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집안 문제 (2)
계획은 간단하다. 우선 팽우진과 언가혜에게 둘의 관계를 알고 있다며 협박... 아니, 관심을 끌고.
용봉회가 끝난 뒤. 지정된 장소에 모인 둘이 과하게 취해 있는 모습을 확인한 나와 당소월이 바로 앞의 객잔으로 데려간다.
"마지막으로 술에서 깬 둘에게 솔직한 사정을 듣는다. 정말 완벽한 계획 아닌가."
"완벽하긴 뭐가 완벽해요! 방금 협박이라고 하셨지요?!"
"잘못 들은 거다."
"애초에 두 분 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취해 있을 리 없잖습니까!"
"몸을 가누지 못하면 전부 취한 것 아니겠나. ...그래. 마혈을 짚이거나, 마비 독에 당해도 아무튼 취한 거다."
"독?! 저까지 끌어들일 생각이신가요?!"
기겁하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얼굴. 부드러운 뺨의 감촉에 내심 감탄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나. 우리도 언젠가 부부가 될 사이이니 미리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부부... 일심동체...."
"거기에 우리가 하려는 일은 한차례 우리의 목숨을 노린 마교가 무슨 속셈인지 자세히 알기 위함이기도 하나, 동시에 팽가와 언가 사이의 오해를 풀고 둘의 화해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협행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일이지."
"협, 행...?"
"그래. 협행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협행."
"어... 으, 어?"
당소월의 녹색기 도는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
좋아. 잘 먹히고 있네. 이대로만 하면....
나도 모르게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려던 순간.
"핫!"
정신을 차린 당소월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런 비겁한! 그렇게 말하면 제가 천 소협의 말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는지요?"
"아니었나?"
"당연히 아니랍니다!"
"허면 내 손은 왜 가만히 붙잡고 있는 거냐."
"읏!"
자신의 볼을 감싼 내 손을 떼어놓으려는 듯, 그 위에 손을 얹었으나 그냥 얹어 놓은 채로 가만히 있는 당소월.
이쪽을 향해 한차례 입술을 삐죽이더니, 이내 아쉽다는 듯 미련 가득한 움직임으로 내 손에서 벗어난다.
"하아... 천 소협. 정말로 이게 맞는 일인가요?"
"솔직히 방금 건 나도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리 쉽게 넘어갈 줄이야."
"이잇! 그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팽가와 언가의 후계자를 납치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요!"
"납치가 아니라 임시 보호일 뿐이라니까 그러네. ...뭐어. 옳은 일이 되도록 만들 생각이다. 이번 일이 그리 단순할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야."
"가만 보면 천 소협은 참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체 뭐가 그리 불안하신지요? 솔직히 제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답니다.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한, 한 세대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성취를 이루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기야. 내게는 회귀 전의 무위를 되찾는다는 정도의 감각이라, 지금의 속도도 꽤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회귀를 모르는 당소월의 눈에는 혼자 무공을 익혀 몇 년 만에 절정에 도달하더니, 겨우 삼 년 만에 초절정에 한발을 들여놓은 것 아닌가.
물론 무림의 역사 속에 비슷한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당파의 창시자라는 장삼봉, 소림사의 달마대사, 그리고 달마대사의 맞수이자 한때 서장 무림을 지배했던 혈불(血佛) 또한 그러했다.
물론, 내가 저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회귀라는 요소를 떼어 놓고 봐도 나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뤘거나.
시간은 오래 걸려도 남들이 보지 못한 경지를 뚫어 내는 데 성공한 이들이니까.
그렇기에 나를 보고 놀라워할지언정 의심스러워하지는 않는 거겠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 소협.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팽가와 언가의 사이가 험악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이권 다툼에 말싸움. 심해 봐야 살벌한 대련 정도랍니다. 누구 하나 죽을 정도로 싸우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물론, 팽 소협과 언 소저의 관계는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잠깐. 방금 '지금은'이라 하셨는지요?"
지금이라도 나를 말리기 위해 설득을 이어 나가려던 당소월이 흠칫하며 되물었다.
"맞다. 지금은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 심해질 거라 본다. 아마도 그게 마교의 속셈일 테고."
"마교의 목적이나, 은근슬쩍 중원의 불화를 조장하는 최근 행보를 생각하면 이치에는 맞습니다만... 이미 무림맹에서도 인지하고 두 가문에 경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회귀 전에는 주도면밀하게 중원을 침공하는 순간까지 잘 숨겨 왔던 것 같으나,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내가 마교의 계략을 몇 개 밝혀내긴 했지.
물론, 지금까지의 선입견이 있어 진지한 위협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으나.
무림맹에서도 경계 정도는 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북성에서 마교의 영약이 나돌 때 금방 알아차린 거겠지.
분명 지금쯤 마교 입장에서는 계획이 자꾸 어그러져 답답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가 그런다고 포기할 놈들 같나?"
"으음. 한 번뿐이지만, 직접 상대해 본 입장에서는 그럴 것 같지 않긴 하지요."
마교도는 기본적으로 미친놈들뿐이다. 그리고 미친놈들에게 이성적 판단을 바라서는 안 된다.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래서 실패할 것 같다?
이전 생에서 마교 상대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았던 나다. 그 뒤에 이어질 양상은 안 봐도 뻔하지.
조용히 물러나는 게 아니다. 더 큰 강수를 두어,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려 들겠지. 그나마도 여의찮으면 최대한 깽판이나 치고 갈 테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포기를 모르는 그 저돌성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 있었다.
천마를 제외한 마교의 전력은 기껏해야 명문세가 하나 정도임에도 쉬이 격퇴하지 못했던 이유가 그래서 아닌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리고 서둘러서 나쁠 것도 없겠지. 하북성에 마교의 영약이 나돈 지 제법 오래됐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납치라는 거군요."
"...다른 이유도 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나는 내가 다른 사람과 빠르게 친해지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되더군."
"남궁 소협이랑은 금방 친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냥 남궁 형이 이상한 거다. 살짝 기세를 내비치고, 우승 축하도 좀 해 주고, 어쩌다 보니 체면을 살려주긴 했다만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지. 칭찬에 굶주렸다는 팽우진의 말대로 인정욕이 강한 사람이라 가능했던 거다."
"그 정도 해주면 누구나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아, 인정욕이라면 조금 그런 면이 보이긴 했지요. 그래도 잘 보면 아무리 자기를 띄워 준다 해도 아무나 곁에 두는 건 아니랍니다. 황보 소협을 바라볼 때의 시선을 기억하시는지요?"
"상당히 차갑더군. 조금 거칠게 말해 쓰레기를 보는 시선이었다. 실제로 비슷하기도 하고."
지금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회귀 전에는 아귀부에 의해 황보광의 행적이 널리 알려졌었다.
양민이나 힘없는 무인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부린다는 정도는 어느 정도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드러난 건 그보다 더 심했었지.
"뭐, 아부에 약하긴 해도 사리 분별은 확실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슬슬 약속 장소에 도착해 가니, 어떻게 팽우진과 언가혜를 제압할지가 중요한 거지."
"...정말 하실 생각이시군요."
"처음 전음을 보낼 때부터 시작했었다."
"일단 납치... 아니, 보호한 뒤에는 생각하신 게 있으신지요?"
"우선은 사정을 듣고, 정보를 공유해야지. 가능하면 이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좀 설명하고. ...납득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허면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실패하면 더 큰 일이 될 테니 말이지요."
"실패할 것 같지는 않다만, 그 말은 당소월 너도 공범이 되어 주겠다는 소리인가?"
"어차피 이미 저와 천 소협은 하나로 묶인 상태라 혼자 빠져나갈 방법도 없답니다. 무엇보다 완전한 기습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둘 모두 경계하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혹시 모르니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만나는 순간 강력한 마비를 일으키는 독이 있는데...."
조심스런 어조로 내게 속삭이는 당소월. 그 내용은 꽤나 그럴싸했다.
***
구름이 달을 가리며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팽우진과 언가혜. 둘 앞에 나서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군. 조금 늦었다."
"네놈.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소리를 한 거냐. 당가의 데릴사위가 우리를 협박해서 뭘 얻으려는 거지?"
"대답에 따라서는 저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인사를 건넸건만, 돌아오는 것은 자기가 진짜 호랑이라도 된 것마냥 으르렁대는 팽우진과 싸늘한 어조로 내공을 끌어 올리는 언가혜.
"협박이라니. 말이 심하지 않나. 그저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을 뿐이거늘."
"하! 우연이군. 이쪽에서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코웃음치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팽우진. 큰 덩치와 가감 없이 드러내는 기세가 한 마리 맹수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당당히 걸어오던 팽우진의 표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이게 무슨 냄새... 커헉!"
순식간에 와락 찌푸려지는 얼굴. 숨을 쉬기 힘들다는 듯, 한 손으로 목을 틀어막은 팽우진이 내공을 억지로 끌어 올리며 등에 멘 대도를 뽑았다.
"독...! 이게 당가의 뜻이라 말이냐!"
"그럴 리가 있나. 그냥 독단이다."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그대로 검을 뽑아 도를 향해 휘둘렀다.
채앵!
독을 몰아내느라, 그리고 급하게 겨누느라 대도에 실린 내공은 미약하다. 대신 워낙 힘이 좋아서일까. 손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상당하다.
물론, 외공만으로 내공을 압도할 수 있다면 심법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겠지.
팽우진의 힘을 가늠했으니, 두 번째로 휘두르는 검은 그에 맞춰 내공을 한층 끌어 올렸다.
서걱.
맹렬하게 타오르는 검기가 그대로 대도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무슨?!"
검이 튕겨 나가거나, 힘겨루기 같은 양상이 될 줄 알았던 팽우진이 당황한 사이. 귀영보의 묘리를 이용해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까지와 비슷한 움직임. 하지만 실제로는 미묘하게 다른 간극에 그대로 속아 넘어간 팽우진의 대처가 반 박자 늦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점혈.
퍼억!
워낙 근육이 두꺼워 힘을 좀 세게 준 탓일까. 주먹으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마혈을 제압당한 팽우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깟 점혈...!
무식하게 힘으로 점혈을 풀려는 팽우진. 놀랍게도 팽가의 뛰어난 근골은 이를 가능케 했으나.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안심해라."
내가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리 없잖은가.
순간 멈칫한 팽우진을 향해 다시 한번 마혈을 찌르고, 이어 아혈까지 짚어 말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연신 사과하며 쓰러진 언가혜를 안아 드는 당소월이 있었다.
처음에는, 짙은 갈색을 띠지만 무미 무취한 독을 어둠을 틈타 하독하고, 그렇게 일차적으로 중독된 이들을 향해 대놓고 신 향기가 나는 독을 뿌림으로써 몸을 마비시킨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둘을 제압할 수 없다. 너무 위험한 독은 쓸 수 없는 데다가, 은밀함을 신경 쓰면 사용할 수 있는 독은 더더욱 제한 되니까.
거기에 팽가와 언가 모두 뛰어나 외공 덕에 신체 자체가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다는 이유도 있고.
하여 몸이 둔해진 팽우진은 내가 나서 점혈한 뒤. 언가혜가 그를 도우려는 순간을 틈타 당소월이 재차 강한 독을 뿌리며 동시에 무력화시킨다.
즉흥적인 계획이었지만 어떻게든 됐네.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노려보는 팽우진.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쩍 감겨주고는 그대로 둘러메며 말했다.
"인정하마. 당소월 넌 납치에 소질이 있군."
"...제발 그 입을 다물어 주시지요, 천 소협."
언가혜를 업은 당소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남은 건 둘을 데리고 객잔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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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혈을 풀어 주자, 팽우진이 비장한 태도로 외쳤다.
"큭! 죽여라!"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어쩐지 조금 소름이 돋는 첫마디였다.
111화. 집안 문제 (3)
당소월의 독과 내 점혈에 제압당한 팽우진과 언가혜.
둘을 업고 바로 앞의 객잔에 들어갔다. 적당히 허름하지만 방 자체는 그리 좁지 않은 곳.
적어도 네 명이 들어가기엔 충분하리라 생각했으나.
"거의 다른 사람의 배는 되는 것 같군...."
"팽가의 사람은 다들 이 정도는 된답니다. 경지가 높아지면 더 커지기도 하지요."
"허어. 여기서 더?"
그냥 바닥에 눕혀 두었을 뿐인데 방이 꽉 차 보이는 덩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소월은 팽우진과는 반대로 아담한 언가혜를 침상에 눕혀 두고는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바닥과 침상에 누워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의식은 멀쩡할 테니 가만히 들어라.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당소월도 너희를 해할 생각은 없다. 이를 빌미로 무언가 얻어낼 생각도 없고."
"천 소협. 천 소협. 그렇게 말해도 전혀 안 믿을 것 같습니다만. 이미 독에 중독시키고 힘까지 써서 데려온 것 아닙니까."
"...나도 알고 있지만, 일단 말은 해야 할 것 아니냐."
납치는 처음인지 안절부절못하는 당소월. 그런 그녀를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생길지 얼마나 불안하겠나. 내심 가장 듣고 싶은 주제가 나오면 경청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다. 거기에 지금은 몸을 움직이지도, 반박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듣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니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거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왜 이리 자랑스러운 얼굴로 설명하시는 건가요, 천 소협?"
"...자, 일단 전제는 바로 잡은 것 같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
"천 소협? 저기요?"
어이없어하며 나를 부르는 당소월의 목소리를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 너희 둘을 해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목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납치... 아니, 보호하지도 않았겠지."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 하여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무시당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입술을 삐죽이는 당소월.
마음 같아서는 저 입술을 그대로 잡아당기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기껏 잡은 분위기가 엉망이 될 것 같아 참았다.
절대 당소월이 가만히 당해 주지 않고 뭔가 돌려줄까 두려워 그런 건 아니다.
"자잘한 이유는 여럿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귀찮게 무언가 숨기는 것 없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다. 내가 평범하게 다가가 평범하게 친해져서 평범하게 말을 꺼냈다면 오늘처럼 둘 사이가 험악한 척 연기했을 것 아니냐."
오랜 친구라던 남궁종조차 팽우진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얼마나 친해지건 제 입으로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허면 왜 숨김없는 대화가 필요하느냐.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지.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하북성에 나도는 수상한 영약이 마교의 것임을. ...나는 이게 제법 위험한 전조라고 생각한다."
