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4)
"경고. 경고. 경고. 시스템 손상. 시스템? 손!상? 손상! 위협! 위협, 제거, 제거, 제거···!"
그 금속 표면체가 달아오르는 것을 넘어, 뒤흔들리며 진동한다.
-그으응
-기이잉
"멸망기신이 3 페이즈에 진입합니다. 1초 뒤, 중력 붕괴가 시작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0.5, 0.4···"
"흡!"
-[절대 방어]
초월급 방어 스킬을 최대 한도로 끌어올린다. 빛의 안개가 한우현의 몸 전체를 감쌌다.
-[포스 전투술 제 7형 : 역장 외골격 : 흡수 장갑]
동시에 그 힘을 다시금 미세하게 퍼뜨리며, 스스로의 육체 표면 형상에 알맞게 재구축한다.
그 물리적 성질 또한 부여한다. 미세한 포스의 입자들이 [절대 방어]와 어우러지며 강한 탄성력으로 출렁이도록.
"중력 붕괴 시작. 파편에 주의하십시오."
-쿠아아아아
거기까지 준비했을 때, 무지막지한 규모의 빛과 소리가 터져나갔다.
멸망기신의 표면을 이루는 대부분의 금속체와 부품들이 폭발하듯이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으윽...!"
그에 휘말려 날아가며, 한우현은 다시금 포스를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연산했다.
"파편들이 접근합니다. 각 운동량···"
"100kg 이상 파편들만 알려!"
그 이하는 대충 쳐낼 수 있으니까.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연쇄무도]
-카강
-티잉
-키깅
초월적인 속도로 휘둘러지는 방패가 구형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무수한 파편들을 쳐냈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서는 날아가는 궤도를 제어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기에, 파편의 방어에만 집중한다.
"대형 파편들이 비산합니다. 우방 1시 방향, 전방 2시 방향, 하방 6시 방향."
-[포스 전투술 제 1형 : 벡터 재조정 : 스칼라 조정]
-콰광
한우현의 방패에 닿은 초대형 금속 파편들이 그 운동량을 잃고 힘없이 떨어진다.
-[포스 전투술 제 1형 : 벡터 재조정 : 삼각 초기화]
동시에 몇몇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궤도로 꺾이거나 튀어나간다.
왼쪽으로 부딪혔는데 오른쪽으로 튀어나가고, 위로 부딪혔는데 아래로 튀어나간다.
"착지 지점의 형상이 불안정합니다. 날카로운 포스 역장체가 착지 지점에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착지 시 충격 대비···"
"하!"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유체화]
그 몸이 인체의 관절과 근육 구조를 비웃는 형상으로 기괴하게 늘어진다.
동시에 목을 꺾어 아래를 보며, 거기 틀어박힌 거대한 금속 덩어리와 가지들을 본다.
공전하며 돌던 금속 바닥들과, 거기 부딪힌 멸망기신의 껍데기들이 위협적인 모양으로 부서져 있었다.
그것에 지나지 않다면 드론이 경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멸망기신의 가장 단단한 외부 표면을 이루고 있던 물질들이기에.
너무도 날카롭고 단단한 포스 역장체가 그 안과 밖에 깃들어 있다.
한우현이 파편들에게 하나하나 신경써서 방어해야 했던 이유였다.
그 모든 형상과 방향, 구조를 기억하며 다시금 [절대방어]를 한껏 끌어올렸다.
-콰과광
극도로 강력한 역장과 방어 스킬들이, 한우현의 몸을 지키며 역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기계와 금속 덩이들을 박살냈다.
"크윽···"
충격이 꽤나 만만치 않았지만, 한우현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그 주인에게서 떨어져서 포스 응집도가 약했던 탓인지,
[절대방어]을 뚫고 타격을 가하는 수준의 충격은 아니었다.
"섬멸. 섬멸. 섬멸. 섬멸···"
-철컥
-철컥
-철컥
그 표면이 다 떨어져 나가, 안의 핵융합 반응로가 시뻘겋게 드러난 채.
멸망기신 내부의 반응로에서 빛과 열이 폭발적으로 요동쳤다.
"융합포 패턴 감지. 방어 불가능. 절대 즉사 패턴입니다. 안전 구역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어디지?"
"융합포 각도, 시간, 총합 연산. 안전 구역··· 표시합니다."
-키이이잉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오르는 반응로를 보며, 한우현은 발바닥과 발목에 포스를 한가득 주입했다.
-[빛의 발걸음]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기동술 : 허공답보]
-콰광!
한우현의 발을 주위로 충격과 운동량을 버티지 못하고 주위 바닥 전체가 요동치며 박살난다.
발과 발목에 너무도 큰 물리력이 깃들어 도약했기 때문이었다.
안전 지대로, 가능한 빨리 가야 했으니까.
사실, 절대 즉사 패턴이라고는 했지만.
한우현이 [절대 방어]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한다면 막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포스 효율이 그다지 좋지 않기에 굳이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뿐.
-휘익
그렇기에 아슬아슬하게, 허공에 보조 지능이 띄워 준 공간에 안착한다.
-[부양]
정신없이 움직일 때는 포스 전투술이 더 낫지만.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플레이어 200레벨 공용 스킬, 부양이 더 효율적이다.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초월적인 열과 빛이 모든 주위 공간으로 퍼져나갔다.
-쿠아아아앙
불가해한 수준의 에너지가 포스와 함께 몇몇 안전 공간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 작렬했다.
마치 태양을 액체로 만들어서, 쏟아붓는 듯한 공간.
그 한 가운데 있는 듯한 수준의 온도.
하긴, 핵융합 반응로 내부의 연료를 그대로 분출하는 것이니.
실제로 별의 온도와 비슷할 것이다.
"다음 패턴 연산 준비해라."
"확인. 구르기, 기계 팔 폭풍, 레이저 사격, 블랙홀 패턴 연산 준비합니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열왜곡]
직접적으로 맞지 않고 안전 지대에 있음에도, 수천 도는 될 법한 열기.
너무 뜨거워서 피부가 괴로워, 그를 약간 완화했다.
"10초 뒤, 융합포가 종료됩니다."
"좋아."
-[포스 전투술 제 10형 : 의식 확장술 : 광역인지]
가장 험난한 순간.
철두철미하게, 빠르게,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만전을 가한다.
한우현의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포스가 신경 구조를 모방하며 온 몸에서 확장되어 퍼져나갔다.
그 유사 신경계의 포스 다발들이, 막 울컥대며 융합로의 틈새를 닫는 멸망기신에게 닿는다.
그 구조 하나하나가, 속속들이 한우현의 인지 영역에 [새겨졌다].
"이해가 쏙쏙 되잖아."
식당으로 비유하자면...
"융합포 종료. 0.5초 뒤, 멸망기신이 움직입니다."
쓸데 없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조 지능이 끊어주었다.
"말살 프로토콜 개시. 목표 포착."
-쿠르르르
그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거대한 쇳덩어리가 삽시간에 굴러왔다.
-후우욱
-후우욱
동시에 뜨거운 대기를 가르며 기계 촉수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둘러졌다.
"기계 팔 패턴 포착. 좌방 1시, 8시, 4시, 우방 3시, 10시, 11시 방향에서 0.1초 간격으로 쇄도."
"계속 체크해!"
그의 바로 앞에서 렌즈 뿐 아니라 온 동체에서 붉은 빛을 질질 흘리며.
멸망기신이 공격을 계속한다.
-콰과광
-콰과곽
-으즈직
따라서 계속해서 막고, 벤다.
반복해서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을 펼치며 방패로 일부는 막고, 일부는 빗기고, 일부는 흘린다.
-콰자작
그러면서 몇몇 팔은 끝을 자르거나 부순다.
팔을 모조리 끊어 놔야 다음 패턴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 모든 것들이 분명 아까와 같은 기계 팔 패턴이지만, 완전히 양상이 다르다.
고정된 채로 내지르던 찌르기에 가까운 1, 2페이즈와는 달리.
이번에는 직접 스스로 굴러오며 휘두르는 공격이기에.
"흡!"
1분 정도 수십 번의 기계 팔 공격을 막으며, 절반 쯤 되는 팔이 잘렸을 때 쯤.
-후우웅
-콰광
-후우웅
-콰광
순간적으로 기계 팔들의 속도가 느려졌다.
"레이저···"
"위치 띄워!"
"연산 완료. 시야에 활성화합니다."
다시금, 동력실의 벽과 바닥에서 레이저 총구들이 한우현을 조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이저들의 위치에 맞춰 이동할 여유가 없다.
기계 팔들에 대응하기에도 바쁘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정면에서 방어한다.
-[절대 방어]
-[포스 전투술 제 7형 : 역장 외골격 : 흡수 장갑]
-[물리 왜곡술 : 전자기유도 : 광학유도]
"0.1초 뒤 레이저 발사. 멸망기신의 기계 팔에 실린 포스가 약화됩니다."
"하아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지잉
-지잉
-지잉
모든 공격을 정면에서 버티며, 기계 팔의 속도와 강도가 약해진 순간.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강화운동]
모조리 베어낸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속도로 검기가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단 한 개의 팔도 남기지 않고, 모든 기계 팔이 잘려나간다.
"경고. 경고. 심각한 손상···"
좋다.
만약 이 번에 기계 팔을 2개 이상 남겼었다면, 공간 전체를 타고 구르며 진격하는 구르기 패턴이 시작된다.
공격력이 약한데다가 전투 지속 시간까지 짧은 현재의 한우현으로서는 골치 아픈 패턴.
다행히 잘 넘겼다.
이제, 마지막이다.
"반응로가 열립니다. 1초 뒤에 블랙홀 패턴이 시작됩니다."
"그래, 슬슬 끝내자고."
그 말에 보스 몬스터가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전 방향, 중력 구속 개시."
-우우우웅
다시 조여들며 닫혔던 반응로 틈새 사이사이가 벌어지며, 무지막지한 중력이 작용한다.
-[빛의 발걸음]
-[포스 전투술 제 6형 : 란나찰 : 공간 당기기]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오히려 힘을 싣고 날아간다. 보스 몬스터의 정 중앙. 그 거대한 렌즈 눈을 향해.
칼과 방패를 한껏 내민 채, 틀어박혔다.
-콰과광
엄청난 속도로 부딪혔기에, 멸망기신의 표면 상당 부분이 박살나며 파편이 튀었다.
"목표 흡착 확인. 파괴 시퀀···"
그 표면이 불안정하게 떨린다.
"지금입니다."
"알아!"
-[바위에 꽂힌 검]
-콰드드득
보스 몬스터가 그 표면을 완전히 해체하며, 내부로 갈아먹기 직전에.
힘껏 검을 박으며 궁극기를 사용한다.
몸 전체에 차원을 초월한 듯한 괴리감이 흘렀다.
20초 동안 유지되는 무적기의 효과.
방금 전과 같이 쌍생성과 쌍소멸을 끌어올려도 되겠지만, 이번에는 보다 편한 방법을 선택하자. 슬슬 지끈거리는 송과체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열왜곡]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흡성대법]
이미 반 쯤 망가진 상태에서 발악하는 것이 바로 3페이즈.
즉, 그 동력인 핵융합 반응로 또한.
이미 멸망기신의 통제에서 반 쯤 벗어난 상태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덧칠하기 ]
그러니 흡수하고, 역으로 발산할 수 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벌겋게 안에서 휘몰아치는 작은 별과 같은 핵융합 에너지체들이.
유유히 한우현을 향해 흐르며 그 검에 빨려들어간다.
"오류. 오류. 동력원 약화. 동력원 약화···"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이라는 양대 오리지날 스킬을 통달한 플레이어나 시도할 가치가 있다.
게다가, 사실 정석대로라면 이런 변칙적인 행위는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한우현의 직업이 공격기가 약한 [성기사]이며, 시간도 부족하기에 이렇게 어려운 기술까지 꾸역꾸역 만들어 써 먹는 것이지.
만약 그가 딜러 직업군이었다면, 지금 그냥 극딜기로 해체하고도 남았다.
"하여간, 밸런스 패치 좀 하고 망하지··· 전자기인 같은 걸 개사기로 만들어 놓고···."
괜스레 이미 죽어 없어진 개발자들을 욕하며, 그 모든 에너지를 한 층 더 응축해 [바위에 꽂힌 검]에 더욱 강하게 불어넣었다.
-구구구구
-그그그그
절대 무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검이 불안정하게 뒤흔들리며 그 주위로 입자와 파장을 요란하게 내뿜었다.
"오류, 오류? 종료. 종료. 자연사? 종료? 자연사?!"
멸망기신이 최후를 직감한 듯, 그 렌즈를 미친 듯이 회전하며 한우현을 향해 조리개를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콰자작
마지막 쐐기로, 방패를 굳이 검 위에 한 번 더 강하게 박았다.
그 손짓과 함께 어마어마한 소음이 울리며 주위를 진동시켰다.
-그오오오
불가해한 수준의 빛과 열, 포스가 웅장하게 퍼져나가며.
-콰과과과
검의 아래에 꽂힌 멸망기신의 핵에 정통으로 작렬한다.
-쿠아아
한참이나.
아주 한참이나.
-휘오오
완전히 그 움직임부터 빛, 소리까지.
모든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자세를 유지한 채 가만히 버텼다.
-카자작
마침내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자, 한우현은 검을 바닥에서 뽑았다.
"...후. 보조 지능."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핵융합 반응로 활동 분석··· 활동 종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해 주듯.
[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격파하셨습니다! ]
[ 최초 격파! 진정한 대적자에게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
[ 보상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
상태창이 그의 눈앞에 뜨며.
-후우웅
보스룸에 그가 입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 공간이 어그러지며 한우현을 감쌌다.
61화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
-파앗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한우현은 마치 그 모든 싸움이 꿈이었다는 것 마냥.
멀쩡해진 상태의 동력실에 들어와 있었다.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상자]
단 하나의 차이는, 원래는 보스가 있었을 위치에.
기계 장치들이 뭉친 듯한 모양의 상자가 있었다는 것.
"정말 쓸데없는 건 똑같아."
정작 보스의 공격 방식이나 패턴 등은 게임과 완전히 다르면서.
게임사가 이상한 방식으로 설정해 놓은 [보스-보상 이원화]는 그대로 따라가다니.
참으로 부조리한 형태다.
"[캐릭터 프리셋], [보상용]."
어차피 드롭 아이템은, 드롭 아이템 확률을 늘린다 해도 그다지 유의미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어려운 것도 아니니, 구태여 장비를 보상 확률을 높이는 아이템으로 바꾼다.
-[신성한 검]
-콰자작
기본 공격기로 상자를 살짝 건드려 주자, 마치 풍선이 터져나가듯.
무수한 아이템이 허공으로 튀어나오며 바닥에 떨어졌다.
-[영혼 결정]
-[마법의 흔적]
-[프리미엄 포인트]
-[기계 핵 파편]
-[반짝반짝 용기의 물약]
-[반짝반짝 지혜의 물약]
-[보스 몬스터 현상금···]
-[응축된 포스 에너지···]
"하."
당연하게도, 그 무수한 아이템의 대부분은 쓰레기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보스 몬스터 보상이 창렬하고 섭섭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확률을 높여 조금이라도 아이템이 더 나오긴 했지만, 어차피 이제 현실에서 보스 레이드를 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유저들이 가진 것을 모두 합치면 수 백만, 수 천만은 될 보상 아이템이나 포인트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최초 격파 보상이 추가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진짜는 이것이다.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
-[포스 한계 돌파권]
"나와라."
즉시 둘 모두를 꺼내들었다.
먼저, 포스 한계 돌파권.
-[포스 한계 돌파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대상, [아서]."
-[한계를 돌파합니다! 최소 1에서 최대 200만큼의 포스 한계 수치가 증가합니다···]
그 알림과 함께 단풍잎 모양의 돌림판이 나타났다.
-드르르륵
"이딴 데에까지 확률, 확률··· 하긴 동사과, 은사과, 금사과, 백금사과, 금강사과까지 팔아먹던 새끼들 다워."
물론 유저들 대부분이 어이가 없어 그 미친 BM 구조의 아이템들을 전혀 구매하지 않긴 했지만.
아무 곳에나 확률을 쑤셔박는 행태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 빈정거리면서도 한우현은 돌림판을 노려보았다.
정말로 중요했으니까.
10사도를 넘어가는 보스를 잡기 위해서는.
최대 수치인 2000의 포스는 물론이요, 그보다 훨씬 높은 포스가 필요하다.
물론 모두가 그리할 필요는 없었다.
딜러는 질을 양으로 떼울 수 있으니.
탱커와 힐러만 제 몫을 그 이상으로 해 주면 된다.
그러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플레이어.
라일리 그레인저와 한우현은 그 이상으로 최대한 포스가 높아야 했다.
-[200··· 1··· 2···]
"확률 주작은 뭐야 씨발···"
200까지 간 숫자가 다시 1로 돌아가자 한우현은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141··· 142··· 143···]
-[축하드립니다! 최대 포스 수치가 150만큼 증가했습니다!]
"후."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아주 좋았다. 목표로 했던 최소 수치인 100은 넘겼으니까.
원래 최대 수치가 2000이니, 현재의 최대 수치는 대략 2150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응축된 포스 에너지 조각]."
게임이었다면 이미 포스 수치가 최대라 이건 쓸모가 없었으니, 곧바로 바로 팔아서 현금으로 바꿨을 것이다.
그럼 게임 디렉터는 골드 조각 그만 팔아 제발 돈 좀 써 줘, 라고 울부짖었겠지.
지금은 아니다. 그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물건이니까.
"사용."
-파앗
그 에너지 조각이 빛나며 한우현의 몸에 깃들었다.
딱히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그저, 무언가가 몸 안에 깃들며 커지는 느낌이 있었을 뿐.
"...음."
아주 희미하게, 송과체에 그것이 깃들며, 약간 그 안의 신경 세포들이 변화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원리를 자세히 알기는 힘들었다.
애초에 회귀 전에도, 전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서 연구했음에도.
포스는 그 대부분의 작용 기전과 원리가 정체 불명인 힘.
지금 포스가 늘어나는 걸 그가 본다고 해서 알기는 힘들었다.
"흡···!"
-[광신의 광검]
포스를 적당히 쓸 수 있는 기술을 사용하며, 소모를 확인했다.
확실히 늘었다. 두 배로.
따라서 현재 한우현의 포스 수치는 200. 이제 그를 섬세하게 제어한다면 500 정도의 힘은 평소에도 무난하게, 폭주한다면 800도 가능하다.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
다음 보상을 확인할 때다.
-탁
현재 한우현의 옆을 맴돌고 있는 전투 보조 지능.
그와 거의 똑같이 생긴 둥그런 쇳덩이가 떨어졌다.
"이건 어디다 써야 좋을까···"
말 끝을 흐리며 회귀 전의 물건.
[공격대 보조 지능]과 그 옆의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는 참으로, 너무나도, 그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 했던 물건.
-대체 이게 뭐지? 무슨 원리로 돌아가는 거지?
-회로 구조도가 아예 현실의 반도체와 근간부터 다릅니다!
-인공지능 설계 코드, 얼핏 보면 언어 모델과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뇌 신경망을 모사한 듯한···
-젠장, 어떻게든 분석만 가능하다면 강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분석한 것 만으로 이미 GPT-10 수준의 성능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걸 분해해 봤자 어차피 보스들이 튀어나오기 전에 제대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라일리 그레인저. 우리가 가진 모든 데이터를 넣어, 이를 애드 온Add-on으로 개발하겠습니다.
