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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5. 종말의 어둠 (4)

카르나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 생각해 보면 단서는 있었는데."

아스트라 슈나프가 된 그의 영적 기운은 너무 방대해 빙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손가락만 들어가도 대상이 펑 터져 버릴 정도였다.

카르나크는 이 현상을 영혼이 육체와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서라 여겼다.

다른 몸으로 영혼을 옮기려 해도,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 기운을 실험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시공 회귀 마법까지 만든 것이다.

단순한 빙의로는 영혼만 깔끔하게 빼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너무나 오랜 시간 섞이고 섞여 구분할 지표 자체가 존재치 않는다.

"하지만 이 몸은 나 자신 그 자체잖아. 원래 하나였던 영혼과 육체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본질 그 자체가 지표가 되어 주니 깔끔하게 분리가 되지."

실제로 여기까진 성공이었다.

그의 영혼은 모든 사령력을 버리고 현재의 육신에 문제없이 안착해 완벽한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남은 아스트라 슈나프의 영역은 그냥 그 시간대에 버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영적 기운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가 너무 거대해도 빙의에 실패하긴 마찬가지란 걸 미처 생각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만약 카르나크의 사령력이 영혼에 귀속된 채 함께 이 시대로 회귀했다면?

그렇다 해도 여전히 그의 영혼은 사령력과 분리되어 이 시대의 육체로 깃들게 된다. 결과 자체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경우엔 순서가 바뀌어 버려."

분리 후 시공 회귀가 아니라 시공 회귀 후 분리로.

아스트라 슈나프의 영역, 사령왕의 권능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저게 지금 종말의 어둠이 되어 온 세상에 퍼졌다, 대충 이렇게 된 것 같거든?"

바로스는 눈을 껌벅거렸다.

설명이 좀 어렵긴 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 옆에서 보필하다 보니 상황은 이해가 갔다.

그럼에도 납득하긴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내다 버린 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하게 생겼다는 겁니까?"

"아마도?"

"아니, 도련님이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일곱 교단이 담합해서 세상 멸망한다고 벌벌 떨 정도는 아니지 않...."

말하다 말고 바로스는 입을 닫았다.

그 7여신교를 몰락시킨 게 바로 카르나크였다.

"에이, 그래도 세상에 강력한 제국과 왕국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제국도 왕국도 우리가 싹 다 멸망시켰잖아."

"용족이랑 요정족도 있고... 4대 무왕과 3인의 대마법사도...."

"죄다 죽여서 언데드로 만들어 부하로 부리고 다녔잖아."

그뿐인가?

종국엔 일곱 여신마저 세계에 영향력을 잃었다.

사령왕의 힘이 온 세상을 뒤덮는 바람에 여신의 가호가 닿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이 세계를 파멸시킨 거 맞네요?"

카르나크에게나 정복이지, 산 사람들 입장에선 종말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제 저걸 당하는 쪽이 되었다고?

"잠깐만요."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며 바로스가 반론을 제기했다.

"그땐 도련님이 그 힘을 다룰 수 있으니까 세계 정복이 가능한 거였잖아요?"

지금은 그냥 권능만 남아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다.

"하나로 모이지도 않은 힘인데 설마 그조차도 감당 못 하겠어요?"

설령 누군가가 저 권능의 일부를 모아 또 다른 사령왕이 된다 하더라도, 진짜 카르나크에 비하면 분명 약할 것이다.

"응, 그래. 네 말이 옳아."

카르나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바로스."

"네."

"내가 세계 정복한 게 언제였지? 정확히는 아스트라 슈나프가 되고 몇 년 만에 세계를 정복했지?"

"에, 용황제 쓰러뜨린 게 마지막 전투였으니까...."

대충 계산한 바로스가 말을 이었다.

"아스트라 슈나프 되신 다음 3년 정도 후네요."

"그치?"

카르나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우리가 시공 회귀했더라?"

"대충 70년쯤 지나고... 켁!"

그제야 바로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카르나크가 세계를 정복하고 사령왕이 된 게 그의 나이 50대 초반쯤이다.

그리고 120살쯤 됐을 때 이 시대로 왔다.

온 세상을 말아먹었을 때보다 무려 70년 가까이 더 강해진 후란 소리다!

"세계 정복 당시의 나보다, 회귀 직전의 내가 최소 5~6배는 더 강할걸."

바로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상상해 보니 정말 끔찍하도록 강대한 힘이었다.

세계를 지키는 일곱 여신들이 종말이 도래했다며 일제히 신탁을 내리기에 충분할 만큼.

사색이 된 바로스가 다급히 질문을 이었다.

"도련님이 범인이 아닐 가능성은 정말 없어요?"

저 끔찍한(?) 사령왕 시절의 카르나크를 상대할 바엔, 차라리 정체불명의 이계 마신이 쳐들어오는 게 백배 나은 것이다.

"맞다! 시간대가 안 맞는다 하셨잖아요?"

따져 보니 좀 이상하다.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시공 회귀를 한 건 1년 전쯤이었다.

그런데 저 종말의 어둠은 그보다 이전부터 이미 세계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교단의 발표를 보면 아직 다 뿌려지지도 않았다.

시간 차를 두고 꾸준히 시공을 넘어 지속적으로 이 세계를 침탈하는 중이다.

"앞뒤가 안 맞잖아요! 애초에 도련님이 범인일 수가 없는데요?"

"나도 그건 이유를 모르겠어."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했다.

"프레드란 놈에게서 입수한 종말의 어둠 있잖아? 그거 속성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나랑 일치해."

란돌프 건이나 프레드 건에서 카르나크가 전혀 의심받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카르나크가 아무리 본인의 사기를 듬뿍 남겨도 교단에서 볼 때는 종말의 어둠일 뿐이다.

그러니 그에게 의심이 갈 리 없다. 이미 대륙 곳곳에 종말의 어둠이 뿌려지고 있었으니까.

"틀림없어. 이거 내 힘 맞아.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를 몰라서 그렇지."

"도련님의 힘이라면... 지금이라도 도로 거두진 못하고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종복을 노려보며 카르나크가 핀잔을 던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느 날 부자가 금화 주머니를 들고 와 광장에 확 뿌려 버린다.

그리고 외친다.

'금화여, 내게로 돌아오라!'

흩어진 금화들이 저절로 날아와 부자의 주머니로 돌아올까,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싹 다 주워서 횡재했다며 집으로 들고 갈까?

내다 버린 시점에서 이미 카르나크는 지배력을 잃은 것이다.

"더 이상 신경 끄고 살 수 없어졌다, 이젠."

예전처럼 손 놓고 무시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

미친놈이 힘을 키워도 너무 키웠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카르나크 자신이다.

인류의 힘을, 세계의 저력을 믿고 신경 끄라고? 본인이 그 인류도 세계도 조진 장본인인데?

"못 믿어! 저걸 어떻게 믿어!"

발작하는 카르나크를 달래며 바로스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쩝니까?"

진정한 카르나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정보를 모아야지."

현재로선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계획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나야 세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 그놈한테서 사령력을 흡수했던 것처럼요?"

"응. 그런 식으로 내게서 분리된 사령력의 상태를 확인해야겠어. 이번엔 양이 너무 적어서 정보라 할 것도 없었지만."

프레드에게서 흡수한 종말의 어둠은 너무도 미약했다.

원래 카르나크의 권능과 비교하면 진짜 부스러기, 대양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낸 수준에 불과하니 정보도 거의 없다.

"좀 더 많은 자료를 모을 필요가 있다."

"말인즉슨, 이제부터 종말의 어둠을 수집하러 돌아다녀야 한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영지에서 속 편하게 지내는 생활은 당분간 안녕이라는 소리도 되고요?"

"...그렇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답게 살면서 인생 즐길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이들에겐 실로 가혹한 운명이었다.

카르나크가 한탄을 터트렸다.

"아, 이번엔 진짜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세상이 나를 내버려 두질 않는구나!"

바로스가 핀잔을 던졌다.

"세상이 뭔 상관이에요? 도련님이 자초하신 건데."

"그, 그렇긴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건 생각도 않고 세상 탓부터 하는 거 보니 역시 우리 도련님이십니다."

"아, 닥쳐, 좀."

***

다음 날 아침, 카르나크는 가문의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석 달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다."

이미 그럴듯한 이유는 만들어 놓았다.

달라스의 마법서를 통해 열심히 마법 수행을 쌓고 있지만 역시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고위 마법사를 초빙하거나, 아니면 직접 마법사 길드를 찾아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의 수준에서 도움이 될 정도의 고위 마법사 초빙에는 많은 돈이 든다.

아무리 영지가 풍족해졌다곤 하지만 영주 된 몸으로 어찌 허투루 돈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니 직접 수도로 가서 마법의 지식과 지혜를 쌓고 오겠다. 호위는 바로스 1명이면 충분하다."

노집사는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현재 제스트라드 영지는 별일 없이 무난히 돌아가고 있었다. 영주가 석 달쯤 자리 비운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을 터였다.

그리고 카르나크는 이전, 결투 재판 때도 몇 달씩 자리를 비운 적이 있는 것이다. 이미 해 본 일이니 또 저지른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저 당시엔 다들 반대했다.

자리를 비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투 능력도 없는 카르나크가 일개 시종 하나만 데리고 영지를 벗어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카르나크가 끝끝내 우겨서 어쩔 수 없이 수락하긴 했지만.

반면 지금은?

카르나크도 마법사로서 힘을 키웠고 바로스는 제스트라드 최강의 기사가 되었으니 크게 곤란할 것이 없다.

게다가 노집사가 응원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세상을 보며 견식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지요! 정말 좋은 경험이 되실 겁니다!"

아무래도 그는 카르나크가 젊은이다운 호기심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경험은 이미 지겹게 했는데....'

어쨌든 오해해 주는 건 다행이다.

다른 가신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영지는 저희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영주님께서 더욱 성장해 돌아오시길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모두를 대표해 노집사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부디 일곱 여신의 가호가 영주님께 깃들기를."

카르나크 입장에선 차마 웃지 못할 소리였다.

'그 여신들, 죄다 작당해서 나 조지라고 신탁 내렸거든? 잘도 가호해 주겠다.'

자리 비울 동안의 영지 관리에 대해 인수인계를 마친 뒤 그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서니 바로스가 열심히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등 따시고 배부른 집 떠나 도로 세상 떠돌 생각을 하니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어휴, 이제 와서 또 이 보따리를 싸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그때보단 상황이 좋잖아."

그를 달래며 카르나크가 돈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우리 이제 돈 많아. 무려 금화도 있다, 이제?"

바로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그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진미를 먹을 수 있는 겁니까? 잠도 최고급 여관에서 푹 잘 수 있는 거고?"

"당연하지, 추적자도 없는데?"

왕년 세상을 떠돌 땐 항상 숨어 다니며 뒷골목만 전전해야 했다.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돈이 많아 봤자 떳떳하게 정체를 드러낼 팔자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7여신교의 추적도 경계해야 했으니, 잠 한번 푹 자지 못한 시절이었다.

"쫓기던 시절만 생각해 오만상 찌푸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다르구만요."

그냥 졸부 귀족가 도련님의 대륙 유람이라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을 듯했다.

"어차피 할 고생이면 즐겁게 하는 게 좋잖냐?"

"그건 그러네요."

완전히 짐을 싼 바로스가 배낭을 어깨에 멘 뒤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정말 수도로 갈 건 아니잖아요?"

"데라트 시티. 그 프레드란 놈이 처음 힘을 얻은 곳이니 뭔가 단서가 있을 거다."

#21화. 6. 데라트 시티

봄의 기운이 가득한 너른 들판.

죽 뻗은 곧은길을 따라 두 사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백마를 탄 흑발의 청년은 누가 봐도 귀한 집 자식이었다.

사슴 가죽과 비단을 섞어 짠 고급스러운 여행복 차림, 허리에 찬 마법의 지팡이도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귀족 출신의 마법사임이 분명했다.

그를 수행하는 갈색 말의 젊은 기사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잘 단련된 체격에 날카로운 눈빛, 여행자답게 중무장은 아니었지만 비싼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걸쳤고 토시와 각반 역시 질 좋은 강철제였다. 등에는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메고 있었는데 이 역시 상등품이었다.

젊은 기사 바로스가 문득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네요. 예전엔 돈이 있어도 일부러 허름하게 입고 다녔는데."

귀한 집 자식 카르나크가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돼. 번듯하게 정체 밝히고 다녀도 되니 얼마나 좋아?"

"돈 많은 티 내면 골치 아픈 놈들이 꼬이지 않을까 했는데 딱히 덤비는 놈들도 없고요."

"당연하지. 그것까지 감안해서 이렇게 입은 건데?"

도적을 경계해 가난한 여행자처럼 위장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도적은 돈 많은 여행자를 노리는 게 아니라 만만한 여행자를 노린다. 위험을 감수하고 거액을 노리느니 안전하게 소소한 푼돈을 챙기는 게 이득이니까.

그렇다고 너무 부잣집 공자가 유람하는 것처럼 보여도 좋지 않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덤비는 놈들이 생길 테니까.

이런 의미에서 현재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복장은 꽤나 적절한 수준이었다.

척 봐도 뒷배가 있는 귀족가의 여행자들, 그렇다고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비싸면서도 실용적인 차림을 하고 있다. 상당한 여행 경험이 있는 노련한 이들의 복장인 것이다.

바로스의 덩치와 무장 수준, 카르나크가 찬 마법 지팡이 역시 이들이 만만찮은 상대임을 대놓고 보여 준다.

"도적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괜히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지, 보통은."

보통이 아닌 도적들이 나타난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현 카르나크의 혼돈마법과 바로스의 무력만으로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다.

만약 지금 수준에서 감당 못 할 정도의 적을 만나게 된다면?

"그땐 사령술 쓰면 되고."

덕분에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이 쾌적하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길 저편을 바라보던 바로스가 물었다.

"그런데 종말의 어둠은 어떻게 찾으실 거예요? 혹시 그거 찾는 마법이 따로 있다거나 합니까?"

"연구 중이긴 한데, 당장은 없다."

"그럼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정석대로 가는 거지. 우리가 왕년에 자주 가던 곳 있잖아?"

이해했다는 듯 바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모험가 길드 신세 지는 겁니까?"

모험가 길드.

이는 원래 현상금이 붙은 수배자를 사냥하는 바운티 헌터에서 출발한 조직이었다.

수배자 사냥은 무력 못지않게 정보도 중요하다. 일단 어디 숨었는지 알아야 사로잡건 죽이건 할 것 아닌가?

바운티 헌터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힘을 합쳐 사냥감을 노리던 것이 아예 정보 취합과 인맥 연결을 전문적으로 하는 조직, 바운티 헌터 길드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정보와 인맥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며 덩치를 키우자 길드의 누군가가 생각했다.

'굳이 바운티 헌터들에게만 정보를 팔 필요가 있나?'

누군가에겐 쓰레기 같은 정보라도 누군가에겐 천금의 가치일 수 있다.

고대의 보물이나 인류 이전의 이종족들이 남긴 유적, 일명 던전을 탐사하는 트레저 헌터에게도 정보를 팔았다. 자연스레 트레저 헌터들도 길드의 일원이 되었다.

마물이나 마수를 퇴치하는 마물 헌터 역시 좋은 정보 구매자였다. 이들도 길드의 일원이 되었다.

이쯤 되니 더 이상 바운티 헌터들만의 조직이 아니었다. 명칭이 헌터 길드로 바뀌었다.

헌터 길드는 점점 세력을 넓혀 대륙 전역으로 퍼졌다. 동시에 그 성격도 점점 바뀌었다.

뭔가를 '사냥'하는 이들보다 그냥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이들이 더 많아진 것이다.

의뢰 형태 역시 훨씬 다양해졌다.

돈 받고 각 지방 귀족들의 영지전에 뛰어드는 용병 업무.

상단이나 여행자를 지키는 호위 업무.

