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30-40

[30] 30화. 대계

천마의 무위가 충격적이라 종종 깜빡하곤 하지만, 본래 마교는 그리 강한 집단이 아니다.

무공은 열심히 익히지만 재능을 가진 자는 거의 없고, 수련하는 무공 중에서도 상승의 무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지. 거의 없는 게 아니라 하나도 없다. 회귀 전에 보았던 마교의 상승 무공은 천마가 정립하여 가르친 것이 전부였을 정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무림 전체에 원한을 가진 이라는 소리는 무림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속하기를 거부한다는 듯하기도 하니까.

지금껏 중원 무림이 가꿔온 무학을 계승하지 못했으니 깊이 있는 무공이 나오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그들은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부작용이 심한 마공을 익혔고 ...사술(邪術)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술을 배척하던 중원 무림과 달리 계속해서 발전시킨 덕분일까.

무공은 부족해도 사술만큼은 중원 무림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이 마교다. 금제 또한 그 일부니, 당진천조차 당장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거라면 제가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무어라?"

해괴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는 당진천.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겠지만, 나는 진심이다.

금제는 마교의 사술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 높은 기술. 실제로 정사연합이 꽤나 애 먹었다고 했었지.

그렇기에 가장 먼저 파훼법이 나온 사술이기도 하다.

"제가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이런 사특한 수에는 겉핥기로나마 조예가 있습니다."

"절강성 출신이라는 말로 뭐든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말게."

"그럼 예비 사위를 한번 믿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까보다는 낫군."

고개를 끄덕이는 당진천.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가 실망할 일은 없을 거다.

나는 그냥 알려준 대로 달달 외웠을 뿐이지만, 파훼법 자체는 중원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만든 것이니까.

진법으로 유명한 제갈세가, 파사현정의 공능을 지닌 불가와 도가의 문파, 그리고 마교만큼은 아니지만 사술에 능숙한 사마세가.

정사연합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절대 힘을 합칠 일 없는 셋을 믿어보자.

***

당진천을 따라 도착한 객잔의 가장 외진 방. 그곳에는 일전에 보았던 노인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행색이 추레할 뿐, 피가 묻거나 어딘가 잘린 부분도 없어 겉보기는 심문 중인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하다.

다만, 그것이 정상으로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멍하니 풀어진 눈동자. 끊임없이 무언가 웅얼거리는 목소리. 입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

진작에 정신이 무너진 것 같은 모습.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평범한 노인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겠지.

"연기는 적당히 해라. 이 자리에 너의 그 얄팍한 흉내에 속아줄 사람은 없으니."

"이런...아쉽게 됐군.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이지만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는 노인. 말투 또한 무기력하긴 했으나 머뭇거림은 없었다.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고명한 독왕께서 실수로라도 말도 못 할 수준까지 망가뜨릴 리 없잖은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고쳐두었겠지."

"자네는 아닌 척해도 은근 아부가 대단하단 말이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거 보게. 지금도 입에 기름칠하고 있지 않나."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의 모습에 노인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역겨운 것... 정파의 어른이라는 자가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사람 죽이는 법도 모자라 고문하는 법까지 가르칠 생각이냐... 당가의 소문이...."

"시끄럽다."

냅다 아혈을 짚어 입을 다물게 했다. 이미 단전이 부서져 내공 하나 없는 상대였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더라.

"어차피 또 무인은 살인귀 집단이라든지, 무공은 사라져야 한다든지, 네놈들의 그 자기 파멸적인 교리를 읊는 것이 전부겠지."

"...."

"네놈들의 그 구구절절한 사연도, 뒤틀린 생각도 알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와 내 사람이 꾸역꾸역 중원까지 기어들어 온 마교도의 사주로 죽을 뻔했다는 것뿐."

"...."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노인.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본래 금제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금지된 일을 행하려 할 때 큰 고통을 주어 막는 것. 고독이 그 대표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두 번째로는 심상에 특정 명령을 새겨넣는 강력한 암시다. 섭혼술 혹은 특수한 의식을 통해 거는 것인데, 워낙 복잡한 수법이라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얼마 없다.

그리고 마교는 특이하게도 위의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했다고 한다.

금제를 두 개씩 건다는 것이 아니라 둘을 하나로 엮어, 더욱 촘촘한 금제를 걸었다나.

고독을 제거하면 암시가 발동해 스스로 심장이 멈춰 죽고, 이지가 흐려지면 다시 정신을 회복시켜 암시가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고 했었지.

만약 단숨에 이지를 무너뜨리면 그대로 고독이 심장을 괴사시킨다.

물론, 동시에 제압하면 이론상 아무 문제 없이 금제를 해제할 수 있으나....

사람의 이지가 언제부터 흐려지고 언제부터 또렷한지를 어떻게 정확히 가늠하겠는가.

체질이 다르고, 정신력이 다르며, 조금 전처럼 이지를 제압당한 척을 하며 혼동을 줄 수도 있고.

그렇기에 고독을 속이고 암시를 덧씌워서 뭐라 뭐라 복잡한 설명을 듣긴 했다만... 솔직히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그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만 알고 있을 뿐.

손을 따라 녀석의 심장 부근에 파고드는 기운. 단전이 부서진 영향인지 혈도가 완전히 말라붙었지만 억지로 내공을 밀어 넣었다.

"...!"

강제로 혈도를 넓혀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내공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제법 고통스러운지 녀석의 눈이 크게 떠진다. 상관없다. 어차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포박된 상태 아닌가. 집중력이 흔들릴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강제로 넓힌 혈도를 따라 내공이 내달린다. 우악스레 가로막는 장애물을 깨부수자, 노인의 칠공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여기서 괜히 시간을 끌면 출혈이 심해져 죽는다. 그러니 단숨에 기억 속 혈자리를 찾아 내공을 뻗쳤다.

푸확!

거칠게 피를 토하는 노인. 하지만 그 시선이 공허하고, 심장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뛰고 있었다.

금제를 해제한 것만으로 이리되진 않으니, 그간 들이킨 미혼독이 뒤늦게 힘을 발휘하는 것일 터.

"후우."

그제야 얹었던 손을 떼고 당진천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됐습니다. 뇌해혈을 건드린 터라 일각쯤 지나면 죽거나 백치가 될 테니, 그사이에 심문을 마치셔야 합니다."

"...이렇게 쉽게 말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묻는 당진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검을 뽑아 단숨에 노인의 눈앞까지 찔러 들어간다. 눈과 닿기 직전에서야 멈춘 검 끝. 하지만 녀석은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하지만 검이 아닌 질문에는 즉각 반응했다.

"이름과 마교에서의 지위를 말해라."

"여능학. 신교의 악견대주를 맡고 있다...."

멍하니 그리 중얼거리는 녀석. 이에 당진천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이게 처음 듣는 마교의 정보였다. 아직 좀 더 확인해 봐야겠다만, 녀석이 거짓을 둘러대는 것 같지는 않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어설픈 연기와는 달리, 자연스레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는 여능학의 모습에 놀란 당진천.

검을 집어넣으며 당진천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중에 전부 알려드릴 테니, 지금은 심문에 집중하죠.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습니다."

"아, 그래. 일각 정도라 했나? 이것저것 캐내기에는 조금 애매하군. 어디 보자...."

잠시 말을 고르던 당진천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가를, 소월이를 노린 연유가 무엇이냐."

"...대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계? 설마 마교주가 당가의 여식을 해하라 명령한 건가?"

"아니다... 교주께서는 그저 염려하셨을 뿐, 행동으로 나선 것은 독단적인 결정이다."

"허어. 독단이라. 하기야.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야 그런 명령을 내리진 않겠지. 그럼 대계는 또 무엇이지?"

"무림의 멸망. 각자의 복수를 행하는 궁극적인 계획이다."

"쯧. 언제나 그렇듯 마교 놈들의 망상병이 도진 건가."

혀를 차는 당진천. 마교에게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전혀 믿고 있지 않는 모양새다.

사실 이 시기에는 누구나 당진천처럼 생각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마교는 이미 수차례 복수를 부르짖으며 중원을 향해 검을 빼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청성파를 넘어서지 못해 십만대산으로 되돌아가야 했지만.

청성파가 강성한 거대 문파인 건 사실이고, 도가 무공 중에서도 특히 실전성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구파일방에 들 정도로 대단한 곳은 아니다.

가끔 청성파를 피해 몰래 중원에 숨어든 마교의 고수도 그 수준이 대단치 않았고.

즉, 마교 또한 기껏해야 거대 문파와 비슷하거나 조금 못한 정도의 전력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소리.

다만 당대의 마교에는 천마가 있다.

아직 천마라 불릴 정도는 아니겠지만, 훗날 마공으로 화경,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미친 괴물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마교의 침략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뒤. 꽤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벌써부터 물밑 작업에 들어갔을 줄이야.

당진천은 망상병이 도진 것이라 치부했지만, 내겐 조금 다르게 들렸다.

아직 이전 생에서처럼 천마라는 오만한 별호를 내걸 정도는 아닌 듯 하나... 이미 마교주의 자리에 올랐으며, 오랜 시간 준비해 중원을 공격해 오리라고.

이후에도 당진천은 여능학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다른 일행은 있는지, 마교의 현 상황, 당가 외에 노리는 곳이 있는지 등등.

이지를 제압당한 여능학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지만... 기껏해야 대주 급이라 그런 걸까. 알고 있는 정보가 그리 대단치 않았다.

묘하게 실속 없는 심문이 계속되던 도중. 슬슬 일각이 다 되어 가는지 여능학의 입에서 침 대신 피거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다음이 마지막 질문이 될 터.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질문 내용을 고민 중인 당진천의 옆에 서며 물었다.

"장인어른. 마지막 질문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음? 아, 자네가 있었지. 그러게나. 놈들을 쓰러뜨린 것도 자네와 소월이었고, 이렇게 심문할 수 있는 것도 자네의 공이니 말일세."

"감사합니다."

짧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여능학의 앞에 섰다. 눈이 반쯤 뒤집힌 녀석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물었다.

"마교주의 경지가 어떻게 되지?"

"교주님의 경지는... 크륽."

한차례 피를 토해낸 여능학이 몸을 부르르 떨며 툭 내뱉었다.

"극, 마에 오르셨다."

그것이 여능학의 마지막이었다.

녀석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극마. 극마인가."

흔히들 말하는 화경의 경지였다.

[30]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1] 31화. 대계 (2)

이미 천마는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것도 모자라 마교주가 되어 침략을 준비 중이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들으니 충격이 더 크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가 십오 년...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무림의 멸망을 계획했다는 말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사연합이 결성되기 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반 이상 박살 날 때까지는 천마는 단 한 번도 멈추거나 머뭇거리는 일 없이 파죽지세의 기세로 중원을 짓밟았다.

아무리 천마가 압도적인 강자라고 하나, 오랜 세월 중원에 군림한 이들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지금까지는 천마의 불합리한 무위와 명문 정파의 방심이 낳은 결과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면에는 용의주도한 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한숨을 푸욱 내쉬는 것도 잠시. 큼직한, 하지만 남자 손 치고는 과하게 유려한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자네. 이제 심문도 끝났으니 나랑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장인어른."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내용일세."

당진천이 어깨에 올린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말했다.

"마교의 금제에 관한 것은 어떻게 알았나? 아니, 이번 기회에 다른 것들도 속 시원하게 말해 보게. 한두 개면 그냥 덮고 넘어갈까 싶었지만, 이렇게 많으면 그러기도 힘들잖나."

"예비 사위의 정을 봐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럴 생각이네. 지금도 자네를 강제하려는 건 아니고."

"그렇다면...."

"다만 알고 싶은 걸세. 사정을 알면 무언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나. 자네가 나와 소월이를 도와주었듯, 나 또한 그리하고 싶네."

"...."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우웅-

당진천이 기막을 펼쳐 방 전체를 둘러쌌다.

"자. 이제 누구도 이 안에서의 대화를 듣지 못할 걸세. 당가와 소월이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네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약조하겠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리고 숨길 이유도 딱히 없다.

어디까지나 믿어 주지 않고 광인 취급당할까 봐 비밀로 했을 뿐이지.

만약 제대로 믿어 준다면, 그리하여 기꺼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망설였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내 의지는 명확했고, 해야 할 말은 이미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기에.

그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혀. 어색하게 굳은 입술. 목은 울렁이기만 할 뿐, 숨소리조차 내뱉기 힘들었다.

그런 내 이상을 눈치챈 걸까. 당진천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자네. 괜찮은 겐가?"

"예. 괜찮습니다."

이번에는 술술 나오는 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내 회귀에 관해 밝히려는 순간.

"...."

이번에도 어김없이 굳어 버린 몸뚱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알 수 없는 현상.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누군가 내가 말하려는 것을 막고 있다는 감각만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말이 아닌 글로 전해보려 해도 마찬가지.

마혈이라도 눌린 것처럼 굳어 버린 몸으로는 당진천에게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어색하게 멈칫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당진천이 따스한 눈빛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까도 말했듯, 강제하려는 것은 아닐세. 무리할 필요는 없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터라. 다만,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드리겠습니다. 절대 당가와 당소월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 알겠네. 말하기 힘든 일이라면 묻어두는 것도 좋겠지. 허면 자네도 기억해 주게. 언제든 당가의 귀가 열려 있다는 것을. 자네가 준비되었을 때를 기다리고 있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기막을 회수하는 당진천. 그 배려는 고마운 것이었으나, 지금은 순수히 감사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금제를 걸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당진천과 헤어진 뒤.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잠시 공터의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게 금제가 있었다.

차분히 내면을 살펴보아도, 내공으로 전신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지만 확실하다.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려 하는 것을 막는 금제가 걸려 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아."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었다.

애초에 죽은 사람을 되살려 과거로 돌려보내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한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비하면, 금제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지.

