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0화. 예상치 못한 소식 (2)
"새 검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외출용으로 화려하게 꾸며 입은 옷을 갈아입어 다소 편해진 복장의 당소월이 약간 가시가 돋친 어조로 그리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겠다만. 설마 내가 혼자 검을 가지러 가서 조금 삐졌나?"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로 삐지겠습니까. 물론 기왕 정혼자다운 일을 하겠다며 외출한 거 마지막까지 정혼자답게 마무리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 하지만요."
"하긴.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데 이 정도로 마음 상하지는 않겠지."
내 말에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던 당소월의 입술이 점점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삐진 당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어른스러운 여자가 취향이다."
"...구체적으로는요?"
"그렇군. 구체적으로는 녹색 옷이 잘 어울리고, 자기가 연상이라며 어린애처럼 으스대기도 하지만, 갑작스레 생긴 정혼자를 배려해 여기저기 안내해 준다거나, 정혼자다운 일을 하자며 밖으로 데려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려나."
"흠흠. 좋아요. 오늘은 소협의 정성을 봐서 이 정도로 봐주도록 하지요."
짐짓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하지만 이미 볼이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난데없이 손부채를 부친다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헤실대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그렇게 약속 장소에 반쯤 도착했을 무렵. 당소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천 소협. 역시 아버님을 따라 제 죽음을 사주한 이들께 가시려는 건가요?"
"그럴 생각이다."
"...."
당소월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 결심한 얼굴로.
***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접객실. 문 앞에서 가볍게 기척을 내고 문을 열자 일전과 비슷한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과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식탁을 채운 음식들, 상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당진천.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없던 당청과 처음 보는 중년인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묘하게 무거운 분위기려나.
평소에도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종종 당소월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당진천이었으나, 오늘은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고 부른 건 아닌듯하다.
아니, 실제로 그렇겠지. 당청이야 그렇다 쳐도 괜히 이 자리에 못 보던 얼굴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 차이를 나만 느낀 건 아닌지 당소월이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숙부님도 함께 계셨군요."
"뭐. 대충 짐작한 것 같지만 이번에는 나름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중년인. 우락부락하다거나, 기세를 주변에 흘리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위협적인 외견.
그 와중에 언행만큼은 가벼운 것이 여러모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당소월의 숙부라는 호칭에서 짐작 가는 것이 있기도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당소월과 연을 맺게 된 천휘라고 합니다."
"당유진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가주님의 수신호위로 일해서 얼굴 볼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 저번에 보내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으려나?"
"예. 마침 제게 딱 필요한 것이라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몸이라도 튼튼해야 할 테니까."
"?"
작게 중얼거린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당진천이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인사도 끝났으면 이제 자리에 앉게."
"네."
당소월과 나란히 자리에 앉자 눈썹을 꿈틀거리는 당진천. 다만, 익숙해진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선 들게. 유진이 녀석 말대로 할 이야기가 있다만, 이게 제법 밥맛 떨어지는 이야기인 터라."
뭐, 당연한 일이지. 지금도 신경 쓰이는데 자세한 내용을 듣고 나면 밥이 넘어가지도 않을 거다.
먼저 회과육을 한점 집어 먹은 당진천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월아. 오늘 천 소협과 저잣거리에 나갔다고 들었다만...."
신변잡기에 가까운 잡담. 오늘 나가서 무슨 재밌는 일이 있었는지, 새로 받은 검은 마음에 드는지, 그리고 당가에서의 생활은 편안한지 등등.
이런저런 주제로 담소를 나누며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당진천이었으나, 식사가 거의 끝나고 슬슬 할 이야기도 끝날 무렵이 되자 그의 기세가 변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기세를 발출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단순히 존재감이 뚜렷해진 것에 가까웠지.
하지만 화경의 고수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압박감이고, 권위가 되었다.
당소월의 아버지가 아닌, 사천당가의 가주로서의 일면을 내비친 당진천이 입을 열었다.
"소월이의 습격을 사주한 배후를 찾았다. 마교의 끄나풀이라더군"
"형님께 들었습니다.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말해 보도록."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꽤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처음에는 개방에 의뢰했지만, 돈을 빌려준다거나, 마차를 내어주는 등.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협력한 이들만 나오고 진짜 대가리는 안 나오더군. 그래서 반쯤 포기했네만...."
여기까지는 회귀 전에 들은 이야기와 똑같다.
"갑자기 하오문에서 연락이 오지 뭔가. 이번 일을 저지른 건 광동성에 숨어들어 당가에 원한을 가진 사파 무인을 선동한 마교도들이지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며 말일세."
"조금 뜬금없군요. 갑자기 하오문이라니."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하여, 하오문이 보내온 정보를 그대로 개방에 보내 교차 검증했네만 한 치의 거짓도 없더군."
과연. 이제 좀 이해가 된다.
회귀 전과 달리 몸을 뺄 시기를 놓친 놈들이 하오문에게 포착됐고, 하오문은 하오문대로 당가의 분노가 튈까 두려워 바로 정보를 넘긴 것이리라.
놈들이 발견되었다는 광동성에는 하오문의 본단이 있으니 의심받고 싶지 않았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당진천이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일. 내가 직접 놈들을 한 줌 독수로 만들어 버릴 걸세."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음?"
"당소월을 죽이려던 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를 죽이려던 이들이기도 합니다. 은혜든 원한이든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주는 것이 무림의 법도 아니겠습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다만... 정말 괜찮겠나?"
"복수는 남의 손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 말에 당진천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남의 손이라니 좀 서운한 말이구만. 곧 자네도 당가의 일원이 될 텐데 말이지."
"허면, 당가의 가훈에 따르는 것으로 하죠.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저는 아직 열 배의 원한을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겠네. 내일 점심 전에 출발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해 두게."
"예."
흔쾌한 수락.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천마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이 시점에서의 마교는 상당한 저평가를 받고 있다.
아니, 실제로 약한 게 맞다. 천마가 강한 거지 마교도까지 강한 건 아니니까.
본격적으로 중원을 침공해 온 시기에도 천마를 제외한 화경의 고수는 없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마교의 끄나풀을 상대하는데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무위를 자랑하는 당진천이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을 터.
그러니 이건 본보기인 것이다.
감히 자기 딸을, 당가의 여식을 해하려 한 것들을 철저하게 밟아 버림으로써 가문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본보기.
은혜도 원한도 뭐든 과할 정도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몸담은 것만으로도 거미줄처럼 엉겨 붙는 무림의 은원에 대처하는 당가의 자세니까.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했으니, 나 하나 끼어든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겠지. 대수롭지 않게 수락한 건 그래서일 테고.
미리 들었던 이야기인 만큼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는 당소월. 그녀가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버님."
"말해 보거라."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너까지 말이더냐?"
"예. 천 소협의 말대로 어찌 됐건 이 복수의 주체는 저희 아닙니까. 아무리 아버님이라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두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되묻는 당진천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당소월이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 소협이 가는데 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으. 저희가 이제 남도 아니니까요."
"...."
말없이 복잡한 표정을 짓는 당진천. 그 모습에 당소월이 황급한 한마디 덧붙였다.
"거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님이 함께 있잖습니까. 제가 두려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으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귀여운 아부. 하지만 아부라는 걸 알아도 내심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걸까.
웃음을 참기라도 하듯 움찔거리는 당진천의 입꼬리. 애써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한 가지만 확인하면 허락하마. 자화배독초의 흡수는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끝났답니다. 지금도 적당한 수준이라면 독공을 펼칠 수 있고, 사흘 뒤면 완전히 흡수가 끝나 전력을 다할 수 있겠지요."
"딱 좋군. 어차피 광동성까지 가는 데 최소 사흘은 걸릴 테니, 그동안 이동과 흡수에만 집중하거라."
"네!"
선물이라도 받은 양 활짝 웃으며 답하는 당소월. 이에 당진천이 결국 참지 못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당청이 끼어든 것은.
"아버지. 저는...."
"청아. 너는 집안을 지켜야지. 독혈대와 장로 어르신들이 남아 있겠지만, 어찌 가주의 혈족이 완전히 자리를 비운다는 말이냐."
"아뇨. 제가 집안을 잘 지키고 있을 터이니, 오시는 길에 기념품이나 사달라고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만."
"뭐라?"
"광동성의 백화주가 그렇게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이긴 한데 원숭이가 빚은 술이라지 뭡니까. 대체 무슨 맛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어이없어하는 당진천 앞에서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는 당청.
"축하주로 딱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 렇지. 축하할 일이긴 하구나."
마지못해 동의하는 당진천.
뭐지? 설마 당가에는 은원을 하나 갚을 때마다 축하하는 전통이라도 있는 건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당진천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소월아. 그리고 천 소협."
"네?"
"무슨 일이십니까?"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둘의 정혼식을 올리겠다."
그리 말한 당진천이 내키지 않아 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혼식 이후에는 장인어른이라 부르게. 나 또한 소협이 아닌 사위라 부를 터이니."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지금 말고 나중에! 돌아와서 정혼식까지 마친 이후의 이야기일세!"
"명심하죠, 장인어른."
"끄으윽...!"
당진천이 뒷목을 잡았다.
너무 그렇게 사위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2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1] 21화. 광동성으로
다음 날 아침. 외당에 모인 열 명 내외의 무인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당소월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당가 특유의 넉넉한 무복으로도 가리기 힘든 굴곡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는다.
슬쩍 시선을 피하며 괜시리 허리춤의 검이나 만지작대고 있자니, 당소월이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소협은 긴장되지 않으십니까? 참 태연한 표정이네요."
"새삼스럽게 무얼. 나는 위험하지도 않은 일 앞에서 긴장할 만큼 섬세한 사람이 아니다."
"네네. 소협과 달리 섬세한 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답니다. 그러니 어서 저를 진정시켜 주시겠나요?"
그리 말하며 조금 전까지 자신의 가슴에 올려 두었던 손을 내미는 당소월.
"...."
말없이 이를 바라보고만 있던 것도 잠시. 입술을 삐죽 내민 당소월이 흥흥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여기서는 손 좀 잡아 주면서 괜찮다, 이번에는 저번과 다를 거다. 뭐 그런 이야기라도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지요?"
"으음."
댓 발 삐져나와 있는 당소월의 입술을 검지로 꾸욱 눌러, 다시 집어넣고는 피식 웃었다.
"진정할 필요는 없다. 은원을 갚기 위한 것이라 한들, 결국 사람 죽이러 가는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살인에 무뎌지지 마라. 죽고 죽이는 일에 무감각해지는 순간이 네 검이 무뎌지는 날이다. 그리고 무림은 무딘 검이 살아남기엔 썩 좋은 곳이 아니지."
"...."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당소월이었으나, 이내 진지한 기색으로 무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진정시켜 달랬더니, 긴장하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요."
"으음."
"하지만 소협이 저를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당소월이 내 검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짐짓 장난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저는 검 안 쓰는 건 아시지요?"
"...비유다 비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자, 이를 따라 하듯 히- 하고 미소 지은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었답니다. 아무튼,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지기는 했네요."
"그럼 됐다."
괜히 퉁명스레 답해보았지만, 당소월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릴 뿐이었다.
"좋아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당장 해야 할 일만 생각하도록 하지요! 예를 들자면... 암혼대 분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한다던가 말입니다."
"이제 와서 묻는 말이다만, 암혼대의 수준은 어느 정도 되는 건가? 설마 여기 모인 이들이 평균인 건가?"
누군가 보는 사람도,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열 명 내외의 무인들.
얼마나 강하지는 직접 싸워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일단 느껴지는 기세로는 하나하나가 완숙한 일류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얼마나 빨리 닿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노력하면 오를 수 있는 경지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약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 오를 수 있는 현실적인 한계라는 뜻이니까.
대부분의 무인이 삼류와 이류 어딘가에서 생을 마감하고, 일부는 일류에 올라 작은 무관을 차리거나 외진 마을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실제로 적사파의 문주는 일류 무인이었고, 그 밑의 잡것들은 대부분 이류 수준이었지.
절정의 벽이 너무 두껍고, 검기의 위력이 너무 강해 일류라 하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지만... 어찌 됐건 한 분야의 대가들이 보잘것없을 리 없잖은가.
헌데 지금 눈앞에는 그러한 일류 무인이 일개 대원으로 모여 있는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아무리 당가가 대단한 성세를 자랑하는 오대세가의 일원이라는 걸 알아도 놀라울 수밖에.
회귀 전에는 사흑련이나, 마교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연합에서나 볼 수 있던 모습이다.
아무래도 사파는 각자도생이라는 느낌이 강해 크게 세력을 일구기 어렵단 말이지.
어찌어찌 성공하더라도 조금만 약해지면 주변에서 바로 물어뜯어 버리기도 하고.
내 말을 들은 당소월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설명드리지 않았었지요. 당가에는 여러 무력대가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독혈대(纛血隊)와 암혼대(暗魂隊)랍니다."
"얼핏 듣던 이름이군."
"둘 이외에는 가문의 경비를 관리하거나, 성도의 사업체를 관리하거나, 수련에 집중하며 자잘한 일을 맡거든요."
유사시에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순수 무력대라는 건가. 당연히 그만큼 신경도 많이 썼을 테니, 평균적인 무위가 높은 것도 이해는 간다.
"둘 다 당가의 무공을 두루 익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독공에 재능이 있는 자는 독혈대로, 암기술에 재능 있는 자는 암혼대로 들어가지요."
