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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50-60

#50화. 13. 킹스 오더

정체불명의 존재, 테스라낙과 조우하고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카르나크는 두 번 더 공허에 진입을 시도했다. 어둠의 눈을 만들고 띄우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하나 만드는 데 보름씩 걸렸으니 두 번이 한계였다.

하지만 건진 것은 없었다.

그나마 첫 조우 땐 근접한 거리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엔 아예 근처에도 가지고 못했고, 세 번째엔 위치 파악조차 불가능했다.

명백하게 누군가가 그의 접근을 경계하며 막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탐사는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바로스와 세라티를 부른 뒤 카르나크가 상황을 설명했다.

"더 했다간 역으로 내 위치가 특정될 것 같더라고. 너무 위험해."

상대의 정체도 모르는데 이쪽의 정보를 계속 넘겨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적당한 선에서 자제할 필요가 있다.

바로스가 물었다.

"그럼 알아낸 것이 없는 겁니까, 도련님?"

"아주 없는 건 아니지."

뭔가 의지를 지닌 존재가 있고, 카르나크의 옛 권능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않았나?

"그게 뭔지부터 파악해야 해. 그래야 종말의 어둠 문제를 해결하건 말건 하지."

"일단 검은 신의 교단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하네요."

"그렇겠지. 테스라낙 운운했으니까."

문제는 이 상황에서 검은 신의 교단이 어떤 입장이냐는 거다.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바로스?"

지금 이 사태는, 카르나크가 금화를 한 무더기 뿌렸더니 개나 소나 주워 가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금화가 열리는 나무가 따로 있었다는 거지. 보통 사람들 눈엔 보이지도 않는 엄청나게 높고 거대한 금화 나무가."

"그래서요?"

"누군가 그 나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장대로 열심히 나무를 때려 금화를 떨어트리고 있다면? 그 와중에 다른 놈이 금화 나무에 접근하자 장대를 휘두르며 꺼지라고 난동을 부린다면?"

검은 신의 교단이 금화 줍는 놈들인지, 아니면 장대를 휘두르는 놈들인지가 문제다.

그냥 떨어지는 금화 아무 생각 없이 줍는 놈들이라면 별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장대를 휘두르는 놈들이라면?

"사안이 심각해지지."

세라티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요?"

"장대라고 비유하니 감이 안 오는 모양인데, 세라티. 그건 시공 저편까지 권능이 닿는다는 의미야."

"카르나크 님이 하신 것도 시공 저편에 권능을 보낸 것이잖아요?"

"전혀 달라."

카르나크의 수법은 어둠의 눈을 이용해 공허 내부를 살피는 것에 불과하다. 딱히 무슨 영향력을 줄 수는 없다.

"10킬로미터 밖을 원거리에서 살피는 것과, 10킬로미터 밖의 사물을 원거리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시공의 저편까지 권능의 영역을 넓힌다?

이는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카르나크조차도 수십 년에 걸친 실패 끝에 간신히 가능했던 일이다. 시공 회귀의 술법이 그것이니까.

"내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이유가 이거다."

시공의 저편에 존재하는 카르나크의 옛 권능에 손을 뻗으려면, 사령왕 시절의 카르나크조차 초월하는 절대적인 권능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 그 정도 힘이 있다면 굳이 금화만 떨어트리고 있을 필요가 없겠지? 그냥 나무를 뽑아 버리면 되니까."

"계속 금화 따먹고 싶어서 일부러 내버려 두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비유의 의미로 나무라고 한 거지 정말로 종말의 어둠이 계속 열리는 건 아니거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 상황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현세에서 공허 너머로 영향력을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돼. 그 정도 힘이 있다면 굳이 저런 짓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공허 내에 테스라낙이란 놈이 따로 존재한단 소리가 되는데,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느냔 말이지?"

중얼거리는 카르나크를 지켜보던 세라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이런 건 어떨까요?"

이래저래 전설이며 영웅담 같은 걸 좋아한 그녀였다. 마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으니 오히려 마법사라면 떠올리지도 못할 상상도 가능했다.

"혹시 카르나크 님의 권능이 그 자체로 일종의 자아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면요?"

바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말이 돼요? 그럼 세라티 경의 오러도 따로 유령 돼서 돌아다니게요? 말 걸면 대답도 해 주겠구만."

반면 카르나크는 비웃지 않았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한데, 상황 자체가 워낙 어이가 없으니 무시할 수도 없겠군."

마법학의 상식은 차치하고 현상만 봤을 땐 은근히 그럴듯한 가설이다.

장대를 휘두르는 놈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나무 자체가 스스로 종말의 어둠을 흘리고 스스로 가지를 휘둘러 접근하는 놈들을 막고 있다면 대충 앞뒤는 맞게 되는 것이다.

바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넘겨짚는 것 같은데요?"

그럼 저 영기의 나무가 테스라낙이란 이름을 스스로 붙였단 말인가? 검은 신의 교단에 힘 나눠 주면서 죽음의 신 노릇 하는 것도 스스로의 의지고?

단순히 기운일 뿐이던 것에서 저절로 자아가, 무에서 유가 탄생했다?

"이러면 도련님이 신을 만들었다는 소리가 되는데요? 에이, 아무리 도련님이 대단하시다지만 이쯤 되면 자의식 과잉...."

얼굴을 붉히며 카르나크가 항변했다.

"누가 신을 만들었대? 넘겨짚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결국 이게 문제다.

아는 게 없다는 것.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저 테스라낙이란 놈에 대해 더 알아보기 전에는 말이지."

그리고 현세에서 테스라낙에 대해 알아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역시 검은 신의 교단을 조사해야겠는데...."

전생과 현세를 통틀어 오직 저들만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카르나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의 내가 놈들을 조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혼란의 시대.

대륙 곳곳에서 사령술사들이 창궐하였으니 이에 7여신교는 심문관 제도를 부활하고 제도를 정비해 맞섰다.

특별히 양성된 이 심문관들이 여러 협력자들과 함께 사령술사들을 사냥하고 심판했으니, 이 협력자들은 어둠사냥꾼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응할 수 없는 사태도 있었다.

대륙 전역에 세력을 떨치는 사교단, 검은 신의 교단이 그것이었다.

초반엔 속세의 왕국들도 딱히 검은 신의 교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이 혼란해지면 온갖 사교도가 들끓는 것은 필연이었다. 저들 역시 그런 흔한 사태의 일종이라고만 여겼다.

하나 검은 신의 교단은 여태 봐 온 사교단과는 궤를 달리했다.

테스라낙이라는 죽음의 신을 섬기는 이 사교단은 실로 놀라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나 무시무시해 어느새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니, 슬슬 7여신교뿐 아니라 속세의 권력자들조차도 좌시할 수 없는 위협이 되었다.

검은 신의 교단에는 고위 귀족, 심지어 왕족이나 대영주까지 속해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아쉬울 것 없는 지위를 지닌 이들이 왜 저런 사교에 빠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저들이 각국의 고위층이란 점이었다.

단순히 사령술사 개인을 사냥하는 권한은 7여신교에 허락할 수 있다. 이는 '치안'의 영역이다.

하지만 세력을 지닌 고위층이 얽혀 들어가면 이는 '정치'나 '반역'의 영역이 된다. 이것까지 7여신교가 관리하려면 그만큼 권한도 커져야 한다.

고위 귀족, 심지어 왕족조차도 뜻대로 처벌할 수 있어야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데 이는 속권이 교권에 침해당하는 심각한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7왕국 연합은 따로 전담 기관을 설립했다. 성직자가 아닌 이들에게 직접 감찰관의 권한을 부여해 사교도를 상대하게 한 것이다.

오직 검은 신의 교단만을 사냥하는 왕실 직속 특무기관, 킹스 오더가 그것이었다.

***

입을 오물거리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테스라낙에 대해 조사하려면 역시 사교단의 고위직 정도는 잡아야겠지?"

까드득거리며 바로스가 대답했다.

"일개 신도들이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입안 가득 퍼지는 참깨 향의 고소함을 음미하며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고위직을 붙잡으려면 우리끼리는 영 힘들 테고."

달콤한 설탕 크림을 혀로 핥으며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있는 놈들인데 지금처럼 동네 사령술사 사냥하면서 우연히 걸리길 바라는 건 무리죠. 잘해 봐야 졸병이나 잡겠지."

심각한 얼굴로 카르나크는 입속의 내용물을 꼴깍 삼켰다.

"역시 킹스 오더에 들어가야 하려나?"

바로스도 진지하게 입가에 묻은 설탕 자국을 닦으며 대꾸했다.

"그렇겠죠?"

"두 분 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요...."

옆에서 지켜보던 세라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이런 심각한 상황에 과자가 입에 들어가요?"

두 사내가 격하게 항변했다.

"당연히 들어가지!"

"그럼요! 이거 먹으려고 시간까지 되돌렸는데!"

"아, 매번 먹어도 맛있다."

"그러게 말입니다요."

그렇다.

아무리 세상의 운명이 흔들리고 종말이 닥쳐온다 해도, 중요한 일과를 포기할 순 없는 것이다.

바로 오후의 간식 시간이다.

"...."

세라티는 그저 침묵했다.

다 큰 사내 둘이서 소녀들처럼 과자 그릇 앞두고 까르르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참, 뭐라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의외로 불쌍한 면도 있는 것 같고?'

카르나크는 오히려 그녀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세라티는 과자 안 먹어?"

"단거 안 좋아해요."

순간 두 사람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헉!"

"세상에!"

"어떻게 단걸 안 좋아할 수가 있지?"

"인생의 행복 절반은 포기했구만요."

한숨을 쉬며 세라티가 과자 쟁반을 치웠다.

"대충 다 드셨으면 의논이나 마저 하시죠."

그 와중에도 각자 남은 과자를 한 움큼 챙기는 걸 보니 절대 먹다 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손안의 과자를 소중하게 쥔 채 카르나크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킹스 오더에 들어갈 방법을 고민해 보자고."

유스틸 왕국 역시 킹스 오더를 창설한 뒤 검은 신의 교단, 일명 암흑교단을 사냥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는 카르나크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솥뚜껑만 한 손바닥에 알록달록 사탕을 올려놓은 바로스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듣자 하니 벽이 높아도 보통 높은 게 아니던데요."

단순한 사령술사 사냥이 아니니만큼 킹스 오더에 주어진 권한은 엄청나다.

상대가 귀족이나 왕족이더라도 즉시 체포 및 심문이 가능하며, 심지어 증거만 확실하다면 즉결 처형권까지 지니고 있다.

이 정도 권한을 주지 않고서야 은밀하게 암약하는 암흑교단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악용되면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것이기에 킹스 오더의 선발 조건은 엄청나게 까다롭고 엄격하다.

왕가에 대한 충성심, 7여신에 대한 독실한 신앙, 거기에 뛰어난 무력과 전투력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사령술을 상대할 풍부한 경험도 요구한다.

"우리도 나름 데라트 시티에선 어둠사냥꾼으로 명성을 날리긴 했지만, 이 정도로 과연 입단 조건이 될까?"

"조건이 맞고 안 맞고가 문제가 아니죠."

그 전에, 킹스 오더의 문턱을 넘을 방법조차도 당장 없었다.

단순하게 실력만 높다고 전부가 아니기에 킹스 오더는 철저하게 추천제로만 이루어진다.

물론 카르나크에게도 알리우스라는 7여신교 쪽 인맥이 있긴 하지만....

"킹스 오더는 어디까지나 왕실 직속 기관이지."

일개 지방 귀족일 뿐인 카르나크에게 왕실 쪽 인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실력 위주로만 인원을 선발하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그러게요. 무슨 공개 입단 테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지방에만 처박혀 살았나, 이거?"

"할 수 없죠.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나요, 어디?"

"어쩌지? 무턱대고 수도로 가서 대뜸 킹스 오더 본부를 찾아가 봐?"

"너무 막무가내 아니에요?"

"달리 방법이 없잖아, 지금."

심각한 얼굴로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안에 쥔 과자며 사탕은 냠냠 잘도 먹고 있었지만.

얌전히 듣고만 있던 세라티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카르나크 님, 지금 킹스 오더가 되는 게 목적이신 거죠?"

"왜? 혹시 아는 인맥이라도 있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원하시면 당장이라도 입단 지원은 하실 수 있을걸요."

"엥?"

"우리가요?"

#51화. 13. 킹스 오더 (2)

세라티의 인맥은 두 사람도 이미 아는 이였다.

"알리우스 씨가 있잖아요."

물론 두 사람이 알리우스를 처음부터 배제한 이유도 있다.

"킹스 오더는 왕실 직속이라며?"

"7여신교와 별개 조직 아니었어요?"

그녀가 둘의 오해를 정정해 주었다.

"별개의 독립 조직인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아예 연관도 없는 건 아니거든요."

아무리 각 왕실이 독자적으로 사교도 사냥을 나서려 해도 7여신교를 배제할 순 없다. 사령술사를 상대하려면 강력한 성직자의 존재는 필수니까.

이런 이유로 각 왕실은 7여신교의 고위 성직자 역시 왕실 직속으로 두길 원했다.

당연히 7여신교도 처음엔 난감해했다.

이단 심문의 권한은 위대한 여신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오직 성직에 임하는 자만이 그에 따른 의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심문관의 권한을 일반인에게 주고, 심지어 그 밑에 성직자를 수하로 붙인다?

여러모로 교리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원리주의자들의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현재 7여신교는 대륙 전역에 창궐하는 사령술 사건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속세의 권력이 검은 신의 교단을 맡아 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은 분명했다.

"실제로 암흑교단이 개입된 사건에서 7여신교가 고초를 겪은 경우도 꽤 있다고 하고요."

정치적 문제와 얽히게 되면 속세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7여신교로서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각국의 왕가가 상황을 주도하는 것 자체는 7여신교로서도 찬성할 일이다.

그래서 절충선을 찾았다.

킹스 오더는 어디까지나 왕가 직속, 하나 그 구성원은 7여신교가 추천을 통해 결정하며 혹여 왕가가 직접 임명할 경우 7여신교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하면 속세의 지배자들이 심문관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교리상의 허물도 어느 정도 가려진다.

각국의 왕가도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7여신교에서 성직자를 지원받아야 할 처지인지라 마냥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알리우스 씨에게도 추천인 권한이 있다는 이야기예요. 1급 심문관이니까."

설명을 듣던 카르나크가 문득 의아해했다.

"세라티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어?"

이건 소문 정도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꽤나 깊이 관련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밀이 아닌가?

"그야 알리우스 씨 본인한테서 들었으니까요."

세라티가 빙그레 웃었다.

"애초에 저랑 릴테인 씨는 킹스 오더 입단 추천을 받을 예정이었거든요."

카르나크 일행이 처리한 트리스트 시티 사건이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것이다.

세라티는 오러 유저, 릴테인은 6서클의 마법사였으니 둘 다 실력은 충분하다. 그간 많은 사령술사를 사냥하며 실전 경험도 증명되었다.

"그래서 슈트라프 주교 문제까지 해결하면, 확실히 킹스 오더의 자격이 입증될 거라 하더군요."

