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20화 한국 관리자 김재승 & 차정훈 (4)

"너희들은 강하다. 하지만, 너무 강하다! 그래서 오히려 위험하다."

-[내리치는 빛]

한우현의 검 끝에서 나아간 빛줄기가 암살자에게 내리꽂혔다.

공격 스킬이 아닌, 타게팅 지정으로 표식을 남기는 스킬.

"이 놈을 봐라! 너희랑 비슷한 수준의 고레벨이다! 하지만, 스킬 한 번에 우리 모두 죽을 뻔 했다!"

사실이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캐릭터의 방어력보다 공격력에 능력치 구조가 집중 되어있다.

"이건 현실이다! 게임처럼 HP가 있는 게 아니야!"

플레이어의 스킬 대부분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면.

고레벨이라도 그냥 허무하게 즉사당할 수 있다.

"실수 한 번에 죽는다! 게임과는 다르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가.

한우현이 너무나도 능숙하게, 초월적인 속도로 암살자를 진압하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반응해 방어하지 못했던 순간.

"...뭐,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맞는 말이지만..."

"...미친..."

"...어떻게..."

따라서 일단은 그 말에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회귀 전, 무수한 인간들을 지휘했던 한우현은 인간의 공포, 분노, 광기, 희열···

그 군중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위협과 해소. 군중 연설의 기초.

"그러니까, 우리는 모여야 한다."

그로서 이 자리에서 중심자인 그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크림슨 링]."

"[놀라운 장비 초월의 주문서]."

"[광란의 토템]."

"[아이신기오로 링 IV]."

"[극한 레벨 승급의 비약]."

뒤이어 근거들을 휘몰아친다.

존재 자체가 밸런스 붕괴를 상징하는 아이템들을 꺼내 든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 존재를 알기에, 타 서버의 대표자라는 상징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내보이는 물건.

"나는 전 서버의 대표자다."

거기 서 있는 모든 이들이 홀린 듯이 한우현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할 수 있다.

일대 일로 설득한다면 이걸로도 충분하지만, 군중을 대상으로는 다르다.

압도적인.

보다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오래 했고, 잘 아는 사람이지."

이 또한 증명 가능했다.

그 말을 뒷받침 해 줄 아이템들을 꺼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아껴 두었던 정말로 귀한 아이템들.

"[2005년 1주년 불꽃놀이]."

"[2006년 2주년 몬스터 카니발]."

"[아기 버섯의 공격력 축복]."

"[슬라임 군단의 귀여운 힘]."

"[반짝이는 햇빛 물약]."

"[영롱한 달빛 물약]."

"[놀라운 무지개]···"

"[새싹 세계수를 위한 영양]..."

"저, 저거 뭐야."

"단종 버프?"

"저걸 어떻게 다 들고."

하나하나가 나온 지 십 년이 넘은 구 시대의 버프 아이템들.

한우현은 그것을 보란 듯이 들이켰다.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미친."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나갔다.

"말 만으로 다 믿을 수는 없겠지."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오류가 난 상태창을 이용해, 결정적인 공갈을 치는 것.

"200레벨 공용 스킬. [날카로운 눈]. 여기 있는 유저들이라면 다들 마스터 했겠지. 그걸로 날 봐라."

잠깐의 침묵.

모두가 그 스킬의 액티브 효과를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었던 효과.

그리고, 일치된 목소리가 피시방 앞에서 퍼져나갔다.

"...[날카로운 눈]."

"...[날카로운 눈]. 미, 미친?"

"...[날카로운 눈]. 씨발?"

"...[날카로운 눈]. 전투력이··· 20억?"

"...[날카로운 눈]. 주스텟 18만? 이게 말이 돼?"

"차정훈하고 김재승이 주스텟이 10만 정도인데?"

"포, 포스가 저렇게 낮은데도 스텟이 저 정도면."

중첩이 가능한 단종 된 옛날의 버프까지 모조리 합쳐진 지금.

상태창의 오류 수치를 뺀다고 하더라도, 그 실제 수치적인 힘만으로.

한우현은 단신으로 서울 전체를 으깨버릴 수 있는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뇌와 근육에 흐르는 초월적이고도 불가해 한 힘을 느끼며 다시금 외친다.

"다시 말한다. 나는 전 세계 서버 통합 길드, 루시드의 길드장 한우현이다!"

"지금 전 세계에 분탕 종자들이 날뛰고 있다!"

"플레이어와 모두의 안전을 위해, 한국 지부장으로 차정훈과 김재승이 임명되었다!"

다시 한 번 한우현은 차정훈과 김재승을 내려다보았다.

"길드에 가입해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다."

그리고 둘과, 모두를 향해 나직히 읊조렸다.

이미 암살자를 막아주며 그들의 표정과 감정을 파악했지만, 100%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분, 저희 말을 들어 주십시오!"

"지금 저희는 위험합니다! 너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요!"

"서로의 안전과 질서를 보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별 거 아닙니다! 그냥 길드 가입이에요!"

다행히, 목숨의 위기에서 구해진 두 남자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것이라는 한우현의 호소를 이해했다.

아주 잘 이해했다.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단체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납득.

"[길드창]!"

"[길드창]!"

한국의 첫 길드원이자, 한국 지부장.

세계 최강의 딜러 둘이 공개적으로 가입을 천명했다.

"씨, 씨발. 진짜?"

"길드라고? 전 세계 통합?"

"아니, 우리가 캐릭터가 된 지 하루 밖에 안 지났는데?"

"좀 이상한데. 애초에..."

"차정훈이랑 김재승이 한국 대빵? 몰라. 난 들어갈래."

"잠깐, 잠깐만. 길드 정보라도···"

"[길드창]. 나도 가입한다! 차정훈 따라간다 그냥!"

다행히, 두 유튜버의 전면적인 보증.

그리고 모인 구독자들 대부분이 그들의 진성 중의 진성 팬이라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사람들도, 차정훈과 김재승이 적극적으로 독려하자 조금씩 가입을 시작했다.

"여러분! 방금 보지 않았습니까! 그 미친 놈···"

"다들 저 오래 봐 왔죠! 믿고 와 주세요!"

이미 대세라는 듯이, 자기도 얼떨결에 들어와 버렸으니 그냥 너희도 들어오란 듯이.

"어... 뭐, 길드가 별 것도 아니니. [길드창]."

"가입 정도야 괜찮겠지. [길드창]. 가입한다!"

절반 즈음이 가입을 외쳤을 때, 반발이 터져나왔다.

"아니, 시발! 차정훈, 김재승! 니네 둘 다 길드 귀찮다며 솔로 플레이만 했잖아!"

"아, 그게···"

"진짜 니들 길드 맞아? 저 놈이 협박한 거 아냐?"

한 명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보아하니 꽤나 높은 고 레벨의 랭커.

화려한 용 모양 상징이 새겨진 갑옷을 보니 용기사다.

...아는 놈이었다. 용기사 권승환.

회귀 전 미래에서, 강남구 내전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던 자.

그 말에 김재승과 차정훈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한우현을 흘겨봤다.

사실, 반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나를 못 믿겠다는 거냐?"

한우현이 직접 답해주기로 했다.

"그게 아니잖아! 하루 만에 통합 길드라고? 그게 말이 돼?"

아주 타당한 지적이었다.

한우현은 살짝 긴장했다.

실제로 플레이어들의 단체는 회귀 전에는 두 달이 흐른 뒤에야 조직되기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서로가 너무 강하고 자아가 비대해, 만나기만 하면 뭉치기는 커녕 서로 다툼이나 해댔기에.

랭커들의 경우 그것이 더욱 극심했다.

정상인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단체를 결성하고 상황을 안정화 시키려 해도.

너무 강력한 랭커 급 정신병자 분탕종자들이 그것을 훼방놓았다.

좆목질은 처단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미친 소리를 지껄이며.

따라서, 한우현이 없었다면 당연히 전 세계 통합 길드 같은 것은 생길 수 없다.

설사 플레이어들이 정상인이었다 해도 하루만에 전 세계 초능력자들을 아우르는 단체가 생긴다?

그것도 각 지역별로 지부장과 그 밑의 간부들까지 체계적으로 세운?

말이 되나?

"어쩌라는 거지? 이미 중국, 동남아시아 서버의 모든 랭커들이 동의한 사안이다."

한우현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논리가 아니라, 억지와 힘으로 그 타당한 지적을 뭉개기로 했다.

"시발, 증거도 없잖아!"

"증거? 증거라..."

하지만 한우현은 그냥 강하기만 한 랭커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20년간 무수한 플레이어들을 지휘하고 통제했던 세계 최후의 공격대장.

현 시점에서 그 누구보다 게임 폐인 플레이어들의 정서와 심리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따라서, 그 합리적인 지적을 오히려 역으로 뒤튼다.

"마침 잘 되었군. 모두 함께 보도록 할까?"

"뭐?"

한우현이 오히려 피식 웃자, 지적했던 용기사가 당황했다.

"증거 말이다.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이 자리에서는 한우현의 과거 모습이 즉각적으로 연상되지 않아, 유저들이 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지만.

증거 부재보다 더더욱 큰 문제가 있다.

한우현의 캐릭터 아서는 게임 내에서 꽤나 유명하게 신상이 털려 있었다는 문제.

"방금 가입 한 친구들! 마법사 계열 직업 있나!"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방구석에서 게임만 처 해대는 폐인.

직업도 없이 사회생활이라곤 자퇴한 고등학생이 마지막인.

그것도 오랜 학교 폭력으로 정신병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사람.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유저들 사이에서 그 모든 정보가 알려진, 전형적인 겜창 인생의 히키코모리.

"예, 저 마법사입니다! 정확히는 [별자리꾼]이요!"

"[차원 관문]. 레벨 200 공용 스킬. 익혔겠지?"

그런 인간이.

어떻게 하루 만에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규합하는 조직을 창설하고 그를 지도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게 개연성 이전에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런, 매우 합리적인 의심.

거기까지 플레이어들의 의심이 뻗어나가기 전에, 상황을 완전히 굳혀버린다.

"예! 오는 길도 제가 열었습니다! 별로 안 어렵더라고요!"

"잘 됐군."

그 표정에 기대감이 어려 있다.

길드장의 첫 지목과 명령. 당연히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난 한우현을 존경해서 그럴 리는 없었다. 단순히 이 상황에 신이 난 모양.

"[차원 관문]. 여기서 여의도까지 열 수 있겠나?"

"어? 여의도요? 어··· 한 번에는 안 될 거 같은데요."

"저요! 저도 쓸 수 있어요!"

"좋아. 이어서 연다."

"그럼 고속 터미널 역까지 가고, 그 다음에···"

"그런데 여의도는 왜요?"

한우현은 계획을 말했다.

"한국공영방송 본사로 간다. 곧 저녁 생방송 뉴스가 시작하지?"

"...에?"

플레이어들이 웅성댔다.

"김재승, 차정훈. 방송은 많이 해 봤겠지? 발표를 맡긴다."

"네, 네?"

"...알겠습니다, 길드장."

김재승이 살짝 어안이 벙벙한 듯 반응하자, 차정훈이 대신 대답했다.

이제 완전히 상황을 받아들인 모양.

"가자."

"네! 동북 쪽으로... [차원 관문]!"

차원 관문이 열렸다.

"8시가 되기까지 30분도 안 남았군."

"...방송국에서, 무슨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거야?"

아직 가입을 하지 않고 웅성대고 있던 절반 남짓의 플레이어들.

어느새 그들의 대표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진 듯, 앞으로 나선 용기사가 중얼거렸다.

"중국, 동남아시아, 한국 서버. 셋을 합친다면 충분히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그건 맞는 말이지만."

"유저들도 얼마 없는 글로벌 서버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 세계 플레이어의 99퍼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그걸 왜 방송국에서.... 아."

그제서야 용기사의 표정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서, 설마. 지금 방송 탈취라도 하려는 거냐?"

"약속은 지켜야지.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한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야 하지 않겠나?"

"뭐? 북한?"

그 말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다시 퍼져나간다.

북한이 한 사제 플레이어에 의해 그 지도부들이 죄다 학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늘 아침부터 널리 알려진 뉴스였다.

그를 보고선 뒤를 따른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이 함께 휴전선 너머로 깽판을 치며 넘어갔다는 것도.

일반인들 사이에서 불과 하루 만에 플레이어의 존재가 확실히 각인될 수 있었던 뉴스.

"자, 들어와라. 너희도 와서 직접 보고 결정하지 그래?"

"...젠장. 여러분, 뭔 개소리를 하나 보기나 해 봅시다."

한우현이 폭격 하듯이 내지르는 정보에 질린 듯, 결국 용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눈치를 보다가, 하나 둘씩 발걸음을 내딛었다.

여의도.

한국 공영 방송사로.

하나하나가 군단에 필적하는 초능력자 무력 단체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21화 청와대 탈환 (1)

방송국 입성 자체는 쉬웠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생방송 도중에 난입하는 것을 쉽사리 허락해주지는 않았다.

"북한이랑 미국 소식은 언론사 직원이면 당연히 다들 알고 있겠지?"

"네, 네? 그게···"

"쉽게 쉽게 가자고. 우리도 괜히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다."

"해 끼치러 온 게 아닙니다. 정말 실례인 것을 알지만, 부탁 드립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됐다, 차정훈. 그냥 올라간다."

"잠깐만요!"

한우현은 그를 제지하려는 경비원을 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리눌렀다.

"해외 지부장들의 방송이 곧 시작된다. 우리도 맞춰야지."

"...씨발, 진짜야?"

"이거 이래도 돼?"

"범죄인 거 같은데..."

"너무 당당하잖아."

슬슬 일단 따라는 가고 있었지만, 길드에 가입은 하지 않은 플레이어들도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봐. 대체 뭘 보여주려고 이러는 거야?"

"얌전히 보기나 해라. 증거를 원하지 않았나?"

"...저도 가입하겠습니다."

"저도요."

몇몇이 비 가입 플레이어들의 군중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딱히 그것이 다른 이들에 의해 제지되지는 않았다. 남은 이들도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나 호기심과 혼란에 빠져 있었으니.

"생방송 데스크는 8층이다."

"저희가 앞서가겠습니다!"

순식간에 플레이어들의 군단은 방송사를 점령했다.

물론 거창하게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줄줄이 모여 힘으로 밀어붙여, 계단과 엘리베이터로 생방송 현장에 난입했다.

-뭐, 뭐야! 당신들 뭐야!

-테러리스트다!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라.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니까.

다행히 해외 소식에 빠른 기자들이 미국 대통령을 죽이고 북한 주석궁을 무너뜨린 초능력자들에 대해 알아차렸다.

곧, 공포에 찬 눈빛으로 PD며 카메라맨 같은 이들이 자발적인 협조를 이뤘다.

"아, 아, 들리는가? 잘 나오는 거 같군."

한우현은 거만한 자세로 뉴스 데스크에 눕듯이 앉았다.

그 바로 앞에 차정훈과 김재승이 모든 장비와 무기를 착용한 채, 카메라를 확인했다.

"어이, 분할 송출 가능한가?"

"되, 됩니다만···"

협조적이지 않은 놈들에게 시범으로 벽을 부수고 마법을 보이며 협박한 보람이 있었다.

"북한의 조선중앙TV, 인도네시아의 텔레비시 레푸블리크 인도네시아, 중국의 환구시보 채널. 한국까지 합쳐서 4분할 송출해라."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

그가 미리 연락한 해외 서버의 랭커들이 방송사를 막 점령할 시각이다.

