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10. 시체들의 밤 (4)
험상궂은 사내 5명이 눈앞의 광경을 보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이놈들이 여기 죽어 있지?"
이들 역시 란펠트의 말단 조직원들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거리를 수색하던 중, 다른 구역을 헤집던 놈들이 죽어 자빠져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적의 공격이라기엔 상황이 좀 이상한데...."
아무리 봐도 서로 찔러 죽인 모양새였다.
워낙 서로 찔러 죽이는 경우가 많은 도시에서 살다 보니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들이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다.
"혹시 마법사가 현장을 조작한 건가?"
"그렇다는 건...."
"지금 어딘가에서 놈이 우릴 노리고 있다는 소리잖아?"
순간 섬뜩해져 조직원들이 시체를 등진 채 안개 저편을 응시할 때였다.
등 뒤에서 피투성이 시체 2구가 스르르 일어났다.
"으어어...."
신음 소리에 놀란 란펠트의 조직원들이 채 몸을 돌리기도 전이었다. 시체가 쥔 칼이 사내 1명의 가슴팍을 깊숙이 찔러 갔다.
"커, 커억!"
생명 하나가 너무도 쉽게 사라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조직원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으아아!"
"시, 시체가 움직인다!"
"사령술이야!"
피투성이 시체가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사내들도 기겁하며 맞서 싸웠다.
"젠장! 마법사라며?"
"빌어먹을 윗대가리 놈들!"
"이런 중요한 건 미리 알려 줘야 할 거 아냐!"
찌르고, 베고, 피를 뿌리며 난투가 이어졌다.
시체의 몸통에 칼이 박힌다.
"으어어어...."
소용없다. 이미 죽은 자는 또 죽지 않는다. 무작정 밀어붙이며 칼을 찌른다.
사내의 몸통에 칼이 박힌다.
"크억!"
비명이 터져 나온다. 산 자가 생기를 잃고 인형처럼 쓰러진다.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시체와, 세 치만 베여도 때론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산 자의 대결은 너무도 불합리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모, 목을 베!"
"베어도 안 죽어!"
"그럼 목도 베고 팔다리도 다 잘라!"
고작 2구의 움직이는 시체를 전투 불능으로 빠트리기 위해 5명의 사내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다섯 중 2명이 목숨을 잃었고, 3명도 중상을 입은 채 가쁜 숨만 내쉴 뿐이었다.
"헉, 헉헉...."
"그래도 이렇게까지 조져 놨으니까...."
"...두 번 다시 못 일어나겠지."
덤벼들던 좀비의 머리통을 통째로 부수고, 팔다리도 아주 잘 다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설령 또 움직인다 해도 공격 수단이 없으니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빌어먹을, 시체가 움직인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중얼거리던 사내의 안색이 문득 창백해졌다.
'잠깐, 시체가 움직인다고?'
이 자리엔 시체가 2구 더 있다. 방금 저 좀비들에게 죽은 란펠트의 조직원들이다.
"으어어어...."
"어어어어...."
죽은 동료들마저 좀비가 되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공포에 찬 비명이 밤안개를 뚫고 울렸다.
"으아아악!"
***
도시 곳곳에서 기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동료들이 서로를 죽이고, 그대로 좀비가 되어 일어나 또 다른 동료들을 습격해 간다.
하지만 란펠트 조직원들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트리스트 시티 중부의 한 거리.
10여 명의 조직원들이 좀비 3구를 난도질하는 중이었다.
"헉, 헉헉...."
"흥! 이까짓 좀비 따위...."
"냉정하게 대처하면 별것도 아니다!"
다들 피와 죽음에 익숙한 전투의 베테랑들, 고작 좀비 정도에 맥없이 당하진 않는 것이다.
피를 닦으며 조직원 1명이 침을 퉤 뱉었다.
"흥, 사령술사 놈. 이 정도로 우리가 흔들릴 줄 알았나?"
죽은 동료를 다시 죽이는 일에 대한 고뇌?
그딴 건 애초에 없다.
살아 있는 동료도 수틀리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 이미 시체 된 놈 난도질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주위를 수색해라! 분명 이런 짓을 한 사령술사가 근처에 있을 것이다!"
부하 몇 명이 거리 곳곳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골목 안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놈들이 여기 있다!"
"그쪽이냐!"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이 살기등등하게 골목으로 몰려갔다.
그렇게 막 골목 안쪽을 노려볼 때였다.
"어?"
"뭐야?"
안쪽에 아무도 없었다. 사령술사는 물론이고, 외침을 터트린 조직원마저.
"...그럼 방금 그 소리는 누가 지른 거지?"
다들 어안이 벙벙할 때였다.
골목 밖에서 다른 수하 하나가 이들을 불렀다.
"이쪽입니다, 형님!"
보고를 하자마자 부하는 빠르게 뛰어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혀를 차며 다른 이들도 그를 따랐다.
"그새 거기로 도망갔나?"
그런데, 막상 도로 거리로 나오니 그 부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 어디 갔어?"
사내들이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거리 반대쪽에서 사내 1명이 뛰어왔다.
"이쪽엔 아무도 없습니다, 대장."
방금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던 그 부하였다.
그를 보며 대장이 물었다.
"뭐야, 너? 언제 그쪽으로 갔냐?"
"네?"
"방금 이쪽으로 뛰어갔잖아!"
"네에?"
이해가 안 가 서로 당혹할 때였다. 이번엔 발걸음 소리가 먼저 들렸다.
탁탁탁탁!
그러더니 안개 속에서 똑같은 부하가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다.
"대장, 이곳엔 아무도 없... 헉! 저거 뭐야!"
그는 반대편의 또 다른 자신을 보며 기겁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당황에 빠져 우왕좌왕할 때였다.
대장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발소리가 들렸지?"
아까는 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속임수다! 이놈이 가짜야!"
이래 봬도 트리스트 시티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이런 속임수에 넘어갈 것 같으냐!
"이 자식!"
"어딜 사람을 속여 넘기려고!"
본때를 보여 주겠다며 사내들이 칼을 쥐고 우르르 덤벼들었다.
"어? 어? 이 무슨?"
상대가 당황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로도 목숨이 날아가는 인생이었다. 신속하게 손을 써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으, 으아악!"
사람 하나가 난도질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다. 사람 하나였다.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 사람 하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쥔 채 사내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기...."
"이거 느낌이 어째...."
"진짜 같은데...."
대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진짜일 리가 없잖아?"
왜냐면 진짜는 지금 그의 뒤에 있으니까. 확실히 발소리를 들었으니까.
"안 그러냐? 프로트...."
이름을 부르며 그는 수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흠칫거렸다.
"프로트?"
없다.
분명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그 수하가 보이지 않는다.
"얘 어디 갔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있긴 있다.
자신의 손에 난도질되어, 시체가 된 프로트가 말이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럼...."
"...우리가 방금 죽인 이놈이?"
그 시체가 일어난다.
"으어어어...."
동료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으어어어...."
뼛속까지 원한으로 가득 차 사기와 탁기를 풀풀 풍기는 또 하나의 좀비가 되어서.
"으아아아!"
***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분명 눈앞에 있던 동료가 사라지고, 없어야 할 동료가 눈앞에 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들리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없는 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만이 환청이 아니다. 있는 소리를 없애는 것 또한 환청이다.
"아니, 분명히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소리 없이 뛰어오는 동료를 칼로 찌르면 생생한 피가 쏟아진다.
요란하게 떠드는 동료를 등 뒤로 보내면 어느새 사라져 있다.
"다들 정신 차려!"
"흩어지지 말고 뭉쳐 있어!"
그렇다면 등을 맞댄 동료만큼은 믿을 수 있을까? 등에서 전해져 오는 이 온기만큼은?
그 온기가 어느새 싸늘한 냉기로 바뀌어 가는데?
푸욱!
"크어억!"
"어, 어느 틈에...."
분명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가, 피투성이 시체가 되어 동료였던 이를 찌른다.
죽은 자가 또다시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 신음하며 대지를 걷는다.
"흐, 흩어져!"
"우리 중에 좀비가 있다!"
"말도 안 돼! 조금 전까진 멀쩡해 보였는데...."
경악과 패닉 속에서 좀비를 썰던 중이다. 열심히 함께 싸우던 동료의 눈알이 갑자기 기괴하게 돌아간다.
"야, 너, 너 눈이...."
지적받은 동료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한다.
"내 눈이 뭐?"
참으로 인간적인 반응이라 안심하는 것도 잠시.
데구루루.
동료의 눈알이 쏙 빠진다. 검붉은 힘줄에 매달려 안구가 대롱대롱 흔들린다.
"으아아아악!"
기겁하며 일제히 칼을 휘두른다.
"크억! 아니, 왜 갑자기 날...."
갑자기 공격을 받은 이가 원통해하며 죽어 간다.
살아남은 이들이 숨을 헐떡이며 죽은 자를 노려본다.
그리고 경악한다.
'내, 내가 본 건 뭐지?'
'분명히 눈알이 아래로 굴러떨어졌었는데?'
시체의 두 눈이 멀쩡하게 붙어 있다.
멀쩡한, 그러나 이제는 초점을 잃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시체가 신음을 흘리며 좀비가 되어 일어난다.
"으어어어...."
이젠 정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그저 공포와 혼란, 절망 속에서 비명을 터트릴 뿐이었다.
"으아아아악!"
***
카르나크는 계속해 작업을 이어 갔다.
트리스트 시티를 누비며 란펠트 조직원들을 찾는다.
애초에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니는 놈들이니 찾기는 쉽다.
발견하면 어둠의 장막을 펼쳐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란펠트 무리에게 현혹술을 걸고 상황을 조율한다.
사령력에 여유가 없으니 대규모 현혹술은 걸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도 별문제는 아니다.
짧은 환청 한마디 정도는 사령력도 별로 잡아먹지 않으니까.
"속았지?"
이 한마디면 족하다.
누군가가 의심스러운 말을 내뱉었다는 것만으로 저희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난다.
"이, 이 자식!"
"잠깐! 왜 나를 의심하는 거요?"
물론 냉정한 이들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한다.
"다들 정신 차려!"
"누군가가 우릴 홀리고 있는 거다! 보면 모르나?"
여기서 또 살짝 소금을 쳐 간을 맞춰 준다. 환상이라는 이름의 소금이다.
"잠깐... 당신 얼굴이...."
"내 얼굴이 뭐?"
"으아악! 가까이 오지 마, 이 괴물!"
"네놈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시체가 늘어나고, 늘어난 시체가 산 자를 또 죽이고, 시체가 또 늘어난다.
심지어 미처 예상 못 했던 상황도 있었다.
자중지란이 일어난 란펠트 조직원들의 모습이 일반 시민들에겐 어떻게 비칠까?
앗, 저 꼴 보기 싫은 란펠트 놈들이 당한다!
그런데 비싼 검과 갑옷을 걸치고 있네?
단순히 흩어 놓기만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르나크는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나쁜 놈들만 모여 있으면 이렇게 되는군."
나쁜 놈들끼리 모여서 나쁜 짓을 하면, 항상 나쁜 현실만을 보고 살게 된다.
세상이 오로지 나쁜 일로만 가득하게 느껴지니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져도 최악의 결과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트리스트 시티의 시민 대부분은 모든 문제를 오직 칼과 폭력으로 해결해 왔던 이들이지.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도련님이 말씀하시니 참 설득력이 넘치네요."
바로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착하게 못 살아서 우리가 그 꼴이 됐었죠, 아마?"
"그래서 이렇게 선행을 이어 가고 있잖냐?"
으스대는 카르나크를 보며 세라티는 부르르 떨었다.
'이게 진짜 사령술이라는 거구나....'
그는 전설의 사령술사처럼 거대한 어둠을 펼치고 도시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저 도시를 배회하며 간단한 현혹술을 걸고 또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계속 죽어 간다....
'정말 이자의 권속이 된 게 잘한 일일까?'
물론 그녀도 살인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모험가로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사투를 벌인 적도 많고, 악당을 징벌한 경험도 풍부하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악당이라도, 사람이 이렇게까지 간단히 죽어도 되는 걸까?
그런 세라티의 시선을 느꼈는지 카르나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이거 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 평소엔 이러지 않아, 나도."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네?'
표정을 보니 정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세라티는 살짝 안심했다.
'하긴, 아무리 사령술사라 해도 사람인데 이런 짓을 마음 편하게 저지를 리가 없....'
"원래는 도시 전체에 어둠의 마력을 깔고 한 번에 시체 군단을 일으키거든? 내 사령력이 미천해져서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실망한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부끄러운 포인트가 그쪽이었어?'
세라티가 기막혀하는지도 모르고 카르나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힘없이 살려니 참 힘들구나."
확실히 피곤한 작업이긴 했다. 왕년의 그였다면 절대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았겠지.
그래도 덕분에 억울하게 죽는 이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간다.
억울한 시체가 대지를 걷고, 억울한 원혼이 하늘을 맴돈다.
"이 정도면 쪽수는 대충 맞췄지?"
카르나크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나의 군세여...."
음산한 목소리가 그림자를 타고 도시 전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군단이 되어 내 명에 따라 진군하라!"
#41화. 11. 새벽의 저주
시체들이 움직인다.
쪼개진 머리를 휘청거리며, 길게 늘어진 내장을 질질 끌며 어기적어기적 걸어간다.
잘린 팔, 잘린 다리가 담긴 피 웅덩이를 뒤로한 채 밤의 고요를 괴성으로 더럽혀 간다.
으어....
으어어어....
으어어....
골목마다 좀비가 가득했다. 거리마다 시체가 넘치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세라티는 한탄을 흘렸다.
"여신이시여...."
시체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수십? 수백?
그런 귀여운 숫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족히 3천은 되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이는 모든 것이 시체일 리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현실에 지옥을 끌어내린 자, 이제 자신의 주인이 된 흑발의 청년을 돌아보았다.
카르나크는 시체의 도시를 바라보며 뿌듯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먹히겠지?"
"이제 알리우스 씨와 릴테인 씨를 구할 수 있겠군요."
"그러고 보니 바로스 너 말고 다른 동료를 구하러 가는 건 처음이야."
"저도요, 도련님 말고 딴 사람 챙기긴 처음이네요."
후회가 밀려온다.
어쩌면 이 일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많은 피가 흐르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라티는 다시 한번 뇌까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
밀려드는 시체들의 군단, 그 너머로 어둠이 깔린 란펠트 저택이 흐린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시체들이 손을 뻗어 담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어어...."
"으어...."
시체가 시체를 밟고 오르며 거대한 물결이 되어 저택 사방을 침식해 간다.
설탕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좀비들이 저택 곳곳을 새까맣게 뒤덮어 간다.
슈트라프는 저택 지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건 대체...."
정황을 볼 때 그 카르나크란 놈이 한 짓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놈이 이렇게나 강력한 사령술사였다고? 하지만 분명 사령력은 별거 없었는데....'
놈이 지닌 어둠의 마력은 고작해야 좀비 십여 마리도 제대로 다루기 힘든 수준이었다. 적어도 슈트라프가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이 정도 힘이 있었다면 굳이 아까 도주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아니면 정말 강력한 사령술사는 따로 있는 걸지도?'
