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리고 난 많은 걸 알지
"길드 마스터, 여기 그 외국 애들이 보낸 자료야. 일단 명목상 한국을 본사로 하고, 걔네들을 지사로 하는 구조 설립은 모두 끝났다는데."
한우현은 빠르게 서류를 넘겼다.
최윤. 역시 최초의 빌런 사령관 답게도, 미치광이 빌런 플레이어들을 잘 데리고 놀고 있다.
보아하니 그 공격성이 지나치게 강해, 첫 날부터 날뛰려던 이들을 죄다 북한으로 끌어모으고 심지어 통제까지 잘 하고 있는 추세.
하긴 정말로 무차별 난동을 부리는 최고 수준 랭커 플레이어들이 남한에 남아있었다면 아무리 한우현이라고 해도 이렇게 성공적으로 경기도와 서울 일대를 소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북한 내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넘어 지옥도가 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세계 멸망의 위기 앞에서, 그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
꼬우면 체급을 높여서 세계적 영향력이 높은 중요한 국가가 되었어야지.
어쨌든 북한으로 넘어간 빌런 플레이어들도 그 전력 하나는 쓸 만한 미친 놈들이 많았으므로, 반 년 내로는 융화 시킬 예정이다.
겸사겸사 통일의 숙원을 이룬다고 입도 좀 털어주면서 정부한테 돈도 뜯어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리하오란. 아직 중국 공산당을 완전히 먹지는 못했지만,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은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든 모양이다.
중국 주석이 어떻게든 공산당 내부 정치 구조를 지키려고 발악을 하고 있긴 하다만.
그 무력부터가 너무나 초월적이고 일반인들은 대적은 커녕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니.
뭘 어쩌겠는가?
그러게 평소에 자기 나라 청년들에게 대우를 잘 해 줬어야지. 그랬다면 무수한 홍위병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충성했을 텐데.
하긴, 그래 봤자 어차피 반 사회적 게임 플레이어란 것들이 자기 나라에 애국심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마카오와 홍콩에 조세 회피와 투자 돌림용 페이퍼 컴퍼니도 잘 만들고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이라면 뇌식선 후앙푸셴의 목격 정보가 이따금씩 들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도사]는 유틸기가 너무나 뛰어난 직업이니 이해할 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첸 헨드릭. 2주만에 싱가포르 금융계 전체를 사실상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리 적법한 지분과 상속 관계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국가 전체를, 무력이 아니라 금력으로 지배하다니.
···무서운 놈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이 쪽에 충성하고.
그 야심도 오직 싱가포르의 지배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구태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응우옌 바오 쯔엉.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잘 평정했다.
회귀 전, 자바 섬의 침몰을 주도했던 그 산하의 이그드라실 작업장 출신 플레이어들은 이제 빌런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당당한 질서 유지자다.
다만, 의외로 베트남이 문제인 모양.
이건 의외다. 회귀 전, 응우옌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모두를 폭압적으로 지배했었는데.
그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베트남에는 눈에 띄는 유명한 지배자 플레이어가 없었기에.
베트남 출신으로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한 응우옌은 두 지역 모두를 맡기기에 적합한 인재였으니까.
이번에는 그 범죄조직 출신인 것 치고는 굉장히 유하게 행동하는 모양이다.
뭐, 지금의 진행 속도도 나쁘지 않았다.
엘리자 나바로. 필리핀은 완전히 그녀의 왕국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태평양 물류 운송이 중요하지, 필리핀의 정치 경제 사회 쪽이야 그다지 세계적으로 중요하지 않으니.
자기 맘대로 지지고 볶아도 별 문제는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미국.
···라일리 그레인저. 그녀 자신도 모르게, 은밀히 그녀를 중심으로 한 질서를 유도하고 있는 곳.
다행히 그 넓은 땅에 비하면 플레이어들의 수가 적은 편이라, 미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전미 플레이어 연합이 대충 질서 확립에는 성공한 듯 하다.
자칭 길드 미국 지부장이라는 것들은 왜 자기들이 한국 길드가 아니라 미국 정부에 협조해야 하는지 불만을 가진 모양이지만.
미국의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은 플레이어 스킬 개발에 있어 한우현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초월적인 격차를 가진 곳이다.
그러니, 대 놓고는 아니더라도 그 밑의 선에서는 최선을 다해 도와줘야지.
종합적으로, 그의 희망사항보다는 진행 속도가 느린 편이었지만.
충분히 예상 범주 내의 속도로, 세계 길드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좋아. 대충 문제는 없군."
"...내가 잘 모르기는 하는데, 그렇게 대충 봐도 돼?"
"대충 본 게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기에, 라니아의 의문을 일축했다.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가속]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이해 확장]
아직 전투가 가능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신경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단계의 운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근데 암만 생각해도 난 이 자리에 안 맞는데··· 이거 맞아?"
"어차피 일은 네가 아니라 이준범이 한다."
"으으···"
"이제 아버지랑 좀 친해져 봐라. 좋은 사람이던데."
"아니, 남의 가정사에 참견하지 마."
그... 아니, 그녀의 불평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일에 집중했다.
"쯧."
지방의 플레이어 범죄 수사 기록들을 빠르게 넘기던 도중 쓴 소리를 내뱉었다.
담호영, 회귀 전의 행적을 바탕으로 했던 예상대로 제주도에서 목격 증언이 나왔다. 역시 거기가 고향이 맞는 모양이다.
하지만 몸은 사리고 있는지, 전 같은 무차별 연쇄 살인을 벌이고 있지는 않다. 지금은 너무나 바쁘니, 한우현이 직접 신경 쓸 수는 없었다.
-그만 좀 쫓아. 네 대장놀이는 방해 안 한 다니까?
"..."
고문 살해 현장에 남겨진 편지 사진을 치우고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 한우현과 길드 자체에 대해 복수심을 품은 것 같지는 않다만...
그래도 두고 볼 수는 없다.
그 한 놈에 대한 수사와 추격은 안준과 안설에게 맡겨 놓아야지.
거기까지 생각하고선 다음 보고서를 펼쳤다.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 * *
총 인원이 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 기업체. 그 실체는 군벌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집단.
당연히, 운영하려면 아주 효율적인 체계가 필요하다.
한우현은 필요한 체계들을 대충 끄적인 기획서들을 들고 길드 대표 개발자의 방으로 찾아갔다.
"신창민. 다음 프로젝트다."
"그... 만..."
"길드 웹 페이지와 공식 앱 페이지를 만드느라 수고 많았다. 이제 길드 전투 통계 프로그램 차례다."
"...다 해 줬잖아."
"그래, 더 해 줘라. 그 다음에는 훈련 보조 프로그램도 만들어야 하니까."
"씨발! 코드도 다 짜 줬잖아! 유지 보수도 자동으로 돌아가게 해 줬잖아! 씨발 그냥 다 해 줬잖아! 대체 얼마나..."
"네가 선택한 길드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물론 보수도 충분히 주겠지만."
퀭한 낯빛으로 신창민이 중얼거렸다.
"억울하다 억울해, 너무나 억울해... 어떻게 플레이어 출신 개발자라는 새끼들이 이렇게 코딩 실력이 뒤떨어지지... 이런 새끼들 믿고 총괄 개발자 한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야..."
"믿겠다. 지금까지 잘 해 왔으니까."
"하 시발 진짜 못 해먹겠네... 형님들 나에게 정답을 알려줘..."
한우현은 그의 반발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입으로는 온갖 쌍욕을 퍼붓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도 플레이어의 초월적인 동체 시력으로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며 코딩을 하고 있었기에.
심지어, 손 뿐만 아니라 [염동술사]의 기초 스킬인 [기초 염동력 제어]를 활용해 키보드 여섯 개를 동시에 두드리고 있었으니.
저 정도 건방진 처사는 충분히 봐 줄 만 했다.
"그럼 부탁하지."
"대가리 터진 놈들에 뭘 바라냐... 쌀 팔아먹는 새끼들에 뭘 바라냐..."
"아니, 저희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신창민 수준은 바라지도 않으니 반의 반이라도 해라, 이 스크립트 키디들아."
"아, 예..."
"으, 애초에 난 컴공 학점도 바닥인데..."
대신 그 옆에서 열심히 신창민이 던져 놓은 코드들을 보충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이들.
보조 개발자들에게나 핀잔을 한 가득 놓았다.
이 놈들은 갈궈줘야 성과를 내는 놈들이었으니까, 찾아올 때마다 신창민 좀 본받으라고 말을 해 줘야 했다.
* * *
핏빛 머리칼의 여자가 그의 옆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스시헌이라니, 원래 그리 부자도 아니었으면서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대관을 해 달라고 한 거에요?"
"내가 원래 아는 게 좀 많지."
"뭐, 그렇긴 하시지... 아무튼, 대충 지금 금속 성질 연구가 어디까지 됐냐면..."
-우물우물
막 이타마에 쉐프가 그의 눈앞에 내려놓은 홋카이도산 바훈우니 군칸마키를 씹으며 한우현은 바다향을 음미했다.
역시 성게알은 북해도산이지.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여유롭게 하자고. 나도 오랜만에 좋은 데 오는 거니까."
"오랜만은 무슨, 매 끼를 온갖 파인다이닝에 쓰고 있으면서..."
"그런 거나 추적하고 있다니, 미래도 할 일이 없나?"
"나유나가 알려준 건데요? 왜 자기는 안 데려가냐고 불만이 많던데."
"하는 일도 없이 부하들만 부리고는 월급을 천 만원이나 받으면서 불만도 많군. 하던 얘기나 계속하자고."
"뭐야, 듣고 있었네요.
"물론이지. 물성과 전하도 연구까지면 너무 느리다. 일주일 내로 합금 성질 연구까지 가야 해."
"아니, 대체 독촉을 뭐 이리 심하게 하는 거야?"
정재선이 한숨을 푹 쉬며 그 앞에 놓인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대충 씹어넘겼다.
"급하니까. 이건 다음 연구 소재인데, 이래 가지고 시작이나 하겠나?"
그리 말하며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재현해 낸 미스릴의 전하 박리 성질 구조도를 내밀었다. 곧바로 귀찮다는 듯 그것을 받아 든 정재선의 눈빛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4차 전지? 길드장 씨, 이게 뭔지나 알고 논하자는 거에요?"
"정확히 초전도체를 봤을 때랑 같은 패턴의 답변이군, 정재선."
그녀가 붉은 눈썹을 한 번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좋아.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지."
"4차 전지란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지. 하지만 만약, 이 금속 특유의 저항 구조와 전하도를 활용해서···"
"잠깐만, 잠깐만. 지금 바로 전화해야겠어. 어, 난데. 신소재공학부? 걔네들 팀장급 좀 빨리 바꿔 봐."
