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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2. 훌륭하신 영주님? 누가? (5)

매일같이 바로스는 패고 또 팼다.

매일같이 카르나크는 맞고 또 맞았다.

"주, 죽겠다...."

오늘도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카르나크는 울상을 지었다.

전신이 타박상으로 욱신거린다. 움직일 때마다 근육통으로 몸이 비명을 지르는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열심인데 조금은 실력이 늘지 않았을까?

그렇진 않았다.

애초에 배운 게 없거든.

"야, 슬슬 뭘 좀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냐? 피하지 못하면 비껴 맞는 법이라도...."

그저 갑옷 입고 검 쥔 자세를 취한 채, 얻어맞고 오뚝이처럼 일어나기만 반복했을 뿐이다.

"비껴 맞는 건 쉬운 기술인 줄 아세요?"

슬슬 몸이 건장해진 바로스가 몽둥이로 어깨를 툭툭 쳤다.

"고작 한 달, 아니, 이제 열흘밖에 안 남았네? 하여튼 시간이 없는데 대체 뭘 익힐 수 있겠습니까?"

"그럼 이 훈련은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건 통증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죠."

뛰어난 검술? 강인한 체력? 강철 같은 맷집?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생초짜가 전투에 임하려면 이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챙겨야 하는 부분이 있다.

"얻어맞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제정신을 유지하고, 제정신을 유지해야 싸우건 도망치건 하죠."

보통은 굳이 이런 과정까지 따로 겪게 하진 않는다.

그냥 대련 과정에서 저절로 터득하게 되니까.

재능이 있는 이라면 금방 익숙해질 것이고, 재능이 없어도 시간을 들이면 결국은 몸이 적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도련님에겐 시간도 재능도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죠."

납득이 가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납득이 된다고 불만도 사라지는 건 아닌 법이다.

"이러다 골병이라도 들면 더 문제 아니야?"

바로스가 코웃음을 쳤다.

"골병들 만큼 때리지도 않았거든요? 어차피 갑옷 위를 두들기는 건데."

말투만 시건방질 뿐, 사실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카르나크에게 충성하는 심복 중의 심복이다. 소중한 주인을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도련님이 하도 몸 쓰는 일이랑 담을 쌓아서 그렇지, 실은 이거 그렇게 혹독한 훈련도 아닙니다. 충분히 힘 조절 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하루도 안 쉬고 훈련만 해도 돼? 너무 과한 훈련도 안 좋다던데."

"그건 어느 정도 몸이 만들어진 후 이야기고, 지금 도련님 수준이면 밤에 푹 자는 것만으로도 휴식은 충분해요."

아무리 따져도 씨알도 안 먹힌다.

"그놈 참, 꼬박꼬박 말대꾸는 잘하네."

바로스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사령술에 대해 도련님께 떠들어 대면 무슨 기분이겠습니까?"

"한없이 가소롭겠지?"

"네, 그게 지금 제 기분입니다."

"...."

"그러니까 닥치고 일어나세요. 지금도 시간은 가고 있다니까요?"

***

매타작 수련이 시작된 지 닷새째.

결투까지 열흘 남은 시점이 되어서야 겨우 카르나크는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아주 기본적인 베기와 찌르기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기합을 터트리며 눈앞의 바로스를 향해 횡베기를 이어 간다.

"헙!"

몽둥이로 가볍게 튕겨 내며 바로스가 소리쳤다.

"기합은 우렁차게!"

재차 찌르기를 시도하며 카르나크가 목청을 높였다.

"타앗!"

그래도 바로스에겐 아직 불만인 듯했다.

"더 크게 내지르십쇼! 기합은 힘주려고 넣는 거 아닙니다! 남들 들으라고 하는 거지!"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 집중하려고 기합 터트리는 거, 맞지 않냐?"

"도련님은 그렇단 소리죠."

현재 카르나크의 수준이면 기합을 터트리건 사자후를 내지르건 어차피 비실비실한 일격밖에 못 날리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난 아직 싸울 의지가 충만하다!'라고 어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갑니다!"

친절하게 입으로 알려 주며 바로스가 몽둥이를 휘둘러 왔다.

그간의 수행이 아주 헛되진 않았는지 카르나크가 재빨리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리고 방패째로 날아갔다.

"커억!"

우당탕탕!

바닥을 구르는 소중한 주인을 향해 심복이 충심 어린 조언을 날린다.

"참격 날아오면 버틸 생각 마십쇼! 무조건 땅바닥을 구르는 겁니다!"

"...좀 부끄러운데 버티면 안 되나?"

"칼이랑 갑옷이랑 같이 썰리고 싶으세요?"

"응, 구를게."

칼질 한 번 하고 방패로 막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피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평생 이 정도로 몸을 혹사시켜 본 적이 없는 카르나크에겐 실로 가혹한 일정이었다.

"아고고...."

욱신거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카르나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휴, 내 팔자에 무식한 칼잡이랑 드잡이할 일이 생길 줄이야."

"그러게 취미로 검술 같은 거라도 좀 익히시지 그랬어요? 100년 내내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셨으면서."

"취미란 건 재미있는 걸 말하는 거다! 땀내 나는 사내놈이랑 숨소리 들리는 거리까지 찰싹 붙어서 싸우는 게 무슨 재미라고?"

사령왕이 되기 전, 사령술사임을 감추고 방랑하던 시절부터 그는 철저히 마법사로 행세하고 살았다.

전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거리를 벌리고 벌린 뒤, 멀리서 쾅!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 자체가 싫은 것이다.

"원래 내 전술은 고기 방패 내세우고 그 틈에 뒤에서 조지는 거였어."

"잘 알죠, 제가 바로 그 고기 방패였는데요."

연신 투덜대면서도 카르나크는 착실히 수련에 임했다.

시간이 흐르며 어느 정도 성과도 나왔다. 예전엔 볼품없는 골방 샌님이었는데 지금은 볼품없는 삼류 병사 정도로는 보인달까?

덕분에 자신감도 좀 붙었다.

"이 정도면 나한테도 승산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바로스도 순순히 인정해 줄 정도였다.

"열심히 하셨죠. 지금이라면 바로 죽이지는 않겠어요."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고작 그거야?"

그렇게 점점 결투 일자가 다가왔다.

결투 이틀 전.

"이 정도면 그럭저럭 준비가 된 것 같군요."

바로스가 몽둥이가 아니라 장검을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최종 단계에 들어가겠습니다."

***

죽은 자들의 제국, 네크로피아의 2인자.

4대 무왕 중 셋을 해치운 지상 최강의 데스 나이트.

이것이 과거 바로스를 칭하는 수식어들이다.

"하지만 제가 4대 무왕들보다 더 뛰어난 전사였던 건 아니죠."

무력도, 기술도, 정신력도, 경험도 모두 저들이 위였다.

그럼에도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령왕 카르나크의 압도적인 권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

"훗, 내가 좀 잘나긴 했지."

"그럼요. 너무 잘나셔서 해골에 사령 씌우고 사셨잖아요?"

으스대는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원망하듯 말을 이었다.

"좀 덜 잘나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우리도 스테이크 썰면서 와인 마시고 살았을 텐데."

"그랬으면 진작 우리 둘 다 죽었을걸."

하여튼 바로스는 분명 4대 무왕에 비해 한 수 아래였다.

그러나 그가 다른 무왕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부분도 있었다.

"약자를 희롱하면서 수치를 주다가 죽이는 건 제가 최고죠. 평생 그러고 살았으니까."

"음험한 녀석 같으니."

"도련님이 시키신 거잖아요! 증오와 분노를 끌어내서 죽여야 좋은 언데드로 만들 수 있다면서요?"

덕택에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예측할 수 있다.

란돌프가 어떻게 카르나크를 가지고 놀다가 어떤 식으로 그를 굴복시킬지만큼은.

"틀림없이 이렇게 나올 겁니다."

바로스가 장검을 휘둘러 카르나크를 압박해 왔다.

"처음엔 이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도련님을 희롱하겠죠."

기겁하며 카르나크가 바닥을 굴렀다.

"켁! 너, 너무 빠른데?"

입으론 느릿느릿이라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의 검격이 연신 날아오는 것이다.

계속 검을 휘두르며 바로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젠 피할 수 있잖아요?"

과연 그간의 수련이 헛되진 않았다.

볼품없이 바닥을 구르고 갑옷 위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어떻게든 정타는 피하는 카르나크였다.

"헉! 헉헉!"

맞고 구르면서도 애써 일어나 재차 검을 겨누는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움직임이시네요."

"어, 정말 괜찮아?"

"네,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수준입니다."

"...."

"진짜로 칭찬한 거예요. 그 수준까지 오르는 것도 쉬운 일 아니거든요?"

하여튼, 이렇게나 전의를 불사르는 카르나크를 상대하며 란돌프는 꽤나 흡족해할 것이다.

명색이 결투 재판인데 지나치게 약자를 핍박하는 것처럼 보여도 곤란하니까.

"이러다가 슬슬 끝을 보려고 하겠죠."

그럼에도 바로 목숨을 노리진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그림은 상대의 무릎을 꿇린 채 패배를 인정하게 하는 광경이거든요. 도련님을 처형하는 건 신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명예로운 기사로 남을 수 있을 테니."

그러니 란돌프가 노릴 부분은 카르나크의 양다리다.

"팔은 베여도 근성으로 서 있을 수 있지만 다리가 잘리면 근성이고 뭐고 없잖아요? 그냥 무릎 꿇는 거죠, 뭐."

바로스의 움직임이 갑자기 변했다.

순식간에 그의 전신이 흐릿해지더니 섬광이 카르나크의 무릎 위로 번뜩인다.

"헉!"

반응할 여유조차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카르나크를 보며 바로스가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다리를 베어 버리겠죠."

"...난 이걸 막아야 하는 거고?"

"네."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리는 부분을 미리 알고 있으면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어요. 당연히 반복 연습도 할 거고."

이때가 유일한 반격의 기회라며 바로스는 말을 이었다.

"물론 아무리 상대가 허점을 보인다 해도, 대충 검 휘두른다고 맞아 주는 건 아니죠."

이때만큼은 정말 위력적인 검술을 제대로 펼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며 바로스가 장검을 역수로 잡아 검극을 바닥에 갖다 댔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양 무릎을 방어하는 자세가 되었다.

"지금부터 도련님이 배우셔야 할 기술은 이겁니다."

검을 마치 퍼 올리듯 사선으로 베어 올리며 양손을 바꿔 쥔다. 그렇게 눈앞의 허공을 한 번 베어 낸 뒤, 양손에서 한 손으로 그립을 바꾸며 어깨를 내밀어 거리를 늘린다. 동시에 회전력을 실어 한 번 더 베어 올린다!

파팟!

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2단 올려 치기, 오버 킬."

눈을 동그랗게 뜬 카르나크를 향해 바로스가 차분히 중얼거렸다.

"델피아드의 무왕, 레번 스트라우스의 비전 검술 중 하나입니다."

"...."

카르나크는 말없이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예전엔 저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보았을 것이다. 검 자체를 휘둘러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질리게 칼질을 해 본 지금은 알겠다. 방금 바로스가 선보인 기술이 얼마나 고도의 것인지.

"그걸 나보고 하라고?"

"네."

"그럼 좀 일찍 가르쳐 주든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익혀?"

"하루면 충분합니다."

바로스는 여전히 태연했다.

"제대로 익히는 게 아니라 흉내만 내는 거니까요."

기술을 제대로 익힌다는 건 수천수만 번 반복을 통해 그 기술이 몸에 완전히 깃들어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경지를 말한다.

"그런 숙련도까진 기대도 안 해요. 그냥 정해진 상황에서 그럴듯하게 흉내만 내시면 됩니다."

"그래도 돼?"

"원래는 안 되죠."

하지만 카르나크라면 딱히 문제가 없다.

"어차피 이번 일만 끝나면 칼 쥘 일도 없으시잖아요. 오히려 하루 종일 벼락치기 확실하게 하고 도로 잊어 먹는 게 효율적입니다."

"그런가?"

긴가민가하면서도 카르나크는 검을 쥐었다.

"알았어, 해 볼게."

검극을 바닥에 대고, 눈을 빛내며 검을 올려 친다!

-오버 킬!

장검이 저 멀리 훨훨 날아 연무장 구석에 나뒹굴었다. 칼 놓쳤단 소리다.

기술 자체가 몇 번이나 그립을 고쳐 쥐는 방식이라 손가락이 꼬인 것이다.

"...이거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거 맞아?"

바로스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다 도련님 수준을 생각해서 정한 일정이에요."

"대체 내 수준을 어느 정도로 잡은 건데?"

"집에서 자수만 놓은 10대 귀족 아가씨요."

"빌어먹을 놈...."

***

구시렁대면서도 카르나크는 바로스의 지시대로 충실히 수련에 임했다.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이 더 지나고, 마침내 아침 해가 밝았다.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사활, 그리고 카르나크의 목숨이 걸린 바로 그날.

알리움의 결투 재판 당일이었다.

#11화. 3. 결투 재판

은과 청동으로 치장된 화려한 전신 거울.

그 위로 상체를 탈의한 사내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육체였다.

적당히 살이 오르고 근육이 붙은, 딱히 크지도 작지도 않은 덩치. 아무 청년이나 데리고 와서 벗겨 놓아도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카르나크에겐 실로 뿌듯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야, 나 제법 몸 좋아졌잖아?"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그는 싱글벙글 웃었다.

항상 멸치와 건어물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던 몸이 이젠 제법 사람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근육 꽤 붙지 않았냐, 바로스?"

혹독한 단련의 결과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주인을 향해, 충실한 시종이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넨다.

"그 정도 굴렀는데 남자인 이상 그 정도 근육은 붙어야죠. 아니, 여자라도 그 정도는 되겠다. 고기도 그렇게 많이 먹였구만."

"고작 한 달 만에 이렇게나 변했는데 칭찬 좀 해 주면 안 되냐?"

"평소 얼마나 몸을 안 움직이셨으면 고작 한 달 만에 그렇게나 변했겠습니까? 제발 주제 파악 좀 하시라니까요."

카르나크는 잠시 의아해했다.

분명히 평소처럼 건방진 태도이긴 한데, 뭔가 느낌이 좀 다르다?

이유를 깨달은 그가 바로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걱정 마라. 잘될 거다."

이제 곧 카르나크는 란돌프와 결투 재판을 벌여야 할 몸이다. 바로스는 그 점이 못내 불안한 것이다.

"끙,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아무리 모든 대비를 해 뒀다 해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세상사인 법.

"계획대로 안 풀리면 바로 사령술 발동하세요. 보는 놈들 다 죽이고 도망가면 되니까."

"아, 그랬다간 또 과거의 재탕이 된다니까?"

"당장 죽는 것보단 낫잖습니까? 목 잘린 다음 결투 이겨 봤자 의미 없어요."

보통은 목 잘리면 끝이지만 카르나크는 다르다. 죽임을 당해도 사령술을 이용해 언데드로 부활할 수 있다.

대신 인간의 감각은 잃겠지만.

"도망쳐도 살아서 도망쳐야죠. 사람답게 살아 보겠다고 다 버리고 돌아온 건데."

"알았다, 알았어."

바로스를 달래며 카르나크는 고개를 돌렸다.

방 한편에 세워 둔 갑옷과 장검, 방패가 보인다. 오늘을 위해 바로스가 심혈을 기울여 손질해 놓은 무구들이다.

걸음을 옮기며 카르나크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가자고, 결투 장소로."

***

결투 재판을 위한 임시 투기장은 알리움의 신전이 위치한 북쪽 들판에 세워져 있었다.

