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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오리너구리]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 1-200 @연재중

[1] 1화. 회귀

배가 고팠다.

그래서 검을 휘둘렀다. 가진 게 몸뚱이뿐인 고아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다행히 내게는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무공 하나 배워 본 적 없는 녀석이 초절정에 올랐으니 말 다 했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베고, 그 핏값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검을 휘두르고....

그런 나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더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걸.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검귀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마두라 불릴 정도의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피를 너무 많이 봤다. 그게 문제였다.

검 끝에 자비를 두지 않았고, 인정(人情)을 두지 않았으니, 오래 살아남을수록 복잡해지는 은원이 거미줄처럼 전신을 얽매는 것은 당연한 일.

피투성이 길의 한가운데서 깨달았다. 세상일이라는 게 검 한 자루로 어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검귀라는 별호가 퍼져 나가려던 차. 마교가 발호했다.

평소에도 자주 중원을 침공해 오던 녀석들이었지만,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의 근본은 무림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 복수를 꿈꾸며 뭉친 집단이니까.

엄밀히 말해 패배자 집단이나 다름없는 이들 아닌가. 제대로 된 무공도 없고, 돈도 없고, 뒷배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원수를 죽이겠다는 악기뿐. 그렇기에 언제나 정파에겐 연민을, 사파에겐 비웃음을 사는 집단이었다.

...천마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는 중원 전체를 불태우는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일방은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그 자리에서 멸문당했으며.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성세를 구가하던 오대세가는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했다.

사파 무인의 연합인 사흑련 또한 다를 게 없었다. 성정은 둘째치고 능력 하나는 확실했던 사흑련주가 순식간에 살해당하자 살아남은 이들은 마교에 투신하거나, 어딘가로 도망쳐 버렸으니까.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가 하나둘 허무하게 죽고, 나중에는 합공까지 했건만 천마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더라.

명실상부 고금제일인.

정사가 오랜 앙금을 털어내고 힘을 합쳤음에도 그를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도달한, 내 평생의 은원이 만들어 낸 악명조차 하찮게 영락하고, 서로가 서로의 생존만을 도모하는 한 시대의 끝자락─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고, 또 도망친 끝에 다다른 하북성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독무후 당소월. 사천당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와는 정파와 사파라는 출신의 차이가 있음에도 말이 잘 통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태어난 사내와, 가진 것을 전부 잃어버린 여인이 가까워지기에는 별다른 계기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들은 천마가 황실의 군세마저 무너뜨리고, 기어이 하북성에 발을 디디며 끝을 고했다.

여기서 더 도망치면 갈 곳이라고는 요녕성 혹은 새외무림 정도겠지. 이렇게 된 거 아예 천마를 피해 중원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당소월은 천마와 싸우기를 선택했다.

"정말 가야겠나?"

"저를 살리기 위해 많은 가솔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훌륭한 이들이라 생각한다. 나는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행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전 그날 이후로 당가의 율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저런. 그 많은 이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되겠군."

"하지만 검귀, 당신은 살릴 수 있답니다. 도망칠 생각이시죠? 시간 벌이는 충분할 테니 안심하시길."

"...알고 있었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으로 흐릿한 밤하늘은 달빛조차 어둡게 물들였다.

당소월은 그런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땅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한동안 말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던 우리였으나, 엇갈린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에게로 향했다.

당가의 멸문 이후 하얗게 센 머리카락. 길게 자란 앞머리는 얼굴의 오른쪽 절반을 덮었고, 머리카락처럼 빛깔이 변해 버린 녹색 눈동자에는 짙은 피로와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잠시 얼굴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나?"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얌전히 이쪽을 향해 얼굴을 들이미는 당소월. 그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옆으로 넘기자, 흉하게 녹아내린 반쪽이 드러난다.

절세미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했을 미모를 뒤틀어 놓은 상처. 어린 시절,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한계를 뛰어넘은 독공을 펼치다 이렇게 됐다고 했던가.

당소월 본인조차 꺼리는 흉터지만 그것이 내가 그녀를 꺼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한참을 당소월의 맨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기억하는 걸 넘어, 아예 심상에 새겨 넣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당소월의 얼굴이 살짝 붉어질 때쯤. 각오를 다졌다.

"함께 가지."

"안 됩니다."

"왜. 내가 독무후 자네처럼 화경이 아니라 그런가? 초절정이라도 나 정도면 꽤 도움이 될 거라 자신한다만."

"검귀. 당신이 목숨을 걸 이유는 없습니다. 항상 말하지 않았나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고."

"그렇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내가 그동안 당소월과 나눈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보잘것없는 고아로 태어나, 한 자루 검에 의지해 살아온 인생. 그 끝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인을 만났으니 예전처럼 살 수는 없었다.

어느새 다시 얼굴의 반쪽을 가린 당소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당소월은 순간 흠칫했으나 잡힌 손을 빼진 않았다. 대신 머뭇거리며 내 손을 마주 잡았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까. 차마 당소월을 바라볼 수 없어 괜스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달아오른 체온을 식히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밤이 어둡군. 오늘은 만월이 뜬다 하여 기대했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밤하늘이라 생각하면 좀 아쉽지요."

"언젠가 맑은 날이 오면 다시 보러 오지. ...함께 말이다."

"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내 말뜻을 이해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시나요? 당가의 건물은 죄다 불타 무너졌고, 자랑이던 연못은 말라 버렸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전각을 짓기 딱 좋답니다."

"갑자기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요. 함께 달 구경을 위한 건물을 짓자는 소리지요."

"나랑 네가?"

"예. 저와 당신이."

함께 무너진 가문을 재건한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바짝 굳어 버린 내 모습에 당소월이 한차례 키득이더니, 쥐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이리로 오세요."

"...어딜 가려는 거냐."

"제 방이랍니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데 여기서는 좀 그렇잖습니까."

"그, 런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소월을 따라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밤새 서로의 시간을 나누었다. 내일이 오지 않을 사람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만나기 전까지의 과거를 공유했고,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계획했다.

만약 이게 저잣거리 매담자(賣談者)의 이야기였다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천마를 쓰러뜨리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겠지.

허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소월은 가문의 복수를 위해,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불사를 각오로 천마의 앞에 섰고.

사천당가의 마지막 꽃은 심장이 꿰뚫려 스러졌다. 바로 내 눈앞에서.

주변을 보랏빛으로 물들인 독기의 늪. 그 중앙에서 힘없이 죽어 가는 당소월. 그녀의 얼굴은 고통과 못다 한 복수심으로 표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독기를 뒤덮듯, 얼굴 위로 난처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 모양뿐인 속삭임.

'살아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당소월은 떠나가는 천마를 향해 독수를 뻗었다.

화경에 이른 독인의 몸마저 녹여 버릴 정도로 강렬한 독기. 주변의 자색 늪이 이에 반응하며 거세게 끓어오른다.

당소월이 자신의 전부를 격발시켜 펼친 최후의 절기. 닿은 것은 뭐든 녹여 버리는 독무(毒霧)가 천마를 집어삼킨다.

아무리 천마라도 무사할 수는 없었는지 녀석의 피부가 조금씩 타들어 갔다. 하지만.

쿵!

강하게 내지른 걸음 한 번에 모든 것이 흩어졌다.

당소월이 쥐어짠 최후의 의념도, 그녀가 일평생 쌓아온 독으로 이루어진 안개도, 심지어는 시체마저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아."

더는 흘릴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분루(憤淚). 희미해져 가는 알싸한 독의 향기. 짐승의 것에 가까운 포효.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내 손에 들린 한 자루 검.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강렬한 살의가 시야를 붉게 물들인다.

"죽여 버리겠다!!"

내공, 수명, 이성 등등. 내게 남은 모든 것을 불태우며 천마를 향해 일직선으로 짓쳐 들었다.

허나, 그럼에도 극의에 다다른 천마신공의 마기를 베어낼 수는 없었다.

"....."

천마가 항상 두르고 있는 호신강기조차 뚫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지독할 정도로 삭막한 눈빛. 그 무저갱을 들여다보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물론이요, 당소월마저 눈앞의 사내에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으리라고.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오늘로 끝이라 정한 목숨이다. 얼마 남지 않은 선천진기를 아낌없이 터뜨렸고....

천마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손을 까딱였다.

우웅-!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강기. 검게 물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이를 갈았다.

"...닿지 못했는가."

만약 내게 조금만 더 재능이 있었다면,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조금 더 고강한 무공을 익혔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당소월이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천마를 벨 수 있었을까.

허무하게 흩어지는 후회. 이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다.

그랬어야 했다.

***

"커허억!"

통째로 날아갔을 터인 머리를 더듬거리며 숨을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혹은 밤새 술이라도 마시다 정신을 차린 것처럼 알딸딸한 감각.

오랜만에 회귀 전의 일을 꿈으로 꾼 건가. 어쩐지 잠자리가 사납더라니.

그렇다. 이유도 모르고 원리도 모르지만, 나는 죽지 않고 과거로 회귀했다. 거진 20년 전의 어린 시절로 말이다.

뿌옇게 흐려진 머리로 주변을 살폈다.

어두컴컴한 동굴 벽. 코끝을 찌르는 독특한 악취. 덜덜 떨리는 몸뚱이. 텅 비어버린 단전.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는 환경과 몸 상태다. 이를 자각하자 뒤늦게 어제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연명할 뿐인 고아로 회귀한 나는 꽤 열심히 두 번째 삶을 살았다.

초절정에 이르렀던 깨달음을 바탕으로 빠르게 무공을 수련했고, 나를 사파 무인의 세계로 꼬드겼던 흑도 조직을 무너뜨려 자금을 확보했으며.

....그렇게 단기간에 얻은 힘과 재산을 전부 쏟아부어, 무림초출이던 당소월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읍! 으브븝!"

발치에서 꿈틀거리는 당소월을 바라보았다.

잔뜩 흐트러진 당가의 녹의. 점혈이 풀릴 것을 대비해 팔다리는 두꺼운 밧줄로 꽁꽁 묶었고, 자결을 막기 위해 입에는 재갈을 채웠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형형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당소월.

"저질러 버렸나."

당소월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내가 한 일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자면... 그래.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

[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 2화. 납치

"저질러 버렸나...."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

일 처리는 깔끔했다고 자신하기에 바로 추적대가 따라붙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지.

정파에는 무림출도라는 이름으로 후기지수가 홀로 중원을 유랑하는 알 수 없는 전통이 있다지만, 이들이 집을 나갔다 해서 정말로 방치되는 것은 아니다.

거대방파쯤 되는 여력이 있다면 주기적으로 생사를 확인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지원을 보내기도 하니까.

그들은 후기지수에게 경험을 쌓게 하고 싶은 거지, 죽음으로 내몰고 싶은 게 아니니 당연한 일.

허나... 이를 잘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가 아니면 기회가 없었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저질렀다.

미안한 마음에 당소월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지난밤은 잘 잤나?"

"으븝! 읍읍!!"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발작적으로 꿈틀거리는 당소월. 너무하네.

일단 당소월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려 구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아 가볍게 운기를 시작했다.

광랑탈명공(狂狼奪命功).

초절정에 오르며 얻은 깨달음을 담아 재정립한 심법이다.

이제 회귀 전처럼 제대로 된 심법을 배우지 못해 만성적인 내공 부족과, 내공의 혼탁함에 발목 잡힐 일은 없다고 봐야겠지.

실제로 잠깐 운기 했을 뿐인데 어제 무리하느라 텅텅 빈 내공과 체력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후우."

일단 급한 불만 끄고서 눈을 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당소월이 이쪽을 향해 기어 오려 낑낑대는 소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내가 운기 중일 때를 노려 주화입마라도 일으킬 생각이었나?"

"으브읍!"

"미리 말해 두지만 헛수고다. 지금의 너로는 점혈을 풀지도, 밧줄을 감아 둔 말뚝에서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거기에 설령 어찌어찌 구속을 풀고 내게 한방 먹이더라도 광랑탈명공의 내공은 다소 특이해 쉽게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는다.

거기까지 말해 주진 않았지만, 지금의 당소월이 무슨 짓을 하건 내게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전해졌나 보네.

"....."

여전히 눈빛은 살벌했으나 전신의 힘이 살짝 빠진 당소월. 그런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소리를 지르건 욕을 하건 상관없으나, 혀는 깨물지 마라. 이를 약속하면 재갈을 풀어주마."

"....으득."

당소월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따르는 게 불쾌한지 입에 물린 나무 재갈을 바득바득 갈았지만 곧 벗길 테니까 괜찮겠지.

조심스레 재갈을 빼내자, 길게 늘어졌다 끊어지는 침. 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아주고 있자니 조금 진정한 당소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목적이죠?"

"음?"

"반로환동까지 한 노선배시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가를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를."

"...노선배?"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하긴. 회귀 전에는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어른이라 서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당소월은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이제 막 약관이 됐을 당소월과 그보다 어린 지금의 나. 아직 성장기다 보니 나이의 차이가 더욱 크게 다가올 것이다.

헌데, 그 어린아이에게 다른 어디도 아닌 사천당가의 직계 여식이자, 손꼽히는 후기지수인 당소월이 패배했다?

기습이었다지만 아무런 상처도 없이 사로잡힌 시점에서 서로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을 터.

설마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 못 할 테니, 반로환동한 노고수라고 여기는 거겠지.

놀랍게도 반로환동한 고수가 재차 무림에 나서는 일은 가끔 있거든. 하지만 당소월에게 그리 여겨지는 건 썩 달갑지 않은 일이다.

