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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160-170

160. 원인과 결과 1

"그 녀석의 이름은 펜그릴 스펜서. 한때 스승님의 제자이자, 저와는 입사 동기입니다."

"입사 동기?"

"물론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요."

펜그릴은 트라코티의 대표적인 인형사 가문인 스펜서 가문 출신으로, 공방에 들어온 첫날부터 압도적인 실력으로 선배들을 무릎 꿇린 천재였다.

인형사 5~6명이 머리를 맞대야 겨우 완성할 수 있는 마도골렘을 혼자서 제작해내고, 망가진 인형을 눈으로 살짝 보기만 했을 뿐인데 문제 원인을 파악하는 등.

"저는 물론이고 다른 인형사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었죠."

그 결과, 펜그릴은 공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기 공방 주인은 저 녀석 말곤 없다'라는 평가를 들으며 하비 사르반의 수제자 자리에 앉았다.

"제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차기 공방 주인 소리를 듣는 놈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뜻이구만."

"...."

"하지만 그런 펜그릴도 스승님에 비하면 풋내기였죠."

펜그릴이 아무리 뛰어난 인형사라 해도, 하비는 공방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어?"

"믿기지 않겠지만 그렇더라구요."

"인성에 찍을 포인트까지 재능에 몰빵했구만."

덕분에 모두가 펜그릴을 대단하게 생각할 때도, 하비는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낮잡아보고 무시했다.

"그 녀석 공방 주인만 아니었어도 피츠타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됐을걸."

"당연히 특별대우는커녕 칭찬 한 번 해주신 적 없었죠."

물론 펜그릴도 유명 인형사 가문 출신인 데다, 하비만큼은 아니어도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만큼 호락호락하게 굽히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매일같이 기 싸움을 벌여댔다고.

"스승님한테 그나마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녀석밖에 없었거든요."

"어찌 보면 사제가 똑닮았네요."

이래저래 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펜그릴이 하비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하비는 펜그릴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언젠가 공방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면 이 자식 말곤 없군. 나머진 고려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뿐이니까.'

라는 식으로 펜그릴을 후계자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나 다른 인형사들은 당연히 펜그릴이 차기 공방 주인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략 석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펜그릴은 말없이 종적을 감췄다가 한 달 만에 공방에 나타났다고 한다.

"석 달 전이요?"

"스승한테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러 휴가라도 떠난 거 아닐까."

"그러더니 엄청난 인형을 만들어냈죠."

돌아온 펜그릴은 골렘 하나를 제작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구체관절인형이었으나,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고 주인의 명령에 충성하며 따르는 등, 하비가 제작하는 특수 골렘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골렘이었다.

"물론 스승님이 제작한 골렘에 비하면 움직임도 단순하고 매우 약해서 상업용으로 쓸 수 없는 열화판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골렘에는 마력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펜그릴은 마력 없이 움직이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골렘을 개발한 것이다.

"마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고?"

"그게 가능해?"

"덕분에 저희 공방은 난리가 났죠."

비록 미완성 상태이긴 하나, 잘 연구하면 인형사 업계에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골렘.

-이건 보통 업적이 아닙니다!

-정식 후계자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공방 인형사들은 이번 업적을 높게 쳐서 펜그릴을 정식 후계자로 확정 짓고, 기술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법인데?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이런 걸 연구하고 있던 거냐.... 당장 써먹을 물건은 못되지만, 흥미가 생기긴 하는군.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내 이름에 먹칠은 안 하겠지. 내가 은퇴할 때 차기 공방 자리는 너한테 넘겨주마.

성격 나쁜 하비도 그때 처음으로 펜그릴을 칭찬하며, 정식 후계자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뇨. 지금 당장 공방 주인 자리를 물려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펜그릴은 정식 후계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무려 하비한테 공방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선언한 것이다.

-뭐가 어째?

-스승님이 은퇴하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이게 지금 돌았나? 네까짓 게 공방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죠. 스승님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뤄냈으니, 공방 주인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펜그릴의 태연한 대답을 들은 하비는 당연히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했다.

-뭔가 요상한 걸 만들어내긴 했다만, 결국 네가 만든 건 미완성에 열화판이다! 감히 이런 실력으로 공방 주인 자리를 내놓으라고?

-저는 재능도 있고, 경력도 충분하고, 업적까지 이뤄냈으니 더 이상 스승님 밑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펜그릴은 망설임 하나 없이 꿋꿋한 태도를 유지했고, 분을 참지 못한 하비는 펜그릴의 뺨을 때리며 소리쳤다.

-이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것! 내 공방에서 당장 꺼져! 네놈은 제명이다!

-...그럼 하는 수 없군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펜그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손으로 우리 공방의 대를 끊고 싶진 않았는데, 스승님의 의견이 그러시다면야.

-뭐라고?

-저는 오늘부터 독립하겠습니다.

-그, 그 말은 공방을 세우겠다는 거냐?

-네. 지금은 임시로... 스펜서 인형 공방이라고 해두죠.

트라코티 인형 공방에서 쫓겨난 펜그릴은 이참에 자신만의 공방을 세우겠다며 개운하게 떠나버렸다.

"당연히 스승님은 얼마 안 가 망할 거라면서 신경도 안 썼지만...."

"실제로 망한 건 여기였군요."

"펜그릴이 새로운 공방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인형사들이 그쪽으로 옮겨갔거든요."

펜그릴이 개발한 새로운 골렘에 관심을 갖고 이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비의 더러운 성격을 꾹 참으며 제자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비 개새끼! 이건 기회다!'

'해방이다!'

'만나서 X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

다들 망설임 없이 스펜서 공방으로 옮겨갔다.

하비만큼은 아니지만 펜그릴 역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인형사였으니까.

"그 결과, 고작 며칠 만에 트라코티 인형 공방의 인형사는 10명도 남지 않게 됐죠."

"이거,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하비 탓이라 할 말이 없는데."

"그러게요."

그렇게 해서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하루아침에 문 닫기 직전으로 몰락했다.

"보통 공방이 문을 닫을 땐 주인의 실력이 떨어지거나, 후계자를 찾지 못할 때나 벌어지는 일인데 말이죠."

하지만 하비의 경우엔 실력은 그대로지만 본인의 품행과 인성 때문에 제자들이 죄다 떠나버린 기묘한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야."

"조금만 착했어도 저렇게까진 안 됐을 것을."

인형사들이 죄다 스펜서 공방으로 떠나버렸으니, 고객들 역시 스펜서 공방으로 몰려가버린 상황.

설상가상으로 카마르가 폐쇄되면서 단골 손님과의 거래도 불가능한 상태다.

"그래도 특수 골렘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스승님뿐이라... 손님이 아주 끊기진 않았죠."

"아니 그럼 공방이 문 닫기 직전인데도 그런 인성질을 하고 있던 거야?"

"이쯤 되면 인간이 아니라 악귀인데요."

강승현은 하비를 좀 더 고통 줄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제자들이 트라코티에서 흙을 구해왔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못 되다 보니 모험가님들을 부려먹은 겁니다."

"어이가 없네."

"그리고 얼마 전부터, 펜그릴이 스승님을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재료를 못 구해서 모험가를 착취하다니.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락하셨는지요? 스승님.

-나가!

-물론 오래 못 버티겠죠. 이대로 가다간 공방은 문을 닫을 테니, 스승님은 50살도 안 되는 나이로 은퇴하실 텐데요.

-나가라고 했잖아!

-하지만, 지금 트라코티에서 특수 골렘을 만들 수 있는 건 스승님뿐이니... 저희 공방으로 오신다면 제 수제자로 삼아드리죠.

-이 망할 새끼!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한때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였던 하비는, 제자 놈한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매우 굴욕적인 발언이나 듣는 신세로 전락했다.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엄청난 어그로력, 보고 배워야겠네요."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야."

덕분에 지금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는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공방이 문을 닫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수백 년간 이어져온 트라코티 흙인형 기술법이 소실되는 게 큰 문제였다.

"지금 남은 사람들은 아직 실력이 미숙해서 배운 기술을 전수할 수가 없거든요. 스펜서 공방과 합치는 건 스승님이 죽어도 반대하실 거고."

덕분에 공방에 남은 제자들은 매일같이 머리를 싸매는 상황이다.

"그러고 보니, 직스 씨랑 다른 사람들은 왜 남은 건가요?"

"맞아. 나 같음 진작 이적했을 텐데."

