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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60-70

#60화. 15. 슬기로운 사교도 사냥

브렐란트 백작가 건을 처리한 카르나크 일행은 정식으로 킹스 오더에 합류했다.

원래대로라면 두 건 정도 더 견습 기간을 거쳐야 하지만 타르만의 평가가 워낙 좋았기에 에란텔 단장도 바로 이들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후 그들은 4대대에 소속되어 여러 사건들을 처리했고 계속 성과를 냈다.

그렇게 3개월째.

이제 카르나크 일행은 독자적으로 사교도 소탕 임무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

유스틸 왕국 서부에 위치한, 대륙 북쪽을 남북으로 가르는 렐제베트 산맥.

라케아니아 제국과 인접한 이 험준한 산맥 깊은 곳에 수백의 무리가 모여 있었다.

대부분 평범한 농민들, 그것도 아이나 아녀자, 노인이 절반 이상이었다.

약한 이들이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신실한 기도를 올린다.

"우리를 보살피소서...."

"당신의 어린양들을 굽어살피소서...."

압제로부터 도망쳐 이 황량한 산속까지 숨어들어 와 가냘픈 희망을 붙잡고 기도를 올리는 그 모습들은 실로 신실해 보였다.

너무 신실해서 문제였지만.

신앙심으로 가득 찬 한 노인이 두 손을 들었다.

"제물을 받아 주소서!"

그리고 어린 아기를 든 채 모닥불로 다가간다.

"당신에게 바치는 피의 제물을!"

이들 모두가 검은 신의 교단을 따르는 사교도였던 것이다.

광기에 차 사람들이 목청을 높인다.

"이는 테스라낙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고난일지니...."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낙원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광신도들의 기도도 더욱 커진다.

마침내 노인이 모닥불 앞에 섰다.

노인의 손에 들린 어린 아기가 막 불 속으로 던져지려던 찰나....

"미친놈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요새 밖에서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섬광이 모닥불을 일격에 박살 내며 사방으로 불티를 튀겼다.

콰아앙!

폭발과 동시에 요새 벽을 타고 한 여인이 날아든다.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투기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신도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킹스 오더!"

"맙소사! 왕국의 불신자들이다!"

제물을 바쳐야 할 모닥불이 사라졌다. 어찌할 바를 몰라 노인이 아기를 든 채 허둥지둥했다.

"이, 이런... 이러면 의식이...."

그 틈을 타 여인이 노인에게 접근해 갔다.

이내 노인을 걷어찬 뒤 곧바로 허공에서 아기를 낚아챈다.

너무나도 우아하게, 아기에게 그 어떤 충격도 없이 가뿐히 받아 든 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그래, 착하지. 이제 괜찮아요."

아기를 달래는 여인을 보며 노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악한 여신의 개들 같으니!"

기가 막혀 여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악? 아기를 불 속에 집어 던지려던 놈들이 누구보고 사악하다는 거야?"

노인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여인이 천고의 죄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과연 거짓에 현혹된 어리석은 불신자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 믿는가?"

"현혹이고 나발이고, 그럼 애를 불에 던지는 게 나쁜 짓이 아니라는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아기를 안은 여인의 등 뒤, 요새 장벽 너머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부우우우웅!

뒤이어 장벽 곳곳이 무너지며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왕국의 심판관, 킹스 오더가 이끄는 정예병들이었다.

"왕국의 첨병들아, 인륜을 저버린 자들을 벌하라!"

***

사방에서 비명이 메아리친다. 병사들에 의해 죽어 가는 사교도들의 비명이다.

"아아아악!"

"어머니...."

"테스라낙이시여...."

대부분 순박한 농민이었던 이들이다. 전투 따윈 겪어 보지도 못한 이들이니 정예 병사들의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실로 잔혹한 학살극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표정엔 그리 동요가 없었다.

"정말이지 사교도 놈들이란...."

"제대로 미친 놈들이구나."

이들 모두, 요새 밖에서 이미 본 바가 있는 것이다.

순박하다는 이 농민들이, 검은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며 나무 기둥에 엮어 놓은 무수한 시체 더미를.

순박하다는 것이 선량하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순박하기에 더더욱 쉽게 악에 빠질 수도 있다.

"살려 두어선 안 될 악종들!"

분노에 찬 병사들의 검은 거리낌이 없었다.

사교도 대부분이 맥없이 쓸려 나갔다. 죽어 가며 그들은 자신이 믿고 따르던 신, 그리고 신관들을 부르짖었다.

"테스라낙이시여!"

"팔레스틸 님!"

"어디 계십니까, 다리온 님!"

저들이 그토록 부르짖은 검은 신의 신관들, 어둠의 사령술사들은 교인들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들은 또 다른 상대에게 이미 가로막혀 있었으니까.

***

요새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2층 목조건물.

건물 내부에서 사령술사 2명이 3명의 남녀와 대치 중이었다.

흑발의 젊은 마법사와 투박한 금발의 기사, 그리고 아직 어려 보이는 성직자 여인.

개중 젊은 마법사를 바라보며 사령술사들은 치를 떨었다.

"크으...."

"킹스 오더가 어떻게 여기를 찾아낸 거지...."

분명히 은밀하게 움직였음에도 저들은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추적해, 너무도 쉽게 이 비처까지 들이닥쳤다.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이 의문은 사령술사들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킹스 오더로서 이번 임무에 참가한 2급 심문관, 태양의 여신 라티엘의 성직자인 밀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찾아낸 건가요, 카르나크 공?"

그녀가 본 카르나크의 행보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아니고 추적대를 푸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산맥 도착하더니 산세 한번 슥 훑어본 게 전부였다.

-저기구만. 가자.

어이없어하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였는데, 막상 와 보니 정말로 사교도의 은신처가 있더라?

카르나크가 밀리아를 돌아보며 달래듯 말했다.

"지금 느긋하게 수다나 떨고 있을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나중에 알려 드리지요."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납득하며 밀리아는 다시 눈앞의 사령술사에게 집중했다.

"그러네요. 지금은 저들을 벌하는 것이 우선이니."

물론 바로스는 진실을 안다.

[뭐라고 변명하실 건데요, 도련님?]

[일단 쟤들부터 처리하고 나중에 고민해야지. 매번 핑계 만들려니 이것도 피곤하네.]

그때 적발의 여인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구출한 아기를 다른 병사에게 맡긴 뒤 뒤늦게 합류한 세라티였다.

"바깥은 어때, 세라티?"

"저항이 제법 거세긴 하지만 큰 피해는 없을 거예요."

그녀가 밀리아를 돌아보며 정중히 부탁했다.

"그래도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 밀리아 신관님은 병사들을 돌봐 주세요."

"네? 하지만 사령술사를 상대하려면 신관인 제가 있어야...."

당황한 밀리아를 향해 카르나크가 부드럽게 말을 더했다.

"병사들의 목숨도 누구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우리만으로도 저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 귀한 생명을 우선적으로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밀리아는 감동했다.

'자신의 안위보다 병사들의 목숨을 더 중하게 여기다니!'

실로 본받을 만한 귀족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계속 거절하는 것은 오히려 카르나크에 대한 무례가 되리라.

"알겠습니다. 그럼 라티엘의 축복을."

밀리아의 전신에서 빛이 흘러나와 카르나크와 바로스, 세라티를 감쌌다. 어둠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여신의 축복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병사들을 보조하기 위해 밀리아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남은 이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아, 갔다."

"이제 이거 걷어 줘요, 도련님."

"알았어."

순간 사령술사들은 경악했다.

젊은 마법사의 전신에서 어둠의 힘이 피어오르더니, 밀리아가 건 여신의 축복을 말끔히 지우는 것이 아닌가?

"헉!"

"킹스 오더가 어둠의 힘을?"

축복 도로 지운 카르나크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 이것 참 귀찮네.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세라티는 영 찜찜한 얼굴이었다.

"그녀 나름대론 열심히 걸어 주고 간 건데, 무슨 때 낀 것처럼 대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요?"

혼란에 빠진 사령술사들이 어둠의 힘을 끌어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테스라낙께서 선택하신 몸!"

놈들 주위로 검푸른 유령의 형체가 나타난다. 피투성이가 된 기사와 병사의 영혼이 귀곡성을 터트린다.

캬아아아악!

대지의 사념에 묶인 전장의 지박령을 불러내는 사령술, 황야의 고혼이었다.

여태 만난 어설픈 놈들과 달리 이들은 제대로 어둠의 지혜를 터득한 사령술사인 것이다.

"진정한 어둠의 힘을 맛보여 주마!"

여전히 세라티는 긴장하지 않았다. 결과가 어찌 될지 뻔히 아니까.

과연 카르나크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오, 제대로 사령술을 펼쳤네? 솜씨가 나쁘지 않군."

덕분에 편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힘만 쓰는 무식한 놈들보다...."

검지를 세워 허공에 가볍게 빙글 돌린다.

"오히려 제대로 아는 쪽이 역이용하긴 훨씬 쉽지."

어둠의 기류가 역류하며 소환된 유령들이 역으로 사령술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헉! 이게 무슨?"

"아니, 왜 내 명령을 듣지 않는...."

이내 요란한 비명이 건물을 가득 메웠다.

"으, 으아아악!"

***

널브러진 사령술사들의 시체를 향해 카르나크가 오른손을 뻗었다.

스르르륵....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손바닥을 통해 스며들었다.

"자, 그럼 종말의 어둠은 내가 몽땅 챙기고."

어둠을 거둔 오른손 대신 왼손을 내민다. 왼손에서 또 다른 어둠이 흘러나와 시체로 스며든다.

"대신 더미를 넣어 줘야지. 우리 밀리아 양도 교단에 제출할 건 있어야 하니."

사방의 사기를 긁어모아 응축시킨 카르나크의 '어둠'이었다.

이 역시 속성 자체는 종말의 어둠과 다를 바가 없다.

"퀄리티는 천지 차이지만."

지금의 카르나크도 종말의 어둠을 만들 순 있다.

애초에 본인이 사기와 탁기를 긁어모아 사령력으로 변환하면 그게 바로 종말의 어둠이니까.

하지만 이걸 실제로 유용한 권능으로 정제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반면 지금 시체에 뿌린 탁기는?

그냥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아 꾹꾹 응축시켰을 뿐이다.

똑같은 탁기지만 정제되어 있지 않으니 사령력으로는 쓸모가 없다.

"하지만 성직자가 보기엔 똑같지."

입에 넣고 씹어 보기 전엔 절대 구별 못 할 가짜 음식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제정신 박힌 성직자가 이걸 입에 넣고 씹어 볼 리가 없잖아?"

아무거나 처먹는 정신 나간 놈이 아니라면 이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놈을 사령술사라고 부른다.

카르나크는 안심하고 어둠의 본질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양손을 벌리며 마력 운용에 들어갔다.

"자, 그럼 사령력은 사령력대로 분리하고...."

그의 왼손이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혼돈마력은 혼돈마력대로 분리한 뒤...."

오른손이 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이걸 잘 버무려서 갈무리하면!"

빛과 어둠이 동시에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전혀 사기나 탁기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기운이었다.

카르나크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6서클 됐다."

#61화. 15. 슬기로운 사교도 사냥 (2)

마력을 점검하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나쁘지 않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4서클 수준의 마력만을 지니고 있던 그였다. 그걸 이 짧은 시간에 6서클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방식을 바꾼 덕분이었다.

최대한 안전하게, 순수한 사령력만을 100퍼센트 정제해 혼돈마력으로 만들던 것에서 순도를 낮추는 대신 마력 증폭률을 대폭 높인 것이다.

그리고 남은 탁기와 사기는 혼돈마력을 따로 운용해 쓴 약에 당질을 코팅하듯 뒤덮어 감췄다.

이렇게 해도 외부에서 볼 땐 여전히 평범한 마력일 뿐이니 정체가 들킬 염려는 없으리라.

그럼에도 바로스는 여전히 걱정인 모양이었다.

"아우, 정말 이렇게 위험한 짓 하셔도 되는 겁니까?"

이제껏 카르나크가 굳이 저 방식을 취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혼돈마법으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지 않으셨어요?"

갓 회귀했을 때의 카르나크는 되도록 사기와 탁기를 멀리하며 모든 사령력을 혼돈마력으로 바꾸는 데만 전념했다.

일반인에 비유하면, 몸에 좋은 음식만 골라 소식하면서 건강을 챙기는 행위라 하겠다.

그러다 상황이 어째 좀 이상하게 돌아가 사령력 비축률을 살짝 높였다.

이는 과식을 해서라도 체중을 늘려 일단 체급부터 높이는 행위와 비슷하다. 근육은 사실 어느 정도 몸에 지방이 있는 쪽이 상승률이 크니까.

이렇게 하면 살은 좀 찌겠지만 근력은 더욱 높아진다.

그런데 지금 하는 짓은, 아예 소화시키기 힘들 정도로 폭식을 하며 무작정 살부터 찌우는 행위에 가까웠다.

당장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 버리면 돌이키기 힘든 고도비만이 된다.

이 '사령력에 의한 고도비만 상태'가 바로 '언데드화'인 것이다.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가 버리면 완전히 언데드 되는 거고.

물론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멈추면 되는 일이었다. 카르나크도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전생 때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결국 해골바가지 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카르나크가 인상을 썼다.

"적당히 몸 사릴 상황이 아니라고, 이제."

***

슈트라프 주교를 상대했던 트리스트 시티 전투.

그때만 해도 카르나크는 상황에 대해 큰 경각심을 지니진 않았다. 예상외의 강적이 나올 수도 있으니 혹시 모를 대비는 해 두자 정도였다.

하지만 듀랄드까지 만나고 나니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브렐란트 백작가 사건을 해결한 뒤 수도로 귀환하며, 카르나크는 바로스와 세라티에게 그 문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슈트라프와 듀랄드, 둘 모두 공통점이 있다는 건 알지?"

성직자였던 슈트라프는 사령술사가 되었음에도 여신의 신성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러 유저였던 듀랄드 역시 뱀파이어가 되었음에도 생명기라는 투기를 발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알긴 합니다만...."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렇게까지 큰 문제입니까?"

사령술사가 된 슈트라프는 신성술을 거의 쓰지 않았다. 손에 넣은 사령술이 워낙 강력했으니까.

신성력이 남아 있긴 했지만 별 영향은 주지 못한 것이다.

