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질서 악 (1)
-짹 짹
싸늘한 기운이 맴도는 겨울의 아침.
서울 서대문구로 세 명의 길드 임원이 모였다.
홍세희. 나유나. 한우현.
본격적으로 길드 설립과 채용 절차 업무에 착수한 김재승, 차정훈, 권승환과 달리.
그들이 오늘부터 시작할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으, 씨바··· 경찰들 얼굴은 보기 싫은데."
나유나가 투덜거렸다. 경찰청 건물을 보자 짜증이 난다는 듯이.
"그, 그러게요... 꼭, 와야 하나..."
비슷하게도, 홍세희는 꺼림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킬 한 번이면 무너질 건물을 앞에 두고 초월적인 능력의 플레이어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둘 모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보군."
"너, 넘겨짚지 말아 줄래?!"
"아닌, 데요오..."
"뭐, 랭커란 것들이 하긴 그렇겠지. 괜찮다. 나도 여긴 아니지만 소환 당했던 적은 꽤 있으니."
사실이었다. 돈이 너무도 급했을 때, 물통팔이 입금을 좀 늦게 하다가 소환 당한 적이 있었으니.
"길드장이... 그랬었다고?"
"상상이 안 되는데요오..."
둘 모두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지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에 기억도 잘 안 난다.
"근데, 우리 진짜 겁나 강한데. 얘네들 협조가 굳이 필요해?"
"그러게요, 저 혼자서도... 돌아다니면서 다 잡을 수 있는데."
"길드, 길드 하니까 진짜 길드인 줄 아나 보군."
"..."
"..."
"길드는 강하지. 정확히는, '힘'만 강하지. 힘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은 맞다. 하지만, 힘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면 공부라는 건 왜 하겠나?"
"씨발, 길드장 똑똑해서 좋겠어. 어쩌라고?"
"..."
당연하게도, 레벨 290을 넘긴 랭커답게.
나유나와 홍세희는 모두 고졸이었다.
"지레 긁히지 마라. 난 중졸이니까."
"아."
"에."
검정고시를 보기는 했지만, 한우현은 진짜로 필요해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대체하기 위해 시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부모가 하도 빌어서 그냥 대충 본 것이지.
그래서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검정고시를 가지고 중졸이 아니라 고졸이라 주장하기보다는 그냥 중졸이라고 판단하는 게 맞다고 생각되었다.
"명심해라. 우리는 플레이어 범죄를 '수사'하고 '진압'해서 최종적으로는 '처벌'하고 '복종'시켜야 한다."
"그건 나도 알거든."
"이그드라실 투기장 마냥 토너먼트로 플레이어끼리 PVP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수사, 체포, 최종적으로는 설득과 복종까지.
당연히 무력도 필요하지만, 경찰의 협조는 무조건적으로 필요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게임 폐인이었던 것들이, 초능력자가 되었으니 경찰 노릇을 잘 할 거다?
형사법도, 추적학도, 프로파일링도, 범죄심리학도.
하나도 모르는 일자무식의 사회 부적응자들이?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 경찰과 검찰의 협조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갑인 건 사실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도 무조건 숙일 입장은 아니라는 거다."
"아니, 말은 청산유수야. 중졸이라면서···"
"네..."
둘 모두 한우현의 그 말을 이해했다.
정확히 역학관계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뭐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나도 절대 싫다는 게 아니야, 그냥 하필 여기 서대문구 경찰청이 좀···"
"온 적이 있었나?"
"고아원 새끼들이 이상한 걸로 억지 고소해서···"
"평범한 고소로는 동네 경찰서나 가지, 경찰청까지 올 일은 없을 텐데."
"...아, 기억났다. [공원의노리쨩]."
"뭐, 뭐가 기억나? 조용히 안 해!"
홍세희가 나직히 나유나의 캐릭터 네임을 읊자, 그녀가 바로 발작했다.
하지만 홍세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토르 키고 인터넷에 사지절단 혐짤 달리다가 실수로 IP 들켜서 신고랑 차단 먹."
"왈랄랄루! 왈랄랄루!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조용. 안 궁금하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주도적으로 말 할 기회를 얻어 신이 난 탓일까.
끔찍하게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그드라실 랭커답게도, 그 입을 닫지 않았다.
"아, 기억나는 거 더 많은데··· 히히···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레이드 빠진다는 길드원한테."
"그건 걔가 잘못 한 거지! 왜 먼저 말도 안 하고 먼저 잡은 레이드 일정을..."
"조용히 하라고."
한우현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사람을 오뚜기로 만들고 다니는 행적만 봐도 그 취향이나 성정이 어떨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전혀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과거였다.
"경찰청 안에서는 이상한 말 하지 마라."
"나, 나도 알거든! 쟤가 이상한 거야! 쟤가!"
"에션족 정상화 한다면서 에인션트섭 게시판에서 시비 털고 다니다가 통매음으로."
"꺄아악! 닥쳐! 닥치라고!"
"안 궁금하다고."
-딱
"으븝!"
"말 했을."
-딱
"악!"
"텐데."
한우현이 포스를 담아 머리가 울릴 정도의 강도로 꿀밤을 때려주고 나서야, 둘을 조용히 시킬 수 있었다.
"홍세희. 너도 차정훈 따라다니면서 칼 들고 협박 사진 찍어댄 걸로 전과 생길 뻔 하지 않았나?"
"윽, 악, 으븝?"
"그, 그래! [차정훈똥꼬내꺼]! 너도 에션족 애들이 차정훈 욕했다고 '에션족 너프' 팔에다가 커터칼로 새겨서 인증했잖아!"
"니, 닉 말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건 독립투사의 혈서 비슷한 거야..."
"독립투사는 지랄, 그리고 니가 먼저 내 닉 불렀잖아!"
"하아."
한우현이 온 몸에 포스를 끌어올렸다.
"..."
"..."
둘 모두, 사회성은 극악할지언정.
포스 감지 및 운용 재능은 뛰어난 이들이기에, 그를 느끼고 입을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좋아. 이대로만 있어라. 이제 들어간다."
-쿵
소란을 정리한 한우현은 방패를 보란 듯이 내리 찍으며 존재감을 알렸다.
-끼이익
굳은 얼굴의 두 경찰관이 대문을 열어 주었다.
"반갑습니다··· 길드장님."
"뭐, 그래. 나도 반갑군. 한우현이라고 한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 난 제복의 중년 남자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경찰청장 치안총감 조제호입니다."
"직접 나올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야."
"행안부 장관··· 아니, VIP께서 당부하신 사안을 부하를 시킬 수는 없지요."
눈치를 살피며 작게 말한 조제호는 다시 한우현과 눈을 마주쳤다.
"청장실로 가지요. 보안을 요해야 하니까요."
"안내 부탁하지."
-똑똑
"들어가네."
"음?"
한우현은 눈썹을 살짝 위로 올렸다.
청장실 안에 양복을 빼입은 퀭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기에.
"아··· 자네도?"
"인사는, 해야지··· 내가 뭣 때문에 밤 새 이 고생을 했는데."
경찰청장의 떨떠름한 반응을 뒤로 하고 그가 말을 이었다.
"반갑지는··· 못하군요."
"검찰총장? 이건 좀 의외군.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바쁜 이유가 바로 플레이어들 때문인데, 길드장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다니··· 아랫 것들이 실수를 한 것이지요."
검찰총장이 음울하게 읊조리며 손을 내밀었다.
"뭐, 어쨌든 결과적으로 만나주니 고맙군. 길드장 한우현이다."
"이해심이 깊으시군요··· 이원서입니다."
"흠."
"검찰총장···"
나유나는 시큰둥하게 그 인사를 받았고, 홍세희는 살짝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찰총장보다 뉴스에 훨씬 자주 나와, 어느 정도 유명한 인사였으니까.
정부 공식 위계 상으로는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은 동등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권한은 하늘과 땅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아무리 검찰의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권한을 늘린다 해도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근본적으로, 두 조직의 사법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큰 격차를 가지기 때문에.
그래서 기왕이면 검찰과도 전적인 협조 관계를 이루어야 했던 한우현의 입장에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류적으로만 협업을 맺는 것과, 직접 그 조직의 수장과 협의를 이루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경찰도, 검찰도, 지금 참 고생이 많은 친구들이야. 많은 도움이 되길 바라지."
"예, 정말로··· 단순히 체포 협조를 넘어, 수사의 주도권 자체가 그 쪽에 계시니···"
"검찰 입장에서는, 솔직히 길드라는 것에 법이 더 이상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검찰총장의 눈빛이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최소한,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요."
"좋은 자세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인사를 마친 경찰청장이 부하 경찰들을 모두 밀어냈다.
"모두들, 호출 할 때까지 접근을 불허하지. 한 시간 뒤에 오게."
"예? 그렇지만···"
"따르게. 의미 없으니까."
"네, 네···"
망설이는 이들까지. 주위 모든 사람을 물리고, 문까지 닫고 나서야.
경찰청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목 마르실 테니, 차라도 드리겠습니다. 좋아하시는 것이라도?"
"철관음 있나? 안계나 고법산이면 더 좋겠군."
"...입맛이 꽤 고급이시군요. 그런 건 없습니다."
"녹차로."
"아, 저도···"
"난 믹스커피."
"난 안 주나?"
"자네는 차 싫어하잖아. 물이나 마셔."
"흐, 기억력이 좋아···"
-쪼르륵
"그런데, 의외로 겁이 없군. 차관급 공직자가 호위 한 명도 없이 말이야."
"하, 없을 리가요···"
"농담도 잘 하는군."
한우현의 한 마디에, 조제호와 이원서 둘 모두가 헛웃음을 흘렸다.
"두렵지 않나? 손짓 한 번이면 건물 전체를 으깨버리는 초능력자가 세 명이나 있는데."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반항할 수 없는 존재라면."
차를 다 만든 그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의미가 없으니,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요."
"나 또한 그리 생각하지. 태풍이나 지진에 저항하려고 하는 건 의미 없는 발버둥이니."
"...호."
한우현은 살짝 감탄했다.
둘 모두.
생각보다는 대범한 인물들이었다.
"무시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협조 요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저희의 일을 떠넘기는 것이니까요."
"상시 부여 된 특별 수사권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렇다 해도 사법 질서가 완전히 붕괴 되는 것보다야..."
서랍에서 한 가득 서류철을 가지고 온 조제호가 그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원서가 그 서류들 중 빨간 도장이 찍힌 몇몇 문서를 따로 뽑았다.
"이틀. 단 이틀 사이에 발생한 플레이어 범죄 목록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 중에서도 특히 위험한 대규모 살상 혹은 테러지."
"...하."
"생각보다도 훨씬 많군. 어떻게 이 많은 사건들이 이슈가 되지 않은 거지?"
"한국은 생각보다 언론 통제가 강한 국가입니다. 물론 그것도 이미 한계에 이르렀지만요."
"좋아. 일단 대충 보지."
"이번에는 따로 연동할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서류로 드립니다만···"
추가로, 그들이 태블릿 PC를 눌러 활성화 시키고서는 내밀었다.
"실시간 신고 알림 어플입니다. 관리 권한을 드렸으니, 수사하실 길드원 분들께도 이걸로 프로그램 설치를 승인하시면 됩니다."
"좋군. 하지만 좀 번거롭겠어. 플레이어와 일반 범죄의 분리는 어려운가?"
"최대한 수사관들이 빠르게 분류해서 알려드리겠지만,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해서···"
"솔직히, 이 실시간 신고 종합 어플 자체만 해도 개발된 지 2년도 되지 않은 물건이거든."
"뭐야, 한국 치안 강국 아니었나···"
나유나의 의문에 검찰총장이 비웃음을 흘렸다.
"한국이 치안 강국이라는 건 일반인들의 전형적인 착각이지."
"물론, 범죄율이 낮긴 합니다만 그건 말 그대로 무수한 CCTV로 이루는 예방적인 조치···"
"경찰도, 검찰도. 돈도, 인력도 부족하다."
"조금만 사건이 장기화되면 사실상 수사는 중단되는 것이나 다름 없지요."
"그것도 그나마 대처가 가능한 범죄에서나 통용되는 말. 지금은 사실상 경찰이 손을 놓은 상황이니···"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의 특성에 비하면··· 오히려 범죄가 아직 적은 편이라고 보는 게 맞지. 길드가 엄포를 놓은 덕인지···"
한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한 분석이었기에.
"생각보다 플레이어들에 대해 잘 아는군?"
"작년인가, 전국에서 대규모로 칼부림 이슈가 있었지."
그 말에 홍세희의 눈끝이 살짝 떨렸다.
"이그드라실 아이템을 맞추기 위해 대출을 해서 생활이 힘들다는, 이해하기 힘든 진술이 많았어."
"흡."
한우현은 커터칼과 식칼을 들고 사진 찍기를 즐기는 친구에게 눈동자가 돌아가려는 것을 참았다.
"아, 그, 그러, 셨군, 요오···"
홍세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41화 질서 악 (2)
"뭐, 이야기가 좀 샜네만··· 아무튼,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뜻이네."
"물론 전달 체계 자체가 좀 원시적이지만. 그건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
"좋지, 좋아."
한우현은 밝게 웃었다.
최대한 온화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많이들 걱정하고 불편했을텐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지. 범죄자들, 확실히 잡아 주지. 걱정 말라고."
그러면서 눈을 마주쳐 주었다.
"우리는 그런 '빌런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선량한 플레이어'들이니까."
당연히, 개소리였다.
한우현이 수사권을 넘겨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빌런의 처벌이 아니라, 빌런의 복종이었다.
정말로 끔찍한 선을 넘는 수준만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이 겉으로만 처벌과 반성을 보인 채, 길드의 주요 인물로 재 배치 될 예정이었다.
"믿음직하군···"
"확실히, 자네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달라···"
하지만, 당연히 그런 계획을 티 내서는 안 된다.
회귀 전의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은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극도로 무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세계적인 수준의 선진국을 지배하는 위정자들.
주위에 강대국들이 너무나 많아 그 국민들은 잘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대한민국의 체급은, 매우 높고 영향력도 강한 편이다.
따라서 아무리 국민들이 정치인과 관료의 추태를 욕하고 비웃는다 해도.
진정 사람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시스템의 주인인 사회의 엘리트들은, 그 능력을 사리사욕에 쓸지언정.
머리가 나쁜 이도, 뻔히 보이는 마수를 눈치채지 못할 이도 아니었다.
"난 자리에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경찰청장. 검찰총장.
겉으로는 플레이어 길드의 우위를 인정하고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아주 다르다.
극도로 긴장한 채, 경계와 불안으로 가득 찬 감정이 대뇌 피질 위로 느껴진다.
똑똑한 사람들이기에, 당연히 매우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지금도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나 다름 없는.
그 조직을 무섭도록 빠르게 갖춰나가고 있는 길드라는 괴물이.
테러와 범죄를 일으키고 다니는 미치광이들마저 잡아먹는다면.
대체 그 끝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우려를.
"철저한 처벌과 예방, 추적으로. 플레이어 범죄를 막겠다."
하지만,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반인에 불과하니까.
아마 지금도 필사적으로 플레이어들을 모집하고 있겠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들.
군인, 경찰, 공무원···
그 안에서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들에게 온갖 사탕발림을 하면서 어떻게든 내부 조직을 구상하려 할 것이다.
"받기만 할 수는 없지. 그 쪽도 자문이나 협조가 필요하다면, 언제나 편히 공문을 보내도록."
"아,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드립니다."
"나한테도 하는 말인가?"
"검찰도 수사에 참여하니까."
"그렇다면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다.
국가에 협조하고자 하는 플레이어라면 그 능력이 보잘 것 없을 것이며.
능력이 뛰어난 플레이어라면, 국가의 명령에 협조할 인성과 사회성을 가지지 못했을 테니까.
오로지 세계 최강의 무력과 재력을 갖춘 길드만이.
정신병자 플레이어들을 집어 삼킬 수 있는 요람이 되리라.
"현재 생각하고 계신 수사나, 진압 방향이 있으십니까? 아마 없으실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래.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한 수사 보조 인력이 있네만..."
"물론, 있다."
"예?"
그 말에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둘 모두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당연했다.
한우현이 보기보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란 것 정도는 이미 정치인들과 고위 공무원들 사이에 널리 퍼졌을 것이다.
하지만 생전 처음 집단의 수장을 맡은 인간이, 수천, 수만 명의 초능력자 테러를 진압하는 전략을 이미 생각해 두었다고?
그런 대답을 예상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플레이어. 특정된 다수 집단 전체를 억압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범죄나 대 테러 이론과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지."
이 또한 사실이었다.
회귀 전, 미국 국토안보부 관료들이 플레이어 범죄 심리학을 정밀히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었으니까.
그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정신력이 너무나도 나약하고 폭력적인 어린 아이들.
따라서, 선제 조치.
빅 브라더에 가까운 감시와, 무엇보다 빠른 진압.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먼저 플레이어 테러 전용 신고 채널을 개설할 것이며···"
"지역구마다 이동 스킬인 [차원 관문] 스킬을 사용 가능한 마법사를 배치···"
"배치 마법사의 상위 부서로는 시 단위의 출동 본부를···"
"도 단위로는···"
"안타깝지만 도서지역과 섬 등지까지 모두 대비하기는 힘들다. 대신···"
"극도로 긴급한 사태의 경우 길드 본부에서 즉시 연속적인 [차원 관문]을 통해···"
"시, 도별 경찰과의 연계는···"
"군 부대와의 연계도 있어야겠지. 그건···"
자연스럽게, 경찰과 검찰 측에서 길드에 제안하려고 했던 조직.
아마도, 그 구조가 정부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도록 급조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 시스템.
그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훨씬 더 구체적인 시스템을 역으로 제안한다.
"아, 예···"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하셨군···요···"
한우현의 설명을 들으며.
둘 모두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첫 번째는 그 방법론과 구조가 너무나도 체계적이었기에.
당연히, 미국 국방부가 설계한 대 테러 대응 플레이어 본부를 한국에 맞게 약간만 수정한 것이었으므로 체계적일 수 밖에.