무엇보다 순리를 벗어난 것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마공을 익힌 무인의 심신이 변질되듯, 회귀라는 역천(逆天)을 겪은 나는 오죽하겠는가.

헌데, 누구에게도 내 회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것이 어떻게 대가가 되는 것인가.

문득 떠오른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어젯밤의 당소월.

아무리 같은 인물이고 내 기억 속 모습과 닮았다고는 하나, 이전 생의 당소월과 지금의 당소월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겪은 과거가 다르고, 나와 쌓은 기억이 없는데 똑같을 리가 없지.

내가 사랑하는 당소월은 죽었다. 더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그런 당소월을 한없이 닮은 또 다른 당소월이다.

"...그런 건가."

작지만 절대 좁혀지지 않는 간극.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곪아 가는 속내. 이해받지 못하는 삶은 확실히 괴로운 일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못 버틸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 정도는 아니다. 이젠 아니게 되었지.

전날 밤. 당소월은 이미 내가 자신이 아닌, 자신과 닮은 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노라 말했다.

그럼에도 상관없으니, 나를 자신에게 반하게 하겠다며 당돌히 선언하기도 했고.

더 바랄 게 어디 있는가. 이거면 충분하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금제가 걸려 있었다는 부분이다.

지금껏 회귀를 불가사의한 현상. 운이 좋아서 벌어진 일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의도가 있고, 그 누군가는 내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득한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본다 생각하자 차오르는 무력함.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찌 됐건 죽어서 그대로 끝났어야 할 삶을 연장해 준 것 아닌가. 내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도 주었고.

고마워했으면 고마워했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천 소협? 안에 들어가 계시지 뭐 하고 계신지요?"

"당소월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 갑자기 무슨 그게 무슨 부끄러운 소리십니까."

"물어보길래 솔직히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제가 이리 반응할 걸 기대하고 말씀하셨지요?"

"뭐어. 그 부분은 부정하지 않겠다."

내 망설임 없는 대답에 당소월이 잠시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키득이며 나란히 등을 기대고 섰다.

"아버님에게 들었어요. 천 소협 덕분에 길어질 줄 알았던 심문이 금방 끝났다지요?"

"마침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대단하다고 한답니다."

발치의 돌멩이를 툭툭 차는 당소월. 그녀가 슬그머니 내 소매를 잡아 온다.

아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 새끼손가락에 얽혀 오는 가느다란 감촉.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어 둔 당소월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제가 천 소협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음? 갑자기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랍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소협에게 도움만 받았잖아요. 다음에는 제가 무언가 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결국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흠흠. 방금 건 저를 좋아한다는 말과 소협이 원해서 한 일이라는 말을 일부러 헷갈리게 말씀하신 거지요? 전부 간파했으니 원하시는 대로 놀라주지는 않을 거랍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했다는 뜻 말고는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만?"

"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들 하지. 그런가. 내게서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가."

"이, 이익...! 아니거든요?!"

발을 동동 구르며 잇소리를 내는 당소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낄낄대고 있자니, 조금 남아 있던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중요한 것은 당소월이 곁에 있고, 내겐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는 것이거늘.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손가락을 잡아당겨 전체를 맞잡았다. 단단히 깍지를 끼자 멈칫하는 당소월.

손가락을 이리저리 꼼지락대던 그녀였으나, 결국 못 참겠는지 샤샥 손을 빼낸다.

스스로 잡을 때는 괜찮지만, 잡히는 건 좀 부끄러운 모양이다.

"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으니 소협도 적당히 하고 들어가시지요."

"오늘도 내 방에 들어올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문을 열어 두겠다만."

"오, 오늘은 그럴 일 없으니까 푹 쉬시기나 하시지요! 심문도 끝났으니 소협만 나으시면 바로 출발할 거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리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당소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우선 내상을 마저 다스린다.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이전 생보다도. 아니, 그 괴물 같던 천마보다도 더.

***

며칠 뒤.

외상은 전부 아물고, 혈도에 남아 있던 마기도 대부분 태워 슬슬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무렵.

이전 생에는 그렇게 드나들던 광동성까지 왔음에도 객잔에만 처박혀 있던 것이 아쉬워 잠시 밖으로 나왔다.

내일이면 돌아갈 텐데 한 번쯤은 둘러봐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한동안 사파의 영역에 발 디딜 일 없을 테니.

"예전에는 그리울 일 없을 거 생각했는데 말이지."

어둑한 하늘. 하나둘 밝아오는 거리의 등불. 하루의 피로를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와, 하루의 지긋지긋함을 끌어안고 일을 시작하는 이들.

어찌 보면 사천성에서도 자주 보던 야시장이 열리는 모습이었으나, 눈앞의 풍경에서는 전반에 깔린 묘한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사파의 영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밤공기.

물론, 같은 사파의 영역이라 해도 절강성과 광동성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절강성은 사흑련의 본거지다 보니, 칼잡이들을 향한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다고 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좀 살벌하긴 하다. 실제로 칼부림이 자주 일어나기도 하고.

반면 광동성은 하오문의 영향이 훨씬 크다 보니 그 분위기도 다르다.

화려하고, 퇴폐적이며... 비루하다.

다만, 그것이 썩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들은 혼자가 아니니까. 다 같이 인생의 밑바닥을 핥고 있으니까.

하오문의 영역에서는 특유의 안락함이 느껴진단 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멍하니 밤거리를 둘러보았으나, 그것도 여기까지.

일단 당가의 예비 데릴사위인데 밤거리에 너무 빠져들 수는 없잖은가. 슬슬 객잔으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이! 또 도망치면 그때는 다리를 분질러주겠다고 했을 텐데!"

"꺄아아악! 그래! 분질러 봐 이 개새끼야! 그럴 수 있으면 말이지!"

낯익은 비명과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실제로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저 녀석이 왜 여기에...?

[31]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2] 32화. 재회

"이 빌어먹을 년이! 또 도망치면 그때는 다리를 분질러주겠다고 했을 텐데!"

"꺄아아악! 그래! 분질러 봐 이 개새끼야! 그럴 수 있으면 말이지!"

익숙한 비명과 욕지거리. 고개를 돌려보자, 그곳에는 실제로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낯빛. 뼈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몸뚱이. 그럼에도 묘한 색기가 느껴지는 분위기.

기억 속 모습보다 많이 유약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어떻게 저 여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설리향. 회귀 전에는 귀음마녀(鬼音魔女)라 불리며 나와 같은 철혈당에 소속되어 있던 녀석이다.

무위 자체도 절정에 이르렀던 만큼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진가는 무위가 아닌 익힌 무공에 있었으니.

설리향은 특이하게도 음공을 익힌 고수였다.

음공은 익히기 힘든 무공이지만, 그만큼 특이하고 대처하기 어려운 무공이기도 하다.

덕분에 철혈당에서는 거의 손꼽히는 전력이었는데....

뭐, 말이 당(堂)이지 그 규모는 기껏해야 십 수명밖에 안 되는 집단에서 조금 잘났을 뿐이다.

애초에 철혈당은 사흑련에서 사고 친 문제아들을 모아둔 유배지 같은 곳.

철혈당주의 무위가 사흑련주와 같은 화경이 아니었으면 다른 이름으로 불렸겠지.

나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설리향 또한 워낙 지랄맞은 녀석이라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는 없었으나, 서로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던 사이.

그런 설리향이 왜 여기서 이렇게 무력하게 처맞고 있는....

"아."

오늘이 그날인가.

사파라 하여 다들 태어날 때부터 사파였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타고난 성정이 아닌 처한 상황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지 않던가.

굳이 말하자면 인성이 꼬인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 꼬인 사람이라고 해야겠지.

모난 사람만 모이는 철혈당에는 유독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설리향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바탕 죽일 듯이 대련한 뒤, 몰래 훔쳐 온 철혈당주의 술을 나눠 마시며 잠깐 과거의 일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설리향의 과거는 나름 만만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 내게도 꽤나 기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감히! 지부장님의 관심을 좀 받는다고 무언가 달라진 줄 아나! 네년은 그래 봐야 기녀다! 다리나 벌리고 아양이나 떨면 그만인 년이란 말이다!"

"그 기녀 하나 관리 못 해서 쩔쩔매는 주제에 큰 소리나 치기는! 그리고 내가 왜 기녀야! 어느 날 사람을 납치해서 기녀로 만드는 게 하오문의 방식인가 봐?"

"...건방진 년. 오냐. 이번 기회에 그 비루한 몸에 규칙이라는 걸 새겨 주마."

인상을 와락 찌푸린 거한이 성큼성큼 다가와 설리향의 뺨을 후려쳤다. 내공까지 끌어올려서 말이다.

퍼억!

"아아악!"

어찌나 강한 충격인지 제법 떨어진 이곳까지 울려 퍼지는 둔탁한 소리.

설리향의 고개가 확 꺾였으며, 가녀린 몸은 그러고도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옆으로 넘어진다.

적당히 두들겨 패던 지금까지와는 명백히 다른 위력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허나, 이 또한 지금까지와 다를 것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설리향.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빨갛게 물든 뺨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리 내공을 담아 때렸다지만 벌써 부어오를 리는 없다. 그저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흐르며 얼굴의 반쪽을 붉게 물들인 것.

무공을 익히기는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해 부실한 지금의 몸으로는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을 터.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리는 설리향이었으나, 그녀는 기어이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앙칼지다 못해 표독한 눈빛으로 말없이 쏘아보는 설리향.

이에 압도당한 거한이 순간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 설리향은 이런 여자였다. 저 성질 더러운 모습을 보자 절로 솟아오르는 반가움.

동시에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대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설리향의 삶에 기구함을 더하는 날이니까.

인파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는 사이. 자신이 설리향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는 걸까.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씩씩대는 거한이 발을 굴렀다.

쿵!

"뭐냐 그 눈은. 아직 부족했던 거냐!"

"...내가 네놈이었다면 계집애처럼 입만 나불댈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주먹을 휘둘렀을 거야. 어차피 그거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잖아? 제 어미를 때려죽인 패륜아답게 말이야."

"이 개 같은 년이!"

거한이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힘 조절은 개나 줘버렸다는 듯, 쥐꼬리만 한 내공을 잔뜩 불어넣는 녀석.

저런 걸 맞고 몸이 성하기는 힘들 터. 실제로 회귀 전의 설리향은 한쪽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되었으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했지만, 그 신경질적인 면모를 생각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지.

그렇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와 설리향은 함께 싸우던 동료였다. 알기 싫어도 이것저것 알게 될 만큼.

"거기까지."

"이건 또 뭐...."

스릉.

말이 끝나기도 전.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의 목덜미에 검을 겨누었다.

기껏해야 이류 수준의 무인이기 때문일까. 내 발검에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 하고 눈을 떠는 거한.

잔뜩 긴장한 녀석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이 여자를 놓고 가라. 그럼 아무 일도 없을 거다."

"...사천당가의 데릴사위께서 무슨 연유로 이런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겁니까?"

"나를 아나?"

"물론입니다. 비록 지금은 못난 모습을 보였으나, 제가 하오문에서 이십 년을 넘게 일했습니다. 어떤 귀빈이 와 계시는지 정도는 숙지하고 있습죠."

조금 전의 왈패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거한.

하기야. 하오문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면, 단순한 왈패라고는 볼 수 없겠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살짝 움직여 녀석의 목에 작은 실선을 내주었다.

"알았으면 얌전히 물러나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하오문의 연주 지부장께서 눈여겨보는 여자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예?"

"내가 하오문 전체도 아니고, 지부장의 눈치를 봐야 하냐는 말이다."

"...혹여 당가를 염두에 두시고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재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베푼 호의를 잊으신 건 아니잖습니까."

유독 당가와 호의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하는 녀석.

확실히 이번 일에는 하오문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 그리고 은원은 당가에서 중요히 여기는 것 중 하나기도 하고.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 보았다. 설리향이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나서긴 했으나, 이 일에 내가 끼어드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손득만 따져보면 손해가 더 크다. 당연한 일이지. 아무리 설리향이 나중에 절정 고수가 된다지만 하오문 전체와 갈등을 빚을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니까.

아니, 애초에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네.

설리향의 재능은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 특유의 악기를 양분 삼아 자라난 것.

내가 설리향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해결해 준다 해도 내가 아는 그 귀기(鬼氣)어린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리라.

그러니 순수하게 이득만을 추구한다면 설리향이 무너지고 짓밟혀, 그 재능을 개화한 순간을 기다렸다가 은혜를 입혀두는 편이 나을 터.

회귀 전에 보았던 검증된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것은 물론, 내게 빚을 진 셈이니 다루기도 편할 테니까.

허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에 취해 넋두리를 늘어놓던 설리향의 모습을 기억한다. 살기 위해 살지 말라던 철혈당주의 말을 떠올렸다. 내게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던 당소월의 말을 되새긴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회귀 전의 당소월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독심(毒心)을 품었다. 그렇기에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소월이 스스로의 독기로 얼굴을 녹이고, 독기를 품어 한 명의 무인으로 거듭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나름의 이득이 있어 행동한 것이겠지만, 하오문이 당가에 호의를 베풀었음은 알고 있다."

"허면...."

"그게 네놈이 목숨을 건지는 이유다."

거한의 목에 대고 있던 검에 내공을 실어 그대로 위로 쳐올린다.

퍼억!

거리가 짧은 탓에 그리 큰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에 실린 경력이 턱을 파고들어 녀석의 머리를 뒤흔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몽롱하게 풀리는 초점. 갸우뚱 기울어진 녀석이 스르륵 쓰러진다.

쿵!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설리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귀 전에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었으나,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그대로였다.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흐트러졌고, 평소에도 자주 얻어맞은 것인지 옷자락 사이사이로 오래된 듯 검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보인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는 표독함 대신 당황이 깃들어 있었으나, 그것이 나를 신용한다는 뜻은 아닌지 부단히 이쪽을 훑어본다.

