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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4)

다음 날 아침, 알리우스와 릴테인, 세라티와 카르나크 일행은 예정대로 데라트 시티를 출발했다.

그 과정에서 각자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따로 움직였다.

보란 듯이 신관복이며 마법사의 로브, 기사의 갑옷을 걸친 것은 물론이다.

그렇게 데라트 시티를 떠나 반나절 정도 움직이다 다시 경로를 바꾸었다.

미리 약속한 곳에서 다시 합류한 뒤 각자 준비한 옷차림들을 꺼냈다.

"자, 그럼 위장합시다."

알리우스는 신관복 대신 여행자 복장을 취했다. 신관의 지팡이도 허름한 조각을 덧붙여 평범한 모습으로 바꿨다.

카르나크와 릴테인은 쉬웠다. 그냥 마법사 로브 벗고 완드만 숨기면 그만이니까.

바로스와 세라티는 조금 까다로웠다.

바로스의 경우, 갑옷을 벗어도 워낙 덩치가 커 단련한 티가 났다. 덩치를 줄일 순 없으니 대신 품이 넓은 코트로 전신을 가리고 성인 장정만 한 배낭을 짊어져 일꾼으로 위장했다.

세라티는 지나치게 예쁘다는 게 문제였다.

행상 중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정도의 미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모만으로 시선을 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얼굴로 변장하는 것도 위험했다.

변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심을 받을 테니까.

특히나 이제 가게 될 트리스트 시티는 온갖 범죄자들의 소굴이니, 변장을 알아챌 가능성도 높다.

알리우스는 이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차피 수상해 보일 거라면, 처음부터 수상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지요."

그래서 세라티는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고, 손에는 고운 장갑을 끼고, 정작 복장은 허름한 여성용 여행복을 걸친 어색한 차림이 되었다.

정체를 숨기고 몰래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귀족 영애의 모습이었다.

"아, 얼굴에 이런 거 발라 본 적 없는데...."

화장이 어색한 듯 연신 뺨을 만지는 세라티를 보며 릴테인이 빙그레 웃었다.

"과연, 이렇게 하면 의심을 받아도 별문제가 없겠군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평범한 행상 일행일 것이요, 경험 많은 사람이 보면 사연 있는 귀족 영애를 모시기 위해 변장한 이들로 보이겠지.

어느 쪽이건 진짜 정체는 숨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위장을 마친 뒤 카르나크 일행은 트리스트 시티가 위치한 북서쪽으로 경로를 잡았다.

산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바로스가 투덜거렸다.

"도보로 이동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리겠네요."

미안해하며 알리우스가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말을 타고 움직이면 눈길을 끌 수밖에 없어서요."

말이란 물건은 워낙 값비싼 것이라 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법이다. 평범하게 위장했으니 평범하게 고생하는 수밖에.

의외로 카르나크는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난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전생의 그는 몸 힘든 짓은 죽어도 안 하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까지 할 정도였다.

-난 아무리 운동해도 땀이 안 나는 체질이야!

오죽 몸을 안 움직였으면 저런 줄 알고 살았을까?

과거의 카르나크에게 육체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 두뇌 활동에 지장을 주는 하찮은 저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니 부담 없이 언데드로 자신을 바꿔 버릴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다르다.

-오! 소중한 육체! 아끼고 다듬어야지.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고, 건강해지니 그만큼 컨디션도 좋아지고, 땀 흘리고 나서 먹는 식사의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여행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식도락을 챙길 정도로 말이지.

"자, 식사합시다!"

점심때가 되자 칼같이 카르나크가 일행을 환기시켰다.

적당히 관로 근처의 나무 아래 모여 앉아 식료품을 꺼낸다.

보통 여행자들의 식사라면 건과, 비스킷, 말린 육포 등등이겠지만....

"케이퍼를 넣은 우설 테린 샌드위치입니다!"

"루콜라 퓌레와 아카시아튀김을 곁들인 비둘기구이입니다!"

"화이트 와인과 후추로 맛을 낸 민물가재찜입니다!"

바로스의 배낭에서 나온 것은 데라트 시티의 고급 맛집 명물들이었다.

하나같이 보존성과 휴대성은 개나 줘 버린 메뉴들인 것이다. 적어도 이런 길바닥에서 나올 물건들은 절대 아니었다.

알리우스가 어이가 없어 뇌까렸다.

"...누가 보면 도시락만 싸 오신 줄 알겠네요."

"든든하게 먹어야 힘이 나죠!"

"...정말 도시락만 싸 오신 건 아니죠?"

"맞는데요?"

설마 싶어 배낭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안에 포장 음식만 가득 들어 있었다. 성인 장정 1명이 통째로 들어갈 만한 저 거대한 배낭에 말이지.

"갈아입을 옷은요?"

"입던 거 빨면 됩니다!"

"해지면요?"

"꿰매면 되죠!"

"갑옷이나 무기는...."

"코트 안에 입고 있습니다! 안 벗으면 돼요!"

"그래도 그런 차림이면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맛있는 거 먹으면 없던 힘도 납니다!"

"...."

알리우스는 침묵했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워낙 논리 정연(?)하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세라티도 어이없어하긴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사나흘은 더 움직여야 하는데 음식이 상하지는 않을까요?"

바로스는 그 점도 대비해 두었다.

"도련님께서 미리 보존 마법을 걸어 두셨습니다!"

릴테인이 기겁하며 물었다.

"이 많은 음식에 일일이 보존 마법을 걸었다고요?"

보존 마법 자체는 3서클의 주문이라 그 역시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보존식을 챙겨 온 이유는....

"세상에, 하루 종일 매달려도 모자랐을 텐데요?"

보존 마법은 즉발 주문이 아니라 장시간의 캐스팅을 요하는 마법인 것이다.

6서클의 마법사가 음식 1인분을 사흘간 보존시키려면 마법만 1시간을 걸고 있어야 한다. 보존 마법이 있음에도 보존식이 여전히 유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단하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카르나크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공을 들여야 좋은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까?"

"아, 예...."

사실 카르나크 수준에선 저렇게까지 오래 안 걸린다.

'내가 지금 마력이 부족할 뿐이지 연산력이 달리진 않거든.'

마력량 때문에 4서클까지밖에 쓸 수 없지만 경지 자체는 이미 대마법사조차 초월한 그였다. 릴테인이라면 하루 종일 걸릴 마법도 10분 안짝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꽤나 화기애애했다.

카르나크도 바로스도, 맛있는 음식을 자신들만 먹는 야박한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같이 드실래요?"

"감사해요!"

맛있는 거 마다할 인간은 세상에 없는 법이다.

바로스의 제안에 세라티가 반색을 하며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덕분에 초면이었던 이들의 거리감도 상당히 좁혀졌다.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씹으며 세라티는 새 일행을 찬찬히 살폈다.

얼핏 보기엔 딱히 특이할 게 없는 이들이었다.

한 영지의 영주와 그 수행 기사, 흔하다면 흔한 조합이다.

실력 역시 나이에 비해 제법 강한 전사와 마법사지만, 오러 유저인 세라티에 비하면 분명 평범하다.

'그런데도 사령술사들을 그리 쉽게 잡아들였단 말이지?'

워낙 서둘러 움직인 탓에 대련 한번 제대로 못 해 봤으니 실력이 궁금하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일까?

'지금까지 봐 온 바로는 그냥 밥에 환장한 인간들 같은데....'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평범한 여정이었다.

행상으로 위장한 카르나크 일행은 유스틸리아 관로를 따라 계속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고, 마침내 이들은 트리스트 시티에 도착했다.

***

오는 내내 카르나크는 생각했다.

'죄악의 도시라니, 이름 한번 거창하게도 붙였다.'

도시의 슬럼가는 익숙하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전생 땐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곤 했으니까.

대륙 곳곳의 유수한 도시들을 다 겪어 본 그에게 이런 촌구석에서 죄악의 도시니 뭐니 불린다 해 봐야 감회가 있을 리가?

세상 어딜 가건 법의 사각은 있게 마련이고 치안이 엉망인 곳도 얼마든지 흔한데 그걸 가지고 참 유난 떤다 싶었다.

'그래 봐야 다 사람 사는 동네인데, 뭘.'

...라고 생각했는데, 트리스트 시티는 일단 겉보기부터가 남달랐다.

도시의 기본 골조 자체는 그럴듯하다.

원래는 유스틸 왕국의 서부 전선이었다 보니 튼튼한 석조 건물들이 도처에 세워져 있고 거리도 제법 돌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그 폐허를 널빤지며 통나무로 대충 수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폐허라기엔 지나치게 멀쩡하고, 도시라기엔 지나치게 황폐하다.

버려졌다기에는 지나치게 사람들이 많고, 활기차다기에는 지나치게 분위기가 암울하다.

"이거 참... 인상 깊은 도시로군요."

"괜히 죄악의 도시라 불리는 게 아니죠."

계속 걸음을 옮기니 시장이 나왔다.

시장 역시 무너진 건물을 대충 보수하고 가판이며 천막이 사방에 널린 형태였다. 기시감이 느껴져 카르나크는 실소했다.

'이거 완전, 제국의 암시장 같은 분위기로군.'

암시장과 다른 점은 아직 해가 떠 있다는 것뿐이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시장 곳곳에 장을 보러 나온 아낙들이 많았다. 다들 평범하게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모습에 세라티가 중얼거렸다.

"무법 지대라더니 어느 정도 치안은 유지되나 보네요?"

알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치안은 자급자족이라더군요."

"네?"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세라티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갑자기 누더기 차림의 한 소년이 길 가던 아주머니의 장바구니를 날치기했다.

"에잇!"

대뜸 달려가 손칼로 줄을 끊고 바구니를 낚아채 바람처럼 질주하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릴테인과 세라티가 놀라 중얼거렸다.

"날치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요?"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놀라지 않았다.

'치안이 개판이라는데....'

'사람이 많건 적건 뭔 상관이겠어?'

예상대로 행인들은 옆에서 날치기를 당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흥미롭다는 듯 지켜볼 뿐이었다.

하나, 이어진 사태는 두 사람의 예상조차 벗어났다.

"어머?"

날치기당한 여인이 당황하질 않는 것이다.

태연하게 품에서 섬뜩한 단검(!)을 꺼내더니 그대로 던져 버린다!

휘이익!

푹!

단검은 정확하게 소년의 허벅지에 꽂혔다. 피가 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심지어 여인은 서두르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쓰러진 소년에게 다가가 일단 장바구니를 챙긴다.

"에이, 손잡이 고쳐야겠네."

대수롭잖다는 듯 중얼거리며 단검도 마저 뽑는다. 피가 튀는데도 눈도 깜빡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더니 그냥 제 갈 길을 간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욕설을 퍼붓는 것도 아니었다. 진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가 버린 것이다.

"아으, 아으으...."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년을 향해 행인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진다.

"쯧쯧, 그 솜씨로 날치기를 노렸느냐?"

"구걸부터 다시 시작해라."

어린아이가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켜보던 카르나크 일행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뭐야, 이거?"

"이 동네 분위기 왜 이래요?"

한편 세라티는 안절부절못하며 알리우스를 돌아보고 있었다.

'어쩌죠, 알리우스 님? 저 아이, 저대로라면....'

우연인지, 아니면 여인의 투척술이 절묘했는지 소년은 허벅지의 혈관을 피해 칼을 맞은 상태였다. 일단 생명의 위험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 해도 저걸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 하물며 알리우스는 성직자가 아닌가?

알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치안이 자급자족이라고.'

과연, 골목 안쪽에서 어린아이 3명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다들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익숙하다는 듯 쓰러진 소년에게 다가가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는다.

그 와중에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거봐, 카인 오빠. 날치기는 위험하다니까!"

"성실하게 몸을 팔면서 살자, 우리."

소년의 팔다리를 부축한 아이들이 다시 쪼르르 골목 안으로 모습을 숨긴다.

이 모든 것이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남은 것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과 시장을 오가는 행인들뿐.

"자, 자! 랫티어 고기가 쌉니다!"

"오늘 들어온 싱싱한 순무가 있어요!"

바닥에 가득 고인 빨간 핏자국을 보며 릴테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왜 도로 곳곳이 갈색으로 변색되었나 했더니...."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영 찜찜하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실로 인상 깊다는 표정이었다.

"에, 일단 사람 사는 동네이긴 한데...."

"사는 사람의 부류가 좀 많이 다르네요."

딱히 여인이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정식으로 무술을 익힌 이들에 비하면 확실히 어설프다.

그런데 기본 상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인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그렇다.

"굳이 따로 주의를 드릴 필요는 없겠군요."

알리우스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보셨죠? 이게 트리스트 시티입니다."

카르나크 일행은 분명 강하다.

아마 정면으로 붙으면 세라티 혼자서도 어지간한 도적들 수십 명은 가뿐히 쓰러뜨릴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에서 정면으로 덤벼 주는 친절한 이들 따윈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31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5)

카르나크 일행은 계속 거리를 걸었다.

그 와중에 날치기 두 번, 강도질 세 번을 더 목격했다.

고작 1시간도 되지 않아 범죄만 다섯 번을 본 것이다.

그럼에도 딱히 알리우스가 나설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이후에 만난 날치기꾼들은 시장의 소년과 달리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절묘하게 짐을 낚아채고, 곧바로 내달리며 미리 대기했던 동료에게 짐을 넘기고, 그 와중에 날아오는 단검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 버린다.

날치기당한 이는 길길이 날뛰지만 주위 반응은 또 달랐다.

"녀석들, 제법 솜씨가 좋은데?"

"날치기하려면 저쯤은 해야지."

쓰러진 소년에게 아무 관심도 안 주었던 것처럼, 날치기당한 사람에게도 아무 관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피 흘릴 일도 없고, 성직자가 나설 일도 없다.

강도질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어이, 형씨, 돈 좀 빌릴까 하는데?"

뒷골목도 아니고 거리 한복판에서 우락부락한 떡대들이 뜨내기 행상을 털어 댄다. 행상들은 당연히 분노해 맞서 싸우려 한다.

하지만 애초에 쪽수에서 사정없이 밀린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주머니를 빼앗긴다.

그런데 강도 짓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그 와중에도 생명에 지장이 생길 만큼은 절대 패질 않는 것이다.

딱 제압 수준으로 쓰러뜨리고 돈만 챙겨 빠르게 자리를 뜬다.

"크윽!"

"이 개 같은 놈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얻어맞고 돈 빼앗긴 행상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지만, 알리우스 입장에선 나서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사람 목숨이 걸렸다면 모를까, 이 정도로 정체를 드러낼 수는....'

그래서 어쩌나 고민만 하고 있는데, 딱히 이런 태도가 눈길을 끌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재밌는 구경 났다는 듯 보고만 있으니까. 그러다가 상황 종료되면 그냥 제 갈 길 가니까.

어이가 없어 바로스가 혀를 찼다.

"와, 뭐 이런 동네가 다 있죠?"

그 역시 온갖 불법적인 범죄가 횡행하는 도시의 뒷거리를 돌아다녀 봤지만 여긴 확실히 다르다.

"이래서 불법이 아니라 무법의 도시라고 하는 건가 보네요."

법이 존재하는데 어기는 것과, 어길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세라티가 근심하며 말했다.

"함부로 여관에 묵을 수도 없겠는데요, 이거."

도시 전체가 란펠트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수틀리면 뒤에서 칼 꽂는 놈들 천지다. 여관에 가도 눈이라도 편히 붙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무 곳에나 묵었다가 자는 동안 칼침 맞는 거 아니에요?"

알리우스가 동의하며 대꾸했다.