두 번째는 저것이 공갈이 아니라 정말로 실현된다면.
사실상 대한민국 전체의 교통망과 치안 체계가.
길드라는 일개 사조직에 의해 집어삼켜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뭐야, 왜 갑자기 조용해?"
"그, 너무 어려워서 그런가···아···"
"하긴 우리도 몇 번이고 들어서 겨우 대충 알아들었으니까."
그 핵심이 될 양대 간부.
홍세희와 나유나만이 이 자리에서 그 의미를 온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희가 추가로 도움을 드릴 만한 경찰이나, 검찰 보조 인력들은..."
"플레이어인가?"
"아니오, 그렇진 않습니다만..."
"그렇다면 정중히 사양하지. 당분간 길드는 플레이어 위주로 채용 계획을 진행할 생각이니까."
그 말에 둘 모두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마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인력 도움이 필요치 않다고? 자료만 있으면 된다고?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한우현이 내놓은 계획들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럴 듯 하다.
심지어 길드는 이미 면책권을 부여받았다. 인권과 형사법을 신경 쓰지 않고 체포 작전을 펼친다는 뜻이다.
"..."
"..."
"왜 그러지?"
한우현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들의 속내가 너무나도 뻔히 보였기에.
자연스럽게 경찰과 검찰을 자문으로 파견해, 조금이라도 그 방향을 통제하고 유도해 보려던 계획이 어이없게 거절당했으니.
당황스럽겠지.
"뭐, 자세한 건 이따가 서면으로 보내지. 우리도 바쁘니 말이야."
"아, 그."
"잠시만요."
그 둘 사이에 바쁘게 눈빛이 오갔다.
동시에 망설임과 당황, 그리고 충동의 감정들도.
그리고 경찰청장이.
티가 나지 않게 했다고 스스로는 생각했겠지만.
슬쩍 휴대폰의 옆 버튼을 눌렀다.
한우현은 살짝 눈끝을 치켜올렸다.
무슨 수작이지?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똑똑
"뭐야?"
"이런,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따가 다시 오게!"
정말로 자연스럽게, 경찰청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마치 늘 있는 WWE 마냥 자연스럽게 기술을 주고 받는 듯한 연기.
감정을 희미하게 읽을 줄 아는 스킬만 없었다면.
한우현도 깜빡 속아 넘어 갈 만한 수준이었다.
"아니. 들여보내지."
"예?"
하지만, 넘어가 주었다.
희미하지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 밖에서 긴장의 감정을 풍기며 나타난 이그드라실 포스의 존재가.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셋이었다.
멀끔해 보이는 인상의 양복을 입은 흑발 흑안의 남성.
경찰 제복을 입은, 어딘가 닮은 인상의 녹발 녹안의 남성과 청발 청안의 여성.
둘 모두, 비현실적인 총천연색의 머리칼과 미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플레이어를 상징하는 외양.
"후, 미안하네. 꼭 자네랑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업무 분장도 안 된 차라···"
"이 변, 자네도 마찬가지야. 검사 그만 둔 지도 꽤 됐잖아. 내가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이, 정말로 우연인 양, 그들에게 주의를 주듯이 타일렀다.
한우현은 그 말을 들으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둘 사이에 오간 눈빛을 보았을 때, 애초부터 지금 이 자리에 난입이 결정된 인사라고만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테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신고가 들어오고 있단 말입니다!"
"예, 시일이 급합니다. 저희가 경찰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하나는 맞다.
청발 청안의 여성을 볼 때는 경찰청장과 검찰총장 모두 기대, 안심의 감정을 띄웠으니까.
하지만 흑발 흑안의 남성을 볼 때에는 경찰청장은 기대를, 그에 비해 검찰총장은 경계와 의심의 감정을 나타냈다.
마지막으로 녹발 녹안의 남성에 이르러서는···
둘 모두 의심을 넘어 한심함과 짜증, 그리고 아주 아주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플레이어 손님들. 어째서 대기를 시켜 놓았던 것일까?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제 2 안.
비 플레이어들의 길드 잠입이 어려워졌을 때를 대비한 인력들.
플레이어 출신 인사들이었다.
"흐음..."
하지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셋 모두, 무조건적으로 정부에 충성하는 이들은 아니라는 것을.
하긴 당연했다.
진정 정부에 충성하며, 대 놓고 군벌을 표방하는 반 정부 집단의 내부에 잠입할 요원들을.
그것도 플레이어들 중에 가려서, 단 이틀 만에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셋 모두 플레이어들이군."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경찰청장도, 검찰총장도.
그들이 황급히 대체자로 결정하고 선택한 이들을 대상으로 연기하는 지금.
플레이어 스파이들을 믿지 못한다.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지만, 오히려 반갑군. 왜 왔는지 알 것 같으니."
"엥, 누군데?"
"...아는 사람인가요?"
겉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맞았다.
하지만 가슴에 보란 듯이 단 명찰을 보자, 기억이 떠올랐다.
"한 명은 알 것 같군. 이 변호사."
"...예."
그 말에 양복을 입은 남자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혀를 굴렸다.
"반갑습니다. 저는 전직 과학수사부 사이버 수사과 소속 검사이자···"
"법무법인 단풍.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확률조작 유저 소송 대표 변호사 이철성. 알고 있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실지 저도 들은 지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환영한다."
"부디 저··· 네? 아?"
"자세한 건 방위부장 나유나와 얘기하도록. 사법부에 들어가면 큰 도움이 되겠어."
"...? 잠깐만, 길드장. 저 사람 말이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상관 없다."
당황한 나유나와 이철성의 반응을 무시했다.
"애초에 영입을 생각하고 있던 인사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높은 법조인이니, 그쪽을 자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철성이 말꼬리를 흐리다가,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르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나?"
"아뇨,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그저, 이렇게까지 환영 받을 줄이야는 예상치 못해서요···"
그의 눈빛이 나유나와 한우현을 오갔다.
"두 분 모두, 저를 굉장히 나쁘게··· 생각 하실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거든요."
"?"
"아."
그 말에 나유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템 값 떨군다고, 굉장히 분노하신 글을 쓰시지 않으셨었습니까··· 저한테요."
"아."
그제서야 한우현도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20년, 아니 25년 전에 그가 씩씩대며 주장했던 것을.
-저 씨발 놈의 소송단들 때문에
-설거지할 뉴비는 사라지고
-내 아이템은 똥값이 돼가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신이 있다면 제발 들어주소서!
-만국의 익벤남들이여, 일어나라!
42화 질서 악 (3)
게임사가 확률을 조작한 아이템을 팔았다.
그 결과, 유저들이 손해를 봤다.
그 손해를 청구하기 위해서, 몇몇 유저들이 변호사를 선임했다.
심지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고 레벨 플레이어로, 굉장히 그 이해도가 높은 유능한 이를.
여기까지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은 전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평범한 민사 소송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거, 뭐라 변명 할 말이 없군."
"변명은요, 뭘··· 그럴 수도 있죠."
이철성도, 한우현도. 어색하게 웃었다.
그 소송의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계기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다.
-골드 시세가... 왜 이래?
-아니 씨발 내 템값이!
-(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그림)
분명 유저들을 위한 일을 했음에도, 유저들을 전혀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씨발 사료 충분한데 왜 불 붙임?
-어차피 보상 안 해 준다니까
-겜 이미지 망치지 말고 조용히 좀 하라고, 할 거면.
-더 내려갈 이미지가 있긴 함?
-에션족은 에게로
-진짜 쌀먹충 새끼들 미친 거냐 니들이 피해자라고 ㅅㅂ
-씨발 지금 골드 시세가 저 소송 뉴스 뜨고 나서 얼마나 내려갔는지 알아?
-좆철성 개 씨발련 어그로 그만 끌라고
-진짜 칼 들고 쑤셔 줘? 사료 다 뿌리고 끝났다니까! 그만 처 나대!
더 이상 내려갈 이미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망친다는 이유로.
이그드라실 확률조작 대표 소송 변호사는 온갖 인신공격과 음해, 심지어 살해 협박에까지 시달렸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이다 못해 기괴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아이템 가치가 정말이지 오래도록 유지되고 수호받는 게임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유저 대부분이 그를 절대적인 진리로 떠 받들 정도로.
그러니 그 인 게임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이 왔을 때, 플레이어들 대부분은 이성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시간, 돈, 인생, 모든 것을 바친 세상이 통째로 무너질 위기였으니까.
"지금 와서 말하기는 좀 많이 민망하지만, 이제라도 사과하지."
"아니요, 사과 하실 것까지야··· 그런 건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합니다."
회귀 전의 한우현도 당연히 그런 정신병자 플레이어들 중 하나였다.
"고, 고소 안 했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저도 인터넷 많이 합니다, [공원의노리쨩] 님."
"이씨, 멀쩡한 이름 놔두고 닉 부르지 마···!"
그리고 물론, 길드원 대부분도 그러했다. 괜히 쌀먹겜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으니.
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나유나를 보고 그는 방긋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이제 직속 상사니 예의를 지켜야죠."
"으으···"
"잘 부탁드립니다, 방위부장 나유나."
"왜 긁히는 거 같지···"
어색한 듯 악수하는 둘.
그를 확인하고서는 다음 사람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아, 예··· 저는 국가수사본부 사이버범죄수사과 소속 안설입니다."
"저는 범죄예방대응국 치안상황과 소속 안준···입니다."
뭔가 어색한 듯,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남자와.
그를 강제로 끌고 온 듯한 인상의 활발해 보이는 여자였다.
"흐음."
"에휴, 이렇게만 말하는 것보다는··· 닉네임으로 말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하시겠죠."
"자, 잠깐만."
"제 오빠의 캐릭터 네임은 [천둥신토르]에요."
"...뭐?"
"천둥신토르가, 경찰이었어?"
"...너."
홍세희가 처음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그것도 아주 강렬히.
"내 골드를 1000억은··· 빨아 먹어 놓고서는. 경찰...이었다고?"
"자, 잠깐만요! 갚았잖습니까! 다 갚았잖아요!"
"다 갚는데, 1년이나 걸렸잖아···! 강화비가 부족해서 1주일만 기다리래놓고···!"
"조용. 조용히 해라."
"...개새끼···"
슬슬 정말로 살기를 내뿜으려 하자.
홍세희를 진정시킨 한우현은 기억을 떠올렸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랭커. 정확히는, 구 세대 랭커. [천둥신토르].
그는 이그드라실 플레이어들이 쌀먹충으로 타락하기 전, 아직 순수했던 옛 시절.
그 시대를 상징하는 랭커였다.
-취업도 했고, 요즘 바빠져서 더 이상 랭커 노릇은 하기 힘들 것 같네요.
-모두들 잘 지내십시오!
아름다운 퇴장을 했었던, 10년 전의 랭킹 1위 플레이어.
-야, 천둥신토르 돌아왔대!
-...대리작? 이런 걸 왜 하는 거야?
-정말 운이 좋지 않다면 손해일 텐데···
그는 홀연히 돌아왔다.
자기가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니.
대신 강화를 해 주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며.
-뭐야, 강화를 원트에 연속으로 성공해?
-기댓값의 절반으로 20성을 달았잖아?
-이건 진짜로 대리 강화 할 만 하네!
놀랍게도, 그것이 꽤나 성공적이었다.
유저들도 만족했으며, [천둥신토르]도 만족하는 거래였다.
-야, 근데 천둥신토르 요즘 좀 아이템 주는 게 늦는 거 같지 않냐?
-어? 너도?
-난 골드가 좀 밀렸다고 좀만 기다리라던데···
하지만 그 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평균의 법칙에 따라, 초반 강화의 운은 후반 강화의 불운으로 이어졌다.
물론 수학적으로 평균의 법칙이 반드시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천둥신토르에게는 그것이 좀 더 강하게 찾아왔다.
-씨발, 대체 아이템을 몇 개나 밀린 거야?
-강화한다면서 빌린 골드가 몇 조? 한화로는···
-이 미친 새끼가 몇 천 만원어치를 떼먹었어?!
심지어, 현역 경찰관 유저의 인증이 그 사건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씨발, 저 현직 경찰인데 얘한테 떼였어요. 제가 직접 해결합니다.
-크으 역시 클린겜~
-우리 게임에는 경찰도 있다구~
-저 유인원 새끼들은 별 병신 같은 걸로 게임에 자아의탁을 하네···
다행히, 그것이 효과가 있었다.
-천둥신토르입니다. 제가 무모한 사업을 시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씨발, 진짜 내 아이템 떼이는 줄 알았네···
-햇살론 이자가 코앞인데 이거 떼이면 진짜 난 한강 각이었다
-...천둥신보다 왜 저새끼들이 더 병신같지?
현직 경찰관이라는 유저가, 그를 결국 붙잡아 모든 아이템과 골드를 토해내게 했다.
그 과정에서 진심을 보였으니 제발 형사 처벌만은 용서해 달라는 태도까지.
-뭐, 아이템에다 골드까지 다 받았으니···
-굳이 신고하기도 귀찮고.
그렇게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 둘이 남매였나?"
"저도 몰랐죠. 오빠가 꽁꽁 숨겨서···"
"그,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오빠는 그냥 말 하지 마."
놀랍게도, 그 일에 숨겨진 비밀이 있었나 보다.
하긴, 아무리 경찰관이라 해도 너무나 빠르게 범인을 찾아내고 설득시켰다.
피해액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손해 배상도 확실히 했고.
원래부터 알던 사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뭐,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큼···"
경찰청장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하기야, 도움을 주겠다는 자원 경찰관이라는 양반이.
그 게임에서 사기를 치고 다니기로 유명했던 옛 랭커다?
솔직히 한우현이 지금 장난하냐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관으로는 어느 정도 일했지?"
"처음 임용되면서 게임을 접었으니, 15년 정도··· 되었습니다."
"범죄예방대응국이라··· 좋아, 적성도 맞겠고. 레벨은, [날카로운 눈], 288··· 높군."
랭커 급은 아니었지만, 280 이상만 해도 한국에 1000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빠가 좀 미덥지 않겠지만··· 경찰과 검찰을 통틀어서 가장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고. 그 일만 제외하면 실적도 좋은 편이에요."
그 말에 한우현은 눈길을 돌렸다.
"확실히, 그렇지. 너도 안다. 블라인드에 강화 사기 당한 경찰관 썰 올렸었지."
"아니, 왜 그걸로 기억을··· 그, 맞긴 한데요."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저도 오빠보단 레벨 낮지만···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이해도도 나름 높다고 자부하고. 최근 그 쪽 사건도 정리 잘 하고 있으니."
"굳이 길게 소개할 필요 없다."
"네?"
"모두 환영하니까."
길드에 고용될 비 플레이어들의 수는 너무 많다. 그러니 애초부터 통제가 힘드므로, 지금은 철저히 검증하고 차단한다.
하지만 플레이어라면 얘기가 다르다.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설령 정부의 스파이라도 충분히 속아 넘어가 줄 가치가 있으니까.
"환영하지만, 그 이전에 다시 확인하지. 우리 길드는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플레이어 범죄의 수사 및 체포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첩보 요원은 그 행동과 마음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길드는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인 무력을 갖춘 플레이어의 단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우위와 대표성이 굳어질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우리 길드에 파견 혹은 소속된 시점에서, 그 이전 집단보다 길드에서의 활동의 비중이 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에 소속된 이들의 입지는 점차 흔들릴 것이다.
여기가 대우도, 조건도, 하는 일조차.
모든 것이 더 좋은데.
내가 왜 일반인들 따위를 위해 좆뺑이를 쳐야 하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경찰, 법무법인에서의 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이를 모두 인지하고 동의하겠나?"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길드의 활동에 젖어들수록.
한우현이 굳이 세뇌를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자연히 스스로를 일반인이 아니라 길드원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최대한 돕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왔습니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는 결코 일반인이 될 수 없으니까.
핵 폭격을 맞아도 멀쩡하고 손짓 한 번으로 지진과 해일을 일으킬 수 있는 초인들.
그 대부분이 정신병자, 사회 부적응자, 사이코패스인 이들.
"좋다. 좋은 인재를 소개해 주어서 고맙다, 총장, 청장."
"예, 별 말씀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 변은 검찰 소속도 아닌데···"
셋 모두와 다시금 악수를 나누고서는, 한우현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철성 변호사는 랭커 급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플레이어들의 성정과 행적에 관심이 많을 인물이다.
전투력이 높지 않기에 회귀 전에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회귀 전 권승환이 만들었던 서울 연합에 소속되었었다는 기사를 보았었다.
아마 검찰총장이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그보다는 개인의 의사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안준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지만, 한우현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예 플레이어로서 활동 자체를 꺼리는 감정을 표현했으니까. 실제로 회귀 전에서도 안준과 안설 모두 전혀 모르던 인물들이었다.
경찰 출신으로 게임 안에서 사기나 치고 다녔다는 것도 경찰청장이 그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고 레벨의 경찰. 그 족쇄가 결국 안준을 떠밀었을 게 분명했다.
혼자라며 거부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여동생까지 부탁했겠지.
안설.
능력은 잘 모르지만, 성정으로는 가장 까다로울 이다.
경찰청장과 검찰총장 모두가 신뢰를 보냈으니까.
아마, 실제로 적극적으로 길드 내부의 정보를 수집해 정부에 보낼 유일한 첩보원이 그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 했다.
애초에 그 힘의 격차가, 일개 경찰 한 명이 정보 좀 빼돌린다고 해서 역전될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그녀도 곧, 플레이어의 자리는 길드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자세한 것은 서면으로 보내지. 내일부터 잠실의 길드 본사로 출근하도록."
"벌써 본사가 있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너희 둘도 방위부장인 나유나 밑에서 일하게 될 거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유나님."
"저, 저도요."
"아, 응···"
세 명이나 자기 앞에 인사하자, 기분이 좋아진 듯.
우쭐거리는 나유나를 보자 뭔가 아니꼬운 마음이 올라왔다.
"인사는 다 마쳤나? 그럼 이제 가 보지."
"어? 잠깐만, 내 첫 부하 직원인데···"
"다음 약속이 곧이다. 일어나라."
