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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90-100

90화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 (1)

-모든 승객 여러분께 전달드립니다. 저희 여객기는 곧 인천 공항에 도착 예정이며···

"휴."

"긴장되십니까?"

"솔직히, 조금 그렇네요."

"아무래도 무서운 인물이니까요. 이해합니다."

"그것보다는··· 아니, 아니에요."

뭐라 망설이던 은발적안의 여자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흠."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사이보그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뭐, 하긴 그레인저 양은 이미 두 번이나 만나 봤으니 그리 낯설진 않겠죠."

"네, 네?"

그 갑작스러운 지적에 순간 라일리 그레인저가 얼굴에 당황의 감정을 띄웠다.

"그, 저는 한 번 만났을 뿐인데요. 두 번이 아니라."

"문자."

"···어."

"설마, 정말로 저희가 몰랐을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아, 그게."

피식 웃음지은 사이보그. 유진 킴이 좌석을 뒤로 젖혔다.

"괜찮습니다. 결과가 좋았으니까요."

"좋았, 다고요?"

라일리가 눈에 의문을 띄웠다.

"별 내용이 있는 대화도 아니었는데."

"사실, 저희는 어쩌면 더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만."

"···문자 한 번, 1시간도 되지 않는 대담 한 번으로 친해지는 걸 기대했다고요?"

"뭐, 근거는 있었습니다."

"근거요?"

"네."

라일리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어차피 제 상사가 될 사람인데, 말마따마 관계에 도움이 될 요소가 있다면 저도 알아야죠."

"으음, 여기서 다 설명하기엔 좀 어려워서요."

"···?"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레인저 양은, 지금처럼만 하면 되십니다."

"···하아, 당신들은 정말 숨기는 게 많네요."

-절레절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불평을 내뱉었다.

"항상 뭔가 알 수 없이 진행하고, 물어봐도 지금은 대답하기 어렵다고 하고."

"하하, 그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진이 대수롭지 않게 그 불평을 웃어넘겼다.

"하지만 정말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치지직···

-치지직···

그의 안구 카메라 안쪽으로, 그만이 볼 수 있는.

-코드 네임 독재자 : 한우현

-감정 분석 결과 : 깊은 자기 혐오, 후회, 피해의식

-폭정의 예외 대상 : 미국 정부, 전미 플레이어 연합장 라일리 그레인저

-예상 시나리오 : 회귀에 관여한 집단? 이전 시간대에서의 관계? 마음의 빚? 안배?

-예상 과거선 : 배드 엔딩? 멸망? 보스 몬스터들에 의해? 아니면 플레이어들에 의해? 그는 어떤 역할을? 우리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자세한 것은 직접 세부 관찰 요망.

-아직 시나리오 성립에는 근거가 부족.

무수한 추측과 추론들의 활자들, 그리고.

-추신. 그를 관찰하는 동시에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것. 어거스틴 커크패트릭.

-추신.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에 대한 명확한 입장과 가능하다면 그의 속내까지 알아볼 것. 멜린다 프랭클린.

-추신. 국정원 휴민트와 길드 내 전달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전투술만으로는 연구가 어려움. 가능한 한 길드의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서 조사할 것. 특히 [포스 전투술]에 대해서도. 자일라 라모.

-추신.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과와 미래중공업 이그드라실 연구부, 미래대학교 의과대학의 연구에 대해 알아볼 것. 그리고 [물리 왜곡술]에 대해서도. 알론 무하마드.

조사국의 핵심을 맡고 있는 천재들이 당부한 가장 중요한 목표들이 스쳐지나갔기에.

그것들만 생각하고, 정리하기에도 바빴으니까.

"···왜 말을 하다가 멍을 때려요, 킴?"

"아, 아닙니다."

아주 짧은 시간만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그녀 또한 뛰어난 플레이어.

아무래도, 그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신경계 강화]의 기초를 익힌 그녀가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웠던 모양.

"할 일이 많아서요. 아시다시피, 지금도 일하고 있거든요."

"하긴, 매일 보고서만 수백 장을 보고 쓰고 계시니···."

거기에는 납득했다는 듯,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금 제가 할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겠죠."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가 막 졸업한 학생이라 아직 이해에 어려움이 많네요."

"괜찮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따라와 주신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랜 국무회의 끝에 마침내 '길드'와 공식적인 관계를 합의하기로 결정지은 미국 정부.

세계 최강대국에서 동북아시아로 파견된.

"합의한 대로, 대한민국 정부는 패싱Passing할 예정입니다."

"지금 길드와 워낙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죠."

전미 플레이어 연합장에게,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대표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뭔가 다른 수라도 있나 했지만, 그냥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인물에 휘둘리는 상황으로 결론내려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네요. 거기도 대통령이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럴 뻔 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모든 나라의 정치인들이 합리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라일리."

유진이 조롱하는 듯한 기계음을 낮게 냈다.

"다행히 한국의 양당은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지, 대통령과 슬슬 거리를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길드 측에서 대통령을 무력화하리란 것은 확실한 분석이겠죠?"

"제거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아마 곧 그리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길드의 행보에 대한 지지로 받아들여질 것이고요."

"좋습니다. 완벽히 이해하셨군요."

"저도 꽤 똑똑하거든요?

"설마 제 앞에서 머리 자랑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으으."

그 건방진 말투에 라일리가 살짝 그를 째려보았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장을 따고, AI 프롬프팅에 있어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

차마 그 앞에서 지능을 논하자니 스스로 민망해져서.

"하하, 농담입니다. 그레인저 양도 물론 똑똑하시죠. 플레이어가 되기 전의 성적도 꽤나 좋으시던데요?"

"됐어요. 그 쪽 앞에서 컴퓨터공학을 논하고 싶진 않네요."

"그와 별개로, 기초적인 포스 신체 강화와 현실 왜곡 마법을 모두 이해하셨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신 겁니다."

"···그러고 보니, 포스 강화와 왜곡 마법."

유진이 던진 단어에, 라일리가 의심스럽다는 듯 한 마디를 던졌다.

"길드에서 만든 플레이어 전용 스킬이라는 것들과, 이름이 비슷하네요."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네."

그 스킬들의 구체적인 구사법이야 당연히 기밀에 부쳐졌지만.

한우현을 비롯한 1군 작전부 외에도, 권승환이 편성하여 강도 높게 훈련시키는 2군, 3군 작전부들에게도 기초 정도는 가르쳐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스킬의 이름과 대략적인 효과 정도는, 미국 정보부가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솔직히 저는 아직 시간 여행자라는 주장이 아직 믿기지 않지만, 정말이라면··· 관련이 있을까요?"

"흐음, 글쎄요···."

-까라락.

의수로 된 손가락들을 마주 끼워 잡으며, 유진 킴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저희가 길드와 함께하게 된다면, 서로 교류하게 될 테니··· 가 봐야 알게 되겠죠."

"하긴, 마법과 무술은 초능력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발상이니··· 충분히 겹칠 만 하죠."

"후후. 아무튼. 저희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것입니다."

-서그적.

미국 행정부의 인장이 찍힌 서류 다발이, 다시금 펼쳐졌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플레이어에 관련된 모든 일들의 권한이."

-서그적.

"길드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협조하겠다는 의사의 전달이지요."

"그리고 그가 요구한 그 세부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저희의 편입이고요."

"조사국은 편입까지는 아닙니다만, 긴밀한 연계와 협업을 요구한다고 했으니 거의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서그적.

다시금 페이지를 넘긴 유진이, 몇몇 페이지를 짚었다.

"솔직히 대외적으로 보면 미국이 일개 조직에게 숙인다는, 참 믿을 수 없는 모습이지만··· 다행히 그는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확실히 그랬죠. 저도 처음에는 듣고 놀랐었지만, 다시 조건들을 알고 나서는 다른 쪽으로 이상하다고 느꼈으니까요."

"다른 어느 나라도 플레이어 조직에 대해, 이 정도의 자율권과 정부의 통제권을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대외적인 비밀을 조건으로 한, 믿을 수 없을 만치 자비로운 조건들.

플레이어 연구, 협업, 통제, 조직 활성화에 있어.

거의 모든 권한을 미국 정부가 북미와 남미에 대해서는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도록 승인하지만.

보스 몬스터와 관련된 플레이어의 차출에 대해서만, 길드가 우선권을 발휘하겠다는 조건.

사실상 길드 미국 지부의 운영과 구조 성립조차도, 미 정부에 대부분을 위임하겠다는 양보.

물론 대외적으로는 미국 지부 또한 각국의 지부와 비슷하게 발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야겠지만.

"뭐, 좋은 것이지요. 미국의 외교관들은 유능하니까, 그를 잘 설득할 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일지도요."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대가 없는 양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드의 전력은 이미 전 세계를 으스러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 국방부의 분석에 따르면, 이미 미국의 전력을 분쇄하는 정도를 넘어 순조롭게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을 수준.

그러니까, 진짜 목적이 있을 것이다.

유진 킴이 생각하기에, 한우현이 미국만을 예외로 관대하게 대하는 이유는.

미국 플레이어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했을 때에만 얻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를 노리기 위함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키이잉···

-치이잉···

그의 포스 반응로와 포스 인공 두뇌 안에, 무수한 가능성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무튼 당황스러운 순간들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곧이어 눈앞의 존재들에 대한 정보를, 초월적인 인지로 분석하는 스킬을 발동했다.

"제가 곁에서 잘 도와 드릴 테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살짝 웃은 그는 잠시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가 직접, 한국으로 와야만 했던 이유.

회귀자 시나리오에 대해 검증하기 위해 이상현상 조사국 전원이 한 달 내내 달라붙어 어설프게 완성해 낸.

가장 유효한 수단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웅···!

-[날카로운 눈]

대상의 상태창을 볼 수 있는, 플레이어 200 레벨 공용 스킬.

-우우웅···!

그것이 한층 더, 깊어졌다.

-[분석하는 눈]

시각 구조와 뇌신경이 더욱 촘촘히 이어지며 세상에 새겨진 [정보라는 개념] 자체를 인식한다.

-[꿰뚫어보는 눈]

더 나아간다.

-[모든 것을 보는 눈]

더 자세히 본다.

더욱, 더욱.

-[절대적인 눈]

게임이라는 불합리한 체계의 탈을 뒤집어 쓴, 포스라는 힘의 근간까지.

-[전지적 운영자 시점]

그리하여 마침내.

-[스킬 종류 : 오리지날Original]

-[스킬 효과 : 게임 로그를 분석합니다.]

-[스킬 피로도 : 포스를 초당 53,284.382F만큼 소모합니다. 동시에 사용자의 송과체와 후두엽, 전두엽의 해석 인지 영역을 소모하며, 사용자의 제어 능력에 따라라···]

-[어떤 정보를 더 열람하시겠습니까?]

한우현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회귀 전의 미국이, 무려 5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끔찍한 종말의 한 가운데서 버티고.

무수한 오리지날 스킬들을 개발할 수 있었던 근간이자.

유진 킴 외의 그 어떤 이도 이해할 수 없을 만치 복잡하게 만들어진, 최초의 오리지날 스킬이.

-팍, 파악···

순간적으로 유진 킴의 카메라에서 번뜩였다.

-파아악!

그러나, 삽시간에 그 빛이 터져나가듯이 순간적으로 렌즈가 꺼졌고.

"이런."

유진 킴의 시야가 잠깐 암흑으로 물들었다.

···조금씩 희미하게 시각이 회복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오래 쓰기에는 너무 어려운 기술인 모양.

하지만 괜찮았다.

캐릭터 정보만, '제대로' 본다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 생각한 유진 킴이 고개를 다시 살짝 돌렸다.

"···?"

코드 네임 독재자, 그가 마주할 때마다 극심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는 여자를 향해.

"···왜 그리 보세요?"

라일리 그레인저의 아바타가 정말 예쁘기는 하다만··· 그것만이 이유일 리는 없겠지.

또 다른 세계선에서의 그와 그녀는.

대체,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91화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 (2)

잠실, 길드 사옥 앞의 공터.

-펑!

-찰칵, 찰칵!

-펑! 찰칵!

그 넓은, 이제는 아예 기자 회견장으로 마련된 야외에서.

"···길드 미국 지부의 설립은 비단 미국 뿐 아니라, 세계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중요한 조치입니다. 이는 비로소 모든 서버의 플레이어들이 연합했음을 뜻하며···"

-퍼퍼펑!

-찰칵! 찰칵!

"···저희 길드가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추구하는 동시에,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그 어떤 것보다 정의를 위해···"

잘생긴 금발청안의 성기사가, 발표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그 시작을 증언하는 귀빈들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한우현의 고갯짓에 따라.

-벌떡.

사제복을 입은 은발 적안의 여성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총길드장, 한우현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꽈악.

그가 어색하게, 긴장한 듯 뻣뻣하게 악수했다.

-꽈아악.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오래.

-···길드장님?

-아.

라일리가 [전음]으로 속삭이듯이 의문을 표하고 나서야, 한우현은 그 손을 놓았다.

"···?"

약간 속으로 의문을 담으며 그녀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화면과 자료로 보았을 때나, 지난 번 미군 기지에서 잠깐 만났을 때나.

한우현은 그 때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를 제외하면, 철인에 가까운 면모만을 보였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리 긴장한 것 같지?

하지만 라일리가 그 의문에 대해 보다 자세히 생각할 틈새도 없이.

"네, 안녕하십니까? 모든 영역 이상현상 이상예측부장, 유진 킴입니다."

"마찬가지로, 잘 부탁하지."

곧이어 사이버펑크적인 차폐복을 입은 사이보그가, 악수를 마쳤다.

"이로써 모든 미국의 플레이어 조직 또한 공식적으로 세계 길드의 산하에 속하게 되었음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척.

-척.

-척.

그 뒤에, 흑인 여성, 흑인 남성, 백인 남성이 순서대로 일어났다.

"다음으로, 북미에서 빌런들에 맞서 인상적인 활약과 리더십을 발휘한 대표 플레이어들."

한우현이 좀 더 풀어진 얼굴로, 셋을 바라보았다.

"각 지역별 플레이어의 대표의 역할을 인정해, 공식적인 직위를 수여합니다."

그들이 어색한 한국어를 주워섬기며.

"밀라 바지즈를 뉴욕 하부장으로 임명한다. 잘 하도록."

"아,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로버트 아론을 샌프란시스코 하부장으로 임명한다. 잘 하도록."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한우현이 나눠주는 임명장을 받았다.

"마틴 마셜을 시카고 하부장으로 임명한다. 잘 하도록."

"안녕,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들이 모두 앉고, 라일리와 유진마저 앉고 나서야 한우현은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제 질답을 시작할 예정이다. 앞서 말했듯이, 너희들은 편한 대로 준비한, 혹은 원하는 질문에만 답하도록.

"그럼, 잠깐 질답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거기 왼쪽에 계신 분부터 받지요."

"고려일보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와 달리 미국에 있어서는 굉장히 설립 절차가 늦어졌는데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네, 자세한 이유까지 모두 밝히기에는 미 정부와 길드의 협약이 있기에 어렵습니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만 간략히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일리가 느꼈던 순간적인 긴장의 기색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듯.

"앞서 말씀드렸듯, 길드의 목표는 질서와 안정입니다. 미국은 다른 지역들과 달리, 정부가 저희 플레이어들과 원활히 협조를 이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요. 따라서 저희로서는 지금까지와 같이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성은···."

"···네, 답변 감사합니다!"

"CNN입니다! 미국 플레이어들에게도 던전에 대한 입장 및 전매 조치가 그대로 유지될 것인지···"

"대부분의 조치는 그대로 유지됩니다만, 미국 뉴욕 던전의 경우 지리적 거리가 있는 만큼 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지부장에게 보다 자율권이 주어질 예정으로···"

순식간에 능숙하게 기자들에게 응대하고, 답하는 것을 보며.

"으음."

역시, 방금 그 느낌은 단순한 착각이었던 것 같다고.

라일리 그레인저는 생각했다.

"(폭스 뉴스입니다. 질답 가능하겠습니까?)"

"음? 아, 네···."

그 생각에 빠져있었기에, 순간 별 생각 없이 한 대답.

"(미 국방부 내부의 소식에 의하면 전미 플레이어 연합과, 미국 내 길드 조직들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했는데요. 혹시 어떻게 두 조직이 연합되었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아?"

한국 길드원들이 몰래 묻겠다는 듯 영어로 속삭이듯이 들어온 질문. 거기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충이라도 괜찮습니다! 혹자는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이미 한국에서.)"

"(아, 그, 그게.)"

전미 플레이어 연합은 존재 자체가 기밀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전까지, 연합 소속 플레이어들과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이 미국 내에서 잦았던 만큼.

통합된 현재, 굳이 그 조직의 과거 갈등과 나아가 미 국방부가 깊이 연계된 이질감을 부각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스윽.

-스윽.

순간 당황한 그녀는 도와줄 부관인 유진 킴을 찾았지만, 그도 어느 새 무수한 다른 각국의 언론지들에 둘러싸인 상태.

"(저희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관이 아닌, 어디까지나 기존에도 해당 현상에 대해 대비하던 기관입니다. 물론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생소하겠지만···)"

"으, 으음."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단하게라도 입장을.)

미국에 있는 내내, 거의 정부 요인들에게 둘러싸여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전미 플레이어 연합은, 지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미국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해당 답변을 미 국방부 산하 플레이어들 전체의 의사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당연히 라일리 그레인저는 기자 응대 경험이, 거의 아니 전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네?)"

"(내부 조사에 의하면 길드로의 편입에 불만을 가진 미국 내 플레이어들이 상당하다는 여론이 있었다는데요.)"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예, 정확히는···)"

다행히 한우현은 티 나지 않게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만."

"길드장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몇 가지."

"그 부분에 대한 질답은 다음에 마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곤란한 듯 어물거리던 그녀와 기자의 사이에 재빨리 끼어들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곤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아도 된다."

"예···."

"편히 있도록."

묘한 표정을 지어보인 한우현이 다시금 등을 돌렸다.