이건 말이 된다. 도망친 뒤 동료를 데리고 왔다면 앞뒤가 맞는다.
자신의 추리를 확신하며 슈트라프는 사악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군."
이토록 강력한 사령술사라면 분명 엄청난 권능을 지니고 있을 터.
'그 어둠을 흡수하면 내 힘도 훨씬 커지겠지!'
슈트라프가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지하실 벽을 뒤덮은 흉측한 고기의 벽에서 수십 줄기의 촉수가 쏘아졌다.
"오라, 지옥이여. 만악의 어둠 아래 이 땅에 강림하라...."
어둠의 마력이 꿀렁대며 촉수를 타고 흐른다.
촉수를 타고 흐르는 마력이 저택 전체를 휘감으며 거대한 권능으로 화한다.
"진실된 어둠의 군세가 일어나 내 적을 칠지니...."
타락한 성직자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갔다.
"이는 죽음을 지배하는 왕의 명이로다...."
란펠트 저택 상공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
첫 번째 어둠의 나팔이 하늘을 울린다.
우우웅!
밤하늘 곳곳에 구멍이 생겨난다. 어둠이 공허한 외침을 토하며 온갖 마물들을 쏟아 낸다.
팔과 다리, 머리와 날개가 제멋대로 붙어 마치 망가진 찰흙 조각처럼 보이는 괴물들.
지옥 최하급의 부정형 마물들이었다. 놈들이 불협화음을 토하며 좀비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크캬캬캬!
캬아아!
두 번째 어둠의 나팔이 이어졌다.
대지가 흔들리고 무수한 촉수들이 솟구쳤다.
수많은 촉수들이 시체를 휘감고 으깨고 쳐 내고 부숴 버린다. 피와 살점이 튀고 또 튄다.
나팔 소리는 끝없이 이어져만 갔다.
우우우우웅!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나팔이 계속 울린다. 그때마다 풍경이 녹아내리고 지옥이 펼쳐진다.
더 이상 현세의 풍경이라 할 수도 없는 악몽이었다.
움직이는 시체와 일그러진 괴물들이 고기로 된 나무와 뼈로 된 꽃잎 사이를 노닐며 피와 비명을 토하고 또 토했다.
으어어어....
아아아아....
끔찍한 혼란의 도가니였다.
저택 전체에서 신음과 폭음, 금속음이 어우러져 밤하늘을 시끄럽게 달궜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르나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거 사룡(死龍)의 일곱 나팔수잖아? 용케 저 술법을 알고 있네. 어디서 배웠지?"
전생 때 저 술법을 아는 이는 오직 카르나크뿐이었다.
하토바 교단의 비밀 창고 내에서 수백 년간 썩어 가던 고대의 사령술을, 그가 몰래 빼돌려 재현했으니까.
"맞다, 저 인간, 원래 하토바 교단 성직자랬지? 그럼 이상할 것도 없나."
그렇다는 건 전생 땐 카르나크가 독점했던 다른 지식과 지혜도 지금은 딴 놈들이 챙겨 갔을 가능성이 크단 소리다.
그때와 달리 지금 시간대엔 온갖 잡다한 사령술사들이 창궐하고 있으니까.
'이거, 내 수법에 내가 당할 일도 있을 수 있겠군. 미리 대비를 해 놔야겠어.'
어쨌거나 이건 나중에 신경 쓸 일이고.
"슬슬 움직이자."
카르나크가 손짓을 했다.
지금까진 감시를 피해 암흑의 장막을 펼치고 저택 근처 건물 옥상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졌으니 저 혼란 속에 숨어 란펠트 저택까지 이동할 수 있으리라.
"이 틈에 동료를 구해야지."
멍하니 서 있던 세라티도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
지금은 후회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리우스와 릴테인을 구해야 한다.
냉정해진 그녀가 전황을 파악하며 물었다.
"아직은 시기가 이르지 않을까요?"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전투가 진행되어 혼란이 커졌을 때 움직이는 것이 전략상 유리하다.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시간 끌면 들켜."
"네?"
들키다니? 뭘?
"환각인 거 들킨다고."
놀란 눈으로, 세라티는 란펠트 저택을 뒤덮어 가는 수천의 좀비 떼를 바라보았다.
"...저거 전부 환각이었어요?"
카르나크가 어깨를 움츠렸다.
"전부는 아니고, 200구 정도는 진짜야."
그러더니 또 부끄러워한다.
"야! 지금의 내가 어떻게 사령술만으로 수천 명을 죽이냐?"
여전히 뭐가 부끄러운 건지 이해가 안 가지만 여하튼 본인은 부끄러운가 보다.
변명하듯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시간만 충분하면 못 죽일 건 없긴 한데...."
좀비 군단을 수천 단위로 늘리려면 란펠트 조직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란펠트 가문이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해도 수색대만으로 수천 명을 풀 정도는 아닌 것이다.
즉, 트리스트 시티의 일반 시민들까지 손을 대야 한다.
"아무리 나라도 그게 진짜 악행이라는 것쯤은 알거든! 아니면 혹시 이런 상황에선 거기까지도 허용 범위인가?"
어이없어하던 세라티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잘하셨어요! 당연히 그렇게까지 하시면 안 되죠!"
마음 한구석이 환해진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악당은 아니었구나!'
물론 하룻밤 사이 200명을 죽인 것도 엄청난 학살이긴 하다.
하지만 죽일 놈 죽이는 것과, 상관없는 사람까지 죽이는 건 죄의 무게가 다르다.
"역시 악당만 죽여야 해. 경험상 좋은 사람까지 죽여 버리면 후환이 크더라고."
그럴 줄 알았다며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당은 복수를 하지 않거든."
이해가 안 가 세라티가 되물었다.
"악당이 복수를 하지 않는다고요?"
보통 악당들이 항상 하는 소리가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하겠다!' 등등이 아니었던가?
"말만 그렇지 대부분은 확실히 조지면 깔끔히 포기하더라고. 제 목숨까지 걸면서 복수하는 놈은 실제론 없더라."
반면 좋은 사람의 죽음은 다르다.
좋은 사람이 죽으면 다른 좋은 사람들이 들불처럼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라는 실체를 갖게 되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가공할 힘으로 변하지.
사령왕이었던 카르나크는 그 힘을 절실히 맛본 바 있었다.
물론 그 힘까지 죄다 짓누르고 세계를 정복하긴 했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이 너무나 컸다.
'아무렴, 예전처럼 살진 말아야지.'
새삼 다짐하며 카르나크가 바로스와 세라티를 불렀다.
"어서 동료들을 구하러 가자고."
***
사방에서 전투가 이어진다.
어딜 봐도 시체와 마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야말로 지상에 펼쳐진 수라도 그 자체였다.
그 현세의 지옥 속을 세 사람이 걷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을 펼친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였다.
좀비와 마물 사이를 지나가며 세라티는 혀를 내둘렀다.
'이게 정말 환각이라고?'
바로 옆에서 좀비 하나가 나가떨어진다. 그리고 괴성과 함께 다시 일어나 이형의 마물에게 덤벼든다.
너덜거리는 내장, 팔뚝, 푸른 피부마저 너무 생생하다.
'아무리 봐도 진짜 같은데.'
환술은 시전자의 상상력에 크게 의존하는 수법이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이렇게나 정교한 환상을 만들 수 있단 말이야? 저런 피와 내장, 피부의 질감까지 전부 재현할 정도로?'
그런 세라티의 반응을 보며 카르나크는 내심 만족했다.
'아직 실체까지 파악하지는 못한 모양이군.'
이게 바로 그가 자신하는 환술, '복사 붙이기'였다.
상상력만으로 환상을 구현하는 건 엄청난 집중력과 기억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을 베낄 뿐이라면 난이도는 크게 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싸우는 좀비는 잘해 봐야 200여 구, 카르나크는 이를 20배 이상 환상으로 늘려 복사한 뒤 서로 뒤섞어 전장에 풀어놓았다.
이 경우 똑같은 좀비들이 무수히 많을 텐데도 세라티가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있다.
일부러 좌우를 반전시키거나, 사이즈를 줄이고 늘리거나, 움직이는 속도에 완급을 주는 등의 다양한 차별점을 뒀으니까.
이렇게 하면 어지간히 집중해서 보지 않는 이상은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시체가 너덜너덜하다 보니 복장이 죄다 누더기라는 것도 장점이다.
'역시 내가 연출은 좀 한다니까?'
물론 이렇게 해도 마물이 환상을 그냥 통과한다면 금방 들키겠지.
하지만 카르나크의 환상술엔 한 가지 강점이 더 있었다.
그의 환상에는 나가떨어지는 반응까지 구현되어 있다.
'환술을 걸 때 제일 중요한 건 리액션이거든.'
칼을 휘두르면 베이고, 걷어차면 나가떨어진다. 그 후에 다시 일어나 덤벼든다.
다만 평범한 인간의 환상일 경우엔 어색한 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칼로 베었는데 멀쩡한 모습으로 재차 덤벼든다? 여기서 환상임을 눈치채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라면 이 문제도 사라져 버린다.
애초에 너덜너덜한데? 애초에 칼 맞아도 도로 일어나는데?
괜히 사령술사들이 환상술을 쓸 때 끔찍한 몰골의 좀비나 해골을 주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다.
적에게 공포를 안겨 주려는 목적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환상의 주역이 너덜너덜한 시체여야 디테일한 부분을 재현하느라 과하게 정신력을 소모하는 걸 막을 수 있다.
하여튼 오러 유저인 세라티마저도 이 환상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심지어 환상임을 알려 줬는데도.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그 슈트라프란 놈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단 소리지.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겠어.'
***
카르나크의 추측은 옳았다.
"흥,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지만...."
슈트라프는 저 수많은 좀비 군단이 설마 환상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이까짓 좀비 따위, 아무리 많아 봤자 내 상대는 아니다!"
어둠의 마력을 한껏 퍼부으며 그는 계속해 사령술을 펼쳐 갔다. 덕분에 사령력 소모가 극심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기고 있었으니까.
저택을 포위한 좀비 무리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반면 그가 부른 지옥의 마물들이며 사령결계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승리가 확실한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사실은 실체인 진짜 좀비들이 나가떨어지며 환상도 함께 사라졌을 뿐이지만, 슈트라프는 그 사실을 몰랐다.
마물과 결계에 별 피해가 없던 것 역시 실은 대부분의 좀비가 환상이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 역시 알 수 없었다.
그저 강력한 사령술사를 먹어 치우고 더욱 힘을 키울 생각에 흥분할 뿐이었다.
'어디냐?'
전장 곳곳에 원견의 시야를 던져 목표를 찾아간다.
분명 저곳 어딘가에 카르나크와 그 일당이 숨어 있을 터.
'어디 있는 거냐?'
발견만 하면 바로 마물들을 집결시켜 사로잡겠다며 슈트라프가 눈을 부라릴 때였다.
"오, 저택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구만요?"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아따, 넓기도 하다. 왜 지하를 이렇게나 크게 키웠대요?"
"원래는 와인 저장고겠지. 우리 집 지하에도 이런 거 있잖아."
"에이, 이렇게까지 크진 않죠."
음성은 사령술을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두 귀로 들리고 있었다.
'헉!'
슈트라프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피로 물든 끔찍한 광경의 지하 별실, 그 입구에 세 남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 차림의 흑발 청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슈트라프인가? 이렇게 생긴 양반이었구만."
중년 사내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저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42화. 11. 새벽의 저주 (2)
세라티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란펠트 저택 지하의 규모는 상당했다. 높이가 거의 7미터에 달하고 좌우로도 20미터가 넘어 보였다.
'이게 정말 와인 저장고? 너무 큰데?'
자세히 살펴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실은 지하 1층, 2층으로 나뉜 구조였는데 벽이며 바닥을 날리고 거대한 공간으로 바꾼 것이었다.
'알리우스 씨와 릴테인 씨는 어디 있지?'
그녀가 동료들을 찾는 동안, 슈트라프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잠깐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전술 자체는 대단할 것 없다. 그의 신경을 저택 외부로 돌린 뒤 그 틈을 타 잠입한 것에 불과하다.
단지 비겁한 사령술사 주제에 안전한 좀비 군세에서 일부러 빠져나와 위험한 곳에 직접 뛰어들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이다.
카르나크 일행을 노려보며 슈트라프가 중얼거렸다.
"잘도 속였구나."
"잘도 속더라고."
그를 위아래로 살피며 카르나크가 비아냥거림을 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좀비들 상대하느라 힘깨나 쓰셨나 봐?"
"으음...."
슈트라프는 작게 신음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지금의 그는 내내 사령술을 펼치느라 상당한 마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여전히 카르나크보다는 월등히 높다. 하지만 이전처럼 사령력의 격차만으로 압도할 만큼은 아니다.
더 이상 필승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저택 외부에 투입된 사령력을 거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슈트라프의 귀에 목소리가 울렸다.
"펼쳐 놓은 사령술 도로 거둬서 마력을 보충하시게? 뭐, 그러시든가."
카르나크는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그럼 우린 도로 도망치면 되지. 좀비 군단이 지하실까지 편히 오겠네."
"어? 좀비 군대만으로 저 작자 잡을 수 있어요, 도련님?"
"에이, 그건 무리지. 저 인간, 꽤 세."
카르나크가 주위를 가리켰다.
"하지만 이 지하 시설은 확실히 박살 낼 수 있을 것 아냐?"
곳곳에 붉은 마법진과 문양이 그려져 있다. 벽이며 기둥에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뭉쳐 연신 꿈틀댄다.
문외한에겐 그저 지옥의 풍경처럼 보이겠지만 카르나크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것은 제단이다.
사로잡은 제물을 사기와 탁기로 물들여 악마에게 바치는 제단.
본인도 비슷한 거 많이 만들어 봤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설마 이 정도 규모의 제단을 며칠 만에 원상 복구시킬 수 있겠어?"
"그럼 우린 그냥 푹 쉬고 내일 밤에 다시 오면 된다는 거네요?"
"그렇지!"
슈트라프는 인상을 썼다.
확실히 저택 외부의 좀비 무리가 지하실까지 밀려들어 오면 골치 아파진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 장소가 전장이 되는 시점에서 제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기껏 장시간 공을 들여 마련했는데 허무하게 잃을 순 없다.
하지만 저들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것도 기분 나쁘다.
"도망치겠다고? 기껏 구하러 온 동료들을 도로 버리겠다는 거냐?"
"물론 걱정은 좀 되지만...."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단이 망가지면 적어도 제물로 바쳐질 걱정은 없을 것 아냐?"
바로스가 또 끼어들었다.
"저 양반이 그냥 죽여 버리면 어쩌시려고요?"
"사령술사가 기껏 손에 넣은 귀한 제물을 그냥 포기한다고? 고작 내 성질 긁으려고? 잘도 그러겠다."
슈트라프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아주 대놓고 수작질을 하고 있는데 문제는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놈의 말대로 아무 이득도 없이 고위 성직자와 마법사 같은 귀한 제물을 그냥 죽여 버릴 순 없다.
"좋다, 넘어가 주마."
슈트라프가 결계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네놈들이 착각한 게 하나 있구나."
두 팔을 감싸고 있던 촉수들이 스르르 풀려 고기의 벽으로 돌아간다.
