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50] 50화. 살귀(殺鬼) (3)

"마폭단(魔爆丹)? 저걸 왜 살수가...."

선천진기의 존재가 밝혀진 이후로,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파 무림에서 자주 보이는 잠력 폭발 계열 무공.

일시적으로 내공과 신체 능력이 폭발적인 성장을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탈진하거나, 심하면 기혈이 뒤틀려 더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 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럼에도 익히는 사람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닿을 수 없는 힘을 잠깐이나마 휘두를 수 있게 해주니까.

당장 내가 광랑탈명공을 만들 때도 잠력 폭발 계열 무공 몇 개를 참고했었다. 덕분에 폭발적인 내공 운용의 실마리를 얻었고.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천진기를 격발했을 때의 폭발력은 모방하는 것일 뿐, 정말로 선천진기를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가는 탈진이나 무공의 상실 수준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죽음을 맞이했을 터.

애초에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구명의 한 수가 필요하여 익히는 것인데, 목숨이 날아가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마교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제대로 된 무공이 없어 부작용을 감수하고 마공을 익히는 판국에 선천진기가 대수겠는가.

천마를 제외한 마교도들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놈들의 무서운 점은 무위가 아닌 불타는 복수심에 있다.

당연히 목숨을 내던지더라도 순간적으로 큰 힘을 얻는 방법에 관해 활발한 연구가 있었고.

마폭단(魔爆丹) 또한 그 과정에서 탄생한 마교의 비전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는 잠력 폭발 계열 무공의 공능을 구현해 주는 단약.

하지만 그 효율은 원본이 된 잠력 폭발 무공의 몇 배를 뛰어넘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무인들과 달리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더라도 눈앞의 원수에게 한칼 먹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

정말로 선천진기를 격발시키는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주화입마를 일으켜 반발력까지 활용하는 약이니 말 다 했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필연적인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약효가 다하기 전까지의 효과는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살귀 둘은 어찌 된 영문인지 마교의 비전인 마폭단을 삼켰다.

일단 비전인지라 만드는 것도 어렵고, 외부인에게 내어주기는 더더욱 어려울 텐데 말이다.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르는 기세. 피부는 시꺼멓게 변색하여 죽어 가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주화입마의 증상인 핏빛 안광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은밀하던 살기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주변을 할퀴는 것에 기겁한 귀영신투가 내게 물었다.

"이보게. 방금 마폭단이라고 했나? 혹시 저들이 먹은 환약이 뭔지 알고 있는 겐가?"

"마교의 비전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살곡이 마교의 의뢰를 받아 추적하고 있었다 하셨지만...어쩌면 좀 더 복잡한 관계일지도 모르겠군요."

"이거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구먼."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귀영신투. 다소 지친 표정이었으나, 굳게 다물린 입가에서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졌다.

하여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십쇼."

"이 늙은이가 뭘 할 줄 알고 그러나?"

"그건 모르겠지만, 죽음을 각오한 이들은 대개 지금의 어르신 같은 표정을 짓더군요."

"거 어린놈이 별걸 다 아는구먼."

헛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잡는 귀영신투. 무릎을 살짝 굽히고, 팔을 자연스레 늘어뜨렸을 뿐인데 그 존재감이 극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눈으로 보면 보이지만, 마치 사람이 아닌 계곡 바닥을 굴러다니는 바위라도 본 것 같은 기분.

지금의 살귀 놈들보다 더욱 살수 같은 모습에 내심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무덤을 만드는 중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어쩌다 보니 여기가 내 무덤이 될 것 같지만 말이야."

"여기서 살아 돌아가시면 무덤에 넣을 무공 중에 괜찮은 거 몇 개 빼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어? 그야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얼마든 해 줄 수 있지. 이 늙은이의 무공 빼고는 뭐든 내어주겠네."

"어르신의 경신법은 분명 훌륭하지만, 제가 익힌 것도 썩 나쁘지 않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약속하신 겁니다?"

"좋네. 무공은 물론이요, 무덤의 위치가 실린 장보도까지 덤으로 주겠네."

"그건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에야 의미 있는 물건 아닙니까. 아무튼 정해졌으니 저쪽을 부탁드립니다."

"흠?"

옆쪽. 당소월와 독혈부대주가 마찬가지로 마폭단을 먹고 폭주하는 살귀에게 역으로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가리켰다.

"저쪽을 도와 먼저 처리하고 주시겠습니까. 이쪽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죠."

"...괜찮겠나?"

"제 실력은 아까 보셨잖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귀영신투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조금만 버티고 있게. 금방 끝내고 올 터이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특유의 바닥을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으로 당소월 쪽으로 향하는 귀영신투.

동시에 갑자기 불어난 힘을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리던 두 살귀가 동시에 땅을 박찬다.

콰앙!

살수의 무공이라기엔 너무나 요란스러운 소리. 지면이 움푹 패일 정도로 강하게 걷어찬 둘이 형형한 살기를 뿜어내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속도에 다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어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스듬히 내려찍는 유엽도와 일직선으로 빠르게 내질러진 자검(刺劍).

망설임 없이 내 목덜미를 베고, 심장을 찔러오는 둘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놈들은 귀영신투를 노린 척했을 뿐, 진짜 목적은 처음부터 나였다는 것을. 아마 나를 배제하지 않고는 귀영신투를 쓰러뜨리지 못하리라 생각한 거겠지.

이를 악물며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나아갔다. 무기가 완전히 휘둘러지기 전, 아직 힘이 실리지 않은 시점을 노려 아래서 위로 내지른 검.

잘 정련된 적색 검기와, 탁하지만 짙은 유엽도의 회색 검기가 충돌한다.

콰앙!

워낙 검기에 들어간 힘이 큰 탓인지 쇳소리가 아닌 작은 폭발에 가까운 굉음이 울려 퍼진다.

반 박자 늦게 그에 어울리는 수준의 반동이 검을 타고 팔로 전해져 온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금 전이라면 모를까 놈들이 마폭단을 삼킨 지금은 힘 싸움은 물론, 검기의 위력으로도 이길 수 없다.

하여, 충격에 저항하며 버티는 대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멀찍이 날아가는 몸뚱이. 비스듬한 궤적 탓에 허공에서 몸이 비스듬하게 꺾이며 회전한다.

덕분에 뒤이어 내 심장을 노리던 기다란 자검은 가슴팍이 아닌 옆구리를 찌를 수밖에 없었다.

"큭!"

살이 한 움큼 뜯겨나갔지만, 그래도 심장이 부서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

허공에서 빠르게 점혈을 통해 지혈하고는 그대로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살짝 굽혔던 무릎을 단숨에 펼치며 튕기듯 땅을 박찼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를 가늠하며 얇게 퍼뜨렸던 살기를 한곳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놈들은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해 기운을 줄줄 흘리는 것은 물론, 주화입마가 시작되어 살기를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스쳐 지나가는 살기를 감지해 궤적을 예측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한데 집중하는 것이 옳으리라.

들끓는 살기를 내부로 발산하는 대신 내면으로 수렴시켰다.

모든 이가 처음부터 정기신을 품고 태어나며, 이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로 무위가 정해지는 것이라면.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 타인을 위축시키고, 심하면 내상까지 입히는 살기는 가장 흔하며 가장 미숙한 의념의 활용일 터.

내공에 살기를 녹여내는 것으로 광랑탈명공이 여타 신공에 밀리지 않는 위력을 갖게 된 것은 그래서이며, 더 짙은 살기를 녹여낼수록 그 위력은 강해진다.

...그만큼 부작용 또한 늘어나겠지만.

코끝을 스치는 탄 냄새와 비릿한 혈향.

두 눈은 분명 다음 초식을 이어 나가는 살귀를 향하고 있었으나,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넘실대는 화마에 휩싸인 전각. 바닥을 가득 채운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는 강처럼 흐른다.

붉게, 그저 붉게 물든 심상이 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설리향을 잃고, 서문화린을 잃은 그날. 손에 들린 검 한 자루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그날.

회귀 전의 당소월은 벽 앞에서 방황하는 내게 조언했다. 심상에 품는 것은 무인의 이상이라고.

하지만 내가 품은 것은 나의 지옥이었다.

살고 싶어서 죽인다. 죽이고 싶어서 죽인다. 화가 나니까 죽인다. 무참히 살해당한 동료의 복수를 위해 죽인다. 그냥 죽인다.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지는 잊은 지 오래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살의뿐.

그리고 내 검은 이 지옥에서 완성되었다.

"후우."

짧은 한숨에 가까운 호흡. 어느새 내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풍경은 사라지고, 잔뜩 충혈된 눈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두 살귀만이 보였을 뿐.

이번에는 내 목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자검을 향해 검을 뻗었다.

어느새 내 검에 휘감긴 검기는 한층 뚜렷해져 있었다. 그 기세는 화염처럼 넘실댔으며, 색은 짙어지다 못해 피처럼 검붉게 물든 상태.

그리하여 내 검이 자검의 옆면을 두드린 순간.

카드드득!

핏빛 검기가 자검의 회색 검기를 갉아먹고 불사르며 전진한다. 그리하여 얇은 자검을 완전히 두 동강 내기 직전.

유엽도가 내 허리를 양단할 기세로 날아들어 몸을 뺄 수밖에 없었다.

"쯧."

혀를 차며 물러나자, 뒤늦게 기겁하며 자검을 회수하는 살귀. 이제 보니 나한테 달려들다 말고 뒤돌아 귀영신투에게 향하던 녀석이다.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위축된 녀석.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 공포를 제거하기로 유명한 살곡의 살수에게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한 모습이다.

어쩌면 주화입마에 빠져 감정이 격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한번 노려 볼 만하다.

붉게 물든 심상에 고여있는 살기를 단번에 퍼 올렸다. 이는 나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애초에 그럴 수 있었다면 내 심상이 그리 끔찍하지 않았겠지.

평소처럼 날카롭게 갈아 내거나, 특정 인물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아닌 그저 쏟아 낼 뿐인 살의.

진득하게 주변을 잠식하는 살기에 맞닿은 두 살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명백한 동요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그러지. 날 죽이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것이 아니었나."

"...괴물 같은 놈. 누가 살귀(殺鬼)라는 건지."

낮게 뇌까리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다급히 자검을 들어 올려 막아내는 녀석.

뒤이어 크게 휘둘러진 유엽도가 내 어깨를 끊어 내려 든다.

하지만 그 속도가 조금 전과 달리 다소 둔하다. 여전히 마폭단을 먹기 이전보다는 빠르지만, 지금이라면 어찌어찌 대응할 수 있는 수준.

그거면 됐다. 주변에 두른 살기로 궤적을 읽는 것은 불가능해도 내겐 멀쩡한 두 눈이 있으니까.

발의 방향, 허리의 뒤틀림, 어깨의 각도, 그리고 시선 등등.

지금껏 여러 무공을 해체해 왔듯, 이번에는 상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해체해 예측하기 시작한다.

완벽하진 않으나, 당장 써먹기엔 충분하다.

쾅! 까득! 카앙!

연신 부딪히는 세 자루의 날붙이. 그럴 때마다 살귀의 회색 검기가 불똥처럼 부서지며 흩어진다.

죽거나 죽이거나. 그 모든 순간에서 상대보다 우월할 필요는 없다.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순간만 압도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상대의 팔이 완전히 뻗어지기 전에 한걸음 성큼 다가가 검을 맞대고, 서로의 검기를 부딪혀 갉아먹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될 것 같으면 즉시 몸을 뺀다.

때때로 피하거나 막아 내지 못하는 검격이 내 몸에 상처를 남겼으나, 근육과 뼈까지 베어 내는 일은 없었다.

출혈마저 피하지는 못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 대신 둘을 상대로 물러남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빠르게 소모되는 내공. 이제 슬슬 지금처럼 최대한의 검기를 뽑아내기 힘들어질 무렵이었다.

"크흑! 이건...!"

"저 독사 같은 년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살귀들의 몸이 확연하게 둔해진 것은.

내 내공이 다하듯, 마폭단의 유지 시간이 끝나서가 아니다. 원인은 놈들의 머리 위.

상공을 유유히 날개짓 하는 철나비였으니까.

추혼비접(追魂飛蝶). 오직 당가의 직계만이 다룰 수 있다는 비전 암기.

기본적으로 직선 혹은 곡선을 그리는 평범한 암기와 달리, 예측하기 힘든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하늘을 유영한다.

철나비가 한번 날개짓을 할 때마다 옅은 보랏빛 독분이 흩날렸고, 그 가루가 두 살귀의 머리에 닿은 거겠지.

물론 내게도 독분이 떨어졌으나, 내 혀 밑에는 당소월이 건넨 피독주가 있다.

지금껏 대등히 싸우던 놈들이 갑자기 둔해졌으니, 결론이 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걱!

유엽도를 든 살귀는 팔이 팔꿈치 부근에서 잘리고, 뒤이어 목의 절반이 베여 쓰러졌고.

자검을 든 살귀는 내 검을 막아 내려다 결국 자검이 산산이 부서졌고, 자신의 검기가 서린 파편에 눈을 잃은 뒤 목이 베여 쓰러졌다.

당소월의 개입으로 순식간에 기운 승패. 이를 자각하자 몰려오는 뿌듯함과 피로함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집요하게 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도는 추혼비접이 있었다.

"?"

눈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머리 위에 쌓여 가는 독분.

마비 독이었는지 슬슬 저릿해지는 몸뚱이와, 저 멀리서 울먹이며 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아."

내 심상에서 끌어올린 막대한 살의는 아직도 넘실대며 주변을 잠식하고 있었다.

즉, 다른 사람이 보기엔 완벽한 주화입마다.

[5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1] 51화. 오해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머리 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독분.

슬슬 저릿해 오는 몸뚱이와, 저 멀리서 울먹이며 이쪽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당소월, 그리고 내 주변을 잠식한 농도 짙은 살기에 깨달았다.

이거. 다른 사람이 보기엔 완벽한 주화입마겠군.

하여, 당소월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오...!"

오해다. 이건 주화입마가 아니라 내 무공의 부작용이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진정된다.