생각해보라. 내 입장에서는 겨우 몇 달 전에 장래를 약속한 사람에게 어르신이라 불리는 꼴 아닌가.

이는 어떻게든 바로잡아야 하는 착각이다.

"나는 올해로 열다섯이다."

"...그렇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째서인지 경계심을 한껏 끌어올린 당소월. 자신이 열다섯이라 우기는 정신 나간 노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다.

슬프지만 당장은 이 오해를 풀 수 없을 것 같네. 엄밀히 따지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닌지라 일단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그렇다면 납치할 생각도 하지 말았어야지요."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너를 위해 저지른 짓이다."

"그것참 안심되는 말이군요."

시큰둥한 태도로 내 말을 흘려듣는 당소월. 틀렸나. 이건 완전히 들을 생각이 없는 거네.

하지만 내가 당소월을 위해 납치했다는 말은 사실이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밤하늘 아래서 약속을 맺었던 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들었거든. 그녀의 얼굴 절반이 녹아내린 건 무림초출 때의 일이었다고.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사천당가의 유명한 율법이다. 이 율법이 널리 알려진 덕분에 함부로 당가와 대적하려는 이는 없었다. 반대로 무언가 은혜를 입히려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렇게 무림의 복잡한 은원을 강경한 태도로 헤쳐 나가는 당가였으나... 아예 적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

세상에는 자신이 잘못한 일은 기억 못 하고 당한 일만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극악무도한 이라도 한 명쯤은 그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으며, 아무리 철저히 복수해도 날파리 한둘을 놓치기도 하는 법.

원한을 열 배로 돌려준다는 건, 달리 말해 열 배의 복수심을 심는다는 소리다.

감히 사천당가를 적대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하지만 그 얼마 없는 이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라 부르기에 마땅하리라.

당소월은 그런 녀석들에게 습격당했다.

사천당가의 손에 멸문한 흑도 문파의 생존자, 토벌당한 산채의 녹림도, 악명 높은 마두의 제자, 자신의 죄를 당가에 뒤집어씌우다 박살 난 살곡의 살수 등등.

당가에 깊은 원한을 가진 이들이 뭉쳐 당소월을 공격한 것이다.

아마 자신이 당가의 손에 잃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당소월은 최고의 선택지였다.

그녀는 사천당가의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막내딸이자, 독령지체(毒靈之體)라는 특수한 체질의 주인이었으니까.

만약 당소월을 죽일 수만 있다면 당가에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다 여긴 거겠지. 실패했지만.

끝자락이라고는 하나 아직 일류에 불과한 당소월.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전부 독령지체 덕분이다.

독령지체는 체내에 독을 저장하고 그렇게 저장한 독을 합성해 더욱 강한 독을 만들어 내는 체질.

이를 이용해 자기 자신조차 녹아내릴 정도로 강한 독을 뿌려 기어이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에는 뭐... 격노한 당가주가 직접 추적한 끝에 살아남은 습격자 전원을 한 줌 독수로 녹여 냈고.

당소월은 평생 자신의 얼굴을 꺼리며 앞머리로 가리게 됐다는 그런 이야기지만.

그녀가 녹아내린 반쪽 얼굴을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습격 자체를 막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거야 당신이 야밤을 틈타, 저를 습격했으니까 그렇지요."

"....."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언제 어디서 당소월이 공격받을지 모른다면 따라다니면서 지키기보단, 그냥 당소월을 안전한 곳에 박아 두는 게 더 간단하지 않나.

무엇보다 어떤 무공을 쓰는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쓰러뜨리는 일보다, 회귀 전의 일이라고는 하나 몇 번 합을 맞춰 본 적 있는 당소월을 제압하는 게 훨씬 편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당소월 너를 노리는 놈들이 있다고."

"저도 분명 말했지요. 알려줘서 고맙지만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다고요."

"불가능하다고도 말했다만?"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나요? 실제로 저를 노리는 건 선배님이었잖습니까."

"난 열다섯이래도."

"열다섯 살 소협은 그런 말투 안 씁니다."

"...내 말투가 어떻길래 그러나?"

"가문의 어르신들 같군요. 적어도 저보다 어리다는 느낌은 아니지요."

듣고 보니 이 나이 때의 나는 좀 더 격식 없는 말투였지. 아니, 빌어먹고 사는 고아였던 탓에 비굴한 느낌이 강했나.

아무튼 괜히 무게 잡지는 않았었다. 무게 잡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는 것에 가까웠으리라.

잠시 기억을 되짚어,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떠올렸다.

"마, 말투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 와서 그러셔도 곤란합니다, 선배님."

"....."

조금 마음이 꺾일 뻔했다. 회귀 전의 당소월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리고 눈앞의 당소월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뾰족한 목소리로 입을 여는 당소월.

"그나저나 선배님. 이제 슬슬 저를 이리 납치한 목적을 여쭈어도 될런지요?"

"흠? ...아니, 응?"

"...제가 아직 살아 있고, 단전이나 팔다리의 근맥도 멀쩡하며, 이렇다 할 고문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저를 멀쩡히 살려야 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의식적으로 말투를 바꾼 나를 향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당소월.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그냥 하던 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평범한 이유로 납치한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들어드릴 것이 있다면 들어드릴 테니 저를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내 목적이라...."

당소월을 곧 있을 습격으로부터 지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얼굴을 보며 눈물짓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이게 내 목표의 전부다.

"이미 몇 번이고 말했지만, 곧 당가에 원한을 가진 이들이 공격해 올 거다."

"저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배님. 큰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니 지금이라면 없었던 일로 해드릴 수 있답니다."

"당가의 비수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동하지만 아쉽게도 응할 수는 없다. 미안하군."

"허면 저희 사이의 은원이 더욱 깊어질 뿐이지요."

칼같이 대답하는 당소월. 잠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조금 늦을 수는 있겠으나, 당가에서는 분명 변고를 눈치채고 추적대를 보낼 터. 아닌가?"

"맞습니다. 제가 이래 보여도 집안에서는 귀염둥이인지라."

"보면 안다. 아무튼 내 조건은 간단하다. 당가의 추적대가 이곳을 찾거나, 1년이 지나면 놓아주마."

추적대가 도착하면 그들에게 당소월을 맡기고 도망치면 된다. 이쪽을 찾지 못하더라도 1년쯤 지나면 당소월을 습격에서 지켜 내기엔 충분할 터.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몸값은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요?"

"필요 없다. 대신 이곳에 잡혀 있는 동안은 얌전히 내 말에 따르도록. 어떤가? 이 정도면 꽤 후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만."

"예? 그 정도라면.... 힉!"

돌연 인상을 와락 찌푸린 당소월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떻게든 내게서 자신을 지키려는 것처럼.

"...또 뭐지."

"제게 원한이 있는 것도, 당가의 풍족함이 목적인 것도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 제 몸이 목적 아닙니까."

"?"

"젊은 몸을 되찾으니, 젊은 여인이 그리워지신 겁니까. 애통하군요. 이런 차가운 동굴에서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노괴에게 제 처음을 빼앗길 줄이야...."

"....."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감히 당가의 여인을 강제로 취할 때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냐...."

얼굴을 다치기 전의 당소월은 꽤 자신감이 넘쳤구만. 실제로 그만큼 예쁘긴 하지만 말이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들인 채, 파르르 떠는 당소월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빠악!

"으햣!"

생각보다 강한 충격. 당소월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조건을 추가하지. 나를 노괴 취급하는 것과 이상한 억측은 그만두도록. 그리하면 네가 걱정하는 일도 없을 거다."

"...그, 그러지요."

당소월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 3화. 납치 (2)

"배가 고픕니다."

꽁꽁 묶인 당소월이 당당한 태도로 그리 말했다.

"벽곡단이라면 있다만."

"선배... 아니, 소협께서는 수련하느라 맛이 가서 잘 모르실 수 있지만 벽곡단은 음식이 아니랍니다."

"배부르고 몸이 망가지지 않으면 음식이지."

"아뇨. 벽곡단은 맛도 없고 영양도 딱 죽지 않을 정도잖습니까. 나무껍질 캐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나무껍질을 음식이라 부르지 않지요."

"...."

그렇게 벽곡단이 싫은가? 뭐,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이해되지만 말이다.

가루 낸 곡물에 약간의 송화를 넣고 굳힌 음식이 맛있어 봐야 얼마나 맛있겠는가.

폐관수련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먹을 일이 없는 녀석이긴 하다.

실제로 나도 한동안 여기서 폐관수련한다 생각하고 처박혀 있을 생각이라 미리 사 둔 거니까.

"그래도 먹다 보면 괜찮다만."

"저런. 불쌍하게도 혀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오는 당소월. 그녀가 짐짓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 따라해 보세요 소협. 벽곡단은."

"벽곡단은."

"음식이 아니다."

"음식이.... 아니, 잠깐."

생각 없이 따라 하려다 멈칫했다. 나와 약속을 맺은 이후로 적개심은 많이 줄었지만, 어째 뻔뻔함은 그 이상으로 늘어난 것 같단 말이지.

"납치당한 주제에 바라는 게 많군.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

"재수 없으면 1년간 벽곡단만 먹어야 하잖습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아차. 이건 안 하기로 했죠. 그럼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죽겠습니다."

"...나한테 그런 허세가 통할 거라 생각하나? 억지로 먹이면 그만이다."

"소협이야말로 제가 못할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저 또한 억지로 토하면 그만입니다."

"....."

당소월이라면 진짜로 할지도 모른다. 그런 여자라는 건 몇 번이고 경험해 봤으니까. 다만 요청을 들어주려 해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돈이 없다."

"...예?"

"피독주를 사느라 가진 돈을 다 썼단 말이다."

"아."

아무리 내가 당소월의 모든 수를 꿰고 있다고는 하나, 내공도 육체의 단련도 한참 부족한 내가 준비 없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서 실행한 거사였다. 회귀 후, 짧은 시간 동안 긁어모은 전 재산을 다 털어 넣을 정도로.

내 말에 한참을 망설이던 당소월이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요대의 오른쪽 뒤편. 그 안에 제 전낭이 있습니다. 꺼내 쓰시지요."

"으흠. 그러지."

괜히 헛기침하며 당소월의 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녹의가 손끝을 스치며 간지러운 소리를 낸다. 과연 사천당가. 좋은 옷 입고 다니네.

요대는 단단하게 묶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소월의 허리에 딱 달라붙는 수준은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오히려 헐렁하게 느껴질 수준.

옷을 넉넉하게 입어 몸의 윤곽을 숨기는 건 독뿐만 아니라 암기도 자주 사용하는 당가 무인의 특징이니 당연한가.

실제로 어젯밤, 내게 저항하던 당소월은 온갖 곳에서 암기를 꺼내 던졌으니까.

혹시라도 암기에 손이 베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요대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읏."

당소월이 순간 움찔거렸다. 아무리 허락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이 내 검을 만지면 흠칫하게 되던데... 대충 그런 거겠지. 빨리 끝내야겠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요대 안쪽을 더듬었다. 겉으로 보기에 부풀어 있는 곳이 없어 전낭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다른 뭔가 문제인 걸까. 당소월이 몸을 꿈틀거리며 자꾸만 내게서 벗어나려 든다.

"자, 잠시! 거긴...."

"가만히 좀 있어라. 방해다."

하여, 어깨를 붙잡아 고정시키고는 다시금 안쪽을 훑었다.

"힉!"

비도, 우모침, 쇠질려... 그 외에도 손끝의 감촉만으로는 알 수 없는 몇 종류의 암기를 거쳐 마침내 전낭에 닿았다.

"이건가."

"맞, 습니다! 맞으니까 빨리 손이나 빼시지요...!"

"재촉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대체 얼마나 배고픈 건지 원."

"....."

당소월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전낭 쪽이다.

꽤나 묵직한 무게. 반쯤 풀어 안쪽을 살펴보자, 동전도 아닌 은자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회귀한 뒤로 모은 금액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이걸 무림초출이 용돈으로 받아 들고 다니는 거라고?

"...오대세가는 상상 이상으로 부유한가 보군."

"당연한 소리를. 아, 혹시 이제라도 몸값을 받고 싶어지셨습니까? 지금 당장 저를 풀어주시면 그 전낭 가득 금자를 채워드리지요."

"자기 돈도 아닌 가문의 돈으로 유세 떨지 마라."

"그럼 제 몸무게만큼의 금은 어떻습니까."

"난 그깟 황금보다 당소월 네 가치가 더 크다고 믿는다."

"확실히. 제가 좀 대단한 여자긴 하지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 태연스런 모습에 피식 웃으며 혈도를 짚었다.

점혈은 내일까지 버티겠네. 구속도 튼튼하고.

확인할 것도 다 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삐걱거리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바로 아랫마을에 다녀올 생각이다만 먹고 싶은 음식이나, 따로 필요한 게 있나?"

"그으읏. 먹을 건 뭐든 좋습니다. 고기가 들어 있다면 말이지요. 그 외에 필요한 건.... 자유?"

"도망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정말인가요?!"

"하지만 이미 약속까지 해놓고 도망친 주제에 다시 붙잡히면... 그땐 기대하도록. 적어도 지금처럼 물렁하게 굴진 않을 터이니."

"....."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정말 당소월에게 모질게 굴지는 못하겠지.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더라.

