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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85-90

85화 정신적 외상(Psychological Trauma)

[제 2 사도 알을 깬 자 아브락사스를 격파하셨습니다!]

모두의 눈 앞에, 상태창이 나타났다.

"흐읍!"

하지만, 거기에 집중할 틈이 없었기에 한우현은 재빨리 몸을 놀렸다.

[최초 격파! 진정한 대적자에게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후우우웅!

황급히 흩어진 차정훈과 김재승의 조각난 시체 덩어리들의 위치로 오갔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포스로 끌어당겨, 뭉쳐들었다.

"으, 으으, 으으으···."

"우욱, 으윽, 우웨엑!"

"씨발, 씨발, 씨바아알···!"

송과체만 있어도 부활은 가능하지만, 시체가 불완전할수록 부활 후유증이 더욱 오래, 강렬히 나타난다.

그러니 시체를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챙기는 게 맞았다.

[보상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후우욱!

겨우 겨우 마지막 조각마저 한우현의 몸과 포스로 강력히 묶어낸 순간.

-웅-웅웅-웅웅웅!

비척대며 구역질을 하고, 신음을 흘리던 모든 공격대원들의 주위 공간이 어그러지며.

-파아아앗!

모두가 방금 전과 거의 같지만, 말끔해진 모양의 새로운 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철퍼덕.

-철푸더덕.

한우현은 대략 10개쯤 되는 인체의 조각들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으, 씨, 애미씨바알···."

"아흑, 엄마아···."

"챠오니마, 자오바단, 츠지비우···."

"윽, 으흐흑. 아으흑."

-스윽.

-스윽.

곧바로 그 조각들을 최대한 온전한 형태를 취하도록, 그러모아 배치했다.

그리고선, 한참을 기다렸다.

"으으으."

"으윽."

모두의 흐느낌과 구역질이 끝날 때까지.

-쿵!

방패를 땅에 찍은 한우현이 최윤을 쳐다봤다.

"최윤. [부활]을 써라. 그리고 연이어 [치유]하고."

"···알았어."

북한에서 험한 꼴은 많이 봤을 테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런 전투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듯.

멍한 눈으로 최윤이 셉터를 들어올렸다.

"[부활]."

-스르르륵···!

가슴 한 켠이 크게 파헤쳐진 육신에 살이 부풀어오르고, 파손된 장비 아이템들이 서로 엉겨붙으며 제 모습을 되찾는다.

-스르륵···!

실제로 사제의 스킬들은 원리상 단순히 회복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상 플레이어의 상태를 보다 온전하게 끌어올리는 것이기에.

"아. 아윽, 쿠헉···?"

"김재승. 정신이 드나."

"아, 으에? 으아아?"

퀭한 낫빛으로 눈을 뜬 김재승이 무심코 스스로의 몸을 더듬거렸다.

"으, 으으, 으아아악!"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한참이나.

"으흐, 흐으, 으흐흑···."

"괜찮다. 이제 끝났으니까."

한우현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뜨며 중얼거렸다.

"최윤. 다음 부활까지는?"

"포스 회복 보면 10분 정도···."

"그래. 다들 쉬고 있어라."

"재승 씨 괘, 괜찮아요···?"

"으으, 아,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자, 엘릭서 마시고, 잠시 누워 있어요."

"몸에 힘 풀고, 다시 [치유]걸어 준다 최윤."

"알았어, [치유]···."

그나마 몇 분간 감정을 토해내며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스린, 다른 공격대원들이 그를 토닥여주었다.

"하아."

한우현은 거기서 고개를 돌린 채, 보상 상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어렵다.

너무도 어렵다.

그 혼자서 버티면서 싸우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에 아무리 초월적인 수준의 전투 능력과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이들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호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스스로의 방어마저 도외시하는 상황이라면.

"···아니."

그렇지 않다.

이건 변명이다.

명백한 실수에 대한 변명.

이미, 과거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놓고서도 변명을 할 생각을 하는가.

-콰드드득

-쯔악!

한우현은 혀를 강하게 깨물었다.

-쯔읍.

포스가 흐르는 피가 배어 나오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과거와는 달리, 그는 이제 세상의 미래를 책임지는 존재.

한 번의 실수도, 한 번의 어긋남도 용납되어서는 아니 된다.

"아, 이제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부활]!"

"어, 으, 아으윽?"

"빨리, [엘릭서]! 이거 마셔 씨발!"

"읍, 으읍? 아브븝?"

"그래, 쭉! [치유], [치유]···."

그리 생각하며, 한우현은 다시 뒤로 돌았다.

"다들, 정말로 수고 많았다."

그리고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차정훈, 김재승. 미안하다."

인정해야 할 때였으니까.

"놈이 설마 방어를 포기하고 달려들 줄은 몰랐다. 상정하지 않은 움직임이라, 놓친 내 잘못이다."

"으으···."

"네에···."

둘 모두, 멍하니 대답했다. 제대로 한우현의 말을 인식했는지 의심될 정도로 힘 없는 말투.

"오늘 정말로 큰 일을 해 주었다. 너희 둘 뿐 아니라, 다른 모두도."

하지만 일단 넘어갔다. 지금 격려해야 할 것은, 저 둘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안다. 너희들이 받았을 충격과, 공포와, 당황을."

그 방패와 검을 크게 들어올리며, 빛을 담았다.

"몇 번이고 몸을 베이고, 죽음의 순간을 넘기며 두려웠겠지. 동료의 죽음은 언제 겪어도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고."

"···."

"부활이 가능하니까 별 거 아니라는 개소리는 하지 않겠다. 부활은 만능이 아니니까."

실제로 그러했다.

아브락사스가 아무렇게나 공격을 난자해서 망정이었지.

만약 섬세하게 두개골의 한 가운데를 공격해 으깨서 송과체가 완전히 뭉개진다면.

부활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잘 해 줬다."

지금은 어떻게든, 그들의 정신을 지탱해 줄 때다.

"실수도 있었지만, 너희 모두가 훈련대로 마지막까지 따라와 줬기에."

"아니, 아니, 길드장!"

"그래."

"어떻게, 어떻게."

장즈하오가 온 몸을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지 않다. 나 역시."

"거짓말, 하지 마라! 너무나 익숙하다는 태도가 아닌가?!"

곧바로 한우현의 말들을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끊어버리고,

"두렵고 충격적이지만."

"길드장도! 두 달 전까지는!"

"버텨야 하기에, 너희와 다르지 않."

"우리와 같은 게임 폐인이 아니었나?!"

"···."

울부짖듯이 외쳤다.

"맞, 아. 대체, 대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거야?"

라니아도 혀를 떨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우리는 겨우 뒤에서 공격이나 깔짝이고."

"날아다니는 칼만 피해다녔는데도 돌아버릴 것 같은데."

반으로 약해졌기에, 너무도 쉽사리 격파한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하지만 진정 제대로 된 전투는 최초 격파이며, 더더욱이 플레이어들과 대등히 싸우기 시작하는 것은 3 사도가 시작점이다.

"이게, 이게 아니잖아. 이게,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렇기에 생각보다 쉬운 듯 하다고 느꼈던 공격대원 모두가, 충격과 공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두 명이 죽고, 다른 모두도 몇 번이고 목숨의 위기를 겨우 넘겼으니까.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저 괴물과 정면으로 싸우는 거다요."

엘리쟈 나바로가 멍하니 중얼거렸고.

"나, 나는 부활이 이런 건지 몰랐어."

"너무, 너무 끔찍해···."

차정훈과 김재승이 그제서야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듯.

"이게, 뭐야아···."

"이걸 몇 번이나 해야 한다고?"

울먹이고, 흐느꼈다.

"···."

그 모든 광경을 쳐다보며, 한우현도 잠시 말을 멈췄다.

"이해한다."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방향의 설득이 필요한 모양이다.

위로를 넘어서, 의무감과 절박함마저 심어줄 설득을.

"왜 이래야 하나 싶겠지. 다른 플레이어들도 많은데, 하필 우리여야 하냐 싶겠고."

-치이잉.

-위이잉.

"그게 아니다. 하필 우리가 아니라, 반드시 우리여야 하는 거다."

그의 온 몸에 강렬한 포스가 흐르며, 빛과 소음을 동반했다.

"모두들 잘 알겠지만, 너희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들이다."

한우현이 검 끝을 빛내며, 하나하나 방향을 틀어 겨누었다.

최윤, 장즈하오, 시하이옌, 나유나, 홍세희, 차정훈, 김재승, 엘리쟈 나바로, 라니아···

"우리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바, 밖으로 나오면!"

나유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 같이 다굴 할 수 있잖아! 그럼 10명 제한 없이, 고렙인 애들 다 모아서, 길드원들 다 같이!"

"밖이면, 서울에서?"

한우현이 차갑게 대답했다.

"아니면 뉴욕? 베이징? 자카르타?"

"···그, 그게."

"모두 인구 수가 천 만이 넘는 도시지. 보스는 네 던전 입구 중 하나로 나오고."

성기사가 절망스럽게 얼굴 표정을 구겼다.

"그나마 나와서 토벌이 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보스도 바보가 아니다. 나오자마자 잡는다면 모를까, 만약 도망친다면?"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에 제 2 사도가 나오자마자 어딘가로 숨는다면? 대 도시에다가 원거리로 비행검만 날려댄다면? 마안으로 수 억 명에게 낙인을 찍어대면?"

당연히.

과거에 있었던 일이었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그렇게 멸망했었으니까.

"그, 그렇지만."

"싫어도 해야 한다. 밖으로 나온다면, 이렇게 여파 걱정 없이 싸울 수조차 없으니까."

보스 몬스터와 플레이어들은 초월적으로 강력한 존재들이다.

아직은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능력치와 포스를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다 깨닫지 못한 상태지만.

