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80화. 백발나찰
-백발나찰(白髮羅刹) 서문화린. 나를 납치해라.
이것이 내가 생각한 최선. 서문화린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무림맹주의 눈을 속일 자신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이 자리를 전혀 다른 문제로 덮어버리는 것뿐 아니겠는가.
중요한 것은 서문화린이 사흑련에 투신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우여곡절은 있을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니까.
물론 내 전음을 들은 서문화린은 자신의 비밀이 들킨 거라 생각해 화들짝 놀랐지만.
"히끅!"
비무장에 올라오다 말고 혼자 딸꾹질을 하는 서문화린.
크게 떠진 두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의미 없이 뻐끔거렸으며, 당장이라도 내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크게 당황한 서문화린이었으나, 화경에 이른 고수답게 빠르게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어느새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여 전음으로 답해온다.
-무, 무슨 소리인지 본녀는 전혀 모르겠느니라!
...아닌가?
그냥 얼굴만 차분해지고 여전히 속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비무장 위에 서서 포권을 취하며 계속해서 전음을 던졌다.
-다 알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전음으로 답한 것은 물론, 이 몸 대신 본녀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만.
-느앗?!
혼자 자신의 작은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는 서문화린. 그 돌발행동에 심판은 물론이요 관객들의 시선까지 집중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재빨리 포권을 취하며 마주 인사해 온다.
이후로는 심판 역을 맡은 무림맹의 절정 고수가 비무에 대한 규칙을 설명해 주었지만, 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시 전음에 집중했다.
이제 철혈당주라 부를 수 없고, 백발나찰이라는 별호는 썩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무난하게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좋겠지.
가명이지만, 그동안 동행하며 자주 이름으로 불렀으니 조금 익숙해지기도 했고.
-서문화린 선배. 많이 당황스러우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 동행한 정을 보아서라도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아까부터 왜 소름 돋게 존댓말을 하는 게냐? 그리고 분명 이 몸이 본녀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게 백발나찰이라는 마두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느니라. 전음 또한 꼭 절정의 고수만이 쓸 수 있는 기예는 아니니라.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는 듯, 자신의 팔을 슥슥 쓰다듬는 서문화린.
자기 입으로 자신을 마두라 하며 부정하는 것을 보아, 끝까지 모른 척으로 밀고 나갈 생각인 거겠지.
전음에 필요한 것은 뛰어난 내공 수발 능력이지 경지가 아니니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고.
뭐어, 이 정도는 예상했다. 말로 어찌어찌 설득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는 나대로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잖은가. 그 결과가 바로 내가 납치당하는 것이다.
-모른척하고 싶다면 그리해도 상관없습니다만, 한가지는 알아주십시오. 저는 서문화린 선배가 용봉지회에 참가한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몸은 서린이니 서문화린이 아니니라. 또한 용봉지회에 참가한 목적이라고 해봐야 경험을 쌓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전부이니라.
-일전에 말씀드렸으니 아시겠지만...저 위쪽, 귀빈석에는 무림맹주가 와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서문화린 선배를 의심하고 계시겠죠.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이 몸은 그 서문화린인가 뭔가 하는 자가 아니니 걸리는 것 없이 떳떳하느니라.
-숨길 자신이 있으신 모양이지만 분명 실패할 겁니다. 만천하에 그 정체를 강제로 까발려지고, 파렴치한 노괴로 낙인찍혀 어디에도 쉬이 발 붙이지 못하는 신세가 될 테고요.
-...노괴는 말이 너무하지 않느냐.
조금 시무룩해져서 투덜대는 서문화린을 향해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저를 납치하십시오. 어차피 까발려질 거 아닙니까. 적당히 시간이 지난 뒤에 풀어주신다면 사실 서문화린 선배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몸은 절대 서문화린은 아니지만...애초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게냐. 한 사람의 주장으로 무림 전체의 의견이 뒤집힐 리 없지 않더냐.
-무림 전체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당문은 다르겠죠.
서문화린은 용봉지회를 피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무림맹주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분명 많은 사람이 서문화린의 정체를 알고 경악하며, 비난하겠지. 거기에 당가의 예비 사위인 나를 납치하면 더더욱 심해질 테고.
하지만 내가 서문화린에게 해코지를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녀가 진심으로 은원을 벗어나 새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면.
다른 이는 몰라도 당가에서는 내 말을 믿어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미 당가의 일원이니까.
은혜가 됐든, 원한이 됐든 철저하게 갚아주는 것이 당가의 가훈.
서문화린을 한 번만 믿어달라고 한다면, 당진천은 고민하긴 해도 거절하진 않으리라.
물론, 처음에는 그 취급이 조금 박하긴 하겠지. 좋은 객실을 내어줄지언정 경계의 눈을 거두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서문화린이 무림의 풍문과 달리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를.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가는 천천히 서문화린을 받아들일 것이다. ...철혈당에서 나와 설리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서문화린 선배. 저를 납치하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
슬슬 심판의 설명도 끝나가고, 본선 첫 비무의 기대감과 함께 무림맹주의 의심도 깊어지고 있다.
이제 고민이 아닌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서문화린은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많이 생각해 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 몸은 서문화린이 아니라 서린이니라.
-...그렇습니까.
더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세를 잡는 서문화린. 이대로 대련이 임하려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전음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서문화린 선배는 저를 납치하게 될 겁니다.
순순히 나를 납치해 준다면 최고지만...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
서문화린이 나를 납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지.
의아해하는 서문화린의 앞에서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밀고는 살짝 무릎을 굽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바닥이 지면에 밀착하되, 발뒤꿈치는 살짝 띄워두는 것.
언제든 용천혈을 통해 내공을 터뜨릴 수 있도록, 그 반발력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뻗게 하는 자세.
내게 맞춰 개량되고, 최근에는 귀영보의 묘리까지 섞이긴 했지만...그 근본은 어디까지나 뇌명보.
그 뇌명보를 내게 전수한 당사자인 서문화린이 못 알아볼 리 없다.
실제로 처음에는 아리송해하던 그녀였으나, 지금은 입을 떡 벌리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건...!"
깜짝 놀란 서문화린이 기함하는 순간.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데엥!
서문화린에게 무어라 답해주는 대신,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콰앙!
관객들에게도 잘 들리게끔 큼직한 종을 사용했지만, 그보다도 한층 요란한 소리가 내 발밑에서 들려온다.
내공이 일으킨 작은 폭발이 묵직한 울림과 함께 내 몸뚱이를 앞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이는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쾅! 콰앙! 콰릉!
연달아 내 발밑에서 터져 나오는 내공. 뇌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소리가 탁하다.
이것저것 많이 섞였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속도만큼은 원본이 되는 뇌명보에 크게 밀리지 않았으니.
네 번. 단 네 번의 발걸음으로 이 넓은 비무장을 가로질러 서문화린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짙은 늘어뜨렸던 검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쐐애액!
어느새 붉은 검기를 머금은 검신이 맹렬한 속도로 서문화린의 목을 향해 쏘아진다. 하지만.
툭.
나보다도 한층 짙은, 진홍색 내공을 손에 두른 서문화린이 가볍게 내지른 일수에 그대로 궤적이 틀어진다.
최소한의 권기를 둘러 보호를 마치고는 그대로 검로에 손을 집어넣어 쳐낸 것이다.
전력은 아니라고 하지만, 너무나 간단히 막힌 일격. 사실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내가 끝끝내 넘어서지 못한 벽을 넘어선 화경의 무인 아닌가.
애초에 이길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경지를 잃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중이기 때문일까. 힘을 제한해도 깨달음은 그대로라는 의미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비무의 목적은 서문화린을 이겨 먹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그녀에게 받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지.
서문화린이 나를 납치하게 만드는 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그 보법!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느냐!"
"제 입을 열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는 본격적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대각선을 그리며, 때로는 수평으로.
복잡한 움직임이 하나로 연계되며 대단한 위력을 내는 초식은 아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그저 평범한 검격의 연속.
다만, 그것이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든다.
광랑탈명공처럼 이 이름없는 검법 또한 여기저기서 괜찮아 보이는 검법을 이어 붙인 것이니.
본래라면 누더기가 됐어야 했을 검이 이리도 매섭게 휘둘러지는 것은 내 깨달음. 그리고 서문화린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래. 말하자면 서문화린에게 배우고, 그녀의 복수를 행하며 완성시킨 검.
군데군데에서 묻어나오는 자신의 흔적에 혼란스러워하는 서문화린. 그녀가 내 검격을 하나하나 걷어내며 물었다.
"이, 이 검은 또 누구에게 사사한 것이더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짧게 고개를 저으며 광랑탈명공의 내공을 한층 더 끌어 올렸다.
검신을 휘감은 검기가 몸집을 부풀리며 흉악한 기세를 드러낸다. 동시에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살기.
광랑탈명공에 내재된 살기를 더는 숨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살기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소월이나 설리향. 그리고 서문화린에게 위협이 될 일은 없겠지.
무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러한 살기를 품게 된 이유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
다만, 내가 이런 식으로 일견 흉악해 보이나 실제로는 절제된 살기를 뿜어내는 것 자체가 서문화린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나 보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이느냐."
그리 중얼거린 서문화린이 다시금 내 검로를 향해 주먹을 집어넣는다. 지금까지와 비슷한 대처. 허나 이번에는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검과 주먹이 맞닿기 전. 그 위를 덮은 각자의 검기와 권기만이 서로 맞닿는 순간.
서문화린의 진홍색 권기가 크게 일렁이더니, 이내 뚜렷한 형상을 취한다.
강기. 오로지 화경에 오른 무인만이 펼칠 수 있다는 압도적인 무력의 상징이 내 검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붙잡아 당긴다.
일부러 저항하지 않고 끌려가자 한층 더 가까워진 거리. 서문화린이 복잡한 표정으로 내 수혈을 짚었다.
투둑.
"결국 네 뜻대로 되었느니라. 그러니 잠시 눈을 붙이고 있거라."
막대한 내공이 기혈의 일부를 틀어막으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감기는 눈. 저항하려면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겠지만...그러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저 멀리서 무림맹주로 보이는 노인이 벌떡 일어서고, 설리향이 비무장으로 난입하려다 당소월에게 저지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당소월에게는 미리 말해뒀지만, 설리향은 깜빡했었네.
뭐, 알아서 잘 설명해 주겠지.
이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8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1] 81화. 서문화린
"동백꽃은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지 않고 한 송이씩 통째로 떨어지느니라. 신기하지 않으냐?"
"사람 목이 떨어지는 것 같아 조금 섬뜩합니다만."
"...동백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마도 혈랑 그대뿐일 것이니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서문화린. 앳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고충이 느껴진다. 어쩌면 저 길게 늘어뜨린 백발 때문에 더욱 위화감을 자아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반로환동하여 몸만 젊어진 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동백꽃보다 자꾸만 서문화린에게 향하는 시선을 눈치챈 건지, 그녀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오늘치 대련은 끝이니라."
"그리 말하니 제가 무슨 밥 먹고 대련만 해 달라고 하는 사람 같아 서운합니다."
"아니었느냐?"
"...요 며칠간 철혈당주님께 밥 먹고 대련만 요청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아닙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시길래 뭘까 싶어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흠흠. 그냥 둘러대는 것 같지만 지금은 오늘은 그대 말대로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겠노라."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앞에 자라난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는 서문화린.
완전히 자라난 동백나무는 나조차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만큼 큼직했다. 그 앞에 선 서문화린이 너무 작아 보여 나도 모르게 물었다.
"업어 드립니까?"
"...혈랑. 그대는 때때로 본녀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사실 철혈당주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에게 무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철혈당에 처박힌 것이고요. ...다만, 조금 전은 시비 걸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 보기 편하시라고 꺼낸 말입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됐느니라. 적어도 아직은 아니니라. 보거라.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았느냐. 곧 개화할 터이니 그때 귀음마녀 그 아이도 불러 같이 구경이나 하자꾸나."
"겨울에 꽃구경을 말입니까?"
"동백꽃은 원래 겨울에 피는 꽃이니라. 혈랑 자네는 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에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뭐어...이 나무가 동백나무라는 사실도 방금 알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느니라. 본녀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무인이라 해도 검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세상에는 혓바닥이 검보다 날카로운 이도 존재하고, 한 손으로는 열 손을 감당하지 못하는 법이니라."
"아무리 날카로운 혀를 지녔다 한들 제 검이 그보다 더 날카로우면 그만이고, 한 손이 열 손을 합친 것보다 거대하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리 말하자 서문화린은 동백나무를 바라보는 자세 그대로 말간 웃음을 짓는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파의 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즐거움이 담겨있는 웃음소리였다.
"후후. 말은 잘하는구나. 혈랑. 그대가 지금 말하는 것이 천하제일인임을 알고 있는 게냐?"
"이게 그 정도의 일입니까?"
"그렇고말고. 검 한 자루로 세상 모든 문제를 베어 내는 것은 본녀는 물론이요, 속 좁은 사흑련주나, 무림맹주...심지어는 황실조차 불가능한 일이니라."
"허어...."
아직 내겐 아득한 이름들. 그러나 이마저도 부족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입을 벌린 내 모습에 서문화린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실망할 필요 없느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니. 중요한 것은 혈랑 그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니라."
"무엇을 원하는지 말입니까."
"옳다. 본녀가 아무리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한들, 가장 원하는 단 하나가 불가능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
서문화린이 그토록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안다. 일전에 적적하다며 부른 술자리에서 들었으니까.
다만 이해할 수는 없다.
복수해야 할 이에게 복수한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만일 당시의 일로 원한을 품은 이가 복수를 부르짖으며 달려들더라도 그저 베어 버리면 될 일인 것을.
결국 무림은...정파는 몰라도 이 빌어먹을 사파 무림은 죽느냐 죽이느냐로 모든 것이 귀결된다.
죽지 않으려면 언제나 죽이는 쪽에 서야 하는 법. 실로 당연한 이치 아닌가.
내가 속으로 의문을 삼킨 것을 알아챈 걸까. 서문화린이 빙글 몸을 돌리며 이쪽을 돌아본다.