그리 말하고는 팽우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와 내 정혼자 또한 한차례 마교에게 노려진 적이 있지. 실제로 싸워 보기도 했고. 놈들이 지금껏 중원 무림에 대단한 풍파를 일으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팽우진의 아혈 위에 손가락은 얹자, 당소월도 기다렸다는 듯이 언가혜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댄다.
"자. 이제 이야기할 것은 다 했으니 점혈을 풀겠다."
짧은 눈짓을 보내자 찰떡같이 알아듣고, 언가혜의 몸에서 독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하는 당소월.
나 또한 팽우진의 아혈을 점하고 있던 내기를 뽑아내 풀어주었다. 그리고.
"큭! 죽여라!"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아혈만 풀어 주었건만, 입이 풀리자마자 한다는 말이 이거라니.
어쩐지 조금 소름이 돋는 첫마디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마혈까지 풀어 주면 다시 싸움 나는 거 아닌가.
그런 이유로 마혈에 손가락만 올린 채, 짐승마냥 으르렁대는 팽우진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도중.
뒤에서 다소 무기질적인. 하지만 신기하게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만큼은 선명히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 가가. 그만 하세요. 저도 가가도 다친 곳은 없고, 혈화검귀의 말대로 멀쩡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냈으면 끝까지 모른 척했겠죠. 시작이 무례하긴 했으나,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죠. ...그리고 저희가 생각한 사람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요."
"...가혜 네가 그렇다면야. 알겠다."
"이게 뭔."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들을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팽우진이 바로 목청과 함께 그 기세를 줄였다.
분명 아까까지 큿! 죽여라! 같은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며 최후를 각오했던 녀석이 연인의 한마디로 바로 그 각오를 꺾어 버리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지만, 동시에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반대되는 경우지만, 나 또한 당소월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방향성은 반대지만 얼추 비슷한 거겠지.
언가혜가 아직 독기가 안전히 가시지 않아 평소보다 더 뻣뻣해 보이는 손목을 풀어 주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팽우진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그렇게 몸의 자유를 되찾자마자 바로 옆자리의 언가혜에게로 향하는 팽우진.
"괜찮나? 나야 점혈에 무기가 부러졌을 뿐, 상처 하나 없이 점혈당했다지만 너는 중독당하지 않았나."
"당 소저가 깔끔하게 독기를 빼내 주셔서 멀쩡합니다. 그나저나 중독은 팽 가가도 당했던 것인데 이렇게 막 움직여도 괜찮은가요?"
"치명적인 독기도 아니잖나. 조금 저리긴 한데 움직일 만하다."
"보통 그런 걸 괜찮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여전히 무표정한 채,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내는 언가혜. 그녀가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이를 알아챈 당소월이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팽우진의 몸에서 뽑혀 나가는 짙은 갈색의 독기. 신 냄새를 풍기는 독이 순식간에 당소월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를 바라보던 언가혜의 눈이 살짝 움찔거렸다.
"...처음 볼 때도 신기했는데 해독제를 먹이는 게 아니라 직접 독기를 빼내시는군요."
"독공은 제 특기인 터라."
여유롭게 눈웃음을 짓는 당소월이었으나... 나는 안다. 저거 지금 좀 당황하고 있다는걸.
언가혜처럼 한 차례 더 중독시킨 것은 아니라고 하나, 팽우진이 두 독을 조합해야 효과가 나오는 강력한 마비 독에 당했는데도 너무 멀쩡하니 당황한 거겠지.
다만, 이는 당소월의 독이 약한 것은 아니다. 그냥 팽우진의 육체가 무식하게 강한 것이지.
언가의 육체도 강인하나, 이는 강시 제조법에서 유래된 온갖 약물을 이용한 외공 수련의 결과다.
제대로 익히면 검기는 너끈히 막아내는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되나... 어디까지나 피부와 뼈가 단단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움직임에 묘한 뻣뻣함이 묻어나오는 것이고.
반면 팽가는 그냥 전체적으로 뛰어난 근골을 타고났고, 그에 걸맞은 외공으로 이를 한층 더 갈고 닦은 육신을 지니는 것이니.
피부가 질기고 뼈가 단단한 것은 기본이고, 근육이 크게 발달하여 힘도 강해지고, 안쪽까지 튼튼해져 내상도 잘 안 입는 데다가 어지간한 독은 그냥 몸으로 버틸 수 있게 된다.
회귀 전. 살아남은 팽가의 방계와 함께 싸워 본 적이 있어 잘 안다. 아니, 방계가 그 정도였으니 직계인 팽우진은 더 대단해지겠지.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내심 시무룩해하는 당소월의 허리를 뒤에서 톡톡 두드려 주며 위로해 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안부는 충분히 나눴을 테니, 이제 나랑도 이야기하지. 팽가와 언가 사이의 분쟁이 평소보다 격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교겠지. 이전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도, 가혜도, 양 가문의 어른들도 다들 말이다."
"으음?"
진정한 팽우진이 생각보다 멀쩡하고 차분한 사람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니, 알면서 대체 왜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거지?"
그 말에 답한 것은 팽우진이 아닌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댄 언가혜였다.
"간단합니다. 생각보다 영약의 효과가 좋아서 그렇죠. 서로를 비난하는 척, 시중에 떠도는 영약을 독차지하려는 겁니다. 물론, 신강과 하북 사이의 거리. 그리고 마교의 전력을 얕잡아본 것도 있지만요."
"...그 영약의 재료가 무엇인지는 아나?"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적어도 무림맹이 입수한 것은 말입니다."
귀영신투의 정체는 숨기고 그냥 무림맹의 정보원이라 알린 건가. 하긴, 진작에 은퇴한 사람이긴 하지.
거기에 귀영신투가 계획 중이라던 화려한 장례식을 생각하면 이름이 알려지는 게 더 곤란할 것이다.
다만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마치 하북성의 것은 다르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열화판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팽우진이 답을 이어갔다.
"실제로 다르다. 일단 팽가의 의약당에서 조사한 바로는 사람이 아닌 동물로 만든 것이라 하더군. 물론 이 또한 산채로 단약으로 만들었다니, 꽤나 잔인한 과정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니 크게 비난받을 일은 없겠지."
"언가의 의약당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서로 마교와 손을 잡았다며 비난해 대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누가 이 영약들을 차지하느냐를 두고 겨루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욱 거칠게 나가는 것도 있겠지만요."
"...."
마교의 영약임을 밝혔음에도 결국 회귀 전과 달라질 게 없는 건가.
아니,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오히려 더 안 좋다고 볼 수 있으리라.
마교는 한층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여차하면 판을 뒤엎을 준비라도 하고 있겠지만, 반대로 팽가와 언가는 과정이 조금 달라졌을 뿐 알고서도 마교의 계략에 놀아나는 중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
"나였으면 찝찝해서라도 취하려 들지 않았을 것을."
"개인이라면 천 소협처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거대한 가문을 이끄는 입장이라면 조금 달라진답니다."
내 말에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당소월. 왜냐는 의미를 담아 지그시 눈을 바라보자 헤실거리며 말을 잇는다.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영약에는 한계가 있지요. 같은 영약은 두 번 먹으면 그 효과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기도 하고, 이미 많은 내공을 쌓았다면 자잘한 영약은 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 그러니 위험하다 싶으면 영약 한둘은 포기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훨씬 이득이랍니다."
"그렇지. 무엇보다 부족한 내공은 깨달음으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내공이 부족하면 깨달음을 얻어 단전을 키우라는 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아."
어이없어하다 말고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천 소협이라면 가능한 일이긴 하네요. 하지만 천 소협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주시지요."
"그런가? 내공이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거지 양은 너무 부족하지만 않으면 괜찮다만."
회귀 전에 항상 내공 부족에 시달리던 나였으나, 답답함은 느꼈을지언정 내공이 부족해 이길 싸움에 지거나 그러진 않았다.
뭐어. 당소월 말처럼 정말 내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 팽우진과 언가혜마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고 있었지만.
"...아무튼 내 이야기는 넘어가고. 가문이 되면 달라진다는 건 무슨 소리냐."
"큰 집단의 힘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면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강해질 필요가 있답니다. 가전무공이라도 가문이 커지면 다소 수준 낮은 무공은 공개하는 것이 그래서지요. 같은 이유로 영약은... 특히 중하급 영약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가문의 실속을 담당하는 허리층이 두꺼워지지 않습니까."
"이해했다."
당가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이러한 시야는 잘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하나 배웠으니 괜찮겠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팽우진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영약을 탐내는 이유는 알겠다. 헌데 이는 어디까지나 가문의 생각이고 너희는 다르다는 듯이 말한다만... 왜 그런지 물어도 되겠나?"
"별거 아니다. 가문의 어른들은 과거에 마교도가 일으킨 문제를 몇번 해결한 적이 있으시다더군. 다만 독하긴 하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가벼이 보시지 뭔가. 반대로 우리는 아직 마교도를 상대해 본 적이 없으니 대충 넘기기가 불안했던 거고."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저희가 마교를 경계하며 가문에는 비밀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독자적으로 조사를 이어 나가던 어느 날."
거기까지 말한 언가혜가 한차례 운을 띄우고는 무표정했던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노기를 표했다.
"저와 팽 가가의 사이를 알고 있다며 협박해 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가문에 알려지고 싶지 않으면 쓸데없는 조사는 그만두라더군요. ...아마 마교도가 보낸 것이겠죠."
"아."
회귀 전의 둘이 왜 죽었는지 알것 같았다.
112화. 집안 문제 (4)
내가 팽우진과 언가혜에게 접촉하기 전. 미심쩍음에 독자적으로 마교를 조사하던 둘에게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고 한다.
둘의 사이를 알고 있다며, 이를 까발려지고 싶지 않다면 마교에 대한 조사를 멈추라는 협박이 담긴 서신.
"아."
그제야 회귀 전의 둘이 왜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 확신을 얻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만, 가문에 둘의 사이가 들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우선은 아버지를 설득해 봐야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히고 근신 당할 것 같긴 합니다만."
살짝 안색이 어두워지는 언가혜. 그녀의 표정을 본 팽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였다.
"괜찮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데리러 갈 테니."
"네?"
"아버지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다행히 내게는 뛰어난 동생이 있다. 무공은 나보다 조금 떨어질지 모르나, 가주로서의 재목은 몇 단계는 더 위에 있는 자랑스러운 녀석이지."
"자, 잠시만요 팽 가가. 설마...?"
"그래. 아버님이나 다른 어르신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여차하면 팽가의 이름을 버리고 출가할 생각도 있다. ...물론, 가혜 네가 그런 나라도 괜찮다면의 이야기지만."
"저야 당연히 괜찮죠! 제가 팽 가가가 명문가의 자제라는 이유로 좋아하는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 없잖습니까. 설령 팽 가가께서 일개 낭인이 되더라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때는 저도 같이 출가하겠습니다."
"가혜...!"
"팽 가가...!"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둘.
갑작스런 애정행각에 순간 흠칫하긴 했으나, 동시에 원하던 확신을 얻긴 했다.
가문의 험악한 관계에서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 둘의 사정은 분명 가슴 아픈 일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함께 자진할 이유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내가 본 팽우진과 언가혜는 제법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조금 전의 대답 또한 출가하면 출가했지 쉬이 현실에 절망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회귀 전의 둘이 비극의 주인공처럼 함께 목숨을 끊은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거나, 마교의 손에 살해당한 뒤에 자진한 것처럼 꾸며졌거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가능성을 더 높게 생각하고 있다.
언가혜는 그렇다 쳐도, 팽우진의 성정이라면 여차하면 정면 돌파를 선택할 테니까.
"생각보다 위험할지 모르겠군."
"역시 천 소협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두 분의 진심은 알겠습니다만, 그 뒤의 일을 생각하면 보통 힘든 게 아니겠지요."
"으음?"
"특히 진주언가는 하북팽가와 달리 언 소저 이외에 후계를 이을 만한 사람이 없거든요. 애초에 여자인 언 소저가 소가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고요."
"내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만."
"여자라도 방계보다 직계의 피를 잇는 게 중요하다 여겨 소가주의 자리에 올린 것인데, 그리 도주해 버리면 아마 새외무림으로 도망쳐도 어떻게든 추적해 오지 않을... 네? 이게 아닌지요?"
진지하게 둘의 미래를 걱정하는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손잡고 도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것 아니냐. 앞으로의 일을 감수하고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거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천 소협도 제가 어느 날 사고 쳐서 당가를 떠나 도망 생활을 하자 해도 받아주겠다는 소리신가요?"
"당연한 말을 하고 있군. 물론, 단둘은 조금 곤란하지만... 필요하다면 얼마든 그럴 수 있지."
"흐응. 헤에. 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소리시군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잖나."
"후후. 농담이랍니다. 하루 종일 침울해진 천 소협을 보고 싶진 않으니, 그럴 때가 되면 꼭 향이와 화린 언니도 꼬셔보도록 하지요."
"...."
순간 떠오르는 용봉지회에서의 속삭임. 내가 설리향과 서문화린에게 미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해 주겠다는 말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내 모습이 자못 우스웠는지 당소월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미셨는지요?"
"아, 도피 이후의 둘이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둘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천 소협? 분명 두 분께 위해는 가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당소월의 말이 들린 걸까. 서로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팽우진과 언가혜가 흠칫하며 이쪽을 노려본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설령 내가 나쁜 마음을 품고 둘을 납치했다 하더라도, 인질은 살아있을 때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을."
"역시 경험자...."
감탄하는 당소월과,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는 팽우진과 언가혜.
내가 너무 몹쓸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내가 위험하다 말한 것은 마교가 둘을 노릴 것 같아 그렇다는 소리다."
"노린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기껏해야 가문에 알려지는 정도겠지. 설마 팽가의 장자인 내 목을 노리겠나."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팽우진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미 당가의 금지옥엽을 죽이려 한 적도 있는데 팽가라 하여 다를 게 있을 것 같나."
"허?"
"아, 설마?"
눈을 크게 뜨고 당소월 쪽을 바라보는 팽우진과 언가혜.
시선을 받은 당소월이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랍니다. 물론, 직접 제 목을 베어내려 나선 것은 아니지요. 당가에 원한이 있는 이들을 모으고 선동하여 제 위치로 보냈을 뿐이니까요."
"마교의 목적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중원 무림의 끝. 모든 무인의 죽음을 바라고 있으니. 다만, 방법이 많이 달라진 것 같더군."