"다른 것도 많다."
"...그냥 씨발 다 오라고 해."
"그래, 그거지. 다 해 줘야 한다고."
한우현은 표정을 구긴 정재선 앞에서 미소를 지었다.
"너희 대기업에서 그 많은 복지와 월급으로 사원들한테 그냥 다 해 주는데, 밥 값을 하게 만들어야지."
"저기요, 길드장 씨. 재벌이 돈이 썩어나는 줄 아는데, 그 중 자유롭게 유동되는 자산은 별로 없어요. 지금도 영혼까지 끌어 모은 거라고."
"더 내놔라."
"...아버지한테 여쭤보고."
"그리고 오리칼쿰, 아다만툼의 합금 연구는 아직인가?"
"연구 시작한 지 2주도 안 됐는데 합금? 일단 둘 자체의 성질부터 알아내야···"
"투자금도 더 필요하다."
"우리가 니네 저금통으로 보이나 봐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아마 될 것이다.
"내가 근거도 없이 제발 돈 좀 줘요~ 외치기라도 하나? 이 모든 게 얼마나 가치가 높은지 알 텐데?"
"아니, 그건 알아. 아는데요. 돈은 그렇다 치고요! 요구 시간이 너무 짧잖아! 뭐가 그리 급한데!"
짜증을 내는 그녀를 뒤로 하고 스시야의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평화로운 하늘을.
"시간이 없거든."
장비 아이템과 강화의 원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려면.
오리칼쿰, 미스릴, 아다만툼이라는 비 현실 금속에 대한 선행 연구가 필수적이다.
포스를 제대로 담아 작용시킬 수 있으면서, 현실의 과학 기술로 제련 할 수 있는 중간자적 물질이니까.
하지만 회귀 전에는 끝내 플레이어블 장비 수준의 장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된다.
7사도 이후부터는 최종 장비 이상의 무기와 방어구가 필요하니까.
한우현이 구체적으로 그 특성과 연구 방향까지 다 알려줬기에, 확실히 연구 자체는 성과가 빠르게 나오고 있었다.
정재선은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재 정도는 되었다. 예상보다 유능하게 일을 처리 해 주고 있었다.
역시, 재벌 3세 하면 망나니라는 이미지만 떠올리는 것은 편견에 가깝다.
...물론 인터넷에서 미개한 국민들한테 엘리트가 뭔지 알려주겠다고 기만질을 하던 녜힁을 떠올려 보면, 좀 다른 방향의 망나니기는 했지만.
아무튼, 한국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이들이 멍청하기만 할 리가 있나?
따라서 그가 느끼기에, 회귀 전보다 그 속도가 다섯 배는 빠른 듯 하다.
···하지만, 겨우 다섯 배.
"야, 연구 속도 좀 더 내 봐. 뭐라도 나오면 성과금 두 배로 올린다고."
"뭐, 지금도 잠을 못 자고 있다고? 자지 마! [엘릭서] 마시면 피로도 싹 날아가니까 자지 말고 계속 연구해!"
"안 아까워! 그거 전 세계에 수백 조개는 있는 아이템이거든? 길드에서 무한 공급 해 준 다니까···"
계획대로 되고 있지만, 그래도 느리다.
더, 더 서둘러야 했다.
* * *
정부가 아무리 기를 쓰며 언론에 압박을 한다 한들.
언론사 사주들까지는 어찌저찌 통제해도, 모든 기자들을 죄다 틀어 막을 수는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한우현이 편의를 봐주는 기자들만의 정보가 풀려나가자.
그들을 중심으로 온 사회의 이슈가 집중되자, 거대 언론사들의 적대적인 운영에도 불구하고
길드에 찾아오고 기웃거리는 기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꽤나 중요한 언론사의 핵심 데스크 소속들 조차도.
"하하, 안녕하십니까? 고려일보 소속은 처음이군요."
"예, 안녕하십니다... 사회부 기자 위재헌입니다."
"그 쪽은 센트럴 타임즈? 반갑습니다. 한우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길드 전속 기자로 배정될 예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겨레일보 사회부 기자 오주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그리고 동화일보까지 오실 줄은 몰랐군요. 여한열 기자님? 지난 번 길드 분석 기사는 잘 봤습니다. 잘 쓰셨더군요."
"아, 그... 처음에는 그런 논조가 아니었는데. 데스크에서 수정을 좀 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요. 차나 한 잔 하면서 말씀 나눠 볼까요?"
"오, 향이 정말 좋네요. 꽤 고급인가 봅니다?"
"저도 차는 잘 모르지만, 이건 정말 향긋한데."
-호르릅
기자들의 감탄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한우현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발효가 조금 잘못 된 모양. 보이차가 목으로 넘어가는 찰나, 살짝 구린 내가 느껴진다.
리하오란, 이 짱깨 새끼가. 중국 공산당 핵심 간부들이 애용하는 최상급으로 보내 준다더니.
이딴 게 최상급이라고? 사기를 당한 게 분명했다.
-탁
살짝 짜증을 실어 찻잔을 내려놓은 한우현은 다시 싱긋 웃었다.
"다름 아니라, 새로 취재하시는 분들이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으셔서 말입니다. 몇 가지 소스를 좀 드리려고 합니다."
"...소스요?"
"주신다면 감사히 적겠습니다만..."
"다름 아니라 이번 달 내로, 미래 일렉트릭에서 상온 초전도체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저희랑 협업해서요."
어리둥절한 그들 앞에 폭탄을 던졌다.
"...?"
"...?"
"...?!!!"
잠깐의 침묵과, 그 뒤의 소리 없는 경악.
"당연하지만, 저희의 초능력과 아이템... 그와 관련된 물건입니다. 아직은, 미래 연구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안이기도 하고요."
"그, 잠시만. 잠시만.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더 자세히 얘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아껴두는 게 선생님들께도 더 이득이지 않을까요?"
차갑게 웃으며 그 말을 던졌다.
"..."
"...잠시만요."
기자. 인터넷에서는 기레기라고 흔히 무시 받는 직업이지만.
그것은 언론계 카르텔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찌끄레기들의 이야기일 뿐.
대한민국 거대 언론사에서 그 주류에 속하는 기자들은 거물급 정치인과 기업인들도 어려워하는 상대다.
언론 자체가 사회 기득권의 나팔수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부를 구성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
절대적인 복종과 기득권이라는 법칙은 없다.
언론 통제는 결국 큰 방향에서의 조절과 억제일 뿐이지.
정말로 기자와 기사들 하나 하나의 의지까지 조절하고 통제하는 것은 어려우니까.
"이거... 설마, 저희가 처음 듣는 겁니까?"
"글쎄요... 어떨까요?"
그러니까, 떡밥을 던진다.
하나가 아니라, 계속 던진다.
"...앞으로 자주 오도록 하겠습니다. 한우현 길드장님. 이건 제 명함입니다."
"아, 저도..."
"혹시 앞으로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저한테 연락 부탁드립니다. 제가 다 해드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지금 연락하는 다른 기자들, 그러니까 서울 진압 작전 때 있던 친구들이..."
맛있는 정보는 언론이라는 사냥개를 길들이는 가장 좋은 수단이니까.
* * *
"재무 구조 설계는 끝났습니다. 솔직히, 자본이 워낙 많으셔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잘 했다. 완벽하군. 역시 유저 대표로 나올 만 해."
"그거랑은 상관 없는 분야기는 한데··· 크흠, 감사합니다."
한우현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그런데··· 아직 시민당, 공화당에 아는 친구들. 좀 있나?"
"예? 있기는 한데···"
"그건 왜 물으시죠?"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게임 유저 대표단 활동으로 유명세를 얻어.
잠깐이나마 시민당과 공화당에서 대변인 자리를 맡았던 이들.
어리둥절한 양주은과 임수호에게 목소리를 내리 깔며 말을 이어나갔다.
"청년 정치인들 중, 플레이어 혹은 플레이어의 친인척이 있다면 찾아서 포섭해라. 아니지. 청년 정치인 뿐 아니라 그냥 너희가 아는 모든 법조인, 정치인에게 접근해라."
"그, 길드장님··· 대변인 자리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리 거물이거나, 중요한 자리가 아닙니다."
"저희 말고도 대변인 해 봤던 사람이 수두룩한데, 저희의 말을 그리 들을 것 같지는."
"아직 일반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군. 기술 하나를 알려주지.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그 움직임에 따라 나오는 뇌파의 흐름을 느껴라."
-스윽
한우현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동시에 스스로의 표정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바꿨다.
"화를 내 봐라. 슬퍼해 봐라. 짜증을 내 봐라."
"...이건."
"콜드 리딩 같은 겁니까...?"
매우 강렬한 감정의 파장을 느낀 둘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이걸 '정신 감응'이라고 부르지. 플레이어라면 더 잘 느낄 수 있지만, 연습한다면 일반인에게도 쓸 수 있다."
"설마,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건가요?"
"그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뇌파는 인간의 뇌 활동을 모두 드러내는 신호가 아니니까. 그냥 감정, 표층 의식의 분출 정도다."
한우현이 정신 감응 기술의 한계에 선을 그었지만, 둘 모두 그것에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감정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심리전과 정치전에서 세 수는 앞서 간다는 뜻이었이니까.
"...이걸 저희한테 알려주는 이유가."
"당연히 쓰라고 있는 거지. 플레이어가 아니라, 청와대와 여의도에 있는 것들한테 말이다."
다시 뒤돌아, 의자에 앉은 한우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희는 길드, 아니 모든 플레이어들을 통틀어 몇 없는 정계 경험이 있는 플레이어들이다. 동시에 캐릭터 스펙이 준 랭커 급인 유일한 전직 정치인이지."
"그, 전직이라고 하기도 뭐하다니까요."
"게다가 지금 시민당이랑 공화당 모두 우리한테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그러니까 너희의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라. 길드는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다. 아, 그래. 이렇게 생각하지."
한우현이 장식용으로 벽에 걸어 놓은 그의 칼과 방패에 눈을 돌렸다.
"우리는 반란군이다. 그것도 이미 반란을 성공했지만, 정부가 억지로 그걸 숨기는 반란군."
"···맞는 말이긴 하네요."
"군사 정권 시절 헌병들 흉내라도 내란 겁니까?"
"그 이상. 너희는 더 이상 시민당, 공화당 안에서 여의도 청년 호소인 나부랭이들이 아니다."
"···"
"···"
"너희는, 우리는. 절대 갑이다. 전 세계에서 그 누구도 이제 우리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갑... 아예 입장을 완전히 다르게 들어가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당당하게 위세를 부려라. 그들을 압박해라. 내리 눌러라."
"···알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계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너무 많은 걸 요구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인맥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최소한의 보험은 깔아서 나쁠 게 없겠지."
