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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 90-100

90. 새벽의 호숫가 3

"이야... 엄청 크네. 저거 하나 잡으면 게살 한 트럭 나오겠다."

김호정이 초거대 크랩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무 커서 언뜻 보면 생물이 아니라 건축물처럼 느껴진다.

"안 그래도 저놈 고기가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맞습니다. 피츠타 크랩 게살은 최고급 식재료에 속하지요."

시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츠타 크랩의 게살은 카마르 특산물 중 하나다.

한국이나 아즐 대륙이나 맛있는 게살은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다.

"입에서 부드럽고 살살 녹아서 주로 카마르 귀족들이 선호합니다."

"대신 쓰러트리기 어렵죠."

껍데기가 워낙 단단해서 부수기 어렵고 집게발은 바위를 부술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도 사람 3명 정도가 모이면 피츠타 크랩 한 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데."

시릴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손에 쥔 검을 꽉 쥐면서 말이다.

"저렇게 커다란 놈은 어떻게 쓰러트려야 할지...."

피츠타 크랩은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몬스터다. 그런데 사이즈까지 비정상적으로 커졌으니 긴장할 수밖에.

"거대한 바위, 아니... 작은 바위섬만 한 크기의 피츠타 크랩이라니...."

"저, 저런 괴물이 카마르에 들어갔다간 우리 모두 끝장이야!"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저놈이 집게발을 휘두르면 수백 년 된 건물이 처참하게 무너진다!"

"막아야 한다! 반드시!"

이들은 피츠타 호수에 오래 살았던 만큼 피츠타 크랩의 강력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인 주술사 놈들. 저게 비장의 무기였나?'

강승현은 마법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아무리 어인 주술사들이 서포트한다고 해도 고작 생선 몇 마리가 성을 무너트릴 순 없지.'

결국, 성을 부수기 위해선 보다 강력한 몬스터가 필요했다.

'그럼 꽤 강한 놈이라는 뜻이겠네.'

주술사들이 생명을 바쳐가며 불러낸 몬스터니까.

"...."

호수 위의 거대한 피츠타 크랩은 인간들을 비웃는 것처럼 눈을 움직이더니

철썩, 철썩.

마침내 호숫가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촤아아악!!

밀려온 파도가 강승현의 몸을 휩쓸었다.

당장 뒤로 넘어질 것처럼 강력했다.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3 : 피츠타 마린 이어커프(좌)]

하지만 강승현은 피츠타 마린 이어커프 덕분에 밀려오는 파도에 버틸 수 있었다.

"이, 이런 괴물 놈이!"

"막아라! 반드시 막아야 한다!"

"썩 꺼져!"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밀려온 파도에 넘어지면서도 피츠타 크랩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카각!!

깡!!!

각자 들고 온 무기를 휘둘렀으나 녀석의 단단한 게딱지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으윽...."

"단단하다.... 장난 아니게!"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공격했지만 피츠타 크랩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갔다.

촤아악....

녀석은 기어이 물 밖으로 올라오더니 단단한 집게발로 땅을 내려쳤다.

쿠우우웅!!!!

땅이 흔들리며 강력한 진동이 일어났다.

"이, 이 엄청난 힘은 또 뭐야...."

"그냥 집게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이렇게 강력한 공격이 카마르 성에 가해졌다간...."

마탑의 결계가 없는 한, 카마르 성은 공격을 버틸 수 없다.

저 엄청난 공격력으로 성을 공격했다간 얼마 못 가서 처참하게 부서질 것이다.

촤아아아악!

피츠타 크랩의 공격으로 땅이 갈라지며 파도와 함께 호숫물이 흘러들어왔다.

철썩, 철썩!

피츠타 크랩은 지금까진 몸풀기였다는 것처럼 집게발에 묻은 흙을 호숫물로 씻었다.

크랩도 몸에 흙이 묻는 건 싫은 모양이다.

"크, 큰일이다.... 갈라진 땅으로 호숫물이 밀려온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호수의 온갖 몬스터들이 카마르로 침입하게 돼!"

이제 이판사판이다.

놈을 막지 않으면 카마르는 멸망한다.

"이 게자식아!!!!"

김호정이 비명을 질러대며 삽을 휘둘렀다.

카마르의 금빛 영광이 크랩의 등딱지를 내려쳤으나,

쾅!!

바위도 부수는 금빛 영광도 단단한 껍데기를 부술 순 없었다.

"도대체 뭐 이렇게 단단해?"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네요."

"체엣!"

김호정은 혀를 차며 혈석을 꺼냈다.

"잡으면 게살 파티! 못 잡으면 카마르 망하는 거냐구!"

"선택지가 너무 극단적인데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고 피츠타 크랩을 향해 은빛 영광을 투척했다.

'이게 안 먹히면 프리아의 석궁도 안 먹힐 텐데.'

[투척★]

후우욱!

은색 모종삽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으나,

텅!

단단한 껍데기에 닿는 순간, 그대로 튕겨 나가버렸다.

퐁당!

튕겨 나간 은빛 영광은 그대로 호숫물 속으로 빠져버렸다.

[카마르의 은빛 영광이 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10초 뒤, 은빛 영광은 다시 손으로 돌아왔다.

강승현은 손에 쥔 은빛 영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튕겨 나갔다?'

남들은 무기를 휘둘러서 몰랐던 것 같지만, 투척 무기를 사용한 강승현은 알 수 있었다.

'은빛 영광이 껍데기를 스치지도 못하고 튕겨나갔어.'

아무리 단단한 껍데기라고 해도 흠집도 안 나는 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예 공격이 들어가지도 않은 모양이다.

'...다시 한번 해보자.'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인벤토리에 넣고, 프리아의 석궁을 들었다.

'이번에는 [관찰의 눈]을 켠 상태로.'

강승현은 피츠타 크랩을 향해 프리아의 석궁을 겨누었다.

[작살 화살★]

파박!

방아쇠를 당기자 크랩 게딱지를 향해 작살 화살 두세 개가 날아갔다.

팅! 텅! 텅!

작살 화살조차 녀석의 껍데기를 꿰뚫을 순 없었다.

하지만 강승현의 눈에는 똑똑하게 보였다.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효과가 발동했다.]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작살 화살이 게딱지에 닿는 순간, 녀석의 몸 위로 이러한 정보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공격이 먹히지 않은 건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때문이었다.

'공격이 몸에 닿는 순간에만... 발동하는 스킬인가?'

게딱지를 공격하지 않을 땐 저런 정보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이 보유한 패시브 스킬의 효과인 것 같다.

'설마 저런 스킬을 갖고 있을 줄이야.'

강승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던져보았다.

[투척★]

텅!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효과가 발동했다.]

투척한 보주는 단단한 게딱지에 부딪혀 날아갔다.

만약 이 광경을 지옥에 있을 아일이 봤다면 울면서 바닥을 구르지 않았을까.

'마법은 아니고... 일반 스킬인가 보네. 마법이었다면 보주로 부술 수 있을 테니까.'

[후크 샷 - 크레인]

촤르르르르!

강승현은 튕겨 날아가던 보주를 낚아챘다.

'보주도 안 통하고, 무기도 안 통하고... 여명의 성수 화살은 당연히 안 통할 것이고.'

지금 강승현이 가진 수단으로는 녀석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즐 대륙에 약점이 없는 존재는 없어.'

하다못해 신이라는 놈들도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저런 일개 몬스터 따위가 약점이 없을 리가 없다.

'힌트만 얻는다면 [관찰의 눈]으로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쏴아아아....

그러는 사이, 피츠타 크랩은 카마르 성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제, 젠장...."

"끄떡도 안 해...."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이미 수백 마리의 몬스터와 상대하면서 지칠 때로 지친 상황이었다.

'스태미너 화살을 쏴준다면 회복하겠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는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뻘짓이다.

"카마르에는...."

카타일러 가문 사람 중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시옐뿐이었다. 그녀는 피츠타 크랩을 향해 기어가더니 녀석의 다리를 붙들고 발악했다.

"죽어도 못 보내!"

피츠타 크랩은 귀찮다는 듯 다리를 까딱거렸으나 시옐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쿠르르르!

결국, 피츠타 크랩은 집게발로 바위를 집어 들었다. 바위를 내려쳐 시옐을 치워버릴 생각이다.

"시, 시옐... 어서 피해...!"

쓰러져 있던 시릴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곧 쓰러졌다. 움직일 기력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강 선생... 이거!"

늘어져 있던 김호정이 금빛 영광을 내밀었다.

피츠타 크랩의 게딱지는 못 막아도, 놈이 들고 있는 바위는 부술 수 있다.

'김호정 씨는 투척 스킬이 없었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까지 달려갈 시간이 없다.

[투척★]

강승현은 금빛 영광을 손에 쥐고,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투척했다.

콰르르릉!!

금색 삽이 바위에 닿는 순간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투두두둑!!

"고, 고맙습니다!"

시옐은 팔을 뻗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잘한 돌 조각을 방어했다.

파악!

금빛 영광은 바위를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 피츠타 크랩의 다리에 명중했다.

쩌적!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는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았는데, 방금 그 공격으로 피츠타 크랩의 다리에 금이 간 것이다.

'...공격이 먹혔다?'

강승현은 황급히 [관찰의 눈]을 켜고 피츠타 크랩의 다리를 살폈다.

[피츠타 자이언트 크랩의 왼쪽 3번째 다리.]

[금이 간 상태.]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을 보호하고 있다.]

[이 다리는 격이 다른 검붉은 감각의 효과를 받지 못 한다.]

금이 간 다리 위로 이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을 사용하면 그 어떤 공격도 받지 않지만, 딱 한 군데, 공격이 통하는 부위가 생긴다.

'저게 놈의 약점이었구나.'

약점 부위를 지키지 못하면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이 해제되는 모양이다.

"다들 일어서요."

강승현이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스태미나 화살을 발사했다.

"놈의 약점을 찾았으니까."

"약점...?"

"약점은 저깁니다."

[작살 화살★]

강승현은 고민 없이 작살 화살을 발사했다.

파바박!!!

작살 화살 세 개가 연달아 날아가더니 왼쪽 3번째 다리에 박혔다.

"저길 공격하면 놈을 부술 수 있습니다."

"공격이 먹혔잖아!"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는데!"

몸의 스태미나가 회복되자, 쓰러져 있던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지, 지금이라면 막을 수 있어!"

사람들은 의욕을 불태우며 피츠타 크랩한테 달려들었다.

"죽어!"

"카마르에는 못 보낸다!"

그들은 가져온 무기가 부서지도록 피츠타 크랩을 공격했다.

피츠타 크랩은 집게발을 휘둘러 사람들을 쫓으려 했으나,

"몸이 부러지더라도 막아주마!"

"우리가 카마르의 병사다!"

다들 집게발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도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았다.

쩌어억!!

그리고 마침내, 피츠타 크랩의 다리가 뜯겨나갔다.

"다리를 부쉈다!"

"해냈어!"

[몸을 보호하던 스킬 효과가 사라졌다.]

그때, [관찰의 눈]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강 선생! 봤어?"

"저도 봤어요."

김호정은 서둘러 금빛 영광을 주워왔다. 그 역시 메시지를 본 모양이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딱지는 김호정 씨가 맡으세요."

"맡겨둬!"

앞으로 달려나간 김호정이 금빛 영광으로 게딱지를 내려쳤다.

"죽어라 게자식아!"

쩌저저적...

파가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게딱지가 부서졌다.

게딱지가 부서지면서, 놈의 내장이 드러났다. 저게 피츠타 크랩이 숨기고 있던 진짜 약점이다.

'껍데기가 단단하다는 건 그만큼 속살이 부드럽다는 뜻이거든.'

물론 껍데기 좀 부서졌다고 죽을 놈은 아니라, 피츠타 크랩은 집게발을 휘둘러 김호정을 공격하려 했다.

카앙!!

김호정이 금빛 영광으로 집게발을 막아내며 씩 웃었다.

"강 선생, 지금이야!"

녀석은 지금 김호정을 공격하느라 내장을 보호할 겨를이 없다.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는... 이거다!'

동이 트기 직전,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투척했다.

91. 그 정도는 해야죠

강승현의 손을 떠난 은빛 영광이 피츠타 크랩을 향해 나아갔다.

슈욱!

부서진 껍데기는 연약한 속살을 보호해줄 수 없었고, 공격을 쳐낼 집게발은 엉뚱한 곳을 향한 상태.

놈은 지금 은빛 영광을 막을 수단이 없다.

푸우욱!

은빛 영광이 크랩의 몸에 처박힌 순간.

[크리티컬!]

강력한 크리티컬 대미지와 함께 속살이 터져나갔다.

끼기기긱!

피츠타 크랩은 잠시 몸을 꿈틀거렸으나, 곧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쿠웅!

동시에 김호정을 짓누르던 묵직한 집게발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머, 멈췄다."

"이 녀석... 죽은 건가...?"

지켜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피츠타 크랩 곁으로 다가갔다.

다들 자기가 가진 무기로 툭툭 건드려봤지만, 피츠타 크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움직여.... 이 녀석 죽었다고!!"

"해, 해냈다!"

"우리가 카마르를 지켜냈다!"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쓰러진 크랩을 둘러싸고 환호했다.

'드디어 끝났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피츠타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어두웠던 주위가 밝아 왔다.

새벽 호숫가의 치열한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일단 무기부터 회수하고....'

강승현은 피츠타 크랩의 몸에 박혀 있던 은빛 영광을 끄집어내며 잔해를 털었다.

[업적 달성!]

동시에 쓰러진 피츠타 크랩 위로 업적 알림창이 나타났다. 김호정도 업적 메시지가 나타났는지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업적 나온 건 좋은데 날밤을 꼴딱 샜네.... 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일인지."

김호정은 크게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포인트 많이 벌었으니까 좋잖아요."

"야근 수당 아무리 많이 줘도 하기 싫은 거랑 같지 뭐."

"전 야근 재밌던데요."

"방금 그건 못 들은 거로 할게."

"아무튼, 업적이나 확인해 보죠."

강승현이 업적을 확인하려던 찰나였다.

