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호수 북쪽 3
첨벙! 첨벙!
촤아아악!!!
물속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 떼가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중간중간 오징어 몇 마리도 섞여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데?"
철퍽! 철퍽!
녀석들은 배를 침몰시킬 생각인지 보트로 돌진해와 몸을 부딪쳐댔다.
"인챈트는 이런 때 필요한 거죠."
쿵!
사방에서 큰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내구도 강화 +600%」]
[「물 속성 저항 +550%」]
[「방수 +550%」]
[「대미지 감소 +600%」]
고작 물고기 몇 마리로는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
"튼튼해서 좋네."
"바위로 내려쳐도 흠집 하나 안 날걸요."
"이건... 계란으로 바위 긁기!"
이건 카마르 최강의 마법사, 가바인 영주가 직접 부여한 인챈트니까.
"하지만 그냥 두자니 거슬리고."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며,
[피츠타 별붕어] [피츠타 은붕어]
[피츠타 꼬붕어]
[호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물고기.]
[약하고 사고방식이 단순하다.]
[간단한 미끼만 있어도 쉽게 잡을 수 있다.]
물고기 떼의 정보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역시 멍청한 물고기들밖에 없네.'
사고방식이 단순하다는 정보대로 피츠타 붕어 떼의 움직임은 정말 단순했다.
"빨리 치우고 갑시다."
"오케이!"
[작살 화살★]
파바박!!
강승현이 물고기 떼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새까만 작살들이 몸통을 꿰뚫었다.
첨벙! 첨벙!
꿰뚫린 물고기는 몸부림 한 번 치지 못하고 물속으로 힘없이 빠져들었다.
"진짜 약하네."
김호정이 삽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혈석 버프를 걸 필요도 없었다.
촤아, 촤아.
두 사람이 달려드는 물고기를 치우는 동안 발릭 부부는 묵묵히 노를 저어 나아갔다.
"정말 물고기 말고 다른 몬스터는 보이지도 않네요."
"그래서 좋지만."
모험가 조합에서 본 의뢰서 내용대로, 물고기 이외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촤악, 촤아악!
두 사람이 물고기를 열심히 베어 가르는 사이, 죽은 물고기가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
작살에 꿰뚫린 물고기, 으깨진 물고기, 거기에 토막 난 물고기까지....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김호정은 오만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작업 환경이 너무 후진데?"
"이 업계가 다 그렇죠 뭐."
그래도 사람 시체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강승현은 이렇게 덧붙였다.
"근데 말야."
"네."
푸각!
김호정이 날아온 물고기를 삽으로 토막 냈다.
"뭔가 좀 생각보다 시시한 느낌인데.... 그냥 이렇게 물고기만 잡아도 되려나?"
"음."
김호정의 말대로 덤벼오는 물고기를 토막 내는 건 정말 쉬웠다.
공격력이 높지도 않고, 방어력도 약하고.
"사실 그 점이 신경 쓰이긴 해요."
그렇다면 이렇게 약한 물고기들이 왜 일부러 강한 상대한테 덤벼오는 것인가.
"이런 수준이면 인챈트가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거든요."
"그 말 들으니까 이상하네. 꼭 일부러 죽기 위해 덤벼오는 듯한...."
김호정이 이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가, 강승현 힐러님!"
발릭이 배 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뭔가 다가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물 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지금까지 상대한 물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사이즈였다.
촤아아아악!!
이윽고 큰 물보라가 일어나며 녀석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몸을 가진 대형 물고기였다.
"저 녀석이 여기 보스인가? 엄청 크네."
"음...?"
"이름이 뭐지? 혹시 피츠타 대빵큰물고기?"
"저건 카마판 피시예요. 성격 더럽고 육식성이죠."
피츠타 호수와 어울리는 푸른 비늘을 가진 거대한 물고기, 카마판 피시.
시력이 안 좋다는 게 특징이다.
첨벙! 첨벙!
녀석은 주위에 떠다니던 죽은 물고기를 먹어치우더니 강승현 일행이 탄 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쪽으로 온다! 우리가 열심히 잡은 물고기로 배 채우면서!"
"그럼 저 녀석도 회 쳐버리죠."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석궁을 겨누었다.
[작살 화살★]
파바바박!!
뻗어 나간 작살 화살이 놈을 향해 날아갔으나, 녀석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 화살을 피했다.
큰 몸집에 비해 몸이 날렵한 녀석이었다.
촤아아아아!!
쿵!!!
빠르게 헤엄쳐온 카마판 피시가 배를 향해 들이박았다.
배에 걸린 인챈트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인챈트가 없었다면 배가 산산조각났을 것이다.
"우왓...! 멀미 방지 없었음 분명 토했을 거야. 파도 출렁이는 거 봤어?"
그냥 겉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방금까지 잡고 있던 붕어와는 수준이 다르다.
"붕어들보다는 좀 낫네요."
인챈트를 열심히 걸어둔 보람이 느껴졌다.
이 녀석하고 안 만났으면 서운할 뻔했다.
"속도는 물론이고 공격력이랑 방어력도 훨씬 높을 거고."
보통 민물고기는 작고 바닷물고기는 크지만, 카마판 피시는 민물고기인데 더럽게 크다.
그거도 모자라 빠르고 튼튼하기까지.
"역시 쟤가 보스 맞네."
"그럼 이쪽도 공평하게 버프 걸죠."
속도가 빨라서 맞추기 힘들다면 화살 쏘는 실력을 늘리는 수밖에.
강승현은 진홍의 루비를 꺼냈다.
[정신 집중!]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 효과를 받습니다.]
[명중률 상승!]
루비를 손으로 움켜쥐자 붉은빛과 함께 버프 효과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피하나 보자."
강승현은 돌진해오는 카마판 피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녀석은 이번에도 헤엄쳐 피하려 했으나,
파바박!!
팍!
미처 피하지 못한 작살 화살 두 개가 카마판 피시의 등을 보기 좋게 꿰뚫었다.
그 때문인지 녀석의 움직임이 살짝 둔해졌다.
'오케이, 명중.'
역시 진홍의 루비라니까.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 선생, 민물고기는 회로 먹는 거 아니라구."
"기생충이 많긴 하죠."
퍼억!
이어서 김호정이 휘두른 금삽이 카마판 피시의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그러니 매운탕이나 해 먹자!"
[껍데기 분쇄]
[비늘이 벗겨져 나갔다!]
카마판 피시의 방어력이 깎여나가며 동시에 타격 부위의 비늘이 벗겨졌다.
"매운탕 좋죠."
강승현은 비늘이 벗겨진 부위를 노리고 작살 화살을 발사했다.
파바바박!!!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대미지가 들어갔다.
이번 대미지는 녀석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안 그래도 방어력이 내려간 상태인데, 비늘을 벗겨지기까지 했으니!"
"이번 건 좀 아프겠죠."
"이예에 나이스!"
김호정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강승현은 그 틈에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었다.
벌컥! 벌컥!
"이대로 좋게 물러나면 편하겠지만."
"그냥 보내줄 리가 있나!"
첨벙! 철썩!
카마판 피시는 몸부림을 치더니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뭔가 헛짓거리를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딱 보니까 저거 물대포 쏘겠네요. 물고기 몬스터들의 주특기."
"근데 왜 멀리서 쏘려는 거지? 앞에서 쏴도 되잖아."
"가까이서 쏘면 안 되는 이유가 있겠죠."
일부러 멀리 떨어지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발동할 때 시간이 걸리는 스킬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대미지가 꽤 강력하겠지만요."
"좋아! 배로 쫓아가자!"
"김호정 씨, 아무리 이 배에 이동 속도 인챈트를 발랐어도 그건 좀."
"주, 죽을 것 같아."
"헉, 헉...."
발릭과 데이지는 지금도 필사적으로 노를 젓는 중이다.
여기서 더 빠르게 저으라고 하면 오열하지 않을까.
"여기서 속도를 더 올리는 건 불가능해요. 이게 모터보트라면 모를까."
"어... 그러면 어쩌지? 그냥 한 대 맞아?"
강승현은 배에서 멀어지려는 카마판 피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저 녀석이 이쪽으로 오게 해야죠."
[후크 샷]
차르르르르르!!
빠른 속도로 날아간 갈고리 화살이 카마판 피시의 꼬리에 박혔다.
[후크 샷 - 크레인]
방아쇠를 당기자 사슬이 감기며 카마판 피시가 이쪽으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왠지 큰 놈이 잡힐 것 같았는데."
"대어다!"
첨벙! 첨벙! 첨벙!
카마판 피시는 심하게 몸부림쳤으나,
"흡!"
야매 힐러는 몸도 좋아야 하는 법.
강승현은 그냥 힘으로 버텼다.
촤르르르!
촤아아!
카마판 피시는 휘감기는 사슬과 함께 질질 끌려왔다.
"하여간 강 선생, 진짜 굉장하다니까."
"야매 힐러니까 이 정도는 해야죠."
"그럼 나도!"
김호정은 다시 한번 삽을 휘둘렀다.
퍼억!
[껍데기 분쇄]
이번엔 비늘이 벗겨지진 않았지만, 어김없이 카마판 피시의 방어력이 깎였다.
[작살 화살★]
파바바박!!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첨벙! 첨벙!
카마판 피시는 한참 몸부림쳤으나 몸에 박힌 후크 샷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날아오는 공격을 고스란히 맞는 수밖에.
촤아아아!!!
결국, 도망치는 건 포기했는지 카마판 피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잠수했다.
"뭐야? 이게 끝이야? 도망쳤어?"
"글쎄요?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보스도 별거 아니네."
김호정은 이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강승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도망칠 리가 없어. 뭔가 공격을 준비하려는 거겠지.'
배에 걸린 각종 인챈트 때문에 지금 같은 평범한 공격으론 부술 수 없다.
그러니 피해를 입히고 싶다면 사람들을 직접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
'굳이 잠수한 이유가 뭘까.'
이유 없이 잠수했을 리가 없다.
사람을 공격하는 몬스터라면 더더욱.
'저 녀석이 이 상황에서 우리들을 공격하려면....'
강승현의 머리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카마판 피시 역시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녀석."
"응?"
"배를 뒤...."
푸우우우우!!
강승현이 뭔가 말하려 했으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수 속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이, 이게 뭐야!"
물기둥에 휩쓸린 배는 중심을 잃고 뒤집혀버렸다. 동시에 배가 뒤집히면서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배 밖으로 튕겨나갔다.
"가, 강승현 힐러님!"
"밑에! 밑에!"
"으아악!"
발릭 부부가 비명을 질러댔다.
허공에 높이 뜬 채로 호수 아래를 바라보자,
촤아아악!
카마판 피시가 입을 쩍 벌린 채, 제 입으로 떨어질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잡아먹진 못해도 한둘 정도는 먹을 수 있겠다는 듯이 말이다.
"물고기치고는 머리 좀 썼네요."
배에 걸린 인챈트는 대미지만 막아줄 뿐, 배를 뒤집는 것까지 막아주진 않는다.
나름 잔머리를 굴린 셈이다.
"으, 어, 어쩌지? 이대로 떨어지면 물고기 밥 신세야!"
패닉에 빠진 김호정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강승현은 무척 태연한 얼굴이었다.
"발판만 있으면 됩니까?"
"그, 그렇긴 한데. 아무것도 없잖아? 물 말고는...."
"뭐, 발판이 없으면."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발밑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만들면 그만이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101. 월척
인벤토리에 넣어둔 얼음 포션이 소멸하고,
석궁에 차가운 얼음 포션 화살이 장전됐다.
스으으으으....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냉기를 품은 차가운 화살이 쏟아져 나갔다.
'놈을 죽일 만한 위력은 없지만.'
쩌적! 쩌저적!
'입을 못 다물게 할 순 있지.'
카마판 피시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호수에 거대한 얼음 발판이 생성됐다.
"주문하신 발판 완성."
"가, 강 선생? 발판이 생긴 건 좋은데...."
김호정이 난감한 얼굴로 발밑을 바라보았다.
입 벌린 물고기를 대신해서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나타난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얼음판에 충돌하는 거 아냐?"
물고기한테 먹혀 죽을 일은 사라졌지만, 이대로 가다간 익사가 아니라 추락사할 판이다.
"나야 뭐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아닐 거 아냐."
"그건 그렇네요."
두 사람과 달리, 발릭 부부와 루디는 평범한 아즐대륙민들이다.
이 높이에서 그냥 떨어졌다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것이다.
"뭐, 옆에 저 같은 유능한 힐러가 있으니 다쳐도 별문제는 없긴 한데."
"다치는 게 아니라 까딱하면 죽을 거 같아."
"부상자를 안 만드는 힐러가 최고의 힐러겠죠."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 응? 뭐?"
"금삽 좀 빌려주세요."
"어, 어. 알았어...."
김호정은 카마르의 금빛 영광을 넘겨줬다.
'이걸 어디에 쓰려고?'라는 얼굴로.
"기껏 만든 게 아쉽긴 하지만."
"아쉽긴 하지만?"
"부숴야죠."
탓!
밑으로 낙하하던 강승현은 손에 쥔 금빛 영광으로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내려쳤다.
쿠웅!
'일명 벼락치기!'
쩌적!
[크리티컬!]
엄청난 충격과 함께 얼음덩어리가 무참하게 박살나더니,
파가아아악!!!
얼어있던 카마판 피시 역시 산산조각났다.
'김호정 씨는 까먹은 거 같지만, 금빛 영광은 부수기에 특화 보너스가 있거든.'
[땅, 바위, 금속, 눈 부수기 특화]
-[추가 대미지 +50%]
그러니 냉동 물고기 정도는 금빛 영광으로 가볍게 토막 낼 수 있다.
"선생 또 뭔가, 뭔가를...."
"허억...."
"저, 저런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일격에...!"
나머지 일행은 멍한 얼굴로 얼음덩어리 박살 쇼를 바라보았다.