지금의 정부는 오래 갈 수 없다.
가만히 있어도 그러할진데, 자꾸 반항하려는 기색을 보인다.
거기까지는 괜찮다만, 반항을 넘어서 그 이상의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곤란하다.
그러니 대비를 할 필요성이 있다.
어지간하면 내버려 둘 생각이지만, 어지간하지 않은 수준이라면...
새로운 질서를 강요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직접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세워야 할 지도 모르니까.
56화 던전 속으로 (일러스트)
"일어나라."
"으, 으으, 으으으··· 어, 엄마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얼음 뿌려라."
"네! [기초 원소 제어 - 냉기]!"
"크아압! 흐아악!"
온 몸을 파들파들 떨던 남자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흐리멍텅한 눈을 떴다.
"...어? 여긴··· 어디?"
"반갑다. 2주 만이지?"
"...아."
남자가 자기 몸을 더듬거렸다. 하얀 수의를 입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게 뭐야···"
"기억이 안 나나? 내가 도와주지."
한우현이 칼과 방패를 높이 들며 신호를 보냈다.
"..."
그 멍한 눈에 점차 공포가 깃들었다.
"하, 으, 아아? 아아아?"
그 앞에 도열한 다른 길드원들이 무표정하게 하나의 사진을 펼쳤기 때문에.
심장이 파괴된 째로, 길드 냉동 창고에 보관된 그의 표본 사진을.
"넌 죽었다. 2주 동안. 그리고 지금, 사제의 [부활] 스킬로 부활했지."
"자, 잠깐, 잠깐마안···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
"너에게 세 번째 기회를 주겠다."
칼과 방패에 하얀 기운이 어렸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절단하는 기운이.
"마지막 질문이다. 길드에 들어오겠나, 아니면 다시 시체가 될 테냐?"
"...시, 싫어."
"음?"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비척거리며 기어 온 그가 한우현의 발등 앞에 얼굴을 파묻었다.
"뭐든지,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바알···"
"그래. 환영한다, [어차피못접잖아]."
한우현은 손을 내밀었다.
"저기 가서 수액이나 맞으면서 잠시 쉬도록."
사실, 회복력이 극도로 뛰어난 플레이어의 특성상 굳이 맞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 미숙한 것들에게 정신적인 회복 시간은 필요했다.
"다음. 이제 절반쯤 해치웠나?"
"네, 딱 그 정도입니다."
현재 냉동 창고에 보관된, 끝까지 저항한 시체들의 수는 총 800구 가량.
그 중 절반을, [부활] 스킬을 쓸 수 있는 사제들을 총동원해 조금씩 살려냈다.
워낙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긴 스킬이라, 한 번에 처리하기 어려웠기에.
"다행히 공식 출범식 전까지 죄다 해치울 수 있겠군. 열 명만 더 살리고 가자."
"네. 다음 프로필입니다. 캐릭터 네임 [스테고사우르스]..."
"그 다음 캐릭터 네임은 [핵무기를발명한건]..."
"그 다음 캐릭터 네임은 [에인션트는안돼]..."
다행히 한우현의 예측이 맞았다.
끝까지 발악했던 미치광이들도, 죽음에서 돌아오는 끔찍한 경험을 맞이하자.
그 순간에는 반항은 커녕 자기 의지조차 제대로 부여잡지 못했으니까.
물론 정말로 끝까지 반항했던 놈들도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 수는 100명도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극도로 공격성과 광기에 절여진 미치광이들.
그 정도는, 없어도 된다. 필요 없다.
대신 생체 실험 재료들도 필요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써먹어 주는 수 밖에.
"일어나라."
"...아···으···"
"너에게 세 번째 기회를 주겠다."
그리 생각하며, 할 말을 반복했다.
* * *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가.
세상에 플레이어들이 나타나고, 딱 한 달이 지났다.
-펄럭
잠실.
공식 명칭 루시드 길드. 대부분이 그냥 길드라고 부르는 집단의 사옥.
그 곳에 플랜카드가 내걸렸다.
그와 함께 무수한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찰칵
-찰칵
그 뒤를 무수한 기자들과 카메라, 드론들이 따랐다.
"예, 오늘부로···"
"비공식 질답은 언제부터···"
"CNN입니다. 미국의 플레이어에 대해.."
"하나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든지요. 아직 시간이 많으니···"
화려한 복장으로 도열한 플레이어들이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몰려나왔다.
"거기, 질서 지켜요!"
"기자들 다 자리 정해져 있으니까 아무데나 앉지 마시고···"
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언론사 인파.
본격적으로 길드의 통제가 사회에 퍼지며.
도저히 더 이상은 언론을 틀어막을 수 없는 정부가 길드 정보 통제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정각···"
시간을 확인한 화려한 복장의 여자가 주위의 마법사 플레이어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선 그 스스로도 마법봉에 빛을 맺혔다.
-퍼벙
-퍼버벙
라니아가 마법봉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화려한 빛과 소리가 주위를 크게 울렸다.
어떤 살상 위력도 없는 순수한 효과.
화려한 현실 왜곡 스킬에 특화된 [마법소녀]의 특기 중 하나였다.
"길드 공식 출범식을 시작합니다!"
-짝짝짝
-짝짝짝
동시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 가장 앞에 있는 화려한 갑옷 차림의 성기사에게 집중되었다.
길드장, 한우현에게.
-치익
연단에 선 한우현의 뒤로, 세 개의 스크린이 동시에 활성화 되었다.
북한, 중국, 인도네시아를 보여주는 화면이었다.
그 화면에 최윤, 리하오란, 응우옌 바오 쯔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비슷하게 각 국가의 수도 지역에 건물을 하나 차지하고, 플레이어들이 도열한 채 화려한 스킬들을 뽐내며.
"먼저, 저희 길드의 각 지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소개를···"
불과 한 달.
그 짧은 시간만에, 전 세계에 그 존재감을 너무도 강력히 뿌리박아버린 무력 단체.
그들이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구조를 굳히고, 발표하기 시작한다.
"후···"
그 광경을 중간 쯤 되는 자리에 앉은 채 보던 허무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저 현장의 중심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너무도 긴장되는 순간이었기에.
국정원 대민심리전단부 제 1 팀장 허무성.
···라는 거창한 직위는,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고 성능 통계 AI를 이용해 대 국민 여론 동향 추이를 분석하는 일개 팀원일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국정원 요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하는 일의 대부분은 여론 분석 AI가 잘 돌아가는지 입력 가중치를 체크하면서 멍때리는 게 다였다.
그러니까··· 그 시간에 좀 놀았다.
그가 어릴 적부터 계속 해 왔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돈 없으면 적, 돈 있으면 동지라 외치던 그들!
-이제 그 말에 스스로가 갇혀버리리라~
-역지사지, 그들이 혐오했던 그 자리에 서보게 되리!
-거짓된 웃음이 그들 스스로를 조롱하게 되리라!
-노래 좋고~ 박자 좋고~ 아, 진짜 너무 날먹 날먹 신나는 날먹인데···
평화로이 음악을 들으며 월급 루팡이나 하는 공무원 생활.
일반적인 공무원보다 월급도 많고 이것 저것 수당도 잘 챙겨 줬기에, 나름 만족스러운 직업이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뭐, 뭐야 이거?
-내 본캐 수정학자? [고래가되고싶은회충]?
-뭔 미친···
하지만 처음의 당황은 묻혀버렸다.
-그 죄를 물어, 국무위원장을 처형한다!
-우리는 세계 유일의 플레이어 집단, 길드다.
더 미친 일들이 일어났기에, 그에 집중하는 데에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어서.
곧이어 국정원 전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상부에 그의 존재를 알렸다.
-뭐? 자네가 플레이어라고? 레벨이··· 274?
-뭐 이리 높아? 야근이 잦아서 게임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아··· 흠, 그런 건가. 뭐··· 지난 일이니 문제 삼지는 않겠네. 어차피 자네 업무는 잘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자네가 할 일이 좀 바뀔 가능성이 높네.
-그, 기왕이면 그냥 하던 일 계속 하면 안 될까 합니다만···
-글쎄··· 일단, 국정원에 계속 있고는 싶나?
-네, 여기가 적성이 맞다고 생각해서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일단 알겠네.
당연히 국정원 내 유일한 플레이어였던 그는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뭐 이상한 거 시키는 건 아니겠지··· 난 싸움 같은 건 죽어도 못 하는데. 에이, 설마···
그 설마가 맞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무성 팀원··· 아니, 팀장. VIP가 널 호출했다.
-네? 부장님, 팀장이라뇨? 그리고 VIP?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이견을 받을 시간이 없다. 네 기존 업무 분장은 오늘 내로 다른 팀원한테 빨리 인계하도록.
-그리고, 네 캐릭터 정보를 최대한 자세히 써서 나, 아니 국정원장님께 바로 제출해라.
-이건 휴민트 관리법 및 적대 집단 잠입에 대한 첩보론이다. 일주일 내로 외우도록.
-자, 잠시만요! 휴민트요? 잠입? 전 단순 행정직입니다!
-그건 지금까지였고, 앞으로는 좀 다른 일을 하게 될 거다.
-안 돼요! 못 합니다! 블랙 요원 같은 거 할 줄 모릅니다! 애초에 그런 거 하려고 여기 들어온 것도 아니고요!
-시간이 없어! 지금 한국의 치안 체계가 완전히 그 놈들한테 삼켜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마라. 넌 공식적으로 파견되는 화이트 요원이니까.
-아니, 화이트라고 해도, 애초에 요원 훈련 같은 건 받지도 않았는데.
-조용! 국가 비상 사태야! 이미 국가 안보 주권이 반 쯤 넘어간 거나 다름 없단 말이다!
-씨발, 씨발, 씨발··· 잠깐,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오래는 못 준다. 오늘 내로 부탁하지.
그는 애국자는 전혀 아니었지만, 자기 직장에는 만족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국정원에서 심상치 않은 업무를 요구할 낌새를 보이자.
-젠장, 그만둬야 하나? 근데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공무원 그만두면 뭘 먹고 살아. 마누라랑 자식들은?
-플레이어가 되었다곤 하지만 길드에 들어가면 무조건 스킬로 싸움을 시킬 거 같은데... 난 싸움은 못 해.
-어쩌지...
차마 그것을 곧바로 거절하지는 못했지만,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미스터 허? 안녕하십니까.
-외국인? 저 영어 잘 못 합니다만···
-제가 한국어는 잘 하니까 괜찮습니다. 실례지만 지금의 대우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예?
-선생님께서는 잘 알지 못하실지 몰라도, 지금 선생님의 가치는 정말로 높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 정부에서 너무 그 쪽을 푸대접 하는 것 같군요.
-...당신들 누구야.
-정식으로 소개드리겠습니다. 미 중앙 정보국 한국 지부장입니다.
