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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80-90

#80화. 20. 왕자의 계략 (4)

왕자의 방을 나서자마자, 자연스럽게 바로스와 세라티가 카르나크를 힐끔거렸다.

"도련님?"

"예전처럼 살지 않는다면서요?"

억울한 듯 카르나크가 눈을 찌푸렸다.

"내가 한 짓 아니거든?"

정말로 그는 알포드를 죽인 적이 없었다.

"내가 그 인간을 죽여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비밀이 있어야 유지를 하지! 그 작자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실제로 알포드는 카르나크 일행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몸 바뀐 내내 왕궁에 갇혀 있었으니까.

"괜히 손썼다가 쓸데없이 의심만 사지. 특히나 마지막으로 만난 게 나라면 더더욱."

알포드가 죽은 건 사흘 후의 일이다. 이미 다른 이들이 심문한 뒤라 카르나크에게 혐의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세라티가 물었다.

"그럼 그때 하신 건 뭔데요?"

멀쩡한 사람 대가리에 침 꽂고 뇌를 이리저리 후벼 팠는데, 누가 봐도 사악함 그 자체였다.

"그건 진짜 별것 아니었고."

알포드 왕자가 어떤 식으로 검은 신의 교단과 손을 잡았는지, 사교도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빼냈을 뿐이다.

"이 정도면 예전처럼 산 건 아니지 않아?"

"...정신 지배에 기억 조작까지 해 놓고요?"

세라티의 반문에 바로스가 슬쩍 카르나크를 변호했다.

"저 정도면 예전처럼 살지 않은 건 맞네요. 죽이질 않았잖아, 무려?"

어쨌건 카르나크가 저지른 게 아니라면 범인은 하나밖에 없다.

세라티가 인상을 썼다.

"검은 신의 교단 쪽에서 손을 썼다는 소리군요."

바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알포드 왕자가 가진 정보를 유출시키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추가로 이쪽의 정보도 손에 넣으려 할 테고."

이 또한 별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미리 손을 쓴 거잖아."

정보를 빼낸 뒤, 알포드의 기억 역시 깔끔하게 날려 버린 것이다.

세라티가 놀라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짐작하셨어요, 카르나크 님?"

"사교도도 사령술사잖아. 사령술사들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뭘."

이제 남은 건 데츠라스 일당의 영혼을 통해 교차 검증하며 쓸 만한 정보를 캐내는 것뿐.

"시간을 두고 천천히 훑어봐야지."

세라티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사람의 영혼인데, 그걸 무슨 서류 뭉치처럼 취급하시는 건 좀...."

"멀쩡하지 않은 사람의 영혼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죄 지은 놈이 죗값 받는 거잖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이 작자들과 어울릴수록 선악의 기준이 자꾸 모호해지는 기분이었다.

빙그레 웃으며 카르나크는 발길을 돌렸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고."

***

늦은 밤, 제도에 위치한 귀족가 저택의 서재에서 20대 중반의 금발 사내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용모에 푸른 눈동자,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인상의 청년이었다.

청년과 마주 선 30대 남자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유스틸 왕국 쪽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휴델 님."

평범한 복색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남자의 정체는 검은 신의 교단에서도 제법 지위가 있는 사령술사였다.

그럼에도 휴델이라 불린 청년 앞에선 시종일관 공손하기 그지없다.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사령술사가 보고를 이었다.

"로이드 왕자는 자신의 몸을 되찾았고, 데츠라스 주교는 순교했습니다."

"젠장...."

휴델은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떤 놈이 훼방을 놓은 거지?'

한 나라의 왕자를 손에 넣기 위해 들인 수고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것이 한 방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뒤처리는 제대로 했겠지?"

"예. 알포드 왕자의 영혼은 제대로 수거되었습니다."

아무리 죽은 자가 말이 없다지만, 사령술 앞에선 오히려 산 자보다 더한 떠벌이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검은 신의 교단에선 특히나 사후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올바른 사령술은 오직 테스라낙을 섬기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

그러나 어설픈 강령술은 뜨내기 사령술사조차도 성공하곤 하니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왕자의 영혼은?"

이어진 휴델의 질문에 사령술사가 검은 진주를 하나 꺼냈다.

"이곳에."

유스틸 왕실은 왕자의 혼이 여신의 곁으로 향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열심히 장례 절차 밟고 있겠지만, 사실 그의 영혼은 이 진주 속에 있는 것이다.

"상황 파악이 끝나면 말끔히 소멸시키겠습니다."

진주를 받아 든 휴델이 이리저리 살폈다.

"달리 써먹지는 않고? 이래 봬도 왕족의 영혼 아닌가?"

"품질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긴, 영혼의 가치는 혈통이나 생전의 지위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지."

사령술의 위력은 영혼 그 자체만으로 결정된다. 어떤 의미로는 매우 공평하게 인간을 대한다고 할까?

진주를 돌려주며 휴델이 질문을 이었다.

"이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이들은?"

"그들도 모두 처리했습니다. 다행히 알포드 왕자가 소수의 측근에게만 상황을 알려 뒤처리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요."

"그나마 뒷수습이라도 제대로 해서 다행이군."

물론 그렇다고 칭찬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휴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유스틸 왕국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데.'

검은 신의 교단이 손을 뻗은 곳은 유스틸 왕국뿐만이 아니다. 전 대륙, 인류의 모든 영역에 골고루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스틸 왕국은 특별했다.

'엘레자르 님께서 특별히 살피라 하신 곳이니까.'

3인의 대마법사 중 1인이자 라케아니아 제국의 황실 마도사, 엘레자르 데 리플라시온.

그녀가 검은 신의 교단을 이끄는 3인의 성인 중 1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실로 극소수다. 그리고 휴델은 그 극소수 중 1명이었다.

엘레자르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

"대륙 동북부 지방 좀 자세히 살펴봐, 휴델."

이 느닷없는 명령에 휴델은 당황했다.

"황송하오나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선 너무 막연한 명령입니다."

다행히 엘레자르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상황이 명확하지 않아서 그래. 뭐랄까, 특이한 사건이 있으면 유심히 지켜보라 정도밖에 말 못 하겠는데."

기밀 사항이라 일부러 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애매한 듯한 눈치였다.

덕분에 휴델도 용기를 냈다.

"그렇다면 조사 범위라도 좀 좁혀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음, 그러니까...."

나른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말을 맺었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닌데 우리가 저지른 짓처럼 보이는 일들을 알아보렴."

***

왜 그런 명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령이 떨어졌으면 충실히 행하는 것이 좋은 수하의 자세인 법이다.

그래서 대륙 동북부에 해당하는 유스틸 왕국과 타룸 왕국을 특별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유스틸 왕국에서 뭔가 사달이 일어난 것이다.

'대체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휴델은 문득 의아해했다.

보고를 마치고도 사령술사가 자리에서 물러나질 않았다.

"아직 뭔가 남았나?"

눈치를 보며 사령술사가 입을 열었다.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문제라니?"

"알포드 왕자의 영혼은 거두었습니다만, 데츠라스 주교의 영혼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순간 휴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뭐?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예? 그, 그건 저도 잘...."

보고하던 이가 오히려 당황했다.

원래 사령술을 펼치다 보면 영혼 잃어버리는 일은 부지기수다. 설마 휴델이 저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할 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저 그의 지식이 아직 미천해서일 뿐.

데츠라스에게 걸린 술법이 어떤 것인지 아는 이에겐 실로 큰 문제였다.

'테스라낙 님의 낙인이 찍힌 영혼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다고? 설마 여신의 개들이 그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

당황한 휴델이 허겁지겁 서재를 나섰다.

"제단으로 가겠다! 강령 의식을 준비하도록!"

당황하며 사령술사도 바로 뒤를 따랐다.

"아, 알겠습니다!"

***

휴델과 사령술사는 저택 지하로 향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나가니 은밀하게 감춰진 석실이 나온다.

살점 덩어리며 검은 점액, 말린 풀과 괴상한 동식물 등 온갖 기괴한 물건들이 사방에 걸려 있고 바닥에 붉은색의 마법진이 그려진 곳이었다.

석실 중앙에 선 휴델이 눈을 감았다 떴다.

푸른 눈동자는 물론이고 흰자위까지 칠흑으로 까맣게 뒤덮인다.

"오라, 신도 데츠라스여...."

그렇게 몇 번이나 초혼을 시도해 보았지만 데츠라스의 영혼은 응답하지 않았다.

'정말이군. 혼이 사라졌어.'

휴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벌써 죽음 저편의 세계, 피안으로 건너간 것일까?

아니, 그건 너무 이르다.

데츠라스의 혼에는 위대한 어둠의 신, 테스라낙의 증표가 찍혀 있다. 평범하게 피안으로 향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영혼을 빼돌렸다는 소리가 되는데....'

휴델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만약 마법이나 신성 주문에 의한 짓이라면?

테스라낙은 죽음과 어둠의 신이다. 그런데 그 죽음의 권능을 마법이나 여신의 신성 주문으로 깼다?

이건 사령술사가 빛 계열, 혹은 치유 술법으로 마법사나 여신의 성직자들을 능가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있어야 그럴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사령술사의 짓인가?'

분명 세상엔 테스라낙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교단과 상관없는 사령술사들도 대거 존재한다. 워낙 종말의 어둠이 많이 뿌려졌으니까.

그들도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들 중 검은 신의 낙인을 지울 정도로 강한 자가 존재하는 걸까?

'모르겠군.'

여하튼 이대로 계속 시도해 봐야 건질 것은 없을 듯했다.

그래서 알포드의 영혼 쪽으로 강령술을 돌렸다.

"일어나라, 이단자 알포드여...."

흑진주 속에 갇혀 있던 영혼이 바로 반응했다.

"으, 으어어어...."

알포드가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반투명한 영체가 되어 나타난다.

영혼을 제압한 뒤 휴델은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리고 더더욱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이건 또 뭐야?!"

알포드의 영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몰라서는 안 되는 부분까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교단과 협력했던 일조차도 모르고 있잖아?"

누군가가 먼저 손을 써서 기억을 지웠다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아주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마법이나 신성술로도 인간의 기억은 지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억을 가지고 노는 건 보통 사령술사들이나 하는 짓이다.

더구나 데츠라스 일행의 영혼 행방불명 사건까지 염두에 두면 더더욱 그렇다.

엘레자르의 명령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닌데 우리가 저지른 짓처럼 보이는 일들을 알아보렴.

강령술을 거두며 휴델이 입을 열었다.

"유스틸 왕국 쪽을 제대로 조사해야겠다."

사령술사가 고개를 넙죽 숙였다.

"누구를 보내시겠습니까?"

휴델은 잠시 고민했다.

"데츠라스 주교를 파견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니...."

교세를 넓히려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탐색하는 것이 목적, 그렇다면 무작위로 소동을 일으킨 뒤 반응을 살피는 것이 제일 합당한 전략이다.

'얼마 전 본단에서 요검(妖劍)을 한 자루 내려 줬었지?'

생각을 정리한 휴델이 말했다.

"그걸 쓰겠다."

사령술사가 흠칫 놀라 반문했다.

"예? 하지만 그건 저희도 제어를 할 수가 없습니다만."

휴델이 싸늘하게 웃었다.

"제어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괴물은 그저 세상에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파문을 일으킨다.

상대가 사령술사건 아니건 분명 반응을 보이리라.

"풍랑이 일면 숨어 있던 암초가 드러나는 법이지."

#81화. 21. 짧은 휴가

10년 넘게 지속되어 온 유스틸 왕가의 암투는 결국 로이드 왕자의 승리로 돌아갔다.

알포드 왕자가 사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왕자의 외척이며 그를 지지하던 세력 역시 붕 뜨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진 않았다. 알포드의 죽음을 두고 명쾌한 조사를 벌여야 한다며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조사를 할수록 알포드 왕자가 사교도와 손을 잡았음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사교도들이 확실히 꼬리 자르기를 한 탓에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알포드와 그의 측근들이 검은 신의 교단과 어울렸던 정황은 계속 튀어나왔다.

더구나 측근이 아니었던 이들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바보도 아닌데 왕자가 뒤로 딴 꿍꿍이 꾸미고 있다는 걸 모를 순 없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간 거지.

결국 이렇게 결론이 났다.

저 흉악한 사교도들이 알포드를 속이고 알차게 뒤통수를 쳤구나!

왜냐고?

그야, 누가 봐도 강력한 왕이 될 알포드 왕자가 사라지고 허약해 빠진 로이드가 왕이 되면 사교도들이 이 나라를 장악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로이드 왕자도 굳이 모든 진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육체가 바뀌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철저히 감춘 채,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골방 속의 샌님인 양 행세했다.

카르나크의 조언 때문이었다.

"육체가 바뀌었었다는 사실을 숨기라고? 어째서?"

"로이드 왕자님의 영혼도 사령술에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가 되니까요. 괜히 오해 살 일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난 사교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들은 사령술과 얽혔다는 이유만으로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텐데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나는 사교도가 택할 정도로 만만한 왕자가 되지 않나?"

"그럼 무슨 문제라도 생깁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왕자님이 또 계신다든가?"

"아, 그렇군."

알포드가 죽었으니 이제 로이드는 유스틸 왕국의 유일무이한 후계자다. 만만하건 허약하건, 그를 대체할 자가 존재치 않는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알아서 일이 잘 풀릴 거란 소리군. 이해했다, 카르나크 경."

여러모로 카르나크 일행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로이드 왕자는 어떻게든, 가능한 한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정녕 바라는 것이 없나? 내 힘이 닿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보겠네."

카르나크는 시큰둥한 태도로 대꾸했다.

"나중에 사교도들 상대할 때 뒤처리나 좀 도와주시면 됩니다. 이번처럼 귀족이나 왕족이 얽혀 있으면 골치 아프거든요."

정말이지 사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답변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원하는 걸 주도록 하지."

미리 준비한 듯 로이드가 품에서 황금 인장을 꺼냈다.

"이게 뭡니까?"

"그대가 내 대리인이며, 내 명을 받들어 움직인다는 증표일세. 이것이라면 사교도 사냥이 좀 더 편해지겠지?"

편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왕자를 등에 업고 권력을 멋대로 휘두를 수도 있다.

사실 이렇게 쉽게 건넬 물건은 아니다.

"이런 걸 함부로 주셔도 되는 겁니까?"

"내가 봐 온 그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뭔가 사람 잘못 본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카르나크는 저걸 휘두를 생각이 없었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심드렁하게 카르나크가 인장을 받아 챙겼다.