"실제로 많은 뜨내기들이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고들 하더군요. 그래서 반드시 연줄이 있는 곳을 찾아야만 한다고."

릴테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여관방에서도 방어 결계를 쳐야 하는 겁니까? 이거 참, 노숙도 아니고...."

다행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제가 염두에 둔 곳이 있습니다, 릴테인 씨."

"네? 하지만 트리스트 교구는 의심스럽다고...."

외부에서 활동하는 신관들이 그 지역 교단을 찾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하토바 교단은 신뢰할 수 없다.

애초에 그 이유로 이렇게 변장을 한 것 아닌가?

"예, 그래서 다른 현지 협력자를 찾았지요."

"...믿을 수 있는 자입니까?"

이 도시의 분위기를 보건대 현지의 협력자는 필수였다.

그런데 과연 그 협력자를 믿을 수 있을까? 이미 란펠트 가문이 도시 전체를 장악했는데?

그 답은 중앙 거리에 도착하자 바로 알게 되었다.

"아니, 여긴...."

눈앞에 세워진 커다란 저택을 보며 세라티가 황당하다는 듯 뇌까렸다.

"플라드 저택이잖아요?"

하토바 교단에 의해 몰락한 바로 그 가문이었다.

***

플라드 저택의 외관은 평범했다. 아니, 정확히는 꽤나 낡은 건물이었다.

여기저기 수선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 차라리 카르나크의 제스트라드 저택이 더 크고 화려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의 저택은 놀랍도록 사치스러워 보였다.

"야, 주위가 이러니 상대적으로 좋아 보이네."

도시 전체가 누덕누덕 기운 수준의 건물들뿐이니 그냥 외관만 멀쩡해도 굉장히 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이 정도라도 저택을 유지 보수한다는 건 실제로 사치스러운 행위가 맞기도 하다.

"몰락했다 해도 아직 힘이 꽤 있는 모양이군요?"

카르나크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망한 가문이 협력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 싶었는데, 이 정도면 믿을 만하다.

'게다가 란펠트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있을 테니 배신당할 걱정도 없지.'

저택으로 다가가며 알리우스가 대꾸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죠? 지금 우리에게 플라드 가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이들도 달리 없습니다."

"하토바 교단도 이들에겐 적 아닙니까?"

"정확히는 하토바 교단의 트리스트 교구가 이들의 적이죠. 그리고 우린 그들을 응징하러 온 것 아닙니까?"

"과연, 서로의 이득이 맞아떨어지는군요."

눈치를 보며 저택 입구로 향하니 문지기 2명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둘 다 나이가 많고 실력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역시 몰락하긴 몰락했구나 싶었다.

일행이 다가오자 문지기가 경계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알리우스는 말없이 품에서 웬 브로치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얼핏 평범한 브로치인데도 문지기가 바로 경계를 거뒀다. 아마도 사전에 약속된 증표 같은 것인 듯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이미 밤이 된 저택 곳곳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니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인 1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플라드 가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주 실데라입니다."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 험한 도시에 사는 여인답게 신체는 꽤나 발달해 있었다.

[척 봐도 한가락 하게 생겼는데?]

[드레스보다는 갑옷이 더 어울리는 아가씨네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습관처럼 상대를 파악하는 사이, 알리우스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토바를 섬기는 알리우스입니다. 반갑습니다, 실데라 양."

그녀는 플라드 가문의 전 가주, 마라드의 딸이었다.

전 가주가 사령술사와 손잡고 폭주할 때 가장 앞장서 반대하다 미움을 사 한동안 유폐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가문이 몰락한 후론 오히려 남은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이유가 된 것이다.

그녀만이 플라드 가문이 사령술과 더 이상 관련이 없다는 증명이 되니까.

"아버지의 죄악에 대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 목표는 그저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것뿐이죠."

순간 실데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 간악한 란펠트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힘이 부족하니...."

현재 플라드 가문의 전력은 거의 남지 않았다.

사령술과 관련이 있던 주요 세력은 처형되었고, 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나섰거나 제 앞가림하기만도 벅찬 처지다.

"그렇다 해도 아직 도시 곳곳에 영향력이 남아 있습니다. 저희를 믿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알리우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 플라드 가문에 남은 이들은 사령술과 '정말로' 무관한 이들뿐이었다.

조금만 관련이 있어 보여도 처형했으니까.

죄 없이 죽은 이들도 굉장히 많았다.

정말이지 아무리 털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이들만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다.

그만큼 교단의 심문은 가혹했다.

그리고 이들은 란펠트 가문 못지않게 하토바 교단에도 증오를 품고 있었다.

그 증오의 대상을 교묘히 트리스트 교구만으로 좁힌 것이 알리우스의 수완이었다.

"교단에서도 트리스트 교구의 폭거를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저들은 반드시 여신의 벌을 받게 될 겁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알리우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현 상황에 대해 알려 주시겠습니까?"

***

현재 란펠트 가문의 경계는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이미 하토바 교단이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분을 위장하고 접근해 사령술의 증거를 찾는 교단의 기존 수법은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아예 모르는 이는 들이지도 않는다.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랜 수하가 아니면 접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고슴도치처럼 빳빳하게 침을 세우고 으르렁대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알리우스가 세운 계획은 심야의 습격.

교단이 아닌 다른 세력으로 위장해 저택을 공격한 뒤, 상대의 경계를 흔들어 가며 그 와중에 사령술의 증거를 찾는 것이다.

"단순 무식한 방법이지만 의외로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이기도 하죠. 어디까지나 무력이 받쳐 줄 때의 이야기지만."

이를 위해선 란펠트 가문의 현 전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도를 가져와 테이블에 펼치며 실데라가 입을 열었다.

"현재 란펠트 저택에 상주하는 병력은 100여 명 정도입니다. 전원 2급 모험가 수준의 전사들이고, 2서클의 마법사가 셋, 3서클이 다섯 있습니다."

이외에도 도시 전역에 휘하 세력이 퍼져 있으니, 과연 한 도시를 장악하기에 충분한 무력이었다.

그럼에도 릴테인은 안도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군요."

저택 병력만 보면 현재 카르나크 일행의 수준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다.

더구나 병력 배치며 교대 상황까지 상세히 조사되어 있으니 충분히 치고 빠질 수 있을 듯하다.

실데라가 안색을 굳혔다.

"문제는 사령술사들이지요."

저들이 숨겨 놓은 사령술사가 얼마나 강한지,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플라드 가문의 정보력으로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건 맞닥뜨려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알리우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 점은 괜찮습니다."

사령술사가 강력한 이유는 쉽게 힘을 얻는다는 것 말고도 또 있다.

수법이 너무 생소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강자라도 경험 밖의 일을 당하면 의외로 쉽게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리우스 일행은 문제가 없다.

"이분들은 모두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베테랑들이니까요."

***

트리스트 시 서쪽에 위치한 란펠트 저택의 거대한 지하실.

벽마다 화톳불이 꽂혀 어둠을 밝히는 그곳에서 온갖 신음이 울리고 있었다.

"으으으...."

"으아아...."

벽이며 기둥마다 피로 물든 사람들이 걸려 있다. 다들 피부가 벗겨지고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흉측한 몰골이다.

어찌나 끔찍한 광경인지 지옥이 실재한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2명의 사내가 지하실 한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흔 언저리로 보이는 장년인과 3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지하실을 지켜보며 청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교단이 파견한 자들을 마지막으로 처리한 것이 벌써 한 달 전입니다. 슬슬 본산에서 다시 손을 쓰지 않을까요?"

장년인은 대수롭잖다는 반응이었다.

"교단에서 계속 사람들을 보낸다면 그야말로 기꺼운 일이지. 더더욱 제물이 늘어날 테니."

그는 지하실에 묶인 수십 명의 사내들, 하토바 교단이 보낸 어둠사냥꾼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강자들이었다. 다른 사령술사를 상대해 본 경험 역시 풍부했다.

"하지만 사실 저들은 진정한 사령술사를 상대해 본 적이 없지."

어설픈 밑바닥 인생들, 아무런 지혜나 지식도 없이 위대한 어둠의 힘을 창이나 칼처럼 휘두르기만 하는 어리석은 것들.

사령술사라 칭하기도 부끄러운 하찮은 자들만 상대한 주제에 자신들이 무슨 사령술의 천적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 어리석음의 결과가 이것이다.

장년인이 오른손을 들었다. 동시에 지하실 전체에서 어둠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악!"

"아아아악!"

메아리치는 비명 속에서 피어오른 어둠이 장년인에게로 모여들었다. 어둠을 흡수하며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양질의 사기로 바뀌었군."

청년이 근심하며 물었다.

"몸에 부담은 없으십니까?"

"아무래도 좀 있긴 하지."

여전히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하며 장년인이 양손을 모았다.

"그러니 이렇게...."

합장한 두 손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대지의 여신, 하토바의 광휘였다.

"위대한 여신의 가호로 몸을 지키는 것 아닌가?"

장년인, 하토바 교단의 트리스트 교구장 슈트라프 주교는 양손에 빛과 어둠을 머금은 채 사악하게 웃었다.

"이번엔 좀 고위 성직자가 쳐들어와 줬으면 좋겠군. 그만큼 건질 것도 많을 테니 말이야."

#32화. 9. 란펠트 저택

짙은 안개가 깔린 트리스트 시티의 밤거리.

5명의 사내가 골목 사이로 달리고 있었다. 가죽 갑옷에 단검 등으로 무장하고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전형적인 도적들의 모습이었다.

"서둘러라. 시간을 맞춰야 한다."

"예, 형님."

시야가 극히 제한됨에도 이들의 움직임은 거리낌이 없었다.

다들 도시의 지리에 익숙한지 딱히 횃불 같은 광원의 도움 없이도 안개와 밤의 어둠 사이를 쉽게 가로지른다.

이윽고 사내들이 커다란 저택 근처까지 도달했다. 좌우로 뻗은 담장의 끝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저택이었다.

안쪽을 살피던 이들 중 1명이 긴장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경계가 보통이 아니군요."

건물 자체는 꽤나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원래는 트리스트 백작가의 저택이었으니 그럴 만하다.

하나 이곳을 차지한 란펠트 가문은 우아한 귀족의 저택을 흉흉한 도적의 요새로 바꿔 놓았다.

원래는 장미 넝쿨이 아름답게 타고 올라야 할 담장에 칼날과 사금파리를 꽂아 넣어 외부의 사소한 침입자조차도 경계한다.

우아해야 할 정원수들은 왕창 가지를 친 뒤 임시로 만든 초소를 얹어 놓아 석궁을 든 경비병들을 배치했다.

심지어 화려했던 귀족풍의 정원은 아예 통째로 갈아엎었다. 자질구레한 조경수들을 싹 밀어 버려 연병장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시야를 가리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조치다.

사내 1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길 습격하다니...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않겠죠?"

다른 사내가 핀잔하듯 대꾸했다.

"담을 넘으라는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린 그저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기만 하면 돼."

물론 그조차도 충분히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한 바였다.

이들은 모두 란펠트 가문에 의해 가족과 동료를 잃은 플라드 가문의 잔류자들이었으니까.

새 가주 실데라는 가문에 남은 정예 20명을 모은 뒤 말했다.

-복수의 밤이 왔습니다.

자세한 계획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모인 이들 역시 일부러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들 계획을 아는 이가 많을수록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는 걸 알 정도로 노련한 이들뿐이었다.

그저 가주를 믿고 계획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그녀가 세운 계획이 쓸모 있기만을 바란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이들은 계속 기다렸다.

안개가 짙어 달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고, 교회의 종도 이런 심야에는 치지 않는다.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감각뿐.

"좋아, 이 정도면 다들 제 위치에 갔겠지."

중년인이 손짓을 했다.

"시작해라."

다른 사내가 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기름이 가득 든 화염병이었다.

"비열한 란펠트 놈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로 불을 붙인 뒤 던진다.

"어디 엿 좀 먹어 봐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담장 안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공격이다!"

"전원 위치로!"

***

아무리 카르나크 일행이 강하다 해도 적의 본거지를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알리우스는 플라드 가문을 끌어들였다.

미끼 병력이 사방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내부로 진입한다는 양동작전이었다.

"고작 20명이라 해서 솔직히 실망했는데...."

상황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해 주고 있군요."

란펠트 저택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소요가 일고 있었다.

복면을 쓴 이들이 연신 화염병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아 댄다.

목표는 목재로 만든 초소.

과연 견고하게 만든 물건이 아닌지라 금방 불길이 치솟는다.

그리고 금방 가라앉는다.

"흥! 우리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했을 줄 알았나?"

주요 거점에 화재를 대비해 마법 결계를 치는 것은 상식인 것이다.

란펠트 저택에는 3서클의 마법사도 상주하고 있으니 고작 화염병 정도로 불을 낼 수는 없다.

뭐,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니까.

"어떤 놈들이 감히!"

"란펠트의 힘을 보여 주마!"

이내 저택 곳곳에서 무장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도시를 장악하고 승리자의 위치에 선 후였다. 하찮은 졸병조차도 하나같이 기세등등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군기가 투철하단 소리는 아니다. 절반 정도는 술기운으로 얼굴이 시뻘겠으니까.

"아, 씨! 한창 술 잘 먹고 있는데 어떤 놈들이야?"

애초에 성실하게 사는 놈들이면 이 자리에 있지도 않는 것이다. 원체 방탕하게 살던 뒷골목 인생이라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지.

그런데 의외로 술에 취한 상태로도 제법 실력을 발휘한다.

"으아! 이놈의 자식들!"

"죽여 주마!"

항시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절제 속에서 신체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이 노련한 무인이라면, 술 처먹고 해롱거리다가도 일 터지면 바로 정신 차리고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노련한 무뢰배다.

다들 술에 취한 상태로도 용케 전투에 임했다.

"죽어라, 잡것들!"

"네놈들이야말로 죽어라! 더러운 란펠트 놈들!"

이내 격돌이 이어지고 박투가 벌어졌다.

창칼 부딪치는 소리, 비명과 신음, 기합과 괴성이 어우러져 밤안개 가득 퍼졌다.

"으아아아!"

"타아아앗!"

이 모든 광경이 거대한 물그릇 위로 비친다. 릴테인의 원견 수경 마법이다.

현재 카르나크 일행은 란펠트 저택에서 한 구역 떨어진 3층 건물 옥상에 숨어 있었다. 이곳에서 전체적인 전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세라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제대로 검을 쓸 줄 아는 자조차 없네요."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병사들보단 강합니다. 오러 유저께서 보기에야 하찮겠지만요."

"아니,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요...."

지금 뛰쳐나온 이들은 플라드 가문의 습격자들과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전력이 거의 3배 차이가 나는데 저 정도라는 건, 그만큼 실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다.

"저 수준이면 란펠트 가문의 진짜 전력은 아닐 거라는 소리예요. 아무래도 사령술사는 내보낼 생각이 없나 보군요."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체력 소모를 피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입니다."

플라드 가문 덕분에 곧바로 저택 안쪽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알리우스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목표 정도는 우리가 직접 끄집어내야지요."

***

한창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란펠트 저택의 사방, 카르나크 일행이 노린 것은 그 사이의 빈틈이었다.

릴테인의 부유 마법으로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바로 텅 빈 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여기도 경비가 순찰하고 있어야겠지만....

"없네요."

릴테인의 말에 카르나크가 신기할 것도 없다며 대꾸했다.

"당연히 저쪽 갔겠죠, 뭐."

옆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도 꿋꿋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한다?

이건 군기가 투철한 병영에서나 있는 일이지, 이런 뒷골목 싸움에서 기대할 덕목은 아닌 것이다.