한우현의 절반 수준으로라도 그 운용이 능숙해진다면, 존재 자체가 재앙이 된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보스 몬스터와 부딪힌다면 여파가 어느 정도로 강할까?"

-우우웅!

-우우우웅!

"민간인과 재산 피해는 둘째 치고라도, 아예 땅과 하늘이 뒤흔들리는데."

실제로 회귀 전, 세계가 멸망했던 가장 큰 이유.

플레이어들과 보스의 전투가 낳은 결과.

-오, 오존층이 찢어졌습니다! 복구가··· 불가능합니다!

-북대서양 해류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항해 체계를 새로 짜야 합니다!

-시베리아 기단이 방금 뒤섞이며 인공 태풍이 발생했습니다! 이러면 기후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올해 세계 농산물 작황이···!

-파, 판이! 유라시아 판이 제 7 사도에 의해, 갈라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전축이 뒤흔들리고, 해양 기류가 파괴되었으며, 대기층이 엉망으로 찢어졌다.

전 세계가 사막이 된 것은 단지 보스가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한 플레이어들의 스킬 여파로 인해 지구 기후와 지질, 대기 구조가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우현이 회귀하기 직전.

지구는 전 세계가 낮과 밤에 따라 최고 기온이 200도에,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에 이르며.

지각이 무너져 녹아 맨틀이 드러난 곳만 수십 개에 이르는.

화성보다도 혹독한 환경을 가지게 된, 불모지 행성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여기선 그런 걱정 없이 싸울 수 있고, 막 눈을 떠 미숙한 놈을 상대할 수 있지."

"···."

"···."

모두가 침묵으로 그에 응수했다.

"우리 모두, 원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있을 게 아니냐."

"···."

"···."

"···."

"···."

하지만 그 다음 말에는. 전원이 불편하게 표정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깊이 생각하기 싫다면, 하나만 생각하자."

-터벅터벅.

한우현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모두의 어깨를 순서대로.

-턱.

-턱.

하나씩 하나씩.

-턱.

-턱.

짚고, 토닥여주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러니, 이건 해야 할 일이라고."

"···예."

"···네에."

"···예에."

여전히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듯, 다들 허무감이 가득 묻어 있는 기색이었지만.

다들 최소한의 의지는 생긴 듯, 멍하니 대답은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강제할 수는 없는 법.

"강요하지는 않겠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싸우는 게, 좋을 리는 없으니까."

"···네?"

"그, 그러면?"

"···?"

"정말로 못 버티겠다면, 다음 주까지 말하도록."

회귀 전에 최강자라고 해서, 지금도 꼭 그리하란 법은 없다.

이들은 한우현이 예상하기에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이들임은 틀림 없었지만, 억지로 시킨다고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는 없는 법.

조금은 풀어 주는 것도 필요했다.

"다만, 어지간하면 함께 해 주면 좋겠어. 너희는 내가 직접 훈련시킨 세계 최강의 전력들이니까."

"···."

"···."

"···."

그 말에 모두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잘 생각해보고, 집에 가서 쉬면서 앞으로 진로를 생각해 보도록."

-터벅터벅.

거기까지 말한 한우현은 공격대원들을 지나쳐, 앞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너희를 믿는다. 그 뿐만 아니라, 길드원들 모두를."

-척!

말을 이으며 검붉은 에너지체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크기의 보상 상자를 향해 검을 내밀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어."

-스가악!

검이 상자 표면을 가볍게 긁었고.

-퍼버벙!

화려하게 상자가 터져나가며, 무수한 아이템들을 흩뿌렸다.

-[영혼 결정]

-[마법의 흔적]

-[프리미엄 포인트]

-[암흑신성의 파편]

-[반짝반짝 용기의 물약]

-[반짝반짝 지혜의 물약]

-[보스 몬스터 현상금···]

-[응축된 포스 에너지···]

-[최초 격파! 진정한 대적자에게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마천의 영혼 성물함]."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템 하나를 곧바로 손 위에 올렸다.

-[아이템 종류 : 소비 아이템]

-[영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한 생명체의 송과체를 손상 없이 고스란히 담습니다. 송과체의 추출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담겨진 송과체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에게 새로운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소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스스로를 위해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흩뿌려진 아이템들의 한가운데서, 길드장 한우현이 읊조렸다.

공격대원들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맹세하듯이.

86화 싱글벙글 세계촌 (1)

-[속보입니다. 방금 막 전 세계 플레이어들에게 제 2 사도에 대한 클리어 메시지가···]

-[이로서 등장이 예견된 12 사도 중 2 사도가 성공적으로 격파되었으며···]

-[플레이어들의 단체, 길드의 위세가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동시에 너무도 급진적인 이들의 행보에 우려를 표하는···]

-[군사 전문가들에 의하면 보스 몬스터라는 플레이어만이 대처 가능한 위협을 길드가 지나치게 부풀려 과장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 또한···]

한국 뉴스가 흘러나오는 일본 도쿄의 한 건물.

"지부장님, 보고입니다."

"응, 그래."

-촤악!

여우귀를 쫑긋거린 여자가 빠르게 서류들을 넘겨 보았다.

-쿵.

"잘 된거 같아. 한국에서 시킨 대로만 한 거지?"

"네, 재일교포 위주로 그대로 들은 대로 해석해서."

"으응."

-쿵.

"여긴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이 부분. 이 부분. 이 부분. 하쿠랑 가네사카 보내서 다시 확인시켜 줄래?"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플레이어의 초월적인 인지 연산 능력으로, 그것들을 지적하며 도장을 찍었다.

"별 문제 없을 거 같기도 하지만, 아직 일본에선 우리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으니까··· 더 신경써야지."

"맞습니다."

"근데 말이야, 중세 잽랜드다워. 왜 아직도 쓸데없이 종이 서류를 쓰는 거야?"

"아하하."

그 말에 일본도를 찬 헌병 차림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왜, 우리나라 욕하니까 싫어?"

"아니, 아닙니다. 저도 이 병신 같은 유사국가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그럼 그 차림새부터 좀 바꾸지···."

"그, 이게 제일 좋은 장비라서."

"에휴··· 하여간 조센이나 잽이나."

최윤성을 바라보며 툴툴댄 하세가와 시호리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우리, 잘 하고 있는 걸까."

"···."

"아직도 테러하는 놈들이 여전히 남아있고."

"···죄송합니다."

"신임 총리는 우리 편이지만, 나머지 모든 정치인들이 다 쓸려나가서 정계도 개판이고."

"···미안."

시호리의 자비에 기대 겨우 속죄의 기회를 얻은.

최윤성이 눈을 감고, 죄책감 어린 목소리를 냈다.

"탓하자는 게 아니야. 나도 어리고, 너희도 어렸으니깐."

상황을 오히려 가볍게 환기해 보려는 듯, 그녀의 목소리 끝이 억지로 올라가며.

"나는 그저, 우리 같은 게임 폐인들이. 히키코모리들이. 제 아무리 길드의 지침을 따른다 해도."

애써 발랄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국가 전체에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바람직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감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응."

최윤성이 일본도를 살짝 고쳐잡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길드장의 말대로, 솔직히 우리같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일을 잘 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요."

"···내 말이 그렇다는 거야."

"하지만, 길드장은 당신이 일본에서는 최선이라고 했잖습니까."

"···."

그 말을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듯, 시호리의 표정이 중압감에 흐려졌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시호리의 결정을 존중하신 것이겠죠."

"···."

"저희를 믿으란 말은, 우리를 믿으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다만, 길드에서 당신을 중심으로 배치하고 설계한 구조도는 정말로 믿을 수 없을 만큼 체계적이니까."

"···응."

시호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그들을 믿는 만큼 스스로를 믿는다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고마워."

"고맙기는, 저희가 더 감사하지요. 용서 받은 것 만으로···."

"후."

-[다음 세계 길드 회의가 곧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에, 세계 각국의 정부는···]

짧은 대화로 의지를 얻은 듯.

-살랑살랑.

시호리가 뒤에 달린 여우 꼬리들을 흔들며, 뉴스로 다시금 눈을 돌렸다.

"그래, 잘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해 보자. 힘 내서···."

그녀가 서류로 눈을 돌렸다.

막 생겨난 일본 지부장은,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도."

"네?"

서류에 서명을 한 시호리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서걱서걱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스윽.

조금의 기대를 담은 듯한 목소리로, 던전의 입구와 제 2 사도의 사진을 보며.

* * * *

미국 백악관White House.

-웅성웅성···

-소곤소곤···

그 중앙 회의실.

국무 회의를 막 준비하던 현장.

부통령, 국토안보부장관, 국방부장관, 중앙정보국장···

-한국은 지금···.

-보스 몬스터의 능력에 대해 분석하자면···.

-현재 미국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현황이···.

하나 하나가 일국의 국가 수장에 준하는 영향력을 지닌 자들이, 쉴새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철컥.

-···

-···

그 대화들은, 하나의 인영이 나타남과 동시에 일제히 멎었다.

"안녕하십니까? 조금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닐세. 어제, 업무가 특히 많이 추가되었으니까. 그럴 만 하지."

부통령이 그의 사과를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감사합니다. 긴급한 사안인 만큼, 빠르게 발표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온 몸에 기계 회로와 금속 의수, 의안, 의족과 같은 의체가 달린 동양인 사이보그. 로보캅을 연상케 하는 모습.

-[길드-전미 플레이어 연합 통합 계획]

"오늘 시나리오 발표를 맡게 된 유진 킴입니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이상예측부장.

"현재 상황에 대한 짧은 분석을 먼저 말씀드리고, 차후 권장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달칵.

집무실 뒤의 거대한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길드장은 현재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이 연구에 협업하기를,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미국 지부로서 들어오기를 강력히 권고하였음.]

