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90-100

[90] 90화. 인정

흑천검문주가 쓰러졌다고 하여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흑천검문의 생존자는 남아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흑천검문주를 상대하느라 너무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는 것. 검 몇번 휘두를 정도는 되겠지만 절정 무인을 둘이나 베는 것은 힘들 터.

이를 알아차렸는지 조금 전의 전투에 압도되고, 문주의 죽음에 굳어있던 이들이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지, 지금이다! 문주님의 원수를 갚아라!"

"숨을 고르게 두지 마라! 죽을 땐 죽더라도 혼자 죽지 마라!"

"...지랄들을 하는군."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달려드는 상대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조금 지쳐 보이긴 하지만 여력은 충분해 보이는 선두의 절정급 둘.

분명 이대로라면 힘겨운 개싸움이 시작되겠지.

하지만 이미 내 검으로 흑천검문주를 베어낸 이상, 굳이 정직하게 받아줄 필요는 없다.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는 품에서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퍼엉!

큼직한 폭발음. 무수히 많은 우모침이 쏘아지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절정급 무인의 얼굴을 뒤덮는다.

묵연침통(墨煙針桶). 소량의 화약을 이용한 암기 발사대 같은 것으로 당가를 떠나기 전, 당진천으로부터 하나씩 호신용으로 받은 기물 중 하나다.

"뭣?!"

난데없이 튀어나온 당가의 비전에 기겁한 녀석이 다급히 검을 휘둘러 보지만...검기고 나발이고 이렇게 많은 우모침을 어떻게 전부 쳐내겠는가.

애초에 묵연침통 같은 것은 그 전조를 읽고 미리 자리를 피하거나, 검기를 길게 늘린 검막을 펼칠 수 있어야 막아낼 수 있는 것.

아쉽게도 둘 다 해내지 못한 상대는 군데군데 우모침이 박힌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커헉!"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물든 안색. 당연한 말이지만 우모침은 그 자체로는 살상력이 거의 없는 무기. 그렇기에 항상 극독을 발라놓는다.

이 자리의 모두가 당황해 쓰러진 놈을 바라보았다. 썩어도 절정급인지 바로 죽을 것 같지는 않네. 어쩌면 시간을 들여 독기를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만,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운기행공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은 사실.

지금 몸 상태로도 절정급 무인 하나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터. 그래도 좀 더 쉬운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면에 박혀있는 검을 한 손으로 뽑아 겨누고, 다른 손으로는 품에서 주먹만 한 유리구슬을 꺼내 들었다.

대단한 투척술은 필요 없다. 그냥 던지면 유리가 깨지며 안쪽에 가둬둔 독연이 퍼져나갈 테니까.

물론 안에 담긴 독연은 상당한 맹독이고, 그 특성상 피아를 가리지 못하지만....

당소월 덕에 꾸준히 학령초를 먹어 식물 독 전반에 내성이 있는 내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거라면 남은 몇 명의 일류 무인마저 그대로 쓰러질 터.

결국 혼자 나를 상대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흑천검문의 마지막 장로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비겁한! 네놈이 그러고도 무인이고 검수란 말이냐!"

"당가의 사람이 암기와 독을 쓰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암기술과 독공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신외지물에 의존한 수지만...어찌 됐든 당가의 기술 아닌가. 그리고 나는 당가의 데릴사위고.

"꼬우면 미리 대비했어야지."

"...!"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자니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눈동자. 하지만 어차피 살아서 빠져나갈 방도는 없다는 깨달았기 때문일까.

상대의 눈동자에 결연한 기색이 서린다.

"좋다. 그럼 어디 한번 흑천검문의 마지막 검을 받아 보아...."

퍼억!

말하던 도중.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돌연 수 장을 굴러 바닥을 나뒹구는 녀석.

가슴께가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파인 것을 보아 즉사는 확실하네.

설마 싶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작은 입술을 앙다문 서문화린의 주먹을 휘두른 자세로 서 있었다.

조금 전의 일격은 그녀가 뻗은 권풍이었으리라.

왜인지 눈가가 촉촉한 서문화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끼어들면 안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사이에 마음이 또 바뀌었다더구나."

"???"

아니. 상관극이 그래도 사흑련주인데 이렇게 오락가락해도 되는 건가?

내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지만, 이건 좀 그래서 상관극 쪽을 바라보았다.

두 자루의 창을 다시 등에 멘 그가 껄껄 웃으며 이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본 련주가 한 약속은 네놈이 흑천검문을 쓰러뜨렸을 때, 조용히 보내주기로 한 것뿐이다."

"거짓말! 저희 문주님과 백발나찰을 막아주시겠다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얼어있던 흑천검문의 일류 무인이 악을 썼지만, 상관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 흑천검문주가 죽었잖냐. 죽은 사람이랑 나눈 약속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어디 있지? 무엇보다...."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 약자를 향한 경멸을 숨기지 않은 이죽거림이었다.

"진정 백발나찰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다 하여 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나?"

"...."

입을 꾹 다무는 녀석. 알고 있는 것이다. 설령 그대로 나와 싸웠더라도 쓰러지는 쪽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깨를 축 늘어뜨린 녀석이 고개만 번쩍 들었다. 그 눈에는 질척한 원한이 가득했었다.

"내 형님은 백발나찰 네년의 손에 죽었다."

"본녀의 오라비 또한 흑천검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느니라."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생각은 없다."

"본녀라고 다를 줄 아느냐?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던 과거를 이제야 마무리 지을 수 있겠구나.

코웃음 치며 주먹을 허리춤에 가져다 대는 서문화린. 금방이라도 권풍을 쏘아낼 것 같은 모습에 비틀거리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앗! 비키거라! 설마 저 녀석들을 감싸려는 것은 아니잖느냐!"

방방 뛰는 서문화린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잊으셨습니까."

"무얼 말이느냐."

"흑천검문은 재차 멸문시키는 것은 저라고 했습니다."

"그건...."

서문화린이 무어라 반박하려는 것보다 한발 빠르게 왼손에 쥔 큼직한 유리구슬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파열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독연. 소매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내공을 끌어 올려 저항하는 이는 있어도 뒤로 물러나는 이는 없었다.

눈, 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내게 달려드는 흑천검문의 무인들. 그중 대부분은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쓰러졌지만, 일부는 어떻게든 도착해 검을 휘두른다.

힘은커녕 무게조차 제대로 실리지 않은 검격을 가볍게 피하고 쳐내며 그대로 죽기 직전의 숨통을 완전히

마지막까지 서문화린에게 복수심을 표하던 녀석이 자기 심장을 꿰뚫은 검을 맨손으로 부여잡았다.

칼날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뚝뚝 떨어지는 핏물.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피를 한 됫박 토해낸 그가 마지막까지 원망의 말을 토해냈다.

"너희를...저주한다."

"그러던가."

"하지만 너희가 우리를...쿨럭! 원망하는 것 또한 이해한다."

"...뭐라?"

그런 말을 들을 거라 예상치 못했기에 나도 모르게 흠칫 떨리는 어깨.

녀석이 천천히 감겨가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네 원한을 보았다.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살의를 느꼈다. 우리가 품은 원한을 다른 이들도 우리에게 품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이었지."

"이제와서 사죄라도 하려는 건가."

"그럴리가. 다만...언젠가 네놈도 스스로의 업보에 짓눌리길 바랄 뿐이다."

"허."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이는 녀석.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별거 아니었네.

"진작에 알고 있었다."

회귀 전. 검귀라 불리며 흑천검문의 관계자를 전부 베어 죽인 나를 원수로 여기는 자가 한두 명이었겠는가.

어쩌면 언젠가는 녀석의 말대로 은원의 굴레에 내가 당하는 날이 올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결국 찾아온 것은 나의 업보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였다.

중원 무림의 복잡한 은원을 케케묵은 옛이야기로 만드는 고금 제일의 괴물. 천마.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싶군."

결국 이번 생에도 천마의 손에 죽는다면 내가 쌓아 올린 은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흩어지는 것이고.

천마를 쓰러뜨린다면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어있을 테니 어중간한 복수에 당할 일은 없겠지.

뭐, 어느 쪽이건 흑천검문과의 악연은 오늘로 끝을 맺었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다.

"후우...."

마지막으로 처음에 묵연침통에 당한 녀석을 마무리 지으러 돌아보았으나, 그곳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죽어있는 시체뿐이었다.

아무래도 우모침에 묻은 독을 몰아내던 도중, 독연의 독기가 더해지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내장이 녹아내린 것이리라.

"...이제 끝인 게냐?"

내게 다가와 조심스런 어조로 묻는 서문화린.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일단은 그래 보입니다."

"허면 거기 가만히 서 있거라."

마침내 접근 허가(?)가 떨어진 서문화린이 내게 다가와 그 작은 체구로 낑낑대며 부축해 주기 시작했다.

조금. 아주 조금 서 있는게 편해졌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서문화린을 응시했으나, 그녀는 진땀을 흘리며 내 몸을 살펴볼 뿐이었다.

"이런. 외상도 심각한데 내상 또한 만만치 않으니라. 특히 혈도는 너덜너덜하고 단전은 일그러진 것이 회복에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은데...."

"뭐, 시간만 있으면 나을 수준입니다."

"그게 몇 년이 걸릴 줄 알고 그러느냐!"

"몇 년까지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내가 이래저래 뜯어고치긴 했지만, 원래 광랑탈명공은 하자가 많은 무공이다.

근간이 근간이기도 하고, 정순함에서 오는 안정성을 포기하고 위력에 집중한 무공이기에 폭혈공의 묘리도 상당히 섞여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개량 과정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몸으로 시험해 본 것. 당연히 그만큼 덜 치명적으로 다치는 법이나, 빠르게 회복하는 요령 정도는 익히기 싫어도 익히게 된다.

외상은 모르겠는데, 내상은 길어봐야 석 달이면 어떻게든 될 터.

호들갑을 떠는 것을 넘어 눈가에 물기가 촉촉하게 차오르는 서문화린의 모습에 곤란해하던 차.

만족스레 내 마지막 전투를 지켜보던 상관극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던졌다.

"받아라."

"이건...?"

작은 환약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 매듭을 풀자 알싸한 약향이 풍겨온다.

"사흑련에서 쓰는 내상 치료용 요상약이다. 내공 증진 효과는 거의 없지만, 회복에는 훌륭하더군. 금돈의(金豚醫)가 만든 것이니 믿어도 좋다."

"금돈의!"

서문화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기야. 금돈의가 유명하긴 하지.

언제나 휘황찬란한 금색 장포로, 툭 튀어나온 배를 감춘 의원. 돈만 충분히 지불하면 정사를 가리지 않고 치료해 주는 무림의 기인 중 하나.

상당히 비싼 대금을 요구하고, 돈이 없는 환자는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그 뛰어난 실력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감사합니다만 대체 왜 이걸 제게?"

"그게 금돈의의 약이 맞는지 확인은 하지 않는 거냐?"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였습니다. 제가 그래도 당가에서 삼 년을 살았으니 약인지 독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

사실 회귀 전의 상관극이 종종 금돈의에게서 약을 사들이는 모습을 본 적 있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뿌리며 환심을 사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설령 진짜 나를 속이고 독을 먹이려는 것이라 해도 당가에서 받은 최상급 피독주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낙관도 조금 있고.

다치고 지친 몸으로 상관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시선에 약간의 호의 그리고 진득한 욕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물건이구먼. 이름이 뭐라고 했나? 천...천호?"

"천휘입니다."

"그래 천휘. 이것도 받아 가라."

품에서 꺼낸 흑색으로 칠한 상아에 금박을 입힌 화려한 패를 건네는 상관극.

그 위에는 보란 듯이 사흑련주(邪黑聯主)라는 글자가 붉은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

아니 이걸 여기서?

상관극이 인재 욕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명백히 정파의 인사에 속하는 내게 련주패를 넘길 줄은 몰랐는데.

"알지 모르겠지만 그건 련주패라는 거다. 사흑련 본단에서 보여주면 귀빈으로 맞이할 테니, 언제든 찾아오고 싶을 때 찾아와라. 다시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예?"

"딱 한 번. 그 패를 가지고 사흑련을 방문하면 본 련주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뭐든 들어주마. 대신 그날 이후로 너는 사흑련에 소속되어 본 련주의 수하가 되어야 한다."

꽤나 파격적인 조건. 하지만 서문화린은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잇! 당장 버리거라! 본녀도 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뭐든 해줄 터이니, 그 패는 당장 버리거라! 지지니라!"

땅바닥에 떨어진 당과라도 본 것처럼 내 손목을 탁탁 치는 서문화린. 하지만 이게 얼마나 큰 호의라는 걸 아는 사람으로서 바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쓸 일이 없는 게 최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아닌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나쁠 건 없다.

서문화린의 손을 피해 련주패를 품에 넣고 포권을 취했다.

"련주패도 그렇고 이 요상약도 그렇고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제가 그 호의에 답해드릴 거라고는 장담 드릴 수 없습니다만."

"흐흐. 지금은 그걸로 됐다. 보아하니 앞으로 네놈과는 오래 볼 것 같으니까."

그리 말한 상관극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선물도 있지만...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지. 지금은 지금의 승리를 만끽하도록 해라."

자기 할 말을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상관극.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문화린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둥글둥글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녀의 말을 듣지 않고 패를 받아든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잠시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지금은 쉬면서 몸을 회복시킬 곳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어디 객잔이나 잡고 기다리면 무림맹에서 알아서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나머지 치료는 그쪽에서 받기로 하죠."

