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1)
"...야, 뉴스 봤냐."
"청와대 뉴스는 없던데."
"그거 말고, 판교에 게임사 본사 붕괴한 거. 디렉터도 죽었다는데."
"...서버도 박살 났겠네."
"길드장이 그것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뭔 미친... 야, 우리랑 청와대 구하는 거만 해도 바빴는데. 그거 포기하고 게임 회사나 지켜야 했다는 거냐?"
"하긴, 그런가..."
"아무튼, 이제 진짜 유튜버로는 못 돌아가겠네. 게임도 서비스 종료니까..."
"..."
대화를 나누던 차정훈과 김재승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 둘은 피시방에 있었다.
정확히는 피시방 안, 차정훈의 방송 스튜디오.
유튜브 촬영용으로 쓰는 곳이기에, 꽤나 널찍한 공간이었다.
"야."
"왜."
"넌 어떻게 생각하냐?"
"...몰라. 모르지."
"하··· 나도 모르겠다."
둘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다기 보다는··· 해야지."
"난 솔직히 아직도 고민이다."
"그만두겠다고?"
"..."
"그만두면, 가만 두겠냐?"
"그렇겠지···?"
"무엇보다, 그래도 길드에 있는 게 나아··· 진짜 뒤질 뻔 했잖아."
"하···"
길드.
얼떨결에 가입해 버린 단체.
그것도 그냥 길드원이 아니라, 무려 한국 지부장이라는 거창한 직위로.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지랄을 할 줄은 몰랐지."
"북한에 테러한 놈이 길드 소속일 줄 누군 알았냐고."
처음에는 말 그대로 플레이어들의 모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너무나 강한 플레이어들이 뭉치고 교류하기 위한 모임.
그로써 안전도 도모하고, 사회적인 의견이나 여론 같은 것도 한 목소리로 낼 수 있겠다고만 생각했다.
곧바로 방송국에 갈 때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해외 플레이어들과 이미 조율된 사안이라기에 에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가 아사리판이라는데 단체 선포 정도는 필요해 보이기도 했고.
-그 책임을 물어, 국무위원장을 처형한다!
-잠깐만! 난 그런 적이 없···
그 생각은 북한 지부장이 보란 듯이 이북의 독재자를 잘 다져진 고기덩어리로 만들자 싹 날아갔다.
중국 주석과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공포에 절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플레이어는··· 존재 자체가 인간의 형상을 한 전략급 병기다.
-그럼 길드는, 당연히 무력 단체지.
다시금 둘 모두 현실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현실에 강림한 초능력자 플레이어들은 모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고레벨 유저들이다.
정공, 면제, 쌀먹, 주작, 분탕, 패륜···
무수한 악명으로 뒤덮인 인성의 플레이어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강하고 초월적인 힘을 얻어버린 게임 폐인들.
그러니까, 당연히 길드는.
평범한 단체가 될 수 없었다.
-잠깐, 잠깐만···
-청와대로 간다.
-...
거기에 한 술 더 떠, 다른 플레이어들이 청와대에 쳐 들어가 대통령을 고문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로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 해도 벅찼다.
-[신성한 땅]!
-...
-제압 끝냈다. 옮겨라!
길드장이 강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가 너무나도 강렬했으니까.
그 추측은 그가 보여준 모습들에서 확고히 증명되었다.
-저건 스킬이 아니잖아.
-이건 스킬이기는 한데··· 저렇게 쓸 수가 있어?
-...따라갈 수가 없어. 이해가 안 돼.
-대체 뭐하던 인간이었던 거야?
-만렙이면, 밥 먹고 게임만 했을 텐데...
-어떻게 저게 10년을 넘게 하루 종일 게임만 한 폐인이야?
단순한 무력의 강함을 논하기 이전에, 그 능력의 완숙한 활용과 상황을 판단하는 안목, 정신병자 랭커들마저 무릎 꿇리는 압도적인 카리스마까지.
길드장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도저히 그 앞에서, 자기는 못하겠다고 말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길드에서 탈퇴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맞서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해 보자고."
"씨발, 난 면젠데···"
"뭐, 군대를 가야만 잘 싸우는 건 아니잖아."
"말이 회사지, 하는 꼬라지를 보면 군대보다 더 살벌한데."
"피시방 운영이랑 좀 비슷할까? 나 나름 직원도 많이 써 봤는데."
"비슷하겠냐?"
차정훈의 농담에 김재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풋."
"큭."
하지만 덕분에 분위기는 약간 풀릴 수 있었다.
"...그래, 해 봐야지."
"좋게 생각하자. 이거, 정말 대단한 자리라고."
"대단한 자리면 뭐하냐. 우리가 그 일을 잘 해야지."
"뭐, 지금은 아직 어려운 건 안 시키잖아."
덕분에 사업 이야기에 집중 할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 바빠질 테니까, 준비나 하자고. 알아 보란 건 좀 알아봤어?"
"어. 다행히 잠실 쪽에 괜찮은 건물이 하나 있긴 하더라."
"회사용으로? 어디··· 괜찮네. 큼직하고, 교통도 좋고. 계약은 전세? 월세?"
"그 쪽에서 제시한 건 월세기는 한데··· 길드장이 돈은 많다고 하니. 매매도 생각해 봐야겠어."
"회사 구조는 어떠려나···"
"하긴 그것도 맞춰 봐야지. 넌? 행정 업무 맡을 애들 알아본다며."
"일단 좀 오래 같이 일한 피방 알바들 중에 괜찮은 애들 뽑아놨어."
"보자. 오, 레벨도 꽤 높네. 근데 정상인 맞지?"
"칼부림은 안 할 애들이야."
"아니, 그게 기준이냐···"
시시덕대며 길드장이 내린 업무들을 점검했다.
막 회사를 세우기 위해 필요했던 일들.
그것마저 모두 점검을 마치고선, 뭔가 떠올랐다는 듯.
김재승이 한 마디를 던졌다.
"근데 말이야. 하나 이상한 게 있어."
"응?"
"한우현. 길드장 말이야. 원래도 유명한 인간이었던데."
"아···"
차정훈이 그 말에 침묵했다.
"좀, 이상하지 않냐."
"...굳이 의심 할 필요가 있을까."
"그거 보면 진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신병자 수준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 부적응자 수준의 폐인이던데."
"과장이 있었겠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누구 하나 잡아서 조리돌림 하는 거 한 두 번 봐?"
차정훈이 그렇게 김재승의 의문을 일축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그 의문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한우현 이 찐따새끼 와꾸 개레전드네 ㅋㅋㅋㅋㅋ
-불안장애, 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쿼드라플 크라운 ㅋㅋㅋㅋ
-아서 <- 솔직히 나 같아도 학교 다닐 때 옆에 있었으면 바로 담당일진 마려울 듯 ㅋㅋㅋ
-어떻게 사람이 하루에 사냥 20시간씩하면서 매일 정신병약 호르릅 ㅋㅋㅋ
-한우현 이새낀 뭔 깡으로 지 실명 아이디로 인터넷에서 나댐? ㅋㅋㅋㅋ
-사회 부적응자시래잖아 ㅋㅋㅋㅋ 능지도 그런가보지 ㅋㅋㅋㅋ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 매일 같이 비웃음 당하는 탱커 직업.
성기사의 대표이자 사실상 유일한 랭커.
그에 대해 보기 좋게 정리해서 몇 달에 한 번씩 조리돌림 당하는 글.
차정훈과 김재승 모두 한우현의 캐릭터인 아서에 대해 알아보려 하다가, 그 글을 보았다.
"..."
"..."
한우현의 현실에서의 사진과, 현실에서의 친구들의 증언들까지 어떻게 모았는지.
인간의 악의가 실로 강렬히 느껴지는 글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과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한우현의 과거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글들이었다.
"플레이어가 되면, 정신도 바뀌나?"
"우린 그대론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뭐라고 물어보나?
인터넷에 당신 신상 찾아보니까 정신병자 폐인으로 유명하시던데요? 해명 좀 해 보시죠?
그 무서운 길드장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닌 것 같았다.
-똑똑
"아, 네! 누구십니까?"
"나다."
그래서 둘 모두,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마른 입술을 씹고 있다가.
노크 소리가 들리자 황금히 일어섰다.
불필요한 의문을 저 멀리 던져버리기 위해.
"들어오십시오! ···어?"
"당신들은 어제?"
들어오는 길드장과, 다른 이들을 보며 차정훈과 김재승은 침을 삼켰다.
"어···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
온 몸과 머리에 붉은 빛이 맴도는 용기사.
샐쭉해 보이는 표정으로 황토빛 눈과 머리칼을 빛내는 풍수사.
마지막으로, 온 몸에 검은 후드와 천을 칭칭 두르고 검은 복면까지 쓴 은발의 암살자.
다들 이미 본 사람들이었지만.
그 첫 만남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어색하게 눈알을 굴릴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다들 봤겠지만, 한 번씩 다시 인사 나누지."
어색한 분위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한우현이 입을 열고 화두를 주도했다.
"용기사 권승환. 풍수사 나유나. 암살자 홍세희. 추적귀 차정훈. 포격수 김재승. 성기사 한우현."
"이상이 지금의 길드 임원진 내정자들이다."
"왜 부르나 했더니, 임원진이라고?"
나유나가 당황스럽다는 듯 답했다.
"질문은 다 듣고 나서."
"하··· 그래. 들어나 보지."
"흠···"
"뭐, 뭐? 왜?"
"말이 짧군?"
"너, 너도 반말 하잖아···요?"
"..."
"...이익···"
한우현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기초적인 길드 구조를 말해주지. 우선, 하나부터 짚고 넘어간다."
보드 마커를 들고 크게 네모를 그렸다.
"길드는 명목상 회사다. 모든 플레이어들을 고용할 기업이지."
그 위에다가 거대한 칼을 그렸다.
"하지만 우리는 공식적으로 정부에게서 플레이어에 대한 수사권, 처벌권과 작전권을 위임 받았다."
"그랬죠···"
"그러니까,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일은 사실상 군대와 그리 다르지 않다."
차정훈과 김재승이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히는 군대와 경찰을 합친 사조직. 그래, 헌병 경찰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군."
둘의 예상대로.
길드의 본질은 군벌이라는 것을, 길드장이 직접 확인 사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는 말도록. 초반에는 플레이어들을 통제하겠지만··· 나중에는 다를 테니."
"다르다고?"
권승환이 의문을 제시했다.
"길드, 플레이어의 통제를 위해 세운 것 아니었나?"
"그러게. 다른 게 있어?"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요?"
내내 침묵하던 암살자.
홍세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흠."
한우현은 말을 아꼈다.
보스 몬스터에 대해서 벌써부터 말하기에는 좀 일렀다.
최소한 회사의 구조를 확립하고, 모든 길드원들을 제대로 회사에 소속시킨 뒤.
그 때에 이르러서야 전 세계 서버 랭커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라면서 준비를 시키려 했지.
물론, 지금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꽁꽁 숨겨야 할 정보는 아니었다.
"뭐, 좀 다르지만 비슷하다."
그래서 대충 주워 섬기듯이 답을 해 주기는 했다.
"네? 비슷하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질서 지킨다며, 길드장 씨? 전쟁? 이야, 반란군 납셨네."
"조용."
경악한 차정훈과 빈정거리는 나유나를 말 한 마디로 침묵시켰다.
"오늘은 길드 설립에 대해서만 말하지. 너희들의 의문에 대해서는 차후에 계속 회의를 하며 해소해주도록 하겠다."
"아니, 이건 짚고 넘어가야지. 우리가 뭣 때문에···"
"저, 전 전쟁은 못 합니다! 면제라고요! 면제!"
"야, 여기 면제가 너만 있냐?"
"씨발, 면제겜 티 내지 말고..."
겨우 침묵시켰더니, 다시 시끄러워졌다.
한우현은 혀를 찼다.
쯧.
괜히 화제가 이 쪽으로 튀었다.
-쾅
책상을 내리찍었다.
"게임이 현실이 되었다. 그런데 왜, 플레이어만 튀어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예?"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 PVP만 있는 게임이던가? 다른 컨텐츠들도 아주 많지, 안 그래?"
"...!"
"...?!"
결국 한우현은 일주일 후, 전 세계에 생성될 던전과 보스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대충 추측 할 만한 단서를 주었다.
"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유추일 뿐이니."
그리고 살짝 발을 뺐다.
사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컨텐츠 대부분은 그리 위험하고 흉악한 것들이 없으니.
플레이어들이 조금만 머리를 굴린다면, 가장 걱정스럽고 위협이 될 컨텐츠인 보스 몬스터에 대해 생각이 닿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에 대한 걱정을 굳이 너무 크게 부채질 할 필요는 없다.
길드 설립 첫 날.
그 확립에만 집중해야 할 날이니.
"...알겠습니다, 길드장."
"하··· 진짜, 뭐 자기는 다 안다 이거지."
다행히, 첫 만남부터 모두에게 보였던 모습.
초월적인 신위와 무엇이든지 대비한다는 그 믿음직한 행태가.
일단은 길드원들을 납득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강제로 무릎꿇렸던 이들마저도.
"그럼, 각자 맡을 자리부터 말 해 주도록 하지."
31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2)
모두가 한우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 그 수장의 입을 본다.
"차정훈, 김재승. 너희는 말했듯이 한국 지부장이다."
그의 눈은 무감하다.
응당 해야 할 일, 자신이 원래 앉았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태도.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을 주지. 길드 설립 자체에 신경써라. 그리고 당분간은 새로운 길드원들을 맞이하고 그들의 정보를 정리한다. 즉, 인사팀의 업무를 도와라."
그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기에, 모두들 당연히 그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길드는 크게 인사부, 재무부, 방위부, 정보부, 작전부, 홍보부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래서, 그나마 몇 번 반항심을 보였던 나유나마저도.
저 눈을 한 길드장 앞에서는 더는 쓴 소리를 내뱉을 수 없다.
"권승환. 너는 인사부장이다. 훈련과 인사 업무를 맡는다."
"뭐? 나?"
"이력은 잘 알고 있다. 육군훈련소 출신 부사관이지. 부상으로 제대했었고. 잘 하리라 믿는다."
"난 그런 걸 말 한 적이 없는데?!"
"간단하다. 신입 길드원들을 신병들이라고 생각해라."
"아니···"
"자세한 건 서면으로 보내주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권승환의 입을 닫게 했다.
괜찮았다.
권승환은 믿을 만 한 인물이었으니까.
회귀 전에는 한우현이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죽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한우현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강남구 내전의 중심부에 있었던, 몇 안 되는 생존자.
그 끔찍한 사건이 큰 충격이 되었는지, 그는 플레이어들이 더 이상 통제불능으로 날뛰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었다.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영주.
폭군 권승환의 탄생이었다.
-지금 이 시간부로 개인 활동을 하는 플레이어들은 무조건 처형이다!
그는 함께 살아남은 플레이어들과 함께 서울 연합을 선포했다.
-질서 유지 위반, 사형!
-자의적인 스킬 사용, 사형!
-사형!
-사형!
-사형!
그러나 그 지배가 너무나도 강압적이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정부와 지자체들은 그 폭압적이고도 공격적인 조치로 입을 틀어 막을 수 있었다.
-이 좆 같은 새끼가, 지만 고 레벨이야?
-강남구 내전에서 살아 남은 게 훈장이야?
-전투 경험 좀 있다고 칼 안 들어가나?
플레이어들에게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 내전의 결과에 충격을 받고 통제를 받아들이려 했던 플레이어들도, 점차 그 잔악함에 치를 떨며 등을 돌렸다.