"센트럴 타임즈입니다! 현재 길드는 모든 아이템과 골드를 전매하고 있지만, 그와 대비되게도 골드와 아이템의 소비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요. 이의 전망에 대해서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아이템은 대부분이 포스를 어떤 형태로든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공격적인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위험성이 있기에 선행 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골드는···"

"겨레일보입니다. 최근 길드와 정계의 관계가 지나치게 경직되었다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의 제보가 지속해서 나오고 있는데요. 혹시 플레이어들의 대표로서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저희는 언제나 정부와 기관, 나아가 국민들 전체에 대한 신뢰와 협조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다시금 기자들에게 눈을 돌리며 바쁘게 대담을 이어나가는 한우현.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의식은 단 한순간도,

라일리 그레인저를 놓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

만약, 만에 하나, 혹시라도.

그가 더 이상 공격대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그녀가, 그 자리를 맡아야 했으니까.

···사적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 * * *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기자회견이 이어진 뒤.

"좋아. 자네 생각보다 훨씬 유능한데?"

"그, 제가 이름이 좀 그래서 그렇지 정말로 회충은 아닙니다···."

"찔리기는."

최상층 집무실에서 피식 웃음을 흘린 한우현은 다시금 모니터에 올라온 한 명의 사진을 손 끝으로 긁었다.

"그나저나, 뭐 이딴 새끼가 국가 수장이랍시고 지랄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군."

"···크흠."

"대통령이 상황 파악을 못 한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정말로 그대로 하실 예정이실까요?"

"그래. 국정원에 친한 놈들이 있으면, 슬슬 야당에 줄을 대라고 해라."

"별로 친한 동료나 상사는 없습니다만··· 말씀이라도 감사합니다."

"좋아, 그럼··· 이런."

-끼이익

-덜컥

-덜컥

-덜컥

간단히 최상층 아래에서, 한국 지부장들인 차정훈과 김재승에게 업무 안내를 다 대충 인계받은 듯.

막 들어온 미국 하부장들과 눈을 마주쳐 주며.

"자네는 이만 가보도록."

"네, 수고하십시오."

허무성을 손짓 하나로 내보낸 한우현은 미소를 지었다.

"앉지. 할 얘기가 많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길드장."

라일리까지, 미국 대표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한우현은 손을 그러모았다.

-[신성한 땅]

-쿠웅!

곧이어 [영역 선포기]를 쓰며, 혹여나 대화가 새나갈 우려를 한 번 더 차단했다.

"(내가 영어는 좀 할 줄 아니, 이제부터는 영어로 진행하지. 다들 그게 더 편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바꾸었다.

"기밀을 요하기에 통역을 피하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한국어는 저도 좀 할 줄 압니다. 제가 통역을 맡을 수도 있는데요."

"(한인 3세 출신인 건 알지만, 능숙하진 않지 않나? 아무래도 통역으로는 어감까지 전하기 힘드니,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지.)"

그 유려한 억양에 유진 킴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를 굉장히 잘 하시는군요?)"

"(글로벌 시대에 기본이지.)"

"(···역시.)"

뒤이어 속으로는 여러 가지 추측을 떠올렸다가 가라앉혔다.

저 뉘앙스.

중앙 정보국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단어 선택 버릇이 비슷하다는 의심.

우연일까? 저 뉴욕식 사투리가 그리 흔치 않은 건 아니니까.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

"(그럼,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금 역할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레인저, 아론, 마셜, 바지즈. 넷은 플레이어 대표 역할이지만, 그레인저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아직 어려움이 많겠지.)

"(···아무래도, 플레이어들이 워낙 미치광이들이 많아야 말입니다.)"

그 말에 흑백이 뒤섞인 듯한 광대 복장의 남자. 마틴 마셜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퀄이면 그래도 플레이어 세력 중에서는 가장 얌전한 편이지. 리딧이나 원챈에서는 이미 통제에서 벗어난 놈들이 꽤 되지 않나?)"

"(···리딧이야 제가 최근에 정리해 보내드렸지만, 원챈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나요?)"

"(그,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애초에 그 쪽은 개인주의자가 워낙 많아서 저도 곤란해서.)

보라색 아프로 머리를 한 밀라 바지즈가 놀랐다는 듯 약간 눈을 크게 떴고.

남부 연합기와 기괴한 큐아넌 장식물들을 주렁주렁 매단 로버트 애런이 헛기침을 했다.

"(나도 인터넷 많이 하거든. 당연히 리딧도, 퀄도, 원챈도 이따금씩 볼 정도로.)"

이건 거짓말이었다.

한우현이 회귀 전, 인터넷을 많이 했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영미권 인터넷 커뮤니티까지 뒤질 정도로 시간이 많지는 않았으며, 애초에 그 정도로 영어 실력이 좋지도 않았다.

지금의 유창한 영어 실력과, 약간의 프랑스어 구사력은 모두 미국에서 꾸준한 훈련을 받으며 얻게 된 것.

"(뭐, 나만 해도 구글에만 검색해도 나올 정도의 유명인일 텐데. 내 과거에 대해서는 알아보고 오지 않았나 보군?)"

그 말에 셋 모두 순간적으로 당황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건 날조 아니었습니까?)"

"(솔직히 너무 믿기지 않아서 그냥 쌩 거짓 정보라고 생각했는데요.)"

"(누구나 부끄러운 과거는 있는 법이지.)"

"(···당신이 우리와 비슷한 인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습니다만···.)"

"(왜 아니겠나? 만렙 게임 폐인인데.)"

-호륵.

웃음을 흘리며 철관음차를 마신 한우현은 다시금 성공적으로 흘러온 계획을 점검했다.

"(차들 한 잔 하고, 본격적으로 업무 얘기를 시작하자고. 과자도 곁들이고 말이야.)"

"(예. 감사합니다···.)"

"(예.)"

"(이런, 맛만 보겠습니다. 몸이 이런지라.)"

라일리 그레인저. 한우현을 제한다면,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

유진 킴. 이 세상의 본질을 무수한 가능성으로 나누어 분석하는 천재 중의 천재이자, 사실상 미국 정부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있는 전략가.

로버트 아론, 밀라 바지즈, 마틴 마셜. 과거 미국 내전의 축을 이뤘던 반 정부 플레이어 집단들의 선봉장들까지.

다행히 미국의 주요 플레이어들 대부분을, 그 회귀 전 행적을 바탕으로 해 은밀히 구상하였던 그림대로.

거의 완벽히 모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틈새를 메꿔 줄 때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한우현이 진지한 눈빛으로 세 하부장들과 눈을 마주쳤다.

"(현재 미국 정부와, 너희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미국 빌런 플레이어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지?)"

92화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 (3)

"···숨길 일이 전혀 아니니,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파충류 코스프레를 한 듯한 남자가 먼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원챈에 대해 잘 아시는 듯 하니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지요. 보시는 대로, 전 음모론을 꽤나 좋아합니다. 물론 전부 믿는 건 아니고, 반쯤은 컨셉이기도 하지만···."

로버트 아론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문제는, 진심으로 도저히 정부 말은 못 듣겠다고 날뛰는 놈들이 너무 많아요."

"그건 우리 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일주일 전까지는 한국 본부와 협상 중이라는 식으로 어찌어찌 제어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둘도 어설프게 정리한 듯 한 서류를 꺼냈으며.

"이건 미 국방부와 국토안보부에서 정리한 소요 사태와, 테러들의 지역 및 시간 순 통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유진 킴이 태블릿 PC를 꺼내들었다.

"흐음···."

-우웅.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든 채, 한우현은 빠르게 [신경 가속]으로 사태들을 정리했다.

당연히 한우현이 가장 오래 과거에 활동했던 곳은 미국이었으므로.

세계적으로 보면 그 위험성이 낮더라도, 미국에서는 그 존재감이 있었던 주요 빌런 플레이어들도.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자, 비교해보자.

캘리보니아, 플로리다, 뉴욕, 펜실베니아, 텍사스···

"휴."

일리노이, 오하이오, 조지아, 하와이, 노스캐롤라이나, 뉴저지, 미시간···

"엄살이 심하군, 유진 킴?"

"···예?"

순식간에 미국 50개 주들의 테러와, 그를 일으킨 조직, 개개인들을 파악한 한우현은.

"솔직히 좀 걱정했었는데, 이 정도면 한국 집행부가 파견될 필요는 없겠는걸?"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도.

"로버트 아론, 밀라 바지즈, 마틴 마셜. 자네들도 칭찬해 줘야겠어."

"예?"

"그, 솔직히 잘 하지는 못 한 것 같은데요."

"···감사히 듣긴 하겠습니다만."

일단 그가 이름을 알 정도의 소요를 일으켰던 빌런들은, 대부분이 '아직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었으니까.

즉, 안정된 상황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그가 보기에는, 나쁘지는 않은 상황.

"중앙정보국과 국토안보부도 고생이 많았겠어."

"···마치 들여다보고 하는 말씀 같군요."

이런, 들켰나?

아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미 정부라면 이미 첩보부의 도적계 플레이어들 다수가 미국 정부의 현황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을 테니까.

조금은 티를 내도 되겠지.

"···뭐, 앞으로 계속 같이 갈 관계인 만큼 별 상관은 없겠지만요."

묘한 미소를 띄운 유진 킴이 다시금 모니터에 올라온 테러리스트들과 그 관련자들의 얼굴을 짚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듯 하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말씀하신 그대로,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길드 미국 지부만으로도 해결이 가능한 수준으로 보이는군."

"물론 라일리가 좀 바빠지겠지만요."

"네, 사실 직전까지도 주 세 개를 돌아다니면서 진압했거든요."

라일리와 유진 킴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다른 지부장들에게도 칭찬을 해 주긴 했지만, 정말로 로버트와 밀라, 마틴의 역량으로 제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미국 정부의 필사적인 물밑 작업이 있었겠지.

"잠깐 각 지부별, 고 레벨 플레이어들의 명단도 보자고."

-스으윽.

-스으윽.

순식간에 태블릿 PC를 조작한 한우현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마틴 마셜."

"예."

"빈센트 블랙우드, 프랭클린 토런스, 다리우스 콜, 나타니엘 자하스터, 맥스웰 홀로웨이. 이 놈들에게 주변부 안정화를 맡겨라."

"네? 길드장, 실례지만."

"안다. 네 말을 잘 들을 놈들이 아니겠지. 하지만 자하스터와 홀로웨이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 사이에 평판이 좋다."

"···?!"

"블랙우드, 토런스, 콜은 현재의 질서에 불만은 많지만 그래도 근본부터 못 써먹을 놈들은 아니다. 사고를 좀 쳤더라도, 잘 조건을 내세우면 충분히 설득이 가능할 거다."

미국 중부 지역의 주요 빌런과 영웅들.

"그들을 네 밑으로 복종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자료와 자금은 이따가 서면으로 자세히 보내주지."

"그, 셋은 압니다만 둘은 잘 모르는 친구입니다. 찾아봐야겠지만 정말 그들만으로 될까요?"

"걱정 마라. 중부 지역에는 그들이 아는, 그들을 아는 플레이어들이 많을 테니까. 충분히 영향력이 있을 거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맥한테 더 듣도록."

맥을 경악한 표정의 마틴 마셜에게 붙여 준 한우현은 눈길을 보라색 아프로 머리의 흑인 여성에게 돌렸다.

"밀라 바지즈."

"···예, 마스터."

완전히 질서가 붕괴된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미국 전역.

그 해결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사리 짚어낸 것을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과 입을 벙긋거리는 밀라를 보며.

"너도 아는 놈들을 추천해 주지. 엘리야 킹슬리, 데이브 하그로브, 마르곳 싱클레어, 루시우스 밴스, 베로니카 브레이브즈."

-촤라락!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사진들을 [벡터 재조정]으로 허공에 띄웠다.

"이것들은 마틴 마셜에게 말했던 놈들보다 더 중요하다. 미국 동부는 워싱턴과 뉴욕이 있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니까."

"···데이브 하그로브는 어떻게? 도저히 소재지를 찾지 못해서, 접촉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경단의 우두머리였는데."

"길드는 네 생각보다 훨씬 유능하다."

"그, 그리고 베로니카 브레이브즈는 저희도 몰랐던 인물인데. 특별한 활약이 있었나요?"

"없었다. 하지만, 잠재력이 뛰어난 인물이지."

유진과 밀라의 의문에 짤막하게 답을 해 주고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들은 각각 뉴욕, 펜실베니아, 뉴저지, 메사추세츠, 캐나다 국경지대 지역을 맡겨라. 각자 고향에 애착심이 있으며, 실제로 인근 플레이어들과 관계도 깊으니까."

"잠시만요. 마르곳과 엘리야를 제외한 셋은 이름 빼고는 전혀 모르는 인물인데 어떻게."

"맥, 자세한 설득 방법과 영입안, 그리고 지원 조건도 알려줘라."

"잠시 저를 보시죠. 자료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로버트 아론."

"네, 네!"

멍한 수준을 넘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그 동공이 흔들리는 파충류 인간을 바라보았다.

"미국 서부도 중요하지. 이들을 기억해라. 로건 하츠론, 시에라 카스틸로, 칼 매튜, 다미안 리즈, 리븐 맥코이."

회귀 전, 아론과 함께 미국 서부를 뒤흔들었던 지배자들의 이름을 내뱉는다.

"둘은 아직 네 밑에 있는 걸로 안다. 반항기가 있지 않나?"

"그, 어떻게 아셨는지? 정부와 붙어먹다니 길드에 실망이라는 식으로···."

"다른 세 놈은 탈퇴했겠지."

"···그것도 맞습니다. 정확히는 탈퇴라기보다는 연락이 끊긴 거긴 하지만."

"동부 지역의 하부 관리자로는 이것들을 임명해라."

"제, 제가 어떤 식으로 설득해야할까요? 지금 제 밑의 조직은 반쯤 와해되었는데."

"그래, 그 놈들도 리더쉽은 있지만 사회에 불만이 많은 놈들이지."

고개를 끄덕인 한우현인 손가락을 튕겼다.

"구태여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모인 김에, 한 번에 해결하자고. 홍세희!"

-스르륵!

"으, 으응···."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정보부장을 호출했다.

"오늘 내로 열다섯 명 전부, 만나고 올 수 있겠나?"

"···오늘, 이라면 여섯 시가안··· 그건 좀, 힘들고오, 12시간 내로는···."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라."

"이, 이씨이··· 진짜···"

"정예들을 데리고 가도록. 피해 없이 제압하려면 인력들이 필요할 테니까."

-먼저 미국에 가 있는 놈들을 활용해라. 한국에 있는 놈들은 야당과 여당 쪽 놈들을 다루는 일만 해도 바쁘니.

-아, 알았어어···

-도착할 때쯤 구체적인 접선 방법도 알려주지.

구태여 미국 전역을 어떤 식으로 감시하는지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전음]으로 전달했다.

-스르륵···

불평을 내뱉은 그녀가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췄다.

"여, 열 두 시간이요? 미국으로 가는 데에만 플레이어의 신체능력을 최대로 발휘해도 3시간은 걸릴 텐데?"

"3시간은 무슨. 30분이면 가지."

[암살자]의 고유 기술인 [그림자 타기]는 게임 안에서는 근처의 지역으로 짧은 무적시간과 함께 순간이동할 뿐인 기술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그 원리를 약간 응용한다면, 무적 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그림자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다.

[암살자] 외에도 대부분의 도적계 플레이어들은 그런 식으로 지형지물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기술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그 누구보다도, 전 세계의 정보 자원을 관리하는 첩보원에게 적합한 인재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정신병자들이라는 뜻도 되지만.

"자, 다들 대충 알아들었으면 세부 구조도도 얘기해주도록 하지. 유진 킴?"

"예, 이 부분은 같이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한미군 기지에서 짧게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미 국방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한 계획들.

-팟.

-팟.

-팟.

-팟.

미국의 50개 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미국 지부는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 동부, 중부, 서부의 하부장으로 너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근 주 2~3개를 묶어서 주부장을 임명할 계획이다."

-스으윽!

빠르게 한우현의 손가락이 주요 주들을 가리키며 긁었다.

"물론 이는 임시 체계이고, 너희가 보기에 싹수가 있는 놈이 더 보인다면 추가로 결재를 올리도록. 그러면 미국 정부와 협의해서 인근을 책임질 놈을 재가하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빈센트 블랙우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딸린 가족들이 많다. 2년 전 실직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엘리야 킹슬리, 관심을 구걸하는 것에 병적으로 미쳐있으나 사회적인 직위만 보장해준다면 오히려 협조적이다. 어머니와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으니 아버지를 통해···."

"로건 하츠론, 선천적인 간헐성 폭발 장애를 앓고 있으므로···."

모두들, 맥이 전달해준 자료들을 읽는 것만 해도 바빴으므로.

"···생각보다, 제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한우현 님."

"미 국방부와 협의할 때부터, 미리 준비해 둔 사안이었다. 중앙 정보국만 해도 이 정도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나?"

"글쎄요, 신상 정보야 물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만···."

유진 킴이 어딘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그와 카메라의 동공을 마주쳤다.

"이렇게 구체적인 설득 방법과, 인생사와, 그들의 가치관까지 모두 파악하고 계시다니. 마치···."

"할 말이 많으니, 쓸데 없는 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한우현은 그 시선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그 말이 맞지요."

그 말에 수긍한 듯, 유진 킴이 카메라를 점멸시키듯이 번쩍이다가 꺼뜨리며 눈을 감았다.

-웅-웅웅-웅웅웅···

극도로 복잡하고도 섬세한 포스 회로의 기동음을 내며.

-웅-웅웅-웅웅웅···

상당히 기묘한 행동이었지만 그 정체모를 스킬 운용을 느끼면서도 한우현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미래에서 유진 킴이 저 독특한 고유 포스 회로 활성화를 할 때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전략을 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졌나 보다 할 뿐.

어차피 그의 예상대로라면 미국도 곧 그의 대전략과 목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테니.

전 세계에서 가장 쓸모있을 국가, 그 대표자를 구태여 방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짝짝!

거기까지 생각한 한우현은 박수를 쳐 주의를 환기했다.

"암기는 거기까지. 어차피 모두 자세히 정리해 나눠줄 예정이니, 미리 너무 열심히 보지 마라."

-팟!

-팟!

-팟!

맥이 띄워 준, 보스를 공략할 작전부를 제외한다면 유사하게 구성된 구조도를 보여주었다.

"체계에 대해서도 간략히만 짚자고. 대체적으로는 중국, 동남아시아, 한국, 일본과 비슷하게 돌아갈 거다."

"이건, 당신이 직접 짠 건가요?"

"그래. 첫 날 구상한 거지."