과거의 마교는 악에 받친 복수귀 집단이었다.
팽가의 장로들이 마교를 독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것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지. 실제로 그랬기 때문.
하지만 천마가 마교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저 분에 못 이겨, 어느 정도 성취를 쌓으면 곧장 중원에 달려와 칼부림을 일으키는 대신.
계획적으로 다른 이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중원에서의 분쟁을 유도하는 것이 느껴진다.
회귀 전에는 끝까지 몰랐던 것이나, 이번에는 이런저런 우연이 겹쳐 알게 된 사실.
"마교가 당소월의 죽음을 바란 이유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가장 간단한 이유는 역시 최근에 살곡을 흡수한 마교가 살곡의 원수인 당가에 크게 한방 먹이는 것으로 서로의 결속을 꾀한다는 것이지만...."
"자, 잠깐. 그 살곡이 마교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했나? 단순히 마교의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여기까지는 전해 듣지 못한 건가. 상관없겠지. 어디 가서 말하지는 마라. 이는 마교의 영약을 가져왔다던 그 정보원이 직접 확인하고 살곡에 쫓겨 가며 알아낸 사실이다."
"흉악한 것들끼리 잘도 만났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팽우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조금 전에 말한 당소월 암살 사주는 어디까지나 단순히 생각해 봤을 때의 일. 하지만 그럴 거라면 아예 살곡의 살수를 보내는 게 훨씬 확실하고 좋은 일 아니겠나. 당시의 내 정혼자는 무력적으로 그리 출중하지 못했으니."
"...약관에 완숙한 일류면 제법 대단한 일이랍니다?"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실전의 문제다. 아직 이류던 나한테도 지지 않았나."
"그건 예외지요!"
자존심이 상했는지 볼을 부풀리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볼을 꾸욱 눌러 바람을 빼주고는 말을 이었다.
"여하튼 막 절정에 오른 고수를 앞세우긴 했으나, 결국 오합지졸에 불과한 사파의 떨거지들을 시켜 당소월을 노린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당소월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당가와 사파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려는 거겠지."
"네? 그런 건가요, 천 소협?"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없었다고 가정해 보지. 당소월 네가 결국 백살도객의 손에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몰려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당가로 도망쳤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일단 아버님이 분노하셨겠지요."
"분노라는 말로 끝나지 않을 거다. 장담컨대 장인어른께서는 왜 독왕이 독왕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중원 무림에 단단히 새겨 주시겠지."
실제로 이전 생의 당진천은 사파를 마구 헤집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당소월의 습격에 관련된 이들은 전부 한 줌 독수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 일을 계기로 사파와... 정확히는 사흑련과 당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이들 중 사흑련의 간부도 있었기 때문.
안 그래도 적이 많은 당가의 적이 몇 배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당가의 힘 대부분은 이를 감당하는 데 쓰였고.
"만약 마교의 목적이 중원을 분열시키는 것에 있다면...."
마교의 실체에 점점 가까워지는 팽우진과 언가혜를 죽이고, 서로 자진한 것처럼 꾸미겠지.
서로 싸우다 공멸한 것처럼 만드는 건 무공의 흔적을 남겨야 하니 힘들겠지만, 조용히 자진한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다양한 방법이 있을 테니까.
그 결과 팽가와 언가의 분쟁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을지언정, 감정의 골은 이전보다 훨씬 깊어지겠지. 마교가 용의자에서 벗어나는 것은 덤이고.
지금은 서로 으르렁대지만, 공통의 적이 나타난다면 어찌 됐든 정파라는 이름하에 힘을 합칠 수 있는 관계지만.
후계자를 잃은 뒤에는 그러지 못했다. 덕분에 팽가와 언가는 천마의 손에 차례로 멸문당했었고.
물론 이를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둘의 죽음은 미래에 있었던 일. 이를 추측처럼 꾸며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는지 금제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몸이 굳고,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감각. 내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당소월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으신가요 천 소협?"
"...걱정 마라.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말이 멈췄군."
뒷말을 이어 가려던 생각을 버리자, 그제야 자유로워진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향해 살포시 미소 짓는 당소월.
"아무리 그래도 결국 남의 일인데 그렇게나 신경 쓰시더니. 팽 소협과 언 소저에게 저희의 일을 겹쳐보고 계셨던 거군요."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둘 다 마교 때문에 큰 곤란을 겪는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긴 하다.
그 외에도 마교의 계획을 방해하고, 팽가와 언가의 사이를 개선해 여차할 때 함께 천마와 싸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내 생각은 여기까지다. 정리하자면 둘은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이를 도우며 마교에게 역으로 한방 먹이고 싶다는 정도려나."
"크흠. 의도는 고맙군."
"네. 방법에는 여전히 불만이 많지만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는 팽우진과 언가혜. 그리고 당소월은.
"엣헴."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허리에 손을 얹고 콧바람을 불고 있었다.
갑자기 훈훈해진 분위기가 어색하여, 스윽 시선을 돌렸다.
"뭐어. 신경만 쓰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생각나는 게 없지만 말이다."
팽우진과 언가혜가 마교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애초에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중하급 영약을 하북성에 마구 뿌린 이유는?
단순히 둘을 싸움 붙이려고 한다기에 영약은 너무 과한 수단 아닌가? 어찌 됐든 한쪽이 크게 성장할 텐데?
마교가 무공은 부족해도 금제와 고독에 한해서는 다른 어디보다도 뛰어난데, 어쩌면 뿌려진 영약을 이용해 무언가 하려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떻게 막아야 하지?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그러던 도중. 당소월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천 소협! 소협께서는 결국 마교의 음모를 보다 명백하게 밝혀내고 분쇄하고 싶은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지. 무작정 나서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어디부터 조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이 있답니다."
귀가 절로 솔깃해지는 말. 뭔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향이와 화린 언니를 데리고 하북성으로 두 분과 함께 가죠."
"뭐라?"
"무슨 일이 생겨도 화경의 절대고수이신 화린 언니가 있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거기에 향이는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어서 좋고요."
"...!"
"조사 방향도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을 거랍니다. 애초에 그 방향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니 팽 소협과 언 소저에게 협박 서신을 보낸 것일 테니까요. 하던 대로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하나하나 맞는 말이긴 하다만, 장인어른이 허락하실 것 같진 않군."
안 그래도 우리가 나갈 때마다 사건에 휘말려 걱정이 많은 분이다. 당연히 절대 허락 안 해주겠지.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은 당소월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허락이 왜 필요하지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용히 가출하지요!"
"...."
그게 무슨 미친 소리니.
"당장 하지."
113화. 가출
다음 날 아침. 당소월이 이른 시간부터 설리향과 서문화린에게 잠시 바깥바람 좀 쐬고 오지 않겠냐며 둘을 불렀다.
대단한 짐을 챙긴 것도 아니고, 당진천에게도 평소처럼 인사했던 그야말로 평범한 나날의 평범한 외출. 하지만.
"으음? 잠깐 외출하는 것 치고는 너무 멀리 나오지 않았느냐? 무한은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지쳐있던 터라 본녀는 좋다만, 주변에 길과 풀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아, 그러네요. 저희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아침 식사는 놓칠 것 같은데요 당 언니? 가주님은 당 언니랑 식사하시는 거 되게 좋아하시잖아요."
가도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문화린과, 허기가 지기 시작했는지 자신의 홀쭉한 배를 어루만지는 설리향.
선두에서 걸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당소월 돌연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멈추지 않고 뒷걸음으로 가도를 나아가며 말하기를.
"저희는 이제부터 하북성으로 갈 거랍니다."
"네? 어디라고요 당 언니?"
"그건 또 무슨 소리느냐? 여기서 하북성이 왜 나오는 게냐."
"왜냐면 저희는 이제부터 가출할 생각이기 때문이지요."
마치 오늘은 아침은 뭘 먹을 거라는 듯, 너무나 담담하고 일상적인 어조.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못 알아듣고 눈만 깜빡이던 둘이 한 박자 늦게 당소월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가, 가출이요?! 이렇게 갑자기요?!"
"뭘 그리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말하는 게냐?! 가출이라니! 심지어 본녀를 데리고 가출...? 또 독왕에게 이상한 오해를 사기 딱 좋지 않느냐!"
"서문 언니는 오해가 아니었잖아요. 정말로 한쪽 발을 들고 냄새 좀 맡아 보라며 쫓아오신 거 맞으면서...."
"그건 너희 때문 아니느냐!"
놀라다 말고 놀리는 설리향과 이걸 또 잘 받아 주는 서문화린.
둘이 잠시 티격태격대는 모습에 당소월이 소리내어 키득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제대로 처소에 아버님께 보내는 서신을 남겨 두었으니 말이지요."
"당 언니?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서신 남겨 뒀다고 가출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시죠...?"
"천휘! 그대는 정혼자가 되어서 말리지 않고 무얼 한 게냐!"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설리향과, 내게 책망의 화살을 돌리는 서문화린.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라."
팔짱을 끼며 자리에 멈춰 선 서문화린. 자신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지는 자세다.
잠시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이를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뭐어. 슬슬 거리도 멀어졌으니 한번 설명할 때긴 했습니다.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이거라도 드시고 계십쇼."
품에서 미리 챙긴 당과 하나를 꺼내자, 코웃음을 치는 서문화린.
"하! 본녀가 이런 당과로 마음을 풀기라도 할 줄 알았...뇸뇸...느냐!"
반사적으로 받아 든 당과를 입에 무는 서문화린. 그녀의 눈매는 어느새 한껏 유순해져 있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설리향. 그녀의 의문은 타당하다.
반로환동으로 몸은 어려졌다고 하나, 나이는 당진천과 비슷한 서문화린이 겨우 당과 하나로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 되는 게 말이 되는가.
놀랍게도 말이 된다.
반로환동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수명을 거스르는 것은 물론, 아무리 경지가 높아져도 피할 수 없는 노쇠한 육신을 갈아 끼우는 것이기에.
하지만 반로환동은 하늘이 내려준 기연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의 힘과 바람으로 거머쥔 것.
당연히 이런저런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큰 부작용이 바로 젊다 못해 어려진 육신에 정신이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
계획대로라는 생각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설리향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천휘.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쉿."
물론, 뒤에서 지그시 어깨를 누르는 당소월의 손에 바로 제압당했지만.
"향아. 무슨 불만이 있는지는 알겠지만, 지금은 천 소협이 말하려던 중이잖니. 나중에 한꺼번에. 알겠지?"
"네, 네에."
유독 당소월에게 약한 설리향이 흐물흐물해지자, 이제야 들을 준비가 완료된 청중들.
당소월과 한차례 뿌듯함이 담긴 시선을 주고받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처음부터 설명하지. 일전에 장인어른께서 하북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이야기하셨을 때 한가지 생각한 것이 있는데...."
"가지 말라니까 더 가고 싶어진 게냐?!"
"...일전에 당소월이 마교의 사주로 습격당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코흠흠."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서문화린이 당과를 입에 물고 조용히 경청하기 시작했다.
***
"뭐, 그렇게 된 겁니다."
"과연. 그래서 팽가와 언가의 아해들과 함께 하북성에서 마교를 파헤쳐 보겠다는 소리더냐?"
"예."
"너무 위험한 것 같구나. 물론 천휘 그대는 후기지수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긴 하지만... 마교에도 초절정의 고수는 존재하느니라. 화경의 고수가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이지."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그 노골적인 염려에 어쩐지 말랑해진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초절정의 무인이 상대라면 말씀하신 대로 저라고 무조건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서문화린 선배를 이렇게 모신 겁니다."
"즉, 위험할 것 같으면 본녀의 그늘에 기대겠다 그 말이느냐?"
"안 됩니까?"
"그럴 리가! 당연히 얼마든 본녀에게 기대도 좋으니라! ...다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니 이번 기회에 서문세가의 무공을 몇 개 더 배워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비전 같은 거 가르쳐 주시고, 아무튼 배웠으니 서문세가의 일원이라는 말씀을 하실 거라면 차라리 거절하겠습니다."
의심스레 노려보자,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는 서문화린.
"칫! 그럼 그냥 본녀의 금나수법이나 몇 개 익히거라. 이를 약속하면 기꺼이 도와주겠느니라."
"그런 거라면야 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설리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소월에게 물었다.
"당 언니. 제가 아직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지금이 이상한 건가요?"
"물론, 지금이 이상한 거란다. 보통은 화린 언니 같은 절대고수에게 뭐라도 하나 배울 수 있다면 전 재산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그런데 향이 너는 괜찮니?"
"저요? 으음. 여기까지 와서 혼자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그리고 저도 필요하니까 부른 걸 테고요. 저는 뭘 하면 되나요, 당 언니?"
"앗, 음. 적당한 상대를 만났을 때의 실전 경험...?"
"?"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설리향이 뒤늦게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저, 사실 별로 도움은 안 되지만 그냥 경험이라도 쌓으라고 데려온 건가요?!"
"으흠. 천 소협? 향이도 함께한다고 하니, 어서 출발하지요."
"당 언니? 당 언니?!"
당소월의 소매를 잡고 살살 흔드는 설리향의 애원 아닌 애원을 흘려 넘기고는 다 같이 약속 장소인 객잔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팽우진과 언가혜가 있었는데, 그 옷차림이 조금 달랐다.
자랑스러워하다 못해 주변에 과시하듯 평소에도 입고 다녔던 가문의 이름이 새겨진 무복은 온데간데없고.
아무런 문양도,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무난한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뭐, 나와 당소월도 당가의 녹색 무복을 입고 있으니 여기를 떠나기 전에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네.
속으로 해야 할 일을 한가지 추가하며 둘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별일 없었나?"
"아무 일도 없었다. 없었지만...."
"정말로 이게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네요."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팽우진과 언가혜.
가문을 속이고 몰래 만나는 건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잠깐 세상 좀 둘러보고 온다며 말없이 가출하는 건 신경 쓰이는 모양.
팽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괜찮다.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닐 뿐, 하북성에서 조사를 이어 갈 것 아니냐. 우리는 몰라도 너희는 그냥 집 앞에 마실 나온 셈이잖나."
"그래서 더 신경 쓰인다는 소리다! 재수 없으면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맞닥뜨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발끈하고는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는 팽우진. 녀석의 시선이 그제야 내 뒤의 설리향과 서문화린에게로 향했다.
