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100-110

[100] 100화. 용봉지회 (5)

설리향의 혈도를 타고 차디찬 한기가 소용돌이친다.

그녀가 익힌 빙하진기는 오로지 음한지기를 받아들이고, 이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

경천동지할 정도로 위력적인 것도 아니고, 신묘한 공능을 지닌 것도 아니다.

대신,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내공의 출력만큼은 무엇에도 밀리지 않으니.

이는 체력도 내공도 심지어 쌓아 온 수련의 세월조차 부족한 설리향이 위지수련보다 유일하게 앞서는 것이었다.

'단기 결전으로 가야 해.'

그나마 있는 승산이 있는 길을 향해 설리향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타닷!

나아간다. 그 기본에 충실한 정직한 보법이 설리향에게서 펼쳐진다.

본래라면 몇 년 익히다 다른 보법으로 갈아타야 하는 기본공. 이를 본 위지수련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용봉지회까지 와서 기본공을 꺼내 든다. 일류에 들어선 무인이니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모를 리 없을 터.

그렇다면 일부러 기본공을 꺼내 든다는 것은 패배를 예상하고 미리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지금 이게 무슨...!"

한 소리 하려던 위지수련이었으나, 채찍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설리향의 눈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부릅뜨인 눈. 기합을 내지를 힘조차 아깝다는 듯이 꾹 다문 입가. 그리고 채찍 위에 서려 있는 옅은 서리.

그 기세는 살기만 띠지 않았을 뿐, 생사결에 임하는 무인처럼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그대로 설리향의 초식에도 묻어나왔다.

어깨 뒤쪽까지 넘겼던 팔이 큼직한 반원을 그리며 수직으로 떨어진다.

쐐애애액-!

기껏 편(鞭)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설리향이 택한 것은 모든 기교를 벗겨낸 단순한 궤적.

다만, 그 안에 아무런 변화가 없던 것은 아니다.

설리향의 어깨를, 팔꿈치를, 손목이 저마다의 원을 그리며 가속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를 받아내는 것은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채찍이었으니.

기다란 채찍이 기다란 원을 전부 그렸을 무렵. 채찍 끝은 위지수련의 눈으로도 쫓기 힘들 정도로 빨라져 있었다.

위지수련이 이에 반응한 것은 오롯이 그녀가 지금껏 쌓아 온 수련의 성과였다.

터엉!

반 박자 먼저 들어 올린 검을 후려치는 설리향의 채찍. 다만, 막아내긴 했으나 완전히 후려치지도 베어내지도 못했으니.

채찍의 궤적은 막혔으나, 원을 그리려던 힘 자체는 남아 그대로 검을 몇 바퀴나 휘어감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상대의 검과 자신의 채찍이 단단히 연결되었음을 깨달은 순간. 설리향의 입이 처음 열리며 거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앗!"

빙하진기를 운용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출력으로. 아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평소의 한계를 넘어선 내공을 때려 박는다.

그 강렬한 의지에 반응해 설리향의 내공이 채찍으로 집중되더니, 안 그래도 이미 서리에 덮여있던 채찍에서 하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구음절맥보다는 못하지만, 순음지체 또한 천고의 체질.

설리향이 타고난 순수한 음기는 그대로 빙하진기의 구결에 따라 짙은 음한지기가 되어 단전에 쌓였고.

이는 그 무엇보다도 정순한 내공이 되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위지수련이라도 쉬이 밀어내지 못하고, 한번 허용하게 되면 그대로 내상을 입고 쓰러질 터.

허나, 열양공이나 음한공을 익힌 이들이 상대와 무기를 맞댄 채, 상대에게 자신의 내공을 밀어 넣어 그 특이한 성질로 우위를 점하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거기에 설리향은 이미 이 수법을 예선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하지만 쉽게 당해 주지는 않을 거예요!"

전력으로 달려드는 설리향의 모습이 기꺼운지 즐거운 표정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는 위지수련.

설리향이 빙하진기와, 몸에 품은 순수한 음기 덕에 자신의 경지보다 훨씬 많은 양의 내공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동급의 무인 사이에서의 이야기.

위지수련은 이미 절정에 한발을 걸치고 있는 무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평범한 일류 무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리라.

"흐읍!"

짧게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위지수련의 검에서 옅은 분홍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검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하지만 일반적인 어기충천의 수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밀도 높은 힘.

설리향의 내공은 화경에 오른 당진천조차 감탄할 정도로 정순한 것이었으나, 화산파의 무공 또한 정순함으로는 어디 가서 밀리지 않았으니.

우웅-

서로의 내력이 충돌하며 채찍과 이에 묶인 검신이 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둘 다 내공을 완전히 유형화할 정도는 아니기에 그 조용한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설리향의 강렬한 음한지기 가까이에 붙어 있는 둘은 내공 싸움의 양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채찍을 타고 한기가 흘러 들어가며 검신의 절반 이상을 하얗게 물들였던 서리. 하지만 그 경계는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중이다.

내공에서 밀린 자리의 서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더운 날씨에 녹아내렸고, 남은 물방울은 진동하는 검신이 털어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아니, 그 위를 뒤덮듯 옅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만약 위지수련의 내공이 자신의 내공을 전부 밀어낸 뒤에는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일.

그러나 설리향의 눈빛은 담담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각오를 굳히는 설리향. 본래라면 여기서 음공을 펼쳐 상대의 집중을 흐트러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예선에서 선보였던 방법. 거기에 방심하고 있던 당시의 심사관과 달리 위지수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여기서 음공으로 위지수련을 흔들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내공만 낭비할 가능성이 높다.

설리향이 유일하게 앞서는 것이 내공인 만큼 어설프게 날려버리는 것은 멍청한 짓.

그렇기에 설리향은 옅은 가능성을 향해 도박 수를 던졌다.

으득.

설리향이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불이 붙은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미 서로의 무기는 얽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 그렇다고 금나수법이나 각법으로 다투기엔 채찍이 길어 서로의 손발이 닿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설리향이 음공 대신 선택한 것은... 스승인 암혼부대주에게 배운 암기술이었다.

채찍은 힘이 아니라 유연함과 넓은 관절의 가동을 이용해 휘두르는 것. 그렇기에 편법의 대부분은 양손이 아닌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당연히 설리향 또한 한쪽 팔은 자유로웠으니, 그 하얀 손이 잠시 품에 들어갔다 나온 순간.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쇠구슬 두 개가 걸려있었다.

"암기?!"

눈을 크게 뜬 위지수련. 그녀가 설리향이 예선에서부터 보기 드문 빙공으로 사람들 입에 올랐기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미리 알고 있었기에 예상외의 수단에 크게 놀란 것이리라.

"받아라!"

일부러 소리 높여 외친 목소리. 요란스레 휘두르는 팔.

설리향의 행동 하나하나는 위협의 의지를 갖고 행해졌으며, 실제로 쏘아진 암기는 정확히 위지수련의 양 눈을 향하는 중이었다.

사람이라면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것이 정상인 상황. 그러나 무인은 이러한 반사적인 허점을 통제하기 위해 평생을 수련하는 이들이다.

어려서부터 화산파에서 나고 자란 위지수련 또한 당황은 할지언정 어지간한 일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향해 날아드는 쇠구슬을 똑바로 바라보던 위지수련이 고개를 꺾었다.

물론 몸을 틀지 않고 고개만 까딱이는 것으로는 완전히 피할 수 없었기에 쇠구슬 하나가 그녀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퍽!

날붙이가 아닌 쇠구슬이기에 피부가 베이지는 않았다. 그저 충격에 머리가 흔들리며 흐트러진 위지수련의 앞머리가 그녀의 한쪽 눈을 가릴 뿐.

어찌 됐든 쇠구슬에 얻어맞은 것이니 고통은 상당할 터. 하지만 길게 드리운 머리카락으로 한쪽 눈을 가린 위지수련은 찡그리기는커녕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설리향의 한 수에 감탄했다는 듯, 혹은 이제부터 일어날 일이 기대된다는 듯이.

"훌륭하세요, 여협. 좋은 걸 보여 주셨으니 저 또한 그에 걸맞은 것을 보여 드려야죠."

그 말과 함께 위지수련의 검을 붙잡고 있던 설리향의 채찍 끝부분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투둑.

"...어?"

자신이 준비한 수가 전부 통하지 않았음에 허탈해하던 설리향의 눈이 흔들렸다.

암기가 날아오는 도중에도 설리향의 내공을 밀어내던 위지수련은 기어이 자신의 검을 온전히 되찾았고.

검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위력적인 빛무리가 설리향의 채찍을 그대로 베어낸 것.

동시에 위지수련에게서 화산의 보법이 펼쳐졌다.

사뿐사뿐 나아가는 걸음걸이. 하지만 그 한번 한 번에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진다.

설리향이 바닥에 힘없이 늘어진 채찍을 회수하기도 전에 끝낼 것처럼 저돌적인 기세.

실제로 그럴 생각으로 달려들고 있었고, 이는 당사자가 된 설리향 또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채찍을 회수하다가는 늦어...!'

채찍보다 몸을 빼는 것을 우선시한 설리향. 그녀가 뒤로 몸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위지수련의 검이 휘둘러졌다.

서걱.

늦지 않게 거리를 벌렸기에 아직 검이 닿을 정도의 간격은 아니었다. 다만 위지수련이 베어낸 것은 설리향이 아니라 그녀의 채찍이었다.

"읏!"

잇소리를 낸 설리향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남아있는 채찍의 길이는 기껏해야 평범한 검보다 조금 긴 정도.

이래서야 아무리 휘둘러도 제 위력이 나오기 힘들다.

...이젠 휘두를 시간조차 없기도 하고.

채찍을 베어낸 위지수련이 쉬지 않고 달려들며 검을 휘두른다.

동작 하나하나의 연결은 유려했으며, 검 끝은 흔들리며 예상치 못한 궤적을 자아낸다.

연분홍색 잔상이 뒤늦게 칠한 검로는 꽃봉오리를 닮았으나, 설리향에게 이를 알아볼 여유는 없었다.

무의미해진 채찍은 진작에 손에서 놓았다. 암기를 꺼낼 틈은 주어지지 않고, 어찌어찌 던지더라도 너무나 간단히 격추당한다.

도박 수가 실패했으니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라는 걸까.

설리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중이었다.

'안 돼.'

위지수련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그녀의 몸에 작은 상처가 늘어난다. 약간 화끈하긴 해도 별로 아프진 않다. 출혈 또한 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위지수련이 일부러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비무니까. 실력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그러한 이유로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설리향은 위지수련의 간격에 들어온 이후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선다.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팔뚝에 얇은 실선이 생기고, 이젠 남아있는 암기도 얼마 없고 그나마도 닿지 않으리라.

여기에는 그 어떤 잔재주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위지수련은 강하고 설리향은 약했다. 그뿐인 이야기.

'난....'

물론, 이를 힐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지수련은 예전부터 뛰어난 후기지수로 유명했고, 설리향은 이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무림초출이니까.

이대로 천천히 밀리다 그대로 항복하더라도, 혹은 아예 연무장 밖으로 떨어져 실격패 당하더라도 다들 이 정도면 잘 싸웠다며 박수를 보내리라.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기에.

설리향의 입김을 타고 한기가 새어 나왔다.

101화. 용봉지회 (6)

'이걸로는 부족해.'

설리향에게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이기면 좋긴 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승리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도, 혹은 화산파의 무공을 견식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보여 줘야 해.'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무리하는 천휘에게.

실제로 천휘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답답해하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그저 증명하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서?'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이렇게 힘든데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천휘에게 받은 것이 많아, 이를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 버티는 것은 아니었다.

극한에 몰리자 용봉지회 내내 그녀를 옥죄던 강박이 벗겨진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광경.

'아.'

날아오는 칼날. 자신이 그토록 닮고 싶었던 아름다우면서 강한 무인. 그리고 저 위에서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하지만 걱정된다는 듯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천휘.

이 모든 것이 그녀로 하여금 외면하고자 했던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한다.

설리향의 눈이 가장 마지막에 담은 것은 아무런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오롯한 자기 자신이었으니.

그제야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자각했다.

'나, 역시 천휘가 좋아하나 봐.'

이미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당소월로부터 천휘를 빼앗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당소월 또한 설리향에게 고마운 사람이고, 언제나 자신을 이끌어 준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다만 설리향이 바란 것은.

'나를 돌아봐 줘.'

독점할 수 없어도 좋다. 애초에 단 한 번도 자기 것인 적이 없었으니까.

'나를 봐.'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번 자각하자 타는 듯한 갈증이 멈추질 않는다.

'나를....'

천휘가 가끔 보이던 애틋한 눈빛을 기억한다. 힘들게 수련을 마친 날이면 섬세하지만 거칠게 등을 눌러주던 손길을 기억한다.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취향을 알고 있다는 듯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좋았고, 자신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추궁과혈 뒤에 올라오는 은은한 열기가 좋았다.

'나를 돌아보게 하겠어.'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

천휘가 먼저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헛된 기대로 밤을 지새우지 않으며 먼저 다가가겠다.

차마 당소월의 자리를 넘보지는 못하나... 그럼에도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다.

지난 삼 년간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탓일까. 설리향의 내면은 폭발하기 직전이었으니.

