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40화. 복귀 (2)
"색공의 재능이다."
"...."
"...."
마차에 흐르는 싸늘한 정적.
베개 대신 자신의 허벅지를 내어준 자세 때문일까. 자연스레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던 당소월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내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색공의 수련 도구로 전락할 뻔한 이에게 색공을 익히지 않아 아쉽다고 한 것 아닌가. 그것도 정혼자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말이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오해다."
"오해... 말이지요."
"나, 난 그냥 무공 안 배워도 될 것 같아...."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당소월과 그런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스윽 거리를 벌리는 설리향.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마저 해명하려 했으나.
꾸욱.
당소월이 내 이마를 부드럽게 짚으며 누른 탓에 결국 포기하고 누운 채로 말을 이었다.
"꼭 색공을 익히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그쪽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지."
"그러니까 소협은 설 소저가 그런 쪽의 재능이 있다는 말씀이 하고 싶으셨던 거지요?"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어?"
이제는 아예 내 볼을 콕콕 찌르기 시작한 당소월. 아픈 건 아니지만, 묘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반면 설리향은 표정은 찡그리고 있었으나,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목소리였고.
한숨을 푸욱 내쉬며 쉴 새 없이 내 볼을 괴롭혀 대는 당소월의 손을 붙잡았다.
"순음지체를 말하는 거다."
"...앗!"
"맞아. 그런 것도 있었지."
헛다리를 짚은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 당소월. 설리향은 자기 일에도 남 일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뭐, 무공은 물론이요 자기 체질에 관해 아는 게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지만.
"순음지체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부끄럽게도 저는 제 독령지체 이외의 다른 체질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답니다. 음기와 관련된 것 같긴 한데... 구음절맥 비슷한 것인지요?"
"나도 내가 그런 체질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 좋은 거야?"
아는 게 없어 보이는 둘. 하기야. 나도 회귀 전의 설리향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음기가 쌓이는 체질은 구음절맥이 너무 유명한 탓에 다른 체질은 잘 알려지지 않으니까.
착각한 게 부끄러운지, 자꾸만 손을 빼려고 하는 당소월.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의미심장하게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를 느릿하게 간질일 때마다 흠칫하는 당소월이었으나, 조금 전에 내 볼을 찔러댄 기억이 있어서인지 차마 피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구음절맥과는 다르다. 구음절맥은 말 그대로 절맥. 주요 기혈이 막혀 음기가 제대로 비정상적으로 쌓이는 체질이다. 그 양과 질이 어마어마한 탓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길어봐야 약관쯤에 절명하는 체질이지."
"나 죽는 거야?! 지금이 열다섯이니까... 앞으로 오 년밖에 안 남았다고...?"
기겁한 설리향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자신의 수명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당소월이 비어 있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후후. 혈맥이 막혀 죽음에 이르는 체질에 붙는 것이 절맥이라는 이름이랍니다. 순음절맥이 아닌 순음지체이니 부작용이 있을지언정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당소월의 말이 맞다. 순음지체 또한 범인에 비해 막대한 음기를 타고나는 것은 사실이나, 단명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순음지체의 특징은 음기의 양이 아닌 그 정순함에 있다."
"정순함?"
"그래. 본래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탁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게 나쁜 일은 아니지.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가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탁기가 무공 수련에는 방해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많은 문파와 세가가 아직 탁기가 많이 쌓이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가르친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는 쌓인 탁기 때문에 혈도가 좁아지고, 내공의 수발 또한 원활하지 않기 때문.
열다섯에 무공을 익힌 나도 마찬가지다. 아주 늦지는 않았으나, 어려서부터 영약과 벌모세수 등을 받은 명문 출신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하지.
최근에 먹은 백독청혈단 덕에 꽤 개선되긴 했지만 말이다.
"허나, 순음지체는 그러한 탁기가 잘 쌓이지 않는 몸이다. 누구보다도 정순한 음기를 타고난 덕에 어지간한 탁기는 그대로 쓸려 나가기 때문이지."
홍화루주는 그러한 설리향의 음기를 흡수해 자신의 내공에 섞인 탁기를 몰아내려 했으리라.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설리향이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음. 탁기가 없으면 뭐가 좋은 거야?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며."
"있는 게 자연스럽지만, 없으면 특별한 것이지. 심법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지고, 효율도 좋아진다. 늦게 무공을 배워도 대성할 수 있다는 소리다."
"즉, 무공에 재능 있다는 거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히히. 그냥 한 번 더 듣고 싶었어. 뭐 잘한다는 소리는 살면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실없이 웃는 설리향. 회귀 전의 그녀는 태생부터가 잘못된 무공을 익혔음에도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지금은 그때처럼 귀기 어린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겠지만... 만약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다면 더 높은 곳을 노릴 수 있으리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야기를 듣던 당소월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협. 이러한 체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주는지가 아니라 어떠한 부작용이 따라오는지라고 생각합니다. 순음지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아시는지요?"
"물론 알고 있다. 단명할 정도는 아니나 음기의 양이 많은 건 사실이고, 굉장히 정순하기까지 하니 가만 놔두면 음기가 쌓여 생기는 자잘한 문제에 시달리겠지."
"어, 어떤 문제인데...?"
기뻐하다 말고 침을 꼴깍 삼키는 설리향.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회귀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잠시 곱씹었다.
"어디 보자... 우선 추위를 심하게 타겠군. 그 외에는 혈색이 좋지 않아 피부가 창백해 보인다거나, 팔다리의 힘이 약해지고, 헛것이나 헛소리에 시달리기도 한다."
"...엄청 심각한 거 아냐?!"
"맞다. 죽지만 않을 뿐, 사람 하나 미치게 만들기엔 충분하니까. 다만 이는 해결책이 명확하다."
"휴우. 방법이 있긴 한 거네."
"없었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알려 줘 봐. 나 급해."
마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설리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간단하다. 음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히면 된다."
"그런 것도 있어?"
"물론이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색공 계열이지만...."
"...."
"표정 풀어라. 익히라는 말 안 할 테니."
"영 의심스러워. 어떻게든 나한테 이상한 거 배우게 하려는 거 같은데...."
말하다 말고 흠칫한 설리향이 조심스레 당소월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말해 놓고 보니 정혼자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모양.
다행히 당소월은 그 시선의 뜻을 눈치채지 못한 듯 장난스레 키득일 뿐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니 걱정 마렴. 그렇지요, 소협?"
"맞다. 음한계열 무공도 있고, 사파 무림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지만 귀기를 다루는 무공 또한 음기와 깊은 연관이 있지."
이전 생의 설리향은 그중 후자를 익혔었다.
귀령음곡성(鬼靈陰哭聲). 처음에는 단순히 목소리에 음기를 담아 내뱉을 뿐이었던 것을 사흑련에서 공을 세워 받아낸 음공과 철혈당주의 도움을 받아 개량한 무공.
익히지는 않았으나, 옆에서 지켜본 것이 있으니 구결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알려 줄 수는 없다. 그래봐야 별 의미도 없고.
설리향의 귀령음곡성은 본인의 암울한 과거가 있었기에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설리향에겐 그만한 분노와 한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담을 것이 사라졌으니, 무공의 위력이 반토막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무엇보다 이젠 다리를 절지 않으니, 굳이 음공에 집착할 필요는 없잖나.
...무공을 펼칠 때마다 과거의 상처를 헤집고 괴로워하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조금 있고.
"어느 쪽이건 희귀한 무공이지만, 그중에서는 음한공이 그나마 구하기 쉽겠지. 당소월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수준이 썩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당가의 비고에도 음한공이 있지요. 아마 발품을 팔면 좀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을 거랍니다."
"그럼 고마운 일이다만... 그렇게까지 해 줄 생각인가?"
"에이. 저한테 결정권은 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그냥 할 수 있다 뿐, 결국은 아버님께서 결정할 일이지요."
"하긴. 맞는 말이군. 지금 우리끼리 호들갑 떨어 봐야 별 의미는 없지. 당가의 주인은 장인어른이시니."
이야기가 당진천으로 귀결되자, 설리향이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으. 가주님이 허락해 주시긴 할까...?"
"설리향 네가 성도에서 평범히 살아가는 대신 무인이 되어 당가에 몸을 의탁하고 싶다 하면 도와주시긴 할 거다.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예에. 천 소협은 이미 당가의 일원이고, 설 소저는 그런 소협의 은인분의 여식이시니까요. 그리고 당가 입장에서 고수가 될 자질을 품은 이를 놓치는 건 아쉬운 일이기도 하지요."
"내가 고수...."
잠시 고민하던 설리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번 해볼게. 천휘 너는 받은 것을 돌려줬을 뿐이라 했지만, 내게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야."
"허어?"
"이번에 내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다음에는 도와주는 쪽이 되고 싶어. 무림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은혜를 갚고 싶은 거야."
"...."
설리향에게... 아니,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준 적은 있으나, 먼저 베푼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손을 빼낸 당소월이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천 소협. 그거 아시는지요? 당가가 원한뿐만 아니라 은혜도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는 이유가 바로 이래서랍니다."
"...그런가."
"예에. 적을 단호하게 처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늘리는 것 또한 더없이 중요한 일이지요."
언제나 나는 은원 중 원(怨)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는 내 삶에서 무언가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비중이 너무나 컸던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리라.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미소에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돌아가면 바빠지겠군."
이번 전투에서 느낀 것이 있다. 지금의 내 몸은 깨달음을 온전히 펼치기엔 너무 연약하더라.
지금까지는 아직 어리니 천천히 육신을 단련하고 내공을 쌓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다.
본래 몇 년 뒤에 가져갈 생각이었던 그걸 미리 챙겨 둬야....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잠시. 이어진 당소월의 목소리에 상념이 끊어지고 말았다.
"역시 그렇겠지요? 조금 부끄럽지만 그만큼 기쁘기도 하네요. 소협이 그렇게나 저희 약혼식을 기대하고 계실 줄이야."
"...."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아무래도 계획은 좀 더 미뤄둬야 할 것 같다.
[4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1] 41화. 약혼식
마차에 난 작은 창문. 그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 저 멀리에는 제법 익숙해진 성도의 모습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군."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는데 기분 탓인지요?"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무슨 일이든 아무 문제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면 괜히 불안해지지 않나."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만."
내 옆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하여 말없이 맞은 편의 설리향을 바라보자,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응응. 무슨 말인지 알지 그거. 내 인생이 이렇게 순탄할 리가 없는데, 삶이란 건 원래 좀 더 더럽고 치사한 엿같은 무언가였을 텐데... 하는 느낌 말이지?"
"정확하다. 역시 나만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었군."
"너나 당 언니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나도 지금 딱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리 말하는 설리향은 얇은 서책 하나를 무릎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벌써부터 무공서를 읽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밑 준비... 즉, 글을 배우기 위한 책이니까.
누군가 스승이 되어 일대일로 설리향을 가르쳐 주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당가에는 음한계열 무공을 익힌 사람이 없다.
어찌 됐건 심법인 만큼 기본적인 것은 얼마든 가르쳐 줄 사람이 있겠으나, 깊게 파고들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 구결을 곱씹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법.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구결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참오(參悟)가 됐건 실전이 됐건 이 모든 건 결국 그다음의 일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로 설리향이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회귀 전의 내가 철혈당주의 도움을 받아 그러했듯이.
"헌데 장인어른께서 이리도 흔쾌히 허락하실 줄은 몰랐다. 가전무공은 아니라고 하나, 어찌 됐건 당가의 무고에서 꺼낸 무공을 내어주는 것이잖나."
"아무래도 천 소협의 영향이 컸겠지요. 아직 저와 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나, 이미 당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소협이 다른 일도 아니고 과거의 은혜를 갚는다는데, 어찌 한 손 거들지 않을 수 있겠나요."
"몇 가지 조건을 붙인다거나, 조금은 난색을 표할 줄 알았지."
"그래서야 은혜를 두 배로 갚는 게 아니게 되잖습니까. ...무엇보다 설 소저의 사정을 듣고 아버님께서 저를 조금 겹쳐 보신 것 같기도 하고요."
중원이 넓다고는 하나 이름이 붙을 정도로 특수한 체질을 타고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재능과, 그에 수반하는 부작용을 공유할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소월과 설리향은 서로 다른 체질을 타고났으나, 체질로 인해 크고 작은 고충을 겪는다는 점은 동일할 터.
어쩌면 당진천은 당소월에게 사정이 비슷한 말동무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정작 설리향과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당소월이 아닌 나였지만.
"어떤 사정이 있었든 나한테는 감사한 일이지. 평생 배울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글공부를 하게 된 것도 신기한데, 명가의 식객이 된다니."
"식객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나?"
"아니.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당 언니에게 들어서 알지. 좋은 집에서 맛난 거 먹고, 따뜻한 옷 입으면서 무공만 익히다가 여차할 때 당가를 위해 일하면 되는 거잖아? ...아, 천휘. 이건 뭐라고 읽어? 저번에 배웠는데 생각이 안 나네."
"누에 잠이다. 너무 간단히 표현하긴 했지만, 얼추 맞는 말이군. 이해한다. 차라리 뭔가 문제가 생기는 편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질 것 같단 말이지."
"응응! 다만 너무 안 좋은 일은 안 되지만."
"마차의 바퀴가 부러진다거나 수렁에 빠져 잠시 멈춰서야 하는 정도가 딱 좋겠군."
일이 잘 풀렸다 느끼는 건 설리향뿐만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지.
이전 생에는 알지 못했던 당소월 습격의 배후를 찾았다. 덕분에 지금 시간대의 마교의 동향 또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전혀 모르고 있던 회귀의 금제에 관해 눈치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설리향을 만나 구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고생은 했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 있었던 셈.
특히 내 삶의 가장 큰 미련 중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게 가장 크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설리향의 모습에 당소월이 살짝 토라진 듯,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었다.
"일이 문제 없이 잘 풀리고 있다면, 기뻐할 일이지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을 걱정하며 두려워할 어디 있는 겁니까. 됐으니까 소협은 이리 오시지요.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답니다."
"뭔데 그러나."
"당가로 돌아오면 바로 약혼식부터 올리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혼례가 아닌 약혼식인 만큼 그리 화려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많은 사람을 부를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 하여 대충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건 그렇지. 당가쯤 되면 내부 행사라도 체면을 차려야 하니까."