일행은 잽싸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 앞쪽까지 달려가자 그제야 대기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흥!"

"기다리고 있었다!"

"저 잡것들이야 보나 마나 미끼겠지."

다들 무장부터가 달랐다. 제대로 금속 갑옷을 갖추고 장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겉보기엔 정규 기사라 해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카르나크 일행을 노려보며 놈들이 한마디씩 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벨렌? 칼라? 스타일?"

"혹시 플라드인가?"

"에이, 거긴 이미 망했는데?"

워낙 적이 많다 보니 짐작 가는 곳도 너무 많은 모양이었다.

거리를 둔 채 경계하는 이들을 보며 알리우스는 옅게 웃었다.

"반응도 그렇고 무장도 그렇고, 확실히 이쪽이 진짜 정예들이군요."

이놈들까지 당해 버리면 그땐 사령술사를 투입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릴테인이 마법의 완드를 쥔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일단 인사부터 날리고 볼까요?"

화염이 일어 올라 완드를 휘감았다.

전조 반응을 본 란펠트의 병사들이 기겁해 소리쳤다.

"마법사다!"

"전원 산개!"

곧바로 커다란 불덩이가 허공을 갈랐다. 폭발이 일어나며 귀를 찢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콰아아앙!

화염이 너울대며 열기가 공기를 끓인다. 운 좋게 피하더라도 그 여파만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할 위력이다.

하지만, 정작 쓰러진 이들은 없었다.

"크윽!"

"누가 이런 느린 마법에 맞아 준다더냐!"

파이어볼이 작렬하는 순간, 사방으로 몸을 던지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피해를 줄인 것이다.

두꺼운 갑옷의 방어력이 있으니 직격만 피하면 이 정도로도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

다들 전투 경험이 많다 보니 마법에도 익숙한 듯 보였다.

하지만 릴테인도 익숙하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는 애초에 빗나갈 걸 상정하고 다음 연계 공격을 준비한 후였다.

"암운의 포효여, 대지를 타고 흘러라! 체인 라이트닝!"

시간 차를 두고 발동한 전격의 그물이 정원을 타고 흘렀다.

날아드는 전격을 보며 병사들이 기겁했다.

"헉!"

"또 마법이 날아와?"

기껏해야 2~3서클 마법사만 봐 왔던 이들에겐 예상 못 한 공격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마법이 이어지는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채 피하지 못한 병사 4명이 전격에 휩싸였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어억!"

"아아아악!"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다른 놈들부터 조져! 뒤섞이면 함부로 마법을 쓰지 못할 거다!"

쓰러진 동료들은 뒤로한 채 남은 놈들이 일제히 덤벼들기 시작했다.

사기를 끌어내려는 듯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쫄지 마라!"

"고작 다섯 놈에 불과하다!"

세라티가 가볍게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먼저."

허리춤의 장검이 부드럽게 뽑힌다. 칼날이 붉은 광채로 뒤덮여 간다.

섬뜩한 적색 섬광이 선두에 선 2명의 병사를 그대로 베어 갔다.

서걱!

검도, 방패도, 갑옷조차도 일격에 베어 버리는 핏빛 검광.

란펠트의 용맹한 정예가 동강 난 고기 조각으로 변해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달려들던 병사들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에엑! 저 빛은...."

"투기검?"

경악하며 놈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오러 유저라고?"

"아니,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작자가 왜 이런 곳에 있어?"

아무리 트리스트 시티가 죄악의 도시니 인세의 지옥이니 해도 결국은 변방이었다.

오러 유저쯤 되면 보통 왕도 같은 큰물에서 놀지 이런 시골에까지 오는 경우는 잘 없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이것들아! 오러 유저가 별거냐?"

세라티의 검을 가리키며 그가 애써 목청을 키웠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고작해야 적색급에 불과해!"

오러 유저의 경지는 투기검의 색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세라티의 투기는 붉은빛. 유저 유저 중에선 분명 제일 낮은 수준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녀를 우습게 볼 이유는 되지 못하지만.

병사들 중 노련한 이들은 어이없어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고작이라니....'

'분명 투기검이 붉긴 한데....'

'그래도 투기검이잖아!'

'오러 유저 중에서 제일 약하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저건 이런 소리나 다름없는 것이다.

-상대는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다! 쫄지 마라!

이쪽은 죄다 고양이라고.

고양이 입장에서 상대가 호랑이건 표범이건 뭔 차이가 있는데? 어차피 물리면 한 방에 죽는 건 마찬가지구만.

하지만 란펠트 저택의 모든 병사들이 저들처럼 노련하진 않았다. 젊고 혈기 왕성한 이들에겐 저 정도로도 사기가 오른다.

"젠장!"

"그래, 오러 유저가 별거냐!"

"곧 지원군이 온다!"

"설마 그때까지 버티지도 못하겠어?"

악을 써 대며 병사들이 세라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검을 고쳐 쥐며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흥!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적당히 할 생각은 없다.

이들이 비참하게 무너져야 란펠트 측도 경각심이 생길 테고, 그래야 사령술사라는 숨겨 둔 전력을 끄집어낼 수 있을 테니까.

세라티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녀의 사방으로 붉은 검광이 흩뿌려졌다.

"타아앗!"

#33화. 9. 란펠트 저택 (2)

붉은 검이 작렬할 때마다 붉은 피가 튄다.

안개 낀 밤하늘 아래 붉은 비가 비명과 함께 내린다.

"아악!"

"으아악!"

세라티는 계속해 전장을 누볐다.

과연 오러 유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무인답게 그녀의 검은 막힘이 없었다.

검을 휘두르면 칼날을 베어 버리고 방패로 막으면 방패를 썰어 버린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로스는 내심 혀를 차고 있었다.

'아직 적색급이라 그런가? 움직임이 영....'

오러 유저의 경지는 총 다섯 단계로 나뉜다.

불처럼 타오르는 투기를 다루는 적색급.

레드 나이트라 불리며 붉은색의 오러를 사용한다. 투기를 끌어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파괴력을 보이는 강능제유의 경지다.

이 정도만 되어도 어딜 가든 명성을 떨칠 수 있다. 변방에서는 레드 나이트 1명만으로 세력 구도가 크게 바뀔 정도다.

그 위 단계가 물처럼 차분한 투기를 다루는 청색급.

블루 나이트라 불리며 푸른색의 오러를 사용한다. 노련한 투기 제어가 가능해져 압도적인 파괴력뿐 아니라 섬세한 기교까지 겸비하는 유능제강의 경지다.

왕국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강자로, 보통은 고위 귀족가에 초빙되거나 왕실 기사로 일하며 얽매이기 싫어하는 경우엔 초일류 모험가로 활동하곤 한다.

이마저 넘어서면 퍼플 나이트라 불리게 된다.

적색과 청색을 합일시킨 보랏빛 투기를 다루는 자색급으로, 투기의 완급 조절이 완숙에 도달한 강유일체의 경지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진정한 초인의 영역으로 유력 기사단의 단장, 혹은 대륙 최강이라는 제국 기사단이 이 경지에 머무르고 있다.

여기서 한 번 더 벽을 허물면 은빛의 투기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실버 나이트 혹은 은의 기사라 불리는, 기교와 위력은 물론이고 검술의 상식마저 극복한 경지다.

사물에 투기를 깃들이는 수준을 넘어 투기 그 자체를 유형화시켜 다루는 영역으로, 제국 기사단장이나 일국의 수호 기사들이 이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리고 궁극의 경지인 황금의 기사.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이치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한 자루 검으로 풍운조화마저 일으킨다고 한다.

그 자체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오직 4대 무왕만이 올랐다고 전해지는 무신의 영역이다.

데스 나이트 로드였던 왕년의 바로스는 4대 무왕과도 자웅을 겨룬 초강자 중의 초강자였다. 그렇다 보니 지금 세라티의 움직임이 영 눈에 밟히는 것이다.

'아, 저거 저렇게 움직이는 거 아닌데.'

'아, 저기서 저러면 안 되는데.'

'아, 왜 저렇게 쓸데없는 동작이 많아?'

물론 지금의 그가 세라티를 탓할 자격은 없다.

투기조차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굴 폄하한단 말인가?

'에잉, 주제 파악하고 내 할 일이나 해야지.'

달려드는 병사 하나를 걷어차며 바로스는 재차 전투에 집중했다.

란펠트의 병사들은 세라티만 노리고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노련한 이들은 다른 일행을 더욱 집중적으로 노렸다.

저 무서운 오러 유저를 직접 상대하느니, 동료를 붙잡아서 인질로 삼는 게 훨씬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동료란 작자들도 절대 만만치가 않다는 점이다.

"작렬하라, 익스플로전!"

릴테인의 화염구가 황량한 정원을 때렸다. 폭음과 함께 광풍이 불며 흑연이 피어올랐다.

콰아앙!

"찰리가 당했어!"

"젠장! 물러서!"

"등! 등을 노려!"

"단검 던지라고! 단검!"

"야! 그걸 떠들면 어떻게 해!"

멀리서 칼을 날리려는 이들은 세라티가 재빨리 처리한다.

"흥! 누가 그렇게 놔둔대니?"

둘 다 미리 손발을 맞춰 본 적이 없을 텐데도 절묘하게 합격술을 이어 가고 있었다. 카르나크가 감탄을 흘렸다.

'역시 베테랑은 베테랑이구만.'

'그러게요. 경험이 많으니 임기응변만으로도 손발을 잘 맞추네.'

하지만 이들은 미처 몰랐다.

정작 놀라고 있는 것은 세라티와 릴테인이라는 것을.

'아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싸우지?'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호흡은 실로 완벽한 수준이었다.

바로스가 치고 빠지고, 카르나크가 마법을 날리고, 계속 위치를 바꿔 가면서 싸우는데 그 와중에도 절대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가장 유리한 위치를 시종일관 고수하며 차분하게 전투를 이어 가니 란펠트 병사들이 아무리 덤벼들어도 난공불락의 성처럼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저들이 쓰러뜨린 숫자는 세라티와 릴테인의 배가 넘었다.

오러 유저도 아닌 바로스와 4서클 마법사인 카르나크의 조합이, 오러 유저와 6서클 마법사의 조합보다도 오히려 강하다니?

'어쩐지 알리우스 신관님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더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전투 센스가 엄청나네, 정말?'

실은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함께한 기간이 너무 길어서일 뿐이었다.

자그마치 100여 년을 같이 싸웠는데?

그냥 머리 비우고 대충 싸워도 알아서 호흡이 맞는다. 오히려 손발이 어긋나기가 더 힘들 정도다.

덕분에 란펠트의 병사들은 내내 밀리는 중이었다. 도저히 노릴 빈틈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알리우스조차도 약점이 아니었다.

장검을 휘두르며, 그는 접근하는 란펠트 병사들을 차분히 상대하고 있었다.

사령술사가 나타날 때까진 신관이란 사실을 숨겨야 하니 일부러 일개 검사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검술 실력이 상당하다. 다른 일행처럼 압도적이진 않지만 착실히 몸을 보호하며 전투를 이어 간다.

"헛! 타앗!"

상황을 살피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기사급은 되는 거 같은데?]

[우리 영지 기사들보다도 잘 싸워요. 성직자가 어디서 칼질을 저렇게 배운 거래?]

결국 무수한 시체들만 남긴 채 병사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저택 안쪽으로 물러서는 적들을 노려보며 세라티가 인상을 썼다.

"이런...."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웠는데도 추가 병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이 이 저택의 모든 전력일 리도 없다.

"설마 사령술사가 없는 거 아니에요, 이거?"

"그건 아닐 겁니다."

알리우스가 안색을 굳혔다.

아까와 달리 란펠트 저택의 기운이 변하고 있는 탓이었다.

"더러운 사령술의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군요."

점점 암운이 짙게 깔린다.

세라티나 릴테인은 미처 느끼지 못하겠지만, 성직자인 알리우스에겐 털끝이 곤두설 정도로 불길한 어둠의 기운이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우리를 맞이하려는 속셈인가 봅니다."

***

콰앙!

두꺼운 목제 대문이 일격에 박살 났다. 동시에 카르나크 일행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돌입과 동시에 사방을 경계한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마법의 완드를 겨눈 채 릴테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조용하군요."

백작가의 저택이었던 곳답게 1층 홀은 넓었다.

좌우로 연결되는 4개의 복도, 그 중앙에 2층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보인다. 벽 곳곳에 촛불을 켜 놓아 제법 밝기도 하다.

"저쪽이에요."

인기척을 느낀 세라티가 계단 위쪽을 가리켰다.

흑색 로브 차림의 사내 3명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러 유저에 상급 마법사라...."

"제법 이름을 떨친 이들이겠군."

"허나 어둠의 권능 앞에선 무의미할 뿐이지."

음습한 목소리와 함께 공기가 무거워진다. 성직자가 아닌 이조차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어둠의 기운이다.

란펠트 가문의 사령술사들이었다.

"보아라!"

"이것이 진정한 사령술의 힘이니라!"

놈들이 일제히 검은 마력을 떨쳤다.

칠흑의 그림자가 삽시간에 홀을 가득 메웠다.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제껏 저들이 봐 왔던 '일반인'들이라면 그랬을 거란 소리다.

알리우스는 흡족해하고 있었다.

"오, 세 놈이나 되나?"

릴테인과 세라티도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저 정도면 증거로는 충분하겠군요."

"셋 다 잡아가는 게 좋겠죠?"

다들 안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대놓고 좋아하지만 않을 뿐,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마찬가지다.

[저거 어둠의 군주 몇 인분이에요?]

[처먹은 어둠이 제법 많나 봐. 세 놈 합치면 10인분은 되겠다.]

[역시 큰 사건에는 큰 콩고물이 떨어지는 법이구만요.]

공포는 고사하고 긴장조차 느끼지 않는 카르나크 일행을 보며 사령술사들은 분노했다.

"이놈들이!"

"감히 우리를 비웃어?"

과연 오러 유저며 상급 마법사다운 오만한 태도다. 평생 자신들 같은 밑바닥 인생을 무시하며 살아왔겠지.

"언제까지 비웃을 수 있는지 보자!"

이를 갈며 사령술사들이 어둠을 허공에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서로의 마력을 합쳐 보다 강력한 존재를 소환하려는 것이었다.

"오라, 죽음의 화신이여!"

이내 어둠이 거대한 낫을 든 기괴한 악령의 모습으로 변했다.

"가라, 스펙터! 놈들의 생기를 모조리 흡수해 버려라!"

스펙터가 가공할 사기를 사방으로 떨치며 괴성을 터트려 댔다.

끼에에에에엑!

***

스펙터는 악령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언데드다.

성직자의 권능이 없다면 창칼은 물론 마법도 잘 먹히지 않는다. 덕분에 언데드와의 전투가 익숙하지 않다면 일류 전사나 마법사도 상대하기 어렵다.

위력 또한 무시무시해서, 단 한 마리만으로 마을 하나를 모조리 몰살시킨 적도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들은 이제 곧 저 오만한 침입자 일행이 죽어 나자빠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여신의 빛이 모든 부정한 것을 벌하리라!"

알리우스의 떡갈나무 지팡이가 섬광을 쏘았다. 날아들던 스펙터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둔화되었다.

사령술사들이 흠칫하며 신음을 흘렸다.

"어?"

뒤이어 릴테인이 마법을 외운다.

"쏘아지는 작렬의 창, 플레임 스피어!"

둔해진 스펙터의 전신을 화염 창이 꼬치처럼 푹푹 찔러 댄다.

"...어어?"

