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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01-10

야매 힐러로 사는 법

01. 어떤 힐러 1

"마, 마을이다.... 살았어!"

남자는 불빛을 발견하고 환호했다.

이름은 루스. 아즐 대륙 어디서나 볼 법한 모험가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어깨는 찢어져서 너덜거렸고, 발목은 욱신거린다. 루스는 한숨을 푹 쉬며 인상을 썼다.

'아무리 그래도 떼로 몰려오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루스는 오는 길에 검은 갈기늑대의 습격을 받았다.

한 마리였다면 쉽게 처리했겠지만, 늑대 계열 몬스터는 최소 2~3마리씩 무리 지어 돌아다닌다.

"야비한 새끼들."

루스는 이를 빠드득 갈면서 중얼거렸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서른 마리!'

안 그래도 강한 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덤비는데 당해낼 수가 있나.

동료 없이 혼자 다니는 모험가에겐 검은 갈기늑대보다 끔찍한 놈도 없다.

'일단 치료를 해야 하는데....'

루스가 치료를 머뭇거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돈이 없었다.

'먹고 잘 돈만 남겨놓고 다 썼지. 저쪽 술값이 너무 싸서....'

보통 싸구려 숙소가 1박에 6000골드에서 7000골드.

가장 싼 메뉴는 모험가 조합에서 파는 빵과 스튜에 야채 절임을 곁들여 먹는 2500골드짜리 식사. 일명 모험가 정식.

즉, 루스의 전 재산은 기껏해야 일만 골드. 포션 몇 개 사면 사라질 돈이다.

'돈 없으면 포션 사 먹는 게 국룰이긴 하지.'

포션 쭉 빨고 하루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하면 치명상이 아니고서야 낫는다.

지금 치명상을 입어서 그렇지.

'포션으로는 안 되겠네. 힐러한테 가야겠다.'

힐러를 찾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교회에 가는 것이다. 교회는 어지간한 마을에는 전부 있고, 교회의 사제들은 힐링 스킬을 갖고 있다.

사제가 손만 대도 온갖 상처와 부상이 낫지만, 그만큼 비싸다. 아주 간단한 상처 치료도 수십만 골드는 받아가는 놈들. 일명 사제 힐러.

-아이베르 님의 힘으로 상처가 말끔히 나았습니다. 치료비는 100만 골드입니다.

-치료비는 전부 아이베르 님을 위해, 아이베르 님을 모시는 교단을 위해 사용될 예정입니다. 이아 아이베르.

기본적으로 힐러 치료비는 비싸다. 그중에서도 사제들은 신을 핑계로 돈을 뜯어 가기 때문에 자비가 일절 없다.

-골드가 없으신 분께는 신의 축복을 내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이베르 님을 향한 성의를 보이세요.

덕분에 가난한 평민들은 힐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사제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왕족과 귀족 같은 높으신 분들이나 돈이 엄청 많은 모험가뿐.

물론 교단 사제들만 힐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모험가 중에도 힐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모험가 힐러.

교단에 속한 사제 힐러보다 훨씬 싼 값에 치료해주지만, 그만큼 실력이 딸린다. 어쨌든 아마추어니까.

'현금이 없어서 모험가는 안 되겠고, 사제 놈들을 찾아가야겠네.'

돈이 없는데 치료비가 필요할 경우, 모험가 조합에서 빌릴 수 있다. 대신, 수수료를 포함한 금액을 의뢰 보수에서 떼어간다. 한마디로 모험가 조합 대출이라 할 수 있다.

별로 추천하고 싶은 방식은 아니지만, 루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혹시 힐러 찾으세요?"

루스가 모험가 조합에서 확인증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어떤 남자 하나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예 뭐. 근데 현금이 없어서 모험가 힐러에게는 못 가니, 사제 놈들이나 찾아가려구요. 조합 놈들이 대신 내줄 테니."

"싸게 해드릴게요. 치료받고 갚으셔도 됩니다."

정상적인 힐러는 선불을 요구하지, 저렇게 친절한 소리 안 한다. 몸이 멀쩡해지면 먹튀 할 확률이 높으니까.

"힐러 배지나 보여주고 말해라."

루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힐러가 워낙 돈을 잘 벌다 보니, 힐러 행세하는 가짜 힐러들도 판친다. 치료하는 것처럼 눈속임하는 건 힐을 쓰는 것보다 쉬우니까.

'사제 힐러는 신분을 증명하기 쉽지만, 모험가 힐러는 겉만 봐선 모르니까.'

그래서 생겨난 것이 힐러 배지. 모험가 조합에서 만든 힐러 신분증이다.

진짜 배지는 아니고, 모험가 조합에서 지급하는 특수 스킬이다. 뭘 모르는 놈들은 배지라는 말만 듣고 진짜 배지를 내밀기도 한다고.

"배지 잃어버렸어? 보여달라니까."

힐러 배지가 없는 힐러는 십중팔구 사기꾼 아니면 협회에서 제적당한 힐러. 그런 놈한테 치료를 받았다간 몸이 낫기는커녕 상태가 악화된다.

"힐을 쓸 줄 모른다고 했더니 발급을 안 해줘서 없네요."

힐러 배지가 없는 건 물론이고, 아예 힐을 쓸 줄 모른다?

남자가 너무 뻔뻔하게 나와서 루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살다 살다 별 또라이를 다 보겠네."

마을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사기 치는 놈을 만날 줄이야. 루스는 남자를 무시하고 갈 길 가려 했다.

"거기 오른쪽 어깨."

그때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이나 창 같은 무기가 아니라 단단한 발톱이나 손톱 같은 거에 찢긴 걸 보면 몬스터한테 당하셨네. 두 번 세 번 공격한 게 아니라 딱 한 대 때린 걸로 사람 가죽을 이렇게 찢어먹으려면 꽤 강한 놈이라는 건데."

"...."

"상처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걸 보면 이 주변에서 당했다는 소리고.... 이 주변에 사는 놈 중에 그럴 만한 놈은 검은 갈기늑대밖에 없네요. 그것들한테 당하셨죠?"

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싸움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 읊어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남자는 대답 대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더니 루스의 발목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발목 절뚝거리는 건 가시나 나뭇가지에 찔려서. 늑대랑 싸우다가 푹 찔리셨겠네. 발목 때문에 휘청거려서 늑대한테 한 방 먹은 거고."

루스는 경악하며 남자를 쳐다봤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실제로 루스는 검은 갈기늑대 무리와 싸우다 나뭇가지에 발목을 찔렸다.

그 뒤로 발목을 신경 쓰느라 방심해서 어깨를 당한 것까지, 모두 남자가 말한 그대로였다.

"뭐야.... 당신 점쟁이야?"

"내가 점쟁이면 그걸로 먹고살지 이러고 살겠습니까? 점치고 궁합 봐주겠죠."

"점 보셔도 되겠는데 뭘."

"내가 힐은 쓸 줄 몰라도 남 고치는 거로 밥 벌어 먹고사는 놈이거든요."

남자는 루스의 말을 웃어넘기며 말했다.

"사제 놈들 가면 한 60만 골드? 모험가 힐러한테 가면 30만 골드 정도 받을 테니...."

"그래서 결론이 뭔데?"

"딱 15만 골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5만! 딱 좋네!"

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치료비로 딱 15만 골드만 받을게요."

"이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네."

루스는 남자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놈은 힐도 쓸 줄 모르는 주제에 힐러 행세를 하는 사기꾼이었지!'

청산유수처럼 줄줄 늘어놓는 말에 홀려서 깜빡 속을 뻔했다. 루스는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그냥 찍어 맞춘 거 가지고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하네? 대충 싸구려 포션 몇 개 붓고 말겠지. 사지 멀쩡한 양반이 그러고 살지 마쇼."

루스는 남자를 노려보며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힐로는 못 고칠 텐데."

"뭐라는 거야."

"돈은 돈대로 날리고 후회하실걸요. 불쌍하니까 13만 골드에 해드릴게요."

남자는 무척 인심 썼다는 얼굴로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힐로 못 고치는 게 어딨냐?"

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힐은 만능은 아니다.

독이나 마비 같은 일부 상태이상이나 질병은 힐로 고칠 수 없다. 당연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도 살릴 수 없다.

"있는데요. 솔직히 많지."

"아, 있긴 하지! 근데 이런 상처는 잘만 고쳐주잖아!"

물리적인 상처는 힐러가 숨만 쉬어도 고칠 수 있다. 힐러가 그것도 못하면 힐러 일 때려치워야지.

"뭐... 아프긴 더럽게 아프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상관없나?"

남자는 루스의 귀에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리더니 몸을 비켜주었다.

"혹시 자다가 아프면 찾아오세요."

그러더니 자기가 머무는 여관방 주소를 알려주고 가버렸다.

"뭐 저런 웃긴 놈이 다 있지?"

루스는 재수 옴 붙었다며 어깨를 탈탈 털었다. 힐 받으러 가는 김에 축복 세례까지 쏴달라고 할까.

-"치료비는 62만 골드입니다만, 모험가 조합의 확인증을 가져오셨지요.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주신 아이베르 님 최고."

"이아 아이베르. 모험가님의 앞길에 아이베르 님의 은총이 있기를."

사제의 치료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동시에 루스는 62만 골드의 빚이 생겼다.

'비싸긴 하지만 효과 하나는 확실하니까.'

살갗이 찢어져서 너덜너덜했던 어깨 상처가 아물고, 쓰라리던 발목이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됐다.

'아까 그 웃긴 새끼 생각나네. 뭐? 힐러가 못 고쳐?'

못 고치긴 개뿔. 당장이라도 나가서 싸워도 될 정도로 잘 고쳐줬구만.

'일단 오늘 밤은 푹 쉬고 내일부터 빡세게 벌자.'

루스는 뻐근한 몸을 풀며 교회 계단을 내려갔다.

'응...?'

순간 발목에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다친 발목이었다.

'뭐지?'

발목을 다시 살폈지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피부색이 살짝 불그스름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만져 봐도 아프진 않았다.

'착각했나?'

하긴, 방금 힐러한테 치료를 받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

루스는 신경 쓰지 않고 여관으로 향했다.

목욕을 끝내고 침대에 눕자 사기꾼에 관한 생각은 싹 사라졌다. 이제 푹 자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날 새벽, 루스는 끔찍한 고통을 맛보며 눈을 떴다.

"끄악...!"

처음에는 여관에 불이 난 줄 알았다. 다리가 불에 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스는 다급하게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웠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다리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아으아악!!!"

"무, 무슨 일이신가요?"

오밤중에 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더니 여관 종업원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루스는 바들바들 떨면서 외쳤다.

"히, 힐러...! 힐러 좀 불러줘요! 빨리! 아악!"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루스의 다리를 보고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힐러한테 힐까지 받았는데 왜...!'

낫기는커녕 오히려 상태가 나빠지다니.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자기 다리를 자르고 싶었다.

-힐로는 못 고칠 텐데.

그때, 루스의 머리에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후회하실걸요.

-혹시 자다가 아프면 찾아오세요.

녀석은 루스의 다리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힐 받아봤자 소용없고, 자다가 아파 뒈질 거라는 점까지도.

그제야 루스는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파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데 뭔 수로 가냐고.... 아, 저기요!!"

루스는 방금 나간 종업원을 다시 불렀다.

힐이 먹히지 않는다면 다른 힐러를 불러봤자 시간 낭비다.

"왜 그러세요?"

"다른 힐러는 소용없어.... 그 녀석, 그 녀석을 불러야...."

루스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남자의 이름을 모른다.

여관방 주소는 알려줬지만 까먹은 지 오래다. 사람 이름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시, 시발.... 알려줄 거면 이름이나 알려주지...!"

"누구 말씀하시는지 알아요. 힐 못 쓰시는 힐러님 말씀하시는 거죠?"

놀랍게도 종업원은 남자를 알고 있었다.

"바로 불러올게요! 저희 여관에 머물고 계시니까...."

"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종업원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참에 방문이 열렸다.

"이미 도착했거든요. 힐 못 쓰는 힐러 왔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2. 어떤 힐러 2

"늦은 시간인데 수고 많으십니다, 줄리아 씨."

남자는 종업원한테 인사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바닥에 엎어진 루스를 바라보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얼굴로.

"많이 피곤하실 텐데, 여기서부턴 저한테 맡기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줄리아라는 이름의 종업원은 미소지으며 방을 떠났다.

이제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다리가 아파 죽으려는 루스와 남자뿐이다.

"아이고, 아까 보고 또 뵙네요."

"...."

"그래서 힐러 치료받고 좀 나아지셨습니까?"

"보, 보면 알잖아! 끄으윽!!"

루스는 남자의 조롱에 반박도 못 하고 다리를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에도 알 수 있듯 새까맣게 변색된 다리. 거기에 쉬지 않고 몰려오는 끔찍한 통증까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내가 그래서 소용없다고 했는데. 괜히 아깝게 돈만 낭비하시고...."

남자는 무척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했다.

자업자득이긴 했다. 남자는 친절하게 경고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은 건 루스 본인이었으니.

"당신.... 지, 진짜 힐러야?"

루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을 여관 종업원이 힐러라며 데려온 사람이다.