"예에. 그러니 이리 오셔서 미리 이야기하자는 거랍니다. 저희가 직접 해야 할 일은 얼마 없겠지만, 그렇기에 희망 사항이 있다면 미리 정리해서 전해야 하는 거랍니다."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당소월. 조금 억지스레 주제를 돌린 것 같지만... 이건 이것대로 괜찮으니 어울려 주기로 했다.
당소월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바짝 붙이며 물었다.
"그래서? 무얼 미리 정하자는 건가?"
"식의 순서나 내용은 당가의 전통대로 하겠지만, 어디서 올릴지라던가 누구를 부를지 정도는 미리 정해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다만, 가능하면 실내보다 바깥이 좋겠군. 답답한 건 영 질색이니. 그리고 따로 부를 사람은...."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철혈당주의 얼굴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였던 내가 다 커서 만난 스승이자 부모 비슷한 존재.
시야가 짧던 내게 검이 아닌 세상을 보라 이르고, 가르쳐 줄 수 있는 무공은 아낌없이 베풀었으며, 언젠가 살기 위한 삶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라며 당부했던 이가 아니면 누구를 부르겠는가.
다만, 내가 아는 그 철혈당주는 이젠 없다.
회귀 전의 당소월과 설리향이 지금과 다른 사람이듯, 이 시간대의 철혈당주 또한 같은 사람인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
절로 지어지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따로 없군. 난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
"...."
"...."
그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기 시작한 당소월이 어색한 미소로 내 어깨를 토닥인다.
"괘, 괜찮답니다. 이젠 저희 당가가 소협의 가족 아니겠습니까."
"으응! 친구는 내가 해 줄게. 그럼 되는 거 아닐까? 그렇죠, 당 언니?"
"...둘 다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난 괜찮다. 그리고 당소월. 그쪽 어깨는 두드리지 마라. 아직 아프니까."
"예? 아, 죄송합니다. 저번에 입은 상처가 아직 안 나으신 건가요?"
"거의 나았다.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피멍이 들었을 뿐이니 성도에 도착하기 전에 나을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빨리 출발하더군."
"저도 아버님이 바로 다음 날 연주를 뜨자고 하실 줄은 몰랐답니다. 그래도 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해야지요. 어깨를 보여 주시겠나요?"
"어차피 옷 입으면 가려질 곳인데 뭐가 그리 중요하나."
"됐으니까 상의를 좀 내려보시지요. 피부가 푸르딩딩해지는 것이야 소협 말대로 옷 위로 가릴 테니 상관없지만, 어깨가 아프면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며 자세가 이상해지지 않습니까. 이건 안 될 일이지요."
"그냥 참으면 된다. 그럴 수 있는 수준이니."
"뭘, 미련하게 참으려 그러십니까. 지금부터 조치하면 될 일인 것을."
"멍에도 약이 있나? 근육통처럼 꾸준히 내공을 돌려 회복력을 높이는 게 전부로 알고 있다만."
"약은 없지요. 하지만 아프지 않도록 진통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당소월이 내 어깨 쪽 옷을 붙잡고 내렸다.
스륵.
순식간에 옷이 흐트러지면 어깨가 드러난다. 순간 이게 뭔가 싶어 멈칫한 사이.
당소월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슬쩍 튀어나오는 선홍색 혓바닥.
"베에...."
일전에 그러했듯, 내 상처 부위를 할짝거리기 시작한 당소월. 간지러우면서도 축축한 이 감각에는 영 익숙해질 수가 없단 말이지.
벌써 세 번째건만 변함없이 쑥스러운 기분에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읽던 책으로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반쯤 가린 설리향이 있었다.
"히잇!"
화들짝 놀라 굳은 모양새. 그런 와중에 눈동자만큼은 흥미진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말릴 생각은 없는 모양.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빳빳하게 굳어 있자니, 기어이 어깨를 침 범벅으로 만든 당소월이 천천히 머리를 떨어뜨렸다.
빠르게 옷을 가다듬고는 어깨를 살짝 움직여 보았다. 약간 감각이 둔해지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는 데다가 고통 또한 확연히 줄어든 상태.
일전에 보여 준 적 있는 마비 독의 응용이리라. ...굳이 이런 방식이어야 하느냐는 의문은 남아 있지만.
빤히 당소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되물어 온다.
"왜 그러시는지요?"
"몰라서 묻나?"
"감사 인사라면 됐답니다. 정혼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걸 왜 굳이 여기서 하냐는 뜻이었다. 여긴 다른 사람도 있잖나."
"이미 암혼대가 보는 앞에서도 한 적 있는 일인데, 이제 와서 부끄러우신 건지요?"
"...솔직히 말해 봐라. 그냥 내 몸을 핥는 데 맛 들린 거 아닌가?"
"조금은요? 소협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 하게 되지 뭔가요."
혀를 빼꼼 내밀며 배시시 미소 짓는 당소월.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째 이상한 취향이 생겼군."
"그래서? 싫으셨나요?"
"...."
"대답해 주시지요."
"싫다고는 안 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좋긴 한데 장소를 좀 가려 줬으면 한다."
"예에. 앞으로는 그리하지요."
당소월이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덜컥! 쿵!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돌연 주저앉는 마차.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당소월을 붙잡고 버텼다. 하지만.
"으햑!"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던 설리향은 그대로 천장에 머리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으으... 대체 뭐야 갑자기."
꽤 강하게 부딪혔는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떨어뜨린 책을 더듬거리며 주워 드는 설리향.
그녀의 질문에 답하듯, 마차의 창문 쪽에서 암혼대원 하나가 벽을 두드렸다.
"세분 모두 괜찮으십니까? 바퀴가 부서졌으니 일단 나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하지요."
짧게 대답한 당소월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진짜 마차 바퀴가 부러질 줄은 몰랐네요, 천 소협."
"나도 좀 놀랐다. 그래도 덕분에 괜한 찝찝함이 사라지긴 했군."
"예에. 성도에 거의 도착해서 부서진 것이라 다행이기도 하고요."
서로 피식 웃어 주고는 설리향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어디 부딪힌 건 그녀뿐이니까.
"너도 괜찮나?"
"...괜찮아. 좀 아프긴 한데 혀를 깨문 것도 아니니까 금방 낫겠지."
그리고는 딱 달라붙어 있는 나와 당소월을 번갈아 바라보는 설리향.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응. 그렇지. 이게 맞아. 내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 거였는데."
어쩐지 허탈해 보이는 미소였다.
[4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2] 42화. 약혼식 (2)
"광동성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하여 일이 끝나자마자 상태를 보러 왔더니... 멀쩡하다 못해 아주 힘이 넘치는 모양이네, 소형제."
당가로 돌아오고 며칠 뒤. 수련이라는 핑계로 도망친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자니, 어느새 방문한 당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광동성에서 하오문과의 일이 꼬여 기진할 정도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 일로 부족함을 느끼는 거라면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네. 소형제는 이미 그 나이대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니까."
"염려의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제 부족함을 느끼긴 했으나, 조급함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죠."
"이런 재수 없는 녀석.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무장에서 이리도 살벌하게 검을 휘두른단 말이야."
"그것이 실은...."
검을 집어넣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
"천 소협! 이 옷 어떤가요? 저와 어울리는지요?"
아침 수련을 마친 뒤. 몸을 씻고 나오자, 내방을 자기 방인 양 차지한 당소월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당가의 옷이 늘상 그러하듯 전체적인 기조는 녹색. 하지만 그 위에 금실로 수놓은 자수라던가, 하늘하늘한 장식이 많이 달려 있어 상당히 화려해 보인다.
무복이라기보다는 궁장. 그중에서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녀석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소월이 좋은 옷을 입었는데 아름답지 않을 리가.
갑자기 등장한 당소월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울린다. 평소와 달리 헐렁한 옷이 아니라 딱 맞는 옷을 입은 게 신선해서 좋군."
"세상에. 그럼 평소에는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나."
"빨리 대답해 주시지요. 품이 넉넉한 옷과 딱 맞는 지금 같은 옷 중 어느 쪽이 더 좋은가요?"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만."
"...."
불만스럽게 찡그려진 당소월의 눈썹.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말은 제가 무슨 옷을 입건, 얼마나 꾸미고 오건 소협께서는 관심 없다는 건가요."
"아니다."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경종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당소월 네가 거적때기를 입고, 며칠은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모습으로 있어도 여전히 내 눈에는 예뻐 보일 거라는 소리였다."
"흐응.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협의 취향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그렇지."
"허면 소협의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이 옷은 어떠신지요?"
이상할 정도로 집요한 당소월의 추궁에 잠시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더 좋은 것 같군. 평소와 다른 것이 신선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묻는 거냐."
"약혼식 때 무슨 옷을 입을까 해서 말이지요. 일단 자주 보던 무복과 다른 느낌이 좋다는 소리지요? 하기야, 특별한 자리니 평소랑 다른 옷을 입어 보는 게 낫겠지요. 그럼 이런 느낌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잠깐. 여기서 더 갈아입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지요. 정식으로 혼례를 치를 때라면 정해진 옷을 입어야겠지만, 어디까지니 약혼식 아닙니까. 격식만 갖추면 복장 자체는 비교적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답니다."
"그냥 지금 걸로 정하는 게 어떤가."
"에이. 그래도 준비한 게 몇 가지 더 있으니 비교해 보긴 해야지요. ...앗, 혹시 귀찮으셨나요?"
"...괜찮다. 아직 식사 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말이다."
"다행이네요! 그럼 제 옷을 정한 뒤에는 우선 식사부터 하고 천 소협의 옷을 같이 정하도록 하지요."
"...."
"역시 귀찮으신 게...."
"아, 아니다. 정말 기대되어 말문이 막혔을 뿐이다."
***
"대충 그런 느낌으로 하루 종일 옷을 보고 감상을 쥐어짜거나, 반대로 이것저것 갈아입으며 감상을 들어야 했습니다."
"...소형제. 혹시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건가?"
"예?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들으신 게 맞습니까, 형님?"
"그럼 아니었나? 소월이가 소형제에게 가장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소리 아닌가. 거기에 직접 입을 옷을 골라 주기까지 했고."
"그보다는 하루 종일 시달린 부분에 집중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설마 지금 우리 소월이가 귀찮다는 뜻인가?"
이쪽을 노려보는 당청의 기세가 살짝 날카로워진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싫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들어 보시겠습니까?"
"흥.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묘하게 가시 돋친 반응. 이번에는 막내 동생을 이렇게나 아끼는 당청조차 질릴 만한 내용이리라.
"이건 그다음 날의 일입니다만...."
***
"천 소협. 이것 좀 마셔 보시겠습니까?"
"이게 뭐지."
"학령초(鶴靈草)를 달여 만든 차랍니다."
"...날 독살할 셈인가?"
학령초는 독초로 유명한 풀이다. 그냥 먹어도 어지간한 무림인은 버티지 못하고 내장이 녹아내리지만, 이를 가공하여 다른 독과 섞으면 그 유명한 칠보추혼독이 된다.
일곱 걸음 걸을 정도로 짧은 시간 만에 독이 전신에 퍼져 죽음에 이른다는 그 지독한 극독 말이다.
그리고 지금 당소월은 내게 학령초를 달여 만든 독 차를 내놓은 것이다.
"...."
무언가 서운하게 한 점이 있었나 싶어 당소월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뭘 잘못한 적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어제도 결국 해 질 때까지 옷 고르는 일에 어울려 주었고.
내 시선을 받은 당소월이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키득이기 시작했다.
"아하하. 설마 제가 소협에게 해가 되는 것을 드리겠습니까. 몸에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희석했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애초에 독 차를 왜 마시게 하려는 건가."
"그야 필요한 일이니 그렇지요?"
"설마 날 중독시킨 뒤, 해독제를 빌미 삼아 이런저런 일을 시키려고...!"
"여기가 무슨 살곡인 줄 아시나요?! 그런 거 저얼대 아니랍니다! 무, 물론 소협에게 이것저것 시켜 보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있기는 있는 건가.
"아무튼 정말 아닙니다! 오히려 소협의 몸에 좋은 일이지요!"
"독이 어떻게 몸에 좋단 말이냐. 쓰기에 따라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학령초는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없어 악명 높은 독초인 것 아닌가."
"잘 알고 계시네요, 소협. 독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일 텐데."
"약혼 상대가 약혼 상대니 어느 정도는 배워 둬야겠다 싶었을 뿐이다."
회귀 전의 당소월에게 이것저것 들은 것도 있고,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 담긴 서책은 나도 열람할 수 있어 종종 만독당이나 의약당의 서고에 방문하곤 했다.
무공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독과 의술에 관한 지식은 살다 보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방금 말한 것처럼 당가의 일원으로서 체면치레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내 말을 들은 당소월이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잘하셨어요. 아주 바람직한 태도랍니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드릴까요?"
"...됐다. 그리고 어린애 취급하지 말도록."
살짝 노려보자, 장난이었는지 항복하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는 당소월.
입가에 걸려 있는 저 생글거리는 미소가 오늘따라 참 얄미웠다.
하여 괜스레 툴툴거리며 재차 물었다.
"그래서? 대체 희석시킨 독이 어떻게 몸에 좋을 수 있다는 소리지?"
"학령초는 독성이 강하지만, 그만큼 내성이 잘 생기는 독이랍니다."
그러니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희석시킨 학령초 차를 먹이고, 내성이 붙으면 좀 더 진한 차를 먹여 더 강한 내성을 붙이기를 반복한다.
"최종적으로는 천 소협이 학령초의 독에 완전한 내성을 가지게 되겠지요."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감이 오지 않는군."
"극독이라 불리는 독은 보통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독을 정교하게 섞어 만드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학령초는 그러한 조합 독을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즉, 극독을 접했을 때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다는 건가."
"그 이상이지요. 서로 맞물리며 몸을 잠식시켜 나가야 할 독 중 핵심적인 부분이 갑자기 무력화된 것입니다. 다른 독이 의도대로 기능할 리 없고, 결과적으로는 독성을 절반 이상 떨어뜨리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답니다. 덤으로 학령초의 내성은 식물 독 전반에 관한 내성처럼 작동하니 범용성도 좋고요."
"허어...."
그건 확실히 엄청나네.
학령초의 독에 완전한 내성을 갖는 것만으로도 식물독 전반과 조합된 극독의 위력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다니.
하지만 그렇기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좋다면 왜 아무도 학령초의 독으로 내성을 만들 생각을 안 하는 거지?"
