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10-20

[10] 10화. 사천당가 (2)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 앞. 상석에 앉은 당진천이 말했다.

"일단 앉게."

"네."

당진천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적당한 자리에 앉아, 나를 따라 옆에 앉은 당소월이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세상에. 천 소협 존댓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요?"

"...날 대체 뭘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어른을 대하는 예의 정도는 당연히 안다."

"근데 왜 저한테는 안 하시는 거죠? 제가 소협보다 오 년이나 어른 아닙니까. 그 말투 때문에 착각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다섯 살 차이면 또래지. 어른은 무슨."

"또래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 같은 다섯 살 차이라도 지학과 약관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답니다. 앞으로는 저한테도 존대하도록 하세요."

턱을 치켜들고 우쭐대는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너도 나한테 편하게 말하는 게 어떻겠나. 그럼 아무 문제 없다만."

"에이. 저는 천 소협에게 존대 받고 싶은 거지, 반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랍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소월 너한테 존대를 하고 싶진 않더군."

"저한테만큼은 존대를 하고 싶지 않다니. 그게 무슨 의미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이쪽을 노려보는 당소월. 확실히 집에 있으니 편하긴 한가 보다.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네.

식탁 밑에서 내 발을 가볍게 밟으려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발재간을 피해 역으로 제압하며 코웃음 치는 것도 잠시.

당진천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다.

"오늘을 위해 진 숙수가 꽤 신경 썼다더니 향이 좋군. 부족하면 더 내오라 할 테니 마음껏 들게."

"와! 아버님 말씀을 듣고 보니, 확실히 맛있어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얼핏 들으면 호의로 가득 찬 당진천의 권유. 실제로 당소월은 별 신경 쓰지 않고 생글거리며 젓가락을 들었지만....

나는 봤다. 그사이에 살짝 찡그려진 눈썹과 금방이라도 뻗어나갈 것처럼 흔들렸던 기세를.

과연. 과보호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당소월이 가문을 아꼈던 만큼, 당가 또한 당소월을 아낀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가주이자 아버지인 당진천이 가장 심했나 보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 또한 식사를 시작했다. 그간 먹었던 당가의 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린 몸뚱이는 생각보다 식욕이 왕성하더라.

회귀 전에는 배곯지 않을 정도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던 터라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

오늘 같은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은 아닐 테니 부지런히 먹기로 했다.

그렇게 손에 잡히는 것부터 쉴 새 없이 입에 넣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당진천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천휘라고 했나. 입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군. 이거 양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제가 성장기라 좀 많이 먹습니다."

"그렇지. 많이 먹어야 많이 크는 법 아니겠나. ...헌데 자네는 밥 먹는 시간보다 검을 휘두른 시간이 더 길어 보이는군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휘둘러야 더 맛있는 걸,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법입니다."

"맞는 말이군. 그럼 자네는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만족할 텐가? 이번 일로 당가가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손 닿는 범위 내에서는 무엇이든 도와줌세."

"글쎄요. 제가 배가 고파 검을 잡은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양과 질을 늘린다고 하여 배가 부를 것 같진 않군요."

"평생을 허기진 채로 살겠다는 소리인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잠시 식기를 내려놓으며 당소월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반쯤 피하고 있던 당진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렇게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런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고개를 끄덕인 당진천. 그가 이번에는 당소월을 바라보았다.

"소월아."

"어.... 왜 그러시나요 아버님?"

갑작스런 나와 당진천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얼 타던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천 소협과 약혼을 맺어라."

"네?! 그게 무슨...."

난데없는 약혼 소리에 황망한 표정이 된 당소월. 그녀가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오물거리며 나와 당진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태연히 동파육이나 우물거리는 내 모습에 기가 막혔는지, 대놓고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한다.

"저기요. 천 소협? 지금 저랑 약혼 이야기가 나왔는데 밥이 넘어가시나요?"

"밥이 안 넘어가는 상황 같은 건 없다. 그리고 방금 나눈 대화를 듣지 않았나.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

"다른 말을 한다는 건 알겠지만 뭐였는지는 몰랐죠!"

"요약하자면 독왕께서는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으셨고, 나는 다른 건 됐으니 한 식구가 되고 싶다 대답했다."

"방금 그게 그런 내용이었나요?!"

입을 쩍 벌린 당소월. 밥 먹던 도중에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내용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슬쩍 턱을 닫아주자, 당진천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소월아. 당장 혼인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대하게 약혼식을 올려 여기저기에 알리겠다는 말도 아니고. 그저 일단 정혼자라는 자리를 주어 곁에 두고 지켜보자는 소리다."

"하지만...."

"솔직히 소협에게 받은 게 적지 않단다. 구명의 은은 물론이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자화배독초를 내어주지 않았더냐. 그게 너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지는 잘 알고 있을 테고."

"그건, 그렇죠."

여전히 불퉁한 목소리. 그런 당소월을 향해 당진천이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물론 과정이 과격하기 짝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허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천 소협은 당가의 일원이 되길 요구할 자격이 있다. 인정하느냐?"

"...네."

"그래. 여기까지는 가훈과 도리에 관한 이유였다. 이제부터는 가주로서 가문의 이득 이야기를 하마."

"더 있는 건가요?"

"생각보다 많을 거다. 우선 소협의 무위를 봐라. 저 나이에 절정 고수를 쓰러뜨리고, 수십의 무인을 베었다. 소월이 네게 밀리지 않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 조금 걸리는 부분도 있다만.... 당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만한 기연도 없을 것이다."

"으음...."

"거기에 가문이나 뒷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데릴사위로 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도 한몫하고."

"그걸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요."

"소협에겐 불행이지만 당가의 입장에선 다행이지."

그리 말하고는 힐끗 내 쪽을 바라보는 당진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내용이니 말해놓고 미안해할 필요 없는데 말이지.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탕초리척을 집어 먹었다. 새콤달콤한 것이 제법 배가 찼음에도 입맛을 돋운다. 확실히 숙수 실력이 대단하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미소. 옆에서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당소월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저는 이렇게나 심란한데 속 편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칭찬 고맙군."

"칭찬 아니거든요?"

이쪽을 찌릿 노려본 당소월이 당진천을 향해 물었다.

"다른 이유도 있는 거죠? 더 알려주세요, 아버님."

"음. 앞선 이유는 천 소협을 당가의 사람으로 만들면 얻는 이득에 관한 일이지만, 이번엔 천 소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의 문제다."

"그으. 천 소협이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랍니다. 거절당한다고 해서 행패 부리고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 너와 천 소협이 동굴에서 살림을 차렸던 일을 말하는 거지."

"사, 살림이라니.... 하지만 저를 찾아오신 건 아버님뿐이니 아무 문제 없지 않나요?"

자신이 헛다리를 짚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건지, 지난 한 달 반 동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자각한 건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당소월.

당진천이 한층 복잡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이 끊긴 소월이 너를 어떻게 찾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당가의 추적대...?"

"사천성 내부였다면 가능했겠지. 하지만 네 소식이 끊긴 건 호북성에서의 일이다. 거기까지 손을 뻗는 건 아무래도 무당과 제갈의 눈치가 보여 힘들다."

"그럼.... 아! 개방이군요."

"맞다. 개방의 도움을 받았고, 덕분에 네 위치를 알 수 있었던 거다."

"달리 말하면 저와 천 소협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개방이 알고 있다는 소리네요. ...예를 들면 한 달 넘게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라거나요."

"물론 개방이 바보는 아니니 어디 가서 큰 소리로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개방의 특성상 완전히 숨기기도 힘들겠지."

개방은 거지들이 모여 만든 방파다. 정식으로 무공을 익힌 이들이라면 엄격히 통제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개방도까지 제어하기는 힘들 터.

결국 알음알음 퍼져 나갈 것이다. 당소월이 무림행을 나섰다가 외간 남자랑 아예 살림을 차리다시피 했다는 소문이.

"명목뿐이나마 당사자를 정혼자로 삼으면 조용히 사그라들 소문이다. 허나, 그러지 못한다면 한동안 활활 타오를 소문이기도 하고. ...당가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소월이 네 혼삿길이 막힐까 두렵구나."

"걱정이 과하세요 아버님. 제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이제 막 약관인걸요. 거기에 아버님을 잘 만나서 집안도 좋지요."

"네가 평범한 아이였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소월아. 너는 독령지체다. 본래라면 환골탈태를 이뤄 독인이 되어야 얻을 수 있는 몸을 날 때부터 갖고 있다는 소리다."

"아...."

"너도 알 거다. 독령지체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는걸. 인간보다 독물에 가까운 몸은 수련하지 않더라도 점점 그 독기가 짙어지겠지. 나중에 가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지금은 자화배독초까지 흡수하지 않았느냐."

"...."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진천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혼인할 필요는 없다. 만약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더라도 괜찮다면 굳이 재촉하지 않으마. ...다만 네게 그럴 생각이 있다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걸 기억해 줬으면 하는구나."

"...네. 그럴게요 아버님."

"미안하다. 하지만 너도 천 소협을 좋게 보고 있는 것 같으니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버님이 절 위해 하신 말씀이라는 건 잘 알아요. 그러니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당소월. 감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둘의 모습에 어쩐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쉽게 말해 체할 것 같다는 소리다.

하여, 잠시 수저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그 문제라면 해결책이 있다."

"네?"

"무어라?"

동시에 이쪽을 향해 고개를 꺾는 당소월과 당진천.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온다.

특히 당진천 같은 경우에는 경지가 높아서인지 자연스레 기세도 강렬해졌고.

슬쩍 눈치를 보다 말을 고쳤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런 건 됐으니까 어서 말해 보게. 만약 허튼소리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용서치 않겠지만, 사실이라면...."

"간단한 일입니다. 결국 체내의 독기가 너무 강해서 생기는 문제 아닙니까. 그렇다면 독기의 흐름을 제한하면 될 일이죠."

이 문제에 관해서는 회귀 전의 당소월도 깊게 고민했던 일이다.

당시의 그녀는 결국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고, 오로지 무공에만 집중하며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문제는 당가가 멸문해 버리지 않았는가.

당소월은 마지막 당가의 혈족으로서 다시금 가문을 부흥시킬 의무가 있었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에 걸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왔고, 결국 답을 얻었다.

그날은 밤새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들어준 터라 아직도 기억한다.

"독인의 독기를 제어하는 구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하면 빙 돌려 말한 고백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1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1] 11화. 사천당가 (3)

전생의 당소월이 알려 준 구결을 읊었다.

처음에는 못 미더운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당진천이었으나, 후반부까지 전부 들은 지금은 경악과 허탈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사천당가의 가주일세."

"알고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사람이라는 말일세. 특히 그것이 독과 암기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세상 누가 당가의 권위를 부정하겠습니까."

"허나, 내 딸에게만큼은 못 해주는 일이 더 많았네."

"...."

죄책감, 안도, 그리고 약간의 후련함. 지금 이 순간. 내게 고개를 숙인 당진천은 사천당가의 가주도, 화경의 고수도 아닌 한 명의 아버지였다.

"고맙네."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소월이가 위험할 때 지켜 주지 못했네. 허나, 자네는 해냈지."

"제가 없었어도 어떻게든 됐을 겁니다. 그리고 따지자면 전 납치범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독령지체는 당가의 무인에겐 천무지체가 부럽지 않은 천고의 자질일세. 그러나 무인이 아닌 여인으로서의 소월이에겐 저주나 다름없었겠지. 자네는 이를 해결해 주었네."

"우연히 구결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쩌면 제가 없었더라도 본인이 알아서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어찌 됐든 자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품속의 보물을 내어준 건 사실 아닌가."

"당가의 가훈을 알고 있으니 그리한 것입니다."

"그랬다면 먼저 조건을 내걸었겠지."

"...."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실제로 대가를 받을 생각이 없었던 건 맞다. 당소월이 만든 것을 당소월에게 돌려주는 것뿐. 당연한 일에 생색을 내기는 좀 그렇잖은가.

"그동안 내가 소월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라도 빨리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네."

"가진 것도 많으신 분이 너무 소박하십니다."

"실은 자네를 소월이의 약혼자로 삼으려던 것도 그래서일세. 자네의 마음은 모르겠으나, 소월이가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으니 밀어붙인 게지. 당가의 재산과 권위를 미끼 삼아 말이야."

"아, 아버님?!"

옆에서 눈치 보며 듣고 있던 당소월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당진천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 같은 집도 절도 없는 낭인이야 결혼을 하건 말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당소월처럼 명문가의 여식이 혼인을 하지 못했다는 건, 그 자체로 큰 흠결이라고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건 더 큰 흠결이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고아로 자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허나 당진천과 당소월에게는 심각한 고민이었으리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잠시. 이내 당진천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지금 말하는 것이 맞겠지. 미안하지만 그간 자네의 뒷조사를 좀 했네."

"잘하셨습니다. 아무리 은인이라 해도 사위 후보가 될 예정이라면 뭐 하는 놈인지는 알아야죠."

"이해해 줘서 고맙군. 자네의 행적에 대해 여러모로 궁금한 점은 많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겠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만 이거 하나만은 대답해 줄 수 있겠나?"

"무슨 일입니까?"

"천 소협. 자네는 혹시 천살성(天殺星)과 관련이 있는가?"

"?"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천무지체, 독령지체, 구음절맥, 구양절맥 등등. 세상에는 드물지만, 특수한 체질을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체질들은 특별한 재능을 선사하는 대신, 그에 준하는 대가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 천무지체는 무공에 한하여 절대적인 재능을 얻지만, 너무나도 대단한 재능 때문인지 세상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 감정이 극도로 옅어진다고 한다.

당소월이 가진 독령지체는 환골탈태로만 얻을 수 있는 독인의 몸을 타고나는 대신, 시간이 지날수록 후대를 보기 힘들어지고.

절맥류는 뛰어난 오성과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몸을 얻지만, 시한부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로부터 이러한 체질들은 동경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훌륭한 재능은 좋으나 그 대가까지 좋아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대단한 자질을 타고난 체질의 주인, 그들을 걱정하는 이, 순수하게 흥미 위주의 연구에 빠져든 사람 등등.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해결책을 궁리해 왔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내놓을 수 있었으니.

천무지체의 무정함은 질리지 않도록 다양한 문파의 무공을 익히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천무지체가 나타나면 구파일방의 공동전인이 되는 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독령지체는 지금껏 빨리 후사를 보는 것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다 여겨졌지만... 회귀 전의 당소월이 독인의 신체 반응 하나하나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고.

