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10-20

10화 중국 관리자 리하오란 (3)

한우현이 중국에서 직접 만나야 하는 플레이어의 기준은 명확했다.

중국 서버는 한국 다음으로 거대한 서버였다.

따라서 개발 국가인 한국 만큼은 아닐 지라도, 꽤나 많은 랭커의 숫자를 자랑했다.

다르게 말하면, 게임에 모든 인생을 바친 폐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전력으로서도, 중국의 안정화를 위해서도.

모조리 복종시켜야 했다.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처리해야 했다.

쭉정이들까지 하나하나 그가 설득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것들은 리하오란이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기대할 수 밖에.

다행히 중요한 인물들은 한국의 무수한 초월적인 광기를 가진 빌런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중요 영웅 플레이어 네 명. 중요 빌런 플레이어 여섯 명.

레벨과 별개로 포스 능력 운용과 제어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다른 초반의 미숙한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능력 각성을 하자마자 스스로의 힘에 적응하고 그 강약과 조절을 할 수 있었던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인물들.

설득하든, 복종시키든, 싹을 자르든. 오늘 내로 모두 담판 지을 작정이었다.

"베이징에 있는 친구들부터 만나지."

"베이징대학 옆의 청년 요양원으로 가겠다. 거기 두 명이나 있다. 한 명은 안다."

공교롭게도, 비교되는 두 명이었다.

하나는 가장 필요한 영입 대상이요 하나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였으니.

레벨 293 야만전사 장즈하오. 캐릭터 네임 대장군.

회귀 전 중국 마지막 레이드에서 리하오란을 살려서 한국으로 보낸 영웅이었다.

당연히 대신 본인이 죽었으므로, 한우현은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这是什么样的闪电?(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很高兴认识你,张梓豪. (오랜만이야, 장즈하오.)"

하지만 의외의 복병에 부딪혔다.

"아··· 한우현, 문제가 하나 있다."

"설마 거절 당했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설득하지. 통역해라."

"그게 아니다. 한 번 실력을 보고 싶다는데."

"...픕."

한우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날카로운 눈]을 쓰지 않았다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비록 오류가 난 공갈 상태창이라고는 해도, 300의 레벨과 주 스텟 12만의 초월적인 능력치를 보고도 저런 말을 하다니.

한 편으로는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한우현은 그가 저 정도 강단이 있으니 자기 목숨을 바쳐 친구를 살렸겠거니 추측했다.

"그, 포스가 낮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단다···"

"하."

그거였나.

"그리고 [성기사] 같은 쓰레기 직업이 세계 최강 길드 마스터라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 한다··· 능력치와는 상관없이."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탱커가 무의미한 게임 설계 구조 상, 실제로 그 딜이 탱커라는 이유로 다른 직업군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 직업인 성기사는 쓰레기가 맞았으니까.

다만, 그것은 성기사 자체의 성능이 쓰레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게임에서 탱커가 존재 의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 판단은 아주 틀린 판단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성기사만이 다른 플레이어들과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정면에서 견디고 아군을 보호해 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게임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지만.

게임과 현실이 다르다는 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아무리 회귀 전의 영웅이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게임 폐인 출신이라는 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우현은 장즈하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의도가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장즈하오가 한우현을 보는 눈에는 질투나 깔봄보다는, 순수한 호승심만이 있었다.

한우현은 적당한 수준에서 힘의 차이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옆에 공터가 있더군. 거기서 금방 끝내지."

"괜찮나? 우리의 힘을 본다면 여파가···"

"어차피 내일이면 세상이 뒤집힌다. 그리고 힘의 제어는 완벽하니 걱정 말도록."

"..."

리하오란이 통역을 하자, 장즈하오가 기대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곧바로 요양원 앞의 공원에 나온 한우현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새벽이라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반경 10m 안까지라면 충분히 후폭풍은 제어 가능하다.

"하오. 라이."

한우현은 회귀 전의 리하오란에게 배운 기초적인 중국어를 주워섬겼다.

그 뜻은 좋다. 와라. 정도가 된다.

"我将这场战争献给奥丁!(이 전쟁을 오딘께 바친다!)"

장즈하오는 봐 줄 생각이 없는 듯, 곧바로 궁극 스킬을 사용했다. 레벨 250 야만전사 강신 궁극 스킬.

하긴 직업적 유불리를 감안한다면, 인게임이었다면 저 정도 레벨 차이면 거의 동급이다.

-[전쟁 신의 일격]

장즈하오는 두 눈에서 붉은 빛을 마치 번개처럼 뿜어냈다.

그리고 어느 새 뽑아낸 기다란 도끼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다는 '무기와 함께 몸을 던졌다'.

"여왕··· 아니지."

아마도, 회귀 전의 한우현이었다면 조금은 긴장했을 것이다.

야만전사는 최근 단순한 북방 전사에서 전쟁 신의 대전사 컨셉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북방 신수 4마리의 힘을 쓴다는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사소한 설정 붕괴가 있었지만, 아무튼.

그리고 최근 리메이크 된 직업이 그렇듯이, 가장 강력한 티어를 자랑했다.

따라서 설령 한우현이 300 레벨이었다고 해도 그 둘의 전투 센스가 같은 수준이었다면, 꽤나 어려운 싸움이었을 것이다.

"[절대 방어]."

-스아아악

하지만 한우현은 현 시점에서 세계 유일의 실전을 통달한 플레이어였다.

불완전한 레벨 300 달성으로 얻은 초월급 스킬은 사실 쓸 필요도 없었지만.

제대로 수준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쓰기로 했다.

빛이 한우현의 주위를 안개처럼 감쌌다.

레벨 20 스킬인 [여왕의 방패]가 승급해 얻은 레벨 300 초월급 스킬. [절대 방어].

비록 오류 때문에 완벽히 시스템 적으로 적용된 스킬은 아니었지만.

그 반작용이 주위로 전혀 퍼지지 않았을 정도의 완벽한 운용이었다.

"柔软的?(푸, 푹신하다고? 무슨?)"

"내 차례군."

장즈하오의 경악에 찬 목소리를 한우현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빛의 봉인검]."

레벨 150 스킬. 적의 무장을 해제하고 움직임을 봉인하는 제 스킬.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추가적으로 송과체를 인위적으로 의식하며 자극한다.

시간이 서서히 느려지며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이그드라실 포스가 대뇌 피질에서 맥동했다.

회귀 전, 미 국방부 산하의 과학자 플레이어들이 개발한 오리지날 스킬.

[포스 전투술 제 5형 : 신경 조작술 : 신경 가속].

플레이어 각성을 똑똑히 느끼며, 더욱 운용이 능숙해진 기술.

한우현의 양 손의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8개의 빛으로 이뤄진 쐐기가 만들어졌다.

-콰각

-콰각

-콰각

-콰각

-콰각

-콰각

-콰각

-콰각

0.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갔다.

장즈하오는 온 몸이 굳어진 채 쓰러졌다.

발목, 무릎, 팔꿈치, 허리, 목, 어깨에 빛의 쐐기가 빼곡하게 박힌 채로.

"계속 하겠나?"

"...他问我是否想继续.(...계속 하겠냐고 물으신다.)"

"这是荒谬的.虽然我在竞技场的等级低很多,但我还是和圣骑士打了一架.这是一个不同的水平...我承认.(말도 안 되는군. 투기장에서 당신보다 레벨은 훨씬 낮았어도, 성기사와 싸워 봤는데 격이 다르다... 인정한다.)"

"장즈하오가 인정한다고 한다."

다행히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준 보람이 있었다.

"[길드창]."

"[公会窗](길드창)."

세 번째 길드원을 영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장즈하오. 리하오란. 이번에는 너희의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얼마든지 명령해라."

"什么?(뭐지?)"

사신死神 시하이옌習海燕. 레벨 291 암흑술사.

1억에 달하는 플레이어와 일반인들을 베이징 투기장에서 잔혹하게 상잔시킨 베이징의 첫 번째 영주.

서로가 서로를 증오에 빠져 죽이게 해, 중국 내전을 돌이킬 수 없을 만치 키운 미치광이 학살자.

하지만, 중국에 거의 없는 레벨 290대 랭커.

리하오란, 장즈하오 다음으로 중요한 랭커이자 빌런 플레이어.

반드시 복종시켜야 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에 살고 있었다.

"시하이옌에 대해 아나? 캐릭터 네임 사신의 암흑술사다."

"你的真名是習海燕吗?...疯子.(본명이 시하이옌이었나?...그 미치광이.)"

"장즈하오가 안다고 한다."

뒤이은 설명을 들었다.

이미 중국에서는 유명한 모양이다.

한우현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매일 같이 중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VPN을 키고 고어 스너프 필름을 올리는 분탕종자.

서로 다른 아이디 수십 개로 그 짓을 하는 탓에 중국의 웹사이트 운영자도 골머리를 앓는 악성 유저.

"...아주 미친 년이었군."

한우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살짝 회의감이 들었다.

저런 자를 아무리 기선을 제압해서 휘어잡는다고 해도.

부하로 부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아니지."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애초에 정상인들만 부하로 받는다면, 보스 몬스터를 이길 수 없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를 위해서는 전 세계의 경제력, 기술력, 인력을 모아야 한다.

그래도 막을 수 있을까 말까 의심되는 것이 12사도.

빌런들도 모조리 찍어 눌러, 그에게 복종시켜야 했다.

"정신병자... 하지만, 그 능력은 진짜다."

한우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그녀도 매우 강력한 플레이어다. 일단은 영입을 제안할 예정이다."

"...同意.(...알겠다.)"

"同意.(알겠다.)"

리하오란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장즈하오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회귀 전의 행적을 생각한다면 한우현부터도 그녀를 당장 처 죽여버리고 싶었으니.

"가지."

정 설득이 불가능하다면 처단해야겠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즉시 셋은 장즈하오가 살았던 고시원의 옆 옆 건물로 들어갔다.

시하이옌은 이 건물의 3층에서 살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

멍한 눈으로 잘생긴 남자 하나를 질질 끌고 가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흑발. 흑안.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

플레이어.

"....사신 시하이옌."

"什么什么?!你是谁?(뭐, 뭐야?! 넌 누구냐?)"

그녀는 휘황찬란한 갑주를 걸친 한우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阴影隐藏!(그늘 숨기)!"

기절한 남자를 놔두고 순식간에 훅 꺼지듯이 사라져버렸다.

"미친 년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天啊他妈的(이런 씨발.)"

"설마, 벌써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아직 선을 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직전이었다.

"둘 모두, 저 남자를 보호해라. 그리고 방어에만 집중해라. 시하이옌은 은신과 흡혈에 특화된 암흑술사다. 막 플레이어가 된 너희가 맞서기 어렵다."

천천히 송과체에서 온 몸의 감각신경과 눈, 코에 이그드라실 포스를 집중한 한우현은 말을 이었다.

포스를 최대로,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수치는 약 500.

전투 가능 시간은 1분 정도.

"명심해라. 스스로의 몸만 지켜라."

한우현은 신경 세포들 전체가 포스에 물들었다고 판단하자, 그 힘을 내질렀다.

"[신성한 땅]!"

레벨 130 스킬, 영역 선포기.

원래대로라면 그 내부에서 방어력과 공격력이 오르는 효과만 있었다.

회귀자 한우현은 보다 강화한 능력을 추가로 발휘할 수 있다.

그 영역에서 모든 공간과 생물체는 그의 의식에 들어오게 된다.

역시나 미국의 능력 연구자들과 플레이어들이 협업해서 개발한 테크닉이었다.

"거기냐?"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림자에 숨어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몇 미터도 되지 않는 벽에 숨어 있었다.

한우현은 건물이 부서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며 도약했다.

-[빛의 권능 : 마법 파쇄]

손에 스킬을 해제하는 스킬이 오러처럼 맺혔다.

그대로 그것을 벽에 내리꽂자, 그림자가 붕괴되듯이 흘러내렸다.

숨어 있던 흑발의 여성이 한우현의 손아귀에 잡혔다.

"哦,这太荒谬了!(마, 말도 안 돼! 절대 은신 상태인데!)"

목덜미를 잡힌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11화 중국 관리자 리하오란 (4)

"컥, 커흐악!"

"사신 시하이옌. 중국, 아니 세계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

"等一下!等一下!(잠깐만! 잠깐만!)"

"너 때문에 거의 성공할 뻔 했던 한국과 중국의 연합 공격대. 10번째 레이드가 실패했다."

"我的错!这是一个错误!我只是...(내가 잘못했어! 실수라고! 난 그냥···)"

한우현은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고 싶었던 말을 읊었다.

그와 함께 진득한 살의가 밀려올라왔다.

그냥, 죽여버릴까.

···

안 된다.

그것은 일방적인 감정의 배설일 뿐.

"...[빛의 봉인검]."

회귀 전의 일은 회귀 전의 일. 과거에 불과하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플레이어 대부분은 빌런이라 해도, 신념형 악인이 아니다.

그냥 찌질하고 뒤틀린 병적인 폐인들이었을 뿐.

즉, 적절한 조련과 통제라면.

길들일 수도, 그 가치도 있다.

"얌전히 있어라."

시하이옌의 아찔할 정도로 예쁜 얼굴이 공포에 젖어 일그러졌다.

죽이려는 줄 오해한 모양이다.

"...[进入黑]!!(어둠 속으···!!)"

"안 되지."

중국어는 하지 못했지만, 한우현은 그녀가 쓸 스킬을 예측했다.

모든 직업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무적기를 쓰려는 것으로 보였다.

상관 없었다.

한우현은 손아귀에 모은 포스를 그대로 그녀의 머릿 속으로 주입했다.

그리고 섬세한 운용으로 포스를 곧바로 송과체에 집중했다.

모든 플레이어 능력의 근원.

시하이옌의 송과체에서 나와 그녀의 몸을 암흑 에너지로 영체화 하려던 포스. 그것이 한우현의 포스와 얽히며 삐걱댔다.

"케, 케흐악! 캬학!"

"엄살 피우지 마라."

뇌 안에서 포스가 충돌하자 시하이옌의 눈동자가 발작하듯이 뒤집혔다.

괜찮다. 플레이어의 육신은 초월적으로 강력하다.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머리가 조금 아플 뿐이지.

-빠작

이윽고 기분 좋은 어그러짐이 포스의 감각 말단에서 느껴졌다.

암흑술사의 무적기. [어둠 속으로]가 취소되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시하이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无敌技能取消了?(무적기가 취소? 말도 안···)"

"발악은 끝났군. 이제, 자라."

-콰곽

그녀의 온 몸에 빛의 쐐기를 박은 한우현은, 마지막 쐐기를 윗목에 강하게 박았다.

연수Pons. 신체의 무의식 대사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

최소 12시간은 잠들 것이다.

"끝났다, 장즈하오, 리하오란. 와라!"

둘은 빠르게 도착했다.

그리고 둘 모두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처는 물론이고 건물에 손상이 거의 없다. 대단히 섬세한 실력이다, 길드장."

"太棒了...(대단하군···)"

-휙

한우현은 둘의 경악에 반응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놀라울 것이니, 일희일비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대충 기절한 시하이옌을 장즈하오에게 던졌다.