서문화린의 몸에 반쯤 체중을 실은 채,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하려던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발걸음을 물렸다.

"왜 그러느냐?"

"그래도 챙길 것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닥을 나뒹구는 흑색 일체의 검. 그리 격하게 부딪혔음에도 흠집 하나 없는 검신은 여전히 매끄러웠다.

"통짜 현철인가."

사람은 미워해도 물건에 죄는 없잖은가.

[9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1] 91화. 인정 (2)

"이잇! 흑천검문의 검이 그렇게 좋은 게냐?"

침상에 누운 채, 새 검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모습에 심통이 난 걸까. 허리에 손을 얹은 서문화린이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

살짝 튀어나온 볼을 찌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새로 얻은 검을 들어 보였다.

"보십시오. 검신을 물론, 검 자루와 코등이까지 전부 현철로 만든 녀석입니다. 자루 겉 부분에 감은 가죽을 제외하면 단단히 맞물린 하나의 쇳덩어리나 다름없죠."

"그게 그리 대단한 것이느냐?"

"단순히 서로 맞물리게 설계하든, 다른 방식을 사용하든 한 자루의 검으로서 완결성을 지닌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짜 현철로 주조한 것은 아마 이 검 하나뿐일 겁니다."

"애초에 그 현철 검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는 소리니라."

"후우. 이러니까 권사는."

"무어라?!"

눈을 사납게 뜬 서문화린. 그 불합리한 분노에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었다.

"우선 현철은 그 성질부터가 멋있습니다. 순도 높은 현철은 무엇 하나 반사하지 않는 순수한 검은색을 띠지만, 광을 내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반듯하게 빛낼 수 있죠. 그 시점에서 이미 멋있지 않습니까?"

"...자, 잘 모르겠다만."

장난으로 벌집을 쑤셨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벌 떼에 기겁한 사람처럼 주춤거리는 서문화린.

불쌍하게도....

현철 검의 멋짐을 모르는 서문화린을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우선 도망가지 못하도록 손목을 꼭 붙잡은 상태에서.

"흐앗!"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현철은 다른 금속보다 훨씬 무겁지만, 그 대신 훨씬 단단합니다. -아직 외공과 내공의 수련이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에게는 쓰기 불편한 검일 뿐이나, 절정에 오르기만 해도 확 달라지는 것이 바로 현철로 만든 검입니다."

"하, 하지만 현철로 만든 무기보다는 한철로 만든 것이 더 고평가받지 않느냐. 천휘 그대가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게 잘 이해가 안 되느니라. 하물며 원수의 검이거늘...."

"...갈!!"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기. 결국 이를 참지 못하고 내뱉자, 제자리에서 폴짝 뛰며 놀라는 서문화린.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놀람과 억울함이 뒤섞인 표정에 나 또한 짐짓 엄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서문화린 선배. 길 가다 재수 없게 산적을 만나면 역으로 놈들을 쓰러뜨리고 시체에서 전낭을 챙긴 적이 있지 않습니까?"

"보, 본녀는 없느니라."

"...."

하기야.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겠으나, 마음만 먹으면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던 서문화린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흑천검문과 다른 사파 문파를 쓰러뜨리며 재물을 털어가기만 해도 삼대는 놀고먹을 부자가 되었을 테고.

하지만 서문화린은 그러지 않았다. 필요한 만큼은 챙겼으나, 자신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복수라며 그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챙긴 것은 서문세가의 무공이 유일하다.

어찌 보면 순수한 일념. 그렇기에 지금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만.

"모르시면 그냥 알아만 두십시오. 보통은 가져다 씁니다. 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물건에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러하느니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문화린. 좋아. 일단 여기까지 납득시키는 데는 성공했네.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세상 사람들은 만년한철로 만든 검을 최고로 칩니다. 저도 여기에는 동의합니다. 만년한철은 극히 희귀하다는 문제를 제외하면 좋은 점밖에 없지 않습니까."

만년한철은 그저 깔끔하게 단조하기만 해도 검강을 버텨낼 정도로 단단하다.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아니기에 조금씩 패이고 휘어지겠으나...다른 무엇도 아닌 강기에 버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거기에 내공을 증폭시키는 공능까지 있어 같은 힘으로도 더 큰 검기나 검강을 피워올릴 수 있다나.

무림에서는 무림맹의 상징이자 역대 무림맹주들 사이에서 계승된 정천검(正天劍)이 유일한 만년한철 검이라 정확한 정보가 드물다.

널리 알려진 게 이 정도니, 어쩌면 더 대단한 검일 수도 있으리라.

"뭐, 만년한철은 너무 희귀해 현실적으로 명검이라 함은 대체로 한철이나 현철로 만든 것입니다. 그중 현철에 관해서는 제가 조금 전에 말했으니 넘어가고...한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음기를 머금어 항상 차갑고 녹이 잘 안 슬어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 가볍고 단단하다는 것. 아무래도 이 셋이 가장 큰 특징 아니겠느냐."

"그중 녹이 잘 안 슨다는 것 말고는 전부 현철의 하위 호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으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문화린. 그녀를 위해 보다 상세히 그리고 차분하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가벼운 것은 좋지만, 외공을 수련해 힘이 강해지고 쌓아 올린 내공으로 이를 보조하면 다른 검도 전부 가벼워집니다. 자신의 검을 한 손으로 쉬이 휘두를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얼마나 더 가벼워지든 의미가 없죠. 반면 무거움은 다르잖습니까"

"그럴싸하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기만 하다면 무거움은 곧 힘이 되는 법이니. 쾌검 같은 경우에도 가벼우면 당연히 좋겠으나, 그대 말대로 일정 이상의 가벼움에는 큰 차이가 없는 법."

"예. 애초에 쾌의 묘리는 얼마나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힘을 집중시키느냐가 관건 아닙니까. 검신의 탄성을 이용하는 변검이나 환검이 되면 또 이야기가 다르겠습니다만...."

"그 둘은 목적이 명확하여 검을 따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 예외로 치자꾸나. 허면 단단함은 어째서더냐?"

"말해 무엇합니까. 괜히 용봉지회 예선에 한철 덩어리 대신 현철 덩어리를 쓰는 게 아닙니다. 더 튼튼하니 그런 것이죠. 무엇보다 내공을 좀 난폭하게 운용해도 문제없이 받아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허어. 그리 생각하니 또 맞는 말이구나."

지금이야 당가에서 만들어 준 백련정강 검을 사용하니 큰 문제가 없지만, 회귀 전에는 돈이 없거나 괜찮은 장인을 구할 수 없어 싸구려 검을 사용했던 시기가 종종 있었다.

잘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이 부러졌을 때의 철렁함이란....

한번 당해본 사람이라면 좋은 검에 집착할 수밖에 없으리라.

내 이야기를 들은 서문화린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우. 알겠느니라. 현철 검이 그대에게 그리 중한 것이었다면 원수의 검이라고는 하나, 이대로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이니라...."

조금 미련이 남은 얼굴로 내 손에 들린 흑검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그 모습에 깨달았다. 무언가 오해가 있다는 것을.

"서문화린 선배. 한가지 정정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얼 말이느냐?"

"제가 이 검을 유용하게 사용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그대로 써먹진 않을 겁니다."

"...으에?"

어벙한 표정을 짓는 서문화린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통짜 현철 아닙니까. 그대로 녹여내면 이만큼의 현철이 나온다는 소리입니다. 당가에 가져가 한차례 녹인 뒤, 새로운 검을 만들어달라 할 예정입니다."

"그, 그래도 되는 것이느냐?"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것 같지만...당가의 장인이 한발 앞선 것 같더군요."

무공이 시간이 지나며 발전하듯, 야장술 또한 시간이 지나며 발전하기 마련.

하물며 당가는 유능한 대장장이들이 모여 사는 가문이기도 하지 않나. 그들 간의 기술 교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진짜 전설적인 대장장이가 만든 것이라면 오래되어도 훌륭할 수 있지만...이 검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더라.

그 이야기에 살짝 처져있던 서문화린이 방실거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음음. 그렇다면 본녀는 아무런 반대도 없느니라. 아니, 대찬성이니라.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실실 웃는 나와 서문화린.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다소 현실적인 주제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몸 상태는 어떠하느냐? 요상약은 반쯤 먹은 것 같다만...효과는 좋은 게냐?"

"예. 벌써 일주일째 누워있는 것 아닙니까. 외상도 얼추 아물었고, 내상도 군데군데 찢어진 혈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금돈의의 약은 효과가 좋았다. 당초에는 석 달을 예상했던 회복 기간이 이대로라면 한 달로 줄어들 정도로.

물론 아직 완전히 회복되려면 멀었다. 하지만 전부 회복한다면 분명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겠지.

무리했다고는 하나, 초절정에 이르는 깨달음을 휘두른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지금의 몸뚱이는 사실상 초절정에 반쯤 발을 걸친 단계라고 봐도 괜찮으리라.

신검합일을 이루며 정기신 중 기와 신을 합일시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부족한 내공을 채워 온전한 초절정에 오르는 일뿐.

...물론 채워야 하는 내공이 좀 많이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그릇을 넓히는 것과, 채우는 것 중 후자가 훨씬 쉽겠지.

이번에는 좀 위험할 뻔하기도 했고, 다소 우악스럽긴 했으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싶어 나 또한 자세를 최대한 바로잡았다.

그러자 서문화린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본녀가 조금 생각해 봤느니라."

"무엇을 말입니까?"

"천휘 그대는 이리된 것이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본녀에게는 본녀를 위해 다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느니라."

"저런. 자의식 과잉이십니다. 제가 서문화린 선배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잘 됐으면 좋다고 여기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읍읍!"

돌연 내 입을 덮는 말랑하고 따스한 감촉. 미간을 살짝 찌푸린 서문화린이 조막만 한 손바닥으로 내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쉿. 본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 조용히 머리가 끄덕이거라."

"...."

끄덕끄덕.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 서문화린.

만족한 건 만족한 거고 손을 놔줄 생각은 없나 보다.

"여하튼 본녀가 생각해 본 바. 그대가 이리 다친 일에는 본녀의 책임도 상당 부분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만약...."

만약 서문화린이 복수를 완벽히 행하여 놓치는 이가 없었다면.

만약 서문화린이 내 말을 들어 용봉지회를 끝까지 치르지 않았다면.

만약 서문화린이 상관극의 말이 흔들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처음부터 관철했더라면.

무수히 많은 만약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한숨만 푹푹 내쉬던 서문화린과 시선이 마주쳤다.

꼴깍.

왜인지 한차례 침을 삼킨 서문화린이 침상을 팡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 엎드리거라. 본녀가 친히 추궁과혈을 통해 그대의 회복을 도울 터이니."

"?"

기분 탓일까.

어째 서문화린의 추궁과혈이라는 말이 조금 음흉하게 들렸다.

[9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2] 92화. 인정 (3)

추궁과혈은 기본적으로 가까운 사이에서나 해주는 일이다.

우선은 난이도. 정확한 혈도에 정확한 내공을 꾸준히 주입해야 하기에 어느 한쪽이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간격 안에 들어오는 걸 넘어, 아예 혈도에 조금씩이나마 내공을 주입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실력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믿을 수 있는 이에게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추궁과혈이다.

마찬가지로 해주는 쪽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하다 보니 잘 안 해주려 하는 것이다.

혈도를 깨끗이 하는 벌모세수나, 가진 내공을 물려주는 격체전공과 달리 신체를 빠르게 회복시켜 주고 건강히 만드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효과도 없으니 그 필요성이 비교적 낮다는 점도 있고.

나야 설리향에게 자주 해 주었지만...그거야 회귀 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데다가, 지금의 설리향은 무림의 불문율 같은 것을 잘 모르는 데다가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기에 가능했던 일.

그런 의미에서 알 거 다 아는 서문화린이 추궁과혈을 해주겠다 하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회귀 전에도 들은 적 없는 제안이니까. 무슨 계기라도 있었던 걸까?

"추궁과혈 말씀이십니까? 조금 당황스럽습니다만."

"왜 그러느냐. 설마 본녀를 못 믿겠다는 건...."

"물론 서문화린 선배는 믿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한 달. 심지어 흔적을 남기는 걸 넘어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리고 있으니, 곧 무림맹의 인사들이 찾아오겠죠."

"...그래서 안 받겠다는 소리느냐?"

조금 시무룩해진 서문화린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서문화린 선배의 추궁과혈은 받아야죠. 그저 갑작스레 권하신 연유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흐흠. 그런 거라면 조금 전에 말했듯이 본녀가 그대의 부상에 나름의 책임을 안고 있기 때문이니라. 무엇보다 자식이 아플 때 간호해 주는 것이 부모 된 도리 아니겠느냐."

"그거 아직 포기 안 하셨습니까? 제가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힌 건 사실이니 스승으로 모실 생각은 있습니다만 이 나이에 갑자기 양어머니가 생기는 건 좀...."

회귀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나다. 당시의 나이를 합쳐도 서문화린보다 어리다는 건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내 체감 나이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은가.

이런 내 완고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다소 불퉁한 표정으로 침상을 재차 두드리는 서문화린.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은 엎드리거라."

"예, 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뒤집었다. 격하게 움직이면 당연히 어디 하나 터지겠지만, 살살 움직이면 이 정도는 문제없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무게감. 서문화린이 내 위에 올라타는 감각이었다.

"후으. 그, 그럼 이제 시작 하겠느니라."

"왜 그렇게 떠시는... 오."

서문화린의 목소리가 떨리길래 조금 걱정했으나.