그 회전을 따라 기다란 백발이 허공에 펼쳐졌다가 가라앉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향하는 시선.
서문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당에서 올라와 내 앞에 선다.
조금 전의 동백나무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차이 나는 키.
소녀의 모습을 한 노고수는 언제나 그러하듯, 색이 바랜 듯한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꾸나. 오늘치 대련도 끝났으니, 이제 공부를 해야 할 차례 아니더냐."
"...꼭 해야 하는 겁니까?"
"그 말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구나. 이미 이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니었느냐? 본녀가 무공을 봐주는 대신 무공 외의 공부를 하기로 말이니라."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일 몰아서 할 테니, 오늘은 조금 빼주실 수 있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으응? 갑자기 오늘은 왜...아."
무언가 깨달은 서문화린이 얼굴을 붉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겉보기에 맞는 나이가 된 것처럼.
"오, 오늘이 귀음마녀 그 아이와...."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 아침에 받은 하얀 배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붉게 물든 서문화린의 얼굴 위로 복잡한 표정이 떠오른다.
부끄러움, 안도, 부러움,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체념 등등.
너무 많은 감정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결국에 자리 잡은 것은 꾸며낸 차분함이었다.
"코흠.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구나. 본녀가 말을 꺼낸 것이기도 하니 오늘치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겠느니라."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일도 미루지는 못할 것이니라. 이틀 뒤면 혈랑 그대가 임무에 나서는 날이 아니더냐."
"약속은 제대로 지킬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면 됐느니라."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돌아가는 서문화린.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물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철혈당주께서 오늘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 그거라면 별거 아니니라."
대수롭지 않게 조금 전까지 바라보고 있던 마당의 동백나무를 가리키는 서문화린.
"요즘 슬슬 눈이 내리는데 마침 봉오리가 맺혔으니, 운이 좋으면 눈 속에서 피어난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을 뿐이니라."
"아, 설리향과 함께 보자던 게 그런 소리였습니까."
"그런 것이니라. 알았으면 너무 늦지 않게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오거라."
"조금 멀리까지 가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이고는 나는 설리향의 방으로, 서문화린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약속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내가 조금 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으니까.
며칠간 쌓인 눈으로 하얗게 물든 철혈당의 전각은 넘실대는 화염에 불타고 있었으며.
꽃이 피면 함께 구경하기로 했던 설리향은 내 품에서 눈을 감았으니까.
결국 마지막 한 마디를 완성하지 못한 설리향을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잠들듯 편한 얼굴로 담벼락에 기댄 설리향. 그 얼굴을 기억에 새기듯, 한참이나 바라본 뒤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불타는 전각을 올려다보며 검을 뽑았다.
스릉.
설리향의 말대로 나는 검 좀 잘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놈이니까.
그러니 저 안에서 흑천검제와 싸우고 있을 서문화린을 돕는다 ...그리고 설리향의 복수를 대신한다.
"...."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들끓는 감정을 살의로 벼려내며 안쪽으로 향했다.
하얗게 쌓인 눈은 불길에 녹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뒤섞여 더러운 진창이 되어 있었으니.
짓무른 땅을 박차고 달려가길 얼마나 계속했을까. 저 멀리서 내 앞을 가로막는 흑천검문의 무인이 보였다.
방해되길래 베었다.
그 소란을 듣고 찾아온 이도, 도망치는 이도, 맞서 싸우려는 이도, 목숨을 구걸하는 이도 전부 베었다.
한차례 멸문한 문파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마주치는 흑천검문의 무인은 죄다 이류에서 일류였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베어 내며 깊숙이 들어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달라졌다.
철혈당에서 일하는 이들이 아닌, 흑천검문의 무인이 죽어 나자빠진 경우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
분명 좋은 소식이건만, 내게는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격전이 일어난 것은 확실한데, 주변이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서문화린에게 복수하러 왔다던 흑천검제 또한 화경에 오른 무인이라 들었다. 그런 둘이 싸우고 있음에도 이렇게 조용할 이유라면....
으득.
이를 악물며 내공을 억지로 쥐어짜 땅을 박찼다. 점점 많아져, 이제는 발 디디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쓰러져있는 흑천검문의 무인들.
다만 이는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뚝 끊겨 있었으니.
집채만 한 바위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으로 부서진 전각.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마당.
오직 그곳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모습을 자랑했다.
불길이 닿지 않은 것처럼 소복하게 쌓인 눈. 붉은 꽃이 만개한 동백나무. ...그리고 이를 힘없이 무릎 꿇은 채, 올려다보는 서문화린.
"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서문화린은 아직 살아 있었으나, 그 상태는 심각했다.
그녀의 작은 몸에는 다섯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고, 한쪽 팔은 어딘가로 사라졌으며, 다리는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철혈당주!"
지금껏 억지로 삼켜온 열기가 단숨에 역류하며 머리를 뜨겁게 달군다.
안 된다. 설리향에 이어 서문화린까지 잃을 수는 없다. 오직 그 생각 하나로 미친 듯이 달려 서문화린에게로 향했다.
내 발걸음에 치여 쌓여 있던 눈이 흩날린다.
마치 눈이 내리는 것 같은 모습에 가는 숨을 이어 가던 서문화린이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친다.
힘없이 꺼져가는 눈빛에 완연한 반가움이 깃든다.
"왔, 느냐."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금 당장 치료하겠습니다."
"되었다. 이는 치료해서 될 일이 아니니라."
"그런 말 하지 마시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문화린의 등에 박힌 검을 뽑아내며 즉시 점혈로 지혈한다. 이를 반복하며 남은 검을 뽑아 내던 것도 잠시.
세 번째 검을 뽑던 도중에 발견하고 말았다.
서문화린의 가슴에 생긴 큼직한 구멍을.
본래 심장이 있어야 할 장소가 텅 비어 있다. 그녀의 말대로다. 이건 치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화경 무인의 막대한 내공 덕분이리라. 그나마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는 중이었고.
할 말을 잃은 나를 위로하듯 서문화린이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혈랑. 귀음마녀는 어찌 되었느냐?"
"...제가 마지막을 배웅하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본녀도 곧 그리될 텐데 마지막으로 그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썩 괜찮은 기분이니라."
"죄, 송합니다."
"으음? 무엇이 말이느냐?"
"제가 너무 늦었잖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서문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혈랑. 그대는 늦지 않았느니라. 오히려 딱 맞춰 온 것이지."
"그렇습니까?"
"그런 것이니라. 보거라. 마침 꽃이 예쁘게 피지 않았느냐. 이를 같이 볼 수 있었으니 그대는 늦지 않았느니라."
서문화린의 말대로 하얀 눈 사이로 빨간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은 꽤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멍하니 동백나무를 올려보던 도중. 돌연 동백꽃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서문화린이 말했던 것처럼 꽃잎 하나가 아니라 꽃 한 송이가 통째로 말이다.
서문화린의 발치에 떨어진 동백꽃. 이를 가만히 내려보던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혈랑."
"예."
"본녀는 곧 죽겠지만 그대는 살아남을 수 있으니라. 비록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 흑천검제는 죽었니라. 남은 것은 기껏해야 그대와 비슷하거나, 더 약한 놈들뿐이겠지."
이제 보니 널브러진 흑천검문의 시체들 사이에 유독 화려한 옷을 입은 녀석이 있었다.
머리가 터져나간 탓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복장으로 보아하니 아마 저 시체가 흑천검제의 시체일 터.
"그러니 도망치거라. 목숨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가 누구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래. 그랬었지."
조금 약해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화린.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눈 위에 떨어진 동백꽃에 머물러 있어 다행이다.
덕분에 내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도망칠 생각 따위는 없다. 흑천검제는 죽었다고 하나, 이 자리에는 아직 흑천검문의 무인이 제법 남아 있을 터.
놈들의 목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베기 전까지는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다.
"혹여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흑천검제는 결국 본녀의 손에 죽었으니 혈랑 그대가 복수할 상대는 없느니라."
"제 목숨을 노린 것도 아닌데, 귀찮게 다른 사람의 복수를 짊어져서 무엇합니까."
거짓말이다. 난 이미 설리향의 복수를 이어받았고, 서문화린의 피 값 또한 저들에게 물을 것이다.
우선은 이 자리의 흑천검문에게,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놈들과 연관 있는 모든 것들에게.
젊은 시절의 서문화린처럼 실수로라도 놓치는 이는 없으리라.
"...그럼 이제 마지막 부탁이니라. 본녀를 지금의 모습으로 기억하지 말아다오."
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 서문화린이 말을 이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 하였느니라. 그 뜻은...."
"꽃처럼 빛나는 시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 아닙니까."
"...옳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어떻게 잊겠는가. 서문화린이 반로환동으로 어린 시절의 모습을 취한 것이, 복수를 모르고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는데.
"혈랑. 아니, 천휘야. 내 죽음을 기억하지 말거라. 대신 나와 함께해서 즐거웠던 추억만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느니라."
"그리하겠습니다. 언제까지고 철혈당주께선... 스승님께선 제게 한 송이 동백꽃으로 기억되실 겁니다."
"스승인가. 조금 아쉽지만 나쁘지 않구나. 그래. 나쁘지 않으니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리는 서문화린. 그녀의 말끝이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툭.
낙화의 순간처럼 힘없이 꺾인 머리. 그녀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동백꽃이 눈 위를 뒹군다.
점혈이 풀린 탓인지 뒤이어 서문화린을 중심으로 피가 흘러나온다.
하얀 눈 위에 피어난 새빨간 얼룩. 마치 동백꽃을 닮은 그 모습을 가슴에 새겼다.
함께 생활하던 전각이 불타는 모습을 새기고, 설리향이 남긴 잔향을 새기고, 서문화린의 피로 그린 꽃을 새기고, 이 모든 상실을 새기고.
그리하여 나의 지옥을 새긴다.
서문화린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잊고 싶지 않았기에, 잊을 수 없었기에. 그렇다면 차라리 흉터가 되더라도 평생 잊지 못하도록 심상을 파낸다.
코끝에서 탄 냄새와 비릿한 혈향이 풍기고, 시야는 일그러져 붉게 물들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들끓는 살기는 주화입마의 전조였으나...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서문화린의 죽음을 확인한 흑천검문의 떨거지들이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니까.
비틀거리며 일어서 검을 겨누었다.
"와라."
그렇게 주화입마에 빠져 반쯤 미쳐 버린 채, 기어이 복수를 이루었을 즈음.
나는 초절정에 올랐고 검귀(劍鬼)라는 별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
눈을 뜨자 코끝에서 무언가 타는 냄새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미치셨습니까? 이렇게 작은 동굴에서, 그것도 입구를 수풀로 막아놓고 불을 피우면 어쩌자는 겁니까. 당장 끄십쇼."
"힝. 알겠느니라."
어설픈 납치범 서문화린이 시무룩하게 모닥불을 껐다.
정신 차리자마자 죽을뻔했네.
[8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2] 82화. 서문화린 (2)
연기로 자욱한 동굴 안. 나와 서문화린은 눈물을 머금고(꽤 매캐했다) 그냥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입구를 숨기려고 가져다 둔 수풀은 치워 버렸고.
"서문화린 선배. 분명 제가 납치해 달라 하긴 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목숨까지 앗아 가시면 곤란합니다."
"오, 오해니라! 본녀는 그냥 동굴 바닥이 차가워 몸을 따뜻하게 해주려 했을 뿐이니라!"
기겁하며 고개를 휘휘 젓는 서문화린.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기 때문일까. 흰색 머리가 좌우로 흩날리는 모습이 퍽 반갑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서문화린이 불안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오해하면 안 되느니라? 본녀는 그대를 해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느니라?"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이젠 본녀라는 말을 숨기지도 않으시는군요."
"이미 알 거 다 아는 모양인데 힘들게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헌데 본녀가 본녀를 본녀라 지칭하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느냐?"
"제가 절강성 출신이라 백발나찰의 소문은 어릴 적에 많이 들었습니다."
아직 화경에 오르기도 전. 초절정 무인인 시절부터 그런 오만한 말투로 원수를 하나둘 장사 보냈으니 유명해질 법도 하지.
다만, 서문화린에게는 조금 다른 부분이 충격이었나 보다.
"어릴 적... 아직 몇 년 전처럼 느껴졌건만 벌써 그렇게 오래됐단 말이느냐?"
"족히 십수 년은 지났을 겁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아직 약관이 안 됐습니다."
"...!"
뻣뻣하게 굳은 서문화린. 마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억지로 목도한 사람 같다.
물론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많으니라."
호들갑스런 분위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서문화린.
환골탈태에 이어 반로환동까지 겪은 얼굴은 앳되고 귀여웠으나...일체의 거짓을 허락지 않는 분위기와, 숨기지 않고 드러낸 화경 무인으로서의 기세.
이 둘은 서문화린의 인상을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저 존재감에 압도당한 것이지.
정도와 성질의 차이가 있을 뿐, 내가 지금껏 봐온 모든 화경 무인에겐 인간 같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고 이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자니, 마침내 서문화린의 작은 입이 열렸다.
"약관이 채 되기도 전에 절정의 끝자락에 오른 것은 본녀로서도 경악할 만한 일이니라. 하지만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니라. 무림은 넓고 천재는 많은 법 아니겠느냐. 또 그 정도는 되어야 사천당가의 데릴사위가 될 수 있는 법일 테고."
이는 서문화린 본인부터가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여 화경의 경지까지 올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허나, 본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느니라. 지금까지는 그저 기분 탓이라 여겼건만, 이번에 직접 보니 알겠구나."
서문화린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쪽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그 익숙한 기질.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뇌명보임이 확실한 보법. 그리고 본녀에게 향한 것은 아니나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짙은 살기."
자신이 느낀 위화감을 하나하나 나열한 서문화린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다.
마음만 먹으면 속눈썹의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 검이 아닌 권의 간격에서 말을 잇는다.
"천휘. 그대는 서문세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게냐?"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는 것이라 해야겠지.
회귀에 관한 이야기는 모종의 금제 때문에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서문화린 본인에게 싸우는 법을, 뇌명보를 가르침 받았다고는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서문화린에게 서문세가의 이야기는 그저 넘길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납득하지 않는다면 쉬이 넘어가 주지 않으리라.