인간 메테오가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풍덩!
얼음덩어리를 부순 직후, 강승현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호수에 빠졌다.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3 : 피츠타 마린 이어커프(좌)]
물속에 들어오자 이어커프의 효과가 나타났다. 덕분에 수중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확실히 편하네. 스킬도, 아이템도.'
주위에 떠다니는 얼음 때문에 물속이 꽤 차가웠지만, [수중 체온 유지]의 효과로 큰 문제는 없다.
강승현은 금삽을 인벤토리에 넣고 물 위로 헤엄쳐갔다.
'석궁이야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지만, 삽은 잃어버리면 찾기 힘드니까.'
촤아악!
물 위로 올라온 강승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처에서 부서진 얼음 덩어리를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
"휴."
호수에 뛰어들어서 그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젖어버렸다. 안타깝게도, 강승현에겐 옷을 말리는 스킬 같은 건 없었다.
'놔두면 마르겠지.'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푸하학!"
"후악! 퉷!"
곧이어서, 김호정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잡고 올라오세요."
"고마워."
강승현은 수제 붕대를 밧줄처럼 던져주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놀라서 간 떨어질 뻔했어...."
"좀 다치고 그래야 제가 치료해드리는데."
"간 떨어질 뻔했다니까."
붕대를 잡고 올라온 김호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역시 물에 젖어서 눅눅했다.
촤악!
"어우 축축해."
"시원하고 좋잖아요."
"사고방식의 수준이 다르네...."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옷의 물기를 짜냈다.
철퍽! 촤악!
"헉, 헉. 살았다...."
"루디야, 괜찮니?"
"응.... 근데 좀 추워."
잠시 후, 발릭 가족도 얼음 조각 위로 올라왔다. 다들 안색이 많이 나쁘긴 하지만, 어쨌든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한 모양이다.
"허억, 헉.... 모험가님들은 늘 이런 삶을 보내시는 건가?"
"여보, 우리 애들은 절대 모험가로 키우지 말자...."
발릭 부부는 정말 지친 얼굴이었다. 수명이 10년은 깎인 것 같았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저렇게 지쳐있다면 어디 하나쯤은 다쳤겠지.
강승현의 말을 들은 발릭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까 제가 튕겨나갈 때 부딪친 거 같습니다. 이놈이 욱신거리네요."
"좀 볼게요."
강승현은 발릭의 팔을 살폈다.
육안으로는 별 차이가 없지만,
[타박상]
[강하게 부딪쳐서 생긴 상처.]
[그냥 둔다면 출혈과 함께 부어오를 것 같다.]
[관찰의 눈]을 켜고 보니 전형적인 타박상 설명이 나타났다.
'뼈는 멀쩡한 것 같지만.'
무리해서 움직이면 심한 통증이 느껴질 것이다.
'노를 젓는 건 불가능할 것이고.'
아픔을 참고 젓는 선택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사람을 부려먹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네요. 그래도 통증을 줄여야 하니...."
까각!
강승현은 나이프로 얼음을 작게 조각냈다.
"김호정 씨, 이것 좀 마력으로 감싸주세요."
"오케이."
김호정이 없는 마력을 쥐어짜서 아이스팩을 만들었다.
좀 엉성하긴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찜질 끝나면 붕대로 감아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발릭은 감사 인사를 하며 아이스팩을 팔에 갖다 댔다.
"다른 분들은 어디 다친 곳 없으세요?"
"전 괜찮아요. 루디는?"
"저두 괜찮아요."
데이지와 루디는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죽어라 노를 젓고, 물고기의 습격을 받고, 하늘로 치솟았다 호수에 빠지는 개고생을 해서 그런지 둘 다 무척 지친 얼굴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호수를 건널 수 있지만... 다들 상태가 영 안 좋으니 쉬었다 가야겠네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힘들고 지칠 땐 스태미나 도핑이 답이다.
"한 병씩 드세요."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일행에게 스태미나 포션을 나눠주고
자신도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새콤한 사과 맛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정말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어. 역시 보스는 다르구만."
김호정이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물론 저걸 작살내버린 강 선생이 더 괴물 같지만. 작살 화살로 작살을!"
"...."
김호정은 웃으며 농담을 던졌으나 강승현의 표정은 어딘가 굳어 있었다.
"재미없어? 미안."
"그런 게 아니라."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신경 쓰이는 거?"
"카마판 피시는 눈이 되게 나쁜 놈이에요."
카마판 피시는 크고 날렵한 스피드를 가졌지만 시력이 안 좋다는 큰 단점을 갖고 있다.
"보통 햇빛을 피해 호수 밑바닥에 머물지, 물 위로 올라오진 않는 놈이거든요."
"눈부신 걸 싫어하나 보네."
시력이 낮은 대신 감각이 발달한 몬스터.
심해어 비슷한 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해가 저물지도 않았는데 우리 앞에 나타났죠."
강승현은 그 점을 신경 쓰고 있었다.
물 위로 올라올 이유가 없는 녀석이 나타났으니까.
"역시 호수 밑에 무언가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하진 않겠죠."
아무래도 가까이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쩌적!
날아간 화살이 얼음 발판을 만들었다.
강승현은 그걸 밟으며 카마판 피시한테 다가갔다.
김호정도 조심조심 뒤를 따라왔다.
"뭐 좀 알겠어?"
"...."
카마판 피시의 몸은 어느새 반쯤 녹아 있었다.
그리고 몸 사이사이에서 작고 파란 알갱이가 빛나고 있었다.
"음? 저거 뭐야? 물고기 알인가?"
"...보통 아가미로 알을 낳진 않죠."
[관찰의 눈]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자, 죽은 카마판 피시 위로 정보가 떠 올랐다.
[몸의 일부분이 얼어 붙어있다.]
[머리 부분이 으스러졌다.]
카마판 피시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피츠타 마린 조각.]
[카마판 피시의 몸에서 만들어졌다.]
파란 알갱이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역시 피츠타 마린이었군."
"피츠타 마린? 아 그거 보석이잖아."
피츠타 마린은 이름 그대로 피츠타 호수의 특산물이다. 두 사람이 가진 이어커프에 박힌 보석이기도 하다.
"맞아요. 피츠타 마린은 피츠타 호수 생물체들의 몸에서 종종 발견되는 보석이에요."
"오, 심봤다!"
김호정은 들뜬 얼굴로 피츠타 마린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참고로 저건 너무 작아서 보석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가끔 살아있는 놈들한테서도 발견되긴 하는데, 보편적으로 죽은 생물한테서 발견되죠."
"윽? 이거 요로결석 같은 거야?"
"그럴 리가."
강승현은 피츠타 마린 조각을 살피며 말했다.
시체한테서 나오는 보석이라 꺼림칙할 법도 하지만, 카마르 사람들은 예쁘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문제는 방금 잡은 카마판 피시의 몸에서 나오면 안 될 물건이라는 거죠."
이론상 피츠타 마린이 생성되기 위해선 최소 이틀은 지나야 한다.
즉, 죽은 지 한 시간도 안 된 물고기의 몸에선 나올 수 없는 물건이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은...."
[관찰의 눈]
강승현은 다시 한번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관찰의 눈에 새로 얻은 정보를 추가하자,
[죽은 지 3일은 지난 것 같다.]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쓰러트리기 전부터 죽어 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싸운 건 살아 있는 카마판 피시가 아니라, 카마판 피시의 사체였던 모양이다.
"그럼 이 녀석, 좀비야? 전혀 몰랐어."
"일단은 비슷하긴 한데."
강승현은 여명의 성수 화살을 꺼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령술을 이용해 부활시킨 언데드가 아니라는 소리다.
"흑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사령술은 아닙니다."
"그럼 이건 도대체 뭐야?"
"사령술을 쓰지 않고 시체를 조종하는 놈이라면...."
그것도 시체를 조종해서 인간을 습격하는 부류. 머릿속에 떠오르는 놈들이 몇 놈 있다.
강승현은 여명의 성수 화살을 집어넣고 카마르의 은빛 영광을 꺼냈다.
"다른 생물의 몸에 들러붙어 살아가는 놈들."
강승현은 카마판 피시를 향해 은빛 영광을 휘둘렀다.
[절개]
쫘아악!
반쯤 녹은 생선 안구를 찢어내자 그 사이에서 식물 줄기가 터져 나왔다.
"기생형 몬스터가 있죠."
102. 물결 기생초 1
강승현은 다시 한번 나이프를 휘둘러 줄기를 베어냈다.
언뜻 보면 기생충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쫘아아악!
잘려나간 줄기에서 뿜어져 나온 건 핏물이 아니라 찐득한 체액뿐이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강승현은 바닥에 떨어진 줄기를 주워들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식물처럼 생겼지만, 이 녀석은 흙이나 물에서 자라난 게 아니라 물고기 머릿속에서 자라난 괴생물체.
"그, 그게 뭐야?"
"기생형 식물 몬스터. 그중에서도 물결 기생초네요."
물결 기생초는 검녹색 줄기를 가진 수중식물로 주로 호수나 연못 같은 민물에서 서식한다.
이렇게만 보면 평범한 식물 같지만,
"이 녀석이 카마판 피시를 조종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조종?"
이 녀석은 다른 생물의 몸에 기생하는 내부 기생형 몬스터다.
그것도 다른 생물을 조종하는 지배형 기생 식물.
"꽤 악랄한 놈이죠."
"악랄하다고? 뭐 무슨 짓을 하는데?"
"물결 기생초는 숙주의 몸을 강탈해서 먹잇감을 찾거든요."
강승현이 은빛 영광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기분 나쁘니까 호숫물로 깨끗이 씻으면서.
"우와 진짜 악랄해."
"일단 몸속에 들어왔다 싶으면 바로 뇌부터 장악해요."
생긴 게 워낙 평범한 놈이라 평소에는 일반식물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숙주가 자신을 섭취하는 순간 활동을 시작한다.
"줄기를 몸 전체로 쭉 뻗다가 뇌에 뿌리를 처박으면 감염 준비 끝."
이 녀석한테 감염된 숙주는 자아를 잃고 조종당하게 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좀비가 되는 것이다.
"물결 기생초는 숙주를 이용해 다른 생물을 사냥하고 배를 채우지만, 정작 숙주는 아무 영양분도 얻지 못한 채 죽는 거죠."
물론, 물결 기생초는 숙주가 죽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숙주의 몸이 썩거나 파손돼서 쓸모없어지면 새 숙주를 찾으러 가면 되니까.
숙주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해만 끼치는 전형적인 기생형 몬스터라 할 수 있다.
"흐어억...."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정말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그럼 저거! 사람도 조종하고 그러는 거야?"
"사람한테 기생할 능력은 없어요."
"아휴 다행이네."
김호정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으나,
"시체의 뇌를 파먹는 건 할 수 있지만."
"으아악! 더 끔찍해!"
뒷이야기를 듣고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말을 이어갔다.
"방금 말했듯 물결 기생초는 사람한테 기생하진 못합니다."
물결 기생초 자체는 기생 능력을 빼면 특출난 능력은 없다. 하지만 감염된 숙주를 조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거 식인식물이었구나...."
"그래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몬스터에 속하죠."
그것도 꽤 적극적으로 공격해오는 케이스.
다른 먹이를 마다하고 사람을 공격할 정도로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기생형 식물 몬스터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인간의 뇌라는 말도 있고.
"그럼 이 녀석이 카마판 피시에 기생했다는 건...."
"당연히 사람들을 편하게 공격하기 위해서겠죠."
거대한 사이즈의 카마판 피시라면 손쉽게 인간을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강승현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꾸르르르르르....
카마판 피쉬의 시체가 마구 부글거리더니.
쯔으으으으ㅡㅡㅡㅡ
쫘악.
쫘아아아악!
몸 이곳저곳이 찢어지면서 물결 기생초의 줄기가 뻗어 나왔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살아 있던 모양이다.
"우아아아악!"
"저게 아직도 살아있었네."
물결 기생초는 정말 역겨울 만큼 신나게 꿈틀거렸다.
"강 선생 구충제!!"
"식물한테는 제초제를 써야죠."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씩 웃으며 석궁을 꺼냈다.
"천연 제초제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박!
차가운 얼음 화살이 물결 기생초 줄기에 처박혔다.
쩌적!
쩌저적!
식물 몬스터들은 대부분 얼음 공격에 약한 법. 얼음 화살의 여파로 줄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파각!!
곧, 강력한 빙결 대미지와 함께 물결 기생초의 줄기가 박살 났다.
"새, 생각보다 약하네."
"물결 기생초는 숙주를 조종하는 거 빼면 별 능력 없거든요."
숙주를 조종할 때는 위협적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그냥 물풀이다.
"힘이 없으니 남한테 기생이나 하는 거죠."
불에 태워도 죽고 얼려도 죽고 칼로 뿌리를 썰어버리기만 해도 순삭.
거기에 독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날것으로 먹지만 않으면 몸에도 괜찮다.
"끓는 물에 삶으면 쫄깃해서 먹을 만하대요."
"누가 저딴 걸 먹어볼 생각을 한 거래?"
김호정은 굶어 죽어도 안 먹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어쨌든 죽은 거지? 또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그게 말이죠."
강승현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얼어 죽은 물결 기생초 조각을 주워들었다.
"물결 기생초의 숙주 조종 능력이 대단하긴 한데, 보통 카마판 피시 같은 강력한 몬스터한테는 안 통하거든요."
기생형 몬스터라고 아무거나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강력한 상대를 어설프게 조종하려 들면 역으로 당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조종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쇠약하거나 저항력이 사라진 시체라면 모를까.'
그런데 녀석은 카마판 피시를 조종하고, 심지어 강승현 일행한테 기생하려 했다.
'도대체 목적이 뭐지?'
강승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치밀한 적일수록 이유 없이 덤비지 않지.'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눈이 푸르게 빛나며 정보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물결 기생초에서 잘라낸 줄기.]