"그거야 간단하지요. 우선 어떻게 독을 뽑아내고, 얼마나 희석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잖습니까. 무턱대고 시도했다가는 한방에 이승을 떠야 하는데, 그런 도박에 목숨 거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냥 우린 게 아니었나?"
"쉬이 독을 추출할 수 있었다면 독공을 다루는 무림방파가 몇 배는 더 있었겠지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게 아니랍니다."
당소월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돈이지요."
"돈?"
"예에. 학령초가 흔한 독초는 아니고, 인위적으로 기르는 것도 불가능해서 말입니다. 한 뿌리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간답니다. 헌데, 그걸 내성이 갖춰질 때까지 꾸준히 사들여야 한다면 부담이 엄청나겠지요."
"...그런 걸 내게 먹인 건가?"
"후후. 감동받으셨나요?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당소월이 보란 듯이 검지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지 끝에서 흘러나오는 걸쭉한 검은 방울.
"내공 소모가 상당하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뽑아 쓸 수 있답니다."
"아."
독령지체는 한번 흡수한 독을 내공만 있다면 다시 재현할 수 있는 체질이다.
한번 학령초를 먹어 두었다면, 추가적인 금전 소모 없이 학령초 독을 생성할 수 있다는 뜻.
그제야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독 차를 내려다보았다.
"알겠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번 마셔 보지."
"쭉 들이키시지요. 쭈욱."
당소월의 흐뭇해하는 시선을 받으며 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커헉!"
"천 소협?!"
돌연 달아오르는 체온과 장이 꼬인 것 같은 복통.
전형적인 중독 증상.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때려 박아 방금 들어온 독기를 억누르고 있자니, 자신이 더 당황한 듯 허둥대는 당소월.
"어, 어째서죠? 분명 희석은 완벽했는데...."
횡설수설하면서도 일단 비틀거리는 나를 옆에서 부축한다. 그 동그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헐떡이며 물었다.
"혹시 자화배독초로 강해진 독성도 계산했나...?"
"아."
멍하니 입을 벌리는 당소월의 모습에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다행히 열 좀 나고 배 아픈 걸로 끝났지만, 결국 그날은 하루의 절반을 측간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음음. 그러니까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소월이가 자네를 위해 몸에 좋은 걸 구해 왔다는 소리 아닌가."
"무슨 보약이라도 지어온 것처럼 말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형님...."
"보약 맞는 것 같다만."
"...."
그거야 당청 같은 당가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 아닐까.
할 말은 많지만, 애써 눌러 참고 있자니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당청.
"하아. 이번에 하오문 측에서 사죄하는 의미로 소형제에게 공진환을 한 알 내어주겠다 하여 알려 주러 왔건만... 괜히 자랑만 듣다 가는군."
"그걸 먼저 말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턱걸이긴 하지만 공진환은 상급에 해당하는 영약이다.
[4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3] 43화. 약혼식 (3)
식객들이 주로 머무르는 외원당.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 하고 있나?"
"보면 몰라? 무공 수련 중이잖아."
마보 자세로 바들거리는 설리향. 그런 그녀를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특수한 몇몇 예외가 아닌 이상 모든 무공은 하체로부터 시작한다. 하체를 단련하면 그만큼 무공의 기본기가 깊어지고 체력도 늘어나니 고되긴 하나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겠지."
"잘 알았으면 이제 좀 가. 힘들어 죽겠는데 말 시키지 말고."
"하지만 이런 자세로는 힘들기만 하고 제대로 단련이 되지 않을 거다."
"뭐어?"
눈을 크게 치켜뜬 설리향. 하지만 여전히 팔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어 그닥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자세가 놀라울 정도로 엉망이군."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설리향의 어깨와 팔꿈치에 손을 얹었다.
"봐라. 팔은 쭉 뻗고, 어깨에는 힘을 풀어라. 어깨로 팔을 들어 올리려 하지 마라. 아, 팔과 지면이 평행하는 것도 잊지 말고."
"어? 으어에?"
이상한 소리를 내는 설리향. 그 어벙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리 쪽을 가볍게 눌렀다.
"허벅지도 팔과 마찬가지로 지면과 평행선을 그리도록 해라. 힘들면 어정쩡하게 들어 올리지 말고 차라리 다리를 더 넓게 벌리도록."
"지금 어딜 만지는 거야?!"
"어디긴. 쓸데없이 무릎에 부담을 주는 각도로 꺾인 허벅지다. 더 내려라. 보이지 의자가 있다는 느낌으로 엉덩이를 쭉 내려."
"어, 엉덩이...."
순간 얼굴을 붉힌 설리향이었으나,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시키는 대로 자세를 고친다.
"옳지. 이대로 딱 백을 셀 동안만 버텨 봐라."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이게 무슨...."
"...."
"아잇!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그러니까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는듯한 눈빛은 저리 치워!"
소리를 빼액 지르며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설리향. 열심인 것 같아 보기 좋네.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자니 어찌어찌 숫자를 전부 세고서야 쓰러지듯 공터 바닥에 널브러지는 설리향.
이젠 소리 지를 힘도 없는지 조용히 헥헥거리는 그녀를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려 공터 옆에 자란 나무 그늘로 옮겨 주었다.
"시원하네...."
"그늘이니 당연히 시원하겠지."
"그걸 누가 몰라? 옮겨 줘서 고맙다는 소리잖아."
"그냥 처음부터 고맙다고 해라."
"고 마 워! 됐지?!"
"잘했다."
한 음절마다 힘주어 말하는 설리향에게 피식 웃어 주고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가볍게 손을 비볐다.
"...뭐 하는 거야?"
"방금 미련하게 수련하던 누구를 옮기느라 묻은 땀을 닦고 있었지."
"고, 고맙다는 말 취소! 다 필요 없으니까 저리 가!"
"주변에 그늘은 여기밖에 없다만. 그리고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나."
"...."
말없이 이쪽을 노려보는 설리향. 분명 뾰족한 시선이건만 어째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전 생의 설리향에게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당시의 그녀는 마음을 허락한 몇 명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가시를 세웠으니까.
나 또한 처음 만나고 몇 달은 그 표독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괜히 철혈당으로 좌천당한 게 아니었지.
천재적인 재능과 음공이라는 희귀한 무공을 지녔으나, 그 이상으로 다른 이들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사흑련이 사파의 조직이라지만, 어찌 됐건 조직은 조직. 뛰어난 한 명도 좋지만, 내부의 규율이 그보다 더 중요하리라.
...이렇게 말하는 나도 수틀리면 검부터 뽑아대는 바람에 좌천당했었지만.
이쪽을 노려보던 설리향이 결국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길래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지금 당 언니랑 약혼 준비다 뭐다로 바쁘지 않아?"
"바쁘지. 그래서 도망... 아니, 더 바빠지기 전에 잠깐 들른 거다."
"???"
설리향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못 본 척 말을 이었다.
"아, 그 전에 잠시 궁금한 게 있다만."
"뭔데."
"분명 설리향 네가 쓸만한 무공을 구하는 사이에 당가의 무인이 무공의 기초를 봐줄 거라 들었다만... 항상 이렇게 엉망인 자세로 혼자 수련하고 있었나?"
"...그건 아냐. 무사님은 잘 가르쳐 주셔. 아까도 혼자 하다 보니 자세가 이상해진 거지 원래는 제대로 교정해 주시고."
"그럼 방금 내가 본건 뭐냐."
"그으. 실은 오늘은 쉬라고 하셔서 아침부터 글공부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머리가 아파서 잠시 숨 돌린다는 게 그만 이렇게 됐지 뭐야."
"...."
요는 공부하기 싫어서 수련이라는 핑계로 딴짓하고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설리향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외쳤다.
"나,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앗!"
"...뭐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 글 배울 때 비슷한 소리를 하며 연무장으로 뛰쳐나갔다가 철혈당주에게 다시 끌려왔던 적이 몇 번 있으니까.
"그래도 쉬라고 할 때는 쉬어라. 이거 하나만은 지키도록."
"알았어 알았어. 이제 남은 시간은 얌전히 쉬면서 글이나 공부하면 되잖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네 수련을 봐주는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당가에서 아무나 붙여 줬을 리는 없다. 아마 스승...까지는 아니어도 교두 역할깨나 해 본 이겠지. 다 계획이 있어서 오늘은 쉬라고 했을 것이다."
"앗! 맞아. 분명 암혼대의 부대주라고 하셨어.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 뵀던 분인데...."
"...부대주를 붙여 줬단 말이냐?"
다른 곳도 아니고 당가의 양대 무력대중 하나인 암혼대의 부대주라니.
암혼부대주는 광동성에 다녀오는 길에 몇 번 봤다. 완숙한 절정급에 다다른 여류 무인이었지.
암기를 주로 쓰는 암혼대지만, 허리춤에 채찍을 달고 있던 것을 보아 편법에도 꽤 조예가 있으리라.
"당가에서 네게 거는 기대가 큰 모양이군. 좋은 기회니 헛되이 쓰지 마라."
"나도 알아. 애초에 나를 가르쳐 보고 싶으시다며 직접 자원하신 분이야. 가볍게 볼 리가 없잖아?"
"먼저 나섰단 말이냐?"
"응. 나랑 처지가 비슷하셨다고 하시더라. 당가의 은혜로 새로운 기회를 얻었으니,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다고 하셨어."
"허어."
하기야. 일전에 당소월에게 듣기로 암혼대에 들어오는 조건은 암기 실력과 당가를 향한 충성심뿐이라고 했지.
미혼인 경우에는 당가의 가까운 방계와 혼인을 주선해 주기도 한다나.
그만큼 검증된 인재만 뽑는다는 소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당가에 충성할 수밖에 없는 우여곡절을 지닌 이들만이 들어온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운이 좋았군.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쉬어야 할 때 무리해서 수련했단 말이냐?"
"으읏! 이, 이젠 안 그럴 테니까 더는 말하지 마!"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다."
"걱정?"
"그래. 보통 기초 수련을 하며 푹 쉬라는 말이 나오는 건, 곧 죽기 직전까지 굴릴 터이니 몸 상태를 회복해 두라는 뜻이니 말이다."
"...."
그제야 자신이 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은 설리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창백해진 그녀의 안색에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본론이 아직이었군. 이번에 약혼식이 끝나면 당소월과 잠시 섬서성으로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다.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 같으니 미리 말해 두러 온 거다."
"뭐?! 둘이서?! 아, 아무리 정혼자라지만...."
"설마. 이번에 배후를 잡긴 했으나, 어찌 됐든 당소월이 위험할 뻔하지 않았나. 나도 마찬가지였고. 호위를 몇 명 대동하긴 할 예정이다."
"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설리향. 이번에 섬서성에 가는 표면적인 이유는 방금 말한 대로 여행이다.
당소월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첫 무림행에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야 했다는 것.
그리고 나와 당소월이 좀 더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여서 마침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섬서성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으나... 사실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섬서쌍귀.
어느 날 불현듯 등장해 온갖 패악질을 부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벌당한 쌍둥이 형제의 별호다.
정파의 영역이라 하여 사파 무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섬서쌍귀처럼 두려움을 모르고 설치는 이는 없었다. 정확히는 생기더라도 금방 없어졌다고 해야겠지.
실제로 섬서쌍귀의 동생 쪽은 종남파의 제자에게, 어찌어찌 도망친 형 쪽은 화산파의 제자에게 베이는 것으로 악명의 끝을 장식했으니까.
다만, 내가 섬서쌍귀의 소문을 들은 것은 그들의 악명과 두 명문 정파의 활약이 절강성까지 퍼져서가 아니다.
양아치에 가까운 삼류 무인이던 둘이 어느 날 갑자기 절정의 고수가 되어 나타난 이유가 우연히 발견한 절세의 영약 때문이라는 소문이었지.
흔한 이야기다. 우연히 발견한 기연으로 갑자기 고수가 되는 것은.
어린 시절에는 나도 그런 영약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괜히 산을 넘을 때 길이 없는 방향을 찾아다녔으나....
한번 길을 잃고 개고생한 뒤로는 그만뒀다. 기연은 천운의 영역이고, 이는 내가 찾고자 하여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은 채로 말이다.
그때는 나도 참 어렸지. 내공만 있으면, 절세의 신공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당시의 교훈 덕에 그냥 흘려 들었던 소문이었으나... 천마가 침략해 오고, 정과 사가 손을 잡아 간신히 대항하던 무렵.
어쩌다 보니 함께 싸우게 된 화산파의 고수에게 당시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섬서쌍귀가 먹었다던 영약은 실존했고, 형 쪽이 죽기 전에 목숨을 부지하고자 그 위치를 털어놓았다고 했던가.
당연히 남은 영약은 없었지만, 그 자리에는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의 시체와 훼손된 비급 쪼가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번 섬서행에서 노리는 건 그 영약이다.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 고수는 화산파가 멸문한 이후, 술이 들어갈 때면 중얼중얼 과거의 영광스럽던 나날을 읊조리곤 했었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덕분에 찾아가는 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본래 기연이란 천운의 영역. 하지만 시간을 거스른다는 본의 아닌 역천을 저지른 내겐 손에 닿는 영역이기도 하다.
가만 놔두면 섬서쌍귀가 발견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를 테니, 가로채는 것에 미안한 마음도 전혀 들지 않고 말이다.
다만, 반으로 나눠 먹었는데도 삼류 무인을 절정까지 끌어올릴 정도라면 보통 영약이 아닐 터.
영약은 준비되지 않은 이가 먹으면 약효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하여, 적어도 절정에 오른 뒤에야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아직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고, 그래야 약효를 온전히 흡수할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최근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지만.
아껴 먹을 때가 아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최대한 빠르게 회귀 전의 무위를 되찾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화경의 경지에 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래야 천마 상대로 도망을 치건 한칼이라도 휘두르건 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러한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설리향에게 물었다.
"기념품으로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나?"
"...섬서성이 뭘로 유명한 동네였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리향의 모습에 낄낄 웃어 주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나와 당소월의 약혼식이 열렸다.
[4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4] 44화. 섬서행
약혼식은 검소한 건지 화려한 건지 모를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화려한 장식과 그 이상으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당소월이었으나, 정작 식의 내용이 짧아 금방 끝났고.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외부인은 때마침 공진환을 전해 주러 도착한 하오문의 사람뿐이었으며.
나름 잔치를 열고 성도 인근의 민가에 음식을 돌리기도 했지만, 정작 내 이름을 아는 이는 얼마 없었다.