-기어코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냐? 이대로면 한국은, 아니 세계 전체가 망하는데!
-니 때문에 먼저 망하겠다 애미 뒤진 새끼.
-죽어, 좆 병신 같은 새끼야!
-대인전 태세로!
-크악!
-진형 전환! 마법사들은 제 3 번 진형, 전사들은 제 7 번 진형!
-씨발, 부활하면 그만이야!
-컥!
-이러지 마라...! 이러면 진짜 망해...
-그 말은 니가 죽인 플레이어랑 일반인들한테나 하지 그래!
-안... 돼...
결국 권승환은 빌런 플레이어들에 의해 토벌 당했다.
그 토벌은 한국의 사회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권승환이 억지로 틀어막으며 위태로이 유지하려 했던 행정, 입법, 사법부터 해서 모든 대한민국의 체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사관 출신의 밀리터리 덕후였던 그가 세계 최초로 만들었던, 다수의 고레벨 플레이어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가정한 전투 교리.
직접 강남구 내전을 목도하고 기억했던 생존자가 한국군의 현대 전투 교리와 게임 스킬 트리를 결합해 만든 것.
그것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라. 난 널 믿는다."
"씨발, 내가 못 믿겠는데요···? 애초에 나 육사 출신도 아닌데 고졸 부사관이 뭘 안다고?"
"그것도 해결 해 주지. 일단 이거부터 공부해라."
한우현은 책자를 내밀었다.
이미 그는 달달 외워버렸기에 고스란히 필사 할 수 있었던 미래의 훈련 교리를.
권승환이 처음 만들었던 그것의 수준은 어설프고, 저열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연구를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나아가 그 전투 교리는 미 국방부에 의해 플레이어 훈련법과 전투 교리로 발전되었다.
"플레이어 전투 교리Player Military Doctrine···? 게임 가이드북이야?"
"그래. 내가 직접 만들었지."
"뭐, 나도 모든 직업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없는 것보다야. 근데 인벤이나 나무위키가 더 낫지 않나?"
피식 웃고선 그를 대충 촤라락 넘기던 권승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씨, 씨발. 이게 뭐야?"
"아, 참고로 지금은 바빠서 권승환부터 줬지만."
"말도 안 돼. 왜, 아니 어떻게 이런 게 있는 건데?"
그 반응을 무시하고서 타다닥 책자를 뿌렸다.
"너희들도 모두 배워야 한다. 아니, 모든 길드원이 배워야 한다. 물론 너희들에게는 그리 급하지 않으니, 여유를 주지."
"미친, 미친, 미친···"
권승환이 혀를 꼬며 코를 박아대고 책자를 미친 듯이 탐독했다.
그를 본 김재승, 차정훈, 홍세희, 나유나도 호기심이 든 듯 손을 뻗었다.
"..."
"..."
그냥 게임 가이드북을 읽으려는 모양새였던 그들의 표정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섭게 굳어졌다.
"...뭐죠 이게?"
"뭔 소리야?"
여자인 나유나와 홍세희는 아예 이해를 못 했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야전 교본Field Manual이잖아."
"...이거, 어디서 만든 겁니까? 아니, 아니지."
"이런 건 존재할 수 없는데. 말이 안 되잖아요."
차정훈과 김재승은 면제와 공익이기는 했어도, 현역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겉 핥기로나마 그 의미를 이해했다.
"세상이 게임이 된 지 겨우 하루가 지났어요. 그런데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전투를 상정한 교본이지."
한우현은 그의 의문을 끊었다.
"내가 만들었다. 밤 새서."
"...? 무슨 말도 안 되는. 길드장이 아무리 천재라도."
권승환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걸 어떻게 개인이 만들어? 민간인이? 불가능해. 길드장··· 육사 출신이야?"
"난 현부심이다."
"..."
다행히, 그 핑계가 있었다.
"말했지만, 난 게임을 아주 오래 했다. 거의 서비스 시작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했을 정도니까."
책자를 다시 집어들었다.
핵심은 모두 담겨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모든 내용이 담기지는 않은 전투 교리를.
모든 내용을 다 넣기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아마도 내 신상은 모두들 알고 있을 테니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만··· 뭐, 내 학창 시절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지."
어차피 교리서만 본다고 해서 진짜 제대로 된 플레이어 전력이 될 수는 없다.
실전에 가까운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에 직접 관여하며, 전체 교리서를 제대로 집필할 예정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노트를 끄적이는 시늉을 한다.
"그 때마다 난 망상을 했다. 아, 내가 게임 캐릭터가 된다면 어떨까. 참 좋을 텐데. 일진들 죄다 두들겨 패고, 참교육 할 수 있을 텐데."
"거기서 한 층 나아갔지. 다른 애들도 게임 캐릭터 능력을 얻으면? 게임 캐릭터들끼리 현실에서 싸운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은, 우리도 안 해 본 건 아니긴 한데···"
그 유치한 소리에 권승환이 공감 해 주었다.
"그렇게 만든 내 중2병 노트다. 내가 잘 싸울 수 있었던 이유도 그거지."
"...길드장 직업은 성기사잖아요."
"그런데?"
"여긴 46개 직업이 다 있는데요?"
"이그드라실 연맹 풀 효과를 받는 건 기본 아닌가?"
"아, 그건···"
간단히 차정훈의 의문을 분쇄했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은 연맹이라는 참으로 극악무도한 시스템이 있다.
부캐를 많이 키울 수록, 자기가 보유한 모든 캐릭터의 기초 능력치가 증가하는 시스템.
심지어 그 캐릭터의 직업마다 그 보정치가 달랐다.
그래서 제대로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직업의 부캐를 최소 레벨 150까지는 키워야 했다.
-46 캐릭터 150레벨을 찍으라니, 이건 미친 짓이야.
-육성템에만 100만원이라니, 이런 게임이 어딨어
-하지만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똑같이 사냥 하는 거, 골드 더 먹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난 새로운 왕! 날 원하는 이그드라실 월드!
-미친 새낀가 별 병신 같은 소리를.
-이딴 게임에 부캐만 40개씩 처 만들며 인생을 낭비하라고? 겜 접는다 병신들;;
당연히 그런 미친 육성을 하는 뉴비들은 거의 없었기에, 게임에 새로운 유입은 거의 없었지만.
효과적인 매몰 수단이었기에, 랭커들을 효율적으로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난 랭커니까, 당연히 46개 모두 250까지는 찍었지. 전 직업에 대해 그 정도 이해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도 250렙 부캐는 30개 뿐인데?"
"미친. 무슨 인생을 산 거야?"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한우현은 다시 책자를 펼쳤다.
"내가 중2병 노트라고는 했지만, 어젯밤에 현실적으로 아주 잘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쓸 만 할 거다. 모르는 게 있으면 나랑 권승환한테 물어보면서, 배우도록."
"아니, 나도 지금 막 배우고 있는데 왜 나한테 물어봐..."
"다른 길드원한테도?"
"그래. 길드원이라면 어차피 다 알아야 하는 내용이다."
"하···"
다들 완전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우현이 나름대로 군사 용어들을 대중적인 용어로 윤색해가며 기초 교본을 수정했지만.
누가 봐도 중2병 노트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실전성이 짙어 보이는 교리였으니까.
하지만 한우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드러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일일이 죄다 태클을 걸기에는 너무 많을 정도로.
그래서 그들도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재무부는··· 지금은 공석이지만, 내정자가 있고."
"누굽니까?"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니니, 지금 확정 짓기는 어렵군. 하지만 너희도 아는 인물일 거다."
라니아는 꽤나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이었다.
몇 안 되는 이그드라실 여성 랭커로. 그를 이용해 상당히 많은 후원금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그 행태가 너무 심해, 점차 반발을 사며 게임 폐인들이 과거 행적을 파헤쳐 공격하려 했다.
그 결과, 과거 물통 사기를 치고 다녔던 것이 드러나자 잠적해버렸다.
하지만 그 레벨과 능력치 하나는 확실했으니, 모든 플레이어들이 그를 보고서는 놀란다 해도 못 받아들일 것 까지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 아니, 그에 대한 가장 큰 약점을 이미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니깐.
물론 재무부장으로 반드시 라니아-이세현이 내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준범은 아무리 얼굴마담이라고 해도 자기 아들이 부장 급 직위에 앉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면 그가 알아서 쓸만한 이들을 물어올 것이다.
"뭐,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한우현은 나유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 나유나가 뭔가 찔린다는 듯이 손끝을 살짝 떨었다.
"뭐, 뭘 봐? ···요?"
"나유나. 너는 방위부장이다."
"...뭐하는 건데 그게? ···요?"
"너한테 아주 잘 맞을 일. 플레이어 범죄를 수사하고 체포하는 일이다."
"수사? 체포?"
그녀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비틀렸다.
"어제의 너 같은 빌런 플레이어들. 우리에 반항하는 놈들. 그들을 강제로 길드에 가입 시킬 부서지."
"...뭐야, 그거 엄청 중요한 자리 아니야?"
나유나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중요하다 뿐인가? 내가 어제 말 한 즉결 처분권. 그를 가장 잘 행사할 수 있는 곳인데."
"어?"
"반항하는 놈들은 죽여도 좋다. 너는 하나만 생각해라."
한우현의 눈에 스산한 빛이 깃들었다.
"어차피 사제 플레이어에게는 [부활] 스킬도 있다. 나중에 살리면 그만이지. 너는 최대한 악랄하고도 잔인하게, 길드에 반항하는 놈들을 억압해라."
"...너."
그 말에 그녀가 순간 혼란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좋지 않나? 네가 바라던 일이잖나."
"아니, 누굴 미친 년으로 알아···"
미친 년 맞잖아. 사람 팔 다리를 뽑아서 전시하는 게 취미인 사람이 미친 년이 아니냐?
한우현은 순간 그 말을 그냥 해 버릴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참았다.
"...솔직히, 좀 좆 같았는데."
"뭐, 우리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다는 건 나도 이해한다."
한우현이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 대해 잘 안다. 무슨 일을 시켜야 너희의 적성에 맞을지, 너희가 잘 할지도 말이다."
"난 너 처음 보는데··· 애초에 게임에서도 우리 만난 적 없잖아."
"그래서, 하기 싫다는 거냐?"
"..."
나유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일이랑은 좀 달라서 그래."
"하지만, 더 마음에는 들겠지."
"...에휴, 어차피 싫다고 할 상황도 아닌 거 같고."
한숨을 쉬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 그런데 나 혼자?"
"어제 있던 네 부하들. 적당히 밑에 들여라."
"걔들은 부하 아닌데··· 그냥 우연히 모인 거라고."
나유나의 목소리에서 이제 반항심이 거의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든 것이리라.
"상관 없다. 어차피 너랑 비슷한 놈들이니 잘 맞겠지."
"하, 알겠어."
"..."
"...요."
뭐, 반말을 찍찍 싸제끼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 줄 만 했다.
일만 잘 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다음. 홍세희. 너는 정보부장이다."
은발에 검은 후드를 걸친 암살자. 내내 말이 없던 이.
그녀를 가리켰다.
"...네."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녀와는 다르게, 반발한 이는 따로 있었다. 김재승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하마터면 나도 넘어갈 뻔 했네! 쟤가 왜 여깄어요?!"
아주 타당한 반발이었다.
"아, 설명을 해 주는 것을 잊었군."
32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3)
"왜 여깄기는. 소중한 길드의 간부니까."
김재승이 게거품을 물었다.
"우리 죽이려 한 새끼잖아! 씨발 가입은 그렇다 치고 왜 내 앞에 있는데!"
"아, 그, 저, 그···"
솔직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기에.
그 말에 홍세희가 입을 어물거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호르릅
그 반응들을 무시하고 백화점의 식품관에서 산 고급 당일 수확 국산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진한 당도와 산도가 시판 주스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그의 혀에 안겨주었다.
-꿀꺽
음미를 마친 한우현은 씩씩대는 김재승을 다시 바라보았다.
"오해가 좀 있었다. 오늘 오는 길에 대화를 좀 나눴지."
정확히는, 대화라기보다는 조련에 가까웠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차정훈 너를 굉장히 많이 좋아한다는데?"
"...아, 누구신지 알 것 같은데."
그 말에 차정훈이 떨떠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안다고?"
"그, 악질···"
"...설마 그 스토커?"
"스, 스토커 아니거든···요···"
"아니 당신 경찰이 주의 주고서는 안 오기로 했다면서요...?"
"조용.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한우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린 둘을 진정시켰다.
"일단, 사과부터 하지. 홍세희."
"저, 그, 그러니까아···"
그녀가 말을 더듬다가, 갑작스레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 정말 죄송합니다아··· 제가 미쳤었나 봐요오···"
"내가 싸우는 와중에 도발 스킬을 사용했던 건 알지?"
"그···랬나?"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좀 불필요하게 흥분했었던 모양이다. 이건 내 실수다. 인정하지."
한우현이 관대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하나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다.
"지, 진짜 반성하고 있어요오···"
"아니,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실, 나도 어지간하면 굳이 마주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같이 일을 해야 했으니.
본격적으로 길드를 세우기 전에 관계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절대 은신] 스킬이 있는 유일한 두 직업이 [암살자]와 [암흑술사].
즉, 다른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절대적인 정보와 선공의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들.
그 누구보다 정보부에 걸맞는 인재.
다른 암흑술사와 암살자 랭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나서 대충 포스만 느껴 보아도.
레벨과 관계 없이 그 재능 자체가 홍세희에 비하면 부족했다.
무엇보다 홍세희는 비록 정신병자 스토커기는 했어도, 그 능력 자체가 미래에서는 확실히 검증된 이였다.
세계 최고 레벨의 암살자 답게도, 그녀는 강남구 내전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스스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광적으로 좋아했던 차정훈이 그녀 때문에 죽었다는 현실을.
그래서 제대로 미쳤다.
-니가 우리 정훈이 죽였지!
-씨발, 뭐야!
-암살왕이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녔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유명해진 플레이어가 있다면, 죄다 찾아가 [암살검]을 쑤셔 댔다.
-[어둠 속으로]!
-씨발, 눈앞에서 놓쳤어!
-이 미친 년이 혼자 다른 스킬 쓰나?
-아무리 [암살자]라도 은신 성능이 말이 안 되잖아!
당연히 온 세상에 적을 만드는 미친 짓이었지만, 초월적인 수준의 은신 스킬 운용에 대한 재능으로 살아남았다.
회귀 전, 그녀에게 공격을 당하기 전에 그것을 감지 할 수 있었던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한우현과 라일리 그레인저마저도 죽지는 않았지만, 무방비하게 선공을 허용했을 정도로.
-멈춰! 언제까지 이런 미친 짓을 할 거냐!
-저희 대화 좀 해 봐요!
-차정훈, 차정훈, 차정훈... 보고 싶어...
비유로서의 미친 년이 아니라, 정말로 뇌의 논리 구조 자체가 망가진 듯한 미친 년이었기에.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가, 언젠가부터 종적을 감췄다.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이라면 한우현이 간부 자리에까지 앉힐 이유로는 조금 부족했을 것이었다.
-습격이다!
-...암살왕? 시스템 상 최초 입장자는 우리인데? 어떻게 던전에서?
-히, 히히, 히히히, 차정훈, 차정훈...
암살왕 홍세희는 던전을 입장한 후에도 보스에게 존재를 인식 당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 한 번이었지만, 게임의 시스템을 초월하는 수준의 은신 스킬.