"그야, 스승님의 인간성은 도저히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스승님의 작품은 그 인간성을 견딜 만큼 아름답고 가치 있으니까요."

직스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큼 하비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뜻하는 말이었겠지만.

'이 녀석도 제정신이 아니네.'

'일단 하비보다 더 미친놈인 건 확실하군.'

강승현과 김호정은 직스가 눈치채지 못하게 뒤로 살짝 거리를 뒀다.

"아무튼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펜그릴이 왜 그런 행동을 벌인 건진 저도 모르겠으니, 자세한 건 스승님에게 물어보셔야 할 것 같네요."

"물어볼 필요 있어? 이건 누가 봐도 펜그릴이 하비의 더러운 인성 때문에 빡친 거잖아."

김호정이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번 이야기에 교훈이 있다면, 그건 사람은 역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거와는 별개로, 스승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직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하비가 죽었다면,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정말 완벽하게 끝장났을 것이다.

"설마 독에 중독되셨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사실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직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르카코테신은 합성독이라 자연적으로선 절대 중독되지 않는 독입니다."

그런데 하비가 르카코테신에 중독됐다는 건, 누가 작정하고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걸 의미한다.

'현시점에서 하비가 죽으면 트라코티 공방은 끝장나고, 트라코티 공방은 대표적인 반 위즈멜 세력이지.'

즉, 하비의 목숨을 노린 범인은 위즈멜 교단이라는 소리다.

161. 원인과 결과 2

"암살이요...?"

"혹시 짚이는 게 있으신가요? 하비 어르신한테 원한 가질 만한 사람이라든가."

하비가 반 위즈멜 세력인 이상, 이번 암살 미수 사건을 조사해보면 위즈멜 교단의 배후를 확실히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스승님한테 원한 가질 만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얼마나 많은데?"

"트라코티 주민의 45% 정도는 스승님을 싫어해요."

"오, 그래도 55%는 남아있네."

"나머지 55%는 스승님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상상 이상의 쓰레기구나."

문제는 하비가 너무 쓰레기라, 원한 가질 만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당장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도 하비에게 이를 갈고있는 상황이었으니.

'사실 의심 가는 녀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선 중독 원인부터 차근차근 파악해볼까.'

하비의 몸 상태와 증상 발생 시기를 고려해봤을 때, 중독 시기는 대략 3주 전쯤이다.

"직스 씨, 하비 어르신이 지난 3주 동안 만난 손님이나 방문한 장소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스승님은 공방이 이렇게 된 이후로 한 발짝도 안 나가셨습니다."

"한 발짝도?"

알고 보니 하비는 펜그릴한테 제자들을 빼앗긴 뒤로 공방에 처박혀 인형만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그래서 트라코티 상황도 몰랐던 거야?"

"외부에서 중독당했을 확률은 없다고 봐야겠네요."

하비가 한 달 넘게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녀석을 중독시킬 수 있는 장소는 이 공방뿐이다.

"공방 안에서 당한 거라면... 밥에 독이라도 탄 거 아닐까?"

"꽤 보편적인 암살 방법이죠."

르카코테신은 섭취나 투여는 물론 피부에 닿기만 해도 중독되는 맹독이다.

잠복기가 길고 효과가 느리게 나타나는 독이라, 보통 음료나 음식에 타서 암살하는 경우가 많다.

"직스 씨, 하비 어르신의 차와 식사는 주로 누가 가져다드리나요?"

"그 녀석이 범인일 거야!"

"주로 제가 가져다드리는데요."

"아."

직스의 발언에 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김호정은 슬그머니 [신의 소통]을 끄고 물었다.

"...혹시 저 녀석이 범인인가?"

"그건 아닐 거예요."

르카코테신은 무척 비싼 독극물이고, 피츠타 호수 지역에서 구할 수 없다.

호수 밖으로 나간 적 없는 직스가 손에 넣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뭣보다 저 녀석을 포함해서 공방에 남은 인형사들은 하비 어르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광인들이니까요."

이 녀석들이 얼마나 광인이냐면, 3시간에 한 번씩 약을 써야 하는 하비를 살리겠다고 교대로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고 있다.

하비를 죽일 거라면 진작 죽이고도 남았을 놈들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범인이야?"

"분명 외부인인 건 틀림없는데요."

"어, 어쩌면...."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레베카가 창백한 얼굴로 목소리를 꺼냈다.

"펜그릴 스펜서가... 범인 아닐까요."

"일리는 있죠."

녀석은 하비를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손님인 데다, 르카코테신을 구할 수 있는 재력을 갖고 있고, 하비와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

'뭣보다 위즈멜 교단과 관련 있을 놈이거든.'

펜그릴이 인형 공방을 떠나 스펜서 공방을 세운 시기는 트라코티에 정체불명의 종교단체가 나타난 시기와 비슷하다.

거기에 더해서 두 집단 모두 인형 공방을 없애고 싶어하는 데다, 카마르를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가 겹치면 우연이지만, 두 개, 세 개가 겹치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니까."

"그럼 그 녀석이 진짜 범인이야?"

"정황상 그렇지만,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요."

우선, 일반적인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의 잠복기가 1~2달이지만, 하비는 고작 3주 만에 증상이 나타났다.

그 말은 단기간에 많은 양의 독에 노출됐다는 뜻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하루도 빠짐없이 독을 먹거나 투여해야 하거든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만 펜그릴은 하비 어르신에게 독을 주입할 만한 기회가 없어요."

펜그릴은 하비를 자주 찾아오긴 해도 매일 찾아오진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다고 해도 하비의 몸에 손을 대거나 뭔가를 먹인 적은 없었다.

"르카코테신은 몸에 접촉하지 않으면 중독시킬 수 없는 독이니까, 하비가 치를 떨면서 싫어하는 인물은 불가능하죠."

"그럼 인형을 조종했다든가?"

"마스터 인형사라면 수상한 인형 정도는 금방 간파하고 분해할걸요."

이번 일에 펜그릴이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대량의 독극물을 매일 접촉시켰는지 그걸 알 방법이 없었다.

"펜그릴이 진범이라면 남을 시켜서 독을 먹였을 텐데.... 직스, 공방에 찾아온 손님은 더 없어?"

"펜그릴을 제외하고는 모험가님들밖에 없을 겁니다."

"모험가밖에 없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강승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스 씨, 분명 하비 어르신은 모험가들이 가져온 흙으로 인형을 만들고 있었죠?"

"아... 네. 저희가 쓸 흙은 저희가 직접 구하지만, 스승님은 모험가들이 구해온 흙을 써서 인형을 제작하십니다."

"그 흙은 어디에 보관 중이죠?"

"스승님 전용 재료 창고에 보관합니다."

"당장 안내해주세요."

강승현은 인형 공방 재료 창고로 향했다.

그동안 모험가들이 가져온 흙이 창고 구석에 쌓여 있었다.

"...직스 씨나 다른 사람들은 이 흙에 손대지 않으시나요?"

"네. 스승님이 싫어하시거든요."

"흙이 이렇게 많은데 자기만 쓰는 거야? 하여튼 인성...."

"그럼 이 흙에 접촉한 사람은 하비 어르신뿐이겠군요."

강승현은 창고에 보관된 흙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엔 붉은 숲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흙덩어리다.

[관찰의 눈]

하지만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붉은 숲에서 가져온 토양.]

[이 흙은 오염됐다.]

[손대지 않는 게 좋다.]

[접촉시 상태이상 '중독'에 걸린다.]

[속에 르카코테신이 섞여 있다.]

이 흙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모험가들이 가져온 흙은 전부 르카코테신에 오염된 상태였다.

즉, 하비가 중독된 이유는 오염된 흙을 사용해 인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르카코테신은 피부로 접촉하기만 해도 중독되는 독극물이니까.'

그것도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만들었으니 엄청난 양의 독이 몸으로 흡수됐을 것이다.

"흐, 흙이 오염됐다구요?"

"우리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이럴 수가...."

그 이야기를 들은 세 사람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흙에 직접 닿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직스 씨, 이번 일은 어르신께 알리고 지금까지 만든 인형을 전부 창고로 옮겨다 폐기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혹시 인형이나 흙과 접촉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알려주세요. 증상은 없어도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일 테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 공방 상황이 좋지 않아서 외부로 판매된 인형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어쩐지 치료제를 써도 회복이 느리더라.'

