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70화. 성장
성장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성장이라고.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정수리 보면서 무슨 눈높이 타령이야?!"
기겁하며 거리를 벌리는 설리향. 빠르게 뒷걸음질 치면서도 자연스레 궤도를 꺾어 당소월의 뒤에 숨는 모든 과정이 퍽 자연스럽다.
"이제 보니 보법이 제법 자연스럽군."
"...천휘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은데."
고개만 빼꼼 내민 설리향의 어이없어하는 한마디. 당소월도 여기에는 동의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사실 보법뿐만이 아니지요. 편법(鞭法)도 꽤나 그럴듯한데, 요즘에는 적성에 더 맞는지 음공(音功)을 조금씩 익히고 있다 들었답니다."
"당 언니?! 지금은 제 편을 들어주는 거 아니었나요?!"
"어머. 정혼자의 편을 들어주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장난스레 웃으며 설리향을 떨어뜨리고 내 옆에 서는 당소월. 그 모습에 설리향의 눈가에 배신감이 차오른다.
"익! 이익...!"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잇소리만 내며 발을 구르는 모습에 나와 당소월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키득였다.
"뭐, 너무 그러지 마라. 솔직히 말해 나와 당소월은 그냥 잘하던 사람이 잘했을 뿐이니까."
"예에. 보통 이립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오르면 천재라고 치켜세우는데, 여기 있는 천 소협은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설 소저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요."
그 말대로다.
나야 회귀 전의 깨달음을 고스란히 가진 것은 물론, 이번 생에 얻은 것들을 추가로 녹여내었으니 빠르게 강해지는 게 당연하다.
아니, 강해진다는 말도 우습지. 내게 있어서는 예전의 힘을 되찾는 것에 가까우니까.
당소월 또한 비슷한 상황. 독을 다루는 당가에서 독물 그 자체가 되는 독령지체를 가지고 태어나, 가주의 직계 자손으로서 온갖 영약을 먹고 신공을 익혔으며, 최근 삼 년은 아예 화경 고수인 당진천이 집중적으로 수련을 봐 주기까지 한 것이다.
당소월이 열심히 수련에 임했기에 가능한 성취겠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딱 맞아떨어졌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는 없을 터.
반면 설리향은 어떠한가. 식객치고는 제법 많은 지원을 받긴 했으나, 직계인 당소월에 비할 바는 아니다.
심지어 당가에 오기 전까지는 무공을 전혀 몰랐고,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출발선이 다르지 않나. 지난 삼 년간 열심히 수련한 결과니 좀 더 자랑스러워해라."
"...뭐어. 전부 당 언니랑 가주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그런 거 아니겠어? 물론 천휘 너도."
진지하게 칭찬을 받자 부끄러움에 목을 움츠리는 설리향. 입꼬리가 씰룩이는 것이 누가 봐도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회귀 전의 설리향이랑 똑 닮았네. 사람이 좀 비비 꼬인 면이 있어 솔직하게 칭찬해도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었지.
거기에 순음지체랑은 별개로 그냥 음공에 재능이 있었던 걸까. 다리가 멀쩡하고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결국 음공을 찾아 익히니 더더욱 겹쳐 보이더라.
이는 당소월 또한 마찬가지. 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만류귀원신공이라는 현시대 최고의 독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당소월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회귀 전의 모습처럼 완연한 검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둘을 보며 이전 생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곧잘 있던 일이라 익숙해지긴 했지만....
"언제봐도 예쁜 색이란 말이지."
"...다음은 저인가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경계와 기쁨이 반쯤 섞인 표정을 짓는 당소월. 뭔가 싶어 빤히 바라보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가의 여인으로 태어나 어찌 당하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는 제가 선공을 취하지요."
"갑자기 무슨...."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이쪽을 손가락 두 마디만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천 소협은 키가 많이 크셨네요."
"앞으로 더 클 거다. 구체적으로는 당소월 네가 까치발을 딛고 서면 바로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으읏! 그,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날렵해지셨지요. 귀여운 맛이 줄어든 건 아쉽지만 이건 이것대로 멋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당소월 너를 귀여워할 테니 얼추 균형이 맞겠군."
"아으으.... 소협은 원래도 대단했던 무공이 한층 더 대단해지셨네요. 비록 제 무림행이 전부 짧게 끝났다고는 하나, 그 과정에서 천 소협을 만났으니 친구들을 만나 무림행 이야기를 해도 자랑거리가 많겠지요."
"고맙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을 거다. 당소월 네 좋은 점은 나만 알고 싶으니 말이다."
"...?"
잠시 눈을 깜빡이며 무슨 뜻인지 곱씹던 당소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한 그녀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흐야악!"
그리고는 물 흐르듯 뒷걸음질 치며 설리향의 뒤에 웅크려 앉았다.
조금 전에 한번 본 것 같은 구도. 다만, 좀 자라긴 했으나 여전히 체구가 왜소한 설리향의 뒤에 당소월이 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살짝 가려졌을 뿐, 잘만 보이는 당소월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한쪽 팔로는 설리향의 다리를 휘어 감고, 다른 팔로는 내 쪽을 향해 검지를 척! 뻗는 당소월.
"반칙! 그건 반칙이랍니다!"
"서로 칭찬하며 부끄럽게 만드는 규칙 아니었나?"
"대충 비슷하지요. 하지만 방금의 어디에 칭찬이 있었습니까...!"
"으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심드렁하다 못해 무기질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으면 이제 슬슬 출발하지? 가주님을 너무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떫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설리향. 하긴. 너무 노닥거리긴 했지.
아직도 쪼그려 앉은 당소월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제 장인어른께 인사하러 가지."
삼 년만의 외출이다. 용봉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중간에 여기저기 들러서 즐기지 말라는 법은 없잖나.
여비는 넉넉하게 받아야지.
***
아직도 나는 당가에 익숙해지지 못했나 보다. 내가 생각하는 넉넉함과 당진천이 생각하는 넉넉함의 기준이 달랐다.
"...이보게 사위. 오늘부터 먼 길 떠나는데 가장 먼저 하는 말이 금자는 쓰기 불편하니 은자도 섞어 달라는 말인가?"
"사치를 부리는 게 아닌 이상 은자도 큰 금액입니다만."
"당가의 사위라는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독왕의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니 좋은 객잔에도 묵고 그래야지."
"으음. 좋은 객잔은 객실도 넓으니 한방을 써도...."
"잠시 기다리게."
내 말을 끊은 당진천이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인다. 동시에 그 방향으로 막대한 내공이 뻗어나가더니, 천장의 구슬 장식 하나가 덜컥거린다.
대체 뭘 하려길래 여기서 허공섭물까지...?"
솔직히 당황스러웠지만,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진천의 내기가 어떻게 몸 바깥에서도 그 힘을 유지하는지, 구슬을 받치는 순간 뻗어나간 내공의 성질이 어떻게 변하는지 등등.
솔직히 당장은 봐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해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 터.
그렇게 뇌리에 지금의 장면을 새겨넣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당진천이 허공섭물을 선보이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어느새 구슬을 손에 쥔 그가 책상 위에 이를 올려놓았다. 자신이 아닌 내 쪽에 더 가깝게.
"날이 밝아 잘 티가 나진 않네만 야명주일세. 팔면 비싸겠지."
"갑자기 이건 왜 꺼내신 겁니까."
"방 하나같은 헛소리 말고 최소 두 개는 잡게."
"...."
아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허공섭물까지 써서 자기 방에 박힌 야명주를 뜯었다고?
정식으로 약혼을 올린 지 삼 년이 넘었는데도 이러면 내 쪽에서도 조금 오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야명주를 받아 챙기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저랑 당소월이 한방을 쓰고, 설리향은 다른 방으로 보내 곧 손주를 볼 수 있게 해드리죠."
"뭐라?!"
기겁한 당진천이 금나수법으로 내 손에서 야명주를 가로채더니, 그대로 천당으로 던진다.
암기라도 된 듯 부자연스러운 궤적을 그린 야명주가 다시 장식 사이에 끼이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짐짓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당진천.
"방금 일은 없던 일로 하게."
"예, 뭐. 알겠습니다. 다만, 제가 정혼식을 치른 지 삼 년이 넘어가니, 언제쯤 진짜 혼인을 허락해 주실지는 좀 궁금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칠 년은 더 미루고 싶다만."
"기어이 십 년을 채우시겠다면 바로 당소월을 데리고 가출하겠습니다."
"오."
뒤에서 키득이던 당소월이 구미가 당긴다는 듯이 반응하자 당진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했으면 약혼식도 치르지 않았겠지. 다만, 아직 때가 아닐 걸세. 우리야 사위가 뭐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잖은가."
"제가 누군지 이름을 알리라는 소리군요."
"맞네. 반드시는 아니지만 가능하면이다만, 자네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잖은가."
"용봉지회 힘내라는 말을 참 길게도 하십니다."
"...오냐 이 사위 놈아. 용봉지회 나간 김에 우승이나 한번 하고 오거라. 가서 자네가 누구의 정혼자인지도 멋있게 밝히고!"
"예. 맡겨만 주시죠."
자신만만하게 그리 대답하자, 당진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에이잉. 어째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지."
"그만큼 장인어른을 가깝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사내놈이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당진천. 한참을 그렇게 웃고 떠들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뒤이어 나와 당소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말했다.
"이번에는 호위 없이 가겠지만... 뭐, 괜찮겠지."
"걱정 마시죠. 만약 재수 없게 초절정 무인과 싸울 일이 생기더라도 도망 정도는 칠 수 있을 겁니다."
"팔다리 성히?"
"그건 확답하기 좀 어렵습니다만...."
내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이런저런 가정을 해 보고 있자니, 당진천이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거칠게 두드렸다.
"농담일세. 사실 이마저도 불안하면 아예 밖에 나가지 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건 그렇죠."
이 넓은 중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초절정 무인은 기껏해야 백 명 내외다.
사실상 천하백대고수의 일원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이를 우연히 만나는 것도 모자라 적대까지 하는 일이 얼마나 일어나겠는가.
"먼저 가서 그간 밀린 경치 구경이라도 하고 있게. 나는 일이 많아 본선 시작 날짜에 맞춰 도착하도록 할 터이니."
"장인어른도 오시는 겁니까?"
"그거 아나? 당가는 사실 용봉지회가 시작된 이후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이 없네."
"아무래도 규칙이 규칙이니 말이죠."
암기도 날이 없는 것으로 제한되고, 독은 아예 금지된다.
독과 암기를 주력으로 삼는 당가 입장에서는 손발을 묶어놓고 싸우라는 소리나 마찬가지.
"하지만 사위 덕분에 이번에 처음으로 우승이라는 걸 해볼 것 같으니 구경은 가야 하지 않겠나."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약간 씁쓸해 보이는 표정의 당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해야 하는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만. 이만 가보게. 방은 꼭 따로 쓰고."
"그리하겠습니다. 무한시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장인어른."
한차례 정중히 포권을 취하고는 미리 준비해 둔 짐을 챙겨 당가의 대문을 나섰다.
지난 삼 년간의 외출 금지가 끝나는 날이었다.
[7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1] 71화. 성장 (2)
오랜만에 멀리 떠나는 것이라 제법 들뜬 당소월과 달리, 당가를 떠나는 것이 조금 불안한 걸까.
아까부터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설리향이 내게 물었다.
"있잖아. 용봉지회는 왜 하는 거야?"
"그걸 이제와서 묻는 건가?"
"아니, 나도 기본적인 건 알거든? 정파 무림의 단합, 후기지수들끼리의 친목, 쉽게 겪을 수 없는 비무 경험 등등.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는 건 스승님한테 들었어. 근데 이걸 전부 감안하더라도 너무 성대한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야."
"아, 그런 이유인가."
확실히 설리향의 말대로 용봉지회는 그 규모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대회긴 하다.
중원 전역의 호사가들이 모여드는 것은 물론이요, 재능 있어 보이는 제자를 원하는 문파, 그들을 상대로 한탕 벌어 보려는 장사치, 엉덩이 무거운 대형 방파의 어르신들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니 말 다 했지.
"거기에 우승자에게는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돌아가면서 내놓는 최고의 영약이 주어진다며? 우승까진 아니어도, 좋은 성적을 거두면 무림맹에서 보관 중인 무공이나 무기를 내어주기도 하고."
"맞다. 그래서 과거에는 사파 무인이 이를 노리고 참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더군. 전부 잡혔지만 말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 심지어 화경의 절대고수도 몇 명 참관하는 자리에서 모두를 속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당연한 일.
다만, 설리향이 신경 쓰이는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나 보다.
"내가 지금까지 무공을 익히며 무림에 대해서도 배우면서 생각한 건데... 무림인은 다들 폐쇄적인 것 같아."
"그건 부정하기 어렵군."
대장장이나 의원 또한 자신의 기술을 내어주기 꺼리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누가 볼 새라 아무도 모르는 비처에서 폐관 수련을 한다거나, 자신의 진신무공을 훔쳐 간 이를 끝까지 쫓아가 추살하는 경우처럼 극단적인 보복은 보기 힘들다.
무공의 특성상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지만... 덕분에 다른 곳에 비해 폐쇄적인 분위기가 정착한 것은 사실.
설리향이 의아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비무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귀한 영약에 무공까지 내어주는 건 조금 신기해서 말이야."
"흠흠. 그 부분은 제가 알려드릴게요, 설 소저."
슬그머니 나와 설리향 사이에 끼어들며 헛기침을 하는 당소월. 그녀가 방긋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초에 무림맹은 그러한 폐쇄적인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만들어진 조직이라 그런 거랍니다."
"어? 그런 거예요?"
"예에. 지금의 무림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화로운 편이라 잘 상상이 안 되지만... 과거에는 심심찮게 혈사(血事)라 부를만한 일이 일어났었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다. 나도 서문화린에게 짧게 들었던 이야기지만, 사흑련이 세워지기 이전의 무림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정파와 사파의 영역이 지금처럼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기에 서로 간의 충돌이 빈번했고, 누군가 죽으면 복수라는 이유로 더 큰 피를 보는 경우도 가끔 일어났다나.