사실 트리스트 시티 건은 단순한 사교도 사냥을 넘어선 사안이었다. 한 도시를 장악한 권력자가 상대이니 원래는 킹스 오더의 일이다.

"하토바 교단의 치부이다 보니 어떻게든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한 거였죠. 그러고 나서 우리를 킹스 오더에 추천해 쓸 만한 인재도 보내 주고, 덤으로 월권행위에 대한 변명도 할 셈이었다던데요. 수도로 진출해 보다 큰일을 할 수 있으니 저희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요."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미리 언질을 받았단 말이지...."

바로스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우린 그런 이야기를 미리 못 들었죠?"

"그게요, 이제 와서 말하긴 좀 웃기는 이야기인데...."

세라티가 고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약해 보이잖아요?"

"약해?"

"우리가?"

"그러니까 서류상으로는요."

물론 세라티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얼마나 괴물인지 잘 안다. 저들의 비밀에 대해 모르는 알리우스나 릴테인도,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으니 실제론 보통 실력자가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이걸 남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카르나크는 4서클의 마법사일 뿐이고 바로스는 아직 투기도 각성 못 한 일반 기사에 불과하다.

실제 실력은 분명히 뛰어나지만 서류상으로는 영 평범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두 분도 트리스트 시티 사건에 부른 거예요. 기량은 평범하더라도 사령술사 상대로는 전문가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사건까지 해결하고 나면 우릴 꼬드길 생각이었다, 이거구만?"

"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없었지?"

"알리우스 씨가 이야기 꺼낼 틈도 안 주셨잖아요."

뭔 말을 하기도 전에 카르나크가 먼저 영지로 귀환한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랬지, 참."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바로스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유독 아쉬워하더라니."

쓸 만한 협력자를 잃었다기엔 실망한 표정이 과해서 좀 이상하게 여기긴 했었다.

"가만, 그러면 우린 그냥 도로 알리우스 씨를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세라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분명 곧바로 추천서 써 줄걸요."

***

목표가 정해졌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는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데라트 시티로 떠나진 못했다.

"아이고, 안 됩니다!"

노집사 타펠의 격한 반대 때문이었다.

"영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 영지는 누가 다스린단 말입니까?"

카르나크로서는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뭘 새삼스레 이제 와서...."

이전에도 몇 달, 심지어 반년 넘게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가?

원래 지방 귀족 중에는 영지를 대리인에게 맡기고 중앙에서 정치에 뛰어드는 일들이 굉장히 흔하다.

영주 자신이 1년 내내 직접 영지를 관리하는 경우는 정말 변경의 시골뜨기가 아니고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몇 달은 중앙에서, 몇 달은 영지에서 일하며 관리하는 게 일반적인 케이스다.

즉, 카르나크도 별문제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말이지.

"이전에는 목숨이 걸린 상황이 아니었잖습니까!"

데벤토르 자작가의 위협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땐 어쩔 수 없었다. 그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이후 데라트 시티로 향했을 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수도에 마법 공부하러 가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이후에 카르나크가 사령술사 잡겠다며 설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기쁘기도 하고 걱정도 태산이고 그랬다.

그런데 이젠 아예 킹스 오더가 되겠다고? 저 무시무시한 암흑교단과 싸우러 가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괜찮아. 난 안 죽을 거니까."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어디 사람 봐 가면서 피해 다닌답니까?"

"그,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꼬장꼬장한 노집사를 바라보며 카르나크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냥 이대로 영지에 처박혀 있으라고?"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오직 제스트라드 남작가만을 생각하는 충성스러운 노집사 타펠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성혼을 하시고, 후계자를 두셔야지요! 삶을 누리는 것은 그다음! 그것이 가문을 잇는 자의 의무입니다!"

***

킹스 오더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사흘째.

여전히 카르나크는 영지에 발이 묶여 있었다.

"후계자라니...."

서재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린다.

"지금 당장 마누라감을 어디서 구하라고?"

소파에 늘어져 있던 바로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구해도 문제죠. 당장 결혼해도 애 나오려면 열 달은 걸릴 텐데요."

현 사안이 그렇게까지 질질 끌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거참, 생각도 못 한 데서 발목 잡히네."

카르나크가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영지민 중 건강한 아가씨 골라서 애 좀 낳아 달라고 할까? 어쨌거나 후계자만 있으면 되잖아."

"평민 출신 아내도 괜찮은 거예요?"

"나도 절반은 평민 혈통인데, 뭘.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면 해선 안 될 짓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허송세월 보내고 있을 수도 없잖아요."

"그렇지. 역시 아무나 적당한 처녀 하나 골라서...."

"물레방앗간의 메리란 처녀가 참하다던데요."

"예쁘냐?"

이 와중에도 예쁘냐는 소리부터 나오는 걸 보면 카르나크도 어쩔 수 없는 사내인 모양이었다.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죠? 얼굴도 못 봤는데."

"하녀 중에 누구 없을까? 영주 부인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넘어올지도 모르겠는데."

"봐 둔 애 있어요?"

"아니.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얼굴도 기억 안 난다."

한편, 세라티는 서재 한쪽에 서서 한심해하는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 저런 영양가 없는 헛소리만 주워섬기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녀가 중얼거렸다.

"좀 신기하긴 하네요."

카르나크가 고개를 돌렸다.

"응? 뭐가?"

잠시 머뭇거리다 세라티는 작게 말을 이었다.

"...카르나크 님이 저는 언급하지 않으셔서요."

사실,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상대는 그녀다.

카르나크의 권속이 되었으니 어떤 명령이라도 충실히 복종해야 할 처지다. 몸을 바치라 하면 좋건 싫건 따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미녀가 아닌가?

하지만 온갖 영지 처녀들을 주워섬기는 와중에도 정작 세라티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설마 그녀를 소중히 여겨서?

글쎄다. 저 인간이 그 정도로 양심적인 것 같진 않고.

그럼 그녀가 평민이라서?

그럴 리도 없다. 영지 처녀들도 평민이긴 마찬가지니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까지 매력이 없나?'

물론 카르나크와 결혼하고 싶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니 미묘한 기분인 것이다.

뚱한 세라티를 보며 카르나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너를?"

그러더니 대뜸 폭탄선언을 던졌다.

"세라티는 내 권속이잖아. 그 상태로는 애 못 낳는데?"

"...네?"

"영혼이 내게 묶여 있잖아. 그래서 아무리 남자랑 동침해도 절대 애 안 생겨. 남녀의 영혼 일부가 뒤섞여서 새로운 영혼이 안착할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잠깐! 절 불임으로 만든 거였어요?"

기겁하며 세라티가 고함을 터트렸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요!"

카르나크도 바로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과격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그러게요. 상시 피임 상태라서 오히려 좋은 건 줄 알았...."

"야, 이 미친놈들아!"

세라티는 잠시 휘청거렸다. 너무 충격적인 소리를 들어 다리가 풀리고 있었다.

'역시 이 인간들은 방심할 수가 없구나....'

애써 정신을 수습하며 그녀가 또박또박 물었다.

"자, 이 빌어먹을 권속이란 게 되면 일상생활에 지장 생기는 게 또 뭐 있어요? 솔직히 말해 보세요."

서로를 바라보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열심히 주워섬겼다.

"어, 그게...."

"더 이상 없죠?"

"응응! 이게 다일걸."

물론 세라티는 믿지 않았다.

이젠 그녀도 아는 것이다.

'이놈들은 애초에 일상생활이란 게 뭔지도 몰라! 그러니 지장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할 수 있을 리도 없지!'

문제가 닥치기 전엔 아예 인식조차 못 한다는 소리다.

어쨌거나, 이쯤 되니 더 이상 저 꼴을 봐주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세라티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고민 그만하시죠, 이제."

"쓸데없는 고민이라니? 후계자 문제로 안 보내 준다잖아."

"편지나 한 장 남기고 그냥 밤에 몰래 떠나요. 걱정 마라, 나 안 죽는다, 명성을 얻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겠다. 대충 이런 식으로."

의외로 간단한 해결책에 카르나크가 눈을 반짝였다.

"그냥 그래도 돼? 나쁜 짓 아냐?"

당연히 나쁜 짓이다.

상식인이라면,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영주라면 결코 저질러선 안 된다.

"나도 저 생각 자체는 해 봤는데, 해도 되는 나쁜 짓인지가 애매하더라고. 이러다 나중에 욕먹는 거 아닌가?"

"저한테 이런 짓까지 해 놓고 그딴 걸 고민하시는 거예요?"

"너한테 욕먹는 건 상관없지. 어차피 내 권속인데."

"...."

이를 득득 갈며 세라티는 애써 웃었다.

"네, 문제없어요. 그냥 젊은 혈기로 명예 타령하는 멍청이가 될 뿐인데요? 카르나크 님이 살아서 돌아오시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거고, 죽은 후에는 어차피 욕을 먹건 말건 상관없잖아요?"

"그렇구만!"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카르나크가 눈을 빛냈다.

"짐 싸라, 바로스! 오늘 밤에 뜨자!"

***

다음 날 아침.

노집사 타펠은 한 장의 편지를 쥔 채 절규하고 있었다.

"영주니이이이임!"

편지 내용은 참으로 심플했다.

『걱정 마라, 나 안 죽는다. 명성을 얻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오겠다.』

세라티의 의견을 과하게 수용한 결과라 하겠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고? 최근에 변하신 줄 알았는데 도로 예전처럼 구시잖아?'

그사이 달라진 부분은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그 여자 탓이다!'

붉은 머리칼의 미녀를 떠올리며 노집사는 이를 갈았다.

'그 여자가 우리 착한 영주님에게 나쁜 물을 들이고 있어!'

#52화. 13. 킹스 오더 (3)

야반도주(?)한 카르나크 일행은 다시 데라트 시티로 향했다.

일행과 재회한 알리우스는 크게 기뻐했다.

"참으로 하토바의 인도하심이 아닐 수 없군요!"

너무 기뻐해서 카르나크가 도리어 당황할 정도였다.

"...혹시 저희를 추천하면 알리우스 씨에게도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저도 실적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니까요."

물론 지금까지도 실적은 충분히 쌓았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무려 1급 심문관이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제 추천인이 3명이나 킹스 오더에 입단하게 되면 제 평가 역시 더욱 높아지겠지요. 운 좋으면 특급의 위계를 넘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세라티가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의외네요."

마냥 선인인 줄만 알았던 알리우스에게 저런 출세욕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특급 심문관이 되면 보다 큰 권한이 생기고, 그럼 보다 많은 신민들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어찌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알리우스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이제 갓 1급의 위계를 얻은 그는 아직 킹스 오더에 어둠사냥꾼을 추천한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기에, 더더욱 신중을 기해 사람을 고르고 골랐다.

그게 바로 트리스트 시티 작전에 참가한 카르나크 일행과 세라티, 릴테인인 것이다.

그런데 세라티가 카르나크의 기사가 되는 바람에 셋을 잃었다.

게다가 남은 릴테인마저 입단을 포기해 버렸다. 슈트라프를 상대하며 자신감을 잃은 것이 이유였다.

하긴, 워낙 손도 발도 못 써 보고 처참하게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어둠사냥꾼마저 관두고 다시 마법 수행에 들어갔다던가?

"세 분이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로서 사교도로부터 신민을 구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군요."

바로스와 카르나크가 몰래 마법 전언을 나눴다.

[역시 알리우스 씨는 괜찮은 사람이구만요.]

[얘보다 쟤가 더 나은 것 같은데?]

둘의 시선이 세라티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를 보세요?]

카르나크의 권속이 되었으니 이제 은밀한 마법 전언 체계에 세라티도 집어넣은 것이다.

그렇게 셋이서 몰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알리우스는 일필휘지로 추천서를 작성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천장일 뿐이고 입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류를 건네며 그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여러분이라면 분명 가능하실 거라 믿습니다. 부디 하토바의 가호가 있기를!"

***

변경 중의 변경인 북쪽 영지, 제스트라드 남작령.

여기서 북부 최대의 도시인 데라트 시티까지는 사흘이 걸린다. 또한 데라트 시티에서 유스틸 왕국 수도까지는 열흘이란 시간이 추가로 든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며, 이 시대의 여행이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실로 위험한 행위이므로 아무리 카르나크 일행이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 없이 잘 왔네요?"

평야 너머에 펼쳐진 거대한 도시, 유스틸 왕국 수도 드룬타를 바라보며 바로스가 히죽 웃었다.

카르나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작해야 유스틸 같은 소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 리가 있겠냐?"

옆에서 듣고 있던 세라티가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아무 일 없었다고요?"

오는 동안 도적단도 한 번 만났고, 사령술사는 두 놈이나 찾아서 붙잡아 근처 교회에 넘겼다. 도시를 들를 때마다 소매치기며 강도 만난 건 너무 흔해서 세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며 내내 혀를 차고 있던 세라티였다.

"이게 대체 어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요?"

"응? 그 정도야 그냥 여행하다 보면 일상 아닌가?"

"대체 두 사람 다, 전생 땐 무슨 삶을 사신 거예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도적질은 대개 우리가 저질렀지?"

"우리가 사령술사였고요."

"강도질, 소매치기도 우리가 했지, 당한 적은 없구나."

항상 여행하며 봐 온 광경이었기에 별생각 없었는데 원래는 저 광경을 펼친 놈이 카르나크 자신이었다.

이 두 인간 말종들을 제외하면 세상은 충분히 평화로웠다는 소리다.

"아, 지금 세상이 정말 혼란스러운 게 맞구만요."

"그러니 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지."

다시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가 거대한 도시, 왕도 드룬타의 전경을 눈대중했다.

"이제 킹스 오더 본부를 찾아가면 되려나?"

***

유스틸 왕국 수도 드룬타는 잘탄강을 낀 채 세워진 왕국 최대의 도시였다.

중앙엔 왕성이 우뚝 서 있고 거리 곳곳에 탑과 교회가 즐비하다. 일개 건물들도 대부분 2~3층이다.

그 웅장한 도시를 수많은 시민들이 오간다. 일국의 수도인 만큼 인구 역시 장난이 아닌 것이다.

무수한 인파 사이를 지나치며 세라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데라트 시티도 북부에선 알아주는 도시지만 수도에 비교하면 촌 동네처럼 보일 정도였다.

"우와, 역시 왕이 사는 곳답게 어마어마하네요."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시큰둥했다.

"여전히 조촐한 동네구만."

"여전히 소소한 도시이기도 하고요. 뭐, 아담해서 좋네."

"...지금 대체 어느 동네랑 비교하고 계신 건가요?"

"테아 크라한."

"론토라스."

테아 크라한은 라케아니아의 제도고, 론토라스는 7왕국 연합의 최강국 펠마이어 왕국의 수도다.

둘 다 유스틸 왕국보다 월등히 국력이 강하니 당연히 수도의 규모도 훨씬 크겠지.

"뭐, 저 두 도시도 네크로폴리스에 비하면 작았지만."

어째 으스대는 듯한 카르나크의 태도에 세라티가 피식 웃었다.

"네크로폴리스라. 이름만 들어도 뭐 하는 곳인지 알겠네요."

저런 음침한 명칭을 도시에 붙이는 경우는 보통 없다. 보나 마나 전생 때 카르나크가 세웠다는 언데드 제국의 수도이리라.