하비는 약을 맞는 동안에도 계속 인형을 제작했다.

그때마다 르카코테신에 닿았을 테니, 치료되지 않은 것이다.

"서, 설마 모험가들이 범인이었다니...."

"도대체 원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이런 짓을...."

두 사람은 창고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강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범한 모험가가 이렇게 많은 독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연히 이번 사건의 진범은 따로 있다.

"정황상, 펜그릴이 모험가들을 이용해서 하비에게 오염된 흙을 전달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비에게 들킬 위험도 없고, 직접 접근할 필요도 없이 중독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럼, 그동안 어르신을 찾아온 건... 몸 상태를 체크할 생각으로?"

"그러겠죠."

"왜, 왜 그렇게까지...."

레베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이유는 당사자한테 들어봐야겠죠."

물론 그러기 위해선 펜그릴에게 협력한 모험가를 찾아야 했다.

"직스 씨, 그동안 흙을 가져온 모험가들에 대한 기록은 없나요?"

"있어요. 스승님이 누가 흙을 자주 가져오는지, 많이 가져오는지 기록해두라고 하셔서."

"더러운 인성이 이렇게 도움이 되네."

강승현은 직스가 가져온 서류를 살폈다.

지난 3주 동안 흙을 가져온 모험가 중, 가장 많이 찾아온 많은 인물의 이름을 찾았다.

'찾았다.'

녀석의 이름은 리트.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형 공방을 찾아온 유일한 모험가였다.

"아, 이 사람... 방금 공방을 떠난 모험가입니다!"

"방금?"

"네. 오늘도 흙을 가져왔거든요."

직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루를 보여주었다.

혹시나 해서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이 흙은 오염됐다.]

[속에 르카코테신이 섞여 있다.]

어김없이 경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걸로 녀석이 펜그릴의 협력자라는 건 확실해졌다.

"지금 나가면 따라잡을 수 있겠네요."

"당장 가자!"

"직스 씨도 따라오세요. 우리는 이 녀석 얼굴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강승현 일행은 곧장 창고를 뛰쳐나가 공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찾았어요. 저 사람입니다."

다행히 녀석은 멀리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한가하게 공방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간식을 사 먹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응? 뭐야?"

"이 흙, 방금 모험가님이 저희 공방에 파신 거죠?"

"그런데 왜?"

"이 안에서 독극물이 검출됐는데...."

직스가 여기까지 말한 순간,

"시발!"

녀석은 리트를 밀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려고."

그때,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강승현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큭!"

"할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주시죠."

"비켜! 뒈지기 싫으면!"

리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고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캉!

그러자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꺼내 녀석이 휘두른 검을 막아내고,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뻐억!

석궁을 소환해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끄악!"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흙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바박!

그 뒤, 방아쇠를 당겨 녀석의 발목에 흙으로 만든 화살을 처박고,

[대지의 뼈]

발목에 박힌 흙 화살을 날카로운 뼈 가시로 바꿨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흙이 날카로운 뼈로 변해 몸에 파고들자 녀석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이제 이야기할 기분이 들죠?"

"사, 살려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일단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죠."

강승현은 리트를 끌고 공방 거리 안쪽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약 5분간, 리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됐어?"

"녀석한테서 이런 걸 얻었어요."

돌아온 강승현은 열쇠 하나를 꺼냈다.

"스펜서 공방의 비밀창고 열쇠라고 하더군요."

162. 원인과 결과 3

"나,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돈을 준대서 따랐을 뿐이야! 제발 살려줘!"

대략 5분 전.

생명의 위험을 느낀 리트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래서 배후가 누구라구요?"

"스펜서 공방이야! 그놈들이 시켰어!"

'역시 그 자식이 범인이었군.'

강승현의 예상대로, 펜그릴 스펜서는 모험가에게 돈을 주고 오염된 흙을 인형 공방에 넘기고 있었다.

"내가 공방 관계자랑 직접 만난 건 한 번이고, 그 뒤로는 비밀 창고에서 써서 물건만 운반했어."

"비밀 창고?"

"스펜서 공방 입구 쪽에 있어. 겉보기엔 그냥 벽이지만, 열쇠를 쓰면 들어갈 수 있다고."

리트는 품에서 창고 열쇠를 꺼냈다.

특이하게도 금속이 아니라 흙을 구워 만든 열쇠였다.

"내가 아는 건 다 말했어.... 이제 살려줄 거지?"

"...."

"그 녀석들이 흙에 장난을 쳤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설마 독을 섞은 줄은 몰랐다고.... 알았으면 나도 안 했지."

"그럼 살려는 드릴게요."

강승현은 열쇠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대신, 전치 3주 부상으로."

"끄아아아아악!"

"상식적으로 고작 장난 하나 치겠다고 3주 내내 돈까지 줘가면서 모험가한테 일을 맡길 리가 없잖아."

그 뒤 약 5분간.

골목에서 리트의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다시 현재.

강승현 일행은 스펜서 공방에 도착했다.

"여기가 스펜서 공방인가."

"스케일 크네요."

스펜서 공방은 기존의 공방 거리 지역이 아니라 트라코티 서쪽, 기록상 위즈멜 교단 건물이 존재했던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이건 뭐 숨길 생각도 없잖아."

"장소까지 노렸네요."

공방 자체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집단이지만, 펜그릴의 능력과 기존 공방의 인형사들의 협력 그리고 스펜서 가문의 지원으로 고작 두 달 만에 급속도로 성장한 상태였다.

"비밀 창고는 어디쯤에 있으려나...."

"여기예요."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공방 건물을 둘러보았다.

[문이 숨겨져 있다.]

[문을 열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다.]

공방 건물의 왼쪽 벽 구석에서 정보가 떠올랐다.

"그 눈 진짜 유용하네."

"제 밥줄이니까요."

강승현이 열쇠를 벽에 접촉시키자 숨겨져 있던 창고가 드러났다. 창고 안에는 흙이 담긴 자루가 잔뜩 쌓여 있었다.

"어때?"

"전부 오염된 흙이에요."

[이 흙은 오염됐다.]

[접촉시 상태이상 '중독'에 걸린다.]

[속에 르카코테신이 섞여 있다.]

강승현이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창고 안의 모든 흙자루에서 경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독하다 독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가, 강승현 힐러님! 여기 이쪽...."

창고 안쪽을 보던 레베카가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다. 레베카를 따라 가보자 엄청난 양의 약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한 느낌이 풀풀 넘치는 약병이었다.

"전부 르카코테신이네요. 그것도 희석된 게 아니라 원액."

이 주변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인 데다, 이만한 양을 구입하려면 몇억 골드는 들었을 것이다.

"이걸로 확실해진 거지?"

"네."

이번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은 스펜서 공방, 펜그릴 스펜서다.

"증거도 손에 넣었으니, 공방 주인을 만나러...."

"설마 여기까지 알아내실 줄이야."

그때, 등 뒤에서 딱히 듣고 싶지 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펜그릴 스펜서가 거만한 얼굴로 서 있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는데, 찾아갈 수고를 덜었네요."

"우린 네 녀석의 비밀을 알아냈다! 이제 어쩔 테냐? 죽일 거냐?"

강승현 일행은 여차하면 바로 공격할 생각으로 무기를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스펜서는 뜻밖의 소리를 꺼냈다.

"음, 슬슬 티타임이라서 그러는데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뭐?"

"사실 저도 여러분한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강승현 일행은 펜그릴을 따라 스펜서 공방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테이블에는 따뜻한 차와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드시죠. 동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말리아로즈 잎을 우려낸 차입니다. 향이 무척 진하고 좋은 품종이죠."

펜그릴은 세 사람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물론 찻잔에 손대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여기다 르카코테신 탄 거 아냐?"

"그럼 제가 다 마셔야겠네요."

펜그릴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두 번째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음, 독은 안 탄 건가? 그럼 마셔야지."

김호정은 그제서야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강승현과 레베카는 여전히 찻잔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강승현은 [관찰의 눈] 덕분에 이 차에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있지만,

'자기 스승 독살하려는 사람이 주는 차는 마시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그냥 재수 없어서 손대지 않은 것뿐이다.

"쓸데없는 티타임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강승현은 테이블에 병을 내려두었다.

아까 창고에서 꺼내온, 르카코테신 원액이 담긴 독약병이다.

"하비 어르신을 죽이려 한 이유가 뭡니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펜그릴은 느긋하게 꽃향기를 즐기며 입을 열었다.