-제 아무리 저희 조사국의 초인연무부가 개발한 [포스 전투술]이나 초상연구부가 개발한 [물리 왜곡술]을 쓴다고 해도, 결국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보스의 공격을 모두 파악하고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잠재력이 높은 물건을 겨우 그런 식으로.
-제 말을 믿으십시오. 전 세계 제일의 시나리오 분석 전문가이자 AI 연구자로서 하는 말입니다.
-...알겠어요, 유진 킴.
-당신도 부탁합니다, 한우현. 탱커의 데이터도 필요하니까, 틈 날 때마다 라일리와 함께 데이터를 입력하며 강화 학습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다, 이상예측부장.
-그런, 이만 전 할 일이 많으니까···
그를 받아들던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 때는 시간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보스 공략도 즉각적으로 마친 데다가 공격대의 규모가 안정적이다.
게다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전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 구조도 멀쩡하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인 한국과 미국도 그 기능이 거의 온존하다.
즉, 이걸 꼭 보스 공략에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물론 플레이어와 길드 자체의 전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그가 직접 쓰는 것이 좋겠다만.
길드 내 유일한 제대로 된 해커인 신창민은 AI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실제로 회귀 전에서도,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을 제대로 포스까지 활용하며 분석하고 개조했던 핵심 주도자는 유진 킴이었다.
무수한 시나리오 분기 분석으로 예언에 가까운 예측과 전략을 만드는 무시무시한 천재.
그에게 맡기는 것이 정답이리라.
설령 미국이 길드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은, 어쨌거나 세계 질서의 유지를 바라는 집단이니까.
어떻게든 이걸로 차 세대 인공지능을 만들던지, 아니더라도 다른 기술력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주기로 했어도 표면상 대가는 받아야 했으므로, 뭘 요구할지 생각을 해 봐야겠다.
"그럼··· 응?"
그렇게 결정을 내린 한우현은 살짝 당황했다.
-삐비빕
멍하니 그 핵에 달라붙을 듯이 가까이 다가간 [공격대 보조 지능]과 눈이 마주쳤기에.
정확히는, 카메라와.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아이템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뭐?"
순간 당황했다.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활성화? 이건 소비 아이템이 아니야. 이런 기능은 없는데?"
정말이었다.
[공격대 보조 지능]은 철저히 보스 몬스터와 플레이어들의 공격 패턴을 학습시키고.
그의 대응에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인공지능이었지.
자의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인간처럼 대화하는 언어모델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력된 대화문 외에는 선제적으로 언어를 출력하는 기능 자체가 없다.
"...설마."
-그런데 이거, 불완전해.
-무슨 소리지, 유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AI 모델들과 다르게,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은 인간의 뇌를 모방한 구조로 추측되는데. 인간의 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뉘어지지.
-절반의 성능이란 건가?
-절반까진 아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야.
"흐음."
잠깐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계획대로라면, 보스 몬스터를 모두 물리치는 데에는 길게 잡아도 1년 반.
연구에는 너무도 짧은 촉박한 시간.
사용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가 직접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방법이 있다면···?
"사용자의 의사를 확인. [융합합니다.]"
"아니, 잠깐···!"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확정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진 한우현은 다급히 고개를 내리며 인공지능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려 했지만.
-철컥
-철컥
-철컥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어느 샌가 그 핵에 딱 붙어버린 [공격대 보조 지능]이, 멋대로 아이템 활성화를 시작해 버렸다.
"[재조립 프로토콜 시작.]"
"[재구축 프로토콜 시작.]"
"[AI 초기화. 재시작합니다···]"
"아니, 이게 뭔."
정말로 너무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보다는 황당할 정도였다.
명령은 커녕 속으로 그래볼까 생각한 것에 반응하다니?
그 이름인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에 걸맞지 않게도, [공격대 보조 지능]은 다소 멍청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연산과 분석 성능만 좋을 뿐, 주인으로 각인된 사용자 외의 명령이나 행동을 창조적으로 행하지는 못하는 수동적인 AI였다.
원본인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너무나도 비교되는 성능.
"[초기화 완료. 최적화 시작···]
"...하, 됐다. 이미 늦었네."
5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순식간에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과 [공격대 보조 지능]은 그 내부 구조가 해체되며 서로 얽히고서는.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마냥 하나의 구형 로봇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철컥
-철컥
-기이잉
한우현은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차피 AI 연구 따위야 당장 보스의 공략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단기적으로 보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삐익
그리고 마침내, 그 합체가 완료된 듯.
그 한 가운데 있던 조리개에 빛이 들어오며 한우현의 눈과 렌즈가 마주쳤다.
"최적화 완료. 반갑습니다, 한우현님. 공격대장을 뵙습니다."
"...뭐?"
너무나 인간적인 말투로, 그것이 마침내 스피커를 울렸다.
"저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이 필요합니다."
"넌 뭐지? 네 이름을 말해라."
-[광신의 광검]
순간 긴장한 한우현은 검 끝에 검기를 피어올렸다.
보상 아이템인 만큼 그를 적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사람처럼 변모한 말투.
그를 여전히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제 이름은··· 없습니다. 제 이름을 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이름은 [공격대 보조 지능]인데?"
"그건 이름이 아니라 기능입니다. 성의가 없으시군요."
"...허."
그 농담에 한우현은 다시 스킬을 해제했다.
일단, 그를 주인으로 의식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이름, 이름이라··· 일단, 네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부터 물어보자."
"네, 한우현님. 저는 상호 연산이 가능한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 둘이 융합되어 비로소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우현님의 전투 및 그 외의 모든 활동에 대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위이잉
그 위로 포스 방어막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원본이 보스 몬스터이기에 원래도 레이드 도중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강렬한 모습.
"기존 기능인 공격대 보조 외의 기능 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먼저, 마스터의 포스 제어 및 운용 전반을 보조해 드릴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현재 부족하신 포스의 부족분을 임의적으로 보충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호오."
굉장히, 굉장히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얼마나?"
"현재 저의 포스 수치는 100이지만, 앞으로 보스 몬스터 공략을 지속함에 따라 성장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약점.
포스 부족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좋아. 그리고?"
"한우현님이 그리고 계신 모든 전략에 대해 최대한의 지식을 학습해, 조언해 드릴 수 있습니다."
"최대한?"
"기존의 [공격대 보조 지능]이 녹화하고 기록된 모든 20년간의 지식을 이용해, 마스터의 소위 '세계 정상화' 계획의 전략에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 하긴 모두 기록했으니 그것도 알겠구나."
"또한 아이템 분석, 추가 보스 몬스터 세부 전략 수립, 플레이어 스킬 전략 분석에도 연산을 할애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 스킬 전략 분석에, 아이템 분석?
이것도 꽤나, 아니 아주 대단한 능력이었다.
한우현의 계획에 매우 중요한 부분들이니.
"그 외에도 많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그렇습니다."
"아이템, 플레이어··· 그 외에도 포스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가능합니다만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제 주 기능은 포스 플레이어, 포스 몬스터, 포스 아이템에 관련된 연산입니다."
"그래, 그것만 해도 좋아. 훌륭해."
그 말을 들은 인공지능은 의기양양한 모양새로 살짝 빙빙 돌며 날아다녔다.
"이제 멸망기신이 망가지기 이전의 원형, [창조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위대함을 이해하셨습니까?"
뭐지.
이 건방진 말투는?
이게 아까까지 무미건조하게 보스의 공격을 읊던 그 놈이 맞나?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확실히 그를 주인으로 의식하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이만 인벤토리로···"
"잠깐. 이제 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급한가? 이따가 나가서···"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흐음···."
잠깐 침묵이 일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일부니까, 데우스?"
"···."
그 말에 구체의 조리개가 살짝 구겨졌다.
"데우스··· 데스우··· 스우?"
"···."
"마키나··· 마키··· 맥Mech."
그제서야 마음에 든 듯, 그 조리개가 활짝 열렸다.
"확인. 이제부터 제 이름은 맥Mech입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공격대장 한우현."
그리고 달뜬 듯한 어조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세계를 구원하실 수 있기를."
62화 싱글벙글 지구촌 (1)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
버지니아 주Commonwealth of Virginia 알링턴 포토맥 강 근처.
세계 최강대국의 국방부, 펜타곤Pentagon이 있는 곳.
-드르륵
-드르륵
그 지하에서 한 사람이 쉴 새 없이 눈동자와 손가락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커크패트릭, 이 정보들은 모두 확실한 것입니까?"
"모두 확실하다. CIA가 확실히 교차 검증을 마쳤으니."
"좋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참으로 많은 정보기는 하지만... 충분한 정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이 정도 정보로, 정말로 그의 정체를 판별할 수 있다는 건가?"
날카로운 인상의 늙수그레한 백인이 중얼거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어제 막 새로 만든 분석 모델로 하면 조금은 시나리오 추측이 나올 것 같습니다."
"후··· 그래. 힘 내게. 나도 바쁘니까 가 보지. 라일리 그레인저한테도 가르칠 게 많으니까. 수고하게, 유진."
"네, 이만···"
-쾅
여유가 없는 듯, 대충 닫은 문에서 꽤나 큰 소음이 울렸다.
하지만 방 안에 남아있는 동양인 남자는 전혀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키이잉
-위이잉
-애널라이징···
-애널라이징···
-이퀄라이징···
-시퀀싱···
수십 개를 넘는 컴퓨터들이 그와 무수한 전선으로 연결되어, 무수한 신호를 주고받기에 바빴으니까.
"아."
몇 분 정도가 지났을 때, 그 남자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기계 음에 가까운 목소리를.
-치이잉
그리고 그 손 위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가족들과 대화. 동생과 지속적인 교류. 후회와 비애의 감정이 정신 분석 결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빙의자Possessor는 아니야."
-지지직
P-12-P라는 이름의 문서 파일이 홀로그램에서 삭제되었다.
"길드 사옥 앞에 던전 입구가 생겼다. 선제적인 지식을 알고 있기에 선점한 위치. 자체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지식은 없을 환생자Rebirther도 아니다."
-지지직
P-12-R2라는 이름의 문서 파일이 홀로그램에서 삭제되었다.
"역시 처음 짐작했던 게 맞았어."
그 기계로 된 눈이 환하게 빛났다.
"현재 코드 네임 독재자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나리오는 P-12-R1. 회귀자Regressor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이상예측부장.
현실 붕괴 시나리오의 창설자이자 주도자.
하버드 대학교 컴퓨터과학과 수석 졸업자이자 대규모 언어 모델LLM 심화 전공 창립자.
이상 격리 재단이라는 미국 최고의 집단 창작물, 그 시작을 세운 다섯 창립자(O5 Council) 중 하나.
마지막으로, 한인 3세 출신의 레벨 261 전자기인 플레이어.
"심지어 대놓고 드러내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 비밀을 숨기려는 방향의 행보는 전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 그래, 급해, 성급해... 조급해 보여. 우리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르겠군. 이건 아직 모르겠어..."
유진 킴이 그 여러 빛나는 화면들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자체가 아니라, 왜 돌아왔느냐겠지."
그 화면에는 너무나 잘생긴 금발 청안의 서양인이, 세상 모든 것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래에서 세상이 멀쩡했어도 회귀했을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지만, 괘념치 않고 계속 말을 잇는다.
"그렇지 않았겠지. 실패했으니까 돌아온 거야. 뭘 실패했을까? 왜 실패한 거냐?"
그 옆에 무수한 문서들이 함께 떠올랐다.
-주요 우울 장애
-불안 장애
-조현병 초기 의심
-대인 기피증
-피해 망상증
-회피성 성격 장애
-반사회성 성격 장애
-...
일반적인 사회 생활조차 수행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수준의 정신병 진단 코드들.
그러나, 수만 명의 초능력자들을 거느리는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의 수장의 정신 감정 결과.
"15년을 방구석에서 나가지 못한 중증의 우울증 환자."
그 화면을 유진 킴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대체 어떤 끔찍한 미래가 너를 이렇게 바꾼 거냐? 독재자."
침묵 속에서 컴퓨터의 전자 회로들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
미국 뉴욕.
그 중심지,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
꽤나 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초능력자 플레이어들이 뉴욕 주지사를 협박해 얻어낸 큼직한 사무실의 안.
'자칭' 미국 길드 지부 중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곱슬거리는 양갈래 아프로 보라머리를 한 흑인 여자가 불평하며 휴대폰을 쾅 내려놓았다.
그 충격에 맞춰 그녀가 쓰고 있는 붉은 안경도 한 번 들썩였다.
"지부장님, 왜···"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돼! 길드만이 유일한 플레이어들의 단체라며!"
-쭈왑
-쭈왑
뒤이어 그녀가 냉장고에서 막 꺼낸 초록색 하드 아이스크림을 강렬하게 빨았다.
"쭈읍··· 음, 바로 이 테이스트야."
"지부장님, 아이스크림 흐릅니다. 대체 왜 그렇게 요란하게 드시는···"
"이렇게 먹어야 맛이 나. 아무튼, 우리가 이렇게 다 해 주는데, 대체 왜 미국 정부 따위에 협조해야 하는 거냐고."
"애초에, 우리가 정식 지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시끄러!"
-휙
-퍽
"악!"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잘생긴 백인 남성의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에휴, 싫어도 안 들으면 무슨 조치를 취할지 무서우니··· 해야지."
툴툴 대던 그녀는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고 외쳤다.
"다른 애들 연결이나 다시 해 봐!"
"그, 아직 점심을 다 안 먹었다고···"
"하여간 게으름뱅이 새끼들! 게임 폐인들이 다 그렇지···"
-다 들린다, 밀라 바지즈.
어느새 화면에 나타나서 목소리를 낸 것은 기괴한 용모의 남성이었다.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완전히 다른 분장을 하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긴 얼굴을 한 사람.
"들으라고 한 거야, 이 언에듀케이티드 스투피드야!"
-하여간 생김새만큼이나 교양도 없군. 내가 나온 대학은 네가 평생을 공부해도 못 갈 곳이란 건 알고 언에듀케이티드니 뭐니 지껄이는 거냐?
"하, 그 대학 나와 가지고 혐오 글이나 싸지르는 백수인 게 자랑이야, 마틴 마셜?
마치 백인과 흑인을 반 반 잘라서 붙여 놓은 듯한 광대 같은 몰골.
-최소한 대학도 안 나온 백수보다는 대학이라도 좋은 백수가 더 낫겠지?
"KKK 숭배하는 흑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코미디언인 새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름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고졸 PC충 따위가 하는 지적 따위 웃기지도 않다.
"다시 말해 주지만, 나는 PC충이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권 운동가야.
-그러시겠지. 나도 KKK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공부도 안 하면서 차별이라고 지껄이는 머저리들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똑똑한 엘리트일 뿐이고.
"그래, 그리 생각하던가. 마음대로 주장하라고."
-빈정대지 마라. 애초에 지금 네 생김새부터가 흑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차별이다.
"난 흑인이 아니라 히스패닉이라니까?"
-언제는 혼혈이라더니, 필요할 때만 갖다붙이는군.
눈살을 찌푸린 흑백 융합의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화두를 돌렸다.
-쓸데없는 언쟁은 여기까지. 시간이 아깝다.
"그래, 나도 너랑 안 맞는 거 아니까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좋다. 방금 네가 불평한 것. 나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긴 하다. 중졸따리 옐로우 몽키가 우리 대장이라니, 참으로 불쾌한 일이지.
"전체 플레이어의 60퍼가 한국인이고, 90퍼가 아시아인인 시점에서 그런 인종차별은 별 의미가 없는데."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드장의 선택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뭐? 왜?"
말싸움을 하면서도 그다지 정말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는 않았던 밀라가 표정에 의문을 띄웠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길드가 미국에 영향력을 끼치지 않으려는 모습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자세한 건 그 큐아넌(QAnon : 미국 정부와 연예계가 거대한 음모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공유하는 집단) 망상병자 새끼가 오고 나서···
-다시 말하지만, 난 망상병자도, 음모론자도 아니야.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추측을 기반으로 딥스의 비밀을 파헤치는 거지.
-하, 레드넥(Redneck : 미국 시골 지역 거주 백인들을 비하하는 멸칭) 친구 왔군.
화면 하나가 더 켜지며, 남부 연합기Confederate flag를 그 뒤에 크게 매달고.
온갖 외계인 상징물부터 랩틸리언, 프리메이슨, 딥 스테이트, 일루미나티···
아무튼 너저분한 장식물들이 한 가득 널브러진 방의 풍경이 들어왔다.
-네 말 같지도 않은 그 음모론들까지는 존중해 주겠다만, 제발 방 정리는 좀 해 주면 안 되겠나?
-어차피 우리 대부분이 방구석 히키코모리인데 정리는 무슨? 조던 피터슨도 방 정리 안 하고 사는데!
그 중앙에서 마틴 마셜의 핀잔에 반박한 것은 얼굴이 파충류마냥 변형되어 있는 기괴한 인간이었다.
외계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곧바로 랩틸리언이라고 비명을 지를 만한 모습을 한 인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리 말고도 간부 길드원들이 보고 있다는 걸 제발 의식해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이 휘가(Whigga : 저학력, 저소득 백인층을 비하하는 표현) 새끼야.
-반박하지, 정리는 아니지만 나름 규칙은 있는 상태다 물라토(Mulatto : 흑백혼혈을 비하하는 표현) 엘리트주의 광신도야. 모두 과학적으로 별자리 위치에 맞춰서 정렬되어 있지. 나를 백신에 들어있는 나노 로봇 세뇌술사들한테서 지켜주는···
-물라토와 엘리트주의자라는 말 자체는 그리 기분 나쁘지 않지만, 그걸 로버트 너 같은 저학력자한테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군.
-말끝마다 대학, 저학력··· 그 나이 처먹고 자랑할 게 대학 뿐이냐?
"야! 하루 종일 싸울 거야? 회의 안 해?!"
그 유치한 꼬라지를 참아 보려고 했던 밀라 바지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긴 해야지.
-그러니까 지적질도 적당히...
"자, 기록 시작한다. 다른 간부들도 들어오라고 하고."
다행히, 셋 모두 그렇게까지 정신병자들은 아니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닫았다.
-뭐, 좋다. 미국 시카고 '임시' 길드 지부장. 마틴 마셜 입석.
캐릭터 네임 [BlackLivesMatter]. 미국 최대의 질답 커뮤니티 웹사이트, 퀄Qual 소속 플레이어 대표.
-후, 우주 에너지야 제발 우릴 지켜 줘... 미국 캘리포니아 '임시' 길드 지부장. 로버트 아론 입석.
캐릭터 네임 [OpenEyetotheTruth]. 미국 최대의 밈Meme 생성 유머 커뮤니티 웹사이트, 원채널1Channel 소속 플레이어 대표.
"그래, 에듀케이티드 해 지자고. 미국 뉴욕 '임시' 길드 지부장. 밀라 바지즈 입석."
캐릭터 네임 [SocialJusticeWarrior]. 미국 최대의 인터넷 커뮤니티 웹사이트, 리딧Readit 소속 플레이어 대표.
셋 모두가 나름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화면에 하나의 PPT를 띄웠다.
"미국 길드 회의, 시작한다. 첫 번째 안건은 길드장의 유일한 명령. 어떤 식으로 '전미 플레이어 연합'과 '라일리 그레인저', 네로를 돕느냐야.
-돕는다라, 그것도 자연스럽게, 티 나지 않게··· 정말 어려운 주문이군.