하지만 이런 내 사정을 모르는 당소월은 바짝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당가의 여식으로서 어찌 한번 내뱉은 약조를 내팽개치겠습니까. 다만 본래 동굴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지낸다면 필요한 것이 꽤 많겠지요."

"구체적으로는 뭐가 필요하지?"

"우선 바닥에 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 딱딱하고 울퉁불퉁해 누워 있기도 힘들더군요."

"그리고?"

"항상 같은 옷만 입을 수는 없으니, 여벌을 조금 구해 주시겠습니까? 본래라면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을 통해 지금 입고 있는 당가무복을 구했겠지만... 거기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적당히 깨끗한 옷이면 족하지요."

"알겠다."

"식수나 빨래 등. 생활을 위한 물은 충분한지요? 부족하다면 따로 담아 둘 항아리가 필요할 겁니다."

"...준비해 두마."

당소월의 말을 듣다 보니 알겠다. 나는 어떻게 납치할까 고민했을 뿐, 그 이후의 일은 전혀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걸.

머릿속으로 필요한 물건을 정리하며 되새기는 것도 잠시. 기세 좋게 필요한 물건을 말하던 당소월이 버벅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뭐지? 어차피 네 돈으로 사는 거니 편하게 말해도 된다만."

"그러니까... 으읏!"

말할까 말까 고민하듯 입술만 오물거리는 당소월. 하지만 이내 각오를 다졌는지 비장한 기세로 입을 열었다.

"속곳. ...그리고 요강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

"...사실 아까부터 참고 있습니다만,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 같답니다."

"...그런가."

"아, 속곳은 어디까지나 여벌이란 의미지 살짝 지렸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시길."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된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졌다.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깊게 내쉬려는 순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빳빳한 태도로 이쪽을 노려보는 당소월과 눈이 마주쳤다.

하긴. 부끄럽지 않을 리가 없지. 그저 자존심 때문에 티 내지 않으려고 뻗대는 게 분명하다.

당소월이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라는 건 몇 번이고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잠시만 가만히 있도록."

"예?"

의아해하는 당소월의 혈도를 짚었다. 점혈을 반쯤 풀어 내공을 조금이나마 운용할 수 있도록.

"...이건?"

"다녀올 때까지 버텨라."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만, 이렇게 내공을 돌려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적은 양이지만 잘만 쓰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잘만 쓰면은 무슨.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하지만 약조하지 않았나. 지킬 거라고 믿네."

"....."

입을 헤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 갑자기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빠진 표정이다.

"그럼 이제 진짜로 다녀오도록 하지. 그동안 얌전히 있도록."

"예, 뭐어... 잘 다녀오세요?"

더듬더듬 인사하는 당소월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동굴을 나섰다.

***

당소월은 혼란스러웠다.

"왜?"

어째서 그는 점혈을 풀어주고 자리를 비웠는가.

설마 자신을 믿는다고 한 말이 진심이었던 건가? 물론 당소월은 자신의 약조를 지킬 생각이긴 하다.

약조도 약조지만 그녀를 납치한 노괴의 실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얌전히 있는 쪽이 더 안전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내공을 운용해 생리현상을 억제하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싫다고 거절하자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든 광인.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무위를 가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암기가 어떻게 날아올지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완벽한 대응. 독에 대한 조예도 제법 깊은지, 피독주로 해독 가능한 독과 그렇지 않은 독을 구분하며 돌파와 회피를 번갈아 가며 압박해 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소월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노괴의 눈이었다.

차갑게 가라앉고, 예리하게 날이 선 눈동자. 마치 한 자루 검을 박아 넣은 것처럼 무감정하고 살벌한 기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도 뒤에 숨어 있던 얇은 우모침을 발견해도, 은밀하게 하독된 독이 내부를 흔들어도, 최후의 발악으로 단숨에 무수한 우모침을 흩뿌리는 묵연침통(墨煙針桶)까지 격발했음에도.

노괴는 단 한 순간도 동요하지 않고 정확한 순간, 정확한 방식으로 당소월의 모든 것을 파훼했다.

심지어 자신의 수준에 맞춰 줄 요량이었는지 검기조차 뿜지 않고 말이다!

아무리 자존심 강한 당소월이라도 마음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통한 심정으로 정신을 잃었건만.

눈을 떠보니 팔다리를 구속당하고, 내공도 봉해진 채, 재갈을 물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너무나 멀쩡한 상태였다.

"멀쩡한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과연 지금 이 상태를 멀쩡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다.

한숨을 푸욱 내쉰 당소월이 묶여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 세기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내공이 돌아왔으니 빠져나올 구속이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실제로 조금 무리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한쪽 손목을 탈구시켜 억지로 빼낸다거나.

지금 도주하면 그 광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결론을 내렸다. 몸에서 힘을 빼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추욱 늘어진 것이다.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약속의 무게와 선명한 위화감이었다.

제 입으로 가문을 들먹이며 한 약속이니 쉬이 깨뜨려선 안 된다. 이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어째서 자신을 납치한 노괴는 몸값을 요구할 것도 아니면서 사지 멀쩡히 구속해 뒀는가. 그냥 근맥을 끊는 편이 훨씬 편했을 텐데.

또한 전낭을 뒤지며 허리를 더듬... 아니, 남은 암기의 존재를 알았을 텐데 빼앗지 않고 그대로 놔둔 이유는? 당가로 돌려보내 주는 조건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 건방지게 굴었건만, 큰 불평 없이 전부 들어준 것은 왜인가.

평범한 이유로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에 깨달은 당소월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로 잡힌 것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설마?"

어쩌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어쩌면 그 노괴는 진심으로 당소월이 위험하다 생각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목적은 둘째치고 수단과 방법이 괴팍하기 그지없었으나....

"노괴들이 다 그렇죠, 뭐."

반로환동한 고수가 제정신이 아닌 건 상식 아닌가.

당소월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납치범의 진의 같은 것보다 요의를 참는 게 더 중요했기에.

[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 4화. 납치 (3)

물을 담아두기 위해 산 큼직한 항아리. 그 안에 사 온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 등에 짊어지고 동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안방이라도 되는 양 편한 자세로 뒹굴거리는 당소월과 시선이 마주쳤다.

"오셨나요?"

"누가 보면 집주인인 줄 알겠군 그래."

"이게 가장 편한 자세라 어쩔 수 없었답니다. 그나저나 빨리 그걸...."

"아, 이것 말인가?"

항아리 안쪽에서 잘 포장된 만두를 꺼냈다. 아직 따뜻한 데다 고기도 아낌없이 들어간 녀석이니 분명 만족할 터.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만두를 본 당소월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만두는 됐습니다.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그거라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나. 뭘 달라는 건지 확실히 말해보게."

"큭!"

당소월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일생일대의 원수라도 마주한 것 같은 표독스런 얼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말을 듣고 모든 걸 이해했다.

"...요, 강 좀 주시겠습니까."

"아."

깜빡했다.

잽싸게 꺼내긴 했으나, 지금의 당소월은 팔다리를 묶인 것이 애벌레와 다름없는 상태. 이대로는 요강이 있어도 볼일을 보기 힘들 것이다.

나만 그리 생각한 것은 아닌지, 눈앞에 놓인 요강을 바라보던 당소월의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이내 전신으로 번져, 이제는 숫제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바들거리는 당소월. 그녀가 조심스레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소협. 그으. 혹시나 해서 묻는데 설마 제 전낭을 가져갔을 때처럼, 제 옷도 소협이 벗겨주겠다는 말을 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렇게까지는 안 한다. 중요한 건 당소월 네가 이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지, 꼼짝도 못 하게 묶어두는 게 아니니까. 잠시 풀어주마."

"가, 감사합니다!"

당소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단순하다면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 반응에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밧줄을 풀어주자, 풀려난 손목을 어색하다는 듯, 매만지는 당소월. 그녀가 요강을 주워들다 말고 멈칫했다.

"소협은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만."

"알, 겠습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꽉 깨문 당소월이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바닥에 툭 떨어지는 요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무복 안쪽이었으니까.

그렇지. 볼일을 보려면 우선 바지부터 내려야지.

이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동굴 밖으로 몸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끝나면 말해라."

"네? 아! 네! 그리하겠습니다!"

입에서 힘을 푼 당소월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동굴 입구 쪽 벽에 기대고 섰다.

단순히 납치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같이 산다는 건 생각보다 고려할 게 많은 일이었네.

이제부터라도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볼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볼일을 마친 당소월의 목소리가 동굴 안쪽에서 들려왔다.

"소협.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일단 말해 봐라."

"...볼일을 다 본 뒤의 요강은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알아서 치우마."

동굴안으로 들어가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손과 발을 남은 밧줄로 다시 묶은 뒤에야 바닥에 놓인 요강을 집어들었다.

따뜻했다.

***

근처 강가에서 요강을 비우고, 깨끗이 씻은 뒤. 다시 동굴로 돌아오자 그곳에는 만두 쪽으로 꾸물꾸물 기어가던 당소월이 있었다.

"...."

"...."

말없이 교환하는 시선.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당소월이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손이 묶인 채로 먹으려니 쉽지 않더군요. 혹시 한 번 더 풀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안된다. 이건 조금 전과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식사는 내가 먹여줄 수 있으니 풀어줄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예?"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허면 부탁드리지요."

만두를 향해 기어가는 대신 천장을 보며 드러눕고는 입을 크게 벌리는 당소월.

"요 잠깐 사이에 뻔뻔함이 늘지 않았나?"

"이미 볼장 다 본 사이인데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군. 허나 누워서 먹으면 체하기 딱 좋다."

누워있는 당소월의 어깨를 일으켜 벽에 기댄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꽤나 세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는 너는 꽤나 신경이 굵은 것 같군.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라도 짓고 있을 줄 알았다."

"참고있는 겁니다. 소협께서 제 절망한 모습을 즐거워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분하지 않습니까."

"내게 그런 취향은 없다. 됐으니까 일단 입이나 벌리도록."

"아앙."

고분고분 입을 벌리는 당소월. 먹이를 조르는 아기 새 같은 모습에 피식 웃으며, 적당한 크기로 만두를 뜯어주었다.

당소월이 우물거리는 사이에 나 또한 내 몫의 만두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나 한입, 당소월 한입 번갈아 먹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삼킨 당소월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식사도 마쳤으니 잠간 이야기 좀 하지 않겠습니까?"

"이야기? 무얼 말인가."

만두를 먹여주느라 가까워진 거리에서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여는 당소월.

"소협은 저에 대해 잘 아시지요?"

"어느 정도는 알지."

회귀 전의 당소월과 지금의 당소월은 겪은 사건이 다르다. 완전히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우선 머리 색이나 앞머리가 그러하다. 회귀 전의 당가의 멸문 이후로 머리가 하얗게 셌다. 거기에 상처를 가리기 위해 길게 기른 앞머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녔고.

반면 눈앞의 당소월은 머리도 까맣고, 앞머리는 단정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음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외에도 어조, 몸짓, 외형 등. 자잘한 부분이 상당수 다르리라.

"...그 아련한 눈빛은 무엇인지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만."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 신경 쓰지 말라니 그게 무슨...."

당소월이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잇는다.

"좋아요. 아무튼 소협이 저를 잘 안 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협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군."

"예에. 그러니 이제부터 서로 알아가 보도록 하지요."

"....."

일순, 호흡이 멎었다.

회귀 전. 천마를 피해 수많은 무인이 정사의 구분 없이 하북성으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많은 갈등이 있었고, 나와 당소월의 사이도 크게 다르진 않았었지.

서로 소 닭 보듯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관계. 하지만 내가 마교의 멸천대와 싸우다 위험한 상황이 되자, 당소월은 가장 먼저 달려와 주었다.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깨달았다. 물론 당시에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어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왜 도와주러 왔느냐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묻는 내게 당소월은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함께 싸우는 전우. 그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만약 제 답이 불만족스럽다면... 이제부터 서로 알아가면 되겠지요.'

그 일을 계기로 나와 당소월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아직 약관밖에 되지 않은 어린 당소월이 자신을 납치한 이를 향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분명 회귀 전의 당소월과 지금의 당소월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소월은 여전히 당소월이었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당소월이 잘 걸렸다는 듯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소협 지금 웃었지요? 그럼 동의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슬쩍 손을 가져다 대보니, 정말로 올라가 있는 입꼬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된 이상 거절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라."

"그럴 생각입니다. 우선...."

넉넉히 사 온 터라 아직 꽤 남아 있는 만두. 당소월은 그중 하나를 턱으로 까딱이며 말했다.

"우선 하나 더 먹죠."

"마침 나도 하나로는 모자라던 차였으니 잘 됐군."

"그리고 이름을 알려주시지요."

"이름?"

"예. 저는 아직 소협의 이름조차 모른답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알려준 적이 없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뜯은 만두를 입에 넣어주며 답했다.

"천휘다."

"천 소협...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별호는 어떻게 되는지요?"

"그런 거 없다."

처음 얻은 별호는 혈랑이었고, 초절정에 오른 이후에는 검귀라 불렸지만... 지금은 별호랄 게 없다.

당연한 일이지. 회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가 대부분 과거의 성취를 되찾느라 수련에 매진했으니 말이다.

다만, 힘을 숨기고 다닌 것은 아니었고 피독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자잘한 흑도방파 몇 개를 털었으니 언젠가는 별호가 붙긴 했을 거다. 그게 지금은 아니었을 뿐.

