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외전. 쌀먹충 한우현 (2)
-꿈틀.
이불이 바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으음."
한우현은 눈을 떴다.
다행히 아침 - 세간 사람들은 그것을 저녁이라고 부른다 - 에 종종 그를 기분 나쁘게 하는 햇볕은 없었다. 기분 좋게 어둑어둑한 밝기가 그를 맞이했다.
-덜컥.
일어나면 매번 해야 할 일을 수행하듯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어제 먹다 남은 즉석밥을 꺼내려다가 그 행동을 멈췄다.
"···어."
한우현은 뭔가 신체에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손을 좀 더 많이 뻗었어야 냉장고 안 쪽까지 손이 닿았을 것이다.
-휘적. 휘적.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팔이 너무 빠르게 냉장고 깊숙이까지 팔이 들어갔다.
마치 컴퓨터를 키고 마우스를 움직이는데, 마우스가 너무 빨라서 컨트롤이 어려운 느낌이었다.
"뭐야, 정신이 덜 들었··· 나?"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은 한우현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아, 이이, 아에이오우? 뭐야?"
마치 성우와도 같은 미성이었다. 발음이 너무나도 또렷하고 부드러웠다. 교양이 부족한 한우현은 잘 몰랐지만 마치 성가대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스윽. 스윽.
당황한 한우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거기에는 몇 달 동안이나 깎지 않아 지저분하게 자랐던 수염이 전혀 만져지지 않았다. 마치 백옥같이 부드러운 피부였다.
"뭐, 뭐야? 뭔데 씨발. 이게 뭐야?"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우현이 자기 전에 수염을 깎았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자기 전에 무언가를 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간이었다. 그것은 면도, 샤워, 세수 등 청결에 관련된 것에 특히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한 달, 여의치 않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이나 씻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온 몸이 너무 끈적해서 도저히 버티기 어려울 때에나.
-드르륵!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객관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그다지 마주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저벅, 저벅!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거울 앞에 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예 방 전체에 거울은 화장실에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
-드르륵!
하지만 이 같이 영문이 모를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거울이 필요했다.
-타악!
스스로의 모습을 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한우현이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갈 정도로.
"···."
빠르게 달려들어간 화장실의 거울 안에는 처음 보는 사람의 형상이.
그러나 분명히, 익숙한 모습의 얼굴이 있었다.
"···성기사?"
금발청안의 미소년. 어지간한 서양 모델이나 영화 배우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비현실적인 외모. 160cm대의 키와 90kg을 넘어가던 한우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
그가 10년에 걸쳐 섬세하게 커스터마이징한 성기사 캐릭터 [아서]를, 지나치게 빼다박은 얼굴이었다.
"뭔, 미친?"
그리고 이 상황은, 아무리 평소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잘생겨졌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하던 사람이라도.
"···아니, 아니지 이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야 당연하게도, 그 누구라도 갑작스럽게 자기가 왠 잘생긴 서양인의 몸에서 일어나면 좋다고 환호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한우현이 아무리 게임 폐인이라도 거기에다가 잘 되었다고 환호할 정도의 정신병자는 아니었다.
"이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그렇기에 한우현이 처음으로 든 생각은 현실 부정이었다.
요즘 너무 수면 리듬을 개판으로 해서 환각을 보는 것인가, 라는 의심도 했다. 그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미친 과학자가 잠이 든 사이에 그의 뇌를 잘생긴 서양인에게 꺼내서 갈아끼웠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현실성 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했기에.
-딸깍!
평소라면 늘 그랬듯이 밥을 먹고서는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켰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우현은 20살 이후 처음으로 일어나자마자 게임을 실행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간만에 검색 포털 홈페이지를 열었다.
"으, 으음."
변신? 환각? 뭐라고 검색을 해야 할까. 망설이며 검색어를 고민하던 한우현은 곧이어 생각을 멈췄다.
"···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본 순간, 검색을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실시간 검색어]
[1. 베이징 테러]
[2. 중국 주석]
[3.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4. 이그드라실 게임사]
[5. 이그드라실 개발자]
[6.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캐릭터]
[7. 변신]
[8.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랭커]
[9. 초능력]
[10. 미국 대통령 담화]
3번 이후까지의 검색어는 그래도 그의 빈약한 지능으로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다.
이 기괴한 현상은 한우현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만약 혼자만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는 어찌할 줄 몰라 벌벌 떨기만 했을 것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최소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뭔가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도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뭐야."
그러나 그 위의 검색어가 그를 보다 충격에 빠뜨렸다.
"중국, 테러?"
한우현은 세계 정세에 그다지 크게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과 미국의 무역 전쟁이 어쨌느니, 유럽의 관세 정책이 어쨌느니 하는 것에 관심이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한우현이 예외로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유명한 게임이 당연히 가지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작업장이라는 것이다.
수십 수백만의 봇 캐릭터들을 돌려 인 게임 경제를 망가뜨리는 악성 플레이어들. 아니 플레이어라기보다는 암 종양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망겜이 그러하듯, 아니 대부분의 게임이 그러하듯이.
작업장과 봇을 잘 잡는 운영을 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어지간한 세계 규모의 다른 명작 게임 운영사들도 골머리를 앓는 문제였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같이 오래되고 노후화된 게임의 운영사가 잘 대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랭커들 뿐만이 아니라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유저 대부분은 작업장과, 그 작업장을 운영하는 국적의 플레이어들을 혐오했다.
구체적으로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인들을 혐오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알겠지만 그러한 작업장은 당연히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이 사악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인건비가 싸니까 개발도상국에서 작업장을 많이 돌리는 것일 뿐이었지.
하지만 그렇게 깊이 생각할 필요성은 대부분의 월드 오브 위그드라실 플레이어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이그드라실 플레이어 대부분은 인게임 채팅으로 매일같이 중국을 욕하면서 혐오적인 언사를 행하는 인간들이었다.
"으, 음."
그래서 한우현은 약간의 통쾌감을 느끼면서도, 약간의 의문과 공포를 느끼며 뉴스를 클릭했다.
-딸깍.
[속보입니다. 오늘 저녁, 중국 베이징에서 대규모의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베이징의 현장은 참혹합니다. 중국 주석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부분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며...]
화면에 뭔가 희미한 시멘트와 돌 덩어리들이 한 가득 비춰진다.
저게 뭐지?
한우현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분명 아나운서는 베이징이라고 했다. 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것은 마치 거대한 거인이 꼼꼼히 즈려밟은 듯한 시멘트 바닥 뿐이었다.
거기에 뭔가 붉고 하얀 얼룩들만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한우현은 베이징에 뭐가 있고, 파리에 뭐가 있고 하는 것을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대학교도 한 번도 다니지 않고 휴학한 한우현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베이징에 자금성이 있다는 사실과, 거기에 중국의 초대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보통 중국에 대한 뉴스나 영상이 나온다면 거기가 가장 먼저 나오므로 공부를 못 하더라도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런데 저 뉴스 화면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지나갔나···?"
[지금 이 곳은 믿기 어렵겠지만 한 때 자금성이었던 터입니다.]
아.
뒤로 감기와 앞으로 감기를 반복한 끝에 한우현은 자기가 예측했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단 것이다.
뉴스는 줄곧 중국 공산당과 자금성이 있던 곳을 자료 화면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있'었'던 곳을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
[전 세계 곳곳에서 산발적인 테러가 일어나는 가운데 처음으로 일어난 국가 수반에 대한 테러로 현재···]
-딸깍.
한우현은 멍해진 기분으로 마우스를 눌러 영상을 멈췄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을 힘겹게 움직여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유저들이 사용하는, 한국 최대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트래픽이 지나치게 많아 접속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딸깍.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트래픽이 지나치게 많아 접속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딸깍.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트래픽이 지나치게 많아 접속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딸깍.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한우현은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 있었다.
"우, 우욱."
사진이 첨부된 게시물을 클릭한 한우현은 황급히 뒤로 가기를 눌렀다.
지나치게 잔인한 사진이 올라왔기에 역겨워서.
"이, 이게 다 뭐야."
그리고 그것 뿐 아니라, 너무도 많은 게시물들이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무수한 광기의 현장.
[좆 됐다 좆 됐다 좆 됐다 좆 됐다]
[중국 간 놈 진짜 미친새끼임?]
[정상화 ON! 사진 인증한다 zzz]
[아니 씨발 진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임?]
어제까지의 한산하던 망겜의 게시판과 달리, 게시물들은 초 단위로 수백 개가 올라오고 있었다.
[게임 운영자들 뭐해 씨발 니들이 설명해야지]
[개발자들은 마라엽떡뚱카롱 먹느라 바쁜데 이런 짓을 어케 함 ㅋㅋㅋ]
[ㅋㅋㅋ 이제 우리 세상이다 좆반인들 컷 컷 컷!]
"···이런 씨발."
몇 번 클릭을 하던 한우현은 이내 유의미한 정보를 뽑아내기를 포기했다.
하나하나가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혐오스러운 사진들이 가득했으며, 지리멸렬하게 분열된 언어들이 나열되어 있어서.
[오늘 나한테 깝치는 양아치 새끼들 전부 찢어죽였음 ㅋㅋ 잘했으면 추천 부탁]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공부 말고 게임이나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ㅋㅋ]
[미친 놈들아 제발 정신 차려 가만히 있으라고 이게 무슨 짓이야]
[스트레스 풀 겸 동네 뒷산 하나 날렸다 시원하지?]
[이제 현실에서 물통 팔아야징 헤헹]
대부분을 넘어서, 거의 모든 게시물들이 저열한 광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ㅋㅋ 버러지들 '창세의빛'으로 시원하게 지우고 옴 ㅁㅌㅊ?]
그러다가 한우현은 덧글이 1만 개가 넘어가는 오늘의 인기 글을 클릭하였다. 불과 30분 전에 작성된 글.
"···뭐지 이건."
어지간히 어그로를 끄는 글들도, 지나칠 만치 도배되는 다른 광기 어린 글들에 밀려 조회수가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겨우 30분 전에 작성된 글이 어떻게 덧글이 1만 개가 넘어가는가? 클릭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최선의 힐?"
인기 게시물의 작성자는 아는 놈이었다. 어제 그에게 덧글을 달아준, 나름 유명한 사제 유저.
"이 정신병자 새끼가 왜···."
물론 긍정적으로 유명한 유저는 아니었다.
매일 같이 인간의 사악함과 안락사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정신병자였으므로.
한우현도 그가 매일같이 싸 대는 뻘글의 존재만 알았을 뿐 그다지 친한 유저는 아니었기에, 그냥 흔한 반사회 성향을 드러내는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최선의힐은선제공격 : ㅋㅋ 참교육 사진들 인증한다 감상 후기 남겨라]
그러니까, 하늘에 떠서 사제 140레벨 궁극기 스킬인 '창세의 빛'을 마구 내려 인간과 건물들을 장난감처럼 부수는 사진들을 보고 나서야.
"···미친."
한우현은 비로소 세상이 제대로 좆 됐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드르륵.
동시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넋을 놓고 스크롤을 내렸다.
서버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너무나도 긴 로딩시간. 하지만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
-드르륵.
사진은 하나같이 비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기가 베이징에 도착했음을 인증하는 듯한 브이자 인증샷과 중국 초대 주석의 초상화.