즉.
현실이 되어 게임과는 달라졌을 던전과 보스의 정보.
그것을 아무런 희생 없이 조사하고 정찰할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뛰어난 [암살자]다. 정확히는, 모든 도적계 플레이어 중에서도 그 능력이 독보적이지."
"그, 그, 그 정도는 아닌···데에···"
인생에서 처음 듣는 칭찬인 듯 그녀가 손가락을 비비 꼬았다.
"정말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하고, 능력도 있으니 이만 용서해주지 그러나."
"아니··· 하··· 아무리 그래도···"
"에휴··· 야, 어쩔 수 있냐."
"정말로 그게 길드장 뜻입니까?"
김재승이 여전히 불편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가 풀었지만.
끝까지 반발하지는 못 했다.
"어차피 죄질로 따지면, 우리한테 공격 미수한 것보다 청와대 테러한 게 더 크지."
"뭐야, 가만 있는 나는 왜?"
"넌 조용히 있어라."
"이익···"
다행히, 어찌어찌 납득은 한 모양이다. 나유나의 투정을 일축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우리 길드는 능력주의다. 과거도, 행적도··· 정말로 도저히 갱생 불가라면 모르겠지만, 어지간하면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
"예,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김재승, 차정훈. 너희도 알지 않나? 랭커라는 것들이 얼마나 정신병자들인지."
"시발, 나한테 하는 말 아닌 거 같은데 왜 찔리지···?"
권승환이 혀를 찼다.
"그만큼 잘 해 준다고 하니까, 믿어주도록."
"하··· 정 길드장의 의지가 그러하다면···"
"아, 그리고 차정훈. 너는 좀 친해지도록."
"예? 예? 저요?"
차정훈이 화들짝 놀라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같은 길드 임원진이니, 좀 친해져야 하지 않겠나?"
"헤, 헤헤··· 마, 맞아요오···"
복면을 쓰고 있음에도 너무나도 티가 나게 홍세희가 얼굴을 붉혔다.
"...이건 비즈니스적인 겁니다."
"그래, 비즈니스적으로 말이다."
"감사합니다아···!"
홍세희가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깨달았다고는 해도, 당연히 그것 만으로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우현은 그녀와 하나의 조건을 거래했다.
차정훈과 아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조건.
물론, 무조건 잘 되게 해 주겠다는 보장은 아니었지만.
"이, 이따가··· 카페라도 갈까요오···"
"아니, 일 하고 있잖아요 우리···"
"그 말이 맞다. 잡담은 다 끝나고 해라, 홍세희."
"네에···"
세계 최강의 도적을 끌어들이는 데에 그 정도야.
충분히 감안할 만 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지."
그녀의 기를 죽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홍보부. 플레이어들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부터 영업, 광고를 담당한다."
그리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여론과 언론에 대한 조작 및 공작까지.
"영업, 이미지메이킹? 그런 게 왜 필요해?"
"길드를 아무리 보기 좋게 포장해도, 결국 플레이어들의 이미지가 좋기는 힘들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플레이어로 각성한 이들의 과거.
그리고 고 레벨 플레이어일수록 그들의 끔찍한 성정과 행적이 일반인들에게 공포를 줄 수 밖에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길드는 아무리 여러가지 업무를 진행하는 회사로 포장한다 해도.
그 본질은 결국 사병 조직이었다.
"여기도 내정자가 있다. 플레이어로서가 아니라, 연예인으로서 세계적인 유명인사지."
"...설마, 아이돌 말하는 겁니까?"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 한국이 자랑하는 K-POP 스타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돌들을 영입할 필요성이 있었다.
심지어 그 직업도 유용했다. 타락귀와 사령술사.
인 게임에서 유일하게 [타락하는 정신]과 [영혼의 유혹]이라는 광역 현혹계 스킬이 있는 직업이니까.
"그래.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크림슨씽의 하나, 세븐가이즈의 랑 말하는 거 같은데."
나유나가 답했다.
면제겜이라는 악명에 걸맞지 않게도, 지나치게 오랜 역사와 추억으로 인해 유명인들도 꽤나 플레이하는 게임.
그 둘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을 플레이하는 가장 유명한 한국 유저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이 딱히 게임의 품격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우리 게임은 클린해서 크림슨씽이랑 세븐가이즈도 즐긴다고!
-그렇게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븐가이즈 랑, 크림슨씽 하나가 재미있게 하는 겜 무시? 세븐가이즈 무시? 이러면 다들 말 못합니다
-어휴.. 뭔 중학생도 아니고···
-나도 한 분탕 하는데 이 새끼들은 진짜 좆같네
-뭐 이딴 병신들이 당당하게 헛소리를 하지?
애초에 좀 유명한 연예인이 한다고 해서 좋아질 정도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 유저들의 패악질과 정신병적인 분탕이 다른 인터넷 유저들마저 고개를 젓게 할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기에 두 연예인은 대체 왜 그런 망겜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레벨도 높아, 진심으로 하기로 유명했다.
"맞다. 그 둘."
"...올까요? 솔직히 둘 모두 월드 스타라서 엄청난 부자인데다가, 아이돌 활동 중에 길드에 들어올 이유가."
"걱정 마라. 길드 활동은 결코 빡빡하지 않으니까. 사실상 들어온다기보다는, 계약을 맺는 수준을 생각하고 있다."
"예, 뭐, 길드장이 그렇다면야···"
"너희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을 둘러보았다.
"길드는 회사지만, 느슨한 조직체로 운영할 예정이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바쁘겠지만, 그 뒤로는 우리는 우리가 잘 하는 것만 하면 된다."
"우리가 잘 하는 거요? 그건···"
한우현은 대답 대신 손에 빛의 에너지를 응집시켰다.
"스킬. 전투."
"...그게 마지막 부서라는 건가?"
권승환이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까지 말한 모든 부서는 결국 마지막 부서를 보좌하기 위한 조직에 불과하다."
그가 표정을 굳혔다.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작전부. 길드의 기둥이자, 뿌리이자, 모든 것이다."
한우현이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 역할은 단 하나. 실제 작전에 동원된다."
"...플레이어 잡는 건 내 역할이라면서? ...요?"
"다르다. 방위부는 국소적인 조사와 상황에 따른 전투를 염두에 둔다. 즉, 전투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 말은 아주 많은 것을 함의했다.
방위부와의 차이점이 전투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면.
"작전부는 전략, 전술적 단위의 전투를 목표로 설정하고 수행한다."
"..."
"동시에, 상황에 따라 모든 길드원을 차출할 권한을 지닌다."
작전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심지어, 모든 길드원을 차출해? 한국의 플레이어 숫자는 수십 만에 이른다.
그냥 전투가 아니라 대규모 회전을 염두에 두는 설계.
그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250 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은 그 하나하나가 전략급 병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총길드장이지만, 동시에 작전부장도 겸임할 예정이다."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것.
레벨 290을 넘어선 플레이어들은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다.
그들은 군단급 전력을 넘어서, 일국의 전력에 비견 될 만한 존재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다. 따라서 일단은 없는 부서라 생각하도록."
한우현은 김재승, 차정훈, 권승환을 쳐다봤다.
"앞으로 한 달 정도, 내 주 업무는 인사부 산하의 훈련교관이다. 물론 다른 일도 모두 막히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호출해라."
"이, 전투 교리로?"
"그렇지. 군인 출신이니 잘 알겠지만, 훈련이라는 게 책만 보고 되는 게 아니지."
"으음··· 알았어. 훈련 기간은 어느 정도로 잡지?"
"한 달."
"한 달 안에 이걸 다 가르친다고··· 좀 빠듯하겠는데."
"걱정 마라. 내가 만든 것이니, 내가 직접 가르치는 것을 보면 생각만큼 어렵거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암만 봐도 중2병 노트는 절대 아닌데···"
고민에 빠진 권승환을 뒤로 하고,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 그런데 길드장님. 좀··· 그렇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헤실거리며 딱 붙은 홍세희를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밀어내고 있던 차정훈이었다.
"근거는 다 들었는데 말이야. 대체 우릴 뭘 믿고 이렇게 임명하는 거냐고."
나유나가 그 말을 이었다.
"우리, 어제 처음 만났잖아."
그 말에 모두가 동의 한다는 듯, 한우현을 쳐다봤다.
당연히 가질 만한 타당한 의문을 담아.
33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4)
"우리 마음이야 그렇다 치고서라도, 뭔 수로 그런 걸 죄다 관리해요?"
"난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밥 먹고 게임만 했는데?"
나유나, 홍세희, 권승환, 차정훈, 김재승.
한우현이 정한, 길드의 시작을 닦을 임원진들.
중요한 얘기를 한다며 모으길래, 일단 길드 소속인 만큼 따라나왔다.
간단히 어떤 역할을 할지 나누어 맡을 것 정도만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이 중에 회사 다녀 본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군대도 회사라면 모르겠지만···"
"군대도 너 밖에 안 갔어."
"씨발, 면제겜 진짜···"
그러나 그 얘기를 찬찬히 들어보니 극도로 세세하게 틀이 잘 갖춰져 있었다.
너무나 완벽하고 체계적인 모습.
"그 의문은 다 설명한 뒤 해소 해 주도록 하지. 일단은 계속 들어라. 여기서 끝난다면 너무 허술하지. 하위 부서들도 설명하겠다."
심지어, 단순히 게임 길드의 시스템을 적당히 현실에 맞춘 형태가 아니라.
"인사부는 하위 부서로 훈련부, 실적관리부···"
군대의 체계를 사기업과 게임 길드에 효율적으로 융합시키고 녹여 놓았다.
"재무부는 크게 길드 내부의 자금 흐름을 관리하는 내무부와, 외부 투자를 관리하는 외무부···"
당연했다.
이것은 회귀 전, 미국 국방부가 만든 체계였으니까.
"작전부의 내부 구성은 아직은 기밀이지만, 크게 나누자면···"
국방부가 직접 관리하기에는 그 경직성과 난해함이 컸다.
세계 멸망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 자율성을 크게 보장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미 국방부는 플레이어들만의 조직을, 외부로 돌려 따로 구성했다.
"방위부와 정보부의 인사는 홍세희, 나유나에게 맡기겠다. 그를 권승환이 검수하도록. 아마 서로 당분간은 영역이 겹칠 테니까."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게임 디렉터, 소설 시나리오 라이터, 만화 작가들, 군사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그 구조를 만들었다.
초능력자들의 독자적 무력 집단이라는 정체성에 알맞을 체계를.
"방위부는 공안부, 집행부, 사법부로 나뉜다. 각각 범죄의 예방 및 수사, 직접적인 체포 작전, 약식 재판을 맡는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세계 플레이어 연합Global Player Union의 구조였다.
안타깝게도 회귀 전에는 그 목적을 그리 잘 수행하지 못했다.
많은 한국인 플레이어들이 그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했었으니까.
"정보부는 내부 정보를 관리하는 방첩부와 외부 정보를 관리하는 첩보부로 나뉘며···"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들어오지 않는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살 할 것이니까.
동시에 길드원들에게는 확실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 플레이어들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만을 강요한다.
또한 길드의 구조를 한국 사회의 환경에 보다 알맞게.
아프리카의 생산자 기반 군벌들의 체계를 참조해, 보다 플레이어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로 개조했다.
"이, 이거. 뭐 이리 복잡해? 길드라며? 이게 무슨 길드야?"
"...구조가 회사라기보다는, 작은 국가에 가깝군요."
"정확히는 독자적인 무력을 갖춘 사조직..."
이 자리에 있던 이들 중에서 그 복잡한 구조도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상이다. 이제, 질문 해도 좋다."
김재승이 입술을 달싹 거리다가, 마침내 그 의문을 이어나갔다.
"대체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게임에서도 만나지 못한 우리를 어떻게 믿고."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나눠주는데?"
이것은 그들의 능력에 비해서도, 신뢰 관계에 비해서도.
너무나 과도한 자리였다.
처음에는 어, 뭐지? 아 저런 일도 해야 하나? 싶었다가.
씨발, 뭐야? 하나도 모르겠는데?
라고, 스스로도 확신할 만큼.
"흠··· 내가 그만큼 너희를 믿는다고 해 두지."
"..."
나유나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헛소리였나? 좀 더 솔직히 말하지."
솔직히 너무나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두 미래의 정보.
회귀 전의 그들의 행적과 능력을 바탕으로 결정한 인선이었으니까.
모두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플레이어로서의 전투력과 빌런들을 통솔할 수 있는 지도력이 입증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회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납득 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회귀는 쉽사리 밝힐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고.
물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한우현은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수한 전쟁을 치르며 그 대명제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 사실이 밝혀지리라.
어쩌면... 미국 중앙정보국이라면, 벌써부터 그의 존재 자체가 모순적임을 분석해 냈을지도.
"당연히 못 믿는다. 정확히는 너희의 능력은 믿지만, 충성심은 기대도 하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한우현은 효과적으로 군중을 묵살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힘으로 짓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상관 없다. 꼽나?"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억울하다 억울해, 라도 외치고 싶나?"
"왜, 왜 날 보는데?!"
"간단하다. 너희가 할 일을 하면 난 돈도, 아이템도, 권력도. 뭐든지 준다."
그의 눈이 잔악하게 빛났다.
"할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길드에, 나아가 이 사회에 필요 없다. 그러니 '처분'한다."
"...그, 그게 무슨 소리, ···에요?"
그 말에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 듯, 나유나의 말 끝이 떨렸다.
"내가 이해되지 않나? 이해하려 하지 마라. 딱 두 가지만 기억해라."
아주 간단한 전략이었다.
"길드 안에서 길드원의 일을 해라. 그렇다면 뭐든지 주지."
당근.
"길드에 맞서려 하지 마라. 그렇다면 모든 걸 빼앗아 주지."
그리고 채찍.
"딴 생각은 하지 마라. 한국, 아니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들이 죄다 뭉쳐서 나한테 덤벼도. 나 혼자서 바로 찢어버릴 수 있으니까."
길드가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 최소의 기간은 한 달.
그 뒤로는 도저히 그 누구도 판을 깰 수 없을 만큼 길드의 존재감이 확고해 질 것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다소 억압적이고 우악스럽다 해도.
반발이 있다 해도.
"알겠나?"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수 밖에.
"...네."
"...네."
"예."
"예에···"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만 쓸 수는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라."
사람은 채찍질만 해서 다룰 수 없다.
"너희들 모두, 실제로 능력이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그 재능을 발휘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 뿐."
노예들은 그렇게 부려도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일만 반복 시킨다면.
저 레벨 플레이어들까지는 그렇게 억압할 수 있다.
길드 임원들까지 그렇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 모두, 능동적으로 일 해야 했다.
"이건 플레이어의 스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권승환. 너한테는 충분히 사람들을 관리할 능력이 있다."
"어? 네? 나? 내가 말입니까?"
"차정훈, 김재승. 너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 인플루언서다. 모든 플레이어가 너를 알고 좋아한다."
"그, 그렇긴 한데."
"그건 그냥 유튜버라서···"
"나유나. 비록 테러기는 했어도, 너는 그 정신병자들을 잘 모아 데려갔지. 그들을 통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칭찬, 맞아···?"
"홍세희. 나한테 제압당하긴 했어도, 너는 현 시점에서 도적 스킬에 있어 세계 제일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에, 에엑···"
한 마디씩 던져주었다.
모두 진실이었다.
"그러니, 스스로의 능력과 존재에 자부심을 가져라."
한우현이 방패를 높이 들었다.
길드 루시드의 상징이 될 방패를.