"과연. 그래서 이번에는 암혼대만 모인 건가."
당진천은 독왕이라는 별호가 붙을 만큼 독공에 조예가 깊은 고수고, 당소월에 이르러선 아예 독령지체를 타고났다.
독이 부족할 일은 없으니, 암기를 잘 다루는 이들 위주로 데려가려는 것이겠지.
"주요 무력대인 만큼 지원도 넉넉하답니다. 봉급도 많고, 자신에게 맞는 상승무공도 전수해 주고, 주기적으로 하급 영약도 내어주거든요."
"어디 가서 받기 힘든 대접이긴 하군."
속으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궁금하면 자네도 한번 암혼대에서 굴러보는 게 어떤가?"
어느새 다가온 당진천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제 당가의 사람이 됐는데, 당가의 무공을 좀 익혀 봐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무공은 언제나 환영입니다만, 암혼대로서 활동하는 건 조금 내키지 않군요."
"왜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겸양은 말게."
"반대입니다. 제가 너무 뛰어나 저도 암혼대도 서로 불편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올라온 이들만 모인 곳에 갑자기 당소월의 정혼자랍시고 들어온 신입이 무위까지 높아 버리면 뭘 명령하기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자네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만은 좋지 않네."
"이번 기회에 자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 드리겠습니다."
"허어. 그래. 기대하지 않고 지켜보겠네."
이 나이대 특유의 치기라 여긴 걸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흘려 넘기는 당진천.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그의 양옆에 따라붙은 두 남자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한 명은 어제 식사 자리에서 잠깐 봤던 당진천의 수신호위라는 당유진이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내가 모르는 이였다.
노년에 가까운 사내. 머리는 반쯤 희끗하게 물들었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어지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다.
느껴지는 기세는 회귀 전의 나와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즉, 최소 초절정의 무인.
그가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공자께서 소문 자자한 소월 아가씨의 정혼자시군요. 저는 부족하나마 저들을 이끄는 당철영이라고 합니다."
"암혼대주셨군요. 당소월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암혼대에 대해서도 잘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다. 허나, 독공을 못 쓰는 동안 당가에서 가장 암기를 잘 다루는 분에게 암기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하! 아가씨께서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이거 참. 기쁘면서도 가주님 앞에서 들으니 멋쩍군요. 저도 아가씨께 공자님의 검술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오."
스윽 옆을 돌아보자, 그에 맞춰 내 시선을 피하는 당소월. 진짠가 보네.
"그런 칭찬은 나한테 직접 해줬으면 한다만."
"그랬으면 이렇게 능글맞게 굴 것 같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정답이다. 이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나. 기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칭찬할 점은 없나? 지금이라면 다 들어줄 수 있다."
"...."
입을 꾸욱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당소월. 다만 귀 끝이 열이라도 오른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당진천이 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슬슬 출발할 생각이니 따라오거라."
그리 말하고는 앞으로 한걸음 나서는 당진천. 깔끔하게 대열을 맞추고 서 있던 암혼대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든다.
이를 따라 천천히 걷는 당진천. 바로 뒤를 당유진과 암혼대주, 그보다 조금 더 뒤를 나와 당소월이 따라 걸었다.
그렇게 우리가 암혼대원들 사이를 가로질러 선두에 서자, 뒤를 돌아본 당진천.
그가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는 암혼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조금 전까지와 확연히 다른 무게감 있는 시선. 화경 고수로서의 강렬한 기세와는 조금 달랐다.
높은 곳에 서는 자 특유의 좌중을 휘어잡는 위압감에 가까웠지.
당진천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이 자리의 모두에게 또박또박 들리도록 약간의 내공을 실어 입을 열었다.
"다들 이야기는 들었을 거다. 소월이가, 당가의 여식이 듣도 보도 못한 무뢰배 놈들에게 노려졌다는 사실을."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기세가 약간 거칠어지거나, 힐끔힐끔 당소월을 바라보았을 뿐.
어느새 진정한 당소월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받아 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허나, 다행히도 놈들은 전부 여기 있는 천 소협의 손에 대가를 치렀지."
이번에는 내게 집중되는 시선. 흥분한 와중에도 눈빛에 담긴 것은 고마움이나 감탄 같은 것이었다.
지금껏 당가에서 생활하며 종종 받았던 시선이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영 익숙해지질 않는 감정이기도 하다.
조금 부담스럽단 말이지.
"그리고 이번에 그 무뢰배 놈들을 부추긴 배후를 알아냈다. 마교. 진작에 중원 밖으로 내쫓겨, 슬쩍슬쩍 간만 보던 버러지들이 감히 당가의 혈족에게 원한을 품었나 보더군."
돈이 됐건 무공이 됐건, 당가가 가진 무언가를 노리는 거라면 굳이 당소월을 죽이려 들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살려서 몸값을 받아 냈어야 하지.
하지만 놈들은 당소월의 목숨을 노렸다. 그리고 마교에 몸담은 이는 보통 두 부류다.
무인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선 이.
그리고 중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루지 못할 복수심에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힘을 갈구하는 이.
당연한 말이지만 전자는 굳이 중원 깊숙한 곳까지 숨어들 생각을 않는다. 애초에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다시 중원 땅에 찾아오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니 굳이 중원에 몰래 잠입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써서 당소월을 죽이려 할 정도라면....
원한에 몸을 맡긴 후자겠지. 그것이 당가를 향한 원한인지, 당소월은 그 중간 과정일 뿐 진짜 목표는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로 원한을 쌓았으니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지 않겠나."
당진천의 담담한 목소리에 동조하듯,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작은 욕설. 그리고 미처 억누르지 못한 암혼대원의 기세가 거칠게 흔들린다.
살기 등등해진 암혼대를 향해 당진천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우리는 오늘 당가의 가훈을 실천하러 간다."
와아아-!
당진천의 말이 끝나자마자 울려 퍼지는 환호성. 그 중앙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복수를 위해 나선다는 상황이 자체가 영 어색했기에.
"...."
말없이 검 자루를 쓰다듬고 있자니 당소월이 조용히 내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개온다.
"긴장하셨는지요?"
"그럴리가."
"하지만 제 눈에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니 특별히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를 돌려주듯 비슷한 듯 다른 답을 내놓는 당소월.
그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이게 모범답안이랍니다."
"...."
그 말뜻을 알아듣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앞으로는 참고하도록 하지."
[2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2] 22화. 광동성으로 (2)
사천성과 광동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만, 일류 무인. 그것도 빠르고 가볍기로 유명한 당가의 경신법을 익힌 이들이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닐 터.
"싸우러 가는 것임을 감안해 체력 분배를 신경 쓰더라도 칠 주야면 능히 도착...."
"네? 저희 말 타고 갈 거예요, 소협. 애초에 아버님께서 사흘에서 나흘 정도 잡고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리 말하는 당소월.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아무리 무인이 빠르고 체력도 좋다지만, 말보다 빨라지려면 특수한 경공을 익혔거나 절정 이상의 무위에 올라야 한다.
거기에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탈것을 타고 다니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은가.
다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나는 말 타는 법을 모른다만."
"말 타실 줄 모른다고요? 왜요?"
이번에는 고개를 반대로 갸웃거리며 되묻는 당소월. 순수하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듯한 반응에 이쪽이 되레 당황한 것도 잠시.
뒤늦게 무언가 깨달은 당소월이 눈을 크게 뜨며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흡! 으브브븝."
"그냥 손 떼고 말해도 된다."
"죄송해요... 제 주변의 무인들은 다들 기초적인 수준이나마 승마를 배워서 무인은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답니다."
"그럴 거라고 대충 짐작했다."
당가의 무사들은 다른 곳에 비해 넉넉한 지원을 받고 있을 테니, 종종 말에 탈 일이 있겠지. 그래서 배우는 걸 테고.
다만, 대부분의 무인은 아예 편하게 이동하려고 마차에 타는 거라면 모를까 말을 타고 다닐 일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말보다 느릴 때는 돈이 없어서 말을 구하지 못하고, 수련을 거듭해 힘을 쌓고 그게 걸맞은 돈을 모았을 때는 말보다 빠르고 체력도 좋아져 타고 다닐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
회귀 전의 나 또한 이러한 사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잠시 무언가 고민하던 당소월이 머뭇거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어. 천 소협?"
"무슨 일이지?"
대각선 아래쪽을 향하는 시선, 머리카락 끝을 빙글빙글 꼬는 검지, 그리고 괜시리 땅을 비비적대는 발.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고 있는 당소월이 내 쪽을 힐끔대며 말을 이었다.
"타실 줄 모르신다면... 저랑 같이 타시지 않겠습니까?"
"허어?"
"소협이라면 분명 익히는 속도도 빠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만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소협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 뒤에 타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거랍니다."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사흘에서 나흘간 찰싹 달라붙은 채로 이동한다라.
슬그머니 차오르는 기대감.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짧은 연설을 마치고, 하인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말과 짐을 가져오라 시킨 당진천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말이다.
"아직 결혼도 안 한 것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 천 소협은 내 뒤에 타도록."
"아버님?!"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는 당소월. 당진천은 그 모습에 껄껄 웃으면서도 내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빨리 고개를 끄덕이라는 압박. 하지만 이런 것에 굴하기에는 걸린 판돈이 너무 컸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장인어른. 장인어른께서는 대사천당가의 가주이시며, 이 자리에 모인 무인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십니다. 저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실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아직 그렇게 부르지 말래도."
"청 형님도 형님이라 부르는데 장인어른을 장인어른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혼식이 아직이지 않나."
"다녀오면 치를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아직 아니라는 소리군. 자, 가세. 내 말은 덩치가 크고 튼튼하니 둘이 타도 거뜬할 걸세."
그리 말하고는 내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고 가는 당진천.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보았으나 화경이라는 경지는 거저 주어진 게 아닌지 절묘한 수법에 전부 파훼 당했다.
당소월이 벙찐 표정으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키득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선 말려 줬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렇게 가장 앞자리까지 끌려오자, 그제야 나를 놔주는 당진천.
가볍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투덜거렸다.
"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장인어른. 제 발로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직 장인어른 아니네. 그리고 '걸어올 수 있다'와 '순순히 걸어온다'에는 큰 차이가 있잖나."
"...."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며칠간 당소월의 뒤에 붙어서 이동하느냐, 당진천의 뒤에 붙어서 이동하느냐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자 아닌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당진천이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뭐, 나도 자네와 가까워지고 싶어 그런 것이니 너무 불만스러워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쉬는 사이. 저 멀리서 하인들이 데려온 말이 도착했다.
***
광동성까지 가는 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일단 전원이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는 데다가, 한 소속이라는 걸 증명하듯 녹의를 입고 있었으며, 하나하나가 최소 일류급의 무인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바짝 독이 오른 녹림의 산적들도 모른 척 보내주더라.
다만, 예상치 못한 소란은 있었다.
누가 길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요구한 것도, 객잔에서 시비가 붙은 것도, 심지어 재수 없게 은원이 있는 다른 무인과 맞닥뜨린 것도 아니다.
잠을 자거나, 필요한 물건을 보충하기 위해 하루에 한 번씩은 적당한 마을에 들렀는데....
호남성에서도 남쪽. 그러니까 광동성에 가까워질수록 마을 사람들이 과하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곳은 작은 방책 뒤에 숨어 농기구로 어설픈 무장까지 했을 정도.
사흑련이 자리 잡은 것은 절강성이나, 광동성 또한 예로부터 사파의 영역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아마 우리를 뜯어먹을 거 없나 찾아온 사파 무인으로 착각한 거겠지.
물론 대화로 잘 해결하긴 했지만,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받은 게 처음이었는지 암혼대 일부는 조금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음."
"왜 또 그러나."
이동하는 사흘 사이에 제법 친해진 당진천. 공적인 일이거나 당소월이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꽤 소탈한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된 터라 마음 편히 입을 열었다.
"무공은 무인의 육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죠. 예를 들어 팽가의 무인들이 하나같이 장대한 기골을 자랑하는 것은 핏줄의 영향도 있겠으나, 무공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남들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레 왜 꺼내는 것이냐."
"혹시 당가 무인의 얼굴이 하나같이 살벌하거나 표독스러운 것도 그래서입니까?"
"그게 무슨...."
어이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는 당진천.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처음에는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 그, 왜. 당소월은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하니 귀엽지 않습니까."
"음. 내 딸이 어미를 닮아 미색이 뛰어나긴 하지. 이번 무림행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장담컨대 중원사화는 중원오화가 되었을 걸세."
"...."
그냥 당소월 예쁘다는 칭찬 한번 했을 뿐인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일 거라며 장담하는 당진천.
이것만큼은 언제 봐도 적응되지 않는 터라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청 형님도 귀공자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헌앙한 외모를 지니셨고요."
"맞다. 청이 그것이 나를 닮아 한 인물 하지."
"...?"
아무리 나라도 이번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당진천이 못생겼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잘생긴 편이겠지.
당연한 일이다. 무인은 무공을 단련할수록 신체가 개선되니까. 화경까지 갈 것도 없이 초절정쯤만 되어도 못난 외모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당진천은 전체적으로 왠지 모를 위압감이 있었다.
고절한 무공이 아닌 순수한 외모에서 나오는 압박감. 그리고 이는 당진천만의 것은 아니다.