"윽···!"

"리하오란, 맡기겠다. 설득할 수 있겠나?"

"물론이지. 맡겨라."

회귀 전, 너무나 그 죄악이 깊은 중국의 빌런 플레이어들은 리하오란이 모조리 처단했다.

그러나 빌런도, 영웅도 아닌 회색분자 플레이어들은 결국 리하오란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리하오란의 통솔력이라면 시하이옌도 복종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당분간 길드에 얌전히 있게는 할 수 있으리라.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 달이면 길드의 체계와 위상은 그 누구도 넘보지 못 할 만큼 완전히 굳어질 테니.

한우현은 다음 목표를 말했다.

"다음. 충칭으로 간다."

중국을 지배했던 빌런들.

아직은 나약한 폐인에 불과한, 힘만 센 어린 아이에 가까운 미래의 빌런들.

인체조각사 후웨이. 캐릭터 네임 홍군판편집자.

광분자 리즈시웅. 캐릭터 네임 항미원조볶음밥장인.

인육백정 왕첸. 캐릭터 네임 난징페스티벌.

뇌식선 후앙푸셴. 캐릭터 네임 비인간으로단약연단.

광살왕 즈거링. 캐릭터 네임 베이징천안문을사랑해.

사신 시하이옌 다음으로 유명했으며, 보스 레이드를 돕기는커녕 방해했던 쓰레기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모두 복종시킬 것이다.

물론, 영웅도 있다. 정중히 초대해야 할 귀인들.

신성선 화즈펑. 캐릭터 네임 전업자녀의안락사.

수호검 류샤오린. 캐릭터 네임 역사적납급시간.

환희소녀 양위엔신. 캐릭터 네임 탕핑도망학개론.

회귀 전 리하오란을 마지막까지 지킨 이들.

그들도 중요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빌런들 보다 더욱 중요했다.

길드에 들어온 빌런 플레이어들이 폭주하지 않도록 선을 잡아 줄 역할이니.

"오늘 밤 내로 모두 만나지."

"충칭에 있는 사람의 직업은 용술사다. 마법사 계열이니 같이 [차원 관문]을 쓰면 이동이 더 빠를 거다."

"좋지. 서두르자."

한우현과 장즈하오, 리하오란은 다시 이동했다.

"我们是一个公会.所有玩家的联盟.(우리는 길드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연합.)

"简直不敢相信······我变成这样了,不到3小时就组团了?(믿을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변한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단체가 결성되었다고?)

"[인벤토리]."

다시금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这个物品和等级······是真实的.真的吗!你真的要雇用我作为执行官吗?(이 아이템과 레벨... 진짜잖아, 진짜야! 정말 나를 간부로 영입하겠다고?)"

"你想进来吗?(들어오겠나?)"

"晚安!隔壁房间也有朋友.他们的水平可能比我低,但他们会以自己的方式发挥作用!(좋아! 옆 방에 친구들도 있어. 나보다는 레벨이 낮지만 그들도 나름 쓸만할 거야!)"

"그거 마음에 드는군."

한우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수가 늘어난 이들은 다시 이동했다.

상하이.

광저우.

선전.

톈진.

청두.

우한.

난징.

시안.

그리고 마지막으로, 홍콩.

한우현은 마지막으로 모인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들의 근처에 살던 친구들까지 겸사겸사 합쳐진 결과.

대략 100여명의 플레이어들을 가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중국 서버 최강의 랭커들.

다만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한 명은 놓쳤군."

"추적하겠다. 잡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정보는 전달하지."

"워낙에 위험한 놈이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최선을 다하겠다."

리하오란의 자신 있는 대답에 한우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놀랍게도 미래의 빌런 플레이어 여섯 중 다섯은 이미 새벽부터 자기 능력을 깨닫고 시험하려 했었다.

-동작 그만.

-你是做什么的?你也是玩家吗?(뭐야, 넌? 너도 플레이어냐?)

다행히, 놈들이 선을 넘기 전에 그것을 제지할 수 있었다.

두 놈은 반항했기에 제압했지만, 두 놈은 말로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뇌식선腦食仙 후앙푸셴.

회귀 전, 플레이어들의 송과체를 뽑아먹어 레벨 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미치광이 도사.

그 놈은 얌전히 이불을 두른 채 앉아 있었다.

-皇甫贤.(후앙푸셴).

-...是玩家吗. 像我这样的.(...플레이어인가. 나와 같은.)

-잠깐, 리하오란. 물러나라.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리하오란이 아니라 그가 직접 대화에 나서려 했다.

그러자 후앙푸셴은 가만히 눈치를 살피다가 잽싸게 도망쳐 버렸다.

직업이 도사라, 미리 [수묵화]를 이용한 차원 이동을 준비해놓았던 모양.

무적기와 이동기가 합쳐진 탈출 스킬이었기에 한우현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너무 그 한 놈 때문에 걱정하지 만다."

신경쓰는 듯한 한우현의 기색을 보던 리하오란이 읊조렸다.

"너희의 영입 기준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영입하기로 한 사람들 모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유명하다."

"首先,让人们知道公会的存在并开始报名.(일단 길드의 존재를 알리고 가입을 시작시키지.)"

"我也会召集同党同行会的成员.(저도 같은 파티랑 길드원들 모아 볼게요.)"

"我很期待这一点.(이거, 기대되는데.)"

"即使我们大惊小怪,他们醒过来后大概也会接受.(우리가 분탕종자기는 했지만, 아마 저 놈들도 깨어나면 수락할 거다.

"行会会长的提议客观可信,具备良好的条件.(길드장의 제안은 객관적으로 믿을 만 하고 조건도 좋다.)"

"영향력이 강한 이들이니 산하 길드원을 생각보다 빠르게 결집하고, 통제도 쉬울 것 같다."

한우현도 리하오란의 말에 수긍했다.

그는 이제 집단의 수장이다.

그냥 집단의 수장이 아니라, 세계의 멸망을 막을 유일의 길드장.

모든 것을 그가 하나하나 다 신경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았으며, 불가능했다.

"네 말이 맞다. 이제 중국의 관리자는 너니까. 맡기마."

"네가 처음으로 한 명령. 아직 잊지 않았다."

리하오란이 다시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다시 돌아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만, 거기부터 시작해서 공산당 위로 올라간다. 아주 빠르게."

그 광기와 열망은 아주 믿을 만 했다.

"먼저 중국 10대 대도시를 점령하고···"

"공산당에 요구할 플레이어의 직위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과 항구, 대기업에 대한 방어···"

"쓸만한 놈은 가입시키고, 위험한 놈은 처리···"

"오직 우리만이 세계 유일의 플레이어 길드···"

이것 저것 보다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보상도.

"금괴다. 10kg. 위안화로는 500만 위안 정도지."

"500만··· 위안?"

리하오란이 경악했다.

그가 아무리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지만, 지금은 그 기반이 약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바로 쓰기 힘들겠지. 위안화로도 주지. 받아라."

금은방에서 환전한 400만 위안도 얹어주었다.

"적당히 밑에 놈들에게 나눠주고, 필요한 곳에 써라."

길드장인 한우현이 그 권위를 보증해줘야 했다.

단순한 신뢰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그 장면을 보던 플레이어들의 눈에도 자연히 탐욕과 함께 경외가 어렸다.

"단체를 세우려면 여기저기 쓸 일이 많을 테니, 아끼지 않아도 된다. 돈은 많다."

"길드장··· 정말 나를 계속 놀라게 한다. 인벤토리에서 나온 것을 보면 게임 아이템인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 이런 것까지 준비를···"

"그런 의심이었나. 걱정 마라. 아이템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순도 99.999%의 진짜 금이 맞다."

리하오란은 그 말에 순간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상념에 빠졌다.

"...길드장의 의도도 알겠다. 길드는 금이 많겠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우현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역시 리하오란은 똑똑했다. 그의 기대 이상으로.

"내가 뭘 바라는지 예측이 가나?"

"자금으로 쓰기 위해서는, 출처 세탁이 필요하겠다. 원활한 처리와 투자를 위해서는 그 이상의 여러 조치도. 은행과 금융계에서 일하는 동기들을 알아보겠다."

리하오란은 칭화대학의 공청단 부위원장이자 경제학과 수석 졸업생이었다.

비록 지금은 방구석 게임 폐인으로 전락했지만.

능력과 뒷배가 생긴 지금이라면, 성공한 동기들과 다시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

"그걸로는 금괴를 탈법적으로 사용하고, 불리기에는 부족하다. 카지노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지 않나? 그 쪽으로 귀금속 공방도 알아봐라."

"카지노? 귀금속?"

"그리고 중국은 경직적인 경제 사회 구조가 남아있지. 싱가포르 쪽에도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 거다."

"뭐?"

"싱가포르를 통해 홍콩, 마카오를 경유해 최종적으로 한국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가게 설계한다. 넌 홍콩과 마카오 쪽의 무역 회사 설립을 준비해라."

리하오란의 얼굴에 이젠 경악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운 의문이 떠올랐다.

"길드장··· 그 레벨이면 밥 먹고 게임만 했을 텐테? 돈 세탁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리 잘···"

"우리 둘 다 잘 모른다. 전문가를 고용해야지. 난 방향만 잡을 뿐."

"...맞다. 사소한 의문이었다. 따르지."

그러고 나서야 한우현은 비로소 안심하고 중국을 떠날 수 있었다.

-으적

-으적

홍콩 앞 해안가에서, 정통 조주 방식으로 돼지기름과 땅콩을 이용해 만든다는 월병집.

가게 주인 인상이 고집이 세 보여 믿음이 가, 기운 보충을 위해 월병 하나를 샀다.

고소한 유미와 감칠맛. 전혀 느끼하지 않은 적정의 달달함.

기대한 것보다 높은 수준. 이건 꽤 괜찮았다.

"숨도 돌렸으니, 서둘러야겠어."

지금 시각은 아침 여섯 시.

늦은 시각은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의 수도 섬인 자바가 침몰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마지막으로 싱가포르."

동남아시아 서버의 랭커들을 만날 때다.

12화 동남아시아 관리자 응우옌 바오 쯔엉 & 엘리자 나바로 & 첸 헨드릭

-첨벙

-첨벙

-첨벙

이번에는 서해보다 외해였기에, 좀 더 여파를 신경쓰지 않고 달렸다.

"하. 일본 서버도 있었다면···"

남중국해, 다른 말로는 서필리핀해라고도 불리는 바다를 달리며 한우현은 탄식을 내뱉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서버는 원래 네 개가 아니었다.

다섯 개였다.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글로벌(정확히는 북미와 남미), 그리고 일본.

하지만 안타깝게도, 2022년에 일본 서버는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확률을 조작한 랜덤뽑기 캐시 아이템을 팔았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피해 사례를 일본 검찰이 제대로 털었다.

게임사는 한국과 중국 정부에는 로비를 성공했지만, 일본 정부에는 실패했다.

-일본 플레이어 여러분에게 끼친 피해에 깊게 사죄하는 바이며···

게임사는 1년 동안 결제했던 모든 아이템 내역을 환불해주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참으로 무성의한 조치였다.

어쨌든, 그 결과 일본에는 더 이상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플레이어들이 없다.

따라서 그 전에 레벨이 높았던 일본의 플레이어들도 각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일반인이었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서버가 없어지고 나서도 한국 서버로 굳이 캐릭터를 옮겨 플레이 했던 일본인이나, 재일교포 플레이어도 극소수 있었으니까.

그들도 영입해야겠지만, 유의미한 숫자는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자. 일본에 미치광이 플레이어들이 적다는 보장이 없으니···"

사실, 그럴 확률이 더 컸다.

그가 기억하는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 10명 중 6명이 빌런이다.

하물며 그보다 더 폐인들이 많은 한국 서버는?

10명 중 8명이 테러리스트, 사이코패스, 분탕종자에 가까웠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 따위에 인생을 바친 인간들한테 이런 힘이 주어진 건 부조리의 극치지."

그 자신도 그런 플레이어들 중 하나, 아니 그 정점이었지만.

한우현은 그들을 비하하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당연했다.

회귀 전 플레이어들의 인성이 일반인의 절반 수준이라도 되었다면 세상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면서 경험치 도핑을 하고, 3분에 한 번씩 딸깍대며 캐릭터를 이동하고.

그런 사냥에 하루에 십 수 시간을, 그것을 일 년 365일 내내 하는.

그 딴 게임에 인생을 낭비해 랭커가 된 것들이 정상인일 리가 없지 않은가?

랭커들 중 정상인은 오직 한 명 뿐이다.

라일리 그레인저. 캐릭터 네임 네로.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

그러나 그 레벨의 게임 폐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세계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

만약 세상에 용사라는 호칭을 딱 하나에게만 달아줘야 한다면, 그것은 한우현이 아니라 라일리의 것이어야 했다.

"네로..."

한우현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볼 수 없다.

언제나 그를 이끌어 주던 가장 위대하고도 고결했던 구원자.

한우현은 이제 혼자다.

아니, 혼자보다 더 나쁘다.

이제는 한우현 그 자신 뿐만이 아니라 리하오란, 장즈하오, 최윤부터 시작해 중국, 미국, 남미, 동남아시아, 한국 전역의 플레이어.

심지어, 과거에는 그를 지켜주었던 라일리 그레인저마저도.

이제는 한우현이 지켜야 할 대상이다.

전 세계의 인류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약한 생각은 여기까지.

한우현은 다시 마음을 되잡았다.

어느 새 인도네시아에 거의 다 왔다.

서둘러야 했다. 오후가 되기 전까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동남아시아 서버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쓸 만한 랭커들도 별로 없었다.

한우현은 그들에게는 엄청난 능력이나 고결한 인성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세계의 무역 컨테이너선들이 지나는 해협.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가 있는 주요 항해 포인트.

말라카 해협.

파나마 운하,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3대 해상 운송로.

이 곳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 무역이 반 쯤 마비된다.

그 곳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 지배자로서 내정된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 번째. 응우옌 바오 쯔엉. 직업은 드루이드.

베트남 출신의 인도네시아 조직폭력배.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골드를 채굴하는 작업장 말단에서 조직 수장까지 출세한 거물.

자기한테 반항하는 수만 명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폭압적인 지배를 펼쳤지만, 베트남과 태국 일대가 멸망하자 다급히 동남아시아 전 서버의 플레이어들을 끌어모아 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선 그 스스로는 소순다 열도에서 보스 몬스터와 함께 자폭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회귀 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지배자.

"범죄조직 출신의 폭군이었지만 선은 지키는 놈이지. 한국 인터넷 웹사이트 관리도 잠깐 해 봤던 놈이라 한국어도 조금은 할 줄 알고... 어차피 많은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운송로만 지키면 돼."

두 번째. 엘리자 나바로. 직업은 마법소녀.

필리핀 출신의 버츄얼 유튜버이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인터넷 방송인.

회귀 전의 그녀의 부하에게서 듣기로는 버튜버로 데뷔하면서 한 번 인생의 역전을, 플레이어가 되며 두 번 인생의 역전을 했다던가.

잘생긴 남자만 보았다 하면 눈깔이 돌아가 납치하는 남미새.