"동행이 있다는 말은 들었다만... 저 둘인가? 한 명은 기억에 있는 얼굴이군."
"청음빙화 소저시네요. 비접독봉의 친한 동생이자, 그 재능을 높이 사 어린 시절부터 당가의 식객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언가혜의 말에 따라 한차례 설리향에게 향했던 시선이 이번에는 서문화린에게로 향한다.
앉아있음에도 큼직한 팽우진의 덩치에 놀란 것인지 슬그머니 내 뒤에 서는 설리향.
그 사이에 무언가 깨달은 팽우진이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백발나찰 선배십니까?"
"...본녀가 그런 별호로 불리는 것은 사실이나 썩 좋아하는 별호는 아니니라."
"죄송합니다. 과거, 서문세가가 그러했듯 다시 정파의 길을 걷기로 하셨다는 이야기는 무림맹을 통해 들었습니다."
"코흠. 그런 것이니라."
"하지만, 제 아버지와 같은 배분의 선배를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희가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극도로 정중한 팽우진의 태도. 사실 저게 올바른 태도긴 하다.
중원 무림 전체를 뒤져도 몇 없는 화경의 무인이자, 외형과 달리 오래전부터 무림에서 활동하던 사람 아닌가.
아무리 자신감에 넘쳐도 후기지수가 서문화린을 상대할 때는 저게 맞다. 맞지만... 우리 일행은 좀 서문화린의 취급이 박하긴 하지.
애초에 처음 만나기를 새로 사귄 벗처럼 만나서 그런 것도 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전생에 오랜 시간 한솥밥을 먹으며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서문화린 본인이 우리 앞에서는 무게를 잡지 않으니 그리 대한 것인데.
"코흠. 코흠."
"...."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나와 팽우진을 번갈아 보는 서문화린. 따로 말은 안 했으나, 자신이 이런 사람이니 앞으로 좀 잘하라는 뜻이겠지.
잠시 내게 눈치 아닌 눈치를 준 서문화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녀 또한 너희를 돕기로 했으니 한동안 볼 일이 많을 것이니라. 나찰이라는 말이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니, 편하게 부르거라."
그 말에 잠시 고민하느라 멈칫한 팽우진 대신 언가혜가 입을 열었다.
"일면식도 없는 저희를 위해 이리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한동안 가문의 힘은 빌릴 수 없겠으나, 최대한 불편함이 없도록 모시겠습니다."
"어, 르신...."
시무룩해진 표정. 그리고 서글픈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거 봐라. 정작 어르신 취급하면 서운해할 거란 말이지.
서문화린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는 팽우진과 언가혜를 향해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쯤 장인어른은 물론이고, 도왕과 권왕께서도 우리가 남겨 둔 서신을 발견했겠지. 배는 좀 고프겠지만, 아침은 거르고 바로 출발하지."
하북성까지는 갈 길이 멀다.
.
.
.
.
.
무한 시를 떠나, 하북성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팽우진과 언가혜가 가끔 몰래 만나 서로의 조사 결과를 공유하던 작은 가옥으로 향했으나.
그곳에 남은 것은 큰불로 모든 사람이 떠난 폐촌. 그리고 새까맣게 탄 집터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마공의 흔적이군."
단순히 재수가 없었던 건 아닌듯했다.
114화. 가출 (2)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일행이 하북성에 도착할 때쯤에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단체로 가출했다는 소문이 벌써 하북성까지 퍼졌더라.
우리 중 가장 느린 설리향의 경공 속도에 맞춰 이동했다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소문이 확산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아마, 개방을 이용해 일부러 소문을 내고 우리를 찾아다니는 거겠지. 예상했던 대로의 상황이다.
다만,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당진천이야 뒷목을 부여잡긴 해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을 거다.
내 무위도 무위지만 화경 무인인 서문화린도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뭐어. 이는 어디까지나 서문화린이 악명과 달리 심성이 곧고, 어지간한 상대는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나나 당소월 손에서 정리된다는 걸 알고 있는 당진천에게나 해당되는 일.
팽가와 언가의 가주는 지금쯤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서로 앙숙처럼 여기는 가문의 후계자가 동시에 사라진 것 아닌가.
심지어 둘은 평소에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친구라던 남궁종마저 팽우진과 언가혜가 정말로 사이가 나쁜 줄 알고 있는 상황.
온갖 부정적인 억측을 내세우며 으르렁대는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당장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다. 어디로 갈지는 생각해 뒀나?"
"물론. 나와 가혜가 가끔 만날 때 사용하는 집이 있다."
"집? 허어. 아예 살림을 차렸을 줄이야."
"살림이라니...그 정도는 아닙니다."
내 반응에 부끄럽다는 듯 부정하는 언가혜. 그러면서도 슬쩍 팽우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영 싫지만은 않은 모양.
놀랍게도 저 둘은 하북성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저런 분위기였다.
현재의 심각함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도 있겠지만, 눈치 보지 않고 붙어 있는 게 처음이라 많이 들뜬 모양.
이쯤 되면 슬슬 감탄스러운 터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내 등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천 소협. 천 소협. 저희가 동굴에 꾸며둔 살림살이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면 그냥 놔두고 왔습니다만...."
"글쎄. 주인 없는 물건이나 다름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가져가지 않았을까 싶군. 다만, 멀쩡한 집이 아니라 산 중턱의 동굴이라 아직 그대로일 수도 있겠지."
"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멀쩡하게 남아있지는 않겠지요. 사람은 몰라도 산짐승이 드나들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신경 쓰인다면 이번 일이 끝나면 사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보겠나?"
"으음...역시 됐습니다. 분명 멀쩡한 꼴로 남아있지 않을 터이니, 추억은 추억인 채로 남겨두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곁에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쪽을 향해 배시시 미소 짓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설리향과 서문화린이 뒤에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두 쌍이 아주 그냥 막상막하로구나. 본녀가 보기에 휘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소월이가 약간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 같으니라."
"그러게 말이에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빨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며칠간 번갈아 저러는 걸 보고 있자니... 에휴."
아니, 그런 이유였다고?
진짜 별생각 없었기에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당소월을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내가 신검합일의 경지를 되찾으며 한층 감각이 예민해진 것은 사실이나, 전음으로 떠든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당소월에게도 들렸을 텐데 말이다.
헛웃음을 짓고 있는 것도 잠시. 무언가 이상했는지 언가혜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혹시 방금 동굴이라고 하셨나요? 혈화검귀 소협께서는 본디 낭인이라 하셨으니 쌓아둔 재산이 얼마 없을 수 있습니다만, 비접독봉 소저는 조금 사정이 다르잖습니까."
"아! 분명 그 말이 맞습니다. 몰래 쓰는 것이라면 큰돈을 융통할 수는 없지만, 작은 마을에 작은 집 하나 마련할 정도는 어떻게든 될 테니 말이지요. 다만, 그으. 제게는 선택지가 없었답니다. 천 소협에게 납치당했던 터라."
"...!"
"아."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언가혜와 멍한 소리를 내며 끄덕이는 팽우진.
나에 대한 인상이 순조롭게 망가지고 있구만. 전부 사실이라 딱히 반박할 거리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주제를 돌렸다.
"둘만의 비밀 가옥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만, 굳이 거기로 향하는 이유라도 있나?"
"당연히 있다. 팽가와 언가의 영역 사이에 있어 둘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해 가는 곳이다. 거점으로 삼기에는 충분하지."
"거기에 지금껏 조사한 결과는 대부분 그곳에 보관해 두었습니다. 기억하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그동안 전부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서로 관점이 다르고 가진 지식이 다르니 여러분이 읽으면 또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겠죠."
맞는 말이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회귀와 관련된 것들 전반에 금제가 걸려있어, 둘이 모아둔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큰 도움이 된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언젠가 해주할 수 있긴 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추리인 것처럼 말하는 건 금제에 걸리지 않으니까.
만약 이번에도 마교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의 계획과 천마의 강함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 이전 생처럼 허무하게 각개격파 당하지는 않으리라.
***
팽우진과 언가혜가 말했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마을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재와 검댕으로 새까맣게 물든 대지. 그 위에는 집이 있었다는 흔적 정도만이 남아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팽우진. 여기 살던 사람들은 진작에 마을을 떠난 것인지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로 불이 나도 꺼지고 나면 남은 것이라도 챙기기 위해 생존자들이 잔해를 뒤적이곤 한다.
그런 이들조차 없다는 소리는 둘 중 하나다.
"불이 나고 제법 시간이 흘렀던가,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죽은 거겠군."
"누가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르겠... 설마?"
팽우진과 비슷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언가혜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주변 집터를 몇 개 확인한 뒤에 바로 너희의 가옥으로 향하는 게 어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팽우진과 언가혜. 둘과는 잠시 갈라져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 다른 잔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숯 더미를 들어 올렸다. 무너진 지붕이었던 것을 치우고, 부러진 기둥을 밀어내자 그제야 드러나는 내부.
그곳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죽어있는 크고 작은 소사체 두 구가 있었다.
부모가 자식을 지키다 그대로 숨을 거둔 것 같은 모양새. 이것만 보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을 짐작케 하는 구도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쉽사리 생각나지 않아, 그저 노려만 보는 것도 잠시.
새까맣게 눌어붙은 시체의 등에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검흔이다."
"검흔이로구나."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동시에 입을 여는 서문화린. 이에 설리향이 눈썹을 찡그렸다.
"검흔이라고? 난 잘 안 보이는데... 만약 천휘 네 말이 맞다면 누가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고, 사고인 것처럼 불이라도 붙였다는 거야?"
"그럴 확률이 높겠지."
굳이 죽은 시체를 다시 불태울 이유는 정해져 있다. 죽은 이의 신원을 숨기기 위하여. 혹은 부검을 통해 어떻게 죽였는지를 숨기기 위해서니까.
다른 건 몰라도 검에는 제법 자신 있는 나조차 검으로 단번에 심장을 꿰뚫었다는 것만 알 수 있고, 어떤 검법을 사용한 건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분명 이게 목적이리라.
"본녀 또한 같은 천휘와 같은 생각이니라. 다만 지금은 다른 집을 추가로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당장 판단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으니라."
"예에. 화린 언니의 말이 맞아요. 사람마다 사정은 있으니, 어쩌면 이 집이 특이한 경우일지도 모르지요."
하여, 이번에는 조금 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의 가까운 집터의 잔해를 치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검흔은 없으나,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것 같은 시체를 발견했다.
정적인 자세였던 조금 전과 달리,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일까.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설리향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쓸어 주며 진정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보통 불이 나면 질식해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외로 불에 타서 죽는 경우는 흔치 않지."
이전 생의 철혈당이 무너질 때 질리도록 보았던 것이라 잘 안다.
"연기에 질식한 경우 조용히 정신을 잃기에, 약간 몸부림치는 경우는 있어도 이 정도로 격하지는 않지. 보통 이런 건...."
"몸에 직접 불이 붙은 이들이 죽으면 이런 시체가 남느니라. ...서문세가가 멸문하며 그리 죽은 이가 몇몇 있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느니라."
당시의 일을 떠올린 건지 마찬가지로 살짝 기세가 사나워진 서문화린.
남은 한 손으로 이번에는 서문화린의 등을 토닥여 주며 따로 다른 집을 뒤져본 당소월에게 물었다.
"그쪽은 어떤가?"
"여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여긴 아예 머리가 부서져 있습니다."
내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차가운 어조. 사파로 살며 이런 꼴 저런 꼴 많이 봐 온 나와 달리, 정파인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당소월에게는 누군가 마을을 몰살시키고 불태웠다는 사실이 참기 힘든 모양.
이후에는 팽우진과 언가혜와 합류했으나, 그쪽도 얼추 비슷한 사정인 듯했다.
검흔까지는 몰라도, 명백히 화재가 아닌 이유로 죽은 시체들이 묻혀 있었고 갑작스레 불이 난 것이라 쳐도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
아마 살아서 도망친 이는 한 명도 없거나, 운이 좋아도 한 명 있을까 말까 하겠지.
자주 오지는 못해도 나름 마을 사람들과 친분이 있던 팽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이것도 전부 마교의 짓이냐?"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니 산적이 소행일 수도 있고, 여기저기 떠도는 사파 고수가 모종의 이유로 저질렀을 수도 있으니까."
"여긴 하북성이다. 감히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야."
"처음에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팽가와 언가의 영역 사이에 끼어 있어 둘 중 어느 가문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이라고."
"...."
중원의 땅은 너무 넓고, 평범 이상의 힘을 지닌 무인 또한 너무 많지만, 관군의 창칼은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생겨난 것 아닌가.
여긴 명백한 정파의 영역임에도 팽가와 언가의 분쟁 때문에 보호받지 못한 것 같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인지 침울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는 팽우진과 언가혜.
"너희 둘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일인 데다가, 양 가문 전체가 나서야 하는 규모의 일이니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다."
"...고맙다."
"지금은 그보다 본래 목적인 너희의 가옥으로 향하는 게 좋겠군. 이곳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은 얼추 다 알아보았잖나."
"가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금 떨어진 곳이라고는 하나, 마을 안에 속하는 곳입니다. 당연히 안에 있는 조사 결과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을 겁니다."
체념한 듯한 언가혜의 목소리. 하지만 그래서 중요한 거다.
"맞는 말이다. 멀쩡하길 바랄 수는 없겠지. 허나,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만행을 저지른 이가 마교인지 다른 누군가인지는 알 수 있을 거다."
"예?"
"설마 중요한 정보를 아무 데나 올려두진 않았을 것 아닌가. 땅에 묻어 두든, 찾기 힘든 곳에 숨겨 두든 했을 터. 아닌가?"
"마, 맞습니다. 불을 피할 정도는 아니지만,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긴 했습니다."
"만약 내가 마교도라면, 굳이 이런 시골 마을을 찾아올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협박으로도 멈추지 않는 너희 둘을 죽이거나... 적어도 지금껏 모든 자료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겠지."
당연히 가장 철저하게 수색하고, 가장 철저하게 불태웠으리라.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파헤치며, 마지막에는 신경 써서 꼼꼼히 불태웠겠지.
공들인 파괴는 그 자체로 흔적이 되기도 하니까.
그런 이유로 팽우진과 언가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집.
아니나 다를까. 잔해를 전부 파헤쳐도 보이는 것은 새까만 숯덩이거나, 부서진 잔해뿐.