심지어 자질구레한 심부름 등을 대신해 주는 전령 업무나 떼먹힌 돈을 대신 받아 주는 등의 사소한 문제 해결까지도 담당하게 되었다.

더 이상 헌터조차 아니게 되었으니 이름을 또 바꿀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돈 되는 일이면 다 하는 비정규직 용역 인력'이라고 하면 너무 길고 멋도 없다.

그래서 선택된 칭호가 바로 '모험가'였다.

지금이야 개나 소나 모험가라 불리다 보니 낯부끄러운 칭호가 됐지만 당시만 해도 꽤나 이미지가 좋은 단어였으니까.

온갖 정보가 모이는 모험가 길드는 한창 고대의 사령술 지식을 찾아 헤매던 카르나크에게 실로 유용한 곳이었다. 그 역시 길드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만큼 쓰레기 정보도 많아서 잘 걸러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지."

바로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립네요. 왕년에 신세 톡톡히 졌었는데."

도망자 신세이던 두 사람이 가장 흔하게 자처한 신분이 바로 모험가였다.

떠돌아다니는 모험가는 신분 세탁이 쉽다. 듣도 보도 못한 다른 왕국의 다른 영지 출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카르나크가 바로스를 돌아보며 핀잔을 던졌다.

"그 시절이 그립냐? 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직업 특성상, 아무래도 모험가였던 경우보단 수배자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어제의 친구가 내 목 따겠다고 두 눈 벌게져서 쫓아오는 상황은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지."

"죄다 죽여서 좀비 만드셨으면서 뭘 새삼스레 친구 타령입니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너머로 도시가 보였다.

유스틸 왕국 북부 최대의 교역 도시, 데라트 시티였다.

"과연 저곳에 우리가 찾는 사령술사가 있을까요?"

바로스의 질문에 카르나크가 차분히 대꾸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지. 사령술사란 게 그렇게 흔할 리가 없잖아."

"뭐, 나쁘지 않은 이야기구만요."

바로스는 히죽 웃었다.

사실 인내심까지 들먹일 일은 아니었다.

"고급 여관에서 질 좋은 술과 요리를 먹으면서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죠!"

***

데라트 시티에 도착하자마자 카르나크는 우선적으로 모험가 길드부터 찾았다.

전생의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정체를 감추고 길드에 등록해 모험가로 활동하곤 했다.

신분을 숨기고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

그 와중에 몰래 사령술 관련 정보도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이번엔 굳이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지."

지금은 제스트라드의 영주, 카르나크 남작이라는 떳떳한 신분이 있다.

종말의 어둠 관련 사건을 조사하는 것 역시 딱히 범죄가 아니다.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종말의 어둠 관련 정보를 수집해 달라는 의뢰를 맡겼다.

핑계 역시 그럴듯하게 댔다.

-우리 영지에 종말의 어둠과 관련된 사령술사가 나타났다. 다행히 라티엘 교단이 그를 처치했으나 언제 또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 수상쩍어 보이지도 않으리라.

그런데 알고 보니 굳이 핑계까지 댈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다른 귀족들도 모험가 길드를 통해 파멸의 신탁과 관련된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영지에서 언제 사령술사가 창궐할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는 것은 좋은 영주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모험가 길드가 보기엔 카르나크 역시 흔한 고객 중 1명일 뿐이었다.

"데라트 시티 모험가 길드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르나크 남작님! 최신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데라트 시티에서 머무른 지 1주일째.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최상급 여관에 짐을 푼 뒤 신나게 먹고 마셨다.

구리 광산 덕분에 돈이 많았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가장 비싼 방에 묵고 최고급 요리를 시켜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실로 한량 그 자체였다.

그래도 다른 졸부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윤락가에서 여인을 안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딱히 이들이 성적으로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둘 다 간신히 인간의 육체로 돌아온 처지다. 게다가 한창때의 젊은 몸이 아닌가? 성욕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도덕이나 윤리에 신경 쓰는 놈들도 아니니, 실제로 사창가를 가긴 갔다.

그래, 가긴 갔는데....

"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창녀들을 본 카르나크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사령술사인 탓이었다.

좀 강력하다 싶은 사령술사에게 붙은 이명은 보통 이런 식이다.

죽음의 군주, 어둠의 군주, 역병의 군주 등등.

사령술사는 병마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성직자와 달리 치료가 아니라 감염의 스페셜리스트지만.

즉, 카르나크의 눈에는 윤락가 여인들의 성병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건강 때문에 간식도 자제해 가면서 먹는 인간들이 어찌 함부로 몸을 굴릴 수 있을까?

"역시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해서 착실히 살아야겠다. 그게 사람답게 사는 거겠지?"

"결혼하실 생각은 있나 보네요?"

"당연하지. 나 이제는 영주인데?"

한 가문의 가주라면 후계자를 남기는 것도 중요한 의무다.

"결혼은 당연히 해야지. 이왕이면 마음에 드는 여자랑."

정략결혼으로 얼굴도 못 본 여자랑 혼인할 생각은 없다. 현 제스트라드 남작가가 그 정도로 아쉬운 처지는 아니다.

"그러는 바로스, 넌? 마음에 드는 여자 혹시 없었냐?"

"실은 생각 중이던 애가 하나 있긴 했습니다."

최근 저택 하녀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워낙 의미심장해 그 역시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 왜 안 꼬셨는데?"

"막 꼬시려고 하던 차에 어떤 미친놈이 세상에 종말을 뿌려 댔거든요? 덕분에 여기서 이러고 있습죠."

"미, 미안하다...."

***

하여튼 놀기는 참 잘 놀았다.

문제는 본래 목적 쪽이었지만.

"1주일이나 지났는데 영 소득이 없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럴 줄은 미처 몰랐는데."

종말의 어둠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여신이 직접 신탁을 내리고 일곱 교단이 공표했다.

세상에 파멸이 닥치니 모두 어둠에 대비하라고.

이러면 일반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야산에서 산적이 날뛰어도 어둠에 물든 탓, 숲에서 마수가 창궐해도 어둠에 물든 탓, 사기당해 돈 떼어먹혀도 사기꾼이 어둠에 물든 탓.

앞집 개가 뒷집 닭을 물고 가도 개가 어둠에 물든 탓이라며 떠들어 대는 판국이었다.

세상 모든 나쁜 일은 죄다 종말의 어둠 탓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에휴, 이래서 일곱 교단이 그동안 신탁을 숨긴 거구나."

카르나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온 세상에 별의별 사령술 관련 사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당연히 진짜는 거의 없었고.

"프레드 그놈은 대체 얼마나 대놓고 사고를 쳤기에 그렇게 쫓긴 걸까요?"

"했던 짓 보니까 안 걸리는 게 신기한 수준이긴 하더라."

데라트 시티까지 와서 안 사실인데, 라티엘 교단도 처음부터 프레드를 쫓은 건 아니었다.

사건 초반엔 모험가 길드를 통해 수색 의뢰가 들어갔다.

그 와중에 몇몇 모험가들이 희생을 당했고, 수상쩍게 여긴 라티엘 교단 신관 하나가 사건을 쫓다가 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교단이 병력을 대거 투입한 것이다.

워낙 엉터리 정보들이 많다 보니 일곱 교단도 모든 일에 뛰어들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확실해진 후에야 개입한다.

"그 전에 먼저 사건을 가로채야 해."

밤거리를 걸으며 카르나크가 기원하듯 말했다.

"내일은 뭔가 쓸 만한 정보가 있으면 좋겠는데...."

#22화. 6. 데라트 시티 (2)

데라트 시티에 머문 지 열흘째.

오늘도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여관을 나서자마자 모험가 길드부터 들렀다.

새로운 정보를 확인한 뒤 동네 맛집 탐방을 나서는 것이 요즘 이들의 일과였다.

"어서 오세요, 카르나크 남작님."

1층 로비에서 10대 소년이 싹싹한 태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접수원으로 일하는 견습 길드원, 한스였다.

"의뢰를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래, 쓸 만한 내용이 있나?"

"아쉽게도 오늘도 그다지...."

종이 뭉치를 내밀며 한스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린 그가 보기에도 길드의 정보들이 쓰레기임을 알 수 있었던 탓이다.

"상관없다. 나도 큰 기대는 안 하니까."

태연하게 대꾸하며 카르나크는 서류를 받아 훑었다.

역시나 오늘도 건질 것은 없었다.

옆에서 훔쳐보던 바로스가 인상을 썼다.

"아니, 술 먹은 남편에게 두들겨 맞던 아내가 가출한 걸 종말의 어둠 탓으로 돌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저 남편 놈은 평소엔 아무리 맞아도 얌전히 있던 아내가 갑자기 집을 나간 걸 보면 어둠에 물든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정말 어둠의 힘을 얻었으면 가출을 했겠어요? 당장 남편 놈부터 찢어 죽였겠지."

"그러니 이것도 엉터리 정보란 소리지."

한스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종말의 어둠 관련 정보는 아무리 사소해도 전부 수집하라 하셔서 그런 겁니다만... 앞으로는 좀 거를까요?"

"아니다. 혹시 모르니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해 주게."

사령술의 극한에 다다른 카르나크는 최고위 신관들조차도 알아보지 못하는 희미한 어둠의 흔적도 파악할 수 있다.

겉보기엔 쓰레기 정보라도 남들은 찾지 못하는 의심스러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런 사소한 단서조차도 안 보여서 문제지만.

"오늘도 꽝인 것 같군."

실망한 카르나크를 바로스가 달랬다.

"이번엔 세랄 거리로 가 보죠? 그 근처에 바게트를 기막히게 굽는 빵집이 있다던데."

"가자. 벌써 침 나오네."

새로운 미식에 대한 기대로 두 사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그렇게 식탐에 물든 주종이 나란히 길드를 나서려 할 때였다.

로비 건너편 홀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 믿지 못한단 말이오? 정말로 사악한 사령술사가 나타났다니까!"

바로스와 카르나크가 황당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사령술사라는데요?"

"말도 안 돼. 이렇게 타이밍 좋게?"

***

소리를 지른 이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농부였다.

데라트 시티에서 하루 정도 거리에 위치한 겔파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라 했다.

"그러니까 마을에 사령술사가 나타나 그걸 알리러 여기까지 왔다 이건가요?"

접수원 한스의 질문에 농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아무도 내 말을 믿어 주질 않더라고!"

소란을 피운 탓에 1층 홀엔 접수원 말고 다른 모험가들도 모여 있었다. 모험가들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그렇지? 듣자 하니 신전 쪽은 이미 다녀온 것 같고."

종말의 어둠 사건은 7여신교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다. 보통은 일곱 교단 중 한 곳을 찾아가면 대응 인원을 파견하기 마련이다.

어디까지나 진짜 종말의 어둠이 관련된 사건이면 말이지만.

"교단에서는 믿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다니까!"

한스의 질문에 억울한 듯 농부가 소리를 질렀다.

모험가 중 1명이 그를 달랬다.

"자, 자!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지. 어찌 된 일이오?"

농부가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 겔파 마을에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나타났다. 마을 숲에 위치한 귀족가의 버려진 별장에 자리를 잡은 그는 기이한 수법으로 마을 처녀들을 모조리 홀리고 다녀 젊은이들의 눈총을 받았다.

"결혼을 약속했던 에밀리조차도 놈에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그래서라뇨?"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던 모험가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게 전부?"

뭐가 더 필요하냐며 농부가 언성을 높였다.

"에밀리는 성실하고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에게 홀딱 빠지는 그런 가벼운 여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심 점찍어 둔 여자가 엉뚱한 놈에게 눈이 돌아갔다, 틀림없이 어둠의 힘에 홀린 거다, 뭐 이런 소리인 것 같았다.

요즘 세상엔 참 흔한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모험가가 질문을 이었다.

"그자의 외모가 어떤가?"

이를 득득 갈며 농부가 대꾸했다.

"기생오라비 뺨치게 잘생긴 놈입니다."

"나이는?"

"20대의 젊은 청년입니다."

"혹시 마을 처녀들을 홀려서 돈을 뜯어내거나 하나?"

"아니요, 어디서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놈입니다."

듣고 있던 모험가들은 어이없어했다.

"그러니까...."

"젊은 놈이 얼굴도 잘생겼는데 돈까지 많아서 여자들을 후리고 다닌다는 소리지?"

"그게 어둠의 힘씩이나 필요한 일인가?"

뒤에서 듣고 있던 바로스가 슬쩍 나섰다.

"그럼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자를 그냥 내버려 뒀습니까? 고작 1명인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는 없잖습니까?"

농부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놈에게 홀려 있습니다...."

"그자가 무슨 짓을 했는데요?"

"그, 그게...."

이어진 바로스의 의문에 농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을 잔치를 열거나,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주거나 하는 식으로...."

젊고 돈 많고 잘생긴 놈이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하단 소리였다.

한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저희 길드 입장에선 귀하의 신고를 접수할 수가 없군요. 아니면 개인적으로 따로 의뢰를 하시겠습니까?"

"그, 그럴 돈은...."

농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험가를 고용할 정도의 거액이 일개 농부에게 있을 리 없었다.

사령술 사건은 7여신교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니 그것만 믿고 데라트 시티까지 온 모양이었다.

결국 농부는 상심한 채 길드 건물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모험가들이 비웃음을 던졌다.

"그냥 못난 놈이 잘난 놈 시기하는 것뿐이잖아?"

"쯧쯧."

"하여튼 요즘 이런 일이 워낙 흔해서, 원."

마찬가지로 비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길드를 떠났다.

그렇게 막 골목 하나를 돌았을 때였다.

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수상하죠, 도련님?"

"수상하지."

"저거 딱 도련님이 할 법한 짓이잖습니까?"

"실제로 비슷한 짓 하기도 했고."

얼핏 저 이야기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분명 젊고 잘생기고 돈 많고 친절한 남자에게 마을 처녀들이 꼬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저 정도로 능력 있는 사내가 뭐 하러 일개 시골 마을 처녀들을 유혹한단 말인가?

"진짜 능력 있는 놈이면 귀족 영애를 꼬시지, 굳이 수수한 시골 처녀를 노리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나크가 중얼거렸다.

"진짜 바람둥이 사기꾼에게 시골 처녀는 별 가치가 없지."

하지만 순진한 시골 처녀가 큰 가치를 지니는 영역도 있다. 정확히는 처녀의 '영혼'이.

"흑마술 계열일까요?"

"내가 봐도 그래."

물론 세상은 넓고 괴팍한 놈들은 많으니 진짜 시골 처녀 노리는 놈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겔파 마을이라고 했지? 가 보자."

"다들 비웃고 넘어간 덕분에 골치 아픈 모험가들이 꼬일 일도 없겠고, 부담 없이 확인할 수 있겠네요."

***

하루 거리라고는 했지만, 이는 두 발로 천천히 걷는 농부 입장이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반나절 만에 겔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인근 언덕에 올라 두 사람은 상황을 살폈다.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다. 얼핏 보기엔 전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나크는 흐뭇해했다.

"제대로 찾아왔네."

바로스가 물었다.

"뭔가 보입니까?"

"너도 보여 줄게."

카르나크가 혼돈마력을 일으켜 바로스의 시야를 살짝 덮었다. 그러자 마을의 경치 아래로 희미한 검은 선들이 연결된 것이 보였다.

"오, 결계군요."

마을 지하를 통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힘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워낙 은밀하게 감춰져 있어 상당한 고위 성직자라 할지라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솜씨가 괜찮아. 이 정도면 정석대로 익힌 것 같은데?"

얼뜨기만 보다가 정상적인(?) 사령술을 보니 반갑기까지 한 카르나크였다.

계속 마을을 살피며 바로스가 질문을 이었다.

"종말의 어둠인 건 맞고요?"

"그건 잡아 봐야 알지."

어둠의 속성은 근원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프레드 사건 때도 직접 어둠을 뽑아 흡수하기 전까진 속성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냥 일반적인 사령술사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그럴지도."