그렇게 살다가 보스가 필리핀 일대를 침몰시키려 하자 맞서싸우다가 죽었다.

회귀 전 필리핀의 지배자.

"잘생긴 남자에 환장한 미친 년이지만 자기 왕국은 확실히 지키는 여자지."

세 번째. 첸 헨드릭. 직업은 장궁수.

싱가포르 금융 재벌가의 숨겨진 사생아 출신 재벌 3세 게임 폐인.

그는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 자신의 존재를 언론에 폭로하려다가 들켜 반 쯤 감금당했다.

그 뒤로는 딱 먹고 살 만큼의 돈만 받으며 게임만 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했다.

"각성하자마자 아버지를 포함해 싱가포르 은행과 금융가 재벌을 죄다 죽이고, 심심할 때마다 아무나 저격해 대며 살았지."

싱가포르 전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빅 브라더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했으나.

보스 몬스터가 찾아오자 응우옌 바오 쯔엉과 합류해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회귀 전 싱가포르의 지배자.

이 놈도 리하오란과 비슷한 타입이다.

능력과 야망은 있으나 환경이 그를 잡아먹어 망가진 엘리트.

그에게 전면적으로 협조하는 리하오란이 없기에, 그 셋 모두가 중국처럼 쉽게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를 하면 곤란했다.

한우현은 이 놈들에게는 더욱 큰 보상을 미끼로 주기로 했다.

물질적인 보상과, 무력적인 보상.

하나가 한국 돈으로 10억에 달하는 금괴. 그리고 환전해 온 7억에 달하는 달러들.

방점으로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 하나씩이면 선수금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마침 셋 모두 랭커 급에 발을 들이는 290레벨에서 딱 1 레벨이 모자라기도 하니.

"Nguyễn Bảo Chương.(응우옌 바오 쯔엉.)"

"Opo opo! siapa kamu!(뭐, 뭐야! 넌 누구냐!)"

다시 한 번, 비슷한 과정들을 거쳤다.

"정말로 모두 합의했다? 중국, 한국, 미국 서버의 플레이어들 모두?"

한우현은 4대 단종 아이템과 능력의 시연을 반복했다.

인도네시아의 관리자로 임명한다는 말과 함께 금괴와 달러,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까지 보여주었다.

결국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우현은 그에게 말라카 해협의 안전 보장과 적극적인 길드원 영입을 요구했다.

"또 하나. 부하들을 잘 관리해라. 인도네시아 정부에 불만을 가진 놈들이 많을 테니."

"으음..."

그리고 그것만 지킨다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으며.

그 과정에서 길드의 이름을 맘대로 팔아도 된다고 전했다.

"Okk. (알았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했던 응우옌 바오 쯔엉이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자 태도가 바뀌었다.

그가 쌀국수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것까지 확인한 한우현은 필리핀으로 이동했다.

"Eliza Navarro(엘리자 나바로.)"

"Ano, ano! Kayo ba mga viewers ko? Ang stalking ay isang krimen! (뭐, 뭐야! 내 시청자냐! 스토킹은 범죄다!)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Talaga bang sinasabi mo na basta protektado ang dagat malapit sa Pilipinas, magagawa mo lahat ng gusto mo?(정말로 컨테이너선들이 다니는 필리핀 인근 바다만 잘 지키면, 다른 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

마지막 목적지는 싱가포르였다.

"Chen Hendrick.(첸 헨드릭.)"

"...You, player. It's also very powerful.(...너, 플레이어군. 그것도 아주 강력한.)"

의외로, 첸 헨드릭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스를 느낀 모양.

불과 하루 만에 포스 감지를 깨우치다니, 정말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덕분에 예상보다도 훨씬 말이 잘 통했다.

"OK. Are you saying we just need to maintain Singapore's financial and bond markets? Leave it to me.(좋다. 싱가폴의 금융과 채권 시장만 잘 유지 시키라는 거지? 맡겨라.)

"One more. I want to create a tax haven for gold money laundering in Singapore. Is it possible to create a paper company related to gold processing?(하나 더. 싱가포르에 금괴 돈 세탁을 위한 조세 회피처를 만들고자 한다. 금 가공에 관련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 수 있겠나?)."

"It's not very easy, but it's not difficult either. It won't even take a week after I succeed my father.(아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렵지도 않다. 아버지를 계승하고 나면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것 같군.)"

"Do you want help?(도움을 원하나?)"

"No, that's enough for me alone. There aren't many players in Singapore, so you can leave it to them. I will make sure you will not regret choosing me.(아니,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싱가폴에는 플레이어들도 별로 없으니, 맡겨도 된다. 나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

첸 헨드릭은 원하는 것이 명확했으며, 그것이 한우현이 줄 수 있는 길드의 인정과 정확히 부합하였다.

그렇기에 별 다른 설득 없이 자의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하긴 회귀 전에도 단순히 질서를 부수는 것을 넘어, 실제로 금융 재벌가들을 복속시켰던 이였다.

그다지 긴 대화가 아니었음에도 그 능력과 열망이 강하게 느껴질 정도.

어쩌면, 동남아시아 서버 전체의 관리는 첸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구태여 그런 말을 해 응우옌과 첸을 싸움 붙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세 랭커 모두를 가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아쉽게도, 동남아시아 서버에도 당연히 빌런 플레이어들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국 정부가 멸망 직전 수배했던 것과 다르게,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 정부는 그들의 실명과 소재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기억해라. 이 여섯 플레이어를 발견한다면 즉시 연락하도록. 위험하고도 중요한 놈들이다."

그래서 아는 것은 캐릭터 닉네임 뿐. 아쉬운 대로 그것이라도 일단 주지시켰다.

마지막으로 서로 연락 체계를 만들게 했다.

"명심해라. 정부가 완전히 붕괴되면 안 된다. 정부를 무너뜨리려 하지 말고, 길들여라."

"적극적으로 길드원을 영입해라. 너희의 말을 듣지 않는 놈은 처단해라."

"당분간 필요한 자금은 내가 준 달러로 충당해라. 금은 한번에 다량으로 풀면 곤란하다."

셋 모두에게 다시 보다 자세한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첨벙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싱가포르를 떠나며 한우현은 진한 성취감과 피로감을 느꼈다.

쉴 새 없이 바다를 달리느라 목이 마르기도 했고.

그래서 잠시 대만에 들러 망고 밀크티를 하나 포장했다.

회귀 전의 그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음료수를.

-우현, 혹시 먹거나 마시고 싶은 거 뭐 없어요?

-음··· 콜라.

사실, 마실 필요는 없었다.

플레이어는 이그드라실 포스가 신체대사를 대체한다.

따라서 순수한 식욕이 아니라면 먹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그의 취향은 향이 맑은 청차. 우롱차와 호지차 같은 것들.

밀크티는 한우현 입장에서 향을 음미하기에는 너무 탁한 맛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고 밀크티를 산 이유는 하나였다.

회귀 한 달 전.

라일리의 말이 떠올랐기에.

-콜라는 지금도 인벤토리에 있잖아요?

-달라. 인벤토리에 있는 건 게임 아이템이잖아. 콜라 회사랑 콜라보해서 있는···

-아, 콜라 타운요. 그래픽이 예쁜 마을이었죠.

-아무튼 현실의 콜라랑은 미묘하게 달라. 그리고 거기다 라임하고 레몬을 살짝 섞고 싶단 말이지...

-복잡하네요. 저는, 망고 밀크티가 먹고 싶은데.

-망고면 망고고 밀크티면 밀크티지, 그걸 섞어? 너무 혼잡스럽잖아.

-안 먹어봐서 그래요. 나중에 대만에 가서 먹어보세요.

-대만은 침몰했잖아.

-...나중에요.

"...맛있네. 좀 많이 달긴 하지만."

그는 망고를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 삼켰다.

"나중에 미국에 갈 때, 하나 사 가야겠어."

한우현은 미국을 생각했다.

라일리 그레인저를.

"지금쯤, 백악관White house에 잡혀 갔으려나."

13화 미국 수호자 라일리 그레인저

"부디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미 정부와 하느님의 인도 하에 계심은 이 나라의 진정한 축복입니다. 당신이 지금 위대한 미합중국의 유일한 희망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지금 땅을 밟고 서 있는 나라인 미합중국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희다 못해 투명할 정도의 피부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은발적안의 초월적인 미모를 가진 소녀가 늙은 백인 남성의 손을 맞잡았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이니 애국이니 하는 말을 하며.

"그럼, 이만···"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리의 눈앞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인물.

미국 부통령이 땅에 코가 닿을 듯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지금은 대통령 권한 대행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국가 원수.

그녀는 지금 백악관White house에 있었다. 정확히는 반쯤 부서진 백악관에.

미국의 시스템은 굉장히 정교했다. 대통령이 암살 당했는데도 혼란에 빠지기 보다는 시스템을 따라 움직일 정도로.

6시간 전, 미국 대통령이 골프를 치던 도중 갑작스레 나타난 괴한에 의해 시체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되살아났다.

그것을 현장에 있었던 모든 경호원들이 보고 인지했다.

경호원들 역시 죽었지만, 죽기 전에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대통령이 암살당했다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 언데드Undead로?"

충격적인 소식이 백악관에 즉시 전달되었다.

대통령의 사망과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

백악관의 싱크탱크와 FBI, CIA가 긴급히 모은 정보들이 세계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테러들을 종합했다.

그 중에서도 유의미한 정보가 보고서의 형식으로 불과 두 시간만에 정리되었다.

다시 한 번 실무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수행했다.

연방수사국, 중앙정보국, 정보조사국, 국방정보국. 그들이 머리를 맞댔다

미국의 관료들은 정말로 유능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이 변한 현실. 아무런 인과도, 논리도 없이 변한 현실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분석하고 앞으로 변할 세상의 구조를 예측했다.

대통령이 암살 당한 지 단 여섯 시간이 지났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랭커 전원의 개인정보와 그들이 일으킨 테러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부통령의 책상 위로 올라왔다.

"초능력자··· 그것도 그냥 초능력자가 아니라, 게임 플레이어?"

전 전 대통령이 만든 미 정부의 위대한 시스템인 프리즘 프로젝트의 위력이었다.

전 국민을 넘어 전 세계 민간인들의 개인정보를 언제든 도감청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

"그런데, 죄다 한국인이라고? 이 무슨 부조리한···"

안타깝게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게임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한 때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20년이 넘는 운영 역사를 거치며 현재는 대부분의 랭커가 개발 국가의 유저인 한국인 뿐인 게임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전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다. 그것도 미국에.

물론 한우현이 회귀한 지금 기준으로는 유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직 전 세계에 알려지기 이전이었다.

"그래도 미국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그렇게 적지는 않다."

부통령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며, 뒤바뀐 세상의 시나리오를 분석한 끝에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미국에 존재하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즉시 미 연방 수사국FBI을 보내게. 그리고 최대한 강압적이지 않도록, 아니 최대한 정중하게 초대를 부탁하게."

그리고 고심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라일리 그레인저. 플레이어 네임 Nero. 이 분은 특별히 더 정중하게 부탁하도록."

전 세계 최고 레벨의 플레이어였던 네로가 집 안에서 고민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럽게 백악관에 오게 된 배경이었다.

이 결정이 부통령이 인생에서 내린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대통령을 자기의 언데드 소환수로 종속시킨 사령술사는 이내 대통령의 뇌 속에 있는 정보를 쥐어짜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미국은 대통령 하나를 조종한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한인 2세 출신으로 왜소한 체격을 가져 칭챙총 소리나 들으며 매일같이 처맞기만 하던 것이 사령술사의 학창 생활이었다.

사회 공부는 커녕 학교 생활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인생.

캐릭터 네임 [제너럴조의사도]가 알 수 있는 지식이나 판단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대통령을 종속시킨 것도 미국을 지배하겠다는 거창한 야욕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골프를 치고 있다고? 이 바로 앞의 골프장에서?"

갑작스레 얻은 힘을 한 번 써 보자는 마음에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지.

어쨌든 미국 대통령은 그의 하수인이 되었다. 영혼이 저당 잡힌 언데드. 그래서 이제 대통령은 자신의 주인의 뜻을 수행한다.

"Nothing on now.(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요.)"

이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냐는 물음에 대통령은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한다.

노예가 된 대통령은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의 시스템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것이 이미 미 정부에 전달되었음을 최대한 쉽게 말했다.

"씨발, 뭔··· 대통령이 내 부한데 왜 아무 것도 못 해?"

사령술사는 그것의 1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백악관 전체를 내 걸로 만들면 어때? 거기다가 상원, 하원 의원들까지 언데드로 만들면?"

"Everything.(그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령술사는 좀 더 큰 다음 목표를 설정했다.

이내 백악관으로 차원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령술사 130레벨 영역 선포기인 '창세의 어둠'을 쓰려고 했다.

스킬의 효과는 지정 지역에 있는 보스가 아닌 특정 레벨 이하의 몬스터들에게 언데드 속성을 부여한 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효과였다.

게임에서는 실효성이 없는 전형적인 쓰레기 스킬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들은 시스템적으로 레벨 0 플레이어임과 동시에 레벨 0 몬스터로 판정된다.

그러니까 사령술사의 창세의 어둠은, 다른 어떤 직업의 스킬들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더 무서운 스킬이 되었다.

"...사제? 네로?"

"...누구세요?"

즉, 미국 행정부 전체가 언데드가 될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먼저 와 있던 한 명의 플레이어만 아니었다면.

레벨 300 사제, 라일리 그레인저. 캐릭터 네임 네로.

네로의 직업은 사제였다. 정확히는, 치유와 축복에 특화된 정통파 서포팅 스킬 트리를 탄 사제.

그래서 네로의 몸에는 이제 피와 전기신호 대신에 막대한 신성력과 축복이 흐른다.

따라서 사령술사가 백악관에서 광역 스킬인 '창세의 어둠'을 쓰려고 하기 전.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과 상극인 힘을 느꼈다.

사령술사는 자신이 있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한국 외에서는 현재 별로 플레이어가 없는 게임이었다.

250 레벨을 넘는 플레이어는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미국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어의 존재를 느꼈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글로벌 서버에 만렙 나왔다며? 개쩌네. 뭐하는 애래?

-여자라던데? 힐러.

-글로벌 서버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 주로 하지?

-중국이랑 동남아 섭은 따로 있으니까 미국이랑 남미 쪽인가?

-근데 걔 말고는 고렙 유저가 거의 없다는데?

-아 글로벌 섭은 고아원 서버가 대부분이네? 하여간 에션족 새끼들이 다 그렇지 ㅉㅉ

-암튼 대단하긴 한 듯 사제면 파티플 해야 할텐데 파티원도 없이 만렙 찍고

글로벌 서버는 말이 글로벌 서버지, 미국과 남미를 합치고서도 한국 서버의 10분지 1도 안 되는 유저만이 있는 서버였다.

심지어 그 10분지 1도 안 되는 유저도 에인션드 월드 - 고대의 월드라는 뜻이기에, 타 월드의 유저들은 이를 고아원 또는 에션족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 라는 과금을 제한한 특수한 시스템의 전용 월드의 유저였다.

정상화 패치로 인해 대부분이 레벨이 반토막 나, 레벨 250 이상의 유저라고는 아예 씨가 마른 망한 서버.