"자막도 알아서 달고."

-치지직. 치지직.

해외 방송사들의 동시 송출이 이뤄짐을 확인한 한우현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성기]. [서버 전체 모드]."

그의 손에, 너무 시끄럽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단종된 아이템이 들렸다.

모든 플레이어에게 방송과 관계없이 그 의사를 내리꽂을 수 있도록.

"리하오란. 최윤. 응우옌 바오 쯔엉. 시작해라."

전 세계에, 방송과 관계없이 그 목소리가 울렸다.

"중계해라."

카메라가 확대되며, 방송이 시작되었다.

서방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들의 국가를 대표하는 새로운 지배자들의 방송이.

"나는 길드 [루시드]의 북한 지부장. 최윤이다."

북한.

"我是公会[Lucid]中国分会的会长.这是李浩然.(나는 길드 [루시드]의 중국 지부장. 리하오란이다.)"

중국.

"Saya adalah ketua guild [Lucid] cabang Asia Tenggara. Ini adalah Nguyen Bao Truong.(나는 길드 [루시드]의 동남아시아 지부장. 응우옌 바오 쯔엉이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일대.

"우리는 길드 [루시드]의 한국 지부장. 차정훈과 김재승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방송에 나온 지부장들의 온 몸에 불가해한 빛과 물리력이 깃든다.

가장 먼저 조선중앙TV의 화면에 한 뚱뚱한 남성이 철푸덕 엎어지듯이 나타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무위원회 위원장.

북한의 국가 수장.

-첫 번째 길드의 행사를 시작한다! 우리 북한의 플레이어들을 억압하려 한 죄!

최윤이 찢어지는 웃음을 보이며 스태프 끝에 하얀 에너지를 응집시켰다.

그 뒤에 벌벌 떠는 북한의 방송인들과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빌런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그 책임을 물어, 위원장을 처형한다!

-잠깐, 잠깐만! 나는 그런 적이 없...

-끄드적

그의 몸뚱이와 머리가 함께 으깨졌다. 기괴하고도 끔찍하게.

"하."

한우현은 웃음을 흘렸다.

최윤에게는 오늘 저녁에 방송을 하니, 생방송으로 협조해달라는 말만 전했다.

그랬더니 자기가 좀 재량을 발휘 해도 되겠냐고 물었지.

길드장이 원하는 길드의 지배에 도움이 될 퍼포먼스를 해 주겠다고.

참을성을 가지고, 북한의 국가 수장을 남겨두었다가 지금 꺼내든 것을 보니.

그를 아주 충실하고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뒤에 늘어선 플레이어들을 보니 빌런들을 유인하고 통제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해냈다.

-...

-...

하지만 그 자리에서 웃고 있던 것은 한우현 뿐이었다.

방송국에 강제로 끌려나온 듯 리하오란의 옆에 불편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중국 주석. 그리고 응우옌 옆의 인도네시아 대통령.

길드의 방송을 본 둘의 얼굴이 경악으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탁

-탁

포스와 빛에 물든 리하오란과 응우옌이 주석과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만한 표정으로.

둘 모두 파들파들 떨며 악수를 했다.

"나는 길드 [루시드]의 총 길드장. 한우현이다."

그를 확인한 한우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선포한다. 우리는 전 세계 유일의 플레이어 통합 길드, [루시드]다."

마침내, 세계 멸망의 시작점. 각성 첫 날을.

"경고한다.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채 행하는 모든 개인 행동을 금한다."

완전히 다르게 시작했다.

역사가 바뀌었다.

"길드 외의 다른 플레이어의 존재와, 단체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 세계 질서의 붕괴가 아닌, 플레이어 길드의 창설로.

"반복한다. 모든 랭커가 이미 우리 길드에 가입했으며, 그 밑 급의 플레이어들도 가입 중이다."

이제 한우현은 세계 최강의 무력단체의 주인이다.

"대세를 거스르지 마라."

정확히는, 지금 이 순간은 아닐지라도.

곧 그렇게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우리는 길드다."

한우현은 차갑게 웃었다.

그 광소가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 * *

방송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북한의 국가 수장을 으깨버린 것이 다른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나 보다.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길드 창설 선포 방송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끝났다.

북한이야 애초에 국가 협력보다는 최윤의 통제 영역으로 만든 것이니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한국에서의 방송도 그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다.

"이제 생각이 좀 바뀌었나?"

"...가입."

"음?"

"[길드창]. 가입한다."

그리고 그 모든 방송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

결국 모두 가입하게 되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반발했던 용기사가 그 시작을 끊었다.

"저게 모두 조작일 리는 없겠지. 그럼, 가입하는 게 맞고..."

"훌륭한 결정이다. 어차피 모두 가입하게 되어 있으니, 일찍 할 수록 좋지."

"그래, 그 말도 맞지."

심지어 끝까지 고민하던 이들까지 설득했다.

"보니까 이미 중국, 동남아면 사실상 전체 대세나 다름 없어."

"그래도..."

"방송 나온 거 봐. 애초에 우리도 길드 소속이라는 듯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어..."

"세계적으로야 아니지만, 한국 길드는 이제야 막 시작이지. 지금 들어오면 창립 멤버 혜택도 있지 않겠나?"

한우현이 거들어 주자, 모조리 가입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방송 선포와 그를 통한 길드 대세론의 전파는 한 시라도 빠를 수록 좋았기에 미리 했다.

그러나 사실 중요성으로는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이제 어디 가나요?"

"뭐 더 할 거 있나? 해산···"

"아직 해산 할 때가 아니다."

한우현이 흥분해서 왁자지껄 떠드는 플레이어들을 진정시켰다.

"그럼 또 어디 갈까요? 맡겨만 주십쇼!"

처음으로 [차원 관문]을 열었던 별자리 직업의 마법사가 기대된다는 듯 말을 걸었다.

"종로로."

"예! 종로로!"

"청와대 본관으로 간다."

잠깐 플레이어들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잘못 들었습니다?"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다."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에 의해 청와대 습격이 일어난 지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이 그 안에 대통령이요 여당, 야당 대표까지 죄다 끌고 와서는.

조리돌림과 고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완전히 막기에는 늦었다.

하지만, 난입한다면 지금이 딱 알맞은 시기였다.

"거기에 빌런 플레이어들이 지금 모여 있다."

한우현의 그 말에 침묵이 웅성임으로 변했다.

"조용! 걱정할 필요 없다. 싸울 필요 없다."

지금 한우현이 모은 플레이어들도, 빌런 같은 성정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청와대에 쳐들어간 플레이어들과 비교하면.

유튜버를 보러 왔다가 우발적으로 전투를 벌일 뻔 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얌전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놈들은 내가 혼자 해결할 것이다. 너희들은 뒤에서 자기 몸만 지켜라."

그 말에, 오히려 길드원들 사이에서 싸한 침묵이 다시 맴돌았다.

"..."

"...길드장."

"길드장님!"

당황스럽다는 웅성임이 이어졌다가, 하나의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야, 그럴 순 없지!"

의외로.

정말로 의외로.

거기에다가 작정하고 반기를 든 놈이 나왔다.

"넌?"

한우현의 길드 가입 권유에도 가장 먼저 반발했던 용기사.

권승환이었다.

뒤늦게 가입한 것이 찔린 탓일까? 이해할 만한 심리였다.

"너 혼자 다 할 거면 길드가 왜 필요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네놈들이 필요한 건 보스 레이드에서지, 사람끼리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야.

너희를 묶은 건 너희들이 사고를 치지 않게 막기 위해서다.

한우현은 목까지 올라오는 그 말을 삼켰다.

"씨발, 우리도 고렙이야!"

"직접 싸워 본 적은 있고? 싸움은 스킬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전에, 전투 경험이 있나?"

"너도 없··· 진 않구나, 아무튼!"

그 놈이 목에 핏발을 세운 듯이 외쳤다.

"너보다는 못 싸우겠지! 근데 이러면 우리가 좆도 의미가 없잖아!"

한우현은 눈썹을 실룩였다.

"너희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너희들, 스킬 정도는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위력을 제어 할 수 있나?"

보란 듯이 신성력의 불길을 포스를 이용해 팔과 다리에 둘렀다.

"이건 스킬이 아니다. [기초 신성력 제어]를 응용한 거지."

그것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마치 폭발할듯이 부풀어올랐다.

"스킬 위력 그대로 쓰면, 그냥 에너지를 뿜는 것 만으로."

그러다가 가라앉았다.

"이 방송국 건물이 날아간다. 너희들은 다치지는 않겠지만, 저 멀리 튕겨나가겠지."

물론, 정말로 그들이 아예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구태여 같이 가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이것은 설계 중 하나였다.

"뭐··· 구태여 끼어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플레이어들이 길드원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한우현의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지금은,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버를 따라서 우르르 들어온 친목 단체.

길드원들에게 길드란 딱 그 정도 인식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방송을 하면서 뭔가 자기들이 대단한 걸 했다는 기분 좋은 만족감은 얻었겠지만.

아직은, 소속감이 부족하다.

"정 돕고 싶다면, 진짜 준비가 된 놈만 받겠다. 나머지는 뒤에서 구경만 하고. 나와라."

그렇기에, 그가 강제하면 안 된다.

실제로는 강제하더라도, 그 모양새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협조.

"씨발, 끝까지 무시는···"

"저, 저도 돕겠습니다!"

스무 명 정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온다.

자기 의지대로 나왔지만.

결국에는 그의 명령에 따르는 상황.

그 또한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좋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놈들도, 길드의 두 번째 공식 행사인데 빠질 수는 없지. 따라는 오도록."

그러면서 한우현은 그를 살짝 흘겨봤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의 대표성을 더욱 강조할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답을 해 줘야겠다. 물론 대 놓고는 아니고, 은근 슬쩍.

"네!"

"쩌러레츠고!"

"와, 청와대···"

"지린다!"

"길드 존나 멋있는데...!"

"국가권력급 드가자!"

"씨발 섹스!"

한우현은 그 환호성을 들으면서 기분 좋음 보다는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어린 애들도 아니고 전부 성인일진데, 말투니 단어 선택이 너무나도 유치해서.

하긴 하루 종일 이그드라실 딸깍만 하며 인터넷만 하던 폐인들에게 성숙한 대화 수준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어차피 그런 걸 다 알고 시작한 일 아닌가.

저 놈들도 죄다 어떻게든 길드의 이름 아래 묶어서 어르고 달래서 자기 자신의 몫을 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속으로 욕이나 하는 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었다.

경멸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우현 그 자신이 모든 정신병자 플레이어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니까.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추구해야지. 저 멍청이들도 어떻게든 가르쳐서.

그래도 일단 저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건 너무 없어보이니, 앞으로 어지간하면 대표 담화 같은 것은 김재승과 차정훈에게만 맡기는 게 좋겠다.

생각을 마치고선 명령했다.

"[차원 관문], 열어라."

-후웅

청와대 내부의 정확한 좌표까지는 몰랐기에, 바로 그 안까지 [차원 관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역시, 가둬 놓았군."

하지만 거의 바로 앞에 열렸다.

희미하게 알록달록한 무지개 같은 것에 둘러 싸인 청와대의 앞에, 길드원들이 하나 둘씩 발을 내딛었다.

"어? 결계?"

"뭐지?"

"이거 [풍수사] 영역선포기 같은데?"

그리고 그 앞에는 그들만 온 것이 아니었다.

"누, 누구십니까?"

"...능력자다. 그 테러···"

"모두 경계!"

경찰들. 경찰 특공대들. 양복을 입은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

그들이 온갖 공사 장비요 공성 장비 같은 것들로 무지개의 벽들에 부딪히며, 그 안에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

한우현은 경탄했다.

풍수사의 영역 선포기인 [풍월을 읊는 무지개 그늘].

원래 범위는 저 정도로 넓지 않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주위 몇십 미터도 되지 않으니. 게다가 진입을 원천 차단하는 기능도 원래는 없다.

보아하니, 반경 킬로미터 단위로 설치해 아예 진입이 불가능한 모양이다.

"최소 레벨 290 이상이다."

스킬의 효과와 범위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것은 그보다 낮은 레벨에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은 연습이.

재능도 필요하다. 포스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던 힘을 다룰 수 있는 다중 인식 제어 능력.

이렇게 금방 대규모 스킬을 만든 것을 보면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딛는 290 레벨 이상이 확실했다.

"저, 길드장? 어쩌죠?"

"이거 [마법 해제]류 스킬로 해제가 되나?"

"안 될 거 같은데··· 애초에 그건 버프랑 디버프나 해제하는 거잖아."

"씨발, 안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설마 대통령 죽인 건가?"

"뭐? 설마···"

그 설마가 거의 맞았다.

죽이진 않았지만,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을 당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하다가, 지금쯤 제발 죽여달라고 하고 있겠지.

"조용! 뚫고 들어간다."

"예? 이걸요?"

"야, 길드장이잖아. 뭔가 있겠지."

"아니, 영역 선포기를 뚫는 효과를 가진 스킬이 없는데···"

"그러게, 어떻게..."

한우현은 그 말들을 무시하고 경찰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22화 청와대 탈환 (2)

"안녕하지는 못하겠지만, 반갑다. 난 플레이어 길드장 한우현이다."

"...네?"

양복을 입은 사람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다가,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는···"

이내 짜증이 난다는 듯이 한우현을 노려보며 손짓을 하던 그는, 황급히 그 손길을 제지당했다.

그의 곁으로 다급히 다가온 한 경찰이 귓속말을 했다.

-기, 길드장입니다, 길드장!

-길드장이 뭔데?

-초능력자들 대장이요!

-...이 씹. 그걸 왜 지금 말해!

-저 놈들이 그걸 발표한 게 방금 전입니다.

-발표하고 바로 왔다고?

-그런 것 같습니다.

둘은 그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얼굴빛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귓속말은 초월적인 감각을 지닌 플레이어인.

한우현에게도 고스란히 들렸다.

뭐, 굳이 엿들은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대화는 끝났나?"

지금 중요한 건 공식적인 절차였다.

"...대통령 경호처 이재윤 차장입니다. 경호처장은 저 안에 갇혀 있습니다."

"저 쪽은?"

"101 경비단장 황준서 총경입니다."

다행히, 그 짧은 귓속말로도 한우현이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나 보다.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대통령 경호처와 경찰 경비단장 모두 한우현을 전혀 무시하지 않았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겁니까. 이거 당신들 짓입니까? 북한까지."

"요구 사항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런 권한이."

아니, 극도로 경계했다.

북한과 미국에 일어난 일이 드디어 한국에도 일어나는지 의심하며.

"걱정 마라."

그 의심을 풀어줄 때다.

당연히 일반인에 불과한 그들은 길드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우리는 막으러 온 거다."

"네?"

그 말에 경호처 차장의 얼굴에 의문이 번졌다.

그와 반대로 무력해 보이던 경비단장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청와대에 대한 테러 정보를 입수해서, 진압을 지원하러 왔다."

"그, 그 말은."

"우리 플레이어 길드는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당신들의 작전에 최대한 협조하지."

물론.

당연히 그것이 한국 정부를 위해서는 아니다.

모든 것은 길드가 주도하는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이니까.

"비켜라."

"저, 정말입니까? 이걸 뚫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경비단장이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초능력자, 저희가 데려와서 시도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만···"

반대로, 경호처 차장은 말꼬리를 흐렸다.

의외로 사고가 열려있는 사람이었던 듯, 다른 플레이어를 그 짧은 시간 내로 급히 수소문했었나 보다.