데벤토르와 제스트라드의 경계인 이곳은 평소엔 사람들의 발길이 극히 뜸한 장소다. 신관들과 양치기들 외엔 거의 드나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투기장에 도착한 바로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벌렸다.

"으아, 생각보다 구경꾼들이 너무 많은데요?"

투기장 양쪽에 도열한 제스트라드 영지 사람들과 데벤토르 영지의 사람들, 여기에 재판을 관장하기 위한 알리움의 신관들까지 있다.

족히 100명은 넘는 규모였다.

갑옷 차림의 카르나크가 걸음을 옮기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겠지. 영지의 운명이 걸린 결투잖아."

"남 일처럼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여전히 근심 어린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바로스가 물었다.

"만일의 경우 도망칠 수 있겠어요?"

"이 숫자면 충분히 가능해."

태연한 그의 태도에 바로스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카르나크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분명 도망칠 자신은 있다.

하지만 다 죽일 자신은 절대 없다.

'도망치면 정체도 바로 들통나는 거지.'

사령술사로 평생 쫓기며 살아야 하는데, 그 결과가 어떤지는 카르나크도 잘 알지 않는가?

'역시 결투에서 이길 수밖에 없겠군.'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카르나크는 투기장 입구로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지민들이 눈물을 훔치며 기도를 올린다.

"아이고, 도련님...."

"부디 알리움께서 우리 영주님을 보살펴 주시길...."

"전 가주님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반응이 생각보다 긍정적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게 아니라, 정말 카르나크가 이길 가능성도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카르나크 입장에선 웃기는 이야기였다.

상식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골방 샌님이 고작 석 달 비밀 수련했다고 닳고 닳은 기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정말 입을 잘 털었나 보군.'

하긴, 원래대로라면 사령술로 결투에 임할 생각이었을 테니 주위 사람들에게도 그 자신감이 전해졌겠지.

'실은 인생 종 치는 길인 줄도 모르고 말이지, 에휴.'

이윽고 투기장 중앙에 한 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 신관이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알리움의 권위 앞에 침묵할지어다!"

이내 사방이 조용해졌다.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양측 모두 상대의 증거가 허위임을 주장하였으니, 위대한 알리움의 가호 아래 진실을 판가름하게 되리라!"

신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스트라드의 영주, 결투자 카르나크는 여신의 앞에 서시오!"

카르나크가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전신을 반짝이는 강철 갑옷으로 감싸고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든 그의 모습은 꽤나 그럴싸해 보였다. 제스트라드 측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다시 한번 신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벤토르의 기사, 결투자 란돌프는 여신의 앞에 서시오!"

마찬가지로 환호가 터졌다. 데벤토르 측이었다.

"와아아아아!"

환호 속에서 거구의 사내가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평범한 일상복 차림의 란돌프였다.

카르나크와 달리 갑옷도 방패도 없다. 그저 평소 애용하던 거대한 대검 한 자루만을 등에 패용한 상태다.

미리 약속한 사항이었다. 양쪽의 기량을 볼 때 이 정도는 되어야 공정한 결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여전히 란돌프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렇기에 그의 입가엔 여전히 자신만만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침내 투기장 가운데서 서로를 마주하며 선다.

알리움의 성물을 내세우며 신관이 물었다.

"결투자여, 그대들은 알리움의 이름으로 정정당당히 싸울 것을 맹세하는가?"

검을 뽑아 투구 앞으로 가져가며 카르나크가 답했다.

"제스트라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란돌프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의기양양하게 외칠 뿐이었다.

"데벤토르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오!"

고개를 끄덕이며 신관이 뒷걸음질을 쳤다.

"여신의 가호 아래 정의의 천칭이 기울어지리라!"

투기장을 빠져나간 중년 신관이 마지막 외침을 터트렸다.

"결투 재판을 시작한다!"

***

란돌프가 등 뒤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섬뜩한 강철의 음향이 귀를 찌른다. 별로 크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몸이 위축되는 소리다.

물론 카르나크는 위축되지 않았다.

이걸 대비해서 일부러 바로스가 칼 넣었다 뽑았다 하면서 스르릉 소리도 엄청 냈었거든.

"제스트라드의 애송아."

검을 가볍게 늘어뜨리며 란돌프는 사납게 웃었다.

"지난 석 달간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볍게 한 발 앞으로 디뎠다. 동시에 참격이 카르나크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재빨리 카르나크가 방패를 들어 막았다.

터엉!

쇳소리와 함께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란돌프 역시 상대가 막았다고 딱히 놀라거나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못 막았으면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휘두른 일격이었다.

"고작 몇 달 만에 터득할 만큼 검의 길은 얕지 않다."

이죽대며 란돌프가 공세를 이었다. 카르나크도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란돌프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 낸 뒤 카르나크가 반격에 나선다. 그럼 란돌프는 가볍게 피하며 다시 추가타를 날린다. 그걸 다시 방패로 막고, 또 반격한다.

탕, 타탕!

쇳소리가 연신 울리며 공방이 이어졌다.

얼핏 보기엔 그럴싸한 결투 장면이라 제스트라드 측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오!"

"도련님이 잘 싸우고 계셔!"

"이제 도련님이 아니시잖아! 영주님이라고 불러야지!"

카르나크도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히 초반은 바로스의 예상대로군.'

전혀 빠르지도, 위력적이지도 않다. 상대의 수준을 파악해 보겠다는 의미가 다분한 공격이다.

심지어 공격의 궤도조차도 뻔해서 연습한 대로만 움직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할 일은 하나뿐.

누구보다도 우렁차게 기합을 터트리며....

"타아앗!"

눈빛과 기세를 총동원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기개를 보인다!

챙! 채챙!

몇 번 더 검격이 오갔다. 란돌프가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눈빛이 제법 좋군."

솔직히 실력은 별거 없었다.

제대로 된 기사라 할 순 없다. 아니, 제대로 된 병사라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전투에 임하는 태도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결투 재판답게 쓰러뜨릴 수 있겠어.'

란돌프의 검력이 한 단계 올라갔다. 아까와는 다른 검압이 카르나크의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헙!"

방패로 막았다간 통째로 썰릴 기세.

물론 카르나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

기다렸다는 듯 카르나크가 몸을 던지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

뭐랄까, 상대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피하는 경우는 상정하지 않아 란돌프도 살짝 당황했다.

전장이라면 여기서 그냥 쫓아가서 칼 푹 찌르면 끝인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결투인데 그런 짓을 하긴 좀....'

일단 카르나크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날리는데....

데굴데굴!

"얼씨구?"

또 검을 날리는데....

데굴데굴데굴!

"이놈이?"

어이도 없고 조금씩 열도 받는다.

설마 자신을 상대로 계속 이렇게 구르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 여기는 것일까?

'그 정도로 기사를 우습게 안단 말이지?'

란돌프의 기세가 살짝 변했다.

"이거, 조금은 진심으로 가야겠군."

간만 보는 수준에서 적절히 소금을 치는 단계로 전환한 셈이었다.

경험 많은 전사라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세가 날아들 거라는 걸 알 수 있으리라.

물론 카르나크에게 검투의 경험 따윈 없다. 당연히 상대의 기세가 변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전투 경험이 철철 흘러넘치는 충실한 시종이 있지.

"도련님!"

바로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사전에 약속한 신호였다.

'아, 지금이냐?'

솔직히 카르나크가 보기엔 대체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만 바로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갑자기 카르나크가 방패를 버렸다.

"엥?"

란돌프는 살짝 당황했다.

'저게 미쳤나, 주제에 방패를 버려?'

물론 실제론 방패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 마음만 먹으면 란돌프는 언제라도 카르나크의 목을 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란돌프 입장이고, 카르나크가 할 짓은 아닌 것이다.

방패를 버린 카르나크가 정식으로 자세를 취했다.

"나도 진심으로 가겠다, 란돌프 경!"

양손으로 장검을 굳게 쥐고 상대를 겨눈다. 바로스가 반나절 넘게 투자해 그의 몸에 각인시킨 기수식이었다.

순간 데벤토르 기사 측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

"어?"

"저 자세는...."

"설마?"

제스트라드 가문의 검술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유명한, 특히나 유스틸 왕국 북부에선 어지간한 기사들이라면 다들 아는 검술의 기수식.

란돌프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델피아드 검투술?"

#12화. 3. 결투 재판 (2)

델피아드 검투술.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무가, 스트라우스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검술 중 하나다.

당대의 가주인 갤러드 스트라우스는 저 델피아드 검투술을 극의까지 익혀 무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무왕의 검술이라니...."

란돌프는 혼란에 빠졌다. 결투를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전설적인 무왕의 검술을 들고나와서는 아니었다.

'저걸 모르는 놈이 누가 있다고?'

델피아드 검투술 자체는 대륙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초 단계만큼은.

워낙 유명한 검술이다 보니 따라 해 보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이거 우린 익혀 봤자네.

델피아드 검투술이 강한 건 어디까지나 투기를 익힌 다음부터.

투기를 다루는 용법이 오묘하고 강력하기에 그토록 명성을 얻었지, 그 전 단계에선 오히려 일반 삼류 검술보다도 못하다.

대신 기본을 닦는 데는 효과가 엄청나게 좋기에 기사들 사이에서 종종 종자들에게 입문 과정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그걸 지금 들고 왔단 말인가?

'뭐지? 뭔가 속셈이 있나?'

혹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진정한 델피아드 검투술, 비전 중의 비전이라는 투기 운용법을 손에 넣은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자신 있게 결투에 나선 건가?

'고작 석 달 연습해 놓고?'

석 달이면 투기는 고사하고 기본기도 제대로 익히기 힘든 시간이다.

'앞뒤가 안 맞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란돌프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구경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야?"

"저게 무왕의 검술이래."

"그 전설의 무왕 말이여?"

"오메, 그럼 란돌프 경, 큰일 난 거 아녀?"

그렇다.

문외한이 전문가를 이해 못하듯, 전문가도 문외한을 이해 못한다.

기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삼류 검술조차도 제대로 익히는 데 몇 년이 걸리며, 델피아드 검투술 같은 초일류 검술이라면 평생을 투자해도 모자란다는 것을.

그런데 문외한은 이렇게도 생각하는 것이다.

무왕의 검술쯤 되면, 몇 달만 익혀도 삼류 검술 몇 년씩 익힌 놈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없는 일도 아니긴 하다.

간혹 아직 어린 스트라우스 가문의 직계들이 노련한 일반 기사들을 펑펑 해치우곤 하니까.

하지만 그건 그냥 그들이 천재 중의 천재라서 그런 것이지, 델피아드 검투술이 일반인을 몇 달 만에 초일류 검사로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사정을 파악한 란돌프가 헛웃음을 흘렸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골방 샌님이 어쩌다 무왕의 검술서를 손에 넣고는 그게 무슨 엄청난 기회라도 된 줄 알고 석 달간 대충 익힌 다음 내 앞에 섰단 말이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큭, 크크큭!"

키득거리며 그는 허리를 폈다.

'나쁜 이야기는 아니군.'

무왕의 검술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면 보다 그럴듯하게 결투 재판을 끝낼 수 있을 터였다.

검을 겨눈 채 란돌프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제스트라드의 새 영주여! 알리움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다!"

***

주위 반응을 보며 카르나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걸로 지난 석 달간의 행적은 대충 얼버무릴 수 있겠군.'

당연히 그는 델피아드 검투술 따위 모른다. 할 줄 아는 건 딱 기수식까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 시간대의 카르나크가 싸질러 놓은 짓의 뒷수습 때문이었다.

힘을 얻겠다며 몇 달이나 집을 비웠다. 그렇다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사로 행세했을 테니 별문제 없었겠지만 기사로 나선 지금은 그에 걸맞은 핑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충실한 시종에게 물었다.

"바로스."

"왜요, 도련님?"

"혹시 이런 거 없냐? 손에 넣기만 해도 모두가 경악할 만큼 엄청나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는, 그러면서 나도 흉내 낼 수 있는 그런 검술."

질문하면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손에 넣기만 해도 모두가 경악할 정도면 굉장히 희귀한 검술이란 소리다.

그런 희귀한 검술을 이런 시골 기사들마저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력한 검술인데 멸치 사촌인 카르나크가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하고?

"없으면 말고. 나도 큰 기대는 안 하고 물어본...."

"있어요."

"엥?"

"있다고요, 그런 검술."

무려 100여 년이나 무의 길을 걸었던 바로스다. 그 엄청난 시간 동안 그가 수집한 대륙 각지의 검술도 한둘이 아니다.

"레번 경의 델피아드 검투술이 딱 그 조건에 맞네요. 현시점이면 갤러드 경이 무왕이겠지만."

"너 그거 할 줄 알아?"

"대충은요."

명성이 자자했던 4대 무왕 중 셋이 바로스의 손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들의 무술 역시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바로스가 무슨 하늘이 내린 세기의 천재라 검을 주고받으며 기술을 훔쳤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가르쳐 달라고 하고 배웠죠, 뭐."

저들은 패한 후 데스 나이트로 되살려져 사령왕의 충실한 수족이 되었다.

데스 나이트 로드인 바로스의 충실한 부하이기도 했으니 그냥 가르치라고 명령만 하면 바로 복종하는 것이다.

"덕분에 4대 무왕 중 라피셀 거 빼곤 다 익혔지요."

참고로 라피셀의 기술만 못 익힌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카르나크가 데스 나이트로 만들질 않았다.

4대 무왕의 홍일점, 라피셀 크로테움.

그녀는 실로 위대한 인류의 영웅이었다.

다른 무왕들이 모두 쓰러지고 3인의 대마법사마저 사령왕의 충복이 되어 버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마지막까지 카르나크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그 영웅적 행위에 걸맞게 유독 가혹한 결과를 맞이했다.

패배한 그녀를 황궁 네크로폴리스의 문지기로 만든 뒤 동, 서, 남쪽 대문에 각각 배치시킨 것이다.

동시에 세 곳을 지킨다는 게 뭔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이게 사령술이 개입되면 말이 된다.

뼈는 발라서 스켈레톤 병사로 일으켜 동쪽에 배치.

살점은 따로 떼서 플레시 골렘으로 만들어 서쪽에 배치.

영혼은 분리해서 리빙 아머에 연결해 남쪽에 배치.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억겁의 고통을 내린 셈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카르나크가 혀를 내둘렀다.

"와, 나 진짜 몹쓸 놈이었네? 왜 그땐 이런 기분을 못 느꼈지?"

"지금은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지?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돼. 아무렴."

저따위 대화를 부담 없이 하는 시점에서 사람답게 살기란 요원한 게 아닌가 싶지만 아쉽게도 주인 놈이나 종놈이나 아직 그 정도로 인간이 되진 않은 듯하다.

어쨌거나 무왕의 검술은 치기 어린 젊은이가 힘을 얻었다고 착각하기 딱 좋은 간판이다.

결투가 끝난 후에도 별 의심은 사지 않으리라.

'이제 남은 문제는....'

검을 쥔 채 카르나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만 살아남으면 되네.'

***

방패를 버리면서 카르나크는 그럴싸한 델피아드 검투술의 기수식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먼지 나게 처맞기 시작했다.

"큭! 커억! 컥!"

방패가 있을 땐 통째로 막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좀 쉬웠다. 하지만 이젠 검을 들어 막아야 하는 것이다.

란돌프 경이 갑자기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뭔가를 한다.

뭘 했냐고? 카르나크 입장에선 알 수 없다.

뭔가 번쩍했으니 칼을 휘둘렀다는 건 알겠는데 딱 거기까지다.

"크윽!"