모든 당가의 무인은 얼굴에서 독기, 혹은 신경질적인 면모가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나이가 많은 이일수록 심하고, 비교적 젊은이들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성.
그래서 당가의 무공에 그런 부작용이 있는 건가 싶어 물어본 것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네."
"예?"
조금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 혹시 제게 말해 주시기 힘든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어본 것뿐이니까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당가의 무공이 원인인 건 맞지만, 무공 그 자체의 공능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다."
"???"
한층 더 아리송해지는데. 혹시 일종의 선문답인가? 직설적인 사파 무인들과 달리 정파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화법이라고 들었는데.
다른 말뜻이 있나 고민하는 사이. 당진천이 껄껄 웃으며 턱을 까딱였다.
"자네. 지금 자네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줄 아나?"
"무표정 아닙니까?"
"정확히는 조금 미간을 찌푸린 무표정이지. 그리고 그게 바로 자네가 당가 무인들에게 받은 인상의 정체일세."
"...아!"
당진천의 말을 한차례 곱씹어 보자 그제야 이해됐다.
"독공과 암기술은 아무래도 신경 쓸 것이 많은 무공이죠."
"그런 걸세."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당진천.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네.
독과 암기 전부 까딱 잘못하면 자기 자신은 물론, 친구와 가족마저 다치게 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그런 만큼 평범한 병장기를 다루는 것 이상으로 주의해야 했고, 이러한 집착에 가까운 집중은 무의식중에 사람의 신경을 갉아 먹는다.
자연스레 얼굴을 찌푸리게 되고, 인상을 쓰게 되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과민반응 하게 될 터.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얼굴에 흔적이 남아 신경질적이고 표독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는 당진천의 말대로 무공 그 자체의 공능 혹은 부작용이 아니다.
평생 밭을 갈아온 농부의 피부가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것처럼, 혹은 평생 망치를 두드려 댄 대장장이의 팔이 길고 두꺼워지는 것처럼.
단순히 축적된 수련의 흔적이고 습관일 뿐이다.
다른 명가가 그러하듯 사천당가에도 몇몇 선입견이 있는데... 그중 당가의 무인은 다른 정파 무인에 비해 음험하고 표독스럽다는 말이 이런 이유로 생긴 거였나.
"그럼 당소월은 괜찮겠군요."
"벌써부터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다른 녀석들보다는 낫겠지."
당소월에겐 독을 신중히 다루거나, 남은 독을 계산하며 싸울 이유가 없다.
독령지체는 독을 수족처럼 자연스럽게 다루게 해주며, 아예 체내에서 독을 합성하는 체질이니 말이다.
회귀 전의 당소월은 녹아내린 얼굴 반쪽을 항상 가리고 다녔으며, 당가의 멸문을 겪은 이후라 시종일관 우울하고 독기가 그득했었다.
반면 지금의 당소월은 처음에는 틱틱댔던 것 같은데 요즘은 뭐랄까... 친해질수록 사람 잘 따르는 강아지 같은 면모가 좀 보인다고 해야 하나.
물론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변함없긴 했지만, 워낙 회귀 전과 인상이 달라져 나중에 어떻게 될지 궁금했는데.
당진천의 말대로라면 그냥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 없겠네. 내가 그럴만한 일을 겪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고.
속으로 작게 다짐하는 사이. 당진천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자네. 아직도 소월이를 그냥 당소월이라 부르는 건가? 이제 곧 정식으로 정혼자가 될 텐데 다른 호칭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 소저라던가."
"당가에 당씨가 몇 명인데 당 소저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럼 이름에 붙이면 되잖나. 소월이가 자네의 격식 없는 모습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았네만, 앞으로는 자네도 공적인 자리에 설 일이 있을 텐데 미리 하나쯤 정해두는 게 좋을 걸세."
"맞는 말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답답하게 뭘 그리 망설이나. 속 시원하게 이유라도 말해보게."
"소월 소저라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
당진천이 어이없다 못해 뭐 하는 놈이지 싶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겐 너무 낯간지러운 표현이었으니까.
[2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3] 23화. 광동성으로 (3)
사흘이 지나 나흘째에 도착한 광동성. 자잘한 마을을 지나쳐 적당히 번화한 곳에 들어서자 어린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대협! 처음 오신 건가요? 혹시 마구간이 큰 객잔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마구간이라."
당진천이 아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거라. 조금 더러워도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닷!"
순간 움찔한 소년이 한결 빠릿해진 모습으로 길을 안내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의아했는지 당소월이 약간 속도를 높여 나와 당진천의 말과 나란히 서며 물었다.
"아버님. 방금 전에 무슨 말을 하신 건가요?"
"객잔뿐만 아니라 하오문에도 볼 일이 있다는 소리란다."
"네? 그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소월. 잘 모르는 듯하여 이번에는 내가 답해주었다.
"하오문(下汚門)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봐라. 별거 아닌 말장난이다."
"...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당소월. 다만, 그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나 보다.
"아버님이야 그렇다 쳐도 소협은 어찌 아시는지요?"
"무림행 좀 해본 이들은 다들 안다. 개방과 접선하려면 옷자락에 매듭이 묶인 거지를 찾으면 되고, 하오문에게 볼일이 있다면 소맷자락에 검은 칠을 하고 다니는 이들에게 일을 시키며 더러워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면 된다."
"그런 게 있었군요... 허면, 저희는 지금 하오문의 지부로 향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 일단 저 아이가 하오문도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알아보지는 못했을 거다. 아마 우리가 향할 객잔의 주인도 잘 모를 수 있고."
"예? 하오문은 개방처럼 정보를 다루는 문파가 아니었나요?"
"맞지. 다만, 개방과 달리 하오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받거든. 직접적으로 의뢰를 맡은 창구나, 이 동네의 정보를 정리하여 본단에 보내는 이들을 제외한 다른 하오문도는 대부분 어중이떠중이라고 보면 된다."
누군가 하오문을 찾으면 가능한 한 윗사람에게 전달한다. 가끔 같은 하오문도가 도움을 청하면 가능한 선에서 돕는다. 가능하면 배신하지 않는다.
이 셋이 하오문도가 해야 할 일의 전부다.
위의 규칙만 지킬 수 있다면 누구나 하오문도가 될 수 있다. 무공을 익히지 않더라도, 정보원의 일을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개방이랑은 많이 다르네요."
"아무래도 그렇지. 애초에 생긴 목적이 다르니까."
개방은 한창 아직 정파와 사파의 영역이 지금처럼 깔끔하게 나뉘기 전, 허구한 날 쌈박질만 하는 무인들 틈바구니에서 생겨난 문파였다.
본래 평범한 양민이었으나, 무인 간의 싸움에 휘말려 가족을 잃거나 재산을 빼앗겨 거지가 되는 일이 흔했던 시절.
모든 것을 잃고 거지로 연명하던 한 사내가 이대로는 안 된다며 비슷한 처지의 거지들을 이끌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니.
그가 바로 개방의 초대 방주였다.
"이건 저도 어린 시절에 배운 이야기네요.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적을 개에 비유하며 내쫓아 정파와 사파의 영역을 구분 지은 것이지요? 앞으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국의 거지들을 통해 구주팔황의 정보에 귀를 기울였고요."
"맞다. 개방이 협을 강조하는 것도, 정보를 다루는 것도 전부 초대 방주의 영향이지."
지금 와서는 개방의 세력이 커지고, 힘과 돈이 생기며 청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파벌이 생기긴 했지만....
회귀 전. 천마가 마교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무렵. 개방은 파벌 상관없이 가장 먼저 맞섰고, 싸울 수 있는 마지막 한 명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는 나를 포함한 사파 무인 전원이 지니고 있던 정파에 대한 불신. 의협은 곧 위선이라는 조롱 섞인 사고방식이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개방의 무공은 맥이 끊겼으나, 그들이 보인 의기는 정과 사가 힘을 합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반면 하오문은 조금 다르다. 애초에 하오문이라는 문파는 누가, 언제, 무슨 연유로 세웠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으니까."
"어째서인가요?"
"그야 자연스레 생긴 협력 조직이 어느 순간 문파로 바뀌었기 때문이지."
천한일, 힘든 일을 하는 이들은 다른 이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기 힘들다. 같은 처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누구도 그들의 어려움을 알아 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농부가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 의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그 원형이었다.
무공의 자질, 정보를 취합할 뛰어난 오성, 그리고 의협심 등.
다양한 조건을 보고 제자를 받는 개방과 달리, 하오문이 정말 아무나 받아주는 이유도 그래서다.
애초에 그런 아무나가 모여서 만든 곳이니까.
"하오문의 목적은 거창할 게 없다. 생존. 이 험난한 세상에서 험한 꼴 보지 않고 생존하는 것만이 그들의 목적이니. 규율이 느슨한 것도 그래서다."
누군가 하오문을 찾으면 알려 주고, 같은 하오문도를 돕고, 서로 배신하지 않는다.
실로 간단한 규율.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아니라 '가능하면'이라는 말이 앞에 따라붙었다는 점이리라.
꼭 따를 필요는 없다. 목숨의 위협이나 눈 돌아가게 큰 이득 앞에서는 얼마든 어겨도 좋다.
그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 하류 인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 그리하라. 나라도 그랬을 터이니.
"이것이 하오문의 진짜 방침이라고 할 수 있지.
"...제가 생각한 문파와는 많이 다르네요. 막연히 사파의 개방 같은 느낌을 상상했는데 말이지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하오문이 정보 조직으로 유명해진 건 개방을 따라 해서니까. 다만, 목적이 조금 다르지."
"목적이라 하심은... 역시 돈인가요?"
"거기에 하나 더 붙는다. 혹시 모를 위험을 미리 알고 피하기 위함이지. 토끼가 늑대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한껏 키운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개방이 악용될 여지가 있는 정보는 의뢰받지 않듯, 하오문은 위험한 의뢰는 잘 받지 않는다.
목숨을 걸 만큼의 금액을 약속받지 않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이번에 하오문이 부탁하지도 않은 배후에 관한 정보를 당가에 보낸 것도 그래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님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요?"
"...그런 이유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당가의 분노를 피해 가기 위함이 주된 목적일 거다."
하필이면 마교 첩자 놈들이 숨어든 곳이 하오문의 본단이 있는 광동성이고, 하필이면 건드린 게 집요하기로 유명한 사천당가고, 하필이면 놈들이 실패 소식을 듣는 것보다 당진천이 배후를 찾는 것이 빨랐다.
발 빠르게 위의 정보를 취합한 하오문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괘씸하게 숨어든 마교 놈들을 팔아넘기고 돈과 신뢰를 챙기자.
"그게 우리가 이렇게 광동성까지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이번에 장인어른께서 하오문을 찾는 것도 하오문으로부터 단순히 정보만 받은 게 아니라 배후를 잡을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는 약속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할 거면 확실히 하는 게 하오문 입장에서도 좋을 테니."
"와아... 진짜인가요 아버님?"
당소월이 크게 뜬 눈으로 당진천을 바라보았다.
"전부 천 소협의 말이 맞다. 솔직히 좀 놀랐네. 자네에게 검재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만한 식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뭔가."
"제가 절강성 출신이다 보니 어쩌다 들은 게 있었을 뿐입니다."
적사파를 무너뜨리고 고향을 나와 사흑련에 들어가기까지.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떠돌며 낭인으로 살았었다.
그러면서 하오문과 엮일 일이 제법 있었고, 사흑련에 들어간 뒤에는 철혈당주에게 이것저것 듣기도 했으니 하오문의 방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말을 들은 당진천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절강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되는 건 아니네만... 뭐, 됐네. 식구가 똘똘하면 서로 좋은 일 아닌가."
껄껄 웃어넘기는 당진천. 마침 그러는 사이에 객잔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큼직한 건물. 아마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객잔이 아닐까 싶다. 하기야. 마구간이 큰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일단은 들어가서 좀 쉬고 있게. 하오문 쪽은 나와 암혼대주 둘이서 다녀올 테니."
말에서 내리며 그리 말하고는 똑같은 내용을 암혼대에게 전하는 당진천.
그가 부대주에게 전낭을 건네고는 대주와 함께 우리를 안내한 꼬마를 따라 어딘가로 사라졌다.
최대한 뭉쳐있을 수 있는 방을 빌리는 부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소월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번에 자화배독초의 흡수가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 잠깐 보여 줄 수 있겠나?"
"후후. 깜짝 놀라실 겁니다."
당소월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가슴을 쭈욱 폈다.
***
당진천과 암혼대주가 하오문에서의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일행의 절반은 빌린 방에서 쉬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두세 명씩 뭉쳐서 필요한 물건을 사러 저잣거리로 향했다.
그리고 나와 당소월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면....
짹-!
뒤뜰에서 참새를 잡고 있었다.
"죽인 건가?"
"설마요. 단순히 마비시켰을 뿐이랍니다. ...하지만 효과가 생각보다 강하네요. 어쩌면 진짜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겠어요."
곤란한 표정으로 쓰러진 참새를 들어 올린 당소월. 그녀가 가볍게 깃털을 쓰다듬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참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돌연 푸드덕 경박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날아올랐다.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가. 날아다니던 새를 손짓 한 번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은 분명 대단했지만, 내가 독공에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인지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군."
"아! 방금 건 은밀하지만 즉효성과 위력이 떨어지는 마비 독이랍니다. 가만히 쉬고 있는 참새라면 모를까 날아가던 걸 떨어뜨릴 정도는 절대 아니지요."
