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네 주 동안! (3)
"흐음··· 좀 쉬었다 오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왔다고."
"예, 한우현님."
"그럼 그 동안 자네 자리를 대체할 사람에 대한 말이 나왔을 텐데."
"물론 나왔습니다만···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자원자가 없어서요. 그래서 그 제안은 무산되었습니다."
"다행이긴 해. 그런데, 그렇단 말이지···"
-탁
-타닥
한우현이 말없이 책상을 두드렸다.
한참이나.
"이준범."
"예."
그러고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은데?"
"예? 그럴 리가 없습니다. 길드 안에서도, 밖에서도 제 처신은 완벽했습니다. 세현이가 제 아들, 아니 딸이라는 것도 아무도 모르고···."
"맞아. 그것 때문에 내가 집도 못 들어가고 길드에서 먹고 자고 다 하는데."
"글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허무성?"
"예, 예? 갑자기 왜 저한테?"
한우현이 넌지시 던진 말.
"...아, 너였냐?"
"당신."
"자, 자 잠깐만!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거기에 이준범과 라니아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애, 애초에 저는 이제 한국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모를 일이지. 미국을 우선시한다고 해서, 한국을 완전히 배신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이 고아원 같은 새끼가. 길드장이 미국을 봐준다고 해서 너까지 호구로 봐도 되는 줄 알아? 당장 그냥."
"아아악! 정말로 억울하다고요!"
이대로 가다가는 억울하다 억울해라며 노래라도 부를 듯한 기세.
"그런 뜻은 아니었다. 정말로 의견을 물어 본 거야."
"그,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너무 격렬한 반응이라, 한우현은 허무성을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길드, 한국 정부, 미국 정부 세 곳 모두에 발을 걸친 그야말로 고래 회충 같은 놈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미국 정부와는 협력해야 할 관계였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정보를 주는 대신.
허무성을 약간이라도 복종시킨다면 충분히 쁘락치로서 이용할 가치가 있었으니까.
"둘 모두 진정해라. 아마 허무성이 흘린 정보는 아닐 테니까."
"그, 그렇다니까요···"
"그냥 길드의 자금 행보가 너무나도 순조로우니까, 자연스레 할 의심이었을 뿐이다."
"정말로, 잘 숨겼는데···"
"이준범. 당신이 엘리트기는 하지만, 그건 금융과 재무에 대한 것이지. 정보전이나 첩보전에 대해서도 잘 알까?"
그 말에 이준범이 눈살을 찡그렸다 피기를 반복하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그렇다고는 못 하겠군요··· 그럼 어쩌지요?"
"걱정 마라. 아직은 의심 정도일테니까. 무엇보다, 이미 내가 잘 곤조를 부리지 않았나?"
"곤조라고? 깽판이 아니라?"
라니아가 피식 웃었다.
-찾았다 쳐 죽일 범인들!
-하, 한우현? 갑자기 세종시에는 왜?
-쳐 죽여 버리겠어!
-히이익!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시지 말고 왜 그리 분노하셨는지!
-잠깐만 길드장님! 진정하시지요!
-진정은 개뿔! 사탄의 혈육들아!
-지금 내가 중졸이라고 무시하는 거냐! 하긴 고위 공무원들이면 학벌도 좋겠지!
-저, 저희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잠깐, 거기로 가시면 안 됩니다!
의도적으로 흘리는 기만적인 모습들.
정부가 은근슬쩍 스리슬쩍 길드의 정치적이거나, 재정적인 행보에 제동을 걸라 하면.
한우현은 단 하루도 참지 않고 그 즉시 법원, 기재부, 국회의사당 등 기관들의 본부에 찾아가 개지랄을 떨었다.
-해골 세 개 배달 해 줘?
-청와대 말고 세종시도 한 번 훈육 마려운데···
-아, 우리의 세금을 빨아먹는 곳이구나! 정상화가 필요해요!
덤으로, 그런 모습을 보이기를 아주 좋아하는.
나유나를 필두로 한 집행부 플레이어들도 잔뜩 이끌고.
당연히 숟한 장 차관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고.
-누, 누가 그 분 좀 데려와!
-이준범? 아무리 너라도 이번에는 못 참는다!
-그러지 말고 잠시 진정 하시지요. 무엇이 불편하셨습니까?
-감히 우리에게 법을 가지고 시비를 털어? 당장 그 판사랑 검사 새끼들부터 데려와! 덤으로 기재부 장관이랑 차관도!
-아이고, 그게 아닙니다. 여기 좋은 차가 있는데 잠깐 오셔서···
-좋은 차라고? 흥, 과연 얼마나···
마지막으로 늘 있는 WWE를 하듯 이준범이 찾아와 그를 진정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준범의 입지는 당연히 미칠 듯이 올라갔고.
"국정원도 병신이 아니지. 뭔가 수상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아챌 만 해. 길드의 활동을 전혀 막지 못하고 있지 않나?
"그렇지만, 솔직히 제가 없었더라도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막지 못할 것은 자명한데."
"한은의 다른 위원들이 널 질투했을 수도 있지."
"그것도... 그럴 듯 하군요."
"무엇보다 국정원과 기재부 양 쪽의 파견자가 제 역할 못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 의심의 이유로는 충분해."
"저, 저도요?"
"그래. 헤드 스파이가 삼중 첩자인 것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래야 안 남길 수가 없으니까. 솔직히, 네가 이렇게 허술하게 구는 데 안 들킨 것도 CIA가 뒷받침을 잘 해줘서 그런 거지 네가 잘 해서가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그, 아무도 없긴 해도 그건 좀 말하지 마시고···"
"아무튼, 길드 내부에서 정보가 샐 일은 없다. 이준범 너도 간부들 외에는 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하지만 영원히 들키지 않을 거란 생각을 버리도록. 준비는 해 두어라."
"준비라면?"
"아예 넘어올 준비."
"..."
아무리 이준범이 자식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한 평생을 몸담은 금융공무계. 심지어 그 자리도 고위직인 한국은행.
그를 버리라는 말에는, 잠시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강요는 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해 준 것만으로도, 솔직히 자네는 충분히 큰 도움을 주었으니까."
-호르릅
그 대답을 기다리며, 한우현은.
중국 안휘성 산 육안과편 녹차를 마시며 그 진한 단 향을 음미했다.
이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군.
"하지만, 이건 자네를 위한 제안이기도 해. 지금의 한국 정부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테니까."
"...그럴 거라고는, 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요. 국정원은 아무래도 하는 일이 그렇긴 하지만."
"허무성 네가 알려준 작전들만으로 판단한 게 아니다."
국정원이 준비하고 펼치는.
길드에 대한 모든 공작들.
약점을 제대로 잡은 허무성을 통해 그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긴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것때문에만 정부를 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던전까지 세상에 나왔는데, 아직 정신을 전혀 못 차리는군."
-[플레이어 공무원 잠입 작전 3안 - 폐기]
-[플레이어 군인 잠입 작전 5안 - 폐기]
-[고려-센트럴-동화 여론전 2안 - 실행 중]
-[내부 길드원 아이템 우선 거래안 - 폐기]
허무성이 빼돌린 국정원의 작전 계획서들.
-[길드장 대리 플레이어 옹립 계획 - 실행 중]
다른 건 뭐 귀엽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만.
-[제주도 중심 빌런 플레이어 집단 구축 계획 - 실행 중]
"아무리 그래도 담호영한테 손을 벌릴 생각을 해? 이건 멍청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라군. 허무성, 담호영이 뭐라고 하던가?"
"정부 제안 자체에는 긍정적인 듯 했지만, 길드와 싸울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더군요. 특히 한우현님께, 그만 좀 스토킹 하라고 전해달라고..."
이것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기에, 좀 더 자세히 그 보고서를 훑어봐 주었다.
"뭐, 우리 대신 찾아준 건 감사한 노릇이니 다르게 써먹어 줘야겠어."
"일단 닿는 연락 내역은 모두 전해드리겠습니다. 길드 쪽에서 보낼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도..."
"그래, 복종은 못 시킬 놈이라도 일단 대화가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닌 듯 하니... 다른 나라까지 가서 깽판치는 것보다야, 저 밑에 찌그러뜨려 놓는 게 낫겠지."
"...실제로 담호영이 그런 비슷한 말도 했습니다."
"젠장, 역시 멍청한 놈은 아니야. 전자기인, 이 개사기 직업 진짜..."
욕을 씹어뱉고선 휴대폰을 닫은 한우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바꿔야겠어."
"...예?"
"우리가 아니면 보스 몬스터는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후우웅
그 손 위로, 포스 에너지체가 정팔포체Tesseract를 그리며 순환했다.
"도움을 줄 생각은 커녕 어떻게든 분탕 칠 궁리나 하고 있으니. 미국이랑 너무 비교되는군."
-꿀꺽
그 살벌한 말에.
허무성, 라니아, 이준범 모두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뭐,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언제부터 이 나라의 정부가 미래를 생각했다고."
"크흠, 그건 좀 이따가 생각하시지요. 너무 열만 내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이준범이 헛기침을 하자 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너무 먼 얘기니까. 허무성, 당신은 이만 가 보고. 미국으로 간다는 놈들은 최대한 은밀하게, 따로 움직이게 해."
"예, 가보겠습니다···"
-덜컥
"그럼 애초에 하기로 했던 거나 정리해 보도록."
"네. 아이템 사업 쪽은 처음에는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순조롭습니다."
-드르륵
-삐빅
이준범이 그 안경을 한 번 올리고서는 PPT를 가리켰다.
"암거래가 아직 있긴 합니다만, 큰 규모의 거래는 나유나의 집행부와 홍세희의 정보부가 거의 차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좋아. 이번 달 규모는?"
"아직 미래 그룹에서 데이터 정리를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최소 매출 1조는 나올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작인 걸 감안하면, 제대로 연구한다면 10조는 거뜬하겠어."
"...대단하시군요. 저 압축적인 정보만 보고서도 성장 규모를 예측하시다니."
한우현의 잠겨드는 말에 이준범이 놀랍다는 듯이 화답했다.
"아니, 중졸이라면서 대체 저런 그래프는 어떻게 해석하는 건데?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해석이 아니라 감이다. 너도 회사 하나 진득히 운영하면 그런 눈이 생길걸, 라니아?"
"...그럴 거 같진 않은데."
그건 라니아의 말이 맞았다.
저 예측은 정말로 이준범이 정리한 자료들을 보고 한 말이 아니라.
과거 세계 플레이어 연합과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이 합작해 이뤄낸 아이템 연구 사업의 성장 추세.
그를 토대로 한 추측이었으니까.
"전매와 던전 사냥 정책에 대한 길드원들의 불만은?"
"솔직히, 만만치 않습니다. 간부들의 무력이 워낙 압도적이라 찍어 누르는 것 자체는 성공했지만... 그게 정말로 마음까지 복종시켰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지. 사실상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를 반 쯤 압수하는 것이니. 뭐, 그 부분은 내가 직접 잘 조율해 보겠다."
"예, 주의 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길드원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소요 사태 수준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투자와 판매 채널이 제대로 자리잡으면 인센티브라도 좀 뿌려야겠어. 그건 그 쯤 넘어가고... 금융 쪽을 봐 볼까."
"이 쪽은 예상 이상입니다. 첸 헨드릭, 정말 대단하더군요. 솔직히 싱가폴이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은행에서 일했다면 어땠을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혼자서 다 한 건 아니지. 우리와 중국 금융계들도 뒷받침하고 있으니까."
-촤라락
싱가폴의 투자 설계안들도 빠르게 넘긴 한우현은 그를 덮었다.
"좋아. 이대로면 자금줄은 전혀 문제 없고. 다른 사안은?"
"오성 측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계속 미래 그룹에 집적대고 있다는군요. 그 외에도 중국 재벌들과 미국의 공룡 대기업들이 계속 협업 의사를 타진하고 있습니다만."
"중국은 모두 리하오란에게 맡기고, 오성은 정재선한테. 미국은··· 조만간 내가 정몽현과 만나서 구체적으로 협의해야겠어."
나머지 둘이야 적당히 둘에게 공을 실어주면 되겠지만.
미국은 결코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말이 공룡 대기업이지.
그 뒤에는 당연히 미국 정부가 관여하고 있을 테니까.
너무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여지를 주면서.
조금씩 미국과는 협력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아이템 연구나 사업, 투자야 한국에 있는 엘리트와 기업가들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오리지날 스킬의 연구와 개발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천재들이 필요하니까.
"..."
"뭐야, 그 표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잠시 기억 속에, 그가 기억하는 다섯 명의 영웅이 떠올랐다.
그 중 플레이어는 하나 뿐이었고, 그마저도 전투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지만.
그들이 없었더라면 미국도 10년은커녕 2년도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무하마드, 라모, 커크패트릭, 프랭클린, 킴.
특히, 킴은···
지금의 그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모든 것까지는 모르더라도, 절반의 진실에는 다가가지 않았을까.
세계 제일의 창의력을 자랑하는 이상예측부.
그들이 만들어낸 현실 붕괴 시나리오는 정말로 기기괴괴한 것들까지 모조리 대비하는 미친 세계선들의 다발이다.
당연히, 한우현이 생각하기에 구체적으로 그 시나리오들이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지는 못했어도.
불과 하루만에 전 세계를 장악하는 초능력 군벌을 만든 정신병자 독재자는 너무나도 현재의 세계에 이질적인 존재.
거기에 대해서도 그들이라면 어느정도 정체를 가늠하리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야!"
-포보봉
"크흡?!"
순간 한우현은 포스를 끌어올려 [반격]을 할 뻔 했다.
쓴 맛의 비눗방울들이 잔뜩 그의 얼굴에 쏟아졌기에.
"마스터. 왜 대답을 안 해?"
"...무슨 짓이냐, 라니아. 감히 내 혀의 미각을 교란해?"
"화 내는 포인트가 좀 이상한데. 내가 세 번이나 물었는데 멍 때렸잖아."
-[신성한 검]
한우현이 들고 있던 금속성 펜 끝에 하얀 빛이 맺혔다. 그리고선 약간의 분노를 담아 중얼거렸다.
"다음부터는 빛이나 소리로 주의를 주도록. 내 입에다가 이상한 걸 대지 마라."
"네이 네이. 어? 잠깐만."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홍세희? 뭐야, 이렇게 급하게?"
"그, 급해서요··· 이, 이거···"
"아니, 너만 히키코모리냐? 왜 아직도 말을 더듬어?"
"가, 갈구지 마요오··· 라, 라니아 같이 유, 유튜브하는 사람들은 몰라···"
"씹, 나도 아싸거든? 어디··· 어?"
"뭔데 그러지? 줘라."
-탁
둘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류를 넘기자.
아무래도 중요하거나, 중요하진 않더라도 무언가 유의미한 소식이 담겼다고 생각되었다.
곧바로 그를 낚아챈 한우현은 심드렁하게 종이들을 넘겼다.
"미국 지부장들 사이에 갈등이 좀 있고. 자금을 좀 지원해 달라고? 뭐, 어려울 거 없지. 주한미군? 미국 이민 가려는 애들? 이건 뭐 허무성이랑 그 쪽 친구들이 알아서 할···"
-펄럭
"..."
-[밀라 바지즈 : 일주일 전부터 라일리 그레인저가 전혀 대외 활동이 없음. 대리자로 하위 간부 플레이어들만이 모습을 보임.]
-[로버트 아론 : 전미 플레이어 연합 측의 결속이 흔들리는 듯 했으나, 그 뒤로 한국인 출신 플레이어들이 갑작스레 대규모로 합류하며 안정화.]
-[마틴 마셜 : 라일리 그레인저의 잠적 이후 이상하게 늘어난 이민자 플레이어의 행적과 미국 정부의 침묵을 감안한다면, 타국에서 영입 활동이 의심됨.]
-펄럭
보고서의 마지막 장에는.
경기도 동두천 시.
주한미군 육군기지 캠프 케이시Camp Casey에서 흐릿하게 찍힌.
은발 적안의 사제복 차림을 한 여자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마스터, 어쩔래?"
"...그, 명령이 없어서어··· 사진만 찍고 왔는데에···"
그 둘의 질문에,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했다.
71화 불청객 (1)
서울특별시 용산구.
사람이 거의 없는, 으슥한 그 인근 산기슭.
-부스럭
일곱 명의 은밀한 복장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한미군 용산기지USAG YONGSAN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위치에 도달할 때까지.
"...모두 정지."
"예, 길드장."
"예, 마스터."
"예, 길드장."
한우현의 손짓과 말 한 마디에.
여섯 명의 플레이어가 모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가 좋겠군. 너, 너, 너. [은신]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정찰하고 온다. 전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허한다. 내부 플레이어들의 정보만 확인하고 오도록."
"확인."
"확인."
"확인."
"만에 하나, 만약의 경우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인명 피해를 내서는 안 된다. [제압기]만 사용해라."
-끄덕
-끄덕
-끄덕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선, 셋이 눈을 감았다.
-[거리의 어둠으로]
-[비밀의 마술]
-[의로운 기도비닉]
부랑자, 의적, 괴도의 형체가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우린 대기한다. 맥, 넌 은폐장 활성화한 뒤 변동 상황에 대비한다."
-스르륵
그를 확인하고선 다시 말을 이었다.
"[천리안]은 다들 슬슬 마스터했겠지?
"예, 길드장님."
"정찰하고 있도록."
-덜걱
말을 마친 한우현은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우내옥에서 포장한 육수가 그 안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벌컥
잘게 썬 아롱 사태와 양지가 한우현의 입 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역시, 의정부파니 장충동파니 논쟁이 많아도.
그의 입에는 우내옥이 가장 맛도 진하고 훌륭했다.
"으, 아무래도 불안한데에··· 내가 갈 걸 그랬나아···"
"너무 부하들을 의심하지 마라, 홍세희."
"의심이 아니라아··· 그, 실수할까봐 그러지···"
"정보부장, 걱정 마시죠."
지팡이와 단검을 들고 주위를 사주경계하던 암흑술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부장님에 비하면 정말로 수준 이하긴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우리도 잘 하니까요."
"그, 잘 싸우기는 하지이··· 근데 잘 숨진 못하자나아···"
"그건 부장님 기준이고··· 솔직히 길드 임원들 빼면 아무도 우리 못 찾잖아요."
"그래, 맞아요. 뭐 위험한 임무도 아니고, 라일리 그레인저가 한국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만 알아보면 되니까."
"계획대로면 직접 마주칠 일도 없지 않습니까."
천자락을 칭칭 감고 차크람을 손에 든 모래꾼도 거기에 첨언했다.
-꿀꺽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감시는 최대한 또렷이 하도록. 송과체 존재감은 어떻지?"