동시에 이어지는 세라티의 붉은 투기검.

"이얍!"

가벼운 기합과 함께 스펙터가 두 동강 나더니 그대로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어어어?"

하필 저들에겐 성직자도 있고 언데드와의 전투도 익숙한 것이다.

기껏 부른 스펙터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넋이 나간 사령술사들을 노려보며 세라티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저놈들 붙잡아서 돌아가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군요."

평소라면 이대로 종말의 어둠을 뽑아내고 끝이겠지만 놈들은 란펠트 가문의 죄악에 대해 증언을 해야 한다. 그러니 사로잡을 필요가 있다.

"차라리 아까의 전투가 더 귀찮았던 것 같네요."

실소하며 적발의 미녀가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수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어느새 사령술사들의 코앞까지 들이닥친다.

기겁한 사령술사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 허억!"

그때였다. 주저앉은 놈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폭발해 버렸다.

펑! 퍼펑!

사방으로 육편이 휘날리고 피가 튀었다. 알리우스가 놀라 외쳤다.

"세라티 양! 제가 사로잡아야 한다고...."

"제, 제가 한 짓이 아니에요!"

당황하며 그녀가 뒤를 돌아볼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

기괴한 소음과 함께 벽이 일그러지며 검붉은 고깃덩어리로 바뀌어 간다. 바닥이 물컹대는 피의 늪으로 차오르고 천장에 수많은 흉측한 촉수가 돋아난다.

실로 악몽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알리우스는 당황했다.

"...이, 이건 대체?"

여태 수많은 사령술사들을 처치한 그였지만 이런 경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악령을 부리거나 구울, 좀비 등을 다루는 수준이었다. 제법 강력한 사령술사는 지옥의 악마를 소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경우에도 주위에 탁기와 어둠을 짙게 드리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지금은?

평범하던 귀족 저택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해 버렸다.

공간 자체를 바꿔 버리는 엄청난 이적인 것이다.

릴테인과 세라티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건 마치 어릴 때 들었던 전설 속의 사령술사 같지 않은가?

"이, 이게 실제로 되는 거였어?"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렇게 일행이 패닉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울렸다.

"허허, 이거 참...."

음성은 쓰러진 사령술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러 유저와 6서클 마법사도 대단한 수확인데...."

사령술사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머리가 박살 난 시체의 목구멍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인데 저들의 음성일 리가 없다.

"알리우스 심문관까지 왔나? 이 모자란 것들도 쓸모가 있었군."

알리우스는 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슈트라프 교구장?"

#34화. 9. 란펠트 저택 (3)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몇 번이나 만난 적이 있어 알리우스는 이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트리스트의 교구장, 슈트라프였다.

"어째서 당신이 사령술을...."

비웃는 답변이 돌아왔다.

"뭘 그리 놀라지? 애초에 날 의심하고 이렇게 몰래 기어들어 온 것 아닌가?"

물론 의심은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령술사와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정도였다. 설마 본인이 사령술사가 되어 버렸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맙소사! 여신의 종이 부정한 어둠의 힘을 탐한단 말이오?"

"탐하지 못할 이유는 또 뭐가 있단 말이냐, 하하하!"

짙어지는 조소와 함께 공간 전체가 꿈틀거린다. 어둠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며 중압감으로 변해 전신을 짓누른다.

"크윽!"

위기감을 느낀 세라티가 주위를 살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퇴로 확보다.

'출구는?'

돌입할 때 파괴했던 대문은 어느새 흉측한 고깃덩이들로 막혀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곧바로 투기검부터 발했다.

"타앗!"

붉은 오러가 고기의 벽을 때렸다. 그리고 바로 사그라졌다.

잠시 흔들렸을 뿐, 벽은 전혀 뚫리지 않았다.

"뭐가 이리 단단해?"

릴테인도 멍하니 서 있지 않았다. 애써 냉정을 되찾으며 마법을 준비해 날린다.

"파이어 애로우!"

고기의 벽을 향해 화염 화살이 연달아 작렬했다.

쾅! 콰콰쾅!

아쉽게도 결과는 같았다.

폭음이 일어나고 잠시 후 멀쩡한 고깃덩이들이 꿈틀대는 모습이 보인다.

오러도 마법도, 제 위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암흑에 휩싸여 위세가 죽어 버린 것이다.

"제가 사기를 걷어 내겠습니다!"

떡갈나무 지팡이를 겨누며 알리우스가 신성력을 끌어 올렸다.

"하토바의 빛이여!"

찬란한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사특한 존재를 불사르는 신성한 여신의 광휘였다. 이 빛 앞에 사라지지 않는 어둠은 없었다.

...여태까진 말이지.

어둠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성스러운 빛을 삼키며 더더욱 위세를 키워 간다.

사방이 죽음의 기운으로 넘실거리고 바닥에 고인 피의 늪이 회오리친다.

"신성력이 통하질 않다니...."

알리우스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강력한 사령술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어둠의 권능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쯧쯧, 이보게, 알리우스 군."

탁기로 가득한 공간 너머로 목소리가 울린다.

"자네들이 만난 이들이 진짜 사령술사라고 생각했나?"

얼핏 안쓰러워하는 듯한....

"아니지, 아니야."

실상은 지극히 조롱으로 가득한 목소리다.

"생각해 보게. 사령술이란 게 고작 그 정도였다면 왜 7여신교가 대대로 어둠의 권능을 그리 경계했겠나?"

현재 대륙 전역에 창궐하는 '종말의 어둠' 사역자들.

이들 대부분은 사령술이 뭔지 모른다. 그냥 힘이 생겼기에 그걸 휘두를 뿐이다.

말하자면 우연히 보검을 주운 것과 같다.

손에 쥔 검을 막무가내로 휘두른다 해서 검술가라 할 수 있나?

"얼뜨기들만 상대하다 진짜를 만나 보니 기분이 어떠신가?"

세라티와 릴테인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

보이지 않는 압박이 더욱 강해진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흐릿해지고 호흡이 가빠 온다.

사방을 둘러보는 알리우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젠장, 이제 어찌해야 하지?'

***

지옥 같은 풍경, 뇌수를 후벼 파는 듯한 자욱한 암흑을 눈앞에 두고도 바로스는 태연했다.

'이야, 이 정도면 진짜 사령술사라고 자처할 만하네?'

다른 이들은 이 끔찍한 풍경과 어둠의 기운에 공포를 느끼겠지만 그는 다르다.

'간만에 보니 그립구만, 이거.'

왕년에 지겹게 봐 왔던 광경인 것이다.

카르나크가 뻑 하면 펼쳐 낸 뒤 적들을 조졌던 평범한 사령결계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그때와 달리 이 공간이 더 이상 아군이 아니지만 뭐, 상관없다.

사령술의 극의에 도달한 자, 사령왕 카르나크가 옆에 있는데 대체 뭐가 걱정이란 말인가?

'오히려 좋은 일이지.'

이 정도로 강력한 사령술사라면 종말의 어둠도 많이 처먹었을 터!

'잘하면 바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기대하며 바로스는 힐끔 옆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카르나크가 보였다.

그는 새삼 감탄했다.

'역시 우리 도련님이 연기력 하나는 죽이신다니까? 오래 모신 나에게조차도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일 정도잖아?'

저 노련한 연기력은 정말이지 본받을 만하다.

자신도 열심히 경악한 표정을 지어 주며 바로스가 마법 전언을 몰래 날렸다.

[자, 도련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요?]

이제 곧 카르나크가 평소처럼 사령력의 흐름을 파악한 뒤 결계의 약점을 가르쳐 줄 것이다. 자신은 그냥 시키는 대로 그 부분을 찔러 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태연하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련님.]

어째 카르나크의 답변이 없다?

[도련님?]

시종일관 '당황한 연기'만 하고 있다?

[왜 그러세요? 사령술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제야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 본다.]

[네?]

[이런 거 처음 본다고!]

[...네에?]

***

카르나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슈트라프가 펼친 사령결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사령술사가 귀했던 전생의 세상, 그때의 기준으로도 족히 일류 사령술사에 비견될 만했다.

그래 봤자 카르나크 입장에선 삼류지만.

사령왕이 보기엔 여전히 하찮다. 가볍게 집중하기만 해도 마력의 흐름과 수법이 손에 잡힐 듯 뻔히 보인다.

문제는, 뻔히 보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왜 사령력에 신성력이 섞여 있는 거야?'

현재 펼쳐진 사령결계는 순수한 어둠의 기운으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검은 마력의 흐름 속에 신성한 빛의 궤도가 복잡하게 겹쳐져 있었다.

저 신성력의 융합이, 뻔히 보이는 사령결계를 정작 파훼는 할 수 없는 제3의 수법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빛과 어둠이 융합되었다고? 이게 말이 되나?'

저걸 상식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이거다.

빛이 어둠을 정화하고 있다.

저런 상태라면 내버려 둬도 사령결계가 알아서 붕괴해야 정상이었다. 사령력과 신성력은 절대 양립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양립하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지나치게 상식 밖이라 가설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느긋하게 가설이나 정립하고 있을 상황도 아니었다.

'이래서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여태 카르나크는 온갖 사령술사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고생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마력이 적들보다 높아서가 아니다.

시공 회귀 후, 일부러 혼돈마력만을 키워 온 카르나크였다. 어떻게든 최소한의 힘만으로 상황을 처리하면서 사령술 연마를 최대한 피해 왔다.

그렇다 보니 사령력 자체는 지극히 적다.

순수하게 사령력만으로 따지면 저 대가리 터져서 나자빠진 얼뜨기 사령술사들조차도 카르나크의 10배는 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 손쉽게 사령술사들을 처리한 이유는 상대의 약점을 뻔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예지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뭔 짓을 해도 미리 선수를 쳐 사령술 발동을 막고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법이 불가능하니....

[바로스, 긴장해라.]

오직 혼돈마력과 한 줌의 사령력만으로 저자를 상대해야 한다.

[재수 없으면 우리, 여기서 죽는다.]

카르나크는 침을 삼켰다. 이 시대로 회귀한 뒤 처음으로 위기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바로스의 안색도 바로 굳었다.

[그런 상황이에요?]

자세한 건 모르겠다. 하지만 카르나크의 저런 표정은 너무나도 잘 안다.

[에잉, 어쩐지 그동안 너무 잘 풀린다 싶더라.]

***

"도망칠 방법 따위 없다...."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암흑의 공간이 움직였다. 피의 늪이 꿈틀대며 수십 줄기의 촉수가 솟구쳐 허공을 갈랐다.

"제물들아, 그 어리석은 영혼을 어둠에 바쳐라!"

릴테인이 황급히 바람의 마법을 준비했다.

"질풍이여, 참수의 칼날이 되리! 윈드 블레이드!"

세라티도 투기검을 날렸다.

바람의 칼날과 붉은 오러가 늪을 가르며 퍼져 나가 촉수들에 적중했다.

파파팟!

날아들던 촉수들이 동강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릴테인이 중얼거렸다.

"어, 이번엔 먹히나?"

아까는 오러도 마법도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것이다.

막 알리우스 일행이 화색을 띠려던 차였다.

싸늘한 카르나크의 음성이 들렸다.

"좋아할 것 없습니다. 일부러 당한 것일 뿐이니까."

"네?"

의아해하는 세라티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비쳤다.

나가떨어진 촉수들이 일제히 다른 형태로 변한다. 저마다 2미터에 달하는 암흑의 거인이 되어 기괴한 소음을 내뱉기 시작한다.

고오....

고오오....

피와 어둠으로 이루어진 사령 인형, 카오틱 골렘이었다.

골렘들이 일제히 일행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알리우스가 신성한 장막을 펼쳤다.

"하토바여! 당신의 종을 가호하소서!"

반구 형태의 성광이 일행의 주위를 휘감았다. 황금빛 장막이 잠시 밀려오는 골렘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오오오!

괴성과 함께 카오틱 골렘들이 빛의 장막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이다.

쾅! 쾅! 콰쾅!

일격, 일격이 꽂힐 때마다 폭음이 울리며 장막이 일그러졌다. 알리우스가 연신 신음을 터트렸다.

"큭! 크윽!"

골렘의 공세가 퍼부어질 때마다 충격이 역류해 그를 강타하고 있었다.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라 어둠의 기운이 실린 주먹질인 탓이었다.

"소용없소이다, 알리우스 신관."

조롱이 들려온다.

"그대의 빛은 진실된 어둠 앞에 너무도 미약할 뿐이니."

내장이 뒤틀리며 피가 솟구친다.

"쿠, 쿨럭!"

각혈하며 알리우스가 비틀거렸다.

릴테인이 정신을 집중하며 외쳤다.

"조금만 버텨 주시오!"

언제 이 장막이 깨질지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강력한 마법으로 상황을 뒤집어 놓을 필요가 있다.

주문이 끝나자 릴테인이 완드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만물을 태우는 광포한 폭염이여, 플레임 스트라이크!"

현재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최강의 화염계 주문이었다.

거대한 불기둥이 홀을 가득 메우며 골렘들을 일거에 쓸어 갔다.

콰콰콰콰콰!

아니, 쓸어 가는 줄 알았다.

불기둥이 날아드는 순간 카오틱 골렘들이 입을 벌렸다. 어둠을 토하며 놈들이 굉음을 발했다.

고오오오!

폭염이 어둠에 휘감겨 모조리 사그라졌다.

흩어지거나 박살 난 것이 아니다. 아예 소멸해 버린 것이다.

"저런, 남의 집에 함부로 불을 지르면 쓰나?"

혀를 차는 목소리와 함께 결국 빛의 장막이 깨졌다.

콰앙!

카오틱 골렘들이 몰려와 일행을 덮친다.

거대한 어둠의 손아귀가 알리우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윽! 하, 하토바시여...."

애써 신성 주문을 발동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둠이 전신을 파고들며 신성력의 발동 자체를 막아 버린다.

유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역시 신관부터 확보해야지."

릴테인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제길! 어서 다음 마법을 날려야 하는데....'

워낙 큰 마법을 날린 직후라 마나가 들끓고 있었다. 잠시만 호흡을 조절하면 다시 마법을 쓸 수 있을 텐데, 그 '잠시'가 주어지지 않는다.

퍼억!

골렘 하나가 그를 두들겨 쓰러뜨리고 짓밟았다. 발바닥에 깔린 채 릴테인이 꿈틀거렸다.

"으, 으어어억!"

그리고 이내 축 늘어졌다.

역시나 어둠의 침범에 의해 정신이 제압당한 것이다.

"자, 상급 마법사도 잡았고."

슈트라프의 관심이 세라티에게로 옮겨졌다.

"이제 남은 건 저 아가씨뿐인가?"

물론 아직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슈트라프는 그들에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투기도 각성 못 한 평범한 기사와 4서클의 중급 마법사일 뿐이었다. 오러 유저에 비하면 하찮은 제물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이다.

세라티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헉, 헉헉!"

동료들이 연달아 쓰러졌음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연신 투기검을 휘두르며 카오틱 골렘들을 노린다.

"타아아앗!"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투기검을 휘둘러도 모조리 골렘들이 두른 어둠의 갑옷 앞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결국 일격을 허용했다.

육중한 정권이 그녀의 어깨를 강타한다.

퍼억!

간신히 비껴 맞긴 했지만 충격으로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 틈에 골렘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 이익!"

다급히 투기검으로 골렘의 팔을 자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전히 카오틱 골렘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참으로 알찬 영혼이로구나."

허공에서 흡족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실로 훌륭한 제물이 될 것이다."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평범한 강철 검이 골렘의 팔뚝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두꺼운 팔뚝이 바로 잘려 나갔다.