물론 실패했으니 이렇게 못 들어가고 있었겠지만.

주위에 널려 있는 공사 장비요, 공성전에나 쓸 법한 큼직한 물건들을 보니 그 외에도 꽤나 용을 썼던 모양.

아마 전혀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플레이어의 스킬은 이그드라실 포스를 기반으로 한다.

포스는 오직 포스로만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포스가 없는 무기나 물체는, 포스로 형성된 것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심지어 타인의 포스라면 더더욱이 어렵다.

각성 첫 날인 현 시점에서는 플레이어끼리 서로의 스킬에 간섭하는 수준의 응용력을 발휘할 수 없다.

"바로 뚫어주지."

"아, 아 예!"

원래라면 아무리 한우현이 누구인지 막 알려졌다고 해도, 이렇게 쉽사리 존중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편견에 가득 찬 동물이니까.

북한 수뇌부가 죄다 죽었다니, 미국 대통령이 암살당했으니 하는 소식을 봐도 남의 일로 치부하는 것이 인간.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빛의 권능 : 마법 파쇄]."

하지만 청와대가 알 수 없는 힘에 둘러 쌓이고, 그것을 어떠한 수단으로도 돌파할 수 없을 때.

너무나 큰 무력감만이 경찰도, 경호원들도, 그를 보던 시민들에게 맴돌 때.

그들은 인정 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신경 가속]

한우현의 시간이 느려졌다. 중추신경계를 타고 흐르는 이온 채널들의 박동이 가속된다.

-[날카로운 눈]

한우현의 망막, 수정체, 홍체, 뒤이어 안구 신경계가 포스로 강화된다.

결계를 이루는 포스의 구조와 회로, 정보가 한우현의 뇌로 흘러들어간다.

-[신경 이해 확장]

시각 정보의 결합과 해석을 관장하는 후두엽Occipital lobe.

포스가 후두엽 뉴런의 시냅스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그 내부 구조를 프랙탈 구조로 강화해 반복시킨다.

"크···"

한우현은 뇌가 타 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신경 섬유 다발들 사이 사이의 가닥들.

신경과 신경을 오가는 전기신호와 구조체들이 수 배, 수십 배, 수백 배로 증폭된다.

아무리 포스 운용의 달인인 한우현이라도 뇌의 한계를 벗어난 시도.

하지만, 보인다···

길드 창설 선포를 하며 마셨던 버프들.

전성기 한우현의 능력치를 두 배 가까이 증폭시켜 준 힘.

그리고 플레이어로 각성하는 과정에 느꼈던 포스의 구조에 대한 이해.

그것이 그 시도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흐."

혀 끝에서 비릿하게 느껴지는 쇠 맛. 그리고 뜨거워지는 뇌척수액을 느끼며 한우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도 않군."

마침내 결계 전체의 구조가, 파악되었기에.

"부서져라."

여섯 개의 기둥 구조. 거기에 순서대로 [풍수사]의 포스 구조를 흉내 내 주입한다.

서서히 파문이 일었다.

한우현이 결계에 꽂아넣은 주먹부터 시작해, 마치 알맞은 열쇠를 꽂아넣은 장벽이 무너지듯.

빛의 균열이 무수히 퍼져나갔다.

-파가각

-쨍그랑

그리고, 거대한 유리조각들이 비산하듯이 터져나갔다.

"미, 미친!"

"진짜 해제했잖아?"

"아니, 무슨 스킬을 쓴 거야?"

"성기사 뿐 아니라, 그냥 게임 자체에 영역 선포기 해제한다는 개념이 없는데···"

"시끄럽다."

한우현은 길드원들 뿐 아니라, 경악으로 웅성대는 경찰과 경호원들까지 진정시켰다.

"들어간다. 우리가 선두에 서지."

그 모든 것이 주위의 시민들 뿐 아니라, 한우현이 방송국에서 데려온 기자들에 의해 뉴스에도 생생히 중계되었다.

곧 모든 한국인, 나아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무력하고, 세상이 뒤집혔음을.

"경호처 차장. 본관으로 안내해라."

"예, 예!"

결계에 손을 꽂아 넣을 때까지만 해도 좀 불퉁해 보이던 태도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거의 상급자를 모시는 듯한 자세.

납득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이미 플레이어가 저 짓을 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저긴가?"

"네, 조심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태도가 떨떠름했던 것은, 다른 플레이어라고 해도 저걸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였겠지.

"저희가 뒤에서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협조는 하겠다만 무조건 지켜주겠다는 확답은 못하겠군."

"예···"

실제로 그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다.

길드원들부터도 그 뒤에서 플레이어라 해도 저걸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으니.

경찰과 경호처 사람들도 그것을 모두 듣고 인지했을 것이다.

"후."

하지만 보기 좋게 그 예상이 박살났지.

길드원들이 생각없이 지껄이는 걸 보고, 길드장이 그냥 초능력자들 대장이 아니라.

그 능력조차도 초월적인 존재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전사계, 도적계는 앞으로. 마법사계, 궁사계는 뒤로 모여라."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방송실을 점령해서 길드 창설을 선포한 것.

그것보다도 훨씬 중요한 절차다.

회귀 전의 한국 정부는 극도로 무력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했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리 놔두면 안 된다.

한국의 세계에서 가장 플레이어가 많으며 강력한 국가다.

정말로 정부의 역할을 하든, 길드의 꼭두각시로 만들든.

기능을 하게 해야 한다.

"돌입!"

동시에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한우현은 스킬을 추가로 발동했다.

-[절대 방어]

한우현을 필두로 한 스무 명의 선봉 플레이어들에게 빛의 안개가 씌워졌다.

"[폭풍의 전진]!"

"[도검난무]!"

"[화염구]!"

"[번개 화살]!"

한우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스킬 쓰란 말은 안 했는데.

뭐, 대규모 스킬이 아니니 저 정도는 괜찮겠지.

-콰직

청와대 본관의 문을 박살내며, 한우현과 선두 플레이어들이 난입했다.

"씨발, 뭐야!"

"어,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무지개 그늘]로 막았는데?"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자들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사자후]

"모두, 멈춰라!"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다.

-[신경 가속]

-[신성한 땅]

한우현은 자신이 가진 모든 포스를 최대로 폭주시켰다.

-파아앗

송과체에서 흘러나오는 포스가 미칠 듯이 날뛰며 퍼져나갔다.

-[물리 왜곡술 : ]

대지와 대기가 한우현의 색채로 물들었다.

-쩌저적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포스의 줄기가 주위 모든 송과체와 공간을 묶는다.

모든 포스와 시공간이 한우현의 제어 하에 얼어붙듯이 굳어졌다.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정도를 넘어서, 현실의 법칙을 기만하고 비웃는 현상.

당연히 원래 [신성한 땅]이 가진 효과가 아니었다.

궁극의 오리지날 스킬. 영역 선포기와 현실의 물리 법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초월적인 기술.

-[물리 왜곡술 : 현실 재조정 해석 : 정지장]

극한으로 증폭된 능력치와 한우현의 제어 능력이 빚어낸 신기. 하지만 오래 유지 할 수는 없었다.

최대 5분. 그 안에 모든 것을 판가름 해야 했다.

"이··· 미이··· 치인···"

한우현은 살짝 놀랐다. 이걸 저항해? 한우현의 시선이 그 말을 중얼거린 백금발의 여성에게 갔다.

윗머리에 귀여운 뿔이 나 있는 여자였다. 황금빛 눈동자에 앙증맞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큼직한 지팡이로 땅을 짚고 있는, [풍수사].

청와대를 뒤덮은 영역 선포기인 [풍월을 읊는 무지개 그늘] 스킬의 주인.

하지만 반응했다 해도, 느리다.

그녀에게만 정신을 팔 틈이 없다. 빠르게 현 상황이 어떤지 파악할 때다.

한우현이 초월적으로 가속된 동체 시력으로 흩날리는 파편들 사이의 플레이어와 사람들을 포착했다.

야당 대표. 양 팔이 뽑힌 채 기절해 있다.

여당 대표. 입과 눈, 귀에 시뻘건 구멍만 남아 있다. 옆에 널브러져 있는 건 혀와 이빨인가?

대통령. 팔과 다리가 없군. 오뚜기 같은 모양새다. 물론 오뚜기 같이 귀엽지는 않다.

그 외에도 총리니, 장관이니, 유명한 국회의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있다.

죄다 몸이 온전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마치 마트의 시식코너에 있는 것 마냥 줄을 서 있는 화려한 복식과 외모의 사람들.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풍수사. 유일하게 한우현의 스킬을 인식한 자.

한우현은 0.5초 만에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했다.

"하."

보아하니 정치인들은 모두 제 정신이 있기는커녕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한 꼬라지다.

아마 사제가 있었겠지. 포스가 없는 일반인에게는 공격기가 아닌 플레이어 스킬의 효과가 대폭 반감된다.

그래도 치유나 버프, 디버프 스킬의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것으로 치유와 고문을 반복한 모양이다.

"네가 대장이냐, 풍수사?"

한우현은 얼어붙은 세상에서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며 혀를 조금씩 움직이려 하는 풍수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아주 제대로 날뛰었군. 미친 년."

"...대...체...?!"

그녀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23화 청와대 탈환 (3)

"...무...슨···"

"대단하군.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한우현은 [신성한 땅]을 펼칠 때,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부작용이니 여파니 신경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영역을 최대한의 힘으로 묶었다.

모든 포스와 집중력을 투사했다.

"심지어, 계속 적응하고 있는 건가..."

한우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 한우현이 펼친 것은 단순히 상대의 행동을 억제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소.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All-Domain Anomaly Resolution Office·AARO.

플레이어 조차 아닌 과학자들이, 플레이어가 쓸 수 있는 포스를 가장 엄밀하게 분석하는 데 성공한 곳.

그를 기반으로 무수한 오리지날 스킬을 개발한 천재들의 요람.

그 정점에 선 스킬이 바로 [현실 재조정 해석]이다.

위상 수학을 기반으로 현실의 공간을 다양체와 연속체로 나누어 해석하고.

그 모든 구조체를 시공간적인 매듭으로 묶는다.

그리하여 시공간이 스킬 시전자의 의지와 정신을 중심으로 흐르게 만든다.

현상 물리학 연속성의 개념을 뒤집고 왜곡하는 이적.

배우기는커녕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만 1년이 넘게 걸렸던 기술.

심지어, 이러한 정지장조차 [현실 재조정 해석]의 가장 기초적인 활용에 불과하다.

"...제···기···"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면 인식조차 불가능한 스킬. 그것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다니.

오로지 포스의 운용에 대한 순수한 재능.

레벨이 단순히 높아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응용력을 넘어서는 재능.

쓸 만하다. 아주, 쓸 만하다.

다르게 말하면, 미래에도 분명 두각을 나타냈을 플레이어라는 뜻.

"그러고 보니··· 하."

그녀의 얼굴을 살살 매만지던 한우현은 떠올렸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직업도 풍수사. 너였구나."

오뚜기 나유나.

매일매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유명 인사를 투표 받았던 플레이어.

그리고 선택된 자를 찾아가 팔과 다리, 눈과 혀를 뽑아 죽느니만 못한 상태로 만든 고문 성애자.

회귀 전에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녀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

한우현 개인으로서는 그다지 큰 원한은 없었다.

나유나는 한우현이 활동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죽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빌런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인 한국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데 결정타를 가한 빌런.

한국 최대의 재벌가인 오성 그룹의 혈족 전원이 그녀에 의해서 오뚜기가 되었다.

뒤이어 전 현직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겁을 먹은 재벌가들이 막대한 돈과 귀중품들로 플레이어들을 고용했었다.

나유나는 그녀를 도발한 미래 그룹의 재벌 3세를 따라가다가 함정에 빠져 죽었다.

그녀를 필두로 한 빌런 플레이어들도 흩어졌다.

하지만, 이미 너무도 늦은 상황이었다.

나유나와 그녀의 부하들에 의해 한국의 정치인, 사회 수뇌부는 죄다 미쳐버리거나 폐인이 되었다.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대한민국이라는 강대국이 완전히 붕괴될 정도로.

그 지도자들이요 사회의 주요 구조체들이 완전히 기능을 잃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놈도 있군···"

미래 그룹 재벌 3세 플레이어 정재선.

한국 정치인과 재벌들이 죄다 미국으로 도망치는 와중, 온갖 연구 프로젝트니 길드 후원이니 발표하면서 뭐라도 하려고 발악하다 죽었던 플레이어.

플레이어로서도, 경영자로서도 그다지 능력이 좋았던 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일하게 플레이어들과 제대로 협력해 레이드와 아이템 연구 개발을 시도했던 자다.

한우현이 생각해보니, 어차피 오성 그룹의 기술력이 조금 더 좋다고 해도.

플레이어와 포스, 아이템에 대해서는 영점에서 시작한다.

차라리 플레이어가 가문에 있는 재벌가 기업 쪽이 협업하기 좋을 것 같다.

"미래 그룹으로 계획을 바꿔야겠군."

상념을 끝낸 한우현은 서서히 포스를 끌어올렸다.

"솔직히, 지금 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다만···"

서서히 뇌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시간도, 마음도. 내키지 않는군."

한우현의 눈에 서늘한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빛의 봉인검]."

"즈아암···까···"

"가만히 있어라."

-콰각

뭔가 말을 내뱉으려 했던 풍수사는, 그대로 온 몸이 굳어졌다.

"큭···"

한우현은 현기증과 두통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서둘러야 한다.

현재 청와대에 있는 빌런 플레이어들의 수는 74명.

한 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공격 스킬을 쓴다면, 청와대가 박살난다.

스킬을 막는다고 해도, 플레이어들만이 제대로 대응가능하다.

주위에까지 그 여파를 100%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게 되면 안에 있는 모든 민간인들이 즉사한다.

그러니까, 빠르게 끝낸다.

압도적.

초월적인 신위로.

어떠한 피해도 없이 순식간에 제압한다.

"[빛의 봉인검]."

"[빛의 봉인검]."

"[빛의 봉인검]."

점점 더 심하게 아파지는 두통과 현기증을 버텨내며, 한우현은 스킬을 반복했다.

-콰곽

-콰곽

암살자를 제압했을 때처럼 세심하게 필요한 부위에만 박아넣지는 않았다.

경추와 요추. 인체 활동을 관장하는 대부분의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

인당 두 개만 박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스킬은 사용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물론 숙련된 플레이어라면 뇌신경의 포스 발산만으로도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풍수사 나유나도 그러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큭."

-콰곽

마침내 마지막 플레이어에게도 봉인검을 박아넣은 한우현은 온 몸에 힘을 풀었다.

"...됐다."

그리고,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하던 공간 인식을 놓았다.

소리 없이 중력파의 파장이 퍼져나가며, 얼어붙은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털썩

"...길드장!"

"뭐, 뭐야?!"

순식간에 74명의 플레이어들이 죄다 쓰러졌다.

그 한가운데에서는 한우현이 무감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한우현 다음으로 앞에 나섰던 권승환이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들도 길드원으로서 할 일을 하겠노라고 나섰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할을 하지 못 했다.

뭐, 아주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우현이 다 하기는 했어도, 결국 청와대에 스킬도 쓰면서 같이 돌입했으니까.

길드장의 강함에 대해 모두에게 인식 시켜 주었음과 동시에, 소속감도 고취 시켜 주었다.

병풍이라도 충분히 의미 있었다.

"이런··· 이런 스킬이 있어? 성기사한테?"