"절대 말인가?"
"절대랍니다. 힘을 강하게 주거나 내공을 더 쏟아붓는 것으로 위력을 높일 수 있는 일반적인 병장기와 달리, 독은 위력과 용법이 정해져 있거든요."
"하긴. 생각해 보면 독의 양을 늘린다고 하여 위력마저 강해지는 것은 아니지. 그저 저항할 내공이 부족해 중독되는 것이니까."
"그런 거랍니다."
"허나, 같은 독이라도 위력이 다른 독이 있잖나. 예를 들어 산공독이 그렇지. 어떤 녀석은 중독되면 내공을 일절 움직일 수 없지만, 어떤 것은 힘겹게나마 내공의 운용이 가능하지 않나."
"그런 경우는 독의 위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순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지요."
"순도?"
"예에. 같은 술이라도 그냥 마시는 것과 물에 타서 마시는 건 취기가 올라오는 속도가 다르잖습니까."
"...그렇게 비유하니 바로 이해되는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다시 무리에 섞여 어딘가로 날아가는 참새를 유심히 살펴보는 당소월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 수려한 콧날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독의 위력 자체가 높아진 거라면 해독하기도 쉽지 않겠군."
"쉽지 않다 뿐이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이쪽을 돌아보는 당소월. 우쭐대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더니, 이제는 아예 팔짱까지 꼈다.
자연스레 가슴을 강조한 그녀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담컨대 제가 직접 독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면 완벽한 해독은 어려울 거랍니다."
"...."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2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4] 24화. 광동성으로 (4)
당소월의 호언장담을 실제로 확인해 볼 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헤헤. 저기 보이는 저곳입니다요. 오늘 점심까지는 객잔에 머무르는 모습을 확인했으니 확실할 겁니다요."
비굴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염소수염. 당진천이 데려온 하오문의 정보원이자 안내 담당.
그가 광동성 전체가 자기 안방이라도 되는 양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최단 거리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동안 다소 풀어진 암혼대였으나, 슬슬 목표가 가까워질수록 처음 출발할 때의 살기등등함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열 명 남짓의 무인이 자아내는 정련된 기세. 그 선두에 선 당진천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인원은 보고 그대로인가?"
"예에. 절정 급이 셋에 일류가...."
"아니. 그런 건 됐네. 나는 지금 베야 할 목이 몇 개인지 묻고 있는 걸세."
"...총합 열다섯입니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하는 염소수염. 당진천이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여기까지 수고했네. 덕분에 빠르게 올 수 있었군. 마지막으로 놈들이 머무르는 객잔까지만 안내해 주겠나?"
"무, 물론입지요. 여기서 금방입니다요."
마구 고개를 끄덕인 염소수염이 앞장섰다.
"연주라는 곳입니다요. 꽤나 번화한 곳이고 나름 화려하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유흥이 발전한 곳은 아닙죠.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느긋하게 놀러 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상단이라 그런 겁니다요."
"하루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외지인이 들락날락할 테니 숨어들기 쉽겠군. 빠르게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말이야."
물론 놈들이 그 소식을 듣는 일은 없을 거다. 당소월은 내 덕에 무사했고, 당진천의 도움으로 아무도 모르게 당가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당진천이 수신호위인 동생마저 내버려 두고 혼자 뛰쳐나간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정작 당유진 본인이 들으면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벌써 뉘엿뉘엿 해가 져가는 시간대임에도 여전히 길게 늘어선 상단의 줄을 보다 입을 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 그 틈을 타 놈들이 도망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부분은 걱정 마십쇼. 이미 놈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사방에 하오문도를 배치했습니다요. 도망치거나, 몰래 빠져나가는 걸 막지는 못해도 어디로 몇 명이 갔는지는 바로 알 수 있습죠."
"그렇다고 합니다, 장인어른. 조용히 줄 서서 들어간 다음 덮치는 것보다 그냥 지금 단번에 치고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 마음이 참 급하군 그래? 하지만 오히려 좋네."
피식 웃으며 끄덕이는 당진천. 그리고 화들짝 놀라 이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염소수염.
내가 누군지 궁금하긴 해도,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상상 이상의 호칭에 놀란 것이리라.
물론 당진천은 그런 염소수염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암혼대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말은 잠시 여기에 묶어 두고, 경공으로 단숨에 벽을 넘어간다. 위치는...."
말하다 말고 염소수염 쪽을 돌아보는 당진천. 시선을 받은 그가 멍때리다 말고 빠릿하게 대답했다.
"화정 객잔이라는 작은 객잔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요.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평범한 건물이라 설명만 듣고 바로 찾아가기는 어렵습니다요."
"허면 내가 너를 붙잡고 달리마. 안내에만 집중하도록."
"예?"
당황한 염소수염을 번쩍 들어 옆구리에 끼는 당진천. 그가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어찌하겠나? 이대로 내가 놈들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릴 수도 있다만."
"죽을 뻔했던 건 저희입니다."
"소월이 너도 같은 생각이더냐?"
자신을 향한 질문에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천 소협과 마찬가지예요, 아버님. 이렇게 도와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날 느꼈던 무력함도, 두려움도 전부 저희의 것이랍니다."
제법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리 말하는 당소월.
아직 어설프긴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과거를 설욕하려는 한 명의 무인이었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당진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다. 마음대로 해보거라."
한차례 당소월에게 고개를 까딱여 주고는 그대로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흐어어업!"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염소수염이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당진천의 뒤를 따르는 당가의 무인들.
나와 당소월도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그럼 가볼까."
"앞장서시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경공을 펼쳤다.
***
그리 높지 않은 도시의 외벽을 두어 번 박차는 것으로 뛰어넘은 뒤, 염소수염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달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대로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너무 허름하지도 않으며, 손님도 그럭저럭 있는 말 그대로 평범한 객잔.
"여기! 여기가 화정 객잔입니다요!"
염소수염의 외침에 당진천이 멈춰 섰다. 그러자 하나둘 뒤따라 도착한 암혼대가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싼다.
그 심상찮은 분위기에 웅성이면서도 멀찍이 도망가는 양민들. 특히 객잔에서 식사 중이던 이들은 한층 신속하게 반응했다.
냅다 식기를 내팽개치고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양손을 들고 천천히 객잔을 빠져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이에 당소월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작게 속삭였다.
"다들 너무 익숙한 것 아닌지요?"
"그만큼 자주 겪어본 일이라는 거겠지."
이 시기의 광동성은 절강성에서 밀려난 정사지간의 무인이 모여들 시기다. 하루가 멀다하고 무인가의 생사결이 펼쳐지곤 했을 터.
익숙해지기 싫어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둘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에는 양민이 아닌 무인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몰래 빠져나가려던 마교도도 있었다.
살아남긴 글렀으니, 소식이라도 마교에 전하려는 건가.
"저놈! 저놈은 마교도입니다...요?"
염소수염이 녀석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보다 내가 한발 빠르게 검을 뽑았다.
서걱!
이류에 불과한 녀석은 내 일검에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베였다. 그렇게 주인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푸욱!
뒤에서 날아든 비도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정확히 한 중년인의 미간을 꿰뚫었다. 암혼대주의 솜씨였다.
손잡이까지 깊게 박힌 비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중년인의 몸이 뒤로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 반 박자 늦게 허탈해하는 염소수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음. 저놈도 마교도가 맞습니다요. 헌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요? 혹시 본래 알던 자입니까요?"
염소수염을 힐끗 돌아보며 대답해 주었다.
"얼굴이 아니라 품은 마기로 알았다."
"예? 하지만 내공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요. 아직 소협께서는...."
익힌 무공과 가진 내공의 성질에 따라 무인의 기질이 변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품은 내공이 적으면 크게 티가 나지 않으며, 무위가 낮으면 기세를 읽는 것도 쉽지 않다.
초절정의 경지에 달한 암혼대주라면 모를까 아직 일류 수준인 내가 숨어 있는 마교도를 찾았다고는 믿기 힘들겠지.
다만, 염소수염이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내겐 이 몸에 맞지 않는 깨달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마교라면 질릴 정도로 상대해 보았다는 것이 그러하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나서자, 순간 집중되는 시선.
사전에 말했던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는 당진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는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버러지처럼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네놈들이 죽이고 싶어 하는 당소월이 여기 있다!"
"세상에! 여기서 저를 파시는 건가요, 천 소협?!"
당소월은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어쨌든 효과는 뛰어났다.
"가라!"
객잔 이층에서 들려오는 외침. 마기가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벽이 부서진다.
콰앙!
비산하는 잔해 사이로 몸을 던지는 세 명의 무인. 목적지는 나... 아니, 내 옆의 당소월인가.
조금 전의 몰래 빠져나가려던 녀석과 달리 제법 강한 이들로만 이뤄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당소월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부나방처럼 달려드시기는."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린 당소월이 한 손을 크게 휘둘렀다. 펄럭이는 소매. 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옅은 보랏빛의 독무.
숨을 참으며 독무를 빠져나온 넷. 하지만 그들이 당소월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녹아내린 피부.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제대로 서지도 못해 하나둘 쓰러지는 다리.
놈 중 하나가 부릅뜬 눈으로 이를 갈았다.
"어떻게... 숨은 참았는데...."
"독은 들이마셔야만 위험한 게 아니랍니다. 때로는 닿기만 해도 살을 녹이는 독도 있는 법이지요."
그래도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며 작게 덧붙이는 당소월.
이를 마지막으로 숨이 붙어 있던 녀석이 한 번도 휘두르지 못한 검을 떨어뜨렸다.
조용하고 빠른 죽음. 하지만 아직 마교 놈들이 전부 쓰러진 것은 아니다. 객잔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아직 건재했으니까.
"지금이다!"
처음 들려온 것과 같은 목소리. 그와 동시에 부서진 벽면 너머에서 재차 뛰쳐나오는 마교 놈들.
다만 이번에는 두꺼운 옷으로 몸을 칭칭 휘감은 것이 명백히 당소월이 조금 전에 보여준 독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열에 가까운 놈들이 단숨에 날아들었고, 그중에는 강렬한 마기를 풍기는 절정의 고수도 섞여 있었다.
아무리 당소월이라도 방금처럼 독무 한 번으로 전부 처리하기는 힘든 상황. 그녀가 이를 악물며 소매를 한층 크게 펄럭였다.
쐐애애액!
쏘아지는 암기. 그 끝이 번들거리는 것을 보아 모종의 독이 발라져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독공에 비해 암기술은 조금 떨어지는 당소월이다.
일류에서 이류 남짓한 어중이떠중이들은 몇몇 처리할 수 있겠으나, 절정 무인에게마저 통하리라 보기는 힘들겠지.
당소월 혼자였다면 말이다.
광랑탈명공을 극한으로 운용한다. 일전에 당유진에게 받은 백독청혈단 덕분에 한층 수월하게 반응하는 내공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간다.
의지에 따라 내공이 일어나고, 내공의 움직임에 따라 잠잠하던 살기가 들불처럼 타오른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생과 사의 간극. 달빛이 가리어진 어두운 밤하늘. 허망하게 흩어진 약속. 무의미한 유언.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심상에 눌어붙은 그날의 풍경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순수한 살기를 벼려 내어 만든 검. 그 실체 없는 날붙이가 죽음을 각오한 무인의 심장을 꿰뚫는다.
"허억!"
공중에서 당소월의 암기를 쳐내려다 말고 멈칫한 녀석. 그걸로 충분했다.
퍽!
당소월의 암기술이 독공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당가의 암기술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빗나갈 리 없잖은가.
그리고 당소월의 암기에는 독이 묻어 있다. 아마 꽤나 지독한 녀석으로.
"바, 방금 그건 대체 무어냐...!"
이쪽을 노려보며 이를 가는 녀석. 그 절절한 반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당소월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에. 이렇게까지 해주셨으니 저 또한 뭔가 보여 드려야지요."
대체 무슨 독을 준비하고 있는 건지 미약한 녹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리 대답하는 당소월.
이쪽은 충분한 것 같으니 이제 내 일에 집중할 차례다.
기척을 숨기고 있다 구멍 뚫린 벽이 아닌, 입구 쪽에서 기습해 오는 두 명의 절정 무인.
양옆에서 짓쳐들어오는 도끼와 주먹. 그 위에 뒤덮인 거무죽죽한 기운을 보며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절정 초입인가. 저 둘은 지금의 내겐 버겁겠지. 버겁겠지만....
"해볼 만하군."
못 이긴다는 뜻은 아니다.
[2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5] 25화. 눈먼 복수
거무죽죽한 마기를 두른 도끼와 주먹이 천휘를 향해 날아든다.
"이, 이런!"
당진천의 명령대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암혼대주가 다급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손가락 사이에 비도 둘을 끼웠다.
무림에서 경지 이상의 적을 쓰러뜨리는 일은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다. 체력, 부상, 기습, 실수, 재능 등등.
여러 가지 변수가 맞아떨어지면 얼마든 하수도 고수에게 칼을 꽂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을 칼에 맞으면 십중팔구는 죽는다.
암기와 독을 다루는 당가의 무인인 만큼 암혼대주는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당소월처럼 중독된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멀쩡한 절정의 무인 둘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직전에 보여준 가공할 살기는 암혼대주 본인조차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으나, 천휘의 무위는 여전히 일류에 머무르고 있었다.