조금이나마 원형을 유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가혜가 말했던 것처럼 반쯤 파묻힌 바닥에 숨겨둔 비밀 금고. 거기서 한가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녹아내리며 패인 돌바닥. 뱀이 기어가는 듯한 굴곡진 곡선은 내 기억에 있는 것이었으니.
혈염사활마공(血炎蛇活魔功). 살아있는 뱀처럼 교활하게 움직이며, 피를 보면 한층 불길이 거세지는 마공.
회귀 전에 한차례 맞붙었으나, 결국 쓰러뜨리지 못해 당소월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혈염권마(血炎拳魔)의 무공이었다.
115화. 암계
천마를 제외한 다른 마교도의 수준이 대단치 못한 것은 사실이나, 강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전에 내가 쓰러뜨린 아귀부 또한 회귀 전에는 결국 초절정에 닿아 장로 자리에 오른 녀석이지 않은가.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가 없을 뿐, 초절정의 무인이라면 몇 명 있었고.
혈염권마 적영후 또한 그렇게 초절정에 오른 마교의 장로다.
아귀부와의 차이는 하나. 아귀부는 앞으로 초절정에 오를 녀석이지만, 혈염권마는 지금 기준으로도 제법 오래전에 초절정에 오른 상대라는 것.
악명이지만, 중원에도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적잖이 있을 것이다.
뱀이 기어간 흔적처럼 녹아내린 돌바닥을 가볍게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열기나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차갑고 매끈한 감각만이 전해질 뿐.
가만히 바닥을 매만지는 내 모습에 당소월이 바로 옆에 쪼그려 앉으며, 같이 바닥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확실히 이건 좀 특이하네요. 아무리 집 전체가 타오를 정도로 큰불이 났다지만, 돌바닥을 녹일 정도는 아니지요."
"마공의 흔적이다."
"예?"
이 정도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면 금제에 걸리지 않는 걸까. 이번에는 중간에 막히는 일 없이 생각한 것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혈염사활마공(血炎蛇活魔功)이 아닐까 싶군.
"혈염사활마공이라면... 설마 혈염권마의 무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혈염권마를 알고 있나?"
"예에. 천 소협만큼은 아니지만, 저 또한 제 목숨을 노리던 배후가 마교임을 알고 이것저것 알아보았답니다. 약 삼십 년 전에 곤륜파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 아닙니까."
시기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곤륜파에서의 일로 그 별호가 널리 알려진 것은 맞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눈을 가늘게 뜬 서문화린이 맞장구를 쳤다.
"혈염권마라면 본녀 또한 들어보았느니라. 청해와 강서성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워낙 큰일이라 소문 정도는 들리더구나."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그러시나요, 서문 언니?"
이제 기본적인 상식은 알지만, 여전히 무림의 일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설리향의 질문.
난데없는 언니 소리에 꼬박꼬박 어르신이라 부르던 팽우진과 언가혜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서문화린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혈염권마가 어린 시절에 곤륜의 도사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한답시고 곤륜파의 어린 제자를 보이는 족족 태워 죽였다는 내용이었느니라."
"마교도가 과한 복수를 행한 거야 안타까운 일이긴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곤륜의 도사가 먼저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에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설리향. 그녀가 배운 상식으로 정파인은, 특히 도가의 무인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아니겠느냐. 어디까지나 들은 소문이라 전부 진실이라 확언할 수는 없으나... 이름난 상단의 망나니 아들이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곤륜파에 들어갔지만,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몰래 술 마시다 저지른 경우라고 하더구나."
"애초부터 나쁜 사람이었다는 거군요. 곤륜파는 왜 그런 사람을 받아준 거래요? 역시 돈 때문인가요? 곤륜파 정도 되는 곳이 돈이 아쉬워 골칫덩이를 껴안지는 않을 것 같은데...."
"금전적인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그보다는 선업을 쌓아야 등선에 이를 수 있다는 도가의 가르침 때문일 것이니라. 계도는 대표적인 선업 아니겠느냐."
맞는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세속에 많이 가까워졌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선업을 추구하는 이들이 도사들이다.
혈연을 중요하게 여기며 고우나 미우나 어지간하면 끌어안고 함께 가는 세가와 달리, 문파는 받아들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당파나 화산파 같은 곳에서 재능 있는 사람만 골라 받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도가 문파에서 주로 받는 이들은 집안이 힘들어 차마 키울 수 없어 내버린 아이, 모종의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기부금을 받고 부잣집 아이를 잠시 맡아 주며 무공을 가르친다거나, 우연히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를 발견해서 냉큼 데려오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그저 갈 곳 없는 이들. 가만 놔두면 혼자 살아가기 힘들 것 같은 사람.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진심으로 새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소수의 몇몇을 받는 것이다. 재능은 어쩌다 운 좋게 얻어걸리는 것이고.
얼핏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 하지만 그 행동 원리가 선업을 쌓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면 전부 이해된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가끔 부유한 집안에서도 골칫덩이 자식을 맡기기도 한다.
문파 입장에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진짜 망나니라면 당연히 거절하겠으나, 어지간한 수준이라면 그냥 받아준다고 하더라.
하지만 언제나 일이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
당연히 잊을만하면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터진다고 한다. 살인까지 나는 건 굉장히 드문 경우지만.
복잡한 표정으로 설리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네요. 자신들이 받은 제자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곤륜파에게 앙심을 품은 거죠? 마교에 투신해 힘을 기른 뒤에는 그 복수를 행한 거고요."
"과정은 맞으나, 그런 건 복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니라. 당사자가 아닌 무고한 주변 사람을 셀 수도 없이 산채로 불태우지 않았느냐. 본래 복수에 대의는 없는 법이라지만, 이는 복수라는 말조차 아까운 미치광이 살인마의 화풀이니라. 혈염권마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은 아니라는 거겠지."
"아... 명심할게요. 그나저나 별호는 그냥 주먹 잘 쓰고, 불도 잘 지르는 마교도라 붙은 게 아니었나 보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리향. 그런 그녀를 향해 이번에는 내가 대답해 주었다.
"혈염은 녀석이 익힌 양강기공인 혈염사활마공에서 따온 것이고, 주먹을 주로 쓰기에 권이 들어간 것도 맞지만, 마(魔)가 붙은 것은 마교도라 그런 것이 아니다. 그에 걸맞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지."
"...서문 언니도 그렇고, 천휘 너도 그렇고 단호한 반응이네. 혈겁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저질렀길래 그러는 거야?"
"잘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럼 여기서 문제다. 혈염권마의 아버지를 때려죽였던 곤륜파의 무인은 어찌 되었을 것 같나?"
"갑자기? 어디 보자...."
검지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던 설리향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일단 살인을 저질렀으니 관군에게 끌려가거나, 곤륜파의 뇌옥에 갇혔겠지? 혈염권마가 복수하러 나선 걸 봐서 죽지는 않은 것 같구."
"비슷하다. 곤륜파의 뇌옥에 갇혀있다가 십 년쯤 지난 뒤에야 풀려났지. ...그리고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혈염권마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 남을 도우며 살았다.
"어?"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뜬 눈을 깜빡이는 설리향.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이전 생에서 어쩌다 혈염권마와 한번 맞붙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살아난 뒤.
혈염권마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을 느껴, 연륜이 좀 있는 고수들이나 곤륜파의 생존자들에게 혈염권마에 관한 것을 물어보고 다녔으니까.
그렇게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놀랍게도 혈염권마의 아버지를 죽인 녀석은 그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넘어가는 법이 없고, 아무리 극악한 상대라도 죽이지 않고 살려서 그 대가를 치르게 했으며, 시간 날 때마다 마교로 투신한 혈염권마의 행방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간 자신이 쌓은 모든 재산을, 필요하다면 목까지 내어주기 위하여.
보통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나, 뇌옥에서 십여 년간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그는 선업을 행할 때만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나.
뇌옥에 갇힌 그가 십여 년간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면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곤륜파도 그리 생각했는지 그를 도중에 본산 제자로 받아들였을 정도니까.
덕분에 초절정의 경지를 이루자마자 곤륜파를 찾은 혈염권마는 너무나도 간단히 자신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이는 혈염권마 본인도, 곤륜파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평생토록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으나,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명 정당한 복수를 다했건만 세상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할 때, 그리하여 평생 쫓던 것의 허무함을 마주하고 삶을 부정당한 순간. 사람은 망가지게 된다."
"그전에는 멀쩡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네."
"그만큼 이후에 더 돌아 버렸다는 소리지. 안 그래도 혈염사활마공의 부작용으로 괴로워하던 녀석은 이를 계기로 일말의 자제심을 놓아 버렸다는군."
혈염사활마공은 마공 중에서도 특히 강한 마공이다. 양강기공인만큼 체질을 많이 타긴 하지만, 반대로 타고난 양기가 충분하다면 대체로 위력이 대단한 마공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강함을 약속하니까.
문제는 혈염사활마공의 불길은 주인마저 불태운다는 것.
피를 보면 한층 불길이 거세지는 마공답게, 익힌 자의 피마저 불태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혈염사활마공으로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는 가만히 있어도 작열통을 느끼게 되며, 경지가 높아질수록 이는 더욱 심해지기만 한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시도 때도 없이 불타는 고통을 느껴야 하니 사람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사소한 일로도 분노하게 되니.
당시의 혈염권마는 복수를 향한 강한 의지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를 잃어버리자 그에게 남은 것은 완전히 연소되지 못한 원한과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무공뿐.
"하여, 복수를 마친 혈염권마는 다시 한번 곤륜파를 찾아 원수에게 도움받은 이들, 그가 길러낸 어린 제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산채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설리향. 평생에 걸쳐 사람을 구했다면 몇 명이나 그 도움을 받았을까.
적어도 한두 명은 아니겠지. 수십... 어쩌면 수백의 사람이 혈염권마의 손에 잔인하게 불탔을지도 모른다.
곤륜파에서도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나, 자신과의 전투를 철저히 피하고 약한 이들만 노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그렇게 당대 곤륜파의 후기지수 절반 이상을, 주변 마을의 양민을 셀 수도 없을 만큼 살해한 뒤에야 혈염권마는 곤륜파의 천라지망에 잡혔으니.
같은 초절정에 이른 장로들은 물론이요, 화경에 오른 당대의 장문인 또한 혈염권마의 목을 베기 위해 나선 터라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청해는 중원의 다른 지역과 달리 마교가 있는 신강과 직접적으로 땅을 맞대고 있는 곳이라는 점.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마교의 지원에 결국 혈염권마를 놓치고 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교의 절정 고수가 죄다 죽어 나가긴 했지만... 어찌 됐든 초절정에 이른 혈염권마는 살아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후로도 혈염권마는 크고 작은 학살을 멈추지 않으며 무림공적이라 불렸으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대외적인 활동을 끊었다고 한다.
다들 마공의 부작용을 견디지 못해 자기 자신마저 불태운 것이거나, 지나가던 협객의 손에 목을 베인 것이라 여겼지.
실제로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으니까.
...하지만 일전에 당진천과 함께 마교도를 심문하며 얻은 내용에 따르면 조금 다른 추측을 할 수 있게 된다.
천마. 그가 마교에 들어가 두각을 드러낸 시점과 혈염권마가 잠잠해진 시점이 정확히 일치하니까.
그리고 지금. 혈염권마답지 않게 뒤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녀석은 천마에게 깊이 매료되어, 그의 지시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만 이 추측은 혈염권마의 이야기와 달리 금제에 걸려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슬슬 금제의 조건이 이해되기 시작하네. 아마 혈염권마에 대해서 관대하게 풀어준 것도 서문화린이나 당소월처럼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겠지.
반대로 천마의 존재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언급하려 해도 강하게 금제가 발동하는 것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팽우진과 언가혜 쪽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해서는 잘 안 것 같군. 어떻게 하겠나?"
"여기까지 와서 적에게서 눈을 돌릴 이유는 없지."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둘. 다만 일단 말하고는 슬쩍슬쩍 서문화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니.
"으응?"
그 의미를 눈치채지 못하고 갸웃거리는 서문화린. 이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화경의 절대고수이신 서문화린 선배가 우리를 도와준다니, 초절정이건 무림공적이건, 양강기공이건 별로 위험하진 않긴 하다."
"본녀... 말이느냐?"
그제야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기대하는 시선을 보내왔는지 알아채고 당황한 서문화린.
잠시 두리번거리며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허리에 손을 얹는다.
의기양양한 표정. 살짝 치켜든 까치발. 웃음을 눌러 참듯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
누가 봐도 으스대는 모양새로 턱을 까딱이는 서문화린.
"옳다! 본녀만 믿거라! 혈염권마가 됐건, 뭐가 됐건 본녀의 주먹이 더 강하느니라!"
"오오...."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감탄하며 박수를 치는 팽우진과 언가혜.
...하지만 왜일까. 저렇게 들뜬 서문화린을 보면 더 불안해지는 것은.
***
혈염권마를 쫓던 도중. 설리향과 함께 고립되었다.
"조졌나?"
"아직 아니니까 입 좀 다물어!"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116화. 암계 (2)
팽우진과 언가혜는 절정에 이른 고수다.
물론, 둘에게는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재능과 신공이라 불리는 무공이 있기에 이십 대에 절정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둘의 사정을 제쳐놓고 순수하게 무력만 놓고 보자면 중원 어딜 가도 꿀리는 수준은 절대 아니리라.
만약 둘을 확실하게 끝장내고 싶은 거라면 어중간한 절정 고수 몇보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필요하겠지.
예를 들면 혈염권마처럼.
"하지만 마교 놈들도 저희 쪽에 서문화린 선배가 있다는 건 예상치 못할 겁니다."
"음음. 그대는 본녀만 믿으면 되니라. 일전에 흑천검문주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 것이 내심 걸렸거늘. 생각보다 금방 빚을 갚을 일이 생겼구나."
"빚이라니.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고, 제가 나서고 싶어 나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본녀가 느끼는 감상은 오롯이 본녀의 것 아니겠느냐. 본녀는 그대에게 일방적으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이를 풀어내고자 함이니라."
"뭐어... 그런 거라면 제가 더 할 말은 없죠. 솔직히 든든한 것 또한 사실이고 말입니다."
"엣헴!"
우리 일행이 자신에게 기대고 있음을 알아차린 뒤로 기분이 좋아 보이던 서문화린이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이를 한번 짚은 이유는 이동 내내 어르신 소리를 들어 살짝 삐진 서문화린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함은 아니다.