뭐어, 그렇다 하여 순탄하게 끝났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자! 여기 한잔 받게!"
"...방금 받은 삼장로님께 받은 잔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만."
"그러니 후딱 비우고 본 노부의 잔을 받아야지."
"...."
두 눈을 질끈 감고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목을 화끈하게 태우는 열기. 반 박자 늦게 올라오는 주향. 순간 어지럽게 흔들리는 시야.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끔씩이나마 즐겨 마시는 편이었지.
다만, 회귀한 이후의 몸으로는 처음 마시는 것인 데다가 이렇게 미친 듯이 퍼부으며 마신 적은 없는 터라 취기를 억누르는 게 쉽지 않다.
"프하...."
"흐하하하! 잘했네! 노부가 삼장로 고놈보다 조금 더 따라 줄 터이니 기대하게나!"
참았던 숨을 내뱉자, 내 옆에 앉은 일장로가 호탕하게 웃으며 빈 잔에 술을 따른다.
쪼르르.
분명 다 비웠을 텐데, 어느새 가득 차올라 찰랑이는 술. 표면에 반사된 내 얼굴은 이미 뻘겋게 달아오른 지 오래였다.
약혼식 자체는 아무 문제 없었다. 문제는 그 뒤에 이어진 연회였지.
지금껏 볼 기회가 없던 장로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술을 권했고, 거기에 다른 당가의 요직을 꿰찬 이들도 한잔씩 따라 주더라.
내 입장에서는 벌써 수십 잔을 쉬지 않고 마셔대는 셈.
아무리 몰래몰래 내공을 운용해 주독을 날려버리고 있다 하나, 이 정도로 들이마시면 아직 덜 여문 몸으로서는 힘겨울 수밖에.
결국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안주 좀 먹고 마시겠습니다."
"음? 아, 얼마든 그러게! 하하하!"
그래도 이번에 술을 따라 준 일장로는 배려심이라는 게 남아 있었는지, 재촉하는 대신 기분 좋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기름진 돼지고기를 한입 가득 욱여넣었다. 적어도 먹는 동안에는 마시라고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천천히 우물거리고 있자니, 일장로가 끌끌 웃으며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나이 깨나 먹은 것들이 고약하게 굴었던 모양이야. 미안하네. 이쪽에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
입에 가득 찬 고기 때문에 무어라 답하지 못하고 그냥 바라만 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수염. 녹색 무복은 살짝 해졌고, 외견은 노쇠해 보이지만, 눈에서는 정광이 흐른다.
전형적인 노강호다. 흔히들 말하는 무림에서는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는 말에 나오는 그 노인 같은 모습.
실제로도 초절정에 달하는 무위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일장로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됐네. 굳이 대답하려 하지 말고 편히 듣게."
"...."
"실은 가주가 본 노부를 포함한 다른 장로들에게 단단히 이르더군. 소월이 고것이 예비 사위를 데려왔으니, 일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말이야."
"...?"
"본래 직계의 피를 이은 아이의 혼사는 가문 전체가 나서야 하는 중대사지만...소월이에게는 독령지체의 부작용이라는 문제가 있었잖나."
독령지체는 사람의 몸을 독물에 가깝게 만드는 공능이 있다.
아무런 독도 흡수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를까, 본격적으로 독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체내에 자연스레 독기가 스며들 수밖에 없는 것.
독령지체의 주인이야 그에 걸맞은 내성 또한 지니고 있기에 별문제 없지만... 문제는 그 자식이다.
연약한 태아가 독기를 버텨 낼 재간이 있겠는가. 독령지체의 소유자는 일정 이상의 성취를 이루면 아이를 갖기 힘들어진다.
"소월이는 당가의 홍복이네. 분명 대성을 이루고 당가의 무공을 한층 더 발전시키겠지.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네."
독공을 익히기만 하면 대성이 보장됐다고 할 정도의 자질. 하지만 독공을 익히면 본인의 미래를 일부 포기해야 한다.
당소월 또한 사천당가의 일원. 아무리 가문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장로 전원은 가주와 한가지 약속을 했네. 만약 소월이가 혼인을 마음먹는다면 이는 당가의 행사임과 동시에 우리의 손을 떠난 일이니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저 긍정하기로 말일세."
내가 당가에 해준 일이 많긴 하다. 당소월의 목숨을 구했으며, 자화배독초라는 독인에게 둘도 없는 영초를 먹였으며, 독령지체의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구결을 전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금처럼 빠르게 아무런 반대도 없이 약혼까지 이어진 것은 얼떨떨했는데... 그런 뒷사정이 있었다니 이제야 이해된다.
"자네가 당가에서 생활한 지 제법 됐지만, 노부를 포함한 다른 장로들과는 약혼식이 되어서야 만난 것도 그래서네. 예전에는 나는 아닐 줄 알았건만,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 꽉 막힌 늙은이가 되더군. 그래서 괜한 소리 할까 봐 일부러 마주치지 않았던 걸세."
"...."
꿀꺽.
입에서 우물거리던 음식을 삼킨 뒤에야 입을 열었다.
"허면, 이렇게 제 옆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해 주신다는 것은 괜한 소리가 나올 일은 없는 것이라 여기면 되겠습니까?"
"바로 봤네. 아마 다른 늙은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노부 또한 자네에게 고마워하고 있네. 덕분에 몇 없는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으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더구만. 그러니 이제 쭉 들이키게. 그 사이에 주독은 충분히 몰아내지 않았나."
"...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공의 수발 자체는 본 노부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은밀했지만, 냄새는 숨기지 못하잖나."
독공을 익힌 이들은 대체로 후각이 예민하다. 냄새로 독을 구분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 것인데.
지금처럼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나는 술 냄새와 주독을 배출하면 흘러나오는 부자연스러운 술 냄새를 구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무위 자체는 회귀 전의 나와 같은 초절정이지만, 오랜 시간 갈고닦은 경험은 무위와는 별개의 무기가 된다는 거겠지.
헛웃음을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한잔 감사히 받겠습니다."
***
다음 날 아침. 내 방을 찾아온 당소월의 기척에 몸을 일으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겠군."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 했잖습니까. 장로 할아버님들이 주신다고 넙죽넙죽 전부 받아먹으니 몸이 남아나질 않겠지요."
"다 사정이 있었다."
"네네. 처음 마셔 보는 거라 주량 조절이 어려웠던 거죠? 저도 그랬으니 이해한답니다. 다만, 다음에 마실 때는 꼭 저랑 같이 마셔요."
"...."
물가에 내놓은 자식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등을 두드려 주는 당소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심란하기 그지없었지만, 반쯤 기절할 때까지 마신 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바로 출발해도 정말 괜찮으신지요? 저는 하루 정도 쉬었다 가도 상관없습니다만."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잠시 보고 있어라."
우선 기지개를 켜며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뒤,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슬쩍 뚜껑을 열자 순식간에 퍼져 나오는 약재 특유의 꿉꿉한 향기.
"그건... 공진환 아닙니까."
"맞다. 이번에 하오문에서 받은 것이지."
당가와의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가능하면 작은 빚이라도 지워 두려다가 역으로 큰 사고를 일으킨 홍화루주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하오문.
놈들이 부랴부랴 사죄의 의미로 보낸 것이 바로 이 공진환이다.
대환단, 자소단, 만독단 같은 한 방파를 대표하는 영약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그래도 돈주고 구할 수 있는 영약 중에서는 가장 좋은 녀석 중 하나다.
하오문 입장에서는 최대한의 성의 표시를 한 셈.
내가 꺼낸 공진환을 본 당소월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천 소협... 설마?"
"음. 흡수하다 보면 숙취 정도는 날아가겠지."
영약은 흡수하기 쉽게 가공된 것이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약효가 내공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 손실은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호흡과 함께 흩어지거나 전신의 세맥에 녹아든다.
세맥에 기운이 녹아들면 자연스레 몸에 활력이 돌고, 숙취 같은 가벼운 이상 또한 단숨에 낫는다.
큰 내상을 입은 상태면 모를까 숙취 정도로 약효가 줄어들진 않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만, 그럼에도 많은 무림인이 최대한 멀쩡한 몸 상태일 때 영약을 섭취하는 것은 집중력 때문.
즉, 집중력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숙취해소제 대신 영약을 먹어도 아무 문제 없다는 소리다.
천고의 영약도 아니고 공진환 정도라면 지금 상태로도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터.
공진환이 상급에 속하는 영약이긴 하나, 회귀 전에 이미 몇 번 먹어 본 녀석이기도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를 모르는 당소월 입장에서는 기겁할 일인지라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자, 잠시만요 소협. 차라리 나중에 드시는 게...."
내가 공진환을 삼키는 게 그보다 좀 더 빨랐다.
혀에 닿는 순간 끈적한 꿀처럼 녹아내리는 공진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씁쓸한 약재의 향기를 풍기던 것이 순식간에 청량한 향을 자아낸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공진환의 기운을 재빨리 광랑탈명공의 구결을 따라 인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단전의 내공을 최대한 빠르게 순환시켰다. 그렇게 생성된 내공의 흐름이 덩어리진 공진환의 기운을 채찍질한다.
결국 주변으로 흩어지려던 기운은 기존 내공과 뒤섞여 혈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순환을 거듭할수록 공진환의 기운이 광랑탈명공의 내공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자 어느새 온전히 내 것이 되어 있는 공진환의 기운.
처음 내공을 순환시키던 때. 가속이 붙기 전에 놓친 일부를 제외하면 모조리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어 번 더 내공을 돌리며 급격히 불어난 내공을 천천히 단전으로 되돌렸다.
모든 내공을 단전으로 회수한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평소보다 확연히 묵직해진 것이 묘한 위화감이 드는 단전. 숙취로 비실대던 몸은 가벼워졌으며, 정신 또한 맑았다.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좋긴 뭐가 좋아요! 대체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호법을 서주던 당소월이 답답하다는 듯,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려 댄다. 몇 대 맞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으니까 일단 봐라."
"...뭐를 말인가요."
불퉁하게 대답하면서도 일단 팔을 멈추는 당소월. 그녀의 앞에서 보란 듯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방금 막 불어난 내공을 아낌없이 검에 쏟아부었다.
우웅-
옅은 공명음과 함께 검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기류. 일전에 귀목마녀를 상대했을 때처럼 무리하지 않고도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실전에서 써먹기엔 부족함이 없으리라.
딱딱하게 굳은 채, 내 검 위에 피어오른 검기를 바라보는 당소월. 그녀의 보기 드문 멍한 표정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떤가? 이 정도면 잘 흡수한 것 같다만."
"...예? 아, 흠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하지만 놀란 건 놀란 것이니, 다음부터는 언질이라도 주시지요."
"명심하지."
당소월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어색하게 주제를 전환했다.
"그, 그나저나 제대로 채비는 마치셨는지요?"
"이제부터 할 생각이다만, 어제 대강 준비해 두긴 했다."
튼튼한 무복, 잘 드는 검,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행낭.
섬서까지 가기엔 너무 단출한 차림새지만, 전낭이 묵직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소월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처음 납치했을 때가 생각나네.
내 시선을 눈치챈 당소월. 그녀가 아직 홍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키득이며 가볍게 팔을 벌렸다.
"이번에는 납치하지 않으시는지요?"
"원한다면 해 주마."
"흐흫. 꽤나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요. 이미 아버님과 설 소저가 밖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잠깐. 그건 언제부터지?"
"제가 들어올 때부터려나요?"
"내가 공진환을 흡수하는 데 걸린 시간은 어느 정도였나."
"한다경에서 한 식경 정도는 되지 않겠..., 아."
그제야 지금 상황을 깨달은 당소월이 눈을 크게 떴다.
이른 아침부터 정혼자의 방에 들어가 한참 뒤에야 나오는 딸. 그리고 어째서인지 멀쩡하다 못해 기운이 넘치는 사위.
"으음."
조졌나?
[4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5] 45화. 섬서행 (2)
"자네. 대체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길래 이리도 오래 걸린... 음?"
눈을 가늘게 뜨던 당진천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허, 참. 어이가 없구만. 이래서야 한 소리 하려 해도 뭐라 하지도 못하겠어."
"장인어른께서 하오문에서 공진환을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전부 그 덕분입니다."
"글쎄. 공진환이 좋은 영약인 건 사실이지만, 내공 증진 이상의 공능은 없다네. ...언제부터였나?"
진작에.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쓴 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마침 일전에 잠깐이나마 검기를 선보인 적 있잖은가.
"이미 마교도와 검을 맞대며 감을 잡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실전을 겪으니 싫어도 체득되더군요."
"솔직히 믿기 힘들 정도네. 자네 나이에 이만한 무위를 이룬 이가 얼마나 있겠나. 나도 그 정도는 아니었거늘."
"아직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이 있고, 내공도 있으나, 몸이 그에 따라가질 못하잖습니까."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지. 제대로 시간을 들여 단련하는 수밖에."
피식 웃은 당진천이 뒤편의 두 남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어디 가서 다치고 돌아올까봐 제대로 호위까지 붙여 둘 생각이었는데, 괜한 짓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농담이네. 싫다고 해도 붙여 둘 생각이니 따돌리고 가면 안 되네."
"명심하죠."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있던 설리향이 다가왔다.
"천휘. 조금 전의 이야기. 잘은 모르겠지만... 더 강해졌다는 거지?"
"맞다."
"축하해. 그리고 그으. 안전하게 잘 다녀오고."
"너까지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듣기로는 어디 나갈 때마다 다쳐서 돌아온다고 하던데?"
"...부정할 수 없군."
공진환을 먹기 전에도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긴 했으나, 그래도 사실은 사실인지라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동안 수련이나 제대로 하고 있어라. 저번처럼 또 혼자 무리했다가는 몸 상하기 딱 좋으니 조심하고."
"안 그래도 저번에 한 번 혼났어. 이제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괜찮아."
"그럼 됐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조금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다. 약혼식 이후의 연회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으니까.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분명 독혈대의 부대주였지.
"설마 부대주께서 저희의 호위를 맡은 겁니까?"
"두 분의 무위가 출중하시니 호위를 자처하려면 부대주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암혼대가 암기를 주로 다루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면, 독혈대는 독공을 주로 다루는 무인들이 모인 무력대다.
당연히 이쪽도 최소한 일류는 되어야 들어갈 수 있으며, 부대주쯤 되면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기 마련.
그런 전력을 붙여 주는 시점에서 당진천이 당소월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연락이 끊긴 기간 동안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무탈하게 무림행을 다녀오라는 거겠지.