절맥류는 무수히 많은 의원이 연구한 끝에 그 치료법이 확립되었다. 귀한 영약과 뛰어난 무인의 도움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지만,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게 된 것이다.

천살성도 이러한 특수체질 중 하나다.

천무지체에 버금가는 무(武)의 재능을 얻는 대신, 살심을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체질.

다만 앞선 체질들과 달리 수반하는 부작용이 본인이 아닌 타인을 해치는 것이기에 심각하건만, 이를 해결할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이 점지한 살겁의 운명이라 하여 천살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천살성을 타고난 이를 발견하면 즉시 죽이는 것이 원칙이다. 하물며 자비를 베풀더라도 뇌옥으로 끌고 가 감시 겸 보호하다 살심이 폭주하면 그때 죽이는 게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경계 받는 존재가 바로 천살성이다. 실제로 몇 번이고 중원 무림에 혈사를 일으켰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데 나보고 천살성이냐고 묻는다니....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뜬 탓일까. 당진천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해 말게. 자네를 천살성으로 의심하는 게 아닐세. 일전에 그렇게나 지독한 살기를 뿜었음에도 소월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깔끔하게 갈무리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그건 천살성이라면...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대부분의 무인에겐 불가능한 일이네."

"그건 그렇죠."

"내가 갑자기 천살성을 거론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네의 무공 때문일세."

"제 무공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기절한 사이에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 잠깐 진맥을 했다만... 굉장히 특이한 성질의 내공을 다루더군."

"아."

당진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됐다. 광랑탈명공으로 쌓은 내공에는 살기가 녹아 있다.

내공의 정순함은 부족하지만 위력만큼은 여타 신공에 밀리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고.

대신 언제 주화입마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문제가 있으나.

애초에 그 안에 깃든 살기는 내 삶에서 비롯된 것.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광랑탈명공의 살기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당진천의 눈에는 내가 어디서 굉장히 위험한 마공이라도 주워 익힌 것이라 보이겠지.

내 뒷조사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시골 흑도방파 밑에서 죽지 않을 만큼의 밥만 받으며 구르던 고아가 어느 날 역으로 흑도 놈들을 베어버리고 종적을 감췄다.

무언가 기연이라도 있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마침 나는 위력적이지만 불안정해 보이는 무공을 익히고 있고.

아니나 다를까. 당진천이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파의 노괴들조차 자네 같은 성질의 내공은 다루지 못한다네. 만약 그런 게 가능한 이가 있다면...."

"제가 천살성은 아니지만, 천살성이 남긴 무공을 익혔다고 보고 계시는군요."

"...맞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점점 더 위험해질 걸세. 예전이야 자네에게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이젠 아니잖은가."

"이젠 아니라 하심은...."

"자네가 원한다면 당가의 내공심법을 내어주겠네. 내공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만큼 영약도 지원해 주지. 그러니 위험한 무공은 내려놓는 게 어떤가?"

"...."

물론, 당가의 심법을 알려준다고는 해도 비전을 전수하진 않겠지.

허나 가주가 직접 말을 꺼낸 만큼 허접한 무공을 전수하지도 않을 것이다. 최소한 상승의 심법은 될 터.

상승의 무공은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무학을 품고 있다. 아무렴. 꾸준히 익히기만 해도 절정의 경지를 보장하는 것이 상승의 무공이니까.

당가니까 기꺼이 하나 내어줄 수 있는 거지, 중소 문파는 상승 무공이 나돈다는 소문 하나로 혈사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당진천의 명백한 호의다. 하지만 받을 수 없는 호의였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아무리 초라하다 해도 저는 다른 사람의 산이 아닌, 제가 직접 쌓아 올린 산을 오르고 싶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잘못하면 비탈길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해도 말인가?"

"아무리 굽이지고 좁은 길이라 해도 저의 길입니다. 쉽게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말씀하신 대로 제가 넘어진다 하더라도... 옆에서 잡아주는 이가 있다면 분명 괜찮을 겁니다."

"허어."

감탄과 연민. 그 사이의 어딘가쯤 되는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당진천.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네. 다만, 언제든 조금 전의 제안이 유효하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가볍게 꾸벅이자 당진천이 만족스레 웃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알려준 구결은 얼추 맞는 것 같지만 일단 이쪽에서도 따로 확인은 해보겠네."

"그러십시오. 저도 어쩌다 들은 걸 전해드렸을 뿐이니 저보다 독왕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음... 캐묻지 않겠다고 해놓고 자꾸 물어봐서 미안하네만, 혹시 이 구결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솔직히 너무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네."

하기야. 그 구결은 당소월이 당진천과 같은 화경의 경지에 올라 만든 것이다.

독공으로는 중원 제일이라 불리는 당진천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무학이 담긴 독공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 해도 믿어 줄 것 같진 않으니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이 넓은 중원에서 독공의 으뜸을 뽑으라면 당연히 사천당가의 이름이 나오겠으나, 그렇다 하여 독공이 사천당가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잖습니까. 기연이 있었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런가. 중원은 언제나 넓은 곳이었지. 어느 날부터 나도 독왕이라는 허명에 취해 시야가 좁아졌던 걸지도 모르겠군. 알겠네. 그 정도면 충분하네."

다른 독공의 고수가 있다는 말에도 기분 좋게 웃은 당진천이 내려놓았던 식기를 들었다.

"식사 중에 이야기가 길어졌군. 조금 식었으니 다시 데워 오라 이르겠네."

즐거운 기색으로 숙수를 부르는 당진천. 그 뒤로는 약간의 잡담과 함께 정말 먹는 데만 집중하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

식사를 마치고 당소월과 함께 각자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이었다.

"끄윽. 배부르군."

"더럽습니다, 소협."

"이런. 그 동굴에서 이미 볼꼴 못 볼 꼴 전부 공유한 사이가 아닌가. 이제 와서 이 정도로 타박하진 말아줬으면 하는군."

"저, 저는 나름 신경 썼거든요?! 부끄러운 일을 공유한 적은 없습니다!"

"나도 아네. 잘도 볼일 볼 때마다 그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했지. 솔직히 너무 불편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던데."

"꺄아아악! 그만! 이 주제는 그만 이야기하지요! 적어도 제 앞에서는 금지예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는 당소월. 내공은 안 썼지만, 대신 힘 조절도 안 했기에 제법 매웠다.

그럼에도 당소월의 격렬한 반응을 보고 있자니 즐거워지는 건 왜일까.

이후로도 한참을 투닥이던 당소월이었으나, 돌연 힘이 빠진 것처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아... 솔직히 말해서 너무 당황스럽네요. 제가 걱정했던 거랑은 전혀 다른 내용의 대화가 오간 데다가, 심지어 그토록 고민하던 독령지체의 부작용까지 간단히 해결될 줄이야."

"뭐,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 아니겠나."

"이 정도로 운 좋게 모든 일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일은 보통 없답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천 소협. 어디서부터 노리고 있었던 거죠?"

"노리다니. 무얼 말인가."

"제 정, 횬자 자리 말이에요!"

정혼자 부분에서 혀를 씹은 낸 당소월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거, 조심성 없기는."

"대답이나 해주시지요...."

또 깨물까 조심조심 말하느라 목소리에 힘이 빠진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정혼자 자리를 노린 건 아니다. 목숨 한번 구해 줬다고 바로 결혼시키려 들 줄은 나도 몰랐고, 당소월 너도 모르지 않았나."

"으음. 그렇긴 해요."

"다만, 그렇군. 당가에... 정확히는 너에게 빚을 지울 생각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있었다."

"아...."

아쉬운 듯한 소리를 낸 당소월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데 그건 언제쯤부터인가요?"

어디 보자. 회귀 전의 이야기를 제외한다면 역시 그때겠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짧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네 눈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곤란해하는 미소를 보는 순간부터였다."

"...!"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는지 눈이 점점 땡그래졌다.

"소, 소협? 방금 그게 무슨...!"

당황한 당소월의 목소리.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리 나라도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으니까.

[1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2] 12화. 사천당가 (4)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당진천. 그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영 믿을 게 못 되는군. 안 그런가?"

"암요. 수신호위도 내팽개치고 홀로 뛰쳐나가는 가주가 있는 세상이니 개방의 정보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기 힘들겠죠."

"아직까지도 꽁해 있었나. 내가 아니라 자네의 느린 발을 탓하게."

"...."

조금 떨어진 구석에서 입을 꾹 다문 녹의의 중년인.

자신의 배다른 동생이자, 수신호위인 당유진의 소심한 반항에 당진천이 껄껄 웃었다.

"생긴 건 살벌한 녀석이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구나."

"가주님에 비하면 부드럽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라 된 거라고 합니다. 전 오래오래 살 거라 벌써부터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렇겠지. 천 소협을 조사한 것도 그래서고."

"소월이도 그렇고 가주님도 그렇고 제법 마음에 드신 것 같은데 사위라고 불러주시진 않는 겁니까?"

"아직 약혼식도 안 치렀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아닐세."

자리에 앉은 당진천은 가만히 서류에 적힌 천휘의 정보를 읽었다.

급하게 의뢰한 것이라 정보가 제대로 걸러지지도 않고, 깔끔하게 정리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는 보고서.

'절강성 변두리에서 태어난 천애고아. 어려서는 구걸을, 조금 커서는 지역 흑도방파인 적사파에 들어가 어설프게나마 검을 쥐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사군.'

사흑련이 발족하며 사파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곳이 된 절강성에서는 더더욱 흔한 일.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진 천휘의 행적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적사파에서 흑도로서의 삶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돌연 며칠을 잠적했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적사파의 문주를 포함한 모든 무인을 살해한 뒤 금품을 챙겨 사라졌고.

무공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소년이 저질렀다기엔 무위가 됐건, 손속이 됐건 어느 쪽으로도 믿기 힘든 일.

심지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천휘는 절강성 내부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유명한 흑도방파를 멸문시키기를 반복했다.

'살아남은 이가 얼마 없어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만, 적사파를 제외하면 별다른 연관은 없었다.'

해당 지역에서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문파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다시피 한 수준.

그렇다고 협행을 했다고 보기에도 좀 그런 것이,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부 털어 갔기 때문이다.

마치 제 주머니에서 돈을 빼가듯, 뒤탈이 없을 만한 문파를 털어 가는 것. 이는 굳이 말하자면 홀로 떠도는 사파의 고수들이나 보여 줄 법한 행보다.

그렇게 한동안 절강성 이곳저곳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천휘였으나,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더니 호북성의 한 암시장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급하게 피독주를 구했다는데, 아마 당소월을 납치하기 전날의 일이리라.

며칠 뒤에는 유경촌에서 두 사람분의 음식과 생필품을 사 갔다는 증언이 있었고, 이를 마지막으로 지금에 다다른다.

"유진아. 넌 이것만 보면 천 소협이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

"악독한 것들 사이에서 태어난, 더 악독한 것. ...하지만 이렇게 묻는 걸 보아 실제로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 적어도 아무한테나 악독하게 굴진 않았네."

당진천은 아직도 천휘를 처음 보았을 순간을 기억한다.

도저히 그 경지의 무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살기. 피 칠갑이 되어도 마지막 적을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무너지지 않는 독기.

허나, 이 모든 것은 당소월 앞에서 봄날의 눈처럼 녹아내렸다.

거기에 당가에 머무는 동안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수련에만 매진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검은 날카로웠지만, 언제나 그 날이 바깥을 향해 있었다."

조금 달랐지만 천휘의 태도는 당가의 무인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당소월이 끌렸던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아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만."

"일이 잘 안 되셨나 봅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네."

"좀 돌려 말하지 말고 알기 쉽게 알려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유진아. 조금이라도 머리를 써볼 시도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

"그게 싫어서 후계자 경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운 게 삼십 년 전입니다."

"하! 그리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지."

당진천이 입가심용으로 가져온 차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우려하던 문제는 없다는 건 확인했네. 하지만 자세한 건 물어볼 수 없겠더군."

"천하의 독왕께서 말입니까?"

"천하의 독왕이니까 더더욱 그런 걸세. 나조차 해결하지 못한 소월이의 천형을 천 소협이 해결한 것 같다고 하면 믿겠는가?"

"그건 또 무슨...."

당황해하는 자신의 이복 동생에게 조금 전에 들었던 구결을 알려 주는 당진천.

처음에는 갑자기 이게 뭔가 싶어 멍하니 눈만 끔뻑이던 당유진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독공에는 영 재능이 없어 암기술 위주로 익혔지만, 그 또한 초절정에 달한 고수.

조금 전의 구결이 수준 높은 무리(武理)를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걸 천 소협이 알려주었단 말입니까?"

"기연이 있었다더군. 구결은 따로 확인해 봐야겠지만,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네."

"...당가 외에 그만한 독공의 고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전대고수 중에는 하나 있지. 너도 알고 있잖느냐. 독의(毒醫)라는 별호를."

"죽은지 200년 가까이 된 사람 아닙니까. 굳이 말하자면 전전대 고수겠군요."

"사람은 죽어도 공부는 남는다. 애초에 평범한 불치병인 줄 알았던 독령지체가 어떠한 체질인지 알려진 것도 독의 때문 아니었나."

독령지체를 타고난 사람이 당소월 하나인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몇몇 있긴 했으나, 사람이 평범하게 살면서 중독될 정도로 독을 먹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은 자신의 체질이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살다 갔거나, 알아도 제대로 된 독공이 없어 활용하질 못했다.

하지만 의원 가문에서 태어난 독의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체질의 특이함을 금방 깨달았고, 약과 독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

약 또한 독의 일종이고, 독 또한 약으로 쓰일 수 있다면 자신의 체질을 이용해 많은 이를 치료할 수 있을 터.

그런 생각 하나로 독의는 중원을 떠돌며 많은 사람을 살려 이름을 날렸으니. 독령지체라는 체질이 널리 알려진 것도 그때였다.

"당가와는 갈래가 다르다고 하나, 독의의 의술 또한 훌륭한 독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고치지 못한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불임 하나뿐이었다는군."

"그마저도 말년에 성공했나 봅니다."

"덕분에 소월이가 한시름 놓을 수 있었지."

"허어. 정말로 이게 독의의 깨달음이라면 은혜의 대가로 무엇을 내어줄지가 중요하겠군요. 천 소협은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고 합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네."

"예?"

"아, 그 전에 소월이의 목숨값은 어떻게 받겠냐고 했더니 밥이나 같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더군."

"그건 또 뭔...."