사흑련주를 인간적으로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업적만큼은 존중하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라고 했지.
"여기서 놀라운 것은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힘의 눈치를 본 게 그 모양이라는 소리지요."
"무림맹이 없었던 시절에는...."
"그때는 나라조차 무림을 관리하길 포기했다고 하지요. 관무불가침의 원칙이 그 시절에 나온 것이랍니다."
칼 든 망나니가 자기들끼리 죽어라 싸워대는데, 심지어 강하기까지 해서 쉽게 진압하기도 어렵다.
결국 당대의 황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인 간의 갈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 불똥이 양민에게 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부.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된 정파. 그들은 잠시 복수보다 대의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과거의 원한을 잊었고, 자기 자신과 가족뿐만이 아니라 생판 남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며, 기꺼이 경쟁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기나긴 무림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은원의 굴레를 벗어난 조직. 오직 대의만을 위해 움직이는 무림맹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정파 무림의 적폐 조직 같은 느낌이긴 하다만... 나는 아직 천마가 중원을 침략할 때 가장 앞장서 싸웠던 모습을 기억한다.
비록 무림맹이 무너지고, 정파의 기둥이라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절반 이상이 멸문한 뒤의 생존자는 대부분이 복수귀가 되었다고 하나.
그들이 품었던 높은 이상과 결연한 최후마저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니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조금 어른스러워진 당소월이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에 무림맹은 계속해서 자신의 건재함을 내세워야 하지요. 용봉지회에 과할 정도의 상이 걸린 이유도 그래서랍니다."
"일종의 과시인가요? 무림맹이 이렇게 강하다. 그러니까 함부로 설치지 마라 같은...."
아직 살짝 앳됨이 남아있는 설리향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당소월이 키득이며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정답이랍니다. 이제 설 소저도 척하면 착하고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어엿한 무인이네요!"
"과시치고는 너무 규모가 커서 바로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대단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애 취급하지 말아 주세요, 당 언니. 저도 이제 열여덟이에요. 다 컸다구요."
부끄럽다는 듯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툴툴대는 설리향. 그 모습에 당소월이 한층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저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 소협은 이런 걸 잘 안 받아 주잖습니까. 귀염성 없는 정혼자 대신 잔뜩 귀여워해 드리지요."
"아니, 그런게 어딨... 흐약?!"
이제는 등을 토닥이는 것을 넘어 마구 간질이는 당소월. 옆구리까지 닿는 그녀의 손길에 설리향이 꿈틀거리며 반항하긴 했으나, 벗어나려 들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의 사이가 많이 좋아졌기 때문.
당소월은 일전에 설리향을 보면서도 과거를 떠올린다는 말을 한 이후로 갑자기 잘해 주기 시작했었지.
그것이 조금 의아해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돌아온 대답이 좀 가관이었지.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라나?
본인 말로는 내가 당소월과 같은 눈으로 보는 것은 어쩌지 못해도, 설리향에게 잘해 주어 여차할 때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고,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는 거라는데....
"에잇!"
"히잇! 여, 옆구리는 안 돼요 당 언니!"
저런 모습을 보면 그냥 동생 같은 존재가 생겨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평생을 막내로 살아와서 그런가?
거기에 설리향도 내게 주기적으로 추궁과혈을 받기 시작한 후로 당소월을 좀 더 신경 쓰고 좀 더 잘해 주려 들었지.
이유를 물으니 나 때문이라는 영문 모를 대답만 돌아왔지만.
뭐어... 과정은 이해가 안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둘의 사이가 좋아졌으니 다행이다.
솔직히 처음에 당소월에게 털어놓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불안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가끔은 그 정도가 과한 것 같아 좀 그럴 때도 있지만.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는 하나, 엄연히 바깥이다. 둘 다 좀 자중하는 게 어떤가?"
"헉. 이거 천 소협이 질투하는 거겠지요?"
"맞는 것 같아요 당 언니. 조금 전에 말씀하신 귀염성 없다는 부분을 신경 쓰는 거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다 들린다. 대체 왜 나한테서 귀여움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숨을 푸욱 내쉬자니 당소월과 설리향이 서로를 한차례 바라보고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렇게 싫어하는 부분이 재밌어서랍니다."
"놀리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 반응이 좋으니까 놀리는 거지."
"...."
무림맹까지 이 둘이랑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조금 서글퍼졌다.
***
사천성을 지나 슬슬 호북성에 들어설 쯤이었다. 설리향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생각보다 위험한 일은 없었네? 천휘 너랑 당 언니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쯤 한두 번 정도는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지, 본래는 이게 맞다. 여기가 사파의 영역도 아닌데 그리 사건사고가 많으면 중원 땅이 어떻게 굴러가겠나."
"하지만 천휘 너랑 당 언니는 여러 번 위험했다며."
"...그래서 장인어른이 우리를 삼 년간 성도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으신 거지."
"아버님이 걱정이 많다고 하기에는... 저희가 정말 운이 없었죠."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부분이 신경 쓰이더라.
바로 지금껏 겪은 사건 사고가 전부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뒤틀려다 생긴 문제라는 부분.
당소월이 습격받아 독기를 폭주시키는 일을 막는 거야 습격자랑 싸워야 하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후에 마교라는 배후를 밝혀내고 그들을 베러 간 일이라거나, 그곳에서 우연히 설리향을 발견하고 기루에서 빼 오려다 하오문 지부 하나를 상대하게 된 일이라거나.
영약 좀 챙기러 갔더니 다 죽어가는 전대 고수인 귀영신투를 만나 마교의 근황을 전해 듣고, 추적해 온 살수를 쓰러뜨린 끝에 종남파로 피난 가기까지.
주변에서는 나갈 때마다 사건에 휘말리니 걱정스러운 거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회귀 전의 사건을 바꾸려니 역풍이 부는 것 같아 찝찝함이 더 강했다.
실제로 당소월을 납치하기 전, 혼자 돌아다닐 때는 자잘한 시비가 걸린 적은 있어도 큰 위험에 휘말린 적은 없었잖은가.
정해진 일을 바꾸는 데는 그만한 대가가 있는 것인지, 혹은 알게 모르게 연관된 경우가 많은 마교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셈이라 충돌이 잦은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지금으로서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무언가 바꾸려 들지 않은 지금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것.
"글쎄. 그런 것 치고 객잔에서 술에 취한 무인과 시비 붙었다가 당 언니가 수면 독으로 조용히 만든 거라든가, 녹림도를 자칭하는 삼류 산적으로 관아에 넘긴 일. 그리고 천휘 네가 덥다고 한밤중에 물 한 바가지 퍼와서 얼려달라고 했다가 나중에 당 언니한테 걸려서 한 소리 듣는 등 자잘한 일은 많았잖아."
"...마지막 건 억울하다."
대충 요약하자면 밤에 다른 여가 방에 그리 휙휙 들어가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애초에 들킨 이유가 본인도 더워서 물 퍼왔다가 마주쳐서 아닌가.
그래도 꽝꽝 언 얼음을 머리맡에 두니 한결 낫긴 하더라.
아무튼 그렇게 평화롭다면 평화롭게 호북성을 가로지르기를 며칠이나 반복했을까.
슬슬 무한시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 적당히 괜찮은 객잔에 방을 잡고, 일 층에서 식사하려던 도중. 약간의 소란이 들려왔다.
"감히! 대 금화상단(金花商團)의 물건을 훔치다니!"
"오, 오해니라! 이 몸은 그런 적 없느니라...!"
성을 내는 덩치가 크다 못해 후덕한 인상의 사내와,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작은 체구의 여인.
그중 여인의 뒷모습이 너무나 눈에 익었다.
"...."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7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2] 72화. 성장 (3)
"감히! 대 금화상단(金花商團)의 물건을 훔치다니!"
"오, 오해니라! 이 몸은 그런 적 없느니라...!"
작은 객잔이 아님에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다만, 아직 얼굴을 본 것은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다.
"잠시 상황을 보고 오겠다."
"소협?"
"천휘? 너 설마?"
"그냥 상황만 살피는 거다. 중재할 게 있으면 중재하고, 아니라면 다시 돌아올 터이니 식사가 나오면 먼저 먹고 있...."
"예쁜 소저를 구해 주고 사이좋아지려는 속셈이지?! 당 언니랑 나 앞에서 그러면 안 돼!"
말은 그리하지만 입꼬리는 실실 웃는 것이 반쯤 장난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설리향.
이에 당소월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설 소저? 저야 정혼자니 그렇다 쳐도, 설 소저는 대체 왜...?"
"...당 언니 앞에서 그러면 안 돼!"
잽싸게 수정한 설리향의. 그 뻔뻔한 표정에 참지 못하고 가볍게 딱콩을 놔주었다.
빡!
"아얏!"
빨갛게 물든 이마를 감싸며 부들대는 설리향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대 해석하지 말고 기다려라. 뭣하면 같이 와도 좋고."
"아파서 못 일어나앗...!"
"으음. 일단 여기서는 소협에게 맡기지요. 그러다 필요해질 것 같으면 나서겠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이쪽을 노려보는 설리향과, 그런 그녀의 키득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당소월.
당소월이 설리향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 주는 것을 뒤로 하고 소란의 진원지로 향했다.
"이리도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다니! 안 되겠구나. 내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년에게 도둑맞은 금와 값을 받아내고야 말겠다!"
"이 몸은 싸울 생각이 없느니라... 다시 한번 차분히 이야기를...."
"무림의 대화는 검으로 하는 법!"
촤앙!
잔뜩 분개한 표정으로 검을 뽑는 거대한 덩치의 사내. 그 과정은 심히 느릿하고, 여기저기 붙은 군살이 떨리며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지만.
스릉.
그를 따라 말없이 검을 뽑는 수하들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호위... 아니, 상단이라 하였으니 표사들인가.
일류 끝자락에 달한 이가 하나, 일류 턱걸이가 둘. 이류 남짓이 다섯. 삼류는 없다.
무가나 문파가 아닌 상단에서 고용한 인원치고는 상당한 수준의 인력이다. 나름 정예라고 할 수 있을 터.
이를 잘 알고 있으니 자신만만하게 나선 거겠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뒷모습이 아닌 옆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여인이라기보다 소녀에 가까운 앳된 외모. 그리고 이러한 외모를 감안해도 작은 체구와 여리여리한 체형.
엉덩이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은 처음부터 그런 것처럼 새하얗고, 피부는 아기처럼 잡티 하나 없이 뽀송뽀송하다.
아직 거리가 조금 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 좋은 향기가 나겠지.
반로환동하며 생긴 부작용 아닌 부작용 중 하나라고 했던가.
용봉지회가 시작되어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재수 없으면 본선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슬슬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아직 무한 시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반가움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리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겁먹은 척하면서도 어떻게 제압해야 힘을 숨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서문화린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잠시 기다려 주겠나. 검은 무인의 훌륭한 대화 수단이지만, 아무 때나 뽑아도 되는 물건은 아니잖은가."
"...네놈은 누구인데 감히 금화상단의 행사를 방해하는 거냐!"
"당가의 천휘라고 한다. 멀리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의 억울함이 느껴져 이야기라도 들어 보려 하네만, 괜찮겠나?"
"당가! 그 사천당가란 말이오? 하지만 소협은...."
순간 말투가 정중해진 후덕한 사내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 성씨가 다른 이유는 당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로 당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일행이 있는 식탁을 가리키자, 그중에서도 당소월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과연.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보아, 독공으로 높은 경지를 이룬 분이 확실하구려. 미안하오. 의심하려던 것은 아니나, 조금 예민해져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굴었던 모양이오."
"괜찮다. 감히 사천당가의 이름을 사칭하는 이는 얼마 못 가 더는 사칭하지 못하는 몸이 되겠으나, 중원은 넓은 곳이니 당장 눈앞의 상대를 속이는 정도는 가능할 테지. 합당한 의심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
"고맙소."
말은 그리하지만 눈빛에서 자꾸만 흘러나오는 안쓰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
처음에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반 박자 늦게 그 진의를 깨달았다.
녹색으로 물드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상승의 독공을 익혀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올라야 드러나는 변화다.
그리고 절정이라는 경지는 빨라 봐야 이립쯤. 이전에 오르면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경지다.
즉, 눈앞의 후덕한 사내는 나를 무공에 미쳐 늙은 나이까지 독신으로 지내던 여인에게 팔려 간 어린 남자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열 살도 넘게 나이 차가 나는 여인과 혼인할 이유는 거기서 거기니까.
전부 오해지만, 말로 꺼내지도 않았고 솔직히 좀 재밌으니 정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요즘은 좀 덜하다지만 심심할 때마다 나를 노괴인 줄 알았다며 놀리던 당소월이 역으로 같은 취급을 받을 줄이야.
물론 이 자리에는 진짜 노괴가 하나 있지만.
슬쩍 서문화린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쉬며 평평한 앞섶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화를 피해 진심으로 안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진짜 무위를 아는 내게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저거 그냥 과하게 힘을 꺼낼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심한 거겠지.
화경의 절대고수인 서문화린이 표사들을 제압하지 못할 리는 없으나, 그녀가 반로환동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겐 일류 중입 정도로 보이는 무림초출이 홀로 정예 표사들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보일 터.
안 그래도 용봉지회 때문에 누가 누가 더 강한지 같은 주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확 주목하는 것도 당연지사.
적당한 성적을 내며, 적당한 선에서 탈락하여, 적당한 신분을 얻어 정파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려는 그녀에겐 달갑지 않은 주목이겠지.
일단 이번 일을 통해 친분을 만들고, 그 뒤에 어떻게 도와줄지 생각해 봐야겠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후덕한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어 죄송하오. 금화상단주의 장남인 추정산이라 하오."
