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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프롤로그

세상이 망했다. 처참하게.

[ 정말로 추억의 과거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다행히,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명) ]

지금의 길은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가져본 적 없던 초월적인 권력의 길을.

그 시작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미치광이 빌런 플레이어들.

그것들에게 복수를 넘어, 완전한 충성과 복종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 하여 마침내, 세상을 삼키고.

정상화하리라.

2화 최후의 모험가

"···."

갑옷 차림의 한 남자가 사막의 한가운데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명) ]

아주 한참이나 그 허무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손으로 돌렸다. 꼭 쥐고 있던 무지갯빛 단풍잎으로.

"네로. 이제 진짜 난··· 혼자네."

마치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기다렸지만.

"···."

당연히 단풍잎 따위가 그에게 대답을 해 주지는 않았다.

-[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단풍잎··· 부탁해요.

그 대신 흐릿한 기억 속의 목소리와, 아이템 알림만이 환청처럼 울렸을 뿐.

"부탁···."

세상에 플레이어들이 나타난 지 20년. 멸망한 세상을 홀로 떠돌아다닌 지 10년.

"부탁, 한다니···."

한우현이 환청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그것은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기억에 남은 그녀의 목소리가 불규칙적으로 희미하게 튀어나오는 것에 불과했지만.

"쓰레기 같은 세상, 쓰레기 같은 인간들..."

-제발 모두를 구해주세요, 한우현.

"내가, 구하긴 뭘 구한다고... 난 내 자신도 구하지 못했는데."

-저는 당신을 믿어요.

"좆망겜..."

그럼에도 그 맥락에 전혀 맞지 않는 목소리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정신병자 플레이어 새끼들은 네 생각보다도 훨씬 악의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World of Yggdrasill은 흔한 한국형 2D 횡스크롤 MMORPG였다.

직업을 골라 전직을 하고, 스킬을 배우고, 사냥을 해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파밍하고 강화하고, 공격대를 이뤄 보스도 잡는.

중세 판타지풍 세상에서 성장해가며 모험을 한다는 너무나도 흔한 컨셉의 게임.

다만 특별했던 점 하나는.

게임의 수준.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좀, 많이, 아주 많이.

쓰레기 같기로 유명했다는 것.

-아 그저.. ^확률주작777없는슬롯머신없뎃컨텐츠소모속도조절5중나생문쌀먹도박햇살론팩트는게임이건강해지는중인비정상의정상화겜^

그리고 현실로 튀어나온 미치광이 빌런 플레이어들, 그 능력의 근원이었다는 것.

게임 스킬 능력을 각성한 플레이어의 대부분은 그 게임이 가지는 악명에 걸맞은 초월적인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신병자. 혐오주의자. 분탕종자.

-또, 또 실패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도무지 협조하지 않습니다!

-테러입니다! 빌런들이 통제 불능입니다!

-빌어먹을 정신병자 빌런 새끼들! 세계 멸망이 코앞인데!

-대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성과 지능을 가지고 있기에 저러는 거야?!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게임 플레이어 정신 분석 통계에 의하면, 고 레벨 플레이어들의 80% 이상이 반 사회성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도대체 어째서 저딴 미치광이 게임 중독자들에게 이다지도 불합리한 힘이 주어진 거야···!

-그런 분석을 할 때가 아닙니다! 이번 던전 공략도 실패하면 던전 브레이크입니다!

-게임 설정 대로면 일주일 내로···.

-던전 밖으로 보스가 튀어나온다면, 격파 가능성이 어떻게 되지?

-안 그래도 낮은데, 거기서 절반으로 떨어집니다.

-···이대로 끝인가?

심지어, 빌런 플레이어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게임에서는 으레 플레이어들이 공략해야 할 목표.

던전과 보스 몬스터라는 대적 요소가 등장하니까.

하지만 게임에서의 구현보다 훨씬 더 불합리하고 무시무시하게 바뀌었기에.

미국 정부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시도한 던전 클리어.

그 모든 시도들은 게임과 다르게 너무나 높은 난이도 때문에, 결국 겨우 12개 던전 중 3개의 격파에 그쳤다.

제한 시간을 넘자 던전 밖으로 강림하며 더욱 강력해진 보스 몬스터는, 당연히 훨씬 더 막기 어려웠고.

어떻게든 정상인 플레이어들을 세계 곳곳에서 긁어모아 결성한 미국 국방부 산하 공격대도 몇 번이고, 끊임없이 무너졌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가 반복되었다.

다행히 하나 하나의 실패가 곧 공격대의 전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 더는 못 하겠어요. 대체 어떻게 저런 괴물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보스를 잡는 건 불가능해요.

-미국 정부도 이미 기능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는데, 우리끼리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우현, 라일리. 당신들도 포기하시고 그냥··· 쉬세요.

-어차피 둘 다 이제 만렙이라 초월급 스킬 있으니까, 살아남을 순 있을 거 아냐.

-멈춰! 아니야! 아직 막을 수 있어!

-···보내주세요, 한우현. 억지로 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길. 그래, 가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레이드를 실패할 때마다, 희생을 최소화하며 성공적으로 후퇴해서 살아남았더라도.

하나 둘씩 공격대원들은 의지가 꺾여나갈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몇몇 보스를 어마어마한 피해를 낸 끝에 토벌한다 해도.

허무하게도, 시간이 지나자 그것들은 끊임없이 던전에서 부활해 튀어나왔다.

모두가 하나 되어 힘을 합쳐도 대적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수준의 초월적인 괴물들일진데, 부활까지 한다?

전 세계가 빌런 플레이어들에 의해 갈등의 도가니에 빠진 상태로는,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세상은 완전히 망했다.

"...하지만, 이딴 결말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

그 끝맺음과 함께 단풍잎의 정보창이 보다 자세히 활성화되었다.

[2005년 1주년 기념 아이템 : 추억의 단풍잎]

[종류 : 소비 아이템 / 이벤트 아이템]

[효과 : 현재 캐릭터의 플레이 기록을 되짚어, 가장 그리운 추억의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추억을 느껴 보세요!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오픈 첫날부터, 1주년이 될 때까지 꾸준히 플레이해 주신 원로 플레이어분들께만 드리는 운영진의 마음입니다!]

이 아이템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고귀했던 위인.

인류의 수호자이자, 최후의 공격대장.

동시에 한우현의 구원자이자, 친우이자, 그 어떤 다른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치 소중했던 사람.

그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었으니까.

[ 아이템 교환 신청 : 네로 ]

[ 수락하시겠습니까? ]

-단풍잎··· 부탁해요.

라일리 그레인저. 캐릭터 네임 Nero.

세계 최강의 힐러이자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분탕종자들에 의해 허망하게 그 최후를 맞이한 영웅.

-아무래도, 이제 레이드는··· 불가능해.

-하하··· 그렇네요. 그래도, 저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거에요.

모든 공격대원들이 자포자기한 채 흩어지고 도망쳤을 때.

그녀의 옆에 남았던 플레이어는 단 한 명 뿐이었다.

한우현. 캐릭터 네임 아서. 직업은 성기사.

그 한우현도 원래는 다른 나약한 플레이어들과 그리 다른 인간 군상이 아니었다.

보스 레이드에 처음 참가한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다 죽어버리자, 그냥 자기도 죽자는 마음에 몸을 던진 것에 불과했다.

별생각 없이 죽을 자리를 찾았기에, 죽는 순간까지 애초에 떠날 생각이 없었던 사람.

라일리 그레인저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런 그를 끊임없이 설득하고 응원했다.

가르쳐 주었으며, 인정해 주었고, 방향을 알려주었다.

-첫 레이드 일정이 잡혔어요. 저랑 당신이 선두에 설 거고요.

-나 같은 폐인이, 선두에?

-쓰레기라뇨? 당신이 지금 얼마나 중요한데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탱커라고요?

-그딴 게 무슨 의미가. 내가 가장 강한 탱커라고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능력이 아니야. 내가 잘하는 건 게임뿐이라고··· 그마저도 현실에서는 아니야.

-용기를 가지세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

-그 모든 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요. 저와 당신은 같아요. 당신을 믿으세요. 우리를 믿으세요.

처음으로 한우현을 무한히 믿고, 응원하고, 격려해 준 사람.

아주 오래된 우울증, 피해망상, 인간 불신을 가진 병자였던 한우현이었지만 점차 그녀에 감화되었다.

그래서 한우현은 그녀에 힘을 실었다.

모두가 포기하고 도망치던 순간까지도, 예정된 멸망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 뒤를 따랐다.

최소한 받은 만큼은 돌려주고 싶었으니까.

그녀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한우현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 선의는 보답 받지 못했다.

-어이, 라일리. 2사도 거의 잡아가는 거 같아서 묻는 건데. 그 아이템이 뭐지?

-그러니까, 미국 정부가 숨겨 놓은 아이템들 다 가지고 튀었다며.

-···?

-오래 살게 해 주는 물건이 있다며? 그게 뭐야?

-야, 저리 꺼져. 나한테 먼저 말 해 봐. 그 아이템이 뭔데?

-···!

-이런 젠장! 라일리 이 씨발 년아! 아이템! 그거 정체가 뭐냐고!

-아이템! 아이템 내놔! 뭐든지 다 처 내놓으라고! 다 꺼내!

-이 씨발! 안 내놓으면 죽인다!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빨리! 빌어먹을!

-젠장, 니 년이 자초한 거야!

-···!

-어? 어이, 잠깐만! 위협만 한다고...

-협박을 하라니까 왜 칼빵을 놔!

-···씨발, 몰라! 도망가!

-모르겠다, 일단 튀어!

최후의 레이드 시도가 끝나던 순간.

세계 유일의 퓨어 서포팅 클래스 랭커의 죽음은.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었던 보스 격파의 가능성을 0으로 만들었으며.

세상의 확정된 멸망이라는 명제에 못을 박게 만들었다.

"···."

라일리 그레인저.

숨어만 지낸다면 충분히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만렙 플레이어.

하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성인.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플레이어들에 의해 배신 당해 죽었다.

세상이 망하는 순간까지 협동은 커녕 분탕과 광기에만 절어있었던 머저리 게임 중독자 폐인 새끼들에 의해서.

끔찍하게도 멍청하고 이기적이기에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쓰레기들.

그 지능이 너무도 낮아 원숭이, 유인원만도 못한 것들.

···그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조금만, 더 잘 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강했더라면... 아니, 그냥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주르륵

한우현의 눈에서 피눈물이 맺혔다.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만이 끓어올라서.

죽기 직전 발악하는 보스 몬스터를 막느라,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겨우 보스를 죽이고 나서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장난 뒤였다.

남은 사제가 그녀가 유일했기에, [부활]도 불가능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 사로잡은 빌런 플레이어에게 물으니, 그 대답이 가관이었다.

-대체 왜 그랬던 거냐!

-라, 라일리. 걔한테 세상이 망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그딴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격분해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지만.

-···진짜였다고? [추억의 단풍잎]?

놀랍게도 그 말이 진실이었다.

서비스 극 초창기 때부터 게임을 해 왔던, 한우현도 전혀 존재를 알지 못했던 아이템.

"과거···."

그것을 내려다보며 그는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라일리와 다르게, 한우현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그다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우울증과 피해망상에 빠져, 세상이 게임이 되고 나서도 반 년 간 방구석에서 잠만 잤다.

또 반 년 간은 그를 강제로 끄집어낸 동생의 손에 끌려 다니기만 했다.

부모님도 모두 죽고, 동생마저 죽고 난 뒤.

그리고 세상이 거의 망하고 나서야 자살하는 심정으로 보스 레이드에 뛰어들었다.

너무도, 너무도 늦게.

그렇게 만난 라일리 그레인저에게 가르침을 받은 끝에, 비로소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세상이 게임이 된 첫날부터 미국 정부와 함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한 라일리와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랬기에.

시간을 되돌린다면 한우현은 정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 만한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잘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었으니까.

라일리 그레인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마지막 순간 아이템을 그녀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넘긴 것이리라.

"···라일리. 네 의지를 헛되이 할 수는 없지."

단풍잎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이미 마음은 정해 놓은 상태였다. 회귀의 준비도 이미 모두 마쳤다.

구태여 지금에서야 이 단풍잎을 꺼낸 것은, 정말로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라일리 그레인저를 죽인 그 쓰레기 같은 것들. 마지막까지 분탕질에 미쳐 있었던 병신들.

그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최소한 죽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비록 그의 손으로 죽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은 확인했다.

[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명) ]

이제 세상에 남은 플레이어는 그 뿐이다. 상태창이 명백히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혼자라는 뜻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스 몬스터들에게 있어,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목표는 한우현 뿐이라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쿠릉, 쿠르르릉

플레이어의 초월적인 감각 능력.

-까끼끄르가르에에엑? 까찌그아아아!

그것이 저 멀리서 죄어들 듯이 다가오는 괴물들의 전조를 느끼게 해 주었다.

"···하."

한우현은 수 백 킬로미터 밖에서 다가오는 흉악한 소리를 들으며 조소했다.

천둥 소리는 10사도 천둥왕. 그리고 울음소리는 8사도 흉합체의 상징이었다.