갑옷 위로 불꽃이 튀었다. 란돌프의 일격이 또 그를 강타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은 갑옷 위로 맞아서 참격이 아니라 타격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충격으로 날아간 카르나크가 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흥! 또 그 짓인...."

란돌프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아까의 구르기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잉?'

아까는 그냥 굴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이다!"

굴러간 카르나크가 자연스럽게 주저앉아 도로 검을 겨누고 있었다.

"와라! 데벤토르의 기사여!"

완전히 일어난 게 아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만 앞으로 겨눈다.

그런데 폼이 어째 그럴싸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자세를 낮춘 채 적을 노려보는 자세 같다.

심지어 그 상태로 큰소리도 뻥뻥 친다.

"이 정도로 제스트라드의 혈통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무 당당해서 란돌프조차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뭐라는 거야, 이놈이? 쓰러뜨린 거 맞잖아!'

뭐, 별 상관은 없다. 그럼 쫓아가서 마저 패 버리면 되지.

놈은 한 영지의 주인답게 최고급 갑옷을 입고 있다. 손 좀 과하게 쓰더라도 볼품없이 죽어 버리진 않을 터.

'우선 기운을 빼 두자.'

맹렬한 참격이 채찍처럼 카르나크의 갑옷 위를 두들겨 댔다. 신음을 터트리며 카르나크도 계속 바닥을 굴렀다.

"큭! 크윽! 큭!"

그래도 치명상까진 가지 않는다. 맞는 순간 미련 없이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렀기에 충격만 관통할 뿐 갑옷까지 뚫리진 않는 것이다.

그래 놓고 또 상체만 일으킨 채 폼 잡으며 큰소리 뻥뻥.

"제스트라드의 검은 꺾이지 않는다!"

란돌프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의외로 방어는 꽤 하는구나, 델피아드 검투술의 비껴 흘리기인가?"

카르나크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놈일세,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과연 바로스의 말대로였다.

고작해야 시골 기사다 보니 안목이랄 게 없다.

자신감이 붙는다.

기합을 터트리며 카르나크가 다시금 전의를 불살랐다.

"타아앗!"

***

바로스는 흐뭇해하고 있었다.

'비껴 흘리기 곧잘 하시네. 역시 내가 좀 잘 가르치긴 했지?'

카르나크는 모르고 있지만, 그는 정말로 갑옷을 이용해 참격을 비껴 흘리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리 갑옷이 단단해도 저렇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바로스가 그를 두들기면서 일부러 그런 반응을 보이도록 유도하며 수련을 시킨 것이다.

초보자 수준에선 저 사실을 의식해 버리면 오히려 할 수 있던 것도 못하니까 일부러 본인에겐 감췄지만.

'허세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떠시고.'

여전히 처맞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날아가 바닥을 데굴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표정은 실로 당당하고 눈은 세상을 오시할 듯 형형하게 빛난다!

"제스트라드의 검은 꺾이지 않는다!"

들려오는 카르나크의 외침에 바로스는 실소를 흘렸다.

'하긴, 허풍 떠는 건 원래 전공이셨지? 잘하실 만도 하네.'

사령술사란 건 기본적으로 허세가 많이 들어가는 직종이다. 최대한 음침하고 사악한 분위기를 깔아 놓고 상대를 공포로 몰아야 효과가 커지는 술법인 탓이다.

왕년의 카르나크도 뭔가 있는 척 허풍 떠는 건 거의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 오랜 경험이 지금 빛을 발한다.

"덤벼라, 란돌프 경!"

한쪽 무릎만 꿇은 채 땅을 짚으며 검을 겨눈다! 어디까지나 그럴싸하게! 문외한이 보면 마치 원래부터 저런 기술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나 쓰러진 거 아니다! 상대와 팽팽하게 싸우고 있는 거다!

그 용맹한(?) 모습에 관중은 감탄했다.

"오오오!"

"도련님이 저리 강하셨다니!"

기사들도 다른 의미로 감탄하고 있었다.

데벤토르 기사들은 카르나크의 분투에 경의를 표했고....

"저 애송이 도령이 뭘 노리는 건지 알겠군."

"어차피 패배할 처지라면 최대한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것인가?"

"비록 실력은 없지만 귀족다운 훌륭한 기개로다."

제스트라드 기사들은 숫제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저런 분을 망나니 취급했었다니....'

'나의 불찰이로다. 비록 실력은 없다 해도 주군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이거늘!'

실력이 없다는 것이 어찌 흠이 될까?

그의 정신만큼은 실로 기사다운 고결함을 지니고 있거늘!

***

주위의 평가와 달리, 당사자인 카르나크는 죽을 맛이었다.

'아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거야?'

란돌프가 바로스의 예상대로 움직여 주긴 한다.

덕분에 연습한 대로 버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고작 한 달의 벼락치기 훈련으로는 슬슬 한계다.

'언제쯤 기회가 오는 거야, 바로스?'

다행히도 란돌프의 인내심 역시 바로스의 예상 내였다.

'좋아, 이 정도면 결투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끝내기로 마음먹으며 란돌프가 검을 가볍게 고쳐 쥐었다.

그 순간 바로스가 또 고함을 질렀다.

"도련님!"

'아, 지금이냐?'

반색을 하며 카르나크가 앞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란돌프의 거구도 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란돌프가 뭔가 한다.

뭘 하냐고? 아까도 그랬지만, 여전히 카르나크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냥 돌진하며 머릿속으로 수를 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대뜸 바닥에 칼을 꽂는다!

타앙!

칼날과 칼날이 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란돌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막았다고?'

가볍게 시야를 희롱한 뒤 다리를 베어 버리려 했는데, 놀랍게도 상대가 전혀 현혹되지 않고 하단 참격을 정확히 막았다! 검술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생초짜가!

'이 무슨....'

란돌프가 당황하며 주춤거리는 찰나였다.

'기회다!'

카르나크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타아앗!"

2단 올려 치기, 오버 킬.

하루 종일 죽어라 연습한, 미래의 무왕 레번 스트라우스의 절기가 허공 가득 빛을 뿌렸다.

#13화. 3. 결투 재판 (3)

두 줄기 검광이 허공을 찢는다.

섬뜩한 빛이 2개의 초승달을 그리며 란돌프의 정면으로 쇄도한다.

"...헉!"

기겁하며 란돌프는 몸을 틀었다. 이번엔 정말 허를 찔린 것이다.

그리고....

"아!"

관중은 탄식을 터트렸다.

란돌프의 가슴팍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송골송골 배어 나와 옷섶을 적신다.

빗나갔다.

그것도 좀 많이.

지켜보던 신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아깝군."

혼신의 힘을 다한, 제대로 허점을 노린 참격이었다. 절기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는 대단한 기술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의 숙련도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정규 기사라면 무의식중에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제스트라드 기사 1명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기적은 없는 것인가...."

카르나크는 노력했다.

아침 일찍부터 수련에 임하고, 하루 종일 피땀을 흘리며, 자신들이 알던 왕년의 망나니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그에게 좋은 감정이 없던 이들조차 희망을 떠올릴 정도로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고작해야 고양이가 할퀸 듯한 얕디얕은 자상 한 줄이 전부.

"하, 하하...."

실소하며 란돌프가 검을 들었다.

"제법이군. 네놈 수준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봐도 되겠어."

기사들은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압도적인 실력 차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은 정말...."

기사 1명이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잔혹하리만치 불공평하구나...."

***

바로스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운이 좋군.'

정말 운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까지 예상대로 흘러가기도 쉽지 않은데.'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대체 어디가?

카르나크가 한 달 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데, 정규 기사쯤 되면 누구나 그 정도 노력은 한다. 그것도 수십 년을.

하물며 상대는 데벤토르 최강의 기사, 란돌프 경이었다.

재능을 타고난 이가 어릴 적부터 혹독한 수행을 쌓아 저 위치까지 올랐다.

그런 이가 고작 하루 벼락치기 한 기술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오히려 노력이 헛되다는 증거이리라.

'아무렴, 저런 걸로 불공평하다고 하면 안 되지.'

바로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불공평한 건 지금부터인데.'

***

"아, 이거 참...."

란돌프는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쥐 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내가 그 꼴을 다 당하네?"

고작 카르나크 '따위'에게 일검을 허용했다. 추가로 살짝 피도 봤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일이지만 란돌프에겐 충분히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분명 동료 기사들이 술 먹을 때마다 안주 삼아 떠들어 대리라.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겠어, 젠장."

바로 마무리를 지으려던 차였다.

고개를 숙인 카르나크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상대는 목숨을 걸었는데 고작 놀림당할 게 걱정인가? 미안한 기분 들 필요 없어서 좋군."

"음?"

순간 란돌프는 의아해했다.

'미안한 기분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카르나크가 씩 웃었다.

"실은 그게 무슨 기분인지 나도 잘 모르지만."

갑자기 란돌프의 전신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푸아아앗!

당황하며 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살짝 찢어진 옷섶 사이로 검은 어둠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둠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하며 거대한 형상을 그린다.

"이, 이게 뭐야?"

기회를 틈타 카르나크가 검을 찔러 갔다.

"타아앗!"

물론 바로 걷어차였다.

아무리 상대가 패닉에 빠져도, 단련한 기사를 상대하기엔 어림없었다.

퍼억!

문제는 걷어차인 카르나크가 거의 5미터 넘게 날아가 버렸다는 점이었다.

"헉!"

관중 모두가 경악했다.

전신에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성인 장정을 발 차기 한 방에 저렇게 날리다니?

이는 투기를 각성하지 않은 인간이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괴력이다!

"뭐야, 저 힘은?"

"저 꺼먼 건 뭐고?"

"마치 악마의 형상 같은...."

경악이 파도처럼 투기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한 신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사, 사령술이다!"

***

사방에서 외침이 들려온다.

"사령술?"

"저게 말로만 듣던 사령술이란 거야?"

"맙소사! 어찌 란돌프 경에게서 저런 사악한 기운이?"

란돌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령술? 누가? 내가?'

사령술이라고? 이름만 들어 봤지 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그게 왜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솟구친단 말인가? 힘은 또 왜 이렇게 늘어나?

검을 쥔 채 그는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나는, 그게...."

하필 그 동작에 맞춰 검은 기운이 크게 솟구치며 흑색 날개를 만들고 칼날에 어둠을 덧씌운다.

시기적절하게 바로스가 소리를 질렀다.

"악마의 날개다! 저놈이 도망갈 셈이야!"

그제야 정신이 든 알리움의 신관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심판관들이여! 어서 저자를 포박하라!"

무장한 전투 신관들이 우르르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는 결투 재판의 처형을 담당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이들이었다.

"알리움의 이름으로!"

"부정한 존재에게 정의의 심판을!"

사방에서 성광이 번뜩이고 창칼이 날아들었다.

혼란에 빠져 란돌프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

검은 거인이 날뛴다.

"으아아아!"

그때마다 전투 신관들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한 번 쓸릴 때마다 수 미터 가까이 날아가는데, 결코 평범한 인간이 선보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진정 사령술이로다!"

"이 악마 놈!"

사령술사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전투 신관들이 끊임없이 란돌프를 몰아붙였다.

정신없이 대검을 휘둘러 대며 란돌프는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

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뭔가 항변을 하고 싶은데, 머리가 마비되어 말이 잘 안 나온다.

그저 감정이 터져 나와 포효로 변해 흐를 뿐이다.

"으어어!"

하지만 그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잠깐 발작처럼 터진 검은 기운은 금방 옅어졌다. 동시에 란돌프의 괴력 역시 사라져 갔다.

"놈이 약해진다!"

"이 틈에 제압을!"

그럼에도 여전히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

사령술이 아니더라도 란돌프는 원래 데벤토르 최강의 기사였다. 본연의 힘을 앞세워 울분을 터트리며 멧돼지처럼 날뛰고 또 날뛰어 댔다.

"으아아아아!"

결국 전투 신관들은 제압을 포기하고 목표를 제거로 바꿨다.

사방에서 칼날이 란돌프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갑옷을 걸치지 않은 란돌프에게 그 모든 공세를 전부 막아 낼 능력은 없었다.

칼날이 꽂히고 또 꽂혔다.

참격에 베이고 또 베였다.

"으아아악!"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그는 결국 투기장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숨을 거두는 란돌프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카르나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는데?'

원래는 란돌프가 이 자리에서 제압당해 신전으로 끌려갈 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실상이 발각될 위험이 있으니 그 전에 바로스보고 슬쩍 끼어들어 죽여 버리라고 했었는데....

'저놈이 저렇게까지 제 성질 못 이기는 놈인 줄은 몰랐지. 뭐, 이해는 간다만.'

억울함이 골수까지 치민 란돌프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는 바람에 이 자리에서 결판이 나 버린 것이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아이고, 아파라....'

5미터나 날아갔으니 아무리 좋은 갑옷 입었어도 후유증이 장난이 아니었다.

바로스가 죽어라 굴린 덕에 제때 낙법을 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디 하나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카르나크가 외쳤다.

"알리움의 신관이여! 결투 재판은 어찌 되는 것인가?"

란돌프의 시체를 둘러싼 채 혼란에 빠져 있던 신관들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결투 재판이라니? 지금 그게 중요한가?'

'금기 중의 금기, 끔찍한 죄악의 씨앗이 발아하였거늘!'

그런데 생각해 보니 중요한 거 맞다.

무려 알리움의 이름을 건 신성한 재판이 아닌가? 확실하게 결론을 짓는 것 또한 성직자의 의무인 것이다.

애써 정신을 차린 심판관이 오른손을 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데벤토르의 결투자는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들고 신성한 결투 재판에 임했다! 이는 감히 여신을 우롱한 끔찍한 처사이니!"

신관의 목소리가 투기장 가득 울려 퍼졌다.

"제스트라드의 결투자, 카르나크 남작의 승리를 선언하노라!"

환호는 없었다.

그저 적막만이 감돌 뿐.

모두가 공포와 경악 속에서 투기장의 시체를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

데벤토르 자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가문의 기사가 사령술과 연관이 되었으니 구리 광산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알리움 교단 본산에서 직접 신관들을 파견해 자작가를 샅샅이 뒤졌다. 혹여 또 있을지 모를 사령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란돌프의 숙소 여기저기서 사령술 문양이 그려진 손수건, 사특한 주술 부적이 꿰매진 속옷 등이 발견되었다.

그가 추악한 어둠의 힘을 빌렸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란돌프의 여동생은 자신이 정체불명의 행상에게서 구입한 물건일 뿐이며 란돌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강력히 피력했지만, 이는 본인에 대한 의심마저 높이는 행동일 뿐이었다.

여동생이며 동료 기사들과 그 가족들, 하인이며 하녀까지 심문의 대상이 되었다.

지은 죄가 없으니 결국 의심을 거두긴 했지만....

"꽤나 고초를 겪었다고 하더라고."

카르나크의 설명에 바로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란돌프 경 여동생인가 하는 아가씨에겐 좀 미안하네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말은 미안하다는데 표정은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카르나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럴 땐 미안해하는 게 사람답게 사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대부분 그러는 것 같던데."

억울한 사람들을 두 자릿수로 양산해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저거였다.

아무래도 이놈들이 인간 되려면 갈 길이 먼 것 같았다.

어쨌거나 카르나크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주 잘 풀렸어. 돌아오자마자 목숨 걸라기에 기겁했는데."

신관들 앞에서 사령술을 쓰면 무조건 들킨다. 이건 사령술의 극의에 다다른 카르나크라 할지라도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발상을 바꾼 것이다.

'이왕 들킬 거, 쓰자! 대신 나 말고 란돌프가!'