"전 스승님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증거가 이렇게 많은데 발뺌하시겠다?"

"그런 뜻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치료제를 드릴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더니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쓸 것도 없이, 그게 르카코테신 치료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죠?"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스승님이 워낙 고집이 세신 분이라서요."

펜그릴은 뻔뻔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몸이 쇠약해지시면 제 밑으로 들어오시려나 했죠."

"완전히 미친놈 아냐, 이거."

하비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독을 먹였다.

지금 펜그릴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진짜 목적이 뭐죠? 고작 사람 하나 스카웃하겠다고 벌인 짓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데요."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펜그릴은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워낙 낡아서 제목을 읽을 순 없지만, 책 표지에 위즈멜을 상징하는 문양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역시 위즈멜 교단이었군."

트라코티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종교 집단의 배후는 펜그릴 스펜서였다.

"제 목적은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고 위즈멜 님을 맞이하는 겁니다. 인형 공방에는 위즈멜 님의 자료가 잔뜩 보관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어야 하죠."

처음에는 정식으로 공방을 물려받고, 합법적으로 위즈멜 자료를 획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비가 최소 30년은 은퇴할 것 같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공방을 뺏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고.

"...그렇게까지 위즈멜 교단을 세우려는 이유가 뭡니까. 스승 등에 칼까지 꽂아가면서."

"후후후."

펜그릴은 재수 없는 귀족 웃음소리를 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신은 누군가를 스승으로 섬겨본 적 있나요?"

"딱히."

강승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과 만나본 적 있으십니까?"

"없네요."

"저한테 스승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펜그릴 역시 일반인 기준으로는 압도적인 재능과 실력을 타고난 괴물이었으나, 무슨 짓을 해도 하비를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을 넘기 위해 이 악물고 노력했지만, 실력이 오르면 오를수록 재능의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펜그릴은 깨달았다.

자신은 언젠가 스승을 따라잡을 순 있겠지만, 그때는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일 거라고.

"나는 생전에 무슨 짓을 해도 스승님을 넘을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땐 정말 괴로웠습니다."

"솔직히 아무래도 좋네요."

"차라리 스승님을 죽일까 생각도 해봤죠."

"왜 이렇게 극단적인데."

"그러다 떠올렸습니다. 내가 스승님을 뛰어넘을 수 없다면, 스승님을 내 밑으로 끌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뭐?"

"진심이야?"

이야기를 듣던 강승현 일행은 질색했다.

"위즈멜 님이 다시 나타나신다면, 과거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형 공방과 그것의 주인인 스승님이 몰락하실 겁니다. 혹시 저주라도 받아서 다시는 인형사 일을 못 하게 된다면, 저는 스승님이 죽기 전에 스승님을 뛰어넘을 수 있겠죠."

펜그릴은 태연한 얼굴로 내뱉었다.

"이 자식, 제정신이 아니잖아."

"이건 직스보다 더 미쳤네요."

강승현과 김호정은 슬그머니 펜그릴한테서 물러났다.

"아, 이건 제 개인적인 욕망입니다. 위즈멜 교단을 세우고자 하는 진짜 이유는 트라코티를 위한 일이니까요."

"트라코티를 위해서?"

"지금 트라코티 꼴을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펜그릴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일 새로운 부상자가 발생하는데 제대로 된 치료 시설은커녕 힐러조차 없는 열악한 마을로 변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카마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트라코티를 방치했습니다."

놈들은 그저 무책임하게 숨어버렸다.

덕분에 피츠타 호수 주변 마을만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까진 악독한 도적단이 빨간 머리를 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트라코티 주민들이 박해받았죠. 심지어 그놈들은 트라코티 출신도 아닌데!"

쾅!

펜그릴은 크게 분노하며 창문을 내려쳤다.

'레드로드를 좀 더 혼내줬어야 하는 걸까.'

'우와, 우리가 레드로드 도와준 거 알면 죽이겠네.'

강승현과 김호정은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듣자 하니 그 도적단의 대장은 카마르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카마르는 아무 죄 없는 트라코티만 탓했죠."

펜그릴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트라코티를 위해서라도 카마르와 연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위즈멜 교단이다?"

"위즈멜 님에 대한 자료를 숨겨둔 건 인형 공방만이 아니거든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주 자리를 이어받은 펜그릴은, 저택을 살펴보던 도중 우연히 위즈멜의 정보를 발견했다.

"제 선조님이 남기신 기록이었습니다."

"선조님?"

"그분도 인형 공방 소속이었지만, 위즈멜 님을 차마 버릴 수 없었는지 일부 자료를 빼돌려 집 안에 숨겨두셨더군요."

'인형 공방을 배신하는 게 가문 내력이군.'

펜그릴은 그 기록을 통해 과거 트라코티에서 있었던 일과 잊혀진 신, 위즈멜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인형 공방과 카마르에 크게 분노하며,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위즈멜 교단이야말로 지금의 트라코티에 꼭 필요한 세력입니다."

이야기를 마친 펜그릴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는 살짝 식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설명해 드렸는데도 방해하겠다면...."

"아, 나는 딱히 당신을 막고 싶은 게 아니라 위즈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뿐이라서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정말 좋은 의도로 교단을 세우려 한다면, 강승현 입장에선 딱히 막을 이유가 없다.

'하비는 거품 물겠지만.'

강승현의 목적은 위즈멜을 조사해서 관리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내는 거니까.

"그렇다면 저희 교단에 협조하시죠. 위즈멜 님이 이 땅에 강림하신다면,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게 될 겁니다."

"뭐 어떤 식으로 협조하길 원하는 건데? 전단지라도 돌려?"

김호정이 옆에서 과자를 씹어먹으며 물었다.

"위즈멜 님을 강림시키려면 스승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스승님을 설득해주세요."

"하비가? 왜 필요한데? 무슨 도구야?"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펜그릴은 하비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자세한 건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하비를 스카우트하려는 것과 관련 있는 것 같다.

"그건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요."

"천천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당장 대답해주지 않으셔도 되구요."

펜그릴은 미소와 함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강승현은 여전히 찻잔에 손대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복면단도 위즈멜 교단 소속입니까?"

강승현은 자료실에서 마주친 복면 무리를 떠올렸다.

"아, 그 친구들이라면... 돈을 주고 고용한 모험가지, 저희 교단 소속은 아닙니다."

하지만 펜그릴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정직원이 아니라 임시로 고용한 알바생이라고.

"그자들은 위즈멜 님에 대해 캐고 다니는 사람을 조사하라고 보냈더니 무고한 주민을 공격한 쓰레기들이죠."

"...."

"따로 처벌하려 했는데 모험가 조합에 잡혀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지금까진 긴가민가했지만, 강승현은 방금 그 대화로 확신했다.

'이 자식,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네?'

지금 펜그릴은 뭔가를 숨기고 있다.

163. 위작

'복면단이 교단 소속이 아니라고? 말이 되냐?'

놈들은 분명 '위즈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심지어 위즈멜을 언급하지 말라는 저주까지 걸려 있던 상태였다.

'리트만 봐도 몸에 저주 같은 건 걸려 있지 않았거든.'

즉사 계열 저주는 시전자의 몸에도 무리가 가는 스킬이라 죽여서라도 입을 틀어막아야 할 상황이 아니고서야 거의 발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즉사 저주를 걸어놨다는 건, 그 녀석들이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복면 무리는 자신들의 몸에 저주가 걸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자기 목숨을 내다버리는 짓은 교단 광신도들이나 하는 짓이거든.'

강승현은 복면 무리가 위즈멜 교단 소속이라고 확신했다.

'이걸 일부러 숨긴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거기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더 있다.

위즈멜 교단 특성상, 분명 복면 무리는 트라코티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마센을 포함한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복면 무리를 처음 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저 녀석,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강승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펜그릴을 바라보았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이래저래 수상쩍은 놈이군. 역시 초면에 존댓말하는 놈치고 정상인 놈은 없다니까.'

펜그릴이 트라코티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것 같다. 하지만 중간중간 감추고 있는 비밀이 그를 마냥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 녀석 뒷조사나 해볼까.'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티 타임은 금방 지나가는 법이죠."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슬슬 하비 어르신한테 약 줄 시간이라서요."

"스승님을 무사히 설득하시면 좋겠네요.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펜그릴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걸 본 강승현은 '자기가 독을 먹여 죽이려 한 인간을 설득하라는 사이코 새끼'라고 생각했다.