살집이 많이 붙어서 그렇지 정중하면서도 당당한 인사.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라지만, 경험상 이런 사람이 사기를 치는 일은 거의 없더라.
나 또한 포권으로 마주 인사를 하자, 뒤늦게 서문화린이 허둥대며 작은 주먹을 한 손으로 감쌌다.
"본... 아니, 이 몸은 서린이라고 하느니라. 이렇게 나서 주어 고맙구나."
"...."
아니, 서문화린 이 사람 숨길 생각은 있는 건가.
본래 자신을 지칭할 때 쓰던 말버릇인 본녀를 숨긴 건 좋다. 하지만, 그 대신 이 몸이라 칭하는 건 또 뭐고, 저 나이 많아 보이는 말투와 성의 없이 바꾼 이름은 또 뭔지.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라는 걸까, 서문화린이 말할 때마다 추정산의 시선이 날카로워진다.
괜히 수상하게 여긴 게 아니다. 나 같아도 의심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안다. 서문화린은 강제로 뺏었으면 뺏었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이는 아니라는 것을.
"멀리서 듣기로는 무언가 귀중한 물건을 도둑맞았고, 그 범인으로 이쪽의 소...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만. 내가 들은 게 맞나?"
서문화린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기에 소저라는 부분에서 조금 말을 절었다. 그래도 알아듣긴 다 알아들었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추정산.
"맞소! 당가의 사람이라면 필시 독물에도 자세할 터! 부디 이번 일을 도와주었으면 하오. 사례는 확실하게 약속하오!"
"이, 이 몸은 정말로 결백하느니라! 당가라면 이 무고함을 알아줄 것이라 믿네! 다만 그으. 가진 것이 부족하여 사례는 많이 약속할 수가 없느니라...."
힘차게 항변하다 뒤로 갈수록 쭈글쭈글해지는 서문화린.
서문세가의 무공은 되찾았지만, 재산은 되찾지 못했었다고 했지.
흑천검문을 멸문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흑천검문주가 열세에 몰리자 문파원들이 일제히 재산을 들고 도망쳤다던가.
실로 사파다운 얄팍한 의리라고 할 수 있겠다.
가족이나 적전제자 같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다 그런 법이리라.
덕분에 흑천검문주의 아들이 도망칠 수 있었고, 복수를 부르짖으며 서문화린과 공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일이 없을 거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를 먼저 설명해 줬으면 한다만."
"이런! 내가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나 보오. 우선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소."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추정산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북해빙궁에서 대량의 음기를 머금은 것이라면 뭐든 사들인다는 소식에 최근에 붙잡은 금와(金蛙)를 팔기 위해 상행에 나섰다고 한다.
금와는 태양처럼 금색으로 빛나는 두꺼비로 영물의 일종인데.
금와 자체는 짙은 양기를 품었으나, 스스로가 이를 견뎌내질 못해 극음의 기운을 품은 독을 전신에서 뿜어내며 살아가는 영물이다.
심지어 살아있기까지 하니, 계속해서 음기 섞인 독을 뿜어낼 터.
"그만큼 몸값이 비싼 녀석일 테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상행에 임하고 있었소."
"하지만 문제가 생겼군."
"맞소. 어제 하룻밤 만에 금와가 감쪽같이 사라졌지 뭐요.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 소저가 그 범인 같소."
"왜 그리 생각하나?"
객잔의 삼 층 전체를 빌렸소. 객잔주에게도 손님을 올리지 말라 일렀고, 표사들을 시켜 불침번까지 서게 했지. 허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르는 얼굴이 삼 층을 돌아다니고 있더군."
"그게 여기 있는 서 소저군."
"맞소. 어떻게 표사들의 이목을 숨기고 올라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수상한 것은 사실이잖소."
"일리가 있군. 그럼 서 소저. 무어라 변명할 거리가 있나?"
"이 몸은 훔치지 않았느니라... 그저 못 올라가게 막고 있길래 궁금증에 올라가 봤을 뿐, 무언가를 훔치려는 의도도 없고 훔치지도 않았느니라!"
"...."
어쩌면 서문화린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기나긴 복수를 끝마치고, 처음으로 여유롭게 둘러보는 세상 아닌가.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을 수도 있지.
하지만 이를 솔직하게 말해 봐야 아무도 믿어 주지 않으리라.
대체 어느 누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기어이 통행을 막아 둔 곳에 숨어들겠는가. 아니, 그럴 능력은 또 어디서 나왔고.
서문화린을 화경의 절대고수가 아닌 일류 중입의 좀 어벙한 여류 무인 정도로 보는 다른 이들에겐 도통 믿을 수 없는 일.
내가 서문화린의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이렇게 나오면 좀 힘들다.
아마 회귀 전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금화상단의 사람들을 전부 제압하고 도망치듯 무한시로 떠나지 않았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다행히도 금와는 좀 특이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독물(毒物). 그리고 여기에는 독의 전문가가 있다.
뒤에서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당소월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좀 도와주겠나?"
"어머? 맨입으로요?"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입술을 할짝거리는 당소월.
그 모습이 실로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나?
[7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3] 73화. 성장 (4)
"나 좀 도와주겠나?"
"어머? 맨입으로요?"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며 입술을 할짝거리는 당소월.
물론 반쯤 장난으로 한 일이겠지.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해 놓고 정작 부탁하는 일이라고는 시답잖은 일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다만, 삼 년이 지나며 한층 물오른 미모. 그리고 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몸의 균형이 잡혔기 때문인지 주변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추정산이 이제는 배신자를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당소월과 설리향이 있는 식탁으로 돌아갔다.
"당소월. 우리 사이에 이러긴가?"
"우리 사이가 뭔가요? 저는 잘 모르겠으니 소협이 설명해 주실런지요?"
"정혼자 사이 아닌가. 너무 인색하게 굴지 말아줬으면 한다만."
"흐응. 누가 들으면 제가 소협에게 엄청난 걸 요구하는 줄 알겠습니다?"
"아니었나?"
"조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독물의 추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저도 천 소협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 하나를 부탁하려 하는 거랍니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는 당소월. 그 모습에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대체 뭘 시키려고 이러는 건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당소월이 나를 향해 손을 살랑였다.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자, 내 귀에 대고 짧게 속삭이는 당소월.
귓가에 닿는 온기와 당소월 특유의 체향에 절로 풀어지는 긴장. 알면서도 당한다는 건 분명 이런 일을 말하는 거겠지.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반쯤 체념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지는 속삭임.
속닥속닥.
"...정말 그거면 되겠나?"
"세상에. 천 소협은 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신 것 아닌지요? 누가 보면 제가 평소에 무리한 부탁을 하는 줄 알겠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나. 나는 오늘 내가 뼛속까지 털리는 건가 싶었다."
"이미 천 소협의 것이 제 것이고, 제 것이 천 소협의 것인데 털어먹어 무얼 합니까. 됐으니까 슬슬 일어나지요. 아까부터 설 소저의 시선이 따갑답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설리향이 강제로 떫은 과일을 먹은 사람처럼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소월이 그런 설리향의 모습에 키득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자. 어서 앞장서시지요.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 편하게 식사를 마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나나 당소월은 몰라도 설리향은 밥 먹다가 체할 것 같은데 말이지.
***
"당가의 당소월이라고 합니다. 금와의 행방을 찾는 것을 도와주셨으면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는지요?"
"맞소. 이번 거래는 우리 금화상단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니, 만약 금와를 찾아만 준다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이 몸도 마찬가지이니라! 대단한 것은 약속할 수 없지만... 억울함을 풀어 준다면 도울 수 있는 뭐든 돕겠노라!"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추정산과 서문화린의 모습에 당소월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사례는 필요 없답니다. 그저 금와의 독을 조금 얻어가고 싶은데 괜찮을런지요?"
"금와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이라면 얼마든 가져가도 좋소!"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쪽의 소저는...."
"서린이라고 하느니라."
"...?"
서문화린의 괴상한 말투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나를 바라보고는 납득했다는 듯 끄덕인다.
뭐지. 어째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지.
울컥하고 차오른 의문을 힘겹게 내리누르고 있자니, 당소월이 서린을 안심시키려는 듯 방긋 웃어주었다.
"서 소저도 용봉지회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그러하니라. 좋은 기회라 조금 이르지만 무림초출에 나서기로 했느니라."
"하기야. 올해를 놓치면 오 년을 기다려야 하니 이해한답니다. 혹시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런지요?"
"가, 강서성 출신이니라. 사문은 작은 일인전승 문파지만, 스승님께서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이름을 알리지 말라 당부하셔서 알려줄 수 없느니라. 미안하구나."
마치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 같은 어색함. 별거 아닌 주제에도 바짝 긴장한 주제에 대답 자체는 막힘없이 나오는 것을 보아 서린이라는 새 신분에 맞게 따로 준비한 설정이리라.
다만, 원체 남을 속이는 일에 재능이 없기 때문인지 서문화린의 자기소개는 수상쩍어 보일 뿐.
그 위화감에 당소월이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번에도 내 쪽을 바라보더니 편안해진 표정으로 끄덕인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저 엉망진창인 설명을 믿을 마음이 들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나는 그래도 절강성 출신이라든가, 행적이라든가, 무공의 연원 같은 걸 제법 자연스레 잘 둘러댔던 것 같은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허면, 같이 식사라도 하며 강서성의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한번 둘러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아무래도 기회가 나질 않아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조금 궁금했던 차랍니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손으로는 내 등을 콕콕 찌르는 당소월. 그러고 보니 원래 강서성을 지나 한 바퀴 크게 돌려던 것을 도중인 호북성에서 납치해 버렸었지.
반쯤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한 당소월의 대답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서문화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
"물론이지요. 애초에 대단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랍니다. 그저 정파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일을 하려는 것뿐이지요."
"허억!"
무림행 떠날 때마다 일이 생겨 조기 귀가한 탓일까. 사실상 처음 해보는 정파 무인다운 언행에 뿌듯해하는 당소월.
그리고 사파 무림에서 겪기 힘든 직접적인 선의에 감명받은 것인지 숨을 크게 삼키는 서문화린까지.
언뜻 보기에는 서로 억울할 수 있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정의로운 당가의 자제라는 실로 바람직한 모습이나.
그 속내를 알고 있는 내게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렇게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한차례 헛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흠흠. 그럼 이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만. 금와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물론이오. 우선 어제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 똑바로 들어있는 것을 확인했소."
"이상한 점은 없었고요?"
"딱히 없었던 것 같소만. 아! 그러고 보니...!"
무어라 천천히 설명을 이어가는 추정산.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준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렵잖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지요. 서 소저는 금와를 훔치지 않았답니다. 어쩌다 삼 층을 돌아다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거 보거라! 본...아니, 이 몸이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그럼 대체 금와는 어디로 갔단 말이오!"
의기양양해하는 서문화린과 다급해진 추정산. 당소월이 진정하라는 듯 둘을 말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금화상단에서는 금와를 옮기기 위해 많은 조언을 받고, 꼼꼼하게 준비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부분이 있던 것 같아서 말이지요."
"간과한 부분 말씀이오?"
"예에. 잘 아시다시피 금와는 짙은 양기가 고인 자리에서 자라며, 자신 또한 그에 걸맞는 양기를 품게 된 영물이지요. 다만 태생이 음기와 친숙한 두꺼비인지라 스스로의 양기를 견디지 못해 극음의 기운이 서린 독으로 전신을 보호하고요."
"맞소. 하여, 양기가 강한 먹이를 먹인 것은 물론, 음기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특수 제작된 우리에 가둬둔 것이오."
"안전하게 옮기기엔 올바른 방법이지요. 다만, 그 안전이 사람의 안전일 뿐. 우선 금와의 우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물론이오."
앞장선 추정산이 우리를 삼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텅 빈 우리.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당소월이 손을 집어넣어 안쪽을 더듬으며 말했다.
"운반 도중에 금와의 독과 그 음기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하지만 음기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뜻은 음기가 우리 안쪽에 고인다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우리에서 손을 꺼낸 당소월. 그녀의 손끝에는 하얀 서리가 묻어있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금와는 양기가 충만한 곳에서 생활하는 영물이지요. 헌데, 이렇게 자신의 독이 빠져나가지 못해 음기가 고인 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설마 얼어 죽은 것이오?"
"그랬다면 시체라도 남아있겠지요. 무엇보다 영물은 생명력이 강해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답니다."
"허면 대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이오?"
"추운 우리를 벗어나 자신이 그나마 따뜻한 곳으로 향했겠지요. 아무리 영물이라도 두꺼비는 두꺼비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이니...."
작게 중얼거린 당소월이 자신의 손에 묻은 금와의 독을 가볍게 할짝였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창가로 향했다.
드륵.
반쯤 열린 창문을 조심스레 열자, 그곳에는 나른한 표정으로 햇볕을 쬐는 황금색 두꺼비가 있었다.
"마침 날이 더운 여름이기도 하니, 다행히 이 정도로 충분했나 봅니다."
"허업!"
깜짝 놀란 추정산이었으나, 이내 그 얼굴에 피어오른 것은 머쓱함과 의아함이었다.
"우선 서 소저에게 사죄하겠소. 함부로 도둑으로 몰아가 죄송하오."
"흐에? ...아! 괘, 괜찮으니라. 아무리 봐도 두꺼비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잖느냐. 이런 곳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니라."
살아있는 영물이 신기한 건지 멍하니 금와를 바라보던 서문화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추정산 또한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젓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엄한 사람을 의심하고 검까지 뽑은 것은 사실이잖소. 이에 대한 배상은 확실히 하겠소. 용봉지회에 참가한다고 하였으니, 무한으로 향하겠구려. 숙소는 따로 생각해 둔 곳이 있소?"
"없느니라. 허나, 무인이 되어서 잘 곳을 가려서야 되겠느냐. 비를 피할 지붕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느니라."
"그렇다면 금화상단이 운영하는 객잔에서 머무는 것은 어떻겠소? 서신을 하나 드릴 테니, 이를 보여주면 마음껏 머물다 갈 수 있을 것이오."