그리고 번쩍이는 빛과 경악하는 듯한 주변의 중국인들.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는 듯 했지만 스킬을 쓰는 사제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애초에 사람을 노렸다기보다는 공간 자체를 으깨려고 하는 듯 했으니.
-드르륵.
물론 그것이 도망치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스킬에 휘말리지 않았다 해도 주변 건물들이 죄다 붕괴되고 지반이 뒤흔들리는 데 어떻게 살아남는가?
사진을 보던 한우현은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을 것임을 직감했다.
파괴.
사진의 시점이 점점 높아진다.
파괴.
시야 전체에 건물 수백 개가 들어오고, 그것들이 모조리 다 무너진다.
파괴. 파괴!
이건 테러 따위가 아니었다.
캐릭터 네임 '최선의힐은선제공격'은 그냥 스킬을 보이는 모든 곳에다가 난사했다.
-드르륵.
딱히 무엇을 노린 게 아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자금성에 도착한 뒤, 그 주위에 있는 크고 중요해보인다 싶은 건물은 죄다 부쉈다!
천천히 [신성의 날개]라는 사제의 공중 이동기로 떠오르면서, 폭격을 하듯이 스킬을 퍼부은 것이다.
아이디에서 알 수 있듯이 '최선의힐은선제공격'이라는 사제는 힐러로서의 서포팅 트리보다는 딜러 트리를 탄 유저로 보였다.
사제는 원래 힐러 직업이지만, 게임의 병신 같은 설계 구조 때문에 사냥이 너무도 힘들어지자 딜러 트리가 생겨났으므로 충분히 그럴 만한 추측이었다.
"···다, 진짜라고."
사제는 만족할 만큼 부순 다음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몇 번씩 차원관문을 열고, 순간이동을 거듭하며 바다를 건너는 사진을 남기며.
마지막으로는 거기다가 즐겁다는 듯이 인증 샷을 남겼다.
푸르딩딩한 피부색과 기괴할 정도로 큰 입과 눈을 크게 만들어 웃는 사진을.
마치 옛날에 유행했던 일본의 인디 공포 게임에 나오는 듯한 귀신의 형상이었다. 고인물들이 흔히 별로 할 게 없다고 생각될 때 하곤 하는 다른 게임을 캐릭터들을 따라하는 커스터마이징 룩.
분명 게임에서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게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플레이하던 유저 중 랭커는.
모두 현실에서도 그 캐릭터가 되었다. 그들이 쓰던 스킬을 모두 쓸 수 있게 된 채로.
"그럼, 나도?"
한우현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소식들 때문에 자기도 변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상태창!"
===
캐릭터 네임 : 아서
캐릭터 랭킹 : 101위 (현재 전체 플레이어 수 : 102만 2941명)
직업 : 성기사
레벨 : 294
HP : 90493 MP : 40032
근력 : 90939 민첩 : 46375
지능 : 48323 건강 : 47934
감각 : 46384 매력 : 45988
···
전투력 : 9억 8235만 2038
···
···
===
당연히, 상태창이 자연스레 나왔다.
하지만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태창의 내용 자체는 자기도 다 아는 내용이었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특별히 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이그드라실의 상태창은 지나치게 무의미한 정보가 많아 이걸로는 뭔가를 파악하기에 어려웠다.
직접 시험을 해 보아야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테면, 스킬이라던가.
"으음. 어떻게···."
한우현은 당장이라도 스킬들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게시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제목 : 아니 씨발 좆병신같네 왜 나만 룩 이따구임?]
[작성자 : wkdfowoe]
[(머리카락만 빨갛게 변한 채 얼굴을 가리고 찍은 셀카 사진)]
[아니 변할 거면 차라리 다 변하던가 왜 머리색만?]
[덧글]
[ciooekd : 쪼렙이라 그럼]
[riirkfll : 보니까 200렙이면 엄청 낮은 건 아닌 거 같은데 겨우 저거만?]
[tydivu : 200부터 변하기 시작하고 250부터 캐릭터랑 비슷해짐]
그걸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유저가 1억 명에 달하는 거대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정신병자들이 1억 명이나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 때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정말로 초등학생들부터 중년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던 국민 게임이었다. 한국에서는 특히 그러했고, 세계적으로도 꽤나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며 과금 구조가 악랄해졌고, 디렉터가 바뀔 때마다 유저들이 줄어들었다.
그 유저들은 방학 같은 이벤트 시즌에 종종 돌아오곤 했지만 계속 정착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 결과 한 번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해 본 사람들은 정말로 많았지만, 지금도 꾸준히 플레이하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계정 수에 비해 극도로 적었다.
즉, 정말로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이 죄다 캐릭터로 변했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인은 캐릭터로 변할 사람이 안 변할 사람보다 많았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럼 엄청 많진 않을 수도."
그러나 저 말대로라면, 그렇지 않았다.
방학 때나 간혹 들어왔거나 한창 옛날에 잠깐 플레이했던 유저라면 200레벨까지 육성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병신 같은 게임 답게 200레벨이 되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컨텐츠는 즐길 수 없었다. 즉 대부분의 뉴비는 대부분이 그 전에 폐사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200레벨대라면 이미 꽤나 하드한 플레이어였고, 250레벨을 넘어선다면 어지간히 시간이 남아도는 앰생이거나 돈이 썩어나는 멍청이어야만 했다. 당연하게도 그런 플레이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좋은 건가···?"
처음에는 당황스럽게 느껴졌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한우현 그 자신에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외모는 물론이요 능력까지 과거의 한우현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우현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변해버린 이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면 그것은 특별하지 않았겠지만, 보아하니 그 정도로 많지는 않다.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감정.
특별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294 레벨의 랭커의 머리 속에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금 떠올랐다.
감히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미명 하에 초등학생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오래된, 열망.
한우현 또한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잘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히, 히히."
무의식적으로 한우현은 바보처럼 웃었다.
웃은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것으로 보였다. 하긴 게임이 아무리 즐거워도, 키보드와 마우스를 그다지 많이 누르지도 않고 3분마다 스킬을 한 번씩 누르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정신구조라고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우현은 사냥에 재미보다는 의무감만을 느꼈다.
당연히 웃음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었고, 언제나 혼자였으므로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혼잣말만이 그가 하는 언어의 전부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한우현의 마음 속에 들어찼다.
-덜컹!
한우현은 다급하게 옷장을 열고 뒤졌다. 마지막을 외출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에, 외출복들은 변변찮은 것이 없었다.
전 같으면 상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한우현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지나가다가 보면 넋을 놓을 정도로 잘 생긴 미소년 백인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럴 듯하게 입고 싶었다.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혹시 나가서 묘령의 미녀가 그를 보고 매달릴지도 모른다는 음습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우현은 열심히 옷장을 뒤진 끝에, 그가 지금 입을 만한 그럴 듯한 옷은 한 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밥 값도 모자란데 나가지도 않을 옷을 그가 사 둘 리가 없었으므로.
결국 한우현은 현실과 타협하기로 결심했다. 집 안에서 속옷으로 쓰는 검은 반팔을 입고 그 위에 헐렁대는 츄리닝을 입었다.
"···생각보단 괜찮네."
의외로 그렇게까지 추레하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실이었지만 패션의 시작은 몸매요 완성은 얼굴이었으니.
아마 트렁크 팬티만 입었어도 한우현은 모델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아무튼 거울을 본 한우현은 애써 납득하고선 집 밖으로 나섰다.
외출을 결심한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원룸 빌라를 나서자 마자, 한우현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
"···."
거리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막 해가 지긴 했지만, 지금 시각은 막 저녁과 밤의 사이라고 할 만한 시간. 한창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저녁을 해결하는 시간이었다.
한우현이 사는 경기도 북부의 빌라촌은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지만 근처에 지하철 역과 술집이 위치해 언제나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있다가도 한우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슬슬 피하더니 사라졌다.
"뭐, 뭐야."
한우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그가 무슨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처럼 지나다니기만 해도 여자들이 줄을 서는 것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 때 그런 망상을 자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들이 그리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남자라고 다르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최소한 호감형 얼굴과 몸이라고 생각했다. 한우현은 당연히 힐끔대는 부러움과 동경의 시선을 기대했다.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 망상에 시달리는 것인가? 사실 이 모든 게 내 착각이었나? 나는 그냥 뚱뚱하고 못생긴 병신일 뿐인가?
-스윽.
지하철 역까지 걸어간 한우현은 다시 한 번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으, 으음."
다시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생긴 얼굴. 8등신을 넘어 9등신이 아닌가 의심되는 머리와 신체의 비율. 한우현의 생각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진짠데."
그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착각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게임이 현실이 된 게 모두 한우현의 망상에 불과했다고 해도, 최소한 지금 본인의 모습은 진짜였다.
결국 한우현은 위대한 결심을 내렸다.
바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그것은 조금 어색할지라도, 절대로 위대한 결심이라 표현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우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퇴 이후로는 모르는 사람은 커녕 아는 사람인 가족과의 대화도 꺼렸으므로. 심지어 최근 몇 달 동안 그는 아예 말이라는 것 자체를 혼잣말 말고는 한 적이 없었다.
마침 막 지하철 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나오는 사람이 한우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휴대폰에 코를 박을 듯이 얼굴을 붙이고서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착각인지, 피해망상인지. 행인이 한우현을 잠깐 쳐다보고는 모르는 척 하는 것 같았다.
"저."
-휘익!
행인은 거의 달리는 듯한 속도로.
아니, 정말로 달려서 한우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요."
안타깝게도, 한우현의 육체는 전과 같이 비루하고 뚱뚱하고 느려터진 몸이 아니었다.
캐릭터인지 뭔지 아무튼 변하면서, 적응하기 힘들 정도의 반사신경과 근력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지독하게 사회성이 없고 눈치가 없는 한유현이라도 노골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표정은 눈치 챌 수 밖에 없었다.
"···도망?"
그것은 공포였다.
101화. 외전. 쌀먹충 한우현 (3)
한우현이 처음부터 사회 부적응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적지만 나름 친구도 있었고, 공부도 중간 정도는 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그러던 그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시절부터였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순수했지만, 그만큼 순수했기에 때로는 악의에 가득 찬 행동을 쉽사리 벌이기도 했다.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다른 여러 이유도 많았다. 선천적인 비염이라던가, 여드름으로 좋지 않은 피부, 그다지 좋지 못했던 소통 능력이나 대화에서의 단어 선택 등···.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사소한 핑계였지만,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학교폭력은 한우현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학창 시절 그는 언제나 이사를 가고 전학을 가고 싶어했지만 한우현의 가정은 이사를 마음대로 가기에는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따라서 한우현은 3년만, 2년만, 1년만을 생각하며 억지로 버텼다. 중학교는 끝이란 게 있으므로.
마침내 고등학교에 들어왔을 때, 한우현은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우현은 은따가 되었다. 조용한 왕따.
고등학생들은 중학생 시절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성숙한 아이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함부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상당히 줄어든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한우현이 간 고등학교는 부모가 나름 신경을 썼기에 학생들의 폭력성이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우현이 학창 시절에 얻었던 행운의 끝이었다.
"씨발···."