"일단 길드장 말이 맞아요. 보낸 세 친구는 안 느껴지는데, 그 외에도 꽤 강력한 친구들이 보이네요. 한국인인지 미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군이겠지. 이것도 꽤 신기한 일이군. 주한미군 중에 각성자가 저 정도로 많다라···"
"그, 내가 보기엔··· 죄다 미군은 아닌 거 같은데에··· 백인이나 흑인은 별루 안 보이구···"
"아마 최근에 영입한 인사들이겠지."
한우현은 그 말을 끝맺음으로 상념에 잠겼다.
꽤나 많은, 미국으로 넘어간 플레이어들의 동태.
여기까지 와서 보니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거의 폐쇄된 것이나 다름 없는 용산기지.
그 곳이 CIA와 주한미군의 플레이어 플랜 본부로 다시 기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꽤나 괘씸한 일이었다.
아무리 길드가 다른 모든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미국에는 유하게 대처하고 있다고는 해도.
한국의 플레이어 인재들을, 미국이 이렇게 대 놓고 빼돌리고 있었다니.
하지만, 한우현은 전혀 그에 대해 불쾌감이나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어째서 그가 길드를 만들고 세웠는가?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서?
아니다.
세계 질서를 안정화시키고.
정신병자 플레이어들이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고.
전 인류의 힘을 하나로 집중해 마침내 모든 사도들을 막아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은, 그의 권력과 패도에는 방해가 될 수 있어도.
최종적인 목적에 있어서는 협력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글로벌 서버. 북미와 남미에는 고 레벨 플레이어들이 너무나 적다.
해당 서버의 주류는 에인션트 서버라는 특수한 과금 제한 서버였으나, 작년에 이뤄진 정상화 패치로 인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레벨과 능력치가 반토막났기 때문.
그러니 인력이 너무나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들 나름의 자구력을 갖추고 연구가 이뤄져야 할, 최소한의 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느 정도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미국에 건너가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으며, 그가 설계하고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물론 대 놓고 그런 특혜를 미국에만 줄 순 없으니, 이렇게 눈감아 주는 데에만 그쳐야겠지만.
···그러나.
이건.
어찌 해야 할까.
-우우웅
눈을 감은 한우현의 송과체를 중심으로, 그 간뇌, 중뇌, 교뇌, 소뇌, 대뇌까지.
복잡한 포스의 구조체가 휘몰아치며 그 시공간적인 구조를 집적시키고 공간적인 신경계 형상을 반복시켰다.
그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사람만이 떠오른다.
이 세상의 모든 선의를 빚어낸 듯한 용사.
···그의 구원자.
라일리 그레인저.
회귀 전, 과거에서 한국은 지구 최악의 마경이나 다름 없었다.
사회 질서와 정의는 모조리 붕괴되고.
세계 제일의 정신병자들이 학살과 난동, 약탈을 벌이며.
12사도 중 여섯이 주 활동지로 삼았던 곳.
하지만, 그만큼 플레이어 전력도 강했던 곳.
따라서 미국이 가장 공을 들여서 비밀 작전을 펼쳤던 곳이었다.
물론 그것이, 한국의 주요 플레이어들이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견되는 플레이어와 요원들은 절반 이상이 중간에 처참하게 개죽음당했으니까.
-아무래도, 제가 한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절대로 허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사도전의 지휘는 아무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대체 몇이나 되는 고 레벨 플레이어와 요원들이 희생을 당한 건가요! 차라리 전력으로 한국에 부딪혀서 안정화를.
-전력으로 가면, 저희가 당합니다. 한국은 지금 그런 상태에요.
-...정말이지.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그렇다면 나라도.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우현. 세계 유일의 제대로 된 탱커가 그 마굴에 가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훈련이나 하십시오.
-하지만.
-당신은 지금 튼튼할 뿐이지, 가 봤자 다른 고 레벨 플레이어에 비해 작전을 잘 펼칠 수 있는 역량은 없습니다.
-그러니, 가서 훈련이나 하십시오.
-제 6 던전의 브레이크가 코앞입니다.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가 그런 위험한 곳에 오는 부담을 감수할 수는 없었으니.
당연히 라일리 그레인저가 한국에 오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평화롭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위험한 곳은 결코 아니다.
그녀가 와도, 신변이 위협받을 상황이 아닌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굳이 직접 찾아올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체 어째서? 그녀 또한 한가하지 않을 텐데? 미국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 해도 너무나 바쁠 텐데...?
그리 생각하며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짜군."
"면도 없이 마시면 당연히 짜죠. 애초에 왜 냉면 육수를 담아 가지고 마시는 겁니까?"
"평양냉면의 고아한 맛도 모르는 놈하고는 대화 안 한다."
"아니, 하여간 입맛 자부심은 정말 대단하셔..."
암흑술사의 불평을 한 귀로 듣고 흘렸지만.
그 의문은 잠재우기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한국으로 올 이유가 없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지금 한국은 길드의 전면적인 통제를 받고 있으니까.
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특히 아시아 전역에 길드에 반하는 집단을 플레이어건 비플레이어건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면서 독자적 단체를 구축한 라일리 그레인저가 한국에 방문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용기요.
나쁘게 보자면 미국 정부와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길드에 선전포고를 하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물론, 한우현은 그런 무의미한 분쟁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미국 정부가 보기에는 그런 우려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왔을까?
라일리 그레인저는 인간의 선의를 믿는 성품을 가진 영웅.
세상의 평화와 수호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때때로 이성보다는 감성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설마··· 그가 망설이다가 보냈던 문자 때문에?
겨우 그것 때문에 그를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절차든, 비공식적인 절차든 밟아서 길드에 제안이 들어왔겠지.
정말로 몰래 들어온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텐데.
현재까지의 정보만으로는 잘 알 수 없다.
"...좀 늦는데에···"
"뭐, 서류 같은 게 깊숙이 있나 보죠."
"[천리안]으로 봐도 특별한 소요는 없··· 아."
주위에 모래의 기운을 날리며 용산 기지를 내려다보던 모래꾼이 말끝을 흐렸다.
"어? 뭐지, 희미하게 뭔가가··· 아니, 희미한 게 아니라···"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가, 이내 커졌다.
"...미친, 뭐야? 이걸, 어떻게 이 존재감을 감춘 거지? 내가 모르는···"
"뭐냐? 왠 호들갑이지. 설마 전투라도 일어난 거냐?"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녀 같습니다. 만렙."
"뭐? 어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저기···"
한우현이 그 말에 표정을 굳히며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리안]
-[신경조작술 : 신경 이해 확장]
그와 동시에, 세상이 느려지며 한우현의 수정체와 홍채에 포스의 줄기들이 엮였다.
시신경과 후두엽이 강화되며 그 방향을 확대했다.
그 곳에는 헬기에서 내리는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닿을 듯이 늘어진 은발.
루비를 깎아낸 듯 빛나는 붉은 눈.
정체를 티내려고 하진 않은 듯, 수수한 검은 정장 셔츠와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플레이어임을 내보이는 눈과 머리의 색깔이었다.
"...젠장, 진짜였잖아."
"뭔 생각으로 여길 온 거지? 그것도 몰래."
"...그, 달라질 거언··· 없어. 시비도, 전투도 걸면 안 돼애···"
"그 말이 맞다. 미국 정부의 대리인이 잠입했다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홍세희의 말을 곧바로 한우현이 이었다.
그들이, 한우현의 진정한 속내를 잘못 해석하면 안되니까.
"우리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미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니까."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지···"
"이미 신신당부 했으니까, 들어간 놈들도 별 다른 사고는 안 칠 겁니다."
"그래. 이 일은 차후 공식적으로 항의하면 된···"
"경고. 경고. 포스 대규모 파동 감지!"
"뭐?"
-번쩍
그러나, 한우현의 말이 채 끝맺음지어지기도 전에.
갑작스레, 저 멀리서 캠프를 향해 걸어가던 은발 적안의 여자가.
허공에서 파란 보주가 그 끝에 달려있는 셉터Scepter를 소환했다.
-[절대 선의]
-[여신을 향한 기도]
-[신성한 하늘]
그리고, 그 끝에서 무수한 황금과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
"...무슨?!"
"뭐, 뭐야아 이게···?!"
빛은 단순히 뿜어지지만 않았다.
순식간에 하늘로 뻗어나가며, 용산 기지 전체를 덮었다.
당연히, 잠입한 세 도적 정보부원들은 물론이요.
한우현, 홍세희를 포함해 대기하고 있던 다른 길드 플레이어들까지도 포함하는 범위로.
"홍세희! 당장 전달해라! 모두 즉시 작전 수행 중단하고···!"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한 한우현이, 곧바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지만.
"아, 안돼애···! 연결해 둔 [전음]이 모두 끊겼어···. 사제 영역선포기, 때문인 거 같."
"대체 뭐야! 네로는 퓨어 서포터 아니었어?! 무슨 위력이?!"
"큭."
이미, 늦었다.
단순히 뭔가 상황을 눈치채서, 스킬을 쓴 것 뿐이라면 괜찮았다.
-[신성의 노래]
-라아아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레벨 300 사제. 라일리 그레인저가 저 먼 거리에서도 느껴질 만치 강력한 포스를 심어 목소리를 냈다.
-웅-웅웅-웅웅웅!
그 주변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의 송과체가 그에 반응해 공명했다.
-[빛의 권능 : 마법 해제]
곧이어 다급히 빠져나가고자 했던 도적 플레이어들의 은신이, 모조리 강제로 해제된다.
목소리에 담긴 포스로 인해서, 게임에는 있지도 않은 수준의 초월적인 왜곡의 권능으로 벗겨지며.
-[하늘을 굽어 살피는 눈]
-[천사의 몸놀림]
그녀의 눈이 환하게 빛내고, 그 끝에서 잔상만을 남기며.
-쐐애액!
그 중 하나에게 몸을 날렸다.
온 몸에 강력하고도 섬세한 포스를 두른 채로.
72화 불청객 (2)
"이, 이런 씹?!"
"어떡해?"
은신이 벗겨진 두 도적 플레이어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둘의 대장.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인 의적에게 향했다.
-카가가각!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크, 으윽··· 뭐, 뭐 이리 힘이 세···?!"
"Vous êtes brillante?(당신, 뛰어나군요! 단순히 스킬만 쓰고 있지 않다니!)"
너무나도 강렬한 공격을 막기만 해도 바빴으니까.
포스를 한 가득 실은 셉터가 두 개의 수리검에 가로막히며 파열음과 마찰음을 울렸다.
-콰과과!
-파아-앙!
그리고 그 엄청난 수준의 포스 충돌 반응에 의해, 주위로 소음과 바람이 폭발적으로 터져나갔다.
그 뿐만 아니다.
-[천사의 손길]
무수한 버프 스킬들과 생체학적인 강화가 포스의 고리로 엮이며 그녀의 몸을 둘러쌌다.
-[신성의 날개]
동시에 빛으로 이뤄진 날개가 사제의 등 뒤로 돋아나며 포스의 순환 속도를 한 층 가속했다.
-[빛의 별]
뒤이어 빛과 에너지의 덩어리들이 그녀의 머리와 팔 주위에서 뭉쳐 솟구치며 연쇄적으로 의적의 전신을 후려쳤다.
-파바박!
-파바방!
"끄흐흡...!"
동시에, 대답은커녕 힘을 주기 바쁜 의적에게 그녀가 다시 물었다.
"Qui êtes-vous ? Pourquoi êtes-vous ici ? (당신 정체가 뭡니까? 여긴 왜 잠입한 거죠?)"
"이, 이런 씹, 좀, 멈추라고!"
"이 곳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다? 길드가 보냈습니다? 정보부?"
"젠장, 꺼져! 싸우러 온 거 아니야!"
-채앵
-쿠구구궁!
힘을 실어 의적이 셉터를 쳐냄과 함께.
-[담 넘기]
-퍼벙!
그 몸에 강력한 반발력을 주어, 뒤로 날아가듯 밀렸다.
초월적인 운동량을 담은 내던져짐이었기에, 그 궤적을 따라 무수한 소닉 붐이 일어났다.
-콰광!
-퍼버벙!
그에 휘말린 캠프 건물 중 하나에 균열이 가해졌다.
-구르릉···
-우르릉···
동시에 직접적으로 충격이 가해지지 않은 건물들도 불안정하게 그 표면이 뒤흔들렸다.
"크으윽···!"
하지만 전혀 그 충격과 여파를 신경쓰지 않고, 의적이 벌떡 일어나며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흩어져! 원래 합류지점이 아니라, 더 멀리!"
"확인!"
"확인!"
"Non!(그렇겐 안 되죠!)"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 중 하나.
레벨 300 사제 Nero.
-키기기깅!
-피리리링!
라일리 그레인저의 주위에 무수한 기하학적인 포스의 형상이 겹치며 현실을 왜곡했다.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포스들이 세상을 잘게 쪼개며 물리법칙들을 붕괴시킨다.
-██ !!
-███ !!
그녀를 중심으로 리만 다양체와 퍼펙토이드 공간이 강제로 뜯어고치고 이어붙어진다.
-████ !!
뒤이어 중력파와 광자, 탄성파가 비명을 지르며 현실을 뒤흔든다.
"무, 무슨?"
"이건··· 길드장의?"
"왜 저 여자가?!"
당연히 그 기괴한 여파와 전조는, 서울 토벌전에서 그들 셋 모두가 겪은 바 있었다.
따라서 경악하며 더욱 도주에 박차를 가한다.
-[물리 왜곡술 : 위상가변칙 : 폐곡공간]
그러나 순식간에, 그 구조체들이 사제의 영역 선포기인 [신성한 하늘]에 완전히 덧붙여졌고.
-콰으응!
-흐우웅!
내부의 위상 구조들이 [뒤흔들리며 서로를 닫았다].
-울렁···
-꿀렁···
삽시간에, 라일리를 중심으로 한 주위 100m 공간.
그 안에 강제로 세 도적이 [끌려왔다].
"Non, Non.(이대로 보낼 순 없습니다.)"
그녀가 웃음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렸다.
"어, 어떡해 대장?"
"이 씹, 나보고 뭘 어쩌라고?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냥 항복해요?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으으으으, 씨발, 씨바알···."
망설이던 의적이 마침내 입술을 꽉 깨물며, 라일리 그레인저를 노려보았다.
"···싸우지 말라곤 했지만. 이런 상황에까지 한 말은 아니겠지."
결단을 내렸기에.
"죽이지만 않으면 돼. 어차피 네로는 퓨어 서포터 트리야. 만렙이라 해도 세 명과 이길 수는."
"Ah-haha, un Pure Supporter ?(아하하, 퓨어 서포터?)"
그러나 그 말을 끊고선, 라일리 그레인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냥 순수 지원가라면 어떻게 글로벌 서버에서 최대 레벨입니다?"
"···한국어, 꽤 하시는군요."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한국 게임입니다, 내 시청자 중 한국인도 있습니다."
"겨우 그걸로, 큭!"
그 짧은 화답을 끝마치기도 전.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힘이 휘몰아쳤다.
-후우웅!
-우우웅!
그냥 힘이 아니라, 실제로 생물학적이고도 물리학적인 왜곡을 일으키며.
-화아아악!
포스가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그녀의 무기와 뇌 그리고 전신에 깃들었다.
"[날카로운 눈]. ···대장. 저 여자 스텟이 좀 이상한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 씨발··· 하여간 글섭도 운영 괴상하게 했다더니."
"아니, 잠깐만. 저 무-"
그리고, 그 가공할 만한 위력을 넘어.
초월적인 수준으로 뭉치고 휘몰아치는 포스의 폭풍을 보며.
셋 모두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란 걸 예상했-
-콰드득!
-퍼벙!
-퍼버벙!
"큭!"
"허억?!"
본능적으로 수리검과 카드 다발을 들어 그 충격파를 막아낸 괴도와 의적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아?"
그들 사이에 있었던 부랑자가, 그 위치에서 사라져버렸기에.
-[빛의 봉인서]
"느리다, 느리다."
"···?!"
"···??"
셋 중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시간의 찰나.
"흐, 흐아아아? 무, 무슨!"
"무적기? 은신?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순식간에 빛나는 책장들에 휩싸인 채.
그 행동이 봉쇄된 부랑자가 그녀의 셉터 위에 둥실 묶여 있었다.
"다시 말합니다. 항복합니다."
"···항복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가 이대로 항복하면 길드장이 뭐라고 할지 두렵거든."
"동감. 젠장, 마지막까지 최선이라도 다해야 할 말이 있지."
-휘리리릭!
-화라라락!
하지만 전혀 둘의 의지를 신경쓰지 않는 듯.
"그가 당신들을 가르쳤습니다? 기대됩니다!"
-후웅!
너무나도 가벼운 태도로 미소지은 라일리 그레인저가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어느 새 순백과 황금의 천자락으로 둘러싸인 사제복 차림으로 뒤바뀐 채.
-번쩍!
-번쩍!
무수한 황금빛이 그녀를 둘러싸고는, 터져나갔다.
-[의로운 기도비닉]
-[비밀의 마술]
단 한 순간의 접전이었지만, 둘 모두 빠르게 현실을 이해했다.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 라일리 그레인저는 분명 퓨어 서포터 클래스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방심하거나, 봐 주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어그로!"
"알았어!"
순식간에 하나는 정면에서, 하나는 후방에서.
위치를 옮기고선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림자 친구 : 분신술]
정면에서 달려든 의적의 신형이 흐려짐과 동시에, 그 그림자에서 무수한 인형이 튀어나오며 흩어졌다.
-[복수의 수리검]
-[복수의 수리검]
-[복수의 수리검]
동시에 그들 모두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똑같은 동작으로, 수리검을 내던졌다.
-쉬리리릭!
-휘리리릭!
파공성과 함께 무수한 수리검이 라일리의 전신에 쇄도했다.
"좋습니다! 강합니다!"
하나 하나가 너무도 강력한 포스를 실었기에, 치명상으로 작용할 만한 것들.
아마도 그녀가 단순한 사제 플레이어였다면, 첫 번째 공격에 모든 방어막이 파괴되고.
뒤 이어 날아드는 수리검들에 의해 전신이 난자당했으리라.
하지만 라일리는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키리리링
무수한 포스의 형상이 공간 다양체를 형성하며 조밀하게 뭉쳤다.
-후우웅
그 위에 사제의 보호기가 씌워지며 한 층 위력을 강화했다.
-티디딩!
-티디딩!
모든 수리검이 순식간에 공간 자체를 괴리하는 수준의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씨이-이이잉!
심지어 그에 그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방어막 주위로 빛으로 이뤄진 깃털들이 떠오르더니.
-파바박!
-파바바박!
의적에게 쇄도했으니까.
-푸확!
-촤학!
"크윽...!"
어떻게든 몸을 놀려 회피했지만, 몇몇은 의적의 몸에 강하게 틀어박히며 출혈을 일으켰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주의를 분산하기 위한 허초였을 뿐.