-삐비빅!

그 문장과 함께 동북아시아 일대, 동남아시아 일대에 퍼진 길드의 지부와 활동 라인들이 세계 지도를 배경으로 형상화되었다.

-삐비빅!

뒤이어 유럽, 아프리카, 남미, 북미에도 몇몇 점들이.

"보시는 대로, 현재 길드의 질서는 사실상 대항 불가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반은 기계에 가까운 유진 킴조차, 두렵다는 듯 살짝 그 지도를 힐끔거렸다.

"전체 플레이어 전력의 60%가 길드에 가입되었으며, 핵심 전력이라고 칭해지는 290 이상과 250 이상은 80%가 길드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촤라라락!

나유나, 홍세희, 정재선, 권승환, 라니아 등 무수한 간부들의 얼굴이 그들이 맡은 역할과 함께 나열되었다.

"길드의 구조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체계적입니다. 군사, 재정, 외교, 정보전까지. 만들어진 지 두 달도 되지 않았으며, 하루 만에 만들어진 단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이지요."

동시에 그 구조도의 선들이 미국 본토와 연결되며 마인드맵을 그렸다.

"다행히 길드의 일시적인 묵인 하에, 이번 달까지 비공식적인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선들이 다시금 미국을 하나씩 붉게 물들이며, 마침내 거대한 엑스 자 모양을 그렸다.

"한 달 전까지는 어떻게든 방어는 가능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어떤 방법으로도 저지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하아."

"정말 믿을 수 없군."

"아무리 초능력자라고 해도, 어떻게 이리도 빨리."

부통령을 위시로 한 무수한 장, 차관들이 한숨을 내뱉었다.

"따라서, 저희 조사국 모두는 비현실 시나리오 고려 결과, 더 이상은 길드의 제안을 유예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조건을 보지."

"예. 여러가지 재정적이거나 외교적인 협조 사항도 있지만···."

-딸깍.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을 상징하는 원형의 문양과, 전미 플레이어 연합을 상징하는 별 문양이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 둘입니다. 저희 조사국이 길드와 '전면적인' 연구 협력 관계를 맺을 것. 그리고 전미 플레이어 연합의 길드 미국 지부로의 편입."

"···어느 것 하나 만만한 조건이 없군."

"그렇지요, 둘 모두 사실상 정부 기관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국방부장관의 반문에 유진 킴 또한 표정을 어둡게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에게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다른 시나리오는 없는 것인가?"

"예. 현재 길드 산하에 존재하는 공식 군사 조직···. 집행부와 작전부는, 그 산하 몇백 명 만으로도 일주일 만에 미국 전체를 초토화 시킬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저와, 연합의 작전 팀이 나서도요?"

은발 적안의 이쁘장한 여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아크비숍이 나섰을 때,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네?"

"뭐?"

순간 모두의 안색에 당황이 어렸다.

"만약 라일리 그레인저와,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초기에 무력화 된다면···."

그 반응들을 무시하고선 유진 킴이 기계음을 이어나갔다.

"미국은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

"···."

"···."

음울한 침묵이 번져나갔다.

"···그래, 어차피 모두들 인지한 보고였지."

"안타깝게도, 어제 밤 동안 계속해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 보았지만···."

"충분히 이해했네."

"···어쩔 수 없는 것인가요."

"하아."

사실, 미국의 관료들도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가장 약한 플레이어조차도 일반인들로서는 대응은 커녕 반응조차 어려운 수준.

그런 마당에 그 끝을 알기 어려운 소위 랭커급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모인 단체에게.

아무리 세계 최강대국이라 해도, 아무리 뒤늦게 플레이어들을 이민시키려 해도.

우위를 내주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상황 자체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키잉

-키잉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유진 킴이 온 몸에서 포스의 불빛을 활성화했다.

"명목상으로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길드장은 저희에게 많은 자율권을 보장했습니다."

-제 1항. 전미 플레이어 연합은 이름을 지부로 바꿈과 동시에···

-제 2항. 전미 플레이어 연합, 이하 길드 미국 지부는 특수한 상황을 제하고서는 미 국방부와 정부의 협조를···

-제 3항.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은 길드와 함께 스킬, 아이템에 대한 모든 연구 권리와 협업을···

"다소의 내정 간섭은 어쩔 수 없지만, 보스 몬스터의 강림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길드 미국 지부는 많은 자율권을 보장받았습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좀 이상하군."

"맞습니다, 부통령님. 미국이 아무리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국가라고 해도."

"중국, 동남아시아 권역, 지금의 일본에 비하면 너무도 유한 조건이야."

부통령의 의문을 외무부장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받았다.

"불과 두 달 전의 미국에게 요구하였다기에는 오만한 것들이지만, 지금의 길드의 위상으로 보면 특혜에 가까운 자율권이지요."

여기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유진 킴이 눈을 빛냈다.

-키이잉!

"모두들, 집중해 주십시오. 다소 믿기 힘들고,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

-파앗

화면에 새로운 슬라이드가 올라왔다.

-[현실 붕괴 시나리오 - 길드장 한우현 분석안]

과거와 현재의 한우현의 사진을 양 옆으로 띄운 슬라이드가.

"이 부분은, 저희가 코드 네임 독재자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수락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던 가장 큰 근거이자."

가만히 앉아 있던 조사국장 멜린다가 한 마디를 더했다.

"현재의 모든 믿을 수 없는 상황들에 더해, 길드의 존재 자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입니다."

-치지직

화면이 암전하며, 하나의 번호를 띄웠다.

-[P-12-R1]

-[Meaning : Protagonist-Typer 12-Regressor]

"Regressor회귀자?"

"주인공 유형 12? 저게 무슨 소리인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단어의 등장에, 국무회의의 모두가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댔다.

"다들 조용히! 보고를 모두 듣고 질문하지."

그 웅성임은 부통령의 일갈에 의해 잦아들었다.

"너무도 체계적인 길드의 구조, 이상할만치 전투에 능숙한 길드 군사 전력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초인연무부장 자일라 라모.

날카로운 인상의 동양인 여성이 일어나며 마이크에 입을 댔다.

"포스 스킬들에 대한 초월적인 수준의 이해. 스킬들의 원리를 분석하는 너무도 많은 기초학문에 대한 지식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초상연구부장 알론 무하마드.

유순해 보이는 인상의 아랍계 남자가 일어나며 마이크에 입을 댔다.

"무수한 플레이어들과 길드원들, 한국의 첩보원에 의해 분석된 그들의 조직력과 통제력."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현장조사부장 어거스틴 커크패트릭.

깡마른 인상의 백인 남성이 일어나며 마이크에 입을 댔다.

"저희는 단순한 창작물 침식 현상 뿐 아니라, 이 모든 것들에도 불합리와 모순이 있다고 분석했으며."

마지막으로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장 멜린다 프랭클린.

통통한 인상의 흑인 여성이 그들의 뒤를 이었으며.

"길드장 한우현은 아이템이든, 스킬이든, 모종의 수단을 이용해."

-팟

-팟

-팟

-팟

유진 킴이 그 뒤로, 한우현의 행동거지와 명령, 계획들을 띄웠다.

"또 다른 세계선에서 시간 역행Time Slip을 해 온, 미래인으로 추측됩니다."

-···??!

-···!!

-···?!

부통령을 포함한 잠시, 그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벌떡!

-벌떡!

-벌떡!

일제히 일어나며, 경악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다시, 좀 더 자세히 근거를."

"부통령님! 정말로 이게."

"믿기 힘들겠지만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이런 미친, 아인슈타인이 무덤에서 일어날 소리를!"

그 소란의 한 가운데에서.

"시간."

가만히 앉아있던 은발적안의 여자.

"여행자?"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 재능으로, 만남의 순간부터 상대의 감정을 강렬히 느꼈던 사제.

"당신이···?"

라일리 그레인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87화 싱글벙글 세계촌 (2)

중국 베이징 시.

그 중심부, 빌딩의 최상층.

"흐음."

-타라락.

-타라락.

삼색으로 염색된 머리칼의 남자가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부장, 뭐 그리 고민이 많음?"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그 반응을 보며, 막 상하이에서 돌아온 두 화려한 복식의 남자와 여자가 질문을 했다.

"문제가 있어. 그것도 많이, 생각보다 많이 말이야."

"뭐?"

"많이?"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가 살짝 눈썹을 올렸다.

"상하이방의 지도자가 우리한테 전면 협조하기로 했는데, 상해 금융계에 문제가 많다고요?"

"그래."

-촤라라락!

길드 중국 지부장.

중국공산주의청년단 플레이어 총위원장이자.

현재,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국 공산당 내부를 게걸스레 삼키고 있는 권력자.

-화르륵!

리하오란이 인쇄한 서류들이 무가치하다는 듯, 불꽃을 일으켰다.

"역시 예상대로, 주석이 그리 만만하진 않네. 아무래도 수작을 부리고 있나 봐."

"주석파가 아직도 그 정도 영향력이 있다고? 상하이방의 남은 유일한 동앗줄이 금융계인데, 그마저도 믿을 수 없다는 겁니까?"

"정확히는, 믿을 수 없다기보다는."

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애초에 상하이방의 유의미한 세력이, 그다지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겠지."

"하아, 처음에는 다들 기대가 많았는데."

"쭉정이···."

-후우욱!

리하오란이 바람을 불러내, 그 잿가루들을 창문 밖으로 흘려보냈다.

"괜찮아. 전 전 주석이란 양반이 그리도 쉽게 호언장담을 하며 전적인 도움을 약속했을 때부터, 예상한 바였으니까."

"예상했다고요? 그럼 더더욱이 가만 있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닙니까?"

화려한 중국 선협 소설에 나올 법한 도복 차림새의 남자.