"강승현 힐러."

시릴의 큰아버지, 헤카로 카타일러가 다가왔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자네 덕분에 카마르는 물론, 우리 가문을 지킬 수 있었어. 정말 고맙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승현은 적당히 대답하며 사람들을 살폈다.

치열한 싸움이었던 만큼,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왼쪽 팔은 아까부터 제대로 못 쓰는 걸 보면 마비 독에 당한 것 같네. 피부도 너덜너덜하고.'

특히 헤카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기에 몸이 만신창이었다. 강승현은 헤카로의 왼팔을 살피며 물었다.

"그 왼팔, 마비 독에 당하신 거죠?"

"응? 어어, 그렇네. 아까 놈들과 전투할 때...."

"할퀴거나 물린 자국은 없고 뭔가에 쓸려서 피부가 찢어진 흔적만 남아 있네요. 그렇다면 독을 체내로 주입하는 타입이 아니라 피부에 뿜어내는 타입이라는 뜻인데... 이런 상처는 채찍같이 휘두르는 무기에 당할 때 생기죠."

그 말과 동시에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을 뿜어냈다.

[관찰의 눈]

[마비]

[팔이 마비되어서 움직일 수 없다.]

[강한 타격을 받아서 피부가 쓸려나갔다.]

[피부가 쓸려나가면서 생긴 상처에 마비독이 뿌려진 것 같다.]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공격에 당했다.]

예상대로, 헤카로의 왼팔을 마비시킨 독은 피부에 뿜어내서 묻히는 타입이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몬스터는 딱 한 마리밖에 없지.'

강승현은 마비독 치료제를 꺼내며 말했다.

"채찍질 비슷한 공격을 하면서 독을 묻혀댈 녀석은 그놈밖에 없네요. 바테트 피시한테 당하신 거죠? 꼬리 비늘이 노란색인 물고기."

"그, 그걸 어떻게?"

"아즐대륙 서부 호수 지역에 사는 몬스터 중 마비독을 뿌릴 만한 놈들을 추려보면 대충 감이 오죠."

상대를 마비시킬 때 이빨이나 독침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피부에 마비독을 묻히는 수생 몬스터.

그중에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를 수 있는 물고기는 장어처럼 긴 몸을 가진 바테트 피시밖에 없다.

"...정답일세. 자네 말 그대로야."

헤카로는 아까 자신을 공격한 바테트 피시를 떠올렸다. 그는 녀석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왼팔을 희생해 꼬리 공격을 막고, 칼을 휘둘러 절단했다.

"상처를 잠깐 봤을 뿐인데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믿을 수가 없군."

"힐러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죠."

강승현은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다.

'제대로 된 힐러라면, 부상 원인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힐만 꼬라박을 게 아니라.'

이것이 강승현의 생존 철학 11번.

"지금 바로 치료해드릴게요."

강승현은 헤카로의 팔에 치료제를 사용했다. 바테트 피시의 마비독은 증세가 빨리 나타나지만, 독성이 약한 편이다.

그래서 자연치유도 가능하고 치료제를 쓰면 순식간에 중화할 수 있다.

"치료제를 썼으니 마비는 1분 안에 풀릴 겁니다. 그렇게 강한 독도 아니니까."

'바테트 마비독 치료제까지 구비하고 있다니.'

헤카로는 놀랍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모험가 조합 최상급 힐러도 잠깐 보기만 한 걸로는 상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정말 대단한 청년이군. 보통이 아냐.'

상처를 보기만 해도 원인을 알아내는 통찰력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철저한 준비성.

힐에만 의존하는 힐러한테선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면모였다.

'이래서 싸움에 끼어드는 게 좋다니까.'

헤카로가 야매 힐러의 솜씨에 감탄한 사이, 강승현은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방이 환자투성이잖아.'

사실 강승현이 이번 싸움에 협력한 진짜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싸움이 끝나면 부상자가 반드시 생길 것이고, 그들을 전부 치료하면 포인트를 두둑하게 벌 수 있을 테니까.

"다른 분들도 무료로 치료해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시죠."

강승현은 늘 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약품과 붕대를 꺼냈다.

"함께 싸워준 것도 고마운데 치료까지 해주신다구요?"

"그것도 무료로?"

"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물론 강승현의 속셈을 전혀 모르는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크게 감동해 눈물을 글썽였다.

"강 힐러님! 탱커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크게 감동받은 사람 중에는 시릴과 시옐도 있었다. 두 사람은 강승현에게 달려와 말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저 괴물을 결코 쓰러트릴 수 없었을 거예요!"

"시옐 씨가 귀한 무기를 빌려준 덕분이죠."

"맞아 맞아."

강승현이 은빛 영광을 보여주자,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들어 올렸다.

삽과 모종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번 싸움의 VIP는 이 녀석들이지!"

카마르 병사의 명예를 상징하는 이 두 무기가 카마르를 위협하는 괴물을 무찌른 셈이다.

"역시 두 분한테 드리길 잘했어요."

시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마르의 영광도 창고에서 장식품으로 썩는 것보단 두 사람이 써주는 걸 좋아하겠죠."

앞으로도 자신을 대신해 유용하게 써달라며 시옐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말 어마어마한 싸움이었네요."

시릴이 호숫가를 둘러보며 말했다. 움직임을 멈춘 거대한 게와 사방팔방에 죽어 있는 물고기들.

그리고 몸을 제물로 바친 어인들까지.

"이 많은 적들을 우리가 막아냈다니."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부상자가 있기는 해도 사망자는 없었다.

이번 싸움은 카타일러 측의 완벽한 승리였다.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강승현이 없었다면, 카타일러 저택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릴은 그 점을 무엇보다 감사하게 여겼다.

"제가 반어인 변이화에 당했을 때도 구해주시더니.... 선생님은 저희 가문과 카마르의 은인이십니다!"

"저는 원래 남을 돕는 걸 좋아하거든요."

강승현은 자신을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을 좀 골리는 취미가 있긴 하지만.

"선생님처럼 아무 대가 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분은 흔치 않을 겁니다!"

시릴은 감동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본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생각했다.

'사실 받을 건 다 받았지만.'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강승현은 이들을 치료하면서 대량의 포인트를 벌었다.

그래서 치료비는 그걸로 퉁쳤다.

"흐어어어암.... 더는 못 버텨."

아까부터 계속 하품하던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인벤토리에 던져넣었다.

"난 이제 잘란다...."

그러더니 그대로 엎어졌다.

더 버티질 못하고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잘 거면 방에 가서 자셔야지."

강승현은 곯아떨어진 김호정을 일으켜 어깨로 부축했다.

-"호숫가에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빨리도 오셨네."

잠든 김호정을 부축해서 나아가던 참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카마르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다 몇 마리야?"

"저쪽에 거대한 피츠타 크랩도 있어!"

"이 많은 몬스터를 여러분들이 쓰러트렸단 말입니까?"

병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헤카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새벽에 출몰한 몬스터는 저희가 전부 처리했습니다. 자세한 건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결계가 소멸한 틈을 노리고 접근한 놈들이죠."

강승현과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침입한 몬스터들이 카마르 민가를 습격했을 것이다.

병사들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조만간 카마르 경비대가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영주님에게 보고를...."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쇼!"

병사들이 몬스터 사체를 수습하는 동안, 강승현 일행은 피츠타 크랩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사이즈의 거대한 피츠타 크랩...!"

"이 정도 사이즈면 우리 모두가 먹어도 고기가 남을 겁니다!"

카마르를 위해 열심히 싸웠으니, 그 보답을 받을 차례다.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환호하며 피츠타 크랩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승리 기념으로 축하파티라도 하죠!"

"게살 파티!"

"파티 좋지!"

"솔직히 이거 먹으려고 힘냈다!"

단단한 껍데기 때문에 쓰러트리기 까다롭고 손질하기 어렵지만, 피츠타 크랩 게살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맛이다.

"선생님! 저희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안에서 푹 쉬고 계세요!"

"뭐, 어제부터 빡세게 달리긴 했죠."

강승현은 어제 어인과 싸운 걸 회상했다.

'호숫가에서 싸우고, 호수에 들어가서 싸우고, 의무실로 가서 싸우고.'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싸움만 한 셈이다.

"슬슬 쉬긴 해야겠네요."

"...커어어어...Zzz...."

강승현은 곯아떨어진 김호정을 바라보았다. 스태미나에 집중투자하면 버틸 만하지만, 보통은 지쳐 쓰러지는 게 정상이다.

"저희는 가서 쉬겠습니다. 뒷일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세요."

"아, 힐러님 혹시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크랩 몸통을 해체하던 사람이 물었다.

피츠타 크랩은 맛도 좋지만, 아이템 제작을 위한 재료로 유명한 녀석이다.

"그러면 오른쪽 집게발하고, 껍데기 조각을 가져갈게요."

야매 힐러에겐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약재상이라면 환장할 것이다.

강승현은 절친한 약재상을 떠올렸다.

'라페이 씨가 좋아하겠는데. 여행 선물로 가져다주자.'

강승현은 부서진 껍데기 잔해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응...?'

부서진 껍데기 조각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중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녀석이 있었다.

'이건 뭔데 이러지?'

강승현은 주워든 껍데기 잔해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겉보기엔 별로 특이할 게 없었다.

'[관찰의 눈]이라도 써볼까.'

혹시나 해서 [관찰의 눈]을 사용한 순간,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

[장신구 아이템]

[업적 달성!]

또 하나의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92. 달달한 휴식

'여기서 업적이 뜨네.'

강승현은 피츠타 크랩 껍데기 조각을 바라보았다. 다른 조각과 달리 묘한 기운을 뿜고 있어서 평범한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설마 장신구 아이템이었을 줄이야.'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

[장신구 아이템]

'거기다 낯설지 않은 이름까지.'

이 아이템의 이름 속에는 피츠타 크랩이 가진 무적의 방어 스킬,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이 담겨 있다.

어딜 봐도 평범한 아이템은 아니다.

'일단 업적만 가볍게 확인해볼까.'

강승현은 [업적]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적 달성 : 진귀한 유품]

[A급 이상의 강력한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특수 아이템 '몬스터 유품'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강력한 몬스터의 유품을 습득하는 게 조건이었나.'

몬스터를 사냥할 경우, 낮은 확률로 특별한 힘이 남긴 잔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아이템을 몬스터 유품이라 부른다.

당연하지만 몬스터가 강하면 강할수록 얻기 힘들다.

'일단 유품부터 살펴보고....'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

[피츠타 자이언트 크랩의 껍데기 조각]

[이 아이템을 소지할 경우 이하 효과를 받는다.]

-[체력 +15%] [방어력 +15%]

-[물 속성 강화 +30%]

-[피츠타 호수 몬스터 대미지 반감 +15%]

-[물리 공격 대미지 반감 +10%]

-[물 속성 공격을 받을 경우 7% 확률로 체력을 회복한다.]

-[피격 시 3% 확률로 10초간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스킬의 효과를 받는다.]

껍데기 파편은 이러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템 성능은 나쁘지 않지만... 나한테는 딱히 쓸모없겠는데.'

물 속성 강화와 체력 상승, 대미지 반감. 좋은 옵션이긴 하지만, 강승현에게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스태미너 관련 옵션만 있었어도.'

전체적으로 야매 힐러보다는 탱커한테 어울릴 법한 아이템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 옵션은 맘에 드네.'

3% 확률로 10초간 모든 공격을 무시하는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스킬을 발동하는 옵션이다.

당장 쓸모는 없지만 갖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이제 남은 건 [남겨진 유품] 업적의 보상이다.

'유품을 습득해서 해금되는 업적이니까. 그와 관련된 보상을 주겠지.'

[보상 수령]

강승현은 업적 보상 버튼을 눌렀다.

또 사악한 룰렛 소리가 들려오려나 했지만, 조용한 걸 보면 확정 보상인 모양이다.

[※스킬(유품을 거두는 손) 획득]

'유품을 거두는 손?'

스킬을 확인해보자,

[유품을 거두는 손]

[몬스터 유품 획득 확률이 3% 증가한다.]

이러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유품 획득 확률을 올려주는 스킬이라.'

이름 그대로 몬스터 유품 획득 확률을 올려주는 스킬이었다. 이게 있으면 앞으로 더 많은 유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스킬을 손에 얻었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일단 확인은 대충 끝냈고....'

"커어어...."

옆을 보자 곯아떨어진 김호정이 보였다.

이제 첫 번째 업적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지만, 한숨 자고 일어나서 해도 늦지 않다.

'나도 슬슬 자러 갈까.'

강승현은 카타일러 가문 저택으로 돌아왔다.

방안은 암막 커튼을 쳐놔서 무척 어두웠고, 깔아둔 휴식 결계의 양탄자 덕분에 중간중간 깨는 일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 방해 없이 편하게 잘 수 있던 순간이었다.

-"...."

강승현이 다시 눈을 뜬 건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커어어어...."

김호정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

어디서든 잘 수 있는 스킬이라도 얻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 몇 시지?'

방안은 암막 커튼 때문에 여전히 어두워서 시간대를 알 수 없었다. 커튼을 살짝 들춰보자 해가 떠있는 걸 보면 낮인 것 같긴 했다.

강승현은 마나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07:24]

시계를 보니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지금 아침 7시인가. 겨우 1시간밖에 안 지났...을 리가 없지!'

강승현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엇, 선생님! 잘 주무셨습니까?"

시릴이 거실에서 청소하고 있었다.

"저희가 얼마나 잤죠?"

"하루 종일 주무셨어요."

"하루 종일?"

겨우 1시간 지난 게 아니라, 무려 25시간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강승현은 다음 날 아침이 되도록 자버린 것이다.

"...정말 하루 종일 잠만 잤나 보네요."

"너무 곤히 자고 계셔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시릴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된 전투로 많이 지쳤을 테니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고.

'그건 그렇고 슬슬 출출한데....'

아무것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잤더니 배가 고팠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물었다.

"다들 식사는 진작 하셨겠네요."

피츠타 자이언트 크랩 퇴치 기념 게살 파티.