어찌 되었건 확인해 봐야 한다. 그리고 확인은 전혀 어렵지 않다.

보는 눈도 없고, 눈치 봐야 할 동료도 없는데?

이대로 그냥 놈이 머무른다는 귀족가의 별장으로 달려가 처리해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결계 펼친 상태를 보니 제법 수준은 있는 놈 같지만, 그래 봤자지."

자신만만하게 카르나크가 고삐를 당기려 할 때였다.

"자, 후딱 가서 해치워 버릴...."

갑자기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언덕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심지어 그 기척은 이들을 향해 곧장 달려오고 있었다.

"어라? 누가 오는데요?"

단순히 인기척만 느낀 바로스와 달리, 카르나크는 꽤나 놀랐다.

'고위 신관이잖아?'

사령술사와 성직자는 서로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 다가오는 이는 상당한 수준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이 정도 위계의 성직자가?'

당황한 그의 눈에 한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산악의 문양을 그려 넣은 녹색의 법의 차림에 떡갈나무 지팡이를 든 20대 청년이었다.

달려오며 청년이 두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다.

"시, 실례합니다! 여러분!"

***

달려온 청년 신관이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대뜸 말을 쏟아 냈다.

"이 마을의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오신 모험가시죠? 마침 잘되었습니다! 저도 이곳을 확인하려던 참입니다!"

이쪽이 뭐라 하기도 전에 단언해 버리는 모습이 좀 어이가 없다.

바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뉘신지?"

그제야 아차 싶은지 신관이 말을 골랐다.

"이런, 제 소개가 아직이었군요. 저는 하토바를 섬기는 알리우스라고 합니다."

"대지의 교단 신관님이셨군요."

알은척을 하며 바로스도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제스트라드 가문의 기사, 바로스. 이분은 저희 영주님이신 카르나크 남작이십니다."

남작이란 소리에 알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모험가가 아니셨습니까?"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카르나크가 되물었다.

"왜 신관님께선 저희를 모험가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야 차림새만 봐도 상당한 실력자임이 틀림없어 보여서...."

그제야 두 사람은 상황을 알아챘다.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누가 봐도 실력자처럼 보이도록 옷차림을 하고 다녔더니 그걸 보고 착각한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알리우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두 분은 이 마을을 조사하러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바로스가 카르나크에게 마법 전언을 건넸다.

[어쩌죠?]

언제까지고 눈짓만으로 의사를 교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카르나크는 혼돈마법을 이용해 바로스와 은밀한 전언 체계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이 신관 놈, 어차피 이 마을에 꽂혀서 계속 파 볼 것 같은데.]

일단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겠다.

카르나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일부러 조사를 하러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죠."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다며 알리우스가 반색을 했다.

"그렇다면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여신을 위한 성무입니다!"

용건 뻔히 알면서도 카르나크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성무라 하시면?"

알리우스가 긴장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에 사악한 사령술사가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3화. 7. 모범적인 사령술사

알리우스는 데라트 시티에 위치한 대지의 교단 유스틸 북구 교구 소속 신관이었다.

"부끄럽게도 1급 심문관의 위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급 심문관이시라고요?"

"예, 심문관이라 함은...."

"아니, 심문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대대로 7여신교는 사령술의 흔적이 발견되었을 때마다 노련한 성직자를 파견해 진위를 살피곤 했다. 이때 내리는 직위가 바로 '심문관'이었다.

임명된 신관이 사건의 진위를 파악한 뒤 여신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다시 기존의 직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원래는 임시직이다.

"심문관에 위계가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위계가 있다는 건 정식 직위라는 소리가 되는데, 심문관이 항상 필요할 정도로 사령술사가 사방에 널려 있다면 사람 살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알리우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세상이 와 버렸다는 것이 문제지요."

종말의 어둠 관련 사건이 너무 많아져 예전처럼 임시로 파견하기엔 인력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요새는 아예 전문 심문관을 따로 양성한다고 했다.

"전 막 1급의 위계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2급이었지요."

카르나크는 감탄을 흘렸다.

원래 신관의 위계란 건 저리 쉽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계면쩍은 듯 알리우스가 뒷머리를 긁었다.

"워낙 사건이 많습니다. 심문관으로 일하면 싫어도 경력을 쌓게 되지요."

확실히 그는 꽤나 유능한 편에 속하는 듯했다.

그 역시 카르나크와 같은 이유로 겔파 마을의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니.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내가 이런 시골 마을을 노린다는 건 역시 좀 이상하지요."

이야기를 듣던 바로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신관님 혼자 오신 겁니까? 사령술사가 정말 저 마을에 있다면 위험하실 텐데요."

당연히 교단의 병력을 대동해야 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알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현재 교단은 확실한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증거요? 심문관이 확인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닙니까?"

"예전에는 그랬습니다만...."

한숨을 내쉰 뒤 그는 힘없이 대꾸했다.

"실은 교단에선 이 역시 헛소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충분히 수상한 상황 아닙니까?"

미처 못 알아챘다면 모를까, 알리우스가 이미 허점을 짚었는데도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요새는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실은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물론 그건 사령술과 아무 상관이 없었고요."

"...젊고 돈 많고 친절하며 잘생기기까지 한 놈이 고작 시골 처녀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상황이 흔하다고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바로스의 말에 알리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문제인 겁니다."

돈이 많다는 건 대체 어느 선부터 돈이 많다는 걸까?

잘생겼다는 건 대체 어느 선부터 잘생긴 거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실 나이 하나 빼곤 숫자로 딱 떨어지는 사항들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젊다'의 기준조차도 상대적이다. 70~80살의 노인만 가득한 마을에서 50대는 젊은이 취급받는 법이지.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저 능력 좋은 남자를 '금화를 펑펑 쓰는 기생오라비 뺨치게 생긴 귀족가 공자'쯤으로 치부하고 시골 처녀 꼬드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적당히 모은 돈 좀 있고 피부가 햇볕에 덜 그을리기만 해도, 시골 기준에선 돈 많고 잘생긴 축에 낄 수 있지요."

"아, 그런 경우라면 시골 처녀 노리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예전 같으면 흔히 있을 법한 사건 사고조차도 지금은 종말의 어둠 탓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워낙 가짜 정보가 범람해서 어지간히 확실하지 않은 이상 교단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인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저 역시 이 마을에 사령술사가 있다고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수상한 부분을 확인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바로스가 어이없어하며 카르나크에게 마법 전언을 걸었다.

[이거, 우리도 허탕 칠 뻔한 거였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번엔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린 거였잖아?]

역시 모험가들 따윈 멍청하다고 비웃으며 자신만만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 참, 예전 생각만 하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겠군.'

하여튼 저 마을에 사령술사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 신관님께선 증거를 찾아 교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카르나크의 질문에 알리우스가 쑥스러워했다.

"실은 저 혼자서 처리할 생각이었습니다."

단순히 젊은이의 만용만은 아니었다.

그의 신성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당장 그의 접근을 느끼고 카르나크가 흠칫 놀라지 않았던가?

신성력만 보면 제스트라드 영지를 찾았던 라티엘의 신관들을 다 합쳐도 알리우스의 절반이 채 안 될 정도다.

'역시 1급의 위계. 어지간한 수준의 사령술사라면 정말로 단독으로 해치울 수도 있겠어.'

그럼에도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한 것은, 역시 동료가 있다면 신성 주문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일 터.

"두 분 모두 상당한 실력자이신 듯하니...."

사실 알리우스가 진짜 원하는 쪽은 바로스였다.

카르나크야 나이도 젊고 마법사라 그냥 보기만 해서는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스는 다르다.

거구의 잘 단련된 육체,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검과 갑옷. 저런 몸을 지니고 저런 장비를 걸친 자는 절대 약할 수 없다.

그가 진지하게 청했다.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

알리우스가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바로스가 몰래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도련님?]

[어쩌긴? 신관 앞에서 사령술을 쓸 순 없잖아. 적당히 핑계를 대서 일단 헤어진 다음 우리끼리 처리해야....]

대꾸하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카르나크가 말을 바꿨다.

[아니다. 같이 움직이자.]

[엥? 그래도 돼요?]

[마침 좋은 기회야. 이참에 확인해 볼 게 있어.]

알리우스를 돌아보며 카르나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강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저희 역시 여신의 아이들, 미약하나마 성무를 돕는 것이 의무겠지요."

기뻐하며 알리우스가 성호를 그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일곱 여신의 축복이 두 분께 깃들기를."

바로스는 여전히 찜찜해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이러다 사령술 써야 할 상황 오면요?]

[쓸 땐 쓰는 거지. 내가 사람들 몰래 사령술 쓴 게 뭐 한두 번이냐?]

[그때마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죠.]

말이 몰래지, 그냥 대놓고 사령술 쓴 다음 정신 조작으로 기억 지우는 게 왕년 카르나크의 주요 수법이었다.

[기억 지워진 사람들, 죄다 악몽 꾸면서 비실비실 앓다가 미쳐 버렸잖아요. 이번에도 그러시려고요?]

[좀 그런가?]

[그렇죠. 우리 이제 사람답게 살기로 했잖아요?]

참고로 이들이 말하는 '사람답게 산다'의 기준은 딱히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선하게 산다가 아니다.

정확히는 저렇게 살고 싶긴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른다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정한 기준은 이거였다.

-예전처럼 살지 않는다.

[저 신관은 좋은 사람입니다.]

성격이 좀 급하고 멋대로 단정 짓는 습관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선량한 인간이다.

남들 다 무시하는 상황인데도 일부러 발품을 팔아 이 마을까지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건 예전처럼 사는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야.]

동의하며 카르나크는 선한 해결 방법을 찾아 고민했다.

[가만있자, 정신에 지장을 안 주면서 기억을 지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 조작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정말 도련님은 전형적인 사령술사시네요.]

[사령술 말고 혼돈마법으로 지울 거야.]

[그런 방법도 있습니까?]

[혼돈마력을 가늘게 침처럼 늘려서 뇌의 기억 중추 일부를 태워 버리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

[왜? 내가 뭐 말 잘못했냐?]

[아니, 역시 도련님은 모범적인 사령술사구나 싶어서요.]

[사령술 안 쓴다니까! 왜 자꾸 사령술사 타령이야?]

마법 전언으로 오간 대화라, 겉으로 보기엔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문 걸로만 보일 뿐이다.

그 표정을 달리 해석했는지 알리우스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마을에 사령술사가 있다고 확인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설령 있다 해도...."

떡갈나무 지팡이를 꾹 쥔 채 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제게는 하토바의 가호가 있으니 사악한 사령술사 따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스는 알리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그 사악한 사령술사가 댁 대가리를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걸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참으로 든든하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

겔파 마을은 한산했다. 주민들 대부분 밭에 갔는지 몇몇 아낙들과 아이들만 간혹 눈에 띌 뿐이었다.

카르나크 일행을 본 주민들이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웬일로 외지인이 이 마을에 왔냐는 표정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여관 같은 건 기대할 수 없겠군요."

여관이 있을 정도로 외지인이 자주 오가는 마을이면 저런 반응일 리가 없었다.

말고삐를 쥐고 걸으며 바로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을 맡기고 짐을 풀 장소가 필요한데...."

여관이 없는 마을에서 묵을 장소를 찾으려면 촌장집이나 지역 교회로 가는 것이 여행자의 관례다.

"이 정도 마을이면 작은 교회 하나 정돈 있겠죠?"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없을걸."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알리우스가 대신 대답했다.

"이 마을에 교회가 있었으면, 그 농부가 굳이 데라트 시티까지 찾아왔겠어요?"

"그렇군요. 전 무식한 칼잡이라 거기까진 생각이 안 미쳤습니다."

두 사람의 추리에 감탄하며 바로스가 막 마을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정갈하게 지어진 작은 백색 건물이 보였다.

지붕에 푸른색의 성물을 매달고 입구에 바람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건물이었다. 바람과 하늘의 여신, 사이샤를 섬기는 교회가 틀림없었다.

바로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있는데요, 교회?"

잘난 척 추리하더니 바로 틀린 두 사람이 딴청을 피웠다.

"어, 있네?"

"...그 양반은 그럼 왜 데라트 시티까지 온 걸까요?"

피식 웃으며 바로스는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잘됐네요. 저기서 신세 좀 져야지."

교회는 워낙 작아 신관도 단둘뿐이었다. 40대 중반의 마을 교회장과 30대로 보이는 수녀였는데, 꽤나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바람의 교회에 어서 오십시오, 대지의 형제여."

말을 맡기고 짐을 푼 뒤 용건을 전했다.

사정을 들은 교회장, 그라스 신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그 친구가 거기까지 갔습니까?"

듣자 하니 이미 이곳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친 후라고 한다.

이들이 자기 말을 믿어 주질 않자 굳이 데라트 시티까지 온 것이다.

"클레오 씨는 성실하고 좋은 분입니다. 마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모두가 그를 좋아하지요. 사령술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 뒤뜰에 말을 묶고 온 줄리아 수녀도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 두어 달 전에도 다른 사제 한 분이 찾아오셨지만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두 사람 모두 저 정체불명의 능력남, 클레오에 대해 눈곱만큼도 수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먼 길을 오셨는데 허탕을 치시게 되어 아쉽네요."

알리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 직무상 허탕을 치는 쪽이 사실은 좋은 일이거든요."

"어머나, 전에 오신 분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데라트 시티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좀 늦어 교회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이들에게 손님용 작은 방을 안내한 뒤 줄리아 수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편히 쉬세요."

***

자신들만 남게 되자 카르나크가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신관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오는 도중에 마을 곳곳에서 신성 탐색을 걸어 보았습니다만, 딱히 수상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역시 헛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사령술사는 정체를 감추는 데 능하지요.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순 없습니다."

바로스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럼 좀 더 상황을 살펴봐야겠군요. 오다 보니 주민들이 모이는 술집이 있던데요."

지역 주민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면 제일 만만한 곳이 술집이다.

술 좀 들어간 인간은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하기 마련이니까.

바로스의 경우엔 입맛을 다시는 폼이, 그냥 술 먹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지만.

알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라스 신관과 줄리아 수녀의 태도를 보면 클레오란 자가 마을 주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요. 탐문을 해 봐야 뭔가가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술 못 먹게 된 바로스가 시무룩해진 사이, 카르나크가 대신 질문했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창밖을 내다보며 알리우스는 안색을 굳혔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요."

그의 시선은 마을 서쪽, 옛 귀족의 별장이 위치해 있다는 우거진 숲으로 향해 있었다.

#24화. 7. 모범적인 사령술사 (2)

카르나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사령술사를 직접 찾아가겠다고? 그래서 뭘 어쩌려고?'

정면으로 부딪쳐 봐야 상황은 뻔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사령술사세요?

-아닌데요.

-아이쿠, 오해했군요. 안녕히 계세요.

이럴 순 없지 않은가?

과연 알리우스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대놓고 심문하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심문관에겐 심문관만의 방법이 있지요."

카르나크가 눈을 빛냈다.

'호오, 내가 모르는 사령술 탐색용 신성 주문이라도 개발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인 법, 전생 때는 지금처럼 사령술사가 우후죽순으로 창궐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해가 지기 전에 바로 움직여야겠군요."

막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알리우스가 제지했다.

"완전히 밤이 된 뒤에 움직일 겁니다. 지금은 쉬시죠."

"...그래도 되는 겁니까?"

태양 빛은 어둠의 위세를 크게 약화시키는 법, 그렇기에 사령술사는 깊은 밤일수록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도 굳이 해가 완전히 저문 뒤 상대를 찾겠다고?

"밤이 깊은 쪽이 진짜 사령술사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더 쉽거든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말을 마친 알리우스가 침대로 향했다.

"그럼 전 잠시 눈을 좀 붙이겠습니다. 밤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단순히 졸려서가 아니라,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신성력을 채우려는 것이었다.

정말 사령술사와 한바탕해야 한다면 성직자로서 응당 취해야 할 태도였다.