보스 하나만 해도 상대는커녕 간신히 도망이나 칠 수 있을 뿐인데.

하물며 둘이라면, 도주조차 불가능한 상황.

"하하."

그러나, 한우현은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미칠 듯이 웃었다.

"네로. 네 부탁을 들어주겠다. 내가 세상을 구하겠어."

그 눈이 광기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너와는 다를 것이야. 세상을 망친 쓰레기, 미치광이, 버러지들!"

"그들을 모조리 지배하고, 나에게 복종시킬 것이니까!"

동시에 단풍잎을 높이 치켜들었다.

[ 현재 보유 아이템 수 : 193,274,728개 ]

"자산."

[ 캐릭터 레벨 : 300 ]

"무력."

[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명) ]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지식으로."

단풍잎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을 거스르는 빛이 그를 감쌌다.

"세상을 내 권력 아래 둘 것이니!"

그 빛의 터져나감과 함께, 회귀자回歸者 한우현이 울부짖었다.

"그것이 내 복수다!"

3화 회귀자 한우현 (1)

온 세상이 회색으로 물들며 멈췄다.

[추억을 만끽하세요! 추억을 느껴보세요···]

뒤이어 유치할 정도로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가득 찬 듯한 그래픽의 질문창이 떠올랐다.

아마도 옛적 색감을 보여 줘, 추억에 젖게 하려는 의도로 추측되는 모양새.

"···."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우현은 그 의도에 공감할 수 없었다.

세상을 미치광이 플레이어들에 의해 멸망하게 만든 게임 따위, 오픈 초창기 때부터 20년이 넘게 했다고 해도.

추억이나 그리움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당신이 가고 싶은 추억의 때는 언제인가요?]

하지만 상태창은 그의 심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묻는다.

"최대한, 최대한 먼 과거. 세상이 망하기 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전."

한우현도 위로 따위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곧바로 답했다.

최대한 먼 과거로. 기왕이면 저 저주 받을 게임이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전의 과거로 가고 싶다는 최선의 답을.

[탐색 중입니다···]

[오류! 캐릭터 생성 날짜와 충돌 오류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갈 수 있는 가장 먼 추억의 때는 7305일 전입니다.]

···역시.

당연하게도, 제한이 있었다.

"쯧."

정확히 20년 전, 더 정확히는 2025년 1월 1일 자정. 세상에 게임이 덧씌워졌다.

따라서 과거로 간다면 최소한 그 때까지는 되돌아가야 했다.

혼돈과 광란의 첫 일주일. 강력한 랭커급 플레이어 다수가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허무하게 죽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최소일 뿐, 기왕이면 더 먼 과거로 갈 수록 좋았다.

플레이어의 능력과 아이템이 없더라도 그가 아는 모든 지식으로 미리 준비와 대비를 할 수 있었으니.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현재 캐릭터의 플레이 기록이니까, 캐릭터가 현실에 나타난 게 첫 기록···."

아쉽지만, 이게 최선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날짜 설정 완료 : 2025년 1월 1일]

[정말로 추억의 순간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선택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주의! 이 아이템은 소비 아이템으로, 사용 시 '영구적'으로 소멸됩니다.]

[주의! 추억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능력치의 변동 혹은 손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예 / 아니오 ]

마지막으로 예, 를 누르기 직전.

한우현은 다시 한 번 그 주의 문구를 확인했다.

[추억의 단풍잎] 외의 아이템이 손실 된다는 내용은 확실히 없었다.

그렇다면 인벤토리는, 확실히 무사할 것이다.

[현재 보유 아이템 수 : 193,274,728개]

그의 계획의 가장 큰 중추이자 발판.

20년 간 세계를 떠돌며 긁어 모은 무수한 아이템들.

전 세계 모든 서버의 단종 아이템과, 현실에서 천재들이 개발하고 시험하며 만들어 낸 아이템들.

"...예. 2025년 1월 1일."

그 모든 아이템들의 확인을 끝내고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 때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확인되었습니다. 추억의 그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즐거운 추억의 옛날 그 시절!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플레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억? 추억이라고? 미친 소리..."

그의 비웃음과 함께, 단풍잎이 화려하게 터져나갔다.

알록달록한 단풍잎이 무수히 쏟아져 내리듯 흩날리며 주위를 뒤덮었다.

* * * *

"...아."

한우현은 정신을 차렸다.

[ 캐릭터 네임 : 아서 ]

-딸깍. 딸깍.

-콰과곽

지금 그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왜? 게임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서.

어떤 게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한우현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자퇴에 이어 대학교 제적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게임.

-보라! 이 세상의 진정한 노동자들! 우리의 고통을 노래하노라!

-매일 극심한 고통을 견디며 우리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신이 있다면 제발 들어주소서!

화면 한 쪽에서는 사냥과 동시에 보기 위한 유튜브가 틀어져 있다. 정의로운 청년이라는 자가 노래하는 장면을 보니 뮤지컬 영상인가 보다.

사냥이 너무나도 지루하기에 유저들이 흔히 행하는 멀티태스킹.

"크, 크흐, 크흐흑···"

그 증오스러운 화면을 보며 한우현은 흐느꼈다.

세상이 뒤바뀌자마자, 바로 격분한 플레이어들에 의해 게임사와 서버가 파괴 당해서 서비스가 종료된 게임.

정말로, 정말로 시간을 되돌렸음을 증명하는 가장 큰 증거.

그 앞에는 불어 터진 라면과 쉰 내가 나는 김치가 놓여 있었다.

게임을 하며 먹기 위해 올려놓은 것이었을까?

한우현은 떨리는 손으로 김치를 집어 씹었다.

-으적

시고, 맵고, 짜다.

맛대가리는 더럽게 없었지만, 너무도 오래된 기억 속의 맛.

마지막으로 한국 음식을 먹은 것이 언제던가?

"크흐으아아악···!"

한우현은 웃었다.

기쁨의 웃음이 아닌,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광소.

"···흐."

광소를 그치고선 자연스럽게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사냥을 하던 캐릭터도 따라서 움직임을 멈췄다.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딸깍

[주의! 현재 적용되어 있는 버프 스킬 32가지와 버프 물약 14가지의 효과가 해제됩니다!]

[주의! 게임 종료 시 8시간 25분 동안 증폭된 경험치 증폭의 펜던트 효과가 초기화됩니다!]

쏟아지는 경고 문구. 하지만 한우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딴 건 그에게 전혀 중요치 않았으므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더 이상 20년의 인생을 쓰레기 게임에 갈아바친 우울증, 피해망상, 불안장애 환자 한우현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수백 번, 수천 번을 부조리한 괴물 보스 몬스터와 빌런 플레이어들과 맞서 싸우고 살아남았던.

스킬 대인 전투전의 통달자.

플레이어 전술 지휘의 1인자.

대 보스 레이드 베테랑 공격대장.

세계 최강의 탱커이자 성기사.

전 세계의 모든 아이템을 긁어모은 최후의 플레이어.

그러나 결국에는 실패한, 멸망한 세계의 회귀자.

아서가 있을 뿐이었으니까.

"시간은? ···응?"

회귀 전, 너무도 오랜 홀로 방랑하는 나날로 버릇이 된 혼잣말.

자연스레 그를 내뱉은 한우현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뚱뚱하고 비대한 몸매. 기름진 피부와 머리카락. 몸도, 생각의 속도도 느려 터졌다.

둔하다.

회귀 전의 그가 가졌던 이상적인 플레이어의 육체와 너무나 달라, 이질감이 든다.

그래서 자연스레 시각을 확인했다.

[2024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01초]

그의 예상과 달리 게임화 직후가 아니라, 그 직전이었다.

차라리 좋다. 아니, 오히려 좋다.

세상이 게임으로 덧씌워진 날은 2025년 1월 1일.

그 날 자정, 모든 플레이어들은 도저히 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수마에 빠져들었다.

평소 같으면 밤 새 게임을 하는 폐인 플레이어들도 하나같이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의 졸음.

따라서 원래라면, 한우현도 이맘 때쯤 아무 생각 없이 졸아버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덜걱

의자에서 일어난 채. 이번에는 참기로 했다.

플레이어의 육체로 탈태하는 과정. 그것을 정확히 느껴 볼 심산이었다.

그런 판단 하에 한우현은 눈을 부릅떴다.

"···큭."

견딜 수 없을만치 심한 졸음이 곧 느껴졌다.

[2024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55초]

하지만 참았다.

20년 동안 한우현은 수 없이 보스 몬스터들과 빌런 플레이어들을 상대했다.

그 모두를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살아남았다.

그 모든 끔찍했던 일들과 시간에 비한다면.

이까짓 졸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024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59초]

그러니까.

"반드시, 해 내겠어. 모든 것을··· 바꿀 것이야."

그 의지의 되뇌임과 함께, 시야가 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2025년 1월 1일 오전 00시 00분 00초]

뇌 한가운데 있는 송과체Pineal Gland가 폭발적인 힘을 내뿜었다.

플레이어의 모든 초월적인 능력의 근원.

데카르트가 주장하길, 영혼과 신비를 관장하는 뇌의 심층부에 위치한 숨겨진 진짜 뇌.

송과체에서 맥동하듯이 퍼져나가는 이그드라실 포스Yggdrasill Force가 그의 육체를 힘을 쓰기 적합한 형태로 개조하고 뒤틀고 승화시킨다.

"...!"

1초.

아니, 0.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한 한우현은 분명히 느꼈다.

뻗어나가는 힘의 가지들. 게임 내에서 모든 힘과 신비와 마법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원.

순서대로 간뇌, 뇌줄기 전체, 대뇌, 이어서 뇌 신경, 척수 신경, 몸 전체의 말단 말초 신경 하나하나까지 파고들며 퍼지는 그 구조체들.

동시에 온 몸의 근육과 뼈, 피가 증발하듯이 타오른다. 초월적인 물질들로 대체된다.

그 모든 과정을, 명확하게 느꼈다.

"흐으, 흐으으, 크으으···"

엄청난 고통이었다.

잠들기는커녕, 기절했다고 해도 이것을 도저히 버틸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의 고통.

"크흐윽···!"

하지만 버텼다.

그럴 가치도 있었다.

송과체에서 뻗어나가고 지배하고 조종하는 힘과 에너지의 가지, 구조, 순서···

그 모든 것이 뇌에 새겨지듯이 그려졌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

한우현은 베테랑 플레이어였지만, 그 힘을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플레이어는 아니었다.

이제는, 다르다.

그 과정을 명확하게 느끼고 이해했다. 보다 더 완벽하게 힘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그드라실 포스가 움직이고 몸에 깃드는 원리를 똑똑히 목도하였으므로.

그리고.

[2025년 1월 1일 오전 00시 00분 01초]

지옥과도 같았던 1초가 지났다.

한우현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세상의 해상도가 달라졌다. 선명하고, 또렷하며, 모든 것이 정확하게 보인다.

시야의 위치도 달라졌다. 20cm정도 더 높아졌다.

힘이며 뇌의 연산 속도, 반응 속도도 말할 것 없이 달라졌다.

마지막 점검을 할 차례였다.

-끼이익

한우현은 거울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갔다.

과거의 그는 원래 자기 모습을 마주치기 싫어했기에, 일부러 방에 거울을 두지 않아서.

거울은 화장실에만 있었으니까.

"상태창."

예술적인 9등신의 비율을 가진 금발청안의 조각 미남 서양인을 보며 한우현은 중얼거렸다.

탁하고 갈라진 가래 낀 목소리 같던 2분 전까지의 목소리와는 아예 딴 판인, 미성의 목소리로.

===

캐릭터 네임 : 아서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02만 2941명)

직업 : 성기사

레벨 : 3??

···

===

그리고, 상태창을 처음 외침과 함께.

알림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Lv. 300에 도달하였습니다!]

[Lv. 20 고유 스킬 '여왕의 방패'가 초월합니다...]

[Lv. 300 초월급 스킬 '절대 방어'를 얻습···##@%₩&]

[오류! 오류! 오류!]

"뭐야? 오류?"

한우현이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캐릭터의 능력치를 재조···₩&%@]

[오류··· 오류··· 오#₩@&]

파박하는 듯한 번쩍임과 함께, 상태창이 마치 터지듯이 꺼졌다.

"이런 씹... 이게 뭐야?"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그 텅 빈 자리를 울렸다.

4화 회귀자 한우현 (2)

-치익

차분히 생각하기 위해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땄다.

그의 취향은 잘 익은 레몬과 라임의 즙을 짜 만든 수제 콜라였지만, 지금 그런 짓거리를 할 여유까진 없었으니.

그냥 입에 털어 넣었다.

"···당도 조절이 좀 별론데."

어쨌든, 10년 만에 마신 진짜 콜라.

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보자. [상태창]."

-지지직

"···."

여전히 상태창은 전혀 그 기능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노려보며 한우현은 침착하게 그 이유와 기전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설마 능력치의 변동이나 손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상태창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단 뜻이었나?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큰 위기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상태창은 말 그대로 플레이어의 정보를 나타내는 정보창이었을 뿐. 플레이어 능력의 근원이 아니었으므로.