-미, 미 중앙 정보국? CIA?
-예, 맞습니다. 저희는 선생님께서 정말로 뛰어난 요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저는 그런 거물이 아닙니다만···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그냥 몇 가지···
그런 성격의 그가 결정을 내리게 해 준 건 당연히,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전 세계의 경제 지수가 흔들리는데, 달러화가 많은 게 안정적이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게나 많이 주신다고요?
-그리고 원하신다며 언제든··· 아예 오셔도 됩니다. 미국은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 아닙니까? 저한테 이렇게 접근해서, 매수하려 하시면.
-당연히 동맹국이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온건한' 수단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외부 요인.
세계 최강대국의 정보 기관이 직접 흔드는 유혹.
그 앞에, 어차피 얼마 있지도 않은 애국심 따위는 날아가 버렸다.
안 그래도 미치광이 초능력자들 소굴에 기어들어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미국 정도면, 든든한 까지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자기 안전 정도는 보장해 줄 뒷배는 되어 줄 것 같았다.
"예, 그러면 발표는 이만 마치고··· 질답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다과도 준비해 놓았으니 편히 계시다가 가시죠."
그렇게 한참이나 생각을 이어나간 끝에, 뭐라고 길드장이 말하는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허무성은 비로소 길드 공식 출범식의 발표가 끝났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길드장이 그의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음도.
"그럼··· 아, 당신은?"
"아, 네!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최대한 정중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쓰며, 허무성은 벌떡 일어났다.
"그래, 국정원 소속이라고 했지?"
"네··· 공식적으로는 길드 사회 활동 자문위원입니다만. 저를 정부 직통 핫 라인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좋아. 너무 들쑤시고 다니지는 말라고."
"예, 아무래도 좀 불편하시겠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불편···? 흐음···"
주위를 살짝 둘러본 한우현이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 행동에 허무성은 살짝 긴장했다.
뭐지? 내가 뭔가 실수를 했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의 수장과 만나는데 실수를 안 할 수가 있나. 내가 모르는 실례를 한 것이겠지? 젠장, 뭐라고 사과하지?
"넥타이가 좀 불편하군. 삐뚤어져 있잖아?"
"...?"
"자. 이제 됐어."
"아, 그,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까지야. 그럴 수 있지.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악수를 하며 허무성은 생각했다.
국정원 상부에서 경고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너무 긴장하거나 떨면서 대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네, 제가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최대한 협조 도와드리겠지만··· 제가 보는 건 모두 보고해야만 한다는 것은,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충분히 이해하고 있네. 그리고··· 보고는 당연히, 한국 정부를 말하는 거겠지?"
"...? 네, 그렇습니다만."
-피식
한우현이 비웃자 허무성은 살짝 당황했다.
저 짧은 대화에서 웃긴 지점이 딱히 있나?
그의 당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우현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이 귀 끝에 닿을 정도로.
"한국 말고, 미국 친구들한테도 잘 말해주라고."
"...?!"
그대로 굳어버린 허무성을 내버려 둔 채 다른 기자들에게 발걸음을 돌리며, 한우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국 놈들, 빠르군. 미국으로 가장 많은 한국인 플레이어들을 빼돌리는데 기여한 자. [고래가되고싶은회충]을 벌써 포섭한 상태였다니.
생각난 김에 미국에서 자의적으로 가입해서 무리를 꾸리고 있는 자칭 글로벌 서버 지부장들에게도 귀뜸을 해 줘야겠다.
라일리 그레인저에게 절대적으로 협조하라는 은근한 협박을.
그리고선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9분.
딱, 그가 설계한 대로의 시간이었다.
-호릅
리하오란이 게임 폐인이었던 양반이 뭐 이리 입맛이 고급이냐고 불평하며 새로 가져다 준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이 맛이었다. 고아하게 발효된 갈색의 향취. 끝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은근한 풍미.
다시 리하오란의 명칭을 짱깨새끼에서 의동생으로 수정한 한우현은 정각이 되기를 기다렸다.
-우르릉
-쿠구궁
그리고 얼마간 뒤, 결코 크지는 않지만 작지는 않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어? 어? 뭐야 이거?"
"지진?"
"딱히 예보도 없었는데?"
"다들 조심하세요!"
"야! 설마 [지진] 스킬 쓴 애 있는 건 아니지?!"
"여기 건물이 몇 갠데 궁극기를 써! 말도 안 되는 소리!"
놀란 기자들과 플레이어들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쿠릉
"어, 멎었다..."
"뭐야, 그냥 약진이었네."
"하긴 한국이 지진 완전 청정 지역은 아니니까."
이내 그 소리와 진동이 잦아들자, 다들 진정할 수 있었다.
딱 여섯 명만 빼고.
이 현장에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길드의 핵심 간부들.
"자자, 여기로들 다시 오세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 이쪽으로오···"
"자리로들 돌아가요! 지금부터 진짜 발표 시작하니까!"
라니아, 나유나와 홍세희, 권승환이 침착하게 길드원들과 기자들을 다시 제 자리로 유도했다.
"다음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중국, 인도네시아도 준비 됐답니다!"
뒤이어 차정훈과 김재승이 발표 화면을 다시 활성화시키며, 단상 앞으로 모였다.
"어? 저기?"
"뭐야?"
어느 샌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사옥의 바로 앞, 기자 회견장의 단상이 있던 곳.
그 곳에 새로이 나타난 어두운 벽돌로 이뤄진 널찍한 구조체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자연스레 걸어간 한우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하나를 더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울, 베이징, 자카르타, 뉴욕.
각 서버 지역에서의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사도 던전으로 입장할 수 있는 문이 생성되는 곳.
그 저주받을 던전의 아가리를 보며, 한우현은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렸다.
20년 전.
너무도 늦게 공격대원으로 합류했던 그가, 처음으로 던전에 들어서던 순간을.
한낱 게임 폐인에 불과했던 그가 삶의 목표를 세우고 공격대장으로 거듭났던 순간을.
이번에는 기필코, 반드시... 그녀를 잃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며, 울컥 올라오는 후회의 소용돌이를 우겨 삼키고선 입을 열었다.
"던전 공략 계획입니다."
경악에 빠진 기자들의 질문과 반응을 무시하고, 그 말을 이어나갔다.
"던전이란 괴물들이 사는 미궁이자, 길드의 설립 목표이자, 저희 모든 플레이어들의 존재 의의입니다."
앞으로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던전이 열린다.
그리고 한 달 내로 보스를 죽이지 못하면, 그 안에서 힘을 잔뜩 쌓아서는 강해져서 튀어나온다.
"오늘, 첫 번째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공략할 예정입니다. 제가 직접."
그러니까, 공략은 무조건 서둘러야 한다.
57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1) (일러스트)
명멸하는 전등들이 흔들리는, 망가진 기계 실험실들이 이어진 복도 한 가운데.
"[공격대 보조 지능]."
-위이잉
한우현의 손에 둥그런 구체 모양의 기계가 나타난 후, 회로가 돌아가는 소리를 내며 떠올랐다.
"활성화."
-삑
-삑
-삐비빅
기계음과 함께 그 구체의 카메라에 붉은 빛이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공격대장님. Boss-Raiding Add-on 온라인. 정보를 입력하십시오."
"공격대원 수 1명, 목표 보스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보스 생성일은 오늘."
"캐릭터 정보 확인···"
전투 보조 인공지능 드론.
미 국방부가 연구 시간이 너무도 부족하자, 보스 최초 격파 보상으로 나온 AI 핵의 상세 분석을 포기하고.
그냥 그대로 활용하기로 결정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보스 공략을 도와주는 드론의 완전 활성화를 마친 뒤, 고민에 빠졌다.
"다음 보스가 나오는 건 한 달 뒤···"
한우현은 홀로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첫 번째 사도야 나 혼자서도 잡을 수 있다만··· 한 번 잡는다고 끝이 아니지. 어차피 부활하니까..."
한 달에 하나씩 열리는 열두 던전.
격파 되지 않은 채 또 한 달이 지나면, 이 세상의 에너지를 충분히 흡수한 보스들이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다.
그 산하의 몬스터 군단들과 함께.
심지어 죽인다 해도 마찬가지로 한 달이 지나면 부활하니, 꾸준한 격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도는 서열이 높아질수록, 압도적으로 강해진다.
한우현 혼자서도 그 이후 서열의 사도 보스와 싸우면서 '버틸 수는 있지만', 시간 안에 그들의 포스 보호막을 깎아서 '격파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제 2 사도부터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해야 한다.
···강인한 정신력과 애국심을 가진 특수 부대원들이나, 잠입 요원들도 최소한 1년의 훈련은 거쳐야 제 몫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물며, 그 정신적으로 나약한 플레이어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 현실에서의 보스 레이드를 잘 따라올 수 있을까?
회귀 전에도 태반은 보스와 마주하면 벌벌 떨며 무적기와 회피기만 쓰면서 도망만 다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진정 보스와 제대로 싸울 수 있었던 플레이어들은 전 세계에 100명도 되지 않았었다.
"...약한 생각은 하지 말자."
안 돼도, 되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멸망을 막기 위해.
"···분석 완료. 추천 인원은 입장 최대 한도인 10명입니다. 홀로 격파 자체는 가능하나, 공격력이 약한 성기사 단독으로 격파하려면 시간적, 공격적 전략 피로도가 크기에 추천하지 않습니다."
"확정된 사항이다. 현 상황에서 최선의 전략을 분석해라."
"확인. [성기사]의 최선 공격 전략을 구상합니다. 추천하는 전투법은 [성기사 전투 교리 - 대 괴수 방검술]이며···"
"동작 한 번씩 재생."
"확인. 재생합니다..."
-휙
-휘릭
-휙
현실의 무술과는 아예 그 근간부터가 다른 동작들. 기괴할만치 크고 어지러이 휘두르는 검과 방패.
-후욱
-휘익
-시잉
초능력자 플레이어들도 따라하기 힘들 정도로 궤도가 불안정한 검과 방패의 움직임.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초인연무부. 그들이 무수한 히어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의 동작과 현실의 무술을 조합해 만들어 준 동작들.
"...스승님."
허망한 인상의 한 동양인 여성의 얼굴이 한우현의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그 분도, 이번에는 지켜 드리리라.
대충 그 동작들을 한 번씩 반복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다시 앞으로 갈 테니 길을 안내해라."
"내비게이팅.... 보스룸으로 인도합니다."
"가면서 세부 전략은 천천히 안내하도록. 탱커로서 천천히가 아니라, 딜링에 집중한 속전속결 전략으로 설계해라."
"확인. 별도 연산 진행 중입니다..."
"다소 무리인 전략이어도 괜찮다. 숙련도가 있으니..."