[기생형 식물 몬스터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카마판 피시한테 기생한 상태다.]
[강력한 마력에 노출된 돌연변이.]
[지금 상태라면 인간에게 기생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체가 사망하면 활동을 정지한다.]
'돌연변이?'
꽤 충격적인 정보가 드러났다.
평범한 기생초는 신경 쓸 거 없지만, 인간에게 기생할 수 있는 돌연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자식, 변이체였나.'
변이체.
일반 몬스터한테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진 일종의 돌연변이다.
'라페이 씨한테 이야기를 들어두길 잘했네.'
변이체는 개체 수가 적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관련 자료도 매우 적다.
몬스터 잔해에 미친 라페이가 아니었다면 이 정보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녀석의 특징은 기생 능력 강화였나 보군.'
강승현이 그 사실을 깨닫자, 눈앞에 나타난 정보가 변경됐다.
[물결 기생초 변이체한테서 잘라낸 줄기.]
원인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
'카마르에서 유출된 대량의 마력이 피츠타 호수 속 물결 기생초한테 영향을 끼쳤겠지.'
대부분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그중 한 녀석이 마력을 견디고 변이체로 변이한 모양이다.
'카마르 사람들이 들으면 난리가 나겠군.'
저런 게 일반 사람들한테 노출됐다면 무슨 난리가 벌어졌을지.
'마탑 하나 관리 못 해서 이게 무슨 난리야. 하이베 그 새끼, 확 갈아버렸어야 했는데.'
강승현은 아즐 대륙 곳곳의 오염지대를 떠올렸다.
마력은 분명 편리한 에너지지만, 잘못 다루면 큰 사고를 일으킨다.
흑마력은 마력보다 훨씬 위험하니 말할 필요도 없고.
'카마르가 폐쇄되어서 망정이지.'
지금은 피츠타 호수에 사람이 드나들 일이 없다. 변이체가 번식을 못 한다는 게 다행일 뿐이다.
정보를 정리한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이 자식,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설명하자면 길지만 궁금하다면 말해드리고."
"들으면 정신건강이 나빠질 것 같으니 안 들을게."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아저씨가 들으면 울고불고 난리 칠 테니 간단하게 줄여서 설명해주기로 했다.
"요약하자면, 피츠타 호수의 몬스터를 다른 곳으로 도망치게 만든 원흉입니다."
카마판 피시는 물론이고, 사람도 조종할 줄 아는 기생초라면 다른 몬스터쯤이야 쉽게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뭐야, 도대체 얼마나 강한 놈인데?"
"집 앞에 저런 게 나타나면 짐 싸 들고 이사할 수준?"
내심 몬스터들도 필사적이었던 모양이다.
저런 괴물이 있으니 어떻게든 해달라는 무언의 시위. 안타깝게도 카마르 사람들은 못 알아들었지만.
"으음? 그럼 오징어랑 물고기는 왜 남아있는 건데?"
"그야 그놈들은 머리가 나쁘니...."
강승현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세쿼이아 오징어는 왜 남아있는 거지? 그렇게 멍청한 녀석들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지능이 있는 놈들이라면 물결 기생초를 피해 달아나는 게 정상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오징어들은 호수 북쪽을 떠나지 않았다.
'...가만.'
강승현은 황급히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잘려나간 물결 기생초 위로 읽어낸 정보들이 떠올랐다.
'아까 정신없어서 그냥 넘긴 게 하나 있었지.'
[물결 기생초에서 잘라낸 줄기.]
[기생형 식물 몬스터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본체가 사망하면 활동을 정지한다.]
강승현은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정보를 살폈다.
"김호정 씨."
"응?"
"우리, 쉴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고생해서 잡았건만, 본체는 따로 있었다.
"이 녀석이 본체가 아니에요. 우리가 헛고생했네요."
"그럼 이건 뭔데? 베이비 기생초?"
"변이체는 번식을 못 하니 아마 분신이겠죠."
분신을 잡느라 쓸데없이 힘을 뺐단 말인가.
강승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업적이 안 나온다 했어.'
관리자 놈은 본체와 분신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곳에서 철저한 놈.'
정말 언제나 재수 없는 녀석이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뭐, 우리가 꼭 잡을 필요는 없긴 한데."
"저런 찝찝한 걸 놔두곤 못 살지."
"내버려 두면 주위로 퍼져나갈 수도 있고."
물결 기생초가 분신까지 생성할 정도라면, 지금 호수 밑바닥이 무슨 꼴일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마탑 놈들 때문에 귀찮은 괴물이 또 생겼네.'
인간에게 기생하는 것도 모자라 분신까지 생성하는 물결 기생초.
딱히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진홍의 마탑 때문에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탄생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본체만 잡으면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점이군요."
"오, 진짜 다행이네. 원리가 뭐야?"
"본체와 분신이 마력으로 이어져 있거나 텔레파시 같은 걸로 소통할 테니까요."
그러니 본체가 사망하면 분신도 덩달아 사망하게 된다.
반대로 분신이 사망할 땐, 본체한테 별 타격이 없다.
"그럼 분신은 왜 보낸 거래?"
"...."
강승현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호수 아래를 힐끔 들여다봤다.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판 밑에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참, 이거 돌려드릴게요."
호수를 바라보던 강승현은 아까 빌린 금삽을 김호정에게 돌려줬다.
"잘 썼어요."
"아까 정말 운석 충돌하는 줄 알았다니까."
금삽을 돌려받은 김호정은 실실 웃으며 인벤토리에 넣으려 했다.
"아, 넣을 필요는 없어요."
"왜?"
그러나 강승현은 김호정을 말리더니,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자기도 석궁을 불러내 손에 쥐었다.
"지금 당장 써야 하니까."
쩌적.
쩌저저적!
이윽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강력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 뭐야 이거?"
"아까 분신은 왜 보냈냐고 물어보셨죠?"
본체는 분신이 죽어도 아무 피해도 받지 않지만, 분신이 죽기 전까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있다.
"우릴 낚으려는 미끼였겠죠."
"미, 미끼?"
파가아악!!
동시에 무언가가 얼음판을 부수고 호수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본체 녀석이 우릴 마중하러 왔으니까."
103. 물결 기생초 2
촤와아아아!
풍덩!
얼음을 부수고 나타난 건 검푸른 빛을 띤 거대한 오징어였다.
정확하게는 거대한 오징어의 다리 두 개.
"저, 저거 세쿼이아 오징어 맞지?"
"네. 그거네요."
시옐 카타일러가 말하던, 북쪽 호숫가에 들이닥친 괴물 오징어.
다른 몬스터들이 다 도망간 상황에도 호수 북쪽을 꿋꿋이 지키던 놈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물결 기생초한테 감염된' 세쿼이아 오징어네요."
카마판 피시처럼 쓰고 버릴 분신이 아니라, 모든 사건의 원흉인 본체한테 감염된 불쌍한 녀석.
더 불쌍한 건, 카마판 피시처럼 죽은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을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어쩐지 그 똑똑하고 성질 더러운 놈들이 안 도망가고 남아 있더라.'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두머리가 제일 먼저 감염되었으니까.'
아랫놈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거나, 기생초의 분신이 심어진 상태일 것이다.
"이렇게 큰 오징어가 살 거라곤 생각 못 했어."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 위로 보이는 다리만 10m가 넘어가니, 오징어 본체는 얼마나 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카타일러네 식구들 집에서 본 녀석은 쬐끄맸잖아."
"당연히 이 사이즈가 정상은 아니겠죠."
세쿼이아 오징어는 크기가 천차만별이라고 듣긴 했다. 하지만 저 정도로 커진 건 카마르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마력 때문일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변이체가 되진 못했나 보군.'
그 때문에 물결 기생초 본체한테 당한 것 같다.
그렇다고 약한 몬스터는 아니겠지만.
"일단 버프부터 걸고 시작을...."
[강화제 - 방어 상승]
강승현의 손에 청록색 바늘이 생성된 순간이었다.
촤아아아!!!
심한 파도가 일어나더니 세쿼이아 오징어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서진 얼음판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공격하려나 봅니다. 일단...."
"제, 젠장... 어지러워...!"
김호정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저앉았다.
삽을 지지대 삼아 버티려는 것 같지만, 심한 멀미 증세 때문에 쉬워 보이진 않았다.
"우으웨게겍."
김호정은 헛구역질하며 괴로워했다.
배를 타는 것도 힘들어하는 양반이, 뗏목보다 열악한 얼음 조각 위에서 버티긴 힘들 것이다.
"아, 아까 그 배만 멀쩡했어도!"
"배는 지금...."
강승현은 시선을 살짝 옮겼다.
기껏 비싼 인챈트 파우더를 발라 만든 배는 저 멀리 떠밀려 간 상태다.
"저기쯤 있네요."
"너무 멀어...."
열심히 헤엄치면 닿기야 하겠지만, 그 전에 오징어 다리한테 작살날 것이다.
김호정이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미안, 선생. 지금은 죽어도 도움이 안 될 거 같우웨게켁...."
"어쩔 수 없죠."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었다.
동료가 쓰러지긴 했지만,
'까짓거 혼자 상대하지 뭐.'
야매 힐러에겐 흔한 일이다.
강승현은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발밑을 향해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쩌적!
얼음 화살이 호숫물을 얼리며 부서진 얼음판을 단단하게 고정했다.
'이 정도면 15분, 아니 10분은 버티겠지.'
강승현은 김호정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저씨는 거기서 요양이나 하고 계세요."
후우욱!
세쿼이아 오징어의 오른쪽 다리가 움직였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내려쳤지만,
촤락!
샤아아아아.
강승현은 얼음판을 이용해 일부러 미끄러지며 공격을 회피했다.
'얼음판에선 움직이기 불편하긴 해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으니.'
그리고 중심을 잡음과 동시에 오징어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물 밖에서 쏘는 거라 느리긴 하지만.'
[작살 화살★]
파바바박!!
새까만 작살 화살이 세쿼이아 오징어 다리를 마구 꿰뚫었다.
'물에 사는 몬스터한텐 이거보다 좋은 게 없거든."
워낙 덩치가 큰 놈이라 천천히 쏴도 빗나갈 일이 없다.
처얼썩!
화살에 맞은 세쿼이아 오징어가 몸부림치며 경련을 일으켰다.
촤아아.
촤아.
오징어 몸부림에 밀려온 호숫물이 강승현의 발목을 적셨다.
주위에 떠다니는 얼음 때문에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응?"
그때, 머리 위로 그늘이 생겨났다. 뒤를 돌아보자 세쿼이아 오징어가 왼쪽 다리를 내려치기 직전이었다.
후우욱!
'미끄러져서 회피하긴 그른 것 같으니....'
강승현은 씩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후크 샷 - 러시]
파악!
촤르르르르르!!
갈고리 화살이 얼음덩어리를 향해 날아가 박혔다. 동시에 사슬이 감기며 몸이 빠른 속도로 끌려갔다.
쿠웅!
쩌저적!
그 덕에 세쿼이아 오징어의 왼쪽 다리는 아무것도 없는 얼음판을 내려친 꼴이 됐다.
[작살 화살★]
파바바박!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작살 화살을 박아주었다.
엄청난 수의 새까만 화살이 깊게 파고들면서 세쿼이아에게 강력한 대미지를 입혔다.
지지지직!
놈의 다리에 화살을 몇십 발쯤 박았을 때였다.
[찔러 잡기!]
[작살 화살의 효과로 상태이상 '속박'이 발동됩니다.]
작살 화살의 특수 능력이 발동했다.
'화살을 많이 맞을수록 확률이 증가한다고 했지.'
덕분에 세쿼이아의 다리는 마비 독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타이밍 좋네.'
녀석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다.
푹!
[절개]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휘둘러 속박된 다리를 공격했다.
쯔즈즈즈즈!!!
촤아아아!
[절개]로 살덩어리를 찢어내자, 세쿼이아 오징어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공격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쿵!
"으아아아아!!"
"히이익!"
그 충격으로 얼음판이 심하게 흔들렸다.
겁에 질린 발릭 가족은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꾸그그그그그....
촤아아아악!
세쿼이아의 잘린 단면에서 물결 기생초 줄기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기분 나쁠 정도로 꿈틀거렸다.
'보고 있으니 짜증 나네. 잡아 뜯어버릴까.'
강승현은 기생초를 패줄 생각으로 석궁을 겨눈 채 가까이 다가갔다.
꾸르르르르르!
그 순간, 잘린 단면이 부글거리더니 살덩어리가 재생하기 시작했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생각했다.
'육체 재생 스킬인가?'
소실된 신체 부위를 새로 만들어버리는 귀찮은 능력. 이래선 다리를 공격하는 게 의미가 없다.
'그래도 재생 속도는 느린 편이니까....'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막 재생하려는 왼쪽 다리를 향해 얼음 화살을 날렸다.
쩌적!
[상태이상 '냉동' 상태!]
다리가 얼어붙으면서 단면의 재생이 멈췄다.
재생 스킬을 가진 적을 상대할 때는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거나 재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강승현은 단면 부위를 얼려서 재생을 막는 걸 선택했다.
'그다음은 끊어내기!'
푹!
까가가각!
강승현은 쥐고 있던 은빛 영광을 다리에 찔러넣고 [절개]를 사용했다.
차갑게 얼어 있어서 꽤 단단했지만,
팍!
파각!
팔에 힘을 줘서 억지로 끊어냈다.
이렇게 얼려서 절단한 신체부위는 녹기 전까진 재생하지 않는다.
'역시 얼려서 썰어버리는 게 답이네.'
문제는 단검이 째는 데는 효과적이어도 썰기에 적합한 무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넓적한 식칼이라도 하나 준비해 둘 걸.'
콱,
콰악!
그때, 발밑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촤아아아아!!!
세쿼이아의 또 다른 다리가 얼음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역시 다리를 더 꺼내셨군.'