"네, 네에··· 이, 일어나요···"
"잠깐만, 휴대폰 번호부터 교환을···"
"일어나라고."
"아, 보채지 마. 5분만 있음 돼. 여기..."
신난 듯 안준과 안설의 휴대폰을 뺏어 든 나유나.
두 번 말했으니, 이제 말로 하는 건 끝이었다.
-쭈욱
손에 포스를 실어, 밍기적거리는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뭐, 뭐하는 짓이야악?!"
"홍세희, 답신은 왔나?"
"예, 예에··· 평창동 본가에서 보자는데요···"
"들었지? 이만 실례하겠다."
이미 한우현의 절대적인 길드 내 위치를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전부가 나유나의 버둥거림을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시지요."
"앞으로 많은 도움 기대하겠습니다···"
-끼익
경찰청 건물을 나와서야 나유나는 겨우 그 손아귀를 뿌리쳤다.
"아악! 쪽팔리게 이게 뭐야! 나 방위부장이라며!"
"아는 거도 아직 하나도 없는 게 무슨 부장 노릇을 한다는 거지?"
"니가 다 알려줬잖아!"
"정말 그게 끝이면 개나소나 부장이겠군."
"대체 왜 나만 가지고 이래!"
"그러니까 말 좀 잘 들어라."
"씨발, 씨발···"
"뭐라고 했지?"
"..."
툴툴댄 그녀는 한우현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그,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말라고··· 안 좋은 기억 나니까···"
"[차원 관문]이나 열어라. 목적지는 종로 평창동이다."
"으그그···"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양대 재벌 가문의 일익.
미래 그룹과 접촉할 때였다.
43화 미래를 거머쥐어라 (1)
적발적안. 아니, 적보다는 핏빛에 가까운 색깔을 한.
정장 차림의 여성이 차를 홀짝였다.
"...아버지."
"그래."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람에게 중얼거렸다.
"바뀌는 시대에는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것이 사업가의 덕목이다."
"만남 자체를 거절하자는 게 아니에요. 저도 앞으로 그들이 중요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까지 직접... 이건 예의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예의라."
흰 머리가 잔뜩 난 중년. 아니, 노년에 가까워 보이는 남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정말 예의를 차리는 것이지."
"...청와대랑 비교할 수는 없죠. 애초에, 청와대는 테러를 당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최소한 우리는 협박이 아니라 협업과 투자 제안을 구한다고 하지 않느냐."
"...그게 뭐가 다를지."
그 불퉁한 말에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머저리 같은 정치인들은 그를 그저 양아치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구나."
"흥, 그 정신병자들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아는."
"회장님."
"이제 총수님이라니까. 온 게냐?"
"예."
비서실장이 극도로 긴장한 태세로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라. 응접실로. 우리도 이것만 마시고 가지."
"회··· 아니, 총수님. 다시 한 번 당부드리지만, 부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대도."
"제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아저씨."
"아가씨···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도 비서실장은 전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놈은 그냥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교차 검증된 증언에 의하면 홀로 플레이어 수십 명을, 몇 초만에 제압했다고 하니···"
"이미 아는 내용 아니냐. 그러니까 더더욱이, 중요한 사람인 거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총수님께서 같이 있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초대는 아가씨만···"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버지는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전혀 몰."
"그만. 이미 결정한 사안이다."
한 마디.
하지만, 그 권위를 실은 말에 불안해하던 여자와 비서실장 모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응접실로 가자."
비록 미래 그룹은 해체되었지만.
그를 계승한 미래 중공업 그룹의 주인.
정몽현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군주 중 하나였으니까.
* * *
웅장한 저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응접실.
화려한 외모의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와작
-와작
"정신 사납다. 그만 처먹어라."
"그, 너무 맛있어서···"
"다과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닙니다. 간식 먹으러 온 게 아니니까요."
"음음, 냠냠···"
"...그거까지만 먹어라."
"헤헤···"
한우현의 핀잔에 쿠키를 흘리면서 씹어대던 홍세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셋은 앉아서 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우현은 전날 밤, 홍세희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미래 그룹의 저택에 몰래 잠입해 사업을 제안하는 편지를 놓고 오라는 명령을.
현 미래 중공업 그룹의 총수인 정몽현의 막내딸이자, 한국 재벌가 유일의 플레이어가 그 대상이었다.
-오늘 점심 때까지 평창동 저택으로 오십시오.
놀랍게도, 무시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제안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 답이 왔다.
역시 한우현의 추측이 맞았다.
정재선은 게임이 된 세상과 플레이어들에 대해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실패했던 회귀 전과 마찬가지로.
하긴, 그 캐릭터 네임부터가···
상념에 다시 빠진 한우현을 두고, 눈치를 살피던 홍세희가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는 그··· 재벌이랑, 아무 상관 없지 않나요···"
"그러게, 우린 왜 데려온 거야?"
"길드 업무에 임원들이 오는 게 불만인가?"
"아, 아니 누가 불만이래! 그냥 권승환이랑, 그 유튜버들은 자기 일 하는데··· 왜 우린 계속 끌고 다니냐 이거지···"
사실,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의문이었다.
"교육이자, 실습이지."
"교육? 뭔 소리야?"
"너희 모두,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직업도 없이 게임만 하지 않았나?"
"..."
"그, 그건 길드장도 마찬가지···였다면서요오···"
둘 모두 똥 씹은 표정을 했다.
"권승환은 학벌이 좋은 친구는 아니지만, 직업 군인 출신이지. 심지어 훈련 교관. 그러니까 사람을 다루는 법을 최소한은 안다."
그 설명을 이어나갔다.
"유튜버들도 마찬가지지. 정신병자들을 상대하는 것만 십 년은 한 친구들. 그러니까, 사회성이 있다. 알아서 자기 일을 할 수 있다."
"....이 씨···"
"너, 너무해요···"
당연히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그 말의 진의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둘이 사회적 장애인이라는 비난이었으므로.
둘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는, 말이 부장이지. 사실 스킬 난사하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건 길드 임원의 덕목이 아니야."
한우현이 휴대폰으로 쉴새 없이 차정훈과 김재승이 보내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지금 나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너희가 일을 배우고 체험하는 시간이다."
-탁
법인 승인과 대출 자금 분배 계획의 초안을 대충 확인한 한우현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입은 닫고 눈을 크게 떠라. 귀를 열어라.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를 배워라."
"아니, 씨발··· 중졸이라며. 이거 맞아?"
"기, 길드자앙··· 일진 출신이야? 아닌데에··· 개 찐따였다던데···"
"과거에 얽매이지 마라. 우리는 그 전까지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그리고, 비록 한우현이 무섭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그 둘이 힘만 더럽게 세면서 멍청한 플레이어에 불과했다면.
애초에 전투원으로나 쓰지, 길드 간부로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 모두, 빌런 출신이었으나.
회귀 전 무수한 빌런들을 이끌고 다루며 사회 질서의 파괴에는 그 능력을 증명했으니.
뒤틀린 방향으로라도 통솔력은 있다.
그러니, 가르치면 배우긴 할 것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해··· 길드장이 그 게시판에 박제된 앰생 인간이라고?"
"그건··· 동감···"
"오는군. 모두, 일어나라."
수군대는 둘에게 말한 한우현은 다가오는 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허··· 듣긴 했지만, 정말 잘 생겼군."
"칭찬 고맙군."
"...이 봐, 말투가 왜 그 모양."
"됐다. 원래 그런가 보지."
발끈하는 그 옆의 여자를 막아 세우고서는 늙은 남성이 손을 내밀었다.
"정재선의 아버지, 정몽현일세. 소소하게 사업체 하나를 굴리고 있지."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군. 길드장 한우현이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재벌가 수장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이였기에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고시원을 보며 놀라는 천룡인의 표정이란 짤로 유명했으므로.
그 생각을 넘기고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반갑다. 많이 실례였는데, 이렇게 시간을 내 주다니."
"하, 실례인 것 정도는 안다니 다행이야. 미래증권 투자전략부 3팀장 정재선이다."
한우현은 둘 모두와 인사를 마치고선, 바로 본론을 꺼내 들기로 했다.
"주위 사람들을 물려 줄 수 있나?"
"...이 새끼가 지금 보자보자하니까."
"아가씨, 잠깐만."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비서실장의 안색이 하얗게 물들었다.
하지만 정재선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끝 마디마다 핏물이 배어나오며 날카롭게 돋아났다.
[혈법사]의 기본 전투 스킬. [핏빛 칼날]의 시작 태세였다.
"너. 미래가 우습게 보여? 그 전에, 너보다 40살은 많은 어른한테 반말이나 찍찍 싸고."
"아가씨, 그만하십시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잠시 진정을."
"무례해 보였다면 사과하지. 내가 말투가 좀 딱딱한 편이라서."
한우현은 관대한 말투로 사과했다.
어차피 미래 그룹과의 협업은 반 쯤 확정이었으니, 한 번쯤 굽혀주는 것 정도야 문제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죄다 정신병자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안하무인일 줄은."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도 참을 수는 없었다.
"풋."
"...?"
정확히는,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하하하! 우리가 죄다 정신병자라고? 크흡, 크하하하!"
"뭐, 뭐야? 왜 웃는 거야?"
"재미있군. 미래 그룹의 재벌 3세, 정재선이 이 정도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 줄이야."
"...?"
그 말이 놀리거나 비웃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타내는 감정이 느껴져.
정재선은 혼란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 뿐만 아니라 정몽현, 나유나, 홍세희부터 주위의 경호원과 비서실장들까지.
도대체 뭐가 웃기다는 건지 의문의 표정을 띄웠다.
"우리 사업 얘기 전에, 플레이어로서 얘기를 먼저 시작해보지."
"무슨 소리···"
"[녜힁]이라고 불러줄까?"
"...아그그극?"
순간 그녀의 혀가 꼬였다.
동시에, 나유나와 홍세희의 눈이 커졌다.
"...녜힁?"
"...녜힁이 왜 여기서 나와?"
잠깐의 시간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두, 나가세요."
"네? 아가씨? 무슨···"
"나가라고.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정재선이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뇌까렸다.
-우르르
비싼 돈을 받는 경호원들 답게, 고용주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
순식간에 응접실은 텅 비었다.
"..."
"흠, 아무래도 그리 좋아하는 이름이 아닌가 보군? 의외야."
"..."
"네이밍 옥션에서 1억이나 주고 산 이름이 아닌가?"
"분명 [정체불명의 이름표]를 썼는데."
정재선이 의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눈]을 쓴다고 해도 캐릭터 상태창 못 보게 해 놓았는데. 어떻게 안 거지?"
"아이템은 만능이 아니다. 스킬을 조금만 응용한다면, 원 정보 따위야 쉽게 볼 수 있지."
"...스킬을 응용한다고?"
"궁금한가?"
"아니, 안 궁금해··· 그게 아니라···"
"잠깐만. 내가 궁금하군."
"물어보도록."
정몽현이 입을 열었다.
"재선이가 플레이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게임에서 유명한가? 그랬을 것 같지 않은데··· 애초에 바빠서 게임을 할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유, 유명하죠... 엄처엉···"
대답을 한 것은 홍세희였다.
"미친 비틱질 플레이어로···"
그 말이 맞았다.
[녜힁]은 부자 플레이어였다.
구체적으로는, 시간을 소비하는 사냥이요 아이템 세팅은 죄다 부주 대리로 돌릴 정도로.
그리고선 본인은 게시판에서 죽치고 앉아 다른 놈들에게 자기 학벌과 재산의 자랑만 하고 다니는 네임드였다.
하지만, 그냥 자랑질이나 해 대는 플레이어였다면 그리 유명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방식이 심히 읍습하고 찌질해, 이그드라실 유저들 사이에서도 유명세를 얻었다.
-저 너무 힘들어요 ㅠㅠ 백수로 산 지 10년···
-아 씨발 녜힁 저 새끼 또 익춘문예질하네
-저 녜힁 아닌데요 그게 누구에요? 중학교 못 다녀서 국어 잘 못해요 ㅠㅠ
-...어, 말하는 꼬라지 보니 앰생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응 녜힁 맞아~ 니들 같은 좆병신 앰생 거지들하고 수준이 다르지~
-아오 씨발 또 속았네
-미개하기 짝이 없는 국민들한테 내가 교육을 해 주지···
정작 게임은 그다지 하지도 않으며 대리로 레벨을 올린 랭커.
얼마나 비싼 VPN으로 부계정을 만들어 돌리는지.
차단을 하고 또 해도 매번 새로운 컨셉의 불쌍하고 역겨운 쓰레기 인생을 연기하다가.
자기 정체가 밝혀지면, 그보다 열등한 유저들이 욕을 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그야말로 비틱질과 기만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재벌 3세씩이나 되어서는 인터넷에서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에 도파민을 느끼다니···"
"...두 글자라고는 해도 저딴 닉네임에 1억을 태운 것만 봐도 진짜 부자긴 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니, 왜 재벌 3세가 그딴 짓을··· 하고 다녀요···"
그 모든 행적을 듣고 나서야.
정몽현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니, 재선아··· SNS 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네 실언 때문에 정계를 은퇴했는데···"
"...죄송합니다.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해서... 하지만 이런 일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들키지 않게."
"비서실장도 완전히 SNS는 끊었다고 보고해서 믿었는데, 그걸 게임으로..."
정재선의 반응을 지켜보던 한우현은, 기세를 몰아치기로 했다.
한우현이 아무리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결국 그 본질은 사업과 경영에 있어서는 일자무식.
제대로 협상 절차에 돌입한다면 그가 대기업 회장과 재벌가 후계자들과 동등한 협상을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압도적인 물건을 내놓아, 충격을 준다.
"얘기가 좀 다른 데로 샜군. 사업 아이템부터 보여드려야 했는데 말이야."
"그래, 그게 뭐지?"
한우현이 화제를 전환하려 하자, 정재선이 황급히 그를 물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목 아래가 붉어진 것을 보니 어지간히 부끄러웠나 보다.
혈류가 얼굴에 쏠려 빨개지려는 것을 혈법사의 [기초 혈류 제어]로 막은 모양.
"하아··· 완전히 말렸구나, 재선아. 지금 그게 협상의 자세가 맞냐?"
"...전 후계자 교육도 안 받았잖아요!"
"기본 경영 교육은 받았잖니···"
"아무튼, 긍정적으로 검토할테니 괜히 재지 말고 빨리 말해."
"뭔지도 듣지 않고 긍정적이라는 말은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바쁜 사람들이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어설픈 이상한 거 들고 와서 약 팔아 봤자 안 먹힌다고."
정몽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를 개의치 않고, 한우현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두 분 모두, LK-99라고 들어는 봤나?"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정몽현도, 정재선도 아닌.
나유나였다.
"아, 초전도치. 한때 떠들썩 했지. 그러고 보니 요즘 어떻게 됐나 모르겠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딴 거, 이제 필요 없으니까."
"...지금, 당신."
정재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온 초전도체라도 가지고 있다는 거야? 그게 뭔지나 알고 말 하는 거야?"
"[오리칼쿰 주괴] 1개."
그 말과 함께, 무지갯빛 금속 덩어리가 한우현의 손 위로 떨어졌다.
"[전자석 유도 키트] 1개."
그리고, 인 게임에서 로봇 잡몹을 잡으면 나오는 아이템도 꺼냈다.
"아쉽게도, 난 딱히 공부를 잘 했던 사람이 아니라서 이 가치를 잘 모르지만···"
-위잉
장치가 작동되자, 오리칼쿰 덩어리가 떠올랐다.
홀린 듯이 공중에 뜬 그 금속을 바라보던 둘과 눈을 마주쳤다.
"미래 중공업이라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조작은 아니겠지. 초전도체의 검증은, 연구소에서 1시간도 걸리지 않아 가능하니."
"진짜 협업이란 말이야? 삥을 뜯으러 온 게 아니라고···"
둘 모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 최고의 공학자, 과학자들을 그 산하에 거느린 사업가이기에.
아주 빠르게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있었다.
"이거, 이런 질문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네만···"
완전히 달라진 눈빛을 한 정몽현이 한우현과 눈을 마주쳤다.
약속을 잡고 나온 막내 딸의 보호자가 아닌.
수십 조 자산 가치의 대기업을 지배하고 다루는 재벌가 수장의 눈빛으로.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뭘 원하나? 라고 묻지만··· 이건 다르게 물어야겠네."
"바라는 대로."
"우리가, 자네에게 뭘 해 줄 수 있겠나?"
한우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모든 것."
44화 미래를 거머쥐어라 (2)
-끼이익
한우현과 나유나, 홍세희가 저 멀리 걸어나가는 모습.
그를 지켜보던 정몽현과 정재선은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눈을 책상 위로 돌렸다.
"이거, 참··· 정말이지, 천운이군. 천운이야···"
정몽현이 중얼거렸다.
한우현이 샘플로 놓고 간, 오리칼쿰 주괴가 둥둥 뜬 것을 바라보며.
"연구소 감정 결과는 분명 믿을 만 하겠지?"
"예, 총수님. 애초에 그리 복잡하거나 엄밀한 검증이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상온 초전도체···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니."
"...마음에는 안 드는 놈이지만, 확실히 제안 자체는 합리적이에요. 아니, 우리가 이득이에요."
"그렇지.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다."
"심지어 저게 끝이 아니고, 다른 특수 금속들은 더 활용도가 높을 것이라니..."
"내 말이 맞았구나. 그렇지 않느냐?"
"...네."
정몽현이 정재선을 바라보았다.
"재선아. 내가 널 많이 아낀다는 걸, 알고 있겠지."
"...알아요."
"비록 네가 사고도 치고, 철 없는 면도 있지만···"
"죄송합니다···"
"늦게 얻은 만큼, 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딸이다."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그가 비서실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래서 항상 마음에 걸렸단다. 비록 너 자신부터도 그다지 흥미가 없긴 했지만··· 너에게 중요한 자리가 없다는 게."
"전 그냥, 작은 계열사 사장 정도면 돼요. 이미 오빠랑 언니들이 다 자리가 있는데."
"그게 진심인 것도 알고 있지만··· 아비 마음이 그렇지가 못하구나."