잠깐의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뭐라?"
서문화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서문화린이 지금 주제에 민감하며,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도 조금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결국 그럴듯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진솔하게 답할 수밖에 없잖은가.
"제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어 자세히는 설명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서문화린 선배께서 우려하시는 것처럼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익힌 것은 아닙니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노려보는 서문화린. 분명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키라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참이나 마주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숨을 푸욱 내쉬는 서문화린.
뒤이어 나름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려는 것인지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하아... 이래서야 끝이 없느니라. 일단 본녀에게 다시 한번 천천히 보여 주겠느냐? 판단은 그 뒤에 하마."
"평소처럼 펼치면 되겠습니까?"
"전력으로 펼쳤으면 하느니라."
"알겠습니다."
서문화린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문세가의 무공은 이미 한차례 사파 문파의 손에 넘어갔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들, 나처럼 회귀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강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문화린 또한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 뒤에야 복수를 이룰 수 있었고, 그동안 명문으로 유명한 서문세가의 무공을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지.
서문세가의 무공은 여러 사파 문파의 손에 흩어졌고, 그곳에서 철저히 분석되었다.
어느 정도냐면 어렸을 적엔 무공에 관심이 없어 기본적인 호신용 권각술만 익힌 서문화린보다 서문세가의 무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자가 있었을 정도.
그렇기에 서문세가의 무공을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둘 중 하나. 서문화린과 같은 가문의 생존자거나... 서문세가를 멸문시킨 이들의 관계자거나.
아마 서문화린이 내게서 보려는 것은 이러한 점이겠지.
기본적인 권각술을 이리저리 뜯어고쳐 경지에 이르렀고, 서문세가의 무공을 전부 회수한 뒤에는 이를 다시 익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서문화린이다.
다른 건 몰라도 누구로부터 어떻게 익혔는지를 보는 눈은 확실할 터.
마침 동굴 바깥으로 나왔으니 적당히 거리를 벌리며 자세를 잡았다.
한쪽 발을 반보 내세우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발뒤꿈치는 약간 띄워 지면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떨어뜨렸고.
뇌명보의 가장 큰 장점인 급가속을 살리기 위한 자세.
본래 용천혈에 내공을 집중하는 보법 자체는 많지만, 대부분은 정교한 움직임이나 예상외의 변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일종의 보조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작정 내공을 터뜨리는 것은 단순한 낭비인 데다가, 그 반작용으로 몸이 날아갈 정도라면 발바닥이 멀쩡할 리 없잖은가.
하지만 뇌명보는 이를 잘 조정하여 몸에는 부담이 없고, 내공 소모도 적절한 수준으로 낮췄으며, 반발력으로 인한 가속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취한 보법.
다른 보법들처럼 화려하게 눈을 현혹하지도 않고, 신묘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검을 빗겨나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저 불신의 순간,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직선적인 움직임.
...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번에 서문화린의 뇌명보를 보고는 생각이 좀 달라졌지만.
아마, 회귀 전과 달리 내 경지가 높아져 보이는 것이 달라졌고 귀영신투로부터 이 보법의 이름을, 그 안에 담긴 진의를 조금은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서문화린의 뇌명보는 단순히 빠른 것이 아니라, 빠르게 몰아치며 상대를 압도하는 화려한 보법이었다.
다만, 그녀가 원한 것은 내가 평소에 펼치는 방법이라 했으니 그리해야겠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 같지만,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한층 더 굽혔다.
내게 주가 되는 것은 언제나 검이었다.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궤적을 그리는 검으로 조금씩 우위에 서며, 상대가 무너지는 순간 단숨에 목을 베고 심장을 꿰뚫는다.
그러니 서문화린이 내게 알려준 방식은 보다 공격적이고 저돌적이었으며...연속으로 몰아치는 대신 단 한걸음에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는 수법이었다.
"쓰읍. 후우...."
들이켠 숨이 폐부를 달군다. 동시에 호흡과 함께 삼킨 희미한 자연지기가 광랑탈명공의 흐름에 휩쓸려 혈도를 질주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광랑탈명공에 내재된 살기에 물든 내공이 그 끝, 단전에 닿는 순간.
단전에서 솟구친 막대한 내공이 뇌명보의 묘리에 따라 혈도를 내달린다. 그리고.
콰앙!
요란스러운 굉음과 함께 발바닥의 중심. 용천혈에서 내공이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터져나간다.
내공으로 된 발판이 나를 밀어내는 듯한 감각. 시야의 주변이 선처럼 늘어나며, 거센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온다.
그만큼이나 빠르게 땅을 박찬 몸뚱이가 서문화린을 향해 쏘아졌으나.
"흡."
달려오는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젓는 서문화린. 그 작은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몸이 빙글 회전하더니, 어느새 그녀의 옆에 멈춰 있었다.
내가 검으로 비도를 휘감아 그대로 돌려보내듯, 서문화린 또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나를 회전시키며 멈춰 세운 것.
본래라면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갈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약간의 어지러움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고 있자니, 보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시종일관 진지하던 서문화린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잠깐 보여준 짙은 살기와 어울리게 호전성이 강해진 모습이나... 원수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는구나. 오히려 친숙할 정도이니라."
"그렇습니까."
그야 서문화린이 직접 개량하여 전수한 것이니 당연한 일. 이를 말할 수는 없기에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무공에 맞게 개량해 가는 도중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구나. 수준 높은 무인이 애초부터 단 한 사람을 위해 뇌명보를 손댄 것일 터. 내 말이 맞느냐?"
"얼추 맞습니다."
"허면 다행이니라. 누구인지는 몰라도 본녀 이외에 서문세가의 생존자가 있었다는 뜻이잖나.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니라. ...혹시 누구인지 물어도 괜찮겠느냐?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구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듯, 나름의 사정이 있는 터라."
"그런가...."
조금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화린이었으나,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짓궂은 미소로 변했다.
"스승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쳐도, 어찌 됐든 그대가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힌 것은 사실이니라. 그리고 본녀는 서문세가의 적법한 주인이고. 그렇지 않느냐?"
"맞습니다만 갑자기 뭡니까."
경험상 저렇게 웃을 때마다 사고를 쳤었단 말이지.
학습된 불안함에 흠칫 몸을 떨자, 서문화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반로환동 때문에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가슴을 쭈욱 펼치며 말을 이었다.
"본녀를 어미라 불러보겠느냐?"
"...?"
보통 거기서는 가주가 먼저 나오는 거 아닌가.
[8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3] 83화. 서문화린 (3)
세간은 용봉지회 도중에 난데없이 벌어진 납치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로환동에 이른 절대고수가 당가의 데릴사위를 납치한 것 아닌가.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없다. ...물론 무림맹 내부는 아주 뒤집어졌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무림맹이 주최한 행사 도중에! 무림맹의 한복판에서! 오대세가의 일원이 사파 나부랭이에게 납치당하다니!"
격분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중년의 사내. 군데군데 새치가 보이는 머리카락과,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분노를 대변한다.
그 모습은 지켜보던 승복을 입은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언 시주께서는 잠시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그 해결책을 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잖습니까. 무엇보다 언 시주나 저희보다 더욱 상심한 아이는 따로 있고요."
"그건...!"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킨 중년 사내. 진주언가의 방계로 태어나, 현재는 무림맹의 무력대 중 하나인 청풍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언사후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성정은 선하지만 워낙 성격이 불같고 자존심이 강한 것은 물론, 실제 능력까지 뛰어나 남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고 살아온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예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의 부대주급 이상이 전부 모인 이 자리의 유일한 예외. 졸지에 정혼자를 잃은 당소월이 있었으니까.
눈치를 잘 안 보는 것이지 아예 없는 것은 아닌 언사후가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걱정말거라! 네 정혼자는 무림맹이 전력으로 수색할 터이니 금방 소식을 알 수 있을 거다! 다들 그렇지 않나?"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묻는 언사후. 그 질문에 다들 작게 긍정하거나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언사후가 너무 격하게 반응하니 굳이 나서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눈 뜨고 코를 베인 것 같은 이번 납치 사건에는 다들 분노하고 있으니까.
다른 어디도 아닌 무림맹에서, 그것도 용봉지회가 개최되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체면에 민감한 무인들이 발끈한 것은 물론이요, 그 범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사파 무인으로 악명을 떨친 백발나찰 서문화린이라는 사실에 이를 가는 이도 있을 정도.
정파와 사파의 원한이란 그만큼 케케묵은 것이며 당연한 것이기도 하니까.
자신을 향해 보내오는 안쓰러운 시선과, 결의 어린 분위기에 당소월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청풍대주님.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에게 미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리 나서주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허어."
가장 제정신이 아닐 사람이 가장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몇몇 이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물론 당소월이 이러한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늦어도 한 달 안에는 돌아온다고 했지요? 뒷일은 어떻게 하려고 일단 일부터 벌이는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긴 하지만, 일단 천휘로부터 한동안 납치당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기 때문이다.
천휘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그녀에게 이번 사건은 어이없고, 피곤한 일이지 위험한 일은 아니리라.
'어젯밤에도 향이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아버님에게는 또 뭐라 해야 할지....'
"하아."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작은 한숨. 이를 지켜보던 백의의 중년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작은 키. 왜소한 체격. 머리카락이 반쯤 세어 나이는 많아 보이지만, 눈빛은 정명하고 전신이 근육으로 들어차 있으며, 피부에는 그 흔한 주름 하나 없다.
의천신개(義天神丐) 곽후.
과거에는 개방주로서 그 의협심을 널리 펼쳤고,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은퇴한 현재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정파의 큰 어른.
아무리 그래도 무림맹주 앞은 긴장되는지 당소월이 침을 꼴깍 삼키는 순간. 의천신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백발나찰은 성정이 포악한 것이 아니라 복수를 너무 잔혹하게 하여 마두라 불리는 이. 데려가면서도 적의보다 당황이 더 컸던 것 같으니 아마 짚이는 것이 있을뿐, 확신하지는 못한 것일 터. 혹시나 해서 묻네만 정혼자가 서문세가의 멸문과 관련이 있나?"
"아뇨. 없을 거예요. 천 소협은 절강성 출신이긴 하지만, 연관된 문파는 기껏해야 시골의 작은 흑도 문파 정도였지요. 그나마도 스스로 정리하였고요."
당소월의 말을 잠시 곱씹던 의천신개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강성 태생에 시골 흑도 문파와의 갈등이라. 안 봐도 어떤 느낌인지 보이는구먼. 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네. 혹시 더 알고 있는 것이 있나? 직전에 보여 준 살기가 조금 신경 쓰이는구먼."
"...그 살기는 무공의 특성 때문일 겁니다. 자세히는 알려 주지 않았으나, 스승이 계셨다는 이야기는 종종 했지요. 어쩌면 그쪽과 관련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는 것만이라도 말해 주겠나? 작정하고 도망치는 화경 무인을 잡기란 어려운 법이지만, 아직 백발나찰이 확신이 없어 망설이는 중이라면 이를 이용해 제발로 오게 만들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우선...."
천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는 당소월.
그렇게 당소월은 자작극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한동안 평화로웠던 무림맹은 의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어떻게든 쫓을 궁리를 하는 사이.
가장 중요한 천휘와 서문화린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면....
"서문화린 선배. 냄새가 너무 심합니다."
"마, 말이 너무하지 않느냐! 본녀는 오늘 아침에도 제대로 씻었단 말이니라!"
서문화린의 정수리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냄새가 난다 아니다로 다투고 있었다.
***
키 차이 때문일까. 코를 들이밀자 자연스레 서문화린의 정수리에 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에 기겁한 서문화린이 자신의 정수리를 가리며 샤샥 멀어졌다.
"본녀는 깨끗하니라! 그렇게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그대가 이상한 것이니라...!"
"깨끗한 거랑은 별개로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느아앗!"
화는 나는데 차마 때릴 정도는 아니기 때문인지 애꿎은 발만 콩콩 구르는 서문화린.
다만, 이마저도 크게 힘이 실린 것은 아닌지라 기껏해야 고양이의 하악질 정도의 위협이 느껴졌을 뿐.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을 좀 이상하게 했나 봅니다. 냄새가 아니라 향기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느냐!"
"환골탈태를 이룬 이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육체에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
독공을 익힌 당진천은 환골탈태를 통해 완전한 독인이 되었다. 이제 그는 당소월처럼 체내에서 독을 만들고 조합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서문화린은 환골탈태를 통해 반로환동을 이루었다. 그녀의 바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평범한 사람을 독인으로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팔다리 한두 개 정도는 우습게 재생되기도 하는 신체의 재구축.
반로환동으로 어려진 몸에서 아기 냄새가 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불쾌한 냄새는 아닙니다. 오히려 맡고 있으면 안정되는 향기죠. 다만 냄새든 향기든 너무 강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래서야 추적당하기 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였느냐? 하기야. 본격적으로 추적술을 익힌 이들은 기감뿐만 아니라 오감마저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무공을 익힌다고 들었느니라."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한 서문화린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헌데 안 씻어서 나는 냄새도 아니고 그저 몸에서 나는 향기를 어찌 지운단 말이느냐."
"냄새를 지우는 방법이 하나 있으니 시험해 보죠."
당소월에게 미리 받은 냄새를 지우는 독을 꺼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효과를 지니고 있으니, 이게 안 통하면 그냥 얌전히 추적당할 수밖에 없겠지.
일단 동굴 주변에 독을 조금씩 뿌리고는 마지막으로 서문화린의 손에도 몇 방울 떨어뜨렸다.
"삼키지만 않으면 안전한 독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애초에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는 몸이니 괜찮으니라."
"...반로환동에 그런 효과도 있었습니까?"
"없느니라. 그냥 본녀의 내공이 심후하여 그런 것이니라."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본격적으로 추적이 붙기 시작했을 터. 어차피 지금의 동굴에서는 오래 머무를 수 없다.
그러니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 위해 살펴본 것인데....
아무리 둘러봐도 진짜 아무것도 없는 산속. 높은 곳에 올라가 보아도 시야가 닿는 곳에 마을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딥니까?"
