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60화. 귀영신투
비무가 끝난 뒤. 내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이 여러모로 충격이었는지 웅성이는 종남파 제자들을 뒤로하고 연무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천 소협. 잠깐 저 좀 보시지요."
"...."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걱정 반 질책 반의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당소월이 남아있긴 했지만.
멈칫하며 당소월 쪽을 바라보자 부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당소월.
눈은 크게 뜨고, 눈썹은 올라갔으며, 입술은 삐죽 내민 채, 볼은 살짝 빵빵해진....
그러니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화난 사람 같은 표정을 한 당소월이 내 앞에서 재차,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를 취한다.
"천 소협."
"으음."
"방금은 실전이 아니라 단순한 비무였지요?"
"그렇지."
"허면 이렇게 다칠 이유가 있는지요?"
"...이제 당소월 너도 알다시피 내 무공은 원래 이런 식이다."
조심스레 항변하자 당소월의 검은색 눈동자에 녹빛이 한차례 반짝인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는 당소월.
"예에 그렇겠지요. 소협의 무공은 육참골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럼...."
"하지만 아까 소협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전 목숨을 건 실전이 아니라 비무 아닙니까."
"이, 이건 종남의 장로와 펼치는 비무다. 오늘 같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잖나."
"...."
반사적으로 한마디 내뱉었더니, 이쪽을 말없이 노려보는 당소월. 그녀가 재차 반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은 나보다 큰 키 때문일까. 눈앞에 갑자기 크게 부푼 가슴팍이 들이밀어지는 듯한 풍경에 흠칫 몸이 굳었다.
지금 상황에 이러면 안 되는 건 알면서도 자꾸만 틀어지려는 시선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자니.
이런 내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소월의 입술이 이젠 보란 듯이 댓 발 삐져나와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무엇을 말하건, 당소월의 걱정스런 추궁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라고.
하여, 말 대신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조심스레 한쪽 손을 뻗어 당소월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는 엄지로 삐져나온 입술을 지그시 눌러 주었다.
"미안하다."
"...."
"앞으로는 당소월 네가 보는 앞에서 다치는 일을 최대한 줄여 보마."
"...."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미리 이야기해 둘 수 있도록 하마."
"...."
아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뾰족한 당소월의 눈빛. 아직 뭔가 부족한가 싶어 한참을 고민하다 덧붙였다.
"그, 그리고 오늘은 밤새 네가 하자는 대로 어울려 주마. 골패건 뭐건 말이다."
"...흫."
그제야 좀 마음이 풀렸는지 배시시 미소 짓는 당소월. 쏙 들어간 입술에서 엄지를 떼자, 아예 뺨을 감싸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온다.
부드럽게 떼어내고는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말하기를.
"약속이랍니다?"
"그래. 약속하지."
"이번만이니까 다음에도 같은 방법으로 빠져나가시면 안 되는 거 잊지 마시구요."
"당연한 일 아닌가."
"좋아요. 그럼 이제 지혈부터 하지요."
"이, 이런 곳에서 그건 좀 어떨까 싶다만."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소월이 건수를 잡았다는 듯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천 소협. 방금 무슨 생각 하셨나요?"
"아무 생각 안 했다."
"혹시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한참 선배이신 삼 장로님 앞에서 천 소협의 상처를 핥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셨는지요?"
"그런 적 없대도."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손으로 뿜는 독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천 소협이 정 입으로 하길 원하신다면야."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나름 강경하게 말하려던 순간. 당소월이 언제 나를 몰아갔냐는 듯, 상쾌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랍니다."
"...뭣."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시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이 정도 상처는 손가락으로 충분하답니다. 물론 흉지지 않으려면 나중에 제대로 약을 발라야겠지만요."
그리 말하고는 한차례 내 손등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소월. 한두 방울 새어 나오는 정도의 출혈이 완전히 멎고, 계속해서 느껴지던 고통도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금까지의 비무로 한창 날카로워진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그렇게 키득이며 내 상처 부위를 어루만져 응급처치하는 당소월. 얼핏 보면 나를 여기저기 더듬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겠는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무슨 말을 하려 하셨는지요? 마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싫다."
내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히죽이며 말을 이어가는 당소월.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음음. 정혼자의 혀를 독점하고 싶은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흐흫! 일 아니겠습니까."
"방금 중간에 웃지 않았나?"
"그런 적 없답니다. 아무튼 그런 거라면 달리 말해 다른 사람이 없는, 저희 둘뿐인 공간에서라면 얼마든 괜찮다는 뜻이지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만."
"그럼 오늘 저녁에 고생한 소협을 위해 제가 또 나서 드려야겠네요."
"그냥 골패만 몇번 치다가 자면 안 되겠나...?"
내가 기겁할 때마다 점점 미소가 짙어지는 당소월. 그래... 행복하면 된 거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웅성이던 제자들을 진정시키고 온 삼 장로 전일비가 옆에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나 흉한 살기를 뿜던 것이 지금 보니 거짓말 같구나."
"...놀리러 오셨습니까."
"설마. 나는 진심일세. 그 정도의 살기는 사십 년 전에 각성한 천살성을 토벌할 때나 느꼈던 걸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천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건 아네. 천살성을 직접 보고, 검을 맞대기까지 했으니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지. 자네는 천살성이 아니네. 애초에 천살성이라면 이렇게 정혼자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 수는 없을 테니."
"솔직히 말씀해 보시죠. 역시 놀리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대답 대신 낄낄대는 전일비. 그 사이에도 당소월은 묵묵히 상처의 지혈을 마치고, 흐트러진 옷매무시까지 단정하게 바로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뿌듯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요."
"뭐가 말이냐."
"의도적으로 삼 장로님을 모른 체 한 거요?"
그리 말하고는 내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삼 장로에게 돌리는 당소월.
"제 정혼자에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 장로님."
"허허. 그래. 내가 너무 심하긴 했지? 다만 나도 이렇게까지 저돌적일 줄은 몰라 많이 당황했네. 그런 소협이 이렇게 얌전해질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좋은 정혼자를 만났구나."
"예에. 저도 그리 생각한답니다."
한 번뿐이지만, 어린 시절의 당소월을 만난 적 있기 때문일까.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 된 전일비.
반면 당소월은 마냥 뿌듯한지 살짝 어깨가 올라와 있었다.
그 모습이 얄밉지만, 한편으로는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잠시 당소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전일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잠깐 자네의 무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겠나?"
"예? 그야 물론 괜찮습니다."
"우선 다른 제자들에게는 자네의 살기가 무공의 특성일 뿐, 정말로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설명해 두었다네. 실제로 검격이 매섭긴 했으나 살초는 없었잖나."
"아, 그 부분은 감사합니다."
아무리 감정이 격해지기 쉬운 비무 중이라고는 하나, 그토록 짙은 살기를 흩뿌리며 종남파의 장로를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까딱 잘못하면 내가 정말로 전일비를 죽이려 들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 부분은 잘 설명했다니, 한시름 덜어도 괜찮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전일비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겠네. 자네의 무공. 그건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더군."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모든 걸 혼자 해낸 것처럼 느껴지는군요. 많이 도와준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 한들, 무공을 완성시킨 주체는 자네 아닌가."
"뭐어. 그렇죠."
검기를 사용하지 않고, 검술만을 겨루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전일비의 눈엔 무언가 보였나 보다.
"무공의 이름이 어찌 되나?"
"광랑탈명공(狂狼奪命功)입니다."
"사파스러운 이름이구먼."
"실제로 사파의 무공을 근간에 두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전일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내 제자가 되지 않겠나?"
"...예?"
"물론, 제자라고는 해도 속가제자 같은 것일세. 당가의 사위를 종남산에 얽매어 둘 수는 없잖나. 그저, 지금의 무공이 아닌 종남의 무공을 배워 보는 게 어떠냐고 묻는 걸세."
"...."
예상치 못한 내용에 순간 멈칫한 사이. 전일비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도 느꼈을 걸세. 뿌리도, 지향하는 바도 다르지만 자네의 무공과 종남의 무공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야 뭐어."
"분명 처음부터 다시 익힌다 해도 지금의 무위를 되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걸세. 스스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이 늙은이는 장문인보다 배분이 한참은 높네. 그러니 다소 무리한 일이라도 밀어붙일 수 있을 걸세. 예를 들면 상승무공이라던가 영약이라던가 말이네."
쉽게 말해 각 잡고 밀어주겠다는 뜻. 다만, 전일비에게서는 인재를 향한 욕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안타까움이 더 커 보였지.
"아무래도 삼 장로께서는 제가 지금의 무공을 버리시길 원하시는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자네의 무공에 자네가 집어삼켜질 테니까. 허투루 흘려듣지 말았으면 하네. 오래 살다 보니 실제로 그런 이들을 몇몇 봤기에 하는 말이니."
전일비의 말은 사실이겠지. 사파 무인 중에 고수가 얼마 없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니까.
제대로 된 뿌리 없이, 오직 강해지기 위해 익힌 무공에 휘말려 스스로를 잃는 것이다.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고수를 나 또한 제법 알고 있다. 회귀 전의 기억이지만.
허나, 나는 예외다. 차라리 벽에 막혔으면 막혔지, 주화입마에 휩싸이지는 않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종남의 검에는 종남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었죠."
"자세한 것이 궁금하다면 내 제자가 되게."
"제 검에 담긴 것은 제 삶입니다."
"...."
그도 그럴 것이 내 심상에 지옥을 품은 시점에서 나는 이미 주화입마에 빠진 것과 다름없는 상태니까.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만한 살기를 품고 살아가는 시점에서 미친놈이나 다름없다는 것쯤은.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제 삶인데, 어찌 삶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단 말입니까."
"...."
내 말을 곱씹던 전일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기 삶은 내버릴 수 없는 법이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강요할 생각은 없었네. 다만."
잠시 말을 고르던 전일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만, 그런 선택지도 있음을 기억해 주게."
전일비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무장을 나섰다.
어쩐지 그 뒷모습은 잔뜩 지친 사람처럼 보였다.
***
비무까지 끝마치고 다시 돌아온 객방. 나를 따라 들어온 당소월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뭐 하고 놀까요? 뭐 하고 놀까요?"
"...."
가만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금쇠는 굳게 잠겨 있었고, 독혈부대주는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즉, 이 방엔 나와 당소월 둘뿐이다.
[6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1] 61화. 귀영신투 (2)
방문을 닫고, 꼼꼼하게 잠그기까지 한 당소월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뭐 하고 놀까요? 뭐 하고 놀까요?"
"...."
비무 중에 다친 상처는 이미 치료가 끝났고, 독혈부대주는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
여기서 나갈 명분도 없고, 누군가 들어올 일도 없다는 소리다.
즉, 이 방에는 나와 당소월이 둘뿐.
이를 자각하자 괜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정작 당소월 본인은 아무 생각이 없는지 품에서 아침에 슬쩍 보았던 골패를 꺼내고 있었지만.
하기야. 골패는 오래된 도구고, 이를 이용해 앞날을 점치기도 하니 종남파 어딘가에 골패가 굴러다니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부적 써주고, 제사 지내주면서 참배객의 복을 기원해 주는데 골패점 정도야 놀랄 만한 일도 아니지.
다만, 골패는 통상 노름에 자주 쓰인다는 점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벌써부터 이런 거에 맛 들이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아나? 규칙이 꽤 복잡할 텐데."
"물론이랍니다. 독혈부대주에게 어제 배웠는걸요?"
"...."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에게 그런 거 가르쳐도 되는 건가.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디 가서 사기당하지 말라고 예방 교육 좀 시킨 것에 가까웠다.
"돈을 걸면 도박이 되고, 도박은 아무리 무공의 경지가 높아도 도박꾼을 이길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했지요."
"맞는 말이군."
흔히들 도박꾼이라 하면 화려한 손기술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기 어려운 신호로 서로 간의 정보를 교환하거나, 교묘하게 상대의 생각을 몰아가고, 도박 도구 그 자체에 수작을 부려놓는 경우가 더 많다.
독혈부대주의 말처럼 아무리 무공의 경지가 뛰어나도 당할 때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아예 손도 대지 않는 것이 상책이나... 본래 사람이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존재를 확인하고 흥미까지 느꼈다면 돈을 걸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나으리라.
독혈부대주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당소월이 눈을 반짝이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니 돈이 걸리지 않은 내기는 어떨런지요?!"
"...?"
뭔 소리인가 싶어 당소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화배독초로 체내의 독기가 한층 강해진 탓일까. 검은 바탕에 옅은 녹색빛이 감도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회귀 전에 반쪽만 드러낸 얼굴을 보고도 아름답다 여겼는데, 양쪽 다 드러낸 지금은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다만, 외모는 몰라도 전체적인 인상은 내 기억 속 모습과 꽤 달랐으니.
감정표현 자체는 확실했지만 그 폭이 희미했던 이전 생과 달리, 지금의 당소월은 피어나는 새싹처럼 생생한 반응을 보인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웃음. 기대가 큰지 살짝 거친 콧김과 언제든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움찔거리는 입가.
거기에 내게 얼굴을 들이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연스레 내 쪽으로 쏠린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겼으며, 시선은 자꾸만 넉넉한 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가슴께로 향한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무 가깝지 않나?"
아무리 오해가 풀린 이후로 당소월이 내게 스스럼없이 굴었다지만, 이 정도로 가까이 붙은 건 손에 꼽힐 정도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게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당소월의 반응.
"네? 이제 정혼자 사이니 이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닌지요?"
"정혼과 결혼은 다르다만."