화즈펑이 의문을 던졌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쪽 꽌시가 있는 친구들을 더 동원해야 할 것 같은데요."

"동의. 시하이옌과 장즈하오가 필요함."

"그 친구들 말고도 금융계에 연이 있는 길드원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워낙 저희가 기반이 부족한지라."

"닥닥 긁어봤자 공청단은 출신 성분부터가 상대가 되지 않음."

근대풍 제복을 입은 여자, 류샤오린도 짧게 덧붙였다.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그래.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이거든."

-딱!

-촤라라락!

리하오란이 손가락을 튕김과 함께, 또 하나의 서류들이 주우욱 날아들어왔다.

"가만 있을 자가 아니니, 대체 무슨 수작을 준비할까 좀 추적해 봤더니··· 이렇게 선을 넘어 줬거든."

그 곳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두개골이 한 가득 쌓인, 허름한 창고의 사진과.

공장의 밖으로 막 발을 내딛는 남루한 차림새의 무협 소설에 나올 법한 도사의 사진이 있었다.

"···뇌식선腦食仙."

"만주 쪽에 있었단 말입니까?"

"베이징에서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동북 3성 쪽 공안들이 감도 못 잡았다라... 합리적 의심을 해 봐야겠지."

"주석, 이 자식이."

"용납할 수 없는 일임."

"물론, 증거는 없지만."

리하오란이 경멸스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촤라락!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걸 방치했으니, 이걸 가지고 확실히 압박을 해 볼 생각이야."

"···그건 그렇지요. 우리의 경고를, 전혀 듣지 않았다는 거니까."

"애초에 우리는 무시한다 쳐도, 한국 간부들이 저걸 본다면 결말이 뻔한데 이해할 수 없음."

"대외적으로 발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당의 혼란도, 놈의 반응도 예측하기 어렵지. 다른 건 몰라도 후앙푸셴의 도주 실력은 정말 뛰어나니까."

-촤라락!

뒤이어, 또 다른 서류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달 하나와 별 다섯 개가 걸린 국기가 찍힌 서류들이.

"그러니, 이걸 가지고 물 밑에서의 압박 뿐 아니라.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명분'까지도 삼아볼 생각이야."

-호릅.

차를 한 모금 마신 리하오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친구 나라, 여기를 따라가는 방향으로."

"···싱가포르요?"

"이 방식을 따른다? 그게 무슨 뜻?"

동남아시아 제일의 금융 허브, 그 재계의 분석에 대한 문서들이 눈앞에 떠오르자 둘 모두 의문을 띄웠다.

"봐봐. 동남아시아 지부장, 응우옌 바오 쯔엉이 어떻게 우리보다 훨씬 쉽게 일을 처리하는지."

"그건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 없음."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국가의 체급부터가 다른데 여기와 비교하는 건."

"첸 헨드릭."

둘의 말을 끊고, 리하오란이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 작은 나라, 싱가포르의 하부장이지만. 하는 일만 보면 사실상 응우옌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통제를 맡고 있어."

-스그극!

그 사진을 손톱 끝으로 긁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세계 4대 금융지의 은행들과 재벌들을 이렇게 손아귀에 넣고 통제하다니. 솔직히, 이건 인정해야 해."

"···."

"···."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무르게 굴었다는 걸 말이야."

"지부장."

"리하오란."

둘의 목소리가 불안하다는 듯 흔들렸다.

"그러니까, 본받을 생각이야. 이 친구들의 방식을."

"그 말은."

화즈펑이 침을 삼켰다.

"봐 주는 건 여기까지야. 좀 더 온건하게 처리하고 싶었지만."

리하오란이 창문 밖으로 눈빛을 돌렸다.

"태자당 뿐 아니라, 공산당 전체가 썩어 빠져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 하니.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새로 만드는 게 맞는 방법이었어."

공산당 중앙 위원회가 위치한, 건물을 향해.

"모조리 불러. 공청단 소속 플레이어들 중 랭커 급 전원을."

-반짝

-반짝

-반짝

그의 주위로, 얼음꽃과 번개꽃과 불꽃이 자그마하게 피어나 공전했다.

"리즈시웅. 양위엔신. 후웨이. 즈거링. 왕첸. 그리고 다른 도시에 있는 친구들도, 치안 유지할 친구들만 남기고 전부."

뒤이어 스스로도 조금은 불안하다는 듯, 그러나 기대된다는 듯.

"뭐, 주석 자리를 갈아치우기에는 아직 이른 듯 하지만··· 공산당 내부의 권한 구조를 조금 바꾸는 것 정도라면, 그다지 충격이 크지 않겠지."

달뜬 목소리로.

"오늘. 중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을, 공식적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게서 박탈한다."

충격적인 선언을 내뱉었다.

"애초에, 우리들 하나하나만 나서도 죄다 쓸어버릴 수 있는 군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안 그래?"

모든 권력의 근원은 금력과 무력이니.

이제는 중국 플레이어들이 가장 증오하던 권력자들.

그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기반을, 마침내 무너뜨리기 위해.

"가자. 태자당도, 상하이방도, 주석파도, 서열 정리를 해야지."

"···지부장의 결정이 그리하다면."

"···호출하겠음."

둘 모두, 그리 생각하는 중국 플레이어들의 일원 중 하나였기에.

과격하다고는 생각했을지언정.

반대하지는 않았다.

"정상화의 시간이다."

* * * *

동남아시아 최대의 증권 거래소.

싱가포르 거래소 주식회사Singapore Exchange Limited의 한 복판.

"흠, 귀가 간지러운데."

-후비적.

"누가 내 얘길 하나?"

그 중앙부에서 기다란 활을 든 포도색 머리칼의 남자가 귀를 후비다가.

"일단 하던 일부터 하고···."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에, 그 행동을 멈췄다.

-촤라라락!

-촤라라락!

무수한 태블릿 PC들을 바람을 불러일으켜 띄운 채, 동시에 화면을 넘기며 보고 있었으니까.

"싱가포르개발은행Development Bank of Singapore Limited은 적당히 따라는 주고 있지만, 부족해. 이 무능한 새끼들, 앉아서 돈만 먹더니 진짜 투자나 세탁을 제대로 하려니까 퍼지기만 하는데."

플레이어의 특권.

초월적으로 향상된 인지와 연산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근데 화교은행Oversea-Chinese Banking Corporation 새끼들은 무능한 건지, 반항하는 건지. 하여간 짱깨 새끼들은···"

본인부터도 중국계라는 사실은 그다지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욕을 내뱉으며.

-똑똑.

-벌컥!

"저, 하부장님?"

"거기서 말해."

-꿀꺽.

그 무수한 서류들과 컴퓨터 화면들의 흐름을 보며 침을 삼킨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응우옌이 방금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계획서를 좀 더 자세히 세워 달라고···."

"아니, 이 쌀국수 새끼가."

그가 인상을 구겼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줘야 해? 인도네시아가 뭐 다른 동남아 나라들처럼 유사국가도 아닌데, 뭐 이리 자꾸 묻는 게 많아?"

다 해 줘도 불만이 많아,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쉬익!

"어, 어엇?!"

부하가 막 들고 온 서류를 바람으로 잡아당겼다.

"인도네시아 거래소가 말을 안 들어? 그럼 힘으로 찍어 누르고, 뭐, 지분 구조? 하아, 돈이나 쓰고 말해···."

노래하듯이 빠르게 응우옌이 보낸 요청들을 요약한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건 보낼 만 하긴 하네. 동남아시아 지부 재무 구조가 너무 엉망진창이야. 무역 수지도 지장이 있다라."

"그, 첨언에 의하면 그 쪽 지부에 머리 쓸 줄 아는 친구들이 적으니, 좀 보내줄 수 있냐고도."

"···인도네시아 인구 수가 3억인데,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우리한테 파견을 해 달라고? 그건 안 돼. 여기도 부족해. 차라리···."

잠깐 고민에 빠진 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 그래. 내가 직접 잠시 다녀와야겠어."

"예? 직접요? 안 됩니다! 지금 일이."

"가면서 하면 되지."

"그, 그래도···."

사실상 싱가폴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길드 재무 구조와 자금 세탁 전체를 도맡은 하부장.

"야, 언제까지 내가 다 해줘야 해? 너네도 다 해줘도 불만이 많냐?"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보면서 좀 배웠을 거 아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첸이 다시금 싱가포르 하부장의 간부들을 떠올렸다.

다행히 동남아시아 국가 중 가장 평균 학력이 높은 국가였기에, 쓸만한 친구들이 꽤나 존재했지만.

그에 비한다면 다 합쳐도 현상 유지나 제대로 할까 의심되는 한심한 놈들을.

"···언제까지 하부장인 내가 다 할 수는 없지."

"으으."

하지만, 이번 기회에 한 번 부하들이 어느 정도로 싱가포르를 통제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보완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일 인수인계 천천히 해 줄 테니, 오늘까지 하던 일 대충 정리하고 다들 오라고 해."

"예!"

"그래, 가 보고."

첸 헨드릭이 잠깐이라도 빠진다면, 그의 초월적인 지도력으로 얼기설기 엮은 은행, 증권, 기업들의 연합이 불안정해질 것은 너무나 뻔했다.

"음, 이렇게 된다면. 아니지. 그럼 그 때는 저렇게. 이 시나리오도 준비하고. 음."

따라서 빠르게, 무수한 가능성들을 속으로 생각하고 검토하고 결정했다.

사장이 모든 것을 다 하는 회사는 없는 법이니까.

지난 두 달 간 가파르게 달렸으니,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리라.

"길드장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도 한다고 했으니, 중국이랑 같이 도우려면···."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

"아, 가기 전에 뵙고 갈까."

재미난 호기심을 눈빛으로 띄우며.