암혼대주의 팔이 한껏 뒤로 젖혀졌고, 손가락 사이의 비도는 검기를 피워올린다.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았다. 완전히 튕겨내는 것은 불가능해도 천휘의 머리를 향한 궤적을 뒤틀기엔 충분하리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비도를 쏘아내려는 순간.
텁.
"됐네."
"가주님!"
당진천이 그의 팔을 붙잡아 멈췄다. 이에 암혼대주가 크게 반발하며 외쳤다.
"당가의 은인을 이리 허무하게 죽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럴 일 없으니까 잘 지켜보게."
얼핏 들으면 냉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목소리. 하지만 오랜 기간 당진천의 밑에서 힘써온 암혼대주는 알 수 있었다.
당진천의 눈동자에 깃든 선명한 기대를.
암혼대주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당진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천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
당진천이 자신을 말린 이유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양옆에서 짓쳐들어오는 도끼와 주먹. 이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휘두른다.
노리는 곳은 도끼날이 아닌,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루 부분. 부기(斧氣)가 서려 있지 않은 터라 검을 맞댈 수 있는 곳이었다.
다만 그것이 막아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순간적인 파괴력만큼은 도를 넘어서는 것이 도끼라는 무기고, 부술(斧術)은 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니.
힘이 실리지 않은 자루라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위력을 품고 있겠지. 그러니 이건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용하기 위해서 내지른 검이지.
카득!
자루와 부딪힌 검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며 거력의 일부가 손목을 타고 전해진다.
이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자세를 무너뜨린다. 단, 넘어지진 않도록 하체에 힘을 강하게 준 채로.
순식간에 지면과 평행을 이룰 정도로 꺾인 허리. 머리 위로 반 박자 늦게 날아온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철판교라고도 부르는 수법. 본래는 이리 빠르게 허리를 낮출 수 없어 반대쪽에서 날아온 주먹은 피하지 못했겠으나, 도끼에 담긴 힘 덕분에 가능했다.
자신의 일격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녀석이 이를 갈았다.
"네놈!"
다급히 다리를 들어 이쪽을 걷어차려는 녀석. 하지만 미리 움직이고 있던 나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허리를 뒤틀어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붕 뜬 다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서걱.
자세가 자세인지라 깊게 베진 못했다. 하지만 그 위치가 다른 어디도 아닌 허벅지 안쪽이다. 한동안은 움직임에 지장이 생기리라.
그렇게 베어 낸 뒤에는 용천혈에서 내공을 폭발시켜 튕겨 나가듯 몸을 빼냈다.
발바닥이 조금 얼얼하지만, 권기를 두른 주먹에 맞는 것보다는 낫다.
콰앙!
뒤늦게 돌아본 권사가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바닥을 후려치자 움푹 패인 지면.
그렇게 거리를 벌린 채, 찬찬히 습격해 온 이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도끼를 든 거한. 아니 거한이라는 말은 조금 틀린가. 키는 큼직했지만, 몸은 비쩍 말라 뼈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으니까.
거진 목내이에 가까운 꼴로 무거운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은 위화감이 가득했으나, 되레 그렇기에 익숙한 녀석이었다.
아귀부(餓鬼斧) 단묵상.
회귀 전에는 마교의 몇 없는 초절정 고수 중 하나였던 녀석이며... 내 손에 한 번 죽었던 녀석이다.
잠력을 폭발시키는 무공을 익힌 덕에 큰 힘을 낼 수 있지만, 반대로 그러한 무공을 익힌 탓에 진원진기가 상해 저런 몸뚱이가 되었다나.
반면 그 옆에 있는 권사는 내가 모르는 인물이었다.
몸의 털이란 털은 전부 사라졌는지 머리카락은 물론이요 눈썹마저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모습.
거기에 털이 사라져 드러난 피부는 검게 물들어 갈라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썩은 고목을 연상시켰다. 윤곽을 통해 여자임을 유추하는 것이 전부인가.
아마 몸을 한층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종류의 외공이겠지.
둘 다 괴이한 모습이었지만 본래 마공이란 이런 법이다.
괴상한 방법으로 빠르게 강해지고, 때로는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부작용이 따른다.
그렇기에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강해지고 싶은 이들만 익히는 무공이기도 하고.
둘의 무공을 짐작해 보는 사이. 허벅지에 난 상처를 점혈로 지혈한 아귀부가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당가의 여식이 아니라 네놈을 노린 게 정답이었나."
"마치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그래. 정파를 자칭하는 위선자 놈들답게 여차하면 다 같이 몰려들겠다는 건가. 마지막 순간에 네놈들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래 끓는 소리로 끅끅 웃어대는 아귀부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착각하지 마라. 너희는 내 손에 죽는다는 뜻이었으니."
어깨에 힘을 빼고 검 끝이 시야의 중앙에 들어오도록 겨눈다.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리되, 움직이기 편하도록 왼발을 반보 뻗는다.
초식. 이라고 하기도 뭣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
그 상태에서 광랑탈명공을 다시금 극성으로 운용했다. 들끓는 살기를 한점에 집중시키는 대신 넓게 퍼뜨렸다.
내 몸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역에 들어온 아귀부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놈! 어린 것이 이런 지독한 살기라니! 절대로 살려둬선 안 되겠구나!"
"허, 참. 애초에 너희 마교는 무인이라면 전부 죽이고 싶어 하지 않나. 누가 들으면 고명한 도사나 스님인 줄 알겠다."
피식 웃는 사이. 그 틈을 타 지금껏 조용히 있던 권사가 달려들었다.
아마 내가 대화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기습해 보려는 의도겠으나...이미 주변 일대는 내 살기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리고 내게 살기란 무공의 근간이며 내공에 녹아든 의지의 편린.
즉, 이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내 기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소리다. 하물며 내게 살기를 품었다면 더더욱.
권사가 움직이기도 전에 반응해 몸을 꺾는다.
단숨에 공간을 격한 녀석이었으나, 한 끗 차이로 내 가슴 어림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손톱.
촤아악-!
권각술에 더불어 조법도 쓰는 건가. 피부처럼 딱딱하게 굳으며 더욱 길어진 손톱 위로 넘실대는 마기가 퍽 위협적이다.
물론 맞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녀석이 뻗은 팔을 회수하기 전에 검을 내리쳤다.
카앙!
"허어."
"...!"
분명 손목을 내리쳤을 텐데 들려오는 것은 금속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어찌나 단단한지 각질에 약간의 균열이 생긴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상처는 없었다.
눈을 크게 뜬 권사가 이를 악물며, 반대쪽 주먹을 뻗는다. 하지만 기습도 읽혔는데, 눈앞에서 대놓고 날리는 일격이 통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 먼저 피하며 검을 휘두른다.
캉!
이번에 베어 낸 곳은 비교적 연약한 겨드랑이. 주먹을 내지르며 드러난 잠깐을 노렸으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깊은 균열을 남겼을 뿐, 피부를 뚫어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무공은 없다. 천마 상대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나, 소림사의 금강불괴마저 부서졌거늘 이런 마공에 약점 하나 없을 리 없잖은가.
분명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단단한 몸뚱이 때문인지, 단순히 타고는 무재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권사의 무공은 경지에 맞지 않게 단조로웠다는 점이다
마공으로 억지로 강해진 마인에게서 자주 보이는 특징. 피하고자 한다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피할 수 있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여기저기 베어 보며 약점을 찾고 싶었지만....
"크아아아아! 죽여 버리겠다!!"
지금 내가 상대하는 이는 한 명이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지면을 박차며 달려오는 아귀부.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와 눈에서 은은하게 흘리는 혈광을 보아 잠력을 폭발시킨 거겠지.
조금 전보다도 한층 빠르고 위협적인 모습. 처음에 썼던 철판교의 수법으로 똑같이 피하는 것은 힘들 터다.
하지만 녀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귀부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한번 파훼한 무공 상대로 겁먹을 이유는 없으니까.
옆에서 날아드는 권사의 다리를 기감으로 느끼고 피하며, 아귀부를 향해 몸을 던졌다.
후웅!
왜소한 몸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거력.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우악스레 휘둘러진 도끼가 내 정수리를 향한다.
뒤로 반 발짝 물러나자, 내 코끝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며 애꿎은 바닥을 내리찍는 도끼.
콰앙!
도끼가 지면 깊숙이 박혔다. 아귀부가 금방 다시 뽑아내긴 했으나, 그사이에 나는 이미 검을 휘둘렀다.
츠팟.
도끼를 쥐고 있던 아귀부의 손등이 깊게 갈라지며 뼈가 보였다. 하지만 녀석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피가 줄줄 흐르는 손으로 힘껏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가끔은 올려 찍기도 하며, 가끔은 수평으로 내지르기도 하는 도끼.
하나하나는 평범한 일격이지만, 그것이 거듭될수록 미친 듯이 빨라지는 속도. 그만큼 도끼날을 뒤덮은 부기의 기세도 맹렬해진다.
마기로 이루어진 폭풍을 연상시키는 연격. 완전히 붉게 물든 눈은 살짝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머리가 맛이 간 것이리라.
주변 모든 것을 갈아 버릴 듯한 위용. 허나, 이미 몇 번 봤던 것이다. 그것도 미래의 아귀부가 펼친 훨씬 수준 높은 것으로.
폭풍의 중심에서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른다.
아무리 반 박자 먼저 움직인다지만, 이렇게나 빠르면 이전처럼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그러지 못하는 것은 궤적에 검을 밀어 넣어 방향을 뒤튼다.
그동안 당가에서 수련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면, 당유진에게 받은 영약 덕에 혈도가 더욱 넓고 튼튼해진 것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겠지.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도끼는 피해도 점차 거세지는 검은색 부기가 내 몸을 조금씩 갈라내며, 상처 부위로 마기가 스며들고 있으니까.
일반적인 내공과 달리 난폭한 마기는 체내에 들어온 순간 독과 다름없으나....
물러날 수는 없다. 어설프게 거리를 벌렸다가는 아귀부의 기세를 따라가지 못해 기회만 노리고 있는 권사에게 그대로 등짝을 얻어맞을 테니까.
그리고 상처가 느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니까.
서걱!
앞머리가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아귀부의 손가락이 하나 절단된다.
팔뚝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아귀부의 옆구리가 찢어진다.
어깨에서 튄 피가 볼을 적신다. 아귀부의 오른쪽 귀가 날아갔다.
허벅지의 살점이 뜯겨나간다. 아귀부의 왼쪽 손목 힘줄이 베였다.
목덜미의 거죽이 찢어진다. 아귀부의 단전이 으스러진다.
기껏 아문 가슴의 흉터 위로 새로운 상처가 덧씌워진다.
푸욱!
그리고 아귀부의 심장이 꿰뚫렸다.
[2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6] 26화. 눈먼 복수 (2)
내지른 검이 아귀부의 앙상한 가슴팍을 꿰뚫었다. 검 끝에서 느껴지는 심장을 짓이기는 감각.
쿠웅!
쉴 새 없이 몰아치던 도끼가 바닥에 떨어진다. 주변을 갉아먹던 마기도 흩어진 지 오래.
멍하니 자신의 가슴팍에 돋아난 검을 바라보던 아귀부가 상처투성이 손으로 이를 움켜쥔다.
손등은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베였고, 손가락 하나는 어딘가로 날아가 성치 못한 손에 상처가 하나 추가된다.
꾸욱.
날카로운 검날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단전이 부서지고 심장이 으스러진 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강한 악력.
다만, 힘을 줄수록 상처는 깊어졌고 그리하고도 검을 뽑아낼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커헉!"
결국, 피를 토하며 축 늘어지는 아귀부. 검에 올려놓았던 손이 스르륵 떨어진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 가까스로 고개를 든 아귀부가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무너진 몸과 달리 의지만큼은 꺾이지 않았다는 것처럼.
"너, 이 어린 것아. 내 너를 죽였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자진하거라."
"이건 좀 억울하군. 굳이 따지자면 내가 그쪽에 원한이 있는 것이지, 그쪽이 내게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잖나. 이젠 생긴 것 같지만."
"그런 뜻이... 쿨럭! 아니다."
중간에 재차 피를 토한 녀석이 한층 파리해진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무공에 재능이 있다. 사람 죽이는 재주를 타고났다는 말이다."
"칭찬 고맙군."
"몸에 밴 살기를 보아 이미 많은 사람을 죽여왔겠지."
"...."
맞는 말이다. 시간이 되감기며 없던 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내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살기 위해 죽였고, 죽은 이의 복수를 위해 죽였으며, 마지막에는 이기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천마에게 달려들었다. 나 자신을 죽인 셈이다.
본래 무인의 삶이란 추락하는 순간까지 칼날 위에서 비틀거리는 위태로운 춤사위와 같은 것. 허나, 나는 그중에서도 조금 심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마교와의 전쟁을 겪지 않았던가.
이 시대의 누구보다도 많은 죽음을 보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리라 확신한다.
아귀부가 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눈으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네 나이대에 이만큼 망가지는 사정이야 뻔하지."
"망가졌다라."
"아무렇지도 않게 살기를 뿜고, 주저 없이 사람을 베어 넘기는 모습을 망가졌다고 하지 않으면 무얼 망가졌다고 하겠느냐. 죽고 싶지 않아서 베었나? 악적이라서 베었나?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해 베었나?"
