하게 일어나는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의 압박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작디작은 소녀의 등 뒤로 자색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가공할 파괴의 권능이 보랏빛 안개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간다.

트리브와 해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러 유저?"

"그것도 퍼플 나이트라고?"

***

고작해야 열서너 살 정도 되는 아이였다. 걸음마 시작할 때부터 무술을 익혔다 해도 간신히 기본기나 터득했을 나이란 소리다.

물론 세상엔 간혹 천재가 나온다.

하늘이 내린 재능 중엔 극히 어린 나이에 오러를 각성하는 경우도 있다.

당장 세라티도 20대 초반에 오러를 각성한 천재가 아닌가?

특히나 이 시대의 최강자들, 모든 무인의 정점이라는 4대 무왕쯤 되면 전원 10대 중반에 오러를 각성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각성했다 정도지, 저 나이에 벌써 자색급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현상은 마검 마레다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없어!'

'여전히 아무런 연결도 느껴지지 않는데?'

당황한 트리브와 해리스를 바라보며 소녀가 중얼거렸다.

"인간...."

희미한 음성을 흘리며 한 발 앞으로 내딛는다.

"구해야 해...."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해리스의 좌측으로 파고들었다.

기겁한 해리스가 몸을 틀었지만 이미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시야 사각으로 벗어나며 우측으로 이동한 것이다!

'빠, 빠르다!'

흐름을 타고 파고든다. 가녀린 손가락을 부드럽게 말아 귀엽게 주먹을 쥔다.

그리고 명치에 일격.

"꺽...."

보랏빛 파동이 해리스의 전신을 덮쳤다.

단 일격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두 무릎이 꺾였다.

"해, 해리스 경!"

당황하며 트리브는 투기검을 끌어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마검을 쥐고 있을 때보다 지금이 월등하게 강하다니?

"타앗!"

기합을 터트리며 트리브는 사력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소녀는 없었다.

"구해야 해...."

희미한 속삭임만을 남긴 채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핏물로 떡이 진 잿빛 머리칼 아래 푸른 눈동자가 빛난다. 그 상태로 가볍게 점프해 하이킥을 날린다.

퍽!

채찍처럼 감아 치는 킥이 트리브의 경추를 정확히 가격했다.

고통은 없었다. 그저 신기할 정도로 간단하게 의식이 흐려질 뿐.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쓰러지는 두 사람을 보며 세라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뭘 해 보기도 전에 둘 다 당해 버렸다. 그만큼 압도적인 움직임이었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권속...."

세라티는 당황했다. 어째 그녀만 호칭이 달랐다.

아니, 다른 건 호칭만이 아니었다.

"죽인다!"

갑자기 소녀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트리브와 해리스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가공할 펀치와 킥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피하며 세라티가 이를 갈았다.

'야! 왜 나한테만 이래?'

뭔가 억울하다! 가장 먼저 구해 준 건 오히려 그녀였는데!

그런데 웃기게도, 워낙 살기등등하니 오히려 피할 수 있었다.

트리브나 해리스는 아무런 전조가 없어 미처 방어도 못 했는데, 세라티를 상대할 땐 노골적으로 살기가 먼저 느껴지는 것이다.

진짜 자색급 오러 유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다.

물론 그래 봤자 '아주 조금' 더 버틸 뿐이지만.

"으, 으아아아!"

막 세라티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등 뒤에서 한 줄기 폭염이 날아들어 소녀를 노렸다.

재빨리 소녀가 뒤로 물러섰고, 빈자리에 폭발이 일었다.

콰아아앙!

지켄이 급하게 마법을 날려 그녀를 구한 것이었다.

"무사한가, 세라티 경?"

소녀가 공세를 멈추더니 지켄을 노려봤다.

"인간...."

또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을 내뱉는다.

"구해야 해...."

도로 살기가 사라지고, 우아한 공격이 이어진다.

문제는 저 우아한 공세가 너무나 빠르고 아무 전조도 없다는 것.

지켄이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소녀가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

당황한 지켄의 턱이 핑 하고 돌아갔다. 팔꿈치로 깎아 내듯 턱 끝을 돌린 것이었다.

뇌가 흔들리며 이내 두 다리가 풀려 인형처럼 무너져 내린다.

풀썩!

"지켄 경!"

한발 늦게 달려온 카르나크가 소녀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세라티?"

소녀가 이번엔 카르나크를 노려보았다. 또 호칭이 바뀌었다.

극심한 분노를 담아 외친다.

"...카르나크!"

'엥? 쟤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아니, 생각해 보니 뭐, 열심히 서로 불러 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단지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다음 호칭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저주스러운 사령왕!"

카르나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

***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소녀가 카르나크를 노려본다.

엉겨 붙은 잿빛 머리칼 아래 때 묻은 얼굴이 드러난다. 여태 몇 번이나 봤던 어린아이의 얼굴이다.

'누구지? 어떻게 예전의 나를 알고 있는 거지?'

모르겠다.

원체 타인에겐 관심이 없는 카르나크였다. 굳이 저 소녀가 아니더라도, 타인의 인상착의 따윈 잘 외우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낯익은 느낌도 들고....'

소녀의 어깨 위로 또다시 자색의 오러가 피어올랐다.

"으아아아아!"

괴성을 터트리며 몸을 날린다.

가볍게 수도를 내리칠 뿐인데 가공할 기세가 뒤따른다.

쿠쿠쿠쿵!

보랏빛 오러의 칼날이 카르나크를 쪼갤 듯 날아들었다. 세라티가 다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카르나크 님!"

투기검으로 튕겨 내려 했지만 위력 차이가 극심했다. 단방에 뒤로 튕겨 나갔다.

"컥!"

나가떨어지면서도 그녀는 어이없어했다.

'뭐, 뭔 위력이 이리....'

이쪽은 칼날에 오러 씌우고 전력으로 휘두르는데, 저쪽은 그냥 맨손으로 슥 오러 뿌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뭉개 버린단 말인가? 얼마나 차이가 심하기에?

세라티를 치운 소녀가 손날로 카르나크의 머리통을 노렸다. 다급해진 카르나크가 사령술을 펼쳤다.

"그림자여, 날 지켜라!"

혼돈마법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미 뼛속까지 익숙해진, 졸면서도 펼칠 수 있는 사령술이어야 이 타이밍에서도 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자색 오러와 어둠의 장막이 충돌하며 폭음이 인다.

콰앙!

일격에 장막이 찢어지며 카르나크도 뒤로 날려갔다.

"케엑!"

이대로라면 허무하게 목 잘릴 상황이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질 때였다.

멀리서 10여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휘익! 휘이익!

카르나크를 쫓아가던 소녀가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오러가 피어오르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공중에서 박살 내 버렸다.

펑! 퍼퍼펑! 펑!

간신히 살아남은 카르나크의 눈에, 분지 저편에서 한 무리의 병력이 맹렬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련님!"

"카르나크 경!"

"대장님!"

바로스를 위시한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였다. 지켄의 신호를 받은 이들이 이제야 복귀한 것이었다.

쓰러진 카르나크를 보며 밀리아가 소리쳤다.

"조심해요! 상대가 사령술을 펼치고 있어요!"

멀리서 봤을 뿐인지라 그가 펼친 그림자 방어막을 상대가 날린 공격으로 착각한 것이다.

카르나크로서는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딱 걸릴 뻔했다.

달려온 킹스 오더 대원들이 소녀를 포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켄 대장?"

"트리브 경도...."

쓰러진 이들을 살펴본 바로스가 상황을 파악하며 말했다.

"작전 실패로군요. 그럼 마검 마레다는...."

그리고 깨달았다. 아직 상황 파악 제대로 못 했다는 것을.

소녀의 양손이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어라? 마검은?"

저 멀리 땅바닥에 거대한 양수검이 마법 사슬에 꽁꽁 묶여 짓눌려 있는 것이 보인다.

대원들이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마검 저기 있는데?"

"그럼 저 소녀는 왜?"

총체적인 몰이해의 현장이었다.

대체 작전을 성공한 건가, 실패한 건가?

그동안 소녀는 주위의 킹스 오더 대원들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다.

더 이상 카르나크와 세라티를 쫓지 않는다. 오히려 킹스 오더 대원들을 우선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인간...."

또다시 음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구해야 해...."

#92화. 24. Karma girl

잿빛 머리칼의 소녀가 걸음을 옮긴다.

차분한 눈빛, 앙다문 입술로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눈앞까지 다가온다.

'어?'

순간 킹스 오더 대원은 반응하지 못했다.

너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살의도 적의도, 하다못해 사소하게 인상을 쓰는 전조조차 없었다.

퍽!

갑자기 섬광이 번뜩였다. 희미한 비명과 함께 대원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끄, 끄어...."

순간적으로 간격을 좁히며 올려 차는 프론트킥이 턱을 정확히 가격한 것이다.

거기에 오러까지 깃들어 있으니 단련된 전사가 한 방에 혼절해 버렸다.

한 박자 늦게 다른 대원들이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뭐야?"

"왜 우리가 정신을 놓고 있었지?"

좌우로 참격이 날아온다. 몸을 틀며 소녀가 양손을 든다.

타탁!

그다지 빠르지도 않았는데 타이밍이 워낙 정확해 칼날이 좌우 손가락에 붙잡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직한 목소리.

"인간...."

칼날이 붙잡힌 대원들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엑?'

'이게 실제로 되는 거야?'

영웅담에서야 손가락으로 날아오는 칼날 잡는 고수가 흔히 나올지 몰라도, 이걸 현실에서 저지르는 인간은 난생처음 봤다!

"구해야 해...."

옅은 읊조림을 남기며 소녀가 양팔을 털었다.

보랏빛 오러의 파동이 칼날을 타고 흘러 두 대원을 강타했다.

"컥!"

"아악!"

또 동료 2명이 혼절해 바닥에 나뒹군다.

킹스 오더는 혼란에 빠졌다.

아까부터 구한다면서 왜 자꾸 사람을 패는 건지 모르겠는데, 애가 세도 너무 세다!

"다들 조심해! 마검이 전부가 아니었어!"

"젠장! 왜 맨손일 때가 더 괴물인 거야?"

한편 세라티는 카르나크를 호위하고 있었다.

말이 호위지, 실은 남들 싸울 때 뒤에서 몸 사리고 있었단 소리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까의 그 가공할 살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소녀의 공격에 살의가 없다는 점이 양심의 가책을 덜해 줄 뿐이었다.

'그런데 진짜 나 상대할 때랑은 대접이 완전히 다르네?'

세라티를 상대할 땐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듯 분노와 살의를 펑펑 터트리더니, 다른 킹스 오더 대원들은 착실하게 기절만 시키고 있다.

그냥 손속에 사정을 둔다 정도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 있을 때에도, 혹여 크게 다칠 것 같으면 일부러 자세를 바꾸며 물러난다.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반드시 후유증이 남지 않는 공격만을 행한다.

아주 작정하고, 다치지 않게끔 쓰러뜨리는 것이다.

동료들끼리 대련을 해도 저렇게까지 상대의 안전을 신경 쓰진 못할 것 같았다.

카르나크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적어도 한 가지는 알겠군.]

[뭐가요?]

[어떻게 그렇게나 강력한 마검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 말이야.]

마검이 강한 게 아니다. 검 자체는 그냥 평범한 마물이다.

단지 저 여자애가 너무 센 거다!

[마검은 그냥 정기만 보탰고,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한 건 저 소녀 본인의 실력이었어.]

오히려 마검을 쥐고 있어서 그동안 약했다고 봐야 한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 나이에 저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세라티가 카르나크를 닦달했다.

[잘 좀 생각해 보세요.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왜 꼭 내가 범인일 거라 생각하는 건데?]

[이 상황에서 사령왕 찾는 애가 그럼 아무 상관도 없겠어요?]

[우연일 수도 있지!]

그동안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접근만 하면 곱게 기절해 버리니 함부로 덤빌 수가 없는 것이다.

킹스 오더가 머뭇거리자 소녀도 딱히 추가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바로스가 슬금슬금 가까이 갔다.

'와, 진짜 세네. 그런데 묘하게 낯이 익은 느낌이....'

그때였다.

그를 본 소녀의 얼굴이 급변했다.

두 눈에 불길이 일렁이며 전신에 보랏빛 오러가 크게 타오른다!

"로드 바로스!"

"엥?"

바로스는 당황했다.

바로스 경이 아니라 로드 바로스라고?

그가 저런 칭호로 불린 건 현 시간대가 아니다.

소녀의 날카로운 외침이 흡사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죽어!"

소녀가 몸을 날려 바로스를 덮쳤다.

세라티를 상대할 때와 같았다. 노골적인 살기, 극도의 분노가 무자비한 오러의 폭격이 되어 쏟아졌다.

"으, 으아아악!"

살기가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보니 궤도를 예측하기 쉽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바로스가 바닥까지 구르며 정신없이 피하기 시작했다.