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쓸데없이 강력한 마비 독에 몸이 굳어 첫 한마디밖에 내뱉지 못했지만.

결국 한 손에는 늘어뜨린 검을, 다른 한 손은 당소월 쪽을 향해 뻗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춘 몸뚱이.

만약 평소에 하체 단련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했다면 그대로 넘어졌으리라.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당소월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하지요?! 천 소협이 주화입마에 빠지시다니...."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소협께서 주화입마에 빠지신 건 확실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실 겁니다."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니요! 저 농밀한 살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나요 부대주?! 단순한 기세도 아니고 살기에요 살기!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저렇게나 줄줄 흘려대는데 그게 제정신으로 보이시는지요!"

말이 너무하네. 물론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애초에 이 살기는 내가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삼킨 주화입마에서 비롯된 것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다만, 그럼에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또 뭔가.

속으로 투덜대던 것도 잠시. 이번에는 귀영신투가 잔뜩 지친 목소리로 독혈부대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호위 말이 맞네. 저 어린것에게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이리도 흉한 살기를 뿜고 있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닐세. 마지막에 하려던 말을 기억하나?"

"...오지 마. 라고 하려 했겠지요."

"맞네. 거기에 검이 아닌 빈손을 들어 올렸지. 이쪽을 말리려는 것처럼. 분명 저만한 살기에 휩쓸린 상태에서도 잊지 못하는 소중한 게 있는 걸 테지."

"아...!"

무언가 북받쳐 오르듯 눈을 크게 뜬 당소월. 다만, 그렇게 감격한 표정을 지어도 곤란할 뿐이다.

이 손은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독 좀 그만 뿌리라는 소리란 말이지.

피독주를 물고 있고, 내공도 열심히 돌리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뚫고 마비시킬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강한 독을 쓰는 건지....

속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자니, 이 정도면 됐다고 판단한 건지 내장된 독을 전부 소모한 것인지 더는 독분을 뿌리지 않는 추혼비접.

이를 회수한 당소월이 아련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중에 무차별적으로 흘러나오는 살기에 닿아 안색이 창백해지긴 했으나,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꿋꿋이 다가오는 것이 묘한 기특함을 불러일으킨다.

사서 하는 고생임에도 말이다....

나는 이미 심상을 본래 있던 깊숙한 곳에 가라앉힌 지 오래다. 지금 흘려대는 살기는 단순한 감정의 잔향.

답답할 때 악 소리를 지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당장은 시끄러울 수 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시원해지고 편안해지는 그런 것.

한동안 살기를 발산하고 나면 진정될 텐데, 당소월은 이를 기어이 뚫고 들어온다.

당소월이 조심스런 손길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천 소협. 제가 반드시 소협을 원래대로 되돌려 드릴게요."

"...."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

그리 말하고는 대답 없는 나를 살며시 끌어안는 당소월.

아직 전투의 여운이 남아,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당소월의 감촉이 더해진다.

넉넉한 옷자락 사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훅하고 들어오는 특유의 체향과 뒤늦게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 날카로운 검처럼 날이 선 기세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의 지옥이 설리향과 서문화린을 잃으며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를 그런 지옥에서 끌어 올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소월이다.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진정되는 감정.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소월은 내 목덜미에 머리를 묻은 채로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

"일전에 말한 적 있지요. 소협은 마치 검집 없는 검처럼 항상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고요. 그때는 미처 말하지 못한 말을 지금 할게요."

얼굴을 간질이는 당소월의 머리카락. 희미한 숨결이 귓바퀴를 쓸어내리며 다음 말을 잇는다.

"제가 소협의 검집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제가 소협이 돌아올 장소가 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제 품에서 편히 쉬시지요."

그리고는 천천히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는 당소월. 이대로 수혈이라도 짚으려는 건지 들어 올린 손가락에 내공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사이에도 나는 계속해서 독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녹아든 살기가 짙어지며 그만큼 강해진 광랑탈명공의 내공은 효과적으로 체내의 독기를 불태울 수 있었고.

혀 밑에 숨겨둔 최상급 피독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독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거기에 내 내공 운용 능력까지 합쳐지면 아무리 당소월이 자화배독초로 강화된 독을 다룬다 해도 뻣뻣하게나마 움직일 정도는 된다.

진짜 주화입마에 빠져서 내공이 내 통제를 벗어나 날뛰는 상황도 아니잖은가.

필사적인 의미를 담아 뻗은 팔을 안쪽으로 굽혔다.

포옥.

"...어?"

한쪽 팔 뿐이지만, 이쪽에서 마주 안는 모양새.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했는지 허둥대는 당소월을 한층 강하게 끌어안았다.

"주, 화입마... 아니다."

"아, 읏, 흐앗?!"

이상한 소리를 내며 딸꾹질하는 당소월을 재촉했다.

"해독 어, 서."

"네, 네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주입한 마비 독을 다시 회수하는 당소월. 남아 있던 독이 깔끔하게 그녀에게 빨려 들어간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후우."

"히약!"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어째서인지 파르르 떠는 당소월. 그녀가 아직도 정신이 없는지 빙글빙글 도는 눈으로 물었다.

"저어. 천 소협?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는지요...?"

"어찌 된 일이고 자시고. 애초부터 주화입마에 걸린 적이 없다."

"예?"

"살의는 내 무공에 뒤따르는 부작용이다. 이번에 좀 무리했으니, 그만큼 살기가 폭주하긴 했지만 전부 통제하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 그러면 지금 제가 한 일은...."

"으음.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밖에 할 말이 없더군."

"...."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얼굴이 빨갛게 물든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 검집이 되어 주겠다고 했던가."

"꺄악!"

부끄러운지 말아쥔 주먹으로 내 등을 통통 두드리는 당소월. 자꾸만 멀어지려 하길래 팔에 힘을 강하게 주어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꾸 어딜 가려고 그러나. 내가 돌아올 장소가 되어 준다 하지 않았나."

"이, 잊으세요! 잊어 주시지요!"

"싫다. 그렇게 비장하게 다가와 어떻게든 해 주겠다며, 자기 품에서 편히 쉬라는 약혼녀의 모습을 어떻게 잊겠나."

"끼야아아아악!"

이제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르는 당소월. 수치심에 바들바들 떠는 모습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과연. 내가 주화입마에 걸리면 당소월 너는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 이거 무슨 일이 있어도 살기에 집어삼켜지면 안 되겠군."

"그, 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저만 착각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부대주랑 귀영신투 어르신도...!"

"그래그래. 두 분도 헷갈렸겠지. 하지만 당소월 너처럼 나 하나 끌어안자고 미쳐 날뛰는 살기를 헤집고 다가오진 않았지."

"...익! 이익!"

너무 놀려댄 탓일까. 단순한 수치심에 약간의 분노를 담아 잇소리를 내는 당소월.

아니, 그냥 소리만 내는 게 아니다. 얼굴을 반쯤 묻고 있는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으니까.

피가 나지는 않게, 하지만 살짝 아플 정도로 우물대는 당소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잇자국은 그만 남기고 이제 떨어져라. 전투가 끝났으면 마무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이 일은 잊지 않을 거랍니다, 소협. 언젠가 복수해 주겠어요."

"이런. 당가의 복수는 무섭지. 하지만 나도 이제 당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멀쩡한 사람 머리에 마비 독을 뿌린 원한은 잊지 않겠다. 평생 기억하며 우울할 때마다 떠올리고 웃어야지."

"그냥 한 번쯤은 져 주면 안 되시는지요?! 이래 보여도 제가 소협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이랍니다?"

"그랬다가는 이렇게 안고 있을 이유가 없어지지 않나. ...무엇보다 착각이긴 했으나, 나를 위해 나서 주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기도 했고."

"읏!"

숨을 삼키는 당소월. 조금 전이랑은 다른 이유로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다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법.

뿜어내던 살기가 사라진 후. 독혈부대주가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평소의 덤덤한 표정 같아 보이지만,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것이 안도와 흐뭇한 그 사이의 어딘가인 듯한 얼굴로 입을 여는 부대주.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아가씨와 함께 쉬고 계시면 그사이에 시체의 수색을 마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부대주는 어디 다친 곳 없나?"

"가져온 독을 대부분 쓰긴 했지만, 이렇다 할 부상은 없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협."

꾸벅 고개를 숙인 부대주가 살수들의 시체를 뒤져 보기 위해 멀어진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당소월의 뒤통수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쉬고 있으라 하지 않았나. 실제로 지치기도 했으니 일단 앉지."

"...."

당소월이 말없이 끄덕이며 몸을 떨어뜨린다. 이번에는 붙잡지 않고 놓아준 뒤, 지금껏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예 드러누운 귀영신투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피가 묻긴 했으나, 자신의 상처는 없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다만, 워낙 기력이 쇠한 상태였으니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

품에서 소분해 둔 육포 꾸러미를 꺼내 그대로 귀영신투 쪽으로 던졌다.

휘익- 텁.

누운 채 손만 뻗어 잡아챈 그가 이쪽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꾸벅인다.

나 또한 마주 꾸벅여 주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는 당소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열심히 움직였더니 배고프다."

"...제 육포라도 드실런지요?"

"주면 감사히 먹지."

마찬가지로 간식처럼 먹으려 소분해 둔 육포 꾸러미를 꺼내는 당소월. 독혈부대주의 몫을 따로 빼두고 하나씩 나눠 먹으며 말했다.

"일단 급한 불은 끄긴 했다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예에. 이대로 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살곡이 그리 만만한 집단은 아니지요."

"살귀급은 놈들에게도 귀중한 전력이라 들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악착같이 달라붙지 않겠습니까. 살귀를 다섯이나 잃고 의뢰에 실패한 것과, 살귀를 다섯이나 투자하더라도 의뢰를 성공시킨 것은 전혀 다르니 말이지요."

"재수 없으면 살왕이 직접 나설 수도 있겠군."

"의뢰는 반드시 수행한다가 살곡의 자부심이니 말이지요."

거기에 마지막에 살귀 놈들이 삼킨 약은 분명 마교의 비전인 마폭단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마교의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마교의 침략이 있기 몇 달 전, 무림맹의 이름난 고수들이 살왕의 손에 암살당한 사건이 있다.

결국 마지막 희생자가 동귀어진의 수로 살왕의 목을 베며 막을 내렸으나, 꽤 떠들썩한 일이었기에 멀리 떨어진 광동성에도 소문이 들려왔을 정도.

그때는 단순히 살왕이 무리한 의뢰를 받다가 죽었구나 싶었는데....

어쩌면 의뢰의 주인이 마교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아예 살곡이 마교의 밑으로 들어갔거나.

어느 쪽이건 썩 좋지 않은 상황. 다만, 이를 알았고 알릴 기회가 있다는 건 오히려 행운이다.

회귀 전에는 모르고 일방적으로 맞다가 결국 그 꼴이 났지만... 이제는 아니잖은가.

증언해 줄 귀영신투가 있고, 이번에 쓰러뜨린 살귀는 증거 그 자체니까.

"이제부터 바빠지겠군."

"예에. 아무래도 다음 추격이 오기 전까지 서둘러야 하니 말이지요."

다른 의미로 했던 말이지만, 당소월의 말도 맞다. 어딜 가나 살수를 달고 다니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조금씩 무너지겠지.

그러다 재수 없으면 살곡의 악명에 한 손 거드는 신세가 될 테고.

잠시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예정대로 종남파로 가지."

이 주변에서 가장 가깝고, 살곡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으며, 도와줄 것 같은 곳은 종남파뿐이니까.

[5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2] 52화. 오해 (2)

독혈부대주가 시체를 뒤져 아직 사용하지 못한 마폭단 두 개를 회수했다.

일반 살수가 아닌, 내가 단숨에 죽인 살귀의 품에서 나오더라. 나름대로 귀한 취급인 모양.

그 외에도 검게 칠한 비도와 독이 담긴 구슬 향로를 회수했다. 아쉽게도 명령서나 지부의 위치가 담긴 지도 같은 건 없었다.

부대주에게서 받아 든 물건을 한차례 확인하고는 품과 행낭에 적절히 나눠서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한쪽을 잃어버려도 괜찮도록.

"이 정도면 되겠군."

사실 이것만으로는 살곡의 살수라 주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애초에 놈들은 특정 당할 만한 물건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곡의 악명이 높은 이유는 단 하나. 그 무공이 살수치고 높기 때문.

본래 무공이란 오랜 시간 대를 이어 연구하며 발전하는 것. 그렇기에 오래된 명문 방파의 힘이 강한 것인데....

살수는 조금만 강해지면 바로 임무에 투입되어 픽픽 죽어 나가잖는가. 구조적으로 무공이 강할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이를 해낸 살곡이 무림인들의 두려움을 사고 유명해진 것이지만.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자잘한 상처는 있지만 큰 외상은 없는 상태. 다만, 아직 덜 여문 혈도가 한층 거칠어진 광랑탈명공의 기운을 견디지 못해 내상을 입었다.

내공 운용 자체는 문제없지만, 한동안 전력을 끌어올리기는 힘들겠지.

"당소월 너는 괜찮나?"

"예에. 내공을 너무 써서 조금 지치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랍니다."

"부대주도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고 했었지. 다행이군. 그럼 어르신은...."

"다리가 한쪽 없는 거 말고는 멀쩡하네."

"...원래 없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멀쩡한 구석이 얼마 없었다는 뜻이네. 그래도 전보다는 낫지만. 뭐라도 먹으니 좀 힘이 나더군."

끌끌 웃으며 빈 주머니를 돌려주는 귀영신투. 그리 많은 육포가 들어 있던 것은 아니지만, 한동안 굶고 있던 그에겐 만족스러운 한 끼였나 보다.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팔 근육을 내보이는 자세를 취하는 귀영신투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이대로 종남파로 향해 도움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어르신은 어찌하실 겁니까? 예정대로 무림맹으로 향하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뭘 그런 걸 묻고 있나. 당연히 같이 가야지. 무엇보다 증거는 전부 자네가 들고 있는데 혼자 무림맹에 가서 뭐 하나."