구체적으로는 선을 넘었을 때 당진천과 강제 비무를 치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다.
물론 당소월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했지만.
스륵.
내 양 볼을 부드럽게 감싸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당소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과 내 것이 아닌 체온에 머리로 열기가 확 솟구친다.
자연스레 고정된 시선. 한층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짐짓 엄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서? 하실 건가요, 마실 건가요?"
"...."
말은 그리하지만 내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
실제로 이렇게 붙잡힌 시점에서 내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으니, 나를 참 잘 알고 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좋다. 그럼 뭘 내기로 걸 생각이지?"
"으음. 그러네요. 역시 여기서는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게 좋지 않을런지요?"
"소원?"
"예에. 물론 무도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요."
"나쁘지 않군."
그리 말하고는 이번에는 이쪽에서 당소월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만 당하는 것은 억울하지 않나. 이 정도는 돌려줘야 수지가 맞는다.
과거에는 독기로 녹아내려 항상 가리고 다니던 오른쪽 얼굴. 하지만 지금은 그저 보드라운 살결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제부터라도 당소월 네게 뭘 시키면 좋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읏!"
자신이 역공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당소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 샤샥 거리를 벌린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지요! 세 번 해서 먼저 두 번 이기는 사람의 승리 어떻습니까?"
"난 상관없다."
당소월이 품에서 꺼낸 골패를 우르르 바닥에 쏟았다.
***
"어, 어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절규를 내지르는 당소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한 안색. 하지만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어째서 제가 이렇게 탈탈 털린 건가요 천 소협! 설마...!"
"설마는 무슨. 애초에 이제 막 규칙을 배웠으면서 나한테 이길 거라는 자신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
"소협이 이렇게 잘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요! 아니, 아직 나이도 얼마 안 되면서 왜 이리 능숙한 건가요?!"
"그 정도는 규칙을 물어보기는커녕 역으로 괜찮겠냐고 물어볼 때 깨달았어야지."
"됐으니까 어서 대답해 주시지요! 설마 속임수를...?! 대체 저한테 얼마나 엄청난 일을 시키려고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수작은 부린 적 없다. 정말 순수하게 실력 차이일 뿐이지. 아, 덤으로 당소월 네가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있겠군."
"아니,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재촉하지 않아도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단순히 어린 시절에는 도박장에서 잔심부름하며 빌어먹던 시기도 있었을 뿐이다."
"그런...!"
뭐, 반쯤은 사실이다. 너무 어려 뭘 시키기도 뭐한 시절에는 적사파가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사흑련에서 소속된 이후. 돈도 좀 만져 봤겠다 큰맘 먹고 온갖 무공을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하오문 소속의 한 도박꾼이 상승의 검법을 걸고 도박을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도박에서 이기면 무공을 그냥 내어주고, 지면 금자 열 냥을 내야 한다는 조건이었지.
당시의 나는 사흑련주의 쪼잔한 견제 때문에 사흑련의 비고에서 좋은 무공을 익힐 수 없었다.
덕분에 한 번도 상승의 검법을 익혀본 적이 없었고, 상승 무공쯤 되면 매물로 잘 나오지도 않는 것이라 제법 절박하게 매달렸었다.
스무 번이나 패배할 줄은 몰랐지만.
처음에는 내게서 금자를 마구 뜯어내고 좋아하던 녀석도, 열 번을 넘기자 슬슬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스무 번을 채우자 그냥 무공서를 내어주며 부탁하더라.
그냥 내어줄 테니 그간 있었던 일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이다.
아마 내가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것이 두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당시의 나는 화가 좀 나고 답답하긴 했지만 보복까지 할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수락했고.
그럭저럭 친해진 다음엔 도박꾼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한두 판이라면 모를까. 나같은 초짜는 자신 같은 전문적인 도박꾼에게 털릴 수밖에 없다더라.
나를 앞에서 벗겨 먹을지언정 뒤통수는 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름 괜찮은 녀석이었지.
...다음에는 영약을 걸고 똑같은 도박판을 벌이다 성질 더러운 사파 고수에게 목이 베였지만.
결국 그 고수는 하오문에게 추적당한 끝에 똑같이 목을 베였으나, 그래 봐야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후로는 아예 도박장에 발을 끊었고.
아무튼 그렇다 보니 지금의 내 골패 실력은 상승 검법을 얻기 위한 발버둥의 흔적이다. 이제 막 규칙만 배워온 당소월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는 일은 요원할 터.
삼판이선승에서 내리 두 판을 연속으로 패배한 당소월이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처럼 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런 당소월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디 보자. 내가 이겼으니 소원권은 내 손에 들어왔군. 뭐를 시키는 게 좋으려나...."
"큿! 어차피 소협은 머릿속에 무공 생각밖에 없지요?!"
입술을 깨문 당소월이 침상 위에 발라당 드러누우며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귀찮게 달라붙는 저 같은 건 방치하고 어서 다른 선배님들과 무공 이야기나 하러 가시지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이가 없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은 당소월 너랑 함께하기로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그리고 내가 무공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 가긴 어딜 가나."
"...!"
반 박자 늦게 내 말뜻을 알아챈 당소월. 그녀가 부끄러워하면서도 헤실대는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나 무방비하게 내 앞에 몸을 드러내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호다닥 이불을 끌어당겨 몸에 감는다.
다람쥐에서 도롱벌레로 변한 당소월이 얼굴만 빼꼼 내밀며 물었다.
"그, 그럼 제게 무슨 일을 시킬 생각이셨는지요?"
"별거 아니다. 그냥 당소월 네가 이렇게 해서라도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니."
"앗."
정곡이라도 찔린 것처럼 놀란 당소월. 그녀가 잠시 목을 움츠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펴며 물었다.
"많이 티 났는지요?"
"많이는 아니다. 다만 원하는 걸 콕 집어 말하지 않고 굳이 소원권을 꺼내는 것이 조금 어색했을 뿐이니."
"...소협은 저를 잘 안 보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고 계시네요?"
"글쎄. 어쩌면 네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 내가 너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
"와. 방금 건 좀 소름 돋았답니다."
"...."
"농담이니 안심하시길."
여전히 이불에 양팔을 넣어 둔 채, 머리로 내 허벅지를 콩콩 두드리며 웃는 당소월.
슬쩍 다리를 펴주자, 아예 내 허벅지를 베개처럼 베고 누워 이쪽을 올려다본다.
"천 소협의 말이 맞답니다. 실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이렇게 하지. 내 소원은 당소월 네가 지금 품고 있는 고민을 내게 털어놓는 거다."
"이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제가 참 정혼자를 잘 만난 것 같단 말이지요."
혼자 키득이던 당소월이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다음 말을 이었다.
"흠흠. 일단 먼저 말씀드리지만, 저는 누구를 의심한다거나, 질투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랍니다. 이 부분은 명심해 주시길."
"벌써부터 불안해졌지만 알겠다. 그리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뜸을 들인 당소월의 입술이 열렸다.
"소협. 일전에 저를 보며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고 하셨지요?"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고도 말했지."
"...허면 설 소저를 보면서도 그분을 생각하시는지요?"
"...."
예상치 못한 질문. 다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당소월은 내가 설리향을 보면서 이전 생의 설리향을 떠올린다는 것을 알아챈 거겠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골라낸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6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2] 62화. 귀영신투 (3)
"...허면 설 소저를 보면서도 그분을 생각하시는지요?"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힌다.
설리향을 보면 이전 생의 당소월을 떠올리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당소월을 보며 이전 생의 당소월을 떠올리듯, 설리향을 보며 이전 생의 설리향을 떠올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두 사람 다 내 인생에 깊게 각인된 존재라 이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
이 질문의 또한 그런 의미에서 던진 것이겠지.
당소월은 내가 자신에게 품은 호의의 발단을 누군지 모를 과거의 존재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실제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분명 나는 지금의 당소월을 각별히 생각하긴 하지만....
내가 알고, 나를 알아주고, 많은 기억을 공유하며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던 약속을 맺은 이전 생의 당소월 또한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기에.
엄밀히 말해 모르는 사람이었던 이번 생의 당소월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낸 것도, 이를 토대로 연심을 피워낸 것도 분명 회귀 전의 당소월 때문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설리향도 마찬가지다. 회귀 전의 설리향과 지금의 설리향을 같은 사람이지만 별개의 존재로 여기고 있긴 하나.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설리향이 틱틱대던 모습을. 가끔 순음지체의 부작용으로 혼자 몸을 떨던 것을. 별거 아닌 장난에 부들거리며 화내고, 별거 아닌 선물에 폴짝 뛰며 기뻐하는 단순함을. 같은 이름의 배를 받을 땐 얼굴을 붉히며 기뻐하던 표정을. 침상에서 흘리는 교태로운 목소리를. 확신을 갈구하는 듯한 애절한 몸짓을.
그리고 내 품에 안겨 내뱉은 마지막 숨결을. 흘러내리는 뜨거운 피를. 투정 어린 욕지거리를. 결국 완성되지 못한 마지막 한 마디를. 코끝에 남은 배의 잔향을.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자각이었고, 이를 조용히 곱씹을 틈도 없이 닥쳐온 상실이었으며, 결국 그 빈 자리를 채운 것은 나 자신조차 불태울 격렬한 분노였다.
그을음처럼 눌어붙어 떼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짙은 흔적은 이미 심상의 일부가 되었으니.
당소월이 그러하듯, 설리향 또한 내겐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존재이며,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지금의 설리향에게 그 영향이 갈 수밖에.
한참을 고민하며 고르고 또 골라낸 말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나는...."
당소월이 묻는 것이 회귀 전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설리향에게 호의를 품는 것이라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갑작스레 도려내진 연심이 다시금 자라나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설리향을 보면서도 때때로 같은 생각을 한다."
"아...."
힘이 빠지며 축 늘어지는 당소월의 목소리. 이에 다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당소월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처음에 제가 말하지 않았는지요? 어떠한 질투도 의심도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불안은 있었겠지. 그러니 일전에 한 번 했던 말을 구태여 다시 하마."
내 허벅지를 베고 있는 당소월. 그녀의 검녹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 정혼자는 너다. 당소월 너 말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
"나를 꼬시겠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군."
광동성에서 있었던 일을 재차 들먹이자, 이건 참을 수 없었는지 당소월이 피식 웃었다.
"거기까지 걱정하지는 않았답니다. 하지만 뭐... 듣기는 좋네요. 조금 더 말씀해 주실런지요?"
"여기서 더?"
"예에. 여기서 더. 그래야 혹시 모를 경우에도 불안해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테니 말이지요."
"...?"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당소월이 더 해 달라고 하니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당소월 네 눈동자는 참 아름답다."
"느에?"
"독령지체의 독기 때문이겠지만, 검은 눈동자 위로 옅은 녹빛이 일렁이는 모습은 무슨 보석 같잖나."
"어어... 더 한다는 게 이쪽이었나요? 저는 단순히 소협에게 정혼자는 저뿐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만...."
"아, 그것도 추가하지. 다음은 머리카락이겠군.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보기 힘든 색에 절로 시선이 가는 것은 물론, 항상 잘 관리하여 길게 늘어뜨린 모습은 비단결 같아 아름답지. 거기에 움직이기 편하게 묶어 올리면 드러나는 새하얀 목덜미가 시선을 잡아끄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뒤흔들리곤 한다."
"아으, 추가라니. 이거 얼마나 이어지는 건가요?"
"기다려 봐라. 이제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 입술이랑, 향기, 손가락,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스럼없이 가벼운 신체접촉을 한다든가, 그럴 때마다 자꾸 가슴이 닿는다거나 아직 하고 싶은 말은 잔뜩 있다."
"...소협. 매번 무뚝뚝하게 받아 주셔서 잘 몰랐는데, 혹시 이런 쪽에 엄청 흥미진진하신지요?"
"당연한 말을. 장인어른의 눈치라던가, 무공 수련이라던가, 아직 정혼 관계인데 너무 빠르면 당소월 네가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라던가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 참고 있을 뿐이다."
"그, 그러셨군요?"
"음. 그런가. 잘 모르니 이런 걸로 자꾸 불안해하는 거겠지."
"불안까지는 아니랍니다...?"
조심스레 그리 말하는 당소월. 이번에는 그녀의 입술에 엄지를 밀어 넣었다.
졸지에 내 엄지를 물고 있는 꼴이 되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당소월에게 속삭였다.
"됐으니까 일단 들어라. 당소월 네가 원한 것 아니냐."
"...."
바람 앞의 촛불처럼 마구 흔들리는 당소월의 눈동자. 그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다음이 입술 차례였던가."
아직 이른 저녁이니 시간은 충분하리라.
***
"후우."
객방을 나오자 확 밀려드는 바람이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기분 좋게 식혀 준다.
방금 분 바람에 밀린 것일까. 동시에 구름에서 벗어난 달이 희미하게 밤의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늦었군."
분명 저녁이었던 시간대가 그새 완연한 밤이 된 것이다.
그새 나의 이런 점이 좋다 공세에 시달린 당소월은 여전히 도롱벌레 상태로 내 방에서 잠든 상황.
하기야.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물들인 수준을 넘어, 꺄악 꺄악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렀으니 지칠 법도 하지. 낮에는 비무도 있었잖은가.
나도 마음 같아서는 옆에 누워서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그 전에 바람이라도 쐬려고 이렇게 나온 것이고.
열이 오른 것은 당소월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둡군."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되지만, 딱 그뿐이다. 아마 오늘 걸린 달이 초승달이라 그런 거겠지.