"어이, 신!"

"예, 예에···!"

구석탱이에 처박혀,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집사복 차림의 늙수그레한 남자를 일깨웠다.

"내가 아까 귀가 좀 간지러웠거든."

"···예?"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어머니랑, 아버지랑. 할아버지, 할머님도. 잘 지내나 궁금해지더라고."

"예, 예에? 갑자기 무슨 소리신지."

"무슨 소리기는."

-끼이익

창문 밖으로 그 활을 길게 잡아당긴 남자가, 저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피잉!

-끼이익!

"오, 명중."

저 멀리 있는 새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선 가볍게 미소를 짓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내 명령을 잘 따랐는지, 확인해야 할 때인 거 같아서."

"모, 모두들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계십니다! 도련님께서 계시던 전 감옥에서요!"

"신."

-핑

-핑

-핑

그를 중심으로, 바로 옆에 놓인 화살통에서.

-피빙!

-피빙!

-피비빙!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져 나오며, 신이라고 불린 남자의 주위를 초월적인 속도로 맴돌았다.

"감옥이 아니라. 자택이라고 해야지."

"그, 그, 죄, 죄송합."

"난 두 번 말 하는 걸 싫어해."

-후우욱

어느 새 온 몸에 바람을 휘감고 집사에게 접근한 첸 헨드릭이, 피식 비웃었다.

"그래도 집사 아저씨한테는 옛 정이 있으니까, 이렇게 잘 대해 주잖아. 그렇지?"

"도, 도련님."

"자, 가자."

평온하기만 했던 그의 눈에 질척한 증오와 기대감이 깃들었다.

"아버님과 할아버님이 과연 내가 먹었던 그 식사를 잘 드시고 계신지, 봐야겠어."

88화 싱글벙글 세계촌 (3)

"야, 또 실패···."

"쉿!"

별 생각 없이 입을 연 화려한 복식의 남자, 그 입을.

"말로 하지 마!"

마찬가지로 화려한 코스프레 복장의 여자가, 다급히 막았다.

"읍, 으읍, 왜?!"

"우리 말하는 거도 다 감시할지도 모른다니까?"

"아니, 이 항구까지 누가 감시한다고···."

"이 씹, 입 닫으라고!"

-웅웅웅···!

여자가 씩씩대며 지팡이 끝에 포스 에너지마저 끌어올리자.

"예민하긴, 씨발···."

비로소 남자가 입을 닫았다.

"···온다."

그리고 둘을 보며, 골목길 사이사이를.

-두리번.

-두리번.

불안한 듯 서성이며,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다가오는 여럿의 인영이 등장했다.

-두리번.

-두리번.

또 한 무리.

-두리번.

-두리번.

그리고 또 한 무리까지.

"야, 좀 알아냈어?"

"···응. 애초에 그리 큰 비밀이 아니었던 거 같아서, 생각보단 쉽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끼이익···.

부산, 컨테이너 정박항.

그 중 낡은 하나 안에 들어간,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

"[염동 세계]! ···일단 내 감각으로는 별로 걸리는 건 없긴 해."

"[영역 전개]!"

"[정화의 영역]!"

"···좋아, 위치 확인이야 어쩔 수 없어도 별다른 카메라나 녹음기 같은 건 안 느껴져."

"젠장, 이런 데까지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놓진 않았겠지···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그래, 우리 다들 핑계는 대 놨지만 이런 데서 모이는 것 자체가 리스크니까."

그들이 급하다는 듯, 곧바로 목소리를 낮춰 회의에 들어갔다.

"다들 예상했다시피, 길드는 모든 소속 플레이어들을 감시하고 있어. 모종의 수단으로."

"그건 알고 있었잖아. 문제는 그 감시는 어떤 식이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냐는 거지."

여자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응, 가장 중요한 시스템은 두 개야. [길드원 위치 파악]과 [초 인공지능 맥]."

"맥이면, 길드장이 달고 다니는 그 드론?"

"그래. 지금까진 그냥 보스 레이드에서 애드 온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집행부 애들한테 들어보니까, 감시 체계에도 관여하는 거 같아."

"···씨발, 그럼 답이 없잖아."

"위치 파악도 게임 시스템으로 하는 거면, 막는 게 불가능하단 거 아냐?"

"진짜 미친, 빅 브라더도 아니고 이 정도로 죄다 감시하고 다니는 게 말이 되나···."

그의 침울한 말에, 다른 이들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흘렸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그 드론을 공격해서 없애는 건 말이 안 되고··· 길드를 탈퇴하는 건 그것보다도 더 말이 안 되지."

"그럼 어떡해?"

"···솔직히 이대로면 그냥 길드 말 잘 듣는 게 답이라는 결론밖에 안 나오는데."

"야, 씨발 이렇게 숨 막히게 살라고?"

"평생을?"

"그렇지만 집행부 걔들 너무 강하잖아. 초기 멤버라서 다들 충성심도 강하고."

"뭣보다 길드장은 그 집행부 전체가 다 달려들어도 못 이긴다는데."

"아니, 그 정병 탱커충 새끼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야···."

한참을 소곤거리던 플레이어들.

"강원도 대표, 네 생각은 어때?"

"있겠냐고. 경상도 대표부터 말하시지 그래."

"야, 뾰족한 수가 있으면 너한테 물었겠냐?"

"···나도 없어. 전라도 애들은?"

"좋은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대안 정도는 있긴 한데···."

의욕 없어 보이는 삐쩍 마른 남자가, 힘 없이 석궁을 어깨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뭔데?"

"야, 있으면 아무거나 말해 봐."

"아니, 진짜 좋은 생각은 아니고 그냥 대안이라서."

"좆 같은 소리 해도 딴지 안 걸 테니까, 일단 내놔 봐."

"으음···."

그 말에 주위 플레이어들의 눈치를 보는, 전라도 대표라고 불린 남자.

"···미리 말하지만, 이건 길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거나, 탈출하는 방법은 아니야."

"그럼?"

"결국 길드가 이렇게 모든 플레이어들 동선 하나하나 감시하고, 아이템 수까지 체크하고··· 그럴 수 있는 건, 걔들이 독점적인 단체라서 그런 거잖아."

"존나 세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서, 뭐?"

-꿀꺽.

모든 이들이 그에게 집중하는 것을 느낀 듯, 남자가 침을 삼키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결국 그 근거가, 보스 몬스터 공략이란 거지. 그러니까."

"···아하."

소보루 마크가 그려진 큼직한 빵을 씹어먹던 남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부 말고, 우리끼리 보스를 공략해 보자?"

"그래. 게임에서는 솔직히 주보돌이로 몇 백 번은 잡았던 놈들이니까."

"영상 보면 게임이랑 좀 다르던데."

"당연히 게임보다야 어렵겠지. 그치만 결국 근본이 어디 가?"

"맞아, 결국 보스는 딜찍누라고."

"으음, 애매한데."

회의적인 목소리와, 찬동하는 목소리가 뒤섞였고.

"그래도 일단 나쁘진 않은 아이디어 같기도 해."

"우릴 길드 외로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긴 하니까."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목소리를 키워 보자라."

"어, 뭐 대충 그런 말이지."

"흐음."

-짝!

곱슬머리의 남자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박수를 쳤다.

"좋아. 일단 이거로 밀어 보자고."

"괜찮을까?"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있겠지?"

"야, 걱정 마. 5 사도까지 죄다 우리가 몇 번을 잡았냐? 내가 나무위키에도 그거 다 적은 인간이야."

그 말에 마른 남자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자신감, 나쁘지 않네. 그럼 충청도 대표··· 네가 한 번 주도해 볼래?"

-으적

소보루빵을 마저 씹어먹은 남자가 손을 들며, 어조를 약간 올렸다.

"아냐. 나도 솔직히 아직 세력이 크진 않으니까. 이건 모두 모여서, 의견을 합칠 사안이야."

"음, 그건 그렇제."

"맞아."

"그리고 어쩌면 길드 내부 뿐 아니라, 정부라던가 다른 길드 운영에 불만을 가진 플레이어들까지도."

"그래. 걔네까지 잘 하면,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나도 확신이 없긴 한데. 다들 비슷한 생각이야?"

스스로의 생각에 자신이 없다는 듯, 전라도 대표가 다른 플레이어들과 눈을 마주쳤다.

"···."

"···."

"솔직히 아주 좋은 아이디어는 아닌 거 같긴 하지만···."

몇몇이 눈빛을 주고받았고.

"당장 생각하기에는, 반전 기회로는··· 나쁘지 않은 거 같네."

"그럼 제주도 애들한테도, 연락 정도는 넣어 볼게."

"그 새끼들은 진짜 사이코패스들인데?"

"···어차피 씹힐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에휴, 그래 없는 거보단 낫겠지.

"좋아.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이만 돌아가자고."

"그래, 너무 오래 있었어."

"우리 위치도 [길드원 파악] 때문에 아직 가입 안 한 애들 빼고는 공유될 테니까."

"진짜, 미친 독재자 새끼···."

길드에 이미 가입당한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몇몇이 발걸음을 돌렸다.

"길드 쪽 반발하는 애들 의견은 이따 정리해서 보내줄게."

"그래, 수고해."

-터벅터벅

-저벅저벅

먼저 나간 이들을 보며, 남은 이들이 불만 어린 몇 마디를 더 내뱉었다.

"···하려면 뭐라도, 서둘러야 해."

"곧 길드 가입자 수가 전체 플레이어의 70%에 육박하게 될 거야."

"그 중 충성파가 벌써 반, 최소 30%는 되는 거 같으니까."

"이렇게 숨통 막힌 채로 살 수는 없어."

영상과 광고로 한우현이 최대한 그 위험성을 알리긴 했어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플레이어건 비플레이어건 간에 직접 체험할 일이 없는, 현실에서의 보스 몬스터의 위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발악이었다.