생각해 보면 귀영신투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넘겨준 북해빙궁의 심법과, 사람 갈아 만든 영약이 내 품에 그대로 있었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됐네. 혹시 모르니 자네가 가지고 있게. 보아하니, 이 늙은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자네에게 있는 편이 더 안전한 것 같으니."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젓는 귀영신투. 꽤나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맡고 있죠."

"잘 부탁하네."

여차하면 내가 대신 무림맹까지 가져다 달라는 소리겠지. 비급과 목함을 꺼내려다 말고, 그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뒤이어 나머지 일행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결정된 것 같으니 종남파로 향하지. 부대주, 제대로 쉬지도 못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바로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그게 제 일입니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꾸벅이는 독혈부대주.

그녀를 따라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귀영신투의 조언에 따라 움직인 흔적을 지우면서

***

최소한의 휴식만 취하며 달리기를 사흘. 멀게만 보였던 산이 어느새 성큼 가까워졌고, 길게 늘어선 양민들의 행렬도 이따금 보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추가적인 습격은 없었다.

"천 소협. 이쯤이면 슬슬 숨을 돌려도 되겠지요?"

"그래. 여기서부터는 종남파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으니 괜찮을 거다."

"흐아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당소월. 폐에 있는 공기란 공기는 전부 끄집어낼 것 같은 기세가 꽤나 요란스럽다.

이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우리 쪽에 쏠렸으나, 이내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갈 길을 재촉한다.

그 눈빛을 알아챈 당소월이 눈을 끔뻑였지만... 사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의 우리는 꽤나 행색이 추레하니 말이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쉴 새 없이 경공을 펼쳤는데 씻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같이 꼬질꼬질한 모습인데, 심지어 한 명은 다리가 불편하기까지 하다. 누가 봐도 딱한 사정이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남산까지 찾아온 모양새.

뒤늦게 이를 깨달은 당소월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던 귀영신투가 그리운 표정으로 종남파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먼."

"...혹시 종남파에서도 뭔가 슬쩍하셨나요, 어르신?"

당소월이 설마설마하는 표정으로 묻자, 귀영신투가 자랑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장문인의 방에서 유운검의 검집을 빌려왔지."

"...."

"좋은 검답게 검집도 좋더군. 허허."

당소월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

유운검은 종남파의 상징이다. 장문인과 그 후계만이 익힐 수 있다는 유운검법의 이름을 따와 붙였을 정도로 오래된 신물.

그런 유운검의 검집을 훔쳤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검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는 소리 아닌가.

신투라는 별호가 붙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싶어 감탄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귀영신투에게 목숨이나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만큼은 훔치지 않겠다는 규칙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기도 하네.

어쩌면 지금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전대 고수가 아니라, 무림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무공을 누군가에게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신투라는 별호는 검왕이나 독왕 같은 하나의 상징이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귀영신투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아무도 모르게 동굴에서 숨을 거두었을 텐데, 그 동굴에는 훼손된 북해빙궁의 무공서와 영약만이 남아 있었으니까.

왜 무공서를 찢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자신의 진신무공을 남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지.

본래 죽음을 앞둔 고수는 인색하던 가르침에 후해진다.

자신이 지금껏 쌓아 온 것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것은 일종의 본능.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가능하면 그것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가문이 생기고, 문파가 세워진 것 아닌가.

허나 귀영신투는 이를 거부했다. 자신의 도둑질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며 딱 잘라 고개를 젓는다.

물어보지는 않았으나, 아마 무언가 사연이 있는 거겠지.

솔직히 귀영신투의 보법은 조금 탐난다. 이미 내겐 철혈당주가 만들어 준 보법이 있고, 이는 광랑탈명공에 딱 맞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렇다 하여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두 보법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한 가지 공유하는 묘리가 있다.

잘만 하면....

"약혼자 놔두고 이 늙은이 얼굴은 왜 그리 징그럽게 쳐다보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 싱겁기는."

이어지려던 상념이 귀영신투의 목소리에 끊긴다.

실없이 껄껄대는 귀영신투였으나, 그 시선은 마치 선을 긋는 것처럼 단호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고 미리 차단한 것처럼.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어르신을 기억하는 이는 얼마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종남파에서는 조용히 계셔야 합니다."

"걱정 말게. 한번 털었던 곳을 또 터는 취미는 없으니."

어이가 없지만 그렇기에 나름 믿음직한 이유. 종남파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그동안 고민하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약조하셨던 무공 말입니다만."

"아, 이 늙은이의 목숨을 살려줄 테니 내 무덤에서 원하는 무공을 하나 내어달라는 것 말인가. 기억하고 있네."

덤덤히 끄덕이는 귀영신투의 모습에 당소월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네? 싸우던 도중에 그런 약속을 하셨나요, 천 소협?"

"기왕 목숨 거는 거 뭐라도 하나 받으면 좋잖나."

"하지만 그건...."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는 당소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는 것 같은 모양새에 귀영신투가 고개를 끼어들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의협심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나, 지금의 내겐 부담스럽다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은혜를 입으면 언제 갚겠나."

"보답을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저희가 위험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네들 덕에 내가 죽지 않고 이리 살아남은 것 아닌가. 만약 자네들이 없었다면 동굴에서 굶어 죽었거나, 살수와 싸우다 죽었을 것이 확실하네."

끌끌 웃으며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귀영신투가 다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떤 무공을 원하나? 마음 같아서는 아예 무덤으로 데려가 고르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위치와 구조를 들켜 버리잖나. 필요한 무공을 말해 주면 나중에 가져오겠네."

"일단 그전에 질문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빙하진기는 북해빙궁에서 어떤 위치의 무공입니까?"

"아, 음한기공이 필요한 겐가? 솔직히 추천은 안 하네. 나름 상승무공인지라 북해빙궁에서도 귀하게 보관하고 있으나, 일종의 계륵 같은 것이니까."

"계륵 말입니까?"

"그래. 빙하진기는 북해빙궁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무공이네. 달리 말해 가장 불친절한 무공이기도 하지."

본디 사람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존재다.

남자는 양기가 더 짙고, 여자는 음기가 더 짙다는 소리도 결국은 음양의 조화 위에서 그러하다는 말이고.

만약 이 조화가 깨진다면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빙하진기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정순한 음한지기를 담는 데 집중한 무공이네."

북해처럼 추운 곳이 아니면 제대로 연성할 수 없고, 설령 어찌어찌 익히더라도 내공이 쌓일수록 몸 상태가 나빠진다.

"익히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정순한 내공을 쌓을 수 있지만, 구음절맥 같은 특수한 체질이라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일류 수준이 되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고 하네."

"정순한 음기?"

"특수한 체질...?"

나와 당소월이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귀영신투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심지어 빙하진기는 이 정순한 음한지기 그 자체를 무기로 삼는 무공일세. 강기공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겠지. 안 그래도 위험한 음한지기를 대량으로 다루는 무공이니 익힐 수 있는 이가 한정될 수밖에 없네."

그렇기에 북해빙궁에서 빙하진기는 오랜 전통의 상징이고, 강력하기까지 하지만 익히기가 너무 까다로운 무공이라 천천히 사장되는 중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몇 대전의 빙궁주가 빙백신공(氷白神功)이라는 희대의 음한기공을 창안하는 바람에 완전히 잊혀지고 남은 것은 상징성뿐인 무공이네."

빙백신공이 빙궁주의 비전무공이 되며 그 상징성마저 빚이 바래어, 지금은 계륵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나.

다만, 어차피 설리향이 익힌다면 아무런 상관없는 문제다. 빙하진기가 얼마나 정순한지는 모르겠으나, 순음지체가 그에 밀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

문제라고 할 만한 점은 따로 있다.

"빙하진기를 익힌 사실을 북해빙궁이 알면 문제 삼을 것 같습니다만."

"빙하진기를 알아볼 정도의 고수가 중원까지 내려올 일이 흔치는 않겠으나, 설령 들키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걸세. ...북해빙궁은 천천히 쇠퇴하는 중이니까."

"쇠퇴, 말입니까?"

"한 자리에서 그리 오랜 시간 음한지기만 쏙쏙 골라 먹는 무공을 수련한 걸세. 아무리 대자연의 기운이 방대하다고는 하나 슬슬 마를 때가 된 거지."

"허어."

"물론 그들도 나름 대책을 준비하는 모양이네만, 잘 될지는 모르겠군. 아무튼 그런 상황이니 북해빙궁의 무공을 훔쳐 익힌 이를 발견한다 해도, 빙궁의 일원으로 초대했으면 초대했지 해치려 들진 않을 걸세."

하기야. 무공을 다음 대로 잇는 것이 중요한 무가에서 그 무공이 끊길 위기인 거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설리향이 익혀도 괜찮으리라.

"내가 괜히 비고에 침입해 다른 무공을 제쳐두고 빙하진기를 훔쳐 온 게 아닐세. 음한기공을 원하는 거라면 차라리...."

"빙하진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자네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겐가? 뒤탈 걱정 없는 음한기공이 빙하진기 하나는 아닐세. 해남성의...."

"빙하진기로 받아 가겠습니다."

두 번이나 단호하게 말하자,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는 귀영신투.

"에이잉. 난 제대로 설명해 줬으니, 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따지지 말게. 알겠나?"

"걱정 마시죠."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투덜거리는 귀영신투의 목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종남파의 현판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저 도둑놈을 냉큼 잡아 와라!"

"아."

바로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5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3] 53화. 종남파

종남파(終南派).

멋들어진 글씨체로 쓰인 현판이 줄 서서 들어오는 방문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문에서 느껴지는 묘한 위압감. 다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럴만한 구석이 없었다.

산 중턱에 지어진 탓인지 그리 큼직하지도 않고, 도교 문파이기 때문인지 장식이 화려한 것도 아니다.

하물며 문지기 겸 방문객의 안내를 돕는 종남의 제자들이 위협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대체 무엇이 이러한 존재감을 만들어 내는가. 잠시 고민하던 순간, 내 시선이 아까부터 쭉 현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더 정확히는 현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에 가깝겠지.

"저 현판."

"예?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천 소협. 현판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검결이 담겨 있군."

그렇다. 저 거침없는 필체는 붓을 검처럼 잡고 휘둘러야 나오는 것이다.

부드럽고, 어디로든 뻗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손을 가져다 대면 베일 것 같은 예리함.

외유내강은 도교의 무학에서 자주 보이는 양상이라지만, 이 현판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 깊이가 남다르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유명한 신공절학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가까우리라.

오랜 시간, 수많은 천재가 일생을 바쳐 익히고 발전시켜 온 무공.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의 결정체.

기껏해야 나 하나를 품을 뿐인 내 무공에는 없는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발걸음도 멈추고 멍하니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주운 두꺼운 나뭇가지를 지팡이처럼 쓰고 있던 귀영신투가 끌끌 웃었다.

"이거 완전히 홀렸구먼."

"으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귀영신투님은 뭔가 보이시나요?"

"보이기야 하지. 자네의 약혼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일세. 이런 건 무위나 깨달음보다 순수한 검재(劍才)가 더욱 중요한 법이니까."

"검재...."

멍하니 중얼거리는 당소월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그렇게 바라보지 말았으면 하는데. 그랬다가는 또 내가 천재라며 착각할 것 같지 않은가."

"아, 그건 곤란하지요. 이야기만 들어도 당시의 천 소협은 엄청났으니 말입니다."

일전에 언급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들먹이자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렇게 한참을 웃은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천 소협은 저 현판에서 무엇을 보셨는지요?"

"유(流). 그리고 변(變)의 묘리가 끊임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어떤 묘리를 품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겠군."

면면부절(綿綿不絕).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부드러움도, 수백 가지로 뻗어 나가는 변화도 이를 위한 수단일 뿐.

그것이 검이 됐든, 무공 그 자체가 됐든, 혹은 다른 무언가가 됐든 말이다.

"현판에 담긴 검결은 어느 검법의 일부일 뿐이라 정확하지는 않겠으나... 만약 누군가 제대로 펼친다면 수많은 초식이 자유롭게 연결되는 느낌이 아닐까 싶군."

지금 생각해 보면 도가 문파의 검은 대개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회귀 전, 궁지에 몰린 정사가 힘을 합쳐 싸우던 시기. 이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반 이상이 멸문당했으나, 모든 구성원이 죽은 것은 아니었으니.

살아남은 일부는 연합에 합류했고, 덕분에 같이 싸우며 그들의 무공을 견식 할 수 있었다.

사문을 잃은 복수심으로 검에 살기가 그득하긴 했지만... 무당의 태극도, 화산의 매화도 결국 모든 초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동일했다.

초식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초식이 그러하다는 점이다.

어떤 초식을 어떤 순서로 펼치건 본래의 위력을 온전히 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귀영신투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추측이 맞네. 도가 무공에서 공통점이 느껴진다면, 그들이 같은 도(道)를 추구하기 때문이겠지."

"같은 도를 말입니까? 흥미롭긴 합니다만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실은 나도 잘 모르네. 내가 도둑놈이지 도사는 아니잖나. 다만, 예전에 막역한 친우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대부분의 도가 문파는 전진교라는 뿌리에서 갈라진 것이라고 하더군."

최초로 무공을 통해 도를 이루고자 한 도사들의 집단. 전진교는 오랜 옛날에 변질되고, 갈라진 끝에 멸문했으나, 그 가르침은 널리 퍼져 지금의 도가 문파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 종남산은 꽤 유서 깊은 곳이네.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생전에 그 가르침을 펼친 곳이기도 하며, 전진교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니 말일세."

"허어. 그 정도로 말입니까?"

"자네가 멍하니 바라보던 저 현판도 오랜 전통의 일부네."

아직 종남파가 지금처럼 이름 높은 문파가 아닌 시절. 뛰어난 자질을 지닌 이를 찾기 위해 당시의 장문인이 자신의 심득 일부를 담아 써 내린 현판이라고 한다.

현판의 글씨로부터 검결을 읽어 내는 자를 차기 장문인으로 삼기 위해서라나.