"그래도 되겠느냐!?"
"물론이오. 도움을 드린 당가의 세 분도 함께 초청하고자 하오만, 어떻게 하시겠소?"
나와 당소월, 그리고 설리향이 한차례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고맙게 받겠다."
"금와의 독만 받겠다 했던 게 조금 무안하긴 하지만... 숙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만큼 조금 늦으면 좋은 객잔은 잡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으니 솔직히 다행이네."
우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제야 긴장이 턱 풀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추정산.
결과적으로는 당가와 장래가 유망해 보이는 서문화린과 좋은 연을 맺었으니 다행이라 여기는 것이겠지.
선의와 신의로 보이지만 상인 나름의 속셈이 있는 것이리라.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니 상관없지만.
"후우. 솔직히 한때는 어찌 되나 싶었는데 잘 해결되어 다행이오. 헌데, 문제는 알았으나 그 해결법은 짐작이 가지 않는구려. 혹여 조언해 줄 것이 더 있다면 경청하겠소."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답니다."
당소월이 창틀 앞에 우리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 손을 가져다 대는 설리향.
그러자 우리 안쪽을 새하얗게 물들인 서리가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빙하진기를 이용해 우리에 서린 음기만 빨아들인 것이겠지. 독기는 그 전에 당소월이 흡수했을 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기가 완전히 빠진 우리. 이를 힐끗 바라본 금와가 뒤뚱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폴짝 뛰어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영물은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지요. 바깥에서 힘들게 사는 것보다, 갇혀있더라도 편하게 먹이를 받아먹으며 사는 게 좋아 제 발로 머물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몇 가지 조건만 만족해 준다면 제 발로 도망칠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지요."
금와의 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독을 채취한 당소월. 그녀가 만족스레 웃으며 간단한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
추정산에게 서신을 받고 헤어진 날 저녁.
술에 취한 당소월이 한쪽 팔로는 내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팔은 허공에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들어보시지요! 우리 천 소협이 글쎄...."
그 꼬부라진 발음에 설리향은 물론이요, 서문화린의 표정마저 피곤하게 물들었다.
나로서는 다른 이유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그런가. 키는 성장이 멈춰도 독주머니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건가....
[7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4] 74화. 취기
금와를 되찾은 추정산은 우리에게 서신 하나를 써주고는 바로 표사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우리 또한 조금 늦어진 식사를 마치고 다시 무한 시를 향해 출발하기로 했고.
다만, 이전과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동안 동행하게 됐네요. 잘 부탁드려요, 서 소저."
"앗! 금화상단의 객잔에서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렇겠구나. 나도 잘 부탁하느니라!"
서문화린이 동행하게 되었다는 것. 이번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가장 큰 목적이 서문화린을 사흑련이 아닌 당가로 빼 오는 일인 만큼 내겐 다행인 일이다.
서문화린 또한 제자리에서 작게 뛸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지만.
아마 자신이 그리던 새로운 삶. 사람다운 삶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생각하는 거겠지.
다만, 당소월과 설리향의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나 보다.
"이번이 무림초출이라고 했나요? 아직 잘 모르는 것들이 많을 테니,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셔도 괜찮답니다?"
"너도 용봉지회에 참가한다고 했지?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데... 사문은 비밀이어도 나이까지 비밀은 아니지?"
서문화린을 둘러싸고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질문을 퍼붓는 둘.
당소월은 지난 삼 년간 시도 때도 없이 내게 한탄하던 다음에 무림행에 나서면 해보고 싶은 일들, 그중 하나인 후배를 도와주는 선량한 무인 역할을 해낼 수 있어 기쁜 것 같았고.
설리향은 무공을 배우고 처음으로 자신과 수준이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사람을 만나 들뜬 모양새.
하지만 나는 안다.
서문화린은 사실 무림행에 이골이 나다 못해, 한때 백발나찰(白髮羅刹)이라는 악명으로 중원 전체를 진동시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저렇게 앳된 얼굴과 작은 체구를 지녔음에도 속은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의 화경 무인이라는 사실을.
나 혼자 웃지 못할 상황에서 서문화린은 허둥대면서도 하나씩 답해주었다.
"어엇. 그럼 용봉지회에 관해 물어봐도 괜찮겠느냐? 참가하겠다고는 해도 자세히 아는 것이 없어 조금 답답했느니라. 그리고 나이는... 여, 열여섯이니라."
"큽!"
나이가 열여섯이라는 부분에서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내 돌발행동에 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는 당소월.
"천 소협? 괜찮으신가요?"
"흠흠. 괜찮다. 단순히 사레가 들렸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넘어가는 당소월. 이 와중에 서문화린은 찔리는 게 많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의 이면을 본 느낌?
이전 생의 전부 체념한 모습보다는 훨씬 보기 좋지만, 어쩐지 보면 안 될 것을 봐버린 기분이란 말이지.
이런 내 복잡 미묘한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소월은 방긋방긋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맞아! 그러고 보니 다른 이야기 하느라 정작 물어보려던 강서성의 이야기는 못 들었네요."
"그러고 보니 그러했느니라. 어디 보자, 다음 마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으니 이야깃거리를 아낄 필요가 없겠구나. ...혹시 강서성에는 다른 곳처럼 패자라 부를 만한 가문이나 문파가 없는 이유를 아느냐?"
아니, 여기서 그 이야기를?
강서성에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에 맞먹는 집단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백발나찰 서문화린이 십수 년 전에 강서성 전체를 뒤집어 놓았으니까.
정파였던 서문세가가 멸문하며 사파 세력이 득세했으나, 그마저도 서문화린의 손에 죄다 멸문당했으니 결국 남은 것은 고만고만한 중소 문파들뿐.
넓은 강서성 전체를 휘어잡을 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것에는 서문화린이 지대한 영향를 미쳤으리라.
그리고 이 사실을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터.
뭐어. 오랫동안 은거하며 무공 수련에만 매진하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 아닌가.
이야기할 거리가 이 정도밖에 없었던 거겠지.
...절대 은근슬쩍 강서성 이야기인 척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리라.
***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구체적으로는 웃음 참기에 가까스로 승리하여 별 탈 없이 도착한 다음 마을.
적당한 객잔을 잡은 당소월이 예상외의 제안을 했다.
"한동안 함께 다녀야 할 텐데, 어색한 사이로 있는 것보다는 조금 친해지는 게 좋지 않을런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오늘은 밥만 먹는 게 아니라 술도 한잔 곁들이자는 뜻이랍니다. 물론 서 소저는 조금만 마셔야겠지만요."
"나야 좋지만... 설리향, 그리고 서, 크흠. 린. 너희는 어떻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버벅이고 마는 혀.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서문화린이었으나, 몇 번 반복하자 이젠 그러려니 넘기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좋아."
"이 몸도 괜찮으니라. 다, 다만 너무 비싼 술은 조금 곤란하느니라...."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는 당가의 여식이랍니다? 여비는 넉넉하니 마음껏 드시지요."
가슴을 활짝 펴고 엣헴 거리는 당소월. 저것도 언젠가 해 보고 싶은 일이라던 '처음 만나 연을 맺은 무인과 술 마시기'라 신난 게 분명하다."
하지만 뭐어. 어찌 됐든 즐거워 보이니 그거면 됐지. 독령지체를 타고난 당소월이 과하게 취할 일도 없을 테고.
대수롭지 않게 조금 독한 백주를 주문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처음에는 좋았다. 이번 용봉지회의 우승 상품은 소림사에서 내걸 차례라 그 유명한 대환단이 걸려 있다거나.
무당파에서 나오는 후기지수 중에 벌써부터 차기 장문인으로 낙점받은 엄청난 천재가 있다거나.
이번 용봉지회에서 황보세가와 진주언가 중 어느 쪽이 권룡의 별호를 가져갈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는 이야기 등등.
공통의 주제인 용봉지회와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강호의 최신 소식을 흥미롭게 듣던 서문화린이 그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던진 질문에서 문제가 시작됐지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느니라. 둘은 정혼자라 하였는데 어쩌다 그런 사이로 발전했느냐? 명가의 자제가 으레 그러하듯 정략혼이라고 하기에는 그으, 당가의 이름이 너무 높지 않느냐."
"이런. 지금 내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집안이라고 돌려 말하는 건가?"
"아, 아니니라! 이 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느니라! 그게 아니라 단순히 정혼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했을 뿐이니라!"
농담 한번 했더니 기겁하며 고개를 휘휘 젓는 서문화린. 길게 늘어진 하얀 머리가 덩달아 흔들리며 그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을 가린다.
당소월이 그 모습에 키득이며 백주를 한입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굳이 말하자면 정략혼이 아니라 납치혼에 가깝겠지요."
"납치혼 말이느냐...?"
반쯤 산발이 된 머리를 뒤늦게 가다듬으며 되묻는 서문화린. 나와 당소월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 납치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대체 얼마나 간이 커야 당가의 여식을 납치한다는 말이느냐?"
"흐흫. 역시 서 소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런데 짜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답니다!"
"뭐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은근슬쩍 상체를 뒤로 빼기까지 하는 것이 진심으로 기겁한 모양이다.
"일단 말해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고 처음부터 무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잖나."
"그으. 천휘? 말로 해서 안 된다고 바로 납치부터 하는 건 정상이 아니다? 나 때도 그랬잖아."
"자, 잠시만 기다리거라. 한번이 아니었단 말이느냐?"
"응.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아, 순서상 당 언니 이야기부터 듣는 게 나으려나?"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럼 저에 이어서 설 소저가 서 소저에게... 으음. 둘이 성이 비슷해 부르기 힘드네요. 설 소저랑은 알고 지낸 지 제법 됐으니 편하게 향이라고 불러도 괜찮을런지요?"
"네? 저야 좋죠. 전 이미 언니라 부르고 있는데, 정작 당 언니는 저를 소저라 부르는 게 조금 신경 쓰였거든요."
"버릇이 되어 버려서 부르던 대로 불렀을 뿐, 향이와 거리를 벌리려던 생각은 아니랍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슷한 고충을 품고 있는 저희 사이잖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진짜 자매처럼 지내고 싶답니다."
"언니...!"
평소에 동경하던 사람에게 자매처럼 지내자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잔뜩 감격해 눈시울을 붉히는 설리향.
반면 당소월은 계획대로라는 듯, 수상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문화린은 그냥 감동적이라며 작은 손으로 작은 박수나 치고 있었고.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백주를 한 잔 더 따라 홀짝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자연스레 내게 잔을 내민다.
비어 있길래, 생각 없이 따라주자 그대로 한입에 털어 넣은 뒤에야 말을 이었다.
"흠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서 소저. 서 소저라면 처음 무림행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그것도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남자가 위험하니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 사정은 들어볼 것 같으니라."
"하지만 정말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요?"
"...정말 큰 일이고, 신뢰가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발걸음을 물리지 않을 것이니라."
나름 진지한 목소리. 한번 정한 일은 어지간하면 굽히지 않는 서문화린다운 결정이다.
다만 그런 그녀도 이어진 당소월의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렇게 말했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강제로 제압당해 납치당했지요. 글쎄 눈 떠보니 어두컴컴한 동굴 속이지 뭐예요."
"허업!"
희대의 색마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서문화린. 이건 좀 억울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뭐가 되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납치범?"
"세상 어느 납치범이 인질의 투정에 점혈도 풀어주고, 아랫마을까지 가서 먹을 것이나 침상 대용으로 쓸만한 가죽까지 사 오겠나. 심지어 당소월 네 요강도 내가 비웠잖나."
"꺄아악! 그건 갑자기 왜 말하시는 건가요!"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내가 아니다만."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서문화린이 이제는 아예 의자를 끌어내 반대편인 설리향 쪽으로 바짝 붙었다.
"요강...."
그 알기 쉬운 반응에 당소월이 깔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하핫!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서 소저. 이렇게 있었던 일만 나열하면 이상해지지만, 천 소협은 나름 제게 잘해주었답니다. 그랬으니 지금은 이리 약혼을 맺은 것이지요."
"그런 것이느냐?"
"예에. 이제부터 왜 그러지 자세히 알려드리지요."
술 한잔으로 가볍게 목을 축인 당소월이 입을 열었다.
"이게 사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이지요...."
이어지는 당소월의 이야기. 납치한 쪽이 아니라 당한 쪽이라 그런 걸까. 나보다 훨씬 선명하고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더라.
얼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나도 들으면서 좀 재미었는데, 처음 듣는 서문화린은 오죽하겠는가.
중간에 나를 반로환동한 노괴로 착각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식은땀을 줄줄 흘린 것을 제외하면, 연신 감탄한 기색으로 맞장구를 쳐주더라.
그 이후에는 배후를 찾아 확실히 은원을 마무리 지은 일이라거나, 설리향이 자신을 빼 오려다 수틀리자 그냥 납치해 버린 일을 이야기하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 생각한 서문화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아직 무림초출이라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느니라. 그러니 이건 이 몸이 아닌 이 몸의 스승이 겪었던 일이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척 자신의 과거를 살짝 풀려는 서문화린.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한껏 상기된 당소월의 목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사실 천 소협이...!"
"...?"
갑자기 말을 빼앗긴 서문화린이 멈칫했으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 할말만 이어 나가는 당소월.
그 막무가내에 깨달았다. 당소월이 어느새 혼자 백주를 다섯 병이나 비웠다는 것을. 그리고 주독을 몰아내기는커녕 일부러 몸에 퍼뜨리고 있다는 것을.
"대체 왜 주독을 그대로 놔두는 거지...?"
"히힛. 그야 술을 마실 때는 취기를 억누르지 않는 것이 예의 아니겠습니까아."