"뭐, 있으면 편하긴 하겠군요."

서운한 듯 로이드가 눈을 흘겼다.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하긴, 그래서 나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이긴 하네만."

***

이번 사건에서 카르나크 일행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로이드 왕자를 구했을 뿐 아니라, 오랜 왕가의 암투를 끝내고 왕국을 안정시켰다.

"아쉬운 건 대외적으로 알리질 못해 딱히 포상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군."

에란텔 단장의 말에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겠죠. 공식적으로 전, 로이드 왕자의 명을 받들어 미친 알포드 왕자를 막은 게 전부니까요."

"달리 원하는 건 혹시 없나?"

"그럼 밀린 휴가나 좀 쓰게 해 주시죠."

"휴가? 자네가?"

에란텔은 의아해했다.

워낙 바쁘게 사는 킹스 오더 중에서도 카르나크는 유독 사교도 사냥에 매달리기로 명성이 높았다.

킹스 오더가 된 이래 거의 쉬지 않고 매번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주위에서 좀 쉬어라, 7대대원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등의 충고를 할 정도였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쓰게나. 하지만 어쩐 일로?"

"이번 일은 꽤 힘들었으니까요.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 자네들도 사람이긴 했구먼."

흔쾌히 에란텔은 휴가 서류에 서명을 남겼다. 그리고 카르나크 일행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보냈다.

"그럼 푹 쉬게나."

집무실을 나서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싱글벙글 웃었다.

"오, 사람답단 소리 들었다."

"그러게요, 우리도 많이 변하긴 했나 봐요!"

당연히 세라티는 어이없어했지만.

"...그게 그런 뜻이 아닐 텐데요?"

하여튼 재정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에 붙잡은 사교도들의 영혼은 워낙 지닌 정보가 많다. 시간을 들여 차분히 심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카르나크는 특별히 수도 외곽 숲의 오두막 하나를 빌렸다.

원래는 사냥철 귀족들이 사용하는 곳이라 평소 인적이 거의 없어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가자. 으슥한 데 틀어박혀서 샅샅이 좀 훑어봐야지."

***

오두막에 도착한 뒤 카르나크 일행은 바쁘게 움직였다.

바로스는 오두막을 정리하며 한동안 머무를 채비를 했고, 세라티는 카르나크를 돕기 위해 지하로 향했다.

식자재를 보존하는 지하실을 싹 치운 뒤, 사령결계를 펼쳐 본격적으로 강령술을 펼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웬일로 이번엔 준비가 기네요, 카르나크 님?"

세라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평소엔 그냥 쉽게 영혼 부르시지 않았어요?"

"영혼이야 지금도 쉽게 부를 수 있어."

데츠라스와 케일, 올트의 영혼은 이미 완벽하게 제압했다.

망혼의 호롱에 잘 보관해 놓았으니 그냥 필요할 때 꺼내기만 하면 된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이번엔 파악해야 할 정보가 좀 많아서 말이지."

세상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듯, 강령술에 의한 심문이라고 산 자를 고문하는 것에 비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문제는 강령술의 부작용.

죽은 자를 불러 심문하는 것은 시전자의 영혼을 사악하게 물들이는 행위이니 자칫하면 오히려 사령술사가 광기에 휩싸이게 된다.

물론 카르나크에겐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다. 악령이 오히려 카르나크를 들여다보고 미쳐 버릴 정돈데?

두 번째 문제는, 좋은 질문을 해야 좋은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산 사람은 아무리 고문을 해도 반드시 진실을 토하란 법이 없다. 의지 견정한 이라면 극심한 고통조차 이겨 내며 심문자를 속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 죽은 자는 결코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명령한 대로, 충실하게 진실만을 토한다.

"죽은 자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 의지가 없다는 게 반드시 장점만은 아닌 것이다.

"포괄적인 정보를 얻고자 할 땐 의외로 살려서 고문하는 게 더 나을 때가 많아."

산 자를 붙잡아 놓고 '아는 거 전부 불어!'라고 닦달하며 고문을 계속한다 치자.

그럼 정말 있는 말, 없는 말 다 내뱉게 되는데, 그 와중에 건지는 정보가 상당하다.

게다가 본인의 '의지'로 떠드는 것이니 어느 정도 정보를 축약, 정리해서 내뱉기도 한다.

이쪽은 느긋하게 듣고 있다가 조금씩 조율(그러니까 손톱을 살짝 뽑아 준다거나 하는 거)만 해 줘도 된다.

"반면 강령술로 소환한 영혼은 충실하게 명령에 따르지."

아는 거 전부 불라고 하는 순간 정말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두서없이 토해 내는 것이다.

"세라티도 어둠사냥꾼 시절 많이 봐서 알 거 아냐? 악령들이 얼마나 두서없이 떠드는지."

"아, 그런 문제군요."

하늘은 파랗다, 태양은 빨갛다 등등의 온갖 헛소리까지 내뱉는 형국이다.

그래서 영혼을 심문할 땐 명확하고 적합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

괜히 카르나크가 데츠라스 특유의 술법, 마법과 사령술이 융합된 골렘을 정신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최대한 사전 정보를 파악해야 나중에라도 추가 정보를 빼내기 쉬워지거든."

그렇게 파악한 사전 정보를 통해 일일이 질문을 골라 일일이 캐물어야 하니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사교단에 대해 알아내야 할 게 많잖아. 아마 며칠은 각오해야 할 거야."

설명을 마친 뒤 카르나크는 망혼의 호롱에 손을 가져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짙은 사기와 함께 음산한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일어나라, 나의 종, 데츠라스여...."

어둠이 피어오르며 희끄무레한 영혼이 나타나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명을 받드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

휴가를 받고 숙소를 숲속 오두막으로 옮긴 지 닷새째.

카르나크는 꾸준히 강령술을 펼쳐 데츠라스 일행의 영혼을 심문했다. 그리고 검은 신의 교단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데츠라스는 사교단에서도 제법 지위가 높았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꽤나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 냈다.

"암흑 추기경, 휴델 그렌탈이라...."

추기경이라는 직위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사교도들이 자신들도 종교 집단이라며 기존 7여신교의 직위를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니까.

중요한 건 사교단의 중추부에 접근할 직접적인 정보를 얻었다는 점이다.

"20대의 잘생긴 청년에 제국 출신, 서부 접경 지역이 본거지란 말이지?"

이것만으로 바로 휴델이란 자를 찾을 순 없겠지만, 탐색 범위를 크게 좁힌 것은 사실이다.

"나중에 킹스 오더 돌아가서 추가로 조사해 봐야겠네."

그 외에도 건진 것이 제법 많았다.

데츠라스가 구사했던 마법과 사령력의 융합, 이 전대미문의 수법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다.

"이거, 내 혼돈마법이랑 다른 방향으로 사령력을 조율한 방식이었군."

카르나크는 사령력에서 사기와 탁기를 지워 혼돈마력을 만들어 냈다.

이 수법은 방향성이 정반대다.

마나에 사기와 탁기를 퍼부어 사령력과 흡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령력 같지만 사령력은 아닌데, 또 사령력이 아니라고 하기엔 한없이 사령력에 가까운 제3의 마력이라고나 할까?

이 상태라면 마법과 사령술을 융합해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술식의 오묘함에 카르나크는 새삼 감탄했다.

"이건 진짜 고난이도의 마법인데?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다."

과거의 그는 사령술의 극에 달한 자였다. 그래서 그 지고의 경지를 통해 사령술을 혼돈마법으로 바꿀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는 마법의 극에 달한 자가 지고의 경지를 통해 마법을 사령술로 바꾼 케이스였다.

"현시대에 이게 가능한 마법사는 얼마 없는데."

10서클의 추구자, 3인의 대마법사거나 그 수제자 정도만이 가능한 수준의 마법이다.

옆에서 보조하던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안 되지 않아요? 그 양반들이 뭐가 아쉬워서 사령술에 손을 대요?"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론상으론 바로스 네 말이 맞긴 한데...."

이 기현상은 마법 관련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러와 사령력, 신성력과 사령력의 융합 역시 본 바 있다. 전부 검은 신의 교단과 얽혔을 때의 일이다.

이 방식대로 사령력과 다른 기운을 융합시키려면 한 가지 대전제가 필요하다.

사교도 중에 사령술을 익힌 궁극의 오러 유저, 사령술을 익힌 궁극의 성직자, 사령술을 익힌 궁극의 마법사가 존재해야 한다.

7여신교의 교황이나 4대 무왕, 3인의 대마법사쯤 되는 존재가 사령술에 매진한 뒤 사교단에 뛰어들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얼핏 지나친 비약처럼 보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온 세상을 정복한 언데드 두 놈이 모든 힘과 권세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온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니고?"

"...그것도 그러네요."

뭔 일 생길지 모르는 게 세상사인 법.

고난이도의 마법 술식이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리 황당한 추론이라도 무시할 순 없다.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되도록 비약으로 끝났으면 좋겠군요. 그 작자들이랑 다시 싸우긴 싫은데."

"그건 동감이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좀 더 힘을 키우긴 해야겠지."

카르나크는 내심 예전에 정해 놓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수준'을 또 한 단계 올렸다. 그리고 투덜거렸다.

"거참, 소시민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싶은데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리지?"

"자업자득이라는 속담을 아시는지요?"

"시끄러."

어쨌든 술식 자체로도 공부가 되었다. 특히나 운용법 면에선 건진 것이 매우 컸다.

카르나크가 양손을 들었다.

왼손에 혼돈마력, 오른손에 사령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 방식이라면 나도 마법에 사령술을 응용할 수 있겠어."

#82화. 21. 짧은 휴가 (2)

휴가 열흘째.

오랜만에 카르나크는 지하실에서 나와 오두막 뒤뜰로 향했다.

술식 해석 및 응용 작업에 어느 정도 진척이 생겨, 실제로 마법에 적용해 보기 위해서였다.

몸을 푸는 그를 보며 바로스가 물었다.

"오래 걸리셨네요."

"응? 뭐가?"

"술식 해석요."

워낙 잘난 인간이라 데츠라스의 마법 따윈 순식간에 익혀 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닷새가 넘게 매달리지 않았나?

"도련님은 궁극의 사령술사시잖아요. 그런데 아직 남들에게 배울 게 있어요?"

"사령술이야 더 배울 거 없지. 내가 제일 잘났는데."

배움을 얻은 건 마법 술식 쪽이었다.

카르나크의 마법 실력도 물론 상당히 뛰어난 편이지만, 사령술처럼 절대적인 경지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사실 그렇게 오래 걸린 거 아니거든! 나니까 닷새밖에 안 걸렸지, 다른 마법사였으면 몇 달은 걸렸을걸."

카르나크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럼 어디 시험을 해 볼까."

차분히 혼돈마력을 운용해 마법을 구사한다.

"일어나라, 대지의 혼이여!"

쿠우우웅!

뒤뜰 일부가 솟구쳐 뭉치며 커다란 흙인형이 되었다. 골렘 소환 주문이었다.

지켜보던 바로스가 눈을 빛냈다.

"오, 이제 저 골렘에 데스 아머를 덧씌우는 겁니까?"

데츠라스의 수법을 재현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못해."

혼돈마법과 데츠라스의 술식은 방향성이 정반대다. 데스 아머 골렘처럼 마법과 사령술을 융합하는 식으로 구사할 순 없다.

"엥? 그럼 뭘 새로 익히셨다는 건데요?"

카르나크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튀겼다.

"이런 거."

다시 한번 굉음이 일었다.

쿠우우웅!

굉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쿵! 쿵! 쿠쿠쿵!

계속해 뒤뜰 여기저기에서 소음과 함께 흙더미가 뭉쳐 솟구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커다란 흙인형이 되어 대지에 우뚝 선다.

"어라?"

"어머?"

바로스와 세라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뒤뜰에는 20기나 되는 골렘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어떻게?"

"저게 저렇게 많이 부를 수 있는 거였어요?"

카르나크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마법만으로는 불가능하지."

수준이 비슷하다면 사령술사의 소환술이 마법사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이것이 세상의 상식이다.

수십, 수백의 좀비나 스켈레톤을 부리는 사령술사는 솔직히 크게 신기하지 않다.

하지만 골렘 수십, 수백 기를 다루는 마법사를 본 적이 있나?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라도 골렘 3~4기조차 다루기 벅차하는 것이다.

"대마법사조차도 다루는 골렘의 숫자를 대폭 늘릴 순 없어. 왠지 알아?"

"왜요?"

"골렘은 매번 마법사가 직접 조종 술식을 짜 넣어야 하거든."

마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집중력과 연산력의 문제다.

"그래서 마법사는 골렘 수십 기를 동시에 다루는 것보다, 수십 기의 힘을 지닌 슈퍼 골렘 하나를 만드는 쪽을 선호하지."

반면 사령술사는 정반대였다.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는 사령술사가 직접 조종 술식을 짜 넣을 필요가 없다.

"시체의 잔존 사념이 조종 술식을 대체하니까."

그냥 일으키기만 하면 끝이다. 연산력이나 집중력 등은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령력만 허용하면 수백, 수천의 언데드도 펑펑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두 방식을 혼용했다."

소환한 20기의 골렘을 가리키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골렘 1기 소환할 때마다 잔존 사념을 하나씩 넣어 주고, 혼돈마력을 사령술처럼 운용해 움직이는 거야."

이게 그가 얻은 새로운 힘이었다.

사교도들처럼 마법과 사령술을 융합할 수는 없다. 방향성이 전혀 다르다.

"솔직히 할 필요도 없고. 내 수준에 무엇 하러 그런 짓을 해?"

그쯤 되면, 마법과 사령술을 융합하는 것보다 그냥 사령술을 쓰는 게 차라리 더 낫다.

"하지만 이 방식이면 꽤나 쓸모가 있지."

카르나크가 다른 주문을 준비했다.

사령술의 운용 방식으로 혼돈마법이 발동한다. 등 뒤로 수십 개의 검은 광구가 떠오른다.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그냥 작렬의 마탄 아니에요? 색깔만 다르고."

"겉보기엔 그렇지."

두고 보라며 카르나크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칠흑의 마탄!"

수십 개의 마탄이 숲 여기저기를 강타하며 폭음을 일궜다.

콰콰콰콰콰쾅!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실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제야 이해한 세라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마법의 강점은 강력한 파괴력.