'어차피 패배가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전부 토해 내고 쓰러지겠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변에 다른 누가 있더라도 들을 수밖에 없도록,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도록 소리 높여 외치리라.

내가 여기에 있노라고.

위지수련의 검을 피하기 급급하던 설리향의 입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온 숨결에 한기가 섞인다.

한곳으로 집중되는 내공. 그리고 이어지는 청아한 목소리.

"———————!"

눈앞으로 암기가 날아올 때도 놀라지 않던 위지수련이 순간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뒤이어 막대한 음한지기가 설리향의 노랫가락을 타고 주변을 휩쓸기 시작한다.

가사는 없다. 목소리는 좋지만 음정이 단조로워 흥얼거림에 가까운 다소 심심한 노래.

하지만 이어지는 결과는 결코 심심하다고 폄하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설리향을 중심으로 연무장 바닥에 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설리향의 노랫소리를 들은 모든 이가 서늘함에 팔을 쓰다듬는다.

허나 특이하게도 이를 위협적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운 날에 서늘한 그늘을 마주친 사람처럼 반가워했으면 반가워했지, 두려워하지는 않으니까.

연무장을 넘어 관객석까지 닿는 설리향의 음공 또한 그러했다.

궁지에 몰려 발악처럼 내지른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악기나 독기 같은 흉흉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안에 담긴 것은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오기와, 자신의 모든 것을 선보이겠다는 결의뿐.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만큼 순수한 호승심으로 받아들였으리라.

하지만 바로 앞에서 짧게나마 서로의 무공을 겨루던 위지수련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다.

"비무 상대는 저인데 말이죠."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리는 위지수련.

설리향이 남은 모든 힘을 쥐어짜 내지른 음공은 격렬했지만, 날카롭지는 않았다.

자신의 운용 능력을 넘어선 양의 내공이었기에 단숨에 방출할 수는 있어도, 섬세하게 조작하지는 못했기에.

하여 위지수련은 설리향을 둘러싼 음한지기의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버텼다.

저 거친 흐름에 직격당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즉시 몸을 뺀 덕에 여파만 막아 내면 되는 상황.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올리며, 가만히 검을 겨누는 위지수련.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다. 아마 지금이 설리향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리도 내공을 뿜어대면 탈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덕분에 설리향의 노랫소리는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계속되었다.

그녀가 폐부에 담아둔 호흡을 전부 토해 내고, 단전에 남은 내공을 마지막 한 줌까지 텅텅 비워내며... 그 안에 담긴 의지가 당사자에게 흐릿하게나마 전달될 때까지.

"...아."

그렇게 모든 것을 토해 낸 설리향의 노래가 끊겼다.

완전히 얼어붙은 바닥. 겨울처럼 싸늘한 주변 온도. 그리고 잔존한 음한지기를 찢어 버리며 피어나는 화산의 검.

어느새 그녀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춘 위지수련의 검.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설리향이 잔뜩 지친, 하지만 후련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졌습니다."

설리향의 용봉지회는 여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되는 것도 분명 있으리라.

***

"아."

설리향의 노랫소리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주변을 얼리는 막대한 음한지기 때문도, 내공이 흩어지기 쉬운 음공임에도 소리가 닿는 끄트머리까지 서늘함을 실은 내공 운용 능력 때문도 아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

나는 회귀 전의 설리향을 안다. 그녀가 귀음마녀라 불리며 귀곡성처럼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담은 것이 무엇인지 기억한다.

한(恨).

자신의 비통한 처지를 한탄하고,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세상을 원망하고, 너도 그리되어야 한다며 저주한다.

사파 무인 중에는 인생이 기구한 자가 많다지만, 설리향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수준이었으니.

사람의 몸으로 사람의 것이 아닌 귀기를 다루는 것이 바로 이해되더라.

처음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특히 남자를 향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설리향이 나와 그런 관계가 되었던 것이 신기했을 정도였고.

하여, 내게 설리향의 음공이란 비명과도 같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이 내지르는 최후의 발악.

내가 철혈당이 무너지고, 설리향과 서문화린이 쓰러지는 풍경을 지옥이라 칭하면서도 심상에 단단히 새긴 것처럼.

설리향 또한 자신만의 지옥을 품었기에 나를 만나고 날 선 태도는 누그러졌으나, 무공에 담긴 한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게 설리향의 음공은 한스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말뚝처럼 단단히 박혀 있었으나.

지금의 설리향은 전혀 다르더라.

당연히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험한 꼴을 겪지 않았으니, 그때 같은 한스러움이 묻어나올 리는 없다고.

그러나 이렇게나 달라질 줄은 몰랐다.

설리향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안에 담긴 한기가 기분 좋은 시원함을 선사하는 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음공을 토해 낸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는 내가 회귀 전부터 설리향을 지켜봐 온 사람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녀의 노랫소리가 가리키는 것이 나였기 때문에 느껴진 것.

설리향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음공에 담긴 것은... 명백한 연정(戀情)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봐 달라고.

귓가를 맴도는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서늘한 한기가 그리 속삭이는 것만 같아 설리향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런가."

설리향이 내게 어느 정도 호의를 품고 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하오문으로부터 도와주기도 했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나름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것이 이런 종류의 호감일 줄은 몰랐다.

내 안에서 설리향과의 인연은 한번 끊어진 것이었으니까.

분명 떠올리면 그립고, 애틋함은 여전히 남아있으나... 이는 죽음을 통해 강제로 끝을 맺었다.

설리향이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에도 설리향은 다시금 나를 마음에 품었다.

내가 회귀 전의 당소월과 지금의 당소월을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번 반한 것처럼.

혹은 과정이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당소월이 나를 이전 생에 그러하듯 좋아해 준 것처럼.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미 내 옆에는 당소월이 자리 잡았고, 나는 당가의 데릴사위라는 점이다.

설리향의 마음을 알았고, 가능하다면 이에 부응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하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답답함. 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설리향이 자신의 성취를 선보였고, 그것이 설령 승리로 이어지지 않음에도 대단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터.

그런데 옆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인 걸까.

멍하니 연무장을 내려다보던 당소월이 조용히 내게 손을 뻗었다.

...다만 그 손길은 비무 시작 전의 내가 그러하듯 손등을 감싼 것이 아니었다.

스윽.

당진천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각도로 내 허벅지에 손을 얹은 당소월. 그녀가 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직접 닿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신중하게도 육성으로 속삭이는 대신, 전음을 보내 왔다.

아무리 당진천이 화경의 고수라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보내는 전음을 듣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

대체 이렇게 은밀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어쩌면 내가 설리향의 음공에서 느낀 것을 당소월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 소협. 그거 아시나요? 당가의 데릴사위라 하여 첩을 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저 첩을 들일 권한이 소협이 아닌 제게 있을 뿐이지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당소월이 소리내어 키득이고는 말을 이었다.

-달리 말해서 제가 허락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뜻이랍니다.

-....

-예에. 제가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그 은근한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당소월은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102화. 별호

이후에 이어진 용봉지회의 양상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오대세가와 구파일방 출신이 높은 성적을 기록하고, 낭인이나 중소문파 출신 중 재능있는 한두 명이 두각을 드러내고....

당소월은 나름대로 선방했으나 결국 소림사의 후기지수에게 패배했다.

외공을 얼마나 열심히 수련한 건지, 쇠구슬을 정통으로 맞아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들더라.

아마 날붙이 암기가 허용됐더라도 이기기 힘든 상대지 않았을까.

그래. 이변이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쪼물쪼물.

"천휘. 내상은 다 나았어?"

"다 나았다."

당소월이 당진천과 함께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가자, 슬금슬금 다가와 내 어깨를 쪼물대기 시작한 설리향.

조용히 뒤를 돌아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응? 왜 그래?"

"이제 괜찮으니, 안마는 필요 없다만. 애초에 안마로 내상은 안 낫기도 하고."

"...야! 너는 막 추궁과혈 한다면서 나한테. 어? 그런 짓까지 해놓고! 내가 그냥 안마 좀 해준다는데 그걸 못 참아?! 어차피 지금 아무도 없잖아!"

"보, 본녀가 여기 있느니라."

서문화린이 구석에서 슬그머니 손을 들었지만, 설리향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내가 천휘 너처럼 이상한데 만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어깨잖아! 내 호의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거랑 그거랑은 경우가 다르지 않나. 그리고 이상한 데라고 하지 마라. 등이었잖나."

"아 몰라 몰라! 할 거 없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 봐!"

고개를 휘휘 저으며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설리향.

그렇다. 용봉지회에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지만, 그 이후에는 이변이라 할만한 것이 생겼으니.

바로 설리향이 틈만 나면 은근슬쩍 내게 달라붙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유는 안다. 지난 비무에서 본 것이 있는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다만, 당소월이 마지막에 전음으로 했던 말까지 겹쳐져 머리가 복잡할 뿐이지.

살면서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생각처럼 잘 안되는지 손아귀로 주무르는 건 포기한 걸까. 가볍게 말아쥔 주먹으로 내 어깨를 통통 두드리고 있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 내렸다.

"고맙지만 정말 됐다. 슬슬 내상이 나았으니,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어떤 상태인지 확인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쓰읍. 무공... 알았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무공 이야기를 꺼내자 아쉽다는 듯이 물러나는 설리향. 그리고는 이쪽을 노골적으로 노려보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렇게 배려심이 뛰어난 여자라고 주장한 것 같은 느낌.

"어때? 천휘 네가 그동안 몸이 근질거렸다는 걸 아니까 바로 양보해 주는 거. 내가 이렇게 배려심이 뛰어난 여자야."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완벽했을 거다."

헛웃음을 지으며 검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무한 시에 도착했을 때 머무르던 금화상단의 객잔은 방이 하나라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 괜찮은 곳이었지만.

중간에 내가 납치당해서인지 무림맹에서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다며 당소월과 설리향에 방을 내어주었고.

뒤이어 도착한 당진천은 물론, 온갖 소문과 함께 돌아온 나와 서문화린 또한 자연스레 함께 무림맹에 머무르게 되었다.

본래 여러 손님을 모시려고 만든 별채를 우리 일행이 거의 독점하는 상황.

나야 편하니 좋지. 등 따습고 고기반찬 꼬박꼬박 나오는 것도 좋지만...그보다는 연무장이 정말 잘 만들어져 있는 게 참 마음에 들더라고.

하기야. 무림맹에 머무르는 사람은 십중팔구가 무인일 테니, 지내는 곳에 제대로 된 연무장을 만들어 두는 것이 당연한 거겠지.

아직 손에 익지 않은 흑색 검을 허리춤에 고정시키고 있자니, 뒤에서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에휴. 요즘 아이들은 참 무섭구나."

"서문화린 선배. 혼자서 방 지키고 계실 게 아니라면 잠깐 제 상대를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으응?! 본녀 말이느냐? 당연히 괜찮고말고! 어서 가자꾸나!"

마침내 말 걸어주는 사람이 생겨서인지 신나서 폴짝폴짝 뛰어오는 서문화린. 그 모습을 보며 설리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뒤이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긴 했으나... 이내 아차 한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

푹신한 침상이나, 삐걱이는 나무 바닥이 아닌 단단하고 평평한 돌바닥.

내공은 충만하고, 혈도는 멀쩡하며, 그간 잘 먹고 잘 쉰 몸뚱이에서는 힘이 넘친다.

다만, 이 모든 것보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손바닥에 착 감기는 손잡이와, 팔과 어깨까지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

회귀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검을 잡지 못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일까. 부족한 조각이 채워진 것처럼 이제야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좀 살 것 같군요."

"그대도 참 어지간하구나."

"본래라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 겁니다. 허나, 용봉지회를 보고 나니 조금 참기 힘들어지지 뭡니까."

"이해하느니라. 본녀도 결승에는 제법 감탄했었으니."

결승은 남궁세가의 소가주와 소림사의 불제자가 맞붙었다.

남궁세가는 회귀 전에 완전히 멸문당해, 직계의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남궁의 검은 변질된 모습으로도 본 적 없었기에 기대가 컸는데....

직접 보고 나니 왜 남궁세가가 천하제일검가를 자처하는지 알겠더라.

그들의 말은 오만했으나, 그 오만함에 걸맞은 실력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이번 용봉지회의 우승은 남궁세가에서 차지했고.

소림사의 후기지수 또한 훌륭했고, 그가 펼친 무공은 분명 감탄스러운 것이었으나....

검이 아닌 권각술이었기에 아무래도 내겐 감동이 덜하더라.

"아, 본녀에겐 여전히 천휘 그대가 더욱 놀라우니라. 살아온 날이 적지 않고, 겪은 일이 얕지 않으니 천재라 불리는 이는 꽤 많이 봤다고 자신하느니라. 당장 본녀 또한 그러한 분류에 속하는 사람이고."

"저도 제가 잘난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니라. 천재란 익히고 깨우치는 속도가 빠른 이를 말하는 것이니라. 남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능숙하게 해내고, 때로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런 이들이지."

"예. 아마 제가 그런 천재인가 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천재란 결국 과정을 단축시키고, 색다른 결과를 내놓는 이들이라는 소리니라. ...헌데 천휘 그대에겐 과정이랄 것이 존재하지 않았느니라. 갑자기 어디서 뚝 하고 떨어진 것이지."

"...."