"식구(食口)가 필요하다고 하지 뭔가. 소월이를 보면서 말이야."

"...."

할 말을 잃은 당유진. 그런 동생의 모습에 당진천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여전히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네. 이 구결이야 독의의 것이라 쳐도 무공은 또 어디서 만난 기연인지, 어떻게 사파 놈들이 소월이를 해하려는 것을 알아챈 건지, 소월이의 위치는 또 어디서 알았으며 동굴에서 발견한 자화배독초는 정말 우연히 있던 것인지...."

"하지만 의심하지 않기로 하셨군요."

"식구가 되어 달라는 말이 꽤 인상 깊었거든. 거기에 어찌 됐건 당가에 많은 것을 안겨 준 은인 아닌가."

그리 말한 당진천은 책상 위의 서류를 한데 모아 삼매진화로 불태웠다.

"하여, 소월이와 맺어 주기로 했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 인재는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아야죠.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장로 어르신들과 소월이의 의사입니다만...."

"그 부분은 걱정 말게."

당소월에게는 천휘를 당가로 끌어들였을 때의 이런저런 이득을 이야기했지만, 당진천이 결심한 계기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소월이가 이미 천 소협을 마음에 품은 것 같더군. 어르신들이야 조금 불만스러워 하실 수도 있으나, 결국 내 의견에 따라줄 걸세. 독령지체의 부작용을 알게된 뒤로 혼사에 관한 것은 전적으로 나와 소월이의 뜻을 우선시하겠다 하셨으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괜찮겠죠. 그나저나 소월이가 천 소협을... 하기야 무림초출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이해는 갑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가문을 나와 무림에 발을 디뎠더니, 자신보다 어린 소년에게 돌아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거절했으나, 다음날에 정면으로 덤벼오는 소년에게 패배해 그대로 납치당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천당가에서 막둥이로 태어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것은 물론, 독령지체라는 체질 덕에 천재적인 재능마저 타고난 당소월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터.

헌데, 걱정했던 일은 전혀 없었고 한 달 넘게 이어진 동굴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심지어 그 끝에는 정말로 당소월을 노리는 이가 있었고, 천휘는 그에 맞서기 위해 검을 들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절정의 무인도 하나 있었다고 하니 정말로 목숨을 내건 것이리라.

거기까지 떠올린 당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저라도 반하겠군요."

"첩을 넷이나 들인 녀석의 말이라 그런지 의미심장하군."

"부러우면 재혼하시죠. 벌써 형수님이 돌아가신 지도 십 년이 넘었습니다. 가장 어린 소월이도 다 컸고요."

"일 없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잿가루를 적당히 치워 버린 당진천이 입을 열었다.

"...약혼을 맺을 예정이긴 하지만, 당장 혼인시킨다는 소리는 아니다. 천 소협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지켜봐야지. 그 사이에 소월이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그러라고 있는 게 약혼 아닙니까. 다만 언제까지고 살펴만 볼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두신 기간은 있습니까?"

"십 년."

"?"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려면 십 년은 필요하지 않겠나."

"거, 너무 긴 거 아닙니까. 그때면 소월이가 서른이 됐을 때입니다만."

"이미 소월이의 혼인이 늦어졌다고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잖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늦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본심을 말하십쇼 가주... 아니, 형님."

"굳이 일찍 결혼시킬 이유도 없어졌는데,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평생은 아니어도 좀 더 이 애비 곁에 있어 줬으면 한다."

"어차피 데릴사위라 소월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어이없어하는 당유진의 반응에 당진천이 코웃음을 쳤다.

"아들밖에 없는 녀석이 딸 가진 아비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느냐."

"딸 가진 사람이 세상에 형님 한 명뿐인 건 아니잖습니까. 유독 극성이라는 걸 제발 알아차리십쇼."

"나 정도면 보통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당유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되레 큰 소리를 내는 당진천.

평소에는 참 믿음직스러운 가주이며, 친근한 형이자, 강직한 무인인 당진천을 존경하는 당유진이었으나....

당소월이 관련된 일에는 여러모로 유감스러운 모습만 보여 주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이러다가 소월이랑 그 천휘라는 아이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시려는지."

"뭐라?"

"지금이야 천 소협의 나이가 어리니 그렇다 쳐도, 나중 일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한창때의 남녀를 약혼으로 묶어 두고 그리 오래 방치하는데 정녕 아무 일도 없길 바라시는... 겁니까...?"

"...."

말끝을 흐리는 당유진이었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전달되었다.

눈썹을 파르르 떨던 당진천이 어느새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때는 둘 중 하나는 죽어야겠지."

"소월이를 과부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아차, 말이 잘못 나왔군. 그때는 비무로 가르침을 내릴 생각이네."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만...."

"글쎄, 생사결이 아닌 비무라면 죽진 않을 걸세. 어찌 됐건 천 소협도 보통은 아닌 터라."

담담하게 말하며 비어 버린 잔에 차를 다시 채우는 당진천. 다만 이번에는 그냥 마시는 대신, 잔 위에서 손가락을 비벼 보라색 가루를 약간 풀었다.

평범한 차를 굳이 알싸한 독 차로 만들어 마시는 모습에 당유진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당진천은 태연한 어조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니, 독공까진 아니어도 기본적인 내성은 있어야겠구나. 우선 목숨에 지장이 없는 독부터 훈련을...."

이건 전부 당소월과 천휘를 위한 일이다. 그리 말하며 온갖 독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당진천.

당유진은 그런 이복형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영약이라도 하나 따로 구해다 줘야겠구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 당유진이었다.

[1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3] 13화. 사천당가 (5)

뜬금없이 당소월에게 영약을 선물 받았다.

"...?

"제가 드리는 건 아니고 숙부님께서 천 소협에게 전해달라고 하신 거예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얼마든 제게 감사하셔도 괜찮답니다?"

정말 자기가 준비한 선물도 아니면서 엣헴거리는 당소월. 작게 콧김을 내뿜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생각해 보마."

"...생각 대신 바로 행동에 옮기는 건 어떨런지요?"

"그 또한 생각해 보마."

"칫!"

검은 환단과 함께 들어 있던 편지가 있길래 펼쳐 보았다. 대충 요약하자면 당소월을 구해 줘서 고맙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내용.

다만, 어떤 약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운이 꽤 상당한데 무슨 영약인지 아나?"

"으음. 이건 백독청혈단(百毒淸血丹)이네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만들기 어려운 영약이라 어지간하면 당가 밖으로 유출되지 않는 것이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대단한 영약인가?"

"물론이죠. 백독청혈단은 백 가지 독을 잘 조합해 서로의 독성을 상쇄시키고 약성만 남긴 영약이거든요. 내공 증진에는 큰 효험이 없지만, 순수하게 몸에 좋아요."

"비슷한 거라면 들어본 적 있다. 하북팽가에는 외공의 성취를 돕는 영약이 있다던데, 그 비슷한 종류의 영약인가 보군."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네요. 백독청혈단은 장기와 혈도를 튼튼하게 만드는 약이지, 뼈나 근육을 성장시키는 효과는 없으니까요."

"허어."

그런 공능이라면 지금의 내게 딱 맞는 영약이다.

외공이야 빨리 수련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단련해 나가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혈도는 다르다.

어린 나이에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먹으며, 상승의 무공을 익힌 명가의 자제들과 달리 내겐 기초가 부족하다.

회귀 전의 내가 괜히 내공 때문에 고생한 게 아니다. 혈도는 좁고, 쌓은 내공은 탁하니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답답하게 여겨진 것이지.

물론 광랑탈명공을 익히며 내공의 문제는 해결됐다. 여전히 정순함은 부족하지만 살기를 녹여 내어 위력과 수발 능력을 보완했으니까.

다만 혈도의 문제는 여전했다. 아무리 기의 섬세한 수발이 가능하다 한들, 혈도가 좁으니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내공의 양은 부족하더라.

그렇기에 이런저런 영약을 찾아보았으나...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대단치 않은 것들뿐이라 큰 효과는 볼 수 없었다.

백독청혈단 하나로 고질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당가에서도 나름 귀한 영약이라니 훨씬 나아지긴 할 터.

"이거 언제 한번 감사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겠군."

"숙부님은 당가 안에서도 조금 특별한 위치에 계신 분이라, 아버님을 제외하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없으실걸요?"

"그래도 계속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한 번쯤은 만날 일이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호법이나 부탁하마."

"네? 지, 금이요?"

아무리 그래도 당장 먹을 줄은 몰랐던 걸까. 까만 눈동자를 멍하니 깜빡이는 당소월. 그녀의 얼빠진 모습에 낄낄 웃으며 환단을 삼켰다.

좋은 영약이라니 흡수하는데 꽤 고생할 줄 알았건만... 두어 번 소주천을 돌리자 칠할 이상이 혈도에 흡수되었다.

내공 증진에는 별 효과가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여기서 뭘 더 해야 할 것 같지는 않다.

당장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 혈도에 녹아든 기운이 조금씩 혈도를 넓고 단단하게 다져주겠지.

"...후우."

숨을 크게 내쉬며 눈을 뜨자, 그곳에는 어이없어하는 당소월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는 아니지만, 상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곳에서 당소월은 허리에 손을 올린 자세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소협. 대화 중에 다짜고짜 영약을 먹는 건 또 무슨 경우 없는 짓인지요."

"그야 영약은 손에 들어온 즉시 취해야 하지 않나. 물론 안전한 장소나,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아니, 영약을 누가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급하게 먹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영약뿐이겠나. 먹던 밥도 자주 뺏겨 봤다. 세상에는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검을 드는 사람이 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으니까."

"...아잇! 그리 말하면 제가 뭐가 되나요?!"

투덜대는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 말도 일리가 있군. 지금의 나는 비루한 거렁뱅이도, 검 한 자루에 의지해 근근이 먹고 사는 낭인도 아닌 당가의 예비 데릴사위니까."

"네?"

"적어도 정혼자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

시선의 갈피를 못 잡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당소월.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입가를 우물거리는 모습이 퍽 재밌다.

그렇게 당소월의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던 것도 잠시. 마음을 굳힌 건지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그럼 조금 이르지만 주변을 안내해 드릴 테니, 제 정혼자로서 필요한 일들을 체험해 보시겠나요?"

"정혼자로서의 일이라... 어쩐지 어감이 불순하군. 불순한 일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소협은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으신지요? 어떻게 그런 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실 수 있습니까."

"무얼. 부끄러워하고, 외면한 끝에 후회한 적이 있기에 더는 망설이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허공을 바라보며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리는 것도 잠시.

돌연 샐쭉해진 표정의 당소월이 입을 열었다. 살짝 냉랭해진 목소리로.

"흐응. 천 소협을 후회하게 만든 사람이 있군요?"

"이젠 없으니까 삐져나온 입술을 집어넣어도 된다."

"그게 무슨... 아."

눈을 크게 뜬 당소월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말실수라도 한 것이라 여기는 거겠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정말 별거 아닌 일이니. 그보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급하니 빨리 대답해 다오."

"...당가의 사위로서 가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뿐인 이야기였으니 이상한 기대는 멈춰 주시길."

"아쉽게 됐군. 그래도 당가를 구경할 수 있다는 건 좋지. 그동안 방과 연무장만 오가느라 조금 질린 건 사실이니까. 바로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천 소협에게 가장 익숙할 의약당부터 갈까요? 저와 함께 가시면 소협은 못 들어가 본 곳까지 둘러보실 수 있겠지요."

"그건 좀 궁금하긴 하다만, 이게 데릴사위의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당가의 의약당은 만독당 만큼이나 중요한 곳. 천 소협도 방금 드셔 봐서 잘 아시잖습니까? 독과 약은 한 끗 차이라는 걸."

"과연. 내가 의약당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돌아가는 구조는 알아야 한다는 거군."

"바로 그거예요! 의약당 뒤에는 대장간이랑 만독당도 한번 들르지요. 그다음은 내원 무사들의 연무장에 갔다가, 마지막으로는 식객들이 있는 외원당까지 보고 오면 얼추 저녁 시간이 되겠네요!"

"나야 전부 구경할 수 있다면 좋지만, 정말로 보여 줘도 괜찮은 거 맞나? 정혼자니 뭐니 해도 아직 말뿐인 약속이다만."

"후후.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 아니겠습니까. 당가의 누구도 아버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답니다. 심지어 아버님 스스로도요. 무엇보다...."

"무엇보다?"

"천 소협이 한번 본다고 바로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당가의 저력이 얄팍하지 않답니다."

"...."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저만 따라오시길."

쿡쿡 웃으며 몇 걸음 걸어가더니,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당소월.

실로 노골적인 눈빛. 이에 떠밀리듯 그녀의 옆에 따라붙자, 당소월이 그제야 만족스런 기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저기 보이시는지요? 저 나무는 제가 어릴 적에 심었던 나무예요. 씨앗을 심으면 정말로 나무가 자랄까 싶어 어린 시절에 몰래 심었는데 이게 진짜로 싹이 터서...."

"음. 그렇군."

조잘대는 목소리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나란히 걸었다.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요? 지금 대충 흘려듣고 적당히 대답하셨죠!"

이런. 들켰나.

***

조금 틱틱대기도 했지만, 말했던 대로 의약당부터 시작해서 외원당으로 이어지는 경로로 당가를 안내해 준 당소월.

내가 사흑련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나름 대주까지 올라갔었다. 하여, 아무리 당가라도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은 생각이 좀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고,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다.

사흑련은 사파 무인이 뭉쳐 만든 조직인 만큼, 힘의 논리가 당연스레 통용되는 곳.

당연히 소속된 이들 또한 무력이 됐건, 재력이 됐건,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됐건 힘을 가장 큰 미덕으로 여겼는데.

그 때문인지 사흑련에서 장인이나 의원의 대우는 그렇게 좋진 않았다.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당가는 달랐다.

독과 암기의 조종(祖宗)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정파와 사파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당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 꽤 보람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외원당까지 둘러보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당소월은 내게 '사천당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는 걸.

회귀 전의 당소월이 왜 그렇게 가문에 애착을 품었는지, 복수에 집착했는지, 그리고 나와 함께 무엇을 만들고자 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좋은 곳이군. 당가는."

"그렇죠? 이제는 여기가 천 소협의 집이기도 하답니다."

"집, 인가."

생각해 보면 지금껏 여기저기에 몸을 의탁한 적은 많았으나,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흐흥! 이제 아시겠습니까? 소협이 어떤 사람을 납치한 건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우쭐대는 미소를 짓는 당소월. 자연스레 강조되는 목의 선을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끄덕였다.