세라티도 애매하다는 표정이었다.

"듀랄드 경 역시 대단하긴 했지만, 심각하다고 할 정돈 아니지 않나요?"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오러 유저의 능력을 잃지 않았으니 확실히 강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세라티에게 패하지 않았나?

어둠의 힘을 손에 넣었다고 무슨 무소불위의 강자가 되진 않는 것이다.

"간신히 이긴 제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카르나크 님이 그렇게까지 심각해할 이유는 없지 싶은데요?"

종말의 어둠이며 정체불명의 파괴신 등, 이미 충분히 심각한 사건들이 온 세상에 펼쳐진 상태였다. 저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중요도가 크게 낮은 느낌이다.

카르나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듀랄드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 슈트라프 주교 역시 마찬가지였고."

순간 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놈들이 신성력을, 투기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진짜 심각한 거다."

세계의 기운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투기, 마력, 신성력, 사령력은 하나를 터득하면 다른 분야는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상식이자 진리.

"그런데 그 상식이 깨졌어. 종말의 어둠을 이용하면 마법사도 사령술을 배울 수 있고, 오러 유저도 어둠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도 가능했잖아요, 그거?"

사령술을 익힌 마법사가 바로 아크 리치고, 어둠의 일원이 된 오러 유저가 바로 데스 나이트다.

"도련님도 얼마든지 했던 짓인데 왜 그리 신경 쓰시는 겁니까?"

"아직도 이해 못 했구만."

한숨을 쉬며 카르나크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본 적 있어? 왜 세상에 사령술사의 숫자가 그리 적은지."

굳이 생각까지 해야 하냐는 투로 세라티가 되물었다.

"온갖 사악한 짓은 다 저질러야 하고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게 되는데 숫자가 많은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문득 카르나크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사악한 짓이라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불로불사와 강대한 힘을 포기할 만큼 인간이라는 종자가 선하던가?"

사령술을 익히면 쉽게 힘을 얻을 수 있다. 남들보다 월등히 빠르게 강해질 수도 있다.

경지에 오르면 불로불사도 꿈꿀 수 있고, 온갖 신체적 장애도 극복할 수 있다.

여신의 율법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조차 가능해지는 어둠의 권능이 바로 사령술이다.

그저 도덕과 윤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기만 하면 저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령술을 익히려는 이들은 극소수지."

이게 과연, 사령술까지 익히려 할 정도로 사악한 인간이 극소수이기 때문일까?

늙어 죽음을 눈앞에 둔 마법사가, 신체 일부를 잃어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게 된 무인이, 여신의 은총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성직자가 사령술에 손대지 않는 이유가 그저 그들의 영혼이 올곧고 아름다워서일 뿐일까?

"그보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

세계의 기운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이 대전제가 바로 사령술사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는 가장 큰 억제력이었다.

"궁극의 경지에 든 대마법사가 있다 치자. 그리고 그가 늙고 나서 죽음이 두려워졌다 쳐."

사령술을 이용하면 죽음을 유예시킬 수 있다. 뱀파이어가 된다거나, 아니면 다른 사령술을 익혀 사령술사가 되어 젊음을 되돌려받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대마법사가 아니게 된다.

"평생 쌓아 온 모든 마력을 잃을 테니까."

삼류 바운티 헌터 수준의 초짜 뱀파이어가 되거나, 일개 성직자에게도 벌벌 떠는 빈약한 사령술사가 될 뿐이다.

"오러 유저도 마찬가지지."

세상을 오시할 4대 무왕이라 할지라도 오러를 포기하고 사령력을 손에 넣는 순간, 칼 좀 잘 쓰는 일개 사령술사로 굴러떨어진다.

그래서 대마법사가 힘을 잃지 않고 불로불사를 손에 넣으려면 아크 리치가 되는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육체를 버리고 피 대신 어둠이 흐르는 존재가 되어서야, 겨우 기존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오러 유저의 경우엔 자신을 유지할 수도 없고."

카르나크에 의해 데스 나이트가 된 전생의 무왕들이 그렇다.

그들은 분명 데스 나이트가 되고도 오러를 암흑투기로 바꿔 기존의 능력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로 자아를 잃고 사령왕을 섬기는 인형이 되었다.

이게 대체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진정한 강자에게 사령술은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닌 거야.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심지어 그 바닥이란 게, 단순히 젊고 약한 상태가 아니라 세상 모두로부터 배척당하는 저주받은 삶이다.

자신이 원래 지녔던 힘을 되찾을 수도 없다. 오로지 사령술사로서만 살아가야 한다. 평생 쌓아 온 경험도 쓸모없어진다는 의미다.

"비유하자면, 노인에게 젊음을 되돌려주는 대신 평생 쌓은 재산과 인맥을 빼앗고 슬럼가 같은 곳에 떨구겠다는 소리랑 같은 거랄까?"

그래서 사령술은 대대로 약자의 무기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륜과 도리마저 저버리고서라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자 하는,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는 자들이나 금기 중의 금기라는 사령술에 손을 댔다.

"반면 기득권층은 어둠의 힘을 그리 욕심내지 않았지. 이미 힘을 가진 자들에겐 별 쓸모도 없으면서 세상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것일 뿐이니까."

그런데, 기존의 힘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사령술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면?

그저 자신의 양심과 도덕, 윤리를 포기하는 것만으로 더욱 강해지고, 심지어 불로불사조차 이룰 가능성이 있다면?

"맙소사...."

바로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제야 카르나크가 말한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은 탓이었다.

"이 시대의 강자들이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여태 카르나크는 이 시대의 강자들을 딱히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한 아군이라고만 생각했다.

도로 사령술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경계했던 잠재적인 적은 종말의 어둠 관련자들뿐이었는데, 상대가 사령술을 쓰는 이상 카르나크에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령술과 기존의 기운이 섞인다면 이 모든 전제가 무너져 버리지."

슈트라프의 사례도 있듯, 다른 기운과 사령력이 결합될 경우 카르나크의 지식에서 벗어난 기이한 현상을 일으킨다.

성직자나 마법사, 오러 유저가 힘을 잃지 않은 채 사령술까지 터득한다면 예전의 경험만으로 간단히 농락할 수 없다.

"어떤 기존의 강자가 사령술사로 탈바꿈해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야. 아, 물론 설마하니 3인의 대마법사나 4대 무왕까지 사령술에 손을 댈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강자들 중에는 사령술에 매혹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아지겠죠. 도련님이 왜 걱정하시는지 알겠네요."

바로스뿐 아니라 세라티도 이해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검은 신의 교단이 다른 사교단과 달리 무섭게 세력을 불릴 수 있었는지도 납득이 가고요."

카르나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제까지는 그냥 수준급의 마법사가 되면 족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가능한 힘을 키워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수준까진 강해질 필요가 있다.

눈치를 보며 세라티가 물었다.

"그 제 한 몸 건사하는 기준이 어디인가요?"

이 카르나크란 인간의 기준이 워낙 괴상하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것이다.

"...설마 과거의 사령왕으로 돌아가시겠다는 건 아니죠?"

물론 그 역시 살아 있는 육체를 포기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인간임을 유지하는 선에서 최대한 마력을 높일 생각이다."

"그게 어느 정도인데요?"

"나도 모르지."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번도 안 걸어 본 길이잖아. 지금의 내가 어찌 알겠어?"

***

카르나크가 6서클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식은 킹스 오더 전체를 뒤흔들었다.

"벌써?"

"분명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4서클 끝자락이라 하지 않았나?"

너무도 단기간에 경지가 확 올라 버린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성장세였다.

그래서 카르나크도 열심히 변명을 준비해 놓았다.

제가 원래 가문에서 마법서 하나만 가지고 독학하던 신세였거든요? 그러다가 수도로 와서 킹스 오더가 된 후 수많은 마법 지식과 지혜를 접하고 나니 어머나, 세상에? 마법의 경지가 급격하게 오르지 뭡니까!

실제로 왕국 수도엔 마법 길드 도서관이 있고 킹스 오더의 권한 덕분에 카르나크의 열람권 역시 높은 편이다.

변명을 위해서 일부러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 죽치고 있었다. 혹여나 생길 의심을 막기 위해서였다.

'사령술이 연관되었다고 의심하는 놈이 전혀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의심하는 놈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그를 사령술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왜냐고?

전례가 없으니까.

세계의 기운은 섞이지 않는다. 당연히 마법사가 사령술을 이용해 마력을 높이는 일도 존재할 수 없다. 마법의 힘을 버리고 더욱 강력한 사령술사가 되면 됐지.

물론 지금은 저런 일이 생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최근의 사태일 뿐이다. 기존의 인식으론 카르나크의 발전과 사령술을 연관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전례에 따라 판단했다.

"하늘이 내린 천재로구나!"

"시골에 틀어박혀 있던 탓에 여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것뿐인가?"

"드디어 우리 왕국에도 대마법사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참으로 유스틸의 홍복이로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이들 중엔 젊은 시절 저 정도 진도를 보이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은 것이다.

보통 저런 천재들이 나중에 대마법사가 되거나, 혹은 젊은 천재는 나이 든 범재일 뿐이란 소릴 들으며 그냥 제자리에 머무르곤 한다.

"뭐야? 괜히 걱정했잖아?"

아무 문제 없이 카르나크는 고위 마법사로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예상 밖의 출세도 했다.

카르나크를 높이 평가한 에란텔과 기존의 대장들이 그의 지위를 높여 주었다. 이제 카르나크는 킹스 오더 7대대의 대장으로, 새로운 대대를 맡게 되었다.

"출세하셨네요, 도련님."

"이제 와서 내가 이런 걸로 기뻐할 이유야 없다만...."

카르나크는 히죽 웃었다.

다른 이유로 기쁘긴 했다.

"사교도들 상대하기 훨씬 편해진 건 좋구만."

#62화. 15. 슬기로운 사교도 사냥 (3)

7대대를 맡은 후에도 카르나크의 주가는 계속 올라갔다.

다른 킹스 오더들에 비해 실적이 월등히 뛰어난 탓이었다.

다른 대대는 사건 하나 맡으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

물론 브렐란트 백작가처럼 운 좋게 빨리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임무상 저건 악운에 가깝기 때문에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상대가 먼저 습격해 왔는데 운 좋게 반격에 성공한 경우니까.

그런데 카르나크는 너무도 빠르게 사교도들을 척척 잡아내는 것이다.

게다가 정보도 척척 잘만 뽑아낸다. 그리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소탕도 간단히 해낸다.

그래서 초반엔 그가 사교도의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읽고 나선 그런 의문도 접었다.

보고를 받아 보면 이게 또 착실하게 추측과 심문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저 남들보다 추리를 잘하고, 또 고문을 통해 정보를 끌어낸 뒤 진위를 가리는 능력이 뛰어날 뿐이다.

당연히 바로스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야, 해답을 먼저 알고 상황을 맞추는 것뿐이니 추리 능력 출중한 걸로 보이겠죠."

세라티도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심문 같은 거 한 적 없잖아요."

그냥 죽이고, 강령술로 영혼 불러다 강제로 정보 불게 만든 게 전부다.

카르나크는 당당했다.

"모로 가도 목적지만 잘 도착하면 됐지, 뭘."

어쨌건 사교도 사냥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카르나크가 대장이 된 후에도 다섯 건의 사교도 혐의를 더 맡아 훌륭히 처리해 냈다.

모든 일이 순탄히 풀리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카르나크는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영 성과가 없는데?"

***

유스틸 왕국 동남부에 위치한 국경 요새 아스라.

요새 중앙에 위치한 탑의 지하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으아아아악!"

지하실 입구에서 서성이던 라티엘의 성직자, 밀리아는 몸서리를 쳤다.

'끔찍해....'

머리로는 알고 있다.

왕국의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선 사교도를 심문해 정보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문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것을.

놈들이 저지른 죄악을 생각하면 합당한 형벌이나 다름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아아악!"

다행히 카르나크 대장은 밀리아가 심문 과정에 참가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 게다가 여성이기까지 한 그녀를 배려한 것이다.

'역시 대장님은 좋은 분이야.'

내심 카르나크에게 감사하며 밀리아는 지하실에서 멀어졌다.

성직자답게, 사교도를 위한 마지막 기도문을 중얼거리면서.

'라티엘이시여, 저 죄 많은 영혼에게 속죄의 안식을 허락하소서.'

***

흔들리는 촛불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어두운 지하실.

카르나크는 지하실 한편에 놓인 탁자에 앉아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번 사교도 사냥을 킹스 오더에 제출하기 위한 보고서였다.

반대편에서 신음이 들린다.

"으, 으으으...."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붙잡힌 사령술사였다.

그 앞에서 바로스가 의자 하나 갖다 놓고 앉아서 지루하단 표정을 짓다가 가끔 칼로 푹푹 찌른다.

"으으, 으으으...."

어찌나 혹독한 고문을 당한 건지, 칼로 찔렸는데도 희미한 비명만 나올 뿐이었다.

바로스가 혀를 찼다.

"이거 비명이 너무 작은데요. 기력 다 빠졌나?"

별거 아니란 듯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찌르고 돌려."

과연, 칼로 푹 쑤신 뒤 후벼 파기까지 하니 요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별일 아니란 듯 사람을 고문하는 그 광경을 보며 세라티는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광경이야.'

그간 카르나크가 사교도를 심문한 적이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심문이란 상대를 압박해 정보를 토하게 만드는 행위니까.

하지만 고문도 하지 않았다는 소린 아니다.

피를 흘리던 사령술사가 애처롭게 뇌까렸다.

"차, 차라리 죽여...."

바로스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도 그냥 빨리 죽이고 싶어.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밀리아를 살살 꼬드겨 지하실 밖으로 내보내는 건 성공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심문하는 티는 내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

즉, 한동안 지하실 밖으로 비명이 들려야 한다.

"으아아아아악!"

세라티는 시선을 돌렸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이는 인과응보일 뿐이라는 것을.

저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이조차도 가벼운 처벌일 뿐이라는 걸.

'아니, 인과응보이긴 한가, 이게? 악행을 더 큰 악행으로 짓눌러 버리는 건데?'

하지만 카르나크를 말리자니 그것도 좀 애매했다.

덕분에 암흑교단의 사교도들은 빠르게 소탕되었고, 억울하게 희생될 뻔한 왕국민들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수단이 잘못된 건 분명한 것 같은데 결과가 워낙 좋다.