사령술의 강점은 극히 효율적인 마력 소모와 간단한 연산에 의한 연속 폭격.

칠흑의 마탄은 저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사령술과 마법의 장점만을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기존의 마법사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사실 난이도는 몇 배나 높거든."

다른 마법사가 이 방식을 쓰려면, 여태 익혀 온 마법 외에 사령술 운용법도 따로 익혀야 한다.

그런 시간 낭비를 할 바엔 그냥 기존의 효율적인 마법을 구사하는 게 백배 낫다.

하지만 카르나크는 세상에서 가장 사령술을 잘 쓰는 인간이었다.

"쉽고 어색한 방법보다, 어려워도 익숙한 방법이 낫지."

무엇보다 최고 장점은 따로 있었다.

"이거, 겉보기엔 여전히 마법으로밖에 안 보이지?"

잔존 사념을 넣는 것이지 영혼을 넣는 게 아니다. 골렘에 사기나 탁기가 묻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 골렘을 수십 기씩 다룬다 해서 사령술사라고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천재 소환술사가 나타났다고 감탄하면 했지.

칠흑의 마탄 역시 마찬가지.

사기도 탁기도 느껴지지 않으니 그냥 머리 좋은 마법사가 마탄 많이 쏘는구나 정도로만 여길 것이다.

여러모로 흡족한 결과였다.

"시간을 들이면 계속 전용 술식을 늘릴 수 있을 것 같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정말 좋은 공부가 됐어."

마력을 가라앉히며 카르나크는 뿌듯해했다.

지켜보던 바로스가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좋으시겠수, 난 여전히 오러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는데."

"아, 그거 말인데."

그제야 생각난 듯 카르나크가 고개를 돌렸다.

"네가 왜 오러를 각성 못하는지도 대충 알겠더라."

"엥? 어떻게요?"

납득할 수 없었다.

무인이 아닌 카르나크가 바로스도 모르는 오러의 비밀을 파악했다고?

"응. 이번에 사교도들 심문하다 깨달은 건데...."

어이없다는 듯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바로스 너, 사령술사였더라?"

황당해하며 바로스가 눈을 깜빡였다.

"...제가요?"

***

전생 때나 지금이나 바로스는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몸이 좋은 덕에 머리가 고생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단 소리다.

평생 책을 멀리하며 살았다.

카르나크가 워낙 닦달을 해 그나마 글자 정도는 읽을 줄 알았지만, 그래 봤자 검술서나 무술서를 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제가 무슨 사령술사예요?"

"제대로 된 사령술사란 소린 아니고...."

머리를 긁으며 카르나크가 설명을 이었다.

"생각해 봐. 우리가 그동안 잡았던 어둠의 군주님들은 뭐, 제대로 된 사령술사였냐?"

바로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종말의 어둠 믿고 멋대로 날뛰던 작자들도 사령술사이긴 했네요."

사령술은 마법과 다르다. 지식과 지혜가 있으면 좋긴 하지만, 없다고 전혀 힘을 쓸 수 없지는 않다.

글자조차 못 읽는 까막눈 사령술사도 존재할 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 종말의 어둠 같은 걸 취한 적이 없는뎁쇼? 아니면 혹시 모르는 사이에 어둠에 물든 적 있어요, 저?"

그렇다면 실로 억울하다! 기껏 회귀한 뒤 얼마나 건강에 신경을 쓰며 살았는데?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네 육체는 멀쩡해. 문제는 영혼 쪽이지."

마나와 오러, 신성력과 사령력.

이 기운들은 한번 터득하면 돌이킬 수 없다. 체내에 쌓아 권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시전자의 영혼과 육체가 그 방식에 최적화되기 때문에.

그렇다.

'영혼'과 '육체'다.

"육체에서 기운만 지운다고 완전히 리셋되진 않는다는 소리야."

아무리 바로스가 풋내기 시절의 육체로 돌아왔다 해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사령왕을 보필한 데스 나이트 로드인 것이다.

"...그러니까 데스 나이트였지 사령술사는 아니었잖아요."

"바로스, 네 주특기가 뭐였냐? 빙의랑 암흑 투기였지?"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기운을 훔쳐 쓰거나, 아니면 아예 타인의 기운을 뽑아 어둠의 힘으로 바꾸는 행위에 통달한 자.

"이걸 사령술사라고 안 부르면, 대체 뭐가 사령술사인 건데?"

바로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듣고 보니 납득이 간다.

카르나크가 그렇게나 썩어 빠진 놈이었는데, 100년 동안 옆에 붙어 다닌 놈이 안 썩었을 리 없잖아?

"가만, 그럼 도련님은 어차피 사령술사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였어요?"

분명 카르나크는 사령력을 터득한 이후로만 회귀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마법이나 다른 걸 못 익히고 혼돈마법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그런데 사실은 사령력이 있건 없건 이미 영혼이 사령술사라 다른 건 못 익히는 거였다고?

"꼭 그렇진 않아."

실은 이것이 그동안 카르나크가 이 문제를 미처 깨닫지 못한 이유였다.

육체에 기운이 쌓인 후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영혼의 경우엔 그냥 과거의 버릇이 남아 있는 것일 뿐이다.

영혼의 버릇을 지우면 새 출발도 할 수 있으니, 무의식중에 무시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까 저 버릇 고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더라고."

오러를 터득하는 행위를 색깔놀이로 비유해 보자.

평범한 사람들의 영혼이 흰색이고, 오러를 다루는 영혼이 붉은색이라면?

오러를 터득하는 과정은 영혼에 붉은 염료를 붓는 것이 된다.

그런데 현재 바로스의 영혼은 파란색인 셈이다.

"파란색에 붉은 염료 부어 봤자 보라색밖에 더 나오겠어?"

이래서는 아무리 기존 방식으로 연습해도 원하는 결과가 나올 리 없다.

일단 영혼을 흰색으로 만들고 나서야 기존 방식대로 오러를 각성할 수 있겠지.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고 있었던 셈이지."

바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상황이 이해가 갔다.

"저만의 고유한 오러 각성 방식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군요?"

"그렇지."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기대에 찬 바로스의 시선을 외면하며 카르나크가 딴청을 피웠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칼잡이냐? 네가 칼잡이지."

"윽...."

실망한 바로스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애초에 카르나크는 사령술사일 뿐이다. 당연히 사령술 관련 문제점만 짚어 줄 수 있다.

"해답은 제가 찾는 수밖에 없겠군요."

***

카르나크 일행이 받은 휴가는 총 20일.

그 기간 동안 카르나크는 알찬 시간을 보냈다.

마법과 사령술을 혼용하는 새로운 수법을 개발하고, 그동안 무식하게 늘려 온 혼돈마력을 안정화시키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마법사로서의 실력도 크게 늘었다.

경지는 여전히 6서클이지만 마법의 위력과 효율이 크게 오른 것이다.

실제로 전투에 돌입하면 어지간한 7서클 마법사와 붙어도 밀리지 않을 터였다.

세라티 역시 충실하게 심신을 재정비했다.

강자와의 전투를 되새기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꾸준히 바로스에게 가르침을 받아 가며 오러를 연마했다.

그저 바로스만 속 터질 지경이었다.

"문제를 파악한 건 좋은데, 도무지 답을 모르겠구만요."

영혼에 안 좋은 버릇이 들었으니 그 버릇을 지우라고? 그러니까 그게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전생 때 터득한 검술의 지식과 지혜도 이 경우엔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경우 자체가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남들과 다른 길을 걸으면 이게 문제다. 문제 생겼을 때 참조할 것이 없다.

결국 아무 감도 잡지 못한 바로스였다.

"아오, 나만 제자리네."

휴가 기간이 끝나자 카르나크 일행은 킹스 오더 본부로 돌아왔다.

7대대의 부하 중 1명이 황급히 그를 맞이했다.

"카르나크 대장님! 이제야 돌아오셨군요!"

어째 평소와 달리 긴박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안색을 굳히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예, 왕국 남부, 제텔바 지방의 일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원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피를 마시는 마검이 나타났습니다. 검 쥔 자를 홀려 살인귀로 만드는 마물이라고 합니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의아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피를 마시고, 사용자를 홀려 살인귀로 만든다고?]

[그냥 흔해 빠진 물건 아니에요, 도련님?]

[응. 별것도 아닌데 왜 이리 난리지?]

대원이 잔뜩 굳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5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에란텔 단장님도 이 건을 심각하게 여기고 계시고요."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500명? 열흘 만에?"

"고작 마검 한 자루로요? 그게 말이 되나?"

#83화. 22. 마검 출현

열흘 전, 제텔바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마레다에서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 주민들은 물론이고 키우던 가축들까지 모조리 죽어 버린 것이다.

특기할 부분은 주민과 가축 전부 피가 빨려 미라처럼 말라 있었다는 점.

흡혈귀, 혹은 그에 준하는 마물의 출현이라 여기고 인근 신전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역시나 피를 빨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체불명의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마레다 마을을 시작으로 고작 닷새 만에 4개 마을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그 피해가 무려 수백에 달했으니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제텔바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인 아첸바트 시티에서까지 피해자가 대거 생겼다.

도시쯤 되니 아무리 괴물이라도 마주친 모든 이들을 죽여 버릴 순 없었다.

힘이 부칠 때까지 살육을 저지른 뒤 도망쳤고, 그 와중에 다수의 목격자가 나왔다.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여신교단도 학살의 주체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무수한 살육을 저지른 괴물의 정체는 기괴한 형태의 양수검을 든, 고작해야 열서너 살 정도의 작은 소녀였다.

예전이었다면 저런 하찮은 소녀가 어찌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대륙 곳곳에서 종말의 어둠이 창궐해 온갖 사령술이 판을 치는 시절이었다.

교단은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했고, 이내 소녀를 지배하고 있는 마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긴, 워낙 가공할 사기와 혈기를 풍기고 있었으니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겠지만.

목격자들의 증언, 현장에 남아 있는 흔적과 기운 등을 조사해 옛 문헌 기록들과 교차 검증하면 꽤나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을 숙주로 삼아 힘을 발휘하는 요검으로 판단됩니다.

-블러드 이터 계열의 마검으로 보입니다.

사악한 힘을 지닌 유물을 뿌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짓은 사교도들의 주특기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짓이라기엔 지나치게 학살의 간격이 짧고 범위가 넓었다. 조직적인 활동일 가능성이 컸다.

자연히 여신의 교단은 검은 신의 교단을 의심했다.

상대가 사교도라면 킹스 오더의 몫.

수도 드룬타로 연락이 갔고, 5대대가 임무를 맡아 움직이게 되었다.

***

"...그리고 엊그제 연락이 왔지. 5대대가 몰살당했다더군."

한숨을 쉬며 에란텔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본부가 발칵 뒤집혔더라니...."

이들이 서 있는 곳은 킹스 오더 본부의 특별 회의실.

에란텔 단장을 비롯해 1대대와 7대대의 중추가 모인 곳이었다.

5대대의 궤멸은 킹스 오더 창립 이래 최악의 사건이다.

이런 일이 터졌으니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그래서 킹스 오더 최강이라는 1대대와,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7대대가 함께 소환된 것이다.

1대대의 대장 지켄과 그의 부관인 트리브, 해리스.

7대대의 대장 카르나크와 그의 부관인 바로스, 세라티.

모두를 둘러보며 에란텔 단장이 말했다.

"자, 다들 상황은 이해했겠지?"

40대 중반의 마른 사내, 지켄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예상을 크게 상회하는군요."

여신 교단에서는 마검의 능력을 레드 나이트 중 상위급 정도로 예상했다. 그간 벌인 학살을 토대로 내린 추론이었다.

비슷한 연배의 기사, 트리브도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5대대도 결코 약하지 않거늘...."

1대대의 대장인 7서클의 마법사 지켄과 부대장인 청색급 오러 유저, 트리브.

둘 다 유스틸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1대대가 킹스 오더 최강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보기에도 마검의 위력은 지나치게 높았다.

"단신으로 5대대를 모조리 쓰러뜨렸다라.... 트리브, 자네라면 가능하겠나?"

"무리지. 단시간에 수백 명을 학살하는 건 여건이 허락한다면 어찌 가능하겠지만."

어차피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한 학살이다. 개인의 강함보다는 기동성과 지구력의 문제이니 아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뒤를 받쳐 줄 때의 이야기다. 사람인 이상 먹고 자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아닌가?"

반면 마검에 홀린 상태라면 의식주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터.

"하지만 5대대를 상대로? 어림도 없지."

에란텔을 돌아보며 트리브가 물었다.

"단장님이라면 가능하시겠습니까?"

평소라면 겸손을 떨었겠지만 지금은 상대의 전력을 파악해야 하는 자리다. 쓸데없는 겸양보단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에란텔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전력을 다하면 가능할 것 같긴 하군. 하지만 나 역시 무사하다는 보장은 없다네."

보고에 따르면, 마검의 소녀는 전투를 벌이고도 별 상처 없이 자리를 떴다고 한다.

회의실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킹스 오더의 단장 에란텔은 유스틸 왕국에서도 둘밖에 없는 퍼플 나이트였다. 오러 유저 사이에서도 괴물 취급을 받는 전술 병기란 의미였다.

그런데 고작 검 한 자루만으로 평범한 백성을, 심지어 건장한 사내도 아니고 연약한 소녀를 그 정도의 괴물로 탈바꿈시킨다?

지켄이 혀를 찼다.

"과연 어둠의 권능은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이렇게나 강력한 마검이 존재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비밀 전언을 주고받았다.

[점점 더 이해가 안 가네요, 도련님.]

[동감이다. 그 정도면 청색급도 모자라서 자색급에 필적한단 소린데....]

[저렇게 강력한 마검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어요?]

[절대 없지.]

[그렇죠?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구만요.]

세라티가 끼어들었다.

[저기,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세상은 넓다.

아무리 카르나크가 사령술의 극한에 달했다 해도, 저렇게까지 단언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모르니까.]

[그게 다예요?]

[아니, 정말로 내가 모르면 없는 거라니까?]

사령왕이 되어 세계를 지배한 뒤, 카르나크는 전 대륙을 샅샅이 뒤져 어둠의 기물들을 모조리 거둔 적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령술 계열의 물건이라면 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새롭게 만들어 낸 마검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불가능해.]

[왜요?]

[내가 못 만드니까.]

[...와, 진짜 오만한 말씀이시네요.]

하지만 카르나크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사령술 관련만큼은.