24시간이나 지나버렸으니 이미 끝났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피츠타 크랩 요리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피츠타 크랩이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지만, 하루가 지났으니 남은 게살은 없을 것이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뇨? 선생님하고 일행분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시릴이 당당한 얼굴로 소리쳤다.

"기다렸다구요?"

"두 분이 안 계시는데 어찌 저희끼리 진행하겠습니까!"

지금 카타일러 가문은 게살은커녕 음식도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들 하루 종일 굶었다구요?"

"물은 마셨습니다!"

이들은 강승현 일행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 함께 물만 마시며 굶은 것이다.

'이 자식들, 돌아버린 건가.'

다른 의미로 굉장한 사람들이었다.

"안 그래도 슬슬 일어나실 것 같아서 음식 준비는 간단하게 끝내뒀습니다! 몸만 오시죠!"

"그럼 가서 김호정 씨 데려올게요."

강승현은 다시 방으로 되돌아갔다.

"커어어...."

김호정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내일 밤까지 잘 것 같다.

"아저씨, 일어나쇼. 아침이니까."

화악!

강승현은 암막 커튼을 걷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벌써 밥 먹을 시간이야...?"

"네. 우리도 피츠타 크랩 요리 맛 좀 봐야죠."

"흐어어어엄."

김호정은 크게 하품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살 파티는 놓칠 수 없지."

"뻘짓 그만하고 빨리 나오세요."

-강승현은 김호정과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테이블을 펼쳐두고 저택 마당을 연회 파티장처럼 꾸며뒀다.

"게살 파티!"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술 꺼내! 오늘 같은 날에 마셔야지!"

테이블에는 온갖 종류의 피츠타 크랩 요리와 시옐이 잡아온 세콰이어 오징어 요리가 진열되어 있었다.

찜 요리, 게살 수프, 칠리 크랩.

심지어 밀가루를 넣어 만든 크랩 케이크까지.

"아직 많이 있으니까 실컷 들어요."

"나는 게살 크림!"

"칠리 크랩 어딨어?"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로 게살 요리를 접시에 담고 있었다.

"난 오징어 요리부터 먹어볼래. 한국 오징어 요리랑 비슷하면 좋겠는데."

"전 게살 수프부터."

강승현과 김호정도 각자 마음에 드는 요리를 골랐다.

"강 힐러님! 김호정 님!"

접시에 요리를 담고 있는데 시옐이 다가왔다. 그녀는 접시 가득 요리를 담고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두 분 다 많이 드세요! 이번 싸움의 VVIP니까!"

"감사합니다."

"원래 피츠타 크랩 요리는 카마르에서 경사스러운 날에만 먹는 음식이거든요."

오늘 같은 날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다.

강승현은 접시를 가지고 빈자리에 앉았다.

"카타일러 가문의 일원이여, 모두 수고 많았다."

테이블 중앙에 앉은 헤카로가 자리에 앉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남들은 무의미한 행동이라 비웃었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카마르를 지켜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감시대를 설치해가며 호수를 감시한 카타일러 가문의 노력이 빛을 보인 날이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쓸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을 할 뿐이다!"

헤카로가 말을 마치며 잔을 들었다.

"그리고 강승현 힐러와 김호정 탱커! 두 사람은 우리를 위해 힘을 기꺼이 빌려주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카마르는 물론이고 카타일러 가문 역시 큰 피해를 입고 멸망했을 것이다.

"우리 카타일러 가문은 두 사람에게 입은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옳소!"

"정말 감사합니다!"

"힐러님이 시릴의 목숨도 구해주셨다면서요!"

"은인이야, 은인!"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야, 살다 살다 이런 경험도 해보네."

김호정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를 씰룩거렸다.

강승현은 말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두 모험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카타일러 가문을 위해! 카마르를 위해!"

"건배!"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환호하며 잔을 들었다.

강승현과 김호정 역시, 그사이에 껴서 술잔을 부딪쳤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

"맛 좋네요. 귀족들이 환장하는 이유도 알겠고."

고된 싸움을 끝내고 먹는 음식만큼 맛있는 건 없다. 강승현과 김호정뿐만 아니라,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 역시 행복한 얼굴이었다.

"피츠타 크랩 게살을 언제 이렇게 먹어보겠어."

"지금 아니면 못 먹지!"

"일단 먹어둬! 먹고 죽자!"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즐기던 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식사 중이셨군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카마르 경비대가 여긴 어쩐 일입니까?"

발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자 카마르 경비대가 찾아왔다.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카마르 영주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카마르 영주?"

"영주님이 여러분을 초청하고자 합니다!"

93. 영주의 초청 1

"여, 영주님이 우리를?"

"무슨 일로 찾으시는 걸까?"

"호숫가 사건 때문이겠죠."

아즐 대륙의 영주는 자기가 다스리는 도시와 그 주변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의무를 갖는다.

카마르 영주는 몬스터 습격을 막아준 것에 대한 보상을 내리기 위해 카타일러 가문을 초청한 모양이다.

"우리끼리 게살 파티 열어서 화가 나신 게 아니구요?"

"...그런 쪼잔한 일로 경비대를 파견하겠어요."

물론 권력을 내세워 사람들을 갈구는 악덕 귀족이 없진 않다. 아즐 대륙은 거지 같은 신분제 사회니까.

하지만 카마르 영주는 병사를 보내 카타일러 가문을 정중하게 초청했다. 적어도 나쁜 의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자세한 건 저 사람들이 알려줄 거 같네요."

"영주님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영주님의 서신...."

헤카로가 카타일러 가문을 대표해 영주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서신을 읽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주님께서 우리의 업적을... 인정해주셨군."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이 새벽에 침입한 몬스터와 목숨 걸고 싸워서 침입을 막아낸 사건.

카마르 영주 역시 그 소식을 접해 들었고, 카타일러 가문을 높게 평가했다.

"카마르를 지켜낸 일을 칭찬하며, 그에 맞는 포상을 내릴 테니 가문의 대표자와 강승현 일행을 초청한다고 적혀 있네."

평생 카마르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마법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

"영주님이 우리를 만나고자 하신다!"

"드디어! 우리 카타일러 가문이!"

"카마르에서 인정받았다!"

드디어 그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영주가 보낸 서신을 3줄 요약하자면 이렇다.

[너희가 새벽에 몬스터 잡았다며?]

[잘했다, 푹 쉬고 조만간 얼굴 좀 보자.]

[올 때 강승현 힐러와 일행도 꼭 데려올 것.]

결론은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소리다.

"영주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지. 지금 당장 가겠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헤카로는 카타일러 가문을 대표해서 영주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저도 가고 싶지만... 전부 몰려가면 난리 나겠죠."

"다녀오십시오, 형님!"

"우리는 큰아버지 몫까지 크랩 요리 먹고 있을게요!"

다른 가족들은 기쁜 마음으로 헤카로를 배웅했다.

정말 사이좋기로는 카마르 1위인 집안이다.

"강승현 힐러, 김호정 탱커. 자네들도 어서 준비하고 오게나."

마차에 올라탄 헤카로가 강승현에게 말했다.

영주는 카타일러 가문뿐만 아니라 강승현 일행도 함께 초청했기 때문이다.

"아.... 우리도 가야 하나?"

"당연히 가야죠."

두 사람 역시 이번 습격 사건의 VVVIP 멤버.

오지 말라고 해도 가주는 게 예의다.

강승현 일행은 마차에 올라탔다.

-"음, 카마르 영주는 어떤 인간이려나."

"저도 만난 적은 없고 듣기만 했지만...."

카마르 영주에 대한 이야기는 마탑 교수 탄셀한테 간단히 들은 적이 있었다.

진홍의 마탑 출신.

원소 마법을 마스터한 천재 마법사.

마법 실력만 놓고 본다면 현 마탑 마스터인 로케르와 맞먹는 인물이다.

"마탑 마스터랑 맞먹을 정도라니."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다른 마법사들처럼 자만하지 않고 노력하는 인물이래요."

"오, 의외로 좋은 녀석이었구만."

엄청난 재능을 가진 천재 마법사인데 잘난 척하지 않고 성격까지 좋은 영주.

아즐 대륙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대로 좋은 사람이에요. 딱 한 가지 큰 결점이 있어서 그렇지."

"딱 한 가지 큰 결점? 그게 뭔데?"

"그게...아 도착했다."

"일단 내리자구."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영주의 거처에 도착했다.

강승현 일행이 마차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어서 오게! 어서!"

저 멀리서 카마르의 영주, 가바인 디 알테가르츠가 달려왔다.

"자네들이 우리 카마르를 구했다지? 몬스터 놈들이 성을 무너트릴 뻔했다면서!"

그것도 울면서 말이다.

"여, 영주님.... 진정하시지요."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는...!"

가바인 영주(만 74세)는 당황한 헤카로를 붙들고 엉엉 울어댔다.

"뭐, 뭐야. 영주라며?"

"정말 듣던대로군요."

그 꼬라지를 보던 김호정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한 가지 큰 결점이라는 게...."

가바인 디 알테가르츠.

남들보다 몇 배나 많은 마력량과 엄청난 마법 재능을 가졌고, 뛰어난 인성을 가진 카마르의 영주.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모든 걸 주지 않았다.

"네. 울보에 겁쟁이예요."

그는 카마르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 재능을 가졌지만, 동시에 카마르에서 가장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물건이 떨어지기만 해도 놀라고, 작은 벌레만 봐도 벌벌 떨면서 무서워한대요."

"그런 겁쟁이가 어떻게 대마법사가 돼?"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설명만 들으면 세상천지의 모든 걸 겁내는 쫄보였으니까.

"너무 겁이 많아서 다 배웠으니까요."

"다 배웠다고?"

"불이 무섭다고 물 마법을, 지진 나는 게 무섭다고 땅 마법을, 바람 부는 게 무섭다고 공기 마법을...."

가바인 영주는 누구보다 겁쟁이지만, 마탑 마스터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마법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온갖 마법을 배우고 그걸 또 마스터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이런 느낌."

"공 맞는 게 무서워서 피해 다니다가 우승한 피구 게임 같네."

거기다 다른 마법사들은 정신력이 떨어지면 마법을 쓸 수 없지만, 가바인 영주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원래 멘탈이 안 좋은 인간이라 정신력 하락을 무시하고 마법을 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상 최강의 마법사...어디까지나 이론상이지만."

강승현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회의실에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이번 사태에 대해 회의 중이었거든."

강승현 일행은 가바인 영주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자네 말이 맞아. 나는 겁쟁이야....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가바인 영주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카마르를 살기 좋고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 노력했네! 내가 살고 있으니까!"

카마르가 서부 최고의 안전 도시가 된 이유도 다 이 인간 덕분이었다.

말 그대로 안전과민증 환자.

"그래서 마탑이 복구될 때까지 우리끼리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새벽 사이에 몬스터가 침입해 오다니!"

지금 카마르는 임시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24시간 교대 근무를 서고 있었다.

임시 결계는 마법사들이 한순간이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그대로 소멸해 버리니까.

"놈들은 일부러 새벽 시간을 노리고 습격한 모양이지만, 여러분의 활약으로 실패했지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늙고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경비대의 눈을 피하려고 안개 마법까지 사용한 걸 보면 정말 작정하고 공격해왔다는 뜻이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우리 카마르는 정말 망했을 거야...."

가바인 영주가 강승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카마르 성벽이 무너진다면, 임시 결계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임시 결계까지 사라진다면 카마르는 더 이상 외부 침입을 막을 수단이 없다.

영주의 말대로 강승현과 카타일러 가문은 카마르의 모든 것을 지켜낸 셈이다.

"이번 일로 깨달았네. 전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카마르는 마탑 결계에 너무 의존하고 있단 말이야!"

가바인 영주는 뭔가를 결심한 듯 주위의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늘 말했지 않소? 혹시 결계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한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고!"

"면목 없습니다...."

마법사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바인 영주는 예전부터 대책을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계속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 일은 모두가 내 뜻에 찬성하는 걸로 알겠네."

"저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투자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마법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계약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걸 만족스럽게 보던 가바인 영주는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확실해졌네. 우리는 마법의 도움 없이도, 혹은 최소한의 마법으로 카마르를 지킬 수단을 만들어야 해."

카마르에도 영주가 관리하는 경비대가 있긴 하지만 도시 규모에 비해 너무 작고 부실했다.

귀족들이 마탑의 결계만 믿고 제대로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병사들은 다 외부인들이지."

"아무래도 카마르 사람들은 마법사를 목표로 하다 보니...."

"그래서 나는, 카마르 최초의 기사 가문을 만들 생각이네."

지금까지 카마르에는 마법사 가문만 존재할 뿐, 기사 가문은 아직까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비대와 병사 취급이 나빴던 것이다.

"그 말은, 경비대를 개편해서 기사단으로 키우시겠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 업무는... 카타일러 가문에 맡기지!"

가바인 영주는 카타일러 가문을 정식 기사 가문으로 인정하고, 카타일러 기사단 창설을 허가했다.

카마르 최초의 기사단이 탄생한 것이다.

"기사단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전부 카마르에서 책임지겠네. 자네는 아무 걱정 없이 인재 양성만 생각하게나."

"영광입니다!"

헤카로가 감격한 얼굴로 소리쳤다.

카마르 병사가 되는 걸 목표로 삼던 가문인 만큼, 이것보다 더 값진 보상은 없다.

"와, 가문이 통째로 떡상하셨네!"

"내 대에서 우리 가문 평생의 숙원이 이뤄지다니.... 이건 전부 두 사람 덕분일세."

이제 카마르의 그 어떤 마법사도 카타일러 가문을 낮잡아볼 수 없을 것이다.

헤카로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혹시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하게."

"괜찮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영주님이 주실 거라서요."

카타일러 가문뿐만 아니라 강승현 역시 몬스터의 습격을 막고 카마르를 구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카타일러 가문은 카마르를 구한 보상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죠. 그렇다면 카마르를 구하는 데 협력한 모험가도 그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겠네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원하는 건 카타일러 기사단에 맞먹는 거대한 보상이었다.