그 경계심 가득한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설리향. 맞나?"

"맞아, 요. 그쪽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모습에 무심코 반말했다가 어설프게 존대를 덧붙이는 설리향.

생각해 보면 일단 끼어들긴 했는데 이렇다 할 명분은 없는 상황이네. 정확히는 명분이 있긴 하나, 이미 시간의 역행에 묻혀 사라졌다고 해야겠지.

그러니 새로운 명분을 지어내야 했다. 설리향 본인도,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 사이에 숨은 하오문도들도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명분을.

잠시 입을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술김에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설리향의 과거사. 그 일부를 약간 왜곡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나는 네 아버지인 설 대인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뭐?"

"하여,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

"그 인간이 그럴 리 없는데... 아니, 없는데요?"

"편하게 말해도 된다. 나이도 비슷한 은인의 딸에게 존대를 들을 생각은 없으니."

"아, 응."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설리향. 조금 전처럼 대놓고 경계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양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 그녀의 아버지는 아내를 잃은 뒤로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고, 결국에는 어린 설리향마저 기루에 팔아넘긴 작자다.

심지어 그 돈마저 도박비로 날려 먹었다. 이후로는 어딘가로 사라져 행적이 묘연해졌고.

가장 꾸며내기 좋은 부분이긴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아무튼, 이것으로 명분은 세워졌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우리를 둘러싼 구경꾼들을 향해 외쳤다.

"사천당가의 천휘다! 나를 하오문의 연주 지부장에게 안내해 준다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주마!"

잠깐의 정적. 서로를 바라보던 관중 사이로 하오문도로 보이는 이들이 앞다퉈 달려왔다.

***

지부장과의 이야기가 안 좋게 끝났다.

그래서 설리향을 납치했다.

"조졌군."

[32]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3] 33화. 재회 (2)

하오문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거리는 홍등가였다.

붉게 빛나는 등불 사이를 걷고 있자니, 주변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한다.

척 봐도 아직 어려 보이는 내가 옆에 거하게 얻어맞은 기녀를 끼고, 다 큰 어른의 안내를 받으며, 이 거리의 중심인 홍화루로 향하니 시선이 향할 수밖에.

이 와중에 지지 않겠다는 듯, 목은 빳빳이 세우고 살짝 치켜 올라간 눈에 힘을 주는 설리향이었으나... 결국 과한 관심을 버티지 못했는지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콕콕.

"있잖아."

"뭐냐."

"무슨 생각이 있어서 가는 거 맞지?"

"물론이다. 설리향 네가 기루에 팔린 이유는 돈 때문 아닌가. 몸값을 지불하고 낙적시키면 금방 끝날 일이지."

"그 돈이 어디 있다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내 몸값은 좀 비쌀 텐데? 그리고 기루가 기녀를 묶어두는 방식은...."

"별의별 트집을 잡아 빚을 늘린다는 것 말인가? 알고 있다. 나름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막 고향 마을을 나와 이곳저곳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던 시절. 여느 사파 무인이 그러하듯 나 또한 기루의 경호 일을 맡은 적이 있다.

그때 들은 바에 따르면, 제공하는 식사, 옷, 기녀로서의 교육 등등.

온갖 것들에 가격을 매겨 빚을 늘린다고 한다. 심지어 꽤 바가지를 씌워서.

"평범하게 일해서는 평생 갚을 수 없으나, 기녀로서 일한다면 나이가 들어 시들해질 쯤이면 간신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라고 했던가."

"...잘 아네? 그런데도 괜찮은 거야?"

"필요할 때 쓰라며 받은 전낭이 꽤 두둑하더군."

"너 당휘가 아니라 청휘라며."

"예비 데릴사위니까 얼추 비슷한 거지 무얼."

"...그럼 지금 정혼자의 돈으로 기녀를 낙적해 오겠다고 말한 거야? 고맙긴 한데 제정신 맞아?"

"말에 어폐가 있군. 정혼자의 돈으로 은인의 딸을 구하는 거다."

"아버지가 누군가의 은인이라니. 난 그것부터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는 설리향.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새빨간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내 말이 틀렸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으니, 결국 믿을 수밖에 없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걷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어느새 도착한 으리으리한 기루 앞.

우리를 안내하던 하오문도 하나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여기입니다, 대협. 이곳 홍화루가 지부장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손을 은근슬쩍 내미는 것이 어서 약속했던 사례를 달라는 모양새. 당소월에게 받았던 전낭에서 은자 한 냥을 던져주자, 호들갑스럽게 꾸벅이고는 빠르게 멀어졌다.

다시 전낭을 품에 넣고 있자니,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홍화루를 올려다보는 설리향이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었다고? 하긴 그래서...."

"혼자만 아는 소리하지 말고 나도 알 수 있게 말해라."

"아버지가 나를 넘긴 곳이 여기거든. 지부장이 내게 눈독을 들인 것도 자기 가게에서 나를 봐서 그런 거겠구나 싶어서. 남색을 즐길 것처럼 생겨서는 매일 자기 기녀랑 나뒹군다더니. 진짜더라."

"그 정도라면 단순히 여색을 밝혀서는 아닐 수도 있지. 하오문의 지부장이 평범한 사람일 리는 없잖나."

"그런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리향. 아직 무공을 잘 모르는 시점이니 떠올리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중성적인 외모와 지나친 호색은 흡정공의 부작용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채음보양, 혹은 채양보음의 수법을 사용해 자신의 역량 이상의 내공을 흡수했을 때의 부작용.

회귀 전에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나, 흡정공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지부장이 설리향을 점찍었다는 뜻은 역시....

차갑게 내려앉는 감정을 애써 숨기며 정문으로 향하자, 이쪽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문지기가 앞으로 가로막는다.

조금 전에 망설임 없이 은자를 꺼낸 모습을 보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꽤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여는 문지기.

"도망간 기녀를 잡아 오신 겁니까. 여기서 기다려 주시면 따로 사례해 드리겠습니다."

"됐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이곳의 주인을 만나기 위함이니."

그리 말하고는 입고 있는 녹의가 잘 보이도록 괜스레 소매를 펄럭이며 말했다.

"홍화루주를 만나러 왔다고 말을 전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향하는 문지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의 옆에는 묘령의 여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열 명 중 아홉 명이 돌아볼 법한 미모. 화려하면서도 약간의 노출이 있는 옷차림. 그리고 노골적으로 색기를 흘리는 분위기까지.

타고난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질적이나, 그 기질 자체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색공을 일류 수준까지 익힌 기녀인가. 분명 하오문에서도 한가락 하는 녀석이겠지.

상대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는지, 이쪽을 향해 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주님께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담담히 대답하자 의외라는 듯 눈썹을 움찔거리는 녀석. 대놓고 수작 부리려던 건 아니지만, 아예 반응조차 안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어서 안내나 하라는 듯 까딱이는 것도 잠시. 설리향이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조심해. 홍화루의 일급기녀야. 자꾸 쳐다보다가는 순식간에 홀릴지도 몰라. 다들 그랬으니까."

"걱정 마라. 저 정도는 나한테는 안 통한다."

사실이다. 광랑탈명공의 특성상 색공이나 정신을 어지럽히는 종류의 사술은 그 위력이 반감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내 기경팔맥을 흐르는 내공에는 살기가 녹아 있지 않던가. 거기에 육체는 아직 부족해도 의지는 초절정에 올랐던 그대로고.

색공으로 화경에 오른 색마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내가 휘둘릴 일은 없다.

무엇보다... 저 기녀가 익힌 색공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향한 시선. 설리향이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이쪽을, 아니지. 차라리 날 봐. 그게 나을 거야."

"그래서 쳐다본 거 아니다."

색공은 당연히 이성에게 더 효과적이지만, 동성이라고 그 공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설리향에게 영향이 갈까 싶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지. 다른 건 몰라도 설리향에게 이런 어설픈 수준의 색공이 통할 리 없으니까.

***

겉보기만큼이나 화려한 실내와 위로 올라갈수록 크게 들려오는 남녀의 격한 숨소리 끝에 다다른 홍화루 최상층.

"루주님. 말씀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라 하거라."

안쪽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미성인 것은 확실한 대답에 기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마자 펼쳐지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색의 조합.

빨갛거나, 황금색이거나, 반짝인다.

그 셋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실내 풍경에 압도된 듯, 멈칫하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서듯 성큼성큼 앞장서 들어갔다.

돈을 많이 바른 것이 느껴지긴 하는데... 사흑련에서는 이보다 더 화려한 것도 많이 보았다.

당가에서는 이보다 훨씬 기품 있는 방에 수차례 드나들었고.

그러니 이러한 외적인 것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방의 중심에 앉아 있는 홍화루주니까.

"어서 오시오. 저 멀리 사천성에서 오신 귀빈. 그리고 집 나간 우리 막내."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느릿하게 일어나며 입을 연 사내.

옷깃은 제대로 여미지도 않아 상체가 반쯤 드러났고, 나이가 적지 않아 보이는 얼굴은 수염 하나 없이 매끈했다.

거기에 어떻게든 남자답게 꾸며보려 한 것 같지만, 몸 선이 가늘어 그나마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상의를 풀어 헤치지 않았다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홍화루주. 그가 가느다란 목소리와, 사내다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찾아온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하오문의 연주 지부장이자, 이곳 홍화루의 루주요."

"환대 고맙군. 그쪽 또한 내가 누군지 잘 알거라 생각하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사천당가의 천휘다. 이쪽은...."

"...."

내 말을 받아주는 대신, 조용히 홍화루주를 노려보는 설리향.

그 날카로운 적의에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별로 말하고 싶진 않은가 보군. 하지만 누군지는 그쪽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렇소. 내가 눈여겨보는 아이이니 당연하지."

"이익!"

잇소리를 내며 홍화루주를 노려보는 설리향.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굳이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적어도 아직은.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고는, 내 옆을 가볍게 두드렸다.

"와서 앉아라."

"...알았어."

끝까지 홍화루주를 향한 경계를 놓지 않은 채, 시킨 대로 옆에 앉는 설리향.

그 고분고분한 모습에 홍화루주가 눈을 반짝였다.

"호오. 아직 어떤 사정으로 찾아온 것인지는 듣지 못했으나, 이 말괄량이가 남의 말을 듣는 건 놀랍구려. 괜찮다면 그 비결을 알려줄 수 있겠소, 소협?"

"무얼. 그저 자유를 약속했을 뿐이다."

"자유라 했소? 이 거리에서 그 말에 홀려 신세를 망친 이가 한둘이 아니긴 하오. 어쩌면 막내도 그리될지 모르겠군."

그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짙은 조소가 떠오른다. 마치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을 꾸짖듯이.

하지만 나는 한때의 치기 어린 충동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럴 나이는 진작에 지났고.

"됐고.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지. 설리향을 기적에서 낙적시키려 한다. 지고 있던 빚은 얼마나 되지? 가능하다면 바로 지불하고, 모자라다면 당가에 사람을 보내 그만큼 가져오도록 하마."

"흐음... 그 전에 잠시. 어인 이유로 당가의 예비 사위께서 한낱 기녀에게 이런 지대한 관심을 쏟는지 알 수 있겠소?"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지만 가늘게 뜨여 뱀을 연상시키는 눈빛이 요사스럽기 짝이 없다.

누가 색공을 익힌 녀석 아니랄까 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지. 과거에 설리향의 아버지인 설 대인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하여, 이제라도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다."

"은혜라. 그건 중요하오. 특히 사천당가에서는 더더욱 그렇겠구려. 이제 곧 당가의 일원이 될 터이니 과거의 일을 확실히 정산하고 싶은 거요?"

"대충 그런 거다."

네 대답을 들은 홍화루주의 입꼬리가 삐죽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하오? 정말 미안한 이야기나, 향이는 돈으로 내어줄 수 없는 아이요."

"햐, 향이?!"

설리향이 자신을 향한 친근한 호칭에 소름이 돋는다는 듯 으르렁댔지만, 홍화루주는 그녀에게 잠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 쪽을 바라보았을 뿐.

"돈이 아닌 다른 걸 원한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자세하게 말해주겠나."

"물론이요. 사실 향이는 내 후계자가 될 아이라오. 소협은 혹시 순음지체(純陰之體)라는 것을 들어보셨소? 이는 그 자체로 색공의 재능이나 다름없는 체질이오."

순음지체라면 알고 있다. 아마 홍화루주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쉽게 말해 음기의 순도가 일반적인 여인의 몇 배나 짙은 체질이다.

어디까지나 극음에 가까운 기운을 타고날 뿐, 그 양이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구음절맥처럼 음기가 과하게 쌓여 단명할 일은 없지만, 그만큼이나 순수한 음기를 품은 몸.

그것이 순음지체다.

제 딴에는 부드러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설리향을 훑어보는 홍화루주가 입을 열었다.

"세상 누가 자기 제자가 될지도 모르는 이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기겠소."

"정작 홍화루주 그대는 돈 몇 푼에 설리향을 사 왔으면서 말인가?"

"이 정도는 정파에서도 흔한 일 아니오? 가난한 집안이 자기 자신을 믿음직한 문파에 파는 것 말이외다."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세속 문파는 몰라도 도가나 불가 문파에서는 종종 고아를 데려와 키우고는 한다. 그것도 소정의 돈을 주면서까지.

하지만 이는 일종의 상생에 가까운 일이다.

도사와 스님들이 선업을 쌓는 것은 물론, 어린 시절부터 키워낸 충성도 높은 문파 구성원을 늘릴 수 있고.

집은 다른 가족들을 먹여 살릴 생활비를 벌 수 있으며, 아이는 적어도 배를 곯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 만약 무공에 재능이 있다면 그 이상을 누릴 수도 있고.