기나긴 시간동안 당했던 학교폭력은 한우현의 자존감과 소통능력, 공감능력을 송두리째 앗아가기에는 충분했다. 한우현은 친구와 소통하는 법을 몰랐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했던 게임과 인게임에서 타 길드원들과 벌이는 키보드 배틀이 다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당연히 그렇게 오래된 게임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는 연예인도, 가수도, 노래도, 게임도, 기존의 친구들도 없던 한우현은 당연히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의 주제를 찾기 어려웠다.
맥락 없는 대화 주제, 알아듣기 힘든 발음, 남들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는 피해 망상, 비대한 체구로 나는 땀 냄새까지.
이는 고등학교 내에서 비주류들만 모였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들마저도 꺼릴 만한 특성이었다. 오타쿠 그룹들도 취미가 비주류인 것이지, 사회성이 비주류인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따라서 한우현은 고등학교 생활마저도 은은한 경멸과 불편함의 시선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소통 능력과 사회적 능력은 더욱 더 내려갔다.
하지만 유일하게 하나 생겨난 뛰어난 능력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많은 소극적인 사회 부적응자들은 그저 도피를 선택한다. 그러니까, 그냥 혼자 있기를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냥 불편함이 아니라, 공포에 젖은 시선이라면. 그것은 거리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강렬한 감정이다.
처음 보는 감정이라서 생소했지만 처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한우현이 중학생 시절 학교에 가기 전마다 거울을 보았을 때 그가 자연스레 지었던 표정이었으므로.
"왜, 왜···?"
누군가가 한우현을 보고 공포를 느낀다니. 한우현은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준비해 두었던 말을 모조리 잊었다.
한우현 같이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사람을 만나기 전에 대화할 단어들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이는 가족들과의 대화에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엄정한 규칙이었다.
한우현은 나름 상대의 여러 반응에 따라 했어야 할 말을 준비해 두었었다. 동경과 선망의 말투라면 살짝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고마움, 경멸과 비난이라면 미안하다고 하는 어조의 인사, 그냥 귀찮다는 반응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실수라는 변명···
공포와 도망은 그 중 어디에도 준비하지 않았던 경우의 수였다.
물론 학창 시절에도 그를 보고 도망갔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를 보았을 때 놀리면서 하는 도망가는 척이었다.
재미를 위한 것이지, 정말로 공포를 느껴서 가는 도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번은 아니었다.
정말로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듯한 도망이었다.
"착, 각이겠지···?"
한우현은 분명히 사회 부적응자고 소통 부적응자였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멍청한 존재는 아니었다. 이는 그 자신이 많은 인터넷과 게임 폐인들과는 다른, 주제를 아는 능력이라고 자부하는 부분이었다.
너무나도 오래 남의 표정을 읽고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당황을 공포로 해석하는 것은, 한우현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있을 법한 실수였다.
어쩌면 그를 사이비로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했다. 너무 잘생긴 외국인이 인사를 하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럴 수 있었다.
남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언제 당해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특히 이번처럼 평소보다 큰 용기를 낸 날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한우현은 이번에도 거부당한다면,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다.
-스윽.
-스윽.
그리고 더 큰 전진을 위해 그는 시선을 돌려 새로운 대상을 물색했다. 지금의 그는, 스스로도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해 이 바뀜을 남에게 확인받아 확신을 얻고자 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우현 자신이 보기에는 잘생긴 남자였다.
따라서 한우현은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그의 인생에서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할 행동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어머니나 선생님 같은 대화를 했던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한우현이 생각하는 여자라는 생명체의 정의하고는 조금 다른 상대였다.
거기에는 여성에 대한 조금 음습한 망상과, 확실한 거부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좌절감이 뒤섞여 있었다.
한우현은 구부정한 자세와 익숙하지 않은 고개의 움직임으로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탁!
-탁!
-타닥!
주위의 모든 가게와 식당, 편의점 등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손님이 있던 곳들도 기겁을 하며 손님들이 달아났고 사장이 황급히 불을 껐다.
-타악!
-타악!
꺼지지 않는 곳은 전자동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지하철 역사와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뿐이었다.
"···음."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한우현은 가만히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인내심을 소요하는 작업이었다. 한우현 같이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이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스킬을 써보자고 결심했다.
어떻게 써야 할까? 한우현은 고민했다. 그가 본 스킬을 쓰는 실제 인물은 중국에서 학살을 저지른 사제인 '최선의힐은선제공격' 뿐이었다. 그것은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 뿐이었기에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있는 매체라고 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한우현은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전통적인 마법을 쓰는 수단을 떠올리고 말했다.
"여, 여, 여왕의 방, 패!"
그의 주 캐릭터이자 현재 모습의 직업인 성기사는, 설정상 여왕이라는 대륙의 수호자를 모시는 기사였다. 주력기는 타이밍에 맞춰서 쓰면 5초에 달하는 무적 상태를 부여해 주는 여왕의 방패.
스킬의 쿨타임이 6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상시 무적기나 다름없는 터무니없이 강력한 사기 스킬이었다.
당연하지만 유일하게 상시 무적기를 가진 직업은 다른 유저들에게 원성을 샀고, 그의 직업인 성기사는 너프를 받았다. 상징이나 다름 없는 무적기는 그대로 둔 채 딜링 능력이 반토막 났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한우현은 애초에 그 무적기 하나를 보고 선택한 직업이었으므로.
아직 그가 랭커가 아니었던 시절, 보스를 잡으며 장비를 막 맞추던 시절.
보스의 패턴은 딜로 찍어 누르기가 되지 않아 파훼가 난해했다. 도저히 한우현의 저열한 반사신경과 인지 능력으로는 제대로 된 공략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우현은 주 캐릭터를 성기사로 선택했다. 딜이 너무 낮아 남들보다 공략하는 데에 배가 되는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거나 잡을 수는 있게 되었으므로.
그 약점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도 손에 꼽는 랭커가 되고 나서는 거의 해소되었다. 이그드라실 코어라는 스킬 강화 포인트를 무한에 가까운 사냥으로 무한히 수급한 한우현은 그를 고스란히 딜링 스킬에 투자했다.
따라서 한우현은 결과적으로 상시 무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딜링 능력도 나쁘지 않은 캐릭터를 완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딜러 직업군인 랭커들에 비하면 아무리 그래도 부족한 수준이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한우현은 스스로의 투자가 빛을 발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여왕의 방패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스킬이었으며, 한우현이 자연스레 처음으로 사용하기를 선택한 스킬이었다.
하지만 한우현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데다가,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하나를 잊었다.
그것은 스킬 [여왕의 방패]는 무적기일 뿐 아니라 반격기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오, 우, 오오···."
자연스럽게 빛이 마치 흐르듯이 한우현을 감쌌고, 방패의 형상을 취했다.
"괘, 괜찮은데에···!"
한우현은 전능감에 취했다. 지금 이 안에서 그는 무적이었다. 그 누구도 한우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무적의 요새!
하지만 전능감도 잠시. 1초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한우현은 이내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
"···윽."
마치 소변을 오랫동안 참았을 때 느끼는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뭔가 힘을 풀고 해방을 해야 할지, 아니면 억지로 이 불편감을 찍어눌러야 할지. 한우현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불편감을 '해방한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파앗···!
스킬 '여왕의 방패'는 발동과 함께 캐릭터의 공격력과 레벨, 받은 피해량을 측정한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무적시간이 끝날 때마다 주위 몬스터에게 빛으로 반격을 가한다.
-파아앗···!
그가 받은 피해는 전무했다. 하지만 한우현이 뭔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피해는 아닐 지라도 시스템은 상황이 뭔가가 한우현에게 위협을 가한다고 판정하였다.
그것은 한우현이 후천적으로 얻은 병적인 피해망상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정신적인 피해의식이 언제든지 자기가 느끼는 불편감을 곧 불특정 다수 혹은 무언가에 의한 공격으로 해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은 한우현이 스킬을 통해 반격을 가할지 아닐지를 불편감과 피해망상에 대한 해소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콰과광!
-콰과광!
-콰과광!
그래서 스킬 '여왕의 방패'는 종료와 동시에 자신의 역할인 반격을 수행했다.
294레벨의 최종 데미지 계수와 종합 환산 전투력 수치 9만에 달하는 전투력, 한계까지 강화한 스킬 강화가 합쳐져서 불가해한 규모의 물리적인 파동을 일으켰다.
-쿠-우우-우우우우!
-콰-아아-아아아아!
초음파와 초저주파, 열, 소음이 웅장한 빛과 함께 주위를 갈아버리며 퍼져나간다.
지하철 역은 물론이요, 주위의 건물이니 식당 가게들도 당연히 포함하는 규모의 힘이었다. 거기에 아직 남아있던,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사장과 알바들도.
"어? 어?"
-콰과과과!
힘이 퍼져나간다. 한우현이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
그야 당연했다. 게임 스킬은 보통 제어라는 기능이 없다. 버튼이 누르면 정해진 그래픽과 모션이 나갈 뿐.
따라서, 현실에서도 그 특징은 그대로 재현되었다.
"아, 어? 어어어?"
하물며 한우현은 처음으로 스킬을 사용했으므로, 더더욱이 그 과정을 제어하는 방법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다.
-후와아악!
-화아아악!
그래서 그는 넋을 놓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엾게도 너무나도 강력한 육체적 스펙이 상황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모른 체를 해도 아마 감각으로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전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쿠궁!
-쿠구궁!
0.1초 만에 지하철역 출구 8개가 전부 무너졌다.
-콰앙!
-콰과광!
0.23초 만에 지하철역 내부가 붕괴되었다. 그 안에서 때마침 정차한 지하철 하나는 통째로 으깨졌다. 역사 지하에 있는 사람들도 모조리 으깨졌다. 피와 살이 마치 찰흙처럼 분쇄되었다.
대략 몇십 명 쯤 되는 사람들이 흙과 돌, 물리적인 충격파에 휩쓸렸다. 그들은 자기가 어떻게 죽은 지도 모르는 채로 죽었다.
-쿠와아아아!
-콰아아아!
0.35초 만에 충격이 주위 건물들까지 번졌다. 문을 닫았던 식당과 술집들이 마치 선풍기 바람에 날아가는 모래성처럼 가루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숨을 죽이고 공포에 몸을 떨며 제발 저 미치광이가 조용히 지나가기를 빌던 사장과 알바생들도 가루로 분해되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에,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어떻게 죽는지는 알고 죽는 행운을 얻었다.
한우현은 구체적으로 사람이 몇이나 죽었는지 까지 정확히 세거나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월적인 캐릭터의 육체적인 능력 덕분에, 미세하게 들리는 신음 소리와 비명을 들었다. 동시에 당연히 자기가 존재하는 공간에 사람이 많이 다니지는 않았어도, 이 충격파의 여파에 무수한 사람들이 휘말렸다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게 되었다.
-후우우웅!
-우우우웅!
0.47초 만에 열과 빛 그리고 소음이 주위 반경 20m를 완전히 분해했다. 하지만 그것이 겨우 294 레벨 랭커의 힘일 리가 없었다.
-파아앙!
-피이이잉!
0.59초 만에 주위 50m에 그 여파가 작렬했다. 가루가 되지는 않았지만 산산조각 난 건물과 흙, 시멘트 바닥, 벽돌들이 강제로 주위로 밀려나며 퍼졌다. 너무나도 강력한 물리적인 충격량을 얻은 그것들은 순식간에 음속을 돌파했다.