무엇보다 루스의 다리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힐을 못 써서 정식 힐러는 아닌데, 일단은요."

"자, 자고 있었는데 다리가 갑자기 이렇게 됐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스는 간절하게 소리쳤다.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이러다 죽을 거 같으니까 빨리 어떻게 좀...."

"치료비는 30만 골드. 선불로 부탁드립니다."

"뭐?"

루스가 간절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아까는 15만이었잖아? 왜 두 배나 올라가?"

"싫으면 마시고."

"잠깐 사이에 가격이 두 배로 오르는 게 말이... 끄아아아아아!!!"

루스는 더 심해진 통증 때문에 바닥을 굴렀다. 남자는 루스를 힐끔 보더니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상황이 아까보다 세 배는 나빠졌으니까 그러죠."

실제로 아까 15만 소리를 들었을 땐 이 지경까진 아니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중환자. 30만 골드는 오히려 싼 편이다.

"아직 덜 아프신가 본데. 비싸면 다른 힐러 부르세요."

"아, 알았어! 알았어요!! 낼게요!"

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사람은 원래 궁지에 몰리면 없던 공손함이 튀어나오는 법.

"근데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그러는데?"

루스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칼을 가리켰다.

"이 녀석 팔면 20만 골드는 나올 겁니다.... 그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저게? 20만 골드?"

언뜻 보기엔 그냥 고철로 보이는 낡아빠진 칼. 하지만 검집이나 검 손잡이를 자세히 보면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아까 몬스터랑 싸우느라 상태가 안 좋긴 한데, 당장 드릴 수 있는 게 저놈밖에 없어서요...."

루스의 방어구는 싸구려라 가치가 거의 없다.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은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싹 팔아버렸고.

말 그대로 칼 한 자루만 들고 있는 상황.

"나머지 돈은 제가 피를 뽑아다 팔아서라도 나중에 꼭 갚을 테니, 제발 좀 살려주세요.... 선생님!"

루스는 이제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 남자를 놓치면 진짜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루스의 검을 집어 들었다.

"험하게 다뤘지만, 꽤 아끼는 칼 같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사가 자신의 검을 판다는 건 영혼을 파는 것과 같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소리겠지.

남자가 뭐라 외치자 검이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원래는 30만 골드를 받겠다고 했지만, 20만에 해드릴게요. 나중에 돈 들고 오시면 검 돌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상태 좀 봅시다."

치료비도 받았겠다. 남자는 바닥을 기고 있던 루스한테 다가갔다.

보이는 그대로 루스의 다리는 엉망이었다.

"내가 힐 안 먹힐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들으셨어야지."

"이거... 뒈질 병입니까? 뒈질 병이에요??"

"죽을병이었음 아까 거기서 그쪽 기절시켜서라도 치료해드렸죠."

남자는 놔둬도 괜찮겠다 싶어서 루스를 보내줬다. 죽을병이었으면 루스를 제압해서라도 치료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픈데 죽을병이 아니라고?"

"그냥 좀 더럽게 아프기만 하고 다리를 못 써서 그렇지."

"그럼 꽤 심각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루스의 다리를 쿡 건드렸다. 루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괴로워했다.

"끄아악...!"

"그쵸? 더럽게 아프죠?"

"아 예!! 진짜 뒈질 것처럼 아프니까, 말 그만하고 빨리 치료 좀...."

"댁이 계속 내 말을 잘라먹으니까 그러죠. 입이나 다물어요."

"예...."

말 좀 그만하라고 했다가 역으로 닥치게 된 루스. 조용히 하면 빨리 치료해줄까 싶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 비명은 질러도 됩니다. 괜히 참지 말고. 아프긴 진짜 아플 테니까요."

"네네, 알았으니까 빨리 치료 좀...!"

"자, 여길 보시면 알겠지만."

남자는 웃으면서 루스의 어깨를 가리켰다. 검은 갈기늑대한테 당한 상처가 있었으나 지금은 말끔하게 고쳐진 상태다.

"어깨 쪽 상처는 멀쩡하죠?"

"그, 그러게요? 여기는 멀쩡하네...."

같은 힐러한테 치료를 받았음에도 어깨는 완치됐고 발목은 아니라니. 루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뭐, 여기도 내가 치료할 수 있긴 한데... 이미 나았으니 신경 쓸 필요 없고...."

남자의 시선이 루스의 어깨에서 발목으로 내려갔다. 보랏빛으로 보일 정도로 시꺼메진 피부가 눈에 띈다.

"혹시 모를까 봐 설명해주는 건데, 알아도 그냥 들으세요."

"예...."

남자는 루스의 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힐은 어지간한 상처는 다 치료해주지만, 독이나 질병은 못 고칩니다. 중독된 상처에 힐을 쓰면 일시적으로는 상태가 좋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증상을 뒤로 미루는 게 전부죠."

"그럼 내 발목은... 윽!"

루스는 인상을 쓰며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멀쩡했다. 힐 때문에 상처 하나 없으니까.

하지만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겁니다."

루스의 다리가 이 꼴이 난 건 독 때문이었다.

"최근에 독에 당한 기억은 없는데...."

"발목은 왜 다치셨는데요."

"검은 갈기늑대랑 싸우다 나무에 찔려서....헉!"

"그게 원인입니다."

범인은 검고 동글동글한 열매가 인상적인 흑진월귤나무. 이 근처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독나무다.

"도, 독나무?"

"잎사귀는 물론이고 뿌리와 나뭇가지에도 독을 품고 있어서... 땔감으로도 못 쓰는 놈이에요."

뭘 모르는 모험가들이 야영한답시고 흑진월귤나무를 꺾다가 독에 중독되거나 골로 가는 일이 종종 있다. 불로 태워서 생기는 연기 속에도 독이 들어있으니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건, 검은 갈기늑대와 싸우다 흑진월귤나무에 중독되는 거죠."

흑진월귤나무는 검은 갈기늑대 서식지에서 자생한다. 정확하게는 흑진월귤나무 주변에서 검은 갈기늑대가 사는 거지만.

"그, 그러고 보니...."

루스는 아까 검은 갈기늑대와 싸울 때를 떠올렸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사방에 낮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얼마나 유용하겠어요? 사냥감을 나무 주변으로 몰아가기만 하면 스치기만 해도 중독시킬 수 있는데."

늑대들이 괜히 흑진월귤나무 자생지에 사는 게 아니다. 사냥감을 쉽게 사냥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중독된 줄도 모르고 싸우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한 통증을 느끼고 쓰러질 테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튄 건데.... 내가 거기서 계속 싸웠으면...."

"백퍼 죽으셨습니다."

루스는 몸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다치자마자 도망쳤다.

다치지 않아서 계속 싸웠다면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독이 온몸에 퍼진 채 검은 갈기늑대한테 전신이 찢겨서.

"와씨...."

루스는 순간 오싹함을 맛보며 몸을 떨었다. 다친 게 오히려 행운이었을 줄이야.

"흑진월귤나무의 독 자체는 고통스러운 통증만 있지,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닙니다. 근데 거기서 몬스터와 엮이면... 사람 죽이는 독극물이 되는 거죠."

안 그래도 강한 몬스터가 독까지 써대니 버틸 수 있을 리가.

"거기다 놈들은 사냥감이 독에 중독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속셈으로 일부러 봐주면서 싸웁니다."

멋모르는 모험가들은 검은 갈기늑대들이 만만하게 느껴져서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 최후를 맞게 된다.

"저런 위험한 나무를 왜 마을 주변에 심어둔대요? 싹 다 뽑아버리든가...."

"흑진월귤나무는 나뭇가지는 물론이고 뿌리와 잎사귀까지 독을 품고 있긴 하지만...."

남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작은 나무 열매. 물어볼 것도 없이 흑진월귤나무의 열매, 흑진월귤이다.

"열매는 독이 없으니까 드세요."

루스는 남자가 내민 흑진월귤을 바라보았다.

내내 흑진월귤나무의 위험성을 설명하다 먹으라고 하면 누가 먹겠는가.

"독이 없다구요?"

"그럼 독 있는 걸 먹이겠어요? 뭐 필요하다면 먹이긴 할 건데... 이건 없다니까요."

"...."

"모험가라는 사람이 뭔 겁이 그렇게 많으신가 몰라."

"아니, 상식적으로 댁 같으면 먹겠어?"

"이 새키가 아직 몸이 덜 아픈가 보네."

남자는 루스한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리며 흑진월귤을 삼켰다.

"자, 보셨죠? 먹어도 이상 없으니까 닥치고 빨리 좀 먹어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먹으면 치료 안 하고 가버리겠지.

루스는 찜찜한 얼굴로 흑진월귤을 먹었다. 전체적으로 새콤하지만, 살짝 달면서 짭짤한 맛도 느껴지는 묘한 과일이다.

"어...."

동시에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살짝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그럭저럭 참을 만한 수준으로. 이제 굴러다니면서 비명 지를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설마 다 나았나...?"

"당연히 아니죠. 진통제도 힐도 없으니 드린 겁니다."

흑진월귤은 나무의 독을 해독시키는 효능이 있다. 중독된 지 얼마 안 된 환자는 열매 한두 개만 먹어도 낫지만, 루스처럼 독이 잔뜩 퍼진 경우는 어림도 없다.

대신 통증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일단 먹여두면 편하다고.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이거 맛있네."

루스는 흑진월귤을 다 먹고 입맛을 다셨다.

안 먹겠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본인이 직접 가서 따오세요. 마을 주변에 널려있으니까."

"독나무인데 내버려 두는 이유를 알겠네."

"그게 없으면 사람들이 굶어 죽거든요."

흑진월귤은 열매가 많이 열리고 영양분이 풍부하다.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쪄먹어도 맛있지만, 말리거나 잼으로 만들어 보관하면 겨우내 먹을 수 있다.

"귀족들은 손도 안 대요. 배고픈 평민들만 먹지."

그도 그럴 게, 독도 독이지만 흑진월귤나무 주변에는 검은 갈기늑대가 어슬렁거린다.

먹을 게 널린 귀족들이 위험성을 감수할 정도로 맛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평민들이나 먹는 과일이다.

"흑진월귤은 꾸준히 섭취하면 흑진월귤나무 독 저항력이 생깁니다."

흑진월귤을 꾸준히 먹는 마을 평민들은 물론이고, 검은 갈기늑대와 같은 몬스터들도 독 저항력을 갖고 있다.

"먹다가 안 먹으면 독 저항력이 몸에서 사라지지만."

그래서 열매를 먹지 않는 귀족들이나,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된 모험가들은 독 저항력이 없다.

"그럼 이제라도 열매를 계속 먹으면 됩니까...?"

"한 달 내내 세끼 꼬박꼬박 먹으면 움직일 수 있겠죠."

"아, 한 달 내내 먹어야... 잠깐, 다시 말해봐요."

한 달?

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달 동안 꾸준히 먹으면 다리를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럼 한 달 뒤에나 걸을 수 있다구요?"

"네."

남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루스는 미칠 것 같았다.

당장 갚을 돈이 60만 골드가 넘어간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아니 미치겠네.... 선생님, 그거 말고는 방법 없어요? 지금 내가 한 푼도 없어서 한 달이나 놀 수가 없네요! 댁도 모험가라면 내 심정 잘 알 거 아닌...."

"있는데요? 내가 언제 없다고 했나?"

남자는 주머니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3. 어떤 힐러 3

"포션?"

남자가 꺼낸 건 액체가 들어 있는 포션병. 흑진월귤과 같은 색상의 검은색 포션이었다.

"이건 흑진월귤로 만든 해독제입니다."

"해독제...?"

남자는 포션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걸쭉한 액체가 출렁거렸다.

"흑진월귤의 해독성분만 추출해서 제조한 거죠."

독이 너무 많이 퍼져서 손 쓸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한 포션. 흑진월귤과 성분 추출용 약초를 써서 만든 것이다.

"아니, 방법이 있으면 있다고 미리 말씀하시든가!"

"말하려고 했어요. 근데 흑진월귤 효능을 물어보시길래 그거부터 알려드리려고."

"그야, 그때는 치료법이 그것만 있는 줄 알았으니까 그랬고!"

루스는 남자가 꺼낸 포션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괜히 쫄아서 난리 피웠네!'

동시에 안심했다. 치료할 방법이 있어서.

"아무튼 그걸 쓰면, 내가 한 달 내내 누워있을 필요는 없겠죠?"

"빠르면 이틀, 제가 추천하는 건 사흘 정도."

"이틀?"

거기서 더 줄이는 건 무리라고. 하루 이상은 쉬어야 다리가 제 기능을 할 거라고, 남자는 덧붙였다.

"독은 해독제를 쓰면 낫지만, 독 때문에 약해진 체력까지 회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아씨.... 아까 사제놈한테 가지 말걸."

이때부터는 힐이 먹힌다. 중독 상태가 치료된 다음이니까.

'정작 힐러 부를 돈이 없다는 게 문제지.'

모험가 조합한테 가봤자 빌린 돈이나 갚으라고 재촉할 것이다.

"내가 그래서 가지 말라고 친절하게 말씀드렸잖아요. 돈하고 시간 낭비라고."