'그래, 놈들의 자업자득일 뿐이야.'

애써 납득하며 그녀는 카르나크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떻게 사교도들을 찾았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적어 대고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세라티가 물었다.

"이번엔 무슨 변명을 하실 건가요?"

대답 대신 카르나크가 서류 일부를 가리켰다.

읽어 보니 내용이 대충 이렇다.

『사교도 중 한 놈이 보다 강대한 어둠의 힘을 얻기 위해 금지된 술법을 사용했다. 이는 '저주받은 손'이라 불리는 사악한 사령술로, 인간의 손을 잘라 말린 뒤 어둠을 깃들여 저주를 거는 매체로 삼는 물건이었다. 운 좋게 이를 손에 넣은 뒤, 마법으로 흔적을 뒤쫓아 놈들의 근거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서류를 읽어 가던 세라티가 의아해했다.

"저주받은 손? 그런 게 있었나요?"

그러자 바로스가 묶여 있는 사령술사의 오른손을 대뜸 잘라 버렸다.

"으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솟구쳤다.

잘린 오른손을 탈탈 털며 그가 대수롭잖게 내밀었다.

"자요, 도련님. 저주받은 손."

"피 좀 더 빼. 그래야 잘 마르지."

"네."

지켜보던 세라티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그리고 바로 좌절했다.

'잠깐, 나 왜 저런 광경은 또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과 어울리다 보니 인성이 어느새 꽤나 마모된 모양이다. 이래서 친구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세라티가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동안이었다.

결국 사령술사의 숨이 끊어졌다. 과다 출혈로 인한 실혈사였다.

심드렁한 바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죽었다."

"비명 많이 지르고 죽었지?"

"네, 도련님."

"됐어, 그럼."

참으로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하여튼 이걸로 '심문하는 척'이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다.

시체 앞에 서서 카르나크가 사령력을 끌어 올렸다.

유능한 성직자라면 충분히 감지할 만한 어둠의 기운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묶인 사령술사 놈도 죽어 가며 사방에 어둠의 기운을 뿌렸으니까.

종말의 어둠이 근원인 기운이라 카르나크의 사령력과 속성이 똑같다. 직접 이 광경을 보지 않는 이상 어느 신관이 와도 둘을 구별할 수 없으리라.

"자, 그럼 정보를 뽑아내 볼까."

***

강령술을 펼쳐 갓 죽은 싱싱한 사령술사의 영혼을 불러낸다. 그리고 영혼을 억압해 모든 것을 불게 만든다.

강력한 사령술사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사령왕이었던 카르나크에겐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검은 신의 교단에 대해, 죽음의 신 테스라낙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고해라."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죽음의 왕이시여.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소서...."

살아 있을 땐 그나마 반항도 하던 사령술사였지만 영혼이 된 지금은 충실한 노예일 뿐이다. 바로 모든 정보를 낱낱이 불었다.

그러나 정작 쓸모 있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분명 사령술사의 영혼은 진심으로, 아는 것을 완벽하게 토설했다.

그 내용이 이따위라서 문제지.

"테스라낙의 정체가 뭐지?"

"죽음과 어둠의 파괴신이자,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여는 창조신입니다."

"대외적인 포교 내용 말고, 검은 신의 교단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고하라."

"죽음과 어둠의 파괴신이자,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여는 창조신입니다."

"젠장, 이놈도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네."

붙잡은 놈들이 검은 신의 교단에서 그리 고위층이 아니다 보니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7여신교의 신관을 붙잡고 같은 질문을 하면 뭐, 답변이 크게 다를 것 같은가?

신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지란 원래 저 정도가 한계다.

하지만 이건 테스라낙이 정상적인 신일 때 이야기지.

"존재하지도 않던 신이 갑자기 생겼는데 이상하단 생각도 안 해 봤냐?"

"죽음도 어둠도 태초부터 있었으니, 어찌 신이 갑자기 생길 수 있겠습니까?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이나 어리석은 인간이 미처 몰랐을 뿐이지요."

"아, 그런 식으로 가르치나?"

너무 잔챙이만 걸린다.

테스라낙의 진실에 대해 아는 이가 하나도 없다.

"역시 사교단 내에서 좀 높은 신분이어야 진실을 알 것 같은데."

사교도들을 여럿 붙잡은 덕분에 검은 신의 교단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은 했다.

암흑교단은 3명의 수장에 의해 다스려진다.

그 밑에 6명의 추기경이 있고, 13명의 대주교, 그리고 각 지역별로 수십 명의 지부장이 점조직을 관리하는 형태다.

그동안 붙잡았던 테스라낙의 신관들은 저 지부장 밑에서 암약하는 놈들이었다.

지부장쯤 되면 워낙 몸을 잘 숨기고 있어 테스라낙의 신관들조차도 자기 윗사람이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제대로 아는 경우가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바로스가 말했다.

"적어도 지부장 정도는 붙잡아야 쓸 만한 정보가 나오겠는데요."

"그러게. 그래야 좀 더 윗선까지 추적해 낼 수가 있겠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카르나크는 강령술을 거뒀다.

"여기까지군. 이번 놈도 통 영양가가 없어."

사령술사의 영혼이 그대로 어둠의 탁기가 되어 그의 힘으로 바뀌었다.

"아아아아아악!"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영혼이 최후의 절규를 내질렀지만 카르나크도 바로스도, 심지어 세라티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간 한두 번 본 광경이 아니니까.

한숨을 쉬며 카르나크가 불만을 토한다.

"일부러 킹스 오더에까지 들어왔는데도 일이 영 안 풀리네."

바로스도 동감이란 표정이었다.

"대주교나 추기경쯤 되는 거물이 걸려 주면 좋을 텐데요."

세라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만큼 심각한 사건이 터진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되길 바랄 수도 없잖아요? 그만큼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될 텐데."

그러자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저런 관점도 있구나."

"역시 여기선 저런 식으로 말해야 사람다운 건가 보죠?"

"좋은 거 배웠네."

한심하다는 듯 왕년의 절대자들을 지켜보는 세라티였다.

"...이게 굳이 배워야만 알 수 있는 사항인가요?"

어쨌든 큰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는 점은 옳다. 그래야 사교단의 중추까지 파고들 여지가 생긴다.

카르나크가 턱을 매만졌다.

"진짜 대형 사건 좀 안 터져 주려나?"

***

소원은 이루어졌다.

킹스 오더 본부, 에란텔 단장의 집무실.

그곳에서 카르나크와 7대대에 새로운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수도 드룬타에 암흑교단과 결탁한 자가 있다는 소문을 접했다네. 이를 조사하고 진위를 가려 여신과 국왕의 이름으로 벌하게."

어째 단장의 음성이 어색했다. 평소의 자신만만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카르나크도 굳이 물었다.

"혐의 대상자가 누군데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그게...."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에란텔 단장이 대꾸했다.

"...유스틸 왕국 제2왕자, 알포드 루단 유스틸 전하일세."

#63화. 16. 왕가의 암투

유스틸 왕국의 현 국왕, 위스콧 1세에겐 2명의 아들이 있다.

올해로 20살이 된 제1왕자 로이드 루단 유스틸과 19살인 제2왕자 알포드 루단 유스틸이 그들이다.

이 둘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사이였다.

장자의 원칙에 따른다면 제1왕자 로이드가 왕위를 잇는 것이 상식인데, 이게 좀 골치 아픈 부분이 있는 것이다.

원래 위스콧 1세의 정실은 멜레아 왕비, 유스틸 왕국의 고위 귀족가인 휠러 공작가의 여식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왕비가 된 여인이었다.

국왕과 왕비의 사이는 딱히 금슬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가문을 위해 정해진 상대와 혼인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이들이었다. 둘 다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며 열정을 불태우는 성격도 아니었다.

혼인 후 10여 년간, 평범한 왕가의 일원으로서 그냥저냥 무난하게 부부 생활을 이어 갔다.

문제는 둘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는 점.

왕국에 후계자가 없다는 것은 꽤나 심각한 사안이다.

당연히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도 위스콧 1세에게 후궁을 들여 후사를 이을 것을 권했다.

여러 후보 중에서 유서 깊은 가문인 탈라인 후작가의 칼피아가 선택되었다.

멜레아 왕비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다. 여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기야 했지만 허물이 있으니, 자신이 왕자를 못 낳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내심 후궁도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자신의 허물이 덮어질 거라 기대한 면도 없지 않았다.

이런 경우엔 왕실의 방계에서 가장 피가 짙은 이가 왕위를 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후궁이 된 칼피아가 덜컥 왕의 아이를 가진 것이다.

심지어 입궁 후 석 달쯤 지났을 때 확인을 해 보니 임신 3개월 차였다. 그냥 첫날밤에 바로 아이가 들어섰다는 소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칼피아는 순조롭게 몸을 풀어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 제1왕자 로이드였다.

크게 기뻐하며 위스콧 1세는 율법을 관장하는 달의 여신, 알리움의 이름으로 당당히 로이드 왕자를 정명한 후계자로 선포했다.

여기까진 그냥 평범한 왕실의 비사일 뿐이리라.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후궁을 맞이했다 하여 국왕과 왕비의 사이가 크게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멜레아는 겉으로는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했다. 딱히 시기나 질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무리 애를 못 낳는다고 해도 왕비는 왕비, 즉 마누라고, 남편과 마누라가 동침하는 것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

칼피아가 임신 중이었으니 자연스레 위스콧 1세의 발길은 도로 멜레아 왕비에게로 향했다. 후계자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졌으니 오히려 예전보다 서로를 편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결혼한 지 10년이나 지난, 서른이 넘은 멜레아 왕비에게 뒤늦게 아이가 들어섰다. 제2왕자 알포드의 탄생이었다.

왕실은 발칵 뒤집혔다. 실로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장자의 원칙 아래, 여신의 이름으로 정당한 계승권을 지음받은 제1왕자.

엄연히 정실의 배에서 태어난, 혈통으론 월등히 앞서는 제2왕자.

심지어 양쪽 모두 고작 반년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과연 진정한 왕의 자격이 있는 이는 누구인가?

***

"대충 이런 상황이다."

카르나크의 설명에 세라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수도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퍼져 있는 이야기더라고요. 두 왕자의 불화에 대해서."

고급스러운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채 바로스도 혀를 찼다.

"불화 정도가 아니던데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던데."

현재 이들은 드룬타의 외곽에 위치한 여관,'용의 메아리'에 묵고 있었다. 고급 여관에 미리 돈을 주고 장기 투숙 계약을 한 것이다.

원래는 수도에 따로 집을 마련할 생각이었지만 솔직히 그건 너무 돈 낭비였다.

킹스 오더는 임무 특성상 워낙 집을 자주 비운다.

실제로 카르나크 일행도 킹스 오더가 된 지 벌써 7개월째지만 정작 수도에 머문 것은 30일도 채 되지 않았다.

잘 쓰지도 않을 빈집을 비싼 돈 주고 구입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가문이 부자가 되었어도 그렇지,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더 사 먹고 말겠다는 게 카르나크의 선택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싱싱한 과일과 달콤한 과자를 테이블 위에 놓고 냠냠 집어먹고 있기도 하고 말이지.

"하여튼...."

잘라 놓은 사과 하나를 베어 문 뒤,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것엔 국왕의 무책임이 제일 큰 모양이야."

장자의 원칙으로 무장한 제1왕자와 정실의 혈통인 제2왕자.

양쪽 모두 명분상 크게 우위에 서질 않는다.

뒷배가 되어 주는 세력은 휠러 공작가를 외가로 두고 있는 제2왕자가 훨씬 강하지만, 하필 제1왕자를 여신의 이름으로 후계자로 지음해 버렸다.

국왕 입장에선 어느 쪽을 택해도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위스콧 1세의 결정은....

"그냥 문제를 뒤로 미뤘더군."

이는 당장 판가름할 일이 아니다. 왕자들이 자라나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는가? 국왕 자신의 사례도 있듯,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확실한 결정은 왕자들이 성혼을 하고 난 후 신중하게 하겠다!

이야기를 듣던 세라티와 바로스가 어이없어했다.

"진짜 우유부단한 태도네요?"

"후환 만들기 딱 좋은 짓이기도 하고요."

국왕 딴에는 신중하게 결정한다고 한 짓일지 모르겠지만, 이게 듣는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 들릴까?

어머나! 저쪽 왕자님에게 뭔가 일이 생기면 우리 왕자님이 왕이 된다는 소리네?

카르나크가 실실 웃었다.

"덕분에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더라."

두 왕자가 태어난 지 어언 20년.

제1왕자를 섬기는 탈라인 후작가와 제2왕자를 섬기는 휠러 공작가는 수시로 대립했다.

길 가다가 마주치면 칼부림하는 건 예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나왔다. 몰래 서로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았다.

바로스가 흥미로워하며 웃었다.

"개판이구만요. 하긴 왕가 속사정 대부분이 개판이긴 하지."

세라티만 어이없다는 반응.

"그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예요?"

두 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내 일이 아니잖아?"

"남 망하는 거 재밌어하는 건 인간의 본성 아니었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발끈하다 말고 세라티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 망하는 거 보면서 즐거워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걸 인정해 버리면 자신도 '저놈들' 같은 인간이 될 것 같다.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그럼, 두 왕자 중 누구에게 더 왕의 자격이 있나요?"

카르나크가 콧방귀를 뀌었다.

"왕의 자격이라는 게 대체 뭔지부터 정의하는 게 순서 아닐까?"

"그야, 능력이라거나 성품이라거나...."

"둘 다 이제 갓 20살 안짝인데? 능력이 뛰어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아직 세상을 배우기도 벅찰 나이들이었다. 능력을 보여 줄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둘 다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낼 정도의 엄청난 천재들도 아니었고.

"물론 성품만 보면 제1왕자가 더 왕위에 어울리긴 하더군."

제1왕자 로이드는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매사에 성실하고 겸손한 성품이기도 했다.

반면 제2왕자 알포드는 성질이 급하고 폭력적이며 오만하기까지 하다.

솔직히 왕국의 미래만 보면 로이드 왕자가 훨씬 왕위에 어울린다.

그럼에도 위스콧 1세가 로이드의 손을 들어 주지 못한 이유는 그가 너무도 허약한 체질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툭하면 열이 오르고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나이가 든 후에도 몸은 나아지지 않아, 최고의 스승 밑에서 성실하게 최고의 검술을 익혔음에도 일개 병사 하나를 간신히 상대하는 수준이었다.