-후-욱!
진짜는 그 뒤에서 접근하는 괴도였다.
-[괴도의 흉내내기 : ???]
-[물리 왜곡술 : 위상가변칙 : 공간절단]
"···하아?"
미소 짓던 라일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괴도의 특수 스킬. [괴도의 흉내내기].
카드에 자신이 자세히 관찰한 스킬을 순간 담아내, 일회용으로 펼칠 수 있는 기술.
그 것에, 한우현이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비장의 한 수로 담아 준.
순간적인 공격력 하나는 최고 수준에 이르는 공격이 발동했다.
"씹, 존나 어렵네···!"
-우우웅···!
대체 이게 뭔 기술이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괴도는 제 멋대로 튀어나가려는 그 일격을 어떻게든 제어했다.
플레이어는 죽는다고 해도, 뇌 정 중앙부가 극심히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부활]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고 레벨 플레이어의 경우 포스 동화도가 높은 만큼, 사제의 [치유]에 의한 효과도 크고.
이미 이 곳에 잠입해 관찰하며, 라일리 외에도 여러 사제들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치명상 정도는 입혀도 괜찮으리라!
"그 기술, 무엇입니다···?!"
"나도 몰라, 씨발!"
-[비장의 카드, 흩날려라!]
그리 외친 괴도는 카드 하나에 그 기운을 최대로 담으며, 동시에 주변으로 무수한 카드들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후우우욱
그에 맞서, 라일리 또한 방금과 마찬가지로 공간적인 방어막을 형성했다.
-콰드드득
-콰과광
-콰과광
그 모든 과정이 수 초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초월적인 포스 제어력으로 구축한 방어막. 당연히 보다 공격력이 강한 수리검들마저도 막아냈으니, 흩날리는 카드들도 갈려나갔을 뿐 방어막이 파괴 당하지는 않았다.
"후우··· 흡!"
"···아!"
하지만, 틈새는 생겼다. 그 사이로 괴도가 정신을 집중하고서는, 하나의 카드를 힘껏 던졌다.
-피이-잉!
심지어 방금 막 연속적으로 방어를 마친 참에 곧이어 날아온 공격.
그 절단력도, 돌파력도 수리검과 카드 폭풍을 따위로 취급할 만큼 강렬한 수준이었다.
-파자장!
"엇···?!"
-파자자장!
오른손을 내밀어 방어막을 집중해 강화하려던 라일리.
-서걱!
그 모든 방어막을 순식간에 공간째로 [절단]하며, 카드가 정통으로 그녀의 한 가운데를 지나 저 멀리 날아갔고.
-꾸르륵···
-왈칵···!
뒤늦게 라일리의 가슴 한 가운데, 큼직한 구멍이 생기며 피분수가 터져나갔다.
"···아."
-철푸덕!
-철벅!
뒤이어 포스와 함께 피와 살점이 터지듯이 그 절단 부위에서 튀어나왔다.
-우우웅···
-끄우웅···
"커헙...!"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한 듯.
그녀가 피를 한 움큼 뱉어냄과 함께 주위의 폐곡공간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영역 선포를 펼친 중심자가 크게 부상을 입자, 집중력이 흔들리며 스킬이 여파를 입은 것.
"미, 미친! 저래도 돼?!"
"씹, 사제잖아! 회복하겠지!"
"그, 그렇겠지?! [공간절단] 하나 더 있나?!"
"응, 어디로?!"
"지금 바로···!"
그에 반색한 둘이 다시금 물러나며 합류했다.
"이걸로, 저기 흔들리는 곳···"
하지만 괴도가 카드를 꺼내 들어 던지려고 하던 그 찰나.
-화라락!
-화라락!
둘 모두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라일리의 셉터 끝에서 뿜어진 포스의 줄기들.
-주르륵···
-철퍽···
-처더덕···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접근한 라일리 그레인저가, 심장 한 가운데서 엄청난 양의 피와 살점들을 흘리며 둘 사이에 파고들어.
-웅-웅웅-웅웅웅···
어느새 그 둘을 완전히 옭아맨 상태였기에.
"···젠장."
"···봐 줬던 건가."
"···."
-찔꺽···
둘의 대답에 대답하지 않고선 하얀 빛을 왼손에 만든 라일리가 그것을 대충 가슴 한 가운데에 가져다 댔다.
-[치유]
-[치유]
-쯔으읍···!
-촤아압···!
-울컥, 울컥···!
흉측하게 드러난 갈비뼈, 심장, 폐 내부에서 살과 피부가 돋아나며 서로를 자연스레 연결했다.
-꿀꺽.
그에 더해 [엘릭서]마저 꺼내서 한 움큼 들이키고 나서야 라일리는 표정을 풀었다.
"방심했습니다. 자···!"
-화아악
다시금 그녀의 셉터에서 빛이 뿜어졌다.
공간 전체에 작용하는 포스의 염동력이 묶여 있는 세 플레이어에게 닿아, 모두를 그녀의 바로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럼, 이제···"
-쩌어-어엉!
-콰자자작-!
하지만 라일리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그녀를 중심으로 한 폐곡공간 전체가 크게 출렁이며 뒤흔들렸다.
"···?!"
방금 전, 괴도가 카드를 날려 공간을 흔드려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
자연히 그녀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쩌어어엉!
-쿠궁
-콰르르릉
하지만 그녀의 인식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 1초도 지나기 전에.
-파가가강
[위상가변칙]이라는 위상 수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 공간의 성질을 바꾸고 엮는 기술.
그것이 막강한 포스의 폭력 아래 깨져나갔다.
"케윽···!"
자연히 공간 왜곡을 유지하며 포스의 구조체들에 연결되어 있던 라일리의 송과체 또한 충격을 받았다.
"무엇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이자, 그와 함께 제일의 재능까지도 갖춘 천재.
-[정화]
-[치유]
-[정화]
순식간에 뇌 내부를 정상화시킨 라일리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
그리고선, 그 눈을 크게 떴다.
"No!"
"Stop!"
"Careful, Please!"
공간이 깨져나가며, 주위 미군들의 당황스러운 웅성임과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쿠궁-!
"Stand on!"
"Move, Move!"
폐곡공간이 뒤흔들리자, 그 밖에서 끼어들지 못했던 무수한 미국 소속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날아들어오며 라일리를 둘러싸듯 엄호했다.
그리고선 모두가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한 쪽을 노려보았다.
금속과 대지가 부딪히는 소리를 크게 내며, 누군가가 착지한 위치를.
-화악!
이내, 포스가 물리력으로 치환되며 착지된 공간 주위에 일어난 흙먼지들을 강하게 날려보냈다.
"···라일리."
그 가운데서, 첫 마디가 흘러나왔다.
"···Guild Master?"
고개를 막 들어올린 성기사가, 사제와 눈을 마주쳤다.
73화 불청객 (3)
-후우웅
한우현의 손짓에 따라, 제압당한 세 명의 도적이 다시 그의 옆으로 끌려왔다.
"그, 대장."
"괜찮다. 잘 했다. 다음에 말하지."
"····예."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그가 다시 라일리와 눈을 마주쳤다.
"····."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한참이나.
그 기다림의 끝에, 오히려 먼저 말문을 튼 것은 라일리였다.
"길드 마스터."
"····."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보게 되다니 유감입니다."
"····."
"불편하실 것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네로. 라일리 그레인저."
그 말만을 하고선.
한우현은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말았다.
도저히.
도저히 그 얼굴을 더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당신을 믿으세요.
-이렇게··· 아니, 그렇게가 아니에요. 자, 이대로 저를 따라해 보세요.
-좋아요, 잘 했어요! 역시 할 수 있다니까요!
-막으세요!
-다 당신 덕분이에요.
-첫 번째 클리어라니, 원래라면 꿈도 못 꿨을 텐데! 대단해요!
-역시 보스를 막을 수 있는 건 한우현, 그대가 유일해요.
-한우현.
-아서.
-우린, 해 낼 수 있어요.
-해 낼 거에요! 이길 거에요!
-···.
-안 돼···
-···.
-···아···
-단풍잎···
-부탁해요···
"큭."
"저?"
한우현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눈을 강화된 감각으로 포착한 라일리는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저 반응은 무엇인가, 하는 표정으로.
"···?"
그 앳된 얼굴을 보며 한우현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안 된다. 이 자리에서 병신같이 과거의 감정을 질질 흘릴 수는 없다.
우선, 자신의 실수부터 인정해야 한다.
도적들을 보내 정찰시키면서, 당연히 라일리 그레인저가 캠프에 있을 가능성도 고려하였다.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보부 간부들은 본신의 전투력도 뛰어나지만, 그 전에 은신과 도주에 특화된 자들이니까.
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라일리가 생각보다 훨씬.
회귀 전과 비교해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캠프에 복귀하는 즉시, 이질적인 은신 플레이어들의 존재감을 느끼고 광역 마법 해제를 갈겨버렸으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과거의 미국 국방부는 플레이어들의 결집과 사회 안정에 집중하기에도 너무나 바빴다.
자연히 결집한 플레이어들의 훈련도 주먹구구였고, 체계적인 훈련보다는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대련을 하며 전투 교리의 틀을 쌓아나갔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국방부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모두 그 능력을 온전히 미국 소속 플레이어들의 훈련에만 쏟았으리라.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인 라일리에게는 더욱 더.
심지어, 그녀가 퓨어 서포터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쉽게만 볼 수 없었다.
라일리 그레인저는 정상인이다. 정신병만 몇 개씩 주렁주렁 달고 있는 다른 랭커급 플레이어들과는 다르게.
왜?
어떻게 이 쓰레기 같은 게임 이그드라실에서.
정신병자 폐인도 아니면서 전 세계 랭킹 1위이자 유일한 300레벨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글로벌 서버, 즉 남미와 북미를 총괄하는 서버.
그 대부분의 아이템을 독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로벌 서버는 미국과 남미를 아우르는 거대 서버였지만, 그만큼 유저 수가 많지는 않았다.
유저 적대적 운영으로 인해 계속 유저들이 줄어든 끝에, 남은 랭커급 유저들은 대부분이 한 길드에 모이게 되었다.
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온라인 게임의 특성상 편의를 위해서였지.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채 지나기도 전, 그 내부에서 큰 분쟁이 벌어졌다.
아주 크나큰 아귀다툼이.
구태여 설명하기에도 지나치게 지리하고 추한 과정이었으며, 라일리 그레인저 또한 그 중간에서 추방을 당했던 이들 중 하나였기에.
한우현은 그 글로벌 서버 최대 길드의 해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그가 확실히 아는 것은 단 하나.
그 결과로 글로벌 서버의 290레벨 이상 랭커는 단 한 명 만이 남게 되었으며.
서버 유일의 길드에 남은 모든 아이템과 골드를 그녀가 모조리 상속 받았다는 것.
글로벌 서버 전체의 단종, 희귀, 유일 아이템부터 막대한 게임 머니까지.
그 모든 것들을 통해 그녀는 그리 많은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지 않았으면서도, 서버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다.
즉.
게임 상의 스펙 하나만 놓고 본다면.
라일리 그레인저는 한국 서버의 랭커들 대부분을 능가한다.
물론 직업 상의 특성으로 인해, 끝까지 간다면 퓨어 서포터가 퓨어 딜러를 생사결에서 이길 수는 없겠지만···.
아직 모두의 숙련도가 미숙한 현 시간대에서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게다가 보아하니,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이 작정하고 그녀를 제대로 키워낸 모양.
당연히 한우현에 비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그 다음 가는 정도에는, 근소하게 걸칠 만 하다.
현재 그녀의 전투 실력을 보면 그의 바로 밑 수준 플레이어들인 나유나와 라니아마저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바였지만, 괜찮다.
어차피 라일리도, 한우현도 이 자리에서 제대로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수습을.
이 전투 현장과 그녀의 잠입, 길드의 입장.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자연스레 정리하는 것이.
지금은 맞으리라.
"···잠깐, 대화라도 하지. 무기는 내려 놓고."
"예?"
"···Sir."
"···So···"
"···No, its···"
그 모든 생각들을 빠르게 정리한 한우현은, 검과 방패를 내려놓았다.
-스륵···
-스르륵···
-[캐릭터 프리셋 : 일상용]
내려놓을 뿐 아니라, 아예 모든 전투 장비를 해제했다.
"···예, 알겠습니다."
"···Huh."
"···Oh, God···"
라일리 또한 그에 화답하듯, 셉터를 내려놓았다.
자연스레 긴장감이 풀리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미군들과 플레이어들.
모두의 표정이 비로소 풀어지던 순간.
"자리부터 만들자고."
한우현만이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굳은 표정으로.
"책임자, 빨리 오도록 전해라."
입을 열었다.
* * *
다행히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빠르게 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탁
-탁
세 명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남자가 손가락을 책상 위에 두드리다가 그 움직임을 멈췄다.
"목이 좀 마른데."
그리고선 상석에 앉은 성기사가 중얼거렸다.
-쪼르륵
-탁
"차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부대 내에 없어서요. 커피라도 괜찮으실지."
"괜찮다. 고맙군."
통역관이 낸 커피를 받아든 한우현은 복잡한 심경으로 이제야 막 앞에 앉은 세 명을 노려보았다.
라일리 그레인저. 전미 플레이어 연합 회장.
데이빗 아이히만. 주한미군 총사령관.
셀린 오베르마이어.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우선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군. 통역관만 남기고 모두 최대한 물러서 줬으면 좋겠는데."
"모두 물러가도록."
"Sir? But."
"명령이다."
"...OK."
"On it."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에 순식간에, 통역관도 포함해서.
네 명을 남기고 모든 캠프의 인원들이 사무실에서 빠져나갔다.
길드의 정보부 플레이어들까지 포함해서.
"한국어는 제가 할 줄 아니, 통역도 겸하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유능하군. 한국의 버러지들이랑은 수준이 달라."
"크흠,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일을 크게 키우지 않아 주신 것에 대해 먼저 감사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맺으며 중앙정보국 지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과하게 비굴하지도, 건방지지도 않은 자세였다.
"별 말을. 나도 굳이 미국과 지금 충돌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그런 거다."
"...그 말씀은?"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난 전미 플레이어 연합에 대해서 그리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
"...!"
"정말입니다?"
그 말에 중앙정보국 지부장, 주한미군 사령관의 얼굴에 화색이 크게 올라왔다.
라일리의 표정에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놀람과 기쁨의 감정이 드러났다.
"...놀랍군요. 참으로 감사하신 일입니다만, 그 진의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뭐, 솔직히 말하지. 내가 미국을 지배하려고 했다면 당연히 그 연합 따위 바로 밟았겠지만··· 내 목적은 그게 아니거든."
-호록
향도, 산미도 별로군. 하긴 코쟁이 군인 놈들이 맛에 대해 뭘 알겠어.
속으로 소심하게 욕을 해 주고선 한우현이 잔을 내려놓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길드의 목적은 질서다."
"질서요?"
"그래. 좀 거칠게 말하자면··· 굳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플레이어들을 얌전하게만 만들어 준다면 된다는 뜻이지."
물론 그것이 진짜 속내는 아니었다.
만약 미국에 라일리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이 없었다면, 당연히 봐주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그 둘을 존중했기에 예외로 둔 것이지.
그러나 그 배경을 설명할 순 없었다.
"...저희의 예상과 좀 다르군요."
"이해한다. 솔직히 우리가 깡패들로만 보였겠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변명할 필요 없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니까."
한 번 인상을 찌푸린 한우현이 다시 라일리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선이 있지. 나 외의 유일한 만렙 플레이어가 허가는 커녕 통보도 하지 않고 입국해서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다니."
"...그것은 이유가 있."
"라일리, 잠시만요. 그것은 저희의 결례임을 충분히 인정하는 바입니다."
"말로만?"
"...구체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흠, 바라는 것이라···"
-타다닥
손가락을 탁자 위에 피아노처럼 두드리고선 잠깐 뜸을 들였다.
"많지만, 하나하나 열거하기보다는··· 좀 단순하게 요청하고 싶군."
"단순하게요?"
"그래. 음··· 이게 좋겠어. 전미 플레이어 연합. 그리고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AARO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겁니까?"
"홈페이지도 있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건 그렇지만, 아닙니다··· 예. 그 둘에 대해서요. 말씀을 계속 하시지요."
"두 기관 모두, 앞으로 전면적으로. 나와 길드에 협조해줬으면 좋겠군."
고개를 갸웃하는 라일리와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밑으로 들어오란 뜻이다."
그리고 마주치기 힘든 그녀의 눈을 억지로 잠시 쳐다보았다.
"세계 최강의 힐러도, 레이드에 필요하니깐."
* * *
"..."
"..."
"...갔군요."
-드르륵
창문을 닫은 주한미군 총사령관. 데이빗 아이히만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실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전미 플레이어 연합까지야 그렇다 쳐도, AARO는 엄연히 정부 기관인데."
"아닙니다. 저건 들어오란 말이 아닙니다."
데이빗 아이히만과 셀린 오베르마이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협조해주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의사를 들어주겠다. 대신 명목상 길드를 윗 존재로 인정하라··· 그런 제안에 가깝습니다."
"그런가요, 저는 잘···"
"아무래도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셨으니, 모두 이해하시긴 힘들겠죠."
"정치란 참 어렵네요."
"유의미한 요구 제안은 사실상 단 하나. 당신이 오래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 뿐입니다."
"어차피, 일정도 거의 다 끝내서 며칠 내로 출국할 예정이었으니. 그건 다행이네요."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뜬 라일리가, 고개를 저으며 천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제안의 진의들이 그렇다면··· 도대체 왤까요?"
"글쎄요, 표면상으로는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었지만."
"길드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미국은 물론이요, 전 세계가 연합한다고 해도 대적이 불가능한 수준인데. 정말로 순수히 세상을 위한 마음일까요?"
"그렇다기에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한 폭압적인 태도와 너무 차이가 납니다."
"...어쩌면."
"예?"
"아니, 아니에요."
라일리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초인연무부장 자일라 라모.
그녀가 처음으로 개발한 기술인 [신경 조작술].
그 파생 효과로 일으키는 [정신 감응]은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즉, 라일리 그레인저는 분명히 느꼈다.
어떻게든 옥죄고, 버티고, 가두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 남자가 자신을 쳐다 볼 때마다 쥐어짜내듯이 흘러나오던 감정의 다발들.
비탄.
비애.
존경.
동경.
분노.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중 가장 크게도, 후회.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절박한 감정들.
...대체 왜?
그것들 때문에, 라일리는 그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74화 땅 따먹기
"...그, 제안 요청은 확실히 받았습니다만."
"그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전례가 없는 수준을 넘어 개인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 아닌."
"흐으음···"
한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쿠구구
-쿠구구
주위의 사물들이 뒤흔들리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포스에 인해 들썩거렸다.