어차피 먼 거리의 투기장 속 싸움이었다.

어차피 서로 얽힌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사악한 어둠이었다.

그 정도면 카르나크가 몰래 쓰고 란돌프에게 떠넘기는 속임수가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상대가 피를 흘려야 사령술을 자연스럽게 걸 수 있다는 거였는데, 고생한 보람이 있었지."

그간의 수행을 떠올리며 카르나크는 흐뭇해했다.

바로스가 문득 물었다.

"혹시 교단에서 의심하거나 하진 않을까요? 이런 수법을 도련님이 처음 쓰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예전에도 사령술사는 있었는데."

"내가 처음일걸."

"엥? 그래요?"

서로 근접한 상태에서, 자신의 힘은 숨긴 채 남이 사령술을 쓴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고도의 운용은 지금의 나니까 할 수 있는 짓이야. 보통은 못 해."

심지어 왕년의 카르나크조차도 불가능했다.

사령왕이라 불릴 정도로 극의에 다다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전례가 없으니 문제 되진 않을 거다. 다만...."

말하다 말고 카르나크가 살짝 안색을 굳혔다.

"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있어."

"뭐가요?"

"일이 너무 잘 풀렸다는 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란돌프는 사령술의 힘을 빌릴 필요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이미 기사로서 인정받고 있었으며 앞날도 창창하다.

반면 이 상황에서 가장 수혜를 많이 받은 이는 누가 봐도 죽음을 피한 카르나크다.

"아무리 전례가 없다 해도 이 정도면 나를 의심할 법하거든."

대놓고 의심하진 않는다 해도 검사 정도는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령력 감춰 놓고 심문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교단은 카르나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제스트라드 가문 쪽으론 아예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

마냥 데벤토르 자작가만 뒤엎을 뿐이었다.

"이건 뭐랄까, 란돌프 경이 사령술을 접한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잖아?"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며 카르나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왜 란돌프 경같이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 사령술을 썼는데 아무도 그 상황을 의심하지 않는 거야?"

***

유스틸 왕국 북부 교구를 담당하는 알리움 교단의 게셀란 대신전.

한 중년 신관이 60대의 노인 앞에 부복해 있었다. 금박을 수놓은 화려한 법의를 걸친 노인이었다.

노인이 물었다.

"확실히 확인했는가? 이는 중대한 문제다. 티끌만 한 실수도 용납될 수 없음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 신관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제가 심문관의 위계를 받은 지 어언 3년입니다. 그동안 많은 경험을 쌓았지요. 그 경험을 통해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유리병 속에서 희미한 암흑이 잠시 꿈틀거렸다.

지극히 미약한, 그럼에도 여신을 섬기는 이라면 느끼지 못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결코 평범한 사령술사의 것이 아닙니다. 속성이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확신을 담아 중년 신관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여신께서 경고하신 초월자의 파편, 세계를 파멸시킬 죽음."

데벤토르의 기사, 란돌프의 시체에서 추출한 암흑을 내밀며 표정을 굳힌다.

"종말의 어둠이 틀림없습니다."

유리병을 받아 든 대주교가 탄식을 터트렸다.

"어둠의 권세가 어느새 여기까지 퍼졌단 말인가...."

#14화. 4. 파멸의 전조

결투 재판의 승리로 구리 광산은 확실하게 제스트라드 가문의 것이 되었다. 영지를 구한 카르나크 역시 영주의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잔치가 열렸다.

소와 돼지를 잡았고 영민들에게도 많은 술과 음식이 베풀어졌다.

이 즐거운 연회 속에서 특히나 눈에 띄었던 것은 '존경스러운 새 영주님'의 모습이었다.

"바로스!"

"네, 도련님!"

"소고기다!"

"돼지고기도 있어요! 소시지가 아니라 막 잡은 돼지고기가!"

"기름기가 자르르 흘러!"

"소스도 발려 있는뎁쇼!"

둘은 그야말로 감동의 눈물마저 흘리며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찌나 진심으로 감격하던지 영민들이 도리어 당황할 정도였다.

"저렇게까지 기뻐하실 일인가?"

"물론 소고기가 귀한 음식인 것은 맞다만...."

일개 영민들에게 소와 돼지란 특별한 잔칫날,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못 먹는 음식이다. 그것도 풍년 한정으로.

그러니 이들 역시 오랜만에 맛보는 소와 돼지의 맛 앞에서 충분히 감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의 반응은 너무도 과격한 것이다.

"귀족들은 고기 자주 먹지 않나?"

"그런데 꼭 수십 년 만에 처음 먹어 보는 것처럼...."

"에이, 그럴 리가 있나? 귀족인데."

진실을 모르는 영민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혹독한 수행을 쌓으셨으면 저런 작은 것에 저리 기뻐하실까?"

"혹독할 만하지. 목숨을 거셨지 않은가?"

"사람은 정말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구먼."

다들 존경의 눈빛으로 새 영주 카르나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망나니였던 이가 새사람이 된 것도 모자라 영지를 구하고 영민들의 미래까지 지켜 주었으니, 어찌 경의를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카르나크는 별생각 없이 고기만 으적으적 씹을 뿐이었다.

"아, 맛있다. 근데 다들 왜 날 보지?"

"우리가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닐까요? 더 먹으면 배탈 날지도."

"조심해야지, 귀한 몸인데."

하여튼 만사가 잘 풀렸다.

부자 가문의 주인이 되었고 영민들의 존경과 호의도 받고 있다. 그를 싫어하던 가족들은 알아서 자멸해 버렸다.

시공을 되돌려 회귀할 때 원했던 모든 목표가 이루어진 셈이다.

술잔을 부딪치며 카르나크는 싱글벙글 웃었다.

"이제 느긋하게 인생 즐기는 일만 남았다, 흐흐흐."

"그러게 말입니다요, 도련님. 헤헤헤."

환한 웃음으로 답하는 바로스였다.

***

결투 재판이 벌어진 지도 어언 3개월 뒤.

제스트라드 가문의 외부 연무장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모여 눈앞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기사와 20살 남짓한 청년의 대련이었다.

"조심해라!"

입으로 경고하며 30대의 기사가 참격을 날린다.

"예!"

청년도 신중하게 공격을 받아치며 반격에 나선다.

연신 칼날과 칼날이 오가며 한동안 치열한 검투가 이어졌다.

앳되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청년의 실력은 상당했다. 정규 기사를 상대로도 용케 밀리지 않는 것이다.

잠시 후, 호흡을 고르며 기사가 검을 거뒀다.

"후우, 여기까지 하자꾸나."

청년도 검을 거두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땀을 닦으며 제스트라드의 기사, 발튼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거의 나와 대등한 수준이 되었구나."

눈앞의 청년, 바로스가 느닷없이 기사가 되겠다며 나설 때만 해도 다들 어이없어했다.

듣자 하니 델피아드 검투술을 얻은 카르나크와 함께 수행을 했다는데....

'뛰어난 검술을 얻었다고 마냥 강해지는 게 아니라니까?'

'문외한들의 착각은 못 말리겠군.'

처음엔 너무 어처구니없어 비웃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측은할 뿐이었다.

'적당히 두들겨 맞으면 금방 현실을 파악하겠지.'

그런데 고작 몇 달 만에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쑥쑥 늘어난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고참 기사, 토레스 역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바로스, 네게 이 정도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기술 습득이 엄청나게 빠른 데다가 전투 감각도 나무랄 데가 없고, 아직 성장기라 하루가 다르게 신체 능력이 올라간다.

어마어마한 천재였다. 이런 시골에 묻혀 있기 너무 아까울 정도로.

'이 녀석, 실전이라면 슬슬 나도 감당할 수 없겠는데?'

그렇다고 대놓고 칭찬하면 오만해질지 모르니 토레스 경은 짐짓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만하지 말거라. 재능을 타고난 전사가 경험 부족으로 참변을 당하는 건 흔한 일이다."

바로스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토레스 경."

물론 그는 아직도 실력 대부분을 숨기고 있었다.

진심으로 싸우면 이들, 제스트라드의 기사 5명 정도는 혼자서도 1분 안에 다 썰어 버릴 것이다.

애초에 란돌프 1명조차 감당 못한 시골 기사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저들을 비웃을 이유는 아니다.

'실제로 내가 무슨 엄청난 천재인 건 아니지.'

자신이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이유는 왕년에 쌓은 어마어마한 전투 경험 덕분이지, 무슨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란 걸 바로스는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데스 나이트가 되기 전의 그는 잘해야 이류 기사, 투기도 채 각성 못 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도련님 도움 없이 나 혼자 투기를 터득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뭐, 이론은 다 아니까 예전보다는 낫겠지 싶다만.'

어쨌든 바로스에 대한 평가가 엄청나게 올라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사들이 호의가 가득 찬 눈으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대단하다."

"네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이라니...."

"이런 재능을 가지고도 그동안 그런 망나니짓이나 해 댔단 말이냐?"

"아니, 그래서 오히려 이 정도의 싸움 감각을 익힌 걸지도 모르겠군."

그간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망나니짓으로 욕을 많이 먹긴 했지만, 사실 그리 엄청난 사고를 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인근 도시 몰래 가서 술 마시고 도박하고 뒷골목에서 싸움질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돈이 없어서 여색은 밝히지도 못했다.

저 정도는 기사 자신들도 종종 하는 짓거리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 10대인 놈들이 벌써부터 '어른의 놀이'나 해 대며 뒷생각 없이 살면 망나니 맞긴 하지.

감회가 새로운 듯 토레스 경이 중얼거렸다.

"기쁜 일이다. 너도 그렇지만 도련님께서 그렇게 철이 드실 줄이야...."

그간 변모한 카르나크를 보며 의심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리 영주가 되고 사람이 변했다지만 왕년의 망나니가 어디 가겠냐는 것.

하지만 그 의심은 눈 녹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술 한 잔에 너무도 감동하는 모습을 다들 봤거든.

영혼까지 떠는 듯한 그 격한 감동은 틀림없이 술꾼이 최소 몇 년 이상 금주해야 겨우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자제하며 반주 정도로만 술을 드시더구나. 그 덕인지 도련님, 아니, 영주님께서도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

토레스 경의 말에 바로스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그야 그렇겠죠.'

예전과 달리 카르나크는 육체 쪽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딱히 기사가 되겠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뿐.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죽은 몸으로 지내 왔는데? 갖고 있던 그 모든 걸 포기하며 겨우 이 육신을 다시 얻었는데?

관용구가 아니라 실질적 의미로도 정말 '귀하신 몸'인 것이다.

무조건 건강이 최우선! 젊을 때 잘하자! 나이 먹고 몸 챙기면 이미 늦어! 내가 늦어 봐서 안다니까?

둘 다 몸에 좋은 것들 골고루 챙겨 먹고, 규칙적인 생활 하고, 운동 열심히 하면서 소중한 육신을 아끼고 다듬는 데 열중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

"그러게 말이오. 독서에도 열중하시던데?"

"예전과 달리 여가의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내고 계신다더군."

"전 남작님이 돌아가셨을 땐 눈앞이 캄캄했는데...."

새 영주, 카르나크를 떠올리며 기사들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제 제스트라드 영지의 앞날은 밝게 빛나리라!

바로스만 내심 쓴웃음을 유지할 뿐이었다.

'서재에 처박혀 사시는 건 맞지. 댁들 상상처럼 독서에 열중하시는 건 아니겠지만.'

***

회귀 후 카르나크의 원래 계획은 대륙 곳곳의 보물을 챙기고 미래를 예지해 장사로 수익을 올려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이놈의 집구석은 도무지 답이 없을 정도로 몰락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구리 광산의 존재로 돈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다.

동시에 대륙을 돌아다닐 이유도 없어졌다.

애초에 저 계획 자체가 적당히 힘 있는 지방 귀족이 되어, 튀지도 무시당하지도 않는 평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미 그렇게 되었는데 뭐 하러 영지 뛰쳐나가 고생을 한단 말인가?

모험심? 젊은 날의 열정? 세상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이미 세상을 대여섯 번은 돌아다녔는데? 그 와중에 볼 거 다 보고, 심지어 못 볼 꼴도 다 봤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름 피우며 놀기만 할 생각도 없었다.

구리 광산을 보유한 시점에서 데벤토르 자작가 같은 놈들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나타난다고 봐야 했다.

욕심만큼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없는 법.

영지를 지킬 최소한의 힘 정도는 지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령술을 쓸 수는 없으니 세상에 드러내도 무방한 능력이 필요하다.

제스트라드 저택 2층에 위치한 커다란 서재.

창문 사이로 비치는 달빛 아래, 카르나크가 바닥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후우우...."

심호흡과 함께 정신을 집중해 사방의 기운을 긁어모은다.

깊은 밤의 어둠, 달빛의 음기, 희미한 부정의 기운 등이 그에게로 모이며 재가공된다.

잠시 후 카르나크는 눈을 떴다.

"좋아, 어느 정도 모였군."

그가 손가락을 들었다. 손끝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바로스가 호기심을 보였다.

"어라? 사령술 특유의 그 느낌이 안 드네요?"

사령술이 발동할 때 풍기는 죽음의 기운은 평범한 인간이라도, 아니, 살아 있는 생물체이기만 해도 불길함을 느끼게 되어 있다. 성직자들이 특히나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카르나크가 펼친 불꽃에선 그 느낌이 안 든다. 그냥 평범한 마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색깔도 붉고. 보통 불처럼 보이는데요?"

"그렇겠지."

카르나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사령술에서 비롯되었지만 더 이상 사령술이 아니니까."

지금의 그에게 사령술은 더 이상 매력적인 힘이 아니다. 열심히 힘 키워 봤자 그 결말이 어찌 될지 뻔히 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기사나 마법사, 혹은 성직자로 새 삶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원래 사령술은 일단 한번 익혀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그건 저도 알죠. 사령술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세상엔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생명력을 다루는 기사의 투기.

자연력을 다루는 마법사의 마나.

빛과 섭리를 따르는 성직자의 신성력.

마지막으로 사령술, 혹은 흑마술이라 불리는, 죽음과 어둠의 힘을 다루는 권능까지.

이 방식들의 공통점은 세상의 기운을 체내에 쌓아 권능으로 바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전자의 영혼과 육체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에 최적화된다.

즉, 한번 선택해 버리면 끝이다.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가 무예도 함께 익힌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팔다리 달렸는데 창칼을 못 휘두를 이유야 없으니까.

하지만 투기를 터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영혼과 육체는 이미 마나의 속성으로 물들어 버린 후라,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기운은 마나로만 쌓일 뿐인 것이다.

사령술 역시 마찬가지.

한번 검게 물들어 버린 영혼은 도로 하얗게 되지 못한다.

"뭐, 정확히 말하면 탈색이 되긴 해. 탈색 자체는."

문제는 지닌 기억이며 인격까지 함께 탈색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저 기운을 힘으로 바꾸는 행위가, 스스로의 영혼과 육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령술을 익힌 오러 유저나 마법사, 성직자가 타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힘을 잃고 심지어 성격마저 변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런 카르나크가 완전히 새 출발을 하려면 아예 사령술을 익히기 전으로 시공 회귀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귀 주문 자체가 사령술이라는 공통점을 시공의 목표로 설정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 탓에 사령술을 익힌 이후로밖에 돌아올 수 없었다.

"바로스 너야 나한테 편승하는 식이라 데스 나이트가 되기 전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했지만 말이야."

사령왕 시절부터 카르나크는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귀 후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대처법도 준비해 두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손끝의 불꽃을 흔들며 그는 자랑스레 웃었다.

"혼돈마력이라 이름 붙였지."

