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여긴 우리 구역이다 (4)
-온 세상을 정상화 해~ 정! 상! 화!
-이그드라실을 좀먹는 에션족
-빌런들을 퇴치하는 구 원 자
-이그드라실을 공격하고 음해하는 고아원
-그 분의 진격으로 10만명을 정상화~
"정상화! ···하."
한참을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얼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그 노래를 멈췄다.
"이 병신들."
그리고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를 울렸다.
"정찰만 하고 오라니까, 기어이 싸움을 걸고는, 심지어 쳐 발렸네."
그 말에 호응하듯, 다른 이들이 주위에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 암흑술사는 [절대 은신] 판정 스킬도 있는데 왜 꼬라박아?"
"그보다 입구면··· 씨발, 코앞이잖아?"
"흐, 애미···"
"좆 같은 새끼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북한이나 갈껄."
"그러게, 북한은 진짜 우리 세상이라는데."
"씨발, 좆 거지 새끼들한테 갑질해서 뭐하게? 한국에서 놀아야지."
"애초에 북한 위원장? 걔도 길드 소속이라며."
"어쨌든 거긴 여기랑 다르게 뭐든지 맘대로라는데."
"더 좆 같네··· 왜 우리 세상이 왔는데 저딴 짓을 하는 거야?"
"고아원 출신인가?"
"아니, 한우현 그 새끼도 본 섭인데. 심지어 지난 달에 에션족 너프해야 한다고 지랄하던 것도 봤다고."
"...이상해."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엄마 팬티나 뒤집어 쓰고 방송하던 새끼가···"
-키리릭
한 명이 무심코 던진 말에, 순식간에 반응하듯.
전기와 에너지가 흐르는 와이어가 날아가 그의 목에 휘감겼다.
"켁!"
"하나, 내가 뒤집어쓰고 방송하려던 건 엄마가 아니라 누나 팬티였다. 실수로 잘못 쓴 거지.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실리콘 재질 피부와 얼굴이 끼긱거리며 그 쪽을 향했다.
"둘, 그리고 엄마도 싸질러 놓고 책임 안 지는데, 내 허락 없이 날 낳아서 고생시켰으니 나도 내 엄마 허락 없이 지랄 할 권리가 있다."
이어서 갈라지는 기계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자자작
동시에 와이어가 휘감기며 그를 잡아당겼다.
"자, 잠깐만. 내가 잘못···"
"셋, 그건 단순히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다. 나의 정당한 사회 실험이자 인간 심리학적으로 이목을 끌기 위한 시도였을 뿐이지."
빈정거린 플레이어를 눈앞까지 끌고 온 그는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대상을 내려다보았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그만해!"
"넷, 이해력이 떨어지는 고아원 새끼는 필요 없다."
"난 고아원 아니라 본섭 출···"
-으그자작
순식간에 금속 와이어와 전기 에너지로 이뤄진 채찍이, 그의 몸 전체를 갈아버렸다.
뼈와 핏물, 내장 덩어리가 주위로 파편이 되어 튀어나갔다.
-쯔걱
-찌걱
-왈칵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남은 걸레짝 같은 시체 덩이에 그는 화풀이를 하는 듯 한참이나 채찍질을 했다.
-지지직
전기가 흐르는 채찍에 의해 누린내가 날 정도로 지방과 근육 조직이 타고 나서야 그 행동이 멈췄다.
"불안하군. 불안해. 불안. 매우 불안···"
다른 빌런들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의 광기. 정신병자를 넘어 불가해한 수준의 행동 양상.
너무도 공포스러웠기에, 아무도 그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담호영. 캐릭터 네임 [맑은눈의광인].
레벨 295 전자기인.
남산에 모인 플레이어들에게, 여기까지 와서도 따로 다닐 거냐고 윽박 지른 자.
원래는 이 정도로 잔악한 성정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이그드라실 유저 평균.jpg
-[속옷을 뒤집어쓰고 방송을 하는 모습의 사진]
-[부모한테 이그드라실 런처를 설치하는 스크린샷을 보내며 용돈을 요구하는 사진]
-[능력 재설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매우 불안함을 호소하며 모친에게 패륜적인 욕을 하는 사진]
-와 씨발··· 이게 사람?
-좆 같은 건 니만 보라고 아오
인터넷에 온갖 변태 성욕적이고 패륜적인 글을 싸지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즐기던 폐인.
일주일 전, 세상이 게임으로 바뀌고 난 뒤.
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른 문제점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씨발, 뭐야, 왜 내 몸이 기계야!
-...맛은 느껴지지만, 먹어도 먹어도 만족감도, 포만감도 없어.
-잠도 안 오고, 성욕도··· 없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그건 바로, 그의 직업이었던 [전자기인]은 설정 상 기계를 인간과 융합해 만든 실험체 병기. 즉, 사이보그였다는 것.
하루 아침에 모든 인간의 생물학적 욕구가 거세 된 그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충격을 넘어, 새로운 욕구를 스스로 개발하게 되었다.
-사, 살려줘! 제발!
-아, 이건 좀 재밌는 거 같기도.
-아아악! 아아악!
-이제 자위도 못하는데, 대리 만족이라도 해야지···
가학증.
자신과 다른, 진짜 인간 생명체가 내지르는 고통과 비명에서 감정과 욕구를 느끼는 것.
심지어 기계와 융화된 몸이기에, 다른 플레이어들보다도 훨씬 스킬의 운용이 정확하고 뛰어났다.
따라서 저런 흉참한 행동에도, 그 누구도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난 그 놈, 알아. 지난 달에 같이 레이드도 돌았단 말이지··· 성바퀴답게 딜이 쓰레기 같긴 했지만."
담호영이 눈깔을 뒤룩뒤룩 굴렸다.
정확히는, 조리개와 홀로그램으로 이뤄진 렌즈를.
"그 때는 나랑 별로 다를 거 없는 놈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어.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그, 맑눈광. 지금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조용. 조용히 해 봐."
슬슬 산 위에서도 육안으로, 포위망이 보일 지경이자.
그에게 참지 못하고 한 명이 질문을 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이렇게까지 모아 놓고서는 설마 대책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대책? 흠··· 대책···"
피식 웃은 그가 온 몸의 회로를 활성화했다.
-전투 태세 발동.
-포스 해체 회로 가동.
-에너지 이퀄라이저 온라인.
"저 놈들 총 숫자가 1000명쯤 된다고 했나? 하지만 전투 제대로 하는 집행분가, 뭔가 하는 놈들은 별로 없고."
"...우리가 다 합쳐서 500명 쯤인데."
한우현이 예측한 숫자인 1000명은, 말 그대로 남산에 모이기만 한 빌런들의 숫자.
담호영을 임시로나마 따르기로 한 수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저 놈들, 숫자만 많지 실제로 싸우는 애들은 별로 없어."
"그건 그렇지만··· 안 싸운 건지, 못 싸우는 건지는 모르잖아."
한 명이 딴지를 걸었다.
"생각을 해 봐라. 일주일 내내 우리가 뭘 하든, 길드라는 거 안에만 처박혀 있었던 애들이 잘 싸우겠냐? 아니면 내내 사람 죽이고 다녔던 우리가 더 잘 싸우겠냐?"
"아니, 씨발 넌 길드장이랑 싸워보지도 않았···"
"조용. 길드장? 그 놈. 등산로에 막 들어섰다."
조리개를 확대한 담호영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도망친 건, 수가 밀렸기 때문이지. 흩어져서."
"..."
"..."
"실제로 싸우는 숫자를 봐. 그럼 우리가 더 많다. 그러니까 전략? 간단하다. 모두 뭉쳐서, 전사랑 도적계는 앞으로. 마법사랑 궁사계는 뒤에서 공격한다."
더 이상 다른 수가 없다고 느낀 듯.
그 말이 조리에 맞지 않다고 느낀 이들이 더욱 많았지만.
"하, 씨발···"
"이런 새끼 믿고 온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야."
"꼬라박기나 해 보자."
어차피,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끝까지 도망친 정신병자들이었기에.
무기를 꺼내 들며, 마지막 돌격을 준비했다.
"그래, 가 보자고."
-치이잉
담호영이 회로가 켜켜이 박힌 혀를 날름거렸다.
"너희는 따라 오면서, 내가 한우현 그 새끼 갈아먹는 거 구경이나 해라."
논리도, 전략도 없는 전술이었지만.
그 위력 하나는 진짜였다.
그들의 눈이 광기와 증오에 들어찼다.
세계 최강의 정신병자들이.
* * *
-꿀꺽
"후우··· 좋아. 다들 잘 만들었군. 잘 했다."
"...그걸, 진짜 먹을 수 있··· 어요?"
한우현이 마지막으로 포스 덩어리를 삼키는 것을 본 홍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연히 있으니까 먹었지. 물론, 너희끼리 함부로 하진 마라."
"걱정 마, 돈 주고 먹으라 해도 난 못 먹겠으니까···"
"대체 이런 걸 만드는 방법은 어디서 만들어 온 겁니까?"
홍세희, 나유나, 권승환, 차정훈, 김재승.
현 시점에서, 가장 포스 제어와 운용력이 뛰어난 플레이어.
그들에게 한우현은 하나의 아이템을 만들기를 강요했다.
-이대로 따라해라. 공 모양으로.
-완전 복잡한데···?
-포스가 포스를 이으며 도넛 모양으로 순환하는 구조체. 쉽다.
-으음···
-좀 더 힘을 집중해라.
-힘을 줘 보라고?
-똥 싸듯이?
-똥은 무슨 헛소리냐. 그게 아니다. 둥글게 말리는...
-...안 되는데.
-...아, 되려고···
-이런 느낌...?
-그래, 잘 하는군. 그 상태로...
급하게 포스가 필요할 때, 포스를 안정화시켜서.
타인이 쓸 수 있도록 해 주는 [포스 토카막].
물론, 당연히 제한이 많았다.
주는 사람부터가 제어력이 극도로 섬세해야만 소위 [포스 토카막]을 만들 수 있다.
받는 사람은 더더욱이 뛰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탄을 처먹는 것이나 다름 없다.
"후··· 바로 써야겠군."
온 몸에 포스가 불안정하게 울럭불럭 거리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포스 토카막을 먹고 나서는, 그 포스를 곧바로 소비해야 한다.
아무리 길어도 5분. 그 이상 포스를 가둬두려고 하다가는 송과체를 시작으로 온 몸의 신경계가 파열된다.
그것도 한우현이 극도로 뛰어난 제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기예.
회귀 전, 포스 토카막을 섭취 후 1분 이상 그 기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자는 라일리와 한우현을 비롯해 100명도 되지 않았다.
[ 이그드라실 포스 : 4000 (최대 2000) ]
그러나 그것도 정상적인 양의 포스를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
이론 상, 타인의 포스를 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원 포스 수치의 절반 정도.
그러니까 100인 원 수치대로라면, 안정적으로는 50 정도나 더 다룰 수 있다.
이렇게 포스를 쓴다면, 잠깐은 괜찮아도.
5분이 지나면 전신의 말초 신경계를 이루는 랑비에 결절들이 산산조각난다.
10분이 지나면 송과체를 중심으로 간뇌와 대뇌의 뉴런 구조가 모조리 붕괴할 것이다.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원래는 이 수단까지 사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길드의 전력 자체가 빌런들에게 밀렸다.
길드의 공식적인 첫 무력 행사.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위용으로, 한 치의 피해 없이 진압해야 했다.
그러나 빌런들이 예상보다도 훨씬, 훨씬 많이 모였다.
심지어 그 지휘자까지 만만치 않은 놈.
회귀 전, 전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포스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은 빌런.
후유증을 감수하고서라도, 피해 없이 압도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가자."
산 정상을 쳐다보며 한우현은 중얼거렸다.
시선이 느껴졌다.