"자, 잠시만요. 모든 조건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전체 할양은 너무 터무니없."
"내가 서울 전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라도 했나? 송파구 전체를 내놓으라고 하기라도 했나? 겨우 올림픽 공원 하나의 용도 좀 변경하는 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용도 변경이 아니잖습니까···! 올림픽 공원 전체를 일개 사조직의 전용지이자 군사 훈련장으로 만들겠다는 건!"
"흠, 우리가 던전을 제대로 공략하지 않으면 보스 몬스터들이 서울 한복판에 강림할텐데. 다음 던전 공략까지 열흘도 남지 않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던전과 괴물을 잡는데, 그 만한 규모의 훈련장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안 그래도 우리의 훈련 여파 때문에 민원이 많을 텐데. 차라리 널찍한 전용 공간이 있는 게 낫지, 안 그래?"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엇보다 제 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
"호오? 제 선?"
"...! 자, 잠깐."
지리한 변명이 멈칫거리자, 한우현이 비웃으며 응수했다.
"국토교통부 장관의 선에선 안 된다라··· 네 위에는 한 명밖에 없을 텐데?"
"자, 잠시만요. 오해입니다."
그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지금 네 말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나?"
"그."
"내가 직접 대통령을 찾아가길 원한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데."
-[캐릭터 프리셋 : 보스용]
순식간에 양복 차림을 했던 한우현의 복장이 뒤바뀌었다.
전투용 무장으로.
"아, 이러면 또 행정부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려나? 입법부도 겸사겸사 데려와야 하나?"
"그, 잠시.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울상을 지은 국토교통부 장관이 휴대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피했다.
-쪼르륵
잠시간의 평화로운 시간.
한우현이 올 때마다 개지랄을 떠는 통에, 어거지로 공무원들이 비치해 놓은 보이차를 섬세한 손동작으로 따랐다.
맹해차창 7572.
자체의 질보다는 기념품에 가까운 물건이지만, 청와대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것을 황급히 가져왔다고 했었나.
-호록
"...괜찮군."
한 병에 몇 백만원짜리임을 감안한다면 터무니 없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나름의 기준으로는 칭찬을 해 주었다.
-우물우물
차만 마시자니 입이 심심해, 호원당에서 사 온 개성식 만두약과도 씹어 주었다.
향이 보이차랑 완벽히 어우러진다고 하기에는 힘들었지만, 특유의 유미와 보이차의 발효취는 나름의 색다른 맛이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상념을 떠올렸다.
역시, 한국의 정치인들은 협조적이지 않다.
단순히 플레이어들이 미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주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보스 몬스터의 위협에 대해서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 것이겠지.
비현실 시나리오에 대해 제대로 연구하는 집단은 미국밖에 없으니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실제로 보스 몬스터 외의 던전에 있는 잡몹들은 약하기 그지 없으니까.
돈을 쉽게 번다며 몰려드는 플레이어들을 통해 조사한 바로는 너무도 만만해 보였겠지.
하지만, 보스 몬스터와 일반 몬스터의 괴리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일반 몬스터는 사실상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200레벨 플레이어들도 몇 분 만에 수백 마리를 스킬만 날려서 한 번에 몰살시킬 수 있지만.
보스 몬스터는 가장 약한 제 1 사도라고 해도 강림하는 즉시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을 쓸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차이는 영상적인 중계와 광고만으로는 실감하기 힘든 것.
유튜브와 연예인들로 보스의 위험성에 대해 선전하고 설파해 봤자, 정부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싶었으리라.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희망을 보고자.
역시 한 번 더 조치를 취하기는 해야겠다.
그 전에, 허무성을 통해서 그들의 심층 심리를 한 번 더 파악하고.
물론, 그가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하긴 예전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그것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일지도."
인상을 찌푸린 한우현이, 마지막 만남의 순간 느꼈던 대통령, 여당 대표, 야당 대표의 감정들을 회상했다.
그리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복종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적대만을 가슴에 품었던 것들을.
이 세상이 얼마나 나약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량한 권력과 직위를 그리도 지키고 싶단 말인가.
하긴, 애초에 여당이고 야당이고 플레이어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030 세대와는 끔찍이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
어쩌면 그냥, 그들이 무시하던 집단들이 권력자로 등극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머릿속에 이대녀 이 미친 새끼들, 이대남 이 미친 새끼들을 외치며 날뛰던 과거 대통령의 행보가 떠올랐다.
실제로 회귀 전의 과거에서도 정치인들은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권승환한테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목줄을 씌우려 했었지.
그 결과 권승환이 토벌당한 뒤, 한국의 모든 질서가 붕괴되자 죄다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긴 했지만···
-덜컥
"예, 예··· 알겠습니다."
전화기에 대고 연신 고개를 숙인 장관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마침내 돌아왔다.
"좋은 소식 들고 왔으면 좋겠는데, 장관."
거기다 대고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거든."
"그,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기로 했으니까요···!"
"아, 그래?"
-꿀꺽
들려온 대답에 맞춰,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차를 남김없이 마셨다.
"그거 참,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선 상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우현은 차갑게 미소지었다.
* * * *
그 시각.
청와대 본관.
어느새 플레이어들이 난입하며 박살냈던 현장을 다 청소하고 보수를 마친 듯, 멀쩡해진 모습의 내부 집무실 안.
그 안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변화시키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올림픽 공원 전체를 내놓으라고?!!"
"대, 대신 꽤나 많은 양보를 얻지 않았습니까! 진정하시지요, 각하!"
"올림픽 공원을 개발한다면 그 경제적 가치가 몇십 조는 될 텐데! 아으악!"
더는 참지 못한 듯, 대통령이 들고 있던 만년필을 집어던졌다.
-휘익
"윽···!"
"...피해?"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놀려 피한 국무총리.
그를 보며 한 번 더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대통령이 다시 표정을 폈다.
"하아, 하아··· 참아야지. 참아야지. 지랄을 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조건이라도···"
"그래, 그 놈들이 뭘 해주겠다고?"
"여당과 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발표를 해 주고, 질서 안정화에 대한 공을 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젠장, 어차피 지지율도 당내 총론도 씹창난 마당에."
"그래도, 그만큼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한 여당과 야당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 놈 다 길드한테 꼬리를 만 병신들인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또?"
"향후 대북 외교에 대해서도 정부의 노선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북··· 그 돼지 새끼가 뒤지긴 했지만, 거기 상태가 좀 어떻지?"
"...솔직히 더 안 좋아졌습니다. 그 전에는 질서라도 있었지, 지금은 아예 국가라고 부르기도 힘든 수준입니다."
"남아있는 북한군들이 있을 텐데? 그 놈들이 뭐 김씨 복위 운동 같은거라도 안 하나?"
그 질문에 국정원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북 휴민트들에 의하면 남은 인민군들이 뭔가 하려고는 했지만, 애초에 북한으로 간 미치광이들은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더군요. 그냥 북한군은 심심할 때마다 찢어 죽이고 노는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 정말 사이코패스군, 사이코패스야···"
"그래서 요즘은 저희한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요구는 다 받아들일테니 흡수통일이건 뭐건 어떻게 좀 해 달라고···"
"아니, 우리 코가 석잔데 뭔 흡수 통일이야 빨갱이 새끼들이. 하여간···"
-똑똑
"뭐야, 지금 바쁜데··· 들어와."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양복을 입은 늙수그레한 남자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달려들어왔다.
"국정원장? 할 일이 많을 텐데 뭐하러 직접."
"닿았습니다! 각하, 답변이 왔다고요!"
"뭐가 닿아? 설명을 자세히 해야."
"제주도 말입니다!"
"...!"
"...!"
그 말에, 국무총리와 대통령 모두 안색을 바꿨다.
정확히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정말인가?"
"예. 유보적인 대답이었지만, 저희의 조건 자체는 마음에 든 듯한 반응이었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야 좀 성과가 나는군. 수고했네, 원장."
"별 말씀을···"
"허무성이 영 일을 잘 못하는 것 같아서 짜증만 났는데, 역시 그 놈만 무능하지 자네 팀원들은 잘 하고 있군 그래."
"그 친구는 원래 휴민트가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요."
"그래, 좀 더 자세한 보고서는 없나?"
"네, 여기 드리겠습니다."
국정원장이 웃으며, 그러나 살짝은 불안한 듯.
보고서를 손에서 건네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뭐지?"
"...각하. 이건 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 자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거시는 건."
"나도 알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한테 무슨 기대?"
피식 비웃고선 대통령이 그 보고서를 손에서 건네받았다.
"애초에, 그 놈들이 요직에서 권력을 누리게 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해. 절대로. 서로 상잔시켜야지, 어떻게든···."
그 눈빛에 증오와 혐오가 불타오르듯이 흘러나왔다.
"공부는 커녕 투표도 제대로 안 하던 쓰레기 같은 것들이 무슨 정치요, 군대놀음이야··· 병신같은 년놈들이."
소위 윗 세대들이 극도로 경멸하는 세대 집단에 대한 의지도 함께.
-촤라락
그 평과 함께 보고서의 첫 장. TOP Secret이라는 표지가 넘어갔다.
-[담호영. 캐릭터 네임 맑은눈의광인. 제주도에서 국정원과 접촉 후 대화 성공.]
-[비록 첫 접촉을 시도한 국정원 요원은 고문당한 끝에 겨우 목숨만 부지했으나, 정부의 제안 자체에는 생각해보겠다는 답변을 남김.]
-[길드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담호영은 현존하는 초능력자 플레이어 전원을 통틀어 유일하게 길드장 한우현과 정면 상대가 가능한 플레이어임.]
-[많지는 않지만 그를 따르는 극소수 범죄자 플레이어들을 통해 국정원이 물밑 협상을 한다면, 대안 집단의 수장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낮지 않음.]
"이딴 범죄자 새끼가 그 놈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라···."
"어떻게, 그대로 진행할까요?"
그 물음에, 대통령은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진행시켜."
스스로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보스 몬스터의 위협이던, 던전이 가진 위험성이던, 빌런들에 의한 사회의 파괴건.
뭐든지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 한국의 대통령이었으니까.
물론.
그 모든 비밀스러운 논의들이.
미국 정부에도, 길드에도 고스란히 흘러가고 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 * *
해질 녘.
잠실 길드 사옥 앞.
대문 앞에 막 도착한 한우현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문 앞에서 서성이던 꽤나 화려한 원피스 차림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에.
"어, 길드장? 생각보다 일찍 왔네?"
"나유나? 뭐냐, 그 차림은?"
평소 입고 다니던 [풍수사] 직업군의 플레이어 장비인 색동 저고리와 달라, 순간 다른 사람인 줄 알았었다.
"어, 그, 기분 전환 좀 하려고! 플레이어 전투복은 좀 갑갑하잖아?"
"그렇긴 하지···"
나유나의 당황한 듯한 말에 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포스가 깃든 아이템은 그 재질에 상관없이 불편한 면이 없지 않으니까.
"아무튼, 나도 막 나왔는데. 우연히 만났네?"
"생각보다 국토교통부 장관이 말이 잘 통해서 말이야. 일찍 퇴근하려 했지."
"...그으래? 그럼 이제부터 저녁까진 할 일 없는 거야?"
"그렇긴 하지. 나유나 너도 일찍 나온 걸 보니 마찬가지인가?"
그 말에 우쭐대려는 듯, 그녀가 가슴을 펴고 왼손으로 스스로를 팡팡 두드리며 으스댔다.
"흐흐, 내가 오늘 몇 명이나 새로 가입시켰는지 알아?"
"...멀쩡한 상태로 가입시켰겠지?"
"에? 그게 중요해?"
"뭐, 중요하진 않긴 하지··· 집행부 운용은 네 권한이니까."
"아무튼, 그러면 음, 나도 한가하거든 이제?"
"그래, 조기 퇴근 축하한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길드장 엄청 미식가라며. 빌붙자는 건 아니고, 나도 좀 궁금해서 그런데···"
-빠라락!
-삐라락!
"저녁이라도 같···"
"잠깐."
쭈뼛대던 나유나의 말을 채 다 듣지 못 한 채, 한우현은 다급히 휴대폰을 켰다.
"뭐야, 말하다가 중간에?"
"미안하다. 그냥 문자가 아니라서."
"엥?"
정말이었다.
이건 홍세희를 필두로 한 정보부, 그 중에서도 첩보부 산하의 플레이어들이 정리한 소식.
정말로 긴급하게 한우현에게 전달할 보고서를 빠르게 확인하기 위한 전용 회선의 알림음이었으니까.
실제로 지난 번의 아랍 지역 플레이어 테러 외주 영입 의사나, 러시아 아이템 밀수 같은 것도 이를 통해 빠르게 확인한 사안이었다.
-홍세희
-긴급 상황. 뉴스 빨리. 일본.
"따라와라, 나유나."
"아, 잠깐, 설마 야근은 아니···"
-덥석
"에? 어? 으?"
투정을 들어 줄 시간이 없었기에, 다급히 그 손을 잡아끌고 길드 1층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오늘도···"
"당장 TV 켜!"
"예? 예!"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윽박질러, 빠르게 1층에 있는 커다란 TV를 뉴스 채널로 바꿨다.
-속보입니다. 일본 총리가 암살당했습니다. 현재 자일당 내부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으며···
-일본 총리실 뿐 아니라 당 내 유력 의원 여럿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는 상황이며···
-대기업 및 인구 밀집 현장을 중심으로 테러가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현재 범행 현장의 감식 결과, 가능한 폭발의 규모와 흔적이 현존하는 여러 폭발물들에 맞지 않아···
-유력한 범행 단체 혹은 범인으로 약 6주 전부터 갑작스럽게 나타난 초능력자, 소위 플레이어에 의한 테러가 아닌지 의심이···
"···에?"
"무, 뭐야?"
한우현이 요란하게 고함을 지르며 들어온 것이 감각이 예민한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도 들린 듯.
어느새 길드 로비에 다른 플레이어들도 웅성이며 모여들었다가, 뉴스를 보고 안색을 굳혔다.
"···나유나. 집행부 전원 소집해라."
"뭐? 지금?"
"그래. 지금 당장."
그리고 그들 중 누구보다도 그 안색을 굳힌 한우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었다.
"그리고 출국 준비해라. 아주 바빠질 예정이니까."
"···이 씨. 큰 마음 먹고···"
나유나가 뭐라고 불평을 하는 듯 했지만, 지금 전혀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기에 흘려들었다.
다음 레이드까지 아무리 준비 기간이 며칠 안 남았다 해도.
동북아시아 경제 블록의 한 축이자,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의 사회 경제가 무너진다면, 그 여파는 끔찍하게도 거대하니까.
훈련 시간의 단축을 무릎쓰더라도.
이 사태는 길드 주요 간부들이 직접 나서야 할 사안이었다.
"...모처럼인데···"
"거기 너희. 당장 비행기 표 알아보고, 라니아한테 일본 외무성에 연락하라고 전해."
-현재 자위대와 일본 경찰 측은 피해를 추산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아득!
그 특파원 뉴스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회귀 전에는 한국 플레이어들의 패악질에 그 기가 눌려.
몇몇을 제외하면 전혀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일본 서버 출신의 플레이어들이었을진데.
-현재 일본 정부는 완전히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며...
갑작스럽게, 이렇게 큰 변곡점이 생기다니.
···하지만, 이미 일은 터졌다.
"차정훈, 김재승도 당장 호출해라. 이번 주 동안 내 대행으로 할 일을 인계해야 하니까."
지금은 현 시점에서의 최선을 다할 때.
다음 작전까지 시간이 얼마 없는 만큼.
"서둘러라."
일본 서버의 일은.
그 진상과, 원인을 파헤쳐서.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리라.
75화 버튜버 지망생 하세가와 시호리
"...음질, 인터넷 연결 다 괜찮고."
좁은 자취방 안.
한 여자가 그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카메라가 잘 따라오는지 체크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트래킹··· 문제 없고! 방송 준비, 해도 되겠지...!"
뒤이어 표정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화면에 나오는 자신의 가상 캐릭터 얼굴이 잘 반응하는지도 확인한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화면 내부의 캐릭터가 뻣뻣하게 웃고, 고개를 흔들고, 손을 내민다.
그리 비싼 모델을 쓰지는 않는 듯, 동작도 표정도 약간 어색했지만.
페이스 트래킹까지 잘 되는걸 확인한 그녀는 방송 시작, 버튼을 터치했다.
-딸깍
"자, 다들 가보냥~ 가보냥~!"
-...
-...
-[시호땅카와이]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잇쇼니사케노무카]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스레딕에서왔으면개추]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반도침몰기원99일차]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
대략 8명 남짓.
"..."
방송 화면을 지켜보며, 기대감이 잔뜩 들어찬 눈이 빛났다.
하꼬 버츄얼 유튜버들의 꿈.
평균 시청자 수가 10명도 되지 않는 새싹들의 폐기장 플랫폼.
미리암Miriam의 버튜버 지망생, 시호땅으로서의 일상을 시작할 때였다.
"오늘도 반갑다냥~!"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밝게 인사했다.
-본인도반가우면 개추ㅋㅋㅋ 일단나부터ㅋㅋㅋ
-잇쇼니사케노무~
-가보냥 가보냥~
"에, 오늘도 비슷하네··· 냥···"
어제와 마찬가지로 변함이 없는 시청자의 수.
한 때는, 이것보다는 훨씬 희망찬 방송을 했었다.
으레 대부분의 버튜버 지망생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시청하던 이리암 버튜버를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에.
그 사이오시의 방송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끝나는 시간에 맞춰 방송을 시작했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방송 끝난 라이버랑 시청자가들이 간간히 놀러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저열할 만치 괴상한 단어 선택과 소통 능력, 비호감적인 행동들로 인해 오는 유입들은 죄다 절단기에 갈아버렸다.
오히려, 그녀의 방송을 봐 주는 사람들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다른 곳에서 생겨났다.
한 때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라는 일본에서는 서비스 종료된 게임을 꾸역꾸역 한국 서버까지 와서 한다는 짤이 나돌아.
그 호기심에 우르르 몰려왔다가, 그들이 대부분 빠져나가고 나서도 남은 한국인들과, 한 두 명 될까 말까 한 일본인들.
열 명도 되지 않는 유일한 고정 시청자.
그러니까 정말로, 적었다.
따라서 좀 더 기다려 보려 했지만, 여전히 더 들어오지 않는다.
"하아··· 괜찮아! 와타시한텐 조센타치들만 있어두 되니까냥!"
-조센 ㅇㅈㄹㅋㅋㅋㅋ 얼탱이가 없네
-한국은 캉코쿠라고 하는거에요 학생···
-애초에 우리 오고 나서는 한국말로만 방송하는데 일본인이 들어와도 나가겠다 ㅋㅋㅋ
-ㄹㅇㅋㅋ
"아니, 오마에들이 조센이라 하는 게 더 찰지다고 했잖냥?! 그리고 일본인이 들어와야 나가든지 하지! 들어오지도 않는데 뭘 나가냥!"