"그럼 저희는 서문화린 선배만 믿고, 혈염권마를 추적하도록 하겠습니다."
"으응? 추적이라 하였느냐? 최대한 흔적을 숨기고, 목격자도 없애기 위하여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놈이다만... 그대에게 쫓을 방법이라도 있는 게냐?"
"저 혼자라면 조금 힘들겠으나,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허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대의 뜻대로 해보거라."
서문화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팽우진과 언가혜를 향해 물었다.
"제법 일이 커지긴 했다만, 이제 와서 팽가와 언가의 도움을 받긴 힘들 거다. 이유는 너희도 잘 알 거다."
"으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예. 저도 팽 가가와 같은 생각입니다."
초절정에 이른 마교도가 하북성에 숨어들어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가출이고 뭐고 가문의 도움을 구하는 게 맞다.
어찌 됐건 팽가도 언가도 하북성에 자리 잡은 정파 가문 아닌가.
마을 하나가 몰살당한 일이 생겼는데, 알력 싸움을 이유로 눈치만 보고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으니.
"가문 어디에 간자가 숨어있는지 모르는데 함부로 정보를 누설할 수는 없지."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쥐새끼를 잡아내어 벌할 것입니다."
그렇다. 팽가와 언가에는 마교의 간자가 숨어들어 있다. 둘이 각자의 가문에서 알아낸 사실을 대조해보다 무언가 어긋남을 느끼고 알아낸 사실.
본래 밀회를 가지기 위해 마련한 가옥에 그간의 자료를 모아 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집안에 숨겨놨다가는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뭐, 정작 숨겨 둔 가옥을 들켜 그간 수집한 자료와 증거가 죄다 잿더미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팽우진과 언가혜의 머릿속에 들어간 정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렇기에 혈염권마의 다음 목적은 둘의 목이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팽우진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가주님께 올라가는 정보에 손을 댈 정도라면 낮은 지위는 아닐 터. 대체 무엇이 아쉬워 팽가를 배신한 건지...."
"일단 말해 두는데, 배신할 마음으로 배신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또 무슨 괴상한 소리냐. 배신이 아닌 배신도 있단 말인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간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소리지. 금제, 혹은 고독에 대해 들어 보았나?"
"금제는 알고 있고 팽가에도 비슷한 것이 몇 개 있다만... 고독은 실존하는 것이었나? 과장된 이야기라 생각했다만."
"보통은 그렇지. 허나, 마교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무공은 다소 수준이 떨어질지언정, 사술에 한해서는 중원의 그 어느 곳보다 더 조예가 깊을 터이니."
"그것참 마교답군. 혈화검귀 너는 가문의 배신자가 모종의 이유로 강제로 마교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확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뿐이지. ...무엇보다 금제와 고독 때문이라 하여 배신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나."
"...그 또한 맞는 말이지."
복잡한 표정으로 재차 한숨을 내쉬는 팽우진. 그런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하는 언가혜를 잠시 기다려 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가문의 도움은 받을 수 없으나, 서문화린 선배의 도움은 받을 수 있잖나. 하여, 이제부터 혈염권마를 추적하려고 한다."
"추종술도 익혔나?"
"조금은."
회귀 전. 마교와의 전투가 길어지고, 그만큼 처절해지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검 이외의 것도 배워야 했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적을 쫓아 죽여야 했고, 쫓아오는 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는 흔적을 숨겨야 했으니.
기본적인 추종술 정도는 당연히 익히고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혈염권마를 찾아내긴 어렵겠지. 아무리 불길이 흔적을 지워낸다 해도 이렇게 깔끔하기는 어렵다. 마교도는 싸우는 법은 알아도 숨기는 법은 모르는 이들이니."
"...살곡이군요."
언가혜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전력이 되는 살귀급은 제법 줄여 놓았으나, 무위가 부족하다 하여 잡기까지 부족한 것은 아닐 터. 혈염권마처럼 화려한 흔적을 남기는 이가 활보하고 있음에도 이리 조용한 것은 분명 살곡의 살수들이 그를 따라다니며 보조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일리가 있군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체 살수까지 나서 은폐한 흔적을 어떻게 추적하실 생각이십니까?"
"꼭 모든 것을 본신의 힘으로 해결하라는 법은 없지. 당소월의 독을 사용할 것이다."
"예?"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는 법 아니겠나."
"방금은 참 당가의 사람 같았습니다."
언가혜의 감탄에 어깨를 한차례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여하튼 너희에게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흔적을 쫓긴 하겠으나, 아무리 당소월의 도움을 받은 나라도 전문적인 살수의 실력을 완전히 간파하기는 어려울 터. 하여 사전에 미리 후보지를 좁혀 두고자 한다."
"후보지를 좁힌다 하심은?"
"팽우진. 언가혜. 너희 둘이 평소에 자주 밀회를 같던 장소를 하나도 남김없이 알려다오. 가옥의 위치를 알았을 정도면 이미 너희에 대한 조사는 끝났겠지. 혈염권마의 다음 목적지는 자주 만남을 가지는 곳일 확률이 높다."
"...."
"...."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한참 뒤에야 팽우진이 헛기침으로 침묵을 깼다.
"크흠!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알려 주겠다만... 이제부터 들을 이야기는 절대 비밀이다. 알겠나?"
"당연히 그럴 생각이니 걱정 마라."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네 오는 팽우진.
그제야 왜 둘이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 용케도 할 거 다 하고 있었구만.
***
어쩌다 보니 팽우진과 언가혜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생활을 알게 된 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땅을 파고 있는 당소월의 곁이었다.
"뭘 하고 있나?"
"이대로 떠나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 넓은 마을도 아니고, 잔해의 절반은 이미 뒤집어 놓았으니 시체라도 묻어 주려고 한답니다."
"돕지."
일단 반쯤 파둔 땅을 마저 파내, 간소하게나마 무덤을 만들어 주고서야 입을 열었다.
"독이 필요하다."
"어떤 독 말씀이신지요?"
"열홍초(熱紅草), 자환과(紫幻果), 삼엽화사(三葉花蛇), 백각오공(百脚蜈蚣)의 독을 동일한 비율로 섞은 녀석이 필요하다."
"마교도를 잡아 심문하실 때 필요한 독이라면 더 효율적인 녀석이 많답니다?"
"내가 먹을 생각이다만."
"...천 소협이 어인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또한 곧 뒤따라갈 생각이라는 점은 알아주시지요."
"그 마음은 실로 감동적이지만, 내가 죽어도 당소월 너는 살아라. 그리고 죽으려고 먹는 게 아니다. 나라고 목숨이 아깝지 않을 리 없잖나."
"글쎄요. 천 소협의 평소 행보를 생각하시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구시지 않습니까."
"나는 다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흐응."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삐딱한 태도로 턱을 까딱이는 당소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자세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당소월 너도 알다시피 조금 전에 나열한 독은 전부 양기를 가득 머금은 독이다."
"양기를 머금은 수준이 아니라 하나같이 장기를 녹여내는 극독이지요."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죄다 섞으면 의외로 그 독성이 확 죽는 조합이기도 하지."
"거기까지는 저도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중화되고 남은 독성이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양독(陽毒)의 특성상 고통스럽긴 할 겁니다."
"대신 감각이 극한까지 예민해지는 효과가 있지 않나."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말을 길게도 늘려 하시는군요."
"거기서 설리향의 도움을 받는 거다."
"예?"
어리둥절해하는 당소월을 향해 피식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설리향의 음기를 받아들여 고통까지 중화한다. 그리하면 남는 것은 예민해진 감각뿐 아니겠나."
"...참신한 접근법이지만, 그렇게 될 거라는 보장은 없잖습니까."
"그 독을 내가 먹으려는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지금 당장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적당한 산짐승이라도 잡아 확인해 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그때 내게 하독하면 되잖나."
"그런 거라면 상관없지만... 잘 될지 모르겠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손가락 끝에서 각기 다른 독을 방울방울 뽑아내는 당소월.
아마 별문제 없을 거다. 이건 회귀 전의 내가 하도 혈염권마에게 처맞고 돌아와 이를 갈아대니, 당소월이 다음에는 기습당하지 말고 역으로 기습하라며 만들어 준 조합법이니까.
물론, 당시에는 설리향이 없으니 당소월이 내 상태를 직접 살피고 다시 배합한 음기 서린 독으로 중화시켰으나.
설리향이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으리라. 당소월이 독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선보인다면, 설리향은 음기를 다루는 것에 그 엇비슷한 재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지금의 당소월은, 회귀 전의 당소월에 비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을 터.
그런 이유로 택한 것이 지금의 방식이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독을 조합하는 당소월. 설리향을 불러 주변을 날아가던 새로 가볍게 시험해 보았으나....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새.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당소월이 손끝마다 진득한 독액을 흘리며 다가왔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알아내신 건가요, 천 소협?"
"비밀이다. 하지만, 독령지체의 체질을 개선하는 구결을 만들어 낸 이와 같은 사람에게 들었다는 정도는 말해 줄 수 있겠군."
"설마 또 여자인가요?"
"여자긴 하다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아...."
이제는 제법 오래전의 일. 아귀부를 쓰러뜨린 다음날, 내 방에 숨어든 당소월에게 했던 이야기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 그럼 이제 하독할 테니 입을 벌려 주시지요. 향이 너는 바로 중화할 수 있도록 천 소협의 등에 손을 대고 있으렴."
"네."
쪼르르 달려가 내 등에 손을 얹는 설리향. 그녀의 말똥말똥한 시선을 마주한 당소월이 천천히 내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네 개의 손가락. 그 감촉을 느끼기도 전에 끈적한 독액이 식도를 타고 흐른다.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몸. 전신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잇소리가 흘러나오려던 순간.
등에 닿은 설리향의 손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시원한 기운. 순식간에 치솟던 고통이 가라앉기 시작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오감이 확장되며,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으니.
"찾았다."
이제 쫓는 건 우리가 될 터다.
117화. 암계 (3)
추적은 순조로웠다.
본래 추종술은 기감보다 예민한 오감이 더 중요한 기술.
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무공을 익히는 것이 추종술의 기본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지금. 나는 당소월과 설리향의 도움으로 일시적이나마 확장된 감각을 손에 넣었다.
세상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야. 이는 내 것이 아닌 빌려온 경치이기에 무공 수련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으나....
당초의 목적인 혈염권마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쫓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했다.
까맣게 탄 마을을 뒤로 하고, 희미하게 남은 부자연스러운 깔끔함을 쫓는다.
그러다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갈림길이 나오면, 팽우진과 언가혜에게 들었던 장소로 향하는 길목을 고르며 나아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몰살시킨 마을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벌렸다고 안심했는지 하나둘 튀어나오는 익숙한 흔적들.
혈염사활마공의 부작용으로 몸부림친 흔적이었다.
아무리 감정을 죽인 살수라 한들 피로까지 없애지는 못할 터.
이 정도면 괜찮겠다며 풀어진 방심을 틈새 삼아 몇몇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거겠지.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한 사람의 흔적이 아닌 것 같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천 소협?"
"말 그대로다. 어쩌면 혈염권마 혼자에 살수 몇이 붙어 다니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지."
"어... 다른 마공의 흔적을 발견하셨는지요?"
"아니. 똑같은 혈염사활마공이지만, 흔적으로부터 느껴지는 체격이나 성취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더군. 제자... 까지는 아니어도 혈염권마와 같은 무공을 익힌 이들도 함께 움직이는 것 같다."
마교에서도 무공을 익히나, 중원의 무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무공 그 자체를 떠받들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무인은 원수요, 무공은 원수의 검과 같은 위치니까.
필요하기에 무공을 익히지만, 그것을 독점하려는 생각은 없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도 어디까지나 도구. 원한다면 누구에게나 기꺼이 알려준다.
말만 들으면 참 이상적인 모습이지만... 그들 대부분이 복수에 미쳐있다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무공이 죄다 마공이라는 크나큰 문제가 있지.
아무튼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전 생에도 혈염사활마공을 익힌 자는 혈염권마 외에도 여럿 있었는데.
이미 경지를 이룬 혈염권마의 가르침을 받고도, 다들 부작용을 이기지 못해 미쳤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던가.
회귀 전에는 먼 과거의 일이었으나, 지금은 현재의 일일지도 모르겠네.
"머릿수가 늘어난다 해도 대부분은 일류. 잘해 봐야 갓 절정에 오른 수준일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혹시 모르니 일단 알아 두라는 것뿐이다."
"아하? 이해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 일러 두지요."
고개를 끄덕인 당소월이 뒤따르는 일행들에게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며 다시 다음 흔적을 찾아 나서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우리 앞에는 널찍한 강과 이를 따라 길게 늘어선 진촌(津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뱃놀이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
"뱃놀이하기 딱 좋은 곳이네요, 당 언니."
"쉿! 경치 좋은 바깥에서, 남들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은밀하게 즐기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하면 안 된단다!"
"그,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는데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설리향과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당소월.
물론 팽우진과 언가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어째서인지 서문화린도 덩달아 붉어진 얼굴로 연신 딸꾹질만 하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문화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문화린 선배."
"으햐악! 보, 본녀는 아무 생각도 안 했느니라! 어차피 배는 강물에 흔들리는 것이니,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느니라...!"
"서문화린 선배의 상상력에는 언제나 감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습니까."
"본녀의 상상력이 뭐가 어떻길래 그러는 게냐! ...하지만 뭐어. 그대의 말도 맞구나.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팽우진과 언가혜가 자주 오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면, 혈염권마 또한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이미 떠나갔을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는 서문화린.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희미한 기운이 뻗어 나오기 시작한다.
자세히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 힘들 정도로 하늘하늘한 기세. 그나마도 점점 희미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기감의 영역을 훌쩍 넘어선다,
반죽을 강하게 눌러 얇고 넓게 펴낸 것 같은 느낌.
화경에 이르러 의념으로 내공을 정련할 수 있게 되면,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기예들이 가능하게 되니.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옮기는 허공섭물이 그러하고, 있을 수 없는 밀도로 내공을 응축시킨 검강이 그러하며, 지금의 서문화린이 펼치는 마을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기감 또한 그러한 기예 중 하나다.
그리하여 주변 일대를 은밀하게 뒤져보던 서문화린이 번뜩 눈을 떴다.
"수상한 기척이 있구나."
"그게 사실입니까?"