즉, 딱히 없다고 해서 전투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능력치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직접 시험해서 확인하면 그만이니까.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것부터 확인해 봐야 할 듯 했다.

"[인벤토리]."

오히려 상태창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파앗

그의 눈이 빠르게 아이템들의 목록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미래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모든 아이템들이 그대로였다.

[ 현재 보유 아이템 수 : 193,274,728개 ]

한우현은 라일리 그레인저와 함께 가장 마지막까지 활동했었던 공격대원이었다.

따라서 공격대의 후원자였던 미국 정부가 만들거나 수집한 모든 아이템들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미국 정부와 전 세계가 멸망하고 나서 그 아이템들은 조금씩 소모되었지만, 여전히 많았다.

라일리가 죽고 나서는 무수한 빌런 플레이어들도 사냥했다.

그들이 다른 플레이어들을 배신하고 협박해서 얻은 귀중한 아이템들도 쓸어 담아 가지고 왔다.

-[...]

-[재설정상자 473,231개]

-[초월의 불꽃 382,215개]

-[...]

그 모든 아이템들이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었다.

창을 보던 한우현은 이내 아이템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금괴] 1개."

한우현의 중얼거림과 함께 밋밋한 모양의 큼직한 금덩이 하나가 그의 손 위로 떨어졌다.

10kg짜리 금괴.

게임 내에서는 중급 제작 재료였던, 그리고 대장장이 시스템이 삭제되고 나서는 단종 되었던 잡템.

현실의 금과 완벽히 같은 물질이기에, 그 쓸모를 깨달은 한우현이 회귀 전 20년에 걸쳐 아드득 바드득 긁어모은.

-[금괴 20,218개]

수백 톤에 달하는 황금.

개인이 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믿을 수 없는 재화이자,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규모의 현물 자산.

그러나... 그리 많음에도, 결코 한우현이 모든 계획을 세우고 그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결코 넉넉하지는 않은 재화.

전 세계를 아우르는 플레이어들의 유일 집단을 만들고.

그를 뒷받침할 무수한 전문가들을 고용하며 육성하고.

방해하거나 반항하는 빌런들을 죄다 찍어누르고 진압하고.

그 과정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을 전 세계 각국 정부를 제어하고 통제하고.

아이템들도 게임 시스템의 수준을 뛰어넘도록 연구하고.

...그가 할 일이 너무도 많다. 하나하나 세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그래도.

그가 회귀 자체에 뭔가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던 우려들에 비하면.

종합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과거와 미래의 무수한 아이템들도 모조리 성공적으로 가지고 온 데다가.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과 필요한 지식 그리고 정보들도 완벽히 숙지하고 암기했으니.

능력치도 시험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회귀 전의 그와 비교해서 터무니없이 약해진 느낌은 아니다.

-휘익

팔과 다리를 한 번 굽었다 피며 기지개를 피고, 육체의 성능을 가볍게 체크할 준비를 했다.

"흡···!"

한우현은 온 몸에 빛을 끌어올린다는 심상을 떠올렸다.

-우우웅

이내 전신에 초월적인 기운이 흐르며 육체가 강화되었다.

다행히, 조금은 약해진 듯 했지만.

능력치 자체는 회귀 전과 거의 비슷했다.

"[절대 방어]."

-스아악

만렙 특전 스킬도 조금 불안정했지만, 섬세하게 조정한다면 실전에 활용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듯 했다.

온 몸에 빛나는 방어막 같은 스킬을 유지하던 한우현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스킬과 플레이어 힘의 근원.

포스가 불안정하게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느꼈기에.

"이게 무슨···?"

다시금 집중해서, 그 상태를 살펴본다.

"이 정도면, 초기 수치인 100? 빌어먹을···."

한숨을 푹 쉬고서는 지직거리며 나타나지 않는 상태창을 노려보았다.

"다시, 처음부터··· 아니, 아니야. 완전 초기 수치는 아니지만···."

원 수치에 비하면 어처구니 없는 수치로 떨어진 포스. 당연히 회귀 전과 비교하면 약해졌지만.

그 떨어진 수치보다는, 꽤나 높이 운용할 수 있었다.

한우현이 체감하기에 섬세하게 하면 300··· 단기적으로는 500 정도로.

최대인 2000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았지만.

극한까지 다다른 포스의 운용 경험과 능력.

그것이 한우현이 능력치 한계를 초월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그 한계의 초월이 정말로 포스 수치와 상관이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현 수치대로면 플레이어나 보스를 상대로 한 장기전은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포스는 주 스탯 능력치만큼 중요한 절대적인 강함의 지표는 아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중요한 능력치다. 제어, 균형, 순환, 회복, 안정성 등을 나타내니까.

하지만 괜찮다.

당장은, 당장은 무력이 중요하지 않다.

보스 최초 격파 보상을 모조리 독식한다면 그 수치도 느리게나마 올릴 수 있다. 어차피 계획 범위 내였다.

거기다가 플레이어 각성 후 한 달 정도까지는 레벨이나 능력치, 포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막 각성해 스킬들을 겨우 겨우 따라하는 것이 당분간의 게임 폐인 출신 플레이어들.

그들은 20년에 걸쳐 무수한 실전에서 온갖 기교와 힘의 운용을 완전히 통달한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정리한 한우현은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00시 30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아직은 플레이어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지만, 곧 그들이 하나 둘 일어날 테니까.

그리고 변한 자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할 것이었다.

자각할 뿐 아니라, 그 능력으로 무언가 큰 일을 벌이려고도 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움직일 때다.

대충 집안에 굴러다니는 넝마 같은 츄리닝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자취방이 경기도 북부라, 다행히 종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

24시간 운영하는 곳 중 가장 큰 금은방.

거기 들어가기 직전, 발걸음을 멈췄다.

-서울 24시 감자탕! 원조 할머니 손맛!

국밥집. 원래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눈길이 이끌리는 곳.

국밥은커녕 한국 음식 자체를 마지막으로 먹어 본 것이 10년도 넘었다.

포션 외의 음식을 입에 담은 기억도 5년 전이 마지막이다.

너무나 유혹적인 간판.

"···낭비할 시간이 없어."

이미 한우현은 과거로 돌아왔다.

음식 따위는 일을 모두 마치고 나면 원 없이 먹을 수 있다.

게다가 플레이어가 되기 전 라면과 치킨만 처 먹던 예전과 달리.

지난 10년 간, 한우현은 미국에서 최고 중요 인물로 대우받았다.

그 대접으로 인해 그의 입맛도, 당연히 잘 먹지 못했던 세계 멸망 이후와는 별개로 극도로 높아진 상태.

메마르고 멸망한 세계에서 훌륭한 음식에 대한 갈증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어차피 플레이어는 양분을 필수적으로 섭취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어지간한 고급 음식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게 되었고.

즉, 아무거나 잘 먹는 입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어차피 저런 곳의 국밥은 먹어 봤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오는 길에, 할 일을 다 끝내고 나서···."

그렇게 추억의 갈증을 참고, 금은방에 들어갔다.

-딸랑

"안녕하세요."

"Hello... Nice to meet."

"시간 없으니 빠르게 갑시다."

"아니, 한국어 잘 하시네..."

"금괴입니다. 24K. 10kg짜리 골드바 2개요."

"2, 20키로를 바꾸신다고요? 지금?"

테이블 위에 놓은 금괴를 본 금은방 주인의 눈이 탐욕에 물들었다.

"...그런데 인증 마크가 안 찍혀 있는데. 그, 인증서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닌데, 이러면 확인해야 할 게 많고 세금 문제도 복잡해져서···"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래 걸립니까?"

"지금은 직원들이 별로 없어서, 아무래도 내일 아침까지는···"

이럴 시간이 없다.

힐긋 시계를 본 한우현은 좀 손해를 보기로 했다.

"세금 다 떼고, 최종가를 시세의 90%로 쳐 주십시오."

"...네? 90퍼요?"

"대신 지금 당장. 절반은 달러로, 절반은 위안화로 해 주십시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금은방 주인의 눈이 경악으로 퍼졌다가 잦아들었다.

"···대체 출처가, 아니, 아니지."

"됩니까?"

"음···"

"그럼 다른 가게로."

진짜 그럴 마음은 아니었다.

아무리 종로라고 해도, 새벽인 지금 운영하는 24시간 금은방은 많지 않으니.

구태여 다른 가게에서 또 실랑이를 하느니 그냥 더 깎을 생각이었다.

"에헤이, 잠깐, 잠깐만. 성격이 뭐 이리 급하셔."

어차피 금괴는 많았다.

지금은 급전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어설프게 처분하는 것일 뿐.

겨우 몇 억 원에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었다.

"됩니까?"

"됩니다, 되고 말고요. 달러, 위안화요? 잠시만요, 외화는 따로 가진 친구가 있어서. 깨우면 바로 올 겁니다.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 주시죠."

"하나 더. 3억은 원화 수표로 됩니까?"

"···이거, 나중에 조사 들어오면 저희가 비밀 보장은 못 해드립니다."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시다면야···."

다행히, 굳이 더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 넣어 주십시오."

"꽤 무거우실텐데···."

"괜찮습니다."

[인벤토리]에는 게임 아이템만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15억 원에 달하는 달러와 위안화를 가방에 우겨넣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향했다.

-쏴아

바닷가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구글 지도를 켰다.

뒤이어 중국과 서해, 한반도를 확대했다.

대충 경로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캐릭터 프리셋], [보스용]."

순식간에 다 해진 츄리닝만 걸친 그의 의복이 코스플레이어처럼 휘황찬란한 갑옷으로 탈바꿈했다.

플레이어가 되며 초월적으로 상승한 그의 인지 연산 능력이 다시 한 번 구체적인 계획을 점검했다.

오늘 밤 각성한 플레이어들의 서버별 능력과 수만 보면, 국가의 중요도 순서는 한국, 중국, 인도네시아, 미국.

미국은 알아서도 잘 돌아가는 나라니, 지금은 구태여 찾아갈 필요도가 떨어진다.

또한 가장 중요하고 강한 한국 플레이어들은 너무 많고, 독립적이고, 인성과 사회성이 특히나 파멸적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모으기는 어렵다.

즉. 중국을 규합하고,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해서 전 세계 서버의 통합 길드를 선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계획이리라.

"하아···."

만약 그의 목표가 그냥 빌런들을 죄다 없애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어렵게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회귀 전, 유명했던 빌런들을 찾아가 전부 암살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보스 몬스터라는 것들이 곧 세상에 나온다.

그것들은 탱커로 설계된 성기사 직업인 한우현이 혼자서 잡을 수 없다. 공격력이 뛰어난 다른 플레이어들의 집단. 즉 공격대가 필요했다.

그러니, 빌런들을 처단하는 것을 넘어 그들을 복종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의 음울한 눈빛이 모바일 지도에 떠오른 태극기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았다.

한우현이 최종적으로 오늘 낮까지 돌아와야 할, 저주받을 나라.

대한민국은 마지막 순서로, 세계 길드의 권위를 내세워 가입을 대세인 것처럼 밀어붙일 예정이었다.

-퍼벙

순식간에, 해변을 박찬 한우현의 신형이 흐려지듯 사라졌다.

-쉬이익

뒤이어 그 뒤로 소닉 붐Sonic Boom을 일으키며, 그의 몸이 인간의 의식 영역을 초월한 속도로 가속하였다. 서쪽을 향해서.

5화 회귀자 한우현 (3)

-첨벙

-첨벙

-첨벙

쉴 새 없이 발을 놀려 바다를 달렸다. 음속을 돌파한 속도로.

바다에는 방해물이 없었기에 한우현은 해일과 파도만 일으키지 않는 한계에서 최대한도로 가속했다.

-철썩

나름 조용히 오려고 속도를 늦췄지만, 금방 베이징에서 가장 가까운 연안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저 너머에서 아릿아릿하게 비치는 해안가 도시의 불빛들이 보였다.

숨을 잠시 고르며 한우현은 한 플레이어를 떠올렸다.

세계 최초의 빌런 플레이어이자, 첫 번째 빌런 사령관.

라일리 그레인저 다음 가는 수준의 재능을 가진 힐러-딜러 하이브리드 클래스 사제 랭커를.

중국 베이징으로 새벽부터 와야만 했던, 두 번째 이유이자 한우현의 모든 계획의 시작점.

-부욱

그 생각을 끊고선 한우현은 가방의 지퍼를 당겼다.

입이 심심해서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감자칩을 꺼내기 위해.

-와사삭

"···향이 별론데. 해바라기유? 조금 산패됐어."

감자칩은 그가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도 좋아했던 간식이었다.

물론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도 좋아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미국 친구들이 추천해 줘서 알게 된 좀 더 좋은 것을 즐겨 먹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감자칩은 그가 생각하기에 세계 최고의 향신료인 트러플과 가장 잘 어울리는 간식이었으므로.

이탈리아 알바니아 산 화이트 트러플을 함께 갈아서 곁들였었지.

-으적으적

하지만 지금은 그리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니까, 대충 과거의 향수만 느끼면 족했다.