"내가 지친 건 사실이지만...."
발치에서 암흑이 일어 올라 회오리치며 사방으로 퍼져 간다.
"네놈 따위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으어어어....
어어어....
지하 곳곳에서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건장한 거구의 중무장한 구울들.
슈트라프가 여태 붙잡아 놓았던 어둠사냥꾼들의 시체였다.
어둠의 마력이 지하 공간 전체를 가득 떨쳐 울렸다.
"사자가 지쳤다 하여 쥐 새끼 하나 못 잡겠는가!"
***
검과 방패, 갑옷으로 중무장한 구울들이 괴성을 터트리며 달려든다.
"크아아아!"
"으아아!"
바로스와 세라티도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수십 마리의 구울들 사이로 두 자루 검이 종횡무진 날뛰기 시작했다.
카르나크도 양손을 들었다.
지금의 그는 사령력을 꽤나 챙겨 놓은 상태다. 혼돈마력만으로 싸워야 했던 때와는 다르다.
"오라, 영혼의 노예들아, 연옥의 심해에서 그대들을 부르노라...."
저주받은 영혼을 소환하는 흑마술, '지저 세계의 메아리'가 발동되었다.
지하실 바닥 곳곳에서 악령들이 일어나 구울들을 덮쳐 갔다.
"캬캬캬캬!"
"크캬캬!"
신음과 괴성, 기괴한 소음이 어우러지며 혼란한 전투가 벌어졌다.
승패는 쉽게 갈리지 않았다.
슈트라프의 사령술은 조잡했지만 워낙 사령력이 높았고, 카르나크의 사령술은 효율의 극한이었지만 그럼에도 마력의 총량에서 한참 밀린다.
이 점이 구울과 악령에도 반영되어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는 것이다.
계속 사령술을 운용하며 카르나크는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오려나?'
슈트라프는 딱히 사령결계를 추가로 구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더더욱 어둠의 마력을 퍼부어 구울의 위력 자체를 높일 뿐이었다.
"일어서라, 나의 종들아! 죽음이 그대들을 가호할지니!"
혼탁한 어둠의 권능이 쓰러진 구울 전사들에게 쏟아진다. 놈들이 더욱 강화되어 몸을 일으킨다.
팽팽하게 싸우던 악령 무리며 바로스와 세라티가 조금씩 밀린다.
"윽!"
"이놈들, 어째 더 세졌는데...."
내심 카르나크는 슈트라프에게 점수를 주었다.
'제법 학습 능력은 있군.'
사령결계는 쓰지 않는다. 오직 미리 배치해 둔 구울 전사들만을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결계 무효화 수법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유를 알고 하는 짓은 아닌 것 같지만.'
대충 '사령결계는 통하지 않지만 다른 사령술은 통한다.'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원인까지 파악했다면 사령결계 중 술식이 단순한 건 그냥 써먹었겠지?'
어쨌든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편하게 놈의 마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카르나크 일행이 버텨 줘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세라티 양! 좌측!"
"네, 바로스 씨!"
경험 많은 바로스와 오러 유저 세라티, 이 두 조합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대응하는 것이다.
세라티의 움직임에 맞춰 바로스가 보조하니 쓰러지는 구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만 갔다.
안색이 굳어 가는 슈트라프를 노려보며 카르나크는 차갑게 웃었다.
'자, 비장의 한 수를 꺼내실 때가 됐을 텐데?'
***
날뛰는 바로스와 세라티, 소환된 악령들, 밀려오는 구울들이 끝없이 충돌한다.
그때마다 지하실 전체에 혼탁한 어둠의 마력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친다.
웅웅웅웅!
슈트라프는 식은땀을 흘렸다.
'제길....'
소용돌이가 거칠어질수록 사령력도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설마 저놈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 줄이야....'
이대로라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 전에 뭔가 수를 써야 했다.
다행히 그에겐 마지막 한 수를 펼칠 힘이 남아 있었다.
이를 갈며 그는 언성을 높였다.
남은 사령력을 총동원해서,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최강의 존재를 부른다!
"오라, 게헤나의 악마여!"
허공에 어둠의 문이 열렸다.
소환문 너머로 지옥의 풍경이 비치며 3미터에 달하는 핏빛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티가 기겁해 외쳤다.
"아, 악마!"
반면 바로스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아, 마즈눈이네. 저거 또 써먹나?"
카르나크도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바로스마저 짐작한 걸 그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 정도로 몰아붙이면 마즈눈을 꺼내 들 거라 예상했다.
퍼플 나이트에 준하는 저 심연의 악마는 이 상황을 확실히 타개할 수 있는 최강의 카드일 테니까.
카르나크의 어깨 너머로 어둠이 피어올랐다.
악마 소환술 역시 사령결계술 못지않게 복잡한 술법이다. 그리고 복잡한 술식이라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
"그럼 끝내자고."
간단한 사령결계가 악마 소환식을 덮었다.
혼선이 일어나며 소환술 자체가 취소되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어둠의 문이 도로 줄어들며 새어 나오던 지옥의 마력 역시 급속도로 위세를 잃어 간다.
부름에 답하려던 악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어어?"
당황한 악마와 당황한 슈트라프.
둘을 보며 카르나크는 싱글벙글 웃었다.
'이거만 무효화하면 더 이상 사령력도 남아 있지 않을걸.'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쿠웅!
갑자기 굉음이 터지며 축소되던 어둠의 문이 멈춰 버렸다.
카르나크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엥?"
***
원래 어둠의 문은 족히 수 미터에 달했다. 3미터의 거구인 악마, 마즈눈이 건너오기 충분한 크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해야 1미터 정도? 문이 아니라 창문 사이즈다.
바로스는 멍하니 창문 저편, 지옥에 서 있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
마즈눈도 멍하니 창문 저편, 현계에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
인간과 악마가 서로를 마주 보고 눈만 껌벅거리는, 돈 주고도 못 볼 기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스가 황당해하며 카르나크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저거 닫히다 마는데요?"
황당해하긴 마즈눈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뭔가?'
어둠의 문이 열려 있다.
그래, 열려는 있다. 개구멍 사이즈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면 못 지나갈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네발로 기어야만 할 수준이었다.
고귀한 심연의 악마인 자신이 개처럼 기어야 한다는 소리다.
'계약을 포기해야 하나?'
그러기엔 너무 아깝다.
그의 계약자는 자신을 부르는 대가로 많은 영혼을 약속했다.
'할 수 없군....'
마즈눈은 소환문에 양손을 뻗었다.
시뻘건 악마의 손가락이 소환문을 붙잡고 마력을 부여한다. 붉은 전격이 사방으로 튄다.
파지지직!
동시에 소환문이 도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악마가 자신의 힘으로 어둠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었다.
세라티가 외쳤다.
"카르나크 님! 문이!"
콰앙!
폭발과 함께 어둠의 문이 박살이 났다. 폭연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섰다.
외침이 울렸다.
"계약자여! 원하는 바를 고하라!"
넋이 나가 있던 슈트라프가 허겁지겁 대꾸했다.
"사, 사내놈들은 죽이고 저 여자는 내게 데려와라!"
"아까와 똑같은 조건이군."
쓴웃음을 지으며 마즈눈은 카르나크 일행을 바라보았다.
조건은 같으나,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보이는구나, 후후후...."
악마의 눈동자 위로 긴장한 바로스와 세라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둘 다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심연의 악마 마즈눈은, 지금의 바로스는 물론이고 오러 유저인 세라티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위급 악마다. 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검을 쥔 채 바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이것도 물론 계획의 일부겠죠?"
실망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43화. 11. 새벽의 저주 (3)
거구의 악마가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이 몸이 이 땅에 강림했으니...."
묵빛 눈동자를 데굴거리며 오만한 음성을 내뱉는다.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느니라, 하찮은 인간들아."
바로스와 세라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독한 압박감이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으음...."
"저런 고위 악마라니...."
카르나크도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왜지? 왜 소환문이 도로 닫히지 않은 거야?'
명색이 사령왕이었던 몸이다. 비록 힘을 잃어 빌빌대고는 있다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과 지혜가 사라지진 않는다.
이유는 금방 알아냈다.
'젠장, 저게 문제였군.'
원래 악마를 소환하는 흑마술은 사령결계술 못지않게 복잡한 술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슈트라프가 시전한 술법은 조금 달랐다.
'저놈, 수박 겉핥기로 익힌 놈이다 보니 제대로 술식을 전개하지 않았어!'
그냥 중요한 주요 술식만 몇몇 전개하고 모자란 부분은 죄다 사령력으로 때운 것이다.
사령술의 장점은, 제대로 펼치지 못해도 사령력만 퍼부으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니까.
그렇다 보니 상황이 애매해졌다.
마냥 단순한 술법은 아니니 술식상 혼선을 일으킬 정도는 된다. 그런데 이게 또 소환술이 완전히 취소될 정도로 복잡하지는 않다.
단순함과 복잡함, 그 경계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달까?
그 결과 술식이 취소되다 말고 멈춰 버렸다!
'잠깐? 그런데 내가 왜 저걸 미처 못 알아차렸지?'
분명히 슈트라프가 악마 소환술을 쓰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이 계획을 세운 것인데?
'아차!'
그제야 카르나크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범했는지 깨달았다.
'내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구나!'
환술을 걸고 도망치면서 원견의 시야로 살펴봤을 뿐이다. 직접 악마 소환 장면을 본 게 아니다.
당장 카르나크도 슈트라프를 비웃지 않았던가?
-멀리서 원격으로 조종하며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기껏 남 비웃어 놓고 똑같은 실수를 본인도 저지른 것이다.
그냥 악마 소환했다는 사실만 보고, 당연히 그가 아는 악마 소환술을 썼을 거라 지레짐작해 버렸다.
'아오,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하다니....'
아무래도 회귀 후, 너무 평화로운 분위기에 찌들었던 모양이다.
포효하며 마즈눈이 마력을 떨쳤다.
"계약을 이행하겠다!"
광풍이 불어닥쳐 카르나크 일행을 몰아붙였다.
압박감을 이겨 내며 바로스와 세라티가 움직였다.
악마의 좌우로 뛰어들며 현란한 공세를 날린다!
"헛!"
"타앗!"
소용없었다. 모든 참격이 도로 튕겨 나올 뿐이었다.
막대기로 철판을 두드리기라도 한 듯 악마의 피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가소롭구나, 벌레들아."
느긋하게 뇌까리며 마즈눈이 손에 쥔 검을 크게 휘둘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참격이었다. 당연히 둘 다 간단히 공세를 피했다.
하지만 참격을 따라오는 거대한 기운까지 피하긴 무리였다.
콰콰콰쾅!
암흑의 파도가 지하실 바닥을 파헤치며 둘을 덮쳤다.
휘말린 두 남녀가 가랑잎처럼 날려 갔다.
"크윽!"
"도, 도련님!"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바로스가 카르나크를 불렀다.
"이제 어째요?"
양손에 화염구를 움켜쥔 채 카르나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어쩌긴 뭘 어째? 싸워야지!"
2개의 화염구가 마즈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악마가 콧방귀를 뀌었다.
"훗, 이 정도는 막을 필요도 없다!"
콰쾅!
그저 노려보는 것만으로, 날아들던 화염구가 허공에서 터져 버렸다.
워낙 힘의 격차가 크다 보니 접근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암담해하며 바로스가 투덜거렸다.
"아니, 저걸 지금 우리가 무슨 수로 잡는다고...."
***
호흡을 고른다. 정신을 집중하고 또 집중하며 모든 투기를 검 끝으로 모은다.
타오르는 불의 검을 휘두르며 세라티는 악마에게 덤벼들었다.
"타아앗!"
붉은 투기가 연신 춤췄다. 그녀의 신형이 어지러이 공간을 뛰놀았다.
석벽이며 돌바닥이 파헤쳐지며 가루가 되어 비산했다.
콰콰콰쾅!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이요, 파괴력이었다.
"죽어! 이 악마!"
마즈눈은 그 모든 공세를 우습게 받아 냈다.
"느리고 약하구나."
세라티의 움직임은 분명 빨랐지만, 악마는 더 빨랐다.
세라티의 투기검은 분명 강했지만, 악마는 더 강했다.
애초에 적색급 오러 유저의 장점은 인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빠르고 강력한 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빠르고 더 강한 적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압도적으로 불리해진다. 뭘 해 볼 수조차 없게 되니까.
"제, 제길!"
그럼에도 세라티는 용케 버티고 있었다.
그녀가 잘나서는 아니었다.
"이 여인은 사로잡는 것이 계약이었지?"
그래서 대충 걷어차거나 밀어내기만 하며 적당히 상대하는 중.
반면 바로스에겐 가차 없었다.
"이 사내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온갖 화염구와 마력의 칼날, 짓누르는 압박의 포효와 수십 줄기의 마력탄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 우엑! 우와앗!"
그 압도적인 융단폭격 앞에서 바로스는 미친 듯이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다.
뛰고, 구르고, 때론 기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으아아아!"
대단한 점은, 그 와중에 용케 한 대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쪽이 공격을 하기도 전에 그에 맞는 회피 자세를 취하고,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미리 피하고, 떨어지는 폭격 자리는 먼저 뛰어 벗어나 버린다.
마즈눈으로서도 꽤나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녀석은 무슨 예지 능력 같은 거라도 있나?'
그럼에도 여전히 위협은 되지 않았다.
간혹 섬뜩한 반격이 돌아오긴 한다. 신기하게 마즈눈의 허점을 파고들어 날카로운 일격을 먹이는 경우도 있다.
"타아앗!"
그런데 피부에 흠집 하나 못 낸다.
워낙 악마의 방어력이 높다 보니 투기검이 아니고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갈며 바로스가 투덜거렸다.
"아, 진짜 내가 마즈눈 따위한테 고전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앞에선 세라티와 바로스가 날뛰고 뒤에서는 카르나크가 열심히 마법 날리며, 이들은 치열하게 악마와 싸워 갔다.
물론 이 상황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즈눈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인간들은 쥐 새끼 같아서 툭하면 도망가곤 하더군."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공세를 버텨 내며 천천히 카르나크 일행을 밀어붙일 뿐.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점점 세라티의 호흡이 가빠 온다.
점점 바로스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점점 카르나크의 마력이 고갈된다.
차라리 저 악마가 호쾌하게 날뛰어 주기라도 하면 그 틈을 노려서 현혹술이라도 걸어 보겠는데 도통 틈을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억지로 빈틈을 만들 만큼 큰 마법을 쓰자니 그럴 마력이 없다.
'쟤들이 뭐라도 좀 해 주면 좋겠는데....'
카르나크는 아쉬워하며 바로스와 세라티를 바라보았다.
둘 다 용맹하게 싸우고 있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세라티의 검은 궤도가 너무 단순해 아무리 휘둘러도 악마를 맞히질 못하고....
'크윽, 너무 빨라!'
바로스의 검은 위력이 너무 약해 아무리 악마를 맞혀도 타격을 줄 수가 없다.
'아이고, 되게 단단하네!'
답답해진 카르나크가 혀를 찰 때였다.
"차라리 둘을 합쳐 놓으면 참 속 편하겠... 어?"