"물론이니라. 본녀가 살펴보는 것을 눈치채면 도망칠 것이 뻔하니, 자세히는 들여다본 것은 아니나... 얼핏 훑어본 바로는 희미한 마기가 느껴지는 곳이 있느니라."
"부탁드리겠습니다."
"코흠! 얼마든 맡기거라! 아, 하지만 아무리 본녀라도 손은 둘밖에 없으니, 혹시 도망가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니라. 그러니, 여기서는 천천히 포위하는 식으로 가자꾸나."
"합리적이네요. 그럼 놈들의 목적일 팽우진과 언가혜는 서문화린 선배 쪽에 두도록 하죠. 거기가 가장 안전할 테니 말입니다."
"살수도, 양강기공을 익힌 무인도 경험이 부족하다면 경지와는 상관없이 낭패를 겪을 수 있는 상대. 알겠느니라. 그리 하마."
"예. 그럼 저는 가장 무위가 약한 설리향과 함께 있기로 하고, 당소월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옆을 돌아보자 당소월이 자신만만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초절정이라는 혈염권마는 화린 언니가 상대하겠지요. 나머지는 저 혼자 싸우는 게 차라리 속 편하답니다. ...극독을 꺼낼 수 있으니 말이지요."
"하긴. 당소월 너와 비슷한 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곁에 있는 게 방해겠군."
"후후. 시간은 좀 걸리지만 천 소협도 분명 그리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걱정한 적은 없다만 기대하고 있겠다."
피식 웃어주고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괜찮겠지? 이견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팽우진과 언가혜. 둘의 표정은 이미 각오로 비장해져 있었다. 하지만.
"있잖아. 이제부터 싸우러 가는 거지?"
"그래. 만약 무섭다면 그냥 안전한 곳에 빠져있어도 된다."
"...아냐. 어차피 무인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천휘 너나, 스승님한테 많이 들어본 거니까.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야. 긴장해서. 응."
그리 말한 설리향이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녀의 흐트러진 기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돈된다.
"좋아. 각오 됐어."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아니, 마교도라지만 다른 사람을 죽일 각오 말이야. 나야 당연히 안전하겠지. 천휘 네가 있는데."
"...."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내심 감탄하고 있자니, 설리향이 허리춤에 걸어둔 채찍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이제 가자."
"알겠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서문화린 선배?"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야 서문화린에게 묻자, 그녀 또한 희미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본녀를 따라오거라."
짧은 한마디와 함께 앞서가는 서문화린. 그런 그녀를 뒤를 따라 빠른 걸음으로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저 멀리서 보이는 척 봐도 외지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 모습을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육안으로 확인한 서문화린이 작게 속삭였다.
"이 이상 다가가면 혈염권마라는 녀석의 기감에 걸리겠구나. 여기서부터는 계획대로 찢어져야겠느니라."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고는 일행들과 널찍이 거리를 벌린다. 그리하여 완성된 약간 헐거운 삼각형.
어차피 사람이 얼마 없어 촘촘한 포위는 불가능하다. 거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방비 같은 것.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얼추 준비가 끝났다고 여긴 건지 서문화린이 선두의 사내를 향해 단숨에 뛰쳐나갔다.
타닷.
전력까지는 아니지만, 화경에 이른 절대고수의 편린이 엿보이는 재빠르고 위력적인 움직임.
순간 주변의 자연지기가 서문화린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는 건가.
서문화린이 두어 걸음 내디뎠을쯤. 그녀의 기척을 감지한 혈염권마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의 부하를 내던지며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무슨...!"
어이없어하면서도 강제로 떠밀린 마교도의 골통을 깨부수는 서문화린.
퍼억!
무어라 유언을 내뱉을 시간도 없다. 그저 갑작스레 떠밀리며 자기도 모르게 지른 당황스런 비명이 그의 유언이었다.
손을 털어 피를 닦아낸 서문화린이 황망한 표정으로 외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이라니! 그러고도 네놈이 무인이더냐!"
"어느 고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고로 무림에서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 하였소.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도 도움이 되는 말이었구려."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며 외치는 혈염권마. 생각해 보면 서문화린은 여자면서 몸은 아이지만, 실제 나이는 노인이니 전부 해당되는 말이었다.
한때 곤륜파의 천라지망에서도 벗어난 마인답게 촉이 좋은 모양.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다른 마교도들과, 무표정하게 주변을 지키고 선 살수들이 일제히 서문화린을 향해 달려든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그 사이에 혈염권마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 보려는 모양.
고수가 얼마 없고, 서로가 서로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것이 당연한 마교에서는 합리적인 선택.
물론, 아무리 머리수가 많아도 서문화린의 발을 오래 잡아두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잠깐 숨 돌릴 정도겠지. ...하지만 혈염권마는 그 흉악한 별호와는 반대로 도망에는 이골이 난 무인.
이미 다 계획이 있는지 망설이지 않고, 강을 향해 최단 거리로 경공을 밟고 있었다.
그 속도 또한 상당하니 이대로라면 서문화린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강으로 뛰어들 수 있을 터.
그 귀에는 모르겠다. 무사히 도망칠 수 있는지, 아니면 거센 물살 속에서 잡힐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녀석이 달려오는 방향이 공교롭게도 내가 있는 방향이라는 거다.
"멀리 떨어져라 설리향."
"어? 어어... 응!"
자신이 끼어들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잽싸게 몸을 피하는 설리향.
하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관계자처럼 보인 걸까. 눈을 가늘게 뜬 혈염권마가 다짜고짜 설리향의 등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화르륵.
혈염권마의 주먹에서 타오르는 내공에 쏘아진다.
죽지는 않겠지만, 까딱 잘못하면 전신에 큰 화상을 입을 정도의 위력.
이대로 부상자를 만들어 조금 더 발걸음을 늦추겠다는 노골적인 노림수다.
...하지만 그것보단 내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설리향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잖은 짓을."
단숨에 뽑아 든 검을 휘두른다. 잘 갈린 검풍이 허공을 베어 가르며 혈염권마가 방출한 내공과 충돌하니.
퍼엉!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내공으로 이루어진 불덩이가 반으로 쪼개져 소멸한다.
혈염권마의 앞을 가로막고 녀석의 미간을 검으로 겨누었다.
"이 앞을 지나가려거든 나를 쓰러뜨려야 할 거다."
"그럼 다른 길로 돌아가마."
"?"
망설임 없이 몸을 꺾어 기어이 강으로 뛰어드는 혈염권마. 그 자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에 순간 흠칫했다.
이딴 게 악명높은 마교도...?
회귀 전이랑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118화. 혈염권마
회귀 전의 혈염권마는 그 이름에 걸맞은 실력과 성정을 자랑하는 마인이었다.
아직도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이 선명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정사연합에서 보내준 지원을 전부 불태우고, 새까맣게 탄 시체 위에서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괴인.
자신이 일으킨 불길로 밤하늘을 붉게 밝힌 혈염권마는 홀로 찾아온 나를 발견하자마자 주먹을 휘둘렀다.
기습이었으나, 나 또한 긴장을 풀지는 않았기에 어렵잖게 막아 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뒤따르는 극양의 성질을 지닌 권기.
응축된 내공이 타오르는 불처럼 일렁인다 하여 기염(氣炎)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혈염권마의 기염은 진짜 불꽃 그 자체였다.
내 살기가 녀석을 옥죄고, 검으로는 그 뻣뻣한 목을 베어 내려 했다면.
혈염권마의 주먹은 검을 쳐내며,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열기로 나를 불태우려 들었다.
대화는 일절 없었다. 그저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살초를 겨루었을 뿐.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지, 눈에 초점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노인은 팔에 검상이 하나둘 새겨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광소를 터뜨렸고.
나는 직접 당한 곳은 없으나,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에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빠르게 지쳐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결국 내가 먼저 쓰러지리라는 확신이 들어, 무리해서라도 몸을 빼내 당소월에게로 돌아갔던가.
이후에 이어진 몇 번의 싸움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그런 이유로 나에게 있어 혈염권마는 미친 방화광이고,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는 행위에서 안정을 찾는 잔학한 마인이며, 한 끗 차이로 내가 넘어서지 못한 강자 중 하나였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만 노리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도망치는 녀석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어찌 됐든 내게는 강하고 까다로웠으며, 그만큼 제정신이 아닌 상대였다. 하지만.
"그럼 다른 길로 돌아가마."
"?"
망설임 없이 몸을 꺾어 강으로 뛰어드는 혈염권마.
자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에 순간 흠칫하여 반응이 늦고 말았다.
회귀 전이랑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 아닌가.
분명 나랑 싸울 때만 해도 자기 자신을 장작 삼는 한이 있더라도, 눈앞의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는 미친놈이었는데....
서문화린이. 자신보다 강한 화경 무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치다니.
그래. 알고는 있었다. 원래 저런 녀석이라는 것을.
회귀 전의 혈염권마를 강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도 녀석이 당시의 나를 싸워 볼 만한 상대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네놈이 그러고도 마교의 장로냐!"
풍덩!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혈염권마가 강가에 몸을 던지는 소리. 아직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한 건가.
소리의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뇌명보를 밟았다.
초절정에 한 발짝 내디딘 육체는 이전보다 훨씬 강인해졌으니, 용천혈을 통해 더욱 많은 내공을 더욱 거칠게 터뜨릴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그대로 한층 빠른 속도로 이어진다.
콰릉!
이제는 제법 천둥을 닮은 소리와 함께 밀려나는 몸뚱이. 시야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저 멀리에 있던 강가가 성큼 다가온다.
잔물결로 일렁이는 수면. 강이 제법 넓으니 수영으로 도망치는 중이라면 아직 건너는 중이어야 한다.
즉, 완전히 건너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쯧."
혀를 차며 갈무리하고 있던 살기를 전부 풀어 놓는다.
주변 일대를 뒤덮는 농밀한 살기. 하지만 잡히는 것은 없다. 그저 드문드문 정박해 있는 조각배가 흔들릴 뿐.
살기와 이어진 내 기감은 세밀한 것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그 범위는 평범한 수준.
결국 강가에 서서 인상만 찌푸리고 있자니, 그사이에 다른 마교도와 살수를 죽이고 제압한 서문화린이 다가왔다.
"녀석은 어디 갔느냐?"
"모르겠습니다. 일단 강에 빠진 것까지는 들었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잠시 눈을 감은 서문화린이 처음 혈염권마의 위치를 알아냈을 때처럼 얇게 펴낸 기운을 사방으로 퍼뜨린다.
이곳처럼 작은 말을 정도는 단숨에 뒤덮을 정도로 드넓은 화경 무인의 기감. 아무리 혈염권마라도 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다만.
"...곤란하게 됐느니라."
눈을 가늘게 뜨며 흘러가는 강물을 노려보는 서문화린.
"왜 그러십니까? 설마...?"
"그건 아니니라. 살수의 정점이라 불리는 살왕이라 한들 본녀의 기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거늘. 당연히 혈염권마의 위치는 느껴지느니라. 다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는 서문화린. 그녀가 강의 하류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수공(水功)이라도 익힌 모양이구나. 강의 중앙에서 잠수한 채, 빠르게 멀어지고 있느니라."
"예?"
"아직은 기감에 잡히고 있으나, 조금 있으면 그나마도 벗어나겠구나. 쫓아가는 건... 너무 늦은 것 같고."
"서문화린 선배의 속도로도 그렇습니까?"
"지상에서 달리면 당연히 따라잡을 수 있느니라. 허나 놈은 깊은 물 속에 숨었잖느냐."
이어진 서문화린의 설명에 따르면 등평도수로 수면 위를 달리거나, 허공답보로 하늘을 달리면 속도가 느려진다고 한다.
물살까지 받아 가며 수공을 펼치는 혈염권마를 잡기에는 속도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지상에서 달리며 권강을 쏘아내기에는 강이 너무 넓어서 문제.
"본녀가 백보신권이라도 익힌 게 아니라면 맞추기 힘들 것 같구나."
"아...."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르면 체외로 방출한 내공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당소월이 절정에 오르며 암기에 내공을 실을 수 있게 되었고, 나 또한 아예 검풍에 검기를 실어 혈염권마로부터 설리향을 지키지 않았는가.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다르지만, 이르면 일류. 늦어도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다만, 어찌 됐든 체외로 내공을 쏘아내는 일이니 그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아무리 강한 내공을 실어도, 날아가는 속도는 비교적 느리다는 문제가 있다.
애초부터 내공 그 자체를 다루는 데 집중한 무공인 강기공을 익혔거나, 서문화린이 말한 소림의 백보신권같은 특수한 무공이 아니라면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터.
결국 서문화린이 말한 대로 혈염권마를 지금 당장 붙잡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뽑아 들었던 검을 집어넣고는 가만히 서문화린을 바라보았다.
"보, 본녀를 어이하여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기는! 할 말이 있거든 숨김없이 말하거라!"
"할 말 같은 건 없습니다. ...생각한 건 있지만 말입니다."
"에이잇! 그럼 생각한 것이라도 당장 본녀에게 고하거라."
한쪽 발을 콩콩 구르며 성을 내는 서문화린. 그 묘하게 하찮은 몸짓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냥... 서문화린 선배께서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신 것 치고는 조금 성과가 별 볼 일 없지 않았나 싶었을 뿐입니다."
"끄앙!"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쥐어뜯으며 그대로 무너지는 서문화린. 안쓰럽다면 안쓰러운 모습에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동글동글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죠. 서문화린 선배가 도움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조금 운이 없었을 뿐 아니겠습니까."
"본녀를! 본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괜찮습니다. 저는 서문화린 선배를 탓할 생각 없습니다. 다음에 잘하면 되죠."
"이럴 때 말고 평소에 그런 기특한 말을 하면 안 되겠느냐?!"
"혈염권마는 놓쳤지만, 다른 마교도는 제법 붙잡으셨잖습니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입니다. 놈들을 심문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알아내고, 그대로 팽가와 언가에 넘기죠. 혈염권마에 관해서는...뭐, 다음에 또 기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익! 잡을 것이니라! 본녀가 다음에야말로 꼭 잡을 터이니 그렇게 기억하고 있거라! 알겠느냐?!"
잇소리를 내며 폴짝 뛰어오르는 서문화린. 보아하니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팔만 붕붕 휘두르기 시작하는 모양.
그 모습에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몸을 돌렸다.
"당연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죠. 다들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코흠. 그럼 됐느니라."