어차피 멀리 나갈 생각도 없고, 기감을 펼치면 끝날 문제니 상관없지만.
딱 객방 앞의 작은 공터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갈 생각이다. 그 뒤에는 당소월을 이불에서 풀어주고,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야지.
머리를 긁적이며 간단한 계획을 세우고는 생각 없이 공터를 걷기 시작했다.
당소월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고, 사실 나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다.
다만, 설리향을 방치하지 않고, 당가로 데려온 이상 한번쯤 짚어 볼 만한 문제기도 했다.
그렇게 홀로 생각을 정리하며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둑한 시야의 너머에 비쩍 마른 인형이 보였다.
"이 늦은 시간에 뭘 그리 돌아다니는 겐가?"
"귀영신투 어르신?"
"맞네. 나일세. 그러니 그리 귀신 바라보듯 보지는 말아 주겠나?"
"분명 기감을 펼치고 있었습니다만...."
"끌끌. 자네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아직 내 기척을 감지하기엔 한참 이르네."
"아뇨. 그게 아니라 이 한밤중에 왜 기척을 지우고, 어둠에 몸을 숨기며 밖을 배회하고 있었냐는 뜻이었습니다."
"뭐, 뭐라?"
"혹시 이번에도 종남파에서 뭔가 슬쩍한 건...."
"에라이 이놈아! 대체 날 뭘로 보는 게냐!"
"언제나 어르신께서 직접 말씀하시듯 도둑놈이죠. 그것도 기껏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까지 가서 털어온 물건을 잃어버린 도둑."
천마를 상대하며 남만야수궁에서 슬쩍한 호심갑은 단번에 박살 났고, 간신히 건진 북해빙궁의 무공은 내게 넘어왔다.
즉, 귀영신투로서는 말년에 개고생만 하고 건진 건 하나도 없는 상황.
"그래서 종남파에서 뭐라도 하나 건지시려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네. 다만, 이미 유운검의 검집을 훔치지 않았나. 내가 훔칠 수 있는 물건 중에 그보다 값진 것은 없네."
"과연.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겁니까."
"자꾸 그렇게 이 늙은이를 염치도 없는 것으로 몰아갈 텐가?"
"실례했습니다. 제가 겁이 많아 밤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그림자를 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확인하려는 습관이 있는 터라."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만 귀신이라면 어찌할 생각인가?"
"베어야죠."
"뭐라?"
"이 밤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인간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놈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놈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베어야죠."
"...."
잠시 침묵하고 있던 귀영신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별호에 귀(鬼)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투를 수식하는 말이지 내가 귀신을 자처하는 것은 아닐세."
"?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그, 그런가."
"...."
"...."
순간 흐르는 어색한 정적.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한 귀영신투가 한 발로 콩콩 뛰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보니 진짜 귀신같은 그림자네. 귀영신투의 귀영과는 다른 의미지만.
아무튼 검은 인형이 가까워질수록 좀 더 자세한 이목구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옅은 달빛 아래서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뒤에야 헛기침을 하는 귀영신투.
"흠흠. 좋은 밤일세."
"예. 좋은 밤입니다. 그래서 왜 이런 시간에 그러고 계셨던 겁니까?"
"그거 아직 계속되는 거였나...?"
입을 쩍 벌린 귀영신투였으나, 이내 끌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이제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옛 친구를 만나고, 젊었을 때면 도둑질하기 딱 좋은 날이라며 기뻐했을 초승달을 보자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해져 바람 좀 쐬고 있었다네."
"그렇군요. ...헌데 달빛이 거의 없는 삭월이 더 좋은 날 아닙니까?"
"의외로 아니라네. 삭월에는 사람들의 경계심이 올라가니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거든."
"허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하기야. 당장 나도 어두우니 기감을 둘러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평소라면 아무 때나 기감을 퍼뜨리진 않았을 텐데.
만약 더 어두운 밤이었다면, 더 넓게 퍼뜨리려 들었겠지.
상대를 적당히 긴장시키고, 적당히 방심시키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귀영신투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지."
"저를, 말입니까?"
"맞네. 단둘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 말일세. 자네의 무공에 대해서 말이야."
"제 검에 살기가 짙긴 하지만, 천살성이 아님은 삼 장로께서 보증하셨습니다."
내 말에 귀영신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검이 아닌 보법에 관한 이야기일세."
"예? 제 보법에 무슨...."
보법을 언급할 줄은 몰랐기에 흠칫한 사이. 귀영신투가 어두운 밤 마저 꿰뚫어 볼 만큼 강렬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 보법.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서문세가의 것 아닌가."
"...!"
내게 지금의 보법을 가르친 이는 철혈당주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서문화린이다.
[6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3] 63화. 귀영신투 (4)
서문화린.
그녀는 한때 이름을 날리던 명문정파 서문세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여인이었다.
뛰어난 검술로 유명한 곳이나, 정작 서문화린 본인은 무공에 관심이 없어 아주 기초적인 것을 제외하면 열심히 익히지 않았다고 했었지.
언젠가 혼인하면 다른 집으로 가게 될 여인이라 가문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검보다 자수를 가까이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돌연 서문세가는 멸문을 맞이한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강서성.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처럼 강력한 정파 세력이 없으면서, 바로 옆에는 절강성이 자리 잡아 정과 사가 뒤섞여 투닥이는 동네다.
당연히 사파 무리에게 강서성의 한 축을 꽉 잡고 있는 서문세가는 눈엣가시였을 터.
결국 서문세가만큼이나 오래된 사파 문파인 흑천검문은 야망 있는 중소 문파를 설득하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사파 무리를 모아 서문세가를 멸문시키기로 한다.
그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오랜 다툼을 끝내고 화해를 청하는 척, 흑천검문주가 혼담 의사를 내비친다.
아무리 명문으로 추앙받아도, 강서성에서의 끝나지 않는 영역 다툼에 지친 서문세가는 이를 받아들이고.
결국 아직 혼인하지 않은 서문화린의 남동생과 흑천검문주의 딸의 혼인식이 열렸고.
경사스러워야 할 날은 서문세가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숙수를 매수해 술에 독을 타 가주와 그 측근을 중독시켰으며, 하객인 척 모여든 이들은 하나둘 숨겨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서문세가가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었으나, 그 이상으로 흑천검문의 준비는 철저했다.
강서성의 정파를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무사들은 하나둘 무력하게 쓰러졌고.
초절정 무인 중에서도 상대할 자가 손에 꼽힌다는 서문세가의 가주는 중독된 채로 분투했음에도 결국 흑천검문주의 손에 목이 베인다.
새신랑이 되었어야 할 앳된 남동생은 신부의 손에 심장을 꿰뚫려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뜬 채 숨을 거두었다.
서문화린이 살아남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공이 얼마 없고, 무공을 익힌 자 특유의 기세 또한 희미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덕분에 어찌어찌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서문화린의 세상이 하루아침에 불바다로 변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기 눈으로 가족과 가신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심정이 어떻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주 잘 안다.
분명 도저히 삭힐 수 없는 열불을 품고 있는 것 같았겠지. 이를 악물고, 가슴께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보아도 꺼지지 않는 불길.
오죽했으면 그 하룻밤 만에 까맣던 머리가 새하얗게 색이 빠졌겠는가.
이를 잠재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복수.
서문화린은 복수를 다짐하며 강서성을 떠나 중원을 떠돌기 시작했다.'
귀한 집 아가씨로 태어나 해본 적 없는 노숙을 해보고, 굶어도 보고, 사기도 당해 보고... 그리고 무공으로 사람을 죽여도 보았다.
복수하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했고, 무림은 어린 여자애가 홀몸으로 살아남기엔 썩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좋지 않은 목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전부 때려죽여야 했다.
다행히 서문화린은 무공에 흥미가 없었을 뿐, 재능은 충만했고 호신용으로 배운 간단한 권법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본격적인 검공에 입문하기 전, 몸을 만들기 위해 익히는 기본공에 불과할 권법과 가문의 기초 심법을 파고들며 개량하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그녀는 고수의 반열에 들었고, 이를 자각한 순간 미뤄 둔 복수를 시작했다.
물론, 절정의 무인이 강력하긴 하나, 혼자서 강서성의 지배하는 여러 문파를 전부 멸문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문화린은 가장 약한 문파부터 찾아가 천천히 유인하거나, 때로는 급습하여 한 명씩 쓰러뜨리기 시작했고.
문파원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한 서문화린의 복수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졌다.
그녀의 무위가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여러 문파와 가문을 멸문시켜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다.
흑천검문을 비롯한 서문세가의 멸문에 가담한 세력이 본격적으로 서문화린을 추살하려 들었으나.
그녀는 이 모든 위험을 꺾고, 되려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더 많은 문파를 멸문시켰다.
서문화린의 기세는 파죽지세와도 같았다. 들불이 퍼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재앙.
결국 모든 문파가 멸문하고 흑천검문 하나만이 남은 상황까지 다다랐으니까.
서문화린은 잘 알고 있었다. 흑천검문주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과 같은 초절정의 고수였으며, 서문세가의 무공을 흡수해 더욱 강해졌다는 사실을.
다만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복수라는 불길은 이미 그녀 자신조차 불태우는 중이었기에.
결국 흑천검문 무인들을 죄다 때려죽이고, 문주와도 사흘 밤낮으로 생사투를 벌인 결과.
기어이 서문화린은 흑천검문주의 머리를 부숴 버렸으며, 그녀는 어느새 백발나찰(白髮羅刹)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흑천검문까지 멸문시키며 복수를 끝마친 서문화린.
그녀의 불길은 꺼졌으나, 이번에는 남은 잿가루가 서문화린을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복수에 미쳐 있다고는 하나,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본래 선한 성격인 그녀가 못해도 수백을 때려죽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잔뜩 지친 서문화린은 흑천검문에 남은 서문세가의 무공을 수습해 조용히 은거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서문세가의 멸문과 그 복수에 관한 이야기.
다만, 여기에는 약간의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기본공을 개량하고, 끝없는 실전으로 초절정에 오른 서문화린에게 가문의 비전 무공이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지금껏 익힌 무공의 명백한 상위호환을 접하자, 그녀의 무공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기어이 화경이라는 드높은 경지에 올랐으나.
복수를 끝마친 이후로 그녀를 뒤흔들던 죄악감과 참오가 영향을 끼친 걸까.
환골탈태 자체는 화경에 오르며 누구나 한다는 것이지만, 서문화린의 경우에는 몸이 익힌 무공에 최적화되는 것을 넘어 아예 어려지는 반로환동을 겪었다.
그렇게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몸으로 돌아온 서문화린은 다짐했다.
이제 복수는 끝났고, 좀 달라지긴 했으나 가문의 무공도 이었으니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피비린내 나지 않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겠노라 말이다.
하여, 자신이 서문화린이라는 증거를 최대한 지우고 호북성으로 향했다.
무한시에 있는 무림맹. 그곳에서 열리는 용봉지회에 참가해 이름 없는 문파의 적당히 실력 좋은 후기지수로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뭐. 본래는 결승 때나 모습을 비추는 무림맹주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첫 비무부터 구경한 탓에 바로 들켜버렸지만.
한창 복수 중일 때의 잔혹한 손속 때문에 이미 사파의 거두 정도로 여겨지는 서문화린이다.
화경에 이른 고수이기에 좋게 좋게 말로 타이르긴 했지만, 아무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쫓겨났고.
결국 자신의 어려진 모습마저 알려지자, 새로운 삶을 단념했다. 그리고는 있을 곳이라도 찾기 위해 사흑련에 투신했으며.
그곳에서 나와 설리향을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서문세가와 서문화린의 이야기다.
그녀는 나의 스승이며 부모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무공을 전수해 주지는 않았으나 내 무공을 봐주는 정도는 종종 해 주었다.
덕분에 검술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심법을 개량했으며, 따로 놀던 보법을 내게 딱 맞는 것으로 새로 익힐 수 있었는데.
지금껏 서문화린이 내게 맞춰 만들어줬다고 생각한 보법이 서문세가의 무공을 개량한 것이라니.
언제나 내게 자신의 무공을 물려줄 생각은 없다며 선을 긋던 서문화린이었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귀영신투 어르신. 이게 정말 서문세가의 보법입니까?"
"일단 내 눈에는 확실해 보이네."
"서문세가의 무공은 한때 여기저기 퍼지지 않았습니까."
"백발나찰이 다시 수습하긴 했으나, 몇몇 무공은 워낙 널리 퍼져 되찾기 힘들었겠지. 허나, 이건 그런 어중간한 무공이 아니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귀영신투. 생각해 보면 그는 서문세가의 비고에 침입한 적 있는 사람이며, 다른 건 몰라도 보법이나 신법에 한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이다.
단순한 착각이라고 보기는 힘들겠지.
"알겠습니다. 제 보법이 서문세가의 것이었다고 치죠. 그럼 어중간한 무공이 아니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네. 애초에 자네는 지금껏 이 보법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었나?"
"이름은 없습니다. 제 스승께선 저를 위해 만들었고, 제가 쓸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하여 따로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셨으니까요. 만약 이름을 붙이고 싶다면 제 마음대로 하라 하셨으니, 굳이 말하자면 무명보(無名步)일 겁니다."
"아이고... 이렇게 뛰어난 무공이 하나 묻히는 거구나."
"대체 귀영신투께서 제게서 보신 서문세가의 보법이 무엇이길래 그러십니까?"
"뭐기는 이놈아. 뇌명보(雷鳴步)라고 들어는 봤느냐?"