다른 킹스 오더 대원들이 허겁지겁 원호에 나섰다.

"헉!"

"갑자기 돌변했어?"

"바로스 경!"

그 모습을 지켜본 세라티와 카르나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확정이네요.]

[응, 내가 범인이네.]

이쯤 되니 더 이상 부인할 수가 없다.

카르나크를 사령왕이라 부르는 데다가, 왕년의 데스 나이트 로드를 콕 짚어 증오를 불태우고 있는데 이게 우연일 리가 있나?

간신히 도망친 바로스가 자세를 고치며 혀를 내둘렀다.

"헉헉, 큰일 날 뻔했네."

슬금슬금 뒤로 빠지고 그 자리를 다른 대원들이 차지한다.

그 모습을 바라본 소녀는 잠시 고민했다.

맨손으로 싸우려니 자꾸 '목표'가 도망친다.

좀 더 예리한 공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쓰러진 킹스 오더 대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원이 놓친 장검 한 자루가 저절로 떠올라 소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 상태로 양손을 늘어뜨린다.

우우웅!

청색의 오러가 오른손의 장검을 타고 피어올랐다. 동시에 왼손이 붉은 투기로 물들었다.

어깨 너머로는 여전히 보랏빛 오러가 안개처럼 피어난다.

대원들이 눈을 껌벅였다.

"저게 뭐야?"

"저게 왜 돼?"

자색 오러를 바탕으로, 적색 오러와 청색 오러를 동시에 펼친 것이다.

오러의 수위와 속성마저 자유자재로 바꾸는 초월적인 경지였다.

"저건 단장님도 못하시지 않아?"

"최소한 은검기를 다루는 경지는 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었어?"

바로스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저게 뭡니까, 도련님? 이 시대에, 저 나이에 저게 가능한 검사가 있었어요?]

세라티가 물었다.

[저거 힘든 거였어요?]

예전에 그녀의 몸을 차지했던 바로스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여 줬다.

그가 워낙 쉽게 하기에 그냥 경지 좀 높아지면 다들 하는 건 줄 알았지.

바로스가 발끈하며 대꾸했다.

[당연히 힘들죠! 나쯤 되니까 하는 거거든요!]

카르나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즉, 저 아이는 바로스 수준의 오러 운용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지?]

이 시대로 돌아와 힘을 다 잃어서 그렇지, 왕년의 바로스는 4대 무왕 중 셋을 처리한 지상 최강의 검사였다.

'확실히 아까부터 익숙한 느낌이긴 한데....'

바로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술이 익숙한 건 아니다. 무술 자체는 굉장히 보편적인, 유파를 특정 지을 수 없을 정도의 기본기만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흐름 속에 깃든 무의 기풍은 틀림없이 접한 바 있다.

'어디에서 봤지, 내가 저걸?'

카르나크도 다른 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무술 같은 건 모르겠다. 어차피 그쪽은 전공도 아니다.

하지만 오러에서 느껴지는 영혼의 파장은 알 수 있다.

'이상하네. 분명 초면인데 왜 기시감이...?'

그때였다.

소녀가 시선을 돌렸다.

"로드 바로스...."

그러더니 돌연 불같은 고함을 토한다.

"저주스러운 사령왕의 개!"

킹스 오더 대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입장에선 정말 뜬금포도 이런 뜬금포가 없었다.

"...?"

"...?"

하지만 카르나크와 바로스에겐 뇌리 저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외침이었다.

"켁!"

"옴마야!"

둘 다 깨달은 것이다, 이 익숙함이 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크, 큰일 났다!"

갑자기 카르나크가 지팡이 끝을 휘저으며 사색이 되어 외쳤다.

"작렬하라, 섬광의 빛이여!"

10여 개의 마탄이 빛을 뿜으며 허공을 가른다.

소녀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마탄을 노려보며 전신에 오러 실드를 드리웠을 뿐.

콰콰콰콰쾅!

작렬의 마탄이 그녀를 두들기며 연달아 폭음을 울렸다.

하지만 피해를 주진 못했다. 소녀는 굳건한 산악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모든 공세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 틈에 카르나크가 몸을 휙 돌렸다.

"바로스! 세라티!"

어차피 한 발 맞히나 열 발 맞히나 소녀의 오러 방어를 뚫을 순 없다. 그건 안다.

하지만 열 발인 경우가 좋은 점도 있었다.

흙먼지도 10배가 넘게 피어오르거든!

"도망쳐!"

소녀의 시야를 가린 뒤 카르나크는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괴상한 신음을 던지며 바로스도 그 뒤를 따랐다.

"으히이익!"

상황이 이래서야 세라티도 저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

둘을 쫓아가며 그녀가 황당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둘 다? 정말 아는 사람이에요?"

항상 제 잘난 맛에 살던 두 사람이 이렇게 사색이 되는 건 처음 봤다. 심지어 은밀한 마법 전언을 쓸 여유조차 없다니?

"라피셀이야!"

카르나크가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시프라스의 무왕! 라피셀 크로테움!"

***

킹스 오더 1대대 대원들은 당혹하고 있었다.

'또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1대대 지휘관인 지켄과 트리브, 해리스가 전부 쓰러졌다. 그러니 이제 킹스 오더를 지휘할 이는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밖에 없다.

그런데 그 중요한 지휘관들이, 부하들 죄다 버리고 대뜸 도망을 쳐 버렸다?

'우리도 도망쳐야 하나?'

'쓰러진 동료들을 버릴 순 없잖아!'

당연히 1대대 전원이 허둥대고 있는데, 의외로 7대대는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저 양반, 또 뭔가 속셈이 있나 본데요?"

"에휴, 항상 저런 식이지."

"그러게 미리 상의 좀 하면 덧나나?"

다들 익숙하다는 듯 소녀를 포위하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대장에게 버림받았는데도 배신감 따위 전혀 느끼지 않는 표정들이다.

카르나크가 평소 비겁한 인간이었다면 다들 경멸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의외로 그는 대원들 사이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일단 부하들의 생명을 아껴, 험지로 몰아넣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실은 부하들이 없는 쪽이 사령술 쓰기 편해서 일부러 떨어트려 놓는 것이지만.)

전공을 탐내 무리한 임무를 떠넘기지도 않았다. (대대 전체의 전공보다는 본인이 직접 사교도 붙잡아 정보 캐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특히 대원들의 술과 밥을 챙기는 데는 '매우' 진심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식사만큼은 영혼이라도 걸린 것처럼 철저하게 굴었던 것이다.

자고로 몸으로 일하는 이들에겐 밥 잘 챙겨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법이다.

원래도 좋은 상관이었고, 평소에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일이 흔했으며, 뜬금없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워낙 많았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도주 정도야 당황할 일도 아니지.

"카르나크 대장이 뭔가 작전이 있나 보군!"

"그럼 맞춰 줘야지!"

7대대가 열심히 몸을 던져 소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덕분에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는 무사히 협곡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호흡을 고르며 카르나크가 치를 떨었다.

"세상에, 진짜 라피셀이잖아?"

바로스도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라피셀이 여기 있는 겁니까, 도련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세라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도대체 라피셀이 누구예요?"

#93화. 24. Karma girl (2)

4대 무왕의 홍일점, 라피셀 크로테움.

사상 최연소로 무왕의 칭호를 얻은 자이자, 온 세상이 사령왕의 공포에 굴복해 버린 후에도 끝까지 맞서 싸웠던 위대한 인류의 영웅!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어이없다는 듯 세라티를 타박했다.

"왜 몰라?"

"4대 무왕이잖아요?"

여전히 세라티는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4대 무왕 중에 라피셀이란 이름은 없는데요?"

크로테움이라는 성은 익숙하다.

벨티아 크로테움, 시프라스 출신의 여검사로 현 4대 무왕 중 1인이자 홍일점이기도 한 절대 강자다.

하지만 그녀는 올해로 마흔이 넘은 성숙한 여인이었다. 저런 소녀가 아니었다.

"아, 그렇지...."

뒤늦게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정신을 차렸다.

잠깐 헷갈렸는데, 생각해 보니 세라티가 라피셀을 알 리 없었다.

"이 시기엔 아직 라피셀이 무왕이 아니지?"

"그보단 미래의 4대 무왕 중 대부분이 이 시기엔 아직 무왕이 아니죠."

레번 스트라우스는 아버지인 무왕 갤러드 스트라우스의 후계자로 활동하고 있다.

말리칸 툰은 동부의 은거지에서 수행 중이니 아직 무왕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드렐타인 텔릭스는 현역이겠네요. 그 양반은 이 시대에도 무왕일 테니."

다만 두 사람이 기억하는 60을 넘긴 나이의 원숙한 노검사가 아니라, 갓 무왕이 된 한창 젊고 팔팔한 30대 검사다.

그리고 라피셀 크로테움은....

"아직 벨티아가 제자로 들이기도 전이겠구나, 지금 시기라면."

벨티아의 제자가 되어 크로테움이란 성을 받고도 무려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무왕의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세라티가 킹스 오더와 대치 중인 잿빛 머리 소녀를 힐끔 보았다.

"그러니까 저 아이가 미래의 무왕이란 의미인가요?"

"응."

"그럼 대체...."

여전히 소녀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킹스 오더를 하나하나 기절시키고 있었다.

검을 들었음에도 베지 않는다. 오러를 뭉툭하게 뭉쳐 칼날이 아닌 몽둥이로 후려갈긴다.

카르나크 일행을 대할 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저 미래의 무왕에게 무슨 짓을 하셨기에,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구는 거예요?"

갑자기 카르나크가 머쓱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 그게...."

한숨을 쉬며 바로스가 대신 대꾸했다.

"...철천지원수가 맞으니까 그렇죠."

***

카르나크가 본격적으로 사령왕으로서 악명을 떨치며 세상을 한창 뒤엎을 때의 일이었다.

이미 인류는 그의 언데드 군세 앞에 대부분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3인의 대마법사와 4대 무왕 중 대부분이 사령왕의 방대한 권능과 그 저주받을 심복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그럼에도 라피셀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 아무리 좌절이 닥쳐도 다시 일어나며 꿋꿋이 어둠에 대항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실로 인류의 등불이나 다름없었다.

사령왕 입장에선 매우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네크로피아 제국을 괴롭히는 라피셀의 활약에 결국 카르나크가 직접 나섰다.

"뭘 어쩌셨는데요?"

"원래는 은거한 벨티아를 붙잡아 인질로 쓰려고 했어."

그런데 인질극이 통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스승의 목숨조차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하고 계속 사령왕에게 대적한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정의를,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벨티아를 언데드로 만든 다음 라피셀 잡아 오라고 시켰거든?"

순간 세라티는 입을 쩍 벌렸다.

"네에?"

그러니까, 부모나 다름없는 유일한 스승을 언데드로 만든 다음,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고?

"기껏 붙잡았는데 써먹긴 해야 할 것 아냐? 벨티아도 뭐, 전성기는 지났지만 아직 쓸 만했고...."

"강아지 아기."

"응?"

"아뇨, 아무것도."

어쨌거나 듣고 보니 철천지원수 되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바로스가 슥 끼어들었다.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저게 끝이 아니라고요?"

벨티아를 벤 뒤 라피셀은 더더욱 분노에 불타 카르나크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아스트라 슈나프로 변모한 카르나크의 힘까지 감당할 순 없었다.

결국 몰려오는 언데드 대군 앞에 검이 꺾였다.

생포한 라피셀에게 카르나크는 실로 끔찍한 처벌을 내렸다.

뼈는 발라서 스켈레톤 병사로 부리고, 살점은 뜯어내 플레시 골렘으로 만들고, 영혼은 분리해 리밍 아머에 봉인한다.

-감히 내게 대항한 시건방진 여자여,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지옥 속에서 억겁에 걸쳐 고통받게 해 주마!

"...라시면서 말이죠."

바로스의 말에 세라티는 카르나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퀴벌레가 나타나도 이보단 호의적일 듯한 눈빛이었다.

"와, 악마도 울고 가겠네요...."

"실제로 내가 울린 악마가 많긴 해. 세라티 너도 봤잖아. 마즈눈, 그놈도 울면서 소멸했...."

"말 돌리지 마시고요."

"응, 미안."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카르나크도 자신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옹호할 생각 따윈 절대 들지 않지만.

한숨을 쉬며 세라티가 중얼거렸다.

"왜 카르나크 님을 보자마자 비명 지르고 도망갔는지 이해가 가네요."

자신도 전생 때 그런 꼴을 당했으면 보자마자 기겁하고 도주할 것 같았다.

바로스와 자신만 미친 듯이 죽이려 날뛴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 놈은 사령왕의 심복이고 다른 하나는 권속이니까.

그때 세라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전생?'

말하다 보니 깨달은 점이 있다.

"저 소녀가 미래의 무왕이라고요?"