-젠장, 나부터도 저 랩틸리언들 득시글 거리는 정부는 너무 싫은데. 나보다 훨씬 더 반 정부, 반 사회적인 놈들을 어떻게 협조시켜?
-그건 로버트의 말이 맞다. 정신병자 새끼들이 안 날뛰게 억제하는 것 만으로도 골머리가 아픈데, 정부에 협조라니.
"일단 우리 셋은 싫어도 길드장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지만, 그걸 다른 플레이어들한테 납득시키는 건 다른 문제야."
-안 그래도 라일리 그레인저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병신들이 너무 많아.
-내가 이 큐아넌들 대장이 되기는 했지만, 매일 같이 언제 공격하냐는데 뭐라고 대답하냐고!
"하아, 그건 좀 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가 다시 직접 물어볼게. 일단, 두 번째 안건으로. 다들 던전이 생기고, 공략을 시작한 건 알고 있겠지?"
-알지. 이미 몇몇 놈들이 당장 뉴욕으로 가서 골드랑 아이템 채굴한다는 걸 겨우 말렸다.
-솔직히 나도 궁금하긴 한데... 체계를 만들기 전까지는 무조건 출입 금지라며?
"그래. 길드 마스터의 말에 의하면 모든 골드와 아이템은 길드를 통해서 전매되어야 해. 우리는 그 체계가 너무 엉성하니까, 미국 정부. 즉 전미 플레이어 연합과 연계가 되어야 하는데..."
미국 최강의 게임 폐인들.
그러나, 막상 스스로가 속한 집단의 수장으로 올라서고 나자.
자기들은 상대적으로 정상인으로 여겨지게 만들 정도의 극심한 반 사회성 정신병자들이 너무도 많음을 깨달은 이들.
그 대표자들이 대화를 시작한다.
방구석에서 인생 전체를 쓰레기 게임에 바친 끝에 미쳐버린 정신병자들을 어떻게 통제할지에 대한 회의를.
* * *
"지부장, 대충 대도시들의 치안은 안정화가 된 것 같다."
"그래, 장즈하오. 수고 많았어."
우락부락한 형상으로 온 몸에 문신이 그려진 남자가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역으로 중국 자체가 길드의 통제 하에는 들어왔지만··· 오히려 길드 자체가 잘 통제되고 있다고는 힘들어."
"흐음···"
그 말에 푸른색, 빨간색, 흰색의 머리카락이 브릿지처럼 튀어나온 채 뒤섞인 남자가 침음을 흘렸다.
"그나마 양위엔신이나 류샤오린, 화즈펑 같은 친구들이 어찌어찌 제어를 해 보려고 하지만."
"그 친구들한테는 언제나 감사할 뿐이지."
"다른 놈들이 자꾸 선을 넘어. 일반인들한테도, 빌런 플레이어들한테도 너무 과하게 대응하는 면이 있단 말이야."
"시하이옌은?"
"의외로 그 여자는 오히려 조용한 편이야. 나한테 자꾸 한우현은 언제 중국에 오는 거냐고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리하오란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차를 마셨다.
한우현이 한 번만 더 이딴 저급한 차를 보내면 의형제가 아니라 짱깨 새끼라고 불러 주겠다며 반송한 보이차를.
그것도 한 병이 몇 백만원짜리기에 버리기엔 아까워, 중국 길드 집무실에 놔 두고 먹고 있었다.
몇 번을 마셔 보아도 잘 모르겠는데. 이 정도면 좋은 차 아닌가? 향도 좋고, 목 넘김도 깔끔하고.
대체 뭐가 상했다는 건지.
하여간 평소엔 그 끝이 없어 보이는 초인이지만, 겨우 음식 하나 가지고 이리 정색을 하는 걸 보니 그도 취향이란 게 있는 인간이긴 한가 보다.
-덜그럭
그리 생각하며, 차를 내려놓고 장즈하오와 눈을 마주쳤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장즈하오. 우리가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는 아무 문제 없으니까."
리하오란이 비릿하게 웃었다.
"오히려, 어느 정도 막 나가는 건 필요하지. 이건 길드장의 지시사항이기도 해. 우리의 역할은 평화가 아니라 통제니까."
63화 싱글벙글 지구촌 (2)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필요하다고? 그 지나칠만치 잔인한 짓들이? 전혀 모르겠는데."
장즈하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중국은 땅이 너무 넓어. 길드장, 내 바숑디가 했던 것처럼 진압 작전을 펼치기엔 어렵지."
"그래서, 철저하게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그래.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은, 길드의 존재 목적 자체가 다르거든."
-호록
차를 다시 한 잔 마신 리하오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창문가로 이동했다.
베이징 전체의 풍광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베이징에서도, 중심지에 해당되는 빌딩 최상층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풍경.
길드장이 얼마가 들던, 당 간부들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중국 지부의 본사로 삼으라고 지정한 건물이었다.
···그 앞에 던전 입구가 생겨나, 자연스레 길드의 사유지가 되고 나서야.
리하오란은 길드장이 그리 강조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차피 한우현이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니,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아무리 중국 플레이어들이 난다, 긴다 해도 결국 세계 최강의 전력은 한국이지."
"뭐, 개발 국가가 한국이니까 당연한 거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러니까 던전 공략은 한국 길드가 주축이야."
"우리도 참가는 할 거라며?"
"틀려, 장즈하오. 우리도가 아니라, 우리만이지."
"...아."
그제서야 장즈하오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그 바위같은 근육들을 꿈틀였다.
"길드장이 대 보스전 훈련을 요구한 플레이어는 너와 시하이옌, 단 둘 뿐이야. 심지어 나도 제외하고선 말이야."
"하긴, 리하오란 너는 전투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긴 하지···"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을 마셔 랭커, A급 플레이어로 취급받는 290레벨이 되기는 했지만.
리하오란은 전투에 그다지 능숙하지는 못했다.
이는 둘이 대련하며, 서로가 확실히 인정하게 된 지점이었다.
"다른 중국 길드원들은 오직 대인전 훈련만 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길드 본사가 우리한테 기대하는 것도 한국이랑 다른 거야."
"우린 던전에 들어갈 일이 없다?"
"정확히는, 들어가 주면 좋지만··· 바쁠 테니까, 사회 유지에 집중하란 거지."
그리 말하며 리하오란이 책상 위에 펼쳐진 중국 지도.
그 도시들을 하나하나 손가락 끝으로 짚어나갔다.
"말이 안정화지, 대 놓고 벌이던 범죄가 수그러든 정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플레이어 범죄자들은 어느 정도인지 예상도 가지 않을 정도야."
"시하이옌이 애쓰고 있다고는 하던데, 아무래도 더 독촉해야겠어."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솔직히 우리 같은 게임 폐인들이 갑자기 얻은 능력이 있다 해도, 지배자 노릇을 얼마나 잘 하겠어?"
"...네가 그리 말하면 솔직히 그다지 신뢰가 안 가는데."
"생각보다는 잘 하고 있긴 해. 하지만 그래 봤자 진짜 위정자의 수준은 아니지."
리하오란은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했다.
"넌 잘 하고 있어. 중국공산당의 3대 축인 공청단 전체가 이제 우리의 것이나 다름없지."
"난 애초에 그 간부였고."
"그 뿐만 아냐. 한 달만에 태자당 새끼들 절반을 날리고, 주석의 권력 구조도 반 쯤 붕괴시켰지. 이건 힘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장즈하오의 눈빛에 존경과 자긍심이 들어찼다.
"애초에 중국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우리가 말 뿐인 단체가 아니라 정말로 힘과 명분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라고."
"그 시작은 한우현이 던져준 것이지."
"아니, 한우현이 던진 건 설립 멤버 100명일 뿐. 이 모든 건 결국 네가 만들어낸 거야. 자긍심을 가져, 리하오란."
"그래, 노력하긴 했지··· 하지만 최선의 결과는 아니야."
"하, 내가 괜히 사탕발림하는 줄 알아? 이건 나 뿐 아니라, 화즈펑, 시하이옌, 류샤오린, 후웨이 같은 친구들도 모두 인정하는 거라고."
"글쎄, 길드장에 비하면···"
"그 인간이랑 왜 비교를 해? 꿈도 커, 리하오란."
장즈하오가 그제서야 표정을 풀면서 피식 웃었다.
"전 세계 최강의 무력단체를 만든 인간과 비교를 하려면, 명 나라를 세운 주원장이라도 데려와야 할 걸?"
"주원장? 그 병신과 비교하는 게 오히려 바숑디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아무튼, 내 말은 넌 충분히···"
-쾅
그 말을 끊은 것은 문이 벽에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였다.
"하하, 미안! 좀 늦었지!"
중화 요리사 차림을 하고선 중국 요리용 국자를 든, 잘 생긴 남자가 쾌활하게 웃으며 널찍한 집무실에 들어왔다.
"리즈시웅, 들어올 때는 예의를 좀 갖춰. 우리는 이제 방구석 탕핑족이 아니니까."
"예의는 무슨, 우리 사이에!"
리즈시웅. 캐릭터 네임 항미원조볶음밥장인.
그가 장즈하오의 핀잔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널찍한 소파에 앉고는 그 옆에 놓인 찻주전자를 따랐다.
"음, 향 좋고. 근데 나 10분 늦었는데, 왜 둘 뿐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대체 왜 너희는 약속 시간을 지킬 생각을 안 하는 거냐?"
장즈하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조금 늦긴 했지만, 애초에 내가 3등이잖아! 하필 나한테 그러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이러면 나 섭섭해!"
"말을 말지."
"그보다 칭찬이나 좀 해 달라고. 내가 이번에 충칭 테러하려던 미친 놈들 잘 막았잖아!"
"...죄다 찢어 죽인 다음에 부활시켜서 복종시킨 게 잘 막은 거냐? 굳이 그렇게까지 잔악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말 했잖아."
"하, 장즈하오. 내가 몇 번이고 말하지만···"
"시, 실례합니다아···"
"늦었음, 미안."
둘이 막 말다툼을 하려던 때.
두 여자의 목소리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죄, 죄송합니다아··· 날아오려고 했는데에···"
"오는 길에 플레이어 범죄 신고가 너무 쌓여서. 좀 제압하느라 늦었음."
"뭐, 그럴 수 있지. 앉으라고."
화려한 고스로리 드레스와 진한 화장을 한 이쁘장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먼저 앉았다.
양위엔신. 캐릭터 네임 탕핑도망학개론.
그 옆에서 정장을 입은 채 딱딱한 말투를 내뱉던 단발의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여자도 이어서 앉았다.
류샤오린. 캐릭터 네임 역사적납급시간.
"아, 다른 친구들도 오네."
"네, 네 그러게요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왜 맨날 다들 늦는지 모르겠음."
-벌컥
가장 먼저 발을 들인 것은 흑발 흑안에 장발의, 몸에 딱 달라붙은 흑색의 장포를 두른.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공산당 이 씹 새끼들, 우리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호군줄 아나···"
"시하이옌. 이제 슬슬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제대로 구슬릴 방법을 배울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 귀찮게 왜? 그냥 진짜 다 죽여버리면 안 되나? 공청단 같은 거 굳이 필요도 없잖아 리하오···"
"아, 곧 한우현이 중국에 온다는데."
그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들어온 시하이옌의 표정이 순식간에 헤벌레 풀어졌다.
"...뭐? 진짜? 언제? 언제 오는데?!"
방금까지 피워 올리던 살기를 순식간에 없애며.
"언제? 간 보지 말고 빨리 말해봐! 혹시 뭐라고 특별히 한 말 없어? 어쩌면···"
"농담이다. 던전에 들어간 양반이 중국에 올 이유가 어딨겠어?"
시하이옌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그딴 농담, 존나 재미없어."
리하오란을 째려보고선 그녀가 자리에 앉자, 그 뒤를 하나 둘 씩 화려한 용모의 이들이 이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 피해자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응급 조치라도 도와준다는 것이 그만."
화즈펑. 캐릭터 네임 전업자녀의안락사.
"아, 미안. 인민해방군 중앙군사위원회 놈들이 자꾸 우리 작전에 딴지를 걸더라고? 그래서 좀 매달아주고 오느라."
후웨이. 캐릭터네임 홍군판검열삭제자.
"나도 난징에서 숨어있던 놈 몇이 갑자기 공산당 만세 외치면서 덤비길래, 꼬리 좀 터느라 늦었어. 이따가 자세히 보고할게."
왕첸. 캐릭터 네임 난징페스티벌.
"늦잠을 좀 잤다. 반항하는 빌런 놈들 해체하고 조립 하느라 어제 피곤했거든."
즈거링. 캐릭터네임 베이징천안문을사랑해.
"정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엘릭서] 마시면 피로까지 없어진다고 해도, 잠도 못 자고 일하니 죽을 노릇···"
"늦어서 죄송합···"
그리고 리하오란이 한우현이 돌아오고 난 뒤, 추가로 영입한 랭커 플레이어들 다섯 명 정도가 더 들어왔다.
중국 10대 대도시를 비롯해 중국 공산당에 이르기까지.
인구 13억의 세계 대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조직의 지배자, 정신병자들.
그들 모두가 원탁을 중심으로 기다란 소파에 둘러앉았다.
"다 모인 거 같으니까··· 중국 길드 회의, 시작하지."
리하오란의 눈빛이 잠겨들었다.
"첫 번째 안건은 던전 공략이다. 정확히는, 보스를 제외한 잡몹들을 잡는 계획이지."
"뭐, 그다지 어렵진 않겠네. 잡몹들은 레벨 200급 플레이어를 기준으로 해도 약하잖아?"
"맞아, 리즈시웅. 중요한 건 그 다음이지."
리하오란이 차를 홀짝였다.
"던전 몬스터에서 드롭된 모든 골드와 소비, 재료 아이템의 강매. 길드장이 강조했지."
"말이 강매지, 사실상 장비 아이템을 제외한 모든 아이템의 압류잖아."
"이 정신병자 새끼들이 받아들일지··· 나부터도 거부감이 슬슬 피어오를 지경인데."
"슬슬 길드가 대세가 되었으니, 불만은 가지더라도 반항은 못 할 거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건 반드시 이행해야 해. 골드와 아이템의 길드 독점은, 세계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니까."
"흐음, 슬슬 길드에 완전히 충성하는 놈들 위주로 전략을 좀 더 자세히 짜 봐야겠어···"
"우리 같은 앰생들끼리 생각한다고 뭐가 나오겠나. 리하오란, 장즈하오가 북경대랑 칭화대 출신 애들 데리고 방법 좀 찾아 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이건 그냥 너희가 알고만 있으라고 한 얘기지."
-와작
왕첸이 책상 위에 놓인 월병을 우물우물 씹다가, 삼켰다.
"이거 맛있네. 근데 알고만 있으라고 한 얘기라면, 또 다른 본론이 있단 거야?"
"그래. 가장 중요한 얘기지."
잠깐 뜸을 들이고서는 리하오란이 별 것 아니란 말투로 한 마디를 던졌다.
"전 전 주석이 오늘 저녁, 여기로 올 거거든. 비밀리에."
"...!"
"...!"
-벌떡
-벌떡
-벌떡
그 말에.
미리 알고 있었던 장즈하오를 제외한 모두가 표정에 경악을 띄우며 일어났다.
제 아무리 못 배우고 멍청한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중국의 국가 원수.
주석들의 계보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일으킨 행동이었다.
"전 전 주석이라면."
"아니, 아니. 모두들 속단하지 마. 리하오란, 그냥 그 한 명이 오기로 한 거 아냐? 정확한 의미가."
"아니. 너희가 생각하는 게 맞아."
리하오란이 비릿하게 웃었다.
"전 전 주석으로서가 아니라, 상하이방上海帮의 대표자로서 온다는 의사를 확인했다."
중국 공산당을 한 때 떠받쳤던 세 기둥 중 둘.
그 썩어 가라앉았던 두 축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 * *
"두목, 정말 어쩔 겁니까? 이 병신 새끼들, 우리 말을 전혀 안 듣는데요."
"두목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부장이라고 부르라니까."
"아 맞다, 적응이··· 죄송합니다, 두목."
"큭."
시시껄렁한 태도의 그의 농담에 피식 웃은 응우옌이 보고를 받아들었다.
-[베트남 현황 보고서]
-[현재 하노이 시와 호찌민 시를 중심지로 지속적인 갈등 우려]
-[동남아시아 지부 소속 길드원들이 파견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남베트남 출신 플레이어들의 반 정부 성향이 지나치게 높음.]
-[그와 대비되게 베트남 정부가 지속적으로 남베트남 지역 플레이어들에 대한 여론전을 시도 중]
-[현재로서는 내전을 막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무력적 개입이 불가피함.]
"...하아."
응우옌 바오 쯔엉이 한숨을 내뱉었다.
"쩐 응 호우. 넌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하다뇨?"
"넌 하노이 출신이잖아. 나야 호치민 출신이니, 다른 생각이 있을까 해서 말이야."
"..."
"..."
온갖 증오와 혐오의 감정만을 남긴 채 떠나왔던 고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을 생각하며, 둘 모두 침묵에 빠졌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쩐 응 호우였다.
"...출신이라고 해도. 거길 떠난 지가 20년, 아니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딱히요? 이젠 별 생각이 안 들어요. 뭐, 호감이 가지는 않다만···"
"으음···"
응우옌의 눈치를 보던 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두목도, 베트남 정부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묵사발 내 버리죠. 주제 파악도 못 하는 것들인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하, 그 빨갱이 새끼들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우리가 고향에서 이렇게 쫓겨나듯 떠나지도."
"그만. 애초에 그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어."
"하긴, 북베트남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남베트남이 병신이라서 그런 거죠. 나도 이젠 알아요."
그의 비웃음을 무시하고서는, 응우옌이 음울하게 읊조렸다.
"이제 그 일은 우리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 없어. 그러니까, 일단은··· 베트남 정부에 협조하자."
"뭐, 과거는 과거일 뿐이죠! 애초에 우리도 인도네시아에서 훨씬 잘 먹고 사는데! 그리 하겠습니다!"
애초에 별 감정이 없었던 듯.
씨익 웃음을 지으며 쌀국수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낸 쩐이 뒤돌았다.
"나가는 길에 바라무나드와 아오히신도 불러라."
"어? 인도네시아랑 말레이시아 정부는 별 탈 없이 협조하고 있잖아요?"
"잘 협조하니까 오히려 그만큼 협업할 일이 많은 거지."
"아, 그렇네요··· 바로 오라고 할게요! 날아오면 10분 정도 걸릴 겁니다! 힘 내세요, 두목!"
"말 끝마다 두목은··· 이제 우린 길드라니까."
피식 웃은 응우옌이, 손을 흔들며 쩐을 배웅했다.
-탁
하지만,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응우옌 바오 쯔엉은 표정을 굳혔다.
"...베트남."
너무도 증오스러운 조국.
이제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그 글자조차 마음에 담고 싶지 않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지금의 베트남은 조국조차도 아니다.
그의 조국은, 지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 새끼들보다도 더욱 더 쓰레기 같았던 똥 덩어리였으니까.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일이 많아."
동남아시아 일대 전체의 관리자.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이미 완전히 길드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남은 나라는 베트남과 태국 뿐.
베트남도 그 체급이 낮지만은 않은 나라니, 함부로 정부나 행정을 무너뜨릴 순 없다.
이는 길드장, 한우현이 몇 번이고 강조한 내용.
그를 위배할 수는 없으니 베트남 정부를 압박하면서도 일단은 협조해 준다.
그나마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던 태국은 오늘 그에게 꽤나 좋은 소식을 보내 주었다.