"우리는 지금까지 한낱 게임 폐인에 불과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무시받았지."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리는 초능력자다. 플레이어다. 너무나 강력한 존재지."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란 무엇인가?
"길드는 그 정점이다. 우리는 세계 최강의 무력 단체다."
수많은 답이 있다. 질투, 열등감, 희망, 금전, 증오···
"플레이어들은 그 위치를 자각해야 한다. 책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있으니.
"그러니, 우리는 이제 달라질 것이다. 아니, 이미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자부심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정신을 마취시키고 노예처럼 일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마약.
명예.
"길드의 이름 아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존재로 거듭난다."
한우현은 거짓말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리 될 것이었으므로.
"힘만 센 어린아이가 되고 싶나? 아니면 사회가 인정하는 진정으로 높은 인간이 되고 싶나?"
"..."
"..."
"길드는 일반인들과 위화감이 너무나 큰 플레이어들. 우리를 사회에 녹임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사회적 직위를 보장할 단체다."
다시금 하나하나 눈을 마주쳐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너희가 하기에 달려있다. 나는 강하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지."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기를 바란다. 부탁하지."
아주 살짝.
결코 비굴해 보이지 않는 수준의, 높은 각도로.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씨발··· 그래."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뭐, 까짓 거 그렇게 어렵겠어··· 군대 두 번 가는 거지!"
"우린 안 갔다니까."
"아니, 다 아니까 자꾸 면제 티는 내지 말라고 좀···"
그 연설이, 효과가 있었다.
한우현이 둘러보니, 다들 의욕과 열정이 어느 정도 눈에 돌아왔다.
드디어 그들의 마음이 제대로 길드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길드 설립 절차에 대해 논해보지."
"예, 이 부분은 저랑 재승이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기본 행정직을 맡을 플레이어들입니다. 정훈이가 아는 플레이어들과, 피시방 알바들 중 믿을 만 한 이들을 추리고···"
어차피 플레이어기만 하면, 능력이야 어떻든 인성만 정상인이어도 상위 1%라 할 수 있었다.
"좋아, 이 부분은 알아서 하고. 건물은?"
"제가 말씀드리죠. 말하신 대로 잠실에 딱 좋은 매물이 하나 있습니다."
"말한 조건에도 충족하나?"
"예, 건물 자체도 튼튼하고 사내 구조도에도 맞게 층과 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면 별도의 인테리어도 필요 없겠군."
"마침 한 달 전에 건설사 하나가 부도가 나서 비었답니다."
"건물주도 만나 봤나?"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만, 매매 의사가 없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다만 가격이 좀···"
"회사 명의로 매매한다고 전해라."
"아, 예···"
둘 모두 짧은 시간 안에, 나름 준비를 잘 해 왔다.
하긴 구독자 100만짜리 유튜버면 그 자체로 중소기업이나 다름 없는 개인 사업자다.
길드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나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정도 단계에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저희가 법인이랑 등록도 다 준비는 했는데···"
"좋다. 서류는 내 메일로 다 보내도록. 오늘 가는 길에 해치우도록 하지."
"그런데, 일단 이거 당장 건물값은 빼고서라도 이것저것 부대비용만 생각해도···"
차정훈과 김재승이 입을 모아 난처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길드장의 설계 대로라면, 당장 천 억은 넘게 필요합니다. 이번 달을 보자면 그 이상 들지도 모르고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한우현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쓸데 없는 우려를 하는군. 그걸 왜 걱정하지?"
"예?"
"한국에서 기업이 야심차게 사업을 시작할 때, 그걸 사원들과 회장이 통장을 깨서 돈을 모으던가?"
"...?! 설마?"
한우현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곧 은행에서 사업자 대출이 나올 것이다. 5000억. 아주 싼 이자로 말이다."
"5, 5000억? 길드원들 돈이라도 뜯어서 열심히 쓰는 줄 알았더니..."
"플레이어들? 그 목소리만 존나 큰 쌀먹충 놈들 믿고 해 달란 거 다 해준다면 내가 병신이지."
그가 노래를 하듯이 비웃었다.
"걱정 마라. 너희들 보고 제발 돈 좀 써 주라며 빌빌대는 일 따위는 없다. 부족한 건 모두 내 개인 재산으로 벌충한다. 사내 보유 현물도 중요하니까 말이야."
"...길드장 개인 재산? 길드장 코디 보면, 200도 없을 것 같은 코딘데..."
"지분권이 없는 은행 대출을 제외한다면, 기업 재무 구조는 100% 내 자본 출자에 기반할 것이다."
말을 마친 한우현은 아이템을 꺼낼 준비를 했다.
"[금괴]."
34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5)
금괴를 꺼내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돈 걱정은 마라. 금괴는 정말로 넉넉하니까."
어느새 한우현의 주위에 금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너무 많이 꺼내기엔 곤란하겠군. 여기가 그리 튼튼한 곳은 아니니, 무게가 부담스러워서."
"...이거, 설마 게임 아이템입니까?"
"맞다. 대장장이 중급 제작 재료."
"아니, 이거 단종 된 지가 언젠데 대체 이걸 왜 가지고 있는 거야···?"
나유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단종템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었어? 뭐, 그래 봤자 몇 십, 몇 백 개겠지만. 엄청 많긴 하네. 수백 억이라니."
"몇 백 개? 나를 웃기려고 했다면 칭찬 해주마."
"씨발, 틀리면 틀렸다고 하면 돼지 빈정대기는..."
그녀의 짜증을 무시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대장장이 체계를 최종 단계인 신장 급까지 올렸었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는 메이커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었다.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라는 두 체계.
하지만 두 메이커의 대우는 딴 판이었다.
연금술사 물약은 강력한 효과로 인해 모두에게 사랑받는 시스템이었다.
대장장이 장비는 보스 장비에 비해 너무나도 무가치했다.
따라서 점점 유명무실해졌고, 개발사도 그를 인지해 여러가지 보완점을 내놓았지만.
기존 아이템의 가치를 훼손할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서는 대장장이 시스템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그렇게 대장장이 시스템과 관련된 광물 아이템들은 단종되었다.
큰 의미가 있지도 않았기에, 관련된 단종 아이템을 수집하는 이도 별로 없었다.
"...혹시, 다른 광물도 있습니까?"
"눈치가 빠르군. 물론이지."
심지어 금괴는 중급 제작 재료였다.
흔히 게임에서 하급, 중급, 고급으로 재료의 급이 나뉜다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고급일수록 더 희귀할 것이라 판단하기 쉽다.
"미친, 미친···"
"왜 그래? 광물이 뭐가 의미가 있는데? 금이야 다르지만···"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필드 전체에 무작위 생성되는 광물이 죄다 고급으로만 고정되었기에, 오히려 중급과 하급이 더 귀했다.
따라서 금괴는 그 수도 적으면서 쓸모조차 없는 아이템이었다.
당연히, 서버 전체의 아이템을 긁어모은 한우현에 비하면.
가진 사람이 별로 없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광물에 뭐 특별할 게 있나? 은괴 같은 건 얼마 하지도 않잖아."
"아니, 그거 있잖아. 최고급 광물 재료···"
"미스릴, 오리칼쿰, 아다만툼. 당연히 아주 많다."
그리고, 이스터에그 같은 설정이기에 대부분의 유저들이 전혀 알지 못했지만.
"오리칼쿰은··· 인 게임 설정상, 초전도체 아닙니까···?"
금보다도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는 물질이.
한우현의 손 안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걸 알다니, 디멘션 게이트 스토리를 꽤나 감명 깊게 본 모양이지?"
"거기에 그런 게 나와?"
"그거 방송 할 때, 상온 초전도체 떡밥이 있어서 기억했지. 하··· 이건 진짜 미쳤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쟁여 놓는 건데···"
디멘션 게이트는 만우절에 출시되었던 깜짝 컨텐츠였다.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이 모종의 이유로 현실의 지구와 연결되어 사람들이 교류한다는 짤막한 에피소드.
스토리 자체는 심히 유치했지만, 평행세계의 캐릭터들 설정이 꽤나 매력적이었기에 유저들 사이에서는 나름 인기가 있던 컨텐츠였다.
"젠장, 나도 없는데."
"단종된 지 10년 가까이 된 아이템들인데 그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긴···"
거기에 이그드라실 월드의 물질 몇몇이 지구에서 신물질로 각광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요소는 아니었다.
그냥 이세계의 물질이 엄청 대단해! 라는 클리셰로 한 번 나오고 말았을 뿐인 장면이었으니.
"...그거 뿐만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 설정이 실제로 적용되었다.
이제 그건 이스터에그 따위가 아니었다.
이를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는 권승환이었다.
재빨리 위키에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디멘션 게이트를 검색하고서는 아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다만툼은 상온 핵융합의 그릇? 미스릴은 사차 전지의 재료이자 이론상 모든 화학 반응의 촉매제와 저해제가 된다?"
"그게 뭔 소린데?"
"뭔 소린지는 나도 고졸이라 잘 모르겠는데··· 그냥 딱 봐도 개 쩌는 거 같은데?"
그들의 말이 모두 맞았다.
심지어, 그것들만이 끝이 아니었다.
"그래. 사실 금보다도 그것들이 더 중요하지."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제작 재료들 중 유일하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 금속들.
-합금 구조가 물리 법칙을 무시합니다···
-이럴 수가, 단지 얇게 뽑아 내는 걸로 새로운 성질이 추가된다니!
-그저 게임 레시피를 변형했을 뿐인데 이런 효과가?
-오히려 초전도체와 사차 전지는 가장 원시적인 활용에 불과할지도···!
그것들로 무수한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미국은 정말로 경이로운 결과들을 얻어냈다.
비록 그 결과물들을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멸망해버렸지만.
그 연구들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이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 했겠지?"
그 모든 결과물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라일리를 잃고 멸망한 세계를 홀로 떠돌았던 지난 15년.
한우현은 끊임없이 공부했다.
플레이어가 관계된 모든 분야는 닥치는 대로.
전문 서적과 전공 서적 중 스스로 활용 가능하다 싶은 건 이해가 되건 되지 않건 무작정 외웠다.
당연히 고졸조차 아니었던 한우현이 모두 이해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연구 방향성과 결과물들은 모조리 숙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 중국, 한국의 거대 자본가들과 협상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끝내 미래에선 실패했던.
플레이어 최종 장비 이상의 장비와 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시도.
그것에 성공 할 지도.
"이거, 대기업들이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겠는데요."
"근데 이건 최상급 재료라 다른 애들도 좀 가지고 있지 않을까."
"길드장 보다 많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게, 나도 미스릴은 조금 있으니깐."
"그것도 걱정 마라."
한우현은 보다 구체적으로 길드의 운영 방향을 입에서 꺼냈다.
"모든 아이템은 길드가 플레이어에게서 선독점 권한을 가질 예정이다."
"선독점? 그 말은···"
"그래. 우리가 전매한다."
"플레이어들이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겠나?"
"윽···"
홍세희가 그 말에 침음을 흘렸다.
제압 당할 때의 기억이 났나 보다.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하지. 어차피 지금도 길드 가입자는 속속들이 늘어나고 있는 참이니."
"애들이 잘 하고 있나 보네."
나유나도 길드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없는 길드원들.
수백 명의 고 레벨 플레이어들.
한우현은 그들에게 딱 하나만을 명령했다.
아는 플레이어들을 최대한 많이 가입시키라는 명령.
플레이어들이 아무리 멍청하고 공격적인 성정을 가진 이라도, 아주 단순한 것 하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소속한 집단이 강하고 거대해질 수록, 그 구성원도 나쁠 게 없다는 것.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좋은 건 유치원생도 아는 진리가 아니던가?
-자자, 친구들! 어서들 가입 하라고!
-아니, 방송 보긴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갑작스레.
-...안 해?
-히, 히익! 잠깐만! 한다고! 스킬 좀 치워!
-진작 그럴 것이지. 자, 너 추천인은 나다?
-씨발, 다단계냐···
-꼬우면 너도 해.
-...좋아.
물론, 그 특유의 반사회적이고 소통성 없는 태도 때문에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못했지만.
청와대에서 흩어지고 나서, 지속적으로 길드원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리하오란과 응우옌도 애쓰고 있나 보군."
-[What the fuck? how···]
-[아오 한국 말 하라고]
-[게시판에 번역기 내장 기능 있잖아]
-[그거 성능 좆구림]
-[人太多了!]
-[씨빨 영어는 대충 단어라도 보이지 한자는 뭐야]
-[Where is guild master?]
-[나 전투력 봐라 오천플마단 새끼들 깝 ㄴㄴ]
-[인장 주작은 뭐야]
-[씨]
-[발]
-[년]
-[주작 아닌데? 게임 상태창을 어케 조작함?]
-[그냥 지랄 해 봄 ㅋ]
-[You idiot!]
-[Kmm hyo dyw bou?]
길드 게시판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한국어,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영어가 뒤섞여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
이따가 적당히 서버 별로 게시판을 나누어 놓아야겠다.
"벌써 길드원이 2만이라···"
상태창에 뜨는 전 세계 플레이어의 총 숫자는 100만 가량.
불과 하루 만에 그들의 2%가 가입하다니.
한우현이 직접 가입시킨 이들과 그들의 직접적인 동료들의 수를 모두 합친 것이 대략 1000명.
그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목표치보다는 낮았다.
길드가 제대로 대표급 단체로 인정받으려면, 최소 10만명이 가입해야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보스를 격파할 때까지 20만은 가입해야 했다.
만약 그 전에 길드의 이권을 침해 할 만한 다른 플레이어의 단체가 등장한다면, 골치 아파진다.
아주 많이 곤란해진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초강대국과 그 산하의 플레이어 집단은.
약하더라도, 그 잠재력을 어느 정도 존중해 줄 가치가 있었으니까.
당연히 언제까지나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그녀도 길드 아래 둬야 했다.
"...하아."
괜스레 마음이 묵직해져 한숨을 내뱉었다.
"뭐, 뭐야. 뭐 문제 있어?"
나유나가 괜스레 찔린다는 듯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문제 없다.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뭐야, 싱겁게···"
툴툴대던 그녀를 잠깐 노려 보았다.
"싱겁게···요···"
"이제 플레이어들의 길드 내 위치에 대해 말하지."
"위치요? 일반적인 회사의 체계랑은 좀 다릅니까?"
"군대 식인가···?"
차정훈과 권승환의 의문을 뒤로 하고 말을 이었다.
"다들 알겠지만, 플레이어는 게임을 해 봤다고 모두 각성하는 게 아니다."
"레벨 200부터란 거지. 거의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길드장 말까지 듣고 보니 확실하네."
"그래. 그 숫자가 전 세계에 100만명이다."
"허··· 많네."
다들 상태창으로 랭킹 정보를 확인했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사안이지만.
새삼스레 다시 확인해 보니 엄청난 숫자였다.
하나하나가 일반인의 수 배에서 수십 배의 힘을 발휘하는 초능력자가 100만명?
사회 질서가 흔들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실제는 좀 더 적다."
"적다고?"
"그래. 레벨 250 이상과 레벨 200 이상은 매우 차이가 크거든."
한우현은 보드 마카로 선을 그었다.
"기준점은 크게 넷이다. 레벨 200, 250, 290, 300."
"200이랑 250은 대충 알겠어."
"그래, 너희 생각이 맞다. 5차 전직으로 포스를 몸 안에 축적하기 시작하는 레벨 200. 능력자기는 하지만··· 어설프지."