"그 부분에 대해 캐물으려는 것은 아니니라. 애초에 본녀는 이미 한번 그대의 심상을 엿보았잖느냐."

"그랬죠."

당시의 내가 흑천검문주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조금 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을 끄집어내고, 전생의 깨달음을 억지로 쥐어 휘두른 것.

덕분에 이기긴 했으나 몸은 엉망이 되었고...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흘러넘친 기세가 사방팔방 퍼졌을 테니, 그 자리에 있던 서문화린과 사흑련주는 무언가 알아챈 거겠지.

"그것이 급하게 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느니라. 지극히 과격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본녀가 어찌 그 길을 부정하겠느냐. 다만 그으...."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너무 놀라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니라?"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서문화린이 한쪽 손을 뻗어 까딱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말이 아닌 몸으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구나. 한번 전력으로 와 보거라."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전력으로 와 보라는 말은 좋네.

화경의 절대고수인 서문화린이라면 이전 생의 무위를 제법 되찾은 지금의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전부 받아줄 수 있을 터.

하여 처음부터 냅다 검기를 뽑았다.

우웅-

검과 손이 하나가 되어 달라붙는 듯한 감각. 단전에서 뻗어나간 내공은 눈에 띄게 넓어진 혈도를 질주해 그대로 검신을 뒤덮는다.

화마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핏물을 닮은 것 같기도 한 검붉은 일렁임.

검염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나, 상당히 강렬한 검기에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그대로 서문화린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으음?"

뒤늦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멈춰 섰다. 설마 싶어 고개를 들자 내 예상이 맞다는 듯 조용히 끄덕이는 서문화린.

잠시 눈을 감고 의식을 내면에 집중시켰다.

우선 내상은 다 나았다. 내공은 이전보다 조금 늘었고, 혈도는 신검합일을 체화시키며 넓어졌으니 당연히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내공의 양도 많아진 상태.

이에 따라 자연스레 검기의 출력 또한 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를 마음껏 휘두르는 것뿐.

...헌데 무언가 걸린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이에 조금 더 집중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살기가...."

"코흐흠. 조금 변했을 것이니라."

내공에 자연스레 녹아 있던 살기. 그 덕에 광랑탈명공은 이런저런 부작용을 달고 있음에도 위력 하나는 신공에 맞먹을 수준이 되었으나.

지금은 바로 그 살기가 이전과 달라졌다.

내공에서 살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진득이 녹아 있었으니까.

물론 살기가 약해졌다는 것 또한 아니다. 독살 맞은 살기는 여전히 위협적이니까.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위화감은 대체....

"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야 눈치챘다. 이 살기는 분명 나의 것이지만, '지금의' 내 살기는 아니라는 것을.

본래 내가 품은 살기는 이전 생의 설리향과 서문화린이 죽은 그날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잊으라 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아 심상에 새긴 나의 지옥. 그렇기에 내 시간은, 내 발걸음은 항상 같은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복수해야 할 흑천검문주는 이미 죽어 버렸고, 설리향과 서문화린 또한 살아 돌아올 수 없다.

이미 지난 과거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얼마나 강해지고, 얼마나 행복해지든 평생 그날의 지옥을 품에 안고 살아야 하리라.

...그리 생각했었다.

진짜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리향은 사지 멀쩡히 잘 살아있고, 서문화린도 불안하게나마 평범한 삶에 한 걸음 내디뎠으며, 이 둘의 죽음을 초래할 흑천검문주는 내 손으로 베었다.

정말로 과거를 바꿔 버린 셈.

여전히 그날의 광경은 생생하고,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끓어오르는 살의는 분명한 나의 것이지만....

"곤란하군."

정작 나는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다.

길었던 애도는 길잃은 복수를 마치며 끝을 맞이했으니까.

뭐, 과거의 것이 되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내 기억이고 내 감정이다.

여전히 심상은 또렷하며, 그 밑바닥에 고인 끔찍할 정도로 짙은 살기를 다루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그저 더 이상 같은 길로 나아갈 수 없을 뿐.

"허어."

분노와 살의가 더 이상 내 길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뭐. 그건 그거고 대련은 대련이지만.

"갑니다."

"느응?!"

서문화린의 눈이 당황으로 크게 뜨였다.

103화. 별호 (2)

분노와 살의가 더 이상 내 길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아직 그 답을 알지 못한다.

...뭐. 그건 그거고 대련은 대련이지만.

"갑니다."

"느응?!"

곧장 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서문화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비스듬하게 그어 올린 검을 아래서부터 장저로 쳐올리며, 아예 자신의 머리 위로 빗겨낸다.

회귀 전, 철혈당주이던 시절과 달리 반로환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이라면 작아진 신장을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보다.

내 검격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낸 서문화린이 눈을 마구 깜빡이며 물었다.

"아, 아니 겨우 그것뿐이느냐?! 본녀가 당사자는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분명 천휘 그대가 품은 심상은 본녀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느니라."

"얼추 비슷하긴 하죠."

눈앞에서 모든 혈육을 잃은 서문화린과, 한 식구라 생각하던 이들을 어찌할 틈도 없이 잃어버린 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국 이뤄 낸 복수.

그런 의미에서 나와 서문화린은 닮은 점이 많았다. 회귀 전의 그녀가 내게 우리는 서로 닮았노라 말했을 때보다 더욱.

서문화린이 내게 조심스런 태도를 보인 것도 분명 그래서겠지.

평생을 복수 하나만을 보고 살아온 사람이 복수를 이룬 뒤의 겪을 일을 알고 있으니까.

이전 같지 않은 자신이 당황스럽고, 평생을 쫓던 목표가 사라져 허탈하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런 와중에 후회와 미련만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떠오르니.

서문화린이 전대 흑천검문주를 쓰러뜨린 이후. 무공만 회수한 뒤 바로 칩거를 시작한 것도 분명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복수가 끝난 뒤에도 삶은 이어집니다."

위로 튕겨진 검을 그대로 내려찍는다. 검신 위에서 타오르는 검기는 내 눈에도 위협적이었으나, 서문화린은 정확히 같은 수준의 권기로 검면을 후려친다.

터엉!

수직으로 내리찍었을 터인 검이 서문화린의 손짓 한 번에 직각으로 꺾인다.

단순히 쳐낸 것이 아닌 내가 내리찍던 힘까지 그대로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상대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합류하되, 약간의 변주를 주어 자신도 모르게 그 결과가 뒤틀리게 하는 수법.

내가 자주 써먹는 착의 묘리는 바로 여기서 배운 것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나는 이리도 강렬하게 검기를 머금고 있는 상대의 검을 완벽히 틀어버릴 자신은 없다는 점이겠지.

검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검기를 뽑아내야 하고, 검기와 검기가 부딪히면 상당한 반탄력이 발생하니까.

서문화린은 그마저도 단숨에 휘어잡아 비틀어버렸지만.

아직 절정이던 무렵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 내심 감탄하는 사이. 서문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맞는 말이긴 하다만...복수에 눈이 멀어있을 때, 그 이후의 이를 생각하는 게 가능한 일이느냐?"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예에. 혼자라면 말입니다."

설리향과 서문화린의 묘비를 세운 이후. 내가 검귀라 불리며 두려움을 사고, 마교의 침공으로 중원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도 나는 여전히 이룰 수 없는 복수에 눈이 멀어있었다.

그래. 당소월을 만나기 전까지는.

"...천휘, 그대는 달랐다는 소리느냐?"

"사람을 지옥으로 내미는 것이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사람을 그 지옥에서 끌어 올리는 것 또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나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당소월이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소월에게서, 당소월은 내게서 복수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그리하여 함께하는 미래를 약속했다.

설령 천마에게 꺾여 단순한 꿈으로 끝났을지라도, 회귀를 통해 서로 다른 시간으로 영영 헤어지게 됐더라도....

그럼에도 나는 내가 당소월에게 받은 것을 기억한다. 내 삶이 복수가 아닌 그 너머에 있음을 안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복수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

천마.

오직 그 괴물 같은 작자만이 내가 뛰어넘어야 하는 상대였다.

"그러니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 제가 평생을 품어 온 것들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조금 그렇습니다만... 사람이 언제까지고 과거에 묶여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과거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라... 맞는 말이구나."

검기를 순간적으로 길게 늘여 보기도 하고, 회전을 실어 위력을 배가시켜 보기도 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예를 선보였으나 이를 전부 피해 내거나 쳐내는 서문화린.

옷자락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심어 둔 마음이란 말뚝에 감긴 밧줄과도 같은 것이니라. 이를 허리춤에 묶으면 휘청거릴 때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느니라.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도와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셈이겠구나."

"하지만, 멀리 나아가고자 하면 오히려 방해될 겁니다."

"옳다. 스스로 허리춤의 매듭을 풀었다면 본녀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구나."

"뭐어.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종남에서 익힌 중심 잡힌 연계는 아무리 검이 튕겨 나가도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귀영신투에게 배운 귀영보의 묘리는 같은 검로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

지금의 나는 분명 검기를 두른 폭풍과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맨손으로 받아 내는 서문화린이 더욱 대단해 보이는 거지만.

내 검격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서문화린이 고개를 저었다.

"방향은 몰라도 괜찮으니라.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으니. 천휘 그대가 기억할 것은 오로지 하나. 무엇을 위해 길을 걷느냐 뿐이니라."

"무엇을 위해...."

"그 하나만 똑바로 세우면 조금 헤맬지언정 언젠가는 그대만의 답에 이를 것이니라. 그리하여 스스로를 완성해야 하느니라."

"...."

회귀 전에도 당소월에게 들었던 이야기. 초절정을 넘어 화경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성해야 한다고 했었지.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모른다. 모르지만...다행히 예전과 달리 시간이 제법 있다.

부족한 내공을 채워 완전한 초절정에 오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 생의 무위를 온전히 되찾으리라.

마침내 출발선에 서게 되는 셈.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 걸까. 가만히 내 공격을 받아주던 서문화린의 기세가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무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보다 흉포한 무언가.

"이 정도면 원껏 쏟아낸 것 같으니 슬슬 본녀의 차례로 넘어가마."

"...살살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작고 연약해 보이는 체구지만,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만큼은 나찰의 그것이었으니.

서문화린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콰앙!

정면에서 맞부딪히는 검과 주먹. 분명 이쪽을 배려해 나와 비슷한 수준의 권기만을 두르고 있음에도 밀린 것은 나였다.

"흐읍!"

뒤로 크게 튕겨 나가는 검. 그 기세를 거스르지 않고 빙글 회전하며 하단을 베어 낸다.

하지만 이는 미리 발을 들어 올리고 있던 서문화린에게 밟혀 그대로 땅에 처박힌다.

내공을 조절하고 있으니 단순한 힘 차이는 아니다. 천근추의 묘리가 그녀의 발을 넘어 내 검까지 무겁게 만들었을 뿐이니까.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 송곳처럼 뾰족하게 갈아낸 서문화린의 내공이 내 검기를 뚫어내긴 했으나, 신검합일을 이룬 내 검을 완전히 장악하기엔 무리가 있다.

일순.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사이에 본래의 무게를 되찾은 검.

서문화린 본인은 천근추로 여전히 무거웠으나,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된다.

전신에 고르게 퍼져있던 내공이 허리와 팔다리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이대로 검을 위로 쳐올려 서문화린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그럴 생각으로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일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본녀에게는 손과 발이 다름이 없노라고."

검기가 일렁이는 데다가, 위로 강하게 휘둘러지는 검신 위에 찰싹 붙어 있는 서문화린.

"아니 뭔...."

발에 권기를 둘러 검기를 막아 내고, 초상비의 수법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고는 착의 묘리로 그대로 검신 위에 올라탄 것이다.

절벽을 수직으로 오르는 기예는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어느 정도 해볼 수 있는 일이지만...검기를 두른 검 위에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헛웃음을 짓는 내게 서문화린이 의기양양 표정으로 발을 뻗었다.

무슨 검이라도 겨누는 것마냥 내 턱 아래를 점하는 서문화린의 발.

권기는 실려 있지 않았기에 신발 위로 드러난 발등의 보드라움만이 느껴졌으나... 이것으로 대련이 끝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검기를 거두었다.

"한 수 배웠습니다."

"음음. 그대도 훌륭했느니라. 새로운 깨달음을 꽤나 능숙하게 다루더구나."

"예, 뭐."

회귀 전부터 얻었던 깨달음이라 별로 기쁘지는 않다.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니까.

괜시리 불퉁한 마음에 검 위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서문화린을 향해 보란 듯이 코를 킁킁거렸다.

"좋은 대련이었습니다만, 다음에는 맨발로 하지 않겠습니까? 더운 여름이라 그런지 조금...."

"무, 무어라?! 설마 본녀의 발에서 냄새가 난다는 소리느냐?!"

"아뇨 뭐.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만, 예...그, 아시죠?"

"모르니라!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니니라! 반로환동하며 본녀의 몸에서는 좋은 향기밖에 나지 않는단 말이니라!"

"좋은 향기?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관점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갸아악!"

결국 못 참고 터진 서문화린. 그녀가 아예 신발을 벗어 맨발을 드러냈다.

"맡아 보거라! 다시 한번 제대로 맡아 보란 말이니라!"

"싫습니다."