다만, 종남파가 커져 제자가 부족할 일이 없고, 순수하게 무재만 보고 장문인을 정하기엔 내부가 복잡해진 이후로 사라진 전통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저 현판을 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감이네. 종남파가 이렇게 위대하다, 이 정도는 얼마든 보여 줄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네."

"덕분에 하나 건진 것이 있으니, 제게는 감사한 일이군요."

이전 생에서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이 멸문한 이후에도 과거를 그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이 이해되질 않았었는데 요즘은 좀 알 것 같다.

지금껏 당가에서 봐 온 것들, 그리고 아직 현판뿐이지만 종남파의 당당함에서는 느껴지는 바가 많았기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앞장서서 나아가던 당소월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천 소협. 그만 멍하니 있고 빨리 올라오시지요. 이제 곧 저희 차례랍니다."

"지금 간다."

피식 웃으며 당소월을 따라 잠시 멀어졌던 앞줄에 바짝 붙었다.

그 뒤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좀 꼬질꼬질해지긴 했으나 우리가 당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는 간단했고, 사정을 설명하자 장문인이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으니까.

사천성과 섬서성이 바로 이웃한 곳이기에 당가와 종남파 사이의 교류가 활발했기에 가능한 일.

이제 남은 것은 종남파의 장문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당가에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

그런 이유로 종남파의 내부를 지나던 도중. 어느 노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배꼽까지 길게 늘어진 흰 수염. 정갈한 도복. 꼿꼿한 허리. 그리고 부드럽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세.

외부인으로 보이는 우리가 종남파의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이 의외였던 걸까. 선풍도골의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도사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이놈! 아무리 늙었어도, 그 뻔뻔스러움은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구나!"

"예, 예? 그게 무슨...."

순간 당황한 당소월이 흠칫 몸을 떨었으나,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나나 당소월 하물며 독혈부대주도 아니었다.

은근슬쩍 우리의 뒤에 숨으려던 귀영신투였지.

노인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외쳤다.

"종남의 제자들은 들어라! 저 도둑놈을 냉큼 잡아 와라!"

"아."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저 노인은 귀영신투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고, 심지어 얼굴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재수 없으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우리도, 명령을 받은 종남파의 무인도 순간 당황해 멈칫한 사이.

서로의 눈치만 보며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모습에 선풍도골의 노인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아이고! 답답해서 안 되겠다, 이놈들아! 그래! 차라리 내가 직접 갈 테니 구경이나 하거라!"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달려들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느껴지던 기세에서 짐작하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상당한 고수다.

아마 진작에 초절정에 올랐으나, 끝내 화경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이리라.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죽기 전에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아니! 자네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그러긴가!"

"그날부터 네놈은 친구가 아니었어!"

저 노쇠한 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모를 정도로 폭발적인 움직임. 귀영신투 또한 특유의 신묘한 보법으로 대응하려 들었으나.

그간의 피로가 쌓인 것은 물론, 한쪽 다리조차 없는 몸으로는 한계가 있는지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선풍도골의 노인이 허리춤의 검에 손을 뻗을 때는 기겁하여 나 또한 검 자루를 손에 쥐었으나....

날을 뽑는 대신, 검집 채로 들어 올린 검을 몽둥이처럼 휘두르길래 긴장이 탁 풀렸다.

"어디 네놈이 그리도 좋아하던 검집으로 좀 맞아 보거라!"

"아악! 자네 정말 이러긴가! 이젠 다리도 없는 불쌍한 친구를 그리도 괴롭히고 싶은 게야?!"

"누가 친구인가! 그리고 다리 한 짝은 또 어디다 버려 두고 왔어!"

걱정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선풍도골의 노인. 귀영신투가 지팡이 대용으로 쓰던 나뭇가지를 휘둘러 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검집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급격한 각도로 꺾이며 귀영신투의 지팡이를 피해 몸통을 후려치기를 반복한다.

빠르고, 변칙적이며, 유연한 검술. 얼핏 보면 그 고절한 무공에 완벽히 말려든 귀영신투가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이나마 함께 싸워 본 터라 알 수 있었다. 귀영신투가 그냥 맞아 주고 있다는걸.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 짐작하건대 아마 예전에 귀영신투가 저 노인에게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는 것이리라.

...십중팔구 도둑질과 관련된 일일 테니 자업자득이겠으나,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

어찌 됐든 귀영신투는 우리 일행이기도 하고, 이번 일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증인이기도 하니까.

하여 열심히 매타작 중인 선풍도골이었던 노인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바쁘신 와중에 잠시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으음? 너희는 또 무슨... 당가의 아이들이로구나."

"이번에 연이 닿아 당가의 정혼자가 된 천휘라고 합니다."

"당소월입니다."

반 박자 늦게 나를 따라 포권을 취하는 당소월의 모습에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을 줄이야. 세월이 참 빠르구나."

"저를 아시는지요?"

"막내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종남파를 대표해 당가에 방문한 적이 있네. 그때 잠깐 본적이 있지."

"그건... 기억이 안 날만 하네요."

"그냥 늙은이가 반가움에 헛소리했다 여기고 흘려주게나. 아, 나는 종남파의 삼 장로인 전일비라고 하네."

"삼 장로님이셨군요."

"허허. 이거 첫 대면에 못난 꼴을 보였구나. 예상치 못한 인연을 만나 너무 흥분한 모양이야."

날이라도 잡은 것처럼 날뛰던 삼 장로가 머쓱하게 웃으며 검을 뒤로 숨기며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귀영신투 이 친구를 놓아달라고 했던가?"

"맞습니다. 복잡한 사연이 있었던 것은 짐작 갑니다만, 지금은 잠시 귀영신투 어르신을 놓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저희는 지금 장문인께 향하는 중입니다. 귀영신투 어르신은 저희의 사정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분이시죠. 이후에는 제대로 돌려드릴 터이니 잠시만 부탁드립니다."

"뭬야? 그래도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어찌 이리 매정할 수 있더냐!"

귀영신투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지만, 이 자리에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삼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다만, 이 작자가 또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갈지 모르니 나도 같이 가지."

"그러시다면야."

결국 검을 다시 허리춤으로 되돌린 삼 장로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새 부러진 나뭇가지 대신 직접 귀영신투를 부축해 주며 말했다.

"일단은 가세. 쌓인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풀기로 하고 말이야."

"...그러지. 나도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잔뜩 있으니."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 나란히 붙은 둘의 모습을 보며 당소월이 작게 속삭였다.

"검집만 훔쳐서 정말 다행이네요."

"음. 그러게 말이다."

만약 유운검을 훔쳤다면 검집으로 몇 대 얻어맞는 게 아니라 검날에 베였을 테니까.

[5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4] 54화. 종남파 (2)

종남파 장문인의 인상은 예상과 꽤 달랐다.

당대의 장문인은 유운검선(流雲劍仙)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중원의 몇 없는 화경 무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결국 천마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나, 그전까지는 누구도 쉬이 대적할 수 없는 절대고수 중 하나.

분명 그에 걸맞는 분위기를 자아낼 것이라 생각했으나.

"삼 장로. 또 일거리를 만들어 오신 것이오?"

"허허. 이번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네. 굳이 말하자면 일거리가 굴러들어 온 것이겠지."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중년과 노년 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외견.

머리는 반쯤 희끗희끗해졌으나, 눈가에는 이와 대조되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종남파라는 거대한 문파를 이끄는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피로해 보이는 외견.

무인이 아닌, 문사에 가깝게 느껴지네. 그것도 부서를 잘못 걸린 불쌍한 문사려나.

본래 이 넓은 중원에서 화경이라는 드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을 만나기는 지난한 일이다.

다만,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꽤 많은 절대고수를 만나 보았다.

독무후라 불리던 회귀 전의 당소월, 독왕 당진천, 철혈당주 서문화린, 그리고 사흑련주까지.

친근함과는 별개로 하나같이 아득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이들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들이 정립한 무공의 흔적이 느껴졌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렇기에 눈앞의 유운검선이 더더욱 놀라웠다. 며칠을 쉬지 않고 싸워도 멀쩡한 고수를 대체 얼마나 혹사시켜야 저 지경으로 만든단 말인가.

가장 가까운 혈육을 화경 무인으로 둔 만큼, 이것저것 보고 들은 게 많은 당소월도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뜬 상태.

정작 유운검선은 익숙하다는 듯, 우리의 시선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소.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꼴이 말이 아니구려. ...이는 피차일반 같지만 말이오."

"앗! 처음 뵙겠습니다, 유운검선님. 당가의 당소월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소. 미리 연락을 받은 것도 있고, 젊은 시절의 자네 모친과 얼굴이 쏙 닮기도 했으니."

"제 어머니를 아시나요?"

"오래전. 아직 독룡이라 불리던 진천이 녀석과 함께 무림행을 다녔던 적이 있소. 그때 몇번 봤었지."

"아."

예상치 못한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멍한 표정을 짓는 당소월. 유운검선이 그런 그녀를 향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 무림행에 변고가 있었다길래 걱정했건만, 다행히 잘 해결되어 이리 다시 나올 수 있었나 보구려. 좋은 방을 내어줄 터이니 원하는 만큼 편하게 머무르며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시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다른 일로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다른 일 말이오?"

당소월이 뒤에 있는 일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쪽은 제 정혼자와 저희의 호위를 맡은 독혈부대주입니다."

"천휘라고 합니다."

"종남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호위야 일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이해하겠지만 정혼자라니!"

놀란 유운검선이었으나, 아직 당소월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쪽은 전대고수이신 귀영신투님이시고요."

"...방금 뭐라 하였소? 귀영신투라면 그 귀영신투를 말하는 것이오?"

유운검선이 눈을 크게 뜬 채, 뒤에서 귀영신투를 부축하는 건지 구속하는 건지 모를 자세의 삼 장로 전일비를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질문에 전일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당시의 장문인께선 어렸을 테니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유운검의 검집을 훔쳐 간 그 도둑놈이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랐으나, 소란스러웠던 기억은 있소. 이리 장문인 자리에 오른 뒤에는 기록으로 보았고. ...다만, 그 일은 이미 끝난 일 아니오."

"검이 아닌 검집만을 훔쳐 갔다는 점, 그리고 잃어버린 전진의 무공을 대신 놓고 갔다는 점을 고려하여 전대 장문인께선 귀영신투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셨었지."

"그렇다면 이제 와서 귀영신투를 잡아 온다 한들, 처벌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겠구려."

"물론이네. 내가 이리 귀영신투를 붙잡고 있는 것은 과거의 인연 때문일 뿐이니, 장문인께선 내가 아닌 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게."

"허어."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다시 이쪽을 바라보는 유운검선. 당소월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찌 된 것이냐면...."

당소월이 차분한 목소리로 하오문을 통해 들은 습격의 배후, 그리고 대망산에서 우연히 발견한 귀영신투의 은신처와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 마지막으로 살귀들이 먹은 마교의 비약까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중간중간에 마폭단과 귀영신투가 마교에서 훔쳐 온 영약을 보여 주는 것은 덤이었고.

처음에는 다소 나른해 보이던 유운검선의 표정이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점점 커져 가는 압박감. 분명 있는 듯 없는 듯했던 기세가 조금씩 그 몸집을 부풀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것이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겠지. 유운검선이 미간을 찌푸린 것은 마교에서 사람을 갈아 영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으니까.

지금의 유운검선에게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분위기에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경지를 숨기고 다니거나, 다른 화경 무인에 비해 못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조각구름처럼 무해하다가도 언제든 비바람을 머금은 먹구름처럼 날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을 뿐.

그 변화무쌍함이야말로 유운검선의 깨달음이고, 평생에 걸쳐 체화시킨 종남의 무공인 거겠지.

순간 떠오른 것은 현판에 새겨진 검결. 이를 몸으로 체현한 존재가 바로 눈앞의 유운검선이겠지.

...이러한 기질을 자연스레 두른 무인의 검은 어떤 것일까. 내 검으로는 어디까지 대응할 수 있을까.

회귀 전에 보았던 종남파의 생존자들이 펼치던 무공을 참고해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맞대 보았으나, 영 감이 오질 않는다.

호승심과는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순수한 흥미에 가까우려나.

내가 본 적 없는, 상상할 수 없는 검이 궁금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영약을 구해 빠르게 이전 생의 무위를 되찾을 생각이었지, 종남파와 화산파에 들르는 일 자체는 별 기대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본 종남과 화산의 무인은 멸문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대단치 않은 이들뿐이었기에.

하지만 지금. 이렇게 온전한 종남파의 모습을 보고 나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당가에서도 자주 감탄하긴 했지만... 여긴 내게 한층 친숙한 검문이기 때문일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당장 지금도 현판에서 본 검결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유운검선을 보고 기세 조절이 대단하다고 여기고 넘어갔을 터.

사파에서 칼부림이란 곧 생사결을 의미하지만, 정파에서는 다른 문파의 후기지수끼리 대련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다.

심지어는 아예 무림맹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비무 대회인 용봉지회라는 것도 있을 정도.

상황이 이러니 지금은 힘들겠지만, 만약 당초의 계획대로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종남과 화산을 방문했다면.

그랬다면 어쩌면 검으로 유명한 두 문파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같은 후기지수끼리 붙을 테니 대단한 무언가는 없겠으나... 뿌리를 살짝 엿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검을 발전시켜 왔는지. 그것만 알아도 큰 도움이 되리라.

"아."

그제야 깨달았다. 회귀 전의 나는 명문 정파의 검술을 제대로 접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름 높은 검문은 대부분 정파 소속이고, 죄다 천마의 손에 멸문당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무공을 계승한 이들도 있었으나... 복수심과 체념으로 얼룩진 검은 본래의 의도와 멀어진 상태였고.

무엇보다 살기가 그득한 것이 내겐 너무나 친숙한 검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온전한 정종검공이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리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문득 주변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흐르는 어색한 정적. 먼저 입을 연 것은 히죽이던 귀영신투였다.