어깨 위에 작은 손이 올라오고, 이어서 약간의 압박감과 함께 내공이 들어오는 순간. 약간의 의심조차 그만두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추궁과혈을 해준 적은 있어도, 받아본 적은 없었던가.

어깨에서 들어온 기운이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뒤이어 서문화린의 손이 허리를 향해 내려올 때마다 이러한 열기는 더욱 증폭되며 전신을 맴돈다.

스스로 운기행공을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나른함에 가까운 활력이 몸을 가득 채우는 감각.

그래. 마치 날 좋은 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마루에 누워,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스스로 떠올려 놓고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란 말이지.

과연. 설리향이 내 추궁과혈을 받은 뒤에 한동안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게 이래서인가.

...아닌가?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서문화린의 추궁과혈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공의 흐름이 원활해지고, 내상을 입은 부분은 부드럽게 감싸 회복은 돕는 간질간질한 감각.

정확히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 혼자 운기행공할 때보다 훨씬 더 자연 치유력을 끌어올려 주리라.

쪼물쪼물.

한차례 허리 아래쪽까지 내려온 서문화린의 손이 다시금 어깨 위로 올라간다.

잠시 끊긴 흐름. 그 틈을 타 자연스레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후우...."

"앗, 괜찮았느냐?"

"예. 추궁과혈을 받는 것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좋습니다."

"후후. 사실 본녀도 처음이라 조금 불안했네만, 그대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니 잘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느니라."

"무엇입니까?"

잠시 우물쭈물대던 서문화린. 그녀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본녀가 팔을 뻗기 힘드니라."

"예?"

"...본녀의 키가 작아, 그대의 허리에 앉아 어깨까지 손을 뻗기가 힘들다는 소리니라."

"그 정도로 작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무, 물론 하려면 얼마든 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으... 일전에 본 것을 따라 해 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본녀에게는 조금 버겁구나."

아무래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그런 걸까. 작게 중얼거리는 서문화린의 목소리 뒷부분이 잘 들리지 않았다.

서문화린은 되묻는 나를 향해 대답해 주는 대신 조용히 자세를 숙이며 손을 뻗었다.

어깨 뒷부분에 닿는 말랑한 손바닥. 그리고 귓가를 간질이는 미지근한 숨결.

"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손이 안 닿는 건 아닌데, 너무 밀착하게 된다는 소리였네.

몸이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겉보기와 달리 나이는 상당한 서문화린이다. 아무래도 이런 쪽에는 조금 보수적일 수밖에.

겨우 한번 왔다갔다하고 끝이라니. 그러려는 생각은 아니겠지만 줬다 뺏는 것 같아 조금 침울해지려던 순간.

"이잇! 본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 다 방법이 있느니라!"

"그렇습니까?"

"물론이니라! 검수는 경지가 높아지고 신검합일을 이루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지만, 권사는 애초부터 자신의 몸이니 그 비슷한 일을 일찍부터 할 수 있느니라."

"그렇겠죠."

"허나 본녀라면 좀 더 대단한 일도 가능하느니라."

"대단한 일이라 하심은...."

"신체를 극한으로 활용하는 것을 넘어 약간이나마 신체라는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느니라!"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권법은 주먹으로 펼쳐야 하고, 장법은 손바닥으로 펼쳐야 하며, 각법은 다리로 펼쳐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니라."

"아하."

팔이건 다리건 결국 신체. 그렇다면 권과 각의 구분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서문화린은 이에 아니라는 답을 내놓은 것이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다. 무학의 통합 아닌가.

자신의 무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깨달음. 그간 쌓아 올린 공부가 드높을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이어진 서문화린의 말에 흠칫하고 말았다.

"즉, 본녀라면 발도 손처럼 쓸 수 있다는 소리니라!"

"...설마."

"옳다! 발로 밟으며 추궁과혈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이게, 맞나?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의문이 떠올랐으나, 이에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서문화린이 내 등에 발을 얹었다.

어느새 버선까지 멋은 것인지 굳은살 하나 없는 작고 말랑한 발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럼 이제 다시 시작 하겠느니라."

"엇, 그 잠시 기다려주십...."

꾸욱.

적절한 세기로 어깨를 누르는 서문화린의 발. 자신 있게 말한 것이 허세는 아니었는지, 확실히 효과는 좋았다.

몸에 닿는 면적이 달라졌을 뿐, 압박해 오는 힘도 비슷하고 혈도에 녹아드는 서문화린의 내공도 엇비슷하다.

"으응? 방금 무어라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감사하다는 소리였습니다."

"새삼 들으니 쑥스럽구나."

짧게 헛기침을 한 서문화린이 피식 웃고는 내 등을 골고루 밟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나른함에, 서문화린의 내공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흐름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모양새는 조금 이상했지만, 효과는 확실하네.

***

용봉지회는 잠시 중지됐다.

전대고수인 백발나찰이 반로환동을 이루어 나타나더니, 그대로 당가의 데릴사위를 납치해 사라졌다. 심지어 짧게나마 동행한 사이라더라.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인가.

호사가들은 용봉지회보다 천휘와 서문화린의 소식을 더 궁금해할 정도였다.

물론, 무림맹이 용봉지회를 중지한 것은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지만.

심지어 오대세가의 일원인 당가의 사람이 납치당한 것 아닌가. 은원에 지극히 민감한 당가의 눈치를 본 것도 조금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용봉지회를 취소하는 것은 좀 모양새가 빠지니 나온 결론이 바로 잠깐의 중지.

하여,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며 내부에서는 일전에 당소월에게 말했듯, 전력으로 추적에만 집중하던 무림맹.

마침내 그들의 귀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서 이리 찾아온 것이라네."

"맹주님께서 이리 신경 써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 감사는 무슨. 또 흔적을 찾았지만 추적 중이라는 소리나 할 텐데, 굳이 감사하지 않아도 된다 소월아."

의천신개 곽후. 무림맹의 맹주이기도 한 그에게 이리도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같은 화경의 무인이자, 오대세가의 주인이며, 이번 납치극에서 사위를 잃은 독왕 당진천 정도면 모를까.

팔짱을 끼며 애써 화를 눌러 참는... 것처럼 보이는 당진천.

처음에는 무한 시에 도착하자마자 천휘가 납치당했다는 소식에 펄쩍 뛰며 당장 암혼대와 독혈대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기겁한 당소월이 그를 말리며 사실 천휘가 일부러 납치당했음을 몰래 알렸기에 그렇게까지 긴박한 상황이 아님은 알고 있다.

지금의 날 선 태도 또한 당소월의 이야기를 듣고, 꾸며낸 것이고.

하지만 이를 모르는 무림맹주는 미안해하면서도,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진짜일뿐더러, 단순히 지나간 흔적만 찾은 게 아니니 안심하시게. 최근 안휘성의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네."

"예?"

눈을 크게 뜬 당소월. 분명 천휘는 그녀에게 자기 발로 돌아올 것이라 말했었다.

무사히 풀려나 제 발로 돌아와야 서문화린이 사실 극악무도한 마두가 아니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릴 테니까.

하지만 어느 한 군데에 계속 머물고 있다니.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심각해진 당소월. 그런 딸의 기색을 읽은 당진천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맹주. 어차피 백발나찰이 있으니 추적대만으로는 당장 어찌하지 못할 터. 결국에는 직접 나설 생각이었겠지? 나도 함께 가겠네."

"처음부터 그걸 부탁할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이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무림맹주.

그렇게 당진천은 물론이요, 당소월과 설리향까지 합류하여 천휘가 머무른다는 안휘성의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았다.

"에잇! 에잇!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느냐?"

"예. 좀 더 세게 밟아주십시오."

엎드린 천휘와, 그의 등을 꾹꾹 밟아대는 서문화린의 모습을.

[9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3] 93화. 증명

사람은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니, 사실 이미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자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만 그중에서도 무인은 훨씬 더 많은 증명을 필요로 한다.

비록 검을 들었을지언정 인간 백정이 된 것은 아니라는 증명, 여전히 강인하여 무너지지 않으니 감히 도전할 생각을 말라는 증명.

이외에도 수많은 증명을 이고 살아가는 것이 무인이다.

검을 쥔 자가 검을 쥐지 않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똑같이 검을 쥔 자들 앞에서 당당해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리고 지금. 나 또한 증명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오해다."

"...."

"...."

차가운 눈으로 침상에 엎드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당소월. 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설리향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안 믿는 눈치. 그럼에도 나는 증명해야 했다.

방금 전의 행위가 외설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서문화린 선배. 일단 좀 나와주시겠습니까."

"히끅!"

어찌나 놀랐는지 대답 대신 딸꾹질을 하며 내 위에서 내려오는 서문화린.

그간 꾸준히 먹은 금돈의의 요상약과 서문화린의 추궁과혈. 그리고 운기행공에만 집중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이제 몸만 움직이는 것이라면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내공까지 평소처럼 다루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게 뻘쭘히 서 있는 맨발의 서문화린 옆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볍게 팔을 벌리며 당소월 쪽으로 향했다. 우선은 가볍게 회포를 풀며 냉랭한 태도를 누그러뜨리는 게 좋겠지.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그동안 별일 없었나? 내 쪽에는 들어도 믿기 어려운 일들이...."

"그만. 거기 멈추시지요."

검지를 척 뻗으며 나를 멈춰 세우는 당소월. 그 눈빛에는 불신과 불안. 그리고 약간의 납득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대체 어디서 뭘 납득한 거지?

멈칫한 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당소월.

"천 소협. 그거 아시는지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천 소협을 찾기 위해 달려온 것이랍니다. 저와 향이 또한 불안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이 자리에 선 것이지요."

"...미안하다."

당소월은 이미 내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기에 척 봐도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한자리에 눌러앉은 것이 더 불안했으리라.

"사죄를 받으려는 것은 아니랍니다. 애초에 제가 똑같은 상황이었어도 천 소협은 똑같이 달려와 주셨을 테니 말이지요."

"당연한 소릴. 중원의 끝자락이라도, 아예 새외무림이더라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예에.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지난 며칠간의 마음고생이 소협의 멀쩡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안도로 뒤바뀐 것이겠지요."

"며칠?"

분명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이상하게 거지를 연상시키는 난잡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년의 사내.

아마도 무림맹주로 추정되는 이가 의문을 표했으나, 당소월은 모른 척 흘려 넘기며 자신이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다만, 지금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

뒤에 이어질 말을 직감하고 침을 삼켰다. 하지만 당소월은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뻗고 있던 검지로 나와 서문화린을 번갈아 가리키기 시작했다.

"두 분. 어쩌다 그리 가까운 사이가 되신 건지요? 그리고 소협은 사실 이, 이런 망측한 취향을...."

"아니다."

"아니니라!"

동시에 부정하는 나와 서문화린. 기겁하여 곧장 해명에 나섰다.

"방금 건 이상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치료의 일환이었다.

"그, 그러하니라! 발로 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추궁과혈이었느니라!"

서문화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듯 팔을 크게 휘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설리향이 눈을 크게 뜨고 살짝 뒤집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추궁과혈?!"

"그, 그러하니라. 혹시 무언가 잘못됐느냐?"

"당연히 잘못됐지! ...요!"

"호칭은 찬찬히 바꿔 가면 괜찮으니 지금은 편하게 말해보거라. 대체 무엇이 그리 문제인 게냐?"

"뭐가 문제긴! 서린...아니, 서문화린 어르신께서 천휘에게 추궁과혈을 해 주었다는 것이 문제야!"

"어르신?!"

제법 충격이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리는 서문화린.

반로환동을 이룬 것은 최근이지만, 어르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지는 제법 됐을 테니 호칭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리라.

아마 지금껏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설리향에게 어르신 소리 들은 것이 충격인 거겠지.

정체를 숨기고 쌓은 것이라고는 하나, 당소월과 설리향과의 관계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으니까.

다만 이러한 서문화린의 반응에도 설리향은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추궁과혈이라니. 그건...그건!"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설리향. 혼자 다른 것이라도 상상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서문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다. 하지만.

"멈추시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서문화린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가르듯, 조용히 끼어드는 낡은 나무 봉. 무림맹주가 틈을 보아 겨눈 것이다.

슬쩍 주변을 둘러본 당진천 또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자연스레 나와 당소월의 앞으로 나섰고.

사실상 무림맹주와 당진천이 서문화린을 견제하고, 우리를 뒤로 빼낸 듯한 구도.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심각한 분위기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순식간에 그 방향성이 달라졌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

서문화린 또한 이를 읽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선 본녀가 정체를 기만하고 용봉지회에 참가한 점. 그리고 천휘를 납치하며 소란스럽게 만든 점은 사과하마."

"보란 듯이 연무장을 반파시키고, 인질을 방패 삼아 유유자적 빠져나간 것을 사과 한마디로 끝내기엔 너무 과한 것 같다고 생각하네만."

"틀린 말은 아니구나. 허면 그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 본녀가 한차례 무림맹의 일은 방해하였으니, 한번 무림맹의 일을 돕도록 하마. 물론 정당하고 떳떳한 일에 한해서 말이니라."

"...무림맹의 일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한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다른 누구도 아닌 백발나찰이라 불리는 이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지만."

"사흑련에 들어오라는 련주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는 말이니 본녀에게도 나름의 결단이 있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느니라."

"사흑련?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구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느니라."

어깨를 으쓱인 서문화린이 몇 걸음 더 물러나더니, 조금 전까지 내가 누워있던 침상에 걸터앉았다.