"에이잇! 말이 많구나! 이렇게 된 이상 강제로라도 본녀의 말을 증명하겠느니라...!"

작은 키 때문일까.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와 일자가 되도록 곧게 들어 올린 서문화린.

아무리 무복을 입고 있다지만, 숭하기 짝이 없는 자세.

그러나 이미 발냄새 의혹에 눈이 돌아 버린 서문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콩콩 뛰어 다가온다.

"자! 어서 확인해보거라!"

"싫다는데 왜 자꾸 그러십니까. 정 확인받고 싶으시다면 저기서 구경 중인 설리향에게 하십쇼."

"나, 나?!"

처음에는 자기 수련에 집중했고, 나중에는 우리의 대련에 감탄한 표정을 지었으며, 지금은 입을 틀어막고 소리죽여 웃던 설리향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스윽 서문화린의 맨발을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미묘한 표정은 덤이었고.

"이, 이놈들이! 안되겠구나. 본녀가 오늘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오명을 씻어 내겠느니라!"

결국 진심으로 삐진 서문화린이 내공까지 써가며 나와 설리향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를 치켜든 숭한 자세로!

"서문화린 선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꺄아악! 서문 언니가 이상해졌어!"

"어딜 가느냐! 본녀를 이리 만든 것은 너희들이거늘!"

그렇게 한참을 꺄악꺄악거리며 연무장을 빙글빙글 돌던 도중.

잠깐 무림맹에 볼 일이 있어 나갔던 당소월과 당진천이 돌아왔다.

"저 왔어요, 천 소협! 들어보시지요! 방금 나갔다가 들은 것인데 글쎄 저희에게 별호가...아?"

하늘을 향해 당당히 치켜올린 다리로 콩콩 뛰어 쫓아오는 서문화린과, 그런 그녀를 피해 도망치던 나와 설리향의 모습을 보고 멈칫하는 당소월.

사실 굳어 버린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이럴 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정적만이 흐르는 연무장. 그 고요함 때문일까. 유독 당진천의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허어...."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선명한 것이었으니.

주책 부리는 늙은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에 서문화린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본녀를... 본녀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거라앗!"

여름이었다.

104화. 별호 (3)

연무장에서 돌아온 이후. 한데 모인 자리에서 당소월이 본래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천 소협. 저희에게 별호가 생겼답니다!"

"그만큼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생길 만도 하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조금 뚱한 표정이 되었다.

"천 소협은 기대되지 않으신지요?"

"별호에 의미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칭송하건, 경멸하건, 내 검은 오로지 나의 것이니. 그런 외적인 것에 신경 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수련한 게 이득이다."

"흐으음. 본심은요?"

"...어차피 용봉지회에서 활약한 건 너나 설리향 아니냐. 내가 한 일이라고는 납치당한 일뿐이니 좋은 별호가 붙었을 것 같진 않군."

내 솔직한 대답에 당소월이 키득이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시지요. 소협에게는 제법 근사한 별호가 붙었답니다."

"어떻게 말이냐?"

"그 부분이 조오금 걸리는데 말이지요...."

말끝을 흐린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저와 향이의 별호부터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리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니 불안해지지만... 일단 그러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리향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에게 별호가 붙었다는 소식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호... 나한테 별호?"

쉬지 않고 히죽이는 입가. 들썩이는 엉덩이. 그리고 이따금 반짝이는 눈빛으로 당소월의 다음 말을 조용히 재촉하기까지.

실로 알기 쉬운 반응에 이 자리의 모두가 미소를 머금었다.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사회적 위신에 투덜대던 서문화린마저 표정이 풀어졌을 정도.

"흠흠. 향이가 기대가 큰 것 같으니 너무 시간 끄는 것도 좀 그러겠지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면...우선 제게는 비접독봉(飛蝶毒鳳)이라는 별호가 붙었답니다."

"잠깐. 당소월 네 독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나는 알지만, 용봉지회에서는 암기술밖에 선보인 적 없잖나."

"예에. 다만, 제가 독공을 규칙으로 막아 놓고 암기술에 관한 별호만 주는 건 조금 그렇잖습니까."

"그건... 그것대로 놀리는 것 같긴 하군."

"아무래도 그렇지요. 하여, 용봉지회를 마친 당가의 자제에게 별호를 붙여줄 때는 실제 주력으로 삼는 무공을 넣어 붙여준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답니다. 조금 오래전의 일이지만 마교의 고수를 중독시켜 쓰러뜨린 적도 있고 말이지요."

용봉지회에서는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살랑이는 보법을 보여주었기에 비접. 거기에 독공을 주로 사용하기에 독봉.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별호인 건가. 복잡하기도 하네. 당소월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이번에는 옆에 있던 설리향이 당소월을 향해 슬그머니 상체를 내밀며 물었다.

"당 언니? 그럼 제 별호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후후. 그렇게나 궁금했던 거니? 그렇다면 기대해도 좋단다. 향이 너한테도 근사한 별호가 붙었으니."

당소월이 그리 말하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설리향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고조되어 가는 설리향의 기대감 속에서 당소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향이 네게는 청음빙화(淸音氷花)라는 별호가 생겼단다."

"청음빙화! ...기쁘긴 한데 화(花)가 들어간 별호라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네요."

기뻐하다가도 얼굴을 붉히는 설리향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런가? 나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만."

"...진짜?"

"당연히 진짜지."

꽃이 들어간 별호는 여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실력이 뛰어난 이에게만 붙여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리향은 꽃에 비견될 만하긴 하다.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과 이에 대비되듯 새하얀 피부. 설리향 특유의 풍부한 감정 표현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만나 더욱 선명해졌으며.

다소 앳된 인상이 남아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여인으로서의 태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물론.

순음지체의 영향으로 전체적으로 굴곡진 곡선은 꽁꽁 싸매고 있음에도 묘한 색기를 풍긴다.

이런 설리향을 꽃이라 부르지 않으면 누구를 꽃에 비유하겠는가.

"그러니 안심하고 지금을 즐겨라."

"헤, 헤헤. 그렇다면 다행인데...."

실실 웃다가도 흠칫한 설리향이 당소월 쪽을 돌아본다.

그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당소월이 이내, 키득이며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친다.

"괜찮아, 향아. 나는 무위를 더 중요하게 보는 봉의 별호가 좋기도 하고...처음부터 화의 별호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네? 그럴 리가요! 당 언니는 저보다 훨씬...!"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라 화라는 별호는 기본적으로 미혼에게만 주어지는 거라 그런 거란다."

"...네?"

눈을 땡그랗게 뜬 설리향에게 당소월이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막 널리 알리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게 천 소협이라는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다닌 것도 아니잖니? 몇 년 지났으니 이젠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고. 아직 혼인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정해졌으니 만인에게 그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이라 부를 수 없는 거란다."

"아."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설리향. 그리고는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었겠으나, 비무 때 보여 준 모습. 그리고 최근 들어 잦아진 치근거림 덕에 그 의미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것이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당소월의 눈치를 볼 차례였다.

분명 다 알고 있을 당소월은 짙은 미소를 띠며 본론으로 돌아가 하던 말을 이어 나갈 뿐이지만.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천 소협의 별호입니다만."

"대체 무슨 별호이길래 그리 뜸을 들이는지...."

당소월이나 설리향과 달리 나는 별호로 불리는 것이 처음이 아니다.

회귀 전에 이미 겪었던 일 아닌가. 그거도 두 번이다.

혈랑이랑 검귀라는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별호였으나, 명예는 없어도 쓸데없는 시비가 붙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 쓸모 있는 별호였지.

물론 이번 생에는 그 정도로 사파스러운 별호가 붙지는 않을 것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진 않았으나, 과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지금의 나는 명문정파인 사천당가의 예비 데릴사위니까.

아무리 간이 커도 이상한 별호를 붙이지는 않았을....

"혈화검귀(血火劍鬼)."

"?"

"천 소협의 별호는 검귀랍니다."

"...대체 누가 그런 별호를 붙였단 말이냐?"

하필이면 회귀 전의 별호였던 검귀라는 말이 들어간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걸리는 건 역시 앞에 붙은 혈화라는 부분.

아무리 생각해도 정파의 무인에게 붙기엔 너무나 흉흉한 별호 아닌가.

불만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어진 당소월의 말을 듣고 납득했다.

"사흑련주가 직접 붙인 별호라 하더군요."

"으음. 그럼 어쩔 수 없지."

사흑련주는 내가 흑천검문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내 심상에 새긴 것들을 엿본 이들 중 하나라는 소리.

회귀 전에도 내게 검귀라는 별호를 붙여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사흑련주였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거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사흑련주가 그렇게 부르겠다는데 이에 반발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절강성 쪽에서 퍼져나간 별호가 무한시까지 퍼진 것이라면 이제 와서 정정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미 일어난 일이고 뒤집기 어려운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뿐이지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이쪽이 익숙하니 상관없지만, 당가에는 누가 되겠지.

조심스레 당진천 쪽을 바라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뭐, 괜찮네. 자네가 잘못한 일은 아니잖나. 그리고 처음 자네의 무공을 봤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긴 했네."

"장인어른...."

"물론 나야 자네가 아무리 막대한 살기를 품었다 한들, 이에 휘둘리지 않음을 알고 있네. 그토록 빠르게 성장하며 주화입마 한번 찾아오지 않았잖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건, 당가는 자네를 품기로 했네. 그러니 괜찮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이자 끌끌 웃으며 남은 차에 독을 풀어 부글부글 끓는 독 차로 만든 당진천.

그가 척 봐도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눈을 부릅떴다.

"뭐어. 그건 그거고 감히 남의 사위에게 그런 별호를 붙이고 퍼뜨린 사흑련주와는 언제가 한번 결판을 봐야겠지만 말이네."

"...."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엄청 화난 것 같은데.

"잠깐. 당소월 너는 분명 근사한 별호가 붙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혈화검귀 정도면 엄청 멋있는 별호 아닌지요?"

"???"

"???"

서로 마주 본 채, 눈만 깜빡이는 나와 당소월.

고개를 좌로 갸웃거리자, 똑같이 좌로 갸웃거리고. 반대로 우로 갸웃거리면, 나를 따라 우로 갸웃거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

그렇게 서로 갸웃갸웃하던 것도 잠시. 이내 무언가 깨닫고는 경악했다.

"설마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한 건가?"

"당연하지요. 강해 보이는 단어가 넷이나 들어갔는데 어찌 멋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너무나 태연스러운 대답. 오히려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약간의 답답함마저 서린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래. 세간의 평가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정혼자 마음에만 들면 되는 거지."

"후후. 역시 그렇지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배시시 미소 짓는 당소월.

뭐, 아무리 봐도 사파의 별호긴 하지만, 아무튼 별호가 생겼다는 것 자체는 환영할 일이다.

이제 몸도 제법 컸고, 과거의 무위도 상당 부분 되찾았으니 슬슬 이런저런 무림의 일에 뛰어들 생각이니까.

별호가 있으면 아무래도 바로 알아봐 줄 테니 서로 편하겠지.

아니, 어쩌면 사파스러운 별호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내가 이제 와서 무림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생각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회귀 전. 진짜로 어린 시절의 나는 먹고 살기 급급해 오직 생존에만 집중했으나....

나중에 가서는 칼 밥도 좀 먹고, 굶어 죽거나 맞아 죽을 걱정도 줄어들어 여유가 생기며 무림의 풍문에 조금씩 귀를 기울였기 때문.

그때가 바로 지금 나이쯤이었으니, 끊이지 않고 사건 사고가 터지는 무림에서 슬슬 내가 아는 이야기가 튀어나올 차례라는 소리다.

잘만 하면 내가 개입하여 이득을 취하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제 와서 무림의 명성을 얻고 싶다거나, 힘 자랑을 하고 싶다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서문화린과 가벼운 대련을 하며 되새기지 않았던가. 내 목표는 결국 천마를 상대하는 것에 있다고.

천마는 분명 고금제일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괴물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화경의 절대고수들이 약한 것은 아니잖은가.

마교의 침공 초창기에 천마를 만만하게 보고, 혹은 서로의 자존심을 세우느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대고수들이 절반 이상 죽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이 사흑련과 힘을 합쳐 천마와 맞섰으나 결국 전멸한 것이고.

즉, 중원 무림은 가진 저력의 절반 정도로 천마와 맞선 셈.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천마를 경계했다면. 자존심보다 대의와 생존을 우선시했다면.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중원 무림의 힘을 한데 집중시키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리라.

다행히 나는 평생을 사파로 살아 그들의 심리에는 빠삭하고, 지금은 정파인 당가의 소속이니 한 번쯤 시도는 해볼 만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무림이 나를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소란스러웠던 일이 뭐더라....

속으로 기억을 되짚으며 고민하는 사이. 독차를 한 잔 더 만들어 마시던 당진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걸 잊을 뻔했군. 방금 무림맹주를 만나 들은 이야기인데 일단 자네도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예? 뭐길래 그러십니까?"

"일전에 자네가 소월이와 함께 섬서성에 갔다가 난리 난 적 있잖은가. 그때 귀영신투가 마교에서 훔쳐 오고, 무림맹으로 보낸 영약을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사람으로 만든 약을 어떻게 있겠습니까. ...설마 또 마교 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비슷하지. 무슨 일이 생긴 건 다른 동네지만, 마교가 배후에 있는 건 확실해 보이니 말일세."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당진천이 말을 이었다.