#15화. 4. 파멸의 전조 (2)

사령술사들은 왜 혐오와 경멸,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될까?

이건 이유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확하다.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만 골라 하니까. 그래야 강해지는 인간 말종들이니까.

그래서 모든 사령술사들은 최대한 정체를 숨긴다.

남들 앞에선 일부러 평범한 마법처럼 보이는 수법만 쓰고, 진짜 사악한 수법은 몰래 암약하며 사용한다.

그럼에도 신관이나 감 좋은 인간들에게 들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령술의 근원인 사령력 자체가 너무도 '더러운' 마력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기운, 원한, 증오, 공포 등 세상의 모든 부정하고 사이한 탁기를 긁어모아 힘으로 바꾼 결과물이 바로 사령력이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사령술이 발동되기만 해도 저절로 기피하게 된다.

썩어 가는 시체 근처에 가면 절로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막게 되는 것처럼.

그런 사령력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

이는 제아무리 인류 역사상 최강의 사령술사였던 카르나크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사령술의 근본 자체가 부정한 기운을 다루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그 부정한 기운이 바로 혐오를 유발하는 것이다.

일단 썩히는 것부터가 시작인데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아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여기서 카르나크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잠깐, 원래부터 썩혀서 만드는 음식도 있잖아!'

발효라는 기법은 인류 역사에 얼마든지 사례가 있다. 당장 인간 시절 그리 좋아했던 술부터가 그렇고.

'더러움을 씻어 낼 수는 없지만, 더럽지 않다고 느끼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후 그는 사령력을 '발효'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했다.

물론 음식을 썩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니, 발효 과정을 실제로 사령술에 적용할 순 없다.

하지만 개념은 차용할 수 있는 것이다.

'부정한 기운을 토대로 가공된 사령력을 다시 한번 2차 가공한다면?'

몇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결국 이론적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육체로 돌아온 뒤 실제로 구현해 냈다.

"사령력에서 원한이나 증오 같은 부정한 감정을 걷어 내고 순수한 어둠과 죽음의 기운만을 남긴 뒤, 그걸 최대한 재가공해 자연스러운 마력에 가까운 형태로 변환한 거야."

카르나크가 주위에 몇 개의 불꽃을 더 피워 냈다.

역시나 사령술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 평범한 마력만 느껴지는 불꽃이었다.

장난스레 뇌까리며 카르나크는 빙그레 웃었다.

"마나 같지만 마나는 아닌데, 또 마나가 아니라고 하기엔 한없이 마나에 가까운 제3의 마력이라고나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로스가 물었다.

"그러니까, 잡다한 거 다 거르고 맛있는 술만 남긴다는 소린가요?"

"대충은?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쩐지... 왜 도련님이 내내 서재에만 처박혀 계시나 했습니다. 예전엔 공동묘지 같은 음침한 곳만 찾아다니셨잖아요. 원한이 떠도는 전장이나."

"원래 사령술은 탁기가 짙을수록 위력도 강해지니까."

하지만 혼돈마력은 그런 탁기를 다 걸러 내야 한다. 그래야 순수한 죽음의 기운만 남겨 재가공할 수 있다.

"이젠 오히려 그런 곳을 피해 다녀야지. 괜히 일거리만 더 늘어나는 셈인데."

바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로선 다행이네요. 또 예전처럼 시체 파내야 되는 줄 알았는데."

시체만 파냈던가? 애꿎은 사람들 납치해서 고문하면서 영혼을 타락시켜 억지로 힘으로 바꾸기도 했었다.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는 실감이 나는데요."

"많이 착해진 것 같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과거의 악행이 워낙 극심했다 보니, 이 정도면 착해진 것 맞긴 하지.

불꽃을 거두며 카르나크는 흐뭇해했다.

"이걸로 신관들 앞에서도 일반적인 마법사 행세를 할 수 있게 됐어."

란돌프와의 결투 재판 땐 시간이 촉박해 어울리지도 않는 기사 노릇을 해야 했다. 이제 그런 위험한 짓을 다시 할 필요는 없으리라.

문득 바로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게 왜 혼돈마력이에요?"

설명을 들어 대충은 알겠는데, 아무리 봐도 혼돈이란 단어의 의미와는 아무 상관 없어 보인다.

"차라리 발효마력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나?"

"그건 이름이 멋이 없잖아!"

"그게 다예요?"

"무시하지 마라, 이름 중요하다. 당장 사령술이란 명칭만 봐도 모르겠냐?"

과거에는 사령술사를 흑마법사나 흑마술사라 칭하기도 했다.

죽음의 힘을 다루는 게 사령술이고 어둠의 힘을 다루는 게 흑마술이다.

엄밀히 말하면 수법 자체는 좀 다르다. 하지만 두 수법의 근원된 기운은 거의 같은 것이다.

사령력은 죽음과 어둠의 힘, 흑마력은 어둠과 죽음의 힘 정도 차이밖에 없다.

"홍차에 우유 타나, 우유에 홍차 타나 똑같지, 뭘."

이렇다 보니 사령술 익힌 놈치고 흑마술 안 익힌 놈 없고, 흑마술 익힌 놈치고 사령술 안 익힌 놈 없다. 당연히 사령술사가 곧 흑마술사일 수밖에.

이 인식이 바뀐 것은 마법사들의 반발 탓이었다.

흑마술, 흑마법은 어쩐지 마법과 관련이 깊은 것 같은 뉘앙스다. 그에 비해 사령술은 전혀 상관없는 사악한 힘처럼 느껴진다.

마법사들은 고집스럽게 흑마술이란 단어를 없애고 사령술이라는 단어만을 세상에 퍼트렸다.

같은 이유로, 사령술사들도 스스로를 흑마법사라 칭하지 않았다.

사령술사들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마법사의 하위 갈래로 인식되는 것은 자존심 문제인 것이다.

"이제 좀 이름의 중요성을 알겠냐?"

바로스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더 따지진 않았다.

이해는 안 가지만, 본인이 좋다면 좋은 것 아니겠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쇼."

***

이 시대로 회귀한 지도 어언 반년이 지났다. 카르나크가 새 영주가 된 지 1년이 지난 시기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바로스는 매일같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며 기사로서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출신이 워낙 미천해 아직 정식 서임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미 영지 내의 사람들은 그를 인정한 지 오래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바로스는 명실공히 제스트라드 최강의 기사였다.

이젠 다른 기사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감당이 안 될 만큼 그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단지 아직 대외적으로 명성을 떨칠 기회가 없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작 바로스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는 게 더 좋지.'

명성이 높다는 건 그만큼 전투를 많이 겪었다는 소리도 된다.

수십 년 동안 온갖 굵직한 전장에서 살아온, 종종 죽기도 했던 바로스에게 명성 따윈 관심 밖이었다.

'그보단 땀 흘리고 마시는 한 잔의 맥주가 더 소중해!'

오늘도 보람찬 개인 훈련을 마치고 땀투성이가 되어 한 잔 들이켠다.

"크아! 이거야말로 하루의 낙이지!"

맥주잔을 비운 뒤 바로스는 저택 훈련장을 나섰다. 우물가로 가서 땀을 씻을 생각이었다.

지나가던 하녀들이 상체를 탈의한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 바로스다."

"쟤 요새 엄청 멋있어졌더라?"

멀대처럼 키만 컸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어깨는 딱 벌어지고 가슴팍은 들판처럼 드넓으며 등은 마치 소와 같고 팔다리는 꽉 찬 근육으로 약동한다.

과거와 달리 이젠 젊다고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어도 적당히 먹고, 아무리 귀찮아도 꾸준히 단련하며 이 '살아 있는 육신'이 계속 '싱싱하게' 유지되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런 바로스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혈기 넘치는 나이임에도 욕망을 자제하며 스스로를 단련하다니, 이 얼마나 바람직한 모습인가?

물론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중년 사내에 가까웠지만.

'맥주 한 잔만 더 마시고 싶다. 그래도 참아야겠지? 무조건 건강이 제일이야, 아무렴.'

***

제스트라드 저택 집무실.

카르나크는 평소처럼 업무는 진작 끝내 놓고 혼돈마력을 수행 중이었다.

열심히 마력 전환 중인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간식 가져왔습니다, 도련님."

"들어와, 바로스."

기사 대접을 받는 위치인 만큼 이런 사소한 일은 이제 하녀들에게 맡겨도 되겠지만, 여전히 그는 충실하게 카르나크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왜냐고?

접시를 테이블에 놓자마자 쌓인 과자를 슥 반으로 갈라 자기 앞에 놓는다.

"절반은 제 거죠?"

영주님이나 드시는 귀한 과자를 남들 앞에서 먹을 순 없으니 시중 핑계 대고 나눠 먹는 것이다.

"그래, 먹어라, 먹어."

연신 과자를 입에 넣으며 마냥 행복해하는 두 사람이었다.

"아, 달다."

"으아, 맛있다."

과자는 순식간에 동났다. 카르나크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되나? 과자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바로스가 바로 제지했다.

"살찝니다."

"난 원래 살 안 찌는 체질인데?"

"그게 더 문제예요. 날씬한 사람이 배만 볼록 나왔을 때가 제일 위험하다니까요?"

한창 젊은 두 사람이 고작 과자 몇 개 더 먹는다고 무슨 큰일이야 나겠냐마는 세상 좀 오래 산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저런 사소한 걸로 시작해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몸 망가져 있는 게 세상 이치인 법이라는 걸.

"그래, 나 자신을 믿지 말자. 제일 못 믿을 게 나 자신이더라."

미련을 버리며 카르나크는 과자 접시를 물렸다.

뒷정리를 하며 바로스가 물었다.

"마법 쪽 수련은 잘되어 가요?"

"슬슬 마법사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될 것 같아."

기사로서 결투 재판에 나섰던 카르나크지만 그렇다고 계속 기사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번복했다.

"내게 기사의 길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마법사의 길을 걷겠다!"

놀랍게도 그에겐 델피아드 검투술 말고 다른 인연도 있었던 것이다.

"델피아드 검투술을 익히기 위해 산속에서 수행하던 중 위대한 유산을 발견했다. 바로 150년 전 명성을 떨친 궁정 마법사 달라스의 마법서다!"

"오오! 영주님께 그런 행운이!"

제스트라드 가문 사람들은 카르나크의 선택을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들 결투 재판을 지켜본 바가 있는 것이다.

분명 카르나크는 굳건한 정신력과 투지, 귀족다운 기개를 보여 주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영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싸움을 잘하셨나?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좀....'

'솔직히 재능은 없으시더라.'

'마법사로 대성하실 수 있으면 그게 최고지!'

무려 일국의 궁정 마법사의 마법서라지 않는가? 어쩌면 제스트라드 가문에서 초일류 마법사가 나올지도 모른다!

"궁정 마법사의 마법서를 얻어서 마법 실력이 쑥쑥 올라갔다.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야기잖아?"

카르나크의 말에 바로스는 한쪽 눈을 치켜떴다.

"그렇죠, 그렇긴 한데...."

궁정 마법사의 마법서? 그딴 거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그다.

"달라스가 누구예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긴 합니까?"

"진짜로 유명한 사람 맞아. 그러니까 내가 이름을 갖다 썼지."

달라스는 정말로 150년 전 명성을 떨쳤던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아직도 이름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그럼 진짜 달라스의 후예가 나타나거나 하면 어쩌려고요? 궁정 마법사의 유산이면 문제 생길 수도 있을 텐데요."

"안 생겨."

"확실해요?"

"확실해. 달라스는 제자도 남기지 않았고 마법서 같은 것도 쓰지 않았어. 연관될 일 자체가 없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데요?"

과연 카르나크에겐 자신만만해할 근거가 있었다.

"본인이 알려 줬으니까. 바로스 너도 아는 작자거든?"

"엥?"

"왜, 네크로피아 남부 관리하라고 보낸 아크 리치 기억하지?"

잠시 기억을 더듬던 바로스가 눈을 크게 떴다.

"뎀피스 총독요?"

"응. 그 양반 인간일 때 이름이 달라스야."

"150년 전의 마법사라면서요? 어떻게 우리랑 같이 놀고 있었대요? 시간대가 안 맞는데."

"바라칸트 산맥에서 유적 하나 발굴한 건 기억나?"

"네."

"거기서 마법사 뼈다귀 발굴해 가공한 다음 영혼 강령시켜서 아크 리치 만들었잖아. 그 양반이야."

"아...."

진짜로 존재하던 마법사로부터 진짜로 그가 쓰던 고유 마법을 배워(정확히는 정신 지배 걸고 강제로 뜯어낸 것이지만) 혼돈마법 술식으로 바꿔 놓았다.

"마법사로 행세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후후후."

물론 이 정도로 사령왕 시절의 그 엄청난 권능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무슨 상관이야? 다시 세계를 정복할 것도 아닌데."

영지를 지킬 수 있을 정도, 혹시 생길지도 모를 사고에 대처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면 충분하다.

"그 힘으로도 감당 못 할 진짜 큰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애초에 그런 큰일에는 끼어들지 말아야지."

100년 넘게 살아 보고 깨달은 사실이 있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큰 힘에 큰 사건이 따르는 건 확실하다. 이건 겪어 봐서 안다.

"무조건 콕 처박혀서 쥐 죽은 듯이 살 거야! 절대 세상사에 끼어들지 않을 거라고!"

주먹까지 쥐어 가며 카르나크는 각오를 다졌다.

그것이 오산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대략 3개월 후의 일이었다.

#16화. 4. 파멸의 전조 (3)

제스트라드 영지의 구리 광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이는 테카스 상회다. 채굴, 정제, 유통의 대부분을 그들이 맡고 있다.

그렇다고 제스트라드 남작가가 가만히 앉아 불로소득만 받아먹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제덴 산맥 북부 깊은 곳에 위치한 탓에 광산 주위에서는 온갖 마수와 사나운 맹수가 출몰하곤 했다. 이 위험으로부터 광부들의 안전을 지키고 길을 확보하는 것이 제스트라드 가문의 주요한 임무였다.

구리 광산 서쪽의 한 숲속.

10여 명의 병력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놈들이 온다!"

"대열을 유지해!"

마수들이 병사들을 노리고 덤벼든다.

얼핏 커다란 잿빛 늑대처럼 보이지만 비정상적으로 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마수, 스네롤이었다.

스네롤 무리가 병사들을 포위하며 포효를 터트렸다.

아우우우!

방패를 내세워 진영을 유지하며 병사들도 소리를 질렀다.

"버텨!"

"창을 찔러!"

날카로운 발톱이 방패를 긁는다. 창날이 번뜩이며 허공을 가른다. 피가 튀며 마수의 비명이 숲을 흔든다.

크아아아!

병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한 놈 죽였다!"

"정신 차려! 아직 많이 남았어!"

전투를 지켜보던 바로스가 감탄을 흘렸다.

"이야, 다들 잘 싸우네?"

스네롤의 신체 능력 자체는 일반적인 늑대와 크게 차이가 없다.

놈들이 마수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빨과 발톱에 깃든 맹독 탓이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마비되니 상대하기가 극히 까다롭다.

'예전엔 저 스네롤 무리만으로도 참 많이 죽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스네롤을 잘도 상대하고 있었다.

딱히 병사들의 평균 실력이 과거보다 높아져서는 아니었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만.'

광산의 수입으로 영지의 무장 수준이 크게 올라간 덕분이었다.

구리 광산이 없던 시절엔 기사들조차 체인 메일과 플레이트 메일을 섞어 입어야 했다.

병사들은 저급한 가죽 갑옷, 혹은 그조차도 없어 창과 방패만 들려 내보내기도 했다.