그리 감자칩을 씹으며 한우현은 회귀 전의 중국에 대한 회상을 이어나갔다.

-와자작

세계 각국에서 갑작스레 초월적인 힘을 얻은 플레이어들에 의한 테러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소, 속보입니다! 베이징 전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찬란한 빛이 쏟아지면서 모든 건물이 무너졌다고...

중국은 가장 먼저 그 테러가 국가 수장을 겨눈 국가였다.

첫 날 새벽,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중앙 위원회가 몰살당했다. 당연히 공산당 내부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중국 정부와 당의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거대한 국가가 그렇듯이, 중국 공산당은 중앙 위원회 뿐 아니라 전국대표회의,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등 다른 여러 기관들로도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그들은 빠르게 자신들을 공격한 미치광이 초능력자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선전포고도 없는 테러에 정당한 대응을 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테러를 가한 한국인 플레이어를 찾아 그에게 보복을 가하려 했다.

덤으로 그와 뜻을 같이하기로 한 동료들한테도 같이.

한국의 미치광이 게임 폐인들은 그 보복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헤헤, 난장판이다~!

-다들 모여~!

즉시 베이징을 포함한 중국 전역의 대도시가 응징을 받았다.

상하이, 광저우, 충칭, 선전, 톈진, 청두의 건물이란 건물들은 모조리 박살났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보이는 대로 지역 자체가 으깨졌으므로, 중국군은 죄다 군복을 벗고 도망쳤다.

그들이 자랑하는 거대한 항공모함들은 불과 일주일 만에 모조리 수장되었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몰아쳤으며, 운석이 떨어졌다.

반격?

인 게임 설정 상, 레벨 200 이상의 플레이어들은 이그드라실 포스라는 특수한 에너지를 쌓기 시작한다.

또한 게임에서 그 이상 레밸 대의 사냥터에 등장하는 모든 몬스터들은 이그드라실 포스를 가지고 있기에, 포스가 없다면 아예 공격이 통하지 않게 된다.

즉, 포스의 수치에 따라 서로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력이 결정된다.

아무런 포스가 깃들어 잇지 않은 현실의 총과 미사일을 갈겨 봤자 플레이어에들은 피해를 입기는 커녕 간지럽지도 않다.

-항복, 항복합니다! 무조건 항복합니다!

-말씀하시는 조건은 뭐든지 무조건 수용하겠습니다!

-제발 그만 둬 주십시오!

단 2주 만에, 중국 인민 해방군이 전멸했으며 1억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중국 '임시'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현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한국의 미치광이 학살자들을 진정 시킬 수 있었다.

-에이, 재미 없네.

-뭐, 실컷 놀았으니 슬슬 집에 가 볼까.

-야, 한국에 핵 쏘고 싶으면 쏴도 돼. 솔직히 나 중국보다 한국이 더 싫거든.

-진심이야. 오히려 한국이랑 핵 전쟁 했으면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차라리 국가의 전쟁이라면 중국이 핵 전쟁이라도 벌일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강력한 초인 플레이어들.

심지어 자기 자신의 나라에 별로 애착을 가지지 않아 한국에 핵을 쏘겠다는 협박도 전혀 통하지 않는 초인들.

발악하듯이 쏜 핵조차도 플레이어들의 영역 선포 스킬에 모조리 소멸해버렸다.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유린이었을 뿐.

그 모든 사건이 일방적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중국 서버 플레이어들의 무대응.

중국 공산당과 그를 포함하는 자국 전체를 증오하고 혐오했기에.

오히려 한국인 플레이어들의 테러 행위를 방조하고 반긴 중국 서버 플레이어들의 성향.

-玩家······真的很强啊.(플레이어··· 정말 강하군.)

-真果断啊.我非常喜欢.我们也早该那样做了.(과감하네. 아주 마음에 들어. 우리도 진작 저럴 걸.)

-嗯?让我守护中国?为什么是我?(응? 중국을 지켜달라고? 내가 왜?)

-躺平吧~ 我们是躺平族~(드러누워~ 우린 탕핑족이다~)

게임의 개발 국가가 한국이기에,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진 한국 서버.

당연히 중국 플레이어들이 강하다고 해도, 한국 플레이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데다가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았던 공산당을 응징해 주는 한국 플레이어들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이럇샤이마세~

-하오 하오!

오히려, 환영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청년들 대부분이 중국 공산당의 광적인 충성분자들이라고 착각한다.

-主席去世了! (주석이 죽었다!)

-什么?真的?(뭐야, 진짜로?)

-不是在开玩笑!整个紫禁城和共产党中央委员会大楼都完全变成灰尘了!(거짓말 아니야! 자금성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물 전체가 완전히 먼지가 되었다고!)

-那真是痛快啊!(그것 참 시원하네!)

-是谁干的这种事?(그런데, 누가 그런 짓을?)

그것은 큰 오해다. 전 세계 어느 국가의 청년들도 자기 국가에 충성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의견이 주류인 나라는 없다.

단지 그 불만이 억제되느냐, 억제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이그드라실 게이머들은 반사회적인 이들이 많았으며, 그것은 중국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응당 게이머들이라면 국가의 검열과 억압에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었으므로, 그 불만도 꽤나 컸다.

-玩家······超能力者们.(플레이어··· 초능력자들이 그런 거야.)

-玩家们真的那么强吗?那我们呢?(플레이어들이 그렇게나 강하다고? 그럼, 우리도?)

-我们不应该阻止它吗?(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为什么是我们?(···우리가 왜?)

-这是你的机会.(이건 오히려 기회야.)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깽판을 치는 것을 관망했다.

침묵했다.

거기서 나아가 몇몇은 오히려 협조하고, 그에 함께하기까지 했다.

한참 뒤.

중국이 자기들의 놀이터임을 확신한 한국의 플레이어들이 만족할 때까지 공산당을 상대로 파괴와 학살을 벌이고.

마침내 중국에서 떠나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중국인 플레이어들도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从今天起,重庆由我统治!(충칭은 오늘부터 내가 지배한다!)

-在深圳建个人屠宰场怎么样?这听起来挺有趣的!(선전에 인간 도살장이나 세워볼까? 재밌겠는데!)

-从今天开始,南京将举行节日!哦,你问是什么节日?当然是南京节了!(오늘부터 난징에서는 축제가 시작된다! 아, 무슨 축제냐고? 당연히 난징 페스티벌이지!)

각자 미리 합의 하에 나눠 놓은 지역구와 성을 하나씩 차지하고, 영주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만족할 만큼 중국 전역을 유린하고 떠났을 때, 중국은 산업과 무역 구조 전체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희토류를 생산하는 중국의 광산들은 죄다 폐쇄되었으며 논과 밭도 초토화 되었다.

공장들은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었으며 섬유는 물론이요 철강, 자동차, 선박, 기계류도 모조리 생산이 전면 중단되었다.

-중국 기업들과 한 계약이 모조리 파기 되었습니다!

-그럼 우린 도산이야!

-생산은 다 되었는데 항구까지 옮길 수가 없답니다!

-항구까지는 옮겼는데 항구가 봉쇄되었다고 합니다!

-항구에서 배에 싣기까지는 했는데, 플레이어가 배를 전부 가라앉혔다고···.

-이러면 우리 회사만 망하는 게 아니야···!

따라서 당연히 중국과 교역하는 전 세계 대부분 국가의 경제도 혼란에 빠졌다.

무수한 세계적인 대기업들부터 시작해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뒤이어 약소국들의 무역 수지 구조가 파탄 나며 순차적인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이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해체되고 나서는 더욱 심화되었다.

자기가 지역의 영주임을 선포한 중국인 플레이어들에 의해 중국 전체가 아예 갈기갈기 찢어졌으니까.

그 단초가 된 한국인 플레이어들도 더 이상 거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분열된 꼬라지가 그들이 보기에 썩 보기 좋았으므로, 그냥 시시덕대며 구경했다.

중국의 성 간 경계는 반 쯤 무법지대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역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자연히 물류와 운송부터 세계 원자재 시장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갑작스럽게 사라졌으니, 그 충격은 너무나 컸다.

세상이 게임이 되고 2주가 지났을 때, 전 세계 물가가 5배로 올랐다. 한 달이 지나자 10배로 올랐다.

그 쯤 되자 일반인들은 물론이요 플레이어들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었다.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인도, 아프리카, 남미 같은 온갖 원자재 생산 지역들도 뒤따라서 죄다 돌이킬 수 없을 만치 완전히 망해버렸으니까.

곧 전 세계에 인플레이션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달러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화폐가 휴짓조각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복잡한 세계적인 정치, 사회, 경제 구조의 연쇄적인 붕괴.

대학교는커녕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던 한우현이 그 모두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런 그가 전 세계의 경제와 정치적 질서에 대해 대충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들어 보세요. 중국이 어떻게 망했냐면···.

-미국은 다른 나라와 좀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어떻냐면···.

-동남아시아에는 말라카 해협이라는 곳이 있어요.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들의 힘을 연구해서 성과를 낸 기업들도 있었죠. 그 성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냐면, 대표적으로...

-한국인 플레이어들은 정말로 수가 많았죠. 그 중 특히 존재감이 굉장했던 이들이 누구였었냐면···.

-재밌지 않아요? 정말로···.

-한우현! 흘리지 말고, 꼼꼼히 들으세요! 다 당신한테 필요한 지식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한우현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일리."

라일리 그레인저와 단 둘이 오랫동안 멸망한 세계를 떠돌면서, 할 것은 대화 뿐이었다.

그 대화의 대부분은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 그녀는 아는 것이 많았다.

한우현은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라일리 그레인저는 같이 있는 내내 세상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망했는지를 구체적이고도 세심하게 설명했다.

그 때는 그녀의 중얼거림들이 단순히 아쉬움, 후회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서 기인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지식들이... 처음부터, 계획하고 가르쳐 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추억의 단풍잎]의 유일한 소유주.

라일리 그레인저는 애초에 스스로가 과거로 갈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너무나도 어려운 세계 정세에 대한 분석과 역사와 전략을 그에게 가르쳤다. 배우게 했다. 지나칠 만치 상세하게.

"큭···."

한우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아주 큰 슬픔을.

"내가 무슨 영웅이라고···."

고등학교도 다 다니지 못하고 자퇴한 채, 쓰레기 같은 게임에 인생 전체를 낭비한 우울증, 불안 장애, 대인기피증, 피해 망상 환자.

그것이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까지의 한우현을 나타내는 글자들이었다.

한낱 게임 폐인에 불과했던 한우현을 세계 최강의 탱커이자 공격대장으로 만들어 준 것은 라일리 그레인저였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빚만이 가득하다.

"···반드시. 반드시. 실패하지 않을게. 모든 걸···."

그러니까, 이번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리라.

그 시작이 바로 중국이다.

갑작스럽게 능력을 얻은 플레이어들은 전 세계에서 난동을 피웠다.

그 선을 제대로 폭주시킨 계기가 바로 베이징 테러.

대놓고 수만 명을 죽여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음을 전 세계에 증명해버린 사건.

동시에 빌런 플레이어라는 개념이 세계 최초로 탄생한 순간.

따라서, 한우현이 한국이나 미국, 동남아시아, 유럽 같은 여러 나라가 아닌 중국에 가장 먼저 방문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한우현의 계획에는 자본이 필요했다. 그것도 많이, 아주 많이.

금괴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한국에선 그를 활용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관치 금융이 뿌리 박힌 금융 후진국이니까. 심지어 그 출처가 게임 아이템이므로 보다 적합하게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에 특화된 다른 나라들을 경유하며.

길드의 뿌리를 뒷받침해 줄 해외 지주 회사들을 만들어야 했다.

그럼으로서 무력과 금력을 동시에 휘둘러, 세계를 잠식할 것이다.

아시아 제일의 금융 중심지인 중국과 싱가포르가 그 계획의 시작점이었고.

또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야? 너, 뭐야? 누구야?"

회상은 거기서 끊겼다. 갑작스럽게 들린 한국말에 의해.

6화 북한 관리자 최윤 (1)

-으지직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를 대충 바다 위로 던졌다. 한 두 입이나 먹을 만 했지, 그 뒤는 솔직히 돈 주고 먹으라 해도 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기에.

알바니아산 화이트 트러플까지는 아니어도, 빼리고나 운남산 블랙 트러플을 곁들이면 먹어 줄 만 할텐데.

"너, 뭐야? 누구냐?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리고선 한우현은 말이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10m쯤 너머.

"대답, 안 하냐? 복장 보니 전사 계열 같은데. 공중에는 어떻게 떠 있는 거지? [부양] 공용 스킬은 지속 시간이 길지 않은데?"

아주 화려한 추기경 복장을 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마법사 계열 아니면 [차원 관문] 스킬도 없을 텐데... 설마 여기까지 뛰어서 왔을 리는 없고. 한국인이 아닌가?"

지금 한우현은 아주 눈에 잘 띄는 모습이었다.

베이징 바로 앞의 해협 한 가운데에 공중에 떠올라.

플레이어라면, 도저히 무시하고 지나가기 어려울 만치 존재감을 자랑하기 위해 온 몸에 빛을 두르고 있었으니.