* * * *

한반도의 북녘.

각이 맞춘 듯한 깨끗하고도 적막한 도시.

-척!

-척!

-척!

거대한 남자의 동상 둘이 세워져 있는.

그 중심부의 광장.

"받들어, 총!"

"위대하신 구원자들께 경례!"

"아아, 그래. 다들 내려 봐."

"이번 애들은은 좀 괜찮네."

"하여간 빨갱이 새끼들이 상명하복은 잘 한다더니, 개 뻥이야 개 뻥."

실실대며 깡마른 군인들의 도열을 구경하던 화려한 외모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제 해산들 해 봐."

"해, 해산, 이요?"

"그래. 해-애-산. 이해 못 해?

그 말에 망설이던 군인이, 살짝 배를 움켜쥐고는.

"저, 그, 그러니까."

"뭐야, 왜 쭈뼛거려?"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 군인들이. 전부 배급이 끊기고, 장마당도 닫혀서. 이렇게 열병식을 하면. 관례대로면 배급을."

"하."

-콰작!

거기까지 말을 내뱉은 인민군 대령의 양 팔이,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증발했다.

"아, 아아악!"

"하나. 빨갱이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 하나, 빨갱이는···"

"둘. 빨갱이는 윗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두, 두울···."

"세엣. 우리는 위대하신 백두혈통들보다도 더 위대하고도 위대하신 너희들의 구원자시다."

찢어져라 입을 벌리며 웃는 플레이어들.

-후웅!

-후웅!

그들이 하나씩 하나씩, 평양의 상공에 떠올라.

그 아래 도열한, 자그마한 열병식을 진행하는 군인들을 광오하게 내려다보았다.

"윽, 으악!"

"아악!"

곧이어 끔찍한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지른 조선인민군들의 팔다리를.

-촤학!

-촤좌좍!

정확한 저격으로,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아니, 비명 지르지 말라니까?"

"이 얼마나 자비롭냐? 전 수령님은 곡사포로 처형했는데, 우린 이렇게 깔끔하잖아?"

"맞아, 치유도 해주고, 응?"

"어, 근데 지금은 우리 대장도 없는데 이럼 누가 치료해?"

"응? 대장 말고도 사제 많잖아?"

"지금 여긴 다섯 명 뿐인데?"

"어, 그래?"

그 말을 듣자 좀 뻘쭘해진 듯.

-스윽.

신나게 트집을 잡을 놈들을 찾아 팔다리를 으깨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내렸다.

"음. 야, 미안하게 됐다?"

"아윽, 아흐흑···!"

"어무이, 어무이···!"

"야야, 그만들 봐 주자. 얘네는."

그렇게 막 불가해한 폭력이 잦아드려는 찰나.

-탕!

하나의 총성이, 허공을 울렸다.

"···아, 안 돼!"

"아."

-웅웅웅!

"구, 구원자는 무슨! 다, 당신들이 몇이나 죽였는데!"

"하."

허공에 뜬 총알을 움켜쥔 도사와.

그 아래에서 아주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아래를 바라본 무녀, 기공술사, 대전사, 원소술사···.

무수한 직업군들이, 유희거리를 찾았다는 표정으로 한 군인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대체 왜 우리한테 이러는 겁네까?!"

"왜냐니."

-후욱!

총알을 잡았던 플레이어가, 그 바로 옆에 안착했다.

"너희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군대에서 뺑이칠 일은 없었을 텐데."

"이게 다 너네 돼지 새끼랑, 그 밑에서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은 쓰레기 시민들 때문이잖아."

"응?"

"그럼, 그러면! 왜 이런 식으로!"

그 군인이 울부짖었다.

"이미 공화국 전체가 당신들 손에 있는데! 왜 아무 의미 없이 괴롭히기만 하냐는 겁네까?!"

-피식.

-피식.

-피식.

"야, 빨갱아. 니네는 벌레 잡을 때, 의미를 생각하면서 잡냐?"

"너네는 존재 자체가 불쾌한 것들이야."

"주제도 모르고, 유사 국가의 유사 시민들이."

"우리 위에서 핵이니 오물이니 테러니."

"너네 전 수령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역겹다고."

그들이 한 데 모여, 무기를 들어올렸다.

-우웅

-우우웅

-웅우웅!

이내, 거대한 압력이 점차 죄어들었다.

"아, 아악?!"

-우두둑

총을 쏘았던 인민군 소좌의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꺾이며, 그 안에서 뼈가 드러났다.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마."

"꼬우면 혁명했어야지."

"누가 그 돼지새끼 모시고 살래?"

"아, 아아악!"

-퍼버벅

역장들의 한 가운데 갇힌 그의 몸에서 근육과 장기들이 눌려 터져나왔다.

"히, 히끅."

"으, 으욱."

"흡."

그를 지켜보던 무수한 조선인민군들의 눈에, 무기력한 공포가 깃들었다.

3대 독재를 이어나가던 백두혈통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미치광이 초능력자들에 의해.

더욱 끔찍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폭정이 자연재해처럼 펼치는 나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일상이었다.

"아, 이 짓거리도 계속 할 순 없다니까. 지금 조금이라도 더 즐겨야지."

"뭐, 언젠간 통일 할 거니까."

"그 때까지만 좀 놀자고, 빨갱이 새끼들아."

광기어린 목소리들이, 평양 시 만수대 언덕에 울려퍼졌다.

"대장이 슬슬 안정화 할 시기가 머지 않았다고 하니, 조금이라도 재밌게 살아봐야지."

* * * *

-중얼중얼···

-중얼중얼···

촛불 하나가 켜진 거대한 동굴의 안.

수염을 덮수룩하게 기른, 기다란 천자락을 옷처럼 칭칭 두른 남자가.

-중얼중얼···

-중얼중얼···

너무나 빠르게,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무언가를 외우고 있었다.

"주인님, 다음 수행자들이 왔나이다."

"그들을 들여보내라."

"알겠나이다."

퀭한 낯빛의 남자의 질문에,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움직여라!"

"들어가라!"

"크악!"

"크흐으윽!"

곧이어, 수십 명의 터번, 구트라, 이바야···

아랍 풍 복식을 입은 수많은 남자들이 끌려왔다.

"앉-아라."

"앉-아라."

그리고 퀭하고 어두운 피부색을 한 사람들.

-지지직!

-지지직!

"아, 아아악!"

"아악! 알겠습니다!"

"크흐흑!"

아니, 언데드로 사역받는 자들이 지팡이를 올려 그들을 지졌다.

"다들 온 것 같군."

그들이 모두 조용해지자, 마침내 벽을 바라보며 진언을 외우던 남자가 일어났다.

-스으윽

"السلام عليكم 안녕들 하십니까?"

"아, 아제른! 자, 자네가 설마, 실종의 범인이었다고?!"

그리고 아는 사람이었던 듯.

가장 앞에 있던, 마찬가지로 수염을 덮수룩하게 기른 아랍계 남성이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 라시드.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에서, 촛불이 비친 남자가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힘, 저 기괴한 부하들. 설마, 그 사탄의 혈육들···."

"···사탄?"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캬아악?"

"크하아악?"

동시에, 그들의 뒤에 도열한 언데드 소환수들이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콰아악!

-콰아악!

라시드라고 불린 자의 어깨를 강하게 깨물었다.

"아, 아아악! 자, 잠깐!"

"놓아주거라. 아직 진실을 깨닫지 못한 어린 아이들일 뿐이니."

그리고 그의 자비로운 한 마디에 의해, 겨우 그 고통이 멎었다.

"까르르륵."

"끼에륵."

"헉, 허억···."

"아직 세상의 새로운 이치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시군요. 괜찮습니다."

아제른이 다시금 평화로이 미소지었다.

"라시드, 저는 당신들께 새로운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기회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진정한 신이 무엇인지요."

"신? 신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그 황망한 답변에 라시드라고 불린 남자가 입을 어물거렸다.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희 내면에 있는 신에 대해서요."

"내면이라니··· 신은 오직."

라시드가 거기까지 말을 하려다가, 순간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오, 오직."

그러나 잠깐의 망설임이었을 뿐, 이내.

"아, 아, 알라 뿐이시거늘!"

눈을 질끔 감고는, 외쳤다.

"하아."

그 대답에 아제른이 한숨을 내쉬고는.

-후우욱!

어둠의 기운을 타고, 빠르게 그의 앞으로 내려왔다.

"눈이 있다면 보고, 귀가 있다면 들으십시오."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내가 그 사막 신 나부랭이한테 힘을 얻은 것 같습니까?"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

"나를, 보십시오."

그 광기 어린 말에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고개를 겨우 들어올렸다.

"아냐, 아냐··· 아제른. 아직 늦지 않았네."

침을 꿀꺽 삼킨 라시드가 아제른을 바라보며, 각오를 한 듯.

"자네가 지금까지 터키, 이라크와 이란에서 저지른 모든 납치와 테러, 그리고 범죄 행위들··· 면책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네."

"아직도 허무한 소리를 하는군요. 이 세상에 우리가 믿는 신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규모가 줄긴 했지만, ISIS는 이라크와 이란에 여전히 영향력이."

"저는 세상이 바뀌고 나서, 터키에서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서로 닿지 않는 대화.

"수뇌부들도 잘 설득한다면 자네가 사탄의 혈육이 아니라 신의 사자로."

"나는 어찌하여 이런 깨달음을 얻었는가. 우리 조직의 한국인 포로에게 배운 게임 따위로 힘을 얻다니, 어찌나 부조리한가."

"제, 제발 내 말을 듣게. 이러면 아니되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오로지 고뇌와 고심으로 도달하는 니르바나निर्वाण야 말로."