[요새야 워낙 신기한 방식으로 사령술을 쓰는 놈들이 자꾸 튀어나와서 아주 확신할 수 없긴 한데....]

설령 다른 기운과 사령력을 융합하는 방식이라 해도, 저런 마검은 이론상 존재할 수 없다.

[신외지물로 능력을 부여하는 것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거든.]

혹여 카르나크조차 모르는 수법이 새로 있어 퍼플 나이트에 필적하는 권능을 부여하는 마검을 만들었다 치자.

[그 정도 힘을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진작 펑 터져 버리지.]

[버티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내가 굳이 권능 다 버리고 시공 회귀까지 했겠니?]

사람다운 감각 좀 느껴 보겠다고 애꿎은 인간들 잔뜩 붙잡아 펑펑 터트려 본 놈이 하는 말이었다.

충분히 근거가 있는 추측인 것이다.

[뭔가 다른 게 있어.]

***

회의를 마치고 차후 대책이 결정됐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원래는 에란텔 단장이 직접 나서려고 했다.

마검의 위력이 자색급에 필적하니, 퍼플 나이트인 자신이 상대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지켄과 트리브가 만류했다.

"단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건 곤란합니다."

"사교단 놈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잖습니까?"

왕실 기사단장 알론드와 킹스 오더 단장 에란텔은 유스틸 왕국에 둘밖에 없는 자색급 오러 유저다.

사교도들이 수도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란 의미다.

"어쩌면 단장님을 왕도에서 끌어내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지요."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단장님이 드룬타를 떠나는 것 자체의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이미 사교단 때문에 알포드 왕자를 잃었다.

왕가의 오랜 암투가 끝난 건 좋은 일이지만, 덕분에 왕위 계승권자는 이제 로이드 왕자 1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마저 사고를 당하면 유스틸 왕국의 정세가 크게 흔들린다.

지켄과 트리브가 에란텔을 설득했다.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힘을 합치면 설령 단장님이라 해도 무사하진 못하실 텐데요? 게다가 카르나크 경과 7대대도 있습니다."

에란텔도 납득했다.

"알았네. 그럼 자네들에게 일임하지."

그렇게 1대대와 7대대가 합동작전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1대대의 대장 지켄이 총지휘관, 카르나크가 부지휘관을 맡았다.

덤으로 마검의 이름 역시 정식으로 정해졌다.

저런 유의 마검이 칼날에 이름 새겨 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원래 명칭이야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이름이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다.

매번 보고서에 '왕국력 XX년, XX지방에 출몰한 마검'이라고 적을 순 없지 않나?

그래서 태풍이나 지진처럼, 특별한 사건이나 마물 등에도 명칭을 따로 붙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마검 마레다라...."

숙소로 돌아가며 카르나크가 혀를 찼다.

"세상이 변하니 마검 이름도 희한하게 붙이네."

원래 저런 유의 마검은 세월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명칭이 붙곤 했다. 심연 지배자니 어둠 소환자니 하는 식으로.

반면 이 마검은 '마레다'란 이름이 붙었다.

검이 처음 발견된, 최초로 피해를 입은 마을 이름이 마레다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이래도 되는 거야? 죽은 사람들은 굉장히 억울할 것 같은데."

소중한 추억이 깃든 마을 이름이 사악한 마검의 이름이 된 셈이다.

"이래서야 죽어서도 눈 제대로 못 감겠다."

별것 아니란 듯 바로스가 대꾸했다.

"관리들이 대충 붙인 이름이잖습니까? 그 동네가 원래 그렇죠, 뭐."

"하긴, 공무원스럽긴 하다."

세라티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산 사람 목숨은 신경도 안 쓰시면서 죽은 사람 기분은 챙기시는 거예요?"

"왜? 이상해?"

"...그러니까, 왜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지가 더 이상하다니까요?"

"어, 나한텐 흔한 일이라서?"

세라티의 표정이 묘해졌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법도 하다.

산 사람 목숨은 무시하고 죽은 사람 기분은 챙긴다? 이것이야말로 사령술의 본질 아닌가?

어쨌든 세 사람은 계속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마검 마레다는 지금도 어디선가 학살을 이어 가고 있을 터였다. 시간적 여유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늘 내로 7대대 전원을 소집해 1대대와 합류한 뒤 제텔바 지방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스가 한숨 섞인 하소연을 흘렸다.

"킹스 오더는 여전히 바쁘구만요. 휴가 복귀한 게 오늘인데."

#84화. 22. 마검 출현 (2)

카르나크 일행이 왕도 드룬타를 떠난 지 사흘째.

한 적막한 시골 마을에 수십 명의 외지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텔바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마검 추적부터 나선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였다.

마검 마레다가 마지막으로 학살을 저지른 마을을 찾아, 거기서부터 흔적을 더듬는 것이었다.

마을 곳곳에 말라붙은 혈흔이 가득했다.

잘려 나간 시체며 인간의 살점 조각들을 지나치며 대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하군."

"족히 수십 명은 죽은 것 같아."

주위를 살피며 지켄이 물었다.

"이곳 마을 주민들은 다 죽었나?"

30대 초반의 갈색 머리 여인이 질문에 답했다. 킹스 오더 1대대 소속 2급 심문관, 불과 투쟁의 여신 카테라의 성직자 메이리였다.

"10여 명 정도의 생존자가 있습니다. 인근 사이샤 신전에서 보호 중이라더군요."

"몰살시키진 못했다는 소리군."

마검 출현 초기에는 생존자조차 못 남기고 마을이 몰살당한 적도 많았다. 미처 도망을 가지 못한 탓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 눈에는, 그저 거렁뱅이 소녀가 분수에 안 맞는 커다란 칼을 한 자루 쥔 채 비척비척 걸어오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그걸 보고 누가 도망을 가겠는가?

좋은 사람이라면 안쓰러운 소녀를 챙겨 주려 다가갈 것이고, 나쁜 놈이라면 나쁜 마음 먹고 다가가겠지.

어느 쪽이 되었건 마검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젠 제텔바 일대가 전부 공포에 젖어 있으니, 마검의 소녀가 나타나기만 해도 모두 겁에 질려 도주했으리라.

"아무리 마검의 능력이 엄청나다 해도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는 주민들을 전부 붙잡을 순 없었겠지."

지켄은 고개를 돌려 라티엘의 법복을 걸친 소녀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카르나크의 부하인 7대대 2급 심문관, 밀리아였다.

"밀리아 신관, 메이리 신관을 도와 추적을 시작해 주게."

"예, 대장님."

명령이 떨어지자 두 여인이 10명의 병력을 대동해 마을 밖으로 향했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어둠의 흔적을 파악해 마검 마레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남은 이들을 돌아보며 지켄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거리를 두고 뒤따르도록 하지. 다들 절대 경계를 늦추지 말게."

***

1대대와 7대대는 계속 남하하며 마검 마레다의 자취를 쫓았다.

추적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어둠의 흔적이 워낙 강력했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있었다.

2급 심문관 수준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흔적이었다.

너무 거침없이 나아가기에 오히려 세라티가 의아해할 정도였다.

[이거 제대로 뒤쫓고 있는 것 맞나요, 카르나크 님?]

[잘하고 있는데, 왜?]

[그냥 너무 쉬워서요.]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데?]

애초에 마검에 홀린 시점에서 이성이나 지성 따윈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피와 살육을 찾아 헤매기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원래 마검이란 게 그래. 누군가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닌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걸.]

그동안 어찌하지 못했던 이유는 만나는 족족 다 죽어 나가서이지, 찾지 못해서는 아닌 것이다.

[5대대도 찾기는 쉽게 찾았잖아? 그 후가 문제였지.]

[그렇군요.]

[걱정 마. 저 지켄이란 양반,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별문제 없이 끝날 것 같은데?]

그렇게 1대대와 7대대가 남동쪽으로 반나절쯤 움직였을 때였다.

한발 앞서서 추적 중이던 메이리와 밀리아가 본대로 돌아왔다. 둘 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마검 마레다의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지켄 대장님."

***

초원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듬성듬성한 숲이 펼쳐진다.

마검의 소녀는 숲 그림자 사이에 숨어 있었다.

빛을 피하려는 듯, 굵은 나무 아래 주저앉아 최대한 몸을 웅크린 자세였다.

"저것인가?"

목표물을 살피며 지켄이 명령을 내렸다.

"전원, 포위망을 펼치도록."

1대대와 7대대가 널리 퍼져 숲 곳곳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5대대와 거의 다를 바가 없는 전략. 언데드 계열 마물을 상대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사령술사나 언데드 계열 마물은 함부로 인해전술로 몰아치면 곤란한 경우가 생긴다.

인간의 정혈을 먹이로 삼는 마물은 아군을 잡아먹고 기력과 권능을 회복할 수 있다. 어설픈 약자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일부러 정예를 모아 따로 킹스 오더를 창설한 것 아닌가?

하지만 저 마검 마레다는 정황상 퍼플 나이트에 필적한다. 특수 부대인 킹스 오더의 대원조차도 약자에 속하는 셈이다.

오직 강력한 오러 유저와 고위 마법사만이 저 마검을 직접 상대할 자격이 있다.

하나 예상 밖의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니, 남은 이들도 포위망을 구축한 채 압박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두 사내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1대대의 부대장, 청색급 오러 유저 트리브와 지켄의 부관인 적색급 오러 유저, 해리스였다.

여기에 7서클 마법사인 지켄과 2급 심문관 메이리가 가세하면 1대대 최정예 멤버가 완성된다.

마법 지팡이를 꺼내 쥐며 지켄이 카르나크와 세라티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먼저 탐색을 해 보겠네. 자네들은 상황을 봐서 움직여 주게."

"알겠습니다."

"대기하고 있을게요."

두 사람 역시 마검을 직접 상대할 정도의 강자다. 6서클의 마법사와 레드 나이트니까.

하지만 무작정 숫자만 많다고 능사는 아닌 것이다. 괜히 손발 안 맞으면 오히려 서로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포위망을 유지한 채 상황을 지켜보다가 균형이 무너지거나 위험 상황일 때 끼어들기로 약속해 두었다.

바로스? 바로스는 애초에 오러 유저가 아니라 언급도 안 됐고.

'아, 서럽네, 진짜.'

투기검을 빼 들며 트리브와 해리스가 나무 그루터기 가까이 접근해 갔다.

여전히 소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검은 달랐다.

우우우웅....

칼날이 흔들리며 기괴한 공진음을 울린다. 공기를 타고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묘하게 섬뜩하게 들리는 비웃음이었다.

키득....

마검의 주위로 어둠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소녀가 움직였다.

소녀가 검을 들고 일어나는 게 아니라, 검이 소녀를 매달고 허공으로 떠오른다.

'점점 사기가 짙어지는군.'

긴장하며 지켄은 지팡이 끝을 어루만졌다.

5대대의 사례도 있으니 무모하게 움직일 순 없다.

"어디, 반응을 한번 볼까?"

방대한 마나가 술식을 타고 흐르며 마법이 되어 현세에 현현한다.

지팡이 끝에서 불길이 치솟고, 솟구친 불길이 허공에서 뭉치며 회오리친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거대한 불기둥이 숲 중앙을 꿰뚫었다.

무지막지한 폭발이 숲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

사방에서 폭연이 밀려왔다. 얼굴을 가리며 세라티가 투덜거렸다.

"아니, 숲에서 화염 마법을 쓰면 어쩌자고...."

자칫하면 산불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나 카르나크는 별거 아니란 반응이었다.

"다 알고 한 짓일걸. 설마 7서클의 종사자가 그 정도 생각도 없었으려고."

과연, 치솟은 불길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라졌다.

정확하게 마검이 있던 위치만 새까만 재가 되었고 다른 곳은 멀쩡하다.

처음부터 마법을 시전할 때 후속 조치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정확한 마법의 집중과 파괴, 그리고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없애는 제어력까지.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이었다.

아쉽게도 빗맞았지만.

"쳇!"

검은 연기 사이로 소녀가 날아올랐다.

딱히 부상 따윈 없어 보인다. 직격 직전에 바로 몸을 뺀 모양이다.

"아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소녀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지켄이 실드를 펼치며 외쳤다.

"트리브! 해리스!"

안 그래도 두 사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헙!"

짧은 기합성과 함께 청색의 투기검이 춤을 췄다.

트리브의 푸른 검광이 연신 마검의 흑빛 기류와 충돌해 파공음을 일궜다.

그 틈에 해리스가 뒤를 노린다.

신중하게, 주위를 흐르는 모든 기운과 기류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소녀에게 접근한다.

'방심은 금물이다.'

5대대의 오러 유저는 해리스와 동급인 레드 나이트였다. 그들이 그리 간단히 목숨을 잃었는데 어찌 긴장을 풀겠는가?

확실한 거리를 확보하고 난 뒤에야 차분히 붉은 투기검을 날린다.

"타앗!"

청색과 적색 그리고 흑색의 빛이 연신 얽히며 어지러운 빛의 윤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폭음과 쇳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또 울렸다.

쾅! 콰쾅! 콰콰쾅!

그렇게 마검의 움직임을 막은 뒤, 지켄과 메이리가 나선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지켄이 빙계 마법을 펼쳤다.

"얼어붙어라, 쏟아져 내려라, 이는 겨울을 지배하는 왕의 명령이로다!"

무수한 고드름이 생성되어 마검을 노리고 쇄도한다.

그때마다 검은 기류가 피어올라 고드름을 부수고, 눈부신 파편이 사방에 비산한다.

하나 부순다고 끝이 아니었다.

부서진 파편이 범위 내의 모든 사물에 달라붙어 얼어 갔다.

마검의 표면이 안개가 낀 듯 얼어붙으며 소녀의 움직임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트리브와 해리스에게도 해당된다. 두 사람 역시 냉기로 인해 둔해지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 뒤에는 성직자가 있다.

"카테라여, 싸우는 자들에게 투쟁의 축복을 내리소서!"

신성한 빛이 둘의 냉기를 말끔히 지워 갔다.

자유로워진 트리브와 해리스가 오러를 끌어 올리며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타아아앗!"

그렇게 팽팽한 전투가 이어졌다.

과연 마검 마레다는 강했다. 넷이서 쉴 새 없이 몰아쳐도 전혀 물러서지 않은 채 매서운 공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켄은 오히려 안도했다.

마검의 소녀는 혼자다. 반면 킹스 오더엔 아직 추가 전력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겠군.'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성과가 없으니 답답했던 걸까?