왕자가 플레이어로 각성했으니, 길드 태국 지부 구성에 있어 자율권을 달라고?
다른 대부분의 나라와 다르게, 태국은 입헌군주정이지만 왕실의 권력과 권위가 막강하다.
혹자는 태국이 입헌군주정이 아니라 전제군주정이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응우옌도 태국의 정치 구조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예전에 태국에 갔을 때 왕실모욕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비웃었던 적이 있기에.
왕자라면, 충분히 국가를 안정화시킬 길드 임원의 자격도, 권위도 있으리란 것을 이해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왕자가 굳이 초능력자라고 밝혀 어그로를 끌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다가 길드가 슬슬 세계 질서에 있어 절대적인 중심으로 떠오르자 마음이 바뀐 모양.
현명한 판단이다.
레벨도 랭커 급인 290은 아니지만, 270이면 그럭저럭 대장 노릇을 하기에 납득되지 않을 레벨은 아니다.
어차피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다른 나라에까지 갑질을 하기에는 귀찮다.
응우옌 바오 쯔엉의 권력욕은 오직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만 국한되어 있으니까.
"길드장한테 물어봐야겠지만, 아마 긍정적으로 답할 것 같고···"
-펄럭
다음 페이지로 넘긴 응우옌의 얼굴 위에 다시 주름살이 끼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이것들은 어쩌지."
고레벨 플레이어 인구 밀도가 너무도 낮지만.
다수의 작업장 출신 플레이어들에 의한 소요가, 결코 적지만은 않은 나라들.
"대충 통제야 되고 있지만, 쓸 만한 놈들도 안 보이고···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파견해 봤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어."
-똑똑
"어, 들어와라."
-끼익
들어온 사람은 둘이었다.
잘생긴 서양인 남성과, 예쁜 서양인 여성.
그다지 개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둘 모두 작업장 출신이었기에, 코디네이팅에 투자를 하지 않아 그런 것이었다.
"바라무나드, 아오히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다른 플레이어들을 더 빠르게 가입시키고, 통제해야 한다."
"뭡니까, 들어오자마자 본론부터?"
"우리도 바쁜 와중에 온 거라고."
"안다. 하지만 더 강조할 게 있다."
한우현이 회귀 전, 특히 주의했던 여섯 빌런 중 두 명.
다행히 응우옌이 빠르게 만나고 설득해 영입하는 것에 성공하여서.
현재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하부장을 맡은 자들이었다.
"자카르타에 던전이 생긴 건 알고 있겠지."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지부장?"
"오는 길에도 봤고, 뉴스로도 봤습니다만."
"안다니 사소한 설명은 넘어가고. 그럼···"
일단은, 가장 중요한 나라인 인도네시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플레이어가 있는 곳.
그 일부터 처리하기로, 응우옌 바오 쯔엉은 마음먹었다.
64화 싱글벙글 지구촌 (3)
필리핀.
그 수도, 마닐라 시City of Manila.
그 중에서도 도심 한 복판의 빌딩.
"지부장님, 이 정도면 오늘 할 일은 다 끝낸 거 같네요."
"응, 좋아, 수고했어! 으그극···"
푸른 머리칼의 사이드테일을 한 여성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그러고선 과장되게 입을 벌리며 미소지었다.
"하여간 우리 매니저들, 고생도 많아. 완전 하는 일이 바뀌었는데 이렇게 잘하다니!"
"아하하···"
"막 잘하고 있진 않은 거 같은데."
"이 정도면 잘 하는 거지! 애초에 인도네시아나 말레이 쪽 애들이 너무 완벽주의라니까?"
그녀가 툴툴대며 마법봉을 허공에 크게 휘둘렀다.
"그냥 대충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뭐하러 정부를 뒤엎고 통제해? 굳이 안 그래도 우리 말 잘 듣는데?"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우리가 귀족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는데."
"그리고 더 어려운 건, 귀족 노릇이 생각보다 만만한 건 아니란 거지."
그 말에 시뻘건 머리색을 한 남성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가 열심해 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인 놈들이 너무 많으니···"
"호세! 내가 방금도 말 했지만, 우린 무역만 잘 돌아가게 하면 돼! 길드장도 필리핀이 망하건 말건 맘대로 하라고 했다니깐?"
"내가 아무리 애국심이 없다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 하겠다. 병신같은 나라지만 조국인데···"
"에휴, 내가 보기에는 넌 너무 애국주의자야."
-와삽
피식 웃음을 짓고선, 엘리자 나바로가 보기 좋게 깎여있는 망고를 한 입 베어물었다.
"음, 음··· 이거, 외국에도 귀빈들한테만 수출하는 특산품이랬지?"
"네, 그렇죠. 왜 그래요?"
"흐음, 한국으로 보내면 길드장이 좋아하려나···"
"길드장이요? 그 무서운 인간은 왜?"
"잘 보이면 좋잖아! 지금 미국 대통령보다도 힘이 센 상사인데···"
"차라리 남자친구한테나 주시지 그래요? 양이 얼마 안 돼서 한국까지 보내기엔 좀 애매해서."
"남자친구? 아, 당분간 없을라구."
"...?"
"...예?"
"뭐? 엘리자가?"
"뭐야, 왜 그리 놀라?"
그 말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버츄얼 유튜버.
엘리자 나바로는 남자친구를 정말로 자주 바꾸는 여자였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잘 생긴 남자가 그 옆에 붙어있지 않으면 온갖 히스테리를 부리는 괴팍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헤어졌다도 아니고, 당분간 없겠다니?
"아니, 나도 언제까지 연애만 할 순 없잖아! 결혼도 해야지!"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는데 무슨 결혼 타령? 그리고 엘리자 넌 평생 결혼 안 할 거라며?"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자꾸 딴지 걸면 이번에 테러 신고 들어온 거 맡긴다?"
"귀찮은 일 맡긴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환영이야. 미친 놈들 진압하는 것도 은근 시원하거든."
"에, 이게 아닌데···"
당황으로 입술을 실룩인 엘리자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고선 그 눈빛에 공격적인 감정을 담았다.
"그리고 너네, 만약 밖에서 내가 남자친구가 많았다, 마구 바꿔댔다 이딴 소리 하면··· 진짜 죽는 거야."
"아니, 매니저 때도 그런 말은 안 하고 다녔는데 뭘 새삼 갑자기?"
"하여간 뜬금 없기는. 누가 물어봐도 말 안 해요, 그런 거."
"아, 신고 들어왔다. 마침 근처군. 다녀오지, 엘리자."
"어, 응. 기왕 나간 거 그 쪽에 새로 가입했다던 애들한테도 눈도장 좀 찍고."
"알았다."
-덜컥
호세를 배웅해 준 엘리자의 눈이 창 밖을 향했다.
정확히는, 서북녘의 바다를.
"던전에, 들어갔다고···"
그 얼굴에 아련한 감정이 피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당연히 게임 커스터마이징이겠지만, 역시 진짜 개 잘생겼단 말이야··· 대체 얼마나 섬세하게 아바타를 만든 거야?"
그리고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 *
한 낮, 잠실의 한 건물.
그 앞의 널찍한 공원에서, 화려한 머리색과 외양을 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멍을 때리고 있다.
"아··· 개 힘들어···"
"아니, 힘들진 않은데 걍 귀찮아 난···"
"집에서 자고 싶다아···"
그 앞의 야트막한 바위 위에는 용이 형상화된 듯한 갑옷을 입은 거친 인상의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화면을 터치하고 있었다.
-착한 학생은 주작 같은 거 하면 안 돼!
-센세,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저는 인장을 주작한 적이 없습니다.
-떽! 여기 증거가 있어요! 5억 5천만이 아니라 5천만이잖아!
-억울합니다, 센세. 제가 그런 쓰레기 같은 게임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선생님한테는 그래도 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면 씨발 년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고!
-아니, 정말로 제가 한 게 아닌···
"뭔 스토리가 이리 유치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권승환이 휴대폰의 화면을 껐다.
최근에 핵심 개발자들이 대규모 탈주를 했다고 했었나?
그래서인지 게임 스토리도, 일러스트도 퀄리티가 이상해졌다.
어차피 캐릭터가 예뻐서 했던 거지, 게임 자체가 재밌어서 했던 게 아니었으므로.
저 게임도 슬슬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권승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상!"
그리고선 외쳤다.
-[사자후]
한우현이 그에게 가르쳐 준 오리지날 스킬을 쓰며.
"흐악!"
"뭐야 씹!"
그 요란한 울림에 꾸벅 꾸벅 졸던 길드원 전원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자, 모두들 일어납니다! 쉬는 시간 끝났습니다!"
"기상!"
"기상!"
그 뒤를 교관 플레이어들이 돌아다니며 이었다.
"아오, 뭐 벌써···"
"애초에 다들 체력도 좋으면서 앓는 척은?"
"아니, 체력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씨발 군대도 면젠데 뭔 신병 훈련을 받아···"
"난 공익이라고, 훈련소는 중도 퇴소 받았는데."
"불평들 그만 하십시오! 공익이건 면제건, 다들 앓던 병도 플레이어 되면서 나았을 거 아닙니까!"
"난 정공인데."
"난 정면."
"반박 안 받습니다! 다음 훈련 시작합니다! 다시 직업군별로 모이세요!"
길드 인사부 산하의 훈련부.
거기 소속된 직업군인 출신 플레이어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널브러진 길드원들을 독려했다.
"자, [신체 강화]류 스킬부터!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자연스레, 스킬 이름 말하지 말고!"
"지금 너무 강합니다! 근력을 일반인 수준부터 그 천천히 강화하세요!"
"네, 그리고···"
"잘들 하고 있네, 이 정도면."
그 광경을 지켜보던 권승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길드장의 걱정대로, 모든 플레이어들을 훈련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권승환과 한우현이 직접 선별한 군인 출신 플레이어들.
그들 모두에게 플레이어 전투 교리의 기초를 가르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거, 묘하게 한국군 전투 교리랑 조금은 비슷한데···
-정확히는 한국군 베이스에 미군을 끼얹어서 강화한 느낌.
-뭐야, 너 미군 교리는 어떻게 알아?
-중딩때 밀덕이었거든. 지금은 아니지만···
-카투사 쪽 애들이랑 같이 배우면 좀 더 잘 될 거 같은데, 잠시만요.
그리고 아무리 미국이 그 대부분을 뜯어고쳐 엄청나게 바꿨다고 해도.
그 근간이 결국 권승환 회귀 전의 미래에서 만든 것이었으므로, 애초에 그 산하 집단에게 잘 맞을 수 밖에.
-좋아, 이 정도면 기초는 되었어.
-직업별 세부 공략까지는 좀 더 저희끼리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래, 막히는 게 있으면 해당 직업과 같이 오면 내가 더 자세히 알려주겠다.
-한 달 안에 전사, 마법사, 궁사, 도적의 기초만 쑤셔박으면 된다.
-걱정 마세요. 다들 훈련교관 노릇은 지겹게 해 봤으니까요.
-흠, 공익이랑 면제들 대상으로는 안 해봤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물론, 직접 해 보니 그 대상이 그들이 지금까지 가르쳤던 대상들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아무튼 잘 진행되고 있는 듯 했다.
"길드장이 언제쯤 나오려나···"
"그러게, 언제쯤 나오지? 뭐, 설마 그 괴물이 다치지는 않겠지만··· 보양식이라도 사 놔야 하나?"
"...? 나유나?"
"지난 번에 질긴 건 싫다고 했는데, 그럼···."
"네가 왜 여깄어?"
"왜 있기는? 산책하러 나왔지. 겸사겸사 니들 농땡이 안 치나 감시도 하고. 꼽냐?"
권승환이 아리송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신고가 많다고 뛰쳐나가 놓고서는, 산책?"
"흐흐, 당연히 죄다 잡아왔다 이 말씀. 지금쯤 지하에서 반성문 열심히 쓰고 있을 걸?"
"...이번에는 멀쩡히 데려왔겠지?"
"아니,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 수상한 시선에 나유나가 발끈했다. 그에 맞춰 그녀의 온 몸에 무지갯빛 기운이 자연스레 흘렀다.
어느덧 [풍수의 기운]을 그 세기와 지속 시간에 있어 완벽하게 제어 가능하게 된 모습.
"나도 정말 개 빡치게 하는 놈들만 훈육해줄 뿐이거든?"
"보통은 팔 다리를 찢는 걸 훈육이라고 하지 않잖아."
"아니, 훈육이 맞는데, 아으··· 뉴턴 선생님, 토시아키 선생님···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알려 줘···"
"그게 뭔데 씹덕아. 제발 너만 아는 이상한 얘기는 좀 그만 해라."
"아, 됐어! 하여간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더럽게 딱딱하게 구네."
-피식
"...지금 비웃은 거냐, 권승환?"
"아니, 아니, 오해야... 이 씹, 그 지팡이 좀 치워 봐!"
저도 모르게 웃음을 띄웠다가 식겁한 권승환이 다급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냥, 우리가 이렇게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하, 당연하지! 우리가 세계 최강인데, 못 하는 게 말이 돼?"
"...한 달 전에도 그랬냐?"
"지금이 주요하지, 한 달 전 얘기를 왜 꺼내?"
-우우웅
용기사의 거대한 검에 용이 둘러싸는 듯한 화염의 기운이 맺혔다.
"우리, 세긴 세지. 근데, 이렇게 사람들 지휘하고, 훈련시키고, 체포하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사회생활. 리더쉽. 솔직히 전혀 없다고 생각했거든, 나한테는. 흔히 관심병사 하면 사병만 있는 줄 알지만··· 부사관 중에서도 그런 놈은 있어서 말이야."
"난 여자라서 모르겠는데?"
"...그래, 그런 게 플레이어들의 평균적인 공감능력이지."
"...? 죽을래?"
"아무튼, 내 말은···"
권승환의 얼굴에 묘한 부끄러움, 자긍심,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약간의 의문을 담아 말을 이었다.
"이상하잖아. 게임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던 병신들을 데리고, 이렇게 탄탄한 단체를 만들다니."
"너랑 다르게 난 원래부터 잘 살았거든?"
잠시 권승환의 뇌리에 그녀가 에인션트 게시판에 도배해 댔던 혐오스러운 사진들이 스쳐지나갔다.
"...뭐, 그렇다 치자."
"뭐지, 그 좆 같은 표정은?"
"내 말은, 우리 자신들조차 모르던 재능을 어떻게 이렇게 잘 집어줬느냐야."
"음··· 뭐, 그건 맞는 말이네."
나유나도 그 말만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권승환도 플레이어의 훈련과 그 교리가 너무나도 스스로에게 잘 맞았고.
나유나 또한 빌런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가입시킨 뒤, 부리는 일들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동시에, 잘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좀 수상하고, 길드장이 숨기는 것도 많은 것 같지만."
"숨기긴 뭘 숨겨? 너도 별 쓸 데 없는 의심을 해."
"아무튼, 지금은 고맙다는 거지··· 한우현 뿐 아니라, 너랑 홍세희, 라니아부터 해서. 다른 모두들한테 말이야."
나름 감성적인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나유나는 권승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우웩. 한우현 이름 말하면서 얼굴은 왜 붉혀? 너, 길드장 좋아하냐? 미친 게이 새끼."
공감은 커녕, 차게 식은 눈빛으로 권승환을 노려보았기에.
"...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지.
권승환은 그리 생각하며, 그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에 반박을 하려 했다.
-[멸망기신을 격파한 원정대여! 그대들이 이그드라실의 진정한 영웅이다!]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서]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모든 플레이어의 눈 앞에 떠오른 상태창때문에, 쏙 들어가게 되었다.
"아."
"아."
나유나도, 권승환도.
길드 본사에서 서류를 열심히 승인하던 차정훈도, 김재승도.
양주은과 임수호와 함께 투자 계획을 짜며 어찌 한국 정부를 협박하는 게 잘 먹혀 들어갈지 고민하던 라니아도.
리하오란, 응우옌 바오 쯔엉, 라일리 그레인저를 비롯한 전 세계 플레이어 질서의 중심들.
그 모든 세상의 플레이어들이.
비로소 자각하게 되었다.
진정,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 * *
"...지금까지 파악된 요소는, 이렇습니다."
"네, 잘 알았어요. 의외네요. 미국 길드 지부장 세 명이 모두 그리 협조적이라니..."
"다행히, 셋 모두 생각만큼 정신병자들은 아닌 듯 합니다. 물론 정상인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미국 정부에 불만은 있을 지언정, 당장은 대화가 먹히는 것 같군요."
"네, 그렇다면 다른 플레이어들과 던전에 대한 사안은 국방부와 조사국 분들께 맡겨도 되겠네요."
그 말에 늙수그레한 인상의 백인 남성이 한 숨을 푹 쉬었다.
"하아, 던전이라니. 조사국 측에서 언젠가 나올 것이라 예측하긴 했지만 오늘일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한국의 길드 선포일과 겹치다니... 우연일까요?"
"글쎄요... 합리적인 의심을 해 봐야 할 때 같군요."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제 원래 계획을 바꿀 정도는 아닌 거 같네요. 어차피 제가 할 일은 당장은 없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입니다."
"아니에요."
은발 적안의, 초월적인 미모를 가진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죠. 그러니까, 제가 가는 것이기도 하고요."
"...가더라도, 직접적인 만남이나 대면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현장조사부장.
어거스틴 커크패트릭이 표정을 굳히며 손을 들었다.
"유진 킴에 의하면 코드 네임 독재자가 미국에 알 수 없는 호의와, 존중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정말로, 위험하지는 않다니까요."
라일리 그레인저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예, 당신께 해코지까지 가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한국에 세계에 단 둘 뿐인 만렙 플레이어가 몰래 들어오는 것을 용납한다는 뜻일까요?"
"금방 갔다가 금방 나올 거잖아요."
"심지어 그 목적도 고 레벨 플레이어들을 빼돌리는 것인데다가, 이미 전미 플레이어 연합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길드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단체입니다."
"안 들킬게요. 말 했잖아요? 전 재능이 있어요. 아직은 그 스킬들은 초기 개발 단계지만, 무하마드 덕분에 실력이 정말로 늘었으니까요."
"무엇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독재자는 지금 회ㄱ, 크흠."
거기까지 말한 커크패트릭이 순간 실수했다는 듯 얼버무렸다.
"회?"
"...아닙니다. 아무튼 정말이지, 은근히 고집이 있으시군요··· 알았습니다. 꼭 계획대로만 움직이셔야 합니다?"
"예, 명심할게요."
-파아앗
그녀의 붉은 눈망울 위로, 무한히 복잡한 형상의 구조도를 그리는 포스의 연속체가 떠올랐다.
세계 제일의 포스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임을,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내보이는 증거.
"미국으로 올지 망설이고 있다는 고 레벨 플레이어들과, 오도가도 못 하고 있는 주한미군 플레이어들. 그들과만 빠르게 대화를 나누고 오기로."
레벨 300 사제, Nero가 미소 지었다.
어쩐지, 그 자체보다는.
한국에 간다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듯이.
65화 황홀한 모험이 시작되려나 봐 (1)
"도착했습니다. 이 방만 나오면 곧바로 던전 출구입니다."
"확실히 빨라졌군. 가는 길에는 두 시간쯤 걸렸는데, 오는 데에는 한 시간이 좀 넘은 것 같은데?"
"그것이 바로 저입니다. 설정 상으로나 존재할 이그드라실 세계는 물론이요, 지구에서도···"
"됐다. 보스 공략 영상이나 훈련용으로 가공해라."