카르나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이름이 너무 노골적인가? 그런데 막상 명명하려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어."

"덕분에 전생 땐 온 도시가 네크로 천지였어요. 네크로피아, 네크로폴리스, 네크로 월, 네크로 크로스. 도로 표지판에 네크로 안 붙은 게 없었죠, 아마?"

"야, 그땐 바로스 너도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동의했잖아!"

"명명하고서야 알았잖아요. 온통 네크로로 시작하니 길 찾기 더럽게 힘들다는 거."

언데드라고 전부 좀비나 스켈레톤처럼 의식 없는 인형인 건 아니다. 데스 나이트나 뱀파이어, 리치같이 자아가 있는 언데드도 많다.

"덕분에 명칭 좀 고치자고 상소도 많이 왔었죠."

바로스의 말에 세라티가 놀라 물었다.

"언데드가 되어도 불만이 생기나요? 그냥 철저하게 복종하는 줄만 알았는데."

카르나크가 대신 대꾸했다.

"본판은 인간이잖아. 살았건 죽었건 인간은 인간이라고. 자아가 있으면 당연한 이야기지."

"전 언데드가 되면 무조건 술자에게 충성할 거라 생각했어요."

"충성은 해. 충성과 불만이 별개의 영역이라 그렇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충성스러운 놈일수록 불만도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왜 말씀하시면서 저를 봅니까, 도련님?"

그렇게 수다를 떨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슬슬 목적지가 보였다.

킹스 오더 본부는 수도 드룬타의 북쪽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안에 들어서며 습관적으로 바로스가 건물을 살폈다.

"평범한 관청 건물이군요."

하긴, 수도 한복판인데 굳이 요새처럼 꾸밀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경계는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입구의 경비병은 뛰어난 전사였고, 카르나크 일행 역시 추천서의 진위가 확인된 후에야 실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혹여 위조되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마법으로 2~3중의 검토를 마친 것이다.

"하토바 교단의 추천서임을 확인했습니다. 곧 상부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천서를 들고 멀어지는 안내인을 보며 카르나크가 기쁜 듯 웃었다.

"추천서 진위 여부에 민감하군. 위조를 시도하는 놈들이 많은 모양이야."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위조범이 많다는 게 왜 기뻐하실 일이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킹스 오더가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라면 굳이 사교단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특무기관이니 뭐니 감투 달아 놓고 속으로 썩어 든 경우를 하도 많이 봐서, 킹스 오더도 그런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

바로스가 손을 저었다.

"에이, 킹스 오더 창설된 게 1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부패했겠어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썩는 데 일정 시간은 걸리는 법이다.

"그러니까 다행이라고. 여기 있으면 제대로 사교단과 접촉할 수 있겠어."

그러는 동안, 추천서를 들고 갔던 안내인이 다시 일행에게 돌아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오더 로드께서 세 분을 맞이하실 겁니다."

***

카르나크 일행은 잠시 본부 1층에서 기다렸다.

그동안에도 수시로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사복이나 제복 차림, 간혹 마법사나 신관의 복장을 한 이들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스가 혀를 내둘렀다.

"다들 만만치 않네요."

바로스쯤 되면 그냥 상대를 보기만 해도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안다. 하나같이 어딜 내놔도 꿀리지 않을 강자들이었다.

"란돌프, 여기 왔으면 처맞았겠는데요?"

데벤토르 최강의 기사조차도 여기선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나크가 긴장하며 말했다.

"대부분 5서클 이상의 종사자로군. 6서클도 간혹 보이고."

위대한 사령술의 지혜를 지닌 그라지만 혼돈마력만으로는 아직 4서클에 불과하다. 물론 계속 마력을 키우고 있으니 조만간 5서클에 진입할 수는 있겠지만....

"예상외로 수준이 높은데? 이러다 우리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세라티도 놀란 눈치였다.

"오러 유저도 2명이나 봤어요. 저랑 비슷한 적색급의 경지였던 것 같은데."

그녀는 여태 자신 외에 다른 오러 유저를 본 적이 없었다.

데라트 시티는 물론 그 일대를 통틀어도 세라티가 유일한 투기 각성자였다.

"그 희귀하다는 오러 유저가 흔하게 보이다니, 역시 수도는 다르네요."

그녀의 감탄에 카르나크가 핀잔을 흘렸다.

"에이, 오러 유저가 드문 건 사실이지만 희귀하다고 할 정돈 아니지. 특히 적색급 수준이면."

"또 카르나크 님만의 제멋대로 기준인 거예요?"

"그보다는 관점의 문제지."

오러 유저는 분명 드문 존재다. 인구 80만이 넘는 유스틸 왕국에서도 채 100명이 안 될 정도로.

그런데 사실, 인구 80만 정도는 대륙에서 그리 큰 나라가 아닌 것이다.

유스틸 왕국처럼 작은 나라에서도 100명 가까이 있는 존재가 과연 희귀한 거냐고 묻는다면 또 애매하다.

"노는 물에 따라 관점도 달라진다는 건가요?"

"여기가 일국의 수도라는 점도 있고."

무릇 인간이라면 능력이 커질수록 돈과 명예를 찾아, 보다 큰물에서 활약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세라티 너도 원래는 수도로 향할 예정이었다며."

안 그래도 숫자 적은 오러 유저나 고위 마법사인데 죄다 돈 되는 수도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지방에선 오러 유저 보기가 힘들지. 고위 성직자야 7여신교가 직접 관리하니 지방에도 골고루 분포해 있지만."

수도에선 오러 유저라고 대접받길 기대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물론 인정은 해 주겠지만 지방에서처럼 마구 떠받들어 주진 않을 것이다.

뭐, 세라티 입장에선 별문제가 되진 않았다.

"어차피 카르나크 님이랑 엮인 이후엔 대접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흥!"

뾰로통한 그녀를 보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뭐 괄시한 거 있냐?"

"그러게요. 세라티 경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데."

"본인들은 모른다는 게 제일 문제라고요."

어쨌거나 주위를 둘러볼수록 전생 때는 겪어 보지 못한 신선한 감각이 느껴진다.

주눅이었다.

"와, 이러다 우리 진짜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실적 좀 더 쌓은 다음 올 걸 그랬나요, 이거?"

"남의 평가에 전전긍긍해 보는 건 처음이야. 신기한 기분이네."

"저도요."

다 큰 사내 둘이서 손가락 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세라티가 혀를 찼다.

"얼마나 막 사셨으면 남의 평가를 신경 쓰는 게 처음일 수가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침내 안내인이 카르나크 일행을 불렀다.

"로드 에란텔께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53화. 13. 킹스 오더 (4)

일행이 안내받은 곳은 킹스 오더 본부 3층의 한 집무실이었다. 중후한 인상의 40대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킹스 오더의 단장을 맡고 있는 에란텔이라 하네."

에란텔 폰 나이아드.

그는 왕실 기사단장인 알론드 경과 함께 유스틸 왕국에서도 둘밖에 없는 자색급 오러 유저, 퍼플 나이트의 경지에 오른 유명한 기사였다.

원래는 유스틸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공명정대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 세인의 평도 좋고 국왕 위스콧 1세의 신임도 두텁다.

그런 그를 킹스 오더의 단장으로 앉혔다는 건 그만큼 왕실에서도 이 사안을 중히 여긴다는 의미다.

일행도 자기소개를 했다.

"제스트라드의 카르나크입니다."

"카르나크 남작님을 섬기는 세라티입니다."

"카르나크 남작님을 섬기는 바로스입니다."

손에 든 추천서를 가리키며 에란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3명 다 자격은 충분하더군. 신분도 확실하고. 무엇보다 알리우스 심문관의 추천이니 신뢰할 만하지."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몰래 눈빛을 교환했다.

'알리우스가 꽤나 유명한가 보지?'

'그러게요. 수도에서도 이름을 알 정도네요?'

이들이 실감을 못 했을 뿐이지 사실 알리우스는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1급의 위계에 오를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 거기에 심문관으로서의 활약도 대단하다.

데라트 시티에서 하토바 교단이 처리한 사령술사의 숫자는 무려 50이 넘는다. 유스틸 왕국의 모든 교단을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실적인 것이다.

"알리우스 심문관이 신중을 기해 고른 이들이라면 영광스러운 킹스 오더의 일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문득 에란텔이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 킹스 오더가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입단했다 해서 바로 정식 킹스 오더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분간은 신입 단원 자격으로 실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고참 오더 밑에서 사교단을 상대하며 현장을 익히게 하며,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인지에 대한 마지막 검토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직 킹스 오더라 할 수 없지. 명령을 받아 킹스 오더의 일을 하는 것일 뿐."

쉽게 말해, 즉결 처형권이나 포괄적 심문권같이 악용될 권한은 주지 않고 일 처리 능력만을 일단 판단하겠다는 소리였다.

"자네들뿐 아니라 신입이라면 모두 거치는 과정일세."

카르나크도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쉽게 받아들여졌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사교도들도 간단히 침투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꽤 신기한 조합이더군? 한 영지의 주인과 그 기사들이 한꺼번에 입단이라...."

"혹시 문제가 됩니까?"

카르나크의 질문에 에란텔이 손을 저었다.

"응? 아, 그렇진 않아.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전에도 영주가 직접 휘하 기사를 거느리고 가입한 경우가 있었다. 3대대의 대장인 롤랑 자작이 그 케이스였다.

대귀족이야 가문의 주인이 이런 목숨이 걸린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건 책임감 없는 행동이겠지만, 시골 귀족들에겐 오히려 가문의 위세를 높일 좋은 기회다.

특히나 영주가 공명심에 불타는 젊은 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문 입장에선 영주쯤 되는 인물을 그냥 사지로 보낼 순 없으니 당연히 강력한 기사를 옆에 붙이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자격도 없는 이를 휘하 기사만 보고 킹스 오더로 임명할 순 없으니 대부분 탈락이지만, 저 조합 자체는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닌 것이다.

에란텔이 진짜 신경을 쓴 건 다른 쪽이었다.

'...제스트라드 남작가가 오러 유저를 품을 정도의 가문이었나?'

본인 앞이라 돌려 말하긴 했지만, 평범한 변경 지방 귀족의 기사라기엔 세라티의 실력이 과했다.

저 나이에 투기를 각성할 정도의 재능이라면 어지간한 대공가에서도 눈독을 들일 인재이니까.

'고블린 손의 명검인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알리우스의 추천서에 따르면 카르나크 남작은 기량에 비해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세라티가 오러 유저 특유의 감각으로 이를 미리 파악한 걸까?

에란텔은 이내 호기심을 접었다.

'흠, 두고 보면 알겠지.'

어차피 실습 기간은 거쳐야 한다.

정말 카르나크가 드러나지 않은 보석이라면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것이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죽거나 귀향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뒷짐을 진 채 에란텔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그대들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리겠네."

바로스와 세라티가 당황해 되물었다.

"네? 지금 당장요?"

"저희 오늘 여기 왔는데요?"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중년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의 일이란 게 그렇다네. 항상 일이 터지고, 항상 바쁘지. 자네들도 익숙해져야 할 게야."

각오해라, 이제부터 고생문 열렸다, 라는 의미가 담뿍 담긴 미소였다.

"킹스 오더에 온 걸 환영하네."

***

킹스 오더는 단장인 에란텔 경을 중심으로 일곱 대대로 이루어지며, 각 대대의 인원은 8~10명 정도의 소수 정예로 구성된다.

카르나크 일행은 그중 4대대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첫 임무를 함께할 선임 킹스 오더들을 만났다.

유서 깊은 명문 귀족인 알반 백작가의 차남으로 5서클의 종사자인 마법사 타르만.

어둠사냥꾼으로 활동하다가 킹스 오더에 투신하게 된 검사 칼드.

바다의 여신 아티마의 2급 심문관 앨리스가 그들이었다.

다음 날, 이들은 꼭두새벽부터 수도 드룬타를 떠나 왕국 남부로 향하고 있었다.

관도를 따라 움직이며 세라티가 투덜거렸다.

"왕도 구경도 못 하고 바로 출발할 줄은 몰랐어요."

전생 때 드룬타 자체는 지겹게 봐 왔던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아쉬워하긴 마찬가지였다.

"쳇, 맛집 리스트 다 뽑아 놨었는데."

"그러게요. 서쪽부터 차례로 순회할 생각이었는데."

투덜대던 바로스가 앞장선 이들에게 물었다.

"혹시 킹스 오더는 항상 이렇게 바쁩니까? 쉬는 기간도 없을 정도로?"

"설마 그렇겠나?"

오동통한 체구를 지닌 30대 사내, 킹스 오더의 4대대장 타르만이 성격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자네들은 타이밍이 좀 안 좋았어. 하필 우리 임무가 떨어진 그날 도착했거든."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인 거였군요."

"운이 좋은 거라 할 수도 있지. 수습 기간 길어서 좋을 것도 없잖나?"

검사 칼드가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타이밍이 좋아 봐야 며칠 정도 대기하는 게 다였을 겁니다.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인상을 지닌 청년이었다.

특이하게 단도와 장검의 쌍수 검투술을 쓴다는데, 델림 지방 일대에선 적수가 없는 강자였다고 한다.

"그래 봤자 킹스 오더에선 평범한 축이지만 말이죠. 아직 투기도 각성 못 했고."

중얼거리며 칼드는 세라티를 힐끔거렸다.

역시 검에 뜻을 둔 이답게 새로 입단한 오러 유저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반면 성직자인 앨리스는 세라티의 다른 부분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세라티 씨는 피부가 굉장히 고우시네요? 오러 유저답지 않게."

"...피부랑 오러가 상관이 있나요?"

"우리 대대에도 오러 유저가 둘 있는데, 둘 다 전신이 상처투성이거든요. 그래서 오러 유저라면 다들 그런 줄 알았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바로스가 문득 의아해했다.

'4대대에 오러 유저가 둘 있다고?'

참고로 4대대의 대장은 눈앞의 마법사 타르만이다. 그렇다는 건....

"오러 유저가 고작 일개 대원이라는 겁니까?"

그래도 오러 유저쯤 되면 당연히 대장을 맡을 줄 알았다.

타르만이 피식거렸다.

"왜? 난 아직 5서클에 불과한데 오러 유저가 내 밑에 있는 게 이상한가?"

"아, 아니요. 타르만 공이 약하다는 소린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아직 오러 유저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니까."

보통 적색급, 레드 나이트는 6서클의 마법사와 동격으로 대우받는다.

물론 전투력의 비교는 좀 애매하다.

소규모 전투라면 적색급 오러 유저가 6서클 마법사를 압도할 것이고, 대규모의 전장이라면 6서클 마법사가 훨씬 승리에 도움이 될 테니까.

어쨌건 5서클이라면 분명 오러 유저보다는 격이 낮은 것이 사실.

그럼에도 타르만이 대장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단 내가 백작가의 혈통이란 점이 크지."

아무리 실력 위주의 소수 정예라도 신분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우리 임무에선, 신분도 실력의 일부거든."

사령술사야 색출한 시점에서 그냥 죽이면 끝이다.

하지만 사교도는 귀족이나 왕족일 경우 속세의 신분을 이용해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많다.