"그래. 다음에 납치할 때는 당가 전체를 상대로 도망칠 자신이 있을 때나 해야겠군."

"먼저 대화로 해결한다는 발상은 없는지요?"

"그러지 않았나. 들어주지 않았을 뿐이지."

"아."

괜히 찔린 당소월이 스윽 시선을 피하길래, 그녀를 중심으로 반 바퀴 돌아 시선이 향하는 곳에 섰다.

"대화할 때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해라."

"...!"

깜짝 놀란 당소월이 반사적으로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내공이 실린 것도 아니고 힘 조절도 적당했기에 아프진 않았다.

"뭐지?"

"말이 안 통하면 실력행사. 소협이 제게 알려주신 것 아닙니까."

"그 실력행사로도 내게 밀렸던 것 같다만."

"...."

아직 검은 눈동자를 가늘게 뜬 당소월이 계속해서 내 어깨를 괴롭혀 댔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려는 것처럼.

찰싹찰싹!

여전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당소월이랑 투닥대고 있으니, 당가의 사람이라면 쳐다볼 수밖에 없겠지.

"저분이 그?"

"...내 아들보다도 어려 보이시는데."

"예끼 이 사람아. 저분도 아가씨처럼 대단한 분이겠지."

"아가씨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먼."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데려오시지 않았나. 어쩌면...."

자기 딴에는 최대한 조용히 중얼거린 것이겠지만,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똑똑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

한참을 집중하던 당소월이 멈칫하더니 슬쩍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로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흠흠. 아무튼 한 바퀴 돌았으니,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그러지. 마침 수련 좀 하다 잠들면 딱 좋은 시간이니까."

"소협은 정말 수련을 좋아하시네요?"

"세상에 수련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다, 필요해서."

"필요해서 말인가요? ...그, 그런데 말입니다. 너무 혼자만 수련하는 것도 안 좋다는 거 아시는지요?"

"음?"

"결국 무공이라는 건 혼자 펼치는 게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얽히는 것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던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열기만 했다.

"소월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에 전부 묻혀 버렸기에.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녹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당소월을 닮은 얼굴이었다.

[1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4] 14화. 비무

"소월아!!!"

"...!"

무언가 말하려던 당소월이 입만 뻐끔거렸다. 그만큼 절묘한 타이밍에 끼어든 목소리였기에.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녹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당소월과 닮은 얼굴이었다.

"소월아! 소월아! 소월아!"

당소월의 이름을 마구 부르며 가까워지는 사내.

녹색 무복과 얼굴을 보아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길래 슬쩍 거리를 벌렸다.

"앗...."

이어질 일을 대충 예측한 당소월이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반면 달려오던 사내는 눈에 불을 켜며 경공을 펼쳤고.

파밧!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사내가 당소월의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별로 살이 빠지지는 않았는데요."

"내 동생아!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거 맞느냐? 혹시 모르니 의약당에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조금 지치긴 했어도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오라버니."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감히 어떤 무뢰배가 당가의 핏줄에 손을 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걱정 말거라. 반드시 놈들에게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으. 무뢰배가 아니라 사파의 무인들이었답니다? 그리고 이미 전부 죽었어요. 여기 있는 천 소협이 도와주셨거든요."

"사파의 무인이나 무뢰배나 거기서 거기지. 그나저나 소협이 ...소월이의 은인이시라면 내 은인이며 당가의 은인이기도 하지. 정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소. 당청이라고 하오. 지난 용봉지회 이후로 암룡(暗龍)이라 불리고 있소.

호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해맑은 미소로 포권을 취하는 당청.

콧대 높은 명문가의 자제. 심지어 용의 별호를 받을 정도의 실력까지 겸비한 사람치고 꽤나 소탈해 보인다.

나 또한 마주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하려던 순간. 당소월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어, 음. 오라버니 그게 말이지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하하! 간식 말이더냐? 당연히 챙겨왔지! 이 오라비가 방금 막 임무에서 복귀하긴 했으나, 그래도 동생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 올 여유 정도는 있었다. 매번 어디 나갔다 올 때마다 당과를 졸라대니 이것 참...."

품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내는 당청. 그 태연한 모습에 당소월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가요?! 그보다 오라버니!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닙니다! 천 소협은 단순히 은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버님께서 정해 주신 저, 정혼자라는 말씀을 드리려 했어요!"

"하하! 그런 농담은 됐다. 벌써부터 정혼자라니 그게 무슨....

"진짜랍니다."

"...?"

당청이 녹슨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듯 삐걱이는 움직임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정, 혼자?"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

"형님?!"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당청. 그런 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이번에 당 소저와 좋은 연을 맺게 된 천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좋은 연이라니! 설마...!"

"방금 뭐라고 했나요! 소협. 방금 저를 소저라고 부르셨지요?!"

"그런 적 없다 당소월."

"...."

"...."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 여동생을 바라보는 당청과,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처남 앞이니 격식을 차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

그렇게 기묘한 대치가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지려던 찰나,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길래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를 바꾸지. 여긴 너무 사람이 많다."

"...."

"...."

당소월과 당청은 묘하게 닮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비록 이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다고는 하나, 당소월은 현시점에서도 약관의 나이다.

당가의 멸문 이후로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독공의 성취가 높아지며 녹색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다시 검게 물들긴 했으나.

헐렁한 당가의 무복 너머로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곡선이라든가, 이목구비의 전체적인 인상, 그리고 목소리까지 내 기억 속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당소월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마교에게 모든 것을 잃은 뒤의 당소월.

당연히 그녀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들려오는 풍문으로 독왕이 얼마나 장절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당소월의 이야기를 통해 형제들이 얼마나 그녀를 아꼈는지 추측하는 정도였지.

그리고 이렇게 직접 당청을 마주한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들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당소월을 아꼈다는 것을.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도중. 분명 이쪽을 향해 호의 어린 미소를 짓던 당청이 도둑놈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방금 그 말은 사실인가? 소형제가 소월이의 정혼자라고?"

"예."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 아버님께서 그걸 허락하셨나?"

"...."

거기서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은 대체 왜 나오는 걸까.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는 않았으나, 독왕께서 직접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역시 독령지체 때문인가. 아니, 아무튼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하지. 나는 당청이다. 사천당가의 소가주이자 소월이의 오라비 되는 사람이지."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천휘라고 합니다."

"오! 정말 소월이가 내 이야기를 했나?"

"...사실 거짓말입니다."

"에잉."

혀를 차며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걷어차는 당청. 이 와중에 암기술의 묘리가 섞인 건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돌이 주변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설마 은근슬쩍 무위를 과시하는 건가 싶을 정도의 위력과 정확도.

얼추 느껴지는 당청의 경지는 완숙한 절정.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경지라도 일전에 상대했던 백살도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파의 무공으로 오른 경지인 만큼 큰 결함도 없을 테고, 절정쯤 되면 같은 경지라 해도 초입과 완숙은 상당한 수준 차이가 나니까.

한참을 툴툴거리던 당청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 아버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우리 당가가 소형제에게 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기도 하고."

"얼추 맞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과분한 제안을 받을 수 있었죠."

"하하! 상대가 내 동생이라면 어떤 남자를 데려오건 전부 과분할 테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

말없이 고개를 돌려 당소월을 바라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냐는 의미를 담아서.

내 시선을 눈치챈 당소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통한 뺨 옆으로 빼꼼 삐져나온 귀는 그 짧은 사이에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 이런 사람인가 보네.

"그보다 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려 줄 수 있겠나? 급보를 듣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라 정확한 일은 모르거든."

"어렵지 않죠. 우선 제가 당소월을 납치한 이야기부터 하자면...."

"잠깐. 방금 뭐라고 했나?"

"...당 소저?"

"아니! 그것 말고 납치 말일세!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겐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소월이 제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기에."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가장 처음부터 하나도 빠지는 것 없이 자세히 설명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고향을 나온 이유부터...."

"그 부분은 넘어가도 되네! 소월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때부터 설명해 보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당청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거, 바라는 것도 많지.

일단 원하는 대로 당소월을 처음 발견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

.

.

.

.

"그렇게 된 겁니다."

"소월이를 제압해서 납치? 우연히 발견한 자화배독초? 사파 무인 서른? 심지어 그중 하나는 절정 고수라니?"

성심성의껏 설명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사기꾼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구나.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차라리 독령지체에 대해서도 꿈에 나와서 알고 있었다고 하지 그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느 날 엄청난 악몽을 꿨더니, 뇌리에 독령지체에 관한 구결이 남아 있었지 뭡니까."

"뭐라?"

눈살을 찌푸린 당청. 그 심기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황급히 당소월의 옆구리를 찔렀다.

콕콕.

당청의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소월의 입이 열렸기 때문.

"하아. 방금 건 헛소리지만, 전체적으로는 소협의 말이 맞습니다 오라버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제가 전부 겪은 사실이랍니다. 전투가 끝날 때쯤 도착하셨지만 아버님도 그 자리에 있으셨고요."

"그건 정말 위험할 뻔했구나. 무사해서 실로 천만다행이야!"

"...형님이 물어보신 일입니다만, 어째 제가 말할 때는 하나도 안 믿으신 모양입니다?"

"그만큼 황당한 이야기 아닌가."

"당소월이 말할 때는 좀 태도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만."

"그 또한 당연한 일이지. 가족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나. 그런 의미에서 형님이라 불러주니 나 또한 소형제라 부르겠지만.... 자네와 내가 아직 매제라고 부를 만한 사이는 아니잖은가."

"...."

너무 당당해서 서운하기는커녕 유쾌하게 느껴질 정도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당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형제는 가문이 어떻게 되나? 사문은? 꽤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몇인가? 그리고 지금 어디 가는 건가?"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물어볼 건 다 물어보는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몸뚱이 하나만 들고 세상에 내팽개쳐졌더군요. 가문은 없습니다. 사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는 올해로 열다섯이고... 지금 가는 곳은 제게 배정된 연무장이죠.

막힘없이 흘러나온 대답. 이에 반응한 것은 당청이 아닌 당소월이었다.

"네? 천 소협의 연무장이요?"

"그래. 조금 전에 나와 함께 비무하자고 말하려 하지 않았나. 마침 잘 됐군."

"그으. 맞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단둘이 되기 위한...."

"단둘? 세상에. 그런 음흉한 계획이 있었을 줄이야."

"음흉한 일을 할 생각은 없답니다."

"그럼 무슨 일을 저지를 생각이었지?"

"음흉한 일 빼고 이것저것?"

"오."

대충 그런 느낌으로 건전한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자니, 당청이 대견하면서도 아련한.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당소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가.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나.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

"...오라버니? 저는 그냥 비무만 할 생각이었다고 말한 건데요?"

"비무!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당청의 축 처진 어깨가 활짝 펴지고, 반쯤 감겨 있던 눈동자에서 활기가 감돌았다.

꽤 살벌한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는 당청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소형제. 나와도 비무 한판 하지 않겠나?"

"싫습니다. 비무로 끝내지 않을 생각 아닙니까."

"나를 뭘로 보고! 나 당청일세! 사천당가의 소가주이자 암룡으로 이름 높은 후기지수가 바로 나일세!"

"훌륭하십니다. 저는 당가의 예비 데릴사위이지만, 별호는 아직 없는 터라."

"큭! 좋네. 나와 비무를 하면 승패와 상관없이 영약 하나를 내어주마! 어떤가?"

"끌리는 이야기지만, 이미 백독청혈단을 하나 받아먹어서 한동안은 다른 영약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벌써?! 대체 누가...아니, 영약이 안 된다면 새 검은 어떤가? 당가의 대장장이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다네."

"검?"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적사파의 문주가 쓰던 걸 뺏어 쓰고 있던 터라 아주 나쁜 무기는 아니지만, 당가의 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뭣보다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싸우기만 한 탓에 슬슬 이가 빠지기 시작했고.

"좋습니다. 해보죠."

벌써 기대되기 시작했다.

[1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5] 15화. 비무 (2)

나와 당소월. 그리고 당청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연무장.

그 중앙에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난 곳에 자리 잡고 선 당청이 손목을 풀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규칙을 짚고 넘어가세. 어디까지나 비무이니 독과 살초는 금지. 암기도 날붙이는 사용하지 않겠네. 무위의 차이가 있는 만큼 내공 사용도 제한해야 할 것 같다만, 어느 정도가 좋은가? 소형제에게 맞추지."

"일류 수준.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어떻습니까?"

"좋군.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어느 한쪽이 기권하면 거기서 비무는 종료. 인정하나?"

"바로 시작하죠."

"하하! 너무 급한 것 아닌가 소형제."

"그만큼 기대된다는 뜻입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뒷전이 된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해 보이는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었다.

"또 뭐가 불만이길래 그런 표정을 짓고 있나?"

"불만이라... 계획이 틀어진 건 그럴 수 있지요. 이제 납치범도, 은인도 아닌 정혼자가 되었으니 소협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은 사실이나, 오랜만에 본 오라버니가 반가운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비무가 끝나고 나서라도 괜찮다면 시간을 내겠다. 해가 질 때까지. 아니, 진 이후에도 상관없다."

"후후. 그건 고마워요. 다만 제가 불만스러운 건 다른 이유 때문이랍니다."

"다른 이유라면?"

"너무 들뜬 것 아닌지요. 검이라면 저도 구해다 줄 수 있고, 비무도 얼마든 어울려 드릴 수 있는데."

거기까지 말한 당소월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좀 더 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겨 주세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

순간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홧홧거리는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분노를 닮은, 하지만 그렇게 격렬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간질간질한 감각.

하지만 이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약간의 시간을 들인 끝에 나온 것은 작은 끄덕거림.

당소월도 나와 다르지 않은지 마주 끄덕여 주었으나,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까지는 차마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당청은 이러한 어색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제 그만 시작하지."

불편한 티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당청. 말로만 투덜대던 그의 기세가 날카롭게 정련되었다.

반사적으로 자세를 잡으며 검을 뽑자, 그제야 만족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린 당청.

"나는 소월이와 달리 꽤 까다로울 걸세."

"그 정도는 별호를 듣고 짐작했습니다."

당소월도 당가의 무인인 만큼 암기술을 상당한 수준까지 익히긴 했으나, 그녀의 주력은 결국 독공이다.

그렇기에 일전에는 피독주를 준비하는 것으로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

반면 당청은 암룡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암기를 주로 다루는 무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완숙한 절정의 고수인데 독공 없이도 강하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상대하기 버거울 수밖에.