94. 영주의 초청 2

"허허, 겸손하구만!"

강승현의 말을 들은 가바인 영주는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자네야말로 카마르를 구해낸 영웅 아닌가?"

몬스터의 침입을 가장 먼저 눈치채고, 거대한 피츠타 크랩을 쓰러트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모험가.

강승현이 없었다면 카마르를 지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카타일러 가문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사람은 저 친구였지.'

귀족들은 실력 있는 모험가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건 가바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친구가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카마르가 훨씬 안전해질 터!'

모험가들은 돈과 명예만 쥐여주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법.

가바인 영주는 값비싼 아이템과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강승현을 스카웃하기로 했다.

"보상이라면 걱정 말게. 자네 마음에 쏙 들 만한 것들로 준비했으니까."

가바인 영주가 손짓하자 그의 하수인들이 화려한 보물상자를 가지고 왔다.

상자 안에는 진귀한 레어 아이템들이 담겨 있었다.

"한 알만 먹어도 허기와 피곤함이 사라지는 에브렌 올리브, 스태미나를 영구적으로 늘려주는 황금빛 활력 버섯 포션, 마력 회복량을 늘려주는 잼 애뮬릿 새벽 바다의 블루 토파즈, 마법 공격력을 대폭 올려주는 뮤텔리온의 반지...."

그 외에도 수백만 골드가 넘어가는 각종 레어 아이템들이 가득했다.

일반 모험가들은 만져보기는커녕 평생 구경도 못 해볼 물건들이다.

"마음에 드는 걸 가져가게나. 전부 가져가도 괜찮네."

"하나같이 비싼 아이템들이네요."

"이게 다가 아닐세. 자네도 슬슬 평민 신분을 벗어나야겠지."

가바인 영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알테가르츠 가문에서 자네를 후원해주겠네. 나와 함께 카마르를 안전하게 지키지 않겠나?"

귀족의 후원. 그것도 보통 귀족이 아니라 카마르 최고 권력 가문의 힘을 빌릴 기회.

"자네 같은 인물이라면 카마르의 귀족이 될 자격이 있어."

모험가라면 절대 거절할 리 없는 제안이었다.

'최고급 아이템에 알테가르츠 가문의 후원. 이거라면 그 어떤 모험가라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

가바인 영주는 자신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걸 기대하며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레어 아이템에 귀족의 후원이라...."

하지만 강승현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당황한 가바인 영주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음.... 그, 왜, 왜 그러나?"

"좋은 보상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아니네요. 거절하겠습니다."

"뭐, 뭣이라?"

"돈 몇 푼 받겠다고 귀족 비위 맞추면서 일하는 건 딱 질색이라."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가바인 영주는 몰랐겠지만, 그는 최근에만 귀족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한 전적이 있었다.

'어, 어...어떻게 모험가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가바인 영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일개 모험가가 귀족의 후원 제안을, 그것도 카마르 최고 권력 가문을 거절하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생각해보니 저 친구는 혼자서 진홍의 마탑 동력 시스템을 쓰러트린 괴물이었지....'

강승현은 몬스터로 변이한 진홍의 마탑 동력 시스템을 쓰러트리고 마탑 붕괴를 막아냈다.

그 말은 진홍의 마탑 전체와 싸워서 이긴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 친구의 정체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안티 매지션!'

강력한 마법 방어력과 마력 저항력을 가진 안티 매지션이 아니고서야 마탑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

가바인 영주는 강승현을 모험가로 위장한 안티 매지션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내 후원을 거절했던 거구만. 안티 매지션은 마법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제야 앞뒤가 맞다. 멋대로 결론 내린 가바인은 초조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것도 모르고 부하가 되라고 했으니 화가 많이 났을 게야.... 안티 매지션하고 틀어져서 좋을 게 없는데.'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마탑을 혼자 상대할 정도로 강한 안티 매지션은 이길 수 없다.

겁 많고 소심한 영주는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내, 내가 크게 실언했네. 자네 같은 실력자가 나처럼 답답하고 한심한 인간 밑에서 일하는 건 껄끄럽겠지...."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요."

"그런 관계로 보상은... 자네가 원하는 걸 준비해주겠네. 어떤가?"

고민 끝에, 가바인 영주는 강승현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다.

괜히 쓸데없는 걸 줬다가 더 빡치게 만들면 안 되니까.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한테 선물을 주고 싶을 땐, 갖고 싶은 걸 주는 게 맞다.

'영주가 준비한 보상은 나쁘진 않아. 확실히 신경 써서 준비하긴 했어.'

귀족 후원은 그렇다 치고, 이번에 가바인이 준비한 보상은 일반 모험가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거기다 쩨쩨하게 아이템 하나만 던져준 리웬과 달리 박스째로 가져가라며 내밀기까지.

'하지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아니지. 황금빛 활력 버섯 포션은 탐나지만....'

강승현이 원하는 보상은 이런 아이템이 아니었다. 귀하긴 하지만, 당장은 필요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구할 수 있었으니까.

'나 혼자선 구할 수 없는 걸 뜯어내야 해.'

지금 여기서 받아내야 하는 건 카마르 영주한테서만 얻어낼 수 있는 특별한 보상이다.

'그것도 아주 비싼 녀석으로 말이지.'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보상을 요구하기 전에 설명할 게 있습니다."

"설명?"

"저랑 김호정 씨는, 카마르에서 조금 떨어진 하인드 마을이란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인드. 아즐 대륙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

강승현 일행이 거점으로 삼은 지역이다.

"하인드 마을?"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대도시에 비하면야 촌구석이니까요."

"나는 카마르 밖으로 잘 안 나가니까...."

가바인 영주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겁이 워낙 많아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 카마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하인드는 작은 마을이긴 해도 여행객들이 꼭 들러야 할 마을입니다."

북쪽과 동쪽은 삼림과 산악지대.

서쪽은 정글과 늪지대.

남쪽은 숲과 넓은 평야지대.

하인드 마을은 이런 곳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지리 특성상 여행객들의 휴게소나 다름없는 마을이다.

"인적 드문 곳에 있고 근처에 몬스터가 많아서 모험가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죠."

몬스터가 많아서 의뢰가 넘치다 보니 모험가들에겐 벌이가 좋고, 여행객들은 쉬었다 갈 수 있어서 좋고.

크기는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마을이다.

"그래서 모험가 조합 놈들은 일찌감치 건물을 세워놨고, 교단 놈들도 자기 세력을 넓혀가고 있죠."

현재 하인드 마을의 가장 큰 외부 세력은 아이베르 교단과 모험가 조합.

두 세력은 사이좋게 사람들을 부려먹고 있다.

'위치적으로 중요한 마을이긴 한데, 규모가 작아서 이것들이 유독 활개 친단 말이지.'

특히, 모험가 조합 지부장 리웬 허셔.

놈은 실력도 없는 주제에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하인드 마을 주민들과 모험가를 착취하는 중이다.

강승현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진 방법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 뒀지만, 슬슬 한 방 먹여줘야지.'

지금 하인드 마을에 필요한 건 기존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이다.

"이런 중요한 마을에 모험가 조합하고 교단만 있다는 건 좀 그렇죠?"

"그럼 자네가 하려는 말은...."

"진홍의 마탑과 협력해서 하인드 마을에 마법협회 지부를 건설해주세요."

마법협회.

마법 물품을 매매하고 관련 의뢰를 받거나 숙소를 빌릴 수 있는 마법사 전용 시설.

지금 하인드 마을에는 없는 건물 중 하나다.

"마법협회를?"

"네. 보상으로 하인드 마을 지부를 원합니다."

마법협회는 일단은 모험가 조합과 협력하는 우호관계지만, 솔직히 사이가 그리 좋진 않다.

마법사들이 워낙 잘난 척이 심해서 일반 모험가들을 낮잡아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둘은 라이벌 경쟁업체니까.'

그래서 서로 의뢰가 겹치기라도 하는 날엔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싸우는 일도 많았다.

'하인드 마을에 마법협회가 생긴다면 모험가 조합이 지금처럼 활개 치긴 힘들지.'

마법협회도 그렇게 멀쩡한 세력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모험가 조합이 모든 걸 해먹는 상황에선 이보다 쓸만한 놈들이 없다.

'거기다, 마법협회는 모험가 조합과 경쟁하긴 해도 증오하진 않지만....'

교단은 마법협회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고.

마법협회 역시 교단을 머리 빈 광신도 집단이라며 혐오한다.

'중앙 왕성의 제재만 없었다면 진작 전쟁 났겠지.'

하인드 마을에 마법협회가 생긴다면 모험가 조합은 몰라도 아이베르 교단은 100% 견제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협회 지부 건설은...."

"모험가 조합보다 허가받기 어렵다는 건 알아요."

마법협회는 건물 특성상 건설 비용이 많이 들고, 허가받기 어렵다.

그래서 쉽게 볼 수 있는 모험가 조합과 달리 주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시설이었다.

'모험가 조합처럼 마구 지어대면 너무 싸구려 같다나 뭐라나. 재수 없는 놈들.'

흔하고 널린 모험가 조합과는 다르다는 우월감.

강승현은 그런 마법협회의 방침을 건방진 마법사 집단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마르 영주와 마탑 마스터가 협력하면 쉽게 허가받을 수 있겠죠."

마법사들의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와 진홍의 마탑을 대표하는 마스터.

'마탑과 카마르는 마법협회에 지원금을 아주 많이 내고 있다고 들었거든.'

이 둘이 손잡고 밀어붙인다면 아무리 시골 마을이라도 마법협회 건설 허가를 받아낼 수 있다.

"제 부탁이라고 하면 마스터 로케르도 거절하진 못할 겁니다."

진홍의 마탑 역시 강승현한테 빚이 있다.

카마르 역시 빚이 생겼으니 둘이 사이좋게 움직이면 될 것 같다.

"하긴, 자네는 우리 카마르와 진홍의 마탑을 구해냈으니... 요청할 만한 자격이 있지."

강승현의 이야기를 듣던 가바인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안티 매지션이 마법협회를 지어달라고 하다니, 특이하구먼.'

여전히 안티 매지션으로 착각한 채로 말이다.

"마법협회 건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추진하겠네. 하지만 시간은... 조금 걸릴지도 모르겠군."

가바인 영주는 조심스럽게 강승현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고 싶어도 우리가 이래저래 어수선한 상황이다 보니...."

"천천히 진행하셔도 됩니다. 하인드 마을에 마법협회를 짓는다는 공고문만 먼저 보내주세요."

"알겠네. 그 정도는 쉽지."

그렇게만 해도 모험가 조합과 교단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발광할 것이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마법협회가 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안 했을 테니까.

'그 자식들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네.'

즉, 강승현이 원했던 진짜 보상은 교단과 모험가 조합에 먹일 엿이었다.

"이야, 강 선생! 보상으로 돈이 아니라 건물을 받아버리네."

"도시를 구했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죠."

뒤에서 구경하던 김호정이 감탄한 얼굴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온갖 보상을 구경했지만, 건물을 받아가는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그것도 교단이랑 조합 놈들 한 방 먹일 보상이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남 엿 먹이는 게 취미니까요."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강승현은 남을 모욕 주면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 타입이다.

그래서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았다.

"하여간 성격 참 독특해요."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의도는 불순하지만, 결과적으로 강승현의 고약한 취미 덕분에 하인드가 좀 더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

"다음에 또 도시 구하면 그때는 하인드 마을에 집 좀 지어달라고 해. 난방 되는 녀석으로."

"그럴까요."

두 사람이 이런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던 참이었다.

"다들 여기 있었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헤카로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뭔가를 잔뜩 들고 있었다.

"손에 그건 뭡니까?"

"임시로 만든 카타일러 기사단 배지일세."

"기사단 배지?"

"우리 가문이 정식 기사단이 됐으니, 기사단원을 상징하는 증표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헤카로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에게 스킬 스크롤을 보여주었다.

'종이를 찢어서 스킬을 얻는 일회성 스크롤이네.'

카타일러 기사단 배지 역시 힐러 배지나 크림슨 엠블럼과 마찬가지로 소환물 형태로 생성하는 특수 스킬이었다.

카마르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했다고.

"아, 그렇지. 두 사람한테도 나눠주겠네."

"'저희한테요?"

"그래도 돼? 우린 카타일러 사람도 아닌데."

"자네들은 우리 기사단의 은인 아닌가. 당연히 받을 자격이 있지!"

헤카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스크롤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카타일러 기사단에 없어선 안 될 창립멤버라면서.

"앞으로 카타일러 기사단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게나.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니까."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감사인사를 하며 스크롤을 받았다.

급하게 만들어서 종이는 투박하고 새겨진 글씨는 거칠었지만, 신생 기사단 카타일러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가만, 이게 기사단원을 상징하는 증표니까....'

스크롤을 꼼꼼히 살피던 강승현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습득하면 카타일러 기사단을 멤버십 리스트에 등록할 수 있는 건가?'

오늘 막 창설됐지만, 카타일러 기사단도 어엿한 아즐 대륙의 단체. 어쩌면 [멤버십 스킬]을 받을지도 모른다.

'바로 습득해볼까?'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스킬 스크롤을 찢었다.

95. 카타일러 기사단

찌이익!

스크롤을 찢은 순간,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킬(카타일러 배지) 획득]

그와 동시에 강승현의 스킬창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다.

[카타일러 배지]

[카타일러 기사단 소속임을 증명한다.]

'일단 스킬은 손에 넣었고.'

[카타일러 배지] 역시 [크림슨 엠블럼]과 마찬가지로 스킬 자체에는 아무 능력 없는 관상용이다.

하지만 차원이동자는 이 스킬을 이용해서 [멤버십 리스트]를 활성화할 수 있다.

'진홍의 마탑 때는 로브를 입고 써야 하는 조건이 있었지만, 유니폼도 없는 신생 기사단은 상관없겠지.'

강승현은 카타일러 기사단 배지를 소환했다.

파아앗!

손 위에 생겨난 푸른빛이 방패 형태의 배지로 변하면서,

[업적 달성!]

[멤버십 리스트에 <카타일러 기사단>이 추가됐다!]