애초에 저 속세의 권력자들 때문에 일부러 킹스 오더를 창설한 것 아닌가?

"나처럼 빽 든든하고 혈통 좋은 놈이어야 빽 좋고 혈통 좋은 사교도 놈들을 찍어 누르기 쉽지 않겠나? 세상엔 실력보다 가문의 위세를 더 높이 치는 놈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사실은 이게 더 중요하다.

"사교도 상대로는 전투력보다 오히려 다른 부분이 더 필요하다네."

오러 유저라면 당연히 전투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런데 사교도들이 어디 정면으로 정정당당하게 덤벼 주는가?

"킹스 오더의 주 임무는 전투보다 정보 수집, 사교도 색출, 요인 납치, 심문 쪽이 더 많지. 실전 능력만 높다고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아."

세라티가 혀를 찼다.

"어째 몹쓸 짓 하는 임무뿐인 것 같은데요?"

타르만이 낄낄 웃었다.

"정확히 파악했군! 사교도에게 몹쓸 짓 하는 게 바로 우리 일이라니까?"

그런 만큼 사교도 상대로는 단순히 싸움만 잘하는 오러 유저보다는 다양한 수법을 지닌 마법사가 좀 더 유리하다.

그래서 킹스 오더의 대장들은 대부분 마법사였다.

킹스 오더 전체를 총괄하는 단장은 간판 역할도 겸하니 명성 높은 기사인 에란텔 경이 적격이지만, 실제 임무에서는 마법사가 오러 유저를 부관으로 두고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전쟁터와는 정반대네요."

"전장에서야 대장이 앞장서서 빛나는 검 열심히 흔들어 줘야 병사들 사기가 오르니까 오러 유저가 최고지. 하지만 우리 임무는 누가 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니지 않나?"

고개를 끄덕이던 세라티가 다른 의문을 품었다.

"그런 이유라면 성직자에게도 자격이 있지 않나요?"

다양한 수법이란 면에선 성직자도 마법사 못지않다. 무엇보다 사령술 상대로는 마법사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당장 알리우스 씨도 심문 같은 건 잘하던데.'

그 대답은 앨리스가 대신해 주었다.

"킹스 오더는 7여신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곳인데 저희 같은 신관들에게 대장 자리를 줄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대장이 될 만큼의 고위 성직자가 있지도 않았다.

킹스 오더에 배치되는 일곱 여신의 성직자들은 전원 2급 심문관들이다.

특급이나 1급은 7여신교가 자기들 일 처리하기도 벅차니 못 내주고, 3급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수준이 낮아 킹스 오더의 임무에 못 따라가고.

"저야 별 불만은 없지만요. 여기서 실적 많이 쌓으면 1급 심문관에 오를 가능성도 높아지거든요."

오가는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카르나크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슬슬 자세한 사항을 알려 줄 때가 아닙니까?"

"응? 자세한 사항이라니?"

"우리 임무에 대해서 말이죠."

임무에 대한 대략적인 브리핑은 받았다.

『유스틸 왕국 남부의 지방 귀족 중 하나인 브렐란트 백작에게 검은 신의 교단에 투신했다는 혐의가 있다.

신분을 숨기고 모험가로 위장한 뒤 브렐란트 백작령으로 향해, 확실한 증거를 파악한 뒤 국왕의 이름으로 백작을 벌하라!』

하지만 보다 자세한 사항은 하나도 듣지 못한 것이다.

"백작에게 어떤 혐의가 있는 건지, 그 정보가 정말 확실한 건지, 어떤 증거를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습니다만."

카르나크의 요구는 분명 타당하다.

그럼에도 타르만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전부일세."

"네?"

"그게 다라고. 우리가 아는 모든 걸 자네도 알고 있구만."

"아니, 그럼 상대가 진짜 사교도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움직이는 겁니까?"

"그걸 알아보려고 지금 우리가 움직이고 있지 않나?"

쉽게 말해서, 맨땅에 헤딩하는 것부터가 임무란 소리다.

"왜 그리 바쁘다는 건지 알겠군요."

고개를 젓는 카르나크를 보며 타르만은 히죽 웃었다.

본부에서 본, 단장 에란텔의 입가에 걸린 것과 똑같은 미소였다.

"킹스 오더에 온 걸 환영하네."

#54화. 14. 검은 신의 영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7여신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삶을 살며 죽음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이는 진리였다.

아무리 강한 자도, 권세를 누린 왕이라도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그렇기에 브렐란트 백작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겨우 본 소중한 아들이 타고난 체질 탓에 서서히 죽어 가도, 7여신교의 신성 주문으로도 고칠 방법이 없어 스물을 넘길 수 없을 것이라는 가혹한 이야기를 듣고도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것이 운명이었으니까.

인간이라면 감내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아니었다.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세계의 이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 없이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였다.

진정한 신에게 귀의하라고. 그리하면 아들이 살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 그들 말대로라면 아들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제의한 것은 어둠의 술법, 사령술.

당연하게도 브렐란트 백작은 크게 분노했다.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를 저버리고 사악한 힘에 손을 대라는 것이냐?"

하나 그들은 오히려 반문했다.

"누가 그것을 자연스럽다 말했습니까?"

"7여신께서 정하신 세상의 이치가 아니냐?"

"정녕 여신께서 당신에게 그 가르침을 내리셨습니까? 여신의 뜻을 안다 칭하는 7여신교의 신관들이 한 말이 아니고요?"

"하! 그럼 네놈들은 진정한 신의 뜻을 안다는 말이냐?"

그들은 7여신교의 가르침을 차근차근 부정해 갔다.

"신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처하는 이가 있다면 실로 오만한 자이겠지요."

"우리가 말씀드리는 것은 신과 여신이 아닙니다."

"신과 여신을 따르는 인간에 대한 것이지요."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저 세상을 조금만 넓게 보시라는 겁니다."

"세상이 사령술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백작님께선 과연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브렐란트 백작은 현혹되지 않았다.

"헛소리! 사령술에 빠진 자의 말로가 어떤지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죽은 자를 살리려 사령술을 쓴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다.

소중한 사람을 살렸더니 괴물이 되었다.

다 썩어 가는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었다.

육신은 물론이고 정신조차 더 이상 자신이 아는 소중한 이가 아니었다, 등등.

하나같이 아름답게 끝나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사령술이 그토록 추악한 수법으로 불리는 것 아닌가?

그들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령술의 말로는 그리 좋지 못했지요."

"지금까지는."

그리고 그 이유까지 입에 담았다.

"이는 진정한 사령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령술은 결코 죽음과 어둠의 능력을 다루는 마법 같은 것이 아니다.

어둠과 죽음의 신 테스라낙, 저 위대한 초월자가 내려 주는 성스러운 권능이다.

"이를 그저 오만한 마법사들처럼, 죽음과 어둠의 권능을 도구로 생각해 휘두르려 했으니 생긴 일일 뿐."

"실제로 마법사들이 신성 주문을 억지로 마법으로 구현하려다 사고를 치는 경우도 많지 않았습니까?"

그들, 테스라낙의 신관이라 자처하는 사령술사들은 자신들의 힘을 어둠의 신성 주문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만이 진정한 어둠과 죽음의 권능을 다룰 수 있다고.

"진정한 어둠의 힘은 테스라낙을 섬기며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7여신교의 신관들이 여신을 섬기며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하면 죽음은 운명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노화는 질병일 뿐이며, 죽음은 질병을 치유하지 못한 자가 맞이하는 결과일 뿐."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 어찌 사악한 행위라 하겠습니까?"

"하물며 아드님은 아직 어리시죠."

"어린아이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녕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라고 보십니까?"

브렐란트 백작은 흔들렸다.

그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아들은 점점 죽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7여신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결국 백작은 뜻을 꺾었다.

"테스라낙께... 귀의하고 싶다. 나를 받아 주시겠는가?"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일단 아들부터 구한 뒤, 7여신교를 찾아 자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죽어 가던 아들은 새로운 삶을 받았다.

***

수도를 출발하고 이레 뒤, 타르만과 카르나크 일행은 브렐란트 백작령에 도착했다.

브렐란트 백작령은 상당히 융성한 곳이었다.

마을도 상당히 크고 오가는 영지민의 안색도 좋다. 시장을 살펴봐도 물건의 종류가 많고 활기가 가득하다.

거리를 살피며 세라티가 중얼거렸다.

"우리 영지도 꽤 잘사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비교가 안 되네요."

무심코 그녀는 제스트라드 영지를 우리 영지라 표현하고 있었다. 그사이 꽤나 정이 든 모양이었다.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구리 광산 얻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딱히 물류 이동의 중심지도 아니었고."

어쨌거나 브렐란트 백작이 유능한 영주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사교도가 된 걸까요?"

세라티의 질문에 타르만이 작게 첨언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아직 확인된 건 아니라네."

브렐란트 백작에게 걸린 혐의라는 게 사실 근거는 빈약하다.

그냥 킹스 오더 2대대가 붙잡은 사교도를 심문하던 중, 브렐란트 백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는 게 전부인 것이다.

"허탕일 가능성이 절반 이상이지."

납득이 안 간다는 듯 카르나크가 물었다.

"그런 식이라면 정보 수집 담당을 따로 두는 게 낫지 않습니까?"

솔직히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재들을 일부러 모은 뒤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직접 시킬 필요는 없지 않나? 그냥 정보 수집은 따로 시키고 킹스 오더는 목표만 처리하는 게 효율적인 것 같은데.'

이어진 타르만의 반문에 카르나크는 비로소 자신이 뭘 착각하고 있는지 알았다.

"자네가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킹스 오더를 따로 창설한 것 아닌가?"

"네?"

"정보 수집 같은 고난이도의 임무를 그럼 아무나 할 수 있겠나?"

감각의 차이였다.

정예 병력은 귀하니까 대기시켜 두고, 좀 떨어지는 애들을 정보부로 써먹는다. 이것이 사령왕이던 시절의 감각이다.

그런데 그 정보부의 조건은?

엄청나게 강할 필요는 없지만, 정보 수집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일정 수준 이상의 전투 능력은 필수다. 그래서 삼류 중에선 그래도 쓸 만한 수준의 언데드 전력을 정보부로 삼아 운용하곤 했다.

저 '쓸 만한 수준의 언데드 전력'과 비견되는 인간 측 전력이 바로 '적색급 오러 유저, 혹은 6서클 전후의 마법사나 2급 이상의 신관'인 것이다.

'정예 병력이란 게 바로스가 지휘하던 데스 나이트 군단 같은 게 아니지, 참.'

카르나크 기준의 소수 정예라면 일반인 기준에선 그냥 비대칭 전력, 1인 군단급이다.

하여튼 왕년에 잘나갔다가 몰락한 놈들의 문제가 이거다.

주제 파악 못 하고 왕년 생각만 하면서 상황을 재단한다는 것.

'아, 계속 신경은 쓰는데도 참 감각을 고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네.'

내심 카르나크가 툴툴댈 동안, 타르만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고문을 통해 얻은 정보이니만큼 전혀 검증되지 않았지. 그러니 선입견을 가지고 백작을 대해선 안 될 게야."

옆에서 칼드와 앨리스도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인간이란 고문을 당하다 보면 정말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마구 늘어놓기 마련이라, 심문하는 입장에서도 진위를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무엇보다, 본인이 착각하는 경우라면 아무리 진위를 파악해 봐야 의미가 없기도 하고요."

이해가 간다며 세라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있는 경우도 있겠군요? 점조직 특성상, 일부러 가짜 정보를 흘려 킹스 오더를 속이려 할 수도...."

그리고 바로 타박을 받았다.

"에이, 그럴 리는 없지요."

"저잣거리 이야기책을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니에요?"

점조직이랍시고 휘하 조직원에게 일부러 가짜 정보를 흘린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

"아무 상관 없는 귀족을 찾아가 '테스라낙 만세!'라고 속삭인 뒤 일망타진당하게요?"

정보를 알려 주지 않을 순 있어도, 가짜 정보를 넘길 순 없다. 그랬다간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르는 셈이 된다.

"그, 그러네요."

부끄러워하는 세라티를 타르만이 달랬다.

"아직 정규 일원이 아니니 착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견습 기간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저편에 미리 봐 둔 여관이 나왔다.

타르만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일단 짐을 풀고, 흩어져 조사를 시작하세나."

***

여관에 도착한 카르나크 일행은 타르만으로부터 킹스 오더의 방식을 배웠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대 킹스 오더임을 드러내서는 안 되네."

어둠사냥꾼으로 위장해 사령술사를 사냥하러 왔다는 식이어도 경계를 사긴 마찬가지다. 어차피 검은 신의 교단 주 전력이 사령술사니까.

그렇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여기저기 질문을 던지며 다닐 수도 없다. 역시나 의심 사기 딱 좋다.

"사교도나 사령술사와는 상관없어 보이면서도 자연스레 탐문이 가능한 방식을 써야 하지."

그래서 타르만은 품에서 초상화를 몇 장 꺼내 나눠 주었다.

"여러 방식이 있지만 지금 쓸 수법은 이거라네."

바로스가 물었다.

"누굽니까, 이건?"

"헬론 크라트, 수도에서 지명수배된 악명 높은 범죄자일세. 귀족들의 저택을 다수 털고 살인까지 저질렀지. 워낙 변장술의 명수라 여태 붙잡히지 않았다네."

"호오, 드룬타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지."

"...네?"

"하지만 이런 수배자를 찾는다고 하면, 그래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면 자연스러워 보이겠지?"

수배자를 쫓는 바운티 헌터로 위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묻는다.

이 위험한 인간이 브렐란트 백작령으로 도망쳐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수상한 사람을 보았는지, 혹은 수상한 일 등을 겪은 적이 없었는지를 알려 달라.

게다가 변장술의 명수라 하지 않나? 혹시 잘 알던 이들이 왠지 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는지도 캐물을 수 있다.

"위험한 수배자가 마을에 들어왔다는데 협조하지 않을 이는 적지. 특히나 적당히 동전푼 좀 쥐여 주면 더더욱 그렇고."

이러면 질문의 목적이 달라도 답변은 사교도에 대한 정보와 겹치게 된다.

이곳 주민들 역시 소문을 떠드는 것에 대한 심적인 거리감이 적을 것이다.

"우리 돈을 받는다고 나쁜 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바운티 헌터에게 정보를 건네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뿐이지 않은가?"

이후 타르만은 일행을 세 팀으로 나누었다.

마법사인 타르만과 전사인 바로스, 전사인 칼드와 마법사인 카르나크, 성직자인 앨리스와 오러 유저 세라티.

혹여나 불미의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니 전력을 고르게 분배한 인선이었다.

카르나크 일행이야 선임의 방식을 옆에서 보고 배워야 하니 1명씩 붙였고.

그렇게 일행은 흩어져 마을 곳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목적이 있으면 행보가 당당해지는 법이다.

아무 의심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타르만은 브렐란트 백작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명목상으로는 허락을 구하는 의미였다.

수배자가 여기로 도망쳐서 우리가 잡으러 왔다. 폐 끼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거다. 이런 위험한 자가 영지 내를 배회하는 것은 브렐란트 백작가에도 좋은 일이 아니지 않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최대한 협조하겠다.