"아니, 스킬이 아닌 거 같은데···"

"누구 본 사람 있어?"

"본 게 아니라, 그냥 장면이 바뀐···"

"조용. 사제들, 나와라."

한우현의 나직한 말에, 길드원들 간에 말없이 눈빛이 오갔다.

그리고 세 명이 나왔다.

"치유해라."

"네, 네···[치유]!"

"[치유]!"

"[치유]! 근데 저희, 셋 다 힐링 트리 안 타서."

"[치유]! 치유 효과가 좀 약해요···"

"괜찮다."

조금씩 팔과 다리, 눈과 혀가 돋아나며 발버둥 치는 정치인들을 보며 한우현은 답했다.

"여러 번 하면 되니까. 치유의 쿨타임이 2초 정도인가?"

"그, 저희 모두 스킬 포인트 투자를 별로 안 해서 5초···"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계속 해라. 멀쩡해질 때까지."

"네! [치유]!"

"거기 다른 사람들! 쓰러진 놈들 죄다 모아서 뒤로 모아라."

"예!"

"끙차! 들어!"

"여기 쌓아!"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다.

"...헉, 허억···"

"...누구··· 십니까···?"

정치인들이 멍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경비단장과 경호처 차장도.

"자네, 자네가··· 데려온 건가?"

"그···"

경호처 차장이 살짝 한우현의 눈치를 살폈다.

한우현은 그를 째려보았다. 좆 같은 소리 할 거면 꺼지라는 감정을 담아.

"여, 여기! 이 분께서···"

다행히 눈치가 빠른 듯, 그는 황급히 물러났다.

한우현은 표정을 살짝 풀었다.

눈치가 아예 없는 놈은 아니다.

"안녕하··· 지는 못하겠군. 대통령."

"자네··· 는 누구인가? 왜 경호처를."

"정식으로 소개하지. 나는 길드 [루시드]의 길드장, 한우현이다."

"길드? 그게 무슨."

"보다 쉽게 말하자면,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 초능력자들의 대표자다."

막 고문에서 벗어나 아직 정신이 회복되지 못해 멍하니 있던 정치인들. 관료들.

그들 모두의 눈이, 한우현의 말을 듣자마자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래. 방금까지 당신들을 고문하고 있었던 자들 말이다."

"..."

"뭐, 지금은 우리가 모두 제압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한우현은 시종일관 거만한 자세로 읊조렸다.

의도 된 것이었다.

한국 대통령도, 야당 대표도, 여당 대표도.

회귀 전에는 하나같이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자기 보신조차 못하는 병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특징을 이용할 때다.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을, 행정부와 입법부를 수호했는데."

한우현은 슬쩍 권승환을 쳐다봤다.

"어이! 멀뚱멀뚱 보고만 있을 거야?!"

"정치인이라는 것들이 은혜도 몰라?"

"우리가 니들 살려줬다고!"

권승환은 눈치가 빨랐다.

"이런 씨발, 우리도 목숨 걸고 지켜주려고 온 건데!"

자기가 거창하게 큰 소리를 쳐 놓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듯.

바람잡이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 주었다.

"좀 많이 서운하네?"

-화르륵

권승환이 든 커다란 두손검에 화염이 피어올랐다.

"창렬하고 섭섭해?"

용기사의 기초 공격력 강화 스킬, [용 숨결 검기]였다.

"히, 히익!"

"그런 게 아니었네!"

"지, 지금 우리가 정신이 없어서!"

"고, 고맙네!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대한민국의 영웅이야!"

PTSD가 도진 듯, 순식간에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발작하며 교언영색을 쏟아냈다.

누가 밥 먹고 선동과 날조만 해 대는 직업 아니랄까봐.

"정말 자네들이 큰 일을 해주었네! 대한민국의 질서를 지키고···"

"이름이 뭔가? 당장 표창과 국가 유공자로···"

"그걸로 되나! 즉시 포상금도···"

"지금 어디서 일하나? 국가 기관에서 지금···"

"이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귀한..."

입을 열자 점차 자신들의 본질을 되찾은 듯.

온갖 현란한 미사여구들을 그럴 듯하게 내뱉었다.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이였냐면, 뭐라고 짖나 들어보자던 눈빛의 길드원들 마저도.

점차 어? 진짜? 그게 되나? 정말로?

싶은 표정으로 조금씩 달라질 정도로.

이 정도면 되었다.

"그만."

한우현이 묵직한 목소리로 좌중을 침묵시켰다.

"..."

길드장의 위엄을 완벽히 각인 당한 길드원들은 모조리 침묵했다.

"아니, 그게···"

"어···"

그러나 정치인들은 말을 이으려 했다.

그마저도 한우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포상금, 훈장, 스카웃. 다 좋지. 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게 있겠어."

한우현은 품 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회귀 전, 한국의 빌런 플레이어들이 주장했던 자기들의 권한들.

그것을 한우현이 행사할 길드에 걸맞게 수정하고, 좀 더 체계적이고도 치밀하게 짜깁기해 만든 조약문.

"읽고, 서명해라."

그것을 대통령, 국무총리, 야당 대표, 여당 대표에게 뿌렸다.

한 덩이씩.

"지문과 인장도 찍어라."

정치인들 사이에 복잡한 눈빛이 오갔다.

너무 정신을 회복할 시간을 많이 주었나? 눈빛을 나누는 꼬라지를 보니 잡생각이 떠오르는 모양.

"할 일이 많지 않나? 일단 읽어보지 그래. 뭐, 안 읽고 찍으면 나야 좋다만."

"흠, 흠··· 그런 게 아니었나. 우리도 갑작스러운 상황인지라, 신중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지."

"길드장 한우현. 우리가 기억하겠네. 이것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 다만···"

"이런 걸 그렇게 빠르게 읽고 결정할 수는 없네. 게다가···"

"읽어라. 지금. 당장."

한우현이 살기를 담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호구로 보이나?"

24화 절대 갑 (1)

"검토? 예정? 약속? 내가 그딴 말을 들으려고 너희를 구한 것 같나?"

한우현이 으르렁댔다.

싸한 침묵이 정치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대답해라."

이내 밍기적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대통령에게 모였다.

심지어 그 정적인 야당 대표마저도.

일단은,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니까. 네가 뭐라도 좀 해보라는 듯이.

"그··· 잠깐만."

결국 대통령이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이내 한 장, 한 장씩 넘겼다.

"무, 무슨."

그리고 안색이 새하얘졌다.

"불체포 특권과 면책 특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더. 더 읽어라."

"...이, 이건 그렇다 치고. 세무 거부권에 특별 수사권? 이런 권한은 법에 존재하지 않네!"

한우현은 그의 경악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럼 만들면 되겠군. 법을 선포해라."

"대통령은 입법의 권한이···"

"대통령령 법규명령으로 선포해라. 작년 말에도 잘 써먹지 않았나?"

자연스레 자기 권한이 아니라는 듯 빠져나가려는 대통령을 윽박질렀다.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에 대해 조금 아는 사람들은 대통령이라 해도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정치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은 명목상 삼권분립이 이뤄져있지만, 사법부의 판단은 사실상 행정부의 그늘 아래 있다.

정말로 중요한 법이 아닌 조례 수준의 법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선포하고 철회하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책임을 너한테만 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 말에 여당 대표와 야당 대표도 입술을 깨물었다.

입법권은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여당이 사실상 거수기 역할을 한다.

따라서 당연히, 이 모든 조약의 증인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건 군부 정권, 아니 전시 상황에서도 상상 할 수 없는 혜택이네! 이런 걸 부여 할 수는."

"뭔가 착각하는 거 같군. 내가 허락을 받으러 온 것 같나?"

그들의 고문 받을 때에는 공포로 벌어졌던 입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벌어진다.

"나는 통보를 하러 온 거다."

한우현은 경멸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협상이니 검토는커녕, 제 정신조차 유지하지 못했던 것들.

조금의 시간과 기회를 주자마자 이렇게 상황을 모면하고자 태도가 바뀌다니.

"법? 권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걸 안 봤군."

아마, 그나마 그는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한우현은 자기 손에 들린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자율 작전권. 무장 저항권. 이게 가장 중요하지."

"아, 아무리 우리가 대표자라 해도 이런 미친 권리를 보장할 수는...!"

"그래?"

국무총리가 울먹이듯이 외치자 한우현은 비웃었다.

"여기 대통령 뿐 아니라 여당 대표도, 야당 대표도, 국회의장도 있군. 행정부와 입법부가 모두 모여 있는데, 사법부까지 데려와야 하나?"

그 말에 야당 대표와 여당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자네가 말하는 권한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하는 말인가?"

"그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할까?"

사실, 그렇게 말하는 정치인들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저 권한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요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멍청한 플레이어들이었다면 그냥 깽판을 치고 돈이나 내놓으라는 식으로 일차원적인 행동을 했겠지.

"..."

불체포 특권과 면책권.

국회의원과 그에 준하는 고위 공무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형사 처벌에 반쯤 면역으로 만들어주는 특권.

물론 당연히 완전한 면역은 아니다.

"이건 평등권을 위배하는 수준을 넘어, 헌법을 파괴하는 수준이네...!"

"재밌는 말을 하는군. 정말로 국민들이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놈들이."

"궤변을···!"

한우현은 평소에 그것이 상당히 아니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그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단순히, 그 자신과 길드가 국회의원 급이 되고 싶다는 유치한 이유는 아니었다.

국회의원은 하나하나가 국가 입법 기관이다. 하나의 국민인 동시에 국가 기관.

따라서 사소한 형법 수사에 죄다 엮이다가는 서로 간에 정쟁에만 얽매여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된 입법 활동이 불가능해진다.

부작용도 있지만, 분명히 그 이유가 존재하는 특권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특권이라 해도 초법적인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말로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도 데려올까?"

"잠깐, 잠깐만···!"

하지만 거기에 또 다른 권한이 더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세무 거부권.

대기업을 넘어서 세계적인 기업이 될 길드에 걸릴 모든 규제와 제한을 회피할 수 있는 권한.

특별 수사권.

특수검사, 흔히 특검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독립적인 수사권의 부여.

즉 플레이어에 대한 수사, 체포, 처벌의 권한을 일개 민간 단체가 가져가겠다는 미친 소리.

그 모든 권한은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자율 작전권.

국방부의 동의 없이 군사 작전을 전국 어디에서나 펼치고, 자원을 징발 할 수 있는 권한.

심지어 그 단체가 스킬로 대지를 뒤엎고 하늘을 쪼개는 플레이어들의 무력 단체다.

무장 저항권.

명목상 '부당한' 명령이나 상황에 저항하겠다. 사실상, 어떠한 명령도 강제받지 않겠다.

길드의 위에는 누군가 서려고 하는 꼬라지는 용납할 수 없다는 노골적인 의도.

"이 모든 것은 기본에 불과하다. 플레이어들이 결집할 수 있는 단체의 최소."

한우현은 대놓고 대한민국 한 복판에 군벌을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군벌의 존재를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떠 받들라고.

대통령, 국회의원, 장 차관 모두 무능할지언정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모든 것의 의도와 파급 효과를 이해했다.

"와···"

"저게 말이 되나?"

"아니, 뭐 그렇게 안 될 건 없는 거 같은데."

"국회의원도 있는 권한 아냐?"

"그러게. 목숨도 구해줬는데."

"저 정도 쯤이야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별 거 아닌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그 뒤에서 수군대며.

정치인들에게 갑질하는 한우현을 동경하는 듯 쳐다보는 플레이어들.

그 권한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 이 자리에서 그 권한들의 의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불가능 하네. 무조건 안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차라리···"

대통령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어이, 모두들!"

한우현이 큰 목소리를 냈다.

"잠깐 나가 있어라. 여기 묶어 놓은 애들 전부 데리고."

"예? 저희 없어도···"

"당연히 괜찮겠지 병신아. 우리가 뭘 했다고. 나가."

"어··· 네!"

몇몇 플레이어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뭔가 중요한 대화를 하려나 보다 납득했다.

썰물이 빠져 나가듯이 플레이어들은 청와대 앞의 정원으로 튀어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무력화 시켜 놓은 플레이어들만 잘 감시하면서, 잠깐만 기다리도록."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차정훈의 대답을 뒤로 하고 한우현은 문의 잔해를 그러 모아 포스로 굳히고서는 대충 입구를 봉했다.

순식간에 청와대에는 한우현과 정치인들만 남았다.

"눈치 빠르신 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더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너, 너무한 것 아닌가! 이러면 자네가 그들하고 다른 것이···"

야당 대표가 공포에 들어찬 눈빛으로 발악하듯 외쳤다.

"내가 언제 나는 다르다고 말했지?"

"히, 히익!"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보니, 또 고문을 할까 봐 걱정한 모양이다.

"그리고 설사 우리에게 강제로 서명을 시킨다 해도, 그런 건 적법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네!"

"우리가 저런 걸 서명한다면 당장 당에서 탄핵과 효력 정지를···"

"내가 바보인 줄 아나? 강제로 서명 받는다고 그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 것도 모를까?"

한우현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좀 앉아 보지. 오래 서 있으니 불편하지 않나?"

자연스레 옆에 밀려나 있던 책상의 상석에 앉으며 덧붙였다.

아마도 원래 대통령의 자리였겠지.

"..."

"..."

그가 단순히 협박을 하려는 것이 아닌 듯 하자, 정치인들이 아리송한 눈빛을 보냈다.

"앉으라고."

한우현은 다시금 짜증을 냈다. 속이 영 좋지 않았다.

여유가 그다지 없었고, 그다지 조절할 필요도 없어서 그냥 화를 냈다.

-탁

-탁

-탁

순식간에 정치인들이 책상에 민첩하게 둘러앉았다.

"차 같은 거 없나? 기왕이면 88 청병이나 조기홍인 같은 보이차 아니면 고법, 안계 철관음으로."

"그, 지금 드릴 수 있는 건 녹차 밖에 없습니다만."

청와대 비서실장이 쭈뼛대며 대답했다.

"그딴 건 필요 없다. 본론에 들어가지."

세금 낭비는 있는 대로 하면서 저 좋은 차들이 없다고? 하여간 쓸데 없는 것들.

짜증을 내고서는 한우현은 그들을 한 번씩 노려봐 주었다.

"조약. 정말로 내가 나하고 길드. 플레이어 초능력자들. 그들을 위해서 만든 것 같나?"

"...?"

"다르게 말하지. 저런 게 없다고 치자. 플레이어들을 그냥 평범한 국민으로 취급한다고 하자고."

한우현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럼 통제 가능 할 것 같나? 너희들이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에 가장 먼저 여당 대표가 뭔가를 깨달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은···"

"플레이어들은 플레이어들 만이 막을 수 있다. 어차피 일반인들은 막을 수 없어."

"절대 막을 수 없다고, 어떻게 보장을···"

국방부 장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흡, 하며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괜찮았다. 국방부 장관? 평소에 플레이어들의 주 연령 층인 2030대 남성에게 큰 공분의 대상이 되는 놈.

눈치 없이 입에서 똥을 싸는 꼬라지를 보니 그럴 만 했다.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한다. 우리는 핵을 맞아도 멀쩡하다. 오로지 이 플레이어 스킬로만 피해를 입을 수 있지."

하지만 무시했다. 대응하기에도 귀찮았다.

한우현이 자연스레 손 끝에서 빛을 피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청와대 경호팀이 이미 교전 했을 때 봤을 텐데. 총을 맞아도 멀쩡한 게 아니라, 아예 반응이 없었을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직접 그 광경을 보았을 대통령이 침음을 흘리며 답했다.