남자는 무척 안타깝다는 말투였으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거봐라. 내가 경고했지?' 이런 얼굴.

"그래도 한 달에 비하면야...."

한 달 내내 누워있기 vs 이틀 동안 푹 쉬고 일하기.

고민할 것도 없다. 루스는 알았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제 어쩝니까? 그거 마시면 됩니까?"

"아니요."

"그럼 바르나요? 다리에?"

"아니요."

"그럼요?"

"살을 째야 합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 살을... 짼다구요? 이거, 이 다리를?"

루스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흑진월귤 덕분에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없는 건 아니다. 손으로 누르기만 해도 아파 죽을 거 같은데, 다리를 째야 한다니?

"그래야 약을 붓죠."

남자는 그런 걸 왜 묻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이, 이걸 칼로 째? 이걸?"

"자, 여기 살 아문 거 보이시죠?"

"...."

"힐만 안 받으셨어도 그냥 상처에 부었을 텐데,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아주 깔끔하게 고쳐놓으셨네요."

루스의 발목 상처는 씻은 듯이 나은 상태였다. 사제 힐러의 고오급 힐을 퍼부었으니까.

"저도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치료하고 싶은데... 너무 완벽하게 나아서."

"...."

"안 째면 방법이 없네요."

루스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전부 본인이 자조했으니까.

"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요. 째는 게 싫으면 한 달 동안 흑진월귤 잘 드시면서 누워 계시면 됩니다."

"다리 째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루스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했다.

남자는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힐을 못 써요.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

"네....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진통제도 없거든요. 그래서 좀 더럽게 아플 겁니다."

"자, 잠깐...."

쫘아악!!

남자는 루스가 말릴 틈도 없이 발목을 그었다. 작은 나이프는 살을 가르면서 상처 부위를 열었다.

"끄으으윽...!"

남자의 말대로 더럽게 아팠다.

눈물이 줄줄 나올 정도로 아팠으나 루스는 참았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검사가, 이까지 일로 난리 피울 수는 없다.

'거, 검사 자존심이 있지!'

몸에 칼 좀 닿는다고 난리 피우면 이 일 못 해먹을 테니까.

루스는 고통을 이 악물고 참았다.

왈칵!

깔끔하게 째진 살갗에서 시커먼 피가 콸콸 쏟아져나왔다.

피비린내 대신 묘하게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흑진월귤나무 중독이다.

"환기해놔도 냄새가 지독하니."

남자는 방 안에 퍼진 냄새가 거슬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상당히 독한 냄새이긴 했다.

'그건 그렇고... 엄청 깔끔하게 찢겼어.'

루스는 방 안을 가득 채운 시큼한 냄새보다는 다른 쪽에 눈길이 갔다. 그건 자신의 발목이었다.

'스킬을 쓴 건가?'

단 한 번의 칼질로 깔끔하게 찢어진 발목. 이렇게 깔끔하게 찢으려면 최소한 스킬을 써야 한다.

'그렇다면 마력이 느껴져야 할 텐데.'

스킬을 쓰기 위해선 마력이 필요하고, 스킬을 사용하면 마력이 몸 밖으로 방출된다.

하지만 남자의 몸에선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검의 초고수라면 스킬을 쓰지 않고 이렇게 벨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뭐하러 욕 처먹으면서 힐러 일을 하겠는가.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이 남자는 검사가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뭐지?'

루스는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루스한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째진 상처만 신경 썼다.

"마음 같아선 피를 싹 뽑아내고 싶지만, 그럴 형편은 안 되고...."

남자는 미리 준비해둔 해독제를 꺼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쏟아부었다.

촤아아악!!!

시커먼 핏물에 해독제가 뒤섞이자, 살덩어리가 점차 본래 색을 찾아갔다. 피에서 풍겨 나오던 고약하고 시큼한 냄새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해독제 한 병을 쏟아부어도 온전한 색으로 돌아오진 못했다.

"한 병 더 갑니다. 여기에 한 병 더."

남자는 루스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해독제 3병을 투하했다.

"끄으으으... 끄으!!"

당연하지만 루스는 죽을 맛이었다. 생살을 짼 것도 모자라 거기에 약을 쏟아부었으니.

거기다 해독제가 몸에 닿는 순간부턴 비교가 안 되는 통증이 몰려왔다.

'지, 진짜 죽는 거 아냐?'

이 순간만은 통증을 가라앉혀줄 힐이 간절했지만,

"참든가 기절하세요."

힐 쓸 줄 모르는 힐러는 차갑게 뱉을 뿐이었다.

"내가 아까 치료 받았으면... 이 지경까진 안 됐겠죠?"

"그럼요."

"으으으!!!"

루스는 진심으로, 남자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생각해보니 저 자식이, 독에 대해 미리 말해줬음 됐잖아.... 아악!!!'

루스는 남자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루스를 무시하고 치료를 진행했다.

-"으으...."

"자, 끝났습니다."

그렇게 한밤중에 시작된 치료는 새벽녘이 돼서야 끝났다. 축 늘어져 있던 루스는 그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살았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의 다리였다.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은 사라지고, 붕대가 깔끔하게 감아져 있었다. 시꺼멨던 피부색도 제 색깔을 되찾았고.

'힐을 쓰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깔끔하게 회복되다니.'

루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심각했던 다리가 고작 몇 시간 만에 이 정도로 회복되는 게 가능한가?

'당장 걷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곧 움직일 수 있겠어.'

루스는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안심한 루스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상처는 금방 아물겠지만, 아까 말한 대로 이틀이나 사흘 정도는 걷지 마세요."

"예...!"

"여관 측에 말해뒀으니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줄 겁니다."

남자는 손에 묻은 핏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방을 가볍게 둘러보자 시커먼 핏물이 방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다. 독 기운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

"피 때문에 여기서 자는 건 힘드실 테고...."

남자는 방을 옮기는 걸 추천했다.

"어디 빈방으로 옮기시면 되겠네요."

이런저런 비용은 치료비에서 뗄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면서.

'그럼 그냥 내 돈 내고 옮기는 거잖아.'

돈 생각을 하니 새삼 사제한테 거금을 주고 힐을 받은 게 떠올랐다.

"아이베르 교단, 이 개새끼들.... 치료를 개판으로 해놓고 60만 골드나 뜯어가? 가서 따지든가 해야...."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남자는 루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다리가 이 지경이...."

"사제 놈들이 그런 일 한두 번 겪어봤겠어요?"

사제들은 아주 영악하고 악랄한 놈들이다. 루스가 찾아가봤자 사제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의 상처가 힐 받은 뒤에 다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라고.

애초에 사제들은 갑이고 모험가는을. 뻔뻔하게 나와도 따질 수 없다.

"괜히 아픈 몸 이끌고 힘 빼면 아깝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물론, 그 새끼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고."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제 놈이 좀만 주의 깊게 살폈다면 흑진월귤나무에 찔린 상처인 걸 발견했겠죠."

사제라고 그런 걸 모를 리가 없다. 어찌 됐건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니까.

"겉만 보고 대충대충 치료하니까 일이 이 지경이 되지."

게으른 놈들.

남자는 사제를 무척 싫어하는지 한참 동안 욕했다. 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남 고치는 거로 돈 받아먹을 거면 일을 제대로 해야지. 안 그럽니까?"

"그렇죠. 망할 놈들."

"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고, 제는 그 망할 놈들 덕분에 벌어먹는 처지라서."

남자는 사제 놈의 무성의한 치료 덕분에 돈을 벌었다. 실컷 욕했지만, 그건 틀림없는 팩트다.

"그래도 선생님 못 만났음 저는 뒈졌겠죠."

"죽을병 아니라니까요. 죽을 만큼 아프긴 하지만."

"예.... 죽을 만큼 아프지만 죽지는 않는 독을 치료해주셨죠."

루스는 어이없게 웃으며 붕대 감긴 발목을 바라보았다.

"어?"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힐에 비하면 느린 속도지만, 잠깐 사이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냥 포션 몇 개 갖다 부은 거 아니었나? 그것도 체력 포션이 아니라 해독제만 부었을 텐데.'

힐을 썼다면 이 빠른 회복을 납득할 수 있지만, 루스는 힐의 흔적조차 보지 못했다.

애초에 본인이 힐은 쓸 줄 모른다고 말한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마력을 소모하는 느낌도 없었다.

'힐도 안 쓰고 이런 짓이 가능하긴 해?'

이쯤 되면 감탄을 넘어서 경악이 나오는 법. 루스는 정체 모를 자칭 힐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혼자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거 하난 확신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야. 이건 틀림없어.'

루스는 자신이 이런 사람을 못 알아보고 사기꾼이라 매도한 걸 떠올렸다.

'얼마나 웃었을까? 모험가라는 놈이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뭘 하겠다고.'

루스는 벌게진 얼굴로 용서를 빌었다.

"아까 사기꾼이라고 욕한 거... 죄, 죄송합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말 많이 들어서 익숙합니다. 상식적으로 힐러가 힐을 못 쓴다는데 누가 믿겠어요."

남자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루스는 능력도 좋은 사람이 마음도 좋다며 감동했다.

"...그리고."

"예?"

"그따위로 말한 놈들이 나한테 달려와서 살려달라고 비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요."

"네?"

"아까까진 사람 무시하던 놈들이 사정사정하는 모습 구경하는 게 내 취미거든요. 그 맛에 이 일합니다."

루스의 감동은 처참하게 박살 났다. 성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실컷 웃더니 루스에게 이름을 물었다.

"아차,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 루스... 루스 테이커인데요."

"알겠습니다. 여관 측에 말해둘게요."

남자는 루스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사람들이 올라와서 방을 옮겨줄 겁니다. 그때까지 푹 쉬시고.... 뭔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있으면 말씀하세요."

남자는 이만 가보겠다며 방을 나서려 했다.

"자, 잠깐... 잠깐만요!"

루스는 다급하게 남자를 불러세웠다.

"그, 그럼 선생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 지...?"

나중에 빚도 갚아야 하고. 칼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 아닌가?

루스의 질문에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4. 힐러로 사는 이유

'벌써 아침이네.'

방으로 돌아온 강승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잘 시간은 진작 지났지만, 그는 무척 쌩쌩해 보였다.

'미리 자두길 잘했지.'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저녁에 자뒀으니까.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환자는 예의 바르네. 감사 인사도 하고.'

이 지랄 맞은 동네는 기껏 목숨을 구해줘도 이래라저래라 하는 놈들이 많다. 은혜도 모르고.

그런 면에서, 어제 교회 앞에서 낚은 환자는 예의 바른편이었다. 눈치도 볼 줄 알고,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곧바로 공손해진 놈.

'이름이 루스 테이커랬나?'

어깨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있던 전형적인 검사 모험가. 독에 중독된 줄도 모르고 힐 받으러 간 흔한 케이스다.

보통 흑진월귤나무 독은 2~3시간만 지나도 증세가 나타난다. 하지만 중독된 상태로 힐을 받는다면 증세가 일시적으로 미뤄진다.

'내가 루스와 헤어졌을 때는 저녁 시간대. 본래는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증세가 나타났어야 하지만....'

하지만 루스는 사제한테 힐을 받았다. 그래서 한밤중에 자다 말고 발작한 것이다.

'증상이 새벽 3시까지 미뤄졌으니까.'

강승현은 그걸 예상하고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잠들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다.

'이 일도 슬슬 익숙해지긴 했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강승현.

이 주변에선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작명.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강승현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원래 지구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지만 어쩌다 이 세계로 넘어온 차원이동자다.

-어느 날 강승현은 이곳 아즐 대륙에서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깨어나고 보니 마법과 몬스터가 존재하는 흔한 판타지 세계에 던져진 것이다.

'내가 왜 이딴 곳에 온 걸까.'

심지어 강승현이 눈을 뜬 곳은 사람 사는 마을이 아니라 축축한 동굴이었다.

먹을 것도 없고, 무기도 없는데 눈 떠보니 동굴. 그것도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동굴.

'이게 없었다면 죽었겠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강승현은 다른 소설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상태창과 인벤토리를 쓸 수 있었다.

[절개(切開)]

강승현이 눈을 뜬 순간부터 습득하고 있던 스킬. 이름 그대로 살을 째 버리는 공격 스킬이다.

범위가 더럽게 좁고, 근접해서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맨손으로 몬스터랑 주먹질하는 것보다는 낫지.'

강승현은 죽을힘을 다해 동굴을 빠져나왔다.

탈출한 건 좋았지만, 바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왜 이런 낯선 곳에 끌려왔는지, 누가 끌고 온 건지도 모르는 판이었으니까.

한 가지 더 다행인 점은, 동굴에서 눈을 뜬 사람이 강승현 말고도 잔뜩 있었다는 점이다. 동굴에서 탈출하는 동안 많이 죽고 다치긴 했지만.

-우리 이제 어쩌면 좋죠?

-집에 갈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여기 좋은데요. 꼭 돌아가야 하나?

-맞아요. 그냥 살죠? 마법 최고.

-나, 난 빨리 돌아가야 해! 가정이 있다고!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궁리했으나 의견이 엇갈렸다. 지구로 돌아가자는 측과 여기에 남겠다는 측으로.