"하북성에서 비슷하지만 내공 증진 효과도, 부작용도 한층 덜한 영약이 나돌고 있네."

"예?"

"그리고 이 영약 때문에 팽가와 언가의 사이가 살벌하다는군. 복잡한 일은 나나 무림맹주가 처리할 터이니 혹시라도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하북팽가와 진주언가 사이의 분쟁. 그 끝은 두 가문의 후계자의 동반 자살이었다.

105화. 정혼자의 의무

"후우...."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 당진천에게 들은 이야기는 그만큼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하북팽가와 진주언가. 두 가문은 예로부터 썩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론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험악한 건 아니고, 전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우선 팽가와 언가 모두 하북성에 위치한 가문이다.

하북성이 넓은 곳이긴 하나, 그만한 성세를 누리는 가문 둘이 공존할 정도는 아니지.

실제로 몇 세대 전, 아직 언가가 강시를 다루던 시절에는 진주언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었으나.

이후, 여러 도술과 함께 강시술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팽가에게 오대세가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그 탓에 아직까지도 두 가문 사이에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이 빈번한 것인데... 팽가와 언가의 무공 또한 문제다.

팽가는 타고난 근골과 뛰어난 외공. 그리고 이를 살려줄 패도적인 도법을 기반으로 부흥한 가문이지만.

언가의 경우, 과거에 주력으로 삼았던 강시술을 근간에 둔 특수한 외공으로 근골을 뜯어고치고, 이를 살린 강력한 권법으로 유명한 가문.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나. 안 그래도 자존심 강한 무인들이니 얼마나 서로가 못마땅하겠는가.

거기에 팽가는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미 탓에 묘하게 음험한 분위기를 띠는 언가를 혐오했고, 언가는 자신의 자리를 뺏어간 팽가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으니.

두 가문이 만나면 싸움이 난다는 것은 무림의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막막해하는 이유는 이러한 케케묵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으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영약을 중심으로 한 팽가와 언가의 분쟁.

회귀 전에는 그 끝이 양 가문의 후계자가 함께 자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 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교의 계략이었다는 점이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일전에 당소월의 습격을 사주한 마교의 고수들을 심문하며, 중원을 침략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극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가, 시간이 지나면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그 미친 괴물이 보다 확실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위해 중원 무림을 분열시키려는 거겠지.

실제로 회귀 전, 당소월의 얼굴 반쪽이 녹아내린 이후로 당가는 사파에 지극히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졸지에 두 후계자를 잃은 팽가와 언가는 당장의 싸움은 멈췄을지언정, 감정의 골이 깊어져 서로의 위기를 구경만 했고.

이 또한 마교의 짓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흑련이 그 세를 확장하려 할 때마다 여러 사건이 터져 결국 절강성을 벗어나질 못했다.

정사의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같은 정파 안에서도 잦은 다툼이 있었으며... 사파 또한 사흑련의 존재에도 하나로 뭉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마가 쳐들어오니,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전력의 절반을 각개격파 당한 것이리라.

어느 정도 무위를 되찾았고, 슬슬 내가 기억하는 사건들이 터질 무렵이니 가능한 한 이러한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고 중원 무림을 하나로 이어야 하는데....

애초에 중원 무림의 평화는 무림맹 같은 거대한 조직이 오랜 시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닿지 못한 이상 아닌가.

그걸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니 막막한 것이리라.

하여,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자니 그 모습을 본 당소월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왜 그리 죽상입니까, 소협."

"별거 아니다."

"그리 한숨만 푹푹 내쉬니 신경 쓰여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답답해 죽기 전에 순순히 말하시지요."

"...실은 장인어른께 들은 팽가와 언가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말이다."

"아, 확실히 그건 저도 조금 신경 쓰이긴 했습니다. 둘의 사이가 나쁜 것이야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마교가 끼어있다고 생각하니 좀 걱정되더군요."

"뭐어. 그래도 마교의 계획 자체는 어그러진 것 같으니, 그 부분은 괜찮을 거다."

귀영신투가 마교에서 훔쳐 온 사람을 갈아 만든 영약.

그만큼 쉽고 빠르게 막대한 내공을 챙길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사람의 진기가 섞인 탓에 부작용도 심해 십중팔구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녀석이다.

회귀 전에는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 이를 열화시킨 중하급 영약을 하북성에 풀었을 때 서로 독차지하고자 싸웠었지.

팽가나 언가 둘 다 신공을 지닌 가문 아닌가. 약효가 열화된 만큼 부작용도 열화되었으니, 그 정도는 심법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리라.

아마 실제로는 뭔가 문제가 있는 영약이었겠지만. 마교가 무림인들이 뭐가 좋다고 영약을 뿌렸겠는가.

서로 싸움을 붙이는 방법이라면 다양했을 텐데.

그랬어야 하는 것이, 이번 생에는 나와 당소월이 귀영신투를 살리고 영약의 존재를 알렸다.

무림맹주가 당진천에게도 이야기해 준 것을 당사자인 팽가와 언가에게 알려주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둘은 그 약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있을 거다.

실제로 당진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지금 팽가와 언가가 싸우는 이유도 회귀 전처럼 영약을 독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더라.

서로 상대가 마교와 손을 잡고 자신을 무너뜨리려 한다며 으르렁대는 것이었지.

사실 이쯤 되면 마교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냥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이를 지켜보던 당소월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의외네요."

"뭐가 말이냐."

"천 소협이 이렇게나 관심을 가지는 것 말이지요. 주변 사람이면 몰라도, 별다른 접점이 없는 남의 일을 신경 쓰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히 남의 일은 아니라 그런 거다."

이번 일이 신경 쓰이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팽가와 언가의 사이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둘이 화해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나, 강대한 외적 앞에서 힘을 합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물론, 이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지. 자세히 설명하려 들면 회귀 사실까지 밝혀야 하니까.

그러니 조금 다른. 하지만 거짓이 아닌 진짜로 우려하는 다른 이유를 입에 담았다.

"계획이 어그러지긴 했으나, 어찌 됐든 마교가 얽혀있다는 게 신경 쓰인다. 한번 당소월 너를 노렸던 놈들이다. 얼마나 헛된 꿈을 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목표가 변하지 않았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노릴 수 있지 않겠나."

"어.... 그러니까 제가 걱정된다는 말이지요?"

"...대충 요약하자면 그런 셈이지."

"흐흐. 흐흐흫."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하는 당소월.

뭔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그제야 입가를 스윽 닦고는 표정을 가다듬는다.

"으흠. 뭐어? 천 소협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지요?"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방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데. 적어도 팽가와 언가 사이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겠지요."

어깨를 으쓱인 당소월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냥 턱을 치켜든 채 있었다.

"?"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이쪽을 재촉하듯 재차 턱을 까딱이는 당소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손끝으로 당소월의 턱밑을 간질였다.

한차례 몸을 떨더니,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히죽인 당소월이 말을 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은 용봉지회가 끝난 뒤에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머무르며 서로 교류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

한자리에 정파를 지탱하는 기둥들이 모인 것이다. 그냥 헤어지기는 좀 아쉽지 않은가.

어른들은 무림맹에서 이런저런 복잡한 이야기를 나누고, 후기지수들은 한데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를 따로 가진다 했지.

"설마?"

"예에. 용봉지회를 계기 삼아 모이는 것이니 용봉회라고 부르는 모임이지요. 어느 순간부터 우승자가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는데... 마침 오늘 초대 서신이 날아왔답니다."

그리 말한 당소월이 자신의 턱에서 굳어있던 내 손을 잡아채, 양손으로 꾸욱 붙잡으며 물었다.

"아마 팽가와 언가의 자제들도 그 자리에 있겠지요. 일전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으니 함께 가볼까 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걸 보아하니, 뭔가 바라는 게 있나?"

"에이.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내가 당해보니 생각보다 귀찮은 대답이군."

피식 웃으며 붙잡힌 손으로 당소월의 손바닥을 안쪽에서부터 살살 간질이며 말을 이었다.

"말해봐라.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지?"

"정말 별건 아니구... 그냥 체면 세워주기?"

"아."

생각해 보면 필요한 일이긴 하다.

당소월이 이번 용봉지회에서 자신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임을 보여주었다고는 하나... 이는 결국 독공과 날붙이 암기를 제외하고 보여준 실력.

아무래도 다른 절정지경의 후기지수들과 비교하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 삼 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 활동에 아예 나서지 않은 적도 있으니 더더욱 그러하고.

거기에 정혼자인 나는 용봉지회에서 기세 좀 드러내고 검 몇 번 휘두르다가, 그대로 서문화린에게 납치당하고 말았잖은가.

물론, 이젠 모두가 서린이 서문화린이고 화경에 이른 고수라는 사실을 안다. 후기지수가 어떻게 반항해 볼 수도 없는 상대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조금 얕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애초에 보여준 게 없으니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내 무위야 금방 알려질 테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건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다만, 당소월은 조금 다르겠지.

이번에야말로 당가에서 용봉지회의 우승을 가져갈 거라 기대하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정혼자를 자랑할 생각에 들떴을 텐데.

내가 서문화린에게 납치당하며 전부 허사가 됐으니까.

심지어 미리 말했다고는 하나, 양해를 구한 것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고.

당소월은 내 무리한 부탁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들어준 데다가, 내가 없어 생긴 여러 문제를 잘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는 소리까지 했고.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나쁜 놈 같네.

아니, 실제로 내가 좀 너무하긴 했다.

잠시 고민한 끝에 각오를 다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럼...!"

"그래. 한번 '제대로' 보여주도록 하지."

"제, 대로요?"

"그래. 체면을 세워달라 하지 않았나. 누구도 당소월 너를 무시할 수 없도록,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마."

"그으. 천 소협? 소협은 이미 대단하시니까 그냥 평범하게 구셔도 충분하답니다?"

"걱정 마라. 나도 벌써 삼 년 넘게 당가에서 생활했다. 귀찮아서 대충 지키고 있을 뿐이지, 격식 있는 자리에서 지켜야 할 예법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지금껏 귀찮아서 대충 지키셨던 건가요?!"

경악하는 당소월의 비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중원 무림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망한 후기지수들이 모인 곳 아닌가. 다들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겠는가.

그러니 여기서는 사파의 방식을 약간 섞어보자. 약해 보이면 바로 물어뜯기는 곳이 사파 무림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분위기 잡는 것 하나는 절대 정파가 사파를 따라갈 수 없다. 생존의 문제니까.

그리고 나는 온갖 허장성세가 판을 치는 사파 무림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려보았다.

"기대해도 좋을 거다."

"평범하게! 그냥 평범하게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당소월이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106화. 정혼자의 의무 (2)

정혼자의 의무란 무엇인가.

이미 혼인한 사이라면 답하기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닐 것이다.

후계자를 낳고, 잘 기르며,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으쌰으쌰 헤쳐 나가는 것.

누구나 잘 아는 내용 아닌가. 물론, 그게 지키기 쉽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미 혼인한 사이라면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만, 그것이 정혼자 사이가 된다면 조금 답하기 애매해진다.

혼인을 약속하긴 했으나, 아직 치르지 않은 정혼자에게 의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많겠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있다고 보는 편이다.

약속일 뿐이라지만, 약속에는 분명 힘이 있으니까.

뭐어, 그게 아니더라도 당소월이 지금껏 나를 위해 해준 것들이나 배려해 준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이유로 조금 신경 써봤다."

"다시 갈아입으시지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젓는 당소월. 어찌나 단호한지 어지간해서는 상처받지 않는 나조차 조금 풀이 죽을 정도다.

그동안 감정이 표정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여인들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무의식적으로 삐죽이려던 입술을 억지로 집어넣었다. 조금 늦었던 것 같지만.

"쓰읍. 입술 집어넣으시지요."

"으븝."

손바닥으로 내 입을 스윽 밀어 넣는 당소월. 입술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과 보드라움. 그리고 특유의 체향을 약간의 불만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낼름.

"꺄악! 아니, 말로 하면 되지 왜 갑자기 혀를 내밀고 그러십니까!"

"말 못 하게 입을 막아둔 건 당소월 너다만."

"그건! ...그렇지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그녀가 축축해진 손을 내 등에 스윽스윽 문지르는 것을 대충 흘려넘기며 재차 옷차림을 확인해 보았다.

당가 특유의 녹색 무복. 평범한 무복은 아니고, 꽤나 고급스러운 녀석이다. 옷 하나로 신분을 유추할 수 있을 만큼 질 좋은 물건.

다만, 이는 양민에게는 통할지 몰라도 무인 상대로는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뒷배가 있건 없건, 어찌 됐든 언제나 누군가를 벨 준비도, 베일 준비도 된 작자들이 무인 아닌가.

그러니 무인 상대로 옷차림에서부터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수라장을 여러 번 헤쳐나온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 말이다.

회귀 전. 내가 이제 막 절정의 경지에 올라 혈랑(血狼)의 별호를 받았을 무렵.

슬슬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내게 시비를 거는 무인이 얼마나 많았는가.

단순히 나를 쓰러뜨리고 명성을 날리고 싶은 녀석, 나를 꺾고 자신의 밑으로 들이려던 녀석. 그리고 자기보다 강해질 것 같은 녀석은 미리 싹을 뽑으려던 녀석까지.