미래에 '무왕이 되는 소녀'가 아니다. 미래의 무왕 그 자체다.

그래야 카르나크를 보고 분노와 증오를 터트리는 게 앞뒤가 맞다.

"맞아."

카르나크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미래의 라피셀이야. 우리처럼 영혼이 시공을 거슬러 왔어."

저 소녀의 영혼이 미래에서 왔다는 건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바로 알았다.

아무리 미래의 무왕이라도 현재는 열서너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 심지어 스승인 벨티아를 만나기도 전이다. 저런 힘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도저히 모르겠는 건 이쪽이었다.

"어떻게 쟤가 우릴 따라 이 시간대로 온 거지?"

***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는 여전히 소녀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7대대는 카르나크를 믿고 열심히 몸을 던지고....

'아이고, 죽겠네.'

'카르나크 대장은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1대대는 미심쩍은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그래도 싸운다.

'작전 짜고 있는 거 맞긴 한가?'

'그냥 도망간 거 아냐?'

그럼에도 후퇴하거나 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슬슬 눈치챈 것이다. 저 소녀에겐 처맞고 쓰러져도 된다는 것을.

쓰러진 이들의 자태가 참으로 곱다. 심각한 부상은 고사하고 멍든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철저하게 안전제일주의로 싸우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이라면 우리도 안심하고 덤빌 수 있지!'

사실 이렇게까지 안심할 일은 아니다.

외상이 없다 해서 안전하게 쓰러졌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겉으론 멀쩡해도 속으론 척추 두 동강 나서 전신불수 된 것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 사실은 일부러 외면했다.

거기까지 생각해 봐야 현 상황에서 도움 될 것도 없고.

투지를 높이며 7대대는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일단 막아!"

"어차피 우린 쓰러져도 괜찮아!"

"시간을 벌면 카르나크 대장이 어떻게든 해 줄 거다!"

이 깊은 신뢰와 아름다운 동료애에 대한 카르나크의 보답은 이것이었다.

"다른 애들 사냥당하고 있으니까, 이 틈에 거리를 좀 더 벌리자."

전황을 지켜보며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슬금슬금 뒤로 내뺐다.

기가 막혀 세라티가 따졌다.

"동료들을 미끼로 쓰겠다는 건가요?"

"쟤들은 괜찮아. 안 죽는다니까."

바로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불구가 되거나 하지도 않을 겁니다. 라피셀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옳지 못한 일은 하지 않는, 설령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져도 결코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지 않는, 인류의 희망.

비록 적이긴 했지만 둘 다 라피셀이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라티는 더더욱 어이없어하며 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그런 대단한 영웅에게 인륜을 저버린 짓을 시키고 영혼을 갈가리 찢어 고문했단 말이지?'

자신이 왜 이딴 놈들 밑에 있는 건지 심각한 회의가 든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왜 저한테도 그렇게 증오를 불태우는 거죠, 그럼?"

카르나크? 누가 봐도 맞아 죽어 싼 짓을 했다.

바로스? 역시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라티 자신은 라피셀에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카르나크가 눈을 흘겼다.

"추악한 사령술사에게 영혼 팔아 목숨 부지한 비겁한 인간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

시무룩해진 세라티를 뒤로한 채 카르나크 일행은 계속 협곡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적당히 으슥한 바위 하나를 찾아 몸을 숨겼다.

"혼돈의 장막이여, 내 위에 드리워 내 적의 눈을 속여라...."

6서클의 은신 마법이 일행 주위로 펼쳐졌다.

환영을 펼쳐 적의 시야에서 모습을 숨기고, 기척이나 냄새마저 감추는 인비저빌리티의 상위 마법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카르나크도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쟤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는 나중에 고민하고...."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저걸 어떻게 잡는다?"

전투 중인 라피셀을 살피며 바로스가 대꾸했다.

"여전히 전투 감각 하나는 끝내주는구만요. 예전에도 저랬는데."

"그러게. 아우, 상대하기 싫다."

치를 떠는 둘을 보며 세라티가 물었다.

"대체 얼마나 강했기에 그래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동시에 대답했다.

"4대 무왕 중에서도 최강이었어."

"무왕이니 당연히 강했죠. 4대 무왕 중에선 제일 약했지만."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서로 말이 달라요?"

***

혈통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은 다른 무왕들.

그에 비해 라피셀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지도 못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가난한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힘겹게 자라다, 도적을 만나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니까.

벨티아에게 거두어지기 전까진 무술 수련은 고사하고 매일 입에 풀칠하기도 벅찬 삶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저런 상황인데도 당대의 무왕이 척 보자마자 홀딱 반해 수제자로 삼았다는 소리다.

"재능 하나는 진짜 압도적이었죠."

물론 그것만으로 다른 무왕들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무왕쯤 되는 인간들치고 천재 아닌 놈 없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모자람 없는 지원을 받고, 본인도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을 하며, 심지어 행운도 좀 더해 줘야 겨우 오를 수 있는 위치가 무왕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라피셀은 4대 무왕 중 최약체였다.

"대신, 요령이 좋아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이 빨랐지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적을 상대로는 제일 강했다.

어떤 기상천외한 술법을 만나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곤 했다.

즉, 무인인 바로스 입장에선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편.

반면 사령술사였던 카르나크에겐 4대 무왕 중 제일 까다로운 케이스였다.

"아, 진짜 귀찮았지."

투덜대며 카르나크는 바위 너머를 힐끔거렸다.

"다행히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놀란 세라티가 물었다.

"저게 예전만 못한 거예요?"

"당연하지. 고작 저 정도로 무왕 소리 들었을 리가 없잖아."

"그럼요. 하늘도 여전히 파랗고 땅도 안 갈라지는데? 지금이야 단련도 안 된 어린 몸에 갇혀서 저 모양인 거죠."

바로스의 말에 세라티는 멍한 얼굴을 했다.

즉, 전성기의 라피셀이 싸우면 하늘 색이 변하고 땅이 갈라졌단 소리?

무왕이란 족속들은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물리쳤다는 바로스는 도대체?

"그럼 바로스 경과 저 아이는 뭐가 달라요?"

"응? 뭐가?"

둘 다 말도 안 되는 괴물이었다가 몰락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몰락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오러도 각성 못해서 빌빌대는 바로스와 달리, 저 아이는 무려 자색급의 오러를 펑펑 날리고 있지 않은가?

"왕년에는 동급이었다면서 어째 지금은 너무 차이가 커서...."

"에이, 상황이 다르지. 바로스와 쟤는...."

그렇게 막 대꾸하던 중이었다.

"아!"

그녀의 질문 덕에 뭔가 떠올랐다.

카르나크가 눈을 빛냈다.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잖아?"

#94화. 24. Karma girl (3)

여전히 라피셀은 차분하게 킹스 오더를 상대하고 있었다.

칼날에 뭉툭한 오러를 덧씌워 몽둥이처럼 만든 뒤 딱 필요한 만큼만 두들겨 기절시킨다. 이쯤 되면 기절이라기보단 마취에 가까운 솜씨다.

마침내 1대대와 7대대 절반 이상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 남은 이는 10명 남짓.

'젠장....'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야?'

'카르나크 대장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무리 상대에게 살의가 없다 해도 이 정도로 실력 차가 극심한데 계속 덤벼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버텼다는 게 킹스 오더가 얼마나 정예인지 증명한 셈이다.

대원들이 하나둘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은 슬그머니 포위망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대단히 노골적인 의미였다.

'자, 우리는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카르나크 대장에게 가라!'

그런데 소녀, 라피셀의 반응이 바뀌었다.

"인간들...."

쓰러진 이들과 서 있는 이들을 번갈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구해야 해...."

그러더니 물러선 이들을 노리면서 몸을 날린다.

대원들이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대장 잡으러 안 가?"

덤비는 상대에게 수동적으로 반격만 하던 소녀가 능동적으로 킹스 오더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자비로운, 그러나 맞는 입장에선 무자비 그 자체인 오러 몽둥이 폭풍이 남은 대원들마저 덮쳐 갔다.

"컥!"

"이, 이런!"

다들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심지어 도망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

인간의 심리는 어느 정도 관성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다.

도주해선 안 된다는 무의식이 먼저 자리 잡고 있으니 바로 태세 전환이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최후의 1명마저 라피셀의 일격에 정신을 잃었다.

"으어어...."

이걸로 이 자리의 킹스 오더 전원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

라피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간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구했어...."

쓰러진 이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녀에겐 만족스러운 결과인 듯했다.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제 진짜 목표를 찾을 차례.

라피셀의 두 눈에서 자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협곡 저편을 노려보며 그녀가 으르렁대듯 외쳤다.

"...사령왕!"

***

협곡 근처의 거대한 바위 틈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카르나크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전부 쓰러졌나?'

저 멀리 잿빛 머리칼의 소녀가 걸음을 옮기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쓰러진 동료들을 살피며 세라티가 물었다.

[다들 괜찮을까요?]

겉보기엔 너무 멀쩡해서 그냥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쉽게 깨어날 수준도 아니었다. 족히 반나절은 의식을 되찾지 못할 듯 보였다.

[괜찮아. 별문제 없을 거야.]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예전부터 라피셀은 인간들 기절시킨 경험이 많았거든.]

덕분에 후유증 없이 쓰러뜨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왜 그런 경험이 많은 건데요?]

[어, 그게, 저....]

또 시선을 피하는 카르나크를 보며 그녀는 해답을 깨달았다.

왜긴 왜겠어?

이 극악무도한 사령왕이란 놈이 워낙 죄 없는 사람들을 자주 정신 지배해서 조종하곤 했으니까 그랬겠지.

'에휴....'

세라티가 한심해하는 와중에도 라피셀은 계속 분지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카르나크...."

음산한 목소리로, 분노를 담아 흐느끼듯 이름을 부른다.

"카르나크...."

어깨를 움츠리며 카르나크와 세라티는 더더욱 바위 그림자로 몸을 숨겼다.

[이쪽으로 오는데요?]

[움직이지 마. 들킬라.]

지금이야 은신 마법 덕분에 자신들을 못 찾고 있지만, 그녀의 예리한 감각이라면 움직이는 순간 위치를 파악할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 바로스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라피셀이 발길을 돌렸다.

그러더니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분지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다?

'엥?'

카르나크는 당황했다.

'어라? 쟤 어디 가?'

적이 알아서 멀어져 주는 건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방향이 문제였다.

저쪽으로 가 버리면 은신 마법 걸고 몰래 이동 중인 바로스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 그녀의 예리한 감각이라면 은신 마법을 걸어도 움직이는 순간 감지당할 것이다.

지금이야 거리가 멀어 알아채지 못하고 있지만, 가까워지면 바로스가 아무리 은밀히 이동해도 결국 위치를 파악당할 터.

바로스를 잃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승산마저 사라져 버린다.

도로 그녀의 시선을 이쪽으로 끌고 와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목숨 거는 수밖에!'

두 사람이 바위 틈새 밖으로 뛰쳐나갔다.

붉은 투기검을 끌어내 겨누며 세라티가 날카로운 고함을 터트렸다!

"이쪽이다!"

라피셀이 고개를 돌렸다.

"아?"

눈가를 가늘게 뜨며 그녀가 꽃같이 화사한 미소를 피웠다.

"...찾았다."

***

잿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발한다.

라피셀의 오른손에 쥐인 투기검이 변화했다.

우우우웅!

잔잔한 청색이던 오러가 이글거리는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뭉툭했던 형상 역시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 칼날이 되었다.

두들겨 패서 기절시킬 생각 따위 전혀 없다, 확실하게 썰어 죽이겠다는 의사 표현이 매우 노골적이다.

세라티가 살짝 울상을 지었다.

'역시 저렇게 나오는구나....'

다행히 라피셀의 시선은 오직 카르나크에게만 꽂혀 있었다.

'하찮은 권속' 따위는 논외인 모양이었다.

"사령왕!"

오러를 폭발시키며 그녀가 몸을 날렸다.

"죽인다!"

동시에 카르나크가 혼돈마법을 발동했다.

"일어나라, 대지의 혼이여!"

사방에서 무수한 흙더미가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일제히 거대한 흙거인으로 변했다.

무려 20기나 되는 골렘을 소환한 뒤 시동어를 외친다.

"명에 따라 내 적을 쳐라!"

골렘들이 라피셀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허공에서 몸을 틀며 그녀가 자색 검광을 흩뿌려 댔다.

"타아아앗!"

오러의 칼날이 골렘들 사이를 무자비하게 수놓았다.

빛이 스칠 때마다 바위가 숭덩숭덩 뭉텅이로 잘려 나간다.

매끄러운 단면을 드러낸 바위 조각들이 바닥에 처박히며 굉음을 낸다.

쿵! 쿵! 쿠쿵!

달군 나이프로 버터를 잘라도 저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가차 없이 썰리는 골렘 무리를 보며 세라티가 다급히 외쳤다.