이 정도는 예상했다.
멀쩡한 다리 두 개를 못 쓰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그것도 박살내드려야겠지.'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이 얼음 화살을 준비하려는 참이었다.
"...!"
퍼어억!
세쿼이아의 다리가 강승현에게 접근하는 대신 근처에 있던 발릭을 공격했다.
"으, 으아아아악!"
발릭이 쓰러진 순간, 녀석은 그를 낚아채서 호수 밑으로 끌고 들어갔다.
강승현과 싸우는 대신 다른 인간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발릭 씨!"
[후크 샷 - 크레인]
차르르르르!
강승현은 갈고리 화살을 발사해 발릭을 끌고가려던 세쿼이아의 다리를 끌어당겼다.
쫘아악!
[절개]
그리고 은빛 영광을 휘둘러 끌려온 다리를 찢었다.
쿵!
붙잡혀 있던 발릭의 몸이 가까스로 풀려났다.
'일단 이 아저씨는 구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강승현은 발릭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또 다른 세쿼이아의 다리가 데이지와 루디를 호수 밑으로 끌고가려는 상황이었다.
"안 돼!"
퍼억!
그때, 옆에 있던 김호정이 몸을 던져 데이지를 밀쳐냈다.
그다음엔 루디를 구하려고 했으나,
콰악!
세쿼이아의 다리는 루디와 함께 김호정의 몸을 휘어감았다.
"...!"
"김호정 씨!"
그리고 손 쓸 틈도 없이, 두 사람은 호수로 끌려들어갔다.
'쫓아가면 늦어.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강승현은 두 사람이 호수 속으로 완전히 끌려가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바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파박!
두 사람의 몸에 바람 화살이 날아들었다.
[바람 속성 강화 +2.5%]
풍덩!
그 직후, 둘은 깊은 물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 강승현 힐러님.... 어쩌면 좋아요...."
겨우 몸을 일으킨 데이지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발릭은 조금 전의 충격으로 기절한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바람 포션을 사용했으니 당장 익사할 일도 없고."
적어도 10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안 그래도 조지러 갈 생각이긴 했는데.'
그리고 들고 있던 빈 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화풀이였다.
'설마 김호정 씨가 끌려갈 줄이야.'
김호정이라면 혼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성격상 어린 꼬맹이를 그냥 두진 못할 것이다.
'애 구하겠다고 끙끙거리다 둘 다 죽어버리겠지.'
그 꼴 나기 전에 오징어를 때려잡아야 한다.
신뢰할 만한 동료를 잃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문제는 이번 보스전이 물 속이라는 건데.'
그것도 타임 오버되면 익사하는 보스전.
심지어 보스몹은 재생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다.
'화살로 찌르는 건 비효율적이고, 단검으로 다리를 써는 건 너무 오래 걸려. 새 무기가 필요하겠는데.'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리 썰기 좋은... 커다란 회칼 같은 거.'
당연히 호수 한가운데에 회칼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만,
쩌적.
쩌저적.
'없으면 만들어야지 뭐.'
야매 회칼을 만들 만한 재료는 있었다.
104. 물결 기생초 3
팍,
팍,
파가악!
강승현이 선택한 야매 회칼의 재료는 얼음이었다.
"저어, 강승현 힐러님. 얼음은 왜 부수는 건가요?"
"이게 금속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무기로 쓸만해서요."
얼음은 쪼개기 쉬워서 가공하기 편하다.
뭣보다 주변에 있는 게 이거밖에 없었으니까.
"얼음이요?"
"날카롭게 깎으면 대미지가 생각보다 잘 나와요."
강승현은 부서진 얼음 덩어리를 깎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깎은 얼음으로 야매 회칼을 만들 생각이었다.
'오징어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이지.'
회칼은 뼈처럼 단단한 물건에는 약하지만, 살 바르기라면 이보다 더 편한 도구가 없다.
칵,
카카카카각!
강승현은 빠른 속도로 얼음을 깎아냈다.
'이 쓰레기 같은 스킬이 도움 될 때도 있네.'
강승현은 스킬창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거 처음 얻었을 땐 엄청 욕했는데.'
[연필 깎기]
[물체를 더 빠르게 깎을 수 있다.]
[이거저거 깎을 때 활용해보자.]
[깎기 속도 +200%]
이 녀석은 강승현이 예전에 획득한 스킬 중 하나다.
당연하지만 룰렛에서 튀어나온 녀석이다.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전투에 쓸 수 없는 일상생활용 스킬이라 평소엔 땔깜용 장작을 손질할 때나 쓰던 쓰레기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엄청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칼날은 이만하면 됐고.'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완성된 얼음 칼날을 바라보았다.
얇고 날카롭게 깎여서 어지간한 금속 무기에도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연필 깎기]에 [황금손] 효과를 받으니 급하게 만든 것 치고는 잘 만들어졌네.'
이렇게 만든 얼음 칼날은 약 200cm쯤 되는 초대형 사이즈.
사람보다 크고 두꺼운 다리를 가진 괴물 오징어 전용 회칼이다.
"어, 엄청 커다랗네요."
데이지가 초대형 얼음 칼날을 보고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걸 단칼에 썰어버리려면 이 정도 크기는 되어야겠죠."
"이렇게 커다란 걸 휘두르려면 힘드실 텐데."
"생각보다 안 힘들어요."
강승현은 얼음 칼날을 들더니 가볍게 휘두르며 움직여 보였다.
"워낙 얇다 보니 들고 휘두르기가 편해서."
"저희 같은 사람들은 들지도 못할 것 같지만요...."
데이지는 얼음 칼날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근처 호수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물속에서 사용하면 녹지 않을까요? 일단은 얼음이니까...."
"평범한 얼음은 그러겠지만."
강승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마력 포션을 꺼냈다.
"마력을 퍼부은 얼음이라면 또 다르죠."
마력으로 얼음 덩어리를 코팅하면 녹는 속도를 늦추고 더 단단하게 강화할 수 있다.
[살포]
강승현은 흡수한 마력 포션을 살포했다.
이렇게 하면 포션을 그냥 붓는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샤아아아아.
얼음 칼날에 마력 포션을 3개쯤 사용하자 냉기와 함께 마력이 섞여나왔다.
'오케이, 성공.'
제대로 된 마력 강화가 아니라 야매이긴 하지만, 대충 30분 정도는 버틸 것이다.
'마지막으로 손잡이로 쓸 부분에 수제 붕대를 둘둘 감아 말면....'
그레이트 아이스 사시미 완성.
[조잡한 수제 얼음 회칼]
[물리 대미지 +100%]
[물 속성 강화 +20%]
[베어내기, 도려내기 특화]
-[추가 대미지 +50%]
-[추가 속도 +40%]
[시간이 지날 때마다 녹는다.]
[녹을 때마다 내구도가 하락한다.]
[완전히 녹으면 소멸한다.]
[남은 시간 28분]
언뜻 보기엔 성능이 좋아 보이지만, 점점 능력치가 떨어지는 쓰레기다.
'급하게 만든 거라 구리긴 한데, 없는 것보다는 낫지.'
강승현은 종종 야매 대장장이 짓을 했다.
야매 힐러로 살다 보니 수제 도구를 만들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업적 달성!]
동시에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이 타이밍에 업적이 뜬다고?'
강승현은 의아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동안에도 아이템을 종종 만들었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업적 달성이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업적 달성 : 기적의 DIY]
[수제 아이템을 만들 경우 극히 낮은 확률로 달성.]
'이건... 확률 업적이잖아.'
무조건 달성할 수 있는 확정 업적과 달리, 같은 행동을 반복할 때 일정 확률로 달성할 수 있는 확률 업적.
요컨대 운빨 업적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극히 낮은 확률?'
당연히 운빨인 만큼 확률이 낮을수록 깨기 힘들고, 좋은 보상을 지급한다.
'설마 관리자 놈이 조작했나?'
극히 낮은 확률은 워낙 깨기 어렵다 보니, 강승현은 관리자를 의심했다.
하지만 평소의 룰렛을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다.
'뭐, 조작이건 아니건 얻었으면 됐지.'
[보상 수령]
강승현은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스킬(랜덤 인챈트) 획득]
[랜덤 인챈트]
[아이템에 2가지 랜덤 보너스 옵션을 추가로 부여한다.]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 한정.]
[한 아이템당 한 번씩만 가능.]
'직접 만든 아이템에 랜덤 옵션 추가?'
과연 극히 낮음 확률로 얻는 보상답게 엄청난 사기 스킬이었다.
물론 강승현은 힐러의 길을 걷는 중이라 그렇게 쓸 일이 많을 것 같진 않았으나,
'마침 손에 있네. 직접 만든 아이템.'
지금 이 상황에선 꼭 필요한 스킬이다.
강승현은 얼음 회칼을 손에 쥐고 스킬을 발동했다.
[랜덤 인챈트를 발동합니다.]
[무작위 보너스 옵션이 부여됩니다.]
-"데이지 씨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무기 조달이 끝나고, 강승현은 물에 들어가기 전 몸을 가볍게 풀었다.
데이지는 얼음에서 나오는 냉기 탓인지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원래 혼자 일하던 사람이라서요."
강승현은 입고 있던 가운을 벗더니 데이지의 몸을 덮어줬다.
살짝 차갑긴 하지만, 남에게 빌려줄 정도는 된다.
"마침, 좋은 무기도 손에 넣었고."
강승현은 씩 웃으며 얼음 회칼을 들어보였다.
아까보다 훨씬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그러면 우리 루디를... 잘 부탁합니다."
"금방 다녀올게요."
풍덩!
강승현은 호수 속으로 입수했다.
-{이이이익!}
북쪽 호수 밑바닥.
김호정은 붙잡힌 루디를 구하느라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 질긴 놈들! 뜯어도 뜯어도 무한재생이나 하고... 심지어 맛도 없어!'
촤아아아악.
거대한 오징어는 아주 느긋하게 먹이를 입으로 가져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둘 다 죽겠지.'
솔직히 혼자라면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혼자라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애가 죽어가는데 어떻게 나 혼자 도망가냐고!'
그래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멍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김호정은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컥....}
마침내 바람 포션의 효과가 사라지고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촤아아!
어디선가 날아온 바람 화살이 김호정과 루디의 몸을 꿰뚫었다.
서걱!
동시에, 루디를 속박하고 있던 세쿼이아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강 선생!}
{사람이 어쩜 이렇게 한결같지?}
뒤를 돌아보자,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칼로 보스몹을 썰면서 등장하긴 했지만,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힐러.
강승현은 가장 먼저 김호정의 안부를 물었다.
{다친 곳은 없어. 죽을 뻔하긴 했지만.}
{안 다쳤음 됐어요.}
{죽을 뻔하긴 했지만....}
팍!
강승현은 김호정과 루디의 몸에 스태미나 화살을 꽂아주었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 진짜 크네요.}
강승현은 세쿼이아 오징어를 바라보았다.
다리 사이즈만 봐도 추측할 수 있었지만,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사이즈였다.
꾸르르르르-!
물론, 그 거대한 오징어는 다리를 잘려서 화가 났는지,
후우욱!!
멀쩡한 다리로 강승현을 공격하려 했다.
{강 선생!}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강승현은 자세를 잡더니,
{루디 데리고 올라가세요.}
들고 있던 얼음 회칼을 휘둘렀다.
샤아아악!
냉기를 뿜어내던 얼음 칼날이 물컹한 살점을 베어냈다.
{조심해! 저 녀석, 물 밖에 있을 때보다 재생속도가 훨씬 빨라졌어!}
김호정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뜯어냈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재생해버렸기 때문이다.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어, 엇!}
김호정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재생하려던 잘린 단면에서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쩌적, 쩌저적!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차갑게 굳어버렸다.
{얼어버렸네?}
{이 녀석 덕분이죠.}
강승현이 씩 웃으며 어깨에 걸친 얼음 회칼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얼음 회칼에 부여한 인챈트.}
-세쿼이아 오징어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먼저 귀찮은 재생 능력을 봉인해야 했다.
'그러려면 얼음 회칼로 베어내고, 그 자리에 얼음 화살을 박아주는 귀찮은 짓을 해야 하는데.'
좀 귀찮긴 하지만 그거 말고는 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랜덤 인챈트를 발동합니다.]
[무작위 보너스 옵션이 부여됩니다.]
'이거면, 얼음 화살도 필요 없겠는데?'
얼음 회칼에 엄청난 옵션이 생성됐다.
+[공격에 성공시 100% 확률로 공격 부위를 '냉동' 상태로 만든다.]
+[냉동 상태의 적에게 추가 대미지 +400%]
베기만 해도 적을 얼리는 것도 모자라, 얼린 상대에게 추가 대미지.
말 그대로 세쿼이아 오징어 척살 무기가 탄생한 것이다.
{널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강승현은 얼음 회칼을 어깨에 걸치고 세쿼이아를 향해 다가갔다.
꾸르르르르!
당연히 세쿼이아는 그 꼴을 그냥 두고 보진 않았다. 녀석은 다리를 휘둘러 강승현을 저지하려 했다.
{오징어 다리는 모두 10개. 아까 위에서 잡은 다리를 1번, 2번이라고 치고, 방금 잡은 게 3번째니까....}
슈욱!
슈아악!
그러자 강승현은 얼음 회칼을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 세쿼이아 4번째 다리를 베어버렸다.
{이게 4번 다리!}
쩌저적!
강승현을 공격하려던 4번째 다리는 차가운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렸다.
보통 사람은 물속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쉽지 않지만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3 : 피츠타 마린 이어커프(좌)]
강승현은 갖고 있던 이어커프의 효과로
[착용 시 수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수중 이동 속도 +50%]
육지만큼은 아니어도 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파각!
강승현은 얼음덩어리가 된 다리를 발로 걷어차 부숴버렸다.
촤악!