한우현이 단순히 협박을 하려고 대화를 시작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우리가 특권을 가지고 싶어서 내놓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

"난 이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미치광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해야 하지."

"...미치광이?"

국무총리가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 미치광이. 게임에 십 수년을 처박아 인생을 낭비한 폐인들. 방구석 정신병자들."

어차피 일주일 내로 플레이어란 것들이 어떤 족속인지는 전 세계가 다 알게 된다.

"그게 바로 플레이어. 게임의 능력을 현실에서 쓸 수 있게 된 초능력자들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 정보를 말해주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선심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과 좀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겠지만..."

칼과 방패를 보란 듯이 휘두른다.

"내가 게임을 얼마나 오래 했을 거라고 생각하나? 플레이어의 능력은 게임 캐릭터에 비례하는데 말이야."

세계 최강의 플레이어.

"대체 게임 따위에 시간과 돈과 정신을 얼마나 꼬라박아야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을 일격에 무력화 시킬 정도의 무력을 얻게 되는 걸까?"

동시에, 그 저주 받을 쓰레기 같은 게임을 그 누구보다 오래 한 정신병자.

한우현이 비웃었다.

25화 절대 갑 (2)

"너희 늙은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주지."

"우리는 사람 죽이는 걸 아주 좋아하는 게임 중독자들이다. 아니지, 이걸론 부족하지. 사람도 잘 죽이고, 건물도 잘 부수고, 질서 자체를 파괴하는 걸 잘 한다.

"아, 그래··· 힘이 아주 아주 센 유치원생. 이게 가장 좋은 요약이겠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요약이었다.

"실제로 너희들이 게임 플레이어들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다니, 재밌지 않나?"

한국의 위정자들은 게임이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과거의 한우현은 그것을 매우 증오했다.

지금은 별 생각이 없다. 게임 규제에 대한 논쟁 따위는 이제 그의 마음 속에서 아무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의제에 불과하니.

"모든 시민이 동등한 존재여야 민주주의가 성립 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지 설명해야 하나? 여기 있는 놈들 중 서울대 안 나온 사람 없을 텐데?"

"...그 내용이, 그들에게 유의미한···"

"그 조약이야말로 우리 플레이어들이 법을 지키게 만드는 울타리가 될 것이다."

목이 말랐다.

"[인벤토리]. [엘릭서]."

유리병에 담긴 포션이 손에 나타났다.

그것을 입에 쏟아 붓듯이 삼켰다. 두통이 조금 가셨다.

"시원하군. 다들 사회계약론 정도는 알고 있겠지?"

"..."

"어차피 플레이어들이 자연스럽게 휘두르게 될 권리들이다."

지끈거렸다. 엘릭서의 효과는 잠깐을 끝으로, 두통과 답답함이 다시 올라왔다.

"너희들을 덮친 놈들이, 어디 권한이나 조약이 있어서 간 크게 그런 짓을 했을까?"

"..."

"그 미국도 지금 대통령이 암살 당하고 부통령이 상황을 수습한다고 발악하고 있는데?"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우리. 아니지."

대통령이 마침내 대표로 그 말에 대답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건가?"

청와대에 입성한 순간부터 시종일관 한우현이 뿜어냈던 초저주파.

인간의 본원적인 공포와 긴장을 자극하는 주파수.

그에 짓눌린 정치인들이 마침내, 심리적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원래 같으면 겨우 그 정도의 논리와 근거로 설득되지 않았을 자들이다.

절망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에 눈앞에 직면한 강대한 힘 아래 결국 무릎을 내리게 된다.

"그래. 질서의 유지."

"...줄 수 있는 게 겨우, 그것 하나 뿐이란 말인가?"

"그 하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제는 깨달았을 텐데?"

한우현이 심드렁하게 으르렁댔다.

"나 혼자서 한국군. 아니, 미군 전체를 궤멸시키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릴 것 같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우현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

한참 동안 침묵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한우현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홀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청와대를 테러한 초월적인 능력자들 수십 명을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제압했다.

그것이 바로 플레이어들의 대장이라고 스스로를 칭한 정체불명의 존재.

한우현이었다.

세계 최강대국의 군대를 한 시간만에 절멸시킨다는 미친 헛소리.

하지만 그 말이 공갈로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도, 공갈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한우현은 장기전이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보스 최초 보상을 얻어 포스를 회복한다면.

충분히 그러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모든 정치인들이 그 말이 진실임을 마음 속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건 어떤가?"

"말해 봐라."

"조약 자체는··· 서명하겠네. 애초에, 그 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같으니."

마침내 대통령이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조약의 대외적인 공개 및 선언은 삼가주게."

"그 정도는 협조해주지. 하지만 영원히는 안 된다."

"...1년."

"그래, 적당하겠군."

"자네 부하들이 이미 다 들었는데···"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애초에 대통령, 당신부터도 청와대 관계자 인터뷰라는 거 다 못 막지 않나?"

"아니, 그건."

"적당히 입막음은 해 두지. 하지만 흘리는 말 정도는 어쩔 수 없다."

"···알겠네."

대통령이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국무총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영상으로 조약을 증빙하지."

"영상까지... 알았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국회 입장에서 대 놓고 저 행사들을 두둔하기는···"

"그런 협조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적당히 입이나 닫고 있으면 된다."

뒤따른 야당 대표의 입까지 다물게 한 한우현은 다시금 서류를 펼쳤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대놓고 깽판을 치지는 않는다. 방금 말했듯이."

인장을 꺼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틀을 존중함을 보여주는 장치이니."

체념한 표정의 대통령. 여당 대표. 야당 대표. 국무총리가 펜을 들었다.

"자, 그럼 찍어 볼까. 국방부 장관, 할 일 없어 보이니 네가 영상을 찍어라."

"네, 넵···"

-서걱서걱

-콰악

펜들이 움직이는 소리와 도장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서류를 넘겨받은 한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보다 자세한 것은 이번 주 내로 다시 전해주도록 하지."

그 말에 대통령과 당 대표, 장관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걱정 마라. 이렇게 온다는 뜻이 아니니. 내일부터 공식적으로 길드를 결성함과 동시에 대외 활동이 시작될 거다."

"...그럼?"

"알아서 사람을 보내라. 너희들도 구경만 하고 있기에는 불안할 테니."

어차피 감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윽박 지른다 해도, 감시자를 보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직접적으로 정부에 의사를 전달할 공식적인 인선이 있는 게 나았다.

"하... 그리 하지."

그 말에 대답한 건 대통령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 이런 저런 고생을 하느라 피곤할 테니, 이만 난 가보지."

소리 없이 정치인들의 눈과 입에 안도가 퍼져나갔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치 심해진 두통과 현기증.

그것을 억누르며 발을 돌렸다.

"다들 알아서 잘 쉬고, 다음에 보지. 아니지. 보지 않기를 바라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다음에 보면,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보게 될 것 같으니."

국방부 장관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낚아챘다.

-띠링

영상과 조약문이 빠르게 한우현의 계정으로 전송되었다.

확인을 마친 한우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섰다.

"와아!"

"나왔다!"

"길드장! 길드장! 한우현!"

"어떻게, 잘 됐습니까?"

"국가권력급! 국가권력급!"

"진짜 우리 면책권 가지는 거에요?"

"그럼 나 물통 사기친 거 이제 무죄 되나?"

"이런 씨발? 사기 쳐서 쌀먹 하던 새끼가 있었어?"

"에헤이, 농담 농담."

30분도 걸리지 않았기에, 플레이어들의 열의가 아직 식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길드의 직위가 보장되었다는 것까지만 말하지."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한우현을 맞이했다.

"와!"

"대박!"

"와아아아!!"

"개 쩐다!!!"

하지만 한우현은 그 환호성에 전혀 기쁨이나 뿌듯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세한 건 대외비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군."

머리가, 머리가 너무도 아팠다. 시야가 겹쳐 보였다.

"하나만 확실히 말해주지. 길드는 이제 한국, 아니 세계를 통틀어 유일하면서 적법한 플레이어 단체다."

걷기가 힘들었다. 균형감각이 어지러웠다.

"씨발, 좆 간지···"

"길드장, 그럼 얘네는 이제 어떡해?"

"속박기가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텐데···"

"우리가 계속 속박기 써?"

"근데 어디 가둘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용기사 권승환이 물었다. 바닥에 누운 나유나의 볼을 발로 꾹꾹 즈려밟으며.

"걱정 마라."

한우현은 칼과 방패를 치켜 들며 바닥에 뻗어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 구태여 끌고 왔던 암살자까지 함께 그 가운데 누워있었다.

모두들 눈알을 굴리며 한우현을 쳐다보았다.

"모두들, 귀는 열려 있으니 잘 들었겠지."

-키잉

한우현의 검과 방패에 빛의 기운이 어렸다.

"이제 나와 길드에는 너희를 처단할 권한이 '적법하게' 부여되었다."

그 칼 끝이 풍수사의 목 끝까지 다가왔다.

"흐··· 흐윽!"

"내가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모조리 모가지를 쳐 내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단 말이지."

-스르륵

"하지만, 기회를 주고 싶군."

그 칼 끝에 서린 기운이 다시금 흩어졌다.

"나유나, 이지현, 박재율, 성하준, 정서원, 제갈선우···"

한우현이 이름을 하나하나 읊을 때마다 쓰러진 플레이어들이 놀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딱히 알고 맞힌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 나유나를 따랐던 빌런들. 그 가운데서도 유명했던 이들의 이름을 읊었던 것이니.

보아하니 그들 중 다수가 여기 있었음이 확실했다.

"궁금하지 않나? 같은 플레이어인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강한지. 우리는 대체 뭐하는 놈들인지."

한우현이 차정훈과 김재승에게 눈짓을 했다.

"차정훈. 김재승. 누군지 알겠지? 그 레벨 단 이그드라실 플레이어들이라면."

"..."

말없이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소개를 해라, 차정훈. 김재승."

"그, 차정훈입니다. 유튜브 이름은 이그드라실 탐방기요···"

"김재승입니다. 유튜브 이름은 익실 보스 싹쓸이."

"한국 지부장이다. 이 친구들 뿐만이 아니지. 랭커라는 랭커는 다 가입하고 있다."

한우현이 다시금 다른 플레이어들을 내려다보았다.

"한국 뿐 아니다. 길드는 중국, 동남아시아, 글로벌 서버도 아우르고 있으니."

"...우리도, 가입하라는 거야?"

그 말을 한 것은, 이빨을 꽉 깨문 동양인 여자였다.

황토빛 눈과 머리빛깔을 가진 풍수사.

"그래, 나유나. 청와대 테러리스트."

"나 혼자 한 게, 아니거든···!"

"누가 봐도 네가 대장인데, 쓸데 없는 말싸움은 하지 말지."

"...가입하면, 뭘 해 줄 건데?"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나쁘지 않았다.

"너희들이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면책. 그리고 길드원으로서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초법적인 권한."

"...모든? 모든, 이라고?"

그 말에 나유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 좀 더 나쁜 조건을 생각했나 보다.

"나는 너희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모든 플레이어들의 연합. 단지 그것이 목표이니."

추가적으로, 너희 정신병자들이 날뛰지 않을 최소한의 족쇄이기도 하지만.

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구태여 내뱉을 필요가 있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안 하면?"

"그럼 죽어야지. 민간인을 학살하고, 정부를 붕괴 시키려 한 테러리스트를 살려 둘 이유가 있나?"

거짓말이었다.

이 자리에 29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만 10명이 있다. 세계 최강의 정신병자들.

보스 몬스터. 12 사도를 공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전력.

정 끝까지 반항하는 한 둘 정도야 처리한다고 쳐도, 대부분은 무조건 복종시켜야 했다.

한우현은 뾰족한 방패 끝으로 그들을 내리 찍을 듯 크게 휘둘렀다.

아주 아주 느릿하고 큰 동작으로.

"자, 자자자 잠깐만!!!"

"야!"

"씨발, 난 죽고 싶지 않아!"

"우릴 죽이려고 한 새끼 밑으로 들어간다고?"

"몰라! 그 딴 거 알 바냐!"

"난 살 거야!"

"나도! 가입! 가입 할게! 한다고!"

"훌륭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한우현의 그런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플레이어들은 그다지 참을성이나 상황 판단력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고.

압도적인 강함과, 확실한 명분까지 한우현에게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은 배짱을 부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길드창]! [가입]!"

"좋다. 어이, 사제. 정화해라."

"[정화]!"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저, 저도요!"

"[정화]!"

한 명이 시작되자, 이후는 쉬웠다.

눈치를 보던 쓰러진 이들이 너도나도 가입하겠다고 외쳤다.

"..."

"넌 어쩌겠나?"

마지막까지 남은 건 한 명 뿐이었다.

풍수사 나유나.

"...으으으."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보를 터뜨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길드라니... 게다가 이렇게 강하다고...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현실을 부정 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26화 절대 갑 (3)

"하, 할 게··· 한다고···"

"음?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한우현은 약간 장난을 치기로 했다.

"들어갈게요··· 길드장님."

"더 크게 말해야지."

"[길드창]... 가입. 가입하겠습니다···!"

당연히 이유는 있었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장난을 칠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

"좋다. 길드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

이것은 권위였다.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도 절대적인 군주.

한우현이 그런 존재임을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무시.

"걱정 마라. 아까 말했지 않나?"

나유나의 등을 탁탁 가볍게 두들기고선 일으켜 주며 말을 이었다.

"부당한 요구는 하지 않는다."

뒤이어 그의 뒤에 늘어선 플레이어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앞에 자리잡은 차정훈과 김재승과 눈을 마주친다.

"우리는 플레이어의 연합이다."

"그냥 연합이 아니다. 오직 우리만이 유일한 길드다."

"우리는 플레이어의 이권과, 플레이어의 질서와, 플레이어의 사회를 대변한다."

-시아악

한우현이 검을 높게 들었다.

그에 빛이 깃들었다.

아주 밝게, 주위의 밤 어둠을 모두 몰아낼 정도로.

"너희들이 과거에 어떤 존재였건, 지금 어떤 계기로 길드에 들어왔건.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유나도, 김재승도, 차정훈도, 권승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

모두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중요한 건 이제 우리가 하나의 길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은연 중 생길 수 있는 두 그룹의 위화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한다.

"나는 길드장 한우현. 너희 모두의 대표자다."

한우현은 품 속에 손을 넣었다. 다시 꺼낸 손에는 수표 다발이 한 가득 들려있었다.

"오늘 모두들 수고가 많았다. 그냥 가기에는 섭섭하겠지. 받아라. 수고비다."

그것을 김재승과 차정훈에게 건넸다.

"오늘 가입한 창립 멤버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나씩 나눠주도록."

여기 모인 이들을 다 합한다면 대략 300명 정도. 다행히 부족하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몇 억은 되는 수표를? 미리 준비한 겁니까?"

김재승이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받아들었다.

"그렇다면?"

"아니··· 네, 알겠습니다. 모두, 받으십시오! 가입비입니다!"

"가입비?"

"가입비는 우리가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게, 뭔 가입비를 들어갈 때 받냐···"

"몰라, 오늘 존나 쩔었는데 마무리도 좋네···"

"와, 100, 150... 200? 이게 얼마야?!"

"200만 지르면 된다더니 진짜 200이네..."

"이거 물통을 몇이나 팔아야 나오는 거냐."