마검의 소녀가 갑자기 뒤로 한 발 뛰더니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하!"

동시에 흉흉한 안광이 번뜩였다.

두 줄기 검광이 트리브와 해리스를 노려 갔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흥!"

"어림없다!"

둘 다 가뿐히 투기검으로 공세를 막아 낸 것이다.

아까와 달리 마검 마레다는 지켄의 냉기 마법으로 많이 느려진 상태다. 느려진 검광조차 막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이 약하진 않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소녀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더더욱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

때가 되었다 싶어 지켄이 외쳤다.

"카르나크! 세라티!"

슬슬 합류하라는 신호였다.

이제까지야 손발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대기를 시켰다.

하지만 한동안 전투를 지켜보지 않았나? 둘 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기다렸다는 듯 세라티가 오러를 떨치며 몸을 날렸다.

"네!"

그녀까지 가세하니 팽팽하던 균형이 깨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투기검의 공세에 마검의 소녀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찢어지고, 핏물이 흐르고, 검은 기류가 새어 나와 사방의 공기를 물들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여유가 넘쳐서라기보단, 그냥 정신이 나가서인 탓이겠지만.

카르나크도 지팡이를 쥔 채 나섰다.

"나, 부른다. 창공의 눈으로 대지를 가로질러...."

그렇게 막 주문을 준비할 때였다.

갑자기 소녀의 웃음이 뚝 그쳤다.

"...."

아니, 그친 정도가 아니었다.

소녀가 카르나크를 직시한다. 카르나크의 눈동자 위로 경악한 소녀의 얼굴이 뚜렷하게 비친다.

갑자기 그녀가 소리 높여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아아악!"

모두가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헉!"

"뭐야?"

날카로운 비명이 연신 숲을 뒤흔들었다. 전신을 벌벌 떨며 소녀가 뒤로 물러섰다.

"아아악! 아아아악!"

그러더니, 갑자기 허공으로 몸을 날린다. 그리고 단숨에 포위망을 뛰어넘어 숲 저편으로 향한다.

명백한 도주 행위였다.

"아, 아차!"

그제야 정신을 차린 트리브가 뒤쫓으려 했지만 이미 타이밍이 늦었다.

마검 마레다는 어느새 숲 저편으로 사라져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남은 이들은 그저 멍하니 숲 저편만을 바라볼 뿐.

"...."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지켄이 물었다.

"자네 대체 뭘 한 건가, 카르나크 경?"

#85화. 22. 마검 출현 (3)

모든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사내에게로 모였다.

다들 말은 없지만 격렬하게 해명을 요구하는 표정들이었다.

"왜들 그러는 겁니까?"

카르나크는 인상을 썼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제가 뭘 한 것 같습니까?"

머쓱해하며 지켄이 시선을 거뒀다.

"그, 그건 아니지."

정말로 카르나크는 한 게 없다. 심지어 주문도 외우다 말았다.

"워낙 상황이 황당해서 해 본 소리일세."

트리브와 해리스도 한마디씩 했다.

"그냥 우연이 아닐까요?"

"어쩌다 카르나크 경이 합류할 때 타이밍이 맞았을 뿐인 듯합니다."

의심은 금방 풀렸다. 실제로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사정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바로스와 세라티는 집요하게 의심 중이었지만.

[자, 자! 도련님.]

[사실대로 불어요.]

[무슨 짓 하신 겁니까?]

[그런 수법이 있었으면 저희한테는 미리 언급을 해 주셨어야죠?]

발끈하며 카르나크가 항변했다.

[아니, 나 진짜로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그런데, 항변하는 것치곤 또 그렇게 억울해하는 표정까진 아니었다.

솔직히 카르나크 본인도 영 찜찜하긴 하거든?

정체불명의 마검이 왕년의 사령왕을 보자마자 놀라 달아나 버렸다? 이걸 그냥 우연이라고 넘기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

'아, 씨, 내가 뭘 했지? 내가 봐도 좀 수상하긴 한데.'

***

마검의 소녀는 도망쳤다. 그것도 포위망 제대로 펼치고 있었는데 허무하게 놓쳐 버렸다.

하지만 지켄은 킹스 오더 대원들을 탓하지 않았다.

누굴 탓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본인도 완전히 허를 찔려 버렸는데?

"거참, 설마 도망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늘....".

애초에 마검 같은 귀물에 도주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 더 신기하다.

저런 타입의 마검은 숙주를 광전사로 만든다.

불리하다고 도망? 처음부터 불리하다는 인식 자체가 생길 수 없다.

아첸바트 시티에서야 힘이 부칠 때까지 살육을 저지르다 도망쳤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 충분히 살육을 해서 만족하고 쉬러 갔다는 쪽이 진실이다.

보고서에만 저렇게 써 놓은 것뿐이지.

어쨌거나 이리되었으니 다시 마검을 추적해야 한다. 메이리 신관과 밀리아 신관이 나섰다.

평소처럼 어둠의 흔적을 감지하며 숲을 나아가던 중이었다.

"어머?"

문득 메이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켄이 물었다.

"왜 그러지?"

"패턴이 변했어요."

마검이 더 이상 대놓고 어둠을 흘리면서 다니질 않았다. 중간에 흔적이 뚝뚝 끊기는 것이다.

심지어 흔적과 흔적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진다.

1시간쯤 더 숲을 헤맨 뒤, 한숨을 쉬며 메이리가 두 손을 들었다.

"놓쳤습니다. 완전히 흔적이 사라졌어요."

난처해하며 해리스가 물었다.

"이제 어쩌죠, 지켄 대장?"

***

한참을 더 추적했지만 마검의 흔적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서서히 해가 저물어 간다. 숲 곳곳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며 수풀과 나무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지켄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 물러나서 다시 대책을 강구하는 게 낫겠군."

숙영 장비를 챙겨 오긴 했지만 목표물을 놓쳤으니 굳이 숲속에서 야영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마검 마레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지금은 역습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선 안전한 곳에서 재정비를 하는 쪽이 옳은 판단이겠지."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아첸바트 시티.

1대대와 7대대는 숲을 벗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양 대대 합쳐 40여 명의 대인원이지만 숙소를 구하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다.

마검 마레다가 날뛰고 있는 탓에 인근 상행들이 일시 멈춘 상태였다. 아첸바트의 여관들 역시 손님이 거의 없어 충분히 킹스 오더 전원이 묵을 장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밤은 적당히 자유롭게 쉬도록. 과하지만 않으면 음주도 허용하겠다."

어차피 마검 추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동안 강행군을 해야 할 테니 오늘은 풀어 주는 것이 좋을 터였다.

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카르나크 일행도 각자의 숙소로 올라갔다.

평소처럼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와 밀리아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내내 마검을 추적하느라 지친 밀리아는 이내 곯아떨어졌고, 딱히 한 게 없어 피곤할 것도 없는 세라티는 짐만 풀고 카르나크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니,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여전히 아까의 사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도련님? 정말 우연인 건 아니겠죠?"

"모르겠다. 우연이라기엔 내가 지은 죄가 좀 많아서."

침대에 걸터앉으며 세라티도 대화에 끼었다.

"전혀 짐작 가시는 부분이 없나요, 카르나크 님?"

바로스가 대신 대답했다.

"솔직히 없지는 않죠."

옛 격언에 이르길, 그대가 심연을 쳐다보면 심연도 그대를 쳐다본다 하지 않았던가.

"마감에 깃든 악령이 도련님 보고 발작한 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내가 왜 심연이냐고!"

억울해하며 카르나크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기엔 스스로도 께름칙한 구석이 적지 않았다.

"...나, 심연 맞나?"

사실 아주 근거가 없는 이론도 아니긴 했다.

마검이란 무엇인가?

사악한 영혼이 깃들여 숙주를 현혹해 온갖 기이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쉽게 말해서 귀신 들린 검이다.

그것도 아주 상태가 안 좋은 귀신이 들린 검이지.

귀신이 귀신의 왕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이렇게 보면 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중얼거리던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래도 좀 이상해."

지금의 그는 왕년의 사령왕이 아니다.

"상대가 왕인 줄 알아야 공포에 질리건 말건 할 거 아냐?"

아무리 희대의 폭군이라 해도, 가진 것 다 잃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저잣거리 배회하고 있는데 마주하자마자 공포에 질릴 리는 없지 않은가?

"마검에 깃든 악령이 시공을 넘어 내 과거까지 꿰뚫어 본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지."

한참 고민하던 카르나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에잉, 모르겠다."

현재로선 정보가 너무 적다. 마검을 붙잡아 연구해 보기 전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스가 입을 열었다.

"가시죠. 여관 근처에 쓸 만한 술집을 알아 뒀습니다. 여관 주인이 추천하더라고요."

"맛있대?"

"양고기 요리 잘한대요. 특제 소스가 예술이라고, 꼭 먹어 보라던데요?"

"오, 가 보자."

언제 고민했냐는 듯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지켜보던 세라티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두 분 다 여전히 밥이 우선이시네요."

하긴, 이들이 시간을 되돌린 이유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그래서, 세라티는 안 갈 거야?"

물론 그녀라고 맛있는 거 마다할 생각은 절대 없다.

"당연히 가야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르나크가 씩 웃었다.

"그럼 먹으면서 마저 고민하자고.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어?"

모두가 사용하는 관용구이지만, 지금의 그에겐 이보다 더 명쾌한 지상 과제도 없으리라.

***

여관들이 대체로 썰렁한 분위기인 것과는 달리 저녁 시간이 된 술집은 꽤나 붐볐다.

여관이야 외지인이 묵는 곳이지만 술집은 현지인들이 주로 다닌다. 그리고 아무리 마검 마레다라 할지라도 이런 시내에까지 출몰하진 않는다.

들어올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들어올 이유가 없어서였다.

마검은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흉포한 곰과 같다. 그 영혼은 항상 굶주려 있으며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 마검이 눈앞의 인간을 놔두고 그냥 지나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시내까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도시 외곽에서 마구 날뛰게 마련이다.

실제로 마검 마레다가 출몰했던 장소는 아첸바트 시티 성벽 근처였다. 그곳에서 살육을 행하다 그냥 떠나 버렸다.

시내는 안전하니 다들 부담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덕분에 킹스 오더 역시 삼삼오오 흩어져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7대대 소속의 월러스와 버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검은딸기 브랜디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모르지만, 이상할 것도 없지."

갑작스러운 마검의 도주는 이들에게도 물론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1대대만큼은 아니다. 7대대는 이전부터 카르나크의 기행을 익히 봐 왔으니까.

"우리 대장이야 워낙 신비한 사람이잖나?"

"바로스 경도 참 신기한 인간이고. 오러 유저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강하지?"

"내 말이. 별로 빠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제압당해 있더라고."

주머니 속의 송곳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나름대로 조심하긴 했지만 7대대원들 대부분이 크건 작건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별로 신기할 게 없는 건 세라티 정도?

그 정도면 적당히 상식적인 오러 유저였다.

저런 미녀가 오러 유저가 되었다는 게 대단하긴 하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녀도 다른 의미에선 좀 이상하다.

"그 인간들 좀 웃긴 것 알아?"

"뭐가?"

"갑자기 입 다물고 자기들끼리 눈싸움 엄청 하는 거 말이야."

"아, 나도 그거 봤어.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원."

그렇게 둘은 신나게 술을 마시고 안주로 배를 채웠다.

내일부턴 다시 위험한 추적에 나서야 한다. 안심하고 마실 시간은 지금뿐이다.

"꽤 마셨군."

"슬슬 돌아갈까?"

"하긴, 내일도 움직여야 하니 이 정도로 끝내지."

적당히 알딸딸한 상태에서 월러스와 버릭은 술집을 나섰다.

늦가을의 칼바람이 모서리를 돌아 피부를 스쳐 지나간다.

골목을 벗어나자 문 닫은 시장이 나온다. 이미 상인들은 전부 철수해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

더럽게 엉겨 붙은 잿빛 머리칼의 작은 소녀,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거대해 보이는 기이한 형태의 양수검.

버릭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익숙한 얼굴이었고 검이었다. 바로 오늘 오전에 본 얼굴이니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런 난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도시 한복판에, 저것이 있단 말인가?

마검을 쥔 소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키득....

흐릿한 비웃음이 두 줄기 비명으로 이어졌다.

***

깊은 밤거리, 달빛조차 흐릿한 길가에 서서 지켄은 탄식을 터트렸다.

"맙소사...."

트리브와 해리스도 굳은 어조로 뇌까렸다.

"대체 어떻게...."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3~4시간 전쯤의 일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잠자리에 들기 전 평소처럼 인원 점검을 시행했다.

1대대는 전원 숙소로 돌아왔는데 7대대에서 2명이 비었다.

7대대 입장에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나 수뇌부인 세라티 입장에선 더욱 그랬다.

"보나 마나 술 너무 먹고 헤롱거리고 있겠죠!"

참고로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별생각 없었다. 둘 다 워낙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이니까.

하지만 세라티는 충분히 상식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니, 당연히 발끈하며 바로 찾아 나섰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다.

길거리 한복판에 쓰러진, 말라비틀어진 월러스와 버릭의 시체를.

다들 놀란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카르나크조차도.

'어, 이건 나도 좀 충격인데?'

#86화. 22. 마검 출현 (4)

성직자 메이리와 밀리아가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시체의 정혈이 모조리 빨려 나갔습니다."

"마검 마레다의 피해자와 일치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지켄이 물었다.

"마검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더 이상한 일은 이쪽이다.

"그런데도 둘 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킹스 오더의 숙소와 시체가 발견된 곳은 한 블록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검이 어둠의 권능을 썼다면 성직자인 이들이 감지하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어깨를 움츠리며 두 신관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저, 전 자고 있어서...."

마냥 이들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주위가 지나치게 깨끗했다. 사기나 탁기 같은 어둠이 발현된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니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할 수밖에.

[나도 아무것도 못 느꼈어.]

[도련님도요?]

이해가 안 간다며 바로스가 캐물었다.

[아니, 사령술이 관련되었는데 도련님이 못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말했잖아, 나도 좀 충격이라고.]

황당한 일이었다.

마검이 힘을 썼다면 그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힘을 쓰지 않았다면, 월러스와 버릭은 왜 당했단 말인가?

"반대로 묻지."

뭔가 생각하던 지켄이 두 성직자에게 물었다.

"어떤 상황이어야, 이 둘이 살해당하고도 자네들이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할 것 같은가?"