"본녀도 모르니라. 그냥 달리며 기감을 펼쳐 가장 적당한 동굴을 찾은 것뿐이니라."
"???"
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허둥대며 한마디 덧붙이는 서문화린.
"그래도 안휘성이라는 것은 알고 있느니라!"
"예?"
그사이에 벌써 다른 성으로 넘어왔다고?
"제가 기절한 지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하루를 조금 넘었을 것이니라."
그런데 벌써 안휘성이라니. 다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절정 무인만 되어도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잖은가. 사람인지라 금방 지친다는 문제가 있을 뿐.
다만, 초절정에 이르면 그러한 체력 문제는 반쯤 사라진다. 실제로 회귀 전의 나는 마교를 피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달린 적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화경의 무인은 어떻겠는가. 사람 하나 업은 상태라도 하룻밤 만에 성 하나를 넘나들 정도는 되겠지.
"...이거 추격대가 못 찾는 게 아니라, 못 쫓아오는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그럴 것이니라."
"허."
냄새를 지우느니,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느니 속으로 호들갑 떨었던 내가 조금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러한 잔재주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뎌지는 법이었지.
허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피식 웃었다.
"괜히 본녀에게 장난치는 건가 싶었는데, 나름 진지한 거였구나."
"저는 언제나 진지했습니다."
"허면 이제 말해 주지 않겠느냐?"
"제가 서문화린 선배에게 납치해 달라 한 이유 말입니까? 그거라면 처음에 말씀드렸듯 정파로의 전향을 돕기 위해...."
"아니. 본녀를 어미라 부르는 것 말이니라."
"...."
대충 흘려넘겼는데 이걸 다시 물어볼 줄이야.
멈칫한 나를 향해 서문화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동행하며 그대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들었느니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뭐, 맞습니다."
"그리고 본녀는 가족을 전부 잃었느니라. 단순히 피가 섞인 이들뿐만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던 식구들까지 전부 말이야."
"그 또한 맞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서문화린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언제나 그녀는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원했고, 회귀 전에는 그 장소로 철혈당은 택했다.
한때 서문화린의 밑에서 생활했던 나이기에 잘 알고 있다.
아마 지금도 그 이야기의 연장이겠지.
"적법하게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힌 이는 이제 우리 둘뿐이니라. 그러니 본녀가 그대를 양자로 들이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이더냐."
"...."
서문화린은 서문세가를... 정확히는 한차례 잃었던 '집'을 재건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내가 이를 도와줄 것을 바라고 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8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4] 84화. 유혹
두 번째로 서문화린의 제안을 거절한 이후.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졌다.
서문화린이 생각보다 많은 거리를 이동한 덕에 생긴 여유. 당장 동굴을 떠나는 대신, 조금 더 멀리까지 돌아보고 마을이 있는 곳을 확인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런 산속에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거기에 나름 계획적으로 납치당한 것이기에 벽곡단 정도는 챙겼지만...그 외의 생필품이 전혀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서문화린의 기억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도중이었다.
"앗!"
돌연 무언가를 발견한 서문화린이 짧은 다리로 오도도 달려가더니, 근처의 수풀에서 빨간 무언가 여럿 뜯어왔다.
"이걸 보거라!"
"뭡니까?"
"산딸기이니라! 초여름까지 열리는 것이라 슬슬 보기 힘들어졌을 터인데... 이렇게 조금 늦게까지 남아있는 아이도 있는 모양이니라!"
뜻밖의 횡재를 했다는 듯 기뻐하는 서문화린. 그녀가 산딸기가 담겨 있는 손을 내밀었다.
"조금 부족하지만... 하나씩 나눠 먹자꾸나."
"감사히 먹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하나씩 번갈아 먹으며 물었다.
"헌데 이런 열매 같은 것을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저도 산딸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압니다만, 이렇게 산속에서 찾기는 힘들더군요."
"으음. 아무래도 본녀가 자주 먹던 것이라 그런 게 아닐지 싶구나."
"어릴 때라면 아직 서문세가에 계실 적 말씀입니까?"
"그러하니라. 무공 수련이 싫어서, 혹은 글공부가 싫어 종종 작은 뒷산으로 도망치곤 했느니라. 그때 출출함을 달랠 겸, 종종 먹었느니라."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추억이 깃든 음식이라는 건가.
이후로도 간단한 잡담을 나누며 산길을 걷던 도중. 하나씩 번갈아 먹던 산딸기의 마지막 하나가 서문화린의 차례에서 멈췄다.
"므으."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이를 노려보던 서문화린이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두 눈을 꾹 감고 자신의 마지막 산딸기를 내밀었다.
"이, 이건 그대가 먹거라!"
"예? 좋아하는 것 아니셨습니까?"
"본녀는 이미 많이 먹었느니라! 그리고...."
잠시 말을 고르던 서문화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래 어미란 자식에게 뭐라도 하나 더 먹이고 싶어 하는 법 아니겠느냐."
"...."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어이가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음흉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산딸기를 흔들었다.
"자. 마지막 남은 녀석이니라. 시기상 이걸 놓치면 내년까지 먹기 힘들 것이니라. 허나, 본녀의 아들이 된다면 기꺼이 양보해 줄 수도 있느니라. 어떠하느냐? 서문휘가 되지 않겠느냐?"
"됐으니까 서문화린 선배나 많이 드십쇼."
"아앗! 너무 매몰차지 않느냐! ...하지만 그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마지막 산딸기는 본녀가 먹으마."
시무룩해하는가 싶더니 결국 산딸기를 입에 넣고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서문화린.
자기가 말하면서도 올해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좀 아까웠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던 길을 마저 갔다.
...당시의 나는 몰랐다. 이게 시작이라는 것을.
***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멀리서나마 마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이기도 하고, 벌써 여기까지 나와 서문화린의 소문이 퍼지진 않았을 터이니 특징적인 백발만 가리고 들어가 방을 하나 빌리려 했건만....
"객잔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남는 집이나 방이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하나쯤은 남기 마련이거늘. 조금 운이 없었구나."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자니, 시간이 너무 늦기도 하여 그냥 헛간과 이부자리만 좀 빌렸다.
철전을 두둑이 쥐여주니 흔쾌히 내어주더라.
하여 먼지만 대충 쓸어내고 그 위에 이불을 펼친 뒤. 자기 전에 굳어 있던 몸이라도 풀 겸, 헛간 뒤편의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코흠흠."
"?"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나타난 서문화린. 그녀가 자꾸 먼 산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본녀는 권각술을 익혔으니, 서문세가의 검술은 이대로 대가 끊기겠구나."
"갑자기 무슨...."
"아아. 검공으로 이름 높던 서문세가의 무공이 이리 허무하게 묻히는 것은 서문세가의 피를 이은 자로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통탄할 노릇이니라."
"심심하면 들어가서 먼저 주무십시오."
순간 서문화린이 움찔했으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색한 혼잣말을 이어갔다.
"다른 누가 대신 익혀 주었으면 좋겠지만,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는 없느니라. 본녀의 양자라면 모를까."
"...."
세상에. 지금 그러니까 무공으로 나를 꼬시는 건가? 서문세가의 양자가 되라고?
나도 모르게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세운 검. 이를 기회라 여긴 것인지, 서문화린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후우. 나이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하나, 후기지수의 무공을 보고 있으면 때때로 답답해질 때가 있느니라. 본녀가 검은 휘두를 줄 몰라도 싸우는 법은 더 잘 알지 않느냐. 자꾸 입이 근질거리지만... 자식도 아닌 남에게 함부로 조언하는 것은 좀 그렇더구나."
"...허."
이젠 무공 봐주는 것까지 덧붙이네.
조금 웃긴 것은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히는 거라든가, 서문화린이 무공을 봐주는 일은 이미 회귀 전에 전부 겪었던 일이라는 점이다.
그때도 철혈당을, 그중에서도 나와 설리향을 각별히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양자와 동급일 줄은 몰랐네.
피식 웃으며 검을 마저 휘두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벽에 막히면 생각해 보죠.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으그긋...!"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할 걸까. 이를 갈며 기묘한 소리를 내는 서문화린.
이후로도 그녀의 유혹 아닌 유혹은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필요한 물건을 사서 무림맹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길을 가던 도중.
조금 좋아 보이는 것이 있었으면 바로 쪼르르 달려와 내게 선물했고(신기할 정도로 매끈한 돌멩이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음 마을에서 객잔을 구하고, 적당한 공터에서 수련하고 있자면 은근슬쩍 찾아와 맛보기라는 듯 조언을 하다가 중요한 부분에서 끊었으며.
조용히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한껏 음험하게 꾸며낸 목소리로 힘을 원하느냐 같은 말을 소곤거렸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진지한 표정으로 내 앞을 툭툭 두드렸다.
"앉으십시오."
"드디어...!"
헛된 기대를 품은 서문화린의 모습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세 번째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서문화린 선배의 양자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예상외의 말에 서문화린의 눈이 살짝 떨렸다.
"어, 어째서인 게냐? 좋은 것은 먼저 나눠주고, 무공도 봐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따로 말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그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생각이기도 하니라. 화경 무인을 뒤에 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말에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표정이 이리저리 변하던 서문화린. 그녀가 최종적으로 지은 표정은 좌절이었다.
"설마 본녀의 외모가 너무 어려서 싫은 건...."
"그건 아닙니다. 실제 나이를 아는데 외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건 그것대로 본녀가 조금 싫구나. 허면 대체 무슨 이유로 거절하는 것이더냐?"
"제가 서문세가라는 이름에 묶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묶이다니! 화, 확실히 본녀에게 붙은 악명이 한둘이 아니긴 하니라. 어쩌면 본녀가 다시 서문세가의 이름을 대면 정파로서 스러진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칠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그대에게도."
맞는 말이다. 서문화린이 서문세가를 다시 세운다는 이야기가 돌면 서문세가는 사파의 가문으로 기억될 것이다.
서문화린은 그것이 싫어 회귀 전에는 서문세가의 무공을 누구에게도 가르치지도 않았고, 스스로 서문세가의 가주임을 자칭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안에서 서문세가는 이미 멸문했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끝날 이름이었으니까.
...지금은 다시 욕심이 나는 모양이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파르르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허나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느니라. 본녀는 그대나 그대를 통해 당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악명을 씻어내려는 것이 아니니라. 문제가 될 것 같다면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여도 상관없느니라."
"그런 식으로 저를 이용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습니다만."
"보, 본녀의 바람을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대의 말이 맞으니라. 평생 볼 피를 다 보았는데 더 보아서 무엇이 남는단 말이느냐. 지금은 몰라도 본녀가 시간을 들여 달라졌음을 보여 준다면 분명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니라."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하고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군요."
"그대에게도 좋은 이야기 아니더냐. 고아로서 당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은 분명 고달플 테지. 소월 언니... 흠흠. 소월이와는 사이가 좋아 보였지만, 당가의 다른 사람들도 그대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 아니더냐."
당소월을 언니라고 부르는 게 입에 익은 모양인지 황급히 말을 바꾸는 서문화린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 장인어른이랑 사이좋습니다. 그리고 당가가 폐쇄적이라 외부인을 자주 배척하긴 합니다만, 한번 울타리에 들어온 이에게도 그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진 않습니다."
"큿...! 허, 허면 무공은 어떠하느냐? 본녀의 양자가 된다면 오대세가만큼은 아니지만, 그 바로 밑줄이라 여겨지던 서문세가의 무공을 전부 익힐 수 있느니라!"
"...."
솔직히 이건 좀 끌렸다. 멸문하기 전의 서문세가는 명문 검가(劍家)였기 때문.
정작 서문화린은 어릴 적엔 무공에 관심이 없어 검술을 익히지 않았지만...그렇다 하여 서문세가의 검의 위력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잖은가.
신공까지는 아니지만 최소 상승 무공.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검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미련을 끊어내듯 한차례 침을 삼키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대체 어째서 그리도 완고하게 거절하는 게냐...? 적어도 이유라도 제대로 설명해다오."
"그렇게 서문세가를 다시 세운다 한들, 서문화린 선배가 진정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뭐라?"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서문화린. 그런 그녀를 향해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서문화린 선배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서문세가를 재건하는 것도, 몸을 깊숙이 담근 사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서문화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화경에 오르고, 환골탈태를 통해 반로환동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깊은 참오를 반복했겠는가.
나야 회귀 전의 서문화린에게 들어서 알고, 오랜 기간 함께 생활하며 은연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서문화린에게는 진작에 끝난 이야기일 것이다.
그저 지금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서문세가의 무공을 이은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에 눈이 흐려졌을 뿐이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해도 좋고, 때로는 조금 힘들어도 좋으니 작은 일에 만족할 수 있는 삶.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즐거운 교류를 이어 나가는 삶. 무인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여인으로서의 삶. 서문화린 선배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것들 아닙니까."
"...."
작은 입을 꾹 다물고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서문화린. 전혀 다른 모습이건만, 어째서인지 그 불안함에서는 회귀 전의 서문화린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일까. 절로 미간의 힘이 풀리며 희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제가 서문화린 선배를 도우려는 것은 제 스승이라면 그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서문화린 선배가 바라는 바를 아는 것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 서문화린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저와 서문화린 선배는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귀 전. 어째서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고 잘해 주는 것이냐는 질문에 서문화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었다.
너는 나를 닮았노라고. 그래서 자꾸 눈이 가고 손이 가는 것이라고.
당시에 받았던 말을 이제야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강제로 떠밀린 피비린내 나는 삶. 복수만을 바라보느라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던 다 타고 남은 잿더미 같은 삶.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바라고 마는 것이다.
"저희 같이 행복해집시다."
"느읏?!"
돌연 서문화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말을 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네.
[8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5] 85화. 유혹 (2)
그날 이후로 서문화린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전에는 틈만 나면 나한테 잘해 주려 들며 어서 양자라 되라고 재촉했다면.
지금은 눈이 마주치면 빳빳하게 굳어 게걸음으로 도망친다거나, 혼자 구석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부여잡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했으니까.
뭐라고 했더라? 그날 밤, 당소월, 쉿... 이런 단편적인 단어만 들려서 뭐라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너무 가까이 가면 또 게걸음으로 도망쳐서 자세히 듣기도 힘들었고.