매우 강렬한 포스의 소유주가 질질 흘리는 혐오의 감정도 함께.
보아하니, 얌전히 그가 올라오길 바라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하아아···"
평소와는 다르게, 한우현은 정신을 집중했다.
고도의 집중을.
-[광신의 광검]
-[신념의 힘]
-[내일의 안녕]
-[빛의 분노]
무수한 버프 스킬들이 그를 둘러쌌다.
"사제, 버프해라."
"네!"
-[축복]
-[신성의 상징]
-[용기의 기도]
-[평화 수호자]
그에 한 층 힘을 더했다.
-[포스 전투술 제 2형 : 신진 대사 초월 : 세포 가속]
-[포스 전투술 제 7형 : 역장 외골격 : 반사자]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가속]
-콰앙
소닉 붐Sonic Boom을 일으키며, 한우현은 도약했다.
2.7초만에, 주위 공간이 길게 늘어졌다.
그 사이를 가로막는 나무와 흙더미와 같은 모든 장애물이 박살났다.
-콰과광
"...?!"
"뭐, 뭔?"
그리고 빌런 집단의 한 가운데 착지했다.
"반갑다, 버러지들아."
"...모두 공···!"
무시하고 할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나 빠르게.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속도로.
"시작해 볼까?"
왜냐하면, 지금부터 시전할 기술은.
숙달된 그조차도 순서대로, 절차를 지켜서 초월적인 인지와 연산을 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려운 스킬이었으니까.
-[신성한 땅]
시작은 플레이어 스킬, 성기사의 영역 선포기.
하지만 그 다음은 좀 다르다.
"[내가 바로 이 세상의 중심이다]."
그 의지를 강제로 현실에 뿌리박으며 세상의 법칙을 광오하게 짓밟는다.
한우현이 만드는 새로운 정보체를 세상에 강요한다.
"[모든 현실은 나의 인식으로 접히고 나뉘고 이어진다]."
-쩌저적
-촤좌좍
한우현을 중심으로 공간이 무수한 리만 다양체Riemannian Manifold와 퍼펙토이드 공간Perfectoid Spaces으로 붕괴된다.
"[모든 현실은 나의 상대성으로 흐르고 늘어지고 빨라진다]."
-히이이이
-시이이이
빛과 중력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시간과 시간 사이를 무너뜨린다.
"[입자와 힘은 이제 없고 포스만이 있다]."
우주를 이루는 기본 구조. 17개의 기본 입자와 4개의 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을 구성하는 기본 상호작용Fundamental Interaction과 소립자Elementary Particle가 그 존재력을 잃는다.
"[미시와 거시의 경계는 없다]."
-? ?? ???
-??? ?? ?
인간이 인식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모양으로 세상이 울렁이고 비틀린다.
양자 세계와 현상 세계의 역학 확률 구분이 무너지며 물질 구조가 중첩된다.
"미, 미친 이게 뭐야!"
"씨발, 무슨, 무슨! 멈춰! 그만"
"끄아아악! 스킬이 아니야! 이건···"
"[그로서 이치가 곧 나고 법칙이 곧 나다]."
한우현의 송과체에서, 파장이 아니라 끈적한 장Field를 이루는 포스의 파도가 범람하며 무너진 세상을 집어삼켰다.
-████████!
그 여파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간신히 존재를 유지하는 빌런들.
아주 만약에, 한우현이 빠르게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방해했다면...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을 수도.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스킬 자체 뿐 아니라 전조만으로도 포스에 숙련되지 않은 지성체의 정신과 육신은 산산조각나는 스킬이었으니까.
-[물리 왜곡술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정신이라도 유지했다면. 아주, 아주 포스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다.
무너지는 현실에서 포스를 이용해 저항했다는 뜻이니까.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
하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근본적으로 포스와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저항까지는 해도,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주인공 보정]
한우현은 마침내 감았던 눈을 떴다.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의 초상연구부, 초인연무부, 이상예측부, 현장조사부 전원이 달라붙어.
미국 정부가 무너지기 직전 완성해낸 위대한 유산.
비록 미완성의 스킬이라 포스 소모 효율이 실로 쓰레기같다는 단점이 너무도 크기는 했지만, 완성만 한다면 그만한 위력을 보이는.
궁극의 오리지날 스킬.
그 [무한한 힘]을 넘어서,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그를 감싼다.
이 세상 자체가 그를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모든 영역]에서 [보정] 해 주고 있었다.
"우욱, 우우욱···"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흐, 흐흐, 그만, 그만, 그마아아안···"
느껴진다.
강제로 이 세상에 쑤셔 박혀진 [한우현의 의지에 복종하는 물질 현상]이라는 원칙.
사방 팔방으로 중력파, 탄성파, 전자기파가 튀어나가며 지성체들에게 [공포]와 [불가능]과 [무기력]의 정보체를 억지로 쑤셔박는다.
인과가 왜곡되고 포스가 없는 물질체들은 형상과 물성이 비정형적인 확률적 상태로 중첩된다.
말 그대로 악몽을 넘어서 불가해한 형상으로 분해되고 응집되는 현실.
빌런들의 절반은 이미 쓰러져 게거품을 물며 펄떡대고 있었다.
"대단하군. 절반이나 제 정신을 유지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무슨, [사령술사]의 [창세의 어둠] 비슷한 건가?"
"씨발, 비슷하긴 개뿔. 스킬 쓰는 것만으로 공간이 이상해진다고···"
"직업은 분명 성기사가 맞는데."
"다들 움직이지 마! 잘못하면 공간째 먹힌다!"
나머지 절반은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놀랍게도.
현실 자체의 인과 구조가 한우현을 중심으로 흐른다는 미친 시공간 영역의 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주위 공간 다양체의 왜곡을 포스로 방어해내고 있었다.
"눈으로 봐도 이해가 안 되고 소리가 미친, 무슨 소리야 이게..."
"씨발, 코스믹 호러야···? 대체 무슨."
"서 있기도 힘든데···"
"괜찮아, 저 놈은 혼자야!"
"아오, 혼자면 뭐 어쩌라고··· 미치겠는데···"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끝까지 저항하기로 마음 먹은 듯.
어떻게든 겨우 겨우, 전투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군."
그 가장 앞에서, 한 남자가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이 공간의 압박에 완벽히 저항한, 온 몸에 회로가 새겨진 로봇 같은 놈.
"그래, 생각이 바뀌었나? 담호영."
"호오, 날 아나?"
"네 방송, 나도 봤거든."
"이거 영광이군. 멋있었지?"
"너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서, 개소리를 하나?"
"푸흐, 푸하하하!"
한바탕 웃은 그가 갑작스레 표정을 굳혔다.
"한우현. 인정하지. 내가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는 걸."
"..."
"너 정말 대단해. 나보다 더 잘 싸우는 플레이어는 못 봤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이리 뜸을 들이지?"
"넌, 지금의 내가 10명은 있어도 못 이기겠어."
담호영이 미세한 감정을 실어 중얼거렸다.
로봇이 말하는 것 같은 미세한 뉘앙스라 알기 힘들었지만, 아주 희미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51화 그래, 당장 꺼져
"마지막으로 묻겠다. 항복하겠나?"
"흐음···"
"항복한다면 너의 모든 범죄 행위를 불문에 부치고, 면책해 주겠다. 그리고 즉시 나 다음가는 길드 간부 자리를 보장하지."
"대신 법은 지켜야겠지?"
"...어지간한 수준의 불법 행위에는, 정부 차원의 면책권이 부여될 것이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지금 내가 말장난을 하러 온 줄 아나?"
한우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의 인과 자체를 고쳐 쓰는 스킬을 사용 중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유지 시간도 길지 않다.
그래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말장난은 아니고, 그냥 조금 시간이 필요해서 말이야···"
"시간을 가져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사실 담호영의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한우현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물론, 그 시간이 되기 전에 무조건 제압할 것이라 큰 의미는 없었지만.
"그런데··· 이거, 우리가 아는 스킬이 아닌 거 같기는 한데···"
-키이잉
-위이잉
-카아앙
그 중얼거림과 함께, 담호영의 온 몸에 박혀진 포스 코어가 제 멋대로 돌아가며 폭주했다.
"자세히 보니까, 스킬이긴 한가 봐?"
"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순간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귀 전의 모습으로 미뤄보아 포스 재능이 한우현보다도 뛰어난 놈이라, 스스로의 시공간에 대한 방어를 한 것까지는 납득했지만.
"따라하는 것까지야 불가능하다고 분석 결과가 나오지만..."
한 번 보고 공간 자체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분석 프로토콜 가동]
-[현실 왜곡 현상 감지]
-[포스 왜곡 원리 분석...]
순식간에 담호영의 몸을 둘러싼 회로들이 포스와 함께 빛내며 무수한 기계음이 흘렀다.
"억지로 저항 정도는, 시도해 볼 만 한 것 같은데."
"멈춰라."
"싫은데?"
[전자기인]의 가장 큰 특징인 양 귀 위에 달린 [포스 반응로]와 [포스 컴퓨터]가 무수한 포스의 줄기를 내뿜으며 시공간 구조체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저항합니다...
-저항합니다...
포스라는 불합리한 힘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슈퍼 컴퓨터와 AI를 뛰어넘는 성능을 발휘하는 포스 전자기 회로들과 함께 신호를 주고 받으며.
"말로 하지 않기를 바라나? 지금 내가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연산 더 빨리. 정확도보다 신속도 위주로."
담호영이 그 말을 무시한 채 읊조렸다.
동시에 실제로, 그 포스 컴퓨터와 반응로들이 더욱 과부하되며 계산을 가속했다.
"이···!"
"난 못 이기는 싸움은 안 하긴 한데, 누구 밑에 들어가긴 싫거든."
한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포스 수치만 넉넉했더라도 정면에서 저딴 어설픈 시도 따위 순식간에 박살 냈을 텐데!
지금은 너무나 희미한 본신 포스로 막대한 [확률 보정]에 들어가는 포스 소모를 제어하느라 강제로 찍어누를 만한 출력이 되지 않았다.
전자기인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내, 유일한 전 계열 하이브리드 직업이다.
그 설정을 반영하듯, 하나 혹은 둘의 스텟만을 주 스텟으로 삼는 타 직업들과 다르게.
여섯 모든 스텟을 주 스텟으로 삼는다. 동시에, 모든 직업군의 장비와 스킬을 어설프게 사용 가능하다.
그 괴랄한 설계때문에 밸런스 패치마다 초약체와 초강체를 오가는 바람에, 랭커 급 플레이어는 단 하나밖에 없는 불안정한 직업.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주 다른 평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직업을 견본으로 삼아 만든 실험체라는 설정 답게도.
실제로 그 몸에 이식된 인공 뇌와 포스 컴퓨터, 인공 심장, 포스 발전기 등이 초월적인 수준의 현실 이해 능력과 포스 재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최강의 잠재력을 가지게 된 플레이어 직업군이었으니까.
심지어 담호영은, 그 수준마저도 뛰어넘는 영역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라일리 그레인저와 한우현이라는 양대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들에게 필적하며, 부분적으로는 뛰어넘는 수준의 포스 이해 재능을 가진 최강의 빌런이었으니까.
회귀 전 담호영의 신상정보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히 알았다면 미리 궁지에 몰거나 암살이라도 했을 텐데, 아는 것이 본명과 캐릭터 네임 뿐이라 미리 조치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를 뒤져서 담호영을 미리 찾아보려는 시도를 했었어야 했을까?
아니다. 길드장 한우현은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확실치도 않은 제주도 전역을 뒤지는 비효율적인 짓까지 할 여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번 서울 소탕 작전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조치를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 생각한 한우현은 이미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달아오른 송과체에 더욱 그 정신을 집중했다.
"젠장, 뭐 이리 복잡해? [칼큘레이션 오버드라이브]!"