-그걸믿었냐;;
-그냥 시원하게 조센징 슬레이어로 방송 바꾸는 거 어떰?
-미친거냨ㅋㅋㅋ
-예로부터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수박도에도 적혀 있으며···
"에휴, 나보다 너희들이 더 답이 없다냥··· 자, 한 잔! 간빠이!
-간빠이~
-간빠이~
-오늘도 무슨 개소리 할지 궁금해서 간빠이~
-챙
몇 되지도 않는 시청자들과 함께, 오는 길에 사 온 소주잔을 부딪히는 시늉을 한다.
"크으··· 역시 취할 때는 소주가 최고다냥!"
-근데 일본에 싸고 좋은 술 많은데 대체 왜 소주를 마시는 거냐
-그러게 수입품인거 감안하면 저거 한국보다 훨 비싸지 않나?
-왜 난 일본인인데 여기서 자연스레 한국말로 채팅을 하는 거지?
-꼬우면 딴 방으로~
그 말에 그녀가 소주잔을 까딱이며 반박했다.
"요즘 소주가 일본에서 워낙 인기가 많아서, 거의 한국이랑 비슷한 가격에 마실 수 있다냥!"
-아니, 한국에서도 요즘 소주 별로 안 마시는데
-뒤틀린한류 크악 씨이빨
-김구선생님··· 보고계십니까? 우리가 전 주인님을 잠식하고 있어요
"꺄하학, 미친 거냐고! 전 주인님? 흐하하!"
그 반사회적이고도 뒤틀린 발언들에도 시호리는 별 생각없이 웃는다.
그리고, 한 술 더 뜬다.
"아무래도 우리 대일본제국이 잘 조련을 해 줬나보다냥!"
-미친년ㅋㅋㅋㅋ
-팻맨, 리틀보이··· 너희가 나갈 때다
-가미카제 : 주인님, 어서 자살을!
-료이키텐카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덴노 헤이카!"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말 따위 아무렇게 내뱉어도 상관없다.
"근데 그럼 현 주인님은 누구냥?
-당연히 천조국이지. 미국 클라스.
-전 전 주인님은 그럼 중국이냐?
-당근빳따죠 쉬바~
-진짜 어지럽네
하물며 그녀의 시청자들은, 자극적인 개소리를 하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는 이들이니까.
"역시 형님의 나라는 달라! 중세 잽 랜드(中世ジャップランド)도 배워야 한다구!"
-조센징 했다가 형님의 나라 했다가 대일본제국 했다가 중세잽랜드 했다가 태세전환 ㅅㅂ ㅋㅋ
-아아··· 이게 진짜 광기라는 것이다
-근데 시호땅, 그거 뉴스 봤어?
"앙? 무슨 뉴스다냥? 와타시는 정치에는 별 관심 없다냥~"
-홀짝
다시 한 번 소주를 홀짝인 시호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클립 첨부]
-이거 보면 미리암 하는 애들 다 망하는 거 아냐?
-꾸욱
시호리는 별 생각 없이 그 링크를 눌렀다.
-[일본 총리_본심작렬_근황.mp4]
-이 보면, 소위 버츄얼 유튜버라는 이 이상한 방송자들이 일본의 고질적인 사회병. 히키코모리들을 양산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에?"
그것이 시청자들과, 시호리가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직접적으로 산업 자체를 제재할 수 있다는 의견이십니까?
-산업 자체라고까지 하진 않았습니다만, 최소한의 선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무나 방송할 수 있는 플랫폼이라던가···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툭
그녀가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선 이미 너무나 많이 마셔서, 살짝 정신이 흐릿해진 상태로.
"...이 열등민족 쪼쿠바리 증세안경이 뭐라는 거야?"
울화를 가득 담아, 다른 말투로 중얼거렸다.
-태권더시호리 샤라웃ㅋㅋㅋㅋ
-증세안경이 뭐임?
-청년들 세금 걷어서 노인들한테 퍼준다는 총리 별명 ㅇㅇ
-근데 씹덕문화는 누가봐도 한국이 일본보다 열등인데 여기서 열등민족 드립이 왜 나옴
-ㄹㅇㅋㅋ
"아니, 빡치잖아! 버튜버는 내 인생인데에! 뭐? 규제에? 하여간 정치인들이란···!
-탁
열이 올랐는지 그녀가 소주병을 그대로 들어올리고서는, 벌컥벌컥 마셔댔다.
-어어?
-저거 캐릭터 판때기 동작 뭐냐? 병째 마시는 거 아님?
-야 그만 마셔
-소주 그렇게 마시면 안 돼
"조용히 해! 조센진 니들도 나 술 마시는거 보러 온 거자나··· 크흡!"
-아니 같이 천천히 마시는거 보려고 온 건데
-누가 병째 샤라웃하래;
"몰라, 빠가···쿠소··· 크! 아, 이제 게임도 섭종해서 못하구··· 방송도 못하면 난 어쩌지이···"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들었다.
"방구석에서 암것도 못하고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도 한국이나 갈 걸 그랬나···"
-하긴 한국어도 나름 수준급이고, 플레이어니까 길드에 지원하면 나름 괜찮을 수도?
-근데 플레이어는 몸 튼튼하다면서 방장은 왤케 잘 취하냐
"그거언, 뭐 정화? 스킬 같은 거 써야 안 취하는 거야··· 난 스킬 잘 못 써서 할 줄 몰라아···"
-벌컥
다시금 한 병을 비운 시호리가, 그 영상을 한 번 더 재생했다.
-소위 버츄얼 유튜버라는 이 이상한 방송자들이···
"아··· 근데, 난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나도 스킬들 펑 펑 날리면, 먼치킨인데에···"
-??
-뭐라는 거임 방장?
-아니, 길드 무서워서 암 것도 못하겠다며 갑자기?
"내가 왜 참고 있어야 하지···? 저것들, 내가 후 하면 죄다 가루가 될 텐데에··· 안 그래, 조센타치들···?"
-맞는 말이긴 한데 소심해서 플레이어 활동은 못 하겠다며
-애초에 일본에는 플레이어들 몇 없잖아 섭종해서
-눈에 띄기 싫다 하지 않았음?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듯.
"내가? 그랬나? 모르겠는데··· 히히··· 참교육 해 주고 올까?"
-뭔 참교육?
-설마 일본 수상관저라도 찾아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말 같은데?
-야, 그만 마셔! 벌써 5병째야
-벌컥벌컥
다시 한 병이 비워졌다.
"이 나라가 나 같은 카와이 JC나 JK에 해 준 거도 없고, 괴롭히기만 하구우··· 히키코모리로 만들구··· 이게 다 자일당 때문 아닌가아···?"
채팅창에 빠르게 걱정과 불안의 감정을 담은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아니 졸업한지가 언젠데 JK 타령이야
-술 너무 빨리 마셔서 그런가?
-야 동조선놈 니가 쟤 진정 좀 시켜봐
-내가 제일 오래 보긴 했지만 그냥 시청자일 뿐이고 집주소 같은 것도 모르는데요?
-음··· 그냥 하는 소리겠지?
하지만 너무도 취했는지, 전혀 그 메시지들을 보지 못한 채.
"야, 딱 기다려! 내가 지그음···! 다, 제대로 교육시켜주고 올 테니까아···!"
-꾸욱
방송 종료 버튼을 누른 시호리는 실실 웃으면서 몸을 비척비척 움직였다.
왠지 모르게 세상이 환해 보였다.
재미난 일이.
황홀한 모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근두운··· 소화아안···!"
-푸루룽
시호리의 입김에서 나온 하얀 안개의 덩어리들이 뭉치며, 그녀를 푹신하게 감싸안았다.
"도쿄로, 고고혓···!"
그대로 구름 위에 쓰러지듯 눕고선.
일본 서버 전직 랭킹 1위. 캐릭터 네임 [중세잽랜드열등민족].
하세가와 시호리의 신형이 빠르게 하늘 위로 솟구쳤다.
* * * *
-부우웅
대한항공, 그 1등석.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공식적인 자리에 있는 만큼 한국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를 개무시한 채로 바다를 건너 가는 건 무리였기에.
한우현은 서둘러 일본 외무부에 그가 직접 가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끊은 가장 빠른 노선을 잡아, 막 출발한 참.
"길드장. 표정 풀어."
"...그래."
"그, 땅콩이라도 좀 먹을래···? 내가 방금 깐 건데···"
"땅콩? 됐어."
그 자리에서 구워낸 잣이나 마카다미아 같은 생과가 아니라면 견과류는 사절이었다.
그렇기에, 나유나의 걱정스러운 말을 무시하다시피 흘리며 최대한 빠르게 여러 자료들을 훑었다.
-띠링
-띠링
-띠링
일본 정부한테 허가는 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미리 보낸 홍세희를 비롯한 정보부 첩보 도적 플레이어들.
그들이 최대한 빠르게 현장을 비롯해, 뒤 이어 나타나는 테러 현장들을 보내주고 있었다.
-까드득
문자와 보고서를 훑어보던 한우현의 입에서 이빨을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씨발···"
-자유일본당 유력 의원들 다수 행방 불명.
-현재 자유일본당 내 남은 유일한 계파는 고이즈미···
-교토 내 테러 연쇄적으로···
-잇산, 아츠비시, 타유타 등 기업 본사에 테러···
-현재 일본 대부분의 도 전역에서 테러가 확산···
-일본 경찰 사상자 지속 발생.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1000명 초과....
-자위대 작전 여부 불확실. 플레이어들에 의해 학살 정황··· 작전 수행 여부의···
"미친 것들, 다 합쳐봤자 천 명도 안 되는 것들이···."
동시에, 목 깊숙한 곳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불과 하루 만에.
세계 3위의 경제대국.
동북아시아, 유럽, 미국이라는 세계 3대 경제 블록의 한 축을 이루는 나라.
일본의 사회 체계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대담하게도, 정신병자 플레이어들이 첫 활동을 현 총리와 그 계파, 행정부 대신들의 몰살로 시작한 덕에.
"···."
한우현의 눈이, 마지막 인물 프로필에 향했다.
-하세가와 시호리. 레벨 294 도사.
-현재 도쿄도 네리마구의 원룸에 거주 중.
-아직 일본 정부와 경찰이 혼란에 빠진 상태이기에 특정되지는 않았으나, 제보에 의하면 도쿄 치요다구 수상관저 테러의 용의자로 강력히 의심됨.
-더불어 다수의 빌런 플레이어들이 시호리를 대장으로 인식하는 듯한 언행을 보임.
"...하세가와 시호리."
회귀 전, 일본의 양대 지배자 중 한 축이었던 여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과거에는 거의 멸망이 닥치기 직전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무기력증 환자.
그러나 진정 최후가 다가오고 나서야 스스로를 희생해 일본을 구원했던 그녀가.
왜,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지?
76화 갈등의 주범 (1)
일본 도쿄 치요다구.
내각의 수장인 총리의 업무 공간.
수상관저가 '있었던' 곳.
그 곳에서 묵직한 미성이 울려퍼졌다.
"···아니야."
한우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선, 말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응? 아니···라고? 어? ···죽었다고? 이 씨이··· 그럼 다른 대신들 찾아가! 죄다 빨리 만나구··· 아니이···!"
"···."
그리고 옆에선 쉴새없이 명령을 내리고 주고받는 홍세희를 둔 채.
-스윽.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너진 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난자되어 있는 칼자국들을.
"역시, 앞에서 본 다른 현장들도 그렇고. 이것들도 그렇고. 전부, [도사]가 만들 수 있는 흔적이 아니야."
"후, 됐다아··· 거긴 운석? 같은 거에다가 뭔가 돌덩이들, 여긴 칼자국? 내가 봐도 그렇기인, 한데에··· 그럼 전사계···?"
"정확히는··· 아니다."
일본도를 쓰는 직업 하나를 생각했던 한우현은 그 말을 삼켰다.
정황상 그 일뽕 이민자 출신 랭커가 의심되기는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으니까.
-찰칵!
-찰칵!
-···!
-···?!
그 반쯤 무너진 건물의 주위로 희미하게 군중들의 웅성임과, 저 멀리서 셔터음이 울렸다.
-더 접근하지 마십시오!
-접근시 위험합니다!
-아직 근방 치안이 안정화되지 않았습니다!
첩보부 소속 플레이어들이 민간인들을 어거지로 물렸지만, 그럼에도 아예 완전히 쫓아낼 수는 없었기에.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
-길드장님! 일본 전역의 소요에 대해 어떻게 관여하실 예정인지···!
인근에서 카메라와 마이크로 내부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기자와 경찰들이 저 멀리서 소음을 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어거지로 모든 사람들을 물린 채 반쯤 무너진 수상관저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휴, 됐다아··· 그, 그럼 길드장··· 계속 막아···?"
"그래. 계속 막아라. 아직 일본 플레이어들이 어디에, 얼마나 흩어졌는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으니까."
"으, 으응··· 그치만 괜찮을까···?"
"걱정 마라."
그리 말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저 멀리서 그들을 힐끗거리는 일본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
"···."
그들 모두, 믿음과 기대보다는.
공포와 불안을 한 가득 눈에 담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자기 나라 사람조차 아닌 타국의 군벌 초능력자 대장과 그 간부들.
이미 한국에서도 사실상 정부 기능을 무력화시킨 집단이 옆 나라로 핵심 전력을 이끌고 들어왔는데 환영을 해 준다?
제 아무리 정부 수반이 날아가 식물 상태에 빠진 국가라고 해도, 그럴 리가 있나.
일본 경찰과 자위대는 유능한 집단은 아닐지언정, 머저리들만 모여 있는 조직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불과 하루 만에 길드의 일본 테러 진압 작전에 협조하게 만들어 준 것은.
한우현의 다소 강압적이고도 급진적인 조치 때문이었다.
-외무대신 협조 의사 확인.
-천황 협조 의사 확인.
-한 시간 내로 대국민 담화 발표 예정.
다행히, 미리 보낸 정보부 간부들이 제 역할을 해 주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길드의 '특별 군사 작전'이 일본 정부한테 인정받게 하라는 명령을, 꽤나 잘 이룩할 수 있었다.
"외무대신과 천황이 병신은 아니어서 다행이야."
"아니, 협박했자나요오···"
"그 느려터진 결정에 도움을 준 것이지.
-그러나 둘 모두 전면 협조적이지는 않음.
-일주일 내로 테러들을 진압하지 않는다면 길드에 의한 내정 간섭은 국내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킬 것이라 우려.
-총리 대행 외무대신에 의하면 언론 통제로도 길드에 숙이는 모양새를 2주 이상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라 당부.
-구우웅···!
한우현의 주위로 포스의 에너지 장이 형성되며 주위 잔해들을 미미하게 뒤흔들었다.
분노와 짜증을 형상화한 현상.
"정정하지. 병신들이 맞아."
-까드득.
그가 이빨을 갈았다.
"나라가 실시간으로 붕괴되고 있는데 조건을 처 달고 있어?"
"너, 너무 강압적이었나아···."
"하, 됐다. 어차피 이 놈들은 오래 볼 놈들도 아니니까."
애초에, 일본은커녕 미국조차 막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길드일 진데.
그가 사회 질서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는 기본적인 행동 방향 하나만 믿고선 토를 달다니.
너희들이 할 행동은, 최대한 빨리 길드가 일본 히키코모리 플레이어들을 죄다 아작낸 뒤.
일본 지부를 빠르게 구축해 안정화시키고, 우리가 떠나게 도와주는 것일 뿐이다.
"자일당에 남은 놈이 고이즈미, 누구라고?"
"그, 소이쿠로? 소이치로?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 데에···"
"아직 연락은 안 됐고?"
"으응··· 그래도 살아있는 건 확실하대! 방금 SNS에서 올라왔다고."
한우현의 인상이 약간 펴졌다.
그래도, 다행히.
살아남은 유일한 계파 중진급 의원이, 쓸만한 놈이었다.
회귀 전 기준으로, 펀하고 쿨한 대처를 통해 플레이어들과의 관계가 원만했으며.
미쳐 날뛰지는 않았더라도 이런저런 사고를 일으켰던 일본 플레이어들을 대표급 랭커 플레이어들과의 협의를 통해 잘 제어했었던 방위대신.
원래 미래에서는 다른 계파에 밀려, 총리는커녕 플레이어와의 협상자 역할도 제대로 못 하다가 도쿄가 제 6 사도에 의해 침몰하며 죽었었지.
어차피 일본 지부를 세울 때, 그 놈을 밀어주려는 계획을 생각해 보긴 했었다.
···하지만, 총리로까지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크게 미래가 바뀐 것이지?
-스르륵.
다시 한 번 콘크리드 건물에 남은 칼자국을 매만지며, 한우현은 과거를 회상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 사정이 굉장히 안정적이고 나쁘지 않았던.
그 덕분에 아주 조금. 다른 나라들에 비해 조금 늦게 멸망을 맞이했던 일본 서버를.
-뭐야, 이그드라실 플레이어들이 죄다 게임 능력을 각성해?
-씨발, 왜 하필 한국 게임으로? 헬조선 싫어서 이민까지 왔는데!
-차라리 일본에 학원도시나 만들어주지!
-···근데, 한국 꼬라지 보니까 이민 오긴 잘 한 거 같은데.
-미친. 진짜 좆망했네?
-···우린 얌전히 있어야겠다.
-바로 옆 나란데 어그로 끌었다가 쟤네 오면 좆된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한 때 일본에도 서비스를 유지했었다.
비록 캐시 아이템의 등장 확률을 조작했다가 일본 검찰에 의해 제대로 털려서, 2년 전 서비스를 종료했지만.
그 모든 플레이어들이, 전원 게임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사죄의 의미로, 일본의 용사님들께 한국 서버로의 이전 기회를 부여하며···>>
-지랄한다 진짜 우리한테 얼마나 더 뽑아먹으려고?
-핑 튀는 한국 서버까지 가서 현질하라고? 이게 일제강점기의 복수냐?
-사죄와 배상을 하지 않은 대가를 이런 식으로 청구하는구나.
게임사 측에서 그 게임에 시간과 현금을 쏟아부은 정신병자들을 일부라도 데려오고자 하는 의도로, 서버 이전 기회를 주었으니까.
물론 일본 유저들의 대부분은 병신이 아니었기에,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으며 그에 응하지 않았다.
-씨발 이거 없으면 내 인생도 없어
-좆 같은 게임사 새끼들 진짜 이딴 식으로 정상화를 하냐
-진짜 정신병자 새끼들 아냐? 저걸 계속 따라간다고?