업적 알림과 함께 신규 단체 등록을 알리는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현재 소속된 단체]

-[진홍의 마탑]

-[카타일러 기사단]

[등록 조건]

-[카타일러 기사단에 가입한다.][달성]

'이걸로 두 번째 단체도 등록 완료. 진홍의 마탑에 비하면 조건이 쉽군.'

조건이 쓸데없이 복잡하고 많던 진홍의 마탑과 달리, 카타일러 기사단은 심플하게 [기사단에 가입한다] 밖에 없었다.

'카타일러답네.'

배지를 얻기만 하면 동료로 인정해주는 간단한 조건. 단순명쾌한 게 카타일러 기사단에 딱 어울린다.

"임시 배지라도 등록하는 데 문제없네요."

"오. 그럼 나도 해봐야지."

찌이이익!

뒤에서 구경하던 김호정도 스크롤을 찢었다. 마찬가지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스킬창에 [카타일러 배지]가 추가됐다.

"됐다! 멤버십 리스트도 해금됐어!"

김호정은 기쁜 얼굴로 자신의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카타일러 기사단에 소속되면서 그 역시 [멤버십 리스트]를 쓸 수 있게 됐다.

'별문제 없이 등록된 건 좋은데, 하나 신경 쓰이는 게 있단 말이지.'

분명 카타일러 기사단은 오늘 카마르에서 만들어진 집단이다.

그런데 시스템에 카타일러 기사단과 관련된 업적이나 스킬이 있다는 게 조금 신경 쓰였다.

'관리자가 차원이동자를 지켜보다가 새 스킬을 만드는 건가? 아니면 시스템이 알아서 그때그때 제작하는 건가.'

진실은 관리자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근데 우리, 기사도 아닌데 기사단에 들어가도 되려나."

"뭐 어때요. 나한테 도움만 되면 그만이지."

이제 하다 하다 야매 기사단원 타이틀까지 얻어버린 힐러.

하지만 강승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야매 힐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먹는 게 야매 힐러의 생존 철학 6번이라서."

"하긴, 선생은 쓰레기도 재활용하는 남자였지."

"우선 업적 보상부터 확인하죠."

강승현은 이번에 달성한 업적을 확인했다.

[업적 달성 : 카마르의 방패]

[카타일러 기사단에 가입할 경우 달성.]

"업적 이름은 카마르의 방패네요."

"늘 생각하는 건데, 이런 이름은 관리자가 하나하나 일일이 짓는 걸까?"

"그러겠죠. 그 녀석 아니면 누가 상태창에 간섭하겠어요."

[보상 수령]

강승현과 김호정은 보상 버튼을 눌렀다.

"진홍의 마탑 때는 젬 애뮬릿을 줬지? 이번엔 뭘 주려나."

"뭐가 됐든 룰렛만 아니면 좋겠는데."

천만다행으로 이번엔 사악한 룰렛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확정 보상이라는 뜻이다.

"조용하네요. 룰렛은 아닌가 봅니다."

"다행이다. 또 타르르르 하는 소리 들렸으면 울었을 거야."

안심한 두 사람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카타일러 배지>에 옵션이 추가됩니다.]

[카타일러 배지]

[카타일러 기사단 소속임을 증명한다.]

[이 스킬을 소지할 경우 이하 효과를 받는다.]

-[물리 방어력 +10%]

-[마법 방어력 +15%]

-[체력 +2.5%] [스태미나 +2.5%]

새로 추가된 옵션은 방어력 상승과 체력, 스태미나 상승. 전부 야매 힐러가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능력치들이다.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네요. 쓸데없는 마력 스탯은 없어서."

"와, 아즐 대륙 사람들이 그 말 들으면 기겁하겠네."

"누군가에겐 보물이라도 나한테는 쓰레기인 물건도 있는 법이죠."

"...그 말, 보통 반대로 쓰는 거 아냐?"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강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업적 보상 확인은 끝났고. 이제 남은 건 멤버십 스킬."

"드디어 멤버십 스킬이 내 손에!"

두 사람은 멤버십 리스트를 확인했다.

[※카타일러 기사단 멤버십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하세요.]

[카마르 수호대]

[카타일러 야간 전투 가이드]

[기사의 기본]

[기초 체력 훈련]

[갑옷 착용법]

이번에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5개.

당연하지만 기사용 스킬이 대다수였다.

"선생은 뭐 고를 거야?"

"글쎄요. 대부분 스태미나를 올려줘서, 뭘 골라도 손해 볼 건 없는데...."

잠시 고민하던 강승현은 스킬 하나를 선택했다.

"저는 이걸로 하려구요."

강승현이 선택한 스킬은 [카타일러 야간 전투 가이드]. 이름 그대로 야간 전투에 꼭 필요한 것만 꾹꾹 눌러 담은 스킬이다.

[카타일러 야간 전투 가이드]

[늦은 시간에도 카마르를 안전하게!]

[야간 투시 +10%][야간 은신 +10%]

[체력 +5%][스태미나 +5%]

[야간 활동 시 이하 효과를 받습니다.]

-[스태미나가 약간 느리게 소모됩니다.]

-[몸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감소합니다.]

-[기척을 감지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스태미나 소모를 늦춰주는 능력이 있구나!"

"그것도 마음에 들지만, 이걸 선택한 이유는 [야간 투시] 옵션 때문이에요."

힐러는 심야 치료할 일이 생각보다 많다. 아즐대륙은 낮보다 밤이 위험한 만큼 부상자도 주로 밤 중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깜깜한 숲이나 산속에서 남을 치료하는 건 쉽지 않죠."

"일단 환자가 보여야 치료를 할 테니까."

일반적인 힐러들은 라이트 스킬이나 힐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 어둠을 몰아내고 부상자를 치료한다.

하지만 강승현은 힐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램프를 따로 준비해야 했지만,

"새벽에 잠 안 자고 카마르를 지킨 보람이 있네요."

이제는 야간 투시를 얻었으니 어두운 곳에서도 편하게 치료할 수 있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스킬창을 바라보았다.

'그 외에도 은신이나 소음 감소, 기척 감지. 하나같이 좋은 옵션들뿐이군.'

나머지 옵션들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밤에 안 자고 뻘짓하는 사람이라면 강력 추천.

"하긴, 요 며칠 밤마다 잠 안 자고 싸우긴 했지. 난 다른 거 골랐지만."

"뭐 골랐는데요?"

"이거."

[기초 체력 훈련]

[카타일러 기사단에 입소한 신참 기사단원을 위해.]

[체력 +5%][스태미나 +5%]

[공격력 +10%][방어력 +10%]

[타인을 보호할 때 추가 방어력 +5%]

[음식 효율 +0.02%]

김호정이 선택한 건 [기초 체력 훈련].

언뜻 봐선 기본적인 스탯을 간단하게 올려주는 스킬이지만, 마지막에 [음식 효율] 옵션이 붙어 있다.

"괜찮은 거 고르셨네요."

"야간 투시는 나한테 필요 없고, 여기서 살다 보니 이거저거 먹을 일이 많으니까...."

[음식 효율]은 뭐든 먹기만 해도 추가 보너스를 주는 능력이다.

체력과 허기만 채워주는 평범한 음식은 물론이고 버프 요리를 먹을 때도 효과를 받을 수 있다.

"저도 이거 고를까 고민했는데, 포션 마실 땐 효과를 못 받아서."

"사람이 포션은 매일 먹지 않지만 밥은 매일 먹잖아."

"저는 매일 마시는데요."

"포션 중독자나 할 법한 발언."

김호정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고 있었다.

"강승현 힐러, 마법협회와 연락이 닿았네!"

그때, 가바인 영주가 기쁜 얼굴로 달려왔다.

"엥? 벌써?"

"빠르네요."

"그러게.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강승현과 김호정은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둘이 한가하게 떠드는 동안, 카마르는 마법협회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것이다.

"하인드 마을 지부 건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이 왔네. 조만간 하인드 마을로 사람을 파견하겠지."

가바인은 우쭐한 얼굴로 떠들었다.

듣자 하니 마탑 마스터와 카마르 영주의 권력으로 허가를 가볍게 따낸 모양.

강승현은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뱉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본격적인 진행은 한 달 뒤에나 가능하겠지만."

"한 달 뒤?"

"아니 왜?"

"뭐, 자네들한텐 먼저 말해줘도 되겠군."

가바인 영주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임시 결계는 너무 불안정해. 약간의 틈만 생겨도 몬스터들이 침입해오지."

이번 몬스터 습격 사태는 강승현 일행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마탑이 언제 복구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더 강력한 결계를 발동할 생각이야."

"더 강력한 결계?"

"폐쇄 결계입니다. 임시 결계의 단점을 보완한 특수 마법이죠."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법사가 대답했다.

폐쇄 결계는 기존의 보호 결계보다 훨씬 강력해서 몬스터의 침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다.

"그런 대단한 마법이 있으면 진작 쓰지."

"근데 이제 와서 쓴다는 걸 보면 뭔가 단점이 있겠죠."

"강승현 님 말이 맞습니다. 폐쇄 결계는 강력한 만큼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임시 결계나 기존의 마탑 보호 결계는 몬스터의 침입만 막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하지만 폐쇄 결계는 일단 발동하면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모든 공격을 막아주는 대신, 사람들의 출입까지 막아버리죠."

말 그대로 카마르 출입을 폐쇄하는 마법.

외부인은 물론이고 내부인까지 통행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다고.

"지금 마법을 발동하면 결계 효과는 약 한 달간 지속될 겁니다. 그 안에 마탑을 복구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어 그럼, 폐쇄 마법이 발동하면...."

"우리도 한 달간 카마르에서 꼼짝 못 하는 거죠."

일단 폐쇄 결계가 펼쳐지면 누구도 도시에서 나갈 수 없다.

강승현 일행 역시 마찬가지다.

"호, 혹시 벌써 발동한 건 아니지?"

"마법진은 내일 가동할 예정이고, 발표는 오늘 오후 예정입니다."

"혹시 카마르를 떠나야 한다면... 지금 준비하는 걸 추천하겠네."

아직 폐쇄 마법을 발동하지 않았으니, 카마르를 떠날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96. 작정하셨구만

"오늘 안 떠나면 한 달이나 머물러야 한다니."

김호정이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만간 카마르를 떠날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2~3일 정도는 쉬었다 갈 생각이었다.

"며칠 푹 쉬고 출발하려 했는데."

푹 쉬기는커녕 짐 싸서 야반도주해야 할 판이다.

"강 선생.... 이거 어떻게 생각해?"

"한 달이나 머무르긴 그렇죠."

생각에 잠겨 있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일주일 정도라면 휴가받은 셈 치고 푹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은 아니다.

'딱히 급한 볼일은 없지만, 한 달 내내 도시에 갇혀있는 건 질색이라서.'

폐쇄 결계를 발동하면 카마르는 안전해지겠지만, 대신 모험가가 할 일이 사라져 버린다.

'쓰러트릴 몬스터가 없다면 치료할 환자도 없어지는 법.'

강승현은 치료할 환자가 없으면 포인트를 벌 수 없다. 거기다 여태까지 모아둔 포인트는 스킬을 새로 뽑느라 대부분 써버린 상태다.

'슬슬 떠나는 게 맞겠지.'

이젠 카마르에 남을 이유가 없다.

포인트를 벌 생각이라면 지금 빨리 떠나는 게 정답이다.

"한 달 내내 숨어 있는 건 성격상 못 할 짓이에요."

"나도 선생 말에 동의해."

김호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단 직접 움직이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당장 준비해서 떠나죠."

그들은 망설임 없이 카마르를 떠나기로 했다.

-"일단 노선을 다시 짜봐야겠네요."

"테이블 좀 빌립시다."

"아, 예예...."

촤르륵.

강승현은 테이블 위에 카마르 근방 지도를 펼쳤다.

"마차는 빌릴 수 없으니... 이제부턴 걸어가야겠지?"

"못 걸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금방 지치겠죠."

그냥 걸어가는 것도 피곤한데 중간중간 몬스터와 전투도 해야 한다.

거기에 모닥불 피우고 야외 취침까지.

"거기다 우리는 요리도 제대로 못 하니 정말 거지 같은 캠핑이 되겠는데요."

"도시락 사든가 요리사 하나 고용하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 밥도 부실한 걸 먹으면서 가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여행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강승현이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마을에서 마차를 빌리면 되지 않나 싶어서."

카마르야 호수 위에 지어져 있으니 다리를 폐쇄하면 마차가 다닐 수 없지만, 다른 마을은 아니니까.

"그래도 반나절은 걸어가야겠지만... 일주일 내내 걷는 것보다는 낫겠죠."

"근데 마부들이 무섭다고 마을 밖으로 안 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지금 피츠타 호수 주위는 마력에 이끌린 몬스터로 득실거린다. 거기다 마차는 소음 때문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돈을 많이 주면 한 놈 정도는 걸리겠죠."

"돈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정상인이면 돈을 줘도 싫다고 하겠지만,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반드시 돈에 미친 놈이 있는 법이다.

"가바인 영주님, 여기서 걸어갈 만한 마을 중에 마차를 빌릴 만한 곳이 있을까요?"

"으음...."

지도를 바라보던 가바인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 상황에 마차를 빌릴 만한 마을이라면...."

가바인의 손이 지도를 가리켰다.

"지금은 여기 트라코티 마을밖에 없네."

트라코티.

피츠타 호수 북쪽, 넓고 음침한 붉은 숲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트라코티에는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마차가 있지. 그걸 빌린다면 몬스터를 뚫고 갈 수 있을 걸세."

"그럼 그쪽으로 가야겠네요."

가바인 영주의 추천을 들은 강승현은 트라코티로 향하기로 했다.

"문제는 카마르에서 붉은 숲에 가기 위해선 피츠타 호수를 건너가야 한다는 점인데...."

강승현은 김호정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호수를 건너야 한다고...."

"그러려면 배를 빌려야겠죠."

"배를 타야 한다고...."

뱃멀미하는 김호정에겐 청천벽력같은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조, 좋아.... 나는 헤엄쳐서 갈 테니, 선생은 배 타고 날 쫓아와."