이런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당소월이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 소협. 저희의 첫 만남이 꽤 요상하고 불합리했으며 일방적으로 제가 고생하는 일이 있긴 했습니다만... 저는 저 나름대로 소협께서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건 고맙군. 솔직히 나도 내가 미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으니까."

"허나, 진솔한 대화를 요청했음에도 그리 나오시면 제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오해다. 나 또한 진실된 대답을 했을 뿐이다. ...서로 알아가자는 말에는 동의하니까."

"....."

"....."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잠깐. 설마 아직도 나를 반로환동한 노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야 뭐...."

"소협이라 불렀으면서? 노괴 취급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잖나."

"젊어 보이고 싶은 노괴가 한둘은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긴 하다. 실제로 무림 역사를 뒤져 보면 재밌는 일화가 많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이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용봉지회에 참여한 사파의 전대 고수가 있겠다.

적당한 선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사파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려 했으나.

본래 결승전 혹은 준결승전 때나 참관하는 무림맹주가 본선 첫 경기부터 참관하러 오는 바람에 바로 들켰다더라.

참고로 그 인간은 이후에 사흑련으로 돌아가 내 직속상관이 되었다. 여러모로 최악이었지.

이번 생에는 사흑련에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정말로 열다섯이다. 한번 팔뚝을 만져 봐라."

"팔뚝이요?"

"반로환동은 단순히 어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공을 펼치기에 완벽한 몸으로 재구성되는 것. 그렇기에 겉으로는 몰라도 만져 보면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죠?"

"아는 사람한테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내 상관이었던 자에게 말이다. 당소월은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기 힘들 때는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정말이다."

퍽이나 그렇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당소월이었으나, 그녀의 묶여 있는 손에 팔뚝을 올려놓자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전과 달리 좋은 무공을 알고, 초절정에 이르는 깨달음을 품은 채로 수련에 임했다지만.

그래봐야 겨우 몇 달. 아직 내공은 이류 수준에 불과하며, 외공 또한 완성되지 않아 몸뚱이가 말랑말랑하다.

일류의 끝자락에 달해, 언제든 계기만 있으면 절정에 오를 당소월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당소월을 잘 아니까. 그리고 그냥 잘 싸우니까 그런 거다.

집중해서 내 팔뚝을 만지작대던 당소월이 침음을 흘렸다.

"이건...."

"이제 믿어 주겠나?"

"아뇨. 생각해 보니 남자의 몸을 만져 본 적이 없어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

하기야.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당가의 막내딸이다. 외간 남자의 몸을 만져 본 적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네.

아직도 내 팔뚝을 꾹꾹 눌러대며 갸웃거리는 당소월에게서 팔을 떨어뜨렸다.

"됐다. 증명할 방법이야 많겠지."

"혹시 삐졌... 아,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으니 노려보지 좀 마시지요. 기껏 먹은 만두가 얹힐 것 같지 않습니까."

당소월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 문제는 소협의 말대로 나중에 다시 나누기로 하고, 지금은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라면?"

"분명 천 소협은 제가 곧 당가에 원한을 가진 자에게 습격받아 목숨이 위태로울 예정이니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지요?"

"그랬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만약 사실이라면 언제, 어디서, 누가 습격해 오는지도 물었으나 전부 모른다 대답하셨고요."

"음."

"솔직히 말해 천 소협도 믿기 힘든 내용 아닙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사실 시간을 거슬러 회귀했는데, 미래에는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돼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알 수 있었다 같은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설령 하더라도 믿어주지 않겠지. 나라도 주화입마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가 싶었을 테니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향해 씨익 미소 짓는 당소월.

"하지만 이렇게 천 소협에게 잡힌 상황이니 소협께서도 좀 더 솔직해지실 수 있겠지요."

보란 듯이 자신의 구속된 양 손목을 보여주는 당소월. 그녀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내 눈을 직시한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제가 근시일 내에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맞다."

"여전히 자세한 근거는 말할 수 없겠지요."

"...미안하지만 그렇지."

"제가 어떻게든 동굴을 나와 무림행을 재개하겠다고 하면...."

"나 또한 어떻게든 다시 너를 붙잡을 생각이다."

"강경하시네요. 하지만 제가 이대로 휙휙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아시겠죠?"

"물론."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고 무림행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다?

다른 사람이 보면 겁먹고 귀환했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사천당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리라.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나... 당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진 당소월에겐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납치한 것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고민하던 당소월이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아직은 검은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알겠습니다. 천 소협의 말을 믿기로 하죠."

"정말인가...?"

"예. 물론 위험하다는 말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저 소협이 소협 나름의 선의로 행동했다는 점을 믿겠다는 뜻이지요."

"그거면 됐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라. 주고 싶은 것이 있으니."

"예? 밥 먹다 말고 어디 가십니까? 저기요? 천 소협? 전 소협 없으면 못 먹는데요?"

어이없어하는 당소월의 말을 적당히 흘려 넘기며 동굴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내가 괜히 이 동굴로 당소월을 데려오려 한 것이 아니다. 나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있다는 걸 알고 찾는 게 아닌 이상,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틈새. 그 안쪽에서 자라난 보랏빛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상하지 않도록 양손으로 부드럽게 받쳐 들고는 그대로 당소월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이건?"

"선물이다."

"....."

멍하니 나와 꽃을 번갈아 바라보는 눈동자. 하긴, 당연히 알아보겠지. 애초에 이건 당소월이 발견했을 영초니까.

다만 꾸벅 고개를 숙인 당소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조금 예상과 달랐다.

"죄송하지만 꽃 선물은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런 거 아니다."

심지어 손발을 꽁꽁 묶은 상태에서 주는 건 좀 어떨까 싶군요. 이참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만, 저는 천 소협에게 납치당한 불쌍한 피해자랍니다. 이런 건 정혼자에게나 하시지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예에. 소협의 말이 맞습니다. 이 꽃은 별다른 뜻이 없는 평범한 선물이겠지요."

말은 그렇게 하는 당소월이었으나, 몸은 진심으로 식겁했다는 듯 꼬물꼬물 기어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조금 억울하네.

[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 5화. 납치 (4)

이쪽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거리를 벌리는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손에 든 자색 꽃을 다시금 내밀었다.

"이건 자화배독초(紫花培毒草)다."

"...예?! 이게 그 자화배독초라고 하셨습니까?!"

화들짝 놀라며 멀어졌던 거리만큼 다시 기어 오는 당소월. 다시금 자세히 꽃을 살펴보더니 감탄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자화배독초를 못 알아본 게 아니라, 내가 준 꽃 선물이라길래 일단 거절하고 본 건가.

이건 이것대로 화나지만... 어쨌든 보다 이른 시기에 자화배독초를 당소월에게 전할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회귀 전. 습격자들을 상대로 분발하던 당소월이었으나, 결국 머릿수를 못 이겨 도망쳐야 했다.

사실 거기까지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다. 만약 당소월이 천재가 아니었다면, 독령지체라는 특수한 체질을 타고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도망치던 끝에 내공과 체력이 바닥났던 당소월은 우연히 이 동굴에 도착했다고 한다.

조용히 회복을 마치고 떠날 생각으로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는데... 거기서 발견한 것이다. 자화배독초를.

자화배독초는 여러모로 특이한 영초다. 우선 저 꽃처럼 생긴 부분은 사실 꽃이 아니라 보랏빛으로 물든 줄기가 변형된 것이고, 이름에 독이 들어가는 주제에 독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자화배독초는 자신과 섞인 독의 종류를 불문하고 그 위력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렇기에 독초(毒草)가 아닌 배독초(培毒草). 독공을 전문으로 하는 무인이라면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영초이며....

체내에 독성을 저장하고, 이를 재현하거나 다른 독과 합성할 수 있는 당소월에게는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은 보물이다.

다만 회귀 전의 당소월은 자화배독초를 발견했음에도 흡수할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자신이 체외로 뿜어낸 독을 강화시키는 일회용 증폭제처럼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

덕분에 동굴 근처까지 추적해 온 습격자 대부분을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문제는 배가된 독기가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일류의 무인으로서는 조절할 수 없고, 독령지체로도 견디기 힘든 독기의 파도.

지친 몸으로 어찌어찌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당소월이었으나, 그땐 이미 얼굴의 반쪽이 녹아내린 뒤였다.

하지만 미리 자화배독초를 먹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독령지체는 모든 독을 기억하고 품을 수 있는 체질이다. 인간이라기보다 독물에 가까운 특성이라 할 수 있지.

독물이 자신의 독에 중독되어 죽는 모습을 보았는가.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독물은 자신의 독에 내성을 갖고 있다.

당소월 또한 마찬가지다. 자화배독초를 제대로 흡수하면 독공의 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렇게 강해진 독공에 버틸 수 있는 내성 또한 갖추게 되리라.

이전처럼 보물을 내다 버리는 것도 모자라 몸까지 상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소리다.

아직도 몽롱한 얼굴로 내 손의 자화배독초를 바라보고 있는 당소월에게 말했다.

"다시 풀어줄 터이니 먹어라."

"예?"

"지금부터 흡수하면 자화배독초를 몸에 기억시키는 데 얼마나 걸리지?"

"...제가 독령지체라는 사실을 아시는군요."

"딱히 비밀도 아니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독령지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까지 아는 이는 많지 않지요."

"그래서 안 먹을 건가?"

"설마요.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헌데 이렇게 자주 풀어주시고, 영초까지 내어주실 거라면 평소에도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동굴에 함께 있는 동안은 생각해 보마."

"그거면 충분하지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기껏 묶은 그녀의 구속을 다시 풀어주자, 내 마음이 바뀔새라 잽싸게 자화배독초를 받아든다.

그리고는 맛이라도 보는 것처럼 혀를 길게 뻗어 꽃 부분을 핥기 시작했다.

"베에...."

"...그건 뭐 하는 짓이지?"

손짓으로 가만히 좀 있어 보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다시금 자화배독초를 음미하기 시작하는 당소월.

자꾸만 꿈틀거리는 선홍색 혀에 시선이 간다. 그러고 보니 당소월은 이번이 무림초출이던가.

그간 집에서 애지중지 자란 터라 자신이 외간 남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모르는 게 분명하다.

나는 괜찮지만 다른 데서 저러고 다니면 안 될 텐데....

"후우."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 그와 동시에 자화배독초에서 혀를 뗀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인다.

"음음. 이제 알겠습니다. 완전히 흡수하는데 최소 석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나 많이? 자화배독초 자체의 독성은 보잘것없다고 알고 있다만."

"맞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답니다. 자화배독초를 흡수한다는 건, 제가 지금껏 기억한 독성 전부가 배가 된다는 뜻. 당연히 그에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런가."

이해했다. 자화배독초 자체는 금방 흡수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강해질 기존의 독성.

자칫 잘못하면 회귀 전의 당소월처럼 몸이 독기를 버티지 못하고 어디 하나는 필히 녹아내릴 터다. 그러니 조금씩 흡수하며 단계적으로 적응시키겠다는 소리겠지.

"독을 몸에 기억시키는 중에는 다른 독을 다루기 힘들 터인데, 하필이면 그게 다른 독의 독성을 배가시키는 자화배독초라.... 한동안 독공은 펼치지 못한다고 봐야겠군. 까딱 잘못하면 품은 독이 폭주할 테니."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말이다."

"독인이 아니더라도 독공은 펼칠 수 있지요. 평범하게 하독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그래서 평범하게 독을 들고 다니나?"

"....."

입을 꾸욱 다무는 당소월. 그렇겠지. 직접 독을 만들 수 있는데, 번거롭게 따로 독을 담아 다니겠는가.

어깨를 으쓱이며 동굴의 비어 있는 부분을 둘러보았다. 제법 널찍하네.

"그나저나 석 달인가. 다음에는 암기 수련용 목인을 만들어야겠군."

"말씀은 고맙지만 소협 앞에서 무공을 보일 생각은 없답니다."

"이미 다 보여 줬으나, 하나도 통하지 않았던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으읏... 그건!"

나한테 어떻게 납치당했는지를 떠올린 걸까. 당소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그 다채로운 표정 변화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비전절기를 내보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무인이 되어서 수련을 빼먹을 수는 없잖나. 이미 내게 보여 준 수법들,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기본기라도 연습하라는 소리다."

"그거야...."

"아무리 고강한 내공도 제대로 검을 휘두를 줄 모른다면 쓸모없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는 몸은 녹슬 뿐이다."

"저,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면 되잖습니까! 어서 목인을 준비해 주시지요!"

"오늘은 안된다. 내일 만들어 주마."

"...이렇게나 저를 도발해 놓고 내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이없어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당소월. 이에 말없이 바깥을 가리켰다.

"슬슬 해가 질 시간이다. 당소월 네가 자화배독초를 취하고 운기하고 나면 딱 잘 시간이 되겠군."

"읏...."

"나도 오늘 못다 한 수련이 있으니 밤잠을 줄여 가며 만들어 줄 생각은 없고."

"....."

그제야 납득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럼 내일 만들어 주시지요 천 소협."

"이제 와서 하는 말이다만 납치당한 주제에 상전처럼 구는 건 좀 어떨지 싶다."

"정말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해주실 거지요?"

"....."

이번에는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 웃어대는 당소월.

"아하하! 급할 건 없으니 하나씩 천천히 채워나가도록 하지요."

"전부 내가 고생하겠지만 그러도록 하지."

그리 대답하자 만족스런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앉는 당소월. 단숨에 자화배독초를 삼키려다 멈칫한 그녀가 이쪽을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호법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제일 위험한 게 나다만?"