-고아원은 아가리 해
-에션족은 에게로
-관심 주지 말자 지들이 쿠소게무 퍼먹겠다는데
하지만, 대부분은 병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극소수는 병신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 1,000명.
인생을 쓰레기 게임에 저당잡힌 히키코모리들.
그 중 랭커급인 레벨 290 이상은 불과 5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결코 무시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숫자였다.
-한국, 중국의 현황은 보셨지요? 저리 되는 꼬라지는 여러분들도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모두들 대단하신 분들이 아니십니까?
-저렇게 사회, 정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도 불편한 게 많습니다!
-정부가 당신들이 원하는 건 뭐든지 맞춰 드릴테니···.
그러나, 눈 앞에서 세계 10위와 2위의 강대국이 어처구니없이 붕괴되는 꼬라지를 본 일본의 정치인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가정 하에는.
어찌저찌 통제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수준의 숫자는 아니었다.
60만의 정신병자 플레이어들이 날뛰는 한국보단 훨씬 나은 사정이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무엇보다 우리가 어그로를 끌어서, 한국 애들이 여기로 오면 어떡해···?
-힘숨찐 메타를 따르는 게 맞는 거 같은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던 것.
중국과 한국의 처참한 몰락을 똑똑히 지켜본 일본 정부와 플레이어들이 그 인식을 같이 한 사안.
결코, 한국의 정신병자들이 일본에 그 광기를 들이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
그것이 회귀 전의 일본을 상대적으로 얌전하게, 국가 질서가 유지되도록 도왔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가장 강한 다섯 명의 랭커가 그 정부에 협조적이었기도 했고.
물론.
미래가 크게 바뀐 만큼 일본 플레이어들이 그렇게 얌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최소한 2 사도 레이드 전까지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일본 플레이어들이 정부의 통제에서 본격적으로 벗어난 것도 6개월은 지났을 때였으니까.
대체 무엇이 그들을 과거와 다르게, 이리도 폭주하게 만들었단 말이지?
"···아."
-뚜르르!
-뚜르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울린 전화벨 소리.
그것이 한우현을 상념에서 꺼내주었다.
"그래, 나유나."
-어, 길드장! 상황 보고하려구! 지금 셋 잡았구, 나머지 하나도 위치 파악했어! 그 제일 중요하다던 애는 아직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괜찮아. 하루만에 거의 다 잡다니, 대단한데? 아주 잘 했어. 이건 확실히 칭찬감이야."
-치, 칭찬? 아니, 그, 싫다는 건 아닌데 그보단··· 아으! 그, 근데! 길드장 말과 다르던데?
"다르다고? 뭐가?"
-얌전할 거라며? 전혀 아닌데? 얘들 선제공격했어!
"···선제공격?"
-응! 다행히 대비를 잘 해서 망정이지, 얘들 실력이 우리 수준이었다면 오히려 당할 뻔 했다구!
"뭐?"
그 말에 한우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파악한 네 명 모두 다?"
-잠시만. ···응, 어, 그 버튜버 빼고 네 명 죄다 그랬다는데.
"···당장 남은 놈들도 죄다 그 쪽으로 끌고오라고 해라. 그리고 잘 잡고 있도록. 지금 바로 갈 테니까."
-응, 기다리구 있을.
그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선, 전화기를 얼굴 아래로 내린 한우현이 홍세희에게 얼굴을 돌렸다.
"지금 당장 교토로 간다."
일본 열도의 전 지배자들이자.
병적으로 한국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증오했던 혐한 컨셉충들.
다행히 나유나가 그들 중 셋을 막 제압해 두었다고 하니.
최대한 빨리 의중을 파악해, 어째서 과거와 이렇게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지 알아내야 할 때다.
* * * *
교토부 경찰본부.
그 널찍한 중앙 홀에, 수백 명의 화려한 복식의 사람들이.
무수한 [무지개 넝쿨]에 얽매인 채, 쓰러져 있었다.
"아, 씨발, 진짜 좆 같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색동 저고리 한복 차림의 여자가 눈에 짜증과 분노를 가득 담아 빛내며.
-퍽!
-퍼벅!
-퍼버벅!
"이."
인정사정없이.
"쪽바리."
완전히 무력화되어, 저항도 못하는.
"새끼들 때문에!"
일본인 플레이어들을.
"기껏 생전 안 입던 비싼 옷까지!"
후들겨 패고 있었다.
"사서 입었는데! 씨! 발! 뉴턴 센세!"
-콰다득!
쓰러져 있던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아아악!"
"칙쇼오! 아으악!"
"씨발! 한국어로! 해! 너흰 싹 다 해골 세 개 감이야!"
"(아니, 미친! 나 한국어 할 줄 모른다고! 통역관 불러와!)"
"(맞아! 못 알아듣겠다고!)"
"···하?"
처절한 비명을 담은 대답에 나유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스윽.
그리고선, 주저앉으며 그 말을 가장 먼저 한 자와 눈을 마주쳤다.
"···쿠, 쿠소."
"지랄하네. 야, 너네 죄다 교포 출신이잖아. 모르긴 뭐 몰라?"
-꾸욱, 꾸욱.
나유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나무 지팡이로 그들의 볼을 쑤셨다.
"···내 할아버지가 조선인이었지, 난 그 손자인데 어찌 조선어를 잘 합니까?"
"내 알 빠냐?"
"그, 스미마센··· 통역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눈치를 보다가 다가온 통역관이 그 살벌한 행동들을 조금이라도 제지해 보려고 한 듯.
"필요 없어. 이 에션족만도 못한 새끼들 때문에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으드득!
"아아악!"
"화풀이라도 해야지."
"···으윽."
그 입을 뗐지만, 즉시 나유나가 한 사람의 손가락을 비틀어버리는 걸 보고선.
신음을 삼키며 빠르게 물러났다.
"그럼···."
-후웅.
"어?"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허공에서 열린 푸른 에너지의 구체였다.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들의 공용 스킬. [차원 관문].
"···앗."
관문의 공간 통로가 물결치는 것을 본 나유나가 빠르게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이, 이씨, 뭐 이리 빨리···."
동시에 손과 얼굴, 머리카락에 튀겨져 있는 살점과 핏덩이들을 대충 닦아냈다.
-[벡터 재조정 : 삼각 초기화]
-후욱!
순간 빠르게 바람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흐르며, 온 몸의 이물질을 닦아냈다.
"여긴가? 하나, 둘··· 대략 500명쯤 되겠어."
"왔어? 짠! 내가 잘 정리해 놨지?!"
순식간에 말끔한 차림새로 변모한 나유나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확실히 그렇군. ···근데 저 핏자국들은 뭐지. 이미 제압은 다 끝난 거 아닌가?"
"아, 아아! 그, 몇몇 놈들이 [제압기] 풀고 반항하려 해서!"
"하긴, 재능이 뛰어나면 그럴 수 있으니···."
고개를 끄덕인 한우현은 나유나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고선 앞으로 나섰다.
아마 그가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일본 전역에 테러를 일으킨 '진짜' 주범들의 앞으로.
"···."
"···."
"···."
"반갑다, 재일교포 친구들."
그 앞에서,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범 없는 산에서의 여우 놀이는 즐거웠나?"
77화 갈등의 주범 (2)
잠깐 그들을 노려봐주고선, 한우현은 기억에 있었던 이름들을 떠올려 내뱉었다.
"하쿠 나가요시. 백영길."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린 주범이 아니야."
백색 브릿지가 검은 머리 사이사이에 박혔으며, 욱일기가 그려진 츄리닝을 입은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최윤성."
"이거 실수한 거야. 주도자는 따로 있다니까?"
황색의 헌병 경찰 차림으로 왼쪽에는 완장을, 오른쪽에는 기다란 일본도를 찬 동양인 남성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가네사카 마사에. 김정혜."
"···저흰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레벨이 높단 이유로 그럽네까?"
허리춤에 방울과 부적을 찬 무녀복을 입은 여자가 북한 억양으로 뇌까렸다.
"알지. 아주 잘 알지."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우현이 [정신 감응]을 일으켰다.
"묻겠다. 하세가와 시호리. 캐릭터 네임 [중세잽랜드열등민족]를 어떻게 꼬드긴 거냐?"
"···?!"
"···뭐?"
"으, 어?"
셋 전부 모두.
의문이 아닌, 당황의 감정과 생각을 띄웠다.
"아니지. 그것만 했을 리가 없지. 어디에 숨겼지? 아니면 가둔 거냐?"
-...!
-...?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었던, 다른 무수한 플레이어들도 그 이름을 들은 듯.
의문과 충격, 혼란의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파장으로 내뿜었다.
역시.
관련이 있었다.
"보아하니 확실하군. 너희, 다 같이 일을 벌인 거냐?"
"다, 다같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맞아. 우리 존나 히키코모리에 개인주의잔데?"
"그, 애초에 지금 다들 처음 만난 겁네다만."
최윤성과 나가요시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대답했다.
"개소리는 집어쳐라. 작당 계획은 다 알고 있으니까. 사쿠라이 카즈키도 곧 잡혀 올 거다."
"뭐? 그, 그, 그게 누군데?"
"무슨, 무슨 소리야? 그걸 왜, 왜 우리한테 말해?"
"그, 이봐요, 통역관! 우린 테러도 안 했다고! 증거도 없잖아!"
"맞아! 테러 현장에 있긴 했지만 난 구경만 했다고!"
"오히려 난동 그만 피우라고 다른 친구들을 설득까지 했는데, 왜 이리 몰아세우는 겁네까?!"
그들이 필사적으로 외치며 [제압기]에 당한 몸을 꿈틀꿈틀 움직였다.
"어쭈, 어딜 비벼? 가만히 안 있어?!"
"크악!"
"윽!"
"이, 이건 오히려 포상··· 악!"
물론 그 시도들은 나유나가 하얀 버선을 신은 발로 마구 밟아주자 그쳤지만.
"억울한가? 왜 테러하지도 않은 자기들을 이렇게 괴롭히나 싶나?"
"그, 그래! 설마 닉이 좀 이상하다고 그러는 거야?"
"게임 닉이야 원래 어그로스럽게 짓는 거잖아!"
"저는 닉도 안 이상한데···."
"···세계 길드장인 내가 그렇게 좀스러운 병신으로 보이나?"
-[신성한 검]
-치잉!
그 질문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한우현은 살기를 내보이며 든 검에 기운을 흘렸다.
물론 객관적으로 대일본제국이니 조센징이니 하는 닉네임들이 보기 좋은 이름은 아니었지만.
이름 하나 가지고 니들이 테러의 주범이냐고 윽박지를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이미 제압된 테러리스트들 모두의 교차 증언이 끝났다. 어젯밤, 너희가 시호리의 이름을 멋대로 팔아서 일본 도 각 지역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규합했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심문은 무슨 심문?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들은 그 증언도, 제보도 아직 제대로 나온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내뺄 생각은 마라."
한우현이 확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일본 전체에 단 다섯 밖에 없는 랭커급 플레이어.
직접적으로 테러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도 그 중 넷이 테러 현장에, 다른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관망하고 있었다고.
대부분의 테러리스트들이 시호리가 가장 먼저 나섰으니 랭킹 1위를 따라간다는 식으로 중언부언을 내뱉었지만.
글쎄. 회귀 전에도 일본 전역을 쪼개서 지배했던 영주들이, 그 상황에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주도자가, 그저 술에 취해 도쿄로 간다는 주장을 끝으로 더 이상의 흔적이 없는 하세가와 시호리라고?
그 우울증, 무기력증 환자가?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다른 내막이 있었다.
"무슨 개소리야! 우연히 모인 거라고! 우린 그냥."
"우연히 모였다면. 어떻게 하세가와 시호리를 언급했을 때."
-후우웅
그의 검이 한 번 허공을 크게 갈랐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인 거지? 너희 말대로면 기껏해야 한두 번이나 어제 처음 본,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아닌가?"
-후와아아악!!
동시에, 그를 따라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쳤다.
"크윽!"
"···윽."
"으으···."
칼 바람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척.
그들의 목 앞에는 방패와 칼이 아슬아슬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수상관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
"···."
셋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분명히 말하는데, 정말로 내가 주범은 아니야···"
"야!"
"젠장, 이미 다 알고 있잖아! 애초에 난 처음부터 그 계획 마음에 안 들었어!"
"증거는 없다고!"
"증거가 무슨 의미가 있어?! 지금 경찰도, 자위대도 이 새끼들한테 꼼짝을 못 하는데!"
"그래, 정답이다 백영길."
"···하쿠 나가요시라고 해. 하아."
욱일기가 새겨진 밴드를 동여맨 머리를 푹 숙인 그가, 한 숨을 내뱉었다.
"···한국에서 플레이어 범죄자들 잡을 때."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파악했기에, 그를 바로 끊었다.
처벌 같지도 않은 반성과 숙려 기간만을 가지고 곧바로 길드원으로 편입되었던 빌런 플레이어들.
항복하는 대신, 비슷하게 취급해달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부적절한 것 같군. 보는 눈이 많잖나?"
"···좋아. 어차피 이미 잡혀 온 마당에."
어차피 그런 조건을 달지 않아도, 나중에 이것들도 써 먹기 위해서는 조건을 달아주려 했으니.
그 정도 요구야 전혀 어렵지 않았다.
"우리끼리 좀 해보려 했는데, 쿠소···."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당할 줄이야."
"차라리 가만 있는 게 희생이 덜한 방향이었을 걸."
하쿠 나가요시의 기가 완전히 꺾인 듯 하자, 마사에와 최윤성도 더 이상 뻣대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듯.
"어떻게 된 거냐면···."
그 입을 열었다.
* * * *
전날 밤.
도쿄 치요다 구.
"흐헤, 흐헤에··· 이 몸, 강림!"
그 곳에,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여우귀와 여러 여우꼬리 치장 아이템을 매단 음양사 복장의 여자가 널브러지듯이 구름에서 내렸다.
-철푸덕!
"응헥! 그아··· 으으···."
그리고 멍하니 눈을 감았다 떴다가, 중얼거렸다.
"···근데 수상관저가 어디지?"
별 생각 없이 이 쯤이려니, 찍고 온 것이라.
무수한 건물들 사이에서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물며 잔뜩 취해, 세상이 빙빙 돌게 느껴지는 상태라면 더더욱이.
"아으··· 머, 상관 없지이···! 천천히 산책, 이라도 해 보는 거야악···."
오래도록 버튜버 생활에 탐닉하느라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대중이나 사회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워낙 곱창난 단어 선택과 파멸적인 대화 소통 능력이, 인터넷을 현실보다 선호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흐흐··· 만나서 뭐라구 할까? 규제 그만 둬? 규제 멈춰?"
"시호땅."
"아니야, 코스프레를 시켜보는 것두···?"
"시호땅!"
"에?"
-스윽.
-스윽.
횡설수설 지껄이며 걸어가는 그녀를 중심으로, 네 명의 인영이 둘러싸며 나타났다.
"머야아···? 친구들이네? 꿈인가?"
"꿈, 아니지만 뭐.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돼."
"반가워. 근데, 가기 전에 우리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시청자들? 나 싸인 아직 안 만들었는데에."
"시청자는 아니지만, 방송 보고 오긴 했지."
"우와···. 그래, 나두 하꼬 아니라고···!"
"시호땅. 사회에 불만이 꽤 많은 모양이야?"
"응! 엄청 많지!"
"특히 이 중세 잽랜드 정부에 말이야. 안 그래?"
"으응. 이씨, 내 유일한 꿈인데··· 총리? 니가 뭔데 내 방송을 박살 내! 응?!"
아직 현실 감각이 흐릿한 듯.
-쉬익!
-쉬익!
그녀의 손짓을 따라 구름과 안개가 뒤섞인 듯한 포스의 에너지체들이 뭉쳤다.
-퍼벙!
-퍼버벙!
그리고, 그것이 주먹질을 따라 여기저기 불규칙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갔다.
"?! 이, 이런 미친!"
"막아, 나가요시!"
"크윽! 사쿠라이! 그 쪽은 네가!"
"쿠소···!"
-콰광
-콰과광
다행히, 네 명이나 되는 랭커들.
그들의 신형이 흐려지며 재빠르게 무기를 꺼내고선, 그 궤적을 쫓았다.
-파바박!
-카자작!
겨우 겨우, 주위의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낼 만한 위력의 기력 덩어리들을,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었다.
-쿠우우!
-콰아아!
비록 모두가 합쳐서야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차단했지만.
"허억, 허억··· 미친, 뭐 이리 강해?"
"쉿. 자극하지 마."
"맞아. 계획대로 하자고."
소곤거리며 말을 주고 받고선.
한 남자가 살짝 앞으로 나서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크흠, 흠. 시호땅. 나도 너 방송 보거든?"
"뭐? 진짜아?"
그 말에 하세가와 시호리가 감긴 눈을 번쩍 떴다.
"물론이지. 기억할진 모르겠지만 [재특회태권대장]이라구···."
"으음··· 기억 안 나는데."
"자주 들어오진 않았어, 지난 달부터 바빠졌었거든."
"그런가아?"
"아무튼 시호땅. 네가 말한 불만, 우리도 모두 공감하는 바야."
"맞아."
"우리 같은 플레이어 친구들이잖아?"
"선량한 우리들을 괴롭히다니, 힘을 보태주려고!"
"그리고 걱정돼서 찾아왔지!"
"응, 그런 건가··· 나 친구 많네! 나도 이제 인싸인 건가!"
여전히 술이 깨지 않은 듯. 헤실헤실 웃으며 개소리를 하는 시호리를 보며.
넷 모두가 한 마디씩 던지고선,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그냥 찾아가는 거보다는."
그리고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우리 생각을 좀 들어보는 건 어때?"
"너도 분명, 들어보면 재밌겠다고 할 거야."
"응, 좋아!"
온 몸에 정령의 기운을 씌운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떤 놀이냐면 말이야···"
무술의 품새를 취한 자세로.
* * * *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른 뒤.
-삐용삐용···
-끼이익··· 쾅!
-꺄아악!
-사, 살려줘!
저 멀리서 들리는 살벌한 소리들을 흘려들으며.
-도로롱···
-도로롱···
"···."
네 명의 플레이어가, 얌전히 잠들어 있는 하세가와 시호리를 불편한 듯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말 같지도 않은 허술한 계획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전이의 토템]을 착용해 그 능력치를 잃은 일본 최강의 플레이어를.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가장 먼저 일본도를 찬 일제 경찰 복장의 남자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최윤성. 캐릭터 네임 [조센징슬레이어]. 레벨 290 사무라이.
"이미 수습 불가야. 차라리 우리가 제어하는 게 낫지."
"하, 길드가 분명 나설 텐데···."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욱일기와 태극기를 기괴하게 섞은 문양이 그려진 태권도복을 입은 남자였다.
사쿠라이 카즈키. 캐릭터 네임 [천황총리태권참수]. 레벨 290 정령투사.