"애초에, 모습부터가 게임 캐릭터 모습이 아니잖아 걔들은."
"그래서 스킬을 쓸 수는 있어도, 일반인에 가깝다. C급이라고 칭하지."
그들의 차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
단순하지만 중요했다.
지금 알려진 것은, 그냥 레벨이 높을수록 더 강하다! 라는 너무나 단순한 추측이었을 뿐.
그 원리와 기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회귀자 한우현을 제외한다면.
35화 길드라 쓰고 군벌이라 읽는다 (6)
현 시점에서는 누구도 모르는 지식.
하지만, 그 정보는 꽁꽁 숨겨야 할 종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최대한 널리 알릴 정보였다.
플레이어들이 자기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해주고.
이해가 불가능한 미치광이가 아닌.
우연히 힘을 얻었을 뿐인 인간으로 인식되게 해 주니까.
"5차 전직. 레벨 200부터는 포스를 수련한다. 그러나 단순히 축적할 뿐, 제대로 포스를 사용할 수는 없다는 설정···"
송과체가 단지 포스를 담을 뿐, 그 활용은 너무나 미숙한 단계였다.
"따라서 현대 화기를 스킬로 막을 수는 있어도, 물리적인 피해를 입는다."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즉, 일반인에 의해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죽을 수도 있지. 레벨 249라도, 일반인에 비해 5배 정도 그 근력과 내구도가 강한 정도다."
하지만 그들도 쓸모가 있었다.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는 쓸 수 없지만, 던전을 수호하는 잡몹들.
그것들도 불어나도록 방치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잡몹을 사냥하고 드롭 아이템과 골드를 채굴해, 길드의 재정을 책임진다.
1차 생산자가 바로 저 레벨 유저들의 역할이었다.
"6차 전직을 하는 250 부터가 진짜지. 게임 설정 상, 축적한 포스를 본격적으로 제련해 사용 할 수 있는 레벨이다."
해부학적으로는, 송과체가 비로소 스스로의 기능을 확장하고 그를 감싸는 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단계.
한우현이 손에 빛을 둘렀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포스에 의해서만 물리적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그 외의 물건에 상처 입지 않는다. 대략 1만 명 정도지. B급이라고 하겠다."
하나하나가 군단급 전력을 낼 수 있는 플레이어들.
현대 화기로 제압이 불가능해지는 단계.
이들이 사회 질서의 가장 큰 불안 요소였다.
"이 친구들이 길드의 사실상 주축이자, 허리를 담당할 예정이다."
그들은 보스 격파의 능력치적인 스펙은 되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어렵다.
현실화 되며 그 능력이 게임에서보다 훨씬 증폭된 보스들.
대다수의 레벨 250 이상 플레이어들은 보스의 공격을 여러 번 버티기 어렵다.
아니, 사실은 한 번도 버티기 어렵다.
공격력이 강하다 해도, 방어력이 약하기에 제대로 대 보스 전투 전력으로 쓸 수 없다.
사제가 [부활]과 [치유]를 난사한다고 해도 그보다 진형이 무너져 전멸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면 의미가 없다.
"그 전력이 약한 C급과 달리, B급은 길드 활동에서 가장 자주 보게 될 유형들이지."
무엇보다, 능력만 있다고 전투가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목숨이 직접적으로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동료들과 연계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정신력.
벌벌 떨며 패닉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반사적으로 훈련 받은 동작을 수행하는 침착함.
그것은 게이머가 아니라 군인의 덕목이다.
플레이어들은 죄다 게임 폐인이요 월드 오브 이그드라실의 가장 유명한 멸칭은 면제겜이다.
그러니까, 사실 레벨과 관계없이 플레이어의 대부분은 보스전을 수행하기 어렵다.
정신을 완전히 개조하는 수준의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사실 C급은 어느 정도 놓쳐도 상관 없다만, B급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많이 가입을 시켜야 한다."
"음··· 충분히 이해 되네. 걔들부터가 위험해."
"알겠습니다. 길드원들에게 그 사항도 하달하죠."
하지만, 제대로 훈련 된 정예 플레이어들만 내세우는 선에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한우현의 계획대로 온 세상이 성공적으로 짜 맞춰질 때의 이야기.
한우현은 결코 자만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무리 시간과 인력이 부족했다고는 해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유수의 인재와 자원을 갈아넣은 공격대가.
12개 중 3개의 던전 밖에 격파하지 못했다.
미래를 알고 있더라도, 한우현이 모든 던전 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을까?
···확신 할 수 없다.
보스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한다면, 그 때부터는 보스 레이드는 더 이상 레이드가 아니다.
자연재해를 자연재해로 진압한다는 구상을 바탕으로 한 대전략급 군사 작전이 편성 되어야 한다.
그 상황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B급도 동원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도 훈련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랭커 급 플레이어들은 대 보스 훈련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보스 레이드를 제외한 다른 모든 길드의 행사에는 B급이 가장 많이 나서게 될 것이다.
"여기부터는 나만이 아는 것이다. 레벨 290 이상. A급이라고 하지."
-톡톡
한우현이 머리를 두드렸다.
"게임 설정 상, 영혼이 육신을 초월하는 단계."
송과체가 비대하게 확장되며 뇌와 육신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는 단계.
그러나 그 원리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이해 시키기에는 어렵기에, 간략히 설명한다.
회귀 전, 미국 백악관을 습격한 레벨 291 사령술사의 시체를 연구소에서 해부해 밝혀낸 비밀이었다.
"원래 플레이어들은 포스에 의해 육체가 강화된다. 그러나 290부터는 강화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지."
"넘어선다면, 어떻게?"
"포스로 이뤄진 육신과 정신을, 신체라는 껍데기가 보조하는 것에 가까워진다는 거다."
보다 정확히는, 포스의 근원인 송과체.
거기서 뻗어나가는 포스의 줄기가 모든 신체 대사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서 마침내 시스템의 보조 없이 사용하는 기술.
미 국방부 산하 모든 영역 이상현상 연구소가 개발한 무수한 오리지날 스킬Original Skill을 본격적으로 사용 할 수 있는 레벨이기도 했다.
물론, 기나긴 연습과 재능이 있다면 레벨 250 이상의 플레이어도 이론 상 오리지날 스킬의 사용을 시도 할 수 있긴 하지만.
"...완전히 통제?"
"음, 잘 모르겠는데···"
그 말에 이 자리에서 한우현을 제외하면 가장 레벨이 높은 둘.
김재승과 차정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자기들의 몸을 만지고 비틀어 댔다.
"그렇게 해서는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의 몸의 구조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포스의 흐름을 느껴야만 알 수 있다."
사실, 그보다 훨씬 복잡했다.
인체해부학, 인체생리학은 기본이요 보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면역학, 생화학, 발생학, 조직학까지도 기본을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웠다.
한우현도 신경 해부학에 대해서는 동생이 남긴 유산인 신경학 교과서를 통해 야매로 배운 탓에.
"...그건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지. 이들은 전 세계에 대략 200명 정도. 가장 중요한 이들이다."
보스 레이드에 동원될, 길드의 창.
하나하나가 일국의 전력에 준하는 이들.
당연히 한우현은 그들의 본명과 캐릭터 네임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은, 최소한 그 특징적인 정보라도.
"이들도 당연히 최우선 영입 대상이지만··· 만만치 않을 거다."
"...왠지 알 것 같네."
"대충 인터넷에 박제 당하는 애들보다 훨씬 더 농도가 높은 수준일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대화가 가능하긴 한가?"
"너와도 대화가 되는데, 안 될게 뭐 있나?"
"왜, 왜 또 나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요?"
발끈한 나유나의 볼때기를 한 번 더 잡아당겨서 조용히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뭐, 이건 사실 별로 의미 없는 정보다만··· 짚고 넘어가지. 만렙, 레벨 300."
그 말에 모두가 순간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를 굴렸다.
"게임 설정 상, 초월자가 되는 단계."
해부학적, 생리학적으로는... 모든 몸의 물질과 신진대사가 포스로 대체 가능해지는 단계.
한우현이 방패를 살짝 들었다.
"해당 직업의 고유 스킬이 초월 급으로 승급하지."
고유 스킬이 초월급으로 승급한다고 해서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은 별 거 없었다.
육신 전체가 포스의 바다나 다름 없어지므로, 더 이상 스킬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모든 스킬의 원리와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고, 자유로이 해체와 조합이 가능하게 될 뿐이었으니.
"S급. 전 세계에 단 둘 뿐이다."
거기까지 말한 한우현은 입을 닫았다.
"...끝?"
"그, 뭔가 더··· 없나요?"
"매우 강하다. 혼자서 A급 열 명은 제압 가능하지."
"길드장은 100명을 제압하지 않았나···"
사실,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얘기하자면 실수를 할 것 같았다.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한우현과 함께 세계 유일의 만렙 플레이어.
사제 네로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구태여 끊었다.
"나도 만렙에 대해서는 다 파악하지 못했다.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고. 길드의 체계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지."
"네, 뭐 그렇다면···"
"하긴 이제 레벨도 못 올릴 테니까."
"길드원은 크게 길드 회원과 길드 사원으로 나눈다."
"회원과 사원이요?"
"그래. 사원은 정직원이다. 너희와 나, 그리고 플레이어가 아닌 행정직과 보조직, 연구직 등이 포함되지."
"회원은 사원이 아니라는 건가요?"
한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예 모든 플레이어들을 회사에 묶고 싶지만··· 내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지."
"사원들 월급은 그렇다 쳐도, 이미 기존에 직업이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강제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하지만, B급 이상은 어지간하면 회원이 아니라 사원으로 고용한다. 위험하니까."
"그건 별로 안 어려울 것 같네요. 레벨 250 이상이라면 백수일 확률이 높긴 해서···"
"방금 내가 말했던 구조도의 주요 임원들도, 어지간하면 B급 이상의 인물로 채울 예정이다."
"음··· 근데 길드장, 이거 말이 회사지."
권승환이 손을 들었다.
"사업을 안 하는데 이게 무슨 회사야? 돈 나올 구석이 없잖아. 그냥 길드장 돈 빨아서 우리한테 월급으로 뿌린다고?"
"...어?"
"..."
"...진짜네?"
그 말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길드의 본질은 군벌이다.
하지만, 군대는 자원을 생산하지 않고 먹어치우기만 하는 단체.
따라서 현실의 군벌 대다수는 마약부터 암거래, 무기 수출 같은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댄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들이 꾸역꾸역 소모하는 재화를 도저히 감당 할 수 없기에.
"돈 나올 구석이 왜 없나?"
따라서 군벌이 어떤 존재인지 이 자리에서 그나마 가장 잘 아는 권승환은.
지극히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당분간은 우리가 할 일이 아주 많다. 그 중 대부분은 플레이어 범죄의 단속이다."
"단속이 어떻게 돈이 나오는데?"
"국가가 대처하지 못하는 안전을 우리가 보장해 주는데, 당연히 보조금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대 놓고 정부에 삥을 뜯겠다는 소리를 약간 순화해서 말했다.
"...보조금을 받긴 하더라도, 그게 몇 천 명 규모의 회사를 운영할 정도가 되나?"
"좋은 의문이다. 당연히 그건 자리 잡기 전의 얘기다. 길드의 체계가 본격적으로 굳어지면, 주 사업은 아이템 판매와 연구가 될 것이다."
"아, 전매···"
"하긴 그렇다면 게임 아이템은 죄다 길드가 독점 할 테니까."
"..."
"그리고, 생각만큼 회사 운영에 돈이 많이 들어가진 않을 거다. 길드는 실적제로 운영 될 예정이니까."
"실적제? 그럼 기본급을 안 준다는 얘깁니까?"
"안 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우 적을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광업, 농업 기반 군벌들이 쓰는 운영 전략.
그 채굴을 몬스터 사냥과 재료 아이템 생산으로 바꾼다면, 길드의 체계와 놀랍게도 흡사해진다.
"실적은 당연히 플레이어로서의 활동에 지급된다. 방금 말 한 플레이어 범죄의 체포, 아이템과 골드의 길드 판매가 대표적인 실적이 되겠군."
"...길드장. 전매로 회사를 유지하려면."
권승환이 중요한 지적을 해야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쉿
-...
쉿, 이라는 입 모양을 지어 그의 입을 닫게 했다.
유일하게 군대에 복무한 놈. 따라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실적제는 게임 던전에서나 가능한 몬스터 사냥과 아이템 파밍이 현실에서도 이뤄짐을 전제로 한 체계라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보조금이니, 단종 된 아이템이니 아무리 팔아먹더라도.
한계와 끝이 너무나 명확하다.
하지만 아직 던전은 세상에 생성되지 않았다.
한 달 뒤에야 첫 번째 던전의 입구가 생성되고, 다시 한 달이 지나야 다음 단계의 던전이 만들어진다.
"..."
권승환의 표정이 충격과 공포와 당황으로 어그러졌다.
미래 정보에 대한 의심은 애초부터 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한 달 안에 던전이 열릴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의심을 피한답시고 길드 체계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건 병신 짓이다.
설령 의심하더라도, 의심일 뿐이라면 괜찮다.
"다들 잘 알아 들었나?"
"뭐, 솔직히 너무 복잡해서... 어련히 잘 하겠지."
"일단 말하신 대로 진행은 하겠습니다만, 막히는 건 계속 여쭤봐도 되겠지요?"
"물론이다."
"..."
결국 길드는 세상의 대세가 될 것이었으니까.
의심해서 뭘 어쩌겠는가?
"질문이 더 없는 듯 하니, 이제 다음 의제로 넘어가지. 오늘의 마지막 의제다."
36화 다시 만난 가족 (1)
"아니, 마지막이라면서 뭐가 계속 튀어나오네."
"회사 세우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부서별 인사 정리까지 끝냈으니 진짜 마지막 맞죠?"
"그래,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으··· 진짜 할 거 많네."
한참이나 회의를 했다.
저녁 즈음이 되어서야 길드의 윤곽과 체계가 모두에게 확실히 각인 될 수 있었다.
"내일도 중간중간 의사소통은 해야겠지만, 내일부터는 각자 할 일을 구체적으로 배분받아서 시작한다."
"진짜요? 휴, 다행..."
"너무 안심하지는 말도록.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
"애초에 이게 회의기는 한가? 길드장 설명만 열심히 들었는데···"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짜내는 것보다는 편하지···"
시시덕대는 길드원들을 뒤로 하고 한우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엥? 길드장, 먼저 가요?"
"그래. 가족 식사가 있어서 말이다."
-휙
수표를 던지자 홍세희가 날렵하게 그것을 잡았다.
"...100만원?"
"그걸로 회식이나 해라. 상사는 이만 빠져 주도록 하지."
"...이건 좋네. 통은 커, 길드장."
"야, 인사가 그게 뭐야! 길드장님 만세!"
"만만세!"
그 환호를 들으며 피시방 문을 열었다.
-찰칵
"...흠."
한우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나름 최대한 은밀하게 따라온 듯 했지만, 플레이어의 감각은 초월적인 수준이다.
단순히 작은 소리와 현상을 감지하는 정도가 아니다.
한우현이 조금만 집중한다면, 초저주파와 초음파는 물론이요.
적외선과 자외선을 포함해 인간의 감지 대역을 벗어나는 빛도 감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기자, 혹은 요원으로 추정되는 이의 발소리와 셔터음도 느낄 수 있었다.
"...뭐, 됐다."
하지만, 그를 막을 필요는 없었다.