카르나크와 바로스도 각자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장을 바라본 채 바로스가 마법 전언으로 물었다.

[실제론 어떤 상황이에요, 도련님?]

[두 사람 모두 정신이 조작되어 있더라.]

알리우스와 달리, 카르나크에겐 그라스 신관과 줄리아 수녀의 상태가 정확히 보인다.

[미간이 칙칙해. 사령술에 걸려 있단 의미지. 워낙 희미해서 알리우스 저 친구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꽤나 강한 사령술사인가 보네요. 원래 성직자는 정신 조작이 힘들지 않던가요?]

[그렇다기보단, 둘 다 워낙 신성력이 낮잖아.]

사실 성직자라 하기도 애매한 수준이긴 했다.

[그러니까 이런 시골 마을에 부임해 있는 거겠지만.]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미약한 현혹술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오면서 이미 전부 확인했다.

[삼류치곤 쓸 만한 사령술사다. 대충 나 20대 중반 때 수준은 되겠던데? 워낙 잘 숨었으니 어지간해선 걸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전생 때는 심문관처럼 사령술만 전담하는 성직자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약했던 당시에도 어떻게든 숨고 도망치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깊이 잠든 알리우스를 힐끔거리며 카르나크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함께 움직이길 잘했군. 이 시대의 성직자에 대해 확인할 수 있으니.'

***

이후 세 사람은 해가 저물 때까지 푹 잤다. 그리고 줄리아 수녀가 차려 준 저녁을 든든히 먹었다.

작은 마을 교회다운 소박한 식사였지만 기력을 회복하기엔 충분했다.

여기서 카르나크는 식대의 몇 배나 되는 기부금을 내밀어 그라스 신관을 행복하게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밤이 깊었으니 잠이나 마저 자겠다며 세 사람은 도로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바깥 눈치를 보던 알리우스가 말했다.

"슬슬 두 분도 잠자리에 들 시간이겠군요. 움직입시다."

그라스 신관과 줄리아 수녀 몰래 교회를 빠져나가자는 소리였다. 사령술사로 의심되는 클레오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카르나크의 의문에 알리우스가 진지하게 답했다.

"혹여 저들이 사령술사에게 현혹당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그럼 이쪽의 움직임이 알려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처음부터 사제인 걸 숨기시는 게 좋지 않았을지...."

"그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유동 인구가 있는 경우엔 그렇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은 외지인이 오는 일이 거의 없지요. 정체불명의 외지인이 나타나는 것보단 확실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쪽이 차라리 낫습니다."

이미 많은 사제들이 대륙 곳곳을 누비며 사령술사에 대한 탐색을 이어 가는 상황이었다.

줄리아 수녀도 말하지 않았던가? 몇 달 전에도 다른 신관이 왔었다고.

그러니 외지인 신관이 마을에 나타나는 것까지는 그럭저럭 허용 범위다.

하지만 그가 깊은 밤에 갑자기 교회 밖으로 나간다면?

"이건 정말 수상한 일이죠."

"그렇군요, 전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카르나크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와 달리 알리우스는 저들에게서 아무런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대응하는 것이다.

쑥스러워하며 알리우스가 대꾸했다.

"정식 심문관이라면 당연히 받는 교육입니다."

확실히 세상이 달라졌다. 예전과 달리 사령술사에 대한 대응책이 7여신교 내에서 체계화되어 있는 것이다.

채비를 마친 알리우스는 다시 짐을 뒤졌다.

허름한 로브를 꺼내 사제복 위에 걸쳐 입더니 마찬가지로 허름한 망토 두 벌과 복면 3개를 챙긴다.

"예비용 망토가 있어 다행이네요."

이를 일행 앞에 늘어놓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

달빛이 창 너머로 흐릿하게 비친다.

창밖의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클레오는 웃었다.

'슬슬 결실을 맺을 시기가 다가오는군.'

창문에 비친 그는 40대 후반의 평범한 중년남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평가와 달리 젊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얼굴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르게 인식하고 있을 테니까.

인간의 정신이란 이 얼마나 허술하단 말인가?

'어리석은 것들, 후후후.'

방에선 한창 하녀 1명이 침상을 정리 중이었다.

사실 진짜 귀족가의 하녀라면 이렇게 잘 시간이 닥쳐서야 침실을 정리하지 않는다. 주인의 눈에 띄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 놓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다.

그러나 이 소녀는 하녀복만 입었을 뿐 실제론 시골 마을의 평범한 처녀일 뿐이니, 그런 것까지 기대하긴 힘들겠지.

정리를 마친 하녀를 향해 클레오가 손짓을 했다.

"이만 물러가거라."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공허한 눈빛을 유지한 채 소녀가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는 잠시 입맛을 다셨다.

'쩝, 이대로 보고만 있자니 참기 힘들군.'

딱히 미색이 고운 편은 아니지만 어쨌건 젊은 처녀다. 확 덮쳐 버리고 싶은 욕망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클레오는 참았다.

처녀의 영혼은 제물로서의 가치가 높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한순간의 욕망으로 그 가치를 떨어트릴 수는 없지.'

이 마을을 장악하고, 어둠의 힘을 모아 결계를 치고, 제물을 바쳐 악마를 소환할 준비에만 무려 반년이 걸렸다.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들기 위해 버려진 별장을 구입하고 수선하는 데 든 금액도 적지 않았다.

'후후후, 이제 곧이다.'

조만간 손에 넣을 강대한 힘을 꿈꾸며 막 침대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별장 전역에 펼쳐 놓은 탐지 결계에 뭔가가 걸렸다.

'...침입자?'

클레오는 흠칫 놀라 정신을 집중했다.

'설마 여신의 개인가?'

안 그래도 마을에 성직자 1명이 들어온 걸 전달받고 찜찜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딱히 드문 일도 아니고, 또 교회에 들어간 뒤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어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침입자들이 있으니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클레오는 허겁지겁 검을 챙겼다.

방을 나서니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3명이 복도 가운데 서 있었다.

'복면이라고?'

성직자라면 얼굴을 가릴 이유가 없다. 게다가 허름한 로브와 망토를 걸치고 있어 옷차림으로 정체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의아해하면서 클레오는 검을 겨눴다.

"네놈들, 뭐 하는 놈들이냐?"

허름한 로브 차림의 사내가 건들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이, 형씨, 소문이 아주 파다해. 어디서 부잣집 도련님이 돈을 물처럼 펑펑 쓰신다고 말이지."

한 손에 단검을 들고 가볍게 빙빙 돌리며 비열한 목소리를 이어 간다.

"그래서 우리도 남는 돈 좀 나눠 받을까 하고 이렇게 찾아왔거든?"

클레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이었다.

'...뭐야? 그냥 강도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돈 많다는 소문이 퍼지면 오히려 이런 일이 더 일어나기 쉬운 법이지.

어이가 없어 클레오는 실소를 흘렸다.

"큭, 크크크큭...."

"어쭈, 지금 웃음이 나와?"

젊은 강도가 인상을 쓰며 단검을 찌르는 시늉을 한다.

"이거 아무래도 칼침 좀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는데?"

가소롭다.

참으로 하찮고 가소롭기 그지없다.

클레오의 눈동자가 변했다. 오만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흥, 제물로도 못 쓸 버러지들 따위가...."

그의 전신에서 칠흑의 어둠이 솟구쳐 복도를 가득 메웠다.

"감히 내 잠을 망친 죄, 죽음으로 갚도록 하라!"

파아아아앗!

끔찍한 사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무릇 살아 있는 자라면 보기만 해도 본능적인 공포에 휩싸여 얼어 버릴 강대한 어둠의 힘이었다.

클레오는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에 바로 굳었다.

"우와, 진짜 바로 정체 드러내네?"

***

알리우스의 '계획'은 이런 식이었다.

"강도로 위장한 뒤, 돈 내놓으라고 협박할 겁니다."

"...네?"

당연히 카르나크는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사령술사를 특정 짓는 신성 주문을 쓰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그런 주문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없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교단에서 여신을 섬기는 사제에게 강도질을 시킨다고요?"

알리우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저만의 수법입니다. 교단에서 권장하는 방식은 아니죠."

카르나크는 살짝 안심했다.

다행히 7여신교가 그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의외로 효과가 좋아서 말입니다."

사령술사는 힘을 얻기 위해 온갖 금기를 범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깊은 밤에 강도를 만났고, 주위에 보는 눈 하나 없는데...."

알리우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깔보며 위협하는 이들을 상대로 과연 후환을 두려워해 얌전히 달라는 거 다 내주고 항복할까요?"

***

사방이 검은 사기로 넘실거린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죽음의 기운이다.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를 번득이는 사령술사의 모습은 실로 공포 그 자체!

...가 되어야 하는데 어째 반응이 영 아니었다.

허름한 로브의 복면 사내가 어깨를 으쓱인다.

"제가 뭐랬습니까? 이 수법이 여태 안 통한 적이 없다니까요."

마른 체구의 사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인간 심리상 통하지 않기가 더 힘들겠군요."

덩치 큰 사내는 좀 애매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보다는, 이 수법이 통하지 않으면 애초에 정체를 파악할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전부 통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아닌지...."

하여튼,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라는 사령술사를 앞에 두고도 다들 참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절대 평범한 강도일 리가 없었다.

"네놈들...."

그래서 오히려 클레오는 침착해졌다.

"역시 여신의 개들이었구나."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망토를 벗어 던졌다. 감춰 놓았던 장검과 마법사의 완드가 여실히 드러났다.

알리우스도 로브 안에서 떡갈나무 지팡이를 꺼냈다.

"어둠을 섬기는 그릇된 자여...."

지팡이가 찬란한 빛을 뿜으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여신의 빛 앞에 무릎 꿇을지어다!"

빛과 어둠이 충돌해 굉음을 일군다. 복도와 천장이 흔들리며 먼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콰콰콰쾅!

요란한 소음 속에서 클레오는 차분히 중얼거렸다.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잠깐 놀라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상대는 고작해야 신관 하나에 전사 하나, 마법사 하나뿐.

저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좋다, 여신의 사냥개들아!"

클레오가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어둠의 장막이 사방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위대한 죽음의 힘을 보여 주마!"

#25화. 7. 모범적인 사령술사 (3)

목소리가 울린다.

"일어나라, 저승의 망자들아...."

복도 바닥 위로 수십 개의 소환진이 그려진다.

"...어둠에 이끌려 그 흉악한 독니를 드러내어라!"

덜그럭거리는 소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과 방패를 든 백골과 반쯤 썩은 시체들. 사령술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스켈레톤과 구울이었다.

안식을 방해받은 망자들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우우우우....

아아아아....

알리우스가 분노해 소리쳤다.

"저주받을 사령술사 같으니! 죽은 자의 안식을 어찌 이토록 더럽힌단 말인가!"

반면 카르나크의 감상은 좀 달랐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친구로군.'

모르는 사람들은 사령술사가 손짓만 하면 시체들이 펑펑 일어나는 줄 아는데, 자고로 씨를 뿌려야 싹이 나는 법이다.

지금 클레오가 소환한 언데드는 스켈레톤 20구에 구울 10구.

저 숫자의 촉매를 마련하기 위해 최소한 무덤 30개는 도굴했을 거란 소리다.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열심히 비축해 놓았나 본데?]

바로스의 감상은 카르나크와도 또 달랐다.

[성실하긴 개뿔, 저놈이 직접 무덤 팠겠어요? 부하 시켰겠지.]

[왜 그렇게 단정 지어? 저놈이 팠을 수도 있잖아.]

[제가 잘 아는 사령술사가 하나 있는데, 죽어도 자기 손발 안 움직이고 시종 시켜서 무덤 파게 하더라고요.]

[그래? 나 말고도 그런 놈이 또 있었나 보네.]

[...역시 도련님은 만만찮네요.]

[응? 뭐가?]

그 와중에도 이들은 착실히 진영을 갖추고 있었다.

바로스가 앞장서 복도를 가로막고 카르나크 역시 양손에 마력을 끌어낸다. 정신을 집중하며 알리우스가 신성 주문을 외운다.

"하토바여, 당신의 종들을 가호하소서!"

성광이 카르나크와 바로스를 감쌌다.

"이제 두 분은 사기에 침범당하지 않을 겁니다."

동시에 바로스의 장검도 백색으로 빛났다. 언데드를 벨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여신의 가호를 퍼부은 뒤 알리우스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잠시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그 틈에 제가 놈들을 처리하겠습니다!"

***

먼저 움직인 쪽은 바로스였다.

"헙!"

짧은 기합과 함께 스켈레톤 사이로 뛰어들어 좌우로 참격을 뻗어 낸다.

스켈레톤 병사들도 빠르게 반응했다.

녹슨 장검을 휘두르며 연거푸 공세를 가한다.

연신 금속성의 충돌음이 울린다.

탕! 타탕!

카르나크도 마법을 날렸다.

"매직 애로우!"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섬광 마법이 달려들던 구울 무리에 직격했다.

적중당한 사지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충격으로 놈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이미 시체이니만큼 팔다리를 잃은 정도로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시체들은 클레오를,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알리우스를 보호하며 전투가 이어졌다.

성광이 둘린 검을 휘두르며 바로스가 마법 전언을 날렸다.

[사제의 축복이란 거, 이런 느낌이었군요.]

[어떤데?]

[도련님이 쓰시던 광폭화 저주랑 비슷해요. 아니, 색만 다르지 똑같다고 해야 하나?]

거무튀튀한 어둠 대신 찬란한 빛이란 차이만 있을 뿐, 바로스 입장에선 의외로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야 내가 걸었던 저주는 광폭화에 이성 유지를 추가한 거니까. 광전사가 이성을 지닌 채 차분히 날뛰면 딱히 성기사랑 다를 것도 없잖아.]

[성기사 입장에선 찬성하기 힘든 의견일 것 같지만요.]

달려드는 스켈레톤 2구를 한꺼번에 쳐 내며 바로스가 슬쩍 물었다.

[도련님은 어때요? 도련님도 축복 받아 본 건 처음이죠?]

[일부러 확인한 보람이 있어.]

알리우스를 힐끔 보며 카르나크는 옅게 웃었다.

[과연 저쪽은 전혀 눈치 못 챈 것 같군.]

아무리 마나와 구별할 수 없다 해도 혼돈마력의 근원은 결국 사령력이었다.

이게 성직자의 축복과 충돌할 경우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이론상으로야 아무 문제 없다지만, 이론과 현실이 다른 경우가 뭐 한두 번이었어야지?

[정말 부작용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든 거잖아.]

아무 신관이나 찾아가 축복을 받는다면, 예상 밖의 부작용이 터졌을 때 상대의 입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이 사령력으로 넘쳐 나니까 티가 안 나지.]

란돌프에게 뒤집어씌운 것처럼, 저 사령술사에게 뒤집어씌울 수가 있다.

혹여 카르나크에게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져도 뭔가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고 둘러대면 된다.

[예전처럼 살진 말아야지, 암.]

[오, 이번엔 진짜 사람답게 판단하신 것 같아요. 웬일이래?]

[...난 항상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한편 클레오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뭐지, 이 위화감은?'

얼핏 보기엔 전형적인 모험가들의 전투였다.

전사는 전위에서 동료를 지키고, 마법사는 후방에서 마법 날리고, 성직자는 전장을 보조한다.

그래, 딱히 특이한 점은 없다.

착실하고 정통적인 팀 단위 전투 방식이다.

'그런데 뭔가....'

언데드를 상대하는 저 둘의 태도가 영 거슬렸다.

대충 싸우는 건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긴장하는 것도 아닌, 자연스럽다 못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이한 표정.

그러고 보니 예전에 비슷한 표정을 본 기억이 있었다.

빵만 20년을 구워 온 고향 빵집 주인장 에롤드 씨. 그 양반이 아침마다 일과를 시작하며 반죽할 때 딱 저런 얼굴이었다.