반면 설리향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비의 손에 강제로 팔려 온 것도 모자라 강제로 기녀가 되게 생겼다. 제자로 삼는다고는 하지만 원치 않는 색공을 가르칠 게 뻔했고.

아니, 심지어 홍화루주는 제자로 보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영약 비스무리한 것으로 여기고 있겠지.

앉은 채로 검 자루를 만지작대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얼마를 가져오건 내어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허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예를 들자면 당가의 만독단 같은 것 말이오."

"...."

만독단은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 같은 당가를 대표하는 영약이다.

내가 넘겨주겠다 약속할 수도 없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기녀 하나 빼 오려 내어주기엔 과한 보물.

사실상 설리향을 넘겨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리다.

잠시 설리향을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야기가 안 좋게 흘러간다는 건 눈치챘는지 불안한 모습.

설리향의 간절한 얼굴 위로 회귀 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냥 데려가야겠다."

검을 뽑으며 전력으로 광랑탈명공을 운용했다.

날카롭게 정련된 살기가 홍화루주의 면전을 향해 쏘아진다.

"무슨...!"

절정에 이른 고수답게 빠르게 반응하는 녀석. 하지만 반 박자 늦게 뽑힌 검이 향한 곳은 정면이 아닌 바닥이었다.

서걱!

"꺄아아악!"

"꽉 붙잡아라. 이제부터 탈출할 테니."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설리향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설리향을 납치했다.

[33]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4] 34화. 잔향(殘香)

"이 배는 껍질 까면 눈처럼 하얗다고 해서 설리(雪梨)래."

"멍청한 것. 원래 배는 하얀색이다. 색 때문이 아니라 과육이 눈처럼 부드러워서 설리라고 하는 거지."

"...."

설리향이 말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가볍게 피했다.

"흥."

"야! 이리 안 와?!"

"싫다. 내가 왜 나보다 약한 녀석에게 맞으러 가야 하지?"

"세게 안 때릴 테니까 그냥 한 대만 맞으라고!"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절뚝거리며 달려오는 설리향을 피해 철혈당의 연무장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두 바퀴쯤 돌았을 무렵. 결국 포기한 건지, 이를 갈던 설리향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안 때릴 테니까 이리 와 혈랑.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흠. 내가 왜 귀음마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아까도 말했듯,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됐으니까 빨리 오라고 이 나쁜 새끼야! 기어이 내가 이 다리로 쫓아가야겠어?!"

"가는 중이었다."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설리향. 그 옆에 가까이 다가가자, 손에 쥐고 있던 배 한 덩이를 내민다.

"이거. 잘라 줘."

"직접 해라."

"검은 네가 더 잘 쓰잖아."

"흠. 맞는 말이군."

"...너 지금 웃었어? 방금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칭찬이었던 거야?!"

어이없어하는 설리향의 손에서 받아 챈 배. 그 껍질을 깎고, 먹기 좋은 크기로 베어 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리향의 말대로 나는 검을 잘 쓰니까.

"여기 있다."

"고, 마워."

미묘한 표정으로 배 조각을 한가득 받아 드는 설리향. 그중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탁하게 죽은 한쪽 눈마저 반짝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밝은 표정.

"이거 진짜 맛있네. 너도 하나 먹어 볼래?"

"내가 잘라 주기까지 했는데, 설마 하나도 안 줄 생각이었나?"

"...너는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이라는 걸 몰라?"

"말을 잘한다 해서 검이 비껴가는 일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수련하는 게 맞지."

"진짜 재수 없네."

툴툴거리면서도 내 입에 배 한 조각을 물려주는 설리향. 먹어 보니 맛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부드럽군."

"무, 무슨!"

조금 전까지 내 입에 닿고 있던 자신의 손가락을 황급히 숨기는 설리향.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탕한 것.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

"그건 말이 너무하잖아! 좀 돌려서 말하라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나 더 줘 봐라. 맛도 괜찮고, 향도 좋아 맘에 드는군."

"...너, 사실 다 알면서 하는 말이지?"

"이런. 들켰나?"

"혈랑 네가 제일 음탕하잖아!"

빼액 소리를 지르면서도 내 입에 한 조각을 더 물려주는 설리향. 그렇게 서로 한입씩 나눠 먹기를 두어 번 반복하자 어느새 남은 배를 전부 먹어 치웠더라.

다시 빈손이 된 설리향. 손에 묻은 과즙을 내 옷에 슥슥 비벼 닦은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맞아.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부탁? 배가 하나 더 남아 있었나?"

"그거 말고. 조금 다른 진지한 부탁."

"돈은 못 빌려준다. 이번에 유가장의 사정이 궁한지 가문의 내공 몇 개를 시중에 내놓는다더군. 지금 가진 돈으로도 아슬아슬해서 걱정이다."

"모든 사람이 혈랑 너 같은 무공광은 아니거든? 내가 부탁하려던 건 그거야. 그으... 알잖아? 내 심법이 되는 무공. 거기에 조금 문제가 생겼거든."

"아. 색공 말인가."

"색공이라고 하지 마!"

"색공 맞잖나."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색공이라고 하지 마! 내가 무슨 색녀 같으니까."

"거, 까탈스럽기는. 아무튼 알겠다. 무슨 부탁이지? 저번 임무 때는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 과하지만 않다면 거들어 주마."

철혈당에 내려오는 임무는 대부분 어렵거나, 까다로운 일이다.

사흑련 내부에서 철혈당이 가지는 위치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일전에 내가 맡았던 일은 그중 전형적인 전자였다. 혼자 힘으로는 버거워 설리향의 힘을 빌렸으니,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 차례지.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설리향이 스윽 시선을 돌리고는 발끝으로 땅을 빙글빙글 파기 시작했다.

"저기. 그럼 말이야."

"음."

"오늘 밤. 나랑 합방...해 줄래?"

"...?"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깃을 여미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색녀 맞잖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다짜고짜 합방하자면서 색녀가 아니라니. 아, 참고로 난 어제도 사흑련 산하 상단을 노리고 도적질하던 수적채를 하나 쓸어버리고 왔지만, 무림인이 아니다."

"진짜 그런 거 아니니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봐! 배까지 얻어먹었으면서 입 씻기 있어?"

"...후우. 좋다. 지난 정이 있으니 해명할 기회 정도는 주마."

"예예. 정말 고맙네요. 해명할 기회를 줘서!"

하나도 안 고마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설리향. 그녀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내가 익힌 무공에 조금 문제가 생겼어. 근데 더는 어떻게 못 할 것 같아서 도와달라는 거야."

"그건... 확실히 큰일이군."

나도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진 못했다. 대부분 저잣거리의 삼류나 이류 수준의 무공을 내 방식대로 개량해 익힌 것이지.

하지만 어찌 됐건 무공으로 만들어진 녀석이다. 결과가 안 좋았을 뿐, 스스로 강해지고자 만들어진 공부였다.

허나, 설리향이 익힌 것은 다르다.

본래 그녀는 기루에 팔린 기녀였다. 다만, 손님을 상대하기 위한 기녀는 아니었다.

흡정공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루주의 인간 영약이 되기 위함이었지.

순음지체(純陰之體). 구음절맥만큼은 아니지만, 범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음기를 타고나는 체질이다.

여느 체질처럼 부작용이 존재하지만, 절맥이라 부를 정도는 아닌 터라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

기껏해야 수족냉증에 시달린다거나, 피부가 창백해진다거나, 색욕이 강하지만 만족하기 어렵다는 등의 자잘한 문제점을 동반할 뿐이지.

하지만 벽을 앞두고 조급함에 빠진 결과, 양기와 음기의 조화가 깨져 남자도 여자도 아니게 된 루주에겐 그마저도 부족했다.

음혼환희공(陰魂歡喜功).

설리향에게 강제로 가르친 색공의 일종으로, 오로지 타고난 음기를 정제하고 부풀리는 데 집중하는 무공이다.

가축을 그냥 잡아먹지 않고 살찌워 잡아먹듯, 설리향의 음기를 최대한으로 뽑아먹기 위해 가르친 것.

하지만 설리향은 루주의 상상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가축의 무공을 뜯어고쳐 강제로 쓸만한 심법으로 만들었고.

갇혀 있는 독방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가락에 맞춰 흥얼거리다 음공의 기초를 깨우쳤다.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에 음기 가득한 내공을 담아 귀곡성(鬼哭聲)을 뱉어 내며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에는 이곳저곳 떠돌다 귀음마녀(鬼陰魔女)라는 별호를 얻고 사흑련에 들어왔고.

물론, 과거의 경험 때문인지 성격이 썩 좋지 않아 자꾸만 다른 무인들... 특히 남자 무사들과 갈등을 빚은 탓에 철혈당으로 좌천당했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다 보니 설리향이 익힌 무공은 태생적인 불균형이 있다.

이제 와서 다른 안전한 심법으로 갈아타고 싶어도, 타고난 음기와 깊숙이 연결된 탓에 그나마도 쉽지 않고.

설리향도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일단 묻겠다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지?"

"이대로 가면 석 달 안에 기맥이 얼어붙어 죽을 거래."

"...당주님께 먼저 상담해 봤나?"

"당연하지. 애초에 석 달이라는 기간을 알려 주신 것도 당주님이니까. 정말 방법이 없다며 미안해하시더라고.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는 설리향. 평소보다 처진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합방하자는 이유는 대충 알겠다. 결국 음기가 너무 많아 문제니, 내 양기로 중화시키겠다는 것이리라.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난 처음이다만."

"나도 처음인데?"

"꼭 나여야만 하나?"

"너 말고 다른 남자들은 전부 병신들이더라."

"하지만...."

"아잇! 너 이번에 유가장의 무공을 사고 싶은데 자금이 아슬아슬하다고 했지?! 그거 내가 좀 보태줄게!"

"오늘 밤에 네 처소로 가면 되나?"

"...."

"돈 때문은 아니다."

"...."

"정말이다."

"...그래. 무공 때문인 걸로 하자."

그날은 밤새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조금 변했다.

"혈랑. 넌 왜 옷을 그따구로 입고 다녀? 사흑련은 무림맹이랑 달리 정해진 옷을 입을 필요도 없잖아."

"무인이 무복이면 충분하지 무얼."

"됐으니까 따라 나와. 마침 내 소매를 수선해야 하니, 겸사겸사 혈랑 네 옷도 맞추게."

티격태격하는 건 여전했으나, 조금 더 사적인 외출이 잦아졌고.

"혈랑. 넌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어? 얼굴도 반반하니 너도 뭐, 남창 그런 거였나?"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됐다."

"흐응. 생각해 보니, 내 이야기는 해도 네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 이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수련에 방해된다. 좀 가라."

"...죽어!"

"대련인가. 좋지."

조금이지만 다른 사람과는 나누지 않던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있잖아."

"뭐냐."

"이거. 머, 먹을래?"

"설리? 맛있으니 나야 좋지만... 아. 그런 뜻인가."

"...응."

설리향이 사 오는 배를 신호 삼아 잠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먹어."

"...오늘도 말인가?"

"불만 있어?"

"그건 아니다만...."

가끔 연달아 배를 사 올 때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나날이었다.

모든 문제를 검으로 해결하려고 든 탓에 떠밀리고 떠밀려 도착한 곳.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유배지가 내겐 가장 편안한 곳이었다.

철혈당주는 잔소리가 많았으나 그만큼 가르쳐주는 것도 많은 사람이었고.

설리향은 자꾸 시비를 걸며 틱틱대긴 하지만... 사람이 그냥 가시가 돋아 있을 뿐, 내게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딱 좋은 거리감. 그리고 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무공을 구하기 쉬운 환경.

부정하진 않겠다. 나는 사흑련에서의 생활을... 철혈당을 꽤 좋아하고 있었다. 그날까지는.

여느 때처럼 어려운 임무와 까다로운 임무 중, 까다로운 임무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멀리까지 다녀와야 하는 일이었기에 보름만의 복귀.

시장 거리를 가로지르던 차에 문득 다른 배보다 배는 비싼 배가 보였다.

설리. 이제는 나와 설리향 사이에서 하나의 신호가 된 과일.

"...."

생각해 보면 지금껏 내가 받기만 했지 먼저 선물했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곧 사흑련에서 임무 성공에 대한 보수를 받을 테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가판대에 올려진 녀석 중 가장 큼직해 보이는 녀석을 하나 사 품에 넣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배지 같은 취급 탓에 다른 사흑련 건물과도 한참은 떨어져 있는 철혈당의 전각.

요 며칠간 쌓인 눈으로 하얗게 물든 전각은....

넘실대는 화염에 타오르고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황망한 목소리. 내공을 끌어올리며 전각을 향해 달렸다.

가까워질수록 하나둘 늘어나는 시체들. 습격자로 보이는 낯선 얼굴도 몇 명 있었으나, 대부분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철혈당 소속의 무인. 전각을 관리하는 하인. 그리고.

"...설리향."

"늦, 었네?"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담벼락. 그 위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이를 악물며 달려갔다.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 붉은 웅덩이 속에 잠겨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본래도 창백했던 피부는 송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혈색이 부족했고, 그나마 멀쩡했던 한쪽 눈에는 기다란 검상이 그어졌으며, 가슴팍에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중상.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의 설리향이 부들거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혈랑. 너 기다리다가 죽을 뻔했잖아."

"누구냐. 대체 누가...."

"흑천검제. 예전에 당주님의 손에 멸문한 흑천검문의 생존자래. 복수를 위해 왔다나."

"복수?"

"그래. 나나 너는 물론, 무림인 모두가 미쳐 있는 그 복수 말이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리 말하고는 피를 한 움큼 토하는 설리향.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쿨럭! ...아. 이거 진짜 죽겠네."

"괜찮을 거다."