허락해 주셔서 매우 감사하다.

뭐,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볼일이 끝나자 타르만은 바로 백작 성을 떠났다. 내내 말없이 따라다니던 바로스가 의아해했다.

"저기, 이게 끝입니까?"

은근슬쩍 심문을 할 줄 알았는데, 진짜 말 그대로 허락만 받고 나온 것이다. 사교도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굳이 백작을 만나신 거예요?"

하지만 역시 경력자는 달랐다.

"원하는 건 충분히 건졌다네."

자신만만한 얼굴로 타르만이 손짓을 했다.

"슬슬 여관으로 돌아가지."

#55화. 14. 검은 신의 영지 (2)

해가 저물자 다른 일행도 여관으로 돌아왔다.

타르만이 모두를 모은 뒤 말했다.

"자, 그럼 정보를 교환하세나."

칼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브렐란트 백작가에 관해서입니다."

브렐란트 백작은 올해로 46세가 되는 장년인으로, 백작 부인은 일찍이 아들을 낳다 죽어 가족은 1명뿐이었다.

부인을 깊이 사랑한 백작은 이후 새로 결혼을 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극진히 보살피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들도 워낙 허약하게 태어나 스물을 넘기지 못할 거란 이야기였다.

"7여신교의 신성력으로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불치병이라는군요."

7여신교의 신성 치유술은 물론 대단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사지의 재생, 사자의 부활, 타고난 불치병 등은 신성술로도 치유가 불가능하다. 이는 여신께서 정한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다.

"그나마 7여신교 덕분에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쪽이 옳겠죠."

타르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술사들이 파고들기 좋은 부분이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일수록 사령술사에게 쉽게 현혹된다.

7여신교의 신성술로는 불가능한 것도 사령술로는 가능하다. 타인을 희생시키는 사악한 방식이라면 여신의 섭리조차도 거역할 수 있다.

물론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심문관 앨리스도 모아 온 정보를 풀었다.

"최근 영지의 치안이 매우 좋아졌다고 해요."

브렐란트 백작가에서 작정하고 강도며 도적, 부랑자 등을 검거해 영지 밖으로 추방시킨 덕분이었다.

"일단 겉으로는 훌륭한 영주님처럼 보이지만...."

앨리스의 말에 칼드가 고개를 저었다.

"의심스럽군요."

"그렇죠. 저희는 오는 길에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까요."

수도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며 인근 마을도 제법 들렀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딱히 이런 소문을 듣지 못했다.

얼핏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싶겠지만, 이는 사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자기 살던 동네에서도 추방당할 정도의 범죄자들이, 대거 다른 마을로 흘러들어 갔는데 조용히 지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다고 타르만 일행과 추방자들의 동선이 우연히 단 한 번도 겹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 추방당한 자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대규모의 행방불명, 이 역시 사령술사가 개입될 때 흔히 벌어지는 일이죠."

"백작이 뭔가 뒤가 구리다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중얼거리며 타르만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난 직접 백작의 성을 찾아가 보았다."

물론 사교도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브렐란트 백작과의 만남에서 뭔가 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중요한 건 성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였다.

"백작 성을 구경하며 재미있는 걸 찾았다네."

창문 군데군데, 유독 천이 두꺼운 커튼들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양 빛을 차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

칼드와 앨리스의 눈빛이 빛났다.

"그건...."

"어쩐지 익숙한 이야기네요."

둘 다 내심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 듯했다.

타르만이 손을 저었다.

"함부로 입에 담지는 말게. 선입견에 빠질 수도 있으니."

아직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증거를 잡을 때까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 전까진 판단을 유보해야지. 신중함 또한 킹스 오더의 의무이니."

***

배우는 입장이라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는 말없이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정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동네에 뭐 살아요, 도련님?]

[뱀파이어.]

미안하지만 카르나크 입장에선 탐색이고 수소문이고 다 의미 없는 것이다.

세라티가 의아해하며 마법 전언을 보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예요?]

카르나크가 사령술의 극에 다다른 자였다는 건 안다. 아무리 사소한 어둠의 흔적이라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무리 그래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저도 어둠의 기운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거든요? 내심 엄청 집중해서 마을 곳곳을 탐지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요.]

심지어 사령술 탐색의 전문가인 심문관 앨리스 역시 아무것도 못 찾았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둔한가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

아무리 카르나크라도 인간인 이상, 너무 희미한 흔적은 종종 놓치곤 한다.

[나라고 뱀파이어의 기운 자체를 느낀 건 아니야. 그건 철저하게 잘 감췄더라.]

제대로 사령술을 펼쳐 제대로 흔적을 모두 지웠다. 아마 알리우스가 직접 와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카르나크가 파악한 건 뱀파이어의 흔적이 아니라, 그걸 감추겠다고 펼쳐 놓은 수법이었다.

[영지 곳곳에 뱀파이어 탐지 차단 술식이 펼쳐져 있는데 왜 모르겠어?]

어떤 식으로든 사령술이 관련되면 도저히 카르나크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흔적을 그냥 놔두면 바로 알아챈다.

흔적을 지우면, 지우는 수법을 통해 바로 알아챈다.

[그럼 차단 술법마저 탐지 못 하게 또 술식을 걸면요?]

[그 술식은 뭐, 사령술 아니래니?]

[아, 의미가 없구나....]

티 안 나게 세라티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쩌죠?]

[뭘 어째?]

[저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줘야 하지 않나요?]

[뭐 하러? 어차피 저쪽도 목표가 뱀파이어란 것쯤은 짐작하고 있을 텐데.]

답을 알고 있다고 다가 아니다.

왜 그런 답을 냈는지, 증거가 무엇인지 입증하는 과정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편법으로 정답을 알게 되었다면 그 답이 왜 나왔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들키지 않을 것 아닌가?

[얌전히 옆에서 보고 배우기나 하자고. 그래야 나중에 우리도 써먹지.]

***

같은 시각, 브렐란트 백작의 고성.

어둠이 짙게 깔린 식당에서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년을 바라보며 백작이 물었다.

"배는 부르느냐?"

"예, 아버지."

술잔을 내려놓으며 소년이 미소를 지었다.

잔에 담긴 핏물을 바라보며 백작이 재차 물었다.

"...이 아비를 원망하지 않느냐?"

"제가 왜 원망하겠습니까?"

진심으로 소년은 웃고 있었다.

"난생처음, 삶이 이토록 편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는데요."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사지의 무기력함도 없다.

더 이상 깊은 밤, 잠을 설치다 극통에 울부짖으며 깨어나지도 않는다.

소년이 새삼스럽다는 듯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이런 고통 없는 삶을 살고 있었군요."

백작이 조심스레 질문을 이었다.

"뱀파이어의 삶을 살게 된 것이 만족스럽다는 거냐?"

이제 그의 아들은 타인의 피를 탐하며, 한평생 어둠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정녕 저 운명이 만족스러운 걸까?

그런 듯했다.

"어차피 인간도 무엇인가를 죽여서 먹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지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아버님은 자비로우신 것 같습니다만."

짐승의 피는 먹을 수 없다. 마물의 피도 먹을 수 없다.

오로지 동족의 피만 먹어야 하는, 숙명적으로 저주받은 괴물.

그러나 그의 아들은 여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아들에게 피를 제공하는 이들은 검은 신의 교단이 준비한 신도들이었다. 그들에게 일정량의 피를 받고 그 대가로 충분한 돈을 하사해 주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양 빛을 보지 못한다는 점은....

"원래도 못 봤는데요, 뭘."

너무 허약해 햇빛 아래에선 금방 현기증이 나는 아들이었다. 오히려 해가 진 후라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지금이 훨씬 만족스럽다.

"식습관이 조금 변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 늘었을 뿐입니다. 어찌 되었건 죽는 것보단 낫네요."

그제야 백작도 미소를 떠올렸다.

"다행이구나."

처음엔 아들만 살린 뒤 바로 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예상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물론 앞으로도 아들의 삶이 평탄하진 않을 것이다.

흡혈귀는 추악한 마물이고, 세상이 아들의 정체를 알아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퇴치하려 하겠지.

죽인다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언데드, 살아서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니까.

순간 백작은 분노했다.

'내 아들이 시체라고? 저렇게 멀쩡히 움직이고 떠들고 웃고 있는데?'

아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예의 바르고 귀족다운,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후계자였다. 성격도 지혜도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이제야 알겠다.

7여신교의 가르침이 틀린 건 아니다. 분명 그들의 가르침은 세상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세상 만물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영원치 않고 항상 변화하며, 이는 여신의 가르침조차 예외가 될 수 없는 법.

검은 신의 교단은 사교가 아니다.

그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진리일 뿐이다.

백작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거라. 언제까지고 그 몸으로 살진 않을 게다."

테스라낙께서 강림하면 저 아이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조화를 이루어 자유롭게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낙원이 열릴 테니까.

브렐란트 백작은 각오했다.

이를 위해 남은 평생을 저 아이를 위해 바칠 것이다. 그리하여 저 아이가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열고야 말 것이다.

"저물어 가는 여신의 빛이 사그라지고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일지니...."

그가 홀린 듯 검은 신의 가르침을 읊조렸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 여명이 밝아 오며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

***

다음 날도 타르만 일행은 계속 정보 수집에 나섰다.

곳곳을 오가며 수배서를 내밀고 수배자를 찾는 척하며 마을의 이상한 점을 파악한다.

앨리스를 따라다니던 세라티가 은근슬쩍 물었다.

"...뱀파이어, 맞죠?"

"일부러 입에 담진 않았지만...."

앨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로 뻔하면 상관없겠죠?"

좀비나 구울은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라 일상생활이 불필요하고, 사령이나 망령 계열은 커튼 좀 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라이프 드레인 계열로 수명을 연장시키는 사령술사들은 태양 빛 아래에서 힘만 약해지지 죽는 건 아니니까.

리치나 데스 나이트? 그 정도로 강력한 놈들은 햇빛 좀 내려찍어 봐야 흠집도 안 난다.

"언데드인데 집에 커튼 두껍게 다는 놈들은 어지간해선 뱀파이어죠."

고개를 끄덕이며 세라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렇게 계속 증거를 찾는 건가요?"

"네. 지루한 작업이죠."

하지만 의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다고 했다.

"간혹 행운이 따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악운이라고 하는 쪽이 옳겠지만."

이런 식으로 탐문을 계속할 경우, 사교도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고 그냥 무시하는 것.

바운티 헌터들이 수배자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 자체는 워낙 흔하다.

제 발 저려 먼저 정체를 드러냈다가 운 나쁘게 걸리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신중한 사교도들은 그냥 숨어서 지나가기만 기다린다.

두 번째는 긁어서라도 부스럼을 떼겠다는 경우다.

의외로 성질 급한 사교도들 중엔 이런 경우도 제법 있다.

"확률은 반반 정도?"

그래서 내일부턴 일부러 해가 진 후에 돌아다닐 셈이라 했다.

"잘하면 저쪽이 먼저 습격할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악운이네요. 위험과 기회가 동시에 온다니."

그렇게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에서 한 청년이 다가왔다. 백작가 휘하의 자경단 중 1명이었다.

"그대가 바운티 헌터, 멜라 양인가?"

참고로 멜라는 앨리스가 사용 중인 가명이다.

"무슨 일이신가요?"

청년이 서류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수배자를 찾았다. 그대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더군."

"네?"

의아해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청년은 그대로 떠났다. 그냥 시킨 일이니까 했을 뿐이라는 태도였다.

남은 세라티와 앨리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있지도 않은 수배자를 어떻게 찾았대요?"

"그러게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56화. 14. 검은 신의 영지 (3)

전달받은 정보를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마을 외곽에 수배자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다. 낮에는 다른 곳에 숨어 있는지 행적을 파악할 수 없지만, 밤이 되면 그곳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것 같다.

그러니 그때를 노려서 붙잡으시라~.

바운티 헌터들에게 정보만 휙 던져 주고 손 떼는 건 일견 영주의 책무를 유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따져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지의 병사를 움직이다가 부상자, 혹은 사망자라도 나오면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한다.

외지인이 공짜로 골칫거리를 제거해 준다는데 왜 굳이 병사들을 굴릴까?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라면 응당 취할 법한 태도였다.

"수배자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말이지."

타르만 일행은 코웃음을 쳤다.

"함정이네요."

"심지어 밤에만 나타난다고? 이건 뭐, 확정이군요."

"이 동네 사교도들은 좀 멍청한가 보죠? 이런 뻔한 함정에 우리가 걸릴 거라 생각하나?"

그때 카르나크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저기, 오히려 골치 아파진 것 아닙니까?"

"음? 골치라니?"

"사교도 입장에서 생각해 보잔 말입니다."

기껏 정보를 전해 줬는데 타르만 일행이 무시해 버리면?

진짜 목표가 수배자가 아니란 걸 인정하는 셈이다. 사교도 입장에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근거가 생긴다는 의미다.

만약 일행이 아무 생각 없이 함정으로 기어들어 오면?

평범한 바운티 헌터라는 의미가 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는 연고 없는 외지인들이 인적 드문 곳으로 와 준다는 소리다. 슥삭 해치워 버리고 대량의 맛있는 피를 챙길 수 있다.

타르만 일행이 정말 킹스 오더이고, 함정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함정에 빠진다면?

어차피 해치워야 할 킹스 오더를 유리한 장소에서 유리한 판을 깔고 상대할 수 있다.

"뭐가 됐건 사교도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없는 것 같은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들도 거기까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내심 카르나크는 혀를 찼다.

'이것들, 제법 세밀하게 움직이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허술하잖아?'

하긴, 킹스 오더가 창설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아직 다양한 노하우가 쌓일 시기는 아니다.

"젠장."

수배자 초상화를 구기며 타르만이 소태 씹은 표정을 지었다.

"수배자 찾는 수법은 앞으론 못 써먹겠군."

칼드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그럼 어쩌죠, 대장?"

무시해야 하나? 아니면 함정인 줄 알면서도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타르만이 힐끔 카르나크 일행을 보며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운이 꽤 좋아."

원래는 타르만과 칼드, 앨리스 셋이서 이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다.

이들만으로 함정인 줄 알면서 뱀파이어의 소굴로 기어들어 간다?

"승산이 없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리스크도 무시할 순 없지."

하지만 지금은 카르나크 일행, 정확히는 오러 유저인 세라티가 있다.

킹스 오더로서나 견습이지, 실전 능력은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 강자가.

"함정에 빠져 주자고."

***

그날 저녁, 타르만 일행은 마을 외곽의 한 오두막에 모여 있었다. 브렐란트 백작가가 알려 준 일명 '존재하지도 않는 수배자'의 은신처였다.

대충 아무 의자에나 걸터앉은 뒤 타르만이 중얼거렸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다들 휴식을 취하며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세라티는 의문을 가졌다.

'너무 느긋한데?'

아무리 오러 유저인 그녀를 믿는다고 해도 여유가 지나쳐 보였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뱀파이어가 그렇게나 만만한 존재인가?'

그래서 은근슬쩍 타르만에게 물었다.

"뱀파이어는 얼마나 강한가요?"

타르만이 피식 웃었다.

"세라티 경이 신경 쓸 정도는 아닐세."