"대체 누가 그런 말을... 아."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이건 누가 말해 준 게 아니다. 그냥 당소월이 취기를 억누를 수 있으면서 일부러 취한 뒤, 술에 취하게 마시는 것이 예의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고 싶은 일을 억지로 막으려 들면 오히려 욕망이 폭주한다는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요오? 아! 배가 고파 먹을 거라도 달라고 했더니, 천 소협이 글쎄 벽곡단을 꺼내지 뭔가요오. 동굴에 갇혀있는 것도 서러운데 밥까지 제대로 못 먹으니 조오금 심술이 나서 벽곡단은 음식이 아니라는 말을 따라 하라고 했는데 진짜로 따라 하는 것도 모자라 조금 귀엽기까지 해서...."
"당소월. 일단 한번 주독을 몰아내는 게 어떻겠나? 뭣하면 내가 빼주겠다만."
"아잇! 천 소협은 조용히 하시지요! 아직 제가 이야기하는 중 아닙니까!"
몰캉.
돌연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허공에 팔을 붕붕 휘두르는 당소월.
한층 커진 것 같은 독주머니의 감촉에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술주정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7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5] 75화. 취기 (2)
반복되는 당소월의 이야기. 나야 어깨의 감촉에 집중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지만, 설리향과 서문화린에게는 버거운 주정이었나 보다.
"야! 천휘! 당 언니 좀 어떻게 해봐!"
"벌써 납치당하는 이야기만 일곱 번은 들은 것 같으니라...."
"뭐, 슬슬 멈출 때가 됐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몸을 반쯤 기댄 당소월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서 천 소협이 제게 뭐라 했느냐면... 으응?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요오?"
"당소월.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겠나? 아니, 그만 마셔라."
"네에? 지금 딱 기분 좋을 때 아닙니까. 쩨쩨하게 굴지 마시지요오."
"슬슬 그런 수준을 넘은 것 같아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직 안 넘었다는 뜻이지요? 딱 한 잔! 한 잔만 더 마시겠습니다아!"
"어쩔 수 없군. 그럼 딱 한 잔만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몇 병째인지 모를 술을 당소월의 잔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꾸욱.
그대로 마혈을 짚어 당소월을 마비시켰다. 이젠 당소월의 경지도 높아져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데다가, 설마 내게 당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지 무방비했던 점. 그리고 취기로 반응이 둔해졌기에 가능한 일.
강하게 짚은 건 아니니 금방 풀리겠지. 그 전에 당소월의 몸에서 주독을 빼낼 요량으로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웅-
내공을 불어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당소월의 숨결에 섞여 짙은 술 냄새가 풍겨왔다.
전부는 빼낸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정신 차릴 정도는 되겠지. 실제로 슬쩍 바라본 당소월의 얼굴은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직 몸을 움직이지는 못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이 저지른 일을 되돌아볼 수 있는 것이리라.
피식 웃으며 마혈을 풀어 주는 대신, 그대로 당소월의 목과 오금을 받치며 안아 들었다.
"아쉽지만 오늘의 술자리는 여기까지만 하지."
"으응. 망설임 없이 혈을 짚을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어떻게 하긴 했네."
"여, 역시 경험자라 그런지 아주 자연스러웠느니라...!"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설리향과 억지로 칭찬을 쥐어짜는 서문화린.
아무래도 술에 취한 당소월이 하염없이 자신이 납치당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했던 터라 그런 거겠지.
"계산은 설리향 네가 해라. 나는 그사이에 먼저 당소월을 방에 눕혀두마."
"나한테 전낭 없는데?"
"내게 있으니 알아서 가져가라."
"어?!"
설리향의 앞에서 가만히 기다려 주자, 당황한 표정으로 목소리가 높아지는 설리향.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손을 쭈욱 뻗어 내 옷깃 속으로 집어넣었다.
더듬더듬.
품 안쪽을 간지럽히는 설리향의 손가락. 묘하게 소심한 움직임에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지금 뭐 하나?"
"전낭 알아서 가져가라며."
"그런데 내 품은 왜 뒤지는 거냐."
"그야 전낭을 찾아야 하니까."
"찾을 필요도 없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전낭을 말인가?"
"...어?"
설리향이 어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여 내 허리 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옷깃 안쪽에서 손을 빼고는 헛기침을 했다.
"흠흠. 전낭이 여기 있었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허리춤으로 손을 뻗는 설리향. 그렇게 전낭을 잡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부쩍 가까워진 정수리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거, 음흉하기는. 내게 정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
제자리에서 펄쩍 뛴 설리향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글쎄. 움직이지 못할 뿐, 잠들거나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닌 당소월 앞에서 그 정혼자인 나를 희롱한 사람이 말해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만."
"야잇! 말을 그렇게 하니까 엄청 이상하잖아!"
"실제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나."
낄낄 웃어주고는 아까부터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서문화린 쪽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농담이니까 이제 가서 계산이나 해라. 내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 너무 늦게 자면 힘들잖나."
"앗."
서문화린은 자신의 경지를 철저하게 숨겨 일류 중입 정도로 보이는 상황이다. 즉, 지금의 설리향과 비슷한 수준.
본인이 슬슬 쉬어야 한다면, 서문화린 또한 쉴 때가 됐다는 지극히 단순한 결론을 내린 설리향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그 전에 잠시만."
설리향이 쭈뼛거리며 굳어있는 당소월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당 언니.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알았죠?"
"...."
아무 말 없는 당소월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설리향이 서린을 데리고 점소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리가 빌린 객실 중 하나에 들어가, 침상 위에 당소월을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는 옆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가? 한참 전에 마혈이 풀렸던 것 같다만."
"으읏. 이런 거는 모른 척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짧게 움찔한 당소월의 눈꺼풀이 깜빡였다. 그 사이로 녹색을 머금은 눈동자가 불만스레 이쪽을 주시한다.
"그 정도로 부끄러워할 거라면 다음부터는 적당히 마셔라. 아니면 취기라도 주기적으로 날리던가."
"...예에. 저도 너무 들떴다는 걸 자각하고 있답니다. 서 소저에게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겠지요?"
"술버릇이 이상한 사람이지,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보인 건 아닐 테니 안심해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한숨만 푹푹 내쉬는 당소월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독이나 마저 몰아내고 푹 자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답니다."
누운 채로 눈을 감는 당소월. 독령지체를 타고난 당소월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독 정도는 운기행공을 할 필요도 없이 흡수하건 날려버리건 할 수 있겠지.
오늘처럼 스스로 취하려 들지 않으면 취하기도 힘들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좀 궁금하긴 하네.
잠시 누워있는 당소월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돌연 한쪽 눈만 뜨며 물었다.
"계속 계실 생각이라면 힘들게 서 있지 말고 옆에 눕는 건 어떠신지요?"
"...아직 장인어른이 무서운 터라 좀 그렇군."
"겁쟁이."
"...."
"흐흫. 농담이랍니다."
그 짧은 사이에 취기를 완전히 해결한 당소월이 언제 주정을 부렸냐는 듯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피식 웃으며 나 또한 마주 흔들어 주고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당소월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제법 마신 탓에 약간의 취기가 올라 있는 상태. 하여, 주독도 빼고 수련도 겸하기 위해 자기 전에 운기행공에 집중하던 도중이었다.
똑똑.
바깥에선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와 익숙한 기척에 금방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잠시만 기다려라."
간단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잠겨있던 문을 열자, 그곳에는 무슨 나쁜 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설리향이 있었다.
"이런 시간에 무슨 일이냐."
"아니, 뭐어. 별건 아니구. 아까 돌려준다는 걸 깜빡한 전낭 가지고 왔지."
"내일 아침에 돌려줘도 되는 것을."
"그래도 신경 쓰이잖아. 나는 어디까지나 당가의 식객. 아예 당가의 자식인 당 언니나, 그 정혼자인 너랑은 입장이 다르다구."
"다른 사람 앞이면 모를까 우리끼리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래 그래.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밤새 전낭을 대신 보관하는 건 좀 신경 쓰여서 잠도 안 온다구. 이 안에 한두 푼 들어있는 것도 아니잖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때는 당소월이 미리 묻혀 둔 특수한 독의 냄새를 쫓아 위치를 추적하면 그만이지."
"그거 예전에 천휘 네 몸에 묻혀 뒀다는 거 아냐? 전낭에도 묻혔다고?"
"설리향 네 말대로 한두 푼 들어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넉넉히 달라고는 했지만, 나와 당진천 사이의 넉넉함의 기준이 달랐는지 상상 이상의 금액을 여비로 받았잖은가. 그만큼 신경 써야지.
여기에는 동의하는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설리향. 그렇게 한참을 끄덕이던 그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으.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천휘."
"그럴 줄 알았다. 뭐지? 일단 말해 봐라."
"별건 아니고. 내가 그동안 외공을 등한시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내공 수련 쪽을 더 우선시했잖아?"
"그랬지."
대량의 기운을 다뤄야 하는 빙하진기의 특성상 빠르게 경지를 높이려다 보면 외공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다.
삼 년 사이에 설리향의 무위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아무래도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외공은 조금 부실한 편이고.
"여기까지 오느라 조금 피로가 쌓인 것 같거든? 운기행공을 해도, 잠을 푹 자도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한참을 우물쭈물대던 설리향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입가를 가리며 작게 속삭였다.
"매번 해주던 추궁과혈. 오랜만에 그거 좀 해주면 안 될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했더니. 내일 일찍 일어날 걸 생각하면 빨리 끝내야 하니 어서 들어와라."
"...응!"
대충 문을 닫으며 내 방으로 들어온 설리향. 그녀가 긴장이라도 한 듯 조금 뻣뻣한 움직임으로 내 침상에 엎드려 누웠다.
장소가 바뀐 탓일까. 아니면 설리향의 말대로 당가를 떠난 이후로 처음 하는 추궁과혈이기 때문일까.
새삼 예전과 달라진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기 좋게 솟아오른 엉덩이. 엎드리며 눌린 탓인지 살짝 옆으로 삐져나온 가슴. 그리고 윤기를 되찾은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삐져나오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까지.
키는 얼마 자라지 않았지만, 키를 제외한 부분은 삼 년 전과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마 앞으로 더 달라지겠지. 순음지체를 타고난 데다가, 음한계열의 무공까지 익혀 상당한 성취를 이루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음기는 설리향의 여성성을 극대화시킬 테니 당연한 일이다. 이전 생에도 마찬가지였고.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은은한 색기를 풍기는 설리향이 엎드린 채, 고개만 이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안 해?"
"재촉하지 않아도 이제 시작할 생각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리향의 하반신 쪽에 걸터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귀 전에 이미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였기에 휘둘릴 일은 없겠지.
흥분보다는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으로 설리향의 등에 손을 얹었다.
"흣?!"
아직 취기가 남아 있는 건지, 설리향에게서 약간의 술 냄새가 풍겨 왔다.
***
서문화린은 솔직히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음음. 조금 이상하긴 해도 다들 좋은 사람이었느니라."
당소월은 조금 술버릇이 귀찮긴 했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 그녀가 평소에 생각하던 정파 무인 그 자체였다.
설리향은 서문화린을 또래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하며 이것저것 챙겨주려 들었고.
천휘는 자신이 무어라 이야기하면 자꾸 표정이 이상해지거나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만, 명백히 이쪽을 배려해 주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에 하나같이 무공도 뛰어났다. 천휘의 기세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고, 그 나이에 완숙한 절정이라는 점은 좀 신경 쓰이지만....
본디 천재란 그런 법 아니겠는가. 서문화린 본인도 천재에 속하는 인물이라 이를 잘 알고 있다.
이런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겉모습만 어린 자신이 섞여 있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는 서문화린이었으나, 그보다 즐거움이 더 컸다.
복수에 바친 자신의 삶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있을 때면 자기도 모르게 히죽이고 있을 정도.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으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가진 술자리의 여운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던 서문화린은 결국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바람이나 쐬어야겠구나."
반로환동을 이룬 몸은 어려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껏 쌓은 무공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겉보기와 달리 튼튼하고 쉽게 지치지 않는 몸이니 하루 정도 밤을 새우더라도 문제없을 터.
그런 이유로 기척을 죽이고 조심조심 방을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으읏?!"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익숙했다.
"설마...?"
서문화린이 기세를 한층 희미하게 죽이고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먼저 올라가 쉬겠다던 천휘의 방. 누가 급하게 닫다가 실수라도 한 건지 문틈이 살짝 열려있었다.
꼴깍.
침을 삼킨 서문화린이 조심스레 문틈에 눈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같은 침상 위에서 천휘가 엎드린 설리향의 몸을 마구 주무르는 모습을...!
정혼자가 아닌 외간 여인의 몸을 희롱(?)하는 천휘와 이를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설리향의 모습에 서문화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에.
'...이건 역시 잘못됐느니라.'
하지만 이내 결론을 내린 서문화린이 문을 열고 둘을 말리려던 순간.
"쉿."
뒤에서 들려오는 당소월의 목소리.
눈앞의 상황에 너무 당황하기도 했고, 일부러 일류 수준에 맞춰 무위를 제한하기도 했으니 당소월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지금의 광경을 당소월에게 들켰다는 것.
조금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들이었던 일행의 내분을 직감한 서문화린이 몸을 벌벌 떨었지만.
정작 당소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문틈으로 안쪽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
도저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서문화린이 멍청히 눈만 깜빡이자 당소월이 조심스레 그녀를 뒤로 잡아끌기 시작했다.
마치 천휘와 설리향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뒤이어 귓가를 간질이는 작은 속삭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괜찮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들어가 쉬시지요."
"...?!"
'다 알면서... 놔뒀다고?'
얌전히 자기 방으로 돌아온 서문화린은 멍하니 침상에 누워 일행의 평가를 조정했다.
조금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지만 많이 이상한 사람들로.
[7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6] 76화. 무한 시
서문화린이 동행하고 며칠이 지났다. 부지런히 이동한 덕에 용봉지회가 열리기까지 제법 여유를 두고 무한 시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읏."
"?"
뭐가 문제인 건지 나와 거리가 좀 가까워지거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피하더라.