그리 말하며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아귀부. 그 목소리에 담긴 것은 명백한 경멸이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결국 네놈도 수틀리면 칼부터 뽑는 인간 백정이라는 점에는... 커흑!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설마 자신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흐흐. 그럴 리가. 모든 무인과 무공은 사라져야 한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말이다."
"...아귀부. 네 사정에 관해서는 얼추 알고 있다."
지금의 아귀부는 이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마인이지만, 회귀 전에는 마교에서 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수였다.
강한 만큼 유명했고, 그의 행적 또한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녹림도에게 아내를 잃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간 황보세가에서는 소가주가 딸을 욕보이고 죽였다고 했던가.
이 시점에서는 황보세가 내부에서 쉬쉬할 뿐인 일이지만, 회귀 전에는 아귀부가 당시의 일을 알리고 녹림과 황보세가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선 탓에 세상 모두가 아는 이야기였다.
어찌 보면 정당한 복수고, 정사를 가리지 않고 무인이라면 치를 떠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사연.
"헌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뭐, 라?"
내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정면에서 부정당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단순한 회광반조일지도 모르겠다.
곧 죽을 사람처럼 흐릿하게 풀어진 아귀부의 눈동자에 불이 켜졌다. 초점이 선명하게 잡힌 동공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내온다.
"내 눈에는 나나 너는 물론, 이곳에 모인 모든 무인들마저 전부 똑같다. 결국 은원에 사로잡혀 맹목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머저리들 아닌가."
"나는! 나는 다르다! 그 은원의 연쇄를 끊고자 무공을 익힌 것뿐이다!"
"아니. 너는 복수할 대상을 무림 전체로 삼았을 뿐이다. 진정으로 은원의 연쇄를 끊고 싶었다면 우선 자신의 것부터 내려놓아야 했을 터.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잖나."
"말도 안 되는 소릴! 세상 누가 멍하니 손에 쥔 힘을 내놓는단 말이냐!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으니까 모든 무인을 죽여 없애겠다는 건가? 그게 수틀리면 검부터 뽑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군."
"...!"
이를 악물고 이쪽을 노려보는 아귀부. 다만, 그 시선이 조금 전처럼 강렬하지는 않았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우리 같은 작자는 검부터 뽑고 보는 거다."
"나, 는...."
"결국 검밖에 보이지 않는다니. 어찌 보면 맹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군. 그렇기에 무인이 된 것이겠지만."
확신이 고집으로 변질된 아귀부의 눈을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가지 우리 사이에 다른 점이 있군."
"...."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한 걸까. 아귀부는 남은 힘을 말하는 데 쓰는 대신,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듣겠다는 것처럼.
"나는 이겼다. 같은 인간 백정에 검밖에 보이지 않는 맹인이라 해도 지는 것보다 이긴 쪽이 좋지 않겠나."
"...."
아귀부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눈을 뜬 채로 숨이 멎어 있었다. 어쩌면 내 말이 끝나기 전부터 그러했으리라.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러자 내 검에 기대듯 서 있던 메마른 아귀부의 몸뚱이가 절로 바닥에 쓰러진다.
털썩.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 위에 널브러진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아까부터 조용히 이쪽을 지켜보던 권사가 있었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안 기다려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나 혼자는. 너를 이기지 못해."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권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썩은 고목을 연상시키는 외형과 달리 청아한 미성. 다만 말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라도 한 건지 중간중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끊는다. 아마 이 또한 마공의 부작용 중 하나겠지.
"아귀부의 생각. 나와 달라. 하지만 동료. 마지막 유언.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그러냐."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세를 잡은 권사.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무리해서 아귀부와 맞붙은 탓에 전신이 상처투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가 줄줄 흐르는 것은 물론, 체내를 헤집는 마기에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다.
아마 며칠은 꼼짝도 못 하고 요양해야겠지. 하지만 한 명 더 베어 낼 정도의 여력은 있다.
"혹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우리 모두. 복수에 눈먼 장님. 내가 죽이고 싶었던 건. 사마세가. 하지만."
"하지만 너희가 죽이려 든 건 전혀 상관없는 나와 당소월이었지."
"미안."
짧게 사과하는 녀석. 무인은 전부 죽어야 하고, 재능 있는 무인이라면 더더욱 빨리 죽여야 한다는 아귀부와는 다른 모습.
하지만 사과 한마디로 끝내기엔 서로 선을 너무 넘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권사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귀목마녀. 사마수련."
"천휘. 별호는 없다."
뒤늦은 통성명을 신호 삼아 서로 기수식을 취한다.
귀목마녀의 주먹에서 시작된 마기는 이윽고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권기를 전신에 두르는 미친 짓. 당연한 말이지만, 몸을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대신, 내공 소모는 수십 배는 될 법한 미친 짓이다.
아무리 성취가 빠른 마공을 익혔다고 하나 절정의 경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진원진기라도 뽑아 쓴다면 모를까.
아마 귀목마녀는 내게 이기든 지든 일다경이 채 지나기 전에 목숨이 끊어지리라.
남은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즉시 땅을 박차는 귀목마녀. 그 모습이 마치 거뭇한 불에 타오르는 장작 같았다.
파밧!
이전보다 훨씬 빨라진 속도로 가까워지는 거리. 마기를 담은 주먹이 내 심장을 향해 쏘아진다.
하지만 이미 주변에 뿌려놓은 살기와 거기서 전해지는 기감을 통해 반 박자 빠르게 읽은 상황.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퍼엉!
허공을 후려친 주먹에서 파공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권풍이 내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리고 바람이 그치기도 전에 솟구치는 다리. 턱을 부숴 놓겠다는 의지가 어찌나 강한지 아직 닿지도 않은 턱이 찌릿하게 저려온다.
덕분에 허벅지가 움찔한 순간에 이미 고개를 저만치 꺾어 피할 수 있었지만.
그 틈을 타 검을 귀목마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나오는 검. 다만, 이전과 달리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단단한 나무껍질 같은 피부에 내공을 두르기까지 했으니 흠집이 남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손아귀를 울리는 반탄력에 검을 놓치지 않도록 꽉 움켜쥐며 계속해서 합을 나누었다.
살아 있는 장작이 된 귀목마녀가 제 목숨을 불태워 얻은 힘을 휘두르면, 나는 이를 피하거나 검으로 흘려 방향을 뒤튼다.
권각술을 펼치는 중간중간에 손톱을 세워 조법을 선보이거나, 주먹을 활짝 쳐 장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의도는 뻔했고, 초식은 정교하지 못하다. 끊임없이 팔다리를 뻗어오는 귀목마녀는 솔직히 말해서 절기를 꺼낸 아귀부보다 못하다.
아귀부의 무공이 극단적으로 공격적이고, 반대로 귀목마녀의 무공은 단단함에 집중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부족한 실력.
하지만 귀목마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는 것이라고 봐야겠지. 이미 목숨을 불태운 이가 거리낄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이를 받아내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를 뿐이다.
캉! 카앙! 캉!
목덜미의 정확히 같은 지점만을 노리는 검. 본래라면 수십 번은 죽었어야 했을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순전히 특이한 마공 덕분이리라.
그렇게 지지부진한 공방을 이어 나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슬슬 진원진기마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인지, 전신을 태우던 그녀의 마기가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더는 내공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목덜미를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카득!
여전히 튕겨 나가는 검. 껍질 조각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다.
슬슬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귀목마녀는 우직하게 주먹을 뻗고, 다리를 휘둘렀다.
하여, 나 또한 몇 번이고 그녀의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었다.
카각! 카드득! 콰직!
계속해서 같은 부위에 검을 내려친 보람이 있었던 걸까. 귀목마녀의 목덜미는 점점 껍질이 부서지더니, 이제는 아예 흐릿하게나마 칼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번 찍은 도끼질에 나무가 서서히 넘어가는 듯한 모습.
그 균열을 확인하고는 주변에 옅게 흩뿌리던 살기를 검에 집중시켰다. 자연스레 뒤따르는 내공.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얼마 남지 않은 광랑탈명공의 내공을 있는 대로 쥐어짜며 정신을... 의지를 날카롭게 벼려 냈다.
지금의 내겐 다소 무리한 일검.
쐐애애액!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기세. 똑같은 궤적. 똑같은 속도.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검신 위로 희미하게 피어오른 붉은 기류가 바로 그러하다.
검기를 발견한 귀목마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
서걱.
놀란 그녀의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장작의 불이 꺼졌다.
[2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7] 27화. 달밤
툭. 데구르르.
귀목마녀의 머리가 베였다. 놀란 표정 그대로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껏 힘이 들어가 있던 근육이 이완되며, 지금껏 참아왔던 고통이 동시에 덮쳐오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 새겨진 자상에서 올라오는 쓰라림. 제법 깊숙이 베인 가슴팍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열기.
상당히 아프긴 하지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처 부위를 통해 기혈에 파고든 마기.
안 그래도 마지막에 검기를 억지로 뽑아 낸 탓에 엉망이 된 혈도를 마기가 헤집고 있으니,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만약 백독청혈단 덕분에 혈도가 튼튼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기절해 있었겠지.
가능하면 한두 개 정도 더 먹고 싶은데.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검을 집어넣었다.
스릉.
어지러워지는 시야. 끝났다고 생각하자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그렇게 비틀거리며 옆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천 소협!"
뒤에서 달려온 당소월이 내 어깨를 끌어안듯 부축해 왔다.
안심되는 온기. 상반신에 와닿는 부드러운 감촉. 매일 바르는 향유의 냄새. 그리고 걱정 가득한 눈빛.
다소 무리한 생사결로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당소월에게 몸을 기댔다.
"이런! 괜찮으신가요? 아니, 이 지경이 될 정도면 아버님께 도움을 요청하셨어야지요!"
"괜찮다. 자신이 있으니 싸웠고, 장인어른께서는 나를 믿어 주신 것뿐이다."
"그걸 말이라고... 아니, 됐으니까 빨리 옷이나 벗어보시지요."
"뭐, 라? 여기서는 좀 그렇지 않나. 적어도 객잔이건 어디건 좀 들어가야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상의면 충분해요. 일단 피는 멈추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잔말 말고 가만히 계시지요."
단호한 어조로 그리 말한 당소월이 내 무복을 잡아당겼다. 마기를 두른 공격을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피해 내기를 반복한 탓일까 이미 너덜너덜해진 무복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찢어졌다.
촤아악-!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지 흠칫한 당소월이었으나, 전신의 자잘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에 그녀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또 이렇게...."
"무얼.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별거 아니다."
"피 칠갑을 하고 그런 말을 해도 신빙성이 없답니다."
한숨을 내쉰 당소월이 품에서 꺼낸 금창약을 상처 부위에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는 혹시라도 마교의 끄나풀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객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다.
그 큼직한 원 안에서 나와 당소월이 싸운 것이고.
즉, 상반신을 벗은 나와, 정성스레 약을 발라주는 당소월의 모습이 암혼대 전원과 당진천에게 보이고 있다는 뜻.
"으음."
불편하다. 내가 주변의 시선을 그리 신경 쓰는 편이 아니건만, 그럼에도 지금의 이 구도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특히 무표정하게 이쪽을 노려보는 당진천과,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어대는 당유진이 무섭다.
더 이상 자극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슬그머니 둘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자연스레 당소월이 싸우던 곳이 보였다.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진 열 명가량의 마교도들. 그중에는 절정 고수로 보이는 노인도 하나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아직 목숨줄은 붙어 있는지 꺼멓게 죽은 낯빛으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상태.
암혼대 몇이 그런 녀석의 단전을 부수고 포박하는 중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내 상박을 만지작대는 당소월에게 물었다.
"일부러 살려 둔 건가? 잘했다. 나는 그럴 여유가 없어 벨 수밖에 없었으니, 저 녀석을 심문하면 되겠군."
"지금 그런 게 중요하신지요. 다른 건 금창약으로 충분했는데, 여긴 약만으로는 힘들 것 같네요."
이쪽을 찌릿 노려보고는 내 가슴팍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덧그리는 당소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 하지만 그 간지러움이 어느 순간 고통으로 변했다. 상처 부근에 닿은 것이다.
"붕대를, 아니 그럴 시간도 부족하네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당소월이 조금 전까지 내 상처를 살펴보던 손으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혀를 쭈욱 내밀었다.
"베에."
"자, 잠깐."
당황한 내가 뒷걸음질 치자, 그런 내 발등을 자신의 발로 밟으며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당소월.
그녀가 눈꼬리를 초승달 모양으로 휘며 눈웃음 짓더니, 그대로 상처의 바깥 부분부터 핥기 시작했다.
할짝 할짝.
축축하면서도 말랑한 것이 내 살결 위를 덧칠하는 감각.
"이게 뭔...."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을 눈치챘다.
백살도객 때처럼 일부러 큰 공격을 유도했던 만큼 가슴팍의 상처가 제일 컸고, 그만큼 출혈도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는데.
그 출혈이 순식간에 멎어 들어가는 것은 물론,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던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당소월이 핥은 상처의 고통만 사라진 게 아니다. 전시에서 느껴지던, 심지어 마기로 인한 내상이 가져온 통증마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마치, 내 몸을 헤집던 예리한 날붙이가 뭉툭하게 갈려 나가는 느낌.
한참을 할짝거린 끝에 만족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떨어뜨린 당소월에게 물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지혈도 지혈이지만, 아픈 것도 많이 사라졌다."
"흐흥. 알고 싶으신가요?"