타앙!

잘린 골렘의 팔뚝이 힘을 잃고 세라티의 목을 도로 풀었다. 틈을 타 바로스가 그녀를 안고 뒤로 물러섰다.

"괜찮습니까, 세라티 양?"

세라티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투기검으로 아무리 베어도 소용없던 암흑의 갑옷이, 고작 강철 검에 수수깡처럼 잘린 것이다.

"어, 어떻게?"

#35화. 9. 란펠트 저택 (4)

"허업!"

기합을 터트리며 바로스는 눈앞의 골렘에게 보디 태클을 날렸다.

어깨부터 깊이 파고들며 중심을 흔드는, 일견 무식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세련된 레슬링 기술이었다.

골렘이 아무리 단단해 봐야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지라 무게중심도 비슷하다. 순간 균형이 무너지며 놈의 두 발이 허공에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스가 골렘의 몸통에 검을 찔러 넣었다.

"에잇! 좀 뚫려라!"

강철의 칼날이 암흑의 갑옷을 비집고 들어갔다. 검은 피가 관통된 상처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엔 통했나?"

골렘의 거체가 서서히 무너진다.

재빨리 물러서며 바로스는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칼날에 맺힌 어둠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이고, 한 놈 해치우기 정말 힘드네...."

투덜대는 거구의 사내를 보며 세라티는 경악했다.

오러 유저인 자신도 어쩌지 못한 것을, 투기도 각성하지 못한 기사가 베어 버렸다고?

그렇다고 바로스의 검이 무슨 강력한 마법 무기인 것도 아니다. 잘 만들긴 했지만 딱히 마법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은 평범한 강철 검이다.

"어떻게 한 거예요?"

"어, 그게...."

바로스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고오오오-!

다른 카오틱 골렘들이 재차 달려든 탓이었다.

"으헉!"

허겁지겁 바로스가 전투를 이어 갔다.

덤벼드는 골렘을 피해 좌측으로 빠져나가 참격을 날리고, 곧바로 검을 수거하며 몸을 돌려 우측으로 파고든다.

타탕!

요란한 금속음이 울리며 어깨를 베인 골렘이 검은 피를 뿜었다.

반면 복부에 칼날을 맞은 다른 한 놈은 멀쩡하다.

세라티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저 골렘의 전신이 전부 투기검을 버틸 정도로 강한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평범한 참격조차도 통할 정도로 약한 곳이 있다!

그녀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골렘 한 놈을 노려 투기검을 뻗었다.

'여기가 약점이야!'

붉은 오러가 카오틱 골렘의 어깨를 강타했다. 바로스가 노렸던 바로 그 위치였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정확하게 같은 부위를 찌른 것이다.

과연 오러 유저다운 가공할 감각이었다.

...통하지는 않았지만.

타앙!

또 투기검이 튕겨 나갔다.

손아귀가 저릿해지는 걸 느끼며 세라티는 당황했다.

'분명히 똑같은 위치를 노렸는데!'

그 와중에도 바로스는 계속 골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치고 빠지며 골렘들을 베어 간다.

그때마다 어떤 놈은 쓰러지고, 어떤 놈은 문제없이 계속 움직인다.

그런데 그 과정에 일관성이 없었다.

허리를 베인 놈은 쓰러지고 다리를 베인 놈은 멀쩡하다?

당연히 허리가 약점인가 싶은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어떤 놈은 다리를 베였는데 그냥 잘리고, 어떤 놈은 허리를 찔렸는데도 끄떡없다.

아까는 가슴을 찔렀는데 뚫리고, 이번엔 가슴을 찔러도 그냥 튕겨 내는 식이었다.

'이게 뭐야?'

세라티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설마 골렘들마다 약점이 전부 다른 건가?'

그것도 이상하다.

그럼 바로스는 저 수많은 골렘들이 지닌 각기 다른 약점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대체 무슨 수로?'

***

패닉에 빠진 세라티를 훔쳐보며 바로스는 내심 혀를 찼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네크로피아의 2인자, 세계를 정복한 사령왕의 최고 심복답게 그에겐 수많은 어둠의 수하들이 있었다. 그리고 개중엔 카오틱 골렘으로 이루어진 군단도 존재했다.

덕분에 이놈들의 약점도 확실히 꿰고 있다.

카오틱 골렘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결계 내에서만 힘을 받아 움직이는 놈들이다.

지금은 사방에 깔린 피의 늪이 힘을 주입하는 매개체였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어둠의 마력을 주입받으며 작동하고 있었다.

'이게 이놈들의 문제점이었지.'

마력 주입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흐름이 비는 곳이 생기는 것이다.

마력이 충만할 땐 오러 유저의 투기검조차 막아 내지만, 흐름이 비면 평범한 검으로도 쑥 찔리게 된다.

물론 그렇다 해서 카오틱 골렘이 무용지물이란 소리는 아니다.

저 흐름의 빈틈은 항상 같은 위치에 생기지 않는다. 골렘의 움직임에 따라 마력의 흐름도 제각각이니, 빈틈 역시 그때그때 바뀐다.

골렘의 모든 움직임을 일일이 파악하고, 그때마다 달라지는 빈틈의 위치도 모조리 외운 뒤, 정확한 타이밍에 그 위치를 정확히 찔러야 겨우 약점 공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왕년에도 저런 짓거리가 가능한 건 대륙 최강이었던 제국 기사단 정도였다. 카르나크의 사령 군단과 싸우며 지겹도록 경험을 쌓은 그들이기에 저런 미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겹도록 제국 기사단을 상대했던 바로스 역시 같은 짓이 가능하다.

놈들이 카오틱 골렘 자빠뜨리는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워낙 자주 겪다 보니 싫어도 카오틱 골렘의 움직임과 약점을 외우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살려 주고 있었다.

'거참, 그 꼴 보기 싫던 제국 기사 놈들을 따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렇듯 오로지 경험만이 전부인 수법인지라 도저히 세라티에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느긋하게 설명할 시간도 없고, 설명해 봐야 더 헷갈려서 움직임만 꼬이겠지.

패닉에 빠진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바로스는 속으로 사죄를 건넸다.

'미안하오. 재주껏 살아 보쇼. 운 좋으면 같이 도망칠 수도 있겠지.'

사실 그라고 속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전생 때나 데스 나이트 로드였지, 지금은 투기도 각성 못 한 평범한 기사일 뿐이다. 이대로 버티고 있어 봐야 결국 체력 떨어지면 끝장이다.

도망이라도 제대로 치려면 카르나크를 믿는 수밖에 없는데....

'도련님은 대체 뭐 하시는 거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로스는 왕년의 사령왕을 힐끔거렸다.

그는 아까부터 혼돈마법만으로 카오틱 골렘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슬슬 사령술 쓰셔야 하는 거 아닌가? 정체 숨기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잖아?'

***

거구의 골렘이 정면으로 밀고 들어온다.

고오오오!

침착한 어조로 카르나크는 시동어를 외웠다.

"아케인 디스크."

마력의 원반이 날아가 정확히 골렘의 다리를 베었다. 육중한 거구가 비틀거리며 피의 늪에 처박혔다.

쿠웅!

동시에 이어지는 화염계 마법.

"파이어 블레이드."

다른 한 놈의 심장이 불의 검에 꿰뚫린다. 덤벼들던 골렘 2기가 간단히 무력화된다.

하지만 여전히 놈들의 숫자는 많다. 아군이 당하건 말건 무식하게 계속 밀고 올 뿐이다.

고오오오!

하지만 카르나크는 포위되지 않았다.

"윈드 워크."

풍계 마법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다. 그리고 곧바로 추가타를 날린다.

"매스 매직 애로우."

콰콰콰쾅!

마법 화살이 일제히 날아가 카오틱 골렘의 머리를 노린다.

6서클 화염계 마법에도 끄떡없던 놈들이, 고작 1서클의 기초 주문인 매직 애로우에 의해 머리통이 펑펑 박살 난다.

콰콰콰쾅!

오직 4서클 이하의 주문들만 구사하면서도 카르나크는 쉽사리 골렘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애초에 바로스도 할 수 있는 걸 그가 못 할 리 없는 것이다.

빛에 오염되어 어둠의 흐름이 영 이상하다 해도 일단 보이기는 뻔히 보인다. 그럼 당연히 빈틈도 파악하기 쉽지.

문제는 이대로 계속 골렘들을 쓰러뜨려 봐야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계속 마법을 날리며 카르나크는 초조해했다.

'아, 이것 참....'

카오틱 골렘은 피의 늪으로부터 계속 힘을 받아 움직인다.

즉, 피의 늪이 멀쩡한 이상 이놈들을 아무리 조져 봐야 늪 속에서 계속해 재생할 뿐이다.

그러니 본진 자체를 박살 내야 하는데....

'...도통 먹히질 않잖아, 이거?'

바로스의 의문과 달리 그는 진작부터 사령술을 쓰고 있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전투 도중에도 기회를 틈타 은밀하게 발치로 사령력을 흘려보낸다. 어둠의 기운을 피의 늪으로 침투시켜 사령술의 지배력을 빼앗으려는 속셈이다.

그런데 자꾸 도중에 막힌다.

저 빌어먹을 오염된 신성력이 사령력과 섞여 있는 탓이다.

그래도 명색이 사령왕이라 결계 구조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까진 해냈는데 지배력을 빼앗을 수가 없다.

'이대로는 당해.'

카르나크의 안색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

란펠트 저택 지하의 음습한 공간.

검붉은 피의 결계진 위에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전신에 어둠의 촉수가 꽂혀 꿈틀대는 기괴한 형태의 중년 사내, 타락한 성직자 슈트라프였다.

"으음...."

그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대체 저놈들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실은 그 역시 세라티 못지않게 당황한 상태였다.

'왜 카오틱 골렘이 저렇게 쉽게 쓰러지는 거야?'

카오틱 골렘은 강력한 신관인 알리우스도, 6서클 마법사와 오러 유저도 상대하지 못한 괴물이었다. 과연 사령술서에 적힌 위력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그들보다도 약한 저 두 놈은 저리 쉽게 상대한단 말인가?

'카오틱 골렘에 무슨 약점 같은 게 있나?'

모르겠다.

그가 본 사령술서엔 그런 내용 따위 없었으니까.

슈트라프가 터득한 사령술의 지식은 전부 하토바 교단이 보관하고 있던 서적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사령술서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7여신교였다.

적의 수법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법. 사령술사들을 쓰러뜨릴 때마다 만일을 대비해 놈들이 지녔던 사령술서들을 신전에 보관한 것이다.

고위 성직자인 슈트라프는 교단 몰래 몇몇 사령술서를 빼돌려 익혔고, 덕분에 일류 사령술사에 버금가는 강력한 어둠의 권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초부터 착실히 쌓아 올린 지식이 아니다 보니 깊이가 없었다.

사령술을 펼칠 수는 있는데 대체 무슨 원리로 발동되는 건지는 모른다.

그냥 책에 적힌 대로 결계 깔고 주문 외웠더니 이렇게 되더라, 이게 전부다.

'아무래도 저놈들은 내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인데....'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카오틱 골렘은 영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

하지만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수법을 바꾸면 그만이지.'

그가 터득한 사령술에는 카오틱 골렘 소환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피의 늪을 이용해 부를 수 있는 어둠의 권속은 충분히 다양하다.

슈트라프는 사령력을 끌어 올렸다.

"운 좋게 카오틱 골렘을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나 본데...."

암흑의 기운이 촉수를 타고 흐르며 석벽을 통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후후후...."

***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카오틱 골렘들을 쉽게 상대한다 해서 세라티의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골렘들이 그녀는 놔둔 채 저들하고만 싸우지는 않으니까.

간신히 위기는 벗어났지만 단지 그뿐, 여전히 세라티는 몰리고 있었다.

"헉, 헉헉...!"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체력이 무한대는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매번 오러를 발하며 기력을 뭉텅뭉텅 쓸 때는 더더욱 그렇다.

점점 더 오러의 흐름이 끊기는 빈도가 높아진다. 한계에 도달한 상태다.

초조한 심정으로 세라티는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들이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해요?"

다급하게 그녀가 소리칠 때였다.

상황이 또 급변했다.

모든 카오틱 골렘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며 피의 늪으로 돌아간다. 동시에 붉은 파동이 늪의 중심에서 퍼져 나와 일행을 덮친다.

파아아앗!

충격파에 휘말려 세라티가 뒤로 날려 갔다.

전혀 전조가 없어 미처 대처할 수도 없었다.

"으윽!"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몇 발자국 밀려날 뿐 버티고 있었다.

이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카르나크가 실드를 펼쳐 충격파를 비껴 낸 것이다. 바로스도 미리 그 위치로 이동한 후였고.

"정말 신기한 놈들이군. 어디서 그런 지식을 얻었는지 모르겠어."

슈트라프의 조롱이 이어졌다.

"하지만 동료를 너무 등한시하는 것 아닌가?"

방금의 충격파로 세라티와 카르나크 일행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피의 늪에서 푸른 악령이 솟구쳐, 혼자가 된 세라티에게로 쇄도해 갔다.

캬아아아아-!

'아차!'

다급히 바로스가 그녀를 구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악령이 먼저 세라티를 덮쳤다.

쓰러진 그녀가 억지로 검을 들어 최후의 투기검을 발했다.

"이익!"

역시나 오러는 통하지 않았다.

마치 환영처럼, 악령이 붉은 검광을 그대로 통과해 세라티를 손톱으로 베어 간다.

서걱!

그녀의 두 팔이 잘려 나갔다.

피는 없었다. 단면이 검게 탄화되어 매캐한 내음만을 떨칠 뿐이었다.

"아아아악!"

극도의 고통으로 세라티가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흐뭇해하는 슈트라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걸로 오러 유저도 확보했군."

쓰러지는 그녀를 악령이 막 낚아채려던 차였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카르나크가 양팔을 떨쳤다.

"이제야 빈틈을 보였구나, 초짜 사령술사 양반!"

무지막지한 어둠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암흑의 파동이 악령을 덮치며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끼에에에엑!

동시에 공간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경악한 슈트라프의 음성이 울렸다.

"사령력? 네놈도 사령술사였단 말이냐!"

흔들리던 공간이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다.

쾅! 콰쾅! 콰아아아앙!

무너져 내린 공간의 저편으로, 일행이 들어왔던 저택 입구가 여실히 드러난다.

통쾌해하는 카르나크의 광소가 이어졌다.

"뻥 뚫렸다! 크하하핫!"

#36화. 9. 란펠트 저택 (5)

공간이 변화한다.

홀을 뒤덮고 있던 피의 늪과 어둠의 촉수들, 고기의 벽이 허물어지고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령결계가 제어에서 벗어난 탓이었다.

'이, 이게 왜 갑자기 말을 안 듣지?'

슈트라프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정황을 봤을 때 분명 저 카르나크란 놈이 저지른 짓인데....

'대체 뭘 한 거냐!'

결계가 부서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가 펼친 그 상태 그대로, 어둠의 마력을 내뿜고 있다.

사령력이 도중에 가로막힌 것도 아니다. 여전히 그의 의지대로 착실히 전달되어 이치대로 결계 위를 흐르고 있다.

분명 사령술서에 적힌 대로 실수 없이 해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되던 게 안 되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너져 내리는 사령 공간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차갑게 웃었다.

'모르겠지?'

결계가 깨져 가는데도 영 반응이 없다. 슈트라프가 극도로 당황했다는 증거다.

'아무렴, 알 리가 없지.'

***

카르나크를 혼란에 빠트렸던 빛과 어둠의 혼합 결계.