그러니까 사령술사는 분명히 미국 최강의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죽어!"

"꺄아아악!"

사실 그것은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만렙이자 랭킹 1위 플레이어인 네로는 인터넷으로 방송도 하고 길드 활동도 오래 했기에 나름 유명한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그것은 랭킹 1위로서 유명했다는 것이지, 그녀의 현실에서의 국적과 직업, 거주지 등이 유명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얼굴도 공개하지 않고 방송에서도 영어를 그다지 잘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네로.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맞았다.

그녀는 캐나다의 퀘벡 주 태생으로,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는 있었지만 모어는 프랑스어였다.

네로가 미국에 살게 된 것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유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의 직장과 동생의 대학이 모두 미국으로 확정난 김에, 이민을 간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미국에는 랭커 플레이어가 없는 것이 맞았다.

-랭킹 1위가, 미국인이었어?

-...씨발, 얼 탈 때가 아니야.

하지만 순간이동으로 신성력이 느껴지는 장소에 왔을 때 본 것은 사령술사의 예상과 달랐다.

랭킹 1위의 유일한 만렙 플레이어의 커스터마이징을 한 외모의 소녀가 다급히 총을 꺼내려고 하는 경호원과 함께 있었으니.

-선제공격으로 처리한다.

사령술사는 잠깐의 당황 후에 빠르게 판단했다.

월드 랭킹 1위 플레이어는 사제였으며 딜링 트리보다 버프와 힐링 트리를 탄 사람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공격했다.

그것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여러가지 비이성적인 이유가 섞여있었다.

동양인 출신으로 미국에서 오랫동안 겪어온 동양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분노, 사령술사로서 시스템적으로 각인된 신성력과 사제에 대한 혐오감, 예쁜 여성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 지금 자신이 물러나 봤자 이미 저지른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으니 차라리 끝까지 간다는 도박적인 마음, 랭킹 1위를 마주한 김에 기습으로 선제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설계...

"[죽음의 일격]!"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악수가 되었다.

네로는 어둠의 화살이 자기한테 날아오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천사의 손길]

아주 강력한 방어 겸 반격 스킬을.

사령술사는 그대로 반탄된 신성력에 의해 녹아내렸다.

주인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 종속되어 백악관 내부를 돌아다니며 학살을 벌이던 언데드 소환수들도 모두 함께 녹아내렸다.

당연히, 어둠의 검을 들고 백악관 직원들을 열심히 죽이던 전 대통령도 함께 녹아내렸다.

"꺅, 꺄아악!"

네로는 한참 뒤에 눈을 뜨고 녹아내린 사령술사의 시체를 마주했다.

충격적이었지만, 오히려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네로는 냉정과 이성을 찾았다.

네로는 비로소 자기가 왜 백악관에 와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없었다면 오늘 백악관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황이 너무나도 분명했으므로.

14화 다시 한국으로 (1)

반사적인 방어 스킬로 사령술사를 녹여버린 네로는 자신처럼 멍하니 있는 몇십 명의 플레이어들을 다시 보았다.

네로에 비하면 그 레벨이 너무나도 낮아, 별로 변하지 않았던 이들.

스킬들의 위력도, 모양새도 일반인에 가까운 능력자들.

그녀가 방어 스킬을 무의식적으로 파티원이라 인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운용했기에, 그들 모두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 모두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 확실했다.

네로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저희,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요."

네로는 미국을 사랑하지 않았다. 조국인 캐나다에도 애국심은 없었다.

그런 고리타분한 마음 따위는 초등학생 이후로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미치광이 빌런들에 의해서 모든 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란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자연스레 글로벌 서버의 일반 월드에서 고 레벨을 유지하고 있는 유저들의 목록을 떠올렸다.

그녀 수준의 레벨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유의미하게 초월적으로 강력할 플레이어들.

글로벌 서버에서 고 레벨 유저는 귀하기에 당연히 대화를 많이 나눠보았다.

-좆 같은 부자들은 전부 다 쥐어짜내서 죽인 뒤 낙수 효과를 이뤄야 한다 나는 신성한 민주주의의 대변자이자···

-감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세금과 복지에 빌붙어 그 삶을 연명하는 버러지같은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모조리 안락사해야하며···

-오로지 하나의 인종 순수한 백인만이 세계의 발전을 이뤘으며 그 외의 열등한 원숭이들은 모두 비누로 만들어 마땅함을···

그들 중 유의미한 대화가 가능했던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네로! 씨발! 왜 너만 착한 척이야! 너도 정신병자인거 다 알아! 만렙 씩이나 찍을 정도로 게임 폐인이면서!

-네로, 사는 곳이 어디냐? 무슨 주지? 무슨 도시? 미국이 아니면 캐나다? 멕시코? 아니면 더 남쪽인가?

-왜 나를 봐주지 않지? 내가 얼마나 많이 후원했는데! 네 방송도 첫 방송부터 봐왔어. 나는 너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나같이 병적인 망상과 공격성을 겸비한 고귀한 인성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 중 미국에 사는 이가 있는지 아닌지는 몰랐다. 글로벌 서버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서버였으므로.

"요원님. 저처럼 아예 변한 사람 중, 호출에 따른 사람이 저 뿐이라고 했죠?"

"...네."

하지만 그녀가 아는 글로벌 본 서버의 250레벨을 넘은 어떠한 유저도 지금 이 백악관에 오지 않았다.

단순히 협조 요청을 거절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았다.

네로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비록 그녀가 게임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고 혼내거나 때로는 싸우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미국의 사회에 잘 녹아든 소중한 가족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도 하찮지 않다.

백악관 곳곳에서 희미한 비명과 욕설,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피와 전기 신호 대신에 신성력과 마력이라는 설정의 포스가 흐르는 그녀의 육체가 그를 모두 인식하였다.

"[축복의 영역], [치유], [회복]..."

인간의 인지 영역과 의식 영역을 초월한 그녀의 신경계가 신성력을 감각의 다발로 삼아 백악관 전체로 퍼진다.

언데드 소환수에게 죽은 경호원들, 몇몇 정치인, 관료, 공무원...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이들이 네로의 영역에 들어왔다.

"[여신을 향한 기도]."

네로는 광역 축복기를 사용했다. 그 모든 이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포스가 없는 일반인들이라 치유에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위급한 출혈이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그 스킬은 응급 처치로 작용되었다.

"[치유], [치유], [치유]..."

모든 이들이 최소한 부상이 더 악화되지는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그를 반복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캐릭터 프리셋], [보스용]."

모든 종류의 강화가 거의 최대치로 이뤄진 최종 장비 세트들이 입혀졌다.

300레벨 사제 네로의 능력치와 스킬이 전투에 걸맞게 재조정된다.

라일리 그레인저는 미국 정부가 힘만 쎈 정신병자 플레이어에 의해 멸망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단은, 미국 정부의 편에 서기로 하였다.

일단은.

* * *

"...라는 일을 겪었겠지."

막 남해를 넘어 제주도를 지나며 한우현은 회상을 끝냈다.

그는 라일리 그레인저에 대해서 잘 알았다.

너무나도 잘.

멸망한 세계에서 단 둘이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의 취향, 일생, 성격, 목표, 그 고결함까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세계 멸망이 시작된 첫 날.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그 모든 것을 지나칠 만치 반복해서, 자세히 들었다. 분 단위로 그녀의 행적을 그릴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러, 도우러 가고 싶지만.

그것은 한우현에게도, 라일리 그레인저에게도, 세계의 미래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으니까.

세계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자, 역으로 그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큰 전력.

한국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일 때였다.

생명체의 한계를 초월한 속도로 바다를 달리기를 몇 분이 지났을까.

-첨벙

-첨벙

저 멀리 이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들과 육지가 보였다.

인천 국제 공항. 거의 다 왔다.

오후 1시.

시간을 확인한 한우현은 안심했다. 휴식을 좀 취할 시간이 날 것 같았다.

-부아앙

적당히 경기도 서부의 해안에 조용히 상륙하고선 택시를 잡았다.

허공을 뛰듯이 도약한다면 집까지 금방 가겠지만, 지금은 낮이다.

그런 짓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데다가, 충격파로 인해 민간인과 건물에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아이고, 외국인이 한국말은 엄청 잘하네?"

"저 케이팝 좋아합니다. BTS, 봉준호, 손흥민, 이그드라실, 렛츠 고."

"뒤에 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 기분이 좋구만! 택시비 천 원 깎아줄게!"

"감사합니다. 역시 방탄소년단의 국가네요."

"잘 놀다 가!"

주책을 바가지로 긁는 택시기사의 질문에 대충 대답해주며.

한우현은 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가 새벽에 한국이 아닌 외국부터 돌아다닌 이유는 명백했다.

외국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그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300레벨 만렙 플레이어. 동시에 4대 단종 아이템과 무수한 재화까지 들고서.

충분히 쉽게, 아니 합리적으로 속아 넘어 갈 만 했다.

한국은 다르다.

한우현은 랭커이기에, 그에 대해 아는 이들이 많다.

그러니까 단순히 레벨과 아이템 만으로 공갈을 치기 어렵다.

그들의 앞에서 정말로 타 서버의 랭커들을 규합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한국 플레이어들은 정말로 까다로운 집단이니, 그러지 않는다면 쉬이 한우현의 말을 듣지도, 믿지도 못할 테니까.

외국 플레이어들이라고 인성이 좋은 것은 전혀 아니지만, 한국의 랭커급 고 레벨 플레이어에 비한다면 그들은 정말로 선량한 이들이다.

심지어 그 숫자도, 레벨도, 전투력도 압도적이다. 다른 모든 나라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게임의 개발 국가가 한국이라서 그런 거지.

"빌어먹을···"

하지만, 그것이 한국이 타 국가에 비해 미래가 밝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어둡다.

오늘 저녁.

대통령과 여당, 야당 대표가 플레이어들에 의해 끌려나와 고문당한다. 처참하게.

그게 어느 정도로 심하냐면, 살려달라는 게 아니라 제발 죽여 달라고 대통령과 정치인들, 장관들이 울부짖게 들 정도로.

그들 중 일부는 과거 시위 운동을 하다가 잡혀갔던 과거가 있는 인물이었다.

즉, 실제로 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해본 적도 있었던 정치인들.

그런 정치인들마저도 정신이 나갈 정도의 고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막지 못한다면, 한국의 정치계와 플레이어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우현은 여당과 야당 중 어느 한 쪽을 편들거나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구를 편 들어주건 무력하고 무능한 놈들이다.

플레이어들의 능력과 전술, 전략까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짜 주었던 미국 정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멍청이들.

더 큰 문제는, 이것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 더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그드라실 유튜버 구독자들간의 내전.

한국 랭킹 1위와 2위 딜러가 그들을 추종하는 원숭이 같은 머저리 플레이어들과 함께 떼거지로,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린 사건.

거기에 더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서비스하는 게임사의 붕괴와 몰살.

그들은 서버 및 본사의 폭파와 디렉터의 공개 처형으로 인해, 아예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오늘 하루에만 그 모든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도 오후 6시경, 거의 동시에.

이것들을 동시에 막을 수는 없었다.

한우현의 몸은 하나였다.

해외 서버의 랭커들을 데려올 수도 없었다.

일단 그들은 한국말도 리하오란을 제외하면 잘 못하는데다가, 대부분 한국 랭커들보다 약했다.

자기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해외 서버의 플레이어들.

그들을 한국에 데려와서 전력으로 쓰는 것은 본말 전도다.

선택을 해야 할 때.

사실, 이미 결정은 내린 상태였다.

오늘 오후 6시에 벌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 세 가지는 이렇다.

첫째, 청와대 테러.

둘째, 게임사 서버 파괴 및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메인 디렉터 공개 처형.

셋째, 한국 최고위 랭킹의 이그드라실 유튜버와 그 구독자들 간의 내전.

"...랭커들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우현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청와대 테러는, 그게 결과적으로 다행인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플레이어들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죽이는 것보다 살려서 가지고 노는 것이 재밌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게임사 본사와 서버 파괴는 얼핏 보면 세상이 멸망하는 상황에서 그까짓 게 뭐가 의미 있는 사건인가 싶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게임이 되고 나서도.

게임에서 레벨을 올리면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회귀 전에서는 게임의 원 서버가 폭파되었기에 알 수 없었던 일이다.

미국 정부는 플레이어를 양산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시도했다.

-젠장, 분명히 서버도, 환경도, 코드 구현도 똑같은데 어째서!

미 중앙 정보국이 서버를 그대로 재현해 서비스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로그를 조작해 양산한 레벨 300 플레이어들은 능력을 얻지 못했다.

-로그 조작이 문제인가? 진짜로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려 보도록!

조작 없이 제대로 사냥해 레벨을 올린 플레이어도 능력자가 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플레이어였던 사람만이 능력자가 될 수 있는 건가···

-이그드라실 레플리카 프로젝트는 실패입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판단한다면, 게임사를 유지한다고 해도.

뒤늦게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이 정말로 플레이어 양산으로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머지 두 사건은, 어떻게든 대처도 가능하고 예상 범주 내에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랭커 사망은 되돌릴 수 없다. 그들은 대체 불가니까.

시체가 되었다고 해도, 플레이어 포스의 근원인 송과체가 너무 심하게 손상되지만 않는다면.

사제의 [부활] 스킬로 되살릴 수 있다.

그러나 강남구 내전에서 죽은 플레이어의 절대 다수는 시체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플레이어들이 너무나도 강력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 화력을 제어할 수 없을 지경이라.

한, 두 명이 죽은 게 아니다.

서울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강남, 서초구의 건물들만의 피해는 제쳐두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은 제쳐 두고서라도.

강남구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허무하게 죽은 플레이어들.

레벨 250 이상의 플레이어 사망자 수가 천 명이 넘었다.

별 특별한 이유로 일어난 내전도 아니었다.

라이벌 유튜버 구독자들 간의 설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서 일어났다고 하니까.

그 가운데서 한국 최강의 딜러 두 명도 죽는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양대 라이벌 방송인들.

"고민하지 말자. 이미 선택은 내렸으니까."

차라리 이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플레이어 전력을 보존하고 길드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결정이 최선이다."

정치인들의 기를 빌런들이 한 번 제대로 꺾어준다면.

차후 협조를 받기 더 수월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15화 다시 한국으로 (2)

-끼익

"도착했습니다! 재밌게 놀다 가세요!"

"감사합니다, 한국 좋아요."

웃돈을 주고 탄 택시는 돈 값을 했다. 인천 바닷가에서 자취방까지 두 배는 빨리 왔으니.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30분.

"하··· 좀 피곤하군."

하지만 아직은 쉴 수 없다.

"당분 섭취를 좀 하고."

포스를 이용해 산소와 양분 같은 신진 대사를 대체할 수 있지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정신적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오가는 길에 보이는 초콜릿 카페에 들렀다.

"다크 트뤼플 초콜릿 네 개 주십시오."

카카오 향이 진한 가나슈를 속에 채운 수제 초콜릿도 그가 회귀 전에 좋아했던 간식이었다.

그를 씹으며 은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띵

번호표가 울리자 창구에 앉아 직원을 마주 보았다.