"괜찮기는 무슨. 하아. 제일 먼저 얼굴 좀 보겠답시고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이게 뭐야."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래 이 나쁜 새끼야. 혈랑 넌 내가 왜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뒤로 갈수록 말끝을 흐리는 설리향.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말할 기력이 없어서지.

죽어가는 설리향이 약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굴, 보고 싶었는데. 은근 반반한 게 내 취향이었거든."

"...미안하다."

"그런 말을 들으려던 게 아냐. 나 곧 죽는데 좀 더 다른 하고 싶은 말 없어?"

"복수는 대신해 주마."

"나쁜 새끼."

"...."

점점 호흡이 느려지는 설리향. 잠시 고민하다 품에서 꺼낸 배 한 알을 그녀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이거...."

"향이 좋아서 사 봤다."

헛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꿈틀거리는 설리향.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품에 배를 안겨 주었다.

설리향이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혈랑. 넌 진짜 나쁜 새끼야."

"그러냐."

"검 좀 잘 쓰는 거 말고는... 잘난 게 하나도 없는 새끼...."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나는 그런 네가...."

작게 입술을 달싹이던 설리향의 말이 멈췄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불타는 전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스릉.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설리향의 말대로 나는 검 좀 잘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놈이니까.

***

설리향을 데리고 어찌어찌 홍화루 밖으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하오문 소속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빼곡히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스릉.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야!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이전 생에는 이루지 못했던 일이다.

[34]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5] 35화. 도주

"지긋지긋한 놈들."

그리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내 앞에서 달려들던 하오문도 하나가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 하고, 한쪽 팔을 베였다.

"아아아악!"

절단면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나뒹구는 녀석. 하지만 이를 확인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뒤쪽에서 창이 날아든다.

목이나 심장이 아닌 어깨를 향해 날아오는 창끝. 제자리에서 회전해 대응하기에는 옆구리에 끌어안고 있는 설리향이 방해된다. 하지만.

"꺼져라."

"허어억!"

고개를 꺾어 시선을 마주하며 날카롭게 벼려낸 살기를 쏘아냈다.

땡그랑.

창을 떨어뜨린 채, 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목을 부여잡는 녀석.

파랗게 질린 얼굴로 꺽꺽대는 녀석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이걸로 당장의 추적자는 어떻게든 됐나.

홍화루를 둘러싼 하오문도를 베어내며 강제로 포위를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추격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아니, 점점 거세지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홍화루주가 직접 쫓아오지 않았다는 점이려나.

아마 흡정공의 부작용 때문에 무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라 그런 거겠지.

하오문의 지부장쯤 되면 내가 단신으로 절정 무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는 순간이었다.

"으읏."

그 피 튀기는 광경에 한숨을 내쉬는 설리향. 하지만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이 된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창을 낑낑대며 들어 올리고는 물었다.

"왜 안 죽이는 거야? 남 돕겠다고 끼어들었다가 누구 죽이는 게 꺼림칙한 거라면 내가...."

"멍청한 것. 그랬다가는 정말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 내가 팔 한쪽 자르는 선에서 끝내듯, 저쪽에서도 내 급소가 아닌 어깨나 허벅지를 노려 공격하고 있다. 아마 절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들은 거겠지."

이유는 간단하다. 내 뒤에 있는 사천당가가 무서우니까.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본인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걸 홍화루주도 다른 하오문도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의 나는 낭인이 아니라 사천당가 소속이다. 실제로 홍화루에서 나를 소개할 때 사천당가의 천휘라고 하지 않았나.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어찌됐건 당가가 하오문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내 목숨이 위험하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함부로 살초를 날릴 수는 없다. 그래서야 당가가 그리 강조하는 은원의 무거움을 경시하는 꼴이 되지 않겠나.

"알았으면 창이나 이리 내놔라."

"명가라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창을 내미는 설리향. 이를 받아 들고는 냅다 옆쪽의 담벼락을 향해 던졌다.

쐐애애액. 콰직!

단단히 틀어박힌 창. 그 모습에 어버버 거리는 설리향을 향해 등을 내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업혀라."

"갑자기?!"

"아까부터 추격이 점점 촘촘해지고 있다. 심지어 이놈들은 뒤에서 쫓아온 게 아니라 우리가 가려던 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홍화루주가 이쪽을 쫓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녀석은 하오문의 지부장이고, 이곳 연주는 하오문의 세력권이다.

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홍화루주의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지금 우리가 유도당하고 있다는 거야?"

"아마도."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고른 길이었는데...."

"네 탓을 하려는 건 아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측은 했고."

객잔으로 향하는 길 중간중간에 설리향이 지름길이나, 조용한 길을 알려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홍화루주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

애초에 여기서 좀 오래 살았을 뿐인 설리향이 하오문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지부장 자리에 오른 홍화루주와 상대가 될 리 없잖은가.

"됐으니까 빨리 업히기나 해라. 상대가 이쪽을 몰아간다는 걸 알았으면 예상에서 벗어나면 될 일 아닌가."

"으읏! 알겠어! 일단 업히면 되는 거지?!"

설리향이 조심스레 내 등에 매달렸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 와닿는 감촉 또한 부드러움보다 딱딱함이 더 강하다.

얼마나 못 먹었으면 사람이 아주 뼈밖에 없네.

속으로 혀를 차며 조금 전에 창을 박아 넣은 담벼락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야! 잠깐! 이거 설마...!"

"입 열지 마라. 잘못하면 혀 깨문다."

기겁한 설리향이 내 목을 단단히 휘감는 감각을 느끼며 땅을 박찼다.

투웅!

"꺄아아아!"

창대를 발판 삼아 단숨에 담벼락 위로, 뒤이어 주변의 전각 위로 뛰어오른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부들부들 떠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안 떨어지니까 눈 떠라."

"으으."

울상을 짓는 설리향이었으나, 이내 그 얼굴 위로 감탄이 피어올랐다.

"와아...."

어두운 밤을 밝히는 무수히 많은 불빛. 연주의 야경에 감탄한 설리향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저거 대부분이 우리 잡으러 온 하오문도다."

"...."

"피해서 갈 수 있는 길을 알려다오."

순식간에 안색이 시꺼멓게 죽은 설리향이 떨리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 저기로 가는 게 제일 빨라."

"알겠다. 그럼 이제 꽉 잡아라."

"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아, 안 떨어진다며 이 나쁜 새끼야!"

설리향의 비명 아닌 비명에 히죽이며 경공을 펼쳤다.

***

"잡아라! 이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부장님이 같이 잡는 사람에게도 보상을 나누어주신다고 하셨다!"

"혼자 다 처먹으려 하지 말고 조를 짜서 상대해라!"

골목으로 들어간 척, 건물 뒤쪽에 바짝 붙어 하오문도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슬슬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무렵이 되어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

계획은 좋았다.

아예 전각과 전각 사이를 넘나들자 어딘가로 유도당하는 감각은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었다.

머리 위에서 그리도 요란스레 달리다 보니, 하오문도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는 것.

나를 상대한 녀석은 죄다 한쪽 팔을 베어 버렸건만, 쫓아오는 이들이 줄어들기는커녕 한층 더 많아지더라.

물론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삼류에서 이류. 힘깨나 쓴다는 것들이나 일류 수준이었으니까.

다만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딜 가도 하오문도가 튀어나왔다. 심지어 평범한 구경꾼인 줄 알았던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들 때는 어이가 없었을 정도.

이렇게나 맹목적으로 달려들 이유라면 하나뿐이겠지.

홍화루주가 막대한 보상을 약속한 것이리라. 그게 무공이 됐든, 금자가 됐든, 혹은 다른 무언가가 됐든.

나도 일평생을 사파 무인으로 살아봐서 잘 안다. 한번 욕망에 불이 붙으면 목이 떨어지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승냥이 같은 족속들이라는 것을.

"하여간 사파 놈들이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슬슬 체력과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지면으로 내려온 것도 그래서고.

지붕 위를 달리려면 계속해서 경공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기엔 소모되는 힘이 너무 컸기 때문.

기진하기 전에 객잔에 도착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러지 못한다면 차라리 숨어 다니며 조금씩이라도 체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조졌군."

재차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벽에 나란히 달라붙어 있던 설리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이 위험한 상황이야?"

"아직은 아니지.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문제다."

"그럼...."

설리향이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여기다! 여기 숨어 있다!"

"실패해도 겨우 팔 한 짝이고, 잘만하면 이 지긋지긋한 팔자를 고칠 수 있다! 뭘 망설여!"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그래봐야 상대는 혼자다! 한 손으로 열손을 막지는 못할 터."

"진짜 쉴 틈을 안 주는군."

숨 한번 고를 틈을 주지 않고 사방에서 달려드는 하오문도들.

등지고 있는 벽을 제외한 삼면에서 도, 검, 창이 동시에 날아든다.

노리는 곳은 급소가 아닌 팔다리 같은 제압하기 편한 곳. 이래서야 나도 살초를 날릴 수 없다.

"쯧."

혀를 차며 가장 먼저 날아오는 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숨죽이고 있던 기세를 정교하게 셋으로 나눈다.

최소한의 내공과 정신력으로 쏘아낸 살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순간 놈들의 몸이 흠칫한다. 그리고.

채앵!

옆으로 쳐낸 창이 다른 녀석들의 무기와 한데 얽힌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자세.

그 틈을 타 세 놈의 팔꿈치를 단숨에 차례로 베어낸다.

"끄아악!"

"내 팔이!"

"괴물 자식...!"

쓰러진 하오문도들의 비명을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든다. 내공이 있다면, 비교적 간단해지지만... 내공 또한 무한하지는 않으니까.

겨우 한번 싸웠다고 차오르는 숨. 어깨는 뻐근하다 못해 감각이 둔해졌고, 단전은 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를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숨는답시고 길이 많이 틀어졌다만."

"저쪽 골목을 빠져나가면 큰 길이 나올 거야.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은 뒤, 쭉 가면 돼. ...이제 거의 다 왔어."

걱정스런 어조로 그리 말하는 설리향. 피식 웃으며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다 왔다는 소리를 벌써 서너 번 들은 것 같군."

"이번엔 진짜야."

"그럼 다행이고."

소란을 들은 다른 하오문도들이 몰려들기 전에 자리를 벗어날 요량으로 지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발소리를 죽이고 좁은 골목을 지나가던 도중. 설리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이름이 천휘라고 했지?"

"맞다."

"왜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그거야 말했듯이...."

"아버지 이야기는 됐어.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진짜라 쳐도 이만한 수고를 감수할 정도는 아니니까."

"음?"

"봐봐. 너는 나를 잘 아는 것 같지만, 나는 네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했어."

"오늘 처음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

"휘. 넌 할 만큼 했어. 아버지에게 어떤 은을 입었는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할 도리는 다했어. 내가 보장할게."

"...."

"그러니까 그만하자.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앞으로는 위험할 수 있다며. 죽지는 않겠지만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칠 수는 있는 거잖아. 네가 지금껏 팔을 베고 다녔던 것처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홍화루주야 당가와의 갈등이 두려워, 나를 꼭 멀쩡히 사로잡으라고 신신당부했겠지.

하지만 밑의 놈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당장 자기 팔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겠는가.

안전하다며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그래도 멈출 생각은 없다."

"야, 이 멍청아...!"

잇소리를 낸 설리향이 멋대로 뒤를 돌더니, 왔던 길을 그대로 거슬러 달려가기 시작한다.

허나, 그래봐야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자의 뜀박질이다.

아무리 지쳤다고 하나, 이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꽈악!

도망치던 설리향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거 놔! 이러다가 너까지 큰일 난다니까?!"

그리 말하며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내 팔뚝을 찰싹찰싹 두드리는 설리향.

하지만 아무리 때리고 밀어 보아도 놓아줄 기색이 없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왜, 왜 그러는 건데... 너도 내 몸이 목적인 거야? 차라리 그런 거라면 한번 하게 해줄게. 어차피 기녀가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설리향의 말을 묵묵히 들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점점 조용해지는 설리향. 이제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따라오는 그녀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다.

"옛날의 나는 꽤 건방진 녀석이었다. 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

"동시에 검밖에 없는 사람이었기에 누군가를 곁에 둘 수 없으리라는 것 또한 어렴풋이 알았다."

"...."

"하지만 틀렸더군. 이런 나도 누군가에게 정을 줄 수 있었다. 누군가는 내 옆에 있고자 했다."

"...."

"뭐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지만... 덕분에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가 당소월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설리향 덕분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받은 게 많다. 그러니 설리향 너는 그저 얌전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 터이니. 알겠나?"

"...응."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대답하는 설리향.

그녀를 끌어당기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역시 여기로 나왔구려."

홍화루주가 우리를 맞이했다.

대로 전체를 빼곡히 채울 만큼의 하오문도를 대동하고서.

[35]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6] 36화. 도주 (2)

"역시 여기로 나왔구려."

그리 말하는 홍화루주의 뒤로 대로를 빼곡히 채울 만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질 나쁜 왈패로 보이는 이부터, 앳된 점소이, 피로한 기색이 완연한 중년의 마부, 이 흉흉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기녀 등등.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모인 것이 하오문이다.

"나 하나 잡겠다고 연주의 모든 하오문도를 긁어모은 건가."

"한 가지 오해가 있었구려. 내가 잡으려는 것은 소협이 아니라 도망친 기녀요. 지금이라면 불문에 부칠 수 있소."

"얌전히 내놓으라는 소리를 쓸데없이 돌려 말하는군."

"그런 뜻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구려."

여전히 호의를 가장한 미소를 짓는 홍화루주. 그 중성적인 얼굴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마라. 이제와서 내가 설리향을 내어줄 것 같나?"

"그 부분이 이해가 안 되오. 시간이 부족해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소협이 당가의 데릴사위라는 것은 알고 있소. 헌데, 왜 이리 한낱 기녀에게 집착하는 거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하오문의 지부장씩이나 되는 이가 어째서 한낱 기녀에게 집착하는 거지?"