관성적으로 대충 주무르는 것 같은데도 주인장의 빵 반죽은 항상 찰지고 윤기가 흘렀다.

반면 조수의 반죽은 아무리 심혈을 기울이고 열성을 다해도 어딘가 허술했지.

'그러니까... 저놈들은 그만큼이나 언데드를 자주 상대했단 소리?'

클레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냥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놈들일 뿐이다.'

어쨌거나 강한 놈들인 건 틀림없었다.

잔뜩 불러 놓은 스켈레톤 병사와 구울이 어느새 거의 다 쓰러진 상태였으니까.

상관없다.

어차피 저놈들은 시간을 벌기 위한 미끼다.

"제법 한가락 하는 놈들이었구나."

조소를 흘리며 그는 양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허나 지금까지는 여흥이었을 뿐...."

사령력이 허공에 검은 마법진을 그리며 묵빛을 발했다.

"진정한 어둠의 권능을 맛보여 주마!"

소환진이 거체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오라, 지옥의 야수여! 내 뜻에 따라 이 땅에 강림하라!"

전신이 붉게 물든 거구의 악마가 복도에 발을 디딘다.

흉악한 외모에 거대한 뿔, 터질 듯한 붉은 근육으로 뒤덮인 야수의 육신, 양손에 쥔 투박한 배틀 해머까지.

2미터에 가까운 덩치라 복도가 꽉 차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크르르르...."

소환된 악마가 불길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계약자여, 무엇을 원하는가?"

"저놈들의 죽음!"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끔찍한 마기와 함께 강렬한 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놈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리라 기대하며 클레오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오!"

"이제야!"

클레오의 기대는 어긋났다.

바로스와 카르나크는 오히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

검을 고쳐 쥐며 바로스가 히죽 웃었다.

[이제 좀 제대로 연습을 하겠네요, 도련님.]

카르나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말이다.]

스켈레톤이나 구울은 사실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다. 까놓고 말해서 일반 병사랑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이다.

만들기 쉽고, 죽인 적을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군대의 일원으로서는 효용이 크지만 개개의 전투력은 평범한 것이다.

그럼에도 노련한 전사들이 저런 하급 언데드에게 당하는 이유는 익숙함의 차이 때문이다.

공격력이나 움직임은 분명 일반적인 인간 병사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방어란 개념에선 좀 다르다.

애초에 시체다 보니 팔다리는 물론이고 머리가 날아가도 계속 움직인다. 생물체와의 전투에만 익숙하던 이들은 이미 해치웠다고 여겼다가 허점을 찔리는 것이다.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죽지 않으니 심적인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사지 날아가도 계속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날아간 팔다리가 도로 붙지는 않잖아?

팔 자르면 외팔이 되는 거고 두 다리 자르면 앉은뱅이 되는 거다. 죽지만 않지 전투력은 착실히 반감된다.

죽은 자가 움직인다는 사실에만 익숙해지면 정말 별것 아니었다.

그리고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현세에서 가장 언데드에 익숙한 이들, 당연히 연습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반면 지금 소환된 악마는 다르다.

[저 정도 악마면 몇 급이죠?]

[최하급이긴 한데, 덕분에 지금 우리 수준에는 딱 맞지.]

[그러네요, 다시 시작했으니까.]

더 이상 사령왕도 데스 나이트 로드도 아니다. 현시점에서 전력을 재검토하며 감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한 연습 상대로 저 악마는 그야말로 안성맞춤!

바로스가 투지 가득한 고함을 터트렸다.

"악마 놈! 내가 상대해 주마!"

그렇게 막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하토바의 빛이여, 악을 멸하소서!"

알리우스가 지팡이를 내리찍으며 거대한 성광을 발했다.

"홀리 디스펠!"

빛의 날개가 복도 천장과 벽을 타고 흐른다. 찬란한 광휘가 악마의 전신을 감싼다.

살기를 터트리던 악마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건!"

공간이 열렸다. 비명과 함께 붉은 육체가 공허의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윽! 역소환이라니!"

악마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방을 뒤덮은 마기와 살기 역시 도로 사라져 버렸다.

홀리 디스펠, 어둠을 지우는 신성 주문으로 악마 소환식 자체를 지워 버린 것이다.

막 신나게 달려들려던 바로스가 눈을 깜빡였다.

"...엥?"

알리우스가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소용없다, 사령술사! 여신의 빛 앞에서 모든 사특한 것은 사그라질지어니!"

비장의 수단을 허무하게 잃은 클레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언데드를 물리치는 신성 주문과 악마 소환을 해제하는 신성 주문은 엄연히 궤가 다르다. 그리고 알리우스는 악마를 소환하기 전부터 이미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스켈레톤과 구울이 시간 벌이용일 뿐이며 이어질 진짜 공격이 악마 소환이란 것까지 읽고 있었다는 의미.

과연 알리우스는 전부 예상하고 있었다.

"그대가 이 마을에서 저지른 짓을 보면 알 수 있지, 사령술사."

심문관으로 많은 경험을 쌓은 그였다. 사령술사들의 범죄를 통해 상대의 주특기가 어떤 식인지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부정한 기운을 통해 언데드를 창궐시키는 사령술은 마을 전체에 역병을 뿌리거나 해서 생지옥으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

반면 클레오는 마을 전체를 현혹한 뒤 처녀들을 홀려서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렇다는 건 제물을 바치고 악마에게서 힘을 얻는 흑마술 계열이 특기라는 소리가 되지 않나?"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가 일행을 돌아볼 때였다.

"자, 이제 끝을 냅시...."

알리우스의 말문이 막혔다.

카르나크도 바로스도, 대놓고 허망해하는 얼굴들이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열심히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아뇨, 그건 아니고."

"저런 거대한 악마를 단번에 해치우시다니, 놀라서 잠시 얼이 빠졌군요."

애써 둘러대긴 했지만 역시 실망감을 감추긴 힘들었다.

[에잉, 연습이고 뭐고 날아갔네.]

[대충 처리하죠, 도련님.]

클레오의 상태를 보아하니 남은 사령력도 얼마 없었다. 그냥 가까이 가서 슥삭 베면 끝이었다.

바로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장검이 싸늘한 예기를 뿌렸다.

"포기해라, 사령술사 놈."

다가오는 죽음을 본 클레오의 안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아직, 아직이다!"

가장 깊은 곳의 어둠까지 끌어내, 영혼 그 자체를 물들이며 힘을 갈구한다.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클레오의 전신이 뒤틀린다.

사지가 뻗어 나가고 옷이 찢어지며 육체 자체가 거대화한다.

이내 흉측하게 변해 버린 놈이 짐승의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아!"

더 이상 그 자리에 인간 클레오는 없었다.

있는 것은 방금 소환되었던 악마와 흡사한 또 다른 악마뿐.

"데몬 나이트! 아직 저 정도의 힘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경악한 알리우스가 일행을 돌아보며 경고를 날리려 할 때였다.

"놈이 악마화 술법을 썼습니다! 다들 조심하시...."

또 말문이 막혔다.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눈이 도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잠깐, 댁들은 왜 좋아하고 있는 건데?'

***

겨우 연습 기회가 다시 왔다.

무릇 기회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법이다.

[저 신관이 또 딴짓하기 전에 후다닥 처리하자!]

[동감입니다, 도련님!]

바로스가 몸을 날렸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곧장 악마화된 클레오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헉! 이놈이!"

놀란 클레오가 죽어라 양팔을 휘둘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공세라도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너무도 쉽게 피하며 연격을 날린다. 마혈이 튀고 또 튀며 순식간에 클레어의 전신이 걸레짝이 된다.

동시에 이어지는 카르나크의 마법들.

"파이어볼, 매직 애로우, 라이트닝 쇼크."

흔해 빠진, 전혀 수준이 높지 않은 공격 주문인데도 타이밍과 각도가 워낙 절묘했다.

날린 모든 마법이 마치 미리 짠 것처럼 악마의 빈틈만 교묘히 노려 적중한다.

폭음과 함께 클레오의 처절한 비명이 복도를 가득 울렸다.

"크억! 아악! 으아악!"

그렇게 한 1분 지났을까?

도로 악마화가 풀린 클레오가 넝마가 된 채 쓰러졌다.

[아, 몸 잘 풀었네요.]

[역시 양보단 질이지.]

짧지만 알찬 연습 시간이었다. 흡족해하며 바로스가 클레오의 등을 짓밟았다.

"크억!"

그리고 순박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제 어쩝니까? 죽여요? 아니면 사로잡나?"

지켜보던 알리우스는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

'맙소사....'

자신이 뭘 해 보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 버린 것이다.

'대체 뭐 하는 자들이지?'

#26화. 7. 모범적인 사령술사 (4)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며 알리우스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싸울 수 있는 거지?'

딱히 초인적인 실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투기를 각성한 오러 유저나 고위 마법사가 구사하는 초월적인 무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술이나 마법의 위력 자체는 분명 평범한 수준이었어.'

그저 노련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모든 공격을 미리 읽고 피하고, 모든 약점을 뻔히 보이는 것처럼 정확히 노리고, 이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계속 행하는데 전혀 긴장 따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전투 경험이 방대해야 저런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심지어 둘 다 아직 20대잖아. 잘해 봐야 내 또래인데 어디서 그런 경험을 쌓았다는 거야?'

알리우스도 나이에 비해 경험이 많은 편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실력을 숨긴다는 작자들이 대놓고 저런 노련한 전투를 보여 준다고? 웃기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아직 젊은 나이라 투기를 각성하지 못하고 마력량 역시 낮지만 재능만큼은 어마어마해서 전투 감각만으로 저런 짓이 가능하다는 것!

'와, 나도 교단에선 수재 소리 꽤나 들었는데....'

남들 앞에선 겸손을 떨었지만 알리우스는 솔직히 자신의 재능을 자각하고 있었다.

남들은 낑낑대며 간신히 하는 걸 쉽게 익힐 수 있는데 그걸 모르면 바보지.

그런 자신이 보기에도 시샘이 날 만큼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제스트라드 남작가라고 했던가?'

결코 시골 영지에 처박혀 있을 인재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점점 혼란해지는 정세 속에서 인재는 항상 부족한 법이었다.

'교단으로 돌아가면 바로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잠시 알리우스가 딴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저기요, 신관님?"

클레오의 등을 짓누른 채 바로스가 그를 독촉했다.

"이제 어쩌냐니까요? 죽여요, 살려요?"

알리우스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쓰러진 클레오에게 다가가며 그가 지팡이를 겨눴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깔려 있던 클레오가 공포에 질려 바둥거렸다.

"으, 으어...."

무시하며 알리우스는 성광을 클레오에게 갖다 댔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터지며 놈의 혈관이 검붉게 물들어 도드라졌다. 이내 피부가 찢어지며 검은 기운이 솟구쳤다.

검은 기운이 허공에 응집되더니 알리우스가 꺼낸 병 속으로 일제히 빨려 들어간다.

잠시 후 모든 기운이 사라져 버렸다.

바로스와 카르나크가 힐끔 클레오를 살폈다. 그는 어느새 절명한 후였다.

"예상했던 대로군요."

병에 성광을 흘려 본 알리우스가 단언하듯 말했다.

"종말의 어둠입니다."

카르나크는 옅게 웃었다.

'오호라, 저런 식으로 처리하는구나? 좋은 거 봤다.'

성직자가 어떤 식으로 사령력을 봉인하는지 옆에서 생생히 지켜본 것이다. 이건 정말 큰 수확이었다.

반면 바로스는 걱정하고 있었다.

[이래도 돼요? 우리도 저거 필요하잖아요. 그냥 눈뜨고 빼앗기게 생겼는데요?]

[괜찮아. 다 대비해 놨어.]

[대비요?]

그때였다.

갑자기 복도 한구석에서 어둠의 촉수가 뻗어 나와 알리우스를 노렸다.

파아아앗!

"아차! 아직 남은 함정이...."

기겁하며 알리우스가 몸을 돌렸지만 반응이 조금 늦었다.

순식간에 촉수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큭! 끄으...."

흐려지는 시야 속에 놀라 달려오는 카르나크가 보인다.

"신관님!"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알리우스는 내심 안도했다.

이미 사령술사는 처리했으니, 이 정도는 저들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다.

'혼자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알리우스가 완전히 기절하자 목을 조르던 촉수도 도로 풀렸다. 놀란 얼굴이던 카르나크 역시 표정을 싹 바꾸었다.

"됐다."

바로스는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하셨대요?"

"뒤로 딴짓하는 거야말로 사령술사의 본분 아니냐?"

"그래도 그렇지, 이러다 의심이라도 사면...."

중얼거리다 말고 바로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긴, 그럴 일은 없으려나?"

종말의 어둠은 병 속에 봉인되었지만 잔여 사기는 여전히 복도 가득 넘실거리고 있다. 그리고 함정을 사방에 까는 것은 원래 사령술사들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이 친구 입장에선 저놈이 수작 부린 걸로밖에 안 보일 테니...."

"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지."

카르나크가 혼돈마력을 살짝 끌어 올렸다.

"자, 봐라? 마법이다?"

"마법인데 어쩌라고요?"

"그러니까 난 지금 마법사라고. 마나를 사역하는."

뒤늦게 바로스도 이해했다.

"아, 그렇구나."

프레드야 무식해서 마법사인 카르나크가 사령술을 쓰는 걸 보고도 '이놈이 정체를 감췄구나!'라며 그냥 넘어갔지만 알리우스는 고위 신관이다.

일반인 앞에서야 사령술사가 마법사인 척 위장할 수 있어도 신관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나와 투기, 신성력과 사령력은 결코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런 양반이 내가 마나 쓰는 걸 뻔히 봤는데 의심을 하겠어? 뭐, 실은 혼돈마력이지만 차이는 거의 없으니까."

쓰러진 알리우스의 품에서 검은 병을 꺼내며 카르나크는 히죽 웃었다.

"이 틈에 조사한 뒤 되돌려놓으면 완전범죄지."

***

"그럼 어디...."

병 속에 담긴 어둠에 혼돈마력을 불어 넣으며 카르나크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지켜보던 바로스가 물었다.

"도련님 부스러기 맞아요?"

"맞아."

"운이 좋네요. 마침 찾은 사령술사가 정확히 우리가 원하던 놈이라니."

"운이 좋은 게 아니더라."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당연한 거야, 이쪽이."

전생에서 사령술사란 가뭄에 콩 나듯 극히 드물게 출몰하는 존재였다.

반면 지금은 종말의 어둠 때문에 우후죽순으로 창궐하고 있다.

"돌멩이 10개 들어 있던 공간에 누가 다른 돌멩이를 만 개쯤 더 때려 붓고 섞었다 치자. 거기서 아무 돌멩이나 하나 집으면? 거기서 원래 돌멩이를 집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냐?"

현재 사령술사로 행세하는 놈들은 거의 대부분 종말의 어둠 관련자인 것이다.

"심지어 원래 있던 돌멩이도 점점 사라지는 상태거든?"

탐색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클레오는 환란이 오기 전부터 사령술을 추구하던 자였다.

원래는 순수한 사령술사였다가, 종말의 어둠을 지닌 다른 놈을 죽이고 힘을 흡수한 케이스인 것이다.

"기존의 사령술사라도 이런 상황에선 우선적으로 종말의 어둠 사냥부터 나서게 되는 거야. 워낙 탐나는 먹이일 테니까."

이래서야 종말의 어둠과 관계없는 사령술사가 남아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설명을 마친 뒤 카르나크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바로스가 눈치를 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뭐 좀 건진 건 있어요?"

"글쎄다. 일단 이놈이 뭐 하던 놈인지는 알겠는데...."

잔존 사념에 따르면, 클레오는 종말의 어둠을 손에 넣은 뒤 테스라낙을 섬기는 사교도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테스라낙?"

바로스는 의아해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응. 죽음의 신이라는데?"

"그게 말이 돼요?"