"안 통하는데요?"

"통하라고 한 짓 아냐!"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용이었다.

전신의 혼돈마력을 모조리 털어 소환한 골렘이 무려 20기.

아무리 라피셀이라도 저걸 다 부수는 데는 꽤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5초쯤 벌었나?

"...무슨 의미가 있어요?"

"있지! 사령술 쓸 시간을 벌었잖아!"

현재 카르나크 일행의 실력으로 라피셀을 쓰러뜨리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카르나크보다 상위의 마법사인 지켄, 세라티보다 상위의 오러 유저인 트리브가 맥도 못 추고 허망하게 당하지 않았나?

마법과 오러로는 절대 맞서 싸울 수 없다.

믿을 건 그저 사령술뿐!

전신의 혼돈마력을 탈탈 턴 카르나크가 곧바로 짙은 어둠을 전신에 드리웠다.

"오라, 나의 종들이여! 죽은 자의 왕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부리노라!"

칠흑의 악령이 어둠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악령들이 허공에서 춤추며 사악한 파동을 뿌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악!

분지를 메운 악령들을 바라보며 세라티가 안색을 굳혔다.

"사령술 써도 괜찮은 거예요?"

"안 들키면 장땡이야!"

이래서 일부러 다른 킹스 오더들이 전부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보는 눈이 없어야 안심하고 사령술을 쓸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도로 깨어나면 사방에 남은 어둠의 흔적을 보고 의아해하겠지만, 그건 라피셀의 짓이라 우기면 된다.

지휘하듯 손끝을 움직이며 카르나크가 명을 내렸다.

"가라, 심연의 부름을 받은 자여. 고통으로 빛과 맞서라...."

악령들이 연달아 라피셀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캬아아아아!

이젠 카르나크도 어둠의 힘을 꽤나 회복한 후였다.

작정하고 사령술을 펼치니 라피셀도 아까처럼 쉽게 처리하지는 못했다.

"사령왕...."

물론 어디까지나 골렘보다 좀 상황이 나을 뿐이지, 결과적으로 시간 벌이일 뿐이라는 데는 차이가 없었다.

"...죽인다!"

밀려오는 악령들을 향해 라피셀이 또다시 무자비한 참격을 퍼부어 댔다. 악령들이 급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 카르나크가 다른 사령술을 준비했다.

"권속이여, 그대를 지음하노라!"

세라티의 발치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라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기괴한 형태의 풀 플레이트 아머로 변했다.

그녀가 놀라 물었다.

"이건?"

"게헤나에서 소환한 블러드 데몬의 갑주다! 이젠 좀 붙어 볼 만할 거야!"

세라티는 내심 당황했다.

말인즉슨, 사악한 지옥의 힘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는 소리가 아닌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끔찍하게 불쾌한 기분을 느껴야 정상이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편해?'

이렇게 안락한 갑옷은 난생처음 걸쳐 보는 듯하다.

'내 영혼, 대체 얼마나 타락한 거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상황이 그리 느긋하지는 않다.

진홍빛 갑주를 걸친 채 세라티가 몸을 날렸다.

"에잇!"

확실히 갑주의 능력이 좋긴 좋았다.

단숨에 그녀가 라피셀의 등 뒤를 잡았다. 신체 능력이 놀랍도록 향상된 것이다.

라피셀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옥의 권속!"

아까까진 '하찮은' 권속이었으니 무시하고 카르나크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령왕의 기운을 듬뿍 머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악한 존재부터 먼저 처리해야 한다.

"죽인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세라티의 정수리에 꽂혔다.

정말이지, 뱀 앞에 선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으아아....'

그럼에도 몸이 움직인다.

"누, 누가 죽어 준대?"

붉은 투기검이 화려한 궤적을 그렸다.

붉은 빛과 보라 빛이 허공에 연신 충돌했다.

쾅! 콰쾅!

놀랍게도 세라티는 무려 세 차례나 라피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적색급과 자색급의 격차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어, 이젠 좀 되는 것 같은데?'

...라고 잠시 착각했을 때였다.

"흥!"

콧방귀를 뀌며 라피셀이 투기검을 길게 올려 쳤다.

황급히 세라티가 몸을 틀어 공세를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보랏빛 오러가 갑주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콰아아앙!

그녀의 전신이 마차에 치인 어린아이처럼 수십 미터나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마치 물수제비처럼 땅 위를 통통 튕긴다.

"커, 커어억!"

이제까진 전혀 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 보는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검을 섞었을 뿐이다. 뛰어난 무인들이 흔하게 보이는 습관이기도 하다.

"으, 으으으...."

신음하며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 지옥의 갑주는 신체 능력뿐 아니라 방어력도 무시무시하게 올려 주는 물건이었다. 덕분에 아직 움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결과가 뻔하겠지.

치를 떨며 세라티는 분지 저편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대체 바로스 경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

어둠이 짙게 깔린 분지 서쪽.

바로스는 야음을 틈타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계속 등 뒤를 살핀다.

'저쪽은 난리 났구만.'

밤하늘 너머로 온갖 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카르나크와 세라티가 라피셀과 한창 전투를 벌이는 광경이었다.

'서둘러야 하는데....'

하지만 이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순 없다. 그랬다간 카르나크가 걸어 준 은신 마법이 깨진다.

아무리 답답해도, 일정 속도를 유지한 채 냉정하게 걸음을 옮길 수밖에.

마침내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들풀 사이로 기절해 쓰러진 지켄과 트리브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저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아니다.

'미안하지만 댁들은 좀 나중에 구해야겠수다.'

바로스는 목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들 사이에 놓인, 마법의 사슬에 의해 억눌려 있는 커다란 양수검.

마검 마레다였다.

#95화. 24. Karma girl (4)

데스 나이트 로드 바로스와 시프라스의 무왕 라피셀.

이 둘은 거의 동급이다.

자세히 따지면 바로스가 라피셀보다 살짝 수준이 낮긴 한데, 그래 봐야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회귀한 바로스는 오러라곤 쥐뿔도 없는데 라피셀은 자색급의 투기를 지니고 있다.

대체 어디에서 저 오러를 얻었을까?

고작 열서너 살짜리 아이가 스스로 훈련해서 얻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미래의 그녀가 챙겨 왔을 리도 없다. 투기는 영혼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니까.

저게 가능했다면 바로스도 그 방대한 암흑투기를 고스란히 지닌 채 이 시대로 회귀했을 것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마검의 힘이지."

마검 마레다는 숙주를 조종해 인간을 베어 그 정혈을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 힘을 다시 숙주에게 보내 더욱 강하게 만들고, 더 많은 인간을 베게 만든다.

"죽인 인간의 정혈을 숙주의 암흑투기로 전환시키는 셈이야."

즉, 현재 라피셀이 휘두르고 있는 오러는 전부 마검이 주입한 사악한 기운인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천재성이 나오는데, 오히려 마검의 지배를 깨 버리고 암흑투기를 그녀 고유의 오러로 바꿨다는 점이다.

심지어 정신이 나간 상태인데도.

"물론 스스로 쌓아 올린 힘이 아니니 한번 소모하면 다시 채울 순 없겠지만, 당장은 라피셀 자신의 오러처럼 쓸 수 있지. 그래서 저런 위력이 나오는 거고."

카르나크의 설명에 세라티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바로스가 오러를 쓸 수 있다면 라피셀과도 싸울 수 있단 소리잖아?

"바로스 경에게 또 제 몸 내주란 말씀이네요?"

웬일로 이번엔 그녀의 짐작이 틀렸다.

"소용없습니다."

바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세라티의 몸을 차지해도 어차피 승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육체적 격차가 너무 크거든요."

순간 세라티가 발끈했다.

"제가 그렇게 수준이 떨어져요?"

솔직히 납득하기 힘들다.

아무리 상대가 미래에 무왕이 될 정도의 천재라도, 지금은 단련하지 않은 10대 소녀일 뿐이다. 그런데 꾸준히 수련을 해 온 20대의 세라티가 그만도 못하다고?

"그게 아니라, 아무리 제가 남의 몸 다루는 데 익숙해도 자기 몸 다루는 것보다 나을 순 없으니까 그런 거죠."

"아...."

이해가 갔다.

동급의 실력자라면 평소 손에 익은 무기인가 아닌가로도 승패가 갈리는 법이다. 심지어 그게 육체라면 오죽할까?

"그럼 어쩌라는 거예요?"

"도련님이 말했잖아요, 해답은 간단하다고."

영 자신 없는 표정으로 바로스는 분지 저편을 바라보았다.

"저보고 몰래 가서 마검 주워서 써 보라는 소리죠, 뭐."

***

세라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바로스는 눈앞의 양수검을 노려보았다.

마검 마레다가 마법의 사슬에 묶인 채 기이한 검명을 흘린다.

웅웅웅웅....

바로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믿을 건 이 마검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답게 살면서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이것뿐이란 소리이긴 하다.

예전처럼 살 생각이면 달리 할 짓이 많긴 하거든?

"좋아, 간다!"

각오를 다지며 바로스는 손을 뻗었다.

두꺼운 손가락이 마레다의 검 자루를 쥐었다.

화르르륵!

검은 불길이 피어올라 눈앞을 가득 메운다. 살기와 광기가 넘실대며 뇌리를 잠식해 간다.

"하찮은 인간이여...."

천둥 같은 목소리가 귓가 가득 메아리친다.

"어둠의 지배를 받아들여라!"

곧이어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악!"

***

닿기만 해도 생명을 거두는 끔찍한 악령들이 허공을 누빈다.

바위조차 쪼개는 파괴의 힘을 머금은 검은 그림자들이 대지를 질주한다.

"캬아아아악!"

"크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악령들은 계속해 덤벼들었다.

분지 전체가 사악한 권능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라피셀은 티끌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카르나크...."

낮은 읊조림과 함께 일검을 떨친다.

자색의 오러가 거대한 칼날이 되어 허공을 덮친다.

한 마리만으로도 신전의 1개 부대가 출동해야 했던 강력한 악령, 레이스가 무려 십여 마리 가까이 한 번에 썰려 사라진다.

"카르나크...."

한 발 내디디며 그림자 무리 사이로 파고든다.

사방으로 오러의 파동이 퍼져 나간다. 빛이 그림자를 지우며 빛의 파문이 대지를 뒤흔든다.

그렇게 길을 연 뒤, 라피셀이 몸을 날렸다.

"...카르나크!"

악령들을 베어 가며 단숨에 술사의 목을 따려는 것이었다.

황급히 세라티가 검을 들어 가로막았다.

"에잇!"

투기검과 투기검이 충돌하며 충격이 전신을 꿰뚫었다.

고통에 세라티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아그그극!'

그래도 이번엔 비참하게 날려 가진 않았다.

게헤나에서 소환된 지옥의 갑주가 제때 그림자 방패를 펼쳐 남은 충격을 막아 준 것이다.

아픈 와중에도 세라티는 내심 감탄했다.

'와, 이걸 막을 수 있네....'

새삼 사령술이란 게 얼마나 강력한지 실감이 든다.

문제는, 그럴수록 저 라피셀이란 소녀가 얼마나 센지도 실감이 든다는 점이지만!

"지옥의 권속!"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라피셀이 왼손을 뻗었다.

보랏빛 오러탄이 섬광이 되어 세라티의 복부에 작렬했다.

"쿠, 쿨럭!"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었다. 피를 토하며 세라티는 또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으으...."

신음하는 와중에도 새삼 상대에 대한 감탄이 나온다.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는 투기를 마치 마법이나 화살처럼 멀리 날릴 수 있다더니....'

그래도 세라티가 분투한 덕분에 악령들이 다시 라피셀의 앞을 막을 여유를 얻었다.

카르나크를 노릴 수 없게 된 라피셀이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여신처럼 우아한 검무가 이어진다. 점점 악령들이 녹아내린다.

그 와중에도 기회만 생기면 카르나크를 노린다.

"사령왕!"

잠깐 악령들의 포위에 빈틈이 생겼다. 빠져나온 라피셀이 투기검을 길게 떨쳤다.

"앗!"

이번엔 세라티가 미처 막아 내지 못했다.

섬전 같은 검광이 정확하게 카르나크의 목을 베어 갔다.

놀란 그녀가 입을 벌렸다.

'카르나크 님?'

다행히 카르나크의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다. 그저 통째로 사라져 버릴 뿐.

환각이었다.

분지 여기저기서 여러 명의 카르나크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죽을 뻔했네...."

"대비하길 잘했지...."

다행히 라피셀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다. 현혹에 걸리기 쉬운 상태란 의미다.

그리고 환영술과 환각술, 현혹술이라면 카르나크도 일가견이 있다!

카르나크의 환영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이대로 바로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떠들어 대던 카르나크 세 놈이 보랏빛 오러에 썰려 사라졌다.

"카르나크...."