한우현은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심지어 좋은 의미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그 위험도로 유명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유명세를 정부가 기를 쓰고 막으려 하겠지만, 힘들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한우현이 대체 뭐하는 인간인지 알아보고 추적하려 할 테니.
그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족과 길드 내부까지 파헤치려 한다면 응징 해야겠지만.
자기 나름은 숨어서 따라오는 정도라면, 봐 줄 만 했다.
"마장동까지··· 시간이 좀 늦었군. 위로 가야겠어."
"...?!"
-파앙
허공을 향해 도약하며, 파파라치의 위치에 신경을 집중했다.
보아하니 따라오려 했다가, 어처구니가 없는 듯 가만히 있는 모양새다.
이 쪽은 포기 할 수 밖에 없을 테니, 아마 남은 길드원들을 따라갈 모양이지.
-후웅
-쾅
-후웅
-쾅
물리력으로 이뤄진 장판을 만들어 밟으며 날아 간 끝에, 금방 마장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분간 인터뷰 요청은 모두 거절해라. 촬영도 포함해서.
혹시 몰라서 임원진에 문자를 보냈다.
지금까지 들은 것 만으로는 사실 밖에 흘려도 상관 없는 것들이었지만.
정보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버릇을 들이면 안 되니까.
"...나중에 홍세희한테 보안 교육도 맡겨야겠군."
어째 생각하면 할 수록 점점 더 할 일이 늘어난다.
어쩔 수 있나. 세상을 책임지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가게로 들어갔다.
"예, 어서 오십시오!"
"한우현입니다. 4명 예약이요."
"네, 가족 분들은 미리 와 계십니다! 바로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쪽인가?"
"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드르륵
한우현은 스피크 이지 형식의 진중한 금고 인테리어를 한 방으로 들어갔다.
"...음."
"우, 우현이···니?"
"형."
아주 널찍한 반원형 테이블 바.
그 앞에 둥그렇게 앉아 있던 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먹먹해졌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비참하게 그 끝을 맞이하고 말았던 가족들.
이미 동생은 만났었지만, 이렇게 세 가족이 모두 모인 것을 보니.
비로소 그 끔찍한 미래와 지금은 다른 시간임을 자각 할 수 있었다.
"...예, 접니다. 조금 늦었네요."
"아니··· 정말로 우현이라고? 이게 무슨···"
중년의 여성이 다가와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진짜, 진짜··· 당신이 우리 아들이라고요? 아니, 인종부터가 다른데···"
그 옆에서 중년의 남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알아요. 믿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맞습니다."
하지만, 감정에 매몰 되는 것은 잠깐일 뿐.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한우현은 지난 번과 비슷한 방식으로, 가족들을 납득 시키기로 했다.
"먼저, 사과 드릴 것들이 좀 있겠네요."
"사과라고?"
그 말에 한우준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재작년에 아버지 법인 카드로 게임에 결제했었죠. 잘못했습니다."
"...뭐, 뭐라고."
"어머니도. 결혼 예물 금반지, 몰래 멋대로 팔아 치운 것.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철이 없었죠."
고개를 푹 숙이면서,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그, 그런 적이 있었어? 나한테 말 안 했잖아?"
"당신이야말로, 우현이가 법인 카드로 횡령을 했단 소리는···"
둘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같이 성을 낸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용서해주며, 다른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일이었다.
"죄송했습니다. 지금까지 불효해서요."
그러니까 확실히, 한우현만이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 가서 자랑 할 일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 그래···"
"일단, 앉자꾸나··· 주방장님이 서 계시니···"
"저는 괜찮습니다. 대화는 얼마든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 저희가 이런 데는 처음 와 봐서···"
바짝 긴장한 기색으로 요리를 대기하고 있는 주방장이 친절히 대답했다. 그 뒤를 한우현이 이어주었다.
"너무 그렇게 불편하게 계실 필요 없어요. 식당일 뿐이니까요."
"뭔 식당이 이렇게 호화로운데···?"
"고급이니까요. 쉐프님, 시작하시죠. 와인도 추천하시는 대로 페어링 부탁드립니다."
한우현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식사를 시작조차 하기 힘들 것 같았기에.
"예, 페어링까지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드리겠습니다. 한우 맡김차림, 시작하겠습니다."
그 눈치를 본 주방장도 재빨리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스윽
"10년 동안 간수를 뺀 신안 천일염과, 영국 왕실에서 쓰는 말돈 소금을 블렌딩한 소금입니다. 조금씩 찍어 드시면 됩니다.
"5가지 후추를 조합해 만든 허브 향신료입니다. 드셔야 할 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뭐, 뭔 소금이요?"
"후추가 5가지?"
"외우실 필요 없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드세요."
한우현은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는 꽤나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미국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인증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플레이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맞이 음식입니다. 대부분의 파인 다이닝에서는 웰컴 디쉬라고 하지만, 저희는 한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갈비탕입니다. 늑간살을 12시간 이상 고아 만들었으며 유럽의 송이버섯이라고 불리는 모렐 버섯을 달여···"
그래서 한우현은 익숙하게 그 대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손으로 들고 마시면 됩니다."
"저, 그런데 우현아··· 이런 데는 어떻게 예약 한 거니? 한우를 정식으로 준다니··· 가격이."
"걱정 마세요. 다 나라에서 해 주는 거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제 한국 은행은 한우현의 저금통이나 다름 없으니까.
"나라에서? 그럼 너 이제 공무원이야?"
"아니, 공무원이라고 이런 델 보내 줄 리가 없는데."
"얘, 조용히 해 봐. 나라에서 뭘 시켜 주는데?"
그 말에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크흠, 당신··· 뉴스 봤잖아. 그거 암만 봐도 공무원은 아닌 거 같은데···"
"나라에서 해 준다면 공무원이 아니면 뭐니?"
"공무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겁니다."
-덜그럭
"육회입니다. 꾸리살에다가 저희 가문에서 직접 담근 전통 고추장, 그리고 캐비어를 더했습니다. 부각과 함께 한 번에 드시면 됩니다."
"캐, 캐비어?"
"캐비어는 먼저 혀 끝으로 입 천장에 부수듯이 드시면 더 좋아요, 어머니."
"...형, 라면이랑 치킨만 먹는 사람 아니었어?"
"교양 좀 쌓았지."
한우현은 식사를 하면서 대화까지 하기에는 할 말이 너무 많음을 느꼈다.
"저도 배가 고프니, 이야기는 식사를 다 끝내고 하지요. 오랜만에 가족 식사니까요."
"그래, 그러자. 이거··· 진짜 맛 하나는 대단하구나."
"나는 캐비언지 뭔지, 비린데···"
"원하신다면 캐비어는 빼 드리겠습니다. 대신 다음 디쉬에 트러플을 조금 더해 드릴까요?"
"트, 트러플이요? 그건 또 뭐야···"
눈을 빛내는 아버지와, 어색한 듯 한 어머니를 보며.
오래간만에 마음 한 구석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회귀 전에는 장례는 커녕 그 죽음조차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다음은 안심 장미입니다. 한국 전통 육포와 프랑스식 브레자올라 햄을 만드는 방법을 섞어서, 안심과 딸기를 얇게 저며 장미 모양으로···"
"이, 이게 음식이라고?"
"누가 봐도 꽃인데···"
심지어 그 순간에는 그것을 슬퍼할 틈새도 없었다.
아니,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무런 감흥 없이, 한우준의 손에 이끌려 미국으로 도망쳤으니까.
"이제 고기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미디움 레어로 구운 안심 위에 화이트 트러플을 얹어 드렸습니다."
"...맛있다!"
"안심이, 이렇게 기름진 부위였니?"
"비싸기만 하고 텁텁한 줄 알았는데···"
"하급 안심은 그렇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철저하게 선별된 한우 암소의 지방질을 측정해···"
그 모든 일은 이제 없던 것이 되었다.
한우현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사라진 미래다.
"다음은 채끝입니다. 유자 머스타드를 얹어 드시면 됩니다."
"머스타드가 이런 거였어? 노란 액체가 아니라?"
"그건 허니 머스타드라고, 값싸게 희석한 소스입니다. 이 홀그레인 머스타드가 그 원본이지요."
"허··· 음식 가지고 별 희한한···"
"와, 진짜 맛있긴 맛있네···"
"우현아, 너도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먹어라."
"예, 고마워요. 아버지, 어머니도 맛있게 드세요."
"으, 어색해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미래를 잊을 수 없다.
한우현이 끔찍할 정도로 무능력하고 짐만 되는 자식이었다는 현실.
마지막 가족이었던 동생이 죽을 때까지 외면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인생.
"...우설입니다. 레몬과 소금으로···"
"...안심추리입니다. 소금만 찍어서···"
"...설야멱입니다. 고려 시대의 고기 구이 방법으로, 얼음과 불을 오가는 조리 방식이···"
"세상에, 세상에···"
"소고기가 그냥 굽는 게 다가 아니구나···"
그를 생각하니.
가족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음식을 입에 담는 모습만 보아도.
단순한 만족감 뿐 아니라, 그를 넘어선 의지 자체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립투입니다. 한국 전통 샤브샤브라고 생각하시면 되시며···"
"즉석에서 양념하는 갈비입니다. 저희가 지금 뼈에서 떼는 모습을 감상하시면 됩니다."
"한국식 햄버거입니다. 불고기를 재해석한 양념과 패티로···"
그래.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의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할 이유는 없다.
가장 소중한 존재인 가족들부터 시작해, 이제는 그의 아래 자리 잡은 빌런 플레이어들까지.
이번 생에는, 그 모두가.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결말을 만들 것이다.
지배를 넘어 구원으로.
"다들 맛있게 드셨나요?"
배가 터져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한 가족들에게 한우현이 입을 열었다.
"허어··· 그래. 정말 원 없이 먹었다. 한우 자체만 해도 자주 못 먹는데, 이렇게 많이···"
"형, 근데 진짜 이거 얼마야? 최소 인당 10만원은 넘어 보이는데···"
틀렸다.
마장동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한우만을 들이는 한국의 전설적인 식당.
그 곳의 지하 1층 전체를 대관했다.
그 가격은 대략 인당 100만원이다. 와인까지 합한다면 인당 150은 될 것이다.
"뭐, 금액은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앞으로 종종 오게 될 테니까."
"...종종?"
하지만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쓸데 없는 걸로 대화의 논점을 흐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것보다, 어머니, 아버지, 우준이도 모두... 궁금하신 게 많을 것 같아서요."
마지막 후식으로 나온 제주도산 애플 망고 빙수를 한 숟갈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음, 당도가 나쁘지 않군.
역시 수입산과는 기본적인 질이 다르다.
"제가 왜, 어떻게 이런 일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이야기 해 드려야겠지요. 전부 다요."
37화 다시 만난 가족 (2)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아버지였다.
"뉴스는 봤다. 네가 길드의 대표라고 선언하는 장면도."
"네."
"...대체, 어떻게? 우현아.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미안하지만···"
"예. 제가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죠, 사실."
"크흠, 그래···"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다들 제가 게임 하나는 정말 오래 한 건 잘 아실 겁니까."
"그래, 그 게임이 네가 그렇게 변한 거랑 관련이 있다지···"
아버지가 말 끝을 흐렸다.
실제로 그 인과 관계가 너무나도 명확했으므로, 하루 만에 전 세계인들이 알게 된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몸이 변한 걸 설명하는거지. 정신이 변하는 게 아니잖아."
동생. 한우준이 덧붙였다.
"나도 알아봤어. 게임 플레이어로 각성한 것들. 당장 나부터도 저레벨이지만··· 아무튼, 마음가짐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아."
그가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러니까, 잘생겨지고 키 좀 커졌다고. 정신병이 죄다 치료되고 아싸가 인싸가 될 수는 없는 거라고."
"그 말이 맞다. 이건 내 순수한 의지지."
"그, 말투부터가 너무 어색한데 우현아···"
한우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를 고칠 수는 없었다.
이는 한우현이 20년간 빌런들과 보스에 맞서 공격대장으로 활동하며 완전히 굳어진 습관이었으니까.
실제로도 그 말투가 위압적인 길드장의 이미지에도 잘 맞았다.
애초에, 한우현은 자신의 옛날 모습을 흐릿하게 기억만 할 뿐이지.
이제는 그와 완전히 다른 인간이기에, 재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난 이렇게 변하고 나서 느꼈지. 지금까지 잘못 살았다는 것을."
"..."
"..."
"...잘못?"
"그래. 잘못. 바뀐 얼굴을 보면서, 거울을 보면서 깨달았지. 내가 너무 불효자로 살았구나, 하는."
"...우현아."
"그,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버지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 정도가 맞았죠. 사실, 몇 번을 미안하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니까요."
"하아···"
"그, 과거가 무에 중요하겠니···"
"과거는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 말도 맞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금 가족들과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 은퇴 할 나이가 다 되어감에도 방구석 백수를 먹여살리기 위해 윗선의 눈치를 보며 회사에 빌붙은 남자.
어머니. 매일매일 자식들 걱정만 하느라 그 허리도 굽고 주름살도 잔뜩 늘어난 여자.
마지막으로 동생, 한우준. 입으로는 온갖 욕과 잔소리를 하면서도 그에게 매 달 생활비를 부쳐줬던 혈육.
"그래서 이제는 달라지려고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아이고··· 당신, 들었어요?"
"으음··· 진심이구나."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대놓고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입술을 씰룩이면서.
동생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 형, 논점 이상하게 흐리지 마."
"우준아, 우현이 모처럼 의지 다지는데 왠 초를···"
"네가 형이랑 사이 안 좋다는 건 알다만."
"그게 아니잖아요! 똑바로 말 해!"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길드 게시판에, 어제랑 오늘 형이 뭐 하고 다닌지 다 올라왔다고! 나도 그거 다 봤어!"
"너도 가입했냐? 이거 미안하네. 신경쓰지 못했구나."
이건 좀 의외였다.
당연히 동생도 가입을 시킬 예정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다지 급하지 않았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회귀 전에서도 한우준은 싸움을 잘 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지킬 정도는 되었지만, 어지간한 플레이어들과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만큼 한우준을 전투원으로 굴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플레이어 친구들 모아서 길드 설립··· 이거까지는 뭐, 그럴 수 있어. 형이 게임 안에도 친구 별로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 했으니까. 모을 수 있지."
"그래, 네 말대로 아는 사람들을 좀 모았지."
"그런데 중국, 인도네시아, 북한에 지부를 세우고 대통령이랑 총리랑 협상하고."
"...으음."
"뭐? 중국, 북한? 이게 무슨 소리니?"
그 뉴스도 보았던 아버지가 침음을 흘렸다.
솔직히, 도무지 믿기 힘든 소식이었으니까.
그냥 한우현이 나라에서 뭔가 좋은 자리를 받은 줄만 알았던 어머니도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 다음에는 청와대에 쳐들어가서 사실상 무제한 면책권을 받아냈다며?"
"뭐, 그렇지.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
"..."
한우준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정확히는, 할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뭐라 정리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데. 안에 히틀러라도 들어간 게 아니라면."
"오해가 있다, 우준아."
"오해?"
그의 눈이 미심쩍게 찌푸려졌다.
"그래, 오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사회성이 좋지 않지. 그건 소통성 뿐 아니라, 나아가 이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 전체에 대한 불신?"
"그래. 플레이어··· 내 친구들."
실제로는 전혀 친구들이 아니었다.
죄다 게임에서는 보스 레이드때 일시적으로 닉네임을 본 정도고.
하물며 그 마저도 많이 마주친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나부터가 그런 인간이라, 친구들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지."