"저는 보모가 아닙니다만, 특별히 마스터가 돌보는 그 원숭이들을 위한 보육 영상을 만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언제나 저한테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해?
너무도 어이가 없어, 한 번 그 놈을 내려다 보아 주었다.
"삐비빕 삡?"
"얼씨구."
-깡
건방진 깡통을 한 대 때려 주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던전 밖으로.
-찰칵
-찰칵
-찰칵
"길드장님! 고려일보 위재헌 기자입니다! 던전에 대해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겨레일보 오주현입니다! 몬스터의 게임에서와 현실의 차이에 대해···"
"센트럴 타임즈 사회부 강상윤입니다! 향후 길드의 계획에 대해···"
뉘엿뉘엿하게 노을이 지고 있는 가운데.
단 한 명의 기자도,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아니, 돌아가지 않은 수준이 아니다.
처음 발표할 때인 한 낮.
그 때의 두 배, 세 배, 다섯 배에 달하는 기자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아, 아. 너무 모여 들지 마십시오. 한 분씩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미소지으며, 한우현은 그 마이크와 카메라들의 한 가운데로 몸을 옮겼다
하지만 그 표정과 다르게 속은 여유롭지만은 못했다.
예상보다 기자들이 훨씬 많았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듯 해서.
-도와드릴까요, 마스터?
-뭐야, [전음]? 이건 어디서 배웠나?
-과거 영상 기록에서 비 전투 스킬들을 분석했습니다. 저도 포스 생명체는 아니지만, 포스 기계체니까요.
-좋아. 기자들 프로필 띄우도록.
-확인.
"고려일보부터 먼저 질답 받겠습니다. 한 명당 질문 기회는 두 번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먼저 던전에 대해서 게임과 다른 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위재헌 기자. 전에 길드장님께 초전도체 정보를 받은 뒤 친 길드 논조를 내고 있는 기자입니다. 또한···
"먼저,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던전에 대한 발표는 곧 정리되어서 길드 공식 입장이 나갈 예정입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말씀드리자면···"
맥의 보조를 받으며, 한우현은 생각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쓸 만 할 지도 모르겠다고.
* * *
-우물우물
-꿀꺽
한 밤.
잠실 길드 사옥의 최상층.
그 위에서 한우현은 야식으로 초밥을 먹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스시야인 스시헌에서 주문해 가져온 초밥을.
그 옆에는 나유나가 딱히 걱정해서 주는 건 아니지만, 배고프면 한 입 하던가! 라며 준 죽이 대충 내팽개쳐져 있었다.
동네 프랜차이즈에서 사 온 모양인데, 한우현의 입장에서 이딴 건 돈 주고 먹으라고 해도 안 먹는 음식이었다.
"하여간 센스 없기는···."
"정성을 봐서라도 먹는 척이라도 하고 버리시지 그러십니까, 마스터?"
"내 소중한 한 끼를 왜 한 입이라도 저딴 거에 써야 하지?"
그가 생각하기에, 죽은 프랜차이즈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그 요리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은 종류의 음식이다.
하다 못해 갖가지 해산물을 넣은 홍콩식 콘지나, 다양한 나물의 향을 살린 정통 교토식 하루노나나구사가유라면 모를까.
"알겠나? 자고로 음식이란 그 문화와 전통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며···"
"저는 혀가 없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습니다만."
"이 깡통 새끼가."
한우현의 표정이 순간 구겨졌다.
아무리 로봇 나부랭이라도 감히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문화.
요리와 음식이라는 고귀한 유산을 폄하하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성한 검]
한우현의 젓가락 끝에 신성한 기운이 맺혔다.
"이런, 기분이 좋지 않으시군요. 신나는 노래라도 틀어 드릴까요?"
"...그래, 틀어봐라."
그 말에 다시 스킬을 해제했다.
하긴, 어차피 진짜로 부술 것도 아닌데 두드려 봤자 뭐 하나.
-여행의 물결을 타고~
-놀이동산에서 춤추자~
-어디든 갈 수 있어, 딱 눈 감고!
-용기만 낸다면!
-신령들이 뛰어노는 곳은 어딜까나~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까나?
-황홀한 모험이 시작되려나 봐!
"...큭. 황홀한 모험이라..."
"마음에 드십니까?"
"암울하기만 하지만, 뭐... 나쁘진 않군."
피식 비웃음을 흘리고선, 한우현은 몸을 편하게 의자에 뉘였다.
-끼이익
"인터넷, 길드 시스템 연결은 이상 없나?"
"네. 포스 운용체인 저 또한 레벨 200 플레이어로 판정되는 모양입니다. 직업은 전자기인으로요. 다만 인터넷의 경우, 회귀 전과 비교해 별 다른 특이점이 없기에 특별한 수집 및 학습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좋다. 부 길드장 시스템 권한을 줄 테니 알아서 관리하도록."
"길드 게시판을 비롯해 길드원들의 동태도 어느 정도 체크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앞으로도, 회귀 전의 과거에 대한 분석 및 정보 관련 대화는 무조건 [전음]으로만 하도록."
-알겠습니다.
"휴··· 그럼, 잠시 방해 말고 그대로 노래나 틀고 있어라."
-우물우물
거기까지 명령하고서는 다시 식도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좀 식긴 했지만 샤리의 스와 시오가 원체 좋다 보니, 맛은 수준급이었다.
"역시 사람은 잘 먹어야 힘이 나지..."
사실, 굳이 플레이어에게는 틀린 말이었다.
원한다면 포스로 양분을 대체 가능하니까.
이건 순수한 정신적인 만족감을 위한 식사였다.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질답을 하고서는, 결국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 되고 나서야 쉴 수 있었기에 취한 휴식의 목적.
"영상 훈련용 편집은?"
-편집 자체는 진작에 끝났습니다만, 마스터의 식사가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오래 드시더군요.
"...시킨 말에만 대답해라."
"네, 마스터."
가만히 그 로봇. 맥을 쳐다보며 딴 생각을 속으로 스쳐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과 괴리가 너무 크다.
뭐··· 성능 자체는 확실히 좋아졌으니, 겨우 말투 하나 가지고 불평하긴 좀 그랬지만.
-탁
그 생각을 끝으로, 스시헌에서 원래는 팔지도 않는 치라시스시와 후토마키.
야식의 마지막 조각마저 해치운 한우현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 만큼 보는 눈이 없어야 했기에.
비밀리에 올 특별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웅
이윽고, 길드 건물 바로 옆의 으슥한 공간. 그늘에 가려진 곳에 [차원 관문]이 열렸다.
-후웅
그리고 하나가 더.
-후웅
-후웅
곧이어 둘이 더 열렸다.
"왔군. 모두 올라와라."
-예, 길드장.
-이 지각쟁이들 진짜! 하도 늦길래 잠깐 잘까 했더니!
-지금 올라가요!
몇몇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한우현의 청각 신경에 저 멀리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어왔다.
-벌컥
"후, 오랜만에 마시는 남한 공기. 좋은데?"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기괴할 정도로 큰 눈에 보랏빛 피부를 한 추기경 복장의 남자였다.
"잘 지냈냐, 최윤? 정신병자들 잘 거느리느라 수고 많았다."
"크크, 수고는. 북한 왕 놀이, 생각보다 재밌던데? 뭐, 짱깨들 못 죽인 건 좀 아깝지만. 빨갱이들 데리고 노는 것도 나쁘지 않았어."
"네 사상에 대해 왈가왈부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짱깨 타령은 오늘은 자제해라."
"알아, 알아. 미리 들었잖아?"
그리 실실 웃은 최윤이 그 다음가는 상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컥
뒤 이어 두 명의 플레이어가 들어왔다.
"안녕하시다, 길드장? 장즈하오다. 오랜만이다."
"아, 아, 안녕하세요! 시하이옌이에요! 오늘 기분 좋으, 아니 잘 지내셨어요!"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온 몸에 바이킹 양식의 문신이 그려진 백인 남성.
치렁치렁한 흑색의 망토를 온 몸에 딱 붙게 입은 채 짤막한 지팡이와 검은 수리검을 든 동양인 여성.
"...? 그래, 반갑다."
둘 모두, 리하오란에게 특훈을 받은 듯.
플레이어가 되며 발달한 뇌 신경 덕분인지, 생각보다 한국말을 꽤나 잘 배운 상태였다.
···시하이옌은 왜 말투가 저런지 모르겠지만, 뭐 외국인이 한국말이 어색한 건 당연한 것.
굳이 딴지를 걸어서 무안을 줄 필요는 없으리라.
둘이 앉고 나서는 문이 닫히기도 전에, 한 명이 뒤이어 등장했다.
"반갑다요, 우현! 오랜만이다요!"
"반갑다, 엘리쟈 나바로. 한 달 만이지? 그 동안 고생 많았어."
꽤나 요란하게, 그 치렁치렁한 하늘색 머리칼의 사이드테일을 휘날리며 들어온 아이돌 복장의 여자.
하여간 누가 어그로 좋아하는 버츄얼 유튜버 아니랄까 봐.
말투가 이상한 것 정도야 한 달 만에 배운 한국어의 수준을 생각하면 이 쪽도 넘어갈 만 했다.
"이건 선물! 망고에요!"
"선물? 그대로? 그럼 검역 절차 없이?"
"그냥 가져왔는데, 괜찮다요?"
엘리쟈 나바로가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위생에 민감한가 걱정하는 모양새.
전혀 아니었다.
병신같이 검역한답시고 한 번 열기로 쪄 버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입산 망고가 제주산 망고보다 맛이 떨어지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제주산보다 필리핀산 망고가 훨씬 우수하니까.
그도 이제 국가권력급인데, 그런 절차나 좀 완화하라고 외교부에 압박을 넣어볼까?
그런 생각을 잠깐 주워 섬긴 한우현은 방긋 웃으며 그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아니, 좋아, 좋아. 나도 망고 좋아하니까. 잘 먹지."
"음, 음! 다행이다요··· 얼마 안 되니, 혼자 다 먹으라요!"
"혼자? 아니, 다들 같이 먹어야지."
"에이, 이건 잘 생긴 사람이 먹어야 맛있다요!"
한우현의 얼굴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던 그녀가 헤벌레 웃었다.
"뭐야, 왜 외국 애들이 더 빨리 오지··· 아. 뭐야? 너 뭔데 그리 딱 달라붙어 있어?"
"선물 좀 주느라 그랬다요! 나유나? 뉴스에서 봤는데, 반갑다요!"
"치, 친한 적 하지 마...!"
"시, 실례합니다아···"
"죄송합니다, 졸다가 샤워하고 오느라."
곧이어 길드 건물 당직실에서 졸고 있던 이들도 합류를 시작했다.
나유나. 홍세희. 차정훈. 김재승. 라니아.
길드의 간부들 중에서도, 그 능력이 본신의 전투력에 가장 집중된 뛰어난 이들.
그들이 모두 앉고서야, 한우현은 입을 열었다.
"우선, 이미 다들 들어서 알고는 있겠지만···"
-탁
-탁
-탁
방 안의 불들이 꺼졌다.
-지잉
뒤이어 한우현의 옆에 떠 있던 드론이 원탁의 한 가운데 위로 날아가, 아래로 홀로그램 영상을 분사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10명은, 앞으로 보스 레이드에 참가할 인원이다."
"으음···"
"알면서도 막상 들으니 좀 그렇네."
"뭐, 보스들 다 게임에선 좆밥들이었잖아?"
"글쎄 현실에서 그리 만만할지···"
그들의 반응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리고선, 한우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무조건적인 확정이라고까지 할건 아니지만··· 너희는 현 시점에서 자체 전투력의 재능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이니까."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레벨 : 200]
"보스 레이드의 인원 제한은 10명. 그러니까, 이제부턴 교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미리 눈도장도 찍고, 인사도 하자는 마음에서 불렀다."
"훈련도 당연히 하는 것이다?"
"저는 준비가 되었다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도 시작해야지."
사실, 한우현의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끌어들이기가 어렵기에, 한 사람이 빠진 상태였다.
세계 최강의 사제이자, 유일한 랭커 급 퓨어 서포터 플레이어.
···마음 같아서는 위험한 일에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라일리 그레인저 없이 격파가 가능한 수준은 제 2 사도, 무리를 한다고 해도 제 3 사도가 끝.
그러니 3 사도 전에는, 한 명이 나가고 대신 그녀가 들어올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장즈하오, 시하이옌, 최윤, 엘리쟈 나바로는 자기 일을 하기도 바쁘지. 따라서 1주일 훈련 후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고, 다시 1주일 뒤에 합류한다. 알겠나?"
"""네!"""
그 말에 외국 지부를 맡은 랭커들 뿐 아니라,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럼, 간단히 브리핑부터 해 볼까. 먼저 보스 공략 영상부터 보지."
"오, 대박."
"이럴 줄 알고 팝콘 미리 준비 해 놨지!"
"따끈한데? 유나 너 센스 있다?"
"자, 다들 팝콘이랑 콜라 나눠 받으시고들..."
-지이잉
-%# %$#$%.
-%#$$!
-#&@#$%.
"...?"
"...?"
영상의 재생이 시작된 순간.
팝콘을 손에 들고, 기대를 띄운 그들의 얼굴과 표정에 의문과 당황이 어렸다.
-%#$&@@!
-$##$@.
"저기, 길드장. 뭐라는지 하나도 안 들리는데요. 영상도 너무 정신이 없고."
"맥. 영상 재생 속도 0.5배속으로."
"죄송합니다. 마스터의 인지 연산 속도를 기준으로 재생했습니다."
"아니, 근데 저 드론은 뭐야. 처음 보는데 뭐 자연스럽게···"
"보스 최초 격파 보상이다. 조금 있다가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 영상이나 모두 보고 말하도록."
-%#$&@@!
-$##$@.
"...여전히 안 들리는데요."
"맥, 더."
"0.2배속으로 재생합니다."
"..."
-툭
홍세희의 손에서 팝콘이 힘없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재미난 후기 영상이라도 보는 것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있었던 길드 임원들.
나유나, 라니아, 김재승, 차정훈, 홍세희를 비롯해.
호기심과 기대를 안았던 외국 지부장들.
장즈하오, 시하이옌, 엘리쟈 나바로, 낄낄대던 최윤까지.
그 표정을 굳혔다.
"...0.2배속이라고?"
"야, 지금 농담 하는 거지?"
"영상이 프레임을 쫓아갈 수가 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모든 길드원들이 0.1배속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현실을 부정하기를 선택했다.
"맥. 0.05배속으로 재생해라."
"확인. 0.05배속으로 재생합니다. 이제 이해가 쏙쏙 되시길 바랍니다, 느림보들아."
맥이 귀찮다는 듯 빈정댔지만, 아무도 그 놀림을 귀담아 듣지 못했다.
다들, 게임의 최고 난이도인 익스트림Extreme의 기준으로 한 보편적인 공략을 따라.
제압기로 묶은 뒤 스킬만 난사하면 1분 안에 부서지는 허수아비인 1 사도를 초전박살내는 매드 무비를 감상하려는 생각이었으니까.
-기계 팔 패턴 예측. 전방 1시, 7시, 10시 방향에서 순차적으로 0.01초, 0.03초, 0.08초 후 발생 예정.
"똑똑히 보고, 듣고, 외워라."
그런 순진한 기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말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략 영상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현실Realism 난이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전 세계 유일의 공격대. 길드 작전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놈들이니까."
-17개 레이저 저격 패턴 감지.
-위치 띄워!
-위치 활성화, 순차적 회피 기동 궤도 권고...
"이런 씨발."
그 침울한 분위기의 한 가운데, 최윤의 욕설이 허무하게 울려퍼졌다.
66화 황홀한 모험이 시작되려나 봐 (2)
계속해서 동영상이 재생되는 동안.
2 페이즈로 넘어갈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웅장하다 못해 압도적인 3D 영상에서 도저히 집중을 뗄 수 없었기에.
-융합포 패턴 감지. 방어 불가능. 절대 즉사 패턴입니다. 안전 구역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어디지?
-융합포 각도, 시간, 총합 연산. 안전 구역··· 표시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집중할 수는 없는 법.
3페이즈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이 공포를 이겨내고 그 입을 열었다.
"이 씨발, 지금 이게 무슨? 중력 붕괴랑 융합포가 왜 저런 패턴이 된 겁니까?"
"아니, 게임에서야 귀여운 2D 그래픽이니까 별 생각 없었는데."
"저거 둘 뿐만 아니라 기계 팔들 속도가 거의 음속에 가까운 거 같은데. 게임에선 저 정도 아니었잖아."
차정훈과 김재승이 그 선두 주자였다.
-콰아아아아!
-콰아아아아!
"...저거 몇 도에요?"
"핵융합 반응로면··· 몇 천도는 되지 않을까요."
"방어 스킬로 막을 수 있다요?"
"게임에서도 절대 즉사 패턴이라서 무적기가 1초 정도 버티고 깨지는데···"
"아니, 안전 지대가 왜 저렇게 작다?"
"실제로도 게임에서도 그건 작긴 했지만···"
뒤이어 엘리쟈 나바로부터 한국어가 서툰 장즈하오, 시하이옌까지.
모두가 자연스레 입을 열고 그 의문을 토해냈다.
-기계 팔 폭풍 패턴 포착.
-좌방 1시, 8시, 4시.
-우방 3시, 10시, 11시.
-각 방향에서 0.1초 간격으로 쇄도.
"씹, 속도가 뭔···"
"그 와중에 저걸 다 잘랐는데?"
"...길드장."
"...멋있다아···"
"아니, 근데 저 스킬은 뭐야? 막 이상하게 움직이는데."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건가?"
설명해 줄 수도 있었지만, 기다렸다.
어차피 영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블랙홀 패턴 감지.
-종료? 자연사? 종료?!
-콰아아아!
"성기사 궁극기면 [바위에 꽂힌 검]인데··· 공격력 약하긴 하지만 1 사도니까 잡힌 건가? 근데 저 마지막에 연료 누출시키는 건 뭐지?"
"게임에서는 연료가 누출되는 건 그냥 그래픽 요소였으니 추측이 안 되네."
"그냥 누출이 아니라 길드장이 끌어 쓰는데···"
"자, 그만."
-짝짝
한우현이 넋을 잃고 거의 토론의 영역에 가깝게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이들의 분위기를 환기했다.
"대충 다 봤으니 알겠지? 지금부터 따라하면 된다."
"..."
싸한 침묵이 맴돌았다.
"제 1 사도는 10년 전에 나온 보스이니, 다들 주간 보스돌이로 몇 천 번은 잡았을 테고. 약간의 훈련은 거쳐야겠지만 잘 할 거라고 믿겠다."
"..."
"..."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풀어주고자 하는 마음에, 한우현은 활짝 미소지으며 부서진 보스 몬스터의 마지막 장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참 쉽지?"
"아니, 씨발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김재승이 입에 게거품을 물며, 진지하게 영상을 보고 메모를 하려 했던 듯 들고 있던 펜을 내던졌다.
-휘익
-탁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짓이기에 가볍게 잡아 주었다.
"제 5 사도 최초 격파자, 김재승. 그 불타는 의지는 좋지만 흥분은 가라앉히시지."
"길드장이고 나발이고! 지금 장난해?! 이걸 어떻게 잡아?"
"내 캐릭터 스펙 자체는 너보다 좋지만, 탱커 직업군인 성기사라서 성능 자체는 너보다 약한데?"
"지랄 마세요! 뭐? 데스 카운트가 없어? 한 번 죽으면 끝? 원래 상위 보스들도 아무리 잘 해도 데스 카운트 절반은 날려먹는데!"