반면 지금은 병사들도 죄다 체인 메일에 강철로 만든 팔과 다리 보호대를 섞어 입고 있다.

기사들은 무려 풀 플레이트 메일, 그중에서도 특히나 비싸다는 강철 건틀렛까지 착용 중이다.

이빨과 발톱에 긁혀도 중독될 염려가 적으니 한껏 용맹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죽어, 이 마수 놈들!"

"덤벼, 이 개자식들! 이젠 우리도 물려도 부담 없다, 이 말이야!"

"아니, 그래도 물리면 안 되지! 정통으로 이빨 박히면 갑옷도 뚫리는데."

난전을 벌이는 병사들의 모습에 바로스가 실소를 흘리던 차였다.

병사 1명이 다급히 고함을 터트렸다.

"바로스 경!"

그를 노리고 스네롤 한 마리가 덤벼든 것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마수가 바로스의 머리통을 노리고 앞발을 휘두른다.

그때였다.

검광이 번뜩이며 오히려 덤비던 스네롤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병사들이 경악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딱히 화려한 검술을 펼친 것도 아니다.

그냥 한 발자국 몸을 틀며 어깨를 돌렸는데, 어느새 칼날이 저편에 가 있다. 베는 동작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바로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위험할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길리먼 아저씨."

"아, 예...."

길리먼이라 불린 병사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라뇨, 이젠 기사님이 아니십니까? 말씀 편히 하십쇼, 바로스 경."

순박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으며 바로스가 웃었다.

"제가 기사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저씨한테 반말 찍찍 해요? 그게 더 이상하지."

최근 바로스는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았다. 카르나크가 영주의 권리로 직접 임명해 준 것이었다.

반대는 전혀 없었다.

실력이 워낙 출중한 데다 그간 영지를 지키며 공도 많이 세웠고, 평소 행실도 모범적이다.

당장 지금만 봐도 저토록 놀라운 무위를 떨쳤음에도 자랑하는 기색이 없지 않은가?

바로스의 어린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는 다른 병사들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강함을 지녔는데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저게 정말 그 망나니 바로스가 맞나?'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도 있구만.'

실은 너무 하찮은 상대라 자랑거리라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이었지만 어쨌건 겉보기엔 차이가 없다.

그 와중에도 바로스는 남은 스네롤 무리를 척척 처리해 갔다.

카아악!

이윽고 마지막 한 놈이 단말마를 터트리며 대지 위로 피를 뿌렸다.

"이걸로 다 처리했군요."

병사들이 뒷수습을 시작했다.

마수의 가죽이며 이빨, 발톱은 마법의 촉매로 제법 비싸게 팔린다. 이를 수거하는 것도 병사들의 좋은 부수입거리다.

그러는 동안 바로스의 부관 격인 고참 병사, 톨레일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바로스 경."

"여러분이야말로 고생이 많으셨지요."

"그나저나 걱정이군요, 스네롤이 이렇게까지 강력한 마수는 아니었는데."

"그런가요?"

"예전에 비해 최소 2배 이상 강해졌습니다. 바로스 경도 느끼시지 않았습니까?"

바로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얘들이 약해졌는지 강해졌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전생에서 처음 스네롤을 조우한 건 막 사령술을 익힌 카르나크와 죽어라 도망치던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었으니, 당연히 스네롤은 지옥에서 온 마수쯤 되는 줄 알았다.

이후 다시 스네롤을 상대할 땐 이미 데스 나이트였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펑 터져 죽는 놈들이었다.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 지금 이놈들이 강한 건지 약한 건지 감이 안 오네.'

물론 대놓고 저렇게 얘기할 순 없으니 슬쩍 말을 돌린다.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이런 싸움에 껴 보지도 못한 놈 아닙니까? 여러분처럼 경험이 많지 않으니 잘 모르죠."

"그건 그렇군요."

납득하며 톨레일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마수들의 상태가 변했습니다. 바로스 경이 워낙 강하고 우리 무장 수준도 올라가서 무리 없이 상대했을 뿐입니다."

이는 유스틸 왕국 북부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대륙 전역에서 점점 마물과 마수의 창궐이 잦아지며 그 위험 또한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인 듯합니다."

바로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역시 톨레일이 말한 소문이 무엇인지 들은 바 있다.

"그... 세상이 파멸한다는 여신의 신탁 말입니까?"

***

몇 년 전, 대륙의 모든 교단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를 지키고 인류를 가호하는 위대한 여신들이 일곱 교단에 동일한 신탁을 내린 것이다.

공허가 입을 열어 허락되지 않은 운명을 토하니.

이는 빛을 지우는 어둠이요, 생명을 거두는 죽음이로다.

환란이 오리라.

그릇된 짐승이 그릇된 힘을 얻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부정한 대지를 걸으리라.

죽음의 왕이 내려와 세상을 피와 눈물로 씻을지니.

이는 곧 파멸을 알리는 종언이 되리라.

파멸의 신탁을 접한 성직자들은 경악했다. 그리고 대륙 각국에 이 사실을 은밀히 알리며 환란에 대비하기 위해 애썼다.

과연, 대륙 전역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창궐이 더욱 잦아지고, 그릇된 힘을 사용하는 사령술사의 출몰이 빈번해지며, 평범했던 이들이 어둠에 물들어 사악한 힘을 떨치며 세상을 어지럽혔다.

처음엔 신탁의 존재를 숨기고 비밀리에 대처하려 했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민심이 어지러워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비밀이었다.

점점 혼란은 커져만 갔으니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일곱 교단은 여신의 신탁을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세상은 파멸한다! 여신의 이름으로 종말에 대항해 싸우라!』

파멸의 신탁이 빠른 속도로 대륙 전역을 강타했으니, 결국 시골구석인 제스트라드 영지까지도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

제스트라드 저택 집무실.

바로스와 카르나크가 머리를 맞댄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이거 뭡니까, 도련님? 예전엔 저런 신탁 같은 거 없었잖아요."

"없었지."

"그런데 구리 광산도 그렇고, 왜 자꾸 과거가 바뀌는 거래요?"

심각한 표정으로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유추할 정보 자체가 너무 적어."

바로스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도련님이랑 뭔가 관련이 있는 건 아니고요?"

환란이 온다?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 죽음의 왕이 세상을 피와 눈물로 씻는다? 세계가 파멸의 길을 걷는다?

"이거 완전히 우리가 했던 짓이잖아요?"

"네가 봐도 좀 그래 보이긴 하지?"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대가 안 맞아. 우리가 돌아온 건 고작해야 1년 전이잖아."

여신의 신탁이 내려진 건 몇 년 전이라 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시공 회귀한 시점보다는 훨씬 이전이다.

"대충 4~5년 전인 거 같거든."

존재치도 않았던 구리 광산이 갑자기 생긴 시기와 얼추 비슷하다. 어쩌면 이 역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란돌프 경 문제를 왜 그리 쉽게 넘어갔는지는 알았다만."

몇 년 전부터 대륙 곳곳에서 사령술을 접하는 이들이 종종 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핍박받는 천민이나 뒷골목의 범죄자 정도가 아니다.

멀쩡한 기사며 마법사, 때론 고위 귀족마저 타락하여 어둠의 힘을 쓰다 발각되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그래서 란돌프 경 사건도 흔한 일인 줄 알고 넘어간 모양이더라고."

"그건 우리에겐 다행입니다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로스가 따지듯 물었다.

"상황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세계가 멸망한다잖아요!"

설령 자신들과 상관없는 사태라 해도, 사태 자체가 거창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기껏 사람답게 살려고 돌아왔는데 세상 자체가 파멸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나도 걱정은 되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니까?"

카르나크가 쏘아붙이며 되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쩌라고? 신탁 내렸다는 7여신교라도 찾아가 보자고?"

"혼돈마력 덕분에 정체 안 들키신다면서요?"

"찾아가서 뭐라 할 건데? 우리가 시공 회귀한 놈들이라 미래에 대해서 좀 아는데, 지금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왜 그런지 좀 알려 주십시오. 이렇게 물을까?"

바로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 그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잠시 적막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카르나크의 은근한 목소리였다.

"별문제는 없지 않을까? 파멸에 대비하라고 여신님들께서 무려 경고까지 해 주셨잖아."

"그렇죠? 세상이 그렇게 쉽게 파멸하겠어요? 도련님이야 몰래 힘 키워서 야금야금 몰아붙였으니까 성공한 거지."

"그러고도 우리가 세계 정복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세상 만만치 않았어."

"정말 만만찮았죠. 3인의 대마법사도, 4대 무왕도, 용황제 그라테리아도."

왕년의 사령왕과 왕년의 데스 나이트 로드는 서로를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걔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아무렴요. 저 죽음의 왕이란 게 설마 도련님만큼 악랄하겠어요?"

결론이 났다.

세상의 저력을 믿자!

위대한 인류는 분명 알아서 환란을 잘 극복할 것이다!

위대한 용족과 위대한 요정족과, 뭐, 하여튼 위대한 기타 등등도 분명 힘을 합칠 것이다!

그러니 신경 끄고 우리는 자기 앞가림만 하며 소소하게 살자!

...그래 봤자 찜찜하긴 마찬가지지만.

'아, 씨, 불안한데....'

'무시하다 엿 될 것 같은데요, 이거.'

***

아무리 영지에 콕 처박혀 산다 해도 세상의 풍파란 그리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북부 시골인 제스트라드 남작가에도 파멸의 신탁은 영향을 끼쳤다.

소문이 퍼진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태양의 여신 라티엘 교단의 성직자들이 영지를 찾아와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차드 백작령에서 암약하던 사령술사 하나가 이곳 제스트라드 남작령까지 도망친 전황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제덴 산맥 인근에 숨어 있는 듯하니, 카르나크 남작가의 협조를 구합니다."

카르나크는 흔쾌히 승낙했다.

"여신의 성무를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라티엘 교단의 요구는 인근 지리를 잘 아는 현지 안내인 몇 명을 빌려 달라는 것뿐이었다.

품은 조금 들고 생색은 크게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카르나크 개인으로서도 마침 좋은 기회였다.

'잘됐군. 그놈을 붙잡으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17화. 5. 종말의 어둠

어둠이 짙게 깔린 산속.

횃불을 든 10여 명의 추격대가 숲속을 헤집고 있었다.

"이쪽! 이쪽이다!"

"놈을 찾았다!"

불빛이 숲속에 숨은 사내를 비췄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볼품없는 인상의 사내였다.

사내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쫓아왔나...."

추격대가 그를 포위하며 검을 뽑았다.

포위망 사이로 태양의 문장을 새긴 갑옷 차림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락한 사령술사여."

라티엘 교단의 성전사였다.

"순순히 무릎을 꿇고 여신 앞에 용서를 구할지어다!"

"크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갑자기 악귀 같은 포효를 터트렸다.

"으아아아!"

어둠이 사내 주위에서 일어 올랐다.

성전사가 긴장하며 소리쳤다.

"조심하라! 놈이 또 악령을 부린다!"

어둠이 검은 악령 다섯 개체로 화해 포위망으로 향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미 저 악령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것이다.

"소용없다!"

"우리에겐 라티엘의 가호가 있음이니!"

병사들이 왼손으로 태양신의 수호 부적을 내밀며 오른손으로 검을 찔러 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칼날 따위 무시할 악령들이 타격을 받아 흐릿해진다.

사방에서 펑펑 하는 폭음이 울린다. 수호 부적의 가호가 병사들의 검에 영체 타격의 권능을 실은 것이다.

그러나 악령들도 쉽게 쓰러지진 않았다.

연신 흔들리면서도 병사들의 발을 묶은 채 귀곡성을 토해 낸다.

아아아아아!

그 틈에 사내가 다시 도주를 시도했다. 성전사가 고함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놓칠 성싶으냐!"

순간 사내가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나와라! 악령이여!"

세 줄기 어둠이 또다시 솟구쳐 악령으로 화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악령들을 보며 성전사가 검을 고쳐 쥐었다.

"아직도 이 정도 힘이 남아 있었나?"

이내 장검의 칼날이 빛을 발하며 악령들을 베어 갔다.

"타아앗!"

태양의 여신 라티엘을 섬기는 성직자의 권능은 정녕 사령술과 상극이었다.

그가 저 악령 셋을 모조리 베어 넘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내가 도망가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새 숲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상대를 보며 성전사가 이를 갈았다.

"흥! 멀리 가진 못할 것이다, 더러운 사령술사 놈!"

***

정신없이 산길을 질주하며 사령술사, 프레드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여신의 개들 같으니...."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차드 백작령 북부 교역 도시, 데라트 시티 뒷골목에 살던 막노동꾼이었다.

고달픈 삶이었다.

하루 종일 짐을 나르고 날라도 손에 쥐이는 것은 잔돈푼뿐.

투박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마구간만도 못한 곳에서 잠드는 일상, 그나마 즐거움이라곤 싸구려 독주로 뇌를 마비시키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었다.

그날도 프레드는 평소처럼 술에 취해 뒷골목에 쓰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더러운 세상...."

귀족들은 그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고생을 모르고 사는데 왜 내 인생은 이럴까?

"차라리 죽을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버릇이 되어 버린 한탄을 내뱉을 때였다.

뒷골목의 어둠이 갑자기 확장해 그를 덮쳤다. 암흑이 그를 휘감고 전신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 어어?"

처음엔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공포는 이내 사라졌다.

상황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서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건...."

그것은 힘이었다.

권능이자 어둠이며 죽음이었다.

알려 준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대륙의 모든 교단이 소리 높여 외치는 바로 그것, 파멸의 신탁이 가리킨 바로 그 종말의 권능이 자신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아아아...."

시체처럼 굳은 채 프레드는 신음을 흘렸다.

어둠의 지혜가 영혼에 직접 스며든다.

소리 없는 진실을 전하며 선택을 강요한다.

외면한다면 어둠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원한다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인간의 길을 벗어나게 된다.

선택하라.

선택하라.

선택하라....

'인간의 길을 벗어나?'

그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는 인간 취급을 받아 보기나 했나?'

선택은 너무도 쉬웠다.

고민 없이 어둠을 택했고, 힘의 사용법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간절히 바라면 된다. 바라면 어둠이 피어오르며 뜻대로 움직이는 악령이 된다.

악령을 부려 자신을 괴롭히던 토목 길드장부터 죽였다. 평소 자신을 얕보던 뒷골목 건달들도 죽였다.

신기하게도 살인은 두렵지 않았다. 뒷감당이 좀 걱정됐을 뿐이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악령은 소리 없이 나타나 목숨을 앗아 가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존재였다. 아무도 살인범이 그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점점 범행은 과감해졌다.

부잣집에 잠입해 모조리 죽였다. 금품을 훔치고 윤락가로 향해 그 돈을 펑펑 쓰며 사치와 향락도 누렸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다면 그 생활이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초반에야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다 해도, 계속해서 살인이 일어나는데 사람들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

이미 일곱 교단은 파멸의 신탁에 대비해 대륙 곳곳의 이상 현상을 감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프레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저 쾌락을 즐기는 데만 열중할 뿐이었다.

결국 태양의 교단 심문관들이 데라트 시티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이내 프레드의 정체를 파악하고 맹렬히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던 악령이지만 신관들 상대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신성력의 가호를 받은 기사와 병사를 상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치는 길뿐이었다.

차드 백작령을 떠나 북쪽으로 향해 도주하고 또 도주했다.

도망자 생활은 혹독했다. 짐승처럼 숲속을 헤매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억울해할 뿐.

"내가 왜 이런 꼴이 된 거지...."

수풀 사이에 숨어 프레드는 손톱을 깨물었다.