"[멈추라고]! 큭!"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송과체에 과부하가 가해지는 것을 감수하며 [현실에 명령]했다.
그 주위의 현실이 우그라들며 담호영의 모든 행동을 [억압했다].
"헉, 흑, 이게 무슨...정말 대단하긴 한..."
담호영의 표정이 부담스럽다는 듯 일그러졌지만, 여전히 그 연산을 멈추지는 않았다.
"흡!"
추가 조치를 가해야겠다.
다리 근육들에 있는 힘껏 힘을 주며 동시에 돌진했다. 검과 방패를 앞세우며.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부여]
-[절대 방어]
제압은 이미 포기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단 죽인다!
"분석, 분석, 분석··· 이게 무슨 결과야? 젠장, 더 빨리 계산해! ··· 자체 파해는 어렵다고?"
무수한 현실의 흐름이 그 돌진을 보정했다.
그 돌진을 인지한 담호영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며, 그 온 몸을 살짝 붉게 달아올렸다.
포스 사이보그에게조차도 과부하가 걸리는 수준의 계산.
-위이이잉
-키이이잉
무수한 포스 발전기와 컴퓨터가 돌아가며 어거지로 [현실의 억압]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만져 보는 것 정도는... 미친, [에너지 방어장]!"
순식간에 한우현은 담호영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동시에 그 칼 끝이 그의 가슴에 거의 닿기 직전에 이르렀다.
"가만히 있어라!"
"애미, 꺼져!"
-[전자기 검무]
-[광신의 광검]
-파가가각
-카가가각
길게 늘어난 에너지 채찍이 한우현의 방패와 검을 아슬아슬한 속도로 쳐냈다.
순간적으로 [확률 보정]의 효과에서 거의 벗어난 듯한 수준의 위력을 담은 저항 수준이었다.
그와 함께 담호영의 몸이 빌런들의 뒤로 크게 밀려나며 물러섰다.
하지만 조금 멀어졌다 해도 확률보정의 영역 안이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저항이라고? 어설퍼! [더 엎드려라]!"
"크, 으, 윽?!"
당연히, 한 번 보고 어찌 어찌 억눌러 저항하려 하는 담호영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해도.
한우현과 정면 대결을 이룰 수는 없었다.
-끄드드드득
순식간에 그 공간이 밀고 당겨지며 모든 영역에서 담호영의 행동이 부조리한 형상으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잠깐은 여유로웠던 담호영의 표정에 다시 공포와 당황이 어렸다.
"역시 안 되겠어. 파해 말고, 틈새라도 만드는 방향으로! 컴퓨터, 계산해! 빨리! 그래, 물량전!"
담호영이 다급히 외치며, 오른손에서 무수한 전기 와이어들을 뿜어냈다.
그것들이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며 그의 뒤에서 몸을 간신히 가누고 있는 빌런 플레이어들을 무리째로 움켜쥐었다.
수십 명의 빌런들이 순식간에 전기 와이어에 휘감겼다.
"으아악!"
"씨발, 담호영 이 개새끼야! 뭐하는 짓..."
"좆 같은···!"
"무슨 짓이야!"
동시에, 다른 손에 들린 에너지 채찍을 힘껏 휘둘러 한우현을 쳐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이 미친 새끼가 왜 우릴 묶어!"
"우욱, 토할 것 같아..."
"아니, 씨발? 이게 무슨 상황···!"
"담호영! 씹새끼야!!"
"컴퓨터 경로! 경로 계산해! 빨리!"
"[동화 작용 계산, 저항 경로 계산...]"
순식간에 담호영이 직조해내는 [저항의 포스 영역]이 그들에게 일시적으로 덧씌워지며 그들의 저항 포스와 강제로 [동화]되었다.
모든 빌런 플레이어들이, 한우현의 영역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남과 동시에.
"아, 그래, 동화... 이거다! 자, 받아 보라고!"
수십 명이 마치 짐짝이라도 된 것 마냥 우수수 한우현에게 쏟아 부어졌다.
동시에 그들이 각자 본능적으로 저항하던 [현실 저항의 포스]가 억지로 담호영에 의해 [꿰매지고 성기며] 한우현과 담호영 사이의 공간을 [흐드러뜨렸다].
-파자작
-서걱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스킬을 파해할 수준은 아니지만, 이대로면 밖으로 나가는 틈새를 만들지도 모른다!
"악!"
"크아악!"
그에게 던져지는 빌런들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만 않을 정도로 베어넘기며 돌진했다.
"계산, 계산, 계산... 크윽! 완벽히 하지 말고 대충! 빨리!!"
"입 닫아라, 담호영!"
순식간에 그 앞에 도달한 한우현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포스 디펜시브 매트릭스]
-[광신의 광검 : 공간 절단]
-파자작
"미친, 무슨 절단력이... 아."
-지지직
전자기인의 보호막이 너무나도 허망히 잘려나갔다.
담호영의 전기와 기름이 흐르는 왼팔과 다리가 으스러져 잘려나갔다.
그러나, 가슴만은 아슬아슬하게 뒤로 몸을 틀어 검 끝이 심장을 엇나갔다.
"...흐."
하지만, 그는 웃었다. 한우현은 웃지 못했다.
그의 주변으로 포스가 안정화되며 공간이 [아주 희미하게 굳어지려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는 것]을, 한우현과 담호영 모두가 느꼈기네.
"멈추...!!"
"경로, 동화, 흐, 흐흐, 흐... 나왔다, 됐어, 됐다!"
아주 잠깐.
[확률 보정]의 공간 영역 사이사이에, 무수한 빌런 플레이어들이 쏟아지며 그 [저항]의 포스가 동화되어 틈새가 생긴 사이.
-[공간 분석 완료. 정상화 공간 탐색 경로 추진]
"젠장, [긴급 탈출]! 빨리!"
"[멈춰라]!"
"지금은 안 통해!"
담호영은 등 뒤에서 추진기를 킨 채, 그 틈이 생긴 공간의 줄기들 사이사이를 잇고 뚫으며 기동했다.
그리고선, 그 영역을 [나갔다].
-우즈즈즈즉
-아자자자작
"흐, 흐으.... 후. 잘 있어라, 한우현."
다시금 빠르게 회복된 [확률 보정]이 유지되는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탈출하며.
-[이온 추진기]
곧바로 담호영은 발 아래에서 로켓 추진기를 추가로 활성화했다.
"헉, 헉. 다음에는 보지 말자고, 한우현. "
그리고 숨을 몰아쉬면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너 방해 안 할테니까, 쫓아오지 말기다?"
-파아앙
그 말을 남기고선, 순식간에 가속하며 하늘 위로 사라졌다.
* * *
"자, 모두들 줄 서세요! 줄!"
"캐릭터 네임 [판교직원들열심], [가입]한다!"
"캐릭터 네임 [모가지손수쳐내]. [가입]... 한다···"
"캐릭터 네임 [에게로꺼지세요]..."
"캐릭터 네임 [오천플마단아님]..."
"네, 캐릭터 네임이랑 전화번호, 본명 적으시고···"
"정확히 적으셔야 합니다!"
"반성문 양식 알려 드렸으니까, 이대로 각자 잘 써오시고···"
"아오, 씨발···"
"하, 그냥 진작 항복할걸···"
"담호영 그 엄마팬티나 뒤집어쓰던 변태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병신이야."
"진짜 길드원 취급 해 준다고? 심지어 고위 정직원으로?"
"네, 반성문만 잘 쓰시라니까요···"
왁자지껄한 남산의 한 가운데.
한우현은 표정을 굳힌 채, 길드원들과 항복한 빌런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호영이 마지막 순간 그에게 쏟아부어버린 빌런 플레이어들.
처음에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그들을 억지로 끌어모은 대장인 담호영이 도주한 것이 너무나도 확실히 보이자.
대다수가 어처구니 없는 마음에, 결국 허무하게 항복해버리고 만 이들이었다.
"어, 아까 나 공격한 후배네!"
"어... 그,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치유]해서 다 나았거든!"
"그, 정말로 괜찮긴 하네... 치유 효과가 현실에선 이런 건가."
심지어, 방금까지 서로 죽이고 죽였던 사람들이라기에는 대화가 퍽이나 평화롭게 이뤄지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죽거나 다친 놈들이 [부활]하고서는 웃으며 후배를 환영한다고 했기 때문에.
물론 한우현이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죽음 이후의 부활은 정말로 정신적인 충격이 크지만, 그를 견디고 용서해 달라고.
그 대신, 부활해야만 했던 이들에게는 큰 수당을 지급해주기로 했다.
다행히 그 보상이 충분했던 듯, 길드원들 대부분이 빌런들에게 별 앙금을 가지지 않은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긴 워낙 전투 흐름 자체가 압도적이라, 애초에 [부활]이나 [치유]까지 필요했던 길드원들이 10명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에게 두둑이 챙겨주며 길드 선배의 위엄을 보여주라고 명령하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마지막 배신 때문에 끝까지 저항했던 놈들을 의외로, 오히려 더 쉽게 설득할 수 있었지만···."
사실, 종합적으로 상황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니었다.
대 놓고 때린 대장의 배신.
그 때문에 한우현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높은 비율로, 마지막 남산의 빌런 플레이어들이 항복하고 전향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놈들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담호영의 실책은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냉정히 전력을 따진 끝에 도주를 선택한 담호영이, 그가 좆 되어 보란 의도로 내지른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그의 눈을 아주 잠깐이라도 가리기 위한 발악이었지.
하지만 그것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담호영을 쫓으려면 영역 선포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확률 보정] 스킬을 해제해야 한다.
그것도 그냥 해제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정해진 순서를 밟아서.
하지만 스킬을 해제하고 나면, 빌런들은?
수십 명을 모조리 죽여버릴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죽이면 나중에 부활시킨다고 해도 저항할 게 뻔하다.
그러니 수백 명을 피해 없이 제압하려면, 스킬 방향성 자체가 조작 계열로 설계된 오리지날 스킬이 필수적이다.
즉, 스킬을 해제한다는 것은.
빌런들의 완전한 복종에 큰 차질이 생김을 뜻했다.
아무리 담호영이 요주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의 앞에 있는 수백 명의 빌런들도 대부분 한우현이 이름과 캐릭터를 기억할 정도의 악명을 떨쳤던 인물들.
담호영 하나 잡자고 그들을 복종시키는 계획을 어거지로 뒤틀어버린다? 설계가 완전히 틀어지는데?
자칫 엇나가면 수백 명의 빌런들과 길드원들이 정면 충돌하게 된다. 그러면 승패와 관계 없이 최소 서울, 최대 경기도 전역이 초토화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개사기 너프 좀 하지, 개발자 이 새끼들..."
말하면서도 개발자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구태여 한 번 읊조렸다.
결국 한우현은 담호영을 포기했다.
다행히 다른 놈들은 저항 정도는 했어도, 스킬을 한 번 보고 제대로 공간 구조체를 구축하고 경로를 이어나갈 수준의 재능은 없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지 않는 선에서 [확률 보정]을 종료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는 컸다.
송과체 내부 세포들이 완전히 진탕이 되었으니까.
몇 없는 [브레인 노말라이저]를 때려박아서 비가역적 손상은 막았지만.
이제 2주 동안, 한우현은 전투 불능 상태다.
역시, 이런 미친 짓은 이렇게 중요한 대 플레이어 작전이 아니면 쓰면 안 된다.
다음에는 무조건 포스를 1000까지는 회복하고 나서야 [현실 재조정 해석]을 써야겠다.
"표정이 왜 그리 죽상이야?"
"...아."
고개를 돌려 말을 건 놈을 쳐다봤다.
붉은 색 용 모양 갑주를 쓴 기사였다.
"작전대로 다 된 거 아냐? 몇 놈 놓치기는 했지만··· 뭐, 정말로 한 명도 안 놓칠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잖아."
"...맞다. 그랬지."