메이리와 밀리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

"아, 그것이...."

이런 경우는 이들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메이리가 먼저 대답했다.

"이런 경우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령술과 무관한 누군가가 따로 월러스와 버릭을 제압해 죽인다. 그리고 마검 마레다는 저들의 시체에서 정혈만을 빨아먹는다.

"이러면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겠죠. 정혈을 흡수하는 과정은 체내에서 일어나는 행위라 외부로 퍼져 나가지 않으니까요."

밀리아도 나름대로 답을 내놓았다.

"이런 경우도 가능하긴 해요."

애초에 월러스와 버릭이 살해당한 장소가 이곳이 아니면 된다.

"저희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살해된 뒤, 정혈이 빨린 시체만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아무것도 못 느꼈겠지요."

지켄의 안색이 더더욱 굳어져 갔다.

"양쪽 모두 한 가지 결론으로 이어지는군."

조력자가 있다.

이는 마검 마레다의 행동을 뒤에서 돕거나, 혹은 마검의 움직임을 제어할 능력이 있는 제3의 인물이 따로 존재해야 가능한 이야기다.

"마검이 스스로 저런 판단을 내리진 못할 테니까 말이지."

이쯤 되면 제일 의심 가는 놈들은 정해져 있다.

"역시 검은 신의 교단인가?"

지켄의 말에 카르나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요?]

세라티의 질문에 그가 두 성직자를 힐끔 가리켰다.

[사교도 놈들이 힘을 썼으면 나는 알아챘겠지. 쟤들이야 못 느낄 수 있어도.]

[사교도이지만 사령술은 안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 정도 인재가 사교단에 있겠냐?]

월러스와 버릭은 킹스 오더의 일원, 선별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런 이들을 사령술 없이 처리할 만큼의 강자가 굳이 검은 신의 교단에 몸을 담을까?

세라티는 그럴 수도 있다는 반응이었다.

[믿음이란 게 꼭 실리만 따져서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그건 또 맞는 말이군.]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면 진짜로 사교단 놈들이 개입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셨어요?]

[또 내가 모르는 수법이잖아, 이거.]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내려다보며 카르나크는 인상을 썼다.

[회귀한 이래 내가 모르는 사령술은 죄다 그놈들 관련된 것뿐이더라고.]

***

지켄은 흩어져 있던 1대대와 7대대를 모두 한 여관으로 모았다. 밤새 마검 마레다의 습격이 또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불침번까진 세워 가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도시 한복판의 여관에서 불침번이라니,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불만을 가진 이는 없었다.

당장 동료가 둘이나 죽어 나갔는데?

뭐, 대부분 뜬눈으로 밤을 새우거나 선잠을 잘 뿐이라 불침번이 필요했을지도 의문이긴 했지만.

그렇게 킹스 오더 전원이 긴장하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마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여관 2층의 작은 방.

1대대와 7대대의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지켄을 돌아보며 해리스가 물었다.

"이제 어쩌죠, 대장?"

원래는 이곳, 아첸바트 시티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마검의 피해자가 나오면 그쪽을 중점으로 추적을 재개할 생각이었다.

이미 흔적을 놓쳤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광야를 배회할 순 없지 않은가?

어차피 마검 마레다는 이 일대의 마을을 계속 습격하고 다녔으니 금방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놈이 도시 한복판에 나타나 버렸다. 전제 조건부터가 달라진 셈이다.

트리브가 인상을 썼다.

"골치 아프군. 평범한 수배자를 추적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니 말일세."

상대가 사교도인 경우는 추적 방법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인간인 이상 의식주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수색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마검은 인간의 정혈을 빨아먹어 숙주에게 에너지를 공급한다. 따로 식사를 할 필요가 없단 소리다.

게다가 숙주의 건강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거나 좋은 옷을 입힐 필요도 없다.

불의 여신 카테라의 성직자, 메이리도 혀를 찼다.

"상대는 식인 괴물이니까요. 기존의 수색 방법을 쓸 순 없겠죠."

옆에서 듣고 있던 카르나크가 문득 투덜댔다.

[괴물인 건 맞지만, 식인을 하는 건 아닌데.]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식인 맞잖아요?]

[인간의 정혈을 빨아먹는 건 그냥 영양 흡수 개념이지. 이걸 식인이라고 하면 어미 배 속의 태아도 탯줄을 통해 식인을 하는 것이게?]

[이상하게 방어적으로 구시네요. 왜 그러세요?]

[아, 그게, 음....]

갑자기 카르나크가 딴청을 피웠다.

바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본인이 예전에 많이 드시던 거라 그렇죠, 뭐.]

놀란 세라티가 카르나크를 노려보았다.

[설마 식인도 했어요?]

[식인 아니라니까!]

인간의 정혈을 흡수하는 건 그냥 사악한 괴물이지만, 식인을 즐기는 건 사악한 변태 괴물이다. 변태 괴물보단 그냥 괴물이 차라리 낫지.

[그래도, 식인귀 소리 듣기 싫어하시는 걸 보면 많이 사람 되긴 하셨네요.]

바로스의 말에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하여튼 상대가 식인 괴물인 이상 그에 걸맞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고민하던 지켄이 입을 열었다.

"결국 문제는 한 가지군. 마검 마레다가 킹스 오더를 의도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인가."

만약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아첸바트 시티를 떠날 필요는 없다. 충분히 대비를 갖추고 습격해 오는 마검을 맞이하면 된다."

단순한 우연일 뿐이었다면?

"마검이 다시 인근 마을을 습격하겠지. 그때 가서 원래 계획대로 추적해도 될 일이다."

지켄의 결론에 모두 동의했다.

어느 쪽이 되었건 킹스 오더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여관이 아니라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겠군요."

카르나크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외부의 기습에 대응할 수 있고, 휴식과 정비가 용이한 도시 속의 요새가 필요합니다."

***

얼핏 까다로워 보이는 저 조건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냥 아첸바트 시티에서 제일 큰 저택 하나를 통째로 징발한 것이다.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 전원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웅장한 곳이라, 건물을 본 바로스가 걱정을 다 할 정도였다.

"이래도 돼요? 이런 저택의 소유자라면 상당히 힘 있는 가문일 텐데. 말 나오는 거 아닌가?"

세라티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 문제 없다더라고요."

"정말요?"

"네. 지켄 대장 사촌 집이라던데요?"

"아, 과연."

킹스 오더 각 대장의 조건은 고위 마법사일 것 외에도 하나 더 있다.

바로 어딜 가도 끗발이 먹힐 혈통 좋은 귀족일 것.

지켄 대장 역시 7서클의 고위 마법사이지만 태생은 후작가의 차남이었다.

본인이 가문에 관심이 없어 마법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 혈통만 보면 시골 귀족인 카르나크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수준이다.

물론 지금은 카르나크도 로이드 왕자의 인장 덕분에 끗발은 지켄 못지않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별문제는 없을걸요. 현재 아첸바트 시티는 킹스 오더에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니까요."

마검 마레다가 날뛰는 바람에 도시를 오가는 상행이 크게 둔화되었다.

경제적으로 타격이 크니 아첸바트 입장에서도 어서 이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 최선이다.

덕분에 킹스 오더는 넉넉하다 못해 푸짐할 정도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저택뿐 아니라 식료품 등도 모두 최고의 것을 제공받았다.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을 보내 주어 무장의 정비 역시 문제없이 해결됐다.

현지 귀족들이 신뢰할 만한 하인들을 보내 주어 잡일에서도 해방되었다.

킹스 오더 대원들은 그저 저택에 머무르며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딱히 갇혀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좋은 집에서 좋은 시중 받아 가며 좋은 밥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는 생활 아닌가? 이보다 더한 휴가도 사실 없다.

그동안 워낙 밖으로만 나돌았으니 이 기회에 대원들도 미진했던 훈련에 열중했다.

그저 카르나크 일행만 조금 찜찜해했을 뿐이다.

"기껏 밀린 휴가 다 썼는데, 또 휴가 받은 느낌이네요."

"그러게요. 우린 그동안 몸 충분히 풀었는데."

저택에서 머문 지 사흘째인데 상황에 영 변화가 없다.

습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소식이 들려오지도 않는다.

빈둥대는 세라티와 바로스를 보며 카르나크가 턱짓을 했다.

"밥이나 먹자. 먹는 게 남는 거라더라."

"좋죠! 마침 좋은 사슴 고기가 들어왔다던데요."

신난 두 사내가 식당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간다.

한숨을 쉬며 세라티도 뒤를 따랐다.

"아, 이러다 살찌겠네."

***

갓 화덕에서 나온 부드러운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 입안 가득 쑤셔 넣는다. 그리고 진한 에일을 들이켠다.

행복한 표정으로 카르나크는 입을 오물거렸다.

"아, 맛있다. 냠냠."

임무 수행 중엔 절대 먹을 수 없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버터나 빵이 비싸다는 소리는 아니고, 화덕에서 갓 나왔다는 부분이 사치다. 들판엔 화덕 따위 없으니까.

양념을 발라 구운 사슴 다리에서 고기 조각을 잘라 접시에 담아 주며 바로스가 물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도련님?"

"평소랑 똑같지, 뭘."

내내 대기하면서 적당히 훈련하고 몸 풀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정도?

세라티가 창밖을 힐끔거렸다.

"하긴, 해 떠 있을 땐 별일 없을 테니 밤에만 신경 쓰면 되겠네요."

사기와 탁기는 태양 빛 아래에서 권능이 크게 약화되는 법, 어둠의 힘을 쓰는 놈들은 절대 낮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말고."

고기 조각을 포크로 집어 들며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마검 마레다는 낮에 움직이지 않겠지만, 사교도들은 습격할지도 모르잖아."

"에이, 그 경우라면 마검의 행위인 척 위장해야 하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

막 바로스가 손을 저을 때였다.

갑자기 식당 건물 저편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며 저택이 뒤흔들렸다.

콰아아아앙!

고기를 입에 문 채 바로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87화. 23. 피를 마시는 검

저택 뒤뜰의 임시 연무장.

킹스 오더 7대대의 비번들이 모여 밀린 훈련을 하고 있던 그곳에 자욱한 폭연이 맴돌고 있었다.

방금 담벼락을 부순 폭발로 인한 연기였다.

10명 정도의 검사와 마법사가 진형을 갖추며 전투태세로 돌입한다.

"다들 주위를 경계해!"

"목표를 확인해라!"

연기 사이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인다.

무너진 담장을 넘어 연무장 가장자리를 돌며 움직이는 잿빛 머리의 소녀였다.

그녀가 쥔 양수검을 본 대원들의 안색이 굳었다.

"놈이군."

"정말 마검 마레다라고?"

대원 중 하나가 어이없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건 대낮인데?"

사교단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기관, 킹스 오더의 일원답게 다들 마검 같은 어둠의 괴물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안다.

마검 마레다가 태양 아래 나타나 좋을 건 전혀 없다. 그냥 지닌 힘만 크게 약화될 뿐이다.

'그런데 왜?'

상식 밖의 일이 터졌다는 건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한껏 긴장했다.

'혹시 우리가 뭘 착각하고 있나?'

'설마 저 마검은 해가 떠 있어도 힘을 잃지 않는 건가!'

그때였다.

마검의 소녀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칼끝에서 시뻘건 어둠의 기운이 쏟아져 채찍처럼 연무장 곳곳을 갈겨 댔다.

쾅! 콰쾅! 콰콰쾅!

공세를 무난히 피해 내며 7대대원들이 의아해했다.

"...아닌데?"

"약해진 거 맞잖아?"

위력이 크게 줄었다. 적색급 오러 유저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7대대원들이 안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러 유저는 없으니까.

트리브와 해리스는 둘 다 어젯밤을 새운 탓에 오침 중이다.

"세라티 경은?"

"식사 중."

"금방 오시겠군."

다들 신중하게 마검의 소녀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쓰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차분히 발을 묶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원래의 마검은 그조차도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뭐지?'

'버틸 만한데?'

수십 차례나 검과 검이 부딪치며 공방이 오갔다. 대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역시 약해졌어!'

일격에 사람과 무기를 통째로 베어 가던 그 무식한 괴력이 크게 줄었다.

부딪치면 밀리는 건 그대로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압도적이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검이 만만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거....'

'다른 의미로 강해졌잖아?'

분명 괴력이나 어둠의 기운은 크게 약해졌다. 그런데 움직임 자체는 지금이 월등히 뛰어난 것이다.

찌르고, 거두고, 파고들고, 거리를 유지하며, 효율적인 움직임을 이어 가는데, 도저히 틈을 찾을 수가 없다.

"크윽!"

"이, 이게 무슨?"

대원들은 당황했다.

맹수처럼 단순하게, 본능적으로만 움직이던 소녀가 지금은 무슨 검의 달인처럼 세련되고 정교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처럼 기이한 비웃음을 흘리지도 않는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무표정한 시선을 유지할 뿐.

"...."

잿빛 머리의 소녀가 사나운 표범처럼 연무장을 누빈다. 그때마다 섬뜩한 검광이 허공을 수놓는다.

"크윽!"

"헉, 허억!"

그래도 대원들은 힘겹게 버텨 냈다. 용케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마검의 위력이 크게 약해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소녀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아까부터....'

'저 친구만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날렵하게 치고 빠지며 오로지 1명만을 쫓아다닌다. 마치 그가 부모의 원수라도 되듯이.

다른 대원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당사자인 7대대원, 레판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뭐야? 왜 아까부터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살짝 억울한 느낌도 들지만, 이건 오히려 기회다.

"어이! 난 도망 다닐 테니 뒤에서 엄호!"

다들 바로 알아듣고 대형을 바꿨다.

레판은 사정없이 도망만 다니고, 다른 7대대원들은 열심히 마검의 진로만 막아선다.

물론 이렇게 하면 절대 마검의 소녀를 쓰러뜨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쓰러뜨릴 이는 따로 있는데.

저 멀리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7대대의 오러 유저 세라티였다.

"다들 무사한가요?"

붉은 오러를 전신에 두른 채, 그녀는 한걸음에 10여 미터씩 거리를 죽죽 좁히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마검의 소녀가 잠시 흠칫거렸다.

"...."

갑자기 소녀의 피부 곳곳이 찢어지며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흘린 피가 칠흑의 기운으로 변해 태양 빛을 가리는 그림자 갑옷이 되어 그녀를 감쌌다.