"첫 날, 급조해서요··· 그런데도, 국방부에서 짠 전미 플레이어 연합의 초기 구상안과 상당 부분 겹치네요."

"···그래, 겹치지.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하니까."

"흐음···."

라일리 그레인저의 묘한 의문을 담은 목소리에, 약간 늦게 대답을 해 버렸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플레이어들을 모으면 좋을까요?

-들어보세요, 우현···.

-쓸데 없는 공상이 아니니까요···.

그 순진무구한 목소리의 위에, 또 다른 나긋한 목소리가 겹쳐 들렸기에.

-아, 우현···.

-부탁, 해요···.

그리고 목소리 뿐 아니라, 동시에 스쳐지나가는 환영도.

···아니야. 이건 현재가 아니야.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어. 모두가 살아 있어.

절망하지 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다.

나만, 나만 잘 한다면.

오지 않을 미래다.

-꽈악!

주먹을 다시 쥐며, 억지로 그 감정의 동요가 주위에 포스 영향력으로까지 퍼지는 것을 막은 채.

"마지막으로, 정보부를 통해 전해질 내용이긴 하지만... 너희가 만나자마자도, 그들 모두에게 내가 하나하나 짚어 지목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켜라."

해야 할 말을 다시금 강조했다.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미국과 그것들 모두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도."

-꿀꺽.

-꿀꺽.

-꿀꺽.

한우현과 눈을 마주친, 미국 세 지역의 각 하부장이.

말 없이, 침을 삼켰다.

"다음으로 라일리 그레인저. 미국 지부장으로서, 네가 할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달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준비되었습니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93화 망겜의 성기사 & 사제 (1)

"지금까지 들었다면 알겠지만, 사실상 사회와 행정, 질서와 관련된 업무는 대부분 하부장들에게 집중시켰다."

"네, 그건 저도 확인했습니다."

"그건 '가진 재능'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미국 지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재능이요?"

"그래. 세계에 단 둘 뿐인 만렙 플레이어를, 관리자 일이나 시키는 건 너무 낭비니까."

-덜컥

거기까지 말한 한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월급 스킬, 한 번 가볍게 써 봐라."

"음, 당신한테 쓰면 되겠습니까?"

"그래."

"좋습니다, [절대 선의]!"

-파아앗!

그녀의 셉터에서 하얀 빛 덩어리가 따스하게 맺히며, 한우현의 전신과 공명했다.

[치유], [정화], [축복], [부활] 등 모든 종류의 사제 스킬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모든 [이상 상태]에 놓인 플레이어들을 [정상 상태]를 넘어 [최상 상태]로 끌어 올리는 궁극의 서포팅 스킬.

"[절대 방어]."

-스아악!

그에 대응하듯, 한우현 또한 맞서 성기사의 초월급 스킬을 사용해 주었다.

"어때?"

"···신기합니다."

"조금 보이지?"

"네, 당신도?"

"그렇긴 하지만, 너만큼은 아냐."

두 초월급 스킬들이 서로 어우러진 가운데.

-파라랑!

-파라랑!

포스 이해에 있어 세계 최고의 재능을 지닌 두 플레이어가, 그 눈을 빛내며 마주쳤다.

"이 구조와 체계는, 오직 우리만이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어."

"당신이 만들고 사용한다는 그 기묘한 기술들도 말입니까?"

"···그래, 여기서 파생된 거지."

"흐음··· 일단 그렇게 이해하겠습니다."

묘한 미소를 지은 라일리를 내려다보며 한우현은 [초월급 스킬]의 원리를 떠올렸다.

레벨 300, 즉 만렙에 이른 플레이어들은 각 직업군을 상징하는 기본 스킬의 강화 형태를 새로이 습득한다.

물론 그 자체의 효과도 절륜하지만.

진정 만렙 플레이어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 뿐에 지나지 않는다.

[초월급 스킬]이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존 스킬 체계를 해체하는 무한한 가능성.

그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른 플레이어 스킬들마저도 자유로이 해체하여 이해하도록 만들고.

마침내, 새로운 스킬 체계마저 창조하는 밑바탕이 되는 것.

"앞으로 언제나, 먹고, 자고, 숨 쉬는 모든 순간마저도 그 스킬을 운용하도록 해."

"···언제나?"

"그 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운용하면서 그 원리를 느껴보고."

"꽤나 어려운 주문입니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될 거야."

몇몇 재능 있는 플레이어들이, 단순히 어설프게 현실 왜곡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

구체적으로 그 방법론과 체계론을 무수한 연구원들과 함께 정리해.

마침내,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의 모든 형을 실제로 구현했던 첫 번째 플레이어.

"나도 그걸 통해 이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니까."

"좋습니다. 안 그래도 어차피 너무 바빠서, 스킬들은 거의 언제나 쓰고 있었으니까요."

"하긴 미군 기지에서 봤던 그 모습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 연습은 있었겠지. 역시 라··· 아니, 그레인저 넌 대단해."

"···칭찬은 기쁘지만, 당신한테 듣자니 좀 민망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라일리 그레인저에게 나긋나긋한 말투로 설명을 계속했다.

"그 날 이후 미 국방부와 많은 교류를 하면서, 결론을 얻었지."

정확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던 그가 강력히 권고한 것이었지만.

"나 다음으로 스킬들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은 만렙 플레이어 뿐이라고."

"그 정도입니까?"

"플레이어 전투 교리의 핵심.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은 너를 통해서 미국의 조사국 연구원들에게 전해질 예정이야."

그녀의 표정이 다소 부담스럽다는 듯, 약간 찡그려졌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이해를 갖출 수 있는 플레이어는 세상에 단 둘 뿐이니까."

"제가 재능이 있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그 정교한 수많은 스킬들을 배우기에는."

"길드원 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도, 우리에 비해서는 부족해."

-파으윽!

-파아앗!

-파라락!

한우현의 주위로, 무수한 현실 왜곡을 만들어내는 흐릿한 일렁임이 비추어졌다.

"어때. 뭐가 느껴지지?"

"···신경, 피, 중력, 소리, 빛? 참 다양하네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한 눈에 그 요소들을 파악할 수 없어."

무수한 포스에 깃든 속성들을 한 번에 느낀 라일리를 보며, 한우현은 속으로 깊은 경이를 느꼈다.

"그리고 이걸 봐."

-츠아아!

-스라라랑!

한우현의 손짓을 따라, 인간의 인지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형체Shapes들이 현실의 물리 법칙을 뒤흔들며 진동했다.

"포스가, 3차원··· 아니, 4차원··· 5차원?"

"정다포체Regular Polychoron.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고차원 다양체."

가장 먼저 개발된 물리 왜곡술.

위상 수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현실 공간을 다루는 기술인 [위상가변칙]의 기초, 4차원 도형체의 인식.

"나 외의 어떤 플레이어도, 아직 이 도형을 만들기는커녕 이해하지 못했어."

"···그 정도는 아니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거야."

경탄스럽다는 듯 그 도형체를 바라보며, 한우현은 덧붙였다.

"미국은 중요해. 가장 플레이어들이 많은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스킬들의 개발에 있어서 우리의 한계는 뚜렷하니까."

"당신의 주장으로는, 당신이 이 모든 것들을 만들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우리가 필요합니까?"

"나는 틀만 잡았을 뿐이지. 한국의 가장 뛰어난 연구원들이라고 해도 근본에 대해 탐구할 수는 없어."

"근본이라, 미국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크신 것 같습니다."

"그래. 스킬들의 개발과 포스의 근본을 탐구하는 데에는 미국을 따라올 집단이 없으니까."

그가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라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길드는 세상을 관리하고, 보스에 맞서 싸워야 해. 하지만 그것도 조금씩 한계에 부딪히겠지."

한우현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결국 플레이어들이 새로 생겨나진 않고, 레벨도 스킬 숙련도도 이제는 더 오르지 않는데."

그 눈에 절박함이 깃들었다.

"보스들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계속해서 부활하니까."

"저희를 그냥 부하가 아니라, 정말로 동료로, 필요하다고···."

"라일리 그레인저. 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비현실 연구 집단인, 모든 영역 이상현상 연구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 주어야 해."

정말로 그러했다.

"연구시설을 옮길 수도, 길드 본부를 옮길 수도 없으니. 그들이 한국에 오거나, 내가 미국에 가는 것에는 한계가 크니까."

"그건 이미 약속한 조약이니, 마땅히 그러겠습니다."

"나아가 세계 제일의 서포터로서, 공격대에도 참여해주어야 하고."

"···으음, 처음에는 둘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라일리 그레인저의 얼굴에 약간의 난처함이 올라왔다.

"이렇게까지 강조를 하신다니, 생각보다 훨씬 둘 모두 바쁘게,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아, 정말로 바쁠 거야."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겠습니다."

그 눈에 의지가 다시금 깃들었다.

"세계 제일의 권력자가 그만큼 절박하게 말하는데,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역시, 넌 천재야."

"당신이야말로. 정말로 큰 의무감을 가지고 있군요."

서로가 [정신 감응]을 통해 감정을 느끼며.

-탁.

-탁.

둘은 손을 마주잡았다.

"···이상합니다."

그리고선, 라일리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겨우 두 번째 만남일 뿐인데, 스킬의 어우러짐도 그렇고. 대화 자체가··· 당신은, 저와 굉장히 잘 맞는."

뒤이어 살짝 망설이다가.

"아니, 굉장히··· 굉장히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이런.

너무 티를 냈나?

"···조사를 많이 했지. 그 쪽만큼이나, 나도 그 쪽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

"으음, 저도 그런 부분에서는 할 말이 없지만··· 정말로 그것 뿐입니까?"

"그래."

"생각보다 길드 정보부의 능력이 대단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어."

"뭐, 알겠습니다. 저 또한 바라는 바니까요."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드장."

"나도, 미국 지부장."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 달리, 너무도 편안한 말투로 대화를 맺은 한우현은.

-촤아악!

-촤아악!

그 초월급 스킬들의 영역을 해체하며, 마침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들, 해산하고 오늘은 이만 쉬도록."

그리고 기나긴 회의의 끝을 알렸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새로 올 놈들을 설득하고 교육시키려면, 아주 바쁠 테니까."

* * * *

-웅-웅웅-웅웅웅···!

밤의 길드 사옥.

-웅-웅웅-웅웅웅···!

외국계 플레이어들이 자주 찾아오기에, 아예 처음부터 그 용도를 마련해 놓았던 귀빈 접객용 숙소.

-웅···!

그 안에서, 한 사이보그가 한참이나 기계음을 울리다가.

"···의외인데. 왜 감시하는 장치가 하나도 없지?"

의문어린 기계음을 내뱉었다.

"하긴, 어차피 [전자기인] 직업군한테 기계적인 감시는 의미가 없긴 하지만···."

다시금 묘한 미소를 띄운 그가, 허공을 무언가가 떠 있다는 것 마냥 어루만졌다.

"이중 상태창이라···."

===

캐릭터 네임 : 아서

캐릭터 랭킹 : 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01만 2102명)

직업 : 성기사

레벨 : 300

···

===

두 개의 창을, 동시에 띄워 놓고.

===

캐릭터 네임 : 아서

캐릭터 랭킹 : 10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01만 2102명)

직업 : 성기사

레벨 : 294

···

===

고심에 빠진 듯, 양 손을 그러모았다.

"역시, 직접 보니 확신이 들어. 회귀자인 건 확정이고.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이거야···."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고민한 후에야, 답을 찾았다는 듯.

-[제 1 시나리오 : 군림할 모든 왕]

"잠재적인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는 미국을 적이 아니라 동료로 본다면, 세계 지배는 그 목적이 아니란 뜻이겠지."

-치지직!

그 문서가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제 2 시나리오 : 반로환동자]

"목적 없는 회귀가 아니야. 멸망을 막기 위한 회귀인 게 확실하다."

-치지직!

그 또한 마찬가지로 지워진다.

-[제 3 시나리오 : 게임4판타지]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은 추가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회귀자나 외부 창작물 존재의 개입은 일단 배제해도 될 것 같아."

-치지직!

-[제 4 시나리오 : 망겜의 성기사 & 사제]

"후회, 구원··· 전형적인 영웅 시나리오지. 거기다가 중앙 정보국 간부들의 뉴욕 사투리와, 퀘벡 사투리가 섞인 영어··· 중졸의 방구석 폐인이 구사한다기에는 너무나도 독특한 언어 습관."

그의 냉철한 눈이 다시금 세부 시나리오를 확대했다.

-제 4-1 시나리오 : ···

-제 4-2 시나리오 : 빌런 확산

-제 4-3 시나리오 : 보스 창궐

-제 4-4 시나리오 : 환경 붕괴

-제 4-5 시나리오 : ···

"역시 넌, 미국에서 우리와 지냈던 사람이 틀림 없어."

곧바로 그 눈 위에, 또 다른 무수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치잉!

-치이잉!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가속]

한우현이 거의 항시로 사용하는 기술이자, 다른 스킬들과 다르게 오리지날 스킬이기에 [날카로운 눈]으로 본다 해도 아무런 정보가 나타나지 않는 스킬.

순간적으로 유진 킴이 모든 포스 반응로의 기능을 끌어올려, 그 모든 정보를 아카이빙한 스킬이었다.

"[전지적 운영자 시점]."

-파아앗!

-[스킬 종류 : 오리지널Original]

-[스킬 효과 : 신경 해부학과 신경 생리학에 대한 고도의 이해를 바탕으로, 뉴런과 교세포들의 활동을 촉진해 그 전기 신호와 화학 신호의 속도를 가속합니다. 사용자의 세포 활동과 신경 조직학 전반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그 효율이 높아집니다. 부작용으로 신경 세포들의 노화 및 자연 손상 또한 가속됩니다.]

-[스킬 피로도 : 포스를 초당 21.412FP만큼 소모합니다. 또한 ATP를 초당 세포체 하나당···]

"더, 더 자세히. 어떻게 구현하는 거지?"

-지지직!

현실을 일그러뜨리는 듯한 정보체들이 유진 킴의 뇌를 파고들었다.

-[스킬 사용법 : 먼저 뉴런 하나하나에 있는 나트륨 채널과 칼륨 채널들의 움직임을 수의적으로 인식합니다. 이를 포스를 통해서 소의식을 가지도록 통제합니다. 동시에 포스 구조체로 인위적인 랑비에 결절과 말이집 구조를 형성해 도약 전도의 속도를 향상시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송과체에서 시작해 간뇌, 중뇌, 소뇌, 대뇌 전체로 확장합니다. 뒤이어 뇌신경과 척수신경 각 말단으로···]

"복잡하군, 정말로 복잡해. 혼자서 만들 수 있을 수준이 아니지, 절대로. 구현도를 더 자세히 보자고."

-파아앗!

그의 눈앞에 무수한 뇌 세포들의 구조도가 마치 3차원 그물 같은 형상으로 펼쳐졌다.

"아예 일반인은 물론이고, 해부한 플레이어들과도 뇌구조가 달라. 이 독특한 가지도··· 어떻게 형성된 거지?"

-츠즈즉!

-[대상 플레이어 '아서'의 뇌 구조도 변형 로그 추정 분석··· 한 번의 큰 변화 이후, 약 20년에 걸친 안정화를 통해 뇌 구조의 적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변화 로그 추적 관찰···]

동시에 시간이 되감기는 듯, 그 구조도가 단순하고도 저열하고도 붕괴되는 형상으로 무너진다.

"···이거였군. 이거였어."

마치, 무수한 사람들이 섬세한 수술을 통해 뇌 세포를 새로이 심는 듯한 형태.

-[···높은 가능성으로 외부의 고도로 섬세한 수십 여명의 포스 운용자에 의한 인위적인 뇌 조직 변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현재 스킬의 사용자에 의해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개량되고 개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스스로 할 수 없지. 뇌 활동에 관여하는 스킬인데, 더 자세히···!"

-[보다 자세한 로그를 확인하···]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듯.

-파악!

유진 킴의 카메라와 함께, 머리 전체적으로 연기가 살짝 피어오르며.

-과열. 과열. 과열···.

"음."

그 상태창들이, 강제로 끊겼다.

"뭐, 괜찮아."

그러나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반쯤 망가진 회로도를 추스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

"알 건 다 알았으니까."

동시에 [엘릭서]를 마시며, 미소지었다.

94화 망겜의 성기사 & 사제 (2)

길드 미국 지부 창설로부터 일주일.

-콰광!

-쿠웅!

-쿠구궁!

잠실 올림픽 공원, 지금은 길드 훈련소로 불리는 곳.

-카앙!

-카가강!

그 중심부, 전체가 정체 불명의 단단한 금속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평야.

-콰과광-!

금속 벌판의 한가운데서.

"후우!"

"하!"

하얀 갑주를 입은 남자와.

-콰광!

하얀 법복을 입은 여성이.

-콰아아아아!

-쿠아아아아!

끊임없이 맞부딪히고 있었다.

"이제 초월급 스킬은, 익숙해졌나 보군!"

"노력, 했습니다!"

불과 일주일 사이에, 약간은 어색했던 한국어 실력이 꽤나 올라온 듯.

-[절대 선의]

-후-우웅-!

꽤나 자연스러워진 한국어를 내뱉은 그녀의 전신이 하얀 빛에 휩싸이며.

-쐐애액!

초월적인 속도를 냈다.

-[절대 방어]

-스아아악!

그리고선, 셉터와 방패의 끝이 맞부딪혔다.

-쿠-우우-우우웅!!!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와 힘을 동반한 충돌.

"좋아, 완벽한 제어야."

"아직, 부족합니다만!"

"일주일 만에 이 정도면, 충분하지!"

-파앙!

그녀를 튕겨낸 한우현은 즐겁다는 듯, 높은 음조로 목소리를 냈다.

"그럼 처음부터 시험해 볼까!"

"갑니다!"

다짐하듯 외치고선, 라일리 또한 진지한 표정으로.

-웅-!

-웅웅-!

-끼-이잉! 후-아앙!

강렬한 의지를 불태우겠다는 듯, 전신에 무수한 생물학적이고도 생화학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포스를 끌어올렸다.

"첫 번째!"

그 의지를 느끼며, 한우현은 [물리 왜곡술]의 시작을 알렸다.

"[운동정역법]부터 보지!"

시전자가 인지하는 물체의 운동을 제어하는 기술.

-[운동정역법 : 운동량증감]

-우우웅!

한우현의 방패 끝이 순식간에 진동하며 가속했다.