무슨 일 있었던 건가? 이동하는 동안은 별일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은근슬쩍 피하는 것이기에 따로 물어보기도 뭐하단 말이지.
애초에 서문화린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인지 기본적으로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는 여인이다.
그녀가 이렇게 반응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기껏해야 술 마시고 평소에 좋다고 생각한 설리향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거나, 뇌명보의 성취가 소성을 이뤘으니 축하해 준다고 직접 요리하려다 재료만 망쳤을 때라던가, 무인이라도 무공 이외의 것을 알아야 한다며 저잣거리의 조금 야한 잡서를 사 읽고는 한동안 맛이 갔을 때 정도 아닌가.
지금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용봉지회가 시작되기 전에 가까워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거리를 두되 꺼린다는 느낌은 아니니, 무언가 말을 하면 들어는 주겠지.
만약 용봉지회가 시작된 이후에 만났다면, 본선이 시작되기까지의 짧은 시간 안에 그녀를 설득해야 했을 터.
당연한 말이지만 서문화린은 나보다 훨씬 윗줄의 절대고수니 납치는 불가능하다.
"으음."
"갑자기 혼자 왜 끄덕이는 거야 천휘?"
"으으음...."
수틀려도 납치라는 강수를 둘 수 없다는 생각에 고민이 깊어졌다...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기에 그냥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짓는 강아지라도 본 것처럼 해괴하게 바라보던 설리향이었으나, 이어진 당소월의 말에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향이는 뭘 모르네요. 지금 천 소협은 사람이 많을 건 알고 있었지만, 정작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이니까 불편해서 그런 거랍니다."
"네? 알고 있는데 왜 불편해요?"
눈을 끔뻑이는 설리향의 말에 당소월이 장난스레 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야 천 소협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곁에 다가오기만 해도 경계하잖습니까. 이만한 인파 사이를 지나기만 해도 상당한 심력 소모가 있겠지요."
"정말이야 천휘?"
"...."
완전한 헛다리다. 내 영역에 들어오는 이를 자연스레 의식하는 것뿐이고, 이 정도는 조심성 많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물론, 내게 회귀 전의 깨달음이 남아있고 지금의 몸뚱이 또한 완숙한 절정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아무튼 숨 쉬듯 자연스레 하는 행위에 지칠 리 없잖은가.
다만, 딱 좋은 변명 거리라는 것은 사실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맞는 말이다."
"너도 참 귀찮게 사는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설리향과, 정답을 맞혀 기쁜지 히히 웃으며 내 옆에 가까이 달라붙는 당소월.
그리고 사실 영역 안의 사람을 인식하는 게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차마 지금 분위기에 말할 수 없어 작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서문화린까지.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하기 때문일까.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집중되기 시작한다.
아마 이곳이 사파의 영역이었다면 지금쯤 한 번 정도는 시비가 걸렸겠지.
하지만 여긴 무려 무림맹의 본단이 위치한 무한 시다. 거기에 지금은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정파의 후기지수와, 세 끼 식사보다 무림의 일이 재밌는 호사가들이 모여있는 상황 아닌가.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긴 했으나, 이어지는 반응은 그러한 내 예상조차 벗어난 것이었다.
"...놀랍구먼. 아직 스물다섯조차 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절정의 경지라니."
"당가의 여식이 기재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형."
"몇 년 전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적이 있다 들었는데, 그 이후로 절차탁마한 모양이구나."
"저희도 열심히 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사형!"
분명 처음에는 외모에 끌려 시선을 두었건만, 마지막에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의욕을 다지는 사형제라거나.
"허어. 하나같이 쟁쟁한 이들 같다만, 누군지 전혀 모르겠네. 자네는 저들의 별호를 아나?"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나. 당가의 여식이고, 뛰어난 실력에도 두문불출하여 별호가 아직 주어지지 않은 이는 하나뿐이거늘."
"과연! 허면 주변의 셋도 비슷한 경우라고 봐야겠어."
"글쎄. 같은 당가의 옷을 입은 둘이야 그럴지 모르겠지만, 혼자 다른 복식을 한 저 작은 소저는 여행길에 합류했을지도 모르지."
"자네 말도 맞네. 그나저나 머리색이 특이하구먼. 당가의 여식이 녹색으로 물든 것이야 독공의 영향이겠지만...."
"하얀색이라. 설마 저 어린 나이에 자연스레 머리가 세었을 리는 없으니, 음한계열 무공을 익힌 게 아닐까 싶군."
"세상에! 실제로 빙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린가?!"
"그거야 모르지. 다만, 확실한 건 봉(鳳)은 몰라도 꽃이 늘어나는 건 확실할 것 같네."
"동의하네. 그럼 이제 무림삼화(武林三花)가 아니라 무림오화(武林五花)가 되는 게로군!"
무슨 무공을 쓸지, 어떤 별호가 붙을지 벌써부터 기대하는 성격 급한 호사가들이라거나.
"앗!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아무런 소식이 없어 조금 걱정되지 뭡니까."
우연히 주변을 돌아다니던 종남파의 진백이라든가.
"...네가 여기 왜 있나?"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천 형. 당연히 용봉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잠깐, 방금 나를 뭐라고 불렀지?"
"예? 그야 천 형이라 불렀습니다만."
"우리 나이는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만."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제가 천 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것만으로도 형님처럼 모실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형님인가...."
회귀 전의 목숨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베풀었던 것을 이렇게나 고마워할 줄은 몰랐다.
이제 보니 지난 삼 년간 열심히 수련했는지 무위도 일류 초입은 벗어난 것 같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이류 수준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전 생에 보여 준 바로는 다소 애매한 재능을 타고났다는 점, 마지막으로 아직 어린 나이임을 감안했을 때 이 정도면 종남파 같은 거대 문파에서도 수재 취급 받기엔 충분하리라.
그리 생각하면 이런 반응도 어느 정도는 이해되네. 진백이 다른 건 몰라도 됨됨이는 괜찮은 녀석이니까.
정사연합이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서로 감정의 골이 남아 있을 때도 한결같이 이쪽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심지어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진원진기를 불태워 활로를 열어 주기까지 했다.
정작 나는 목숨값으로 대신 짊어진 복수를 다하지 못했지만....
복잡함과 뿌듯함이 반쯤 섞인 심정으로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 편한 대로 불러라. 대신 나는 그리 살가운 인간이 아니라 동생이라 불러주지는 못하겠다만."
"하하! 저도 천 형에게 살갑게 아우 소리를 들으면 어색할 것 같으니 오히려 이쪽이 마음 편합니다."
제법 호탕하게 웃는 녀석. 이전에 봤을 때는 아직 아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지금은 회귀 전의 모습에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나저나 천 형. 일행분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 소저 말고는 전부 초면인 분들이군요."
"안 될 것 없지. 이쪽은 진백. 나와 당소월이 잠시 종남파에 머무를 때 연을 맺은 녀석이다."
간단히 설명하자, 포권을 취하며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나누는 설리향과 서문화린.
이후에는 간단한 잡담을 나누거나 근황을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화상단에서 운영한다는 객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우리가 머무를 곳이다."
"...엄청 화려한 곳 같은데,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까?"
"자리야 만들어 주겠지. 정 여유가 없으면 다른 곳을 안내해 줄 수도 있을 테고."
품에서 추정산에게 받은 서신을 꺼내 흔들자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진백.
"아하! 저희 종남파는 일찍 도착한 편이었음에도 객잔을 구하기 어려워 조금 걱정되어 말씀드린 것인데... 이미 다른 분께 소개받은 것이라면 안심입니다!"
"그 정도인가?"
"아시다시피 이번 용봉지회는 소림사에서 우승 상품을 걸지 않았습니까. 다른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영약도 훌륭하긴 합니다만...."
"대환단은 그중에서도 격이 다르지. 과연. 그래서 더 많은 참가자가 몰렸다는 건가."
"맞습니다. 거기에 더해 사람이 몰라니, 그들로부터 돈을 벌고자 하는 이들까지 몰려 저번 용봉지회 때보다 북적거린다더군요."
같이 온 사형에게 들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진백.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걸어가면 보이는 명원객잔에 머무르고 있으니, 심심하면 놀러 오셔도 됩니다."
"뭘 놀러 가기까지 하나. 우선은 용봉지회에 집중하고, 다 끝나면 그때 식사나 같이하지."
"오! 그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용봉지회에 집중해야죠. 솔직히 천 형이 참가하는 만큼 우승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욕에 찬 얼굴로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진백.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소월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누구랑은 다르게 참 저 나이대에 맞는 활기찬 분이시네요."
"그 누구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무림삼화를 무림오화로 만들 정도로 예쁜 데다가 무공도 뛰어난 정혼자가 있을 것 같군."
자연스레 대꾸하자 기분 좋음과 어이없음을 번갈아 표정으로 표현하는 당소월.
그 괴상하다면 괴상한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고 있자니, 설리향이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앞장섰다.
"더 이야기하면 옆에서 듣는 것도 힘들어질 것 같으니 어서 들어가죠! 린아 너도 이리 오고."
"으응. 알겠느니라...."
이쪽의 눈치를 보면서도 순순히 설리향을 따라가는 서문화린.
아직 터지지 않은 폭약이라도 본 것처럼 조마조마한 표정이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마냥 길바닥에 서 있을 수도 없는 것은 사실.
당소월과 한차례 시선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헛웃음을 지으며 앞서나간 둘을 따라 금화객잔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자리가 없다며 난색을 표하던 객잔주였으나, 추정산의 서신을 읽어 보고는 태도를 바꿔 급한 귀빈을 위해 항상 비워 두는 방을 내어주더라.
듣자하니 금화상단이 다른 사업은 죄다 망했지만, 표국 일과 객잔만큼은 잘 되는 중이라나.
그만큼 시설은 좋았다. 애초에 귀빈을 위한 방이라니 당연한 일이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넓다 한들 방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려나.
객잔주에게 부탁해 따로 이부자리만 챙겨 와 적당한 구석에 깔았다. 그리고는 짐짓 단호한 어조로 선을 그었다.
"여길 넘어오지 마라."
"...예?"
"???"
"우리에게 하는 말이느냐?"
어이없어하는 셋의 반응.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7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7] 77화. 무한 시 (2)
제법 넉넉한 여유를 두고 도착한 무한 시. 객잔에 방까지 얻었으니, 이제 용봉지회의 예선이 시작될 때까지 평소처럼 수련에 집중하며 몸을 관리하면 될 줄 알았다.
용봉지회가 단순한 비무 대회가 아니라 친목의 장이기도 하다는 뜻을 알아챈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지만.
"더는 못 한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지 않나.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군. 대체 어떻게 오대세가는 오대세가라는 이름을 지키는 거지? 이래서야 무공에 집중하지 못하지 않나."
"뭐어. 강한 개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변과의 원만한 관계도 중요한 법이지요."
그래도 무한 시에 도착한 처음 며칠을 제외한 이후로 매일 같이 손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지.
"아무튼 난 못한다. 더는 못해. 아무리 내가 정혼자라지만, 모든 모임에 동석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앞으로 세 번 중 한번은 쉬어야겠다."
"지쳐도 세 번 중 두 번은 나가 주시는 거군요...."
서운해 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말에 지금까지의 서운함이 사르르 풀려 버렸지만.
"그래도 이제 복잡한 일은 전부 끝났답니다. 남은 건 진짜 친한 친구들 몇 명과 인사하는 정도인데, 그거야 예선이 끝난 뒤에 천천히 해도 될 일이지요."
"정말인가?"
"예에. 그러니 오늘은 하루 종일 저랑 대련이라도 할까요?"
"좋지. 그럼 바로 내려가지."
곧장 검을 챙겨 들고 객잔 뒤편의 공터로 향하려 하자, 당소월이 키득이며 따라 일어섰다.
"소협은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네요."
"흥. 인정할 수 없는 말이군."
"심각한 무공 중독이잖습니까."
"내가 무공 중독인지 아닌지는 비무로 정하지."
"...."
생각해 보면 당소월과의 대련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지. 당소월이 절정에 오른 뒤에는 아예 처음인가.
만류귀원신공 자체는 회귀 전에 몇 번 보았지만, 그때는 너무 수준이 높아 제대로 보이는 것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배울 점이 제법 많을 터.
"하루 종일 하자고 한 것은 내가 아닌 당소월 너이니,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대련 말씀하시는 거 맞지요?!"
기겁한 당소월의 손을 잡고 반쯤 끌고 가듯 내려갔다.
이후 엉망진창으로 대련했다.
***
"만족스러운 하루였군."
"소협 혼자 만족스러운 것 아닌지요...?"
대련 중 흘린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간단히 씻고 돌아오자, 먼저 씻고 돌아온 당소월이 침상 위에 축 늘어진 자세로 그리 말했다.
옆에 있던 설리향이 그런 당소월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는데, 아마 가볍게 한기를 끌어 올려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겠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신기하면서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서문화린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코흠. 그나저나 무슨 일로 이리 한곳에 불러 모은 게냐?"
"으음. 사실 별건 아니고 예선이 시작될 시기도 가까워졌으니 용봉지회의 일정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침상의 끄트머리에 앉으며 그리 말하자, 당소월을 식혀주는 데 여념이 없던 설리향이 눈을 부릅뜨고 남는 팔을 휘적인다.
"야! 당 언니는 또 왜 이렇게 괴롭혔어!"
"괴롭히다니, 어폐가 있군. 난 그저 대련에 진지하게 임했을 뿐이다."
"그게 그거지! 그리고 네 이부자리에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면서 여긴 뭘 그리 자연스레 앉아?"
"서서 말할 수는 없잖나. 됐으니까 잠깐 비켜봐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뭐? 천휘 너 설마 당 언니한테도...!"
혼자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얼굴을 붉힌 설리향을 옆으로 밀어내고는 당소월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어서 당소월의 머리를 내 다리에 얹어 베개 삼아 눕히고는 갈 곳을 잃은 설리향의 손을 다시 올려두었다.