누가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자 라피셀이 아주 단순한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전부 죽인다!"

오러의 파동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여기?"

파괴의 고리가 대지에 파도를 일으키며 카르나크까지 일제히 쓸어 간다.

"여기?"

사방팔방으로 폭음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여기?"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도 쓰러진 킹스 오더 대원들은 철저하게 챙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혹여 실수로 오러가 그쪽으로 튀기라도 하면, 억지로 공격 방향을 바꿔서라도 절대 폭발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고 있다.

세라티는 내심 감탄했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도 저 정도라니....'

비록 적이지만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대체 얼마나 정의로운 영웅이었기에 저럴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이 작자는 정말....'

한심스러운 눈으로 세라티는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영혼의 주인께서는 최대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숨어 있었다.

어디냐고?

쓰러진 킹스 오더 대원 뒤에 쪼그려 앉아 있다.

적의 호의를 철저하게 이용하며, 아군을 고기 방패로 쓰고 있는 것이다.

"...."

[뭐? 왜?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냐?]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본인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다.

어쨌든, 환영술은 제법 라피셀에게 잘 통하고 있었다.

연신 보랏빛 투기검이 환영을 공격하고, 그때마다 카르나크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환각을 만들어 버텨 낸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결국 마력 다 떨어지면 결과는 뻔했다.

계속해 환영술을 펼치며 카르나크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바로스야, 빨리 좀 와라. 나 죽기 전에....'

세라티가 하소연하듯 물었다.

[저거 대체 언제 힘 다 쓰는 거예요?]

카르나크가 설명하길, 라피셀의 오러는 마검이 주입한 정혈을 다 쓰면 더 이상 추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 힘이 빠진 기미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킹스 오더 전원이 힘 소모하려고 그토록 차륜전을 펼치지 않았나?

[실은 우리가 힘을 제대로 소모시키지 못한 거였나요?]

카르나크가 맥없이 대꾸했다.

[저게 힘이 빠진 거야....]

힘 소모시킨 것도 맞고, 지친 것도 맞고, 비축한 오러가 바닥난 것도 맞다.

실제로는 거의 빈사 상태에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빈사 상태가 저 정도?]

[응.]

[젠장....]

빈사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모습으로, 라피셀이 더더욱 날뛰어 댔다.

사방으로 투기검을 뿌리고 또 뿌린다. 폭발과 폭연과 악령과 환영이 뒤섞여 혼돈을 일군다.

"...사령왕!"

카르나크는 식은땀을 흘렸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그의 사령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슬슬 힘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사람답게 구는 건 여기까진가? 역시 예전처럼 살아야 하나?]

황당해하며 세라티가 한마디 했다.

[지금까진 사람답게 굴었단 말씀이세요?]

아주 작정하고 사령술 펼치는 데다, 사방에 악령이 가득하고, 어둠의 기운이 펄펄 끓어올라 지옥의 한복판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사악하게 굴 수 있단 말이야?'

가능한 모양이었다.

[1대대와 7대대가 죄다 쓰러져 있잖아.]

정의와 명예를 위해 모인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 심지어 7대대는 카르나크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도 지니고 있다.

[저거 싹 다 죽여서 영혼 긁어모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

[네, 여태 사람답게 싸운 거 맞았네요.]

세상에, 저런 악랄한 발상은 떠올려 본 적도 없다. 아예 상상의 저편에 있는 것이다.

뭐, 카르나크도 그럴 마음까진 없었다.

[나도 알아, 하면 안 되는 짓이라는 짓쯤은. 하지만 이대로라면 대책이 없는데....]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라피셀의 움직임이 멈췄다.

"...."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황급히 몸을 날린다.

그녀의 작은 신형이 순식간에 어둠 속을 미끄러진다.

동시에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검붉게 빛나는, 날카로운 섬광의 폭우였다. 수십 자루에 달하는 혈검의 소나기가 쏟아진 것이다.

콰콰콰콰쾅!

무자비한 융단폭격과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양수검을 한 손에 쥔 채 검붉은 오러를 등 뒤로 늘어뜨린 거구의 기사였다.

"다들 살아 있나? 나 아직 안 늦었죠?"

세라티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바로스 경!"

#96화. 25. 로드 바로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했다. 카르나크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늦었잖아!"

억울한 듯 바로스도 반박했다.

"최대한 서둘렀거든요!"

라피셀은 차분히 상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

아까처럼 대뜸 공격하지 않는다.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하다.

바로스가 쥔 양수검을 보며 세라티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그 마검?"

인간을 지배해 살인귀로 만드는 흉악한 마검이었다.

사령왕의 최고 심복이었던 그라도 지금은 평범한 인간.

저 무시무시한 마물의 지배력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바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안 그래도 집중하고 있어요."

실제로 마검의 힘을 다루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자칫 정신 집중이 풀리기라도 하면 밸런스가 깨져 버린다!

'윽? 또 실수했다!'

마검 마레다에서 요란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아악!"

동시에 칼날을 통해 희뿌연 악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 으아! 으아아!"

정신없이 난동을 부리며 어떻게든 칼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친다.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익사자 같은 몰골이었다.

"또 난리네, 이거."

인상을 팍 쓰며 바로스는 검을 털었다.

"어딜 가? 못 가."

검은 기류가 피어올라 악령을 붙잡고 칼 속으로 빨아들인다. 마치 지옥으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다.

"캬아아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을 남기며 악령이 도로 사라진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꾸 성불하려고 한단 말이야, 악령 주제에."

세라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비명이 쟤 비명이었어?'

과연 그 주인에 그 시종이었다.

바로스도 카르나크와 마찬가지로 '심연' 쪽인 것이다.

새삼 자신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한지 실감이 든다.

어쩌다 악령조차 도망 못 쳐 안달인 인간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을까?

황당해하는 세라티를 향해 바로스가 전언을 날렸다.

[도련님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세라티 경.]

[아, 네!]

정신을 차린 세라티가 카르나크에게 달려갔다.

바로스가 마검 마레다를 들어 라피셀을 겨누었다.

"오랜만입니다, 라피셀 경."

웅웅웅웅!

칼날을 통해 검붉은 투기가 불길한 빛을 발한다. 마검의 권능을 통해 끌어낸 암흑투기다.

"우리가 딱히 만나서 반가울 사이는 아니지만...."

라피셀은 이 암흑투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자신의 오러로 바꾼 후에야 제대로 힘을 썼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이쪽이 전공이지.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보지요."

잿빛 머리의 소녀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로드 바로스...."

푸른 눈동자 가득 살기가 떠오른다. 보랏빛 투기가 넘실거리며 전신에 맺힌다.

"저주받을 사령왕의 개!"

증오 가득한 외침이 허공을 떨쳐 울렸다.

***

잿빛 머리의 소녀가 세상을 수직으로 내리긋는다.

땅을 박차며 거구의 기사가 올려 치기로 반격한다.

두 줄기 투기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파지지직!

공기가 깨지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빛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윽!"

"커억!"

둘 다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첫 번째 격돌은 무승부.

속도, 타이밍, 오러의 파괴력까지 모든 면에서 박빙이었다.

지켜보던 카르나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바로스가 마검을 쓰면 지금 상태로도 저 정도 위력은 나와 주는군.'

순수한 마검의 능력만으로는 절대 저 정도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위 몇 개 쪼개고 남은 혈정 동났겠지.

"죽인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라피셀이 재차 참격을 날렸다.

빛의 칼날이 시야를 희롱하며 어지럽게 나부꼈다.

하지만 바로스는 넘어가지 않았다.

'속기엔 이 기술을 너무 많이 당했어, 내가!'

번쩍이는 검광은 무시하고 검의 흐름 자체에 집중한다. 차분하게 날아드는 칼날을 비껴 내며 곧바로 쳐올린다.

타탕!

충돌과 함께 칼날의 공방이 이어졌다.

불꽃이 튀고 또 튀었다. 들풀이 날아올라 박살 나고 대기가 찢어져 울부짖었다.

우르르릉!

두 마리 야수가 예리한 살의로 서로를 노리며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질 않는다.

둘 다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하악, 하악...."

"헉헉...."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바로스가 뒤로 물러서며 마검으로 대지를 내려쳤다.

'일단 숨 좀 돌리자!'

검붉은 오러의 파도가 땅을 부수며 타고 흘렀다.

그가 애용하던 원거리 투기술, 섀도우 클로였다.

그러자 라피셀도 대지를 내리치며 오러 웨이브를 날려 맞받아쳤다.

날아든 양쪽의 투기가 뱀처럼 얽혀 폭발했다.

콰콰콰콰쾅!

지켜보던 카르나크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호오?'

라피셀은 10미터 이상 뒤로 밀려났다. 반면 바로스는 제자리에 꿋꿋이 서서 호흡을 고르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힘을 많이 빼 놓긴 했었구만.'

당연한 이야기였다.

무려 해 질 녘부터 내내 싸워 온 그녀다.

마검의 지배 상태에서도 킹스 오더 전원을 상대했고, 지배에서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싸웠다. 당연히 탈진 직전이겠지.

그렇다고 바로스가 썩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마검 마레다는 진작 거덜이 난 상태였다. 남은 정혈 자체가 얼마 없었다.

그걸 박박 긁어모아 겨우 끌어낸 것이 지금 바로스가 구사하는 암흑투기다.

얼마 없는 힘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압축해서 쓰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바로스용 암흑투기를 미리 모아 둘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간 예전처럼 사는 게 되고....'

암흑투기는 공짜가 아니다. 적어도 100여 명은 족히 죽여야 바로스 줄 정도의 투기를 모을 수 있다.

'하여튼 눈앞의 위기부터 넘기고 봐야겠다.'

그는 차분히 남은 사령력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저 정도로 지쳤으면 슬슬 이 수법이 통하겠지.'

***

라피셀의 정체를 알고 나니 몇몇 의문은 풀렸다.

왜 카르나크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나?

그녀가 당한 일을 떠올리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영혼이 난도질을 당했는데 오죽 공포스러웠을까?

그럼 나중엔 어째서 죽이려고 덤벼들었나?

마검 마레다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지배당한 상태일 땐 사령왕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낼 정도의 정신력이 없었다.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에나 분노로 공포를 누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월러스와 버릭이 죽었을 때 왜 그리 주변이 깨끗했나? 어떻게 성직자는 물론이고 카르나크조차도 아무런 어둠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나?

그냥 어둠의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피셀이라면 마검의 암흑투기가 없어도 타고난 재능과 증폭된 육체 능력만으로 저 둘쯤은 참살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후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마검에 지배되었을 때 라피셀은 실로 이상한 방식으로 7대대 대원들을 노렸다.

카르나크와 가까이 서 있던 순서대로 목숨을 노린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게다가 그녀답지 않게 죄 없는 사람을 집요하게 죽이려 들기도 했다.

라피셀의 영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해답을 알았다.

'저것도 내 업보구만, 에휴.'

카르나크는 라피셀의 영혼과 육신을 세 갈래로 찢어 고문한 뒤 네크로피아의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삼았다. 그리고 저마다 적절한 명령을 심어 놓았다.

인간의 영역을 최대한 경계해야 하는 동문의 스켈레톤 병사가 된 그녀에겐 이렇게.

-접근한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라.

평소 사용하는 주요 관문인 서문의 플레시 골렘이 된 그녀에겐 이렇게.

-오직 사령왕의 최측근들만이 이 문을 지나갈 수 있다.

다양한 이들이 드나드는 남문의 리빙 아머가 된 그녀에겐 이렇게.

-피아를 선별해, 적의를 가진 자의 앞을 막아라.

여기에 원래 라피셀이 지닌, 사령왕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분노도 있다.

-죽여 버리겠다, 카르나크!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이게 죄다 뒤섞이며 대차게 꼬인 것이다.

-접근한 인간들은 오직 사령왕의 최측근들, 피아를 선별해 앞을 막아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실로 개판 그 자체라 하겠다.

이 사실을 깨달으니 사태를 해결할 방법도 보였다.

'그녀의 영혼을 다시 합쳐 버리면 저 광기도 가라앉겠지.'

물론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리면 또 안 된다. 그랬다간 무왕으로 부활한 라피셀에게 맞아 죽는다.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무의식 안쪽으로 완전히 가라앉혀 버려야 해.'

이러면 모든 기억이 봉인되니 증오와 분노도 남아 있지 않을 터.

술법을 전개하며 카르나크가 양손으로 인을 그렸다.

"고통받는 영혼이여, 피안의 명왕이 그대를 인도하노니...."

바닥에 어둠의 마법진이 그려져 음산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개 같은 입자가 퍼져 나가 라피셀의 주위로 향했다.

적의가 없어서인지 그녀는 딱히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한 듯 바로스만 노려보고 있었다.

카르나크의 주문이 이어졌다.

"안식의 길을 따라 평안의 장에 들지어다...."