"말하지 않았소. 난 그저 제자를...."

"제자는 무슨. 흡정공의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닌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려."

"순음지체의 가장 큰 특징은 음기의 양이 아닌 그 정순함에 있지. 그리고 흡정공의 부작용은 대부분 음기나 양기에 섞인 잡스러운 탁기 때문이고."

설리향의 정순한 음기를 흡수하면, 체내의 탁한 음기 또한 어느 정도 중화될 것이다.

결국 농도와 비율의 문제 아닌가. 흙탕물에 맑은 물을 들이부으면 그럭저럭 쓸만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사이에 굴러다니는 짱돌 하나를 집어 든 설리향이 나와 홍화루주의 대화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나한테 뭘 어쩐다는 거야?"

"네게 온갖 부작용이 달렸지만 내공 쌓는 속도 하나는 빠른 심법을 익히게 한 뒤...."

"좀 더 간단히."

"...범하고 죽일 생각이라는 소리다."

"개새끼잖아?!"

그제야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아차린 설리향이 기겁하며 들고 있던 돌을 던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홍화루주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내공 사용에 제약이 있다고는 하나 절정 고수니까.

아무렇지 않게 돌멩이를 잡아챈 홍화루주의 모습에 설리향이 분통을 터뜨렸다.

"하오문은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문파 아니었어? 이래도 되는 거 맞아?!"

"그랬으면 하오문이 사파가 아닌 정파였겠지. 무엇보다 설리향 너는 같은 하오문도가 아니라 외인이잖나."

"그게 무슨...."

무림인의 민낯을 본 건 처음인 걸까. 설리향이 할 말을 잃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하오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서로 돕는 것은 언젠가 자신이 도움을 받기 위함이고.

이를 달리 말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외인에게 잔혹해질 수 있다는 소리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홍화루주가 여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겠소. 지금이라도 내 제자를 돌려준다면 소협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따지지 않겠소."

"거절한다. 아직 내가 받은 은혜를 되갚지 못했는데, 뻔히 보이는 사지로 보낼 수는 없지. 그리고."

한 박자 말을 끊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

홍화루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뒤에 늘어선 수하들을 향해 손을 까딱인다.

"쳐라.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 말에 일제히 달려드는 하오문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설리향. 내 뒤에 잘 숨어 있어라."

"나, 나는 뭘 하면 돼? 돌멩이는 아직 많은데."

"됐으니까 내 곁에서 떨어지지만 마라. 솔직히 말하자면 방해된다."

"으읏.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설리향이 내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검을 들어 올렸다.

홍화루주와 대화하며 조금 회복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지친 몸뚱이.

거기에 누군가를 지키며 싸워야 한다면 평소처럼 위험에 몸을 던지며 싸우는 방식도 불가능해진다.

허나, 상관없다.

아무리 머리수가 많아도 결국은 어중이떠중이들의 모임이 하오문 아닌가.

만일 내가 쓰러진다면, 그건 오직 지쳐 쓰러졌을 때뿐이다. 절대 타의로 쓰러지는 일은 없으리라.

가장 먼저 달려드는 사내 둘. 내 검이 닿는 간격에 들어오기 싫은 것인지 기다란 창을 들고 멀리서 찔러 온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본래 쓰던 무기가 아닌지 움직임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찌르기 또한 느릿하고.

각각 내 어깨와 허벅지를 노리고 날아오는 창날. 그중 먼저 도착한 창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내공을 집중하여 강하게 밀어낸다는 느낌으로.

카앙!

부딪히는 날붙이. 짧은 순간 번쩍인 불티와 함께 창의 궤적이 꺾인다.

"어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꺾인 창이 동료의 창과 얽힌다. 둘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창대를 강하게 짓밟았다.

으직!

어설프게 창을 쥔 녀석은 창을 놓쳤고, 그나마 능숙했던 녀석은 어떻게든 창을 붙잡고 있다가 창대가 부러졌다.

어느 쪽이건 무력화된 상황. 단숨에 짓쳐들어가 낮은 자세로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아아아악!"

"내 다리가...!"

허벅지를 깊숙이 베인 둘이 나란히 엎어진다. 마치 내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

그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사방으로 살기를 피워올렸다.

달려오려다 말고 멈칫한 녀석들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러 묻어 있는 피를 흩어낸다.

"다음은 누구지?"

"...."

"...."

"...."

서로 눈치만 보고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하오문도들. 홍화루주가 그 꼴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이 멍청한 놈들! 상대의 팔을 봐라. 지쳐서 벌벌 떨리고 있지 않나! 직접 쓰러뜨릴 자신이 없다면 어떻게든 버티기만 해라!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지쳐 쓰러질 거다!"

"쯧."

최대한 충격을 줘서 내 상태를 숨기려 했건만, 절정 무인의 눈까지 속이는 건 불가능했나.

홍화루주의 말에 한차례 꺾였던 기세가 돌아온 하오문도들. 놈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한 무더기가 달려들었다.

이어진 전투는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난전이었다.

쉴 새 없이 검을 쳐내고, 내리찍는 도끼를 피하며, 팔을 옭아매는 채찍을 끊어낸다.

그러면서도 나를 우회해 설리향을 노리는 놈을 걷어내고, 멀리서 교태를 부리는 기녀들의 색공을 날카롭게 세운 정신으로 버텨내며, 기회가 보일 때마다 검을 휘둘러 한 놈씩 팔을 베어갔다.

이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에도 뿜어내는 살기에 몸이 둔해지고, 때로는 아예 굳어 버리기까지 하는 녀석들 아닌가.

다만, 빠르게 지쳐 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숨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가쁜 호흡. 천근만근 무겁게 늘어지는 몸. 근육이 경련하며 흔들릴 리 없는 검 끝이 흔들렸고, 내공이 부족해 순간적인 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합을 나눌 때마다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퍼억!

"큭!"

"...어?"

피할 수 있었을 터인 봉에 어깨를 맞았다. 지친 다리가 제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

자신도 맞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의 팔꿈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끄아악!"

팔꿈치에 검이 박힌 채로 펄쩍 뛰는 녀석. 그 충격으로 검이 뽑히긴 했으나,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다.

이젠 팔을 단숨에 베어 낼 힘도 없다는 뜻이니까.

제법 많은 상대를 무력화시키긴 했으나, 내가 쓰러뜨린 만큼의 하오문도가 멀쩡히 서서 눈을 빛내고 있는 상황.

축 늘어진 팔 대신 한 손으로 검을 고쳐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팔이 부들거린다.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흐트러진 검세를 바로잡는 사이. 기세등등한 하오문도들 사이를 제치고 홍화루주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소?"

"글쎄. 내가 비록 이런 꼴이라고는 하나, 아직 네놈보다 약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군."

"...좋소. 자신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 직접 격차를 알려 주도록 하겠소."

내가 지칠 대로 지칠 때까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던 주제에, 좀 해볼 만할 것 같으니 그제야 앞으로 나서는 녀석.

홍화루주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다르다. 지금은 속 빈 강정 신세라지만, 어찌됐건 고수의 반열에 든 무인 아닌가.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의 내겐 위험할 수 있는 상대.

그럼에도 내가 정한 일이고 내가 감수하기로 한 위험이다.

여기서 설리향을 빼앗기고 죽도 밥도 안 되는 것보다는 사고라도 치는 게 낫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가까스로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내렸다.

하단세. 라고 하기도 뭐할 정도로 편하게 늘어뜨린 자세.

한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몸.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 또한 아니리라.

마음을 비운다. 당가가 하오문에게 받은 도움을 잊고, 지금의 내가 당가 소속이라는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지운다.

누구도 죽이지 않는 선에서 끝내려던 안일한 마음가짐을 버렸다.

생사를 가르는 것은 강인한 외공도, 심후한 내공도, 현묘한 초식도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언제나 급소를 파고드는 한치의 날붙이. 그리고 이는 상대를 해하겠다는 선명한 의지에서 비롯된다.

잘 정련된 검처럼 예리하게 날을 세운 기세.

숨길 생각조차 없는 진득한 살기가 전신에서 줄줄 새어 나온다.

이를 바로 앞에서 뒤집어쓴 홍화루주의 얼굴 위로 식은땀 한줄기가 흐른다.

"...미쳤구려. 대체 정체가 뭐요?"

"천휘."

왼발을 반보 앞으로 내디디며 몸을 기울였다.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얼마든 상대의 목을 꿰뚫을 수 있도록.

"칼잡이다."

멋들어진 수식어는 필요 없다. 아직 내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그 의미가 전해진 걸까. 홍화루주가 말없이 허리춤에서 얇은 연검을 꺼냈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낭창거리며 휘어지는 검. 저 끝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건, 반드시 벤다는 각오로 발끝에 힘을 주었다.

탓.

발목만을 이용한 짧은 도약. 별다른 전조도 없이 미끄러진 몸이 거리를 좁힌다.

다만, 본래는 내공을 터뜨려야 하는 것을 맨몸으로 펼쳤기 때문일까. 그 속도가 내 예상보다 현저히 느렸다.

지금의 홍화루주를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지만.

"뭣!"

한 번도 노린 적 없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검에 기겁한 홍화루주.

녀석이 이쪽을 향해 찌르려다 말고 손목을 꺾어 연검을 휘어뜨린다.

터엉!

내 검을 옆면에서부터 후려치는 홍화루주의 연검. 그러나, 연검은 상대와 무기를 맞대기엔 썩 좋은 검이 아니다.

수십 개의 검로로 뻗어나갈 수 있었을 터인 연검이 그저 튕겨 나간다.

다음을 위한 포석도, 나를 유도하기 위한 허초도 아니다. 그저 당장의 위협을 걷어내기 위해 휘둘러진 차악의 수.

이는 홍화루주 스스로도 잘 아는지 녀석의 기세가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투둑.

순식간에 충혈된 눈과,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핏물.

내상을 입더라도 억지로 끌어올린 내공으로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것일 터.

예상했다. 이유가 어찌됐건 무언가 숨겨둔 이는 사정이 궁해지면 우선 숨겨둔 것부터 꺼내고 보는 법 아니던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맹렬한 기세로 솟구치는 연검. 한 마리 뱀처럼 요사스럽게 넘실거리는 검기를 향해 냅다 목을 들이밀었다.

"...!"

살초를 쓰면 곤란해지는 것은 홍화루주도 마찬가지. 녀석의 손목이 무리하게 꺾이며 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그렇게 드러난 홍화루주의 옆구리. 여차할 때 꺼낼 한 수조차 허사가 된 온전한 빈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푸욱.

늑골 사이를 비집고 심장을 꿰뚫는 감각이 검을 통해 전해져온다.

일순 몸을 딱딱하게 굳힌 홍화루주였으나, 이내 막대한 토혈과 함께 추욱 늘어졌다.

"커헉! 이, 이 빌어먹을 애새끼가... 나를 죽이면 네놈은 멀쩡할 줄 아느냐. 뒷일을 어찌 감당할...."

"넌 너무 생각이 많다."

녀석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그대로 검을 비틀어 심장은 완전히 으스러뜨렸다.

눈을 부릅뜬 채로 쓰러지는 홍화루주. 녀석의 뒤통수를 향해 중얼거렸다.

"사파답지 않게 말이야."

나도 별반 다를 건 없었지만.

[36]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7] 37화. 도주 (3)

홍화루주가 죽었다.

지금껏 크게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일까. 술렁이는 하오문도들.

저들 입장에서는 내가 홍화루주의 기녀를 데리고 납치한 것도 모자라, 목숨을 앗아간 것이니 복수를 부르짖을 만한 상황이다.

과거의 내가 불타는 철혈당 앞에서 그러했듯.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제 나나 저들 중 어느 한쪽이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여, 여기까지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앞에 서 있던 족제비를 닮은 얍삽한 인상의 사내가 그리 말했다.

무슨 속임수인가 싶어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니, 들고 있던 쇄겸을 슬그머니 집어넣기까지 한다.

"저는 지부장님이 사람 하나 잡아 오면 금자를 궤짝으로 퍼준다 하여 나왔을 뿐입니다. 재수 없어도 기껏해야 팔 한 짝 잘릴 뿐, 목이 잘릴 일은 없을 거라 했는데... 소협께서는 방금 피를 보시기로 작정하셨죠?"

"맞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으나, 이젠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족제비를 닮은 사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제게 돈을 줄 지부장님도 죽었고, 죽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깨졌는데, 더 싸워 무얼 합니까."

"복수라던가 그런 건 하지 않는 건가?"

"목숨을 걸 만큼의 사이는 아니었던 터라."

딱 잘라 고개를 젓는 녀석.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렸다.

"어, 음. 이제 가봐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라."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도한 표정으로 뒤돌아 도망치는 녀석. 굳이 전력으로 달릴 필요까지 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 것도 잠시.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설리향이 족제비 녀석이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홍화루! 홍화루주가 죽었으니 너네 주겠다고 홍화루에 쌓아둔 보수를 독차지하려는 거 아냐?"

그 말에 순간 멈칫한 하오문도들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불을 켜며 뛰기 시작했다.

"저, 저놈을 쫓아가!"

"독차지하게 두지 마라!"

"팔 잘린 녀석들은 어쩌고!"

물론 전부 홍화루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길로 빠졌고, 일부는 자리에 남아 쓰러진 이들을 수습했다.

마지막으로 색공을 익힌 기녀들은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드립니다 소협."

"홍화루의 기녀가 홍화루주를 죽인 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건가."

"홍화루의 기녀는 대부분 제 의지로 들어온 이들이 아니니까요."

"허어."

설리향이랑 비슷한 이유로 기녀로 팔린 이가 한둘이 아니었던 건가.