"씨발, 물통 타령은 좀···"

한우현이 인당 200만이나 되는 돈을 별 이유도 없이 뿌리는 것은 단순한 돈 지랄이 목적이 아니었다.

손쉽게 파괴와 약탈로 사회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는, 너무나도 강력한 플레이어들.

그들에게 정당한 가치를 부여해 줌과 동시에, 날뛰는 것이 아니라 길드의 아래 있음이 보다 편하고 쉬운 길임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

즉, 길드의 창립 멤버에 대한 최소한의 자긍심과 소속감 고취.

"내일부터 바빠질 것이다. 모두들 본명, 캐릭터 네임, 주소와 연락처를 적고 가도록. 차정훈!"

"네?"

"부탁하지.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예."

"나도 도와주지. 또 뭐 하면 되겠습니까?"

이제는 체념한 눈빛의 차정훈과, 그의 어깨를 잡은 김재승.

"적당히 잘 해산시키고, 내일 다시 보지. 회사를 설립해야 하니."

"회사요? 아···"

"걱정 마라. 길드를 회사로 구체화 하는 방향에 대해서 너희가 잘 알 리가 없지. 너희는 잠실 쪽에 사무실로 쓸 대형 건물과 일할 친구들이나 알아봐라."

"알겠습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한우현은 서서히 흐릿해지는 의식을 간신히 부여잡고, 플레이어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국 최강의 플레이어들, 김재승과 차정훈 그리고 그 팬클럽.

한국 최초의 빌런 단체, 나유나와 일원들.

그리고 그들에는 못지 않지만, 무수한 미래의 빌런과 영웅들까지.

아직 남아 있는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한 거의 모두를 성공적으로 흡수했다.

"...자, 다들 내일 봅시다!"

"집에서 푹 쉬시고요!"

"내일 채용 정보 관련해서 다시···"

"사고 치지 마세요! 그냥 경고 아닙니다!"

"스킬은 되도록이면 밖에서는 자제..."

물론 이것은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기껏해야 동호회에 끌어들인 수준의 결속력에 불과하니.

심지어 아직은 반감도 꽤나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가장 어려운 일을.

예상보다도 더욱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임은 틀림 없었다.

단 한 명의 손실도, 예상의 어긋남도 없었으니.

그러니까··· 이제 좀 쉬어도 될 것이다.

"나도 가보지. 내일 간부들과 함께 피시방으로 다시 오겠다."

"아, 예 길드장."

"살펴 가세요!"

한우현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발을 박찼다.

최대한 힘껏.

섬세한 힘의 조절 따위는 없이, 그냥 강하게 도약해서 날아올랐다.

-휘이잉

아무렇게나 대충 북쪽을 향해 날아 올랐기에, 착지 위치도 정확하지 않았다.

-콰앙

북악산 일대에 처박힌 한우현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플레이어의 육체 내구력은 초월적인 수준이다.

단순히 추락해서 처박히는 충격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

문제는 뇌다.

"괜··· 츠않··· 아아···"

괜찮지 않았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무리 압도적인 신위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해도.

너무나도 강력한 오리지날 스킬을 사용했다.

회귀 전에도 최대한 집중해서 단시간에 끊어 치듯이 사용했던 스킬이 바로 [현실 재조정 해석]이었다.

그것을 무려 10분이나 운용했다.

물론,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만약 한 명이라도 제압에 실패해서 싸움이 일어났다면 청와대는 물론이요 종로 일대가 파괴될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래도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준의 한계에 다다랐다.

감각이 늘어지고, 붕괴되며, 생각하는 게 아프다.

송과체에서 시작되어 퍼져나가는 뇌출혈. 뇌경색. 두개내압 항진. 신경 괴사. 뇌실 파열···

그 모든 것이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다.

"인···벤···"

서둘러야 했다.

이건 직접 조치를 취해야 하는 손상이었으니까.

"[인벤토리]... [브레인 노말라이저 No. 3]..."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기묘하게 생긴 주사기가 나타났다.

게임의 기본 회복 물약인 [엘릭서]로 자연 치유될 수 없는 부상.

플레이어 능력의 근원. 송과체에 관련된 부상.

그를 치유할 수 있도록 미 국방부에서 개발한 특수 의료 기구였다.

게임 아이템들을 조합하고 제련해 만들었기에 그 자체도 아이템으로 판정되는.

"빠···알리···"

한우현은 혀가 꼬이는 것을 느꼈다.

송과체에서 시작된 출혈과 경색이 주위 대뇌와 소뇌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키이잉

포스를 받아들인 기구가 날카롭게 빛나며 회전했다.

그것을 송과체에 가장 가까운 표면인 뒷머리에 조준하고, 강하게 박았다.

-콰드득

"끄흐흡···!"

두개골에 구멍이 나며 대뇌와 소뇌 일부가 뭉그러졌다.

기구에서 튀어나온 오중 침습 구조 바늘이 대뇌를 뚫고 간뇌에 이르렀다.

시상과 시상하부 사이를 포스에 휩싸인 바늘들이 섬세하게 파고들었다.

"하···하아···"

순식간에 의식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이 한우현을 덮쳤다.

-꿀렁

-꿀렁

하지만 버티며, 끝까지 주사기에 계속 포스를 불어넣었다.

포스를 넣지 않으면 이 기기는 플레이어의 신체를 뚫고 약물을 주입할 수 없으니까.

-꿀렁

고농도로 추출-응축된 [엘릭서], 항고혈압제, 뇌압진정제의 유효 성분이 송과체에 흘러들어갔다.

그 모두가 그냥 평범한 약물이 아니라, 플레이어 전용으로 응축-재처리된 물질이었다.

"허억··· 허억···"

박동과 함께 끓어오를 듯 올라가던 혈압과 뇌압이 점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개로 겹쳐 보이던 잔상이 합쳐졌다.

덜덜 떨리던 손과 팔이 그 움직임을 멈췄다.

현기증과 두통도 멎었다.

약간 머리에 뭔가 찬 듯한 불편함만이 남았을 뿐.

"흡!"

그것도 이제 해소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우현은 포스를 주입해 기구를 잡아당겼다.

-꾸르륵

-콰르륵

검게 뭉친 혈전과 죽은 뇌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많이는 아니었다.

송과체와 그 주위의 뇌 조직들이 재생되며 남은 찌꺼기들이 흘러나온 것이었으니.

"하아···"

마침내 모든 이물질이 다 빠져나온 것을 확인하고서, 기구를 빼냈다.

-쯔걱

브레인 노말라이저가 빠져나오기 무섭게 상처는 아물었다.

플레이어의 초월적인 자연 회복력.

오히려 그 때문에, 만약 송과체에 문제가 생긴다면 전용 기구를 스스로 운용하지 않는 한.

어찌 할 수도 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역설적인 육신.

물론 죽고 나서 사제가 [부활]을 쓴다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재사용 대기시간이 긴 [부활]을 그따위로 낭비하는 건 병신 같은 짓이었다.

"흐으··· 이것까지 쓸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군."

한숨을 내쉰 그는 손에 들린 나머지 두 기구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포스를 폭주시킬 때 일어나는 뇌출혈과 뇌경색의 치료에 특화된 No. 3.

그 외에도 송과체가 직접적으로 외상을 입었을 때 쓰는, 뇌 조직 자체의 재생에 특화된 No. 1.

송과체의 포스가 그 자체로 폭주해 신경 다발의 제어 및 감각이 통제 불능일 때 사용하는 플레이어 전용 신경 수용체 차단제 No. 7.

혹시나 더 상태가 악화된다면 그 둘도 써야 했다.

"얼마 안 되니··· 아껴야지."

미국이 멸망하고 나서는 더 만들 수 없었다.

그도 기초적인 원리만 알 뿐, 구체적으로 어떤 기전으로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으니까.

"[포스 공명 투시]."

마지막으로 한우현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영상학적 진단을 내렸다.

자기장MRI조차 튕겨내는 플레이어의 육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개발된 오리지날 스킬이었다.

"괜찮군."

정확히는, 아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은 상처들은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를 수행할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판교는 어쩔 수 없나."

어차피 지금 게임사로 가 봤자,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만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 모였던 빌런 플레이어들도 이미 죄다 흩어졌을 테고.

그 쪽은 포기하는 게 맞다. 이미 막지 못한 것에 연연하는 것은 좋지 못한 태도니까.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거기에나 집중하는 것이 좋으리라.

"이제, 정말로 집에 가자."

이 정도면 집에 가는 길에 대부분은 낫고, 송과체의 상처도 내일 아침쯤 에는 완전히 나을 것 같았다.

-후웅

-쾅

-후웅

-쾅

허공에 물리력으로 된 장판을 만들어 내딛었다.

성기사의 이동기인 [빛의 발걸음]과 오리지날 스킬인 [포스 전투술]이 합쳐져 초월적인 속도를 냈다.

10분도 지나치 않아 자취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아···"

지리한 한숨을 내뱉었다.

"[엘릭서]."

-벌컥

굳이 마실 필요도 없는 포션을 한 번 더 마셨다.

잠들고 나서 일어나면 조금이라도 더 컨디션이 좋아질까 해서.

이건 낭비해도 괜찮았다.

플레이어 한 명이 수만 개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남아도는 아이템이니까.

엘릭서라는 거창한 이름에 맞지 않는 공급량이었다.

"우준이가 남긴 건가."

보란 듯이 컴퓨터 앞에 쪽지 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형에게

"어디···"

-문자나 전화로 하는 게 더 편하겠지만, 뉴스를 보고 나니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좀 더 진지하게, 와 닿게 말을 남기고 싶어서 말이야.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을 지경이야. 정말 내 형 한우현이 맞는지.

-하지만 맞겠지. 그 일은 엄마랑 아빠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형이 그 대출 일을 남에게 얘기했을 거 같지는 않네.

-엄마랑 아빠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게. 대신 우리한테 대체 왜 그렇게 변한 건지. 외모 말고, 성격이랑 그··· 아무튼 뭐든지 말이야. 길드니 대표니 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해서. 모두 다 설명을 자세히 해 주면 좋겠어.

-그리고 어찌 되었든··· 형이 잘 되어서 다행이야. 이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걱정이 되지만.

-그래, 잘 되었으면 좋겠어. 정말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도.

"...우준아."

편지를 다 읽은 한우현의 목소리가 잠겼다.

"...어머니. 아버지."

한우현은 불효자였다.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부끄러운 자식.

나이를 서른이나 처 먹고서는 취업은 커녕 가족의 등골이나 빨아 먹고 살았던 게임 폐인.

부모님이 죽는 그 순간까지 그 방 구석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에 이어 그를 억지로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간 동생마저 죽고 나서야.

한우현은 생의 의지를 각성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런 비참한 최후를.

그에게 베풀기만 했던 가족들이 맞이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 저녁에 왕십리에서 식사하자. 그 때 설명하마.

한우현은 문자를 보내고서는 침대에 누웠다.

27화 황금의 씨앗 (1)

-서버 정상화 해줬잖아~

-본서버 완화도 해줬잖아~

-컨텐츠 출시도 해줬잖아~

-씨발 다! 그냥 다 해줬잖아!

"···아."

한우현은 눈을 떴다.

아침에 맞춰놓은 알람이 시끄럽게 귀를 울려서.

"···시끄러워."

회귀 전에는 이런 괴상한 음악을 좋아했었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알람을 끈 그는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컨디션은 좋아. 모습도··· 나쁘지 않고."

그리고 거울을 보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가 10년 간 섬세히 조율한 커스터마이징 아바타 덕분에, 인세를 초월한 외모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머리칼이 살짝 젖은 채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 그 어떤 사진 작가라도 탄성을 내지를 만한 모습이었다.

"은행부터 가야겠어."

-촤아악

옷장을 열어 본 그는 침음을 흘렸다.

"···그 전에 백화점부터."

어제야 어차피 플레이어들 간의 전투와 단체 조직만을 염두에 둔 활동이었기에 대충 아무거나 주워 입었었다.

어차피 게임 폐인들 앞에서 굳이 격식을 갖춘 복장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나다닐 때마다 갑옷을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대충 편하게 입을 것들이랑··· 양복도 맞춰야겠는데."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아주 오래된 게임이었다.

그래서 판타지풍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스러운 의복도 있다.

문제는 한우현은 코디네이팅에 투자할 돈이 많지 않았던 플레이어였다는 것.

세상이 게임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이 패션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으니, 그런 의복 아이템은 그다지 챙기지 않았다.

"앞으로는 격식도 차려야 하니···."

무엇보다도 의복은 단순한 겉모습만을 나타내는 장치가 아니다.

오늘부터 한우현은 수많은 대외활동을 이뤄야 한다.

재벌, 대기업, 자본가들과 만나 미래의 아이템들에 대한 연구와 투자 계획을 세우고.

민간 군사 기업의 탈을 쓴 군벌이라는 길드의 모양새를 잡고.

금괴를 합법적인 자산으로 세탁하는 준비를 하고.

해외 플레이어들에게도 가이드라인을 잡아주고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몇이나 되는 전문가들을 만나야 할까.

얼마나 많은 사회 고위층들을 설득하고 협박하고 구슬려야 할까.

"···일단은 이거라도 입자."

인벤토리를 뒤진 끝에 예전에 무료 코디네이팅 이벤트로 얻은 멀끔해 보이는 후드티와 슬랙스 바지를 찾았다.

물론 그냥 후드티와 바지는 아니었다.

거기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20주년 기념 문양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으니.

그래도 그게 옷장에 있는 넝마 같은 옷들이나, 판타지스러운 옷들보다는 나았다.

-철컥

옷을 입고 최대한 빨리 근처의 백화점으로 들어왔다.

오늘 할 일이 많았으니, 빨리 끝내야 했다.

"어서 오세···요?"

백화점 입구에 선 직원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양복은 몇 층에 있습니까?"

"7층입니다!"

-와, 미친. 뭐야? 얼굴 봤어?

-한국어 잘 하네.

-연예인인가?

-저 정도면 할리우드 배우 아닌가?

-야, 영화에도 저 정도는 안 나와.

"...의왼데."

한우현은 그 말을 엿들으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사람들은 뉴스라고 꼭 모두 챙겨보는 것은 아니다.

자기 관심 분야의 정보만 보는 파편화의 시대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길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분명히 그의 얼굴을 보고 길드장이라고 수군대던 사람도 봤으니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잘생긴 외모를 힐끔대는 정도만 있었을 뿐.

"언론 통제라도 한 건가."

아주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청와대 습격 사건은 확실히 통제에 성공한 모양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방송국 난입도 차정훈과 김재승을 앞에 내세웠다.

한우현은 가장 뒤편에서 그가 대장인 듯 한 마디를 했을 뿐.

"뭐, 알 사람은 다 알겠지."

어차피 대중들도 곧 알게 될 것이다.

정부가 기를 쓰고 뉴스를 틀어막아봤자, 바뀌는 세상을 막을 순 없으니까.

"어서 오세요! 휴즈 보란입니다! 어···Hello?"

"한국어 잘 하니까 영어 안 써도 됩니다. 양복 맞추러 왔습니다. 가장 좋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네? 가장 좋은··· 거요?"

점원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저, 양복이라는 것이 꼭 비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서요."

"...?"

"몸에 맞는 부분이나, 체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또 종류마다 다르고···"

뭐라는 거야.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에는 물론이요, 그 뒤에도 회귀 전에는 늘상 플레이어 장비만 입고 다녔다.

어느 정도 기초적인 지식이야 라일리한테 들었었지만.