"한우현··· 님?"

"친구입니다. 한국어 잘 하니 영어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우현은 플레이어가 되며 외모도 덩치도 완전히 바뀌었다.

당연히 이제는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당분간은 신원 입증이 좀 불편할 것이다.

"지정 계좌에 입금하려 하는데, 외국인이어도 괜찮지요? 제가 여권 같은 건 지금 없는데."

"아, 예! 입금은 상관 없습니다."

은행 직원이 얼굴을 살짝 발그레 붉혔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데다가 황금 비율의 서양인. 자연스레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으니.

물론, 회귀 전의 미래를 아는 한우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웃긴 반응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온갖 테러와 살육을 저지르고 다니자,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서양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었으니까.

"...이 세 명의 계좌로."

오늘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나면, 가족들을 만나야 했다.

그 때 한우현의 행적과 계획에 대해 납득시키려면 미리 준비를 해 놓는 것이 좋았다.

"그, 실례지만 관계가요···?"

"진 빚이 좀 있어서, 갚으러 왔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표 3억입니다. 1억씩 세 명 계좌로 넣어주십시오."

한우현은 수표 세 장을 턱 창구에 내려놓았다.

헤벌레한 표정으로 한우현의 얼굴을 뜯어보던 은행 직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3억이요?"

"예."

"저, 소액 입금에는 자세한 확인이 필요 없지만. 1억을 넘어서는 거금의 경우에는···"

한우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은 철저한 금융 실명제 국가다.

어지간한 나라에서는 출금이 아닌 입금에서는 그리 철저하게 확인을 하지 않는다.

회귀 전에는 한국의 사회 경제 구조가 거의 붕괴했었고, 따라서 은행을 이용할 일도 거의 없었다.

이용해도 미국에서 주로 했지.

미국에서는 라일리 그레인저가 한우현의 신원을 보증해서, 절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간과했다.

"아예 안 되는 겁니까?"

"절대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한우현은 다시 살짝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최대한 온화해 보이는 표정으로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제가 오늘 할 일이 좀 많아서요. 빨리 처리해야 하거든요."

"아··· 예, 하긴 바쁘시겠죠···"

탁.

한우현은 그의 신분증을 꺼냈다. 회귀 전의 모습을 한 신분증.

"제가 빚을 진 친구입니다. 신분증이요. 친구가 사정 상 지금은 올 수가 없는데, 가족들 사정이 급하다고 해서요."

"아, 그래서 한우현 님으로 등록표를···"

여직원이 말 끝을 흐렸다.

그 애매한 태도에 한우현은 확신했다.

이거, 법적으로는 힘든 절차다.

하지만 사람 하는 일에 절대 안 된다는 게 어디 있나.

말꼬리를 흐리는 것으로 보아, 가족들끼리 신분증을 가져와 대리로 입금하는 일은 흔한 모양이다.

외국인 친구라는 이질감이 심한 인물이라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뿐.

그렇다면 시도해 보자.

"필요한 절차가 있다면, 그 부분은 친구랑 같이 내일 다시 와서 진행하겠습니다."

"예? 내일요?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아리따운 아가씨."

한우현은 혀 끝이 뒤틀리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플레이어가 되기 전, 회귀 전, 회귀 후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이성을 유혹한다는 짓거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단어가 적절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우현은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가족들에게 보내는 입금은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정 안 된다면, 며칠 있다가 해도 된다. 그 때쯤 되면 플레이어와 그의 직위가 사회적으로 공인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 하는 것이 추후 가족들을 만나 설득하기에 편할 것 같아 구태여 서두른 것일 뿐.

통할까?

"...꼬, 꼭 오시는 거에요??!!"

여직원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웅얼거렸다.

한우현은 조용히 혀를 깨물었다.

이런 바보 같은 단어 선택이 통한다고? 라고 생각하며.

"지금 바로 입금 해 드릴 테니까, 인증 절차는 그럼 내일 같은 시각에···?"

"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도 내일 데려오겠습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한우현은 활짝 웃었다.

불법은 아니지만, 은행의 자체 기준을 무시한 것이 분명한 호의.

내일 한우현이 오지 않으면 그녀는 회사에서 징계를 받을 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미소 정도야 얼마든지 지어줄 수 있었다.

"저, 저 그런데."

"네?"

"혹시 사, 사진."

"...?"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증거 없이 3억의 입금은 좀 그렇다는 것인가?

사진으로 신원을 보관해야 한다?

납득할 만 했다.

"예, 뭐 그 정도야···"

"가, 감사합니다!"

-찰칵

"...예."

한우현은 그가 착각했음을 그제서야 알았다.

여직원은 번개같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그걸 옆으로 돌려 셀카를 찍었다.

한우현과 그녀가 같이 나오도록.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꼭 오세요!"

헤실헤실 녹아내린 듯한 표정을 한 여직원이 입구까지 한우현이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살짝 어지러웠다.

"뭐··· 아무튼 잘 됐으니, 됐지."

머리를 휘휘 저은 한우현은 자취방으로 걸었다.

주위에 여파가 없는 수준의 선에서, 최대한 빠른 속보로.

곧 자취방에 도착한 한우현은 약간의 현기증과 탈진감을 느꼈다.

"정말로··· 피곤하군."

한우현은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2시.

플레이어의 육신은 초월적인 내구력과 체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어젯 밤 자정부터 온종일 바다를 달리고, 중국, 동남아시아를 돌아다녔다.

그것도 두 다리로.

초월적인 체력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지칠 만한 상황이었다.

플레이어는 음식도, 산소도 필요치 않지만 수면은 필요하다.

그것은 인체 생리 기전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신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초월적으로 재구성된 뇌와 신경들이라 해도, 노폐물은 쌓인다. 피로가 쌓인다.

이그드라실 포스를 아주 정밀하게 운용한다면 그것도 해결할 수 있다.

회귀 전, 플레이어를 세계 최고의 과학 기술력으로 분석했던 미국 국방부의 부서.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에서 그러한 종류의 무수한 기술들을 배웠다.

라일리 그레인저와 함께.

하지만 그 기술은 집중력을 너무 불필요하게 소모한다.

수십시간을 추격당하거나 연속해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나 쓸 만한 기술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자는 것이 낫다.

"3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어."

한우현은 쉬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기다릴 때다.

"[캐릭터 프리셋]. [휴식용]."

때마침, 일어나야 할 시간과 그의 동생이 찾아올 시간이 겹친다.

그것을 알람으로 삼으면 될 것 같았다.

한우현은 이불을 덮었다.

플레이어가 되며 너무나도 예민해진 감각.

의도적으로 온 몸에 퍼져 있는 감각신경의 이온 채널들을 차단하지 않으면, 이제는 쉬이 잠들기 어렵다.

더군다나 마지막 10년은 언제 보스 몬스터가 쫓아올지 몰라 언제나 긴장을 하면서 지냈다.

이게, 얼마 만에 편안하게 잠드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아···"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느끼는 푹신함. 안락함.

한우현은 이내 단 잠에 빠져들었다.

* * *

-쾅쾅쾅

-쾅쾅쾅

노크를 하던 한우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이 시간이면 집에 있을 텐데, 영 반응이 없다.

"형! 있는 거 알아! 대답 좀 해!"

여전히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시발, 그냥 들어간다! 이상한 짓 하지 마! 나 니 동생 한우준이니까!"

한우준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힘을 최대한 집중해서 몸에 둘렀다.

그의 송과체에서 이그드라실 포스가 스며들 듯이 퍼져나갔다.

방어 스킬.

[화염 정령의 가호]가 한우준의 피부 표면에 골고루 퍼져 깃들었다.

"들어간다!"

갑작스럽게 쓸 수 있게 된 초능력.

아니, 게임 스킬.

한우준이 형의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 계기이자 이유였다.

한우준은 지난 밤, 병원에서 당직을 서다가 한 환자에게 너무나도 기이한 경험을 당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기이한 경험을 직접 행하게 되었다.

-[궤도 화염구].

-미친··· 이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화염술사 스킬이잖아?

자신이 미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한우준은 아침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 아침.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산발적인 테러와, 초능력자에 의한 북한 평양 테러라는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되었다.

"꿈이 아니야. 망상도 아니야. 진짜였어···"

한우준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게임 능력을 쓸 수 있게 된 현실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 하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의해 명확히 입증되었을 때.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뒤바뀐 현실을 마주하기를 택했다.

현실에 나타난 게임 초능력자라는 현실을 천천히 그 좋은 머리로 분석했다.

-형 레벨이 대체··· 얼마였지?

아침의 병원에서 한우준은 충격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한우현,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밥만 축내는 그 게임 폐인.

친형의 레벨이 얼마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게임을 플레이 했었을 때, 이미 한우현의 레벨은 랭커 급의 250을 넘겼었다.

한우준 역시 어렸을 적 형의 권유로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잠깐 플레이 한 바 있다.

비록 깊게 하지 않고 그만둬, 레벨 체계와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지만.

-레벨 차이가 그 정도면··· 방어력이나 공격력? 이건 어떻게 계산되는거지?

그러나 한우준이 생각하기에 이미 그 레벨만으로도 자신과의 차이가 명백했다.

하물며 그것이 5년도 더 전인데, 하루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한 현재라면?

어쩌면 한우현이 무심코 쓴 방어 스킬에 그는 바로 증발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와야만 했다.

-아니, 우준아! 이게 뭐니?

-네? 뭐가요?

-계좌! 계좌에! 누가 입금을 했어!

-예?

-우현이가 보냈다는데··· 말이 안 돼잖아! 어떻게 걔가 1억을 보내?

-1, 1억이요?

-그래! 아니지, 2억이야! 니네 아빠한테도 보냈으니까!

-잠깐, 잠깐만요··· 미친, 저한테도 왔는데요?

-당장 좀 찾아가 봐! 대체 무슨 일인지!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가족들에게 들어온 3억이라는 거금.

그것도 한우현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무슨 사정인지 알아봐야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그는 형을 싫어했다.

하지만 증오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정말로 그 정도로 싫어했다면 잔 소리를 하면서도, 생활비를 그 동안 보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가족이니까. 성공은 못 하더라도 어떻게든 살 길을 찾기를 바랬으니까.

그 때문에 갑작스럽게 너무나 큰 힘을 얻었을 형이.

혼란에 빠져 무슨 짓을 했을지 걱정되어 찾아 왔다.

"콜록, 콜록...어우, 먼지. 흐... 어? 형?"

그래서 한우준은, 매트리스 위에 가만히 앉아서 그를 바라보던 한우현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나칠 만치 맑고, 굳세고, 광기 어리고, 분노에 타오르고, 후회에 잠기고...

무수한 감정을 담은 강철 같은 의지의 고행자와도 같은 눈.

그 눈.

언제나 방구석에서 썩은 동태 눈깔로 게임만 하던 전의 형의 눈빛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왔구나, 우준아. 내 동생."

그 말투도, 전과는 너무나 달랐다.

16화 다시 한국으로 (3)

한우준은 형을 바라보며, 지난 날 밤을 다시 한 번 회상했다.

불과 여섯 시간 전.

갑작스럽게 이상한 초능력을 쓰며 그를 덮친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의 환자.

-[암습]!

-[화염 정령의 가호]

-흐겍!

-...이게 무슨?

다행히, 본능적으로 발현한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힘.

방어 스킬.

그것이 그를 살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밤 새 수많은 그가 아는 스킬들을 시험했다.

위키를 키고 그의 직업이었던 화염술사의 스킬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한우준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수능을 겨우 하나밖에 틀리지 않았으며 유수한 인재들이 모인 의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한 이력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하루 만에 스킬과 포스를 제어하는 법도 거의 완벽히 터득할 수 있었다.

물론 머리가 좋기만 해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이거··· 그냥 쉬운데. 설마 게임을 플레이하기만 했으면, 이 능력이 생기는 건가?

애초에 그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던 능력이 갑자기 생긴 것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쉽고 강한 힘이었다.

이내 아침이 되었다.

믿기 힘든 뉴스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환자도,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 멍하니 뉴스를 본다.

초능력자들의 등장.

미국 대통령의 암살.

무너진 북한 평양의 모습과 자기가 이제 북한의 지배자라고 외치는 기괴한 인간.

그 뉴스를 보고 났을 때, 한우준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의 형이었다.

한우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한우준의 유일한 형제.

서른 살이나 처먹고 취업은 커녕 꼬박꼬박 용돈을 받아가며 밥을 축내고 있는 방구석 폐인.

그가 어릴 적, 억지로 시켰기에 따라갔다가 좀 머리가 굵어지자마자 그만두었던 게임.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 한우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딱 201레벨만 찍고 접었었는데.

여기까지가 프롤로그니까 이것만 넘기면 재밌다기에 해 보았었다.

그 중 80%는 한우준이 아니라 한우현이 대신 플레이 했었지만, 마지막 두 번은 한우준이 직접 사냥해 찍었다.

한우준이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때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오히려 더 재미가 없어졌기에 그만두었다.

어차피 명목상만 한우준의 것이었지 실제로는 거의 한우현이 쓰는 계정이었다.

-그 놈의 게임! 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대학은 그렇다 치고 취업, 아니면 알바라도 해야지!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가 그만둔다고 하며 너도 정신 좀 차리라고 일갈을 하자, 한우현도 부끄러움을 아는지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우준의 목숨을 구했다.

-형을 찾아가야 해. 분명 형도, 초능력자··· 게임 캐릭터의 스킬을 쓸 수 있게 되었을 거야.

-씨발, 3억이라고? 대체 어디서 그런 돈이 나와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형은 그가 찾아가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가 말하는 잔소리도 싫어했다.

한우준 또한 굳이 싫다는 형을 억지로 찾아가지 않았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생활비 지원으로 그렇게 생색을 내기에도 귀찮았다.

병원 일만 하기도 바빴고.

-방에 있기는 한 건가? 아니, 그 전에. 가만히 있기는 한 건가...? 뭔가 큰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다급히 찾아갈 이유가 생겼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거금과, 분명히 초월적인 초능력을 각성했을 한우현.

둘의 연관성이 너무나도 의심스러웠으니까.

"형···? 형이 맞지?"

회상을 끝낸 한우준이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얼굴, 몸매, 분위기부터 태세, 느낌까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지만.

이 시간에 이 방에 있을 사람은 객관적으로 형 밖에 없었다.

"...성기사."

"그래, 맞아. 성기사. 내 본 캐릭터지."

한우현 또한 그에 답했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붉은 빛으로 물든 것 외에는 별로 변하지 않은 동생을 보았다.

"그, 별 일 없어서 다행이네. 아니, 아니지. 별 일 없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나도 막 상황을 파악했으니깐."

"...약은? 잘 먹고 있어? 말투가 왜 그래?"

한우준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한우현은 그제서야 하나를 자각했다.

2년 전의 그 자신은 온갖 정신병을 달고 살았던 폐인이었다. 그래서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고 있었다.

물론, 뇌가 이그드라실 포스에 의해 재조립되며 그것은 상당 부분 날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문제로 우울증만은 몇 달 동안 계속 겪었지만.

그 또한 무수한 전투와 갈등을 겪으며 극복한 지 오래다.