팔짱을 끼고, 콧소리를 내며 우쭐대는 당소월. 그녀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피를 굳히는 독으로 상처 부위의 출혈을 막고, 마비 독을 적당량 섞어 고통을 둔화시킨 거랍니다."
"허어."
당소월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가슴팍의 상처에는 피딱지 같은 것이 출혈을 틀어막고 있었고, 팔다리를 움직여 보니 고통이 줄어든 대신 전체적인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대단하군. 독을 이렇게 쓰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
"뭐어. 솔직히 조금 힘들긴 하지요. 하지만 저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랍니다."
하긴. 독령지체가 있으면 독을 직접 체내에서 생성하고 조합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하긴 하겠네.
"다만, 여기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답니다."
"부작용이라도 있는 건가?"
"부작용이랄까. 그게 말이지요...."
말끝을 흐린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평소보다 붉게 물든 혀를 다시금 길게 내밀었다가 집어넣었다.
"너무 비려요. 원래 이렇게 맛없는 건가요?"
"...."
여러모로 위험해 보이는 발언. 그리고 이는 실제로 위협을 동반했다.
턱.
당진천이 나와 당소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명백하게 내 쪽만 강하게 움켜쥔 그가 눈가를 씰룩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둘 모두 자신보다 높은 무위를 지닌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구나."
"전부 천 소협에게 받은 자화배독초 덕분이랍니다."
"장인어른. 저 환자입니다. 어깨에 힘 좀...."
조심스레 말해 보았지만, 당진천은 듣지 못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거기에! 마지막의 그건 희미하지만 확실한 검기였다! 아직 지학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엿보다니! 무림의 홍복이 당가의 품에 안겼구나!"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장인어른 손을 조금 떼어 주시면...."
"허나, 너무 자만하지는 말거라. 순간의 깨달음은 스쳐 지나가는 것. 지금의 감각을 잊지 말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네."
웃으며 그리 말하는 당진천. 분명 미소 짓고 있을 터인 얼굴에서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환자라는 말이 신경 쓰이긴 했는지 슬슬 손에서 힘을 풀고 있었으나... 완전히 손을 떼기 전에 당소월이 나섰다.
"아버님. 천 소협을 그만 괴롭히고 이리 내어주시지요."
"괴롭히다니. 난 그저 치하해 주려는 생각뿐이었다."
"네네. 그러시겠죠."
어깨를 으쓱이고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당소월.
아직 어린 몸뚱이가 당소월의 품에 쏘옥 안겼다. 평소라면 굴욕이라고 느꼈겠으나, 지금만큼은 반갑기 그지없다.
그렇게 나를 지키듯 감싼 당소월. 마치 알을 지키는 어미 새 같은 모양새.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진천을 지나쳐 하오문의 염소수염이 있는 곳까지 나를 부축해 간 당소월이 물었다.
"혹시 근방에 여기 전원이 묵을 수 있는 객잔이 있나요?"
"예, 예? 연주에 객잔은 많지만, 그만큼 오가며 객잔을 이용하는 사람도 많이 이만한 인원을 받을 여유가 있는 곳은... 아! 하나 있습니다요!"
"어머? 다행이네요. 어디인가요?"
"바로 여기입니다요."
그리 말하며 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객잔을 가리키는 염소수염.
그가 당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금 막 손님이 전부 빠졌으니 자리는 넉넉할 겁니다요.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벽이 부서져 한쪽 방에서는 찬 바람이 들이닥친다는 점입니다만...."
"...그 부분은 저희 당가가 수리하도록 하지요. 아버님. 괜찮을까요?"
"으음. 그리하거라."
힘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당진천. 당소월이 들었냐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자, 염소수염이 눈치 빠르게 쪼르르 객잔 안으로 달려갔다.
그가 주방에 숨어 있던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내 서로 화색이 되어 돌아왔다.
"괜찮답니다요!"
"다행이네요. 가죠 소협. 소협은 저랑 같은 방이랍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간호해 드릴 테니, 빨리 나을 생각만 하시지요."
"참 고마운 말이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이미 동굴에서 한달 가까이 같이 살았으면서 부끄러워하시는 건가요?"
"장인어른을 무서워하는 것에 가깝겠군."
"...그럼 그냥 옆방에 머무르는 것으로 하지요."
"음.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다."
당진천의 꾸깃꾸깃한 미간 주름이 점점 펴지는 것을 보아, 이게 정답이었나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당소월의 부축을 받아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주가 제법 부지런한 사람인지 화려하진 않아도 깔끔한 내부. 침상에 나를 조심스레 눕힌 당소월이 이불을 덮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크게 다친 곳도 없으니 호법을 서 드리겠습니다. 어서 몸을 추스르시지요."
"그래도 괜찮겠나?"
"괜찮고 말고요. 저는 정말 멀쩡하답니다. 제 독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져, 절정 무인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지 뭐예요."
"마기는 독을 몰아내기엔 썩 좋지 못한 성질을 지녔으니 그런 것도 있을 거다."
"소협이 만들어 준 빈틈으로 먼저 중독시킬 수 있었던 덕이 더 큰 것 같지만요."
"말은 고맙군. 다만 굳이 당소월 네가 수고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만."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랍니다.
어깨를 으쓱인 당소월이 주변의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어서 내상이나 다스리라고 재촉하듯이.
"알겠다. 그럼 운기요상에 집중할 테니 잘 부탁하마."
"예에."
방긋 웃는 당소월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광랑탈명공의 구결에 따라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몸 안에 스며든 마기를 몰아내고, 무리하게 쥐어짠 탓에 쪼그라든 혈도를 펴주고, 몸의 활기를 돋궈 회복력을 극대화한다.
마지막 남은 집중력을 쏟아부어 기본적인 운기요상을 마쳤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빠르게 멀어지는 정신.
잔뜩 지친 몸뚱이가 멋대로 잠에 빠져드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저항하지 않았다. 당소월의 말대로 지금은 휴식이 필요할 때니까.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이미 어슴푸레하게 물든 주변. 새벽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당소월은 떠나고 없었다.
다시 내공이나 돌리다 잠들 생각으로 눈을 감는 순간.
끼이익.
무언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맡의 검을 잡아채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누구...읍!"
부드러운 손이 내 입을 틀어막는다.
즉시 검을 뽑으려 했으나, 손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에 멈칫해 고개를 들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이 침입자의 얼굴을 비춘다.
"쉿-!"
그곳에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당소월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세상에.
[2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8] 28화. 달밤 (2)
"쉿-!"
야심한 새벽. 내 방에 몰래 들어온 당소월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세상에.
상상도 못 한 정체에 멈칫한 사이. 당소월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아버님께 들키면 안 되니까 조용히. 약속할 수 있지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내 입을 틀어막던 손을 떨어뜨리는 당소월.
멀어지는 온기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대체 이 시간에는 왜 찾아온 거냐."
"그야 당연히 천 소협과 잠깐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지요."
"이야기?"
"예에. 가능하면 낮에 하고 싶었지만, 소협이 잠드셔서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답니다."
"그런 거라면 내일 해도 되지 않나."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당소월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냥 달도 밝고, 잠도 안 와서 소협이 생각났답니다. 혹시 제가 이리 찾아오는 게 싫으셨는지요?"
"...."
회귀 전의 당소월도 한바탕 마교와 검을 맞댄 날에는 별의별 이유를 대며 내 방에 숨어들곤 했었지.
달이 밝으니 구경하게 나와라. 오늘도 살아남은 걸 축하할 겸 술이나 한잔하자. 죽을 뻔한 거 한번 살려줬으니 말동무 좀 해라 등등.
어찌 보면 억지스러운 요구였으나, 당시에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멍하니 서 있을 건가."
"네?"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편하게 앉아라."
"아하?"
배시시 미소 지으며 침상의 가장자리에 걸터앉는 당소월. 혼자 누워 있기도 뭐해 슬금슬금 일어나,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뭐,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나?"
"물론 있습니다만. 그 전에 하나 확인하지요. 몸 상태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아직 좀 아프시다면 마비 독을 조금 더 내어드리겠습니다."
혀를 빼꼼 내미는 당소월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아프긴 한데 참을 만하다."
"아프긴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어디...."
엉덩이를 바짝 붙이며 맞대 오는 어깨. 가까워진 거리에 침을 꼴깍 삼키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조금 기대하셨는지요?"
"무얼 말이냐."
"제가 낮에 그리했던 것처럼 소협의 상처를 직접 핥을 거라는 기대 말입니다."
"...안 했다."
"음흉하시기는. 천 소협은 어디 가서 거짓말하시면 안 되겠네요. 이렇게 알기 쉬울 줄이야."
한차례 키득인 당소월이 내 팔을 잡아끌어 서로의 손바닥을 겹쳤다.
"그때는 지혈 목적도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단순히 진통 효과가 필요한 거라면 손만 잡아도 충분하답니다. 뭐어. 아버님께 조금 혼나서 그런 것도 있고요. 대신 손은 오래 잡아 드릴 테니 아쉬워하지 마시길."
"아쉬워한 적 없대도."
"그럼요 그럼요. 소협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내 말을 대충 흘려넘기며 독공을 운용하는 당소월. 맞대고 있는 손바닥을 통해 미약한 독기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옅어지는 고통. 그럭저럭 참을 만했던 것이 편안한 수준까지 내려왔다.
한결 편해진 내 기색을 눈치챈 당소월이 다시 몸을 떨어뜨렸다. 처음보다는 가깝지만, 조금 전보다는 떨어진. 어깨가 닿을락 말락 한 상황.
하지만 여전히 손은 맞잡은 미묘한 거리감. 그 안에서 당소월이 약간의 녹색기 도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본론이랄게 있었나?"
"물론이지요! 천 소협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답니다. 대체 격상의 무인을 어떻게 둘이나 상대할 수 있었던 건가요?"
아, 이게 궁금했던 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일단 격상이라는 표현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무인의 높고 낮음을 무엇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당연히 경지 아닌가요?"
"나는 강함이라고 생각한다."
"경지가 곧 강함이잖습니까."
"아니. 경지와 강함은 별개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더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무조건 더 강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경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잠시 고민하던 당소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깨달음의 깊이 아니겠습니까. 각자의 깨달음은 달라도 그 깊이가 같다면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란 무엇이지? 깨달음의 고절함은 누가 정하는 것이지? 애당초 깨달음에 우열이란 존재하는 건가? 그 이전에 깨달음이 실존하긴 하는 건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상념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닌가? 당소월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어, 음. 어어?"
할 말을 잃고 어버버거리는 당소월.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로 반짝이던 눈동자가 그 빛을 잃어 탁해진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 조금 재밌었다.
아마 평소에 해 본 적 없는 생각이라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거겠지. 당연한 일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 보도록 해라. 답이 정해진 것은 아니나, 스스로 납득할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
"일단 묻겠습니다만, 소협께서는 깨달음을 무엇이라 정의하셨습니까?"
요령이다. 사람을 더 잘 죽이는 요령. 그리하여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요령.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깨달음에 대한 정의. 그대로 당소월에게 말할 수는 없다.
"내 답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고 만다. 언젠가 네 답을 찾으면 그때 서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조금 깊게 물어봤을 때의 아버님이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아마 당소월 네 미래를 생각하는 무인이라면 다들 그리 말할 거다."
"흥. 아부하시기는."
그런 적 없는데.
라고 말하기에는 당소월이 기분 좋아 보여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 그럼 다시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경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참고로 제대로 무공을 배운 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일 거다. 가장 처음에 당부하는 말이니."
"이미 알고 있는 내용...?"
고개를 좌로 갸웃, 우로 갸웃, 갸웃갸웃거리던 당소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정기신(精氣神)의 조화, 인가요?"
"거 봐라. 잘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정답이다. 정기신이라 해도 좋고, 심기체라 해도 좋고, 좀 더 간단히 심신이라 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니."
모든 사람은 피와 살로 된 육체(精)를 갖고 태어나며, 이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가장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진원진기(氣)고, 앞선 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의지와 상념(神)이다.
삼류에서 일류는 그중 육체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과정이다. 가장 기본적인 단계이며, 그렇기에 재능이나 특별한 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노력하면 일류까지는 오를 수 있다.
얼마나 빠르게 일류에 도달하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육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면 다음은 내공. 이를 육신의 연장처럼 자유로이 외부로 뿜어내는 경지를 절정 혹은 초절정이라 부르며 이때부터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 인정해 준다.
그렇게 육체와 내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이는 마지막으로 의지와 상념. 즉, 의념이라 부르는 것에 도전하게 되는데....
"나도 아직 도달해 본 적 없는 경지라 자세히는 모르겠군."
"누가 들으면 그 전의 경지는 밟아본 것처럼 들리네요."
"실제로 반 발짝 정도 걸치고 있잖나."
"앗."
내가 잠깐 보여 주었던 검기를 떠올린 걸까. 당소월이 눈을 크게 떴다.
"자, 이쯤에서 지금껏 말한 것들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지. 당소월 네 말대로 경지의 기준은 얼마나 조화를 이루었느냐로 나뉜다. 우리가 팔다리를 움직이듯, 자연스레 내공을 다룰 수 있다면 이를 절정의 경지라 칭하는 것일 뿐. 그 어디에도 얼마나 잘 싸우는지는 들어가 있지 않다."
당연히 검기를 쓸 수 있으면 쓰지 못하는 이보다 더 유리하겠지. 상대가 외팔로 싸울 때 자신은 양팔로 싸우는 꼴 아닌가.