"확인. 유사한 딜탱 직업인 [대전사]와 [흑기사]의 전투 전략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세부 방안을 구상합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끼릭?
-서걱
-끼리리릭?
-콰직
-끼이잉? 끼이익!
-서걱
앞에 나타나는 기괴한 형상의 로봇 기계들. 망가진 거대 공장 실험실이라는 테마에 맞는 몬스터들을 무감하게 썰어넘기며.
이것들은 잡몹에 불과했으며,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서서 처 맞기만 해도.
간지럽지도 않은 수준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기에 벌이는 행태였다.
"분석 완료. 지속적인 방어를 반복하며, [기계 팔]과 [레이저 요격]을 회피 및 방어하며 움직입니다. 패턴들이 멈출 때마다 [입체 기동]으로 빠르게 접근합니다. 근접 후 극딜기인 [광신의 광검]으로 포스 보호막을 깎습니다. 모든 보호막이 소모되었을 때 궁극기 [바위에 꽂힌 검]으로 핵을 격파합니다."
"다 아는 내용 그대로지만, 어쨌든 고맙다."
"대전략 입력 완료. 상세 전투 분석으로 넘어갑니다···"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게임 설정 상 한 사악한 과학자가 세계수의 영혼 일부를 뽑아, 포스 순환 영구 동력 장치의 재료이자 거대 공장 실험실의 관리자로 만들어 낸 거대한 인공지능.
그를 이용해 자동화 연구 공정을 운영하려다가, 세계수의 영혼과 과학자가 입력한 자의식이 충돌하며 내부에서 오류를 일으켜 실험실 전체가 던전으로 변해버렸다.
일그러진 공장을 뒤틀리게 가동해, 포스 에너지와 기계 자원들을 수집하고, 로봇 몬스터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모든 지성체를 말살하고자 하는 미쳐버린 기계 신Deus Ex Machina.
그를 격파하는 것이 배경 스토리였다.
거창한 설정에 걸맞게도 실로 무시무시한 덩치와 성능을 자랑했다.
강대한 핵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무수한 기계 팔 촉수들에 포스 에너지를 실어 적들을 섬멸하는 문어 형상의 기계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인 게임 상에서는 그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극 초창기에 나온 최초의 사도 보스여서, 2020년 즈음에는 최약체 보스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실에서도 가장 약했다.
-생각보다 약하군요.
-이 정도면, 이론상 오리지날 스킬들을 통달한 레벨 290 이상의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혼자서 격파가 가능합니다.
-물론 패턴을 파훼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를 한 순간에 쏟아붓는, 소위 딜찍누로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보스들도 이 정도라면 좋을 텐데요.
하지만, 1 사도는 현실이 게임이 되고 나서 불과 한 달 만에 등장하는 존재.
다른 사도들에 비하면 약하지만, 아직 게임 능력에 적응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에게는 전혀 약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직 모두의 훈련도가 부족한 현 시점에서는 한우현이 홀로 들어가는 것이.
단순히 길드와 그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 효율 상으로도 맞았다.
-쿠우우
한우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웅장해 보이나, 지직거리는 합선과 찌그러진 융합 반응로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문 앞에.
"역시 그대로야."
미궁이라곤 했지만 실제로 그 내부 구조는 미궁보다는, 블록으로 나뉘어진 지하 통로에 가까웠기에.
무너진 동력실의 찌그러진 문 앞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연맹, 연금술 신장, 델리만쥬, 새싹물약, 거대곰, 만렙 축복, 이벤트 축복... 버프는 이미 다 발랐고."
너무도 오래된 게임의 역사로 인해, 난잡한 스파게티 코드 마냥 쓰잘데기 없이 많은 버프들.
현실에서는 그 효과가 게임에서보다 약화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더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능력치를 부여한다.
"입장한다."
-난이도를 선택해 주십시오.
-난이도 : 현실Realism
"어차피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웃기기는."
실제 게임에서, 보스의 난이도는 다섯으로 나뉜다.
이지, 노말, 하드, 카오스, 익스트림.
차이는 체력 하나밖에 없는 실로 무성의한 난이도 구분.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모든 난이도가 사라지고 하나의 난이도만 남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된 지는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다.
게임사에서도 저런 난이도는 당연히 만들지 않았을 텐데.
미심쩍은 일이다.
-입장 인원을 선택해 주십시오.
-입장 인원 : 1명
"예."
-파티가 없습니다. 파티를 생성하십시오.
-파티 생성 : 파티장 : 아서 (성기사)
"예."
-정말로 보스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
-주의! 현실Realism 난이도에서는 데스 카운팅 후의 부활 기회가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실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 / 아니오
"예."
-주의! 현실Realism 난이도에서는 모든 보스 몬스터에게 제압기, 봉인기, 무력화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보스 몬스터들은 순순히 그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예 / 아니오
"예··· 이딴 쓸 데 없는 건 그대로 따라가나."
계속 해서 예, 예를 기계적으로 외치던 한우현은 짜증을 느꼈다.
애초에 여기까지 와서 던전 보스 룸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는 플레이어라면.
당연히 보스 레이드를 하러 온 것일 텐데, 뭐 이따구로 무의미한 질문이 많단 말인가?
-정말로 캐릭터 네임 [아서]의 파티의 보스 룸 입장이 맞습니까?
- 예 / 아니오
"예."
-멸망기신에 맞서는 그대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부디 세계수의 가호가 함께하길···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보스 룸 입구가 마치 공간이 왜곡되듯이 쭈욱 늘어나며 한우현을 삼켰다.
시공간이 늘어지는 듯한 감각이 한참이나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시야가 회복되자, 모든 것이 망가진 듯 뒤틀린 부품과 기괴한 형상의 기계 장치들이 온 천장, 바닥, 벽면에 빼곡히 박힌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기계 장치와 부품들은 모두 만들어진 연식이 다른 듯.
일부는 낡고, 일부는 미래적이었으며, 일부는 삭았고, 일부는 번쩍거렸다.
그리고 그 드넓은 원형의 공간 한 가운데.
2층 건물만한 크기의 거대한 구형의 기계 핵이 허공에 고정된 채,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무수한 기계 팔과 촉수들을 늘어뜨린 채로.
-까드득
제 멋대로 튀어나온 총구 하나를 밟아 부러뜨리며, 한우현의 발걸음 소리가 텅 빈 동력실 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레벨 : 200]
"...침입자 확인."
-철컥, 철컥, 철컥
-번쩍!
천천히 회전하던 기계 핵이, 한우현을 향해 원형의 렌즈를 고정하며 그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커다란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며 붉은 색의 빛을 내뿜었다.
"목표 제거 프로토콜 가동."
-위이이이잉
-기이이이잉
동시에 차가운 포스의 흐름이 그를 둘러싸고 폭발하듯이 퍼졌다.
오직 모든 지성체의 말살과 정화만을 추구하는 의지를 담은 포스.
"그놈의 눈 번쩍은···"
그리 읊조리면서도 한우현은 온 몸에 힘을 끌어올렸다.
-[신념의 힘]
-[내일의 안녕]
-[빛의 격려]
-[빛의 분노]
-[신성한 결속]
방어력과 공격력을 높이는 성기사 플레이어 스킬. 기본 버프들이 순식간에 한우현을 둘러쌌다.
하지만, 이는 기본 중의 기본.
이것만 믿고 있으면, 보스의 첫 공격에 그대로 으깨질 것이다.
-[포스 전투술 제 2형 : 신진대사 초월 : 미토콘드리아 증폭]
ATP라는 생명 에너지의 생산자, 미토콘드리아들이 포스에 결합하며 그 활동을 가속한다.
-[포스 전투술 제 2형 : 신진대사 초월 : 세포 수용체 가속]
-[포스 전투술 제 2형 : 신진대사 초월 : 체액 가속]
무수한 호르몬과 전기 신호를 흡수하고 발산하는 세포들, 그리고 모든 체순환계의 흐름이 그 행동을 초월적으로 가속한다.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가속]
신경 세포들의 줄기체들을 이루는 랑비에 결절들이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포스를 담은 신호를 가속한다. 세상이 느려진다.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자아 세뇌 - 공포 망각, 공격성 증폭, 분노 조작]
대뇌 전두엽에 용기와 의지, 분노가 깃들며 전신의 교감 신경이 활성화되었다.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이해 확장]
동시에, 대뇌 중추 신경계 내부의 뻗어나간 미세 신경 구조들이 조직학적으로 그 모양새를 반복한다.
프랙탈 구조로 작아지면서 그 주인의 의식과 인지와 연산 능력을 무한히 증폭한다.
-[포스 전투술 제 7형 : 역장 외골격 : 흡수 장갑]
한 없이 느려진 시간의 세상 속에서, 뉴턴 역학을 조롱하는 물리적인 힘의 구조체가 성기사의 갑옷을 둘러싼다.
-[포스 전투술 제 9형 : 응급 신체 대사 : 전투 마약 분비]
격렬한 전투와 스트레스 상황에 뇌를 적응시키는 아드레날린Adrenaline과 도파민Dopamine이 폭발적으로 분비된다.
동시에 인간이 만든 가장 순수한 자극제Stimulant인 벤조메틸렉코닌Benzoylmethylecgonine과 알파-메틸페네틸라민Alpha-methylphenethylamine이 뇌 내에서 포스와 결합되며 인위적으로 합성된다.
-치익
마지막으로 미리 주사기에 정주해 놓은 [엘릭서]를 빠르게 경동맥에 주입한다. 빨라진 혈류 순환과 함께 그것이 뇌혈관장벽Blood Brain Barrier을 뚫고 뇌척수액에 퍼진다.
-부륵
-부르륵
엘릭서를 바탕으로 네 성분이 뒤섞이며 모든 부작용을 제거하고 오직 순작용만을 강화하는, 생화학과 생리학 기본 원리를 비웃는 초월적인 물질로 합성된다.
-엘렉사트로핀Elixirtropine 합성
한우현의 모든 체내 대사가 오롯이 전투의 광기를 향한다.
그 모든 과정이 0.85초만에 이뤄졌다.
"제거 프로토콜 가동 개시."
-그우우웅
-키이이잉
-우우우웅
"패턴 분석 시작해라. 그리고 이제부터 브리핑 속도 20배로."
"확인. 브리핑 가속 20배. [신경 가속]으로 이해를 권고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그 거대한 동체를 움직이는 것을 보며, 혀와 고막의 움직임을 점차 가속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이해와 발음 속도로는 보스 패턴 브리핑이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그리고, 찰나가 지나기도 직전.
"기계 팔 패턴 예측. 전방 1시, 7시, 10시 방향에서 순차적으로 0.01초, 0.03초, 0.08초 후 발생 예정."