이건 이것대로 보는 맛이 있어 조금 즐거웠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 법.
당장이야 괜찮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무림맹의 추적은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을 테니까.
슬슬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야 했다. 서문화린을 당가로 끌어들이고, 나를 납치하며 생긴 문제나 악명을 뒤집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서문화린이 객실 앞에서 기척을 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한 번쯤 제대로 대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서문화린 선배. 저희 잠시 이야기가 하고 싶으니 문을 좀 열어 주시겠습니까."
"힉?! 무, 문을 말이느냐?!"
우당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뒤집어진 목소리.
화경의 고수라도 사람이라는 걸까. 자신이 넘어진 건 아니겠지만, 실수로 주변의 물건을 떨어뜨리긴 하는 모양.
한동안 퉁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잠잠해지며 조심스레 방의 문이 열린다.
다만, 완전히 열리지는 아주 작게. 그 작은 틈 사이로 서문화린의 작은 머리가 쏙 삐져나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본녀의 방을 찾는 게냐."
"저희의 앞으로의 일에 관해서 상의하려 합니다."
"본녀와 그대의 앞으로의 일?!"
바늘이라도 밟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폴짝 뛰는 서문화린. 문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이 조금 기괴하다.
"아, 안되니라. 그런 미래는 좋을 수가 없잖느냐! 생각해선 안 되느니라! 무엇보다 정혼자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
"당소월에게는 미리 말하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헉! 서, 설마 그날 밤의 그건 그런 의미였던 게냐...!"
"?"
갑자기 혼자 허둥대는 서문화린. 어째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 느낌인데... 보나 마나 또 이상한 생각하는 중이겠지. 회귀 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다.
서문화린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반쯤 열린 문을 기습적으로 벌컥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보, 본녀는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작은 손으로 낑낑대며 나를 밀어내는 서문화린. 다만, 진심으로 나가라는 뜻은 아닌지 그 힘이 미약하기 그지없다.
그 반항 아닌 반항을 대충 흘려넘기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 주변에 기막까지 펼쳐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흘러 나가지 않게 했다.
돌연 얼굴을 붉힌 채 오들오들 떠는 서문화린.
"허업! 이래서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모르지 않느냐...!"
"예? 그러려고 한 것이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보, 본녀가 화경에 이른 무인이라는 점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어찌할 지에 대해 입을 좀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입을 맞... 으응? 잠시만. 설마 말 그대로 이야기만 하려고 온 게냐?"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
허탈한 표정을 지은 서문화린이 손을 휘저어 내가 펼친 기막 위를 자신의 기막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다란 백발을 빙글빙글 감아 얼굴을 가리고는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수련하다 와서 피곤할 터이니 기막은 본녀가 유지 하겠느니라."
"갑자기 얼굴은 왜 가리시는 겁니까."
"그래서? 앞으로의 일이라면 역시 이 웃기지도 않는 납치극의 일을 말하는 것이느냐?"
"말에는 왜 또 그리 가시가 돋치셨습니까. 얼굴을 가린다고 하여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고, 말에 가시를 세운다고 하여 수치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부 알고 있으면 그냥 조용히 하고 있거라!"
빼액 소리를 지른 서문화린이 다시 자신의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불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흥! 이리 먼저 찾아온 것은 필시 무언가 생각해 둔 것이 있어서 아니겠느냐. 먼저 말해 보거라. 애초에 본녀가 그대를 납치한 이유는 전부 그대가 보인 꾀에 넘어간 탓이니."
"책임을 전부 제게 떠넘기시니 어깨가 무겁지만... 맞는 말이니 어쩔 수 없군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간 생각했던 것들을 입에 담았다.
"우선 적당히 진실과 거짓을 섞도록 하죠."
"그게 무슨 소리느냐."
"밝힐 부분은 밝히고, 숨길 부분은 숨기자는 소리입니다. 예를 들자면 서문화린 선배가 저를 납치한 것은 제게서 서문세가의 무공을 보았기 때문이라든가, 용봉지회에 참가한 이유는 음습하게 어린 무인들과 놀고 싶어서나 무림맹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파의 방식에 질렸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본녀가 정체를 숨기고 용봉지회에 숨어든 것을 그리 생각했던 것이느냐?"
"저는 아니지만 세간 사람들은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시무룩해진 서문화린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충격이었던 모양.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여겨지지 않도록 이제부터 대책을 세우자는 것 아닙니까. 일단 저는 서문화린 선배께서 제게서 서문세가의 무공을 보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저를 납치한 것이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 괜찮겠구나. 무엇보다 본녀의 정체가 이미 알려졌다면 백발나찰이라 불리던 시절의 이야기 또한 널리 퍼졌을 터. 그 부분은 다들 납득하고 넘어갈 것이니라."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다음이죠. 어찌하여 용봉지회에 참가한 것인지, 그리고 저를 납치한 동안에 있었던 일 말입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잖느냐! 본녀는 떳떳하니 아무것도 해명할 필요는 없느니라...!"
"또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적어도 서문화린 선배가 백발나찰이라 불리던 때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 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느냐. 본녀가 한동안 두문불출했다지만, 백발나찰의 악명은 스무 해를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인 것이니라. 이제 와서 말 한두 번으로 뒤집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가장 무난한 방법은 역시 협행입니다만...."
"본격적으로 협행에 나선다면 자잘한 흑도를 몰아내는 정도로는 안 될 터. 사파에 적을 잔뜩 만들겠구나."
"예. 거기에 문제가 생기면 피도 제법 보겠죠. 이건 이것대로 서문화린 선배가 원하는 바가 아닐 터이니,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본녀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느니라. 허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일단 서문화린 선배가 정체를 들킬 것이 확실해 보이니, 수치스럽게 쫓겨나느니 일단 뭐라도 저지르고 다음 기회를 얻어보자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입니다."
"그으... 지금 그대는 아무 생각 없이 일단 납치부터 당하고 본 것이라는 소리인 게냐?"
"아무 생각 없다니요. 수틀리기 전에 판을 엎었다고 표현해 주십시오."
"그게 그 소리 아니느냐! 아니, 생각해 보면 소월이나 향이를 납치한 전적이 있구나! 본녀는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역으로 납치당하려 들 줄이야... 그대는 머리속에 납치밖에 없는 것이느냐?"
"하지만 제일 효율적인 방식 아닙니까."
"보통 사람은 그걸 제일 정신 나간 방법이라 부르느니라! 다른 방법이 분명 있었을 터!"
"있었지만 서문화린 선배가 걷어차지 않았습니까. 전 분명 무림맹주가 본선 초반부터 참가하여 들킬 위험이 크다고 넌지시 경고했습니다."
"...코흠흠. 이제 와서 지난 일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우선 대책부터 짜자꾸나. 어디 보자, 일단 중요한 것은 정파든 사파든 어느 한쪽을 척지지 않으면서 달라졌음을 내보이는 것. 맞느냐?"
"맞습니다. 허나, 극단적이지 않으면 달라졌음을 보여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으우. 본녀도 그리 생각하느니라. 마땅한 방법을 전혀 모르겠구나."
축 늘어진 눈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서문화린. 이전 생에 듣기로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 반로환동의 부작용 중 하나라고 했던가.
그 탓에 단순히 몸만 어려진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어려진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었지.
...가끔 보고 있자면 그냥 사람 자체가 이런 사람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저번에 서문화린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한 게 있습니다만,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으응? 무엇이느냐? 어차피 마땅한 방도도 없으니 편하게 말해도 괜찮으니라."
"제가 서문화린 선배의 자식이 되어드릴 수는 없지만, 이를 연 삼아 무공을 좀 봐주겠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 않겠습니까."
"헤?"
살짝 벌어진 입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문화린. 그런 그녀를 향해 다소 즉흥적인 계획을 설명했다.
서문화린의 원수와 연관 있는 줄 알고 일단 납치했지만 알고 보니 오해였다. 하지만 정당하게 익힌 것이라고는 하나 서문세가의 무공을 배운 것은 사실.
그러니 나를 한동안 당가에 머물며 나를 봐준다는 식으로 나가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지 고민하는 대신 아예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것입니다. 서문화린 선배의 말씀대로 처음에는 시선이 따가울 수 있으나, 이는 당가라는 울타리가 어느 정도 막아 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당가의 식객으로 머물며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본녀에 대한 경계를 푼다는 소리느냐?"
"맞습니다. 서문화린 선배께서 정파 무림에서 칭송받지는 못해도 조용히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기엔 충분할 겁니다."
"당가를 방패 삼아 본녀의 허물을 잠시 덮어 준다는 소리 아니느냐. 듣기에는 달콤하나, 독왕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느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살겁을 일으킬 수 있는, 실제로 살겁을 일으킨 경험이 있는 화경 무인을 제 손으로 집 안에 들이다니. 본녀가 가주였어도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서문화린. 하지만 그녀가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설득은 서문화린 선배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이죠."
"무어라?"
"제가 하겠습니다. 당소월도, 장인어른도, 그리고 당가의 다른 장로와 대주들까지.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습니다. 책임질 것이 있다면 책임도 질 테고요."
"...그렇게까지 본녀에게 잘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느냐? 무공 좀 배우기 위해 그런다기에 너무 지불할 대가가 크지 않느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대의 무공은 약간의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미숙함은 보이지 않았느니라. 놀랍게도 그 나이에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본녀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라."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 길은 제 발로 걸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면...!"
"제가 이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당소월의 덕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서문화린 선배도 가능할 겁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것은 내게 손을 내밀던 당소월의 모습. 그리고 씁쓸한 눈빛으로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던 서문화린이었다.
다시 눈을 뜨고는 서문화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서문화린 선배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
멍하니 벌어진 입.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던 서문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그럴 거라면 본녀가 처음에 말했듯, 그대를 양자로 들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겠느냐?"
"...."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지만, 괜히 인정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부분은 좀 더 시간을 갖고 찬찬히 생각해 봐야지....
***
아쉽게도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긴 했으나 결국 며칠이 지나지 않아 추적대에게 따라잡혔으니까.
다만, 그 추적대는 무림맹에서 보내온 것이 아니었다.
[8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6] 86화. 협박
대략적인 방침을 세운 뒤. 그래서 양자로 들어가느냐 마느냐로 한참을 실랑이질하기를 며칠째였을까.
오늘도 본인의 양자가 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으로 열심히 나를 유혹하던 서문화린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빠르구나."
"측간이라면 출발하기 전에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에이잇! 그런 이야기가 아니니라! 추적을 말하는 것이니라!"
"아. 그런 것이라면 생각보다 빠르군요."
차마 꼬집지도 못하고 내 손등만 꾹꾹 누르는 서문화린.
내겐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훨씬 기감이 뛰어난 서문화린에게는 뭔가 느껴지긴 하는 모양.
조금 이르지만, 슬슬 돌아갈 때인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돌연 서문화린의 태연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이번에는 또 왜 그러십니까."
"...어서 여길 벗어나거라. 아니, 그러기에도 늦었구나. 어서 본녀의 뒤로 오거라."
난데없는 말. 다만 서문화린이 평소에 보여주던 다소 허술한 모습이 아닌, 화경 무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저 멀리서 익숙하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기세에 피부가 저릿해졌다.
"아."
내 기감은 세밀할지언정 그 범위가 대단히 넓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기감이 닿는 범위까지 자신의 기세를 뻗고 있었으니까.
보통 고수라도 평소에는 기세를 숨기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잘 갈무리하며 다닌다.
이는 자신의 전력을 숨기기 위함이기도 하고, 자신보다 약한 이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기에.
다만, 이 기운의 주인은 다르다. 숨기기는커녕 그 난폭하고 위압적인 기세를 사방팔방에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이렇게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 난 무인은 내가 아는 선에서 단 한 명뿐이다.
사흑련주 상관극.
쌍패창왕(雙覇槍王)이라는 별호로도 불리며, 그 이름처럼 두 자루의 길고 짧은 창으로 사파 무림을 평정하고 무림사 최초로 사흑련이라는 사파 집단을 만들어 낸 걸출한 폭군.
...다만, 알고 있기에 더더욱 놀라운 것이다.
대체 이 인간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구석이긴 해도 아직 남궁세가의 영역인 안휘성이거늘.
어이없어하는 사이. 우리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느낀 걸까. 멀리 떨어져 있던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진다.
이에 가도 끄트머리에서 보이던 작은 점은 어느새 큼직한 체형의 중년인이 되어있었으니.
가까이서 본 그는 내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젊고 사나워 보였다.
하기야. 내가 보았던 마지막보다 십여 년 전의 시점이니 당연한가.
이렇게 빨리 엮일 줄은 몰랐던 터라 한숨을 삼키며 불청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칠 척을 가볍게 넘길 법한 장신. 전신은 두껍게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고, 등에서 교차시킨 두 자루의 길고 짧은 창은 아직 뽑히지 않았음에도 예리함을 발하고 있었다.
덩치만으로도 주변을 찍어 누르는 위압감이 느껴졌으나, 진짜는 따로 있었으니.
짐승의 갈기처럼 거친 봉두난발과 굵고 뾰족한 수염. 그 사이에서 타오르는 저 눈동자가 그러하다.
야망.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라는 노골적인 욕망이 담긴 시선이야말로 상관극이라는 인간의 본질이리라.
그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있는 것 같은 살벌한 감각이 닥쳐온다.
이것도 오랜만에 받아보니 조금 그립네.
다만, 내가 가만히 있는 모습을 압도당한 것이라 여긴 건지 서문화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앞을 가로막는다.
마치 나를 상관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 같은 모양새.
이에 상관극의 눈이 이채가 어렸으나... 그가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서문화린을 부드럽게 밀어내고는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무릎 꿇으라 종용하는 난폭한 기운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당가의 어린 후배가 사흑련주께 인사드립니다. 천휘라고 합니다."
"오? 본 련주를 아나?"
"얼굴을 뵌 적은 없지만, 이 기세를 느끼고도 어찌 눈치채지 못하겠습니까."
"...이거 재밌네."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린 상관극.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 살벌한 기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럽다.