"운동은 질량, 속력, 방향이 그 근간입니다!"

그에 마주하듯, 라일리 또한 외치며 셉터에 포스의 오러를 담으며 휘둘렀다.

"따라서 하나하나를 인식하여 움직임을 인식한다면!"

-[운동정역법 : 운동량증감]

-우우웅!

두 무기가 다시금 마주했으며.

"위력을 능히 상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카-아아-아아앙!

-아-아카-카카캉!

동시에 무수한 진동이 서로를 상쇄하며, 그 소음이 잦아들었다.

"읏!"

끝내 그 충격을 완전히 버티지는 못한 듯, 뒤로 날려져 버렸지만.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휘익!

전혀 의지를 꺼뜨리지 않겠다는 듯, 뒤로 몸을 날린 라일리의 등 뒤로.

-촤악!

-[신성의 날개]

새하얀 빛의 날개와.

-후웅!

-[빛의 별]

헤일로가 떠올랐다.

"좋아. 훌륭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다.

힘과 질량의 동질성이라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왜곡하는 두 번째 기술.

"[분열융합술]의 정의는?"

"질량은 곧 힘이요, 힘은 곧 질량입니다!"

-우우웅···!

한우현이 허공에 뜬 그녀를 쳐다보며, 양 손아귀에 빛과 열을 기괴하게 발산해 뭉쳤다.

-[분열융합술 : 쌍생성]

이내 그것을, 빛줄기처럼 쏘아올렸다.

-후와악!

"따라서 양자 영역을 느낀다면 무에서 유를 창출하고, 유에서 무를 삭제할 수 있습니다!"

-[분열융합술 : 쌍소멸]

-파바바박!

불가해하게 뭉친 에너지 덩어리는, 그녀의 셉터 끝에 닿음과 함께 먼지로 흩날리며 잦아들었다.

완벽하다.

"세 번째!"

다음 단계.

열역학 법칙을 왜곡하여, 무수한 포스 에너지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다룰 시간이었다.

"[힘의 순환]은 어디에서 시작하지?"

한우현이 다시금 검을 크게 휘두르며, 그 끝에 무수한 빛과 열, 소리의 충격파를 쏘아보냈다.

-콰하하학!

한 번이 아니라.

-콰하학!

-콰하학!

연속으로.

"모든 에너지는,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힘의 순환 : 흡성대법]

-쿠우우우!

-후우우우!

그 검기들을 자연스레 셉터 주위로 소용돌이치듯 흡수한 라일리가, 온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리릭!

"그리고 포스는 이론 상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힘의 순환 : 엔트로피 역전]

그녀의 전신에서 무수한 포스의 줄기체들이 거미줄처럼 뿜어져나왔고.

"따라서 변형에 한계도, 제한도 없습니다!"

-[힘의 순환 : 덧칠하기]

한우현이 끊임없이 쏘아보낸 검기들이, 모조리 갈라져 흡수되어 그 주위를 맴돌았다.

-우웅-우웅-웅웅웅-!

초월적인 수준의 제어력.

"허."

한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더 어렵게 가 보자.

광속과 시간과 왜곡을 비틀어내 플레이어만의 시간계를 창조하는 기술.

상대성 이론을 조롱할 때다.

"[상대성 흐름]을 정의해 봐라!"

"우리의 시간은···."

라일리 그레인저가 춤을 추듯, 휘몰아치는 오러의 한 가운데서.

"상대적이니···! 의지에 따라, 출렁입니다!"

-파-!

-파-파파!

-파-파파-파파팡!

뒤흔들리는 중력파를 내뿜었다.

-[상대성 흐름 : 빠름의 역설]

-웅-우웅-우우웅!

그녀를 중심으로 왜곡되는 시간계의 흐름.

"좋아!"

그 앞에서 한우현 또한, 마주 보며 포스의 구조체를 시공간에 흐드러뜨리며.

-파-자자-자자작!

-[상대성 흐름 : 느림의 역설]

라일리의 시간 가속을, 다시금 무효화했다.

"하."

"후으으···."

눈을 마주친 둘이, 약속이나 한 듯.

-콰앙!

-콰-앙!

다시금,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물질 상태를 다루는 [상 전이]의 시작은 어디부터지?"

"모든 물질은 그 흐르기에 따라 에너지와 질량을 가변적으로 담으니···!"

만물의 상태는 역학을 따르니.

고체 역학, 유체 역학, 기체 법칙을 통달하여 제멋대로 주무른다면.

"그 상태는 인지와 명령으로 부여하고, 쥐어짜낼 수 있습니다···!"

-[상 전이 : 흐르기]

플레이어는 어떤 극한의 환경에서도 그 상태와 움직임을 제한받지 아니할 수 있다.

"그래, 더 자세히는?"

-촤하하학!

한우현을 중심으로, 바람이 액체와 같이 흐르며 그를 그물처럼 떠받쳤다.

"물질의 기본은 고체, 액체, 기체이며, 그 중간자 또한 부여할 수 있습니다!"

-[상 전이 : 굳기]

주변 공기를 딱딱하게 굳힌 라일리가 그 위에 선 채 되물었다.

"훌륭하다!"

굳고, 흐르고, 퍼지는 물질들의 날씨 안에서.

"그럼 다음!"

씨익 웃은 한우현이, 무릎을 굽혔다.

"현실을 이루는 4대 힘은 뭐지?"

"전자기력, 중력!"

돌진하는 한우현의 움직임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그녀가 한 숨을 돌리고.

"그리고 약력, 강력입니다!"

전신의 포스를 네 가지 힘으로 순환시켰다.

-파직!

-파지지직!

-[전자기유도 : 전기제어]

곧이어 되뇌인 라일리의 주위로, 무수한 전격이 번뜩였다.

-우웅!

-우우우웅!

-[전자기유도 : 자기제어]

그를 바라보며 접근한 한우현의 주위로, 무수한 자기장의 역장이 휘몰아쳤다.

-쩌-저저-저저정!

-즈어어엉!

두 전자기 폭풍이 부딪히며, 주위로 무수한 불꽃이 번뜩였다.

"그럼 마지막."

한우현이 입술 끝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상가변칙]을 구현해 보지."

"우리의 공간은··· 다양하며, 복합적이고, 연속적입니다."

그 흩날리는 불똥들을 사이에 둔 채, 이것만은 어렵다는 듯.

-웅···우웅···!

라일리가 처음으로, 긴장의 안색을 띄웠다.

-휘우웅···!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전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이지."

"어렵지 않아. 특히 너한테는."

믿음직한 어조로 그녀를 독려해 주었다.

"이미 거의 비슷한 [폐곡공간]은 잘만 시연했잖아?"

"그것도, 전혀 쉽진 않았습니다···!"

라일리의 이마가 찡그려졌다가, 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개념이지만, 그래도···!"

-번쩍!

그녀의 눈 주위로, 무수한 4차원 도형체들이 포스로 뭉치며 떠올랐다.

-[위상가변칙 : 연속변형]

-촤아악!

동시에 주위 모든 공간이, 그녀를 중심으로 이끌리듯이 [우그라들었다].

"그래, 그렇지!"

그 끌려가는 공간에서, 한우현 또한 허공에 부유한 채.

-[위상가변칙 : 연속변형]

-우-오오-우오옹-!

마찬가지로 주위 공간을 [우그라들며], 라일리의 영역에.

-스-으아-아아-아아아아-!

-사-아아-으으-으으으으-!

왜곡된 공간을 맞부딪히며, 거의 얼굴이 닿을 듯한 거리로 접근했다.

"축하한다, 라일리."

그 상태로, 한우현은 너무나 기쁘다는 듯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현실 재조정 해석]을 제외한, 모든 [물리 왜곡술]과 [포스 전투술]을 통달한 걸."

"···정말이지, 이게 시작점이라니."

-후와아악!

힘이 빠진 듯, 서서히 깨져 나가는 뒤섞인 왜곡 공간의 안.

"어렵네요. 정말로 어렵습니다. 믿기지 않네요."

"글쎄,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익혔다는 게 난 더 믿기지 않는데?"

"···일주일, 음."

그 말에 라일리가 잠시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멈췄다.

"왜 그러지?"

"···아니, 아닙니다. 그냥,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리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이 무수한 기술들과 원리, 체계... 하나하나 사소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굉장히 노력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당연히, 노력해야지."

"무엇을 위해서 그 정도로?"

"···무엇을 위해서라."

순간, 그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라일리의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세상을 위해서지."

"세상이라, 고요···."

"너무 뻔한 대답일지 모르지만, 진심이야.

"아니에요. 저도 당신의 진심은 충분히 믿고 있습니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만, 조금은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아직 길드장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너무도 많다 보니."

"···글쎄."

"호기심이 들더군요."

"음."

"플레이어가 되며 성격이 바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변화는 정말 극적이라고 들었습니다."

"···."

한우현이 자연스레 꿰뚫어보듯이 비치는 라일리의 시선을 피했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니까."

"흐음··· 당신도, 비밀이 많습니까."

살짝 인상을 찌푸린 라일리가, 그 붉은 눈을 크게 감았다가 떴다.

"···없다고는 못하겠지."

"뭐, 하긴 세계 길드장이 비밀이 없을 리는 없겠습니다만···."

"···지금은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잠시, 아래에서 멍한 눈빛으로 그들의 대련을 올려다보던 공격대원들과 눈을 마주치고서는.

"언젠가는 말할 수 있을지도."

"···."

빈 말이라고 생각한 듯, 묘한 표정을 지은 라일리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자, 다들 모이도록!"

"아, 진짜."

"진짜 미치겠네."

"···."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라니아, 홍세희, 나유나.

잠시 휴식에 들어간 차정훈과 김재승, 그리고 자국으로 돌아간 친구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제 1 공격대원들을 모았다.

"어때, 좀 윤곽이 잡히나?"

"···."

"···."

그 별 것 아니란 듯한 한 마디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만렙이니까··· 우리보다 셀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요···."

홍세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길드장이 직접 과외하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는데···."

나유나가 분하다는 듯, 양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글로벌 섭 1위라서 다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하루에 하나씩 [물리 왜곡술]을 배우다니."

라니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당신들도 금방 배울 수 있어요."

"전혀 아니거든?"

"어차피 곧 배우게 될 텐데, 부정하지 마라."

"하아···."

한숨을 쉰 라니아를 뒤로 한 채 다른 이들과도 인사를 시켜 주었다.

"지난 전투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한 주 동안 다들 잘 쉬게 해 주었고."

-척.

검 끝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리 할 수는 없어. 다음 보스가 또, 나올 테니까."

뒤이어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쉬는 동안에도 나와 라일리의 모습을 계속 보라고 한 거다. 여기 없는 친구들도 3차원 영상을 매일 매일 보내준 이유도 그거고."

-후우웅···!

한우현의 검 끝에, 무수한 포스의 소용돌이가 맺혔다.

"[물리 왜곡술]에도 이제 입문할 때니까."

"아니, 봐도 모르겠다니까요오···."

"진짜 미치겠다 정말."

"지난 번에 어디까지 봤더라."

당연히 좋은 표정들은 아니었지만, 의지는 꺾이지 않았는지.

불평불만을 내뱉으면서도 각자 휴대폰을 보며, 일정을 확인하는 공격대원들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내일까지는 쉴 수 있을거다."

"회의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 맡겨놔도, 준비가 영 만만치 않던데."

"그래."

고개를 끄덕인 한우현이 라일리를 쳐다봤다.

"이제 미국 하부장들도 조직이 완전히 안정화 된 듯 하다고 보고했고, 미국 정부도 그에 동의했으니까."

"예정에 딱 맞게 됐네요."

"네 덕분이기도 하지."

"감사합니다."

"···그래."

라일리의 딱딱할 정도로 공손한 대답에, 한우현이 아주 조금.

대답을 느리게 내뱉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지금 그녀와의 관계는, 전과 너무나 다르니까.

잠깐 스쳐 지나간 아쉬움을 흘리며 한우현이 해야 할 말을 계속했다.

"내일이면 본국에 돌아가서 쉬던 친구들도, 돌아올 테니 다들 환영해 주자고."

"훈련 전 마지막 날인데 휴식은 커녕, 일이나 더 터지게 생겼네."

"이익, 애들이 더 사고치진 않겠지?"

"제, 제가아··· 더 잘 감시해 볼게요오···."

생각에 빠진 셋을 뒤로 하고.

"당분간 바쁘겠네요. 뒤늦게 끼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너만 끼는 게 아니니, 그걸로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요, 남들한테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한우현이 무심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려다가, 그 손을 멈췄다.

"···그럴 리가. 오히려 너한테, 다른 친구들이 배우게 될 거야."

"네? 제 재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건 스킬 학습이고. 아직 보스 전투는 제대로 연습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리고선 아슬아슬하게 등 뒤로, 떨리는 손을 감췄다.

"일단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하와이로 가서, 미국 지부장들과 합류해 오라고."

···애써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지부장이니까, 최소한의 현황은 직접 전해 들어야지."

"네, 그러면 할 일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라일리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내일, 세계 회의에서 뵙도록 하죠."

잠시 그 떨리는 손에 시선을 스치고선, 중얼거렸다.

"길드 마스터."

95화 우리가 곧 질서다 (1)

수십, 아니 수백 명은 될 법한 군중들.

-웅성웅성···

-웅성웅성···

건물을 중심으로, 떼로 모인 기자들.

-드르륵!

그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한우현은 커튼을 쳤다.

"의외시군요. 기자 회견을 꽤나 좋아하시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통제할 수 있다면 그렇지."

대답한 한우현이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을 쳐다보았다.

"이번 회의에는 굉장히 민감한 내용이 많으니, 괜히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더 나아."

"하긴, 평소와 달리 굉장히 보안을 강조하셨으니."

고개를 끄덕인 이준범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아··· 아니, 딸이 오겠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탁.

닫힌 문을 바라본 한우현은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웅···

-···웅웅···

무수한 포스의 가닥을, 실과 그물로 엮어내 주위로 퍼뜨린 채.

-[신경 조작술 : 신경 이해 확장]

한우현의 신경 내부 체계들이 그 미세 구조도를 반복하며 기능을 확장했다.

-[의식 확장술 : 광역 인지]

그리고 수 초 만에 그의 의식이 길드 건물 전체를 덮었다.

-···준비 완료···

-중국 지부는 곧 도착···

-동남아시아도 곧···

-···미국은···

무수한 길드원들의 대화와 생각, 감정이 희미하게 느껴진다.

-웅···웅···!

그를 한 층 넘는다.

-웅···웅···웅···!

더 넓게, 보다 더 넓게.

한우현의 의식이 길드를 넘어, 잠실 전체로 뻗어나간다.

"큭."

그리고 느낀다.

저 멀리서 평범한 복식을 한 채, 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부우웅···

-부우웅···

-부우웅···

길드에서 미리 공항까지 보내 놓은, 리무진을 타고 오는 이들이.

그 모양새에서 전혀 특별함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명령 대로, 기도 비닉에 나름 신경을 쓴 모양.

하지만 지금 길드 앞은 첫 세계 플레이어 회의의 공표로 인해 너무도 인파가 많다.

저대로 온다면 아무래도 이 앞부터는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느낌.

길드 내 플레이어들의 통제만으로 정보의 유출을 막기에는 힘들 정도니까.

아무래도, 조금 도와줘야겠다.

-다들 들리나?

-···?! 길드장?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경로로 오도록. 미리 [차원 관문] 경로를 준비해 놨다.

-바숑디, 오랜만이군.

-여기, 여기, 여기로.

-알았습니다, 길드장.

[차원 관문] 세 번이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올 수 있도록 안배를 한 뒤.

-호록.

그가 직접 섬세하게 숙성도를 조율한 보이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나쁘지 않은 수준.

"···잠깐은, 쉬어 둘까."

-끼이익.

하지만 그 말을 실천할 새도 없이.

겨우 한 번의 목 넘김 직후, 문이 열리며.

"아우, 진짜 바쁘다 바빠."

"아, 안녕하세요오···."

"준비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굳은 표정의 차정훈, 김재승, 나유나, 라니아, 권승환, 홍세희···.

길드 한국 지부의 간부들이, 하나씩 하나씩 문을 넘어왔다.

-후웅!

그 뿐 아니다.

"你好吗?(안녕하신가?)"

비틀린 미소를 지은 삼색의 브릿지를 한 남자.

"오랜만이군, 리하오란. 보내준 차는 잘 마셨다."

"···바숑디는 정말 그거에 진심이군."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든 리하오란이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반갑다, 총대장."

"처음 뵙겠습니다, 한우현."

"안녕하시오."

그 뒤로 화즈펑, 류샤오린, 장즈하오, 시하이옌, 양위엔신, 왕첸, 리즈시웅, 즈거링···.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성들을 지배하는 동시에, 공청단을 내세워 중국 공산당이라는 괴물을 집어삼키고 있는 대륙 최강의 플레이어들.

-척.

-척.

-척.

그들이 리하오란의 뒤에 각을 맞춰 도열했다.

"(크으, 멋있다?)"

"(역시 한국인가. 플레이어들 수준이 완전 다른데?)"

"(어이, 잡담은 작게 해.)"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여긴 중국이 아니야. 우리보다 더 센 애들이 수두룩한데.)"

"(어차피 다 같은 편인데 뭘.)"

물론 중국어로 수군대는 꼴을 보니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다른 보는 눈도 없었으니,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

-후웅!

뒤이어 또 하나.

-후웅!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여우귀와 꼬리를 단 음양사 복장의 여자.

그 뒤를 따르는 일본의 세 하부장.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무래도 이전에 벌인 일이 있었기에, 군기와 긴장이 바짝 든 모습으로.

"···다른 복장은 없나?"

"그, 이게 가장 강한 장비라서요. 명령이시라면···."

"아니, 됐다. 좋은 걸 입어야지."

욱일기로 뒤덮인 츄리닝과 일제 헌병 차림을 보며 살짝 어이가 없었기에 한 번 딴지를 걸고 넘어갔다.

-스윽.

고개를 돌려 다음 사람들을 맞이했다.

"정말 오랜만이군, 동남아시아 지부장. 일은 힘들지 않았나?"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응우옌이 쌀국수처럼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다른 지부들에 비하면 편한 거지."

"···고생은 내가 했고."

그 뒤에서 보랏빛 머리에 기다란 장궁을 짊어진 첸 헨드릭이 약간 짜증난다는 듯 덧붙였다.