생각해 보니 그는 사령술사였다.
이게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급하게 카르나크가 바로스를 불렀다.
"바로스!"
"네?"
"플랜 P다!"
"아!"
이해한 듯 바로스가 카르나크에게로 뛰었다.
"맞다! 그 방법이 있었지?"
그리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카르나크가 그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갔다.
"나의 권속이여...."
어둠이 피어올라 바로스의 머리를 휘감았다. 세라티는 당황했다.
'바로스 경은 권속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방금 카르나크가 지칭한 것은 바로스가 아니었다.
"정신을 열고 받아들여라! 이는 그대의 주인의 명이다!"
바로스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마치 인형처럼 움직임이 단순해지더니, 카르나크 옆에 서서 기계적으로 검을 든 자세를 취한다.
동시에 세라티의 움직임도 변했다.
"헙!"
기합을 터트리며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붉은 투기검이 날카롭게 움직이며 악마의 공세 사이로 파고든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검술이었다.
분명 악마보다 느린데도, 오히려 공간을 선점하며 절묘하게 틈을 파고든다!
"...헉!"
경악한 마즈눈이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가슴팍에서 시뻘건 마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 움직임은....'
재차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세라티가 빙그레 웃었다.
곱디고운 미녀의 입술 사이로 걸쭉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이거, 남의 몸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인뎁쇼?"
***
플랜 P.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그냥 빙의(possession)의 앞 글자를 따온 것뿐이니까.
카르나크가 바로스의 영혼을 그녀의 몸에 덮어씌운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갇힌 채 세라티는 패닉에 빠졌다.
'이, 이럴 수가....'
원래 빙의는 이렇게 간단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은 실로 두터운 영적 방어로 감싸여 있으니, 이를 뚫기 위해선 실로 고도의 사령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라티는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카르나크의 권속이 되었다. 이미 영혼 자체를 그에게 훤히 내비친 상태였다.
카르나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녀의 몸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바로스는 권속이 아니니 저항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고.
'사령술사의 권속이 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공포가 밀려왔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세라티의 몸을 차지한 바로스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세라티 양. 목숨이 걸린 일이라...."
어수룩한 그 말투에 그녀는 애써 공포를 가라앉혔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사령술이라는 더러운 수법에 손을 댔을 때 이쯤은 각오했어야 했다.
'그래, 목숨이 걸렸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로스가 자신보다 검술이 뛰어나고 경험도 많다는 건 세라티도 인정한다. 그런데 그래서?
'바로스 씨가 내 몸을 차지한다고 뭐가 바뀐다는 거야?'
마즈눈 역시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뭘 하고 싶은 거냐, 네놈들은?"
악마답게 상황은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겠다.
"오러 유저도 아닌 놈이 오러 유저에게 빙의해서 뭘 어쩌겠다고?"
세라티가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오러의 힘 덕분이다.
순수한 육체 능력은 바로스가 월등히 높다. 덩치도 훨씬 크고 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있으니까.
즉, 오러를 구사하지 못하면 세라티의 몸은 차지해 봤자인데....
"자신의 투기조차 익히지 못한 놈이 타인의 투기를 어떻게 쓰겠다고?"
이어진 광경이 악마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누가 못 쓴대냐?"
부우우웅!
검에서 붉은 투기가 찬란하게 솟구친다. 누가 봐도 확연한 적색급 오러 유저의 투기검이다.
악마의 지혜를 지닌 마즈눈조차 처음 보는 괴사였다.
"어, 어떻게?"
투기를 익히지 못했다는 건 투기를 다뤄 본 경험이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자기 것도 아닌 남의 투기를 곧바로 다룬다고? 그것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투기검을 겨누며, 세라티의 몸에 들어간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말이야, 다른 사람 투기 쓰는 건 전공이거든!"
데스 나이트 시절 썼던 암흑투기부터가 카르나크가 내려 준 것이지 본인의 힘은 아니었다. 그 전에도 툭하면 남의 몸에 빙의되거나 남의 오러 흡수해서 쓰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나만의 투기는 쓸 줄 모르지.'
정작 바로스 본인이 직접 투기를 각성한 적은 없으니까.
하여튼 이걸로 확실하게 반격할 방법이 생겼다.
카르나크가 유쾌하게 외쳤다.
"좋아, 바로스...가 아니라."
생각해 보니 지금은 세라티+바로스였다.
무릇 호칭은 정확히 불러 줘야 하는 법이다.
"가라! 세라 바로스!"
"거 사람 이름 괴상하게 합치지 좀 마요!"
투덜대며 세라 바로스(?)가 몸을 날렸다.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투기검이 작렬했다.
"타아아앗!"
#44화. 11. 새벽의 저주 (4)
적발의 미녀가 지하 공간을 어지러이 오간다.
붉은 투기검이 시야 가득 화려하게 춤춘다.
"허업!"
마즈눈도 본격적으로 맞섰다.
초고속으로 검을 휘두르고, 마력의 폭풍을 터트리고, 포효로 적을 압박하며 매서운 공세를 가한다.
"크아아아!"
피가 튀었다.
인간의 피가 아닌, 악마의 마혈이.
마즈눈이 눈을 부라렸다.
"이, 이놈이?"
빙의하기 전의 바로스가 덤빌 때도 간혹 방어를 뚫고 날아들던 참격이었다. 맞아도 별문제가 없었을 뿐이지, 사실 베이긴 몇 번이나 베였다.
그런데 이제는 베이면 확실히 부상을 입는다.
"그래 봤자다!"
예상 밖으로 놈이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적색급일 뿐이었다.
반면 오러 유저는 아니라지만 마즈눈은 자색급, 퍼플 나이트에 필적하는 악마.
단순 비교만으로도 2단계나 차이가 난다.
"벌레처럼 짓눌러 주마!"
흥분한 악마가 난폭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지옥마력이 불과 폭발로 현현하여 지하실 전체를 뒤덮어 갔다.
콰콰콰쾅!
여전히 적발의 미녀는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아니, 스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투기 쓰니까 재미는 있네."
너무도 쉽게 피하고, 파고들어 베고, 뒤로 빠진다.
더 이상 레드 나이트의 움직임조차 아니었다. 적색급 오러 유저는 저렇게까지 유연하게 흐름을 타고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새 세라티의 검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 투기검?"
마즈눈은 경악했다.
틀림없었다. 청색급의 오러, 블루 나이트의 경지였다.
'남의 몸을 자신의 것처럼 다루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원주인보다도 월등히 잘 쓴다고?'
검에 깃든 청광을 바라보며 세라티 속의 바로스가 중얼거렸다.
"여기까진 되나? 애가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잠재력은 제법 있구만."
그녀의 입술을 통해 차가운 비웃음이 전해진다.
"덕분에 좀 더 편하게 싸울 수 있겠어."
분노한 마즈눈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비천한 인간 주제에 감히!"
***
세라티는 멍하니 자신을 관조하고 있었다.
'세상에....'
악마가 연신 손톱을 휘둘러 댄다. 채 보이지도 않는 초고속의 공세다.
하나 그녀의 육체는 그 모든 공세를 깔끔하게 피해 내고 있었다.
회피와 동시에 칼날이 미끄러지듯 악마의 팔을 타고 흐른다. 참격이 작렬하고 또 피가 튄다.
이 일련의 동작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유려하게 이어진다.
'내 몸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었구나....'
피투성이가 된 악마가 포효하며 연신 지옥불을 쏘아 댄다. 아예 피할 장소 자체가 없는 광범위한 공격이다.
"크아아아!"
그러니 피하지 않는다.
대신 투기검으로 원을 그리며 불꽃을 걷어 낸다.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며 불꽃을 휘감고, 흘리고, 엉뚱한 데로 비껴 낸다.
'내 오러가 이렇게 흐를 수도 있었구나....'
몸을 빼앗겼다는 공포 따윈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경외만 느껴질 뿐이었다.
여전히 마즈눈이 더 빠르고 더 강하다. 블루 나이트의 경지에 오르긴 했어도 아직 신체 능력은 저쪽이 좀 더 위다.
하지만 압도적인 기교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 놀랍고, 동시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지?'
바로스가 그녀보다 월등한 검의 달인이라서?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여성과 남성은 골격 구조가 다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차이지만, 이 구조적 문제로 인해 몸을 쓰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진다.
저토록 세밀하고 정교한 검술을 쓴다면 그 차이는 굉장히 크게 다가올 터.
그런데 바로스는 그 차이점조차도 감안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수백 번 해 본 것처럼 능숙하게.
이는 단순히 검의 달인이라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빙의의 달인?'
다른 사람, 그것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구 빙의해 본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자연스레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들은 대체 뭐야?'
이쯤 되니 뭐 하는 사람들인지 따위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보다 더 본질적인 의문이 세라티를 감쌌다.
'...애초에 사람이기는 한 걸까?'
***
악마의 팔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크억!"
왼팔을 잃은 마즈눈이 뒷걸음질을 쳤다. 몰리고 몰린 끝에 결국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바로스는 굳이 놈을 쫓아 끝장을 내지 않았다.
"뭐야? 고작 이 정도야?"
오히려 푸른 투기검을 거두며 싸늘하게 웃는다.
"아, 간만에 투기 써서 기분 좋았는데 이제 끝인가."
참으로 시건방진 태도였다.
기가 찬 마즈눈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도저히 다시 덤빌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쪽은 이미 피투성이인데 저쪽은 여전히 여유가 넘친다.
"괴, 괴물 같은 놈...."
실은 바로스도 그렇게 여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하이고, 억지로 경지를 올리니 역시 부작용이 많네.'
겉으로는 오만 방자 그 자체, 악마를 벌레처럼 바라보며 낄낄대고 있지만 속으로는 열심히 오러 수습하고 체내 기운을 안정시키며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다.
'물론 티는 내지 않습니다, 히히.'
허세 떠는 건 바로스도 카르나크 못지않게 경험이 많은지라 표정만 보면 진짜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완전히 속아 넘어간 마즈눈이 희미하게 떨었다.
이대로 속절없이 지옥으로 추방되어야 하나?
'아직 기회는 있다.'
저놈이 저렇게 강해진 건 어디까지나 세라티의 몸에 빙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사령술을 시전한 당사자를 노리면 빙의 상태도 풀린다!
갑자기 마즈눈이 맹렬히 적발의 미녀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바로스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이미 허세 떨면서 호흡을 많이 고른 후였다.
"안 통한다니까?"
악마의 옆구리가 깊숙이 베이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올 때였다.
"이노오옴!"
마즈눈이 머리를 휙 돌리더니 입을 열고 불꽃을 뿜어냈다.
목표는 지하실 저편, 느긋하게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카르나크.
콰아아앙!
채 피하지 못한 카르나크가 폭염을 정통으로 맞았다.
마즈눈은 통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방심했구나, 인간!"
광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
뭔가 상황이 이상했다. 바로스는 여전히 세라티의 몸을 차지한 채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사령술사가 당했는데도 빙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냐, 너?"
그뿐만이 아니다.
"거참...."
지하실 곳곳에서 카르나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부른 놈이나 불려 온 놈이나...."
여기저기서 카르나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잘 속긴 마찬가지구만."
5명의 카르나크가 사방에서 마즈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의 표정이 흉하게 구겨졌다.
"화, 환각이었다고?"
***
카르나크'들'이 떠들어 댄다.
"아까야 워낙 틈이 없어서 무리였지만...."
"지금은 정신없으시잖아?"
"덕분에 빈틈을 많이 보이더라고."
"그럼 현혹술 걸기도 편하지."
사방에 흩어진 카르나크의 환상을 보며 마즈눈은 패닉에 빠졌다.
설마 자신이 그를 노릴 것까지 예측했을 줄이야?
카르나크가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 네놈의 속내 따윌 몰랐을 것 같으냐?"
그 자신만만한 표정을 유심히 보던 바로스가 문득 마법 전언을 날렸다.
[도련님.]
[응?]
[몰랐죠?]
[응.]
솔직히 말하면 놈이 이렇게 느닷없이 기습할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
그런데 왜 현혹술을 펼쳤냐고?
그냥 습관이었다.
워낙 적도 많았고 지은 죄도 많다 보니, 필요하건 필요하지 않건 일단 속임수는 걸고 본다.
[이래서 옛 성현의 말씀이 틀린 게 없다니까? 좋은 습관이 인생을 바꾼다잖아.]
[...그게 그런 뜻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말이죠?]
어쨌든 이걸로 완전히 끝났다.
마즈눈이 그나마 남은 힘을 허무하게 허공에 날려 버렸으니까 말이지.
"하,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런 꼴을...."
허탈해하며 악마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힘을 소진해 지옥으로 추방되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 다시 돌아오면 네놈들부터 찾을 것이다!"
소환이 해제되며 마즈눈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안겨 주겠다! 이는 지옥의 약속이다!"
"오, 그거 무섭네."
비웃으며 카르나크는 오른손을 들었다.
"널 돌려보내면 나중에 내가 큰일 날 거란 소리지?"
어둠이 피어올라 흐려지는 마즈눈의 전신을 휘감아 간다.
"미리 경고까지 해 주는데 무시할 수야 없지."
악마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헉!"
지옥으로의 추방이 막혀 버렸다. 동시에 악마 자신의 마력이 역으로 스스로를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뭐야? 이런 수법이 존재한다고?'
"예전 같으면 종속 걸고 노예로 부려 먹겠는데, 지금은 그럴 사령력이 없거든. 악마 지배도 꽤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서."
쿠웅!
어둠이 악마를 짓누른다. 지옥의 존재력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흩어지며 소멸해 간다.
"그러니까 그냥 깔끔하게 소멸시킬게."
다급해진 마즈눈이 손을 휘저었다.
"잠, 잠깐!"
어찌나 다급했는지 말투도 어느새 바뀐 상태.
"종속의 계약을 맺겠소! 그대의 노예가 되겠다는 말이오!"
"필요 없어."
아쉽게도 카르나크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예전처럼 사는 거잖아, 그건."
처절한 절규가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으아아아아악!"
***
마즈눈의 모습이 완전히 현세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카르나크도 빙의를 도로 풀었다.
자기 몸으로 돌아온 바로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몸 잘 썼어요, 세라티 양."
하지만 그녀는 멋대로 육체를 빼앗은 것에 대한 분노를 토할 수 없었다.
"아악! 모, 몸이...."
바로스가 세라티의 육체를 너무 혹사시킨 나머지 전신이 너덜너덜했던 것이다.
"역시 좀 과하게 쓰긴 했나? 오러 돌려요, 오러. 그럼 좀 덜 아플 테니까."
"그거 할 줄 몰라요!"
"저런, 나중에 가르쳐 줘야 하려나."
"으그극...."
추악한 사령술사의 권속이 된 주제에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리.
이를 갈며 세라티는 애써 고통을 참아 냈다.
그렇게 지하실에 남은 이들은 카르나크 일행과 멍하니 서 있는 슈트라프뿐.
"자, 그럼 저 작자도 처리해야겠군."
슈트라프는 소태 씹은 얼굴이었다.
그토록 방대하던 사령력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이제 자신을 지킬 그 어떤 힘도 없다.
"후...."
한숨을 쉬며 그가 두 손을 들었다.
"항복하겠다."