하지만, 외팔이의 검이 전혀 통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어찌 됐건 급소에 칼침이 박히면 골로 가는 건 동일하니까.
"이번 일도 비슷한 맥락이다. 경지의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내가 더 잘 싸웠다. 그뿐인 일이지."
"저는 그게 더 대단한 것 같습니다만."
"독과 암기를 다루는 사천당가의 여식이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흠흠."
머쓱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배배 꼬는 당소월.
살수 집단인 살곡이 괜히 독과 암기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누군가를 죽이기에 효율적인 무기기 때문이지.
"물론, 예외는 있다. 화경쯤 되면 호신강기를 쓸 수 있게 되지 않나."
강기는 강기로만 깰 수 있는 법.
생사의 기로가 한치에 달려 있다고는 하나, 그 한치를 파고들지 못한다면 이는 무적자(無敵者)나 다름없다.
"화경의 경지부터 고수가 아닌 절대고수라 부르는 것도, 별호에 왕(王)이니 존(尊)같은 광오한 단어가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다. 아무리 많은 무인이, 심지어는 군대가 몰려와도 스스로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무너지지 않는 이를 달리 무어라 부르겠나."
"뭐어.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월. 맞는 말이다. 분명 강기는 비대칭 전력이라 할만한 힘이지만, 중원에 화경 무인이 한 명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기에 천마가 괴물인 것이다.
그러한 화경 무인의 합공을 받고도 역으로 몰살시킨 녀석이니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천마신공의 위용에 마음이 차갑게 굳는 것도 잠시. 당소월이 돌연 기지개를 켰다.
위로 곧게 뻗은 팔은 잘게 떨렸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어렴풋하게 몸 선이 드러난다. 그리고 눈을 꾸욱 감은 채, 반쯤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
"흐으읏... 하아."
묘하게 선정적인 자태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마침 구름이라도 벗어난 건지 확 밝아진 달빛이 평소보다 나른한 당소월의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달이란 아무리 밝아도 해보다는 못한 것.
창백한 달빛에 한쪽 얼굴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 반면, 반대쪽 얼굴은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얼굴의 절반을 숨긴 것만 같은 모습.
"...."
지금의 당소월은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여서, 회귀 전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서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달빛이 신경 쓰이는 걸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보름달에 시선을 고정한 당소월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당가에 돌아가면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르겠지요."
"그, 렇겠지."
"솔직히 기대되네요. 평생 혼인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급하게 혼례를 치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누가 들으면 아예 혼례를 올리는 줄 알겠군. 아직 정혼일 뿐이다."
"그렇긴 하지만, 저는 소협과 파혼할 생각이 없답니다. 그러니 이번 약혼식이 혼례나 다름없는 것 아닐까요?"
그리 말하고는 작게 키득이는 당소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여, 아직 식을 올리기 전인 지금 물어보고자 합니다."
"뭐를 말인가."
"천 소협."
당소월의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처연한 미소를 짓는다.
"혹시 저를 통해 다른 여인을 보고 계시는 것 아닌지요?"
"...."
그 분위기는 기억 속 당소월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너무나 닮아 있었다.
"지금이라면 너그럽게 넘어가 드릴 터이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분명 그래서이리라.
[2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29] 29화. 달밤 (3)
"지금이라면 너그럽게 넘어가 드릴 터이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당소월. 순간 입을 벌리긴 했으나,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말이 아닌 희미한 침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빛이 만들어 낸 음영과 입에 걸린 처연한 미소는 지금의 당소월을 이전 생의... 내가 사랑했던 여인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대답을 기다려 주던 당소월이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인다.
늘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웠다.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당소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거 아시나요? 저는 천 소협을 꽤 좋아한답니다?"
"...."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보다 보니 배울 점도 많고, 연하인 점은 마음에 들고, 솔직히 얼굴도 꽤 취향이거든요. 예에. 이러니저러니 해도 함께 있으면 즐거워요. 아마 앞으로도 쭈욱 그렇겠지요."
그리 말한 당소월이 아예 이쪽을 향해 돌려 앉으며 고개를 들었다.
역광을 받아 어둡긴 하지만, 상처 하나 없는 피부. 잘게 떨리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는 눈동자.
이곳에 있는 것은 산전수전을 겪은 독무후 당소월이 아니었다. 이제 막 무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고, 혼인이라는 중대사 앞에 긴장한 약관의 당소월이었지.
"그동안 조금씩 위화감이 느껴지긴 했답니다. 저와 대화 중이던 소협의 시선이 허공을 향하거나, 난데없이 아련한 시선을 보내올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
"단순한 착각이었으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아니었던 거네요."
당소월이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쓴웃음이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소협을 꽤 좋아한답니다. 하여 질문을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당소월이 한쪽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지금은 자신을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천 소협. 천 소협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그러하듯, 천 소협도 이 혼인을 기대하고 계신가요?"
불안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당연히 나도 기대하고 있다."
회귀 전. 달 없는 밤에 나눈 언약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약속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도.
미련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기대되는 것이 당연하지.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니다.
"내가 너를 통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지금까지는 본질은 같은 사람이라며 유야무야 넘기고 있었으나 이제는 안다. 지금의 당소월과 이전 생의 당소월은 다르다는 것을.
내가 사랑했던 당소월을 다시 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이제서야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다만, 그렇다고 하여 당소월 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함께 지내 보고 깨달았다. 나는 그냥 당소월이라는 사람에게 끌린다는 것을.
모종의 이유로 재차 회귀하여 지금의 기억조차 없는 당소월을 만난다 해도, 반대로 내가 이전 생의 기억을 잃어 백지상태에서 우연히 만난다고 해도.
분명 나는 불에 홀린 날벌레처럼 맹목적으로 당소월의 주변을 맴돌 것이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후의 정혼식을 기대해 주었으면 한다. ...내가 그러하듯."
"아."
여전히 내 뺨을 감싼 채로 굳어 버린 당소월.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저도 참 단순한 여자네요. 겨우 이런 말 몇 마디로 금세 마음이 풀리다니. ...하지만 가만히 소협의 안에서 제가 커지기를 기다리는 건 취향이 아니랍니다."
쭈우욱.
손에 대고 있던 내 뺨을 그대로 잡아 늘이는 당소월. 얼떨떨한 심정으로 불을 내어주고 있자니, 살짝 녹색기가 맴도는 눈동자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이제부터 소협을 꼬셔 볼게요."
"그게 무슨?"
"말 그대로예요. 만약 소협이 제게 반한다면, 그건 시간이 흐르며 다른 누군가를 잊어서가 아니랍니다. 그냥 제 유혹에 넘어가서지요."
"...."
어이없어하는 내 볼을 놓아주고는 검지를 척! 치켜든다.
"천 소협은 곧 중독될 거예요. 바로 저에게 말이지요."
대담하다면 대담한 선언. 본인도 자각하고 있는지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랐으나, 시선을 피하지도 뻗은 검지를 치우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당소월.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안 그래도 몰래 들어온 터라 오래 있기는 힘들답니다."
"으음. 그렇겠지. 아무리 정혼자가 될 사이라고는 하나, 야심한 밤에 남정네 방을 들락날락한 사실이 밝혀져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상한 짓이라도 한 것 같지 않습니까."
입술을 삐죽 내민 당소월이 돌연 내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와앙."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이빨 자국이 남으며 살짝 아플 정도로.
"...뭐 하는 거냐."
"오해받으면 억울하니 진짜로 이상한 짓을 좀 해봤답니다."
"...."
어이가 없어 삐딱한 태도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당소월이 키득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그냥 깨물기만 한 것은 아니지요. 방금 소협에게 쌍두석척(雙頭蜥蜴)의 독을 발라 두었거든요."
"독, 말인가?"
독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애초에 당소월이 나를 해칠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 신경 쓰여 방금 깨물린 손가락을 코에 가져다 댔더니, 당소월이 기겁하며 내 손을 밀어낸다.
"냄새는 왜 맡으시는 건가요!?"
"아니. 독이라고 하길래 신경 쓰여서 그만."
"그냥 맡아서는 아무 냄새도 안 나니 그만두시지요."
"자세히 맡지 못했을 뿐, 냄새 자체는 났던 것 같다만."
"...독의 냄새는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길!"
그리 말하고는 옷소매로 내 손등을 벅벅 문질러 닦는다. 기껏 독을 묻혀 놓고 다시 닦는 건 또 뭐 하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내 시선에 담긴 의미를 느낀 건지 한차례 한숨을 내쉰 당소월이 입을 열었다.
"쌍두석척은 꼬리 대신 머리가 하나 더 달린 도마뱀 영물이랍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한쪽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각자 다른 도마뱀 둘이 되지요."
"거, 참 신기한 녀석들이군."
"여기서 끝이 아니랍니다. 완전한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켜야 하거든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독을 발라 둔답니다. 멀리 떨어져도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걸 방금 내게 바른 건가."
"예에. 이제 천 소협이 너무 멀리 떨어지지만 않으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랍니다."
"혹시 나도 당소월 네 위치를 느낄 수 있나?"
"소협이 독공을 수련하여 독정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신다면 가능하겠지요."
몇몇 무공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면 내공 그 자체의 성질이 변화한다. 열양공이 내공만으로 불을 일으킬 수 있게 되고, 음한공은 물을 얼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은 예.
나 같은 경우에는 내공에 살기를 녹여내었고, 독공을 익힌 사람은 내공과 독기를 합일시켜 단전을 독정으로 변화시킨다 들었다.
지금까지 익힌 무공을 전부 버리고 독공으로 초절정에 올라야 한다라.
"...내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소리군."
묘한 심정에 멍하니 손가락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방금 독공으로 경지에 오른 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만?"
"제 체액과 독을 섞었기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는 건, 저뿐이랍니다. 하지만...."
"하지만?"
"눈앞에 있으면 제가 쌍두석척의 독을 발라두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사실 그러라고 묻힌 것이기도 하고요. 일종의 영역표시랍니다? 아버님이나 가문의 어르신들 눈에는 반드시 소협과 이어지겠다는 의지의 표명 같은 느낌으로 보이려나요?"
장난스레 웃으며 그리 말하는 당소월. 그녀가 이젠 진짜로 가보겠다는 듯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아직 환자이신 천 소협은 푹 쉬시길. 저는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으음."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야말로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당소월.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손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뭐, 됐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 그 언젠가 그토록 아쉬워했던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가부좌를 틀었다.
당소월이 들어와서 깬 것이지, 아직 내 몸은 내상도 외상도 완전히 낫지 않은 상황.
잠은 충분히 잤으니, 다시 운기요상에 집중해야지.
빨리 나아야 빨리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당가에 돌아간 뒤에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광랑탈명공의 구결에 따라 내공을 운용했다. 살기 그득했을 기운이 오늘따라 잠잠하게 느껴진다.
***
"자네. 밤에는 문을 꼭 잠그고 자게."
"예?"
다음 날 아침. 하루 종일 가부좌를 틀고 있던 탓일까. 몸이 뻐근하여 공터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있자니, 어느새 나타난 당진천이 그리 말했다.
그의 시선은 내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제 당소월이 쌍두석척의 독을 바른 쪽이었다.
"안 그러면 내가 실수로 자네 방에 들어갈지도 모르잖는가."
"...."
어제 당소월이 내 방에 들렀다갔다는 건 진작에 들켰나 보다.
흠칫 굳은 내 모습에 껄껄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당진천.
"무얼. 그저 너무 급하게 가지 말라는 걸세. 세상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 아닌가."
"저도 순서 지키는 거 참 좋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심문은 어찌 되고 있습니까?"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돌리려는 것 같지만 어쨌든 자네도 순서를 지키겠다니 그냥 넘어가겠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네."
"예?"
그럴 수가 있나? 당가인데?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이군.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겠고 말이야. 자네 지금 당가의 심문이 지지부진한 것에 놀란 게지?"
"뭐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아직 당소월이 독무후라 불리기 이전. 지금 시대의 중원에서 가장 독에 해박한 것은 다름 아닌 독왕 당진천이리라.
그리고 당가는 독공의 깊이만큼이나 의술에도 조예가 있는 가문.
명줄을 붙여둔 채, 고통을 주는데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심문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설마 손속에 자비를 두고 계신 건...."
"그럴 리가. 당가가 정파를 표방한다고는 하나, 자식을 죽이려던 이에게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잖나. 애초에 자네도 당가의 가훈은 잘 알고 있을 테고."
"허면 무엇이 문제이신 겁니까. 아무리 의지가 강하다 해도 장인어른의 독이라면 의지와 상관없이 진실을 토해내게 만들 수도 있을 터인데."
"음? 자네 좀 잘 아는구만. 대부분은 고통 앞에 의지를 꺾지만, 때때로 고통 앞에 의지를 불태우는 자들이 있지. 마교 놈들은 대부분 그러한 독종들이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의지를 꺾는 것이 아니라 이지를 흐리게 하는 것이네."
회귀 전. 바로 옆에서 당소월이 마교도를 심문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 잘 안다.
다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걸까. 당진천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을 이었다.
"미혼독(迷魂毒)으로 이지를 흐리게 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중요한 배후를 불게 하면 금제 때문에 막히지 뭔가."
"아."
마교는 모든 교인에게 금제를 거는 미친 집단이었지.
"그거라면 제가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기에 파훼법 또한 활발하게 연구됐었다.
[2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0] 30화. 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