***

검붉은 투기와 보랏빛 오러가 허공에서 얽혔다.

파지지직!

전격이 튀며 두 그림자가 양쪽으로 튕겨 나왔다.

마검 마레다를 든 바로스와 평범한 장검을 쥔 라피셀이었다.

"후우, 후우...."

"하아아...."

가쁜 숨을 내쉬며 서로를 노려본다.

바로스의 어깨, 라피셀의 허벅지가 붉게 물들어 간다.

피는 금방 멎었다. 오러 운용이 경지에 오른 이들은 투기만으로도 지혈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혈이 되었다고 상처까지 아문 것은 아니다.

'으, 움직이면 다시 터지겠군, 이거.'

내심 초조해하며 바로스는 등 뒤를 힐끔거렸다.

'뭔가 열심히는 하시는데....'

아까부터 강렬한 사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왜 이리 오래 걸리시나?'

명색이 왕년의 사령왕이다. 사령력이 모자라서 아예 못 하면 모를까, 일단 사용 가능한 경우라면 익숙할 대로 익숙할 터.

계속 라피셀을 경계하며 바로스가 슬쩍 전언을 던졌다.

[도련님, 아직 멀었어요?]

[조금만 더 버텨!]

꽤나 다급한 대꾸였다. 상당히 집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하시는 중인데요?]

[라피셀 기억 봉인!]

[그게 이렇게나 오래 걸릴 일이에요?]

[안 하던 짓 하려니 힘들어!]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기억 조작이 안 하던 짓이라니?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어 가며 뻔질나게 하던 짓거리가 아닌가?

변명하듯 카르나크가 외쳤다.

[라피셀의 영혼을 치유 중이라서 그래! 내가 너 말고 딴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어야지!]

그렇다.

영혼을 뭉개고 박살 내며 기억을 지우는 건 참 쉽다. 그건 만날 하던 짓이다.

그런데 영혼을 보듬어 안고 조심스럽게, 적대적인 행위를 피해 안전하게 치료하며 기억을 잠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이다.

[아으, 평소에 좀 착하게 살걸....]

낑낑대는 카르나크를 보며 세라티는 새삼 놀랐다.

[웬일로 그런 착한 짓을 다 하세요?]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낀 걸까?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걸렸음에도 라피셀의 영혼을 구하려 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나.

[적의나 살의를 느끼면 바로 반격 들어올 테니까! 최대한 살살 구슬려서 치료받게 만들어야 해!]

현재 카르나크의 힘으로 라피셀의 영혼을 지배 혹은 세뇌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기엔 그녀의 정신력이 너무 강하다.

하지만 찢어진 영혼을 치유하는 건 가능했다.

이는 적의가 아니라 호의 쪽이니까.

라피셀의 본능이 허용하는 영역이다.

말하자면, 날뛰는 맹수를 최대한 어르고 달래서 약 먹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

[저야 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불안한 눈으로 바로스는 손에 쥔 양수검을 내려다보았다.

칼날 사이로 힐끔힐끔 검의 악령이 모습을 드러낸다.

비쩍 마른 것이 마치 미라 같다. 이미 정혈은 다 빨아먹혔고, 영기까지 간당간당한 상태인 것이다.

[얘가 못 버틸 것 같아서 말입죠.]

호흡을 고른 라피셀이 다시금 두 눈을 붉게 물들였다.

"...죽인다, 사령왕의 개!"

#97화. 25. 로드 바로스 (2)

자색의 검풍이 쉴 새 없이 바로스를 몰아붙인다. 요란한 금속음이 연신 울려 퍼진다.

정신없이 막고 피하며 그는 이를 갈았다.

'여전히 피곤한 스타일이구만.'

기술적, 경험적인 면에서 바로스가 라피셀에게 뒤처지진 않는다.

투기량에서도 그리 큰 차이는 없다. 둘 다 마검 마레다에서 얻은 기운을 간신히 펼치고 있을 뿐이니까.

심지어 체급은 월등히 앞선다.

지금의 바로스는 좋은 것만 챙겨 먹으며 성실히 단련한 한창때의 젊은 몸이다.

반면 라피셀은 아직 어린 소녀일 뿐, 따로 단련을 한 적도 없으며 영양 보급 역시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육체적인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밀리는 건 바로스 쪽이었다.

"사령왕의 개!"

절규하듯 내지르며 라피셀이 투기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죽인다아아!"

얼핏 단순한 일격으로 보이지만 바로스는 방심하지 않았다.

저 단순해 보이는 궤도가 찰나의 순간 얼마나 기묘하게 바뀌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느 쪽이지?'

경험을 통해 상대의 공세를 예측하며 빈틈을 찾아낸다.

왼발을 내밀어 파고들며 찌르기로 응수!

"윽!"

피를 본 건 바로스 쪽이었다.

그의 찌르기는 라피셀을 스치듯 지나갔지만, 그녀의 사선 베기는 정확히 바로스의 어깨를 베어 냈다.

어깨에서 극통이 느껴진다. 물러나며 바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또 맞았어, 젠장.'

저게 문제였다.

다른 무왕들조차 감탄해 마지않던 라피셀의 가장 큰 장점.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고, 경험이 없어도 스스로 정답을 찾아내는 저 어마어마한 전투 센스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예전엔 그나마 할 만했는데....'

사실 전투 센스만으로 강함이 결정되진 않는다.

배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고? 경험이 없어도 정답을 찾는다고?

이는 반대로 말하면, 열심히 배우고 경험을 쌓을 경우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단 소리다.

그래서 암흑투기가 충만했던 데스 나이트 로드 바로스는 무왕 라피셀을 능가할 수 있었다.

익힌 검술과 경험으로 모자란 전투 감각을 대체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압도적인 육체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투기가 너무 부실하다. 익힌 검술과 경험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다. 아무리 체급적인 우위가 있어도 점점 밀리게 된다.

연이은 공세로 바로스의 신체가 붉게 물들어 갔다.

"윽! 크윽! 윽!"

보다 못한 세라티가 나섰다.

투기검을 휘두르며 라피셀의 배후를 노린다.

[저도 가세할게요, 바로스 경!]

라피셀도 바로 반응했다. 초승달 같은 검투기가 세라티를 후려갈겼다.

콰앙!

충격을 흘리며 세라티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까는 바로 튕겨 나가 물수제비 된 그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용케 공세를 비껴 냈다.

'좋아! 이젠 할 만해!'

여태까진 감히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라피셀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인 것이다. 그럭저럭 레드 나이트 수준으로도 버틸 만하다.

무엇보다 지옥에서 소환한 갑주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문득 의아해진 세라티가 물었다.

[이 갑주, 이렇게나 좋은데 왜 바로스 경은 안 써요?]

바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 그거 못 써요.]

[왜요?]

[갑주 도망가요.]

[...네?]

뭔 소린가 의아해하는데, 바로스가 마검 마레다를 가리켰다.

[얘랑 같은 계열이거든요.]

말인즉슨, 지옥의 갑주도 마검처럼 인간을 숙주로 만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물건이란 소리다.

[잠깐, 그럼 제 영혼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건데요?]

바로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라피셀에게 덤벼들었다.

"타아아앗!"

더더욱 불안해진다. 왜 갑자기 딴청을 피우는 건데?

[저기요, 바로스 경?]

[괜찮아요. 도련님이 잘 처리해 주실 거예요.]

[...뭘 처리한다는 거예요?]

울상을 짓는 와중에도 세라티는 계속 투기검을 휘둘러 댔다. 어쨌든 눈앞의 라피셀을 상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둘이서 협공을 하니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라피셀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윽! 으윽! 크윽!"

카르나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둘 다 잘하고 있군!'

이제 조금만 더 파고들면 그녀의 영혼에 닿을 수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라피셀의 일검이 마검 마레다의 칼날을 강타했다.

굉음과 함께 비명이 이어졌다.

"아아아아아!"

라피셀이나 바로스, 세라티가 낸 소리가 아니었다. 마검 마레다 자체에서 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칼날 위로 검고 투명한 인간 형상의 뭔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하아아아...."

묘하게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검의 악령이 대지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세라티가 눈을 깜빡였다.

"뭐, 뭐예요?"

바로스가 울상을 지었다.

"아, 이놈 결국 지옥 가 버렸네."

***

라피셀의 투기검이 시야를 희롱하며 날아든다.

"로드 바로스!"

뒤로 뛰며 바로스는 바닥을 굴렀다.

타이밍이 실로 적절해 완벽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

스치거나 한 게 아니라 확실하게 피했다.

그런데도 충격파에 휘말려 가랑잎처럼 날려 간다!

"우에에엑!"

곰 같은 거구가 여우처럼 땅 위를 통통 튀었다.

추가타를 막기 위해 세라티가 황급히 라피셀의 뒤를 노렸다.

"에잇!"

라피셀도 검의 방향을 바꿨다.

투기검이 서로 충돌해 굉음을 냈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세라티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쩌죠, 이제?]

암흑투기를 쓰지 못하는 바로스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젠 그녀 혼자서 라피셀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난처해하며 세라티가 전언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제 몸, 드릴까요?]

[어, 뉘앙스가 참 이상하긴 한데요, 그거....]

물론 그녀의 의도는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빙의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이미 늦었어요.]

바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려면 아까 했어야죠.]

이미 카르나크는 사령술 준비에 들어갔다.

빙의를 시도하면 지금껏 펼친 술법을 멈춰야 하는데, 그럼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오히려 더 불리해지는 것이다.

이젠 빈껍데기가 된 마검을 노려보며 바로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악령 주제에 왜 이렇게 근성이 없어? 조금 노려봤다고 그걸 못 버티냐?"

둘을 번갈아 노려보던 라피셀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그리고 바로스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원한이 깊을지는 뻔하니까.

바로스도 응수에 들어갔다.

이젠 더 이상 마검이 아닌, 그냥 양수검을 움켜쥐며 암담한 표정을 짓는다.

'젠장, 이거 감당이 되려나?'

차분한 찌르기와 베기를 연환하며 정교한 검술을 펼친다.

극히 실전적이면서도 이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최고위 검술이 라피셀의 사방을 점유한다.

그리고, 그냥 대충 휘두른 횡 베기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큭!"

충격이 칼날을 타고 올라 양팔을 마비시킨다.

바로스가 울상을 지었다.

'역시 안되는구나....'

광소를 터트리며 라피셀이 그의 정수리에 참격을 내리쳤다.

"아하하하!"

다행히 바로스가 먼저 피했다.

살기가 진해도 너무 진했기에 선수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휘어져 들어오는 미들킥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냥 공세의 연환 자체가 너무 빨랐다.

'아, 알면서도 못 피하겠....'

퍼억!

간신히 자세를 잡은 그의 오른쪽 팔이 축 늘어진다.

최대한 비껴 맞았는데도 한 방에 두꺼운 팔근육이 마비된 것이다. 당분간 이 팔은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죽겠어!'

바로스는 다급히 카르나크를 불렀다. 이제 믿을 건 그밖에 없었다.

"도련님!"

"조, 조금만 더!"

"그럴 여유가 없다니까요, 이젠!"

정말 여유가 없다. 전언이 아니라 육성으로 악을 쓸 정도로.

비틀대는 바로스를 대신해 세라티가 덤벼들었다.

"피해요, 바로스 경!"

우선 라피셀의 정면으로 돌진, 머리 치기로 시선을 빼앗은 뒤 허리 베기를 시도한다.

기초적인 검술이지만 실전에서 잘 먹히는 수법이기도 하다.

물론 라피셀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옥의 권속!"

간단히 피한 뒤 라피셀이 좌우 참격을 날렸다.

순간 세라티가 눈을 빛냈다. 이걸 노리고 일부러 기초적인 수법을 썼다.

'지금이다!'

참격을 무시하며 그녀는 오히려 찌르기로 응수했다.

갑옷의 방어력을 믿은 것이었다.

비록 부상은 입겠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하나 그조차도 라피셀의 예상 내였던 모양이다.

키득....

비웃음과 함께 그녀가 앞차기를 날렸다.

발끝으로 검 면을 걷어차 찌르기를 위로 튕겨 낸다. 이어서 매서운 돌려 차기로 세라티의 옆구리를 노린다.

콰앙!

폭음과 함께 진홍빛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세라티가 비명을 터트렸다.

"아, 아으윽!"

흐릿해지는 정신을 애써 움켜쥐며 그녀는 치를 떨었다.

'뭐가 이리 아파? 저렇게 덩치도 조그만데?'

신장 15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소녀가 맨발로 지옥의 갑주를 쳤는데, 발은 멀쩡하고 갑옷이 박살 난 것이다.

놀랍다 못해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의 오러 운용 능력이었다.

비틀대는 와중에도 바로스는 새삼 혀를 내둘렀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진짜 재능 하나는 천부적이네....'

지금의 라피셀은 정상이 아니다.