이제야 좀 진정한 서문화린과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몇몇은 서문화린의 손에 즉사했지만, 대부분은 팔다리가 박살 났을 뿐 살아는 있었다.
그렇게 바닥을 꿈틀거리는 녀석들을 팽우진과 언가혜가 단단히 묶어 자결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고, 당소월이 중독시켜 무력화시켰으며, 설리향은 그렇게 쓰러진 놈들을 일렬로 늘어놓았고.
일렬로 바닥을 나뒹구는 마교도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이를 본 설리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휘. 아무리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놈들이 저번 마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봐라.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지."
한차례 어깨를 으쓱여 설리향의 시선을 흘려넘기고는 가장 가까운 거리의 마교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녕하신가."
"그윽...!"
"음. 아무리 그래도 말을 못 하면 심문의 의미가 없지. 당소월. 입은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나?"
"어려울 것 없지요."
당소월이 품에서 꺼낸 우모침으로 내 앞에 쓰러진 마교도의 얼굴을 거침없이 찔렀다.
다만 침술을 펼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미량의 독을 흡수하기 위함인지 미세한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우모침. 잠시 뒤,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으득.
입을 열자마자 자신의 혀를 깨물려 하길래, 잽싸게 내공을 둘러 보호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막았지만.
"어딜. 이제부터 너는 자결조차 내 허락을 받아야 할 거다."
"으븝! 으브븝!"
내 손가락을 문 채로, 이쪽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는 녀석. 다만, 입에 이물질이 있어서인지 발음이 부정확해 뭐라는지 모르겠네. 사실 몰라도 상관없다.
중독된 몸으로 작게 꿈틀거리며 반항하는 마교도. 녀석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우웅!
단숨에 내공을 주입하여 기억하는 순서에 따라 혈도를 내달린다.
회귀 전의 정사연합이 머리를 싸매고 만든 마교의 금제와 고독을 동시에 파훼하는 기술이다.
일전에 당진천 앞에서 펼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내공이 마교도의 몸을 마구 헤집는다. 그리고.
푸확!
돌연 입에서 피를 쏟더니,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마교도.
갑자기 백치가 된 것 같은 모습이고, 실제로 가만 놔두면 금방 백치가 되겠지.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묻는 모든 것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물어볼 사람은 많으니, 차근차근 최대한 많은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첫 번째 질문이다. 너희가 하북성에 숨어든 목적은 뭐지?"
"우, 우리는... 팽가와 언가를...."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녀석. 갑작스러운 동료의 배신에 주변 마교도들이 동요하며 분노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에서 힘 풀어라."
다음은 너희니까.
119화. 혈염권마 (2)
심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귀 전에 수십 번은 해 보았던 일이고, 사로잡은 마교도들의 수준 또한 높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천 소협. 혹시 마교와 예전부터 악연이라도 있으셨는지요?"
너무 능숙하게 심문을 이어 나가는 모습에 당소월은 물론이요, 다른 일행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는 것.
잠시 고민하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이건 일전에 당소월 네 습격을 사주한 마교도를 심문하며 장인어른과 함께 펼친 수법이다."
"아, 그래서!"
"가주님도 무서운 분이셨네."
"당연한 일이니라. 자기 딸의 목숨이 위험했는데, 제정신인 부모가 얼마나 있겠느냐.
당진천을 팔아넘기긴 했지만, 덕분에 쉽게 납득하며 넘기는 분위기.
마지막의 서문화린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잘 넘어갔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팽우진과 언가혜를 향해 말했다.
"큰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 마음 같아서는 혈염권마를 마저 쫓고 싶지만... 너희는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말이다."
"나는 가문으로 돌아가야겠다. 하루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하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괜찮다면 포로 몇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한숨을 푸욱 내쉬는 팽우진과, 일부러 멀쩡하게 남겨둔 마교도를 가리키는 서문화린. 그런 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직 살아있는 녀석이 제법 남아 있으니 무림맹에 넘길 놈들을 제외하면 마음대로 해라. 다만, 각자의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이쪽이 동행하도록 하지. 혈염권마는 집요한 녀석이니 따로 움직였다가는 분명 살아서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다."
"그렇겠지. ...고맙다."
"감사드립니다. 이 은은 가문에 돌아가면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꾸벅이는 팽우진과 언가혜.
처음의 그 당당한 모습과 달리 바짝 신중해져 있는 것이 조금 안쓰럽지만... 심문 내용을 들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만큼 심문으로 얻어 낸 내용이 충격적이었으니까.
마교의 목적은 예상했던 대로 팽가와 언가의 사이를 악화시키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팽우진과 언가혜도 죽일 생각이긴 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지만.
"고독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줄이야."
마교의 열화판 영약... 마교도들은 고혈단(蠱血丹)이라 부르는 환약의 안에는 고독의 심장이 들어있다.
영초나 영물이 아닌 평범한 동물의 정혈을 쥐어짜 만들고, 그 과정이 잔인하여 담긴 기운마저 탁하지만.
그렇기에 미약하지만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고독의 심장을 숨기기엔 최적이었던 거겠지.
다만 살아 있는 고독도 아니고, 이미 죽은 고독을. 그것도 심장만 넣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번에 사로잡은 녀석들 또한 혈염권마를 보조하기 위해 동행한 탓인지 아는 게 얼마 없어 심문으로 전부 알아내기도 힘들었고.
다행히 물어볼 상대는 많았기에 추측 정도는 해 볼 수 있었으니.
팽가와 언가가 조사한 것처럼, 고혈단 그 자체로는 부작용이 심할 뿐인 평범한 영약에 불과하나, 마교에는 고혈단을 복용한 사람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릴 수단이 있는 모양.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고독을 심은 것처럼 복용자에게 임의로 고통을 가할 수도 있고, 이를 매개 삼아 사술을 부릴 수도 있겠지.
어떤 수작을 부리건 확실한 것은 마교에게 이득이고, 팽가와 언가에겐 막대한 피해가 될 것이라는 점.
잠시 회귀 전의 양상을 떠올려 보았다.
팽우진과 언가혜의 사후. 두 가문의 사이는 검을 빼 들지만 않았을 뿐, 최악으로 치달았고.
결국에는 어느 한쪽이 멸문을 맞이해도 도와주러 가지 않았었지.
그렇게 하북팽가와 진주언가는 정사연합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마교의 손에 각개격파 당한 가문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멸문당했다지만, 그거야 천마가 직접 나선 다른 곳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다른 멸문한 세가나 문파에 비해, 두 가문의 생존자가 얼마 없었다는 점?
물론 직계나 일대제자 같은 이들은 거의 죽고, 운이 좋아야 한두 명 탈출하는 게 전부긴 하다.
하지만 방계 혈족이나, 어리고 약한 삼대제자 같은 이들을 우선순위가 떨어지는지 덜 집요하게 추적했고.
덕분에 꽤 많은 수가 살아남아, 자신이 속한 가문과 문파의 멸문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게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네.
뭐,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지만.
팽우진과 언가혜를 쫓다가 자진으로 몰아간, 혹은 자진으로 꾸며 낸 마교도는 전부 백치가 되었거나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
그나마 하나 남은 혈염권마는 서문화린의 무위에 기겁하며 줄행랑치지 않았던가.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혈염권마를 잡는 것보다, 마교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다른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언가로 향하고자 한다만 괜찮겠나?"
"천 소협의 뜻대로 하시지요."
"나도 당연히 괜찮아. ...그런데 걸어가면서 이만한 포로를 데려가는 건 힘들지 않아?"
"본녀 또한 천휘 그대의 말에 동의하느니라. 혈염권마를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나, 녀석을 죽이는 것보다는 두 아해들을 지키고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을 우선해야 할 터."
별다른 불만 없이 동의해 주는 일행들의 모습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고맙다. 그리고 설리향 네 말대로 이만한 포로를 전부 데려가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 하지만 마침 여긴 강이 흐르는 곳 아닌가. 중간까지는 배로 이동할 생각이다."
"배는... 처음 타 보겠네."
전투가 일단락나며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그냥 배를 타볼 생각에 설렌 건지 히히 웃는 설리향.
진주언가의 비교적 가까운 곳에 요하라는 이름의 강이 하나 흐르고 있고, 이곳은 요하강과 이어지는 물길 중 하나다.
우리 일행만 해도 여섯에 살아 있는 포로를 합치면 열을 넘는 인원이 이동해야 하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 그만큼 넓은 마차를 어떻게 구하겠는가.
그냥 배 타고 언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리고, 서신을 보내 마중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낫지.
"자, 그럼 이제 출발하지. 그 전에 정리할 건 정리하고 가야겠지만."
검을 뽑아 백치가 된 마교도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설리향이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 물었다.
"죽이게?"
"그래.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만, 그냥 놔둬도 저 상태로는 스스로 밥도 먹지 못해 곧 죽을 거다."
"응. 뭐라고 하려는 건 아냐. 애초에 마교도들이 저번 마을을 불태우며 무슨 짓을 했는지는 봤으니까.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건 알아. ...그냥 조금 무서워져서 말이야."
"뭐가 말이냐."
"분명 저들도 나름의 억울함이 있고, 이를 풀 방법이 없어 스스로 무공을 익힌 거잖아.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치며, 또 다른 원한을 낳으려 한다는 게. 그 굴레가 조금 아득하게 느껴져서 말이야."
"일단 말해 두지만 아무리 무림에서 은원이 중하다고 하나, 마교는 명백히 선을 넘은 것들이다. 일전에 서문화린 선배가 말한 것처럼 단순한 화풀이요, 미치광이의 학살에 불과하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다만... 방금 한 번 죽을뻔했잖아?"
"혈염권마가 쏘아 낸 권기를 말하는 거라면, 그 정도로 너는 죽지 않는다. 내가 몇번이고 막아낼 터이니."
"어? 으응. 고, 마워?"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설리향이 스윽 시선을 피하더니,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에야 말을 잇는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던 건 그거야. 어찌 됐든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만약 내가 죽는다면 천휘 너나 당 언니가 어떨지 걱정되더라고."
"어떻게라. 그거야 당연히 복수해야겠지."
이번 생에는 그럴 일이 없을 거다. 없겠지만...혹시라도 설리향이 모종의 이유로 살해당한다면 당연히 복수해야겠지. 회귀 전에 그러했듯이.
내 즉답을 들은 설리향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바로 그게 걱정이라는 거야. 너무 과할까봐. 당연히 나도 오래 살고 싶지만, 그래도 여차할 때는 그냥 당 언니랑...."
"그만. 왜 갑자기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순간 회귀 전의 설리향의 최후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차가운 어조로 말을 끊었다.
이에 잠시 멈칫한 설리향이 애써 밝은 목소리를 지어냈다.
"으응. 나도 좀 너무 가긴 했네. 미안. 그럼 나는 그동안 당 언니랑 배를 알아보고 있을 테니 할 일 하고 있어."
"...그래."
뒤늦게 평상시의 어조를 끌어 올렸으나, 이미 저 멀리 달려가 당소월의 팔을 잡고 한쪽으로 웅성이는 양민들 쪽으로 데려가는 설리향.
복잡해진 심정을 털어내듯 고개를 휘휘 젓고는 백치가 된 마교도들을 최대한 깔끔하게 베어 냈다.
그리고는 아직 살아 있는 놈들을 팽우진과 언가혜에게 맡기고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서문화린에게로 향했다.
"서문화린 선배.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알고 있느니라. 만약 혈염권마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노릴 마지막 기회는 배로 이동하는 도중일 터. 도착할 때까지 신경 쓰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표정이 어둡구나. 향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 이참에 본녀도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느니라."
"무엇입니까?"
"천휘 그대의 과거. 한때 본녀와 같은 서문세가의 사람을 사부로 두었다는 것은 알겠느니라. 흑천검문을 원수로 여기던 이유도 이해했고."
서문화린이 이쪽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잘 보여 주지 않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헌데, 이제 보니 마교에도 품은 원한이 보통이 아닌 것 같구나. 그대는 본녀를 위해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감수하고, 목숨의 위험 또한 감수하였지. 본녀는 이를 가슴 깊이 고맙게 여기고 있느니라."
"이리 도와주시고, 가끔 무공을 봐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대를 재촉하거나, 무언가 캐내려는 것은 아니었느니라. 그저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이니라. 본녀는 물론이요 다른 이들도 그대의 편이라는 것을."
"...."
서문화린의 은은한 붉은색 기운이 도는 눈동자를 피하듯 잠시 눈을 감았다.
여전히 회귀의 이유는 모르고, 천마는 생각만 해도 막막하며, 마교는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놈들이었는데, 금제까지 빡빡하게 걸려 있는 상황.
아무리 나라도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찌 됐든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
나는 회귀 전보다 더 강해질 것이며, 지키지 못한 이들을 지켰고, 전혀 모르고 있던 마교의 암계 또한 하나둘 밝혀내고 막아내는 중이다.
과거의 일을 잊을 수는 없어도, 너무 날카롭게 반응할 필요도 없으리라.
깊은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배에서 설리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습니다."
"잘 생각했느니라."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화린. 그녀가 작은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이는 것을 받아주고 있자니, 당소월과 설리향이 돌아왔다.
"천 소협! 저희가 전부 탈 만한 배는 없다고 하여, 그냥 여러 척을 빌렸답니다! 이 마을의 어부분들이 길잡이 겸 노잡이 역할을 해 주실 거고요."
"그럴 것 같았다."
혈염권마를 상대하면서 보니 정박해 있는 배의 크기가 전체적으로 고만고만하더라. 많아 봐야 한 척에 길잡이 제외 서너 명 타는 게 전부이리라.
"후후. 상상했던 뱃놀이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어찌 됐든 천 소협과 함께 배에 탈 수 있겠네요."
"아,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설리향이랑 타도 되겠나?"
"...네?"
평범한 어조와 평온한 표정. 그저 대답이 반 박자 늦었을 뿐인데 묘한 압박감이 느껴져 황급히 덧붙였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 끝나면 바로 네가 있는 배로 가마."
"아하? 그런 거라면야."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방긋거리는 미소로 끄덕이는 당소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 좁게 느껴지는 배에 올라탔다.
***
멀리 도망간 줄 알았던 혈염권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주변의 둑을 무너뜨려 생긴 토석류와 함께.
설리향과 함께 타고 있던 배가 뒤집혔다.
120화. 혈염권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