-집에 갈 방법을 찾든지 여기서 살든지, 뭘 하든 간에 일단은 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의견이 갈려서 잠시 시끌시끌하던 차에, 어떤 사람이 조용히 의견을 꺼냈다.

-그건 그렇지.... 음....

-맞아요. 길바닥에서 잘 수도 없고.

-난 배고파. 밥 먹고 합시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여기에 남건, 지구로 돌아가건 말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은 당장 굶어 죽을 판이었으니까.

-우리 이렇게 합시다. 다들 스킬 갖고 있죠? 이걸로 돈을 벌 만한 일을 찾는 거예요.

모험가가 돼서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기사단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가게 일손을 돕거나.

-그러다 보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게 되거나, 이 세계에서 살아갈 기반이 생기겠죠.

그들은 우선 아즐 대륙에서 살아가는 걸 선택했다.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살아서 봅시다.

차원이동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아즐 대륙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강승현도 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지금은 이곳 '하인드' 마을에 머무는 중이다.

'음, 밥때가 됐나?'

열어둔 창문으로 맛있는 스튜 냄새가 올라왔다.

전체적인 가격은 모험가 조합에 비하면 살짝 비싸지만, 그쪽은 사료, 이쪽은 식사다. 수준이 다르다.

'마침 배도 고프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강승현은 방 밖으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스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아침 일찍 일어난 모험가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강승현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던 모험가에게 물었다.

"오늘 스튜 뭐래요? 냄새 좋네."

"양파 크림 스튜야. 좋은 양파를 싸게 샀대."

싸게 샀다면 어쩔 수 없지. 강승현도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오늘도 여관 정식이나 먹을까.'

메뉴 자체는 모험가 정식과 다를 게 없다. 빵, 채소, 스튜로 이루어진 식단.

하지만 여관에서는 부드럽고 촉촉한 빵, 신선한 채소, 진하고 고소한 스튜를 맛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모험가 조합에선 딱딱한 빵, 푸석푸석한 채소, 묽은 맹탕 스튜가 나온다는 거지.'

돈이 없었을 땐 매일 삼시 세끼를 모험가 정식으로 때웠다. 그때 질리도록 먹어서, 굶어 죽는다고 해도 모험가 정식은 먹고 싶지 않다.

강승현은 부엌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관 정식 하나요."

"네, 여관 정식 하나! 3500골드입니다!"

곧장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드는 아즐 대륙의 화폐다. 진짜 금화는 아니고, 그냥 금색으로 칠한 거라고.

'요리 나올 때까지 시간 좀 걸리니까 일기나 써둘까....'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필기구를 끼워둔 수첩을 꺼냈다.

아즐 대륙에 온 이후로, 그는 일기를 쓰는 취미가 생겼다. 뭐라도 기록해두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날씨 더럽게 맑음. 위치 하인드 마을. 흑진월귤나무 중독 환자... 루스 테이커."

당연하지만 강승현이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글은 한글. 애초에 입 밖으로 뱉어내는 말도 전부 한국어다.

그런데도 아즐 대륙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의 소통]이라는 스킬 덕분이었다.

[신의 소통]

강승현이 쓰는 한국어가 자동으로 번역되고, 상대의 아즐 대륙어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게 번역해주는 스킬. 차원이동자는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발동하면 텍스트도 번역해준다.

'이게 없었다면 언어 배우느라 시간 좀 걸렸겠지.'

그래서 누가 [신의 소통]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아즐 대륙 사람은 강승현의 수첩을 읽을 수 없다.

[아이베르 교단 놈들은 오늘도 환자 하나를 골로 보낼 뻔했다.]

[그러면서 60만 골드나 받아 처먹고 싶을까?]

사제를 향한 증오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강승현에게 주어진 직업은 힐러였으니까.

'[관찰의 눈]이 없었으면 내가 힐러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었을까?'

강승현은 스킬창을 열었다.

[관찰의 눈]

[무언가를 관찰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상대의 부상과 몸 상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처음으로 몬스터를 쓰러트렸을 때 습득한 스킬이다. 강승현의 밥줄 그 자체.

'이걸로 밥 벌어먹으니 진짜 밥줄이지.'

본래 [관찰의 눈]은 상대의 약점을 찾아서 적을 쉽게 쓰러트릴 때 쓰지만, 강승현은 이걸 환자 찾을 때 써먹었다.

다친 사람한테 사용하면 부상 수준과 원인을 간략하게 알 수 있으니까.

"아!"

마침 부엌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빼고 보자, 종업원 줄리아가 다급하게 뛰쳐나왔다.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관찰의 눈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자 그녀의 상태가 눈앞에 떠올랐다.

[출혈]

[왼손 검지를 칼에 베였다.]

'칼에 베인 걸 보면 양파 썰다가 손가락 써셨네.'

관찰의 눈을 통해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상황을 추측하면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야매 힐러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스킬이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시고.'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아는 강승현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이리 보여주세요. 다치셨잖아요."

"아, 괜찮아요! 별것도 아니고...."

"별거 아니면 금방 고치겠네."

강승현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치료비 안 받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줄리아씨 말대로 별거 아닌 상처이긴 한데. 손이 이러면 식사 준비를 못 하시잖아요."

여관 식사는 전부 줄리아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다치면 여관이 어떻게 되겠는가.

"나처럼 요리 못 하는 놈은 모험가 조합에 가서 사 먹어야 하는데... 그럴 거면 그냥 굶죠."

"알았어요. 그럼 상처 좀 봐주세요, 힐러 선생님."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관찰의 눈]대로 왼손 검지를 살짝 베였다. 상처가 그리 깊진 않았다.

'약 바를 정도는 아니고. 피만 멎게 하면 되겠네.'

그는 힐은 못 쓰지만, 줄줄 흐르는 피를 멈출 스킬은 쓸 수 있었다.

[지혈]

강승현이 손을 뻗자 손가락의 출혈이 그쳤다. [지혈]은 이름 그대로 출혈을 멎게하는 스킬이다.

'상처를 낫게 하진 못해도 과다출혈은 막을 수 있지.'

힐 하위호환이지만 힐 못 쓰는 야매 힐러 입장에선 유용한 스킬.

"자. 치료 끝났습니다."

여기에 수제 붕대를 꺼내 상처 부위를 감싸는 거로 마무리. 간단한 상처는 치료법도 간단하다.

"감사합니다."

줄리아는 감사 인사를 하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강승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1]

줄리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강승현의 눈앞에는 이러한 텍스트가 떠올라 있었다.

'역시 1포인트짜리였네.'

사실 강승현이 힐러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포인트 때문이다.

[누적 포인트 : 103포인트]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나 같은 차원이동자들이 아즐 대륙 모험가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이유이기도 하고.'

아즐 대륙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많은 스킬을 얻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스킬을 얻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포인트를 모아 룰렛을 돌리는 것이다.

새벽의 치료를 통해 누적 포인트가 100을 넘겼으니, 오랜만에 룰렛을 돌릴 때가 되었다.

'5회 연속 룰렛.'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열심히 모은 100포인트가 사라지고 룰렛이 나타났다. 생성된 룰렛은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룰렛 결과]

☆[스탯(체력+1)]

☆[스탯(체력+1)]

☆[기타(10골드)]

☆[기타(1골드)]

룰렛에서 꼭 스킬이 나오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는 잡쓰레기가 더 많이 나온다.

'양심적으로 골드는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가장 빡치는 순간은 동전 한두 개만 굴러 나올 때.

가장 기분 좋을 때는,

★[스킬(살포)]

새 스킬을 뽑는 순간이다.

5. 함께하시죠

스킬.

마력을 소모해 사용하는 행동.

평범한 행동을 할 때에도 마력을 쓰면 엄청난 위력과 효과가 나타난다.

예를 들자면 주먹을 그냥 휘둘렀을 때보다, 마력을 써서 [주먹질] 스킬을 사용하면 몇 배나 강한 힘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스킬을 잔뜩 갖고 있다고 다 강해지는 건 아니지. 불 속성 마법 재능을 가진 사람이 물 속성 마법을 배워봤자 물뿌리개일 테니까.'

중요한 건 습득한 스킬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가, 다른 스킬과 연계할 수 있는가다.

그리고 '살포'는 이 두 조건에 딱 맞는 스킬이다.

[살포]

[흡수한 포션을 에너지 형태로 바꿔서 뿌린다.]

[사용 시 포션 효과 +30%]

'포션 효과 30% 증가?'

[살포]를 사용하면 체력 100을 채워주는 포션을 체력 130 포션으로 쓸 수 있다.

'포션 종류에 제한도 없어. 아무 포션이나 일단 쓰기만 하면 30% 추가. 이거, 써먹기 좋겠는데?'

거기다 강승현은 [흡수]라는 스킬도 갖고 있다.

[흡수]

[손에 쥔 포션을 흡수한다.]

[흡수한 포션은 몸에 저장하거나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최대 (2)개까지 저장 가능.]

손에 쥔 포션을 흡수해서 쓰는 평범한 스킬인데, 알고 보니 다른 스킬을 쓰기 위한 선행 스킬이었다.

[살포]를 쓰려면 일단 포션을 흡수해야 하니까.

'흡수는 나한테만 쓸 수 있는 거라 별 쓸모가 없었는데, 살포는 환자한테 쓸 수 있겠어.'

강승현이 스킬은 평가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이걸 치료에 써먹을 수 있냐 없냐다.

가령 마법사들이 최상위 마법으로 평가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강승현 식으로 평가한다면.

'열로 소독하고 싶어도 화력이 너무 강해서 다 태워버림. 전투 외에는 아무 쓸모없음. 5점 만점에 별점 1점.'

이런 식이다. 치료에 응용하기 어려운 스킬은 아무리 강력해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살포]는 별점 4점짜리.

'밥 먹고 테스트해볼까.'

아무리 좋은 스킬을 가져도 제대로 쓸 줄 모르면 없는 거랑 뭐가 다르겠는가.

새 스킬을 얻었다면 실전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테스트 정도는 해야 한다.

"오래 기다리셨죠?"

마침 줄리아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안 그래도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주문하신 여관 정식 나왔습니다."

잘 끓인 양파 크림 스튜와 신선한 채소 절임을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빵 한 덩어리.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날개구이 하나.

"줄리아 씨? 이건 안 시켰는데요."

강승현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닭날개구이는 여관 정식에 5000골드는 더 내야 먹을 수 있다.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맛있지만, 가격이 가격이라 가볍게 사서 먹기는 부담스럽다.

"서비스예요. 치료비는 안 받으실 거잖아요."

줄리아는 맛있게 먹어달라는 말과 함께 부엌으로 돌아갔다. 손가락을 치료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그럼 사양 말고."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강승현은 닭날개구이를 뜯으며 미소지었다.

-식사를 마친 강승현은 여관 밖으로 나왔다.

하루를 시작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아즐 대륙에서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어디 보자.'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막 떠나려는 사람이나,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뭔 몬스터가 아침에만 나타난대?"

"어쩔 수 없잖아. 꼭 좀 잡아달라고 부탁하는데."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모험가가 있는가 하면.

"이번 일은 꽤 괜찮았지? 우리 얼마 받냐?"

"몰라 인마. 졸려 죽겠구만...."

의뢰를 마치고 돌아오는 모험가도 있었다.

강승현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아무 포션이나 준비하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체력 포션을 꺼냈다.

포션 병은 언뜻 보기엔 유리처럼 생겼지만, 사실 마력을 이용해 만든 합성물질이다. 그래서 먹어도 상관없다.

'[흡수]를 사용한다.'

강승현은 체력 포션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쩌적!

조각난 포션 병이 소멸함과 동시에 강승현의 손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흡수]

스킬을 발동하자 붉은 액체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흡수됐다.

'이어서 [살포].'

강승현은 오른손을 펼쳤다. 체력 포션과 같은 색의 붉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손을 휘두르자 붉은 오오라가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이거 괜찮은데?'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유용한 것도 있지만, 일단 스킬 연출이 좋았다. 지금까지 얻은 스킬 중에는 이런 화려한 연출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좀 스킬 같다.'

언뜻 보기에는 뭔가 있어 보이는 심오한 붉은 오오라. 사실은 30% 추가 효과를 받은 체력 포션이다.

'그냥 포션 붓는 것보다 훨씬 있어 보이네. 환자들이 좋아하겠지?'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번 살포를 사용했다.

[살포]

별생각 없이 손을 휘둘렀더니, 붉은 오오라가 지나가던 모험가를 덮쳤다.

"우, 우아아악!!!"

"아."

모험가는 붉은 오오라를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졌다.

"이...이 자식! 뭐 하는 몸이냐!"

모험가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더니 검을 꺼냈다. 아무래도 [살포]를 공격 스킬로 착각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사과하면 다냐? 치료비라도 내!"

"대신 체력 회복됐잖아요. 그걸로 퉁칩시다."

"뭐?"

모험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다친 곳도 없고, 눈에 띄는 문제도 없다. 무엇보다 깎여나갔던 체력이 채워져 있었다.

"어, 어?"

"제 말 맞죠?"

모험가는 자신의 몸을 살피더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히, 힐러십니까?"