"이런, 어쩔 수 없잖아. 인도네시아 평균 학력이 싱가폴이랑 얼마나 차이나는데."

"어차피 이 놈이나 그 놈이나 쌀 팔아먹는 원숭이들인데, 수준 차이는 무슨."

"우현! 오랜만이다요!

둘의 짧은 언쟁을 밝은 목소리로, 푸른 사이드테일을 한 머리칼의 여자가 끼어들며 묻어버렸다.

"그래, 잘 쉬었나?"

"···솔직히 잘 쉬지는 못했지만! 필리핀에서도 인터넷 강의 외우기 바빴으니까요!"

주춤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엘리쟈 나바로.

"잘 공부했겠지? 한국으로 왔으니 내일부터 바로 훈련인 것 잊지 말고."

"···정말, 너무하다요. 일 중독자."

뾰루퉁한 기색으로 그녀가 내미는 과일 바구니를 대충 옆의 찬장에 올려 놓은 채.

-후웅!

다음 차원 관문에서 발을 내딛는 이들을 맞이해 주었다.

"공화국의 구원자들, 반갑군."

"크, 언제 들어도 재밌는 이름이야."

광기 어린 미소를 지은 추기경 복장의 남자와, 그 뒤에서 컨셉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반가워요, 길드장."

"위쪽 동네는 저희가 잘 하구 있다구요?"

"언제까지나 이러면 좋을 텐데."

피가 여기저기 범벅이 된 인민군복을, 아무렇게나 기운 옷을 입은 플레이어들이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계속 그리 할 수는 없다는 건 알도록."

"뭐, 저희도 슬슬 재미 없어지는 참이니."

"듣고 오긴 했지요."

"그 전까지라도 신나게 간첩들 색출할 수 있다면야."

다른 지부까지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불량해 보이는 태도.

그러나 확실히 한우현과 길드의 질서 아래에서 그 누구보다도 권력을 만끽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었다.

"그거면 됐다. 나중에 돌아오면 최윤이 보고한 공로에 맞춰 자리를 줄 테니, 그리 알도록."

"흐흐, 그럼 최대한 천천히 가야겠네요."

"지금도 좋긴 한데, 확실히 살기에는 여긴 불편하니까."

"물론 돌아와서는 그렇게 행동할 순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

"뭐, 어쩔 수 없죠."

"충분히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니까요."

건방진 태도였지만, 확실한 상하관계에 대한 인식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최윤이 보기에는 너무 시시껄렁해 보였는지.

"그만."

"음."

"네."

"아, 알겠습니다."

-척!

-척!

-척!

그가 인상을 험악하게 굳히며 그들을 바라보자, 순식간에 북한 지부의 간부들은 각을 바로했다.

"큼, 좀 쪽팔리네 길드장."

"아니다. 북쪽이야 너한테 높은 자율권을 부여했으니."

애초에 북한은 쓰레기장으로 쓰기 위해 처분했던 곳.

"하던 대로 재밌게 지내라. 나중에 한국이 그리워지면 천천히들 돌아오고."

"네, 넵."

"예."

"네."

그러니 그 목표만 잘 수행하고, 북한을 마침내 정상화하는 순간에만 최윤의 복종에 따른다면.

태도 쯤이야, 별 상관 없었다.

"돌아가서 보자, 이 새끼들아. 길드장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몰라서 병신들이···."

"아, 아니 그게."

"그, 잘못했습니다."

"생각보다 유해보여서 그냥."

그 내리갈굼을 뒤로 하고선.

-후웅!

마지막으로 열린 [차원 관문]을.

"안녕하십니까?"

가장 큰 기대를 담아 바라보았다.

"···호오."

"허."

"이런, 정말."

당연히 모든 길드의 지부장과 그 간부들은,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포스의 위력과 제어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 이들이기에.

"···길드장, 다음가는 수준인데."

"대단, 하군."

세계에 단 둘 뿐인 만렙 플레이어를 보며, 그 눈에 경탄을 담았다.

"제가 가장 마지막인 듯 하네요."

루비를 깎아낸 듯한 영롱한 눈과,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수한 포스의 에너지체들.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입니다."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타고 송과체를 형상화 해 주변까지 아지라이 삼키듯 흐르는, 기하학적이다 못해 해체적인 수준의 포스 구조체들.

"마지막 지부인 만큼, 저희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을 것 같으니."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을 완벽히 체화한 플레이어라는, 가장 큰 증거.

"잘 부탁드립니다."

그 힘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라일리는 뒤에 위치한 밀라, 마틴, 로버트와 같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

"우리도, 잘 부탁하지."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 레이드에서도!"

"지, 진짜 대단해애···."

"야, 내가 선배인 거 알지? 앞으로 잘 해라?"

"선배요? 그게 뭐죠?"

"···이익···!"

모두가 어느 정도,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되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아, 그 전에 잠깐."

리하오란이 그 말을 중간에 자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길드장, 우리한테 거짓말을 하나 하지 않았어?"

"하."

비틀린 호기심과 재치의 감정을 느꼈기에, 한우현 또한 짧게 웃어 주었다.

"거짓말이라니, 뭘 말하는 거지?"

"길드 말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냐, 리하오란."

"아아, 짚고 넘어가야지. 응우옌 너도 속으론 조금 찝찝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어차피 지금 와선 중요하지 않은 일 아닌가."

"뭐, 나도 그리 생각하긴 하지만."

첸 헨드릭 또한 궁금하다는 듯, 한 마디를 더했다.

"중국에서는 우리 빼고 나머지, 한국에서는 다른 모든 서버, 동남아시아에서는 마찬가지로 동남아 빼고 죄다 연합했다면서···."

리하오란이 재밌다는 듯 웃음 지었다.

"전부 거짓말이었잖아? 랭커들의 디스코드? 그런 게 어딨어."

"···."

"···."

"···."

그 말에 싸한 침묵이 번져나갔다.

"하루 만에 만든 1인 길드로 공갈을 치다니. 우리한테 사과를 해야 하지 않아?"

"흠, 사과라."

하지만 늘 있는 WWE를 하듯, 한우현은 전혀 그 날카로운 지적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사과가 왜 필요하지?"

"···."

"···."

잠깐의 정적.

"···알고 있었다고?"

"난 진짜 믿었었는데?"

"아니, 그게 시간차로 가입해서 생긴 모순이 아니었어···?"

"뭐야, 장난해?"

그리고 웅성대는 간부들.

"흐."

"하."

하지만 반응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던 한우현과 리하오란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하하하!"

곧이어 마주 웃었다.

"역시 바숑디는 대단해. 마치 미래를 아는 것 같다니까?"

"칭찬 고맙군."

그 뼈 있는 말을 넘기며, 한우현은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래. 아마 모두들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한 모순점, 그게 맞다."

-키이잉···!

동시에 그 뒤에 포스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애초에 랭커들의 비밀 조직이라는 건 없었지. 첫 날, 내가 모든 걸 생각하고 만든 거다."

"···."

"···."

이미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던 듯.

리하오란, 엘리쟈, 응우옌, 첸의 표정은 살짝 찌푸려지는 데 그쳤지만.

"···뭐?"

"아니, 그게 말이 되는."

"그럼 이걸, 길드가."

그 뒤에 있던 간부들은 당황한 듯 움찔대며 수군댔다.

-쾅!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그 웅성거림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중요할까?"

"아니, 중요하지 않지."

한우현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리하오란이 되받아쳤다.

"오히려 더 좋지. 우리들의 대장이 세상이 이 빌어먹을 망겜이 된 지 하루 만에, 온 세상을 지배할 조직을 만들고."

그가 희열에 찬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공갈을 진실로 만들 정도로 유능하고, 뛰어나다는 증거니까."

키득대며 한우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 않나, 바숑디?"

"···."

구태여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엔 민망하고도 부자연스러운 일이라, 굳이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뭐, 아무튼 그 말대로 중요한 건 아니지."

피식 웃은 리하오란이 다시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냥, 직접 만났을 때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었거든."

글쎄.

한우현은 속으로 의구심을 품었다.

그가 회귀 전 기억하는 모든 플레이어들 중, 최고의 정치력을 지닌 것이 바로 리하오란.

원소군주는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뭐, 이번에는 의도야 어떻든 일단은 한우현의 권위와 신비를 더해 주었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좋아. 그럼 정말로 잡담은 끝난 듯 하니."

할 일이 많았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맥, 불 꺼라."

"네, 소등합니다. 모두들 중앙 홀로그램에 집중하십시오."

-치이잉!

화려한 빛의 구조체들이 그들의 한가운데 펼쳐졌다.

"···."

"···."

"···."

한우현은 묵직한 목소리로 모두를 침묵시켰다.

"다들 잘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직의 수좌다."

"제 1회 세계 길드 회의,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진행을 차가운 기계의 목소리가 이어주었다.

"그러니 집중해서, 최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내 주도록."

"우선 발언권은 각 지부장과 총 길드장에게만 존재합니다. 이외의 간부들은 발언 전, 저에게 의사를 전달해 주십시오."

-파앗!

동시에 허공에 지구를 형상화한 거대한 지구의 그림과.

-삑!

-삑!

-삐비빅!

길드를 상징하는 무수한 문양들이, 뒤따라 세계 각국에 내리꽂혔다.

"먼저, 통계 상으로는 잘 알 수 없는 개략적인 상황부터 보고하지."

한우현이 그 모형을 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길드 내에서 우리의 체제에 반감 혹은 불만을 '강하게' 품은 자는 어느 정도나 되지?"

내부 정리에 들어갈 때였다.

96화 우리가 곧 질서다 (2)

"···아니지,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한우현이 말을 고쳤다.

"다른 여러 의제들도 다루겠지만, 이번에 다룰 가장 주요한 의제는 '플레이어의 통제'란 뜻이다."

"(그렇다면 다른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부분은?)"

"그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아."

첸의 반문에 답해주며 한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끼리만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당연히 길드의 지배는 완벽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사상누각에 가깝다고 말해야겠지."

"겨우 두 달 만에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것 같다만···."

"더욱, 더욱 강력하게 통제해야 해.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니까."

"흐으음···."

리하오란에게 대답해주고선, 가라앉은 눈을 시호리, 응우옌, 리하오란, 라일리와 마주쳤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길드 내 반항적인 플레이어들."

"···솔직히 기준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가장 먼저 리하오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보기에 사냥 쌀먹이라도 잘 하는 수준이 절반이야."

"절반이라, 그 정도면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고요?"

"동남아시아는 솔직히, 플레이어 조직력이 너무 약해서."

"날뛰지 않게는 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상황은 전혀 아니다."

라일리가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내보였고, 응우옌도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본 서버와 에인션트 서버 간의 갈등이 계속 터져나오고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출신 서버 타령이라니, 정말 원숭이들이 따로 없습니다."

차정훈과 김재승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문에 던전 몬스터 사냥에 주로 참여하는 에인션트 출신들과 본 서버 출신들인 반사회성 플레이어들 간의 갈등이 적지 않아요."

"다행히 일단은 그래도, 길드 내부에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통제에는 따라 주는 편이지만."

-파앗!

-파앗!

무수한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인적사항이 떠올랐다.

"가입만 하고 그 뒤에는 행적을 감추려 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10%의 간부들과, 30% 정도의 동화된 플레이어들을 제외하면 잠재적 불순분자들에 가깝다고 보일 정도니까요."

"···역시 한국, 본 서버 다운 수준이군."

"대체 왜 이딴 게임의 이딴 정신병자들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지부장들의 불평과 함께, 라일리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결국 길드는 강력히 훈련시킨 친위 집단인 방위부를 통해 억지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일 뿐."

한우현이 경멸스럽다는 듯 한반도의 홀로그램을 손가락 끝으로 꿰뚫었다.

"그 근본은 갑자기 튀어나온 근본 없는 게임 폐인들의 무력 사조직이니, 잘 돌아갈 리가 없지."

"구체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차정훈이 한국의 홀로그램을 확대하며.

-후웅!

각 도마다 활성화 된 붉은 점들을 가리켰다.

"길드에 가입은 되어 있지만, 사냥이나 훈련 등 모든 활동을 회피하며 주기적인 인적 확인에만 소극적으로 응답하는 이들이 30%."

"모든 플레이어들의 활동이 철저히 통제되는 경기도, 즉 수도권에서 벗어난 이들이 30%. 특히 그 중 10%는 비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과 모종의 연락을 돌리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니까, 최소 60%가 길드라는 조직에 반감 혹은 비소속감을 느끼고 있다고 봐야지요."

김재승이 입술을 뜯으며 보고를 마쳤다.

"(이상하군. 길드가 이제 완전히 세계적으로 플레이어의 대세가 되었다는 건 명백할 텐데.)"

첸이 턱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한국은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도, 그 숫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지."

그 의문을, 비상식적인 논리로 해소해 줄 때였다.

"즉, 너 같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반사회적인 폐인들이 많다는 거다."

"(나도 폐인이었긴 하다만.)"

"정신병도 없는 게 무슨 폐인?"

"(···거 조건이 까다로우시네.)"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첸을 뒤로 하고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 미국도 이미 보고를 받아서 대충은 다들 현황을 알고 있겠지만··· 다시금 확인해 보지."

한우현이 둘러앉은 이들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중국도 비슷하다. 주요 10대 대도시는 안정화시켰지만, 나머지 시골 지역에 절반 정도의 플레이어들은 흩어져서 우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어."

-띵.

-띵.

-띵.

가장 먼저 리하오란이 중국 지도에 길드 문양과 그래프를 띄웠으며.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수도권 지역은 통제하고 있어. 다만 이 쪽은 섬이 워낙 많은데다가 한국이나 중국처럼 주민등록 시스템이 없는 만큼 아직 완전한 파악이 어렵다. 인도차이나 반도 쪽은 태국을 제외하면 안정화 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고."

-팟.

-팟.

-팟.

응우옌 바오 쯔엉이 동남아시아 일대에 무수한 붉은 점을 활성화시켰다.

"일본은, 그래도 플레이어가 적은 만큼 그 상황은 좋은 것 같아요···. 길드장이 직접 나서서인지, 1000명 거의 전부가 얌전히 따르고 있으니까요. 100명 정도가 잠적하긴 했지만 그리 강한 이들은 없어요."

하세가와 시호리가 일본 전도와 그래프를 띄우며 다행이라는 듯 말을 맺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미국도 좋지 못해요. 정부 산하에 있었던 이들이야 애초부터 협조적이지만, 미국 임시 지부 출신들은 반발이 상당합니다."

-팟.

-팟.

-팟.

라일리가 미국 전도를 살피며 무수한 플레이어들의 정보를 그 위에 띄웠다.

"다행히 중앙 정보국과 국토안보부에서 모든 역량을 쏟고, 길드장이 지목해 새로이 편입시킨 하부장 플레이어들까지 합쳐져서 안정화는 되고 있지만··· 여전히 플레이어 범죄는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의 의견은 어떻지?"

가장 중요한 국가이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 의견을 존중해줄 가치가 있는 곳.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되도록이면 미국에 타국의 플레이어들이 파견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노력하겠다라···."

"그리고 길드의 결정이 어떤 방향이든 가능한 한 협조할 테니, 그 대신 모든 결정에 앞서 최대한의 정보 공유를 우선적으로 부탁하고 싶다는 말도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도록."

애초에 미국 조사국 측에는 어지간한 수준의 연구부터 해서 대전략 대부분을 공유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정말로 도움이 필요치 않다면, 바라지 않는다고 하겠지.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지부는 자기 일만으로도 이미 과부하가 걸린 상태일 테니, 당연히 미국에 원조를 간다면 한국 지부의 인원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그 땅이 너무도 넓은 탓에, 애초에 치안이 그리 좋지 못한 국가. 총기 자유화로 스스로의 안보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삼을 정도이니.

미국을 제대로 안정화하려면 추가 전력을 투입하더라도 최소 한 달은 걸릴 것이다. 심지어 추가적인 사후 관리도 필요할 테고.

게다가 말이 미국이지, 글로벌 서버는 남미 또한 포괄하므로 브라질과 멕시코 쪽의 플레이어들도 감안해야 한다.

그들은 아직 통제는커녕 파악조차 되지 않은 상태.

···할 일이 너무도 많고, 하나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자연스러운 세계 통제 구도를 짜기 위한다는 명목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관여가 너무 늦은 탓일까.

아니, 아니다. 이미 지금도 하루에 한 시간도 자지 못한 채로 무수한 플레이어들을 어거지로 굴려서 빌런들을 계속 제압하는 상태.

현 상태만 해도 최선이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방위부 플레이어 파견은 우리로서도 부담이 되는 일이니, 다른 쪽으로 도와줄 방안을 생각해 보지."

"남미 쪽에 대해서도 의견이 있을까요?"

"일단은 작업장과 카르텔 출신 플레이어들에 대한 동향을 감시하도록."

회귀 전 기준으로 별 다른 영향력을 남긴 놈들은 없었지만, 작업장 출신 플레이어 중 일부가 엘릭서를 연구해 신종 마약을 개발했었다는 기억이 있었다.

"국방부 측에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차후 추가 간부급 플레이어들의 인선과 하부장들의 구체적인 작전 방향성도 전달해주지."

"알겠습니다."

그가 직접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국 정부에 한 번쯤 주의는 전해 주는 게 좋으리라.

"그리고 또···."

한우현이 머리 속으로 여러 과거의 정책들을 떠올렸다.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많았으니까.

길드 가입 인원이 전체 플레이어의 90%에 달했을 때 꺼낼 만한 플레이어 등록제.

맥을 통한 실시간 위치 트래킹 시스템을 넘어, [전자기인]과 [포스 반도체]를 활용한 거대 서버를 창설해 아예 모든 동선들을 분석하는 방법.

현재 존재하는 빅 브라더 시스템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의 인터넷 검열과 사회성 점수 제도를 참고한 '황금 방패 시스템'을 도입할 수도 있었다.

방위부의 인원을 아예 대거 늘리고, 정보부와 연계해 지역별 통제 체계를 구체화하는 법. 이는 이미 부분적으로 한국에도 적용하고 있는 방안이었다.

충성도와 협력도에 따라 공식적으로 길드 내 직위를 구분시키는 법. 이는 지금도 비공식적으로 적용하고 있었지만, 공식화한다면 반발하는 놈들을 효과적으로 판별할 수 있으리라.