"본녀가 천휘를 납치한 이유는... 아니, 아니지. 그 전에 본녀가 용봉지회에 참가하려 마음먹은 이유부터 설명해야 하겠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서문화린이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본다.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화경에 이르면 누구나 환골탈태를 겪지만, 반로환동까지 가는 경우는 드문 이유를 아느냐?"

***

서문화린은 몇몇 부분을... 이를테면 내가 자신을 납치해 달라 한 부분이나, 흑천검문을 상대하며 내비친 막대한 살기 같은 걸 제외한 모든 일들을 설명했다.

복수에 미쳐 백발나찰로 살아온 나날. 모든 것이 끝난 뒤, 손에 묻은 피가 과했다는 자책으로 칩거한 일.

회수한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히며 화경에 오른 일. 그리고 자신의 후회와 미련이 환골탈태에 영향을 끼쳐 반로환동을 이룬 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얼굴로 산을 내려와 우리 일행을 만난 일.

내게서 서문세가의 무공의 편린을 보고 충동적으로 데려가 어찌 된 일인지 캐물은 일.

그리고 자신이 미처 처리하지 못해 남긴 후환과 사흑련주를 만난 일. 내가 흑천검문을 멸문시킨 일까지.

모든 이야기를 마친 서문화린이 조금 지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니라."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구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닐세."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무림맹주가 입을 열었다.

"멸문한 줄 알았던 가문이나 문파의 생존자가 남아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무공을 조금이나마 연이 닿은 자에게 남기는 것은 흔한 일이니 말이네."

무림맹주쯤 되면 정파 무림의 온갖 소식이 들어올 터.

그중에는 어디가 멸문했다느니, 그 무공이 이어져 재건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당연히 수두룩하겠지.

"사흑련주가 백발나찰이라는 한때 복수귀로 이름 높았던 무인이 화경이 되었다는 소식에 직접 찾아온 것도 이해하네. 그 야망에 미친 작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잖나."

사흑련주는 사파중에서도 특히 탐욕스러운 무인이다. 더 강한 힘을, 더 많은 부귀영화를, 더 높은 지위를, 더 커다란 세력을, 그리하여 세상 모든 것을 제 발아래에 두기 원하는 자.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이러한 성정이 있었기에 지금 같은 경지를 이룬 것이리라.

진작에 겨누었던 봉을 거둔, 하지만 아직 한줄기 의심은 거두지 않은 무림맹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다만, 이쪽의 소협이 홀로 문파 하나를, 그것도 초절정의 무인이 이끄는 곳을 홀로 멸문시켰다는 이야기는 믿기 힘들다네. 차라리 애꿎은 후기지수를 이용해 백발나찰 자네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여기는 편이 그럴듯할 정도일세."

"본녀가 거짓말을 해도 그런 티 나는 거짓말을 하겠느냐.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이니라."

곤란해하는 서문화린. 이를 지켜보고 있던 당진천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맹주. 아마 백발나찰은 거짓을 둘러댄 것이 아닐 걸세."

"당가주. 아무리 사위를 좋게 보아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용봉지회에서 보여 준 기세는 분명 완숙한 절정이었네. 이미 그 나이라고 믿을 수 없는 경지인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초절정은 이야기가 다르잖나."

"사위는 아직 일류에 머무를 때도 절정의 무인을 넷이나 쓰러뜨렸네. 뭐어, 그중 하나는 온전치 못한 상태였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좀 지난 일이네만, 당가에 원한을 품은 이들이 소월이를 노리고 사위가 놈들을 베었을 때. 주모자 격 인물이 초입이긴 해도 절정에 오른 무인이었네."

"허어."

놀란 무림맹주의 표정에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린 당진천이 말을 이었다.

"배후에 있던 마교도에게 은원을 갚아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나? 이때도 사위가 마인이라 조금 불안정하긴 하나 완숙한 절정에 오른 둘을 연달아 베고, 마지막에는 희미하게나마 검기를 발현했지."

"...그건 확실히 대단하구려. 경지의 고하가 무조건적인 승패의 조건이 아님은 알고 있으나, 검기의 유무는 허투루 볼 것이 아니거늘. 아,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지만 마지막 한 명은 또 누구요?"

"하오문의 지부장이네. 다만, 이 경우에는 무공의 부작용으로 내공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상대를 쓰러뜨린 걸세."

당진천으로부터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긴가민가하는 무림맹주. 그런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어쩌다 보니 인사가 늦어졌군요. 천휘라고 합니다. 지금 제 내상이 깊어 기세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잠시 검을 뽑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겠네. 어디 한번 뽑아 보시게."

무림맹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격한 전투로 날이 상한 당가의 검이 아니라, 이번에 새로 구한 현철로 만들어진 흑색 검.

아직 내상이 덜 나아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지만... 잠깐 기세를 내비치는 정도는 가능하리라.

차가운 검자루와 이를 쥔 손의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깊은 곳 어딘가에서 검에서 내린 뿌리와 손에서 뻗어나간 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감각.

우웅-

내공을 담지 않았음에도 검신이 떨리며 울어댄다.

검과 나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를 좁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어나는 검명(劍鳴).

신검합일의 증명이었다.

[9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4] 94화. 증명 (2)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이 움직이고, 수많은 생사의 기로를 헤쳐나온 검은 몸의 일부와도 같으니.

진정으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를 신검합일이라 한다.

이는 무위가 상승한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다다르는 경지는 아니다.

결국 무위란 나 자신의 정기신을 얼마나 합일시켰고,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

신검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와 신을 합일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 검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오던 무림맹주는 물론이요, 어떻게 거들어야 하나 고민하던 당진천 또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리에서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서문화린과, 위화감은 느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당소월과 설리향뿐.

주변의 시선을 한데 받으며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직 베기.

느릿하게 휘두르는 것임에도 검 끝에는 미동조차 없다. 허공을 덧그리는 깔끔한 일선에서는 머뭇거림이 없었고.

태산압정. 검법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삼재검법의 초식 중 하나이자, 가장 기본적인 검을 휘두르는 법.

그렇기에 기교가 들어갈 구석이 없고, 힘을 빼고 내지른 일격이기에 단련한 신체의 역량을 뽐낼 여지조차 없다.

담겨 있는 것은 오로지 순수한 깨달음뿐.

이전에도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었으나, 신검합일을 이룬 뒤에는 그 수준이 달라진다.

반복된 수련으로 몸에 익게 한 움직임이라 한들, 머릿속에 그린 이상과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말 그대로 생각하는 대로 검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검 또한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내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검 또한 무엇을 마주하건 꺾이지 않으리라.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더 큰 힘을 만나면 튕겨 나가거나 부러지기도 하겠지.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뿐.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소리다.

검격 하나하나가 최선. 지금의 내가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일격.

정해진 몇 가지 초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대신,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것을 꺼내 드는 적재적소의 검법을 사용하는 내게 신검합일은 무엇보다도 유용한 깨달음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이런 근본 없는 검을 휘두르게 된 것이 회귀 전에 신검합일을 이루고 난 뒤니 조금 순서가 다른가.

속으로 피식 웃으며 마지막까지 내린 검을 회수했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심력을 쥐어짠 탓인지 벌써 조금 지쳤으니까.

검을 검집으로 되돌린 자세 그대로 한차례 숨을 고르고는 무림맹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 증명이 되었습니까."

"...되었네. 되었고말고."

맥 빠진 소리와 함께 한숨을 푸욱 내쉬는 무림맹주.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나이가 예순이 다 되어가니 살아온 날이 적지 않고, 거지로 태어나 과분한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르며 겪은 경험 또한 부족하지 않다 여겼거늘... 또 한 번 놀라게 되는구먼."

"아직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을 뿐, 온전한 초절정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예끼 이 사람아. 겸손도 과하면 무례라네. 다른 것도 아닌 신검합일이라니... 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 약관밖에 안 된 후기지수가 얻을 깨달음이 아니거늘."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무림맹주. 당연한 반응이다. 신검합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검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하느냐다.

그렇기에 평생 검을 휘두른 초절정의 무인이라도 신검합일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신검합일을 이룬 이들끼리도 이를 무공에 녹여내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검을 온전히 내 의지 하에 두어, 심상에 그려진 이상적인 검격을 현실에 투영하는 식이지만.

회귀 전. 마교의 몇 없는 강자 중 한 명인 검마(劍魔)는 검을 자신의 일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검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그는 검이 아닌 손과 발로 검술을 펼쳤는데....

솔직히 강하다거나, 그 수준이 고절한 것은 둘째 치고 내 입장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마교의 고수는 대부분이 기괴하지만, 검마는 그중에서도 특히 거부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나와는 반대되는 깨달음을 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고개를 휘휘 저어 잠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털어 버리는 사이. 무림맹주도 뭔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건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설마 소협까지 반로환동한 늙은이는 아니겠지."

"...헉!"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는 서문화린. 어째 진심으로 혹한 표정이었다.

뭐어. 엄밀히 말하자면 그 비슷한 일을 겪긴 했지.

차이가 있다면 신체만 과거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을 제외한 모든 것이 되돌아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서문화린 선배. 맹주님께서 농으로 하신 말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쇼."

"하, 하지만 그대가 본녀처럼 반로환동했다면. 그리고 본녀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정체를 숨기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느냐!"

"설마 당가에서 그 정도도 확인하지 않고 저를 사위로 삼았겠습니까."

"앗."

이건 생각지 못했는지 입을 벌린 채 당소월 쪽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그 시선을 받은 당소월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으. 백발나찰 선배. 저도 처음에는 천 소협이 반로환동하여 정체를 숨긴 노괴인 줄 알았지만...."

"허윽!"

불의의 일격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는 서문화린. 오랜만에 당소월과 설리향을 만나 나도 모르게 비교한 탓일까. 놀라울 정도로 건전한 광경이었다.

의도치 않게 서문화린에게 칼을 꽂은 당소월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냥 재능이 출중할 뿐이었답니다!"

"그, 그러했느냐...."

가까스로 쥐어짠 목소리로 대답한 서문화린이 천천히 몸을 추스르고서야 입을 열었다.

"코흠흠. 그으. 더는 본녀를 예전처럼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이해하느니라. 하지만 별호로 부르는 것은 삼가 줄 수 있겠느냐?"

"아."

서문화린의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자신의 별호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린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요. 지금껏 서 소저라 불렀으니 서문 소저는...으음."

"본녀도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지는 않으니라."

조금 시무룩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써 이를 내색하지 않으며 말하는 서문화린.

하기야. 소저라고 불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나긴 했지.

잠시 고민하던 당소월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아! 그럼 화린 언니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언...니?"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 서문화린. 이에 당소월이 여전히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별호가 안 된다면 결국 이름밖에 없잖습니까. 그간 함께 여행한 것도 있고, 외견만 보면 도저히 어르신으로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과정은 좀 그래도 천 소협의 무공을 봐주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러하니라."

생각해 보면 서문화린이 나를 납치한 이후의 일을 설명할 때, 무공을 좀 봐준 이야기도 했었지.

사실은 나를 양자로 들이고 싶다며 호의를 사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본인도 좀 아니라는 건 아는지 그냥 서문세가의 무공을 먼저 익힌 어른으로서 조금 봐주었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직접 말한 것이니 약간의 유리한 왜곡이 있었음을 잘 아는 서문화린이 머쓱함에 괜시리 머리칼만 만지작대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웃고 있는 표정 그대로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화린 언니와는 여러모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답니다. 주로 천 소협에 관해서 말이지요."

"딸꾹!"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딸꾹질을 하고는 당소월의 눈치를 살피는 서문화린.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덤으로 설리향도 왜인지 움찔하며 당소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원활하게 해결되면 좋겠네.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있자니, 그런 셋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흐으음. 아무튼 사정은 알겠네. 무림맹의 위상이 상하긴 했으나,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그런 상황이니 백발나찰... 아니, 서문화린 자네 같은 화경 무인에게 한번 손을 거들어 준다는 언약을 받았다면 더 일을 키울 필요는 없을 걸세."

"저, 정말이느냐?!"

"물론 결정 사항은 아니네. 비록 내가 맹주라고는 하나, 무림맹의 모든 일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다만 이쯤에서 끝내고 넘어가자는 말은 해 볼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무림맹주. 그가 허리를 쭈욱 펴고,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다만 그 자세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만함이 아닌 오직 올곧음이었으니.

곧고, 또 곧다.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준을 관철해 온 사람만이 풍길 수 있는 종류의 분위기.

지금 이 순간. 무림맹주는 맹주가 아닌, 정파의 이름난 협객. 의천신개 곽후였다.

"이번 일이 벌어지고 자네를 따로 조사해 봤네. 서문세가의 멸문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이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더군."

내가 멸문시킨 신생 흑천검문은 명문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규모 있는 문파 수준은 되었다.

초절정의 무인 하나에 절정의 무인이 셋. 거기에 일류에 달한 이들 또한 상당하지 않았나.

서문화린이 한차례 멸문시킨 가문과 문파에서 겨우 십수 년 만에 이리도 많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서문화린이 그어 둔 기준 때문이다.

과거의 서문화린이 복수에 미쳐 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사람으로서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녀는 서문세가의 멸문 당시. 이에 가담한 자들과, 이를 방해하는 자들만 때려죽였다.

즉, 후기지수 정도의 나이라면 도망치는 걸 그냥 놔주었다는 소리다.

그 덕에 신생 흑천검문은 빠르게 융성했고, 서문화린은 자신이 놓친 악연이 더욱 크게 돌아오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결국에는 내 손에 끝났지만.