뒤이어 마검을 높이 쳐들어 땅에 내리꽂는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아까 저택의 담장을 무너트린 그 폭발이었다.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소녀가 몸을 날렸다.

방향은 저택 바깥쪽, 명백한 도주였다.

"또 도망을 쳐?"

이를 악물며 세라티도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마검의 소녀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로 빠져나가 건물의 지붕을 뛰어넘어 모습을 감춘다.

세라티도 쫓아갔지만, 그녀가 지붕 위로 올랐을 땐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이런, 놓쳤나...."

아첸바트 시티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세라티는 인상을 썼다.

"이렇게 쉽게 도주할 거면 애초에 왜 온 거야?"

***

오침 중이던 트리브와 해리스, 지켄이 뒤늦게 달려왔다.

보고를 들은 트리브와 해리스가 연달아 의문을 표했다.

"마검이 공격해 왔다고?"

"대낮에요?"

"그리고 그냥 갔어?"

"아무도 안 죽이고요?"

지켄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 마검 마레다에게 지성이 있는 건가?"

놈의 행동은 명백히 이성적이었다.

낮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란 이쪽의 착각을 이용해 허점을 노렸고, 저택 주변의 다른 인간들은 무시하고 킹스 오더만을 공격했으며,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련 없이 후퇴했다.

"생각이 없는 존재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없어."

해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보기에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검의 행동이 현명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무작정 쳐들어와서, 무턱대고 날뛰다가, 선불 맞은 노루처럼 도망간 것이 전부 아닌가?

"생각이 있는 놈이면 이런 식으로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켄이 한탄하듯 뇌까렸다.

"이놈은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뭐랄까, 입 밖으로 내고 보니 자식 구박하는 전형적인 부모의 말투처럼 되어 버렸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해진 점은 있다.

"마검이 킹스 오더를 노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군.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할까?

고민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킹스 오더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조직이다 보니 이런 상황 자체가 처음이었다. 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혹시나 싶어 지켄이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뭔가 방법이 없겠나?"

마치 '마법'처럼 사교단을 척척 색출해 내는 카르나크의 능력은 킹스 오더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하나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저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지켄 대장님이 모르는 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지금은 겸손을 보일 때가 아니네만."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의 '추리'라 봐야 그냥 눈으로 확인하고 그럴싸하게 덧붙이는 게 전부 아닌가?

'지금은 정말로 아는 게 없지.'

쓴웃음을 짓다 말고 카르나크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은 있습니다."

"어떤?"

"대대원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마검이 기습한 곳은 7대대원들이 모여 훈련하는 연무장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레판만을 노리고 덤벼들었다고 했다.

"최초 피해자인 월러스와 버릭 역시 저희 대대원이지요."

어쩐지 작정하고 7대대만 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처음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도 7대대의 대장을 마주했을 때였지?"

지켄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킹스 오더 7대대와 무슨 연관 관계라도 있는 건가?"

"마검이 계급장 살펴 가며 습격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공통점이 있는 건 사실 아닌가?"

고민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세라티가 의견을 냈다.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확인? 어떻게?"

"숙소 형태를 바꾸는 거예요."

1대대가 7대대를 에워싸고, 7대대 중에서도 레판의 숙소를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시킨다. 이후에 마검이 과연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두고 본다.

"이러면 뭔가 단서가 잡히지 않을까요?"

***

마검 마레다의 습격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이상, 킹스 오더의 대비 역시 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켄은 수뇌부의 불침번 및 취침 시간을 3교대로 바꿨다.

이리하면 어떤 상황에도 전력의 절반 이상은 깬 상태에서 적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대원들의 과한 훈련이나 음주 등도 금지했다.

언제 적이 습격해도 바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뭐, 굳이 말로 안 해도 저런 어리석은 짓을 할 만큼 무능한 킹스 오더 대원 따윈 없겠지만.

1대대와 7대대의 행동 구역 또한 확실히 나누었다.

1대대는 오로지 외곽만, 7대대는 저택 안쪽만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저택 정중앙의 침실엔 레판 혼자 갇혀 지낸다.

마검이 나타날 때까지 오직 그 방에서만 먹고 자는 것이다.

레판 입장에선 팔자에도 없는 감옥살이를 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본인은 별 거부감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뭐가 불만이겠어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밤이 찾아왔을 때.

정말로 목표물이 나타났다.

콰아아아앙!

폭발과 함께 저택 남쪽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마검의 소녀가 야음을 틈타 또다시 저택 부지 내로 침입한 것이었다.

모여드는 1대대의 포위망을 뚫더니 계속 직진, 이내 저택 지붕 위로 훌쩍 몸을 날린다.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며 질주하다 갑자기 멈춘다.

저택 정중앙, 레판의 침실이 위치한 건물 천장 위치였다.

"아하?"

묘한 웃음을 흘리며 소녀가 마검을 내리쳤다.

천장이 무너지며 그녀의 전신이 빠르게 하강해 레판이 있는 방문 앞에 섰다.

하나 그곳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지켄과 해리스, 세라티가 대기하고 있었다.

"맙소사, 어이가 없군."

"진짜 저 친구만 노리네?"

황당해하면서도 셋은 전투태세를 취했다.

이왕 마검이 나타났으니 이 기회에 처리해 버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소녀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그러더니 뚫린 천장 구멍으로 다시 뛰어올랐다. 또 도주를 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해리스와 세라티도 곧바로 소녀의 뒤를 쫓아 뚫린 지붕 너머로 날아올랐다.

"어딜!"

"이번에는 안 놓쳐!"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분인지 이번엔 마검도 추격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는 걸 느낀 마검의 소녀가 갑자기 눈을 붉게 빛냈다.

"아하하하!"

광소와 함께 마검이 검붉은 기류의 칼날을 쏘아 낸다.

가공할 기세의 암흑 오러가 두 사람을 덮친다.

해리스와 세라티도 재빨리 오러 실드를 펼쳐 공세를 막았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깊은 밤이다. 마검의 능력이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폭발과 함께 두 사람이 10미터 넘게 뒤로 튕겨 나갔다.

"윽!"

"이런...."

그사이 마검은 저택 부지를 벗어나 버렸다.

소녀의 그림자가 밤거리로 뛰어들자마자 어둠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일단 저 복잡한 뒷골목 사이로 몸을 숨기면 찾는 건 불가능하다.

세라티가 짜증을 냈다.

"아오, 또 놓쳤어!"

검을 거두며 해리스가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적어도 확인은 하지 않았습니까?"

틀림없었다.

마검 마레다는 명백하게 7대대, 그중에서도 레판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왜?

저택 지붕 위에 서서 어두운 아첸바트 시티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세라티는 안색을 굳혔다.

"한 번 더 시험해 봐요, 우리."

#88화. 23. 피를 마시는 검 (2)

세라티의 의견은 간단했다.

다른 조건은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한다. 대신 한 가지 조건만 바꾼다.

"레판 대원의 기척을 완전히 지워 버리잔 말인가?"

"네, 지켄 대장님. 마검이 아예 그를 찾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나요?"

"가능하긴 할 걸세."

마검 마레다는 대체 어떤 식으로 목표물을 찾는 걸까?

일단 숙주의 시야를 통해 찾는 게 아님은 확실하다.

마검의 소녀는 저택 깊숙이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레판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직진 거리로 달려왔으니까.

"아마도 냄새, 아니면 영혼의 파장을 감지하는 식일 거라 보네만."

언데드 마물, 혹은 사령술로 소환된 악마들이 목표를 찾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그리고 7서클 마법엔 둘 다 차단하는 탐지 방해 마법이 있다.

"그럼 마법진을 펼치고 레판 대원을 집어넣어 보겠네."

"부탁드려요."

덕분에 당사자만 더더욱 갑갑해질 뿐이었다.

침실 한복판에 그려진 마법진 한가운데 앉아, 레판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휴, 이쯤 되면 팔자에도 없는 감옥살이 맞네요."

***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막 아침 해가 떠오르는 여명의 시각, 7대대 소속의 프로스는 아침밥을 먹다 말고 상상도 못 한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콰아아아앙!

식당에 앉아 열심히 빵을 찢어 스튜에 찍고 있는데 갑자기 벽 한쪽이 우르르 무너진 것이다.

동시에, 이젠 너무 자주 봐서 익숙하기까지 한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검 마레다!"

"놈이 이번엔 여기에?"

식사 중이던 7대대가 기겁해 전투태세를 취했다.

동시에 소녀도 움직였다.

"꺄하하하하!"

마검의 목표는 명확했다.

다른 대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직 프로스만 노리며 돌진해 온다.

죽어라 도망 다니며 프로스가 분통을 터트렸다.

"뭔데? 왜 이번엔 나인 건데?"

***

지켄과 트리브 등 수뇌부의 빠른 대응으로 마검 마레다는 별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또다시 도망쳤다.

덕분에 프로스는 무사했지만,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또 7대대?"

"예."

"처음엔 월라스와 버릭, 이번엔 레판과 프로스라...."

지켄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두통이 올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네.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없나, 카르나크 경?"

처음엔 7대대 대장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그리고 이젠 7대대원들만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

"이건 절대 우연일 수가 없어."

"동감입니다. 하지만 정말이지 전혀 모르겠군요."

인상을 구기며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짐작은 고사하고, 사소한 단서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체 마검과 저희 7대대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침묵이 이어졌다.

지켄과 카르나크는 물론,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오러 유저들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저히 짚이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때 눈치를 보던 프로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저기, 황당한 의견이라도 괜찮습니까?"

지켄과 카르나크가 반색하며 되묻는다.

"음?"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아니, 짐작이라 할 정도는 아니고요."

프로스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우연인 것 같긴 한데...."

"지금 우리에겐 그 억측조차도 없다네."

지켄의 허락이 떨어졌다.

한층 편해진 어조로 프로스가 카르나크와 자신을 가리켰다.

"이거 어째, 카르나크 대장이랑 가까이 서 있던 순서 같거든요?"

"가까운 순서?"

바로스가 의아해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장이랑 가까운 순서라면 나랑 세라티 경이어야지, 왜 애꿎은 월라스랑 버릭이?"

물론 카르나크의 심복이 바로스와 세라티라는 건 모두가 안다.

"인간관계 말고요."

프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검의 소녀가 대장 본 뒤 비명 지르고 도망갔을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킹스 오더는 정예 중의 정예다. 당연히 포위망을 구축할 땐 미리 정해진 위치가 있다.

"보십쇼. 월라스, 버릭, 레판, 그리고 저까지. 정확하게 대장 좌우에서 포위망을 펼치던 순서가 아닙니까, 이거?"

다들 눈을 깜빡거렸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기는 한데...."

억측도 정도껏이지,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도 압니다, 어이없는 소리인 거.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라 해서 꺼낸 말일 뿐이에요."

그때 해리스가 손을 들었다.

"괜찮은 의견인 것 같습니다만?"

어이없어하며 지켄이 되물었다.

"자넨 저 말을 믿는 건가?"

"믿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지요."

저 가설엔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확인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거?"

프로스를 돌아보며 묻는다.

"포위망 구축 당시, 자네 다음으로 카르나크 경과 가까이 서 있던 자가 누구지?"

"에, 크란트입니다만."

"좋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리스는 말을 이었다.

"이번엔 자네도 레판 경과 함께 마법진에 들어가 있어 보게. 크란트 대원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다음 날 밤.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 검사 1명이 반파된 저택 기둥에 기대어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에 흙먼지로 뒤덮여 꽤나 고초를 겪은 모습이었다.

"헉헉, 주, 죽을 뻔했네....".

마검 마레다가 제때 도주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7대대원 크란트를 바라보며, 지켄을 비롯한 킹스 오더 수뇌부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네."

"정말로 이 친구만 죽어라 쫓아다녔어?"

"...이게 대체 무슨 의미지?"

***

왜 마검의 소녀는 카르나크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도주했을까?

그리고 왜 킹스 오더 7대대, 그중에서도 유독 카르나크와 근접했던 순서대로만 공격하기 시작한 걸까?

이유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유가 존재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유를 몰라도 패턴을 알면 써먹을 수는 있다.

왜 해가 뜨고 달이 저무는지 몰라도, 그 사실을 이용해 달력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는 있는 것처럼.

수뇌부를 모은 뒤 지켄이 제안했다.

"마검 마레다를 유인해 보세."

상대의 목표를 특정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상대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

우선순위가 높은 레판과 프로스를 미끼로 쓴다면 마검의 소녀를 함정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필요는 없겠군. 인적이 드문 쪽이 마검의 접근을 파악하기도 쉬울 테니."

트리브의 발언에 세라티가 끼어들었다.

"놈이 도주할 때 쫓아가기도 쉬워지겠죠."

그동안 그녀가 마검을 놓친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워낙 빨라서만은 아니다.

"건물이 많은 도시에는 숨을 장소가 너무 많아요."

일단 기척을 감추고 골목길의 어둠 사이로 스며들면 마법이나 투기술로는 감지가 거의 불가능하다.

해리스도 동의했다.

"예전 같았으면 성직자의 신성술로 어둠의 흔적을 찾았겠지만 그것도 안 먹히니까 말이지."

변모한 현재의 마검 마레다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마치 작정하고 지운 것처럼.

하지만 사방이 확 트인 들판이라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대략적인 전략이 세워졌다.

일단 아첸바트 시티를 떠난다. 그리고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야영지를 꾸린다.

"마검의 목표가 확실해졌으니 굳이 1대대가 7대대를 에워싸는 형태를 취할 필요까진 없겠지?"

"평소처럼 좌익과 우익으로 나눠 역할을 분담하면 되겠군요."

야영지 한복판에 레판과 프로스를 배치한다. 이후 마검 마레다가 출몰하면 차단 마법진을 이용해 두 사람의 기척을 번갈아 지워 가며 함정으로 유인하는 계획이었다.

지켄이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아첸바트 시티 인근 지형이 그려진 세밀한 지도였다.

"이곳을 야영지로 삼겠네."

그리고 도시 북쪽의, 시야가 뻥 뚫린 광활한 들판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오늘 내로 이동할 테니 다들 준비하도록!"

***

그날 오후, 킹스 오더 1대대와 7대대는 저택에서 나와 도시 북쪽 초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열심히 야영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천막만 친다고 끝이 아니다.

마검 마레다를 유인해 처리할 전장이기도 하니 여러 다양한 함정들도 미리 준비해 놓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에 놈을 처치해야 한다."

함정들을 확인하며 트리브는 대원들을 독려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번에 끝내 버리도록!"