음속을 돌파했으므로 소닉 붐이 일어났다. 충격파가 충격파를 낳는다.
-퍼벙!
-퍼버벙!
0.98초 만에 그 뒤에 있던 건물들은 모조리 벌집 같은 형상으로 리모델링 된다. 지나다니다가 한우현을 보고 기겁하고 도망가려고 했던 행인들의 몸에는 무수한 구멍들이 뚫린다. 구멍이 너무나도 많이 뚫려서 아예 형체를 유지할 수가 없다.
고기와 피, 뼈의 조각들이 무너진 건물들과 뒤섞이며 끔찍한 모습이 된다. 한우현은 그 중 하나를 정확히 보았다. 85m 앞에서 버스에서 내리다가 그를 보고는 곧바로 온 몸이 버스와 함께 붕괴된 여자를.
꽤나 예쁜 여자였다. 한우현의 취향에 맞을 만큼.
아주 잠깐 동안 한우현은 여러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하나는 저렇게 예쁜 여자는 누가 만날까 하는 생각이었고, 둘은 만약 지금의 한우현의 외모라면 조금 먹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셋은 부서지는 여자의 몸을 보며 느낀 공포와 당황이었고, 넷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심과 그들을 응징한 것에 대한 희열이었다.
네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고서는 한우현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느꼈다.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알 수 있었기에.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한우현이 나름 취할 수 있었던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스킬 한 번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몰살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의미도 없이.
현실을 도피한 망상은 짧았다. 마침내 1초가 지났다.
스킬 '여왕의 방패'가 비활성화 되었다. 성공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했으므로 한우현은 5초의 무적 시간을 가진다. 1초가 지난다면 다시 여왕의 방패를 써서 무적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한우현은 그것에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병신이 아니고서는 지금 상황에 기쁨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선천적으로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이코패스나, 아니면 불경한 이교도들을 지옥에 보내기를 갈망하는 광신도들이나 지금 기쁨을 느낄 것이었다.
"아, 아···."
한우현은 공포를 느꼈다.
그 자신과 이 상황과 이 공간 모두에 공포를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공포를 느꼈다.
"아, 아니야. 아니야..."
당연히 한우현의 방어기제는 현실을 부정했다. 이것은 그가 한 짓이 아니라고. 그냥 스킬을 시험했는데 그 근방에 사람들이 있어서. 부가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들을 속으로 생각했다.
"···이, 으으, 으으윽···!"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사는 정신병자 새끼라도 비웃을 변명이었다. 한우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되지 않았다.
"씨, 씨발! 몰라!"
그래서 한우현은 도망쳤다. 그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주했을 때 늘 그랬듯이.
텅 빈 잔해와 한 때 사람의 형상을 취했었다고 믿기 어려운 핏물 조각들을 뒤로 남긴 채.
그가 인간의 보편적인 속도를 초월해, 음속에 가까운 달리기로 자리를 피할 때까지. 저 멀리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세상이 변하고 난 뒤 단 6시간이 지났을 때.
어린아이만도 못한 참을성과 공격성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더 강한 플레이어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질서와 규칙, 경제, 사회, 제도, 법치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없는 이들이 먼저 날뛰며 사적 제재를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오랜 백수 생활과 사회적인 조롱으로 사회에 오래도록 묵은 원한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제재하거나 억제할 수 없는 미치광이들.
그것은 군대와 경찰로 이뤄지는 질서의 붕괴를 의미했다.
세상이 변한 지 겨우 24시간이 지났을 때.
법과 질서가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아직 바뀐 세상을 받아들이거나 인식하지 못한 시민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하나의 상식이 아주 빠르게 퍼지기 시작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스킬을 쓸 때, 하찮은 일반인 따위는 존재감을 죽여야 한다. 벌레처럼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것은 불과 단 하루 만에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 모두의 인류에게 널리 퍼진 상식이 되었다.
* * *
-덜컥!
-타악!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온 한우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컴퓨터를 켰다. 이 모든 것은 꿈이었다. 꿈이어야만 했다!
더 이상 갑작스레 얻은 잘생긴 외모도, 훌쩍 커진 키도, 아름다운 목소리도. 그 어떤 것도 한우현에게 기분 좋게 여겨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강력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힘과 바뀌어진 현실은 한우현에게 기쁨으로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가 더 좋았다.
늘 그랬듯이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이그드라실 온라인을 켜고, 사냥을 하고, 잠을 자던 나날.
그것은 한우현이 생각하기에 평화롭고 안온한 나날이었다. 한우현은 평소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딴 삶에 100%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우현이 생각하기에 지금 자신의 상태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더 나았다.
너무나도 잘생기고 뛰어난 외모.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외모에 걸맞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힘은 있었으나 그 힘을 어떻게 쓰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방향도 없는 어린 아이. 그것이 한우현의 잠깐이나마 올라갔던 자존감을 박살내 버렸다.
"병신, 병신, 나는 병신이야···."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도덕성보다는 자기 합리화와 비논리적인 공격성이 스스로를 지배하는 인간인 한우현은 이내 감정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이었다.
찐따들은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자주 한다. 한우현도 고등학생 시절 그런 상상을 했었다. 자기가 좀 더 잘생기고 뛰어난 존재였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었다는 망상이 그 예시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게임 캐릭터로 다시 태어난다는 망상까지 가능했지만, 한우현은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지금은 현실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냥 잘생겨진다는 것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므로.
물론 게임 캐릭터가 되는 것과 우월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객관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비현실적인 망상이었다. 그냥 한우현의 취향이 아니어서 그런 망상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는 게 진실이었다.
그러나 망상이 비현실적이었던 현실적이었던 어쨌든, 한우현은 다시 태어났다.
그것도 과거와는 인종도, 외모도, 목소리도, 육체적인 능력도 모든 면에서 다르게 우월한.
하지만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정확히는 바꾸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우현의 정신이었다.
한우현은 그것을 처절하게 실감했기에 가장 크게 좌절했다.
한우현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킬을 한 번 써보고는 아무리 사고를 냈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도망가서는 안 되었다. 히어로 만화의 영웅이었다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람들을 다시 구하려 했을 것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냥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사고를 친다는 어이 없는 일 자체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하나 한우현이 되돌아보기에 훌륭한 행동은커녕 최소한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한우현의 생각에 그 원인이 명백했다. 그것은 한우현이 병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 캐릭터가 되었지만 한우현은 오히려 그 전보다 불행해졌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몇 번이고 누르려다가 주저한 한우현은 결국 아예 전원을 키기를 포기했다. 컴퓨터를 켜서 무엇을 하게? 게임? 이미 그 자신이 본 캐릭터인 성기사가 되었는데? 무엇하러?
게임을 하지 않는다면 뭘 해야 할까? 유튜브? 키보드 배틀? 만화 보기?
그것은 더더욱이 끔찍한 일이었다. 무의미했다.
파들파들 떨며 구부정하게 굽어진 자세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우현은 한참이나 컴퓨터의 검은 화면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102화. 외전. 쌀먹충 한우현 (4)
한우현은 계속 집 안에만 있었다. 밖에서 하루하루, 아니 매 시간마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모르는 채.
정확히는 짐작하고 알기는 했지만, 일부러 모른 척 하였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처음 그가 [여왕의 방패]로 무고한 사고를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속보입니다. 현재 전국 각지가 정체불명의 서양인에게 의해 대규모 테러를 당하는 중입니다. 사망자의 수는 현재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며, 재산 피해는...
-현재 이와 같은 사건이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하지만 그 충격성은 금세 다른 일들에 묻혔다.
그 뒤로 다른 플레이어들이 더한 미친 짓들을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그것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한국은 미국 같이 행정력이 뛰어나고 체계적인 나라가 아니다. 치안력은 보다 뛰어나지만 그것은 한국이 총기 보유가 철저히 금지되고 CCTV가 많은 덕에 이뤄진 것이지, 한국 경찰의 체계가 미국보다 훨씬 뛰어나서가 아니다.
따라서 경찰은 갑작스럽게 지하철역 인근 500m를 갈아버린 금발의 외국인이 누군지 알 수 없다. 찾을 수 없다.
키도, 덩치도, 얼굴도 전혀 달라졌다. 따라서 그 외형에서 한우현을 유추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경찰이 맡아야 할 사건은 한 둘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화려한 색상의 머리색을 가진 서양인들. 한국어와 한글에 능통하며 정작 외국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서양인들.
그들이 한국 곳곳에서 깽판을 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실의 확인과 혼란을 수습하는 것만도 바쁘다.
그래서 이미 일어난 사고에 인력을 할당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을 경찰이 어쩌겠는가?
-가용 인력 전부 순찰로 돌려!
-테러 조사는요?
-야! 지금 전 세계가 다 씹창났는데 뭔 테러 조사야! 조사해서 뭐 어쩌게!
-최소한의 치안이라도 확보하는 게 먼저야! 저 초능력자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혼란이라도 막아야지!
-지침을 내립니다. 화려한 머리색을 가진 서양인 초능력자들과의 교전은 최대한 피합니다.
-순찰의 목적은 일반인의 대피와 질서 확보에 초점을 맞춥니다!
전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치안 수준을 가진 나라의 경찰 지침 치고는 꽤나 충격적인 내부 지침이었다. 그것이 직장인들의 전용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오자 온갖 욕을 들어 처먹었을 정도로.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선택은 차선적으로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중국과 미국의 국가 수반이 사망했다. 그 나라들에는 플레이어가 그리 많지도 않다. 아니, 전 세계 전체에 플레이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끽 해야 다 합쳐도 정말로 강한 랭커 급 플레이어는 수십 명도 되지 않았으니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랭커 급 플레이어는 수백 명이 넘어간다.
랭커 급이 아니더라도, 본격적으로 도시 하나 정도는 날릴 수 있는 플레이어는 수천, 수만 명 이상이었고.
그들과 경찰이 적극적으로 싸우고자 했다면, 아마 한국의 치안은 이내 더욱 더 좋지 않아졌을 것이다.
경찰 조직이 완전히 붕괴한다면 플레이어만 날뛰는 것이 아니게 될 것이었으니까.
-대체 군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거 계엄령 내려야 하는 상황 아닌가?
-하루가 멀다하고 담화하던 미친 새끼는 왜 이번에는 대통령 담화 안 해?
-공무원들이 하는 말 보면 청와대랑 연락이 안 된다는데?
-군대에 있는 애가 말하는 거 보니 거기도 좆 된 거 같은데...
-거기도 초능력자가 나왔어?
한국 정부는 그렇게까지 무능하지는 않다. 정확히는, 정부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무능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밑의 공무원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 사태의 보고는 빠르게 이뤄졌다. 대규모의 초능력자들의 등장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였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대통령과 국방부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보고서를 결제받아야 할 대통령과 장관들은 모조리 사이좋게 모인 채 플레이어들에게 고문당하고 있었으니까.
정치인과 관료들은 수십 번을 팔과 다리가 찢어졌다가 붙었다. 이내 정신이 나갔다가 강제로 각성 스킬을 부여받고 정신이 돌아오기를 반복당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으, 으으, 으으으... 제발, 부디."
"아으, 끄으, 끄으으윽...!"