"다행히 비율이 좋으시고 피부도 좋으셔서···"

"흠."

명품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한우현은 잘 모를 수 밖에 없었다.

"팁입니다. 알아서 가장 비싸고 저한테 맞는 걸로 맞춰 주십시오."

"...잠깐만요!"

그래서 그냥 쉽게 가기로 했다.

한국 백화점에서도 팁을 줘도 되는지는 잘 몰랐지만.

"자, 이리로 오시죠! 마침 이번 달에 나온 신상이 있습니다!"

이게 왠 횡재냐는 듯한 직원의 표정을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좀 끼는 것 같은데."

"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게 체형을 보정해주는 것이거든요! 더군다나 원체 몸이 좋으셔서···"

"흠···"

"저, 그런데 양복만 사실 건가요? 양복에는 넥타이랑 구두도 어울리는 것이 필요한데···"

"그런 것도 취급합니까?"

"물론입니다! 세트까지는 아니지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어차피 모두 필요했다.

"구두는 이 갈색이 마음에 드는군요."

"눈이 높으시군요! 얼마 전에 새로 나온 건데, 손님같이 키가 크신 분들께 특히 잘 어울린다고..."

직원들이 바쁘게 맞추고 대어보고 조이던 것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모두 두 개씩 부탁하지요."

"예! 계산은 최대 6개월까지 할부로 가능하시고..."

"수표로."

어차피 지금 한우현은 통장에 돈이 거의 없다.

그 일은 은행에 가서 본격적으로 처리할 예정이었으니까.

따라서 할부는 오히려 귀찮을 뿐.

"아, 옙!"

"하나는 입고 갈 테니 주시고, 나머지는 주소로."

"예! 그리고 저기."

"?"

"그, 혹시 또 오신다면 제가 잘 모셔 드리겠습니다."

브랜드 지점장 명함이었다.

지금은 이 백화점이 자취방에서 가장 가까웠지만.

어차피 곧 서울 동부 인근으로 이사를 갈 예정인데.

필요할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같은 브랜드의 백화점이 잠실에도 있었으니.

나중에 소개라도 받으면 더 쇼핑이 수월해 질 것 같았다.

-딸랑

"음···"

1층으로 내려와 시계 코너에 눈이 간 한우현은 잠깐 고민했다.

당연히 전자 시계보다 정확도는 물론이요 관리도 불편한 기계식 시계에 흥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여성 명품의 꽃이 가방이라면, 남성 명품의 꽃은 흔히 시계로 여겨진다.

사 두는 것이 보기 좋을까?

"...전투에 불편하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의복을 두른 한우현은 그대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은행 지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제 왔던 곳이었다.

그 입구에서 그의 사진을 찍고는 좋아라 했던 여직원이 가장 앞에서 굳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한우현님."

아니, 그 뿐만이 아니다.

지점장이 그 뒤에 서서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한우현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순간부터.

전 직원들을 도열시키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는 지점장 이준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대화가 빨라서 좋군."

"...그저 불편함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한우현의 예상이 맞았다.

방송 납치라는 초유의 사태를 벌였지만, 의외로 한우현의 얼굴 자체를 깊이 기억하는 대중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는 동안, 그 소식은 사회의 심부 깊숙이 통제되며 퍼졌을 것이다.

따라서 한우현의 행적들 또한 모두 밤새 추적되고 분석되었을 것이다.

"방으로 가지."

"모시겠습니다."

한국의 금융계는 매우 후진적이다.

답답하고 아날로그적이기로 유명한 일본보다도 더.

따라서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가는 관치 금융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다르게 말하면, 한국의 모든 거대 은행들은.

사실상 정부가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금고나 다름 없다.

따라서 민간 은행이라고 해도 정부에게 이렇게 언질을 받고 한우현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대충 금감원이나, 기재부 쪽에서 들었겠지만···"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가방에서 금괴를 하나, 둘, 셋··· 순서대로 차곡차곡 꺼냈다.

총 다섯 개의 금괴가 탁자 위에 놓였다.

한화로 60억 원 어치의 황금.

"기업을 설립하려고 한다. 이는 중국에서 그 과정으로 투자 받은 현물이지."

당연히, 개소리였다.

한우현이 전 세계에 길드를 선포한 것이 불과 하루고, 그 사이에 누굴 만나지도 않았는데 투자는 무슨 투자?

그를 은행 지점장이 믿을 리가 없었다. 한우현도 그렇게 생각했다.

"예, 예에··· 그렇다면 금을 담보로 한 신용 투자 상품을 원하시는 걸까요?"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건 자기 금괴가 합법적인 것이라는 윽박지르기일 뿐이었으니.

길드의 모든 행사는 세무 거부권을 보장 받았다. 그러니, 꼬와도 뭐 어쩌겠는가?

물론, 그것이 공식적인 재가는 아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자면 은행 담당자가 한우현에게 쩔쩔맬 이유도 없다.

지금 은행 담당자가 한우현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일 것이다.

"아니."

"예? 그렇다면···"

아마도, 한우현과 관련된 모든 금융 종사자들은.

기획재정부 장관의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일단은' 한우현이 뭔가 하려는 모든 신용, 대출, 상품 등에 대한 모든 행위에 대해 협조하되.

그 방향성을 은근슬쩍 통제하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을 자세히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나는 내 법인에 투자를 받기 위해서 온 거다."

"회사 자체에 대한 투자요?"

지점장의 표정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만, 막 세워지는 회사에 대한 투자는 일단 전례가 없어서···"

"어이. 쓸 데 없는 얘기는 생략하자. 쉽게 가자고."

한우현은 금이 많다.

매일 매일 억 단위로 낭비해도 수백 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기재부가 뭐라고 하던가?"

"···."

하지만 그것은 평범하게 살아갈 때의 이야기.

한국부터 시작해, 중국, 일본, 싱가포르, 나아가 동남아시아.

뒤이어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마지막으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뉴스도 봤겠지. 길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아나?"

"기사로 나온 것, 그 이상으로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자본주의와 현대 무기로 굳어진 질서를 완전히 깨부수고.

모든 것을 한우현의 통제와 지배 하에 놓으려면.

그것은 부족하다. 금괴 200톤의 극히 일부라 해도, 낭비할 수 없다.

그러니까 금은 결국 길드의 자산일 뿐, 소비에는 신중해야한다.

미끼로만 내걸고 다른 이들의 자본을 게걸스레 흡수해 자라나야 한다.

"툭 까놓고 얘기하자고. 지점장이라고 했지만··· 너. 여기 지점장 아니잖아."

한우현이 초저주파를 담아 으르렁댔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이준범의 눈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이었으니까.

28화 황금의 씨앗 (2)

"한은 정책국 쪽에서 일하던 친구 같은데, 갑작스럽게 고생이 많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명찰이 다르잖아."

아무리 지점장이 해당 지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해도, 결국 그 지점 소속이다.

그러니까 명찰이나 유니폼이 통일성이 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준범은 그 모양새가 너무 달랐다. 그를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도 뭔가 어색했다.

단순히 여기 은행의 윗사람이라서? 아니다.

높은 사람을 대하는 어색함이 아닌 잘 모르는 듯한 어색함.

즉, 아예 이 은행 출신이 아니다. 정부 쪽 사람일까? 정부 쪽 사람이 은행 상담까지 잘 흉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다.

한국은행. 대한민국의 유일한 중앙은행.

정부의 입김이 가장 강한 금융기관.

하지만, 그것 만으로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같은 일이 한국에도 일어날 뻔 했었지."

"예?"

"그걸 막은 게 나다."

"...!"

한우현은 포스로 강화된 뇌신경으로 당황하고 경악한 이준범의 감정을 느꼈다.

회귀 전에서도 다룰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았던 테크닉.

[신경 감응]을 일반인에게도 일으켜 감정과 생각의 표층의식을 흐릿하게 느끼는 것.

정확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을 느끼는 것만 해도 이미 패를 다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애초에 누가 이 자리에 오더라도, 한우현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뺏길 수 밖에 없었다.

"별로 대단한 정보도 아니다. 네가 조금만 신경써서 알아봤으면 바로 알 수 있었겠지."

그 또한 사실이었다.

정부는 나름 최선을 다했겠지만, 전국에 퍼진 생방송과 죽어나간 청와대 경호원들.

그 자리에 있던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

언론 통제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좀 더 알려주도록 하지."

아마 이준범이 아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기재부나 은행 총재에게서 최소한의 정보만 전해 들었겠지.

정부에서 당부한 VIP가 오고, 그가 뉴스에서 무슨 단체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는 정도.

"나는 길드장이다. 그리고 길드는 초능력자들의 무력집단이지. 당연하지만, 소꿉장난이나 하려고 친목회를 세운 건 아니다. 명확한 적대 목표가 있지. 중국과 동남아시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지부가 세워질 예정이고."

"...윗선에서는, 어제 부로 나타난 세계적인 무력 단체의 수장이라고만 하셨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그것 뿐이라면, 내가 청와대에게 주시받을 이유로는 부족하지 않겠나?"

"더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다.

이준범은 한우현이 회귀 전에 알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말을 이어가며 그 감정을 느꼈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회요?"

일단은 위에서 명령을 받아서 왔겠지만, 이준범의 눈에는 그 이상의 열의가 있었다.

아마, 어느 정도 자의로 한우현을 맡기를 지원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그렇다면 이용하고,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

그냥 협력이 아니라, 보다 더 깊숙히.

한우현이 다시 금괴를 꺼냈다.

열 개를 더.

다시 열 개를 더.

스물 다섯 개의 금괴가 책상에 쌓이자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무, 무슨. 이게 전부 진짜 금이라는 말입니까?"

다섯 개의 금괴까지만 해도 놀라기는 했어도 당황하지는 않았던.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자랑하러 온 게 아니다. 이건 단순히 VIP의 명령에만 우리의 가치가 있지 않다는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공갈을 살짝 쳐 보자.

"내가 세울 법인··· 길드라고 하지. 길드는 내가 가진 황금을 바탕으로 한 유사 금 본위제도 검토 중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금 본위제는 금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니 그 이전에 몇 백 톤은 있어야···"

"몇 백 톤? 정말 그걸로 되나?"

"...있으십니까? 아니, 있어도···"

"잡다한 건 넘어가지. 내가 언제 진짜 금 본위제라고 했나? 회사 내에서의 독점적 유통이라는 뜻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게임머니, [골드].

게임이 현실이 되고 나서도 그 가치가 있는 재화다.

현실에서는 별다른 소비처가 없지만, 딱 하나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장비 강화에 직접적으로 소비되니까.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에게는 게임 골드가 여전히 필요하다.

길드는 그 가치를 보증하고 전 세계 플레이어의 게임 머니를 사실상 독점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즉, 현실과 게임의 모든 현금 흐름을 통제하겠다는 의지.

경악할 만한 소리였지만 그 가공할 무력과 재화가 그 말에 최소한의 설득력을 부여했다.

"...대충은 알아들었습니다. 저도 게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하지만 아무리 금이 많더라도, 단순한 자산의 많음과 자산의 투자 운용은 다른 영역입니다."

"자본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말이군. 금이 단순한 귀금속이 아니라는 건 경제학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 중 하나가 아닌가?"

"...경제학과 출신이십니까?"

"그럴 리가. 난 고등학교 중퇴다."

이준범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도저히 대화의 주도권을 쥘 수가 없다.

모든 대화가 예측 불허의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처음 그의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방향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불만이라도 있나?"

"저, 전혀 아닙니다!"

사실, 조금은 만만하게 보는 마음도 있었다.

기획재정부에서 어설프게나마 정리해서 보내주었던 정보.

초능력자, 어처구니없게도 게임 폐인일수록 강하다는 비현실적인 개념.

중년 세대들이 당연히 그러하듯, 게임 폐인은 이준범 나잇대의 사람들에게 인식이 좋지 않다.

그래서 정말이지 한심한 천둥 벌거숭이를 생각하며 나왔다.

막 얻은 힘에 취해 어린애처럼 날뛰는 미숙아.

싸운다면 당연히 지겠지만, 투자니 설립이니 하며 상담을 받으러 온다면?

그렇다면야 상황 주도권은, 우위는 그에게 있다.

세상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초능력자들.

그 플레이어들의 대장을 잘 말로 구슬리며 속내를 알아본다.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할 법한 임무로 여겨졌다.

"금은 그 자체로 달러를 넘어서는 궁극의 현물이지. 내가 뭘 믿고 이걸 은행에 맡기나?"

"은행 만큼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하물며 한국 은행은, 생각하신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글쎄, 원화가 달러랑 테더링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세계에 초능력자들 수십 만 명이 생겼는데, 체제가 잘 돌아갈까?"

"선생님께서 대장이 아니십니까···?"

"난 많은 이들의 대표지만 모두의 대표는 아니지."

"...저의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착각이었다.

눈빛부터가 도저히 게임 폐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절대적인 군주의 기세.

무수한 사람을 지배하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전쟁터에서 수십 년을 구른 듯한 베테랑 군인이 전장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

플레이어란 것들이 전부 이런 존재라는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갑작스럽게 초월적인 능력이 생겼다고 해도.

죄다 게임 폐인 출신인 것이 사실이라면.

저렇게 사람 자체가 바뀐단 말인가?

다른 초능력자들도 저렇게 바뀌었을까?

불과 하루 만에?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본질은 쉬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이준범의 손에 핵무기 발사 버튼이 들린다고 갑자기 사람 성격이 180도 바뀌지는 않는다.

역시 합리적인 예측은 그것이다.

저 자.

길드장 한우현이 특별한 것이다.

다른 플레이어들 중 길드 소속이라는 것들은 죄다 입을 닫았다.

길드 소속이 아닌 놈들은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깽판을 치고 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길드장이다.

이준범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뭐, 좋아. 이미 대화가 많이 산으로 간 것 같으니, 아예 그 쪽을 얘기해 보자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예.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정체 불명의 초능력자 집단의 수장.

한우현을 응대하기로 선발된 엘리트 금융인 답게, 이준범 역시 멍청한 이는 아니었다.

따라서 한우현은 그의 말을 중간중간 자르기는 했어도.

"하지만 기업 운영에 있어서 한우현님의 가장 큰 자산인 금의 신용 가치화라던가, 심지어 그것들을 은행에 맡기시지도 않는다면."

전혀 무시하지는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결국 은행원인 제가 조언하기에는 어려운 영역입니다. 저한테 얘기하시는 이유를···"

"그야 그렇지. 은행원 이준범에게는 말이야."

"..."

"나에게 개인적인 바램이 있어 보이는데. 아닌가?"

"...!"

그 예상대로, 이준범은 그냥 폭탄 돌리기에 당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방구석 게임 폐인 아들.

10년동안 방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아 골머리만 썩이는 놈이었다.

"지금 말하기 곤란하다면 굳이 다그치지는 않겠다."

"...잠깐만요."

"편하게 말해라."

"이건··· 개인적이고도 부끄러운 일이라 그렇습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이 자리에 CCTV도 없는데."

"그런 것도 알 수 있···다고요?"

"나를 무시하지 말도록. 초능력자라고 하지 않았나?"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준범은 그렇게까지 긴장을 많이 하지는 않았었다.

오늘 아침 회의에서 최소한의 정보는 들었었다.

전 세계에 어제 부로 나타난 게임 기반 초능력자들.

심지어 그가 아는 게임이었다.

아들이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보면서 딸깍대는 게임.

-세현아! 세현아!

-방에서 평생을 안 나가던 놈이 대체 어딜 간 거야!