함께 작업하던 1대대원들이 물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라...."

"숙주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까?"

마검에게 홀린 죄 없는 소녀를 희생해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카르나크가 흠칫 놀랐다.

'여자애는 그냥 죽이자고? 그건 곤란한데.'

막 말리려는데, 트리브가 먼저 대답했다.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무조건 살리라는 소리까진 나도 하지 않아."

피식 웃으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가차 없이 죽여 버리는 것도 곤란하지 않은가? 명색이 왕의 칙명에 따라 움직이는 입장인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7여신을 섬기는 인간으로서 살릴 수 있는 생명은 살려야지."

"물론 부대장님 말씀이 도의적으로 옳습니다만...."

젊은 대원 1명이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검이 날뛸수록 피도 계속 흐를 겁니다. 차라리 그 소녀 1명을 확실하게 희생해서라도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40대 사내, 트리브는 20대의 부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딱 자네만 한 나이대에 그렇게 생각했었지."

"아닙니까?"

"논리적으론 자네 말이 맞지."

1명을 희생해 사건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차후에 이어질 더 큰 피해를 막는다?

이론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더군."

문제가 있는 건 항상 사람이다.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은 막상 다수의 피해자도 못 구하더라고. 그냥 1명도 희생시키고, 다수의 피해자도 생기게 만들지."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이어야 오히려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숫자나 수치와는 상관없이.

대원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트리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이 나이 먹고서야 어렴풋이 느낀 것일 뿐이니 당연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미안하군, 나도 칼잡이라 더 이상 설명을 못 하겠어."

"아, 아닙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감탄하고 있었다.

[오, 저렇게 말해야 사람답게 사는 거로군요, 도련님.]

[대단하네. 난 저런 식으로는 생각도 안 해 봤는데.]

[도련님도 어차피 숙주를 살리려고는 했죠?]

[응.]

생명에 우열은 없으니 단 1명의 목숨도 소중하다?

그런 기특한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었다.

[괜히 죽였다가 언데드 되면서 더 강해질지도 모르잖아.]

원래 사령술이 관련되면 살려 두는 것보다 죽이는 쪽이 후환이 되는 경우가 워낙 많은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리 때문에 살려야 한다.

[같은 말을 해도 저렇게 욕 안 먹게 할 수가 있구만요.]

[우리도 배워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말 예쁘게 하는 것도 재능인가? 부럽다.]

듣고 있던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저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트리브가 한 말은 여타 성직자들도 주로 하는 설교였다.

그런데 100년도 넘게 살았다는 양반들이 모른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새겨듣질 않았거든, 내가.]

[예전엔 성직자 만나기만 하면 죄다 죽여서 뼈다귀로 춤추게 만들었거든요.]

[아, 그랬군요... 이 나쁜 분들아.]

[응?]

[아뇨, 아무것도.]

근처의 7대대원들이 그런 셋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또 저 세 사람 말없이 눈싸움만 하고 앉았네, 하는 얼굴이었다.

아차 싶어 바로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내내 여기서 머무르는 겁니까?"

"그래야지."

"마검이 언제 나타날 줄 알고요?"

"모르니까, 나타날 때까지 계속 야영을 해야겠지?"

야영지를 둘러보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지금도 하루 단위로 줄기차게 습격 중이잖아."

#89화. 23. 피를 마시는 검 (3)

과연 카르나크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노을이 초원의 색을 조금씩 훔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사방을 경계 중이던 초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나타났다!"

어두워지는 들판 저편에 양수검을 든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영지로부터 거의 100미터 이상 떨어진, 충분히 대비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역시 사방이 확 트여 있으니 멀리서도 접근을 알아차리기가 용이하다.

"마검이다!"

"전원 전투준비!"

"자기 위치로!"

마검의 소녀가 전투를 준비하는 킹스 오더를 말없이 노려본다. 그리고 대뜸 땅을 박차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야영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쉽사리 방어선을 뚫고 지나갈 순 없었다.

이미 킹스 오더는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돌진하는 소녀의 좌우로 파고들며 대원들이 연달아 공세를 펼친다.

"어딜!"

"쉽게 보내 줄 것 같으냐?"

소녀도 반격에 나섰다.

마검을 휘두르며 검은 기운을 사방으로 떨쳐 낸다. 어둠의 칼날이 대지를 두들기며 무식한 폭발을 일군다.

쾅! 콰쾅! 콰콰콰쾅!

하나 정작 쓰러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전원 폭발 범위 밖으로 몸을 뺀 후였다.

흩어졌다 뭉치며 대원들이 전투대형을 재차 갖췄다.

포위망을 멍하니 훑어보던 소녀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하!"

의외로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다들 침착하게 1차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엔 좀 섬뜩했는데...."

"저것도 워낙 자주 들어서...."

"이젠 뭐 딱히?"

방어선의 지휘관인 바로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작전대로 잘되고 있구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힘을 쓰면 반드시 보충을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마검 마레다는 인간을 베고 정혈을 흡수해 어둠의 권능으로 바꾸는 마물이었다.

무한대로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염연히 한계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1차 방어선에 주어진 임무는 이것이었다.

-마검의 힘을 소모시켜라!

정확히는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며 조금씩 상대의 권능을 갉아 가는 것이 목표였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덤벼들어도 곤란하다. 그러다 마검에 베여 정혈을 빼앗기게 된다면?

본인 죽는 걸로 끝나지 않고 상대의 힘까지 더 늘려 주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점이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마검의 소녀가 눈앞의 대원들에게 참격을 날려 댔다.

밤이 다가온 탓인지 공격에 실린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설령 검을 들어 막는다 해도 통째로 썰릴 것이 뻔했다.

그러니 후퇴에만 전력을 다한다.

"크윽!"

"피해!"

소녀가 쫓아오며 마저 베어 버릴 거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토레스!"

"부디 무사하게!"

고함을 터트리며 대원 2명이 소녀의 등 뒤로 창을 찔러 넣었다.

아주 대놓고 들으라고 소리까지 질렀으니 당연히 소녀도 반응했다.

몸을 틀어 마검을 돌려 휘두르며 간단히 창 두 자루를 튕겨 버린다.

탕! 타탕!

그 대가로 앞서 후퇴한 대원들은 무사히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났고....

"휴우, 살았다."

"좋아, 다시 간다!"

다시 포위망이 구축되어 마검의 소녀를 크게 감싼다.

"...."

마검의 소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목표물은 명확했다. 그러니 그 목표물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방해물의 움직임이 정말 애매한 것이다.

딱 방해가 되기 직전에 도주하고, 목표물을 향해 나아가려 하면 등 뒤에서 자꾸 귀찮게 달라붙는다.

이걸 무시하고 지나칠지, 아니면 머물러 제거할지 애매하다.

그 애매함이 바로 킹스 오더의 노림수였다.

"자, 다들 뒤로 빠지세!"

"좋아! 놈이 야영지 안쪽으로 향한다!"

"우리 차례군!"

"쫓아!"

일단 보내 주고, 뒤통수를 노린다. 이것이 기본 전법.

하지만 워낙 능력 차이가 크니 내내 발을 묶을 수만은 없다.

"키득...."

옅은 조소와 함께 마검의 소녀가 땅을 박찼다.

콰아앙!

발로 뛰었다기보단, 그냥 발밑에서 뭔가 폭발시켜 그 힘으로 날아올랐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폭발과 함께 소녀의 전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단번에 저들을 떨쳐 내며 목표물을 노릴 심산이었다.

"꺄하하하하!"

삽시간에 소녀와 방어선의 간격이 멀어졌다.

이대로라면 거리가 너무 벌어져 놓칠 상황이었다.

바로스가 신호를 보냈다.

"웨스터! 카밀라!"

천막 사이로 로브를 걸친 30대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7대대 소속의 정규 마법사, 웨스터와 카밀라였다.

킹스 오더의 성직자들은 다들 귀한 몸이다. 교단에서 딱 정해진 숫자만큼만 지원을 해 주기에 각 대대별로 1명씩밖에 배정이 되어 있지 않다.

반면 마법사는 비교적 숫자가 많은 편이다.

대대장이 되기 전의 카르나크처럼, 4서클 수준의 마법사는 대대별로 제법 포진해 있다.

두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각자의 마력이 지팡이를 타고 흐르며 찬란한 마법진을 허공에 그린다.

빛의 무늬가 명멸하며 방대한 힘을 사방에 떨친다.

마법을 완성한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뇌화의 일격이여!"

"우리 손에 임하라!"

뇌격의 기둥이 마검을 강타했다.

굉음이 밤하늘을 길게 찢었다.

콰아아아앙!

잠시 후 폭연 사이로 마검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부상은커녕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뇌격에 강타당한 순간 혈기의 장막으로 전신을 보호한 것이다.

그렇다고 마법이 소용없었다는 소린 아니다.

마법을 막기 위해 또다시 비축한 힘을 상당히 소모했을 테니까.

소녀가 마법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마법은 꽤나 위협적이었다. 저들이 무시할 수 없는 방해물이란 의미였다.

그러므로 처리하고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벌써 천막 버리고 날쌔게 도주하고 있었다.

"우리 할 일은 다 했지?"

"그럼요! 튀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는데, 하필 그 방향이 야영지 반대편이었다. 마검이 노리는 목표와 정반대란 소리다.

자, 여기서 또 애매해진다.

목표물은 이쪽.

방해물은 저쪽.

저 방해물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멀어지면 더 이상 방해물이 아니지 않을까?

"...."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기껏 거리를 벌려 두었던 킹스 오더가 다시 달려와 포위망을 재구축했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스가 고함을 터트렸다.

"좋아, 다시 간다!"

***

바로스의 지휘 아래 킹스 오더는 1차 방어선을 굳건히 지켰다.

그럼에도 마검 마레다는 꾸준히 야영지 중심부로 진입해 왔다.

당연했다.

애초에 접근 자체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진입하는 과정에서 힘을 빼 놓을 뿐이다.

확실하게 함정에 빠뜨리기 전에는 너무 몰아붙여도 곤란한 것이다. 그러다 수틀리면 또 도망칠 텐데?

그래서 킹스 오더의 수뇌부, 지켄과 카르나크를 비롯한 오러 유저들은 여전히 함정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트리브가 문득 감탄을 터트렸다.

"맙소사, 저 친구는 무슨 예지 능력자라도 되는 건가?"

정예 중의 정예만 모은 킹스 오더답게 모두가 잘 싸우고 있다.

기사와 마법사가 모두 손발이 척척 맞아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훌륭하게 마검을 압박하는 중이다.

하지만 바로스는 그 사이에서도 유독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딱히 오러 유저인 것도, 남들보다 월등히 빠르거나 힘이 센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지간한 오러 유저 이상으로 수월하게 마검을 상대한다.

치고, 빠지고, 파고들고, 스쳐 지나가고, 상대의 손발을 어지럽히며 호흡과 타이밍을 뺏는데 이 모든 것이 이치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청색급 오러 유저인 자신도 저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저런 걸 할 수 있는 거지?"

미끼 역할을 위해 함께 숨어 있던 레판 대원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러를 쓰고도 못하신단 말입니까?"

물론 바로스가 얼마나 강한지는 그 역시 잘 안다.

대련만 붙었다 하면 이상하게 아무것도 못 하고 말려들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블루 나이트마저 감탄할 정도였나?'

트리브는 고개를 저었다.

"저건 오러와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나?"

오러를 쓰면 물론 강적을 한 방에 베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똑같은 위치를 정확하게, 수십 번이나 오차 없이 찌를 순 없는 것이다.

심지어 가만있는 상대도 아니다.

움직이는 상대를, 급소만 골라서, 움직임을 예상해 먼저 찌르고, 상대가 뒤늦게 도달한다. 얼핏 상대가 칼에 찔려 주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엄청나게 머리가 좋아서 상대의 움직임을 전부 계산하는 건가?"

"그렇게까지 좋아 뵈진 않았는데요."

"그럼 경험이 어마어마한 건가?"

"그렇게까지 늙어 뵈지도 않잖습니까?"

"그러니까 신기하다고."

한편 바로스는 내심 시간을 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마검과 싸운 지도 상당히 지났다. 여기저기 지친 대원들이 보인다.

슬슬 떠넘길 때였다.

"자, 킹스 오더 전원!"

뒤로 물러서며 그가 장난스러운 외침을 토했다.

"퇴근합시다!"

***

후퇴와 퇴근은 단어의 의미가 명확히 다르다.

후퇴는 전투 중 유불리에 따라 뒤로 물러서는 것.

반면 퇴근은?

일터에서 근무 마치고 돌아가는 것이다.

전장에서 아예 떠나 버린다는 소리다.

명령이 떨어지자 킹스 오더 전원이 우르르 야영지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마검은 이내 판단을 내렸다.

상대가 충분히 멀어지고 있었다. 목표물을 노릴 때까지 돌아와 방해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였다.

저것들은 더 이상 방해물이 아니다. 이제 마음껏 목표물을 노릴 수 있다!

"아하하...."

광소와 함께 마검의 소녀가 맹수처럼 초원을 질주했다.

가로막는 것이 없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야영지 중심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결국 목표물을 발견했다.

"으아, 결국 왔네...."

20대 검사가 긴장한 얼굴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7대대 소속, 프로스였다.

흥분한 소녀가 대뜸 그를 노렸다.

"아하하하!"

하지만 방어선에 1차라는 단어가 붙었다는 건 2차도 있다는 의미.

2차 방어선을 담당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1대대의 적색급 오러 유저 해리스와 세라티였다.

"자, 이제 우리 차례군!"

"제가 먼저 갈게요!"

붉은 투기검을 뽑아 들며 둘은 몸을 날렸다.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 아무리 마검이라도 이를 무시하고 프로스를 계속 노릴 수는 없었다.

"아하하하!"

마검의 소녀가 공세의 방향을 돌렸다.

검은 투기와 붉은 투기가 허공에서 충돌하며 폭음을 터트렸다.

간신히 살아난 프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웃기네요. 오러 유저 두 분이 저를 호위하는 상황이라니."

마검을 가로막은 해리스와 세라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귀하신 몸이 되니 좋은가?"

"어서 작전대로 움직이세요!"

"네!"

프로스가 뒤로 빠지고 두 오저 유저가 마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 줄기 파괴의 빛이 초원 위에서 어우러지며 화려한 윤무를 추기 시작했다.

#90화. 23. 피를 마시는 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