"물론, 잘 먹고 있지. 오늘은 그 덕분에 상태가 매우 좋아.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아. 다 네 덕분이야, 우준아."

유려한 미성이 강렬한 의지와 함께 한우현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다, 내 덕분?"

그 자신감이 너무나도 강했다. 목소리도 너무 조리 있고 강력했다.

동생이 보기에 그 말투는, 20년을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한 우울증 환자의 말투가 아니었다.

"...씨발, 뭐야. 너, 한우현 아니지?"

한우준이 얼굴을 굳히고 공격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기억하는 형의 태도, 말투, 성격과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달랐기에.

한우현은 아차 했다.

방금까지 만나고 온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한우현이 처음 만난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과거의 그와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등의 일치성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동생한테도 그냥 빠르게 가족을 부탁하고 자기가 할 일을 설명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과거의 그와의 너무나 큰 괴리감. 의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우현이 맞다."

"누가 바보로 보이냐? 이 방에 살던 사람. 어떻게 했어? 넌 누구야? 돈도 네가 보낸 거냐?"

순식간에 한우준의 주위로 화염구가 화르륵거리며 나타났다.

한우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게임은 5년 전에 접은 저레벨 유저가 그의 동생이었다.

보아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킬을 자유자재로 쓸 만큼 능숙해진 모양이다.

역시 동생은 똑똑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대답해! 3억, 대체 무슨 속셈이냐! 형은 어떻게 한 거야!"

한우현은 빠르게 기억을 뒤진 끝에, 매우 강력한 증거를 찾아냈다.

동생이 그가 친형 한우현임을 확실히 수긍할 근거.

"재작년에, 네가 엄청 화를 냈었지. 그 때는 사과하지 못했다만, 지금이라도 사과를 해야겠어."

"...왜? 뭘? 왜 사과하는데?"

"의사 면허 도용해서 대출 받으려 했던 것 말이야."

"...하."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는 햇살론이라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대출을 잔뜩 받아서 사냥용 아이템을 맞춘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냥을 해, 골드를 열심히 채굴한다.

골드를 충분히 채굴했으면 그것으로 대출을 갚는다.

그럼 남는 것은 사냥용으로 훌륭하게 맞춰진 아이템들 뿐.

-이 글 보니까 이그드라실 마렵네...

-난 이그드라실은 안하는데 최근 이벤트도 하고 템값도 싸다고 하던데

-초기자본 1000만원 정도만 넣으면 최저시급 벌면서 유튜브 넷플릭스 보는 거잖아

-이정도면 나름 할만하지 않나?

-나중에 템도 다 회수 가능하고 좋을 거 같은데···

당연히, 미친 소리였다.

어지간한 게임 폐인이라 해도 게임머니 채굴만으로 대출금을 갚기는 어렵다.

저딴 개소리를 진짜로 시도했던 유저들은 죄다 한강으로 떠났다.

한우현도 저 헛소리를 진짜로 믿고 그대로 시도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잠깐 장비를 교체하려던 중에, 골드의 유동이 막혀서 대출을 시도했던 것일 뿐.

하지만 30대 백수에게 나오는 대출 한도는 너무나 낮았다.

그래서 나름 나쁘지 않은 직업을 가진 가족의 명의를 빌리려 했다.

당연히, 즉시 병원으로 연락이 왔으며 식겁한 동생한테 들켜서 실패했다.

"...진짜야?"

"그래, 진짜로."

"하."

한우준은 뭐라 할 말이 많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좀 늦은 사과라, 더 미안하다."

"아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회귀 전의 한우현이라면 무언의 손짓과 표정을 전혀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과 집단의 갈등과 전쟁, 전투, 아귀다툼을 겪으며 얻은 안목이었다.

한우준이 보기에 한우현은, 지금 저 잘생긴 금발청안의 서양인이 정말로 그의 형이라는 것에 놀랐다기보다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대출 시도의 사과에 더 놀라 보였다.

"몇 번을 사과해도 모자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 얘기하기에는 할 말이 많아. 할 일도 많고."

안타깝게도, 한우현은 할 일이 많았다.

휴식을 넉넉하게 취하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최소한의 회복은 되었다.

이제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가야 한다.

"할 말? 아니, 나도 많은데. 3억, 3억 뭔데? 대체 어디서 그런 돈이 난 거야? 무엇보다···"

"뉴스는 봤겠지? 세상에 플레이어 초능력자들이 날뛰고 있다는 거."

"응? 응, 어."

한우준이 살짝 멍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 한우준은 혼란스럽다. 많이 혼란스럽다.

원래 그가 예상한 형과의 만남과도, 대화와도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급히 형의 자취방을 찾으며 한우준은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형은 중증의 우울증에다가 피해망상에 절여진 인간이었다.

정말로 소극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형이, 해야 할 일?"

하지만 어쩌면, 비사회적인 성정이 반사회적인 성정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갑작스럽게 초월적인 수준의 능력을 쓸 수 있게 된 초능력자가 되었다면, 더더욱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그랬을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찾아왔다.

한우준은 다시 한 번 한우현, 그의 형이라 주장하는 인간을 살펴보았다.

180cm를 넘어 190cm는 될 것 같은 키.

오똑한 코와 빛나는 푸른 눈.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신체비율, 날렵한 얼굴선과 몸매.

하얗디 하얀 피부색. 황금을 녹인 것만 같은 금발.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넘어갈 수 있었다.

대충 알아보니, 플레이어들은 죄다 몸이 레벨에 비례해 캐릭터와 동화되었다고 하니.

"너에게는 언제나 미안한 것들이 많았지.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야."

도저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저 말투.

책임감, 의무, 간절함, 절망, 회한···

그의 형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태도.

"하지만 부탁할 것이 있어.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너에게 미루는 것이야. 미안하다"

"이 시국에 무슨 일을? 애초에 형은 백수인데."

"어머니, 아버지. 가족들을 부탁해. 비록 네가 고 레벨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당분간 옆에서 지키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3억은 대체 어디서 난 거냐고!"

"걱정 마라. 문제 있는 돈이 아니니까. 내일, 내일 모든 걸 말해주마. 그 돈은 그 동안 내가 끼친 폐에 대한 최소한의 사과야."

"...형."

"부탁한다."

"...대체, 그 할 일이 뭔데?"

한우현은 대답 대신에 시계를 힐긋 보았다.

"시간이 없으니, 이따가 뉴스를 봐라."

"뭐? 잠깐만..."

"내일 보자."

아연한 동생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다.

한국 최강의 빌런 플레이어들을 만날 시간이었으니까.

17화 한국 관리자 김재승 & 차정훈 (1)

"자, 여러분들 오늘도 반갑습니다~ 시원하게 능력 재설정부터 때리고 사냥 시작해 볼까요?"

김재승은 인터넷 방송인이었다.

정확히는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라는, 상당히 쓰레기 같은 게임의 인터넷 방송인.

꽤나 유명했다. 방송 수익 만으로도 나름 넉넉하게 먹고 살 만 할 정도로.

"아니 씨발, 형님들 이게 말이 됩니까? 말이, 말이 되냐고요! 부여 능력 재설정을 1000번을 돌렸는데!"

비록 그 과정에서 좀 추한 모습을 생중계 해야 하기는 했지만.

"2급 옵션이 한 번도 안 뜬다고! 내가 1급을 달라고 했어? 2급! 2급만 달아 달라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개억까 씹ㅋㅋㅋㅋㅋㅋ

-아...그저.. ^확률주작777없는슬롯머신없뎃^게임 ㅋㅋㅋㅋㅋㅋ

-맵 옮겨서 다시 강화 ㄱㄱ

-개인맵 패치한지가 언젠데 ㅋ

-걍 옮겨보자 될 때까지 꼴아박기 ㄱㄱ

-숭배하라 신 신 신

-숭배하라 대 대 대

-축복해 줬으니 다시 ㄱㄱ?

"안 해 씨발! 다시 능력 재설정을 내가 하나 봐라!"

물론 일주일 내로 다시 방송할 것임을 김재승도 알고, 시청자들도 알고 있었다.

주 컨텐츠가 강화나 재설정에 실패하고 소리지르며 돈을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것이었으므로, 해야 했다.

도박의 대리만족. 그것이 김재승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주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게임이, 꽤나 풍족한 방송 수익의 거의 대부분을 갈아먹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재승은 가진 재산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 나도 니처럼 피시방 사업이나 할 걸 그랬어."

-야, 피시방 사업은 만만한지 아냐. 나도 월 이 백도 못 벌어. 가끔 컴퓨터 고장이라도 나면 적자라고.

"그래도 뭔가 남은 게 있잖아. 난 겜 접으면 뭐냐? 다른 겜 하면 아무도 보지도 않아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차피 유튜버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겜 망하면 접어야지...

"아 씨, 남 말 하듯이 할래? 야, 니 시청자들이 우리 엄마 반찬가게 별점 테러 한 거 복수 해 줘?"

-어쭈, 너도 내 피시방에 오줌 싸지르러 오게? 오면 진짜 뚝배기 깬다?

"그래, 거기다가 똥까지 싸러 간다. 딱 기다려라. 내일 누가 바지 내리면 올 게 왔구나 해라."

-하이고, 그 놈도 네 사주였구나! 이 사악한 놈...

"개 소리는 됐어. 그래, 정훈이 너도 힘들겠지."

-재승아. 전부터 했던 말이지만, 이그드라실이야 계속 해도 강화 컨텐츠를 좀 줄여. 갑자기는 말고 조금씩 말이야.

"그거 보러 오는 애들인데 그걸 어떻게 줄이냐..."

김재승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대화를 나눈 상대의 이름은 차정훈. 그의 꽤나 오래된 악우이자 라이벌이었다.

딱히 같은 학교를 나오거나, 오래된 소꿉친구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장 구독자가 많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유튜버 둘이었으니, 당연히 서로 친분이 있을 수 밖에.

-제가 차정훈 저 씹새끼만은 반드시 조집니다.

-김재승 이 놈이 하꼬 시절 생각 못하고 깝치는데, 우습죠.

물론 방송에서는 서로 라이벌 구도를 이뤘다가, 화해하는 연출을 많이 보였다.

-뭐? 걔가 잃어버린 대륙을 한다고?

-그렇게 잃어버린 대륙이 좋으면 잃대하러 꺼지세요!

그것이 더 극적이고 재미있기에, 둘이 합의를 통한 유튜브 거리를 뽑아내기 위해서.

"뭐하냐?"

-사냥.

"방송은 끝났고?"

-어. 왜, 술 땡기냐?

"말 안 해도 아는구만."

-이따가 논현 쪽으로 와라.

"이번엔 니가 사라. 너 오늘 강화 성공했다며?"

-그건 또 어떻게 안거야? 강화 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눈치 빠른 놈.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극 초기에는 진짜로 싸웠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둘은 누구보다 서로의 애환을 잘 아는 친구였다.

차정훈. 구독자 100만명의 이그드라실 유튜버이자 레벨 295의 최고위 랭커.

물론 김재승도 거기에 그리 꿇리는 체급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구독자 100만명의 이그드라실 유튜버이자 레벨 295의 최고위 랭커였으니.

"작년에 비하면 시청자가 반 토막이네···"

그러나 그럼 뭐하나.

게임은 하루가 다르게 유저 수가 줄고, 방송 수익도 꾸준히 우하향 중인데.

이제와서는 김재승도, 차정훈도 후회스러운 부분이었다.

둘 모두, 방송을 좀 다른 게임도 하면서 다각화 하려고 시도했었다.

-노잼

-강화 언제 함?

-얘 왜 이상한거 하냐?

그러나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라는 수렁에 매몰된 시청자들이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미래가 없는 상황.

"시발, 이제 와서 유튜브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김재승은 부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기실 차정훈도 피시방 사업이 그리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에는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요금도 올리기 힘들어 대부분의 이윤은 음식에서 나온다.

더군다나 지난 달에는 미친 놈이 팬이랍시고 와서, 같이 방송 촬영은 어렵다고 하자 격노해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컴퓨터들에 뿌려댔다고 한다.

그 손해만 해도 몇 백은 보았을 것이다.

"하··· 다른 애들도 다 접고, 우리 둘 뿐인데."

아무튼 그 둘은 꽤나 친한 관계였다.

다른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랭커급 유튜버들이 게임 망했다며 전부 접고 나서는 더 친해졌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둘이 가장 먼저 연락을 주고 받은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얼굴 보고 얘기하자."

-그래. 밖은 지금 아수라장이니까, 내 피시방 건물 창고로 와.

"알았어."

서로 방송 스튜디오가 멀지 않았기에, 김재승은 빠르게 차정훈의 피시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직업은?"

"본캐야. 추적귀."

흑발 적안의 날카롭게 생긴 동양인 남자가 중얼거렸다.

"나도 마찬가지네. 본캐 포격수."

회색빛 머리칼의 서양인 남성이 답했다.

"진짜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좆망겜 좆망겜 하면서도 제발 안 망하기를 바라긴 했지만, 그게 이 뜻은 아니었는데."

"야, 니가 망하지 말라고 기도해서 이렇게 됐겠냐?

"그건 아니지만..."

뻘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내 둘은 생각에 잠겼다.

"이거 좆 된 거 같은데."

"그건 당연한 거고. 얼마나 더 좆되느냐가 문제지."

둘은 이그드라실 월드의 랭커였다.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

하지만 그것이 그 둘이 다른 유저들처럼 반사회적이고 망상과 공격성에 찌든 정신병자라는 뜻은 아니었다.

물론 둘의 시청자는,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사회성이 떨어지는 오타쿠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튜버면 당연히 비슷한 성향의 오타쿠일 것이라고.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인싸들을 상대하는 방송인이나 연예인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도 인싸여야 한다.

아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며, 대화 기술이 좋아야 한다.

아싸들을 상대하는 방송인이나 연예인이라도 다를 것은 없다.

오히려 어떤 방면에서는, 그 능력이 인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훨씬 뛰어나야 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고레벨 유저 대부분은 게임이 인생이요 인생이 게임인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그 게임에 돈이요 시간이요 영혼까지 죄다 바친 폐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몇 없는, 이제는 둘 밖에 안 남은 방송인들을 물어뜯고 추앙하고 숭배하고 공격하고 추적한다.

시청자들은 방송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방송해주는 장난감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단순히 재미를 위해 광기에 찬 선동과 채팅을 반복한다.

그래서 매 방송마다 김재승과 차정훈은 마치 미치광이 야생마들을 조련하고 어르는 듯한 경험을 한다.

아주 많이 한다.

아무 맥락도 없이 별 의미도 없는 지리멸렬한 개소리를 난사하는 시청자들.

아무리 봐도 뭔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아 별 반응을 하지 않으면 무시했다고 개지랄을 떠는 정신병자들.

오래, 아주 오랫동안 둘은 그런 시청자들을 고객으로 맞이했다.

그 결과 그 둘은 누구보다도 이그드라실 시청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법을 통달했다.

미친 놈들을 상대 가능한 뛰어난 사회성의 유튜버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김재승과 차정훈은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피시방의 자리 한 구석에서.

금발 청안의 아주 잘 생긴 서양인이 보란 듯이 일어나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을 때에도.