"웃기는 인간일세?"
어이없다는 듯 카르나크가 뇌까렸다.
"항복하면 당연히 받아 줄 거라는 그 태도는 뭐야?"
"네놈들이 날 죽일 리 없지."
슈트라프가 비열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아는 정보를 빼내고 싶을 텐데?"
"물론 정보는 필요해. 그런데 그게 왜 네놈을 죽여서는 안 될 이유라는 거지?"
"음?"
"죽인 다음 정보 빼내는 게 더 쉬운데."
"...어?"
슈트라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카르나크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다.
사악한 사령술사다.
"일단 죽이고, 영혼을 강령시켜 고문하면 쉽게 필요한 거 알 수 있는데 왜 살려 둬?"
사령술 앞에선 죽음조차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공포에 질린 슈트라프를 앞에 두고 카르나크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확인은 하자."
예전처럼 살지 않기 위해, 굳이 세라티에게 묻는다.
"얘 혹시 죽이면 안 되냐? 보편타당한 일반인의 감성에서 말이야."
대답은 충분히 보편타당한 것이었다.
"당장 죽여요!"
"그렇다는군."
카르나크가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피어올라 거대한 칼날이 되었다.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한 슈트라프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잠까...."
채 말을 잇기도 전에 그의 목이 뎅겅 잘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죽이면 그만인데, 내가 왜 계속 말을 섞겠냐?"
한 교단의 고위 성직자이자 도시 하나를 공포로 지배한 사령술사의 마지막이라기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이었다.
피를 쏟는 시체를 향해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자, 그럼 내 볼일을 봐야지."
이내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구슬의 형태가 되어 그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제껏 슈트라프가 모은 종말의 어둠이었다.
"오! 푸짐하다."
"어느 정도예요, 도련님?"
"어둠의 군주 30인분은 되겠어."
"집에 갈 수 있겠네요?"
"그러게. 다 끝났으니 돌아갈까?"
멍하니 듣고 있던 세라티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도무지 대화의 맥락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저기요, 알리우스 씨랑 릴테인 씨 안 구해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눈을 껌뻑거렸다.
"맞다...."
"원래는 그 친구들 구하러 온 거였죠, 우리?"
"완전히 잊고 있었네."
"그러게요.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어색하네."
그런 둘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치를 떠는 세라티였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45화. 12. 종말은 열린 문
알리우스와 릴테인은 무사했다. 크게 고초를 겪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붙잡힌 시각이 초저녁, 카르나크 일행이 슈트라프를 해치운 게 다음 날 새벽이었다. 고초를 겪을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다.
구출된 두 사람은 경위부터 궁금해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감옥에 갇혀 있던 내내 건물이 흔들리고 폭음이 울렸으니 일이 터졌다는 것쯤은 눈치챘다.
하지만 구출되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이건 일이 터졌다 정도가 아니다.
사방에 시신이 즐비하고 사령결계의 흔적이 가득한 데다 그 크던 저택은 반파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수를 써야 고작 3명이서 이런 결과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슈트라프 그자를 해치운 거죠?"
산전수전 다 겪은 알리우스도 처음 보는 강력한 사령술이었다.
구출되었으니 일단 좋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들만의 힘으로 슈트라프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로 상대가 만만했으면 처음부터 알리우스와 릴테인도 그리 쉽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카르나크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운이 따랐습니다."
슈트라프의 사령술은 분명히 강력했다. 자신들도 그 자리에서 그냥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령술을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는지 도중에 결계 일부가 해제되더라고요."
그 틈에 저택을 빠져나왔다.
물론 슈트라프도 전력으로 카르나크 일행을 붙잡으려 했지만 오러 유저인 세라티의 힘으로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다.
이후 몸을 숨기고 알리우스와 릴테인을 구할 방도를 궁리하던 중 트리스트 시티에 이변이 생겨났다.
란펠트 세력 내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서로 싸워 대기 시작하더군요."
조직원들이 서로 칼부림을 하는 바람에 도시 전체가 혼란스러워졌다.
"상황을 파악하려 다시 저택 근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실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지요."
무수한 좀비 군단이 란펠트 저택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저택의 사령결계가 좀비 군단과 맞서 싸우는 걸 보니, 슈트라프의 소행은 아니었다.
"아마도 휘하의 다른 사령술사가 반기를 든 게 아니었을까요?"
알리우스도 납득했다.
"그럴 수 있지요. 사령술사란 놈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까."
실제로 슈트라프가 휘하 사령술사의 머리통을 펑펑 날리는 걸 다들 목격하지 않았던가? 부하들이 반기를 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릴테인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우릴 상대하느라 슈트라프가 허점을 보였고, 그 빈틈을 다른 사령술사가 노린 듯하군요."
카르나크가 설명을 이어 갔다.
"마침 기회가 생겼으니 슬쩍 저택으로 잠입했습니다."
사악한 기운이 풀풀 풍기기에 은신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저택 지하로 내려가 보니 슈트라프는 기괴한 제단을 설치하고 뭔가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구울 전사와 악마 소환으로 우리를 상대했습니다. 공간 자체를 지옥으로 바꿔 버리는 강력한 사령술은 쓰지 않고요. 아마도 좀비 군단을 상대하느라 힘을 많이 소진한 것 같았습니다."
이미 많은 사령력을 낭비한 슈트라프는 카르나크 일행의 힘으로도 어떻게든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간신히 버텨 냈고, 오러 유저 세라티의 활약으로 악마를 퇴치한 뒤 슈트라프의 목을 베었다.
"시체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알리우스 씨를 구한 뒤 정화 의식을 부탁드릴 생각이었지요."
"그렇군요...."
알리우스도 릴테인도 이 이야기에서 허점을 찾지 못했다.
일단, 전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긴 하거든.
실제로 도시에 혼란이 일어났고, 실제로 서로 싸워 댔고, 실제로 그 틈을 타 잠입했고, 실제로 세라티가 악마와 싸워 이겼다. 이긴 건 바로스지만 육체는 엄연히 세라티였으니까.
사건 자체는 죄다 진짜였으니 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행운에 감탄할 뿐이었다.
"실로 하토바의 가호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물론 진상을 아는 세라티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와, 이래서 사령술사들이 안 잡히는 거구나.'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놓았으니 전후 사정을 모르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구나 싶다.
이후 알리우스는 빠르게 뒤처리에 나섰다.
우선 슈트라프의 시체에서 종말의 어둠부터 빼냈다.
신성력으로 어둠을 봉인하며 알리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기운이군요. 그동안 붙잡은 사령술사에 비하면 거의 10배에 달하는 종말의 어둠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바로스가 뜨끔해했다. 카르나크는 30배라 하지 않았었나?
[도련님? 정보만 빼먹고 도로 넣어 둔 거 아니었어요?]
[혹시 몰라서 좀 챙겨 뒀어. 나중에 무슨 일 생길지 모르잖아.]
[예전처럼 살지 않으신다면서요?]
[그래서 저만큼 남겼잖아. 예전이었다면 전부 먹어 치웠겠지.]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계속 사령력 키우다 나중에 들키면 어쩌려고요?]
[걱정 마. 시간 좀 들이면 죄다 녹여서 혼돈마력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여전히 카르나크의 생각 자체엔 변함이 없었다.
예전 같은 절대적인 권능은 필요 없다.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기에 필요한 만큼의 힘만 있으면 된다.
단지 이 '필요한 만큼'의 기준이 좀 높아진 것이다.
자기 영지를 지킬 정도에서, 혼탁해진 세상을 무난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슈트라프 같은 놈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적어도 그런 놈들 상대할 수준까진 마력을 높여 놔야지.]
[하긴, 도련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 일이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알리우스 씨의 의심을 사지 않는 일인데요?]
[그건 괜찮아.]
애초에 슈트라프 같은 고위 사령술사 자체를 처음 만나 본 알리우스였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어둠의 마력이 큰지 작은지 알 것 아닌가?
"과연... 이 정도의 어둠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런 엄청난 사령술을 쓸 수 있었겠지요."
의심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볼일을 마친 뒤 카르나크 일행은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알리우스가 플라드 가문과 트리스트 시티의 하토바 교구에 연락을 취했다.
슈트라프가 장악한 트리스트 교구라지만 모든 성직자가 타락한 것은 아니었다. 의심스럽지 않은 이들을 골라 사건의 뒤처리를 맡겼다.
물론 차후에 저들 역시 심문을 통해 흑백을 가려야겠지만, 당장은 필요한 일손이었다.
딱히 저항은 없었다. 간밤에 란펠트 가문 조직원이 너무 많이 죽어 나간 탓에 감히 반항할 세력도 남지 않은 덕이었다.
그렇게 트리스트 시티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그 와중에 알리우스를 놀라게 한 소식도 하나 있었다.
"네? 세라티 씨가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기사가 되었단 말입니까?"
무인이 자신을 의탁할 주군을 찾은 것이 뭐가 이상하겠냐마는, 세라티는 평범한 검사가 아니다. 무려 오러 유저다.
"어쩌다가요?"
놀라 물었지만 이내 알리우스는 표정을 바꿨다.
저건 바꿔 말하면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분이 뭐 하러 그런 시골 영지의 기사가 되었어요?'란 소리인 것이다. 대단히 실례다.
"아니, 그런 의미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아니긴 뭘 아니야? 딱 그 의미인데.'
쓴웃음을 지으며 세라티가 사정을 말했다.
"간밤의 일로, 카르나크 남작님이야말로 제가 충성을 바치기에 충분한 분이시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카르나크에게 큰 도움을 받았고 그의 지혜와 성품이 주군으로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겨 충성 서약을 행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이것도 미묘하게 맞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큰 도움? 받은 거 맞지.
지혜? 뭐, 사령술사로서의 지혜는 엄청나다.
성품? 좋다곤 안 했다. 그냥 주군으로 섬길 만하다고 했지.
'거짓말은 안 했어, 거짓말은.'
사건의 뒤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카르나크 일행은 트리스트 시티를 떠났다.
그러나 알리우스, 릴테인과 함께 데라트 시티로 향하진 않았다.
"그동안 여신의 성무를 행하며 참으로 많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 이제 영지로 돌아가야겠군요."
표면상의 이유는 세라티 때문이었다.
"그녀를 제 기사로 삼았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약식이었지요. 정식으로 서임을 하려면 영지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이유는 종말의 어둠을 필요한 만큼 다 건졌으니 더 이상 사령술사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서지만.
"그렇군요. 그간의 협력에 감사드립니다."
아쉬워하면서도 알리우스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대지를 거니는 이들에게 모든 길은 연결된 길, 부디 당신들의 앞날에 하토바의 가호가 있기를."
***
주군이 된 카르나크를 따라 세라티는 제스트라드 영지로 향했다.
머릿속이 계속 복잡했다. 간밤에 일어났던 일은 도저히 그녀의 상식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렇게 산 건너고 물 건너 반나절을 더 갔다.
결국 세라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뭐예요?"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도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놀라지 않았다. 슬슬 저런 질문을 할 거라 예상하던 차였다.
일단 두루뭉술하게 넘기려 했다.
"나, 제스트라드 남작."
"전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기사죠."
"아, 남몰래 사령술도 익히고 있고."
"남몰래 도련님 사령술 쓸 때 협력하고 있습죠."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란 건 아시잖아요?"
실력도 적당히 보여 줘야 납득할 수 있는 법이다.
도시 하나를 말아먹고, 수많은 시체를 일으키고, 거대한 환각을 만들어 낸 카르나크.
투기도 익히지 못한 주제에 어마어마한 검술과 경험을 보여 준 데다가 타인의 몸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심지어 투기까지 쉽게 사용하며 종국엔 마즈눈 같은 고위 악마까지 해치워 버린 바로스.
남몰래 사령술을 익히고 있었다 정도로 해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은가?
당장 저들이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지식과 노련함만 봐도 그렇다.
"둘 다 잘해 봐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이게 말이 돼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이 안 되지?"
"믿으라고 하는 게 무리죠."
카르나크는 세라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매섭게 눈을 뜬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까, 바로스? 사실대로 말해 줘도 될까?]
[그냥 모른 채로 놔둬도 별문제 없지 않아요?]
[괜히 어설프게 억측해서 사고 칠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권속이 되었으니 배신할 일도 없을 텐데.]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기나 할까요?]
[믿고 말고는 자기 자유지.]
[하긴 그러네요.]
결심한 카르나크가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솔직하게 말해 주지."
세라티가 안색을 굳혔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 세계 정복 했었다?"
"전 도련님 도와서 같이 세계 정복 했었죠."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헛소리세요?"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나크는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 보라고."
#46화. 12. 종말은 열린 문 (2)
자그마치 100여 년에 걸친 이야기를 전부 떠들어 댈 순 없다. 그래서 카르나크는 대충 요약해 전생의 이야기를 세라티에게 해 주었다.
몰락한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사령술을 익히게 된 사정.
가문을 차지하려다 사령술사임이 들통이 나 쫓기던 시절.
이후 세상을 전전하며 힘을 키우고, 그 와중에 사람들의 분노를 사 종국엔 대륙의 공적이 된 이야기.
결국 인간임을 버리고 아스트라 슈나프가 되어 세계 정복에 성공한 뒤, 잃어버린 육신을 되찾기 위해 궁리하던 일까지.
"그런 이유로 이 시대로 돌아왔다, 뭐 이런 거지."
대충 설명을 마치며 카르나크는 눈짓을 했다.
"어때, 궁금증이 좀 풀렸나?"
세라티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맙소사...."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금씩 납득이 간다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군요. 과연, 그래서 그런...."
카르나크가 도리어 당황했다.
"어라? 정말 믿는 거야?"
"설마 거짓말인가요?"
"그건 아닌데, 내가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이야기라서 말이지."
"솔직히 그런 걸 보여 주고 나면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요."
저들이 보여 준 실력 자체가 워낙 허황된 것이었다. 저 정도 허황된 이야기가 바탕이어야 차라리 이해가 간다.
동시에 또 다른 의문도 들었다.
"그렇다는 건, 카르나크 님은 원래 불멸의 존재였다는 건가요?"
"응."
"죽음도 질병도 고통도 없었다는 소리죠, 그거?"
"응."
"심지어 삼라만상을 뜻대로 다룰 정도의 힘을 지녔고?"
"삼라만상의 범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건 세상 정도는 내 맘대로 주무를 수 있었지."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세라티가 재차 물었다.
"그 모든 걸 버리고 도로 인간이 되었다고요?"
하찮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고작 인간적인 감각을 못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포기했다고?
"차라리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육체를 따로 만들면 되지 않나요?"
"해 봤어. 안 되더라."
"그럼 다른 인간에게 빙의하면...."
"그것도 해 봤어. 안 되더라."
"그렇다면 다른 인간에게 감각 공유 같은 걸 걸면...."
"역시 해 봤지. 안 되더라."
무려 수십 년이란 세월 동안 생각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 보았다. 실패하고 실패한 끝에 남은 유일한 길이 이것이었다.
"그런데 세라티도 은근히 이쪽 수법에 대해 많이 아네? 선량한 사람들은 보통 떠올리기 힘든데, 그런 거."