"차 잘 마셨어. 맛있네."

"...실례하겠습니다."

김호정과 레베카도 강승현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때, 펜그릴이 묘한 시선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확.

그것과 동시에 펜그릴이 손을 뻗어 레베카의 후드를 벗겨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대처하지 못했다.

"갈 땐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헉...!"

푹 눌러쓴 후드가 벗겨지면서 레베카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쏟아져나왔다.

"하나뿐인 오빠인데 말이야."

"뭐? 오빠?"

"아, 모르셨나요?"

펜그릴이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르웨나는 제 여동생입니다. 말 안 했나요?"

"뭐? 르웨나가 누군데?"

"제 본명이에요...."

레베카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즉, 레베카의 본명은 르웨나 스펜서.

펜그릴과는 남매 사이였다.

"너 귀족이었어?"

"...."

"지금은 모험가가 되겠다면서 가출한 상태지만, 그 아이도 스펜서 가문의 일원입니다."

펜그릴이 차가운 눈으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모험가가 되겠다는 걸 반대했다는 가족이 펜그릴이었군.'

그동안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기려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물론 숨긴 보람 없이 순식간에 탄로 나버렸지만.

"여전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다니는구나. 너한테 모험가 일은 안 맞는다고 했잖아."

"...."

"거기다 그 어설픈 변장은 뭐지? 설마 내가 그런 걸로 속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레베카한테 다가간 펜그릴은 냉혹한 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넌 정말 어릴 때부터 뭘 해도 제대로 하는 게 없구나. 난 적어도 네가 나한테 먼저 인사하려 할 줄 알았어. 그걸 변장이라고 생각도 안 했으니까."

"...."

"모험가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했으면서, 왜 떠날 때랑 달라진 게 없어? 내가 트라코티를 위해 공방을 세우고 교단을 준비하는 동안, 넌 도대체 뭘 한 거야?"

"야, 야....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듣다못한 김호정이 펜그릴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펜그릴은 차갑게 말했다.

"저한테 남은 가족은 르웨나뿐입니다. 하나뿐인 동생이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는데,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어, 음...."

"하다못해 뭔가 업적이라도 이뤄냈다면 인정하겠지만, 지금 하는 행동을 봐선 단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 같네요."

"미안."

원래 말빨이 딸리는 김호정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재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넌 노력조차 안 해. 물론 너는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노력이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랑 뭐가 다르지?"

"...."

레베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저 그런 모험가로 살 거면 차라리 때려치워. 슬슬 교단 일로 바빠질 거라 네 뒷수습할 여유가 없거든."

"자, 거기까지."

그때, 강승현이 펜그릴의 말을 잘랐다.

"르웨나 스펜서는 잘 모르지만, 제 동료 '레베카 씨'는 저희 파티에서 열심히 활약 중이시거든요."

"...."

"그러니 그쯤 해주시죠."

"...이번엔 믿을 만한 동료를 만난 모양이군요."

펜그릴은 가볍게 미소짓더니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슬그머니 강승현의 옆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 자... 나가자구!"

강승현 일행은 펜그릴의 방을 빠져나갔다.

펜그릴은 세 사람을 잠깐 바라보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강승현 일행은 다시 인형 공방으로 되돌아왔다. 레베카는 우울한 얼굴로 식탁에 엎드렸다.

"이래서 오빠랑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저런 놈이 네 오빠인 거니? 너랑 하나도 안 닮았는데. 얼굴도 성격도."

김호정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레베카를 위로했다.

"그리고 재능도 안 닮았어요. 오빠는 천재고, 저는 별 볼 일 없는 애."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냐."

"저도 사실 인형사가 되고 싶었어요."

레베카는 훌쩍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인형사를 배출해온 가문이니까요."

하지만 오빠인 펜그릴이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탓에 인형사 꿈을 접었다고 한다. 기대 이하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펜그릴한테 경멸받은 건 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자유를 찾아 모험가의 길을 걷게 됐지만, 이것도 제대로 할 줄 못한다고 혼났네요."

레베카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혔다.

"아냐! 그 녀석도 모험가 일하면 떡발릴지 누가 알아? 분명 몬스터한테 한 대 얻어맞고 울면서...."

"오빠는 저랑 다르게 머리도 좋고 마법 실력도 뛰어나고, 사냥 실력도 좋으니 모험가가 됐어도 대성했겠죠?"

레베카는 이제 오열하고 있었다.

김호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오빠 말대로 모험가 일을 관둬야 할까 봐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해야죠."

강승현은 레베카한테 스태미나 포션을 던져주며 말했다.

"제가 볼 때 레베카 씨는 어엿한 모험가거든요. 세상을 모험하고, 의뢰를 해결하고, 안 죽고 무사히 살아있고...."

레베카가 정말 그저 그런 모험가였다면 진작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안전한 시골 마을에 처박혀서 인형만 만드는 놈이 진짜 모험가의 삶을 알 리가 없죠? 알못이 떠드는 말은 무시해도 됩니다."

"...."

"진로 고민을 할 거라면 오빠보다는 마센 지부장한테 털어놓으세요. 적어도 그쪽이 1000배 도움될 테니까."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눈물을 닦았다.

강승현에겐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에겐 아주 많은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누가 찡찡거려?"

그때, 뒤에서 띠꺼운 얼굴의 하비가 나타났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괜히 레베카한테 시비를 걸었다.

"울 거면 나가서 울라고!"

"그 스승의 그 제자.... 성격 나쁜 건 진짜 꼭 닮았네!"

"아까 르카코테신 중독에 대해 알려드렸거든요. 기껏 만든 작품을 다 부수고 오는 길이라 화가 많이 나셨겠죠."

"그런 일 없어도 원래 저렇잖아."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전' 제자가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미쳤냐? 그딴 죽일 놈을 왜 도와줘?"

하비가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르카코테신 중독의 원흉이 펜그릴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제자를 향한 원한이 10000배쯤 증가한 상태였다.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려면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던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 이유가 뭘까요? 아는 거 있으세요?"

"알 게 뭐야? 목 부러져서 죽으라지."

혀를 차던 하비는 툭 내뱉었다.

"뭐, 그 자식 실력으론 특수 골렘을 못 만드니까 그거랑 관련 있겠지."

"특수 골렘?"

"그 녀석이 만든 괴상한 골렘 말이야. 내가 만든 특수 골렘을 흉내 내려다 실패한 것 같거든."

하비는 홍차 한 잔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제작하는 특수 골렘은 자아를 가진 흙인형, 통칭 '에고 골렘.' 따지고 보면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단계인 존재지."

'에고 골렘'은 영혼은 없지만 의지가 깃들어 있어서 일반 생물과 비슷하게 사고하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유사생명체다.

물론, 제작하는 건 쉽지 않다.

제작 과정에서 조금만 실수해도 이성이 없는 몬스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정도 되는 인물은 그럴 일이 없지."

'그 와중에도 자기 자랑을 빼놓지 않는군.'

"하지만 그 녀석이 만든 건... 조금 달라."

하비는 무척 불쾌한 얼굴로 혀를 찼다.

"처음엔 그 녀석이 대단한 걸 만들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보니까 이상한 점이 많더라고."

유사생명체를 창조하려면 육체를 대신할 물체와 정신을 대신할 물체가 필요하다.

하비는 흙으로 육체를 빚고, 그 안에 의지를 담은 마력을 섞어 에고 골렘의 정신을 대체했다.

"근데 그 녀석이 만든 건 마력이 없잖아? 인간으로 치면 영혼이 없는 좀비나 마찬가지라고. 그런데도 자아는 갖고 있었단 말이지."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라는 소리군요."

"물론 그건 실패작이긴 했어. 내가 조금만 연구해보면 금방 해결할 수 있지만 말이야."

하비는 마음만 먹는다면 펜그릴이 만든 골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근데 내가 뭐하러 그 녀석 좋을 짓을 해?"

하지만 펜그릴한테 쌓인 원한이 너무 깊어서 죽어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녀석은 댁한테 독까지 써가면서 골렘을 완성하려는 것 같던데, 이유가 뭘까?"

"멍청하긴, 뻔하잖아?"

하비는 김호정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 자식, 위즈멜 인형을 만들려는 거야."

"위즈멜 인형?"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진짜 살아있는 것 같은 '인형'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거든."