"네. 힐러 맞습니다."

힐은 쓸 줄 모르는 야매 힐러지만.

강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험가는 무척 죄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체력도 회복시켜주셨는데 제가 힐러님을 못 알아보고...."

"그럴 수도 있죠."

어떤 힐러가 시뻘건 오오라를 뿜어내겠는가. 그런 건 야매 힐러나 할 수 있는 짓이다.

"혹시 돈을 받아가시는 건 아니시죠? 하하하...."

"아니 뭐. 그냥 호의로 해드린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세상에."

어차피 길바닥에 뿌리던 중이었다. 누가 주워다 회복한다면 나쁠 거 없지.

"체력 회복을 돈도 안 받고 해주시다니.... 이런 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체력 포션을 쓴 것뿐이었으나, 모험가는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뭐, 아즐 대륙 넓잖아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겠죠."

힐 잘 쓰는 힐러가 있는가 하면, 힐 쓸 줄 모르는 힐러가 있기도 하고.

"갑자기 시뻘건 게 덮쳐와서 누가 불덩이를 날린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오늘 처음 써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스킬이라 좀 많이 놀랐습니다. 하하핫. 힐러님들은 그런 스킬도 갖고 계시군요. 제가 시골 촌놈이라 몰랐습니다!"

'너 말고도 모르는 사람 많을걸.'

강승현은 적당히 모험가의 말에 맞장구쳐줬다.

'이건 아이베르 교단 사제들도 모를 테니까.'

룰렛에서 뽑는 스킬 중에는 차원 이동자만 얻을 수 있는 레어 스킬도 많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파티 하나 들어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모험가 파티요?"

"네. 마침 딱 한 자리가 비어있어요!"

모험가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모험가 파티라....'

강승현은 정식 힐러가 아니라서 힐러 찾는 파티에 참가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초청을 받는다면 또 모를까.

'아직 할 일도 없는데, 따라가 줄까?'

[살포] 스킬 테스트는 끝냈다. 실전에 써먹어도 나쁘지 않겠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근데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장기 의뢰는 힘듭니다. 단기 의뢰라면 갈게요."

"아,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요 앞에 덴트롤 숲 아시죠?"

"알죠."

덴트롤 숲.

하인드 마을 북쪽 입구와 이어지는 지역이다. 숲이 꽤 넓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대낮에도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가까운 거리네요. 바로 요 앞이니까."

"빠르면 오늘 안에 끝날걸요? 늦어도 이틀 안엔 끝내죠!"

"의뢰 내용은 뭔가요. 몬스터 사냥?"

덴트롤 숲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지역이라, 몬스터 사냥 의뢰일 확률이 99%.

"넵. 몬스터 사냥입니다!"

역시 몬스터 사냥 의뢰였다. 그거면 모험가 말대로 금방 끝낼 수 있다. 몬스터를 때려잡고, 증거물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니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그... 덴트롤 숲에 레어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의뢰예요."

레어 몬스터.

일반 몬스터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조금 더 강하고 난폭한 변종 몬스터다. 한마디로 말하면 강화판. 몸집도 일반 몬스터에 비해 크다.

"마을에 침입할지도 모르니, 그 전에 미리 제거해 달래요. 보상은 120만 골드."

"120만이라."

"빨리 처치해주면 좋겠다고 많이 걸었대요."

언뜻 보기에는 많아 보이지만, 1인당 120만 골드를 각각 받는 게 아니다.

'저걸 다른 팀원들과 나눠 가져야 하니까.'

보상은 파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똑같이 나누거나 실력에 따라 나눈다.

어찌 됐건 120만 골드를 혼자 다 먹을 순 없다는 뜻.

"파티원은 모두 몇 명이죠?"

"힐러님까지 오시면 4명이요. 저희 파티는 보상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서...."

그럼 강승현의 몫으로 떨어질 골드는 30만. 사 등분 해도 이 정도면 괜찮다.

"30만 골드... 할게요."

"넵! 환영합니다. 힐러님!"

강승현은 파티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모험가 조합에 가서 다른 동료들한테 힐러님을 소개해드리고... 아,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두 사람은 가는 길에 가볍게 자기소개를 했다.

"강승현입니다. 그냥 힐러라 불러도 되고."

"이름 독특하시네요. 남부 출신이신가?"

아즐 대륙은 크게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진다. 듣자 하니 남부 출신 사람들은 흑발 머리가 많다고.

참고로 하인드 마을은 서부 지방이다.

"네. 남쪽 출신이에요."

강승현은 남한 사람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는 에일릭이라고 하는데, 그냥 릭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릭 씨라고 부를게요. 상관없죠?"

"편하실 대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모험가 조합에 도착했다.

모험가 조합.

일거리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으며, 동시에 의뢰를 받고 수수료도 뜯어가는, 교단 못지않게 돈독 오른 집단이다.

'하지만 조합이 없었다면 모험가들은 굶어 죽었을 것이고, 몬스터는 신나게 날뛰었겠지.'

그런 점을 따지면 중요한 시설이다. 마을 치안도 담당하고, 숙식도 제공하니까.

물론 여관보다 구려서 잘 안 쓰지만.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접수원이 인사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하고 안쪽으로 향했다.

"저희 동료들은... 아, 저쪽에 있네요. 저기!"

릭이 가리킨 곳에 남자 셋이 서 있었다. 둘이 아니라 셋.

"...다 합쳐서 네 명이라서요? 릭 씨 합치면 다섯인데."

"둘은 내 친구들 맞아요. 다른 한 명은 누군지 모르겠네."

"힐러겠죠."

"히, 힐러요?"

아무래도 릭의 동료들이 힐러를 데려온 모양이다. 힐 못 쓰는 야매 힐러가 아니라 진짜 힐러를.

6. 털어먹을 수 있는 상대는 반드시 털어먹는다

"자자, 상황 좀 정리하자고."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그쪽은 릭이 데려온 힐러고."

"강승현입니다."

"이쪽은 헨리가 데려온 힐러?"

리더는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트벨로라고 합니다."

"나는 페리얼이다. 파티에 빈자리 생긴 김에 힐러나 구하려 했더니만...."

설마 둘이나 들어올 줄이야. 페리얼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이래선 30만 골드씩 나눠줄 수가 없어. 그건 다들 알지?"

인원이 늘어나서 한 사람당 돌아가는 보상이 24만 골드로 줄어든다.

페리얼은 그래도 괜찮다면 출발하고, 액수가 마음에 안 들면 파티를 떠나도 좋다고 말했다.

'제안은 나쁘지 않네.'

이러면 괜찮은 사람만 남고, 아니다 싶으면 서로 갈 길 갈 테니까.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마트벨로는 물론이고, 강승현 역시 떠날 마음이 없었다.

'이 녀석도 알고 있나 보네.'

힐러는 마음만 먹으면 30만 골드쯤이야 금방 벌 수 있다. 그런데 굳이 파티에 참가한 이유는, 레어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레어 아이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아이템보다 훨씬 강력하고 옵션이 많아서... 비싸게 팔리고 희귀한 녀석이지.'

돈 없는 모험가들은 어쩔 수 없지 팔겠지만, 힐러처럼 자금에 여유가 있다면 상관없다. 아마 마트벨로는 골드를 포기하는 대신 레어 아이템을 획득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난 솔직히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라.'

아이템을 양보해줄까 하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저는 힐러 경력은 아직 1년도 안 됐지만."

마트벨로가 대뜸 입을 열었다.

"초급 힐링은 물론 중급 힐링. 축복, 빛의 방패, 응급 치료, 안티 포이즌, 리커버리, 리저렉션에 이어서 정화의 빛, 빛의 화살 등등의 신성 스킬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트벨로는 자신이 유능한 힐러임을 어필했다. 힐러 특유의 자기 자랑 시간. '이제 그쪽 차례다.'라는 얼굴로.

'양보해주려 했는데 재수 없어서 안 되겠다.'

힐러들은 이상하게 서로 경쟁하는 걸 좋아했다. 누가 더 힐을 잘하는지, 버프를 잘 거는지.

"저는 뭐...."

강승현은 주머니에 넣어둔 포션을 깨트리며 [살포]를 발동했다. 손에서 붉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 정도?"

손을 휘둘러 오오라를 퍼트리자 페리얼의 체력이 회복됐다. 이미 풀피라 뻘짓이긴 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마트벨로가 놀란 얼굴로 쳐다봤기 때문이다.

'저 스킬은 뭐지? 체력을 회복하는 거 보면 분명 힐러 스킬 중 하나일 텐데....'

어지간한 힐러 스킬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모르는 스킬이라니. 마트벨로의 얼굴은 경악 그 자체였다.

'나처럼 입으로 줄줄 떠드는 게 아니라... 스킬 하나만 보여줘도 실력을 증명할 수 있다는 건가? 이, 이런 건방진 놈!'

아주 단단히 착각한 마트벨로는 이 악물고 노려보며 말했다.

"굉장하네요. 지금까지 그런 힐은 본 적 없습니다. 혹시 다른 스킬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태도는 공손했지만, 표정은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았다.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건 딱히 없는데요."

당장 보여줄 만한 스킬은 [살포]밖에 없다. [지혈]은 스킬 이펙트가 없어서 써봤자 티도 안 나니까.

이거 쓰겠다고 일부러 상처 낼 수도 없고.

"없다구요?"

"지금 쓸 만한 건 없네요."

"그럼 정화의 빛이나 빛의 방패 같은 것도?"

강승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트벨로의 표정이 단숨에 바뀌었다. 경계하는 얼굴에서 낮잡아보는 얼굴로.

'뭐야, 힐링 하나 배운 초짜였어?'

마트벨로는 김이 팍 샌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스킬 이펙트가 화려하긴 하지만 회복량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소형 체력 포션 수준이었지.'

힐량이 그거면 힐러 된 지 한 달도 안 된 초짜라는 소리다.

'내가 모르는 스킬이 아니라,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잊어버린 거군.'

강승현이 쓰는 정체불명의 스킬은 초보 힐러용 스킬일 것이다. 마트벨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마트벨로도 강승현도 전부 동의했기 때문에, 페리얼 파티는 곧장 출발했다. 덴트롤 숲에서 계속 걷다 보면 아데카 대삼림으로 이어진다.

"이번 목적지는 아데카 대삼림에 발들이기 전에 발견할 수 있는 가시나무 수풀이다."

"그래서 무슨 몬스터래요?"

"시궁쥐."

시궁쥐.

아즐 대륙 전역에 서식하는 쥐 몬스터다. 번식력이 좋지만 하나하나는 보잘것없다. 게임으로 치면 레벨 1짜리 잡몹.

"시궁쥐도 레어 몬스터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니까."

쥐 한 마리 잡고 120만 골드를 받다니. 페리얼은 이거보다 편한 일도 없을 거라고 웃어댔다.

"뭐?"

강승현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레어 몬스터 사냥은 절대 쉽고 편한 일이 아니다.

"혹시 레어 몬스터 사냥해본 적 없으세요?"

"어. 만난 적도 없는데?"

페리얼은 그런 걸 왜 묻냐는 투로 말했다. 그냥 좀 강한 몬스터일 뿐인데 싸우는 법이 따로 필요하냐면서.

"저도 없는데요."

"저두요."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 얘네는 기대도 안 했다만.

"그럼 그쪽은요?"

"레어 몬스터와 싸우는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심지어 마트벨로까지. 강승현을 뺀 나머지 전부가 레어 몬스터 전투 미경험자였다.

'아니, 저놈들은 그렇다 쳐도... 힐러라는 새끼가 레어 몬스터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레어 몬스터는 '위압감'이라는 특수 스킬을 갖고 있다.

[위압감]

[사용 시 몸에서 검은 오오라를 뿜어낸다.]

[오오라에 닿은 대상은 지속피해를 받고 피해량과 마력 소모가 두 배로 늘어난다.]

'체력 포션만 많다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긴 한데.'

모험가들은 힐러를 데려가면 체력 포션을 많이 챙기지 않는다.

심지어 힐러가 하나도 아니고 둘. 이 정도면 마력 포션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고 왔다는 소리다.

"레어 몬스터랑 싸우려면 포션이 많이 필요합니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재정비하시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절하게 조언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그래봤자 시궁쥐인데. 포션이 많이 필요할까요."

다들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혹시 포션을 부족하게 가져와서 그러는 거면, 그건 그쪽 책임이죠."

마트벨로는 잘됐다는 식으로 말을 얹었다. 문제가 있다면 파티에서 나가라는 식으로.

'내 이럴 줄 알았다.'

물론, 레어 몬스터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승현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설명해봤자 안 듣는 인간이 태반이니까.

'뭐, 직접 겪어보면 알겠지.'

들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말해봤자 입만 아픈 법.

'말 안 듣는 사람은 굳이 붙잡지 않는다.'라는 게 강승현의 생존 철학 24번.

"그럼 전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지금 가봤자 다 같이 개털릴 게 뻔하고."

강승현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나머지 팀원들은 얼굴을 구겼다. 너네 다 망할 거라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없지. 잘 가쇼."

보통 힐러가 떠난다면 붙잡고 늘어지겠지만, 마트벨로가 있으니 아쉬울 것도 없겠지.