아마 따로 말을 안 했을 뿐, 처음 당소월이 무림행을 떠났을 때처럼 몰래 이쪽의 행적을 당진천에게 보고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어디 위험한 데 가려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만.
***
당가를 나와 섬서성으로 가는 길. 이번에는 서두를 이유가 없기도 하고, 명목상 당소월이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무림행의 연장이기도 하니 마차를 타진 않았다.
평범하게 걸어서 이동하고, 물건도 행낭 하나에 들어갈 정도만 챙긴 상황.
물론, 전낭이 든든하니 평범한 여행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당소월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슬슬 성도가 작게 느껴질 무렵.
두어 걸음 떨어진 뒤에서 따라오던 부대주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나저나 섬서성에 가신다 하셨는데, 특별히 보고 싶은 것이나 가보고 싶은 곳이 계십니까?"
"섬서에 가는 것이니 역시 종남산과 화산을 구경해 볼 생각입니다."
이전 생에 들었던 영약이 있는 곳은 종남산의 조금 아래쪽에 있는 대망산의 어느 동굴이라고 했었지.
종남산과 화산을 목표로 한다면 자연스레 들를 수 있으리라.
내 이야기를 들은 부대주는 잠시 고민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편히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정식으로 당가의 일원이 되시기도 하셨고, 아가씨께는 편히 말하는데 저희를 높여 부르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이쪽이 편하다면야. 헌데 당소월도 부대주에게 존대를 썼던 것 같다만."
"아가씨는 누구에게나 존대를 쓰시니 괜찮습니다."
"...."
그런 이유였나.
"그럼 종남파와 화산파 쪽에는 미리 서신을 보내두겠습니다. 소월 아가씨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불쑥 찾아가면 서로 불편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잠깐. 나는 그냥 산어귀만 둘러보고 갈 생각이었다만."
종남산과 화산은 예로부터 영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물며 지금의 종남파와 화산파는 섬서성을 대표하는 문파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 않나.
그 명성을 듣고 몰려오는 양민이 한둘이 아니고, 나 또한 그사이에 섞여 한번 구경이나 해 볼 생각이었는데....
"제가 함께 움직이는 터라 서신을 보내 두고 인사 정도는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답니다."
"음?"
사천당가는 오대세가의 일원이다. 당연히 다른 정파의 문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종남파와 화산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당가의 여식이 아랫마을까지 왔는데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냥 갔다?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예의 없게 보일 수 있다나.
"...그런 건가?"
"그런 거랍니다. 물론, 조용히 산을 구경하다 가고 싶다고 하면 될 일이니 오래 걸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지만요."
"여전히 정파의 사정은 복잡하군."
"이제부터 익숙해지면 될 일이지요."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입가를 가리고 키득이던 당소월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종남파는 인사만 잠깐하고 내려온다 해도, 화산파에는 잠시 방문해도 괜찮을런지요? 그곳에 친구가 있어 오랜만에 얼굴을 좀 보고 싶거든요."
"상관없다. 어쨌든 서신은 보내는 걸로 하지."
이후에는 말한 것처럼 다음 마을에서 서신을 보내고, 여기저기 구경하며 섬서로 향했다.
아무래도 당소월의 첫 무림행이 내 납치로 끝난 탓에 이래저래 해보고 싶은 게 많았던 모양이더라.
나는 나대로 이동 중에는 경신법을 수련한다거나, 확 늘어난 내공에 좀 더 익숙해지도록 틈날 때마다 검기를 뽑아낸다거나, 당소월이 헤실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등. 나름대로 즐겁게 이동할 수 있었고.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실력을 쌓은 이들을 무림행에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둘러보고, 실전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중원 무림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이 터져 실전을 겪을 수밖에 없단 뜻이기도 하지.
무림초출로 보이는 어수룩한 이들만 노리는 사기꾼도 있었고, 조용히 객잔에서 식사 중이었건만 다른 무인 간의 분쟁에 휘말린 적도 있었으며, 사천성을 벗어난 이후에는 산적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호위인 부대주 선에서 정리됐지만, 때때로 나나 당소월이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위험하지 않다면 굴러들어 온 실전 기회를 걷어찰 이유는 없잖은가.
그렇게 한참을 지나 드디어 도착한 대망산 인근의 마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위치나 주변 지형이 들었던 이야기와 똑같았다.
마침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작은 마을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은 저기서 묵어 가지."
"예에. 마침 딱 좋은 위치네요. ...생각해 보면 지칠 때쯤 혹은 해가 질 때쯤 마을이 하나씩 나왔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맞는지요?"
"맞다.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하거나,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아닌 이상 하루거리에 작게나마 다른 마을이 있기 마련이지."
"신기하네요."
"무얼. 사람의 보폭이나 체력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잖나. 자연스레 그리 형성된 것이다. 물론 경공을 펼치거나, 탈것을 타고 이동한다면 그리 딱딱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당소월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래도 가끔은 노숙해야 하거나, 시기를 맞추지 못해 해가 지기 전까지 급하게 경공을 펼쳐야 할 일이 몇번은 있을 줄 알았지요."
"아, 그 부분은 길잡이의 실력이 뛰어나 그런 거다."
피식 웃으며 여전히 뒤쪽에서 조용히 우리를 따라오는 부대주를 가리켰다.
나와 당소월의 시선을 받은 부대주가 말없이 고개를 꾸벅인다.
"젊은 시절에 자주 섬서성을 돌아다녔던 덕분입니다."
"헤에. 부대주는 섬서 쪽으로 무림행을 시작하셨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당소월은 섬서가 아니라 호북 쪽으로 갔었지. 당초의 계획은 호북, 안휘, 하남, 섬서를 지나 다시 사천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실상 정파 무림의 칠 할을 돌아보고 오는 것을 기대했다가 바로 납치당한 셈이니 당가를 떠난 지 제법 됐음에도 아직 들떠 있는 게 이해되네.
독혈부대주는 당소월의 말에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당시의 저는 독혈대 입단을 앞두고 있던 터라, 마지막으로 한번 자유로이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거든요."
"와아. 그때의 섬서성은 어땠는지요?"
"유행이 변하고, 못 보던 건물이 보이긴 하지만, 의외로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무림인은 허구한 날 싸워대고, 힘없는 이는 그 사이에 끼어 고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 저희가 오면서 그 정도로 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눈을 끔뻑이는 당소월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우리가 마무리를 보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말인지요."
"그래. 객잔에서 시비가 붙은 뒤, 부서진 건물과 가구는 누구 돈으로 고친다고 생각하나?"
"그야 부순 무인들이죠?"
"하지만 그자가 이미 죽었다면 어찌하겠나."
"으음. 소속된 문파나 가문에 연락하겠지요."
"그 문파가 거절한다면? 자기 문파원들이 몰려가 깽판을 부린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싸우다 부서진 것 아닌가. 나라면 책임을 전가할 테지. 하물며 자기 사람이 죽거나 다친 상황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해당 문파가 이미 분쟁이 있던 다른 문파에게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배상해 줄 여력이 안 될 수도 있고.
단순히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억울함을 호소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관아에서 나름 중재를 해 주긴 하겠으나... 손해를 온전히 배상받지는 못하리라.
"무엇보다 양민에게 무공을 익힌 이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물어내라는 말을 꺼내는 게 쉽지는 않겠지."
"아."
넓은 중원 무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성하며, 그 힘만큼이나 정파로서의 위신을 지켜 온 당가에서 나고 자란 이에겐 생각지 못한 부분인 걸까.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는 당소월.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꼽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짧게 나열했다.
"이외에도 산적이 있다는 건 누군가 이미 산적질을 당했다는 뜻이며, 사기꾼이 굶지 않고 또 사기를 친다는 것은 이미 당한 이들이 꽤 있다는 소리지."
"무력만이 힘인 것은 아니지요...."
조금 시무룩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부대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안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제 부군을 만난 것도 무림행 도중이었으니 말입니다."
"진짜요?"
"사실입니다. 도중에 여비가 떨어져 상행 호위를 맡던 도중에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를 치료해 준 의원의 아들이...."
담담한 목소리로 과거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는 부대주.
다소 침울해졌던 당소월이 다시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너무 부정적인 면만 말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지네.
그렇게 말없이 부대주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당소월을 바라보던 도중.
"음?"
문득 영약이 숨겨진 동굴까지 자연스레 데려갈 방법이 떠올랐다.
[4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6] 46화. 섬서행 (3)
대망산 깊은 곳에는 전대고수로 보이는 오래된 시체와 찢어지고 삭아 버린 비급 조각, 그리고 절세의 영약이 숨겨져 있다.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건 쉽지만, 믿게 만들어 같이 찾아 나서게 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 수상쩍은 이야기 아닌가. 차라리 어느 통속 소설 속 이야기라 하면 납득이 갈 정도로.
심지어 나는 시간을 거스르며 생긴 모종의 금제로 인해 누군가에게 회귀 사실을 알릴 수도 없는 상태.
그걸 어떻게 알았냐던가, 누구에게 들었는지를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곤란해질 터.
물론, 밤중에 혼자 몰래 빠져나가 찾아보는 것도 생각해 봤으나....
어두운 밤에 말로만 들어 본 길을 찾는 건 솔직히 자신 없다. 거기에 호위로 붙은 독혈부대주의 기감을 완전히 속이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단순히 기세가 바깥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가다듬는 정도는 항상 하고 있는 것이지만, 숙련된 살수처럼 기척 자체를 숨기는 것에는 서투르니까.
그런 이유로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동굴까지 이동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순간.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푸는 부대주와 이를 흥미롭게 경청하는 당소월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나도 내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유도하면 된다는 것을.
마침 부끄럽지만, 딱 좋은 이야깃거리도 있고 말이다.
하여 이른 새벽에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해 머리를 묶는 중인 당소월에게 물었다.
"여기서 오늘 하루 더 묵어가지 않겠나?"
"네? 갑자기 무슨 일인지요?"
"이곳의 산을 둘러보고 싶어서 말이다. ...조금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으음. 무슨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소협이 그러시고 싶으시다면야 하루 정도 더 머물러도 괜찮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급한 일도 없고요."
좋아. 일단 이걸로 첫발은 내디뎠다.
***
아침만 먹고 바로 오르기 시작한 산길. 그리 산세가 험한 곳은 아니라 여유롭게 산을 타는 당소월과 독혈부대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입을 열지 않는 부대주 대신, 당소월이 먼저 물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산까지 오르시는 건가요?"
"굳이 말하자면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지."
"천 소협은 지금도 어린 것 같습니다만."
"...그럼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때의 이야기로 하지."
"흐흫! 농담이니 그런 표정 짓지 마시지요. 소협이 평소에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니 놀랐을 뿐이랍니다."
아이를 달래듯 내 한쪽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키득이는 당소월.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의 내가 어린 것은 사실이라 그냥 참기로 했다.
애초에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회귀 전의 내가 지금 나이쯤에 있었던 이야기기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그래. 우선 여기서부터겠군. 내게는 스승이 있다."
"뭐어. 그렇겠지요? 천 소협의 나이에 그만한 무위를 이루려면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검술과 심법은 스승님의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무공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지."
"...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는 당소월. 하지만 사실이다.
철혈당주는 내 스승 비슷한 존재였고, 내게 글을 비롯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정작 무공에 관해서는 신법과 싸우는 방법 말고는 알려 준 것이 없다.
물론, 누더기 같은 당시의 검술과 심법을 보며 위험한 부분을 지적해 주긴 했으나... 딱 거기까지.
무공을 봐주며 한 수 가르친 것에 불과하며, 그나마 전수해 준 신법도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 만들어 준 것이다.
철혈당주를 스승처럼 여기고 있으나,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이를 속으로 삼키기만 한 것도 그래서다.'
나는 철혈당주의 진신무공을 계승하지 못했으니까.
옛 기억을 떠올리느라 잠시 입을 다물었기 때문일까. 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이는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심법은 사파의 삼류 무공인 혈랑공(血狼功)에 지금껏 돈으로 사들이거나 훔쳐 낸 다른 심법을 참고해 개량하여 나름의 깨달음을 녹여 내었을 뿐이고, 검술은 그 흔한 삼재검법으로 시작해 온갖 잡스러운 검법을 거친 끝에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방금 개량하고 만들었다고 하셨는지요?"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면 바로 잡아 주신 분이 계시기도 했고,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내게 맞도록 손봤을 뿐이니까. 아마 다른 이가 내 무공을 익힌다면 이류... 잘해 봐야 일류 수준의 무공이지 않을까 싶군."
광랑탈명공의 위력은 전적으로 내 깨달음에 의존한다.
나와 같은 경험이 없었다면, 비슷한 깨달음이 없다면, 부작용으로 들끓는 살기에 휘둘려 주화입마에 빠지겠지.
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제정신으로 휘두르지 못하는 힘은 아무런 의미도 없잖은가.
검술 또한 다를 게 없다. 내 검에 이렇다 할 초식은 없다. 이런저런 검술의 초식 중 괜찮은 부분을 필요할 때 꺼내 쓸 뿐인 누더기 같은 무언가니까.
다만, 적확한 순간에 적확한 초식을 적확한 묘리를 담아 펼칠 뿐.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내 검술은 단순한 허우적거림으로 전락하리라.
내 이야기를 들은 당소월이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 귀에는 그게 더 대단하게 들린답니다. 일전에 아버님의 제안을 거절하며 말씀하신 자신만의 산은 이 이야기셨군요."
"맞다. 다만 대단하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군. 이 부분은 관점의 차이가 아닐지 싶다. 정파의 무공을 잘 아는 것은 아니나, 제대로 된 것은 초식 하나하나에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게 초식은 아무리 고절한 수법이라도 사람 잘 죽이는 요령에 불과하다.
무공을 구도의 수단으로 삼고 그 의미를 곱씹거나, 무공을 이어받고 발전시켜 가문의 끊임없는 부흥을 꿈꾸는 이들과는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그렇기에 초식을 쪼갰다.
내가 아는 검술은 기껏해야 삼류에서 일류 수준에 불과하지만, 모든 무공에는 나름의 진의(眞意)가 존재한다.
그 수준의 고하와, 이를 얼마나 잘 녹여냈는가로 무공의 수준이 갈라질 뿐, 의가 존재하지 않는 무공 같은 건 없을 터.
하지만 나는 공감하지도 못하는 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대신,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을 때까지 잘게 나누었다.