공교롭게도, 그 날 실종되어버렸다.

하지만 찾을 틈새도 없었다.

-VIP가 예의주시하는 분이시다. 어제 은행을 이용했다고 하더군. 오늘 오후에 상담을 예약했다고 하던데.

-극도로 위험한 초능력자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미 미국과 북한이 초능력자들의 테러로 개판이 되었다고 하니 믿어야지.

-이미 은행과 협의가 되었다. 담당자를 한은에서 보내기로. 누가 담당하겠나?

-...

-자원자가 없을 만 하긴 한데···

-...

-제가, 하겠습니다.

-자네가? 자네는 고객 응대를 마지막으로 한지 너무 오래되지···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잘 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지원자도 없으니, 정 그렇다면.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그가 알 것 같았기에.

"사적인 호기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온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이군."

한우현은 그의 대뇌 피질에서 불안하게 어그러지는 파장을 해석했다.

"아, 아닙니다."

"거짓말은 하지 마라. 난 답답한 걸 싫어한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이준범의 입안이 말랐다.

"...실은."

"그래. 뭐지?"

이준범은 결국 털어놓기로 했다.

어차피,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거느리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는 사소한 부탁이지 싶었다.

이미 속내를 들켰다면,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안도 아니다.

"제가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만."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그드라실 플레이어군? 어제 안 들어왔을 테고."

"...!"

그는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이세현···입니다."

"혹시 직업을 아나?"

"...마법 뭐시기라고 하던데, 마법사는 아닙니다."

"...?"

"아... 뭔가 좀 유치하고 샤방거리는 화면을 본 적은 있습니다."

마법소녀? 남자라면 성별에 맞춰서 생성되니 마법소년이겠군.

한우현은 좀 더 캐물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더 특징적인 건?"

"아! 있습니다. 그 캐릭터 위에 계란을 얹었는데, 현실에서도 그럴지는..."

"...???!!! 뭐? 뭐라고 했나?"

"예? 계란이라고..."

"설마··· 아니, 아니, 아들이라고 했지. 딸이 아니라?"

"예."

한우현은 그 대답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미래의 중요한 정보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놀랄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

-고아원 정상화! 에션족 정상화! 지하성 정상화! 잃대 정상화!

각성한 플레이어들 가운데, 다른 게임도 병행했거나 특수 서버 출신인 이들을 정상화랍시고 척살했던 이그드라실 신봉자.

나유나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붕괴시키는 데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빌런 플레이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학살마 라니아'의 본명이 이세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29화 황금의 씨앗 (3)

"...이거, 난처하군."

잠깐의 고민 끝에 한우현은 그 말을 내뱉었다.

일단 어젯밤에 모았던 인물들 중 그런 자는 없었다.

그 특징적인 계란 후라이를 분홍색 머리 위에 얹은 커스터마이징···

빌런 '학살마 라니아'의 상징.

그 아이덴티티를 바꾸고 돌아다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플레이어로 바뀌자마자 잠적했다는 것인가?

라니아의 초기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극도로 은밀하게 활동하며, 증오했다는 에인션트 서버와 타 게임을 병행했던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고 다녔다는 추측만이 있었을 뿐.

"예? 난처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세현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평범하지 않다니요?"

이준범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흠..."

"자세히 여쭤 볼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라."

한우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이준범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를 들어주고 약간의 이권을 봐 달라 하려 했었을 뿐.

정부 관계자에 가까운 인물이니 당연히 100% 믿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그 부탁이나 이권도 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보니, 아버지인 자네에게는... 말을 아끼려 했었네. 이세현··· 지금 좀 사고를 많이 친 플레이어로 의심 중이거든."

"예, 예?! 제 아들이요?"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말을 바꿔야 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미래 한국 최악의 빌런 중 하나. 온갖 이유를 다 가져다 붙여서 자기보다 약했던 플레이어와 일반인들을 학살한 미치광이.

지금은 얌전히 있을까? 유일한 가족에게 말도 안 하고 잠적했던 놈이?

분명 뭔가 일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자네, 사별했지? 아들 외에는 형제자매도 없고."

"예, 예? 그렇습니다만, 그건 어떻게."

역시, 맞다.

-난 고아나 다름 없어. 그래서 고아원섭 새끼들 죽이고 다니는 거지.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

-내 마음인데?

-지금 네가 누굴 죽인 건지 아냐! 고레벨 플레이어 하나하나가 지금 얼마나 귀한데!

-에션족은 에게로~

한우현의 기억에 남았던 라니아와의 짤막한 대화가 스쳐지나갔다.

그녀와는 직접적인 원한은 없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도 강렬히 박혀 있었다.

강원도 일대를 통제하던 플레이어 집단.

아주 질 나쁜 이들은 아니라 설득을 하려 했었다.

실제로도 나름 대화가 잘 진전되었다.

거의 합의가 이뤄 지려던 찰나.

라니아를 필두로 한 빌런 플레이어들이 "고아원 서버 출신이었던 놈들은 용납할 수 없다"라는 미친 소리를 하며.

죄다 죽여버렸다.

-이번에는 또 뭐냐?

-잃어버린 대륙도 했던 놈들이더라고? 잃대하러 꺼지세요, 만들어줬지.

-단단히 미쳤구나! 세상이 망하기 직전인데 대체 왜 이리 게임 플레이어 출신 따위에 집착하는 거냐!

-왈랄랄루~

-이번에는 가만히 못 보낸다! 네 년 만은 반드시 죽인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강력한 플레이어 전력들이 분열했고, 무의미하게 상잔했다.

플레이어들 간의 내전을 끊임없이 부풀렸던 증오의 화신.

"사실, 예의주시 대상이었네. 그래서 조사도 좀 해 뒀었고."

"대단··· 하시군요."

"아버지라면 알겠지만, 그 전에도 저지른 짓들이 꽤 있지 않았나?"

라니아가 유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세상이 게임이 되기 전에는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까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넘겨짚기였다. 증오와 분탕에 미친 인간이라면 으레 그럴 것이라 짐작했었을 뿐.

"...고소는, 꽤 많이 당했긴 했었습니다."

"역시."

한우현은 약간 놀랐다.

부모라면, 자식이 나쁜 놈이라고 했을 때.

그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발끈하기 마련이다.

이준범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체념한 듯이 중얼거렸을 뿐.

"너무 걱정 마라."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힘 없는 태도를 보아하니, 다행히 설득하는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아들이 잘 되길 바라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부모의 마음이 안 그렇겠나요."

새로운 계획이 세워졌다.

어차피 꼭 영입해야 할 대상.

그리고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는 한국은행의 간부.

엮을 만 했다.

"전부터 마음고생이 꽤나 심했었나 보군."

"예··· 세현이, 인터넷 방송을 한답시고 사기도 많이 치고. 감옥도 갈 뻔 했었습니다."

...고소 뿐만이 아니었던 건가.

"힘들었겠어. 하지만 이제는 걱정하지 말게."

한우현이 예상한 인간 군상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아니, 오히려 그를 뛰어넘은 듯한 저 체념한 태도.

전형적인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랭커의 모습.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자네 아들은 이제 인재니까.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인재."

"...길드원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겨우 그 정도일까. 최소 임원급. 핵심... 그래, 사내 재무부 책임자 자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예?"

물론,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설득과 영입에 성공할 때를 전제로 한 가정이었으니까.

"정말이야. 인성에 뭐, 문제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를 만회할 만한 실력이 있거든."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만, 제 아들은 재정 관리는 커녕 회사 생활을 한 적조차 없습니다."

"괜찮네. 도와줄 사람이 있지 않겠나?"

"..."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만한 함의였다.

"전문가들이 붙어서 도와준다면, 훌륭한 재무부장까지는 아니어도... 괜찮은 재무부 임원은 될 수 있겠지."

"....전문가의 도움을 바라십니까."

이준범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길드는 앞으로 커질 걸세. 계속. 독점적인 초능력자들의 집단이니까."

"저는."

"거기에 첫 반석을 놓는다면, 아주 큰 의미가 있지 않겠나? 도움도 되고 말이야. 자네에게도, 자네 아들에게도."

한우현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들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나?"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사람 노릇만 할 수 있기를 바라지요."

"걱정 마라. 내가 누구로 보이나?"

한우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플레이어들. 초능력자들. 죄다 자네 아들이랑 별로 다르지 않은 것들이야. 그리고 나부터도 그렇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니까, 그들에 대해서는 내가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어떻게 다룰지, 어떻게 가르칠지, 어떻게 이끌지."

이준범이 티 나게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꿀렁였다.

"나만한 전문가가 없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한우현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은밀히 포스를 운용했다.

그의 대뇌 피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발산.

기대감, 혼란, 걱정, 다시 기대감···

마침내, 안도.

아마도, 그 짧은 시간 안에 그의 말이 진짜일지, 아들을 도울 수 있을지, 나아가 아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지.

최종적으로는 그 말대로, '사람 노릇을 하게 할 수 있을지'.

그를 생각했겠지.

"어렵게 생각할 게 있나? 자네도 나한테 원하는 게 있고, 나도 자네한테 원하는 게 있는데."

한 가지 난점은, 만약 이준범이 대쪽같은 원칙주의자일 때.

자식에 대한 애정보다 스스로의 직위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큰 사람일 때다.

하지만, 그래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준범의 감정은 꿋꿋함보다는 우울함에 젖어있었으니까.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속으로 미소 지었다. 완전한 협조... 아니, 항복의 의사였으니까.

"아주 많은 것. 재정, 투자, 관리."

"그걸 다 도와 드리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 예상이 맞았다.

이준범은 자식을 위해서는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우현은 손가락을 마주잡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길드에 '공식적으로' 자리도 필요하겠군. 사외이사 자리로 시작할까?"

"그건 현행 법상으로는 무리입니다만··· 잠시만요."

그가 곰곰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무려 5분이나.

그리고 눈을 떴다.

"이사가 아니라··· 투자 자문 역으로 들어가지요. 그게 더 편의를 봐드리기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언제든지 편히 찾아올 수 있겠군."

"인사라던가, 기획 쪽이야 혼자서도 하실 수 있을 것 같지만... 재무 쪽은 구하시기 힘드시겠죠. 어차피 저 혼자서는 힘듭니다. 사람도 더 알아 봐 드리겠습니다."

"호오."

"플레이어 출신이라면 더욱 믿을 만 하시겠죠. 폐인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워낙 유명한 게임이니... 똑똑한 친구들도 플레이어가 없진 않을 겁니다."

"좋군. 좋아."

생각보다.

이준범은 똑똑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나도 그 노력에 보답하도록 하지. 최선을 다해서 말이야."

"...금방 볼 수 있겠습니까?"

"자네 아들? 걱정 마게."

한우현이 손가락을 폈다.

"빠른 시일 내로 좋은 소식 가져오지. 너무 큰 사고를 치기 전에 말이야."

"좋습니다. 아들이 다닐 회사이니··· 본격적으로 설계부터 도와드리지요."

-드르륵

이준범이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민간 군사 기업이라고 하셨지만 사실상 군벌이나 다름 없고요. 자본은 아주 많은 양의 금괴로 보유 중이시고. 해외 지부는 중국과 인도네시아."

"핵심만 잘 짚었군."

"성장 방향에 대해서도 대충 윤곽이 잡힙니다. 아는 친구들에게 포트폴리오를 짜 오게 하겠습니다. 금은 보존하면서 동시에 국내와 해외의 투자를 유치하는 쪽으로요."

"좋아. 그 사안은 곧 결과물을 기대하지."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다."

정부가 기업과 돈을 목줄로 삼아 통제하려던 감시자.

하지만 한우현에게 그리도 황금이 많고, 통찰력과 계획성이 뛰어남을 몰랐을 것이다.

이리도 좋은 인재를, 역으로 먹여 주다니. 고마울 뿐이었다.

"한은 상부에는 어떻게 말할까요?"

"내가 돈 지랄을 하려 하길래, 적당히 말리고 자금을 묶으려 했다고 올려."

"...제 생각과 비슷하군요. 그리 하지요. 감시를 위해 투자 자문으로 들어간다고도 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꼬리는 밟히지 않게 조심하도록."

"물론입니다."

"좋아. 이만 가 보지."

"...한우현님."

그 떨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지. 걱정 말게."

의외의 자리에서, 투자와 금융에 대한 전문가를.

그것도 아주 믿을만 한 자를 영입할 수 있었다.

이로서 한우현이 세우는 절대적인 지배의 계획.

그 첫 발걸음이 성공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난 내 사람을 정말로 아끼거든. 후회하지 않게 해 주지."

"...믿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세현과 이준범 모두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쾅

한우현은 얼굴을 활짝 핀 채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하, 당신 정말로 좋으신 분이군요! 이대로 하지요!"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친 은행 직원들에게도 웃음을 지어주었다.

"다들 아주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도 계속 오지요! 이건 팁입니다!"

순수하다 못해 바보같은 졸부의 목소리로.

-촤악

5만원권을 촤악 뿌렸다.

"예, 예?"

"저, 저희는 이런 팁은 받지 않습니다!"

"하하, 사양하지 마시죠! 저 부자입니다!"

그 뒤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이준범과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한우현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퍼포먼스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은 정책위 소속인 이준범이 한우현과 붙어먹었다?

이런 정보는 그리 오래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다.

금융 사회에서만 오래 지낸 이준범은 자기가 잘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국방부에서 그 정보부와도 오래도록 일한 한우현은 그렇지 않음을 잘 안다.

그렇기에 기만한다.

"나 무시하나? 받아! 돈은 많으니까!"

"예, 예? 그게 아니라···"

"어허, 눈 안 깔아! 감사하다고 해야지!"

"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아주 마음에 들어!"

기만책에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정보가 통제되고 있으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비밀을 감추고자 할 때.

가장 쉬운 것은 바로 '다른 정보를 보임으로써 진짜 정보를 감추는 것'이다.

"알아서 받들어 모시라고! 내가 길드장이다!"

"아이고,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튀어나온 이준범이 손을 싹싹 비비며 비굴하게 웃음지었다.

그러니까, 멍청한 졸부.

막 얻은 힘에 취한 유치한 깡패 대장의 모습으로서.

이준범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정보를 흘릴 은행 평직원들.

그들의 눈을 가린다.

"알아서 잘 해!"

물론 기초적인 혼란책에 불과하다. 아주 큰 효과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대통령이요 국회의원, 재벌들 같은 사회 핵심 지도층들은.

한우현이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딸랑

하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속이는 것은 잠깐이면 충분하니까.

"흠··· 1시라."

문을 열고 나온 한우현은 계획을 점검했다.

"조금 늦었군."

자본과 투자에 대한 밑그림은 아주 훌륭하게 깔렸다.

그것도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빌런 플레이어의 가족 덕분에, 계획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이제 본격적으로 길드의 회사 구조를 그리고, 세울 때다.

"지부장 둘 모두 이런 것에 대해 그리 잘 아는 친구는 아니겠지만···"

괜찮다. 어차피 차정훈과 김재승 모두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실질적으로 한국 지부를 통제할 것은 한우현이다.

"논현으로··· 구태여 오래 걸릴 필요는 없지."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요 길드원에게 날려 호출했다. 모일 곳은 차정훈의 피시방.

-[빛의 발걸음]

양복에까지 세심하게 포스를 불어넣어 강화한 한우현은 발을 박찼다.

세찬 바람과 함께 그의 몸이 하늘로 도약했다.

플레이어의 존재는 이제 전 세계에 공인되었다.

이제,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

30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