"...좋은 사람들은 아닐 것 같은데."
"하, 좋은 사람들이라."
한우현이 비웃었다.
"좀 더 올바른 표현을 써야겠구나. 게임 폐인, 사회의 쓰레기들. 방구석 정신병자들."
그의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변하자마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시아악
디저트 스푼 위에 강렬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 주위의 공기가 지나치게 높은 열과 전하성으로 인해 방전되며 빛이 흘렀다.
너무나도 초월적인 힘.
"세상이 망하겠구나. 정신병자들에게 주어진 분에 맞지 않는 힘 때문에."
"...으음."
한우준은 그다지 열심히 플레이를 한 이그드라실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그 짧은 시간의 플레이에도 유저들의 평균적인 인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그 말만큼은 순순히 납득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겠다는 생각과, 이건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을 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장 형의 변화를 믿지 못했던 한우준이었지만.
일단은 그 말에 집중했다.
"정신병자들의 대장이 필요하다는 생각. 중학생 때, 내가 반장 해 보려고 했던 것 기억 나니?"
"...그,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한우준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뭐, 그렇지. 내가 학교폭력을 당하기 시작했던 계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설마··· 옛날부터, 대장 노릇을 하고 싶었었다는 거야?"
"바로 맞았다."
그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어 주먹을 쥐었다.
"사회성이 영 좋지 않아,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접어두었다만··· 거울을 보니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하지만, 그게 마음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잖아."
다시금 한우준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대장 노릇이라는 게 그냥 사람들한테 어화둥둥만 받는 자리도 아니고.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리는 건데. 그걸···"
"그런 생각도 평소에 많이 했었다. 대통령한테 갑질하기, 중국 주석 한 대 걷어 차 주기···"
유치한 소리로 그에 답했다.
"물론, 현실에서 함부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지. 하지만, 이제는 그게 너무도 플레이어들에게는 쉬워져버렸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게 쉽다고."
"아이고, 난 따라가지를 못하겠네···"
"그러니까, 그런 깽판이 일어날 게 너무 뻔하다고 느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그 선봉에 서기로 했지. 그 선을 잘 지키도록."
"선··· 그런 생각이었다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준이 너까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강하다. 게임을 너무 오래 했거든."
"그게 이런 결과를 만들다니. 참 세상이···"
"한 치의 과장도 없이 그대로 말하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으지직
한우현이 스푼을 뭉쳤다. 작은 공 모양으로 그리고 거기에 포스를 불어넣었다.
-[물리 왜곡술 : 힘의 순환 : 열 왜곡]
포스를 열 에너지로 치환하는 오리지날 스킬. 그 기초적인 활용.
-스르륵
수저가 녹아내렸다.
그를 지켜보던 주방장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 생각해보니 파인 다이닝이라면 수저도 당연히 비싼 것일 텐데.
이따가 나가며 배상해줘야겠다.
-부글부글
그리 생각하는 동안, 공 모양 쇳물이 끓어올랐다.
-훅 후욱 치익
그리고 기체 형태로 응집되더니, 찬란하게 빛을 냈다.
자유 전자가 기체의 틀을 넘어서 방출되는 플라즈마 현상.
여기서 더 힘을 쓴다면 핵융합도 일으킬 수 있었지만,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미, 미친. 쇠를 증발시켜?"
"...안 뜨겁잖아. 이것도 그 플레이어라는 거의 능력이냐?"
"세상에···"
경악한 가족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최대의 힘으로 공격한다면, 여의도를 일격에 폐허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정도라고?"
"무슨, 무슨. 초능력자 얘기는 들었다만. 여의도라고? 말도 안 돼···"
"그런 놈들이 지금, 너무 많습니다. 너무나요."
-드르륵
한우현은 그 빛나는 에너지 덩어리를 양 손 사이에 띄우고서는 천천히 걸었다.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합니다. 그래서, 저보다 약한 그 게임 폐인들이 뭘 할 수 있는지, 뭘 할 지도··· 너무 선히 보이더군요."
그의 눈에 포스가 빛의 형태로 응집되어 빛났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겠다고. 나아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준이까지도."
"지금까지 못다 한 것까지 모두 합해, 잘 해 드리겠다고."
"그 시작을 위해, 저 같은 놈들이 날뛰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피이익
한우현이 힘을 뺌과 동시에 쇳물이 서서히 식어들었다.
"..."
"..."
"..."
침묵이 흘렀다.
"...우현아."
"네, 아버지."
"솔직히, 정말로 그 다짐 자체는 정말로 기쁘다만··· 아직은 믿기 힘든 일이 너무나 많구나."
"이해합니다. 저도 옛날의 저 자신이 부끄러우니까요."
"크흠, 큼···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가족 아니냐."
"...예."
아버지가 붉어진 눈시울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모든 게 다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기쁘다. 네가 네 의지로 대장 노릇이건, 뭐라도··· 하려고 한다는 게 말이다."
"그래, 맞아. 공무원은 아니라도, 중요한 직업을 이제 가졌다는 거 아니니? 엄마는 그거면 됐다."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정말로요."
결국, 그런 말이었다.
너무나 속을 썩이던 방구석 히키코모리 아들이 어떻게 그렇게 심경이 변한 건지.
그 설명이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들이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믿겠다고.
그 모든 의사를 느낀 한우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준아."
"...쳇, 알았어요. 나도 형, 믿어. 못 믿는다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어색하다는 거지. 이해한다. 괜찮아."
"응···"
"앞으로 내가 잘 하마. 아니, 잘 할게."
"아우, 오글거리게 그 말투 좀··· 알았다니까···"
눈치를 살피던 주방장이 갈색 빛의 작달만한 와인 보틀을 꺼내왔다.
"자, 다들 즐거운 가족 화합의 식사 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희가 그 기념으로 드리는 디저트 와인입니다!"
"디저트 와인? 와인도 디저트가 있어요?"
"아이스 와인이라고, 포도를 겨울에 그대로 야외에서 숙성시켜···"
"...! 뭐 이리 달아!"
"진하네···"
다시금 풀어진 분위기를 느끼며, 한우현은 눈을 감고 와인을 홀짝였다.
진한 당도와 함께 느껴지는 희미한 초콜릿, 아몬드, 커피의 향취.
나쁘지 않았다.
-지잉
그 분위기를 느끼던 도중.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국제 발신]
"..."
한우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번역기를 사용하기에 문법이 어색함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체 정체가 무엇입니까?]
-[미국 정부는 저를 말렸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 표정이 굳어짐을 넘어서, 차갑게 떨렸다.
-[대체 어떻게 단 하루 만에 모든 플레이어들을 묶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째서 모든 서버를 대표한다면서, 글로벌 서버에는 아무런 개입이 없으신 것입니까?]
-[부디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우현은 눈을 그 마지막 구절에서 뗄 수가 없었다.
-[저는 당신과 같이 세계에 단 둘 뿐인 레벨 300 플레이어. 라일리 그레인저. 캐릭터 네임 네로입니다.]
38화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1)
-구원자여, 이 땅에 강림하소서! 정의의 멜로디, 온 세상을 채우소서!
-그들의 위선과 거짓말의 사슬을 끊어내고
-그들이 쳐 놓은 그물에 스스로 갇히게 하소서!
고즈넉한 멜로디의 재즈 음악이 울려퍼지는 바Bar의 한가운데.
"...형."
"그래, 우준아."
"이렇게 새삼스럽게 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그 앞에 나란히 앉은 한우준이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선, 어머니와 아버지가 슬슬 자리에서 일어설 때.
한우현은 한우준을 잡았다.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다면서.
부모님도 오랜만에 우애 좀 나누라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갔다.
그래서 그 둘은 지금 바에 와 있다.
"히비키 있습니까?"
"운이 좋으시군요. 마침 최근에 개봉한 게 딱 반 병 있습니다."
"온더락으로 부탁드립니다."
"손님께서는?"
"어, 난···"
"이 쪽은 바는 처음이라. 적당히 달달한 칵테일로 부탁드립니다."
"피냐콜라다로 드리겠습니다. 혹시 과일 알러지 있으신 것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없어요. 그대로 주시면···"
"예, 주문 확인했습니다."
-덜그럭
-서걱
-서걱
바텐더가 얼음을 깎는 사이.
둘 모두 생각에 잠겼다.
한우준은 형이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하는 궁금증에.
한우현은 그 국제 발신 문자 때문에.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결국 식당에서 나오는 그 순간까지 그 문자에 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휴대폰을 만지는 순간,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그 감정을 차갑게 통제하고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해도.
뭔가 실수를 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원 계획대로면, 미국과 그 산하 플레이어들과는.
당분간은 접촉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판단 하에, 무시 하기로 했다.
그래, 이건 합리적인 판단이다.
···절대.
절대로.
틀린 선택이 아니다. 이게··· 맞다.
"...형?"
"아, 응."
"갑자기 왜 이리 손을 떨어?"
"아."
그제서야 한우현은 스스로의 상태를 인식했다.
플레이어가 되고 10년이 지났을 즈음.
감정과 이성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흘리고 다녀서야.
"아무 것도 아니다. 오랜만에 위스키를 마시니 좋아서 말이다."
"...형이 이런 걸 좋아했다고?"
"그래. 히비키는 라···"
아차.
무심코 라일리의 이름을 꺼낼 뻔 했다.
"...라이트한 풍미가 좋은 술이지."
"이게? 한약 향 같은 거밖에 안 나는데. 나도 한 모금 해 볼까?"
"자."
"켁, 케흑! 미친, 통나무 주스 같은 맛이잖아? 이게 뭐가 라이트해?"
"하하, 위스키는 처음이십니까?"
"콜룩··· 위스키가 아니라, 그냥 양주가 처음이에요."
"처음부터 온더락으로 드시는 건 너무 하드하죠. 자, 피냐콜라다입니다. 이걸로 혀를 적시시죠."
"휴··· 이건 좀 달달하네. 난 저런 건 도무지 뭔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어."
"맛보다는 향이지. 오크 나무 특유의..."
"...근데 그런 건 언제 배운 건데?"
"뭐, 인터넷에서 봤지. 아무튼, 본론에 들어갈까."
대충 그 상황을 넘기고서는, 한우현은 할 말을 하기로 했다.
"본론... 그래, 뭔데?"
"우준이 너, 정형외과 레지던트지? 인턴 때는 신경외과를 지망했었고."
"응? 어··· 그렇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인 듯.
한우준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나한테 과외를 좀 해 줬으면 해."
"...과외? 음, 레지던트라는 게 워낙 바빠서···"
"걱정 마라. 나도 자취방 자체를 그 쪽으로 옮길 예정이니까. 자주 찾아갈 테니, 너 편한 시간에 맞추마."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데 뭘? 설마 수능이라도 다시 보게?"
"신경해부학. 골학. 혈관학. 종합적인 기능해부학."
"...해부학?"
"그리고 기왕이면, 인체 생리학도 말이다."
그 의문이 혼란으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
"그, 내가 너무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데··· 기초 의학 공부가 왜 필요한데 형이? 길드장 노릇 할 거 아냐? 의사 할 것도 아니고···"
"플레이어란, 인간을 초월한 존재지만 결국 인간이지."
"결국 인간?"
"이건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연구지만, 플레이어의 힘은 근원 기관이 있다."
그 말에 한우준의 눈이 커졌다.
의학도였으니, 초능력자 힘의 근원이 되는 생체 기관이 있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으므로.
"송과체. 파이니얼 글랜드. 대부분의 척추동물에서는 멜라토닌 분비 외에는 퇴화한 기관이지."
"...그걸 형이 어떻게 아는데?"
"데카르트가 주장했었지. 뇌 안에 숨겨진 장기인 송과체는 영혼과 신비의 근원이라고."
"갑자기 왠 오컬트 같은 소리를... 데카르트? 의사도 아니잖아."
"플레이어에게는 달라. 송과체는 그 신경 줄기체가 확장되어 뇌 곳곳에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돌기를 타고 외부 뇌와 척수로 포스를 흘려보내지."
"...더 말해 봐."
"구체적으로는 송과체를 감싸는 간뇌에서 그것이 정제된다. 그리고 그 아래 있는 뇌줄기. 숨뇌, 중뇌, 교뇌, 연수를 타고 각 신경이 관장하는 영역에 걸맞게 가공되지."
"...씨발."
한우준의 표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굳어졌다.
"나무위키만 봐서 알 내용은 아닌데··· 독학이라도 따로 했어? 아니, 공부 할 이유가 없는데···"
"...그러게 말이다."
그 의문에 한우현도 헛웃음을 지었다.
동생의 아리송하다는 얼굴.
그 위에 피곤에 찌든 퀭한 미치광이 의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차석 졸업생이자, 서울미래병원 수석 인턴 대표.
필사적으로 플레이어의 힘. 포스에 대한 모든 것을 찾고 공부해 형을 바꾸려 했던 회귀 전의 동생이.
-씨발, 씨발, 형··· 세계 최강의 탱커라며··· 형 만큼 레벨 높은 성기사 없다며···
-난··· 그냥 병신이지. 탱커는 무슨···
-하, 능력이 없다고···
-그래, 움직이고 싶지도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무슨 최강이야···
부모님이 플레이어들의 내전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어 버린 뒤.
한우준은 미친 듯이 플레이어에 대한 논문과 연구를 찾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자, 들어봐. 최근에 미국에서 연구해서 밝혀낸 거래. 플레이어가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야.
-그런 걸 들어서, 어디다 쓰냐.
-여기 논문 봐 봐! 이대로만 따라하면, 형이 가진 그 빌어먹을 우울증부터 다른 정신병까지 싹 다 치료할 수 있다고!
-...난 영어 못 해.
-이런 씹··· 그럼 들어! 들으라고! 씨발! 내가 하나부터 끝까지 다 떠 먹여 줄 테니까!
-첫째! 모든 포스의 근원은 송과체다! 스킬을 단순히 쓰는 것이 아니라 진정 제어하기 위해서는 송과체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둘째! 송과체의 존재를 느끼고 나서는, 불수의 장기인 송과체를 수의 장기로 바꿔 통제 해야 한다! 그 과정은 극도로 섬세하고도···
-셋째! 송과체를 의지대로 통제 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간뇌를 통제한다··· 나아가 소뇌, 기저핵, 뇌줄기를 직접... 최종적으로는 대뇌 겉질과 속질을...
-...
-...
그것은 바로, 세계 최강이자 사실상 유일한 탱커 직업의 랭커인 한우준을.
어떻게든 치료하고 고쳐 써 먹는다면, 희망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믿음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기초는 됐어. 형,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 자체가 그리 나쁘진 않아.
-개소리는 하지 마...
-난 입에 발린 말 안 해. 이건 진심이야. 내가 만점자는 아니지만, 수능 전국 1등이 인정하는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리고, 좋은 소식이야. 미국 국방부가 형을 직접 초빙했어.
-...왜?
-형이 필요해! 보스의 공격을 버틸 수 있는 탱커가 형 밖에 없다잖아!
-...난, 아직도 스킬을 제대로 제어 할 수 없어. 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 무섭다고···
-씨발, 좆 같이 얽힌 대뇌 전두엽 죄다 정상화 했다며! 그럼 이론 상 우울증도 싹 날아간다고!
-확실히 전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잘 모르겠다. 그리고, 신경까지가 한계야. 더는 모르겠고, 못 하겠는···
-하, 이제부터가 진짜 내 전문 분야야. 관절과 근육이 정형외과의 핵심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난 싸우기 싫...