놀라서 공격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대신, 일단 상황을 파악하려 할 수 있었다.

"레벨 295 추적귀 김재승. 레벨 295 포격수 차정훈. 만나서 반갑다."

모든 장비 세트와 무기, 방패까지 장착해 누가 봐도 플레이어임을 드러내는 성기사의 형상.

"나는 한우현. 캐릭터 네임은 아서다.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 왔다."

한우현은 최대한 위압적이고도 대단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려 의식하며 인사했다.

"뭐, 뭐야? 누구세요?"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물론 그것이 한우현의 인사를 제대로 받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자기 사업장에서 갑자기 괴한이 나타났는데 자연스레 인사를 받을 리가 있나?

어쨌든 한우현은 안도감을 느꼈다.

원래는 둘이 들어오자마자 본론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차정훈이 김재승에게 문을 열어주기 무섭게, 둘이 진지하게 얘기를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회귀 전에는 둘이 너무도 빠르게 죽었기에, 그 둘의 인터넷 방송 중이 아닌 모습을 몰랐다.

그래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난 뒤, 한 번 현실에서의 면모를 파악하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떤 식으로 설득할지 더 신중을 가해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다행히, 대화를 엿들은 결과.

김재승도, 차정훈도.

플레이어들이 평균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지금 세상이 어떤 위험에 처해 있는지.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둘 모두 정상인이었다. 다른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랭커들과는 다르게.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군. 하지만 워낙 급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들어온···"

"야, 정훈아, 잠깐만. 그 방패. 성기사 랭커?"

"뭐? 아는 사람이야?"

"현실에서 안다는 건 아닌데. 그 탱커 컨셉 랭커 아냐?"

차정훈이 여전히 자기 사업장의 보안에 대해 신경쓸 때, 제지한 것은 김재승이었다.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둘 모두 200레벨 공용 스킬, [날카로운 눈]은 마스터했겠지?"

한우현은 가장 빠르게 자신의 능력과 대표성을 증명시켜 줄 방법을 언급했다.

다행히, 유튜버들은 이미 스킬들에 대해서 최소한의 시험을 마친 이들이었다.

스킬의 효과를 떠올린 그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눈]."

"...[날카로운 눈]."

그 둘의 동공이 찢어져라 커지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레벨, 300? 한국에 만렙 캐릭터가 있었어? 포스는 낮지만..."

"아니, 그보다 전투력이랑 주 스텟. 이거 뭐야? 우리보다 강하다고?"

비록 신뢰를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초월적인 능력치로 한우현이 뭔가 엄청난 인물이라는 존재감을 납득시킨다.

물론 그것은 오류 능력치기는 했지만, 실제로 한우현은 전투에 돌입할 때 그 오류 능력치보다도 더 큰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었으므로.

완전한 공갈은 아니었다.

기세를 몰아서, 이제 그 놀람을 그의 길드에 대한 신뢰로 자연스레 인식시킬 때다.

"능력치랑 레벨 자랑만 하러 온 게 아니다."

이제 길드의 입지를 본격적으로 한국에 세워야 한다.

그 발판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최고의 인플루언서들.

딜러 랭킹 1위, 김재승과 딜러 랭킹 2위, 차정훈.

"나는 전 세계 플레이어 연합의 대표다."

다시 한 번.

한우현은 4대 단종 아이템을 꺼냈다.

모든 서버를 아우르는 플레이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표.

"공식적으로 말하지."

한우현은 약간의 위기감을 느꼈다.

초월적인 플레이어의 감각 신경이 다른 플레이어의 존재를 감지했다.

점차 강남구의 두 유튜버를 만나러 오는 플레이어들의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한우현은 말했다.

"글로벌 서버, 동남아시아 서버, 중국 서버의 통합 길드. 루시드의 길드장으로서 너희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너희들을 한국 서버의 관리자로 임명하고자 한다. 길드에 들어와라."

김재승과 차정훈의 눈 뿐만이 아니라 입까지 경악으로 찢어졌다.

"물론, 대가도 아주 넉넉히 챙겨 주지."

한우현은 보란 듯이 금괴를 한가득 손에 부채처럼 펼쳤다.

18화 한국 관리자 김재승 & 차정훈 (2)

다행히, 두 유튜버 모두 그리 머리가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말귀를 잘 알아 들었다.

"진짜, 진짜 해외 서버 단종템이잖아."

"레벨에다가 아이템들 보니까 확실히 외국 분들하고 관계는 있으신 거 같은데."

"원한다면 중국 지부장과 동남아시아 지부장과 연결해주지. 지금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였다.

당연히, 너무도 갑작스러웠으니.

그것을 봐 줄 시간이 없다. 몰아쳐야 했다. 충성을 맹세 받을 필요는 전혀 없다.

협조만 받아도 된다.

"강제하지도 않는다. 길드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니, 정당한 대가도 얼마든지 주지."

-팔랑

한우현은 금괴에 이어, 보다 직관적인 물건도 꺼냈다.

보란 듯이 1억짜리 자기 앞 수표들을 흔들었다.

오는 길에 다시 한 번 금은방에 들러, 잘게 자른 금괴를 처분해 만든 급전이었다.

"금괴는 쓰기 힘들 테니 이게 더 마음에 들지 않겠나? 그리고 돈 뿐 아니다. 아이템도, 사회적인 직위도. 길드는 모든 것을 보장해 줄 수 있다."

"1, 1억? 그,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그 보상과 신원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일 정도로 둘이 생각이 짧지는 않았다.

"그래, 이해한다. 조금은 상의할 시간을 주지. 많이는 못 기다린다만."

한우현도 그것을 이해했기에, 여유로운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은 초조해했다.

두근대면서 퍼지는 포스의 파장. 느껴졌다.

이미 피시방 앞으로 레벨 290 이상의 랭커 급 플레이어 다섯 명이 모였다.

영역 선포 스킬을 쓰지 않았기에 정확히 주위 몇 백미터 반경을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송과체의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언제 폭주할지 몰랐다.

회귀 전, 강남구 내전은 플레이어들 간의 본격적인 싸움이 얼마나 큰 여파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강남구와 서초구를 넘어서, 아예 서울 남부의 절반이 초토화 된 내전.

수천 명의 플레이어와 수십 만의 일반인이 죽었다.

그 결과 보스 몬스터들이 던전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는 플레이어들이 어지간하면 서로 싸움을 피하게 되었을 정도로.

"...그럼···"

"...하지만···"

"...믿을···"

-우물우물

-꿀꺽

이건 맛이 너무 단조롭군. 차랑 어울리진 않겠어.

그리 생각하며, 대만에서 사 온 펑리수를 삼킨 한우현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15분이 지났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미 차정훈의 피시방 앞으로 플레이어들이 최소 서른 명, 어쩌면 그 이상. 쉰 명? 그 정도 되는 사람이 모였다.

그리고 한 놈이 적대적인 감정의 이그드라실 포스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 매우 강력한 기운을 풍기며.

그 놈이 틀림 없었다.

암살왕.

한국 4대 빌런 중 하나.

강남구 내전에서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는 차정훈의 스토커.

"차정훈, 김재승."

한우현은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원래는 말로 둘을 설득해서 한국의 대표로 삼게 한 뒤, 그 둘에게 열혈 시청자들을 가입시키게 하려 했다.

워낙 유명한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인플루언서들이라 그것만으로 상위 랭커의 최소 10%, 운이 좋으면 20%는 가입 시킬 수 있다.

그럼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허장성세와 공갈로 길드가 대세인 것 마냥 전 세계에 포장할 계획이었다.

-...!

-...!

"귀를 기울여 봐라. 밖에 손님들이 온 거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한우현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회귀 전의 해외 서버의 지배자 출신 랭커들은 애초에 권력욕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계획과 능력, 아이템, 금전을 바탕으로 합류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정을 쉽사리 내렸다.

회귀 전에 허무하게 죽어버렸던 유튜버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남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인터넷 방송인이었을 뿐이었다.

타인을 지배하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형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 유명세를 이용해 바지 사장으로 내세우고, 한국 플레이어는 한우현이 직접 관리하려고 하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성정이 그렇다면 단 시간에 설득하기에는 어렵다.

회귀 전, 강남구 내전의 시작은 오후 7시 경. 지금으로부터 30분도 남지 않았다.

"너희들의 팬인 것 같은데, 말하는 걸 보니 아주 좋은 의도로만 보이지는 않다."

-...야···!

-...!

-문...

-...열어!

한우현의 말에 어리둥절한 둘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전혀 듣지 못한 듯, 침묵만이 지속되었다.

한우현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은 플레이어의 가장 기초적인 오리지날 스킬이지만, 그것도 한 달 뒤에나 개발되는 기술이다.

친절히 알려줘야 한다. 물론 재능 있는 이는 이미 방법을 터득한 이도 있겠지만.

"귀에 신경을 집중해라. 주위가 고요해진다고 생각해."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차정훈과 김재승은 금세 청각을 강화할 수 있었다.

-차정훈! 차정훈! 차정훈! 차정훈!

-차정후운! 차정후우우우운!!!!

-나와! 나와주세요! 나 방송 첫 날부터 봤다고!

-크아아악! 안 나오면 부순다! 너 대출 안 끝났다며 아직!

차정훈의 얼굴빛이 흙빛이 되었다. 피시방을 운영하는 유튜버.

"씨발, 지나가듯이 한 말인데 그걸 기억하네."

차정훈이 파리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겠지?"

"그, 제안은 좀 더 생각을. 우리가 랭커긴 하지만, 저 놈들 대장을 맡으라는 건 좀."

"애초에 난 군대도 면제 받은 사람이에요. 그거 하면 플레이어끼리 스킬로 싸울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한우현은 손을 들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둘을 가로막았다.

"지금 결정하란 게 아니다. 일단 도와주겠다."

그 말에 둘의 눈빛에 약간의 안도가 서렸다.

"아까 너희의 시청자, 팬. 말하는 꼬라지로 봐서는 팬이 맞는지 의심되기는 하지만."

"예, 예. 미친 놈들이죠 아주."

"그 놈의 안 나오면 부순다는 말 들었다."

한우현은 최대한 신뢰가 가는 모습을 연출하려 애쓰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둘 모두 현실에서 싸워 본 적은 별로 없겠지? 하물며 이렇게 되고 나서는."

둘이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파악했다.

게임에서야 랭커지만, 현실에서 싸움을 즐기는 성격은 전혀 아니다.

주도적인 성격도 아니다.

그렇다면 판을 아예 엎는다.

"내가 도와주지. 위험한 놈들은 막아주마. 나는 성기사다. 게임 내 유일한 탱커 직업."

당연히, 막아주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직업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전투경험이 많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우현의 머리가 가파르게 돌아가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계획을 수정하고, 폐기하고.

"그 중 특기는 남을 지키면서 싸우는 거다. 순수한 호의니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그럴 듯한 초안이 만들어졌다.

"..."

"..."

둘은 한우현의 제안을, 일단은, 거절할 수 없었다.

* * *

"와아! 차정훈이다!"

"사랑해요!"

"차정···엥?"

"뭐야, 저거?"

"전사 장비인가?"

"누구야?"

피시방의 문이 열리자, 아이돌을 맞이한 팬 클럽 마냥 엄청난 환호가 울려퍼졌다.

그 환호는 기대한 두 사람의 캐릭터의 현실에서의 모습이 아닌.

왠 호리호리한 인상의 금발 청안의 서양인이 올라오자 곧바로 잦아들었다.

"..."

한우현은 빠르게 플레이어들을 육안으로 스캔했다.

정확히는, 말하지 않고서도 약하게 쓸 수 있는 [날카로운 눈]을 통해 레벨과 포스 수치만 스캔했다.

처음에는 두 유튜버를 앞세우고, 한우현은 뒤에서 플레이어들을 감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차정훈과 김재승 모두 그가 아예 앞에 서는 것을 바랬다.

그리 하여 압박을 좀 해 줄 수 있냐고 해, 기꺼이 승낙했다.

계획대로라면 오히려 그것이 더 좋았다.

물론 그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았다면 차정훈과 김재승 모두 거절했겠지만.

세계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한국 플레이어들의 규합인데, 그런 허락 받을 여유 없었다.

"괜찮아 보이는군. 차정훈, 김재승. 말해라."

한우현은 의도적으로.

자기가 둘의 상급자인 것 마냥, 거만하게 차정훈과 김재승을 쳐다보며 말하고 살짝 비켜섰다.

당연히 모인 구독자 플레이어들도 그것을 명백히 인지했다.

차정훈은 약간 불편하다는 듯 한우현을 살짝 쳐다봤지만, 뭐라 항의하지는 못했다.

만약의 일이 있으면 막아주겠다는 사람이 살짝 무례하게 굴었다고, 그것을 그 자리에서 문제삼기는 어려우니.

"아, 그,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습들이 많이 바뀌셨지만···"

"와아아!"

"진짜 캐릭터 모습이다!"

"개 멋있다!"

"스킬! 스킬 써주세요!"

차정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스킬은 좀 그렇고··· 위험하잖아요! 다들 여기까지 오신 거 보니까 가까우신가 봅니다?"

"아니요! 존나 멀어요!"

"그냥 보고 싶어서 날아왔어요!"

"저도요!"

"전 [차원 관문] 썼어요! 바로 여기까지 와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그리고 유튜버 답게, 능수능란하게 군중의 산발적인 질문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김재승은 근데 왜 여깄어요?"

"합방 계획 하려고 했죠! 지금은 무리긴 한데···"

"어제 둘이 싸우지 않았나?"

"그, 원래 싸우다가 화해하고 그러는 거지!"

"시청자 기만 아니에요?"

"아니, 한 번 싸우면 영원히 싸워야 하나!"

"그런가?"

김재승도 대화를 시작했다.

차정훈의 피시방이었던 만큼 김재승의 팬은 훨씬 적었지만.

애초에 이그드라실 유튜버가 둘을 빼면 죄다 접어서, 대부분의 구독자들은 서로 겹쳤다.

한우현은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안도는 생각보다 둘의 시청자들이 공격적이지 않아서.

불안은 갑자기 없어진 그 적대적인 감정의 플레이어 때문에.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한우현은 암살자가 숨을 만한 장소를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찾아보았다.

그러고도 알 수 없어, 최대한 이그드라실 포스를 옅고 넓게 퍼뜨렸다.

하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그냥 물러난 것일까?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는 좋은 일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나쁘다.

한우현의 계획에는 그 암살자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여기 모인 구독자와, 두 유튜버를 강제로 끌어들이는 데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찰나.

한우현은 기온이 약간 낮아짐을 느꼈다.

구름이 움직이며 해를 가려서 그랬다.

"아니, 그럼 방송은 이제 안 해요?"

"방송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죄다 초능력자가 됐는데."

"유튜버잖아요! 현실에서 게임하는 거 중계하면 되겠네!"

"스킬이 너무 강해서, 바다나 사막에서 써야 할 것 같은데."

"저 방어력 높아요! 제가 상대 해 드릴게요!"

"아니, 미쳤어요?"

구름. 하늘. 위.

한우현은 그제서야 자신이 간과한 것을 떠올렸다.