서문화린이 기겁하며 내 등을 콕콕 찔렀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상관극 상대로는 이게 맞다.
패도(覇道)를 걷는 무인. 그중에서도 정점에 가장 가까우며, 같은 화경 무인 사이에서도 유독 강한 그는 철저히 사파의 논리에 따르는 이였다.
약자를 멸시하고 강자를 대우한다.
다만 힘없는 이가 조아리는 것은 당연하나, 뼛속까지 굴종하면 그건 그것대로 기개가 약하다며 싫어하는 삐뚤어진 유형의 인간.
그렇기에 상관극은 서문화린과 설리향의 죽음 이후, 검귀라 불리며 미쳐 날뛰는 나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의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어 사흑련주에게도 종종 날을 세웠으니까.
과거야 어찌 됐든 사흑련주를 상대할 때 중요한 것은 그를 존중하되, 힘과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 것.
언제 어느 때나, 심지어는 자는 동안에도 이런 폭압인 기세를 뿜으면서 자신에게 겁먹지 않는 이를 좋아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애초에 사파 무인은 대체로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파 무인의 정점에 선 상관극이 가장 제정신이 아닌 건 당연한 일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는 상관극.
"흐하하! 백발나찰이 웬 핏덩이를 납치했다 하여 무슨 소리인가 했더만... 과연. 이 나이에 절정의 끝자락에 선 무위. 그리고 이만한 기개라면 잡아먹고 싶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그, 그게 무슨 망측한 소리더냐! 잡아먹다니!"
서문화린이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토해 냈지만, 상관극은 그저 태연하게 손을 저을 뿐이었다.
"워워. 진정해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본 련주는 남의 취향을 폄하할 만큼 속이 좁은 남자가 아니니 말이다."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조금 더 키운 뒤에 잡아먹을 생각이냐?"
"네놈...!"
서문화린이 내공을 끌어 올리며 내 앞을 다시금 가로막는다. 그에 따라 충돌하는 둘의 기세.
회귀 전의 당소월이 말하기를 화경이란 자기 자신을 완성한 경지라 하였다. 그렇기에 제각각 고유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고.
그리고 지금. 둘 사이에서 섞이고 터져나가는 기운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서문화린이 쌓아 올린 살업과 상관극의 패도가 맞부딪히는 것이니 살벌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다만, 둘의 대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상관극이 한발 물러서며 신경전이 끝난 것이다.
"여기까지 하지. 본 련주는 싸우려 온 것이 아니니까."
"하! 그럼 대체 뭣 하러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긴 것이냐. 아니, 애초에 본녀의 위치는 또 어떻게 알았지?"
"느려터져서 본 련주가 이리 먼저 도착했다만, 위치를 알려준 녀석은 따로 있지. 그리고 왜 이리 발걸음을 옮겼냐니... 그거야 일전의 제안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다."
"사흑련에 들어오라는 것 말이더냐? 이미 거절했던 걸로 기억하느니라."
"그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백발나찰 네 얄팍한 꿈은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거냐."
"...."
입을 꾹 다문 서문화린. 그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서문화린 선배. 사흑련주와 아시는 사이셨습니까?"
"오해하지 말거라. 일전에 한 번 만난 것이 전부이니라."
"일전이라 하심은...."
서문화린이 입을 움찔거리는 순간. 한 박자 빠르게 상관극이 대신 대답했다.
"본 련주가 슬슬 절강성을 넘어 강서성에 손을 뻗어 볼까 고민하던 도중. 문득 백발나찰의 소문이 떠올라 하오문을 시켜 찾아가 본 것이다만... 그때는 이미 반로환동을 겪은 이후더군. 하여 강제하진 못하고 그저 권유했을 뿐이다. 사흑련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회귀 전의 서문화린이 용봉지회에서 정체를 들키자마자 바로 사흑련에 들어간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거기에 결국 강서성에 사흑련의 지부를 세운 것도 사실이다.
인접한 안휘성의 남궁세가와, 호북성의 제갈세가의 견제로 절반밖에 손에 넣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되면 궁금한 것이 하나 생긴다. 자신이 불러 놓고 정작 사흑련에 들어오자 서문화린을 견제한 것은 왜일까.
그녀가 죽은 이후까지 속 좁게 굴지는 않았으나, 살아 있을 적에는 굉장히 쪼잔하게 견제하지 않았던가.
겉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이러한 의문이 겉으로 드러난 것일까.
상관극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군 그래."
"예. 제 짧은 식견으로는 사흑련에 같은 화경의 무인이 하나 더 있다면, 사흑련주께서 불편해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맞다. 불편하겠지. 백발나찰이 내가 생각했던 나찰 같은 무인이 아니기에 더더욱 불편하겠지."
"허면...."
"하지만 그럼에도 사흑련은 백발나찰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본 련주가 사흑련을 세운 이유니까. 실제로는 한직에 앉혀 놓더라도 겉으로는 얼마든 받아들이는 배포를 보여야 다른 멍청이들이 믿고 따를 것 아닌가."
"그럼 서문화린 선배를 영입하려는 것은 애초부터 보여 주기식인 겁니까?"
"맞다. 하지만 이게 백발나찰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나?"
서문화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들켰다면 본녀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히 살아갈 곳뿐이니라. 권력 다툼 따위는 관심 없으니, 사흑련이 울타리가 되어 준다면 나쁠 건 없겠지."
"그건...!"
"그래. 이건 천휘 그대가 본녀에게 제안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기도 하느니라."
"뭐라?"
기세는 험악해도 하는 말에는 나름의 호의가 담겨 있던 상관극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뒤이어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렬한 기세가 내 목을 조여온다.
"설마 본 련주의 계획에 훼방을 놓겠다는 건가? 이곳이 정파의 영역이라 하여, 네놈이 당가의 사람이라 하여 안전하리라는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
살기 섞인 협박. 보통의 후기지수라면 여기서 꼬리를 내렸겠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아득한 경지의 차이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살기에 익숙한 사람이다. 버겁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얌전히 고개를 숙일 정도는 아니다.
상관극을 올려다보며 덤덤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문화린 선배의 거취는 저나 사흑련주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죠. 아닙니까?"
"맞는 말이니라. 그리고."
서문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끌어 올린 기세로 나를 감싼다. 그리고는 미약한 살기를 담아 상관극을 노려보았다.
"본녀의 인질이니라. 본녀의 허락 없이 손대지 말아 줬으면 한다만."
"허!"
헛웃음을 지은 상관극이 나를 향한 살기를 거두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진짜 뭐가 있긴 하나 보군. 조금만 건드렸을 뿐인데 벌써 두 번이나 이리 투기를 내비칠 줄이야. 다만 아까도 말했듯, 본 련주는 이 자리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허면 다시 한번 답해 주마. 사흑련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라. 그러니 어서 절강성으로 꺼지거라."
"흐흐. 착각하는 것 같은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하여 다시 한번 권유하러 온 것 또한 아니다."
엄지로 뒤쪽을 가리키는 상관극. 주변을 가득 채운 그의 기세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 어느새 그곳에는 흑색 무복을 입은 무인 수십이 모여 있었다.
아마 상관극이 말했던 느려터져서 내버려두고 왔다던 일행들이리라.
하나같이 허리춤에 검을 차고, 소매에는 흑천(黑天)이라는 자수를 새겨넣은 무인들. 하나하나가 최소 일류. 개중에는 절정에 오른 자도 몇 명 보였다.
다만 내게 중요한 것은 놈들의 무위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는 그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흑천검문...."
회귀 전. 설리향과 서문화린의 목숨을 앗아간 것들이었기에.
[8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7] 87화. 협박 (2)
"흑천검문...."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살기가 들끓기 시작한다.
회귀 전의 설리향과 서문화린의 목숨을 앗아간 것들.
절로 손에 잡히는 검 자루. 그대로 이 살의를 휘두르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억누르던 도중.
서문화린의 작은 등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본녀와 싸우러 온 것도, 제안하러 온 것도 아니라면 협박하러 오기라도 했다는 소리더냐. 겨우 본녀가 놓쳤던 버러지들을 모아놓고?"
"흐하하! 그럴 리가. 본 련주가 하려는 것은 협박이 아니라 협상이다, 백발나찰."
등에 멘 두 자루의 창을 뽑아 그대로 바닥에 꽂는 상관극.
푸욱!
"여기서 사흑련에 들어온다고 한다면 너와, 네가 그렇게나 싸고도는 저 어린 것까지 전부 살려주마. 거기에 준비한 선물은 덤이고!"
크게 벌린 팔로 흑천검문 쪽을 가리키는 상관극. 저쪽 또한 서문화린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이기 때문인지 눈빛이 제법 살벌하다.
대놓고 상관극이 자신들을 서문화린에게 넘긴다고 했음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녀석들.
아니, 오히려 저들의 선두에 선 한 명은 보란 듯이 살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으나, 보는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 손잡이도, 검집도, 아마 검신까지 새까맣게 물들어 있을 검. 그리고 일찍이 나와 서문화린이 지녔을 복수밖에 보이지 않는 눈.
흑천검제.
아직 그런 거창한 별호로 불릴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회귀 전에는 서문화린에게 머리가 부서진 모습만 보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저놈이 바로 서문화린의 심장을 꿰뚫은 놈이라는 것을, 내가 어찌하기도 전에 죽어버려 복수조차 불가능했던 녀석이라는 것을.
으득.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는 사이. 상관극이 낄낄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본 련주의 호의를 무시하고 기어이 다른 길을 걷고자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선물이 비수가 되는 수밖에."
"하! 협상은 무슨. 결국 협박 아니느냐. 무의미한 짓이니라. 설마 본녀가 네놈을 두려워하기라도 바라는 것이더냐?"
"그럴 리가. 다만, 본 련주로서는 백발나찰 자네가 사흑련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번에 새로이 식구가 된 흑천검문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소리일세."
내 쪽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상관극. 이에 서문화린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죽일 놈이었다면 진작에 죽였겠지. 용봉지회 자리에서건, 납치한 이후건 말이야. 허나, 결국 자네는 그러지 않았어. 조용히 숨어다니긴 했으나, 누가 보면 눈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이가 좋아 보이더군. ...덕분에 백발나찰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놈들이 찾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
잇소리를 내며 흑천검문 쪽을 노려보는 서문화린. 흑천검문주는 그 기세에 몸을 떨면서도 내 쪽을 향해 눈짓하며 이죽였다.
"적어도 우리와 같은 아픔을 맛봐야 하지 않겠소."
"먼저 시작한 건 흑천검문이라는 사실을 잊은 게냐!"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어찌 됐든 내 아비는 백발나찰 당신에게 죽었소. ...나는 네년이 혼자 행복해지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다."
뒷말에 묻어나오는 진득한 원한. 과연. 그렇게 된 건가.
서문화린이 나를 납치했다는 사건과 그 이유 또한 상당히 유명해졌을 것이다.
당연히 서문화린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흑천검문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그리고 서문화린이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소식에 절망했을 것이다. 어찌어찌 문주가 초절정에 오른 것 같지만, 화경은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나야 언젠가 흑천검문주가 흑천검제로 불리며 화경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른 이들은...심지어 본인조차 확실할 수 없는 것이 깨달음 아닌가.
회귀 전에는 서문화린이 곧장 사흑련에 들어갔기에 어찌할 여유도 없었으나, 이번에는 나를 납치하며 한동안 여기저기를 숨어다녔다.
그 사이에 흑천검문주는 도박 수를 던졌다. 서문화린을 죽일 수 없다면, 적어도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아픔을 맛보기를 바라며.
놈들은 사흑련에 들어가며 상관극에게 제안했으리라. 충성을 바치고, 서문화린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나를 죽일 기회를 달라고.
상관극은 상관극대로 서문화린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니 흑천검문을 이용하기로 했으리라.
서문화린이 상관극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흑련에 들어가면 그걸로 끝. 이후에는 흑천검문이 무슨 짓을 하건 복수를 다할 수 없다며 이 자리에서 싸우다 죽기를 택하겠지.
하지만, 만약 서문화린이 상관극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관극은 서문화린을 붙잡고 있을 테고, 흑천검문은 그사이에 나를 공격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초절정 무인 하나와 절정 무인 몇과 다수의 일류 무인을 전부 상대하기란 요원한 일이라 생가하고 있겠지.
결국 눈앞에서 내가 죽는 꼴을 지켜보고 싶지 않다면, 서문화린은 상관극의 의도대로 사흑련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흑천검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서문화린에게 조금이나마 복수할 기회를 얻고.
상관극은 나를 인질 삼아 서문화린을 사흑련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게 놈들의 목적인 거겠지.
이러한 계획 속에서 나는 재수 없으면 죽겠지만... 어지간하면 살아남긴 할 거다. 죽은 인질에는 가치가 없으니까.
다만, 어느 쪽이건 흑천검문은 분노한 서문화린에게 다시 몰살당하겠지. 오롯이 이득을 보는 것은 상관극뿐.
흑천검문 놈들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비장하기만 한 어리석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나, 지금의 흑천검문이 과거에 서문화린이 한차례 멸문시켰던 흑천검문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주가 흑천검문의 장자라 흑천검문의 이름을 대고 있을 뿐, 문파원 하나하나는 서문화린의 복수에 모든 것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니.
그들에겐 서문화린에게 한방 먹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저들의 삶은 이미 십수 년 전에 끝났고, 남은 것은 검게 눌어붙은 복수심뿐이기에.
서문화린이 아끼는 나를 죽일 수 있다면 최고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녀에게 사흑련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을 터.
남은 일평생을 선하게 살아도 벗어 던지기 힘든 사파의 굴레. 흑천검문은 서문화린에게 사흑련이라는 족쇄를 달려는 것이다.
오직 서문화린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말이다.
실제로 이전 생의 서문화린은 평생을 후회와 미련 속에서 살아갔다. 그렇기에 나만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이것저것 가르친 것이고.
...이번 생에는 그리되게 놔두지 않을 생각이지만.
"사흑련주. 그 말은 서문화린 선배의 개입을 막을 뿐, 적극적으로 저를 죽일 생각은 없다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맞습니까?"