그때, 빠른 속도로 다가온 세쿼이아의 5번째 다리가 강승현의 몸을 속박하고, 얼음 회칼을 강탈하려 했다.
팟-!
하지만 세쿼이아의 다리가 칼에 닿기 직전, 얼음 회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뺏기기 전에 인벤토리에 넣으면 그만이지.'
차원이동자는 물건이 몸에 닿아 있는 상태라면,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원이동자들만 쓸 수 있는 꼼수.'
강승현은 그 직후, 넣어둔 얼음 회칼을 다시 불러내더니
쫘아아아아악!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세쿼이아의 다리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쩌저저적!!
찢어진 세쿼이아의 살점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호수 속에 흩뿌려졌다.
꾸르르르!
촤아아!
세쿼이아는 강승현의 접근을 막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쳤으나.
서걱!
서어억!
다리 잘리는 속도만 빨라질 뿐이었다.
'응?'
강승현이 세쿼이아 바로 앞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구그그그!
녀석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집채만한 바위를 집어들었다.
세쿼이아의 몸통만큼이나 거대한 바위였다.
{저, 저건 안 되겠는데? 칼이 부러질 거야!}
{회칼은 뼈보다는 살 바르기용 칼이니까. 좀 불리하긴 하죠.}
후웅!
세쿼이아 오징어는 승리를 확신하며 집채만 한 바위를 내던졌다.
{내가 삽만 가져왔어도!}
안절부절못한 김호정과 달리, 강승현은 씩 웃으며 석궁을 들었다.
{뭐, 그래도 못 벨 건 없지만.}
105. 물결 기생초 4
강승현은 자신의 얼음 회칼을 바라보았다.
원래 회칼은 살을 도려내고 베어내는 데 특화된 도구다. 뼈나 바위처럼 단단한 물체를 벨 때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런 단점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겠지만....'
강승현의 공격 스킬은 오직 하나 [절개]뿐.
공격 범위가 더럽게 짧고, 아주 가까이에서 써야 먹히는 스킬이라 이 상황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사실상 스킬 없이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
당연히 부실한 무기로 스킬 없이 공격했다간 처참하게 부러질 것이다.
'이게 평범한 무기라면 말이지.'
강승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왼손에 석궁을 불러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내가 [랜덤 인챈트]를 써서 얼음 회칼에 부여한 옵션은 2개.'
그중 두 번째 옵션은 이렇다.
[냉동 상태의 적에게 추가 대미지 +400%]
이 옵션은 대상이 얼어있을 때 공격하면 추가 대미지 효과를 받을 수 있다.
'뭐가 됐든 그냥 얼어있기만 하면 된다는 소리지.'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얼음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바위를 향해 얼음 화살을 발사했다.
쩌억!
쩌저적!
얼음 화살에 맞은 바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물론 고작 화살 몇 개로 바위 전체를 얼리는 건 불가능했지만, 애초에 전부 얼릴 필요가 없다.
'베어낼 부위만 얼려버리면 되니까.'
휙,
그 직후, 강승현은 석궁을 내던지고 양손으로 얼음 회칼을 잡았다.
'얼음 회칼은 베어내기와 도려내기 특화 무기.'
[베어내기, 도려내기 특화]
-[추가 대미지 +50%]
-[추가 속도 +40%]
그래서 베어내기나 도려내기를 시도할 경우, 기본 대미지 +100%에 추가 대미지가 +50%까지 올라간다.
'즉, 대상이 냉동 상태로 얼어있고. 얼어있는 대상에게 베어내기를 시도한다면....'
모든 조건이 전부 맞아떨어졌을 때.
스킬 없이도 엄청난 대미지를 입힐 수 있다.
'최종 대미지 550%!'
강승현은 바위를 향해 얼음 회칼을 휘둘렀다.
본래라면 검날이 처참하게 부러질 테지만,
[대상은 '냉동' 상태다.]
쩍, 쩌적!
얼음 회칼에 부여된 추가 옵션과 강승현 특유의 괴력이 합쳐지면서.
파샤악!
얼어붙은 바위는 반으로 무참하게 갈라졌다.
{우, 우와.... 스킬 없이 저게 되네.}
그걸 본 김호정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승현은 전투 계열 직업도 아니고 강력한 공격 스킬을 가진 것도 아니다.
힐은 쓸 줄 모르지만, 그는 분명 시스템상 회복 계열 힐러였다.
{없어도 되게 만들어야죠.}
그런데도 적을 어떻게든 박살 내는 기묘한 인물이었다.
김호정은 그런 강승현에게 물었다.
{선생은... 진짜 못 하는 게 뭐야?}
{힐.}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얼음 회칼을 휘둘렀다.
서거억!
서억!
차가운 검날로 인해 세쿼이아의 9번째, 10번째 다리까지 전부 잘려나갔다.
이걸로 괴물 오징어의 모든 다리가 손질됐다.
{어! 어어! 다 잘렸다! 이제 끝난 건가?}
{아니요. 숨통을 끊어야죠.}
구르르르르르륵-!
하지만 세쿼이아는 다리가 전부 잘려나갔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은 몸을 재생시키려는 듯 발악했다.
{또, 또 재생한다!}
{아직은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쩌저적!
[대상은 '냉동' 상태다.]
하지만 몸을 뒤덮은 얼음이 그걸 방해했다.
{온몸을 냉동시켜 놨으니 쉽게 재생하긴 힘들 거라서요.}
녀석이 잘린 다리를 재생하려면 냉동 상태에서 풀려나야 할 것이다.
{그래도 저저 계속 발악하는 것 좀 봐.}
김호정은 오만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세쿼이아는 여전히 발버둥 치고 있었다.
{포기를 안 하네. 엄청 질긴 자식이야.... 저러다 얼음이 녹으면 어쩌지?}
{별수 있나요. 녹기 전에 처치해야죠.}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회복하며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벌써 이거밖에 안 남았나.'
이제 남은 바람 포션은 5개. 혼자서 사용한다면 앞으로 15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썩 넉넉하다곤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강승현은 김호정에게 말했다.
{김호정 씨는 루디 데리고 먼저 올라가세요.}
{음.... 그래, 알았어. 근데 강 선생은?}
강승현은 대답 대신 비참하게 꿈틀거리는 세쿼이아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을 그냥 버려뒀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어떻게든 여기서 결판을 내야 했다.
{저는 이 자식 마무리 짓고 갈 테니까.}
그 말을 들은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 사망플래그 같은데.}
{보통은 그렇겠죠. 하지만....}
강승현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제가 하면 사망플래그도 생존플래그라서요.}
{크~ 하여간 야매 힐러님....}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긴 했으나,
{사망플래그도 야매로 꽂는 거야 뭐야!}
그게 강승현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납득한 김호정은 실실 웃으며 루디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어디, 그럼....}
강승현은 세쿼이아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가진 10개의 거대한 다리는 모조리 잘려나간 데다, 마지막 비장의 무기였던 바위 찍기도 실패했다.
'이제 어떻게 나오시려나.'
꾸르르르르르.
꾸러럭.
이 이상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세쿼이아는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아직도 할 게 있나?}
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리자,
촤아아아!
'응?'
강승현의 주위로 엄청난 수의 세쿼이아 오징어 떼가 몰려들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하나같이 몸 곳곳에 식물 줄기가 돋아나 있었다.
'이것들은... 물결 기생초한테 조종당하는 숙주들이군. 전부 몇 마리나 불러모은 거지?'
반응이 둔하고 움직임이 비슷비슷한 걸 보면 물결 기생초한테 당해서 자아를 잃은 놈들이다.
녀석들은 강승현한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스르르르.
촤아. 촤아.
몰려온 오징어 떼는 거대한 세쿼이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무슨 보호막을 펼친 것처럼 말이다.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건가.'
익숙한 패턴에 강승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레어 몬스터가 [우월감]을 써서 동족을 부려먹는 것과 똑같은 광경이었다.
'자기보다 약한 놈들을 조종해서.'
강승현은 혀를 찼다.
당연하지만 그리 좋아하는 광경은 아니었다.
서억!
강승현은 얼음 회칼을 휘둘러 오징어 몇 마리를 베었다. 하지만 즉시 새로운 개체가 나타나 빈자리를 채웠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스르르르르르.
몇 번을 공격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피츠타 호수에 사는 오징어란 오징어는 전부 불러모은 것 같다.
'이 새끼가 어떻게든 시간 끌어보겠다고... 별짓을 다 하네.'
이래서는 본체 녀석을 공격할 수 없다.
강승현은 다급하게 얼음 회칼을 살폈다.
[남은 시간 5분]
역시 시간을 끄는 이유가 있었다.
'5분밖에 안 남았잖아.'
5분 안에 오징어 떼를 처리하지 못하면 얼음 회칼이 소멸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세쿼이아의 재생 능력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이제 바람 포션도 얼음 포션도 얼마 안 남았고, 무기를 새로 만들 시간도 없어.'
강승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기생초 새끼가 노린 건 이거였군.'
녀석은 얼음 회칼이 소멸할 때까지, 몸의 얼음이 녹을 때까지 오징어 떼 뒤에 숨어서 버틸 속셈이었다.
치사하지만, 승산은 확실한 작전이다.
'그렇지. 절단된 다리만 재생하면 해볼 만할 테니 테니까. 풀 쪼가리치고는 대가리를 잘 굴렸어.'
그 과정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오징어들이 희생되겠지만 녀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기생형 몬스터에게 다른 생물은 자기가 쓰고 버릴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간 지랄 맞은 쓰레기 새끼들이 너무 많아. 사람이건 몬스터들이건.'
강승현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정보를 정리해보자.'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기 위해서.
'보통 숙주들은 기생체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인 사고를 못 하지만, 본능에는 충실하지.'
세쿼이아 오징어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이 녀석들은 빛만 보면 환장하는 놈들이라 잡기는 쉬웠거든요.
시옐 카타일러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강승현은 허공을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빛에 이끌린다는 점.'
그리고 강승현의 인벤토리에는 엄청난 빛을 내는 아이템이 담겨 있었다.
{여명의 성수 화살.}
파아아아앗-!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여명의 성수 화살이 눈부신 빛을 뿜으며 나아갔다.
그 빛은 피츠타 호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스르르르르.
동시에, 물결 기생초를 감싸던 오징어 떼는 본능적으로 빛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기생초의 세뇌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역시 본능은 못 이기지.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촤아아아아!
강승현은 뿔뿔이 흩어지는 오징어 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물결 기생초를 보호하던 방패가 사라졌다.
꾸륵!
꾸르륵!
당황한 물결 기생초는 몸부림을 쳤으나, 흩어지는 오징어 떼를 막지 못했다.
이제 녀석을 보호해줄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이다.'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관찰의 눈]
그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세쿼이아의 몸 위로 각종 정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부분 냉동][감염][쇠약]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대상의 '냉동'이 풀리려 한다.]
[다리가 얼어붙어서 재생할 수 없다.]
[물결 기생초한테 당했다.]
[물결 기생초의 본체가 뇌에 기생 중이다.]
역시 녀석은 숙주의 뇌를 장악한 상태였다.
강승현은 세쿼이아를 향해 석궁을 겨눴다.
[후크 샷]
푸우욱!
방아쇠를 당기자 발사된 갈고리가 세쿼이아 오징어의 머리를 꿰뚫었다.
촤악!
그 순간, 찐득한 체액이 튀면서 갈고리 끝에 뭔가가 걸린 게 느껴졌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물결 기생초의 본체다.
'잡았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후크 샷 - 크레인]
차르르르르르!
그러자 사슬이 빠르게 감기며 갈고리에 걸린 물결 기생초가 질질 끌려 나왔다.
녀석은 저항하려 했지만, 본체 자체는 힘없는 식물이라 의미 없는 움직임이다.
쫘아악!
휙!
물결 기생초가 완전히 끌려 나온 순간이었다.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놓고 양손으로 얼음 회칼을 잡았다.
[남은 시간 10초]
이제 얼음 회칼의 사용 시간은 10초밖에 남지 않았지만.
{잘 가라.}
볼품없는 기생 식물을 처리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강승현은 검을 휘둘러 물결 기생초를 베어냈다.
106. 호수 정화
샤아악!
얼음 회칼의 차가운 검날이 물결 기생초를 반토막냈다.
파즈즈즈!
하지만 녀석은 끈질겼다.
'평범한 몬스터라면 죽었을 텐데. 변이체는 변이체로군.'
토막난 상태에서도 강승현에게 기생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으나.
[상태이상 '냉동' 상태!]
그 순간, 녀석의 줄기가 단숨에 얼어붙더니.
쩌저저적!
파가악!
처참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며 최후를 맞이했다.
'드디어 뒈졌네. 끈질긴 새끼.'
강승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각난 물결 기생초 잔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강력한 변이체라도 냉기에 약한 물결 기생초의 특성은 어찌할 수 없다.
[남은 시간 2초]
[남은 시간 1초]
[남은 시간 0초]
[얼음 회칼이 완전히 녹아버렸다!]
사르르르.
그와 동시에 강승현의 얼음 회칼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제한 시간이 다 됐기 때문이다.
강승현은 차가운 냉기만 감도는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번 쓰고 버릴 용도로 만들긴 했지만, 막상 사라지니 아쉽네.'
비록 소멸하긴 했으나, 제 역할을 완벽히 수행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강승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렸다.
'샘플은 따로 채집해서 연구해볼까.'
강승현은 물결 기생초 잔해를 수거했다. 미리미리 연구해두면 또 다른 변이체가 발생할 때 대처하기 쉬울 테니까.
'일단 본체는 처리했고, 분신들은 어떻게 됐지?'
꾸륵,
꾸르륵.
위를 올려다보자 세쿼이아 오징어 떼가 몸에서 검녹색 액체를 뱉어내는 게 보였다.
물결 기생초 본체가 사망하면서 숙주에 기생 중이던 분신들도 일제히 움직임을 멈춘 것 같다.