어쩐지 모르게 저 보스 몬스터를 축소한 듯한 모양새의 전투 보조 드론이, 쏘아붙이는 듯한 빠르기로 기계음을 내뱉었다..
"...최대 경계 모드 온라인."
그 기계음이 채 다 이어지기도 전.
굵기가 건물 기둥만한 세 개의 거대한 기계 팔이, 끝에 달린 제 각기 다른 무기를 빛내며.
무지막지한 전기 에너지를 플라즈마와 함께 방전시키며 한우현을 조준해 가리켰다.
-콰과광!
-콰과광!
-콰과광!
동시에, 내리꽂혔다.
초월적인 물리력과 포스를 실었기에.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초월급 스킬이고 나발이고.
반응조차 하지 못했을 속도로.
58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2)
-카가가각...!
당연히 한가하게 멍을 때린다고 공격에 무방비하게 맞는 병신 짓을 하지는 않았다.
-[절대 방어]
-[포스 전투술 제 1형 : 벡터 재조정 : 스칼라 흡수]
-[물리 왜곡술 : 운동정역법 : 운동량 산란]
순식간에 겹쳐지는 무수한 방어 스킬들.
그를 통해 기계 팔 하나는 방패로 정면에서 막는다.
기계 팔 둘은 다른 팔꿈치와 무릎으로 빗기며 튕겨낸다.
"흐읍...!"
그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의 힘을 마찬가지로 물리적으로 왜곡시켜서.
물론, 초월적인 방어력과 함께 공격으로 받은 피해를 반사해내는 효과를 지닌 [절대 방어] 스킬 만으로도 막을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절대 방어]는 방어와 반격이 합쳐진 기술. 방어가 끝나는 동시에 그 포스 에너지가 반격을 위해 쓸데없이 발산된다.
그러니 그 낭비를 줄이기 위해 [절대 방어]는 억제하며 순간적으로 운용하고, 보다 효율적인 [포스 전투술]과 [물리 왜곡술]을 사용해 공격을 정면에서 막기보다는 빗겨낸다.
"꽤나··· 무거운데."
-후우욱
-우우웅
그리 말하며 포스를 한 층 더 높게 끌어올렸다. 그 동안 열심히 연습한 끝에, 전투 가능 시간과 그 위력이 대폭 늘어났다.
100의 포스를 섬세히 운용해 대략 500 정도로, 30분 정도 전투가 가능하다.
모든 보스의 포스 수치는 플레이어 최대 수치의 두 배인 4000.
즉, 포스 위력 반감 공식을 고려한다면, 그의 모든 공격은 그 위력이 8분의 1 토막이 난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괜찮다.
더욱 강하게, 더욱 빠르게 해치우면 되니까.
-[광신의 광검]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위상 수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 이루는, 현실의 시공간을 괴리하는 힘의 비틀림.
그것이 검과 방패에 초월적인 물리력과 공격력을 부여해 준다.
"흡!"
-콰지직!
-크드득!
짓누르는 기계 팔을 베어낸 한우현은 발바닥에 세게 힘을 주었다.
-콰과광!
그 발이 밟고 있던 무수한 기계 덩어리들이 가루가 되며, 충격파가 울려퍼졌다.
동시에 한우현은 허공으로 도약했다.
아주 높이.
"반물질 반응 레이저 감지. 17개 레이저 포구가 한우현 님을 조준합니다."
"위치 띄워!"
그 말과 함께 한우현의 360도 입체적 각도 전 방면을 인지하는 시야 안에, 레이저 총구들이 빨갛게 강조된다.
아이템 자체가 한우현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마치 진짜 게임 화면처럼 레이드 보조를 해 주는 것이었다.
-지잉
-지잉
-지잉
하나 하나가 준 즉사기인 레이저들. 그 모두가 파악됨과 동시에, 여기 저기서 날아오는 레이저들을 회피할 준비를 시작한다. 방어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피할 때다.
-[포스 전투술 제 8형 : 중심 균형술 : 질량 조정]
-[포스 전투술 제 8형 : 중심 균형술 : 무게중심 조정]
-[포스 전투술 제 6형 : 란나찰 : 공간 당기기]
-쒸이익
그의 몸이 괴상막측한 궤도를 그리며 회피기동을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첫 번째 레이저 빛줄기들이, 한우현의 몸을 피해나갔다.
-지이잉
-지잉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레이저 요격 포대의 수가 너무 많다. 그 수와 촘촘함이 거미줄과도 같다.
그러나, 괜찮다.
-휘이익
-쒸이익
-[빛의 발걸음]
본신의 질량과 가속도를 자유자재로 왜곡한다. 공간을 당기고 밀며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다닌다.
한 번이 아니라, 연속으로, 계속해서.
"기계 팔 패턴 예측. 후방 2시, 상방 5시, 전방 9시 방향에서 순차적으로 0.02초, 0.08초, 0.03초 후 발생 예정."
당연히 주 패턴은 레이저 뿐 아니라 기계 팔도 있다.
-콰과광!
-서걱
-콰과광!
-카가강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 모조리 회피한다. 일부 피하기 어렵게 날아오는 기계 팔들은 칼로 끝을 자르며 쳐내거나, 방패로 날아오는 각도를 빗긴다.
한우현을 아슬아슬하게 놓치거나 빗겨나간 기계 팔들이 바닥에 처박히고선 사방으로 금속성 파편과 잔해를 흩날린다.
애먼 벽을 맞힌 레이저 포대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지잉
-지잉
레이저 빛줄기들의 그물망이 더욱 촘촘해진다.
-콰과광
-콰과광
기계 팔들이 마구잡이로 내리꽂힌다.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궤도로 움직일 때다.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 기동술 : 허공답보]
발 밑에 역장체를 만들어 밟고, 뛴다.
"제압 질량체 가동. 제압 드론 가동. 제압 포격 가동."
살벌한 기계음과 함께, 허공에서 무수한 고철 덩어리와 드론들이 줄줄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고철 덩어리들은 자기장에 의해 둥실 떠 있다가 한우현을 향해 막강한 질량과 힘을 싣고 날아온다.
드론들은 시뻘건 렌즈를 번쩍이며 포스를 가득 담은 자폭 반응로에 힘을 싣고 날아온다.
"저건 무시해. 계속 해서 기계 팔과 레이저 패턴만 보고해라."
"확인. 드론과 반중력 금속체 패턴을 연산에서 제외합니다."
드론과 반중력 금속체는 위협적이지만, 속도가 느리다.
그 정도는 한우현이 직접 보고 피해도 된다.
-[광신의 광검 : 칼바람]
-[물리 왜곡술 : 운동정역법 : 궤도 유도]
-퍼버벙!
-쿠아앙!
-퍼버벙!
크게 칼을 휘두르며 그에 맺힌 포스의 덩어리를 던진다.
그냥 대충 날리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확장된 인지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그 궤도를 물리적으로 왜곡해 고정하며.
-쿠아앙!
-퍼버벙!
-쿠아앙!
순식간에 고철 덩이와 드론들이 전멸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카가가각
-카가가각
"초고열 톱날 전방, 후방, 하방에서 0.2초의 시간차를 두고 접근."
"안 맞으니까 그것도 연산에서 제외."
바닥과 벽면 위주로 돌아다니다가 튀어다니는 공격은, 애초에 바닥에 있지 않고 입체 기동을 펼치는 한우현에게 닿지 않는다.
-타다다다
-티딩
-타다다다
-티디딩
"지속적으로 제압 사격이 들어옵니다."
"그것도 빼고."
기관총 방향으로 손을 내민 채 [절대 방어]를 건틀릿에 국소적으로 활성화시켜 그 총탄들을 튕겨내며 중얼거렸다.
제압 사격은 그냥 꾸준히 그를 조준해서 날아오며 위력이 약한 견제 기술에 가깝기에, 위치를 한 번 알아두면 쉽게 대비할 수 있다.
어느 새, 기계 핵까지의 거리가 반 밖에 남지 않았다.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 기동술 : 능공허도]
-[빛의 발걸음]
그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지잉
-지잉
레이저들이 점차 한우현의 움직임을 놓친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놓친다.
-콰과광!
-콰과광!
로봇 팔들도 애꿎은 바닥을 찍다가, 서로 충돌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한우현의 몸놀림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제 한우현은 허공을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너무도 빠르게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패턴들을 성공적으로 회피하고선.
-쿠구궁!
초월적인 가속도와 질량을 실어, 바닥을 박살내며 착지했다.
정확히 기계 핵의 바로 앞에.
보스 룸 입장 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경고. 0.05초 뒤 전류 방전 패턴이 감지됩니다."
-콰지지직
드론의 경고와 거의 동시에, 한우현의 머리 바로 위에서 초 고전압의 전류가 흘렀다.
"후."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기에.
이미 아슬아슬한 범위에서 벽에서 튀어나온 전압 발생기의 각도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전류 방출 완료. 적··· 존재 미감지. 비 상정 움직임."
-까라락
-까라락
모든 패턴을 쏟아낸 보스가 잠시 이상하다는 듯 렌즈 조리개를 조였다가 풀었다.
이것도 이미 알고 있는 패턴이었다.
입장 직후 연속적으로 일으키는 위협적인 패턴들.
무조건 맞을 수 밖에 없는 첫 기계 팔을 제외하고서, 그 뒤에 나오는 패턴들을 모조리 회피하면.
멸망기신은 자기의 공격 패턴이 잘못되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해, 5초 정도 공격을 멈춘다.
"연산자 재 검토 실행···"
"보호막이 약해졌습니다. 0.1초 후 [바위에 꽂힌 검]의 사용을 추천합니다."
"알고 있어."
-[불신자는 눈이 멀지어다]
먼저 들어가는 피해량을 증폭시키는 디버프기. 칼 끝에서 빛이 환하게 맺히며 한 번 가볍게 그 표면을 긁었다.
-[바위에 꽂힌 검]
뒤이어 [성기사]의 [궁극기].
한우현의 손에 들린 검과 방패가 환하게 빛나며 막대한 열과 진동이 부여되었다.
"첫 페이즈는, 빨리 넘어가지!"
그를 정면에서, 드러난 렌즈의 한 가운데 박았다.
거기 박힌 검이 붉게, 푸르게, 마침내 하얗게 물들며 불가해한 수준의 열과 빛을 냈다.
-우우우우우웅!
-휘우우우우웅!
모든 직업군에는 [궁극기]가 있다.
발동 즉시 20초에 달하는 긴 무적 시간과 전용 애니메이션이 나오며, 막대한 피해를 가하는 궁극기.
당연하게도 현실은 2D 횡스크롤 구조가 아니기에, 전용 애니메이션이 송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대 무적] 판정은 부여되었다.
당연히 그 귀한 시간을 허투루 쓸 마음은 없었다.
"[엘릭서]."