뱀파이어가 되면 인간일 때보다 몇 배나 신체 능력이 강해진다. 또한 계속 피를 마시며 힘을 키우다 보면 특유의 혈마법도 구사할 수 있다.

"즉, 인간일 때보다 몇 배 강해지는 게 전부란 소리지. 피를 많이 먹은 놈들은 일류 기사 이상의 능력을 보이기도 하네만...."

그래 봤자 현 일행의 전력에 비하면 크게 경계할 정도는 아니다.

"몇 놈이나 되느냐가 관건인데...."

이 역시 사라진 인간들의 숫자를 통해 대충 계산할 수 있다. 저들의 피를 빨아먹었을 테니까.

보급을 통해 인원수를 파악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많아 봐야 10명 남짓, 큰 위협은 아니라고 판단했네. 그래서 나도 함정에 일부러 빠진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고."

세라티는 의아해했다.

"오래된 뱀파이어는 충분히 강력하지 않나요?"

그녀가 읽은 모험담 중엔 수백 년씩 살아온 군주급 뱀파이어도 나왔던 것이다.

그러자 칼드와 앨리스가 피식 웃었다.

"아, 그야 모험담 같은 데선 그렇게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뱀파이어가 있을 수 없잖아요?"

수백 년씩 피를 마시며 힘을 키운 군주급 뱀파이어라면 분명 굉장한 괴물이겠지.

그런데, 과연 수백 년씩 안 들키고 피를 마실 수 있을까?

"보통은 그 전에 정체 발각돼서 다 죽죠."

"그, 그래요?"

뱀파이어는 다른 마물들처럼 외진 곳에서 힘을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특성상 인류의 생활권에 수시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매일같이 피를 빨면서 수백 년을 버틴다?

이게 가능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뱀파이어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 전설로 치부될 것.

둘째는 투기나 마법, 신성력 같은 초인적인 능력이 실존하지 않거나 있다 해도 극히 드물 경우다.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는 걸 모두가 당연시하고, 또 인간의 몸으로도 뱀파이어 이상의 이능을 얻을 방법이 세상에 널려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냥꾼과 뱀파이어 둘 다 비슷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냥 대낮에는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피 훔쳐 먹는 범죄자일 뿐이잖습니까? 그것도 수시로 범죄를 일으켜야만 하는."

"몇 년 정도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 쳐도 수백 년을 그렇게 버틸 수는 없죠."

"그래서 오래된 뱀파이어는 진작 전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뱀파이어 자체를 근절시키기는 또 어렵죠."

"뱀파이어는 풍토병 같아서, 아무리 멸절시키려 해도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니까 말이죠."

칼드와 앨리스의 설명에 세라티는 머쓱해했다. 역시 이야기와 현실은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궁금한 점은 남아 있었다.

"오러 유저나 마법사가 뱀파이어가 될 경우엔요? 이 경우라면 뱀파이어가 되어도 충분히 강하지 않나요?"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타르만의 말에 따르면 오러 유저나 마법사, 성직자의 경우엔 뱀파이어가 된다고 딱히 좋을 게 없다는 것이다.

"투기나 마력 같은 기운은 뱀파이어가 되면 오히려 못 쓰게 되거든. 더 약해진다고 봐야지."

기운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오러 유저나 마법사라도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 기존의 투기와 마력을 잃게 된다.

평범한 뱀파이어로 시작해, 처음부터 어둠의 마력을 다시 키워야 하는 것이다.

괜히 이들의 태도가 느긋한 게 아니었다.

현존하는 뱀파이어는 아무리 오래되어 봤자 10년 이상 묵은(?) 놈들이 없고, 그 이하는 인간일 때의 강함과 무관하게 한계가 명확하다.

"세라티 경은 뱀파이어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시군요?"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어서...."

"그럼 좀 알려 드려야겠네요."

아무리 뱀파이어가 만만하다 해도 아주 무시할 순 없다.

선임답게 타르만 일행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제일 효과적인 건 역시 신성력이지요. 아니면 신성력이 깃든 7여신교의 성물이나."

이는 뱀파이어뿐 아니라 모든 언데드들의 공통적인 약점이다.

"태양 빛이야 워낙 유명한 거고...."

"은이 약점이라는 건 틀린 이야기예요. 정확히는 신성은(神聖銀)에 약한 거죠. 은이라는 금속이 제일 신성력을 담기 쉬우니까."

다만 한 가지만큼은 이들도 잘 모르는 듯했다.

"마늘의 경우엔 애매하다네."

"상대해 본 사람들마다 말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흡혈귀는 마늘을 두려워한다.

마늘 따위 전혀 소용없다. 마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미신일 뿐이다.

흡혈귀가 마늘을 꺼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실질적인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등등.

"킹스 오더 내에서도 이 부분은 의견이 분분하더군. 뭐가 진짜인지, 원."

그때 세라티는 문득 떠올렸다.

'가만, 바로 옆에 전문가가 있잖아?'

굳이 호기심을 안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냥 카르나크에게 물어보면 된다.

[뭐가 진짜예요?]

[그게, 음....]

애매하다는 듯 카르나크가 대꾸했다.

[효과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해야 하려나, 이걸?]

[네?]

[흡혈귀 사냥꾼들이 온몸에 마늘즙 발라서 냄새를 풍기거나 아예 목에 걸고 다니거나 하잖아? 이걸 뱀파이어 시점으로 바꿔 보면 이런 느낌이래.]

웬 미친놈이 전신에 배설물을 처바른 채 싸우자며 덤빈다.

혹은 목에 X을 걸고 다니며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른다.

[좀 더러운 이야기지만 이해는 바로 되지?]

세라티는 기겁했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진짜 가까이 가고 싶지 않겠네요.]

이래서 킹스 오더 내에서도 말이 전부 다른 것이다.

뱀파이어 역시 비위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며 그냥 도망가 버릴 것이고, 누군가는 애써 눈 딱 감고 무시할 것이며, 누군가는 오히려 분노해 더더욱 죽이려고 날뛰겠지.

[그래도 효과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챙겨 둬서 손해 볼 건 없어.]

실제로 타르만 일행도 이미 마늘을 한 움큼 쟁여 둔 상태였다. 급할 때 던지면 빈틈 만드는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타르만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래 봬도 킹스 오더는 왕국의 최정예들 아닌가? 방심은 금물이겠지만, 뱀파이어 무리 정도에 과하게 긴장할 필요도 없다네."

***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 갔다.

어느덧 낮이 가고 밤이 어둠을 드리운다. 석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이 컴컴해진다.

문득 카르나크가 전언을 날렸다.

[놈들이 온다. 저들에게도 알려.]

지시를 받은 세라티가 입을 열었다.

"슬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명상 중이던 타르만이 의아해했다. 성직자인 앨리스는 아직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감지했나, 세라티 경?"

"그건 아닌데, 그냥 감이 안 좋아요."

그러자 타르만뿐 아니라 앨리스와 칼드까지 안색이 바뀌었다.

"오러 유저의 감은 무시할 수 없죠."

"그렇지."

이게 카르나크가 굳이 세라티를 시킨 이유였다.

평범한 마법사가 성직자조차 감지하지 못한 뱀파이어의 접근을 눈치챈다는 건 의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라티는 상관없는 것이다.

오러 유저의 감이란 게 워낙 두루뭉술하다 보니 다들 그러려니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타르만이 마법의 완드를 움켜쥐었다.

"다들 전투준비!"

다른 이들도 각자 무기를 든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과연 뱀파이어들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가해 올까?

천장? 벽? 창문?

아니면 멀리서 불화살 같은 걸 날릴 수도 있다. 뱀파이어가 두려워하는 건 태양이지 불은 아니니까.

그렇게 한참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였다.

갑자기 앨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기운은?'

동시에 오두막이 폭발해 버렸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광량의 빛이 오두막을 직격해 날려 버린 것이다.

작긴 해도 멀쩡한 집 한 채가 일순간에 폭삭 내려앉았다.

우르르르....

쏟아지는 목재 파편 사이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사이로 6개의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앨리스가 신성한 가호를 펼쳐 모두를 보호한 덕분이었다.

"뭐야, 이건?"

"뱀파이어가 이렇게까지 강하다고?"

타르만 일행은 당황했다.

방금의 일격은 어지간한 오러 유저, 혹은 고위 마법사나 보일 수 있는 위력이었다.

마당으로 뛰어나온 일행 앞에 눈을 붉게 빛내는 뱀파이어 10명이 서 있었다.

개중 유독 눈에 띄는 놈이 하나 보였다.

"역시 킹스 오더 놈들이었군."

무리의 선두에 선, 적색으로 빛나는 칼날을 겨누고 있는 30대 중반의 장년인이었다.

"바운티 헌터 따위가 이 일격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지."

피처럼 붉은 투기검을 쥔 채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적색 오러가 흔들리며 대기를 진동시켜 섬뜩한 굉음을 발한다.

웅, 웅웅웅!

세라티는 옆을 돌아보았다.

"저기요, 타르만 공?"

분명 타르만은 오러 유저가 뱀파이어 되어 봤자 별 볼 일 없다고 했다.

차라리 새로 힘을 키우면 키웠지, 기존의 투기는 쓸 수 없다고.

"그럼 저건 뭔가요?"

타르만이 인상을 구겼다.

"...저게 어찌 된 일이지?"

#57화. 14. 검은 신의 영지 (4)

당황한 이는 타르만과 앨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칼드는 숫제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던 탓이다.

"...듀랄드 경?"

브렐란트 백작가 최강의 기사이자 적색급 오러 유저가 뱀파이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칼드의 반응을 본 듀랄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델림의 쌍검이었군. 킹스 오더에 들어갔었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칼드가 더듬거렸다.

"어, 어째서 당신이 뱀파이어가 되었단 말입니까?"

원래부터 뱀파이어였을 리는 없다. 2년 전만 해도 듀랄드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대낮에, 땡볕 아래에서 그를 본 적이 있으니까!

"대체 당신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오러 유저가 뱀파이어가 되면 오히려 힘을 잃게 될...."

아니, 그건 아니다.

지금 듀랄드의 손에 쥐여 있는 것은 틀림없는 투기검.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칼드를 뒤로한 채 타르만이 앞으로 나섰다.

"브렐란트 백작가가 사교단과 결탁했음이 확인되었군."

그새 진중한 얼굴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연다.

"킹스 오더에 주어진 권한에 의거, 그대들을 여신과 국왕의 적으로 간주하겠다! 순순히 무릎을 꿇고 왕명을 받들라!"

뱀파이어들이 기이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크크큭...."

"키키키킥...."

"왕명?"

"무릎을 꿇으라고?"

"누가 누구에게?"

타르만은 흥분하지 않았다.

정해진 절차라 취했을 뿐이다. 저들이 순순히 항복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따르지 않겠다면 즉결심판뿐!"

칼드와 바로스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카르나크도 마력을 끌어 올렸고, 앨리스도 신성한 힘을 주위에 둘렀다.

"킹스 오더여! 왕의 이름으로 저들을 벌하라!"

듀랄드도 오른손을 들었다.

"가라, 테스라낙의 첨병들이여!"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신에게 이단자의 피를 바쳐라!"

***

타르만 일행과 카르나크, 바로스는 잽싸게 원진부터 형성했다.

서로 등을 맞대고 배후 공격에 대비하며 달려드는 뱀파이어 무리를 상대하기 위해서다.

선두에 선 뱀파이어 하나가 날카로운 기합을 터트렸다.

"캬아아악!"

양 손톱이 길어지며 10개의 칼날이 되어 휘둘린다. 시뻘건 혈기의 그물이 허공을 가른다.

일반 병사라면 이것만으로도 기겁했겠지만....

"흥!"

코웃음을 치며 칼드는 공세를 받아넘겼다.

이건 사실 평범한 단검 휘두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손가락이 5개니 칼날도 5개라고? 그래 봤자 전부 손바닥에 붙어 있지 않나?

궤도는 칼날 5개가 전부 같다. 범위만 조금 넓어졌을 뿐이다.

그걸 양손으로 휘두르니 그냥 쌍수 단검술이나 마찬가지다.

"진짜 쌍검술을 보여 주마!"

칼드도 반격에 나섰다.

쌍검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단검으로 공세를 튕겨 내며 장검으로 연격을 날린다.

"으윽!"

덤벼든 뱀파이어가 피를 흘리며 물러섰다.

그 틈에 칼드가 거리를 좁혔다.

파고듦과 동시에 이번엔 쌍검이 역할을 바꿨다.

빠른 전환이 가능한 단검이 공세를 취하고, 장검의 긴 칼날이 방패가 되어 몸을 보호한다.

옆에서 기회를 노리던 다른 뱀파이어의 손톱이 칼날에 막혔다. 동시에 놈의 가슴팍에도 피가 튀었다.

"비, 빌어먹을 왕실의 개... 쿨럭!"

채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쉰다. 단검이 폐부까지 후벼 파 버린 탓이다.

이 빠른 공방의 변화야말로 칼드가 델림의 쌍검이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비록 투기를 각성하진 못했지만, 이미 그는 경지에 오른 검사인 것이다.

그렇게 칼드는 뱀파이어 둘을 상대로 노련하게 전투를 이어 갔다.

하지만 바로 결판을 낼 순 없었다.

뱀파이어는 칼 좀 맞았다고 바로 쓰러지지 않으니까.

인간이라면 일격에 쓰러졌을 중상이라도, 놈들에겐 그냥 피 좀 잃고 도로 아무는 피육의 상처일 뿐이었다.

'역시 재생력 있는 놈들은 귀찮군!'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성직자의 신성력.

앨리스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아티마시여! 당신의 검에 사특함을 베는 가호를 내리소서!"

칼드의 쌍검에 은은한 빛이 맴돌았다. 언데드의 재생력을 약화시키는 신성 주문이었다.

이걸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주문을 이어 간다.

"여신의 빛 앞에 부정한 것은 불타오를지니!"

은은한 광휘가 아군과 적군 모두를 덮어 갔다.

인간에겐 아무 문제 없지만 언데드에겐 불길처럼 느껴지는 빛이었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뱀파이어들이 악을 썼다.

"캬아악!"

"성직자!"

"저년부터 해치워!"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뱀파이어 한 마리가 할버드를 내리찍었다.

날아드는 도끼날을 보며 앨리스가 툴툴거렸다.

"만날 이래. 항상 나부터 노린다니까?"

항상 겪는 상황이란 소리는, 그 상황에 충분히 익숙하다는 의미.

몸을 틀며 그녀 역시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뱀파이어가 아니라 대지를 향해.

쿵!

땅을 타고 빛이 번지며 달려들던 뱀파이어의 발을 묶었다. 덕분에 내려치던 할버드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기세를 잃은 도끼날이 앨리스의 실드를 뚫지 못하고 도중에 멈췄다.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아티마의 섬광이여!"

빛의 탄환이 뱀파이어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억!"

나가떨어지는 놈을 보며 앨리스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성직자는 싸움 못하는 줄 알아? 우리도 공격 주문은 얼마든지 있다고!"

자빠진 뱀파이어는 금방 도로 일어났다.