하지만 이는 생사결이 아닌 비무. 그렇다면 승산이 있을 터.

내공을 끌어올리자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살기. 본래라면 한 사람에게 집중했을 그것을 최대한 넓은 범위로 퍼뜨렸다.

"이건...?"

주변을 가득 채운 옅은 살기에 당청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허나, 이게 누군가를 노리고 쏘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풀어헤쳤을 뿐이라는 걸 깨닫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왼발을 반보 앞으로 내디디며 물었다.

"후배에게 세 번 양보한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까?"

"소형제처럼 비무에 진심인 무인에겐 오히려 실례 아닌가. 양보 같은 건 없네."

"아쉽게 됐군요."

피식 웃으며 땅을 박찼다.

타닷!

조금이나마 혈도가 넓어진 덕인지 내공의 수발이 한층 원활했다. 그만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 풍경.

하지만 그것이 당청에게 닿을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가까워진 거리만큼 뒤로 물러난 당청. 그가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몸을 던지기 직전에 던진 암기뿐이었다.

너무 거리가 가까워 어딜 노리고 날아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 주변에 흩뿌려 둔 것이 있다. 이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내 살기를... 광랑탈명공의 기운을 헤집고 다닐 수밖에 없었으니.

날아오는 암기를 눈으로 보고, 기감으로 느끼며 검을 휘둘렀다.

챙! 채챙!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날아오는 철전(鐵錢)을 쳐내고, 발등을 노린 쇠구슬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피했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날아오던 쇠구슬의 뒤. 내겐 보이지 않는 각도에 숨어 있던 작은 구슬이 앞서 바닥에 부딪힌 구슬에 튕겨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으니까.

자모환(子母丸)인가. 크고 작은 두 개의 구슬로 상대의 인식을 혼란시키는 종류의 암기다.

단순히 먼저 던진 암기로 눈을 속이는 정도는 사파 무인들도 자주 쓰는 수법이지만, 이렇게 서로 부딪히는 각도까지 고려한 경우는 처음이네.

쥐고 있던 검을 바짝 당겨 잡으며 손잡이로 손목이 있던 부위를 감싸듯 틀었다.

까앙!

손잡이 끄트머리에 맞고 저 멀리 날아가는 자환(子丸). 제대로 맞았으면 손목이 부러지지는 않아도, 저릿함에 한동안 검을 쥐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거기서 비무는 끝이었겠지. 맞았다면 말이다.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자, 저 멀리서 당청이 눈을 가늘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능숙하군."

"당가의 무공답게 그 수준이 뛰어나긴 했지만, 묘리 자체는 사파의 암기 좀 던진다 하는 것들에게서 자주 보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절강성 출신이라고 했던가."

"예."

사파 무인에게 무공이란 이기기 위한 도구다. 독이나 암기는 물론, 인질을 잡거나, 돈으로 매수하고, 친한 척 접근해 뒤통수를 치는 일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당한 놈이 바보라는 풍조가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뭐, 지금은 정파 무인이 사라지고 사파 놈들만 남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것이다.

사흑련이 제대로 자리 잡고, 절강성 전체에 확실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 이후로는 조금 나아지더라.

사파의 조직이라도 어찌 됐건 조직을 유지하려면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당청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주의하게. 앞으로 보여줄 것은 소형제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무공일 테니 말이야. 날은 세우지 않았다지만, 한번 손을 떠난 암기는 멈춰 세울 수 없잖나."

"형님도 조심하십시오. 검은 도중에 멈출 수 있지만, 제가 적당히 하는 것에 서투릅니다."

"...소형제는 검을 드니 꽤 도발적이군 그래?"

"...습관이라 그런 거지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아, 그래. 사파 무인 중에는 얕보이면 죽을 것처럼 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소형제도 이상한 습관이 들었구만."

쯧쯧 혀를 차던 당청이 기습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보란 듯이 대놓고 던졌으나, 쥐고 있는 암기가 무엇인지, 어디로 던지는 것인지, 심지어 언제 던지는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

당가 무복 특유의 헐렁한 옷이 어깨의 윤곽을 가리고, 손은 절반 이상 숨겼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엽전이라는 특이한 형태 때문인지 불규칙한 궤도로 날아드는 철전. 바닥에 닿을 듯이 낮게 쏘아진 자모환.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사이에 숨어 마혈을 노리는 우모침.

특히 마지막의 우모침은 느슨하게 풀어둔 살기를 기감처럼 활용할 수 없었다면, 제대로 감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으리라.

감지할 수 있다고 하여 전부 대응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살기라도 실려 있었다면 궤적을 읽을 수 있었겠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비무. 순수하게 눈과 기감으로 꿰뚫어 보기엔 당청 암기술의 수준이 꽤 높다.

한번 튕겨서 날아드는 자모환 같은 경우에는 살기가 실려 있었다고 해도 궤적을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 같고.

하여 그냥 내가 할 수 있고, 제일 잘하는 일을 행하기로 했다.

무수히 많은 암기가 몰아치는 전방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무슨?!"

경악하는 당청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다리에 집중시킨 내공을 격발시켰다.

파앙!

용천혈에서 터져 나온 내공에 발바닥이 저려 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넓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튕겨 나간 철전이 바닥을 나뒹군다.

제대로 보고 쳐낸 것은 아니다. 그랬으면 절반밖에 대응하지 못했겠지. 이는 엄밀히 말해 암기를 쳐냈다기보다는 암기가 날아올 위치에 검을 가져다 댔다는 것에 가까웠다.

지금은 비무 중 아닌가.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영구적인 손상이 남지 않을만한 부위는 정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깔끔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부위는 더더욱 한정되고.

나는 그저 그런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흐읍!"

휘두른 검을 회수하는 대신, 검의 위치에 맞춰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에 집중했던 내공을 팔과 옷소매에 집중해서.

퍼엉!

옷자락이 허공을 후려치며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바람을 일으킨다.

당연히 우모침에도 내공이 실려 있으나... 워낙 가는 침은 내가 일으킨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궤도가 흔들리거나 위력이 현저하게 줄었다.

당청이 내공을 제한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

그렇게 침 끝이 엉뚱한 곳으로 틀어지거나, 힘을 잃은 우모침을 등짝과 한족 팔로 받아 냈다.

독을 묻힌 것도 아니고 단순한 바늘이다. 은밀하게 혈도를 찔리는 것만 아니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암기.

실제로 약간 따끔한 것 말고는 움직이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남은 것은 하단에서 짓쳐 드는 자모환. 바닥에 닿을 것처럼 날아든 크고 작은 구슬들은 실제로 바닥에 부딪히고,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넓게 퍼졌다.

발목이 아닌 하반신 전체를 뒤덮는 범위. 검 한 자루로 막기는 힘들고, 피하자니 앞선 두 암기를 막아 내느라 늦었다.

그러나 정교한 수는 그만큼 한번 무너졌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붕괴하는 법.

오른발을 깊게 뻗으며 몸을 옆으로 꺾었다. 동시에 팔을 쭉 뻗어 자모환 사이로 검을 밀어 넣었다.

터엉!

손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감각. 눈여겨 봐둔 모환을 검 끝으로 후려치자, 튕겨 나간 구슬이 다른 구슬과 충돌한다.

그렇게 부딪힌 구슬은 또 다른 구슬과 부딪히고, 튕겨 나간 구슬이 주변의 구슬과 부딪히기를 반복하며 난반사한다.

조금 전의 당청이 이미 던져진 자모환을 넓게 풀어 헤친 것과 같은 이치. 다만, 나는 자모환으로 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구슬이 서로 충돌하게 유도했을 뿐이다.

타다닥!

불씨 튀는 소리를 연상시키는 맹렬한 충돌음. 자모환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 바닥에 처박히는 것. 저 멀리 옆으로 튕겨 나가는 것....

다양한 방향으로 튕겨 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부 막아 낼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몸을 옆으로 틀어 자모환이 날아오는 방향에서 몸이 일자가 되도록 면적을 최대한 줄였건만, 그럼에도 팔뚝과 허벅지를 두드리는 쇠구슬들.

그래도 정면에서 얻어맞은 것이 아니라 옆으로 튕겨 나가며 빗겨 맞은 덕인지 맞아 줄 만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씨익 웃으며 욱신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타닷!

가까워지는 거리. 다시 그만큼 거리를 벌린 당청이 암기를 던졌고, 피할 것은 피하고 쳐낼 것은 쳐내며 맞을 것은 맞았다.

대신 이번에는 멈칫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경신법을 펼쳤다.

암기를 하나둘 날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수십 개를 단숨에 던지려면 꼭 한 호흡 멈춰 서야 하는 당청이다.

이쪽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것만으로도 거리는 조금씩 좁혀진다.

한걸음. 또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잔 상처와 멍이 들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검이 닿는 거리까지 이르자, 당청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거 아나 소형제?"

"모릅니다. 힘드니까 말 걸지 말아주시겠습니까, 형님."

"당가는 독기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소형제처럼 말이야."

"그럼 딱 한 대만 맞아주시죠."

"진검 들고 무서운 소리하지 말게."

더는 암기를 던질 만한 거리가 나오지 않자, 자세를 바꿔 권장법의 기수식을 취하는 당청.

가까이서 치고받는 거라면 자신 있다. 딱 옆구리의 옷자락만 베어 낼 생각으로 검을 휘두른 때였다.

챙그랑-

"...?"

분명 손에 쥐고 있을 터인 검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니, 여전히 검 자루는 쥐고 있다. 검신이 부서졌을 뿐이지.

안 그래도 혹사시켜 온 검에 수많은 암기를 쳐내며 생긴 충격이 누적된 상태였다.

휘두르는 힘마저 버티지 못해 부러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하."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부러질 줄은 생각 못 했지만 말이다.

만약 회귀 전처럼 검기라도 길게 뽑아낼 수 있었다면....

아니지. 이건 어디까지나 대련이다. 그렇기에 당청도 내공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리지 않았고, 암기도 날이 없는 것만 사용하지 않았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한숨을 푸욱 내쉬며, 중간이 뚝 부러진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제가 졌습니다."

"어? 어어. 그렇군. 좋은 비무였네, 소형제."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수식을 풀고 마주 포권을 하는 당청.

그렇게 내 아쉬운 패배로 비무가 끝난 순간이었다.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고 있던 당소월이 호다닥 달려와 당청을 쏘아붙였다.

"오라버니! 이제 막 치료가 끝난 사람을 다시 환자로 만들면 어떻게 하시나요!"

"화, 환자 말이냐?"

당황한 당청에게 보란 듯이 내 팔과 다리를 가리키는 당소월.

"보세요! 비 맞은 아기 새처럼 떨고 있잖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다만."

하도 자모환에 얻어맞은 탓에 팔다리가 살살 떨리긴 하지만, 진짜 그 정도는 아닌데.

예상치 못한 비유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부정해 보았지만 당소월에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는 소협을 데리고 의약당에 가볼 터이니, 오라버니께는 이곳의 뒷정리를 부탁드릴게요!"

"그게 말이다 소월아. 생각보다 소형제의 무위가 뛰어나 어쩔 수 없었...."

"흥! 그래도 적당히 하셨어야지요. 나이도 무위도 훨씬 많으신 분이 저보다 어린 천 소협을 이리 핍박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당소월이 당청의 말을 끊고는 나를 자신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포옥.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자세.

사실 회귀한 이후로 어려진 몸뚱이에 불만이 참 많았다. 작아진 키와 약해진 근육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던지.

"음."

하지만 지금. 뒤통수에 닿는 푹신한 감각에 처음으로 어려진 몸이 좋아졌다.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챈 당청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지만.

"오라버니는 이제 제가 아니라 아버님에게 가보세요. 왔으면 왔다고 인사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소, 소월아...?"

당소월의 콧바람에 다시 울상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처량한 모습에 뒤통수를 좀 더 깊게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캉.

"으음."

분명 비무에서는 졌지만, 어쩐지 이긴 기분이었다.

***

하나뿐인 여동생이 제 새끼라도 되는 양 천휘를 애지중지 끌어안은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황망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당청.

그가 어찌어찌 정신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스르륵.

"응?"

어느새 베여 있는 옷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분명 천휘의 검은 부러졌다. 휘두르려 힘을 준 그 시점에 부러진 탓에 검신이 아예 닿지도 못했다.

허면, 이 팔랑이는 옷자락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검풍?"

검의 예리함을 간직한 채로 쏘아진 바람. 그 위력은 기껏해야 옷이나 머리카락을 베어 낼 뿐, 사람을 죽일 정도의 위력은 없다.

그렇다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지만.

적어도 신검합일. 혹은 그에 준하는 깨달음을 얻은 검수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다.

"소형제의 경지는 기껏해야 일류 수준이었거늘."

당청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만히 자신의 옷깃을 내려다보던 당청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버님께 물어볼 게 많을 것 같군."

그리 중얼거리며 당진천이 있을 가주실로 향하는 당청이었으나, 연무장을 세 걸음 정도 나섰을 때 발길을 꺾어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정리는 하고 가야지."

우울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암기를 줍기 시작한 당청.

당가의 암기는 유출을 우려해 시비에게 뒷정리를 맡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에휴."

당청은 세상이 조금 미워졌다.

[1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6] 16화. 비무 (3)

괜찮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와 의약당에 눕힌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검은 언제 받아볼 수 있나?"

"아마 오라버니가 아버님께 인사 올린 뒤에 야장 분들을 찾아가지 않을까요? 조금 이상한 면도 있으시지만,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다만, 지금은 팔부터 나아야지요. 이 상태로는 검을 받아도 휘두르기 힘들 거예요."

"기껏해야 타박상이다. 뼈가 상한 것도 아니니 내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분명 오라버니는 승패 상관없이 만들어 준다 했는데 왜 그리 무리하셨나요? 비무라는 걸 알면서도 보는 사람 맘 졸이게."

"글쎄. 정혼자 앞에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는 어떤가?"

"그걸 저한테 물어보는 시점에서 이미 아니라는 뜻이잖습니까."

"이런. 들켰군. ...사실 이유는 이미 비무 중에 말했다. 나는 적당히 하는 법을 잘 모르거든."

"소협 실력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참에 묻겠는데, 당소월 네 눈에 내 실력은 어때 보이나?"

"경지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강하죠. 성취가 재능을 못 따라가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요."

"재능이라. 솔직히 없는 편은 아니지."