"...전혀 모릅니다만."
"하기야. 서문세가가 멸문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그럴 수 있지. 뇌명보는 극쾌의 보법으로 유명한 상승무공이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여 뇌명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고."
"아."
그리 말하니 한가지 짚이는 것이 있긴 하다. 내 보법은 기본적으로 순간적인 속도와 완급 조절에 특화된 무공이다.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은 조금 부족하지만... 용천혈에서 내공을 터뜨려 급가속할 수 있고, 언제든 진각을 밟아 속도를 그대로 힘으로 바꾸며 급정지 또한 가능하다.
그중 용천혈에서 내공을 터뜨려 속도를 낼 때, 그 폭발음이 언뜻 듣기엔 천둥소리를 닮았다.
아직은 내 경지가 높지 않아 그리 도드라지진 않으나, 초절정에 다다른 이전 생에는 천둥 비슷한 소리를 내긴 했었지.
적이 잠깐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물어뜯기 위한 보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서문세가의 상승 무공 중 하나였다니. 그렇다면 아무리 나라도 외인에게 가문의 무공을 내어줄 수 없다던 서문화린은 대체 왜 내게 그런 거짓말을....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향해 귀영신투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전혀 모르고 있던 모양이구나."
"예. 제게는 그저 저를 위해 만들었다고만 하셨기에."
"자네를 위해 만든 것은 사실일 걸세. 자네가 서문세가의 심법을 익힌 것도 아니고, 그 무학과 묘리를 따로 배운 것도 아니잖은가. 완전히 다른, 자기 자신만의 무공을 익힌 자네라도 어렵잖게 펼칠 수 있도록 많은 개량을 거듭한 흔적이 보이네."
"...."
"필시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대체 왜...."
서문화린은 대체 무얼 위해 그렇게까지 했던 걸까.
그런 의문에 나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 이에 귀영신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라고 했나? 이유야 간단하지 않나. 자네에게 서문세가의 무공을 전수할 이라면 필시 백발나찰뿐일 테고, 그녀는 적이 많은 사람이네."
"적...."
그러고 보면 흑천검문주의 아들이 어찌어찌 살아남아, 서문화린이 그러했듯 복수심으로 화경에 올라 결국 서문화린과 함께 죽었었다.
서문화린의 복수는 화려했으나, 완벽하지는 못했고, 이미 사파의 거두로 낙인찍힌 탓에 무림에서의 인상도 썩 좋지 못하다.
"제자에게 자신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게야."
"아."
이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나만 서문화린을 스승이라 여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 그녀 또한 나를 제자라 생각했으리라.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내리누르는 중. 귀영신투가 본론을 꺼냈다.
"자네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다만, 내가 과거에 서문세가에 저지른 짓을 용서해 주었다는 점, 그리고 이번에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점. 이 둘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네."
"보답이라 하심은?"
"내 보법. 절반 정도는 가르쳐주겠네."
[6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4] 64화. 귀영신투 (5)
"내 보법. 절반 정도는 가르쳐 주겠네."
"전부면 전부지 절반은 또 무슨 소리십니까."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다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아 보법도 절반밖에 전수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닐세."
"...대체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그 정도로 무례한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습니다."
"농담이었네. 아무래도 재미없었던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외다리가 된 신세에 적응하려는 것 같긴 한데, 나로서는 반응하기 어려운 농담이었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는 귀영신투가 말을 이었다.
"내 보법인 귀영보(鬼影步)의 요체는 기만일세. 발재간을 통해 상대와의 거리를 기만하고, 화경 무인의 이목조차 기만하는 것일세."
"기만, 말입니까?"
"맞네. 자네가 내 움직임을 보았으니 묻는 말이네만 어떻게 느껴졌나?"
"희미하고 빨랐습니다. 무엇보다 상대에게 반 박자 느린 반응을 강요하는 것이 감탄스럽더군요."
"...거기까지 알아낼 줄은 몰랐다만 정답일세. 단순한 빠르기만으로는 내 보법을 흉내 낼 수 없네."
귀영신투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감각을 혼란시키고,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빈틈을 끄집어내는 것. 그렇게 드러난 간극에 몸을 던지는 것이 귀영보의 요체일세. 이제부터 자네에게 알려 줄 것이기도 하고."
"반대로 말하면 그외의 것은 알려 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군요."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절반만 가르쳐 주겠다고. 애초에 은밀함은 보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네. 경신법 또한 따로 익혀야 하니 사실상 내 무공을 전부 이어야 하는 셈이지. 그건 안 되네."
경신법과 보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밀접한 관계. 경신법으로 완성되는 보법이 있다 하여 놀랄 일은 아니다.
애초에 무공이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덮어주는 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까.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어르신께서는 분명 자신의 무공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셨습니다. 헌데 제게 반절이나마 전수해 주시는 연유가 궁금합니다. 구명의 은은 이미 빙하진기로 갚지 않으셨습니까."
"별거 아니네. 자네가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착각했을 때의 모습을 보았고, 이번에 전일비 그 친구와의 비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들었네."
귀영신투의 시선이 잠시 흐려졌다. 마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필시 자네도 무언가를 잃은 경험이 있겠지. 그것이 남긴 흉터가 자네를 뒤틀었을 게야."
"...."
"무림이라는 곳은 실로 비정하기 짝이 없네. 자네의 사정은 안타까우나, 자네가 특별히 비참한 경험을 겪은 것은 아닐 터."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화를 겪고도 살아남은 이가 얼마 없고, 그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이는 더더욱 적어 쉬이 드러나지 않을 뿐일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비참함을 곱씹고 있겠지.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끝없는 은원의 연쇄는 멀리에 있지 않다.
당장 회귀 전의 나도 겪어 보지 않았는가.
가문을 잃은 서문화린이 흑천검문을 포함한 강서성의 사파 문파에 복수를 행하고.
살아남은 흑천검문주의 아들은 흑천검제가 되어 다시금 흑천검문을 세워 서문화린에게 복수를 돌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설리향과 서문화린을 잃은 나는 흑천검문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놈들을 죄다 찾아가 죽였고.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스러지는 자가 많긴 하지만... 무림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칼 들고, 자존심 강한 놈들이 모인 곳을 무림이라 부르지 않는가. 하하 호호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괜히 정파가 추앙받는 게 아니다. 그들은 적당한 선에서 은원을 끊을 줄 아는 이들이기에, 원한보다 은혜를 더 중요시하기에, 먼저 베풀 줄 아는 이들이기에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지.
다만, 귀영신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무림의 비정함이 아니었다.
"자네는 그럼에도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지. 이미 한번 잃었던 자에게 새로이 지킬 것이 생겼단 말이네."
"그건...."
"자네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묻지 않을 걸세. 내게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다만, 나는 자네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후배가 같은 실수를 겪는 꼴을 보고 싶지 않네."
그리 말하고는 내 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귀영신투. 회한, 그리고 약간의 안도가 담긴 시선이었다.
"그러니 자네는 더 강해지게. 그렇게 강해진 뒤에도 자네가 무엇을 위해 강해지려 했는지를 잊지 말아 주게. 그거면 충분하네."
"...약조하겠습니다. 어르신의 가르침은 허튼 곳에 쓰이지 않을 겁니다."
이건 진심이다. 당가에 머무르며 그 말도 안 되는 규모에 자주 놀라긴 하지만, 나도 한때는 초절정에 다다른 무인이었다.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고,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부귀영화는 누릴 수 있었던 위치.
그럼에도 내가 한 일은 전 재산을 털어 중원의 온갖 무공을 사들이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는 소리다.
천마의 등장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지만.
세상은 넓고, 내 상상을 벗어난 천재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그 괴물로부터 내 사람을 지켜야 한다.
힘에 취해 쓸데없는 짓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을 터.
이러한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귀영신투가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만족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럼 이제부터 구결을 전수하도록 하겠네. 자네의 보법에 바로 적용할 수 있을 게야."
"그게 가능한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서로 다른 무공 아닙니까."
"가능하네. 애초에 내 무공은 내가 훔친 여러 무공을 짜깁기해 만든 것이기에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중간은 가는 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서문세가의 무공은 이미 한번 훑어본 것 아닌가. 적당히 다듬어 주겠네."
"...."
말없이 노려보자 스윽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 귀영신투.
"흠흠.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자네의 스승은 나처럼 자잘한 과거의 원한을 잊겠다 하지 않았는가!"
"그냥 쳐다본 겁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살벌한 것 같다만."
"제가 워낙 표정이 딱딱해 자주 그런 착각을 받더군요."
"정혼자와 있을 때는 입가가 느슨하기 그지없었거늘...."
"정혼자와 다 늙은 어르신이 같습니까? 됐으니까 빨리 시작하죠."
"뗴이잉. 내가 이런 취급이나 받으면서 가르쳐야 하는 건지."
툴툴거리면서도 굽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는 귀영신투. 그가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 귀영보는 기본적으로 기만하는 걸음이네. 속도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고."
"살귀와 싸우며 인지의 간극을 파고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만이라 하심은 이를 파악하고 역이용하는 겁니까?"
눈의 깜빡임, 들숨이 날숨으로 변하는 순간, 잠시 풀린 집중, 개인의 버릇, 무공의 취약점 등등.
세상에 완벽한 무공은 존재하지 않고, 완벽한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누구나 평소보다 취약해지는 때는 있는 법.
빈틈을 파고들어, 그대로 목덜미까지 물어뜯는 내 무공의 특성상 이에 익숙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동일하나, 그 과정이 상이하네."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발을 튕기는 귀영신투. 순식간에 내 등 뒤로 돌아간 그가 말을 이었다.
"방금. 내 움직임이 보였나?"
"보이긴 했죠. 제 오른쪽으로 뛰어 그대로 배후를 점하지 않았습니까."
"맞네. 그럼 이번은 어떤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한 내게 다시금 보법을 선보이는 귀영신투. 다만 이번에는 그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옆구리로 향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거기서 갑자기 시간이 끊어진 듯 어느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더라.
"...중간에 속도를 높이신 겁니까?"
"속도는 같았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알겠나?"
잠시 입을 다문채, 귀영신투의 두 움직임을 찬찬히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잠깐 생각하는 것으로 바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무공이 아니라는 것만 재차 깨달을 뿐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긴장을 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만...."
"사실 모르는 게 당연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로 앞에서 당하는 자네만큼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무공이니."
끌끌 소리내어 웃던 귀영신투가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일부러 발자국을 남겼으니 한번 봐보게. 그럼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바닥을 내려다보자, 양옆에 남긴 발자국의 차이가 선명히 보였다.
"아."
"이제 알겠나?"
"예. 두 발자국의 각도가 다르군요. 패인 깊이도 다르고 말입니다."
"맞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지. 하지만 자네는 처음에 본 것을 생각하고 두 번째를 판단하려 했을 테고."
"이전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니 예측을 벗어난 움직임처럼 보이는 거군요."
"맞네. 이러한 속임수를 보다 정교하고, 보다 넓은 범위에 적용시키는 것이 귀영보일세."
인지의 간극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인지의 간극을 만들어 파고드는 것이다.
발재간 자체는 환(幻)의 묘리가 섞여 있을 테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무공이 추구하는 바는....
"패(覇)."
언제나 상대를 앞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수를 교환하는 순간순간에만 앞서기 위한 것.
상대의 가장 약한 부위에 내 가장 강한 부분을 부딪치는 요령.
그리하여 시종일관 우위에 서기 위한 묘리.
단순히 속여 넘기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리하여 상대의 흐름을 무너뜨리고, 더 많은 빈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무공.
그것이 내가 본 귀영보다.
"아닙니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이걸 그대로 가져다 쓸 것도 아니잖은가. 제대로 가르쳐 주긴 할 테니 필요한 부분만 취하게. 나나 자네나 이쪽이 더 편하잖은가."
"...맞는 말입니다."
나도 귀영신투도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여기저기서 얻은 것을 뜯어고치고, 이어 붙여 자신에게 딱 들어맞도록 개량했을 뿐이지.
무엇보다 귀영신투는 전투보다 도주를 선호하는 이다. 같은 무공이라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귀영신투가 뒷짐을 지며 말했다.
"대충 알았으면 집중하게. 이제부터 구결을 불러줄 터이니."
이후로 이어진 귀영신투의 무공 전수는 아침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내게 맞도록 다듬고, 몸에 익도록 수련해야겠지만 이걸로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
***
낮에는 종남파의 제자와 비무를 벌이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현판에 새겨진 검흔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밤에는 귀영신투로부터 배운 귀영보를 어떻게 뇌명보에 녹여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방에 돌아가면 당소월과 노닥거리다 잠들기를 며칠.
어느새 당가에서 온 사람이 종남파에 도착했다.
"오랜만...까지는 아니군요 공자. 아무래도 소월 아가씨께선 길게 외유하기 힘든 체질인 모양입니다."
허허로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노년의 사내.
일전에 동행했던 암혼대주 당철영이었다.
[6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5] 65화. 이른 귀가
슬슬 귀영보의 요령을 알 듯 말 듯 할 때쯤.
당가에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다.
"암혼대주께서 오신 겁니까."
"그래도 일전에 한번 안면을 트지 않았나. 익숙한 사람이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가주께서 나를 보내셨네."
암혼대주와는 광동성으로 향할 때 동행한 적이 있었다. 대화를 많이 나누진 못했으나, 실력이 뛰어나며 당가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암혼대주가 허허 웃으며 내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소월을 향해 말했다.