"그렇기에 부탁드리는 겁니다."

"...나는 나대로 수련할 생각이다. 방해되는 게 있으면 치워 주긴 하마."

"예에. 그럼 저는 멋대로 소협 옆에서 운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방긋 웃은 당소월이 자화배독초를 한입에 삼키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실로 무방비한 모습.

잠시 이를 지켜보다 검을 뽑았다. 조금 부족하지만 아침에는 내공 수련을 했으니, 이번에는 외공을 수련할 차례 아닌가.

지금의 내 몸은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는 말랑한 상태. 근육은 부족하고, 균형은 뒤틀렸고, 쉽게 숨이 찬다.

말하자면 아직 불순물이 잔뜩 섞인 고철 같은 상태. 이를 두드리고 또 두드려 한 자루 검으로 벼려 내야 한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 누구나 하는 일이고,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흡!"

소리 죽인 기합과 함께 검이 허공을 가른다. 아무런 기교도 섞이지 않은 평범한 수직 베기.

뒤이어 펼친 검 또한 마찬가지로 우직하게 뻗어나가는 베기와 찌르기의 연속일 뿐이다.

나는 태생이 비루하고,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기에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수 없었다.

사파답게 온갖 잡스러운 무공을 익히고, 그 안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접목시킨 뿌리 없는 무학.

그것이 내 무공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고, 가까스로 살아남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깨닫는 바가 있었으니.

사람을 죽이는 데는 대단한 기술이 필요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곳을 향해 휘두른 검. 더 빠를 필요도, 강할 필요도, 화려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사람은 급소에 검이 한 치만 박혀도 죽는 연약한 생물이니까.

하여 그동안 익힌 모든 잡스러운 기교를 버렸다. 애초에 상승무공은커녕 삼류에서 이류쯤 되는 무공들이었기에 아깝진 않았다.

대신 평범한 검을 휘둘렀다. 처음 검을 들었을 때처럼.

후웅!

허공을 베어 낸 검이 파공음을 터뜨린다. 이래서는 안 된다. 검 끝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내 팔이 닿는 범위에서, 내가 담을 수 있는 힘을 담되, 내 생각대로 움직이도록.

그렇게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을까. 검격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체감된다.

궤적이 더욱 깔끔한 일선을 그리게 되었으며, 귓가를 울리던 파공음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반면 검에 담긴 예리함은 그 존재감을 늘려 간다.

겨우 검 몇 번 휘둘렀다고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다. 그저 이 몸뚱이가 한층 더 검에 적합하도록 변하는 것이지.

아직 어린 몸이라 연약한 건 아쉽지만, 반대로 어리기에 성장이 빠른 점은 만족스럽다.

훨씬 이른 나이부터 제대로 된 방법으로 수련을 시작했으니 회귀 전의 나보다 높은 무위에 다다를 수 있을 터.

그런다고 해서 천마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시도해 봐야지.

최악의 경우. 가문의 복수를 위한답시고 목숨을 내다 버릴 당소월을 강제로 중원 밖으로 끌고 가야 하니, 적어도 화경은 되어야 할 터.

화경인가. 머나먼 이야기지만 해야만 한다면 해내는 수밖에 없다.

당소월과의 대화로 잠시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고, 검을 휘둘렀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결국 체력이 다해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쓰러지던 순간.

"아니, 사람이 무슨 수련을 이렇게 무식하게 하시나요?!"

기겁하며 달려온 당소월이 내 몸을 받쳐 들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한다."

"몸 망치기 딱 좋은 방법이네요."

"무작정 휘두른 게 아니라 전부 계산하며 휘두른 것이니 그럴 일은...."

"네네. 알겠으니까 일단 누우시지요. 에휴, 이 땀 좀 봐. 가능하면 한번 씻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럴 기력은 없겠죠?"

"보다시피."

"그럼 적당히 닦아 줄 테니 얌전히 계시길."

"고맙다."

"뭘요. 제가 받은 게 있는데 이 정도야."

한층 친근해진 어조로 여벌의 옷을 수건 삼아 내 몸을 훑는 당소월. 얼추 닦은 뒤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헌데 반로환동으로 더 강해진 사람은 있어도 약해진 사람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천 소협은 정말로 소협이었던 건지요?"

"...이제라도 알아주니 다행이군."

"전부 그 늙은이 같은 말투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저도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중원은 넓은 법이군요. 저보다 더한 천재가 있을 줄이야."

"부끄러운 말은 그만하고 이제 그만 가서 자라. 나도 곧 잠들 것 같으니."

"너무 무방비하신 것 아닌지요? 제 앞에서 이렇게 탈진해 계시다니. 다시 묶어두지 않는 겁니까?"

"내게 호법을 서달라고 한 너도 무방비한 건 마찬가지 같다만."

"아! 그러고 보니 호법을 서달라고 했더니 칼춤을 추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운기에 방해가 됐나?"

"그건 아니지만요...."

말끝을 흐리는 당소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기세가 당소월을 감싸도록 휘둘렀으니까. 오히려 안정감이 느껴졌으리라.

거기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당소월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일어섰다.

"뭐, 됐습니다. 아무튼 이제 잠이나 자지요. 내일도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눕는 당소월. 몰려오는 졸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봐요."

내가 무어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이후의 생활은 첫날과 다를 게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내공을 수련한 뒤, 아랫마을에서 그날의 식사와 필요한 물건을 사 오고.

저녁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외공 수련에 집중하다 그대로 쓰러지듯 잠든다.

이를 반복하는 사이. 동굴은 점점 살 만한 곳으로 변했으며, 나와 당소월은 조금 더 친해졌다.

시간도 꽤나 흘러 슬슬 당소월이 자화배독초를 절반 이상 흡수했고, 나 또한 일류 수준의 내공을 쌓았을 무렵.

평소처럼 아랫마을에서 사 온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데, 희미한 살기가 느껴져 바깥으로 나왔다.

"하."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와 당소월이 있는 동굴을 중심으로 진을 형성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녹색 무복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 6화. 은원

"하."

저 멀리서 이쪽을 둘러싸며 올라오는 한 무리의 무인들.

기대했던 당가의 무인은 아니었다. 복장도, 무기도 제각각인 저들 중 녹색 무복을 입은 자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유일한 공통점이라고는 미처 억누르지 못해 새어 나오는 살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오더라도 조금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천 소협?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무슨 소리신가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슥슥 닦아낸 당소월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을 죽이러 다가오는 그림자를.

"...설마?"

"맞다. 어디서 꼬리를 잡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켰나 보군."

"당장 여길 벗어나죠. 아직 저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으니 지금이라면...."

"아니. 이미 포위당했다. 이쪽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포위망을 유지한 채 조여 오는 것 같군."

"포위당했다고 단정하긴 이릅니다. 먼저 뒤쪽의 상황을 살펴보러 가보죠."

"내가 익힌 무공이 좀 특이해서 말이지. 살기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살기가 진동하는군."

아마 어디서 당소월을 발견할지 모르니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미리 기세를 끌어올린 것이리라. 내가 느낀 건 무심코 흘린 기운에 섞인 살기일 테고.

"...그런 것도 가능하셨나요?"

"더한 것도 가능하지."

어깨를 으쓱이며 그리 말하자 당소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소협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망치기는 늦었겠지요. 허면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해요."

"대책이고 뭐고 방법은 둘뿐이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거나, 여기서 놈들을 전부 쓰러뜨리거나. 참고로 난 후자를 추천하지."

"왜죠?"

"자화배독초의 흡수가 아직이잖나. 독공을 사용할 수 없다면 포위망을 뚫더라도 추적자를 뿌리칠 수 없을 터. 결국 체력과 내공이 다해 붙잡힐 거다."

"그건... 그렇겠네요."

독은 상당히 효율적인 무기다. 달리면서 대충 뿌리기만 해도 추적자들의 발을 어느 정도 묶을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독공의 사용이 불가능한 상황. 당소월은 독공의 천재지 암기술의 천재는 아니었기에 제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리라.

당소월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이고.

물론 나는 어느 쪽이건 내 한 몸 성히 빼낼 자신은 있으나, 도망치면서 당소월을 안전하게 지킬 자신은 없다.

내 내공은 이제 막 일류 턱걸이 수준을 넘지 않았던가. 어중이떠중이면 모를까 당소월이 죽음을 각오할 때까지 몰고 간 놈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광랑탈명공은 내 깨달음의 집대성인 만큼 내게 딱 맞는 무공이고, 그 근간을 사파 무공에 두고 있어 정순함은 떨어져도 축기 속도는 상당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아직 회귀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도 당소월도 함께 살아남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암기를 던지기 가장 편한 옷이라 그런 걸까. 겉옷이나마 당가의 무복으로 갈아입는 중인 당소월에게 물었다.

"암기는 얼마나 남았지?"

"대부분 천 소협과 싸우다 소모한 탓에 본래 갖고 다니는 양의 삼 할밖에 없습니다. 한둘이면 모를까 저들 전부를 상대하기엔 한참 부족하겠죠."

"암기는 꼭 필요할 때만 던져라. 다 떨어지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이라도 던지고."

"그럼 천 소협은 어찌하시렵니까?"

"나가서 벤다."

"...괜찮겠습니까?"

"글쎄. 누가 뒤를 봐준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군."

"하여간 말은... 걱정 마시길. 당가의 암기술은 짱돌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답니다."

"원래 사람은 짱돌도 잘못 맞으면 죽는다."

"쓰읍! 그냥 얌전히 고개나 끄덕이시지요!"

"...."

맞는 말을 했는데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약간 억울했지만, 이럴 때 괜히 반박했다가는 더 귀찮아진다는 걸 회귀 전에 경험해 봐서 잘 알기에 그냥 끄덕여 주었다.

"음! 좋습니다. 저만 믿으시길! ...그나저나 정말로 당가의 핏줄을 노리는 바보가 있을 줄은 몰랐군요."

"사람은 가끔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움직이곤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허면 이제 나뿐만 아니라 내 이야기도 믿어주는 건가?"

"직접 눈으로 보고도 부정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더 하실 말은 없는지요? 지금이라면 전부 믿어 줄 생각입니다만."

"없... 아니지."

한차례 숨을 고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절대 내 앞에 서지 마라."

"왜죠?"

"위험하니까."

나는 아직 함께 싸우는 것보다, 혼자 싸우는 것에 익숙하다.

***

이쪽이 육안으로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반대로 상대 쪽에서도 우리가 보인다는 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발견한 녀석들이 빠르게 동굴 앞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은 이류에서 삼류 수준의 잡졸이었지만, 몇몇은 제법 흉흉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어깨에 도끼를 짊어진 험상궂은 거한. 양팔이 비정상적으로 긴 꼽추.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인. 그리고 모습은 숨겼지만 기세는 완전히 숨기지 못한 살수가 하나.

일류 무인은 이 넷 정도인가. 다른 잡것들까지 합치면 도합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

이 정도면 어지간한 흑도방파와 맞먹는 전력이지만, 회귀 전의 당소월이 도망치지도 못할 것 같진 않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독공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테고, 암기도 넉넉했을 테니까. 분명 뭔가 하나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기억을 더듬고 있자니, 그들 사이에서 검붉은 무복의 사내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 발걸음에 맞춰 주변 것들이 스스로 길을 열어준다.

"...과연. 이건 고전할 만하군."

고목처럼 깡마른 몸뚱이. 하지만 그 기세는 형형하고, 걸음걸이에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허리춤에는 낡은 도 한 자루가 걸려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얼굴에는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긴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는 아마도 절정 초입. 다만 묘하게 불안정한 것이 완전한 절정에 오른 것은 아니리라.

내공이 혼탁하고, 깨달음의 깊이가 얕은 사파 무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태다. 나 또한 저렇게 어중간한 적이 있으니 잘 알지.

물론 그렇다고 얕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동급에 비하면 부족하다 뿐이지, 명실상부한 절정 고수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니까.

본래라면 머릿속으로만 복수심을 불태울 뿐, 감히 당가의 여식과 싸울 생각조차 못 했을 놈들이 들고일어난 이유가 있었네.

분명 저놈이 구심점이다. 아무리 촉망받은 후기지수라도 약관의 나이에 절정 무인을 쓰러뜨리진 못할 거라 생각한 거겠지.

하나 남은 눈으로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던 백살도객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말해두지. 나는 자네를 해할 생각이 없네. 우리의 목적은 당가의 여식뿐이니."

"저런. 이루어질 수 없는 목적을 위해 달려온 삶인가. 동정심이 드는군."

내 이죽거림에도 백살도객은 흔들림 없는 태도로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보아하니 소형제는 당가의 호위는 아닌 모양이야. 혹시 백살도객(百殺刀客)이라는 별호를 들어 봤는가?"

"전혀 모르겠다."

"그럴 수 있지. 벌써 이십 년도 전에 돌아가신 스승님의 별호이며, 지금은 제자인 내가 자칭할 뿐인 별호니까."

시종일관 날이 서 있던 자칭 백살도객의 목소리가 일순 부드럽게 풀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승님은 썩 좋은 분은 아니셨네. 부족한 재능을 메우기 위해 무고한 양민을 상대로 무공을 시험하시던 분이니."

"별호의 유래를 알겠군. 백 명을 죽여야 비로소 한 명의 도객이 될 수 있을 만큼의 둔재가 인성도 고약했나 보군."

"...부정하지 않겠네. 스승님은 천하의 개새끼셨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백살도객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동자에는 그리움 대신 격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스승이었네."