"혹시 그 둘 때문에 그래?"
"..."
"흠, 많이 중요한가 보네···"
-털썩
권승환이 그의 옆에 주저 앉았다.
"너무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마."
"...좀 티가 났나 보군."
"조금? 하."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재승이 형도, 정훈이 형도. 얼마나 길드장 눈치를 보는데."
"상사 눈치는 봐야지."
"그 정도가 아니야. 길드장 태도 말이야···"
권승환이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급해. 너무 급하잖아. 마치 뭐 하나라도 계획대로 안 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
"뭐, 고졸따리 부사관이 조언하긴 좀 그렇지만."
그 때문에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에 할 말이 없어, 순간 말을 못 이은 것이었지.
"조언이라··· 그래, 들어보지."
"어? 응?"
"곱씹어 볼 테니, 한 번 말해 봐라."
"아니, 또 그렇게 판 깔아줄 것까진 없는데··· 크흠."
멋쩍은 듯 권승환이 헛기침을 했다.
"내 말은, 좀 여유를 가지란 말이야. 군대에서 느낀 건데, 그 때는 엄청 큰 실수 같았어도 지나고 보면 그리 큰 일 아닌게 많더라고."
"글쎄, 작은 실수가 알고 보니 너무도 큰 일의 시작점일수도 있지 않을까···"
"에휴. 이리 말할 줄 알았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냐. 그거 대비하느라 바쁜 거, 충분히 이해하거든."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서두를 이유가 하나밖에 없더라고."
"허."
"던전. 곧 나오는 거지?"
그 말에 한우현은 잊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길드장. 이거, 지속 가능하려면···
-쉿.
보아하니, 그걸 파고들어서 곰곰히 고민해 본 모양이다.
"...그동안 의문을 잘 참았군."
"뭐···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주위의 눈치를 본 그가 속삭였다.
"사실, 나만 생각한 건 아니야.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더라고."
"다들?"
"정확히는, 우리 다섯 명. 하지만···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어."
"뭐?"
한우현은 진심으로 놀랐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것일까.
길드 임원들이, 그를 배려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랐다니.
"정확히는, 차정훈이랑 김재승은 확실히 물어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유나랑 홍세희가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더라고."
"나유나가?"
이건 좀 의외였다.
홍세희야 워낙 소심한 성격이니, 차마 그한테 대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나유나, 그 세상 눈치 없는 이기주의자가 한우현을 믿어 보자고 주장했다니.
"나도 고민한 끝에, 조금만 기다려 보자고 생각이 바뀌었어. 길드장이 하는 행동에 이유 없는 건 없었으니까."
"..."
홀로.
너무도 오래 홀로, 세상을 떠돌았다.
그 과정에서 타인의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다른 방향으로 뒤틀렸다.
그 전에는 관심이 없었다면, 이후에는 알아도 모르는 체 하는 방향으로.
심지어 애초부터 한우현은 사회성이 좋은 인간도 아니었다.
공격대 지휘도, 그냥 우악스럽게 찍어누르듯.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다뤘다.
진정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서야 진정 대장의 책임감과 의무가 무겁게 느껴진다.
"...믿어줘서 고맙다."
"뭘, 고맙긴 우리가 고맙지. 솔직히 반 쯤 강제적으로 들어온 거긴 하지만··· 하다 보니까 우리도 느꼈거든."
코를 권승환이 쓱 문질렀다.
"길드는 진짜, 없었으면··· 세상 다 좆 됐을 거 같다는 거 말이야."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지."
"이 새끼들 진짜 죄다 정신병자라서, 뭐라도 찍어 누를 단체가 있긴 했어야 했어."
"우리라고 다를 건 없다. 고 레벨 플레이어는 모두 그러하니까."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고맙다."
"어?"
한우현이 화답했다.
"믿어줘서 말이다. 빠른 시일 내에, 다 말해 주도록 하마. 무엇보다 내가 아니라··· 너희들의 덕분이기도 하니까."
"큼, 쑥쓰럽네··· 아무튼, 그러니까. 지나간 건 앞으로 잘 대책을 생각해 보고. 너무 걱정만 하지 말라고."
"네 말이··· 맞다. 앞으로가 중요한 것이지."
한우현은 다시 의지를 다졌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어차피 모든 놈을 죄다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원 계획대로라면 담호영을 작전부장으로 앉히려 했었지만... 벌인 행동이나, 느낀 뇌파로 파악한 성정.
직접 만나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놈은 갱생 불가다. 억지로 길드 안에 들인다고 해도, 절대로 얌전히 지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즉시 전혀 방심하지 않고 처리해야겠다.
"추적은 계속 해야겠지만."
"그래, 우리가 저 놈 정보는 예의 주시할게."
무엇보다, 회귀 전과 비교해 담호영에게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그 산하의 무수한 사이코패스 플레이어들의 군단.
담호영은 분명 무시무시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개인.
회귀 전 담호영이 무서웠던 것은 그 스스로의 재능도 큰 이유였지만.
그를 따르는 대한민국의 무수한 빌런 플레이어들.
그 패거리의 위협이 가장 컸다.
당장 아무리 담호영이 그 능력에 눈을 떠 강해진다고 해도···
1대 1이라면, 한우현이 질 리는 없었다.
플레이어들 간의 싸움은 보스 레이드와는 달리, 단기 결전이니까.
-짝짝
"자, 다들 정리 끝났습니까!"
"예!"
"예!"
"그럼 슬슬 돌아들 갑시다!"
"자자 수갑 찼다고 너무 뻘쭘해하지 마시고... 가면 바로 그쪽들도 회식이니까!"
"그래요, 배고프실텐데 갑시다!"
"아니, 우리도 회식이라고...?"
그들을 뒤따라온 2차 진압 부대들까지.
무수한 마법사 계열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포스를 응집해 스킬을 발동했다.
-[차원 관문]
-[차원 관문]
이제 슬슬 스킬의 사용에 익숙해지며, 이름을 외치지 않고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길드원들이었다.
"자, 순서 맞춰서들 들어가세요!"
"수갑 찬 친구들도 줄 맞추시고···"
길드원들을 지켜보던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지팡이가 쿵 꽂혔다.
"야, 니들 뭐해? 안 와?"
"...흠."
저 싹퉁머리 없는 말투만 고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왜 같은 반말인데 권승환과 달리 느껴질까?
"...아니, 강요는 아니고. 천천히 와도 돼지···요."
한우현이 그런 생각으로 나유나를 쳐다보자,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다. 지금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일어나지."
"좋아, 회식은 출장 뷔페라고 했지?"
"기대해도 좋다. 랍스터 무한 리필이니까."
"...출장 뷔페에서··· 랍스터가 나와···요?!"
"난 해산물 싫은데."
"걱정 마라. 한우 등심도 트럭째로 오니까."
"...오."
홍세희와 나유나가 눈을 빛냈다.
"길드장님, 다 들어갔습니다! 오시죠!"
저 멀리서 김재승과 차정훈이 외쳤다.
하나의 차원 관문만 열어둔 채.
"다들, 오늘 고생 많았다."
차원 관문에 다가서며 한우현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다들 들어가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먹고 쉬도록."
"아싸, 진짜지! 이제 말 안 듣는다!"
"히히... 헤헿!"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나유나가 튀어나갔다. 그 뒤를 홍세희가 뒤따랐다.
"...쟤들은 좀 분위기 좋을라고 하면 산통을 깨네."
"그러려니 해요..."
권승환과 차정훈의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한우현도 관문을 넘어섰다.
-짝짝짝
"길드 첫 작전, 성공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준범? 이렇게 대놓고 와도 되나?"
놀랍게도, 길드 사옥 앞 공터.
먼저 건너간 길드원들이 신나게 음식들을 담고 있는 현장에서.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해준 이는 너무나 의외의 인물. 한국은행 정책위원, 이준범이었다.
"잘들 하고 계신가 들러서 알아보니, 전 길드원들을 이끌고 가셔서 정작 뒤풀이 준비가 난항에 빠진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좀 도와드렸습니다."
그 옆에서 전투 비적합 플레이어로 분류되었던 저 레벨 길드원들이 어색하게 웃음지었다.
"그, 생각보다 3000명 어치 출장 뷔페들을 구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음, 그럴 만 하지. 괜찮다."
하긴 작전에 너무 힘을 쏟느라, 뒤풀이 같은 건 남은 길드원들한테 알아서 하라고만 던져놓았다.
회사는 커녕 대부분의 대학교도 다니지 않은 이들이 뒤풀이 준비를 잘 할 리가 없었다.
그의 실수가 맞았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해결된 듯 하니 괜찮았다.
"소개해드릴 분들도 계셔서요. 하루 빨리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두 분 모두 모셔왔습니다."
"두 명이나? 일단 반갑군."
별 생각없이 말했던 한우현은, 순간 눈꼬리를 실룩거릴 수 밖에 없었다.
"...하. 하하."
-[날카로운 눈]
-[캐릭터 네임 : 무토]
-[캐릭터 네임 : 연두]
이준범이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온 두 사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거물들.
회귀 전,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안위만 지키다가 죽었던.
"안녕하십니까. 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위벤 유저 대표. 양주은입니다."
"반갑다, 무토. 전 공화당 대변인."
"아하하··· 그리 오래 하지도 못했는데."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수석 졸업자이자 현직 세무사.
"안녕하세요. 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스레딕 유저 대표. 임수호입니다."
"당신도 반갑다, 연두. 전 시민당 대변인."
"무토보다도 짧게 했는데, 크흠···"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수석 졸업자이자 현직 공인회계사.
-이 새끼는 너무 못생겨서 우리 대표 못 해.
-얘는 씨발 고졸이잖아! 장난해!
-아니 대표로 나선다는 새끼들 꼬라지가 왜 이래?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오... 어... 어...?
-...왜 이런 애들이 우리 게임을 하고 있어?
-뭔가 아니꼬운데...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확률 조작 사건 당시, 양대 유저 커뮤니티에서 대표를 뽑아 기자 회견을 하고자 했을 때.
몇 번이고 대표가 갈아치워지는 가운데, 겨우 겨우 유저들의 까다롭기 그지 없는 모든 조건.
외모, 학벌, 직업, 재산, 레벨, 인 게임 평판까지 그 모든 기준을 통과했던 엘리트들.
그러나 그 뒤에는.
오히려 너무도 스펙이 좋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느낀 게임 커뮤니티에서 온갖 트집을 잡은 인신공격을 해.
결국 이딴 새끼들을 대표하려고 했다니 억울하다 억울해를 외치며 유저 대표단 활동을 접었던.
두 랭커들이었다.
52화 뒤풀이
잠실.
노을이 지는 길드 사옥의 앞.
무수한 산해진미가 한가득 야외에 차려진 채,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글지글
"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크으, 육즙 죽이는데!"
"너도 맛있게 먹어라, 후배야! 닉이 [에션족척결]? 반갑네! 나랑 잘 어울려!"
"아니, [다섯글자에환호성]. 사람 이름 놔두고 닉 부르지 맙시다. 그리고 내가 레벨 더 높은데 반말은···"
"레벨 높으면 존대하란 거냐? 이 새끼도 정신병자네 이거··· 기간제 존대라도 해 줘?"
"존대면 존대지 기간제 존대는 또 뭔···"
"근데 대체 이게 얼마야?"
"지금 길드 작전 들어간 게 1000명쯤 되고, 새로 잡혀 아니 가입한 애들까지 합하면··· 3000명? 더 넘겠는데?"
"랍스터에 한우면 최소 인당 10만원짜리 뷔펜데···"
"야, 공짜로 줄 때 먹어. 나중에 청구할라."
"그건 인정."
뒤풀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절반의 의도였다.
진짜는, 아무리 엄청난 상여금과 즉각적인 [치유], [부활]로 반발을 누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전투 스트레스와, 빌런들에 대한 반감.