언데드의 천적이라는 신성력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그리 큰 타격은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운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공격 주문 대부분이 마법에 비해 위력이 별로 안 세서 문제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성직자의 전투법이었다.

널리 신성력을 퍼뜨려 접근을 막고, 끝끝내 파고들며 약해진 적은 도로 밀어내며 철저히 호신만을 신경 쓰는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적의 숨통을 끊으려 할 필요가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동료들의 몫이다.

"파이어 블래스트!"

재차 앨리스를 노리던 중갑 뱀파이어에게 타르만의 폭염 마법이 작렬했다.

콰앙!

덕분에 놈은 기껏 몸을 일으켜 놓고 도로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크억!"

그 틈에 다른 뱀파이어가 타르만을 노렸지만....

쿠웅!

그 앞을 2미터 크기의 흙인형이 가로막았다. 타르만이 소환한 골렘이었다.

"젠장! 골렘 따위가!"

치를 떨며 뱀파이어가 손톱을 휘둘렀다.

붉은 혈기가 흙인형을 연신 내려친다. 하지만 워낙 단단해서인지 파편만 조금 떨어지는 데 그친다.

흙인형이 재차 손을 뻗어 뱀파이어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도 쉽게 빠져나갔다. 골렘이 워낙 느린 탓이었다.

마법사와 사령술사 모두 술법을 통해 고유의 소환체를 운용한다.

사령술사는 좀비나 구울, 망령이나 사령 등이고 마법사는 골렘이나 꼭두각시 인형, 혹은 환수나 정령이 그것이다.

단, 위력은 꽤나 차이가 컸다.

사령술사는 수백 마리의 좀비도 동시에 다룰 수 있고 인세에 보기 드문 언데드 괴물도 마구 소환하곤 한다.

그에 비해 마법사의 골렘이나 인형 등은 아무래도 느리고 약하다.

환수나 정령쯤 되면 그래도 비벼 볼 만한데, 같은 마력이면 마법사가 환수 하나 부를 때 사령술사는 사령 수십 마리를 부릴 수 있다.

비슷한 수준이면 사령술사의 소환술이 마법사보다 모든 점에서 월등한 것이다.

반면, 마법사에게도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

"라이트닝 블래스트!"

푸른 전격이 허공을 갈랐다. 너무 빨라 피할 수도 없었다.

뇌전이 후퇴하는 뱀파이어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크아아아악!"

적중당한 놈이 순식간에 검게 탄 재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뱀파이어의 재생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할 위력이었다.

일격의 위력은 마법사가 월등한 것이다.

비슷한 수준이면 마법사의 공격 마법이 사령술사보다 모든 점에서 뛰어나다.

그래서 소환술을 쓰는 마법사와 사령술사는 전술도 크게 다르다.

사령술사는 소환수가 전투의 주체이며 자신은 전황을 조율하는 사령관 역할.

반면 마법사에게 소환수는 몸을 지키는 방패일 뿐이다. 전투의 주체는 마법사 본인이다.

들끓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타르만이 전황을 살폈다.

'한 놈 해치웠나? 나쁘지 않군.'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의 전력을 깎았다. 반면 이쪽은 별 피해가 없다.

타르만은 힐끔 카르나크 쪽을 살펴보았다.

저들 덕분이다.

저들의 실력이 기대 이상으로 높았기에 여유로운 전투가 가능했다.

'4서클 마법사에 변경의 일개 기사라더니....'

현재 타르만 일행은 셋이서 뱀파이어 다섯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단둘이서 네 마리를 상대하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것이다!

새삼 감탄하며 타르만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세상은 넓구나. 저런 강자들이 여태 무명으로 남아 있었단 말인가?'

***

타르만 눈에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여유롭게 뱀파이어를 상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아, 이거 애매하네요.]

[하필 상대가 뱀파이어라....]

여유로운 건 맞다.

위기 따위와 거리가 먼 상황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경력을 생각하면 뱀파이어 네 마리쯤은 벌써 참살했어야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사령술사들을 상대로도 노련함만으로 쉽게 해치우곤 했으니까.

연신 마법을 날리며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얘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 놈들이었냐, 바로스?]

[모르겠는데요.]

검을 휘두르며 바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워낙 약해서 그냥 일반 잡병으로 써먹었잖아요.]

세상을 상대로 싸우며 많은 마물들을 휘하로 거느린 카르나크였다. 그 수하 중엔 분명 뱀파이어도 있었다.

문제는, 타르만 일행의 설명에 하등 틀린 부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지 오래 산 뱀파이어가 단 한 놈도 없었다. 그 전에 전부 다 죽었다.

세계 정복하고 수십 년 지난 후에는 그래도 좀 강해진 애들이 나오긴 했는데, 그땐 이미 사령왕에게 대항할 강적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좀비나 구울이 상대라면 나도 약할 때 많이 써먹었으니 대충 전법을 알겠는데....]

뱀파이어의 전투는 본 적도 신경 쓴 적도 없다.

[무시하고 그냥 일반 잡병인 셈 치죠.]

[그게 낫겠다.]

두 사람은 차분히 전투를 이어 갔다.

괜히 무리하지 말고 안전하게.

어찌 되었건 이놈들에게 질 일은 없으니까.

그렇듯 상황은 타르만 일행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별 피해 없이 뱀파이어 무리를 모조리 해치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뱀파이어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테스라낙께서 우리를 가호하신다!"

"설령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죽음의 신께서 부활의 어둠을 내려 주시리라!"

광신에 물든 이들에겐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결말조차도 테스라낙에게 귀의하는 순교일 뿐이다.

동료가 죽어 가도, 자신이 죽어 가도 개의치 않고 무자비하게 덤벼 댄다.

반면 타르만 일행의 안색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긴다고 다가 아니잖아.'

'저쪽이 어떻게 되냐가 문제지.'

전투 도중에도 칼드와 앨리스는 공터 저편을 계속 힐끔거리는 중이었다.

아까부터 무자비한 폭음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쾅! 콰콰쾅! 콰쾅!

두 줄기 붉은 오러를 교차하며 주위를 초토화시키는 세라티와 듀랄드의 전장이었다.

#58화. 14. 검은 신의 영지 (5)

붉은 칼날이 시야 가득 덮쳐 온다.

집중하며 세라티도 반격에 나섰다.

쿠웅!

투기검과 투기검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그로 인해 나무가 흔들리고 대지가 파헤쳐져 먼지가 풀풀 일어 올랐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헐떡이는 적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헉...."

뱀파이어 오러 유저, 붉은 눈의 듀랄드가 감탄한 듯 뇌까렸다.

"아직 어린 나이에 솜씨가 제법이군."

어디까지나 유리한 자의 여유로운 감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내 상대는 아니다!"

재차 오러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허겁지겁 피해 내며 세라티는 이를 악물었다.

'뭔 나이 운운이야? 딱히 경험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 몇 차례나 서로 맞붙었다. 덕분에 상대의 기량은 파악이 된 상태였다.

투기량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 아니, 그녀가 조금 우위이기까지 하다.

검술? 검술도 뭐, 붙어 볼 만하다.

나이야 듀랄드가 세라티보다 10살 이상 많겠지만, 정작 경험만 비교하면 격차가 없었다.

백작가의 기사였던 그는 어디까지나 한정된 상황에서의 전투만을 경험해 왔다.

반면 세라티는 모험가 출신이다.

기간은 짧아도 전투는 훨씬 다양하게 겪은 것이다.

특히나 최근에는 여러 사령술사를 상대하며 더욱 많은 경험을 쌓았다.

오러 유저의 기량만으로 봤을 때, 세라티가 듀랄드보다 모자란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밀린다.

단순히 힘과 스피드 때문에.

"허업!"

기합을 터트리며 듀랄드가 투기검을 내리쳤다.

단순한 일격이었다. 평소라면 바로 막아 낸 뒤 반격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세라티는 그저 버티는 것에만 급급해야 했다.

"크으윽!"

막아 내는 순간 상종 못 할 거력이 양어깨를 짓누른 것이다.

뒤이어 듀랄드가 연격에 나섰다. 투기검이 춤을 추며 좌우로 파고들어 왔다.

"타앗!"

이번에도 세라티는 그럭저럭 피해 냈다.

하지만 피하기만 할 뿐, 그 틈을 노리진 못했다.

'반격하려다 내가 당하겠어.'

연신 몰리며 그녀는 이를 갈았다.

어디를 노리는지는 뻔히 알겠는데, 알면서도 힘에 밀린다.

다음 공세가 어떤 궤도로 날아들지도 알겠는데, 스피드에 밀려 손을 쓸 수가 없다.

'진짜 뱀파이어 짜증 나네....'

인간을 초월하는 뱀파이어의 신체 능력에 오러의 힘이 덧씌워지니, 원래 적색급 오러 유저라면 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나온다.

그럼 왜 레드 나이트는 저런 파괴력을 낼 수 없냐고?

저게 가능한 시점에서 이미 레드 나이트가 아니라 블루 나이트의 경지거든.

그런데 또 듀랄드가 블루 나이트의 경지냐 하면 그건 아니다.

청색급 오러 유저처럼 능란하게 유능제강의 묘리를 펼치진 못한다. 기술 자체는 그냥 평범하다.

'검술은 밀리지 않는데 힘에서 밀리다니!'

여태 그녀가 상대했던 일반 기사들의 심정을 역지사지로 느끼고 있다 하겠다.

승기를 잡은 듀랄드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테스라낙께서 내려 주신 권능을 맛보라!"

"그냥 뱀파이어 되고 힘 좀 세진 것뿐이잖아! 그게 무슨 신의 권능이야?"

"어둠의 일족이 되어서도 투기가 빛난다! 이것이 신의 권능이 아니면 뭐가 권능이란 말이냐?"

"아, 그건 또 그럴듯한 소리긴 한데...."

멍하니 중얼거리던 세라티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설득당할 상황이 아니지.'

어쨌거나 곤란하다.

다행히 다른 동료들은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 봐야 별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듀랄드라면 타르만 일행이나 힘을 감춘 카르나크며 바로스까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세라티가 패하면 다른 동료들도 위험하다.

물론 저기까지 가면 카르나크가 본색 드러내고 듀랄드를 해치워 버리겠지만....

'그래도 어차피 타르만 씨 일행은 다 죽을 거 아냐!'

아니면, 죽진 않더라도 뭔가 기억에 심각한 하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겠지.

타르만 일행을 위해서라도 결코 패배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세라티의 등이 식은땀으로 천천히 젖어 갔다.

'어쩌지, 이거?'

***

상황을 살피던 카르나크가 슬쩍 마법 전언을 날렸다.

[야, 바로스. 저대로라면 세라티 지겠는데?]

검술이 문외한이라고 전투에도 문외한인 건 아니다.

그가 전생 때 겪은 전투가 얼만데? 대충 보기만 해도 견적이 나온다.

[세라티 실력 키워 주는 것도 좋지만 슬슬 교대해야 하는 것 아니냐?]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무립니다.]

그라고 일부러 세라티에게 듀랄드를 떠넘긴 건 아니었다.

[제가 덤비면 필패예요. 마즈눈 상대할 때 못 봤어요?]

[그럼 곤란한 거 아니냐? 너도 질 정도면 세라티는 전혀 승산 없잖아. 너보다 약한데.]

[대신 세라티 경은 신체 능력이 저만큼 떨어지진 않잖아요.]

현재의 바로스가 감당할 수 있는 격차는 딱 세라티 정도였다. 더 벌어지면 아예 기술 자체가 먹히질 않는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란돌프 상대로 몸 사린 것 아닙니까?]

당시엔 갓 회귀한 상태였다. 머릿속에 기술과 경험은 다 들어 있지만, 전혀 단련하지 않은 육체로는 그걸 펼쳐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악마 마즈눈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야 단련깨나 했지만, 그래서 기술은 다 펼칠 수 있었지만, 그냥 피지컬에서 너무 압도적으로 밀려서 아무것도 못 했다.

[먹히지도 않는 완벽한 기술보다, 먹히기라도 하는 어설픈 기술 쪽이 오히려 승산이 높죠.]

[그러다 지면? 또 나보고 사령술 쓰라고?]

[안전한 수법이 있잖아요. 플랜 p 쓰시죠, 플랜 p.]

[아, 그게 있지. 참.]

그제야 카르나크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바로스를 세라티에게 빙의시키는 정도라면 타르만 일행 몰래 구사할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로 세라티의 정신 건강에 지대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세 번쯤 하면 미치니까, 아직 한 번 정도 여유는 있네.]

참고로 이 '은밀한 마법 전언 체계'에 가입해 있는 건 카르나크와 바로스뿐만이 아니다.

정신없이 싸우던 세라티가 치를 떨었다.

[저기요! 다 들리거든요!]

자칫하면 미쳐 버리니까 경계하라 해 놓고, 이렇게 간단히 또 저지르겠다고?

카르나크가 그녀를 살살 달랬다.

[괜찮아. 한 번 정도 여유 있다니까.]

[그래서 정말 위급할 때를 위해 남겨 둔다면서요!]

[지금 위급해 보이잖니.]

세라티는 이를 갈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아까까진 그냥 타르만 일행의 안위만 걱정될 뿐이었는데 이젠 그녀 자신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겨야 해! 절대 지면 안 돼!'

세라티의 기세가 달라졌다.

두 번까진 괜찮다고? 그게 사실이란 보장이 어디 있나?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놈이 한 소리인데!

'여기서 패하면 정신병자 될지도 몰라!'

날카로운 칼날처럼 투기가 매서워지며 놀라운 각오가 전신에 맴돈다.

급변한 그녀의 공세에 듀랄드의 안색도 변했다.

'뭐, 뭐지? 보통 각오가 아닌데?'

***

세라티는 필사적으로 싸우고 또 싸웠다.

"타앗! 하압!"

아까까진 그냥 관용적 의미로 '필사적'이었지만 지금은 진짜로 목숨이 걸린 상황인 것이다.

미쳐 버린다고 목숨까지 잃는 건 아니지 않냐고?

'저 인간이 쓸모없어진 권속을 챙겨 줄 리가 없잖아!'

여태 봐 온 카르나크의 인성을 생각하면 바로 내다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으아아아아!"

그 가공할 투지 앞에 듀랄드도 아까처럼 여유 있게 움직일 순 없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뀐 거냐!'

덕분에 몰리던 상황이 박빙의 승부로 변했다.

세라티도 듀랄드도,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매섭게 투기검을 주고받았다.

콰콰콰쾅!

그럼에도 여전히 승산은 희박했다.

간신히 팽팽한 전투를 유지하곤 있지만 승패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결국 도로 밀리게 될 것이다.

'아으으....'

투기검을 휘두르던 세라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대로 또 몸 빼앗기는 거야, 나?'

순간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때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었다.

'아냐! 정신 차려, 세라티! 이런 생각 자체가 위험한 거라고!'

그때였다.

[플랜 p 필요 없겠는데?]

느긋한 카르나크의 목소리가 마법 전언을 통해 들렸다.

[저대로라면 이기겠네.]

바로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게요. 열심히 굴린 보람이 있구만요.]

세라티는 당황했다.

'내가 이긴다고?'

왜 저들은 자신이 이길 거라 판단하는 걸까? 정작 본인은 전혀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인데!