그들이 모두 이지를 잃기 직전까지 가며, 공포 외의 그 어떤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과서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에 맞서 버티는 내용이 하도 많아서, 많은 사람들은 신념만 있다면 고문에 버틸 수 있다고 믿는다.
"으, 으으, 으으윽..."
"흐악, 흐아아악..."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네."
"슬슬 끝낼까?"
틀린 말이다. 아주 틀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문에 버틸 수 없다. 한 시간이면 정신이 붕괴되며, 몇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고문 피해자들은 절대 다수가 고문 기술자가 원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과 생각조차 조작하게 된다.
"...잘,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최선을 다해 저희가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은 하나같이 굴복했다.
물론 영원히는 아닐 것이었다. 플레이어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이, 잘하긴 무슨.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진짜야. 우리가 뭐 강제한 거 있어?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잖아. 우리도 민주주의 좋아해."
"국민의 뜻대로 하라구, 국민의 뜻대로."
"나 대통령 각하 좋아해. 투표도 그쪽에 했다구."
청와대 경호팀도, 급히 파견된 특수부대도 상처는커녕 그들에게 간지러움조차 입히지 못했다.
이그드라실 포스가 없는 일반인들은 플레이어들에게 너무나도 손쉽고 여린 사냥감이었다.
그래서 이제 플레이어들은 정치인들에게 복수와 통쾌함의 가치보다,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정치인들이 국가 체제를 이용해 발악하고, 반항하려 하면 오히려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았다. 재미가 더욱 기대되는 가치였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한국의 지도자들의 발악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명시하지 않은 채. 이유 없는 악의와 폭력으로 단지 그들을 조롱하고 사라졌다.
-이제 뭐하지?
-뭐, 이제 와서 길드라도 만들게?
-음...
-음...
-뭐, 굳이 모일 필요 있나?
-애초에 약속하고 모인 것도 아니잖아.
-그냥 서로 싸우지만 말자고.
-그래, 뭐 싸울 필요 없지...
태생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사회성이고 소통능력이고 모두 처참하기 그지없는 이들이었다.
그나마 기존에 존재하던 길드원들끼리는 뭉칠 법도 했지만, 우연찮게 얼떨결에 모인 몇 십 명의 플레이어 중 같은 길드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길드원들도, 막상 현실에서 함께 하자 그다지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어색했다. 너무나 오래 혼자 게임하는 것에만 빠져있던 플레이어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흩어져서, 그들이 평소에 살았던 대로, 욕구에 충실한 삶을 추구해 보기로 합의하였다.
한우현 역시 그들과 비슷한 플레이어였다.
조금 다른 점은, 한우현의 폐인적인 특성은 공격성보다는 방어성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우울증. 망상적일 정도로 심화되어, 매일 같이 약을 먹어도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은 우울증.
그래서 이제는 한우현은 약을 먹지도 않았다. 동생이 소개시켜 준 병원에서 먹은 약을 두 배씩 다 처먹고 나서는 그냥 사는 대로 살았다.
한우현은 모든 일을 피해 망상과 자책감으로 해석했으며 주위의 모든 것을 자기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 반격하고 싶지도 않다. 반격은 더한 상처로 돌아옴을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따라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제는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잠만 자고 싶다.
그래서 한우현은 휴대폰도 당연히 꺼두었다. 애초에 별로 쓰지도 않는 폰이었다. 친구도 없었으며, 길드 활동도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커뮤니티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의 은둔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이 아주 완전히 망해서 한우현 외에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을 때까지.
만약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와 고함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쾅쾅쾅!
-쾅쾅쾅!
-형! 있는 거 알아! 대답 좀 해!
-시발, 그냥 들어간다! 스킬 쓰지 마! 나니까!
그래서 그 익숙한 목소리에도, 모른 척을 하려 했었다.
-콰앙!
하지만 동생은 당연하게도 그의 자취방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으며.
"콜록, 콜록... 흐..."
한우현은 더 이상 머리를 움직이기도, 생각을 지속하기도 싫었기에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우, 먼지."
"···."
대답이 들리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던 한우준이 이내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아니, 인영이라기보다는 뭉치에 불과했다.
이불에 칭칭 감긴 채 꿈틀대고 있는 애벌레.
"형...? 한우현?"
한우준은 긴가 민가 하면서도 천천히 이불에 다가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은 한우현이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한우준이 가끔 어떻게 살고 있나 찾아왔을 때, 한우현은 항상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가끔 자고 있는 때도 있었지만 그 때는 오전 시간 뿐이었다. 지금은 새벽에 가까운 아침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한우현이 아직 자지 않고 있던 시각.
다행인 일은 한우현이 방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베이징에 테러를 한 플레이어의 정보와 신원은 한국 전체에 널리 퍼졌다. 게임 홈페이지에 대 놓고 인증을 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한우현은, 당연하게도, 그 사제 따위보다 훨씬 레벨이 높았다.
따라서 한우준은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중증의 우울증에다가 피해망상에 절여진 그의 형은 정말로 소극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비사회적인 성정이 반사회적인 성정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초월적인 수준의 초능력자가 되었다면, 더더욱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그랬을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왔다.
다행히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한우준의 말이 들릴 때마다 조금씩 움찔대는 것을 보니 자는 것도 아니다.
"형, 일어나 봐. 안 자는 거 알아."
응답이 전혀 없다. 한우준은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다. 어차피 별로 의미는 없는 것 같았지만 연차도 내서 며칠은 여유도 있었다.
밀려 들어오는 환자 때문에 병원은 마비 상태였지만 알 게 뭔가? 이미 간호사요 의료 기사, 교수들조차도 나라가 망했다며 무단 결근하는 이가 절반이었다. 그 하나가 거기에 추가된다고 해도 별로 특별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한우준은 천천히 정리를 해 주었다. 먼지가 쌓인 책상을 닦고, 썩어가는 듯한 접시도 닦았다.
-쏴아아아···
-덜그럭, 덜그럭.
물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좁은 자취방 안을 울렸다.
평소에는 그가 해 주지 않았던 일이다. 안 그래도 병원 일을 하기에도 바쁜 삶인데 백수 형의 뒷바라지나 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이따금 와서 잘 살아있는지나 확인하고 잔소리를 좀 하고 떠나는 것이 예전의 방문이었다.
"하, 라면만 먹고 살았나. 나랑 사는 건 비슷하네."
"···비슷하긴, 무슨."
한우준이 마침내 마지막 접시를 덜그럭대며 닦아내고 올렸을 때, 답이 들렸다.
마치 오래도록 찬송가를 열심히 부른 것만 같은 황홀한 미성이었다. 가래가 들끓는 듯한 이전의 탁한 한우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와, 진짜네."
한우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한우현은 변했다. 아주 많이. 한우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놀랍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우준은 뒤를 돌아, 달라진 형을 맞이했다.
180cm를 넘어 190cm는 될 것 같은 키. 오똑한 코와 빛나는 푸른 눈.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신체비율, 날렵한 얼굴선과 몸매. 하얗디 하얀 피부색. 황금을 녹인 것만 같은 금발.
누가 보아도 한국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그것을 넘어 현실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외모.
플레이어를 나타내는 가장 큰 특징. 이질적일 정도로 화려한 외양. 그 특징이 그 누구보다도 강한 모습이었다. 다른 어떤 플레이어들보다도 이질감이 심했다.
그 특유의 구부정한 등과 거북이같이 늘어진 목만 아니었다면 절대 알아보지 못 했을 것이다.
"많이 달라졌네. 다이어트를 이렇게 빨리 할 줄이야."
"지, 랄은···."
"믿고 있었다는 말은 안 할게. 뭐 어쨌든, 좋아졌네."
"···."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억지로 텐션을 높였던 한우준은 살짝 당황했다. 뭔가 대화에 실수를 한 것인가? 당혹스러웠다.
"···."
형의 기분이 무조건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우울증에 시달린 환자니까. 그 피해 망상은 병의 수준을 넘어 환청과 환각의 수준까지 넘어갈 뻔 했다.
그가 급히 병원에서 약을 구해다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믿을 수 없이 기이한 일이더라도, 그의 형은 분명히 변했다. 그것도 아주 우월한 존재로.
게임이 된 현실이 어처구니없었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우준도 이미 겪었으며, 지금도 뉴스로 플레이어들의 광기가 보도되고 있으니.
따라서 한우준은 형이 힘자랑을 하고 다니진 않을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대감을 가지고 조금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
"···."
보아하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한 달쯤 전이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반찬을 전해주러 왔었다. 그 때는 뭐 하러 오냐고 짜증을 있는 대로 내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병신 같다고 생각했으나, 어쨌든 자기 의지는 있어 보였다. 그것이 게임에 대한 의지라서 문제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우준은 레지던트가 되기 이전, 인턴으로도 일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자살 시도로 실려오는 환자를 본 적이 꽤 있다.
그와 비슷한 눈이다.
언제나 썩은 동태 같이 흐린 눈을 하고 있던 형이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어느 정도냐면 그 눈이 여름의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색으로 바뀌었음에도 그 안에 담긴 어둠과 절망은 오히려 더욱 커 보일 정도로.
한우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뭔가 사고가 날 것 같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안되겠다.
"형."
"···."
한우준은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도 아닐 뿐더러 원래도 말주변이 좋은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머리는 좋았지만 그것이 말솜씨로 꼭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냥 정공법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왜 그래? 더 우울해진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왜, 냐니."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의외로 이번에 다시 대화의 물꼬를 연 것은 한우현이었다.
"그냥··· 원래 그랬지. 원래··· 난 그래."
"그걸 말 하는 게 아니잖아. 몰라서 묻는 거야?"
한우준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열었다. 셀프 카메라 모드를 연다. 그것을 그의 형에게 들이밀었다.
"거울, 한 번도 안 본 건 아닐 거 아냐."
"···어. 알아. 근데 그게 뭐."
"아무 생각이 없단 말이야?"
한우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우현도 그걸 느꼈다. 하지만 별 생각이 없다.
오히려 한우현은 지금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죄책감과 자책감을 넘어선 우울감이다.
단순히 동생이 그의 물주이기 때문에 느끼는 불편감은 아니다. 월 50만원씩 받아가는 용돈? 그것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아주 아낀다면 사실 게임 랭커인 그는 달에 몇십 정도는 충분히 게임 만으로도 벌 수 있었다.
다만 실제로 돈이 쪼들리는 것도 사실이기에, 준다기에 거부하기도 뭣해서 받았던 것이다.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한우현의 지금 심리 상태는 이랬다.
게임이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두려움에 떨다가, 갑자기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새로운 행동을 시도하였다.
참혹한 결과를 만들었다.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그것이 오히려 한우현의 유일한 가치요 인생을 부정했다.
현실에서 노력하고 성과를 얻었던 이들의 결과물들은 하루아침에 시궁창에 처박히고, 인생을 쓰레기 게임에 처박은 폐인들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힘은 오히려 한우현의 비참함을 부각했다.
"아무, 것도··· 의미 없어···."
한우현이 생각하기에, 자기 인생은 오직 게임 안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게임이 현실이 되어서 처음으로 밖으로 나갔을 때 한우현이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무 이유 없이 사고를 터뜨려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학살에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저 실수였을 뿐.
하다 못해 한우현이 힘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유치한 쓰레기 같은 이유라도 있었으면 몰랐다. 아니면 나쁜 놈을 응징한다는 같잖은 정의라도 있었다면 몰랐다. 그런 것도 아니었다.