"그래서인지 자네의 손속이 잔혹하고 많은 피를 보았다며 두려움을 사긴 했으나, 그 복수가 잘못되었다며 부정하는 이는 없었지. 오직 자네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히죽.

무림맹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후기지수인 척을 하여 용봉지회에서 난동을 부린 것은 화가 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사파의 낙인을 벗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그 마음이 잘못됐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더군."

무림맹주는, 평생 협을 쫓으며 살아온 무인은 눈을 크게 뜬 서문화린에게 숨김없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

"그러니 자네도 증명하는 걸세. 그 바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본녀는...."

할 말은 있지만, 이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오물거리는 서문화린.

예상치 못한 무림맹주의 지지에 놀란 모습이 역력했지만.

서문화린이라면 잘하겠지. 뭣하면 내가 조금 도와주면 될 일이다.

나는 아직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최후를 잊어 달라고 했던 서문화린의 말을 기억한다.

전각을 불태우는 화마도, 하얀 눈 위를 물들이는 핏물도 아닌. 그저 한 송이 붉은 꽃이고자 함이니.

시린 겨울에 피어난 동백꽃이 지고 난 뒤에는 봄이 찾아온다.

서문화린 또한 그러하리라.

[9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5] 95화. 증명 (3)

"그나저나 내상을 입으셨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신 건가요, 천 소협?"

"뭐, 약이 좋았지. 서문화린 선배의 추궁과혈도 있었고 말이다."

어깨를 으쓱이자, 흠칫하며 당소월의 눈치를 보는 서문화린. 그리고 아까부터 추궁과혈 소리만 나오면 움츠러드는 설리향까지.

둘의 어색한 반응에도 당소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나를 재촉했다.

"괜찮다고 말만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직접 확인해 보겠나?"

슬쩍 팔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내 팔뚝은 만지작대는 당소월. 그리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팔을 돌려주었다.

"팔이 많이 탄탄하시네요. 저는 이런 것도 참 좋아한답니다."

"? 내상을 살펴보려는 것 아니었나?"

"제 몸이라면 모를까 남의 몸을, 그것도 이렇게 걸어 다니는 도중에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그럼 팔은 왜 만진 거냐."

"만지고 싶어서 만졌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

당당하게 그리 말하자 할 말이 없다. 약혼자이기도 하고, 나도 마냥 싫은 건 아니니까.

다만 꼴불견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설리향과 서문화린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혼자끼리 사이가 좋아 보이니 다행인 일이지만... 보고 있으면 조금 그렇긴 하느니라."

"천휘랑 당 언니는 항상 그랬어요. 어르신도 몇 번 보지 않았나요?"

"어, 어르신...."

아니, 그냥 꽁해진 설리향이 서문화린을 괴롭히는 건가.

묘하게 차가운 설리향의 반응에 시무룩해진 서문화린을 힐끔대고 있자니,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내 팔을 요구해 왔다.

"사위. 잠깐 팔 좀 내밀어 보게나."

"...갑자기 말입니까?"

나도 모르게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당진천이 어깨를 으쓱인다.

"어허. 누가 사위가 위험하다는 말에 이 먼 거리를 달려온 장인어른을 그런 눈으로 본단 말이야. 소월이랑 다르게 움직이면서도 기본적인 진맥은 가능하니 얌전히 팔이나 내놓게."

"예."

아마 당소월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긴 했겠지만, 그전에는 상당히 이쪽을 걱정했으리라.

지난 삼 년. 나는 당가의 식구가 되어있었고, 당진천은 자신의 식구를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

머쓱하게 웃으며 팔을 내밀자 그대로 맥을 짚어보기도 하고, 희미한 내공을 흘려보내 안쪽을 살펴보기도 하는 당진천.

그렇게 이것저것 살펴본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중한 상태가 아님은 알았네만, 생각보다 심한 내상이었나 보구먼. 지금은 많이 나았으니 괜찮지만."

"예. 운이 좋았습니다."

사흑련주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돈의의 요상약까지 내어줄 줄은 몰랐지.

거기에 서문화린이 회귀 전에도 안 해준 추궁과혈을 해 주기까지.

이 정도 받아먹고도 회복이 더디면 그게 이상한 거다.

"그래도 한동안 쉬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네. 아쉽게도 이번 용봉지회는 넘겨야겠구먼?"

"...아직 용봉지회가 안 끝났습니까?"

"잠깐 중지하긴 했네만, 이제 사태가 일단락났으니 곧 재개될 걸세."

"오."

취소까진 아니어도 그대로 강행하여 지금쯤 우승자가 나왔을 줄 알았다. 하여 대환단은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쯧쯧.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게."

"제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고 그러십니까."

"뭐기는. 한번 나가 볼 만하다는 생각을 한 것 아닌가. 내 자네를 본 시간이 적지 않은데 그 정도를 모를까."

"...안 됩니까? 내공을 쓰지 않아도 한번 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만."

"헛소리 말고 그냥 쉬게. 헛짓거리하다가 괜히 상처가 터지는 게 더 곤란하네."

아쉬움에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당소월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왜 갑자기 풀 죽으셨나요 천 소협? 설마 아버님이 또 뭐라고 한 소리 하셨는지요?"

찌릿 노려보는 시늉을 하는 당소월. 그 장난스러운 몸짓에 당진천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인어른께 한 소리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만한 말을 꺼내기도 했다."

"으음. 제가 한번 맞춰봐도 될런지요?"

"왜 안 되겠나."

"천 소협. 혹시 용봉지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나가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셨지요?"

"...어떻게 알았지?"

"사실 바로 뒤에서 듣고 있었답니다."

어깨를 으쓱인 당소월. 그녀가 나를 타박하듯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기감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상이라면 그냥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 소협의 나이라면 다음을 노려도 충분하니 말이지요."

"오 년 뒤는 너무 길다."

"무공을 견식할 기회가 아쉬운 것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용봉지회가 끝난 이후에도 무한 시에 남아 따로 비무를 치르는 경우도 있답니다. 대진 운이 나빠 붙어 보지 못한 상대와 손속을 겨루거나, 다시 한번 겨뤄보기 위해 말이지요."

"그건 즐거운 소식이다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허면 왜 스스로 무리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용봉지회에 나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대환단 때문이지."

"대환단... 아니, 정확히는 내공 때문이겠군요."

"맞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천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수한 체질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다만, 내가 타고난 것은 어디까지나 검재(劍才)뿐이다.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하려 혈도는 많이 굳었고, 근골은 평범하기 짝이 없으며, 사파의 무공을 그 근간에 두기에 내공의 정순함 또한 부족하다.

물론, 회귀하며 얻은 깨달음과 그간 당가에서 받아먹은 영약 덕에 혈도는 많이 넓어졌지만....

어린 시절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먹은 이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한 편.

내공 또한 살기를 녹여내어 더욱 내 의지에 순응하도록, 그 위력이 높아지도록 하였으나.

어찌 됐든 결국 살기를 계속해서 다뤄야 하는 것이고, 전력을 다하면 다할수록 심력의 소모 또한 커지는 법 아닌가.

단기 결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싸움이 길어진다면 결국 빠르게 불리해진다는 소리다.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나쁜 상황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늦은 나이에 받은 지원이지만 당가의 지원은 회귀 전에는 상상조차 못 할 것들이었고.

특히 깨달음을 바탕으로 빠르게 경지를 높여나가는 것은 내 가장 큰 무기니까.

당장 지금도 내공만 어떻게든 채우면 초절정의 초입에 발을 내디딜 수 있겠지. 어지간한 상대는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문제는 내가 최종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적이 천마라는 점이지만.

천하제일을 넘어 동서고금제일인이 확실한 녀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금 더 욕심을 부리고, 조금 더 서두를 필요가 있다.

"나는...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도 충분히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 것 아닌지요?"

"부족하다."

내가 빠르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경지를 되찾고 있기 때문.

만약 초절정에 이르고, 회귀 전에도 부수지 못했던 벽에 부딪힌다면 거기서부터는 다른 이들처럼 한참을 헤매겠지.

어쩌면... 결국 벽을 넘어서지 못할지도 모르고.

한동안 내 나이대의 무인들만 접하다가 사흑련주와 서문화린 사이의 기세 싸움을 보고 깨달았다.

내가 과거의 무위를 전부 되찾더라도, 화경의 경지는 여전히 드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화경의 무인들조차 천마에게 우수수 죽어 나갔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세상을 뒤덮는 마기와, 그 중심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던 사내를 떠올리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당소월이 손을 뻗었다.

꾹꾹.

찡그려진 미간을 눌러 풀어주고는 차분히 말을 고르는 당소월.

"너무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천 소협에겐 스스로가 불만스러울 수 있지요. 그것이 집착까지 가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무인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될 테고요. 다만, 그럼에도 저는 이리 말할 거랍니다. 조바심 낼 필요 없다고 말이지요."

"왜지? 혹시나 해서 말해둔다만, 집착이 커져 주화입마에 이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고...그 정도는 내게 심마라 부를 정도도 아니니까."

"그건 다행인 일이지만, 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말한 것이랍니다."

그리 말한 당소월이 옆에서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설리향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다, 당 언니?"

깜짝 놀란 설리향이 꼼지락거렸으나, 당소월은 한층 더 강하게 끌어안아 자신과 어깨를 딱 붙이는 자세를 만들었다. 그리고.

"좀 지난 일이지만 아직 기억하시는지요? 소협이 제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저 또한 소협의 힘이 되어 줄 것이라 했던 것을 말입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혼자 모든 걸 해내려 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부족한 부분은 저희가 채워드릴 터이니."

"어... 저도요?

설리향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되물었으나, 당소월은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럼 아니었니? 향이 너도 천 소협에게 받은 도움을 언젠가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잖니."

"꺄악! 그, 그걸 왜 여기서 말해요, 당 언니!"

황급히 당소월의 입을 손으로 막고는 내 눈치를 살피는 설리향.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한동안 딱 붙어 투닥이던 둘이었으나, 결국 당소월에게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린 설리향이 팔을 치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자유를 되찾은 당소월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하던 말을 이었다.

"후우. 아무튼 기억하신다면 이번에야말로 한번 지켜봐 주시지요. 저와 향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여전히 천 소협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대상인지 말이지요."

"...."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당소월의 말이 맞다. 나는 저 둘이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전부 나 홀로 해결할 생각만 했었다. 일전에 당소월에게 비슷한 이유로 한차례 질책을 들었음에도.

이유는 알고 있다. 아마 둘의 죽음이 가장 내 기억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당소월은 약간의 차이긴 하지만 나보다 먼저 천마에게 당해 쓰러졌고, 설리향은 내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문화린은 이미 화경의 절대고수이기도 하고, 회귀 전에도 내 스승 같은 존재였기에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어쨌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해 죽었다는 무력함이 강하게 새겨져 있는 탓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당소월도 설리향도 잘 살아있고, 회귀 전처럼 어디 한군데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다.

"...알겠다. 이번에는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도록 하지."

"후후. 잘 생각하셨어요 천 소협. 저...는 힘들겠지만, 분명 향이가 우승해서 대환단을 받아올 거예요!"

"네? 저요? 제가요? 어떻게요?! 저 아직 일류인 건 아시죠 당 언니?!"

당소월에게 어깨를 잡힌 채로 펄쩍 뛰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모습에 키득이며 말했다.

"그치만 비무에서는 독공을 못 쓰잖니."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부담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당소월에게서 벗어나려 드는 설리향. 그런 그녀와 순간 시선이 마주쳤길래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응원하마."

"천휘 너까지 그러기야?! 으으...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우승은 몰라도 깜짝 놀라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하라구!"

"그래. 기대하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니, 주변에 어느새 훈훈한 분위기가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당진천과 무림맹주가 흐뭇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라.

...뭐,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한다. 이 나이 때에만 볼 수 있는 풋풋한 모습이긴 하니까.

그렇게 한껏 느슨해진 긴장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 걸까.

돌연 서문화린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음음. 맞는 말이니라. 천휘 그대에게는 본녀라는 어미가 있거늘 여차하면 기대도 좋으니라."

"...."

돌겠네.

[9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6] 96화. 용봉지회

"음음. 맞는 말이니라. 천휘 그대에게는 본녀라는 어미가 있거늘. 여차하면 기대도 좋으니라."

서문화린의 발언에 순간 그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흠칫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분명 이런저런 이야기가 다 들렸을 텐데도 일부러 끼어들지 않고 허허 웃기만 하던 당진천과 무림맹주마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을 정도.

특히 당진천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크게 뜬 눈, 떡 벌어진 입. 그리고 잠깐 잊어버린 호흡까지.

당가에는 어지간하면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가족끼리 밥을 먹는다는 규칙이 있다. 그때마다 나도 껴 있었기에 제법 오랫동안 봐온 사이건만....

당진천이 이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짓는 건 당소월이 속이 더부룩하다면서 내 쪽을 바라보며 배를 쓰다듬었을 때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참고로 그건 밤에 같이 성도의 야시장을 둘러보며 야식을 과하게 먹어서 그런 거다.

손 말고는 잡은 것도 없었기에 해명하는 내내 억울했었지.

아무튼, 그때와 거의 버금가는 충격을 받은 당진천이 나와 서문화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설마 우리 사위가 숨겨진 아들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건 아니니라. 본녀는 복수에 미쳐 살았고, 이후에는 후회에 파묻혀 살았으니. 남자를 만날 여유 같은 건 없었느니라."

"허면, 그 어미니 뭐니 하는 해괴한 소리는 대체 무슨...."