-벌컥
-벌컥
인벤토리에서 물약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우현은 빠르게 엘릭서를 들이켰다.
별 다른 부상을 입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엘릭서는 설정상 모든 부상과 신성력, 마력, 흑마력과 같은 힘을 회복시켜 주지만.
플레이어 능력의 가장 근간적인 힘인 포스를 회복시켜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자연적인 회복 속도를 조금은 높여 준다.
그러니 이렇게 여유가 날 때 마셔주는 게 좋다.
거기에 0.5초 정도가 걸렸다.
-콰드득
바위에 꽂힌 검.
그 이름에 걸맞게, 적에게 검을 박은 뒤.
그 검에 막대한 에너지를 실어 적의 내부에서 폭발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기사는 그 뛰어난 방어력과 보호력을 대가로 공격력을 희생한 쓰레기 직업.
물론 현실에서는 게임과 다르게 공격력보다 방어력이 훨씬 중요했지만.
홀로 보스 레이드를 한다면 그는 가장 큰 약점이었다.
"하아아···"
괜찮았다. 무식하게 포스만 때려박는 건 머저리 플레이어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진정 플레이어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는 것은 지식.
오로지 현실의 모든 법칙에 대한 깊은 이해로 만드는 이적이다.
-[물리 왜곡술 : 분열융합술 : 쌍소멸]
-[물리 왜곡술 : 분열융합술 : 쌍생성]
한우현이 잡은 손 끝을 타고, 뭉치며 주입된 포스들이 검의 표면을 타고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 현상을 일으킨다.
아주 대량으로, 무수히, 많이.
양자 세계에서 확률적으로 일어나는 물질과 반물질의 쌍생성과 쌍소멸 현상.
"...[미시와 거시의 경계는 없다]."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거시 고정]
거기에 더해, 17초나 되는 시간을 들여 집중한 끝에 실현시켰다.
당연히 보스 싸움 중간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애초에, [현실 재조정 해석]은 극도로 섬세한 기술이기에 막대한 포스로 주위 공간 자체를 폭압적으로 찍어누르는 보스들에게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막대한 에너지를 뽑아내기 위한 중간 절차로만 쓰기 위한 것.
20초라는 기나긴 무적 시간이 있기에 이렇게 대 놓고 쓸 수 있었다.
-바바바박
-그그그극
폭발적인 에너지와 질량체가 멋대로 생겼다가 우그라들며 검 주위의 공간을 뒤흔든다.
물질과 반물질이 나타났다가 반응해 사라지는 쌍소멸-쌍생성 현상을 강제로 관측하고 현실에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흔히 사람들이 양자역학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다.
그것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이 진짜로 사람의 눈으로 관측하면 고정되는 의지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플레이어에게는 아니다.
현실의 법칙을 초월한 불가해한 힘으로 포스는 강제로 [관측]이라는 개념을 제 멋대로 뜯어고친다.
그럼으로써 양자 세계의 에너지-물질 생성 현상을 억지로 현상 세계로 끌어올린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흡성대법]
무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순수한 질량과 에너지를 고스란히 포스로 치환해 흡수한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엔트로피 역전]
그 과정이 역순이 아니라 정순이라도 되는 것마냥 가속하며 포스를 정순하게 압축한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덧칠하기]
19.7초가 지난 순간, 그 모든 규모의 포스를 그대로 열과 물리력으로 치환하며 검에 주입한다.
당연히, [바위에 꽂힌 검]의 무적기 범위는 그 장비에까지 포함하기에.
-쿠구구궁
-쿠구구궁
핵 폭탄 수 개는 될 법한 규모의 물리력이, 고스란히 포스와 함께 한 치의 손실도 없이 검 끝을 통해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게 작렬했다.
-구구구궁
너무도 큰 충격과 피해.
"오류, 오류, 오류··· 침입자, 제거 실패."
자연히, 멸망기신의 위에 희미하게 덧씌워진 포스 보호막.
-후아아악
그것이 깨지며, 엄청난 위력의 힘과 바람이 휘몰아쳤다.
"큭!"
-[포스 전투술 제 1 형 : 벡터 재조정 : 스칼라 흡수]
방패를 앞으로 내세워 그 여파를 제어하며, 한우현도 자연히 휩쓸려 뒤로 100m쯤 날려갔다.
억지로 버틸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2 페이즈에 들어가면 모든 주위 지형지물이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니, 지금은 밀려 준다.
"보안 단계 2단계 상승. 보안 단계 2단계 상승. 목표 재설정 완료. 생명체 제거 프로토콜 재실행."
그 말과 함께 보스 몬스터의 렌즈 색깔이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바뀌었다.
겨우 2분도 지나지 않아, 1 페이즈를 끝낸 것이었다.
59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3)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바뀐 렌즈의 빛.
물론 그것이 흔한 SF 영화에서 나온 연출처럼, 보스 몬스터가 착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대충 기계들을 휘두르는 것을 넘어, 본격적으로 기계 핵의 기능을 활성화한다는 뜻이었으므로.
"멸망기신이 2 페이즈에 들어갑니다. 0.5초 후, 모든 지형이 파괴됩니다. 충격에 주의하십시오."
"알아."
드론의 경고에 대답을 해 주기가 무섭게.
"중력장 재조정 프로토콜 가동."
-으드드드득
-쿠드드드득
"적대 생명체 정밀 분석 개시. 클래스 [성기사]. 개체 수 하나. 적응 시작···"
바닥에 붙어 있던 모든 거대한 철판들이 강제로 뜯겨 올라간다. 그 뿐만 아니라 벽에 붙어있던 철판도, 천장도.
-드드드드
-드드드드
모든 거대한 금속 평면체들이 무수히 휘고 굽으며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흐읍!"
당연히 한우현이 내팽개쳐진 바닥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온 몸에 힘을 주며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버텼다.
그 충격적인 중력과 자기장의 폭풍에서, 몸을 낮춰 버티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하나 하나가 수백 평을 될 법한 철판들이 모조리 떠올라, 거대한 동력실의 한 가운데 뜬 기계 핵을 중심으로.
미친 듯이 회전하며,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한 소행성 군처럼 공전한다.
-[물리 왜곡술 : 전자기유도 : 자기장 제어]
-[포스 전투술 제 8 형 : 중심 균형술 : 위치 고정]
그 궤도 철판들 중 하나의 위에서, 한우현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1 사도 주제에 꼴값은 더럽게 떠는군."
중력장 재조정.
게임 내에서는 아주 단순한 패턴이었다.
그냥 플레이어가 밟고 있는 발판들이 회전하며 이동을 약간 방해하는 수준의 패턴이었으니까.
현실에서는 미친 패턴이 되었다.
공격대원들은 구형으로 공전하는 철판 위를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뒤바뀌는 중력-원심력 구조에 적응해야 한다.
심지어 10초 이상 한 철판 위에 있으면, 즉시 멸망기신이 기계 팔을 내뻗어 그 지형을 파괴한다.
그렇게 떨어지면?
곧바로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초고열 톱날들이 떨어진 플레이어를 갈아버린다.
지형 이탈 사망 판정인 동시에 송과체가 갈려버리므로 사제의 [부활]도 불가능한.
"기계 팔 패턴 감지. 0.2초 후에 철판이 파괴됩니다."
-쒸이익
"이크."
딴 생각을 잠시 한 사이, 날카로운 드릴을 장착한 기계 팔이 날아왔다.
-[빛의 발걸음]
-후우욱!
여유로울 정도는 아니지만, 가볍게 뛰어 다음 철판으로 넘어가며 피해 주었다. 그 직후 기계 팔이 철판을 꿰뚫으며 붕괴시켰다.
-쿠구궁
다행히, 2페이즈는 지형 자체가 괴랄해서 그렇지.
"다음 기계 팔 철판 파괴 패턴은 9.8초 뒤로 추정됩니다."
"좋아."
그 만큼 공격 자체는 완화된다.
물론 그것이 여유롭다는 뜻은 아니다.
2페이즈에 들어가며 멸망기신이 내뱉은 [적응 프로토콜].
괜히 한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내부 연산을 [성기사] 분석에 할애하기에, 공격이 약해진 것이다.
이 상태로 10분이 지나면, 멸망기신은 [성기사]에 적응해 받는 모든 피해를 10%로 줄이는 보호막을 펼친다.
물론 계속 펼치는 것은 아니고, 펼쳤다가 해제했다가 하지만.
거기까지 시간을 끌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그러니, 빠르게 가야지.
-타다다다
-타다다다
헬리콥터를 달고, 더욱 더 많이, 빠르게 날아오는 자폭 드론들.
-[광신의 광검 : 칼바람]
그것들은 그냥 원거리 공격 스킬로 격추 해 주면 그만이다.
더 많이 온다고?
지금보다 열 배는 많이 와도, 위협적이지 않다.
-[빛의 발걸음]
-[빛의 발걸음]
"경고. 0.02초 뒤 감속장 생성 패턴 감지."
그 경고와 거의 동시에, 한우현이 새롭게 밟은 철판 전체가 희미한 에너지체로 둘러싸였다.
동시에 그 공간 전체가 끈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씹...!"
그 경고를 듣자마자 황급히 발에 있는 대로 힘을 줬다.
"경고. 0.04초 뒤 전기장 생성 패턴 감지."
다음의 경고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온 몸의 근육을 수축 시키며 뛰었다.
-쿠과광
얼마나 세게 힘을 줬는지, 그 아래 있던 발판이 도약과 함께 우그러지며 살짝 궤도가 흔들렸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급하게 넘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후우우웅
다음 철판으로 넘어가자마자, 그가 전에 있던 철판 전체에 둘러싸인 에너지 장이 완전히 굳어지며 그 공간을 가뒀으니까.
-지지지직
그리고 곧바로, 철판 주위로 네 개의 전깃줄이 연결되더니.
-바바바박
순식간에 철판 전체를 초 고압 전류로 지져 버렸다.
-그르르륵
단순히 지지는 수준을 넘어, 그 철판이 중심을 향해 접히며 우그러 들었고.
공 모양으로 녹아들며 완전히 구겨졌다.
피하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종이 접기를 당해버릴 뻔 했던 것이다.
"감속-전기장 패턴 완료. 다음 감속-전기장 패턴이 2분 내로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건 조심해야지···."
2페이즈의 가장 위협적인 패턴.
무작위 주기로 플레이어의 위치를 감지해 일으키는, 감속장과 전기장의 연계.
게임이었을 때는 그 둘이 따로따로인 패턴이라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었다.
감속장은 그냥 좀 느려질 뿐이었고, 전기장은 전조가 길어서 충분히 보고 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둘을 동시에 쓰며 극도로 위험한 함정이 되었다.
[신경 가속]을 통한 빠른 인지와 전투 보조 지능의 경고가 없이는 회피하기 어려운 즉사기가 되었으니.