-병신, 병신···.
한우현은 그래서 그것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자기가 왜 그랬는지. 그러고도 그것을자신의 초등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 고등학생 시절의 모습을 생각했다. 지금 현재의 모습도 곱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초월적인 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같은 이들이 가질 힘이 아니었다. 그럴 자격도, 성정도, 품성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에게 해당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우현은 그냥 방구석에 처박히기를 선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기로.
이제 그도, 그와 같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잘 이해했으므로.
나름대로 내린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결론이었다. 평화로운 안식을 맞이하기 위한 결론.
한우현이 남에게 영향을 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우현 자신에게 고통으로 돌아온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것을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도록 노력하며 동생에게 설파했다.
한우현은 그동안 많은 민폐를 끼쳐온 동생 한우준에게, 이제는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설득했다.
"아니, 그래서··· 그냥 여기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굶어 죽겠다고? 아니···."
당연히, 한우준은 그런 우울하다 못해 끈적한 병적인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공감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이제는 한국에서 가장 강한, 아니 세계에서 가장 강한 초능력자가 되어버린 사람의 말이라면 더더욱이.
"뭔 개 좆 같은 소리야 그게 대체···?"
그렇기에, 한우준은 결심하게 되었다.
"···이리 와 봐. 나랑 대화 좀 해 보자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달라진, 너무나도 크게 변모한 한우현을.
그의 하나 뿐인 형제를.
"내가 게임에 대해서는 형보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치료하고 고쳐 보겠다고.
103화. 주제 파악
정갈한 일본풍 방의 한 가운데.
"···허허, 참."
"그렇게 한숨만 쉬고 있지 말게."
"이게, 지금 안 쉬고 배기겠나?"
"누군 한숨 안 쉬고 싶어서 안 쉬는 줄 아나?"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래도 그렇지, 탄핵이라니. 그것도 이 빈약한 증거 가지고."
"빈약이라.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당해 놓고도 배운 게 없으신가?"
"지금 그쪽만 탄핵 당한 줄 알겠네. 우리 쪽도 잔뜩 맞았지 않나?"
"그걸 내가 모르겠나? 여의도 밥을 20년 넘게 먹으면서,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지, 그거야 나도 알지. 우리가 하도 겪어서 이골이 난 일 아니겠나만···."
"우리도 답이 없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야. 당장 코앞에 닥친 일을 생각하면 속이 타 들어가."
"하, 모든 게 엉망이야. 저쪽은 아예 강경책으로 나서는데, 우린 뭐 있나? 대책이라도 있나?"
"있을 리가. 당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인데."
"진짜 세상이 망하려고 이러지···."
"뭔가 수가 없을지. 이렇게 방어만 하다가는 답이 없는데."
"···."
주름살이 가득한 흰 머리의 중년 남성이 바닥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방어조차 힘든 상황에, 그 이상을 바라볼 상황이 되긴 할지."
"하긴, 애초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사법부마저도···."
"저기 판사부터 헌재까지, 죄다 미래 법무팀에서 다 설득하고 구워삶았어."
"고려, 센트럴, 동화 쪽도 한때 반항하는 듯 싶더니,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지금은 납작 엎드렸고."
"저 놈, 진짜 중졸 맞긴 한 건가? 사법계며 언론계까지 조종하는 걸 보면 정보기관 출신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나?"
"글쎄 말이야, 원. 청와대가 헛 짓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대체 밑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국정원부터 기재부까지 다 등을 돌린 게야?"
그 말에 둘 다 짜증이 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래도 말일세."
"그래도 뭐?"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리 다르진 않았을지도."
"···."
두 사람 모두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 맞는 말이지.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봐야 뭐하겠나."
"하, 미국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가 굴러가는 건지."
"부통령한테라도 빌러 가야 하나? 제발 우리 좀 살려 달라고?"
"허, 나도 다 알겠네만, 미국 쪽 태도는 이미 굳어졌어. 그 지부 문제만 봐도 그렇고, 대사관에서도 우리 일엔 간섭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더군."
"그러니 애초에 그런 모자란 작자를 그 자리에 올리지 말았어야지, 빌어먹을."
"외부 인사 데려오는 게 우리만 한 일인가? 그래, 이번엔 우리가 잘못했지만."
나란히 피로감에 찬 조소를 흘렸다.
"그렇다고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가?"
"탄핵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겠나만."
"그래도 설득은 해야지."
"여당보다는 상관없다 해도,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 아닌 건 알지 않나."
"하, 애초에 지금 이걸 따질 상황인지조차 모르겠네."
여당 대표가 한숨을 쉬며, 차갑게 식어가는 계란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중국, 일본까지 넘어가면 정말로 막을 수 없는데."
"정말 미제가 우리를 버리려고 작정한 건가?"
"미제라니, 참. NL 출신도 아닌 주제에."
"NL이든 PD든, 지금 상황 보면 결국 미제가 맞지 않나?"
야당 대표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고 피하던 눈길을 상대에게 마주쳤다.
"저들은 심심하면 민주주의 수호라면서 개입하지 않던가? 그런데 길드랑 협약이라니, 우리나라를 군벌 국가로 만들 작정인가?"
"···하아."
"저, 밥값도 못 하는 인간이 생각 좀 하고 움직였더라면, 적어도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겠지."
"대통령 저 멍청한 놈이 말 안 듣는 건 그러려니 해도, 저 게임 중독자 놈들이 이렇게 유능한 건 너무도 이상한 일이야."
"그렇긴 한데, 내 보기엔 지금 청와대에 첩자가 너무 많아. 여기저기서 정보가 줄줄 새 나가고 있어."
"우리 쪽은 안 새는 줄 아나? 전 대변인 주위로 청년 정치인들이 뭉쳐서 대놓고 첩자질을 하고 있는데."
"작년만 해도 찍소리 못 하던 애들이, 아주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들떠 있지."
"이대로 그 병신이 끌려 내려오면, 이 나라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가 없는데."
말의 끝엔 서로가 그 말을 하면서도 공포와 음울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하."
"···결국 차기는 자네 아닌가."
"빌어먹을."
여당 대표의 말에 야당 대표가 눈을 감고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나? 이미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데!"
"어쩌겠나? 이미 다들 탄핵당한 당에서 무슨 염치로 대표를 내세우겠냐며 발 빼는 마당에."
"우리도 그냥 손 털고 빠지는 게 어떨···."
"그럼 청색당이나 노동당에서 대통령 나오는 꼴을 보겠어. 우리는 제대로 찌그러지는 거고."
"···제길, 제길, 제길."
다시금 이어지는 정적.
"···."
"···."
그러다가 둘 모두, 눈동자를 굴려 방문 쪽을 흘겨보았다.
"···."
"···."
더 이상 대화를 해 봤자 답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터벅.
-터벅.
묵직하게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르륵!
"이런, 좀 늦었군. 그동안 잘들 지냈나?"
양복 차림을 한 금발 청안의 서양인이, 서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아닐세. 우리도 금방 온 참인데."
"할 얘기가 많다고 알고 계시니, 어서 앉으시게."
"그래, 일단 목부터 축이고 시작할까."
-쪼르륵
교토산 고급 호지차를 따라 향을 음미한 한우현이 차완무시를 한 입 떴다.
부드러운 식감이 그의 혀를 감싸며 피로를 가라앉혀주었다.
"방음이 살짝 부족하겠군. [신성한 땅]."
-우웅!
아무래도 식당의 특성상 보안이 좋은 곳은 아니었기에, 살짝 미소 지으며 주위에 포스의 에너지 장을 펼쳤다
"음, 우리가 말씀드린 요정집이나 일식집에 가면 편히 대화할 수 있네만."
"난 그런 곳을 식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우현의 눈에 순간 강렬한 의지가 깃들었다.
"근본 없는 찌끄레기 음식들을 대충 그러모아 가지고 한식당이랍시고 내는 곳이 식당이라니, 입에 담기조차 싫군."
"···??"
"···??"
그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둘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일식당도 마찬가지다. 요즘 수준 높은 스시야가 얼마나 많은데 그딴 병신 같은 곳들이 비싼 돈을 받는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아, 음···."
"그, 그러시군···."
야당 대표와 여당 대표 모두 떨떠름하게 그 분노에 영혼 없이 대답했다.
아니, 음식은 대충 배만 채우는 거고 비밀 대담을 나누는 게 중요한 거지.
한정식이니 일식이니 그 근본에 대해 뭐 저리 진심이란 말인가?
한우현이 식도락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둘 모두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신경쓸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드르륵!
"네, 한꺼번에 내 왔습니다. 아나고 시라야키와 우니, 도화새우, 패션후르츠를 곁들인···."
"음, 훌륭해 보이는군. 좋아, 좋아."
너무도 즐거워 보이는 표정의 한우현을 보며, 둘은 다시금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음식 따위야 어찌 되었든.
-덜그럭
"둘 모두 들면서 말 나누자고."
"···예."
"그럼 맡겨놓은 주문부터 확인하지."
어차피 저들이 우리의 미래를 쥐흔들고, 신성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짓밟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그 안에서 버틸 수 있는 콩고물이라도 챙겨가자고.
"탄핵 발의는 준비가 된 걸로 아는데."
"그렇네. 몇몇 거부한 의원들도 있지만."
"대체로 대부분은 찬성하기로 했으니, 이번 주 내로."
"아니, 아니지. 발의 뿐 아니라."
-으적.
장어 구이를 씹은 한우현이 생강채를 집었다.
"이번 달 내로, 헌재 판단까지 끝내도록."
"···뭐?"
"이, 이번 달 말인가?"
그 충격적인 요구에 일단은 가만히 있기로 생각했던 둘 모두, 얼굴에 경악과 충격의 감정을 올렸다.
"그래. 이번 달."
"그건 불가능하네! 물리적으로 헌법재판소 절차는 최소 2달에는 걸쳐."
"흐음."
"그리고 탄핵같이 중대한 심판 행위에는 통상 3달 동안 면밀한 법적 검토가 걸리니, 정말로 서두른다고 해도."
"아아, 그래, 그래. 알았어."
-타악.
꽤나 큰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하지만 내가 중졸이라서, 그런 어려운 건 잘 모르겠거든."
개소리였다.
5년 동안 중앙 정보국이 어떻게든 전 세계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았으니.
한우현은 비록 전문가 수준은 아닐지라도, 영미법과 대륙법 체계에 세워진 각 국가들의 기본적인 사법 구조에 대해 기초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걸 더 도와주면 되겠군."
-촤악!
한우현이 서류 다발을 뿌렸다.
"자, 지난 대선에서 놈이 뿌렸던 뇌물, 협박했던 기업인들의 증언과 증거, 현재까지 이어지는 각종 유관자, 시민단체 비리들이다."
"···??!!"
황급히 그를 집어든 야당 대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며.
"···???!!!"
뒤이어 더욱 빠르게 그 뭉치들을 훑어본 여당 대표의 얼굴은 창백함을 넘어 시퍼렇게 물들었다.
"자, 잠깐만. 약속이 다르잖나! 이건 대통령 뿐 아니라."
"아니, 아니! 그보다 이걸 대체 어떻게! 국정원을 털기라도 한. 뭐, 진짜로···?!"