-닥쳐! 들어! 내가 밤 새서 정리한 거니까! 첫째, 인간의 관절과 근육은 그 구동 범위에 한계가 있으나, 포스를 사용한다면···
-둘째, 포스는 일차적으로는 신경 통로들을 따르지만, 그 다음으로는 림프계과 혈관계를···
-...
미국까지 강제로 그를 끌고 가며 미래를 강구했던 한우준은 정말로 대단한 동생이었다.
그 능력도, 의지도 굳건했다.
그 병신 같았던 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드디어.
-형도 이제, 진짜 초인이야. 스킬이나 싸 지르는 발사대가 아니라.
-이게··· 진짜 플레이어의 힘. 하지만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당연하지. 누가 해부학을 두 달만에 통달 해? A+ 맞은 나도 방학 때부터 1년은 공부했는데.
-그럼 이제 끝인가? 좀 자도...
-아니, 시작이지. 사실 원래는 포스로 뇌 안을 청소하면 정신병도 고칠 수 있다는 거 보고, 시도 한 번 해 본 것일 뿐이었는데...
-효과가... 확실히 있긴 해.
-그래. 형,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고. 그러니까, 더 해보자.
-더?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뭔데?
-이제 물리학을 공부 해 보자.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만약 한우현의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이 한우준에게 있었다면.
세계가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생은 처절하게 노력했으며, 필사적이었다.
-...넌 의사잖아.
-씨발, 나 원래 꿈이 물리학자였거든? 중학생 때 물리 올림피아드 대상도 탔었어! 지금도 취미로 최신 논문 보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건, 형한테 물리학 공부가 필요하단 거야.
-알았어. 하지만 물리학은 왜···?
-토크, 작용 반작용, 역학, 장 이론··· 그걸 제대로 이해하면, 플레이어는 물리 법칙을 왜곡할 수 있대. 허공에 탄성체와 질량체를 만들고, 벡터와 관성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거지.
-...액셀레이터?
-그게 뭔데. 아무튼, 탱커라면 보스의 공격을 흘려야 하니까. 쓸 데가 있을 거야.
-난 아직 싸울 마음은···
-일단 들어 봐. 플레이어의 포스는 과학을, 정확히는 현상 물리학을 부정한다. 열 역학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조롱하고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비웃는다···
-다시 말해, 포스를 다루는 충분한 이해가 있다면···
-...이론상 시공간과 기본 상호작용, 표준 입자 모형을 자유자재로 왜곡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한우준은 그 노력의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플레이어간의 싸움에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도망치던 한 플레이어가 난사하던 스킬에 건물이 무너졌을 때.
거기 깔려서 과다 출혈로 죽었다.
플레이어였지만 그 레벨은 겨우 201.
신체의 내구도가 일반인보다 2배 가량 강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아··· 형···
-안 돼, 안 돼! 조금만 참아, 곧···
-나··· 이미, 안 돼. 어차피··· 못 살려··· [사제]도 없고, 구급차도 없고··· 실혈량이 너무 커···
-아니야, 아니야··· 살 수 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괜찮아. 형 잘못 아니니까. 그냥··· 씹, 운이 나빴던 거지···
-여기, 내가 직접 미국 정부한테 플레이어 시체 넘겨받아서... 해부해 가면서 그린 거야··· 가져가···
-이건 일반물리학 책이지만··· 그 이상으로, 심화된··· 포스로 응용 가능하다는 원리는 다 적어 놨으니까··· 봐···
-내가, 내가 미안해! 눈 감지 마! 한우준!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냥 세상이 좆 같아서 이렇게 된 거니까··· 그냥, 앞으로 잘 해 줘···
-이거, 진짜 형한테 맞게 열심히 쓴 거니까···
-...부탁···해···
한우준이 그에게 철저히 맞춤형으로 만들어 준 지식들은.
단지 고 레벨 성기사였던 한우현을, 진정 이그드라실 포스의 원리를 통달한 최초의 플레이어로 만들어 주었다.
-...이걸 정말 모두 이해 하셨다고요?
-아니, 이해가 아니야... 이해는 어설프지만, 그를 넘어서서... 정말로 제대로 응용하실 수 있으시군요!
-맙소사, 이론적인 영역이었는데··· 정말로 해부학, 생리학에 기초 물리학 전반까지 이해하고 조정하는 플레이어가 나올 줄이야.
많은 이들이 세상이 게임이 되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세상은 게임이 아니었다.
게임으로 이해해서는, 플레이어들은 그 진정한 힘의 티끌조차 끌어 낼 수 없었으니까.
39화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2)
돌이켜 떠올려 보건데, 한우준은 정말로 똑똑한 동생이었다.
사실, 한우준이 보고 적용하기 위해서 한우현에게 가르쳤던 지식들.
그것들은 현실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수준들이었다.
뭐? 플레이어의 힘이 송과체에서 나오니까 송과체를 통제하면 더 강해지는 거 아니냐고?
송과체는 뇌를 구성하는 장기들 중 하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인간은 자기 뇌를 의지대로 통제 할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진화하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어째서 욕망이니 감정 따위에 휘둘려 실수를 하겠는가?
하지만, 놀랍게도 플레이어는 그것이 가능했다.
정확히는, 이론적인 영역이었던 그것을 정말로 현실에서 가능하도록 한우준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정말로 모든 뇌를 수의적으로 활성화 하다니··· 이러면 혈압과 체온부터 수면과 심박수까지 제어 가능 하다는 겁니까?
-네. 할 수 있습니다.
-허, 허어··· 이건, 단순히 안다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
-당신의 재능이에요. 포스를 생리학적으로, 해부학적으로 깊게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 운용마저도 극도로 세밀한 재능!
-...저는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뛰어난 건, 제 동생이었죠.
-그 소식은 유감입니다만···
미국 국방부 산하 모든 영역 이상현상 조사국.
거기서도 만약에, 어쩌면? 하며 추측하고, 상상했던 망상에 가까운 수준.
물론 그것이 완벽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충분했다.
-이제라도,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 하고 싶지만... 솔직히,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가 미국 밖에 없는 마당에. 늦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군요.
-아...
-그래도,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환영합니다. 아서 한우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우현? 공격대 초청은 거절했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전 라일리 그레인저입니다. 세계 플레이어 연합의 회장이고... 아니다.
-그냥, 네로라고 부르세요.
흔히 창작물에는, 초능력자들이 그 능력을 마치 처음부터 달려 있던 팔 다리마냥.
자연스레 쉽게 쓸 수 있다는 듯 묘사한다.
맞다.
세상이 게임이 되었기에.
플레이어들은 그 게임 스킬을 정말로 쉽게 쓸 수 있다.
'그대로 재현만 하는 수준'이라면 말이다.
그것에 불과하다면 플레이어들은 초인이 아니다.
스킬 발사대에 불과하다. 그냥 화력만 세고 좀 튼튼한 포병.
-으음, 어느 정도 이해하셨다고 하지만 정말 제대로 아시는 건 아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공부를 잘 했던 사람은 아닌지라···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플레이어들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니까.
-저희가 좀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오히려, 한우현님의 존재 덕분에. 포스 이론의 많은 부분을 보완 가능 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한우현 님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가르쳐 주시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저런 기교를 익힌 사람 자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연구소에도 몇몇 있습니다.
-...만나고 싶군요.
-다만, 실전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제어하는 수준은 당신 뿐입니다···
-반갑군. 나는 자일라 라모. 네 동생이 읽었다던 논문··· 내가 썼지. 플레이어 신체학 연구원이다.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반갑습니다. 저는 알론 무하마드입니다. 현대 물리학과 고전 물리학 전공이지요. 지금은 물리 왜곡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의 세상은 게임이 되었지만.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무수한 물리 법칙들과 생물학 체계가 포스라는 불합리한 힘의 밑구조를 떠받친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짜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게임 스킬을 넘어서 자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제어하고 다루는 진정한 초인이자 현실의 왜곡자로.
-모두 주목! 지금부터 보고 배우십시오!
-물리학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신경 해부학만이라도 똑바로 외워라!
-씨발, 몸 안에 신경이 저렇게 많다고?
-이 나이 처먹고 저걸 다 어떻게 외워?
포스가 어떤 식으로 체내에서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신경 해부학.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산 되는지 이해하기 위한 골학, 근육학, 관절학, 혈관학, 면역학까지.
마지막으로 스킬들이 어떤 식으로 [단단한 불]이니 [작용자 없는 힘], [공간 왜곡] 같은 비 물리학적 현상을 일으키는지 알기 위한 이론 물리학.
물론, 아주 깊이 이해 할 필요는 없다.
겨우 대학교 학사 과정 정도.
4학년 학부 수준의 지식만으로도 스킬의 이해에는 충분하니까.
문제는,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그 정도 수준의 학문조차도 이해할 지능이 없었다는 것이다.
-씨발, 다음 보스 나올 때까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이걸 공부하라고?
-하지만 이미 익힌 플레이어들의 능력이 너무나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아오 이해가 하나도 안 되잖아 이 리슨리슨아캔리슨족아!
교과서 첫 장부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플레이어들.
고 레벨 플레이어란, 어떠한 사회활동도 하지 않고 게임에 인생을 바친 존재를 뜻한다.
당연히 대학 전공 급 지식을 빠르게 익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레벨 290이 되지 않는 플레이어라면 애초에 보스에 맞서 제대로 방어를 하거나 반응할 수 없습니다!
-씨발, 무적기 있는데···
-무적기 끝나면요? 스킬을 해체하고 자유자재로 조정하기 위해서 이 지식은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외워야 너희들이 산다! 하기 싫어도 해라! 던전 브레이크가 코앞이다!
-씨발··· 난 고졸인데 이걸 어떻게 이해해···
-아가리 해. 난 중졸이야.
-자랑이다 병신아.
그래서 미래에서는.
정말로 선천적인 이해로 인해 본능적으로 송과체를 의지대로 운용한 이들은 있었지만.
-씨발, 못 해! 그냥 뒤질란다! 과학은 중학생 때 포기했는데 뭔 해부학이야!
-저도 못 하겠습니다··· 수포자인데 관성 좌표계? 충격량 계산? 첫 장부터 무슨 소린지···
-플레이어 중에 일반적인 기초과학부 대학생 수준이 되는 이가 이렇게 드물다니.
-괜히 쓰레기 게임으로 유명했던 게 아닌 건가···
끝내 미국 정부가 멸망하던 순간까지.
신경해부학을 이해하고 제대로 그 힘을 원리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이는 100명도 되지 않았으며.
-던전 입구를 봉쇄하는 유일한 가능성이 위상 수학을 익힌 플레이어의 공간 왜곡 스킬인데···
-알론 무하마드가 분명 설계한 대로만 운용한다면 던전 시공간을 아예 지구에서 격리 가능하다고···
-...하지만, 가장 학력이 좋았던 플레이어조차 아직 교과서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서부가 이미 반 쯤 폐허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그건, 포기해야 합니다···
-결국 보스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나···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전반까지 이해한 이는 10명도 되지 않았다.
회상을 마친 한우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길드에는, 연구팀도 필요하거든."
"허···"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플레이어 모두가 너무나 멸망의 위기 아래 빠듯하게 익혀서 대부분이 실패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그 모든 과정을 최적으로 알고 있는 한우현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길드장인 나부터가, 그걸 잘 알아야 하지. 나름대로 혼자서 공부하려고 해 봤지만, 아무래도 부족해서 말이다."
이것은 그 시작점이었다.
한우현의 지식은 철저히 실전과 응용에만 맞춰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됐었다.
애초에 죄다 죽고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혼자서 공부 했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까 부탁 하는 거지."
이번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 그 체계를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울 것이다.
당연히, 한국 최고의 수재들이 들어가는 의과대학에서도 매 년 유급자가 발생하는 과목.
플레이어 고유 신체 대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통달 했다 하더라도.
그 근간인 진짜 기초 의학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런 거라면, 내 전문이지. 형 말대로 신경외과는 사실 개인적으로 아직 흥미가 있어서, 가끔 공부했거든."
"고맙다."
"뭘, 이 정도야. 그런 거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히, 생각보다 동생이 협조적이었다.
"형이 이렇게까지 달라졌는데. 나도 최대한 도와야지."
"..."
그 말은.
살짝.
아니, 많이 감동적이었다.
"아, 하나 더 부탁할 게 있다. 병원··· 그러니까, 서울미래병원 말이다."
"응?"
"거기 신경외과 교수들 중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다리 좀 놔 줄 수 있겠니?"
그리고 당연히, 혼자 공부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모두에게 그 지식을 강제로 주입할 것이다.
틀에 박힌 게임 스킬로는 한계가 있기에, 보스에게 제대로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
한우현이 본격적으로 플레이어 생물학과 실제 인체 생리학, 인체 해부학을 배우고 난 뒤에는.
그 결합된 지식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심화 연구에 들어가야 했다.
회귀 전에서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 미국조차도 무너져가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으니까.
-이 놈은 송과체 구조가 특이하군. 어디...
-마법사 계열은 대뇌 피질까지 뻗어나간 신경 돌기가 각각 고유 패턴을 지닌다···
-도적 계열은 기저핵의 모양이 보다 특징적이군··· 은신과 관계가 있나?
-전사 계열은 소뇌와 척수 시작부가 좀 더 두텁다···
플레이어 고유 생물학은 사실상 한우현이 멸망 후에 죽인 플레이어들을 해부해가며 대부분을 터득했다.
"정확히는, 뇌신경 교실 최고의 임상 교수들을 원한다."
오성서울병원과 서울미래병원은 의료강국인 한국에서도 가장 수준이 높은 곳이다.
특히, 서울미래병원의 신경과는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는 수준.
"그리고 해부학 교실 기초 교수들도."
"...하. 이거, 그런 생각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 분들께 과외 받는 게 낫지 않아?"
"그 권위적이고 바쁜 교수들이 아무리 유명인이라고 해도 기초의학 과외를 해 줄 리가."
"...그것도 맞는 말이네."
"나 스스로의 공부는 너한테 도움을 받고, 교수들과는 공식적으로 플레이어 생물학 연구를 도움 받으려 한다."
"쉬운 부탁은 아니지만, 병원 쪽에서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네."
"다행이네. 너는 언질 정도만 부탁한다. 어차피 공식적으로도 투자와 협력을 제안할 것이니까."
"좋아, 그런 거에 관심 있을 분들이 생각났어···"
잠실은 이제,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될 예정이었다.
한국 최대 규모의 공원과, 한국 최고 수준의 병원.
둘 모두 그 쓸모를 다하리라.
괜히 그 곳을 길드의 위치로 점 찍은 것이 아니었다.
"좋아. 고맙다, 우준아. 한 잔 더 할까?"
"음, 그럼 이번에는 좀 상큼한 걸로···"
-쨍
"건배."
"...건배."
물론, 이것만이 다가 아니다.
신소재 공학, 플레이어 생물학, 포션 화학, 포스 물리 왜곡학까지···
정말로, 정말로 많은.
무수한 산업들이 한우현의 계획 아래 있었다.
그 시작이 바로 서울미래병원.
한국 최대의 재벌가 중 하나인 미래 그룹이 운영하는 곳.
나아가 의학계 뿐 아니라, 그들 전체가 플레이어 산업에 매달리게 할 것이었다.
흔히 등장하는 게임 판타지 소설들에서 마력과 스킬은 분석하기 어렵다고 서술 되지만.
'진짜 세상'은 게임이 아니기에.
이번에는, 그 결과물을 쥐어 짜낼 수 있으리라.
40화 질서 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