기억은 엉망에 영혼은 너덜너덜한 상태.

그럼에도 마검의 암흑투기를 완벽하게 자신의 오러로 바꿔 쓰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닐 텐데 전투 감각만으로 저런 짓이 가능하다니....'

새삼 감탄하던 중이었다.

"음?"

그러니까 지금 라피셀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

자신의 것이 아닌 투기를 스스로의 것으로 바꿨단 소리?

"...아!"

바로스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번뜩였다.

***

추가타가 계속 들어온다. 금이 간 지옥의 갑주 위로 무자비한 펀치와 킥, 참격의 융단폭격이 이어진다. 점점 전신이 피투성이로 변한다.

"악! 으윽! 큭! 아윽!"

세라티의 목숨이 간당간당하기 직전이었다.

콰아아앙!

갑자기 폭음과 함께 라피셀의 작은 몸이 뒤로 튕겨 났다.

붉은 섬광이 날아들어 그녀를 강타한 것이다.

"...오러?"

놀라 세라티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구의 기사가 양수검을 겨누며 붉은 빛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암흑투기가 아니라 불꽃처럼 선명하게 이글거리는 투기검.

확실했다.

순수한 오러였다.

"바로스 경? 설마 각성한 거예요?"

그것도 하필 이렇게나 타이밍 좋게? 대체 어떻게?

"설명하자면 좀 길고...."

세라티를 뒤로한 채 바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일단은 이 자리부터 정리합시다!"

나가떨어진 라피셀이 도로 자세를 갖추고 덤벼들었다. 바로스도 차분하게 검을 휘둘러 맞섰다.

투기와 투기가 충돌했고, 이번엔 바로스가 밀리지 않았다.

찬란한 붉은 오러를 휘두르며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느낌인가?'

언제나 타인의 기운만을 써 왔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의 투기를 직접 써 본 적이 없었다.

'뭐랄까,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군, 이거.'

점점 라피셀이 밀리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녀가 하늘이 내린 천재라도, 이젠 진짜 남은 게 없을 정도로 지친 것이다.

그에 비해 바로스는 아직 여력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력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생겼다고 해야겠지.

"자, 이제 좀 쓰러지시지!"

한번 기운 천칭은 다시 바뀌지 않았다.

바로스의 투기검이 라피셀의 장검을 베어 냈다. 찬란하던 그녀의 보랏빛 오러가 빛을 잃어 갔다.

그 상태로 어린 소녀의 목뒤를 붙잡고 강하게 땅에 내려친다!

쿵!

그렇게 라피셀을 억누르며 바로스가 재차 외쳤다.

"아직도 멀었어요, 도련님?"

"끝났어!"

정확히는, 내내 저항하던 라피셀의 영혼이 저 일격 덕분에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 옳았다.

카르나크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고통의 업이여, 안식의 어둠 아래 잠들어라!"

어둠의 기둥이 라피셀을 내리찍었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질러 댔다.

"아아아아아!"

그러더니 이내 축 늘어진다.

그녀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가 호흡을 확인한 뒤 바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구만."

다가가며 카르나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야, 바로스 너 어떻게 된 거냐? 그 오러는 뭐야?"

#98화. 25. 로드 바로스 (3)

시공 회귀를 한 후, 바로스는 스스로 오러를 각성하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단순히 오러를 각성한 경험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쉬웠으리라. 머릿속에 여전히 전생 때 수집한 수많은 무술서들이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항상 남의 힘, 남의 투기만 써먹었으니 습관이 단단히 잘못 들었다. 영혼의 속성 역시 상당히 변질된 상태였다.

투기를 운용하는 방식은 오러 유저의 그것이었지만, 그 투기를 체내에 쌓는 방식은 사령술사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미 변질되어 버린 그에게는 다른 각성법이 필요한데, 그걸 써 놓은 무술서는 단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전 카르나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들과 다른 길을 걸으면 이게 문제라고. 문제 생겼을 때 참조할 것이 없다고.

"그런데, 눈앞에 그런 케이스가 있더라고요."

바로스가 쓰러진 라피셀을 바라보았다.

마검의 지배에서 해방된 그녀는 암흑투기를 자신의 오러로 완벽하게 변환해 사용할 수 있었다.

남의 투기를 이용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오러를 이용하는 입장으로 바꿨단 의미였다.

남의 힘을 움직이던 감각에서 그걸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감각이기도 했다.

정확하게 바로스가 원하는 바로 그 운용법인 것이다.

세라피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그걸 한 번 보기만 해도 따라 할 수 있어요?"

"저기요, 제가 지금은 이 모양이긴 해도 왕년엔 꽤 잘나갔거든요?"

바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숙련도라든가 정밀도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기술의 요체라든가 핵심, 개념 같은 거야 대충 이해가 가죠."

경지에 오른 오러 유저라면 남의 기술을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다. 하물며 무왕급이라면 오죽할까?

물론 바로스 말대로 숙련도 등이 극히 떨어지니 기술을 훔쳤다거나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방법을 깨달았다는 점.

일단 방향성을 잡았다면 이후엔 수행과 노력의 영역이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피셀을 내려다보며 바로스는 혀를 찼다.

"개념을 잡고 나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도 아닌데, 발상을 못 떠올리겠단 말이죠. 이게 천재와 범인의 차이인가?"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잘된 일이네. 지금 수준은 어느 정도야?"

"대충 이 정도?"

바로스가 손가락을 들었다. 검지에 붉은 오러가 잠깐 맺혔다 사라졌다.

카르나크가 인상을 썼다.

"뭐야? 블루 나이트도 못 되냐?"

"힘주면 될걸요."

순간 검지가 푸른 빛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이내 도로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아, 역시 잠깐뿐이네. 뭐, 앞으로 노력해야죠?"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세라티가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왜 힘주면 경지가 올라가는 건데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예요?"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세라티의 수준이 높아지면 굳이 설명 안 해도 이해가 갈 것이고, 수준이 되지 않으면 백날 떠들어 봐야 이해를 못 할 것이다.

피곤한 듯 오러를 도로 풀며 바로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제가 이 부분에선 라피셀 경보다 낫네요. 그녀는 전부 소진해 버린 듯하니."

둘 다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오러를 각성한 건 아니다. 마검의 암흑투기를 변환시켰을 뿐이지.

다만 바로스는 그 오러 일부를 자기 것으로 바꿔 저장할 수 있었다. 기운을 담는 그릇의 차이 덕분이었다.

라피셀의 그릇이 아름답고 우아한 크리스털 술잔이라면, 바로스의 그릇은 뚝배기라고나 할까?

둔하고 두껍고 투박하지만, 그만큼 튼튼하고 안정적이다.

"앞으로 이걸 밑천 삼아서 열심히 불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중얼거리다 말고 바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어둠이 사방에 깔려 있다.

그 칠흑 속에 널브러진 수십 명의 킹스 오더들.

그들은 여전히 혼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스가 난처해하며 물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들은 어쩐다죠?"

***

분지를 떠난 카르나크 일행은 일단 기존의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라피셀을 천막 안쪽에 곱게 눕혀 놓았다.

혹시 모르니 묶어 놓거나 해야 하지 않느냐는 세라티의 말에 두 사람이 반대 의견을 냈다.

"내 사령술이 제대로 먹혔다면 모든 기억이 봉인되었을 터, 굳이 묶어 놓지 않아도 아까 같은 힘은 쓰지 못할 거야."

"도련님의 사령술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면 도로 아까처럼 날뛴단 소린데, 그럼 대체 뭘로 묶어 놓을 수 있겠어요? 쇠사슬로 묶어도 쉽게 끊어 버릴걸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면 몸이라도 편하게 해 주는 게 나은 것이다.

"이쪽이 나중에 정신 차렸을 때 조금이라도 더 호감을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라피셀을 침낭에 넣어 두었으니, 이번엔 쓰러진 킹스 오더를 챙길 차례였다.

지켄이며 트리브 등을 염동 마법으로 옮기며 카르나크가 말했다.

"이 양반들도 천막에 눕혀 주자."

마찬가지로 어깨에 킹스 오더 대원 하나씩 얹고 바로스도 걸음을 옮긴다.

"이대로 눕혀 놨다간 감기 걸리겠죠?"

"야, 우리가 다른 사람 건강까지 생각하다니!"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된 기분인데요!"

시시덕거리는 둘을 보며 세라티가 눈을 흘겼다.

"...참으로 훌륭하시네요, 거참."

물론 그녀도 열심히 대원들을 나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나르다 말고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안 깨어나죠?"

이들이 기절한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이거 진짜 기절한 거 맞아요? 사실은 크게 잘못되었다거나...."

사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오래 기절하는 일은 잘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지.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당연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농담인 줄 알았어, 마취란 표현이?"

"진짜 마취예요, 이거."

알고 보니 라피셀은 단순히 강하게 상대를 타격해 충격으로 기절시킨 것이 아니었다.

"신경계에 바늘 같은 오러를 침투시켜 마비시키는 방식이니까요."

세라티가 눈을 깜빡였다. 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에요?"

"실은 저도 할 수 있긴 해요."

바로스뿐만 아니라 다른 3인의 무왕도 흉내는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먼저 상대의 몸을 촉진해서 신체 컨디션을 파악한 다음에, 체내의 기운이 흐르는 걸 감지해 적절한 오러의 양을 정하고, 신경조직의 강도를 측정해 어느 정도여야 마비될지 수치도 파악한 다음, 정확하게 타격 순간 오러를 정밀하게 집어넣어서, 딱 원하는 그 위치에 그만큼만 오러를 틀어박는다.

"...이러면 되긴 되죠."

멍하니 듣고 있던 세라티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가능하려면 처음부터 상대가 꼼짝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상대가 조금만 움직여도 저 모든 변수가 시시각각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걸 어떻게 순간적으로 파악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실전에서 쓰는 건 라피셀 경뿐이었죠."

사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긴 했다.

"그냥 팔다리 분질러 놓아도 움직이지 못하긴 마찬가진데 뭘 굳이...."

"그럼 그녀는 왜 이런 짓을?"

카르나크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팔다리 부러진 정도론 정신 지배된 인간들이 멈추질 않으니까 그렇지."

사령술에 의해 지배된 인간들은 어떤 의미에선 좀비와 비슷하다. 육체가 파괴되건 말건 억지로 사지를 움직인다.

정신 지배된 사람들을 최대한 안전하게 구하기 위해 라피셀이 고심 끝에 터득한 신기(神技)인 것이다.

"또 카르나크 님이 원흉이에요?"

"뭐, 그렇지? 이제 와서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네."

"조금 미안한 걸로 끝이에요?"

떠들어 가며 열심히 킹스 오더 대원을 나르고 나니 어느덧 전원을 천막에 눕혔다.

잠들어 있는 이들을 보며 세라티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깨우죠?"

"체내에 박혀 있는 오러를 지우면 도로 깨어나긴 하겠지만...."

카르나크가 바로스를 돌아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

"이참에 푹 쉬게 해 주죠. 오히려 몸에 좋을걸요."

안 그래도 피로가 쌓인 이들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푹 재우면 다음 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마검 마레다도 수거했다.

검을 이리저리 살피며 바로스가 말했다.

"더 이상 마검도 아니군요, 이거."

검에서 흘러나오던 귀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깃들였던 검의 악령이 도망가 버린 탓이었다.

"어쩌죠? 다른 사람들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하긴, 너무 깨끗하긴 하지?"

딱히 해결법이 어렵진 않았다.

너무 깨끗해서 문제라면 도로 더럽히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건 카르나크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지.

"마검의 능력을 원상 복구시킬 수는 없지만, 힘이 소모된 마검처럼 보이게 만들 순 있어."

적당히 사방에서 탁기 좀 모아서 칼날에 발라 주었다.

"그냥 맹물과 김빠진 탄산수의 차이랄까?"

세라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탄산수에서 김빠지면 그게 맹물 아니에요?"

"막상 마셔 보면 의외로 차이가 꽤 나거든, 그거?"

그렇게 뒷정리가 대충 끝났다.

카르나크 일행은 진지 한편에 모닥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제 다들 자연스럽게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요."

별의 위치로 시간을 가늠하며 세라티가 물었다.

"그동안 뭐 하죠?"

아직 동이 트려면 꽤 남았다. 바로스가 눈을 반짝였다.

"밥 먹읍시다!"

어이없다는 듯 세라티가 혀를 찼다.

"...어떻게 만날 밥 타령이에요?"

"원래 밥은 만날 먹는 거거든?"

수저부터 챙기며 당당히 대꾸하는 카르나크였다.

***

아주 작정하고 '마취'당한 킹스 오더 대원들과 달리 라피셀 본인은 그냥 평범하게 쓰러진 상태다.

자연스럽게 남들보다 먼저 정신을 차렸다.

"우우웅...."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눈을 떴다.