"피츠타 호수가 동네 수영장 크기라면 가능하겠네요."

안타깝게도 피츠타 호수는 호수 도시가 건설될 정도로 거대하다.

헤엄쳐서 건너려 했다간 중간에 지쳐서 익사할 것이다.

"그럼 기절하는 약이라도 만들어 줘. 호수 건널 때까지 자고 있을란다."

"좋은 선택이긴 한데, 그러다 몬스터 나오면 제가 김호정 씨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거든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싸울 때는 스태미나가 더 빨리 소모된다.

거기에 자고 있는 동료를 지켜야 한다?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다.

"물에 빠져 죽으면 답도 없잖아요."

"나 멀미약도 잘 안 먹혀.... 게임도 어지러워서 못 한다고...."

"그럼 이쯤에서 도움을 좀 받아야겠네요."

강승현이 미소지으며 가바인 영주를 바라보았다.

"제 보상으로 마법협회를 받았으니, 이번에는 김호정 씨 몫의 보상을 받고 싶은데요."

"보상?"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네. 제 동료 몫의 보상이요."

"아, 아니.... 보상이라면 마법협회로 끝난 게 아니었나?"

가바인 영주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강 선생하고 달리 마법사가 아니걸랑요. 마법협회가 생겨도 나랑은 상관 없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김호정 씨도 이번 습격에서 대활약을 해주셨거든요. 당연히 그에 맞는 보상을 주셔야죠?"

강승현 일행은 꿋꿋했다.

"이, 이번에는 뭔가? 설마 마탑 같은 걸 지어달라는 건 아니겠지?"

"마법협회에 비하면 싼 겁니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랑 김호정 씨가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때 필요한 아이템과 여비를 지원해주시면 좋겠는데요."

"그 정도는 괜찮지...."

가바인 영주는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비싸봤자 건물 짓는 것보다는 쌀 테니까.

"좋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게."

"방금 '뭐든'이라고 하셨죠?"

강승현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우선 식비."

먼 길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한 건 식량이다.

아무리 강한 모험가라도 배가 고프면 싸울 수 없는 법이니까.

"본격적인 식량 준비는 트라코티 마을에서 할 거니까 비상식량과 돈만 준비해주세요. 포션 박스 세트도."

"마력 포션은 필요 없으니까 안 줘도 돼."

오늘 당장 떠날 생각이라 따로 도시락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재료만 가져갔다간 음식물 쓰레기가 될 게 뻔하다.

"알겠네. 비상식량에 식비... 두 사람 몫이면 되겠는가?"

"그다음에는 인건비."

"인건비?"

"붉은 숲은 헤매기 쉽다고 들었습니다."

워낙 넓고 낮에도 음침한 곳이라 지리를 잘 모르는 외부인들은 길을 잃기 쉽다.

"우리를 트라코티 마을까지 안내할 안내인들을 구해주세요."

마탑 사태로 카마르에 발 묶인 사람 중에는 트리코티 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강승현은 그들을 안내인으로 고용할 생각이었다.

"대부분은 몬스터가 겁난다고 카마르를 떠나지 않으려 하겠지만, 한 명 정도는 마을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무려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잖아."

"혹시 없다고 해도, 우리가 호위해준다는 말과 함께 수고비를 챙겨주면... 없던 마음도 생기겠죠."

"아~ 이거 나라면 무조건 한다. 안 할 수가 없네 진짜."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고대부터 돈은 최고의 문제 해결책이었다.

"당연하지만 안내원 몫의 식비도 챙겨주셔야겠죠."

그리고 그 돈은 전부 카마르 영주가 대줄 예정이다.

"알겠네. 당장 사람을 풀어서 붉은 숲을 안내해줄 사람들을 찾겠네. 이거면 되겠는가?"

"아뇨. 아직 필요한 게 많네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수첩을 넘겼다.

"당연하지만, 호수를 건너려면 배가 필요하겠죠. 붉은 숲에 갈 수 있는 나룻배 하나 준비해주세요."

교통비 역시 카마르에서 지원받을 예정이다.

"알겠네. 배도 지원해주겠네."

"배는 저희끼리 저어 갈 테니까 사공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 한 번 쓰고 버릴 녀석으로."

강승현 일행이 호수를 건너고 나면 카마르는 폐쇄 결계를 펼쳐 도시를 봉쇄할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쓰고 버릴 배를 타는 게 낫다.

"알았네. 그럼 이 정도면 되겠는가?"

"아뇨. 아직 멀었죠."

"아직?"

"그냥 나가는 건 위험하잖아요."

지금 피츠타 호수는 몬스터 소굴로 변했다.

배를 띄우자마자 몬스터들이 공격해 올 것이다.

"그래봤자 생선 몇 마리일 텐데, 나나 강 선생이 회 떠버리면 되는 거 아냐?"

"우리야 괜찮겠지만, 배는 아니죠."

강승현 일행이 아무리 강해도 배가 몬스터의 공격을 못 버티면 호수를 건널 수가 없다.

혹시 배에 구멍이라도 나면 그대로 끝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마법사들이 나서야죠."

강승현은 수첩을 또 한 장 넘겼다.

"저희가 타고 갈 배에 인챈트 해주세요."

"배에 인챈트를?"

인챈트.

특정 아이템에 마법을 부여하는 스킬이다.

당연히 아이템의 크기가 클수록, 마법이 복잡할수록 난이도가 높아진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이템에 추가 옵션을 달아주는 스킬이지.'

보통은 오래오래 쓸 무기나 장신구에만 사용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강승현은 그런 기술을 일회용 배에 걸어 달라고 제안했다.

"사람을 태울 만한 배에 인챈트를 하려면 인챈트 파우더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텐데...."

"심지어 쓰고 버릴 쓰레기에?"

"인챈트 된 배는 카마르에도 몇 개 없습니다."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카마르 귀족들은 소리를 질러댔으나,

"호수에 띄울 거니까 방수 마법, 빨리 건너가고 싶으니 수중 이동 속도 증가 마법, 제 소중한 동료가 뱃멀미가 심한 관계로 멀미 방지 마법, 몬스터의 공격에서 버텨야 하니 방어 상승 마법과 물 속성 강화 마법에...."

강승현은 그들을 무시하고 미리 준비해둔 목록을 읽어나갔다.

"...해서 이하 마법이 전부 빠짐없이 부여된 일회용 나룻배를 구해주셨으면 하는데요."

"허어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인챈트를 잔뜩 받은 배를 일회용으로 쓰다니...."

마법협회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지출이 예상되는 상황.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영주 역시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한..."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그래서 안 된다?"

"아, 아니, 안 된다는 뜻은 아니고...."

강승현을 최강의 안티 매지션으로 착각하는 겁쟁이 영주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폐쇄 결계 펼치기 전에 가능하겠죠?"

"가능은 하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강승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다음, 영주를 뒤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어쩐지, 강 선생이 평소보다 덜 뜯어낸다 싶었는데. 작정하셨구만."

"도시 하나 구한 값으로 이 정도는 받아가야죠."

강승현은 매우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남에게 뭔가를 합법적으로 뜯어내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면서.

"근데 배가 준비될 때까지 우리는 뭐하지?"

"모험가 조합으로 가죠."

카마르를 떠나기 전, 모험가 조합에서 확인할 게 있다.

97. 떠나기 전에

영주의 저택을 떠난 강승현 일행은 다른 사람들한테 작별 인사할 겸, 헤카로와 함께 카타일러 저택으로 되돌아왔다.

"오셨다!"

"영주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카타일러 가문을 정식 기사단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강승현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카타일러 기사단에 대해 말해주자,

"우리 가문이... 기사 가문이 된다구요?"

"진짜? 진짜?"

"창고 열어! 술 더 꺼내!"

"축하 파티다!"

가문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타일러 기사단 창립 축하 파티를 해야 한다면서.

"다들 기뻐하는 와중에 죄송하지만."

"우리가 오늘 떠나야 하거든."

"버, 벌써요?"

"며칠만 더 쉬다 가시지...."

하지만 강승현 일행이 떠난다는 걸 알게 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조만간 카마르가 폐쇄되기 때문이다."

그때, 지켜보던 헤카로가 입을 열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두 사람이 한 달간 발이 묶이게 된다고.

"으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한 일주일이면 붙잡아보겠는데."

시릴도 시옐도 무척 아쉬운 얼굴이었으나, 결국 강승현을 붙잡는 걸 포기했다.

모험가를 한 달씩이나 폐쇄된 도시에 묶어 둘 수는 없으니까.

"혹시! 모험하다 무슨 일 생기면! 저희한테 연락하세요!"

"카타일러 가문, 아니 카타일러 기사단은 두 사람의 든든한 아군입니다!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그러더니 헤카로와 똑같은 소리를 하며 강승현을 돕겠다고 소리쳤다.

'집안 유전자 확실하네. 이렇게까지 닮을 필요가 있을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도 어엿한 카타일러 기사단 소속원이니, 카마르에 무슨 일 생기면 편하게 불러주세요."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사실 카마르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법사 놈들은 재수 없고.

그런데도 카마르를 돕겠다고 한 건,

'쓸데없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니까.'

카타일러 사람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크흡...!"

"선생님 같은 분이 있어서 오늘도 카마르는 안전합니다!"

시릴과 시옐은 크게 감동받았는지 눈물을 흘리며 강승현의 손을 잡았다.

곁에 있던 헤카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염치없지만, 혹시 여행하다가 괜찮은 인재를 발견하면 우리 기사단으로 보내주지 않겠나?"

지금 카타일러 기사단에게 가장 필요한 건 훈련생들이다. 헤카로는 강승현에게 기사단에 대한 입소문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카마르뿐만 아니라 피츠타 호수 주변도 안전하게 지키고 싶네. 카마르 사람이 아니더라도 열정과 끈기를 가진 청년이라면 누구든 환영이지."

카타일러 기사단의 목표는 카마르의 안전을 넘어서 피츠타 호수 자체를 지키는 것이었다.

덤으로 일반인을 괴롭히는 악질 마법사도 제재해서 카마르를 모두에게 안전한 도시로 만드는 게 꿈이라고.

"지금까지의 카마르는 마법사한테만 안전한 도시였으니까. 우리는 그걸 바꾸고 싶네."

"좋은 생각이네요. 발상이 마음에 들어."

강승현은 카타일러 기사단한테 얻어맞는 마법사들을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게살 파이하고 게살 스틱이에요. 중간중간에 출출하면 드세요."

"나중에 카마르가 멀쩡할 때 오시면 관광 안내 확실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강승현 일행은 카타일러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났다.

"우리 뭐 빠진 거 없지?"

"없네요."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강승현은 등을 돌려 카타일러 저택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의 감시대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카마르 외진 곳에 있는 조용한 집성촌이지만, 곧 카마르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되겠지.'

저들이 있는 한.

카마르는 마법이 사라져도 안전할 것이다.

-"아까 모험가 조합에 들른다고 했지?"

"네. 확인할 게 있어서요."

두 사람은 카마르 모험가 조합에 도착했다.

"의뢰하러 온 건 아닐 테고, 편지라도 보게?"

"편지도 확인해야겠지만...."

모험가 조합은 아즐 대륙 곳곳에 있어서 가족들이나 지인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다.

마을에 도착한 모험가들이 조합부터 달려가는 이유 중 하나다.

"그거 말고도 확인해볼 게 있어서요."

모험가 조합 안으로 들어가자,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직원들과 모험가들이 보였다.

"보상 받으러 왔습니다!"

"빨리 보상 줘요!"

"잠시만요! 잠시만!"

"이쪽에 줄 서주세요...."

지금 카마르 경비대만으로는 호수에서 기어나오는 몬스터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적당히 돈을 쥐여주고 모험가들에게 일을 맡긴 모양이다.

'돈 하나는 차고 넘칠 테니까.'

역시 부유한 마법사들의 도시다.

그래서 영주를 털어먹을 때 죄책감이 1g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어서 오세요! 카마르 모험가 조합입니다!"

"환영합니다! 지금 카마르는 특별 의뢰를 공고하고 있으니, 시간 나신다면 참여 부탁드려요!"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방문객들한테 인사하며 맡은 의뢰를 홍보하고 있었다.

정말 프로의식 하나는 엄청난 집단이다.

'근데 오늘은 의뢰를 하러 온 게 아니라서.'

강승현은 의뢰 게시판으로 향하지 않고 카운터의 안내원한테 다가갔다.

"원하시는 의뢰가 있다면 저쪽에서...."

"진홍의 마탑 소속원입니다."

"헉, 크림슨 엠블럼!"

강승현이 진홍의 마탑 엠블럼을 제시하자 안내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생각했다.

'위조품일리는 없지만, 이 사람한테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그러면 최소한... 최상급 마법사!'

한마디로 VIP 고객.

빠르게 결론 내린 안내원은 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화, 환영합니다! 모험가 조합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여기가 카마르 지부인 만큼, 모험가 조합은 진홍의 마탑 말이라면 설설 기곤 했다.

각종 의뢰는 물론이고 재능있는 마법사들도 전부 마탑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이번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의뢰를 맡기러 온 건 아니구요."

강승현은 고개를 돌렸다.

카운터 너머에 모험가들이 완료한 의뢰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저 뒤에 있는 건 종료된 의뢰서인가요?"

"네. 오늘 모험가님들이 완료한 의뢰서입니다."

"그럼 좀 볼 수 있을까요? 확인해볼 게 있어서."

"얼마든지요!"

안내원이 의뢰서 한 다발을 가져다주었다.

강승현은 테이블에 의뢰서를 펼쳐두고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음...."

"그건 왜 보는 거야?"

"호수에 출몰한 몬스터 목록을 보려구요."

의뢰서를 살펴보자, 지난 이틀간 호수에서 나타난 몬스터를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어디 어디."

의뢰서를 쭉 확인해본 결과.

동쪽이나 서쪽, 남쪽과 달리, 호수 북쪽 몬스터 퇴치 의뢰는 적은 편이었다.

"음? 북쪽에는 몬스터가 없나?"