"내 말을 믿어. 길드? 걔들은 한국만 제어하기에도 바빠. 곧 다음 보스를 잡는다고 하니까, 개입을 한다 해도 최소 며칠은 걸리겠지."
"중국이랑 동남아 보면 엄청 일 처리가 빠르던데···."
"거긴 따로 지부가 있잖아. 일본에는 지부가 없고."
"그러니까 오래 개입할 수 없단 거지. 중국, 동남아 모두 그 뒤로는 사실상 걔들끼리 개인 플레이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솔직히 뭔가 우리가 먼저 일을 벌인다는 거 자체가 좀 꺼려져."
"맞아. 게다가 한국 애들이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네까···."
거기에 한 명이 더 딴지를 걸었다.
무녀복을 입고 방울과 식신 종이 인형을 허리춤에 찬 여자.
가네사카 마사에. 레벨 290 무녀. 캐릭터 네임 [쇠말뚝일곱개의대죄].
"정말로 이런다고 우리를 중요하게 취급해줄까? 오히려 들키면 좆 될 거 같데만."
"하, 너희 자이니치들은 너무 소심해. 우리가 가만히 있는다고 대접을 해 주겠어?"
"조센 떠난 지가 언젠데 자이니치 타령이야? 재특연 음모론자 새끼가."
"그렇게 치면 나도 재특연 떠난 지 오래됐거든?"
약한 소리는 듣기 싫다는 듯, 태권도복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일본은 플레이어가 너무 적어. 그러니까 중국이랑 한국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죄다 떵떵거리는데, 우리만 눈치보면서 조용히 있었던 거지."
"···계획 자체가 그리 나쁘다는 건 아냐. 문제는 그게 우리 수작이라는 걸 들켰을 때의 뒷감당이지."
"그런 걱정은 마. 실제로 시작을 끊었다는 걸 핑계 삼아서, 시호리한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니까."
"시호리···."
"왜, 새삼 죄책감이라도 들어?"
"···."
"···솔직히 얘 자체는 잘못이 없긴 하잖아."
그 앞에 있는 욱일기를 동여맨 남자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하쿠 나가요시. 레벨 290 염동술사. 캐릭터 네임 [대일본제국만세].
"하, 책임 질 대상은 있어야지. 어차피 히키코모리인데다가 부모랑 사이도 안 좋아서 연고도 없는 년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나도 아직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일본 최고 레벨 랭커를 이렇게, 희생시키는 게 맞나···."
지나칠 만치 수위가 높은 말에 일본도를 든 남자와 무녀복의 여자가 꺼림칙한 반응을 보였다.
"꼬우면 대안을 내던가."
"씹···."
"지금 수백 명이 부화뇌동해서 깽판을 치고 있는데,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건 너희도 동의한 거잖아?"
"하지만 시호리는."
"그럼 더 좋은 방법이 있고?"
"···."
"없지? 그러니까 니들도 결국 따르기로 한 거잖아. 안 그래?"
"···."
하지만 곧바로 날아오는 비웃음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어차피 플레이어들은 지금 죄다 통제 불가야."
"으음."
"이대로 있으면 길드가 곧 쳐들어와서 싹 다 진압한 다음에, 일본 정부도. 우리도. 꼭두각시가 되겠지."
"그러느니 그 직전에 선수를 쳐서. 우리가 주역이 되는 게 맞아."
-후욱
그 손과 발에 정령력이 덧씌워지며, 그가 태권 품새의 자세를 취했다.
"너희는 최대한 티 안 나게, 시호리 이름을 팔아서 각 지역에 깽판을 쳐."
"그럼 난 시호리한테 전이받은 [도사] 스킬이랑 [정령투사] 스킬을 합쳐서 후지산 용맥을 이끌어낸다."
"며칠. 랭커급 플레이어의 능력치를 내가 처먹었으니까. 길어도 일주일이면, 일본 전역을 내가 제어할 수 있게 돼."
"그 때 가서 시호리랑 빌런 플레이어들 묶어서 처단하면, 명분도, 전력도 확실히 우리가 우위에 있게 되겠지."
"그럼 이제 한국에서 온 길드랑 일본 정부와 협상하는 거야.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계획이라기에도 허술한.
정말이지 엉성하고 논리도 뭣도 없는 쿠데타 작전.
"···씨발, 시호리 이 미친년이 갑자기 테러 예고만 안 했어도 이딴 허술한 미친 짓은 안 하는 건데."
"누군 그 말이 이렇게까지 효과가 클 줄 알았냐?"
"젠장, 1위라고는 해도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았는데 테러가 확산되다니."
"됐어. 어차피 우리가 모은 애들도 이젠 통제 불가야.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네 명 모두.
그 말만은 확실히 맞다는 것을 인정하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움직이자고. 길드가 우리 잽랜드에 쳐들어오기 전에, 최대한 판을 굳혀야 하니까."
"하, 그래."
"이따 보자."
-파악
-후욱
-휘이익
순식간에 세 명이, 스킬까지 써 가며 흩어졌다.
각자 맡은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 질서를 붕괴시키기 위해.
남은 정적 속.
후지산의 중턱에서, 사쿠라이 카즈키가 한 마디를 더 중얼거렸다.
"···좆 같은 나라지만, 그래도 내가 먹어야지. 남한테 줄 수는···."
78화 최후의 발악
"어떡해, 카즈키?"
"···."
태권도복 차림의 남자가 표정을 딱딱히 굳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한국 새끼들이 죄다 후지산으로 몰려온다는데. 우리 숫자도 얼마 안 되잖아."
"조용. 조용히 해 봐."
"준비는 얼마나 된 거야?"
"이미 밑에 애들은 다 잡혀들어갔어. 여기까지 오는데 몇 시간도 안 걸린다고."
"다른 플레이어 전이 받아서 안정화 하는 거, 더 빨리는 못 해?"
"일주일은 걸린다는데 지금 당장 좆 될 상황이잖아, 이 쓰레기 새끼야!"
"야, 씨발 어쩔 거냐고!"
"젠장, 나도 방법을 찾고 있잖아!"
-콰과광!
그가 버럭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큭!"
"이런 씹!"
"빌어먹을!"
주위에 원소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사람들을 밀어냈다.
"아니, 길드가 오기 전까지 전부 통제할 수 있다고 한 건 넌데 왜 지랄을 해?"
"누군 성질 없냐?!"
"이대로면 주도권은 개뿔 전부 두들겨 털리게 생겼는데!"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를 낳은 듯.
날려간 플레이어들이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각자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하."
"···? 뭐야, 웃어?"
"방법이라도 생각 났어?"
"그래. 너희들 덕분에 생각났다."
사쿠라이 카즈키의 눈빛에 광기가 맴돌았다.
"그러니 잠깐 다들 모여 봐. 정말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그런 방법이 갑자기 생각났다고?"
"확실한 거 맞아?"
"확실해. 하지만, 너희들의 도움과 협조가 좀 긴밀하게 필요해."
-힐끔.
-힐끔.
그 너무나도 확신에 찬 말에, 일본인 플레이어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래. 어차피 별 방법도 없으니까."
"대신 별 거 없으면, 그냥 항복하는 거다."
"동감. 이건 진짜 승산이 없는데."
"일단 들어나 봐. 좋아. 다들 가까이 와 보라고."
-[전이의 토템]
손 뒤에 아이템 하나를 소환한 카즈키가, 긴장으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뇌까렸다.
"더, 조금 더 가까이."
* * * *
-찌릿.
서른 명 남짓의 플레이어들을 빠르게 훑어본 금방청안의 남자가 그 찡그려진 이맛살을 들썩였다.
"지금 후지산으로 가용 가능한 집행부가, 이게 다라고?"
"응, 다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선에서는···."
"으음···."
"조금 더, 데려올까? 무리하면 100명까진 될 거 같은데."
침음을 내뱉은 한우현의 눈치를 보던 나유나가 물었다.
"아니다. 그 놈이 중요하긴 해도, 다른 지역의 안정화가 더 중요하니까."
"그, 그러엄 우리는."
"첩보부도 마찬가지다. 여긴 직접적인 전투를 벌일 곳이니, 굳이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 인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 래···애? 그럼 난··· 그 사람 만나러 갈게에···."
"그래. 다음 총리로 내세울 친구니, 적당히 우리가 줄 수 있는 조건들을 내세워서 잘 설득해줘라."
고개를 끄덕인 홍세희의 인형이 흐려졌다.
-스르륵···
"그런데 길드장,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그 짧은 증언만 듣고도 바로 이렇게 현황을 파악해서 작전을 세워?"
"단체를 운영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방위부장 노릇 한 지 한 달 넘었어도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나유나의 떨떠름한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한우현은 긴장한 듯 서 있는 집행부 플레이어들과 눈을 마주쳤다.
"이미 오면서 전달받았겠지만, 이 작전은 기존 범죄 진압과 다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한 적이 위에 있으니까."
-촤악!
한우현이 다급히 대충 그린 후지산의 작전 지도가 펼쳐졌다.
"놈은 일본 서버에서 한정으로 단 한 번 풀린 이벤트 아이템. [전이의 토템]으로 능력치가 합성되고 증폭된 상태다. 즉, 레벨의 초월···. 최악의 경우, 나와 동급일 수도 있으니 그리 생각하고 작전에 임해라."
"젠장, 진짜 별 좆 같은 아이템이 다."
"아니 뭐 그딴 사기템이 다 있어?"
"저런 미친 물건을 내놓을 거면 기간제로 해야지···."
"공감이다. 네 달 짜리 기간제로 있었다 해도 미친 아이템이지."
그들의 불평이 타당했기에 한 번 공감을 표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가정은 말 그대로 최악의 경우···. 정말로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을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시잉!
검 끝에서 신성한 검기가 흘러나왔다.
"이건 우리가 그만큼 서둘러 작전을 수행하는 이유기도 하다. 다른 놈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이의 토템]은 능력치와 스킬 레벨의 중첩에 시간이 걸린다. 즉,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지."
실제로 이 작전의 숨겨진 의중이기도 했다.
만약 그냥 다른 일본의 플레이어들한테 들은 정보가 다였더라면, 한우현은 이 한 놈은 홍세희와 나유나한테 맡기고 본인 스스로는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 집중했을 테니까.
그러나 회귀 전의 미래에서, 사쿠라이 카즈키의 행보.
-그히히히, 크히흐흐헤흐학!
-···저게 플레이어라고?
-포스 수치가 보스랑 비슷한 수준인데?
-흐크하학!
플레이어라기보다는 몬스터에 가깝게 변이해 버린, 미쳐 날뛰는 포스 에너지체의 화신.
포스 전투술의 12번째 형이자 궁극기, [화신체]라는 스킬 설계의 밑바탕이 된 자.
그 충격적인 재앙적 존재에 대한 지식이 한우현을 서두르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바쁘게 뛰고 있는데, 이렇게 추가 작전에 동원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다들 하루 종일 뛰느라 피곤하겠지만, 마지막 작전인만큼 힘을 내 보도록. 알겠나?"
"예!"
"예!"
"확인했습니다!"
"좋다. 놈의 인상착의, 혹은 정령체로 변한 모습을 본다면 무조건 나를 호출하도록."
-스으윽!
그 손가락의 끝이 후지산을 중심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난 번 남산 진압 작전과 마찬가지로 둘러싸듯이 올라가되, 교전 발생 시 다른 빌런들을 본다면 송과체를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사살해라."
"기왕이면 심장을 노리는 게 좋을 거야."
"원래라면 제압만 해 두는 게 바람직하지만, 인력이 워낙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응. 애초에 저 놈들도 100명도 안 된다고 하니까, 사리면서 계속 우리 호출하라구."
나유나의 첨언에, 다른 집행부 길드원이 자신있게 외쳤다.
"걱정 마시죠! 우리 실력, 솔직히 이 새끼들이 상대가 되겠습니까?!"
"맞아, 실전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데! 이제야 테러 벌이는 놈들이 무슨!"
"진짜 빌런이 뭔지 보여주자고!"
그 자신 있는 외침들.
"좋아. 다들 믿음직하군."
듣기에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럼 출발한다. 나유나 넌 나랑 함께 움직이면서 [차원 관문] 열지."
"···! 지, 진짜?! 같이, 좋아!"
겁을 꽤나 주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일본 플레이어들은 쭉정이이므로 크게 위험한 작전은 아니었다.
그가 서둘러서 직접 작전을 시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정령왕 사쿠라이 카즈키.
회귀 전에도 레벨에 비하면 지나칠 만치 강한 스킬의 위력과 본신의 능력치로.
일본 전역의 플레이어들을 잡아먹으며 인간은 물론이요 플레이어의 범주도 벗어나게 된 미치광이 정령왕.
"···."
그 놈이 최종뎀 먹고 자라버린 곰팡이마냥 그 능력을 키워나가는 꼬라지를 지켜볼 순 없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포스의 에너지화와 운용에 극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즈키도 주요하게 쓸 계획이었지만···.
이미 선을 넘었다면.
도덕성 이전에 그의 능력은 안정성이 너무나도 뒤떨어진다.
실제로 흡수한 포스와 다양한 직업군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기는커녕, 송과체가 돌아버려서 폭주하는 괴물이 되었으니까.
놈의 상태를 직접 자세히 살펴봐야 알겠지만.
훨씬 더 온건하고 다루기 쉬운 친구가 있다면, 그 불안정하고 폭발적인 놈을 쓸 필요는 없으리라.
"···하세가와 시호리. 살아만 있어라."
회귀 전에는 카즈키가 단순히 뇌식선 후앙푸셴 같이 송과체를 모종의 방법으로 흡수해서 그 능력을 성장시켰을 것이라 추정했지만.
죽기 전까지 비밀로 했었는지, 아예 그런 아이템이 있었을 줄이야는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 잡혀온 세 놈의 증언에 의하면 [전이의 토템]은 완전히 능력을 전이시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물건.
아직, 늦지 않았다.
기왕이면 그 희귀한 아이템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
아무리 그 놈의 잠재력이 뛰어나다 해도 아직은 햇병아리.
길드의 조치가 이리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름 음모를 꾸민 듯했지만, 어차피 미래를 아는 그의 입장에서는 모두 예상 범위 내.
사도에 대한 대비만도 바쁜데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최대한 빠르게 모든 놈들을 진압해 일본 지부를 세우고, 정상화한다.
"가자."
그가 응어리진 목소리로 작전의 시작을 알렸다.
* * * *
"(항복, 항복! 그만!!)"
"야, WWE하냐? 항복이란 말을 왜 못 해?"
"나유나, 일본인 플레이어들이 전부 교포는 아니야."
"엥? 진짜?"
"당연하지."
파들파들 떨며 도게자를 하듯 엎드린 플레이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질을 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려가서, 기다려라."
"하, 하이!"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으나, 한우현의 손짓으로 가도 된다는 뜻을 알아들은 듯.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가 순식간에 굴러떨어지듯 산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후다닥
"저거, 그냥 도망치면 어쩌려고 그래?"
"상관 없다. 밑에서 대기하는 놈들도 있고, 어차피 일본 내 플레이어의 수는 얼마 안 되니까."
"뭐,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나유나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근데 그렇게 겁 준 거치고는, 진짜 생각보단 훨씬 할 만한데?"
"···확실히 그건 그렇지."
한우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올렸다.
-하나 사살, 하나 항복. 지원 불필요.
-둘 사살. 지원 불필요.
-넷 항복. 지원 불필요.
"애들도 다 잘 잡고 있고. 이거, 그 놈도 별 거 없는 거 아니야?"
"글쎄다···."
말꼬리를 흐리며 답했다.
사실, 그가 과잉대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사쿠라이 카즈키가 정령왕으로 각성하기 이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름 뛰어난 랭커급 플레이어기는 해도, 이미 잡아 온 다른 일본인 빌런들과 비교해 그리 특출난 능력을 지녔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으니까.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어쩌면 그가 너무나도 빠르게 그의 계획을 꿰뚫어보고 대처하는 지금.
마음이 조급해진 카즈키가 더더욱 폭주하는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
그리 스스로를 납득한 한우현은 다시금 집행부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둘 항복. 지원 불필요.
-현재 정상까지 500m 남짓.
-현재 정상까지 400m 남짓.
-현재 정상까지 600m 남짓.
"좋아. 그럼···."
한우현이 그 역시 정상으로 막 발걸음을 향하려던 찰나.
-[의식 확장술 : 광역 인지]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후욱!
"길드."
-후우우욱!
그리고 초월적인 속도로, 방패를 휘둘렀다.
"···장?"
나유나를 향해.
-[절대 방어 : 반사 장갑]
-[절대 방어 : 반사 장갑]
"꺄, 꺄아···!"
그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콰과광!
-콰과광!
엄청난 충격파가 울려퍼지며, 그녀가 저 너머로 튕겨졌고.
-콰라라락!
-쿠아아아!
나유나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서, 무지막지한 규모의 용암이 솟구쳤다.
"흐, 흐흐, 흐흐흐흐··· 흐하하하!"
그에 뒤이어, 그 안에서 시뻘건 마그마가 조악하게 인간 형상으로 뭉쳐진 듯한.
큼직한 포스 에너지 덩어리 하나가 뿜어져 나왔다.
"사쿠라이 카즈키. 환영인사가 제법 거칠군."
"씨, 씨이···! 말이라도 하고 좀!"
"나유나, 지금 당장 위로 가라!"
"으으으으···! 미워 진짜!"
"흐히흐하학!"
"어딜?"
-쐐애액!
용암체가 막 위로 방향을 튼 나유나에게 내뿜은 마그마를.
-푸화학!
-쩌저적!
즉시 그 사이에 끼어들어, 방패로 후려쳐 사방팔방으로 쳐냈다.
"네 상대는 나다. 그나저나··· 완전히 돌았군."
"흐크히흐흑?"
인간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슬라임에 가까운 용암 덩어리를 보며 한우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송과체··· 아니, 송과체라고 하기에도 이젠 무리가 있는.
질척한 포스의 덩어리에서 나오는 불안정한 감정의 파도들이 너무나도 불쾌했기에.
"정령투사, 도사, 무녀, 화염술사, 원소술사, 기공술사, 별자리··· 대체 몇을 잡아먹은 거냐?"
"흐끄르륵?"
"계획을 바꿔야겠어."
-[광신의 광검 : 영체 절단]
그 검과 방패에 포스 에너지체의 붕괴와 절리에 특화된 기운이 맺혔다.
-츠자자자···!
비현실 에너지 구조체. 포스 엔트로피와 포스 에너지 법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성립시키는 스킬.
"재능이 아깝지만, 이미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상태이니···."
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네가 모든 책임을 덮어 써 줘야겠다."
"까끄흐즈흑?"
"뭐, 실제로 사실도 그러하니··· 억울하진 않겠지."