"오냐. 바로 봤다. 본 련주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백발나찰을 사흑련에 들이는 것이지 척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럼 제가 흑천검문을 전부 베어 내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허?"
순간 벙찐 표정을 지은 상관극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이구나!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은 분명해 보이나,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제가 서문화린 선배를 보내고 싶지 않으니 어차피 일어날 칼부림입니다. 계획에 실패하면 얌전히 물러나 달라 청하는 것에 진심이고 뭐고 있겠습니까."
"흐흐. 그것도 그렇군. 좋다! 만약 네놈 말대로 흑천검문을 전부 쓰러뜨린다면 약속하지. 본 련주는 이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나마. 더 있어 봐야 백발나찰과의 생사결만 일어날 테니."
"감사합니다."
상관극은 성정이 난폭하고, 힘을 숭상하는 주제에 협잡질에 거리낌이 없고, 호탕한 척하는 속 좁은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죽는 그 순간까지 사파의 지존으로 군림하던 인물이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이는 가능하면 지키고, 자신이 내뱉은 말 또한 어지간하면 지킨다.
그런 모습을 보여왔기에 저 잘난 맛에 사는 사파 무인들이 상관극을 따르는 것이겠지.
상관극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아까부터 나를 지키듯 감싸고 선 서문화린을 뒤로 잡아당겼다.
"서문화린 선배."
"위, 위험하느니라! 차라리 본녀가 사흑련에 들어가마. 그러니 그냥...."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습니다? 이길 자신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 가만히 지켜봐 주십시오. 괜히 끼어들려다 사흑련주랑 싸워 힘 빼지 마시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느냐! 본녀가... 본녀의 눈앞에서 또다시 서문세가의 사람이 죽는 꼴을 봐야 한단 말이더냐!"
"저 아직 서문화린 선배의 양자로 들어간 것 아닙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말은 구태여 다시 입에 담았다. 그만큼 진심이었기에.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함께 행복해지자고. 제가 그리 만들 겁니다."
"...!"
스릉.
눈을 크게 뜬 서문화린. 그녀의 앞에서 보란 듯이 검을 뽑았다.
"뭐어. 흑천검문에게 빚이 있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모든 것을 불사르는 복수는 저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저 오랜 시간이 지났고, 당소월을 만나며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었을 뿐.
설리향의 미처 끝마치지 못한 마지막 목소리를. 하얀 눈밭 위에 흩뿌려진 서문화린의 붉은 피를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서문화린은 잊으라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스스로 날을 세운 검으로 심상에 새겨 넣었으니.
한번 해 봤던 일을 두 번이라고 못 하겠는가.
흑천검문은 서문화린의 손에 첫 번째 멸문을 맞이하고, 내 손에 두 번째 멸문을 맞이하였으며.
이번 생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리라.
서문화린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서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검 자루의 까슬한 감촉. 겉보기보다 좀 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베어야 할 적.
단순명쾌한 사실은 이를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의 안개를 걷어낸다.
이번 일은 다행히 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실로 간단한 일 아닌가.
수십의 일류 무인도, 대여섯은 되는 것 같은 절정 무인도, 아직 초입이라고는 하나 초절정에 오른 흑천검문주도... 그리고 내 앞으로 가로막은 벽마저.
일체의 예외 없이 전부 베면 된다.
자세를 잡은 내 모습에 흑천검문주가 코웃음을 쳤다.
"어처구니가 없군.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그거 아나? 나는 사실 당가의 데릴사위다."
"하! 그게 무슨 상관이지? 백발나찰이 반로환동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우린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그깟 당가가 두려워 일을 그르칠 줄 알았나?"
"설마. 다만, 나도 이제 당가의 사람이 된 만큼 가훈을 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이를 되새기며 지금껏 억누르던 살기를, 외면하던 나의 지옥을 끌어 올렸다.
붉게 물든 심상에는 그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
코끝을 스치는 탄 냄새와 비릿한 혈향. 화마에 휩싸인 전각과 시산혈해의 환시 너머.
심상의 가장 깊은 곳. 그 위에 새겨진 가장 오래 된 상흔에서는.
동백꽃 한 송이가 핀 가운데 희미한 배의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8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8] 88화. 검귀(劍鬼)
오소소.
자기도 모르게 돋은 소름에 서문화린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검을 뽑아 든 천휘. 그가 뿜어내는 살기는 신기하게도 서문화린을 전부 빗겨나가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이는 결코 범상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실체를 가지지 않을 터인 기운은 진득한 늪처럼 주변을 진창에 빠뜨렸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게 된다.
물론 화경에 이른 서문화린은 천휘의 살기를 정면에서 뒤집어쓰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겠지.
이미 자신을 완성하고, 의념을 깨우친 무인은 살기나 미혼술 같은 정신적인 간섭에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내성을 가지니까.
하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화경이라는 드높은 경지에 오른 이가 아니라면 천휘의 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살기란 의념의 기초적인 활용. 누구나 정기신(精氣神)을 타고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해 가진 것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할 뿐이니.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도 미숙하게나마 의념을 다룰 수 있다는 증거가 바로 살기다.
그렇기에 살기에는 언제나 진심이 필요하고... 명확한 한계 또한 정해져 있다.
사람의 정신은 생각만큼 모난 것이 아니기에, 진심으로 누군가를 해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주화입마에 가까워지기 때문.
깊은 살기를 품으려 하면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주화입마에 빠진다면 의지를 날카롭게 벼려내지 못해 살기 또한 약해진다.
보통은 그러하다.
하지만 지금의 천휘는 어떠한가. 검 한번 휘두르지 않았건만, 수십의 일류 무인이 목을 틀어막으며 헐떡인다.
절정에 오른 몇몇은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눈에 띄게 손끝이 떨렸으며, 오직 초절정에 이른 흑천검문주만이 식은땀을 흘리며 온통 새까맣게 물든 검을 꺼내 들었을 뿐.
용봉지회에서 잠깐 검을 맞대며 상당한 살검(殺劍)을 다룬다는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아무리 천휘가 절정의 끝자락에 선 무인이라지만... 아니, 설령 초절정에 다다른 무인이었더라도 이는 너무나 짙은 살기.
그래. 천살성(天殺星)이라도 되는 게 아닌 이상....
"아."
서문화린은 멍하니 천휘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 그 안쪽에서는 주화입마를 상징하는 검붉은 혈광이 일렁이고 있었으니.
이를 마주하는 순간 서문화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저 흉(凶)하고 또 흉하다.
흉흉한 기세를 몸에 두르고, 한층 더 흉흉한 검기를 피워올리는 천휘.
대체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이만한 살기를 품을 수 있는지 경악스러울 정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의념은 곧 의지와 상념. 이는 마음의 다른 말이며, 무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심상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경지에 오른 무인은 의념을 통해 심상마저 엿볼 수 있게 되니.
서문화린은 보고 말았다. 천지를 저릿하게 진동시키는 막대한 살기의 이면에 새겨진 슬픔을.
"...이제야 알겠느니라."
매캐한 탄 냄새 속에서 희미한 자취를 남기는 배의 향기. 검붉은 핏물 속에서 낙화하는 동백꽃 한 송이.
그리고 이어지는 공허함과 자책.
천휘가 품은 것은 살(殺)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애(哀)였지.
저 살기는 천휘만의 애도다.
"본녀와 그대가 닮았다고 하였느냐."
무엇을 마음에 품고, 무엇에 그리 슬퍼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찌하여 저런 흉흉한 방식으로 우는지는 알 수 있었다.
"실로 그 말이 옳구나."
그런 방식밖에 모르니까.
눈물은 곧 약함이요, 약함은 곧 죽음이다.
사파의 작자들은 승냥이와 같아, 물어뜯을 부분이 보이면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어 그 숨통을 끊어 놓으니.
서문화린이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천휘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았으리라.
칼날 위에서 비틀거리는 위태로운 춤사위와 같은 인생.
서문화린은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으나, 결국 스스로의 나약함과 후회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화경에 올랐고, 그리하여 반로환동에 닿은 것이다.
허나, 천휘는 조금 달랐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어, 품으려 하면 할수록 상처만 늘어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휘는 그저 끌어안았다.
깊숙이. 더욱 깊숙이. 괴롭더라도 잊지 않도록. 아프더라도 놓치지 않도록.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미련한 행위.
설령 그것이 자신의 상처를 곪게 할 뿐이라 해도 천휘는 타협하지 않았다.
"허면 본녀도 각오를 다지겠느니라."
당소월과 설리향 곁에 있는 천휘는 제법 즐겁게 웃을 줄 아는 이였다. 서문화린 또한 그리되고 싶었고.
천휘는 함께 행복해질 것을 입에 담았으니.
서문화린은 돌려주지 못한 대답을 입속에서 굴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었다. 언젠가 입 밖으로 꺼낼 순간을 위하여.
단전에서 뻗어나간 내공이 서문화린의 주먹에 서린다. 뭉치고 뭉쳐,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수준까지 농축된 기운이 의념으로 단단하게 가공되니.
강기를 두른 서문화린은 내공의 격류로 흩날리는 백발 사이에서 눈을 부릅떴다.
"사흑련주. 본녀는 이제부터 천휘를 데려갈 생각이니라. 방해한다면 방해해 보거라. 기꺼이 네놈의 골통을 부숴 줄 터이니."
"...본 련주는 고집을 부리기도 했으나, 많은 양보를 하기도 했다. 또 다른 화경 무인을 받아들여 사흑련 전체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도 좋지만, 나 쌍패창왕 상관극이 백발나찰이라는 동격의 무인을 쓰러뜨려 개인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도 있음을 알아라."
"네놈의 패도 놀음에는 관심 없느니라. 본녀는 선언했고, 이를 곧 행할 터이니. 막고 싶다면 그 창을 뽑아 보거라."
"거, 들은 것과 성격이 달라 의아했건만 이제야 본 모습을 드러내는 거냐."
재밌다는 듯 낄낄 소리내어 웃는 상관극.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천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쉰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어린 소년처럼 들떠 있는 상관극. 그는 창을 뽑는 대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이 바뀌었다. 막지 않을 테니 가고 싶으면 가 봐라. 하지만 저 녀석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보고 싶지 않나?"
"...주화입마는 오래될수록 위험해지느니라."
"주화입마?"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되물은 상관극이 무릎을 치며 웃었다.
"흐하하! 방금 주화입마라고 했나 백발나찰? 저게 어딜 봐서 주화입마에 빠진 무인이란 말이냐!"
잔뜩 흥분하여 두꺼운 팔로 전방을 가리키는 상관극. 그곳에는 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검을 휘두르는 천휘의 모습이 있었다.
길게 늘어진 검기가 반쯤 무력화된 일류 무인 대여섯의 목을 베어 낸다. 이에 겁을 먹은 건지, 마지막 발악이라도 되는 듯 일제히 달려드는 흑천검문의 무인들.
천휘는 이를 하나하나 눈에 감고 차분히 대응하기 시작했다.
힘이 필요한 부분은 불처럼 이글거리는 검기로 찍어 눌렀고, 여럿이 뭉쳐 와해시켜야 할 때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한바탕 칼춤을 추었으며, 사각에서 찔러오는 검이라도 알고 있었다는 듯 손쉽게 쳐낸다.
분명 일류라 함은 어디 가서 검 좀 쓴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일 터. 무림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대가의 영역에 다다른 이들이지만....
그런 일류의 무인이 너무나 간단히 쓰러져 간다.
아니, 일류 무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떨리는 손을 다잡고 뒤늦게 검기를 피워올린 절정 무인마저 몇 합 만에 자세가 무너져 그대로 심장을 꿰뚫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 다만, 서문화린을 놀라게 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단 한 순간도 평정을 잃지 않은 천휘의 차분한 반응이 무엇보다도 놀라웠지.
"...주화입마가 아닌 게냐? 아니, 그건 맞구나. 천휘는 분명 주화입마에 빠졌느니라. 다만."
다만, 주화입마에 빠진 채로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미쳤지만 제정신이라는 모순. 그러나 천휘가 품고 있는 심상을 조금이나마 엿본 서문화린에게는 되려 그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아마 천휘가 주화입마에 빠졌던 것은 한참 전의 일. 다만, 지금은 이미 극복한 일이다.
그저 극복한 마(魔)를 내다 버리는 대신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을 뿐.
실실 웃는 상관극이 입을 열었다.
"재미있지 않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망가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렇게나 망가진 채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단 말이지."
"하나도 재미없느니라."
"그래도 일단은 지켜봐야 할 거다. 자네도 느껴지잖나.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
서문화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번 자리 잡은 심상이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의념이란 쉬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휙휙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념에 그만한 힘이 실리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의 천휘는 어떠한가. 흑천검문을 상대하는 그의 기세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는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다는 뜻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동요하고 있다에 가깝겠지.
"흑천검문에 빚이 있는 것은 본녀뿐만이 아니라고 했던가."
서문화린은 천휘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은근슬쩍 캐물어도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노골적으로 주제를 틀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조금씩 내비치는 이야기. 그리고 은연중에 보여 주는 태도로 몇 가지 추측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
천휘에게 흑천검문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리라.
어쩌면 저러한 심상을 품게 된 원인일지도 모르고.
"큿."
이를 악물고 작은 이마를 찡그리는 서문화린. 머리로는 알고 있다. 주화입마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천휘는 상당히 무리하고 있음을.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무리한 내공 운용과, 경지에 맞지 않는 의념의 활용으로 혈도는 엉망이 되고 상단전 또한 바짝 말라붙어 가는 중이겠지.
사흑련주의 방해가 없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말려야 한다.
"허나...."
만약 천휘에게 지금이 그의 심상을, 가장 깊은 곳에서 곪아 터진 흉터를 마주하는 순간이라면.
그렇다면 방해해서는 안 된다.
무인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넘어서야만 성장하는 종자들이니까.
천휘가 진정으로 자신의 지옥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한차례 스스로의 지옥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넘어서야만 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천휘는 서문화린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건만, 정작 서문화린은 천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멀리서 지켜보며 정말 위험한 순간에 달려가는 것뿐.
결국 천휘의 문제는 천휘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사실이 너무나 분하여 서문화린은 자신의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다만, 주저앉아 구경하려는 사흑련주와는 달리 언제든 달려들 수 있도록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서문화린이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녀가 지켜보겠느니라."