"없지는 않아요."

간간이 호수 북쪽 몬스터를 퇴치하라는 의뢰서가 있긴 했다.

몬스터가 전혀 없진 않다는 소리다.

"하지만 대부분 지능이 낮은 물고기 몬스터들...."

"진짜네? 생선밖에 없잖아. 그리고 오징어 떼."

"파리얼이나 피츠타 어인, 물쥐 같은 지능 높은 몬스터들은 전부 다른 방향에서만 나타나고 있어요."

높은 지능 가진 몬스터들은 북쪽을 뺀 다른 장소에서만 나타나고 있었다.

"어, 어제 분명 피츠타 어인은 호수 북쪽에 서식한다고 시릴 그 친구가 그랬는데."

북쪽에 살아야 할 어인이 동쪽이나 서쪽, 남쪽에서 발견되는 상황.

처음에는 결계가 사라져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 몬스터들은 호수 북쪽에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중입니다."

"도망치고 있다고?"

"확실해요."

지금 몬스터들은 호수 북쪽을 기피하고 있었다.

"지금 호수 북쪽에 남아 있는 건 멍청한 물고기들이나...."

"육식성 민물 오징어 세콰이어 오징어뿐."

의뢰서를 전부 확인해본 결과, 그 외에 다른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시옐도 오징어를 한 보따리 잡아왔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붉은 숲에 가기 위해선 호수 북쪽에 배를 띄워야 하거든요."

"으음...."

이런 걸 알게 됐으니 조금 주의할 필요는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상한 걸 봤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한 번 쓰고 버릴 일회용 배에 온갖 인챈트를 덕지덕지 바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호수 북쪽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거기다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건. 우리가 카타일러 가문하고 함께 싸운 어인들."

어인 주술사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피츠타 크랩을 소환하고 죽었다.

"어인 주술사들은 쓸데없이 동료애가 넘치는 놈들이잖아요."

"그랬지."

"그런 놈들이 왜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제물로 바친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동료를 소중히 여기는 놈들이 서로서로를 제물로 바치다니.

"으음.... 그러게. 좀 이상하네?"

"뭔가 있는 건 확실하죠?"

"어.... 근데 이런 거, 카마르 경비대에 말 안 해도 돼?"

"처음에는 말하려고 했는데요."

폐쇄 결계를 발동하면 외부의 접근이 완벽하게 차단된다. 이제 와서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뭣보다 결계가 있으니 카마르는 안전할 것이다.

"괜히 조사하겠다고 들쑤시다 누구 하나 죽는 것보다는, 어차피 폐쇄 결계 펼칠 테니 모르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중에 마탑 통해서 보고할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카마르 안에 콕 틀어박혀 있는 겁쟁이들보다는... 밖으로 나갈 우리들이 걱정이지."

"제가 그래서 영주님한테 돈 좀 뜯어왔잖아요."

강승현은 펼쳐둔 의뢰서를 정리하고 안내원에게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네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혹시 제 명의로 온 편지나 엽서가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카마르를 떠나기 전, 강승현은 밀린 편지를 확인했다.

"네. 모험가님의 이름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강승현입니다."

"편지 확인을 위해 서류 제출 부탁드립니다."

서류를 작성해서 제출하자 안내원이 편지가 있다며 내밀었다.

"오, 편지 왔어? 누구야, 누구?"

"하나는 하인드 마을에서 온 라페이 씨의 편지."

강승현은 대충 훑어보고 구겼다.

맨날 똑같은 소리만 오기 때문이다.

[좋은 약재 구해오면 비싸게 쳐줌]

[언제든지 환영]

즉, 아즐 대륙식 스팸 메일.

읽어볼 가치도 없다.

"쓰레기 버리고...."

두 번째 편지 역시 하인드 마을에서.

보낸 사람은 루스 테이커.

[저 루스입니다 티나한테 편지 받았습니다]

[진짜 재밌었겠네요]

[나도 가고 싶네요]

[모험가 조합 죽어라]

[아, 80만 골드를 보상으로 맡겨놨으니]

[하인드 마을 지부에서 꼭 찾아가시길]

"모험가 조합 놈들은 의외로 편지 검열을 안 하나보네."

좀 잡소리가 적혀 있긴 했지만, 사촌 동생을 무사히 데려와 준 것에 대한 보상을 준비했다는 소리다.

"이건 반반하면 되겠네요. 나 40만, 김호정 씨 40만."

"아니.... 그 개고생에 비하면 너무 싸지 않아?"

"노예가 한 푼 두 푼 모아서 만든 돈이니까 용서해주죠."

세 번째 편지는 북부 출입국 관리소에서.

보낸 사람은 티나 퓨테인이었다.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티나입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조언을 받아 마검사의 길을 걷기 위해 북부 르진페로이를 향해...]

편지가 너무 길어서 요약하자면 북부에 막 도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오, 벌써 북부까지 갔어? 장하네."

"이쪽은 알아서 잘할 테니 신경 안 써도 되겠죠."

"그럼 나도 편지 확인이나...."

김호정이 편지를 확인하려던 찰나였다.

"강승현 힐러님."

카마르 경비대장이 강승현을 찾아왔다.

그는 아까, 카마르 영주의 명을 받고 헤카로와 강승현 일행을 데리러 온 사람이다.

"영주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부탁한 물건이 전부 준비되었으니 카마르 북문에서 뵙자고."

"알겠습니다."

드디어 카마르를 떠날 때가 온 것 같다.

98. 호수 북쪽 1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강승현은 경비대장을 따라 모험가 조합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건물 안에 꽤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좀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어.... 이 정도면 빨리 온 거 아냐?"

뒤따라 나온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3~4시간쯤 지난 상태다.

"우리가 부탁한 물건이 꽤 많았잖아. 거기에 배에다 인챈트도 해야 하고.... 그래서 대단한 줄!"

"물론 대단한 일이 맞긴 한데요."

일반 포션이나 가이드는 돈만 있으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인챈트 아이템을 제작하는 건 꽤 힘들다.

그러니 무척 대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맞긴 한데?"

"저희가 밤새워서 도시를 지킨 것에 비하면야 쉽죠."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리 힘들어봤자 이거보다 어려울까.

3~4시간 동안 미친 듯이 일해서 아이템 준비하기.

vs

새벽에 잠 안 자고 카마르로 몰려오는 몬스터랑 디펜스 게임하기.

'누가 봐도 후자가 훨씬 빡세잖아.'

전자는 후자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다.

"그건 그렇지. 우린 잠도 못 자고 싸웠으니."

"상대가 아무리 대단해봤자 우리만 못하다는 거죠."

강승현과 김호정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쪽입니다."

"알아요."

"오... 다들 모여 있네."

두 사람은 경비대장의 안내를 받고 북문으로 향했다. 거기엔 가바인 영주와 마법사 기타 등등이 강승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탁한 건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요구한 조건을 전부... 달성했네."

가바인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혹시나 해서 [관찰의 눈]을 써봤더니 [마력 고갈] 정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가진 마력을 인챈트에 전부 쏟아부어서 마력이 바닥난 모양이다.

'이 영감 제법인데. 솔직히 기대 안 하고 부탁한 건데.'

아무리 실력자라도 인챈트를 연속해서 시전하는 건 쉽지 않다. 거기에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이걸 성공했다는 건, 가바인이 엄청난 실력의 인챈터라는 소리다.

'이 정도면 좀 더 부려먹을 걸 그랬어.'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바인을 바라보았다. 가바인은 어쩐지 소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자네가 요구한 건 완벽하게 처리했네. 안내인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지."

"수고하셨어요. 마력이 고갈될 정도로 열심히 하실 줄은 몰랐는데."

"...."

"그럼 호숫가로 가죠. 배 상태도 확인할 겸, 안내인들도 만날 겸."

강승현이 카마르 북문을 통과하자 넓게 펼쳐진 피츠타 호수가 나타났다. 다른 곳과 크게 다를 거 없는 호숫가 풍경이다.

유달리 조용하다는 점만 빼고.

"진짜 요상하네. 남쪽이나 서쪽이나 동쪽은 개판 오 분 전이었는데."

김호정이 호숫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조용하면 오히려 수상하죠."

"...물풀 냄새만 풀풀 나."

"역시 뭔가 있긴 한가 본데요."

강승현 역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지금 피츠타 호수는 지능 나쁜 물고기 몬스터를 빼면 죄다 북쪽에서 도망친 상태다.

"그러게. 물이 오염된 것도 아닌데 살던 몬스터들이 도망갔잖아...."

김호정은 호숫물에 손을 담갔다.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했다.

"근데 뭐 어차피 당할 거라면."

강승현은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모르고 기습당하는 것보단."

그리고 주운 돌멩이를 던졌다 받더니, 호수를 향해 던졌다.

"뭐라도 알고 당하는 게 낫겠죠."

[투척★]

빠른 속도로 날아간 돌멩이가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사라졌다.

"강승현 힐러."

가바인 영주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네."

"저쪽에 있는 게 자네가 부탁한 배일세."

가바인 영주가 가리킨 곳에 작은 배 한 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준비한 짐을 실어나를 정도는 됐다.

'저 정도면 충분하지.'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자 나룻배 위로 각종 정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츠타 아드리나무로 만들어진 나룻배]

[가볍고 튼튼한 데다 잘 썩지 않는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 같다.]

배에 대한 간단한 정보는 물론이고,

[「물 속성 저항 +550%」]

[「수중 이동 속도 증가 +600%」]

[「물 속성 강화 +500%」]

[「방수 +550%」]

...[「내구도 강화 +600%」]

[「멀미 방지 +1000%」]

배에 걸려있는 인챈트의 상세 정보까지.

강승현은 나타난 정보를 꼼꼼히 확인했다.

'빠트린 건 없군. 인챈트 성능도 좋고.'

당장 출발해도 문제없는 상태였다.

역시 카마르 영주 특제 인챈트는 다르다.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배야?"

강승현이 배를 관찰하는 동안 김호정이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네. 아드리나무로 만든 배예요."

"저거 상태는 어때?"

"상태는 물론 좋구요."

상태가 좋다 못해 너무 좋아서 한 번 쓰고 버리기 아까울 정도다.

"그럼 가장 중요한 질문인데... 내가 타도 괜찮은 거지?"

"멀미 방지 플러스 1000%. 일반 보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안정성을 자랑합니다."

이 정도 인챈트면 배 위에서 5연속 재주넘기를 해도 멀쩡할 것이다.

김호정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아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혹시라도 빼먹진 않았을까 걱정했다구."

"안내인들을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이 배를 관찰하는 동안 병사들이 안내인을 데려왔다.

빨간 머리 남자와 빨간 머리 여자.

그리고 빨간 머리 꼬맹이까지.

이 3명이 붉은 숲에서 트라코티 마을까지 안내해줄 안내인 가족이다.

"마,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세 사람 모두 무척 긴장한 얼굴로 인사했다.

'긴장하는 게 당연하겠지.'

병사들은 물론이고 카마르 영주와 귀족들, 거기다 카마르를 구한 영웅과 한자리에 있는 상황이니까.

"만나서 반갑습니다.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강승현은 세 사람의 긴장을 풀어줄 겸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쪽은 탱커 김호정 씨. 제 동료입니다."

"다들 반갑네, 반가워!"

김호정 역시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인사를 끝낸 강승현이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저희 소개는 끝난 거 같고, 다들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주시죠."

빨간 머리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발릭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제 아내 데이지, 아이 이름은 루디. 저희 가족은 트라코티 마을에서 도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발릭 부부는 몸이 아픈 루디의 치료 겸 물건을 팔기 위해 카마르에 방문했다.

하지만 마탑 사태로 인해 발이 묶여버렸다고.

"볼일을 끝내고 평소처럼 돌아가려고 했는데 배편이 끊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탑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어쩔 줄 몰라 하던 참이었는데, 가바인 영주님께서 붉은 숲 길 안내 자원자를 찾으셨습니다."

발릭은 망설임 없이 자원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을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집에 아이들만 있어서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데이지가 루디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루디 말고 다른 아이들도 있는 모양.

"어이구, 집에 애들만 있으면 걱정되지. 집밥 안 먹고 군것질하니까."

김호정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정말 아저씨나 할 법한 발상이다.

"그럼 붉은 숲에서 트라코티 마을까지는 여러분에게 믿고 맡겨도 되겠네요."

"평소에는 몬스터와 도적들 때문에 늦은 시간에 돌아다닌 적은 별로 없지만...."

발릭은 무척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안 되나요?"

"아, 아뇨! 한밤중이라고 해도 가능합니다! 붉은 숲은 눈 감고 다녀도 문제없을 만큼 자주 다닌 곳이라."

"그거면 됐습니다."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치적거리는 건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여러분은 길 안내만 해주세요."

"그래그래. 몬스터랑 도적 떼 잡는 건 또 우리 전문이지. 모험가한테 맡기라구."

"그리고 길 안내에 대한 보수도 '확실하게' 지급할 테니."

강승현이 가바인 영주를 힐끔 쳐다봤다.

빨리 돈을 꺼내놓으라는 눈빛이었다.

"꺼내게나."

"넵."

가바인 영주의 명령을 받은 마법사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 품에서 돈 자루를 꺼냈다.

"요구하신 보수입니다."

"오, 꽤 많네."

꽤 묵직해 보이는 걸 보면 아즐 대륙 평민이 한 달은 놀고먹을 양으로 보인다.

물론 귀족 기준으론 푼돈이겠지만.

"이런 돈을... 저런 평민한테...."

그조차도 주기 아까운지 작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렇게 많이...?"

"이게 다 얼마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발릭은 주머니 속 돈을 보고 눈빛이 달라졌다.

"최, 최선을 다해 안내하겠습니다!"

발릭은 의욕 넘치는 얼굴로 소리쳤다.

역시 돈은 최고의 설득 수단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러분을 트라코티 마을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목숨 같은 건 안 걸어도 되고."

강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배 위에 올라탔다.

멀미 방지 인챈트 덕분인지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대신 노나 저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뒤따라온 발릭과 데이지가 노를 집어 들었다.