내내 결계의 지배력을 빼앗으려 시도했지만 도저히 파훼할 수 없었다. 솔직히 좌절감마저 들 지경이었다.

'아니, 세상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사령술이 존재한단 말이야?'

특히나 좌절감이 드는 부분은, 사령왕이었던 자신조차도 이해 못 하는 수법을 원래는 신관이라는 작자가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생하며 모든 권능을 잃었으니 힘에서 밀리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지식과 지혜만큼은 여전히 궁극의 사령술사라 자부하고 있었거늘!

그때 문득 깨달은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그렇다면 저 슈트라프는 궁극의 사령술사, 세계를 정복하고 7여신교와 용황제조차 몰락시킨 괴물 중의 괴물, 사령왕 카르나크조차도 모르는 심오한 지혜와 지식의 소유자라는 소리가 된다.

저게?

고작해야 카오틱 골렘 따위나 소환하면서 잘난 척하는 저놈이?

'이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실은 저 인간도 모르는 거 아냐?'

혹시나 싶어 방법을 바꿔 보았다.

상대의 어둠, 그 제어권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위에 사령결계를 하나 더 깐다!

원래대로라면 바보짓이었다.

상대에게 힘을 더해 주는 짓일 뿐이니까.

사령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만 지니고 있어도 금방 파훼될 수법이었다.

아니, 수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빛과 어둠의 융합이 무슨 심오한 술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그냥 우연히 벌어진 일이고 슈트라프 본인도 이유를 모른다면....

'저놈도 나랑 같은 입장이란 소리지.'

술법을 바꾸는 순간 혼선이 일어날 것이다!

***

예상대로 슈트라프는 전혀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혼선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알아차렸다면 최소한 수습하려는 시도쯤은 했어야 했다.

결국 사령결계는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저택 1층 홀을 돌아보며 카르나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놈도 수박 겉핥기로 익힌 놈일 뿐이구나.'

수박을 건드려 보지도 못한 다른 놈들보다야 훨씬 낫다만, 그래도 진짜 수박 맛을 모른다는 건 마찬가지다.

덕분에 이들을 제압하던 사령결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카르나크가 외쳤다.

"바로스! 튀자!"

안 그래도 지시만을 기다리던 바로스였다.

"넵!"

기다렸다는 듯 출구 쪽으로 뛰쳐나가려 할 때였다. 먼저 빠져나가던 카르나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저 아가씨도 챙겨야지! 버리고 갈 거냐?"

그렇다.

아직 세라티가 쓰러져 있는 것이다. 그것도 두 팔이 잘린 끔찍한 몰골로.

"헉!"

순간 바로스는 경악했다.

'도련님이 다른 사람을 신경 쓴다고?'

동시에 자괴감도 느껴졌다.

잠깐 그녀를 걱정하긴 했지만 금방 잊어버린 바로스였다. 그런데 카르나크는 어느새 타인의 안위를 챙길 만큼 '사람답게' 변했단 말인가?

'이럴 수가! 내가 아무리 그래도 저 인간보다는 사람답다고 생각했는데!'

깊은 자기반성과 함께 바로스는 허겁지겁 세라티에게 달려갔다.

"저, 저리 꺼져... 사령술사 놈...."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녀가 발버둥을 쳤다.

'아, 이 아가씨도 도련님이 사령술 쓰는 걸 봤지, 참?'

짙은 배신감으로 인한 증오 가득한 시선이 그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우릴 속이다니... 이 간악한...."

바로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시선, 하루 이틀 받아 본 것도 아니고.'

발버둥 치건 말건 무시하고 어깨에 짊어졌다.

그러자 그녀의 전신이 축 늘어졌다. 기력이 다해 기절한 것이었다.

'들고 가긴 편해졌구만.'

곧바로 출구를 통해 저택 앞마당으로 뛰었다. 그리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카르나크에게로 다가가 감탄한 듯 말했다.

"도련님, 변하셨네요? 이 아가씨도 다 챙기라고 하시고."

당연하다며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오러 유저는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지. 우린 그냥 죽이려 하겠지만 이 아가씨는 산 채로 확보하고 싶을 거다. 방패로 쓸 수 있어."

바로스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

"역시 도련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구만요."

그래도 아직 자신이 저 작자보다는 조금 더 사람다운 것 같았다.

기쁘다.

"지금 헛소리할 때냐! 뛰어!"

"넵, 넵!"

***

뻥 뚫린 저택 입구를 통해 두 사내가 뛰쳐나왔다.

앞장선 카르나크와 세라티를 짊어지고 뒤를 따르는 바로스였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두 사람을 보며 슈트라프는 이를 갈았다.

"흥! 놓칠 것 같으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펼친 사령결계는 여전히 말을 안 듣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제법 잔재주가 있는 모양이지만...."

슈트라프가 지닌 어둠의 권능은 여전히 방대했다. 말 안 듣는 사령결계에 굳이 연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버리고, 새로 펼치면 된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잔재주 따윈 무용지물!"

굉음과 함께 황량하던 정원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웅웅웅웅!

하늘이 어지럽게 회오리치며 핏빛으로 변한다. 땅이 물컹거리며 수십 줄기의 촉수를 뻗어 낸다. 가시넝쿨이 돋아나 거대한 벽이 되어 둘을 가로막는다.

주위를 둘러보며 카르나크가 혀를 내둘렀다.

"사령력 하나는 진짜 넘쳐 나네. 다른 사령술사들을 엄청 잡아먹었나 본데?"

하지만 여전히 별문제는 아니었다.

또 사령결계를 펼친다고?

또 혼선을 일으키면 그만이다!

"허업!"

카르나크가 양팔을 크게 펼쳤다. 어둠이 솟구쳐 사방으로 팔을 뻗었다.

정원을 뒤덮은 짙은 기운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한 암흑이었다.

그럼에도 결과는 놀라웠다.

펼쳐지던 사령결계가 도로 사라진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하늘도 대지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젠장, 이것도 안 통하나?"

욕설을 내뱉으며 슈트라프는 수법을 바꿨다.

또 다른 사령결계가 펼쳐지고, 또 세상이 변하고, 또 무너져 내린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그 틈을 노려 두 사람은 열심히 도망쳤다.

그렇게 달리던 중이었다. 바로스가 문득 의아해하며 물었다.

"굳이 도망칠 필요가 있어요, 도련님?"

보아하니 이제 카르나크는 확실히 슈트라프의 수법을 박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이대로 되돌아가 저놈을 조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요?"

"저놈이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으니까."

"...네?"

이해 못 한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정원 곳곳에서 시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카르나크 일행이 돌입하며 처치한 란펠트 저택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슈트라프의 사령술로 인해 좀비로 변한 것이다.

"으으...."

"으으으...."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시체 무리가 대지를 걷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평범한 좀비가 아니었다. 어찌나 무식하게 사령력을 때려 부었는지 어지간한 상위 언데드에 필적하는 마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바로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또 알아서 쓰러지겠지, 뭐.'

온갖 고도의 사령결계도 소용없었는데 저거라고 별수 있겠어?

아니었다.

"싸울 준비해라, 바로스."

"엥? 혹시 저놈들한테는 안 통하는 겁니까?"

"그래."

슈트라프의 사령결계는 고도의 수법일수록 무너뜨리기도 쉽다. 술식이 복잡할수록 혼선도 잘 일어나니까.

반대로 이야기하면, 단순한 사령술의 경우엔 잘 통하질 않는다.

"놈이 알고 한 짓은 아니겠지만...."

이럴 줄 알았다며 카르나크가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결국 하나는 걸리게 마련이지."

***

'이번에는 통한다고? 왜?'

의아해하면서도 슈트라프는 눈을 빛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번 술법은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가라, 나의 권속들아!"

좀비들의 형태가 변화했다.

흉측한 송곳니가 돋아나고 손톱이 짐승의 그것으로 변화한다. 뼈대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근육이 부풀어 오른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그 영혼을 내게 바쳐라!"

인간도 짐승도 아닌, 원래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저주받은 괴물들이 고통에 찬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

덤벼드는 기형 좀비 무리를 향해 바로스가 검을 떨쳤다.

"타아앗!"

어깨에 세라티를 짊어진 채 한 손만으로 검을 휘두르는데도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예전부터 사람 짊어지고 싸운 경험이 워낙 풍부한 덕이었다.

'내가 탈진한 도련님 짊어지고 싸운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다행히 이번 생애엔 카르나크도 몸이 상당히 좋아졌다. 덕분에 자기 발로 돌아다니면서 마법을 쓰는데도 제법 여유가 있었다.

"순수한 파괴의 빛이여, 아케인 버스트!"

파괴의 섬광을 연신 날려 다가오는 괴물을 밀어낸 뒤 사령술을 발동한다.

"어둠의 칼날이여, 네 주인을 지켜라, 다크 블레이드!"

검은 칼날이 접근하는 좀비들을 연거푸 베어 갔다.

그렇게 바로스와 카르나크는 밀려오는 좀비 군단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버티고 또 버틴다.

단순히 언데드와의 전투에 익숙해서만은 아니었다.

'저, 저놈들 보게?'

싸우다 위급하다 싶으면 어깨에 짊어진 세라티를 좀비의 공세 앞으로 슬쩍 내미는 것이다.

"미안해요, 세라티 양!"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귀한 제물을 함부로 죽일 순 없으니 그때만큼은 공격을 거둘 수밖에 없다.

기가 차 슈트라프는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나?"

동료를 고기 방패로 쓰다니! 그것도 두 팔이 잘린 가련한 여인이 아닌가?

저것들이 정말 사람 새끼일까?

"정말이지 사령술사 놈들은 상종 못 할 것들이로구나!"

본인이 세라티를 저 꼴로 만들었다는 건 그새 뇌리에서 지운 모양이었다.

자기 합리화라는 게 비단 사령술사만의 특징은 아니니 딱히 신기할 건 없다.

어쨌거나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놀랍도록 잘 싸우고 있었다. 지닌 실력에 비해 엄청난 재주였다.

"그래 봐야 잔재주일 뿐이지만."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 봐야 평범한 인간이다.

사령력은 미천하고 마력은 낮으며 투기도 각성하지 못했다.

"끝을 내 주마!"

슈트라프가 정신을 집중했다.

저택 지하로부터 강대한 사령력이 뿜어져 나와 정원 상공을 꿰뚫어 갔다.

쿠우우우웅!

"오라, 게헤나의 악마여!"

허공에서 어둠의 문이 열리며 3미터에 달하는 핏빛 거인이 나타났다.

머리에 달린 2개의 검은 뿔, 흉측한 외모에 터질 듯한 근육을 지닌 심연의 악마, 마즈눈(maz-nun)이었다.

"크아아아!"

포효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악마가 으르렁댔다.

"계약자여, 원하는 바를 고하라!"

슈트라프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사내놈들은 죽이고 저 여자는 내게 데려와라!"

마즈눈이라면 자색급 오러 유저, 퍼플 나이트에 필적하는 가공할 악마다.

아무리 놈들이 사령술에 익숙해도 압도적인 힘 앞에선 어쩔 수 없을 터!

그런데, 악마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누구?"

"...뭐?"

"대체 누구를 죽이라는 것이냐?"

대체 악마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슈트라프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슬슬 들켰나?"

카르나크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악마를 힐끔거렸다.

"하긴, 저 악마는 뒤늦게 나왔지? 당연히 속지 않겠군."

'속다니? 무슨...?'

그런 슈트라프의 시야에, 손을 흔드는 카르나크가 비친다.

"고마워, 얼뜨기 사령술사 양반."

동시에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당신처럼 환술 잘 걸리는 순진한 인간은 처음이야."

어느새 셋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좀비 군단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악마뿐.

"계약자여, 원하는 바를 정확히 고하라!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데려오라는 것이냐?"

슈트라프는 입을 떡 벌렸다.

"...전부 환상이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분노에 찬 괴성이 저택 지하를 가득 울렸다.

"이 개자식들이 감히!"

#37화. 10. 시체들의 밤

란펠트 저택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어두운 밤거리.

좁은 골목길을 두 사내가 달리고 있었다. 세라티를 짊어진 바로스와 카르나크였다.

골목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뒤 바로스가 거리 너머를 살펴보았다.

"용케 빠져나올 시간을 벌었군요. 진짜 순진한 양반이라 망정이지."

"열 받으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사실 순진해서만은 아니야."

란펠트 저택 쪽을 바라보며 카르나크는 희미한 비웃음을 띄웠다.

"그러게 누가 내내 원격조종만 하래?"

상대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면 아무리 그라도 환상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슈트라프는 저택 어딘가에 숨은 채 간접적으로 사령술을 사용하기만 했다.

"술사 본인을 속이는 건 힘들지만, 원견 주문을 속이는 환상을 만드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런 기초조차 모르는 걸 보면 순진한 거 맞지 않아요?"

"순진한 거랑 무식한 건 다르지. 하긴, 성직자였으니 당연한가? 최소한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으니, 쯧쯧."

혀를 차는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쩝니까?"

"일단 숨을 곳을 찾자."

당장은 조용하지만 이 적막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카르나크 일행을 놓친 슈트라프가 가만있을 리 없다. 당장이라도 란펠트 가문의 수하를 풀어서 도시 전체를 이 잡듯 뒤지겠지.

그 전에 은신처를 찾아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야 하고...."

카르나크가 바로스의 어깨 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여전히 기절한 채 어깨 위에 얹힌 세라티를.

"이 아가씨도 처리해야 하니까."

***

카르나크의 예상대로였다.

분노한 슈트라프는 곧바로 란펠트 가문을 부려 트리스트 시티 전역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도시 곳곳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 문 열어!"

"여기 수상한 외지인 놈 없나?"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란펠트의 무뢰배는 닥치는 대로 여관이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 와중에 억울하게 봉변을 당한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우린 그저 평범한 상인일 뿐인데...."

"이게 무슨 짓이오?"

잘 자다가 끌려 나온 외지의 행상들이 격하게 항변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고 곡소리가 났다.

"으아악!"

"아이고, 그러니까 대체 누굴 찾는 거냐니까!"

"닥치고 따라와! 수상한 놈들은 모조리 잡아 오라는 명이다!"

개중엔 거칠게 반항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악명 높은 범죄의 도시를 제 발로 찾아온 외지인들이다. 평범한 소시민은 애초에 이런 도시를 찾지도 않는 법이다.

"이것들이 사람을 만만하게 보나!"

"우린 뭐 칼 없는 줄 알아?"

사방에서 혈투가 일어나고 소란이 이어진다.

그렇게 고요하던 트리스트의 밤이 발칵 뒤집힌 지도 어언 1시간째.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수색대는 목표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이놈들이 대체 어디 숨은 거지?"

"외지인이 이 도시에서 티가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

누군가가 의문을 던졌다.

"설마 도시 밖으로 빠져나간 거 아냐?"

그리고 바로 반박당했다.

"그럴 리가 있나? 얼마나 많은 인원을 풀었는데."

아무리 무법의 도시라 해도 원래는 일국의 요새였던 곳이다. 사람만 많이 투입하면 철통같은 경계가 가능하다.

"하지만 저택을 직접 공격할 정도의 놈들이니 강제로 뚫고 나갔을지도...."

"그런 보고는 받은 적이 없어."

전투가 벌어지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 소란이 일어나건 시체가 나오건 간에.

도시 경계에 포진하고 있는 이들은 전원 아무 일 없이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대체 이놈들은 어디 있는 건데?"