-촤악
거대한 종이가 펼쳐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어쩌면,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계열사가 될지도 모르는 조직이··· 지금 생겼으니까 말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조직의 구조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그드라실 연구부
-연구부장 : 정재선
-제 1 부서 : 아이템 분석부
-제 2 부서 : 재료 공학부
-제 3 부서 : 포스 연구부
-제 4 부서 : ···
그녀가 전날 밤, 변하자마자 빠르게 구상하고 생각해 두었던 조직의 구조도.
그것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서 정몽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버지. 이걸, 어떻게?"
"나름 열심히 만들었더구나. 역시 너도, 경영 재능이 아주 없진 않아."
"아니, 비서실장··· 이건 하루만에 대충 생각만 해 둔 거라고. 이걸 왜 보여 드린거야."
"크흠. 총수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아가씨."
"아직은, 너무 허접한데···"
"중요한건 구조도가 아니다.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이지."
정몽현이 자랑스럽다는 듯 그 구조도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주 많이 바꾸지는 않았다. 그냥 좀 더 우리 그룹의 실정에 맞게 다듬었을 뿐이지."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이 틀렸구나. 이럴 때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수님."
"재선아. 우리는 플레이어 산업에 있어, 우선 투자 유치권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 길드는 사실상 플레이어들의 유일한 집단이니, 모든 우선권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딱
총수의 신호에 비서실장이 허리를 숙였다.
"예, 총수님."
"미래케미컬, 미래로보틱스, 미래일렉트릭, 미래사회복지재단, 미래정책연구원에게 전해라."
"인력 차출 말이십니까?"
"그 이상. 모든 투자와 연구의 우선 순위를 이그드라실 연구부로 돌려라."
"...모든, 말입니까? 실례지만 총수님, 그리 한다면 임원들의 반발부터 정계에서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책임은 내가 진다."
"아, 아버지."
"이건 도박이 아니다. 무조건 성공하는 선물 상자지."
당황하는 정재선과 비서실장의 반응을 무시한 정몽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초전도체 뿐만이 아니다. 모든 부상을 회복한다는 엘릭서, 플레이어의 신체를 연구해서 나올 의학적인 성과, 초능력의 근원이라는 포스의 원리까지···"
"소재가 매력적이라고 해서, 꼭 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맞다. 하지만, 하나를 더 고려해야지."
그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 길드장, 그 자체의 힘 말이다."
대한민국의 재계를 제패한 끝에, 새로운 길까지 걸어보고자 했던.
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다시금 재벌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노인.
전직 2선 국회의원 정몽현이 중얼거렸다.
"단순히, 무력 단체의 주인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고, 실제로 그 힘도 있지···"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너무나 치밀하고 계획적이구나. 길드 그 자체가, 마치 20년은 준비한 듯한 집단이야. 아니면 미래를 내다보는 재능이 있거나···"
사람은 보는 눈 하나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설령 그 사업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 길드는 충분히 유착할 가치가 있다."
"그건··· 맞는 말이지요."
"청와대 놈들도 어지간히 무능해졌나 보군. 저런 자를 그냥 양아치 테러리스트라고 결론내리다니 말이야."
당연히, 정계를 은퇴했다고는 해도.
전직 국회의원이자 현직 재벌가 수장의 인맥이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자리에 오기 전에도, 그는 청와대의 사정과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가치가 있어. 정치인들과, 오성 쪽. 그리고 바다 건너 놈들 일은 내가 직접 관리 해 주마."
"...아버지."
"너는 연구부 자체의 일에 집중해라."
그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엄정한 기대의 눈빛으로 딸에게 말했다.
"이그드라실 연구부장 정재선. 그룹 내 모든 부서에 대한 차출권을 주겠다. 모든 플레이어 사원을 차출해서, 연구부원이자 길드원으로 임명해라."
"따르겠습니다."
"우리 가훈이 뭐지?"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머쥐는 것이다."
"가라. 할 일이 많겠구나."
"비서실장, 정리 부탁드립니다."
"예, 아가씨."
대한민국 재계 서열 2위. 그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늦은 저녁.
"이 미친 새끼들이! 감히!"
청와대에서 고성이 울려퍼졌다.
물론, 방음이 잘 되는 공간인만큼 밖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나 크게.
"다시 말해!"
"...미래 그룹이."
"더 크게! 그 보고가 사실이라고?"
"예. 길드 사옥으로 미래 중공업 그룹의 총수 직속 비서팀이 오가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길드장이 평창동으로 간 게, 오늘 점심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빨리?"
"...아무래도 총수가, 제대로 붙기로 결정한 모양입니다."
-쨍그랑
중년의 남성이 불 같이 화를 내며 컵을 내던졌다.
"이런 제기랄! 국무총리!"
"...예, 각하."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안에서.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사실, 말이 안 되지는 않습니다. 일단 무력부터가 압도적인 이들이니까요···"
"빌어먹을, 빌어먹을! 미래 이 버러지같은 놈들이! 내가 편의를 얼마나 많이 봐 줬는데! 미리 경고까지 했거늘!"
한참을 씩씩대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후. 돈만 좇는 돼지 새끼들한테 무슨 기대를."
"맞습니다. 애초에 재벌이라고 해도, 이런 국가 비상 상황에서는 정부의 방향성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건 아니지. 미래와 오성, 둘 중 하나만 반항해도 경제 지수와 여론이 흔들리는데··· 아부는 말이 되는 소리로 해라."
"예, 예··· 죄송합니다.
그를 진정시키려 했던 국무총리의 말을 일축했다.
"...그리고 격노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 계속 보고해라."
"예,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이 말하길 수사 조직의 통제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플레이어만 내부로 받는다고···"
"플레이어도 준비 해 놓은 친구들이 있다며?"
"그게, 완전히 믿을 수 없답니다. 언제든 길드 편으로 갈아탈 수 있을 사람들이라고···"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제대로 일 하는 놈이 없군."
대통령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지금, 그 미치광이, 사탄의 혈육들··· 길드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거지?"
"예, 구체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그 육두문자를 들으며 정장을 입은 요원이 화면을 켰다.
-삑
대통령의 눈앞에 슬라이드가 띄워졌다.
"첫 날. 세계 모든 플레이어의 연합··· 길드명 루시드. 이하로는 길드라고만 칭하겠습니다."
한우현의 플레이어로 변하기 전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이 슬라이드에 나타났다.
"새벽 시간대 중국에서 그가 목격되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만, 아직 그 사안은 조사 중입니다."
"외국 상황은 나중에. 지금은 국내 상황에 집중하지."
대통령의 말에 부응하듯, 슬라이드가 빠르게 넘어갔다.
"첫 날. 한국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 둘과 그 팬 집단··· 충돌이 일어날 뻔 했으나, 그가 직접 그 충돌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그게 첫 공식 활동이란 건가?"
"예.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두를 길드원으로 가입시키고, 방송국으로 쳐들어갔다더군요."
"그 방송은 나도 봤지. 그 다음에 바로 청와대로 왔고."
대통령이 중얼거렸다. 끊임없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계속 발표해라."
"이튿날도, 그 행보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빨랐습니다. 길드 법인을 허가받았으며 은행에 대규모로 사업자 대출을 받았습니다."
"뭐? 대출을 왜 해 줘? 있던 돈도 묶어도 시원찮을 판에? 기재부 장관, 제대로 명령 내린 거 맞나?"
"한국은행 측에서는 차후 길드의 자금을 통제하는 데에 그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보고했습니다."
"하··· 좋아,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그 테러리스트 놈들과 회의를 하고, 가족 식사를 했다고?"
"예."
"...역시, 의심스러워."
"자작극, 말씀이십니까."
"그래."
국무총리의 질문에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부와 국회가 위기에 빠졌다.
그 때, 혜성처럼 나타난 초인이 그들을 구원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요구했다.
그 순간에는 공포와 당황에 빠져 서명해버리고 말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차라리 그 자리에서 다시 고문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미친 조약에 서명을 해서는 안 되었다.
당시의 상황 자체가 설계된 듯한 함정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그 당시의 테러리스트들도 듣자 하니 지금은 모두 그 길드라는 집단의 아래로 들어갔다고 한다.
들어간 게 아니라, 애초부터 그 일원이었던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당 대표도, 야당 대표도 그건 인정한 사안입니다."
"하··· 그것도 그렇지. 계속 말하게."
"예. 오늘입니다. 경찰청에 방문해 공식적으로 수사권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부터 본격적으로 체포 작전에 들어간다는군요."
"상황은?"
"길드 내부에서 훈련을 하면서, 실제로 사고를 치는 플레이어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난동을 부리다가 잡혀간 플레이어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아직 대부분은 길드의 손아귀 밖에 있지만..."
"사흘. 겨우 사흘 만에···"
대통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지어 오늘 오후에는 미래와 협약까지, 그냥 협약이 아니라 제대로 붙어먹은 것 같다고."
"예, 그렇습니다···"
보고를 모두 마친 남자.
국정원장이 눈치를 보며 앉았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이미 놈들에게 국가 질서의 절반이 유린당했어."
사실, 그 이상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순히 그 힘만이 무지막지하게 강한 단체였을 뿐인 길드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재벌들과 손을 잡고.
그 힘으로 군대, 경찰, 검찰이라는 국가의 사법과 안보 주권을 대 놓고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길드 내부를 흔들고, 대항 단체를 만들어야 해. 정보도 빼내고."
"물론입니다."
"국정원에서 준비를 했다던데, 어디 한 번 보지."
대통령이 국정원장을 보며 명령했다.
"일어나게, 허무성 요원."
-드르륵
그 말에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머리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카락이 아주 짧게 깎여 있는 남자였다.
"이미 모두 숙지하고, 이 자리에서도 들었으니 잘 알겠지만. 지금은 국가 비상 상황이다."
대통령이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엄령이라도 내리고 싶지만, 그러면 내 모가지가 날아갈 상황이야. 그 놈들은 너무 강하니까."
그 목소리에는 공포와 불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국가정보원 대민심리전단부 1팀장 허무성."
"예, 각하."
"자네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네. 그 때문에 일개 팀원이었던 자네가 파격적으로 팀장으로 승진된 것이지."
긴장한 그의 반응을 살피며 국정원장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길드 내부에 뒤따라 들어갈 공무원, 군인 출신 플레이어들의 기밀 관리자가 되어야 하네. 할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다 해야지. 다 해 줘야 해. 국가를 위해서···"
이내 침묵이 흘렀다.
그 안에서, 아주 작은 기계음이.
그 누구도 듣지 못하는 기계음이 흘렀다.
-삑. 삑. 삑
대통령도,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허무성 요원을 제외한 아무도.
하나의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눈 모든 대화가.
미국 중앙 정보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45화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1)
"하, 내가 주재하는 첫 국무회의 주제가 이딴 것이라니···"
늙은 백인 남성이 온 몸에 땀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괜찮을 리가 있나··· 아, 고맙네."
그의 곁에서 비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손수건을 건넸다. 차가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리처드 디샌티스는 아직도 불과 일주일 전, 자기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는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아니, 그냥 현 상황의 모든 것이 믿기 힘들었다.
한 평생 기독교적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신봉해 온 정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수습은 되어 가고 있다니, 다행이지···"
정확히 6일 전.
전 세계에 미치광이 초능력자들 수십만 명이 나타났다.
미국에도, 당연히 수만 명이.
그리고 나타난 것에 그치지 않고, 난동과 테러를 벌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첫 번째 대상이 대통령이었으므로, 당연히 미국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당장 모든 초능력자, 그러니까 플레이어의 정보를 모아!
-미국에, 전 세계 최고 레벨이 있다고?
-정중하게 모시게!
그가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하고 알맞은 지시를 내린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의 판단 능력보다는 세계 최강대국의 자본과 인재가 구축한 정교한 시스템 덕택이었다.
초능력자, 외계인, 자연 재해 등 상상 가능한 모든 가능성에조차도 해석을 하고 대비를 하는 미국의 저력.
다른 나라라면 그딴 무의미한 것에 뭐하러 예산을 쓰냐고 성을 냈을 만한 것들.
미국은 아니었다. 미합중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돈도, 시간도, 인재도 넘쳐나다 못해 낭비되는 곳이다.
그래서 미국의 재무부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소소한, 일반적인 위정자들의 입장에서는 꽤나 큰 규모의 예산을 미확인 현상 연구부에 배정하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만약 서브컬쳐나 인터넷 괴담, 크리피 파스타 같은 싸구려 공포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아주 잘 알고 좋아할 만한 가상의 단체가 있다.
SCP 재단 Secure, Contain, Protect Foundation.
이는 미국의 한 인터넷 동호회에서 시작된 설정 놀음이다.
설정 상 그들은 국가와 인종, 지역을 초월한 과학적 단체다.
지구와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괴담, 마법, 신비, 이능력, 괴물들을 공권력과 질서를 이용해 분석하고 격리한다.
그 이유는 과학과 이성, 논리로 유지되는 현실을 유지하고 비과학적 현상이 대중에 퍼졌을 때 일어날 혼란을 막기 위해.
그러한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정부 부서가 미국에도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그 이름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All-domain Anomaly Resolution Office였다.
미 국방부 산하에 기밀리에 조직된 비 과학적 현상 조사부.
말 그대로 비밀, 괴담, 대격변, 이능력, 귀신, 외계인과 같은 비과학적 현상에 대해 조사하고 대비하는 곳.
이상현상의 규모가 작을 경우 자체적으로 조사, 해결한다.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부서 자체만으로 대응이 힘들 경우, 예측하고 분석한 시나리오를 국방부와 국토안보부에 제출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정체불명의 초능력자들이 대규모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시나리오도.
-이런 미친 일이 현실에 나타나다니.
-거기 대응하는 시나리오가 있단 게 더 어처구니가 없군.
-보고서를 올리게. 더 자세히 보완해서.
놀랍게도, 완벽한 대응 계획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기초적인 대응 방언 정도는 짜여져 있었다.
-예? 저희가 총 지휘를 하라고요?
-국가 비상 사태입니다. 아니, 세계 멸망 위기지요. 최대한 서둘러 주십시오.
-그,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런 일 하라고 있는 부서 아닙니까?
물론 거창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들이 정말로 비과학적 현상을 규명한 사례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는 대충 정보를 조사한 것만으로 주민의 착각이거나, 오인 신고로 결론 내리는 것이 끝이었으므로.
-다시 반복합니다.
-미국이, 아니 전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 현상을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최소가 세계 대공황, 최악의 경우 세계 강대국들이 모조리 무너질 수도 있어요!
-조사국에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할테니! 규명하고, 조사하십시오!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설립 이후 최초로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진짜 우리가 총 지휘자라고?
-젠장, 일단 현실 붕괴 시나리오들 모아!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들이 만들고 예상한 시나리오들을 가능성 있게 정리하여 보고서로 제출하였다.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첫 날.
그 때는 부통령도 믿지 못했다. 이딴 게임 시나리오 같은 걸 진지하게 들고 온 것이냐고 화를 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만든 위대한 시스템.
프리즘 프로젝트를 활성화시켜 FBI와 CIA가 초법적으로 수집한 무수한 증거를 보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테러들의 영상까지 보고 나서야.
-...모두 진짜군. 진짜야... 제길.
상황을 온연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대체 어째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는 것입니까···"
원래 리처드는 그다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 정치인의 특성 상 어느 정도 기독교 보수의 입맛을 맞춰주어야 했기에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지 정치일 뿐.
그러나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자연스레 신앙심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기도해 봤자 뭐가 바뀐다고."
리처드는 더 이상 생각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의 책임이 너무나도 무겁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가만히 놀아도 되는 자리가 아니다.
미국, 나아가 전 세계 질서의 유지가.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아크비숍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라일라 그레인저. 캐릭터 네임 네로.
미 정부 측에서 임시로 붙인 코드 네임은 아크비숍Archbishop. 대주교라는 뜻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반갑네, 라일리 그레인저 양."
"저 빼고, 다들 도착하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늦었군요."
"괜찮네."
정말로 괜찮았다.
그녀는 지금,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어쩌면 부통령보다도 더.
전미 플레이어 연합.
원래는 오늘 전미가 아니라 세계 플레이어 연합이란 이름으로, 정식 출범할 조직이었지만.
길드의 타 조직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황급히 국방부 산하의 기밀 조직으로 운영 방향성을 바꾼.
급조된 플레이어 조직의 수장이었으니.
"그럼, 시작하지."
-파앗
부통령부터 시작해, 살아남은 미국 행정부의 각 부서별 장관들이 널찍한 슬라이드에 정신을 집중했다.
비상 국무회의Emergency Cabinet meeting의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새롭게 나타난 초인들. 플레이어라고 칭하겠습니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브리핑하겠습니다."
플레이어는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러나 다행히 게임의 개발 국가인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 및 공식 홈페이지의 토론장 글들에 수많은 정보가 여과 없이 쏟아졌다.
지나친 고어 스너프 필름에 가까운 사진과 글들이 올라와 공식 홈페이지를 제외한 커뮤니티는 한국 정부 측에서 급히 폐쇄했다.
공식 홈페이지가 폐쇄되지 못 한 이유는 간단했다.
게임 개발사의 건물과 서버 측도 디렉터와 게임사를 증오하는 플레이어들에 의해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게임 디렉터를 포함한 직원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서버 관리자도, 서버도 파괴되었다.
따라서 공식 홈페이지의 관리 권한 또한 붕 뜬 상태였다.
이 또한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에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을 보내 조사해야 할 사안이었다.
물론 그것이 협조 요청을 받지 않은 지금은 조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국정원을 비롯한 한국 내에 심겨진 미국 첩보원들이 밤을 새 가며 일하고 있었다.
그걸로 부족해, 중앙 정보국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다수도 한국에 파견되어 한국의 현장 곳곳을 조사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그것은 오프라인 뿐만이 아니라, 당연히 온라인에서도 이루어졌다.
아니, 오히려 온라인에서 더욱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온라인 게임이였으므로, 어떻게 보면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의 정보가 더 중요하고 거대했다.