아니, 사실 플레이어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이목을 끄는 모습이었다.

이미 해안을 오가는 중국 어선들이 그를 보고 카메라로 찍으며 뭐라 뭐라 외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온 세상이 뒤집힐 테니.

"...차오 니마?"

한우현에게서 여전히 대답이 없자, 추기경 복장의 남자는 이번에는 중국어를 중얼거리며 노려보았다.

하긴, 이 상황에서는 그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차오니마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어 욕설.

그 뜻은 대충 '느금마' 정도가 된다.

대뜸 욕이라니. 자기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화라도 버럭 내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상대를 뜯어보았다.

푸르딩딩한 얼굴에 죽 찢어진 입과 눈을 가진 기괴한 얼굴.

고전 일본 공포 게임에 나오는 귀신 캐릭터를 닮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온 몸에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보석과 금실을 수놓은 너무나도 화려한 사제복.

즉, 예상하고 기다린 대로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플레이어.

"말이 참 많아, 시끄럽게."

"...뭐야? 한국인이면서 왜 내 말 씹었지? 여기서···"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캐릭터 네임 '최선의힐은선제공격', 최윤."

한우현은 자연스레 그의 캐릭터 네임과 본명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 뭐, 뭐? 내 이름은 어떻게."

그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최윤의 눈이 커졌다.

"네가 지금부터 할 행동. 그만 둬라. 길드 루시드Lucid의 길드장이자 랭커, 나 아서가 전한다."

그 반응을 무시하고, 해야 할 말을 계속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회귀 전, 세상이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미치광이 빌런 플레이어들이 자기 맘대로 날뛰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빌런이든, 아니든, 모든 플레이어들은 이제 그의 밑에 있을 것이다.

그러기 싫다는 이가 있다면? 그런 놈은 이 세상에 필요 없다. 그러니 처단한다.

"이것은 길드의 결정이니, 너에게 거부권은 없다."

모든 플레이어를 강제로 가입시킬 길드.

"이미 글로벌 서버와 중국 서버, 동남아시아 서버의 랭커들도 동의한 사안이다. 한국 서버의 랭커들도 합류 중이지."

그러니까, 공갈을 칠 때였다.

전 세계에 새로운 질서와 패권을 세울 공갈.

한우현과 그의 의지에 복종하는 빌런 플레이어들이 지배하는 시대를 세우기 위해.

"싫다면, 실력 행사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그러고 싶나?"

말을 마친 한우현은 거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씨발, 무슨 개소리야? 루시드? 그건 뭔 듣보잡 길드인데."

당연히, 상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최윤은 자기가 뭔가 힘이 생겼다 느끼자마자 곧바로 옆 나라를 테러 한 분노 조절 장애 정신병자였다.

세계 최초의 빌런 플레이어.

따라서 한우현 역시 그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길드 이름, 처음 듣는데? 애초에 현실에서 뭔 길드야. 너 게임 중독자냐?"

"허."

다만 그 다음 말은 다소 예상 외였다. 그래서 한우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이 정도 레벨이면 그도, 상대도 게임 중독자였다. 그것도 중증의 중독자.

그런데 마치 자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자연스레 공격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되겠어."

"하, 싸우자고? 좋지. 그런데."

"음?"

"누가 병신인 줄 아나. 아서? 그게 진짠지 구란지, 네가 누군지 알고 싸워? [날카로운 눈]."

"호오?"

한우현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벌써 그 스킬의 현실에서의 가치를 알아냈다고?

[날카로운 눈]은 게임 내에서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조건 없이 패시브로 치명타 데미지를 올려주었기에.

그리고, 액티브로 활성화 하면 몬스터의 보다 자세한 세부 정보를 알 수 있기도 한 스킬.

게임에서는 의미 없는 효과였다.

몬스터의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으면 위키를 켜야지, 뭐하러 사냥이나 보스 레이드를 하다 말고 그딴 짓을 하는가?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기능이 훨씬 중요해진 스킬이 되었다.

남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스킬이 되었으니.

"[날카로운 눈]! 오··· 어··· 어어? 어어어?"

"뭘 그리 놀라지?"

한우현은 속으로 살짝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창이라면, 당연히 상대에게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미, 미친. 이게 뭐야? 대체 뭐야?"

최윤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가 퍼지며 떨렸다.

그런데 저 반응은, 그냥 보이지 않는 상태창에 의문을 느끼는 수준의 반응이 아니다.

그보다는 초월적인 뭔가를 목도했을 때 보이는 반응에 가깝지.

"뭐가 그리 이상해서 그러지?"

"아니, 아니 씨발··· 한국에는 레벨 300 없는데? 만렙 없잖아? 너 뭐야? 능력치가 미친, 주 스텟이 12만? 전투력이 12억? 세계 1위?"

뭐?

한우현도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오류가 난 상태창이 그냥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그에게만 보이지 않았던 것인가?

그러나 주 스텟 12만? 전투력 12억? 스스로 작용하는 능력치를 시험했을 때, 그 정도 수치는 결코 아니었다.

오류로 인해, 지나칠 만치 높게 오버플로우라도 나타난 모양.

하지만 그 당황을 전혀 티를 내지 않았기에, 최윤은 한우현의 상태창을 보며 홀로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성기사? 뭐 이딴 쓰레기 직업을··· 아, 잠깐만. 성기사 랭커.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그의 말이 맞았다. 성기사는 쓰레기 직업이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46개라는 엄청나게 다양한 직업 숫자를 자랑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그 숫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44종의 딜러DPS와 1종의 힐러Healer와 1종의 탱커Tank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그 탱커 컨셉충이, 왜···"

"오, 날 아나 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탱커와 힐러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그 직업들은 무시받고, 인구 수도 적었다.

따라서 성기사는 최악의 쓰레기 직업이었다.

그나마 게임 유일의 힐러인 사제는 패치로 딜러 트리가 새로이 생겨서 어느 정도 인구 수가 유지된 것과 비교되게.

그 때문에 아서는 상당히 유명했다.

고레벨 성기사가 한우현이 유일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랭커의 반열에 오르는 290레벨을 넘긴 성기사 캐릭터는 아서가 유일했다.

그 쓰레기 직업으로 이그드라실을 계속 플레이 했으니 비웃음 대상으로 유명할 수 밖에.

"이제 내 말을 좀 들어볼 마음이 생겼나?"

"..."

"대답."

"씨발, 뭔데? 애초에 내가 올 줄 어떻게 알고···"

"대답."

"...무슨 말."

한우현도 당황했지만, 보아하니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치 최윤은 훨씬 더 당황했다.

그렇다면 상황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 그리 생각하며 한우현은 미소 지었다.

"너, 우리 길드에 들어와라."

"뭐? 씨발 이건 또 뭔···"

"싫냐?"

"아니, 너무 갑작스럽잖아. 내가 그 길드에 대해 뭘 알고? 길드장? 너도 씨발 앰생이잖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한우현이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기사 랭커로서 유명하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게임에 온 시간을 바치며 랭커가 되었다.

자연스레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별 생각 없이 그가 주로 쓰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써서 가입했다.

그래서, 신상이 털렸다. 아주 빠르게.

당연히 한우현의 현실에서의 삶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교폭력으로 인해 정신병도 몇 개씩 앓고 있었으며 부모와는 게임 문제로 수도 없이 싸우는 삶.

더군다나 그 외양도 빈 말로라도 괜찮은 외모라고 하기에는 힘든 모양새였다.

자연스레 인터넷에서 무수한 조롱을 들었다.

"하, 내가 앰생이라고?"

"그, 그래!"

처음에는 그 신상의 유포를 막으려 했었지만,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래서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에는 그런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볼 때마다 애써 무시했었다.

그러나 아서의 캐릭터 랭킹이 오르거나 그가 게임 내에서 뭔가 사건의 중심이 될 때마다, 그의 신상은 다시금 끌어 올려져 조리돌림 당했다.

그럴 때마다 혼자서 방구석에서 씩씩대며 분노를 참았을 정도로.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그게 뭐 중요한가?"

"뭐?"

한우현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당시에는 꽤나 기분 나쁜 일이기는 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20년 간 겪은 수많은 보스 몬스터와 빌런 플레이어들과의 전쟁.

그것들이 나약한 방구석 폐인이었던 한우현의 정신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너는 뭐 다른가?"

"뭐? 이 씹새가···"

"솔직해지자, 레벨 289 사제."

그래서 한우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그의 논점을 뒤틀었다.

"그 레벨 찍으려면 몇 년을 사냥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텐데. 너야말로 직업은 있었나? 하루에 몇 시간을 사냥했지?"

"지금 디스전 하자는 거냐? 씨발 년아? 너보다는 나았을 거 같은데? 만렙 성기사···"

상대가 곧바로 울컥했다.

울컥하는데 그친 게 아니라, 들고 있던 거대한 하얀 스태프를 이 쪽으로 내밀었다.

거기에 하얀 빛이 모이며 구체가 형성되었다.

공격의 전조.

"긁혔나?"

"[신성한···]"

당연히 가소롭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기를 꺾어줘야 할 때인 것 같다.

한우현은 발바닥과 발목에 이그드라실 포스를 내리퍼뜨리며, [빛의 발걸음]을 발동했다.

-촤악

순식간에 저 멀리 있던 최윤의 바로 옆을 한우현이 스쳐 지나갔다.

"...어?"

최윤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스태프가 사라졌기에.

"좋게 좋게 말로 하지. 싸워서 너한테 좋을 게 없다, 최윤."

한우현은 뺏어 든 스태프를 한 손으로 휙휙 돌리며 비웃었다.

"이, 이 씨발. 미친. 뭐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궁금한가?"

"스킬은 스킬 이름을 말해야 발동되는데... 그냥 신체능력으로? 아니야, 당한 건 그렇다 쳐도 내가 반응도 못 했는데...?"

정확한 분석이었다.

스킬을 단순히 사용하는 것을 넘어, 그 이름을 구태여 영창하지 않고도 위력과 범위를 조절하는 건 숙련된 플레이어만의 권능이었으니까.

"나도 성기사 스킬은 다 아는데...? 패시브? 애미, 그 쓰레기 직업에 히든 피스라도 있나...?"

이제는 헛다리까지 짚으며 혼란에 빠진 최윤을 뒤로 하고, 한우현은 속으로 살짝 혀를 찼다.

눈앞에서 무기를 뺏기고 나서도 욕을 하다니.

이 상황에서도 분노 조절 장애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한우현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도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정신병적인 면모.

뭐, 좋게 보면 용기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씨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하지만, 무기도 없이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최윤이 결국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

"너, 중국에다가 화풀이 하려고 온 거 안다."

"...그래서?"

한우현은 그를 무조건 막으려 온 것이 아니었다.

세계 최초의 빌런 플레이어이자 그들의 첫 번째 총사령관.

그 결단성이건, 능력이건, 과감함이건, 어떤 식으로든 그 광기와 능력이 입증된 자.

막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틀어준다.

"아예 이해 못 할 건 아니야. 나도 중국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뭐야, 그럼 왜 막는 건데?"

"말했지. 랭커 급 플레이어들이 모인 길드의 결정이라고."

한우현은 머리를 쥐어짜내며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과거의 그는 빈 말로도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다.

평생을 게임에 바친 폐인이 똑똑한 사람일 수는 없었다.

"우리 길드는 지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스킬을 각성한 플레이어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회의 중이다."

"...하?"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20년 간 겪은 무수한 갈등과 전쟁이 그에게 지도자의 덕목과 지혜를 강제로 심어주었다.

그래서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었다.

전문가가 보기에는 상당히 엉성한 계획이요 시나리오.

그러나 게임 폐인들을 잠깐이나마 속여 넘기기에는 충분한 수준의 이야기를.

"레벨 290 이상의 유저는 전 세계에 많지 않아. 다 합쳐도 200명이 되지 않지. 그래서 우리끼리 디스코드 채널이 있고."

"...뭐?"

"말 끊지 말고 들어라. 우리는 급하게 토의했고, 결정했지."

"랭커들끼리, 그런 게 있다고?"

"그래. 우리는 모여서, 질서를 유지하고, 단합하기로 했다."

최윤의 표정이 황망함에 일그러졌다.

"씨발, 니들이 뭔데···"

"우리만 좋자고 하는 게 아니야. 너, 물가가 갑자기 다섯 배, 열 배로 올라도 좋나?"

전혀 납득하지 못한 그의 표정을 보며 한우현은 설명을 덧붙였다.

"전 세계 2위의 무역 대국인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기름 값도 오른다. 치킨도, 햄버거도, 피자도 죄다 한국에서는 못 먹게 된다고."

"어?"

"그냥 비싸지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못 먹게 된다. 그걸 바라나?"

게임 폐인들을 위한 맞춤형 설명을.

그제서야 최윤은 표정이 멍해졌다.

완전한 납득은 아니었다.

그냥 아, 그럴 수도 있나? 듣고 보니 그렇네? 라는 아차 하는 표정.

"대충 이해는 한 건가?"

"어···"

하지만 이 설명 만으로는 저 놈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최윤만 막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빌런 플레이어들.