그러니까 자연스레 그 싸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모두가 어우러져 먹고 마시며 융화되어야 했다.
-자, 이 미디움 레어 굽기가 영광의 지름길이란 말이지!
-어서 오세요 당신의 접시를 비워드리죠!
-아니 씨발 내 접시를 왜 니가 비우는데?
-그래도 우린 춤을 추네요~
-하, 노래하는 꼬라지 보니 이 새끼 취했구만. 나도 뺏어 먹으면 되지!
-접시가 건강해졌네···
그리고, 보아하니 그 의도가 아주 잘 이뤄지는 모양이었다.
길드원들의 파티를 뒤로 하고, 한우현은 여전히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쨍
-쨍
"이렇게 와주다니 정말 반갑군."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빈 말이 아니야. 진심이야."
티 칵테일을 마시며 한우현은 중얼거렸다.
그의 취향에 맞게, 고법 철관음 차를 진하게 우려내서 럼과 라임 쥬스와 섞어 만든 술.
희미하게 느껴지는 리치 향이 아주 좋았다.
"하하··· 좀 어색하네요. 사실 저희가 좀 안 좋게 게임을 떠났던지라."
"아니, 그 원숭이들이 문제인 것이지. 그게 너희 잘못일 리가 있나?"
"위로 감사합니다."
"큭,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지."
비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온갖 조건을 따져서 대표를 뽑아놓고서는, 정말로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엘리트가 나오자.
이제는 열등감이 든다며 끌어내려?
원숭이, 침팬지들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플레이어란 것들 중에 정상인은 없다.
···한우현, 그 스스로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씁쓸하게 자조하며 한우현은 뇌까렸다.
"그러니, 정말로 환영해. 둘 모두 너무나 필요한 인재들이야."
정말이었다.
길드에는 플레이어들이 많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전투직.
회사 자체를 돌아가게 해주는 행정직이 너무나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 플레이어들을 대규모로 채용할 수는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대부분이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사회 부적응자들.
그들과 일반인들을 함께 일하게 하면 무조건 충돌이 일어난다.
또한, 이를 바득바득 갈며 길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정부.
그들이 무슨 수작질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재무와 경영은 모든 회사에서 핵심 중의 핵심 부서.
신뢰할 수 있는 이들로 이뤄야 한다.
그러니, 플레이어들 중에서 정상인들을 채용해야 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은 당연히 고레벨 중에서는 없고, 저레벨 중에서 열심히 찾아도 너무나 적었다는 것.
"듣기로는, 유저 자문단과 대표단에 아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는데···"
"예, 대부분 최근에 게임을 접었던 애들이긴 하지만··· 설득 중입니다. 아마 빠른 시일 내로 오지 않을까 싶네요."
"좋군. 좋아. 대학교 친구들이 많다고?"
"예. 레벨이 높지는 않지만, 증권과 투자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은 만큼···"
"도움이 되겠어. 트레이딩과 분석 전공 쪽이라면···"
"경영 쪽도 친구들이 필요할까요?"
"그 쪽도 있나?"
"많지는 않지만··· 회사 재무 설계 쪽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겠나?"
"예, 안 그래도 이직을 생각 중인···"
하나하나 그들이 읊어주는, 다른 플레이어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러던 도중 뒷풀이 기획팀 한 명이 다가왔다.
"길드장님, 감옥에 있는 애들이 좀 더 달라는데요?"
"원하는 대로 가져다 줘라."
"어휴, 완전 천사셔. 누가 감옥에서 꽃등심이랑 랍스터를 처먹어··· 야! 그냥 계속 가져다 주란다!"
"애초에 말이 감옥이지 그냥 지하 주차장에 모여서 놀고 있구만."
"뭐, 양은 많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갖다오지! [차원 관문]!"
"아니, 지하 1층 내려가는 게 귀찮아서 스킬을 쓰냐?"
"알 빠냐?"
시시덕대며 그들이 빠지자 양주은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상한 거긴 하지만··· 막상 보니 좀 어색하네요."
살짝 취한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게임 캐릭터 모습으로 보는 것 말인가?"
"하하, 그것도 그렇지만··· 저 [공원의노리쨩]이라던가, [차정훈똥꼬내꺼]말이에요."
"풋."
임수호와 양주은의 눈이 자연스레 음식을 게걸스레 삼키는 나유나와, 다른 길드원들의 음식을 뺏어서 차정훈에게 들이미는 홍세희를 훑고 지나갔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웃음을 참았다.
"현실에서 보니, 의외로 인터넷에서처럼··· 무시무시하신 분들은 아니셨네요."
"뭐··· 누구나 현실과 인터넷은 다르니까."
자연스럽게 넘겼지만, 아니었다.
만약 한우현의 개입이 없었다면.
저 둘은 수천, 수만 명을 잔악하게 찢어죽이는 빌런이 되었을 테니까.
둘의 추측이 맞았다.
"사실, 저는 진작에 찾아가 보자고 했지만··· 수호가 밍기적대느라 좀 늦었습니다."
"아니, 그걸 왜 말해."
"사실이잖아 임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군. 괜찮다."
한우현이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옛날에는 철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철성 변호사와 같은 경우였다.
한우현이 인터넷에 싸지른 온갖 패륜적이고도 쓰레기 같은 글들.
당연히, 유저 소송단 뿐 아니라 유저 대표단에도 그 공격성은 향해 있었다.
-게임에 200도 안쓰고
-건강한 이그드라실 음해하고
-온갖 기자회견으로 분탕치고
-감히 정상화를 거역해?
-감히 이그드라실을 거부해?
-넌 마인드가 위선적이야!
둘 역시 고소는 하지 않았지만, 나름 이그드라실 네임드 랭커인 한우현이 쓴 글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2년 전 일인데···"
"하하, 월급은 넉넉히 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더 주신다면 그 만큼 열심히 해야겠네요."
"대신 그 만큼 쓸만한 후임들을 많이 데려와 줘야겠지만."
"이거 유인이 확실히 생기네요."
시시덕대던 임수호가 잠깐 휴대폰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길드장님, 방금 보니까 아직 길드 홍보라던가, 시스템이 좀 미흡한 것 같던데."
"그렇지. 그 쪽도 사람을 모집해야 해."
아쉽게도, 해당되는 부분에도 인재가 마뜩찮았다.
길드를 세운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아직 홈페이지는 고사하고 블로그와 카페로 임시 운영을 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차정훈과 김재승이 개발자 출신 플레이어들을 구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그들의 실력이 높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길드 운영 프로그램과 웹을 개발하는 것에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정확히는 난항 수준이 아니라, 시작도 못 한 수준.
"그렇다면 한 분 더,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기 오시네요."
"인재는 언제든 환영이지··· 허?"
-후웅
차원 관문이 그 둘의 앞에 열렸다.
-[캐릭터 네임 : 채채]
쾌활해 보이는 인상의 연보라색 머리를 한 남성이었다.
"원래 처음부터 같이 하기로 했었는데,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친구들이 말하길, 길드장이 아는 사람일 거라 했는데···"
이준범이 한우현의 반응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아주 잘 알지."
"반갑습니다. 신창민입니다."
"이그드라실 애드온, 환산 전투력 측정기, 캐릭터 애널라이저, 몬스터 메모리얼 개발자. 본업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원래도 판교에서 일했어요. 중소 게임사지만···"
활짝 웃은 신창민이 말을 이었다.
"여기가 월급을 훨씬 많이 줄 거라고, 주은이 그러더군요."
"당연하지. 할 일이 아주 많으니, 각오하라고."
그 누구보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 이해도가 높은.
서울대학교 통계학과 및 컴퓨터공학과 복수전공 프로그래머.
버러지같은 패치나 하느니 보기 좋은 보조 프로그램들 개발하는 채채나 영입하라는 말이 하도 많이 나와서.
게임사한테 오히려 미운털이 박힌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의.
이그드라실 유저 최고의 네임드 해커였다.
"웹 개발도 가능한가?"
"전공은 아니지만, 어렵지 않죠."
"앱 개발도?"
"그 쪽이 제 전공입니다."
"...자꾸 요구해서 미안하지만, 플레이어들의 자료를 정리하는···"
"하하, 환산 전투력 측정기랑 다를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거랑은 좀 다를 텐데···"
"주은야. 원래 몸값 협상은 있어보이게 하는 거야."
"협상의 자세가 아주 잘 되어 있군."
악수를 하며 한우현은 웃었다.
"이준범, 고마워. 정말 고마워. 단순히 이 친구들 뿐만이 아니야."
셋과 눈을 마주치고서는 말을 이었다.
"셋 모두, 어떤 방향으로든 다른 플레이어들을 대표할 만한 친구들이지···."
실제로 그러했다.
그냥 자체의 능력이 좋은 플레이어일 뿐 아니라, 나아가 길드의 대표성을 더해 줄 만한 권위를 가진 유명인들이었으니.
"저희도 압니다. 세상이 지금은 아직, 안정된 거 같아 보이지만···"
"솔직히, 길드 아니었으면 망하기 직전이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죠."
한우현이 세운 길드.
슬슬 그 자체의 대표성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아서,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올 정도였으니까.
"고마워. 하지만, 지금 여긴 즐기는 자리니.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더 이것저것 묻고 싶지만··· 자네들도 늦은 밤에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겠지."
말을 맺은 한우현은 두 팔을 벌렸다.
"이제까지 상사랑 얘기하느라 따분했을 테니, 일단은 좀 먹고 마시고. 내일 마저 얘기하자고."
"하하, 감사합니다."
"이거, 막 가입해 놓고서는 이렇게 비싼 음식들을 축내자니 좀 민망하지만."
웃으면서 그들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뒤.
"음?"
한우현은 저 멀리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아주 멀리는 아니고, 저 앞에 있는 공원에서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에.
"길드장? 왜 그래?"
"저 여자··· 플레이어인가?"
"...아니? 송과체 포스가 안 느껴지는데?"
"...하긴, 그렇지. 착각이었나 봐."
"자, 길드장도 고생 많았으니 쉬면서 해. 이건 내가 직접 구운 거야!"
"좀 질긴데?"
"아오, 빈 말로라도 맛있다고 좀 해주면..."
옆을 지나가던 나유나가 고기를 한 조각 넣어주며 불평을 내뱉었다.
···착각인가?
고기를 씹던 한우현이 눈을 좁혔다.
마스크에 후드티를 뒤집어 써,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앳되어 보이는 인상.
왠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길드장님, 저도 잠시 쉬고 오겠습니다. 연초를 못 펴서요."
"흡연은 몸에 좋지 않다. 오래 살아야지, 이준범."
"하하, 자제하겠습니다···"
"어이, 거기 너. 그래. 저기 주방장한테 따로 준비해 놓은 오세트라 캐비어랑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 젤라또 달라고 해라."
"뭐야, 벌써 디저트 먹게? 하여간 입도 짧네."
* * *
길드원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
나무들이 구석지게 자라 있는 공원 구석.
"휴."
이준범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잠깐 어떻게 되어가나 궁금해서 왔는데, 너무 현장이 개판이라.
황급히 도와주었더니 여섯 시간 내내 생고생을 했다.
물론, 필요한 일이었다.
길드장이 정말 고맙다고 언질했으니.
보아하니, 단순한 뒤풀이가 아니라 길드원의 화합에 정말로 중요한 자리였나 보다.
하여튼, 겉보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초인처럼 보이는 한우현이었지만···
이런 어설픈 곳에서 실수를 하다니.
역시 게임 폐인이기는 한 모양이다.
"뭐, 한 배를 탔으니··· 이런."
-틱
-틱
라이터가 고장났는지, 덜걱대며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다.
-화륵
"여기요."
그 때, 하얀 손이 불쑥 다가와 불을 붙여 주었다.
"휴··· 덕분에."
"저도 한 대만 주세요."
"예, 그 정도야··· 음?"