하비가 펜그릴의 기술을 빌린다면 정말 생물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골렘을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위즈멜을 트라코티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신으로 믿을 거 아냐?"

비록 정체는 흙으로 빚은 인형이긴 하지만, 트라코티 주민들이 눈앞에 나타난 위즈멜을 신으로 섬긴다면 위즈멜 교단을 세울 수 있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다가 진짜 위즈멜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없애버리는 거지. 뻔해, 뻔해."

"과연 최고의 인형사답게 인형 관련으로는 빠삭하네요."

쓰레기도 도움이 될 때가 있는 법.

하비 덕분에 펜그릴의 목적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위즈멜 교단을 막을 것인가, 말 것인가인데."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트라코티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신을 강림시킨다.

분명 펜그릴의 논리에 허점은 없었다.

'하지만 내 본능이 거부한단 말이지.'

강승현은 펜그릴의 행적을 떠올렸다.

적진에 잡힌 부하를 구하기는커녕 토사구팽함.

하나뿐인 혈육을 아끼기는커녕 무자비하게 비난하고 같잖게 여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스승을 중독시켜놓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은 조금도 없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의도가 옳다 해도 장난감 신을 만들어 트라코티 주민 전체를 속이려 한다는 점.'

펜그릴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자기 기준 이하의 인물에겐 자비 없는 성품을 갖진 인물이다.

'트라코티를 향한 마음은 진심으로 보이지만, 근본이 삐뚤어진 녀석은 옳은 일을 하려 해도 악행이 되는 법이거든.'

이런 녀석이 마을을 장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뭣보다 펜그릴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궁금해요."

"비밀?"

"하비 어르신의 실력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겨우 장난감 하나 만들겠다고 몇억을 써가면서 스카웃하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즉, 녀석의 목적.

인형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비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옳은 이유라면 우리한테 설명해줬을 겁니다."

"하지만 숨기는 걸 보면...."

"남에게 알려선 안 되는 그런 이유라는 뜻이겠죠."

아직은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펜그릴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비도덕적인 이유일 게 분명하다.

"그럼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까."

"저, 오빠가... 집 안에서 위즈멜 님에 대한 자료를 찾아냈다고 했죠?"

그때, 주변 눈치를 보던 레베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저희 집을 조사해보는 건 어떨까요?"

"레베카 씨의 집이라면...."

"스펜서 가문 저택?"

인형 공방만큼은 아니지만, 스펜서 가문의 저택 역시 트라코티에서 꽤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대부분 스펜서 공방으로 가져갔겠지만, 미처 찾지 못한 자료가 있을지도 몰라요."

164. 저택에서 1

"출발하기 전에 재정비부터 하자."

"포인트도 얼마 안 남았으니 환자 몇 명 치료하고 갈까요."

"일단, 마센 지부장님께 간단히 설명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스펜서 가문 저택으로 떠나기 전, 강승현 일행은 모험가 조합으로 복귀했다.

따지고 보면 적진에 잠입하는 것인데,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고 가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무사히 돌아왔군. 커피라도 한잔하겠나?"

"아뇨, 괜찮습니다."

"밖에서 차 마시고 왔거든."

세 사람은 오늘 알아낸 정보를 마센 지부장한테 설명했다.

"하비 어르신을 독살하려 한 범인과 위즈멜 교단의 배후세력은 스펜서 공방, 펜그릴 스펜서입니다."

"펜그릴 스펜서.... 역시 그 녀석이었나."

마센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오, 마센 지부장도 잘 아는 녀석이야?"

"잘 알지. 어릴 때부터 봤는걸."

마센 역시 트라코티 토박이인 만큼 펜그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스펜서 가문을 물려받은 가주인 데다, 젊은 나이에 자기 공방까지 차린 천재 인형사지."

"오.... 평가가 의외로 좋네?"

"자기중심적인 데다 남 배려할 줄 모르는 싸가지 없는 도련님이라는 게 문제지만."

"좋지 않구나."

마센도 펜그릴을 그리 좋게 보진 않았다.

실력 있고 유능하지만, 냉정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을 쉽게 상처 주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이 트라코티를 장악하다니.... 이 마을이 망할 때가 된 거지."

'르페니가 말하던 거슬리는 녀석이 펜그릴이었군.'

트라코티의 표면적인 1인자는 하비가 소속된 인형 공방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스펜서 공방으로 넘어간 상태다.

덕분에 모험가 조합도 펜그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목적은 트라코티를 위즈멜 교단의 본거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위즈멜 인형까지 제작해서 트라코티 주민들을 선동할 생각이더군요."

"신과 똑 닮은 인형이 나타난다면 나머지 주민들도 전부 위즈멜의 신도로 변하겠군."

명백한 사기지만, 피해자가 나오는 건 아니라서 모험가 조합이 저지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게 트라코티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판이다.

"물론 전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동감이다. 발상이 기분 나빠."

펜그릴의 인형극에 온 마을이 놀아날 판이다.

트라코티를 사랑하는 마센은 그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당장 트라코티에 이득이 된다고 해도, 결말이 좋을 것 같지 않거든."

"의도는 좋아도 방식이 잘못됐으니."

"하지만 망할 정책 때문에 우리가 공식적으로 나설 순 없고...."

마센이 신호하자 조합 직원 몇몇이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박스 안에 담긴 건 각종 포션들이었다.

"필요한 건 전부 지원할 테니 너희한테 맡기마."

포션은 어쩔 수 없지.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 박스를 챙기며 답했다.

"맡겨만 주세요."

-모험가 조합을 나온 강승현 일행은 스펜서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은 트라코티 남서쪽에 세워져 있었다.

"진짜 으리으리하네."

"귀족놈들이 살 법한 전형적인 저택이네요."

스펜서 가문의 저택은 트라코티 건물 특유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최소 300년은 된 것 같다.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네...."

저택에 도착한 레베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모험가가 된 이후로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한다.

"어릴 땐 맨날 여기서 친구들하고...."

"추억에 젖어 있는 것도 좋지만 일단 수색부터 하죠."

"아, 네!"

세 사람은 저택 정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었다.

[경고][접근금지]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

[상당히 복잡한 마법이라 쉽게 풀 수 없을 것 같다.]

[허가 없이 접촉하는 자를 공격한다.]

[문을 열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다.]

"부수고 들어가는 건 귀찮겠네요."

"뭐, 우리는 옆에 집주인이 있으니 아무 상관 없지만 말이야."

물론, 강승현 일행은 집주인을 데려왔기 때문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레베카 씨, 문부터 열어 주세요."

"네."

달칵.

레베카는 집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덕분에 침입자를 막기 위한 이중삼중의 복잡한 방어 마법은 강승현 일행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실례합니다."

강승현 일행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어둡고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람이 사는 집 같지는 않네요."

"펜그릴 녀석, 이런 음침한 집에 살고 있는 거야?"

"원래 오빠는 일찌감치 집을 떠나서 공방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펜그릴은 인형 제작에 집중하고 싶다며 집을 떠나 오랫동안 숙소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가주 자리를 물려받느라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 가주 승계 문제로 집과 공방을 왔다 갔다 했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하기 싫다고 말하던 게 떠오르네요."

지금은 정식 가주가 되면서 굳이 집에 들를 이유가 없어졌으니, 다시 공방에서 생활하는 모양이다.

"물론 하비네 인형 공방이 아니라 스펜서 인형 공방이겠지만요."

"그럼 저택 관리는 누가 하는 거야?"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저택 자체는 무척 깨끗했다.

"하인이라도 고용했겠죠."

"아, 원래는 고용인을 쓰고 있었는데 오빠가 전부 내보냈어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펜그릴은 저택에서 일하던 고용인을 전부 해고했다.

"그 뒤로 집안 정리는...."

레베카가 복도 끝을 가리켰다.

새하얀 마네킹을 닮은 물체들이 저택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저기 저 애들이 하고 있어요."

"으엑! 저게 뭐야? 몬스터야? 여기 던전이냐구!"

"...저건 청소용 마네킹이에요."

"맞아요. 오빠가 공방에서 제작한 인형이죠."

펜그릴은 고용인을 전부 해고하더니 청소용 인형을 써서 저택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청소용 인형?"

"아무리 귀족이라도 사람 대신 인형을 쓰는 건 사치인데 말이죠."