"없진 않다는 표현은 너무 겸손한 것 같네요. 저 이래 보여도 오대세가로 이름 높은 당가의 딸이랍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것만 먹고, 좋은 무공을 익혔음에도 소협에겐 이르지 못했죠."

"형님 상대로는 졌잖나."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요? 오라버니는 소협이랑 나이 차가 열 살은 되기도 하고, 현 후기지수 중 가장 뛰어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용의 별호를 받으신 분이기도 해요. 반면 소협은 어떤가요? 제대로 무공을 익힌 지는 얼마나 되셨지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당소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정확히 보긴 했네. 회귀를 겪은 지금의 나는 육체와 내공이 깨달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중이니까.

회귀라는 기현상의 존재를 모르는 당소월의 눈에는 내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겠지.

물론 근본 없는 무공으로 어찌어찌 초절정에 오른 적 있는 만큼 꽤 괜찮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신한다.

다만, 당소월이 생각하는 만큼 엄청난 수준은 아니리라.

"아마 당소월 네가 내게서 본 것들 중 절반은 재능이 아닌 각오에서 나오는 강함일 거다."

"마음먹기에 따라 강해질 수 있다면 무공 같은 건 익혀서 뭐 한답니까."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뭐라고 예를 들어야 할까... 그래. 잠깐 논검을 해 보도록 하지."

"논검이요?"

"일전에 상대했던 백살도객과 녀석이 불러 모은 떨거지들과 다시 싸운다고 가정해 보는 거다. 단, 자화배독초를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보관하여 독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로 말이다."

"앗, 잠시만요... 했어요."

눈을 감고 무언가 고민하던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지금 속으로 상상 중인 건가?

평온하게 눈을 감은 당소월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옆에 나는 없다. 도망치고 싶어도 포위망이 너무 촘촘해 그마저도 쉽지 않다. 자, 이런 상황에서 어찌하겠나?"

"으음. 장렬히 싸우다 죽는다. 같은 건 안 되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나를 홀아비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최대한 살아줬으면 한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죠. 솔직히 답이 보이질 않잖아요. 암기술만으로는 힘들어도, 독을 함께 쓴다면 일류 넷에 그 이하 서른 정도는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만...."

"뭐가 문제인가?"

"백살도객이 문제네요. 저는 제 실력에 자신이 있습니다. 천 소협과 비교하면 부족하겠지만, 같은 일류의 경지에서도 특출난 수준이겠지요. 하지만 상대는 절정의 고수 아닙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예?"

"절정의 고수도 사람이다. 심장에 칼이 박히면 죽고, 목이 잘려도 죽고... 독에 중독되어도 죽음에 이른다. 너라면 한 수 위의 상대라도 해볼 만한 것 같다만."

거기까지 들은 당소월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결국 시간의 문제이지요. 경지가 높은 무인은 중독되더라도, 내공을 이용해 독기가 스며드는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체외로 배출시킬 수도 있겠고요."

"중독되어 죽음에 이르는 사이에 먼저 당할 것 같다는 소리인가?"

"예에. 처음부터 저를 상대하고자 준비해 온 이들 아닙니까. 피독주가 됐건, 해독약을 종류별로 챙겨두었건, 독공에 대한 대비 또한 착실히 해 왔을 거예요."

"그렇겠지."

"물론, 독에 중독되는 순간부터 전력이 급감하긴 합니다. 독기를 억제하는데 내공과 심력을 소모해야 하니까요. 만약 암기로 견제하고 경공으로 거리를 벌리며, 더는 버티지 못하게 될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가능성이야 있겠습니다만... 적은 혼자가 아니잖습니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절정의 무인은 암기로 견제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형님처럼 까다로운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모를까 단순히 빠르게 여럿을 날리는 정도로는 부족할 테니까."

"경공은 어떻습니까?"

"당가의 경공은 훌륭하지. 속도만이라면 조금 밀리거나 비슷한 수준일 거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포위된 상황이다. 어느 정도는 거리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도망치는 건 지극히 힘들 것 같군."

"으읏, 어떻게 해야...."

혼자 중얼거리며 이런저런 수를 궁리해 보는 당소월. 하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지, 미간의 주름만 깊어질 뿐이었다.

꾹꾹 눌러 펴주고 싶다는 충동을 참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잠시. 결국 당소월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눈을 떴다.

"모르겠네요. 뭘 어떻게 해보아도 괜찮은 수가 떠오르질 않아요."

"그런가? 내가 보기엔 몇 가지 시도해 볼 법한 방법이 있다만."

그리 말하자 당소월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정말요? 물론 소협이 실제로 비슷한 일을 해내긴 하셨습니다만, 어찌 됐건 제가 백살도객과 일대일로 맞붙을 시간을 벌어 주어서 가능한 일 아니었습니까."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소월 네 이야기를 한 거였다만."

"아."

"물론, 나는 혼자 싸웠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

"...."

조용히 붕대로 감은 팔을 콕콕 찌르는 당소월.

"아프다."

"많이 아파요?"

"참을만한 수준이긴 하다만."

"그럼 참으세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손을 멈춘다. 대신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팔짱을 낀 당소월이 흥흥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소협이라면 어떻게 싸우실 건가요?"

"간단하다. 우선 떨거지들 사이로 몸을 밀어 넣겠지. 사파 무인이라 하여 피도 눈물도 없이 바로 동료의 등을 베지는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면 모를까."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포위당한 것이 검이 닿는 위치에서 포위당한 셈이 되는 것 아닙니까. 더 위험하지 않나요?"

"그렇지만도 않다. 주변을 둘러쌀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정해져 있잖은가. 거기에 따로 합격진을 익힌 것도 아닐 테니 손발이 맞지 않을 거다."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국 무기란 사람이 손에 쥐고 휘두르는 것이다. 투로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

한정된 인원이 한정된 투로로 공격해 올 뿐이니 지레 겁먹고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거기에 내가 다른 무인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백살도객을 향한 견제이기도 하다. 아까 말했듯 사파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배신하진 않으니까. 손바닥을 뒤집는 속도가 빠르긴 해도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답답한 마음에 나와 함께 다른 녀석들까지 베어 버리려고 도를 휘둘렀다가는 기껏 불러 모은 무인들이 그대로 적으로 돌아서겠지.

그들 입장에선 먼저 배신당한 셈 아닌가. 가만히 당해 주진 않을 거다. 도망치거나, 한칼이라도 휘두르며 살기 위해 발악하겠지.

내가 사파 놈들 사이에서 버티는 동안은 백살도객이라도 조심스레 싸울 수밖에 없겠지.

"호쾌함이 사라진 도법은 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도 그 위력이 반감된다. 그리고 떨거지들의 무공은 내 몸에 쉬이 닿지 못하겠지. 일시적이나마 가장 위험해 보이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된다는 소리다."

"...그다음은요? 결국 잔뜩 지친 상태로 한 수 위의 고수를 상대해야 하잖아요."

"어차피 나보다 강하다면 지쳐 있건 팔팔하건 큰 차이는 없다. 아니지. 지친 상태라면 오히려 이를 이용해 방심을 유도할 수 있겠군."

그리 말하고는 내 가슴팍에 검지를 대고 대각선으로 주욱 그었다. 최근에 생긴 흉터를 덧그리듯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은 위험하지만 그만큼 잘 통하는 수법이거든."

"...."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당소월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어영부영 버티다 죽는 것보다, 어찌 됐건 활로가 있으니 해볼 만하지 않겠나. 한 번만 실수해도 바로 목이 날아가겠지만."

"...."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군. 요는 그거다. 나를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는 것."

"왜죠? 천 소협은 인정받는 게 싫으신가요?"

"설마. 나도 사람인 만큼 누가 떠받들어 주면 기분 좋지. 다만, 지금의 너는 나를 명백히 자신의 윗줄이라 단정 짓고 있지 않나."

그게 싫었다.

나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운 좋게 초절정의 벽을 뚫었을 뿐인 사파 나부랭이 아닌가.

반면 당소월은 화경의 경지에 올라, 마지막 순간까지 천마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몇 없는 절대고수였고.

지금이야 회귀 전의 깨달음 덕에 내가 앞서 나가고 있을 뿐. 당소월은 나보다 훨씬 대단해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이십 년. 얼핏 보면 긴 시간이지만, 그 안에 천마라는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다.

여차하면 평생 원망 받을 걸 각오하고서라도 당소월만 데리고 도망칠 생각도 있지만....

짧게나마 당가에서 생활하며 느꼈다. 당소월은 어떻게든 복수에 나설 거라는 것을.

그럴 생각은 절대 없지만, 아예 사지 근맥을 끊고 단전을 폐하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폐인이 된 상태에서도 단념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국 천마가 마교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전에 최대한 강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지금처럼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내 밑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그런 마음만 담아 입을 열었다.

"그러니 나를 네 벽으로 삼지 마라."

"네?"

"나는 너와 함께 나아가고 싶은 것이지, 앞길을 가로막는 한계가 되고 싶지 않다."

"한계...."

"당소월은 얼마든 천휘보다 강한 무인이 될 수 있다. 반대 또한 마찬가지겠지. 나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 생각하기 시작한 당소월. 그녀의 작은 입술이 열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천 소협."

"음?"

"자화배독초를 삼키지 않고 따로 보관 중이라 하였지요? 그렇다면 이를 흡수하는 대신 전부 소모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일시적으로 독공의 위력이 배가될 테니까요."

"위험하다."

"예. 위험할 겁니다. 독령지체를 타고난 저라도 독성을 못 이겨 몸이 붕괴할지도 모르겠지요."

"십중팔구는 그러하겠지."

"하지만 그 자리의 전원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

회귀 전과 똑같은 발상에 다다른 당소월.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다. 네가 본 나의 강함이란 겨우 그런 것에 불과하다. 너무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의 수련에 집중해야...."

"그리고 소협이 쓰러진 저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 주시겠지요."

"뭐라?"

내 말을 끊고 한 마디를 덧붙인 당소월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닌가요? 첫눈에 반해 저를 납치한 천 소협이라면 어떻게든 달려와 줄 것 같은데."

"...."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소협이 위험하면 당연히 구하러 갈 거예요. 그러면 비장한 각오로 목숨을 걸어 얻은 강함이 아니라 저를 믿어서 나오는 강함이겠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천 소협이야말로 자신의 실력을 폄하하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

한 방 먹였다며 의기양양한 태도가 실로 얄미웠지만, 그렇기에 자꾸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1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7] 17화. 성도

지난 비무 때 다친 팔이 낫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천 소협. 오늘 잠깐 같이 나갔다 오지 않겠습니까?"

다짜고짜 내가 있는 연무장에 찾아와 그리 말하는 당소월.

이른 아침부터 얼굴을 보는 건,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고, 갑작스러운 권유였다.

"지금부터 말인가?"

"설마요. 일어난 지 얼마 안 지나서 머리도 부스스하고, 대충 세수만 해서 꾀죄죄한 데다가, 옷도 평소에 편하게 입는 무복이잖아요. 당연히 나아아아중에 점심시간에 맞춰서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소리였지요."

"...?"

순간 당소월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어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곱게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시킨 검은 머리카락.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으면서 은근한 기품이 묻어 나온다.

거기에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에 윤기가 흐르는 것은 물론, 중간에 엉키는 부분 하나 없었다.

부스스하기는 무슨. 분명 좋은 기름을 발라 정성 들여 빗질한 게 분명하다. 직접 한 건 아니고 시비가 해주었겠지만.

다음은 얼굴. 원래도 잡티 하나 없는 피부긴 했지만, 그 위에 옅은 화장까지 하니 본래의 미모가 확 살아난다.

적어도 절대로 꾀죄죄하다고 평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이 또한 시비가 준비해 준 거겠지만.

마지막으로 옷이다만... 무인이 무복을 입지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정리를 마친 뒤. 당소월의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시비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지 마라."

"네? 그게 무슨... 잠시만요. 천 소협 방금 제 이야기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었나?"

그리 되묻자 돌아오는 것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코웃음이었다.

"허, 참. 나 참."

"말을 해라. 말을."

"이보세요 천 소협. 저는 지금 천 소협을 이야기한 거거든요?"

"나 말인가?"

멍하니 되묻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당소월. 아직은 내 몸이 덜 자란 탓에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굴욕적이군.

속으로 투덜대며 검을 다시 집어넣는 사이. 당소월이 내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각 방향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기 시작했다.

"무슨 까치집도 아니고 이게 뭔가요?"

"어차피 새벽 수련을 하고 나면 땀을 흘리지 않나. 그때 시원하게 씻고 아침 식사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요즘 매일 젖은 머리로 같이 밥 먹잖아요."

얼추 머리 정돈을 마친 당소월이 이번에는 내 눈가를 엄지로 부드럽게 비비기 시작했다.

"기왕 세수할 거면 좀 꼼꼼하게 하시지요. 칠칠치 못하게 눈곱을 붙이고 다니시면 어떻게 하나요?"

"그냥 잠 좀 깰 겸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뿐 아닌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제대로 씻으니 괜찮다."

"하아...."

한숨을 푸욱 내쉰 당소월이 반걸음 물러서더니, 자신을 보란 듯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천 소협. 제가 있잖습니까. 매일 아침 천 소협 하나 보려고 이렇게 꾸미고 오는 제가 있잖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다. 본래 자신의 할 일을 마치고, 저녁쯤이 되어서야 찾아오던 당소월이 요즘에는 아침에도 잠깐 얼굴 비추고 가곤 했으니까.

"저희는 어찌 됐건 정혼자입니다. 아직 정혼식은 치르지 않았으나 조만간일 테고, 언젠가는 혼인하게 되어 평생을 서로의 얼굴만 보며 지지고 볶고 살겠지요."

"그야 뭐어. 그렇겠지."

"하지만 저는 정혼자다운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생각한 정혼자다운 일을 해보기로 했어요. 아침마다 찾아오는 것도 그래서고요."

"...."

이런 이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기야 나는 이렇게까지 딱 붙어 있진 않았으나 회귀 전의 당소월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그동안 서로의 볼꼴 못 볼 꼴도 많이 봤고, 각자의 인생사가 험난하기도 하여 사람이 좀 삭막해지기도 했지.

거기에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천마라는 괴물이 세상을 불태운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당장의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당소월 입장은 전혀 다를 것이다.

이제 막 약관이 된 어린 나이. 무림초출에서 겪은 사건 사고. 갑작스러운 혼담.

잘은 몰라도 나보다 훨씬 더 세상을 기대하고, 환상을 품고 있다는 건 확실하겠지.