반발하는 것들끼리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것도 좋다. 실제로 리하오란이 지금 중국 전역을 관리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니까.

애초에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반사회적인 정신병자들인 만큼, 이 방법은 지나친 품을 들이지 않고도 조금만 수작을 부리면 가능한 영역이기도 했다.

홍보부를 통한 은근한 여론전을 보다 강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랑과 하나가 가진 스킬인 [타락하는 정신]과 [영혼의 유혹]은 게임에서는 어그로 기술에 불과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스킬의 체계와 원리를 해체해 [광역 군중 제어기]로 변형시킬 수 있으니까.

지나치게 스킬의 위력을 강화하면 부자연스러운 티가 나므로 곤란하겠지만, 지역별 순회 공연을 하면서 플레이어들을 모아 길드에 대한 은근한 호의를 세뇌로 퍼뜨리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으리라.

그것들 중 단기적인 효과가 좋은 것들 위주로 검토해 봐야겠다.

"무력이야 당연히 우리가 세계 최강이지만, 그것만으로 사회를 통제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러운 방법들을 조만간 정리해서 보내주지."

생각을 정리한 한우현은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과거 미 중앙 정보국에서 구상했었으나, 예산과 시간이 없어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들.

시간은 지금도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의 경제를 집어삼킨 길드는 자금 하나는 정말로 넉넉하므로.

미국 정부와 협업한다면 그 모든 수단들이 충분히 시도해 볼 만 했다.

"그럼 다음 사안. 일반인들의 여론에 대해서 알아보지."

"네, 이 부분은 제가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팟!

-팟!

-팟!

홍보부장 이율이 긴장한 기색으로 무수한 그래프들을 띄웠다.

"당연한 일이지만, 좋진 않습니다···. 만약 저희한테 압도적인 무력이 있지 않았다면, 이미 각국의 정부가 밀어버렸을 정도로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 버러지들만도 못한 사회성을 지닌 놈들이 하루 아침에 초능력자랍시고 거들먹대고 다니는데 여론이 좋을 수가 있나."

"언론들까지야 어찌어찌 당근과 채찍으로 중립적인 수준까지는 만들었지만."

"애초에 지금 전 세계 경제 현황이 그다지 좋지 못해."

첸 헨드릭이 눈살을 찌푸리며 여러 그래프들을 띄웠다.

"이건 싱가포르 증권 거래소에서 분석한 내용이야. 플레이어의 등장 이후 전 세계의 치안 불안도가 500% 증가했고, 금융계의 투자 규모가 거의 반, 아니 반의 반 토막이 났어. 당연히 총체적 무역 규모도 최소 30%가 줄어들 전망이고."

"···그 정도면 심각한데. 어떻게 이 정도라도 인플레이션이 억제되고 있는 거지?"

"길드가 강제로 어떻게든 원자재 생산 국가들을 윽박지르고 선물과 계약으로 추가 지출을 단행하고 있다. 물론 임시 조치지만."

한우현이 인상을 찌푸린 채 리하오란과 첸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다행히 남미야 미국이 도와줘서 무역 구조를 80% 정도까지는 회복시켰지만,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쪽도 그다지 상황이 좋진 않아."

지부가 없는 곳의 현황인 만큼, 총 길드장인 한우현이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보아하니 3 세계 출신이나 불법체류자 출신 플레이어 등이 본국으로 돌아가 왕 노릇을 하려는 듯 하더군."

"···서버도 없는 유럽에는 또 왜 이리 테러가 많아? 이상한데?"

"수집한 정보로는 ISIS가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는 말도 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쪽에 빌런 플레이어들이 나타났다는 말도 있지만··· 이 부분은 더 알아봐야 할 일이다."

-핏.

그 창을 종료한 한우현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운을 띄웠다.

"물론 두 달 만에 생긴 변화라고 보기에는 참 좋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길드장, 이건 전혀 좋은 상태가 아니야."

"맞아. 길드장이 뛰어난 사람이란 건 알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틀린 판단이야. 이대로면 어쩌면 세계 대 공황이."

"아니, 좋은 게 맞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응우옌과 리하오란의 지적을 반박했다.

정말로 그랬으니까.

투자 규모가 줄어? 인플레이션이 겨우 억제된다? 세계 대공황이 '올 지도 모른다'?

회귀 전 과거에서는 대공황 같은 것은 올 틈새도 없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테러와 모든 사회, 경제 구조의 무지성적인 파멸.

일주일 만에 전 세계가 1000%라는 미친 물가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한 달 만에 달러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었으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열심히 머리를 짜고 있으니 걱정 말도록. 미국 지부장?"

"네. 상당한 불안 요소기는 하지만, 길드장의 말대로 아주 나쁜 상황은 아닙니다."

"대체 어떻게요? 들은 대로라면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지난 주에 막 결정된 요소지만, 미 재무부는 약 2조 달러를 긴급 추경하여 세계 각국에 지원하기로 했거든요."

"···2조, 달러? 300조 엔?"

라일리의 말에 시호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역시 천조국이군."

"그 정도로 협조해준다고?"

"미국 입장에서 길드는 전혀 반가운 존재가 아닐 텐데."

"그래도 그 정도 규모면, 일단 경제 불황은 대충 틀어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이번 분기 말이에요."

"···뭐?"

첸 헨드릭이 라일리 그레인저가 가볍게 던진 말에, 충격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4월에도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추경이 이뤄질 거에요."

그녀가 한우현을 바라보며 웃었다.

"유진 킴이 일주일 간 길드에 머물며 매우 큰 감명을 받았는지, 가용 가능한 모든 예산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강력히 설득한 모양이더라고요."

그리곤 살짝 웃었다.

"안정화 예산 뿐 아니라, 길드 자체의 지원까지도요."

97화 우리가 곧 질서다 (3)

"···진짜 말이 안 되네."

"아무리 전 세계에 뿌려지는 총액이라 해도 2000조라니."

"아니, 그러면 금리라던가 다른 경제적 여파도 상당할 텐데."

"그 부분도 이미 재무부 측에서 총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여간 방장 사기맵···."

어설프게나마 아버지한테 경제의 기초를 배운 듯, 라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돈 문제는 해결됐으니 방법을 구체화하지. 일단 여론전은 그동안 자제했었던 방안을 쓰는 게 좋겠군."

"언론에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취할 때라는 건가?"

"그래, 그 동안이야 언론이 우리에 맞서는 입장이었지만··· 이제 슬슬 그렇지 않게 되었으니까."

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길드의 질서는 전 세계 각국에 뿌리 박혀진 상태.

그나마 유일하게 맞설 만한 국가였던 미국마저 완전히 협력 상태로 돌입하며 달러 복사 모드로 돌입했으니.

이제 더 이상 눈치 볼 것도, 거리낄 것도 없다.

"시작은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 시작해라.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의 체제를 삼킨다는 방향으로."

"거부하면?"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을 압박해라. 무력도, 자금도 갖췄으니 오래 버티지 못 할 거다."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애들이 일단 숙이고 있긴 한데, 미국 빼면 다들 솔직히 속에 능구렁이가 가득 찬 놈들이라."

"일단 후진국들은 그냥 대 놓고 무력으로 압박하고. 선진국들은 중진급 정치인들과 가족들 위주로 언론과 뇌물을 비롯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모든 것을 노골적이고도 본격화해라."

"그럼 이제 그 스킬들, 좀 써도 됩니까?"

"정신 공격 계열들, 지금까지는 눈치가 보여서 쓰지 않았다만··· 이제 슬슬 우리한테 뭐라 할 것들이 없지."

한우현이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어차피 효과도 일시적이니까, 경고용으로 날뛰는 빌런들에게 충격과 처벌 목적이라는 식으로 시작해라."

"사령술사랑 타락귀 애들도 모아봐야겠군요."

"다만 정신에 영구적인 타격을 주는 수준은 피해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정도까지만. 정신계 스킬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너무 충격적일 테니까."

"그래, 실질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민주주의 흉내는 내야지."

"이거 진짜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는데요."

"자세한 방법은 내가 알려주지. 금융 쪽은 우리 싱가폴한테 맡기면 알아서 그냥 다 해 줄 테니까."

"우리도 상하이와 마카오 쪽 그룹들을 통해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 중국은 관치사회라 그런 쪽에선 여유가 있거든."

"그럼 동남아, 일본, 유럽 쪽에 집중 투자하면 되겠어."

겨우 회의실 한 켠에 둘러 앉은, 백 명도 되지 않는 이들.

"아프리카는?"

"이미 한국에서 탈출한 불법체류자 출신 플레이어들을 파악해 놨다. 몇몇을 포섭해 놓았으니, 가서 농산물 수출이나 잘 하도록 통제하지."

하지만 하는 대화들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으니.

"좋아. 인도랑 파키스탄도 불체자 출신 플레이어들 때문에 좀 시끄러운 모양이던데."

"그 쪽은 인도 총리랑 협의를 끝마쳤다. 조만간 응우옌이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데리고 정상화 할 예정이지."

"부족하면 중국 플레이어들을 좀 차출해가도 되고."

"아, 그리고 파키스탄 다라 아담 켈(Darra Adam Khel)의 파슈툰 부족을 뒤져봐라. 출신 플레이어는 딱 하나 뿐이니 찾기는 어렵지 않을 거다."

"다리 아담 켈? 그게 뭐야?"

"아이템 제련에 재능이 있는 친구가 있다는 첩보가 있었거든. 찾는다면 설득해서 한국으로 보내라."

"길드장이 직접 챙길 정도면 유능한 놈이겠어. 알겠다. 또?"

"그 외에는 별 거 없다. 적당히 진압하도록."

"흠, 인도도 워낙 거대한 시장인 만큼 아예 손 안에 넣으면 좋을 텐데."

"거긴 플레이어 인구도 적고, 국가 규모도 큰 만큼 명분도, 실리도 부족하다. 현 총리가 유능한 인물로 보이니 힘이나 실어 주는 게 맞아."

전 세계를 통제하고 조종하는 결의들이 하나씩, 하나씩 너무도 쉽게 결정되고 있었기에.

"러시아는 어쩌죠? 블라디보스토크 출신 플레이어들이 좀 있다는 말이 있던데."

"고려인 플레이어들 말하나 보군. 그 쪽은 최윤이 처리하기로 했을 텐데, 어떻게 되어 가지?"

"중국 서버 쓰던 몽골 애들이랑 같이 뭉쳐서 알아서 좆 같았던 새끼들 있었으면 정상화 하라고 했어. 러시아 정부도 병신들이잖아?"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결코 수준이 낮은 전략이 아니었다.

"아직 그 쪽은 플레이어 소요가 별로 없는 만큼 관여할 명분이 부족하니, 물 밑에서 작업하도록."

"일단 벌이는 전쟁부터 좀 압박해 볼까? 그 새끼들이 천연가스랑 석유 가지고 장난질 치느라 좆 같았는데."

"그래. 러시아 정부를 쥐고 흔들면 유가 통제도 덤으로 할 수 있어 효과적일 테니까."

미래에 전 세계의 사회 질서와 경제 체제가 어떻게 붕괴되었는지 똑똑히 기억하는 초인이 모든 판을 짜고 있었으니.

"그럼 대충 세계 각국들에 대한 초안은 된 것 같고."

"유럽이랑 중동 쪽이 전략이 약하긴 한데, 그 쪽에는 플레이어들이 사실상 없는 수준이니 어쩔 수 없죠."

"그 쪽은 막대한 자금을 통해 천천히 압박하도록 하지. 자세한 건 내가 직접 생각하고 실행할 테니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하긴, 이것들 죄다 길드장 머리에서 나온 거니까."

"진짜 대단하긴 하셔."

"···맨날 중졸 타령하는데 지금도 의심된단 말이야."

길드원들을 통해 실행되는 세부 전략에서야 어설픔이 있었을지라도, 큰 흐름은 너무도 완벽하게 짜여지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우리 나라에 대해 얘기를 좀 해 봐야겠군."

"···."

"···."

경외의 시선들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일단 이 쪽 경제 조정 계획은 미래 그룹을 통해서 잘 진행되고 있으니, 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하, 이게 바로 나란 말이지. 어때요?"

"내가 다 해 주는데 이 정돈 해야지."

"···뭐이얏?"

"에이, 엄청 대단하시죠 당연히!"

"요즘 주가랑 재무 분석들 보면 미래가 다시 오성 넘는 거 아니냔 말 나올 정돈데."

"크흠, 그래 그래. 성과가 객관적으로 좋다니까?"

"뭐, 못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부분은 이대로만 가면 될 거 같고. 연구만 좀 더 속도를 내도록."

이맛살을 찌푸린 정재선에게 차정훈과 김재승이 다급히 칭찬 세례를 남발하는 걸 보고.

-휘익!

피식 웃은 한우현이 손을 휙 돌려 홀로그램들을 다시금 정리했다.

"슬슬 한국 재계 장악은 반은 온 것 같으니 된 것 같고. 플레이어들이 좀 문제긴 하지만···."

"어차피 그 부분은 계속 시간을 들여서 추적해야 할 부분이니까."

"홍세희, 빅 브라더 시스템을 좀 더 집단보다는 개개인 추적 쪽으로 손보도록."

"아, 알겠어요오···."

"그럼 슬슬 마지막 사안을 볼 때군."

-삑.

화면 위에 화가 많아 보이는 듯한 중년 남성의 사진이 올라왔다.

"솔직히 별로 중요한 놈은 아니지만 말이야."

-파앗.

그가 차가운 웃음을 내비치며 금방 그 사진을 넘겼다.

"대충 증거 자료는 다 수집해 두었고. 국가 수장이 권한을 유용해 테러를 사주했다는 것 정도면 탄핵 사유로는 충분하겠지."

"하, 진짜 뭐 이딴 새끼가 3년이나 대통령을 하고 있었지."

"애초에 지지율도 개 씹창난 놈이었잖아."

"저, 저 새낄 뽑은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야···."

나유나와 홍세희가 그 평가에 욕을 더해 주었다.

"곧 발표 할 거지? 군인 출신 플레이어들이 언제 시작하냐고 안달을 내고 있다고."

"걱정 마라. 직접 찾아가서 한 마디 하게 해 줄 수도 있으니까."

"···아니 쿠데타도 아니고 그거까지 바란 건 아닌데."

한우현의 호언장담에 권승환이 오히려 뻘쭘한 듯 물러났고.

"근데 어느 정도 증거야? 아빠 말로는 정말로 직접적인 게 아니라면 의외로 별 효과 없을 수도 있다고 해서."

"걱정 마라.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병신 새끼였으니까."

라니아의 질문에 한우현이 비웃으며 하나의 자료를 띄웠다.

-이거 싹 다 넘겨 줄 테니, 진짜 약속 지키기다?

장난스러운 글귀가 써진 채로 첨부된.

-길드장을 암살하는 대가로 정부가 약속한 것과, 차후 플레이어 통제 계획은···

-와, 딱 봐도 개소린데 지들은 진지하게 써 놨더라?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건 네가 맞는 거 같다, 한우현?

-그러니까 약속, 지키는 거 맞겠지?

제주도에서 날아온 기밀 문서를.

"···진짜로 놔 줄 거야?"

"언제까지나 놔 줄 생각은 아니지만··· 솔직히 지금은, 어쩔 수 없지."

나유나가 그 문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고, 한우현도 꺼림칙하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현재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몇 없는, 랭커급 플레이어 중 길드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

레벨 295 캐릭터 네임 [맑은눈의광인] 담호영.

심지어 전자기인은 고유 능력인 [강화 학습]과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해, 재능만 있다면 그 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군.

그 때문에 이제는 나유나를 비롯한 집행부 주요 간부들이 총출동한다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게 된 놈이었다.

잡으려면 한우현을 비롯한 작전부가 직접 함정을 파야 할 판인데, 놈의 활동 반경은 지금 제주도, 대마도부터 해서 오키나와와 대만에까지 퍼져 있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짐작할 수 없는데다가, 길드 통제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마찰들의 조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대 보스전 훈련만 해도 빠듯한 판.

그 놈만 쫓아다니는 것은 우선 순위에 둘 수 없었다.

또한 다행히, 회귀 전보다 범죄는 거의 벌이지 않은 채 다른 [전자기인] 플레이어들을 습격해 해부하는 짓거리에만 주력하고 있으니.

일단은 보스 대비 훈련이 제대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길드와 일반인한테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정권 무력화까지 한 달 간은 네 활동을 묵인해 주지.

-기간제가 겨우 한 달? 네 달은 안 되나?

-나와 협상을 하려 하지 마라. 내가 정말로 널 못 잡아서 놔둔다고 생각하나?

-하, 알았다고. 갤럭시 S3도 이렇게 짧게 대여해주면 욕 먹는데 말이야, 쪼잔하긴.

···썩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그리 맺음짓기로 했다.

보면 볼수록 아쉬운 일이었다.

그 전투력과, 그 초월적인 분석력, [전자기인] 클래스 이해도로만 본다면 유진 킴조차도 뛰어넘는 재능···.

놈만 복종시켜서 작전부장으로 세울 수만 있었다면, 보스 몬스터 공략이 훨씬 더 수월해질 뿐 아니라 오리지날 스킬의 개발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손에서 벗어난 일에 미련을 계속 가질 수는 없는 법.

"좋아. 그럼 대충 이걸로 마무리 할 수 있겠군."

고개를 들어올린 그가 다시 한 번 세계 지도의 홀로그램을 들여다보았다.

"맥, 회의 내용은 모두 기록했겠지?"

"네, 모든 대화의 내용은 기록과 녹화가 이뤄짐과 동시에 그 세부 전략을 현재 연산 중에 있습니다."

그 모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성립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세계 제일의 초 인공지능.

"다들 질문 있나?"

"···."

"···."

"···."

하나하나 너무도 세심하게, 회의를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구체적인 방법론의 수치들까지 명시되어 자료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었기에.

"없나 보군. 그럼 아직 오늘의 시간이 남았으니."

모두들 구태여 질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선, 싱긋 웃은 한우현이.

"훈련 한 번만 참관하고 갈까?"

마지막 일정을 알렸다.

* * * *

-지잉!

거대한, 아주 거대한 공간.

올림픽 공원의 지부 한 가운데 자리잡은, 이전까지의 세계 최대 경기장을 뛰어넘는 수준의.

아득히 거대한 금속 반구체 형태의 돔.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데."