그래서 미 중앙 정보국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 관련된 모든 인터넷 웹사이트의 정보를 통째로 크롤링하고 아카이빙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치밀하고도 세세하게 분석하였다.
"미국에는 플레이어가 그리 많지 않아, 타 국가에서의 정보들이 많은 참조가 되었습니다. 가장 많은 정보와 플레이어의 행동 양상, 능력 자료가 나온 곳은 한국입니다."
다른 모든 국가의 초능력자 전력과 수를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는 국가.
하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그 피해와 혼란이 적었던 국가.
물론, 그것이 피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경우 정말로 국가 붕괴만 면했다 뿐이지.
사실상 치안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 가까웠으니까.
한국은 어찌어찌 테러들을 진압하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타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잡아내고 신고를 통해 다른 플레이어들이 출동을 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그 사건과 수 자체가 너무나도 많았다.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지닌 수천, 수만 명의 빌런들.
심지어 그냥 빌런이 아니라, 어지간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등장했다면 뭐 이딴 미친 먼 치킨을 설정했냐고 욕을 들을 만한 슈퍼 빌런.
"한국은 현재 플레이어의 단체. 길드Guild가 국가 질서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반쯤 집어삼켰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길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가 유지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격변의 첫 날 나타난 플레이어들의 지배자.
한우현 때문이었다.
"코드네임 독재자Dictator입니다."
사실, 아무리 전 세계적인 테러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미국의 저력이라면 절대로 진압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기밀리에 전 세계의 고 레벨 플레이어들을 선점하고, 설득하고, 영입하며.
전 세계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인 라일리 그레인저의 이름으로 끌어모은다면.
어떻게든, 질서의 붕괴만은 막는 것이 가능했었으니까.
정말로 미국 정부가 심각하게 여기는 문제는, 갑작스레 등장한 그들의 연합이었다.
너무나 무시무시한 무력 단체.
"현 시각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 말과 함께 페이지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해당 인물의 변이 전 모습과, 현 모습입니다."
"플레이어들의 변이가 상당히 극적이라고는 하지만··· 저 자는 그게 좀 심하군."
왼쪽에는 비대한 몸집에 썩어빠진 눈빛의 동양인 남성이.
오른쪽에는 음울한 눈빛으로 세상을 경멸하는 듯한 눈빛의 너무나도 잘생긴 백인 남성이 있었다.
"중앙 정보국이 정리한 인물 정보입니다. 캐릭터 네임 아서. 본명은 한우현. 먼저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입니다."
발표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중학생 이후 오랜 학교폭력에 시달린 끝에 고등학교 자퇴. 이후 검정고시를 쳐 대학에 들어갔지만, 수업과 학교 모두에 적응하지 못하고 제적."
"...다른 플레이어들과 비슷하군. 아니, 오히려 더 심해."
자리에 앉아 있던 중앙 정보국장이 침음을 흘렸다.
플레이어들의 인적사항을 밤새 정리하고 분석해, 통계 완성본을 내놓은 이였다.
"15년 동안 중증의 주요 우울 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와 불안 장애Anxiety Disorder를 앓은 끝에, 다수의 성격장애를 추가로 얻었음. 10년 전에 대인 기피증, 7년 전에 회피성 성격장애, 5년 전에 반사회성 성격 장애 진단. 종합적으로 고도의 사회 부적응증, 소통 장애, 피해 망상, 비자살성 자해 증상 가지고 있음..."
발표자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발표 내용은 모두 한국 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탈취해, 오류 없이 주치의와 주변인 진술까지 검증되었습니다."
"초능력자들의 총대장이 15년간 우울증을 앓은 끝에 미쳐버린 정신병자라. 어처구니가 없군."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 행보입니다."
"그래, 계속해보게."
-삑
중국 베이징 시 인근을 촬영한 사진들.
그리고 남중국해를 달리는 한우현의 모습.
중국 전역의 대도시에서 플레이어의 시대를 선포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올라왔다.
"그는 변이 첫 날, 곧바로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또한, 그 직전에 북한에서 테러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 북한 평양 테러 또한 그가 중국으로 가기 전 설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첫 날. 아니지, 첫 날이 아니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지···"
다시 한 번 사진들이 무수히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중국의 랭커 급 플레이어 전원을 만난 뒤에는, 곧바로 동남아시아로 향했습니다."
"이건, 너무나도 파격적인 행보군. 마치···"
"...미리부터 계획한 것만 같은 행동입니다."
모두가 그 생각을 떠올렸다.
"생각하신 대로가 맞습니다. 그는 동남아시아 랭커들은 만나고서는 중국과 마찬가지의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 다음, 한국으로 오기까지 불과 12시간···"
부통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두 지역의 초능력자들 전체를 규합하는 조직을 세우는 데에, 6시간씩밖에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의 정신병자가?"
"플레이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말고도 다른 해외의 길드 수뇌부가 있어, 신중한 회의 끝에 플레이어들이 뭉치기로 했다고 하지만···"
중앙 정보국장이 차가운 어조로 단언했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라고?"
"그가 변하기 전 접속했던 최근 1년 내 모든 종류의 인터넷 기록과 메신저 기록을 분석했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코드 네임 독재자. 그가 모든 걸 설계했다는 것인데···"
대통령이 도무지 믿기 힘들단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여기부턴 전문가가 설명하겠습니다. 조사국장, 일어나게."
-드르륵
국방부 장관의 말에 의자를 끌며 한 꾀죄죄한 인상의 흑인 여성이 일어났다.
그녀는 어딘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구부정한 자세로, 기가 죽은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 마디로, 누가 봐도 나 오타쿠요 외치는 듯한 분위기. 평소라면 국무회의에서 모두가 속으로 무시했을 만한 인상.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상현상 조사국 같은 것은 실권이 있는 자리였을 리가 당연히 없었으며, 간혹 나오는 음모론에 심취한 오타쿠 공무원들이 임용을 자처했을 때 확충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영역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엄청난 조사 권한과 관장 영역에 비해서는, 실속이 있는 부서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재 비상 국무 회의에 있는 모든 장관과 차관, 각료들은 멜린다 국장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부통령조차도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이라는 부서 자체를 이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직속 상위 부서인 국방부 장관만이 존재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도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미국의 수뇌부 모두가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더한 긴장 속에서, 국장 멜린다 루이즈 프랭클린은 화면에 보고서를 띄웠다.
조사국의 팀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정말로 뛰어난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다들 예외 없이 게임, 영화, 소설 시나리오 메이킹과 TRPG의 광적인 매니아들이었으니까.
오타쿠 동료 공무원들이 8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정리한 보고서가 미국의 수뇌부들 앞에서 열렸다.
"현재의 현상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현실 붕괴 시나리오 중 R-14-O에 해당합니다."
"R-14-O? 허···"
웅성대는 장차관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특정 창작물이 현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며 결과적으로는 부분적인 침식을 이루는 시나리오입니다."
46화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2)
"R-14-O라. 다른 시나리오도 좀 궁금해지기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겠지. 더 자세히 말해보게."
부통령 리처드가 진중하게 국장을 재촉했다.
"예, 부통령님.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부서는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인 현상과 사건을 다룹니다."
"즉, 현실로 게임 능력을 가지고 뛰쳐나온 플레이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원리로 그것이 가능한지보다는."
"저희가 예측한 여러가지 비현실적 시나리오들과 현실을 대조해, 일치하는 점을 찾고. 그를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비현실적 현상들이 어떻게 뻗어나갈지를 예측합니다."
"따라서 저희 조사국의 시나리오를 있는 그대로 믿는다기 보다는, 이러한 가능성도 있음을 고려하심을 권장해 드리고 싶습니다."
문장을 내뱉어가며 점점 자신감이 붙은 듯, 멜린다 국장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R-14-O는 [현실의 창작물화]라는 클리셰 시나리오를 다룹니다. 게임화, 소설화, 영화화, 만화화 등 다른 말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 단계에 대해서도 예측을 말해주게."
"예. 이 시나리오에서 첫 번째 단계로는 해당 창작물에 대해 능통한 이들이 능력자가 됩니다."
"하, 첫 번째 단계라. 그럼 두 번째 단계도 있다는 것이겠군."
부통령이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예. 불운하게도··· 창작물의 능력을 얻은 이들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할 대상이 필요하니까요."
"알 것 같군. 보스 몬스터를 말하는 건가?"
한 히스패닉 남성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미 국토안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장관.
미국 국가안보 및 국내 영토의 공공 안전을 책임지는 부서.
40대의 나이로 타 게이머들에 비하면 좀 늙은 편이었지만, 골수 와우 게이머로서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상상력이 뛰어나시군요. 맞습니다."
"크으음···"
"하아, 괴물이라니···"
"설마 그것들도 고 레벨 플레이어들처럼 일반적인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건가?"
"그 부분도 현재 조사국 측에서 게임 개발사의 자료를 추합해, 추후 보고를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어렵군. 어려운 일 투성이야."
국무회의의 모두가 한숨을 내뱉었다.
"보스 몬스터라. 정말이지 미친 헛소리지만··· 이미 미친 일이 일어났으니, 그 다음으로 미친 일이 일어나는게 오히려 상식적이겠어."
부통령의 그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두들 많이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현 시각부로는 상식을 많이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멜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분야에 있어 세계 제일의 전문가인 저희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입장에서도, 상식을 벗어나는 시나리오니까요···"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국장."
상식을 벗어난다는 말은, 단순한 면피성 발언이 아니었다.
세계 멸망 시나리오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였지만, 그 실상은 좀 달랐다.
그것은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공무원들이 쉬는 시간마다 TRPG를 하며 생각난 시나리오들을 모아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오타쿠들의 "야 이거 어때?" "오 좀 재밌는데?" 싶은 설정 놀음들.
그것들을 그럴 듯하게 비현실적 현상에 대한 대비용 계획서라는 식으로 만들어 둔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 짜내서 포장했다고 해도, 그럴 듯하게 발표하기 어려웠다.
내용부터가 비현실적이었으니.
"이제 R-14-O 시나리오가, 구체적으로 현실에 어떻게 대응되지는 발표드리겠습니다."
모두가 다시금 멜린다 국장의 말에 집중했다.
"능력자, 정확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플레이어입니다. 그들이 가진 능력은 모두 예외없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자신이 가진 가장 레벨이 높은 캐릭터에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저희가 짠 시나리오에서의 [특정 창작물]은 한국에서 2003년에 개발한 게임인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 대응합니다. 조사국원들이 면밀히 분석한 바에 의하면 해당 게임은."
그 분석은 한국에서 게임이나 만화, 소설 같은 서브 컬쳐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보고서인 나무위키를 뜻했다.
한인 3세 출신 웹소설 매니아 조사국원이 분석을 도맡아 많은 시간이 절약되었다.
"전형적인 판타지 풍 MMORPG입니다. 저희가 주목한 것은 그 플레이어들의 특징입니다."
-딸깍
동시에, PPT 화면에 무수한 뉴스 기사들이 출력되었다.
-서울 시내에서 32세 남성이 갑작스레 흉기 난동을···
-최근 모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햇살론'이라는 것이 확산되었는데요···
-최근 게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저들 간의 살해 협박이 오가며 실제로···
-게임사가 유저들을 대상으로 확률을 조작한 상품을 판매해, 수십 조의 부당이익을···
-가상 현실 내부에서의 갈등이 현실에도 번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위벤의 게시판에서 서버라는 출신 지역에 따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듯한 자료들이었다.
"음, 내가 아는 게임과 좀 다르군···"
자기가 와우는 좀 안다고 자부했던 국토안보부 장관이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다.
"문제는, 플레이어들의 평균적인 수준입니다."
멜린다 국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그 개발 국가인 한국에서, 극도로 사회적인 인식이 좋지 못한 게임입니다."
"대충 그 이유는 알 것 같군."
번역된 뉴스 기사들과 범죄 자료 화면들을 보며 장, 차관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이유는 플레이어들의 인성과 사회성이 정말로 끔찍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가 그렇진 않을 텐데? 정상인도 있지 않나?"
국토안보부 장관의 말에 국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능력이 강한 초능력자. 즉, 고 레벨 플레이어의 경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젠장."
"...놀랍고도 끔찍한 일이지만, 이미 플레이어에 의한 테러와 범죄들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한 내용이지."
"예. 지금부터 드릴 말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범죄심리학 전문가가 세밀히 분석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그 말과 함께 한 뚱뚱한 백인 남성이 일어나 마이크를 잡았다.
"중앙정보국 소속 취조과 자문의 사무엘 트러지안입니다. 한우현의 행적은 모든 것이 모순 그 자체입니다. 의학적으로, 이 정도로 우울증을 오래 앓은 이는 정상적인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 100% 단언할 정도로?"
국방부장관이 의문을 던졌다.
그야,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어지간하면 100%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 심지어, 우울증 뿐 아니라 증세로 보면 진단만 받지 않았을 뿐이지 조현병 초기 단계도 의심됩니다."
"계속 말해보게."
그가 화면에 띄운 뇌의 CT와 MRI 사진을 가리켰다.
한국의 서울미래병원에서, CIA 요원들이 빼돌린 한우현의 의료 차트였다.
"어지간한 정신과 환자는, 뇌 영상의학적으로 티가 나는 일은 드뭅니다. 이는 뇌의 문제와 정신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아직 연구 단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무엘이 숨이 찬 듯 한 번 말을 끊었다.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육안적으로 뇌의 차이가 티가 날 정도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허어..."
"변이 전의 한우현은 다릅니다. 그 수준이 극도로 심해, MRI로만 보아도 대뇌 피질의 전두엽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일부는 축소, 일부는 확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의사가 아니니, 더 쉽게 말하게."
"아, 죄송합니다. 즉, 영상학적으로 티가 날 정도라면 사실상 집단의 수장은 커녕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보셔야합니다."
그가, 그 시점에서 말투를 바꿨다.
"그런데, 플레이어의 시체··· 백악관 테러리스트. 그를 해부한 결과와, 이 뇌를 비교했을 때. 매우 놀라운 가설이 있습니다."
"...알 것 같군."
보건사회복지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초능력을 사용해, 스스로 뇌의 문제를 고칠 수 있다는 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긍정한 뒤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플레이어의 변이가 이뤄지면 뇌의 성격과 지능을 관장하는 면에서도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가 다른 플레이어들의 범죄 이력과, 정신 분석 감정 결과를 빠르게 넘겼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자들은 그대로 정신병자였습니다. 성정이 변화한 이는 코드네임 독재자. 한우현 뿐입니다."
"자네 말대로면 변하자마자, 스스로를 의학적으로 진단하고 뇌를 구조적으로 고쳤다는 건데."
부통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나온 행적만으로도, 그가 과거에 어쨌건 지금은 대단한 능력자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네. 하지만 이건 너무 비약이 아닌가?"
"아닙니다. 이는 최근 일주일의 행적과, 그의 대화를 모두 제가 직접 하나하나 검증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사무엘이 가장 중요한 말을 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정신병이 모두 치료된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억누르고 있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억누른다고?"
"예. 정확히는, 말이 안 되지만···"
복잡한 심리 감정 결과와, 통계 그래프 수치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면의 광기를 억누른 끝에, 매우 폭력적이고 억압적이지만··· 동시에 겉으로는 그를 드러내지 않는 상태. 감정을 죽인 채 차가운 이성으로 움직이는 기계. 즉, 최종적으로는 정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라고 결론지어졌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직접 상담조차 하지 않고, 분석을 해내다니."
"아직 대중에는 공개되지 않은 중앙 정보국만의 비대면 정신 분석 AI입니다. 시험 단계이고, 대 국민 감시용으로 쓸 작정이냐며 공격받을 우려 때문에···"
"어쨌든, 정확도는 분명한 것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96.78%의 정확도로 코드 네임 독재자의 현 정신 상태를 나타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놀랍게도.
아무리 유능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라 해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우현의 현 정신 상태와 심리를.
거의 정확하게 분석해냈다.
"오랜 시간이라, 그건 말이 안 되니 역시 모종의 방법으로 뇌를 정상화시켰다고 봐야겠지."
"예, 저 또한 그 오랜 시간에 걸친 치료를 했다는 AI의 결론은... 포스를 이용한 순간적인 자가 치료의 결과가 오해석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서 한우현이 있었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식겁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해도 단지 영상과 대화 자료를 수집한 것만으로.
그를 거의 완벽하게 분석해낼 수 있다고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을 테니까.
"아무튼, 결론적으로··· 이 분석으로 인해 그의 중요도와 위험도는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다시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이 앉고, 다시 멜린다 국장이 일어났다.
"종합적으로, 초능력자 대처 시나리오에 입각해 길드와 독재자에 대한 총평을 내리겠습니다."
"길드 마스터 한우현. 그는 플레이어들 가운데서도 그 증세가 극심한 정신병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종의 경로 혹은 재능으로 그를 인위적으로 치유하고 억눌렀습니다."
"교차 검증 된 증언에 따르면, 그는 홀로 고 레벨 플레이어 수십 명을 수 초만에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만렙 플레이어인 라일리 그레인저도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즉, 어떠한 이유로든 플레이어 초능력을 다루는 데에 있어 초월적인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활용에도 전혀 망설임이 없는 과감한 성격의 인물임이 틀림 없습니다."
"동시에, 현 시점에서 그 누구보다 플레이어들의 평균 심리와 군상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를 바탕으로 조직력과 장악력을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실제로 일주일 만에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포괄하는 조직. 길드라는 무력 단체로 그를 증명했습니다."
말이 길어질 수록 부통령을 비롯한 장 차관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뛰어난.
너무도 뛰어나고도, 위협적이고도, 불가해한 수준의 초능력자 독재자가.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분석 결과였으니까.
심지어, 그에 대처하기에는 미국의 현 상태로는 어렵다는 근거가 나오고 있었으니.
"...하지만 협상이 결코 불가능한 상대는 아닙니다. 한국 정부의···"
"질문을 하지. 한국 국정원 내에 매수한 휴민트들은···"
"먼저, 전미 플레이어 연합의 방향성부터..."
"국방부장관입니다. 현재 미국과 멕시코, 브라질 쪽의 플레이어들은···"
"그렇다면···"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세계 최강대국의 심장. 세계를 움직이는 엘리트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이 세상의 질서와 평화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계속했다.