배 조종은 두 사람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물건들인데."

강승현은 배에 실은 물건을 확인했다.

요구한 물건이 하나도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다 확실하네요. 포션도 전부 진품이고."

"그걸 보기만 해도 알아?"

"제가 말 안 했나요?"

"안 했어. 처음 듣는다구."

"저 포션 판별 스킬 갖고 있거든요."

[포션 판별 - 스태미나]

[눈으로 보기만 해도 스태미나 포션을 구분할 수 있다.]

스태미나 포션을 하도 마셔서 달성한 업적 보상이다.

덕분에 다른 포션은 몰라도 스태미나 포션만큼은 믿고 마실 수 있다.

"그래서 스태미나 포션으로 장난질하는 녀석들을 몇 번 혼내줬죠."

"정말 별의별 스킬이 다 있구나...."

"뭐 혹시 더 빠진 건 없죠?"

"딱히 없음. 있다고 하면 내 멀미 정도!"

김호정이 배에 올라타며 말했다.

사람이 배 안으로 풀쩍 뛰어들었지만, 여전히 흔들림 없이 편안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강승현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지려나.'

강승현을 태운 배는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배에 걸어둔 인챈트 덕분이다.

촤아아아!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한동안 카마르에 올 일은 없겠군.'

뒤를 돌아보자 붉은 마탑을 감싼 붉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저녁노을의 영향으로 피츠타 호수가 붉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진홍의 마탑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네.'

-강승현 일행을 태운 나룻배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갔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쓰고 버릴 물건에 인챈트를 해달라니...."

"안 그래도 마법협회 건설과 마탑 복구작업에 돈이 많이 들어갈 예정인데 말이죠."

호숫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법사 몇몇이 투덜거렸다. 강승현이 카마르를 구해낸 영웅이긴 하나, 너무 과한 처사였다면서.

"자네들은 뭘 모르는구만!"

하지만 가바인은 몸을 덜덜 떨었다. 강승현을 안티 매지션으로 착각하는 그에겐 어느 때보다 두려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력이 바닥난 것까지 눈치채다니.... 여, 역시 어마어마한 강자가 틀림 없어!'

대마법사쯤 되면 마력 고갈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가바인은 자신이 마력 고갈이라는 걸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강승현은 그걸 보란 듯이 간파한 것이다.

"그자는 나조차도 이길 수 없는 괴물일세! 입조심하게나!'

"여, 영주님도 이길 수 없다구요?"

"그렇게나 강한 모험가였다니...."

"왠지 마력이 낮다 싶었는데, 일부러 마력이 적어 보이도록 위장하고 있던 거구나! 무서운 놈!"

그 말을 들은 마법사들 역시 몸을 떨었다.

가바인 영주보다 강하다면 카마르의 어떤 마법사가 덤벼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이번 일로 돈이 좀 들었지만, 카마르의 안전을 위한 지출이라고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네."

"영주님 말이 맞습니다!"

"그런 강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단 낫죠!"

"자, 우리는 그만 돌아가세. 폐쇄 결계를 준비해야 하니까."

가바인은 이렇게 말하며 피츠타 호수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강승현을 태운 배가 멀어져 가는 모습이 보였다.

별일 없다면 붉은 숲에 금방 도착할 것이다.

99. 호수 북쪽 2

촤아아아!

촤아!

강승현 일행을 태운 배는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하지만 멀미 방지 인챈트 덕분에 흔들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인챈트 효과 좋네요. 편하죠?"

"그러게 말이야. 진짜 편하다."

카마르 영주를 갈궈서 인챈트를 뜯어낸 보람이 있다. 옆자리의 김호정도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출렁거리는데 속이 멀쩡해."

배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멀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호수 구경이나 하죠."

그래서 평소엔 볼 일 없는 보트 밖 경치도 구경하면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호정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배에 멀미약을 뿌린 건가?"

"멀미약하고는 좀 다른데요."

멀미는 불규칙한 흔들림에서 오는 감각 불일치다. 몸은 흔들림을 느끼는데 눈으로 보기에는 멀쩡할 경우 발생한다.

"멀미약은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을 억제해주는 물건이잖아요."

그러니 김호정처럼 감각이 예민한 사람한테는 멀미약이 별 효과 없다.

"하지만 멀미 방지 마법은 흔들림을 감소시키죠. 멀미 원인을 없애버린다는 느낌?"

"오...."

"그리고 심하게 흔들리면 싸우기 힘들 테니까. 수상전에선 꼭 필요한 인챈트죠."

"하긴 이 정도면 넘어질 일도 없고, 배 위를 돌아다니면서 싸워도 되겠어."

"누워도 될 만큼 편하네요. 안정적이야."

배에 멀미 방지 인챈트를 바른 진짜 이유는 전투할 상황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김호정의 멀미 대책은 보너스.

"어차피 전투를 피할 수 없으니, 미리미리 준비해두는 게 맞아요."

"그렇지. 까딱하면 물에 빠질 수도 있고."

수중전과 마찬가지로 수상전 역시 모험가에게 불리하다. 발밑이 계속 흔들리는 것도 힘든데 배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끝장이니까.

강승현은 그걸 막기 위해 배에 온갖 인챈트를 부여했다.

"다중 인챈트가 생각 외로 어려운 기술이라 걱정했는데, 역시 카마르 최강의 대마법사는 다르네요."

"성능 좋구만."

"그쵸? 역시 좀 더 부려먹을 걸 그랬나."

강승현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높으신 분을 합법적으로 부려먹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가바인 영주가 들었다면 소름 끼쳐 하겠지만.

"어떤 식으로 부려먹게?"

"배를 좀 더 크게 만들거나, 인챈트를 몇 개 더 추가하거나. 아니면 어뢰처럼 몬스터를 공격할 수 있게 마력탄 발사장치를 달아달라고 하거나... 뭐, 이런 식으로?"

"...가바인 영주 울겠다야."

김호정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속을 들여다봤다. 피츠타 호수는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다.

첨벙!

다만, 저녁노을 때문에 붉게 물들어서 좀 불길한 느낌이 있었다.

거기에 몬스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느긋하게 감상만 할 수도 없었다.

"뭔가, 몬스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 긴장되네. 긴장 풀어야 하는데... 청심환 먹고 싶다."

"여기서 한두 번 싸워본 것도 아닌데 초짜처럼 긴장을."

"물에서 죽는 건 무섭다구."

"정 그럼 스태미나 포션이나 빠시든가요."

짧게 투덜거리던 김호정은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어지간히 긴장되는 모양이다.

"그동안 배 탈 땐 멀미하느라 긴장할 틈도 없었는데. 라디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럴 땐 룰렛이나 돌리는 거죠."

한가한 차원이동자들은 시간과 포인트를 낭비할 겸 룰렛이나 돌리면 되는 것이다.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응?"

[업적][new!]

그때, 업적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업적이 있다는 알림 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저번에 나온 업적 확인했어요? 안 하고 그냥 넘어간 거 같은데."

"무슨 업적?"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이요."

두 사람은 엊그제 새벽 호숫가에서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을 쓰러트렸다.

그때 [업적 달성!]이 나타났으나 확인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게 떠올랐다.

"그거 그때 확인하지 않았어?"

"제가 확인한 업적은 [진귀한 유물]뿐이더라구요. 피츠타 크랩 업적은 확인 안 했죠."

"음.... 그러면 아마 확인 안 한 거 같아.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바로 확인해보죠."

강승현과 김호정은 업적창을 확인했다.

아까 확인하지 않고 넘어간 업적이 나타났다.

[업적 달성!]

[업적 달성 : CHITOSAN]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을 처치할 경우 달성.]

"이건가 본데요."

"뭐야 이거? 치토스?"

"...키토산."

[보상 수령]

강승현은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타르르르르르!!!

시스템창을 더 읽을 것도 없이 악랄한 룰렛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얼굴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또, 또 시작이다."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 소리."

"이 망할 시스템에는 음소거 기능도 없나?"

[※이하 스킬 중 한 가지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스킬(방어 상승 버프)]

[스킬(껍데기 분쇄)]

[스킬(거해궁의 가호)]

[스킬(탈피)]

[스킬(크랩 펀치)]

두 번째 업적은 스킬을 주는 업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게딱지 관련 스킬만 골라서.

'5개 중 하나인가? 뭘 줘도 상관은 없는데.'

"저기 선생, 거해궁이 뭐야?"

"게자리요."

"아.... 피츠타크랩이라서."

김호정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거해궁의 가호가 탐나는 모양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건 탈피지만, 이왕이면 치료에 도움 될 만한 스킬로....'

악랄한 룰렛 소리가 끝나고, 강승현의 스킬창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다.

[※스킬(방어 상승 버프) 획득]

[강화제 - 방어 상승]

[사용 시 방어력이 증가하는 강화제를 생성한다.]

[몸에 접촉 시 효과를 받는다.]

[방어력 +100%]

[지속 시간 10분]

'방어 상승 버프라.'

획득한 스킬은 [강화제 - 방어 상승]. 몸에 접촉할 때 방어력 상승효과를 받는 특이한 버프 스킬이었다.

'접촉 시? 그럼 투척용 버프인가?'

강승현은 테스트 겸 스킬을 발동했다.

[강화제 - 방어 상승]

핏!

그러자 손에 청록빛을 띤 바늘이 생성됐다.

바늘처럼 생긴 투척용 버프인 모양이다.

'길이는 2cm 정도인가? 바늘 형태라면 이런 식으로 발동하는 거겠지.'

생성된 바늘을 몸에 가져다 대자,

[강화제의 효과를 받습니다.]

[방어력 +100%]

[남은 시간 10분]

바늘이 소멸하면서 버프 효과가 나타났다.

'쓰기 편하겠는데.'

[강화제 - 방어 상승]은 바늘을 투척하면 멀리 있는 대상한테도 버프를 걸어줄 수 있다.

석궁 쓰는 야매 힐러에게 딱 맞는 스킬이다.

"김호정 씨."

"으응?"

"전 이런 거 나왔어요."

그래서 강승현은 대뜸 강화 바늘을 투척했다.

팍!

"으헉!"

날아간 강화 바늘이 김호정의 이마에 꽂혔다.

그는 놀란 얼굴로 이마를 문질러댔다.

"뭐, 뭐야 이거? 침술?"

"버프 스킬."

몸에 꽂았을 때 확인해봐서 알지만, [강화제 - 방어 상승]을 맞아도 투척 대미지는 없다.

공격 스킬으로는 쓸 수 없으니 사기 칠 때나 쓰면 될 것 같다.

"좋은 거 뽑아서 다행이네. 근데 말 좀 하고 던져도 되잖아. 놀랬다구."

"맞아도 안 아프니까요."

"...아플 때도 말 안 해준 거 같은데."

김호정은 할 말이 많았지만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김호정 씨 스킬은요?"

"나? 나는 껍데기 분쇄."

[껍데기 분쇄]

[사용 시 대상의 방어력을 20% 떨어트린다.]

[피부를 감싼 생체 조직을 40% 확률로 파괴한다.]

이름 그대로 방어력을 떨어트리는 스킬. 부위 파괴 옵션 덕분에 몬스터 잔해를 더 편하게 얻을 수 있다.

껍데기 분쇄라고 쓰여있지만, 껍질, 비늘, 가죽 같은 것들도 전부 해당하는 모양.

"요런 스킬을 얻었어."

"부위 파괴에 방어력 하락 스킬이라.... 괜찮네요. 이래저래 쓸 곳이 많아 보여요."

"탱커한테 어울리는 스킬은 아닌데 말이야."

김호정은 새로 얻은 스킬이 마음에 안 드는지 툴툴거렸다. 자신의 컨셉에 맞지 않는다고.

"좋잖아요. 서로 안 겹치고."

하지만 강승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걸로 이쪽 방어력은 올리고 저쪽 방어력은 깎아버리는 악랄한 전법을 쓸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래도 나 명색이 탱커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둘 다 같은 스킬 뽑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 중복 스킬은 죄악이지."

촤아아아!

촤아!

"힘내자!"

"조금만 더!"

강승현 일행이 신나게 쑥덕거리는 동안, 발릭과 데이지는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거금을 받아서 그런지 둘 다 의욕이 넘쳤다.

"오, 다들 의욕적이네. 역시 돈이 최고야."

"금융치료 좋죠. 내 돈 아니고 남의 돈 쓰는 거면 더더욱."

"선생님들! 슬슬 숲이 보입니다!"

노를 젓던 발릭이 소리쳤다. 고개를 들고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자 시야에 붉은 숲이 들어왔다.

'정말 새빨간 장소네. 기분 나쁠 정도야.'

이름 그대로 새빨간 나무로 꽉꽉 들어찬 숲.

붉은 숲은 상당히 넓지만, 중앙의 트라코티 마을을 제외하면 사람이 한 명도 살지 않는 지역이다.

'몬스터가 득실거리려나.'

날이 저물고 있어서 그런지, 붉은 숲에서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겠네요. 이제 얼마나 걸릴까요?"

몬스터가 들끓는 숲에서 야영할 생각은 없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물었다.

"이대로만 가면 금방 도착할 것 같습니다!"

"트라코티 마을 안내는 맡겨주세요!"

"더 빠르게! 움직이자!"

촤악! 촤아악!

숲이 가까워지자 발릭 부부는 더욱 열심히 노를 저었다.

묘하게 시원한 물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휴, 이제 거의 다 왔네. 걱정했는데 몬스터가 안 나타나서 다행이야."

"그러면 좋겠지만...."

김호정은 안도한 얼굴이었으나, 강승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 것 같진 않네요."

"뭐?"

호수 밑바닥에서 물고기 그림자 같은 게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하세요. 옵니다."

그걸 본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꺼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에이, 안 싸우고 갈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나?"

"저, 저희는 어쩌죠?"

"우리도 싸워야 할까요?"

김호정이 혀를 차며 금삽을 꺼내자, 노를 젓던 발릭 부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두 분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저으세요."

촤아아아악!

이윽고 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수면에서 몬스터 무리가 튀어 올랐다.

"저것들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100. 호수 북쪽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