-후욱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 아래, 확 다가온 아제른의 눈 위에.

검은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가, 열반에 드는 길이라고."

"부디, 부디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누구보다 신실했던 게 자네 아니었던가···."

"신실했었지요. 그런데, 그 신실함의 끝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아제른의 목소리 끝에 음울함이 깃들었다.

"터키에서 자네의 활동이 신경을 못 써준 것 때문에 그러나? 그건 우리의 실수네. 결코 자네를 홀대해서가 아니었어."

"글쎄요,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본다면, 그 시간은 오히려 저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추, 축복?"

"예. 제가 미륵의 가르침과, 그 수선의 길인 플레이어로서의 토대를 닦게 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불경한 말에 안 그래도 공포에 찌푸려졌던 라시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미륵? 수선?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불경한."

"예, 무얼 하러 숨기겠습니까? 저는 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서요."

"프, 플레이어라는 사탄의 힘이 자네의 눈을."

"아니, 아닙니다. 그것은 계기였을 뿐."

아제른의 얼굴에 온화한 평화로움이 떠올랐다.

"진리를 주지 못하고 플레이어 하나 없는 아브라함계 사이비들이 종교라고 한다면."

그의 안대로 씌워지지 않은 한 쪽 눈 위에,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를 모조리 정상화하는 것이, 진정 미륵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니. 이것은 온연한 저의 깨달음입니다."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시네! 나는 자네가 우리 이슬람 국가에 입적하던 순간부터."

"마구니가 가득하구나."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듯.

"끌고 가라. 이것들은 살아서 부처님의 길을 따를 능력이 없으니."

"아제르으으은! 노, 놓아라!!"

"모두 정상화하여, 미륵의 세계를 여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라."

아제른이 염주알을 굴리며 눈을 감았다.

-콰아악!

-콰드작!

-쯔자자작!

"[창세의 어둠]."

순식간에 온 몸의 곳곳을 언데드들에 의해 꿰뚫리며,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한 때 아제른의 상사였던, 이슬람 국가의 조직원들.

-콰자작!

-스하하학!

그들이 하나 둘씩.

기존의 형상을 버리고, 퀭한 눈빛과 검은 피부를 담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무래도, 이름도 버려야겠군. 지금의 이름은 사막 냄새가 나서 불쾌하니."

안대를 끼고 수행복을 걸친 남자는 다시금 고심에 빠졌다.

"미륵, 은 너무 광오하고. 삼장, 법정, 혜월··· 아니야."

-스하학!

-사하학!

어느 새 죽은 이들 모두가 눈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며 일어서고 나서야.

"신행. 신의 길을 걸으니, 이게 좋겠어."

아제른, 아니 신행 앗 마흐무트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제 2 사도, 알을 깬 자 아브락사스가 격파되었습니다!]

"아, 길드, 한우현···."

상태창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

"당신은 미륵이나이까, 천자마나이까···."

중얼거리며 그는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참오의 길을 나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소서···."

-스하학!

그 주위로, 무수한 어둠의 흑마력이 잠겨들듯이 퍼져나갔다.

89화 동경은 이해로부터 가장 먼 감정이다

잠실.

올림픽 공원, 이었던 곳.

그 중심부에서.

-후우욱!

-후우우욱!

한 근육질의 남자가, 여러 화려한 복식을 갖춘 사람들의 사이에서.

"···."

"···."

도끼를 휘두르며, 마치 무술을 시연하듯 춤을 추고 있었다.

-쉬이익!

-쐐애애액!

"됐어, 그만 해."

"마, 맞아요오···."

"다, 본 것 같아."

그 말에 가열차게 도끼를 휘두르던 남자.

"···알았다."

장즈하오가 도끼질, 아니 정확히는.

-척

두 도끼를 마치 검과 방패처럼 휘두르던 동작들을 멈췄다.

"솔직히 우리가 무술이니 체육이니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이건 진짜로, 똑같은 게 맞다요."

"그 말이 그냥 한 게 아니었다고."

최윤, 엘리쟈, 라니아가 동시에 하나의 감상을 내뱉었다.

"하긴, 처음부터 좀 이상했어. 우리가 배운 전투법들은 그래도 상식적인 움직임들이었는데."

"길드장의 검방술은 뭔가 애초부터 사람 같지가 않은 동작들이었지. 그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길드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난."

"의심이라기보다는, 의구심이지, 요."

시하이옌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유나의 불퉁한 말에 답했다.

"한우현은 분명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멋있다는 게 왜 나와?"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벗어나잖아요. 대체 어떻게 보스랑 똑같은 무술을 쓰는 건데요?"

"···그, 게임에서 비슷한 기술 쓰잖아! 보고 따라했나 보지!"

"게임에서 아브락사스는 애초에 대사도 없어! 칼질도 도트 그래픽인데 무슨 비슷한 기술!"

최윤이 짜증을 담아 고함쳤다.

"···."

"···."

잠깐 동안, 정적이 일었다.

"야, 다들. 표정이 왜 그래."

가장 먼저 입을 연.

"최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응?"

"홍세희. 그래서 우리가 뭐 해야 할 게, 달라질 게 있어?"

"장즈하오, 시하이옌. 너넨 어차피 리하오란이 시켜서 온 거잖아. 뭐하러 의심을 해?"

나유나가, 극도로 흥분한 기색으로 하나하나 사람들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지적했다.

"나머지들도! 길드장은, 한우현은! 원래 다 잘 하잖아!"

"···."

"걔는 원래 뭐든지 알잖아! 그, 그러니까."

그러나 열이 뻗친 듯, 말을 하다가도.

스스로 뭔가 이상하고, 논리에 맞지 않음을 느낀 듯.

"···그, 그러니까아···."

나유나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들었다.

"하아."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다들, 솔직히 참가도 안 한 내가 뭐라 조언하기엔 좀 그렇지만."

용 형상 갑주를 걸친 남자가,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길드장한테 비밀이 많다는 것 정도는 모두들 알고 있었잖아."

"···."

"···."

"애초에, 던전이 등장할 예정이라는 걸 길드장이 혼자 예측했다는 것에 더해, 길드장이 보스를 얼마나 열심히 힘겹게 대비하고 준비했는지도."

권승환이 하나하나 다른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우리 모두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도, 덮고 넘어가기로 한 부분이잖아."

"알지만, 그거랑은 다른 문제다요."

"아니, 난 그렇지 않다고 봐."

"어음···."

그의 자신감 있는 발언에 막 반박하려던 엘리쟈가 입을 어물거렸다.

"[신경 조작술], 나도 너희만큼 아니지만 배우면서 느꼈어. 길드장의 감정을."

"···."

"절박함, 위기감, 불안함, 초조함···."

침묵의 한 가운데서 권승환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길드장은 필사적이야. 이상한 수작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고. 뭔가 그리는 큰 그림이 있겠지."

"확실히, 그건 그렇다만···."

"비밀이, 그 정도로 밝히기 어렵다고."

장즈하오와 최윤이 어느 정도 납득한 기색을 보였지만, 여전히 약간은 불만을 내비쳤다.

"···비밀. 못 밝힐 비밀."

라니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선.

"뭐, 말투가 좀 별로긴 했지만. 나도 동의는 해."

"동의, 동의라."

최윤이 잠겨드는 목소리로 라니아의 말에 답하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마스터가 이상하게 알고 있는 게 많고, 설명하기 힘든 모습도 많지만···."

-샤라랑

그녀의 주위로 화려한 비눗방울이 터져나갔다.

"하는 행동거지나 감정들을 보면, 그게 안 좋은 이유일 거 같진 않거든."

"내, 내 말이 그 말이야! 믿어 보잔 말이지!"

"···응, 그래."

라니아가 잠깐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유나를 쳐다보다가, 짤막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니 장즈하오, 시하이옌, 엘리쟈 너희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게."

권승환이 막 끼어들어 그 결론을 내리려던 찰나.

-터벅.

발자국 소리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터벅. 터벅.

"어, 왔구나···."

"으응."

"아, 그, 괜찮다요···?"

"그, 이 쪽으로···."

저 너머에서 날아올라 착지하고선, 걸어오는 두 남자를.

"좀 회복 되셨나···?"

"저기, 말 좀."

"[엘릭서] 좀 더 마시고 왔어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른 사람들이 힘없이 맞이해 주었다.

"···."

"···."

퀭한 낯빛의 두 플레이어.

-털썩!

-털썩!

한국 지부장 차정훈과, 김재승이 주저앉듯이 자리를 잡았다.

"그, 바람은 좀 잘 쐬고··· 왔어?"

최윤이 어색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둘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결정했습니다."

"···네, 저도."

하지만 그 말은 거의 무시하듯 흘리고선.

"저희는, 더 못하겠어요."

"아예, 다 못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차정훈과 김재승 모두가, 충혈된 눈으로 혀와 입술을 떨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나갔다.

"최초 격파는, 너무, 너무 어려워요."

"너무 괴로워. 어지러워. 그, 그 때가 떠올라."

둘 모두, 미안하다는 듯.

"두 번째, 2차 레이드라면 모르겠지만."

"1군, 1군 작전부에는 도저히 더 못 있겠어요."

고개를 푹 숙이면서, 울먹였다.

"죄송합니다."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은 세계 최강이라 할 만하나, 그 의지는 뒤따르지 못했던 이들의 한 마디였다.

* * * *

잠실 사옥 최상층.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우물우물.

최근 후원자와 마찰을 빚어 문을 닫은, 고급 식당의 헤드 쉐프에게 초청 주문으로 포장해 온 전복 타코를 한 입 베어 문 채로.

-꿀꺽.

"흐음."

그를 삼키고서는, 침음을 냈다.

제 2 사도, 알을 깬 자 아브락사스의 최초 격파 보상.