"끌끌. 일비 이놈아.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현판의 저 아이가 현판의 검결을 알아봤다고."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않나. 그저 기세만으로 둘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글쎄. 일단 한 명 눈앞에 있긴 하네."

키득이는 귀영신투의 모습에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유운검선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음? 아, 괜찮소. 현판이야 다 보라고 걸어 둔 것이고, 기세 또한 노기를 미처 숨기지 못해 드러난 것이니 말이오. 그 둘에서 무엇을 가져가든 소협의 능력일 뿐,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다만, 궁금하긴 하구려.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있었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모르는 검이 많다는 것을 되새겼을 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도 있는 법이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아직 유효하오. 종남은 그대들을 당가의 마중이 오는 날까지 살곡으로부터 보호할 터이니, 편하게 머무르며 느긋하게 둘러보시오. 견문을 넓히며 성장하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 아니겠소."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무림의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실은 이쪽도 바라는 게 있기도 하고 말이오."

"바라는 것이라 하심은...."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유운검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종남의 무학이 소협에게 새로움이었다면, 이는 종남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괜찮다면 머무르는 동안 친선비무를 좀 해 줄 수 있겠소?"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아니, 오히려 제겐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잘됐구려. 일단 며칠은 푹 쉬고 편할 때 연무장으로 나와 주시오. 미리 말해 둘 터이니 언제든 상관없소."

"그리하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피곤한 사람을 너무 붙잡은 것 같구려. 사람을 붙여 줄 터이니 이만 쉬시오. 아, 귀영신투께선 잠시 남아 주실 수 있겠소?"

"...나도 피곤하네만. 심지어 나이도 많네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오. 직접 마교주를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을 뿐이니."

"그런 거라면야 어쩔 수 없지."

투덜대면서도 끄덕인 귀영신투. 삼 장로가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에서 의자 하나를 끌어와, 조심스레 앉힌다.

저쪽은 저쪽대로 바빠 보이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일을 해야지.

길 안내를 위해 앞장선 이름 모를 종남의 제자에게 당당히 물었다.

"종남파는 고기반찬 나옵니까?"

도가가 불가처럼 육식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나, 과한 화식을 피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물어본 것인데... 어째 당소월이 보기 부끄럽다는 듯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아. 식사는 벽곡단으로 충분하다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내게 먹는 즐거움을 알려 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소월 너 아니냐."

그리고 이 몸은 아직 성장기라 잘 먹어 줘야 한다.

결국 영약을 못 얻었다면, 잘 먹고 잘 쉬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5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5] 55화. 종남파 (3)

지난 이틀간 잘 씻고, 잘 먹었고, 잘 잤다.

당소월이 당가에 서신을 보냈다고는 하나, 여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아무리 빨라도 며칠은 더 시간이 걸릴 터.

그러니 종남파 내부를 둘러볼 겸, 일전에 제안받은 친선비무까지 해치울 생각으로 일찍 일어났건만.

"일어나셨나요 소협?"

"?"

분명 자기 방이 따로 있을 텐데, 너무나 자연스레 내 방에 들어와 있는 당소월.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지만, 아직 외간 남자의 방인데 이렇게 휙휙 들어와도 되는 건가 싶다.

"오늘은 어떻게 하실 예정인지요? 지난 이틀처럼 뒹굴거릴 생각이라면 제가 재밌는 걸 알아 왔...."

"아니. 오늘은 주변을 좀 둘러보다가 연무장에 들를 생각이다. 유운검선 어르신과 약조한 것이 있잖나."

"...."

어디서 가져온 건지 품에서 골패를 꺼내려다 슬그머니 집어넣는 당소월. 그 시무룩한 표정에 피식 웃어주었다.

"하지만 밤에는 시간이 남겠지. 그때 잠깐 놀아줄 수 있겠나?"

"예에! 얼마든 어울려 드리지요."

당소월이 화색이 되어 희미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참 알기 쉬운 사람이란 말이지.

팔을 쭉쭉 뻗어, 밤새 굳은 몸을 풀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 왜 쳐다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다짜고짜 앞섶을 반쯤 풀었다.

"이제부터 갈아입을 예정인데... 계속 거기 있을 건가?"

"흐앗! 지, 지금 나갈 생각이었답니다!"

당소월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호다닥 빠져나간다. 그 다급한 뒷모습에 낄낄 웃으며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부자리까지 간단하게 정리한 뒤에야 밖으로 나오자, 언제나 그러하듯 묵묵히 서있는 독혈부대주와 그녀의 뒤에 숨어 있는 당소월.

아무리 당소월이 호리호리한 편이라지만, 다 큰 어른이 다른 사람 뒤에 숨는 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독혈부대주의 뒤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나 크게 부푼 무복을 못 본척하며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이다, 부대주. 간밤에 별일은 없었나?"

"예. 아가씨께서 하루 종일 골패로 사기 치는 법을 연습하다 늦게 주무시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일 없었습니다.

"뭣."

세상에. 재밌는 거라고 하길래 그냥 골패로 다 같이 놀자는 건 줄 알았는데, 혼자만 재밌는 일이었을 줄이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움찔한 당소월이 부대주의 등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걸 왜 천 소협에게 말하시나요! 그리고 방이 다를 텐데 어떻게 아셨는지요!"

"바로 옆방 아닙니까. 혼자 중얼거리던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혼잣말을 많이 했나요?"

"평소에는 없지만, 어젯밤에는 유독 많으셨습니다. 조금 들뜨셨나 봅니다. 벌써부터 내기에서 승리하신 뒤, 놀리는 방법을 연습하실 줄이야."

"꺄아악! 거기까지 대답할 필요는 없어요!"

이제는 아예 부대주의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조용히 시키려는 당소월이었으나, 저리도 부끄러워하는 시점에서 이미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그리도 내게 이기고 싶었나?"

"...그야 뭐어. 아무래도 그렇지요."

"잘 됐군. 분야가 상관없다면 내가 당소월 네게 절대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까."

"그런 게 있는지요?"

부대주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당소월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사실 손을 잡으면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나?"

"예?"

"지금부터 종남파의 경내를 둘러볼 예정인데 누가 손이라도 잡으면 어찌 될지 심히 걱정스럽군."

"...."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당소월이 배시시 웃으며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빼지 못하도록 아예 깍지를 끼기까지.

"잠깐. 이러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진짜로 좀 부끄럽다만."

"그러라고 한 거랍니다. 어때요, 이제 좀 연상의 위엄이 느껴지시나요?"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자, 당소월이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앞장서더니 그대로 끌어당긴다.

"그럼 이제 출발하지요. 종남파의 무인은 어렸을 적에 몇 번 만나보았지만, 이렇게 경내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라 좀 기대되네요."

"일단 참배객들이 도는 길부터 가 볼 생각이다만 어떤가?"

"으음. 무난하고 괜찮네요."

종남산은 오랜 시간 도교의 성지였던 만큼 유명한 장소가 여럿 있었고, 종남파는 이를 그대로 흡수하여 수입원으로 쓰고 있다.

덕분에 바깥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을 여럿 구경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제사였다.

초에 불을 피우고, 거기에 부적을 태우는 등. 지금은 거의 사장된 부주술을 연상케 하는 모습.

평범한 도사가 행하는 일이었다면 돌팔이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사기 치는구나 하고 넘어갔겠으나... 다른 어디도 아닌 종남파가 주관하는 제사 아닌가.

화산과 더불어 전진교의 명맥을 이었다는 정통 도가 문파고, 좌도방(左道房)을 멀리하기로 유명한 곳이니 어쩌면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 같군."

"예에. 제 눈에도 그리 보인답니다."

기의 흐름이라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눈에 띄는 변화 같은 것이 전혀 없다.

물론,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오묘한 이치가 있어서 정말로 복을 불러오고 화를 내쫓을지도 모르지.

다만 지금의 모습만 봐서는 무슨 변화가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종남파가, 아니 수많은 도가 문파가 도교의 적통을 이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무공뿐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

"...삼 장로 어르신?"

"나도 있다 이놈아."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삼 장로와 이번엔 제대로 된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귀영신투가 있었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사이가 좋기는. 아직 이 도둑놈에게는 쌓인 게 많네."

"이 친구 이거. 쌓인 게 너무 많아 수명이 다하기 전에 풀어낼 수 없으니 적당히 잊겠다고 한 게 누군데 그런 말을 하나."

"흥! 기억이 나질 않는군."

종남파에 모인 사람을 나이순으로 늘어놓으면 앞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사람들이건만, 열 살배기 어린애마냥 유치하게 투닥이는 둘.

뭐어. 어찌 됐든 화해한 것 같으니 좋은 일이겠지.

절로 나오려는 헛웃음을 적당히 흘려넘기며 물었다.

"그나저나 삼 장로 어르신. 도가 분파에 무공밖에 남은 게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혹시 모산파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들어는 봤습니다. 부주술을 주력으로 사용하던 문파 아닙니까."

"그럼 그 모산파가 왜 멸문했는지는 아나?"

"부주술이 무공보다 약해서 그런 거겠죠."

"아니네. 부주술이 약한 게 아니라, 뛰어난 부주술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없어진 거라네."

비슷한 이유로 진주언가 또한 강시술을 잃고, 권법만 남아 무가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삼 장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과거 모산파의 고수 중에는 부적 하나로 땅을 뒤집고, 비를 내리게 하며, 거대한 불을 일으키는 도사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도사의 수는 꾸준히 줄어들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더는 고수라 부를만한 이가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뛰어난 술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펼칠 줄 아는 이가 없어 천천히 말라 죽었다고 한다.

"한때는 구파일방에 모산파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었다더군. 나도 내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라 직접 그 시대를 경험한 건 아니지만...여기서 중요한 건 이러한 현상이 비단 모산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걸세."

가장 최근까지 살아남은 것이 모산파일 뿐, 이전에도 여러 술법 위주의 문파가 쇠퇴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삼 장로.

달리 말하면 과거에는 무공보다 부주술과 술법이 도가 문파의 주류였으리라.

"전진교가 세워진 이유가 바로 그래서네. 옛이야기 속 도사들이나 쓸법한 신통이 사술과 진법으로 전락했음에도 신선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으니 말이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최후의 등선자인 여동빈이었다.

검 한 자루로 도를 쌓아 검선의 영역까지 오른 그를 따라 하기로 한 것.

하여 전진교는 기존의 도사들이 집착하던 방술과 진언을 버렸다. 전통으로 남은 몇몇을 제외하고 무공에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아직도 여동빈이 마지막 등선자인 것을 보아 전부 실패한 모양이지만.

"도가 무공 대부분이 전진교에서 나온 것도 그래서네. 처음으로 무공에 도를 담고자 한 이들이니, 그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지."

"저는 그보다 우화등선이라는 게 실제로 신선이 되는 것이라는 부분이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냥 수명이 다해 죽었다는 걸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허허. 부정하진 않겠네. 애초에 이 이야기는 내 스승의 스승의 스승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부족한 먼 과거의 일이네.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대의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 그래서 많은 도가 문파가 세속과 가까워진 것일지도 모르고."

거기까지 말한 삼 장로 전일비가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만, 나는 사실이라 믿고 싶네. 그렇지 않다면 지금껏 도사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온 삶이 너무 허무해지지 않겠나."

아마 현시점에서 가장 나이 많은 도사 중 하나라 그런 걸까. 마지막 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거 어쩌다 보니 말이 길어졌군. 늙으면 이래서 안 돼. 젊은이와 대화할 일이 생기면 신나서 쓸데없는 것까지 떠들어 버리니. 그래서 무슨 이야기 중이었나?"

"저러한 제사가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아닌지였습니다."

"아, 그랬지. 내가 하려던 말은 이걸세. 과거에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 시대에는 힘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것. 다만, 그렇다 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닐세."

"어째서입니까."

"그야 간절한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잖나."

그리 말하고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인다.

"무엇보다 종남파를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네."

"...."

아마 저들이 내는 기부금을 말하는 거겠지. 아무리 속가적인 성향을 띠더라도 도사는 도사다.

세가가 그러하듯 본격적인 상단을 꾸리거나, 사파 놈들처럼 대놓고 보호비를 뜯을 수 없으니 기부금이라는 이름의 제사비가 중요한 거겠지.

검문을 자처하는 종남파가 아직까지 이러한 제사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금전적 사유가 제법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이후에는 심심하다는 삼 장로의 안내를 받아, 참배객이 아닌 종남의 제자들이 생활하는 시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더라.

만약 먼 과거에 정말로 강력한 술법이 존재하고, 경지에 오른 사람이 신선이 될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시간을 거스르는 것 또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회귀는 우연찮은 사고가 아닌, 누군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끌어안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아."

비무할 생각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순간 맑아졌다.

회귀의 원리가 무엇이건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칼질뿐.

그리고 여긴 내가 모르는 검을 펼치는 이가 한가득 있었다.

[5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6] 56화. 비무

잠시 수련하던 것을 멈추고 대련에 관해 알리는 삼 장로.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가능하면 비무는...."

"적당히 맞춰 주도록 하겠습니다."

"독을 사용하지 않으면 되지요?"

"고맙네. 그거면 충분하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말이다. 전력으로 붙었다가는 제대로 된 비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어리고 무위도 기껏해야 이류 수준인 삼대제자야 당연하고, 이들을 가르치는 이대제자도 대부분이 일류. 그중에서도 나이가 제법 있는 몇몇만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상태.

물론, 승패가 경지의 고하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일단 나는 회귀 전의 깨달음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잖은가.

지금의 나와 비슷한 경지의 무인 상대로 밀리는 게 이상한 일이다.

당소월의 경우도 마찬가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마폭단을 먹고 폭주하던 살귀는 물론이요.

약간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광랑탈명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던 나조차 잠깐이나마 마비시킨 적이 있었잖은가.

종남파의 제자가 약한 건 아니다. 다들 구파일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세를 지니고 있으니까.

다만, 나와 당소월이 나이에 비해 너무 강할 뿐이지.

기세를 읽었건, 귀영신투의 이야기를 들었건 삼 장로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으니 꺼낸 말일 테고.