"근데 그쪽끼리만 보내면 시체로 돌아올 거 같으니까, 나중에 도와줄게요. 일 인당 30만 골드만 받고."

물론 공짜로 도와줄 생각은 없다. 털어먹을 수 있는 상대는 반드시 털어먹는다는 게 강승현의 생존 철학 2번.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진 않겠지만, 나중에 딴소리하면 곤란해."

페리얼의 얼굴이 단숨에 구겨졌다. 쌍욕이 하고 싶은 걸 꾹 참는 얼굴이다.

다른 동료들도 어처구니없어했다.

"우리가 시궁쥐 한 마리한테 털릴 거라니.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그냥 무시하고 갑시다."

"그러자고. 릭, 넌 어디서 저런 걸 데려왔냐?"

"아니... 나는...."

페리얼은 파티는 마트벨로의 말에 찬성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강승현은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50만 골드로 할 걸 그랬나?"

-페리얼 파티는 강승현과 헤어진 이후 순조롭게 나아갔다.

그들은 어느새 의뢰인이 말했던 가시나무 수풀에 발을 들였다.

"저깄네. 커다란 쥐새끼."

앞장서서 걷던 페리얼이 수풀 사이로 보이는 큼지막한 시궁쥐를 가리켰다.

모든 레어 몬스터한테는 쓸데없이 거창한 명칭이 붙는다. 이 녀석은 '시궁창을 벗어난 시궁쥐'다.

"커봤자 쥐는 쥐네. 공만 하잖아."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쉬자."

각자 준비한 무기를 꺼내고, 힐러는 뒤로 물러났다.

"체력은 맡겨주세요."

"그쪽은 맡길게."

물리 스킬은 마력 소모가 적은 대신, 남은 체력에 영향을 받는다. 체력이 많으면 위력이 강해지고, 체력이 적으면 위력이 약해진다.

그러니 물리 딜러들은 힐러가 체력만 신경 써주면 풀파워로 싸울 수 있다.

"가자!"

세 사람은 동시에 달려들었다.

고작 쥐 한 마리에 120만 골드!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쮜이이익!!"

레어 시궁쥐가 고개를 쳐들고 울었다.

동시에 놈의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악!

페리얼 파티는 검은 오오라에 휩쓸렸다.

'이게 그 자식이 말하던 [위압감]인가?'

동료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려던 마트벨로는 자신의 체력과 마력이 줄어드는 걸 발견했다.

'생각보다 빨리 닿긴 하지만, 아직 포션은 넉넉해.'

상대는 쥐 한 마리.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잡고도 남는다.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아즐 대륙 최약체 몬스터 중 하나인 시궁쥐니까.

'시궁쥐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어.'

나머지 세 사람도 검은 오오라를 신경 쓰지 않고 레어 시궁쥐를 공격했다. 레어 시궁쥐는 다시 한번 고개를 쳐들고 울었다.

"쮜이이익!"

그걸 신호로, 주변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지진? 지진이야?"

"지진 같은 거 아냐!"

땅속에서 나타난 건 엄청난 수의 쥐 떼였다.

레어 몬스터는 [위압감]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족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우월감]이라는 스킬 또한 갖고 있다.

"끄아아아악!!!!"

셀 수 없이 많은 쥐 떼가 페리얼 파티를 덮쳤다.

시궁쥐의 공격력은 고작해야 1에서 2. 한 마리일 때는 간지러운 수준이지만, 떼로 몰려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기에 페리얼 파티는 레어 시궁쥐의 [위압감]으로 인해 지속피해를 받고 피해량이 두 배로 증가한 상황이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마트벨로는 경악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체력이 반 토막이 나고, 반의 반 토막 났다.

마트벨로는 쉴 새 없이 힐을 걸어줬지만, 결국 헨리는 쓰러졌다. 아직 죽은 건 아니었지만, 저대로 놔두면 죽는다.

"헨리! 젠장.... 일단 도망쳐!"

페리얼의 외침을 들은 릭은 가시나무 수풀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달려나간 릭은 다시 돌아왔다. 이들은 레어 몬스터한테 [공간 지배]라는 스킬이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어, 어...? 흐아아악!!"

릭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시궁쥐 떼한테 파묻혀 쓰려졌다.

[공간 지배]를 사용하면, 주변이 미니 던전으로 변한다. 일단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레어 몬스터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젠장! 릭...! 끄아악!"

릭에 이어서 페리얼도 나머지 동료의 뒤를 따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트벨로를 제외한 전원이 쓰러진 것이다.

"말도 안 돼...."

마트벨로도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가져온 포션은 이미 바닥났고, 다른 동료들은 전부 쓰러졌다.

"다 틀렸어."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남은 마력이 전부 바닥났다. 이제 달려드는 시궁쥐 떼를 막을 수단이 없다.

마트벨로는 눈을 감으려 했다.

"뭐야? 벌써 한 명 빼고 전멸했어?"

그때였다.

마트벨로의 몸에 진홍색 오오라가 뿌려졌다. 동시에 0이 돼야 했을 체력이 계속해서 1을 유지했다.

"진짜 개털렸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뒤를 돌아보자, 강승현이 진홍색 오오라를 퍼트리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 봐. 모험가 조합이 고작 쥐 한 마리에 120만 골드를 걸겠냐고."

7. 번거로운 녀석

모험가 조합은 이유 없이 큰돈을 안겨주지 않는다.

'쉬워 보이는 의뢰인데 보상이 좋다?'

세상에 그런 의뢰는 없다. 막상 해보면 귀찮고 피곤한 의뢰일 확률이 높다.

'이번 레어 몬스터 의뢰도 그렇지.'

의뢰 문서에는 {쥐 한 마리만 잡으면 120만 골드!}라고 적혀 있지만, 현실은 우두머리 쥐 한 마리가 불러내는 부하 쥐 수백 마리를 상대해야 한다.

"살아있나?"

강승현은 가장 가까이 있던 헨리를 살펴봤다. 기절해서 의식은 없지만, 숨은 붙어 있었다.

"숨 붙어 있으면 됐네."

나머지 둘도 비슷해 보였다.

여유가 있다면 기절한 세 사람을 치워두고 싶었으나,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마트벨로는 멍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아까 친절하게 설명해줬잖아요. 일 인당 30만 골드만 받고 도와준다고."

강승현은 몸에 달라붙는 쥐를 치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쥐들은 매섭게 달려들었으나, 강승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분명 대미지는 들어가고 있는데?'

힐러 마트벨로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강승현의 체력이 쥐 떼의 공격으로 쭉쭉 내려가는 모습이.

그런데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체력이 0이 됨과 동시에 1로 회복됐으니까.

"도대체 뭘 어떻게...."

마트벨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재생 포션을 쓰면 되거든.'

재생 포션.

마시면 체력을 회복시켜주는 체력 회복 포션.

하지만 먹자마자 체력을 회복하는 체력 포션과 달리, 재생 포션은 일정 시간 동안 체력을 계속 회복할 수 있다.

'지속피해를 주는 적과 싸울 때는 재생 포션이 필수라고. 체력이 0이 되는 걸 방지하는 게 중요하니까.'

효과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체력이 0이 되어도 바로 회복된다. 덕분에 레어 몬스터의 [위압감]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재생 스킬이 있어도 괜찮지만, 이럴 땐 포션을 쓰는 편이 낫다. 포션은 마력이 안 드니까.

'남은 포션이 몇 개더라....'

강승현은 인벤토리를 살폈다.

남은 재생 포션은 겨우 두 개. 맘 편하게 잡담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마트벨로 씨, 시간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예...?"

"이건 이제 2번밖에 못 써요."

마트벨로는 알 수 없겠지만, 강승현은 지금 [살포] 스킬을 써서 재생 포션을 퍼트리는 중이다. 당연히 포션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

'이것도 겨우겨우 만든 거라고.'

페리얼 파티가 레어 시궁쥐한테 털리는 동안 강승현은 재생 포션을 만들고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하인드 마을에서 사는 거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려.'

마을에 다녀오는 사이에 파티가 전멸할 게 뻔했다.

'그나마 이 주변에 재료가 있어서 망정이지....'

포션 재료가 다 그렇듯, 재생 포션 또한 다양한 재료로 만들 수 있다.

덴트롤 숲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재생 포션 재료는 도마뱀 껍질이다.

'그래도 10분은 버티겠지?'

강승현은 숲을 뒤지고 다니며 도마뱀 몬스터를 찾았다. 다행히 덴트롤 숲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 없으니 대충 만들자.'

강승현은 잡은 도마뱀 껍질을 벗기고, 푹푹 끓여서 싸구려 재생 포션을 급조했다. 급하게 만들어서 성능은 처참하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레어 몬스터를 상대할 수 없다.

'아니 10분도 못 버티냐?'

하지만 기껏 포션을 싸 들고 왔더니, 파티가 전멸 직전인 상황.

어이없긴 하지만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힐러 하나는 버티고 있으니 그게 어디인가.

"마트벨로 씨라도 살아있어서 참 다행이네요."

"다들 아직 살아있는데...."

"그냥 두면 곧 죽잖아요."

돈을 받으려면 숨을 붙여놔야 한다. 그것이 '힐러'니까.

강승현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득실득실한 쥐 떼와, 전투 불능 상태의 모험가가 하나도 아니고 셋. 상황만 보면 답이 없다.

쩌적!

하지만 마트벨로만 버텨준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강승현은 살포를 써서 마트벨로의 체력을 채웠다.

"체력은 다 채웠고.... 마트벨로 씨, 빛의 방패 쓸 줄 안다고 했죠?"

"네, 쓸 줄은 압니다만...."

"잘됐네. 저기 세 사람 한곳에 모은 다음에 빛의 방패 쓰세요."

[빛의 방패]는 받는 대미지를 일정 시간 동안 반감시키는 스킬이다. 덕분에 공격력 1짜리 몬스터의 대미지는 0. 이걸 쓰면 쥐 떼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계속 빛의 방패 쓰면서 버티세요. 그럼 재생 효과가 바닥나도 버틸 수 있으니까."

레어 시궁쥐를 쓰러트릴 때까지 빛의 방패 난발하기. 페리얼 파티가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고 싶은데...."

마트벨로가 손을 떨며 중얼거렸다.

"지금 스킬이 안 나와서...."

"예?"

몸 상태에 영향을 받는 물리 스킬과 달리, 마법 스킬은 정신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깜짝 놀라면 시전하려던 스킬이 취소되기도 하고, 충격받으면 스킬이 아예 안 나오기도 한다.

"그... 아니... 제가."

마트벨로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누가 봐도 얼빠진 사람의 얼굴이다.

'놔두면 정신 차리겠지만, 지금이 그럴 상황이어야지.'

이대로 가다간 쥐 떼한테 파먹혀 죽을 판이다. 물리 스킬은 건강이 무너지면 끝장이고, 마법 스킬은 멘탈이 무너지면 끝이다.

"마력도 없고... 마력 포션도...."

"마력이 없어?"

마트벨로의 멘탈이 깨진 결정적인 이유는 마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힐러한테는 흔한 케이스다. 마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럼 마력만 회복되면 쓸 수 있겠네요?"

멘탈이 깨진 이유를 알았으니, 정신 차리게 하는 건 쉽다. 마력을 채워주면 그만이니까.

강승현의 말을 들은 마트벨로의 눈동자가 커졌다.

"호, 혹시 남은 마력 포션 있으신가요?"

"딱히 쓸 곳이 없어서."

마력 포션은 다른 포션보다 훨씬 비싸다.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만들기도 은근 까다롭고. 무엇보다 휴식 이외에 마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나만, 하나만 빌려주신다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마트벨로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몇 배로 갚을 테니...."

"그래요? 나중에 10배로 갚으세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든 마트벨로가 감격스러운 눈으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마력만 회복된다면 뭐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강승현은 포션을 꺼내지 않았다.

"저기, 포션은?"

마트벨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거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서."

[살포]

강승현의 손에서 푸른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마, 말도 안 돼."

푸른 오오라가 몸에 닿자, 마트벨로의 마력이 회복된 것이다. 마트벨로는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스, 스킬로 마력을 회복했다고?"

마트벨로는 힐러의 길을 걸으면서 온갖 스킬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마력을 회복시키는 스킬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마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스킬로 마력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하다.

-스킬로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자는 위대한 존재뿐이다.

스승님도 선배님도,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트벨로는 그렇게 배웠기에 지금껏 인간은 마력 회복 스킬을 쓸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힐러가 마트벨로의 상식을 깨부쉈다.

"다, 당신.... 설마 사도였습니까?"

"뭐?"

'아니, 고작 신의 하수인일 리가 없어...!'

아무리 뛰어난 사도라고 해도 근본은 인간. 마력 회복 스킬은 얻을 수 없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마트벨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강승현은 대답 대신 손에서 푸른 오오라를 뿜어냈다. 푸른 오오라는 어김없이 마트벨로의 마력을 채워주었다.

"이것이 당신의 대답입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는 자.

마트벨로는 확신했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신이나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

"죄, 죄송합니다."

"도대체 아까부터 뭐 하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하찮은 미물이라...."