초식을 이루는 기본 단위.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 내는 가장 작은 움직임.
오직 형(形)만을 체득하여 상황에 맞게 휘두르는 것이 내 검이다.
굳이 안에 담긴 의(意)를 말하자면 적을 죽인다는 정도겠지.
"그래. 조금 자랑하자면 나는 검을 잘 쓴다. 장담컨대 나만큼 잘 다루는 이는 중원 전체를 뒤져도 그리 흔치 않겠지. ...하지만 내 검에 깊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그렇기에 철혈당주는 항상 내게 말했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오직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세상을 둘러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그리하여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검수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언제나 그녀는 내게 무공이 아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주려 했다. 우습게도 나는 한차례 모든 것을 잃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지만....
"아, 생각해 보면 최근에 비슷한 소리를 한 번 더 들었군."
장난스레 웃으며 당소월을 바라보자, 그녀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흠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만일 내가 평생을 내 길 위에서 살아온 탓에 다른 길을 모르는 것이라면, 다른 길도 있고 이쪽도 썩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다 했던가. 당소월 네가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상관없다."
"꺄아악! 부끄럽게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건가요! 여기 다른 사람도 있는데...."
말끝을 흐리며 뒤를 돌아보는 당소월. 그곳에는 자신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는 독혈부대주가 있었다.
물론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 재밌게 잘 듣고 있었던 것 같지만.
원망스런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당소월의 시선에 낄낄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조금 다른 곳으로 새긴 했지만, 요는 그거다.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는 것."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만."
"왜긴. 깊이가 부족할지언정 검은 잘 다룬다고 하지 않았나. 막 검을 들어 아직 깊이가 중요하지 않을 시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나?"
"아."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멍하니 입을 벌리는 당소월.
지금이야 내 얄팍함이 화경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 되었음을 알고, 세상에는 천마라는 괴물이 존재하는 것도 잘 알지만....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의 나는 정말 진심으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 무림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호걸. 맨몸으로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 버금가는 세력을 일궈 낼 대종사.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지."
"...그, 그 정도로 말입니까?"
조금 질겁한 표정의 당소월. 하지만 놀랍게도 회귀 전, 진짜 열다섯 살의 천휘는 그런 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온갖 체질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아나?"
"엇. 그러고 보니 그건 좀 신기하네요."
독령지체와 순음지체는 당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많아 특히 자세할 뿐, 다른 특이한 체질에 관해서도 아는 게 제법 된다.
어떤 공능을 타고났는지,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고 어떤 무공을 익혀야 타고난 체질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지.
보통의 무인은 평생 알 필요 없는 것들을 이리도 자세히 꿰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내가 그러한 체질 중 하나를 타고난 줄 알았다."
"예?"
"솔직히 그 정도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천재라고 생각했으니까."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열다섯 살의 나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막 익히기 시작한 무공에 홀려있었고, 지금껏 절대 이길 수 없다 생각한 적사파 놈들을 문주 빼고 전부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붙을 때였으니까.
심지어 이러한 자만심은 꽤 오래가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은 기분이지만, 아무튼 당시의 나는 진심이었기에 땔감을 구하러 근처의 산에 오를 때도 항상 특이한 지형을 찾아 깊이 들어가곤 했다.
"잘 연결이 안 되네요. 왜 그러셨는지요?"
"나쯤 되면 우연히 기연을 발견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쯤 되자 놀랄 기력도 없는지 그냥 입만 떡 벌리고 있는 당소월. 그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니까.
"그래서 저렇게 특이한 형태의 나무를 보면 그 근처를 돌아보기도 했다. 뭔가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
슬쩍 손을 뻗어 저 멀리에 보이는 옆으로 누워 자라는 나무를 가리켰다.
갈라진 모양이 묘하게 입을 벌린 뱀을 연상시켰다.
산길을 벗어나 그리로 향하자 순간 멈칫하면서도 그대로 따라오는 당소월과 부대주.
좋아. 이걸 몇 번 반복하면 되겠군.
이후로도 두꺼비를 닮은 바위, 귀곡성을 닮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중간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 폭포를 지나쳐 수풀에 가려진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전부 회귀 전에 들었던 이야기 그대로라 조금 헤매긴 했으나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소월도 도중부터는 좀 재밌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따라붙었고.
그렇게 내 부끄러운 과거와 맞바꾸어 도착한 동굴 앞에 잠시 멈춰서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마지막에 찾아낸 곳에 기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절세의 영초가 자라고 있거나, 잠들어 있는 영물이나, 전대고수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비급과 영약을 숨겨 둔 비처 같은 곳 말이다."
"전형적이네요. 하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지요."
이 자그마한 탐험이 마음에 들었는지 콧김을 거칠게 뿜어대는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보기로 하지.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기대하지 말고 말이다."
"예에. 하지만 이쯤 되면 뭔가 있긴 하겠지요. 실제로 소협은 비슷한 방식으로 자화배독초를 찾지 않았습니까."
"뭐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회귀 전에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찾은 것이라는 점은 똑같으니 말이다.
"자, 이야기는 됐으니 옆에 서라. 여기까지 왔으니 동시에 들어가지."
"좋습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당소월과 함께 동굴의 입구를 가로막은 수풀을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것처럼 동굴의 중심에는 비급 하나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목함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가부좌 자세로, 말없이 이쪽을 노려보는 깡마른 노인도 있었다.
은밀하게 뻗어 오는 살기에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살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4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7] 47화. 섬서행 (4)
회귀 전에 들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동굴에는 훼손된 비급과 영약 이외에도 오래된 시체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동굴에는 비급과 영약뿐만 아니라 조용히 이쪽을 노려보는 깡마른 노인도 있었다.
...이 시점에는 아직 살아 있었던 건가.
순간 멈칫한 사이. 은밀히 뻗어 오는 살기에 반사적으로 검을 뻗었다.
스릉.
"천 소협? 갑자기 검은 왜... 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소월이 뒤늦게 구석의 노인을 발견했는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그녀의 손은 넉넉한 소매에 가려져 언제든 출수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 상태.
반면 호위인 독혈부대주 또한 앞으로 나서며 비슷한 자세로 눈앞의 노인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무언의 대치.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인 쪽이었다.
"그만하지. 아무래도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구먼."
약간 갈라지긴 했으나, 적의는 없어 보이는 목소리. 실제로 이쪽을 겨누고 있던 살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쪽 또한 자세는 유지하되, 기세만 살짝 누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고인께서는 누구신데 이런 외진 동굴에 계신 겁니까."
"그 말은 그대로 돌려줄 수 있겠군. 녹의를 보아하니 당가의 사람 같은데, 멀리 떨어진 섬서의 작은 산에는 왜 올라온 겐가? 그것도 인적은커녕 들짐승도 드문 깊은 곳까지 말이야."
"...질문이 잘못됐군요. 고인께서는 누구랑 착각하였길래 저희에게 그리 조용히 살기를 내비치시는 겁니까."
"그걸 눈치챘나? 일순이었는데 어린 친구가 감이 좋구먼. 아니면 내가 정말 죽을 때가 되었던가."
그렇다. 내가 노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동굴에 들어와 살기를 감지했을 때일 뿐, 바깥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다.
처음에 느꼈던 살기도 만약 내가 광랑탈명공을 익히며 살기에 예민해진 것이 아니었다면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정도로 은밀했고.
당소월과 독혈부대주의 반응이 조금 늦은 이유도 간단하다.
눈앞의 노인이 그만큼이나 깔끔하게 기척을 숨기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비급과 영약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끌끌 웃던 노인이 자세를 가다듬자, 희미했던 기세가 선명해졌다.
그제야 그늘진 구석에 있던 노인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얗게 센 봉두난발. 피가 굳어 검붉게 변색된 옷. 그리고 거칠 게 잘려있는 한쪽 다리.
과연. 이래서 굳이 비급과 영약을 미끼처럼 내걸고, 본인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불편한 몸으로 여러 합을 이어 나가긴 힘들 터이니, 단 한 번으로 상대의 목을 꺾어버릴 예정이었으리라.
누구를 상대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저 하나 들어올리기 힘들어할 것 같은 깡마른 몸이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있는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귀영신투(鬼影神偸). 이젠 제법 오래전의 일이지만, 사람들은 날 그리 불렀네."
"귀영신투...!"
당소월이 눈을 크게 뜨며 노인의 별호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며 속삭였다.
"저어. 천 소협. 혹시 귀영신투라는 별호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저도 나름 당가의 여식으로서 무림의 명사들에 대해 얼추 배웠으나 귀영신투라는 별호는 처음 듣는 터라."
"모르는 게 당연하다. 전대고수 중에서도 꽤 배분이 있는 편이고, 수십 년간 활동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없다. 내가 겪은 미래에 귀영신투라는 이름이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철혈당주에게 지나가듯이 들었기 때문.
달리 말하면 반로환동을 이뤘을 정도로 꽤 나이가 있는 무림인이나 그 이름을 기억한다는 소리기도 하다.
나와 당소월의 미묘한 반응에 귀영신투가 머쓱하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허허. 내가 은퇴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 오히려 어린 소협이 내 별호를 들어본 게 놀랍구먼."
"제 무공을 봐주신 분이 어린 시절에 귀영신투께 가문의 무공을 도둑맞은 적 있다고 하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마 스승의 원수를 지금 갚으려는 건 아니겠지?"
"됐습니다. 과거의 원한은 이미 가슴속에 묻었다 말씀하셨으니, 제가 대신 갚는다며 나서는 건 주제넘은 짓이겠죠."
"그건 다행이구먼."
한숨을 푸욱 내쉬는 귀영신투.
이는 사실이다. 철혈당주는... 서문화린은 서문세가가 멸문한 이후로 기존의 모든 원한을 잊고, 오로지 가문의 원수에만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아직 가문이 멀쩡하던 시절에 무공 좀 훔친 도둑에겐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말했었지.
애초에 귀영신투의 이름을 꺼낸 이유도, 그를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여러 무공을 마구잡이로 익히고 자신에게 맞춰 개량해 고수의 반열에 든 사람 중 하나라며 예시를 들기 위함이었고.
원한이 없다는 말에 안심한 미소를 짓는 귀영신투였으나, 이내 그가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네들도 서로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 잘 알았네. 어쩌다 여길 찾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서로 갈 길 가는 건 어떤가."
"조금 곤란하군요. 저희가 기연 찾기 놀이를 하다 진짜로 찾아버린 터라."
"왜, 이 비급과 영약이 탐나던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천 소협?!"
기겁한 당소월을 향해 피식 웃어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물론 억지로 가져가겠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도 힘들겠지만 말이죠."
"이 늙은이는 내어줄 생각이 없는데, 억지로 강탈하는 것도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르신께선 꽤 위급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는 젊은이들 앞에서 허세라도 부려보고 싶지만, 하나 남은 다리와 한 달 가까이 굶은 몸뚱이로는 그것마저 힘들겠구먼."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영약을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목숨값으로 영약을 내놓으라는 거구먼. 합리적이야. 아무리 영약이 귀해도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 경우에는 미안하지만 거절하도록 하겠네."
"어째서입니까."
나도 모르게 찌푸려지는 미간. 그 표정을 본 귀영신투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삶에 큰 미련이 없기 때문이라네. 내 나이가 벌써 아흔을 넘었네. 살 만큼 살았고, 이루고자 했던 것도 거의 다 이루었네."
"거의라 하심은...."
"일단 마저 들어보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이 영약은 자네가 먹어서는 안 되네. 정확히는 누구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해야겠지."
"어째서입니까."
"아무리 무인이 칼 한 자루에 매료되어 삶을 내다 버린 작자들이라고는 하나, 선이라는 게 있잖은가. 어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잡아먹으며 힘을 기르겠는가."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리 되묻자, 귀영신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인간을 갈아 만든 영약일세. 마교의 괴물에게서 훔쳐 왔지."
"...!"
마교에 괴물이라 불릴만한 인물은 하나뿐이다.
천마.
이미 천마가 마교주 자리에 오르고, 중원을 침략할 준비 중이라는 건 일전에 사로잡은 악견대주 여능학을 심문하며 알아낸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녀석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던 귀영신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처음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지. ...실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도굴꾼이었다네."
이어진 귀영신투의 일생은 의로웠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꽤나 파란만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남의 묘를 파헤쳐, 그 부장품을 팔아먹으며 살아가던 나날. 귀영신투는 어느 무인의 묘에서 우연히 발굴한 오래된 무공서를 발견해 익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귀영신투였으나, 제 버릇은 남 못 주는 건지 기껏 배운 무공으로 이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재물을 털기 시작했다.
돈, 영약, 무공, 기물... 귀한 것이라면 무엇하나 가리지 않고 훔쳐댔을 정도.
"단 둘. 사람의 목숨이나, 목숨처럼 소중한 것은 예외였지만 말이네. 그런 건 훔쳐도 쓸데가 없고 자랑하기도 힘들잖은가."
그에게 도둑질은 자신의 성취를 시험하는 수단이었고, 인정욕구를 채워주는 숨통이었다.
"평생을 떳떳지 못한 도둑놈으로 살다가 귀영신투라는 별호를 얻고, 경멸과 경외를 한 몸에 받으니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더군."
"그렇게 좋았다면 대체 왜 은퇴하신 겁니까."
"...더는 훔칠 것이 없어서 그랬네."
전성기의 귀영신투는 막을 자가 없었다. 무위는 초절정에 불과했으나, 오로지 은신과 경신법에만을 파고든 덕에 잠깐이라면 화경 절대고수의 눈조차 피할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훔친 것이 전대 황후의 속곳이었지."
"...대, 대단하긴 대단하셨나 봅니다."
이야기를 듣던 당소월이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로 억지 칭찬을 쥐어짰으나, 귀영신투는 그저 즐겁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무림의 이름난 가문과 문파를 털어 보았고, 수많은 진법과 고수로 무장한 황궁까지 제집 드나들듯 했으니 도둑놈으로서는 이룰 것을 전부 이룬 것 아닌가."
자신이 무엇을 해도, 이 이상의 업적은 세울 수 없겠다 판단한 시점에서 귀영신투는 은퇴를 결심했다.
"제자는 만들지 않았네. 나야 배운 것이 도둑질뿐이고, 성공했을 때의 짜릿함에 중독되어 있었다지만... 솔직히 말해 도둑질이 좋은 일은 아니잖은가."
"자각은 있으셨나 봅니다."