돌이켜보면 나도 천마고 나발이고 결국 당소월이랑 같이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것 아닌가.

너무 무심했나 싶어 반성하던 것도 잠시. 아까까지만 해도 서운하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당소월이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소협은 그냥 이대로 계속해 주시는 게 낫겠네요. 마침 제가 다섯 살이나 누나 아닙니까. 대신 제가 지금처럼 소협의 머리도 매만져 주고, 눈곱도 떼주면 이건 이것대로 정혼자다운 일이 아닐런지요?"

"...그냥 앞으로 좀 더 신경 쓰겠다."

"흐흫. 잘 생각하셨어요. 천 소협은 어차피 누구 만날 일도 없다고 하셨지만, 매일 아침 이렇게 찾아오는 제가 있잖습니까? 막 엄청 꾸미진 않아도 소협한테 보여 주려고 나름 단정히 준비하는 제가 말이지요."

그리 말하고는 반보 물러나 양팔을 활짝 벌린 당소월. 보란 듯이 한 바퀴 빙글 도는 모습에 절로 흘러나오는 헛웃음.

반면 한층 더 기세등등해진 당소월이 뻔뻔함과 당당함의 그 어딘가쯤 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천 소협은 오늘 저랑 같이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이젠 물어보는 게 아니라 확정이군. 헌데, 나갈 수는 있는 건가?"

"네?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저는 소협이랑 달라서 다짜고짜 사람을 납치 감금하는 짓은 안 저질렀습니다만."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것도 모자라 죽을뻔하지 않았나. 독왕께서 그리 쉽게 허락해 주실 것 같지는 않다만."

지금은 다른 관련자들은 있는지, 혹시 배후가 따로 있는 건 아닌지 조사하는 중이라나.

확정이 끝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본보기를 보여 줄 예정이라고 했는데....

회귀 전의 당소월에게 들은 바로는 자잘한 협력자는 있어도, 이렇다 할 배후는 없었다고 했으니 이대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요는 그거다. 당가 입장에서는 아직 당소월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

그런 와중에 다시 밖을 쏘다니겠다고 하면 나라도 안 된다고 할 테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당소월이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당연히 어디 멀리 간다는 뜻이 아니라, 성도의 저잣거리나 둘러보자는 뜻이었죠."

"성도가 그리 작은 동네는 아니다만."

당가가 자리 잡기 전에도 사천성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성도였다. 아무리 오대세가의 일원이라지만 성도 전체가 앞마당은....

"아하?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성도 어디에나 당가의 사람이 있으니, 사실상 앞마당이나 다름없답니다. 호위가 따라붙겠지만 아버님도 허락하셨어요."

"...보통 오대세가가 그렇게 영향력이 큰가?"

"어, 음. 사실 당가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영향력만 따지면 조금 떨어지는 편인데요? 무공의 특성상 조금 폐쇄적인 편이거든요."

"뭣."

"오대세가 중에서도 가장 체급이 큰 남궁세가같은 경우에는 아예 안휘성에서 왕처럼 군림하는걸요? 실제로 제후 출신 혈통이라는데 현 황조의 이야기는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네요."

"...."

과거의 나는 어디까지나 먹고 살기 위해서 검을 들었다. 명예에는 관심 없었으니 굳이 정파 무인들과 부딪힐 이유 또한 없었다. 절강성, 강서성, 광동성 정도만 왔다 갔다 하며 정파의 영역을 피해 다닌 것도 그래서고.

나중에 만나본 정파 무인 대부분은 마교에게 패배해 몰락한 처지였다. 그들로부터 한때 정파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파는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사흑련 같은 집단이 생긴 것도 놀라운 일인데 말이지.

"그런 거라면 알겠다. 점심때라고 했지만, 정확히 언제 보면 되지?"

"으음...제가 준비되면 다시 소협을 찾지요. 그동안 편하게 계세요."

"아니. 이번에는 내가 가마."

"네? 하지만 저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시기가 안 맞으면 한참 기다려야 할 수도 있는데요?"

"기다리면 되지. 지금껏 당소월 네 쪽에서 찾아오기만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마."

"어머...."

당소월이 배시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소협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도록 하지요."

약속을 나누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당소월. 그녀가 연무장을 나서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약속 시간에 맞춰 당소월을 찾아갔으나, 지금 준비 중이니 잠깐 나가 있으라는 소리를 들었다.

애초에 좀 운이 없으면 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그러려니 하며 기다리던 도중이었다.

무심코 내려다본 내 옷차림에 슬쩍 인상이 찌푸려졌다.

"불편하군."

그 비싸다는 사천 비단... 촉금(蜀錦)으로 만들어진 녹색 장포.

피부에 닿는 감촉도, 겉으로 보이는 멋도 그만한 값을 하지만 길고 치렁치렁한 것이 자꾸 몸에 휘감기는 것 같아 움직이기 불편하다.

내 담당 시비에게 당소월이랑 저잣거리에 잠시 다녀올 예정이니 괜찮은 옷을 준비해 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이런 걸 가져오더라.

심지어 한 벌만 가져온 것도 아니다. 동료 시비의 도움을 받아 십여 벌의 옷을 늘어놓고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했고.

전부 녹색을 기조로 만들어진 옷인 터라 솔직히 내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나 골랐더니 이번에는 옷에 어울리는 신발 여러 켤레를 꺼내는 게 아닌가.

신발까지 정했음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길래, 뒷머리만 질끈 묶으며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세상에. 모든 명가의 자식들은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견디며 살아온 건가? 대체 어떻게?

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사흑련에 들어간 이후로는 나름 큰돈을 만져보기도 했으나... 그렇게 번 돈 대부분은 새로운 무공과 영약을 구하는데 써버렸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무공과 영약에는 한계가 있는 터라, 그러고도 부족했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실로 치사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사흑련에도 장서각이 있고, 가끔 포상으로 좋은 무공을 하사하곤 했는데.

내게 맞는 무공이 없다면서 돌려보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당시의 내가 속해 있던 철혈당은 실력은 좋지만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문제아만 모아둔 터라 썩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던 건 사실이고, 사흑련주가 같은 화경의 경지에 올랐으면서 사파 사회에서 겉돌던 철혈당주를 견제하는 것 또한 이해한다.

하지만 공을 세웠음에도 그냥 돌려보내다니. 사파의 지존이 하는 짓거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회귀한 지금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나, 생각할수록 화가 나 속으로 투덜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드르륵-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당소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에 봤을 때와 세세한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좀 더 화사하게 바뀐 화장과, 화려한 궁장과 그에 걸맞은 장신구.

이 모든 것이 합쳐지자 전체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변했다.

내가 아는 당소월이 무인이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명가의 여식이었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당소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입을 헤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던 당소월과 시선이 마주쳤다.

"하!"

"풋!"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동시에 터져 나온 웃음. 어색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졌다.

한참을 서로 낄낄대던 와중. 너무 웃어 글썽이는 눈물을 훔친 당소월이 짐짓 거만한 태도로 턱을 까딱였다.

"그럼 가볼까요 소협?"

"누구 분부인데 감히 거스르겠나."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월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호위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독신인가 보다.

[1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8] 18화. 성도 (2)

내가 사흑련에 들어가 혈랑이라는 별호로 활동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의 직속 상사였던 철혈당주는 여러모로 최악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람은 일평생 무언가를 배워 가면서 살아간다는 것.

걷는 법, 말하는 법, 친우를 사귀는 법, 검을 휘두르는 법, 일하는 법,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법, 가족을 돌보는 법, 옛 선인들의 말에서 도리를 찾는 법 등등.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평생을 배워도 분명 다 배우지 못하리라. 당연히 누군가는 배운 것을 누군가는 배우지 못하고, 같은 것을 배우더라도 그 성취의 더딤과 빠름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 배워야 한다. 지금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느니라.'

그리 말하는 철혈당주의 목소리는 회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려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무엇이 그리도 아쉬웠는가. 비루하게 태어나 배운 것 하나 없는 칼잡이였던 당시의 내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자신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철혈당주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은 기억한다.

하여 처음으로 글이라는 것을 배웠다. 덕분에 나는 비급을 읽고 더 많은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익힌 것은 셈하는 법이었다. 어디 가서 사기당한 뒤에야 사기꾼을 쫓아가 베어 버리는 일이 줄었다.

그 외에도 함께 대작하며 술을 배우고, 사흑련이 돌아가는 구조를 배웠으며, 가끔은 무공을 배우기도 했다.

검술은 실전에서 다져졌고, 심법은 스스로의 삶을 되짚으며 정립한 것이지만, 경신법은 철혈당주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래. 분명 우리의 마지막은 최악이었지만, 그 과정마저 최악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검을 휘두르는 법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다. 본인은 극구 부정하겠지만 철혈당주는 내 부모나 스승 비슷한 존재였으리라.

...다만, 정혼자와 저잣거리에 놀러 나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같은 건 배우지 못했다.

철혈당주도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으니 가르쳐 달라고 해도 그럴 수 없었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막막한 심정을 담아 당소월을 바라보았다.

"어디 갈지 따로 계획해 둔 곳은 있나?"

"아뇨? 근데 그냥 집 앞에 놀러 온 건데 어렵게 생각할 거 있나요? 일단 밥부터 먹고 대충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죠."

"그것도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월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당가의 대문을 지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펼쳐지는 시끌벅적한 풍경.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자 사람이 확 줄어든 한적한 대로가 펼쳐졌다.

안 좋은 거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반대로 너무 좋아 보이는 곳이라 그런 것이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대로를 지나는 마차는 화려했으며, 양옆에 늘어선 건물은 드높았다.

"...비싸 보이는군."

"괜찮아요. 어차피 천 소협에게 돈 내라는 말은 할 생각 없었던 데다가, 이번에 가려는 곳은 당가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저랑 함께 가신다면 공짜랍니다."

"사줄 생각도 없었다. 내 전 재산은 진작에 당소월 네 만두값으로 다 썼으니까."

"세상에. 설마 아직도 그걸로 꽁해 계시는 건가요? 하지만 제 생각은 변함없답니다. 벽곡단은 음식이 아니에요."

"먹고 배부르면 그게 음식이지."

"당가의 숙수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그렇게 열심히 먹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 영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만."

"...배고파서 먹은 거다, 배고파서."

"성장기라서, 였던가요? 후후. 그렇지요. 아직 천 소협은 더 클 때지요."

히죽이며 자신의 정수리에 손을 대며 키를 재는 시늉을 하는 당소월.

아주 조금. 정말 약간 내가 작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열세에 불과하다. 실제로 회귀 전에는 내가 한 뼘은 더 컸으니까.

아니지. 이번에는 더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혔고, 끼니도 거르지 않았으니 더 크게 자랄 것이다.

"오 년 뒤에 두고 보지."

"오 년 뒤에도 이렇게 같이 외출하겠다는 소리지요? 그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차라리 노괴 취급받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만."

"에이. 그랬어도 큰 차이는 없었을걸요? 제가 천 소협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한 데는 나이 말고도 다른 이유가 여럿 있답니다."

그리 말하며 거드름을 피우듯 뒷짐을 진 당소월.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을 가로지르더니, 빙글 돌아 이쪽을 바라보며 뒷걸음질로 걷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 천 소협이 첫인상만큼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요."

"그 말을 내 손에 죽은 놈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말이군."

"설령 다른 사람한테는 살기를 풀풀 풍기더라도 저는 예외잖아요? 그거면 충분하지요."

"허어...."

망설임 없이 대답한 당소월이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는 역시 천 소협이 저한테 홀딱 반해 있어서 그런 거려나요?"

"그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닌데 목숨을 거는 사람은 얼마 없지요. 심지어 보상을 논하는 자리에서 다른 모든 것을 마다하고 저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전 제가 무슨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았을 정도랍니다."

"...잘 찾아보면 몇 명쯤은 있지 않겠나. 사내란 당소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것들이다."

"어쩌면 소협 말대로 누군가는 있을지도 모르죠. 그야 저는 이렇게나 예쁜 데다가 당가의 여식이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소협이 가장 먼저였다는 점이지요."

"예쁘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말하고도 부끄럽지 않냐는 질문은 굳이 하지 않겠다. 하나도 안 부끄러워 보이니까."

"칫."

가볍게 혀를 찬 당소월이 다시 몸을 돌려, 내 눈이 아닌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는... 아니지. 역시 이건 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말을 꺼내 놓고 멈추면 더 궁금하다는 걸 모르나?"

"하지만, 말하기 전에 잠깐 생각해 보니 천 소협에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내용이란 말이에요."

"당소월 네가 무례해 봐야 뭐 얼마나 무례하겠나. 잊었나? 내가 절강성 출신인 것을."

그 말에 당소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만, 대체 절강성이 어떤 곳이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사파의 본거지. 라고 해도 잘 체감이 안 되겠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런지."

잠시 고민하다 괜찮은 일화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우선 나는 고아다."

"엇, 네에...."

"너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지 않아도 된다. 두 분 모두 내가 너무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이렇다 할 기억도 없으니."

"그렇게 말하면 더 반응하기 어려운 거 아시는지요?"

"무얼.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거다."

피식 웃으며 그리 말하자 당소월이 걷는 속도를 늦춰 다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마치 이제부터 이어질 말을 경청하겠다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양민이 득세한 사파 무인의 손에 무너지는 일은 절강성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밖에 나가서 일하던 남편이 사소한 이유로 칼을 빼든 흑도에게 목숨을 잃었다. 차마 아이를 굶길 수 없었던 아내는 이를 악물고 남편을 죽인 이들 밑에서 싸구려 창기로 일했으나, 재수 없게도 술 취한 손님에게 맞아 죽었고.

그렇게 세상에 혼자 남은 아이는 어려서는 구걸을, 조금 자라서는 살길을 모색한 끝에 결국 어미가 그러했듯 원수의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내가 그놈들 밑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 것 같나?"

"...."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꾸욱 다문 당소월. 그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이런. 기껏 놀러 나왔는데 너무 우중충한 이야기만 했군. 걱정 마라. 결국 놈들은 전부 내 손으로 베었으니."

"복수, 였습니까?"

"아니. 살기 위해서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내 부모님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대로 있다가는 부려 먹힐 대로 부려 먹히다 골병들어 죽었거나, 위험한 일에 화살받이로 내던져져 개죽음당했을 것이다.

회귀 전에는 실제로 위험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당시의 내가 빠르게 강해진 건 재능도 재능이지만, 이러한 환경 탓도 있었으리라.