일국의 왕자인 덕분에 수시로 신성 치유술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평민이었다면 10살도 넘기지 못했을 것이란 게 세간의 평이었다.

반면 제2왕자 알포드는 타고난 강골에 무재까지 지니고 있어, 20살을 앞둔 나이에 이미 일류 기사급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오만한 성품 탓에 수련을 게을리하지만 않았다면 투기를 각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마저 들을 정도다.

"제1왕자가 너무 허약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제2왕자 측에서 몰래 손을 쓰고 싶어질 법도 하겠지."

실제로 암살, 독살 쪽은 역시 사령술사가 전문이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세라티는 문득 물었다.

"그럼 전생 땐 누가 왕이 됐나요?"

카르나크가 무심히 대답했다.

"제2왕자. 나중에 왕이 된 알포드와 만난 적이 있으니까 이건 확실히 알아."

전생의 알포드 왕자가 사령술의 힘을 빌렸다는 소린 아니다.

힘을 빌릴 상대도 없었다. 현재처럼 검은 신의 교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로이드 왕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더군."

평생 골골대면서도 제1왕자는 용케 죽지 않고 왕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직후에 내란이 발발했고."

참다못한 제2왕자 측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무수한 피를 흘린 끝에 결국 알포드가 왕위를 찬탈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유스틸 왕국은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결국 제대로 왕 노릇도 못 해 보고 왕국과 함께 멸망했지, 뭐."

"유스틸 왕국이 멸망했다고요?"

놀란 세라티가 눈을 깜박거렸다.

딱히 애국심은 크게 없지만 그래도 조국인데 망했다는 소릴 들으니 떨떠름하다.

"누가 멸망시킨 거죠? 설마 제국인가요?"

유스틸 왕국의 오랜 적수라면 역시 국경 일부를 마주하고 있는 라케아니아 제국.

그런데 그건 아닌 듯했다.

바로스가 대뜸 카르나크를 가리켰거든.

"저 양반요."

카르나크도 서슴없이 손을 들었고.

"응, 나."

제국은 제국인데 라케아니아가 아니라 언데드 제국이었다.

"...어휴."

세라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그리 놀랍진 않았다. 어째 그럴 것 같았달까?

어쨌든 이걸로 대충 상황은 이해했다. 바로스가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이번 임무는 제2왕자 조사군요. 대대원들을 소집할까요?"

카르나크가 그를 말렸다.

"진정해, 바로스. 아직 임무를 맡은 건 아니다."

킹스 오더가 무슨 모험가 길드도 아니고, 입맛대로 임무를 골라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사안이 크면 윗선에서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강제로 떠넘겼다가 실패하기라도 하면 문제가 더 커지니까.

"그래서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지."

"엥? 거절했어요? 왜요?"

이것이야말로 카르나크가 항상 노래를 부르던 '거물들이 엮인 대형 사건' 아닌가?

"다른 대대가 임무 맡으려고 해도 도련님이 억지로 빼앗아야 할 판 아니에요?"

"그래서 더더욱 시간을 달라고 한 거야."

2왕자가 정말 검은 신의 교단과 손을 잡았다?

이건 아무 문제가 없다.

평소처럼 사령술 흔적 먼저 찾고, 그다음에 보고서를 조작해서 핑계를 만들면 된다.

"오히려 아무 연관이 없으면 골치 아프거든."

상대가 왜 죄가 없는지, 무슨 연유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를 일일이 지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카르나크도 모른다.

"그렇구만요."

바로스도 납득했다.

"무고한 사람 누명 씌우는 짓이야 자주 했지만, 무죄 증명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네요."

그러니 일단 카르나크 일행만으로 먼저 조사를 해 봐야 한다.

"진짜로 암흑교단과 연관이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임무를 맡건 말건 해야지."

#64화. 16. 왕가의 암투 (2)

카르나크는 임무를 맡을지 판단할 시간으로 사흘을 요구했다.

어차피 척 보기만 하면 사령술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그였다. 그러니 제2왕자가 암흑교단과 연관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사흘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오산이었다.

수도 드룬타 중앙의 왕성, 델라스타스.

왕성 외곽의 높은 장벽 아래 서서 카르나크가 혀를 찼다.

"아, 이런 문제가 있구만."

모든 사령술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다 해도 일단 본다는 행위 자체는 해야 한다.

겔파 마을 사건처럼 마을 전체에 광범위하게 사령술 결계를 깔아 놨다거나 하면 아무리 은밀해도 멀리서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브렐란트 백작 사건처럼 교묘히 소규모 사령술을 사용했다면 직접 탐색을 해야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왕성 안으로 들어가서 제2왕자나 왕자의 거처를 눈으로 봐야 하는데....

"들어갈 방법이 없잖아."

애초에 왕실과 아무 연도 없는 카르나크가 뭔 수로 왕궁 깊숙이 처박힌 알포드 왕자의 거처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킹스 오더의 신분으로 알현 요청을 넣어?

무슨 명분으로? 그냥 의심스러워서 무턱대고 짚어 보았다고?

잘도 만나 주겠다.

혐의가 사실이건 아니건 저건 충분히 기분 나쁠 만한 일이고, 권력자의 불쾌함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후폭풍이 다르다.

무조건 몰래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카르나크 일행은 지난 이틀간 열심히 왕성 근처를 어슬렁대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숙소에 모여 앉아 카르나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내일까지 답변을 줘야 하는데 어쩐다?"

세라티가 이해가 안 간다며 물었다.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하신 거예요?"

너무 당당하게 굴기에 그녀는 카르나크에게 뭔가 절묘한 마법적인 수법이 있는 줄 알았다. 그걸로 사령술의 흔적을 확인할 거라 여긴 것이다.

설마하니 들어가는 게 문제라는 점조차 떠올리지 못할 줄이야.

'이 인간, 사실은 바본가?'

변명하듯 카르나크가 투덜거렸다.

"그게, 예전엔 쉽게 들락날락했거든."

"어떻게요?"

왕년의 두 '인간 말종'들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다 부수고 들어갔지, 뭐."

"다 죽이고 들어갔죠."

"아, 예...."

이래서 편향된 경험이란 건 위험하다.

뒷골목 범죄 집단의 아지트에 잠입할 땐 온갖 수법을 다 떠올리는 놈들이 정작 일국의 왕성은 출입이 어려울 거란 생각조차 못 떠올리다니.

카르나크도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는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진짜 당연한 건데, 닥치기 전엔 영 생각이 안 미친단 말이야."

머리를 긁으며 그는 고민에 빠졌다.

"어쩌지? 일단 임무를 맡아? 하지만 그러면 혐의가 없을 경우 핑계가 안 떠오르는데."

세라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단 왜 제2왕자를 의심했는지부터 알아보는 건 어때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의심을 했을 테고, 그 이유가 합당하게 들렸기에 에란텔 단장도 이를 심각한 사안으로 여기고 카르나크를 호출한 것일 터다.

그냥 정체불명의 뜨내기가 와서....

-제2왕자가 수상합니다! 사령술사랑 손잡은 거 같아요!

-그럴 수가! 근거는?

-그냥요. 그래도 조사는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군! 킹스 오더 출동!

"...이랬을 리는 없잖아요?"

바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그걸 알아내려면 일단 임무를 맡아야 하잖아요."

저런 상세한 정보는 킹스 오더 내에서도 임무 당사자에게나 알려 주는 법이다.

"거, 지금 고민은 임무를 맡을지 말지라니까요?"

어떻게 이런 것도 모를 수 있냐는 표정으로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세라티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세라티도 똑같은 표정으로 응수해 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제 핑계가 생겼잖아요!"

"엥? 핑계가 생겼다고?"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어요, 세라티 경?"

세라티는 한 번 더 속으로 뇌까렸다.

'이 인간들, 사실은 바본가?'

굳이 핑계를 만들 필요도 없다.

"실제로 지금 우리는 제2왕자에게 접근을 못 했고, 그래서 혐의 자체를 파악하지도 못했잖아요. 그냥 그대로 보고하면 되는 거 아녜요?"

카르나크가 지방의 백성들 상대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출신이 촌뜨기 무지렁이 지방 귀족이다 보니 왕실의 중추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이 임무는 보다 신분이 높은 다른 킹스 오더가 맡아야 할 일인 것 같다.

"이러면 되잖아요."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러게! 그러면 되네?"

"왜 이 생각은 못 했죠, 우리?"

세라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세상만사를 거짓말로만 때우려고 하지 마시라니까요...."

새삼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때론 진실만으로도 상대를 속일 수 있는 법이죠."

"...그게 왜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어쨌든 이걸로 임무를 맡는 것에 대한 부담은 사라졌다. 카르나크가 몸을 일으켰다.

"나, 그럼 킹스 오더 본부 좀 다녀올게."

바로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 경우엔 도련님 평가가 떨어지지 않을까요? 첫 임무 실패가 될 텐데."

그 점에 있어선 아무 걱정도 안 하는 카르나크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뭐 출세하려고 이 짓거리 하냐?"

***

카르나크의 승낙에 에란텔 단장은 만면 가득 기쁜 미소를 지었다.

"오, 임무를 맡겠는가?"

"너무 좋아하시는데요?"

알고 보니 단장 역시 마음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이었다.

"달리 맡길 만한 이들이 없었으니 말일세."

킹스 오더는 임무 특성상 고위 귀족 출신이 많다. 그리고 상대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왕족, 그것도 미래에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였다.

자칫 잘못하면 가문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는 사안인 것이다.

아무리 정의감에 불타고 충성심이 드높은 이라도 가문에 피해가 갈 수 있는 일에 개입하는 건 쉽지 않다.

에란텔이 카르나크를 선택한 것은 그간 보인 성과가 대단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지방의 힘없는 귀족이라 중앙의 권력 다툼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컸다.

무엇보다 부모 형제를 전부 사령술사(?)에 의해 잃었으니 사령술에 대한 복수심이 매우 크다는 점도 신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은 사령술사도 아니었고, 복수심 따위도 없지만 말이지.'

내심 쓴웃음을 짓는 카르나크였지만 당연히 티는 내지 않았다. 이런 편리한 오해를 굳이 정정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임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받고 싶은데요."

"물론일세!"

에란텔이 집무실 금고를 열고 서류 한 무더기를 꺼냈다.

평소엔 그냥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건네는데, 이번엔 사안이 워낙 중대하다 보니 엄중하게 보관한 듯했다.

서류를 건네며 에란텔 단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왕가의 일, 그것도 오랫동안 반목한 두 왕자님들이 관련된 일이네. 부디 신중하게 움직이게."

***

유스틸 왕국 제2왕자, 알포드 루단 유스틸.

그가 검은 신의 교단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들고 온 이는 로이드 왕자의 비밀 정보원이었다.

두 왕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에게 첩자를 심어 놓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첩자 중 1명이 알포드 왕자 근처에서 정보를 캐내다가 이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일국의 왕자가 사령술사와 결탁했다는 건 보통 중대한 사건이 아닌 만큼 로이드 왕자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킹스 오더에 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가 말했다.

"얼마나 조심한 건지 로이드 왕자 쪽 편지 한 장만 달랑 본부로 날아왔다더라."

현재 카르나크 일행은 왕도 동쪽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로이드 왕자의 첩자가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었다.

설명을 듣던 바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 한 장만 믿고 에란텔 단장이 움직였다고요? 그 양반 그런 성격 아닌데."

"그게, 로이드 왕자의 친필 서한이었다 하더라고."

"아, 그럼 충분히 신뢰할 만하겠군요."

에란텔 경은 킹스 오더의 단장을 맡기 전엔 왕실의 부기사단장이었다.

로이드 왕자와도 친분이 있으니 필적이며 평소 쓰는 어투를 통해 서한의 진위를 충분히 판별할 수 있었으리라.

"뭐, 지금 아는 건 이 정도야. 그 이상 자세한 정보는 임무 당사자에게만 전하겠다더군. 킹스 오더도 완전히 믿진 못하겠다는 소리지."

세라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답게 신중하네요."

로이드 왕자 입장에서 에란텔 단장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왕실에 충성하던 이였고, 왕자들의 암투에도 철저히 중립을 지키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신뢰할 수 있다. 사령술 건은 암투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니까.

하지만 킹스 오더 전원을 믿을 순 없는 것이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갈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건 상식이다.

대화를 나누며 세 사람은 계속 수도의 거리를 걸었다.

깔끔한 수도의 건축물 대신 허름한 건물들이 거리를 대신한다. 하층민들이 주로 거하는 수도 외곽의 슬럼가다.

그중 통나무와 판자를 덧대 만든 어수선한 2층 건물이 약속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건장한 사내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며 사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나리?"

카르나크는 피식 웃었다.

'첩자치곤 연기가 영 어수룩한데?'

아마 흔해 빠진 빈민으로 보이려 한 모양인데, 그렇다기엔 덩치가 너무 좋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이 왔으면 의아해해야지 왜 주위를 경계해?

카르나크가 품속에서 엠블렘을 꺼내 들었다.

"킹스 오더다. 그대가 로이드 전하의 밀명을 받은 자인가?"

인장을 확인한 두건 쓴 사내가 말투를 바꿨다.

"그렇군. 그대들이 에란텔 경이 고른 이들인가?"

순간 바로스는 의아해했다.

'말투가 어째?'

첩자치곤 말투가 너무 고압적이었다. 아니, 고압적이라기보단 하대가 자연스러운 말투?

'고위 귀족인가?'

그건 좀 이상하다. 고위 귀족 출신은 보통 첩자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경계하며 바로스가 말했다.

"자, 이제 당신이 신분을 증명할 차례요."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신분을 증명할 유일한 물적 증거가 킹스 오더로 보낸 왕자의 친필 서한이었다네."

"증거가 없다는 거요?"

바로스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세라티 역시 무릎을 살짝 굽혔다.

하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는 반응이었다.

"그러니 내가 증명할 것은 내 얼굴밖에 없는데...."

두건으로 손을 가져가며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말해 두네만, 내 얼굴을 보면 꽤나 놀랄 걸세. 그러니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당부해 두고 싶군."

의아해하는 일행 앞에서 사내는 두건을 젖혔다.

진한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턱선, 강인한 인상을 지닌 청년이 얼굴을 드러냈다.