"자각하고 최대한 몸을 사렸으니 이 나이까지 살아 있는 걸세."
무덤에서 파낸 무공을 시작으로, 온갖 무공을 훔치고 개량한 끝에 만들어 낸 오직 도둑질만을 위한 무공.
귀영신투는 자신의 무공이 후대에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당소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대부분의 명가에서 무공을 훔쳤다고 하셨는데 그럼 혹시...."
"걱정말게. 진짜 중요한 비전은 무인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것 아닌가. 내가 당가에서 훔친 것은 다소 급이 떨어지는 편법(鞭法) 하나와 마취독의 제조법이었네."
"그것도 충분히 기밀입니다만."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당소월. 다만, 이 자리에서 귀영신투에게 오래전의 죄를 물을 생각은 없는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은퇴한 이후. 나는 그간 쌓아 둔 재산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아왔었네. 다만, 슬슬 죽음이 가까워지자 내가 지금껏 훔쳐 온 것들이 아까워지더군."
"의적처럼 민가에 뿌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건 재미없지 않은가. 내 시작이 도굴꾼이었으나, 마무리도 도굴꾼으로 마무리 지어야겠지."
다 늙은 귀영신투가 다시 남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 반대. 남들이 자신의 무덤을 도굴해 주길 바랐던 것이지.
자신이 지금껏 훔쳐 온 모든 물건을 한데 모아, 거대하고 복잡한 무덤을 만들고 그 정보를 장보도와 소문의 형태로 중원에 뿌릴 예정이었다나.
"헌데 늘그막에 욕심이 하나 생기지 뭔가. 기껏 정사는 물론이요 황실의 물건까지 털었으니, 새외무림의 보물까지 있으면 구도가 더 예쁘지 않겠나."
그런 이유로 귀영신투는 북해빙궁과 남만야수궁을 털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터라 대단한 것은 훔칠 수 없었으나... 북해빙궁에서는 나름 괜찮은 음한기공을, 야수궁의 비고에서 영물의 가죽으로 만든 호심갑(護心甲)을 훔치는 데는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마교에서도 뭔가 하나 가져올 생각이었네. 솔직히 큰 걱정은 없었네. 자네들도 알다시피 마교의 독기는 대단하나 무공은 미천하지 않은가."
귀영신투는 마교도들이 신성시하는 성화를 유지하는 데 쓰는 부지깽이라도 훔쳐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고 말았다. 산 채로 사람의 선천진기를 뽑아내 영약을 만드는 모습을.
"실로 끔찍한 장면이었네만, 놀랍게도 누가 강제한 것이 아니었네.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지."
"대체 왜 그런 짓을...."
아연한 표정을 짓는 당소월. 하지만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마교도는 억울함에 가득 찬 복수귀들이거나, 그들 사이에서 자라 복수심을 주입받은 이들이다.
그저 능력이 없어 조용히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여기서 한 인물이 나타난다.
"천마. 당대의 마교주는 자신을 그리 자칭했네. 그 오만함에 걸맞은 무위 또한 갖추고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비원을 대신 이뤄줄 이가 존재한다. 그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갈아 한 알의 영약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마교가 지닌 무서움이다.
"아무리 내가 의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지만, 이건 아니었네. 까딱 잘못했다가는 중원에 큰 피바람이 불 것이야."
하여 귀영신투는 천마에게 진상되었어야 할 영약을 훔쳤다.
그 대가로 천마에게 한쪽 다리가 잘리고, 심한 내상으로 기혈이 뒤틀렸으며, 신강성을 벗어난 뒤로도 의뢰를 받은 살곡의 살수에게 추적받았지만.
"도망치고 도망친 끝에 도착한 곳이 이 동굴일세. 다행히 한동안 추적이 없는 것을 보아 포기하고 떠났거나,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만... 문제는 몸이 너무 상해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 뭔가."
쓴웃음을 짓는 귀영신투는 여전히 바닥에 가부좌를 튼 자세였다.
"이제 알겠나? 이 영약은 누구에게도 넘어가서는 안 되네. 내공 증진 효과는 뛰어날지 모르나, 주화입마를 일으키는 것은 확실하니 말일세. 이미 미쳐 버린 마인이 아니라면 절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잇던 귀영신투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네. 불청객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았을 줄이야."
동굴 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할 정도로 가벼운 소리였다. 마치 살수들의 걸음걸이처럼.
[4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8] 48화. 살귀(殺鬼)
"...아무래도 내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네. 불청객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았을 줄이야."
한숨을 푸욱 내쉬는 귀영신투. 동시에 동굴 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살수의 걸음걸이처럼 가벼운 발소리. 뒤이어 동굴 입구를 가린 수풀을 뚫고 구멍이 뚫린 작은 금속 구슬 몇 개가 흐르듯 굴러들어 왔다.
텅. 터엉.
동굴 바닥에 부딪혀 둔탁한 금속음을 흘리는 구슬. 그 표면에 나 있는 무수한 구멍에서는 옅은 보랏빛 연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좁은 동굴 안을 채워 가기 시작하는 연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슬쩍 당소월 뒤로 몸을 피했다.
"음. 독이군."
"예에. 독이네요."
"어찌하시겠습니까 아가씨?"
"정황상 귀영신투 어르신을 쫓던 살수들의 독이겠지요. 살곡의 독은 어떤지 궁금했으니 마침 잘됐네요."
당소월이 태연한 표정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구슬을 지르밟았다.
그리 튼튼한 녀석은 아닌지 쉬이 으스러지며 흘러나오는 타단 만 내용물.
조금씩 새어 나오던 독연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갔으나... 이내 부자연스럽게 당소월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모습에 귀영신투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가의 무인이니 중독될 걱정은 없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먼."
"저는 조금 저희 가문에서도 조금 특이한 편이랍니다. ...그나저나 꽤 악랄한 독이네요."
미간을 찌푸리는 당소월에게 물었다.
"어떤 독이길래 그러나."
"본래 무언가를 태워 연기의 형태로 퍼뜨리는 독은 편리하지만, 그 위력이 약할 수밖에 없답니다. 농축하기도 힘들고 배합에도 제약이 있으니 말이지요."
당소월이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피독주 두 개를 꺼냈다.
품질이 좋을수록 피독주의 크기가 작아지니, 이 정도면 거의 최상급이겠지.
하독 만큼이나 해독을 중요하게 여기는 당가가 아니었다면 구하기 힘들었을 물건이다.
"그러니 직접적인 살상력을 포기하고, 고통을 주는 데만 집중하기로 한 모양이네요. 식물에서 나온 독이지만, 아직 학령초 내성을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천 소협에게는 위험할 수 있으니 꼭 입에 넣고 있으세요. 귀영신투님도요."
"알겠다."
"오랜만에 보는 피독주구먼. 고맙네."
피독주를 입에 넣고는, 혹시라도 삼키지 않도록 혀 밑으로 굴려 넣었다.
잠시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뽑아 들고 언제든 휘두를 수 있도록 적당히 긴장시키자, 그 모습을 본 귀영신투가 기겁하며 우리를 말렸다.
"자, 잠시만 기다리게. 설마 싸울 생각인가? 그 의협심은 고맙지만,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이 늙은이의 사정에 휘말려 죽게 할 수는 없네."
결연한 표정으로 동굴에 놓여있던 비급과 목함을 우리를 향해 건네는 귀영신투.
"북해빙궁의 빙하진기(氷河眞氣)일세. 이건 자네들이 알아서 하고, 영약은 절대 먹지 말고 무림맹으로 향해 내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주게. ...저들의 목적은 나일 테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겠네."
일단 비급과 목함을 받아 품에 넣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살곡과 당가는 원수에 가까운 사이입니다. 도망친다 하여 순순히 놓아줄 것 같진 않군요."
살곡과 당가 사이에는 오랜 악연이 있다. 처음이야 살곡이 자신의 살행을 당가의 짓인 양 꾸민 것에서 시작했으나.
너무 오랜 시간 싸우며 서로가 서로의 원한을 키운 탓에 이젠 얼굴만 봐도 죽이려 드는 관계가 되었다.
물론 둘의 전력 차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니, 살곡의 위치가 밝혀졌다면 진작에 멸문당했겠지만….
본단 만큼은 꼭꼭 숨긴 터라 둘의 대립이 아직 이어지는 거겠지.
유명한 이야기니 귀영신투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을 터. 그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우리라고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구슬의 독을 흡수한 당소월이 눈을 가늘게 뜨며 동굴 입구의 수풀.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척을 노려보았다.
"귀영신투 어르신이 지금은 노쇠하고, 부상까지 입으셨다고는 하나 명백한 초절정의 고수시지요. 당연히 그만한 전력의 살수를 보냈을 터인데... 혹시 살왕(殺王)이 직접 추적에 참여했나요?"
"그건 아니네. 살귀(殺鬼) 다섯과, 일급 살수 여럿이었던 걸로 기억하네."
살곡의 삼급 살수는 삼류 무인을 죽일 수 있고, 일급 살수는 일류 무인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리고 절정 무인을 암살할 수 있는 이를 살귀라 부르며, 그 위에는 살곡의 주인이자 초절정 무인마저 조용히 목을 떨군다는 살왕이 존재할 뿐.
달리 말하면 절정 무인 다섯과, 일류 무인 여럿이라는 소리다.
얼핏 보면 불리한 상황. 귀영신투는 오래 싸우지 못하는 몸이고, 이쪽의 절정 무인은 독혈부대주 한 사람뿐이니까. 그러나.
"그 정도면 제 독이 통할 테니 해볼 만하겠네요. 절대 제 앞으로 나서지 마시고, 혹시 모르니 나눠주신 피독주는 꼭 입에 물고 계시길."
우리에겐 당소월이 있다. 그리고 나도 일전에 먹은 공진환 덕에 절정 초입이라 부를 수준까지 올랐고.
아연한 표정의 귀영신투를 뒤로한 당소월이 동굴 입구를 향해 냅다 일장을 뻗었다.
파앙!
그 풍압을 타고 뿜어진 독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크하악!"
"꺼흑!"
독연의 고통에 못 이겨 뛰쳐나오면 바로 급습하려 했던 걸까. 입구 근처에 숨어 있던 살수 둘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쓰러진다.
그 틈을 타 독혈부대주가 바깥을 향해 경공을 펼쳤다.
"제가 먼저 나가 길을 확보하겠습니다."
짤막한 한마디. 뒤이어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전투의 소리에 나와 당소월이 들어왔을 때 그러하듯,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곳에는 먼저 나간 부대주가 복면을 뒤집어쓴 살수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독을 흩뿌리고 있었다.
가져온 독을 정말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인지 순식간에 계곡 밑바닥을 가득 채우는 독기.
살곡의 살수들 또한 독을 다루고, 나름의 내성도 있지만... 그 깊이는 당가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만한 독기를 뚫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지 쉽사리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살수들.
물론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일부가 독기가 고여 있는 계곡 밑바닥을 피해 벽을 타고 우회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파른 벽을 경공 하나에 의지해 돌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양쪽에서 둘씩 짓쳐들어오는 놈들은 살수답게 기세가 희미하지만, 그 움직임이 범상치 않은 것이 명백한 절정급이다.
"왼쪽으로 들어오는 살귀는 내가 묶고 있겠다."
"그럼 저는 부대주와 함께 일급 살수를 처리하지요."
당소월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뒤에야 하나 남은 다리로 위태롭게 서 있는 귀영신투를 돌아보았다.
"어르신은...."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뺄 수는 없지. 살생을 꺼리긴 하나, 스스로를 귀신이라 칭하며 인간을 포기한 것들에게 살초를 아낄 생각은 없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셋으로 찢어져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내가 도착한 것과 거의 동시에 살귀 둘이 벽을 지나 바닥에 착지했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무심한 눈동자가 내게 꽂힌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무기질적인 시선. 내게는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살귀중 한 손에 낫처럼 생긴 도... 쇄겸도를 든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당가의 인물이라도 임무 대상도 아닌 후기지수를 죽이는 취향은 없다. 지금 길을 비킨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그쪽이야말로 얌전히 목을 내놓으면 아프지 않게 베어 주마."
"...미친놈인가?"
"살수의 살려주겠다는 말을 믿을 만큼 미치진 않았지."
"쯧."
내 외모만 보고 한번 말로 흔들어 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혀를 차는 녀석.
임무에 방해되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은 물론 아이와 여자마저 거리낌 없이 죽이는 것들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쇄겸도를 든 살귀가 옆에 있던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나머지 하나는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아, 내 상대는 쇄겸도 녀석에게 맡기고 그대로 귀영신투에게 향하려는 모양.
의도적으로 기세를 억누르고 있긴 했으나, 이렇게나 예상대로 움직여 줄 줄은 몰랐는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정면에서 달려오는 쇄겸도를 향해 짓쳐 들었다.
동시에 광랑탈명공의 내공을 풀어헤치며, 눈앞의 상대에게 날카롭게 제련한 살기를 집중시켰다.
"무슨...!"
돌연 부풀어 오른 기세와 강렬한 살기에 숨이 턱 막힌 걸까. 달려오다 말고 멈칫한 녀석.
무방비해진 살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단기 결전이 될 테니 내공을 아낌없이 담았다.
아직 몸이 버티지 못해 신체에 두르는 내공에는 한계가 있으나, 검은 그렇지 않으니까.
우웅.
허공을 가르는 검 위로 피어오르는 붉은 기류.
흐릿했던 검기가 빠르게 안정되더니, 점점 그 빛이 진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핏빛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적색으로 화했을 무렵. 간신히 자세를 다잡은 살귀가 황급히 쇄겸도를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급하게 휘두른 무기와 급하게 끌어올린 검기로 완벽히 대응하는 건 불가능했던 걸까.
녀석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몸이 한쪽으로 기운다.
"어떻게!"
무덤덤하던 살귀의 눈에 경악이 서린다. 조금 전에 자신을 옥죄던 살기에 놀라고, 완연한 검기에 한 번 더 놀란 모양.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른 한 명이 이상을 눈치채고 협공하기 전에 완전히 끝내야 하니까.
위력만큼은 신공에 뒤지지 않는 광랑탈명공의 검기지만, 이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빠르게 회수해 다음 검격을 준비했다.
자세가 무너지며 드러난 빈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큭!"
쇄겸도라는 기문 병기의 이점을 살려 휘어진 날로 어찌어찌 막아 내는 데 성공한 녀석.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했는지, 입에서 무언가를 우물거리더니 그대로 침을 뱉듯 뱉어 냈다.