"현실에서 목숨이 여러 개일거라 생각했나?"
"그건,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재승이었지만, 그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한우현과 김재승의 말씨름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게임이랑 너무 다르잖아! 목숨도 하나인데 이걸 어떻게 잡아!"
"흠··· 어떻게 잡냐니, 내가 잡았잖아? 10분도 되지 않아서 말이야."
"길드장이랑 우리랑 같아?! 길드장은 만렙이고, 미칠 듯이 강하고, 그리고···"
"김재승. 세 달 전에 성기사 같은 쓰레기 직업을 키우니까 그 랭커가 정신병에 걸릴 만도 하다고 말했지?"
"...아, 으? 아니, 저, 그게요? 갑자기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예상치 못하게 들어온 질문.
거기에 순간 김재승이 할 말을 잃고 허둥댔다.
"그 말이 맞아. 성기사는 쓰레기 직업이지. 그 스킬들도 대부분 성능이 쓰레기지. 다른 모든 직업들에 비하면 말이야."
물론, 현실에서는 성기사가 그 정도로 쓰레기 같은 직업은 아니었다.
어차피 플레이어들의 스킬은 제대로 적중하기만 하면 보스 몬스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즉사시키고, 거기에는 성기사도 포함하니까.
대 보스전이 아니라면 그 공격력이 약하다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까.
보스전만 아니었다면.
"내가 저리 온갖 개 지랄을 떨면서 제 1 사도를 잡아야만 했던 건, 내 공격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즉, 너희들이 가면 저렇게까지 힘겹게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
"아니, 패턴은 다 피해야 하잖아요?"
"너희가 플레이어 전투 교리만 통달하고 오리지날 스킬들도 제대로 배운다면, 패턴은 모조리 스킵 가능하다."
"...예?"
그 말에 모두가 흠칫 놀랐다.
패턴을, 스킵 가능하다고?
저 영상이 너무도 살벌해서 아예 잊고 있었던 사실.
애초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 보스 패턴을 제대로 회피하지 않는다.
[제압기]로 보스를 주기적으로 봉인하고, 그 시간 동안 극딜을 넣는 단순한 전략.
그것이 모든 보스에게 통용되었으므로.
"그, 제압기가 안 통한다면서요? 현실에서는?"
"제압기는 안 통하지만, 레이드 최대 인원인 10명이 동시에 최대 화력을 발산한다면 애초에 제 1 사도 따위는 1분 만에 박살난다."
어느새 다시 공손해진 김재승의 말에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으니까.
"음, 화력으로 짓누를 수 있다··· 길드장 빼면 죄다 딜러니까···"
"하긴, 길드장이 스킬 쓰는 걸 보면 전투 센스가 뛰어난 거지 화력이 세진 않았지···"
"아, 저 좆 같은 패턴들 피해다닐 필요는 없다고···"
"아예 안 피해도 되는 건 아니다요. 시작할 때는 피해야 하는···"
"아무리 그래도, 저 놈들을 굳이 꼭. 너무 위험한데. 긁어 부스럼도 아니고."
"그러게, 꼭 잡아야 하나?"
그 의문에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내가 설마 포인트나 아이템 얻자고 보스를 잡은 것으로 보이나?"
"...그건, 아니겠죠."
"..."
"..."
한우현의 싸늘한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닫았다.
"게임 설정 상, 보스 몬스터를 토벌하지 않으면 그 놈들은 마을로 와 깽판을 치지."
"그, 그런 설정이 있긴 했죠···"
"게임에서야 당연히 유저들이 하루에서 수천 번씩 보스를 잡아 댄 데다가, 게임사가 그딴 말 뿐인 기능은 만들지도 않았으니 별 의미가 없었지만."
-쉬익
한우현의 검이 드론이 재생하는 영상에 나오는 보스의 환영을 갈랐다.
"이제는 다르다. 안 잡으면, 한 달 뒤면 더 강해져서 튀어나온다."
"...당연히 던전 입구에서 튀어나오겠죠?"
"그래. 인구가 아주 많은 도시 한 복판에 말이다."
"...던전에서 잡는 게, 맞긴 하겠군요."
차정훈이 입술을 깨물면서 그 말에 애써 납득했다.
"그러니까 매 달, 잡아야 한다."
"...매 달이다?"
"에에··· 그게 무슨 소리이···"
"잠깐, 잠깐만. 한 번 잡았으니 끝이 아니라고?"
"아오, 씹. 게임에서 당연히 보스가 재생이 되는데 현실에서도."
"이런 미친! 그럼 지금 바로 입장하면 다시 있는 겁니까?"
그 말에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두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손을 들어 한 번 모두의 입을 닫게 했다.
"바로 나오진 않는다. 한 달에 한 번씩 재생되니까."
"한 달? 그럼 이미 한 달이 지났으니까, 또 한 달이면···"
"3월 1일에. 빠듯한데."
"걱정 마라. 다시 생기는 보스는 약하니까."
"약하다고요?"
"그래."
한우현은 다시금 혼란에 빠진 이들을 진정시킬 당근을 던져주기로 했다.
"맨 처음 생성될 때, 보스의 포스는 플레이어 최대 수치의 두 배인 4000이다."
"네, 실제로 게임에서도 다 그랬으니까."
"맞다요."
"게임 설정 상, 보스는 잡으면 잡을수록 점차 그 힘이 빠지면서 약해지지."
"그건 그냥 설정이었고, 실제론 아니었잖아요."
"정확히 설명해주지. 자, 여기선 이 친구의 설명을 듣자고."
-쀼빕 삐비빕
그 말에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드론이 화려한 포스의 빛을 둘러 존재감을 과시했다.
"반갑습니다, 위대한 마스터의 쌀을 빨아먹는 원숭이 여러분."
"...?"
"...?"
모든 길드원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심 한우현도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딱히 제지하지 않아, 맥이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최초 격파 보상. [완전한 통제의 인공 핵]입니다. 너무 기시니, 편하게 맥Mech이라고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어··· 최초 격파 보상? 길드장, 이런 건 원래 게임에 없었잖아요?"
맞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최초 보상 같은 게 없다.
애초에 보스 첫 출시부터 그 모든 패턴과 보상을 테스트 서버에 등장시키기에, 정식 도입 당시에는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최초 격파 또한 그냥 현금과 시간을 있는 대로 쏟아부은 정신병자 랭커들의 늘 있는 WWE에 불과할 정도로.
"나도 몰랐는데, 현실에선 주더군. 그리고 보면 알겠지만."
"저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오염되기 이전의 원본. [창조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씨앗입니다."
동시에, 그 카메라에서 붉은 빛을 내뿜었다.
"게임 폐인들이니 잘 아시겠지요? 저는 설정 상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세계관 최고 수준의 지능체이자 학습체입니다. 따라서, 해당되는 무수한 정보를 분석하고 연구해 예측합니다."
"아니, 아까부터 폐인이니 정신병자니 단어 선택이 왜 저래?"
"동감. 로봇 맞아? 뭔 말투가 저래?"
나유나와 라니아가 불만을 토로했지만, 맥은 그 반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처음 생성되는 보스는 그 포스 수치가 최대인 4000입니다. 하지만 에너지 흐름으로 예측하건대, 한 달 후에 생성되는 보스의 포스 수치는 2000입니다."
"2000?"
"그럼 우리가 입히는 모든 피해가 두 배?"
"그렇습니다. 이후 보스가 한 달이 지난 채 나오면, 4000까지 회복되지만요."
"최대한 빨리 공략해야 하는 이유가 그거였나···"
"아무튼 그렇다면,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어도 대략적으로라도 2배 차이···"
"재공략은 훨씬 쉽다는 거네."
"아, 그래서 길드장이 화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한 거군요···"
"하긴 그럼 첫 공략에서는 재공략때보다 체력도 공격력도 4배라는 거니까."
미리 한우현이 새로이 얻은 부관인 맥과 협의한 끝에 만들기로 한 거짓말.
어지간한 회귀 전 지식은, 설정 상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내 최고의 인공지능인 맥이 분석한 것으로 발표하자는 것.
실제로 개연성도, 설득력도 있는 일이기에 그 직관성과 지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길드원들이 납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이딴 허술한 거짓말로 미국 정부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까지 그의 비밀에 대해 속여넘기기는 어렵겠지만.
어차피 영원히 숨길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그건 그다지 상관 없었다.
"그럼 탱커, 딜러, 힐러 배치를 어떻게 하나?"
"일단 최윤이 가장 후위에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근데 게임에서처럼 하자면 나도 딜 하긴 해야 해."
"아니, 사제가 하난데 뭔 딜을 해···"
한 층 풀어진 분위기.
물론, 그 좋은 소식들이 사실이긴 했지만 엄밀히 진실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격파를 거듭할수록 초기 포스 보유량이 낮아지기에, 재공략이 쉬운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첫 공략이 정말로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화력으로 짓눌러 패턴을 생략할 수 있는 수준은 3사도까지가 끝.
그러나 2사도와 3사도의 패턴 생략도 사실 모든 공격대원들이 회귀 전의 공격대원들 수준 정도에 이르렀을 때를 가정한 것.
이건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반의 거짓이었다.
"...게임과는 다를 테니, 권승환한테 자문도 더 구해봐야···"
"일단 우리 훈련부터 제대로 받아야지···"
"...그럼 이렇게..."
"...외국인 친구들은 게임 용어 위주로 좀 더 한국어를..."
"야, 마스터. 근데 아까 말한 [오리지날 스킬]. 그게 뭐야?"
그리고.
라니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던 한우현의 말 하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
"..."
순간, 토론을 나누던 이들 전부가 하던 대화를 멈추고 한우현의 입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미 길드원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길드장이 능력치나 포스에 관계없이 발하는 초월적인 무위.
모든 스킬들에 있는 화려한 효과음이나 전조, 후폭풍 같은 것은 전혀 없지만.
그 위력과 효과는 이해할 수 없을 만치 정확하고 뛰어난, 한우현만의 이상한 전투술.
그 정체가 무엇인지, 마침내 비밀을 듣게 되리라 직감했기에.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일러스트 완성본입니다. 완성이 조금 늦어졌기에, 최신화의 독자 분들도 다시 한 번 보시면 좋을 것 같아 첨부드려요!
67화 황홀한 모험이 시작되려나 봐 (3)
"그, 눈에 집중해서 감각 높이고 그런 거?"
"신경 강화하는 법은 길드장이 계속 강조한 요소긴 하지."
"확실히 그러면 반응속도가 빨라지긴 해. 감각 능력도···"
"근데 게임에 없는 거니까 오리지날이긴 한데, 스킬이라기엔 좀 빈약하지 않아?"
"아냐. 그런 게 아냐. 오리지날 스킬은···."
그들의 의문을, 나유나가 나서서 중얼거리며 정리해 주었다.
"대충, 뭔지 알 것 같은데."
"정답이다, 나유나. 꽤 즐거운 추억이었지."
"···음, 응. 뭐, 추억이긴 해···. 아무튼, 그 막 애들 광역으로 기절시키고, 이상한 공간 만들고··· 그런 거 말하는 거지?"
뭐지?
놀리려고 한 말인데 추억이라고?
한우현은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넘어갔다.
"그래. 나유나 네가 기억하는 건 청와대에서 진입할 때 썼던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정지장]. 꽤나 강력한 오리지날 스킬이지."
다수의 저 레벨 플레이어들을 피해 없이 제압하기 가장 적절한 기술.
"...뭐야, 이름 존나 어려워."
"당연히 어렵지. 오리지날 스킬이 무슨 뜻인지 생각을 해 봐라."
한우현이 피식 웃으며, 양 손에 힘을 집중했다.
"말 그대로, 게임에는 없는 현실만의 기술··· 너희 모두, 스킬의 원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나?"
"네? 원리요?"
"애초에 우리 존재 자체가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원리란 걸 알아볼 수가 있나?"
"그러니까, 스킬이 스킬이지 뭔 원리?"
"애초에 플레이어 직업군들마다 마나니 신성력이니 흑마력이니 사용하는 힘이 다 다르잖아?"
"그런 병신 같은 설정 따위 잊어버려라."
한우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 의문을 일축했다.
마력, 원소력, 신성력, 흑마력, 기, 정령력, 풍수력···
플레이어들이 제각기 쓰는 그 기운들은 모두 [포스]에 무의미한 색깔과 추가 효과를 입힌 저열한 변환에 불과하다.
실체는 오직 가장 순수한 힘이자, 우주의 삼라만상을 뒤트는 불가해 한 에너지.
포스Force 뿐이다.
"오리지날 스킬이란, 포스와 그 근원 기관인 송과체를 탐구해 만들어 낸 실전적인 기술이다."
"실전적?"
"그래, 실전적인. 병신 같은 설계 구조의 플레이어 스킬들과는 그 수준부터가 다른 기술들이지."
-우우웅
-[포스 전투술 제 1형 : 벡터 재조정 : 스칼라 조정]
한우현의 왼손에, 먼지와 빛들이 제멋대로 뭉쳤다가 흩어지며 순환했다.
-[물리 왜곡술 : 분열융합술 : 쌍생성]
한우현의 오른손에 빛과 물질이 기괴한 형상으로 번쩍이다가 생기며 불꽃이 튀겼다.
"""....?!"""
당연히, 연맹 시스템 때문에 모든 직업군의 모든 스킬을 알고 있는 랭커들.
모두가 그것이 성기사 스킬은 당연히 아니요, 나아가 어떤 직업군의 스킬도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든 스킬은 포스라는 힘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없나? 무엇이든지 변환 가능한 에너지인 포스가··· 어째서 신성이니, 화염이니, 냉기 같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아니, 그건 그냥 그게 직업 컨셉이니까 그렇죠."
"그런 생각 한 번도 해 본적 없는데."
"애초에 우리 대부분이 고졸인데 뭔 스킬에 생각이나 분석을 해요."
"세상이 게임이 된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맞다요···"
당연히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한우현은 양 손을 들어 올린 채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컥
"플레이어 스킬들은 그 위력이 대부분 막강하다. 하지만, 스킬의 발산 과정에서 화려한 효과니, 컨셉에 맞는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불필요한 소모가 많지."
"비효율적이란 말이다?"
"그래."
장즈하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세상이 게임이 되자마자, 이 힘 자체를 활용할 방법을 찾아서 시험했지. 다시 말해,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서 포스 그 자체로 순수한 현상을 만드는 것."
"아니, 이상한데··· 그런 생각을 왜 제일 먼저 하는데요?"
"맞아. 우리 대부분이 스킬들 제대로 사용하는 데에만 하루는 걸렸는데."
라니아와 차정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했다.
"조용. 내 성격이 원래 그렇다. 딴지 걸지 마라."
사실, 맞는 지적이었다.
초능력자가 된 정신병자라면, 당연히 그 원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 신나게 발산해서 깽판을 칠 생각이나 하겠지.
당장 회귀 전의 한우현부터도 그랬다.
"..."
"...네이, 네이."
그랬기에 그 타당한 지적을 억지로 깔아뭉갰다.
"현실에서, 정직하게 스킬들만 발사해댄다? 그건 우리가 가진 능력의 티끌에 불과하다. 진정한 플레이어의 능력은 겨우 스킬 발사대 따위가 아니야. 즉, 진짜 초능력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거다."
그 말과 함께 왼손을 들어올렸다.
"포스 전투술. 무수한 인체 생물학과 의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 만들어진 초인을 위한 무학."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물리 왜곡술. 현실 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 만들어진 현실을 왜곡하는 마법."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AARO.
그 산하의 초인연무부Superhuman Training Department와 초상연구부Psychic Research Department가 오직 효율적인 전투와 위력만을 추구하며 만들어 낸.
궁극의 스킬 체계Skil Tree.
"의학? 물리학?"
"씨발, 왜 또 느낌이 싸하지."
"그, 대충 알겠어요. 그러니까 새로 스킬 배우란 거잖아요? 그죠?"
"음, 어렵겠지만··· 해 보지."
"어차피 길드장도 끽 해야 그거 제대로 쓰기 시작한 지 1주일 되었을 거 아냐?"
"청와대에선 하루만 아닌가···"
플레이어들 중 가장 사회성이 좋은 두 사람.
유튜버 출신의 차정훈과 김재승이 애써 웃음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스킬 북 같은 거라도 있으신가? 아니면 그 뭐냐, 스킬 입력? 7차 전직?"
"어떻게 배우면 됩니까? 빨리 가죠. 길드장 말대로면 시간이 없잖아요?"
안타깝게도, 당연히.
"그래. 배워야지. 이것부터 받아라."
현실에서 스킬을 새로 배운다는 것이, 게임에서처럼 만만할 리가 없었다.
-턱 턱 턱 턱 턱
한우현은 미리 준비한 교과서들을 꺼내놓았다.
"이, 이게 뭐야? 미친, 두께가 왜 이래?"
"한 뼘은 되겠는데···? 아니, 두 뼘 그 이상?"
"자, 잠깐만. 난 한국어 잘 못 한다!"
"저도 한국어 잘 못한다요! 대화도 겨우 하는데요!"
엘리쟈 나바로, 장즈하오, 시하이옌의 입이 가장 먼저 벌어지며 비명이 나왔다.
"걱정 마라. 내가 직접 붙어서, 너희 모두 과외 해 줄 테니까."
"내용이 이게··· 생리학, 해부학, 조직학··· 이, 이건 의대에서나 배우는 거잖아!"
"뭔, 죄다 영어에 전문 용어가 글씨는 왜 이리 빽빽해?"
"난 고졸이라고 미친 새끼야!"
"이걸 한 달 만에 배우라고요?!"
당연히 그 외국인 셋 뿐 아니라, 나머지 길드원들도 안색이 새하얘졌다.
"저, 저기 길드장, 농담이지···? 이걸 한 달 안에 외우라고···?"
나유나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내밀어 한우현의 손가락 끝을 긁었다.
"정정하지. 이건 2주 안에 외워야 할 분량이다. 남은 2주 동안 외울 건 따로 하나 더 있으니까."
-턱 턱 턱 턱 턱
두 번째 교과서가 나왔다.
"...제목이··· 물리학 개론?"
"타나이나이. 어차피 배워야 한다면 대충이라도 본다. 오, 한자가 있다···"
중국어로 욕설을 내뱉고선 가장 먼저 손을 내뻗은 근육질의 남자.
장즈하오의 얼굴이 익숙한 글자를 보자 순간 펴졌다가.
"...상대성 이론? 입자 물리학?"
다시 굳어졌다.
"위상 수학. 고전 역학. 해석학. 열역학. 유체역학. 광학. 전자기학···?"
그 모든 단어를 빠르게 중국어로 읊고 나서는 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이 가오리방쯔 미친 것이다? 난 베이징대 출신이지만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 1년은 필요하다!"
"뭐, 이 짱깨 새끼야? 지금 가오리방쯔라고 했냐?"
"너한테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욕이 중요하지 않다!"
"하, 나도 나름 똑똑하거든 이 샤비왕바단아?"
"뭐이악?"
-쾅
"그만."
최윤과 장즈하오가 쓸데없는 부분에서 기싸움을 벌이자, 그를 한 번 끊어 주었다.
"걱정 마라. 너희들 학력과 지능 수준이야 당연히 잘 알고 있으니까."
"""..."""
-호릅
안계 철관음을 한 모금 마시고 향을 음미했다. 산과 이파리의 느낌이 한우현의 목을 적셨다.