회귀 전, 보스 몬스터는 전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었다.

멸망한 세상에는 높은 구조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10년 동안 한우현은 평평한 사막에서만 싸웠다. 수평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옥상."

깨달음과 함께 넓이로 퍼지던 한우현의 이그드라실 포스가 높이로도 퍼졌다.

순식간에 퍼지며, 그것은 이내 차정훈의 피시방 건물 전체를 타고 올랐다.

"빙고."

옥상 위에서, 강력한 이그드라실 포스가 느껴졌다.

얼마나 강력했냐면, 리하오란이 공산당을 씹어먹겠다고 맹세하던 순간.

그 감정이 연상될 정도의 질척한 악의가 담긴 포스였다.

그리고, 꽤나 실력이 있었다.

한우현은 포스를 통해 상대의 의지를 읽은 순간, 상대도 그 의지를 읽었음을 느꼈다.

현실에서 개발된 오리지날 스킬, [정신 감응].

압도적인 이그드라실 포스 운용력을 가진 이가 미숙한 플레이어의 감정과 표층의식을 읽을 수 있는 기술.

놀랍게도, 상대도 미약하게나마 그것을 느꼈다.

한우현과 암살자는 서로의 의지를 읽었다.

순식간에 두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분노, 혐오, 증오, 짜증, 열등감, 광기···

둘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읽었다. 한우현은 그 감정의 전이를 느끼며, 비웃었다. 도발했다.

섬세한 이그드라실 포스의 운용이 한우현의 '비웃음'이라는 감정을 고스란히 암살자에게 전달했다.

포스 수치는 한우현보다 암살자가 훨씬 높았지만, 그 유려한 운용이 암살자의 감정을 뒤집어놓았다.

"[절대 방어]."

옥상에 뛰어내린 검은 인영을 머리를 치켜들어 보며, 성기사는 스킬을 사용했다.

쇼를 할 시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인상을 남길 쇼를.

포스를 최대로 끌어올렸을 때, 전투 가능 시간은 5분.

그 정도면 충분했다.

"퍼져나가라."

그리고 게임 스킬을 고스란히 재현만 하는 수준으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기예를 선보였다.

원래는 본인만 대상으로 가능한 스킬인 [절대 방어].

그것이 주위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덮어씌워졌다.

비록 그 위력은 본인을 대상으로 한 [절대 방어] 보다는 약한 수준이었지만.

한 암살자의 일격을 막기에는 충분한 강도로.

"...!"

암살자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19화 한국 관리자 김재승 & 차정훈 (3)

-시아악

어둠에 휩싸인 듯한 무수한 단검이 흩날리듯이 쏟아져내렸다.

-시아아악

-시아아악

-시아아악

마치 비에 젖은 꽃잎들이 휘날리듯이.

"씨, 씨발 뭐야!"

"이거 [어둠의 검무]잖아!"

"미친 새끼 아니야!"

"사람 모인 데다가 광역기를 써?!"

플레이어들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정확히는, 꼭 맞는 분석은 아니었다.

암살자는 [어둠의 검무]만 쓴 것이 아니었다.

모여 있는 구독자들에게는 견제의 의미로 광역 공격기이자 혼란기인 [어둠의 검무]를 뿌렸다.

한우현이 그것을 공격이 아닌 견제라고 생각한 이유는 명백했다.

검무는 아무 목표도 없이 그냥 대충 흩뿌려졌다. 딱히 힘을 싣지도 않았다.

"그게 진짜냐."

진짜 목표는 따로 있었다.

초월적인 감각 신경으로 인식하는 느려진 세상.

그 안에서 한우현은 그와 김재승을 노려보며 떨어지는 암살자와 눈이 마주쳤다.

-[암살검]

암살자는 두 눈에서 광기와 증오를 질질 흘려대며 두 손에 거대한 단검을 소환했다.

단일 대상 지정형 공격기이자 극딜기.

그것이 진짜 공격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한우현만이 그것을 초월적인 동체 시력으로 간파하였다.

한우현은 겉으로는 표정을 굳히며, 속으로는 웃었다.

놈이 대놓고 판 함정에, 도발에 걸려들었다.

그것도 아주 보기 좋은 모양새로.

"모두, 스킬을 쓰지 말고 대기해라! 반격하지 마! 건물 무너진다!"

한우현은 최대한 우렁차게 외쳤다.

그냥 외친 게 아니다.

공격대장으로 수 많은 레이드를 지휘하면서 터득한 기술.

오리지날 스킬, [사자후].

고성과 함께 초음파, 초저주파를 울리며 인간의 본원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기술.

그와 함께 주위 모든 생명체의 주의를 스스로에게 돌리는 도발기이기도 했다.

게임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정말로 본능적인 위협을 가함으로서 일으키는 도발.

"날- 봐라-!"

-[빛의 광기]

성기사는 탱커로 디자인 된 직업이다.

따라서 당연히, 탱커라면 가지고 있을 도발기도 있다.

하지만 탱커가 무력한 게임 답게, 실제 게임에서는 무의미했다.

대부분의 보스들은 캐릭터를 타게팅해 스킬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구잡이로 스킬을 난사해 플레이어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

게임이 현실이 되고 나서는 그보다도 더 쓸모가 없어졌다.

보스 몬스터도, 플레이어도 지능이 있다.

따라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관심을 구걸한다고 그딴 것에 도발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위협을 가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도발기 [빛의 광기]는 그 자체로는 적에게 눈길 한 번이나 받게 만드는 스킬이지만.

탱커가 정말로 강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한다면서 그 스킬을 동시에 쓴다면.

혼란에 빠진 상대의 정신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킨다.

-[그림자 친구]

안 그래도 정신 감응으로 흥분의 감정에 온 정신이 물든 암살자였다.

눈깔을 까뒤집은 암살자는 그림자 분신을 둘 소환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즉, 보기 좋게 도발기에 걸려들었다.

-[빛의 발걸음]

[절대 방어]를 주위 공간 자체에 씌우기는 했지만, 레벨 290을 넘어서는 유저가 싸운다면 그 여파를 모두 막기는 힘들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압도적인 차이로 짓밟는다.

-[신성한 검]

한우현은 방패와 검에 빛을 덧씌웠다. 공격력을 강화해 타격하는 성기사의 일반 공격기.

-콰직

힘을 주어 도약하자, 순식간에 한우현의 몸이 상공 50m까지 솟구쳤다.

암살자가 그림자 분신과 함께 막 떨어지고 있는 위치.

너무나 빠르고 갑작스러운 이동에 암살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광신의 광검]

분신을 처리하는 데에는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없다.

즉시 그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필살 공격기를 검과 방패에 부여했다.

초월적인 에너지가 빛과 방패에 깃들며 한층 더 공격력이 증가했다.

얼마나 증가했냐면, 그 주위의 대기가 플라즈마화하여 아지랑이가 일렁일 정도로.

거기서 끝이 아니다.

플레이어 전투의 진정한 극의는 게임 스킬을 가져다 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진짜 플레이어의 힘은, 모든 물리 에너지로 변환 가능한 이그드라실 포스를 자유로이 운용하는 것.

그를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물리 현상들을 스스로에게 일으키는 데에서 기인한다.

-[신경 가속]

느려진 세상 속에서 한우현은 다시금 발에 포스를 집중했다.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 기동술 : 허공답보]

에너지를 물리력으로 곧바로 치환해, 작용-반작용을 일으킨다.

-[포스 전투술 제 3형 : 체왜곡 : 강화운동]

허공에서 한우현의 팔과 다리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궤도로 기괴하게 꺾이며 가속한다.

무수한 물리력이 자유로이 검과 방패의 움직임을 보정했다.

-촤악

-촤악

한우현의 검과 방패의 끝단이 0.7초만에 적을 52번 절단했다.

순식간에 암살자가 생성한 [그림자 분신] 둘의 허리와 목이 잘렸다.

당연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므로 소멸당했다.

본체에 비하면 50%의 전투력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처럼 순식간에 소멸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

그걸 본 암살자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경악에서 공포로 변했다.

"해제."

다시금 허공에서 한우현은 검과 방패에 깃든 열과 빛을 해제하며 내려다보았다.

암살자의 현재 위치는 한우현의 바로 5m 위.

분신으로 위에서 떨어지듯이 공격하고, 뒤이어 본체로 결정타를 가할 작정이었나 보다.

아쉽게도, [그림자 친구]가 너무나도 빨리 소멸해 그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그, [그림자 숨기]!"

암살자는 그 계획을 수정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성기사가 강하다. 너무 강하다!

능력치나 레벨이 높은 것의 문제가 아니다.

전투 감각과 기술이 너무나도 뛰어나다!

필히 세상이 현실이 되기 전에도 격투기 선수나, 특수 부대원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암살자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의 생각에, 자기 같은 방구석 폐인이 게임 스킬 좀 생겼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냥 위에서 차정훈의 캐릭터화된 모습을 감상하면서, 그 곁의 김재승한테 짜증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기가 왜 갑자기 공격을 했는지 모르겠다.

필히 순간 미쳤음이 분명하다.

암살자는 스스로의 급발진을 저주했다.

"[어둠 속으]..."

그래서 암살자는 도주를 선택했다. 아니, 선택하려고 했다.

"어딜?"

한우현은 약간 감탄했다.

공포에 젖은 눈을 보니 [빛의 광기]의 도발 효과가 풀린 것이 분명했다.

막 각성한 현재 기준의 플레이어라면 스스로의 이그드라실 포스의 제어에 미숙해야 했다.

최소 1분, 최대 5분은 한우현을 향한 적개심에 돌아 있는 것이 정상.

그런데 30초도 지나지 않아 상황을 파악하고, 도주하려 했다.

더군다나 [정신 감응]에 약간이나마 반항했다.

한우현은 계획을 약간 수정했다.

원래는 본보기로 처형한 다음에, 나중에 사제의 [부활]로 살려내서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보다는 다르게, 곧바로 복종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신성한 땅]!"

영역 선포기를 씀과 동시에, 한우현은 온 몸에서 빛과 열을 흘리며 육체의 근력과 민첩성을 강화했다.

-[포스 전투술 제 2형 : 신진대사 초가속]

[신성한 땅]의 영역 아래 예민해진 감각. 이내 그림자로 흩어진 도적의 형상을 간파했다.

옆 건물을 타고 도적의 이동기인 [어둠 속으로] 스킬로 도망가려는 모양새다.

그렇게 놔둘 수 없다.

-[공중 도약]

허공에 포스를 뿜어내 물리력으로 치환하며, 한우현은 그 벽이 부서지지 않도록 신경쓰며 몸을 틀어박았다.

-[빛의 권능 : 마법 파쇄]

양손에 빛의 형상을 주먹처럼 뭉쳤다.

곧바로 주먹을 그림자가 특히 진한 벽의 영역에 내리꽂았다.

적의 스킬이 해제되었다.

"히, 히이익!"

그림자가 걷히며 스킬이 강제로 해체된 암살자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잡았다."

-[빛의 봉인검]

순식간에 온 몸의 관절 8곳에 봉인검을 박아넣은 한우현은 암살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아아··· 으아···"

됐다.

봉인검이 제대로 박힌 것을 확인한 한우현은 거기에 한 층 포스를 주입해 강화했다.

아무리 포스 운용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최소한 여섯 시간은 무력화되어 있을 것이다.

한우현은 암살자를 대충 건물 앞에다 던져두었다. 발표를 마치고 나서 회수할 생각으로.

"후우···"

다행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분 만에 놈을 압도할 수 있었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한우현은 주위를 내려다 보았다.

모두가 경악이 서린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김재승과 차정훈마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후웅

이내, 한우현이 기다렸던 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차원 관문이 침묵에 휩싸인 군중들의 뒤에 열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기서 싸운 거야?"

"어떤 미친 놈이 도시에서 스킬을."

"저 사람인가?"

"씨발, 뭔데?"

"...성기사?"

"어, 저 사람···"

한우현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모든 이들이 차원 관문을 건너올 때까지.

그러면서 회귀 전, 강남구 내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회상했다.

한국 최대 전력의 플레이어들 수천 명이 무의미하게 죽어버린 충격적인 사건.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았고, 서로 간에 피아가 분명치 않은 난전이었다.

그래서 정보가 많지 않았다.

분명했던 것은 한 암살자가 선제공격을 했고.

그를 김재승이 방어하는 과정에서 공격이 불특정 다수에게 튀었으며.

그 소란을 보고 근처의 김재승의 방송 스튜디오에서 대기하던 이들.

차정훈의 시청자들처럼 자기들의 우상을 기다렸던 김재승의 시청자들이.

[차원 관문]을 통해서 찾아오고.

오해와 설전이 오간 끝에 서로 공격을 하며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내전의 양 주축은 결국 김재승과 차정훈의 구독자들이었다.

"뭐야? 유명한 사람이야?"

"둘은 김재승이랑 차정훈이잖아."

"쟤가 반말 하던데? 매니저라도 되나?"

"그, 탱커 랭커···"

"어? 아서?"

마침내 모든 이가 관문을 건너오고, 한우현의 캐릭터와 신상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사람들이 의문을 표하며 술렁임이 커지려는 찰나.

"조용!!! 집중해라!"

-[사자후]

한우현은 방패를 높이, 아주 높이 치켜들며 군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했다.

만약 이 순간, 한국 플레이어들을 규합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한우현이 나머지 모든 나라의 플레이어들을 부하로 부린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세계 최대 전력은 한국 서버니까.

나머지 플레이어는 전투 전력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것일 뿐.

"나는 한우현. 캐릭터 네임 아서."

-[포스 전투술 제 4형 : 입체 기동술 : 허공답보]

한우현은 보기 좋게, 발바닥에 빛의 역장체를 만들어 허공으로 올랐다.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조금씩 머리에 이그드라실 포스를 집중했다.

-[빛의 축복]

후광, 헤일로가 만들어졌다.

"한국 유일의 레벨 300 유저이자,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다."

마침내 가장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받는다는 높이인 20m에 올라섰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의 통합 길드, 루시드의 길드장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공갈을 칠 때다.

이것만 성공한다면 더 이상 공갈이 되지 않을 거짓 계획.

"우리 길드는 오늘 저녁, 이 곳에서 김재승과 차정훈. 그리고 그의 구독자 플레이어에 대한 무차별 테러 계획을 입수했다."

자연스럽게 김재승과 차정훈을 부하라는 양 내려다본다.

"전 세계의 길드 간부들과 논의한 결과, 한국 플레이어들은 강하지만 위험한 상태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제서야 김재승과 차정훈은 한우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파악했다.

둘의 입술과 눈꼬리가 불안하게 실룩였다.

"따라서 우리는 결정했다. 플레이어의 안전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길드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김재승과 차정훈은 우리 길드의 한국 지부장이다."

둘 모두 한우현을 막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반응도 못 한 채, 미치광이 플레이어에 의해 죽을 뻔 했던 참이었다.

결정권을 그 둘에게 주었다면 여전히 고민했겠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통보하는 상황이라면.

그것까지 거부할 깜냥은 되지 않았다.

"..."

"..."

한우현은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한국 지부장이 정해졌다.

20화 한국 관리자 김재승 & 차정훈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