"그, 그게, 예전에 비슷한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이것이 그녀가 카르나크의 설명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모험담을 탐독하는 취미가 있었던 덕분에, 전생이니 시공 회귀니 하는 이야기도 그럭저럭 납득하는 것이다.
어쨌든 세라티는 혼란스러워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언데드가 되는 대신 4대 무왕조차 초월하는 궁극의 무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난 받아들일 것 같은데....'
카르나크가 저 경지에 오르기까지 실로 부단한 노력과 집념, 흔들림 없는 정신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불멸까지 손에 넣었겠지.
그런데 막상 목표에 오르고 나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그걸 포기했다고?
애초에 그런 인간이면 저 지고의 경지까지 갈 수도 없지 않을까?
카르나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당시엔 진심이었다.
이까짓 살덩이 따위, 그가 꿈꾸는 궁극의 경지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 정도로만 여겼다.
단 하나의 진리, 단 하나의 절대적 목표를 위해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다 생각했다.
"그건 진짜 당해 보기 전엔 절대 이해 못 할걸."
"저도 데스 나이트 된 초반엔 마냥 좋았어요. 인간일 때 불편했던 점이 죄다 사라졌으니까."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히죽 웃었다.
둘 다 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는 표정이었다.
세라티가 조심스레 질문을 이었다.
"그래도... 아깝진 않나요?"
평생 쌓아 올린 것을 잃고도 아쉽지 않을까? 자신보다 약했을 상대에게 밀리는 것이 분하진 않을까? 실제로 슈트라프 '따위'에게서 도망까지 치지 않았던가?
"왜 아깝지 않겠어?"
카르나크가 고소를 지었다.
"가능하면 둘 다 포기 안 했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을 뿐."
과거의 권능이 그리운가?
솔직히 가끔 그렇다.
약해진 현재의 자신에 불만이 없는가?
왜 없겠나? 당연히 불만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아스트라 슈나프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난 지옥의 왕이었어. 아무리 왕이었다 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지옥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었지."
물론 인간이 되었다 해서 천국에서 산다는 소리는 아니다.
사람들도 말하지 않나? 현세가 곧 지옥이라고.
저 말엔 카르나크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지옥에 단계가 있다면, 인간의 삶은 지옥 중간층 정도 되겠지."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삶은 지옥 최하층이었다.
"지옥 최하층의 왕으로 군림하며 세상을 발밑에 굴복시키느니, 차라리 지옥 중간층에서 적당히 안주하며 사는 게 나아."
그가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살아 본 내가 하는 말이니 정확할 거다."
세라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왜 사령술이 금기 중의 금기인지 알 것 같다. 사령술의 궁극에 도달한 자가 내린 결론이 저것이라면.
"언데드가 될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게 나은 건가요...."
카르나크가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야? 죽을 것 같으면 언데드라도 되어야지."
"네? 하지만 방금은...."
"그러니까 되도록 사령술은 멀리할 거야. 하지만 당장 죽게 생겼는데 삶을 포기하라고? 그땐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그럼 기껏 돌아온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아스트라 슈나프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도로 시공 회귀를 한다. 그래서 또다시 인간적인 감각을 되찾는다!
"이쪽이 합리적이잖아?"
옆에서 바로스도 한마디 했다.
"그거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요? 대륙 인구 절반은 죽여야 다시 사령왕이 되실 수 있을 텐데요."
"한 번 해 본 짓이잖아. 예전처럼 몇 년씩 걸리진 않겠지."
"그러네요. 납득했어요."
태연한 두 주종의 대화에 세라티는 부르르 떨었다. 이제야 저들의 행태가 이해가 갔다.
'아, 원래 저런 인간들이구나.'
사고방식 자체가 일반인이랑 다르다.
새삼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카르나크 님."
"왜?"
"전 이제 당신의 기사. 그러니 제 목숨을 다 바쳐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카르나크를 위해서가 아니다. 인류와 세상을 위해서다.
이 위험한 작자가 제 목숨 위태로울 경우 도대체 뭔 짓을 할지 짐작이 안 간다!
돌변한 세라티의 태도에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쨌거나 지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야 없다.
"어, 뭐, 고마워."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니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관도를 따라가는 카르나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라티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인간, 늙어 죽을 때가 되면 대체 어쩔 셈이지?'
***
트리스트 시티를 출발한 지 닷새 뒤, 카르나크 일행은 제스트라드 영지에 도착했다.
"나 왔어, 타펠 영감!"
미리 전갈을 받았기에 저택의 시중인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노집사 타펠이 환한 얼굴로 카르나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영주님."
이미 소문을 통해 전해 들었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데라트 시티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수도에 마법 공부하러 간다던 놈이 생뚱맞게 데라트 시티에 몇 달씩 주저앉았다는 소식을 받았을 땐 타펠도 걱정이 많았다.
세상을 보며 견식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라곤 했지만, 그렇다고 할 일도 미뤄 두고 마냥 놀라는 소린 아니었다. 한때는 어떻게 잔소리를 해야 할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웬걸?
데라트 시티에서 대활약한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명성이 무려 왕국 최북단인 제스트라드 영지까지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사령술사를 처리하고 왕국의 백성들을 구했으니 참으로 명예로운 일이었다. 제스트라드 가문의 위명 역시 크게 높아졌다.
기쁜 마음으로 막 타펠이 칭찬을 늘어놓으려던 차였다.
'음?'
카르나크 뒤에 못 보던 여인이 1명 서 있었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에 시원시원한 인상, 생기가 넘쳐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겐 난생처음 보는 놀라운 미녀이기도 했다.
'...설마?'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타펠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손님이 계셨군요, 영주님. 미리 알려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참?"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카르나크가 그녀를 가리켰다.
"소개하지. 세라티 알렌이다."
젊은 놈이 여행 나갔다가 웬 미녀를 데리고 돌아왔다면 이유는 뻔하다.
모여 있던 저택의 하인, 하녀 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머나!'
'혹시?'
'미래의 남작 부인이신가?'
타펠은 난처해했다.
한 지역의 영주쯤 되는 이가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들일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한다.
하지만 알렌이란 성을 지닌 귀족은 들어 본 바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워낙 흔한 성이었다.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란 의미였다.
'허어,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지?'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가 좀 의외였다.
"그녀는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새로운 기사가 되었다. 정식 서임은 추후에 할 것이니 준비해 두도록."
"...예?"
타펠은 눈을 껌벅였다.
기사라고? 예비 마누라가 아니라?
'아니, 왜 저런 여인을 우리 영지의 기사로?'
그녀는 분명 놀라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몸매 또한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는 미녀의 덕목이지 기사의 덕목은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칼 밥 먹고 살려면 듬직한 근육, 커다란 덩치, 강인한 인상이 기본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옆에 서 있는 저 바로스 경처럼 말이지.
"영주님, 아무리 우리 영지가 변경이라곤 하지만 아무나 기사로 삼을 수는...."
타펠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당황하며 카르나크와 세라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반응에 바로스가 피식 웃었다.
"세라티 경의 예상대로네요."
"자주 겪는 일이니까요."
세라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중간한 놈들이나 무시당하면 화를 내지, 진정한 강자는 둔감한 법이다. 즉석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거든.
백문이 불여일견, 세라티가 검을 뽑았다.
발검 동작이 상당히 세련되어 다들 어느 정도 납득을 했다.
'검 뽑는 건 멋있다.'
'하긴, 여자가 검을 쓰려면 저 정도는 하겠지?'
'하지만 마물을 상대로 우아한 검술은 별 쓸모없다고 들었는데.'
우우우웅!
붉은 빛이 칼날을 뒤덮었다. 동시에 가공할 기운이 모인 이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헉!"
"꺄악!"
하인, 하녀 들이 경악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타펠의 눈동자도 격하게 흔들렸다.
아무리 검술의 문외한이라도 눈앞의 저 빛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투, 투기검? 설마 오러 유저?"
제스트라드 최강으로 인정받는 바로스 경이나 데벤토르 최강의 기사였던 란돌프 경도 저 경지엔 도달하지 못했다.
가문의 모든 기사들이 다 덤벼도 감히 범접지 못할 초인의 영역이 아닌가?
카르나크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아직도 그녀의 실력에 의문이 있나?"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타펠의 표현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아니, 왜 저런 분이 우리 영지에 기사로?"
#47화. 12. 종말은 열린 문 (3)
세라티는 바로스와 함께 카르나크의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기사들은 가정을 꾸렸으니 각자 집이 있지만 둘은 아직 미혼이었으니까.
그리고 며칠 뒤 정식으로 카르나크의 기사가 되었다.
제스트라드의 기사들도 그녀를 진심으로 환영했다.
당연하지만 텃세 따윈 없었다.
텃세도 정도껏이지, 무려 오러 유저가 아닌가? 격차가 이쯤 되어 버리면 감히 뭘 어쩔 생각도 안 드는 법이다.
대신 맹렬한 호기심을 보였다.
과연 말로만 듣던 오러 유저는 얼마나 강할까? 오러 유저는 여인의 몸으로도 무자비한 괴력을 보인다는 게 사실일까?
덕분에 세라티는 다른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
저택 뒤뜰에 마련된 커다란 연무장.
건장한 30대 중반의 사내가 세라티와의 대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스트라드의 기사, 에밀이었다.
훈련용 검을 겨눈 채 에밀이 정중히 말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마찬가지로 훈련용 검을 든 세라티가 정중히 대답했다.
"가르침이라뇨. 오히려 저야말로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이내 에밀이 거칠게 돌진해 갔다.
"타아앗!"
실전 속에서 단련된 매서운 검세가 그녀를 노렸다.
그러나 세라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공세를 가볍게 받아 흘릴 뿐.
탕! 타탕!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수차례의 공방이 오간다.
에밀의 전신이 땀으로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점차 거칠어졌다.
"헉, 허억, 헉...."
반면 세라티는 전혀 바뀐 게 없었다.
땀은 고사하고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는다.
에밀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러 유저란 게 이렇게나 높은 벽이었나?'
적색급은 오러 유저 중에서 가장 초입 단계라 들었다. 게다가 상대는 여인의 몸이 아닌가?
물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투기를 각성 못 했어도, 어느 정도는 맞서 싸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예 상대가 안 된다.
'심지어 아직 투기검은 쓰지도 않고 있는데!'
이어진 세라티의 반격에 신음을 흘리며 에밀은 뒤로 물러섰다.
얼핏 가볍게 견제하는 듯한 참격이었다. 그런데 맞받아치는 순간 마차에라도 치인 듯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크윽!"
간신히 버텨 낸 것은 사내로서의 마지막 오기일 뿐.
"아, 아직 쓰러지지 않았소!"
대련을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세라티와의 대련을 겪어 본 이들이었다.
"에밀 저 친구, 용쓰네."
"저 심정 나도 알지."
"저런 가냘픈 여인에게 힘으로 밀린다는 거, 도통 이해하기 힘들거든."
세라티는 딱히 절세의 검술이나 오묘한 기교를 구사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기초적인 검술만으로 상대할 뿐이었다.
단지 너무 세고, 너무 빠르다.
굳이 투기검을 쓰지 않더라도 오러로 증폭된 신체 능력만으로 절대적인 격차가 있는 것이다.
"커억!"
결국 에밀이 바닥을 굴렀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그가 인사를 건넸다.
"가, 가르침에 감사하오...."
굴욕과 감탄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나가떨어졌으니 당연히 분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오러 유저에 대한 경외감도 크다.
세라티도 검을 거뒀다.
"수고하셨습니다."
여전히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의가 있으니 일부러 땀을 닦는 시늉을 한다.
그녀도 내심 이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뭐야, 다들 길드의 일류 모험가 수준은 되잖아?'
카르나크가 하도 폄하해서 별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실력들이 나쁘지 않았다.
대인전 경험이 적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스트라드 영지의 주적이 마물들이기 때문이니 큰 단점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걸맞게 충분히 단련된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카르나크나 바로스는 왜 그리 자기 영지 기사들을 폄하했을까?
'그 인간들 기준에서야 그렇겠지, 쳇.'
세라티는 입을 삐죽였다.
사실 저들 기준에선 그녀도 삼류였다. 아니, 그냥 온 세상의 절대다수가 카르나크에겐 삼류다.
하도 어이가 없어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럼 카르나크 님이 생각하는 일류는 대체 누군데요?"
대답은 간단했다.
"4대 무왕이랑 3인의 대마법사."
"...."
무의 궁극에 도달한 4대 무왕과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대마법사들이 일류면, 초일류는?
"용황제 그라테리아쯤 되면 초일류지."
"그럼 이류는요?"
"제국 기사단의 각 단장들이나 연방의 수호자들 정도? 7왕국 연합이라면 알테일 왕국 기사단장 정도가 낄 수 있겠군."
참고로 저들은 죄다 은의 경지, 실버 나이트들이다. 무의 궁극까지 딱 한 발자국 남은 이들.
"그 밑은 죄다 삼류고요?"
"응."
"말이 돼요? 그 아래도 격차가 얼마나 천차만별인데!"
자색급, 퍼플 나이트만 해도 적색급 10여 명을 홀로 감당할 정도의 강자다. 적색급인 세라티도 평범한 전사 수십 명은 우습게 상대할 수 있다.
"어떻게 이걸 뭉뚱그려 삼류로 묶을 수가 있어요?"
카르나크의 논리에 따르면, 그럴 수 있는 모양이었다.
"뭐가 이상해? 동전 10닢 가진 놈이나 1천 닢 가진 놈이나, 어차피 가난뱅이인 건 마찬가지잖아."
"아, 그따위로 생각하시는군요?"
"...그따위?"
이후 카르나크가 '왜 난 권속으로 삼기만 하면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어지는 걸까?'라며 의아해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고.
어쨌든 감각 이상한 카르나크 기준이 아닌 보편적인 상식선에서, 제스트라드 영지의 기사들은 꽤나 강한 축에 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라티 앞에선 의미가 없다.
투기를 각성한 자와 못 한 자는 근력, 스피드, 반사 신경 등 모든 신체 능력이 몇 배나 차이가 나니까.
세라티 역시 투기를 각성하기 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잘 알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스 경은 오러도 안 쓰면서 그렇게 강한 거지?'
***
"왜긴 왜예요?"
검을 쥔 채 세라티가 뒤로 튕겨 나갔다.
"윽!"
바로스의 검력에 밀려서가 아니다. 그녀의 참격을 바로스가 비껴 흘리면서 자신의 힘에 자신이 튕겨 나간 것이다.
"세라티 경이 투기를 어설프게 다루니까 그런 거죠."
늦은 오후.
그녀는 오늘도 평소처럼 바로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예의상의 표현이 아니라 진짜 '가르침'이었다.
"물론 제 경지가 아직 낮다는 건 압니다만...."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세라티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그녀가 더 빨랐다. 바로스의 움직임도 분명 느리게 보였다.
그런데, 공격하는 게 보이는데도 막을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검을 빙빙 돌리며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힘의 낭비가 너무 많아요."
아무리 빠르고 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다 해도 일단 휘두르고 나면 원래 자세로 돌아가는 데 딜레이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스는 이 딜레이를 노리는 것이다.
"이 딜레이를 줄이는 건 단순히 동작이 빠르다고 되는 게 아니죠."