"먼저 그 편견부터 깨 줘야겠군. 세상이 게임이 되었다고, 진짜 우리가 게임 캐릭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잠겨 든 눈빛으로 그들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세상에 없던 힘.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능력.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가 필요하지. 이걸 설명해야 아나?"
"아니, 이런 거 몰라도 세계 최강인데 왜."
"너희가 세계 최강? 오리지날 스킬 없이, 쓰레기 직업인 성기사의 쓰레기 스킬들만 가지고도. 나 혼자 너희 모두를 찍어 누를 수 있는데?"
"..."
"능력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잘 싸울 수 있다면, 군인들은 왜 훈련을 하지? 사격술은 왜 존재하지? 전술 전략은 뭐 하러 배우지?"
"..."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명심해라.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그러니 게임 능력도 그 본질은 그렇게 쉽지도, 만만하지도 않아. 어렵고 복잡하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학교 몇 년 과정을 1달 만에..."
"하지만... 그 말대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걸 한 달 내로 절대로 다 배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그, 그래요! 절대 못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시간을!"
"잘 생각했다, 길드장. 그럼..."
"하지만 우린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
"""...?"""
봐 줄 것처럼 말하던 그 방향성이 다른 곳으로 가는 듯 하자, 화색을 띄웠던 장즈하오의 표정이 불길함을 감지한 듯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플레이어에게는 플레이어에게 알맞은 교수법이 있으니까. 첫 번째 기술이자, 너희 모두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걸 알려주지. [신경 가속]과 [신경 이해 확장]이라는 기술이다."
실제로, 포스 전투술Force martial arts 중 가장 먼저 개발된 기술.
애초에 그것이 없다면, 게임 폐인 정신병자들 나부랭이들이 어떻게 그 무수한 학문들을 통달하겠는가?
무수한 물리학, 수학, 생물학, 의학 지식을 죄다 외우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뇌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야 했다.
"쓰는 법은 지금까지도 내가 몇 번이고 대충은 말해주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쓰는 친구는 없지."
"아니, 당연하잖아요. 일단 신경계를 인식하는 거부터가 어려운데."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내가 직접 이해가 쏙쏙 되도록."
-치지직
-치지직
"식당으로 비유하자면, 사장님이 직접 쌈을 싸서 먹여주듯이."
-[포스 전투술 제 9형 : 응급 신체 대사 : 신경 재구축]
-[포스 전투술 제 10형 : 의식 확장술 : 세부 인지]
-우우웅
"하나하나 머리에 친절히 박아주지."
한우현의 양 손을 사이에 두고, 미세한 포스의 가지들이 인간의 중추신경계Central Nervous System을 모사하며 일렁였다.
"자, 한 놈씩 내 앞으로 나와라."
"""...?!!"""
당연히, 모두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다 못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쌀 팔아먹는 원숭이 같은 지능 수준부터 뜯어 고치고 나면, 생각만큼 공부가 어렵진 않을 거니까."
"저, 그, 잠깐만. 뇌를 함부로 건드리면."
"길드장을 못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길드장이 의사도 아닌데 뇌를 고치다뇨!"
"걱정 마라. 내가 어떻게 그 수많은 정신병을 치료하고, 이렇게 강해지고, 무수한 지식을 통달하는 지능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톡톡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머리를 두드렸다.
"각성 첫 날.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이 바로 스스로의 뇌를 고치고 강화하는 시도였지. 그렇에 수십 번은 시험했으니, 아무 문제 없어."
"..."
"..."
"지금의 내 모습을 봐라. 20년을 게임에 바친 정신병자가 이렇게 바뀌었으니, 충분히 믿을 만 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희에게 거부권은 없다. 어차피 너희 말고도 길드 주요 플레이어들에게는 전부 시행할 조치고."
"..."
"..."
"자, 빨리 자원자 나와라."
거기까지 말하자, 정말로 한우현의 말이 진심임을 느낀 듯.
그리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조치임을 모두가 깨달은 듯.
어찌 납득은 한 눈빛을 보였다.
하긴, 애초에 그 본심을 확실히 확인해 스스로를 완전히 길드 지도자라고 인식하는 이들만 모았으니까. 차마 한우현의 명령에 대들 엄두를 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 누구도,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나서지는 못했다.
이해할 만하다. 뇌를 뜯어 고친다는데 누가 좋다고 바로 머리를 들이밀겠나? 이건 그가 빠르게 강제해야 할 일이다.
"걱정 마라. 안 아프니까. 아무도 안 나오면 내 마음대로."
"저, 저가 먼저! 한다!"
"호?"
-벌떡
의외로.
예상을 깨고, 스스로 일어난 자는.
한우현에게 가장 먼저 두들겨맞고 제압당했던 중국 서버의 랭커.
시하이옌이었다.
"빨리 이리 온다!"
"그래, 용감하군. 마음에 들어, 시하이옌."
"그, 살살 할 필요 없으니까!"
"···?"
이건 또 뭔 개소리야.
헛소리를 하는 시하이옌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려다 봤다.
"잘 부탁한다···!"
뭔가 기대하는 듯,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미친 년인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미친 년이 맞긴 하지. 그것도 한 번 지금 고칠 수 있으면 도와줘야겠어.
-후우웅
그리 생각하며, 섬세하게 신경계 구조를 모사한 포스 구조체를 그대로.
시하이옌의 정수리부터 아래로 내리씌웠다.
"흐으윽···!"
"아니, 안 아프다며?!"
"...근데 반응이 이상한데. 왜 좋아하는 거 같냐?"
"이해하려 하지 마라. 미친 년이다."
"아니, 장즈하오 당신 친구 아니에요···?"
"내가? 저 분탕종자랑? 부디 엮지 만다."
"아, 네···"
다행히, 너무 엄살을 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는 다르게.
"하으, 흐으, 하으읏···."
잘 버텨 주었다.
"저런, 분위기가 영 좋지 않군요. 제가 응원가라도 틀어 드리겠습니다."
그 적막을 맥이 풀어 주었다.
-널 기다리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월드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들!
-그 향한 힘찬 너의 발돋움을~
-내딛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하아아···"
"그래, 할 수 있다."
물론, 응원가 하나로 풀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조금은 효과가 있었던 듯.
한 사람의 입에서 멍하니 그 노래를 따라하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68화 네 주 동안! (1)
2025년 2월 10일.
세상이 게임이 되고 난 지, 정확히 40일이 지난 때.
-탁
잠실 길드 사옥 4층. 그 중심부 회의실.
대학교 강의실처럼 꾸며진 방의 단상에서,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신경해부학 5장은 대충 된 것 같고. 그럼 신경생리학 5장 강의로 넘어가지."
"기, 길드장니임··· 조금만 쉬었다가···."
"맞아요오···."
"챠오니마! 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란 말이다···!"
"흐, 흐헤··· 뇌신경은 오오오트트아프··· 코눈눈눈삼눈···."
"복습 할 시간을 좀··· 이해는 커녕 족보도 다 못 외우겠다고!"
"음, 한우현 길드장. 학생들의 집중력이 좀 떨어져 보이는데."
다음 강의를 시작하려던 생리학 교수 길민이 말꼬리를 흐렸다.
원래는 온라인 강의를 만들어주길 부탁하려 했지만.
직접 보스 최초 격파에 참여할 1군 플레이어들은 처음이기도 하며, 그 이해의 수준이 특히 높아야 하기에.
직접 길드에 와서 강의를 해 주기로 계획을 바꾸어, 협약을 맺은 교수들 중 하나였다.
"엄살입니다. 제가 말 했듯이, 신경계 자체를 뜯어고쳐서 암기력과 이해력이 어지간한 의대생보다 높아진 상태니까요. 무시하면 됩니다."
"음, 그 원리는 분명 보았지만 아직 믿기 힘들단 말이지···"
"저도 원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쓰는 기술은 아니니 이해합니다."
"더 쉽고 빠르게 가르치려면 어째야 하나..."
생리학 교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교과서와 논문들을 뒤적거렸다.
-오독오독
"라니아? 뭐 먹는 거야?"
"응? 비타민. 한우준이 주던데?"
"뭐야, 왜 난 안 줘···?"
"어제 저랑 같이 스킬 몇 개 더 시험하느라 피곤해 보여서 준 거에요. 자, 나유나도 드시죠."
"하, 엎드려 절받기로 주는 거 필요 없거든?"
잠깐의 쉬는 시간.
그 동안 한우현도 강의를 같이 들으며, 한우준과 같이 조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직접 그 학문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실습도 시켜 주어야 했으니까.
"후."
그도 조금은 피로했기에, 한숨을 살짝 내뱉었다.
미래대학교 의과대학 기초의학교실.
역시 한국 최고 수준의 병원인 서울미래병원을 가진 곳 답게, 그 성과가 놀라울 정도였다.
아무리 한우현이 연구 방향성과 중요한 지점을 모두 짚어줬다고는 해도.
한 달 동안, 한우준과 한우현을 통해 대충 플레이어 의학의 분석과 개괄을 끝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나서는 알아서 자기들끼리 방향을 잘 잡고 연구하는 듯 해, 앞으로는 필요한 부분에 대한 연구만 추가로 더 잘 주문하면 될 듯 했다.
-터벅터벅
길드 임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직접 질문을 받던 한우준이 강의실 앞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찾아보니 이 부분들을 아직 다들 잘 이해하지 못한 듯 하네요."
"대뇌 각 분절부 기능이야 나중에 복습할 수 있지만, 뇌 신경과 척수 신경의 갈라짐은 지금 확실히 외워야 하는데···"
"교, 교수. 조금만 더 단순히 줄이면 안 된다요··· 우린 의사가 아니라 해부학적인 활용만 하면 된다요···"
엘리쟈 나바로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아무래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단축해야하나···"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만 추려서, 이제는 더 줄이기 힘들지 않을지."
"교수님, 제 생각에는···"
생리학 교수와 한우준이 고민하는 동안.
한우현은 보다 쉽고 단순한 방법으로 그들의 의욕을 돋궈 주기로 했다.
-[포스 전투술 제 9형 : 응급 신체 대사 : 신경 재구축]
-키이잉
그 손 위로 중추 신경계를 모사한 포스 구조체가 떠올랐다.
"졸린 놈들은 말해라. 내가 뇌내의 피로 유발 물질들과 신경계 피로도를 초기화해 주지."
"...즈지씨즈잉."
"...애미씹."
"아오, 협박질만 하지 말고 좀···"
"그, 할 거면 저부터 한다···?"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다. 나도 업무에 집중하다가 피곤하면 스스로 하거든."
혼자 이상한 소리를 하는 시하이옌을 무시하고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모든 기술들의 개발자가 나인데, 못 할 걸 시키진 않아. 다 할 수 있어."
"아니, 할 수 있는 거랑 진짜 하는 거랑 다르다고요···"
"솔직히 일주일 만에 해부학, 생리학, 조직학, 면역학 절반 한 것만 해도 엄청난 거잖아!"
"이거 의대에서는 1년동안 배우는 거라며 씨발!"
"다음 보스가 나오기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당연히 서둘러야지."
-쉬이익
포스 구조체를 다시 비활성화한 한우현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좀 태도를 바로 해라.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교수들 몸값이 얼마인지는 알고 쉬니 마니 하는 거냐?"
"그, 제가 몸값이 그리 비싸진 않습니다만···"
한우현의 말에 민망한 듯 길민이 헛기침을 했다.
"너희들 하나 강의하려고 전용 수업 교재까지 만들어 주고, 울산에서 여기까지 몇 시간을 들여서 오고 있는데 감사한 마음을 가져라."
"하하하···"
-똑똑똑
그리 면박을 주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교수님? 왜 여기로 바로?"
"연락을 돌렸는데 바쁘신지 받지 않으셔서 바로."
"이런, 죄송합니다. 강의에 집중하기 위해 휴대폰을 밖에 둬서."
한우현은 복도로 나가며 밖에 있던 이들에게 일일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닙니다. 이리 깊게 사과할 것까지야. 애초에 예정 시간보다 일찍 왔는데."
"그보다 그것. 퍼펙토이드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체화 한다는게 어떤 모습인지···"
"저도 허수 공간과 실수 공간의 시각적 이해가 무슨 의미인지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만."
"어허, 이 양반들아. 그럼 뜬 구름 잡는 소리 말고, 벡터 조정이 뭔지부터 봐야지."
"벡터 같은 게 뭐가 중요해? 그보다는 시공간 왜곡이 대체 어떤 식인지가."
그 곳에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와 수리과학부 교수들 수십 명이 몰려와 있었다.
"먼저, 안타깝게도 이미 다녀가신 교수님들께 자세히 들으셨겠지만··· 저는 이론적 성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초능력의 본능적인 운용에 물리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토대로, 여러 실험 결과를 보내 드린 것이지요."
"아이고, 그건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러니, 제가 알려드리기보다는 같이 연구하는 방향성으로 나아가고 싶군요."
-스윽
한우현이 손을 내밀었다.
"저와 다른 초능력자 플레이어들이 협조해드리는 만큼, 다양한 연구 결과와 해석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현실에서 플레이어들이 진정 그 힘을 전투에 끌어낼 수 있는 스킬 체계.
"그러니, 일단 강의와 실험 협업 일정부터 맞춰 볼까요?"
포스 전투술은 그 근간을 플레이어 의학에 둔다.
물리 왜곡술은 그 근간을 수학과 물리학에 둔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근간일 뿐.
둘 모두, 진정 통달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생물학과 물리학 자체를 뒤섞어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지식을 갖춰야 한다.
이제 겨우 일주일.
다음 보스 공략과, 첫 보스의 재공략까지 남은 시간은 3주.
시간이··· 없다.
* * *
잠실.
길드 사옥.
그 바로 앞의 던전 입구.
그 곳에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줄을 서 있었다.
"네, 플레이어 정보와 본명 확인 되셨구요··· 여기 조항 확실히 확인하셨죠?"
"네. 던전에서 나온 모든 아이템, 특히 골드와 재료 아이템, 극도로 희소하게 나오는 포스 코어와 포스 먼지는 무조건 길드에 전매한다."
"확인 되셨습니다. 만약 조항을 어길 시, 길드 집행부가 직접 조치를 취하니 주의하십시오."
"...윽."
그 말에, 처음 진압당했던 때.
나유나를 필두로 한 집행부가 행했던 무자비한 짓들이 생각났는지 앞에 있던 플레이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네,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예, 이미 게임하셔서 잘 알겠지만 내부가 딱히 위험하진 않아요··· 가끔 나오는 잠수 방지 몹만 잘 주의해서 잡으심 되시고."
"몬스터는 원하는 만큼만 잡고, 아이템만 나오는 길에 판매하면 된다 이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른 입구에서 들어온 외국인 분들도 계시니까 말 안 통한다고 당황하지 마시구요."
"예, 감사합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조심히 사냥하고 오세요! 다음···"
무수한 플레이어들이, 빠른 속도로 그 안에 들어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던전 내부의 잡몹을 잡기 위해서.
"예, 나오시는 분들은 저기서 처리하고 가시면 됍니다!"
"이 쪽으로! [인벤토리] 공유 시켜 주십시오."
"어, 꼭 전부 보여줘야 해요···?"
"처음이시구나. 네, 아이템 숨기는 거 막기 위해서 전부 보이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전부 제 값은 쳐 드립니다."
"확실히 비싸긴 한데···"
"혹시 사냥 중에 힘드신 거 있으셨습니까?"
"아뇨, 혹시나 해서 챙겨갔던 [엘릭서]도 하나도 안 먹었는데."
"하긴 게임에서도 닿아 봤자 포스 차이 때문에 1 데미지 입었으니까."
"잠수 방지 몹도 한 시간에 한 마리 나와서, 그냥 근처에 있던 애들이랑 순식간에 스킬 쓰니까 다 터지더라고요."
"다행이네요. 나오신 골드 여기 놓으시고··· 오, 포스 먼지가 나오셨어요?"
"네, 진짜 드랍률 낮은데 운이 좋았는지."
"골드는 한화로 대략 142만원 받아가시면 될 것 같네요."
"와, 하루 종일도 아니고 세 시간 사냥해서 100만원?"
"그리고 포스 먼지는 특별히 비싸게 책정되니, 개당 1000만원입니다."
"...?! 지, 진짜요?"
모든 아이템의 전매.
당연히, 처음에는 불만이 꽤 있었다.
-아니, 현실에서 이 아이템들이 얼마나 귀할지 모르는데 이걸 모두 전매한다고?
-그래도 길드에서 막 후려쳐서 구매하는 느낌은 아니긴 한데.
-아무리 비싸게 쳐준다고 해도 실제로 경매하는 거랑은 차이가 크지!
-맞아, 아이템 거래를 전부 독점하겠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좋은 말로 할 때 들으시지 그래?
-아무리 길드가 세도 플레이어 수가 수십만인데 그걸 어떻게 다 통제해?
-암시장이란 게 괜히 있는 줄 아나!
그들의 불만이 사실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플레이어와 그 아이템이 게임에 근간을 두었다고는 해도.
엄밀히 사유 재산인 아이템을 모조리 길드가 독점하겠다니?
-암시장 거래를 이렇게 허술하게 하다니, 병신이냐 너희들은?
-미, 미친? 대체 어떻게?
-텔레그램도 아니고 카카오톡으로 아이템을 팔면서 안 들킬 생각을 했냐? 모두 잡아.
-자, 잠깐만! 항복! 항복합니다!
-좋은 판단이다. 아이템은 모두 압수한다. 불만은 없겠지?
-씨발···
-제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한 대로, 압수한 아이템의 절반만큼 한화로 쳐 드리지요.
-지, 진짜 절반요?
-씨발, 니가 배신했구나!
-병신아, 길드랑 싸워서 쳐발려 놓고서는 또 암거래를 할 생각을 한 니가 멍청한 거지!
하지만, 길드는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
-유럽에서 암거래 제보? 좀 멀리 가야겠군. 홍세희, 네가 가라.
-으, 으응···. [도사] 애들 데리고 [축지법] 쓰면 금방 갈 거 같네에···
-비 플레이어 거래 주도자들은 죄다 손톱과 발톱을 뽑아라.
-그, 그정도로오···?
-그 비싼 아이템들에, 암거래 특수가까지 붙일 정도면 대부호겠지. 선제적으로 막아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발악을 하며 숨어드는 것 까지는 전부 막을 수 없더라도.
그 아이템을 사고자 하는 비 플레이어 단체.
아이템이라는 비현실적인 물건들을 대량 혹은 지속적으로 구매하고자 하려면, 그 체급이 클 수 밖에 없는 이들.
당연히 길드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암거래를 시도하려 하는 부호들은 전 세계에 많지 않았다.
즉, 어마어마한 제보 보상금까지 내건 마당에.
그런 놈들을 적발해서 억압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이라크? 거기서 포스 공격 아이템을 구매하려는 의사를 보였다고?
-네. 이미 몇 번의 거래도 있었다는 것 같습니다. 바로 파견을 갈까요?
-길드장, 이건 좀 큰 건수 같은데··· 어쩔까?
-본보기도 적당히 보여 줘야겠지. 어차피 정규군도, 정규 국가도 아닌 것들. 나유나 네 특기가 뭔지 보여주고 와라.
-...지인짜아?
-그래. 모조리 찢어 죽인 다음에 널어놔라.
-...그, 그 정도 취향은 아닌데. 아무튼 알았어.
즉.
아이템을 몰래 판매하고자 하는 이들은 적당히 경고를 주고 그 아이템들을 압수하는 선에서 그친다.