"이거 그거지? 산업 혁명? 기계의 발달로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당연하지만, 인형을 가동할 땐 돈이 엄청 많이 들고, 효율을 따져봐도 사람 하나를 고용하는 게 훨씬 낫다.

아즐 대륙 기준으로도 정상이 아니다.

"가주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을 해고했다고 했죠?"

"네."

"그럼 그쯤에 위즈멜 자료를 찾아냈나 보네요."

아무래도 펜그릴은 위즈멜에 대한 기록을 유출하지 않으려고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을 전부 내보낸 것 같다.

"인형들은 보고 들은 걸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으니까요."

턱, 턱, 턱.

새하얀 마네킹들이 무감정하게 빗자루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며 주인 없는 저택을 정돈해갔다.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공포영화 같아서 무섭다야.... 저놈들이 우릴 공격하면 어쩌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턱, 턱, 턱.

이때. 청소용 마네킹 인형들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곧 강승현 일행을 지나쳐 다른 곳을 정리하러 가 버렸다.

"단순 노동 작업에 쓰이는 인형들은 입력된 명령대로만 움직이거든요. 얘들은 가드용이 아니라 청소용이니까 우릴 공격하진 않을 거에요."

"공격해 오면 정당방위로 치고 부숴 버리면 되겠죠.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마네킹을 지나쳐 갔다. 저택 안에 청소용 인형만 있다면 강승현 일행을 방해할 사람도 없다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합시다."

"하여간 강심장이야."

"우선, 레베카 씨 오빠 방부터 살펴볼까요."

강승현 일행은 당당하게 펜그릴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도둑이 된 것 같아."

"있어 보이게 괴도라고 하죠."

"차라리 의적이라고 해."

혹시라도 뭔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아무것도 없네요...."

"텅텅 비었잖아?"

"다른 방도 찾아보죠."

방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가구가 옮겨진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뒤, 강승현 일행은 서재나 창고까지 뒤져 봤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레베카는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찾아낸 자료를 전부 스펜서 공방으로 옮겨 버린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차라리 스펜서 공방을 털 걸 그랬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시간 낭비만 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날도 늦었으니 이만 쉬고 내일...."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시려던 찰나였다.

툭.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온 청소용 마네킹이 강승현과 부딪쳤다.

촤악!

그 충격으로 스태미나 포션이 바닥에 쏟아졌다.

"야, 앞을 잘 봐야지!"

김호정이 청소용 마네킹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마네킹은 눈앞의 인간들을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엎질러진 포션만 닦아 낼 뿐이었다.

강승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만, 집 안의 모든 자료를 스펜서 공방으로 옮겼다면 굳이 인형들을 쓸 이유가 없는데?'

아직 사람 대신 인형을 쓸 이유가 있다.

그걸 떠올린 순간 강승현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저택 어딘가에 외부인이 알아선 안 될 정보가 남아 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펜서 공방으로 옮기지 못한 걸 보면, 외부로 옮길 수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거지?'

일단 펜그릴의 방이나 서재에는 없었다.

그렇다고 저택 안을 전부 뒤지는 건 시간 낭비다.

'분명 펜그릴은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위즈멜의 자료를 손에 넣었다고 했으니....'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레베카한테 물었다.

"레베카 씨, 가주의 방이 어디죠?"

"1층이에요."

"그쪽으로 가 보죠."

강승현 일행은 1층 가주의 방으로 향했다.

저택의 주인이 사용하는 방인 만큼, 별도로 지정된 청소용 마네킹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가주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내가 가주라면, 분명 이 방 어딘가에....'

책상을 살펴보자, 정보 메시지가 나타났다.

책상 밑쪽에서 나타난 메시지였다.

[봉인이 풀린 스위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지만, 최근 누군가 봉인을 풀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 수 있다.]

'차기 가주에게 전달할 비밀을 숨겨 둘 거란 말이지!'

강승현은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스위치를 발견했다.

달칵.

버튼을 누르자 책상 밑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펜그릴이 숨기려던 첫 번째 비밀을 찾아냈네요."

"이, 이게 뭐야? 계단?"

"이 집에는 지하실이 없는데...."

"이건 비밀 통로예요. 인형 공방에 있는 거랑 비슷한 거죠."

이 지하실은 버튼을 조작할 때만 진입할 수 있는 숨겨진 공간이었다.

"봉인된 상태에선 사용할 수 없지만, 일단 봉인이 풀리고 나면 누구나 버튼을 누를 수 있어요."

꼭 가주가 아니더라도 버튼을 찾아내기만 하면 쓸 수 있다.

그래서 펜그릴은 고용인을 전부 내보내고 그 자리를 인형으로 대신한 것 같다.

"하긴, 인형이라면 스위치를 찾아내도 누르지 않겠지."

"저 밑에 뭐가 있는 걸까요?"

"글쎄요? 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꼭꼭 숨겨둔 걸 보면...."

강승현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남에게 들키면 곤란한 거겠죠."

165. 저택에서 2

저벅, 저벅, 저벅.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 강승현 일행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지하실에 도착했다.

"여기도 빨간 벽돌집이야?"

기본적인 인테리어는 스펜서 가문 저택과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탓인지 그렇게 낡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뭔가 어수선하군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네요."

지하실 내부에는 안쪽으로 향하는 문과 천으로 덮어진 상자, 알 수 없는 아이템 등등으로 가득했다.

'저건....'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왼쪽 벽면.

그곳은 글씨가 빽빽하게 새겨진 붉은 점토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트라코티를 사랑한 위대한 존재.]

[이곳에, '위즈멜' 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점토판을 가볍게 살펴보자 전부 위즈멜 관련 기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스펜서 가문의 선조가 남긴 물건이군요."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펜그릴은 가주의 방을 정리하던 도중 봉인된 지하실 스위치를 찾아냈다.

녀석은 가문에서 손꼽히는 천재였으니,

어렵지 않게 봉인을 풀고 계단을 내려와 이 점토판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래서 스펜서 공방으로 가져가지 못했구나...."

"벽 전체를 기록물로 쓰는 상황이라면 쉽게 옮기긴 힘들겠죠."

펜그릴은 다른 모든 자료는 스펜서 공방으로 옮겼지만, 이 거대한 점토판만큼은 옮길 수가 없어서 고용인을 전부 내보내고 인형으로 대체해서 외부인의 접근을 막은 것으로 보였다.

"일단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볼까요."

강승현은 점토판을 살폈다.

[언젠가 위즈멜 님이 돌아오신다면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린 인형 공방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펜서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분에게 용서받기 위해, 인형 공방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점토판의 가장 첫 부분에는 공방을 배신한 이유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한마디로 위즈멜 부활하면 망할까 봐 쫄려서 배신했다는 소리잖아."

'역시 인형 공방을 배신하는 게 가문 내력이군.'

결국 선대 가주가 필사적으로 자료를 빼돌린 이유는 위즈멜을 향한 신앙적인 뭔가가 아니라, 천벌받는 게 두려워서였다.

[위즈멜 님은 트라코티에서 숭배받던 수호신이며]

[트라코티 인형사들의 시조격 존재다.]

[대지를 다루는 힘으로 붉은 숲에 은혜를 내려주신....]

그 밑으로 적힌 내용은 위즈멜의 존재와 업적, 위즈멜이 사라진 이후에 대한 온갖 기록이었다.

"대체로 인형 공방에서 발견한 내용과 비슷한 걸 보면, 공방에 은폐한 자료를 몰래 베껴서 기록한 것 같네요."

"그럼 이 점토판을 더 볼 이유는 없으려나?"

"아, 여기는 새로운 정보가 적혀 있어요!"

점토판을 살피던 레베카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벽 한쪽 구석에, 인형 공방에선 보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트라코티 신화]

[여신은 숲을 사랑했고, 숲속의 모든 생물을 사랑하며 그들을 지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숲을 돌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고민하던 여신은 자신의 힘을 살짝 쪼개서 자신의 분신이자 아이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태어난 분신들이 숲 중앙에 여신을 섬기기 위한 마을을 세웠고, 훗날 '트라코티'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즉, 트라코티의 시조는 위즈멜의 분신체.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은 단순한 신도가 아니라, 위즈멜의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우리 마을을 만든 게 위즈멜 님이셨다니."

"그럼 트라코티 사람들은 신의 힘을 물려받은 거야?"

"아마 그러겠죠? 뭐, 위즈멜이 가진 힘의 극히 일부를 쪼개서 만든 분신의 후손들이니 흔적만 남은 상황이겠지만요."