"맞아요.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라니."

그 안에서 응우옌과 시호리가 경탄의 감정을 흘렸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이게 전부 아다만티움과 미스릴의 합금이라고."

"정확히는 아다만툼을 액화시킨 뒤 미스릴에 반응시켜서 정련시키고, 티타늄을 바탕으로···."

"아무도 못 알아 듣는다, 정재선."

막 완성된 훈련장의 앞에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연구부장에게 타박을 해 주었다.

"···아니,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못 알아들어도 설명하는 거거든요? 바빠서 회의도 참가 못 할 정도였는데도 뒤늦게나마 겨우 짬을 냈는데! 하여간 품격 없기는!"

"품격은 네가 이그드라실 스레딕에 싸지른 글들이 더 없."

"···자! 이게 저희 미래 건설이 겨우 두 달 만에! 총력을 다해 만든 세계 제일의 건축물!"

한우현이 내뱉은 한 마디를 덮으려는 듯, 정재선이 눈썹을 파르르 떨며.

-후웅!

-후웅!

-후웅!

무수한 빛나는 [피의 원반]을 보주에서 발사해 널찍한 은빛 금속 재질의 공간 전체를 밝혔다.

"길드 스피어! 이거 하나에만 2조는 들었다고!"

"···이렇게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군. 이 정도 규모의 부지 전체라면 표면만 덮는다 해도 무지막지한 자원이 필요하지 않나?"

"그렇죠! 하지만 저희 그룹의 적재적소에 맞는 인력과 자원의 배치로."

"대 놓고 국가 예산을 뜯어낸 데다가 한 명 한 명이 인부 수천 명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죄다 동원됐으니까."

"···그것도 내 능력이라니까! 왜 자꾸 딴지에요?!"

"농담이었다. 당연히 네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지."

"하여간 얄미워, 정말···."

-캉! 카앙!

그녀의 목소리를 흘리고선 시험 삼아 바닥을 두드려 주었다.

미스릴, 아다만툼, 오리칼쿰을 조합해 만들 수 있는 무수한 신소재들.

그 중에서도 첫 번째로 주문한, 가장 실용적이면서도 대량 생산에 적합한 것.

강력한 포스 저항력, 가벼운 무게, 신축성, 충격 흡수성까지 갖춘 [디펜시움].

막 개발된 물질을 아낌없이 사용해 만든 훈련장의 성능은, 대충 보기에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좋아. 그럼 다들 나와라."

"하아, 그 지옥의 시작이냐 또."

"억울하다 억울해."

"씨발, 그냥 다 해야지, 다 해야 해···."

그리고 그에 욕을 내뱉으며.

-척.

-척.

-척.

-척.

-척.

-척.

-척.

한우현의 뒤를 이어 나유나, 홍세희, 최윤, 장즈하오, 시하이옌, 엘리쟈 나바로, 라니아.

-척.

-척.

"모두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잘, 하겠어요!"

그리고 흰색 법복을 입은 은발적안의 여자와.

음양사 복장의 여우귀와 꼬리를 단 여자가 합류했다.

"모두들, 전투 태세 준비."

"전투 준비!"

-쉬이익!

-차라라랑!

-치리리링!

일제히 허공에 떠오른 공격대원들이, 무수한 [포스 전투술]을 온 몸에 두른 채 긴장의 안색을 띄웠다.

"제 3 사도전 시뮬레이션, 시작."

"제 3 사도의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5, 4, 3, 2···."

한우현의 전신에 거대한 거미의 형상이 덧씌워짐과 동시에, 맥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고.

"···호오. 호오오···."

훈련을 반드시 참관하고 싶다는 의사를 통해, 그들의 맨 뒤에 합류해 지켜보던.

"···하, 하하, 이런 거였나. 이런 거였어."

유진 킴이, 기계 의안을 빛내며 그 무수한 스킬들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98화 이제 조화롭게 (Now in harmony)

거대한 금속 돔.

"하!"

-콰과광!

그 안에서 무수한 굉음이 울려퍼지고선.

"흐읏!"

어둠에 휩싸여 추락하던 홍세희의 신형이 흐려지며, 손바닥을 섬세하게 비틀어 [역장]을 생성했다.

-우우웅!

동시에, 그를 통해 허공을 딛고 몸을 기묘하게 휘며 튀어올랐다.

-쉬익!

빠르게 쇄도하는 거미줄 같은 형상의 포스 줄기체들을, 하나하나 회피하며.

-쉬익!

"좋아, 그런 움직임이다!"

그 동작을 보며 한우현이 외쳤다.

무수한 포스의 스킬들이 휘몰아치는 폭풍의 중심.

-콰아아!

-콰아아!

-콰아아!

그 안에서 그가 다시금 사방팔방으로 빛의 광선을 내뿜었다.

"회피 기동!"

"회피 기동!"

장즈하오가 무릎을 꿇을 듯이 몸을 기괴하게 비틀었다가.

-쿠후웅!

앞으로 튀어나가며, 바닥에 몸을 굴렸다.

-후욱!

동시에 한우현을 둘러싸고 라니아와 엘리쟈가 주위의 [관성]과 [저항]과 [중력]을 왜곡시키며 기묘한 궤도로 비행한다.

-파아악!

나유나가 무수한 강과 바람의 줄기를 타며 그 주변을 초음속에 가까운 빠르기로 둘러싸듯 흘렀고.

-탁!

-타다닥!

-타악!

뒤이어 시호리, 시하이옌이 손바닥과 발바닥 끝에서 막대한 물리력을 발산하며 허공에서 튀어오르다가 내려앉았다.

-쿠훙!

-쿠훙!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허."

그들을 뒤에서 끊임없이 [순간 이동]으로 위치를 변경하면서도 확인하고 서포팅 스킬들을 연결하던 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미쳤는데."

"집중, 하십시오! 최윤!"

헤일로와 빛의 날개를 띄운 채, 모든 공격대원들과 연결되어 무수한 보조를 가하는 동시에.

"이 쪽입니다! 공격!"

"다시, 여기로! 저기로! 보조합니다!"

-[절대 선의]

"빈 틈입니다! [빛의 화살]!"

보조 뿐 아니라 공격까지 딜러들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적재적소에 꽂아넣고.

-팟!

-팟!

-팟!

"위치 다변화! 방향 전환합니다!"

초월적인 속도로 [순간 이동]을 발산해 그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치유합니다!"

라일리 그레인저의 존재감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쩌저적!

"하아!"

-콰아악!

그리고 라일리의 초월적인 속도로 움직이고 포착하는 눈동자가, 그 공격을 맞는 한우현과 마주친 순간.

-파아아앙!

마침내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무너졌고.

"정지합니다. 제 20차 3 사도 훈련전, 종료."

"그만, 모두 정지!"

-쿠르릉!

한우현이 크게 둘러싼 [절대 방어]의 포스 보호막이 무너지며,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들 휴식!"

"휴, 이제는 좀 할 만 하네···."

"[체왜곡]이 이제 슬슬 몸에 익어서 그런가?"

"확실히 온 몸을 슬라임 마냥 비트니까 온갖 움직임이 다 가능해."

"[입체 기동술]도 도움이 꽤 되는 거 같고."

여유가 좀 생긴 듯, 과거 훈련이 그치기가 무섭게 쓰러지듯 누웠던 모습과 비견되게도.

다들 자세를 유지한 채로 편안히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특히 라일리, 시호리."

"예, 예!"

"감사합니다."

아직은 그를 대하기 어려운 듯 말을 더듬은 시호리와 반듯한 자세의 라일리를 보았다.

"뒤늦게 합류했는데도 이렇게나 훌륭히 따라와 주다니, 정말 대단해."

"뭐, 뭘요···."

"저희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에이, 겸손 떨 것 없다요!"

엘리쟈가 밝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솔직히 우리랑 비슷하게 따라온 시호땅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라일리는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다요?"

"하하, 그러게요."

"···흥, 보스전 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나유나는 왜 자꾸 얘한테 틱틱대요? 혹시···."

"호, 혹시는 뭔? 죽을래?!"

"또··· 또오 성질 부리네에···."

"야! 넌 또 왜 지랄이야! 한 판 하자는 거지?!"

"이, 이힛."

"갑자기 왜 싸워요···!"

"늘 있는 WWE에요. 시호리는 걱정 안 해도 될 걸요?"

"아니, 그렇다기에는 너무···."

"음, 그런 거 같긴 합니다만."

"···그레인저는 정말 포스 재능이 뛰어나군. 그걸 감정으로 느꼈다?"

"아, 그랬다는 뜻은 아니고···."

"이 정도면, 이번에는 큰 문제는 없을 듯 하군."

"그으, 그 말은···?"

홍세희가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마침 저녁 시간도 된 듯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마, 마안세에!"

"헤헤, 더 괴롭혀 주셔도 되는데요···."

"미친 년아, 맞는 게 좋으면 너 혼자서 실컷 한다. 난 쉬어야겠다!"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드디어 우리도 백흑요리사에 나오는 곳들 가는구나."

"훈련만 잘 따라온다면 회식 복지 정도야 당연히 베풀어야지."

-시잉.

검과 방패를 등 뒤에 수납한 한우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코스프레 복장으로 가긴 좀 그러니, 다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1층에서 보자고."

"그, 기왕이면 제식 장비라는 멋진 표현을 씁시다."

"맞아요, 이게 공식 장빈데 코스프레라니!"

"솔직히 입고 다녀도 되잖아? 이 근처에 플레이어들이 매일 몇 만 명씩 다니는데!"

"안 그래도 외모가 눈에 띄는데, 굳이 더 어그로를 끌고 싶진 않거든."

-철컥!

문을 연 한우현은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아무튼 다들 기대해도 된다. 칠선은 중식에 있어 내가 한국 최고로 꼽는 곳이니까."

굉장히 진중한 목소리로.

* * * *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

-쨍!

-쨍!

-쨍!

"자, 건배!"

"성공적인 공략을 위하여!"

"그리고 다음 공격대장 자리를 맡게 된 우리 정훈 형이랑, 재승 형한테도!"

"건배!"

"건배!"

열 세 명의 간부들이 화려한 중화 풍의 방 안에서, 일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어휴, 이거 센데?"

"바이주가 원래 그렇지.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장향을 느껴라. 그리고 전채를 살짝 씹으면서···."

"아으, 좋은 술인 거 같긴 한데 난 별로. 뭔 메주 냄새가 나?"

"줘 봐라. 좀 먹기 좋게 해 주지."

-탁.

-착착착!

나유나의 술잔을 뺏어 든 한우현은 순식간에 설탕과 얼음, 레몬과 차를 뒤섞었다.

"자. 팬더 칵테일이라고 하지."

"···나, 나 주는 거야?"

"차슈랑 같이 먹으면 좋아."

갑자기 헤실거리는 표정을 짓는 나유나에게 술잔을 밀어주고선 고개를 돌렸다.

"또 입맛에 안 맞는 친구?"

"잠깐만, 어떻게 만드는 거야?"

"쉽다. 그냥 이렇게 레몬이랑 얼음을 섞기만 하면 돼지."

"···방금 포스 쓴 거 같은데?"

이런, 들켰나?

그가 회귀 전 세계를 떠돌며, 오염된 물을 정화하기 위해 개발했던 원심분리 기술이었다.

덤으로 칵테일을 만들 때에도 종종 쓰는.

"자, 다른 친구들도 나눠주지."

"아, 뭐야··· 나한테만 주는 게 아니었어?"

"나눠 먹어야지, 나유나. 자, 받아라."

"오, 맛있잖아! 어디 나도 한 번!"

"어디··· 뭐야, 잘 안 섞이는데?"

"줘 봐. 이렇게!"

권승환과 라니아가 서로 술을 주고받았고.

"리하오란도 요즘 바쁜가 봐."

"젠장, 오늘 밤에도 또 연락을 돌려야 하나···."

언제나 티격대던 시하이옌과 장즈하오도 편히 대화를 나누었다.

"자, 시호리도 건배! 언제나 고마워! 도사가 그렇게 유틸기가 좋은지 처음 알았다요!"

"에, 엘리쟈 씨도··· 언제나 챙겨줘서 감사하다구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다들 화려한 중식 만찬을 즐기는 가운데.

"자, 베이징덕 나왔습니다!"

"껍질은 설탕에, 껍질과 살이 붙어있는 부분은 싸서 먹어라. 그렇지 않게 먹는 놈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음식 앞에서 가장 진지한 거 같아."

"진지해야지, 인류가 만들어 낸 최고의 문화인데. 어떤 면에서는 레이드보다도 더 중요하다."

"···아하하."

"···그, 그렇죠."

차정훈과 김재승에게 진지하게 읊조린 한우현이 다시금 모두를 둘러보았다.

"아유, 근데 몇몇 못 오신 분들께 미안한데."

"그 친구들한테도 넉넉히 보너스가 나갈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뭐야, 우린 왜 안 줘!"

"작전부는 매 활동마다 특근 수당을 받고 있잖나?"

"더, 더 줘요오!"

"다 해줘도 불만이 많구나, 홍세희. 데이트 횟수를 차감할까?"

"아니, 그걸 왜 길드장이 결정해요?"

차정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다들 정말 고맙다."

모두가 적당히 식사를 진행했다고 느낀 한우현이 다시금 술잔을 높이 들었다.

"특히 차정훈, 김재승. 많이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작전부에 남아준다고 하니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아닙니다··· 솔직히 정말 무섭긴 했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니까, 어차피 우리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저것들이 밖으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길드장과 함께는 힘들어도··· 그 다음에는 역할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좋아, 내가 잘 도와 드리지! 아무래도 길드장은 계속 새 보스 잡느라 바쁠 테니까!"

"그래, 훈련부도 잘 부탁한다. 이번 기수들은 훈련 상태가 특히 좋던데?"

"인사부 애들도 이제 슬슬 적응이 다 됐거든. 완전히 시스템화 됐다 이거야."

권승환이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2 팀과 3 팀들의 모의전 상태는 어떻지?"

"아무래도 길드장이 직접 보스 역할을 하는 수준에는 못 따라오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1 사도는 충분히 딜찍누 가능할 정도야."

"좋아, 2사도는 기동성이 좋은 놈이니 다음에 내가 좀 봐줘야겠고."

고개를 끄덕인 한우현이 차정훈과 김재승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부활 보스를 계속해서 처치해 약화시킬 2팀, 3팀도 충분히 중요한 조직이지지."

여전히 망설임과 두려움이 남아는 있지만.

그 자리를 의지와 결심으로 채운 둘과 눈을 마주쳐 주었다.

"그러니 그 공격대장 자리 또한, 나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라고 할 수 있고. 계속 함께 해 주기로 결정해 줘서 고맙다."

-드르륵.

그리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며, 리하오란이 직접 공수해 준 전통 오량액주를 높이 들었다.

"권승환, 차정훈, 김재승 뿐 아니라."

한우현의 시선이 자리에 앉은 모두에게 향했다.

"너희 모두 첫 전투에서,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안다."

푸른 머리칼의 사이드 테일을 한 마법소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쟈 나바로, 필리핀에서 2주밖에 쥐지 못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힘든 여정을, 계속 따라와 주기로 결정해 줘서 고맙다."

"헤헤, 고맙다요! 그럼 치하의 의미로 키스 한 번?"

"···뭐이악?"

"자, 다음."

"읍! 뭐하는 짓이야!"

순간 정색한 나유나의 얼굴을 얼른 손바닥으로 가린 한우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여간 엘리쟈는 친화력은 좋은데 장난이 지나칠 때가 많다.

"나유나 너도 마찬가지. 너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다."

"···흥, 말로만?"

"그렇지 않으면 길드 내, 외부의 치안에 대한 관리 모두를 너한테 맡길 리가 없잖나?"

투덜대며 눈을 피하는 그녀의 머리를 계속 두드려 주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다들 마음이 흔들릴 때, 네가 나를 믿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걸 들었다."

"···뭐, 뭐어 그야. 당연한 거지이···."

살짝 얼굴을 붉힌 그녀의 앞까지 고개를 내렸다.

"언제나 고맙다."

"···내, 내가 누구때문에 일하는데···."

입술을 어물거리던 나유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음 사람에게 향했다.

"라니아. 재무부 일부터 레이드 준비까지 가장 바쁘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 주기로 결정해서 고맙고."

"뭐, 난 원래 싸우는 거 좋아해서.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었어."

별 거 아니라는 듯 피식 웃은 그녀와 눈을 마주친 한우현이 한 마디를 더해주었다.

"우준이와는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고."

"···그걸 왜 니가 참견해?"

인터넷 방송인 출신인데다가 섬세하게 조율한 커스터마이징 때문이라 그런지, 길드 내외부에서 그 인기는 가장 많은 간부였지만.

여자 경험이 많지 않은 동생이랑 붙여놓고 싶지는 않은 게 한우현의 심정이었다.

···뭐 설마 본인도 그런 생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내 마음이지. 다음. 시하이옌, 장즈하오. 이역만리에서 고생이 많다."

"그만큼 우리가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걸 입증할 수 있다면."

"헤, 저는 길드장이랑 같이 훈련하는 거 좋아서 괜찮아요!"

중국 서버의 양대 최강자들을 치하했으며.

"최윤. 이제는 왕이나 다름 없는데 이런 위험한 일에 계속 나와 주겠다니, 고맙다."

"뭐, 나도 이런 저런 책임질 놈들이 생겼으니까. 북한 애들하고도 나름 정이 들었고."

기괴한 용모의 남성이 씨익 웃었다.

"홍세희도 미국 일로 많이 바쁜 와중에 고생이 많았어."

"저, 정훈 오빠 빈 자리 채우는 거니까아···."

"그리 생각해주면 더욱 고맙고."

모두에게 한 마디를 해 준 한우현이, 마침내 이 자리를 만들게 된.

"하세가와 시호리."

차정훈과 김재승 다음으로 그가 직접 눈여겨보아야 할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일리 그레인저."

아직은 살짝 겉돌고 있는 새로운 멤버 둘.

"일본과 미국을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 있음에도, 기꺼이 가장 위험한 일을 맡아 줘서 고맙다. 그리고···"

-삐빅.

뒷주머니에서 알림이 울리는 것을 느낀 한우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중간에 일어날 예정이기는 했지만,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

-으적.

서둘러 가장 좋은 부위인 배의 껍질을 입에 넣어 주었다. 중국 본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먹어는 줄 만한 맛.