"젠장, 힘이 더 있었더라면...."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약하기 때문에, 추격자들을 모조리 죽일 만큼 강하지 못하기에 겪는 일이라 여길 뿐이다.

"더 강해져야 해...."

숲의 어둠 속에서 사내는 악귀처럼 웃었다.

"그래, 여기서만 잘 도망치면 돼."

눈앞의 위기만 벗어나면 된다.

그럼 더 많이 죽이고, 더욱더 힘을 키울 수 있다.

저런 놈들 따위 단번에 죽여 버릴 절대적인 어둠의 힘을!

"두고 보자, 그땐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까!"

궁지에 몰린 지금도 그는 여전히 힘에 취해 있었다.

***

제덴 산맥 북쪽의 황무지로 이어지는 한 산길의 길목.

길 주위에 한 무리의 병력이 은신해 있었다. 라티엘 교단 추격대였다.

전원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숨어 소리 없이 대기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득 카르나크 옆에 숨은 40대의 신관 1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격대의 우두머리, 로소 신관이었다.

"놈이 정말 이쪽으로 오겠소?"

길 안내 역을 맡은 제스트라드의 병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중팔구는 그럴 겁니다. 제덴 산맥에서 인간이 오갈 수 있는 길은 극히 한정되어 있거든요."

과연, 길 저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였다.

잠시 후 달빛 아래 인간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곤욕을 치른 듯, 남루하기 그지없는 복장의 사내였다.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길을 달린다.

이윽고 그가 은신한 길목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지금!'

로소 신관의 신호에 따라 추격대의 마법사가 양손을 교차했다.

"사방을 밝히는 빛, 루미스 라이트!"

광구가 떠올라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파아아앗!

"어엉?"

갑작스러운 사태에 프레드가 눈을 가리며 주춤거렸다. 그 틈에 은신해 있던 추격대가 포위망을 전개한다.

다시 눈을 뜬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함정이었나?"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소 신관은 흡족해했다.

"역시 지도 백 번 보는 것보다 현지인의 안내 한 번 받는 것이 낫군."

포위망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붙잡겠다는 듯, 결코 서두르지 않고 도주로를 차단하는 데만 전력을 다한다.

추격대를 노려보던 프레드가 갑자기 악을 써 댔다.

"붙잡힐 것 같으냐?"

그의 얼굴에 검붉은 혈관이 눈에 띄게 드러난다.

"내겐 위대한 어둠의 권능이 있다!"

정식으로 사령술을 배운 것이 아니니 주문 따위 외우진 않는다. 사실 아는 주문도 없고.

그냥 이를 악물며 힘을 끌어낼 뿐.

"으아아아아!"

어둠이 일어나 수많은 악령으로 변했다.

거의 스물에 가까운 숫자였다. 프레드도 사력을 다한 것이다.

"가라, 악령들아! 모조리 죽여 버려!"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흥! 이놈이 마지막 발악을!"

"어림없다!"

"모두 수호 부적을 꺼내라!"

훈련받은 대로 진영을 취하며 착실히 대응한다.

신관들의 가호가 깃든 창칼이 악령 무리를 연신 찌르고 베어 간다.

"아, 안 돼...."

프레드는 공포에 질렸다. 기껏 부른 악령들이 차례로 소멸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아아아악!

악령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라면 진다.

이대로라면 붙잡혀 화형대로 향하게 된다.

'그럴 순 없어!'

갑자기 그가 눈을 까뒤집었다. 눈동자가 사라지고 흰자위가 안구를 점령하며 시뻘건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프레드의 발밑에서 반투명한 형체가 솟구친다.

너울거리는 창백한 유령이 검은 옷자락을 흩날리며 귀곡성을 떨친다.

꺄아아아악!

여유롭던 로소 신관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저건!'

회색빛 형체가 병사들을 휩쓸어 갔다. 그들이 들고 있던 라티엘의 수호 부적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헉!"

"수호 부적이!"

유령이 연신 병사들을 누비며 기이한 소음을 낸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요사스러운 음향과 함께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으악!"

"아아악!"

신관들은 경악했다. 신성력을 아무리 쏘아 내도 유령의 기운을 흩을 수가 없었다.

"레, 레이스(wraith)다!"

"맙소사! 저 정도 악령을 불러낼 수 있는 고위 사령술사였나?"

***

길목이 내려다보이는 산 능선의 한 언덕.

두 사람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카르나크와 바로스였다.

"하이고, 막무가내로 날뛰는구만."

경악한 신관들과 달리 카르나크는 한심해하는 표정이었다.

레이스를 부를 정도의 고위 사령술사라고? 저게 어디가?

"사령술의 사 자도 모르는 놈이잖아."

제대로 된 사령술사라면 정확한 언령과 술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레이스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저건 그냥 어둠의 힘을 마구 때려 부어 간신히 하나 소환한 게 전부다.

"하긴, 이래서 사령술이 쉽게 힘을 얻을 수 있긴 하지."

마법사라면 정확한 주문과 운용 없이는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냥 마력만 때려 붓는다?

기운만 빠지고 끝이다.

마법이 발동되거나 하는 일 따위 절대 없다. 지식과 지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령술은 다르다.

무식하게 사령력 퍼부으며 악만 써 대도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온다. 효율이 너무 나빠서 그렇지.

게다가 소환된 레이스 자체는 크게 다를 게 없다.

무식한 놈이 무식하게 힘 펑펑 써서 비효율적으로 소환하건, 강력한 사령술사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극히 효율적으로 소환하건 부리는 악령 자체는 같으니까.

'즉, 사령력만 치면 지금의 나보다는 높다는 건가?'

옆에서 바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도련님? 저쪽이 우리보다 먼저 발견해 버렸는데."

"그러게. 너무 유능한 안내인들을 붙였나?"

원래는 몰래 움직여 라티엘 교단보다 먼저 저 사령술사를 확보할 셈이었다.

그런데 빌려준 제스트라드의 병사들이 의외로 뛰어나, 제대로 함정을 파고 사령술사를 유인해 버렸다.

"저대로 붙잡히면 곤란한 거 아니에요?"

"곤란할 것까진 없고."

저 사령술사가 교단에 사로잡히면?

영주의 권한을 이용해 잠시 심문할 기회를 노리면 된다.

저 사령술사가 저 자리에서 죽어 버리면?

강령술을 이용해 죽은 영혼을 불러서 심문하면 된다.

상황이 꼬여도 어떻게든 대처할 방법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제일 쉬운 건, 직접 저자를 확보해 안전한 곳에서 느긋하게 심문하는 것일 터.

잠시 후 바로스가 눈을 빛냈다.

"어라? 도망친다. 역시 저 수준이면 레이스 따위로도 먹히나 보네."

저 멀리, 레이스를 날뛰게 한 뒤 길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프레드의 모습이 보였다.

"일이 편해지는군."

카르나크가 턱짓을 했다.

"우리도 움직이자."

#18화. 5. 종말의 어둠 (2)

프레드는 어두운 수풀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중이었다.

'산길은 피해야 해.'

아무리 멍청한 그라도 몇 번이나 걸리고 나니 알게 되었다. 길을 따라가면 결국 추격대에 따라잡히고 만다는 사실을.

현명한 행동이라 할 순 없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벗어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행위다. 특히나 악령을 다룰 줄만 알 뿐 신체 능력이 일반인이나 다름없다면 더더욱.

그렇다고 어리석다 할 수도 없었다.

길 따라가면 어차피 걸리는데? 지금의 그에겐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험한 숲을 헤치며 간신히 발 디딜 만한 장소를 찾아 계속 움직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령을 이용하면 앞을 가로막는 수풀 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파괴하라!"

악령이 솟아올라 눈앞의 수풀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그렇게 길을 만든 뒤 프레드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여기만 벗어나면....'

계속된 체력과 사령력 소모로 육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정신조차 몽롱하다.

마치 좀비처럼,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만... 여기만 벗어나면 돼...."

***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숲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이쪽으로 도망쳤군."

프레드가 도주한 경로를 정확하게 찾아, 헤매는 일 따위 없이 곧바로 쫓아간다.

그럴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쯧쯧, 도망칠 땐 함부로 사령술 쓰면 안 된다니까."

조금만 정신을 집중해도 악령이 남긴 흔적이 느껴지는 것이다.

일반인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카르나크에겐 눈부시게 빛나는 이정표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라티엘의 신관들이 우리 영지까지 쫓아왔지."

이 정도 사령력이면 성직자 입장에서도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눈부시게 빛날 정도는 아니겠지만 꽤나 확실한 흔적 정도는 된다.

"하긴, 그 사실도 모르고 있겠지만."

왕년의 자신도 똑같은 실수를 했으니 멍청하다고 타박하기도 애매했다.

이 일대는 전생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도망 다녔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 장소를 지금 또 다른 사령술사가 쫓겨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거 참 남 일 같지 않네."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아련한 기분이 든다거나 하는 그런 인간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저런 기분을 느낄 정도로 카르나크에게 공감 능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사령술 같은 사악한 술법을 익히지도 않았겠지.

"남 일 같지 않다 보니 어디로 도망칠지도 대충 알겠군."

인근 지리를 살피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이 방향으로 좀 더 가면 거기 나오지?"

이해한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기 말이죠?"

여기서 10여 분 정도 떨어진 개울가에 갈라진 절벽 하나가 존재한다.

갈라진 틈이 지그재그로 꺾여, 불을 피워도 빛이 새어 나가지 않으며 환기는 잘되는 기막힌 은신처였다.

카르나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추위에 떠는 도망자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소지."

당시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프레드 역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불을 피우고 온기를 느끼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리라.

그러나 함부로 불을 피울 순 없다. 한밤중의 불빛은 정말 멀리서도 보인다.

그렇다고 사령술로 검은 불꽃을 피워 몸을 덥힌다거나 하기도 힘들다.

그건 불을 피우는 대신 팔굽혀펴기를 해서 몸을 덥히자는 소리랑 똑같다. 잠시 몸은 데워지겠지만 기력은 더 크게 소모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훌륭한 은신처를 과연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을까?

"해 뜰 때까지 숨어 있겠지. 그때의 우리처럼."

"놈이 거기를 미처 발견 못 하고 지나치면요?"

"그땐 다시 추적하는 거지. 확인해 봐서 손해 볼 건 없잖아."

"하긴 그러네요."

절벽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서두르자. 재수 없게 신관들이 먼저 붙잡기 전에."

"네, 도련님."

***

비좁은 절벽 틈새에서 모닥불이 타오른다.

타닥타닥....

흔들리는 불빛 너머로 프레드는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평소 귀족이라며 오만을 떨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간다.

"아아아악!"

평소엔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던 미녀들이 무엇이든 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한다.

"사, 살려 주세요!"

고민된다.

그냥 죽일까, 범하고 죽일까?

"으헤헤헤...."

프레드는 잠결에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즐거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다시 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꿈을 부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정말 여기 있네요, 도련님."

"주위에 감시 결계도 안 쳐 놓았어? 배짱도 좋다."

흠칫 놀라며 프레드는 눈을 떴다.

'누, 누구지?'

목소리는 절벽의 틈새 저편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냥 할 줄 모르는 게 아닐까요?"

"그렇겠네. 제대로 배운 놈이 아니니."

잠이 확 달아났다.

'그새 추격당했나!'

기겁한 프레드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절벽 틈새는 뒤가 막혀 있다. 여기 갇혀 버리면 도망조차 못 치게 된다.

허겁지겁 개울가로 나오니 두 사내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는데요, 도련님?"

"사령술사라고 막 끔찍한 괴물처럼 생기란 법은 없잖아."

"도련님은 푸르딩딩한 해골바가지였는데요?"

"야! 그러는 넌 푸르딩딩한 시체 근육남이었거든?"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린 둘 다 끔찍한 괴물이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저놈이 별거 아니라는 거지. 사령술사가 멀쩡하게 생겼다는 건 그만큼 약하단 소리잖냐?"

프레드는 혼란에 빠졌다. 저들의 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놈들은 뭐냐?"

"뭐겠냐?"

카르나크는 피식 웃었다.

"너 잡으러 온 사람들이지."

하긴 그렇다. 현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그에게 볼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놈들이 감히!"

조롱당한 프레드가 분노하며 어둠을 불러냈다.

"나와라, 악령이여!"

어둠이 응집해 악령 두 개체로 화했다. 하지만 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든 탓이었다.

'젠장! 이놈들 뭐야?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검을 뽑아 들며 바로스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처리할까요?"

"그래. 나도 이참에 연습 좀 하자."

카르나크가 오른손 검지를 들어 가볍게 원을 그렸다.

"영체를 타격하는 검, 스펠 블레이드."

바로스의 칼날이 희미한 백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유령 같은 무형의 존재를 벨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이었다.

성직자만큼 강력하진 않아도 마법사 역시 비슷한 수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카르나크의 그것은 또 조금 달랐지만.

"느낌 어때? 마법 같아?"

"비슷하긴 한데 뭔가 좀 다르네요."

정확히는 스펠 블레이드와 같은 효과를 내는 혼돈마법이다. 겉보기엔 똑같지만 술식이나 마력 운용이 좀 다르다.

"오히려 성직자들의 축복 같은데요? 성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지만."

"축복 같은 거 받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

"남이 받는 건 지겹게 봤잖아요. 대충 비교는 할 수 있죠."

"그렇군. 사기를 걷어 내면 마법보다 신성 주문에 더 비슷해지나? 이건 좀 신기하네."

프레드는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여전히 저놈들의 대화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마법사였나...."

신관들이 본능적으로 사령술을 인식할 수 있듯이, 사령술사들도 본능적으로 신성력을 인식할 수 있다.

저 건방진 젊은 놈에겐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신의 개들이 아니라면...."

순간 프레드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성직자만 아니면 된다.

평범한 기사나 마법사는 이미 몇 명이나 죽여 본 적이 있다!

자신감이 돌아온 프레드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하하, 가소롭도다! 고작 두 놈이 감히 이 몸을 상대하려 하느냐?"

여전히 둘은 비웃을 뿐이었다.

"우와, 민망해라. 어디서 저런 말투를 배워 온 거야?"

"도련님 예전 말투인데요?"

"내가 예전에 저랬어?"

"엄청 비슷합니다요. 사령술 익히면 원래 저렇게 되나?"

"...닥치고 저놈이나 잡아."

시건방을 떨다 못해 진동시키고 있는 두 놈을 노려보며 프레드가 악을 썼다.

"가라, 악령들아! 모조리 죽여라!"

***

악령들이 괴성을 떨치며 좌우로 날아든다.

아아아아!

위치를 파악하며 바로스는 검을 들어 자세를 취했다.

우선 오른쪽을 먼저 공략한다.

"헛!"

짧은 호흡과 함께 찌르기, 그리고 곧바로 사선으로 베어 올린 뒤 감아 치듯이 몸통을 크게 갈라낸다!

콰앙!

폭음과 함께 뭐 해 보지도 못하고 악령 하나가 그대로 소멸되었다.

"쉽구만."

그러고도 바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악령을 해치운 기세를 그대로 실어 왼쪽 놈에게 돌진한다.

악령이 몸을 부풀리며 어둠으로 그를 덮으려 할 때였다.

"흥!"

코웃음을 치며 바로스가 순식간에 이단 올려 베기를 시전했다.

2개의 초승달이 빛을 발하며 순식간에 악령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레번 스트라우스의 절기, 오버 킬이었다.

바로스가 양손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도련님 연습시키다 내가 먼저 손에 익어 버렸네."

놀란 프레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 악령들이 이렇게 쉽게?"

긴장하며 다시금 어둠을 끌어 올린다.