일견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 속에 신기하게 차분한 느낌이 섞인 인상.

그 얼굴을 본 순간 바로스와 세라티의 안색이 굳었다.

"어?"

"당신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초상화를 통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킹스 오더는 직업 특성상 한껏 미화된 예술용 초상화가 아닌, 빛의 마법으로 염사해 만든 실물과 똑같은 초상화로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익힌다.

덕분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알포드 왕자님?"

"이게 무슨?"

두건 쓴 사내의 정체는 유스틸 왕국 제2왕자, 알포드였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다.

제2왕자가 암흑교단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들고 온 이가 제2왕자 본인이라니?

그런데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이어졌다.

"자네들 말이 맞아. 이 얼굴은 분명 알포드의 것이지."

턱을 매만지며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알포드가 아니다.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만...."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난 제1왕자, 로이드 루단 유스틸. 이 나라의 정명한 계승자다."

#65화. 16. 왕가의 암투 (3)

제2왕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자신을 제1왕자라고 우긴다?

평범한 이라면 알포드 왕자의 정신에 상당한 문제가 생겼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사령술에 익숙한 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카르나크가 인상을 썼다.

"두 분의 영혼이 바뀐 것입니까?"

알포드, 정확히는 알포드의 육신을 차지한 로이드 왕자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한 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네만, 이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인가?"

"사령술 중에는 그런 술법도 있으니까요. 조건이 매우 까다롭긴 하지만 말이죠."

왕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자네들을 택한 것이 정답이었군."

이것이 일부러 킹스 오더에 연락을 취한 이유였다.

킹스 오더의 마법사들보다 강력한 마법사가 유스틸 왕국에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령술 관련 사건이라면 저들보다 더 노련한 이들은 없다.

왜냐고? 종말의 어둠이 뿌려지기 전에는 굳이 대사령술 관련 수법을 따로 익힐 이유가 없었거든. 사령술사 자체가 얼마 없었는데?

킹스 오더의 마법사쯤은 되어야 자신에게 걸린 사령술을 알아볼 거라 기대한 것이다.

로이드 왕자가 다시 물었다.

"혹시 킹스 오더가 아닌 마법사들도 자네처럼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제1왕자의 세력에 속한 다른 마법사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제가 무슨 마법적인 안목으로 왕자님의 상태를 파악한 건 아닙니다."

실은 보자마자 '어라? 엉뚱한 영혼이 들어가 있네?'라고 바로 알아봤지만, 일단 모른 척한다.

지금 로이드 왕자에게 펼쳐진 영혼 교환술은 굉장히 고도의 사령술이다.

마법사는 물론이고, 사령술사라 해도 펼친 본인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어디까지나 카르나크쯤 되니까 파악했지, 보통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니 나도 못 알아본 척해야지.'

카르나크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단지 왕자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영혼 교환술이 제일 앞뒤가 맞는 것뿐이지요. 사실은 알포드 왕자님이 저희를 기만하고 로이드 왕자님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실제로 다른 킹스 오더라면 이런 식으로 판단했을 터였다.

로이드 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즉, 아직 내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란 의미인가?"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정황상 당신이 로이드 왕자님일 가능성은 꽤나 높거든요."

"왜 그렇게 판단했지?"

카르나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정답을 아는데 사정을 말하지 못하니 귀찮구만.'

그렇다고 대놓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적당히 입을 털었다.

"에란텔 단장님이 당신의 서한을 신뢰했으니까요. 그분이 제1왕자로 판단했다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에란텔 경마저 속였을 가능성은? 내 친필 서한을 알포드가 따로 손에 넣은 뒤 수작을 부렸을 수도 있지 않나?"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점점 더 로이드 왕자님일 가능성이 높아지네요."

"어째서?"

"만약 당신이 알포드 왕자님인데 속이고 있는 거라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겠죠."

무의식중에 '로이드 왕자'의 친필 서한을 '내'가 따로 손에 넣었다는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자아가 알포드였다면 말이지.

"그, 그렇군."

로이드 왕자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카르나크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왕자님이 보이는 반응만 해도 그렇습니다."

"반응이라니?"

"아까부터 계속 왜 자신을 의심하지 않냐고 따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포드 왕자가 로이드 왕자인 척하고 있는 거라면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자신을 의심하게 할 필요까진 없다.

"의심스러운 부분을 먼저 제거해 확실하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 않... 아니, 그렇군. 그럼 더더욱 이렇게까지 따질 필요는 없지."

"그리고 딱히 득 될 게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득 될 게 없다고?"

"상황이 그렇잖습니까?"

알포드 왕자가 본인이 로이드 왕자인 척하면서 자기 세력과 자기 자신에게 사령술 혐의가 있다고 고발한다?

"굳이 이렇게 해서 알포드 왕자님이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건지 전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군요. 물론 이 역시 제가 상상도 못 할 기묘한 책략을 꾸밀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또한 가능성이 극히 낮다. 아무리 기묘한 책략이라도 최소한 기본적인 틀은 있는 법이다.

여러 상황을 두루 조합해 볼 때, 로이드와 알포드의 몸이 바뀌었다는 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로이드의 표정이 풀렸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듯했다.

"정말이지 다행이군. 자네처럼 지혜로운 자를 만나서 말이야."

바로스와 세라티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혜로운 자?]

[그냥 정답부터 훔쳐본 뒤 끼워 맞추고 있을 뿐인데, 무슨.]

[어이, 둘 다 표정 관리 좀 하시지?]

어쨌거나 덕분에 로이드 왕자는 카르나크를 상당히 현명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신뢰할 만한 마법사로 본 모양이었다.

왕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 몸이 바뀌었다는 걸 마법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는 소리인가?"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물론 마탑의 고강한 마법사들께선 다를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는 있다.

있긴 있는데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촉매도 굉장히 구하기 힘든 데다 고도의 마법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의식이라서 문제지.

'현재 유스틸 왕국 마탑 수준에서는 저게 가능한 마법사가 없을걸.'

로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쉽게 들통날 것 같으면 알포드가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나는 킹스 오더의 마법사라면 내 정체를 증명해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자네들을 찾은 것이네만...."

"일단은 정황부터 들어 보고 싶군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카르나크가 자리를 권했다.

방 안의 허름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그가 다시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그냥 자고 일어나니 내가 알포드가 되어 있었어."

"자세한 과정을 설명해 달라는 말입니다. 왕자님께선 미처 모르시는 단서를 잡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군."

납득하며 로이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닷새 전의 일이었다...."

***

왕자의 말에 따르면 평소와 다를 바가 전혀 없는 하루였다.

"그날도 난 평범하게 일과를 마치고 매일같이 받는 신관의 신성 치유술을 받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네."

바로스가 문득 물었다.

"...매일같이 신성 치유술을 받으신다고요?"

로이드가 실소를 흘렸다.

"자네들도 내 몸이 약하다는 소문 정도는 들었을 텐데?"

"그, 그래도 그렇지...."

저건 약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숨 쉬는 좀비 수준이 아닌가?

물론 왕자님 앞에서 감히 대놓고 말할 순 없지만.

익숙한 반응인지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 아버님이 알포드에게 기대를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여튼 잠이 들 때까지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어."

카르나크가 좀 더 세심하게 짚어 보았다.

"못 보던 물건이 방에 놓여 있다거나, 낯선 이가 주위를 얼씬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에 대해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지."

굳이 사령술이 아니더라도 로이드 왕자는 처소 방비에 대해 항시 신경을 썼다. 알포드와 알력이 깊으니 언제 독살 등을 시도할지 모르는 것이다.

"비단 내 처소뿐 아니라 왕궁 전역엔 강력한 마법과 신성술의 결계가 펼쳐져 있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사령술이란 게 이렇게나 강력한 수법인가?"

"...그 부분은 저도 좀 이해하기 어렵군요."

맞장구치는 카르나크를 보며 세라티가 몰래 물었다.

[실제론 뭐예요?]

[몰라. 진짜로 이해를 못 하겠다.]

[어머, 일부러 모른 척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사령술이라고 만능은 아냐. 이 정도 술법을 펼치려면 그에 걸맞은 준비가 갖춰져야 한다고.]

온갖 방비가 다 되어 있는 일국의 왕궁을 들어가지도 않고 원거리에서 척척 사령술을 건다?

[저게 가능하면 내가 전생 때 그 고생 안 했겠지?]

[카르나크 님이 전생 때 뭔 고생을 했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세라티의 핀잔을 뒤로한 채 카르나크는 고민에 빠졌다.

몇 달 전, 트리스트 시티 사건이 떠오른 탓이었다.

'가만있자, 이건 또 뭐지? 또 내가 모르는 수법이 튀어나온 건가?'

로이드가 다시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잠에 들었고, 다시 눈을 뜨니 주위가 완전히 바뀌어 있더군."

***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느낀 위화감은 컨디션이었다.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기상과 동시에 느껴져야 할 두통이 없었다. 항상 고통스럽던 열도 느껴지지 않았다. 삐걱대던 관절도 기이할 정도로 편안했다.

의아해하며 로이드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순간 움찔거렸다.

'어?'

전신이 밧줄로 묶여 있다. 덕분에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경각심이 든 로이드는 재빨리 전신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아해했다.

'이거 누구 팔이야?'

두툼한 근육질, 잘 갈라진 전완근이 보기만 해도 사내다워 보이는 팔뚝이었다.

젊은 처녀와 비교해도 차이를 찾기 힘들었던 자신의 팔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분명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감았는데 지금은 웬 정체불명의 공간에서 눈을 뜬 것이다.

로이드는 허겁지겁 주위를 살폈다.

작은 석실이었다.

아무 가구도 없는 평범하고 어두운 석실.

마법 조명 아래 기이한 붉은 마법진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자신은 그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3명의, 얼굴을 가린 검은 로브의 사내들.

사내 중 1명이 음험한 목소리를 흘렸다.

"기침하셨습니까, 로이드 왕자님."

단어는 정중하지만 어투에 조롱이 가득하다.

로이드는 침착하게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장소에, 모르는 이들이로군."

충분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순 없다.

"좋은 재주를 지녔구나.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일국의 왕자를 납치했단 말인가?"

과장스레 자신을 훑어보며 로이드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 납치한 뒤, 내 몸에 이상한 짓도 한 모양이군. 내 팔은 이리 굵지 않고, 내 몸도 이리 두껍지 않다."

그 반응에 다른 사내가 혀를 찼다.

"정말 침착하시군요. 최소한의 당혹 정도는 내비칠 줄 알았는데."

서늘한 눈빛을 보이며 로이드가 물었다.

"그래,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사내가 허공에 손을 저었다.

"보여 드리지요."

마법적인 빛의 거울이 허공에 생성되어 로이드를 비췄다.

거울을 바라본 로이드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알포드?"

순간 동생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묶여 있는 모습이며 표정 등을 통해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저 '알포드'가 바로 로이드 자신이다!

아무리 침착한 성품인 그라도 순간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은 로브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왕자님과 알포드 전하의 육신을 서로 뒤바꿨습니다. 위대하신 테스라낙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일이지요, 후후후후."

테스라낙이란 이름은 로이드도 익히 들어 온 바가 있다.

그의 두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사교도!"

***

'음? 좀 이상한데?'

설명을 듣다 말고 세라티는 의아해했다.

'굳이 마법의 거울을 만들어서 왕자의 현재 모습을 보여 주고, 심지어 묻지도 않은 상황까지 먼저 알려 주었다고? 원래 사령술사란 종자들은 저렇게 말이 많나?'

#66화. 16. 왕가의 암투 (4)

사교도들은 묶인 로이드를 끌고 석실 밖으로 나섰다.

지하실을 벗어나 복도로 이동해 위로 올라간다.

눈치를 보며 로이드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속셈이냐?"

"알포드에겐 무슨 짓을 한 거지?"

"일국의 왕자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대답은 없었다.

조금 전 장황하게 사정을 설명할 때와는 정반대, 시종일관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그렇게 맥없이 끌려가던 중이었다.

문득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거 참, 편하군.'

밧줄로 꽁꽁 묶인 채 소처럼 끌려가고 있는데 편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여야 했다.

그런데 진짜로 편하다.

그냥 고통 자체가 없다. 두 발이 너무나 가볍고, 육신이 너무도 쉽게 움직인다.

'하긴, 생각해 보면 깨어났을 때도 그랬지.'

푹신한 침구에서 편안한 잠옷 차림으로 잠들었던 그였다.

하지만 깨어났을 땐 거추장스러운 일상복에 두 팔은 꽁꽁 묶인 상태, 심지어 차가운 돌바닥에 엎어져 있었지.

그런데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러니까, 알포드 녀석은 항상 이렇게 살고 있었단 말이지?'

자신의 원래 육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새삼 실감이 든다.

그렇게 저택 2층으로 올라가니 한 무리의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 아는 얼굴이 있어 로이드가 인상을 썼다.

"세바스티안 경."

알포드 왕자의 심복 중 1명이었다.

"의외군. 설마 자네가 알포드를 배신했을 줄이야."

세바스티안이 풉, 하고 웃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알포드 전하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왜 알포드를 내 고물 같은 몸에 집어넣었단 말인가?"

"하긴, 그렇게 보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군요."

그 반응에 로이드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일단 알포드가 이 상황을 주도했다는 걸 확인했다.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 녀석이 내 몸을 차지해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지?'

세바스티안이 등 뒤의 사내들에게 손짓을 했다.

복도 한쪽의 두꺼운 방문이 열렸다.

내부는 화려한 침실이었다.

일국의 왕자가 거하기에 충분히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

차이점이 있다면 모든 창문에 두꺼운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들어가시지요."

이런 상황에서 반항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순순히 따르며 로이드가 한마디 던졌다.

"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건가?"

사교도들과 달리, 세바스티안에게선 대꾸가 돌아왔다.

"원하는 것 말입니까?"

방에 들어선 로이드를 향해 그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없습니다."

사내들이 로이드를 묶은 밧줄을 도로 끌렀다.

아무래도 계속 묶은 채로 놔둘 생각은 아닌 듯했다.

"왕자님은 그냥 몸 건강히, 얌전히 이곳에 계셔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두꺼운 방문이 굳게 닫히고 잠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카르나크 일행을 둘러보며 로이드는 말을 이었다.

"방에 갇힌 뒤 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부터 했네."