"원래는 내가 좀 더 챙겨줘야 할 텐데, 나도 너무 바빠서 그리 해 주지 못했어. 미안하다."

"아뇨, 뭘요. 충분히 잘 지내고 있는걸요."

"저, 저도요. 다들 잘 챙겨 주셔서요···!"

"그래, 아무튼 점심도 잘 먹지 못해서 많이들 배고플텐데."

-드르륵!

한우현이 의자를 끌며 헛기침을 했다.

"내일 좀 중요하게 진행할 일들이 있다 보니. 난 먼저 들어가보지."

"정계 쪽? 하여간 진짜 대단하셔."

라니아가 게살죽을 한 입 뜨며 인사를 했고.

"아, 또? 조금만 더 있다 가지···."

나유나가 아쉽다는 듯 말을 흐렸지만.

"대신 먹고 싶은 술이나 음식은 마음껏 시키도록. 모레가 레이드니까, 오늘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살짝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탁!

그의 빈 자리.

"···."

"···."

"···."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흐으음."

"···?"

"그레인저, 아니 라일리."

"네?"

그리고선 엘리쟈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 침묵을 깨고선.

"길드장이랑 지난 달에 처음 봤다고 했다요?"

"네, 그렇습니다만."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왜 그렇게 그 쪽만 길드장이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요? 이상해."

"···."

"···."

그 말에 모든 공격대원들이 살짝 공감한다는 듯, 라일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라일리만 보면 눈빛이 막 녹아내리잖아?"

엘리쟈의 장난끼 어린 질문과.

"내가 몰래 찾아봤더니,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은 물론이요 그 뒤에도 전혀 접점이 없던데···."

열 두 명의 시선 그 한 가운데서.

"대체 무슨 사이다요? 응?"

"에?"

그녀가 얼빠진 한 마디를 내뱉었다.

99화 외전. 쌀먹충 한우현 (1)

-딸칵.

어두침침한 자취방의 한 가운데, 모니터의 한 구석에서 마우스가 움직였다.

-개고기 미트볼 <- 이새끼 그래도 이그드라실은 이기는 거 같지 않냐?

-너 이 새끼 이그드라실이 좆으로 보이냐??!!!

-당연히 그건 이기지 ㅋㅋㅋㅋㅋ

-드디어 개고기 미트볼 1승 ㅋㅋㅋㅋㅋ

-와 이걸 개고기가 이기네 ㅋㅋㅋ

"씨발. 이기긴 뭘 이겨."

얼굴 이곳 저곳에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란 남자가 짜증이 가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딸칵.

그리고선 한 켠에 띄워둔 인터넷 창을 닫고, 다시금 시선의 방향을 살짝 조정했다.

그 옆의 게임 화면으로.

-항아!

-항아!

캐릭터가 방패를 휘두르는 모습에 맞춰, 스킬을 사용하며.

···스스로도 그다지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씹."

그러면서 어찌하여 이리도 무의미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깐 스스로의 과거를 반추해 보았다.

한우현.

나이 32세.

고등학교 자퇴 이후 부모의 간청으로 억지로 본 검정고시 이후 성적을 보지 않는 지방 4년제 대학교에 들어가, 7년째 휴학을 거듭하다가 제적. 따라서 학력은 고졸 (검정고시 졸).

하고 있는 일 없음. 즉 직업은 무직.

중학교 때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당한 왕따 이후 사귄 친구 없음. 따라서 현재 연락하는 친구도, 지인도 없음.

달고 있던 십 수개의 정신병으로 인해 훈련소 교육 도중 공황 증세와 자살 미수 증세 발현.

그 결과, 중도 퇴소로 현부심 면제.

-딸깍.

-딸깍.

이것이 지금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던 한우현의 이력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다지 화려한 이력은 아니었다. 추악한 이력에 가까웠지.

아마 그의 부모님 앞에서 이것들을 그대로 읊어준다면 그대로 오열하면서 울부짖을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자퇴, 학교폭력으로 인한 대인기피증, 오랜 휴학···

너무도 오랜 그의 기피 생활은 이미 부모를 충분히 실망시켰다. 더 이상 기대도, 희망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다행히도, 부모는 그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이 낡은 원룸에서나마 매달 50만원의 용돈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었으니.

물론 거기에 부모의 고혈 어린 돈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모는 회사원과 주부로 구성된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으니.

더군다나 은퇴가 가까워지고 슬슬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할 60대의 노부부.

즉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에게 매달 월세까지 100만원을 지원할 형편이 될 리가 없었다.

그가 가장 기피하는 가족인 동생의 지원이 큰 지분을 차지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한우현은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도 사회성도 좋지 못한 그와 달리, 어찌어찌 집에 용돈까지 보낼 수 있을 만큼 자기 몫을 하고 있는 동생.

-항아!

-항아!

물론 사회 부적응자들이 그러하듯이, 한우현은 그의 동생에게 전혀 감사를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한우현의 동생 또한 사람이기에, 지원해주는 자신을 오히려 기피하는 형을 기껍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동생이 그를 지원하는 유일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부모의 형편이 지나치게 어려워지지 않기를 위한 것. 즉 형보다는 부모의 마음을 신경 쓴 것이었다.

물론 한우현이 감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정말로 한 치의 인간의 마음조차 지니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나름 돈을 펑펑 쓰지는 못한다. 아무리 머리가 좋지 않더라도 집안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나름 아껴쓰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매 끼니를 라면과 치킨으로 해치우면서, 남는 돈을 모조리 더 효율적인 쌀먹을 위해 투자한다는 머저리 같은 행동이었다는 것.

그래서, 한우현은 오늘도.

-딸깍. 딸깍.

유튜브를 보면서, 너무도 재미가 없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딸깍. 딸깍. 딸깍.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2000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해 전 세계에 1억 명이 넘는 플레이어를 유지하고 있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흥행의 게임.

···이라는 것은 사실, 한우현조차도 믿지 않는 홍보 문구였다.

그는 정말이지 이 게임을 사랑했다. 동시에 이 게임을 미워했다.

멀쩡하던 자신을 - 물론, 게임을 하기 전에도 그다지 멀쩡한 편은 아니었다 - 나락으로 보냈음과 동시에, 지금 자신의 유일한 성취를 증명해주는 존재였으므로.

-항아!

콰과곽 거리는 칼이 부딪히는 듯한 효과음이 들리며 몬스터들이 일거에 쓸려나간다.

캐릭터가 강해서 그렇냐고? 아니었다. 이 정도 레벨의 플레이어라면 사냥에서 딸깍 한 번으로 몬스터들을 몰살시키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전형적인 옛날식 한국형 MMORPG였다.

몬스터를 엄청나게 많이 잡아대야 하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강화를 해야 하고, 레벨업은 쓸데없이 어려운 데다가 보스 몬스터는 잡아봤자 그다지 의미있는 보상도 주지 않는.

그럼에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게임이자 고인물들의 추억 팔이로 억지로 연명해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게임 디렉터가 부임할 때마다 전보다 더 악랄한 과금구조로 플레이어들을 빨아먹어가며.

한우현은 생각했다. 참으로 좆 같은 새끼들이었다.

좆 같은 새끼들.

좆. 좆. 좆. 좆!

"씨발!"

-쾅!

그는 갑작스럽게 분노가 가득 찬 욕설을 내뱉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게임 캐릭터가 죽어서는 아니었다. 이 병신 같은 게임은 캐릭터가 너무 강해져서 사냥 도중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유튜브에다가 넷플릭스까지 동영상을 두 개씩 보면서 사냥을 한다.

욕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실수로 점프를 하면서 이동 스킬을 너무 빠르게 눌러 스킬이 씹혀 버렸기 때문.

그러면서 자연스레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것 때문에 두 번째로 설치해야 할 스킬마저 씹혀버렸다.

쿨타임이 무려 3분이나 되는 스킬이었지만 거의 움직이지 않고도 사냥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스킬이다.

그 때문에 타이밍 마다 설치하지 않으면 쪼렙 시절마냥 일일이 캐릭터를 움직여서 사냥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고렙들 대부분은 그딴 식으로 사냥을 하느니 그냥 사냥을 3분 동안 쉬기를 선택한다.

당연하게도, 한우현은 랭커였다.

실력이 좋지는 않았고 과금을 많이 하지도 못했지만, 순전히 게임을 오래 했다는 이유 하나로 스펙이 좋아서 된 랭커.

"씨발, 씨발, 씨발, 병신 같은 게임, 병신 같은 게임···."

사실, 이렇게 사냥을 열심히 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한우현의 레벨은 294.

인게임 최고 수준은 아니었지만, 만렙이 300이고 그의 위에 있는 플레이어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최고 수준이나 다름 없었다.

레벨보다 장비의 강화나 스킬 강화가 더 중요하기에 레벨을 올린다고 해서 무조건 최고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나 한우현은 언제나 사냥을 했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사냥을 하고, 잠을 잤다.

과금도 별로 할 수 없으면서 하루에 18시간을 넘게, 때로는 20시간씩 하던 사냥.

그것이 그를 다른 미친 현질 과금쟁이들하고 비교할 수 있을 만큼의 랭킹권에 올려놓은 비결이었다.

아, 랭커라면 인 게임에서 좀 돈을 벌 수 있지 않냐고?

안타깝게도 최근 사탄의 협곡인지 사탄의 화장실인지, 아무튼 그런 이름의 컨텐츠를 제작자가 출시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골드 보상으로 인해 게임 머니 시세가 반의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그 전부터도 계속해서 골드 시세가 내려갔기에 현금으로 바꾸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빨리 물통 거래를 했어야 할 일이었다.

어차피 게임의 유저 수도 줄고 악명만이 높아지는 상황. 기다리면 언젠가 골드값이 오를 것이라는 망상은 헛된 것이었으니까.

쓰레기 같은 운영진 새끼들, 하여간 유저들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 생계가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튼, 올 한 해는 그 때문에 돈이 너무도 부족했기에.

한우현은 사냥에 집착하고 있었다.

오직 사냥의 시간만이 한우현이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사냥은 한우현의 성실성을 의미했으며 무가치하게 돈을 쏟아붓는 멍청이들보다 그래도 그가 조금이라도 나은 플레이어로 느껴지게 했다.

물론 돈보다 소중한 재화가 시간이라는 것은 그에게는 전혀 와 닿지 못하는 진리였다.

돈은 언제나 부족했으며 시간은 언제나 남아도는 것이 백수의 삶이다. 한우현이 시간 또한 한계가 있고 적절히 배분해야 할 재화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설령 알고 있었다 해도 무시했을 것이다.

"씨발, 좆병신 게임 진짜, 이딴 버그가 왜 아직도···."

그리고 위의 스킬 설치 순서는 랭커 뿐만이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들이 자주 쓰는 콤보였다. 당연히 다른 플레이어들도 자주 저런 스킬 씹힘에 걸려들었다. 스킬 업데이트가 이뤄진 지 2달이 지났음에도 버그는 고쳐지지 않았다.

매일 같이 게임 커뮤니티에 디렉터와 버그 팀의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쌍욕이 올라와도 매크로 답변만이 올라올 뿐.

최근에 글로벌 서버인가? 미국의 최초 만렙 달성자가 그 레벨에 오르기 직전 사냥을 멈추고 게임 전반에 대한 장문의 비판을 가했었다고 하던데.

그런 퍼포먼스마저도 들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참. 여전히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랭커들이 아무리 지랄을 해도 버그를 고쳐 줄 생각은 없나 보다.

플레이어들의 수준에 맞게도, 게임 유지 보수 팀들 또한 일을 성실히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일까?

지나치게 노후화 된 게임이라 스파게티 코드로 뒤엉켜 제대로 된 게임 패치가 불가능해지기라도 한 건가?

별 의미 없는 추측이었다.

-우우웅.

분노에 가득 찬 한우현은 신경질적으로 게임을 껐다. 이미 한참 옛날에 다 본 게임 유튜버와 넷플릭스 또한 마찬가지로 종료했다.

-클릭. 클릭.

이렇게 좆 같을 때에는 인터넷에서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 그나마 편안한 잠자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시각은 새벽 6시. 그가 평소에 막 침대에 눕는 시간이었다.

[제목 : 좆좆좆 이 새끼는 대체 점프 설치 버그 언제 고치는 거냐?]

[작성자 : 무명의 유저]

[혹시 게임 개발자들 눈앞에서 버그 고치면 죽인다고 누가 애미애비 잡고 광신의 광검 대기 중이냐? 그러면 ㅇㅈ한다.]

···구태여 이미 털린 신상의 게임 캐릭터를 티 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익명으로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딸깍.

다행히 새벽 시간이라 글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다른 게임 폐인들이 금방 반응을 보여주었다.

[덧글]

[공원의노리쨩 : 그러게 나처럼 마법사 하라니까? ㅋㅋㅋ 광신의광검 타령하는 거 보니까 성기사 같은데 왜 그딴 걸 키워?]

[용기사버프좀 : 아니 그거 6시간 이상 접속할 때만 나오는 버근데? 새벽에는 좀 자라 ;; 니도 쓰레기 직업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맑은눈의광인 : 팩트는 이그드라실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거지. 난 잘만 하고 있는데 꼬우면 꺼지시던가.]

[최선의힐은선제공격 : 그냥 당분간 사냥 하지 마라 나도 그거 땜에 보스만 잡는다 요즘. 개 좆 버러지 같은 게임 이게 다 짱깨들 작업장 때문이지.]

[녜힁 : 꼬우면 제발 돈 좀 써 줘 ㅋㅋㅋㅋ 광검? 이 새끼 그 성기사 랭커 아니냐? 이 시간에 겜 하는 성기사면 킹리적 갓심인데 앰생 버러지 새끼 ㅋㅋㅋ]

평일 오후 2시부터 게임 공식 홈페이지에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

당연하게도 그와 비슷한 인간 군상들이었다.

익숙한 닉네임들. 익숙한 불평.

얼핏 보기에는 그에게 꼽을 주는 것 같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우현처럼 게임과 인터넷을 오래하는 사람들은 덧글에서 나온 행간을 해석할 줄 아는 특수한 능력을 각성한다.

[공원의노리쨩 : 그러게 나처럼 마법사 하라니까? ㅋㅋㅋ 광신의광검 타령하는 거 보니까 성기사 같은데 왜 그딴 걸 키워?]

첫 번째 덧글은 내 직업이 부럽다는 반어법이다.

[용기사버프좀 : 아니 그거 6시간 이상 접속할 때만 나오는 버근데? 새벽에는 좀 자라 ;; 니도 쓰레기 직업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두 번째 덧글은 한우현의 성실성과 노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맑은눈의광인 : 팩트는 이그드라실이 건강해지고 있다는 거지. 난 잘만 하고 있는데 꼬우면 꺼지시던가.]

세 번째 덧글은 최근 최약체에서 최강체로 부상한 [전자기인]의 능력치 보정 패치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놈이었다. 상대방을 긁기 위한 목적의 저열한 감정 발산에 불과하니 신경 쓸 가치도 없었고.

[최선의힐은선제공격 : 그냥 당분간 사냥 하지 마라 나도 그거 땜에 보스만 잡는다 요즘. 개 좆 버러지 같은 게임 이게 다 짱깨들 작업장 때문이지.]

네 번째 덧글은 사실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는 다소 정직한 표현이었다. 정말로 말 그대로였으므로.

···물론 그 뒤의 뜬금없는 중국 혐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말이기는 했지만, 저 놈은 숨 쉬듯이 중국 타령을 해 대는 광인으로 유명했으니 두 번째 문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녜힁 : 꼬우면 제발 돈 좀 써 줘 ㅋㅋㅋㅋ 현질을 안 하니까 게임사가 패치를 못 하지. 근데 광검? 이 새끼 그 성기사 랭커 아니냐? 이 시간에 겜하는 성기사면 킹리적 갓심인데 앰생 버러지 새끼 ㅋㅋㅋ]

마지막 덧글은··· 굉장히 날카로운 통찰력을 발휘한 듯 하기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읽지 않았다. 좆 같은 새끼. 돈 많아서 좋겠다.

-딸칵.

어쨌든, 그 모든 덧글들은 한우현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조언이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보스를 지독하게도 출시하지 않는 전형적인 느려터진 패치 주기의 게임이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랭커들이 보스 몬스터들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플레이하고 수억을 꼴아박은 정신병자 랭커들. 그들은 정상적인 강화 체계를 비비꼬아 어떻게든 말도 안 되는 스펙의 장비로 온 장비창을 도배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일반 유저들과 랭커들의 격차는 하늘과 땅보다 컸다. 그리고 그 랭커들은 자신들의 직위와 장비의 가치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랭커 유튜버들은 하나같이 장비 가치 보존을 외치며 게임사를 압박했다.

고일대로 고인 다른 유저들 또한 상위 장비나 주문서, 강화가 나와 자기들의 아이템이 똥값으로 전락하기를 원치 않았다.

안 그래도 개발력이 허덕이는 게임사 입장에서도 기꺼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새로운 보스가 출시되지 않았다.

그게 너무 길어서, 이제는 랭커들조차도 짜증을 낼 정도로.

맨날 새로운 과금 모델만 내는 데에는 열심이더니 슬슬 보스를 낼 때가 되지 않았냐는 물음에는 매크로 답변만이 날아올 정도였다.

그래서, 남은 보스들은 한우현 그의 입장에서는 사냥할 가치가 그다지 없었다.

돈이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미도 없었고.

"···씨발, 사람 없네."

딴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새로고침을 했지만, 더 이상 덧글이 달리지 않았다.

하긴 게임 자체가 망해가는 판국인데다가 최근에는 정상화 패치 이후 온 인터넷이 AI 영상과 노래들을 찍어내며 게임 유저들을 조롱하는 판국이었으니.

아무리 정신병자 게임 폐인들이라고는 해도 요즘은 인터넷 활동이 주는 추세였다. 이그드라실 얘기만 하면 쌀먹충이라고 두들겨맞으며 괴상한 노래를 듣기 일쑤니까.

오히려 이 새벽 시간에 네임드 유저가 다섯이나 덧글을 달았다는 게 평소보다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

"내일 물통이나 좀 팔아야지···."

거의 빈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한우현은 잠이나 자기로 결정했다.

"아, 쌀값 진짜, 협곡 씨발···."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세상이 망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도 못 한 채로.

100화 외전. 쌀먹충 한우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