왕년에도 죽음의 신이라 불리던 존재가 있긴 있었다.

바로 카르나크 본인.

멀쩡한 인간, 아니, 멀쩡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간 출신인 게 분명한 그에게 저런 거창한 수식어가 붙은 이유가 있다.

7여신교의 교리에 따르면 죽음과 어둠은 여신이 관장하는 영역이 아니다.

어둠은 빛의 여신의 가호가 약해지는 개념이고, 밤은 온갖 마물과 마수가 날뛰는 두려움의 시간.

그렇기에 태양의 여신은 어둠을 몰아내 밤을 낮으로 바꾸고, 달과 별의 여신은 밤의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인간들은 인도한다.

죽음은 가여운 인간들이 맞이하는 어쩔 수 없는 운명.

일곱 여신을 믿고 따르면 죽은 후에도 여신의 천국에 거두어져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여신의 가호 없이 죽음을 맞게 되면 그 영혼은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다.

죽음과 어둠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삶과 빛의 부재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과 어둠의 신이 따로 존재한다고요?"

"사교도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저들의 교리에 따르면 테스라낙은 종말의 어둠을 뿌리는 죽음과 재생의 신으로, 혼탁하고 거짓된 세상을 죽음으로 정화한 뒤 새로운 낙원을 펼치는 존재라고 한다.

바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그 테스라낙이 이 환란을 만든 놈이다, 이런 이야기네요?"

"그렇다나 봐."

어이가 없어 카르나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별걸 다 갖다 붙이네. 어디서 있지도 않은 신을 만들어서...."

본인 입장에선 실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해야겠지?"

"그렇죠, 뭐."

좀 더 탐색을 해 봤지만 그 후론 쓸 만한 내용이 없었다.

워낙 파편화된 상태라 총괄적인 상황을 파악하기엔 여전히 정보량이 적다. 더 알아내려면 더 많은 종말의 어둠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

"이번엔 건진 것도 많은데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어둠이 담긴 병에서 혼돈마력을 끌어내며 카르나크는 싱글벙글 웃었다.

"예상대로야. 성직자 힘 빌리면 엄청 쉬워지네."

"뭐가요?"

"혼돈마력 정제하는 거."

혼돈마력은 정화된 사령력이다. 바꿔 말하면 봉인된 사령력이란 소리도 된다.

이론상, 사제의 신성력을 이용하면 훨씬 쉽고 간단하게 혼돈마력을 정제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실험해 볼 방법이 있어야 말이지."

성직자 초빙한 다음 '제가 이제부터 사령술 쓸 건데요, 이거 신성력으로 정화해 주세요.'라고 하면 참 좋은 반응 나오겠다.

카르나크가 알리우스와 함께 움직이려고 한 가장 큰 이유가 이것이었다.

어떤 식으로 신성력이 사령력을 정화하는지, 그리고 그 방식을 어떻게 혼돈마력 정제에 응용할지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는 것.

병에 담긴 암흑에서 혼돈마력을 모조리 뽑아낸 카르나크가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군."

모자란 지식을 메우고, 마력량도 2배 이상 늘어났다. 별 고생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어 낸 셈이다.

"이 정도면 4서클 마법사로 행세할 수 있겠어."

바로스가 기절한 알리우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 그럼 앞으로도 저 친구를 대동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매번 지금처럼 기절시킨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분명 의심을 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는 안 하지."

카르나크는 손을 저었다.

"신성력을 지닌 존재가 성직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세상엔 사람 말고 물건이 신성력을 지닌 경우도 있다.

성물이 바로 그것이다.

"성물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은 의외로 흔한 물건이거든."

교회에서 돈 받고 파는 성수나 파사의 부적, 수호부 등도 따지고 보면 성물이다. 너무 흔해서 성물이란 느낌이 안 들 뿐이지.

"돈도 많은데 그런 거 잔뜩 구해다 마력 정제에 써먹어야지. 앞으로 좀 편해지겠네."

정보도 마력도 다 뽑아 먹었으니 더 이상 이 어둠의 병에 볼일은 없다.

카르나크는 병을 도로 알리우스의 품에 넣었다.

알리우스가 병을 확인한다 해도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사기와 탁기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을뿐더러, 사령력에서 마력을 뽑아낸다는 행위 자체가 보통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니까.

"비유하자면 배설물에서 영양분만 다시 뽑아내는 셈인데 상식적으로 떠올리기 힘들지, 그런 거."

바로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비유가 너무 더러운 거 아닙니까?"

"사령술이란 게 그만큼 더러운 수법이란 거야. 성직자들에겐 특히."

"우리가 그 정도로 추잡한 존재들이었어요?"

"괜히 온 세상의 혐오란 혐오는 다 받고 산 줄 알아?"

이제 남은 건 기절한 알리우스를 도로 깨우는 일뿐.

잠시 표정 관리를 하더니 카르나크가 다급히 알리우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근심과 걱정을 가득 연기하며 목청을 키운다.

"신관님! 괜찮으십니까, 신관님!"

"으으으...."

옅은 신음을 흘리더니 알리우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안도하며 카르나크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무사하셨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로스는 그저 기만 찼지만.

[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저런 연기를 하시네?]

[표정 관리! 바로스!]

[아, 넵!]

***

클레오가 죽자 겔파 마을에 걸린 사령술도 깨졌다.

현혹이 풀린 주민들은 기억의 모순을 깨닫고 경악했다.

"맙소사, 왜 그런 인간을 젊게 본 거지?"

"왜 잘생겼다고 생각한 거야, 우리가?"

"교회 신관님조차도 사령술에 걸린 거였어?"

다행히 알리우스의 빠른 후속 조치로 공포는 가라앉았다.

우선 마을 교회와 이야기를 맞췄다.

마을 교회라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은 내내 클레오를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라스 신관이 몰래 알리우스를 초빙해 클레오를 퇴치했다.

이런 식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걸로 교회에 대한 신뢰는 다시금 돌아왔다.

게다가 딱히 마을 사람들이 실질적인 피해를 본 부분이 없다는 점도 컸다.

클레오는 분명 마을 처녀들을 붙잡아 제물로 쓰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 그 사전 작업을 위해 마을 전체에 돈을 뿌리며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하필 제물 의식을 치르기 직전에 알리우스에게 걸린 것이다.

겔파 마을 입장에선 그냥 돈만 챙기고 입 씻은 꼴이 되었달까?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분위기가 좀 흉흉해지긴 했지만 그럭저럭 마을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뒤처리를 마친 뒤, 알리우스는 카르나크 일행과 함께 데라트 시티로 향했다.

오는 내내 그는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은 어디서 검술과 마법을 사사하신 겁니까?"

"전투 경험이 많으신 것 같던데, 제스트라드 남작령이 꽤 험한가 보지요?"

"혹시 예전에 사령술사와의 전투를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상당히 관심이 큰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 정도 활약을 보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카르나크는 적당히 대꾸하며 넘겼다.

"운 좋게도 옛 궁정 마법사의 유산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스 경은 델피아드 검투술을 익혔고요."

"저희 영지가 좀 험하다 보니 마물과 조우할 일이 많습니다."

"얼마 전 사령술사가 저희 영지로 도망쳐 라티엘 교단의 힘을 빌린 적이 있지요."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섞으니 꽤나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마침내 데라트 시티에 도착하고 헤어질 시간이 왔다.

"이제 두 분은 영지로 돌아가십니까?"

알리우스의 질문에 카르나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한동안 데라트 시티에 머물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우아하게 묵례하며 알리우스가 오랜 인사말을 건넸다.

"하토바의 가호가 두 분의 여정에 깃들기를."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바로스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또 보게 될 것 같죠, 저 신관? 우리한테 관심 많던데."

"7여신교와 인맥 만들어서 손해 볼 건 없지. 상황이 바뀌었잖아."

어차피 종말의 어둠을 계속 찾아다녀야 할 신세다. 정보를 얻을 루트는 하나라도 더 많을수록 좋다.

카르나크가 말 머리를 돌렸다.

"자, 그럼 우리도 할 일이나 마저 하자고."

신바람을 내며 바로스가 뒤를 따랐다.

"넵! 못다 한 맛집 탐방을 마저 하러 가시죠!"

"야, 어디까지나 종말의 어둠 탐색이 목적이거든?"

"그래서? 밥 먹으러 안 가실 거예요?"

"가야지, 밥인데."

#27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헉,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루크는 계속 달렸다.

"으으, 어째서 이런 일이...."

멈출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저 끔찍한 괴물이 당장이라도 그를 덮칠 테니까.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 해도 등 뒤에서 쫓아오는 저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으, 으아...."

어느새 골목 전체를 검은 그림자가 휘감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루크의 무릎이 풀렸다.

"아아, 여신이시여...."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기도를 올린다. 세상을 가호하는 여신을 부르며 눈앞의 공포를 마주한다.

너울대는 암흑 사이로 흑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지금 네놈이 여신 찾을 자격이나 있냐?"

양손을 뻗으며 루크가 악을 썼다.

"꺼져라, 이 끔찍한 악마 놈!"

루크의 좌우로 칠흑의 악령이 솟구쳤다.

날아드는 악령을 보며 청년, 카르나크는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가 누굴 보고 끔찍하다는 거야?"

30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죽이고, 그 2배에 달하는 여인들을 범하고, 어린아이까지 제물로 바치며 이곳 델라드 일대를 공포로 물들인 놈이었다.

그런 놈이 막상 자신이 몰리니까 순진한 일반인처럼 굴다니.

"이래서 사람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가? 아니,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가? 하여튼 일반인 감성은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르나크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것만으로 악령은 간단히 소멸해 버렸다. 루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내 악령들이...."

골목 반대편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따, 그놈 발 참 빠르네. 사령술사가 웬 뜀박질을 이렇게 잘한대요?"

"원래는 좀도둑이었다더라. 확실히 도망은 잘 치네."

앞뒤로 루크를 포위한 채 카르나크가 손짓을 했다.

"후딱 잡기나 해."

"넵!"

바로스가 몸을 날렸다.

루크가 악령을 끌어내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카르나크의 사령술이 그의 어둠을 단단히 묶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루크는 그저 평범한 좀도둑일 뿐. 그런 그가 단련할 대로 단련한 기사의 주먹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퍽!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루크는 그대로 쓰러졌다.

보디블로우 한 방으로 사람을 실신시킨 바로스가 놈의 목뒤를 잡아 든 채 물었다.

"거기로 끌고 갑니까?"

대수롭잖다는 듯 카르나크가 대답했다.

"응. 종말의 어둠을 뽑아내야지."

***

예전의 카르나크는 사령술사를 잡으면 즉석에서 종말의 어둠을 뽑아낸 뒤 천천히 시간을 들여 혼돈마력으로 정제했다.

하지만 보다 효율 좋은 방법을 찾아낸 지금은 다른 방식을 쓰고 있었다.

데라트 시티 외곽의 한 허름한 창고.

인적 드문 이 어두운 공간에서 웃통을 깐 루크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으, 으으...."

밑에는 커다란 물통이 비치되어 있고, 매단 밧줄을 바로스가 튼튼하게 붙잡고 있다.

카르나크의 목소리가 울렸다.

"담가."

밧줄이 또르르 풀리며 루크가 물통으로 퐁당 빠졌다. 물론 머리부터.

"웁! 우우웁!"

꼬르륵거리며 루크는 발버둥을 쳤다. 물론 온몸이 꽁꽁 묶여 있으니 소용은 없었다.

숨 막혀 죽겠다 싶을 때쯤 돼서야 카르나크가 다시 말했다.

"건져."

간신히 공기를 맛본 루크가 숨을 헐떡일 때였다.

"담가."

꼬르륵!

"건져."

"쿠, 쿨럭! 쿨럭!"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루크는 울먹였다.

"...대, 대체 왜?"

대뜸 자신을 붙잡아 이 창고에 가두더니, 계속 이렇게 물고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문만을 기다렸다. 그 어떤 비밀이라도 아낌없이 토설할 만반의 준비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질문이 없다. 그냥 막무가내로 계속 고문만 한다.

"원하는 게, 쿨럭, 뭡니까?"

왜 질문을 안 하냐고!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할 거라니까?

카르나크의 대꾸는 참으로 야속했다.

"담가."

"웁! 우우웁!"

루크가 뭐라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계속 고문만 진행할 뿐.

그러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고 있다.

"역시 이쪽이 효율이 좋다니까."

'아니, 대체 뭔 효율이 좋다는 거야?'

의문 속에서 루크는 다시 물통 속으로 침잠해 갔다.

그런데 사실, 카르나크는 정말로 고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탁기가 죽죽 빠지네."

그는 그저 '빨래'를 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알리우스 덕분에 신성력으로 탁기를 정화시키는 요령은 알아냈다. 신관 대신 성물을 이용하는 방식도 개발해 냈다. 알리우스를 통해 성수도 잔뜩 마련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문제가 생겼다.

양이 너무 적었다. 성수를 열 병씩 부어도 사령술사의 영혼 전체를 정화하기엔 모자랐다.

그래서 이 방식을 택한 것이다.

빨래할 때도 비누만 가지고 하진 않는다. 물로 헹구며 골고루 때를 빼지.

마찬가지로 성수를 물에 타 희석시킨 다음 전신을 헹궈 가며 천천히 탁기를 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정말 '빨래'였다. 빠는 대상이 옷감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건져."

"어푸, 어푸푸!"

덕분에 루크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지만 당연히 카르나크는 알 바 아니다.

바로스만 좀 찜찜해할 뿐이었다.

"이래도 되나요? 우리 예전처럼 살진 말자고 했잖아요."

죄 없는 인간 붙잡아 고문하며 영혼을 타락시켜 사령력을 뽑아내는 행위는 과거 카르나크가 가장 자주 하던 짓이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고문해 힘을 뽑고 있으니, 이건 예전처럼 사는 게 아닐까?

카르나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땐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한 거였고, 지금 이놈은 나쁜 놈이잖냐?"

하긴, 이 루크란 작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칭호도 따로 생겼을 정도이긴 하다.

"...그런데 얘 칭호가 뭐였더라?"

"또 어둠의 군주였죠."

또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가 있었다.

이놈이 카르나크 일행이 붙잡은 '세 번째' 어둠의 군주거든.

"하여튼 사령술사 놈들은 칭호가 다 거기서 거기라니까."

"그런 것치곤 도련님도 예전에 어둠의 군주라고 칭하신 적이...."

"그, 그땐 내가 어려서 그랬고!"

"그 후엔 역병의 지배자라고...."

"그때도 어렸지!"

"나이 서른 넘겨서도 죽음의 제왕이라 칭하셨던 것 같은...."

"...시끄러."

"넵."

하여튼, 물통에 퐁당퐁당 잠기고 있는 이 사내가 어둠의 군주라 불리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카르나크는 당당할 수 있었다.

"나쁜 놈을 붙잡아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니, 이는 틀림없는 선행이다!"

"...그런가?"

바로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논리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저기 거꾸로 매달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내를 보면 뭔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꾸로 매다니까 힘들어 보이는데, 반대로 매달까요?"

"바로스, 너 진짜 나쁜 놈이구나? 목을 매달면 숨 막혀 죽잖아! 발목을 매달아야지."

"그러네?"

깨달음을 얻은 바로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상대의 목숨까지 염려하시다니, 도련님이 선행을 하고 있는 게 맞군요!"

"그럼!"

둘 다 손목이나 허리를 묶으면 된다는 것까진 생각이 안 미친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저 죽도록 괴로운 건 루크뿐.

"우욱! 쿨럭! 푸허허헉! 야, 이 미친, 케엑!"

처절한 비명 사이로 카르나크의 한가한 목소리가 또 울렸다.

"담가."

***

결국 루크의 탁기는 모조리 빠졌다. 놈이 지녔던 종말의 어둠도 깔끔하게 카르나크에게로 귀속되었다.

동시에 기운을 빼앗긴 루크 역시 절명했다.