정확한 자세와 완급 조절, 수백 번씩 반복해 군더더기를 없앤 움직임, 일격에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기량, 적재적소가 어디인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이야 당장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바로스가 재차 움직였다.
"적어도 움직임에서 군더더기는 없애야 할 것 아닙니까?"
또다시 그의 검이 우아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여전히 느린데도 기묘하게 세라티의 전신을 파고드는 공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분명히 내가 더 빠른데....'
피하고 막는 데만 급급하며 세라티는 한탄을 흘렸다.
평소엔 전혀 느낄 수 없는 허점이 왜 바로스와 싸울 때만 이렇게 펑펑 드러나는 걸까?
그렇게 1분쯤 지났을까?
어쩐지 바로스의 공세가 느슨해졌다. 세라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봐주는 건가요?"
바로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봐주는 게 아니라 슬슬 지친 겁니다."
"표정은 봐주는 표정인데요?"
"아, 이거요? 이건 그냥 습관이고."
지칠수록 태연한 척 사기 치는 게 습관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하여튼 제 능력으론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벌써요?"
"투기도 못 쓰는 몸으로 이런 동작이 계속 가능할 리 없잖아요? 그나마 호흡과 완급 조절로 간신히 하는 거라고요."
"아...."
"오늘의 대련은 제가 졌군요."
"실전이라면 그 전에 제가 죽었겠지만요?"
아무 말 없이 바로스는 빙그레 웃었다. 대답한 거나 다름이 없어 세라티가 눈을 흘겼다.
'흥, 죽이려면 벌써 죽였다 이거지?'
그늘을 찾아 바로스가 대충 주저앉았다.
"좀 쉽시다."
"네."
미리 떠다 놓은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른다.
문득 세라티는 바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나, 권속 되어서 딱히 나쁠 건 없네?'
사령술사의 권속이 되었을 땐 정말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막상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별로 문제 될 게 없었다.
카르나크가 사악한 명령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심성이 악하게 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바로스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어 얻는 것이 어마어마하다.
정해진 스승 없이 여기저기 어깨너머로 검술을 연마한 세라티였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 덕에 젊은 나이에 오러 유저가 될 수 있었지만, 내내 보다 높은 경지에 굶주렸던 차였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스는 정말 훌륭한 스승이었다.
세계 최강의 무인이었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어지간히 유명한 검술은 죄다 수집했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해 이론과 실전의 차이도 잘 짚어 준다.
이 사람 저 사람 빙의해 가며 싸운 경험 덕분인지 타인의 장단점에 대한 이해도도 굉장히 높다.
'맞아, 빙의. 그거 솔직히 좋았는데.'
문득 세라티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몸 빼앗겼을 땐 공포에 떨었지만, 이제 와서 되새겨보면 끝내주는 경험이었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신의 오러가 어떻게 흐르는지, 보다 높은 경지가 어떤 건지를 간접도 아니고 '직접' 경험한 것이다.
욕심이 생긴 그녀가 은근슬쩍 물었다.
"저기, 바로스 경. 그때처럼 또 제 몸에 빙의하실 순 없나요?"
"빙의요?"
"네. 몇 번만 더 경험해 보면 감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바로스가 정색을 했다.
"그거 자주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왜요?"
"실은 그 아이디어, 도련님이 먼저 냈었거든요."
벽에 막혀 고민하는 오러 유저의 몸에 바로스가 빙의한 뒤 높은 경지를 직접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하면 보다 쉽게 벽을 허물 수 있지 않을까?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몇몇 오러 유저를 붙잡아 실험해 본 것이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세 번쯤 빙의를 반복하니까 미쳐 버리더라고요."
"...."
"빙의란 게 영혼 위에 타인의 영혼을 뒤덮는 행위잖아요? 본체의 영혼 자체가 혼탁해져서 결국 자아를 잃고 망령처럼 됩디다."
기가 막힌 세라티가 외쳤다.
"그런 위험한 짓을 저한테 한 거였어요?"
"그때야 목숨이 걸려 있으니 할 수 없이...."
세라티는 정신을 차렸다.
'역시 이 인간들은 방심할 수 없어.'
자칫 잘못하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건질 건 건지더라도 항시 긴장해야 한다.
"세 번째에 미쳤으면, 두 번까진 저질러도 된다는 거네요?"
"그게 왜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뜨악해진 바로스가 세라티를 바라보았다.
'이 아가씨, 은근히 도련님이랑 사고방식이 비슷하네.'
아무리 무서워도 챙길 건 챙기고 싶은가 보다.
"자, 자! 위험한 짓이니까 생각 끄세요. 어차피 그런 짓 안 해도 세라티 경은 강해질 겁니다. 아직 나이도 젊잖아요."
"풉."
그녀는 실소를 흘렸다.
마치 손녀를 혼내는 할아버지 같아서 좀 웃긴다. 한창때의 20대 청년인 주제에 말이지.
'하긴, 바로스 경은 실제로는 나이가 많지?'
육체는 그녀 또래지만, 실제로 안에 들어 있는 건 100년 묵은 요괴.
그리고 카르나크 역시 마찬가지다. 둘 다 겉보기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나저나 카르나크 님은 요새 통 얼굴 뵙기 힘드네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세라티가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영주님이라 그런가? 그간 밀린 업무가 많으실 테니."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바쁘시긴 하겠죠. 밀린 업무 처리하는 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48화. 12. 종말은 열린 문 (4)
제스트라드 저택 2층의 영주 집무실.
오늘도 카르나크는 업무 따윈 순식간에 처리한 뒤 본연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슈트라프에게서 빼앗은 종말의 어둠을 재가공하는 것이다.
아공간에 어둠을 흘려 이리저리 조작하며 한숨을 내쉰다.
"아, 귀찮네, 이거."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였다.
일단 슈트라프에게서 빼돌린 종말의 어둠을 혼돈마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시간을 두고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카르나크가 사령왕의 지혜와 지식을 지니고 있더라도 몇 달은 걸리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왕년에 사령왕이었으니까 몇 년씩 걸릴 걸 몇 달로 줄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대체 슈트라프가 무슨 수로 사령력과 신성력을 융합할 수 있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
역시나 당장은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 그래도 아스트라 슈나프의 속성에서 크게 변한 것 같진 않은데.'
물론 카르나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아니면 슈트라프 그 인간에게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거나?'
그럴 가능성도 적었다.
알리우스에게 넘기기 전에 시체를 열심히 조사해 보기도 했지만 다른 성직자들과의 차이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능성이 '없다'가 아니라 '적다'인 이유는, 조사한 시간이 길지 않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
어쨌건 슈트라프 쪽이 문제가 아니라면 다음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원래부터 내 권능에는 다른 기운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미처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카르나크의 권능은 사령력조차 초월한 궁극의 힘이었다. 기존의 사령력에 대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 역시 앞뒤가 안 맞는다.
아스트라 슈나프가 되고 70년을 지냈는데, 그동안 마력을 수없이 운용하고 또 운용했는데 본인이 그걸 몰랐다?
그 정도로 멍청했으면 애초에 사령왕이라 불리지도 못했다.
'사실 이걸 확인해 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제일 편한 방법은 저 현상을 한 번 더 일으키는 것이다.
대충 적당한 성직자 골라서 강제로 종말의 어둠 주입한 뒤 변화를 관찰하는 게 가장 빠르다. 예전의 그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은?'
그래서 이 문제도 일단 미뤄 뒀다.
어차피 제일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종말부터 막아야지.'
흩뿌려지는 종말의 어둠이 더 이상 세상을 잠식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일단 이것만 처리하고 나면 나머지는 천천히 해결해도 돼. 최소한 상황이 더 악화되진 않을 테니까.'
슈트라프에게서 어둠을 뽑아낸 덕분에 정보량은 충분했다.
종말의 어둠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지, 시공간을 어떤 식으로 통과하는지도 대충 감이 잡힌다.
그래서 현재 카르나크는 아공간을 통해 '어둠의 눈'을 제작하고 있었다. 시공간을 탐사해 사령력의 흐름을 읽어 내는 마력체의 일종이었다.
열심히 종말의 어둠을 조작하다 말고 카르나크가 또 한탄을 내뱉었다.
"아, 진짜 귀찮네, 이거."
어둠의 눈을 시공간에 띄워 세계의 흐름을 읽어 내는 일은 마치 연을 날려 풍향을 파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연의 재료 자체는 별로 안 들어간다. 연과 연결하는 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카르나크의 사령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수법 자체가 쉽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연 역시 정밀하게 만들려면 굉장히 고도의 솜씨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심지어 이건 하늘도 아니고 시공의 저편으로 날릴 권능체였다.
많은 사령력은 필요하지 않아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물론 사령왕이었던 카르나크조차 힘겨워할 정도의 난이도는 아니지만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간다.
비유하자면 도미노 수천 개를 세우는 행위랄까?
도미노 세우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걸 수천 개씩 실패 없이 세우려면 상당한 기술과 정신력, 집중력이 요구된다.
심지어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순식간에 끝내 버릴 순 없다. 지루한 반복 작업인 것이다.
"에휴, 예전이었으면 이럴 필요도 없었는데."
사령왕 시절이었다면 그냥 무한의 권능을 이용해 시공을 박살 내 버리고 슥 훑어보는 걸로 간단하게 끝냈겠지.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힘이 있어도 저렇게는 못 하는구나."
저건 온 세상에 '여기 죽음의 왕이 강림했노라!'라고 외쳐 대는 거나 다름없다.
"이제 와서 그럴 순 없지."
미련을 버리고, 카르나크는 다시 어둠 조작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죽음과 어둠의 권능을 다루는 사악한 사령술사라기보단 차라리....
'...단추 다는 삯바느질하는 기분이구만, 이거.'
문득 카르나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바로스와 세라티가 대련을 마칠 시간이었다.
'뭐 좀 건졌을라나, 그 녀석?'
세라티야 분명히 많은 걸 얻었을 것이다. 원체 텅 빈 그릇이니 뭘 채워도 채워 넣었겠지.
저 텅 비었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카르나크 기준이긴 했지만.
문제는 바로스가 세라티에게서 원하는 걸 얻었느냐다.
바로스가 순수한 호의로만 세라티와 어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지도하고 발전을 지켜보며, 그 과정에서 본인만의 투기 각성에 대한 실마리를 잡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오러 유저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질 않는다.
'나 참, 세계 최강의 무인이었던 놈이 아직도 저런 기초조차 통과 못 하는 게 말이 돼?'
***
같은 시각, 세라티 역시 똑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세계 최강의 검사였다면서 이런 기초조차 통과 못 하는 게 말이 되나?'
오전의 대련 시간은 바로스가 스승, 세라티가 제자였다.
반면 오후의 수련 시간은 입장이 반대다.
"후우우...."
나무 그늘 아래 정좌한 채 바로스가 호흡을 고른다. 깊게 명상에 잠기며 가늘고 긴 숨을 천천히 내뱉는다.
"어때요?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조심스러운 세라티의 질문에 바로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없네요."
"이상하네...."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세라티를 보며 바로스가 물었다.
"세라티 양은 처음 투기 각성할 때 어땠는데요?"
잠시 생각하더니 세라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자신을 관조하며 내면의 빛에 이끌려 손을 뻗고, 한 자루 검으로 화하여...."
"검술서 구절 같은 거 말고요."
어차피 대륙의 일류 검술서는 모조리 외우고 있는 바로스였다.
"그걸 몰라서 못 하는 건 아니거든요?"
세라티가 발끈했다.
"타스칼 검술은 모른다면서요?"
타스칼 유파는 유스틸 왕국 중부의 유서 있는 명문으로, 주로 모험가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검술 유파였다. 그녀가 익힌 검술이기도 했다.
바로스가 머리를 긁었다.
"그러니까 일류 검술서는 다 외우고 있다고...."
"아, 타스칼은 삼류 검술이다, 이거죠?"
"꼭 그런 건 아니고 좀 흔한 검술이다 정도?"
"그게 그 소리죠!"
세라티가 눈을 흘겼다.
멋쩍어하며 실실 웃다가 바로스가 말했다.
"좀 더 세라티 경만의 직관적인 느낌을 알려 주면 좋겠는데요."
"어, 그게...."
그녀는 잠시 자신이 투기를 각성했을 때를 떠올렸다.
쓸데없는 미사여구 다 빼고, 솔직담백하게 그 순간만을 묘사하라면?
"...그냥 되던데요."
"그럴 줄 알았어요."
저건 투기 각성한 오러 유저 전원이 똑같이 하는 소리다.
하다 보니 되던데. 노력하니 되던데.
"역시 내 재능 문제인가?"
고민하는 그를 보며 세라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스 경이 재능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오전 내내 사람을 그토록 바보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재능 없단 소릴 하면 자신은 뭐가 되나?
"투기를 다루는 재능과, 투기를 각성하는 재능은 다른 걸지도요."
바로스도 나름 스스로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투기를 다루는 재능, 검을 다루는 재능, 몸을 쓰는 재능,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검을 만드는 재능과 검을 다루는 재능은 다른 법이잖아요."
검을 다루는 건 검사의 영역이지만, 검을 만드는 건 대장장이의 영역이다.
"어쩌면 투기 역시 비슷한 건지도 모르죠."
한숨을 쉬며 바로스가 다시 정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또 투기를 느껴 보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결과는 마찬가지였지만.
"아, 역시 안 되네."
지켜보던 세라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제가 바로스 경에게 무슨 도움이 되긴 하나요?"
일단 물어보니 대답은 한다만, 자신이 뭘 해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녀가 아는 건 바로스도 전부 안다. 그것도 몇 단계나 높은 수준으로.
"대체 제가 왜 필요한 거예요?"
"혹시 몰라서요."
바로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바로스가 놀던 물은 개구리 중의 개구리, 슈퍼 왕개구리들의 무대였다.
그가 지닌 검술 이론들도 전부 저 왕개구리들의 것이었다.
"혹시 올챙이 이야기를 들어 보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
잠시 세라티는 생각했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고도 얌전히 있어야 할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인간의 두개골을 후려갈겨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생각만 했다.
실행에 옮기기엔 너무 무서웠거든.
"에휴...."
그저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러 유저인데 이렇게 푸대접 받아 보긴 처음인 것 같네.'
타이밍 좋게 바로스도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 때도 그렇게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도련님 힘으로 암흑투기 얻은 걸 생각하면, 진짜 이쪽 재능은 전무한가 싶기도 하네요."
시무룩한 그를 보며 세라티는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이상하지 않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일류 검술은 다 알고 있다. 아무 투기나 손에 넣기만 하면 자신의 것처럼 노련하게 쓸 수 있다. 순수한 육체 능력도 엄청나고, 전투 감각도 뛰어나다.
경험이니 뭐니를 제외하더라도 바로스는 분명 타고난 전사였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투기를 각성하는 재능만 쏙 빠져 있어서 투기를 못 쓴다?
'애당초 투기 각성의 재능이 무인의 재능과 완전 별개라는 게 가능한 이야기야?'
대장장이의 재능이랑 검사의 재능은 물론 다르다.
'하지만 검사가 검술을 맹렬히 수련하다가 대장장이의 기술을 터득하는 건 아니잖아?'