"어찌 됐든 천휘가 서문세가의 무공을 익힌 것은 사실 아니느냐. 적법한 인물에게 적법한 방법으로 익힌 것 같으니 그 부분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으나, 그렇다고 아주 모른척할 수도 없느니라."

"...."

서문화린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당진천은 잠시 말을 고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서문세가를 다시 세울 생각인가? 사위를 양자 삼아서?"

"천휘가 본녀의 뜻에 따라준다면야."

"사위의 뜻을 우선시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네만."

"옳다. 이는 어디까지나 본녀의 억지에 불과하느니라. 이미 천휘에게는 몇 번이고 거절당했으니...."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는 서문화린. 그녀가 내 쪽을 한차례 힐끗거리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느니라. 본녀를 제외하면 천하에 하나 남았을 서문세가의 흔적을 어찌 모른척할 수 있겠느냐."

"...이해는 하네. 다만, 당가로서는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는 점도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당연히 알고 있느니라. 사위에게 갑자기 서문세가라는 이름이 가문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것만이라면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백발나찰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한 본녀가 양어머니라는 사실은 평판에 좋지 않을 터."

거기까지 말한 서문화린이 이쪽은 바라보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본녀는 어디까지나 천휘의 의견을 가장 우선할 생각이니라. 그렇다고 본녀가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알았다. 왜 서문화린이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그동안 조금씩 이야기했던 내용 중에는 서문화린의 거취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전 생처럼 사흑련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파에서 환영받는 것 또한 아니잖은가.

일단 무림맹의 일을 한번 도와주는 것으로 용봉지회에서의 문제는 무마했다지만... 그렇다고 무림맹에 소속되어 활동하기에는 여러모로 힘들겠지.

주변 시선도 시선이고, 끊임없이 의심에 시달려야 하며, 심지어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은가.

그렇기에 나도 내심 원했고, 서문화린에게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안을 하나 이야기했었으니.

당가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부 이를 위한 준비 같은 것이리라.

알아서 잘해달라는 서문화린의 간절한 시선에 한차례 끄덕여 주고는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제게 괜찮은 방법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뭔가?"

"솔직히 서문화린 선배의 양자가 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문세가의 무공이 제 무학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그래서 말입니다만...."

잠시 운을 띄우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문화린 선배를 잠시 당가의 식객으로 받아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식객으로?"

"예. 저는 서문화린 선배에게 무공을 배워 좋고, 서문화린 선배는 저를 설득할 기회를 얻어 좋고, 당가에서는 여차할 때 힘이 되어줄 식객이 늘어난 셈이니 서로 좋은 일 아닙니까."

"서로 좋은 일이라...."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진 당진천.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 솔직히 말해보게. 둘이 미리 짜고 치는 겐가?"

"이런 식으로 말씀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따로 부탁드릴 생각이긴 했습니다."

"흐. 이런 음흉한 녀석. 좋다. 당장이야 이래저래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화경의 무인을 우군으로 두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일 터. 다만, 다음부터는 괜히 복잡하게 돌려 말할 필요 없이 직접 말해도 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잘하자."

내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는 당진천.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럼 양자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명분이겠구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장로들이야 처음에는 머뭇거려도 금방 설득할 수 있을 터이니."

"어, 으음. 그게 말입니다...."

말끝을 흐리는 내 모습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오는 당진천. 그 옆에서 서문화린이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헛기침을 했다.

"코흠흠. 본녀는 진심이니라."

"...사위?"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애초에 천휘 그대는 스스로의 말에 좀 더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느니라. 본녀에게 하, 함께 행복해지자는 말을 해놓고 이리도 차갑게 내치면 어쩌라는 말이느냐."

"사위?! 진짜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게야?!"

경악. 그리고 단계적으로 차오르는 분노. 당진천의 날카로운 기세에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해입니다. 분명 제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의 의미였지 다른 이상한 뜻이 있었던 건...."

황급히 해명하던 도중. 당소월이 다가와 그대로 내 입가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괜찮답니다 천 소협. ...어차피 자세한 건 화린 언니와 따로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말입니다."

"...."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한 시점에서 다 생각이 있었나 보다.

아니지. 힘들게 찾아왔더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외간 여자에게 발로 꾹꾹 밟히면서 더 해달라고 하는 모습이면 나 같아도 자리를 만들었을 거다.

서문화린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분명 그다음은 내 차례일 테고.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꿀꺽.

괜히 침만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 맙다."

"후후. 뭘요. 하나뿐인 정혼자 아닙니까."

"...."

왜일까. 조금 식은땀이 흘렀다.

***

가까운 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도착한 무한시.

예상했던 대로 서문화린이 다시 돌아오자, 많은 반발이 일었지만....

그녀가 사파의 삶을 청산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이번 일의 사죄로 한번은 반드시 무림맹의 일을 돕겠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사그라들었다.

물론, 용봉지회를 보기 위해 몰려온 이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돌았으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백발나찰이라 불리던 서문화린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무한 시에 와있다는 소식에 알아서 입을 조심하더라.

무엇보다 다시금 용봉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그쪽으로 관심이 쏠리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천 소협.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으음. 이젠 좀 힘겹지만 가볍게 운기행공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여전히 내상으로 골골대고 있었다.

중간에 금돈의의 약이 다 떨어져, 당진천에게 받은 당가의 약을 먹고 있는데.

아무래도 약은 금돈의가 더 잘 만들었는지, 당가의 약이 효과가 좋긴 한데 금돈의에 비하면 좀 덜한 것 같더라.

뭐어. 당가의 의술은 어디까지나 독공을 연구하던 부산물이, 속물적이긴 해도 의술에만 매진한 금돈의보다 부족할 수도 있는 거겠지.

그 외에도 다른 사람의 눈치가 보여 그동안 서문화린에게 추궁과혈을 받지 못했다는 점도 한몫했을 테고.

회복 속도가 좀 더뎌졌을 뿐, 착실히 나아가고 있으니 상관없지만.

"내상이 심하면 운기행공도 삼가는 것이 좋다고 들었답니다. 괜히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건 정말 운기행공도 힘들 정도로 엉망인 상태에서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정도는 괜찮다."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답니다. 일단 당가에서 내상에 좋은 영약 몇 개를 보내달라 요청했으니 금방 괜찮아지겠지요. 그때까지는 얌전히 계셔 주시지요."

"나라고 좋아서 문제에 휘말리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은 특별히 조용히 있을 생각이고."

"어머? 왜인가요?"

"다 알면서 묻기는. 당소월 너와 설리향의 비무가 오늘 있지 않나. 장인어른과 함께 응원하고 있으마."

그렇다. 재개된 용봉지회는 나는 부상으로 인한 기권, 서문화린은 실격패시키고 계속 진행된 끝에 드디어 당소월과 설리향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물론 본선이라고는 해도 아직 초반부지만...그럼에도 예선을 거친 이들 아닌가. 나름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을 터.

"당소월 네 상대는 누구지?"

"천풍상단의 표두고, 섬전도(閃電刀)라는 별호가 있다는데...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어쩌면 용봉지회를 기회 삼아 상단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걸지도 모르겠네.

표두의 실력을 증명한다면 일을 맡기는 사람도 늘어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상대가 누가 됐든 저는 제 전력을 다할 생각이니 상관없지만요."

"좋은 자세다. ...역시 문제는 설리향인가."

"예, 향이는 그으. 대진 운이 좀 없네요."

설리향의 상대는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위지수련. 일전에 섬서성 유람에 나섰을 때 만날 예정이었던 화산파에 있다던 당소월의 친구다.

정작 만난 것은 죽기 직전의 귀영신투였지만.

"수련이는 화산파에서도 촉망받은 후기지수고,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수련했으니 지금의 향이에게는 버거운 상대겠지요."

"그럴지도.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긴 할 거다. 다른 어디도 아닌 화산파의 무공을 제대로 견식할 기회니."

"맞는 말입니다만, 반농담으로 저 대신 우승해 올 거라며 마구 띄워준 것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지요."

"...그건 당소월 네가 잘못했다. 비무 경험도 얼마 없는 애가 이런 큰 대회에 나가는데, 마구 부담을 지우다니."

"그치만 향이의 반응이 귀여우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대충 그런 내용으로 투닥이는 것도 잠시, 돌연 문이 열리며 설리향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당 언니. 천휘. 둘 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이제 슬슬 시작하니까 가봐야지!"

바짝 굳은 표정으로 의욕을 불태우는 설리향. 그 얼굴을 본 나와 당소월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픽 웃어버렸다.

"그래. 슬슬 가봐야지."

"그럼 저랑 향이는 먼저 대기실로 갈 테니 아버지랑 화린 언니랑 같이 지켜봐 주시지요."

설리향의 어깨를 가볍게 밀며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당소월.

용봉지회의 진짜 시작이었다.

[9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7] 97화. 용봉지회 (2)

잔뜩 긴장한, 하지만 그 이상의 기대를 품은 얼굴로 서로의 무공을 겨루는 후기지수들.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는 사실상 반로환동을 겪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들 사이에 껴서 아옹다옹대며 우승을 거머쥐는 굉장히 철없는 짓일 지도 모른다.

물론 대환단은 탐나긴 하지만...솔직히 어른스럽지 못한 짓은 사실 아닌가.

구체적으로는 서문화린이 용봉지회에서 눈도장을 찍어 신분 세탁을 하려던 것처럼 말이다.

"...."

"으응? 왜 본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게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요즘 좀 눈이 높아졌다 싶어서 말이죠."

평소에 보던 이들이 당가에서 독령지체로 태어난 당소월이나, 음한지기를 다루는 것에 한해서는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는 설리향 같은 천재들이고.

최근에는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흑천검문의 무인들과 생사결을, 서문화린이나 사흑련주 같은 화경의 절대고수의 기세 싸움을 보았다.

그런 와중에 후기지수 중에서 좀 빼어날 뿐인 이들의 비무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호승심이 돋보이는 건 좋은데 김이 팍 새네.

다만 저들의 무위나 비무 내용과는 별개로 선보이는 무공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

회귀 전의 내가 광적으로 검술을 수집하긴 했으나, 대부분이 사파의 무공이거나 마교의 침공 이후에 변질된 무공이었다.

대부분이 상대를 죽이는 것에 치중된 살기 짙은 무공. 그만큼 실전성이 좋긴 하지만....

무공이란 것이 단순한 칼부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론 내게 무공은 어디까지나 사람 죽이는 기술이고, 많은 사파의 무인이 공감하겠으나.

내 말은 어디까지나 내게만 정답인 것이지, 세상의 진리 같은 것이 아니잖은가.

실제로 정파의 무공은 상대를 해하는 것 외에 다른 이치와 이념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파의 무인이 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니까.

사파의 무인이 빠르게 성취를 얻을 수 있긴 하나, 진짜 강자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정파 무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고.

강해지기 위한 검이 아님에도 결과적으로는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검.

내게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장인어른."

"소월이는 다음 차례네."

"그거 물어보려는 거 아닙니다."

"설 소저는 그다음 차례네."

"그걸 물어보려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둘의 순서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허면 무슨 일인가?"

비무장을 바라보던 당진천이 스윽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향한다.

"강한 무공이란 어떤 무공이라 생각하십니까?"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의외로 어려운 질문을 하는구먼."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당진천이 입을 열었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도 강함이고,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도 강함이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을 지키는 것이지. 그렇기에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무공이 가장 강한 무공이라고 생각하네."

"정파다운 대답이시군요. 하나 예를 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말해 무엇 하나. 내게는 만류귀원신공이... 당가의 독공이 그러하지."

"독공...?"

내 의아한 목소리에 당진천이 끌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가는 선을 지키기에, 그리고 힘이 있기에 대놓고 비난받지 않지만... 무림에서 독을 쓰면 얻어듣는 게 보통이네."

"그건 그렇죠."

"왜 그런지 아나?"

"자신의 무공을 펼쳐볼 기회조차 주지 않고 쓰러지기 때문 아닙니까?"

"맞는 말이네. 무인처럼 자존심 강한 이가 자신의 삶을 쏟아부어 이룩한 무(武)를 부정당하는데 어떻게 견디겠나.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하는 쪽의 입장이네."

한쪽 손을 하늘이 향하도록 펼치는 당진천. 약간의 내공이 움직이더니, 이내 뭉클거리는 검은 연기가 되어 그의 손바닥 위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독령지체는 없지만, 환골탈태를 거쳐 완벽한 독인이 된 당진천이기에 가능한 기예.

당소월의 독을 매일 먹으며 나름 독에 익숙해진 덕일까.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위험하다. 닿는 순간 저항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리라.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한 내 모습에 당진천이 피식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독연.

"알겠나? 자네는 독에 중독되지 않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로 위축되었지."

"독왕의 독을 보고 놀라지 않는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아부는 됐네. 꼭 내 독이 아니더라도 자네가 쉬이 저항하지 못하는 독이면 똑같이 반응했을 걸세. 독공을 펼치는 입장에서는 그저 쥐기만 해도 이득을 보는 셈이지."

맞는 말이다.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싸움은 결국 수읽기로 귀결되는 법. 독으로 상대의 수를 대부분 틀어막을 수 있다면 그만한 이득도 없다.

당진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독은 결국 몸을 갉아먹는 것이네. 덕분에 더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고, 위험을 덜 감수하고 싸울 수 있으며... 설령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목숨을 걸면 한방 정도는 먹일 수 있네."

"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회귀 전. 사천당가의 멸문 소식이었다.

당가가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였는가. 그 과정을 정확히 아는 것은 당가를 멸문시킨 천마뿐이겠지만....