'굴린 보람이 있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가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던 차였다.

무심코 세라티의 투기검이 듀랄드의 공세 사이로 파고들었다.

세라티 본인도, 자신이 대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이해가 안 가는 동작이었는데....

"헉!"

듀랄드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하필 그녀의 공세가 자세를 바꾸는 틈을 절묘하게 노린 것이다.

덕분에 팽팽하던 전투 흐름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어?"

당황하면서도 세라티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붉은 오러가 뱀처럼 파고들어 듀랄드의 사방을 노렸다.

한번 밀리고 나니 듀랄드의 움직임도 급격히 둔해졌다. 정신없이 그가 뒤로 물러서며 이를 갈았다.

"쳇, 제법 한 수가 있었나?"

'...무슨 한 수?'

머리는 혼란스러운데 육체는 착실히 다음 동작을 이행한다.

세라티의 연속 찌르기가 듀랄드의 좌측을 노렸다. 이번에도 투기검이 절묘하게 듀랄드의 방어를 파고들었다.

"...어?"

한발 늦게,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이거다.

투기도 각성 못 한 바로스가 오러 유저인 세라티를 가지고 놀 수 있었던 이유가.

아무리 강하고 빠른 공세를 펼칠 수 있다 해도, 그 공세의 시발점이 되는 자세를 취하는 동작까지 빨라지진 않는다.

그러니 노려야 할 건 날아드는 칼날이나, 그 칼을 휘두르는 듀랄드의 육체가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는 듀랄드 본인의 '의도'였다.

'이거였구나....'

깨달음을 얻은 세라티의 동작이 보다 유연해졌다.

물 흐르듯 깔끔하게 투기검이 원을 그리며 연신 듀랄드의 사방을 공략해 간다.

그 와중에도 계속 의문을 느끼고....

"어?"

의문과 동시에 해답을 얻는다.

"아...."

반면 듀랄드는 미칠 지경이었다.

'뭐야, 이건?'

만만하던 상대가 갑자기 어아어아 하더니 이상하게 강해진 것이다.

'대체 뭐냐? 주문이냐? 아니면 주술이야?'

왜 저 괴상한 소리와 함께 기괴한 반격이 들어오는 건데?

또 세라티의 투기검이 공세를 파고들어 온다.

"어?"

간신히 걷어 내려 하면, 도저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연격이 이어진다.

"아...."

듀랄드의 전신에 피가 튀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육체로도 감당하기 힘든, 투기로 인한 부상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

오만하던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이럴 리가 없어!'

타락한 기사의 표정 가득 절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테스라낙께서 내게 새로운 힘을 주셨거늘!'

모든 투기를 폭발시키며 듀랄드가 머리 위로 검을 쳐들었다. 자신의 안위는 도외시한 채 필살의 일격을 날리려는 자세였다.

"크아아아!"

그 모습을 본 세라티가 인상을 썼다.

'와, 치사하게!'

'너 죽고 나 죽자! 그런데 난 뱀파이어라서 어차피 안 죽어!'란 의미가 다분한 동작이었다.

여기서 아까처럼 허점을 노리려다간 팔 하나는 가뿐히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도로 물러서야 할까? 그래서 기껏 잡은 승기를 포기해?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 지금 사악한 사령술사의 권속이잖아?'

권속이 된 덕분에 잘려 나간 두 팔을 다시 얻었다.

'그럼 팔 하나쯤 내줘도 되는 거 아냐? 어차피 저 인간이 도로 붙여 줄 텐데!'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날카로운 투기검이 횡으로 베어 갔다.

양쪽 모두 자신의 안위는 도외시한, 정신 나간 참격의 격돌이었다.

파아아앗!

승패가 갈렸다.

듀랄드의 붉은 칼날이 세라티의 오른팔에 반쯤 박힌 채 피를 뿌리고....

뚝, 뚝뚝뚝....

동시에 그녀의 칼날이 상대의 목을 정확히 베어 버렸다.

서걱!

섬뜩한 음향과 함께 듀랄드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59화. 14. 검은 신의 영지 (6)

잘린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내 땅으로 떨어져 데굴데굴 구른다.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바람 빠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 끄어어어...."

주인 잃은 듀랄드의 몸통이 서서히 무릎을 꿇었다.

지켜보던 카르나크가 피식 웃었다.

[세라티도 은근 센스 좋은데? 권속인 상황을 잘 이용했잖아.]

[상대가 바보짓 한 덕분이기도 하지만요.]

듀랄드의 판단이 너무 어설펐다.

뱀파이어가 되었다면, 인간을 초월한 재생력이 생겼다면 좀 더 확실하게 움직였어야 했다.

목이 베이건 말건 무시하고 세라티의 팔을 완전히 잘랐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목이 통째로 잘리지는 않았을걸요.]

반쯤 잘린 상태에서 멈췄을 테고, 그쯤은 뱀파이어의 재생력으로 이내 복구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일 때처럼 처음부터 팔을 포기하고 확실히 목을 지키거나.]

그랬다면 서로 별 상처 없이 물러섰을 터였다.

[인간처럼 굴든가 뱀파이어처럼 굴든가 확실하게 했어야죠, 쯔쯔.]

[뱀파이어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럴 수 있지, 뭘.]

듀랄드가 쓰러지니 다른 뱀파이어들의 운명도 길지 않았다.

광신도답게 발악을 하긴 했지만 결국 하나하나 대지에 피를 뿌린다.

"크억!"

"크아아악!"

마지막 한 놈의 목을 베자마자 앨리스가 쪼르르 세라티에게 달려갔다.

"부상부터 돌볼게요, 세라티 경!"

팔의 상처는 깊었지만 절단해야 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앨리스의 치유술이 펼쳐지자 이내 상처가 아물고 고통이 잦아들었다.

물론 완치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운신에 지장이 생길 수준은 충분히 벗어났다.

팔을 움직여 본 뒤, 세라티가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앨리스 신관님."

"저희가 오히려 고맙죠, 우리끼리만 왔었더라면 오히려 당할 뻔했는데요."

진짜로 자신들 셋만 왔으면 황야의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설마 저렇게나 강력한 뱀파이어가 실존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타르만이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만 남은 듀랄드는 여전히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으어, 으어어....'

폐가 없으니 제대로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그럼에도 채 죽지도 못한다.

어둠의 힘이 목만 남은 그를 아직도 살려 두고 있는 것이다.

'아직이다! 난 아직 죽지 않았어!'

타르만이 마력을 끌어내며 손을 뻗었다.

"그래, 죽지 않았지."

백색의 섬광이 듀랄드의 머리통을 직격했다.

"죽지만 않은 거지만."

강렬한 냉기가 잘린 머리를 통째로 얼려 버렸다.

"이걸로 백작의 죄악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군."

염동 마법으로 머리통을 허공에 들어 올리며 타르만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본부에 연락해 주게, 앨리스 양. 브렐란트 백작가를 벌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예, 대장님."

***

사투가 벌어지고 사흘이 지난 뒤, 갓 정오가 지난 브렐란트 백작성.

무장한 100여 명의 무리가 성을 포위하고 학살의 장을 펼치고 있었다.

"모조리 붙잡아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중무장한 병사들이 성안 곳곳을 누빈다. 그리고 덤벼드는 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 간다.

하인들이 죽어 갔다.

"크아아악!"

하녀들도 죽어 갔다.

"아아악!"

병사들의 손속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덤벼드는 하인들과 하녀들은 결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하나같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흉성이 가득한 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인간 이상의 움직임을 보인다.

짙은 커튼으로 가려진 성의 어둠 아래 암약하며 연신 병사들에게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댄다.

"크캬캬캬!"

"캬아아악!"

그럼에도 쓰러지는 건 뱀파이어들 쪽이었다.

킹스 오더 같은 강자까진 아니지만 병사들 역시 전투에 잔뼈가 굵은 정예병이었다. 숫자도 월등히 많았으며, 무엇보다 지금은 대낮이다.

"여신의 이름으로!"

"사악한 존재를 벌하라!"

커튼을 열어젖히기만 해도 태양광이 뱀파이어들을 직격하는 것이다.

애초에 대낮에 전투를 벌인 시점에서 뱀파이어들의 힘은 지독하게 깎이는 법이다.

"아아악!"

병사들의 공세 앞에 백작성은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평소 브렐란트 가문이 자랑하던 기사들도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전원 성 밖에서 그저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럴 수가...."

"백작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어둠의 힘도 암흑교단과도 연관이 없던 기사들과 병사들에겐 현 상황이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킹스 오더가 내세운 듀랄드 경의 '살아 있는 머리'는 브렐란트 백작이 사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아니, 무엇보다 당장 눈앞에서 뱀파이어들이 날뛰고 있지 않은가?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는 법이다.

"우리 성이 사교도의 소굴이었다니...."

수하들의 충성도, 암흑교단의 비호도 사라진 브렐란트 백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성주의 자리에 앉아 칼날을 매만지며 허무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것 외엔.

"테스라낙이시여, 부디 굽어살피소서...."

자살한 백작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성이 완전히 장악된 후였다.

하지만 타르만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백작가의 모든 죄악을 붙잡은 것은 아니었다.

"백작 공자를 찾아라! 죄악의 씨앗은 단 한 톨도 남겨 둘 수 없다!"

***

성 외곽의 한 숲속을 사내 둘과 작은 소년이 달리고 있었다.

"서두르시오, 공자!"

"놈들이 언제 여기까지 쫓아올지 모르오!"

검은 신의 교단을 섬기는 사령술사, 테스라낙의 신관들이 소년을 닦달한다.

하지만 소년의 뜀박질은 점점 느려질 뿐이었다.

애초에 너무 약한 몸이었다. 뱀파이어가 되어도 간신히 평범한 또래의 체력을 복구하는 것에 불과할 정도로.

게다가 지금은 대낮인 것이다.

두꺼운 로브로 몸을 가리고 사령술로 태양 빛을 가리긴 했지만 역시 영향이 없을 수 없었다.

"헉, 헉헉...."

최대한 숲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는데도 점점 호흡이 가빠 온다. 전신 역시 축축이 젖어 든다.

땀이 아니었다.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태양광으로 인해 불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용서할 수 없다.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위대한 테스라낙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소년의 각오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숲 저편에서 3개의 그림자가 나타난 탓이었다.

"아, 역시 여기로 오네요."

"진짜 신기하네요. 어떻게 카르나크 님은 이걸 전부 파악하는 거죠?"

"말했잖아? 난 그냥 보면 보인다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추적하는 게 뭐가 힘들겠냐?"

타르만 일행을 따돌리고 따로 이들을 쫓아온 카르나크 일행이었다.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 그럼 먹잇감을 사냥해 볼까? 부탁해, 세라티."

참으로 사악한 미소였다.

내심 혀를 차며 세라티가 몸을 날렸다.

"네, 네."

사령술사들이 허겁지겁 반격하려 했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그 순간 카르나크가 손가락을 튀긴 것이다.

"누가 사령술 쓰게 내버려 둔대니?"

딱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휘감아 모든 힘을 억제했다.

경악한 사령술사들이 소리쳤다.

"당신도 사령술사였나?"

"어찌 어둠의 힘을 쓰는 자가 테스라낙을 거역하려 하는가!"

"오, 그래도 얘들은 테스라낙에 대해 뭘 좀 아나? 다행이네."

어차피 종말의 어둠을 통해 정보를 빼낼 셈이니 굳이 살려 둘 이유는 전혀 없다.

세라티의 투기검이 두 줄기 섬광을 번뜩였다. 사령술사들의 목이 일시에 날아갔다.

"크어어어...."

"으어어...."

이제 남은 것은 벌벌 떠는 어린 소년뿐.

백작 공자를 바라보며 세라티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어린 소년까지...."

이 아이가 뱀파이어라는 건 안다. 그릇된 어둠의 힘으로 생을 연장한, 결코 용서받지 못할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역시 아이를 죽이는 것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백작 공자, 당신에겐 죄가 없겠지만...."

애써 각오를 굳히며 그녀가 검을 들어 올릴 때였다.

"안 죽이고 뭐 해요, 세라티 경?"

태연한 목소리와 함께 바로스가 소년의 목을 뎅겅 잘라 버렸다.

"아?"

너무 쉽게 죽여 버려 순간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기가 막힌 세라티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니, 그, 그렇게 쉽게...."

"왜요? 얘한테 볼일 있었어요? 궁금한 거 있으면 도련님께 부탁해요. 강령술 써서 알아다 주실걸요?"

"그런 건 아니고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저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냥, 제가 악당이 된 기분이라서요."

상식적인 반응을 앞에 둔 비정상 두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그런가요?"

"우리 착한 일 하고 있는 거 아니었냐, 바로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요."

세라티도 굳이 더 따지지는 않았다.

"아뇨, 잘하셨어요."

"그치? 놀라라. 또 사람답지 않게 군 줄 알았잖아."

안도하며 카르나크가 목 잘린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조리 불타라."

화르륵!

시체 3구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인간의 형상이 불타는 광경은 실로 끔찍한 법이다. 기겁해 세라티가 외쳤다.

"자, 잠깐! 시체는 왜 태우시는 거예요?"

카르나크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내버려 두면 얘들이 가진 종말의 어둠, 교단에 반납해야 하잖아? 흔적을 지워야지."

이번엔 바로스도 의아해했다.

"혹시 처음부터 이들 못 찾았다고 하고 종말의 어둠을 전부 챙길 생각이셨어요?"

"응."

"왜요?"

지금까진 카르나크도 종말의 어둠에 크게 욕심을 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속에 깃든 정보였지, 권능 자체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교단에 넘겨 버렸다.

어차피 사령력 키워 봐야 말로가 뻔하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순수한 혼돈마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그런데 도로 예전처럼 사령력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저 양반이 왜 저러나 싶어 바로스가 카르나크를 말렸다.

"도련님? 우리 사람답게 살자고 다짐했었잖아요?"

"나도 해골바가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까진 없는데...."

종말의 어둠을 모조리 뽑아내며 카르나크가 안색을 굳혔다.

"그렇다고 적당히 힘 키우면서 몸 사릴 수도 없게 됐거든. 상황이 심각하니까."

세라티가 눈을 깜빡였다.

"심각?"

물론 그녀도 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인정한다.

종말의 어둠이 대륙을 더럽히고, 정체 모를 사교단이 권세를 키우고 있으며, 무엇보다 테스라낙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까지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이는 이미 아는 사실이고, 카르나크도 그에 맞춰 적당히 움직이겠다고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이다.

"뭔가 다른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가요?"

"응. 그 듀랄드란 놈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나크가 모든 어둠을 갈무리해 갔다.

"슈트라프란 놈도 문제고."

바로스와 세라티의 표정이 더더욱 의문으로 짙어졌다.

"슈트라프야 그렇다 치고...."

"듀랄드요?"

"그놈, 그렇게까지 세진 않았잖아요, 도련님?"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요."

카르나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들 자체는 별문제가 아니지."

"그럼요?"

그는 몸을 돌렸다. 이곳의 일을 처리했으니 도로 타르만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놈들이 나타나게 된 경위가 진짜 문제야...."

#60화. 15. 슬기로운 사교도 사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