"...."

"천애고아였던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잘 곳을 주고, 가족이 되어 주셨으며, 피를 묻혀 가며 익힌 무공의 모든 것을 물려주셨다."

꾹꾹 눌러 담은 분노. 자기 자신마저 불태워 버릴 것 같은 저 열기는 복수자의 특권이리라.

"당가는 그런 스승님을 악적이라며, 감히 사천성에서 흉행을 저지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더군."

나를 죽이려 드는 자는 죽인다. 그 간단한 원칙만 지키고 살았을 뿐인데, 무림의 은원은 나를 무겁게 질책했다.

"그래서 스승님은 내게 재갈을 물리고, 한쪽 눈을 베어내셨다. 내가 제자가 아닌 납치당한 양민으로 여겨지도록. 그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세상에 완벽한 악인은 없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이라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연인인 법.

"눈앞에서 스승님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원수에게 고개 숙여 감사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었으니까. 스승님이 그걸 원하셨으니까."

녀석 또한 다르지 않다. 스승이 죽었으니 복수한다. 이 얼마나 알기 쉽고 정당한 사유인가.

"안다. 잘못한 것은 스승님이고, 당가는 옳은 일을 했다는 것을. ...하지만 알면서도 가슴을 태우는 천불이 꺼지질 않더군."

나 또한 다르지 않다. 설령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품은 여인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다. 감히 누가 이를 비난하겠는가.

"그러니까 거기서 비키게 소형제.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분명 자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고 자네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을 걸세.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더 늘리고 싶지 않네."

순수하기까지 한 제안.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 자는 분명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그는 악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일지도 모른다.

허나, 상관없다. 검을 든 무인이 서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면 결국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니까.

뒤를 돌아보자 불안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스릉.

검을 뽑았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진다.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한다. 이쪽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터라."

"...그런가."

무겁게 끄덕이는 백살도객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반면 당소월은 한 걸음 물러나며 넉넉한 소매 속에 손을 숨겼다.

언제 어떤 암기를 날리는지 알아차리기 힘들게 하는 당가 특유의 기수식. 이에 백살도객의 뒤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단번에 짓쳐들어올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발치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 그어진 일선.

"여기를 넘어오면 죽는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날아오는 비수.

쐐애액-!

반사광마저 숨기기 위해 날을 검게 칠했지만... 정작 본인의 살기를 감추지 못해 궤적이 뻔히 보였다.

정확히 내 미간을 노리고 날아오는 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과 날이 부딪히며 작은 불똥을 일으켰으나, 어느 한쪽이 튕겨 나오지는 않는다.

비수의 속도에 맞춰 검을 뒤로 빼되, 살짝 검을 비틀어 궤적을 일그러뜨렸기 때문.

착의 묘리에 따라 검에 달라붙듯 따라오는 비수. 그대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자, 날아오던 속도 그대로 원래 있던 곳을 향해 되돌아간다.

"커헉!"

짧은 단말마와 함께 나무에서 떨어지는 흑의인. 그는 가슴께에 자신의 비수가 꽂힌 채, 목이 꺾여 죽었다.

일제히 쏟아지는 경악. 심지어 당소월마저 굳어 버린 모습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물론, 넘어오지 않아도 죽는다."

[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 7화. 은원 (2)

순식간에 날아온 비수를 받아쳐, 흑의인 하나를 쓰러뜨린 모습에 놀란 걸까.

당소월에게만 신경 쓰고, 내게는 별다른 관심조차 주지 않던 습격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명백한 경악. 아직 지학밖에 안 된 것 같은 어린것이 일류 무인을, 그것도 기습해 온 살수를 단번에 처리하니 믿기지 않는 것이리라.

"...그런데 당소월 넌 왜 놀라나."

"천 소협이 마음먹었으면 저는 그날 죽었을 거라는 걸 새삼 깨달았거든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예에. 천 소협이 그럴 리 없으니까.... 맞죠?"

싱긋 미소 지은 당소월이 소매에 숨기고 있던 손을 기습적으로 출수했다.

파앙!

"크아아악!"

본인 실력으로는 위험하다 느낀 걸까. 슬금슬금 뒤로 빠지던 놈 중 하나가 눈을 부여잡으며 무기를 떨어뜨렸다.

당가의 암기는 아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 조각이 눈에 박혔을 뿐. 그러니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거겠지.

급박한 상황도 아니고, 상대가 위험한 것도 아니니 저 정도면 충분하다.

"잡다한 놈들은 신경 쓰지 마시길. 제가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그럼 난 큼직한 놈만 상대하면 되겠군."

피식 웃으며 정면을 노려보자, 살수를 제외한 나머지 일류 셋이 움찔거린다. 본능적으로 눈치챈 거겠지. 자기들로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를 잠시 지켜보던 백살도객이 침음을 흘리며 손을 휘저었다.

"저 소형제는 내가 처리하지. 나머지는 그사이에 당가 년을 상대하고 있어라."

"헤헤.... 나으리의 마음을 아는데 저희가 어떻게 먼저 원수를 치겠습니까요."

꼽추가 비굴한 태도로 그리 말하자, 백살도객은 자신의 도를 뽑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 굳이 쓰러뜨릴 필요는 없으니, 내게 방해가 들어오지 않도록 붙잡고 있어라."

"네, 네엡! 알겠습니다요!"

바짝 굳은 꼽추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멀어진다. 그리고는 다른 녀석들과 함께 무어라 속삭이더니,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누구 하나 놓치지 않을 생각으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어느새 거리를 좁힌 백살도객이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쯧."

피하는 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도에 실린 힘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에 먼저 검을 가져다 댈 수 있도록.

챙!

도의 뿌리 부분이 내 검의 끄트머리에 부딪혀 튕겨 나간다.

근력과 내공의 차이는 명확하나, 상대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한 힘으로 부딪히면 어떻게든 되는 수준인가.

문제는 속도다. 크게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이쪽의 열세라는 점은 명확하네.

나와 상대의 격차를 가늠하고 있자니, 백살도객이 희미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소형제는 나랑 좀 놀아줘야겠어."

"남자에겐 관심 없다만."

"그러지 말고 이것도 받아보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날아오는 도. 내 수준에 맞춰 주겠다는 것처럼 기운을 싣지 않은 순수한 초식의 교환.

챙! 채챙!

검과 도가 맞부딪히며, 몇 번이고 요란한 소리로 울어댄다. 가끔 옷자락을 베이기도 하고, 작은 생채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합을 나누는 과정은 항상 비슷했다.

백살도객이 짓쳐들어오면 그 취약점을 베어내 흐름을 끊어낸다. 이쪽에서 역으로 빈틈을 노려 반격하기도 하지만, 백살도객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부 튕겨 나가는 식.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걸까. 공격을 이어 나가는 대신,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추스른 백살도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일류 수준으로 보이는데, 이만한 검술이라니... 훌륭하네. 그 나이에 이룬 성취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일세."

"검에 나이가 어디 있나. 잘못 맞으면 누구나 골로 가는 게 검인데."

"그 또한 맞는 말이지. 다만 나는 안타까울 뿐일세. 소형제가 이렇게 강하다면 적당히 봐줄 수도 없으니까."

한탄하듯 중얼거린 백살도객의 기세가 갑작스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낡지만 잘 관리된 도 위로 피어오르는 탁한 아지랑이.

흐릿한 적색으로 빛나는 도기(刀氣). 절정 고수의 상징을 머금은 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예리함을 자랑했다.

"소형제의 선택이니 부디 나를 무정타 원망 말게."

"멍청한 소릴."

상대를 죽여야 하지만 원망 받고 싶지는 않다니. 이 얼마나 속 편한 말인가.

생사결을 앞둔 무인이라면 주저해서는 안 된다.

얌전히 목을 내놓고 싶은 게 아니라면, 원망 받더라도 죽이겠다는 각오로 임해야지.

그 간단한 이치를 알려줄 심산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웅-

단전에 깃든 광랑탈명공의 내공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지백해를 내달린다. 어찌나 그 기세가 난폭한지, 누가 목에 칼날을 들이민 것처럼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찌릿하게 만든다.

하지만 괜찮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급소를 파고드는 한 치의 쇠붙이. 아무리 죽을 것 같아도 이 정도에 죽진 않는다.

만약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나의 앞을 가로막은 적일 테고.

"무슨...?"

달라진 내 기세에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백살도객.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무수한 생사의 기로, 죽거나 죽이거나. 이 간단한 물음 앞에 나는 항상 생존을 쟁취해 왔다.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길의 끝에서 도달한 것이 초절정의 경지. 그러한 나의 삶을 녹여 내어 만든 것이 광랑탈명공이다.

살기란 결국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내공에 실은 것. 의지가 담긴 만큼 뜻대로 움직이기 편하고, 그만큼 강맹하다.

위력에 한해서라면 과거의 내가 그토록 갈구하던 상승의 심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공이라 자신할 정도.

다만 광랑탈명공에는 큰 부작용이 하나 있었으니.

도가와 불가의 무공을 익힌 자가 유순한 성격이 되는 것처럼, 광랑탈명공을 익힌 자는 살기가 부풀어 올라 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내게 이러한 공능은 부작용이 아니다. 애초에 광랑탈명공에 깃든 살기는 나에게서 나온 것. 이 정도 충동도 제어하지 못할 리 없잖은가.

"후우...."

숨을 깊게 내쉬며 살의를 한 점에 집중시켰다.

한때 초절정에 달했던 의지로 벼려 낸 살기가 광랑탈명공의 공능과 만나 한층 증폭된다.

이를 정면에서 받아낸 백살도객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소형제도 꽤 위험한 사람이었군 그래."

"무얼. 까마득한 후배 하나 잡겠다고 도기까지 꺼내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어디, 위험한 사람끼리 한판 붙어 봅세."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백살도객이 크게 한 걸음을 내디딘다.

"흡!"

내 목을 향해 비스듬하게 날아드는 도. 휘두르는 속도는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유형화된 기운은 그 위력을 몇 배로 상승시켰으리라.

아무리 어기충검으로 검의 내구도를 강화했다고는 하나, 도기를 견뎌 낼 정도는 아니다.

정면에서 부딪쳤다간 몇 합 버티지 못하고 베여나갈 터.

즉. 검을 맞대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리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도를 응시하며 반보 대각선으로 내디뎠다. 자연스레 틀어지는 몸. 내 목을 스쳐 지나간 도가 얇은 실선 하나를 그린다.

도기 덕에 한층 위협적인 일격이었지만, 전신을 옥죄는 살기에 몸이 둔해진 걸까. 움직임 자체는 전보다 느리고 뻣뻣하다.

반면 이쪽은 내공을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중이다. 덕분에 백살도객의 움직임에 그럭저럭 따라붙을 수 있었고.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을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검격이 백살도객의 팔을 노린다.

도를 내지르느라 팔을 쭉 뻗은 지금의 녀석이라면 막아 낼 수 없는 일검. 거기에 백살도객에게 향하던 살기를 날카롭게 가다듬어 목을 향해 쏘아냈다.

아마 녀석의 입장에선 내 검이 팔과 목을 동시에 노리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사람이라면 반사적으로 더 위험한 목덜미 쪽을 지키려 들었겠지만... 백살도객은 그러지 않았다.

살기에 몸이 멋대로 반응해 움찔거리긴 했으나, 금세 단순한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휘두르던 도의 궤적을 억지로 꺾는 녀석.

한차례 빗나갔던 도가 이번에는 내 허리를 향해 반원을 그린다.

억지로 꺾은 만큼 기세도 궤적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 하나 반으로 갈라 버리기엔 충분한 위력이다.

"후우."

깊이 들이마신 숨을 내뱉으며 내공을 발에 집중했다.

팟-!

용천혈에서 무리하게 기운을 뽑아낸 탓에 발바닥이 아릿하게 저려 왔지만, 덕분에 몸을 튕겨내듯 앞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거의 밀착하듯 달라붙은 거리. 너무 가까워진 탓에 백살도객의 도 대신 팔이 내 허리를 후려친다.

뚜둑.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외공의 성취가 미진한 탓에 제대로 된 권장법도 아니고, 무기를 휘두르던 팔에 맞아도 이 모양이다.

그래도 나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은 아니다.

올려 베기 도중에 짓쳐들어간 검은 찌르기가 되어 백살도객의 팔뚝을 꿰뚫었으니까.

"크흑...! 떨어져라!"

피를 본 백살도객의 눈에 불꽃이 튀더니, 곧장 내 배를 향해 무릎을 쳐올린다.

피하기엔 너무 가깝다. 하여, 뒤로 몸을 던지며 충격에 거스르지 않고 흐름에 따른다.

퍼억!

"...!"

가죽으로 만들어진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 최대한 흘려 맞았음에도 내장이 진탕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백살도객 또한 썩 상태가 좋진 못했다. 검이 뽑히며 뚫린 구멍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고, 축 늘어진 팔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도 끝이 자꾸만 떨린다.

본래라면 점혈로 지혈 정도는 했겠지만... 녀석도 알고 있는 거겠지. 멀쩡한 팔은 하나뿐인데, 이를 점혈에 쓰느라 무방비한 틈을 보인다면 바로 물어뜯긴다는 걸.

결국 한쪽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 손으로 도를 잡은 백살도객이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았다.

"...."

"...."