이걸로 당소월은 베개가 생겨서 편하고, 설리향은 여전히 당소월을 식혀 줄 수 있어서 좋고, 나는 설리향에게서 은은하게 뿜어지는 한기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만족스러우니.
가히 이 자리의 모두가 이득을 보는 절묘한 한 수라 할 수 있으리라.
딱 한 명. 서문화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눈치를 보다가 은근슬쩍 당소월의 소맷자락을 붙잡는 모습이 아주 조금 안쓰럽더라.
"그럼 이제 용봉지회의 예선에 관해서 말이다만...."
"아, 그 전에 오늘치 학... 차는 마셔야지요."
학령초가 귀한 독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서문화린 앞에서 일부러 차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당소월.
씻고 돌아오자마자 준비한 것인지 미리 물이 따라져 있는 잔에 새끼손가락의 끄트머리를 넣고 휘젓는 당소월.
한 바퀴 두 바퀴 손가락이 돌 때마다 투명했던 물이 옅은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적당한 농도가 되자, 그대로 이를 설리향에게 넘기는 당소월.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설리향이 잔의 표면을 감싸더니, 그대로 내공을 끌어올려 내용물에 한기를 불어넣는다.
"얍!"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살얼음이 낄 정도로 차가워진 차.
그사이에 서리가 낀 잔을 받아들며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건 언제쯤 끝나는 건가?"
"글쎄요? 이제 절반 농도까지는 버티실 수 있으니 앞으로 삼사 년이면 완벽한 내성이 생기지 않을까요?"
"도합 칠 년이라니. 길군."
"어중간한 독도 아니고 당가의 독에도 통하는 내성이 생기는 것이니 차 몇 잔 마시고 칠 년이면 싸게 먹히는 것이지요."
"한가지 정정하지. 끔찍한 맛의 차다."
"그래도 차갑게 해서 드시면 맛이 덜 느껴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쭈욱 들이키시지요."
"...알겠다."
사약이라도 삼키는 심정으로 단번에 마셨다.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는 맛에 미간을 와락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용봉지회의 예선 말이다만,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저는 당연히 알고 있답니다."
"난 두 종류가 있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뭔지는 몰라."
"이 몸은 아예 모르네. 그냥 참가자들끼리 대련하는 것 아닌가?"
독차가 담겨 있던 잔을 유심히 바라보던 서문화린이 눈을 끔뻑이며 그리 말했다.
하긴. 무작정 용봉지회에 참가하려 온 거니 잘 모를 수도 있겠지. 사실 그럴까 봐 말을 꺼낸 거긴 하다.
...서문화린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낼 생각이기도 하고.
다행히 이전 생에 서문화린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지난 용봉지회까지 참가했던 형님... 당청에게 물어본 것이 있기도 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야겠군. 예선은 총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편한 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하나는 서문화린이 말한 것처럼 무림맹의 무사와 비무를 치르는 것이다.
당연히 꼭 이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예선을 통과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보여 주는 것.
경지의 고하나 내공을 얼마나 쌓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얼마나 잘 싸우는지만을 평가하는 시험이지.
보통 대단한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삼류 문파나 낭인이나 표사 출신 무인들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현철 덩어리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현철 덩어리를 말이느냐?"
"맞다. 앞선 대련과 달리 이건 경지나 내공이 중요한 방법이다."
한철도 아니고 현철 정도라면 검기로 충분히 파고들 수 있다. 워낙 두꺼운 덩어리니 완전히 베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눈에 보이는 깊은 상처를 새기기엔 충분하리라.
꼭 절정에 이른 것이 아니더라도 일류쯤 되면 신체와 병장기에 내공을 불어넣어 강화시키는 어기충검(御氣充劒)의 수법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터.
어지간한 명검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강철보다 훨씬 무겁고 튼튼한 현철 덩어리에 상흔을 새기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즉, 어기충검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 그리고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내공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현철 덩어리에 생기는 상처의 깊이가 달라진다는 소리다.
기감이 아닌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으니, 여러 사람의 능력을 빠르게 판단해야 하는 예선에 가장 걸맞는 방식이겠지.
덤으로 자신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래서 하는 말이다. 후자는 시험 속도도 빠르고 간단하니, 나와 당소월은 현철에 베고 올 생각이다만... 설리향과 서린 너는 경우가 다르지 않나."
"으음. 그렇긴 해."
"앗, 읏, 엣, 코흠. 이 몸도 그러하니라!"
어찌어찌 일류 중입까지 경지를 끌어올렸으나, 워낙 축기에 들인 시간이 부족하고, 음한지기가 풍부한 환경이나 영약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라 내공량에는 자신이 없는 설리향.
그리고 그냥 화경의 절대고수면서 자신을 일류 중입 수준으로 속이느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서문화린이 각자의 방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겠나? 전자는 어느 정도 실력을 내비쳐야 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대신 좀 더 빠른 단계에서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거다."
"후자는 실력을 숨길 수 있지만, 합격하기가 좀 더 어렵다는 소리지? 나는 그냥 무림맹의 무사랑 대련하는 방향으로 가야겠네. 솔직히 반의반 갑자도 안 되는 내공으로 현철을 어쩌지는 못할 것 같아."
"설리향 네 무공은 한 번에 큰 힘을 쏟아낼 수 있을 테니... 아, 그런가. 숨기려는 쪽은 그쪽인가."
"응.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숨겨야 하는 거라며?"
"향이가 잘 기억하고 있네요. 잘했답니다."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린 채, 방긋 웃으며 설리향을 향해 손을 뻗는 당소월.
이에 설리향이 잠시 망설이다 머리를 들이밀자, 당소월이 이를 슥슥 쓰다듬는다.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하다 서문화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린 너는 어찌하겠나? 네 정확한 무위는 모르나 일류 중입이라면 현철을 두드려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만."
"이 몸은...."
실력을 어디까지 보여야 하나, 적당한 정파의 후기지수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서문화린.
회귀 전의 그녀는 예선부터 비무로 참가하여 약간의 화제를 일으켰고, 그 탓에 흥미를 가진 무림맹주에게 바로 들켰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조건 예선에서 눈에 띄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도중부터 서문화린이 자꾸 나를 피하는 바람에 그만큼 강권할 정도로 친해지지 못했다.
그러니 한마디 덧붙이기로 했다.
"듣자 하니 이번 용봉지회는 생각보다 규모가 커져서인지 본선 초반부터 무림맹주가 직접 참가자들을 격려한다고 들었다. 만약 예선에서부터 좋은 실력을 보여 준다면 그만큼 더 주목받을 수 있겠지."
"...무림맹주가 직접 말이느냐?"
"맞다. 만일 무림맹에 입단하거나, 다른 가문이나 문파에 의탁하고자 한다면 예선을 비무로 치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
이 정도 말했으면 서문화린도 대충 알아들었을 거다.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하던 적당한 한두 번 이기고 떨어진다는 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서문화린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용봉지회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은 포기하고 차근차근 후기지수로서의 명성을 쌓거나.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용봉지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바로 정파인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거나.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의 하얀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서문화린을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리는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
서문화린이 불안과 설렘이 뒤섞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은 리향이와 함께 비무로 도전하도록 하겠느니라."
"...그런가."
이렇게 된 이상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겠다.
[7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8] 78화. 예선
용봉지회의 예선이 시작됐다.
나와 당소월이야 적당한 수준의 검기로 현철 덩어리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그걸로 끝.
이제 남은 것은 설리향과 서문화린의 비무가 끝나길 기다리는 것뿐.
"생각보다 금방 끝났는데 어찌하시겠나요, 천 소협?"
"비무 쪽에는 사람이 많이 몰렸으니, 설리향이나 서린의 차례는 아직일지도 모르겠군. 이대로 우리끼리 객잔에 돌아가는 것도 정 없는 짓이니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건 어떤가."
"겸사겸사 예선 참가자들의 비무를 구경하기도 하고요?"
"뭐, 겸사겸사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잠시 당소월과 함께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무림맹의 연무장.
애초부터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상상 이상으로 넓은 공간.
이를 몇 군데로 나누어 동시에 여러 참가자가 무림맹의 무사와 비무를 하는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그보다도 선명한 환호와 실망에 찬 한숨.
이 짧은 시간 안에 벌써 몇 번이나 갈린 희비를 적당히 흘려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예선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수준은 조금 떨어지는군. 대신 다양한 무공이 보이는 것은 즐겁... 음?"
"향이랑 서 소저가 안 보이네요.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찾기 힘든...."
나와 당소월이 한차례 서로를 바라보고는 슬쩍 말을 바꿨다.
"그렇군. 사람이 많으니 찾기도 쉽지 않겠어."
"예에. 그 깊이는 둘째치고 이렇게나 다양한 무공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분명 귀한 경험이겠지요."
"...."
"...."
이번에도 엇갈린 대답에 서로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차분히 둘러보겠나?"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요. 향이도 서 소저도 눈에 잘 띄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랍니다."
설리향은 순음지체의 영향으로 미모에 물이 오르는 것은 물론, 무의식적으로 색기를 흘리기도 하고.
서문화린의 경우는 말해 무엇하나. 그렇게나 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 있으니, 한번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으리라.
다음 참가자와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하러 온 호사가들 사이를 돌아다니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너무 북적북적한 나머지 쉽게 만나지 못하자 결국 당소월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손짓했다.
"천 소협. 천 소협.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실런지요?"
"뭔데 그러나?"
"바로 천 소협이 제게 목마를 태워 주는 거랍니다."
"???"
갑작스런 제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는 내게 당소월이 키득이며 나름의 이유를 덧붙였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더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향이나 서 소저 쪽에서도 저희를 바로 발견할 수 있을 테지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저는 언제나 진심이랍니다?"
"하! 좋다. 나중에 부끄럽다고 내려 달라고 해도 안 내려 줄 테니 그리 알아 둬라."
"흐응. 그건 제가 할 말이지요. 소협은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태연자약한 태도로 턱을 까딱이는 당소월. 그 도발적인 모습에 울컥하여, 바로 쪼그려 앉으며 자세를 낮췄다.
"어디 한번 올라타 보...."
"에잇."
내가 몸을 숙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깨 위로 올라타는 당소월.
얼굴 양옆을 감싸는 듯한 허벅지의 압박감과 따스한 체온. 그리고 확 풍겨오는 특유의 체향.
농담일 줄 알았는데 진짜로 목마를 탄 당소월의 대담함에 몸이 굳은 사이. 우리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도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다 큰 여인을 목마 태우는 일이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당가의 무복을 보고 입을 다물었을 뿐, 아마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건 저들도 마찬가지겠지.
다만, 기껏 올라탔더니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내가 불만스러운 걸까.
당소월이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통통 두드리며 속삭였다.
"뭐 하시나요, 천 소협.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이래서야 서 있을 때와 다를 게 없잖습니까."
"...."
"아니면 설마... 그렇게까지 말씀하셔 놓고 정작 때가 되니 뒤로 빼시는 건가요? 설마 그런 겁쟁이는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나무 가벼워 올라탄 줄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아부 섞인 허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허벅지를 더욱 강하게 억죄고, 내 머리카락을 잡으며 균형을 유지하는 당소월,
"머리는 좀 놔라. 생각보다 아프니까."
한숨을 내쉬며 당소월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제야 내 허벅지에서 힘을 풀고 머리카락을 놔주는 당소월.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말없이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돈해 주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이쪽을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는 이들만 보였지만, 위에서는 다른 게 보이긴 하겠지.
...당진천이 본선 시작 날짜에 맞춰 천천히 도착한다고 했던가. 다행인 일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주변을 돌아다니던 것도 잠시.
"아! 찾았어요! 마침 시작하려나 보네요!"
반가움으로 확 밝아진 당소월이 옆쪽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무슨 달려오는 마차라도 본 것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는 사람들.
자꾸만 달아오르려는 얼굴에 억지로 뻔뻔함을 두르는 사이. 정작 당소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여기!"
"느읏?!"
그 모습을 본 서문화린이 기겁하며 필사적으로 이쪽을 모른 체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봐야 이미 우리 일행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을 것 같지만.
결국 얼굴을 붉힌 채로 비무를 준비하는 서문화린. 그녀의 상대를 맡은 무림맹의 무사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당가와 깊은 인연이 있나 보오?"
"우, 우연히 오는 길에 만나 동행했을 뿐이니라."
"쉽게 친해지는 것은 젊은이들의 특권이지. 나도 옛날에는 그랬었지."
과거를 회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심사관. 물론, 실제 나이는 전혀 젊지 않은 서문화린에겐 오히려 역효과만 나는 것 같았지만.
"...비무는 언제 시작하는 게냐?"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가능하오."
고개를 끄덕인 심사관이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등에 메고 있던 창을 꺼내 들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반듯한 각도로 들어 올린 창. 오래된 나무처럼 묵직하여 흔들림 없는 자세는 그가 무(武)에 매진한 시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비록 재능이 부족하여 나이가 불혹에 가까워지도록 절정의 벽을 뚫지는 못했으나, 일류의 끝자락에 선 노련한 무인이다.
용봉지회에 참가하는 어중이떠중이를 평가하기에는 차고도 넘칠 터.
하지만 그의 상대는 아쉽게도 정체를 숨긴 노괴... 아니, 꿈을 늦은 나이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화경의 무인이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서문화린이 아니라 서린이라는 무인의 존재를 알리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 빨리 끝내고 싶은 걸까.
서문화린이 자신의 실력을 조금 많이 선보였다.
파밧!
폭발적인 속도로 뛰쳐나가는 서문화린. 그녀가 내게 전수해 준 보법과 비슷하지만 다른... 아마 변형되지 않은 원본의 뇌명보가 펼쳐졌다.
쾅!
"무, 슨?!"
내공을 일류 수준으로 제한했음에도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
아니, 속도 자체는 빠르지만 어디까지나 일류 수준에서 빠르다는 것이니 놀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려치는 것처럼 급격하게 이루어진 가속이 진짜 무서운 점이었지만.