전력을 겨뤄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번 비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변질되지 않은 종남의 검을 견식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상대는 나쁘지 않은 상대니 큰 불만은 없다.

...무엇보다 내가 종남파에서 무엇을 배워 가건 허락할 테니, 그만큼 제자들과 비무해 달라는 것이 조건이었잖은가.

적어도 어제 내가 잡은 깨달음의 실마리만큼은 일해야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삼 장로가 제자들이 옆으로 빠져 중앙을 비워 둔 연무장을 가리켰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순서는 어찌하겠나?"

"제가 먼저 나서지요. 천 소협의 기대가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괜찮다. 당소월 너도 만만찮게 기대하지 않았나."

"그렇게 티가 났는지요?"

"아니. 다만, 그렇지 않을까 예상했을 뿐이다."

결국 이번에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다시 당가로 돌아오게 생긴 상황.

당소월이 이번 무림행에서 겪은 일은 평범한 후기지수는 겪기 힘든 밀도 높은 경험이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종남파 제자들과의 친선비무라는 무림행다운 일을 앞두고 있으니 들뜰 수밖에.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꼼꼼하게 암기를 확인하며 연무장으로 나서는 당소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삼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남파의 제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물었다.

"자! 가장 먼저 종남의 검을 보여 줄 아이는 있느냐?"

우리만 친선비무가 기대되는 건 아닌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도 눈을 반짝이던 저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손을 번쩍 들며 나섰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당소월보다 조금 많아 보이는 나이. 느껴지는 기세는 일류 중입 정도려나.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지 허리춤의 검은 손잡이가 살짝 헤져 있었다.

저 정도면 나이에 비해 꽤 훌륭한 수준이겠네. 본인도 이를 잘 아는지 비무에 나서면서도 자신감과 기대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고.

...당소월이 처음 무림행을 나왔다가 나한테 납치당했을 때가 딱 저런 느낌이었지.

나 또한 저렇게 자신만만하던 시절이 있었고.

뭐어. 천무지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무인으로 살다 보면 한 번쯤 꺾일 수밖에 없는 종류의 자신감이다.

실전이 아닌 비무에서 겪을 수 있다면 다행인 일이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연무장에서 마주 본 둘이 서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당가의 당소월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종남파의 이대제자 진유련이라고 합니다. 저 또한 이름 높은 당가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잠시 뒤. 심판을 자처한 삼 장로의 구호에 맞춰 비무가 시작되었다.

시작하자마자 뒤로 거리를 벌리는 당소월과, 재빠르게 거리를 좁히려는 진유련.

당소월의 주력이 독공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하여 암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에는 자화배독초를 흡수할 때처럼, 독공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암기술 수련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덕분에 둘의 비무는 상당히 화려했고, 당사자도 지켜보는 이도 배울 것이 많아 보였다.

거리 조절을 중요시하는 당가의 보법 때문인지 사뿐사뿐 발을 내딛는 것 같으면서도 휙휙 멀어지는 거리.

동시에 대여섯 개의 암기가 마구 쏟아져 나오더니, 곡선을 그리며 상대를 향해 휘어진다.

진유련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암기가 덮쳐오는 느낌이겠지.

날이 서있는 것은 빠르게 날아들었고, 날이 없는 녀석은 서로 튕기며 변칙적인 궤도를 그린다.

평범한 상대였으면 그대로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을 암기술. 하지만 종남의 무학은 그런 어중이떠중이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흐읍!"

숨을 삼킨 진유련이 팔을 쉴 새 없이 휘둘렀다.

일견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관성이 없는 검격.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음 일격의 초석이 되며 막힘없이 이어진다.

물론, 암기를 쳐내며 자세가 흐트러지기도 하고, 판단이 늦고 휘두르는 순서를 실수해 몇몇 암기를 쳐내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부족함은 보법으로 덮어 낸다. 검술이 그러하듯 어느 방향으로든 전환이 자유로워 놓친 암기를 피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렇게 당소월은 거리를 벌리며 암기로 상대를 압박하고, 진유련은 이를 암기를 쳐내거나 피하며 이를 쫓는 양상이 한동안 반복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공방에서 조금씩 우위를 점한 것은 진유련 쪽이었다. 상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

당소월은 상대방을 몰아가고, 유도하여 결정적인 한 수를 꽂기 위해 암기를 내던지고 있었으나.

진유련이 펼치는 종남파의 무공은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것도, 암기와 부딪혀 멈칫한 것도 전부 다음 수를 위한 준비로 쓰이고 있었다.

멈칫함이 없으니 빈틈을 내보이지 않고, 그렇기에 쉬지 않고 부지런히 당소월을 쫓는다.

당소월의 보법 또한 상당히 훌륭한 것이라 쉽게 따라잡힐 것 같지는 않으나...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지금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겠지.

반면 진유련 쪽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마저도 다음을 위한 초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길게 이어지는 소모전은 당소월이 조금씩 밀리는 중이라 봐야 할 터.

내가 검수라 그런지 조금씩 미숙한 부분이 자꾸 눈에 밟히긴 하지만, 진유련의 무공이 품은 진의는 조금씩 엿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무공은 실수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수련에 힘쓰는 것입니다만 이건 특이하네.

실수하더라도 상관없다. 아니, 애초에 실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만이 존재할 뿐.

얼마든 본인의 기량으로 다음 초식과 연결할 수 있었으니.

저건....

"저건 적을 죽이기 위한 검이 아니군요. 자기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검이지."

"맞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결국 검을 휘두르는 것은 초식이 아닌 검수 아니겠는가. 그러니 좌절하지도, 과하게 기뻐하지도 말고 그저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하는 법이네."

"초식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 뒤에 이어진 결론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서 저 무공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구궁신행검법(九宮神行劍法)과 구궁보(九宮步)라네."

둘 다 들어본 적 있는 무공이다. 다만,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종남파의 멸문 이후에 만난 생존자들은 다들 빠르게 강해지는 무공만 익히기에 바빴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검수 본인이 강해져야 그만큼의 위력을 내는 구궁신행검법 같은 무공은 잘 안 쓰게 되었고.

원래는 저런 느낌이었던 건가. 강한 무공을 익히기보다 검수 본인이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그렇게 강해져야 하는 이유.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내 무학과 너무나 다르다.

내게 검은 언제나 적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 수행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무공이기에 비슷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내 검이 상대의 간격을 파고들고, 자세를 무너뜨려 빈틈을 만들어,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끝에 기어이 숨통을 끊는. 굳이 말하자면 굶주린 승냥이 같은 것이라면.

진유련이라는 종남파의 제가가 펼치는 구궁신행검은 애초에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완결되는 검.

그렇기에 외압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당소월이 흩뿌리는 암기를 쳐내면서도 멈추지 않고 거리를 좁히는 지금처럼.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언제나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내 뜻대로 휘둘러야 하는 무공은 그럴 때 한없이 취약해지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알아두면 제법 유용하게 내 무공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

검이 움직이는 궤적 그 자체가 아닌, 어떤 의도로 검을 휘둘렀는지를 의식적으로 살펴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이대로는 안 된다 여긴 당소월이 판세를 뒤엎기 위해 도박수를 던졌다.

지금껏 거리를 벌리며 암기로 견제하던 양상을 버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마주 달려가며 한층 깊숙이 손을 숨긴 소매를 흔들었다.

펄럭.

큰 동작.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무복 자락. 일견 춤사위처럼 보이는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당소월이었으나, 그 넉넉한 소매에서는 흉흉한 암기가 폭포처럼 쏟아져나왔다.

조준이나, 계산 따위는 없다. 그저 쏘아내는 것 그 자체에 집중한 모양. 실제로 대부분은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도 하더라.

다만, 그것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지금껏 암기를 한씩 쳐내거나 몸을 틀어 피하되, 쫓아가는 것에 집중하던 진유련의 눈앞에 갑자기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는 대량의 암기가 쏟아진 것 아닌가.

자세히 보면 대부분이 의미 없이 그저 쏟아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으나,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한 그녀는 지금껏 그러하듯 어떻게든 쳐내는 것을 선택했는지 자세를 잡는다.

"아이고...."

옆에서 머리를 짚은 삼 장로가 한탄 아닌 한탄을 내뱉는 순간. 진유련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득 채운 암기들 틈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마혈을 노리는 우모침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공 사용은 최소화하여 겨루는 것이기에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제법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몇 줄 위의 고수가 심판을 보는 것 아니겠나.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삼 장로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후웅!

내공이 실린 우직한 검격은 그만큼 강한 검풍을 만들어 낸다.

투명한 손바닥으로 내리 찍힌 것처럼 쏘아진 암기가 멀리 튕겨 나가는 일 없이 조용히 바닥에 처박힌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무위에 흠칫한 둘을 향해 삼 장로가 선언했다.

"거기까지. 승자는 당가의 당소월이네. 지금이라면 왜 그런지 이해할 걸세."

"...예."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우모침이 바닥에서 반짝이는 모습을 본 진유련이 시무룩하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검을 집어넣고 정중한 포권을 취했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덕분에 당가의 암기술이 얼마나 훌륭한지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앗!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종남의 검은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서로의 무공을 내보이고, 격렬하게 맞부딪힌 뒤에는 서로 웃으며 마무리한다. 실로 이상적인 비무의 모습 아닌가.

마지막에 당소월은 물론이요, 나와 독혈부대주까지 쪼그려 앉아 비무에 사용한 암기를 주섬주섬 챙기긴 했지만... 아무튼 분위기가 적당히 달아오르며 훈훈해진 것은 사실.

그렇기에 이건 예상치 못했다.

"종남의 삼대제자인 진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협!"

"...."

내 상대로 나와 비슷한 무위가 아닌 비슷한 나이를 가진 상대가 나올 줄은, 심지어 그게 내가 아는 얼굴일 줄이야.

[5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7] 57화. 비무 (2)

비무라는 게 꼭 비슷한 경지의 무인들 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경지 차이가 많이 나면 직접 검을 겨루며 가르쳐주는 지도 비무라는 것도 가능하니까.

물론 서로의 무공을 선보이며 친목을 다지기 위한 친선 비무에서는 어느 정도 비슷한 경지의 인물을 내보내는 게 맞긴 한 데....

그거야 내가 평소에는 기세를 마구 내비치며 다니지 않으니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

삼 장로가 미리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할 거라는 언질을 주긴 했으나, 기세가 대단치 않아 보이고, 나이도 어리지 않은가.

기껏해야 일류 초입 정도라 여긴 거겠지. 내 비무 상대로 나온 진백은 이류 끝자락이니 무위로도 크게 밀리지 않고, 나이는 비슷한 삼대제자니 딱 좋은 인선이라 여겼으리라.

삼 장로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선 비무로 기대가 커져 예상치 못하긴 했으나 불만을 느끼거나 납득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진백이 내가 아는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으음. 이보게 소협. 아무래도 내 설명이 부족했던 모양이네만...."

"괜찮습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삼 장로에게 고개를 저어 주고는 상대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천휘라고 한다. 잘 부탁하지."

"네, 넵!"

뭔가 이상하다는 듯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던 진백이 고개를 꾸벅이며 검을 뽑아 자세를 잡는다.

먼저 포권을 취했으면서 왜 인사를 한 번 더 하는 건지. 약간 어리숙한 그 모습은 놀랍게도 녀석이 서른 가까운 나이가 되어, 더는 후기지수라 부리기 힘들어질 때까지도 남아 있게 된다.

마주 검을 뽑으며 눈앞의 진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억 속 모습보다 어려진 외모. 다만, 이목구비 자체는 동일해서인지 절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만다.

회귀 전. 마교의 침략으로 하나둘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무너져 가고, 무림맹에서는 부랴부랴 사흑련과 손을 잡았던 시절.

당시의 나는 여전히 사흑련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었을 뿐, 내부의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철혈당이 무너지고, 설리향과 서문화린을 잃은 이후. 어찌어찌 복수에 성공하고 그 과정에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검귀라는 별호도 받긴 했으나.

어느 무력대를 이끌지도 않고, 련내의 중요한 직책을 받지도 않았다.

그저 과거의 서문화린이 철혈당주라는 명함을 받고, 최소한의 임무만 수행할 뿐 사흑련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듯.

사흑련주가 직접 시키는 몇 가지 일을 제외하면 오로지 검의 수행에만 파묻혀 살던 나날이었지.

당시의 내겐 별호처럼 검을 제외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비록 사흑련주가 서문화린과 그녀에게 소속된 나와 설리향을 계속해서 견제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철혈당이 습격당할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준 것 또한 사흑련주였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이는 꺼릴 뿐이지만,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에게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게 대처하는 사내였으니까.

서문화린이 아무리 잠재적 경쟁자였다고는 하나, 일단 사흑련의 일원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니.

개인적인 원한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사흑련 소속인 철혈당까지 쳐들어 와 학살을 벌인 흑천검제과 흑천검문의 무인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주화입마에 빠져 반쯤 미쳐 있던 나를 도와주기도 했고.

사흑련주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지만, 좋은 상사는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최초로 사파 무인의 연합을 만들 수 있었던 거겠지만.

아무튼 요는 당시의 나는 서문화린과 설리향을 잃고 당소월을 만나기 이전이라는 점이다.

즉, 한창 예리하게 주변에 날을 세우던 시기라는 소리.

진백을 만난 것은 그럴 때였다. 종남이 멸문하며 뿔뿔이 흩어진 종남파 무인 중 하나.

무림맹의 소집에 응해 앙금이 남아있는 사파와의 시범적인 연합에 자원한 무인이기도 했고.

당시의 무위는 절정 초입. 평생 일류에 머무는 이들이 한가득하니, 그 나이를 생각하면 꽤 대단한 재능이긴 하다.

다만, 그 정도로는 멸문지화를 겪은 종남파의 복수를 이루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마침 주변에는 비슷한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검귀라 불리는 내가 있었다.

진백은 내게 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때로는 무릎까지 꿇고 애원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당시의 내가 한창 날을 세우던 시기라는 점. 심상에 한 자루 검을 제외하면 무엇도 품지 못했으니.