감금된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탈출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창문에 설치된 창살도 흔들어 보고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방문도 훑어보았다네. 두 팔을 풀어 주었으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지."

그리고 대부분의 감금된 자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딱히 탈출할 방법은 없더군. 예상했던 터라 실망하진 않았네만."

실은 실망보단 환희가 더 컸다.

"육체를 빼앗기고 정체불명의 장소에 갇힌 사람이 할 소린 아니겠지만...."

부실한 육체라는 감옥에 내내 갇혀 있다가 알포드의 몸을 손에 넣었다.

단순히 방 안을 서성대는 것만으로도 자유란 게 무엇인지 실감할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그냥 육체가 바뀐 상태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어."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딱히 묶어 놓은 것도 아니고, 침대도 푹신했고, 갇혀 있는 동안 심심할까 봐 볼만한 서적들도 따로 비치해 놓았다.

"식사 역시 일국의 왕자가 먹을 법한 최고급이었다네."

같은 왕자인데도 로이드는 평생 먹어 보지 못한 맛난 음식들이었다.

"돈이 없거나 차별을 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자극이 강한 음식은 먹으면 바로 탈이 났거든."

맵고 짜고 단 음식이란 게 얼마나 행복감을 가져다주는지 난생처음 경험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로이드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그땐 좋았는데."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걸 왜 자네들이 이해를 하나?"

잠시 의아해했지만, 로이드는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 접촉이 없었다네. 매 끼니마다 식사를 가져다줄 뿐이었지."

식사 때만 열리는 두꺼운 방문.

갇힌 로이드가 탈출하려면 그때가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세바스티안도 바보는 아니라 하녀가 식사를 가져올 때마다 중무장한 일류 기사 4명이 동행했다.

알포드 본인이라도 일대일로 이길 수 없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런 이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감시하고 있으니 식사 때라고 어떻게 손을 쓰긴 어렵다.

"어, 그럼...."

이야기를 듣다 말고 세라티는 의아해했다.

지금 로이드는 분명 저택을 탈출해서 자신들의 눈앞에 이렇게 앉아 있다.

"대체 어떻게 탈출하신 거예요?"

"그게 말이지...."

로이드 왕자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그 친구들이 심각하게 오해한 부분이 있더라고."

***

방 안에 갇힌 채 로이드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일단 현 상황에서 내가 아는 것부터 파악하자.'

알포드가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현시점에선 알 방법이 없다.

확실한 건 둘의 육체가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로이드 자신이 감금된 상태란 것이다.

'당장 죽이지 않는다는 건,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소리.'

주위 환경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간다.

감옥이라기엔 지나치게 안락한, 철저하게 미리 마련해 놓은 공간이었다. 식사도 최상급이고 화장실도 방과 붙어 있어 품위 있게 용변을 처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알포드의 '육체'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은 명백했다.

'무심코 건강에 신경을 쓴 것도 그렇고 말이지.'

그렇다면 식사 때를 이용해 탈출을 꾀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상대는 이 육체를 해하지 못할 테니 그 허점을 이용해서....'

허황된 이야기였다.

이 말은 곧, 일개 병사조차 상대하지 못하던 로이드가 알포드 본인이라도 상대하지 못할 일류 기사 4명을 모조리 제압하고, 저택 곳곳에 있을 경비들까지 모조리 처리한 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저택에서 빠져나가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소리가 아닌가?

"말도 안 되지."

허탈해하며 로이드는 습관적으로 몸을 풀었다.

워낙 엉망인 육체의 소유자이다 보니, 수시로 관절이며 근육을 풀어 주지 않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던 중이었다.

단순히 몸을 풀 뿐인데, 놀라울 정도의 활기와 기력이 전신을 통해 느껴진다.

"어라?"

순간 로이드가 눈을 깜빡였다.

"...되겠는데?"

***

알포드 왕자는 분명 뛰어난 무재를 지니고 있었다.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일류 기사와 맞먹는 기량을 보인다는 건 보통 재능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래 봤자 일류 기사 1명분의 실력에 불과하다는 소리도 된다.

하물며 지금 알포드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이는 제1왕자 로이드, 무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둔재에 불과했다. 그냥 평범한 병사 2~3명만 있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세바스티안은 휘하 기사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을 골라 감시자로 붙였다.

워낙 사안이 중대한 만큼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해 과할 정도로 경계를 한 것이었다.

하나하나가 알포드보다 월등히 강한 자들, 그런 이들을 무려 넷이나 붙였으니 누구라도 대비가 허술했다고 탓하진 못하리라.

하지만 지금 그 4명의 기사들은 시체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으...."

"으으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식사를 받아 든 로이드가 갑작스레 뛰어오르며 선두에 선 기사의 목에 수도 일격, 너무도 정확하게 급소를 강타당해 무릎이 풀릴 때 바로 허리춤의 검을 빼앗아 갔다.

이후 이어지는 섬전 같은 연격.

물론 기사들도 곧바로 대응했지만 로이드의 검이 더 빨랐다.

세밀하게, 정교하게, 모든 공격이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고, 기사들은 그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기사 1명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포드 왕자님 본인도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는데....'

호흡을 고르며 로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은 내 원래 육체가 얼마나 부실했는지 전혀 몰랐던 모양이군."

분명 그는 심각할 정도의 약자였다.

최고의 스승 밑에서 최고의 검술을 배웠음에도 일개 병사 하나 상대하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그런데 이것이, 정녕 무재가 없다는 증거일까?

오히려 반대다.

최고의 스승 밑에서 최고의 검술을 배워, '그 쓰레기 같은 몸'으로 무려 '일반 병사'와 맞먹는 무위를 보였다.

최소한의 힘과 최소한의 움직임, 오로지 수 싸움과 기술만으로 압도적인 체력과 기력, 근력의 격차를 이겨 낸 것이다.

그런 로이드가 멀쩡한, 심지어 강인하기까지 한 육체를 손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알포드 이 자식, 이런 축복받은 몸으로 그것밖에 못했던 거야? 너무 게으름 피운 거 아냐?"

혀를 차는 로이드의 뒤에서 공포에 질린 하녀의 신음이 들려왔다.

"아, 아아...."

빙그레 웃으며 그는 방문을 나섰다.

"걱정 마라. 그대를 해하진 않을 것이다."

굳이 하녀까지 해칠 필요가 없었다.

"그냥 한동안 여기 갇혀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가둬 놓기도 쉽군. 애초에 가둬 놓으려고 만든 곳이니."

***

"예상외로, 그 이후엔 쉽게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네."

철통같은 감시망이 펼쳐져 있을 거란 로이드의 예상은 틀렸다.

당연히 곳곳에 경비가 있긴 있었지만, 다들 그를 보고도 붙잡으려 하질 않았다.

"그냥 경례만 착실히 올리더라고."

그때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내 상황을 일반 병사들에게까지 알렸을 리가 없더군. 무려 사교단이 개입된 사건 아닌가?"

경비들 눈에 여전히 그는 알포드 왕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산책 좀 하겠다며 당당히 정원으로 향했다.

물론 저택을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다.

"진짜 알포드 본인이라도 홀로 외부로 내보내 주진 않을 테니 말이야."

로이드도 왕자인지라 상황을 뻔히 안다.

위험하다며 호위를 붙이려 할 것이고, 그럼 상부에도 연락이 갈 것이며, 그럼 세바스티안이 기사들을 대동해 쫓아오겠지.

"그래서 눈치껏 사람 없는 곳을 노린 뒤 담을 넘었다네."

그렇게 운 좋게 저택에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곧바로 왕궁으로 돌아가기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 정도는 2왕자 측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길목부터 장악할 테고, 채 왕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 붙잡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다른 심복들을 찾기도 애매했다.

사교도들에 의해 육체가 바뀌었다는 말을 믿어 줄 거란 확신이 없는 것이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알포드의 몸으로 홀로 로이드의 세력에 떨어진 꼴이 된다.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일국의 왕자인데 설마하니 대뜸 죽여 버리기야 하겠냐 싶지만....

"아니라고 단정 짓기엔 워낙 암투가 길지 않았나?"

무려 10년이 넘도록 서로의 목을 노리던 사이였다.

멋대로 저지른 뒤 사후 보고를 올리는 것을 진정한 충성이라 생각하는 심복이 없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실제로 비슷한 경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무릇 목숨이란 함부로 도박에 걸 물건이 아니다.

"전례가 없던 상황이라 대체 뭘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더군."

그때 떠올린 것이 킹스 오더였다.

"사령술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말이 통하리라 기대했지. 적들이 내 움직임을 예상할 가능성도 적을 것이고."

그래서 친필 서한을 작성해 몰래 에란텔 단장에게 보냈다.

로이드와는 기존의 친분이 있었으니, 필적을 충분히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단지 여기서 예상 못 한 문제점이 있더군. 난 분명 평소대로 글씨를 썼는데 알포드의 필적이 나와 버렸어."

아무래도 필적이나 습관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에 종속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원래 내 필적이잖나? 연습 좀 하고 나니 도로 원래 필체를 구사할 수 있었다네."

본인의 필적을 본인이 위조하는 것도 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며 로이드 왕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 슬럼가에 몸을 숨긴 채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흘 뒤, 카르나크 일행과 만난 것이다.

"이것이 지난 닷새간의 행적일세."

설명을 마치며 로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자네들과 접선했으니 이제 묻고 싶군."

사령술사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해 본 킹스 오더라면 잘 알고 있을 터다.

"이제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겠는가?"

#67화. 17. 적절한 미끼

유스틸 왕국 수도 드룬타 교외의 한 저택.

알포드 왕자의 추종 세력인 에드란 백작가의 거처로, 로이드 왕자를 놓친 세바스티안이 새로 마련한 아지트였다. 위치가 들통난 이상 계속 같은 곳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

저택 집무실에서 세바스티안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가용 인원을 모두 풀어 로이드 왕자, 정확히는 알포드 왕자의 육신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수도의 모험가 길드를 통해 우회적으로 정보도 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이다.

좌절한 세바스티안이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씹어 댔다.

"벌써 휘하 세력과 접선한 건가? 그래서 모습을 감췄나? 그럼 일이 진짜 곤란하게 되는데...."

혼잣말을 하는 그의 맞은편에 3명의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평소의 검은 로브 차림이 아니라 일반인처럼 보이지만, 검은 신의 교단이 보낸 사령술사들이었다.

개중 50대 사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령술사들의 우두머리, 데츠라스였다.

"왕궁과 탈라인 후작가 쪽은 이미 확인하지 않았나?"

양쪽 모두 오래전부터 첩자들을 박아 두었다. 그러니 적어도 로이드 왕자가 왕궁이나 자신의 외가로 향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세바스티안이 퉁명스레 반문했다.

"하지만 다른 수하들을 찾았을 가능성까지 배제하진 못하지 않소?"

알포드 왕자에게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수하들이 있듯, 로이드 왕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 모든 세력에 전부 첩자를 투입시킬 순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게 가능하려면 세력 격차가 엄청나게 커야 하는데, 그럼 암투가 10년 넘게 지속되었을 리도 없다. 끝나도 진작 끝났겠지.

데츠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 않나?"

다른 사령술사들도 동의하며 입을 열었다.

"로이드 왕자가 수하들과 접선했다면 분명 다른 움직임이 있을 테니, 그에 맞춰 대응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온전한 알포드 왕자님의 육신을 모시는 일이지요.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그러자 세바스티안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건 전부 로이드 왕자의 육체가 바뀌었다는 말을 남들이 믿을 때의 이야기가 아니오?"

저들은 진짜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믿지 않을 때가 제일 문제라니까!"

종말의 어둠이 내린 지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직 세상은 사령술이란 존재에 익숙하지 않다.

당장 세바스티안 본인만 해도 그렇다.

어느 날 갑자기 로이드 왕자가 찾아와서 '난 사실 알포드 왕자다. 로이드와 육체가 뒤바뀌었을 뿐이다!'라고 한다면?

"로이드 왕자가 미쳤거나,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겼겠지. 적어도 저 상황 자체는 절대 믿지 않았을 거요."

그러고 나면 어찌했을까?

기회만 오면 죽이려 혈안이 되었던 목표가 홀로, 은밀하게 손에 떨어진 셈이다.

"처리할 더없이 좋은 기회지."

사령술사들이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바로 죽여 버릴 거란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왕자인데?"

한심하다는 듯 세바스티안이 사령술사들을 바라보았다.

"우린 이미 10년 넘게 서로의 왕자를 죽이려 했소.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이지."

"그래도 정말일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 의심도 안 한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당신들이 사령술사라서 하는 생각이고."

세바스티안조차도 저들을 만난 후에야 육체와 영혼이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까진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소."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저잣거리 영웅담 중에도 간혹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귀족인 내가 그딴 천박한 물건을 읽었을 것 같나?"

그리고 로이드 왕자의 심복들 또한 대부분 귀족이다.

"허, 그런 문제가...."

사령술사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래서야 정말 로이드 왕자가 자기 수하들 손에 의해 죽어 버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행인 점은 아직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는 것이군."

데츠라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희미한 검은 기류가 일렁이다 사라졌다.

"소울 체인질링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두 왕자의 육체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지."

하지만 앞으로도 무사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정말 사령술로 왕자님의 육체를 찾을 방법은 전혀 없소?"

세바스티안의 질문은 지난 며칠간 몇 번이나 들어 온 것이었다. 그래서 사령술사들도 몇 번이나 했던 대답을 반복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이미 행했겠지요."

수많은 마법사와 성직자, 심지어 대사령술 전문 조직인 킹스 오더까지 혼재하는 수도 드룬타에서 벌인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은밀함에 사활을 걸었으니, 사령술을 건 본인들이라도 술법의 흔적을 찾을 방법이 없다. 그 정도는 되어야 들키지 않는 것이다.

세바스티안이 재차 머리를 감쌌다.

"역시 너무 위험한 짓이었어. 왕자님을 말렸어야 했는데."

데츠라스가 혀를 찼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위험한 일은 아니었지. 설마 그대들이 그렇게나 무능할 거라곤 상상 못 했을 뿐."

"...지금 뭐라고 했소?"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기껏 잡아다 준 사냥감을 멍청하게 놓친 게 누구지?"

세바스티안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다른 사령술사들이 둘을 말렸다.

"두 분 다 진정하시지요."

"아직 실패한 건 아닙니다. 의식 전까지만 해결하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두 분의 영혼이 원래 육체로 돌아갈 뿐."