상대 목숨까지 염려하니 어쩌니 해 놓고 막상 볼일 끝나니 가차 없이 죽인 것이다.

하지만 카르나크도 바로스도 그 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목적이 아니다. 그냥 살려 둬야 어둠 정제하기 쉬울 뿐이라 그런 것이지.

덕분에 루크는 온갖 고통과 절망 속에서 천천히 죽어 갔다. 어떤 의미에선 그에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공양이라 하겠다.

루크의 시체를 보며 바로스가 중얼거렸다.

"이건 하토바 교단에 연락하면 평소처럼 처리하겠죠?"

"그래. 우리도 이만 돌아가자."

창고를 떠나 두 사람은 숙소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며 문득 바로스가 물었다.

"어둠은 좀 많이 모으셨어요?"

데라트 시티에 머무른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넘었다. 그동안 사냥한 사령술사의 숫자도 상당했다.

"우리가 그동안 잡은 놈들이...."

바로스가 잠시 손가락으로 꼽아 보았다.

"어둠의 군주 셋에 질병의 제왕 둘, 죽음을 벗 삼는 자 하나였던가? 참 다들 칭호가 거기서 거기란 말이죠."

"죽벗자는 좀 특이하던데."

"요약하니까 뉘앙스가 이상해지는구만요."

어쨌든 그동안 꽤 많은 사령술사를 사냥했고, 덕분에 종말의 어둠도 꽤나 모았다.

그렇다면 슬슬 집에 돌아갈 때가 된 것 아닐까?

"뭔가 변화가 좀 있어요?"

"아직이다."

"대체 얼마나 더 모아야 하는 겁니까? 설마 온 세상에 뿌려진 종말의 어둠을 전부 모아야 하는 건 아니죠?"

"미쳤냐? 평생 걸려도 모자랄 텐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카르나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세상의 종말에 대처할 방법은 세 가지다."

"종말에 대처하기는? 그렇게 말하니 꼭 도련님이 세계의 구원자 같잖아요? 실은 그냥 자기가 싸지른 X, 열심히 치우고 다니는 거...."

"좀 닥치고. 넌 왜 이렇게 토를 자꾸 다냐?"

"네, 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시종에게 눈을 한번 흘긴 뒤,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세상이 어찌 되건 나 몰라라 신경 끄고 사는 것."

이건 불가능하다.

신경 끄고 살기엔 저지른 사고가 너무 컸다. 그래서 이렇게 싸돌아다니고 있는 것 아닌가?

"두 번째는 바로스 네 말대로 뿌려진 종말의 어둠을 전부 수거하는 거지."

이 역시 현실성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온 세상에, 수없이 뿌려지는 그 방대한 종말의 어둠을 모조리 수거한다고? 평생 걸려도 모자랄 대업이었다.

"사람답게 살아 보겠다고 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평생 떠돌아다니며 고생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세 번째 계획뿐이었다.

"어둠이 뿌려지는 근본적인 통로를 막는다."

그간 모은 종말의 어둠을 통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뿌려지는 어둠은 무작위로, 온 세상 아무 곳에나 멋대로 뿌려지는 것이 아니다.

"종말의 어둠이 비처럼 내린다고들 하는데, 그 비도 사실은 구름이 있어야 내리는 것이잖아. 어둠을 뿌리는 시공의 통로를 구름이라고 하면 개념이 얼추 비슷하거든."

아무리 카르나크라도 내리는 비를 모조리 막을 순 없다.

하지만 미리 대비해 구름의 생성을 막을 수는 있다.

"지금까지 모은 정보로 구름의 존재는 파악했어. 그러니 좀 더 정보를 모아 구름의 생성과 출현 조건까지 알아내면, 더 이상 종말의 어둠이 내리는 건 막을 수 있겠지."

물론 이 방식으로 이미 뿌려진 종말의 어둠까지 어찌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아직까진 7여신교가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바로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솔직히 칼잡이인 그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진짜 알고 싶은 건 이거다.

그래서 집에는 언제 가냐고!

"앞으로 몇 놈이나 더 사냥해야 합니까?"

대충 계산한 뒤 카르나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둠의 군주 스무 놈 정도 더?"

쉽게 말해 루크 같은 놈 20명 더 잡으면 된단 소리였다.

어쩌다 어둠의 군주라는 거창한 칭호가 삼류 사령술사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나 모르겠지만, 요새 세상 분위기가 이렇긴 하지.

바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석 달은 더 데라트 시티에 머물러야겠네요. 집사 영감님이 난리 치시는 거 아닌가 몰라."

원래는 수도 간다면서 100일 정도 영지를 비우겠다고 한 카르나크였다.

그런데 이미 그 기간은 지나 버렸다. 수도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카르나크도 아차 싶었는지 표정을 굳혔다.

"슬슬 영지에 연락을 해 둬야겠다. 좀 늦는다고 해야지."

"뭐라고 하시게요? 수도에 머물고 있다고 거짓말해요?"

"그럴 필요 있냐?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데."

수도로 향하던 도중 사령술사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발견했다.

제스트라드 남작가의 이름을 걸고 어찌 그 행태를 두고 볼 수 있으랴? 응당 놈들을 응징하는 것이 귀족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하토바 교단의 지원 아래 사령술사를 퇴치하고 있다. 덕분에 수도엔 가지도 못했다. 한 석 달 더 이러고 살 테니 기다려라.

"이러면 되지."

"그게 사실대로 말한 겁니까?"

"거짓말은 아니잖아."

"그런가?"

뭔가 아리송하긴 한데 반박을 하기도 애매했다.

바로스도 평생 카르나크만 따라다녔다 보니 일반인의 감성과는 괴리가 꽤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엄청 오래 걸리는 건 아니라 이거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으니 바로스의 표정이 도로 환해졌다.

'석 달 정도 더 고생하는 거야 할 만하지, 뭘. 게다가 맛집 탐방 다니는 것도 즐거운데.'

미식가 모드로 돌아선 바로스가 눈을 빛냈다.

"오늘 저녁은 스탈 거리에서 해결할까요? 거기 국수 요리 죽이게 하는 집이 있다던데."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다. 카르나크도 싱긋 웃었다.

"가자, 가자."

보람찬 일과를 마치고 맛집을 찾아 떠나는 발걸음은 어찌 이리 가벼운가!

그렇게 열심히 숙소로 돌아와 옷 갈아입고 도로 나서려던 참이었다.

"카르나크 남작님이시죠?"

웬 평범한 소년 하나가 카르나크를 찾았다.

"하토바 교단의 전갈입니다."

소년이 편지 하나를 건넸다.

평소에도 알리우스와는 이런 식으로 정보를 주고받았기에 카르나크는 자연스레 편지를 펼쳤다.

옆에서 바로스가 기웃거렸다.

"뭐래요? 네 번째 어둠의 군주님이라도 나타나셨나?"

카르나크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리우스가 얼굴 좀 보자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겠대."

#28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2)

7여신교에서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심문관의 위계는 세 단계로 나뉜다.

3급, 교육을 마치고 실무에 갓 투입되는 위계다.

사령술사를 직접 상대하기엔 아직 기량이 낮다. 그래서 보통은 상황이 끝난 뒤 시체 처리나 탁기에 물든 지역을 정화하는 등의 안전한 후속 조치 임무를 맡게 된다.

2급의 위계로 오르면 비로소 실전에 투입된다.

이 위계는 사령술사의 탐색이 가장 주요한 임무다.

증거를 확보한 뒤 교단에 알리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사령술사와의 직접적인 전투도 벌어지곤 한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이들도 상당하기에 교단의 주 전력은 2급 심문관을 지원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1급이 되면 어느 정도 상황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사령술사의 탐색, 증거 확보는 물론이고 직접적인 처벌도 가능하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교단의 자금도 운용할 수 있다.

그래서 1급 심문관은 부족해진 교단의 전력 대신 외부의 힘을 빌린다. 예산을 쓸 권한이 있으니 실력 좋은 모험가를 고용할 수 있는 것이다.

1급의 위계라면 단독으로도 어지간한 사령술사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니 모험가들과 팀을 이루면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1급 심문관들은 모험가를 자주 고용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근 귀족 출신 기사나 마법사의 협력을 받아 사건을 처리하곤 했다.

모험가는 돈을 요구하지만 귀족은 명예를 원하니까.

부평초처럼 떠도는 모험가야 그저 현금이 최고겠지만 이미 기득권인 귀족들에겐 영향력이 더 중요하다.

그까짓 돈 몇 푼 받는 것보다는 7여신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명성을 떨쳐 가문의 이름값을 높이는 쪽이 훨씬 이득인 것이다.

이것이 알리우스가 카르나크 일행에게 눈독을 들인 이유였다.

아무리 교단의 예산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이왕이면 돈 안 들이고 사건을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카르나크나 바로스의 강함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출신만 확실하다면 이들보다 더 바람직한 협력자도 없을 것이다.

교단으로 돌아가자마자 제스트라드 가문에 대해 알아보았고, 저들이 사령술을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부모와 형제를 사령술사에게 잃고 영지조차 빼앗길 뻔했다니! 이들이야말로 사령술사를 처단할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뭐, 죽은 란돌프는 억울해 팔짝 뛰겠지만 알리우스야 거기까진 알 방법이 없지.

겔파 마을 사건 이후 사흘 뒤, 정식으로 협조 요청을 전했다.

"하토바 교단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데라트 시티에 머무르시는 동안만이라도 교단의 성무를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카르나크는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스트라드 가문의 이름을 걸고 기꺼이 돕겠습니다."

어차피 찾아야 할 종말의 어둠이었다.

어차피 사냥해야 할 사령술사들이었다.

[그런데 공짜로 관련 정보를 넘겨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바로스가 마법 전언으로 물었다.

[마다할 이유 있지 않아요?]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교단의 협력자에겐 유능한 심문관을 붙이는 것이 7여신교의 관례다.

[이러면 하토바 교단 쪽 신관이 우리랑 같이 다니게 될 텐데요.]

보는 눈이 있으면 함부로 사령술도 못 쓰고 종말의 어둠 빼먹는 것도 불편해진다.

이를 지적한 것인데 카르나크는 문제없다는 반응이었다.

[안 그래도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상황을 미리 알아봤거든, 내가.]

요새 하토바 교단은 협조자들에게 일일이 심문관을 붙일 여력이 없었다.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일인데 아무 신관이나 데려다 쓸 수는 없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직자여야 한다.

그런데 종말의 어둠 건수가 좀 많아야지?

일손은 적은데 일거리는 많다 보니 하토바 교단뿐 아니라 대부분의 7여신교에선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니곤 협력자들에게 정보만 제공하고 직접 처리하게 하고 있었다.

[어, 그럼 우리 둘만 다닐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심지어 이득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미안해하며 알리우스가 말을 이었다.

"혹여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사정이 사정인지라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니고서는 일일이 심문관을 붙여 드리기는 힘듭니다. 대신 사령술에 대항할 성수나 부적 등은 충분히 마련해 드릴 수 있지요. 두 분의 실력이라면 충분하리라 믿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거 봐! 신관도 안 따라다니는데 성수랑 부적도 공짜로 준댄다!]

다른 이들이라면 고민해 볼 만한 리스크겠지만 두 사람에겐 오로지 득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반대할 이유가 있나?

조금의 주저도 없이 승낙하는 카르나크를 보며 알리우스는 새삼 감탄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다니 참으로 정의로운 성품이로구나, 그런데 왜 이런 이가 망나니로 소문이 났지?'

***

예전 일을 떠올리며 바로스가 중얼거렸다.

"분명 알리우스 씨는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고는 심문관 못 붙인다고 했었죠?"

"그랬지."

"그동안은 계속 서편으로 사령술사에 대한 정보를 보내 줬고요."

아까 받은 편지는 평소와는 내용이 좀 달랐다.

이제까진 데라트 시티 인근에서 출몰하는 사령술사의 소문 중 실존 가능성이 높은 것에 대한 정보를 주로 보내왔다.

반면 지금은 딱히 그런 내용이 없다. 그냥 직접 만나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정보 유출을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건...."

저녁놀이 지는 데라트 시티의 거리는 꽤나 분주했다.

완전히 해가 지기 전 귀가하려는 인파 사이로 계속 걸음을 옮기며 바로스가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 큰일이 터졌다는 소리일까요, 이거?"

"아무래도 그렇겠지?"

카르나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꽤나 급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평소엔 이렇게 빨리 다음 연락을 취하지 않았잖아."

보통은 사령술사를 하나 처리하면 사흘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루크를 처리하고 교단에 알린 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연락이 왔다.

바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은 겁니까? 큰일이 터졌다면 심문관이 옆에 붙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아니, 상황을 보면 알리우스 씨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제일 크겠네."

"물론 나도 신경은 좀 쓰이지만...."

근심하는 바로스를 향해 카르나크가 씩 웃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좋은 일일 수도 있지. 오죽 큰일이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하겠냐?"

큰 힘에 큰 사건이 따라오듯, 큰 사건에는 큰 콩고물이 떨어지는 법이다.

슬슬 거리 저편으로 하토바 교단의 신전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기대감 어린 어조로 카르나크가 말했다.

"잘하면 한 방에 어둠의 군주 열 놈 정도는 채울 수 있지 않겠어?"

***

하토바 신전에 도착한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곧바로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서자 알리우스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접견실엔 알리우스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로브 차림의 사내와 경장갑을 갖춘 탄탄한 몸매의 20대 미녀였다.

카르나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분들은?"

복장 덕분에 사내가 마법사이고 여인이 검사라는 건 알겠는데, 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의 사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명성이 자자한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르나크 공, 바로스 경. 6서클에 종사하는 릴테인이라고 합니다."

바로스가 알은척을 했다.

"아, 상급 마법사 릴테인 님이셨군요."

슬쩍 카르나크가 마법 전언을 날렸다.

[아는 사람이야?]

[우리 경쟁자요. 왜, 알리우스 씨의 협력자 중 도련님 말고도 고위 마법사 하나 있다 했잖아요?]

[아, 두 번이나 선수 친 그 양반이구만?]

이제야 카르나크도 기억이 났다.

알리우스에겐 카르나크 일행 말고도 몇몇 협력자가 더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는 이가 바로 저 릴테인이었다.

그가 여태 사냥한 사령술사의 수는 무려 여덟. 숫자만 치면 카르나크보다도 많은 것이다.

릴테인은 오히려 이쪽을 놀라워하는 것 같았지만.

"고작 두 달도 되지 않아 사령술사 놈들을 여섯이나 처리하셨다지요? 참 인상 깊은 솜씨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지요."

마음에도 없는 겸손을 떨며 카르나크는 릴테인을 살폈다.

마나를 가라앉힌 상태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대충은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래도 갓 6서클에 오른 모양이군. 아직 마력이 안정되지 않았어.'

그렇다 해도 데라트 시티 인근에서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였다.

마나를 체내의 구상 공간인 마나홀에 흘려 원형의 술식, 서클을 그려 냄으로써 현실에 이적을 실현하는 행위가 바로 마법.

강한 마법일수록 더 많은 마나와 더 복잡한 술식을 요구한다.

마법사는 서클의 숫자를 늘려 보다 고도의 마법을 시현하고, 이 서클의 숫자에 따라 마법의 경지가 나뉘게 된다.

1~2서클.

입문의 경지로 보통 견습 마법사라 불린다. 마법을 사용할 순 있지만 마법사라고 당당히 이름을 걸긴 힘든 경지다.

3~5서클.

정규 마법사라 불리며 가장 많은 이들이 머무르고 있는 경지다. 실생활에 쓸모 있는 마법은 물론 살상력이 있는 전투용 마법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다. 사람들도 마법사라고 하면 다들 이 정도 경지를 떠올린다.

6~8서클.

상급 마법사라 불리며 어딜 가도 대우받는 위치에 속한다. 단신으로 수십 명을 학살할 수도 있고 여럿이 모이면 전장의 승패를 주도할 정도의 위력도 보인다. 오러 유저와 비견되는 전투 마법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9서클.