[마천의 영혼 성물함]을 바라보며.

3 사도까지는 회귀 전에도 던전 안에서 격파했었던 만큼, 당연히 한우현이 이미 알고 있었던 아이템이었다.

"맥, 네 생각은 어떠냐?"

"글쎄요. 저는 어디까지나 회귀 전의 지식과 현 상황을 토대로 판단하는 만큼, 전과 같이 쓰는 게 맞다는 의견을 내고 싶습니다."

"단 한 명에게만 쓸 수 있다니."

-꽈악.

한우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금, 그 설명을 읽어보았다.

-[마천의 영혼 성물함]

-[아이템 종류 : 소비 아이템]

-[영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한 생명체의 송과체를 손상 없이 고스란히 담습니다. 송과체의 추출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담겨진 송과체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에게 새로운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소비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거창해 보이는 설명이었지만.

실상은 간단했다.

비 플레이어를, 플레이어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이었으니까.

능력을 포기한 플레이어의 아바타 자체를 고스란히 뽑아서 전승시킨다는 원리로.

"어떻게 최초 보상이란 게, 일회용이냐. 차라리 기간제로 할 것이지."

"제작자의 악의가 느껴지는군요."

"디렉터 그 놈은 이미 첫 날에 죽었는데, 쓸데 없는 소리를."

문제는, 소비 아이템이라는 것.

"하아."

"역시 둘 중에서 고민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만큼 미래에 도움이 될 사람이 없으니까."

"결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치이잉

맥이 집무실 앞에 펼쳐진 슬라이드에, 영상을 투영시켰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초인연무부장 자일라 라모."

"···스승님."

"먼저 그녀를 플레이어로 각성시켰을 때의 예상 효과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자일라 라모는 광적인 히어로물 마니아이자 무술 전문가, 운동학 전문가입니다."

-후욱!

-후우욱!

-후욱!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동양계 여자가 다양한 동작을 드러내는 영상이 송출되었다.

"또한 회귀 전, 이미 해당 아이템을 통해 [권투사]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그 힘을 초월적인 수준으로 이해해 [포스 전투술]을 개발한 전례가 있습니다."

"그래, 검증되신 분이지. 정말로 대단한 재능의 무술가···."

"자일라 라모를 플레이어로 각성시키는 대가로 전면적인 협조를 요구한다면, 미완의 기술인 포스 전투술 12형 화신체를 비롯해, 대부분의 기술을 다듬어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바꿔 말한다면 화신체의 개발 외에는 보완의 가능성이 적다는 뜻도 되지."

"글쎄요, 마스터께서 포스 전투술에 통달하시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창의력이 뛰어나신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

"포스 전투술은 화신체를 제하더라도, 종합적으로도 완성된 기술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초인의 무학]이라는 분야에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내는 것이 검증된 인재고요."

상당히 얄미운 말이었지만, 한우현은 그에 반박하지 않았다.

"라모에게 무투가 계열 직업인 [파도꾼]이나 [권투사]를 전승시킨다면, 전보다 더 안정적인 사회가 유지되는 만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홀로 떠돌면서.

[포스 전투술]은 그 사용과 활용에만 능숙해졌을 뿐, 차마 새로운 기술은 구상할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오리지날 스킬이란 개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알겠습니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초상연구부장 알론 무하마드."

영상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다.

"···선생님."

"그를 플레이어로 각성시켰을 때의 예상 효과를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아랍 계열의 외모를 하고선 구트라 모자를 착용한 수염이 덮수룩한 남자의 주위로.

-파앗!

-파앗!

-파앗!

무수한 물리학과 수학의 공식과 좌표계가 나타났다.

"알론 무하마드는 광적인 마법과 신비의 오타쿠로, 현대 물리학 대부분에 대한 학부 수준의 이해와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에 대한 박사 수준의 전문가입니다."

-모든 물리학의 기초는 뉴턴 역학입니다···

-좌표계를 인식하십시오···

-포스는 이론상 모든 에너지로 치환 가능하며 엔트로피 법칙을 무시하는···

-아니, 그렇게 어려운 설명이 아닙니다···

-이런, 왜 이걸 이해를 못하시지···

-실례지만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십니까? 쌀을 드시는 걸 보니 사람인데 대체 왜 이걸···

-아, 제가 직접 시연할 수만 있었다면···

그 설명과 함께 그가 무수한 플레이어들에게 지식을 쏟아부으며 강의하는 모습들이 빠르게 송출되었다.

"또한 회귀 전, [물리 왜곡술]에 대한 대부분의 초안을 구상했으며 이를 여러 다양한 플레이어 직업군의 스킬 원리를 연구하여 접목시킨 성과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만약 플레이어였다면."

"따라서 알론 무하마드를 플레이어로 각성시키는 대가로 전면적인 협조를 요구한다면, [물리 왜곡술] 전반에 대한 큰 성능의 향상과 함께 미완의 궁극기인 [현실 재조정 해석]에 대한 새로운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확실히 잠재력만으로 보면, 이 분이 더 커."

"하지만, 물리 왜곡술은 포스 전투술에 비해 큰 단점이 있습니다."

한우현의 고심 어린 말을 맥이 차갑게 끊었다.

"근간이 지나치게 섬세한 기술이라, 보스전에서는 적극적으로 쓰기 힘들다는 거지···."

"바로 그렇습니다. 라모가 개발한 [포스 전투술]은 강대하고도 튼튼한 적을 상대로 강대 강의 힘싸움을 전제로 한 기술."

-콰광!

-콰과과광!

라모와 한우현이 주먹과 방패를 부딪히는 영상이 송출되었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냐! 그래 가지고 무슨 탱커 노릇을 한다고!

-크윽···!

-아직 배울 게 많다! [절대 방어] 하나로는 너 하나만을 지킬 수 있을 뿐이야!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남들을 지키려면,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한다!

-일어나라!

"그러나 [물리 왜곡술]은 실전적인 전투보다는 다양한 현실 왜곡 효과를 일으키고 연구하는 것에서 파생된, 전투술보다는 학문에 가까운 영역입니다."

"위력보다는 조정과 분석 그리고 조작에 특화된 기술이니까."

"따라서, 마스터의 주적인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한 전투력의 증강을 꾀하기 위해서는 자일라 라모가 보다 안전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물리 왜곡술은 지금은 대인전에서나 쓰는 기술이지만, 원래의 잠재력은 훨씬 높아."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 손 위로 무수한 포스 에너지체를 응집시켰다.

-후웅!

-후우우욱!

열, 빛, 소리, 전자기파, 중력이 그 안에서 제멋대로 뭉치며 휘몰아쳤다.

"지금은 강력한 포스 파장 때문에 보스를 상대로는 [물리 왜곡술]을 보조가 아닌 주력으로는 쓰기 어렵지만, 내 포스가 회복되고 난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플레이어 능력의 근간을 [무술]로 해석한 [포스 전투술]보다 그 근간을 [마법]으로 해석한 [물리 왜곡술]이 그 잠재력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알론 무하마드를 [염동술사]나 [사제], [사령술사] 같은 마법사 계열 직업으로 각성시킨다면 정말로 엄청난 스킬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애초에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물리학과 수학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스킬 연구가 답보되자, 알론 무하마드는 계속해서 답답해했었으니까요."

맥 또한 한우현의 반문을 긍정했다.

"하지만, 현재는 너무나 시간이 없습니다. 송과체의 충전에만 해도 한 달이 걸릴 텐데,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연구를 시작해 성과를 내는 데에만 두 달이 더 걸릴 것입니다."

"잠재력이냐, 확실성이냐···."

그가 말꼬리를 흐리며 두 사람의 신상정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제 3의 안을 찾아봐야겠어."

"제 3 말씀이십니까? 커크패트릭과 멜린다를 생각하고 계신다면."

"아니, 아니야. 내 말은, 아이템 자체를 아예 다르게 사용할 방법을 말하는 거야."

-콰악.

한우현이 [마천의 영혼 성물함]을 집어, 가까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분 만으로는 안 돼. 애초에 두 스킬 체계는 상호적으로 개발된 기술이야."

의지를 되뇌인 그가, 주먹을 꽉 쥐며.

"[전이의 토템]."

성물함을 든 반대편의 손에 또 다른 아이템을 소환했다.

"이걸로 내 능력을 여기 [전이]시켜보며 원리를 이해한다면."

"위험한 시도입니다. 자칫하면 마스터의 능력치 혹은 포스가 손실될 수도."

"해야 해."

-[대적자의 의지]

-키이잉!

구태여 모든 상태 이상을 해제하고, 정신력을 순간적으로 증강시켜주는 공용 스킬을 발동시켰다.

"난, 할 수 있다."

일회용 아이템을 다회용 아이템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불가능할지라도.

"할 수 있어."

두 번 사용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시도해 볼 만 하리라.

"플레이어 전력도, 슬슬 끌어올려야 하니까."

게임에서와 다르게, 현실에서는 최전선 전투에 임하지 않더라도.

훈련 교관으로서 스킬에 능숙한 이들도 필요하니.

한우현이 한국 지부장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비록 그 의지를 잃었지만, 그렇더라도 절대로 쓸모가 없다 할 수 없는 두 플레이어를.

"다음 멤버로는 역시, 안정성을 위해서라면··· 딜러 보다는 서포터 쪽이 더 낫겠지."

-으적.

-으적.

후식으로 우엉 타르트를 씹으며 한우현은 다시금 화면에 나타난 무수한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훑었다.

-촤아아악!

전 세계의 수많은, 주요 플레이어들의 목록들을 그 시야에 담으며.

-으적.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지만···."

고뇌에 찬 목소리를 냈다.

"역시, 정말로 죄다 통제할 수는 없나."

90화 미국 지부장 라일리 그레인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