내게 인사를 했던 기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도박이 무섭다고 하나, 사람이 순식간에 미쳐 딸까지 팔아 버리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누군가 옆에서 바람을 넣기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요."

"그건...."

회귀 전에도 몰랐던 내용이다.

기녀로 팔린 설리향의 체질을 알아보고 영약으로 삼으로던 게 아니다. 설리향의 체질을 먼저 알아보고 영약으로 삼기 위해 멀쩡한 집안을 망가뜨려 기녀로 만든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나도 설리향도 굳어있는 사이. 기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높게 솟아있는 홍화루를 바라보았다.

"오늘. 홍화루는 주인이 부재한 틈을 타 몰려든 무뢰배들의 실수로 불이 날 겁니다. 기적(妓籍) 또한 그 화마에 휩쓸려 소실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가."

만약 그리된다면 설리향을 낙적해 올 필요는 없어지리라. 애초에 기녀의 신분이 아니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는 저들도 마찬가지겠지.

이번에는 설리향 쪽을 향해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인 기녀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사라질 일터를 향하여.

잠깐 사이에 그렇게나 많던 하오문도가 전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사실에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설리향이 몰래 쥐고 있던 돌멩이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저건 또 언제 주운 건지.

"끝, 난 건가?"

"그런 것 같군. 솔직히 몇 명 더 베어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런 일이 무림인들에겐 흔한 거야? 그... 대장이 죽으면 언제 싸웠냐는 듯 흩어지는 거."

"아니. 보통 그리 쉽게 풀리진 않는다.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은 의외로 적으니 말이다."

가족, 친구, 연인, 부하 등등.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복수를 천명하기에 무림에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

일전에 당소월을 습격한 백살도객과 녀석이 이끌던 무인들이 그러한 경우 아닌가.

당가의 손에 목숨을 잃은 악인이라도 그들에겐 죽어 마땅한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홍화루주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철저하게 돈과 공포로 사람을 통제했던 게 아닐까 싶군."

"목숨을 걸 만큼의 사이는 아니다...였나? 그리고 제 의지로 기루에 들어온 이는 없었다고도 했지."

조금 전에 하오문도로부터 들었던 말을 중얼거리는 설리향.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엎어져 있는 홍화루주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본다. 정말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뭐어. 죽은 사람의 사정 따윈 궁금하지도 않아. 어쨌든 중요한 건 이 개자식이 죽었고, 우린 멀쩡하다는 거니까."

"글쎄. 멀쩡하진 않은 것 같다만."

흩어진 하오문도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검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한꺼번에 몰려오는 피로감. 조금만 집중이 끊기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위태로움에 절로 몸이 무너진다.

"어어?!"

비틀거리는 나를 반사적으로 잡아챈 설리향. 엉거주춤한 자세로 팔을 어깨에 둘러 부축한 그녀가 다급히 물었다.

"야! 정신 차려! 괜찮은 거지? 응? 어디 다친 데 있으면 빨리 말해!"

"...소리 지르지 마라. 귀 아프니까. 설리향 네가 잡고 있는 어깨 말고는 다친 곳도 없다."

"앗."

눈을 크게 뜨며 반대쪽으로 넘어가 다시 부축하는 설리향. 덕분에 통증은 좀 나아졌다.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설리향을 안심시켰다.

"그냥 지쳤을 뿐이니 걱정 마라."

"그럼 다행인데...이제 어떻게 해? 가던 대로 천휘 네가 머무는 객잔으로 가면 돼?"

"맞다. 하지만...."

"괜찮아. 내가 데려다줄게."

"가능하겠나? 나만 지친 것은 아닐 텐데."

직접 싸우거나 경공을 펼친 것은 아니지만, 지붕에서 내려온 이후로 쉴 새 없이 뜀박질했던 것은 사실이다.

무공을 익히기는커녕 제대로 먹질 못해 평범한 양민들보다 빈약한 지금의 설리향에게는 상당한 강행군이었으리라.

그럼에도 힘든 내색 없이 자세를 고쳐잡는 설리향.

"너만큼은 아니지.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천휘 네가 나를 업고 도망 다녔잖아? 이번에는 내 차례일 뿐이야. 거의 다 오기도 했고."

허세를 부리듯 어깨를 으쓱인 그녀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에 이끌려 물먹은 솜마냥 무겁던 몸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달라붙은 거리. 찌든 땀 냄새 사이로 은은하게 풍겨오는 익숙한 체향. 용을 쓰는지 창백하던 설리향의 피부는 피가 쏠려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미 당소월을 통해 깨닫지 않았던가.

아무리 그리워하고, 아무리 기시감을 느껴도 결국 현재와, 회귀 전의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아는 설리향은 없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사 온 선물을 끌어안은 채, 웃으면서 죽었다.

그러니 이건 어째서인지 죽음 이후의 삶을 허락받은 망인(亡人)의 미련 풀이에 불과하다.

대의가 아닌 자기만족. 오직 그것만을 위해 저지른 일이었으나... 후회는 없다.

아마 다시금 되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렇게 말없이 걷기를 얼마나 계속했을까. 인기척 드문 밤거리의 한복판. 아직 잠들지 않은 이들의 소곤거림 사이에 설리향의 목소리가 녹아든다.

"고마워."

내 몸을 한쪽 팔로 단단히 끌어안은 채,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던 설리향이 말을 이었다.

"난 내가 평생 이 거리를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어."

"언젠가 스스로 빠져나왔을 거다."

"몸은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음은 연주의 홍등가에 갇힌 채, 조용히 눈을 감았을 거야. 아! 어쩜 이렇게 비루한 일생이람... 하는 감상과 함께 말이야."

"...."

"하지만 이젠 아냐. 천휘. 네가 내 기억을 덧칠해 줬으니까."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꿋꿋하게 내딛는 발걸음.

"드높은 쇠창살 같던 홍화루의 외벽이 박살 나는 모습을 봤어. 그토록 무섭던 하오문의 무인이 바닥을 기는 모습을 봤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연주의 야경을 기억하며, 볼을 스치는 바람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어."

설리향이 한차례 호흡을 고르더니, 조금 더 힘을 주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됐건, 나를 위해 위험에 몸을 던지는 사람의 등을 봤어."

설리향의 입꼬리가 느슨해지며 보다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은 조심스레 배를 건네던 회귀 전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순간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버린 나 대신이라는 듯, 설리향이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고마워. 천휘 네 덕에 나는 이 지긋지긋한 진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

"...그러냐."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온 한마디. 얼핏 보면 무심해 보일 수 있는 반응에도 설리향은 그저 말갛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천휘. 너는 내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 있어 도와준 것이라 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미 도리를 다하고도 거스름돈이 한참은 남았어."

"설마 그만큼 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

"맞아. 천휘 네가 내게 해 준 것처럼 나 또한 입은 은을 갚기 위해 뭐든 해줄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서야 이쪽을 돌아보는 설리향. 지그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재차 강조했다.

"뭐든 말이야."

"...."

불건전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말투.

지금껏 강제로 익혀야 했던 색공 때문에 종종 색기가 흘러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직 색공을 익히지 않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아, 그냥 타고난 것일 수도.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순간. 잠깐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발치의 돌부리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기진한 몸으로는 저항하기 힘든 흐름에 몸이 절로 기울어진다.

"어? 자, 잠시만!"

어찌어찌 버텨 보려는 설리향이었으나, 그녀 또한 한껏 지쳐 있던 터라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아야야...."

"으음."

뒤로 넘어진 설리향.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 머리를 묻은 자세로 엎어진 나.

회귀 전보다는 좀 작지만, 여전히 푹신한 감촉이 얼굴 전체를 감싸온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설리향이 잔뜩 긴장한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고, 나는 나대로 혼자 몸을 일으킬 수 없어 품에서 바르작거리기만 하던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 것은.

"정혼자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쌍두석척의 독을 더듬어 마침내 찾아냈습니다만...."

당소월이 차분하게 내려앉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천 소협.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고 그 여자는 또 누구인지요?"

그러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37]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8] 38화. 도주 (4)

"천 소협.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고, 그 여자는 또 누구인지요."

막 납치했을 때의 당소월을 연상시키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왜 저러는지 이해는 한다. 내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찾았더니, 길바닥에서 외간 여자와 뒹굴고 있는 꼴 아닌가.

오해 사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당황해서는 안 된다.

우선은 침착하게 설리향과의 거리를 벌리고, 사정을 설명하는 거다.

잠깐 눈을 감으면 그대로 기절할 것처럼 기진맥진한 상황이나, 억지로 힘을 쥐어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풀썩.

"꺅!"

그대로 힘이 다해 다시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고 말았다. 거기에 반사적으로 내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는 설리향까지.

보란 듯이 더욱 깊게 코를 박은 것은 물론, 설리향이 그런 내 머리를 끌어안은 자세.

뒤를 돌아보지 못해 지금 당소월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등골이 서늘한 것을 보아 평소의 온화함을 바래서는 안 되리라.

본능의 경고에 몸을 맡기고 다급히 외쳤다.

"으브븝!"

"힉!"

하지만 입에 들어차는 보드라운 무언가에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리향이 꼬리를 잡아당긴 고양이처럼 펄쩍 뛰는 것은 덤이었고.

"천 소협...."

당소월의 목소리에 약간의 슬픔이 깃들었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천 소협이 외도를 저지르셨다면 저는 두 분을 죽여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밖에 없답니다."

"...!"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설리향이 빠릿한 움직임으로 내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목은 조금 뻐근했으나, 덕분에 입의 자유를 되찾아 말할 수 있었다.

"오해다!"

"예?"

"전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일단 나 좀 일으켜 주겠나?"

"...정말인지요?"

당소월이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내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약간 바르작거릴 뿐, 전체적으로 힘없이 축 늘어지는 팔다리.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챈 당소월이 나를 반쯤 끌어안으며 몸을 지탱해 주었다.

포옥.

뒤통수에 맞닿는 포근한 받침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단 들어봐라."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

이야기가 끝난 후. 착각했던 게 부끄러운 걸까. 당소월이 빨갛게 물든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밤중이라 인기척이 드물긴 하지만, 아예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 연주는 밤에 더 활발한 곳 같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주변에 사람이 얼마 없음을 확인한 당소월이 난데없이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이, 일단 업히시지요. 나머지는 가면서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설마 내게 하는 말인가?"

"그럼 누구겠습니까. 여기서 혼자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하는 사람은 소협뿐이거늘."

"그래도 내가 업히는 건 좀...."

"부축해서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겁니다. 참고로 지금 이 순간에도 암혼대가 연주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답니다. 사라진 소협을 찾기 위해서 말이지요."

"...큭!"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결국 눈을 꾹 감고 당소월의 등에 몸을 맡기자, 알아서 들쳐 업고 자세를 잡는 당소월. 좋은 향기가 났다.

기어이 나를 업은 당소월이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그나저나 요 몇 시진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꽤 소란스러웠을 텐데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가?"

"예에. 저희가 머무는 객잔 주변은 조용했었답니다. 그래서 이제야 소협을 찾아 나선 것이고요."

"덕분에 살았군."

당소월의 목덜미에 두른 팔을 좀 더 강하게 휘어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조금 닿은 탓일까.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던 당소월. 그녀가 말을 돌리듯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소협의 말 대로라면 홍화루주는 마지막까지 당가의 개입을 꺼렸다고 했지요. 어쩌면 객잔 주변에 나름의 조치를 취해 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이곳은 녀석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으니, 잠깐 숨기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테고."

나와 설리향이 막 홍화루를 빠져나가는 사이. 당가 사람들이 머무는 객잔 주변에 연막을 친 것도 모자라 우리를 몰이 사냥하듯 몰아가고 있었던 건가.

확실히 능력은 있는 녀석이다. 이제 와선 의미 없는 일이지만.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으. 사정은 이해했습니다. 우선 두 분을 오해했던 일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생각이 짧았네요. 부디 용서해 주실 수 있을런지요."

"괜찮다. 때가 좋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저도 괜찮아, 요! 정혼자가 다른 여자랑 뒹굴고 있었으면 누구든 같은 착각을 했을걸. 아니, 착각했을 테니까요."

횡설수설하는 설리향. 그런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냐 그 이상한 말투는. 나한테는 편하게 말을 놓고, 홍화루주 앞에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면서 당소월 앞에서는 얌전한 체하려는 건가."

"처음에는 너한테도 이렇게 말했었거든?! 근데 편하게 말하라며! 그리고 나 죽이려는 놈 앞에서 굽실댈 이유가 어딨어? ...하지만 이쪽은 다르잖아."

"어느 부분이 말이냐."

"진짜 명가의 아가씨고, 예쁘고, 어른이잖아. 어떻게 또래 대하듯이 대하겠어."

슬쩍 당소월을 바라보는 설리향. 그녀의 눈에는 약간의 동경. 그리고 자조가 담겨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던 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정. 나 또한 어렸을 때는 비슷했지. 정확히는 적사파를 내 손으로 무너뜨릴 때까지 말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는 것만으로도 나아지겠지만, 이를 달리 말하자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기도 하다.

비교적 둔한 나도 알아챈 것을 당소월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 그녀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사천당가의 당소월이라고 합니다."

"녜, 녜헷! 저는 설리향이라고 해요...!"

"천 소협의 은인은 제게도 은인이지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으음. 우선은 호칭부터 조금 편하게 해보는 게 어떨런지요? 예를 들면 언니라거나."

"어, 언니?!"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란 설리향. 그 모습에 당소월이 키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제가 더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설리향은 나와 동갑이다. 당연히 당소월은 그녀에게도 한참 연상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설리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 언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설리향의 머리를 토닥여 주는 당소월.

이에 설리향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짐짓 슬퍼하는 시늉을 한다.

"천 소협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귀엽지 않단 말이지요."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덤한 얼굴이랑 저 딱딱한 말투 때문이죠?"