"아가씨. 제가 너무 늦게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아, 아니에요! 암혼대주께 서운하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답니다. 다만, 그으. 출발하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갑자기 부끄러워졌다고 해야 하려나요...."
말끝을 흐리며 내 뒤에 슬쩍 몸을 숨기는 당소월. 뭔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암혼대주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아! 당가를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말이시군요. 그건 분명 부끄러우실 만하지만, 이번 일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대체 뭔데 그러십니까? 저만 모르는 이야기라 생각하니 조금 섭섭합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최근 들어 아가씨의 암기술 수련을 제가 돕고 있잖습니까."
"그렇죠."
"그때 제게 말하시길. 이제 독공의 성취는 물론이요, 암기술에도 무림초출 때를 훌쩍 뛰어넘는 성취를 이루었으니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는 불상사는 없을 거라 자신하셨습니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했을 겁니다. 아가씨께선 좋은 일이 있으면 주변 사람과 꼭 공유하시니 말입니다."
"이런. 저희가 당가를 떠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스무날 정도겠군요. 오늘 종남산에서 출발해 부지런히 달린다면 나흘 뒤엔 당가에 도착할 겁니다.
"그래도 한 달을 채우기엔 조금 부족하군요. 그리 자신만만하게 선언해 놓고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겠죠."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내 등에서 벗어나 독혈부대주의 등 뒤로 숨는 당소월의 모습이 있었다.
"뭘 자꾸 숨고 그러나."
"벌써 천 소협을 알고 지낸 지 제법 됐지요. 슬슬 소협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답니다. ...지금 저를 놀릴 생각이었지요?"
"놀리다니. 오해다. 난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바라보았을 뿐이다."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여기서 한 칠주야 정도만 더 머무르면 한 달은 넘길 수 있을 테니, 혹시 그때 출발할 생각이냐고 말이다."
"...."
"여기 계신 암혼대주께서 입을 다물어 주신다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 어떤가? 생각 있나?"
"...이익! 없어요! 없답니다! 그렇게 억지로 한 달을 채워봤자 달라지는 것 또한 없겠지요! 결국 저는 호위까지 거느리고 기세등등하게 두 번째 무림행에 나섰다가 바로 옆에 있는 섬서성을 절반도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온 한심한 여자가 될 테니 말이에요!"
회귀 전의 나처럼 갈 곳 없는 사파 떠돌이에게 무림행은 별거 아닌 일상이지만....
명문 정파에서 자란 젊은 무인은 무림행에 환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제 막 울타리를 나온 후기지수들에겐 무림행 중에 무엇을 겪었느냐 자랑거리가 된다고 했었지.
양민을 핍박하는 산적을 소탕했다던가, 사악한 사파의 무뢰배를 쓰러뜨렸다거나, 어디서 누구랑 비무해 이겼다 등등.
무림에서 칼 차고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하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이들에겐 멋있어 보일 수밖에.
헌데 당소월은 그걸 두 번이나 망친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혹시 몰라 호위까지 함께했는데도.
물론 그 두 번 모두 나름의 사정이 있었잖은가.
"으음. 자신만만하게 말해놓고 바로 어기게 되어 부끄러운 것은 이해하나, 솔직히 이번 일도 암혼대주께서 언급하셨듯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살귀 다섯에 열댓 명의 일급살수를 상대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귀영신투와 독혈부대주의 도움이 있었다고 하나, 어지간한 후기지수였다면 진작에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겠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한 달도 못 채우고 돌아간다 해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의 사건이다.
"그래도 말이지요... 다음 용봉지회 때가 되면 아는 얼굴들을 만날 텐데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슨 이야기를 하긴. 능력 있는 정혼자 자랑이나 하면 되지."
어깨를 으쓱이며 숨어 있는 당소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됐으니까 이리 나와라. 가기 전에 장문인께 인사는 하고 가야지."
"...."
잠시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당소월이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그리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이 정도면 확실히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하지요. 암혼대주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미 유운검선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가주님께서 맡긴 편지도 있는 터라 가장 먼저 들렀죠."
"알겠어요. 그럼 저희끼리 다녀올 테니 독혈부대주와 함께 복귀할 준비를 부탁드려요."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꾸벅이는 암혼대주에게 한차례 마주 꾸벅이고는 당소월과 함께 장문인실로 향했다.
다시 만난 유운검선은 이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바빠 보였고, 피로해 보였으며... 이 모든 것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듯 묘한 여유가 느껴졌다.
"유운검선 어르신."
"그래. 당가주에게 받은 서신의 내용이 궁금해서 찾아왔소?"
"떠나기 전에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 찾아온 겁니다."
"뭐, 별거 없소. 그대들을 보호해 주어 고맙다는 상투적인 이야기가 절반, 언제 한번 예전처럼 술이나 한잔하자는 의미 없는 약속이 절반, 마지막으로 사위가 좀 살벌하긴 해도 천살성은 아니라는 걱정이 절반 적혀 있었을 뿐이니."
"전부 합치면 하나 하고도 반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서신의 내용은 안 궁금합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서로 가주고, 장문인이라는 이유로 쓸데없는 수식어를 늘어놓았으니, 하나 반 분량이 맞소. 그리고 내용이 궁금할까 봐 알려준 것이 아니라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가벼운 주제 선정이었고."
그리 말한 유운검선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서신을 품에 넣었다.
그제야 이쪽을 바라본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그동안 지내며 불편한 곳은 없었소?"
"괜찮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나와 당소월이 거의 동시에 대답하자, 유운검선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비무에서 종남의 제자들을 너무 쥐어팬 탓에 불편하면 어쩌나 싶었으니."
"어디까지나 비무의 범주였다고 생각합니다만...."
"농담이오. 다만, 소협이 진백이라는 아이를 특히 신경 써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옛날 생각이 들었을 뿐이죠."
유운검선이 의도한 대로 나와 당소월과의 비무는 종남의 제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보기 힘든 암기술은 물론이요, 도가의 검과 상이한 살검(殺劍)을 안전하게 겪어 본 것 아닌가.
다만, 당가라는 배경을 지닌 데다가 암기술만 사용해서 그런지 가끔 나이가 좀 있는 이대 제자 상대로 비무에서 지기도 하는 당소월과 달리.
삼 장로를 제외하면 한 번도 비무에서 패배한 적 없는 데다가, 외견도 어리고 검에 살기가 그득한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약간 꺼리는 이들이 있더라. 한번 상대하고 나면 질려서 다시 비무를 신청해 오지 않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 이들 사이에서 진백은 꽤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몇 번을 패배해도 굴하지 않고 웃으면서 비무를 청한다거나, 이해되지 않는 수는 알려줄 수 있냐며 정중히 물어보는 등.
승패나 비무 시의 압박감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그저 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회귀 전의 내가 보았던 그 올곧은 기질은 종남의 멸문을 겪으며 약간 변질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타고난 것이리라.
"허어. 옛날 생각이라. 소협은 아직 어리면서 다 늙은 노인네처럼 말할 때가 있구려."
"아! 천 소협이 좀 그런 면이 있죠."
"...."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 빤히 바라보자,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며 되려 턱을 치켜든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얼굴은 대개 못생긴 법인데, 당소월은 왜 예뻐 보이는 걸까.
아니, 애초에 어떻게 하면 못생겨 보일 수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아무리 당소월의 망가진 모습을 생각해 봐도 하나같이 아름답다는 감상만 든다.
하기야. 얼굴 반쪽이 녹아내린 당소월을 보고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멀쩡한 지금은 어떻겠는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유운검선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딸을 그리도 아끼는 진천이 그놈이 갑자기 정혼자를 이어주었고, 소협의 재능 또한 뛰어나기에 그만큼 당가에 묶어 두고 싶은 인재인가 생각했소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가 보오."
"...아."
그제야 내 시선을 눈치채고 얼굴을 붉히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유운검선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지금껏 자식이 없음을 안타까워한 적은 없었네만 지금은 좀 친우가 부럽구려. 그나저나 천 소협. 이제 곧 종남을 떠날 터인데... 어떻게. 원하는 것은 좀 얻었소?"
"원하는 것 말입니까."
첫날에 유운검선은 말했었다. 종남에서 얻어 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 가져가라고.
그리고 지금. 종남파의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나, 종남파가 무공으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종남의 도(道)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무공으로 그 도에 닿으려는지를 말한 것이지.
중요한 것은 끊이지 않는 흐름. 빗나가거나 자세가 무너지더라도 그조차 하나의 과정으로 포용한다.
상대의 흐름을 끊고, 목을 베어 내기 위한 검이 아닌 자기 자신의 흐름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검.
분명 내 무학보다 깊이 있는 무학이겠으나,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너무 달라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어떤 자세에서도 다음 초식으로 이어지는 검. 느슨해 보이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수많은 초식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 중심의 배분이다.
몸이 흔들리고, 검은 튕겨 나갈지언정 그 중심만큼은 흔들린 적이 없었기에 계속해서 보법을 밟고, 다음 초식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리라.
종남파의 무공을 모르니 어떻게 이를 해결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근추나 중(重)의 묘리를 이용하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
거기에 내 검술을 어떻게 녹여 내느냐는 이제부터 연구하고 수련해 봐야겠지만... 이미 나름의 성과는 얻었다.
유운검선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차고도 넘칠 만큼 받아 갔습니다."
"허허. 그럼 다행이오."
순간 유운검선의 피로한 인상이 부드러운 도사의 그것처럼 변했다.
인자하지만, 이쪽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 그 안에 담긴 약간의 안도.
무엇을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운검선도 나름의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유운검선이 우리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 같은 불상사 때문이 아니라도 언제든 찾아와도 좋네. 친우의 딸과 그 정혼자를 박대할 생각은 없으니."
"따뜻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아버님께 편지만 보내지 말고 얼굴도 좀 비추라고 전해 드릴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문인실을 나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복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귀영신투와 눈이 마주쳤다.
[6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6] 66화. 이른 귀가 (2)
조금 떨어진 복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귀영신투와 눈이 마주쳤다.
비스듬하게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노인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런 정 없는 놈. 가기 전에 얼굴 정도는 비추고 가야 할 것 아니냐."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다만, 어르신이 저보다 빠르셨을 뿐이죠."
"거, 말은 잘하는구먼."
끌끌 웃던 귀영신투가 벽에서 몸을 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하나 건넸다.
"받아라."
"뭡니까 이건."
"내 무덤이 담긴 위치일세.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바로 찾아가진 말고, 나중에 귀영신투의 비고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면 그때 찾아오게."
"...정말 하실 생각이십니까."
"새삼스레 무얼. 도둑질로 시작한 인생, 도둑질로 끝마치는 게 가장 깔끔하지 않나. 무엇보다 이 중원의 수많은 무인이 내 무덤을 도굴하기 위해 몰려든다고 생각해 보게."
"그건 확실히 장관이겠군요."
귀영신투가 목숨보다 귀한 물건을 훔친 적은 없다지만, 자신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가장 귀한 것을 훔친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무덤이자 비고에 신공은 없을지언정 상승무공은 널려 있을 것이며, 신병이기는 없더라도 명검은 가지런히 걸려 있을 것이다.
귀영신투가 활동하던 시절은 거진 육십 년 전의 일이지만, 적게나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남아있다.
분명 비고의 소식이 들려온다면 몰려들 이는 차고도 넘치겠지.
안에 담긴 내용물을 탐내는 사파 무인은 물론이요, 과거에 귀영신투에게 당한 적 있는 정파의 명문들 또한 기꺼이 몸을 일으키리라.
도둑질당한 물건을 되찾는다. 이 얼마나 정당하고 알기 쉬운 명분인가.
"개판이 될 겁니다."
"그걸 바라는 걸세. 장례식은 화려한 걸 좋아하는 터라."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히죽이는 귀영신투. 어찌 보면 아이처럼 순수하게 느껴지는 그 미소에 이쪽도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자네 덕분에 외진 동굴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 대신, 세상 모두에게 내 최후를 알릴 수 있게 됐네."
"그러고 보니, 살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꺼이 장보도를 내어주신다 하셨죠."
"맞네. 본래는 적당한 크기로 찢어 여기저기에 뿌려 둘 예정이었으나, 자네에게는 특별히 온전한 장보도를 주는 것이니 기뻐해도 좋네."
"기뻐하는 건 나중에 가장 먼저 비고에 들어간 뒤로 미루죠. 저희야 이제 당가로 돌아간다지만, 어르신은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연세가 많으시다고는 하나, 아직 정정하잖습니까."
"허허. 아직 오늘내일하는 것은 아니지. 다만, 그리 여유롭지도 않네. 이번 부상으로 원기가 크게 상했으니 내공으로 노화를 붙잡을 수 있는 시간도 줄었을 걸세."
자신의 하나 남은 다리를 내려다보는 귀영신투. 예상과 달리 그의 얼굴에 걸린 것은 미련이 아닌 후련함이었다.
"뭐, 상관없네. 마교에서 본 것을 전했고,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벗과 화해했으며, 자네에게 전할 것도 전했으니 나 또한 이제 곧 종남산을 내려갈 생각이네."
"...그렇습니까."
"뭐, 여유가 없다면 부지런히 움직이면 될 일 아닌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중원 전체에 소문이 퍼지게 하려면 준비할 일이 참 많다네."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겠다는 귀영신투.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 마지막이라 생각한 거겠지.
다시 귀영신투를 만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대는 그의 무덤에 술을 따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이는 언제 보아도 익숙해질 수 없더라.
그런 내 속내가 겉으로 드러난 것일까. 귀영신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넘겨준 것은 장보도 하나가 아니잖은가."