쓰레기 게임에 일생 전체를 바쳐 랭커가 된 끝에 모든 사회성과 인성을 내다 버린 정신병자들.

처음부터 모두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

먹잇감.

보기 좋은 미끼를 던져 두고, 그들이 물어 뜯도록 해야 했다.

최윤은 그 첫 발판이었다.

"물론, 네 입장에서의 불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야. 좆 같은 새끼들 족치고 싶다는 데 뭐가 그리 따질게 많나 싶겠지."

"응? 어, 어 뭐··· 그렇지."

한우현이 뭔가 다른 방도가 있다는 듯 말을 돌렸다. 거기에 최윤이 떨떠름하다는 듯 대답했다.

"방금 말 했듯이, 중국의 문제는 전 세계에 너무나 큰 파급을 일으키지. 그러니까 그렇게 중요한 경제적 위치에 있는 나라를 함부로 무너뜨릴 수는 없어."

"...알아 들었다고. 왜 또 똑같은 소리야?"

"끝까지 들어라. 하지만 네가 싫어하는 데다가, 화풀이를 해도 문제가 없을 곳이 있다."

"...?"

최윤은 멍청하게 눈을 끔벅였다.

그러다가 한우현이 말 없이 손가락을 펴 한 방향을 가리키자 그것을 똑같이 쳐다보았다.

그 손가락은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살짝 동북쪽.

한반도의 북부가 있을 방향이었다.

한우현이 세운 모든 계획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고립된 곳.

7화 북한 관리자 최윤 (2)

"...뭐? 북한?"

최윤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반응했다.

"음... 아니, 갑자기 북한이라니. 좀... 뭐냐. 으음..."

아마, 이대로면 그를 설득하기에는 좀 부족할 것이다.

한우현은 최윤의 평소 가치관을 잘 알고 있었다.

병적인 중국 혐오자인 동시에 인간의 모든 증오를 뭉친 듯한 분노 조절 장애 정신병자.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못 할 것이다.

"...니네 길드, 이거 웃긴 놈들일세. 체급만 낮으면 돼? 그럼 북한 애들은 다 죽여도 된다는 거냐?"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예상대로 비웃음이 날아왔다. 한우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저 방법은 차선이었지만, 결코 최선은 아니었다.

인명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세계 경제를 고려해야 하니 중국 대신 북한에서 깽판을 쳐라?

수뇌부도 아니고, 북한 주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게임 폐인들에게 학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거 씨발 말만 곱게 했지 니가 진짜 미친 놈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중국 서버의 유저들까지 한우현의 아래로 끌어들이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일 주일, 혹은 그 이상이 필요했다.

회귀 전의 중국에 대한 테러와 학살은 불과 하루 만에 시작되었다.

최윤을 시작으로 너무나도 빠르게.

플레이어들은 너무나도 과분한 힘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얻었다.

그들은 세상이 망하는 날까지 그 힘을 끊임없이 과시하고 휘둘렀다.

중국이 아니더라도, 어디에든 그 분노와 증오를 풀 인성 파탄자들.

제물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눈을 돌리기 쉬우며, 플레이어들이 힘을 쓰더라도 국제적인 영향이 그나마 적을 제물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우현은 그런 폭력적인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통솔해야 했다.

그 대부분이 미치광이 빌런들인 플레이어들의 지배자.

상념을 마치고선 다시금 최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물론, 아무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많은 걸 지원할 수 있지."

"뭐? 대가?"

최윤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레벨이라던가, 장비 아이템, 돈. 이런 것들도 있을 테고."

"흠... 돈이라."

최윤의 눈에 얼핏 탐욕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큰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 대한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들이 모인 길드의 인정."

"그 모든 걸 정말로 다 줄 수 있다고? 너네 좆목 길드가?"

그 말까지 마쳤을 때, 최윤은 비로소 흥미를 보였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들을 지원 가능하다는 확신에 찬 한우현의 말.

그것이 가능할 길드의 존재 자체에 흥미를 보였다.

즉, 권력과 집단의 힘에.

"하지만, 당연히 그냥은 안 되지."

"씨발, 또 왜?"

"처음 했던 말, 잊은 건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라고."

"음, 으음···"

대화를 나누며 진정성을 느낀 듯, 최윤은 좀 망설였다.

아예 개소리라는 듯 받아들이던 방금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

"우리 길드는 너를 그렇게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군."

쐐기를 박을 때다.

최윤은 세계 최초의 빌런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아니었다.

중국을 신나게 파괴하며 빌런들의 대장으로 나섰지만, 어느 순간 사라졌다.

행적을 감췄다.

최윤이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1년 뒤.

보스 몬스터들이 던전 밖으로 강림한 뒤였다.

-나, 누군지 알겠지. 레이드에 참가하고 싶다.

-네가? 무슨 꿍꿍이지?

-...절대 피해는 주지 않아. [사제]가 부족하다고 들었어.

-이상한 짓 하지 마라. 이 레이드에 인류의 명운이 걸려 있으니까.

-알고 있어.

짙은 후회와 절망으로 물든 채 찾아 온, 세계 최초의 빌런 플레이어.

그 최후도 그를 끝까지 의심했던 라일리와 한우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씨발, 씨발, 씨발··· 죽어! 죽으라고!

-좆 같은, 병신 같은 게임, 쓰레기 좆망겜···

자기가 공대장 경력이 있었다고 큰 소리를 치기에 제 3 기동대장을 맡겼다.

그를 믿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기동대장을 하겠노라고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신들, 좆 같은 새끼들아! 싸우라고!

나름 용기는 있었다. 그는 스킬들을 있는 대로 열심히 끌어모아 가장 앞에서 싸웠다.

-애미···

하지만,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다.

그것도 공격대의 퇴각을 지키기 위한 결사대장으로서.

그의 말투는 극도로 공격적이었으며 남들에게 반감을 사는 타입이었다.

매우 짧은 시간만 함께했음에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도 자진해서 대장을 맡은 빌런 출신 결사대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최후만큼은 의미 있었다.

"최윤. 너에게 정말로 좋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분명한 분노 조절 장애 빌런 플레이어.

심지어 초창기에 빌런들의 대장 자리까지 맡았던, 지휘력과 통솔력도 안 좋은 의미로 입증된.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스스로를 희생했다.

즉, 빌런 플레이어들의 중간 관리자로 누구보다 적절한 랭커 급 플레이어.

그것이 한우현이 그를 첫 번째 영입 대상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였다.

"너한테도 나쁠 거 없는 제안이다. 북쪽에는 플레이어가 없지. 가면 네 맘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단 거다."

"...더 자세히 말해봐."

"무엇보다, 네가 시작을 끊으면 다른 놈들도 관광 생각이 나겠지."

"그래서?"

"세계 최고의 랭커 플레이어 길드의 권한으로, 그걸 인정해 주겠다. 너를 사실상 그 곳의 왕이자 관리자로."

"...그게 의미가 있다는 근거가 없는데."

한우현은 속으로 웃었다.

근거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논리적인 근거와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적당히 믿을 만한 걸 던져달라는 이야기지.

그리고 한우현은 그런 것이 많았다.

"인벤토리."

한우현은 상대가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만치, 아주 천천히 허공에 손을 펼쳤다.

세계가 멸망하고 나서 남겨진 아이템들을 보여주기 위해.

"[광란의 토템]."

글로벌 서버의 단종 아이템. 일명 광토템. 주위 모든 플레이어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 및 집중 시간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토템.

"[크림슨 링]."

중국 서버의 단종 아이템. 일명 크슨링. 다른 모든 장비 아이템의 세트 효과를 한 번 더 합산 시켜 주는 사기적인 장신구.

"[놀라운 장비 초월의 주문서]."

한국 서버의 단종 아이템. 일명 놀장초. 기존 장비 강화 체계의 근간을 파괴하는 초월적인 강화 수치를 부여해주는 주문서.

"[아이신기오로 링 IV]."

동남아시아 서버의 단종 아이템. 일명 아신링. 보스를 대상으로 한 피해를 레벨에 비례해 증폭 시켜 주는 장신구.

모두가 십 년도 전에 일 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풀렸던 아이템이었다.

지나치게 강력한 효과로 인해 운영진이 급히 최대한 회수하고 절대로 다시 내지 않았던 단종 아이템들.

당연히, 정상적인 경로라면 한 명의 유저가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미친."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유저라면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어지간한 대형 길드에서도 한 개 가지고 있을까 말까 했으므로.

너무나도 희귀하고 강력한 아이템들이라, 다른 서버의 아이템임에도 불구해도 잘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괴]."

한우현은 거기에 방점을 찍듯이, 하나의 금 덩이를 꺼냈다.

"선수금이다. 물론, 네가 우리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가정 하에."

"씨발, 이건 또 뭐야? 설마 대장장이 재료? 8년 전에 단종 된 쓸 데도 없는 잡템을 왜 가지고 있는 거야??"

최윤은 질렸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어때, 충분히 대답이 됐을 것 같은데."

"..."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건 예시에 불과하다."

"그런 게 더... 있다는 거냐?"

한우현은 말 없이 미소지었다.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럼... 아냐, 됐어. 아까 아이템 정보창도 봤으니까... 진짜네. 진짜야..."

"이제 길드를 의심하지는 않겠지?"

"...좋아. 대단하긴 하네. 이건 믿을 수 밖에 없겠어."

최윤은 다시 이성을 찾은 듯 눈을 약간 좁혔다.

"하지만 그건 그 좆목 길드가 대단하다는 근거지."

"음?"

한우현은 예상 외의 대답에 의문을 표했다.

"너네가 날 필요로 할 이유가 아니야. 그것도 관리자 급으로."

"허."

한우현은 살짝 놀랐다. 예상 외로 날카로운 질문.

최윤은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나를 한 나라의 대장을 시켜주겠다고?"

"좋은 제안 아닌가?"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한국에 몇 백 명은 될 텐데, 왜?"

"그만큼 널 높게 평가한 거다. 겸손이 심하군."

"사실이지."

최윤은 레벨이 꽤 높은 유저였다.

하지만 인게임 스펙 기준으로는, 그다지 최고 랭커 급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원래 힐러 트리를 타다가, 뒤늦게 딜러 트리를 찍어 어중간한 스킬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강하긴 했지만 그 레벨 치고는 망캐라고 평가 받을 캐릭터였다.

"첫 번째 관리자로 인정? 좋아, 좋기는 한데. 대체 날 뭘 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의심이 많군."

"대가 없는 호의는 없지. 아무래도 거절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흠..."

아무래도, 결정적인 정보를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좋아. 그렇다면 더 자세히, 솔직히 말하지."

한우현은 좀 더 나중에 말하려고 했던 말을 지금 꺼내기로 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꽤 중요하다. 레벨이나 스킬 뿐만이 아니라, 너 자체가 말이다."

"뭐? 뭐 뭐 뭐 뭔 소리야."

인생에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인 듯, 최윤이 입을 우물거렸다.

기괴한 일본 귀신같이 생긴 남정네가 그러고 있으니 보기 심히 괴로웠다.

하지만 한우현은 참았다. 8 사도 흉합체에 비하면 저 정도야 뭐, 봐줄 만 했다.

"이그드라실에는 사제가 적지. 그리고 그나마 있는 대부분의 사제는 그 정도 레벨이면 딜러 스킬 위주로 투자하고."

"나도 딜링 트리인데?"

"그 정도면, 반반이라고 봐야지."

최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한우현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딜러 트리 스킬이 출시되기 전에 만든 캐릭터이기에 그랬다.

대부분의 서포팅 트리 사제 유저는 오랜 홀대 끝에 거의 게임을 접었다.

즉, 최윤은 힐링 트리만 개발한 전문 서포터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딜힐 하이브리드 클래스로 가치를 보자면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랭커였다.

"알아들었나?"

"...씨발. 힐러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한우현의 예상대로.

그 충동적인 분노 조절 장애적인 면모에도 불구하고.

최윤은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너, 아니지, 너네 길드, 레이드 준비하냐?"

한우현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씨발."

한우현은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그런 것을 믿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추악한 플레이어들을 보아왔다.

한우현은 오로지 과거만을 본다.

회귀 이전의 과거. 지금 시점의 미래.

그것들을 종합해 가능성을 추측한다.

고 레벨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판단했는지,

어째서 그렇게 움직였는지,

평소에 어떤 성격을 지녔었는지···

라일리가 지나칠 정도로 그에게 자세히 말했던 랭커 급의 플레이어들.

그들의 모든 행태와 이야기를 하도 듣고 또 들어, 이제는 모두 외워버렸다.

"현실에서 뭔 레이드? 진짜 겜 중독자 좆목 길드냐? 니네 단체로 망상에 빠졌지?"

"..."

"씨발. ···그런 거지? 거짓말이지?"

"거짓말인 것 같나?"

그래서, 한우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세계 최초의 빌런이라도, 마지막에는 결사대장으로서 희생했던 사람이라면.

힘과 지위와 금전을 약속하며 파멸의 미래까지 설득력 있게 밝혔을 때.

"...이유 없이 생긴 능력이, 아니라고."