"퉷!"
내 눈을 향해 날아오는 얇은 바늘. 이런 걸 입에 넣고 있을 줄은 몰랐으나, 희미하게 살기가 집중되는 부위를 감지했기에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꺾자, 그대로 귓불을 스쳐 지나가는 바늘.
동시에 검을 회수해 더욱 커진 빈틈을 향해 다시금 휘둘렀다.
카앙!
이번에도 간신히 막아 내는 데 성공한 살귀였으나, 그저 한 합 버텨 냈을 뿐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검기를 쓸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검기를 두른 무기와 검을 맞댈 수 있게 되었다는 뜻.
그리고 나와 녀석의 기량 차이는 명확하니까.
한 합. 두 합. 세 합.
때로는 광랑탈명공의 폭발적인 위력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찍어 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거죽에 베이는 것을 감수하며 급소를 찔러 들어갔으며, 때로는 흡착의 묘리로 쇄겸도의 특이한 형상을 역이용하기도 했다.
검을 나눌 때마다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는 살귀.
물론, 녀석이 그동안 가만히 당해 준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에 숨겨둔 암기를 쏘아 내거나, 독에 절인 모래를 뿌리고, 때로는 육참골단의 각오로 달려들어 전황을 뒤집고자 했으니까.
허나, 그 모든 수가 읽혀 무위로 돌아갔다.
당연한 일이다. 살수의 무공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 그리고 내게 무공은 사람 죽이는 기술에 불과했으니까.
근본적인 부분에서 무공을 대하는 태도가 같다 보니 변수를 창출하려는 녀석의 생각은 내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하물며 희미하게나마 뿜어내는 살기까지 느껴지니 당해 주려야 당해 줄 수 없는 상황.
잠깐의 방심. 한 번의 실수로 보인 빈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마치 사냥감을 사냥하는 늑대처럼.
그렇게 여덟 합을 나누었을 무렵.
서걱.
살귀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귀영신투에게로 향하다 말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다른 하나의 살귀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다음."
[4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9] 49화. 살귀(殺鬼) (2)
귀영신투에게 향하다 말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다른 하나의 살귀.
순식간에 예상치도 못한 상대에게 동료를 잃은 탓일까. 복면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를 여실히 드러낸 녀석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다음."
하지만 녀석은 그대로 발걸음을 꺾어 다시 귀영신투를 향해 전력으로 신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살수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등 돌려 도망치는 모습은 처음 본다.
"허어."
절로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삼켰다.
분명 나는 과거의 경지를 일부 되찾아 절정 초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내공만으로 이룬 경지.
이제 검기를 피할 필요 없이 똑같이 검기를 두른 검을 맞댈 수 있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쓰러뜨릴 자신이 있지만....
몸까지 절정 무인에 걸맞은 수준이 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내공을 둘러도 기본이 되는 외공 수련이 부족하니 신체 능력을 일정 이상 끌어올릴 수 없으니까.
즉, 전신을 움직여야 하는 경신법의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
아마 녀석이 나를 상대하는 대신 귀영신투에게로 향한 것도 조금 전의 전투를 보고 이를 알아차렸기 때문이겠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애초에 놈들의 목적이 내가 아닌 귀영신투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는 간다.
어느 정도의 경지를 이룬 무인이라면 정사를 가리지 않고 품은 자부심이 살수에겐 없을 테니까.
살수의 보법답게 빠르게 멀어지는 등. 쫓아가는 건 불가능하니 일단 큰 소리로 외쳤다.
"어르신! 하나 놓쳤습니다!"
싸우다 말고 이쪽을 힐끗 바라보는 귀영신투. 여유가 없는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그의 움직임이 조금 변했다.
기회를 보아 중간중간에 주먹을 뻗던 것을 그만두고, 오로지 회피에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
이제 보니 몸이 쇠하여 움직임이 느리고, 다리 하나가 없어 연속된 움직임이 불가능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귀영신투의 보법은 감탄스러운 수준이었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인지의 간극을 파고들어 언제나 반 박자 느린 대응을 강요한다.
심지어 중간중간에 조금 전에 살귀 놈들이 타고 왔던 절벽에 발을 딛고 몸을 튕길 때가 있는데,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성기에는 화경 무인이 지키고 있는 곳도 털었다는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었으리라.
이 정도면 잠깐 버티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귀영신투가 있는 곳을 향해 땅을 박찼다.
도중에 슬쩍 당소월과 부대주가 있는 곳을 보았는데... 음. 저쪽은 굳이 신경 쓸 필요 없겠네.
일급 살수의 대부분은 당소월의 독에 죽거나 죽어 가는 중이었고,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살귀 하나는 붙잡고 늘어지는 독혈부대주 탓에 독기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쓰러뜨릴 수 있을 터. 결국 이쪽만 잘하면 된다는 건가.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법 가까워진 거리. 나름 이쪽을 견제하려는 건지 검게 칠한 비도 두 자루가 날아왔지만....
아무리 살행에 도가 튼 살귀라 하여도 사람인 이상 살기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 존재는 딱 하나.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천마 정도였으니까.
내 발등과 미간을 노리고 날아오는 궤적을 미리 읽고 움직였다.
채앵!
미간을 향해 날아오던 비도는 검으로 걷어 내고, 발등을 향하던 비도는 보법에 잠시 변화를 주어 왼발과 오른발이 내딛는 순서를 바꾸었다.
내 한 발짝 앞의 지면엔 꽂히는 비도. 이를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걷어차, 가장 가까운 살귀를 향해 돌려주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아가는 비도. 따로 암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손이 아닌 발로 걷어찬 것에 불과해 그리 대단한 속도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날붙이는 날붙이. 호신강기라도 두른 게 아니라면 대응할 수밖에 없다.
"쯧."
살귀 하나가 혀를 차며 몸을 꺾었다. 완전히 피한 것도 아니고, 그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도록 한 것.
그 잠깐의 멈칫거림이면 충분했다.
"백살귀! 조심해라! 아까 말했듯 저 녀석은...!"
내가 조금 순식간에 살귀 하나를 베어 버린 모습을 본 녀석이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발바닥의 중앙. 용천혈을 통해 내공을 폭발시키듯 분출했다.
파앙!
순간 감각이 사라진 한쪽 발. 뒤늦게 얼얼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 대신 순간적인 가속을 얻었다.
지금의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단 한 번뿐인 도약.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에 백살귀라 불린 녀석의 눈이 부릅뜨며 귀영신투가 아닌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창 싸우던 중이라 그런지 이미 권기에 휩싸인 주먹이 내 쪽을 향해 뻗어온다.
아니, 주먹처럼 보이지만 느슨하게 쥔 것을 보아 여차하면 그대로 손등으로 검을 쳐내거나 아예 검신을 잡아챌 요량이리라.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잘 단련된 권사의 손은 평범한 날붙이로는 베기 힘들 만큼 단단하고, 어찌 됐든 신외지물인 무기보다 제 몸인 주먹에 내공을 둘러 발하는 권기가 더욱 강력하니까.
하물며 내 외견은 아직 지학에 불과한 어린 나이 아닌가. 이런 종류의 힘 싸움에서 밀릴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실력 있고, 경험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같은 판단을 했을 터.
다만, 나는 그러한 상식적인 판단에서 벗어난 존재다. 그 어떤 이가 눈앞의 적이 회귀라는 비현실적인 현상을 겪었다고 생각하겠는가.
검을 든 어깨를 한껏 뒤로 젖혔다. 마치 활시위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명백한 찌르기 자세에 백살귀의 눈에 조소가 피어오른다.
찌르기를 활용한 초식은 하나같이 강하고 빠르지만 실패하면 큰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마 지금쯤 나를 자신의 무위에 취해 상대와의 내공 차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경험 부족 정도로 생각하는 거겠지.
바라던 바다.
"스읍."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광랑탈명공의 살기 섞인 기운이 내 의지에 따라 검신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어디로 날뛸지 모르는 맹수처럼 거친 성질. 하지만 내겐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수족에 불과하다.
아직 그 양이 만족스럽지는 않으나, 약간의 기교를 부리기엔 충분하겠지.
검신 위로 조금씩 피어오르는 붉은 기류. 점점 진해지던 검기는 어느 순간부터 회전하기 시작했다.
백살귀를 향해 겨눈 검 끝을 기준으로 나선을 그리는 검기.
허공을 물들이는 적색 와류에 백살귀의 눈동자 위로 경악이 떠오른다.
동시에 길게 부유하던 발이 드디어 땅에 닿았다.
쿠웅!
강하게 발을 구르며 진각을 밟는다. 지금까지 달리던 몸이 우뚝 멈춰 서며, 그 힘이 고스란히 발목을 타고 위로 올라간다.
종아리를 지나, 무릎, 허벅지, 옆구리, 그리고 등짝을 지나 더욱 위로.
근육과 관절이 그리는 작은 회전을 통해 무리 없이 전달되고, 그 과정에서 한층 증폭된다.
사량발천근. 혹은 유(流)의 묘리라고도 부르는 그것.
무당의 도사들은 외부의 흐름마저 제 것으로 삼아 폭포를 거꾸로 되돌린다 했던가.
내겐 그 정도의 기량도 깨달음도 없으나, 진각을 통해 흘러들어온 힘을 어깨까지 전달할 정도의 요령은 있다.
그렇게 말 그대로의 전력(全力)이 어깨에 도달한 순간. 이를 한계치까지 잡아당긴 팔에 쾌(快)의 묘리를 담아 단숨에 쏘아낸다.
콰아앙!
폭발에 가까운 파공음. 붉은 검기의 와류가 허공을 거칠게 잡아 뜯으며 전진한다.
이를 악문 백살귀의 주먹이 단단하게 쥐였고, 그 위를 뒤덮은 권기 또한 보다 두터워졌다.
조금 전처럼 검을 적당히 흘려내거나 붙잡는다는 선택지를 포기한 모양새.
살수답게 평범한 권법을 익힌 건 아닌지, 도중에 팔꿈치 부근이 한 마디 정도 늘어나며 주먹의 궤적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허나, 이 정도의 오차는 별 의미도 없다.
쏘아진 찌르기와 주먹이 가까워진 순간. 검 주변을 휘감고 있는 와류에 끌려가듯 한차례 뒤틀렸던 궤적이 다시금 꺾인다.
충돌하는 주먹과 검 끝. 검기와 권기 사이에 이루어지는 잠깐의 대치. 그리고.
푸욱!
순식간에 주먹을 넘어 팔 전체를 관통한 검이 녀석의 목을 꿰뚫는다.
"...!"
입을 뻐끔거려 보지만, 말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내던 녀석이 그대로 쓰러진다.
"후우."
잠시 참았던 호흡을 내뱉으며 뻐근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간 내공이 부족해 몸으로만 싸웠는데 오랜만에 검기를 제대로 쓰니 조금 즐겁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검을 좋아하긴 한다는 거겠지.
물론, 조금 전의 일격은 내게도 상당한 반동이 있었다.
남은 내공은 이제 절반 정도, 무리한 내공 운용 때문에 혈도에 가벼운 내상을 입었으며,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담았음에도 힘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하고 약간 흘린 탓에 전신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다만, 그럼에도 단숨에 살귀 하나를 줄였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이득이겠지.
이젠 서로 둘씩 아닌가. 수적 불리가 사라졌으니 기량의 비중이 더욱 커졌으리라.
그리고 나는 기량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자신한다. 절대 고수라 불리는 화경 무인쯤 되면 모를까 저런 살수 중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정도로는 내게 닿을 수 없다.
지학의 나이에 검기를 자유자재로 뽑아내는 것은 물론, 일검에 살귀라 불리는 절정급 무인을 격살한 탓일까.
귀영신투가 감탄과 어이없음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년에 하늘이 내린 천재를 둘이나 보았구먼."
"하나는 저겠고, 다른 하나는 누구입니까?"
"말하지 않았나. 당대의 마교주 말일세."
"...글쎄요. 제가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귀영신투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강함은 재능이 아닌 회귀라는 특수한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전생에 도달했던 경지까지는 빠르게 성장하겠지. 하지만 그 이후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화경이라는 드높은 벽이다.
이전 생의 나는 죽음의 위기를 넘어 죽음 그 자체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결국 벽만 두드리다 끝났으니까.
하지만 천마는 달랐다. 내가 결국 넘지 못했던 벽을 진작에 뛰어넘은 화경 무인들의 협공을 받아 내고, 역으로 그들 대부분을 쓰러뜨렸으니까.
귀영신투는 목숨을 걸고 천마에게 진상될 예정인 영약을 빼돌렸지만... 솔직히 말해 이게 천마의 약화로 이어질 것 같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생의 마지막 순간, 독무후로 불리며 화경의 경지에 오른 당소월을 몇 수만에 쓰러뜨리고, 이에 격분해 달려들던 나를 손짓 한 번으로 짓뭉개던 그 순간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세상을 뒤덮는 거대한 칠흑의 마기. 천마라는 오만한 별호에 걸맞는 압도적인 강기공.
아무리 대단한 영약이라도, 그 정도의 힘을 휘두르는 이에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리라.
실제로 귀영신투가 마교에서 훔친 영약은 결국 천마가 아닌 운 좋은 양아치들에게 흘러 들어갔다.
이번에는 우리가 남긴 흔적 때문에 추적하던 살수에게 들킨 것이지, 회귀 전에는 마지막까지 은신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을 터.
헌데 그런 진짜 괴물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 씁쓸할 수밖에.
다만 아무리 막막하다 해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우선은 눈앞의 살귀를 마저 쓰러뜨리는 것부터....
"음?"
일검에 살귀 하나가 당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멀찍이 물러난 녀석들.
둘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빨을 강하게 깨물었다. 마치 사이에 끼워둔 단약이라도 씹는 것처럼.
뒤이어 놈들의 기세가 폭증하기 시작하더니, 피부가 거무죽죽하게 물들고 눈에서는 핏빛 안광이 일렁인다.
완벽하진 못했으나 뛰어난 살수답게 은밀하게 정련된 살기가 주변을 마구잡이로 할퀴는 것은 덤이었고.
얼핏 보면 주화입마에 걸린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나는 안다. 저건 주화입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마폭단(魔爆丹)? 저걸 왜 살수가...."
마폭단은 마교의 비전이다.
아무리 살곡이 마교의 의뢰를 수행하는 중이라도, 쉬이 받아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4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0] 50화. 살귀(殺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