마스터의 칭호를 지닌,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친 강자들이다. 일국의 궁정 마법사나 마법사단의 단장, 혹은 이름 높은 마탑의 주인들이 이 경지에 올라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궁극의 영역인 10서클이 있다.

대륙을 통틀어 오직 셋밖에 없는 존재로, 3인의 대마법사라 불린다. 기존의 마법과는 비교조차 불허하는, 차원이 다른 권능을 구사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현재 카르나크는 4서클의 종사자로 행세하고 있었다. 평범한 정규 마법사인 셈이다.

그에 비해 6서클의 릴테인은 훨씬 윗줄의 마법사였다.

'뭐, 어디까지나 혼돈마력에만 한정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지.'

한편 바로스는 여인 쪽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가씨는 모르겠네요. 알리우스 씨의 협력자 중 저런 미녀 검사가 있었나?]

화려한 붉은 머리에 은은한 적갈색 눈동자, 나라를 뒤집을 정도의 엄청난 미녀는 아니지만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육체 역시 오랜 시간 단련했음이 분명했다. 야생마 같은 생동감이 경장갑 위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저런 외모에 저 정도의 기량이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요.]

과연 그녀는 유명인이었다.

바로스는 물론이고, 딱히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카르나크조차도 이름을 들어 보았을 정도로.

"모험가 길드 소속, 세라티 알렌입니다."

여인의 소개에 카르나크가 살짝 놀랐다.

"아, 세라티 경이셨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도시 여기저기 맛집 탐방을 다니다 보면 이래저래 거리의 소문을 듣기 싫어도 듣게 된다.

저 여인은 요즘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모험가였다.

평민의 여식으로 태어나 여성에겐 불리하다는 무인의 길을 선택, 20살이 되던 해부터 모험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최근엔 모든 기사들의 꿈이라는 투기마저 각성해 버린,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가 바로 그녀다.

세라티가 고개를 저으며 겸양을 표했다.

"전 일개 모험가에 불과합니다. 기사도 아닌데 경이라는 호칭은 가당치 않아요."

"오러 유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서임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운 좋게 남들보다 조금 일찍 투기에 눈을 떴을 뿐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오러 유저 중에서는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하다. 가장 초입인 레드 나이트의 경지에 불과하니 본인은 여전히 미숙함을 느끼고 있겠지.

게다가 카르나크 기준에선 딱히 대단한 수준도 아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면 천재가 맞긴 하지만 저 수준의 재능은 대륙 전체를 훑어보면 족히 세 자릿수는 나오지.'

어쨌거나 이 근처에선 유명인이니 그에 어울리는 반응을 보여 줘야 한다.

카르나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희 같은 필부가 명성이 자자한 오러 유저를 직접 뵙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러자 세라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필부라니요, 여러분처럼 유명하신 분들이 무슨 말씀을?"

"유명?"

"우리가요?"

카르나크와 바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우리가 뭘 했다고 유명해져?]

[그러게요. 그냥 삼류 몇 놈 담근 것밖에 없는데.]

릴테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담백한 성정이시군요. 고작 두 달 만에 그 많은 사령술사들을 잡고도 유명해지지 않을 줄 아셨습니까?"

"아, 그게...."

바로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생각해 보니 화제가 될 일이긴 하구나.'

자신들이야 사령술이 워낙 익숙해 쉽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사실 삼류 사령술사만 되어도 어지간한 일류 마법사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쉽게 붙잡은 루크만 해도 평범한 기사나 마법사라면 5~6명은 족히 달라붙어야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이 짧은 시간에 그리도 많이 처리했으니, 덕분에 현재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하토바 교단의 어둠사냥꾼으로 데라트 시티 인근에서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유명해져도 되는 겁니까, 도련님? 예전처럼 살지 말자고 했잖아요.]

전생 때는 유명하다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 아예 온 세상에 카르나크를 모르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 인류가 공포와 증오를 담아 사령왕의 파멸을 부르짖곤 했었으니까.

[이건 악명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렇죠? 우리 예전처럼 사는 거 아니죠?]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바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이고, 사람답게 살기 어렵네요.]

[그러게 말이다. 뭐 이리 신경 쓸 게 많은지.]

어쨌든 알리우스 입장에서 거물들을 섭외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6서클의 마법사에 오러 유저라면 어딜 가도 대접받는 강자들이다.

카르나크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닌 모양이군요?"

"예."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우스가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죠."

#29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3)

대륙 서부에 위치한 7왕국 연합, 개중 북부의 유스틸 왕국과 북서부의 타룸 왕국 사이에 트리스트라는 도시가 존재한다.

이 도시는 정해진 주인이 없다.

그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만 득실거릴 뿐.

원래 트리스트 시티는 유스틸과 타룸이 세운 일종의 완충지대였다.

오랜 영토 분쟁으로 지친 양국이 각자 자국의 귀족 방계를 내세워 혼인을 시킨 뒤 트리스트 백작가를 설립, 트리스트 백국이라 명하고 중립 지역화한 것이다.

문제는 트리스트 백국이 강을 끼고 세워진 지리적 위치상 교역의 이권이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워낙 요지 중의 요지라 양국이 서로 먹으려고 전쟁까지 일으킨 것이니까.

워낙 돈도 사람도 몰리는 곳이니 이를 제대로 관리하려면 상당한 능력과 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나 트리스트 백작가엔 그 정도의 역량이 없었다. 처음부터 허수아비로 세워진 가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유스틸 왕국이나 타룸 왕국의 힘을 빌리지도 못했다. 양국 모두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허울뿐인 지배자 대신 각종 세력들이 이권 다툼을 벌였으니 도시가 엉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범죄자와 밀수꾼이 판을 치며 하루가 멀다 하고 피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세인들은 더 이상 이곳을 트리스트 백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죄악의 도시, 인세의 마경, 무법자의 천국.

이것이 현재의 트리스트 시티를 칭하는 수식어였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리스트 시티는 두 가문이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며 알리우스는 말을 이었다.

"란펠트 가문과 플라드 가문이지요."

양 가문 모두 밀수와 매춘 관련 조직에서 출발한 천한 신분이었다.

하나 세력이 커진 후로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트리스트 백작가의 후예라며 알력 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주 거짓말도 아니긴 합니다. 양 가문 모두 트리스트 백작가의 피가 흐르고는 있거든요."

양쪽 다 몰락한 백작가의 후예를 가문에 들여 혈통을 잇게 한 뒤 명분을 챙긴 것이다.

물론 유스틸 왕국이나 타룸 왕국이 이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양 왕국 입장에서는 전통도 없는 백작가의 핏줄 따위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트리스트 시티를 확실히 관리할 수 있느냐다.

누구든 상관없으니 도시를 확실히 장악해라.

그러면 그놈, 백작으로 인정해 줄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이것이 유스틸과 타룸 양국의 제안이었다.

덕분에 란펠트와 플라드, 양 가문은 수십 년에 걸쳐 죽고 죽이는 암투를 이어 오고 있었다.

"워낙 양쪽의 세력이 팽팽해 균형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알리우스가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얼마 전, 그 힘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종말의 어둠이 창궐한 탓이었다.

트리스트 시티 같은 무법 지역이야말로 사령술사가 암약하기 딱 좋은 장소다.

당연히 온갖 사령술사들이 추적을 피해 트리스트 시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시를 지배하던 기존 세력과 충돌했다.

주로 부딪친 쪽은 플라드 가문이었다.

사령술사들이 주로 노리는 것은 제물로 삼을 인간의 목숨이다. 밀수를 중심으로 하는 란펠트 가문은 딱히 충돌할 일이 적다.

반면 매춘과 노예 사업을 벌이던 플라드 가문과는 영역이 겹친다.

"그래서 주로 플라드 가문이 사령술사들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사령술사들이 가문에 영입되었다는 점이다.

"사령술 같은 용서받지 못할 힘이라도 저들에겐 꽤 매력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사령술사들도 의외로 쉽게 영입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어둠의 군주니 뭐니 해도 원래는 그냥 빌빌대고 살던 삼류 인생일 뿐이었다. 돈과 여인, 향락을 안겨 주니 바로 넘어가 버렸다.

"우연히 힘을 얻었을 뿐인 하찮은 자들이니 당연하겠지요."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며 알리우스는 설명을 이어 갔다.

"사령술의 힘을 얻은 플라드 가문은 팽팽하던 균형을 깼습니다. 매섭게 란펠트 가문을 몰아치며 트리스트 시티의 전권을 장악해 갔지요."

"그렇군요."

이야기를 듣던 세라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현재 트리스트 시티는 플라드 가문이 장악했겠군요?"

그리고 저 플라드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자신들이 모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알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승리한 쪽은 란펠트 가문입니다."

"네?"

당황한 세라티를 향해 그는 고소를 지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지요?"

몰리던 란펠트 가문이 상대에게서 사령술의 흔적을 발견, 예전부터 관계를 맺던 하토바 교단에 그 사실을 알린 것이다.

일단 사령술의 존재가 확인되자 대지의 교단은 바로 움직였다. 란펠트 가문 역시 평소와 달리 전적으로 협조했다.

현지의 협력을 얻어 교단은 매섭게 플라드 가문을 몰아쳤다.

"결국 오랜 암투는 란펠트 가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사령술과 관련된 이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플라드 가문은 몰락해 간신히 명맥만 남아 있지요."

이해가 안 가 릴테인이 물었다.

"그럼 저희를 부르신 이유는 뭡니까? 이미 상황 다 끝났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하아, 그게 말입니다...."

알리우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스트 시티를 장악한 란펠트 가문 쪽도 사령술사를 부리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거든요."

***

란펠트나 플라드나 범죄 조직이긴 마찬가지다.

그놈이 그놈인데 한쪽만 선량하고 도덕적으로 움직일 리가 있나?

란펠트 가문도 플라드 못지않게 사령술사들을 열심히 영입했던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령술의 힘에 취한 플라드와 달리 란펠트는 최대한 저들의 존재를 숨긴 채 움직여 왔다는 점.

이것이 초반에 란펠트 가문이 힘없이 밀린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이것이 그들의 노림수였던 것 같습니다. 7여신교의 힘을 빌려 상대를 확실히 처리하고 자신들은 힘을 유지할 속셈이었겠지요."

마법사 릴테인이 기막혀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사령술사를 부리는 주제에 상대를 사령술사로 고발했다는 겁니까? 교단의 신관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고요?"

"종말의 어둠을 지닌 사령술사들끼리의 전투는 피아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단에서도 이번에 알아차린 사실이지요."

사령술을 구사하면 주위에 흔적이 여실히 남는다. 7여신교가 사령술사를 색출하는 가장 주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쪽 모두 사령술을 써도 흔적은 똑같은 종말의 어둠밖에 남지 않는 겁니다. 이긴 쪽이 상대를 사령술사라고 고발해도 교단 입장에선 딱히 의심을 하지 않았지요."

"여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무도함이라니, 정녕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군요. 하하...."

릴테인이 헛웃음을 흘릴 때였다.

얌전히 듣고 있던 세라티가 문득 옆을 보며 의아해했다.

"바로스 경은 왜 그렇게 땀을 흘리세요?"

"네? 아, 아뇨, 그냥 좀 더워서요."

"더우세요? 오늘은 오히려 쌀쌀한 날씨인데."

"제가 몸에 열이 좀 많아서...."

"...?"

아무래도 찔리는 게 있다 보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다.

애써 변명하며 바로스는 열심히 카르나크의 눈치를 보았다.

'도련님은 표정 관리 잘되시나?'

카르나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결백, 관련 없음 그 자체다.

심지어 저 사이에 끼어서 같이 혀를 차고 있다.

"그래서 사령술사들은 상종 못 할 존재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놈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면 곤란하지요."

바로스는 감동했다.

'와, 저 뻔뻔한 인간 보소?'

역시 100년 넘게 얼굴에 철판 깔고 산 양반의 연기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저 혐오스럽다는 표정만 지은 채 카르나크가 말을 이었다.

"결국 현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군요."

겉으로는 7여신교의 힘을 빌리고 뒤로는 사령술사들을 부려 란펠트 가문은 역전에 성공했다. 그렇게 명실공히 트리스트 시티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개적으로 란펠트 가문을 사령술 건으로 조사할 순 없겠군요. 이미 무고하다는 판단을 내린 하토바 교단의 체면이 손상될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일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면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보다 소수의 강자들을 움직이는 쪽이 낫다.

"하토바 교단의 실수이니 어떻게든 저희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것이 상부의 의견입니다. 단순한 체면치레 문제를 떠나 교단의 신뢰가 걸려 있으니까요."

알리우스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애초에 인간사에서 체면이 중요시된 이유는 잃었을 때의 실질적인 손해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체면이 손상된다는 건 신뢰가 손상된다는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그만큼 타인의 협력을 얻기도 어려워지며, 협력을 얻기 어려워지면 사령술사를 붙잡는 일 또한 힘들어지니 그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를 늘리게 된다.

"과하면 독이 되지만 필요한 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체면인 법이죠. 상황은 이해했어요."

상황을 파악한 세라티가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출발하나요?"

"내일 아침 바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급하게 움직이시네요? 하긴, 오늘도 꽤나 다급하게 저희를 모으셨지요."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알리우스가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란펠트 가문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하토바 교단은 몇 차례 인원을 투입해 란펠트 가문을 수색하려 했다. 그리고 전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 연락이 완전히 끊겨 버렸지요. 그야말로 허공에서 증발된 것처럼."

희생자들은 어설픈 초짜들이 아니었다. 숙련된 어둠사냥꾼이자 경험 많은 모험가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아무 흔적 없이 지워 버린다는 건, 아무리 란펠트 가문이 한 도시를 장악하고 있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카르나크가 그 점을 짚었다.

"이쪽의 정보가 새어 나가고 있군요?"

"네."

부끄럽다는 듯 알리우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현 란펠트 가문의 제일 큰 용의자 중 1명이 하필 저희 교단 관계자라서 말입니다."

혐의가 걸린 이는 트리스트 교구의 교구장, 슈트라프 주교였다.

하토바 교단 내에서도 고위직의 성직자로, 란펠트 가문을 도와 플라드 가문을 몰아치는 데 선봉의 역할을 했던 이이기도 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챘지만 감히 공론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토바 교단의 성직자가 사령술사와 손을 잡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그래서 이 작전은 어디까지나 알리우스 독단이라고 했다. 심지어 상관인 데라트 시티의 교구장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다행히 저는 1급 심문관이라 이 정도의 권한은 있으니까요. 나중에 사후 보고를 올려도 문책당할 일은 없습니다."

그가 세운 계획은 이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알리우스며 카르나크 일행, 릴테인과 세라티가 따로 움직인다. 저마다 평소처럼 인근의 사령술사를 탐색하는 척하는 것이다.

어차피 요즘은 대륙 어느 곳이건 사령술에 대한 소문이 넘쳐 나니 이런 움직임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도중에 합류해 정체를 감춘 뒤 트리스트 시티로 향하는 거죠. 도시에 잠입해 란펠트 가문의 꼬리를 잡을 셈입니다."

세라티의 안색이 굳었다.

"위험한 일이네요."

그녀뿐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틀림없이 사령술사를 상대하는 전문가들이다. 그동안 알리우스에게 협조하며 익히 증명을 해냈다.

하지만 이번 적은 사령술사뿐만이 아니다.

한 도시를 수십 년 가까이 지배해 오던 거대한 세력이 진정한 상대.

"도시 전체가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 아닌가요?"

"그래서 여러분을 부른 겁니다."

란펠트 가문을 벌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란펠트 가문을 벌할 '증거'를 찾는 것이 목표일 뿐.

신뢰의 눈빛으로 알리우스가 좌중을 돌아보았다.

"여러분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기 몸 하나는 빼낼 수 있을 테니까요."

#30화. 8. 죄악의 도시 트리스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