반면 투기는 검사가 검술을 맹렬히 수련하다 보면 터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재의 연장선상이라 봐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대장장이의 비유는 잘못된 것 같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
카르나크가 제스트라드 영지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 남짓이 지났다.
그동안 세라티는 제스트라드의 기사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바로스도 평소처럼 계속 투기의 실마리를 잡으려 끙끙대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르나크가 두 사람을 불렀다.
"완성했다."
"오, 드디어?"
기뻐하며 바로스가 물었다.
"그럼 이제 다 끝나는 겁니까?"
"계획대로 잘 풀리면 그렇겠지."
사정 모르는 세라티만 의아해할 뿐이었다.
"뭐가 끝난다는 거예요?"
"아,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는 저택을 나설 준비를 했다.
명목상으론 마법의 경지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 영지 인근 숲속으로 들어가 자연의 정기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영지에서 어둠의 눈 띄우다 혹시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것도 엄연히 사령술이다. 괜히 7여신교가 냄새라도 맡으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옆 동네, 데벤토르 영지에서 저지른다."
훌륭한 계책이라며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들켜도 또 데벤토르 쪽에 뒤집어씌울 수 있겠군요!"
"그렇지!"
세라티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나쁜 짓 안 하고 산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응? 이것도 악행이야?"
"...왜 그걸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가 더 궁금한데요."
"아니, 나쁜 짓인 줄 모른다는 소리가 아니라...."
카르나크가 무슨 정박아도 아니고, 선악의 구별조차 못하진 않는다.
그가 구별 못하는 건 선악의 '유무'가 아니라 '정도'다.
"이 정도는 다른 사람도 다 하는 짓 아니냐, 이 말이지."
어디까지나 일반인처럼 적당히 착한 짓도 하고 적당히 나쁜 짓도 하면서 무난하게 사는 게 목표지, 무슨 성인이나 현자처럼 악을 멀리하고 선만을 행하며 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세라티는 머뭇거렸다.
데벤토르 자작가라면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오랜 앙숙으로 몇 번이나 피를 본 사이다. 심지어 전대 남작은 물론이고 카르나크의 형제들까지 죽인 바 있으며, 카르나크 본인조차도 저들에 의해 죽을 뻔했다.
그런 상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 과연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악행'인가?
"그 정도는 남들도 다 하는 것 같긴 하네요...."
카르나크가 방긋 웃었다.
"그럼 어서 출발하자고."
#49화. 12. 종말은 열린 문 (5)
데벤토르 영지 외곽의 한 숲속.
세 사람이 모닥불을 피운 채 모여 앉아 있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숲속 깊은 곳까지 들어온 카르나크 일행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로스가 물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요, 도련님?"
"아직이야. 밤이 정점에 달했을 때 구사해야 효율이 높다."
"이미 달 충분히 높이 뜬 것 같은데...."
"뭐, 얼마 안 남긴 했지."
세라티는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까 들은 이야기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정신이 없는 그녀였다.
'맙소사....'
세계 정복이니 시공 회귀니 하는 것은 거창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건 당장 현실로 닥친 상황인 것이다.
'저 인간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라고?'
정황상 거짓일 가능성은 적다.
카르나크가 그녀를 속여야 할 이유도 없고, 그가 정말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사신이긴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기까지 한 초월자였다면 이 정도 사태를 일으킨 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그녀 같은 평범한 인간이 이런 일에 엮이게 되었는지가 현실감이 없을 뿐.
'나름대론 나도 특별한 축에 낀다고 생각했는데....'
20대에 투기를 각성한 천재 미녀 검사라는 타이틀조차 저들에 비하면 흔해 빠진 일반인이 되어 버린다.
그저 나오느니 한숨이었다.
"에휴...."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모닥불 옆에 앉아 있던 카르나크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때가 됐군."
지금부터 뭘 하려는지는 세라티도 대충 들어 알고 있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어둠의 문을 닫는 건가요?"
어둠의 문이 닫히면 더 이상 종말의 어둠도 내려오지 않고 세상도 더 이상 혼란스러워지지 않으며 환란도 가라앉게 될까?
희망 섞인 그녀의 질문에 카르나크가 코웃음을 쳤다.
"나보고 문을 닫으라고? 내가 지금 무슨 힘이 있다고 시공간에 직접 관여를 하겠어?"
시공 자체를 조작하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권능을 필요로 한다. 사령왕 시절이라면 모를까, 현재로선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럼 끝이라는 이야기는 뭔가요?"
"문 닫는 방법을 알아내겠다는 소리지."
시공에 영향을 받지 않는 투사체를 만들어 탐사하는 건 기교의 영역.
지금의 카르나크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을 알아내서 7여신교에 몰래 넘길 생각이야."
어둠의 문을 꼭 그가 닫을 필요는 없다. 누가 닫건 닫기만 하면 그만이다.
정보를 넘기는 방법도 별로 어렵지 않다.
"슈트라프를 상대하다 우연히 관련 정보를 얻었다고 하면 돼. 고서 위조하는 것도 귀찮으니 그냥 필사본이랍시고 넘기면 되겠네."
"혹시 7여신교가 무시하면요?"
"7여신교가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지."
본인이 직접 상대해 봤으니 7여신교의 저력에 대해서도 잘 안다.
분명 진위를 파악할 테고, 실제로 먹히는 수법이란 걸 깨닫겠지.
"이후엔 알아서 잘하지 않겠어? 7여신교 힘 다 모으고 3인의 대마법사도 부르고 하면 그럭저럭 될 거다."
카르나크는 양손을 펼쳤다.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기이한 형상을 일구기 시작했다. 시공을 넘나들 탐사체, 어둠의 눈이었다.
이윽고 어둠의 눈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이 요동친다. 먹구름이 회오리치며 시공의 문이 열려 공허를 토한다.
폭우가 쏟아지며 뇌성이 사방으로 터져 나간다!
...등등의 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의 눈은 그냥 소리 없이 떠올라 소리 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정말이지 썰렁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실망한 세라티가 중얼거렸다.
"어째 조용하네요?"
"당연하지."
카르나크가 피식거렸다.
"시공에는 아무 변화도 없으니까."
시공의 문을 열고 어둠의 눈을 날린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둠의 눈 자체에 시공을 드나드는 속성이 있는 것이다.
"하늘에 연 띄운다고 막 폭풍이 불진 않잖아?"
"아, 그런 식인 거군요."
어둠의 눈은 무사히 시공 저편에 진입했다. 이제부턴 카르나크도 최대한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이제 한동안 난 정신 줄 놓은 상태가 될 거다. 잘 지키고 있어."
긴장하며 바로스와 세라티가 검을 뽑아 들었다.
"넵!"
"예!"
눈을 감은 카르나크가 어둠의 눈 쪽으로 감각을 옮기기 시작했다.
***
거대한 공허가 눈앞에 펼쳐진다.
세계의 바깥이자 시공의 저편. 너무도 넓고 아득하게 멀어 도저히 끝이 가늠되지 않는 무한의 영역이다.
이 공허 앞에선 세계조차도 그저 작은 티끌에 불과.
한낱 인간의 인지로는 감히 이 무한을 실감할 수 없다. 그저 빈약한 상상만이 허락될 뿐이다.
인지해서도 안 된다. 무한을 실감해 버리는 순간 필멸자의 영혼은 미쳐 버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 공허를 인지하지 못하면 탐사도 할 수 없다.
필요한 만큼 취하고 필요한 만큼 무시하는, 실로 세밀한 감각 조율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자, 가 보자.'
인지하고, 무시한다. 또 인식하고, 무시한다.
끝없는 무시와 방임을 통해 영혼과 자아를 지켜 내며 공허를 유영한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는 혼돈의 영역 속에서 목표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마침내 공허 저편에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아니, 너무도 작디작은, 시들어 빠진 새싹 하나에 불과하기도 했다.
모순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카르나크는 나무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다 썩어 가는 거대한 해골의 무리, 나무처럼 양팔을 벌리고 무수히 뼈의 가지를 뻗은 채 목을 맨 시체의 형상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추악한 형태야말로 왕년의 사령왕이 지닌 권능의 본질이다.
세상을 지옥으로 바꾸고, 인류를 멸하고, 생과 사의 경계조차 부수며, 종국엔 현실과 환상조차 뒤섞어 버린 부정함 그 자체.
'나도 참 이상한 놈이었어. 뭐가 좋다고 저런 걸 뒤집어쓰고 있었는지, 원.'
혀를 차며 카르나크는 공허의 나무, 아스트라 슈나프로 다가갔다.
거대한 줄기가 피로 감싸여 있었다.
가지마다 암흑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지독한 죽음의 기운이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맺힌 과실이 무르익어 하나둘 떨어진다.
그때마다 시공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공허에 틈이 생긴다. 떨어진 과실이 공허 너머로 사라져 간다.
세상에 종말의 어둠이 뿌려진다....
'으, 정신 차려야지.'
홀린 듯 그 광경을 보다 말고 카르나크는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막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원래는 자신의 힘이었다. 그가 키우고 가꾼 권능이었다.
비록 변질될 대로 변질되었지만 기본적인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그 흐름을 타고 어둠의 눈을 천천히 움직인다. 휘몰아치는 암흑의 폭풍 사이로 가장 짙은 어둠이 느껴진다.
'저쪽인가?'
이대로 권능 내부로 진입해 정보를 빼낸다. 그리고 이 변질된 공허의 권능이 더 이상 세상에 관여하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는다.
계속 접근하며 카르나크는 잠시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다.
'계획대로 잘 풀리면 좋겠는데....'
바로스와 세라티 앞에선 큰소리 뻥뻥 쳤지만, 사실 그라고 이 계획에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공허를 수색하는 것까지야 자신이 있었지만 수색이 반드시 단서로 연결되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설령 단서를 잡는다 해도 그것이 꼭 해결책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큰소리쳤냐고?
'굳이 미리 불안감 줄 필요 없잖아. 방법 없으면 그건 그때 고민할 일이지.'
드디어 아스트라 슈나프 근처까지 다가왔다.
전설의 세계수를 연상케 하는 탁기의 거목 앞에서 어둠의 눈이 천천히 선회했다.
'어디로 진입해야 하려나?'
그렇게 적당한 진입로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나라, 필멸자여...."
카르나크는 기겁했다.
이 무한의 공허에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뭐, 뭐야, 이거?"
소리가 이어졌다.
"이는 사라질 운명의 존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로다."
당황하며 그는 자신의 권능이었던 어둠의 거목을 힐끔거렸다.
'설마 저게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조심스레 반문해 보았다.
"...누구냐, 너?"
"나는 죽음이다."
의외로 대답은 순순히 돌아왔다.
"죽음이자 어둠이며, 파괴하는 운명이다."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 대답이 되지 않았을 뿐.
동시에 거센 풍랑이 밀려왔다. 보이지 않는 힘이 어둠의 눈을 폭풍 속의 가랑잎처럼 격하게 흔들어 댔다.
"큭, 으윽!"
카르나크는 혼란에 빠졌다.
워낙 강대한 기운이라 어둠의 눈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건, 그를 밀어내는 이 힘이 종말의 어둠이었다는 점이다.
'뭔가가 내 힘을 자기 멋대로 다루고 있다고?'
거대한 영기의 나무, 아스트라 슈나프에서 한차례의 파문이 퍼져 나왔다.
콰아아앙!
파문에 휩쓸린 어둠의 눈이 점점 찢겨 나간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테스라낙의 이름으로 명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떠나라, 가련한 필멸자여...."
카르나크의 의식이 빠르게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악!"
***
귓가에서 앵앵대는 소리가 들린다.
"...련님!"
"...르나크 님!"
바로스와 세라티의 목소리였다.
카르나크는 애써 눈을 떴다. 조금씩 시야가 돌아오고 있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저 보여요?"
"괜찮으신가요?"
신음하며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라뇨...."
열심히 카르나크를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을 파르르 떨더니 픽 쓰러지더라. 놀라서 얼른 편히 누인 뒤, 팔다리 주무르고 있었다.
이게 바로스의 설명이었다.
"계획이 잘 안된 겁니까?"
"잘 안되고 뭐고 간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며 카르나크가 바로스를 돌아보았다.
"그, 사교도들이 믿는 신 이름이 뭐랬지? 죽음의 신인가 뭔가...."
"네? 어, 그게...."
바로스는 머뭇거렸다. 워낙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보니 그 역시 제대로 기억해 두질 않았다.
대신 세라티가 입을 열었다.
"테스라낙 말인가요? 검은 신의 교단이 섬긴다는 죽음과 어둠의 파괴신...."
"맞구만, 테스라낙."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테스라낙'이라 칭하고 있었다.
"나, 그놈 만났다."
"엥? 테스라낙요?"
"어, 그래. 그거."
바로스는 눈을 깜박였다.
만나다니? 테스라낙을? 죽음과 어둠의 신을?
"...테스라낙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거였어요?"
카르나크는 인상을 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절대 있을 수 없어."
여전히 평범한 밤하늘이었다.
하지만 저 너머에서 일어난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게 왜 존재하지?"
***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는, 위도 아래도 없는 아공간.
짙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세 남녀가 허공에 서 있었다.
죽음의 교황, 어둠의 법왕, 파괴의 성녀.
테스라낙을 섬기는 검은 신의 교단을 이끄는 3인의 성인들이었다.
세상은 이들을 사교도의 수괴,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마인으로 치부하지만 검은 신의 교인들에겐 그 누구보다도 성스러운 이들일 뿐이다.
사내의 목소리가 어둠 사이로 울렸다.
"성역에 이상이 생겼소."
"어찌 그럴 수가 있지?"
또 다른 사내가 의문을 표했다.
"성역은 그 무엇도 범접지 못하기에 성역이거늘."
"모르겠소. 허나 분명히 일어난 일이오."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확인해야겠군요."
어둠이 사라졌다. 세 남녀의 형체도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주위가 바뀌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치장한 우아한 별실에서 여인이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에 갈색 피부, 풍성한 금발을 허리까지 드리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성역이 침범당했다? 신기한 일이네."
여인이 마법의 종을 울렸다.
딸랑딸랑!
이내 어린 하녀 1명이 별실로 달려왔다. 파들파들 떨며 하녀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엘레자르 님."
그 모습에 여인, 엘레자르는 실소했다.
그녀를 시켜 심복을 호출할 셈이었는데, 어째 새로 온 하녀라 그런지 과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엘레자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하녀를 달랬다.
"너무 그렇게 떨 필요는 없단다."
"죄, 죄송합니다!"
물론 하녀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겉보기엔 30대 초반의 미녀로 보이지만 실은 이미 50이 넘은 엘레자르였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마력이 육체의 노화조차 늦추게 해 젊어 보이는 것뿐이다.
모든 마법의 정점에 도달한 3인의 대마법사 중 1인이자 라케아니아 제국의 황실 마도사.
10서클의 추구자, 엘레자르 데 리플라시온.
인세의 최강자 중 하나인 그녀를 상대로 어찌 일개 하녀가 긴장을 풀 수 있을까?
여전히 파들파들 떠는 하녀를 보며 엘레자르가 명을 내렸다.
"가서 휴델 좀 불러 주겠니? 내가 찾는다고만 하면 돼."
"예, 엘레자르 님."
#50화. 13. 킹스 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