한 명만 빼고.
끔벅. 끔벅.
"흐아암···"
처음에는 집중했던 라일리 그레인저는, 하품을 했다.
한우현.
불과 하루만에 전 세계 초능력자들을 규합하는 조직을 세운.
정체 불명의 만렙 플레이어.
한우현.
라일리, 그녀와 같은.
처음에는 그에 대해 다루길래 귀를 쫑긋 세웠지만, 알아듣지도 못할 정신 감정부터 정치적인 얘기를 계속 하길래 점차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딴 생각을 했다.
길드장. 그는 길드 외의 다른 플레이어 조직과 개인 활동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미국과 남미, 즉 글로벌 서버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아직까지 아무런 접촉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반대로, 인정한다고 하면 그 인정 대상에 대해서 발표하지 않는 것 또한 이상했다.
이미 미국과 남미의 플레이어를 총괄하는 조직인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비공식적으로 출범되었다.
길드를 자극할까 봐 대외적인 발표는 미뤄지고, 독자 조직이 아니라 국방부 산하 조직으로 구조가 개편되었지만.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길드 가입파와 연합 가입파 간의 플레이어들 간 언쟁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원격으로 인터넷만 보고 길드에 가입한 플레이어들이 꽤나 많았으므로.
길드장이 미국의 독자적인 플레이어 단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는 자기들끼리 세운 조직들이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고 있었다.
한국은 한 술 더 떠, 아예 가입하지 않는 플레이어들은 전부 처 죽여버리겠다는 기세.
마치 미국만이 예외라는 듯, 길드에서 아무 대응이 없을 뿐.
정말로 다른 단체를 원천 봉쇄하는 원칙이라면 뭔가 조치를 취할 텐데, 우리한테만 그러지 않고 있다.
대체 그의 의도가 무엇일까?
-지잉
"...아."
-[국제 발신]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라.
"...!"
라일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들은 모양이에요."
문자 자체도 홧김에 몰래 날린 마당에, 심각한 국무 회의 중에 자기가 길드장과 개인적인 문자를 주고 받았다고 선언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부통령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중요한 말들과 주제가 계속해서 오갔지만, 그 말들은 더 이상 라일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뜬금없는 대답.
하지만 충분히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일은, 우리들의 행동 방향을 지켜보겠다는 건가..."
남몰래, 아주 작게 중얼거린 라일리.
이것은 그녀의 생각에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미국만의 플레이어 조직. 그 존재를 반쯤 인정해주겠다는 말이었으니까.
한 층 더 나아가 해석한다면, 현 시점에서 세계에서 단 둘 뿐인 만렙 플레이어.
그녀만은 예외로 인정해 준다는 뜻일지도.
"...예외. 인정..."
거기까지 추측하자, 라일리의 기분이 살짝 이상해졌다. 인정이라니...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기쁠 지도.
하긴 한우현 그 외의 유일한 만렙 플레이어인만큼, 이 쪽을 특별 취급할 개연성은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말대로, 기대에 부응하리라.
비록 길드장 같이 무시무시한 큰 그림을 그리며 뭔가 원대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이 사회를 지키고 싶은, 마음 속에 정의감을 품은 하나의 사람이었으니까.
길드에 대적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미국을 지킬 정도로는...
그리 생각하며 라일리는 속으로 의지를 다졌다.
"따라서 앞으로 전미 플레이어 연합의 방향성은···"
-촤락
라일리 그레인저가 상념에 빠진 동안, 국장도 앉아서 감춰진 보고서를 슬쩍 들췄다가 내렸다.
아직은, 보고하기에는 확신이 모자라기에 보류한 시나리오를.
R-14-O.
그 뜻은 현실조작Realism Remodeling-유형 14-덮어쓰기Overwriting 시나리오.
그 뒤에, 이상예측부 부장.
현실 붕괴 시나리오 연구를 총괄하는 미국 제일의 전문가이자 광적인 TRPG 매니아 한인 3세.
유진 킴이 아직은 보고할 단계는 아니지만, 좀 더 의심할 필요는 있다고 말한 시나리오가 감춰져 있었다.
P-12-R1.
그 뜻은 주인공Protagonist-유형 12-회귀자Regressor 시나리오.
-탁
역시, 이걸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멜린다 국장은 서류를 정리했다.
47화 여긴 우리 구역이다 (1)
-타닥타닥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쉼없이 울렸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그와 함께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모인 것 같군."
"죄송합니다, 길드장. 저희가 인맥이 그리 넓진 않아서···"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기자라고 해봤자 결국 IT랑 게임부 쪽이니."
"괜찮다."
한우현은 멋쩍은 듯 눈치를 보는 차정훈과 김재승을 독려했다.
길드원들 중 그나마 기자들, 즉 언론계에 인맥이 있을 법한 유일한 이들.
공개적으로 한우현을 돕기에는 어려운 이준범에게 기자를 모아달라 할 수도 없기에.
그 둘에게 길드의 첫 소탕 작전을 중계할 준비를 하라 했다.
최대한 기자들을 불러 모으라 했지만, 겨우 서른 명 남짓.
그것도 사회부 기자는 열 명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외신은 겨우 폭스 뉴스와 CNN 둘 밖에 오지 않았다.
뭐, 이건 이해할 만 했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지금 국가 기능 전체가 마비되기 직전일테니까.
겨우 이틀의 여유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하는 기자가 있는 언론사였던 폭스와 CNN이 오히려 대단한 것이었다.
"애초에, 너희가 인맥이 넓다 해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는 오지 않았을 거다."
"...예? 왜죠?"
"이건 굳이 따지자면 길드의 홍보에 가까우니까. 정부가 가만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지금 얼마나 유명한데···"
차정훈이 믿기 힘들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 말도 맞았다.
세계 최강의 무력단체, 길드.
그 때문에 기자들이 인터뷰 요청도 무수히 날아들어왔고, 실제로 파파라치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결과물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초능력자들의 집단, 그러나 그 행보는 의문···
-초능력자 플레이어들의 과거는 범죄자?
-플레이어들의 난동에도 침묵하는 길드··· 존재 의의가 무색해···
대부분의 기사가 악의적인 공격과 비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발악을 하는 것이지."
"그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한국이, 그 정도로 언론 통제가 강한 나라라고요?"
김재승도 믿기 힘들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 그건 언론들의 정치적 진영이나, 논조와 관계없는 특징이다. 사실, 굳이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건데···"
"길드장이니까 그러려니 해."
전 세계의 정보를 통제하고 수집하는 기관.
미 중앙 정보국.
그들과 함께 일하며, 한우현은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개념인지 새로이 알게 되었다.
언론이란 결국 사회 지배자들의 나팔수에 불과하다.
한국이 조금 더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다른 나라라고 해서 그리 다른 편도 아니었다.
"언론이 우리 편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기존 질서를 통째로 뒤엎으며 나타난 근본 없는 단체에 우호적일 리가 없지."
당연히, 한우현이 그냥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를 떠돌며 그녀와 나눈 대화들.
라일리가 미 중앙 정보국이 분석한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체제와 구조를.
너무나 자세하고도 열심히 그에게 설명해주었기에, 그 모든 것을 기억할 뿐이었으니까.
"...큭."
괜한 생각을.
한우현은 갑작스레 솟아나는 감정을 통제했다.
"반갑습니다. 길드장 한우현입니다."
"아, 예··· 연예부 이지철입니다."
"이연서입니다. 전 사회부기는 한데, 제 기사를 데스크에서 통과시킬지는 몰라서."
"괜찮습니다. 여기 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드릴 뿐입니다."
그 감정을 잊기 위해, 일일이 기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 모두 긴장한 채로 있다가, 그의 정중한 인사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어, 굉장히 친절하시군요..."
"친절해야지요. 저희의 얼굴을 만들어 주실 분들이니까요."
웃음을 지은 한우현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안 좋은 말들도 있지만은··· 원래 세상 사는 일에 오해가 있고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음, 음··· 그렇지요."
"하긴, 단체를 운영하시려면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시겠죠."
"추운데 오시느라 수고하셨으니, 따뜻한 밀크티라도 한 잔씩 하시죠."
"아, 감사드립니다."
그의 과할 정도의 친절한 태도에.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기자들의 반응도 점차 풀렸다.
"여기 이건, 제 명함입니다. 다들 하나씩 부탁드립니다."
"명함이요? 예··· 그런데 이건?"
"어? 전화번호가 하나 더 있는데?"
"예."
한우현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오늘, 플레이어 범죄에 대한 본격적인 체포 작전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예, 김재승 씨에게 그건 미리 들었습니다만···"
"다만, 저희의 활동을 취재해 주실 기자 분들께서 혹시나 위험에 빠지실 수도 있으시니···"
그가 그 웃음을 살짝, 내리깔았다.
"조금 더, 우선적으로 조치를 취하길 바라신다면. 공식 신고가 아닌 해당 번호로 연락을 주신다면, 빠르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그 말에 기자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정부가 어떻게든 길드의 영향력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고자.
플레이어 범죄와 길드의 가입자 현황이 알려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자들은 알 수 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사회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으며, 그 첨병에 플레이어라는 이름의 정신병자 초능력자들이 있음을.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즉,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길드의 첫 활동에 대해 알리려 온 기자들.
애초에 상부의 지시에 어느 정도 반감이 있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길드에 호기심이 있는 이들.
"...예,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핫 라인··· 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하하, 핫 라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군요···"
그러니까, 플레이어에 의한 신변의 위협이 발생했을 때.
우선적으로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뇌물은.
충분히 뿌려 줄 가치가 있었다.
언론에도 기름칠이 필요하니까.
"흠··· 그러면,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분들도, 발표가 끝나고 작전이 개시되면 저희를 편한 방향으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대충 인사를 모두 나눈 한우현은 단상 위에 올랐다.
길드 사옥 1층에 어설프게 만들어 놓은 발표 단상이었다.
"오늘부로,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플레이어 범죄에 대한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지도가 펼쳐졌다.
동시에 그의 앞에 도열한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첫 날, 그의 압도적인 위용을 체감했던.
길드 창립 멤버들.
일주일 간 간단한 지시와 훈련으로, 최소한의 플레이어 전투에 대한 기초를 쌓은 이들이었다.
-명심해라. 오직 방어 스킬만 쓰고, 놈들을 추적하되 절대로 공격하지 마라!
-기초적인 기술을 알려주지. 뇌 중앙에 신경을 집중한다 생각하고, 다른 놈들을 쳐다봐라. 그래, 송과체의 존재를 느끼는 거다.
-이 기술로, 너희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느끼고 추격할 수 있다. 물론, 도적 계열의 [은신]이나 마법사 계열의 [영체화] 스킬까지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건, 이 기술로 플레이어들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놈들에게 선택지를 강요하는 거다. 도주냐, 항복이냐···
-그리고, 함부로 공격 스킬을 써서 민간인과 부동산에 피해를 준다면··· 즉시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정리하지. 아주 쉽다. 너희들은 안전하게, 몰이 사냥의 몰이꾼 역할만 하면 된다.
물론, 그들에게 주도권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직 스킬의 제어를 전혀 할 수 없는 미숙한 플레이어들이었으니까.
이 놈들에게 진압을 맡기다가는 빌런 하나 잡으려고 건물 수십 채를 무너뜨리는 진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여론은 완전히 아사리판이 날 테고, 한우현의 세계 통제 계획에도 심대한 차질이 생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도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편한 길로 가는 게 좋았다.
"작전은 간단하다. 권승환이 경기 북부에서부터 플레이어들을 통제해, 범죄 신고가 들어온 시점의 장소들을 습격한다. 그러면서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 세부적인 내용을 세우는 데에는 권승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의외로, 직업 군인이라는 이들이 평소에 할 일이 많지 않았기에.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권승환 혼자서는 군사 작전을 세세히 짤 능력이 되지 않았지만, 그를 통해 합류한 여러 부사관과 장교들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하긴, 나라에서 얼마나 군인들을 하찮게 대우하는가? 심지어 사병이 아닌 장교의 경우 더욱 쓰레기로 취급하니.
이제와서 정부가 군인 출신 플레이어들에게 조건을 외쳐 봤자, 공허한 메아리로 들렸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한우현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작전의 기본 지휘권은 각 진압팀장들에게 일임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즉시 나와 권승환에게 조언을 구해라."
그리고 화면을 쳐다봤다.
"홍세희는 경기 동남부부터, 서북쪽으로 똑같이 진행한다."
"나유나 역시 경기 서남부부터, 동북쪽으로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나, 차정훈, 김재승은 다시 세 팀으로 나뉘어 서울 전체를 순찰한다. 그러면서 경기도 진압 팀이 합류하기 전까지 서울 전역의 플레이어들을 진압한다."
"홍세희, 나유나, 권승환의 경기도 청소가 끝나면 모든 길드 집행부는 최종적으로 남산으로 모여 합류한다."
거기까지 말한 한우현은 다시 카메라로 눈을 돌렸다.
"모두, 확인했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예, 길드장..."
"알겠어."
"확인했다."
그 말에 부응하듯, 커다란 모니터에 다섯의 얼굴이 나타났다.
먼저 작전 시작 지점에 대기하고 있던 홍세희, 나유나, 권승환, 차정훈, 김재승이었다.
군인 출신 플레이어들에 의하면, 아무리 길드 측의 조직력이 우위에 있다고 해도.
한 번에 한반도 전체를 쓸어 담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경기도와 서울부터 압도적인 위용으로 진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도 적합한 선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직접적인 무력화와 제압은 집행부 플레이어들만이 시행한다. 그리고 최종 집행은 진압팀장이 무조건 직접 한다."
차정훈, 김재승, 홍세희, 나유나, 권승환.
모두 정말로 포스 운용의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훈련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킬들의 위력 조절과 무영창 발동 그리고 포스를 이용한 기초적인 육체 강화까지 성공해 냈으니.
역시, 그들을 길드 임원으로 임명한 것은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임원들만은 못했지만, 길드 창립 멤버들.
최초의 1000명. 그들도 포스 운용력이 결코 뒤떨어지는 자들은 아니었다.
직업 별로 하나씩 있는 [제압기] 스킬의 위력 조절, 그리고 최대한도의 [방어 스킬]만 연습시켰다고는 해도.
모두가 플레이어의 송과체만 무력화시키는 수준의 위력 조절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도 고루 나누어 진압팀의 수를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고 위험 인물."
한우현의 손짓에 따라, 두 캐릭터가 화면에 나타났다.
분홍빛 머리칼에 계란 후라이 모양 장식을 뒷머리에 붙인 여자.
온 몸에 사이버네틱한 회로와 타투가 새겨져 있는 사이보그 같은 남자.
"캐릭터 네임 라니아, 직업은 마법소녀. 캐릭터 네임 맑은눈의광인, 직업은 전자기인. 마주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마주한다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
확률은 반반이다. 이 둘이 경기도 내부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의 정도는 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회귀 전, 한국 최악의 빌런 단체의 전 수장들.
한우현이 유일하게 끝까지 그 신상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했으며, 아직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두 미치광이.
"그럼, 작전을 시작하지."
-콱
서울의 지리적 중심지.
남산 정상의 지도에 방패를 박은 한우현은 마지막 말을 전했다.
"명심해라. 너희들 수준으로 제압되지 않는 놈들을 구태여 무리해서 잡으려 하지 마라. 그것들은 모조리 남산으로 밀어넣어라."
작전명.
여긴 우리 구역이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만 된다면.
서울과 경기도 일대는 사실상 길드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 * *
"니 애미한테나 가입하라고 해!"
명동 인근의 시내 한 복판.
화려한 머리색의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온 몸에 무지갯빛 실타래가 휘감겨, 기괴하게 몸을 비틀고 쓰러진 채.
[풍수사]의 [제압기], [무지개 넝쿨]이었다.
"씨발, 니가 뭔데 강요하냐고!"
"아이고, 불만이 참 많네. 질서 좀 지키라니까? 나도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좆 까! 스레딕에서 혐짤이나 달리던 앰생 미친년이···"
"뭐야 씨발?"
그 말에 발끈한 나유나가 순간 지팡이를 힘껏 휘둘렀다.
-콰직
"아, 아아악! 내, 내 팔!"
"아."
순간 뻘쭘한 표정을 지은 나유나가 주위의 눈치를 봤다.
"...아니지. 어차피 길드장도 여기 없잖아? 히히..."
그리고 히죽 웃었다.
"···자, 잠깐. 왜 웃는 건데."
"무상의 행복은 없어요~"
-으드득
-으드득
뼈와 근육이 부서지고 뒤틀리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미친."
"이야, 학대파가 따로 없네."
"근데 저래도 되는 거냐?"
"뭐, 어차피 우리 지휘자가 나유난데... 알아서 하겠지."
"하긴 [치유] 스킬 쓰면 어차피 낫고..."
이미 나유나가 청와대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모든 길드원들이 잘 알고 있었기에.
좀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있었지만, 경악한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범죄자, 빌런 플레이어들.
진압하는 데 어느 정도의 과격함을 필요하다고도 다들 생각했으니까.
"나의 마음을! 도려내는! 분충은! 용서하지..."
끔찍하게 육편과 혈편이 튀는 가운데, 결국 희미한 목소리가 비틀려나왔다.
"그, 그만... 그마안... 항복, 가입... 할 테니까 제발..."
"에이, 재미없게. 그러게 왜 괜히 나대?"
툴툴대던 나유나는 활짝 웃으며 피투성이 손을 내밀었다.
"환영해, 신입! 오늘부터 내가 네 상사야!"
그러고선 뒤돌았다.
"자, 너희는 어쩔래?"
"...가입하겠습니다."
"...사지절단 짤 올려대는 게 컨셉이 아니었다니."
"가입, 할게요! 씨발, 지팡이 좀 내려!"
"뭐야, 쉽네. 안 그래?"
그 말에 나유나와 함께하던 길드원들이 피식 웃었다.
나유나가 손 발이 맞는 이들과 팀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청와대 테러범들이 높은 비중으로 모였던.
소속은 길드이나 그 성격이나 손속은 빌런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다음으로 가 볼까?"