"역시 저만 그리 생각한 건 아닌가 봅니다. 그거 아시는지요. 처음에는 천 소협을 나이를 속인 노괴로 오해했답니다."

"네? 정말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설리향. 그 알기 쉬운 반응에 당소월이 흥이 오른다는 듯, 신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며 설리향의 긴장을 풀어 준 당소월이 돌연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에 두른 내 손등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하아. 이렇게 어른스러운 소협이지만, 그래서인지 가끔 열다섯이라는 나이를 잊어버리게 되더군요."

"...."

기분이 묘하네. 당소월이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만, 회귀를 겪은 나로서는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단 말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당소월이 슬그머니 내 손을 감싸온다.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사길. 이번에는 운 좋게 홍화루주를 베는 것으로 끝나서 다행이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쩌나 제가 얼마나 맘 졸였는지 아시는지요?"

"...미안하다.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만."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오늘 같은 일이 있으면 제게 먼저 이야기해 달라는 뜻이랍니다. 소협의 일이 제 일이고, 제 일이 소협의 일 아니겠습니까."

"약속하지. 앞으로는 먼저 상담하마."

"말로만요?"

입을 삐죽 내민 당소월이 자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분명 다음에는 제가 소협의 힘이 되어 드리겠다고 했는데... 천 소협은 제가 못 미더우셨나 봅니다."

일전에 내게 손가락을 걸며 했던 말을 언급하는 당소월. 잠시 고민하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이러면 되나?"

"후후. 좋아요. 아버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끄덕이는 당소월. 업혀 있는 자세 때문일까.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볼이 간지러웠다.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 그래서이리라.

그렇게 서로 낄낄대던 와중. 문득 조금 전까지 신나서 대화를 나누던 설리향의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긴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련하면서도 씁쓸해하는 표정.

하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설리향.

그녀가 감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당가의 데릴사위였구나?"

"설마 안 믿고 있었던 건가?"

"그건 아닌데 실감이 안 났던 거지."

어깨를 으쓱이는 설리향. 이후로도 가벼운 담소를 나누거나, 다친 곳은 없는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객잔으로 향했다.

당소월의 등에 업혀 있는 경험은 솔직히 좀 부끄러웠지만, 그만큼 편안하기도 했다.

밀려오는 피로함에 꾸벅꾸벅 조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터.

점점 비몽사몽해지는 정신으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잠시. 돌연 당소월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천 소협."

"음? 무슨 일이지?"

"본래는 설 소저를 돈으로 사 와 낙적할 생각이라고 하셨지요?"

"맞다. 하지만 이는 가능한 한 원활하게 일을 해결하기 위한...."

"정혼자가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준 돈으로 기녀를 사 올 생각을 했다는 걸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은인의 딸을 구하려던 것뿐이니 말이지요."

"그, 그렇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당소월이 한층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시더니... 혹시 소협께서는 여인을 납치하는 걸 좋아하시는지요?"

"...."

순간 흐르는 정적.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닌 척 귀를 쫑긋 세우던 설리향이 입을 틀어막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분명 엄한 내용이리라.

설리향을 노려보는 사이. 당소월이 큰 결심이라도 내린 것처럼 굳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나 좋아하신다면 제가 한두 번 정도는 더 납치당해 드릴 생각도...."

"그런 거 아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 뿐, 정말 아니다.

...아마도.

[38]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39] 39화. 복귀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객잔에 도착하자 당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다 나은 줄 알았던 내가 제 발로 걷지도 못해 당소월의 등에 업혀 온 것 아닌가. 거기에 못 보던 얼굴까지 데리고서.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쥐어짜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나머지는 당소월과 설리향에게 맡긴 채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떼이잉. 아직도 자고 있는 건가. 당가의 사위가 될 녀석이 이렇게 몸이 허약해서야."

"...홀로 연주 전체의 하오문도를 상대하고, 끝내는 지부장까지 쓰러뜨린 걸 누구도 허약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형님."

잠자던 와중에도 선명히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푹신한 침상.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지저귀는 새 소리.

그리고 내 머리맡을 둘러싼 험상궂은 사내들의 시선. 실로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내공을 돌려 잠기운을 날려 보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로 이리 모여계신 겁니까."

"할 이야기도 있고, 줄 것도 있어서 이리 찾아왔다네."

"좀 더 쉬어야 할 텐데 미안. 그래도 소협에게 도움 되는 일일 테니 늙은이들이 주책이라며 귀찮게 생각하진 말아 줘."

툴툴대는 당진천과, 그의 옆에서 친근하게 손을 흔드는 당유진.

생긴 것과 다르게 사람은 참 좋다. 참 좋은데....

아침부터 보고 있으면 조금 부담스러운 인선이기도 하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대체 얼마나 급한 일인 겁니까?"

"마차를 구해 뒀네. 한 시진쯤 뒤에 성도로 돌아갈 생각이니 준비하란 말을 하러 왔네."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여기서 더 머무르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나. 그래서 일단 성도로 돌아가는 걸 우선시하기로 했네. 아직 몸이 성치 않겠지만 침상 말고 마차 안에서 쉬어 줬으면 하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서둘러야 하네. 할 일이 많으니 말일세. 하오문에 상황을 설명해야 하고, 항의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압박까지 해야 하니 말일세."

그리 말하는 당진천의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애써 화를 억누르는 사람처럼.

무슨 일인가 싶어 옆에 있는 당유진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눈이 마주친 그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천 소협이 아직 소월이와 식을 치르진 않았지만, 당가의 식구라는 사실 자체는 부지런히 보여줬어. 하오문이 모를 리 없는데 이곳의 지부장은 소협을 사냥하듯 몰아갔고."

"뭐어. 제가 설리향을 납치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소협이 데려온 아이 말이지? 은인의 여식이라고 하니 왜 그랬는지 이해는 가지만 과격한 결단이긴 했어. 하지만 세상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고,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야."

당유진이 스산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홍화루주가 해야 할 일은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고 합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했어."

하지만 홍화루주는 그러지 않았다.

당가 사람들이 머무르는 객잔 주변을 통제해 최대한 소란이 들리지 않도록 했고, 그 사이에 하오문도를 풀어 나를 잡도록 했다.

제 딴에는 일단 설리향을 확보한 뒤, 유리한 위치에서 당가와의 조율을 이어 나갈 계획이었겠지.

그만큼 본인이 절박한 상황이었고, 사정을 들으면 당가가 설리향을 내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당가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건 변하지 않아. 그리고 까딱 잘못하면 소협이 크게 다칠 뻔했고."

"그렇긴 합니다...."

홍화루주를 쓰러뜨린 이후. 만약 모여들었던 하오문도가 그대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면 멀쩡히 빠져나오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소협이 잘했다는 말도 아니야. 그런 일이 있었으면 먼저 어른에게 상담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당소월에게 한 소리 듣긴 했습니다."

당소월의 이야기가 나와서일까. 당진천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말하마. 네 실력이 뛰어난 것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아는 일이나, 세상 모든 일을 굳이 검으로만 해결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가져오거라. 그게 어른이 할 일이니."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내가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을 가진 회귀자로서 어린아이 취급이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당소월에게 들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분이 묘하긴 해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좋네.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세."

"다음 말입니까?"

"할 말도 있지만, 줄 것도 있다 하지 않았나."

그리 말하고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이쪽으로 건네기 시작하는 당진천.

"요상환일세. 이건 백초탕이고, 아 보신단도 몇 개 챙겨왔네. 이곳이 당가였다면 더 좋은 약이 있었겠으나, 아쉽게도 바깥이라 당장 구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더군."

"...."

품에 한가득 끌어안은 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다 뭡니까."

"뭐긴. 근처 약방에서 급하게 사 온 약이지. 영약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원기 회복에 좋은 것들이고,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들만 모아왔으니 남기지 말고 다 먹게."

당가의 사위 될 녀석이 이렇게 허약해서 되겠냐며 툴툴대더니, 겨우 하룻밤 사이에 약을 이만큼이나 구해 온 건가?

얼떨떨한 마음으로 받아 들며 말했다.

"감, 사합니다?"

"감사는 됐고 먹기나 하게."

"예."

환단을 먹고 탕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나자, 입에서 약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냄새였지만, 이를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당진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이제 가 보겠네. 곧 사람을 보낼 터이니, 그때까지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마쳐 두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는 당진천과 당유진.

사실 준비하려 해도 챙길 짐이 없다. 내가 가져온 건 몸뚱이와 검 한 자루가 전부니까.

이는 당진천도 잘 알고 있는 일이겠지. 약 기운이 돌 때 운기행공으로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해 두라는 뜻이리라.

"후우."

근육통으로 삐걱이는 몸을 강제로 움직여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깊은 호흡.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내면 깊은 곳으로 침체했다.

***

여전히 여기저기 쑤시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했을 무렵.

내 방을 찾아온 암혼대원을 따라 객잔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내 상상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마차가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당소월과 설리향.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당가의 무인들 사이에 끼어 위축되어 있는 설리향을 당소월이 신경 써 주는 모양새였다.

천천히 다가가자, 그제야 이쪽을 알아챈 당소월이 쪼르르 달려왔다. 잠시 눈치를 보던 설리향이 그 뒤를 따랐고.

"천 소협.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장인어른께서 아침부터 약을 구해 오셨더군. 덕분에 움직일 정도는 된다."

"아버님이요? 흐흫.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협을 마음에 들어 하고 계시는 게 맞았나 봅니다!"

입가를 가리며 키득이는 당소월. 반면 설리향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 내 몸을 이곳저곳 살펴볼 뿐이었다.

"지쳐 쓰러질 정도였는데 하루 만에 괜찮아진다고? 무림인은 전부 그런 거야?"

"단순히 지치기만 해서 그런 거다."

"그게 문제 아닌가...?"

"외상이건 내상이건 크게 다친 곳은 없고, 진기가 상할 정도로 지치지도 않았다. 거기의 영약이 아니라고는 하나 원기를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을 한가득 먹고 운기까지 했으니 가능한 일이지."

"무공 모르는 사람도 이해하게 말해 줘."

"...나 정도 되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좋은 약 먹고 푹 쉬면 금방 낫는다."

"무림인 대단하네!"

그제야 감탄하는 설리향. 그 순수한 반응에 헛웃음을 짓고 있자니, 당소월이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마차 쪽으로 향했다.

"천 소협이 말은 그리했지만, 어디까지나 움직일 수 있다 뿐이지 정말 멀쩡한 건 아니랍니다. 그러니 한동안은 마차에서 꼼짝없이 누워 계셔야겠지요."

"헙! 그런 건가요, 당 언니?"

"예에. 답답한 마음에 투덜대다가 숙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천 소협 나이대의 남자들은 종종 허세를 부린다고 합니다. 안 괜찮은 걸 안 괜찮다고 하는 게 부끄러워 괜찮다고 하는 것이지요."

당소월의 태연자약한 음해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긴요. 허면, 소협이 괜찮다고 할 때마다 쓰러지거나, 어디 한 군데 크게 다쳐온 건 어찌 생각하십니까?"

"내가 언제 그랬나."

"백살도객 때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혼절했고, 아귀부와 귀목마녀를 상대할 때도 마기 때문에 내상이 상당했지요.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조금만 더 무리했다면 분명 진기까지 상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한동안 요양에 집중해야 했겠지요."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말이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잖나."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뜻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랍니다."

"그게 그 뜻 아닌가?"

"이 또한 숙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남자 무인의 유언 중 가장 흔한 세 가지가 괜찮아 안 죽어, 설마 죽기야 하겠어,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마. 라고 합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지 않으신지요?"

"...."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실제로 지금의 내 나이대 무인이 객기를 부리다 사고 치는 일은 은근 흔하기에.

내가 그런 눈으로 보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저 멀리서 암혼대주와 일정을 조율하는 당유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백독청혈단을 준 것도 다름 아닌 당유진이었기에 눈에서 힘을 풀었다.

그렇게 나를 끌고 가던 당소월이 마차의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는 설리향.

둘의 물 흐르는 듯한 연계에 눈 깜빡할 사이에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내 옆에는 당소월이, 맞은 편에는 설리향이 앉은 상황. 꼼꼼하게도 좌석에는 이미 푹신한 가죽이 깔려 있었다.

당소월이 평소처럼 아름다운, 하지만 묘한 단호함이 서려 거부하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리 누우시지요, 소협."

그리고는 내 머리를 느릿하게 잡아끌어 자신 쪽으로 당기는 당소월.

당소월의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누운 자세가 되자. 그제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성도에서 출발할 때는 아버님과 함께 말을 타야 해서 실망하셨지요. 이렇게 돌아갈 때는 저와 같은 마차에 탔으니 참 다행인 일 아닙니까."

자기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자신감 섞인 발언.

평소라면 나 또한 오늘 같은 당소월의 적극적인 모습에 즐거운 마음으로 어울려 주었겠으나....

앞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설리향 때문일까. 괜히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전혀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설리향의 거취에 관해 말이다만."

"어, 어? 나? 가주님이 성도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했는데?"

"그것도 좋겠지. 당가의 비호 아래서 편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다만, 나는 조금 아쉬울 거다."

"아쉬워? 왜?"

설리향이 약간의 기대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게는 무공의 재능이 있으니 이를 썩히는 것은 아쉬울 수밖에."

"아, 무공... 무공?!"

잠시 실망한 듯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는 설리향.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는 그녀의 말이 갑자기 많아졌다.

"무슨 무공의 재능이야? 너처럼 검? 아니면 당 언니처럼 암기 같은 거? 하긴 내가 짱돌을 좀 잘 던지긴 했어."

혼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설리향. 그런 그녀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색공의 재능이다."

"...."

"...."

마차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39] 사천당가의 막내딸을 납치했다(연재)

[40] 40화. 복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