"제법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지만 내 힘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거대한 암흑이 사특한 기운을 퍼트리며 개울가 전체를 뒤덮어 갔다.

"와라! 나의 종들이여!"

또다시 무수한 악령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십여 개체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 저거야? 레퍼토리가 빈약한 양반이군."

이번엔 카르나크도 전투에 합류했다.

우선 바로스가 악령 무리 사이로 뛰어들어 거침없이 찌르고 베어 간다.

"헙! 타아앗!"

그 틈에 카르나크의 마법이 이어진다.

"불이여, 응축하여 폭발하라."

화염구가 연신 악령들을 두들겨 불사르고....

"하늘의 포효가 대지로 흐르나니."

뇌전이 춤추며 어둠을 찢어발긴다.

쾅! 쾅! 콰콰쾅!

폭음이 이어지며 점점 더 악령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검을 휘두르다 말고 바로스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진짜 마법사 같습니다요, 도련님."

흡족한 듯 카르나크도 웃었다.

"그렇지? 구별 안 되지?"

프레드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져 갔다.

'가, 강한 놈들이다....'

이래서야 아무리 악령을 많이 불러낸다 한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보다 강력한 존재를 불러내야 했다.

'젠장, 그건 한 번 쓰면 후유증이 심한데!'

그렇다고 쓰지 않으면 이대로 붙잡힐 뿐.

각오를 굳힌 프레드가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좋다! 네놈들에게 진정한 죽음의 힘을 보여 주마!"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그가 두 눈을 붉게 빛냈다.

"위대한 어둠 앞에 무릎 꿇을지어다!"

"우와, 저 말투도 도련님이랑 똑같...."

"닥쳐, 바로스."

"넵!"

끔찍한 귀곡성과 함께 회색빛 악령이 출몰했다.

프레드가 부릴 수 있는 최강의 사령, 레이스였다.

꺄아아아아!

과연 레이스쯤 되니 저들도 긴장하는 듯했다.

바로스가 뒤로 물러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건 아직 제 역량으론 무립니다."

카르나크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내 마법으로도 무리야. 지금 우리 수준으론 이 정도네."

물러서는 둘을 보며 프레드가 오만하게 소리쳤다.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해도 늦었다! 가라, 악령이여!"

명에 따라 레이스가 어둠을 가르며 회색빛 형체를 길게 늘어뜨렸다.

꺄아아아아아!

귀곡성이 천지를 뒤흔든다. 가공할 음기와 사기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죽음 그 자체가 형상화된 듯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순식간에 레이스가 카르나크의 눈앞까지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야."

레이스를 노려보며 카르나크가 심드렁하게 뇌까렸다.

"꿇어."

날아드는 기세 그대로 레이스가 바닥을 기었다.

끼이이이....

마치 왕에게 부복하듯 얌전히 카르나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니, 사실 무릎은 없으니 그냥 하체 구기고 땅바닥에 깔렸다고 하는 쪽이 옳으리라.

프레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뭐야, 저게?'

#19화. 5. 종말의 어둠 (3)

프레드는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라, 악령이여!"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치고 또 외친다.

"내 명령에 따라 저놈을 죽여라!"

레이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카르나크의 발치에 납작 엎드린 채, 정말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레드를 바라보며 카르나크가 툴툴거렸다.

"왜 자꾸 악령이라고만 하는 거야? 레이스라는 엄연한 명칭이 있는데."

검을 허리춤에 차며 바로스가 대꾸했다.

"배우지 못했으면 그럴 수도 있죠."

애초에 프레드는 정식으로 사령술을 익힌 게 아니다. 그냥 한순간에 어둠의 힘을 얻고 본능적으로 휘둘렀을 뿐이다.

머릿속에 그냥 악령, 많은 악령, 더 센 악령, 이 정도 개념밖에 없는 것이다.

"레이스도 악령의 일종 맞잖아요? 틀린 말 한 건 아니지 싶은데."

"듣는 내 입장에선 엄청 오그라들거든?"

저걸 일반인 감각으로 바꿔 보자.

어느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가라, 인간이여!'

'모두 죽여라, 사람들아!'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사령술사 입장에선 딱 이런 느낌인 것이다.

카르나크가 표정을 구겼다.

"병신 짓은 저놈이 했는데 왜 보는 내가 부끄럽냐? 젠장...."

문득 프레드의 눈빛이 바뀌었다.

"저 힘은...."

마법을 사용할 때의 카르나크에겐 아무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신에서 지독한 사기와 음기가 흘러나온다.

"네놈도 사령술사였구나!"

"그걸 이제 알았나? 어지간히 둔한 놈이군."

혼돈마력으로는 사령술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카르나크에겐 혼돈마력을 정제하고 남은 사기와 탁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극도로 농축된 사령력인 셈이었다.

물론 총량 자체는 지극히 적다. 사령력만 따지면 프레드의 십분지 일도 채 안 된다.

하지만 용량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이다. 레이스 정도는 제압하기 충분할 만큼.

프레드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같은 사령술사끼리 돕고 살지는 못할망정 교단의 개가 되었단 말이냐!"

그러자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소릴 들은 듯한 반응이었다.

"지금 뭐? 사령술사끼리 돕고 살아?"

"와, 저거 진짜 최소한의 상식도 없네요?"

"저렇게 순진한 사령술사라니, 이거 신선한데."

사령술사는 죽음과 어둠을 먹고사는 존재.

이 죽음과 어둠에는 같은 사령술사의 존재도 포함된다. 아니, 오히려 엄청난 영약이나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사령술사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일 따윈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상대를 죽이고 기운을 먹어 치우거나, 아니면 강력한 금제를 걸어 노예처럼 부리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군. 저런 헛소리를 하는 사령술사라니."

"우리 땐 적어도 지식 없이 사령력만 얻는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프레드는 조심스레 눈치를 보았다.

'이놈들....'

레이스를 제압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일까?

이미 그를 다 잡은 사냥감인 것처럼 대하며 저희끼리만 떠들고 있다.

'그렇다면....'

갑자기 프레드가 등을 보이며 맹렬히 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이 떠드는 틈에 도주할 셈이었다.

"얼씨구, 도망치려고?"

카르나크는 굳이 쫓지 않았다.

왜 그가 프레드를 다 잡은 사냥감인 양 취급했을까?

"실제로 다 잡았으니까."

도주하는 프레드의 팔다리에서 갑자기 어둠이 피어올랐다. 암흑이 거대한 손아귀가 되어 그를 붙잡았다.

"커억!"

몇 발자국 뛰지도 못하고 프레드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이미 카르나크는 사령술로 상대의 사지를 은밀히 제압해 놓았던 것이다.

"내가 괜히 말이 많은 줄 알아? 앞에서 시선 끌고 뒤에서 딴짓하는 것도 사령술의 주요 수법 중 하나라고."

미스디렉션이라고, 사령술 관련 서적에 이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도련님 장단 맞춰 드리다 보니 저도 싸우면서 주절거리는 습관이 붙었잖아요. 사실 전 그럴 필요 없는데."

두 사람이 느긋하게 떠드는 동안에도 어둠은 착실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사지를 타고 올라 몸통을 장악하고 종국엔 머리까지 올라간다.

어둠이 프레드의 영혼을 움켜쥐며 뒤틀어 대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 으아아아악!"

***

소환자가 쓰러지자 레이스도 저절로 사라졌다.

기절한 프레드를 향해 카르나크가 손을 뻗었다. 정신 지배를 걸고 정보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눈을 떠라, 나의 종이여...."

눈을 까뒤집은 채 프레드가 입을 열었다.

"예, 주인님...."

이내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라 해 봐야 딱히 중요한 건 없었다.

그냥 힘 생겨서 날뛰다 딱 걸렸다. 끝.

참으로 짧게도 요약되는 인생이었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놈이었군. 이놈 통해서는 건질 게 없겠어."

바로스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자살시켜야지."

두 사람이 개입한 걸 라티엘 교단이 알면 곤란해진다.

"얘 소지품 뒤져서 칼 같은 것 좀 찾아봐."

"네."

길 떠난 이가 칼을 지니지 않는 경우는 없다. 딱히 호신용이 아니더라도 칼은 여행의 필수품이다.

프레드의 품에서 단검을 찾은 바로스가 그걸 상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좀 떨어지자. 피 튈라."

적당히 거리를 벌린 뒤 카르나크는 프레드의 정신을 조작했다.

넋이 나간 프레드가 이내 단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그었다.

푸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튀며 그대로 절명한다.

누가 봐도 '쫓길 대로 쫓기던 사령술사가 삶을 비관하며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상황'이었다.

"이제 라티엘의 추격대가 이 시체를 발견하기만 기다리면 된다."

"사령력으로 자살시킨 거, 들키진 않을까요?"

"상대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들키겠지만...."

카르나크가 프레드의 시체에 손을 뻗었다.

"이 경우엔 어차피 시체에 더러운 탁기가 왕창 남아 있잖아. 똥물에 오수 좀 끼얹었다고 티가 나겠냐?"

시체로부터 어둠이 피어올라 카르나크에게로 향했다. 검은 기운이 그의 손아귀로 맹렬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로스가 놀라 물었다.

"어라? 사령력을 챙기시게요?"

"조금만. 라티엘 교단에 대부분 남겨야 의심을 사지 않을 거 아냐?"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이렇게 더러운 사령력은 오히려 피해야 한다지 않으셨어요?"

혼돈마력은 탁기와 사기를 지우는 데 너무 많은 공이 들어간다.

프레드처럼 지독히 더러운 사령력을 흡수하느니, 그냥 처음부터 순수한 음기를 흡수하는 쪽이 더 효율적이다.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힘 키우려고 그러는 거 아냐. 파멸의 신탁에 대해 알아보려는 거지. 뭔가 건질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계속 어둠을 흡수하며 정신을 집중하던 중이었다.

"...!"

갑자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로스가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대답은 없었다.

그저 충격을 받은 듯 점점 안색이 창백해질 뿐.

"...도련님?"

한참이나 카르나크는 제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경계하며 바로스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려던 때였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

갑자기 깊은 한숨을 쉬더니 카르나크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바로스."

평소의 도련님이었다.

안심하면서도 바로스는 의아해했다.

'왜 저러시지?'

정확히 말하면 평소와는 조금 표정이 다르다.

'저건 마치....'

세상 그 누구보다도 유령에 익숙한 사람이 바로 카르나크다. 온갖 유령을 다루며 죽음과 어둠을 지배해 종국엔 사령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카르나크 상대로는 절대 이런 표현을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꼭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신데?'

***

예상했던 대로 라티엘의 추격대는 프레드의 시체를 찾았다.

일은 문제없이 흘러갔다.

정황을 살핀 라티엘의 신관들은 프레드가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쫓기던 사령술사들이 비관 자살하는 경우는 워낙 흔했기에, 어느 누구도 카르나크나 바로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제스트라드 영지에 감사를 표한 뒤 라티엘의 추격대는 교단으로 돌아갔다.

이후 카르나크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바로스조차 멀리한 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의 대부분을 연무장에 처박혀 살았다. 식사조차도 연무장으로 들고 오게 시킬 정도로 철저히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이것이었다.

-마법을 좀 더 심도 있게 익히고 싶으니 한동안 세상의 일을 멀리하겠다.

기사나 마법사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폐관 수련을 하는 것은 흔하다 못해 상식에 가깝다.

결투 재판 때에도 카르나크는 영지 바깥으로 수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바로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사령왕 시절에도 연구 중인 카르나크는 몇 달씩 홀로 처박히는 경우가 잦았다.

그저 좀 의아해할 뿐이었다.

'대체 그때 그 표정은 뭐였지?'

그렇게 일주일이 되는 날.

겨우 카르나크가 연무장에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바로스를 불렀다.

"저 찾으셨다면서요?"

"그래."

바로스가 서재로 들어서자 카르나크는 곧바로 마법을 준비했다.

혼돈마력을 이용해 서재 전체를 얇게 감싼다.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는 차음 결계였다.

'굳이 결계를? 자기 집인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바로스는 더더욱 의아해했다.

조용한 독서를 위해 특별히 방음이 잘된 서재였다. 그래서 사령술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이 정도의 조심성을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러세요? 도련님답지 않게."

카르나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기, 바로스."

"네."

"내가 그동안 연구를 좀 했거든."

"그, 종말의 어둠인가 하는 거 말이죠?"

프레드를 통해 건진 건 거의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를 유혹한 검은 기운이 바로 대륙의 일곱 교단에서 칭한 '종말의 어둠'이라는 점은.

"그래, 그 여신의 신탁.... 그, 세상의 파멸이니 종말이니 하는 그거...."

흑빛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면서 카르나크는 계속 말끝을 흐렸다.

"도련님?"

바로스가 인상을 썼다.

"왜 이렇게 말을 질질 끄시는 겁니까?"

"하아아...."

한숨을 푹 쉬더니 카르나크가 애써 웃었다.

"그거 내가 범인 맞더라."

***

사령왕 카르나크는 자신의 막대한 사령력을 이용해 시공을 뒤틀어 미래와 과거를 연결했다.

이 연결된 시공의 통로를 이용해 자신의 영혼을 과거로 보내는 것이 바로 시공 회귀 술법이다.

이 술법을 성공시키며 그는 사령왕으로서의 엄청난 권능조차 다 버린 채 이 시대로 회귀했다.

"이제까진 이렇게 된 줄 알았는데...."

의자에 축 걸터앉아 카르나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가 착각을 한 부분이 있더라고."

"착각요?"

"응."

갑자기 카르나크가 딴소리를 했다.

"바로스."

"네?"

"투기나 마나 같은 세상의 기운은 어디에 쌓인다고 생각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로스가 되물었다.

"체내에 쌓이는 거 아닌가요?"

"그래, 정확히 말하면 육체에 쌓이지. 상식이야, 이건."

기사의 투기나 마법사의 마나는 육체에 쌓인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력한 기사나 마법사라도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기진 못한다.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신성한 기운은 체내에 쌓이고, 영혼은 육체와 동조하며 그 기운을 다스린다.

"사령력 역시 이렇게 체내에 쌓이지."

카르나크가 살짝 검은 불꽃을 피웠다가 바로 껐다.

혼돈마력을 이용해 더러운 기운을 지운 뒤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만든 시공 회귀 마법은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 빠져나와 시공을 초월하는 수법이야. 방식 자체엔 문제가 없어."

문제는 카르나크의 경우가 워낙 특이했다는 점이다.

"나, 아스트라 슈나프였잖아?"

언데드 중의 언데드.

죽음의 신이나 다름없는 절대적인 권능의 정화.

"여기서 질문. 사령왕이었던 내가 어떻게 생겼었지?"

바로스는 어이없어했다.

근 100여 년을 옆에서 지켜본 심복한테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어떻게 생기긴요? 해골바가지에 시퍼런 영기 뒤집어쓴 채 유령처럼 한들한들...."

퉁명스레 대꾸하던 그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

'잠깐, 유령처럼?'

카르나크의 입가에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그래. 아스트라 슈나프였지, 나는...."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강대한 어둠의 권능으로 영기의 육체를 만들어, 운명을 초월하고 죽음을 지배한 존재.

그렇다. 영기의 육체다.

육체라 하기도 영혼이라 하기도 애매한, 혼돈의 존재인 것이다.

"난 당연히 내 사령력이 육체에 속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작 그 육체는 영혼에 속해 있었지."

그리고 카르나크의 영혼은 시공을 초월해 이 시대로 돌아왔다.

"설마...."

바로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련님의 권능도 같이 시공 회귀를 했다고요?"

#20화. 5. 종말의 어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