"아."
맞는 말이다. 반쪽짜리지만 귀영신투는 내게 보법을 전수했으니까.
이를 그대로 가져다 쓰지는 않겠으나, 귀영보의 요체는 내 보법에 녹아 함께할 터.
훔쳐 배운 무공은 많으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삶이었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워 가만히 내 발과 귀영신투의 발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니, 돌연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와 나는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같은 점이 있네."
"무얼 말하시는 겁니까?"
"제대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것. 본인이 쓰기엔 별문제 없지만, 다른 이에게 전수할 수 없는 그런 무공을 익혔다는 점이 같다네."
맞는 말이다.
광랑탈명공은 내게 있어 여느 신공에도 밀리지 않는 훌륭한 무공이지만, 다른 이가 익힌다면 희대의 마공이라 불리겠지.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워지고, 그 위력이 강해지는 대신 시도 때도 없이 살의에 시달리는 무공이라니.
설명만 들으면 마공 중에서도 꽤 나사 빠진 종류의 마공 아닌가.
광랑탈명공에 담긴 것은 대단한 가르침이 아닌 내 삶이고, 여기저기서 뜯어낸 무공의 파편은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묘리들이다.
다른 누군가가 익히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오직 나만을 위한 무공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무림의 역사 속에 천재는 많았으나, 자신의 무공과 깨달음을 온전히 남긴 이가 얼마 없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이리라.
하지만 귀영신투는 이에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그리 생각했네. 하지만 젊은 날의 내가 그러했듯, 자네는 귀영보를 조각내고 필요한 부분만 뜯어 본인의 무공에 더하고 있지."
"그리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책망하려는 게 아닐세. 그저...."
잠시 말을 고르던 귀영신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저 놀랐을 뿐이네. 나와 같은 방식으로 무공을 익힌 자네라면, 단순히 따라 하는 걸 넘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귀영보를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그 안에 담긴 궁리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
귀영신투라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이러한 동작을 넣었는지, 어찌하여 사람 죽이는 기술로 사람을 속이려고만 들었는지.
다른 무공을 익힐 때도 그 기본적인 원리와 추구하는바 정도는 자연스레 알게 되지만.
귀영보는 이러한 의도가 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귀영보를 이해함으로써 귀영신투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런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귀영신투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그저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무언가를 훔치며 얻는 희열에 집착하고 있었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는 것에도 희열을 느끼게 되었네."
"무림인 중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제법 있습니다. 도벽이면 그중에서도 무난한 기벽이군요."
"허! 그래. 도벽이지. 내 기행은 결국 도벽일 뿐이었네. 하지만 그 도벽에 미쳐 오랜 친구를 이용해 종남파에 초대받고, 기어이 유운검의 검집을 훔쳤을 때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 줄 아나?"
"죄책감 아니겠습니까?"
"그건 암시장에서 슬쩍한 전진교의 무공을 내려놓고 갔을 때 반쯤 사라졌네."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만...."
적어도 당시의 장문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는 발표를 듣거나, 전일비와 화해한 다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다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그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내가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네."
"예?"
"아무리 방심한 사이라고는 하나, 화경 고수의 이목을 속이고 그의 침실까지 숨어들어 간 것이네. 마음만 먹으면 검집이 아닌 유운검을 훔칠 수도 있었고, 만약 내가 살수였다면 그대로 전대 장문인의 목을 노릴 수 있었다는 뜻 아닌가."
물론 화경의 무인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목을 노릴 수 있다고 했지 취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은 것이리라.
다만, 그 누구도 성공한 적 없는 절대고수를 상대로 한 완벽한 기습이 가능하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중원은 한차례 뒤집히리라.
"자네 말대로 나는 그저 도벽에 미친 사람일 뿐이네. 어렵게 훔칠수록 더 짜릿하고, 호들갑스레 내 행보를 칭송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또한 즐겁지. 무덤을 비고처럼 만들어 장보도를 뿌리겠다는 발상도 마지막으로 무림에 내 업적을 자랑하겠다는 의도였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전부 나와 같지는 않겠지."
귀영신투의 무공의 진수는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내게 알려주지 않은 나머지 반쪽.
화경 무인의 이목조차 속여넘길 수 있다는 은신술에 있는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지 않은 결과밖에 떠오르지 않았네. 하여, 도둑질이라는 업을 후대로 계승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대며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던 걸세."
"그렇다고 하기엔 제게 반쪽짜리나마 귀영보를 전수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자네에게 고마움을 느껴서도 사실이지만...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늘그막에 욕심이 난 걸세."
"욕심이라 하심은...."
"아무리 중원이 넓다 한들 나나 자네처럼 여러 무공을 익히는 이는 얼마 없네. 이를 뜯어고쳐 자신만의 무공을 만드는 이는 더욱 적고, 하물며 높은 경지에 오르는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거의 없을 겁니다."
회귀 전, 진짜로 어린 시절의 내가 괜히 스스로를 대종사급의 천재라 여겼던 것이 아니다.
남들은 불가능한 일이 내겐 가능하니까. 오랜 시간 이어지며 연구된 무공을 단숨에 이해하고 내게 그 일부를 훔쳐 내게 맞도록 개량해 버렸으니까.
아마 젊었을 때의 귀영신투도 비슷했겠지. 애초에 서문화린이 귀영신투라는 이름을 알려준 이유가 가문의 무공을 훔친 도둑이라서가 아니라, 나처럼 여러 무공을 긁어모아 자신만의 것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라서니까.
이는 단순히 근골이 좋다거나, 오성이 뛰어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능이다. 아쉽게도 내가 정말 그 정도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자네 덕분에 나는 사후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 되었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네.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지지 뭔가."
귀영신투의 비고는 중원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축제는 언젠가 끝나고, 뜨겁게 달아오른 것은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누군가 장보도를 모아 무덤의 위치를 찾고, 온갖 기관진식과 경쟁자를 돌파해 비고에 들어선다면 그걸로 끝.
이후로는 조용히 잊힐 뿐이다.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비록 그 형태가 바뀔지라도 내가 남긴 것은 영원히 자네의 무공에 녹아 있을 걸세. 만약 자네가 제자라도 들이면 더 먼 후대로 이어지는 걸 테고."
"흔적...."
"맞네. 흔적일세. 이 몸은 썩어 없어질지라도 제대로 된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 비고 정도로는 부족하네. 보다 확실하게 귀영신투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전해 줄 사람을 원했던 걸세."
"그게 저라는 겁니까."
"자네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전부도 아니고 반쪽짜리 무공을 전수했으면서 거기까지 주장할 생각은 없네. ...어쩌다 보니 또 이야기가 길어졌구먼. 전에도 말했지만 늙으면 이상한 버릇이 생긴단 말이지."
멋쩍게 웃은 귀영신투가 내게 포권을 취했다. 장난기를 쏙 빼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진지하게.
"장척(張跖)이라고 하네. 사람들은 나를 귀영신투라 부르지만, 자네는 이 늙은이를 이름으로 기억해 주게."
그것이 나와 장척의 마지막이었다.
[6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7] 67화. 외출금지
암혼대주와 그가 이끄는 암혼대와 함께 종남산을 내려와 당가로 향했다.
우려했던 대로 살수의 습격이 있긴 했으나... 살왕이 직접 온 것이 아니라면 큰 위협이 될 수 없다.
이쪽에는 완숙한 초절정의 무인인 암혼대주가 있잖은가.
덕분에 일전에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일급살수와 살귀를 상대했음에도 훨씬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더라.
한차례 정리해 뒀으니, 나중에 귀영신투가 준비해 둔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갈 때도 큰 문제는 없으리라.
살수 외에는 이렇다 할 문제 없이 도착한 당가. 이미 소식을 들은 가신과 식솔들로부터 걱정과 안도가 섞인 시선을 받은 나와 당소월은....
"너희 둘은 앞으로 삼 년간 성도 밖으로 나가는 건 금지다."
당진천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어, 어째서인가요, 아버님?!"
"으음. 솔직히 멀리 나갈 때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나 같아도 금지시킬...."
"조용히 하세요! 소협은 대체 누구 편이신지요?!"
"아니, 여기에 편이고 자시고가 있는 거였나."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당진천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월아. 그리고 예비 사위. 솔직히 말해 나는 불안하고, 또 두렵구나."
"아버님?"
"분명 너희는 나이에 비해 강하고, 나 또한 이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강하지만...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너희의 수준을 뛰어넘는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단다."
"그건."
아무리 당소월이라도 당진천이 이리 직설적으로 자신의 우려를 표하자 멈칫할 수밖에 없는 걸까.
치켜 올라갔던 눈매는 평소의 유순함을 되찾고,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은 편안하게 풀어졌으며, 허리춤에 올린 손은 스르륵 제자리로 돌아갔다.
당소월도 아는 것이다. 우리가 겪은 일은 하나같이 흔치 않은 것들이고,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으며... 무엇보다 너무 자주 일어났다는 것을.
세상 모든 무림행이 이 모양이었으면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사문을 나와 홀로 떠도는 일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겠지.
"당연히 평생 성도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은 아니란다. 그저 이 걱정 많은 아비가 안심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높은 성취를 이룬 뒤에 나섰으면 좋겠다는 것이지."
"아버님...."
당진천의 말에 잠시 말문을 삼킨 당소월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삼 년 뒤면 마침 용봉지회가 열리는 시기네요."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으냐. 무엇보다 둘의 성장세를 보아하니 삼 년이면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더구나."
사실 일류만 되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면 작은 무관의 관주 노릇을 할 수 있고, 이름있는 방파의 무력대에 지원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렇기에 처음에 안심하고 당소월의 무림초출을 허락한 것이겠지. 나한테 바로 납치당했지만.
아무튼 지금의 당소월은 그때보다 확연히 강해져 있었다.
비교적 미숙하던 암기술은 암혼대주의 밑에서 수련한 끝에 하나뿐이지만 추혼비접을 능숙히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독공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절정의 무인마저 고꾸라뜨릴 수 있게 된 지 제법 됐다.
자화배독초로 인한 독공의 위력 상승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실전을 겪고 목숨의 위협도 좀 겪어보며 무공 전반의 이해도가 높아진 덕이겠지.
본래 무인에게 위기는 곧 기회다. 죽지만 않는다면 얻어가는 게 있는 법.
내가 근본 없는 무공으로 초절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고, 회귀 전의 당소월이 한참을 막혀있던 벽을 뚫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화경에 오른 것도 사선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자신의 몸에 체화시키는 것.
당소월 또한 마찬가지다. 단기간에 밀도 높은 경험을 했으니, 그 안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을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에 종남의 무학 일부를 훔쳐 익힌 데다가, 귀영보의 요체를 전수받은 나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삼 년씩이나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당진천은 단순히 깨달음을 소화하는 기간을 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당소월은 이미 완숙한 일류의 무인. 나야 한번 넘은 경험이 있어, 쉽게 절정의 벽을 돌파했다지만 당소월은 제법 고생 좀 할 거다.
평생 일류 무인으로 살다 생을 마감하는 이는 수없이 많고, 이를 증명하듯 절정의 벽은 드높으니까.
다만, 당소월이 가진 재능과 체질. 그리고 사천당가라는 배경은 그 자체로 비견할 수 없는 기연과도 같으니.
당진천이 말한 삼 년의 의미는 아마....
"소월아. 사흘 뒤부터 네게 만류귀원신공(萬流歸原神功)의 전반부를 전수할 생각이다. 삼 년 안에 벽을 뛰어넘게 만들어 주마."
"그, 그건 오라버니나 익힐 수 있는 무공 아닌지요?!"
"청이 녀석은 독공보다 암기술에 뜻을 두고 있잖느냐. 실제로 그쪽에 더 재능이 있기도 하고. 하여,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을 전수하기로 했으니 안심해도 된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물론 만류귀원신공은 독공이니 오라버니에겐 도반삼양귀원공 쪽이 더 어울린다는 사실은 이해합니다만.... 둘 다 가주와 소가주에게만 허락된 무공이잖아요, 아버님."
"그렇지. 다만, 소월이 네게 만류귀원신공을 전수하는 건 예전부터 이야기가 끝난 사안이었단다."
"예?"
"소월이 네가 다른 어디도 아닌 이 당가에서 독령지체를 타고난 순간 가주인 나는 물론이요, 모든 장로와 가신들마저 만장일치로 찬성했지. 당연히 청이도 정식으로 소가주가 될 때 들었고 동의한 일. 그러니 복잡한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만류귀원신공을 익힐 생각에만 집중하거라. 괜히 신공이 아니니 만만히 봐서는 안 될 게야."
"어으...."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당소월.
뭐, 그 반응은 이해한다. 만류귀원신공은 당가의 비전 중에서도 특히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니까.
한 번도 소가주 자리를 탐낸 적 없는 당소월에게는 당황스러운 이야기겠지.
하지만 결국 그녀는 만류귀원신공을 익히리라. 적어도 이전 생에는 그랬다.
당시의 당소월에게 듣기로 만류귀원신공은 다양한 종류의 독기를 내공에 스며들게 하는 신공이라 하였다.
본래 독공이란 성취가 높아질수록 내공이 독기를 띄게 되는 무공이지만, 대개는 한두 가지의 독성밖에 갖지 못하는 법.
그 효율도 좋지 못해 직접 상대에게 흘려 넣는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독을 들고 다니며, 독공을 보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독혈부대주가 독공과 더불어 챙겨온 다른 독으로 용독술을 펼치며 싸우지 않았던가.