수많은 사파의 승냥이들을 쳐낸 뒤에야 깨달았다.

지금껏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만만해 보여서 한층 더 시비 걸리기 쉬웠다는 것을...!

하여,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요령이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실제로 지금처럼 칼밥 좀 먹어본 것 같은 분위기를 습관화한 뒤로 시비 걸리는 일이 크게 줄었다.

당소월의 녹색 빛이 감도는 눈동자. 그 위에 비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부러 새 옷이 아닌 흑천검문과 싸울 때의 옷을 입었다.

깔끔하긴 하나, 자세히 보다 보면 옷깃과 소매의 검흔에 절로 향하는 시선.

한 치가 채 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검을 피했다는 증거다.

거기에 허리춤에 찬 검은 또 어떠한가.

안 그래도 명검에 속하는 터라 검집에 들어가 있는 채로도, 상당한 존재감을 발하는 흑검.

이를 잘 손질하여 새것처럼 갈고 닦았으나, 손잡이에는 일부러 이전에 쓰던 검 자루의 가죽을 둘렀다.

보통은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가겠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나, 처음부터 이쪽을 판단하려 드는 이에게는 조금 달리 보일 것이다.

검을 아끼되, 휘두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기까지가 상대가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에게 직접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시선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담담한 시선.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듯, 가볍게 훑어보는 듯한 눈빛.

그것만으로도 여차하면 그대로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시선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거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기세다.

광랑탈명공에는 자연스레 살기가 섞였고, 그 덕에 내가 뿜는 기세는 상당히 살벌한 편이다.

힘자랑하러 가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조절하긴 할 생각이나, 이를 잘만 사용하면 단번에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

당소월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전부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것 같다만."

"읏!"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까. 당소월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쪽을 힐끔거리며 말을 잇기 시작했지만.

"뭐, 뭐어. 지금의 천 소협은 무척 천 소협스러워서 멋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약간 처음 만났을 때 같다고 할까...."

"잘 모르겠다만 괜찮다면 이대로 가도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조금 얌전하게 차려입으시는 편이...."

"괜찮다면 빨리 출발하도록 하지."

"으읏. 아닌데. 이거 정말 아닌데...."

어째서인지 심란해 보이는 당소월. 그녀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려진 탓에 조금 늦고 말았다.

***

이번 용봉회가 열리는 장소는 남궁세가의 저택이었다.

놀랍게도 남궁세가는 기껏해야 오 년에 한 번 찾아오는 무한시에서 편하게 지내자며 아예 별장을 하나 구했다고 하더라.

"당가는 그런 거 없나?"

"있었으면 저희가 숙소 걱정을 할 일이 없었겠지요. 사실 이는 같은 오대세가 중에서도 남궁세가가 유독 유난인 거랍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천당가나 다른 가문들이 돈이 없어 무한시에 저택을 사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도 하고, 애초에 용봉지회는 가문의 품에서 벗어나 세상을 구경하는 무림행의 일부라 여기는 풍조 또한 있어서 그런 것이지.

그럼 대체 왜 남궁세가는 굳이 무한시에 저택을 마련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남궁세가는 언제, 어느 분야에서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가풍이 있기 때문.

어쩌면 제왕검형이라는 광오한 무공이 그대로 남궁세가의 심상에 새겨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런 오만함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제왕검형 같은 특이한 무공을 창안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뭐가 됐건 최고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는 가문이기 때문에, 이렇게 우승한 뒤에는 자신의 무한시의 별장으로 다른 이들을 초대한 것이리라.

아무리 좋은 객잔을 빌려도 자기들이 직접 관리하는 수준에는 못 미칠 것이라 생각한 거겠지.

남궁세가는 용봉지회에서 우승자를 종종 배출하는 가문이기도 하니까.

"이제와서 묻는 말이다만, 용봉회는 참가 조건 같은 게 있나? 언가도 온다는 걸 보면 오대세가와 구파일방만 초대받는 건 아닌듯하다만."

"따로 없습니다. 용봉회 자체가 누가 정해두고 주최한 것이 아니라, 용봉지회 때문이라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돌아가는 건 아쉽지 않냐는 취지에서 열린 모임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굳이 조건에 가까운 것을 꼽자면... 우승자. 그러니까 주최자의 초대가 조건이랍니다."

"과연.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꼭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일 필요는 없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난 곳이라면, 그게 아니더라도 재능이 보이는 이라면 부르는 거겠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러다가도 내 쪽을 보면 다시 표정이 풀리기를 반복하는 당소월과 함께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큼직한 저택.

당가나 일전에 방문했던 종남파처럼 내부에 작은 마을 하나가 들어가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저택 한 채 치고는 굉장히 크고 화려하다.

남궁세가의 과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듯한 외견.

문지기를 서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이 내 쪽을 보는 순간 눈을 가늘게 뜨며, 허리춤의 검 자루에 손을 얹는다.

"누구냐! 감히 대 남궁세가에 사파 나부랭이가... 어?"

물론 그러다가도 가까이서 당가의 무복을 확인하고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와 당소월을 번갈아 바라보는 문지기. 그리고는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됐는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 죄송합니다! 당가의 자제분들인 줄 모르고 제가 그만...."

"하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은 당소월이었으나,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무언가 체념한 듯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전의 실수는 불문에 부치지요.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답니다."

"...."

당소월이 괜찮다고 했음에도 아직 허리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문지기.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상체를 일으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문지기를 돌아본 당소월이 자연스레 내 팔짱을 낀다.

"아, 그리고 자제분들이라는 말은 틀렸답니다."

"제가 또 무슨 실수를...."

"이쪽은 제 정혼자거든요."

"아."

멍한 표정을 짓는 문지기를 향해 씨익 웃어주고는 당당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드디어 이게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아준 거냐."

"설마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옷부터 갈아입히고 싶을 정도랍니다."

"그 정도라면 출발하기 전에 말하지 그랬나."

"얼굴 바짝 들이밀고 아무 말도 못 하게 막은 게 누구인데...!"

이쪽을 찌릿 노려본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김이 빠진 것처럼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에휴. 이제 와서 어떻게 하기에는 늦었지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천 소협의 방식에 한번 맡겨보겠습니다."

"걱정 마라. 내가 언제 당소월 네 기대를 배신한 적이 있던가?"

"말이나 못 하면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도 피식 웃어버리는 당소월.

이미 내 경지가 초절정에 가까워진바.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장 편한 방법은 되는대로 기세를 내뿜는 것이다.

살기는 최대한 자제한다 해도, 이전 생에서부터 쌓은 경험과 지금의 경지가 합쳐져 자아내는 기세는 아무리 대단한 후기지수들이라도 감당하기 힘들 터.

하지만 그러지는 않을 거다. 너무 노골적이라며 당소월이 싫어할 테니까.

...그러니까 몰래 적당히 흘리면 되는 거겠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가볍게 주연을 즐기는 중인 후기지수들이 보였다.

순식간에 이쪽을 향해 집중되는 시선. 조금 늦게 도착한 탓이리라.

쏟아지는 시선이 조금 부담되었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이 긴장되는지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슬그머니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를 느끼고 하나같이 바짝 굳은 표정들. 예외가 있다면 나와 연이 있는 종남파의 무인이나, 당소월의 친구라던 위지수련. 그리고 집주인이자 용봉회의 주최자인 남궁종 정도려나.

이 정도면 예의는 차렸지 싶어 내심 뿌듯해하는 사이.

꼬집.

"끅!"

당소월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뒤이어 작게 입을 뻐끔거리며 보내오는 전음.

-당장 기세 거두시지요.

"...."

조금 시무룩한 심정으로 바로 기세를 갈무리했다.

들켰네.

107화. 정혼자의 의무 (3)

검룡 남궁종. 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하여 검룡이라는 별호를 받은 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찬사와 질시를 보내왔으니까.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언제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아온 그다.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최고임을 인정받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그 자체일 수밖에.

언제나 엄격한 잣대를 늘어놓던 남궁종의 아버지 또한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으니.

전통에 따라 우승자인 남궁종이 주최하는 올해의 용봉회가 크고 화려하게 개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좋군.'

상다리가 휘어질 것처럼 쌓인 산해진미. 무한 시 전체의 객잔을 돌며 긁어모은 맛 좋은 술. 그리고 빈 자리를 채우는 유망한 후기지수들.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같은 현 정파 무림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곳은 물론, 한때 이에 속했거나, 언젠가 이에 도전해 볼 법한 유력한 명문 출신들.

거기에 배경은 보잘것없으나, 가진 재능이 뛰어나 언젠가 그 빛을 발할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武)에 대한 담론을 나누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가문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도 있고, 소속 없는 인재를 영입하는 모습도 종종 보였으니.

남궁종의 눈에는 그 모습이 저잣거리의 술자리와는 다른 품격 있는 모임처럼 보여 진심으로 흡족해했다.

물론 이러다가 시비가 붙어 비무로 이어진다거나, 젊은 남녀가 눈이 맞아 으슥한 곳에서 사고를 치는 일도 제법 많다는 점에서 여느 술자리와 큰 차이는 없지만.

평생토록 검만 휘두르다, 처음으로 모임을 주최해 본 남궁종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상석에 앉아 만족스레 웃으며 술잔을 털어 넣는 남궁종.

애초에 술을 마시는 것도 처음인 터라 금세 인상이 찌푸려졌으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다시 평온한 얼굴을 연기한다.

'쓰고 향도 이상하군. 이런 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네.'

남궁종이 속으로 그리 투덜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거한.

"흐하하! 역시 남궁 형. 술 마시는 모습도 호쾌하기 그지없습니다!"

"...네 형이 된 기억은 없다, 황보광. 애초에 나보다 네 나이가 훨씬 많지 않나."

"그런 세세한 것은 신경 쓰지 마십쇼. 같이 술잔을 들이켜면 형제나 다름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자. 이 아우가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됐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도 있는데 먼저 취해있을 수는 없잖나."

"이런! 제가 그걸 생각 못 했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같이 마시도록 하죠! 하하하!"

짐짓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는 황보광.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남궁종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황보광. 덩치가 아까운 강약약강의 표본. 지금도 나한테 달라붙어 뭐라도 얻어먹으려던 거겠지. 심지어 원래부터 망나니 기질이 강한 황보세가에서도 쉬쉬할 정도의 인간말종이라던가. 친해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놈이다.'

남궁세가는 언제나 최고를 지향하는 가문. 주변 사람을 가려 사귀는 건 남궁종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언젠가 거하게 사고 한번 칠 것 같은 황보광과 거리를 벌린 남궁종이었으나, 이를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옆에 설 자격이 충분한 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니.

"저어. 남궁 소협이시죠? 용봉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즐겁...."

"오! 매화검봉 위지 소저 아니오. 화산파의 검이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으나, 실제로 보게 되어 얼마나 감탄했는지.... 혹시 괜찮다면 잠시 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소?"

"네? 앗, 네에."

화산파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유망한 후기지수인 위지수련 앞에서 부쩍 친근해지는 것 또한 남궁종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남궁종이 화산파의 검에 흥미가 있다는 점이나, 위지수련의 미모가 그의 이상형에 가깝다는 자잘한 이유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남궁종이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성적으로 위지수련과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되었던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은.

사천당가의 당소월. 그리고 그녀의 정혼자인 천휘.

세간에는 맥없이 납치당한 천휘의 평판이 썩 좋지 않으나, 남궁종에게 그러한 편견은 없었다.

'애초에 화경 무인을 상대로 제대로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지.'

언제나 가까이에서 그의 아버지인 검왕을 보고 자랐기에 잘 안다. 화경 무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자들인지.

남궁종 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리라.

오히려 자신을 납치한 화경 무인을 당가로 끌어들인 그 수완을 높이 평가하는 편.

거기에 남궁종으로서는 당소월과 천휘의 무위를 완벽히 간파할 수가 없었다. 즉, 못해도 자신과 같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뜻.

그것만으로도 남궁종이 둘과 친해질 이유는 충분했다.

하여, 잠시 위지수련과의 대화를 멈추고 조금 늦은 손님을 맞이하려던 순간이었다.

사이 좋게 팔짱을 끼고 들어온 두 남녀. 그중 천휘 쪽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뿜어져 나온 것은.

"허업."

"이건...."

"설마?"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 삼키는 소리. 자신에게 향한 것은 아니라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휘를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은근한 기세가 주변 일대를 잠식하고 있노라고.

어찌 된 영문인지 남궁종 본인과 옆에 있는 위지수련은 괜찮았으나, 다른 이들은 천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

주변의 기운에서 위화감을 느끼긴 해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감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아."

'위지 소저는 당 소저와 어린 시절부터 교류를 이어 나간 친우라고 했지. 거기에 나는 일단 초대 서신을 돌린 집주인이니 나름의 예의를 차린 건가.'