자연스레 감사를 표하려던 이준범은 살짝 당황했다.
불을 붙여준 여자가, 너무나도 앳되어 보였기 때문에.
"저 성인이거든요?"
"음, 미안하지만 말로는 못 믿겠구나."
"꼰대네, 완전 꼰대야."
불평한 그녀는 자연스레 그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저씨, 왜 여기 있어요?"
"왜 여기 있냐니?"
"아저씨 플레이어 아니잖아요. 쟤네 길드라는 애들하고 다르게."
"하, 들켰구나."
기분 탓일까? 오늘 하루종일 고생을 해서 누적된 피로 탓일까?
"내가 필요한 친구들이라서."
"왜요? 저기서 일해요? 플레이어도 아닌데?"
왠지 이준범은 처음 보는 여자에게 친숙감을 느꼈다.
"그건 아니지만, 오히려··· 내가 감시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지."
"감시··· 아닌 거 같은데. 너무 친해 보이는데요?"
그래서, 무심코.
굳이 밖에서 꺼낼 필요가 없는 말까지 해 버렸다.
"친해져야지. 아들을 위해서."
"..."
"내가 해 준 게 참 아무 것도 없는 아빠라서 말이다."
"..."
"이제라도, 적성에 맞는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
"...그것도 결국, 강제하는 거 아냐? 당신이 원하는, 바라는 자리로."
"아마 적성에 맞기는 할 거다. 평생을 한 게임이니까..."
"글쎄, 아니라면?"
"하긴 내 생각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후우
이준범이 한숨을 내뱉었다.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존중해 줘야지."
"존중한다고? 한심하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하, 거 봐."
"그래도, 마지막 남은 가족인데··· 어릴 적, 내가 너무 일에 매몰되었다는 핑계로 소홀히 대했지."
"..."
"너무 대화를 하지 않았어. 오히려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어졌어."
"...처음부터?"
"그래, 처음부터... 녀석이 원하던 뭐라도 도와주고 싶으니까."
"길드가 아니라도?"
"최소한 길드 일을 도우며 플레이어에 대해 이해한다면, 설령 길드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세현이한테 맞을 다른 일이라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지."
"..."
소녀가 한참을 침묵했다.
"...왜, 그동안에는. 그렇게 말 안 했어."
"말 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없지 않았잖아."
"그래, 사실 내가 외면한 거지···"
"근데 왜 이제와서?"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하는 거지."
"..."
-치익
다 핀 담배를 내린 이준범은, 그녀를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이제··· 돌아와 주거라. 세현아."
"..."
"내가 잘못했다. 부탁한다."
이세현이 대답 대신, 후드티를 벗었다.
거기에는 자그마한 뿔이 머리칼 위로 살짝 솟아있었다.
직업 [마법소녀]의 변신 전 기본 외양.
스킬을 한 번만 써도 무조건 변신하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코디에 신경을 쓰지 않아.
일반인과 완벽히 같은 상태인 모습.
"...아빠."
53화 마법소?녀 라니아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앞에서, 이세현은 과거를 회상했다.
정확히는, 일주일 전.
세상이 게임이 된 날을.
-...어?
-이게, 이게 뭐야.
-왜··· 왜 내가 여자? 무슨?
믿을 수 없는 현실.
미친 과학자가 실험이라도 한 것인가?
-나 혼자가 아니었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아니, 정상화 된 거야?
-변신! 미친, 진짜야!
아니었다.
게임이 되어버린 세상.
거기에 더해, 극도로 희귀한 성별 생성 오류 캐릭터.
그것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을 뿐.
-씨발, 근데 찾아보니 성별 바뀐 건 나밖에 없는데··· 어쩌지?
-집에는 못 있겠어. 이대로면 인터넷에서 여자인 척 후원받으면서 인터넷 방송에다가 넷카마질 한 게 다 까발려질 거야···
-...좆 같은 게임사 새끼들.
-이 사탄의 혈육들이 주범이야!
반 평생을 게임에 바친 정신병자답게도.
마법소년··· 아니, 마법소녀 라니아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보다는, 그 책임 소재를 누군가한테 돌려 분노를 표출하고자 했다.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그 대상은 명확했다.
그들이 인생을 바친 세상을 만든 저주받을 창조주.
게임사.
-어?
-넌?
-뭐야, 뭐 이리 많이 모였어?
-이거, 우리 같은 생각 한 거 같은데?
-신은 무슨, 게임을 정상화 하랬더니 세상을 정상화해?
-쩌러 레츠고! 게임사 정상화!
-정상화의 시간이다!
-이거 니들이 이런 거지!
당연히, 게임사한테 세상을 게임을 바꾼다는 신적인 권능이 있을 리는 없었다.
-과, 과징금 크악 씨이빨.... 헉, 헉, 제발··· 그만, 그만··· 제가 잘못했으니까.
-계속 춤 춰! 다음 노래를 틀어주지!
-아니, 그건 진짜 제가 춘 게 아니라 AI로.
-알 빠냐?
-춤만 추지 말고 노래도 불러!
-리드미컬하게 댄스해!
정신병자 플레이어들도 그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좆같았다.
힘을 표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갈등의 주범으로 여겨지는 곳.
게임사로 찾아가, 그들의 서버와 건물을 모조리 박살냈다.
-인장 주작은 뭐야 씨...바알... 흐악... 진짜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용사님들, 제발···
-어쩌라고? 춤이나 계속 추라니까?
-더는 못 하겠···
-그럼 반으로 갈라져서 죽어.
-잠깐···
그리고 디렉터와, 전 디렉터와, 전전 디렉터···
아무튼 게임사에 존재하는 모든 핵심 개발자들.
그들을 모조리 끔찍하게 고문해 죽였다.
별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근데 이제 뭐함?
-...그러게?
그러나 게임사와 직원들을 모조리 물리적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린 뒤.
판교에 모인 빌런 플레이어들은 고민에 빠졌다.
화려하게 힘을 과시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제 뭘 하나?
-이대로 흩어지자고? 아쉽지 않아? 우린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라고!
-굳이 그렇게까지 나대야 하나? 그리고 우리가 고렙이긴 한데, 더 전투력 높은 애들 수십 명은 있잖아.
-걔들도 합류시키면 돼지!
-걔들이 우리 말을 들을까?
-그럼 죽여!
-이긴다는 보장은 있고?
그 자리를 대표하는 최고 레벨 플레이어 둘은 약간 의견이 갈렸다.
캐릭터 네임 맑은눈의광인, 레벨 295 전자기인 담호영.
캐릭터 네임 라니아, 레벨 295 마법소녀 이세현.
대 놓고 막 나가 보자는 초강경파와, 막 나가는 건 좋은데 다른 플레이어들 동향을 보자는 강경파.
물론 둘 다 막가파이기는 했기에, 갈등을 빚지는 않았다.
-일단 오늘은 쉬자고.
-그래, 뭐 할려면 내일 또 판교로 오던가.
-여기가 우리 플레이어··· 아니지.
-빌런 플레이어들의 약속 장소로 삼자고.
-빌런? 허, 만화 좋아하나 봐.
-근데 적절하긴 하네.
하지만 전원이 하나의 의견에는 합의할 수 있었다.
일단 하루 정도는,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행동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우리는 길드다!
-길드에 가입되지 않은 채 행하는 모든 개인 행동을 금한다!
여자가 되었기에, 도저히 아버지한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어.
피시방을 변신 전의 모습을 떠돌아다니던 이세현은 경악했다.
-길드? 아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하루? 하루 만에?
-쟤 알아. 정신병만 5개는 앓는 우울증 환자라던데?
-...저 길드장이 그런 폐인이라고?
-우리가 잘못 안 건가···?
그 뿐만 아니라, 판교 게임사 건물들을 죄다 붕괴시킨 빌런들도 흩어져 돌아가는 길에 뉴스를 보다가 경악했다.
-차정훈이랑 김재승이 한국 지부장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세도, 방송 수익을 죄다 현질해서 캐릭터 스펙에 쏟아부은 애들을 이길 거 같진 않은데.
-나유나? 홍세희? 그 미친 혐짤 분탕충이랑 자해공갈 스토커?
-랭커들 수백 명이 벌써 길드에 들어갔다고?
-상황이 뭔가 이상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길드?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들이 긴밀하게 서로 소통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자기 캐릭터 스펙과 범죄 행각을 자랑해대며.
서로 정보를 교류하고, 상황을 알아보려 한 것이었을 뿐.
사회성 하나는 끔찍하게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자기들이 얻은 힘이 너무나도 강하고.
자기 못지 않게 강한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정신병자들이라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기에.
발휘할 수 있었던 자제력이었다.
-길드가 대통령, 여당, 야당한테 뭔가 엄청난 권한을 얻어냈다는데.
-길드장이 계획을 발표했어. 범죄를 저지른 플레이어들은 죄다 체포한다고.
-뭐? 길드 가입자가 벌써 전체 플레이어의 10%?
-...말도 안 돼.
-이대로 저 새끼 밑에 죄다 기어들어가야 한다고?
-싫어!
-싫으면 뭐 어쩌게? 지금 대안이 있나?
-나 방금 한우현이랑 직접 싸우고 항복했다. 니들도 그냥 항복해라.
-이제야 우리 세상이 왔는데 군대 생활이나 하라고?
-싸워 보면 그 소리 안 나올 거다. 우리가 죄다 만렙 찍어도 못 이겨.
-씨발, 현실은 게임이랑 달라! 능력치 아무리 높아봐야 방심하면 한 방이라고!
-길드장은 게임 스킬 안 써. 대신 이상한 염동력 같은 걸로 휙휙 날아다니는데, 대항 자체가 안 돼.
-뭔 헛소리야? 게임 스킬을 안 쓰면 어떻게 싸운다는 거야?
-난 경고했다. 진짜로 니들 위해서 하는 말이야.
"하, 진짜로···?"
"난 못 믿어."
빌런 플레이어들의 반응도 둘로 나뉘었다.
대세가 완전히 넘어갔으니 일단은 저 길드란 곳으로 들어간다는 의견.
죽어도 사회생활은 못하겠고, 중졸따리 앰생 우울증 환자를 윗 사람 취급은 더더욱이 못 하겠다는 의견.
라니아는 중립이었다.
정확히는, 그 자신의 특수성을 믿었기에 택할 수 있었던 중립.
-변신만 해제하면··· 일반인 취급이야. 상태창도 안 뜨고.
-다른 마법소녀나 마법소년도 이런 건가?
-...씨발, 마법소녀 랭커가 별로 없어서 모르겠네.
그래서, 다른 빌런 동료들이 죄다 제압당하는 순간에도.
침묵했다.
끝까지 반항할 정도로 깜냥이 세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드는 들어가기 싫었다.
자기 세상이 온 것마냥, 다른 플레이어들을 죄다 억압하다니.
한우현, 네가 뭐라고? 뭐가 특별하다고?
그냥 인생을 갈아 넣어서 만렙을 찍었을 뿐인 랭커일 뿐인데.
심지어 내가 [성기사] 특집 영상 만들고 싶다고 인터넷 방송으로 한 마디 한 거 가지고.
성기사 랭커로서 인터뷰 해 줄 테니 만나달라고 몇 달을 덧글을 도배해 대며 징징대던 여미새가?
거기에 더해 정신병만 10개는 앓고 있는 사람이 대장 노릇을 한다고?
물론 그것만이 이세현이 길드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길드에 들어가면, 그 정체가 드러날 수 밖에 없었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변하기 전.
현실에서의 신상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숨어 살 예정이긴 하지만··· 한 방 정도는 괜찮겠지."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마음대로 세상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세상.
그를 강제로 억압하는 길드에게, 복수까지는 아니어도.
뒤통수 한 대 정도는 때려주고 싶었다.
심지어 그 계획이, 이세현의 생각에는 그 자신에게 딱히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변신 전에는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기습이니까.