반면 만류귀원신공은 내공에 녹아드는 독기가 여타 독공에 비해 강렬하고, 다른 독을 꾸준히 섭취하여, 내공에 다양한 종류의 독기를 녹여내어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
덕분에 대성하게 되면 만독불침을 얻는 것은 물론, 화경에 다다르면 독기가 내공은 물론이요 육체에 완전히 녹아들어 신체 모든 것이 독성을 띠는 독인으로 거듭난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공능 아닌가?
그렇다. 만류귀원신공은 독을 다루는 것을 넘어, 독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무공.
사람보다 독물에 가까운 몸을 타고나게 되는 독령지체와 그 공능이 닮은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으리라.
허면, 독령지체를 타고난 당소월이 만류귀원신공을 익히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느냐?
그건 아니다.
오히려 독령지체가 만류귀원신공을 만나 그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었지.
다만, 본래는 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에야 익혔다고 들었는데....
뭐, 그 부분은 당진천이 알아서 잘하겠지. 조금 이르더라도 독공으로 화경에 오른 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무엇보다 자기 딸을 끔찍이 아끼는 당진천이 당소월에게 위험한 일을 시킬 리 없잖은가.
당황스러워하는 당소월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다들 괜찮다는데 무얼 망설이나."
"하, 하지만...."
"설마 형님을 몰아내고 가주 자리에 오를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그럴 욕심도 없고, 오라버니가 제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도 잘 알고 있답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럼 전부 해결됐군. 걱정 말고 열심히 수련이나 하면 된다."
"아니 무슨.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소협. 정통성이라든가, 전통이라든가... 제법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으니 말이지요."
"글쎄. 내 눈에는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만. 주변에서도 괜찮다 하고, 본인도 괜찮다 했거늘 뭐가 문제란 말이냐."
"그, 런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만 깜빡이는 당소월. 혼란스러워하는 거겠지만, 내 눈에는 귀여워 보여 키득이던 것도 잠시.
당진천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 사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하네만, 사위는 욕심이 나지 않나? 여자가 가주가 되는 일은 드물지만, 당가에서는 이미 몇 번 전례가 있던 일. 소월이의 능력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노려볼 만하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당가주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이 사천을 주름잡는 힘과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네. 데릴사위로서 누리는 힘이기에 조금 모양이 빠질지언정 누구나 탐내는 자리 아닌가."
"관심 없습니다. 애초에 제게 필요한 것은 당가가 아니라 당소월 본인입니다."
"허어...."
"무엇보다 당가를 손에 넣는다 하여 갑자기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화경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권력만큼이나 할 일이 늘어 무공에 집중하지 못하는 날이 늘겠죠. 장인어른이 그러하시고, 일전에 뵀던 종남의 장문인께서 그러하시듯 말입니다."
언제가 천마가 침략해 오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 압도적인 무려 앞에 화경의 무인조차 빛이 바래고, 오랜 시간 성세를 누리던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무너진다는 것을 안다.
당가의 멸문을 지켜본 당소월의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다는 것을 안다.
직접 본 당가의 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지만, 이에 안주할 수는 없다.
천마라는 피할 수 없는 파멸을 막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기에.
당소월이 당가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뿐이다.
나 자신과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회귀 전보다 강해지도록 만들어 지키는 것. 그리고 마교의 위험성을 알리고 중원 무림이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
그 외에는 아무리 대단한 부귀영화와 명예라 한들 내게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리라.
이러한 내 진심을 읽어 낸 것일까. 당진천이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가르쳐 준대도 싫다는 딸내미나, 당가의 힘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사위나... 아주 끼리끼리 잘 만났구먼. 천생연분이 따로 없어."
"아버님?!"
"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천 소협은 뭘 동의하고 계신 건가요!"
얼굴을 붉게 물들인 당소월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다 말고, 내 어깨를 마구 투닥이기 시작했다.
아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더 놀리면 진짜로 토라진다는 건 경험으로 학습했다.
그런 이유로 가만히 맞아 주고 있자니, 당진천이 헛웃음을 지으며 당소월을 말렸다.
"그만. 너무 사위를 괴롭히지 말거라 소월아."
"괴롭히다니. 그럴 생각은...."
"정 고민된다면 사흘간 쉬면서 고민해 보거라.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을 것 같구나."
그리 말하고는 가볍게 양팔을 벌리는 당진천. 그가 당소월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말하는 게 늦었지만, 무사해서 다행이다. 내 딸아."
"읏. 저, 저도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버님...."
두 부녀의 감동적인 장면에 작게 박수를 치고 있자니, 당소월을 풀어준 당진천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다 슬쩍 팔을 벌렸다.
"사위도 고생 많았으니 한번?"
"으음. 전 됐습니다."
"다행이군. 실은 나도 말해 놓고 좀 별로라고 생각했네."
"...."
그럴 거면 처음부터 묻질 말았으면 좋겠다.
***
"오다 주웠다."
내 방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외원당에 들러 설리향에게 빙하진기의 비급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설마 돌아오자마자 나한테 쓰레기 버리려고 들른 거야?"
"...."
아니, 좋은 걸 구해 줘도 이런 반응이라니.
[6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8] 68화. 외출금지 (2)
"오다 주웠다."
"...설마 돌아오자마자 나한테 쓰레기 버리려고 들른 거야?"
"...."
아니, 좋은 걸 구해 줘도 이런 반응이라니.
빙하진기가 익히기 까다롭긴 하지만, 좋은 무공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심지어 순음지체를 타고난 설리향에겐 하나뿐인 단점마저 별문제 없을....
"아."
괜한 서운함에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문득 내 손에 들린 빙하진기의 비급의 상태가 보였다.
척 봐도 낡아 보이는 외관. 심지어 귀영신투의 고된 도망 생활을 반영하듯,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는다.
끄트머리에는 젖었다 마른 흔적이 있고, 책등마저 살짝 휘기도 했으니까.
괜히 생색내기 싫어 반쯤 장난으로 주워 왔다고 했지만, 아직 무공을 잘 모르는 설리향 입장에선 진짜 주워 온 걸로 착각할 만한 상황.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다. 이번에 어쩌다 연이 닿아 좋은 빙한기공을 얻어서 전해 주러 온 거다."
"이게?"
"이래 보여도 북해빙궁의 심법이라 하더군."
"어, 음. 다른 곳의 무공을 막 익혀도 되는 거야? 허락은 받은 거지?"
"허락은 안 받았다. 애초에 장물이니까."
"장물?!"
그래도 요 한 달간 암혼부대주 밑에서 기본적인 무림의 상식은 배웠는지, 무공을 훔쳐 배웠다간 큰일 날 수 있다는 건 아나 보다.
"다, 당장 돌려놔! 나를 위해 가져와 준 건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북해빙궁이면 되게 큰 곳 아니야...? 그렇게 배웠던 것 같은데."
"맞다. 북쪽의 새외무림 중 가장 큰 세력이지. 하지만 익혀도 괜찮을 거다. 우선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문제가 생겨도 최악까진 가지 않을 테고, 그쪽도 그쪽 나름 사정이 있어 애초에 문제 삼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는 거지?"
"괜찮을 거다. 안 괜찮아도 내가 괜찮게 만들 테니 그 부분은 걱정 마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어떻게 해결하려고?"
"당연히 성의를 다한 사죄와 약간의 거래를 통해서지."
"뭐?! 칼부터 휘두르는 게 아니라?!"
"...설리향 네가 날 대체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대충 알것 같군."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설리향이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미안. 근데 너무 깜짝 놀라서 그만... 아무튼 괜찮다는 거지?"
"그래. 다만 혼자 익힐 생각은 하지 마라."
"어차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할 걸?"
"그렇겠지. 생각해 보면 지금 주는 건 좀 이르겠군."
빙하진기를 다시 품에 집어넣자 어이가 없다는 듯 이쪽을 노려보는 설리향. 입꼬리를 씰룩이는 것이 조금 울컥했나 보다. 회귀 전에 자주 봐서 안다.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아예 뺏어가겠다는 게 아니다. 내가 마음이 급해 순서를 헷갈렸다는 뜻이었지."
우선은 내일 당진천에게 빙하진기를 보여 주면서 이야기해 봐야지. 아마 지금도 설리향이 익힐 만한 괜찮은 빙공을 수배 중일 테니까.
북해빙궁의 무공이라는 점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거다. 귀영신투가 말하길 빙하진기는 좀 특이한 경우에 놓인 무공이라 했었지.
당가의 가주쯤 되면 빙하진기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엿한 상승무공이고 나름의 상징성도 있지만... 오랜 기간 성취를 이룬 이가 나오지 않아, 누가 됐건 익힐 수 있다면 익혀 보라는 무공 아닌가.
무엇보다 본인 말대로 지금 줘 봤자 이해 못 할 거다. 설리향은 아직 무공에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잠시 기다려라."
"으으. 이해했어."
시무룩해진 설리향. 그런 그녀의 축 늘어진 어깨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그리 실망하지 마라. 대신 이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줄 테니."
"아! 맞아. 사부님께 막 위험할 뻔했다고 들었어!"
"흥. 그 정도는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들어봐라. 우선 섬서성에는 대망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마루에 걸터앉아 그간 있었던 일을 가볍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약간의 각색은 곁들여야 했지만.
동굴을 찾은 건 우연이었다거나, 살수를 쓰러뜨릴 때의 묘사를 조금 덜 잔인하게 바꾼다거나 하는 식으로.
평생을 작은 세상에서 살던 설리향이기 때문일까. 무언가 이야기할 때마다 반응이 참 극적이다.
그저 가본 적 없는 섬서성이라는 이유로 눈을 반짝이더니, 내가 어렸을 때는 천재라 생각했다는 말을 하자 미묘한 표정이 되었고.
그 외에도 특이한 지형을 쫓다가 동굴을 발견했다거나, 그 안에서 귀영신투를 만난 이야기, 어찌어찌 살수를 쓰러뜨리고 종남파로 향한 뒤, 그곳의 풍경이나 겪은 이야기 등.
주제가 달라질 때마다 색다른 반응으로 집중해 주더라.
내가 그리 말재주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재밌게 들어주는 청자가 있다면 흥이 날 수밖에.
하여,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최대한 쥐어짜 돌아올 때까지의 일을 풀어주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설리향.
"부럽다아. 나도 나중에 무림행 갈 수 있으려나?"
"열심히 수련하면 안 될 건 없지."
"진짜? 나도 당 언니처럼 약관이 되면 그 정도로 강해지려나?"
"으음. 그건 좀 힘들겠군. 당소월은 훨씬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수련했잖나. 그간 먹은 영약도 상당할 테고."
"...그럼 그 절반?"
"뭐, 절반 이상은 되겠지. 설리향 네 재능이 부족한 건 아니니. 다만 오 년 뒤가 아닌 삼 년 뒤를 바라보는 걸 추천한다."
"왜? 삼 년 뒤에 무슨 일 있어?"
"...사실 나랑 당소월이 삼 년간 외출을 금지당했다."
"...."
"요 앞인 성도까지는 왔다 갔다 해도 상관없지만, 그보다 멀리 가는 건 금지라고 하더군."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잠시 어버버하던 설리향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나니 이해는 되네. 근데 왜 삼 년이야?"
"삼 년 뒤에 용봉지회가 있어서다. 오 년에 한 번 있는 큰 행사인데 이것까지 막기는 좀 그러셨나 보더군."
"아! 용봉지회! 나 이것도 저번에 배웠어! 무림맹에서 중원 전체의 후기지수들을 불러 모아 여는 큰 비무 대회지? 좋은 성적을 거두면 막 별호도 붙여주고 영약 같은 것도 준다며?"
"대체로 맞다. 거기에 한가지 보충하자면 중원 전체의 후기지수가 아니라, 정파 무림의 후기지수라고 해야겠지."
정사지간까지는 이렇다 할 악명만 없다면 괜찮으나, 사파는 아예 출전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달리 말해 용봉지회 참가자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보증이나 다름없는 셈.
서문화린이 용봉지회에서 신분 세탁을 하려는 것도 그래서겠지. 실패하고 사흑련에 들어가게 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그게 아마 삼 년 뒤의 용봉지회일 것이다.
가능하면 서문화린을 사흑련이 아니라 당가로 끌어들이고 싶으니 반드시 참가해야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설리향이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대단한 대회에 나도 같이 나갈 수 있을까?"
"참가하는 거야 누구나 가능하지. 거기서 좋은 결과를 얻느냐가 어려운 거지만."
"끄응. 부지런히 수련하면 삼 년 안에 이류 턱걸이 정도는 될 수 있겠지? 응?"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설리향. 그동안 당가에서 잘 먹고 잘 자서인지 제법 살이 올라왔다.
비쩍 마른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보기 좋네. 동시에 회귀 전의 설리향을 조금 동글동글하게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하고.
설리향은 나나 당소월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 없어 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설리향도 굳이 말하자면 천재에 속하는 편이다. 절대 강해질 수 없는 무공을 억지로 뜯어고쳐 절정의 경지에 올랐으며, 기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훔쳐 듣고 음공의 기초를 스스로 깨우쳤다.
그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환경에서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치며 삼 년이라는 시간을 준다?
"글쎄...."
잘만 하면 일류 초입까지는 노려볼 만할 것 같은데.
미묘한 표정으로 설리향을 바라보고 있자니, 뒷말이 생략된 탓인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하아. 삼 년... 괜찮으려나? 괜히 따라가서 너나 당 언니를 부끄럽게 할 바에는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처음부터 강한 무인은 없으니까. 누구나 자신이 약한 시절이 있다는 걸 알기에 오직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비웃는 이는 없을 거다."