보통은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난리를 친 천휘에게 반감을 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남궁종은 달랐다. 이 와중에 자신을 존중해 준 것이 용봉지회의 우승자임을, 용봉회의 주최자임을 인정해 준 것 같아 조금 기분 좋아졌으니까. 그는 꽤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남궁종이 입가를 씰룩이는 사이. 당소월이 정혼자의 기행을 알아챘는지 무어라 눈치를 주자, 천휘의 기세가 걷혀나간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갈무리했다는 뜻은 아니다.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않았을 뿐, 여전히 일전의 섬찟함을 두르고 있는 천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서야 남궁종은 그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나이는 제법 어려 보였다. 진작에 약관을 넘긴 당소월과 달리, 아직 약관조차 되지 않은 것 같은 앳된 얼굴.

다만, 앳됨이 곧 어리숙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옷은 멀끔하게 차려입었으나, 움직이기 힘든 새 옷이 아닌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평소 입던 옷이고.

허리춤에 맨 검은 잘 관리되어 있어, 언제든 뽑을 수 있다는 것을 자꾸만 상기시킨다.

마치 강호에서 몇십 년은 굴러먹은 노회한 고수와도 같은 분위기.

거기에 조금 전의 그 기세는 또 어떠한가. 남궁종은 직접 받아본 적이 없어 정확히는 모르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미래의 정파 무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후기지수들이다.

그런 이들을 잠시나마 압도한 것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일이리라.

다만, 남궁종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천휘의 눈빛.

'분명 낭인 출신이라 들었거늘.'

아무리 당가에서 몇 년간 생활했다 하더라도, 평생을 살아온 것이 있으니 이러한 연회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다.

화려함도 화려함이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이름값도 있으니까.

하지만 천휘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무심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분명 사람의 눈동자일 텐데, 검신에 반사된 빛을 보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

그러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순간. 남궁종은 깨달았다.

"아."

저 눈에 비치는 것은 단둘. 벨 수 있는 것과, 벨 수 없는 것뿐이라는 것을.

피에 굶주린 늑대. 혹은 언제든 자신을 시험해 볼 준비가 되어있는 명검 같은 인상에 압도된 남궁종은 떠올렸다.

혈화검귀(血火劍鬼). 후기지수에게 붙기엔 너무 거창하고 흉흉한 별호지만, 사흑련주가 강하게 밀어붙인 탓에 누구도 반대하지 못해 그대로 퍼지기 시작한 천휘의 별호.

별호와 함께 천휘가 홀로 검문(劍門) 하나를 멸문시키고, 끝내는 초절정의 무인마저 베어버렸다는 소문이 들렸으나.

워낙 허황된 소문이라 아무도 거기까지는 믿지 않았다. 별호 또한 사흑련주가 조롱의 의미로 붙인 것이라 여기는 이도 제법 있었고.

'멍청한 소리였군.'

남궁종의 눈으로 본 천휘는 진짜였다. 아마, 이 자리를 기점으로 다른 이들의 생각도 천천히 바뀌겠지.

남궁종이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만날 기회가 있어 다행이다.'

남궁종은 가문의 어른들이 그러하듯 언제나 최고의 검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최종 목표.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천휘 같은 이는 분명 천하제일검으로 향하는 여정에 큰 도움이 될 터.

그 짧은 사이에 불이 붙은 야망을 애써 숨기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당소월과 천휘를 번갈아 바라보던 위지수련에게 웃어 보였다.

"즐거운 대화였소, 위지 소저. 지금은 새 손님이 온 것 같아 먼저 일어나 보겠소."

"네.... 아니, 같이 가죠. 저도 소월이에게 인사라도 할 참이었거든요."

하여 위지수련과 함께 당소월과 천휘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둘.

그렇게 둘이 연회장을 가로질러 도착한 당소월과 천휘의 앞에 도착했을 무렵.

따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입을 뻐끔거리는 것을 보아 당소월이 무어라 급하게 전음을 보내는 중이었고.

천휘는 조금 전의 그 만지면 베일 것 같은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혼자 툴툴대고 있었다.

척 봐도 괜히 기세 뿜었다고 연상의 정혼자에게 한 소리 듣는 것 같은 모양새.

방금까지만 해도 대단하지만 다소 위험하게 느껴지던 천휘가 순식간에 그 나이대의 친근한 분위기를 띤다.

"허어."

이에 남궁종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으나.

"잘 왔...."

"이보시게, 소형제! 아무리 그래도 남궁 형의 초대를 받고 온 손님 신분인데 방금 전은 너무 무례한 것 아닌가! 이거 안 되겠군! 남궁형의 아우인 이 철골권협(鐵骨拳俠) 황보광이 후배에게 친히 가르침을 내리고자 하네!"

"...?"

자신보다 한발 빠르게 끼어든 황보광이 소리 높여 천휘를 비난했다.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던 남궁종. 그런 그를 향해 황보광이 씨익 웃어 보였다.

"...!"

그제야 황보광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 일부러 강하게 나선다는 것을 알아챈 남궁종이 그를 말리려 했다.

괜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둘의 실력 차가 너무 났기 때문.

천휘가 본격적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기세를 통해 슬쩍 존재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안의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압도당한 것이고.

하지만 이를 전력이라 여기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도저히 앳되어 보이는 천휘가 그만한 경지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걸까.

황보광은 미쳐 날뛰는 멧돼지처럼 일단 들이받고 본 것이다.

"멈춰라, 황보광. 분명 소란이 일긴 했으나, 살기가 섞인 것도 아니고 그 정도로 무례한 일은...."

남궁종이 황보광의 어깨를 붙잡으며 강경하게 멈춰 세우려 했으나.

"흐아아악!"

그의 손이 황보광에게 닿는 순간. 황보광이 칼에 베인 사람처럼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황보광. 그의 다리 사이에서 반 박자 늦게 축축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모습에 남궁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황보광을 지리게 만든 것 같지 않은가.'

속으로 혀를 차는 남궁종. 그런 그의 앞에서 진범으로 보이는 천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냄새가 나서 그런데, 자리를 옮겨 마저 인사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그 뻔뻔한 모습에 남궁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108화. 정혼자의 의무 (4)

그림으로 그린 듯한 번듯한 귀공자. 하지만 지금은 조금 피곤해 보이는 남궁종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일단 황보세가가 항의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알고 있습니다."

황보광. 회귀 전에는 아귀부에게 그간 숨겨온 행적이 전부 밝혀져 목숨도, 명예도 전부 잃은 녀석이다.

심지어 수련을 등한시하고 망나니짓만 일삼으니, 우락부락한 겉보기와 달리 별거 없는 녀석이기도 하고.

이전 생의 아귀부에게 목숨을 잃는 순간. 놀랍게도 당시의 황보광은 온전한 초절정도 아니었다고 한다. 반쯤 발을 걸친 지금의 나 같은 경우였지.

명문세가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남들보다 몇 배를 앞서 나간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뛰어난 재능, 상승의 무공, 부족함 없는 영약, 그리고 무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까지.

남들은 하나라도 얻고 싶어 평생을 발버둥 치는 걸, 여럿 쥐고 태어났음에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아 날려 먹은 경우.

어째서 황보세가가 이런 녀석을 끝까지 안고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찔리는 게 워낙 많으니 어지간한 일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리라.

하여, 남궁종이 황보광을 말리기 위해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을 노려 끌어올린 살기를 집중시킨 것이다.

...소변까지 지릴 줄은 몰랐지만.

준비된 요리를 입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종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알고 있었단 말이오?"

"들리는 게 있으니 말입니다."

"흠흠. 그저 발끈한 것이 아니라, 다 계산하고 움직였다는 소리인가."

뭐가 그리 좋은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궁종. 그는 황보광과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검에 미쳐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일상이고, 문제를 일으키기는커녕 가끔씩 미담이 들려오며, 마교가 침공해 왔을 때는 가장 먼저 앞장섰다.

결국 천마의 손에 쓰러지긴 했으나, 초절정 턱걸이던 황보광과 달리 마지막 순간에 온전한 화경에 이른 검수이기도 하고.

척져서 좋을 일 없고, 친해져서 나쁠 일 없는 사람.

나야 그런 것들보다 남궁세가의 검술이 더 신경 쓰이긴 하지만, 당소월과 당가에는 그렇지만도 않겠지.

하여, 자리도 옮겼으니 포권을 취하며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쩌다 보니 인사가 늦었군요. 당가의 천휘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얼. 황보광에게도 말했듯, 살기를 실은 것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무례한 일은 아니니 괜찮소."

"그것도 있습니다만, 황보광의 일도 있잖습니까."

"그 또한 괜찮소. 소협이 검을 뽑았으면 더 큰 문제가 되었을 텐데, 이 정도로 끝난 게 어디요."

"...?"

수상할 정도로 호의적인 태도. 이유야 어찌 됐든 내가 한 행동은 연회의 주최자인 남궁종에겐 분위기를 흐리는 일이었을 텐데.

눈을 가늘게 뜨고 남궁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귀공자 느낌의 얼굴. 다만, 그 눈동자에는 진득한 열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흑련주와 비슷한, 그러나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노골적인 욕망.

이 녀석 설마....

"제가 몸이 안 좋아 기권했으나, 용봉지회는 전부 챙겨 보았습니다. 다들 뛰어난 분들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검룡 소협의 비무가 기억에 남더군요."

"하하하! 다른 누구도 아닌 천휘 소협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부끄러워지는군. 다소 험악한 별호긴 하지만, 사흑련주의 인정을 받지 않았소. 이제 보니 알겠구려.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헛소문 없었다는 것을."

슬쩍 운을 띄우자 반색하며 달려드는 남궁종.

그렇다. 녀석의 눈에 비친 것은 노골적인 인정욕.

사흑련주가 세상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정복욕과 지배욕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면.

남궁종은 세상 모든 이에게 찬양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으로 가득 찬 이였다.

이렇게나 노골적인 사람은 처음이지만, 사파 무인 중에는 종종 보이는 경우라 바로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 특유의 최고를 추구하는 가풍을 고려하더라도 심하긴 한데... 그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성 좋고, 재능 좋고, 집안도 좋으면 뭐라도 하나 단점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어느 비무가 가장 좋았소? 산동악가의 신동? 아니면 점창파의 여협? 아, 혹시 결승에서 만난 소림의 스님이오? 다들 훌륭한 상대였으니, 내 부족함이 드러날까 염려되는구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찬양하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종.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검룡 소협의 말씀대로 다들 훌륭한 무인이고, 가슴 뜨거워지는 접전이었습니다만... 저는 소림의 원유 스님과의 비무가 더 마음이 들끓더군요. 마지막에 펼치신 제왕검형은 어찌하여 남궁세가가 천하제일검가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을 정도입니다."

"소협은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려. 분명 남궁세가는 천하제일검가이나,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네."

"그만큼 감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진심이다. 아마 나와 남궁종이 싸우면 내가 이기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왕검형은 내가 지금껏 본 검과는 뭔가 달랐으니까.

"내 아직 소협의 검은 본 적 없으나,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소. 혹시 사문을 물어도 되겠소? 느껴지는 기질이 당가의 검술은 아닌 것 같소만."

"사문이랄 것은 따로 없습니다. 그저 운이 좋아 여기저기서 배운 것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씩 쌓아 올리는 중이죠. 당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허어. 그렇소?"

슬쩍 옆을 바라보자, 위지수련과 즐겁게 회포를 풀다 말고 내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다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당소월의 입가가 움찔거리더니, 결국 헤실거리는 미소를 보내온다.

나 또한 그에 화답하듯 작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고.

이후로도 남궁종을 적당히 칭찬해 주며 친분을 쌓고, 위지수련과도 인사를 나누었으며, 뒤늦게 찾아온 종남파의 진백과 가벼운 안부를 나누었다.

나름 진지하게 무(武)의 길을 걷는 이들끼리 모였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격하게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더라.

내게는 대부분 이미 거쳐왔던 길이기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각 가문과 문파가 추구하는 것이 잘 느껴져 흥미롭긴 했지.

의외로 가장 많이 논쟁을 벌인 건 위지수련과 진백이었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전진파라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그 위치가 가까움에도 이권 다툼 없이 평온하게 지내길래 서로를 잘 이해하는 건가 싶었으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중심을 추구하느냐, 변화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져 발전을 추구하느냐 같은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도교 쪽은 아는 것이 거의 없어 뭐라는지 절반도 모르겠더라.

남궁종이나 당소월은 완벽하게 이해는 못 해도, 얼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 걸 보고 새삼 이전 생의 서문화린이 강제로라도 내게 공부를 시킨 이유를 실감했다.

만약 내게 도가의 가르침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얻어가는 것이 제법 있었겠지.

그리고 이는 곧 시야와 인지의 확장으로 이어지며 깨달음의 단초가 되는 법이다.

...애초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흑천검문을 멸문시키며 내 안의 일은 한차례 완결 났기 때문이겠지.

안쪽을 들여다본 뒤에 바깥으로 시선이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싸움까지는 아닌, 하지만 적당히 뜨거워진 논검 비스무리한 걸 즐기던 도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격앙된 목소리.

"지금 말 다 했나!"

"제가 무슨 못 할 말이라도 했습니까. 이러니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요."

"감히! 더는 못 참겠다! 당장 연무장으로 따라 나와라!"

아니,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는 건 남자 하나뿐이고, 그를 상대하는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꼬리만 끌어올려 차분히 비웃고 있었다.

누가, 뭐 때문에 싸움이 난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당소월이 작게 입을 뻐끔거리며 전음을 보내왔다.

-천 소협. 저 둘입니다.