그래서 찾아왔는데···
"..."
"평생을 숨어서 살 게냐? 너도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지 않느냐···"
이세현, 그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로봇 같은 인간이었다.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용돈만 놓고 가는.
물론 객관적으로, 이세현이 한심한 생활을 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눈빛.
이루 말 할 수 없는 부정의 감정이 가득 담긴 그 눈빛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지금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마디만 걸어 볼 작정이었는데.
말투가 비슷했는지.
자식은 알아 볼 수 밖에 없었는지.
너무나 다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들켰다.
"...나도 몰라. 모르겠어."
"그 모습 때문에 그러냐? 괜찮아. 이미 온갖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미안."
이세현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아버지가 길드에서 나온 모습을 보아하니, 그를 위해서 협조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무리 불효자라지만, 거기까지 알아냈음에도 길드에 테러를 하기에는 꺼려졌다.
그냥, 사라지리라.
그리고 정체불명의 플레이어로 살리라.
코디네이팅은 고정이 아니니까, 바꾸면 그만이다.
계란 머리도 치우고···
"그건 안 되지."
"...한우현."
하지만 그가 막 몸을 돌리는 찰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바로 뒤에서 흘러나왔다.
"마법소녀 라니아. 지금 들어온다면, 즉시 나 다음가는 길드 임원으로 널 임명해 주지."
"..."
"그리고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도, 합법적으로 사면해 줄 수 있고."
"..."
한우현은 지금이 정말로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회귀 전, 라니아는 극도의 공격성과 광기에 절여져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처음부터 그 정도 수준의 정신병자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사회 부적응자기는 하지만... 대화가 안 통하는 수준은 아니다.
회귀 전과는 다르다.
"싫다면?"
"그렇게까지 거부하는 이유가 뭐지? 길드에서 너는 충분히 대우 받을 텐데."
"너야말로, 나한테 왜 이리 집착하는 거야? 아, 혹시 그 때 안 만나줘서 그래?"
"무슨 헛소리지? 만나?"
"기억 못 하나? 뭐, 됐어. 너, 나랑 담호영한테 특별히 현상 수배까지 걸었다며. 우리가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특별하진 않은데."
"단지 능력자를 우대하는 것일 뿐이다."
"니네랑 끝까지 싸우겠단 소리가 아냐. 조용히 지낼게.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진 않아."
"네 재능이 아깝지 않나?"
반항적이고, 그를 적대하지만.
온 세상을 증오하는 그 감정의 파도는 없다.
-난 고아나 다름 없어.
그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그의 아버지. 이준범.
회귀 전에는 아주 안 좋은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냥 안 좋은 수준이 아니라, 그것이 이세현을 완전히 미쳐 버리게 할 정도로.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보다 쉬운 설득의 길이.
"재능은 무슨, 너도 내 방송 많이 봤으면서."
"방송은 봤지만, 그런 것 따위 이제 상관하지 않는다."
"뭘?"
"네가 남자였다는 게, 이제와서 뭐 그리 중요할까?"
"이, 씹 새끼가?"
그녀의 눈에 분홍빛 별과 하트가 비눗방울처럼 피어올랐다.
-[변신!]
아차.
한우현은 실수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원래 의도는 어차피 별로 밖에서 생활하지도 않았고, 이준범도 아들 얘기를 그다지 밖에 하고 다니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딸이었던 것 마냥 처리해 주겠다는 의도였는데.
그게 저 정도의 역린이었다고?
-[내 다섯 손가락에 환호성, 열광해!]
-[나와 계약해 줘!]
-[돔 공연 축하해]
-[화려한 조명이 날 감싸네]
마법사와 도적의 하이브리드 직업.
[마법소녀]의 전투 태세류 스킬이 순식간에 모조리 부여되었다. 그 어떤 스킬명 영창도 없이.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포스 제어 재능을 가졌다는 증거.
뒤이어 화려한 분홍빛 트윈테일이 길게 빛나며 튀어나왔다.
그 복장이 유치찬란하게 빛나며, 순식간에 화려한 여아용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머리 위에 계란 후라이 모양 장식까지.
변신을 마친 이세현이 양 손에 마법봉을 든 채로 읊조렸다.
"다시 말 해 봐. 아니, 말 하지 마. 말하면 죽여버린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내 말은."
한우현은 표정을 굳혔다.
지금은 안 된다.
송과체가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떠한 스킬도 쓸 수 없다.
몸 자체에 흐르는 포스를 이용한 본능적인 방어 정도야 가능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방어일 뿐.
"뭐야, 무슨 일이야?"
"...라니아...? 그렇게 찾아도... 안 나왔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라니아?"
그리고, 마법소녀는 그 직업의 이름에 걸맞게.
변신 모션이 아주 화려하다.
어느 정도냐면, 회식을 즐기고 있던 길드원들 중 특히 감각이 뛰어난 간부들의 경우.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화려한 빛과 효과음을 느끼고 곧바로 올 수 있었을 정도로.
"너 뭐야? 어디 잘 숨어 있다가 나왔네?"
가장 먼저 거들먹대며 나선 것은 나유나였다.
"...청와대 테러리스트."
이세현이 길드원들 모두가 아는 별명을 내뱉었다.
"...뭐어? 이 악녀가?"
그리고 당연히, 나유나도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기에.
지팡이 끝에서 무지갯빛 기운을 끌어올리며 응수했다.
"길드장한테 개같이 얻어터지고 납작 엎드렸다더니 진짜였네. 병신 년."
"응, 훈육이 필요해 보이는데? 곧 라니아는 너희에게 고마워했어, 말 나오게 해 줄게. 야 권승환, 애들 다 불러."
"안 그래도 이미 불렀다."
"굳. 팔다리부터 으깨 놔야···"
"길드 사옥 앞에서 싸워보자고? 난 잃을 거 없는데, 진짜 해 봐?"
일촉즉발의 상황.
한우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소녀]는 회피와 대규모 폭격에 특화된 직업이다.
게다가 현실을 의지대로 왜곡하는 [현실 재조정 해석] 스킬은 그 근간을 마법소녀 직업군의 [주변을 비 현실적으로 예쁘고 아름답게 왜곡하고 무효화하는 현상]에 두어 만들어진 스킬이다.
전자기인과 함께 자체의 잠재력이 가장 높은 직업들 중 하나.
무엇보다 라니아는 [마법소녀] 랭커들 중에서도 그 포스 재능이 가장 뛰어난 자.
즉, 한우현이 아니라면 다른 길드 임원들도 그녀를 결국 제압할 순 있더라도.
싸움 도중, 그녀가 도심과 길드 건물, 저레벨 길드원들에게 뿌리는 무차별 마법 난사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잠깐, 싸우러···"
-쿵
그 긴장감을, 하나의 소리가 끼어들며 풀었다.
한 남자가 무릎을 꿇는 소리.
"세현아."
"..."
"단 한 순간도, 네가 태어난 이후로··· 네가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
"언제나 걱정했을 뿐이었지."
"..."
"지금도 마찬가지야. 네가 잘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길드에 들어온 것이고..."
"..."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나니까... 여전히 내가 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걸 알았다.
"..."
"하지만, 그것이 정녕 네 선택이라면..."
"...?"
"존중... 해야겠지."
"뭐...?"
그 말만은 예상치 못했던 듯. 이세현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얼룩지며 커졌다.
"길드장. 보내 주십시오."
"그건."
절대 안 된다. 전 세계 최강의 마법소녀 랭커. 라니아와 엘리자 나바로는 그의 계획에 필수적인 존재다.
하지만 엘리자 나바로는 필리핀 일대를 통제하는 것만도 바쁜데다가, 언어부터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
라니아가 없다면 오리지날 스킬의 심화 연구가 크게 어려워진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분탕을 칠지도 모르는, 사회 부적응자를? 담호영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이세현까지 풀어주라고?
하지만, 이준범의 눈빛이 너무나도 완강했다. 마치 거절한다면, 절대로 앞으로 협조해 주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
한우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이준범에게 너무나 많은 걸 보여줬다. 양주은과 임수호도 그가 보증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합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 자체의 도움도 너무 컸다.
제길. 하필 전투 불능인 순간에.
"무슨 미친 소리...에요? 쟤가 얼마나 중요한지... 길드장이 얼마나 강조... 했는데에..."
"좆 까. 내가 못 보내. 길드장은 가만 있어."
"한우현, 곧 김재승이랑 차정훈도 온다. 그럼..."
"...가라."
"..."
감정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준범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마법소녀는 회피기가 너무 많다. 그 회피기가 심지어 대부분이 회피와 동시에 마법을 흩뿌려 광역 폭격을 가하는 효과까지 있는 것들.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맞았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명령이라면..."
나유나, 권승환, 홍세희가 무기를 천천히 내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일었다.
"자식을 위한 마지막 부탁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부탁을 들어줬지만, 이준범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세현을 보낸다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씨발."
그리고.
-[변신 해제!]
빛이 일며,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평범한 소녀로 돌아갔다.
"진짜, 아빠, 진심인 거지...?"
이세현이 힘 없이 중얼거렸다.
54화 지식은 곧 힘이다
길드 사옥 맨 윗층. 한우현의 집무실.
뒤풀이 다음 날, 모든 임원들이 모였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재무부장 이세현이다."
"하, 그 물통 사기범을 재무부장으로 앉힌다고? 횡령이나 하는 거 아냐?"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뭐이악?"
"그만. 이세현을 너무 무시하지 마라."
그 옆에서 이준범이 살짝 웃었다.
"제가 잘 도와드릴 겁니다. 양주은 씨, 임수호 씨도 도울 거고요."
"뭐, 그렇다면야···"
"···라니아."
"응?"
"라니아라고 불러. 이세현 말고."
굳이?
한우현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 눈빛이 단순히 싫다를 넘어, 어떤 의지가 보였기에.
"그래. 라니아."
"뭐, 좀 정상적인 이름이니까 그런 닉으로 부르는 것 정도야···"
"하긴 똥꼬내꺼 이딴 걸 보니···"
"저, 저한테 갑자기 왜 이러세요··· 오···"
맞춰 주기로 했다.
뭐, 어차피 원래 남자였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비밀로 지켜주기로 한 마당에.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지."
길드 출범 일주일.
총 가입자 수, 30만 명.
길드 정직원 수, 5000명.
마침내, 길드가 그 구조를 본격적으로 확립했다.
"운영 방향이다. 모두 놓치지 말고 잘 듣도록."
"이제부터 전에 말했던 길드 부서의 분리가 확실히 이뤄진다."
"라니아는 이준범, 임수호, 양주은과 함께 길드 내무 구조와 외부 투자 설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정부가 자금이나 세금 문제로 딴지를 걸면 즉시 나한테 전하고..."
"나유나는 지금까지처럼 플레이어 체포에 앞장선다. 다만 현재까지는 너무 주먹구구였지. 이건 내가 만든 공식적인 길드 수사 절차와, 사법 처리 및 약식 재판 절차다. 안준, 안설 경찰관과 이철성 변호사와 함께···"
"홍세희는 정보부를 만든다. 자, 방첩과 첩보의 기초다. 고졸인 너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었으니 불평하지 말고 외우도록. 차후 전용 훈련 프로그램도 내가 직접 가르쳐 주겠다. 도적 계열 플레이어들은 우선적으로 여기에 배치되며, 향후 업무에 맞지 않는 이들은 따로···"
"권승환은 플레이어 전투 교리 공부는 마쳤나? 좋다, 인사부장. 이건 내가 그동안 정리한 보다 세세한 훈련 프로그램이니 보고. 기초적으로는 직업 계열별로, 세세히는 각 직업별로 모두 다른 커리큘럼이니 유의하도록. 그를 토대로 신입들에 대한 훈련 및 연수는···"
"차정훈, 김재승은 회사 자체의 인사와 경영 설계에 참여한다. 우선···"
할 일이 많았다.