말은 없었다. 그저 잠시 시선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휘둘러진 도검. 살기 짙은 검과 도기에 감싸인 도는 서로 맞닿는 일조차 없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회피와 반격만을 계속하는 나와 백살도객. 그럴 때마다 내 옷자락이 베이고, 붉은 실선이 전신을 내달린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없어 조용해졌을 뿐, 처음 검을 나눌 때와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다만, 한 번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백살도객은 더 이상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차분하게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목을 노리고, 손목의 동맥을 노리고, 심장을 노리는 척하며 고간을 노린다.

철저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움직임. 투로가 교묘하고 악랄해졌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사파 무공의 정석 같은 도법이다.

익숙하다.

철저하게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라는 점에서는 나와 같지 않은가.

허나, 녀석의 도는 깊이가 얕다.

전대 백살도객은 재능이 부족했고, 당대 백살도객은 살의와 궁리가 부족하다.

그런 둘의 손에서 나온 무공은... 파헤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됐다. 전부 읽었으니."

"뭐라?"

검을 바닥으로 늘어뜨린 채, 백살도객을 향해 한 걸음 크게 다가갔다. 이쪽을 경계하면서도 빈틈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녀석.

하지만 그 궤적은 휘둘러지기도 전에 쏘아진 살기와 그간 보여준 초식을 통해 읽었다.

한 호흡 먼저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른다.

이번에는 옷자락을 베인 것은 내가 아니라 백살도객이었다.

"읏!"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다급히 한 걸음 물러난 녀석이었으나, 이를 놓치지 않고 바짝 추격한다.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지고, 작은 생채기가 생기며 핏물이 사방으로 튄다.

이를 악문 백살도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피워낸 도기를 흩뿌리며 역공에 나섰으나... 결과는 변함없었다.

합을 나눌 때마다 백살도객의 몸 어딘가에는 생채기가 생겼고, 한 걸음 물러났으며, 점점 자세가 무너져 간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된다!"

영문도 모른 채, 궁지에 몰리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걸까. 내공을 있는 힘껏 쏟아부어 최대 출력의 도기를 뿜어내는 백살도객.

흐릿한 적색으로 빛나는 도기가 크게 부풀어 오르며 도신 전체를 감싼다. 어디 한 군데 베여도 좋으니, 나를 확실하게 두 동강 내겠다는 의지가 전해지는 모습.

망설임 없이 날아오는 도를 향해 몸을 던지며 피식 웃었다.

"이때를 기다렸다."

"뭣?"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그 의미를 잘 아는 백살도객은 당황하면서도 휘두른 도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준비했건 통째로 베어내겠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허나.

터엉!

촤아악-!

예리한 검풍이 상의를 찢고, 크게 덩치를 불린 도기의 끄트머리가 내 상체를 베어냈지만... 그 깊이가 한 치에 달하지는 못한다.

도기를 사용한 이후로 직접 부딪힌 적 없는 검으로 도신의 옆면을 쳐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탄력을 고스란히 받은 내 검은 중간부터 부러졌으나, 그 대가로 백살도객의 전력을 빗겨낼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푸욱.

부러진 검신이 피륙을 뚫고 심장에 한치의 상처를 남기기에는 말이다.

"쿨럭! 허윽... 난, 나는...!"

손이 베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에 박힌 검신을 부여잡은 백살도객.

녀석은 나와 당소월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텅 빈 눈을 부릅뜨고 죽은 녀석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자니, 길게 베인 내 가슴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몸뚱이. 거죽의 상처라도 이만큼 크면 출혈량이 상당한가.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쓸데없는 감상도 흘려보내고는 혈을 짚어 지혈했다.

한 차례 호흡을 고른 뒤에야 바라본 당소월. 그녀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던지고는 있지만, 전부 돌멩이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암기는 진작에 전부 소모한 모양.

심지어 그 돌마저 부족한 걸까. 표정과 몸짓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 헐렁한 당가의 무복이 땀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숨은 당장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고 있다. 분명 체력과 내공도 아슬아슬한 것이리라.

본래라면 저런 녀석들은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텐데.... 생각보다 독공의 부재가 컸던 모양이네.

반면 적당히 물고 늘어지면 당소월을 붙잡고 있던 습격자 놈들은 비교적 멀쩡했다.

대여섯 정도는 바닥에 널브러져 죽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자잘한 부상만 입었을 뿐 큰 상처는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부러진 검을 든 채, 처음에 그어 두었던 선 앞에 서서 자세를 잡았다. 이에 습격자들이 내가 백살도객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랐으나....

내 너덜너덜한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걸까.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우던 도끼 거한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겁먹지 말고 저 몰골을 봐라! 운이 좋아 백살도객 어르신을 이겼다지만, 저 어린놈도 반송장 상태다! 싸워라! 우리의 은원도, 어르신의 죽음도 전부 피로 씻어낸다!"

-와아아!

눈치를 보던 습격자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무기를 바로잡는다. 결연한 기세 사이사이로 희망적인 분위기가 차오른다.

"허어."

확실히. 이 중에서 가장 엉망인 건 다름 아닌 나다.

옷은 넝마가 되었고, 전신은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탈진 직전의 몸뚱이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고 있다.

거기에 내공은 바닥이요, 검은 부러져 절반밖에 안 남았으니 반송장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겠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질 것 같진 않았다.

바닥에 그어진 선을 괜시리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를 노리고 일제히 달려드는 무인들. 그런 놈들을 향해 날카롭게 벼려 둔 살기를 넓게 풀어 헤친다.

"와라."

[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 8화. 은원 (3)

"제발 늦지 말아 다오...."

사천당가의 가주. 독왕 당진천이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경신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휙휙 멀어지는 풍경. 당가 무공의 특성상 거리 조절에 능해야 하는 만큼, 당진천의 경신법 또한 입신의 경지에 올랐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늘그막에 얻은 막내딸.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당진천의... 아니, 당가의 보물.

당소월의 연락이 돌연 끊긴 지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 부모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당진천이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가의 모든 힘을 동원하고, 개방에 고개를 숙여가며 백방으로 당소월의 흔적을 추적했으니까.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으나... 속만 썩어 들어가던 나날도 이젠 끝이다.

개방으로부터 드디어 당소월을 찾은 것 같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기에.

호북성의 어느 외진 가도에서 독과 암기를 이용한 전투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름 지워 보려 한 것 같지만, 그 특수함을 숨기기엔 부족했던 모양.

심지어 당가의 무공으로 추정되는 흔적까지 발견했다고 하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진천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화경에 이른 자신의 속도에 맞춰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휘하의 무력대는 동원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오대세가의 가주가 이리 쉽게 움직여선 안 되지만, 감히 자식 잃은 아비의 앞을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당소월은 고운 심성과 아름다운 외모로 어려서부터 당가 전체의 사랑을 받은 금지옥엽.

당가의 식솔들은 그저 가주의 뒷모습을 향해 작게 묵례할 뿐이었다.

그렇게 당진천은 꼬박 사흘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경촌...이라고 했던가.'

가도의 끝에 보이는 작은 마을의 입구를 보며 개방에서 전달 받은 정보를 되새겼다.

전투의 흔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마을인 유경촌. 당소월이 사라진 날로 추정되는 다음 날부터 검을 찬 외지인이 나타나 주기적으로 두 명분의 생필품을 조달한다고 했던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분명 당소월은 그 빌어먹을 놈에게 납치당한 것이 분명했다.

하나뿐인 딸이, 그 어여쁜 것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치미는 화.

놈은 무엇이 목적인지 당가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었지만... 납치범의 정체도, 목적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당진천은 지금껏 그래 왔듯, 이번에도 당가의 오랜 가훈을 실천할 생각이었으니까.

폭발적인 속도로 땅을 박차자, 몇 호흡 만에 도착한 입구. 그곳에는 꼬질꼬질한 거지 하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 있던 점이 순식간에 사람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오, 오셨습니까 독왕님. 호북성의 부분타주를 맡은...."

"됐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듯하니, 쓸데없는 인사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세. ...내 딸아이는 어디에 있는가?"

최대한 자제하고 있음에도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당진천의 기세에 개방도가 즉시 손가락을 들어 유경촌의 뒷산을 가리켰다.

"저기! 저 산 어딘가인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오늘 아침에 서른 명쯤 되는 사파의 무리가 향한 것이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타닷.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산을 향해 멀어지는 당진천. 뒤늦게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개방도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가 생겨도 괜찮겠네."

오대세가의 일원인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드넓은 중원에도 몇 없는 화경에 이른 절대 고수라면 어지간한 문제는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까.

***

산을 오르는 당진천의 발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먼저 올라갔다던 사파 놈들은 흔적을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이를 따라 산을 오르기만 하면 됐기 때문.

추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당진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맴돌았다.

'사파 놈들이 어째서 소월이를?'

왜 당소월을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좋은 목적은 아닐 터.

하지만 당소월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당소월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당소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조금이라도 관련된 놈은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실로 사천당가스러운 결론. 들끓는 노기를 내리누르며 기감을 넓게 펼친 당진천이었으나, 그 끝에 잡힌 서늘함에 일순 멈칫했다.

'살기...!'

그것도 보통 살기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살업을 쌓아온 사파의 노고수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끔찍한 살기였지.

정신이 번쩍 든 당진천이 입술을 짓씹으며 경신법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살기의 근원에 도달한 순간.

"으, 아아악!"

서걱.

비명 소리와 함께 들려온 절삭음. 뒤이어 혼비백산한 표정의 머리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당진천의 발치에 부딪힌다.

"...."

눈을 가늘게 뜬 당진천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작은 시체의 산이 쌓여 있었다.

통일되지 않은 복장의 몸뚱이가 땅바닥을 나뒹굴었고, 흘러내린 피는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는 걸 넘어 웅덩이를 만들었다.

익숙한 암기에 맞아 죽은 이들도 몇몇 있었으나, 대부분은 검에 급소를 베여 쓰러진 상황.

아마도 이들은 유경촌의 개방도가 말했던 사파 무인들이리라.

그리고 이들을 전부 죽인 것은 아마 좁은 동굴 앞을 지키고 선 어린 소년일 터.

"음...."

무심코 침음을 삼킬 만큼 소년의 상태는 심각했다.

너덜너덜해진 옷. 전신에 피 칠갑을 한 것은 물론이요, 갈비뼈가 부러진 건지 똑바로 서지 못해 비스듬한 자세. 심지어 쥐고 있는 검마저 절반이 날아간 상태였다.

허나, 당진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살기의 주인 또한, 눈앞의 다 죽어 가는 소년이었다.

겉보기에는 이제 막 지학이 된 것 같은, 당소월보다도 어린 소년이었지만... 저런 살기를 뿜어내는 이를 단순히 소년이라는 말로 넘길 수 있는 것인가.

당진천은 그 답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우선은 당소월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때였다.

화아악-!

광범위하게 흩뿌려진 살기가 한 점에 수렴하더니, 그대로 당진천의 목을 겨눈다.

마치 이 이상 다가오면 베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건방진 것."

물론 당진천은 코웃음 치며 무시했다. 확실히 대단한 살기긴 했지만, 화경에 오른 당진천의 발목을 붙잡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기세를 일으킬 필요도 없다. 그저 받아넘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살기가 짙어졌지만, 이 정도로는 당진천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소년은 부러진 검을 들어 당진천을 겨누었다. 헌데, 그 자세가 조금 이상하다.

검은 똑바로 당진천을 향하고 있지만, 눈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위화감을 느낀 당진천은 보다 자세히 소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반쯤 풀려 허공을 응시하는 눈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미 저 소년은 의식을 반쯤 잃었다. 좋게 말해 무아지경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주화입마나 다름없는 상태.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아채기 쉬웠다.

소년의 발치에 그어진 선. 누구도 이를 넘지 못하도록 버티고 선 것이 분명하다.

만약 당소월이 여기에 있다면, 분명 저 동굴 안에 있을 터. 그렇다면 저 소년은 당소월을 지키기 위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검을 휘두른 것이리라.

당진천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비켜라. ...라고 말해도 들리지 않겠구나."

허면 최대한 빠르게 제압할 뿐이다. 이미 부상이 심하니 자고 있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단숨에 수혈을 짚을 생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을 때였다.

당진천이 그토록 찾던 당소월이 소년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 아버님?"

"...소월이 너냐? 몸은 무사하고? "

"네! 탈진해서 잠깐 정신을 잃은 것 말고는 괜찮답니다. 읏, 차."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당소월. 하지만 잠시 기절할 정도로 탈진했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그대로 힘이 풀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차차...."

비 맞은 아기 새처럼 떨리는 자신의 팔다리를 본 당소월이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소년의 몸뚱이를 붙잡고 재차 몸을 일으켰다.

"천 소협, 잠시만 가만히 있어 보세요."

"?"

스스럼없이 소년의 허벅지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가만히 서 있기 힘들자 아예 상대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당소월.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당진천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너무 스스럼없이 만지는 것 아닌가...?'

당진천이 당황한 사이, 당소월은 뒤늦게 소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악! 천 소협?! 괜찮은 거 맞죠? 아니, 무슨 피가...!"

잘 움직이지 않는 팔로 소년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더니, 무복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한다.

"머, 멈춰라 소월아! 지금 그 소협은 제정신이 아니다! 앞에 서면 위험할 수...."

"...아. 끝났나."

"?!"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라면 뭐든 베어 버릴 것처럼 굴던 소년이 당소월의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았다. 동시에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무아지경이건 주화입마건 간단히 깨지는 것이 아닐 텐데, 그것이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났다.