"물론 그 경우엔 알포드 왕자님께서 저희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들통날 테니 결코 좌시할 일은 아닙니다만...."

"왕자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애써 흥분을 억누르며 세바스티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빨리 로이드 왕자를 찾아야 하오. 그것이 최선이니."

***

카르나크 일행이 로이드 왕자와 접선한 지 사흘째.

왕자는 카르나크가 따로 마련한 은신처에 숨어 있었다. 드룬타의 슬럼가에 위치한 허름한 가옥이었다.

"고귀하신 분을 이런 곳에 모셔서 송구스럽군요."

세라티가 미안해했지만 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쓰지 말게. 딱히 불편하진 않으니까."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 그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왕궁의 비단 금침 대신 짚을 채워 넣은 조악한 이불, 세심하게 영양을 신경 쓴 호사스러운 왕실 요리 대신 저잣거리 평민들이 먹는 일반적인 식사.

왕자인 그에겐 분명 난생처음 겪는 혹독함이어야 하겠지만....

"웃기는 이야기지만, 내 평생 요즘처럼 안락하게 지낸 적이 없거든."

가볍게 윙크하며 로이드는 손에 쥔 빵 조각을 맛나게 씹었다.

"아무리 환경이 극상이면 뭘 하겠나? 육체가 최악이었는데."

그냥 빵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흑빵.

하지만 지금의 그에겐 이 거친 빵을 돌처럼 씹을 수 있는 강인한 이빨과 잇몸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려 소금도 칠 수 있어!

"탈출한 뒤 누더기 뒤집어쓰고 뒷골목에 쪼그려 앉아 잔 적이 있었지. 그때조차도 왕궁에 있을 때보다 편했다네."

세라티가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진짜 몸이 엉망이셨던 모양이군요."

"멀쩡한 몸을 가진 인간들은 멀쩡하지 않은 몸이 얼마나 고달픈지 잘 모르는 법이거든."

반면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깊은 공감을 보였다.

"그렇죠."

"당해 봐야 알죠, 그거."

"...그러니까 왜 자네들은 이해를 하는 거냐고."

혀를 차며 로이드가 화제를 바꿨다.

"그래, 어찌 되었나?"

사흘 전 왕자는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느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게 아니다. 이건 이미 명확한 답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저지른 사교도들부터 붙잡아야 한다. 죽이건 생포하건 간에 저놈들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다.

굳이 카르나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어떻게 해야 사교도들을 붙잡을 수 있을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카르나크는 킹스 오더 대대원들을 부려 로이드가 탈출했던 저택부터 탐색했다.

아쉽게도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지만.

"사령술사들도, 세바스티안 경과 그 수하들도 모조리 자취를 감춘 후입니다."

로이드도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곳에 계속 머무를 리가 없겠지. 그럼 이제 어쩔 텐가? 킹스 오더를 풀어 사교도 탐색에 들어갈 건가?"

"그게 정석이긴 합니다만, 현 상황에는 맞지 않습니다."

여태 킹스 오더가 활동해 온 지방 영지가 아니라 일국의 수도가 배경이다.

탐색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다. 관련된 귀족들도 너무 많다.

아무리 킹스 오더라도 명확한 근거도 없이 관련된 고위 귀족가를 모조리 들쑤시고 다닐 순 없는 것이다.

"은밀하게 탐색을 이어 가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알포드 왕자의 계획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순 없지요."

로이드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인가."

이쪽에서 찾을 방법이 없다면, 저쪽이 찾아오게 만드는 수밖에.

"좋아, 내가 미끼가 되겠다. 그럼 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나?"

카르나크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 그건 당연한 거고요."

"...애초에 날 미끼로 쓸 셈이었나?"

"미끼 되신다면서요?"

"내가 자원하는 것과 자네가 시키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혀를 차며 로이드는 카르나크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카르나크는 이미 그를 미끼로 쓸 셈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뭔가 걸리는 점이 있단 소리다.

"문제가 있나?"

"미끼의 종류가 문제입니다."

무릇 낚시를 하려면, 노리는 어종에 걸맞은 미끼를 달아야 하는 법이다.

"분명 왕자님은 좋은 미끼입니다. 알포드 왕자의 수하들은 대거 떡밥을 물겠죠."

고소를 머금은 채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령술사들은 아니란 말입니다."

도망쳐 자취를 감춘 로이드 왕자, 정확히는 알포드의 육체가 다시 나타났다. 그렇다면 알포드 왕자 측이 취할 행동은?

"당연히 사람을 풀어 왕자님을 재차 확보하려 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사령술사들이 직접 나설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어차피 알포드 왕자 측 전력이 충분한데? 굳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할 리 없다.

"같은 이유로 왕자님이 킹스 오더와 손잡았다는 게 알려져도 곤란합니다."

킹스 오더는 사교도 전문 대응 기관이다.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것에 특화된 조직이란 의미다.

"킹스 오더 상대로는 사령술사보다 오히려 알포드 왕자의 기존 전력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당연히 사교도들은 움직이지 않겠죠."

그래서 저택 탐색 정도의 은밀한 임무는 킹스 오더를 투입할 수 있었지만 로이드 왕자의 호위 같은 직접적인 임무를 맡길 순 없었던 것이다.

"사교도 놈들이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습격한 놈들을 붙잡아 심문하면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실행 부대가 그런 은밀한 사항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굳이 두 왕자의 현 상태를 일일이 밝힐 필요도 없다.

그냥 알포드 왕자가 납치되었으니 구출하라고만 하면 된다.

"마법으로 세뇌된 탓에 지금의 왕자님은 제정신이 아니다, 뭐라 하건 무시하고 일단 모셔 와라, 뭐 대충 이렇게 하면 별문제도 안 생기지요."

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방법이 없단 소리가 아닌가?"

평범한 병사나 기사가 상대라면, 저쪽도 똑같이 평범한 병사나 기사를 동원하는 게 낫다.

킹스 오더가 상대라면, 더더욱 평범한 병사나 기사를 동원하는 게 낫다.

"자네 말대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사교도들은 직접 움직일 이유가 없는데."

"네, 그래서...."

카르나크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적합한 미끼를 추가로 달아 줄 생각입니다."

#68화. 17. 적절한 미끼 (2)

로이드 왕자를 놓치고 이레째.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기분을 느끼던 세바스티안에게 드디어 고대하던 소식이 왔다.

"왕자님을 찾았나?"

수도 드룬타 서쪽의 달레인 거리 근처에서 알포드로 추정되는 인상착의의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달레인 거리라면... 론티움 자작가가 위치한 곳이군."

론티움 자작가는 로이드 왕자의 오랜 지지 세력 중 하나.

"그쪽과 접촉했나?"

보고 중이던 부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진 않았습니다."

왕자는 허름한 부랑자 차림으로 뒷골목을 전전하는 중이었다. 자작가 근처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는 중이란 의미다.

납득할 수 있었다.

함부로 정체 드러냈다가 자기 부하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세바스티안도 생각할 수 있는 걸 로이드 왕자 본인이 모를 리 없겠지.

태어날 때부터 암투에 시달려 온 인생이니 그 정도 조심성은 당연히 지니고 있으리라.

어쨌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 실패를 수습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

"홍염단을 보내라."

홍염단은 기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선 기사 못지않은 전력이 되는 이들이기도 했다.

무릇 기사란 갑옷 입고 말 타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이들을 뜻한다. 하지만 전투란 게 무조건 전쟁터에서만 일어나진 않는다.

납치, 감금, 요인 암살 및 소규모의 시가지 전투 등에선 기사보다 강한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모험가들이나 뒷골목의 도적 길드원처럼.

10년 넘게 암투를 지속해 온 알포드 왕자에겐 기사 못지않게 저런 전력 역시 필수였다.

그래서 비밀리에 수족처럼 움직일 친위대, 홍염단을 따로 양성한 것이다.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고 알포드 왕자의 육신을 확보하는 데 저들만 한 인재도 없으리라.

오랜만에 세바스티안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왕자님을 모셔 올 수 있겠군."

***

해가 저문, 어둠이 짙게 깔린 달레인 거리.

인적 드문 도로 위로 20명의 사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겉으론 평범한 복장이었지만 드러나지 않게 온갖 무장을 갖춘 이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거리를 걸으며 사내 중 1명이 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홍염단의 일원으로 온갖 은밀한 임무를 수행해 온 그들이었다. 개중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임무도 많았다.

그럼에도 이번 명령은 뭔가 좀 이상했다.

『알포드 왕자님께서 독, 혹은 마법에 당해 이지를 상실하셨다. 현재 왕자님은 제정신이 아니니 홍염단조차 적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무조건 신병을 확보하는 것에만 집중하라. 목숨에 지장이 생기거나 사지가 잘리는 큰 부상이 아니라면 상처를 입혀도 무방하다.』

"왕자님께 상처를 입혀도 무방하다니...."

"아무리 정신이 흐려지셨다지만 그건 좀...."

앞장선 날렵한 체구의 20대 사내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홍염단의 단장, 벨라트였다.

"죽거나 사지가 잘리지 않는 한은 신성 치유술로 말끔히 완치된다. 왕자님께 해를 끼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하들은 미심쩍어하고 있었다.

벨라트는 난감해했다.

'곤란하군.'

단장인 그는 사정을 알고 있다.

현재 알포드 왕자와 로이드 왕자의 육신이 바뀌었으며, 이는 알포드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런 중대한 사안을 부하들에게까지 죄다 알려 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다 보니 이렇게 앞뒤 안 맞는 이상한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억지로 벨라트가 화제를 돌렸다.

"현재 왕자님의 위치는?"

정찰을 다녀온 부하 1명이 대답했다.

"저 골목 안쪽 어딘가. 출구는 이미 틀어막았으니 놓칠 일은 없을 거요."

"다른 사람들이 붙어 있진 않던가?"

"적어도 제가 확인하기엔 그런 기색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항상 주위를 경계해라."

로이드 왕자가 탈출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 기존의 부하들과는 접촉하지 못했더라도 다른 조력자를 구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순 없다.

"혹시 왕자님께 아군이 있다면 무조건 죽여라. 왕자님께 독을 쓴 자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한번 사내들이 당황해 물었다.

"그럼 죽이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배후를 캐내야 할 텐데요."

옳은 말이었다. 평소라면 저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거짓말이란 건 여러모로 피곤하군.'

이럴 때 제일 좋은 건 그냥 윽박지르는 거지.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 두고 명령받은 대로만 움직여라!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다!"

그제야 홍염단원들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저마다 거리 곳곳으로 흩어져 뒷골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벨라트는 인상을 썼다.

'대체 알포드 왕자님은 왜 사교도 따위와 손을 잡으신 건지....'

***

왕자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뒷골목 전체에 삼삼오오 흩어진 홍염단원들, 그중 2명이 골목 한구석에 서 있는 누더기 차림의 사내를 발견했다. 허름한 복색이지만 틀림없이 알포드 왕자였다.

조심스레 단원 1명이 말을 건넸다.

"모시러 왔습니다, 왕자님."

왕자가 무심히 단원들을 노려보더니 물었다.

"내가 알포드 왕자로 보이나?"

단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정신이 흐려지셨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평소의 알포드 왕자가 아니었다. 말투뿐만이 아니라 미세한 표정이며 눈빛이 전혀 달랐다.

전투태세를 취하며 단원 하나가 정중히 말을 이었다.

"저항하신다면 강제로라도 모시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왕자님을 위한 일입니다. 부디 용서를."

왕자가 빙그레 웃었다.

"해 보게."

"...예?"

"해 보라고."

그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등을 타고 차가운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음?'

밤바람이려니 하고 무시하기엔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홍염단원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곧바로 왕자의 등 뒤에서, 기이한 괴음을 내며 희끄무레한 형체가 솟구치기 전까진.

사아아아....

두 줄기 어둠이 악령이 되어 허공을 미끄러졌다. 단원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헉!"

"이건 무슨?"

이내 악령들이 단원들을 덮쳐 갔다.

고요하던 뒷골목 위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

뒷골목 곳곳에서 어둠이 흐르고 악령이 날뛴다.

"으아아악!"

"괴, 괴물이!"

아무리 도망쳐도 소용없다.

벽이 열려 촉수를 뻗어 내고, 바닥이 갈라져 시체를 토한다.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지독한 탁기로 물들어 있으니,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 폐가 얼어붙고 눈물이 말라 간다.

"크, 크으으...."

"으어어...."

뒷골목으로 뛰어든 20명의 홍염단원들, 그들 모두가 맥없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홍염단의 단장, 벨라트인들 예외가 아니었다.

으어어어....

어어어....

좁디좁은 뒷골목으로 수많은 좀비들이 섬뜩한 신음을 흘리며 다가온다.

앞뒤로 포위된 벨라트와 두 단원들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진다.

부하들이 애달프게 외쳤다.

"대장!"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벨라트는 답을 줄 수 없었다.

그가 이제껏 받은 수련은 모두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가 이제껏 행해 온 임무도 모두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베면 베이고, 찌르면 찔리고, 피를 흘리면 결국 쓰러지는 적들이었다.

하지만 움직이는 시체가 적이라면? 형체 없는 악령이 목숨을 노려 온다면?

대처법 따위 전혀 모른다.

"뭐야, 이게...."

몰려드는 좀비 떼 속에 파묻히며 벨라트는 절망했다.

'왜 왕자 옆에 사령술사가 있는 거냐고!'

처량한 단말마가 밤하늘 위로 울렸다.

"아아아아악!"

***

이틀 전, 카르나크는 말했다.

"알포드 왕자와 손잡은 사교도들을 전면으로 나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놈들이 왜 나서지 않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첫 번째는 정체가 들통날 위험 때문에.

두 번째는 굳이 사교도들, 정확히는 사령술사들이 나서야만 할 정도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정체가 들통날 염려가 없으며 사령술사들이 나서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적을 만들어 주면 되는 거죠."

이에 대한 그의 해답은 일견 어이없는 것이었다.

"이쪽도 사령술사로 상대하면 됩니다."

로이드 왕자의 조력자가 사령술사라면?

똑같이 숨어 사는 신세이니 알포드 측 사교도가 모습을 드러내도 쪼르르 달려가 고발하거나 할 순 없다. 이걸로 첫 번째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이쪽 전력이 사령술사라면 알포드의 기존 부하들은 당연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러니 따로 성직자나 마법사를 초빙해 처리해야 하는데, 현 상황이 외부인을 끌어들일 만큼 떳떳하지 않지 않은가?