검에 미쳐 살았고, 언젠가 죽더라도 검에 미쳐 죽을 것이 뻔히 보이기에 붙은 별호가 검귀(劍鬼)였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당연히 진백의 부탁을 무시했다. 누군가를 가르칠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내 검을 휘두르려 들었고.

설령 가르치더라도, 내 무공은 오직 나이기에 제 위력을 발휘하는 것들. 다른 이가 익히면 그 효율이 굉장히 떨어지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진백의 검에서는 내가 배울 것이 없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고.

물론 진백에게도 나름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았지만.

종남파가 갑작스레 멸문하며 비전이라 불리는 신공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진백이 익힌 무공은 괜찮은 상승무공이었으나, 종남을 상징하는 몇몇 신공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언젠가 천마를 쓰러뜨리고, 마교를 무너뜨려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천하에 사문의 이름을 세우기 위해서는 유운검법을 대신할 새로운 신공이 필요하다 여긴 것.

진백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 검수들에게 머리를 숙여 가며 가르침을 청했었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만.

자신의 검술을 내어주는 이가 적기도 했지만, 본인부터가 도가라는 뿌리를 포기하지 못했으면서 살기와 분노에 찌든 검을 휘두르니 제대로 발전할 수 있겠는가.

진백의 계획은 원대했으나, 그의 역량과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무공을 휘두르며 답이 보이지 않는 연구를 이어가던 차.

본격적으로 무림맹과 사흑련이 손을 잡고, 남아 있는 정사의 화경 고수 대부분이 천마를 잡기 위한 함정을 팠다.

나와 진백 또한 그 계획에 참가한 무인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마교의 무인을 막아, 천마를 상대하는 동안 방해가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

그리 어렵지 않은 임무였다. 천마를 제외한 마교도는 대단치 않았고, 아무리 천마라면 여덟이나 되는 화경 고수의 합공을 버텨내진 못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뭐어. 세상일이라는 건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 아니겠는가.

천마는 역으로 모든 화경 고수를 때려죽였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는 마교도를, 뒤에서는 다가오는 천마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고.

역으로 포위에 빠져 도망치던 도중. 더는 도망칠 길이 없어 죽음을 각오했을 때였다.

진백은 진원진기를 불태우며 마교도 사이를 돌파해 내가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동안 모질게 굴었건만, 너는 왜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느냐 묻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더 강하니까. 자신이 사는 것보다 내가 살아야 마교에 복수할 기회가 더 늘어나니까.

그러니 여기서 살아남는 대신 반드시 복수를 대신해 달라 하였다.

결국 나는 천마의 일수를 버텨 내지 못하고 패했지만, 한차례 목숨을 구함 받은 것은 사실이다.

사실상 빚은 졌는데 이를 갚지 못한 상황. 내심 마음에 걸리던 일 중 하나였는데... 이걸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이렇게 생겼다.

스릉-

찬찬히 검을 뽑으며 이쪽에서도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팔은 정중앙에. 그리고 검 끝은 시선의 끝에 오도록 맞춘다.

가장 기본적인 자세. 하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지금부터 내가 내보일 검에는 복잡한 기교도, 대단한 묘리도 실려있지 않을 테니까.

지금의 진백이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회귀 전에는 얼마나 강한지를 떠나 서로의 검이 서로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은가.

긴장과 기대가 반쯤 섞인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진백이 내가 자세를 완전히 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하앗!"

특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 다만 그 발걸음 자체가 상당히 가볍다. 앞선 비무에서 보았듯, 언제든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대각선으로 휘둘러 오는 검을 바라보며 가로로 선을 그었다.

채앵!

단번에 튕겨 나가는 검. 그만큼 팔과 어깨가 꺾이며 자세가 무너졌으나, 그것이 무력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허리를 튕긴 진백이 재차 검을 휘두른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꽤 위력적인 검격.

조금 전에 한번 보아 눈에 익은 모습이다. 아마 진백 또한 구궁신행검법을 익힌 거겠지.

이번에는 내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진백의 검. 다만 검 끝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아, 조금 전에 너무나 쉽게 튕겨 나간 것에 동요한 모양이다.

하여, 느릿하게 들어 올린 검을 녀석의 검격에 가만히 맞댔다.

카가각!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멈춰선 두 검신. 다만 이어지는 것은 힘겨루기 따위가 아니었다.

"...어?"

그저 진백의 검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뿐인 상태. 녀석이 검을 내지르려 하면 그 속도에 맞춰 뒤로 내빼고, 반대로 회수하려 하면 그대로 짓쳐들어가며 밀착 상태를 유지한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진백의 뜻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녀석이 검을 움직이려 들면 자연스레 맞닿은 내 검의 영향을 받아 궤적이 엉뚱한 곳으로 틀어졌기 때문.

흡착의 묘리다. 여기에 내공을 활용하면 아예 역공을 취할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익! 이잇!"

어떻게든 벗어나려 검을 휘적대는 진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직 베기는 어중간하게 변화를 주는 것보다 차라리 단숨에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이 좋지. 다만, 아무리 당황했다고 하나 검 끝이 떨리는 건 안 될 일이지."

"네?"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은 진백.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번 해봤는데 안 될 것 같으면 미련하게 붙잡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라.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라. 그리고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민을 멈추지 마라."

"어... 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 되묻는 진백을 향해 피식 웃어 주었다.

"보법은 뒀다가 뭐하나. 검으로는 안 될 것 같으면 아예 거리를 벌려야지."

"앗."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뒤로 훌쩍 물러나는 진백.

이후로도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백은 내게 검을 휘두르고, 나는 이를 걷어내며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

진백이 익힌 구궁신행검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저 가볍고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안다.

처음에는 다소 불쾌해하던 진백이었으나, 합을 나눌수록 그 표정이 진지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종남의 무공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조언하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

그렇게 마흔 합을 조금 넘게 이어 갔을 무렵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지적했고, 진백 본인이 슬슬 지쳐 가는 것 같아 마지막으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청명한 쇳소리와 함께 멀리 날아가 떨어지는 진백의 검.

"아."

잠시 멍하니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진백. 그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떨떨한 목소리로 포권을 취한다.

"제가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비무였다."

이걸로 최소한의 도리는 다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5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8] 58화. 비무 (3)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멍한 표정 그대로 연무장에서 내려가는 진백.

내가 녀석에게 보여 준 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만 보면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지.

다만, 그 모든 것을 한데 나열하고 보면 조금 의미가 달라진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검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 무공의 근간을 이루는 명제고, 무수히 많은 초식을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연계할 수 있는 구궁신행검법을 익힌 진백에게는 나름 쏠쏠한 조언이 될 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검을 집어넣자, 그제야 주변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백이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어떻게...."

"장로님의 말을 듣긴 했는데 이 정도라니."

"이대제자들 중에도 저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하나?"

대련을 구경하던 종남파 제자들의 목소리였다. 뭐어. 저들 입장에서도 황당하긴 하겠지.

지금껏 종남파를 둘러보며 알게 된 것인데, 삼대제자는 아직 어린 십대가 주를 이루며 대체로 삼류에서 이류의 경지다.

즉, 나랑 비슷한 나이대고 그래서 진백이 나선 것이겠지.

그리고 이대제자는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정도고 대체로 일류, 몇몇이 절정에 오른 무위를 자랑하지만... 회귀 전의 내가 이룬 경지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

회귀라는 비밀을 모르는 저들에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어 버리면 비무는 여기서 끝인가?

방금은 진백이 상대라 뭐라도 가르쳐 주려 하다 보니 조금 그림이 이상해졌을 뿐. 이대제자 상대로는 적당히 상대해 주며 비무다운 비무를 해 볼 자신이 있다.

그렇게 애타는 마음으로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어 조금 가라앉은 심정으로 연무장을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허허.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쪽의 소협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할 거라고."

심판으로 있던 삼 장로 전일비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으며 주변의 제자들에게 그리 말한다.

아직 내려가지 말라는 것처럼 강하게 붙잡은 손길. 뭔가 싶어 멈춰서자 삼 장로가 피식 웃었다.

"우선 고맙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네. 백이 녀석이 이번 기회로 크게 성장하겠구먼."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거, 부끄러워하기는. 좋을 때 아닌가. 오래 살며 함께한 주변 사람이 하나둘 떠나는 것은 슬프지만, 이렇게 어린 아해들이 새로운 연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큰 기쁨이고 보람이라네."

"...갑자기 부끄럽게 왜 그러십니까."

"종남이 자네들에게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네."

"지금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만."

"내 지난 며칠간 귀영신투 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네. 내 기감에 느껴지는 것이 있고, 방금 눈으로 본 것도 있지. 아마 자네에겐 이 자리의 누가 나와도 이번 비무가 성에 차지 않을 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말은 그리해도 만족은 못 했을 것 아닌가. 걱정 말게. 다 생각이 있으니."

"정말로 괜찮습니다만."

순수하게 검술만 겨룬다고 했을 때, 제자 수준에서 나와 대등히 합을 겨룰 수 있는 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차기 장문인으로 낙점되어 유운검법을 익히는 중인 대제자 정도가 아닐까. 아니면 장로들이라거나.

이전 생의 내가 이룬 무위는 그러한 것이었다. 정작 이 자리엔 이대제자까지밖에 없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는 걸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대등한 비무에 관한 기대는 접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내 보아하니 종남의 제자들이 그리 부족한 것은 아니야. 다만, 자네가 나이를 뛰어넘은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안 그런가?"

"부담스러운 칭찬이십니다."

"그럼에도 자네는 종남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무학을 일부나마 나눠주었네. 자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저도 종남에서 받은 것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돌려드려야 체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허허. 방금 체면이라 했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일세. 아직 약관도 한참 남은 어린 소협에게 그리 빡빡하게 굴어서야 종남의 체면이 어찌 되겠나."

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주변에 다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삼 장로.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히죽이는 표정 그대로 삼 장로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 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자네의 상대를 해 보고자 하네."

"...예?"

"자네가 백이 녀석에게 그러했듯, 나 또한 자네에게 뭔가 하나 쥐여주겠다는 소리일세. 여기서 그게 가능한 사람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진심, 이십니까?"

"물론이네. 솔직히 다들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그 자리에서는 넘어갔지만, 내심 신경 쓰였다네. 정말로 이렇게 어린 소협이 그만한 무위를 지닌 게 가능한지 말일세."

후기지수들끼리의 비무와 장로급 인사와의 비무는 그 무게감이 다르다. 그래서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던 거고.

하지만 지금. 삼 장로 전일비는 자신과의 비무를 입에 담았다.

내심 울적해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지며, 심장에 기대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한다.

"당장 하죠."

"조금은 사양할 법도 한데...."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삼 장로가 내 맞은편에 서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는다.

스릉.

오래되어 검집은 헤치고, 손잡이는 전부 닳아 버린 애처로운 모양새. 하지만 그 검신만큼은 방금 막 갈아낸 것처럼 시퍼런 예기를 뿜고 있었다.

잘 관리된 검이다. 동시에 최근까지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 또한 검을 뽑아 자세를 잡자, 삼 장로가 입을 열었다.

"삼 초를 양보하겠네."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파앙!

내공의 폭발적인 운용을 넘어, 실제로 용천혈 부근에 작은 폭발을 일으켜 만들어 낸 급가속.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살짝 패이고, 내 몸뚱이는 단 두 걸음 만에 최고 속도에 달한다.

"흡!"

그 속도를 살려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이어서 강하게 진각을 밟아, 달려오던 속도를 그대로 힘으로 바꾸어 검으로 전달한다.

대각선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지는 검격. 강의 묘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검이 전일비의 가슴께를 노리고 쏘아진다. 하지만.

채앵!

분명 내가 먼저 검을 휘둘렀을 텐데, 전일비의 검은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내 검신의 뿌리 부분을 쳐냈다.

아무리 강의 묘리를 담아 힘을 한점에 집중시키면 무얼 하나. 그 방향이 흔들리면 검에 실린 힘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강검이 완전히 휘둘러지기 전에 그 힘을 분산시킨다. 나도 자주 쓰는 기예지만 직접 당하는 건 오랜만이다.

"이거 꽤나 강렬하구먼."

"그러는 어르신은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태을분광검법(太乙分光劍法)이라고 하네. 종남산이 아직 태을산이라 불리던 시절에 만들어져 아직까지 이어지는 무공 중 하나네."

"그런 걸 알려 줘도 되는 겁니까?"

"생사결도 아니고 비무 중인데 당연히 괜찮지. 기껏해야 무공 이름 아닌가."

어깨를 으쓱이는 전일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단순한 이름이라 하여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무공의 이름에는 그 무공의 진의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조금 전의 속도. 그리고 분광검이라는 이름을 보아 쾌검 위주의 무공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쿵!

재차 진각을 밟으며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진각을 통해 올라오는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무게 중심을 한층 견고히 하기 위한 것.

단단히 고정된 하체를 바탕으로 검을 수직으로 휘두른다. 무겁게. 더욱 무겁게.

아무리 빠르게 휘둘러온 검에 막힐지라도, 역으로 밀고 갈 수 있도록. 힘을 검에 집중시킨 것이 아닌, 전신에 집중시켜 휘두른 일격.

본디 빠른 것이란 가벼운 법이고,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법이다.

베이기 전에 베는 것이라면 모를까.

터엉!

둔탁한 소리. 이번에도 검신의 뿌리 부분을 노리고 휘둘러진 전일비의 검이었으나, 그 무거움에 힘을 흩트리는 데 실패했다. 대신.

스르릉-

검을 서로 맞댄 채,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그대로 검의 궤적을 뒤튼다. 자연스레 전일비를 스쳐 바닥에 처박히는 검.

...예상했던 대로다.

저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 정도는 쉽게 대응할 수 있을 터. 거기에 지금은 내 삼 초를 가만히 받아주는 상황이니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대로 부드럽게 흘려내는 것.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크게 한 발 내디딘다. 전일비의 코앞에 서듯 깊숙이.

사실상 검이 아닌 권의 간격. 그대로 검을 고쳐잡고 몸을 뒤튼다.