최소한, 끝까지 개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 * *

최윤은 방향을 돌렸다.

다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날아가고 있었다. 북한을 향해서.

손에 한우현이 쥐어준 금괴 하나와, 달러가 가득 든 배낭을 들고서.

-북한에서는 달러화가 주로 쓰이지. 금은 네가 바로바로 현물로 쓰기는 힘들테니, 이것을 자금으로 써라.

"...씨발, 이것들만 해도 몇 억은 하겠네."

그러면서 최윤은 회상했다. 결국 그가 설득당했던 대화를.

-좋아, 니네 좆목 길드 들어가지. 하지만 명심해라. 난 니 부하가 아니다.

-걱정 마라. 강제하지 않는다. 부탁할 뿐이다. 하나만 도와줘라.

-뭔데?

-플레이어들이 날뛰려고 하면, 최대한 망가져도 괜찮을 나라로 유도해라. 막거나 통제하란 말은 하지 않겠다. 화풀이 공간은 있어야지.

-뭐··· 좋아. 하지만 어떻게? 난 초등학교 반장도 해 본 적 없는데.

-쉽다. 그냥 가장 먼저, 다른 나라에서 깽판을 쳐라. 그 곳이 플레이어들의 놀이터라고 인식되도록.

-조건이 그게 다야? 별 거 없네.

-하나 더. 길드 이름을 최대한 팔아라. 우리의 권위를 퍼뜨리고, 세워라. 가입하겠다는 괜찮은 놈이 있으면 가입시켜라.

의외로 길드의 권고는 별 것 없었다.

하지만 쉽고 좋아 보인다고 다가 아니었다.

최윤이 생각하기에, 저 놈의 말은 분명히 논리적이고 그럴 듯 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너무 완벽했다.

갑자기 세상 플레이어들이 죄다 캐릭터가 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나올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보스 레이드 계획까지 세우고 있다고?

게다가 전 세계 플레이어들이, 말도 안 통하는 인간들끼리 일치단결해서?

"...씨발, 4대 단종템에다가 금괴... 죄다 진짜긴 한데."

하지만 또 믿지 않자니 증거가 너무나 컸다. 그를 영입할 이유도 납득할 만 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역으로 그가 제발 받아 달라고 울며불며 사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 뭐,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걍 스킬 테스트나 해 보자. 머리도 좀 식었으니까, 너무 크게는 말고... 그냥 딱 금수산 태양 궁전? 거기부터 날려볼까."

어쨌거나, 그는 결국 납득했다.

그래서 북한의 수도, 평양으로 깽판을 치러 가고 있었으므로.

화려하게 플레이어와 길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북한을 타도한 최초의 한국인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기는 하네."

최윤이 무심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짱깨 새끼들 좆 같기는 한데···. 嗯,不过仔细想想,毕竟是家乡嘛.(뭐, 그래도 생각해보니 고향이니까.)"

중국 보통화로.

8화 중국 관리자 리하오란 (1)

최윤.

광분사제라는 그 멸칭답게도 특유의 폭발적인 기질은 문제지만, 대화가 아예 안 통하는 놈은 아니었다.

쉬운 대화 과정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결과다.

결국 그에게 설득되었으니까.

-우우웅

게다가,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한우현은 정밀하게 퍼뜨렸던 포스의 감지장을 다시 거둬들였다.

사방팔방으로 최윤의 송과체에서 뻗어나가던 포스의 가지들을 느끼기 위해서 펼쳤던 감각장.

그를 통해 최윤이 가진 포스에 대한 재능을, 첫 날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임 스킬, 그 틀을 깨고 현실에서 보다 자유롭게 초월적인 힘을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예상보다도 쓸모 있는 친구가 될 것 같았다.

"환영한다, 첫 번째 길드원 최윤. 북한 관리자."

날아가는 그를 지켜보며 회상했다.

한우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지...

-꺼져! 전부 꺼지라고 쓰레기 새끼들아! 나 혼자서 충분하니까!

13번째 공격대의 제 3 기동대장 최윤.

공격대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후회와 허무에만 빠져 있었던 세계 최초의 빌런을.

최윤에게도 좋은 제안이며,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최윤의 그 비참했던 최후와 다른 삶을, 이번에는 선물해 줄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서해 너머를 지켜보았다.

곧 휴전선 부근에서 하얀 빛이 작게 번쩍이는 것을 확인했다.

파괴의 빛은 아니었다. 색과 크기로 보아, 버프 스킬.

다행히 학살이 아니라, 길드와 플레이어에 대한 선포로 유인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보다.

역시, 생각이 아예 없는 놈은 아니었다.

그 멀리까지 정확하게 내다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적인 신체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들도 따라하기 힘든 기예.

[날카로운 눈]의 이그드라실 포스 운용을 변형해 만든 오리지날 스킬. [천리안]이었다.

멀리 내다보는 스킬 따위는 전혀 가치가 없었기에 게임에는 없는 스킬.

"좋아."

한우현은 마침내 첫 번째 발판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음을 확신했다.

첫 번째 계획. 중국 붕괴를 북한을 제물로 삼아 막는다는 것을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제 2의 최윤이 나오지 않는다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 내로 중국에도 뭔가를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 복종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새로운 질서를.

한우현은 베이징 칭화대학교 인근의 청년 요양원에 좌표를 찍었다.

중원의 마지막 지배자.

원소군주元素领主 리하오란李浩然을 만날 때였다.

* * *

청년 요양원(한국의 고시원과 유사한 곳)에 사는 리하오란(李浩然, 한국식 독음 : 이호연)은 전형적인 탕핑족(취업포기자)이었다.

어릴 때, 그는 자신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넉넉하지는 못한 낙후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넘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름 부모의 최선을 다한 지원을 받았다.

머리도 꽤나 좋았다.

집안의, 마을의 자랑이 될 정도로.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전국권의 성적표를 받았다.

-하오란! 하오란! 우리 마을 최고의 천재!

-너라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다! 출세할 수 있어!

-이호연, 네가 내 아들인게 자랑스럽구나.

무수한 경쟁을 뚫고 그 많은 중국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정점을 찍었다.

베이징대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명문 대학교.

칭화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입학 이후에도 쉬지 않았다.

뛰어난 머리로 수업을 완벽히 이수해 학점도 잘 받았다.

자격증과 봉사활동이며 각종 대회까지 나가며 대외 활동 스펙도 잘 쌓았다.

지도자의 덕목인 웅변과 논술과 같은 화술, 언어술도 배웠다.

엘리트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가입해야 할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에도 가입했다.

열심히 활동하고 사상을 검증한 끝에 공청단의 중앙 간부들에게도 인정받았다.

평단원들에게도 성공 신화의 모범 사례로 존경 받았다.

그래서 그는 칭화대학 공청단 위원회에도 선발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출세가도였다.

그러니까.

졸업 전까지는.

-아··· 아무래도, 당의 기조가 완전히 굳어진 것 같아.

-많은 자리도 아니고, 겨우 몇 자리를 공청단 간부에게 못 주겠다고?

-위원회에 내년에도 자리가 없을 예정이라네.

-돼지 같은 태자당 새끼들!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박대할 수가! 누구 좋으라고 홍위병 짓을 해가며 충성했는데!

-...괜찮아, 관료만 길이 아니니까.

-일반 기업에의 취직은, 할 수 있겠지.

그보다 훨씬 우수했던 선배들 조차도 죄다 취업에 실패하고 탕핑족이 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희망이 없어.

-난 뭐를 위해 공부를 했던 거지···

-역사적 쓰레기 시간歷史的垃圾時間의 시대다.

그리고 거기에 리하오란도 합류하기 전까지는.

완벽했었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인터넷과 게임 뿐이야.

-좆 같은 나라. 좆 같은 사람들. 좆 같은 당···

-이 나라는 청년을 위한 원칙도, 도덕도, 법규도 없구나.

절망한 리하오란은 현실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그래서 게임에 빠졌다.

가장 싼 청년 요양원에서 머물며, 모든 돈과 시간을 게임에 쏟았다.

돈이 다 떨어지면 죽을 생각으로.

하지만 하다 보니 또 그것이 재밌어서, 그냥 게임에 대한 탐닉을 계속 하게 되었다.

게임 머니를 위안화로 환전하고, 때로는 그 반대로 하고···

그러면서 하루하루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전직 공청단 칭화대학 부위원장이자 수석졸업자의 현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이미 그보다 더 쓰레기 같은 삶을 살거나, 자살로 삶을 마무리한 선배들도 수두룩했으므로.

그 날도 리하오란은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무 졸려서 픽 쓰러지듯 누운 참이었다.

-쿵쿵쿵

"嘈杂!(시끄러워!)

-쿵쿵쿵

"将交货留在后面(택배 왔으면 대충 놓고 가!)

-쾅

"...?!"

리하오란은 새벽부터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미친 놈 하나 때문에 짜증이 났다.

게임을 아무 때에나 너무 길게, 불규칙적으로 해 대서 수면 패턴이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오래간만에 찾아온 수마. 꽤나 오래간만에 달게 잔 참이었다.

비몽사몽 와중에 꺼지라고 대답했다.

그 짜증은 문고리가 부서지며 문이 강제로 열리자 싹 날아가게 되었다.

***

-꿀꺽

이런, 벌써 다 마셨나.

오는 길에 24시간 운영하는 우롱차 프랜차이즈가 있어 구매한 음료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차인 안계산 철관음이 지금 상태가 좋다길래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가짠가 보다.

괜찮았다. 어쨌든 먹어 줄 만한 수준의 우롱차기는 했으니까.

-탁

그를 대충 던져 놓고선 한우현은 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을 쳐다보았다.

머리색이 무지개 마냥 총 천연색이 섞여 있었다. 원소술사 캐릭터의 기본 머리색.

한우현이 기억하는 중원의 마지막 공격대장. 베이징의 마지막 영주.

원소군주 리하오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물론, 자세라던가 태세는 좀 많이 달랐지만.

"他妈的!(이런 씨발!)"

"일어나라, 개고기··· 아니, 호연."

이런, 한국식 독음으로 그 한자 이름을 부르려다가 실수로 발음이 꼬였다.

"리하오란. 만나서 반갑다."

괜찮았다. 자다가 일어난 모양으로 보아, 아직 사태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아마 제대로 못 들었을 거다.

그러면 오히려 좋다. 대화의 주도권을 확실히 쥘 수 있을 테니.

"天哪,你是谁?角色扮演者?(미친, 넌 누구야? 코스플레이어?)"

"据我所知,你父亲是韩裔中国人.(아버지가 조선족인 걸로 아는데.) 시치미 떼지 마라."

한우현은 미리 번역기를 돌려 외워둔 말을 내뱉었다.

그가 리하오란을 중국 플레이어들의 지도자로 점찍은 두 번째로 큰 이유였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한국인이다.

그런 만큼 한국 다음 가는 거대 서버인 중국 플레이어의 대표도 한국어를 할 줄 알아야 했다.

"···."

다행히, 이번에는 그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더니 겨우 어설픈 한국말이 나왔다.

"···아, 안녕하지 못하다."

리하오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선 말을 이었다.

"한국어는 대학교 졸업 이후, 거의 안 썼다. 지금은 잘 못 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려운 한국말을 할 게 아니니까."

한우현은 최대한 위압적인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손거울을 집어 내밀었다.

"거울부터 보고 얘기할까?"

"무슨, 무슨? 이것이 나라고?"

"정확히는 네 이그드라실 캐릭터다."

"···원소술사?"

"그래. 레벨 278 원소술사 리하오란. 너를 찾아 왔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리하오란의 표정이 몇 번이나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연극놀이를 하는 것인가?"

"못 믿겠다면 스킬을 써 봐라. 궁극 스킬 같은 것 말고, 10레벨, 20레벨 스킬."

영 못 믿겠다는 듯 리하오란이 망설였다.

한우현은 먼저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기초 신성력 제어]."

그 이름과는 다르게, 그냥 전반적인 공격력을 높여주는 효과에 불과했지만.

보기에는 화려한 기초 스킬이었다.

"···[기초 원소 제어]."

그것을 본 리하오란도 그제서야 한우현을 따라했다.

방 안을 밝히며 얼음, 불, 전기가 그의 손에서 주먹 만한 크기로 뭉쳤다.

그 크기와 움직임이 한우현의 운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미숙했지만, 아무튼 게임 스킬이 현실에서 나타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지."

한우현은 서두르기로 했다.

예상보다 길이 복잡하고 구글 지도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했다.

이대로면 내일까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까지 처리하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었다.

동남아시아 서버도 중요했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세계 최강의 길드, [루시드]의 길드장 아서다. 본명은 한우현. 한국인이지."

그러니까,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이미 한국, 동남아시아, 글로벌 서버의 랭커들과 합의가 끝마쳤다."

다시 한 번 공갈을 쳤다.

곧 진실이 될 공갈을.

"우리는 너를 지켜봐 왔다. 인상 깊더군. 따라서 이번 일을 계기로, 중국 서버의 랭커들도 영입하기로 했지."

그의 도움 없이도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할 자에게, 미리 손을 내민다.