***
시야는 한없이 붉어, 이것이 화마인지 핏물인지 혹은 검기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니.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나와 검밖에 없다.
나와 검밖에 남지 않았다.
[8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9] 89화. 검귀(劍鬼) (2)
감각이 모호하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몽롱한 머릿속. 귓가는 내 심장 소리로 가득 찼고, 시야에 비치는 것은 베어야 할 것과 이미 베어 낸 것들뿐.
"후우...."
깊게 내쉬는 숨결. 하지만 뒤이어 들이마신 공기에서는 탄내와 피비린내만이 진동했으니.
나는 그저 과거의 희미한 잔향을, 가장 아름답던 순간의 궤적을 쫓아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서걱.
심상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반쯤 쓸모없어진 오감 대신 기감에 의존해 몸을 움직인다.
내공에 녹아 있는 살기와, 살기를 깃들인 내공은 무엇이 다른가.
결국 다르지 않음이라.
내 살기에 몸을 떠는 이는 내 기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흑천검문의 누구 하나 내 인지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몸을 떨며 주저앉는 이도, 이를 악물고 검을 겨누는 이도, 자신의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요란스레 괴성을 내지르는 이도.
그저 느껴진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노리는지.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도 알 수 있다. 알게 되는 것이다.
내게 살의를 품은 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남은 일은 진작에 파훼가 끝난 흑천검문의 검로를 향해 내 검을 끼워 넣는 것뿐.
검술의 흐름을 베어 낸 끝에 사람을 베어 낸다.
서걱.
"어찌...!"
장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기껏해야 절정 수준인지 늙은이가 붉게 물든 복부를 감싸며 경악한다.
"너! 원수의 자식아. 대체 흑천검문의 검공은 또 어디서 훔쳐 배운 것이더냐!"
"자식?"
우리가 숨어 다니던 모습을 보았다고 했던가. 서문화린의 노력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놈들의 눈에 그리 비쳤다니.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런가. 너희에게는 내가 원수의 자식으로 보이는 건가. ...내게 흑천검문은 원수 그 자체이거늘."
무언가를 입에 담는 행위는 그 자체로 힘이 있다. 흑천검문, 원수. 그 둘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시야는 심상의 어느 한 풍경을 비추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는 어느새 무너져 가는 철혈당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서문화린은 잊으라 했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주화입마라는 것은 안다. 이미 지나간 심마를 구태여 붙잡아 되삼킨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내 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에 멈춰 있었다.
당소월은 그런 내 등을 떠밀어 주었으나, 그녀 또한 눈앞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 왔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서도 잃었다.
낳아 주신 부모를, 새로이 만든 가족을, 연인을, 미래를. 심지어는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바랐던 내 목숨마저.
무엇하나 남은 것이 없다. 전부 모래처럼 이 손을 빠져나갈 뿐.
그렇게 흘러내린 것들은 차곡차곡 심장의 밑바닥에 쌓여 갔다. 갈 곳을 모르는 울분이. 후회가. 통곡이. 살의가.
이런 내가 어떻게 마교도를 부정하겠는가. 미련하다 욕하고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빈정댈 수는 있으나 차마 복수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 안에 이렇게나 높이 쌓아 올린 마(魔)가 있거늘.
그리고 지금. 힘들게 틀어막던 둑이 무너진다. 한번 뚫린 둑은 그 내용물을 전부 쏟아내고 바닥을 드러내기 전까지 멈추는 법이 없으리라.
나도 모르게 목구멍을 긁어대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너희는 죽는다."
주변을 잠식한 살기에 짓눌려 있던 흑천검문의 무인들이 잘게 몸을 떨었다.
"발버둥 쳐도 죽는다. 목숨을 구걸해도 죽는다. 도망쳐도 죽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죽는다."
이미 대동한 일류 무인은 대부분은 숨이 끊어졌다. 나름 저항하던 절정 무인 또한 어느새 남은 것은 둘뿐.
어찌 해보기도 전에 대부분의 수하를 잃고 이를 가는 흑천검문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흑천검문은. 오늘 다시 한번 멸문한다."
"노옴...!"
분노한 문주가 흑색 검기를 줄기줄기 흘리며 달려들었다.
초절정이라는 경지에 걸맞는 위협적인 기세. 내 살기에 약간 몸이 둔해지긴 했으나, 그뿐이다.
여전히 그는 지금의 나보다 윗줄의 고수고, 언젠가는 화경에 오를 재능과 독기를 품고 있겠지.
허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대가 설리향을 베고, 서문화린의 심장을 꿰뚫었다는 것.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지만, 그 맹목적인 복수심은 언제고 서문화린에게 닿을 터였다.
돌고 도는 원한의 굴레. 또다시 잃지 않으려면 이 자리에서 끊어 낼 수밖에 없다.
화근을 남겨두지 않는 방식으로.
으득.
이를 악물고 광랑탈명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검신 위를 뒤덮는 검붉은 검기.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검기는 살기를 진득이 머금어 여타 검기와의 비교를 불허하는 위력을 머금었지만... 부족하다.
단전을 쥐어짠다. 심상을 끄집어내는 것을 넘어 나 자신에게 덧씌운다. 떠올려라. 수없이 많은 피를 삼키며 무엇을 생각했는가.
배가 고파서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으로도 닿지 않는다.
그저 벤다.
베어야 하는 것이기에 베고, 베고 싶은 것이기에 베며, 벨 수 없는 것이라도 벤다.
단전이 일그러지고 기혈이 뒤틀린다. 대신 그만큼 거세게 폭주하는 내공.
아릿한 통증과 함께 좁아지는 시야는 붉었다. 한없이 붉어 이것이 화마인지, 핏물인지, 혹은 검기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으나...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나와 검밖에 없다.
나와 검밖에 남지 않았다.
"아."
검 자루를 쥐고 손바닥에서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기묘한 감각이 전해진다.
마치 내 팔이 길어져 그대로 검이 된 것만 같은, 혹은 검이 내 팔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기이한 감각.
검수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한 자루 검을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이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회귀 전. 사흑련주는 그런 이를 검귀(劍鬼)라 불렀다.
비록 과정이 삐뚤어졌을지라도 이는 내가 평생을 바쳐 거머쥔 가장 높은 깨달음.
손에 쥔 검 한 자루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나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경지.
신검합일(身劍合一).
"아아아아아아!!!"
기합을 내지르며 흑천검문주를 향해 마주 검을 휘둘렀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핏빛 검기는 뭉치고 뭉친 끝에 전혀 다른 형상을 취하게 되었다.
검염(劍炎).
의념으로 정련하지 않은, 순수한 기예로 엮어 낼 수 있는 가장 짙은 농도의 검기.
초절정에 올라야 간신히 피워올릴 수 있다는 내공의 불꽃이 내 손에서 휘둘러졌다. 그리고.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믿기 힘든 굉음. 첫 합에서 물러난 것은 흑천검문주였다.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함인지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검염이 아니라 강렬할 뿐인 검기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
"초절정?! 대체 어떻게...."
황망한 표정의 문주가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되물었으나, 지금은 그런 시답잖은 질문에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아직 이 몸뚱이는 초절정의 벽을 깨지 못했다. 반쯤 뚫긴 했으나, 아직은 아니란 말이다.
헌데 억지로 회귀 전의 깨달음을 휘두르게 하였으니 몸이 버티는 게 용하지.
심지어 조금 전에는 정면에서 검을 맞대기까지 했잖은가.
외공 수련에는 지름길이 없는 법.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덜 여문 몸뚱이는 충돌의 반탄력을 버텨 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쿨럭!"
참는다고 참았으나, 결국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흐르는 피.
무리한 내공 운용 탓인지, 조금 전의 합에서 입은 것인지 모를 내상의 흔적.
한줄기 핏자국을 본 흑천검문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 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지! 겨우 후기지수 따위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퉷! 말이 많다."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고는 재차 검을 겨누었다.
내공 소모가 극심해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검을 부딪칠 때마다 반탄력으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며, 주화입마의 영향으로 감각이 오락가락하는 중이지만....
검염을 두른 동안이라면 초절정의 무인을 상대로도 검을 맞댈 수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검을 맞댈 수 있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래. 누구에게도.
검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리는, 검만큼은 절대 이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너무 막대하여 그저 풀어놓는 게 전부였던 살기를 최대한 거둬들인다. 속을 시꺼멓게 불태우는 천불은 여전하나, 이는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태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마교의 방식이지 내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터.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내가 베어야 할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뿐이다.
주워 삼킨 심마의 탓인지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던 시야가 되돌아온다.
코끝을 스치던 탄 내와 혈향이 가라앉는다. 내게 검을 겨눈 것은 흑천검제가 아닌 흑천검문주였으니.
"조금 전에 말했듯, 너는 오늘 죽는다."
주변 일대를 완전히 뒤덮고, 일류 무인조차 숨을 헐떡이게 만들던 살기가. 그날 이후로 쌓이기만 하던 나의 지옥이 단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아무리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라도 이만한 살기를 홀로 받아 내는 건 쉽지 않은지 순간 헛숨을 삼키는 흑천검문주.
녀석을 향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말을 끝마치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퍼엉!
용천혈에서 터져 나온 내공이 몸뚱이를 밀어낸다. 천둥소리를 닮은 굉음과 함께 미끄러지듯 뻗어나가는 신형.
처음 본 이라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인 뇌명보지만, 한때 서문세가를 멸문시키고 그 무공을 취했던 이들에겐 통하지 않는 걸까.
눈에서 이채를 번뜩인 녀석이 차분히 검을 휘두른다. 검기가 아닌 이글거리는 검염을 두르고서.
흑색으로 타오르는 기염(氣炎)은 위협적이었으나, 이에 위축되는 일은 없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같은 흑색의 기운이라도 훨씬 압도적인 것을 알고 있기에.
회귀 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천마신공의 강기를 기억한다. 세상을 뒤덮은 칠흑에 비하면 고작 검 위를 덮은 기염은 무척이나 초라한 것이었으니.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흑천검문주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상체를 뒤튼다.
서걱.
옷자락과 함께 상체의 일부가 베여 나간다. 이글거리는 검염 때문인지 뱀이 기어간 듯한 거친 상처.
다만 그것이 피륙을 베어 냈을지언정 뼈와 근육에 이르지는 못했다.
한치에 이르지 못하는 상처로는 나를 막을 수 없음이라.
"하아아압!"
상체를 뒤틀던 관성을 살려 아예 몸을 회전시킨다. 흑천검문주의 허리를 동강 내기 위한 횡 베기.
설마 검을 쳐내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냥 맞아주며 들어올 줄은 몰랐던 걸까. 기겁한 흑천검문주가 황급히 몸을 뒤로 뺀다.
기껏 내지른 검격이 무의미하게 허공을 갈랐지만 괜찮다. 어차피 일검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기에.
거리를 벌린 문주를 향해 다시금 땅을 박찬다. 더욱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
뇌명보로 다시금 거리를 좁히자, 조금 전처럼 적절한 시기에 검을 휘둘러 오지만....
너무 일렀다. 귀영보의 묘리가 섞인 두 번째 걸음에 거리감을, 속도를 기만당한 흑천검문주의 검이 붕 뜬다.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는 상대의 검을 그대로 후려친다.
카앙!
검염과 검염이 부딪히며 터져 나오는 기파. 전신이 삐걱거리고 내장이 진탕되는 것이 느껴졌으나, 덕분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순수한 검염의 위력만은 내가 앞서는 상황에서 검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하는 순간에 부딪힌 것이다.
순간 자세가 무너지고 몸이 움츠러드는 흑천검문주. 그리 대단한 틈은 아니다. 잠깐의 흐트러짐은 잠깐 신경 쓰는 것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터.
그러니 그 잠깐 사이에 검을 비집어 넣고 뒤튼다.
"이...! 나를 얕보는 것이냐!"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저돌적인 검격에 인상을 와락 찌푸린 흑천검문주가 노호성과 함께 흑천검문의 초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급소를 연속으로 노려오는 까다로운 찌르기. 와류를 휘감고 전방을 휩쓰는 횡 베기. 그저 우직하고 묵직한 올려 베기 등등.
한때 강서성의 패자를 자칭했던 만큼 제대로 된 자세가 아님에도 하나하나가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진작 파훼가 끝난 초식이기도 하고.
챙! 채앵! 카드득!
급소를 노리던 찌르기는 순서대로 몸을 비틀어 전부 피했고, 작은 와류에서 시작되어 면을 점하는 검풍은 그 중심을 꿰뚫려 힘을 잃었으며, 단순하기에 막아내기 힘든 올려 베기는 시작되기 전에 내리찍어 휘둘러지는 일조차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자세가 무너졌지만 상관없다.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다음 검을 이어 나갔기에.
천근추로 휘어잡은 무게중심에 정신을 집중하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내 팔이 어디로 꺾여있고, 발끝이 어디를 바라보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직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검격이 중요한 것이지.
종남파의 가르침이 내 손을 통해 펼쳐진다.
그리고 이에 더해지는 신검합일의 감각.
검은 생각대로 휘둘러지고, 몸은 상상하는 대로 움직였다.
분명 나의 시간은 철혈당이 무너지는 날에 멈춰 있었으나, 그간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설리향이 죽고, 서문화린이 쓰러지는 날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검귀라 불리면서도 살아남았고,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천마에게 목숨을 잃은 이후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이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쉴 새 없이 부딪히는 검. 서로를 잡아먹으려 드는 해묵은 원한. 그 끝에 살아남는 것은 결국 나다.
살기로 둔해진 흑천검문주의 검은 어지러이 흔들린 끝에 완전히 무너졌다.
카앙!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멀리 날아간 흑색 일체의 검.
무방비해진 흑천검문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닌 나다."
경악한 흑천검주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염을 회전시켜 만든 소용돌이를 두른 찌르기.
퍼억!
주인을 잃은 몸뚱이가 쓰러진다.
이루지 못한, 이룰 수 없을 것이라 여기던 복수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진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기나긴 애도가 끝났음을.
[8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0] 90화.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