"국정원? 글쎄,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 보이던데."
강력한 내부 조력자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만, 그들에게 받은 도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결정적인 기여는 해킹과 분석에 특화된 [전자기인] 플레이어들과 세계 제일의 초 인공지능 [맥]이었으니까.
그들을 총동원해, 국정원과 검찰의 모든 자료를 무차별적으로 학습하고.
맥이 대한민국 법조문과 판례, 두 번의 과거 탄핵 사유를 참고하여.
"···."
"···."
완벽하게 정리해 낸 시나리오와 두려울 정도로 상세히 정리된 근거들이, 거기 자리잡아 있었다.
"···크, 크으으."
"대체, 언제부터, 이런···."
당연히, 마구잡이로 대통령에 연관된 자료들을 죄다 긁어모았으므로.
저것은 대통령 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법조인, 기업인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자료들이었다.
"이 정도면 면밀한 검토까지 필요 없이, 충분히 사유가 되지 않나?"
"···타, 탄핵 심판은 저지른 반 헌법적 사유의 양이 아니라 그 크기를 기준으로."
-스으윽.
숨이 막힌다는 듯 말을 더듬는 여당 대표의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못 알아들었나 보군. 증거가 부족하면, '알아서 더 크게 만들어라', 사법고시 수석."
동시에, 그 뒤에서 입술을 깨문 채 이 쪽을 보던 야당 대표에게도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대통령이 참 많은 인권들을 침해한 듯 하니, 인권 변호사 너도 알아서 잘 돕고."
"···이것들을 정말로 활용하려는 생각이란 말인가?"
"글쎄, 너희들이 얼마나, 어떻게 협조하느냐에 달리지 않았을까?"
-후륵.
토사즈쥬레와 우니, 대게살을 뭉친 카니스를 집어든 한우현이 눈을 감고 그 감칠맛을 음미했다.
꽤나 진한 감칠맛이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둘 모두 속으론, 이런 생각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 상태로 지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인터넷 중독자 폐인 새끼가 만화나 영화에 나온 상황을 따라하려나 보다, 정치인들 뇌물 증거 좀 잡으면 꼼짝 못 하리란 그 허접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나보다···."
곧이어 손가락을 딱, 튕겼다.
-후웅!
"나도 약점 몇 개 틀어쥐었다고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유치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는다."
조용한 방의 한 구석에, 차원 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래서, 보다 많은 준비를 해 두었지."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멍한 눈빛과 마네킹 같은 동작으로.
"우, 운영위원장? 법사위원장? 기재위원장?"
"도지사? 국무총리? 국무위원장?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척!
-척!
-척!
"[타락귀] 플레이어의 고유 스킬. 잠깐 동안, 대상 생명체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타락하는 정신]이라고 하지."
-척!
-척!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아안-녀엉-하시입-니까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헌법기관들.
"그런 귀여운 반항은 재미 없을 것 같아서, 해 본 연출인데. 어떤가?"
"이런,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너, 너! 이 사탄의 혈육! 이게 사람이 할 짓이냐!"
"대한민국이 너희들의 장난감으로 보이냐! 이런 짓을 하고도!"
꼭두각시처럼 부려지는 동료들의 모습까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벌떡!
-벌떡!
야당 대표와 여당 대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처음부터 우리를 존중할, 아니 이 나라를 존중할 생각이 전혀 없었군!"
"꺼져라! 너희 같은 것들에게 통째로 나라를 떠 먹여 주느니 차라리!"
절망이 극에 달한 끝에 체념한 것일까.
"차라리? 차라리 뭐?"
"···우린, 협조하지 않겠다!"
"할 테면 해 봐라!"
악에 받친 듯 목청을 높인 둘을 내려다보며.
"···하, 하하."
크게 비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뚝.
갑작스레 웃음을 그치고선, 서늘한 눈빛으로 둘을 내려다보았다.
"착각하나 보군. 협조하지 않으면 너희들만으로 끝날 거 같나?"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너."
당연히 누구라도 알아들을 만한 쉬운 협박이기에, 둘 모두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저벅. 저벅.
그 반응을 무시하고선 다가서며 손가락 끝을 다시금 야당 대표의 이마에 댔다.
"너희 밥 버러지들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지. 난 더 이상 기다릴 수도, 참아 줄 수도 없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얼굴에 분노를 띄웠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력은 우리 길드에게 집중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복종하고, 지원해라. 오로지 모든 보스의 성공적인 공략과, 그를 뒷받침할 연구를 위해서."
"···탐욕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탐욕? 지금 탐욕이라고 했나?"
한우현의 얼굴 전체에 냉소가 흘렀다.
"흐, 그러게 왜 그리 무능하게 행동했지? 왜 그딴 식으로 무의미하게 소중한 시간과 자원을 허비했나?"
아득히 먼 과거를 반추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인데, 어째서 그따구로밖에 대처하지 못했나?!"
"···뭐?
"무, 무슨 소리냐?!"
점차 울분에 차 높아지는 그의 목소리.
처음에는 그저 정치인에 대한 혐오로 외치나 보다 생각했던 둘의 표정이,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광기 어린 분노에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온 세상이 멸망해가는 중에! 그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지도자들이었으면서!"
그러나 그 반응을 무시하고선.
"이제는 세계 최강 대국이 되었는데! 왜 우리 정신병자들을 데리고 잘 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냐는 말이다!!"
한우현의 눈에 과거의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너무도 끔찍했던 과거의 세상이.
"너희같은 무능한 버러지들은, 이 세상에 필요 없다! 주어진 기회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쓰레기들아!"
-우-우웅-!
그 광기가 포스를 타고 너무나도 강렬히, 초저주파와 초음파로 주위 공간에 울렸다.
"으, 으으, 으으으···."
"무, 무슨 헛소리야···!"
불가해한 기세의 파동에 자세를 비틀거리며, 둘 모두 공포와 절망으로 몸을 수그렸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한우현이 웃음을 그친 채 고개를 내렸다.
"썩은 것까지는 상관 없다만, 무능한 건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너희를 어떻게든 '쓸모가 있게' 만들어 주마."
-까딱.
그가 손가락을 움직임과 동시에.
-쿵!
-쿵!
-쿵!
-쿵!
무수한 이지를 잃은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른 채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아가리 닥치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총길드장.
아니, 전 세계를 집어삼킨 지배자.
-스윽.
그의 시선이 멍하니 고개를 떨군 야당 대표에게 갔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차기 대통령."
104화. 제 3 사도 악몽을 비추는 거울 아라크네 (1)
"흐음···."
-꿀꺽.
가만히 서류를 넘기는 한국 최고의 권력자, 한우현.
-꿀꺽.
그 모습을 보며, 앞에 모인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가만히 침을 삼켰다.
"글쎄, 도저히 허락할 수 없겠는데."
"맞습니다. 모두 캐릭터 분석 결과, 최소 기준에 현격히 미달됩니다."
차가운 대답에 맥이 조롱하는 듯한 한 마디를 더했다.
"최소 기준?"
"···도저히요?"
"그래. 너희, 보스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지?"
"길드에서 내세운 영상들은 모조리 다 봤습니다!"
"게임에서도 수천 번은 잡았고요!"
"그래? 그걸 알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고?"
-쾅!
"그럼 더더욱 논할 가치가 없어."
자신만만한 대답에 더욱 어이가 없어진 한우현이 비웃으며, 그들이 가져온 서류를 손바닥으로 쾅 내리찍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본데, 정말로 보스를 잡고 싶으면 정식으로 인사부에 가서 작전부에 편성되고 싶다고 말해라. 애초에 최소 한 달의 전용 특수 훈련은 거쳐야 하니까."
"작전부는 기준이 너무 높지 않습니까! 게다가 친인척 사항까지 전부 제출하고, 심층 정신 검사까지 하라니."
"그것도 통과할 자신이 없는 놈이 보스를 잡고 싶다고?"
"···애초에, 아니."
뭐라 반박하고 싶다는 듯 입을 어물거린 그를 보며, 한우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더 논할 가치도 없어 보이는군. 정직원이면 할 일을 하러 가고, 일반 길드원이면 사냥이나 해서 쌀먹이나 하도록."
"···젠장, 언제까지 그렇게 독식하려는 겁니까?"
"뭐? 독식?"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것만은 어이가 없는 수준을 넘었기에.
-벌떡.
한우현은 안색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할 짓이 없어서, 보상이 좋아서 보스를 공략하는 줄 아나?"
"아, 어?"
"왜, 왜 그러시는."
"너희들이 정말로 이 세상에 쓸모가 있는 존재들인 줄 아나?"
"잠깐만."
-우우웅!
"게임 폐인들 주제에 과분한 힘을 얻은 것들이, 너희들이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아?"
온 몸에 강렬한 포스의 존재감을 높이며.
-웅-웅-웅-!
강력한 분노와 위압의 감정을 주위로 퍼뜨렸다.
"으, 으으윽."
"자, 잠깐마안···."
"이 길드를 유지하는데, 쌀먹이나 하는 네 놈들한테 월급을 주는데. 얼마나 많은 자산과 투자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지도 못 하는 것들이."
한우현이 으르렁댔다.
"세상이 만만해 보이나 본데, 그 같잖은 생각은 집어치워라."
-휙.
감정을 토해낸 한우현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애초에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보스 보상은 대단하지 않다. 최초 격파 보상에 뭔가 엄청난 게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몬스터를 잡건, 보스를 잡건 그 보상은 게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맥은 내가 미국 정부와 함께 강화 학습을 시켰고, 그 자체의 성능이 우리가 분석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에 큰 성과를 낸 거지. 다른 건 특별할 게 없어."
그리고선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2 사도의 최초 격파 보상 또한 비밀로 할 것도 없이 공개했으니 알겠지만, 일회용에 불과하지. 그러니 쓸데 없는 욕심을 부리지 마라."
"요, 욕심이 아니라."
"야 그만. 됐어."
한 명이 반발했지만, 다른 네 명이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아, 알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래, 정 조건이 너무 어렵다면 내가 권승환한테 말해서 한번 훈련 조건을 다시 짜 보지."
"예에··· 알겠습니다."
"말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수그린 이들이 금세 모두 집무실에서 빠져나갔고.
-탁.
"마스터, 어쩔까요?"
"일단 다섯 모두 집중 감시하도록."
"저들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애초에 레벨로 보면 저 놈들은 보스 레이드를 시도할 짬도 안 된다. 진짜 아이디어를 짠 놈들은 따로 있겠지."
눈살을 찌푸린 한우현이 잠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별 시덥지도 않은 것들이 의미없는 수작질을 부리는군."
"쌀 팔아먹는 원숭이들이 다 그렇지요."
"하, 그렇지··· 누구일까."
"아직 길드에 들어오지 않은 고 레벨 플레이어들의 동향을 더 찾아볼까요?"
"그 놈들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길드에 가입되지 않은 놈들의 감시에는 한계가 있어."
"아무래도 제가 직접적으로 길드 시스템 관리 권한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던전 안에서는 통신도 끊기고··· 입구에 따로 간부들을 배치하기에는 인력도 부족해."
-탁.
-탁.
-탁.
책상을 두드리던 한우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차피 지금 기준으로 통제에서 벗어난 놈들 중, 담호영을 제외한다면 특출난 놈은 없어."
"예, 그건 그렇습니다."