-후우웅!
-기이잉!
순식간에 한우현을 중심으로 무수한 포스의 형상과 다발이 뻗어나가듯이 엮여나갔다.
"크흐학!"
0.1초도 되지 않는 순간. 그러나 그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정령의 일격]
-[용암 회오리]
-[번개의 기운]
-[홍수와 범람]
순식간에 무수한 스킬들이 허공에서 뿜어져 나오며 한우현에게 작렬했다.
-[기의 파도]
-[폭풍의 언덕]
-[화염구 세례]
-[별똥별 세례]
그리고 정령투사의 스킬 뿐 아니다.
그가 흡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수한 다른 직업군의 스킬들도.
형상도, 구현도 불안정했지만.
-쿠과과광!
-쩌저정!
-콰자자작!
어마무시한 위력으로 그를 강타했다.
"후욱, 후욱···."
정령체가 된 카즈키의 입장에서도 무지막지한 그 포격이 쉬운 공격은 아니었던 듯, 기괴하게 숨을 몰아쉬며 스킬들이 쏟아져내린 지점을 노려보았다.
"참, 어이가 없군."
"끄, 끄르흑?"
그러나 곧바로, 놀란 듯이 그 괴악한 울음소리가 뒤틀렸다.
"이게 네 최선이었냐, 정령왕?"
한 치의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빛의 안개를 두른 남자가 무표정하게 그를 보고 있었으니.
-퍼벙!
소닉 붐이 일어남과 동시에, 한우현의 인영이 흐려졌다.
"일단."
-촤악!
"끼, 끼헤에엑?!"
"다이어트부터 좀 도와주도록 하지."
한 움큼, 정령체의 일부를 검 끝으로 찢어발긴 한우현이 중얼거렸다.
79화 바로 일본 정상화
-촤학!!
빛에 둘러싸인 검과 방패가, 그를 둘러싼 에너지 덩어리들을 휘몰아치듯이 난자했다.
-촤좌좍!
"크, 끄끼헤엑!"
"강하기만 하면 뭐하나."
그리고선 무감한 목소리가 나직히 울려퍼졌다.
"카흐하학!"
-[신비의 도술]
-[용암 폭풍]
-[휘몰아치는 대지]
-콰과광!
그 목소리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무수한 스킬들이 작렬했다.
엄청난 물리력과 포스, 원소 에너지체들이 합쳐져 빚어내는 폭력.
-[절대 방어]
-[역장 외골격 : 흡수 장갑]
"힘의 제어도, 섬세함도 전혀 없는데."
하지만, 한우현은 그 모든 것을 정면에서 받아내며 거침없이 쳐냈다.
-촤학!!
-츠하학!
-처즈좌작!
초월적인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과 방패로.
그에 닿는 공격들은 모두 비틀리며 휘고 흡수되며 튀어나간다.
"끼히헤헥!"
미쳐 날뛰며 한우현에게 쇄도하려하는 거대한 정령의 화신을 끊임없이 깎아냈다.
이런 정직한 공격 따위.
"끄흐흑."
"지금의 나도 정면에서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라니."
위력이 아무리 강해 봤자, 포스 제어에 통달함과 함께 이제는 그 부족도 어느 정도 해소한 그의 입장에서는.
"···."
"어지간히 급해서, 판단력이 흐려졌나?"
전혀, 상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니까.
"크흐하학!"
-퍼버벙!
-콰과곽!
한우현의 말에 대답할 정신이 전혀 없다는 듯.
거대한 바람, 용암, 번개들이 뭉친. 그야말로 살아있는 폭풍의 형상이 온 몸을 포효하듯이 울렸다.
-크흐오오오!
-스하으아오!
폭풍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금 쇄도했다.
-!-!!-!!!
그 반경 수백 미터의 공간 전체에, 포스의 파동이 울려퍼지며 울린다.
"하, 단말마냐?"
하지만 한우현은 오히려 웃었다.
본능적으로, 지금의 행동이 그의 마지막 수단임을 깨달았기에.
-[...]
-[폭발하는 힘]
-[힘의 형상]
-[...]
그에 부응하듯.
-후우욱···!
-스우욱···!
-즈으악···!
정령체가 무수한 힘을 끌어모으며 주위 공간을 붕괴시키며 끌어당겼다.
-쿠화아아앙!
동시에, 엄청난 기세의 포스, 열, 바람이 주위로 뿜어지며 한우현을 비롯한 흙과 바위를 비산시키듯이 밀어냈다.
-후와아아악!
그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 해도 도저히 버티지 못할 위력의 물리적인 파동.
"흡!"
-[절대 방어]
하지만 한우현은 강하기만 한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포스의 원리와 구조 그리고 체계를 효율적 그 이상으로 깊이 제어하는 자.
-치리리링···!
-차라라랑···!
순식간에 [절대 방어]를 비롯한 무수한 공간 왜곡, 흡수 역장, 물리량 재조정을 비롯한.
-카라라락!
무수한 스킬들의 구현이 그를 둘러싸며 그 강력한 폭발에서 한우현을 보호했다.
"끄흐으아아···!"
그 짧은 틈새를 가지고, 카즈키였던 에너지 덩어리가 힘을 모으며 뒤틀린 형상을 순식간에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무수한 직업군들의 궁극 스킬. [화신체]를 구성하는 변신류 기술들의 총합체로.
-우웅···!
-울렁···!
-꿀렁···!
0.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아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라도 [신경 조작술]을 통해서 극한까지 순간 순간을 파악하는 수준이 아니었다면.
최후의 변신을 막기는 커녕 인지하지도 못했으리라.
"어딜?"
"까흐으그?"
그렇기에 성기사가 온 몸에 환한 빛을 두른 채, 그 중간에 너무나도 절묘히 난입하자.
정령체는 변형시키려던 그 몸을 놀란 듯, 확장시키고 수축시켰다.
-[광신의 광검 : 영체 절단]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검과 방패에 엄청난 위력의 포스 구조체가 한층 더 날카롭고 거칠게 돋아났다.
-스으-가아악!
그것이 크게 휘둘러졌다.
-사아-츠아악!
그것이 빠르게 휘둘러졌다.
-파박!
-파박!
-파박!
연속이라기보다는 동시에 가까운 궤도로 검과 방패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끄, 끼히아악!"
-츠좌작!!
-콰자작!!
동시에 아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치, 그 몸의 4분의 1 정도 되는 규모의 포스 덩어리가 강제로 뜯겨나가졌다.
"크, 크하···"
그 충격이 너무도 컸던 듯, 그가 온 몸을 활처럼 휘며 파들파들 떨었다.
-스걱!
-서걱!
-촤아악!
하지만, 봐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흐윽, 흐아악! 아하악!"
지금은 이성을 완전히 잃은 채 자기가 흡수한 직업군들의 스킬들에 먹혀 폭주하고 있지만.
"잠··· 흐으··· 아! 끄아··· 아안···!"
정신을 차린다면 그가 흡수한 스킬들을 조합해, 일본 곳곳에 있는 온천수나 용암맥을 타고 도망갈 수 있었으니까.
"그, 그마··· 아아악···!"
물론 현 시점에서 그냥 폭주했을 뿐인 카즈키가 과거 정령왕 카즈키의 능력을 고스란히 깨우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정령왕이 온전히 그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은, 100명에 가까운 플레이어들과 보스 몬스터 하나를 잡아먹고.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버리게 되고 나서였으니까.
하지만 주의는 백 번을 기울여도 좋은 것.
-츠자자작!
-서거걱!
일단은, 저 화신체 형상부터 강제로 해제시켜야겠다.
어차피 그 전까지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으니까.
-촤악!
-촤하악!
"좀 아깝긴 하군."
"하으크하악···!"
그가 내뱉는 괴성을 무시한 채, 한우현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한국의 빌런 군주들에 비하면 조금 부족할지라도, 재능 하나는 정말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부족한 제어력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자기 스킬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게 보스 몬스터랑 다를 게 뭔가?
아직 폭주하기 전이라면 그래도 영입을 고심해 봤겠지만···.
이렇게 크게 사고를 친 데다가, 이미 반쯤 송과체가 맛이 갔으니.
-촤아악!
-서걱!
-쓰각!
이 놈은 처분하는 게 맞겠지.
"...하, 항!"
"음?"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쩌억···.
사방으로 에너지체가 말라붙으며, 피와 살점이 튀겼다.
더 이상 정령의 화신체를 유지할 수 없어, 현실 물질로 이뤄진 육체로 돌아왔음을 내보이는.
가장 큰 증거.
"하, 하앙보옥···!!"
"···."
-우뚝
무차별적으로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휘둘리던 검과 방패가 그 움직임을 멈췄다.
"허억, 허억···"
"다시 말해 봐라. 뭐라고?"
"머, 멈춰···! 내가, 내가 졌어!"
"흐."
이제서야 이성을 되찾은 듯, 헐떡이며 뒤틀린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온 카즈키를 내려다보며.
"웃기는군."
한우현은 비웃었다.
"일본 전역을 붕괴시킬 위기에 빠뜨려 놓고, 항복?"
"그건,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다른 범죄 저질렀던 빌런들도 지금은 죄다 길드에서 일하고 있다며!"
"꼴에 한국말은 잘 하는군."
"···만화 보면서 배웠어."
그의 표정이 필사적으로 일그러졌다.
"보면 알겠지! 나, 난 능력이 있다! 이것도 능력 증명하려고 그런 거야!"
"능력? 자기 이성도 유지하지 못하는 게 무슨 능력?"
-철컥.
한우현이 다시 검을 가까이 내밀었다.
"잠, 깐만!"
거기에 카즈키가 눈알을 굴리다가 외쳤다.
"나를, 나를 죽이면 안 돼! 지금 날 죽이면 연결된 플레이어들이!"
"걱정 마라."
한우현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방금 정상에 도착한 친구들이, 네가 강제로 묶어놓은 것들. 죄다 풀어놨으니까."
"뭐? 무슨."
"나름 잘 숨겨 놓은 듯 했지만, 길드가 그런 거 하나 못 찾을까?"
사실, 꽤나 아슬아슬하긴 했다.
나유나가 방금 막 [전이의 토템]에 강제로 씌워진 플레이어들을 해제시켰다고 전했으니까.
나름 잘이 아니라, 정말로 잘 숨겼던 것이다.
"으, 으으···."
마지막 숨겨둔 한 수였던 듯.
[전이의 토템]이 들켰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의 표정이 분노와 광기에 물들었다.
"크흐아아···!!"
-우르릉!
-콰르릉!
동시에 다시 한 번 변신하려는 듯, 온 몸에 포스가 분출되듯이 모였지만.
-콰드작!
그 시도는 순식간에 내질러진 한우현의 검에 의해 머리 한 가운데가 꿰뚫리며.
-털푸덕···
허무하게 끝을 맞이했다.
"그래서 항복을 받아주지 못 한 거다, 카즈키."
-촤악!
검을 한 번 턴 한우현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뇌가 포스에 중독되어서 맛이 간 놈을, 뭘 믿고 쓰겠냐."
그리고 한 마디를 더해 주었다.
"함부로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중하게 쓸 만 했을 텐데···."
비록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을지라도.
"멍청한 놈."
정말로 안타까웠기에.
* * * *
후지산에서 내려오자마자, 한우현은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
다행히, 그 인과관계와 당위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일본 전역의 테러를 획책하고 지휘한 것은 사쿠라이 카즈키로 밝혀져···
-다른 초능력자 플레이어들의 능력과 스킬을 흡수하고 협박해 계획을 주도했다고 하며···
책임자를 내세우고 신임 내각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정상화'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플레이어로 하세가와 시호리는, 책임을 지고자 일본 플레이어들의 대표로서···
-총리 직무 대행 고이즈미 소이치로는 최대한 빠르게 사회를 정상화하겠다고 대책을 발표하였으며···
-세계 길드장 한우현 또한 사흘 내로 지부를 세우고, 최저한의 간섭으로 일본 사회가 정상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삑!
"생각보다도 훨씬 순조로운데."
리모컨을 눌러 흘러나오던 티비 뉴스들을 종료한 한우현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 자신도 오면서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었던 시간.
일주일, 그 안으로 해결하고 다음 레이드를 준비하겠다는 바람이.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이뤄졌으니까.
"역시, 모든 건 하기 나름이야."
"···좀 얄미운데요오···."
"아, 물론 정보부의 도움도 컸지. 이번엔 정말로 수고가 많았어, 홍세희."
"이씨이··· 정훈 오빠도 못 만나고오···."
"걱정 마라. 이번 레이드까지만 끝나고 나면 실컷 데이트하게 해 줄 테니까."
"아니이, 그럼 또 훈련해야한다고 갈굴 거잖아요오···"
이런. 들켰다.
-호릅.
"맞, 맞자나요오···"
대답해주기 귀찮아 일본 외무성에서 선물로 준 녹차.
시즈오카산 교쿠로노사토를 한 모금 마셨다.
중국산과는 또 다른, 은은한 청량감과 떫은 맛이 맑게 그의 입을 적셔주었다.
이것도 꽤 괜찮은데. 최상품이 더 있다면 한 번···.
-똑똑.
"이 씨, 무시하고오··· 들어오세요오···!"
"시, 시츠레이, 실례합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여우귀에 여우꼬리를 한 다발 달고 있는.
음양사 차림의 여자였다.
"그래, 수고가 많군. [중세잽랜드열등민족]."
"머, 멀쩡한 이름 있으니까! 그렇게 부르지는 말아주시죠!"
긴장한 듯 우물거리던 시호리의 표정이 순간 달아오르고선, 빼액 소리를 질렀다.
"중국 친구들은 대부분 닉네임으로 불러주면 좋아하던데?"
"그, 그만요. 안 그래도 인터넷에서 그거 가지고 얼마나 비웃는데."
"그래, 농담은 여기까지 하지."
눈빛을 진지하게 한 한우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협조해주다니 말이야."
"아, 아니요. 제가 더 죄송해요. 그냥 힘을 좀 빌려주면, 일본인 플레이어들끼리 잘 해 보겠다는 말을 제가 취해가지고 별 생각없이 믿어서."
"뭐, 그건 실수가 맞지만··· 이렇게 잘 해결되지 않았나."
-촤악!
한우현이 접대실의 창문을 열었다.
-사쿠라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저 테러리스트때문에 몇이나 죽은 거야!
-쿠소다로!
바로 앞, 합동 분향소에서.
추모의 분위기와 함께, 그 옆에서는 온갖 욕설들이 흘러나오는 현장을 바라보았다.
"너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결국 위에서 내리꽂는 제물이지."
"···제가 정말 자격이 있을까요."
"있지. 고이즈미 소이치로도 결국 네가 잘 설득해 줬잖나?"
"그래도, 한 게 겨우 그거 뿐인데. 그 때도 도움은커녕 구함만 받고."
"하세가와 시호리."
그 소심한 의견을 짓누를 듯.
한우현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넌, 일본 서버 전체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이자."
그녀의 떨리는 눈이 성기사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현재, 모든 플레이어 피해자들의 대표이며."
한우현의 펼쳐진 양 팔이 저 너머의 분향소를 가리켰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 고이즈미 소이치로의 핵심 후원자다."
"···하지만 그 모든 게."
그녀가 목 끝을 떨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당신들이 만들고 조성한 거잖아요."
"흠."
-쪼르륵.
한우현이 그녀의 앞에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홀짝.
그리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잔에도 그를 따르고선 마셨다.
"···."
"···."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게, 나쁜 건가?"
"···."
"우리가 그렇게 빠르게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더 좋아졌을까?"
"···."
"그렇지 않았을 것이란 건 너도 잘 알지 않을까?"
"···그렇지만."
"하쿠도, 가네사카도, 최윤성도. 사실은 처분해도 된다. 그 놈들도 주범은 아니지만 동조자니까.
-탁.
한우현이 찻잔을 놓았다.
"하지만 네 의견을 존중하기에 그들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었고."
"저, 는. 단지."
"결정을 내린 건 너다."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이자, 사실상 세상을 지배하는 군주.
"플레이어들과, 너와, 다른 모든 이들의 죄를 덮고 싶다면.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추구해라."
길드 마스터가 어둑하게 속삭였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그의 입 끝이 음울하게 비틀렸다.
"최선의 정의는 아니지."
지금 일본 지부를 구성할 1,000명 가량의 플레이어들은.
결국 그 반 이상이 테러에 선을 걸친 이들.
길드가 아무리 사쿠라이 카즈키의 존재감을 부각하고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도, 그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를 안정화한다는 명목으로, 그 놈들을 별 처벌도 없이 그대로 가용하는 것이 어떻게 최선일 수 있을까?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다수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결국 플레이어들로 이뤄진 공식적인 길드 산하 조직이 필요하다.
저 놈들을 싹 다 치우고 언어도 안 통하는 한국 길드원들을 파견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애초에 국가별 길드 지부는 빌런 플레이어들을 통제하는 것이 주 목적.
일본 빌런들은 그 수는 적지만 열성 게이머인 만큼 평균적인 레벨이 높다.
그런 만큼 다 죽이기엔 아까울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방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차선책으로 협박하고 억제해 복종시키는 것이 효율적.
"모든 것이 최선일 수는 없어."
"당신 같이 강한 사람에게도요?"
"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우현은 대답했다.
"강하다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마음대로까진 아니어도, 저희 같은 히키코모리들이 어떻게."
"방구석 버튜버 지망생 시호땅."
"으, 윽?"
"나도, 한국 길드원들도, 너와 일본 플레이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이 저 멀리, 한국이 있는 서쪽을 향했다.
"찾아보면 알겠지만, 너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던 게 나였으니까."
"과거에 어떻건, 지금은!"
"그러니까, 최선을 원한다면."
그녀의 말을 끊고, 꼼지락거리는 그 얼굴에다가 손가락질을 했다.
"네가 바라는 최선의 정의를, 네 부하들을 통해 만들어라."
"···."
"내가 그리 했듯이."
여전히 그 의지를 망설이는 시호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뭐, 꼭 지금 결정을 완전히 내릴 필요는 없겠지."
고개를 내려, 서류들을 넘겼다.
"어차피 다음 달에 세계 길드 회의가 열릴 예정이니까."
"세계 회의, 요···."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며, 시호리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의지가 담겼다.
"곰곰히 생각해 보고, 그 때까지 결론을 내려 보도록."
-펄럭!
무수한 괴물들과 기계들의 형상이 가득 정리된 서류를 넘긴 한우현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격려했다.
"넌 할 수 있다."
멸망의 미래에서도 일본 최후의 공격대장으로, 일본 플레이어들을 하와이로 보내고선.
홀로 무려 둘이나 되는 보스와 함께 동귀어진하는데 성공한 영웅.
기적의 음양사 하세가와 시호리라면, 믿을 수 있었으니까.
80화 연습 전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