"하오문에는 많던데?"
"...그쪽은 사파잖나. 내가 말하는 건 정파의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 년 뒤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열여덟 아닌가. 그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대단한 거다. 대부분은 이류와 삼류의 언저리니까."
당가 같은 명문 무가는 일류 무인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고, 주변의 무인이 많이 몰려들기도 하여 일류라는 경지가 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분야의 달인이라는 의미 아닌가. 그리 만만한 경지가 아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고, 수련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래. 기왕 온 김에 도와주고 가마."
"어? 좀 봐주게? 아직 자신 없는데...."
주춤주춤 일어나는 설리향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런 건 암혼부대주께서 잘 봐주고 있겠지. 내가 하려는 건 간단한 추궁과혈이다."
"추궁과혈? 그건 또 뭐야?"
"내공으로 혈자리를 자극해 몸의 피로를 풀어주고, 회복력을 높여 주는 간단한 안마 같은 거다.
원리만 놓고 보면, 수혈이나 마혈을 짚는 것과 비슷하겠지. 그 목적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만드는 것에 있을 뿐.
의원이나 점혈을 제대로 익힌 사람이 펼친다면 치료용으로도 쓸 수 있다지만... 내가 그 정도는 아니니 단순한 잡기라고 해야겠지.
다만, 설리향을 상대로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회귀 전. 나름 거리를 지키며 점잖게 들러붙던 당소월과 달리 설리향은 허구한 날 찾아와 이런저런 요구를 해대기 일쑤였다.
이는 처음 우리의 관계가 서로 틱틱대는 악우여서 그런 것도 있고, 설리향이 그냥 쑥스러움을 뾰족하게 표현하는 방법밖에 몰라서일 수도 있겠지.
그런 상황이다 보니 설리향은 자주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오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추궁과혈이었다.
이전 생의 설리향은 지금과 달리 한쪽 다리를 절었고, 절름발이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피곤해진다며 밤중에 찾아와 추궁과혈을 받고 갔었지.
덕분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리향을 상대로 한 추궁과혈만큼은 자신 있다. 몇 번이고 해 봤던 일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리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마룻바닥을 가리켰다.
"엎드려 누워라."
"응? 이렇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앞에 눕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위에 가볍게 올라탔다.
"어어?!"
깜짝 놀란 설리향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등을 지그시 눌러 다시 눕혔다.
"가만히 있어라."
"뭘?! 뭘 하려는 건데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말은 잘 듣는지 얌전한 자세로 목소리만 높이는 설리향. 대답 대신 손끝에 내공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꾸욱.
"히약?!"
설리향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6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69] 69화. 외출금지 (3)
혈도라 함은 전신을 그물처럼 덮은 기의 통행로다.
이는 실체가 없어 사람의 배를 갈라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것만으로 존재를 의심하기엔 너무나 증거가 뚜렷하기에 실존을 의심하는 무인은 없다.
무인은 혈도를 통해 내공을 순환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자극하여 신체의 여러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혈자리를 짚어 자신의 출혈을 막는다거나. 고통을 잠시 잊는 것은 물론.
상대의 마혈을 짚어 몸을 마비시킨다거나, 수혈을 짚어 아예 기절시키기도 하는 등.
몇몇 유용한 점혈법은 본격적으로 혈도를 연구한 이가 아니더라도 무인이라면 누구나 숙지해 둬야 할 상식으로 통한다.
당연히 설리향 또한 그 개념 정도는 암혼부대주로부터 배웠다. 아직 혈자리의 위치와 이름조차 제대로 못 외웠으나, 그 위력 정도는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천휘의 손가락이 어깨의 혈자리를 가볍게 짚는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어렴풋이 이 부근에 뭔가 있었지 하는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있으니까.
다만, 머리가 아닌 몸은 착실히 반응했다.
꾸욱.
흔들림 없이 깊게 눌러오는 손가락. 아프지는 않지만 압박감은 느껴질 정도의 절묘한 힘 조절.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반사적으로 움찔하긴 했으나 조금 시원하기까지 했으니까.
허나, 뒤이어 천휘의 손가락을 통해 한 줌의 내공이 들어오는 순간.
"히약?!"
설리향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신체 반응에 설리향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뭐, 뭐야 방금?!'
과정은 알겠다. 천휘의 내공은 들어오는 순간 약간의 이질감과 함께 설리향의 어깨에서 뜨거운 열기로 화했다.
천휘의 내공에 자극을 받은 혈자리가 주어진 기운을 받아먹으며 순간적으로 활력을 뿜어냈기 때문.
사실 여기까지 단번에 이해했다는 시점에서 설리향의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증명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설리향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혈자리를 중심으로 뿜어진 활기가 열기로 느껴질 만큼 막대하다는 것. 그리고 이 막대한 활력이 수련이라는 이유로 체계적으로 혹사당한 몸뚱이에 스며드는 순간.
설리향의 몸이 보인 반응은 그녀의 이해를 벗어난 것이었다.
마른 땅이 물을 빨아들이듯 단숨에 기력을 되찾은 근육은 한차례 수축하는가 싶더니, 이내 딱 좋을 정도로 이완된다.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펄떡인 설리향. 뒤늦게 올라오는 편안함과 은은한 만족감에 경각심을 느끼며 외쳤다.
"잠깐! 잠시, 잠시만 기다려 봐!"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추궁과혈이라는 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공 소모도 크고 섬세한 작업이다. 다 너 좋자고 하는 일이니 협조 좀 해줬으면 하는데."
"너무 좋아서 문제라니까?! 이, 일단 여기서 멈추자. 이거 뭔가 이상하다니까!"
필사적인 외침.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설리향이 부족한 어휘를 쥐어짜 전한 말은 천휘에게 닿지 못했다.
"됐으니까 다시 누워라. 이제 막 시작이니."
"어? 으어...?"
천휘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등을 밀자, 속절없이 밀려나 얌전히 엎드리는 설리향.
그녀가 자신이 왜 아무런 저항도 못 했는지 깨닫기도 전에 이어진 것은 천휘의 거침없는 추궁과혈이었다.
꾹. 꾸욱. 꾸우욱.
"흣! 힉! 아흣?!"
천휘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설리향의 혈자리를 짚는다.
가볍게 걸터앉은 천휘의 무게는 태산처럼 느껴졌고, 몸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기가 피어오른다.
광랑탈명공의 내공은 그 거친 성질을 증명하듯 선명한 존재감을 뽐냈지만... 그래봐야 천휘의 완벽한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설리향이 느끼는 것은 제 것이 아닌 기운이 몸을 멋대로 헤집는 감각뿐이었으니.
이는 과장 약간 보태 무자비한 유린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기분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좋았다는 것이지만.
"흐야악?!"
입에서는 비명 아닌 비명만 흘러나오고, 몸 상태는 자꾸만 좋아지지만, 이를 감당하는 이성은 조금씩 녹아내리는 설리향.
자꾸만 흩어지려는 제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대체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추궁과혈을 한번 경험해 보고 설리향은 깨달았다. 받는 쪽 입장은 둘째치고 행하는 쪽은 천휘의 말대로 상당한 집중력과 내공, 인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천휘의 손가락질 하나하나에 이렇게 이렇게나 솔직하게 몸이 반응하게 만들려면 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이어야 할지 설리향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설리향의 착각이다.
천휘는 분명 겉보기와 달리 초절정에 달하는 깨달음과, 밑바닥에서부터 무공을 정립해 온 덕에 무공과 인체에 남다른 이해도를 갖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추궁과혈을 한다면 이 정도로 효과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휘의 추궁과혈 실력은 오로지 설리향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
애초에 회귀 전과 이후를 통틀어 천휘에게 추궁과혈을 요구한 사람은 설리향 하나뿐이다.
어느 정도의 내공을 넣어야 딱 좋은지, 어떤 혈자리부터 짚어야 만족하는지, 평소에 어디를 가장 불편해하는지 등등.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천휘는 설리향의 몸에 대해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회귀 전의 일이라고는 하나, 둘은 아예 살을 겹치기도 하던 사이 아닌가.
그렇다. 천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만든 괴물이었다...!
물론, 자신이 회귀 전에 저지른 업보를 모르는 지금의 설리향은 제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위태위태했지만.
'이거 위험해앳....'
몸에 열기는 오르는데 근육은 멋대로 날뛰더니 추욱 늘어지며 편해진다. 그간의 구부정한 자세로 틀어진 뼈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신경은 멋대로 치료되고 교정되는 신체에 만족감으로 번쩍인다.
사실 설리향은 이 비슷한 감각을 알고 있다.
암혼부대주는 자신과 비슷하게 당가에 들어온 설리향을 진심으로 아끼고, 제자처럼 가르쳤다.
무공을 모르는 비쩍 마른 아이에게 고된 수련을 시켰다는 것을 알고, 때로는 직접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었으니. 실로 참된 스승이라 할 수 있으리라.
허나, 지금. 설리향의 머릿속에서 암혼부대주가 지친 근육을 풀어주던 감각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훨씬 효율적이고, 훨씬 강렬하며, 훨씬 위험한 무언가.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속으로 암혼부대주를 향한 사과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설리향. 그럼에도 자신의 기억이 덧씌워지는 것은 어쩌지 못했으니.
순간 설리향은 직감했다. 앞으로 몸이 뻐근하고 피곤할 때면 본능적으로 지금을 떠올리고 말 거라는 사실을.
"끄아앙...."
결국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설리향은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에 담긴 고양이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
.
.
.
.
그렇게 한참을 이어진 추궁과혈이었으나, 무슨 일이 되었든 끝은 찾아오는 법.
마침내 천휘로부터 해방된 설리향은 흐물흐물해진 채, 마루에 누워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간신히 숨만 몰아쉬는 것이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지쳐 보이지만, 실제로는 푹 자고 일어난 것 이상으로 개운한 몸 상태였으니.
활력이 도는 만큼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는 한 줄기 바람의 소중함을 재차 깨달은 설리향.
그녀의 귓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삼 년. 가능하면 매일 추궁과혈을 해 줄 터이니, 설리향 너는 수련에만 매진해라."
"...뭐? 매일?"
"무조건은 아니다. 나도 사정이 있고 일정이 안 맞을 수 있잖나. 그러니 어디까지나 가능하면이다."
"그, 그건 너무 과한 거 아냐? 천휘 너도 바쁠 테고 힘들 거 아냐."
"슬슬 기본적인 토대는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 같고, 이번에 괜찮은 심법도 구해 왔으니 곧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시작할 터. 지금까지보다 훨씬 힘겨울 거다. 너를 당가에 데려온 것은 나이니, 이 정도는 돕게 해주지 않겠나?"
"...."
천휘 입장에서는 당소월에게는 자화배독초를 주었지만, 설리향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하는 말.
하지만 설리향에게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문제였다.
'오늘 같은 일은 매일 한다고? ...버틸 수 있나?'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난색을 보이는 이성. 가슴 한편에서 피어오르는 기대를 애써 무시하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던 설리향이었으나.
문득 그녀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오르며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 언니...!"
자신이 언제나 머리속으로 그리기만 하던 아가씨 그 자체이며, 정혼자의 은인의 딸이라는 이유로 항상 잘 대해 주던 좋은 사람.
살면서 호의라는 것을 받아 본 경험이 얼마 없는 설리향에게 당소월은 천휘와는 다른 의미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당소월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리라.
"어, 어딜 임자 있는 남자가 외간 여자 방에 들락날락하려고 그래! 당 언니의 허락을 받고 와! 그럼 괜찮아!"
"뭔가 말이 좀 이상한 것 같다만... 뭐, 알겠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천휘. 그 모습이 얄미워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꾸욱 쥔 설리향.
그녀의 손이 스르륵 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동시에 심장 깊숙한 곳을 바늘로 찔린 것 같은 따끔한 감각에 핑 눈물이 돌긴 했으나... 아직 설리향은 그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저 긴장이 풀리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풀어진 것이라 여겼을 뿐.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애써 자신을 다독이는 설리향. 추궁과혈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소월 또한 잘 알고 있을 터.
만약 자신이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 천휘의 횡포 아닌 횡포도 여기서 끝이리라.
...설리향은 아직도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우가 특이한 것이지, 본래 추궁과혈은 이렇게까지 격렬한 상쾌함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튿날 아침. 대수롭지 않게 허락한 당소월의 모습에 설리향이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흐어어...."
그것이 기대인지 두려움인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
당소월은 당진천으로부터 만류귀원신공을 전수받으며 반쯤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
설리향은 본격적으로 빙하진기를 익히며 순음지체의 음기를 제 의지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나는 종남파에서 보고 겪은 흐름의 무학을 검술에, 귀영신투에게 배운 귀영보의 요체를 보법에 자연스레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소월은 당가의 아낌없는 지원과 당진천이라는 훌륭한 스승 덕에 기어이 절정의 초입에 발을 들였고.
설리향은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는 성취 속도를 보이며 일류 중입에 올랐다.
그리고 나는....
"키가 컸군."
당소월보다 키가 커졌다.
그것도 무려 손가락 두 마디나!
"천 소협에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요...?"
"당연한 소리를."
언제나 살짝 올려다봐야 하고, 걸핏하면 연상임을 으스대며 나를 귀여워하던 당소월. 그 굴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슬슬 초절정의 벽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따위는 사소한 성취일 뿐이지.
[6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0] 70화.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