마트벨로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다고, 제가 모시는 아이베르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마트벨로는 이제 덜덜 떨고 있었다. 신도가 자기가 모시는 신의 이름을 걸었다는 건 진짜 죽어도 말 안 하겠다는 걸 의미한다.

'아, 지금 이걸 마력 회복 스킬로 착각하는 건가?'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강승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사실대로 말해주면 쪽팔려서 기절하겠네. 마력 회복 스킬이 아니라 마력 포션인데.'

마트벨로가 기절하면 계획이 물거품 된다. 그렇기에 강승현은 그가 착각하게 내버려 뒀다.

'뭐, 말 안 하고 다니면 나야 고맙지. 그런 거 해명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이 사태를 해명하려면 [살포]에 대해 모든 걸 설명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스킬에 대해 떠벌리고 다니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차원이동자들만 사용하는 희귀한 스킬이라면 더더욱.

'멍청이를 놀리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사태 수습부터 할까.'

이제 몸에 걸어둔 재생 포션의 효과가 바닥날 시간이다.

쩌적!

강승현은 남은 재생 포션 두 개를 전부 박살 냈다.

[흡수]

포션이 흡수된 걸 확인하고 하나는 자신에게, 다른 하나는 마트벨로한테 사용했다.

"마력은 채워줬고, 네가 해야 할 일도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재생 스킬도 타인에게는 쓸 수 없는데...역시 당신은 위대한 존재였군요!"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착각하고 있으니, 어울려주는 게 예의겠지. 강승현은 말을 낮추고 실실 웃으며 등을 돌렸다.

"이제 알아서 해라.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마트벨로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귀찮게 해선 안 된다...! 신이 내게 명령하셨다!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마트벨로는 곧바로 쓰러진 세 사람을 한곳에 모았다. 시궁쥐의 공격이 계속됐으나 마트벨로는 끄떡없었다.

"비켜!"

마트벨로는 달려드는 쥐를 떼어내고 스킬을 준비했다. 여전히 레어 시궁쥐는 검은 오오라를 뿜어냈고, 마트벨로의 마력은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마력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빛의 방패를 못 쓸 정도는 아니다. 다른 스킬이 아니라 빛의 방패만 쓸 거라면 충분한 양이었다.

"신성한 힘을 빌리겠습니다!"

마트벨로는 스태프를 지면에 꽂았다. 그리고 남은 마력과 몸 안의 신성력을 끌어올려, 빛의 방패를 시전했다.

"빛의 방패...!"

어느 때보다도 간절해서일까?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마트벨로와 떨거지 셋을 감쌌다.

달려드는 쥐 떼는 거셌지만, 한 녀석도 빛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쮜익!!!"

"쮜직!"

쥐 떼들은 페리얼 파티에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성공했다!"

마트벨로는 환호하며 소리쳤다.

"신이시여, 제가 해냈습니다!"

"그럼 버텨! 어떻게든 버텨라!"

"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버티겠습니다!"

"아니, 목숨 걸 필요는 없고."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남은 건 레어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뿐이다.

8. 박멸

"이쪽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마트벨로의 빛의 방패가 강한 빛을 내며 페리얼 파티를 감쌌다. 쥐 떼는 빛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이제 저쪽은 신경 쓸 필요 없고. 저 녀석만 처리하면 되는데.'

강승현은 눈앞의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레어 몬스터. '시궁창을 벗어난 시궁쥐'.

놈이 시커먼 오오라를 뿜어내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는 소리다.

'여기서 제일 좋은 건 저 새끼가 우릴 놔주는 건데 말이야.'

레어 시궁쥐도 [공간 지배]를 사용하느라 마력을 꽤 많이 소모했다. 녀석도 쓸 수 있는 마력이 얼마 안 남을 것이다. 몬스터가 포션을 갖고 다니진 않으니까.

'아무리 잘난 몬스터라도 마력이 바닥나면 스킬을 못 쓰지.'

레어 시궁쥐가 [공간 지배]를 풀어준다면, 강승현도 곱게 물러날 생각이었다. 이길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평화로운 선택지가 있다면 그쪽에 눈길이 가는 법이다.

"...."

하지만 레어 시궁쥐는 이쪽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기는 건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정도 마력만 있어도 충분하다! 시간을 오래 끌어도 유리한 건 나다!'

레어 시궁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레어 몬스터가 되면 지능도 레어해진다더니.'

강승현은 혀를 차며 주위를 살폈다. 빛의 방패 속에서 기도하는 마트벨로가 보였다.

"이아 아이베르. 따르는 자는 믿음을."

그리고 기도하는 마트벨로를 쥐 떼가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덤비는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마트벨로를 지켜볼 뿐이었다. 공격해봤자 힘만 빠지고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금이야 발버둥 치고 있지만, 오래 버티진 못 한다.'

'인간이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려라.'

'저 빛이 사라질 때를 노려라.'

수백 마리의 쥐 떼가 꿈쩍도 하지 않고 마트벨로를 주시하는 모습은 정말 소름 끼쳤다. 마트벨로가 빨리 쓰러져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징그럽네, 진짜.'

물론, 저놈들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똑똑하진 않다. 그저 우두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었다.

"이아 아이베르. 믿는 자에게 자애를."

이쯤 되면 이런 상황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기도에 열중하는 마트벨로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마트벨로는 자신을 둘러싼 쥐 떼를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기도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 해도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모험가 힐러치고는 사제만큼 독실한 녀석이군.'

신을 향한 믿음이 강할수록 신성력도 강해진다. 자기가 유능한 힐러라고 떠들어댄 게 허풍은 아닌 모양이다. 강한 신성력은 곧 강한 회복량을 뜻하니까.

'힐러 A가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힐러 B도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이제 할 일이 정해진 것 같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강승현은 잠시 심호흡을 하면서 말했다. 레어 시궁쥐한테 들으라는 것처럼.

녀석이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냐. 힐러가 할 일이 아니지."

힐러의 본문은 서포터다. 딜러처럼 앞으로 뛰쳐나가 싸울 필요 없는 포지션이다. 그런 힐러가 있기도 하지만 보편적이진 않다.

"아무리 포션이 있어도 나 혼자, 힐러 혼자 레어 몬스터를 어떻게 잡겠어."

괜히 레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일반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니까.

"그래서 걍 좋게좋게 가려고 했는데, 네가 자초한 거다?"

하지만 레어 몬스터는 이쪽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역시 싸워서 쓰러트리는 것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정말 다행이지."

원래 레어 몬스터는 고작 포션 몇 개만 준비한 어설픈 모험가가 상대할 몬스터가 아니다. 그것도 혼자라면 더더욱!

"네가 별거 없는 쥐새끼라서!"

"찌이이익!!"

레어 시궁쥐는 큰 소리로 울며 날뛰었다. 욕은 알아듣는 모양이다.

[절개]

강승현은 레어 시궁쥐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는 아즐 대륙 최약체 레어 몬스터. 승산은 있다!'

만약 시궁쥐가 아니라 늑대나 멧돼지였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고 마을로 돌아갔을 것이다.

쫘악!

강승현의 나이프가 레어 시궁쥐의 가죽을 찢었다.

"쮜익!"

레어 시궁쥐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으나 물러나진 않았다.

'쥐새끼라도 레어는 레어지.'

레어 시궁쥐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앞니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강승현은 굴하지 않고 [절개]를 사용했으나, 원체 몸이 작고 날렵한 몬스터다. 레어 시궁쥐는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끅!"

결국, 레어 시궁쥐의 앞니가 강승현의 발목을 물었다.

강승현은 곧장 나이프를 휘둘러 레어 시궁쥐를 떨쳐냈으나, 물어뜯긴 발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냥 스친 거라면 좋겠지만, 레어 몬스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출혈!'

일정 시간 동안 체력이 깎이는 상태이상. 그것도 모자라 재생 효과를 무효화시키는 끔찍한 녀석이다. 약을 먹거나 마땅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피가 계속 흘러나온다.

"꼴에 레어 몬스터라고 머리를 굴리기는 하네. 이건 그냥 재생 포션으로는 못 막지."

재생 포션 효과를 없애려고 일부러 접근전을 허가한 모양이다. 어쩐지 좀 쉽게 잡힌다 했더니만.

"근데 어쩌냐."

나름 머리를 잘 쓴 편이나, 레어 시궁쥐가 예상 못 한 점이 있다. 강승현이 출혈을 멎게 하는 힐러라는 점이다.

[지혈]

상처 부위를 손으로 건드리자 피가 순식간에 멎었다. 레어 시궁쥐도 그것까진 예상 못 했는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힐러라서."

강승현은 체력 포션을 흡수하며 나이프를 휘둘렀다. 이제 재생 포션의 효과가 사라졌으니 체력 포션으로 버틸 수밖에 없다.

"쮜이익!!"

나이프에 베인 레어 시궁쥐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강승현이 놈을 쫓아가 다시 한번 [절개]를 쓰려는 순간이었다.

푸우욱!!

자신의 우두머리를 지키고 싶은 건지, 아니면 우두머리의 명령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건지. 쥐 떼가 사방에서 튀어나와 강승현을 가로막았다.

"쮜직!"

"쮜이이익!"

뒤를 보자 마트벨로를 둘러싸고 있던 쥐 떼가 전부 이쪽으로 몰려왔다. 쥐 떼는 벽처럼 엉겨 붙어 레어 시궁쥐를 보호하려 들었다.

"언제 오나 했다."

저 많은 쥐 떼를 처리하지 않으면 레어 시궁쥐한테 접근할 수 없다.

'하나하나 잡다간 쓰러지겠지.'

강승현이 가진 공격 스킬은 [절개]가 유일했다. 당연히 정석적인 방법으로 레어 시궁쥐를 잡는 건 불가능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강승현이 힐러라는 점이고. 정식 힐러가 아니라 꼼수를 부리는 야매 힐러라는 점이다.

'내가 여기 올 때 재생 포션만 만들어온 게 아니거든.'

시궁쥐가 다 그렇듯, 덴트롤 시궁쥐의 번식력은 무시무시하다. 그런 시궁쥐의 번식력을 억제하는 건 덴트롤 숲 곳곳에서 자라는 덴트롤 박하다.

[덴트롤 박하]

[톡 쏘는 향이 일품인 식물.]

[덴트롤 숲에서 채취할 수 있다.]

[향은 사람한테는 별 해가 없지만, 작은 동물한테는 좋지 않다.]

하인드 마을 사람들은 예전부터 덴트롤 박하의 향을 이용해 살충제로 써먹곤 했다. 위력은 벌레 몇 마리 정도라면 쉽게 죽이는 정도.

'그래서 준비했다. 덴트롤 박하 농축액!'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덴트롤 박하 농축액을 꺼냈다. 병에서 코를 찌르는 박하 향이 흘러나왔다.· 인간보다 후각이 더 좋은 시궁쥐들은 털을 곤두세웠다.

'물론 쥐를 죽일 정도로 강한 건 아니지만.'

덴트롤 박하 몇십 장을 졸여 만든 농축액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맹물이 아니라 덴트롤 박하 오일로 만들었으니까.

"쥐를 죽이진 못해도, 쫓아낼 위력은 있지."

당연하지만 이것도 포션으로 취급한다. [살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다.

쩌적!

강승현은 들고 있던 농축액 병을 깨트렸다. 농축액을 흡수하자 진한 연녹색 오오라가 생겨났다.

"주먹 관련 스킬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강승현은 주먹을 쥐고 드글드글하게 뭉친 쥐 벽을 쳤다.

쿵!!!

동시에 덴트롤 박하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고통스러워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쥐 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수백 마리나 되던 쥐 떼가 사라져버리자, 레어 시궁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쮜직!!!"

레어 시궁쥐는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달아난 시궁쥐를 불러모으기 위해 다시 한번 [우월감]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덴트롤 박하 농축액은 물론이고 재생 포션이나 체력 포션도 남은 게 없다.

레어 시궁쥐가 또 쥐 떼를 불러모으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달려가면 늦어!'

레어 시궁쥐를 가로막는 벽 같은 건 없다. 강승현은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던졌다. 나이프는 바람을 가르고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푸욱!!

단단한 나이프가 레어 시궁쥐의 머리에 처박혔다. 순간 레어 시궁쥐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만 아직 죽은 건 아니다. 결정타를 날려야 했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달려나갔다.

"쥐새끼가 잘나봤자 쥐새끼지."

만약, 레어 시궁쥐가 조금만이라도 침착했다면 나이프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못 하니까 쥐새끼겠지만.

푸우우욱!!

강승현의 나이프가 레어 시궁쥐의 목을 그었다. 레어 시궁쥐는 목이 그인 상태에서도 꿈틀거렸다.

"질긴 새끼."

하지만 곧, 피를 잔뜩 쏟아내며 움직임이 멈췄다.

[공간 지배가 격파됐다!]

레어 몬스터의 사망으로 뒤틀려 있던 공간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미니 던전이 소멸했다.

"이번엔 진짜 아슬아슬 했네...."

강승현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몸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팔다리 멀쩡하고.'

정말 운 좋게도 눈에 띄는 부상은 없었다. 군데군데 쥐 발톱이나 이빨에 긁힌 상처가 남아 있긴 했다.