단, 사려고 하는 비 플레이어라면.
그 놈들이 누구든지, 철저히 말살하고 고문해 본보기를 보인다.
-자, 잠깐!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겁니까! 이건 중국 정부에 대한···
-응, 리하오란이 니들 전부 찢어 죽여도 된다고 했어~
-크아악!
-크아악이 아니라 크악 씨이빨이라고 해야지! 리듬감이 없네!
-자, 온 김에 러시아까지 들러 볼까?
-정상화의 신, 시베리아까지 그 은혜가 닿는다네~
-병신, 지가 독재자라고 길드 눈치도 안 봐도 되는지 아나···
-암거래 크악 씨이빨 바로 집행부 정상화!
-자, 잠깐만!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아이템 압수야 당연하고, 이렇게 크게 판을 벌이면 손톱이 아니라 손가락을 뽑아줘야겠는데?
플레이어는 현대 무기로 대처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
포스가 깃들지 않은 무기로는, 아무리 막강한 위력을 가졌다 해도 플레이어에게 물리력을 가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플레이어 뿐.
다르게 말하자면, 전 세계 플레이어의 60%가 가입한 무력 단체인 길드는.
그 무엇으로도 견제가 불가능한 절대적인 집단.
-아무리 길드라고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 거래를 독점하겠다니!
-자유 시장 경제 체제는 전 세계가 합의한 기본법인데!
-이건 국제법을 정면에서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어쩌라고?
-꼬우면 덤벼. 길드장 얼굴 보게 해 줄까?
-이 병신이 자기 나라 왕이라고 우리한테 깝쳐도 되는 줄 아나.
대 놓고 깽판을 치며, 전 세계 경제 활동과 정치 내정에 간섭하며.
안보 주권과 자유 거래라는 개념을 무시하는 모습.
당연히 각국 정부와 대기업, 군벌, 기득권들이 극심한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들 모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속으로 반발을 삼키는 것 말고는.
-탁
그 모든 보고서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금발 청안의 잘 생긴 남자가 서류철을 덮었다.
"후."
던전 입구에 들어가는 저 레벨 플레이어들까지 창문 밖으로 내려다 본 한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느려, 느려, 느려, 느려... 느리다고."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69화 네 주 동안! (2)
-서걱서걱
-서걱서걱
끊임없이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름을 적고, 미비한 부분은 검토하고...
한우현은 집무실에서 깊은 피로를 느꼈다.
시간이 없다.
너무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짜증만 낼 수는 없었다.
그럴 시간조차 아깝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을 계속한다.
-똑똑
"들어와라."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세븐가이즈의 랑입니다."
"네, 저도 안녕하세요··· 크림슨씽의 하나에요."
캐주얼한 양복과 원피스를 입은.
잘생기고 예쁘기는 했지만 플레이어처럼은 보이지 않는 남자와 여자가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 좀 늦었군 그래? 꽤나 예전에 연락을 보냈는데."
"아하하··· 그, 콘서트 일정이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저희도 바로 가고 싶었는데 엔터 쪽에서 이것저것···"
거짓말이었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그 영향력을 끼치는 유명 아이돌 둘.
아마도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플레이어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을 사람들.
정부가 당연히 순순히 그들이 길드에 합류하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수단으로 둘의 소속사를 압박했겠지.
"괜찮다. 연예인들은 바쁜 법이니, 이해해."
"감사합니다···"
"대신 그만큼 열심히 도울게요!"
그 무안함을 떨치려는 듯, 활기차게 대답하는 둘을 보며.
-똑똑
"들어와라."
한우현은 눈짓을 해, 그 옆에서 대기하던 라니아가 문을 열게 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중년 남성과, 귀여운 소년같은 모습의 작은 키의 남성이 추가로 들어왔다.
"어?"
"어?"
"당신은?"
"...대박."
그리고 넷 모두.
서로를 보며,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개들 하지 그래."
"네! 캐릭터 네임 [체호프], 본명은 이율입니다! 유튜브 채널 [체호프의 총] 운영 중이고요!"
5000만 구독자의,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팬 애니메이션 출신 유튜버.
"곽정팔입니다. 서울에서 피자집 하고 있고··· 캐릭터 네임은 [타락용사]입니다."
"와, 타락용사님! 진짜 뵙고 싶었는데!"
"저도 체호프 진짜 팬이에요! 프리미엄 영상도 다 봤는데!"
"아, 저도 아들이 세븐가이즈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따가 싸인 좀."
"저야말로 진짜 두 분이랑 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자, 사적인 대화는 여기까지."
-파바방!
라니아가 마법봉을 휘두르며 비눗방울을 터뜨려 주의를 환기했다.
"다들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너희 넷은 길드 홍보부를 맡게 될 예정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미 소속사에서도 전면 협조하기로 나왔으니, 잘 부탁하지."
"둘 영상 말고도, 다른 길드 홍보 영상도 많이 한다고 했죠?"
"그래, 체호프. 이미 이그드라실 영상 전문가니, 잘 할 수 있겠지?"
"솔직히, 이그드라실 애니메이션에서 손 뗀지 한참 되긴 했었지만··· 연예인에다가 최초 만렙자까지 붙여 주신다면, 못 하면 안 되죠."
그 믿음직한 말에, 한우현도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좋다. 자세한 홍보 방향성은 이따가 서면으로 전달하지. 일단은 내려가면서 권승환한테 길드 구조에 대해 안내받고, 홍보와 광고에 대한 초안을 생각해주길 바란다."
"예,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출근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널널하네요···?"
"우린 전투 안 시킨다고 했잖아."
"그러게, 싸움 시킬까봐 망설였는데···"
-쿵
시시덕대는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한우현은 다시금 서류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예상보다 아이돌 소속사들이 협조적이군."
"하, 협조는 개뿔. 진작에 왔어야지. 이건 마스터가 너무 무른거야. 나 같으면 엔터사에다가 스킬 한 방 날리고 시작했다니까?"
"그러면 잘도 랑과 하나가 우리 말을 들었겠다, 라니아."
"언제는 말 안 듣는 놈들은 손발톱을 뽑으라니 했으면서, 웃겨. 흠··· 그나저나···"
라니아가 그들이 나간 문을 다시금 쳐다보며, 살짝 헛기침을 했다.
"아, 아, 아아···"
"...뭐하나?"
"응, 어? 뭐, 그냥 하나 보니까 노래 생각나서···"
"...?"
"...뭐야, 그 눈빛은? 아, 목 아프네. 목캔디나 먹을까···."
한우현은 그제서야.
잊고 있었던 하나의 사실을 떠올렸다.
-션족 션족 겜 망치는 에션족~
-구원자를 모욕하는 넌 그냥 에!
-션족 션족 온 세상이 에션족~
회귀 전의 라니아는, 노래를 부르며 학살을 하기를 즐겼었다는 사실을.
"우준이 얘는 뭐 이리 사탕을 자꾸 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음음."
"..."
에이, 설마.
아이돌들을 눈앞에서 보니 노래라도 들으며 흥얼거리고 싶어졌나 보지.
"노래라도 듣고 싶나? 맥, 괜찮은 걸로 하나 틀어줘라."
"응? 아니, 듣고 싶은 게 아니라 하..."
"확인. 마침 좋은 구원의 노래가 있군요."
-그대를 깨우리라, 기간제로!
-기간제 선물, 얼마나 관대한가!
-사라질 운명 그저 감사할 뿐~
"...? 뭐야, 왜 또 좋은데 노래가?"
"뮤지컬인가? 가사는 좀 이상하지만,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군."
-내 사랑이여, 왜 나를 떠나려 하나요?
-이별이 있어야 재회가 더 달콤하답니다!
고개를 주악거리며 그 감성적인 노래를 감상하던 라니아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수호랑 주은이 보러 갈게. 중국 은행들이랑 연계가 슬슬 제대로 되고 있다나 봐."
"그래, 수고해라."
-덜컥
"훈련 일정이나 속행해야지. 슬슬 교육도 다 되어 가니까···"
한우현도 본격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들에 다시금 시동을 걸었다.
-훈련 계획서 : 핵심 작전부
-1군, 2군, 3군 공격대 조직 훈련 계획
-공격대 계획...
-보스 몬스터 분석 :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여론을 조작할 홍보부도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으니, 이제 정말로 중요한 일인.
다음 레이드에 집중해야하니까.
* * *
잠실 길드 사옥의 바로 앞, 그 공터.
"이주일 간. 수고 많았다."
백금과 황금이 어우러진 듯한 찬란한 갑옷을 입은 백인 남성이 중얼거렸다.
"뭐,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기초 의학과 기초 물리학의 전반을 대충이라도 이해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꽤나 훌륭하다."
-짝짝짝
그러면서 박수를 쳤다.
그 앞에서는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이 표정을 굳힌 채로 도열해 있었다.
김재승. 레벨 295 추적귀.
차정훈. 레벨 295 포격수.
나유나. 레벨 294 풍수사.
라니아. 레벨 295 마법소녀.
홍세희. 레벨 295 암살자.
장즈하오. 레벨 293 야만전사.
시하이옌. 레벨 291 암흑술사.
엘리쟈 나바로. 레벨 290 마법소녀.
최윤. 레벨 290 사제.
불과 2주 만에, 고문에 가까운 중추 신경계 확장과 암기를 거치며.
어떻게든 [물리 왜곡술]의 근간인 기초 물리학과 [포스 전투술]의 근간인 기초 의학을 강제로 주입당하는 것에 성공한 이들.
"그럼 이론을 대충 정리했으니, 본격적으로 실전 훈련에 들어가 볼까?"
"중국에서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실전 훈련이다니, 하..."
"저, 저는 준비 됐어요···"
"시하이옌 이 미친 년아, 대체 지금 얼굴은 왜 붉히는 것이다?"
"흐히히···"
"애미 씨발. 할 거면 차라리 빨리 해치우기라도 하자고."
"인정."
자연스레 곳곳에서 불만과 쌍욕이 터져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한우현은 온 몸에 포스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말했다.
"모든 스킬의 배움에 있어 기초는 [인지]와 [해석]과 [확장]이지."
"후···"
"흡···!"
"그래. 그렇게. 모두들 끌어올려라."
한우현의 말과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파들파들 떨었다.
모든 포스 전투술의 근간.
[신경 조작술]에서 파생되는 [신경 가속], [신경 이해 확장], [감각 강화].
신경 세포들을 구성하는 랑비에 결절과 말이집들의 활동을 촉진하고.
돌기체와 축삭체들의 미세 구조를 확장시켜 그 기능과 잠재력을 극적으로 높인다.
"이해가 쏙쏙 되나?"
"이런 걸, 길드장은 거의 항시로 쓰고 있다고··· 존나 미쳤네, 진짜."
"씨발, 가만히 쓰기도 힘든데 싸우면서··· 하."
"준비 다 됐으니까, 다음 걸로 넘어가 이 새끼야!"
"자신감은 좋은 태도다, 최윤."
굉장히 건방지다 못해 불순한 태도였지만.
아홉 공격대원 중 가장 그 훈련 성과가 좋았던 자.
최윤을 격려하며 미소지은 한우현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솔직히, 오늘 하루만에 다 알기는 어렵겠지. 그러니 오늘은 정말로 실전에 들어가기보다는, 구체적인 활용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직접 느껴보는데 주안점을 두겠다."
-우우웅
-우우웅
한우현의 신체 전신에 무수한 포스들의 구조체가 제멋대로 뒤흔들리며 씌워졌다.
"모두들 나한테 포스 신경망을 확장해서 붙여라. 그래, 그렇게."
-쩌저적
-지지직
-차자작
아홉 명 모두에게서, 한우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어설픈 포스의 가지체들이 뻗어나왔다.
그것이 완전히 그의 몸을 감쌌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한우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포스 전투술은 총 12형으로 나뉜다."
-후우우욱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나뭇잎이 휘몰아치며 그의 손 위에서 소용돌이쳤다.
"1형. 벡터 재조정. 신체에 직접적으로 맞닿는 물체의 운동량과 운동방향을 제어한다."
"...뭔가 캐릭터 하나 생각나는데."
"만화랑 아주 똑같진 않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된다."
한우현의 손 위에서 포스가 빛을 발하며 뭉치고서는, 너 덧 개의 화살표를 형상화했다.
"이건 고전 역학. 즉 뉴턴 운동학에 대해 잘 알아야한다. 겸사겸사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좌표계도 알면 좋지."
-콰드득
"아, 잠깐, 제대로 못 봤는데···"
"나중에 계속 다시 보여주겠다. 오늘 모든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을 보여주려면 시간이 없으니까."
"으···"
"씨발 진짜, 미치겠네··· 저거 하나만 해도 만만한 기술은 아니어 보이는데."
"...정말로 저걸 하루만에 죄다 만들었다고? 이상한데. 야, 마스터 너 진짜."
"다음으로 넘어가지. 포스 전투술 2형. 신진대사 초월."
-후우욱
한우현의 몸 전체에 열과 빛이 어른거렸다.
"세포 구조체 전반의 기능을 촉진해, 인체 대사 능력을 촉진하는 기술. 조직학과 생리학,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선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꺼졌다.
"신경 이해 확장으로 지능과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증가된 상태이니, 잘 새기기나 해라. 다음."
무수한 설명이, 너무나도 빠르게 이어졌다.
"제 3형 체왜곡. 인체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동작과 형상을 구사하게 해 준다. 관절과 근육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장기들의 기능을 융합시킨다."
"제 4형 입체 기동술. 2차원적으로 이동하지 않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3차원적으로 움직이는 기술이다. 작용-반작용과 토크, 텐서, 변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제 5형 신경 조작술. 신경 해부학과 신경 생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지, 연산, 해석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게 없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보스의 공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회피하거나 대처할 수 없지."
"제 6형 란나찰. 위상공간과 연속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플레이어의 송과체를 연결해 강제로 적과의 거리를 당기거나 밀어낸다."
"제 7형 역장 외골격. 인체 해부 구조를 역장 에너지체로 해석해 다양한 반응성 효과를 지닌 구조체를 인체 주변부에 생성한다."
"제 8형 중심 균형술. 중력자와 중심 안정성, 질량 안정성을 해부학적으로 조정해 플레이어의 움직임이 현실의 물리 법칙을 무시하도록 해 준다."
"제 9형 응급 신체 대사. [엘릭서]와 병행해 사용하는 신체 대사 조정 기술이지. 필요한 호르몬과 체내 물질을 조합하고 생성하며 전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속행하게 만들어준다."
"제 10형 의식 확장술.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게 해 주는 것이 신경 조작술이라면, 의식 확장술은 아예 생명체의 틀을 넘어선 조직학적 신경 구조를 창조해내고 덧붙임으로서 인지 해석 능력을 부여한다. 이건 아직 어려우니 대충 넘어가지."
"제 11형 반사 입력. 매크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신경 세포체들과 장기들에게 본능적인 방어 동작과 공격 동작들을 포스로 입력해, 인지하지 못하는 전투 영역에 대처하게 해 주지.
"제 12형 화신체. 이건··· 어차피 당분간은 쓸 일이 없으니, 다음에 보여주도록 하지."
-후우웅
그 모든 동작들을 천천히, 세심하게 보여준 한우현은 다시 포스를 가라앉혔다.
가능하다면 그 다음 체계인 [물리 왜곡술]마저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진정 마법에 가까운 체계. 한 번에 다 가르치기는 무리였다.
"자, 그럼 1형부터 따라해 본다. 벡터와 스칼라를 조정해 봐라."
"씨발, 왜 이해가 되는 거지···"
"이런 기술 진작에 있었으면 수포자 안 됐을텐데···"
"그래, 잘 하고 있군. 장즈하오, 그게 아니다. 그러면 질량만 바뀌지. 이렇게···"
다행히 한우현이 하나하나 신경 구조체를 박아주고 조정해주며.
뇌 기능을 교정해준 것이 효과가 있었던 듯.
다들 불과 2주동안 배웠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어찌어찌 따라는 가고 있었다.
"오, 시하이옌. 생각보다 잘 따라가는데? 하지만 방향성이 조금 엇나갔어. 이렇게···"
"자, 잘못했어요! 훈육해주시면 감사히···"
"...? 아니, 공간을 당기는 방향을 좀 바꾸면 된다. 훈육까지야."
"에이···"
"야, 난 왜 안 가르쳐 줘!"
"나유나 넌 잘 하고 있어서 그렇다. 뭐 궁금한 거라도 있나?"
"어? 으? 아, 그, 있지! 여기 근육을 강화한다는 게···"
"힘을 너무 많이 줬어. 이러면 조직이 강화되는 게 아니라 굳어지지. 뼈와 근육을 다르게 강화하려면···"
"헤, 이렇게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삐빅
"...12시."
알람 소리를 들은 한우현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에 맞춰, 저 멀리서 용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남자를 필두로.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고생들 많네. 자, 점심 왔습니다! 다들 모이세요!"
"뭔데, 뭔데?"
"김밥."
"...에이 씨."
기대에 차서 달려든 나유나와 라니아부터 해서, 모두의 표정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그를 보던 한우현이 피식 비웃었다.
"안 먹으면 내가 혼자 다 먹지. 종식당 김밥이 얼마나 귀한 건데. 이리 줘라."
"아니, 누가 안 먹는답니까. 그냥 고생한 거에 비해서 약소하니까··· 어?"
-우물우물
-꿀꺽
한우현이 정말로 가져가려 하자, 다급히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은 김재승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 뭐야, 김밥이 뭐 이리 맛있어?!"
"생긴 거만 김밥이지 맛이 김밥이 아닌데?"
"수고했다, 권승환. 구태여 직접 전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뭐, 우리도 훈련하러 가는 길에 들른 거니까."
"2군, 3군 친구들은 잘 되어 가나?"
"아무래도 길드장이 직접 붙어서 지도하는 것보다야 느리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 속도는 되는 것 같아."
"좋아. 정말 잘 하고 있는데?"
"알면 보너스라도 좀 줘. 훈련 프로그램 짜는데 얼마나 고생했는데?"
"물론이지."
그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한우현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길드 임원들 중 유일하게 공격대에서 빠진 친구.
애초에 그 능력이 본신의 전투력보다는 지휘와 훈련에 있어서 그리 한 것이었다.
제 1 공격대의 구성은 철저히 본신의 전투력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뤄졌으니까.
물론 그것때문에 권승환이 딱히 서운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살벌하고도 잔인할 정도로 압축적인 훈련과 교육에, 자기는 전투조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혀를 찼으니까.
"근데 길드장. 앞으로도 계속 이 공원에서 훈련할 거야?"
"계속은 아니다. 더 큰 공원에서 해야지."
"더 큰? 그런 공간이 있을까··· 따로 훈련장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걱정 마라. 네가 생각하는 규모보다 몇십 배는 큰 걸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정도까진 필요 없지만··· 뭐, 크면 좋지."
고개를 끄덕인 권승환이 다시 그 얼굴을 돌렸다.
"자, 다들 다시 갑시다! 오늘 훈련 일정 소화하려면 빡셉니다!"
"다시 이동!"
"이동!"
-우르르
어느 덧 몇 번이나 훈련 기수들이 바뀐 듯.
새로운 신규 플레이어들로 가득 찬 훈련 교육생들이 몰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한우현은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슬슬 길드도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니, 제대로 된 훈련장도 만들 때가 되었지···"
저 멀리 너머.
서울에서 가장 거대한 개활지 공원 중 하나.
애초부터 그 용도를 점지해 놓았던 곳.
올림픽 공원을 내다보며.
70화 네 주 동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