***

세라티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

흐릿한 의식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플라드 가문으로 돌아가는 건 위험하겠죠, 도련님?"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놈들이 최우선적으로 갈 곳이 바로 자신들을 적대하던 세력들일 테니까. 지금쯤 사람들을 대거 보냈을 것이 틀림없어."

"에잉, 짐들 전부 거기 놔뒀는데 나중에 찾아야겠네요."

"그나저나 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생애에선 쫓기고 숨고 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 팔자가 원래 이런가 보죠, 뭐."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목소리였다. 세라티는 흠칫 놀랐다.

'저들은!'

정신이 번쩍 든다.

똑똑히 본 것이다. 카르나크의 전신에서 어둠의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윽!"

순간 격통이 밀려와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소리를 들은 카르나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깨어났군요, 세라티 양. 몸은 좀 어떠십니까?"

"...더러운 사령술사 주제에 내 몸을 걱정하는 거냐?"

싸늘한 그녀의 반응에 카르나크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었다.

"아, 그렇게 여겨도 어쩔 수는 없습니다만...."

예상외였다.

정체가 들통났으니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저 온화한 표정을 보고 사악한 사령술사라 의심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왜 나를 살려 둔 거지?'

의아해하면서도 세라티는 일단 상황부터 살폈다.

"여기는?"

"트리스트 시티 남쪽 외곽의 숲속입니다. 도시 밖이 아무래도 안전할 테니까요."

"어떻게 경계망을 피해 빠져나온 거지? 순순히 내보내 주지 않았을 텐데?"

"이런 경험이 좀 풍부해서 말이죠."

틀림없이 란펠트 가문은 트리스트 시티를 제대로 봉쇄했다. 어지간히 강력한 모험가나 마법사라 할지라도 저 경계망을 몰래 빠져나오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다르다.

사령술은 정신 지배, 기억 왜곡, 현혹 등에 특화되어 있는 술법이다. 마법사에겐 불가능한 일도 사령술사에겐 가능하다.

경비를 철통같이 서고 있다고?

그냥 일격에 쓰러뜨린 다음 적당히 기억을 조작하면 완전범죄다.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최면이나 세뇌를 걸어 버려도 된다.

사령술사들이 특히나 붙잡기 힘든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령술 자체가 워낙 도주와 은신에 유리한 수법인 것이다.

심지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전생 때도 이런 상황을 수십 번 겪었다.

대륙에서 가장 치안이 엄중하다는 제국 수도에서도 몇 달씩 암약했는데, 이런 시골 도시야 별것 아니지.

"세라티 양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해 잠시 자리를 피했을 뿐입니다."

어조는 태연하지만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처리라고?'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카르나크가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

"처리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요? 하지만 제 비밀을 알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습니까?"

"...날 죽일 셈이야?"

말하면서도 세라티는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죽일 생각이면 굳이 힘들게 여기까지 짊어지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이래 봬도 전 죄 안 짓고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거든요."

"흥, 사령술사 주제에?"

"어쩌다 보니 사령술을 익히긴 했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사령술은 최대한 익히지 않고 이렇듯...."

카르나크가 희미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마법사로서의 길만을 열심히 걷고 있지요."

오러 유저인 세라티는 상대의 기운이 지닌 속성을 꽤나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현재 카르나크가 선보인 마력은 틀림없이 마나였다. 사령력이 아니었다.

'하긴, 저자가 몇 번이나 마법을 썼지만 아무도 몰랐었지.'

그녀뿐 아니라 마법사인 릴테인, 심지어 성직자인 알리우스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분명 어둠의 마력은 아닐 것이다.

'그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걸리는 점이 있다.

"사령술과 마법은 공존하지 못하는 것 아니었어?"

"보통은 그렇죠. 이건 제 독자적인 수법입니다. 되도록 사령술은 익히고 싶지 않아서요."

생각해 보면 성직자였던 슈트라프도 사령술을 썼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세라티는 조금씩 흔들렸다.

정말로 카르나크는 어쩔 수 없이 사령술을 익히게 된 것이고, 지금은 마법사의 길만을 걷는 걸까?

"그렇다면 왜 당신은 사령술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거지?"

순간 카르나크가 실소했다.

"세라티 양, 반대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오러를 버릴 수 있습니까?"

"응?"

"당신이 익히고 있는 투기, 그 힘을 버릴 수 있냔 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미 몸에 익힌 오러를 어떻게 버리...."

"네, 그게 제가 사령력을 버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세라티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 역시 투기를 다루는 입장인 만큼 바로 이해한 것이다.

확실히, 어떤 기운이건 한번 익혀 버리면 그걸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한숨을 쉬며 세라티가 물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날 어쩔 셈이지?"

"기억의 일부를 지울 겁니다. 딱 제가 사령술을 썼던 바로 그 순간만."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의 기억을 지운다고? 사령술은 그런 것도 가능하단 말인가?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세라티 양도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있었을 텐데요?"

"헛소리! 멀쩡한 기억이 지워지는 일이 흔할 리 없잖아!"

"술 먹고 기억 끊긴 적 없어요?"

세라티의 말문이 한 번 더 막혔다.

솔직히 왜 없겠나?

실은 한두 번 정도가 아니라 꽤 많았다. 술 좋아하거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전투 도중 기절했잖아요? 그게 몇 분 일찍 기절한 게 될 뿐입니다."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꽤나 관대한 조건이었다. 사악한 사령술사가 할 법한 수작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날 회유할 속셈이야?"

살짝 누그러진 그녀를 보며 카르나크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동시에 세라티의 어깨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금의 당신은 굳이 회유할 필요까진 없어요. 별 도움이 되질 않으니까."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러 유저가 도움이 안 된다고? 왜?

무심코 그녀의 시선이 카르나크를 따라갔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자신의 어깨 아래. 당연히 팔꿈치가 보인다.

그런데 팔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팔꿈치부터 잘려 나가 새까맣게 탄화된 절단의 흔적뿐....

영혼이 삭아 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

감각이 마비되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전신을 강타한다.

'맞아, 팔을 잃었지, 나....'

두 팔이 없다.

더 이상 검을 쥘 수도 없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몸이 덜덜 떨릴 뿐이었다.

물론 요양을 잘하면 오러를 다시 쓸 순 있겠지. 하지만 평생을 걸쳐 갈고닦은 검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니, 검이 문제가 아니다.

두 팔이 없다는 건 아무것도 쥘 수 없다는 것.

아주 기본적인 일상생활도 불가능하다. 당장 용변을 보고 뒤를 닦는 행위조차 할 수 없다.

한창때의 젊은 미녀가 최소한의 품위조차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절망에 빠진 세라티의 귀에 카르나크의 위로가 들렸다.

"유감입니다, 세라티 양. 당신은 정말 재능 있는 오러 유저였는데."

지금의 그녀에겐 공허한 울림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여."

그녀가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기억? 지울 필요 없어. 그냥 이 자리에서 날 죽여 줘...."

안타까운 듯 바로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도련님? 강력한 성직자를 찾아가 치유술을 받는다거나...."

"사지가 잘린 경우엔 무리지. 너도 알잖아? 아무리 강력한 마법이나 신성 주문도 잘린 팔다리를 되돌릴 순 없다는 거.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이니까."

"하긴, 사령술과는 다르죠."

바로스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사령술과는 다르다고?'

절망에 빠져 있던 세라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잠깐! 그럼 사령술로는? 사령술로는 내 팔을 되돌릴 수 있단 소리야?"

잠시 눈을 깜빡거리더니 카르나크가 나직이 대꾸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난처한 듯 뺨을 긁었다.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어째서?"

"당신을 제 권속으로 만들어야 가능한 방식이라서요. 설마 사악한 사령술사의 권속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죠?"

#38화. 10. 시체들의 밤 (2)

강력한 사령술사는 종속의 계약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제압한 뒤 자신의 권속으로 삼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다.

사령술사에게 붙잡힌 모험가가 극심한 고문 끝에 타락해 악으로 돌아서는 이야기는 각종 모험담에서 흔히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당연히 세라티는 기겁했다.

'사령술사의 권속이 되라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 받아들여선 안 된다.

'하지만....'

딱 잘라 거절하기엔 양팔이 너무 허전했다. 다가올 미래 역시 너무 암울했다.

과연 타락해 악으로 돌아서는 것이, 두 팔을 잃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세라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정말 당신의 권속이 되면... 잃은 팔을 돌려받을 수 있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카르나크가 대답했다.

"네."

실은 아무리 사령술이라도 잘린 사지를 재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법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관련 술법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쪽이 옳다.

그냥 다른 시체 일부를 이식하거나, 아예 어둠의 팔을 돋아나게 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사악한 사령술사가 왜 굳이 상대방 인생까지 생각해 줘 가면서 힘든 길을 가려 하겠는가?

다만 카르나크에겐 세라티의 잘린 팔을 온전하게 되살릴 능력이 있었다. 심지어 빈약한 현재의 사령력만으로도 가능했다.

권속이었던 바로스가 허구한 날 사지 날려 먹고 다녔으니까.

말투가 싸가지없어서 그렇지, 세상에 믿을 놈이라곤 오직 바로스밖에 없는 카르나크였다. 소중한 시종을 장애인으로 만들 순 없으니 진짜 열성을 다해 재생 술법에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중에 그를 데스 나이트로 바꾼 후에는 의미가 없어진 수법이었지만.

"가능은 합니다. 가능하긴 한데...."

영 탐탁지 않아 하는 카르나크의 태도에 세라티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제가 하고 싶지 않거든요. 말했잖습니까? 전 되도록 사령술을 멀리하고 있다고."

정말로 카르나크는 그녀의 기억만 살짝 지운 뒤 풀어 줄 생각이었다.

세라티를 권속으로 삼는다?

오러 유저에 미녀이기까지 한 만큼 분명 쓸모는 있겠지만 지금의 그에겐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그건 예전처럼 사는 게 되잖아.'

애초에 힘을 추구했다면 굳이 혼돈마법을 개발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령력 도로 키우고 있었겠지.

"그, 그런...."

세라티는 당황했다. 이건 예상 못 한 대답이었다.

사실 속으로 의심도 좀 하고 있었다. 자신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유혹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혼란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던 카르나크가 문득 마법 전언을 날렸다.

[야, 바로스.]

[왜요, 도련님?]

[너 일부러 이런 거지?]

신체 일부를 완전히 잃게 되면 성직자의 신성 주문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쯤은 바로스도 이미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일부러 사령술로는 치유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화를 유도한 거다.

[왜 그랬어?]

[이 아가씨, 불쌍하잖아요. 저도 왕년에 팔다리 잘려 봐서 저 기분 잘 알거든요?]

나중에야 도련님이 또 만들어 주겠지라며 대수롭잖게 넘어갔지만, 처음 팔을 잃었을 때의 절망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어서 말입죠. 도련님에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떠들다 말고 바로스는 살짝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카르나크는 더 이상 예전의 사령왕이 아니었다.

[혹시 지금은 어려운 일입니까?]

[물론 예전만큼 쉽지야 않다만 1명 정도는 가능해. 그런데 정말 이 아가씨를 권속으로 삼아도 되는 거냐, 나?]

젊은 미녀의 약점을 잡아 계약을 강제한 뒤, 영혼의 노예로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부린다.

[이건 진짜 추잡한 악당이나 할 법한 짓인 것 같은데?]

[본인이 진짜 추잡한 악당이었다는 자각은 있었나 보네요? 의외네.]

[그래서 최대한 착하게 살아 보려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하다.

[이거 나쁜 짓이야, 착한 짓이야?]

바로스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세라티 양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되죠.]

사정 잘 설명하고 선택을 넘기면 된다. 그럼 결과도 어디까지나 본인이 감당할 몫이다.

[이 정도면 예전처럼 사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군!]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마음이 편해진 카르나크가 온화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세라티 양."

"...네?"

무심코 그녀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었다. 마음이 이미 꺾였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제가 사령술을 기피한다 해도 지금의 당신을 내버려 두긴 좀 그렇군요."

"그, 그럼?"

"세라티 양이 결정하세요. 원하는 대로 해 드리죠."

이대로 기억의 일부를 잃고 두 팔을 잃은 채 장애를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완전한 육체를 되돌려받는 대신 카르나크의 권속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세라티는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잃은 팔을 되돌려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당신의 권속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영혼을 팔아야 하나요?"

카르나크는 실소했다.

"그건 지옥의 악마와 계약해서 힘을 얻을 때 하는 짓이고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권능을 내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대체 왜 실소할 일인지 몰라 세라티는 의아해했다. 사령술사에겐 저게 일종의 농담인가?

"그럼 제 영혼이 어둠으로 물드나요?"

"딱히? 신성 주문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아문 상처가 항상 신성하게 빛나는 건 아니죠? 사령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재생이 끝난 시점에서 당신의 팔이고 영혼일 뿐이에요. 딱히 어둠에 물들거나 하진 않습니다."

사실 어둠에 물들어도 곤란하다.

"권속이 어둠의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으면 제 정체도 들킬 거 아닙니까? 생겨도 없애려고 노력해야 할 입장입니다."

세라티는 당혹했다. 듣던 것과는 좀 다른 듯했다.

사령술사의 수하가 되면 피와 살육에 굶주린 악마로 변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당신의 권속이 되면 전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세라티 양의 영혼이 저에게 제압당하게 되죠."

카르나크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영혼의 구성을 완전히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야 영혼의 설계도를 보고 팔도 재생시킬 수 있거든요."

그 외에도 몇몇 금제가 걸릴 것이다.

"절 배신할 경우 죽음의 대가를 받게 되겠죠. 제 정체를 남에게 밝힌다거나, 제게 칼을 들이댄다거나 할 경우."

"당신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요?"

"가능하긴 한데, 그렇게 하진 않을 겁니다."

"왜요?"

"세라티 양의 정신을 조작해야 하니까요. 이 경우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크게 떨어질 텐데, 굳이 권속의 능력을 약화시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무조건적인 복종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카르나크가 홧김에 '나가 죽어!'라고 세라티에게 고함을 질렀다 치자.

정말 세라티가 나가서 죽어 버리면?

유능한 오러 유저 하나를 허무하게 잃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령술사들도 권속의 정신을 어중간하게 조작하진 않습니다. 아예 이성이 없는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니면 자유의지는 놔둔 채 금제만 걸어서 부리죠."

세라티는 점점 더 흔들렸다.

듣고 보니 어째 각오했던 것만큼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 카르나크가 진실만 말하고 있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

'이 정도면 그냥 충성 서약을 하는 기사랑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나?'

물론 그보다 훨씬 상황이 나쁘긴 하다. 자신의 목숨을 카르나크가 쥐고 있으니까.

하지만 비교 대상이 두 팔이 아닌가?

두 팔을 되돌려받는 대가로 정체가 위험한 주군을 모시는 것이 과연 불공평한 계약일까?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세라티 양."

고뇌하는 그녀의 귀로 은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자유를 제약당하는 것과 잃어버린 두 팔, 검사로서의 미래."

부드럽고 온화한, 그럼에도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목소리였다.

"어느 쪽이 더 소중한지 저울질할 수 있는 건 본인뿐이죠."

말을 마치며 카르나크는 내심 뿌듯해했다.

친절히 설명해 주고 이해도 시켜 주고 기회까지 주었다. 강요한 건 하나도 없다.

'이야,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사람 된 거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바로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카르나크는 선의로, 그것도 최대한 사람답게 살아 보려 노력하며 세라티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악마가 순진한 처녀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 기분 탓인가?'

결국 세라티는 결정을 내렸다.

"...저를 당신의 권속으로 삼아 주세요, 카르나크 공."

***

종속의 계약은 엄청나게 복잡한 고난이도의 술법이다.