정말로 많았다.
* * *
"일주일 동안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형이 말하는 공부가 꽤 중요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병원은 잠시 쉬기로 했어."
"그래도 괜찮은 거냐? 2년차면 가장 바쁠 시기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을 가르치겠다는데 누가 딴지를 걸어?"
한우준이 피식 웃으며 흉기로나 쓸 법한 두께의 의학 교과서들을 차례로 책상에 내려놓았다.
"각오해. 나도 이것들 공부할 때, 진짜 자살하고 싶었으니까."
"최선을 다하지."
한우현은 현 시점에서 플레이어 생물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 엄밀하고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방정식을 배우지 않고 미분 적분의 공식만 외운다?
그 사람이 미적분학에 대해서 잘 안다고 주장한다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제대로 배워야 한다.
전과는 다르게.
"그럼, 시작해 보지. 일단 형이 어디까지 아는지부터 보자고."
해부학Anatomy.
포스를 신체 장기, 근육, 신경부터 혈액, 림프, 골관절들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입해 강화하는지 통달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학문.
"음, 진짜 대단해. 형, 중요한 내용은 진짜 다 알고 있잖아?"
"그런데 너무 족보 위주로만 공부했어. 아, 물론 나쁘다는 건 아냐. 그게 중요하긴 하니까. 근데 그건 의사의 관점이고···"
"형은 해부학을 실제로 활용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려는 거잖아? 그럼 다른 방향으로 공부해야 할 거 같네. 이러면···"
"자, 내가 새로 만든 신경계 순서도를 외우는 방법이야. 식당으로 비유하자면, 리드미컬댄스족해적단이고향으로···"
"뇌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구조가 많아. 하지만 그게 밝혀진 부분이 적다는 건 아니지. 신경계의 기초적인 구조에 대해서 처음부터 짚어보자. 크게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로 나뉘어. 중추신경계도 단순히 뇌 하나가 땡이 아냐. 보통 생각하는 뇌는 대뇌지. 하지만 신체 대사의 기본은 중뇌, 교뇌, 간뇌, 소뇌 등···"
"좋아, 이해가 빠른데? 마치 한 번 예습이라도 한 거 같네. 그럼 이제 근육과 뼈에 대해 알아보자고."
"호시탐탐파트라슈... 겨우 손에 있는 뼈만 해도 무수하지. 하물며 우리 몸에 뼈가 몇 개나 있는 줄 알아? 근육은 또 얼마나 많냐면···"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자니,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불평할 시간이 없었다.
배울 과목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생리학Physiology.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들을 원리적으로 이해하고 조합하고 제어해, 초월적인 신체 능력과 정신 활동을 이루게 해 주는.
두 번째로 중요한 학문.
"기초부터 하자고. 사실 무작정 외우면 되는 해부학과 달리, 생리학은 좀 더 이해해야 하는 학문이거든. 생리학이란 인체의 기능을 물질 상호 작용적으로 파악하는 학문인데..."
"아니지, 아니지. 신경 전달 물질과 호르몬은 완전히 다른 거야. 물론 비슷하긴 하지만."
"좋아. 그럼 이제 근육 세포들에 대해···"
"혈액? 이것까지 알아야 해? 뭐, 필요하다면···"
"형, 정말 똑똑한데? 나 정도는 아니지만, 뭐 이리 잘 외우는 거야? 그동안은 대체 왜 공부를 그렇게 안 한 거야?"
"아...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지. 미안. 넘어가자."
조직학Histology.
큰 구조를 넘어 플레이어 신체의 세부 구조까지 강화해, 그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학문.
"세포가 다 똑같은 줄 알지만, 정말로 많이 다르다고. 일단 내부 구조부터 정확히 파악하자. 핵과 세포질은···"
"세포 분열 과정도 세포마다 다 달라. 특히 심장 세포와 신경 세포는 재생이 어렵기 때문에, 분열도 잘 되지 않지."
"모든 세포가 핵이 있는 건 아니지. 대표적으로 적혈구는···"
"반대로 모든 세포가 세포질이 있는 것도 아니야. 대표적으로···"
면역학Immunology.
폭주하는 포스가 손상시키거나 과하게 강화시켜 일으킬 수 있는 육체의 반작용과 부작용들을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
"흔히 우리 몸의 면역이 백혈구로 이뤄진다고들만 알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단순하면 백혈병이라는 게 왜 있겠어?"
"오, 알고 있다고? 그럼 얘기가 빠르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선천 면역, 후천 면역, 항균 단백질 이건 그냥 인터페론이라고 알면 돼고, 마지막으로 보체."
"하나하나 원리부터 자, 사이토카인이 뭐냐면··· 응? 염증부터 알려달라고?"
발생학Embryology.
치유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상이 극도로 심한 위기 상황에서도 신체 활동과 구조를 포스를 이용해 만들어내고 흉내내서, 평상시처럼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게 해 주는 학문.
그리고 나아가 아예 인간의 틀을 벗어난 수준의 새로운 생명 구조 체계를 플레이어의 육신에 덧붙이는 생명 원리의 근본.
"아니 미친, 멀쩡한 손가락은 왜 자르는데?"
"...재생하는 걸 보여주는 의도는 알겠는데, 알아서도 잘 자라는데 굳이 발생학까지 알아야 해?"
"아··· 치유가 만능이 아니라고? 그래서 재생 과정과 발생 과정까지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발생 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장기는 둘이야. 뇌와 심장이지. 어떤 식이냐면..."
약리학Pharmacology.
엘릭서를 비롯한 무수한 버프와 치유 아이템들의 효과를 이해해, 그 원리를 육체에 보다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학문.
"이건 나도 사실 대충 넘긴 과목이라 잘은 모르는데··· 개론부터 보자고."
"약물의 종류 구분에는 무수한 방식이 있지만, 가장 흔하게 쓰이는 것은 적용 기관에 따른 분류다."
"크게 심혈관계, 자율신경계, 중추신경계, 내분비계 작용 약물로 나뉠 수 있으며···"
"응? 중추 신경계 약물을 특히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왜?"
"...이 약물들을 동시에 복용하면 뇌에 좋지 않아. 아니, 좋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좆 같아져."
"된다고? 무슨 미친··· 하, 그래. 더 자세히 알려주기나 할게. 중추 신경계 약물들은 가장 그 효과가 인간의 정신에 극명하게 반응하는 물질들이다.
"그 종류는 크게 항불안제, 항우울제, 항경련제, 항정신병제···"
생화학Biochemistry.
포션과 버프의 효과를 인위적으로 흉내내고 모사해 필요한 호르몬과 신경 전달 물질을 창조해내고.
나아가 포스를 이용해 신체 활동과 생체 에너지 자체를 공급하게 해 주는 학문.
"...아니 씨발, 이런 것까지 알아서 뭐하게? 아드레날린 같은 건 뇌 활동 제어하면 충분히 분비 가능하잖아?"
"이게 뭐야? 이런 호르몬은 없는데··· 뭐? 플레이어 전용 호르몬이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에휴, 어차피 과학적으로는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고민해서 뭐하냐. 개론부터 보자고. 생화학이란···"
"효소란 무엇인가? 효소란 화학 반응의 매개체이자···"
"유전체와 아미노산의 관계에 대해서···"
"모든 물질과 세포의 작용은 결국 세포 표면부에 존재하는 수용체를 통해 이뤄진다. 수용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스위치이자 통로이자 작용체로···"
당연히 이해가 쏙쏙 되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끔찍하게도 어려운 공부였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책상 위에 앉아서 [신경 이해 확장]을 통해 강제로 뇌 연산과 인지 능력을 부풀리기만 하면 가능한 공부 따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 * *
혼자서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를 다른 이들한테도 가르치고, 그 이상으로 학문적으로 밝혀내고 연구한 끝에.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러니까, 정식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아주 큰 규모로.
"반갑습니다. 길드장, 한우현입니다."
"예. 미래대학교 의과대학장 백규태입니다."
"먼저, 저희 길드의 공식 플레이어 의학 연구 협업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라뇨, 미래생명재단부터 해서 전 세계가 지금 초미의 관심을 가진 분야인데···"
"일단, 카데바Cadaver부터 볼까요?"
"...생각보다 많군요. 시신을 기증한 플레이어가 이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안타깝게도, 끝까지 길드의 합법적인 범죄 예방 및 체포 과정에서 저항한 이들입니다. 대부분이 플레이어 변이 과정에서 본래의 신원을 알 수 없게 되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의과대학 교수가, 거짓말임을 알았다.
하지만 굳이 딴지를 걸지 않았다.
플레이어 범죄와 테러는 그 규모도, 피해도 엄청났으니까.
어지간한 수준의 범죄라면 길드에서 직접 크게 피해를 보상해주고 여러 경로로 사면시킨다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폭력적인 미치광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미래 그룹 재단 측에서 무조건 긍정적으로 협조하라고 압박이 내려오는 상황.
의학적으로도 플레이어의 신체는 너무나 매력적인 연구 대상이었다.
사소한 윤리적 문제점 따위야, 넘어갈 만 했다.
"알겠습니다. 해부학교실 일반해부학 교수 금태섭입니다. 구체적으로 카데바가 몇 구나 있습니까?"
"해부학교실 신경해부학 교수 묵선주입니다. 체내 신경계에 대해 특히 자세한 연구를 주문하셨던데, 이유를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생리학교실 교수 길민입니다. 신경 전달 물질과 호르몬 연구를 위해서는 카데바 뿐 아니라···"
"서울미래병원 뇌신경센터 신경외과 교수 공용우입니다. MRI가 안 통한다면 어려운 부분이···"
"서울미래병원 척추신경센터 신경외과 교수 구효건입니다. 저는 척수 전문 분과의인데···"
"서울미래병원 골관절센터 정형외과 교수 방태신입니다···"
"같은 소속 정형외과 교수 배송익입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 유현식입니다. 제 질문은···"
"알레르기내과 교수 육지섭입니다. 내과 계열은 왜···"
무수한 질문과 대답.
"답해드리지요. 카데바는 아직 확정된 수는 아닙니다면, 100구는 넘을 듯 합니다. 어떤 식으로 연구를 주문하냐면···"
"카데바 외에도 길드원들이 레벨과 직업군 별로 나뉘어, 피와 피부, 뼈와 같은 내부 조직을 곧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신경 연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래서 가장 중점은 신경입니다만, 뼈, 관절, 혈액, 나아가 신체 전체의 대사도 중요합니다···"
"엄밀한 연구가 정석적이지만, 아쉽게도 저희에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보다는 해석 위주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앞에서 한우준이 보충 설명을 이었다.
"예 교수님들, 제가 직접 저 스스로에게 실험해서 이해한 바를 중심으로. 한우현 길드장이 원하는 방향성을···"
-꿀꺽
설명을 맡긴 한우현은 잠깐 목을 축였다.
장흥군에서 막 숙성을 마친 청태전 차. 한반도의 보이차라고도 불리는 물건이다.
-와작
거기에 정통 궁중 한과. 합의 개성주악과, 호원당의 만두약과를 곁들였다.
은은하면서도 고아한 유미와 감미가 차와 함께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그 향도 썩 나쁘지 않았다. 역시 최상급은 중국에서 하나하나 손으로 딴 물건이지만, 가끔은 국산도 애용해 줘야지.
그리 생각하며 열심히 분석 방향을 강조하는 동생과, 그를 듣는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
"...?!"
플레이어 생물학은 최대한 빠르게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보스가 나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한우현이 홀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보스인 제 1 사도를 제외해도 남은 시간은 단 두 달.
그 안에 모든 전투 작전부 길드원들에게 플레이어 생물학의 기초를 쑤셔박아야만.
모든 보스를 격파할 수 있으니까.
55화 그리고 난 많은 걸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