-뭐가 말이냐.

-저 둘이 소협이 찾으시던 팽가와 언가의 후계자란 말입니다."

"으음?"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 당소월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저 둘을 살펴보았다.

조금 전에 난리를 치려다 소변이나 지린 황보광도 덩치는 컸다. 하지만 저기서 홀로 분을 토해내는 사내는 그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인다.

칠 척을 넘어, 어쩌면 팔 척쯤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진짜 무서운 점은 이 거대한 몸이 온통 근육으로 들어차 있다는 부분이다.

정녕 나와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

거기에 등에 멘 대도(大刀)는 또 어떤가. 거의 건장한 사내 한 명 정도의 길이를 자랑하는 쇳덩어리.

저만한 거구로, 저만한 대도를 휘두르면 이를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보나 마나 사내 쪽이 팽가의 후계자겠지.

반면, 그와 대치하는 싸늘한 표정의 여인은 영 반대되는 분위기였다.

같은 여인 중에서도 아담한 몸집. 키도 작고, 무인이라고 하기에는 근육도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인형. ...혹은 살아있는 시체와도 같은 인상.

무기는 따로 보이지 않으니, 권각술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확실할 텐데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육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약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적어도 느껴지는 기세로는 팽가의 사내와 비등한 수준.

피부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관절의 움직임은 묘한 뻣뻣함이 느껴졌으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명백한 귀기(鬼氣)였다.

회귀 전의 설리향이 다루던 기운이기에 잘 안다.

그 자체로 강력한 음한지기와 달리 귀기는 썩 위력이 뛰어난 기운은 아니다. 대신, 닿는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공능이 있지.

귀기에 닿는 상대는 조금씩 정신에 균열이 생긴다. 망설임을 증폭되고, 두려움은 이성을 잡아먹으며, 결국에는 그저 몸을 떠는 것밖에 할 수 없게 만드니까.

실제로 이를 이용한 사술도 굉장히 많다. 환각을 보게 한다거나, 방향감을 상실하게 한다거나, 짧은 시간 의식을 잃게 하는 등.

이전 생의 설리향과 귀기를 다루는 일부 무인들이 자주 쓰던 수법이다.

물론, 이는 만능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단단하게 세우고, 의지를 날카롭게 갈고 닦은 이에게는 효과가 반감될 테니.

거기에 사술이나 다름없는 공능은 정파 무인들의 배척을 받을 터.

만약 언가가 지금껏 오랜 기간 쌓아온 신뢰가 없었다면, 정파에 남아있기는 힘들었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내공이 아닌 심력을 갉아먹는다는 이점은 확실하다.

몸이 아닌 정신을 갉아먹는 독. 귀기를 저만큼이나 두르고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육신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쉬이 우세를 점하기는 힘들겠지.

본격적으로 기세를 드러낸 둘을 가늠하던 것도 잠시. 저 둘이 팽가와 언가의 후계자라면 나중에 함께 자진한다는 소리 아닌가.

분명 내가 듣기로는 가문 간의 험악한 관계에 절망한 두 연인이 함께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했는데....

눈을 가늘게 뜨며 한층 더 내공을 끌어 올려 기감을 확장시켰다.

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세상. 그 안에서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구는 둘은... 쉴 새 없이 조용한 수신호와 전음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하."

진짜 피곤하게들 사네.

109화. 집안 문제

서로 으르렁대는 팽가와 언가의 후계자. 두 남녀의 사이는 얼핏 보기에는 거의 원수나 다름없었으나....

"하."

기감을 확장시키자 다른 사람 몰래 전음과 간단한 수신호를 주고 받는 중이었다.

피곤하게들 사네.

이전 생에는 둘이 동시에 목숨을 끊었기에 얼마나 애절한 사이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평소에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로 위장하고 다닐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속으로 고개를 젓는 사이. 여느 무인들의 싸움이 그러하듯, 말싸움이 그대로 칼부림으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연무장으로 따라 나와라! 대 하북팽가를 모욕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그리 말하면 제가 무서워할 줄 알았습니까? 저번 대련에서는 제가 이겼다는 걸 잊지 마시죠."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

그리고 이를 뒤따르는 왜소한 몸집의 창백한 여인.

이에 당소월이 당황하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은 덤이었고.

"흐끅."

본래는 평범하게 말을 걸고, 자연스레 가까워진 뒤에 사정을 들어볼 계획이었다.

나는 팽가 쪽 후계자랑, 당소월은 언가의 후계자와 말이다. 아무래도 같은 성별인 쪽이 편할 테니까.

하지만 분위기가 이래서야 당초의 계획은 힘들어지겠네.

...뭐어,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솔직히 내가 붙임성 있게 다가가 누구와 친해진다는 것보다 훨씬 현실성 있는 방법이 떠올랐기에.

딸꾹대는 당소월에게 차가운 물을 한 잔 건네주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올 것이 왔다는 듯,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남궁종. 그에게는 술을 한 잔 따라주며 물었다.

"검룡 소협. 저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지만, 소협은 아니겠죠. 저 둘은 평소에도 자주 저렇습니까?"

"후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소. 만날 때마다 항상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연무장을 빌리고는, 서로 마음이 상해 금방 돌아가더군."

"허어. 팽가와 언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 둘이 다른 구성원 중에서도 유독 사이가 나쁠 것이오. 나이가 같으니 자주 비교당하기라도 한 거겠지."

과연.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면 싸우는 척 대련하다가 각자 돌아갔다는 소리인가.

안 봐도 보인다. 집으로 간다고 해 놓고, 어딘가에서 밀회라도 즐긴 거겠지.

"솔직히 주최자로서는 골치 아프기 짝이 없소. 초대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둘 다 초대하면 이리 싸워대니."

"저런."

"팽가 놈과는 나름 오래된 친우라 특별히 부탁까지 했건만 결국 이리될 줄이야...."

"마음고생이 심해 보입니다. 허면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나야 고마운 일이네만... 어떻게 말이오?"

"우선 대화를 해 봐야죠. 대부분의 일은 대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순간 멈칫한 남궁종이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을 지녔소. 심지어 누르면 더욱 거세게 반발하는 성정을 지녔지. 조금 전의 황보광과는 다르오."

"...?"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남궁종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조금 전처럼 살기로 둘을 짓누르려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네.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법 아니니 걱정 마시죠. 아, 술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술이야 부족할 걱정은 없다만...."

여전히 미심쩍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남궁종.

그런 그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험악한 분위기의 둘.

앞장선 팽가의 후계자의 거구가 조명을 가리며 기다란 그림자가 식탁 위에 드리운다.

이쪽을 향해 가볍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는 남궁종을 향해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종아.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다."

"팽우진 이 빌어먹을 놈. 적어도 참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남궁종. 그 틈을 타 슬그머니 팽가와 언가의 둘을 향해 기세를 뻗었다.

위협적인 의도는 전부 뺀. 마치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이쪽을 신경 쓰라는 정도의 의미 담아서.

"처음 뵙겠습니다, 두 분. 저는 당가의 정혼자인 천휘라고 합니다."

"으음? 자네는?"

"혈화검귀? ...아, 죄송합니다."

눈썹을 씰룩이는 팽우진과, 내 별호가 사흑련주가 붙여준 것임을 깨닫고 뒤늦게 사과하는 언가의 여인.

둘을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괜찮습니다. 별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잖습니까."

"팽가의 팽우진일세. 기껏 인사해 줘서 미안하다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군."

"언가의 언가혜입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렇네요. 대화는 다음 기회에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리 말하고는 서로를 노려보는 둘. 그사이에 슬그머니 끌어올린 내공으로 전음을 둘로 쪼개 보냈다.

결국 전음이라 함은 내공을 이용해 소리가 주변으로 흩어지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향하도록 하는 기예.

내공 운용 능력만 받쳐 준다면 이를 쪼개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바로 지금처럼.

-동시에 보내는 전음이니 너희끼리 전음을 나눌 필요는 없으니 그냥 들어라.

-그게 무슨....

언가혜가 무어라 전음을 보내려 했으나, 이어진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너희 둘의 사이를 안다. 가문의 사이가 그렇게 험악한데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지?

-....

-널리 알려지고 싶지 않다면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다시 앉아라. 그리고 연회가 끝난 뒤에는 바로 돌아가지 말고 근처의 청산객잔이라는 곳이 있으니, 그 뒤편에서 잠시 기다리고.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근거 없는 억측으로 협박이라도 하려는 셈인가?

당황한 언가혜 대신 이쪽을 노려보는 팽우진. 그런 그를 향해 조금 전에 둘이 주고받던 수신호를 은밀히 펼쳐 보였다.

나야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알고 있겠지.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언가혜의 창백한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지고 팽우진은 연기가 아닌 진짜 노기를 살짝 내비쳤다.

나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거한이 그러고 있으니 상당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어차피 싸우면 내가 이긴다.

팽우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시금 기세를 끌어 올렸다. 이전처럼 주의를 끌려는 것이 아닌, 명백한 살기를 담아 찍어 누르기 위하여.

"큭!"

오로지 팽우진에게만 향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서로 잘만 대화하다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린 것처럼 보이겠지.

결국 팽우진은 이쪽을 한참은 노려본 뒤에야 남궁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종이 네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였지."

"설마 그걸 이제야 깨달았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나와 팽우진을 번갈아 바라보는 남궁종.

서로 전음을 나누었다는 건 알아도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 갑작스러운 변화의 이유가 궁금한 모양.

솔직하게 말해 줄 수는 없기에 대충 웃어넘기고 있자니, 팽우진이 남는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벗이 얼마나 칭찬에 굶주려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를 망가뜨릴 수는 없지. 대련으로 흑백을 가리는 건 다음으로 하고 오늘이 아닌 다른 날로 하는 건 어떤가."

"좋아요. 저도 남궁 소협에게는 조금 미안했던 터라."

"...나에 대한 음해는 멈춰라."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팽우진을 따라 자리에 앉는 언가혜.

남궁종이 팽우진의 말을 작게 부정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위지수련은 여전히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팽우진과 언가혜의 사이에 껴서 곤란해하는 중이었고.

당소월은 대체 뭘 어떻게 했는지 감도 안 잡힌다는 듯, 빠르게 눈만 감았다 뜨고 있었으니까.

깜빡깜빡.

-천 소협?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두 분이 이리 얌전해진 겁니까?

아, 결국 궁금함을 못 참고 전음을 보내왔네.

-자세한 건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니 나중에 따로 보기로 했다는 것만 알아 둬라.

-예? 예에....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일단 끄덕이는 당소월.

이후에는 기분 좋아진 남궁종이 귀한 술을 꺼내기도 하고, 위지수련이 당소월에게 그동안의 근황과 함께 나에 대한 질문을 하며 분위기를 풀기도 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팽우진과 언가혜 또한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어색하게나마 같이 웃고 떠들었지만....

중간중간에 나를 떠보는 듯한 질문을 던진다거나, 자기들끼리 틈만 나며 눈짓을 주고받더라.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그렇게 깊은 저녁이 되어, 다들 적당히 취한 채 해산할 때쯤. 술에 약한 건지 주기적으로 남들 몰래 주정을 배출하던 남궁종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천휘 소협. 나이가 몇이라고 했소?"

"열여덟입니다만."

"나는 스물다섯이오."

"예? 으음. 그렇군요."

후기지수는 이립이 되지 않은 무인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같은 후기지수 안에서도 나이 차이가 상당한 경우가 있다는 소리.

다만, 이 경우에는 남궁종의 나이가 많다기보다는 내가 어린 거겠지만.

"헌데 갑자기 나이는 왜 물어보십니까? 매화검봉 소저가 제 정혼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때 다 들었던 것을."

"...나는 스물다섯이오."

"???"

대답 대신 자신의 나이를 한 번 더 밝히는 남궁종.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피하며 민망해했다.

"앞으로는 편하게 형이라 불러주시오. 나 또한 아우라 부를 터이니."

"아."

이제 보니 좀 친해졌다 싶으니 호형호제하자는 소리였나.

보아하니, 그리 인간관계에 능숙한 편은 아닌 것 같아 의아해하던 순간.

남궁종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흠. 내 천 아우의 무위가 심상치 않음은 알고 있으나, 어느 수준인지 궁금해 그렇소."

"그 말은...."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한번 남궁세가를 찾아오게. 천 아우도 남궁의 검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으니, 분명 서로가 걷는 길에 도움이 될 것이오."

"검수로서 천하제일검가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다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빠른 시일 안에 한번 연락 드리겠습니다."

"음! 기억하고 있겠소. 그럼 다음에 보지. 조심해서 들어가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로 포권을 나누자, 당소월도 슬쩍 눈치를 보다 같이 포권을 취하고는 내 뒤를 따라 저택을 나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자연스레 내게 팔짱을 끼며 속삭이는 당소월.

"이제 말씀해 주시지요.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팽가와 언가의 둘이 그리 얌전해진 겁니까?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이신지요?"

"별거 아니다."

전음으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이제부터 뭘 할 건지를 들은 당소월이 기겁하며 내 옆구리를 마구 찔렀다. 조금 간지러웠다.

"또 납치를...!"

"실례군. 새로 사귄 벗이 취기로 몸을 가누지 못하길래 근처의 객잔을 잡아 줬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거다.

110화. 집안 문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