죽지 않으려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괜찮다고 한 거다. 최소한 당소월 너는 내게 악감정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닐 테니까."

"...."

한차례 입술을 짓씹은 당소월이 촉촉해진 눈을 크게 떴다.

"천 소협. 조금 전에 하려던 말을 이어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사실 저는 천 소협이 모르는 것들을 제가 알려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답니다."

"음?"

"사파의 방식이 아닌 정파의 방식. 아니,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네요. 그저 평범한 삶의 방식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무인이 평범을 찾아 무얼 하나. 검이 무뎌질 뿐이다."

"검이라 하여 언제나 날카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제가 보는 소협은 저를 예외로 두고 있을 뿐, 항상 날을 세우고 있는... 검집 없는 검처럼 느껴졌거든요."

"부정하진 않겠다. 허나, 그게 배워진다고 배워지는 것인가?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데다가 잘못됐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제가 무조건적으로 옳다거나, 천 소협을 바꾸겠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너무 주제넘은 짓이잖습니까. 다만, 저는 보여 드리고 싶을 뿐이지요."

"보여 준다?"

"예에. 만약 소협이 평생을 소협의 길 위에서 살아와서 모르는 것뿐이라면, 다른 길도 있고 이쪽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 할 뿐입니다. 가능하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말이지요."

문득, 내게 시답잖은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던 철혈당주의 말이 생각났다.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살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 보라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당소월은 철혈당주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멍하니 당소월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살짝 붉어진 얼굴. 무인답지 않게 호흡까지 흐트러진 것이 자신이 말해 놓고 내심 불안한 모양이다.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뭐, 뭔가요! 사람이 기껏 진지한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게 웃기나 하고."

"무얼. 생각보다 간지러운 말이어서 놀랐을 뿐이다. 혹시 따로 준비라도 해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답니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당소월. 이건 예상외인데.

혼자 뭐라 말하면 좋을까 중얼거리며 연습하는 당소월을 떠올리자 조금 즐거워졌다.

"그런가. 그렇지는 않은 건가."

"이익...! 그 표정. 조금 짜증 나는 거 아시나요? 됐으니까 이제 들어가죠! 여기서 먹을 거랍니다."

명월루(明月樓)라는 현판이 적힌 큼직한 주루 앞에 멈춰 선 당소월.

"아직 낮이니 술 없이 음식만 주문할 생각인데. 괜찮겠지요?"

"상관없다. 헌데 여긴 아무리 봐도 꽤 비싸 보이는 가게다만, 혹시 당소월 네가 알려 주겠다는 것이 평범한 삶이 아니라 부자의 삶이었나?"

"짓궂은 농담을 하시려는 것 같지만, 애초에 천 소협은 제 정혼자가 된 시점에서 평생 돈에 궁할 일은 없어졌답니다. 적어도 제가 쓸 수 있는 금액만큼은 천 소협도 쓰실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이냐?"

"아마도요? 어쩌면 제게 오는 돈을 천 소협과 함께 써야 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렇다 쳐도 모자람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직접 당가를 둘러보고 오대세가의 재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알았다. 사파처럼 죽어라 긁어모으지 않으니 돈은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제 보니 굳이 긁어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더라.

만약 내게 거금이 주어진다면, 그 돈으로 무공도 사고, 검도 좋은 걸로 사고, 영약도 사고... 생각해 보니 전부 당가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것들이군.

"...잠깐 생각해 봤더니, 돈이 있어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만."

"그럼 그 부분도 같이 알아보는 걸로 할까요? 우선 식사라도 하면서 말이에요."

"음."

내 팔을 잡아당겨 주루로 이끄는 당소월.

따스한 그 손길에 나도 오늘 하루만큼은 무공도 천마도 잊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다소 자극적인 사천요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 간식을 사 먹고 기예단의 묘기를 구경했다.

그 외에도 성도 여기저기를 누비며 순수하게 즐기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새 해는 저물어 날이 어두워졌고, 가게는 하나둘 등불을 걸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말한 것은 아니나, 슬슬 당가로 돌아갈 생각에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조금 가까워진 간격으로.

그렇게 도착한 당가. 예상치 못한 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아. 널 해하려던 자들의 배후를 찾아냈다."

"네?"

"그게 무슨...?"

배후가 있었다고?

무언가 회귀 전과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19] 19화. 예상치 못한 소식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해가 떠 있을 때보다 분주해 보이는 당가. 묘하게 뒤숭숭한 분위기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잘 모르겠네요. 어차피 오늘 저녁은 아버님이랑 오라버니랑 같이 먹기로 했으니, 그때 물어보도록 하지요."

"으음."

고개를 끄덕이며 외당을 지나 내당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당청과 눈이 마주친 것은.

"...렇게 하거라. 어차피 가주님이 함께 가시니 독보다는 암기를 넉넉히 챙겨서, 음?"

자기보다 나이가 배는 많아 보이는 무인들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던 당청.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오른다.

"소월아! 내 동생!"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무사들을 잠시 세워둔 채, 빠르게 걸어온 당청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기뻐하거라! 감히 소월이 네 목숨을 노리던 작자들의 배후를 알아냈단다!"

"아. 그래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다만 나는 당황으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에 당소월에게 듣기로는 습격 사건에 배후는 없었으니까.

당시에도 독왕 당진천이 직접 나서 복수를 천명했지만, 결국 자잘한 조력자 몇을 처리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끝났다고 했던가.

헌데 그 배후를 찾았다니. 무언가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당가가 무고한 이를 배후로 지목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뭔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데....

"아."

그런가.

회귀 전에는 당소월이 초주검 상태로 돌아온 것이 상당히 유명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얼굴을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 또한 널리 퍼졌고.

반면 이번에는 당가 안에서야 연락이 끊겨 난리가 났을 뿐, 밖에서는 평범하게 무림행을 나섰다가 조금 일찍 돌아왔다 정도로 보였겠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는 이들도 기껏해야 남자가 생겨, 독왕이 직접 둘을 데려왔다.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진상을 알고 있는 것은 당가와, 당가에서 도움을 요청한 개방 정도이리라.

즉, 배후라는 녀석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르는 사이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회귀 전에는 당소월의 소식이 널리 퍼지며 몸을 빼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었을 테고.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머리 쓰는 일은 내 특기가 아니니까. 다만, 당청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당소월의 목숨을 노리는 배후가 있었다면.

어떤 놈들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당가의 직계를 건드린 놈들이다. 아버님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으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할 게야."

웃는 상으로 말하는 당청이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당가만큼 은원에 집착하는 곳이 없긴 하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형님. 대체 어떤 녀석들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음? 소형제도 당사자니 안 될 건 없지."

고개를 끄덕인 당청. 어찌 됐건 내가 당소월을 도와줬다는 걸 상기한 걸까. 평소보다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식사 시간에 아버님께 듣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교다."

"...예?"

"그 복수에 미쳐 아무 데나 시비 걸고 다니는 미친 것들이 중원까지 다시 기어들어 와 감히 소월이를 노리는 흉계를 꾸몄다는구나."

"...."

순간 머리가 굳었다.

이 시기의 마교가 무시당하는 거야 놀랍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무인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복수심은 있으나 무력한 양민들로 시작된 조직이니까.

그 수가 많을 수가 없고, 무력 또한 기껏해야 문파 하나 수준에 불과하니 누가 위협이라 생각하겠는가.

천마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마교의 모든 무공을 뜯어고쳐, 복수귀들에게 칼을 쥐여 주지만 않았다면 쭈욱 그랬겠지.

헌데, 여기서 마교가 나올 줄이야.

마교가 왜 당소월을 노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천마의 얼굴. 무위에 비해 어려 보이는 것이, 한차례 반로환동을 겪은 것이 확실해 보이는 그가 이미 마교주의 자리에 오른 상태라면 목적은 하나뿐.

중원 침략을 위한 밑 준비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간다.

으득.

당소월의 얼굴 절반을 녹여 버린 것도, 목숨을 가져간 것도, 그리고 고달픈 삶의 끝에 간신히 손에 쥔 작은 행복마저 앗아간 것이 전부 마교의 짓이라면.

받은 것은 돌려주어야지.

자꾸만 흘러나오려는 살기를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일전에 만들어 주신다 약속하신 검. 언제 완성됩니까?"

"엇, 으흠! 마침 너희가 외유를 나간 사이에 완성됐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지금 가면 받아 볼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한차례 꾸벅이고는 당소월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하니 잠시 대장간에 들러 보겠다. 식사 시간에 맞춰 네 방으로 찾아가마."

"예? 예에. 그러시지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을 뒤로하고 일전에 견학한 적 있는 대장간으로 향했다.

***

당가의 내당. 그 깊숙한 곳에서도 꽁꽁 숨겨진 곳에 존재하는 널찍한 건물과 그보다도 큼직한 수차(水車).

오직 풀무를 돌리겠다는 이유로 따로 길을 내어 당가까지 끌어온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대공사였겠지만, 당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으리라.

흔히들 당가를 독과 암기의 조종(祖宗)이라고 부른다.

정말로 모든 독공과 암기술이 당가에서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을 만큼 잘 가다듬어 발전시킨 것은 사실.

그렇기에 이 둘은 사천당가를 떠받드는 두 기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독과 암기는 결국 그 의외성에서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밑천이 중요한 거야 모든 무공이 그러하다. 애초에 무공의 발전이란 파훼와, 파훼의 파훼를 반복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다만, 당가의 독공과 암기술은 파훼에 지나치게 취약하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

어떤 독을 쓰는지 알고 있다면 미리 해약을 준비하면 그만이고, 어떤 암기를 어떻게 던지는지 알고 있다면 이를 주의하는 것만으로도 대응하기 한층 쉬워지잖는가.

그렇기에 당가는 폐쇄성에 집착했다.

정말 귀한 독이나 약재는 밖에서 사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만독당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조합한다. 외부인이 그 공식을 유추하는 것조차 힘들도록.

집안까지 강물을 끌어와 수차를 돌리고 풀무를 돌리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여타 대장간처럼 강가에 지었다가는 암기의 정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수차 없이 풀무를 돌리자니 화로의 화력이 불안정해지는 상황.

거기서 누군가 떠올린 것이다. 어차피 집도 넓은데 그냥 한 귀퉁이에 강물이 흐르도록 길을 파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수차를 돌릴 정도의 물길을 내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대공사였겠지만, 당가의 재력은 이를 가능케 했다.

...라고 당소월이 저번에 자랑스레 이야기했었지.

내가 감탄한 부분은 따로 있었지만.

본래 기술이란 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무공조차 비무행이라는 기행이 버젓이 존재할 정도고.

그런데 놀랍게도 당가는 폐쇄성을 유지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쌓았다.

뿌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살수 집단인 살곡. 놈들마저 당가의 앞에서는 독이건 암기술이건 한 수 접어야 한다면 믿어지겠는가.

그중 암기는 무공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 자체의 정교함이 곧 위력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며 독까지 뿌려댄다는 추혼비접(追魂飛蝶).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게 뽑아낸 강철 실인 은형사(隱形絲).

그리고 이렇다 할 준비동작 없이 터져 나오는 화약 암기... 묵연침통(墨煙針桶)같은 것이 그러하다.

회귀 전의 당소월이 주로 독공을 사용했던 것은 단순히 독령지체를 타고나 독공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당가의 멸문 이후로 비전 암기를 재현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다고 했었지.

큰 기대를 품고 도착한 대장간 앞. 활짝 열어 놓은 문을 통해 후끈한 열기가 들이닥친다.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각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금속음.

이제 막 화로에서 꺼내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망치에 얻어맞아 불똥을 눈물처럼 흘렸고, 조금 떨어진 쪽에서는 나이 지긋한 야장들이 얼추 모양이 잡힌 암기를 안쪽으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안쪽 어딘가에서 마저 완성시키는 거겠지.

당소월이 견학시켜 줬던 만큼 여기까지는 나도 출입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복잡한 암기가 완성되고 귀한 암기를 모아 둔 곳은 당가의 직계 혈족에게만 허락된 곳이라고 한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잡일을 하던 주변의 앳된 도제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괜찮겠나."

"앗, 넵! 그으, 누구신지...."

빠릿하게 대답하다 말고 조심스레 되묻는 녀석. 지금의 나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데, 외출용으로 입은 비단 녹의를 입고 있으니 당황한 거겠지.

"소가주께서 나를 위해 준비한 검이 완성됐다고 해서 들렀다만."

"아! 아씨를 구해주셨다는 그분이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스승님한테 말씀드리고 올게요!"

고개를 꾸벅이고는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는 도제. 그가 덩치 큰 중년인 앞에 멈춰 서더니 팔을 마구 휘적이며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있기도 하고,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망치 소리에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마 대충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처음에는 익숙하다는 듯 도제의 말을 대충 흘려넘기던 중년인이 흠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못 보던 검을 들고 돌아왔다.

아직 검신을 보지 못해 확신은 못하겠지만, 검 자루와 검집만 봐도 상당히 괜찮은 검일 것 같았다.

코앞에서 우묵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야장이 입을 열었다.

"살기가 그득하십니다."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사람에게서 검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면 보통 무사분들은 살기가 짙다고 하시죠."

"나름 억누르고 있었던 터라 조금 놀랍군요."

"일평생을 두드려 온 것이 날붙이입니다. 제게 겨누어진 것이 아닐 뿐, 검집에 집어넣지도 등 뒤로 숨기지도 않은 검을 못 알아보지는 않습니다"

그리 말하며 내게 검을 건네는 야장.

"백련정강으로 만든 검입니다. 한번 뽑아 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받아 든 검을 뽑으며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쥐기 편하고 놓치기 힘든 검자루, 저항 없이 검을 토해 내는 검집. 은색으로 빛나는 검신은 내 얼굴을 비추고, 예리하게 선 날은 만족스러웠다.

특별한 재료가 아닌 그저 양질의 철을 여러 번 두드려 만든 검.

그렇기에 야장의 솜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야장은 뛰어난 장인인 것 같고.

만약 재료가 조금 더 좋았다면 명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겠지.

"훌륭한 검이군요. 당가에 뛰어난 야장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짧은 시간에 이만한 검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당가의 무인이라 하여 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야장.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헌데 이 검으로 가장 먼저 무엇을 베실 겁니까?"

"원수요. 내 정혼자를 해하려 든 괘씸한 것들이지."

"과연. 아가씨의...."

고개를 끄덕인 그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처음 벨 상대로는 더할 나위 없군요."

동감이다.

[1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0] 20화. 예상치 못한 소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