"그 전에 길드장한테 보고부터 해야죠, 부장님."
"후후, 그렇지. 이 방위부장이 보고를 한다 이거야!"
실실대던 나유나가 카메라를 활성화했다.
-그래, 나유나. 위치가 어디쯤이지?
"어, 지금 의왕이랑 과천 쪽 거의 끝났어! 얘들도 바로 길드 사옥으로 보내면 돼지?"
-좋아. 생각보다 잘 하는데? 네가 가장 빠르다, 나유나.
"이 쯤이야 기본이지."
-...너무 우쭐거리지는 말아라.
-이익! 칭찬 좀 해 주면 뭐가 덧나?!
"끊는다."
-촤악
한 번 핀잔을 주고서는 한우현은 대검에 묻은 피를 한 번 털었다.
그 앞에는 심장이 움푹 파인 채 눈에 빛이 꺼진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히, 히익···"
"진짜 죽였다고?"
"엄살 피우지 마라. 플레이어는 [부활] 스킬로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미친 소리···"
"조용히 해라."
그의 뒤에 무릎을 꿇고 도열한 이들이 공포에 절은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마지막 기회다."
한우현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우리와 함께하거나, 아니면 이 놈과 함께하거나. 선택해라."
"..."
"..."
"...가, 가입··· 하겠습니다···"
"좋다. 환영한다, 친구."
가장 먼저, 가입을 외친 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물론,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은 받아야겠지만··· 걱정 마라. 빠른 반성에 대한 정상 참작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경기도 일대를 조여드는 포위망.
플레이어임을 너무나도 강력히 티내는, 송과체에서 나오는 포스의 파동.
그 때문에 결코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은신]도, [영체화]도. 계속해서 쓸 수는 없으니까.
물론 [차원 관문]이나 [축지법] 같은 공간 이동 계열 스킬이라면 그를 무시하고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한우현은 바보가 아니기에, 2차 포위망도 구성해 놓았다.
전투 훈련에 익숙해지지 못한 고 레벨 플레이어 길드원들.
-너희들은 딱 하나만 한다. 이 감각을 기억해라. [차원 관문]이 열릴 때 일어나는 포스의 왜곡과 이음...
-이걸 느끼면, 너희들의 포스를 우악스럽게 쑤셔넣어라.
-그리하면 공간 이동 계열 스킬들은 무조건 취소된다.
-싸울 필요 없다. 천천히 뒤따라오면서, 모든 [차원 관문] 계열 스킬을 봉쇄해라.
스킬의 파해 자체는 어려운 테크닉이었지만, 하나만 반복해서 연습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를 통해 모든 도주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짧은 훈련 시간이라고 해도, 그 포위망의 운용자들은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회귀 전, 한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했었던 포스 운용 재능을 가진 빌런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미치광이 빌런이 아니다.
"길드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환영한다. 비록 가입 과정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해도 말이다."
그 이상의 존재.
대한민국, 그리고 전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할 단체의 일원이니까.
"자, 여기 캐릭터 네임 적으시고."
"캐릭터 네임 [10만주령학살] 가입..."
"캐릭터 네임 [에이눈나사랑해], 가입합니다..."
"...? 그 에이타령하면서 뻘글 도배하던...?"
"네, 그 용술사 맞는데요..."
"반갑네! 내가 맨날 '야, 타락귀' 콘 달아줬잖아!"
"어, 그게 당신...?"
구체적인 절차를 넘긴 한우현은 다시 지도를 확인했다.
-호릅
그러면서 작전 중 목을 축이기 위해 담아온 보온병에 담긴 철관음 차를 홀짝였다. 그가 직접 백화점 지하에서 그나마 먹어 줄 만한 걸 골라서 우린 것이었다.
"흠."
아무래도 우리자마자 마시는 것이 아니다 보니 향이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밖에서 잠깐 마음을 진정시키는 정도로는 나쁘지 않았다.
-꿀꺽
"그럼, 다음 지역으로 가지. 친구들이 서울로 거의 다 와 가니까 말이야."
그리고 GPS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서서히, 서울 전역으로 모든 빌런 플레이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48화 여긴 우리 구역이다 (2)
여섯 개로 나뉘어진 집행부들.
당연히, 모두들 작전의 실행 방향성에는 차이가 있었다.
"여러분, 저 차정훈입니다. 저 아시죠?"
"으음..."
"편하게 갑시다. 솔직히 제 방송 봤을 거 아닙니까? 동서남북 강화하는 거."
"보긴 했지만... 그거랑 믿는 건 다르지."
"지금 오면, 모든 범죄 행위 면책 및 사면입니다."
"뭐?"
"진짜야?"
두 유튜버는 당연히 자기 유명세를 이용해 최대한 평화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며.
"항복해라. 두 번 말 안 한다."
"뭔데, 씨발? 우리가 왜?"
"전원, 제압기 준비."
"1분대 준비."
"2분대 준비."
단순히 기계적으로 빌런들을 적군으로 보아, 군대를 운용하듯 제압하는 이도 있었고.
"그, 그러, 니까... 항복하라니까요오..."
"아니 안 들린다고. 똑바로 말 안 해?"
"말을 하긴 하는 건가?"
"...이, 이 씨, 발. 니들 고아원, 출신이지."
"...?"
"말 좀 크게 하라니까 뭔 고아원."
"애초에 에션족 애들은 죄다 정상화 당해서 고렙이 없는데?"
"저, 정상화, 정상화 해야 해... 니, 니들때문에 정훈이가 고생하잖아. 이 고아원 익, 익벤남들아."
"저기, 잠깐만. 진정 좀 하."
-[암살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림자 쇄도]
"아아악! 씨발, 내 팔이!"
"내 다리!"
"그, 그러게에... 왜 말 안 듣냐고... 으... 정훈 오빠 보고 싶네에..."
그냥, 자기 맘대로 날뛰며 방향이 어찌 되었든 죄다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리는 이까지.
각자 그 방법이 달랐다.
하지만 모두들, 작전의 목표는 확실히 잘 수행하고 있었다.
* * *
"다들 잘 하고 있군."
점차 조여드는 길드원들의 위치 현황을 한 번 확인한 한우현은 시선을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돌렸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감옥에 가거나 처형당하는 것 보단 낫지 않겠나?"
"씨, 씨바··· 처형 소리는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아오, 말 잘 듣겠다니까···"
그 말에 수갑을 찬 이들이 혀 끝을 떨며 답했다.
"이동 완료 했나?"
"예, 길드장."
모든 시체의 길드 지하 창고로의 운송까지 확인한 한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지막 기회라고는 했지만.
진짜 마지막 기회는 아니었다.
한우현은 빌런 플레이어들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줄 작정이었다.
첫 번째, 처음 마주했을 때.
사실, 길드의 존재 자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자기 세상이 온 마냥 깽판을 치던 플레이어라 해도, 만렙 플레이어이자 백전노장인 한우현이 눈앞에서 살기를 풍기자.
절반 정도는 무기를 버리며 항복을 외쳤다.
하지만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뇌에 문제가 있는 정신병자들 답게도.
무려 절반이나 그 상황에서도 상대를 인신공격하며 스킬을 준비하려고 했다.
괜찮았다.
이딴 버러지들을 제압하는 데에는 100이 아니라, 10의 포스만 써도 충분하니까.
실제로도 그러했다.
눈앞에서 길드 집행부들이 어그로를 끌며 방어 스킬로 교란을 하면.
한우현이 [신경 가속]과 [포스 전투술]을 미세하게 끌어올려 기습.
그걸로 잡지 못한 놈은 없었다.
두 번째, 제압을 완료하였을 때.
온 몸에 플레이어들의 [제압기]를 주렁주렁 단다면.
움직일 수 있는 건 입과 혀 뿐이다.
여기까지 온다면, 아무리 공격적인 정신병자라고 해도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는 놈들이라면 말이다.
세 번째, 처분 절차의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악하는 미치광이 게임 폐인들이라면.
시간이 없으니 계속 설득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일단 '처분'한다.
최소한의 손상으로 차후 [부활]에 쓰이는 힘을 절약하기 위해.
심장만을 파괴한다.
놈들은 길드 지하의 냉동 창고에 두었다가, 길드의 공식 출범 행사 직전.
그 자리에서 부활시켜, 최후의 기회를 줄 예정이었다.
끝까지 분탕과 반항의 의지를 보이는 놈들에게도 베푸는, 진정한 마지막 기회.
죽음은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다.
한우현은 회귀 전, 끊임없이 보스와 빌런들과 맞서싸우며 당연히 죽음의 경험이 많았다.
수십 번의 부활을 겪으며 겨우 적응했지만, 그 정신적인 충격은 정말로 견디기 어렵다.
게임에서와 다르게, 부활 직후에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만도 어렵다.
뇌 자체가 헝클어졌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무력감.
즉, 인간의 정신이 가장 나약해지는 순간이다.
그러니 부활 직후에는 어지간해서는 굴복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만약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다면···
괜찮았다.
그런 놈들도 쓸모가 있으니까.
미래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그것들을 환영해 줄 것이다.
새로운 생명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연구의 시작은, 누가 뭐라 해도 해부니까.
"으, 다음은 어디죠···"
"강남 쪽 일대는 끝났고, 이제 강북도 거의 청소가 끝났습니다."
"길드장, 보고가 들어왔습니다만... 또 놓쳤답니다."
"흐음..."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최악의 요주의 인물들.
대한민국 4대 빌런 사령관 중 홍세희, 나유나는 이미 완전히 수족으로 만들었다. 남은 건 라니아와 맑은눈의광인.
사실 만남을 예상했던 건 서울이 주 활동 지역이었던 라니아였는데, 의외로 제주도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그 놈에 대한 보고가 튀어나왔다.
회귀 전에는 한우현이 미국에 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분탕질을 시작한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 때는 완전히 한국의 사회 체계가 무너진 상태였기에, 그의 본명과 캐릭터 네임 외에는 아는 것이 없어 찾아가지도 못했었다.
길드의 행보가 그에게 뭔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일까?
"이번에도 다른 놈들을 데리고 도망쳤다고?"
"예."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미 상황 자체가 너무나 유리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몇 명씩 빼돌려 모은다 해도 조직력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작전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간다. 그 놈도 남산으로 몰리고는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알았다, 그 다음은..."
"홍대, 이태원과 용산 서쪽 일대만 몰아넣으면···"
길드원들의 보고를 들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잠깐 휴식 후, 홍대로 [차원 관문]을 연다. 진격 방향은 남산으로. 두 시간 뒤까지 모두 남산으로 모이면 되겠어."
"확인."
"두 시간 뒤까지 남산으로 타겟들을 유도합니다."
"길드장, 여기 권승환이 놓쳤다고 보고한 인원들입니다."
"어디··· 세 명. 전부 마법사 계열? 게다가 이 놈들, 스킬을 좀 쓸 줄 아는군. 이건 직접 가야겠어. [차원 관문]을 하나 더 종묘 쪽으로 열어라."
"예! [차원 관문]!"
"[차원 관문]!"
"[차원 관문]!"
다른 길드원들이 공간 왜곡 계열 스킬을 억제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를 한 번 더 무시하고 관문을 쓰기 위해.
세 마법사가 동시에 힘을 합쳐 스킬을 발동했다.
-후웅
"너, 너, 너, 따라와라. 나머지는 방금 말한대로 홍대로 가서 몰이와 [제압기] 사용에 집중해라."
"예!"
"금방 오겠다."
-후웅
차원관문이 닫히자, 남은 길드원들이 긴장이 풀린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거 만만치 않네."
"일단 대상 자체가 워낙 많으니까···"
"근데 바쁘긴 한데, 그게 막 힘들다기 보다는 그냥···"
그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기계적이고 단순한 느낌이야."
"실제로 싸우는 건 거의 길드장이고 우린 진짜 몰이만 하니까···"
"대체 길드장은 정체가 뭐지? 보니까 게임 스킬은 별로 쓰지도 않던데..."
"성기사가 원래 튼튼하긴 튼튼하잖아."
"그거 빼고는 다 쓰레기인 직업인데..."
그들이 한참을 여러 추측을 던졌지만, 그 추론적인 지능이나 사회적인 지능이나 높지 않은 집단인.
플레이어들끼리 한우현이 사용하는 여러 고유 기술들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뭐, 어쨌든 쉬운 일을 하는 건 여기까지고... 남산에서는 좀 다를 거 같은데."
"하긴 특히 더 미친 놈들이 올 테니···"
"씨발, 나도 한 분탕 하는데 더 한 새끼들이면 진짜 대화가 통하기는 하는 거냐···"
"애초에 지금 범죄 저지르고 다니는 놈들도 사람 안 죽인 새끼들이 없는데."
"미친 새끼들 진짜···"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똑똑한 이는 아니더라도,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근데 길드를 자선사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우리도 저렇게 싸워야 하는 거겠지...?"
"아오, 난 군대도 안 갔는데..."
"여기 군대 간 새끼보다 안 간 새끼가 많아 임마."
"뭐야, 면제겜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어?"
"어쨌든 지금이야 길드장이 진짜 다 해주고 있지만, 보고 배워야 한다고 우리도..."
"씨발, 그냥 계속 다 해주면 안 되나···"
"으, 받은 돈이 있으니···"
"대체 플레이어 훈련 교리 같은 건 어떻게 만들어 낸 거야?"
당연히, 그들에게 전투와 복종을 언젠가는 길드장이 요구할 것이라는 것.
다행히, 객관적으로 길드의 복지와 대우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고.
대부분이 백수 출신이었던 길드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확실히 느껴졌기에, 적응도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이렇게 하니까 효과가 더 좋긴 하네. 여론이라던가···"
"와 씨, 우리가 이 정도로 찬양을 받는다고?"
"칭찬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냐···"
앉아서 쉬며, 휴대폰으로 기사를 보던 한 플레이어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활동을 시작한 길드··· 경기도 전역의 초능력자들 진압 시작?
-무자비한 작전 가운데 민간의 피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속속들이 제압당하는 초능력자 범죄자들···
아주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전보다는 훨씬 더 기사의 어조가 유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들을 따라다니는 기자들이, 행보를 보면서 확실히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길드가 아니라면 미치광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집단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이라도 친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체감을.
자연히 후속 기사들도, 그 현장 기자들의 어조를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있었다.
-씨바 드디어 일하냐
-경찰 이 개 병신 새끼들은 하는 일이 뭐냐
-자는데 옆에서 번쩍거리면서 자동차들 박살낼 때는 개 무서웠는데 이제 좀 해결됌?
-근데 쟤네가 더 무서운 애들 아니냐
-일단 좀 저 미친 범죄자 새끼들부터 처리하고 따져 그건
거기다가 덧글들까지 보면, 확실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게. 굳이 처음에 신고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게 이해가 되네."
"그 때는 너무 수그리는 거 아닌가 했는데."
"개돼지 새끼들,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정신을 차려···"
"백수가 할 말이냐···"
"우리 이제 백수 아니거든?"
테러리스트 플레이어들의 체포 자체가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경찰과 검찰에서 넘겨 받은 범죄 사건들부터, 그 이후로도 계속 신고가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흉악한 수준의 대규모 피해나, 학살 수준의 사건에만 대처에 나섰다.
그 외의 신고에는 침묵했다.
그 정보만을 기록하고 정리했을 뿐.
"그 말이 맞아. 이건, 퍼포먼스적인 것도 있는 거 같아."
"솔직히 나도 이게 오히려 나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기를 모아서 터뜨리는 게 효과가 좋은 거 같네."
왜 이리 신고에 대응이 소극적이냐고 길드장한테 의문을 표했던 몇몇 정의감 있었던 플레이어들도 수긍하게 되었다.
별 발표나 표명 없이 묵묵히 범죄자 플레이어들을 잡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시민들의 피해와 불만이 누적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빌런 플레이어들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극에 다다르기 직전.
길드가 등장해, 빌런과 길드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분리한다.
"...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는 거지."
"진짜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거 아냐?"
"음···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그건 지금도 가능은 하지."
"어, 그건 그렇네···"
단순히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을 단죄하고, 강제로 가입시키는 것.
그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길드장의 모든 결정은 한 번에 여러가지 결과를 추구하며.
그 무수한 연쇄적인 효과와 여파를 효율적으로 통제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다.
"뭐, 우리가 생각해 봤자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10분이면 충분히 쉬었습니다! 다들 일어나시죠!"
"좋아, 가자!"
"[차원 관문]!"
"[차원 관문]!"
빌런 플레이어들의 수 자체는 정말로 많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전혀 조직력이 없었다.
자기들이 몰이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겨우 뭉치는 시도를 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었다.
대부분이 홀로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
그렇기에, 수백 명씩 몰려다니며 송과체를 느끼고 추격하는 길드 집행부에.
절대로 맞설 수 없었다.
* * *
도중에 버거운 수준의 빌런들이 있어, 호출받으면.
중간 중간 다른 집행부들과 합류와 분리를 반복하며.
용산 공원에서 한우현은 제압되어 따라오는 플레이어들과, 시체들을 정리했다.
"좋아. 이것들도 창고로 보내라."
"예··· [차원 관문]!"
"남산으로 가기 전에 이 놈들도 보내 놓아야겠군. 수갑을 찬 친구들은 길드 사옥으로."
"네. 모두들, 이리로 따라오십시오!"
"스킬 쓸 수 있다고 빠져나갈 생각 말고! 어차피 길어야 며칠이다! 그 뒤로는 너희도 정직원이야!"
"씨발, 알아 들었다니까···"
"반성하는 척만 하면 금방 나오니까 조금만 참아!"
"길드장님."
"그래."
"이제 서울은 한 구역만을 빼면 모두 끝났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남산으로···"
거기까지 말을 잇던 한우현은, 본능적으로 포스를 끌어올렸다.
-[포스 전투술 제 11형 : 반사 입력 : 두개골 강화]
뇌신경과 척수신경에 미리 본능적인 동작을 새기는 포스 전투술.
입력된 상황에 맞춰, 뇌 활동을 거치지 않고서도 포스들이 자동적으로 두개골을 강화했다.