하지만 사교도들이 직접 나선다면?

똑같이 사령술에 대해 잘 아니 문제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령술사끼리는 서로의 사령력을 빼앗아 자신의 권능을 키울 수 있지요. 당연히 탐욕에 눈이 멀어 뛰어들 겁니다. 자기가 못 먹으면 남이 먹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핏 그럴듯하긴 한데, 저 계획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 사령술사는 대체 어디서 구하려고? 혹시 킹스 오더에 붙잡아 놓은 사령술사라도 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킹스 오더가 사령술사를 몰래 숨겨 두고 있다? 에란텔 단장 같은 고지식한 인간이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압수한 여러 사악한 물품들은 있거든요."

카르나크는 히죽 웃었다.

좀비? 악령? 온갖 사이한 사령결계?

환상 마법을 이용하면 마법으로도 겉보기엔 흡사하게 만들 수 있다.

마법으로 조종하는 인형에 좀비의 환영을 걸고, 정령 마법에 악령의 환영을 건다거나 하는 식으로.

하지만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이 정도로 속지 않는다.

사령술을 펼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지독한 사기와 탁기 때문이다.

문외한이라도 바로 알아차리는, 생명체라면 무조건 느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마법을 구사하며 입수한 사교단의 제기 등을 이용해 사기와 탁기도 함께 뿌리는 겁니다. 이러면 겉보기엔 사령술을 쓴 것으로밖에 안 보이지요."

"정말 그런 게 가능한가?"

"다른 사령술사를 속이기 위해 최근 개발 중인 수법 중 하나입니다."

"과연, 킹스 오더라면 임무 특성상 그런 것도 필요하겠군."

납득한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획대로 해 보세."

***

카르나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로이드는 뒷골목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저 어둠 너머에서 온갖 비명이 울리고, 온갖 악령이 날뛰고, 시체가 되살아나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비명이 멎었다. 상황이 끝난 모양이었다.

잠시 후 붉은 머리의 여인이 로이드 곁으로 다가왔다.

"혹시 다치거나 하진 않으셨나요, 전하?"

카르나크의 부대원, 세라티 경이었다.

"터럭 하나 다치지 않았다. 카르나크 부대장의 마법은 실로 대단하더군. 일은 잘된 건가?"

"2명, 살려 보냈습니다. 놈들이 제대로 증언을 하겠죠."

계획대로 잘 풀린 것 같다.

안심하며 로이드가 감탄을 흘렸다.

"그나저나 정말 그럴듯하더군. 이래서야 놈들도 속을 수밖에 없겠지."

카르나크의 마법은 정말이지 실감 그 자체였다.

정말 좀비 같았고, 정말 악령 같았다.

"사정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진짜 사령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네."

세라티가 묘한 얼굴을 했다.

"그, 그렇겠죠?"

"응? 왜 그런 표정을 짓나?"

"아뇨, 아무것도...."

#69화. 18. 심야의 사투

"사령술이라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홍염단원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시체가 움직이고 악령이 공격해 오고...."

"사방에 끔찍한 기운이 자욱한데 그걸 못 알아보겠습니까?"

세바스티안은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설마 로이드 왕자 옆에 사령술사가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왕자가 사령술사와 손을 잡은 거지?'

반면 사교도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사령술사란 말인가!"

"테스라낙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뜨내기인 모양이군요."

"그럼에도 사령력은 꽤나 높은 듯하고요."

검은 신의 교단만이 사령술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전 세계에 종말의 어둠이 너무 많이 퍼졌다.

그리고 사령술사는 상대의 권능을 흡수해 자신의 힘을 늘릴 수 있었다.

줍는 놈이 임자라는 소리다.

"우리가 나서겠소!"

항시 몸을 사리던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령술이라면 이쪽이 전문이지!"

"왕자님을 무사히 모셔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상대도 사령술사인 이상 서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기에 세바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부탁을 드리겠소."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사교도들은 방을 나섰다. 바로 준비 작업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혹시나 다른 놈이 주워 먹을까 싶어 마음이 급한 듯했다.

홀로 남은 세바스티안은 혀를 찼다.

'정말 로이드 왕자가 사령술사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얼핏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사령술사에게 당했으니, 다른 사령술사를 찾아가 해결하려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저 어이가 없었다.

이건 예전부터 로이드 왕자가 다른 사령술사를 알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사실은 저쪽도 알포드 왕자님이랑 비슷한 짓을 하려고 했었다는 소리잖아, 이거?'

그거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허허, 왕가라는 곳은 정말로 마굴이로구나....'

***

검은 신을 섬기는 사령술사 데츠라스.

올해로 쉰셋이 된 그는 원래 5서클에 종사하는 마법사였다.

마법계에서 5서클이라면 충분히 제 한몫을 해내는 경지라 할 수 있다. 재능과 노력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위치다.

그럼에도 데츠라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3서클에서 5서클 사이의 정규 마법사, 세간에 널린 마법사 중 가장 흔해 빠진 경지.

고작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높은 곳을 원했고 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목표를 위해 쉴 새 없이 정진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분명 재능이 있었지만 남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노력하는 만큼 남들도 노력했고, 그가 나아가는 만큼 남들도 나아갔다.

모두가 노력하면 결국 남는 것은 재능의 격차뿐.

혹자는 말한다.

삶은 길고, 인생은 단거리달리기가 아니니 꾸준히 달리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자신의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그러다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앞장섰던 이들이 뒤에 주저앉아 있을 것이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젊을 적의 재능만 믿고 게으름 피우다 좌절하는 이들은 분명 존재했다. 뒤를 돌아보면 낙오자들이 보이긴 보였다.

그저, 여전히 저 멀리 앞서 나아가는 이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을 뿐.

수백, 수천의 앞선 경쟁자들을 무시하고 소수의 낙오자들을 돌아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느리더라도 꾸준히 달리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대체 그게 언젠데? 20년 뒤? 30년 뒤? 나이 70~80살 넘어서?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다. 육체가 늙고 병든 후에야 간신히 목적지에 도달한 뒤 만족 속에서 죽어 버리라는 소리인가?

절망한 그를 찾은 이들은 검은 신의 교단이었다.

"마법사 데츠라스여, 진정한 어둠의 힘이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위대한 신의 성도를 앞에 두고 데츠라스가 처음 보인 반응은 실로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사교도 주제에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 미친 것이냐?"

그도 잘 알았다, 사령술 따위 익혀 봤자 마법사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는 비유하자면 싸움꾼이 두 팔을 자르고 집게발을 대신 다는 행위와 비슷하다.

집게발을 달았으니 당연히 전투에 쓸모는 있겠지. 두꺼운 껍질로 더 세게 때릴 수도 있을 것이고, 집게로 적을 으깨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꾼이 두 팔을 지녔을 때 익혔던 무술은 거의 쓸모가 없어진다.

"그런 내게 사령술을 권한다고? 내가 무슨 견습 마법사인 줄 아나?"

견습 마법사라면 고민해 볼 법도 하다.

고작해야 1~2서클의 하찮은 마법을 포기하고 강력한 사령술을 손에 넣는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일 테니.

하지만 데츠라스는 이미 5서클의 마법사였다.

마법에 매진한 수십 년의 인생을 떠올리면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라도, 그 힘 자체는 결코 약하지 않다.

이걸 버리고 초짜 사령술사가 된다 해서 딱히 예전보다 나아질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 검은 신의 교단은 달랐다.

"그것은 진정한 사령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어둠의 권능은 두 팔을 자르고 집게발을 다는 것이 아니었다. 두 팔에 갑각류 같은 껍질을 덧씌우는 것이었다.

그가 익혀 온 주먹질을 그대로 쓸 수 있으며, 추가로 새로운 용법도 익힐 수 있다는 의미다.

여태 쌓아 온 마법의 경지를 유지한 채 새로운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대가는 적고 얻는 것은 많으니, 그가 검은 신의 교단에 귀의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래, 로이드 왕자 쪽에도 사령술사가 있단 말이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출진 준비를 하며 데츠라스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놈을 먹어치우면 얼마나 권능이 높아지려나?"

마법은 마력을 높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마력을 높이는 행위는 실로 고난의 길이다.

물론 사령술이라고 거저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노력 없이 얻는 것은 없다.

하지만 노력의 종류가 조금 달랐다.

마법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갈고닦는 길밖에 없지만, 사령술은 타인의 힘을 훔칠 수 있는 것이다.

'제1왕자 옆에 있는 사령술사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를 갖추며 데츠라스는 생각에 잠겼다.

'뜨내기 종말의 어둠 습득자는 아닐 것이다.'

홍염단을 처리한 솜씨를 보면 무식하게 어둠의 힘만 휘두르는 수준은 벗어났다.

'그렇다 해도 내 상대는 아닐 터.'

기존의 사령술사들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진정한 어둠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들일 뿐이었다.

반면 데츠라스는 사령술사이며, 동시에 마법사다.

외팔이 상대로 두 팔로 싸우는 꼴이니 어지간히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고서야 패할 가능성은 적다.

'즉, 실력이 크게 차이 나면 패한단 소리지만....'

중년 사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현 대륙에 우리 교단을 제외하고 그 정도로 강력한 사령술사가 있을 리 없지!"

***

로이드 왕자는 행적이 드러난 후에도 달레인 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은신처는 옮겼으되 거리 자체에선 계속 모습을 보였다.

첩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파악한 데츠라스는 피식 웃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사령술사들은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란 말이지."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심보가 뻔히 보인다.

상대가 먹잇감으로 보이는 건 비단 데츠라스 쪽만은 아닌 것이다.

뒤를 따르던 사교도 중 하나, 케일도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힘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실로 가소롭군요, 뜨내기 주제에...."

그럴 만하다며 데츠라스가 손을 저었다.

"사령술사란 것들 대부분이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갑자기 큰 힘을 얻은 자들이다. 힘에 취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저러다 임자 만나 된통 당하고 난 뒤 겸손을 배우는 게 일반적이지만....

"보통은 배운 겸손을 써먹기도 전에 세상 하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사교도들은 계속 달레인 거리로 이동했다.

밤이 워낙 깊어 행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간혹 야경꾼들만이 순찰을 돌 뿐이었다.

평소라면 검문의 대상이 되겠지만, 미리 받은 알포드 왕자의 인장이 있으니 아무 문제 없었다.

"슬슬 보이는군."

구름에 가려져 흐릿한 달빛 아래로 어둠 깔린 슬럼가가 비친다.

데츠라스가 두 사령술사, 케일과 올트를 돌아보며 명했다.

"작전대로 움직여라."

"예."

그가 세운 '알포드 왕자 육체 탈환 계획'은 이것이었다.

우선 두 사람이 나서서 로이드 왕자의 사령술사를 유인해 낸다. 이후 상황을 지켜보며 숨어 있던 데츠라스가 기습을 해 완벽하게 놈을 제압한다.

그냥 셋이서 함께 싸우면 될 걸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냐고?

일단 명분은 이거였다.

-적이 도망칠 수도 있으니 뒤에서 전황을 지켜보겠다!

진심은 이쪽이었지만.

'설마 놈이 나보다 강할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일 모르는 거잖아? 일단 저 둘을 미끼 삼아 던져 봐야지.'

저놈들 선에서 처리되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사령력은 적당히 나눠 먹으면 된다. 본인이 절반 먹고 둘에게 남은 절반 주고.

너무한다고? 혼자 다 먹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뭐가 너무해?

혹여 케일과 올트가 데츠라스를 배신하고 둘이서 사령력을 흡수하면 어떡하냐고?

그래 봐야 데츠라스보다 강해지는 건 아니니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하면 된다.

이왕 처벌하는 김에 두 놈의 사령력도 꿀떡 삼키는 거고.

명분이 있으니 교단에서도 크게 뭐라 하진 않으리라.

만약 두 사람이 오히려 당하면?

이는 로이드 왕자의 사령술사가 실로 만만찮은 적이란 뜻이니 둘을 미끼로 쓴 데츠라스의 판단이 실로 현명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부하들에게 칼침 맞기 딱 좋은 방식이지만 데츠라스는 떳떳했다.

저런 생각을 진심으로 할 수 있으니 사령술사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케일과 올트 역시 저 시꺼먼 속내를 모르는 게 아니다.

'젠장, 약한 게 죄구만.'

'그렇다고 거역할 수도 없고.'

케일이 품에서 고풍스러운 랜턴을 꺼내 불을 붙였다.

사아아아....

불꽃이 피어나며 뱀이 지나가는 듯한 괴음과 함께 사방에 한기가 맴돈다.

망혼의 호롱.

전장에서 쓰러진 기사와 병사의 영혼이 봉인된 저주받은 귀물로, 데츠라스가 특별히 내려 준 교단의 보물 중 하나였다.

아무리 미끼로 쓴다 해도 이 정도 살길은 마련해 주어야 명령을 들을 테니까.

랜턴에 정신을 집중하며 케일이 술법을 전개해 갔다.

"테스라낙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호롱불이 푸르게 변하며 땅에서 아지랑이 같은 형상들이 하나둘 솟구쳐 오른다.

"일어나라, 저주받은 전사의 혼들이여...."

무수한 기사와 병사의 유령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귀곡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으아아아아...."

***

슬럼가 안쪽의 허름한 2층 가옥.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카르나크가 문득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왔군."

느닷없는 소리지만 바로스와 세라티는 바로 이해했다.

"벌써요?"

"빠르네요."

홍염단의 공격을 받은 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또다시 알포드 왕자 측의 습격이 이어진 것이다.

바로스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이번엔 사령술사들입니까?"

"예상대로 남들에게 먹잇감 빼앗길까 봐 서두른 모양이다."

세라티와 바로스는 재빨리 전투준비를 갖췄다.

그런 둘을 보며 로이드 왕자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딱히 자네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네만...."

이미 완전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으니 준비라고 해도 별건 아니다.

그냥 카르나크가 마련해 준 비장의 '대(對)사교도 전용 무기'를 챙기는 게 전부다.

문제는 저 비장의 무기란 게 상당히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스가 쥔 것은 기다란 대걸레 한 자루.

세라티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슨 프라이팬 하나.

"...정말 그걸 들고 싸우겠다는 건가?"

#70화. 18. 심야의 사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