세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발의 잘생긴 오빠, 금발의 순하게 생긴 오빠, 엄청나게 예쁘게 생긴 언니였다.

흑발의 잘생긴 오빠가 조심스레 묻는다.

"일어났니?"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라피셀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야?"

어린애다운 앳된 말투였다. 카르나크는 고소를 머금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리고 되물었다.

"넌 누구지?"

누구냐고? 내가?

라피셀은 눈을 깜빡거렸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응."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나?"

"응, 기억 안 나."

카르나크는 내심 안도했다.

'휴우, 기억 봉인은 잘되었군.'

기억도 사라졌고 마검에서 흡수한 오러도 전부 소진했다.

완전히 이 시대의 평범한 소녀로 돌아간 셈이니 더 이상 위험 요소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겠군. 이름이 없으면 부르기 힘들 테니...."

막 그가 가명을 지어 주려 할 때였다.

"라피셀."

"응?"

"나, 라피셀이라고 불렸어. 이건 기억나."

최대한 당황한 티를 억누르며 카르나크는 머리를 굴렸다.

'이름은 왜 기억하지? 정체성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이라 그런가?'

아니면 봉인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어느 쪽이건 확인해 봐야 한다.

"다행이군. 이름을 기억해서...."

말을 이으려던 카르나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라피셀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카르나크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혹시 날 알아?"

"뭐?"

소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나, 당신을 아는 것 같아."

#99화. 25. 로드 바로스 (4)

'날 알고 있는 것 같다라....'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카르나크는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저것만으로 기억 봉인이 실패했다고 볼 순 없다.

일단 침착하게 대꾸한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벌써 며칠째 싸웠던 사이인데 낯이 익은 건 당연하지 않겠나?"

"싸웠던 사이?"

"그래."

라피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거?]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 주죠?]

세라티가 코웃음을 쳤다.

[잘도 사실대로 얘기하겠네요, 두 분이.]

이 작자들의 '사실'이란 게 얼마나 편의적으로 굴러가는지 익히 경험한 바 있다.

어쨌든, 카르나크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킹스 오더에서 조사한 사항을 말해 주마."

정황상 그녀는 원래 시골 마을의 평범한 소녀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다 우연히 마검 마레다와 조우했을 것이고, 마검의 지배를 받게 되었겠지.

이후 마검을 휘두르며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고 킹스 오더와도 싸우고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검이 한 짓이고 라피셀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저 조종당한 상태일 뿐이니까.

당연히 킹스 오더도 지금의 그녀에게 죗값을 물릴 생각은 없다.

"마검의 지배를 받기 전의 네 신분이나 출신은 킹스 오더도 알아내지 못했다."

태연하게 카르나크는 설명을 맺었다.

"솔직히 말하면 굳이 조사하려 들지도 않았지. 마검이 중요한 것이지 네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킹스 오더가 조사한 부분은 저 정도다.

"그렇구나...."

납득하며 라피셀이 중얼거렸다.

"우린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구나."

그리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째서지?"

"음?"

"...당신을 보면 가슴이 뛰어."

잿빛 머리 소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얼굴도 뜨겁고."

들뜬 숨결, 상기된 뺨, 두근거리는 심장.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한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한마디 했다.

[어, 저거 아마도 분노가 아닐까요?]

저걸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격해진 호흡, 흥분으로 빨개진 얼굴, 빨리 뛰는 맥박이란 소리도 되거든.

"그리고 왠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와. 아파."

세라티도 한마디 했다.

[아마도 공포인 듯?]

여전히 라피셀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카르나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카르나크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글쎄. 왜 그런지 모르겠군, 나도."

[왜 몰라요, 흔들다리 효과구만.]

[시끄러.]

당황한 그와 달리 라피셀은 확신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당신은 내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

중요하기야 하겠지.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할 철천지원수니까.

"그래서 말인데...."

부끄러운 듯 잿빛 머리 소녀가 손가락을 꼬며 묻는다.

"...나, 당신 곁에 있어도 될까?"

마치, 갓 알에서 깨어나 어미를 바라보는 새끼 새 같은 얼굴.

순간 카르나크는 미간을 구겼다. 가슴 한편이 바늘로 찔리는 기분이었다.

[크윽, 죄, 죄책감이....]

[축하드려요, 카르나크 님. 드디어 남들 다 느끼고 사는 감각을 느끼셨네요.]

[다른 사람들은 항상 이런 걸 느끼며 산단 말인가? 다들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군.]

[그 정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라피셀은 초조한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애써 태연을 가장해 말했다.

"네 거취는 킹스 오더가 정할 문제다. 그 전엔 내가 뭐라 확답할 수 없어."

"그렇구나...."

실망한 듯 라피셀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졸려."

하긴, 그토록 날뛰었으니 피로가 쌓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녀의 육체는 아직 단련하지 않은 어린아이일 뿐이다.

"좀 더 쉬렴."

다정한 세라티의 말에 라피셀이 무너지듯 잠들었다.

"응...."

그녀를 곱게 눕힌 뒤 세라티가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난처해하며 카르나크가 바로스에게 물었다.

"라피셀이 벨티아의 제자가 되는 게 언제지?"

타인의 개인사를 바로스가 어찌 알겠냐마는, 라피셀의 경우는 꽤 유명하다.

"아마 16살인가 그랬을 겁니다."

무릇 무술은 5~6살부터 시작해야 제대로 기틀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16살이면 무술에 입문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인 것이다.

그럼에도 라피셀은 검을 익힌 지 고작 2년 만에 오러를 각성, 10년 뒤에는 당대 무왕 벨티아 크로테움의 모든 걸 전수받고 20년 후엔 무려 새로운 무왕의 일원이 되었다.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일화였다.

"라피셀이 지금 몇 살일까?"

"글쎄요. 여자애들 나이는 도통 구별이 안 가서."

비교적 상식인인 세라티가 대신 답해 주었다.

"대충은 알 수 있어요.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듯하니까요."

귀족이나 잘사는 집 자식과 달리, 평소 영양이 부족한 일반 평민들은 사춘기도 늦게 온다.

"아마 열서너 살 정도일 거예요."

"역시 이런 건 세라티가 잘 아네."

원래대로라면 라피셀은 2년 뒤 무왕 벨티아를 만나 그녀의 제자가 될 터.

"어쩌실 겁니까, 도련님? 운명대로 따라가게 놔둬요?"

"아니, 당분간은 곁에 둬야 해."

아까는 당황해 얼버무렸지만, 카르나크는 어차피 라피셀을 데리고 있을 계획이었다.

"봉인이 잘되었는지 확인해야 하거든. 다시 기억 돌아오면 큰일이잖아."

"그건 그러네요."

세라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나크에게 그 생지옥을 겪은 미래의 라피셀이 부활하면 무슨 일이 터지는지는 그녀도 익히 봤다.

"그런데 용케 죽여서 후환을 제거하겠단 생각은 안 하시네요?"

말하다 말고 아차 싶어 말을 덧붙인다.

"물론 그건 예전처럼 사는 것이니 안 하시겠죠, 네."

실소하며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죽일 순 없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까."

지금의 라피셀은 미래의 라피셀이다. 카르나크, 바로스와 마찬가지로 시공 회귀했다.

"얘가 어떻게 우리처럼 시공 회귀를 한 건지 알아내야 해."

이 역시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알아내려면 봉인된 라피셀의 기억을 훑어봐야 하는데, 그 와중에 만약 기억이 돌아온다면 매우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저처럼 권속으로 만드는 건요?"

"마찬가지로 위험하지. 영혼 잘못 건드렸다가 기억 되살아날 가능성도 없진 않거든."

필요한 정보만 따로 빼낼 방법이 생길 때까진 곁에 두고 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잠든 라피셀을 바라보며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가만 있자, 무슨 핑계로 얘를 데리고 다닌다?"

***

다음 날 아침, 지켄을 비롯한 킹스 오더 전원은 별 후유증 없이 정신을 차렸다.

당연히 간밤의 일을 궁금해했고, 그래서 카르나크는 적당히 거짓과 사실을 섞어 설명을 해 주었다.

마검에서 해방되고도 저 소녀가 그렇게 엄청난 힘을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알고 보니 킹스 오더가 눈치만 못 챘을 뿐, 실은 마검의 악령이 소녀에게로 옮겨졌던 것 같다.'

그럼 다른 대원들이 몽땅 쓰러질 때까지 카르나크 일행이 모습을 감춘 이유는 무엇인가?

'마검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소녀의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따로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무슨 준비였나?

'20기의 골렘이었다.'

골렘을 20기나 다룰 수 있단 말인가? 마법으론 불가능한 일인데?

'그래서 일단 자리를 피한 것이다. 다른 킹스 오더가 시간을 벌어 주는 사이 골렘 소환진을 준비했다. 그리고 소녀를 유인해 순차적으로 골렘을 투입시켜 상대했다.'

그렇군. 한 번에 20기를 다룰 순 없어도 5기씩 차례대로 소환하는 것은 가능하겠구나.

'그렇다. 자, 이게 그 전투 흔적이다.'

훌륭한 작전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마검의 소녀가 강력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겠군.

'아니다, 매우 힘들었다. 다른 킹스 오더들이 힘을 빼 놓지 않았다면 우리도 당했을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였고, 실제 전투 흔적도 설명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다들 납득하고 넘어갔다.

다음은 마검 마레다의 뒤처리.

성직자들이 회수한 마검을 신성력으로 면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확실해요."

"검의 악령은 사라졌습니다. 이건 이제 평범한 검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다룰 수는 없으니, 절차에 따라 마검 마레다는 왕도의 대신전으로 옮겨져 추가 조사를 하게 되었다.

숙주였던 잿빛 머리 소녀, 라피셀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어졌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 아이의 몸에는 아무런 사특한 기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시골 소녀일 뿐입니다."

카르나크가 물었다.

"혹시 이 아이도 왕도의 대신전에서 추가 조사를 받아야 합니까?"

메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절차는 없습니다."

마검 마레다와 달리 소녀는 흔해 빠진 인간 숙주였을 뿐이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검의 지배를 받았다면 비슷한 행동을 보였을 것이다. 딱히 수상한 점이 없단 소리다.

"그럼 이제 저 아이의 거취는 어찌 됩니까?"

"인근 신전에 맡겨져 성인이 될 때까지 몸을 의탁하겠지요."

안쓰러운 듯 카르나크가 말했다.

"앞으로의 삶이 쉽지 않겠군요."

평민 출신인 메이리가 희미한 비웃음을 띠었다.

"귀족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원래 평민들의 삶은 쉽지 않답니다."

비웃음은 이내 사라졌다.

카르나크가 예상 못 한 발언을 한 탓이었다.

"제가 거두어도 되겠습니까?"

"저 아이를요?"

그녀가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순간의 동정심이라면 말리고 싶은데요."

어린 여자애를 성인 남자가 거두는 건 의혹을 사기 쉽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의혹을.

물론 카르나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라티 경이 그러는데, 저 아이가 검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더군요."

기다렸다는 듯 세라티도 나섰다.

"제가 거두어 종자로 키울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메이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다.

"오러 유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사전에 카르나크와 세라티가 상의한 부분이었다.

"그녀를 굳이 제 종자로 거둘 필요가 있어요? 그냥 카르나크 님 하녀로 써도 될 텐데."

"그래야 나중에 라피셀이 재능을 드러내도 어색하지 않을 것 아냐?"

"...쟤한테 검술 가르치게요? 도로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

"상관없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어차피 강해질 테니까. 그냥 옆에서 훔쳐보기만 해도 너보단 세질걸."

"그 정도예요?"

"기억만 잃었지, 영혼은 미래의 무왕이잖아."

배운 걸 잊어버린 것이지, 아예 배우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타인의 전투를 지켜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회복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검술을 가르치는 게 안전해. 라피셀의 성격이라면 혹여 기억이 돌아와도 자기 스승을 벨 리는 없을 테니까."

인연이란 족쇄를 씌워, 혹여 사달이 일어나도 안전장치를 만들겠단 소리였다.

"어쩜 그런 쪽으로만 머리가 도시나 모르겠네요."

"엥? 이것도 혹시 나쁜 짓이야?"

"딱 잘라 나쁜 짓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질이 나빠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솔직히 저라고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네요. 우리를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결국 라피셀은 세라티가 거두게 되었다. 다른 이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여성 오러 유저가 재능 있는 소녀에게 눈독을 들이는 건 꽤나 흔한 일이다. 애초에 여성 검사 자체가 워낙 드무니까.

"안 그래도 안쓰러운 아이였는데 잘됐구려."

"세라티 경 밑에서라면 좋은 기사가 될 수 있겠지."

그렇게 마검 마레다 사건은 정식으로 종결되었다.

끝까지 풀리지 않은 지켄의 의문만을 남긴 채.

"아니, 그래서 마검과 7대대는 무슨 관계였던 건가, 결국?"

#100화. 26. 뒤틀린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