평범한 사령술사라면 족히 반나절 이상 준비한 뒤, 그러고도 한참 동안 술식을 전개한 후에야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령왕이었던 카르나크에겐 그냥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충분했지만.

"어둠의 주인, 카르나크 제스트라드의 이름으로 묻겠다. 세라티 알렌, 나의 권속이 되겠는가?"

"네."

"그렇다면 정신을 열고 계약을 받아들여라."

무릎 꿇은 세라티의 머리에 카르나크가 손바닥을 얹었다.

어둠의 마력이 정수리를 타고 그녀의 전신을 관통했다.

'헉!'

순간적으로 오러를 발동해 저항할 뻔했다. 이어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하면 그대는 잃었던 것을 되찾게 되리라."

모든 오러를 거둔 뒤, 세라티는 순순히 카르나크의 어둠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잘린 팔로부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큭! 으으윽!"

신음하는 그녀의 두 눈에 변화가 보였다.

탄화된 팔의 딱지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동시에 새로운 팔이 돋아난다.

솔직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상처가 아무는 신성 주문과 달리, 사령술의 재생 수법은 뼈가 돋고 시뻘건 근육이 그 위를 덮고 흉측한 힘줄과 핏줄이 생성되는 식이다. 겉보기엔 정말 징그럽고 끔찍하다.

그럼에도 세라티는 환희에 젖었다.

"아, 아아아...."

팔이다. 잃었던 두 팔이 다시 돋아나고 있다.

고통조차도 감미로운 광경이었다.

카르나크가 그녀의 머리에서 도로 손을 뗐다.

"세라티 알렌, 이로서 그대는 나의 권속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존댓말이 흘러나온다.

"예, 나의 주인이시여...."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혼절한 세라티를 부축하며 바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옛날 생각나네요. 저도 이렇게 기절했었는데."

"이게 그렇게 아파?"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에요. 그래서 이거, 전투 중엔 쓸 수 없었잖습니까?"

"하긴, 성직자의 치유술이 그건 부럽더라."

문득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저 이제 더 이상 도련님 권속 아니죠?"

"아니지."

시공을 회귀하며 과거의 모든 일이 무로 돌아갔다. 당연히 바로스와 맺었던 종속의 계약도 없던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세라티 양을 권속으로 둘 수 있었잖아? 지금 내 힘으로 권속 두는 건 1명 정도가 한계야."

"그럼 전 이제 팔다리 날아가도 재생 못 하는 겁니까?"

바로스는 흠칫 떨었다. 괜히 친절 좀 베풀려다 자기 무덤을 판 게 아닌가 싶었다.

별일 아니란 듯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왜 못 해? 할 수 있지."

"어떻게요?"

"세라티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널 다시 권속으로 삼으면 되지."

"...종속의 계약이 파기되면 세라티 양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릴 텐데요?"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아가씨 살리겠다고 널 장애인으로 만들 순 없잖아."

"어우, 그건 참 고마운 말씀이긴 한데...."

바로스는 기절한 세라티를 빤히 바라보았다.

'몸 건사 잘해야겠다. 내 팔다리에 이 아가씨 목숨이 걸려 있네?'

그녀가 기절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이 대화를 들었더라면 자신의 선택을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슬슬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때였다.

바로스가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안 그래도 고민 중이다."

현재 카르나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반격의 준비를 갖춘 뒤, 알리우스와 릴테인을 구한다.

두 번째, 두 사람은 포기하고 이대로 트리스트 시티에서 도망친다.

"사람답게 살려면 당연히 첫 번째겠지?"

문제는, 혼돈마법만으론 슈트라프를 상대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사령술을 써야 한다. 그래야 승산이 있다.

"그게 왜요? 이제까지도 보는 눈 없을 땐 사령술 잘만 쓰셨잖아요."

"그러니까 보는 눈이 너무 많다고, 이 경우엔."

슈트라프의 사령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를 상대하려면 지금까지처럼 몰래 살짝 힘을 쓰는 정도론 부족하다.

"상당히 대규모로, 본격적으로 사령술을 써야 하는데 이거 아무리 봐도 예전처럼 사는 것 같거든?"

사악한 사령술사로 돌아가 도시를 지옥으로 바꾸며 동료들을 구한다.

사악한 힘에 손대지 않고 그냥 동료들을 버린 채 도망간다.

"어느 쪽이 올바른 거냐, 이거?"

"그러게요. 진짜 헷갈리네."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바로스는 또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세라티 양 깨어나면 물어봅시다."

"응?"

"저 아가씨는 우리랑 다르게 제대로 된 인간이잖아요. 그럼 결론도 제대로 내지 않을까요?"

"그렇군! 야, 바로스 너 점점 더 똑똑해진다?"

#39화. 10. 시체들의 밤 (3)

다시 정신을 차린 세라티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이제 그녀는 사령술사의 권속이 되었다. 어떤 사악한 명령이라도 복종해야 할 처지였다.

과연 카르나크는 종속된 그녀에게 무슨 명령을 내릴 것인가?

첫 명령은 솔직히 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네?"

"골라 보라고, 세라티.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이야?"

권속으로 삼았기 때문일까? 카르나크의 말투는 하대로 바뀌어 있었다.

주저하던 세라티가 조용히 되물었다.

"당연히 알리우스 씨와 릴테인 씨를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체 저게 왜 고민할 문제인지 모르겠다. 설마 저들을 버릴 생각이라도 했단 말인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악한 수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건가?"

"물론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죠. 하지만 방법이 있는데도 동료를 버릴 순 없잖아요?"

애초에 세라티도 두 팔을 돌려받기 위해 사령술을 받아들인 몸인 것이다.

악이라면 무조건 치를 떨 정도로 꽉 막히진 않았다. 어느 정도 세상과 타협도 할 수 있는 성격이다.

"사령술사란 걸 들키면 카르나크 님도 위험해지니 기피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동료를 구하는 건 충분히 올바른 일 아닐까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목적이 옳으면 수단은 악랄해도 된다는 소리네요."

"좋은 일을 위해선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 이거지? 우리, 올바로 살고 있었구만."

"그러게 말입니다."

세라티는 당황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르나크가 활기차게 말했다.

"좋아, 오랜만에 사령술 좀 본격적으로 써 봐야겠다."

"사람들이 많이 죽겠지만, 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니까요."

"어차피 나쁜 놈들이니까 좀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게요? 부담 없어서 좋네."

세라티는 버벅거렸다.

"아, 아니, 그게...."

뭘까, 이 느낌은?

붙잡힌 동료들, 알리우스와 릴테인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분명히 잘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한 기분이 들지?'

***

한 도시를 지배하는 강력한 사령술사가 은신처에 처박힌 채 온갖 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적을 상대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왕년의 카르나크라면 우선 방대한 권능으로 거대한 언데드 군단을 만든 뒤 도시를 쓸어버렸을 것이다.

이후에 차근차근 상대의 방어를 부수며 진군, 종국엔 적의 목을 땄겠지.

"하지만 지금은 사령력이 영 빈약하니 그렇게는 못 하겠군."

슈트라프와 자신의 마력을 비교하며 카르나크는 고민했다.

현재 둘의 격차는 극심한 수준이었다. 사령왕으로서의 드높은 경지를 지니고 있음에도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렛대를 이용하면 1의 힘으로 10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다지만, 그래도 최소한 1의 힘은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어둠이 깔려 있는 트리스트 시티를 바라보며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급한 대로 주위에서 사기를 좀 끌어다 써야겠네."

바로스가 물었다.

"그 정도 사기가 이 주위에 있어요? 여기가 무슨 묘지나 전장도 아닌데?"

"웃기는 이야기인데, 있더라고."

죄악의 도시, 인세의 지옥이라 불릴 정도로 위험한 도시였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고 칼부림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도시 전체가 이미 거대한 묘지이자 피비린내 나는 전장인 것이다.

"와, 그 정도예요? 진짜 사람 살 곳 아니네?"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지?"

왕년의 사령왕과 데스 나이트 로드 입에서 이런 감흥이 나올 정도니, 과연 트리스트 시티가 얼마나 막장 일로인지 익히 짐작이 간다 하겠다.

세라티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아무리 사령술사라도 이곳의 죄악은 심해 보이는구나.'

그런데 어째 이어진 대화가 좀 이해가 안 갔다.

"역시 인간의 생활력은 대단하다니까요."

"그럼. 그러니까 우리가 그 고생을 했지."

"...?"

저게 왜 감탄할 부분인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둘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 놈을 상대할 만큼의 사령력을 모을 수 있다는 겁니까, 도련님?"

"임시로 긁어모은 거라 많이 모자라긴 하겠지만 그럭저럭 최소한의 기준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다음엔 어쩌시게요? 언데드 군단을 만들기엔 써먹을 시체가 없는데."

트리스트 시티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득실거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의외로 묻혀 있는 시체는 별로 없었다.

도시 옆에 강이 흐르거든. 그냥 내다 버리면 되거든.

물고기 밥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뭐 하러 힘들게 땅 파고 매장을 해 주겠는가?

"그렇다고 악령들만으로 군세를 채우자니 사령력 소모가 너무 심해. 내가 지금 그런 낭비를 할 만큼 여유 있는 처지는 아니지."

역시 시체가 필요하다. 그것도 되도록 싱싱한 것들로.

"할 수 없네요. 이번만 예전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그렇지? 되도록 예전처럼 안 살려고 했지만, 이 경우엔 어쩔 수 없다."

"큰 문제는 없겠죠? 세라티 양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짓 좀 해도 된다잖아."

두 사내가 세라티를 보며 참으로 믿음직하다는 듯 헤벌쭉 웃는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다고요....'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로 알리우스고 릴테인이고 버리고 도망갈 것 같았다.

설마 사람인 이상 그러겠냐 싶지만, 왠지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이었다.

"좋아, 대충 계획이 세워졌다."

싱글벙글 웃으며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가서인지 꽤 신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일단 시체부터 대량으로 만들어야지."

세라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부터 란펠트의 조직원들을 하나씩 죽이는 건가요?"

제발 상관없는 시민들까지 죽이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담아 한 질문이었는데, 카르나크가 손을 저었다.

"굳이 세라티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 도시는 치안이 자급자족이라잖아?"

***

트리스트 시티 남쪽의 한 밤거리.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 2명이 거리에 멋대로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밤새도록 도시를 뒤지고 다닌 란펠트 가문의 수하들이었다.

사내 중 1명, 에롤드가 투덜거렸다.

"아, 진짜 이 야밤에 이게 무슨 짓이람."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다. 이런 일을 시킨 윗놈들은 편안히 자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열도 받는다.

"야, 리만! 술병이나 줘 봐!"

리만이라 불린 사내가 퉁명스레 반문했다.

"그쪽도 술병쯤은 챙겨 오지 그랬소?"

"왜? 불만이냐? 억울하면 이기지 그랬어."

"크윽...."

오만 방자하게 구는 상대를 보며 리만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에롤드의 부하일 뿐이었으니까.

리만은 원래 란펠트 가문을 적대했던 크렐 가문의 조직원이었다. 가문이 박살 난 뒤 란펠트 쪽에 몸을 의탁한 처지인 것이다.

원래는 칼을 맞대고 싸우던 이의 밑으로 들어갔으니 참 기분이 더럽기 그지없다.

물론 에롤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흥! 지가 어쩔 건데? 이제 와서 덤비기라도 할 건가?'

란펠트 가문이 도시를 장악했으니 그의 위세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당장 이 리만만 봐도 원래는 그보다 높은 위치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밑에서 구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때였다.

문득 에롤드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등을 보였군."

동시에 칼날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리만이 쥐고 있던 검으로 에롤드를 찌른 것이었다.

기겁하며 에롤드가 검을 뽑았다.

"이 자식이!"

상처는 별로 깊지 않았다.

하지만 피를 보니 눈이 돌아간다.

"그래! 네놈이 결국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다!"

에롤드가 거칠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당황하며 리만은 뒤로 물러섰다.

"어엉? 아니, 이건 그게 아니라...."

조금 전의 일은 리만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멍하니 서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칼끝을 살짝 밀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로 깊은 상처도 아닌데 저리 난리를 피우다니?

"젠장! 모르겠다!"

이미 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평소에도 칼침 놓고 싶은 상대이긴 했다.

챙! 채챙! 챙!

어두운 밤거리 위로 칼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도시 곳곳에서 때아닌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2~3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수색하던 란펠트의 조직원들,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 자식! 결국 내 뒤를 노리는구나!"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누가 당할 것 같으냐?"

"네놈이야말로 이 핑계로 날 처리할 셈이구나!"

야심한 밤에 잠도 못 자고 도시를 수색하는 임무.

궂은일 대부분이 그렇듯 지위가 높은 이들은 이런 일에 잘 끼어들지 않는 법이다.

현재 도시를 수색하는 병력은 란펠트 조직원 중에서도 위치가 낮은 자이거나, 혹은 가문이 몰락한 뒤 외부에서 유입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이 억지로 같은 편이 되었다 보니 동료애 따윈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주 사소한 오해만으로도 눈에 불을 켜고 살기를 터트린다.

비명이 이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으아아악!"

"커억!"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카르나크가 히죽 웃었다.

"잘 먹히고 있구만."

함께 숨어 있던 세라티는 어이없어했다.

"맙소사,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저렇게 쉽게 칼을 뽑는다고요?"

"여기가 멀쩡한 도시라면 세라티 말이 맞지."

하지만 이곳은 트리스트 시티, 치안이 자급자족인 곳이다.

"평소에도 툭하면 칼 뽑는 거, 우리 눈으로 생생히 봤잖아? 쟤들 입장에선 이게 별로 드문 상황도 아닌 거야."

적을 분열시키기 위해 카르나크는 많은 힘을 쓰지 않았다.

그럴 사령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불쏘시개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굳이 파이어볼 날릴 필요 있나? 불티 하나만 놓아도 활활 타오를 텐데."

그저 마력으로 칼끝을 살짝 움직여 준다. 그리고 귓가에 짧은 환청을 남긴다.

'둘만 남았네?'

'복수다!'

'기회가 왔군.'

이 정도만 해도 족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평소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이들은 쉽게 칼을 뽑고 쉽게 죽어 간다.

"아아아악!"

"크억, 이, 이 개새...."

"아악!"

섬뜩해진 세라티는 몸을 떨었다.

'세상에....'

딱히 엄청난 수법도 아니다. 정말 사소한 환청으로, 아주 사소한 오해 하나만을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수십 단위로 죽어 가다니....'

하지만 그녀는 내심 안도의 한숨도 내쉬고 있었다.

카르나크의 수법은 어디까지나 란펠트의 조직원들만을 노리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에겐 해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가?'

반면 바로스는 영 탐탁잖은 표정이었다.

"시체가 너무 적은데요."

도시 곳곳에서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이 넓은 도시에서 고작 수십 명이.

"이걸로 무슨 사령 군단을 만들어요?"

아무리 막장 도시의 막장 인생이라도 저런 단순한 수법이 모두에게 통하진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넘어가지 않는 놈들이 더 많았다.

"마법이다!"

"마법사가 우릴 현혹하고 있어!"

눈치챈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수색대 모두가 2~3명씩 짝을 이룬 것도 아니다. 10여 명씩 우르르 몰려다니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저들에겐 이 수법 자체를 쓸 수가 없다.

"저놈들은 어쩌시려고요?"

카르나크는 태연했다.

"설마 이게 전부겠냐?"

어디까지나 씨앗을 뿌리는 단계일 뿐이다.

"다 방법이 있지."

#40화. 10. 시체들의 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