자신이 알던 상식이 부정당한 당진천이 경악하는 사이. 당소월은 여전히 소년에게 몸을 기댄 채 걱정 섞인 핀잔을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몸이 걸레짝이 된 겁니까. 도망치는 놈은 적당히 놔주라고 했잖아요."

"그랬다가 이번처럼 또 복수하겠답시고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차라리 좀 무리해서라도 확실히 처리하는 게 낫지."

"천 소협이 이렇게 다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이건 내가 아닌 당소월 네 가훈이었던 것 같다만."

"네네. 바로 그 두 배의 은혜 때문에 걱정하는 거니 좀 들으시길."

"걱정 마라. 잔 상처는 많지만, 생명에 지장이 가는 것은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다른 놈들을 붙잡고 있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한 건 저였는데."

"무얼. 내가 백살도객을 쓰러뜨릴 때까지 버티고 있지 않았나. 그거면 충분하지. ...무엇보다 자화배독초를 먹여 독공을 못 쓰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나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그리하겠습니다."

배시시 웃으며 상처를 살펴보는 당소월. 정말 깊은 상처는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맞다. 아버님! 항상 가지고 다니시던 고약을 조금 나눠주실 수 있나요? 여기 천 소협의 상처가 심해서 말입니다."

"...아, 그러마.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멍하니 있던 당진천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품에서 작은 나무통을 꺼냈다.

독만큼이나 약에도 정통한 사천당가가 가주를 위해 비전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만든 것이다. 그 효과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마 시중에 팔면 족히 같은 무게의 금으로 교환할 수 있을 귀물...이지만.

이를 건네받은 당소월은 싸구려 약이라도 바르듯, 손가락으로 듬뿍 퍼내 소년에게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체를 구석구석 더듬는 손길을 지켜보던 천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다."

"뭔가요. 다른 건 몰라도 가슴의 이 상처는 흉터가 남을 것 같아 꼼꼼하게 바르는 중입니다만."

"그건 고맙군. 다만 혼절할 것 같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멀쩡해 보이던 천휘가 돌연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천 소협?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천 소협?!"

몸을 기대고 있던 탓에 같이 넘어진 당소월. 그녀가 천휘의 위에 쓰러진 채,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당진천이 고개를 들었다.

앞을 가로막던 소년이 쓰러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동굴에는... 아무리 봐도 살림살이 같은 것이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당진천은 조용히 당소월을 천휘의 몸에서 떨어뜨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집에 돌아가면 할 이야기가 많겠구나."

"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그런 딸의 모습에 당진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 9화. 사천당가

눈을 뜨자 한 달 넘게 질리도록 봐 온 동굴이 아닌 평범한 천장이 나를 반겼다.

"끄으윽...."

상체를 일으키자,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 베인 상처도 아니고 근육통이라니. 이게 다 외공의 성취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다.

내공은 광랑탈명공 덕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외공에는 지름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고 고급스럽지만, 화려하다기보다는 차분한 느낌.

분명 마지막에 당소월과 그녀를 닮은 중년인의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여긴....

"당가인가."

슬쩍 몸을 내려다보자, 벗겨진 상체가 붕대로 둘둘 감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처는 얼추 치료된 것 같지만... 근육통이 여전한 걸 보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네.

일단 일어나야 뭐든 할 수 있을 테니, 약간의 고통을 감수하고 완전히 일어나려는 순간.

드르륵-

돌연 문이 열리며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있는 당소월과 시선이 마주쳤다.

"천 소협?!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방금 막 일어났다. 아, 미안하지만 잠시 팔을 잡아줄 수 있겠나? 이 빈약한 몸뚱이는 조금 무리했더니 혼자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하더군."

"그런 몸으로 일어나긴 뭘 일어난다고 난리십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당소월이 내 이마를 가볍게 밀었다. 아직 파들거리는 몸뚱이는 이에 저항할 힘이 없어 그대로 풀썩 뒤로 넘어갔고.

상체만 일으킨 거긴 하지만 꽤 아팠거늘. 내 수고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약간의 원망과 어이없음을 담아 빤히 바라보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옆자리에 앉는 당소월.

"그냥 좀 더 쉬고 계세요. 시비를 하나 붙여 드릴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그 아이에게 말씀하시고요."

"가만히 누워 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만."

"저도 부상자가 뽈뽈뽈 돌아다니는 꼴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얌전히 몸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어떨런지요?"

"...잠깐 잠든 사이에 고집이 늘었군."

"그야 여기라 사천당가라 그렇죠. 키우는 개도 자기 집에서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들 하잖아요."

"천하의 당소월이 개는 아니잖나."

"멍멍."

"...."

강아지 소리를 낸 당소월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천 소협.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요."

"당가의 막내딸이 개처럼 짖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좀 어렵긴 하지."

"아뇨. 그거 말고요."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콕콕 찌르는 당소월.

"천 소협은 지금 납치당했답니다. 저번이랑은 상황이 정반대네요."

"허."

설마 이제 와서 뒤끝인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당소월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도 잠시.

이 정도면 충분히 놀려 먹었다 생각했는지, 만족스런 표정으로 끄덕인 당소월이 가져온 짐 속에서 새 약과 붕대를 꺼냈다.

"교체할 때가 됐으니까 잠깐 일으키겠습니다."

"...일어나 있던 걸 다시 눕힌 건 당소월 너다만."

"그러니 다시 일으키는 것도 제가 할 일 아닙니까. 가만히 힘 빼고 계시면 알아서 해드릴게요."

그리 말하고는 내 어깨 쪽으로 팔을 집어넣어,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키는 당소월.

붕대를 풀고, 상처 부위를 젖은 수건으로 닦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이 꽤 능숙해 보인다.

"설마 내가 기절한 사이에 계속 갈아 주기라도 했나?"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드는군. 모르는 사람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건 썩 좋아하지 않으니까."

"축하해요. 소협의 말대로 지금껏 소협의 상처를 돌본 건 저랍니다. 안심하셔도 좋아요."

"그건 고맙지만.... 보통 이런 건 시비에게 시키는 일 아닌가? 당가면 의약당도 따로 있을 텐데."

"시비도 있고, 의약당도 따로 있지만, 어느 쪽을 부르기도 전에 소협이 깨어났거든요."

"음?"

"그 동굴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닷새가 걸렸지요. 천 소협이 혼절한 기간도 그쯤 되고요. 마지막으로 한번 상태를 보러 왔더니 혼자 일어나려고 하지 뭐에요."

당가에 도착하고 얼마 안 지나서 정신을 차린 건가.

"잠깐. 하루 이틀이 아니라 닷새나 내 몸을 보살폈다는 건가?"

"감사 인사는 접어 두시길. 천 소협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아니, 내 말은 그동안 대소변 같은 것도 당소월 네가 처리했냐는 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책임을 져줘야겠다만."

"...책임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설마 내 몸을 구석구석까지 감상하고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나? 있는 집 자식이 더 문란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그, 그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입술만 뻐끔거리는 당소월. 그러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고 붕대를 갈거나 새로운 약을 바르는 모습이 조금 재밌었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한 것 같지만.

"하아.... 소협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세요. 제가 어찌하기 민감한 부분은 아버님이 대신 해주셨답니다."

"아버님이라면... 독왕? 설마 독왕께 그런 일을...."

"삼매진화! 삼매진화로 노폐물을 태웠으니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아시겠으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요!"

"그렇다면야 뭐."

더 장난치면 진짜로 화낼 것 같으니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당소월이 씩씩거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은 터라, 어느새 자잘한 상처는 전부 끝나고 가슴팍에 남은 큰 상처만이 남은 상황.

상체의 절반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자, 그 너머에서 옅은 흉터가 나타난다. 명백한 참격의 흔적에 투덜대던 당소월이 멈칫한다.

"...이건 정말 위험했네요. 조금만 더 깊게 베였어도 내장이 튀어나왔을 거예요."

"안 위험했다. 거죽만 베일 걸 알고 아슬아슬한 수준으로 내어준 거니."

"흉터도 남을 것 같습니다만."

"무인의 몸에 흉터가 남는 건 위기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 아닌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

"물론이죠. 천 소협은 대 사천당가의 은인 아닙니까. 마음껏 자랑스러워하세요."

천천히, 하지만 정성스러운 손놀림으로 상처를 따라 손가락을 훑는 당소월.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는 안타까움과 감사함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혹시 어디 가서 괜한 말씀 하실까 봐 알려드립니다만, 천 소협에 관한 일은 적당히 포장하기로 아버님이랑 이야기를 맞춰놨습니다."

"그게 포장이 되는 수준이었나?"

"저희가 싸운 흔적은 비무한 흔적으로, 납치당한 건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을 것 같다만."

"그러니까 더 괜찮은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독왕이 하는 말인데 머리가 있으면 믿어야지요."

"아...."

하긴. 몇 없는 화경의 고수이자, 사천당가 가주가 하는 말이다. 누가 대놓고 의심하겠는가. 적어도 겉으로는 수긍한 척하겠지.

뒤에서 나오는 말이야 위세로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독왕 당진천에겐 그만한 힘과 세력이 있으니까.

거기에 진짜 중요한 문제는 당소월이 사파 무인에게 습격당했다는 부분이다.

모든 무림인은 은원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만, 사천당가는 아예 가훈으로 못 박아 뒀을 만큼 은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문이다.

헌데 누군가 당가에 원한을 품고, 당소월을 해하려 들었다.

내가 주모자 격인 백살도객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당가의 분노가 풀리지는 않을 터.

사흑련에 정식으로 항의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관련된 곳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쯤이면 내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나, 자연스레 잊혀지리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상처에 약을 마저 바른 당소월이 마지막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소협은 제 은인. 저도 아버님도 이를 그냥 넘길 생각은 없어요."

"잘 됐군.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지."

"솔직하니 좋네요. 뭐, 지금은 회복이 최우선. 수발을 들 시비와 의약당의 의원을 붙여드릴 테니 천 소협은 빨리 낫는 것만 생각하시길."

"그러지."

헌 붕대와 더러워진 수건을 챙긴 당소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왕 일어난 거 운기나 좀 해볼 생각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정신을 침잠시키려던 순간. 문고리를 잡고 있던 당소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 소협."

"더 할 말이라도 있나?"

"몸이 나으시면 보상을 논하기 위해 아버님께서 부르실 겁니다."

"좋군. 당가주께 직접 원하는 걸 말할 기회는 흔치 않으니."

"뭘 요구하실지는 소협이 알아서 생각하실 일이지만.... 그으...."

"이제 와서 사양할 말이 있나? 편하게 말해도 된다."

"아버님이 이상한 소리를 해도 너무 당황하지 말아 주시겠나요? 아무래도 제가 막내다 보니 좀 과보호하는 성향이 있으셔서...."

"음? 그야 딸이 최근에 위험한 일을 겪을 뻔했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충분히 이해한다."

"아뇨. 그게 아니라... 으음."

잠시 고민하던 당소월이 결국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됐습니다. 지금 말해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그냥 알아만 두세요 알아만."

"?"

혼자 그리 중얼거리더니, 이제는 손을 흔든다.

"그럼 이제 정말로 가볼 테니, 푹 쉬고 계시지요."

드르륵-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짧은 말만 남기고 사라진 당소월. 굳게 닫혀 버린 문짝을 바라보다, 다시금 운기에 집중했다.

당소월 말대로 지금은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몸은 완벽하게 회복하다 못해 쓰러지기 이전보다 훨씬 튼튼해졌다.

아무리 회복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지만, 중하급 영약을 끼니마다 퍼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적당한 연무장을 빌려 검을 수련하기도 했다. 대단한 초식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숨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기어코 개인 연무장을 내어주더라.

그만큼 당가에서 나를 귀중한 손님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겠지. 실제로 마주치는 시비나 무사들이 하나같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와서 어색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단순히 내게 머리 숙이는 이라면 회귀 전에도 많이 봤다. 특히 사흑련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나름 대주 노릇도 했던 터라 더더욱 그러했고.

다만, 두려움이나 경멸이 아닌 존경과 감사가 담긴 인사는 처음이라 영 익숙해지질 않네.

그래서일까. 가능하면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해 수련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사천당가가 괜히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손꼽히는 무가가 아니었다. 마음먹고 수련에 집중하고자 하니, 이렇게 편한 곳이 없더라.

사흑련의 시설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귀빈 대우받는 이곳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하여,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사람 하나 없는 개인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중이었다.

어느새 슬금슬금 나타난 당소월이 연무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내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음습하게 숨어 있는 거냐."

"음습하다뇨. 천 소협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저의 따뜻한 배려라고 불러주시겠나요?"

"그래. 배려라고 치자. 허나 평소에는 저녁쯤이 되어서야 찾아오지 않았나. 아직 점심때도 안 됐는데 무슨 일이지?"

지난번 습격 이후로 당소월도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건지, 요즘 수련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들었다.

아직 자화배독초의 흡수가 끝나지 않은 터라 암기술 위주의 수련이라는데.... 저녁때마다 찾아와 힘들다고 투덜거리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더라.

그런데 이렇게 수련을 거르고 올 정도라. 중요한 이야기가 분명하다.

휘두르던 수련용 검을 집어넣고 당소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내게 맞춰 일어난 그녀가 엉덩이에 붙은 흙을 팡팡 털며 웃어 보였다.

"아버님께서 부르셔요. 같이 점심이나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시네요."

"아."

드디어 때가 됐다.

[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0] 10화. 사천당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