-[암살검]
-[복수의 수리검]
-카강
-카가강
순식간에 열 댓개의 단검과 표창, 수리검이 한우현의 머리에 부딪혀 튕겨져나갔다.
-[빛의 광기]
0.02초 만에 한우현은 그 상황을 인식했다.
순식간에 그의 온 몸에 빛이 화려하게 번뜩였다.
도발기가 그를 공격한 플레이어들에게 비춰졌다.
그들의 움직임이 주춤거리며 굳었다.
-[사자후]
"날- 봐- 라-!!"
그걸론 부족하다.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이해 확장]
순식간에 한우현의 온 몸에 퍼진 말초신경 다발들의 끝 마디마디마다 포스들이 갈라졌다.
그것들이 거미줄처럼 흩날리며 반경 100m를 덮었다.
다섯 명의 빌런 플레이어들이 포착되었다.
모두, [은신] 스킬을 수준급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첫 공격이 먹히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신중했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가기보다는, 서로 눈치를 보며 조금씩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도발기 [빛의 광기]마저도 견디다니.
그 인성과 공격성이 일반인과 근간부터 다른 수준인 플레이어에 맞지 않는 태도.
포스 저항력의 재능이, 아주 뛰어난 플레이어들이었다.
"어딜 가려고?"
당연히, 그를 두고 볼 한우현이 아니었다.
-[무궁의 존재감]
한우현은 포스를 최대로 증폭시키며, 주위의 인지 정보를 왜곡했다.
'분노'와 '열망'과 '증오'라는 감정이 포스의 형태로 정제되어 대뇌 피질을 타고 폭발하듯이 분출되었다.
본디 뇌파는 단순한 뇌 활동의 결과값일 뿐이다.
하지만 포스를 이용한다면 다르다.
날카롭게 울리는 뇌파는 그 감정을 인지 정보체적으로 담는다.
그리고, 확장된 신경계를 통해 목표 대상에게 강제로 주입한다.
"...!"
"...!"
"...죽···어라···!"
"죽어!"
아직 송과체와, 그에 연결된 뇌 활동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미숙한 플레이어들.
그들의 부신 겉질과 속질에서 노르아드레날린과 코티솔이 인위적으로 증폭되었다.
분노와 스트레스를 관장하는 호르몬들. 심지어 포스의 영향을 받아, 더욱 폭급해진 생체 화학 물질들.
이어서 그들의 대뇌 피질 전두엽이 불안정하게 활성화되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그들 모두가 눈깔을 까뒤집고, 은신을 해제하며 달려들었다.
"이 쪽이다-!!"
다시금 외친다. 그냥 무의미한 외침이 아니다.
실제로, 이제 그의 스킬에 당한 플레이어들에게는 오직 한우현만이 보인다.
주위 위상학적 구조를 자연스레 한우현에게 집중되도록.
빛과 바람의 흐름을 스스로에게 유도해, 시야와 감각의 사각지대를 없앴기 때문이었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연구소의 초상연구부Paranormal Research Department 전원이 달라붙어 만들어 낸.
오직 한우현만을 위해서 설계되고 완성된.
궁극의 탱커 스킬이자, 도발 스킬.
이 세상의 모든 관심과 의식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현실 왜곡의 권능.
"그래, 날 봐야지."
그 한 가운데서, 한우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새로운 인재들을 환영해 줄 시간이었다.
49화 여긴 우리 구역이다 (3)
"죽어, 죽어, 죽어어···!"
한 여자가 두 눈에서 시뻘건 기운을 흘리며 두 개의 단검을 들고 돌진했다.
서로 길이가 다른 쌍검. 이도류.
순식간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빠지는 데에 특화된 직업인 [검귀]였다.
"흠···!"
그 움직임이 극도로 빨랐기에, 한우현도 순간적으로 인지 영역에서 놓쳤다.
-콰악
그녀가 순식간에 한우현의 뒤로 이동해, 무방비한 그의 등에 하나의 칼날을 박았다.
-[칼날 폭풍]
-[검귀의 분노]
은신을 풀었다가 다시 숨었다가, 해제했다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무수한 칼날이 나타났다가 없어졌다.
"...?"
이성을 잃은 채 난도질을 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어?"
난도질의 감각이, 피륙과 갑옷을 으깨는 느낌이 아니라.
아주 질긴 고무 덩어리를 두들기는 느낌이라.
-[절대 방어]
"역시, 뛰어나다고 해 봤자··· 나유나 만큼은 아니야."
-[포스 전투술 제 6형 : 란나찰]
"끄, 끄압?"
한우현은 물리력을 부여하며, 그녀의 목을 자신의 왼손과 연결했다.
순식간에 초월적인 강도의 [인력]과 [척력]이 그녀의 몸을 우그러뜨릴듯이 잡아끌었다.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온 검귀는 그의 앞에 무릎꿇려졌다.
"[빛의 봉인검]. 얌전히 있어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몸 전체를 옴싹달싹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으···"
"끄으···"
"미이···치인···"
아니,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의적, 암흑술사가 이미 그의 앞에 제압당해 있었다.
"씨발, 대체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균형 감각이 이상해!"
"무슨, 영역 선포기? 아냐, 성기사한테 이딴 스킬이 어딨어!"
남은 둘. 괴도, 부랑자의 상황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달려든 의적과 암흑술사가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려 했지만.
도저히 그 좁은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었으니까.
"왜, 원하던 그림이 아니라서 그런가?"
빛과 바람, 소리가 휘그라진 공간에서 한우현이 비웃었다.
[무궁의 존재감].
주위 모든 지성체들의 이목을 한우현에게 집중시킴과 동시에, 그 공간마저도 인지적으로 왜곡하는 스킬.
이건 그리 부담이 심한 기술이 아니었다.
애초에 보스전에서 그가 거의 상시로 쓰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오리지날 스킬이었기에, 포스의 소모까지 섬세하게 고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욱, 어지러워···"
"야, 씨발. 결곈지 뭔지 몰라도, 어차피 못 나가. 같이 죽인다."
"애미, 이길 수 있어야 덤비지. 지랄 하지 마. 너나···"
"몰라, 따라와라!"
짧은 말 싸움을 끝내고서는 괴도가 덤벼들었다.
-[비장의 카드, 흩날려라!]
그 주변으로 날카로운 포스를 한가득 담은 카드 다발이 꽃잎처럼 휘몰아치며.
마술사 컨셉의 도적이라는 직업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전혀 마술사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카드들에 피와 내장이 한 가득 묻어 있었기 때문에.
싸구려 고어 영화에서 나오는 미치광이 마술사에 가까운 모습이어서.
"한 바탕 죽이고 다닌 모양이군. 이유가 뭐냐?"
"이유? 고아원 새끼들 좆 같아서 그랬다, 왜?"
-카가각
그 위력 하나는 그야말로 절륜했다.
한우현의 [절대 방어] 스킬마저도 조금씩 갈려나갈 정도였으니까.
"그래, 씨발! 애초에 쓰레기 직업··· 가지고··· 오···?"
"흐."
다섯 도적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던 듯, 그 공격력은 인정해줄 만 했다.
하지만, 애초에 공격력이라는 개념은 거대한 목표를 대상으로 할 때나 중요한 개념.
플레이어 대부분은 방어력이 약하다.
그러니, 대인 전투전의 핵심은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냐]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흡성대법]
무식하게 때려박는 포스의 힘은, 강력한 물리적인 충격과 열, 빛으로 변환된다.
그를 다시 흡수한다.
엔트로피 법칙을 비웃는 현상을 일으켜, 충격량과 열과 빛이 다시금 포스로 흡수된다.
-[물리 왜곡술 : 상 전이 : 흐르지 못하라]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의 몸 전체를 흐느러뜨린다.
플레이어의 신체 대사 자체에 관여하는 것은, 저항이 크기에 어렵다.
그러니 주위 공간의 점성과 위상학적 상태를 조정한다.
끈적하게.
포스를 이용해 그 물리적 성질을 굳힌다.
-[물리 왜곡술 : 상대성 흐름 : 느림의 역설]
극한에 이른 [신경 가속]의 권능으로, 주위 공간과 시간을 분할해 파악한다.
포스가 중추 신경계 전체를 타고 가속한다.
빠르게.
더 빠르게.
빛보다 빠르게.
상대성 이론을 조롱하는 불합리.
-우웅
-우우웅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 시간적인 비틀림을 일으킨다.
그 모든 스킬들에 소모된 포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극도로 세밀하게, 필요한 국소적인 공간에만.
1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정 오리지널 스킬의 존재 의의였다.
불필요한 위력의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플레이어를 상대하기에 적절한 수준의 자원만 사용해 이루는.
주위에 어떠한 부수적인 피해도 일으키지 않는 철두철미한 계산전.
"...후우."
물론, 그게 쉬웠다는 뜻은 아니었다.
포스의 가닥을 플랑크 길이 수준으로 흐드리는 섬세함.
무수한 호르몬과 신경계 구조에 대한 이해로, 스스로의 인지 연산 능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재능.
마지막으로 순간적으로 수학적, 물리학적, 생물학적인 원리를 포스로 조정할 수 있는 본능까지.
그 무수한 능력들이 합쳐져야만 벌일 수 있는 이적이었으니까.
"...이, 게 무···스은···"
한우현이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괴도가 박제된 공간에서, 본능적으로 포스가 만드는 부조리한 권능에 저항했다.
이어서 경악한 눈빛으로 혀를 떨었다.
"훌륭했다. 이 정도 제어 능력이라니. 나유나, 홍세희 다음이야."
"헛, 소리이··· 스키이일···?"
"이따가 보지."
-[빛의 봉인검]
"...항복."
괴도의 반대편에서 쇠사슬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부랑자가, 무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야, 씨이···바아알! 너한테··· 기회! 만들어···."
"기회는 개뿔, 우리 열 명이 덤벼도 안 되겠는데···"
쓰러진 괴도가 게거품을 물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좋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수갑 정도는 차 줘야겠어."
"에휴··· 감옥 가는 건가?"
부랑자가 순순히 수갑까지 차자, 파닥대던 괴도도 완전히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한 듯.
"...씨발."
발버둥을 멈췄다.
"..."
검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죄다 잡힐 작정이라, 우연히 마주쳐 합심하기로 한 도적 계열 플레이어들.
물론 그냥 합심한 것은 아니고, 거기에 관여한 한 강력한 빌런 플레이어가 있긴 했지만.
그들이 이미 포위당하며 길드의 저력은 느꼈기에, 무조건 이길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도망조차 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와, 미친···"
"난 보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안구 신경 강화하는 거 연습 좀 하라니까···"
"아니 씨발, 난 아직 신경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그 주위에서, 다른 길드원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한우현이 전투 태세에 들어서자마자, 잽싸게 뒤로 물러나며 방어 스킬로 여파의 통제에만 신경 쓴.
딱히 그들이 야비하거나 약삭빨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길드장의 명령이었으므로.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묻지."
-콰악
"컥, 케흑···"
"두 번째 기회를 주겠다. 길드에 들어오거나, 이대로 죽거나."
그녀의 목에 박힌 빛의 쐐기를 뽑은 한우현은 스산하게 읊조렸다.
"선택해라."
"아···그···"
눈앞에서 살벌하게 빛나는 검을 보던 그녀도, 결국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가, 가입할···게요···"
"좋다. 환영한다, 신입."
언제 그랬냐는 듯.
한우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저기 가서 잠깐 반성의 시간을 가지도록."
"예, 예에···"
"자, 이 쪽으로 오시죠."
"그, 반성이란 게···"
"아, 별 거 아닙니다. 자, 수갑 잠시 차시고···"
수십 명의 길드원들이 익숙하다는 듯, 여자를 인계했다.
다시금 눈길을 돌린 한우현이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걷어찼다.
의적. 암흑술사.
가장 먼저 제압한 놈들이었다.
"다음. 너는 어쩌겠나?"
"씨··· 바알··· 좆··· 까···!"
"흠."
원래라면 한 번 정도는 더 말했겠지만.
시간이 정말로 없었다.
-[신성한 검]
칼 끝에 빛이 깃들며 열기와 예기가 더해졌다.
"어···어?"
"잘 가라."
"자, 잠까."
-콰직
의적의 심장에서 피가 푸슉 솟구쳤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나 보지만, 그럼 더 일찍 했어야지.
"히, 히익!"
"무슨 미친··· 이, 이건 살인이야!"
"잠깐, 한 번 거절했다고 죽여? 이게 무슨 짓이야!"
옆에 있던 암흑술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이미 항복한 세 플레이어도 경악한 듯 몸을 떨며 외쳤다.
"살인? 마치 처음 보는 것마냥 말하는군."
"그, 그 무슨."
"그 정도 수준의 [은신] 능력으로, 길드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 동안 너희들이 뭘 했을까?"
"씨발, 모함하지 마!"
"모함? 큭."
한우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미, 전두엽에서 흘러나오는 불안과 혼란의 감정.
그 모든 것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사람 썰고 다니고, 맘에 들지 않았던 것들 죄다 부수고, 가지고 싶었던 거 훔치고···"
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담은 포스의 빛.
"그러고 다니던 놈들이 아니었다면, 왜 길드를 피해 도망치나?"
"..."
"..."
다시 반항할 법도 했지만.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준 한우현과, 그 뒤에서 싸늘하게 쳐다보는 무수한 길드원들.
차마 다시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한우현이 표정을 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지 않나? 이제부터 잘 하면 되지."
"...잘못, 조금 한 게 아닌데."
"경중이 중요할까? 우리는 이제 일반인이 아닌데."
"뭐?"
그 말에 넷 모두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범죄자를 척결하겠다고 발표하며,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펼친 자의 말이라기에는 너무나 예상 외였기에.
"너희들은 혼자서도 강하지. 하지만, 그거면 되나? 이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
남산에 가기 직전.
더 이상 기자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기에, 그들을 모두 물린 상태였다.
그래서, 플레이어들끼리만 있을 때 내놓을 수 있는 설득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 한 두번은 재밌었겠지. 하지만 죽이고, 먹고, 부수고··· 평생을 그렇게 살 텐가?"
"...으음."
"너희들이 깽판을 치면 칠수록, 사회 구조 자체가 무너질 텐데."
"쓰레기장에서 왕 놀이를 하는 게 재밌을까?"
"그러고 노는 것보다야, 우리가 뭉친다면··· 그게 더 재밌지 않을까?"
그냥 심심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섯 도적 플레이어.
그들 중 부랑자를 제외한 넷.
회귀 전, 홍세희의 산하에 있었던 놈들이었다.
정확히는 부하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부하를 자처하는 무리였었지만.
분명 도적 계열 플레이어들 중, 최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랭커들.
"범죄자 놀이보다는, 엘리트 지배자 놀이가 더 재밌지 않을까?"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지만, 말 하는게 우리 예측이랑 좀 다르네."
"능력이 있는 친구들에게는 그에 걸맞는 대우가 필요한 법이지."
그러니, 사탕발림을 좀 더 해 줄 가치가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손을 잡고 손수 수갑을 채워준 한우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있으니, 잠깐 길드 건물에 갇혀는 있어 줘야겠지만. 힘들진 않을거다."
"그래, 우리 동기들 아냐?"
"환영해, 신입들!"
"사내 급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봐야 안다고!"
그 뒤에서 길드원들이 낄낄대며 무기를 흔들어댔다.
그 분위기에 경도된 듯, 수갑을 찬 이들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합류했다.
"예, 이름이랑 캐릭터 네임 적으시고, 길드 가입도···"
"캐릭터 네임 [늘있는WWE], [가입]."
"캐릭터 네임 [바라는게뭐냐], [가입]..."
"캐릭터 네임 [누워봐들어간다기술하나]..."
"길드장님. 남산 북쪽, 남동쪽, 남서쪽에 모두들 도착했답니다."
"좋아. 몰아넣은 놈들은?"
"만만치 않답니다."
"예상한 대로군."
"아, 그리고 그 여자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한 명이 저 멀리서 감지되었다가 사라졌었는데, 계란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답니다."
"...뭐? 사라져?"
"송과체가 감지되지 않았답니다."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쉽게 갈 수 있었는데, 송과체가 느껴지지 않았다고?
송과체의 존재감은 너무도 강렬하다. 고도의 훈련이 있어야만 그 파장을 감출 수 있다.
대체 어떻게?
"됐다. 이미 놓쳤으면 어쩔 수 없지. 놈들의 정보는?"
"대부분 마법사 계열과 도적 계열입니다."
"하긴, 전사와 궁수 계열은 존재감을 감추는 스킬이 약한 편이니··· 어디 보자, 1000명이라."
그를 보던 길드원이 잠깐 망설였다.
"처음 계산대로면 남산에 200여명 정도가 모일 거라고 하셨는데..."
"좀 많긴 하군."
하긴, 권승환과 그 친구들이 나름 작전을 짜 주긴 했지만.
애초에 초능력자들이 아닌 일반 군인들을 상정한 군사 작전이나 아는 군인들이, 이런 야전 작전을 완벽하게 세워 줄 수는 없었다.
그 작전을 실행하는 다른 두 축인 홍세희와 나유나는 당연히 전투 지휘 경험이 없었고.
"그대로 해라."
"예?"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예, 알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잠깐 휴식···"
한우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계속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아슬아슬하게 주요 빌런들을 빼돌리고 있던 놈.
한국 4대 빌런이자, 그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혔던 사이코패스.
-최종뎀 먹고 자라나버린 고아원~
-이그드라실을 위협하는 그들의 횡포~
-에션족의 행패 더 이상 볼 수 없어!
-결국 정상화를 실시하는 나 자신~
인간혐오자 담호영.
오직 플레이어들만이 정상화 된 세상의 적법한 신인류라고 주장했던.
대한민국의 모든 빌런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학살을 저지른 혐오의 화신.
"분명 이맘때 쯤부터 활동을 개시한 빌런들과 숫자를 비교하자면, 남산으로 오는 놈들이 과하게 많다..."
느낌이 왔다.
"큰 거 한 방이라도 준비하는 거냐, 담호영?"
거대한 악의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직감이.
50화 여긴 우리 구역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