'제일 심하게 다친 건 발목 상처인가? 일단 못 걸을 정도는 아니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이고.'

레어 몬스터를 1대 1로 상대했는데도 이것밖에 안 다쳤다는 건 사실상 기적이다. 강승현은 기적 같은 승리에 기뻐했다.

'이 정도면 업적 하나 나올 법한데?'

보통 룰렛으로 스킬을 뽑지만, 룰렛 말고 스킬을 얻는 방법이 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할 때마다 업적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당연하지만 차원 이동자 전용이다.

[업적 달성!]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강승현의 눈앞에 글자가 나타났다.

[업적 달성 : 레어 1:1]

[레어 몬스터를 혼자서 사냥할 경우 달성.]

"이래야지 그럼."

목숨 걸고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9.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보상 수령]

눈앞에 나타난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르자 룰렛이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다.

업적 보상조차 확률로 지급하는 악랄한 시스템.

★[스킬(투척★) 획득]

"투척?"

강승현은 스킬 이름을 보고 난감해했다. 이름만 봐도 힐러용 스킬은 아니다.

좋은 공격 스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까 좀 힘들긴 했지. 절개 하나로 지랄했으니....'

그렇다고 진짜 공격 스킬을 받길 바란 건 아니었다.

"좋다 말았네."

힐러용 스킬이나 뱉을 것이지. 강승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아즐 대륙에서 모험가로 살아가는 이상,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몬스터가 달려들고, 돈을 노린 강도가 습격해온다. 힐러라고 해도 최소한 자기 몸을 지킬 수단 정도는 있어야 했다.

'이거 그냥 짱돌 하나만 있어도 쓸 수 있겠네.'

보통 투척 계열 스킬은 물건을 던질 때 명중률을 올려주거나 대미지를 올려준다. 그냥 돌 던지기라도 스킬이 되면 무시무시한 위력이 나온다.

강승현은 이 정도면 괜찮다며 만족하기로 했다.

'근데 이 별은 뭐지?'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스킬 이름에 별표가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 얻은 스킬 중에 이름에 별이 붙은 건 없었는데.'

정확한 건 모르지만, 별표는 룰렛 보상 창에서도 가끔 볼 수 있었다.

잡쓰레기한테는 ☆별이 붙고, 스킬이나 아이템처럼 좋은 보상은 ★별이 붙는다.

'이거 그럼 뭔가 좋은 스킬인가?'

스킬 자체에 ★별이 붙어 있는 걸 보면 평범한 스킬은 아닐 터. 강승현은 [투척★] 스킬을 확인했다.

[투척★]

[물체를 투척하거나 날릴 경우 이하 효과를 받는다.]

[투척 명중률 +100%]

[투척 대미지 +100%]

[투척 공격 속도 +100%]

[추가 효과 보너스 +25%]

"명중률과 대미지, 공격 속도 100% 이건 기본 수치인가."

위의 3개는 강승현이 예상한 그대로였다.

"근데... 효과 보너스?"

문제는 4번째. 일반적인 투척에선 볼 수 없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효과 보너스가 25%라고?'

눈이 번쩍 떠지는 문구였다. [살포] 스킬처럼 포션으로 한정된 것도 아니라서, 아무거나 던지기만 하면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스킬이다.

'[살포] 스킬도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더 장난 아니네.'

예를 들어, [투척★] 스킬로 즉사 확률 1%짜리 독침을 날린다면 보너스로 인해 확률이 무려 26%까지 올라간다.

'[살포]에 비하면 보너스가 5% 낮긴 한데, 투척은 아무 물건이나 쓸 수 있으니까.'

짱돌에 중독 확률 2%짜리 독 하나 바르기만 해도 27%. 순식간에 흉악한 무기로 돌변한다.

'이 정도면 레어 몬스터 업적 보상으로 줄 만하다.'

이 스킬이 레인저나 암기 도적한테 주어졌다면 그는 날개 달린 것처럼 날아다녔을 것이다.

정작 이 스킬을 얻은 건 야매 힐러지만.

'거기다 설명대로라면 포션 효과도 25% 상승할 텐데.'

이건 나중에 따로 테스트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은 포션이 몇 개 없으니까.

"그럼 보상도 수령했겠다...."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딱 하나 남겨둔 스태미나 포션으로 기력을 회복하고 마트벨로를 향해 다가갔다. 마력이 바닥났는지 빛의 방패는 사라져 있었다.

"마트벨로 씨, 수고 많으셨어요."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수습하기 더 귀찮았을 것이다.

원래는 30만 골드를 받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녀석에게는 특별히 20만 골드만 받기로 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강승현이 다가가자 마트벨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녀석은 여전히 광신도 모드였다. 이쯤 되면 진실을 말해줘도 안 믿을 것 같다.

"덕분에 편했습니다. 빛의 방패 좋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제가 무덤까지...."

"자자, 헛소리는 스킵하고."

강승현은 마트벨로의 헛소리를 대충 넘기며 물었다.

"아까 그랬죠? 리저렉션 쓸 줄 안다고."

"네. 가능합니다."

"저 사람들 이제 깨워도 될 거 같은데, 깨우시죠."

강승현이 페리얼 파티를 가리키자, 마트벨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태프를 잡았다.

"리저렉션."

마트벨로가 주문을 외우자 신성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밝은 빛이 셋의 몸에 내려앉았다.

"으으... 머리야...."

"으...."

"윽...으윽...."

몸을 일으킨 페리얼을 시작으로, 나머지 둘도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리저렉션은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 스킬이다. 언뜻 보면 부활 스킬로 착각할 것 같지만, 아즐 대륙의 인간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없다.

좀비로 만드는 꼼수는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페리얼은 넋이 나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승현은 레어 시궁쥐 사체를 던져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헉...!"

"이, 이건...."

"레어 시궁쥐 목입니다. 힘들게 잡은 거예요."

페리얼은 레어 시궁쥐 사체와 강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서, 설마 댁이 죽인 거야?"

"그럼 이게 자연사했을까요."

"저, 저 괴물을 혼자?"

페리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과 동료들을 쓰러트린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겨우 혼자서? 심지어 딜러도 아닌 힐러가?

"그럼 설마 기절한 사람들이 잡았을까."

강승현은 당연한 걸 뭘 묻냐는 얼굴로 페리얼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강승현의 온몸에 묻은 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기절한 동안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고, 이 남자는 거기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그쪽끼리만 보내면 다 죽을 거 같으니까 나중에 도와주겠다고."

"허, 허어...."

페리얼의 머릿속에 아까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레어 몬스터에 대해 조언하던 강승현을 무시하고, 미친놈 취급했던 일들이.

'내, 내가 엄청난 거물을 몰라보고....'

지금 페리얼 파티는 덴트롤 숲 깊숙한 곳에 있다. 여기는 사람 하나 파묻어도 티 안 나는 장소다.

'혹시 들킨다 해도 몬스터한테 죽었을 거라고 위장할 수 있고.'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레어 몬스터를 혼자서 잡는 무시무시한 강자다.

페리얼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지금 속으로는 엄청나게 빡쳐 있으면 어쩌지?'

'힐러는 힐러인데 알고 보니 물리치료사였고.'

'통증을 다른 통증으로 잊게 해준다. 이런 건가?'

'지금이라도 엎드려 빌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이제 페리얼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아, 아까 무례하게 군 건...."

"아 괜찮아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강승현은 페리얼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했다.

"아까 약속한 대로 일 인당 30만 골드만 받을게요."

강승현은 레어 시궁쥐 모가지를 흔들었다.

레어 시궁쥐 목에 걸린 현상금이 120만 골드. 일 인당 30만 골드를 낼 수 있는 액수다.

"사, 삼십만...."

하지만 페리얼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목숨 값 30만 골드를 내지 않으면 쥐새끼처럼 만들어주겠다고.

"거기다 치료까지 서비스. 나처럼 이렇게 양심적인 힐러가 어딨어요."

"...."

"문제없죠?"

"네, 네... 드려야죠.... 목숨만 살려주신다면야."

"아, 그리고."

부우욱!!

강승현은 바닥에 있던 쥐 몸통을 베어 갈랐다. 갈라진 뱃속에서 묘하게 생긴 구슬이 나왔다. 레어 몬스터가 떨어뜨리는 레어 아이템이다.

"이건 내 몫으로 가져갈게요."

강승현은 페리얼 파티에서 나갔기 때문에 모험가 조합 보상 120만 골드는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레어 시궁쥐를 쓰러트린 건 강승현이다.

'저 녀석들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래서 페리얼 파티는 레어 시궁쥐가 드롭한 레어 아이템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레어 아이템을 팔아치우든, 직접 사용하든, 길바닥에 버리든. 그건 전부 강승현의 몫이다.

"물론이죠...."

페리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승현은 120만 골드 대신 레어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좀 있으면 골드도 내 주머니로 들어오겠지만.'

원래 털어먹는다는 건 이렇게 하는 거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 조합입니다."

덴트롤 숲으로 떠날 때는 아침이었지만, 하인드 마을에 돌아온 건 저녁이 다 돼서였다.

페리얼 파티는 가장 먼저 모험가 조합으로 향했다.

"의뢰 보고하러 왔습니다...."

페리얼이 의뢰서와 함께 레어 시궁쥐의 머리를 내밀었다. 접수원은 레어 시궁쥐를 살피고 의뢰서를 꼼꼼하게 검토했다.

'내가 점심도 못 먹고 이 시간까지.... 지구에서 살 때나 아즐 대륙에서 살 때나 다를 게 없네.'

접수원이 의뢰를 검토하는 동안 강승현은 200골드를 주고 산 빵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그렇게 맛있진 않지만, 간단하게 허기 달래는 용도로는 이거만 한 게 없다.

"검토 끝났습니다. 깔끔한 일 처리 감사합니다."

빵 한 개를 더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접수원이 미소를 지으며 돈주머니를 꺼내왔다.

"전부 일만 골드짜리 동전이에요."

"감사합니다."

페리얼은 주머니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120만 골드면 엄청 큰돈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생에 비하면 푼돈이었네."

쥐 한 마리 잡고 버는 돈이라면 거금이지만, 목숨 값이라 생각하면 정말 푼돈이다.

"아무리 큰돈이라 해도 목숨이 걸려있다고 생각하면 푼돈이 되는 거죠."

"가져가세요. 어차피 레어 몬스터를 잡은 건 그쪽이고, 우리는 잡을 능력이 없었으니."

페리얼은 강승현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자신은 이걸 들고 있을 자격도 없다면서.

"이걸 내가 다 먹으려니 좀 미안하네."

강승현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미안한 건 사실이다. 어쨌든 이들이 아니었다면 이 의뢰는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오늘 돈도 벌었고 레어 아이템도 얻었으니...내가 오늘 술 한잔 살게요."

"싸가지 없는 새끼 안 죽이고 살려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페리얼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내일 고향으로 내려갈 거라 술자리는 힘들 거 같습니다. 이 일 관두려구요."

페리얼은 무척 착잡한 얼굴이었다. 이번 일이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우리는?"

"셋 다 같은 마을 출신이라. 셋이 같이 죽으면 합동 장례식 치러야 하거든요."

아즐 대륙의 모험가 중에는 같은 마을 출신 친구나 형제자매처럼 아는 사람끼리 만든 파티가 많다. 그래서 합동 장례식도 흔한 편이다.

"나 혼자 죽는 건 괜찮은데, 이것들이 죽으면 마을 어른들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파티의 리더는 이래저래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게 모험가 하겠다고 지랄이나 하고, 그러다 뒈질 뻔하고...."

페리얼이 모험가를 관두려는 이유는 동료들 때문이었다. 자기가 죽을 뻔한 것도 있지만,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강승현은 페리얼을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남았잖아요."

누가 도와줬든, 자력으로 살아남았든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내일은 죽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늘은 살아남았다. 살아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하긴, 죽었으면 모험가를 관둔다는 태평한 소리도 못 할 테니."

페리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술은 다음에 사주시죠."

페리얼은 두 동료를 데리고 모험가 조합을 떠났다.

"그럼 마트벨로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트벨로한테 술자리를 권유해봤으나.

"저는 술 못 마십니다."

마트벨로는 술을 잘 못 마신다며 거절했다.

"위대한 분이 내려주시는 술을 거절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다 술을 안 마셔도 취한 것처럼 헛소리하는 중이기도 하고.

강승현은 마트벨로와 거리를 두며 말했다.

"우리 내일부턴 만나도 서로 모르는 척합시다. 나도 아는 척 안 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지금은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뜻이군요."

뭘 어떻게 하면 이 말을 저렇게 알아들을 수 있지.

강승현은 자기가 멀쩡한 사람 하나를 미친놈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위대한 분의 진정한 모습을 나 같은 미물이 뵙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행이...."

마트벨로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더니, 납득한 듯 서서히 멀어져갔다. 이걸로 저 녀석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상한 녀석도 떼어냈으니 술이나 마시러 갈까.... 아차.'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구슬을 꺼냈다. 아까 레어 시궁쥐한테서 얻은 레어 아이템이다.

"이걸 깜빡했네."

10. 안 들키면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