독에 절어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게 되어 버린 땅과,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빼곡히 박힌 암기의 모습에서 그 장렬함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마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천마를 조금이라도 중독시키고, 하나라도 암기를 박아 넣으려 했겠지.

자신으로 부족하다면, 다음 사람이. 그러고도 모자라면 또 다음 사람이.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 먼저 죽어 나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덕분에 당소월은 도망칠 수 있었고, 당가의 식솔들 또한 뿔뿔이 흩어지긴 했으나 제법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이전 생의 당진천은 천마를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그 행적을 기억하기에 당진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게 이해됐다.

"과연. 대가는 따를지언정 여차할 때 불가능을 가능케 할 기회가 있기에, 독공이 가장 강한 무공이라는 거군요."

"바로 그걸세. 누구 사위인지 이해가 빠르구먼."

흡족한 표정으로 끌끌 웃는 당진천. 짧은 문답이었지만, 덕분에 그가 추구하는 바를 조금 엿본 기분이었다.

당진천은 한 명의 무인으로 있기보다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가문의 수장으로 있기를 택한 것이리라.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오랜 시간 이어져 오고, 번영해 온 가문을... 식구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

스스로가 감히 외적이 당가를 넘볼 수 없도록 하는 거대한 울타리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정말로 정파다운... 아니, 사천당가스러운 대답이네.

그간 당가에서 생활하며 좀 익숙해졌음에도 여전히 내겐 생소하게 느껴지는 가치관.

다만, 지켜야 할 대상이 가문처럼 거대한 집단이 아니라 주변 사람 몇 명이라면. 그렇다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나 또한 당소월이나 설리향. 화경 무인에게 그럴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서문화린이 눈앞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면 기꺼이 그 위험 속으로 검을 들이밀 테니까.

승패도, 생사도 관계없다. 그저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미쳐 버릴 것 같기에.

무언가 잡힐 듯 말듯 간질거리는 감각 속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덕분에 조금 개운해졌습니다."

"무얼. 먼저 이 길을 걸은 선배로서, 그리고 장인으로서 사위에게 이 정도 조언은 얼마든 해줄 수 있네. ...사실 나는 자네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좀 신기하기도 하고."

"예?"

"그렇잖은가. 사실 어떤 무공이 강한 무공이냐, 가장 강한 무공이 뭐냐는 질문은 막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이 주로 하는 질문이니까."

"...생각해 보면 정작 어릴 때는 그런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군요."

당연히 삼류무공보다 상승무공이, 신공이 더 좋은 무공이라는 건 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이 이상의 의문을 품는 대신 당장 내 손에 쥐인 것으로 강해지는 데만 집중했으니까.

내게 무공은 살아남기 위한 도구.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으나....

회귀 전에 한차례 모든 것을 잃어 보며, 나 혼자 살아남아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물론, 당진천의 말이 내게 정답이 될 수 없겠지.

결국 내 일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당진천이 말한 것처럼 조언으로서는 상당히 귀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휘둘리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조언은 많을수록 좋은 것.

옆에서 비무를 보는 척, 이쪽을 힐끗대며 엿듣는 서문화린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느앗?! 마, 말로 하거라! 갑자기 찌르는 게 어디 있느냐!"

"서문화린 선배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무얼 말이느냐?"

"다 듣고 있었으면서 모른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정말로 본녀는 무슨 말이니 모르겠구나...."

스윽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서문화린.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레 이쪽을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코흠흠. 뭐어.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면 본녀에게 강한 무공이란 목청 크게 우는 법과 같으니라."

"예?"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니라. 내가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그대로 되돌려주겠노라고."

"그건...."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이기도 하며,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들어도 좋지만... 가장 들려주고 싶은 것은 역시 본녀의 원수가 되겠구나."

서문화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막아도 전해지도록, 설령 내가 그 앞을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도록 크게 울어대는 것. 그것이 본녀가 여기는 무공이고, 얼마나 크게 우느냐가 강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알겠고.

다만.

"...그 끝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퉁퉁 불어 버린 눈. 다 쉬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지친 몸. 그리고 본녀를 질린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남느니라."

당진천은 설령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세상에 무언가 남기고자 하였다.

반면 서문화린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신과 주변을 조금씩 파멸로 몰아넣을 뿐인 무공.

그렇기에 복수를 이룬 순간 서문화린은 깨달은 것이리라.

과했다고.

그토록 바라던 힘을 얻고, 복수를 이루었건만, 손에 남은 것은 오직 핏물뿐이었노라고.

한차례 스스로의 밑바닥을 돌아보고 이를 받아들인 뒤에야 화경에 오를 수 있었으니.

서문화린이 말하는 강한 무공이란 분명 과거의 그녀가 추구하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서문화린 선배."

"으응?"

"지금은 어떻습니까?"

"...."

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서문화린이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말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본녀에게 무공의 강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라. 중요한 것은 오직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가 뿐이니라."

"그리되실 겁니다."

서문화린이 바란 것은 과거로... 가장 행복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

나처럼 회귀라도 겪는 게 아닌 이상 실제로 돌아갈 수는 없으나, 이제부터라도 쌓아 올리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가볍게 서문화린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순간 빳빳하게 굳은 서문화린.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내게 물었다.

"다들 하나씩 무언가 이야기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대뿐이구나. 그대는 강한 무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 게냐?"

"뭐, 별거 있겠습니까."

당진천과 서문화린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 참고가 되기도 했지만... 평생에 걸쳐 세운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리는 없잖은가.

"사람 잘 죽이는 무공이 강한 무공이죠."

연무장을 내려다보자 비무가 끝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인, 하지만 누구 하나 죽지 않은 평화로운 비무가.

다음은 당소월이 올라올 차례였다.

[9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8] 98화. 용봉지회 (3)

당소월이 연무장 위로 올라온다.

품이 넉넉한 녹의가 살랑이고,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하얀 목덜미가 반짝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땀 냄새 나던 비무장에 꽃이라도 피어난 것처럼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나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닌지, 그간 활동을 전혀 하지 않던 당가의 여식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소란스럽던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그 인위적인 고요함 속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당소월이 내 쪽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

동시에 근처의 모든 관객이 내지르는 환호.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조용히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흠칫한 당소월이 내 쪽을 향해 배시시 웃어주고는 자리에 선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당진천이 끌끌 웃기 시작했다.

"저런. 다들 소월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뭐, 어쩌겠나. 우리 소월이가 좀 예쁜 게 아니니 다들 저리 호들갑인 거겠지."

"저도 사내지만,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그 맘 이해하네. 소월이는 이 애비에게 손을 흔들었건만 다들 무슨 난리인지."

"예에. 정혼자인 제게 손을 흔든 게 분명한데 다들 착각이 심하더군요."

"...?"

"...?"

나와 당진천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에휴. 그거 아느냐? 본녀의 눈에는 둘이 참 똑같은 표정으로 보이느니라. 됐으니까 이제 비무에나 집중하거라. 상대도 올라왔으니 곧 시작될 것 같구나."

다시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서문화린의 말대로 상대 쪽도 올라와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큼직한 박도만큼이나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

아직 내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 정확한 기세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당소월의 앞에서도 당당히 서서 호승심을 내비치는 것을 보아 일류를 넘어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아닐까 싶다.

이름을 들어본 적 없어 대단치 않은 상대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무위가 높네.

어쩌면 표행에 집중하는 표사라 무명이 알려지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것은 당소월에게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고개만 돌려 이쪽을 향한 당소월이 입만 뻐끔거려 말을 전한다.

'지켜봐 주시지요.'

며칠 전에 말했던 자신은 보호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의 연장선이겠지.

저쪽에서도 잘 보이게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심판이 올라와 무어라 말하고는 곧이어 서로 포권을 주고받는 당소월과 상대.

대련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둘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소월은 몸을 뒤로 날리며 소매에서 암기를 꺼내 던졌고, 섬전도는 그런 그녀를 쫓기 위해 한껏 달려드는 모양새.

크고 작은 쇠구슬인 자모환이 바닥에 튕기며 사방팔방으로 퍼졌고, 그 사이사이에는 얇은 우모침이 숨어 섬전도를 노린다.

이를 악물며 한 손으로는 박도를 휘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공을 담아 뻣뻣해진 옷소매를 펄럭이는 섬전도.

카강!

박도로 자모환을 쳐내고, 옷으로는 우모침을 막아낸다.

물론 완전히 막아내진 못하여, 우모침 몇 개를 허용하고 자모환 중 작은 쪽인 자환 하나에 정강이를 얻어맞긴 했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방어.

하지만 당소월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휘릭.

널찍한 소매를 흩날리며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하는 당소월.

그 하늘하늘한 궤적이 교차하며 무수히 많은 암기가 쏟아져나온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지금껏 사용하던 당가의 암기가 아닌 평범한 엽전이라는 점.

엽전을 닮은 암기가 아니라, 정말로 엽전이다. 소매 사이로 언뜻 드러난 당소월의 손에는 엽전 다발을 꿰는 데 사용한 끊어진 새끼줄이 몇 개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돈이 아깝... 아니지, 돈값은 충분히 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당가의 암기는 하나같이 만들기 까다로운 것이라 제작비용이 제법 된다고 들었다.

당장 우모침은 얇게 뽑아내기가 힘들고, 자모환은 잘 튕기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고 했던가.

그렇다 보니 엽전 자체를 던진다고 하여 큰 손해는 아니겠지. 애초에 당가가 몇 푼...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지만, 아무튼 돈이 없어 벌벌 떠는 가문은 아니니까.

다만, 진짜 인상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많은 숫자가 한 번에 날아갔다는 점.

아마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엽전 뭉치 전체를 휘두르고, 적절한 순간에 내공으로 새끼줄을 끊어 쏘아낸 것이리라.

당연히 훨씬 더 많은 숫자를 한 번에 던질 수 있겠지. 대신 손으로 직접 던질 때처럼 세세한 조작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실제로 당소월이 쏘아낸 엽전은 삼 할가량이 빗나갔다.

...대신 그 위력이 생각보다 괜찮았지만.

이전과 비슷할 거라 생각했는지 박도와 내공을 머금은 옷자락으로 몸을 감싼 섬전도였으나.

내공을 먹고 단단해졌을 터인 옷자락은 순식간에 꿰뚫렸고, 박도는 엽전과 부딪히는 순간 반탄력으로 그 끝이 흔들렸다.

다급히 박도 위에 도기(刀氣)를 덧씌운 섬전도. 어찌어찌 급소만은 보호하며 간신히 버텼으나... 전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덩치에 걸맞게 외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인지, 뼈까지 부러지진 않은 모양이나 맞은 부위의 통증이 상당한지 인상을 와락 찌푸린 섬전도.

다만 포기한 것은 아닌지 여전히 꺾이지 않은 눈빛으로 당소월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박차는 지면.

소매는 다 헤쳐 우모침을 막아낼 수 없고, 박도 하나로는 모든 암기를 쳐낼 수 없다.

그렇다고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기엔 몸이 둔하고, 잠깐 멈칫했다가는 조금 전처럼 엽전 세례를 맞게 되리라.

하여 섬전도가 택한 것은 정면 돌파였다.

박도를 세워 정중선만 가리며, 자잘한 방어와 회피는 도외시한 돌진.

본래 뒤로 뛰는 것은 앞으로 달리는 것보다 느릴 수밖에 없으니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오직 거리를 좁히는 것에만 집중한 덕에 나름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도 했고.

...다만, 당가의 보법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타닷.

가볍게 발을 놀리는 당소월. 사뿐한 움직임이었으나, 저만치 멀어진 몸은 섬전도가 기껏 좁힌 거리를 무위로 돌렸다.

거리를 조절하며 독과 암기를 쏘아내는 데 특화된 보법인 만큼, 뒤로 뛰면서도 상당한 속도가 나오기 때문.

그렇게 거리를 벌린 당소월은 다시금 암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날이 선 암기는 사용이 불가능했기에 대부분이 침(針)이나 환(丸) 형태였으나.

각 암기의 특징에 맞게 다양한 궤적을 그렸기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혈자리를 정확히 찌르지는 못했으나, 여기저기 박힌 침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을 유발하기에 딱 좋았으며.

뼈가 부러지진 않았으나, 쇠구슬에 두들긴 부위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오르고 있었으니.

당장 승부가 갈리는 것은 아니나, 가랑비에 옷 젖어 들듯이 상대로 하여금 조금씩 피해를 강요하고 누적시키는 전투.

정석적이지만, 영리한 전투방식이다. 예상외로 잘 다루는 암기술에 내심 감탄하고 있던 것도 잠시.

이를 알아챈 것인지 당진천이 짓궂은 표정으로 히죽였다.

"조금 놀란 표정이구먼, 사위."

"예. 솔직히 당소월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왜. 그간 독공에만 집중한 줄 알았더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죠."

당소월의 암기술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독공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은 사실. 그렇기에 항상 암기술은 독공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예를 들면 추혼비접을 이용해 멀리까지 독을 퍼뜨린다거나, 위력은 대단치 않지만, 완전히 피하거나 막아내기 힘든 암기를 이용해 직접 체내에 독을 주입한다는 식으로.

지금껏 그렇게 싸워왔고, 나랑 대련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왔으니까.

무엇보다 최근에 익힌 만류귀원신공은 절세의 독공 아닌가.

이거 하나 익히기도 힘들 텐데, 다른 무공까지 손댈 여유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거기에 만류귀원신공을 익히고 절정에 올랐으니, 독공을 주로 수련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네.