검신이 지면과 수평을 이룬 상태로 전일비의 명치를 향해 검 자루 아랫면을 내지른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는 검을 휘둘러도 제때 막지 못하리라.

"허어!"

탄식을 터뜨린 전일비가 결국 뒤로 크게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내 검을 쳐내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추격해 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걱.

전일비의 검이 내 앞머리 일부를 잘라낸다. 한 발 내디딘 덕에 언제든 달려들 수 있고, 그대로 수평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자세였음에도 제자리에 멈춰 선 것은 그래서다.

결국 삼 초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고, 내게 검을 휘두른 전일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어이가 없구먼. 내가 검을 휘두른 게 몇십 년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 이 초밖에 양보받지 못한 것 같은데, 한 번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 더는 없네. 됐으니까 제대로 와 보게!"

"이런. 아쉽게 됐습니다."

말은 툴툴거리면서도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드리운 전일비.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이지 않을까.

서로 한차례 웃어대며 자세를 가다듬은 뒤. 다시금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파밧!

이번에 먼저 움직인 것은 전일비였다. 기다란 수염을 흩날리는 그는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나, 손에 들린 것은 날카로운 검이었다.

쐐애액!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휘둘러지는 검. 가만히 내 공격을 받아 줄 때와는 그 기세가 다르다.

이대로 내가 대응할 틈도 없이 그대로 베어 버리겠다는 듯한 느낌. 다만, 움직임 자체는 내 수준에 맞춰 준 것인지 정말 어쩌지도 못할 정도는 아니다.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똑바로 바라보다 반 발짝 뒤로 물러나며 몸을 틀었다.

내 앞섶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검. 순간 드러난 빈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베기가 아닌 찌르기. 빗나가면 자세를 수습하기 어렵지만 가장 빠르게 목표에 도달하는 검.

쏘아진 검이 전일비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

카앙!

돌연 그어진 대각선의 섬광이 그대로 내 검을 후려친다.

"무슨...?"

방금 빗나간 검을 다시 회수하는 대신, 내지른 방향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한층 빠르게 휘둘러온 건가?

그렇게 큰 동작을 아무런 준비 없이, 이렇게나 빨리 취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순간 당황했지만.

"아."

애초에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종남의 무공은 그러한 것이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한 초식의 연계. 이것이 수준 높은 무인의 손에서 펼쳐지면 얼마나 대단한지 그 편린을 본 것 같았다.

적재적소에 검을 휘두르는 나와 달리, 모든 검이 적재적소를 가르는 일격이 되는 무학.

"하핫!"

나와 비슷하지만, 너무나 다른 관점에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자네. 그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어째 전일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지만.

너무하네.

[5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59] 59화. 비무 (4)

"...자네. 그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나?"

"...."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전일비.

너무하네.

순간 울컥하긴 했지만, 말이 아닌 검으로 반박하기로 했다.

쿵!

검이 튕겨 나가며 무너진 자세를 진각으로 다잡는다. 다리와 허리, 그리고 등과 팔로 이어지는 힘의 흐름으로 끌어 올리듯 검을 쳐올린다.

"성격 참 급하기는."

침착하게 검을 휘두르는 전일비. 다만 조금 전의 검격을 회수하지 못해 여전히 그의 검은 하단을 향하고 있다.

아무리 전일비의 검이 빠르고, 어떤 자세에서든 그에 맞는 초식을 펼칠 수 있다 한들 이를 온전히 막아내는 것은 힘들 터.

결국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기세를 빼앗아 올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어떤 검격을 이어 갈까 고민하는 사이.

똑같이 솟구친 전일비의 검이 내 검의 검등을 두드린다. 아니, 두드린다는 표현도 잘못됐다.

단순히 와서 달라붙었다고 봐야겠지. 그 상태에서 이어지는 흡착의 묘리.

이쪽의 움직임에 맞춰 바짝 달라붙은 전일비의 검이 무리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 검의 방향을 뒤튼다.

이전 비무에서 내가 진백을 상대로 선보인 것과 완전히 똑같은 기예. 다만, 그리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다.

헛웃음을 지으며 나 또한 흡착의 묘리에 따라 전일비의 움직임에 대응한다.

카가각!

서로의 검과 검이 얽히고, 미끄러지며, 때로는 뒤집힌다.

검과 검이 맞닿은 부분에서 작은 불똥이 튀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주변을 울리는 사이.

서로의 검만 붙여 둔 채, 우리의 몸은 서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계속해서 뒤틀리는 힘의 흐름을 받아내다 보니 일어난 일.

마치 검을 맞대고 씨름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으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묘리의 깊이를 겨루게 되면, 이것저것 주워 익힌 내가 종남파의 장로를 이기긴 힘들 테니까.

쩌엉!

결국 귀를 울리는 높은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튕겨 나간다.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 미친 듯이 진동하는 검신. 그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게 뒤흔든다.

동시에 나를 추격하듯 성큼 가까이 달려드는 전일비. 기세를 빼앗으려 했던 것이 역으로 빼앗길 줄이야.

이를 악물며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검격을 향해 검을 밀어 넣는다.

채앵!

이후로 이어지는 공방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수한 검의 실력만을 겨루는 비무답게 쉴 새 없이 이루어지는 수 싸움.

판단 자체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기예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검을 맞댈수록 그 깊이의 차이가 여실히 전해진다.

잠시 비등하게 맞서는 것 같더니, 금세 내 검을 튕겨내거나 흘려 버린다.

잡힐 듯 말 듯한 거리감. 다만 언제나 확실하게 나를 웃도는 검.

약이 오르는 동시에 감탄이 나온다. 아무리 허를 찌르고, 빈틈을 비집어 만들어 내려 해도 흔들리지 않는 검세다.

빛살처럼 재빠른 쾌검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막힘없는 흐름을 타고 이어지니.

이를 어떻게든 뒤집기 위해 과감히 파고들어 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다.

...엄밀히 말해 내 검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절묘한 순간에 검을 찔러넣기도 하고, 깊숙이 베어 내며 몸을 피하게 만들기도 했다.

본래라면 진작에 기세를 끊고 퇴로를 막아, 천천히 상대를 사냥하듯 몰아넣어 숨통을 끊을 수 있었겠으나.

이 모든 시도가 전일비가 펼친 하나의 흐름을. 쾌(快)로 하여금 그려내는 거대한 변(變)을 베어 낼 수가 없다.

흐름이 끊기더라도 그 자체를 자신의 흐름에 편입시켜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니 무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합이 이어질수록 밀리는 것은 나일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과연. 이제야 알겠다.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눈앞의 전일비지만 동시에 그가 아니다.

전진교로부터 시작되어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온 종남의 무학.

수많은 이가 익히고, 다듬으며 보완해 나간 무공이 전일비를 통해 펼쳐지고 있을 뿐이었다.

내 검을 집어삼킨 것은 전일비가 아니다. 종남파였지.

장로가 이러한데 장문인은 대체 어떠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답답하지만 동시에 즐겁다. 이렇게 순수하게 검에 몰두한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뭐어. 이대로 가다가는 금방 비무가 끝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뭐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나.

종남의 무학은 분명 경탄스러운 것이나... 내 검이, 그 안에 담은 나의 삶이 쉽게 휩쓸릴 만큼 가벼운 것은 아니기에.

그저 혹시 모를 오해를 위해 먼저 말해 두기로 했다.

"저는 어르신께 아무런 유감도 없습니다."

"으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 무공의 특성상 어쩔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만 알아 주십시오."

검을 강하게 움켜쥐며, 지금껏 억누르던 살기를 거침없이 풀어 헤쳤다.

주변 일대를 뒤덮는 짙은 살기. 평범한 이라면 숨 쉬는 것도 힘들겠지만, 내겐 막혀 있던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시원한 해방감이 몰려올 뿐이다.

"이, 무슨...!"

경악한 전일비. 다만, 그 흐트러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귀영신투에게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하니, 살기가 짙은 무공을 다룬다는 건 알고 있었던 거겠지.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한 것 같지만.

"흉흉하구나. 대체 누가 네게 이런 검을 가르쳤느냐."

"누구도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세상이겠죠."

"허면 대체 무슨 일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냐."

"그건 이제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눈을 크게 뜬 채, 전일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서 펼쳐진 것은 이미 몇 번이고 보인중의 묘리가 담긴 수직 베기.

지금껏 그러했듯 빠르게 휘두른 검을 맞붙이고, 그대로 궤적을 흩트려 흘려 넘기려는 전일비.

다만, 이번에는 조금 그 양상이 달랐다.

주변에 기막처럼 펼쳐 둔 살기를 통해 전일비의 움직임을 한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일부러 검 끝을 흔들어 궤적을 살짝 뒤틀었다.

당연히 무거움을 온전히 담지 못해 위력은 떨어지지만... 이를 흘려 내려는 이 또한 그 섬세함을 살리지 못하게 되리라.

콰앙!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검격과, 이를 제대로 흘려 내지 못한 검이 격돌하며 굉음을 터뜨린다.

힘을 분산하고, 무위로 돌리기만을 반복하던 공방에서 처음으로 정면에서 맞붙은 것이다.

"허어...."

어이가 없다는 듯 나와 자신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는 전일비.

반 박자 늦게 손아귀를 타고 찌릿한 충격이 올라온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검을 놓칠 것 같은 반탄력이었으나, 이를 억지로 붙잡아 둔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축축함. 아마 살짝 찢어진 살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거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내 검이 나를 상하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황한 전일비가 지금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빈틈을 잠시나마 보였다는 거니까.

흘려내기 위한 검으로 정면에서 공격을 막아내야 했으니 자세가 흐트러지는 게 당연하지.

물론 그렇게 흐트러진 상태로도 전일비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얼굴 쪽을 향해 날아오는 예기. 이대로 내가 쫓아오는 것을 견제하여 다시 자세를 가다듬을 생각일 터.

그래서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단, 상체는 지면과 수평이 될 정도로 깊게 꺾어서.

전진하며 펼친 철판교. 평범하게 펼쳐도 상당한 수준의 균형 감각과 근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조금만 실수하면 그대로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지겠지.

달리 말하면 실수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소리다.

쐐액!

문자 그대로 코 앞을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날붙이. 그렇게 검이 지나친 뒤에야 허리를 다시 세웠다.

그 반동을 살려 튕겨 내듯 쏘아지는 찌르기.

하지만 전일비에게 검술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 내 검이 닿지 않는 방위로 보법을 펼친다.

그 와중에도 상체는 흔들리지 않는 전일비. 덕분에 곧장 회수한 검으로 다음 초식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대각선 밑에서부터 짓쳐들어오는 검격. 이를 피하건, 막아 내건 결국 이전처럼 끝없는 쾌검의 연계가 시작될 터.

그러니 이번에는 피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대신 검자루의 밑부분을 망치처럼 사용해 날아오는 검을 내리찍었다.

터엉!

뭉툭한 면에 얻어맞은 검신이 그대로 땅에 틀어박힌다. 조금이라도 늦었거나, 빗맞혔더라면 그대로 비무는 끝이었겠지.

성공했으니 아무 문제 없지만. 애초에 평범하게 대응해서는 전일비가 만들어 내는 흐름에 잡아먹힐 뿐이잖은가.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고 무리해서라도 전일비가 원하는 검을 부정해야 한다.

오직 부정을 위한 부정. 이를 위해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때로는 휘둘러진 검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지극히 위태로운 광경. 하지만 이것이 내 검이다.

깔끔하고 멋있을 필요는 없다.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상대를 죽이는 것.

검을 잘 다룬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긴 하나, 결국 내게 검이란 효율적인 살육을 위한 도구일 뿐.

들끓는 살기가 자연스레 전일비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초절정 무인답게 막대한 살기에도 큰 변화가 없었으나.

결국 이것이 누적되고, 또 누적되다 보니 기감에 혼란이 온 것일까.

아주 잠깐. 눈 한번 깜빡일 정도의 일순 동안 전일비의 검이 삐걱였다.

멈칫했다거나, 속도가 느려졌다거나, 잘못된 곳을 향해 휘두른 것이 아니다.

그저 검격의 안에 새겨진 약간의 망설임일 뿐이지만....

전일비가 처음 드러낸 진짜 빈틈에 이를 악물며 파고들었다.

사납게. 더욱 사납게. 오늘 뜯어 먹지 못하면 죽는 굶주린 늑대처럼. 피 칠갑이 되어서도 이를 드러내는 미친 늑대처럼.

여전히 전일비의 검은 반짝임 정도로 보일 만큼 빨랐고, 그 연계는 무한하여 끝이 없었으나.

나는 더 이상 거기에 휘둘리지 않았다. 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면서도 어떻게든 상대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발버둥 쳤지.

더 이상 이 연무장에 하나의 거대한 흐름은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빛살이 엮어 내는 작은 소용돌이와. 이에 저항하듯 몰아치는 광풍이 있을 뿐.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정신이 또렷해진다.

오직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나와 내 손에 들린 검 한 자루였으니.

그렇게 본능에 몸을 맡기고 검을 휘두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그만!!"

돌연 전일비의 검으로부터 강렬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본래라면 아지랑이처럼 보였을 검기가 중첩되고, 또 중첩되어 하나의 불길처럼 보인다.

큼직한 검염(劍炎)을 휘둘러 나와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전일비.

이에 깊은 물 속에서 머리를 잡혀 올라온 것처럼, 순식간에 집중이 풀린다.

반쯤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있던 정신이 각성하며 뒤늦게 주변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적이 흐르는 연무장. 상처투성이가 된 나. 그리고 옷깃을 살짝 베인 전일비.

그가 자신의 옷깃을 가리키며 히죽였다.

"여기까지 하세.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지 않았나."

잠시 내가 남긴 검흔을 바라보다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검을 집어넣고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지도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나도 간만에 흥이 오르고 좋았네."

그렇게 비무는 끝났다.

"천 소협. 잠깐 저 좀 보시지요."

"...."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걱정 반 질책 반으로 나를 노려보는 당소월이 남아있었지만.

[5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0] 60화. 귀영신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