'저런 식으로 배출되는군. 일단 본체만 처리하면 숙주들한테 큰 문제는 없구나.'
촤아아아.
촤아.
그 뒤 오징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수 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녔다.
아마 다른 녀석들도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다들 어찌어찌 정상으로 돌아온 건가.... 응?'
그때였다.
피츠타 호수의 생물들이 기생 상태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12][+5][+6][+15][+6][+13][+12][+7][+10][+4][+10][+7][+11][+14][+12]....
대량의 포인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포인트? 이 상황에?'
강승현은 의아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이러는 동안에도 포인트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설마 치료로 인정받은 건가?'
강승현이 포인트를 벌 수 있는 건 부상자를 치료했을 때뿐이다.
아무래도 시스템은 기생초를 제거해서 숙주를 정상으로 되돌린 상황을 치료로 인정한 모양이다.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한마디로, 그는 물결 기생초한테 감염된 모든 몬스터를 한 번에 치료한 것이다.
'이거, 나 말고 다른 녀석들은 꿈도 못 꾸겠는데.'
사실상 호수 전체를 치료해버린 유일무이한 힐러.
이게 가능한 힐러는 야매 힐러인 강승현밖에 없을 것이다.
[업적 달성!]
[업적 달성!]
[업적 달성!]
...[업적 달성!]
거기다 포인트만 쏟아지는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일을 해내서 그런지,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도 잔뜩 쏟아져나왔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한 번에 달성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고생한 보람이 있네.'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바라보았다.
사실 차가운 얼음 회칼을 사용하느라 손이 동상에 걸렸기 때문이다.
'물 위로 올라가면 동상 치료부터 해야겠지.'
다행히 증상이 그리 심하진 않았다.
이 정도는 약간의 조치만 취해도 금방 나을 수 있다.
'그럼 슬슬 올라가 볼까.'
강승현은 호수를 뒤로하고 헤엄쳐 올라갔다.
-첨벙!
"휴!"
물 위로 올라온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벌써 새까매진 상태였다.
거기다 시커먼 먹구름까지.
"뭘 했다고 시간이 이렇게."
강승현은 한숨을 쉬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먹구름 때문에 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흘러가버린 건가...."
본래 계획은 날이 저물기 전에 트라코티 마을에 도착하는 거였으나, 이래선 어림도 없을 것 같다.
"강 선생!"
그때 강승현을 부르는 김호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호정은 호수 표면을 떠다니는 얼음조각 위에 올라탄 채로, 강승현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도 안 나와서 궁금해 죽는 줄 알았다구!"
"뭐,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도 멀쩡하게 돌아온 거 보면 그 괴물 녀석은 깔끔하게 처리했나 보네. 역시 강 선생이야."
김호정은 안도한 얼굴로 웃더니 삽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이거 잡고 올라와."
"왜 하필 그거?"
"거기까지 손이 안 닿을 것 같아서."
"그러면 밧줄 같은 걸 던져주든가...."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삽을 붙잡으며 얼음 위로 올라왔다.
밧줄만큼은 아니었지만 삽도 나름 도움이 되기는 했다.
"계속 물에 들어가 있어서 그런가, 온몸이 눅눅하네요."
"수건 빌려줄까?"
"아, 괜찮아요."
강승현은 수제 붕대를 꺼내 몸의 물기를 닦았다.
수제 붕대는 생각 외로 쓸 곳이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요?"
"건너편 호숫가에서 있어. 얼음 덩어리보단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촤아아.
김호정은 강승현이 얼음 위로 올라온 걸 확인하고 금삽을 노처럼 저었다. 두 사람을 태운 얼음 조각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얼음 조각배라."
다른 일행들도 이런 식으로 육지까지 옮긴 것 같다.
타고 온 배는 멀리 떠밀려가 버렸으니까.
"그 삽, 생각보다 쓸모가 많네요."
"그치?"
"주로 잡일에...."
강승현은 짧게 중얼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근데 멀미는 괜찮구요?"
"물론! 안 괜찮지...."
어두워서 몰랐지만 김호정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어쩐지 노를 천천히 젓는 이유가 있었다.
"김호정 씨도 육지에서 기다리지 그랬어요."
"그치만 고생하고 나왔을 때 아무도 안 기다리고 있으면 섭섭하잖아."
그래서 멀미를 꾹 참으면서 기다렸다고. 김호정은 실실 웃으며 노를 저었다.
촤아, 촤아.
"나 같으면 호숫가에서 쉬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큰 도움을 못 줬으니, 이렇게라도 도와줘야지."
정말 김호정다운 대답이었다.
'하긴,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자기 손해 감수하고 남 돕는 타입.'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던져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
포션을 낚아챈 김호정은 다시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촤아아, 촤아아.
"다, 다 왔다!"
"드디어."
두 사람을 태운 얼음 조각배가 건너편 호숫가에 도착했다. 김호정은 육지에 닿자마자 배에서 뛰어내리더니 바닥에 엎어졌다.
털썩!
"나 죽네...."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흙바닥에 코 박고 있는 건 좀."
"선생님...!"
호숫가를 서성이던 데이지는 강승현을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의 눈가엔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루디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데이지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딸이 괴물에게 잡혀가고, 남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데이지 씨는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승현은 정말 영웅 그 자체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딸이 돌아온 이후로는 초조한 얼굴로 강승현이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그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면서.
"말했잖아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그리고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전부 지킨 것이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감사했습니다."
데이지는 걸치고 있던 가운을 내밀었다. 조금 구겨진 것만 빼면 아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강승현이 돌아올 때까지 조심스럽게 보관하고 있던 것 같다.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펄럭.
강승현은 돌려받은 가운을 걸쳤다. 몸이 젖어 있어서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아, 그래서 다른 두 사람은? 발릭 씨랑 루디는 괜찮나요?"
"네. 둘 다 나무 밑에서 쉬고 있습니다."
데이지가 호숫가 나무를 가리켰다.
발릭은 금방 정신을 차렸지만 놀라서 움직일 힘이 없었고, 루디도 큰 사건을 겪은 탓에 기운이 빠진 상태였다.
"김호정 씨도 널브러져 있으니... 여기서 좀 쉬었다 가야겠네요."
강승현은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김호정을 향해 손을 펼쳤다.
[살포]
그의 손에서 퍼져나온 샛노란 오오라가 김호정의 깎인 스태미나를 회복시켰다.
이어서 체력 포션까지 [살포]하자.
"좀 낫네...."
김호정은 내팽개친 금삽을 주워들고 몸을 일으켰다. 이쪽도 몸에 기운이 쭉 빠진 것만 빼면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몸 괜찮아지면 그때 출발하죠. 어차피 오늘 안에 마을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일행들이 하나같이 빌빌거리는 상황에 무리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아휴, 내가 어디 다치기라도 했어야 선생 포인트라도 벌어줄 텐데...."
"스태미나만 회복해줘도 포인트가 들어오긴 해요. 확률이 그리 높진 않지만."
"그래도 말이지."
김호정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싸움은 격했지만, 결과적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굳이 고르자면 내가 입은 동상 정도?'
물론 강승현의 셀프 치료는 포인트를 얻을 수 없으니 아무 의미 없다.
"오늘은 포인트 허탕 친 거 아냐?"
"아, 허탕 친 건 아니에요."
"그러면?"
그 말을 들은 강승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치료할 사람은 없었지만, 치료할 몬스터는 잔뜩 있으니까.
"포인트라면 엄청나게 벌었거든요."
"뭐? 어떻게?"
"감염된 몬스터를 치료해서."
강승현은 물결 기생초가 기생한 몬스터를 전부 치료해서 대량의 포인트를 벌었다.
지난 3년 중 오늘이 역대급일 것이다.
"그 상황에 몬스터를 치료했어? 대단한데?"
"뭐, 저도 얻어걸린 거지만요."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생각했다.
'설마 이런 식의 간접 치료도 인정해줄 줄이야.'
야매 힐러 3년 차.
강승현은 끝없이 야매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벌었어? 500포인트?"
"글쎄요? 확인 안 해서 모르겠는데."
"빨리 확인해봐! 궁금하잖아!"
"알았어요."
강승현은 이번에 누적한 포인트를 확인할 겸 상태창을 열었다.
'한 3000포인트쯤 들어왔으려나....'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열였는데.
[누적 포인트 : 14375포인트]
거기에 잭팟이 터져 있었다.
107. 잭팟
처음엔 잘못 본 건가 싶었다.
[누적 포인트 : 14375포인트]
'1만 4천 포인트라고?'
한 3천~4천 정도를 예상했는데, 앞에 1이 더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역대급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뭐야, 얼마나 많이 벌었길래 표정이 그래?"
김호정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4천."
"오오오!"
"플러스 1만."
"응?"
"4천 플러스 1만."
"뭐어?"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더니 말을 이었다.
"14000포인트 벌었습니다."
"하, 한 방에 1만 포인트 넘게 벌었다고?"
"네. 현재 누적 포인트 14375."
"허어...."
정말 말 그대로 잭팟이 터진 셈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김호정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 선생은, 정말 야매 힐러 아니었음 진작 집에 가고도 남았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차원 이동자를 전부 모아봐도 한 번에 1만 포인트를 모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거 남들에게 말해도 안 믿겠는데."
"그러겠죠. 힐도 없는 힐러가 무슨 1만 포인트를 버냐고."
그중 강승현처럼 페널티와 너프를 잔뜩 받은 인물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이 대량의 포인트를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지...."
포인트를 잔뜩 벌어들인 건 좋다. 기쁘다.
하지만 정작 쓸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 말을 들은 김호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엥? 룰렛 돌리면 되잖아?"
"룰렛이요...."
강승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5회 연속 룰렛.'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14275포인트]
타르르르르.
룰렛을 돌렸다.
☆[기타(1골드)]
☆[기타(2골드)]
☆[기타(5골드)]
☆[기타(1골드)]
☆[기타(1골드)]
그리고 당연하게도 쓰레기만 쏟아져 나왔다.
"룰렛 보상 합계 10골드."
"고, 골드러시...!"
"대충 이렇네요."
"미안, 내가 괜히 돌리라고 해서."
김호정은 곧 죽을 것처럼 미안해했다.
"뭐, 쓰레기가 나온 게 김호정 씨 잘못인가요. 이딴 걸 만든 놈 머리가 잘못된 거지."
나쁜 건 룰렛을 쓰레기처럼 만든 관리자다.
오늘도 강승현의 마음속 관리자를 향한 증오가 더욱 거세졌다.
"아무튼, 룰렛은 포인트 투자 대비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요."
좋은 보상이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보상이 너무 많이 나온다.
"좀 쓸 만한 스킬을 얻으려면 수천 포인트를 먹여야 하니."
룰렛에서 원하는 걸 얻으려면 포인트를 잔뜩 꼬라박아야 했다.
그래서 기본 룰렛은 가성비가 좋지 않다.
"프리아의 룰렛은?"
"그건 석궁 관련 보상만 나와서. 힐러 짓에는 별 도움이 안 되죠."
"관리자 녀석이 이참에 새 룰렛을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말야."
김호정이 허공을 향해 쫑알거렸다.
"새 룰렛까진 아니더라도, 뭔가 포인트 쓸 곳이 늘어나면 좋겠는데 말이죠."
예를 들어 포인트 상점이라든가.
"보통 시스템에 뭘 추가해주는 건 업적 깰 때였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까 받은 업적을 확인 안 했네요."
강승현은 업적 알림 창을 확인했다.
밀린 업적이 잔뜩 쌓인 채 보상 수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수령 업적 : 7개]
그것도 무려 7개나.
오늘은 정말 잭팟 터지는 날인 모양이다.
"선생, 도대체 호수 밑바닥에서 뭘 한 거야?"
"수제 회칼로 대왕오징어 잡기."
강승현은 이번에 새로 달성한 업적을 확인했다.
[업적 달성 : 계란으로 바위 치기]
[업적 달성 : 대왕오징어 사냥]
[업적 달성 : 이물질 제거 성공!]
[업적 달성 : 훌륭한 치료사]
[업적 달성 : 위대한 치료사]
[업적 달성 : 1타 5피]
[업적 달성 : 탐욕의 화신이여]
'이름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가네.'
가령 [계란으로 바위 치기] 업적은 100% 얼음 회칼로 바위를 쪼갰을 때 해금된 업적일 것이다.
[업적 달성 : 계란으로 바위 치기.]
[내구도가 낮거나 망가진 무기로 바위를 부술 경우 달성.]
'역시나.'
이번에 사용한 얼음 회칼은 급조한 탓에 내구도가 무척 낮았다.
덕분에 업적 조건을 만족한 것 같다.
☆[스탯(바위 부수기 특화 옵션)]
[추가 대미지 +30%]
앞으로도 바위를 잘 쪼개라는 뜻인지, 바위 부수기 특화 스탯을 받았다.
'뭐, 나쁘진 않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강승현은 오늘 한 번에 1만 포인트를 벌어들였다. 분명 그와 관련된 업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포인트 관련 업적.'
강승현은 업적 목록을 찬찬히 훑었다.
[업적 달성 : 탐욕의 화신이여]
목록을 찬찬히 훑던 강승현의 눈에 업적 하나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 포인트 관련 업적이다.
[업적 달성 : 탐욕의 화신이여]
[하루 동안 1만 이상의 포인트를 획득할 경우 달성.]
[탐욕스런 당신에게 선사합니다.]
"있네요. 하루에 1만 이상의 포인트를 모으면 달성할 수 있는 업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동안 1만 포인트 획득. 언뜻 봐서는 쉬워 보인다.
힐러를 뺀 일반적인 차원이동자들은 몬스터를 사냥해서 포인트를 벌 수 있으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온종일 사냥만 해도 깰 수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아즐 대륙의 몬스터가 주로 밤에 활동한다는 점. 그래서 낮이 되면 몬스터의 수가 급감해버려서 포인트를 벌기 힘들다.