"뭐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월이가 그동안 독공에 집중한 것은 사실이네."

"허면...."

"독공을 수련하고 남은 시간에 익힌 것이 저 정도인 걸세."

"예?"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 연무장에서 눈을 떼고 당진천을 돌아보았지만,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네. 소월이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다만, 사위 자네가 너무 강하네. 그리고 당가의 무공에 상당히 익숙해졌잖은가."

"아."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내가 당가의 무공에... 아니, 당소월의 무공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하기야 회귀 전부터 합을 맞춰 왔고, 지금은 더 낮은 경지일 때부터 자주 대련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리고 나는 주로 상대의 흐름을 끊는 식으로 싸운다.

당소월의 무공을 훤히 꿰고 있는 상태에서 그 흐름을 끊어 내니, 제 실력을 온전히 드러내기 힘들었으리라.

무엇보다 암룡이라 불리는 당청의 암기도 내게 닿기 힘든데, 굳이 부족한 암기술을 주로 선보일 필요는 없다고 여긴 거겠지.

실제로 암기와 달리 당소월의 독은 내게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었으니까.

"뭐, 조금 덧붙이자면 암기술은 절정의 경지에 올라 날아가는 암기에 내공을 실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그 위력과 활용성이 확 달라지네."

"그것도 있겠군요."

보통 일류 수준만 되어도 무기에 내공을 불어넣어 강화시키는 어기충천의 수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조금 전의 섬전도가 자신의 옷소매를 굳힌 것도 그러한 응용이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손에 쥔 무기, 하다못해 신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물건에 한한 이야기.

몸에서 떨어졌음에도 내공을 유지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니, 일류 수준의 내공 운용 능력으로는 멀리 던지는 암기에 내공을 담기 힘들겠지.

던지는 순간이라면 모를까 조금 날아가면 금방 내공이 흩어져 버리리라. 안정적으로 내공을 실기 위해서는 절정쯤 되어야 가능한 일.

암기가 유용한 걸 알고, 이길 수만 있다면 체면을 크게 가리지 않는 사파에서도 암기를 잘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다.

무림인의 가장 큰 무기인 내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본격적으로 암기술을 수련하는 곳은 이 넓은 중원에서도 단둘, 사천당가와 살곡 정도다.

살곡은 휘하의 살수들을 소모품처럼 대하기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독과 암기를 가르치는 것이니 사실상 제대로 암기술을 연구하고 계승하는 곳은 당가뿐이네.

그리고 지금. 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당가의 암기술이 당소월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암기. 막아 내도 피해도 언제나 그다음이 기다리는 연계에 결국 섬전도가 두 손을 들었다.

이미 전신이 타박상으로 퉁퉁 붓고, 가늘고 굵은 침이 박힌 뒤에야 기권을 선언한 것.

패배를 인정한 섬전도에게 다시 한번 포권을 취한 당소월이 내 쪽을 향해 폴짝폴짝 뛰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천 소협! 제가 이겼어요! 잘 보셨나요?!"

덩달아 다른 것도 흔들리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옆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진천을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거 보십쇼."

역시 나한테 손 흔든 거 맞았다니까.

[9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99] 99화. 용봉지회 (4)

자신의 비무를 마친 당소월은 바닥에 떨어진 암기만 수거한 뒤, 곧장 우리 일행이 있는 관객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당진천의 자리를 밀어내, 옆자리를 차지하더니 대뜸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펴는 게 아닌가.

"엣헴!"

뒷일이 기대된다는 듯 호선을 그리며 감긴 눈. 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 참겠다는 듯 움찔거리는 입꼬리. 거만하다기보다는 장난스러움에 가깝게 치켜올린 턱.

허리에 손을 얹는 자세 때문인지 자연스레 이쪽을 향해 상체를 들이미는 자세가 됐기 때문일까. 넉넉한 무복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하는 곡선에 자꾸만 시선이 향한다.

나도 모르게 정신이 팔린 것을 알아차린 걸까. 당소월이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뜨며 재차 입을 열었다.

"엣헴!"

"뭔...."

그 노골적인 모습에 한차례 헛웃음을 짓고는 보란 듯이 크게 손뼉을 쳤다.

"잘했다."

"더 해주시지요!"

"독공의 성취가 대단함은 알고 있었으나, 암기술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좀 더!"

"본선 첫 비무라고는 하나,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이 용봉지회에서 당가의 위상을 드높인 것이다. 그가 아무런 활동이 없어 무성하던 소문도 오늘로 끝이겠지."

"으음...나쁘진 않은데 뭔가 부족하네요."

여전히 허리에 팔을 얹은 채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당소월.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은 격한 움직임으로 살짝 느슨해져 잔머리 몇 가닥이 살랑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말을 입에 담았다.

"...역시 내 정혼자가 최고다?"

"히야! 바로 그거예요! 역시 천 소협에게는 제가 최고죠? 예에. 잘 알고 있답니다!"

으쓱으쓱.

어깨를 들썩이며 비무에서 이겼을 때보다 더 기뻐하는 당소월.

반면 한 칸 밀려난 옆자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당진천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고, 반대쪽에 있던 서문화린의 눈빛에 울적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당진천은 그렇다 쳐도 서문화린은 왜?

의아함에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내 옆에 앉아있던 당소월이 내 쪽으로 몸을 한껏 뻗는다.

자연스레 내 배를 짓누르는 당소월의 상체. 그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감각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굳어버렸으나.

정작 당소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손을 뻗어 서문화린의 손끝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화린 언니! 화린 언니도 보셨지요? 어땠나요?"

"에, 으, 어?"

혼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둥대던 서문화린이 얼마 지나지 않아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코흐흠. 당연히 보았느니라. 당가의 진정한 저력은 생사결에서 드러나는 것. 규칙이 정해진 비무에서는 여러 제약을 짊어진다는 것이야 유명한 이야기니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본녀의 상상 이상으로 훌륭했느니라."

"후후. 고마워요, 화린 언니."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술술 나오는 서문화린의 대답에 생긋 미소 지은 당소월.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고는 몸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최근에 한 번 설리향까지 껴서 셋이서 이야기를 나눈 뒤로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단 말이지.

아무리 물어봐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게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좋아진 것 아닌가.

약간의 어색함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방향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것도 잠시. 배에서 느껴지던 감각이 갑자기 사라진 탓일까. 약간의 섭섭함에 괜히 침만 삼키고는 전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설리향의 차례군. 그 상대인 위지 소저는 당소월 네 친구라 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나?"

"...."

가볍게 볼을 부풀린 얼굴로 아무 말도 않는 당소월. 잠깐 조금 전의 말을 되짚어 보고는 질문을 정정했다.

"네 친구라던 위지 소저의 무공은 어떠한지 알려줄 수 있겠나?"

"푸흐."

그제야 볼에서 바람을 뺀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저도 수련이의 무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랍니다. 섬서성으로 여행 가는 김에 얼굴 한번 보려 했는데, 결국 문제가 생겨 종남파에 잠시 머무르다가 집으로 돌아갔잖아요?"

"그랬었지."

"이후로는 서신으로 안부를 주고받았고, 무한 시에 막 도착한 뒤에는 시간이 안 맞아 만나지 못했지만... 아! 천 소협이 납치당했을 때는 잠깐 보긴 했는데 정작 그때는 제가 실의에 빠져있던 척... 아니, 실의에 빠져있던 터라 길게 대화하지는 못했거든요."

"그, 그런가."

이렇게 들으니 새삼 내가 너무 막무가내로 굴었다는 실감이 든단 말이지.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당소월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 쥐었....

"음. 흐으음. 흠흠."

그러기엔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노려보는 당진천의 눈치가 보여 그냥 손등만 살살 간질여 주었다.

다행히 당소월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꼬리로 키득였고.

"후후. 용봉지회가 일단락되면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대로 자리를 만들 생각이니 걱정마시지요. 그리고 자세한 무위를 모를 뿐이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답니다."

"대략적으로 말인가?"

"예에. 잠깐이지만 직접 얼굴을 보기도 했고, 들려오는 소문도 있는 데다가, 제 경지가 높아지며 기감도 발달했으니 말이지요."

그리 말한 당소월이 슬슬 다음 비무를 위한 정리가 끝나가는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경지 자체는 일류입니다만... 이미 절정에 반 발짝 걸친 느낌이었지요."

"화산파의 후기지수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라고 했던가. 그리 불릴 정도면 당연한 일이겠지."

일반적으로 약관 전에 일류에 오르면 기재 소리를 듣고, 이립이 되기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다.

다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는 뛰어난 무공과, 그간 쌓아온 재력을 바탕으로 한 지원 등.

여타 평범한 무인과는 차원이 다른 조건에서 어린 나이부터 수련에 임하기에 못해도 한 세대에 한둘쯤인 기재나 천재 소리 듣는 이가 튀어나오는 것이고.

실제로 당소월은 약관 무렵에 일류의 끝자락에 다다랐고, 스물셋에는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손위 형제인 당청 역시 아직 이립이 되기 전이건만, 완숙한 절정의 경지에 오른 지 제법 되었고.

당소월만큼은 아니지만, 당청의 재능도 부족한 편은 아니니 이대로 수련에 매진하면 언젠가는 당진천과 같은 화경의 경지에 오르겠지.

그때가 진정으로 당가의 세대가 교체되는 날일 테고.

뭐, 아무튼 그렇다 보니 화산파의 유망한 후기지수라면 슬슬 절정에 이르렀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다.

당연히 지금의 설리향의 무위 정도는 한참 전에 뛰어넘었을 터.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 아하. 그런 걸 걱정하고 계셨던 건가요 천 소협?"

당소월이 별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픽 웃어버린다.

"향이는 소협 생각만큼 약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물론 비무에서 이기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연무장 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는 당소월. 이제 보니 슬슬 정리가 끝나 심판이 다음 설리향과 위지수련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바짝 긴장하여 굳은 얼굴의 설리향이 심호흡을 하며 연무장 위로 오르는 모습과.

여유로운 표정으로 화산파의 무인들이 몰려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들며 연무장에 오르는 위지수련의 대비되는 구도뿐.

그러나 당소월에게는 다른 것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인지, 한쪽 손등으로 비스듬하게 턱을 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 쉽게 꺾이지 않을 거랍니다. 승패를 떠나 무언가 보여 주긴 하겠지요."

"풀 죽지 않는다면 다행이지."

"예에.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만."

잠시 운을 띄운 당소월이 내 쪽으로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그대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도 그렇고, 향이도 그렇고. 이번 용봉지회에서 예상외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건 전부 소협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거랍니다."

"...."

흠칫한 내게서 고개를 떨어뜨린 당소월이 방긋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연무장 위의 설리향과 위지수련이 서로 포권을 취했다.

***

"아! 어쩐지 눈에 익다 했더니. 저번에 소월이와 함께 있던 여협이셨군요!"

"앗, 넵. 맞아요. 설리향이라고 해요."

"어머. 저는 화산파의 십일대 제자인 위지수련이라고 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후회 없는 비무라 되도록 서로 최선을 다해 보죠!"

티 한 점 없는 맑은 미소로 포권을 취하는 위지수련. 이에 설리향 또한 포권으로 답하였으나 그녀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당 언니의 친구분이라고 했지.'

하나로 묶어 정리한 검은 머리. 흰색과 붉은색을 기조로 한 도복과 그 소매에 새겨진 우아한 매화 모양 자수.

거기에 사근사근한 말투와 여유를 잃지 않는 저 당당함은 또 어떠한가.

설리향이 평가하기를, 위지수련은 단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저 단아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며 순음지체의 잠재력을 개화하기 시작한 설리향이다. 내공 운용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그녀는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위지수련이 두른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기세를.

'당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강하겠지.'

아름답고 강한 여인.

친구는 닮는 것이라 했던가. 위지수련은 설리향이 그렇게나 동경하고 따라잡고자 했던 당소월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설리향은 그런 위지수련과 비무하기 위해 연무장 위에 서 있다.

'나도 알아. 분명 싸우면 내가 지겠지.'

설리향이 지난 삼 년간 무공 수련을 대충 한 것은 아니다. 탈진해 기절하듯 잠드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었고, 손에서 물집이 사라진 때가 없었다.

조금 남사스럽긴 해도 천휘의 추궁과혈이 없었다면 분명 버티기 힘들 수준의 강도.

다만, 이는 상대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더하겠지.

설리향이 스승인 암혼부대주로부터 배운 수련이란, 짧은 시간에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갈고 닦기에 수(修)이고 련(鍊)이라 불리는 것.

위지수련이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수련의 무게는 분명 설리향의 지난 삼 년을 훌쩍 뛰어넘으리라.

'하지만.'

포권을 마친 설리향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관중 사이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얼굴이 있었으니.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의 천휘가, 자신을 격려하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소월이 그러했다.

'보여줘야 해.'

그때 도움을 받은 자신이 이렇게나 성장했다고. 지금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앞으로 더 강해져 언젠가 받은 것 그 이상을 돌려주겠노라고.

만약 그때가 된다면....

뒷말을 삼킨 당소월이 자세를 잡았다.

한쪽 발은 앞으로, 반대쪽 발은 가로로 눕혀서 뒤로.

허리춤에서 풀어낸 채찍을 길게 늘어뜨리며 그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언제든 출수할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 몸을 던질 수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

이에 위지수련 또한 편하게 늘어뜨린 검을 설리향을 향해 겨누며 기수식을 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그와 동시에 차디찬 한기가 설리향의 혈도에 휘몰아쳤다.

[9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00] 100화. 용봉지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