그전까지는 단순히 내공을 때려 박아, 조금 무리해서라도 순간적으로 빠른 속도를 내는 무공 정도로 생각했는데....
일전에 귀영신투에게 무공의 이름을 듣고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방금 펼쳐진 서문화린의 뇌명보는 내 보법과 그 근본이 같다. 다만, 내게는 맞지 않는 방식이더라.
빠르고, 화려하며, 강렬하다. 대단한 무공인 동시에 사용하는 무인을 뽐내는 것 같은 무공.
그중 화려함은 나와 전혀 맞지 않는 묘리를 머금고 있었다. 분명 그래서 내게 전수할 때는 변형을 거친 것이리라.
실제로 내가 익힌 뇌명보의 아류는 그저 빠르고 강렬할 뿐이기도 하고.
뭐어. 상승의 무공인 만큼 단순한 허세나 멋을 위한 화려함은 아니겠지.
화려함이란 곧 시야를 현혹한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환(幻)이나 변(變)의 묘리가 들어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직선적인 움직임.
허면 서문화린의 뇌명보에 담긴 화려함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흐읍!"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창을 찔러오는 심사관.
하지만 놀란 심사관의 자세는 이미 흐트러져있었고, 급하게 내지른 창끝은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고 있었다.
"아."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화려함은 곧 압박감이 되어 심사관으로 하여금 성급한 한 수를 내지르게 만들었음을.
젊은 시절의 서문화린이 걸었던 복수의 길을 생각하면 상대를 압박하는 패(覇)의 묘리가 담겨있다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설프게 내지른 심사관의 창을 고개를 살짝 까딱이는 것으로 피해낸 서문화린이 그대로 간격을 좁혔다.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서문화린을 향해 심사관이 다급히 창대를 휘둘렀지만... 그보다 서문화린의 금나수법이 더 빨랐다.
부드럽게 파고든 작은 손가락이 한 손으로는 심사관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창을 쥐고 있던 손목을 비틀어 잡아 그대로 떨어뜨린다.
순식간에 무게 균형이 무너진 심사관의 종아리를 가볍게 걷어차는 서문화린.
툭.
"엇."
심사관이 그대로 비틀거리더니 툭 하고 넘어진다.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
반대로 뿌듯해야 할 서문화린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경황이 없어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실력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을.
와아아아-!
지금껏 들려온 것 중에 가장 큰 환호. 구경하는 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참가자들 또한 감탄한 기색이 역력하다.
"와아! 천 소협! 방금 보셨나요? 서 소저가 단번에 심사관을 제압한 거요! 실력이 부족한 분은 절대 아닌데 한 번에 넘어뜨리시다니... 서 소저가 자신의 사문을 비밀로 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분명 일인전승의 신비문파 같은 곳이겠지요?"
"...뭐, 비슷하지 않겠나."
서문세가가 멸문당하고, 유출된 무공을 익힌 사파 놈들도 서문화린의 손에 멸문당했으니.
이 중원에 서문세가의 무공을 제대로 익힌 것은 서문화린 하나뿐일 거다. 잘 쳐주면 보법을 익힌 나도 포함되는 거고.
멸문한 지 오래되어 아는 사람이 얼마 없고, 생존자가 서문화린뿐이라 익힌 이가 한 명밖에 없다면 그게 신비문파고 일인전승 아니겠는가.
머쓱하게 떨어진 창을 주워주는 서문화린과, 얼떨떨하게 이를 받아 든 심사관.
그가 잠시 자신의 창과 서문화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합격! 다음 참가자는 나오시오!"
"네, 넵!"
잔뜩 긴장한 설리향이 삐걱이는 움직임으로 심사관의 앞에 섰다.
[7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79] 79화. 예선 (2)
잔뜩 긴장한 설리향이 삐걱이는 움직임으로 심사관 앞에 섰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랑 하는 비무는, 그것도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 서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설리향의 실력이라면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는데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이번에도 당소월이 내 어깨에 올라탄 채로 손을 크게 흔들었다.
"향아!"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을 뿐.
반사적으로 돌아본 설리향이 당소월의 얼굴을 보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얼굴을 푹 숙인 채, 어느새 옆자리까지 다가온 서문화린을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렇게 반응해 줘도 되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부끄럽나?"
"...사실 지금도 많이 부끄러우니 잠시 모른 척해주면 하느니라."
"이런. 그간 우리가 조금은 친해진 줄 알았건만, 내 착각이었나 보군."
"치, 친분의 문제가 아니니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참겠다는 듯 볼을 한껏 부풀렸다가 금세 바람을 빼내는 서문화린.
겨우 이 정도로도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만약 본선에 올라 수많은 사람 앞에서 무림맹주에게 정체를 까발려졌을 때는 어땠을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자니, 평정을 되찾은 설리향이 심사관 앞에서 포권을 취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으음! 그나저나 소저도 일행인가 보오?"
"하나같이 제게는 과분한 이들이죠."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자세를 잡는 둘.
심사관이 지치면 다른 사람과 교대하는 것 같던데, 서문화린 상대로는 뭘 해볼 틈도 없이 끝나서인지 이대로 가려는 모양이네.
같은 일류지만, 심사관은 일류에 오르니 족히 십 년은 넘었을 노련한 무인이다. 아마 실전 경험은 풍부하겠지.
반면 설리향은 짧은 시간 동안 일단 경지부터 올리고 본 경우고, 실전은커녕 당가 바깥의 사람과 치르는 비무가 이번이 처음이리라.
일반적으로는 설리향이 지극히 불리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한다.
분명 설리향은 무공을 익힌 지 삼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잘 다루는 병장기인 채찍도 일류라는 경지에 걸맞은 수준으로 다루느냐면 그 정도는 아니고.
허나, 내공을 다루는 재능만큼은 내가 아는 다른 천재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 설리향이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된 심법을, 그것도 음한지기 그 자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빙하진기를 익힌 것이다. 이 정도 격차라면 제법 해볼 만하리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서문화린에게서 잠시 신경을 끄고 설리향 쪽에 집중했다.
꺼내든 채찍을 길게 늘어뜨린 설리향이 반보 앞으로 나서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흡!"
팔까지 채찍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낭창낭창하게 물결치는 움직임. 이는 그대로 채찍의 끝부분으로 전해진다.
쐐애액!
분명 처음에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파도가 급격히 거세지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심사관을 향해 날아드는 채찍.
꽤 괜찮은 일격. 다만, 노련한 무인을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분하게 창을 뻗어 그대로 채찍에 가져다 댄다.
파팟!
순식간에 창대를 휘감는 채찍. 동시에 그 힘에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회전하는 창끝.
창술의 기본이 되는 란나찰(攔拿扎) 중 란의 기예를 능숙하게 선보인 심사관이 팔을 바깥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안 그래도 창이 회전하며 설리향의 의도 이상의 채찍을 휘어 감은 상태에서 팔을 크게 휘두르면 어찌 되겠는가.
"읏!"
잡아끌려다 되려 잡아끌린 설리향의 몸이 주춤거리며 흔들린다.
채찍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남녀의 차이는 물론이요 외공 수련의 차이도 심한 둘의 힘겨루기는 그 결과가 뻔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찍을 놓치거나, 채찍과 함께 자세가 완전히 무너지겠지.
실전도 아닌 비무니 그 정도면 승부가 났다고 봐야 한다.
첫 일격이 꽤 매서웠기에 이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설리향이 그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었다면 삼 년 만에 일류 중입에 오르지도 못했고, 본선도 아닌 예선에 이렇게 잔뜩 긴장하며 나섰을 리 없잖은가.
당황한 척하던 설리향의 눈동자에서 서늘한 빛이 반짝인다.
이번에는 심사관이 당황할 차례였다. 당연히 이는 연기가 아닌 진짜 놀란 것이다.
"빙공...!"
눈을 크게 뜨며 창을 고쳐잡는 심사관. 어느새 설리향의 채찍은 물론, 이를 단단히 휘어 감은 창대까지 새하얀 서리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맞닿은 무기를 통해 전해지는 빙한지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사관의 손까지 닿을 터.
그리 놔주지는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문 심사관이 내공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별히 모난 곳 없는 정파의 내공으로는 송곳처럼 음기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설리향의 음한지기를 막아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설리향의 배는 될 법한 내공을 쏟아부어 그대로 음한지기를 몰아내고 채찍을 떨쳐 내는 것뿐.
어찌나 내공을 집중시켰는지 그녀의 옷자락이 절로 펄럭이고, 창대는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 비무를 마지막으로 다른 심사관과 교대할 생각까지 한 모양.
그렇게 아낌없이 내공을 집중시키던 도중이었기 때문일까. 심사관은 설리향의 입이 열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
노래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저 듣기 좋은 목소리를 길게 뽑아냈을 뿐인 단순한 발성이지.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설리향의 내공은 목소리와 함께 심사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한창 창에 기운을 불어넣느라 정작 체내를 순환 중인 내공은 얼마 되지 않는 심사관. 그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빳빳하게 굳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면 창대를 타고 흘러들어온 음한지기에 당하거나, 소리와 함께 체내로 파고든 음한지기에 내상을 입을 상황.
결국 그는 제 손으로 창을 놓고는, 남은 내공을 전부 전신으로 돌려 슬금슬금 파고드는 한기를 몰아냈다.
그리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비무는 여기까지일세. 내가 졌군."
"앗."
"이거 개안한 기분이구먼. 열양공이나 음한공이 왜 그리 위협적이라는지 덕분에 잘 알게 됐네."
"가, 감사합니다!"
비무가 끝나자마자 조금 전의 서릿발 풀풀 날리는 차가운 표정을 풀고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는 설리향.
그녀가 고개를 들자마자 이쪽을 향해 쪼르르 달려오더니 그대로 나와 당소월 앞에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당 언니! 당 언니...!"
뭐라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오는 모양.
이에 당소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했어, 향아."
"...네!"
"한창 가슴 벅차 보이는 와중에 미안하다만, 그런 이야기는 내 어깨에서 내려오고 하면 안 되겠나?"
"소협은 정말 분위기를 못 읽으시네요. 여기서는 일단 향이한테 잘했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셔야지요."
"맞아, 맞아. 빨리 나를 칭찬해. 어서 대단하다고, 잘했다고 하란 말이야!"
"...."
이게 내가 잘못한 건가 싶어 서문화린을 바라보았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이기 바쁘더라.
결국 한차례 깊게 심호흡하고서야 설리향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그래. 잘했다."
"성의가 없어! 다시 해 줘!"
"...날아오는 채찍을 보면 그대로 베어내려 들고, 가능하다 싶으면 역으로 무기에 휘감아 상대의 손에서 빼앗는 것이 정석이지. 이를 역이용하여 음한지기를 불어넣은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
"조금 더!"
"자신의 실력을 일부 감추어,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 내는 것은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초 중 하나지. 오늘 너는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한 명의 무인이었다."
"오오! 그거 말고는?!"
"...."
장난스런 눈빛을 반짝이는 설리향. 그녀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당소월을 목마 태운 채로 그대로 뒤를 돌자, 그녀가 다급히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천 소협? 진짜로 이러고 객잔까지 가실 생각은 아니지요...?"
"천휘? 야! 많이는 아니고 딱 한 번만 더 해 주면 되는데? 진짜 가?"
"...."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질 것이 뻔한 싸움은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 주의였기에.
***
그렇게 돌아온 금화객잔. 나와 당소월의 기이한 모습 때문에 약간의 소문이 도는 것 같긴 하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들 예선을 통과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본선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것뿐.
서문화린만큼은 아니지만, 사실 나도 용봉지회에 품은 기대가 크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다양한 무공을 견식할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이 내게 생소한 정파의 무공 아닌가.
여러 무공을 익혀 그 장점을 취합하고, 내게 맞도록 수정하여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는 내게 용봉지회는 잘 차려진 잔칫상이나 다름없는 셈.
그리고 조금 방향성은 다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용봉지회를 기대하고 있다.
당가를 떠나기 전, 당진천이 말하지 않았던가. 비무의 규칙상 당가에서 용봉지회의 우승자가 나오는 것은 처음이라고.
용봉의 별호는 자주 받기도 했고, 우승자가 없다 하여 당가의 체면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내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
당소월과 설리향도 비슷한 기대를 품고 있다. 용봉지회가 끝나면 평소에 친하게 교류하는 이들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할 정도로.
...하지만 내겐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서문화린.
그녀가 이번 생에도 사흑련으로 투신하게 놔둘 수는 없다.
정파에서 태어나 사파로서 삶을 마감한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나 사람다운 삶을 갈망했는지를 잘 알고 있잖은가.
서문화린이 남긴 것이 여기에 있다. 시간을 거슬러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어찌 내가 그녀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겠나.
습관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운기행공을 하는 동안에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얼 어떻게 해도 무림맹주와 서문화린이 마주치는 일을 막을 수는 없다.
내가 뭐라고 무림맹주에게 며칠 늦게 와 줄 수 있냐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서문화린을 뜯어말릴 수도 없다.
일전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고, 이에 서문화린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번 용봉지회를 계기로 새 삶을 살겠다 다짐했다.
대부분의 고수가 그러하듯 한번 의지를 정하면 쉽게 굽히지 않는 서문화린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를 번복하긴 어렵겠지.
만약 내가 서문화린의 정체를 알고 있고, 무림맹주에게 반드시 들킬 거라는 이야기를 터놓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으리라.
왜냐면 이미 무림맹주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참가한 그녀이기에.
목표는 명확하고 조건 또한 변함이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판을 엎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니거나,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법.
그렇게 이것저것 내려놓은 채로 시작된 본선.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내 대진 상대는 서문화린이었으니.
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를 향해 작게 입을 달싹이며 전음을 날렸다.
-백발나찰(白髮羅刹) 서문화린. 나를 납치해라.
이게 내가 생각한 최선이었다.
[7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80] 80화. 백발나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