"거기다 약한 몬스터는 잡아봤자 1포인트밖에 안 준단 말이지."
이 업적을 그나마 쉽게 깨려면 몬스터가 들끓는 오염지대로 가거나, 몬스터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는 몬스터 급증 기간을 노려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야 하니 은근 빡세죠. 아마 이 업적 깬 녀석들도 철저하게 준비했을걸요."
"으음.... 나 같은 녀석은 꿈도 못 꾸겠는데."
김호정은 업적 달성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저는 물결 기생쓰레기 덕분에 쉽게 클리어했지만요."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룰렛 돌아가는 사악한 소리 대신,
★[시스템(포인트 자판기)]
[※이제부터 상태창에서 '포인트 자판기' 시스템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포인트를 소모해 새로운 물품을 획득할 수 있다.]
"포인트 자판기?"
새로운 시스템이 추가되었다.
-[포인트 자판기]
-[오늘의 상품]-
[☆스킬(열 감지)]
[오늘의 상품은 매일 아침 6시에 갱신됩니다.]
[1000포인트를 소모하면 오늘의 상품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룰렛에서 <포인트 자판기 상품 갱신권> <포인트 자판기 할인권> 아이템이 등장합니다.]
포인트 자판기는 룰렛처럼 보상을 랜덤으로 주는 게 아니라, 모든 차원이동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확정 보상 시스템이었다.
'드디어!'
강승현은 환호했다. 그리고 동시에 화가 났다.
'이런 좋은 시스템을 하드 난이도 업적 보상으로.... 쓰레기 새끼!'
역시 관리자는 차원이동자를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강승현은 분노를 참으며 포인트 자판기를 확인했다.
-[오늘의 상품]-
[☆스킬(열 감지)]
오늘 획득할 수 있는 건 고맙게도 스킬이었다.
"와, 포인트 주고 스킬을 뽑을 수 있다고? 진짜 굉장하잖아!"
"매일 새로운 상품으로 갱신될 테니 꼭 스킬이 나오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1골드 얻을 일은 없겠죠."
"잘됐네!"
골드러시를 피할 수 있는 최고의 시스템.
이것만으로도 1만 포인트 업적을 깰 가치가 차고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판기에 올라온 건 무슨 스킬이야?"
"열 감지. 온도 체크용 스킬이에요."
[열 감지]를 사용하면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눈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치료할 환자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고마운 스킬.
"야매 힐러에겐 무척 중요한 스킬이죠."
"오... 그럼 얼른 뽑아봐!"
마침 1만 포인트 넘게 모으기도 했고, 좋은 스킬은 1000포인트를 투자할 가치가 있다.
강승현은 고민 없이 자판기 버튼을 눌렀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13275포인트]
덜컹-!
-[오늘의 상품]-
[SOLD OUT!]
[☆스킬(열 감지) 획득!]
오늘의 상품이 품절 상태로 변하면서 강승현의 스킬창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다.
[열 감지]
[물체의 온도를 눈으로 볼 수 있다.]
[붉은빛을 뿜어내는 물체는 온도가 높다.]
[푸른빛을 뿜어내는 물체는 온도가 낮다.]
비록 하루 1회 한정이긴 하나, 보상을 간편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
과연 포인트 1만을 모아 깰 만한 업적답다.
"그래도 하루에 1000포인트면 좀 빡세네."
"뭐, 일반 룰렛에서 할인권을 뽑을 수 있으니... 그쪽도 병행하라는 소리겠죠."
결국, 자판기가 생겨도 룰렛을 아예 안 돌릴 순 없다는 소리다.
관리자의 악랄함이 느껴진다.
"그럼 새 스킬을 얻은 김에 바로 테스트를."
"또 나야?"
[열 감지]
화아앗!
강승현은 스킬을 사용하며 김호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역시 김호정 씨는 몸에 열이 많아서 붉은빛이고.'
강승현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물 속에 있다가 나와서 전체적으로 푸른빛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오른손이 새파랬다.
'이쪽은 동상 때문이군.'
강승현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잭팟을 즐기느라 잊고 있었지만, 지금 가벼운 동상에 걸린 상태였다.
"아이고, 손 괜찮아?"
김호정이 강승현의 손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심한 건 아니라서."
가벼운 동상이라면 보온하는 걸로 응급처치할 수 있다. 담요로 감싸거나, 따뜻한 물에 담그거나, 다른 사람의 체온을 빌리거나.
"증상이 가벼운 편이라, 따뜻하게 만들기만 하면 나을 수 있어요."
"아, 그럼 이거 도움 되려나?"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부드러워 보이는 담요를 꺼냈다.
"진홍의 마탑에서 산 보온 마법진 담요! 마력을 조금만 넣어도 금방 따뜻해진대!"
"그거라면 괜찮겠네요."
김호정한테서 빌린 담요로 손을 감싸자 따스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완치판정.'
담요로 감싼 손에 [완치판정]을 사용하자 동상이 더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10분 정도 있으면 완치될 것 같다.
"동상 치료하면 움직이죠. 김호정 씨 체력도 회복된 것 같으니."
"그러자고. 바로 트라코티로 갈 거야?"
"너무 늦어서 마을까지 가는 건 힘들걸요."
"그럼 오늘은 노숙해야겠네."
"있어 보이게 야외취침이라는 말을 씁시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참이였다.
"가, 강승현 선생님!"
발릭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시죠?"
"우리 루디 좀 봐주세요! 상태가 이상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 안고 온 딸을 보여주었다.
108. 버텨줘야 할 텐데
"진정하세요.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죠?"
"아까부터 몸을 계속 떨면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발릭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강승현은 그를 진정시키며 루디를 살폈다.
'발릭 씨 말대로군.'
한눈에 봐도 루디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호흡은 불안정하고 몸은 심하게 떨고 있는 데다 피부가 창백했다.
뭣보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서 무척 차가웠다.
'[관찰의 눈]을 쓸 필요도 없어.'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사용하는 대신 [열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아앗!
[열 감지]를 통해 바라본 루디는 붉은빛보다 푸른색에 가까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33.7℃]
측정된 온도는 정상 체온보다 훨씬 낮은 온도.
'이걸로 확실해졌네.'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체온증입니다."
저체온증. 여러 이유로 체온이 떨어진 상태.
보통 체온이 35.0℃ 밑으로 내려간 경우를 말한다.
저체온증에 걸린 환자는 점점 무기력해지다가 체온이 계속 내려간다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저체온증? 오늘 날씨 따뜻했는데?"
김호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상 체온을 유지 못 하는 상황이라면 한여름에도 걸릴 수 있어요. 보통 물놀이나 등산하러 갔다가."
"그, 그렇구나...."
"거기다 어린애라서 더 약한 것도 있고."
루디는 아까 세쿼이아한테 잡혀서 호수 속으로 끌려갔다. 호수 속에 꽤 오래 잡혀 있었으니 체온이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크으! 역시 아까 루디를 구했어야 했는데!"
"그랬어도 저체온증은 확정이에요. 이미 물에 몇 번 빠진 상태였고, 차가운 얼음을 발판으로 쓰고 있었잖아요."
이쯤 되면 루디 한 명만 저체온증 증세를 보이는 게 기적인 수준. 저체온증 환자가 몇 명 더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몸의 물기만 닦고 있었어도 지금처럼 악화되진 않았겠지.'
물은 빠르게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젖은 상태에선 체온 손실이 더 심해진다.
거기에 바람까지 불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서, 선생님.... 우리 루디 괜찮겠죠?"
데이지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겨우 살아돌아온 딸의 몸 상태가 나빠졌으니 무척 불안할 것이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에요."
"저, 그...그럼 저희가 뭘 해야 합니까?"
"우선 젖은 옷은 벗기고 물기를 전부 닦아내세요."
강승현은 손을 감싸고 있던 보온 담요를 풀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열 손실을 막는 것이다.
"그다음엔 담요로 아이 몸을 감싸시고. 머리도 잘 감싸주세요. 체온을 지켜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강승현은 보온 담요와 수건 대신 사용할 대형 수제 붕대를 내밀었다.
이렇듯 수제 붕대는 쓸 일이 많다.
'여기서 온도가 더 내려가면 위험하겠지. 일단은 모닥불 피워서 체온을 서서히 올려야....'
"강 선생, 하늘 좀 봐!"
강승현이 모닥불을 피우려던 참이었다.
"비 오려나 보다!"
김호정이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더 많은 먹구름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저체온증 악화되기 딱 좋은 날씨네요."
"저거 한바탕 쏟아지겠는데?"
안 그래도 밤이 돼서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 이 상황에 비바람까지 몰아친다면 루디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다.
"여기서 트라코티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지름길을 써도... 최소 2시간은 걸립니다. 밤이고 날씨까지 안 좋아서... 더 오래 걸리겠죠."
"마을로 가는 건 포기해야겠네요."
이제 와서 트라코티 마을로 가는 건 소용없을 것 같다. 도착하기 전에 루디가 죽을 테니까.
"그, 그럼 이제 방법이 없는 건가요?"
"염려 마세요."
강승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환자가 살아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려낸다.'가 제 신념이라서요."
"서, 선생님!"
발릭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눈물을 글썽였다.
"정 방법이 없으면 붉은 숲을 불태워서라도... 온도를 올려서 따님을 구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발릭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농담이라 생각했으나, 김호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 선생은 100% 진심이지.'
강승현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일단 숲속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하죠."
"알겠습니다!"
강승현 일행은 서둘러 붉은 숲 안으로 들어갔다.
-바스락, 바스락.
숲 안으로 들어온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붉은 숲이로군.'
붉은 숲 내부는 어디를 봐도 시뻘건 나무와 수풀만 보이는 이상한 장소였다. 심지어 높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하늘은 보이지도 않았다.
"풀과 나무뿐만 아니라 토양도 붉은색이고."
"동물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도 그렇구요."
발릭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가족도 그렇지만, 트라코티 마을 사람은 전부 빨간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나거든요."
붉은 숲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과 동물은 예외 없이 몸 어딘가가 붉게 변한다.
땅은 물론이고 바위나 지하수 역시 빨간색이다.
"아참, 두 분 다 제 뒤를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왜죠?"
앞서 걷던 발릭이 뒤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외부인들이 붉은 숲에 들어오면 길을 잃고 헤매시거든요."
외부인들이 붉은 숲에 진입할 경우 무조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표지판도 세워두고, 마을로 가는 길도 만들어봤지만, 소용이 없더라구요."
"특이한 현상이네요."
다행히 이 현상은 숲에 서식하는 생물들과, 트라코티 마을 사람에겐 통하지 않는다고.
"카마르 마법사님들 말로는 붉은 숲이 가진 고유의 힘이라던데...."
덕분에 트라코티 마을에 가고 싶다면 마을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게 아니면 2시간 거리를 5시간 걸려서 도착하게 된다고.
"뭐, 그런 건 됐고. 이 근처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있나요?"
"동굴 같은 게 없지는 않지만, 제때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가 내리면 이동 속도가 더 느려질 테니."
발릭이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루디가 그때까지 버텨줘야 할 텐데."
데이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품에 안은 루디를 바라보았다. 김호정의 담요 덕분에 아까보단 나아졌지만,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거기다 발릭이나 데이지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군.'
강승현과 김호정은 상태창의 가호를 받아 튼튼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험가도 아니고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다.
둘 다 내색하진 않아도 무척 지쳐 있을 것이다.
'빨리 쉴 만한 장소를 찾아야겠는데.'
부스럭.
그때, 수풀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몬스터인가 했지만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바스락, 바스락.
"강 선생."
"쉿."
강승현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열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앗!
그러자 수풀 곳곳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최소 일곱 군데.
'7명인가. 혹시나 해서 시도해봤는데 이게 되네.'
강승현은 [열 감지] 스킬을 사용해, 수풀에 숨어 있는 적을 탐지했다.
불빛의 개수를 보아하니 모두 7명이다.
"다 보이니까 나오시죠."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
"네 녀석들, 카마르에서 왔지?"
강승현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싹 훑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풀에서 나타난 건 빨간 옷차림의 잡졸들이었다.
"저, 저 녀석들은 레드로드 패거리입니다!"
"레드로드 패거리?"
"붉은 숲에 숨어 사는 도적놈들이죠!"
레드로드 패거리.
붉은 숲에 아지트를 둔 여행객 짐가방을 노리는 전형적인 양아치 집단. 10~20대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무리다.
"소속원은 반드시 빨간 머리여야 하고, 자기들처럼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물건을 빼앗지 않고 그냥 보내준다고 합니다. 참고로 염색도 허용한대요."
"그 정도면 조직 이름을 빨간 머리 클럽으로 바꿔도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만 보면 괴상한 컨셉충 집단 같지만, 이 녀석들은 의외로 현상금까지 걸린 정식 도적단.
피해를 입은 카마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우리에 대해 잘 아는 걸 보니 길게 말할 필요 없겠네. 빨간머리 3명은 보내줄 테니 가셔."
"나머지는 통행료를 내주셔야겠어."
"아, 혹시 마법사라면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마법사 담당이거든."
레드로드 패거리가 무기를 꺼냈다.
카마르 사람들이 대부분 마법사인 걸 생각하면 생각보다는 강한 도적들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귀찮은 놈들이 나타났네."
"비 맞으면서 싸우긴 싫은데 말이죠."
물론, 강승현에게 도적 같은 건 그냥 번거롭고 귀찮은 이벤트일 뿐이다.
도적놈들이 아무리 강해봤자 초거대 세쿼이아 오징어보단 약할 테니까.
"쟤네들 빨리 처리하고 비 피할 곳이나 찾자구."
"...그렇지."
그때, 강승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녀석들 붉은 숲에 숨어 산다고 했죠? 그럼 근처에 아지트가 있겠네요."
"그렇겠지. 근데 왜?"
"도적단 아지트라면 비를 피할 수 있잖아요."