"너에게 중국 지부장 자리를 주겠다. 우리 길드에 들어와라, 리하오란."

"길드? 게임 길드를 말하는 것인가? 미친 소리인가?"

"[인벤토리]."

다시 한 번 한우현은 그 아이템들을 꺼냈다. 단종된 밸런스 붕괴 아이템들.

"이걸로는 부족하지. 충분한 대가와 보상도 주마."

"이, 이 무슨? 이 많은 위안화가 어디서?"

뒤이어 막대한 재력을 증명시켜 줄 위안화 다발까지.

다행히 리하오란은 최윤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긴 중국 최고의 명문대에서 대표 자리에까지 올랐던 사람이 뛰어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눈]. 아이템은 모두 진짜다. 레벨이··· 300? 주 스텟이 12만? 포스는 낮지만··· 미친 인간이다. 하지만 이해했다. 충분히 잘 이해했다."

하지만 여전히 리하오란의 눈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하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스럽겠지.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만약 그가 여기서 좋다고 덥석 물 정도의 인간이었다?

그런 놈이 중국 플레이어들의 마지막 지도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탕핑족 리하오란. 하루 종일 이 좁은 방에서 게임만 하고, 누워서 잠만 자고···"

한우현은 그 망설임을 없애줄 말도 미리 준비해 놓았다.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 외에도, 그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한심하군, 공청단 칭화대 부위원장. 마지막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총회 출석이 그렇게도 만족스러웠나?"

그 말에 리하오란의 눈에 빛이 번쩍 일어났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불꽃, 얼음꽃, 번개꽃이 그의 눈에서 번쩍였다.

9화 중국 관리자 리하오란 (2)

한우현은 회귀 직전까지도 고민했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유지되어야 해. 이건 중국 정부 행적의 호오와는 별개의 문제야."

그 수뇌부인 공산당 따위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그 공장과 막대한 인구가 쏟아내는 생산품들이 제대로 세계의 무역 구조에 남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중국에는 원한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 자신의 인구도 너무 많다.

내부의 적도, 외부의 적도 거대하다.

그것들 모두를 한우현 혼자서 제어할 수는 없었다.

무수한 원자재를 내뱉는 중국의 무역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자체적인 방어 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한우현에게 전적으로 협조적이어야 했다.

협조를 넘어, 복종하고 조아려야 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그 주도권은?

중국 공산당에 넘겨준다고 해도, 공산당이 플레이어들을 잘 다룰 수 있을까? 공산당이 한우현의 말을 잘 들을까?

가장 강한 중국 서버 플레이어 대표를 선발한다면, 공산당이 그들의 대표성을 인정할까? 플레이어와 싸운다면?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역시나 라일리 그레인저가 남긴 말들이었다.

-아, 중국에도 실력이 있었던 플레이어들이 많았는데요···

-어차피 이제 와서는 죽은 사람들 얘기를 해서 뭐하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는 거죠. 만약 그 플레이어들을 좀 더 일찍, 모을 수 있었다면···

-한국 플레이어들도 인성이 하나같이 예술적인데, 중국이라고 다를 거 같지는 않다만.

-한 명 있었잖어요. 중국의 마지막 공격대장.

-원소군주? 그 지독한 인간 불신론자를 말하는건가.

-신기한 사람이었죠. 그렇게 일반인도, 플레이어들도 싫어했으면서. 결국 중국 최후의 공격대를 모아 레이드를 시도했으니.

-어쨌든 실패한 사람이지.

-그래도 통솔력은 확실했죠. 남은 중국의 플레이어 모두가 그를 따랐었으니까요.

-아닌 놈들을 죄다 죽여서 그렇게 만든 거잖아.

-아잇! 그게 요점이 아니잖아요!

한우현은 라일리의 마지막 말을 회상했다.

-한국어도 할 줄 알고, 통솔력도 있고, 책임감도 있고, 일반인과 플레이어 모두에게 중립적인 회의론자···

-뭐, 말 하는 꼬라지는 별로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나쁜 놈은 아니긴 했지.

-저라면, 과거로 돌아간다면,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그를 찾을 것 같네요.

"리하오란. 공청단 칭화대학 부위원장을 역임했지?"

공청단은 한 때 중국 공산당의 3대 세력이었다.

한 때라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공청단共青团. 태자당太子党. 상하이방上海帮.

각기 노력, 혈통, 실무를 상징하는 거대한 세 개의 세력.

1억 당원의 중국 공산당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떠받치는 인재들의 집단.

그러나 현 중국 주석에 의해, 공청단과 상하이방 출신들은 대부분이 한직으로 밀렸다.

이제 중국 공산당은 순혈 공산당 최고위 간부들의 자제인 태자당 위주로만 돌아간다.

"좆 같지 않나? 부모 혈통만 믿고 너희들을 몰아내 버린 태자당 종자들."

그것은 리하오란의 가장 큰 역린이었다.

한 때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의 제일 가는 충성단원이었던 이를,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버릴 정도로.

"하긴 상하이방도 퇴물이 되었는데 공청단 따위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싶다마는."

서서히 리하오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광기, 질투, 분노, 증오로 가득 찬 빛이.

"...너는 나에 대해서, 아주 잘 안다. 너무 잘 안다. 외국인이 알 수 있을 정보가 아니다."

이어서 리하오란은 중얼거렸다.

"나는 그리 중요한 사람도 아니다. 게임과 현실 모두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한우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긁었나?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뒤이은 말에 그 마음이 다시 놓였다.

"왜 나를 선택했는지 묻지 않겠다. 너는 나에게 바라는 게 있고, 내 능력을 인정해 줬다."

리하오란은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의 나는 약하고, 능력도 없다. 하지만 달라질 것이다."

노골적인 욕망. 출세와 권력에 대한 욕망.

그것이 리하오란의 두 눈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네 말을 듣는 대신, 네 힘과 권위를 빌려주어라."

순간, 한우현은 기시감을 느꼈다.

레벨 자체는 훨씬 낮았건만, 그와는 관계없는 인간 자체의 의지에서 나오는 힘을.

"그 길드에 전적으로 충성한다. 대신 힘을 줘라. 책임을 줘라."

지금 한우현은 방구석 탕핑족 리하오란이 아닌, 중국의 마지막 공격대장 리하오란을 느꼈다.

"나는 중국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현실에서 중요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

한우현은 웃었다.

아주 만족스럽게.

"훌륭하다. 우리 길드 또한 너를 실망 시키지 않겠다."

"[길드창]."

"나 리하오란. 캐릭터 네임 원소군주元素领主. 루시드에 가입하겠다."

"환영한다. 중국 관리자."

한우현은 두 번째 길드원을 영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도, 첫 번째 길드원보다 훨씬 의지 있어 보이는.

앞으로 생각이 바뀔지는 몰라도, 지금은 훨씬 충성스럽고 필사적이기까지 한.

"모름지기 집단의 수장이라면, 자진해서 충성을 서약한 이에게 그 대가를 줄 의무가 있지."

"대가? 바라지만, 아직은 아니다. 나는···"

"일단 받도록. 너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드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니."

다시 한 번 한우현은 인벤토리를 열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주기로 정해 놓았던 아이템을.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 12개. 모두 마셔라."

"이건, 한국 서버의 단종 아이템이 아닌가? 대체 단종 아이템을 얼마나···"

"레벨 290은 되어야 너의 대장 노릇에 힘이 실리겠지."

리하오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재였다. 하나만 빼면.

바로, 본신의 레벨이 조금 낮다는 것.

레벨 278은 객관적으로 그다지 낮은 레벨은 아니었다. 세계 랭킹 1만 명 내에 들 정도니.

하지만 중국 전역을 관리할 자의 레벨로는 좀 부족했다.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은 오래 전, 만렙이 300이 아니라 200이었던 시절에 나온 아이템이었다.

-와, 하루 종일 사냥을 해야 레벨 업 할까 말까인데 이거 하나로 레벨 업?

-근데 가격이 너무 비싼데···

-난 시간이 더 소중해.

-잘 모르겠다. 10만원은 좀.

그래서 그 당시에는 그렇게 까지 가치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패치로 인해 만렙이 300까지 오르며 그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비록 레벨 290 이상에는 쓸 수 없도록 패치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까지는 유효했으니.

운영진도 그를 인지했기에, 다시는 그 아이템을 내지 않았다.

현실에 게임이 되고 나서는 더욱 더 가치가 높은 아이템이었다.

-이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은 일반인을 플레이어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야.

-하지만 유의미한 전투력을 가지려면 일반인 한 명에게 250개는 써야 해.

-존재하는 모든 비약을 다 마시게 해도 부족하군.

-이것만 양산에 성공한다면···

단순히 경험치를 얻는 배율을 높이는 축복 아이템들과는 달랐다.

경험치와 레벨 자체를 '조건 없이 직접적으로' 올리는 유일한 아이템이었으므로.

미국 정부가 플레이어를 양산하기 위해 그 아이템을 수배했다.

전 세계에 73개 밖에 남지 않은 그 아이템이 결국 모조리 미국 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10개의 비약이 연구소에서 증발했지만, 결국 재현에 실패했다.

엄밀히는 아예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무의미한 결과였다.

남은 비약은 미국 정부의 대변자였던 라일리 그레인저가 보관하게 되었다.

-라일리! 위험해! 어서 나와!

-안 돼요! 조금이라도 더! 이것도, 이것도···

정확히는, 미 국방부가 제 9 사도에게 무너졌을 때 라일리가 황급히 챙겼다.

그마저도 다 챙기지도 못했다. 건진 것은 겨우 서른 개 남짓. 회귀 후로 가져 온 것도 그게 다였다.

하지만 충분히 지금 쓸 가치가 있었다.

"정말로 내가 이걸 마셔도 되나? 세상이 게임이 되었다면, 이 아이템은 길드장의 생각보다 훨씬 가치가 클 수도 있다."

"알고 있다. 그 모든 걸 토대로 판단한 거다."

"...길드에는 대체 아이템이 얼마나 많은 것이지?"

"네가 지금 생각한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

원소군주 리하오란은 그만큼 중요한 플레이어였다.

리하오란은 본신의 레벨과 스킬로 중국의 마지막 공격대장이 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플레이어들에 대한 설득, 강요, 토론, 정치···

그를 따르는 모든 플레이어와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 구조의 판결.

그리고 선을 넘은 플레이어와 일반인들에 대한 확실한 처단.

모든 지도와 결정에 대한 확실한 근거와 증거.

리하오란보다 훨씬 강하고,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들도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게 된 이유였다.

"그러니, 마셔라."

"길드··· 어떤 이들인지 모르겠지만, 놀랍다. 그냥 아이템이 많은 게 아니라, 이런 걸 막 가입한 나에게."

"걱정 마라. 합리적인 투자이니."

"합리적···."

그랬던 그가 레벨이라는 유일한 약점마저 극복하게 된다면.

어떤 집단을 조직할 수 있게 될까?

한우현은 기대되면서도, 살짝은 두렵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너에게 루시드 길드장으로서 첫 번째 임무를 주지."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을 먹어라. 아래서부터. 플레이어들을 앞세워."

회귀 전, 끝내 중국의 모든 빌런 플레이어들을 척살하는 데에 성공했던 마지막 군주.

리하오란은 은원을 결코 잊는 인물이 아니었다.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준다.

그것이 바로 '정상화'라고 믿는 원칙주의자.

"지금부터 너는 루시드 길드의 중국 지부장이자, 공청단을 대표하는 위원장 플레이어다."

그러니 베풀고, 믿는다.

"할 수 있겠나?"

리하오란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크, 크크큭. 크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 명령이다."

"하겠다. 아니, 하고 싶다!"

"어떠한 원칙도, 도덕도 없는 나라다. 기꺼이 정상화의 원칙을 세우겠다! 우리 플레이어가 주도하는!"

그러면서 그의 뒤틀린 이상론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바숑디把兄弟. 한우현 너는 이제부터 내 의형이다."

바숑디把兄弟. 그 뜻은 의형제. 형제보다도 오히려 높게 쳐 준다는.

중국 꽌시에 있어서 최고봉의 단계.

"좋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협조를 구하지."

한우현은 이제 다음 할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품 속에서 이그드라실 홈페이지에서 뽑은 중국 서버의 랭킹 정보를 꺼냈다.

그 중에서도, 미래에서도 유명했던 플레이어. 그리고 마지막까지 리하오란을 따랐던 플레이어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는 놈이 있나?"

"캐릭터 정보는 둘째 치고, 대체 현실에서의 신상을 어떻게?

"세계 최강의 길드라면 기본이지."

"으음... 몇몇은 안다. 하지만 다는 아니다."

다 알 필요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 10명만 처리하면 된다.

"위치는 내가 아니, 지금 바로 찾아가지."

"알겠다. 최단 경로를 짜자면... 이게 좋겠다. [차원 관문]!"

원소술사는, 마법사 계열 직업이다. 따라서 공용 스킬인 차원 관문이 있다.

리하오란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의도를 파악하고, 할 일을 했다.

한우현은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자."

"길드장은, 계획성이 정말 철저하군..."

"기본이지."

10화 중국 관리자 리하오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