"다음 던전의 보스 룸에 대한 감시는 좀 완화하고, 비 가입 플레이어들에 대한 추적 관찰만 좀 더 강화하지. 그 놈이 만약 관여하면 골치아프니까."
"계획을 구체적으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불만 세력들을 억누르기만 할 수는 없어. 한 번 쯤은 '현실에 대한 자각', 즉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스르륵.
-스르륵.
두 홀로그램의 형상이 나타났다.
"제 3 사도는 오늘 들어갈 예정이니 걱정할 필요 없고, 몰래 들어간다면 4 사도일 텐데."
-키잉!
-키잉!
-키잉!
한우현의 시선이 거대한 거미와 기괴한 형체의 덩어리를 향했다.
"4 사도는 사악한 놈이지만 2 사도처럼 던전 입장과 탈출을 봉쇄하는 유형은 아니니··· 주제 파악을 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공략이야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상관 없다."
창 밖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전 세계에 아직도 보스 몬스터의 위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병신들이 너무 많아. 4 사도 정도면, 딱 실감시켜 주기 좋은 수준이고."
"···확인. 제 4 사도의 던전 브레이크 시나리오를 검토하겠습니다."
"그래, 한 번 경험한다면 오히려 현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테니까."
"다만 지구에서의 보스 레이드가 벌어진다면, 그 여파로 전 세계에 엄청난 패닉이 몰아닥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한 번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야. 준비되지 못한 브레이크보다는, 예방 주사를 맞아 두는 게 낫겠지."
안타깝다는 듯 한우현이 보스의 정보창을 내렸다.
"그러니 그것들은 통제보다는 지켜보는 쪽으로 하자고."
"알겠습니다. 슬슬 레이드 준비를 알릴까요?"
"그래."
그리고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훈련대로만 잘 한다면, 변칙성이 강한 2 사도보다는 멍청한 이 놈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으니··· 이번에도, 잘 해보자고."
마치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를 보듯이.
* * * *
무수한 유리와 거울들이 겹쳐진 화려한 거대한 문의 앞.
-···춤추자···
-···무도회장에서···
-···넌 할 수 있어···
흐릿하게 그 안에서 흥겨운 노래가 들려왔다.
"음악은 좋긴 하네."
"무도회장 테마라서 BGM 팀이 열일했다고 하니까."
라니아가 장난스럽게 한 마디를 흘렸다.
"옛날 생각나네. 이지 나오기 전에는 얘도 진짜 어려웠는데."
"근데 보상은 개 창렬이고. 아오, 최초 격파했더니 보상 미구현이었던건 진짜."
나유나가 불퉁스레 이를 갈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자, 주목!"
-짝짝!
"입장 전에, 다들 복습 한 번 더 하고 들어가자고."
"네, 네!"
"시호리, 브리핑해 볼까?"
"에? 아, 그러니까···."
어물대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3 사도는 [거울]과 [악몽]을 테마로 한 보스에요. 선천적으로 빛을 다루는 힘을 가진 괴물인데, 마신에게 간택 받아 꿈의 권능도 얻었지요."
"그래. 물론 그 테마가 그다지 잘 활용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2 사도처럼, 또 다를지 모르는 일이지. 장즈하오?"
"거울의 가장 큰 특징은 [반사]다."
"그러니 우리의 공격을 상당히 높은 빈도로 반사할 확률이 높아. 공격 시마다 그걸 주의하도록 하고. 시하이옌?"
"악몽은 정신을 다루는 힘이니까, 정신 공격이 들어올 수 있어요···."
"그래. 모두들 내가 다시 한 번 주지한 [정신 방벽] 만드는 법은 잘 배웠겠지?"
"물론이지!"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방벽을 세우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처럼 내가 [신경 조작술 : 다층 자아 분리]로 머리 속에서 전달해 줄 수 없어."
아주 섬세한 운용을 통한다면 가능하겠지만, 보스 룸 같이 강력한 포스 에너지장이 펼쳐진 곳에서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러니 내 지시가 없는 동안에는 맥과 부 공격대장의 지시를 잘 따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일리 그레인저가 엄숙한 표정으로 셉터를 들어올렸다.
-힐끔.
"음? 질문이 있나, 라일리?"
"···아무 것도 아니에요."
왜인지 모르게 그저께부터 이 쪽의 눈치를 보는 거 같지만.
하긴, 그녀 입장에서는 첫 번째 레이드인 만큼 긴장이 될 것이다.
"걱정 마라. 뒤늦게 합류했지만, 훈련 대로라면 충분히 잘, 아니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선 한우현은 다시 맥을 쳐다보았다.
"맥, 준비 절차 확인."
"공격대원 포스 정신체 연결합니다."
-키잉···!
순식간에 맥에서 뻗아나온 포스의 줄기들이 열 명의 공격대원에게 깃들었고.
"버프 스킬, 버프 아이템, 오리지날 스킬, 전 준비 완료."
"모두들, 정신 집중!"
한우현이 크게 눈을 부릅뜨며 뇌 속으로 깊이 의식을 통제했다.
-파아아앗!
"마음에 벽을, 뇌에 벽을, 꿈에 벽을 세운다는 생각으로!"
-[신경 조작술 : 자아 세뇌 : 정신 방벽]
"이렇게!"
"돕겠습니다!"
-[마음의 정화]
-[마음의 정화]
그 뒤를 이어 최윤과 라일리가 [정신 방벽]의 원본이 된 스킬을 구사하며, 모두의 송과체에 덮어씌웠다.
"윽, 좀 어지럽네."
"뭔가 갑갑한 느낌도."
"닫힌 느낌이란 건가."
마침내 모두의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포스와 감정의 여파가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채.
"좋아, 들어가 보자고."
-째앵!
한우현이 먼저 유리 바닥에 발을 내딛으며 소음을 울렸고.
"오-오오- 새로운 손-님이 오셨소!"
"그래도 우린 춤-을 추네요-오!"
순식간에, 깨져나가는 거울들의 속에서.
"오너라 사-랑의 혈-육이여-!"
"어서 일-어서 꿈이 이-뤄져-!"
무수한 유리와 거울로 이뤄진 거미들이, 노래를 하며 튀어나왔다.
"맥, 최단 거리 계산!"
"보스 룸으로 추정되는 포스 파장을 근거로 길을 탐색합니다. 예상 연산 시간 약 2분···."
"천천히 해! 몸이나 풀고 있을 테니까!"
-[광기의 채찍]
-촤아악!
최윤이 가장 먼저 빛의 채찍을 늘어뜨려 그것들을 후려쳤으며.
"끄-어억!"
"키-아악!"
"하, [사랑의 비눗방울]!"
"[죽음의 무도]!"
다른 공격대원들도 빠르게 스킬들을 난사하며, 학살을 시작했다.
"어-디든 갈- 수 있-어!"
"눈 딱 감고- 조금만 지르며언-!"
"지르긴 뭘 질러, 거미 새끼들아!"
"진짜 몹 대사 참 병신 같네!"
"좌표 연산 완료. 이 쪽 방향입니다."
"가자고!"
잡몹은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공격력과 체력이 낮기에, 아무 플레이어라도 학살을 벌일 수 있는 수준.
"아- 비참한 세상아-! 키엑!"
"여자들은 심을 캐고 남자들-은 상하차- 키에엑!"
그렇게 아무렇게나 기묘한 뮤지컬 노래를 부르는 유리 거미들을 순식간에 깨부수며.
"다음, 여기로!"
"거의 다 왔습니다!"
빠르게 보스 룸의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후우!"
"거추장스럽군, 나유나, 막아라."
"알았어! [뒤틀리는 용맥]!"
-쿠와아아아!
마지막으로 보스 룸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뒤따라오는 유리와 거울로 만들어진 거미들을 막고.
-샤라라라···
-샤아아아···
반짝거리는 보스 룸의 입구를 바라보며, 한우현은 중얼거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놈의 페이즈에 대해 정리해보지."
-척!
검과 방패에 포스를 심어 가볍게 휘둘렀다.
"1 페이즈와 3 페이즈는 사실상 허수아비 패기나 다름 없으니 별로 걱정할 게 없다. 중요한 건 2 페이즈지."
"얘도 페이즈 무시하고 이상한 행동 하는 건 아니겠죠?"
"3 사도는 페이즈가 아예 공간적으로 나뉘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2 페이즈만이 실제 보스를 상대하는 거니까."
"2 사도의 패턴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했던 저의 분석을 신뢰하십시오, 시하이옌."
"그, 그렇긴 했지요···."
물론 분석이 아니라 미래 지식이었지만, 확실히 그를 근거로 파티원들을 안심시켜주었고.
"길드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맞아, 지금까지 틀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거미줄 위에서 잘 균형을 잡는 것만 생각해라. 그게 가장 어려울 테니까."
"좋아, 다들 알아 들었지? 추가 질문 있나?"
"없습니다!"
"없어요!"
"없다!"
"준비 다 됐어!"
"좋아!"
-키이잉!
전신에 포스를 한 층 더 강력히 끌어올린 한우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입장한다!"
이미 너무도 익숙해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질문창들을 생략하고.
-[악몽을 비추는 거울에 맞서는 그대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부디 세계수의 가호가 함께하길···]
상태창의 불길한 경고와 함께, 주위 공간이 빛으로 왜곡되었다.
-까앙···!
순식간에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들어선 한우현은.
-우웅!
빠르게 원추세포와 시신경들을 강화하며, 좁은 주변 환경을 확인했다.
"좋아."
제 3 사도의 첫 번째 패턴.
[거울 안의 나].
진입하자마자 갇히게 되는 꿈 속의 거울 방.
"기다려 볼까."
악몽 속에서 침입자들을 둘러싼 거울들은 플레이어의 과거를 투영해 형체를 빚어내고, 내보낸다.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투영한 거울 정령의 정신적인 비난과 침식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바로 1 페이즈였다.
과거 레이드 때와도, 그가 미리 경고했던 것과도, 게임에서의 구현과도.
완벽히 같은 진행이었다.
"자, 와라··· 음?"
그리고 게임에서는 실제 유저의 플레이 기록을 죄다 반영할 수 없기에, 단순히 플레이어의 직업에 따른 행적을 바탕으로 한 과거 모습을 적으로 소환했던 것과 달리.
현실에서는 플레이어들이 게임 캐릭터로 각성하기 전, 폐인일 때의 모습을 구현한 일반인을 과거랍시고 소환해 내보냈으므로.
-스르.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간단히 한 방에 거울 정령을 처치하면 그만인 패턴이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그가 회귀하기 전의 과거에서는, 그랬었다는 것이다.
"···무슨."
과거와 같이 거울 너머에서 비대한 몸집의 썩어 빠진 인간이 튀어나오는 것을 기다리려고 했던 한우현은.
-콰지지지직!
예상과 달리, 서서히 저편에서 모습을 갖추는 회색 빛의 갑주와 방패 그리고 검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이런 빌어먹을."
저건 지금의 한우현의 과거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
-콰득!
-콰드드득!
부서진 지구를 떠돌며 모든 플레이어들에 대한 증오로 물든 괴물.
-콰아앙!
[광군주 아서]가, 그 모습을 갖춰나가며 거울을 두드리고 있었다.
105화. 제 3 사도 악몽을 비추는 거울 아라크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