그건 바로 레드로드 아지트에 묵는 것이었다.
그럼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마을 여관에 비하면 허접하겠지만, 길바닥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안락하겠죠.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일 테니까."
"오, 그러게? 아지트라면 침대도 있겠지?"
"입을 만한 옷도 빌릴 수 있고."
"거기다 몬스터 침입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 놨을 거고!"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그야말로 최고의 쉼터라고.
"안녕하세요 레드로드 패거리 여러분."
"뭐야."
강승현은 아주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더니,
"지금 저희 일행 중에 환자가 있어서 그러는데."
"그래서 뭐? 돈 깎아달라고?"
"오늘 밤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지트에서 묵게 해주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말을 들은 도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뭐가 어째?"
"곧 비가 올 거 같아서요. 하늘 보이시죠?"
"우리가 무슨 여관주인으로 보이냐?"
돈을 내놓기는커녕, 아지트에 묵게 해달라니.
살다 살다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저도 어지간해선 도적놈들 아지트에 묵고 싶진 않은데, 급한 환자가 있어서요."
강승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지트에 묵게 해주시면..., 그렇지. 여러분을 모험가 조합에 넘기지 않겠습니다."
말투는 정중하지만, 결국 아지트를 빌려주지 않으면 모험가 조합에 끌고 가겠다는 뜻.
레드로드 패거리가 듣기엔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런 시건방진 새끼!"
"저저 싸가지! 분명 마법사야! 틀림없어!"
"가만 안 둬!"
앞으로 뛰쳐나간 레드로드 도적단원 하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일회용 스킬 스크롤인가.'
그건 꼬깃꼬깃하게 접힌 스크롤이었다.
찌이익!
녀석이 스크롤을 찢은 순간,
차르르르르르르!
검은 기운과 함께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슬이 강승현을 속박했다.
[마력오염의 사슬 효과를 받습니다.]
[몸속 마력이 흑마력으로 오염된다!]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
[속박에서 풀려나려면 사슬을 파괴해야 한다.]
동시에 강승현의 눈앞에 이러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이건... 마력 오염의 사슬이군.'
[마력 오염의 사슬]은 대상을 움직일 수 없게 속박하고 마력을 오염시켜 스킬을 쓸 수 없게 만드는 스킬이다.
'한마디로 사제와 흑마술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스킬 봉인에 이동 봉인을 거는 스킬.'
벗어나려면 신성력으로 몸을 정화하거나, 흑마술을 사용하거나, 사슬을 스킬 없이 평타로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슬이 생각보다 단단해서 스킬이 없으면 파괴하기 어렵다는 점이지만.'
덕분에 어지간한 사람은 당해낼 수 없다.
강승현은 사슬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꽤 비싼 스크롤을 갖고 다니시네."
"사제나 흑마술사가 아니고서야 그 속박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지. 자, 나쁜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가진 거 털어놔."
레드로드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으나,
"당신네들 하나같이 별 볼 일 없어 보여서, 마법사를 어떻게 조지고 다녔나 궁금했거든요."
강승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도발했다.
"이 새끼가 끝까지!"
"시발, 조져버려!"
"스킬도 못 쓰는 게 어디서 허세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도적단원들이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걸 본 강승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언제 스킬을 못 쓴다고 했나?"
[마력 오염의 사슬]의 효과는 스킬을 직접적으로 봉인하는 게 아니라, 대상의 마력을 오염시켜서 스킬 발동을 방해하는 것이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즉, 강승현처럼 마력이 없는 사람에겐 애초에 통하지 않는다.
109. 물리치료
'역시 나한테는 안 통하는군.'
강승현은 [마력 오염의 사슬]을 무시하고 스킬을 사용했다.
본래라면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마력이 오염되면서 스킬이 캔슬돼야 했지만,
지지지직!
오히려 그를 속박하고 있는 사슬이 불안정하게 일그러지더니
파각!
파각!
파가가각!
흔적도 없이 박살나버렸다.
[마력 오염의 사슬이 파괴됐다.]
[속박에서 풀려났다!]
아무래도 강승현의 몸에 마력이 없어서 벌어진 일종의 오류 현상인 것 같다.
"뭐, 뭐야 이 자식! 뭘 한 거야?"
"사슬을 박살냈잖아!"
레드로드 도적단원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마력 오염의 사슬]이 전혀 먹히지 않는 것도 모자라, 사슬을 한 방에 부숴버렸다.
"[마력 오염의 사슬]이 안 통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 소멸시킨 녀석은 지금까지 없었어!"
레드로드 1호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사제와 흑마술사도 사슬을 한 방에 부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터.
하지만 강승현은 사슬에 손도 대지 않고 부순 것이다.
"엄청나게 단련한 근육으로 부숴버린 건가!"
"이 자식 강하다!"
레드로드 3호와 5호 역시 긴장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끼리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어. 스크롤 가진 거 다 털어봐?"
"내가 가서 대장 불러올게!"
그때, 레드로드 7호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녀석은 주머니에서 하얗고 작은 보석을 꺼냈다.
'저건... 애뮬릿 젬?'
강승현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황급히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파직!
[안개에 숨은 밀키쿼츠]
[???]
[은신]
[???]
아이템 정보를 아주 살짝 확인할 수 있었다.
저 보석의 정체는 사용 시 은신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애뮬릿 젬이다.
'힘도 없는 놈들이 아이템은 하나같이 비싼 것만 갖고 있군.'
파즈즈즈즈.
녀석이 [안개에 숨은 밀키쿼츠]을 주먹으로 쥐자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뜻 보면 순간이동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은신 상태다.
'숨어서 도망치려나 본데, 그렇겐 안 되지.'
물론 순순히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다.
[열 감지]
강승현은 [열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앗!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36.7℃]
'정상 체온.'
은신 상태의 적은 겉모습만 숨겨질 뿐이다.
체온이나 호흡은 그대로라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강승현은 붉은빛을 향해 짱돌을 집어던졌다.
깡!
"으아아악!"
돌에 맞은 도적단원 7호가 바닥을 굴렀다.
그 충격으로 은신 상태가 해제됐다.
"이. 이것도 안 통하다니...."
[안개에 숨은 밀키쿼츠]는 나름 비장의 무기였으나 그마저도 강승현에게 가볍게 간파당한 것이다.
톡!
그때,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응?'
위를 올려다보자 빽빽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흐릿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슬슬 비가 내릴 것 같다.
'비 맞으면서 싸우는 것도 나름 분위기 있고 좋지만....'
강승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초조한 얼굴로 루디를 끌어안은 발릭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환자가 있으니 빨리 끝내야겠군.'
앓아누운 루디를 위해서라도 비가 오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강승현은 들고 있던 석궁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 스크롤 말고는 변변한 기술도 능력도 없는 것 같은데. 나쁜 꼴 보기 싫으면 순순히 아지트로 안내해주시죠."
아까 레드로드가 했던 도발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이, 이 쉐끼가아!"
"우리 레드로드를 무시하는 거냐!"
"쪽수로 밀어붙여!"
"집단구타다!"
도발 효과는 생각보다 굉장했다.
분노한 레드로드 전원이 강승현을 향해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김호정 씨."
"응? 왜?"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삽 좀 빌려주세요."
-잠시 후.
대략 1분 뒤.
"끄으으으...."
"뭐 이런 괴물 자식이 다 있어...."
"우리 힘으론 못 이겨...."
강승현은 레드로드 도적단원들을 깔끔하게 털었다. 그것도 주력 무기가 아니라 남에게 빌린 금삽으로.
"삽으로 맞으니까 더 굴욕적이야.... 크윽!"
"그것도 삽자루로 맞았어.... 차라리 주먹에 맞는 게 낫지."
레드로드 도적단원 3호와 5호가 탄식했다.
심지어 강승현은 스킬도 쓰지 않고 그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지트로 안내할 마음이 들었는지?"
"들었습니다...."
"까불지 않겠습니다...."
아까와는 180도 달라진 대답.
결국 레드로드 패거리는 굴복했다.
"아지트로 안내할게요...."
그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강승현 일행을 아지트로 안내했다.
'역시 스크롤 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었군.'
예상대로, 녀석들은 강력한 스크롤 하나만 믿고 날뛴 피라미들이었다.
그래서 스크롤이 안 통하는 적과 만나자마자 쪽도 못 쓰고 처 발린 것이다.
'이런 잡몹들이 [마력 오염의 사슬] 같은 강력한 스킬 스크롤을 갖고 있다니.'
턱!
'마법사한테 특히 치명적인 스킬이라 이 주변에서 구하려면 좀 빡셀 텐데. 어떻게 구한 거지?'
강승현은 삽자루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생각했다. 뒤에서 김호정이 울상을 지었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애뮬릿 젬도 그렇고. 허접하긴 해도 평범한 도적단은 아니야.'
이들의 주 타겟은 다른 곳도 아니고 카마르.
진홍의 마탑을 빽으로 둔 마법사들의 도시다.
'심지어 카마르는 이 녀석들을 잡지 못해서 현상금까지 내걸었으니....'
그런 도시를 상대로 도적질을 한다는 것부터 평범한 도적단일 리가 없다.
그것도 아지트 위치가 알려진 상태에서.
'이래저래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은 물어볼 시간이 없네.'
우선은 비를 피하는 게 급선무다.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레드로드 도적단원에게 말했다.
"그래서 아지트는 여기서 얼마나 걸리죠? 너무 멀면 좀 곤란한데.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지만, 일행 중에 환자가 있어서."
"5분, 아니... 3분만 가면 됩니다."
"생각보다 가깝네요."
레드로드의 아지트는 숲 입구에서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금까지 잡지 못한 게 신기할 정도.
"이, 이쪽이 지름길입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레드로드는 강승현의 눈치를 보며 안내하기 시작했다.
거친 태도가 물리치료로 인해 공손해졌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강 선생이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가 자기 입으로."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뻔뻔함.
그것이 강승현이라는 야매 힐러였다.
"뭐, 아무튼 드디어 쉴 곳을 찾았으니 됐죠."
"오늘 하루 힘들었지. 진짜 피곤해."
김호정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비 오는 숲에서 노숙할 줄 알았는데, 선생 덕분에 편하게 잘 수 있겠네."
"아까도 말했지만, 있어 보이게 야외취침이라는 말을 씁시다."
"그러면 더 비참해진다구...."
강승현 일행은 레드로드 패거리를 뒤따라갔다.
"근데 아지트로 외부인을 데려가도 될까? 대장 허락도 안 받았는데."
"나도 몰라.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렇다고 안 데려갈 수도 없고. 대장한테 혼나겠지?"
"그래도 대장한테 혼나는 게 낫지 않을까."
레드로드 3호와 7호가 작게 쑥덕거렸다.
그리고 강승현을 살짝 보면서 물었다.
"음, 저기... 실례지만, 선생님은 뭐 하시는 분이신지...."
"리얼 파이트 중점 흑마술사이신가요?"
"힐러입니다. 지금은 하인드 마을에 살면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죠."
강승현은 거짓 없이 사실대로 말했으나.
'세상에 저런 힐러가 어딨어.'
'분명 킬러일 거야.'
두 사람은 1도 믿지 않았다.
"아, 그렇지. 아지트에 묵게 해주시는 대가로 다친 몸을 치료해드릴까 하는데."
"아, 아뇨 괜찮습니다."
"우리 보기보다 건강해요...."
그들은 강승현의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며 눈을 깔았다.
-저벅, 저벅.
바스락.
"도착했습니다."
한 3분쯤 걸었을까, 레드로드 패거리가 수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레드로드 1호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저희 아지트 입구입니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살짝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데.'
그 공간은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동굴과 부러지고 뒤틀린 괴상한 나무들로 가득했다.
'그게 뭔질 모르겠네.'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건 하나같이 새빨간 나무와 돌 뿐이었다.
"붉은 숲에 이런 장소가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발릭 부부는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동굴이 아지트인가요?"
"네. 멋있죠?"
"그냥 동굴인데요."
강승현은 동굴을 바라보았다. 동굴 안에는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과 크고 작은 바윗덩어리가 있었다.
저 문이 아지트 입구인 것 같다.
휘이!
레드로드 2호가 휘파람을 불자,
"정찰팀 아냐? 빨리 왔네."
"그보다 너네 꼴이 왜 그래?
"저 녀석들은 누구야."
바윗덩어리 뒤에서 도적단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아지트 입구를 지키는 감시팀이다.
정찰팀은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손님이야. 비를 피할 곳이 필요하대."
"환자도 있다고."
"뭐?"
"하룻밤만 묵고 간다니까 빨리 들여보내 줘!"
"너네도 처맞는다."
"우리 꼴 보고도 모르겠냐?"
정찰팀은 감시팀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려 했다. 이대로 가다간 강승현한테 얻어맞을 것 같았으니까.
"뭔 개소리야!"
"됐어, 우리가 처리한다. 너넨 빠져."
"가진 거 다 내놓고 썩 꺼져!"
하지만 감시팀은 경고를 무시하고 덤벼들었다.
"환영 인사가 참 격하네요."
뻐억!
"끄아아아악!"
"내, 내 다리!"
강승현은 발차기를 날려 덤벼오는 감시팀을 가볍게 제압했다.
이번엔 무기조차 꺼낼 필요 없었다.
[업적 달성!]
'이놈들은 아까 싸운 애들보다 더 허접하네.'
감시팀은 정찰팀보다 더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통과시키라고 했잖아."
"우리도 맞고 왔다니까."
"쟤들은 그래도 우리보단 덜 아프게 맞네."
레드로드 정찰팀은 얻어맞는 동료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5분 전의 자신들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잠시 후.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 푹 쉬다 가세요...."
"그럼 사양 않고."
물리치료를 받고 공손해진 감시팀은 강승현 일행을 통과시켰다.
강승현은 레드로드 아지트 내부로 진입했다.
110. 레드로드 아지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