-[빛의 발걸음]
"하아!"
다시금 더 가까운 높이의 철판으로 점차 올라간 한우현은 검기를 날렸다.
-퍼벙
-퍼버벙
"경고. 제압 기관포 탄창 회전 확인. 저격이 시작됩니다.
"위치 올려."
-팟 팟 팟
마치 증강 현실처럼 한우현의 시야 안에 홀로그램으로 총구들과 위치들이 떠올랐다.
빠르게 대충 머릿속으로 궤도를 그리며 그들을 모두 인식했다. 곧이어 몸에 [절대 방어]를 두름과 동시에 방패를 휘둘렀다.
초월적인 동체 시력으로,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순서대로.
-타다다다
-티디딩
-타다다다
-팅, 팅
100, 아니 1000mm는 될 법한 무식한 구경의 총탄들이 모조리 방패에 맞고 튕겼다.
아까와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충격이 방패를 타고 느껴졌다.
방금 기관포와 같은 기관포지만, 이제부터는 직접 멸망기신이 그 포스를 실어 사격하기에.
위력이 훨씬 더 올라간 사격이다.
대신, 패턴이 지속 견제기가 아니라 순간적인 위협기로 바뀐 만큼 그 때만 잘 막아주면 된다.
"역시 1페이즈보다는 2페이즈가 문제야."
하지만 모든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내고도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현 상황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의 공략이 걱정되어서.
2페이즈의 중력장 공간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다.
실제로 NASA에서 우주 비행사들을 위한 우주 정거장 훈련 프로그램에, 비슷한 환경이 있으므로.
회귀 전의 한우현도 그를 통해 2주 정도 훈련을 하자 금세 이 중력장 공간에 적응할 수 있었다.
"...다음 달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공략해야 하는데."
원래는 [공격대 보조 지능]이 찍은 영상을 바탕으로 훈련 계획을 짤 예정이었지만.
직접 다시 공략을 진행해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현 시점에서 세계 제일의 플레이어 능력을 지닌 자들.
나유나, 홍세희, 차정훈, 김재승, 권승환, 라니아.
그들은 물론이요, 라일리 그레인저라고 하더라도.
현 시점에서는 도저히 공략은 커녕 이 공간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그가, 직접 달라붙어서 보스의 흉내를 내며 혹독하게 훈련에 직접 임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 것 같다.
-끼리릭
그 생각을 하며, 어느덧 기계 핵의 5m 아래. 가장 위에 있는 철판까지 올라왔다.
-끄르르륵
그 거대한 푸른 렌즈가 한우현을 주시했다.
"하여간 크긴 더럽게 커."
하지만 대응하지 않은 채 한 마디를 날렸다.
지금은 기다릴 때였으니까.
"경계, 경계. 침입자 접근. 광역 청소 개시."
카메라의 조리개와 그 안에 든 시뻘건 렌즈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한우현을 중심으로 고정되었다.
"절멸 프로토콜 온라인. 5, 4, 3, 2···"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순식간에 보스룸 전체에 무수한 레이저 총구들이 돋아났다.
"멸망기신이 절멸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순차적으로 근접 영역부터 밖으로 회피 불가 레이저 청소가 예측됩니다. 1, 0.9, 0.8···"
"좋아, 첫 번째 레이저 패턴에 맞춰서 신호."
"확인. 전체 즉사기 패턴입니다. 전체 공간의 95%에 무작위 반물질 반응 레이저. 예측··· 지금입니다."
-[절대 방어]
-[물리 왜곡술 : 전자기 유도 : 광학유도]
혹시 모를 몇몇 레이저에 피탄 될 것에 대비해, 온 몸에 방어 태세를 두른 채.
한우현은 힘껏 뛰었다.
-지잉
-지잉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 기동술 : 허공답보]
그냥 뛰는 것이 아니었다.
-[포스 전투술 제 1형 : 벡터 재조정 : 기하굴절]
-[포스 전투술 제 8형 : 중심 균형술 : 무게중심 조정]
-[포스 전투술 제 8형 : 중심 균형술 : 질량 조정]
극도로 섬세하게 스스로의 물리적인 운동 방향과 속도를 제어한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궤도로 움직인다.
-[포스 전투술 제 3 형 : 체왜곡 : 연쇄무도]
-후웅
동시에 미친 듯이 방패를 휘두른다.
그 모든 움직이는 레이저 집중기들의 방향과 위치를 계산하며 알맞은 각도와 방향으로 방패를 가져다 댄다.
-파자작
-지잉
-파자작
-지잉
-지잉
대부분의 광선들이 방패에 막히며 산란된다. 열과 빛의 에너지가 방패에 맺힌 [절대 방어]에 흡수되며 사그라진다.
하지만, 아무리 예측 불허로 움직이며 그 광선의 각도를 막아낸다고 해도.
-치지직
-치지직
레이저들의 간격이 너무도 촘촘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일부는 다른 신체 부위에 맞는다. 방어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취약한 부분들.
"큭···"
그 레이저의 위력이 너무나도 절륜하기에 [절대 방어]로 방어하고 있음에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버틴다.
-으드득
-후우욱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유체화]
한우현의 관절과 근육이 인체학적으로 불가능한 방향과 크기로 비틀리며 슬라임이라도 된 것 마냥 흐른다.
그를 통해 그 비좁은 공간들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어거지로 뚫고 통과한다.
-[포스 전투술 제 9형 : 응급 신체 대사 : 출혈 제어]
-[포스 전투술 제 9형 : 응급 신체 대사 : 근육 조립]
-[전투재생]
말단 부위들이 타 들어가지만, 플레이어 스킬과 오리지날 스킬을 조합하며 그를 순식간에 틀어막는다.
"크윽..."
-탁.
그렇게.
-[포스 전투술 제 8형 : 중심 균형술 : 위치 고정]
마침내 1차 레이저 패턴에서 벗어나, 멸망기신의 위에 내려앉았다.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그 검과 방패에 빛, 열, 포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자르는 예기가 깃들었다.
절멸 프로토콜은, 보스에서 가까운 공간부터 무수한 레이저 줄기들을 그물처럼 채워나가며 바깥 영역까지 청소하는 광역기.
-지잉
-지잉
다르게 말해, 이제부터 저 먼 외부까지 발사되는 절멸 프로토콜이 끝날 때까지는.
자유 공격 시간Free Dealing Time이다.
"후우···"
숨을 한 번 몰아쉬며 한우현은 집중력을 높였다.
자유 공격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게임에서처럼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주기적으로 멸망기신은 자기한테 달라붙은 플레이어에게 전격 공격을 가하니까.
그러니 약간의 집중은 가능하지만, 완전히 가만히 서서 공격하지는 못한다.
[바위에 꽂힌 검]도 아직 사용하기에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기술들은 지금은 아끼고, 그 다음에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은, 조금씩 깎아나가며 이동하기를 반복하는 게 효율적이다.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강화운동]
-우우웅
한우현의 방패와 검에 초월적인 운동량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 바닥을 무자비한 속도로 내리찍기 시작했다.
-콰자작!
-콰드득!
날카롭게 포스 역장체와 에너지체가 씌워진 칼과 방패를, 함께 미칠 듯이 휘둘렀다.
-쿠구궁!
-콰과광!
"전격 방출 전조 감지. 0.1초 뒤에 현재 위치에 전격파가 방출됩니다."
"계속 확인해!"
-콰악
바닥을 힘껏 손으로 짚은 한우현이 구르면서 다시금 검과 방패로 보스의 몸통을 내리 찍어 구르기를 멈췄다.
-쿠구궁
주위 공간 자체가 뒤흔들리며 굉음이 울렸다. 파괴적인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에 개의치 않고 다시금 보호막을 찍어내린다.
-콰과광!
-카드득!
당연히 게임에서의 보스전과는 너무나 다른 전투 양상이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3D가 아니라 2D 횡스크롤 MMORPG이기에, 극도로 단순한 방식으로 전투가 이뤄졌다.
평면적인 화면에서 보스가 패턴을 난사하면, 마치 탄막 게임처럼 캐릭터는 열심히 여러 패턴을 피한다.
그리고 보스의 패턴을 봉인하는 [제압기]를 3분마다 한 번씩 쓴다.
그러면 보스는 15초에서 20초 가량 기절하며, 그 동안 모든 극딜기나 장판기, 궁극기 같은 스킬들을 쏟아붓는다.
보스가 깨어나면 다시 도망다닌다.
다른 MMORPG의 여러 복잡한 기믹의 보스전과는 그 수준이 비교되지 않는 단순한 레이드.
그래서, 현실에서는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일단 보스는 더 이상 [제압기]에 당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무조건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지막지한 포스로 실제 보스가 가진 포스의 근원을 정확히 타격해야 했으므로.
굳이 그런 공격을 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시도에 가까워졌다.
또한, 흔히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 극딜을 하기 전에 사용하는 [장판기]나 [설치기]의 대부분은 이제 사용되지 않는다.
직접 강력히 포스를 실어서 구축하지 않은 스킬들은, 그 포스 에너지 변환 효율이 쓰레기이기에.
오로지 플레이어가 가장 깊게 원리를 이해한 주력 기술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공격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전격 방출 전조 감지. 0.12초 뒤에 현재 위치에 전격파가 방출됩니다."
"흡!"
빠르게 위치를 바꾸며, 다시금 현실과 게임의 차이를 구분한다.
즉, 이제 그렇게 쉬운 딸깍거리는 레이드는 없다.
직접 최대한으로 근접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만, 현실의 보스 몬스터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쩌저적
-으저적
-콰드득
미칠 듯이 [광신의 광검]으로 보호막을 난자한다.
"전격 방출 전조 감지. 0.09초 뒤에 현재 위치에 전격파가 방출됩니다."
"하!"
힘을 주어 도약.
-쿠과광!
다시 이동하고, 반복한다.
그 모든 과정을 최대한의 속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을 다시 한 번 초월해.
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속도로 행한다.
-펑
-퍼벙
한우현의 동작 하나 하나마다 팔과 다리, 검과 방패에 소닉 붐Sonic Boom이 일어난다.
계속, 계속해서 그 발 아래의 포스 보호막에 둘러싸인 기계 덩어리를 난자하고 으스러뜨린다.
-쿠궁!
그렇게.
-콰과광!
수십 시간과도 같았던, 5분이 지나갔다.
-지직
-지지직
보스 몬스터의 온 몸에서, 연기와 함께 누선과 합전이 어지러이 흘러나왔다.
"...경고. 경고. 경고. 절멸 프로토콜 완료. 적 제거··· 실패."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모든 금속 표면체가 붉게 달아오르며, 불길한 빛이 일렁였다.
60화 제 1 사도 멸망기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