하지만 이걸로, 트라코티 사람들만 붉은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됐다.

비록 흔적뿐이긴 해도 위즈멜의 힘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인형 공방은 패륜아 새끼들이구나."

"부모이자 스승님 등짝에 칼을...."

이 정보는 인형 공방이 기를 쓰고 지워버렸는지, 공방 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도리에 어긋난 짓이라 차마 남길 수 없던 모양이다.

"이걸 보니까 펜그릴이 왜 그렇게 카마르랑 인형 공방을 원망하고 위즈멜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위즈멜을 모시는 거.... 트라고티 사람들한테는 조상님 차례 지내는 거네? 그걸 못하게 하니까 빡쳤구나."

"그렇다고 해도 지금 행보가 정상은 아니지만요."

강승현은 지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점토판 조사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안쪽으로 향하는 방뿐이다.

"그래서 저쪽엔 뭐가 있을지."

"저쪽은 빈 창고면 좋겠네요...."

레베카가 껄끄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 너머에서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고."

강승현 일행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 곳곳에 흙과 물감, 부서진 인형 파편 같은 게 널려 있었다.

"여기서 인형이라도 만든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

강승현이 이렇게 말한 순간,

바스락!

덜컥!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네발짐승 형태의 골렘 하나가 뛰쳐나왔다.

언뜻 보기엔 고양잇과, 그중에서도 승냥이를 모티브로 제작한 골렘이었다.

"뭐, 뭐야 이거!"

"골렘이에요!"

"우릴 반기는 것 같진 않으니."

끼기긱!

끼기기긱!

승냥이 골렘은 세 사람을 향해 거칠게 울부짖더니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다들 무기나 꺼내세요."

"알았어!"

김호정은 승냥이 골렘을 향해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저리가! 훠이!"

파악!

금빛 영광이 승냥이 골렘의 머리를 강타했다.

원래 땅 파는 데 특화된 도구인 만큼, 흙으로 만들어진 골렘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끼기기기기!

하지만 놈은 머리가 박살 난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고 덤벼들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이었으니까.

"이, 이거 왜 안 죽어?"

"골렘은 핵을 파괴하기 전까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아요!"

"핵은 어딨는데?"

"그건 제작자마다 달라서...."

"아니 그럼 어떻게 잡으라구우!"

김호정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파밧!

하지만 승냥이 골렘은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고 김호정을 향해 돌진했다.

퍼억!

"끄헉!"

"김호정 탱커님!"

김호정은 금삽을 놓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대미지가 제법 컸는지 김호정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끼기기기기기!!!

김호정을 처리한 승냥이 골렘은 타겟을 바꿔 레베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귀찮네."

그때, 강승현이 승냥이 골렘을 막아섰다.

'핵 위치는 [관찰의 눈]으로 조사하면 알 수 있지만... 꼭 그렇게 잡을 이유가 있나?'

강승현은 김호정이 떨어트린 금빛 영광을 주워들더니,

[절개]

파사아악!

승냥이 골렘의 다리를 일격에 베어버렸다.

몸속의 핵이 파손된 건 아니라서 기능이 정지하진 않았지만, 다리가 모조리 박살 난 만큼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두 분 다 괜찮으세요?"

"워어...."

"다리 4개를 전부 베어버리다니.... 그것도 무기를 딱 한 번 휘둘러서!"

"잘 떠드는 거 보면 괜찮으시네."

강승현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김호정에게 금빛 영광을 돌려줬다.

"선생 덕분에 살았어. 10년 감수했네...."

"이쪽에도 골렘이 있어요!"

승냥이 골렘이 뛰쳐나온 곳을 살펴보자, 완전히 박살 난 것부터 시작해서 비교적 상태가 멀쩡한 골렘까지, 다양한 골렘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이 골렘은 염소랑 노루네요. 박살 났지만."

"저 구석에 쥐랑 토끼도 있다."

"전부 트라코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물들이네요."

승냥이 골렘과 마찬가지로, 근처에 보이는 골렘은 전부 산짐승을 모티브로 제작된 골렘이었다.

"전부 오빠가 만든 것 같긴 한데... 왜 만든 걸까요?"

"글쎄다? 동물을 좋아해서?"

"그게, 저희 오빠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굳이 말하면 싫어하는 편이죠."

레베카는 짐승 골렘한테 다가갔다.

"늘 인간형 골렘만 만들지, 동물 골렘은 어지간해선 만들지 않았거든요."

트륵. 트륵.

쥐와 토끼 골렘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몸을 숨기고, 들개 골렘을 몸을 낮게 낮추고 으르렁거리며 경계하는 등 실제 동물과 유사한 행동을 보였다.

"뭐야.... 또 덤비는 거 아냐?"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아요."

승냥이 골렘이 박살 난 걸 봐서 그런지, 다른 골렘들은 쉽게 덤벼오지 않았다. 오히려 강승현 일행을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꼭 진짜 동물처럼 행동하는군.'

일반적인 골렘에선 볼 수 없는 면모다.

강승현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레베카 씨, 혹시 이 녀석들 에고 골렘인가요?"

"어.... 맞는 것 같아요."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단, 마력이 담겨 있지 않은 비정상적인 에고 골렘이라고.

"어쩐지, 골렘치고 너무 리얼하게 행동한다 싶더니만."

"이게 하비가 말한 그거구나."

"아무래도 펜그릴 씨는 여기서 에고 골렘을 연구한 모양이네요."

물론 방 안에 버려진 에고 골렘은 하나같이 불안정하고 미완성된 실패작이었다.

완성된 에고 골렘이었다면 여기에 버려두지 않고 스펜서 공방으로 진작 옮겨 뒀을 테니까.

"일단 이쪽은 신경 끄고 안쪽이나 살펴보죠."

강승현 일행은 방 안쪽으로 다가갔다.

그쪽엔 낡은 노트 몇 권과 수첩이 놓인 책상, 인형을 굽는 가마가 설치되어 있었고,

"으, 으아아아악!"

"히이익...!"

온갖 종류의 산짐승 사체가 널려 있었다.

한둘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마리였다.

"이게 다 뭐야!"

"너무 끔찍해요. 어떻게 이런 짓을...."

그 광경을 목격한 김호정과 레베카는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것도 펜그릴의 짓인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강승현은 침착하게 산짐승 사체를 살폈다.

잠든 것처럼 평온하게 죽어 있는 사체가 있기도 하고, 몸이 끔찍하게 훼손된 사체도 있었다.

'응?'

사체를 유심히 살펴보던 강승현은 그 사이에서 죽은 승냥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다들 이것 좀 보세요."

"왜? 동물 시체는 왜?"

"이 사체, 아까 싸웠던 승냥이 골렘과 똑같이 생겼어요."

"어억.... 진짜네?"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사체를 바라보았다. 승냥이 사체의 얼굴은 아까 박살 낸 골렘과 똑 닮아 있었다.

"혹시 이거 보고 따라 만든 거야? 그 녀석 취향 진짜 고약하네! 기분 나빠!"

"다른 골렘도 마찬가지예요."

승냥이뿐만 아니라 쥐나 토끼, 들개나 염소처럼 아까 발견한 골렘과 똑같은 동물 사체가 방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무래도 골렘을 제작할 때 참고하려고 가져온 것 같습니다."

"골렘이라는 거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거였냐구...."

"아, 아니에요. 오빠는 동물 골렘은 거의 만들지 않지만... 워낙 솜씨가 좋아서 굳이 동물을 포획하지 않아도 제작할 수 있다구요."

레베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펜그릴은 그림 한 장만 있어도 골렘을 제작할 수 있는 데다, 동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런 짓을 했다는 건데...."

"선생, 여기 수첩 있는데 한번 읽어볼까?"

"수첩?"

"아, 이거 오빠 글씨체예요."

"읽어보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수첩은 펜그릴의 수기였다.

[스승님을 뛰어넘고 싶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이딴 문장이 나오는 걸 보면 펜그릴이 작성한 게 확실했다.

[에고 골렘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싶다.]

[하지만 육체를 대체하는 건 쉬워도, 정신을 대체하는 건 쉽지 않다.]

[수백수천 번을 시도했지만, 마력을 이용해 의지를 담는 건 실패했다.]

[나는 스승님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건가?]

수첩 초반부에는 일이 안 풀려서 펜그릴이 한탄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에고 골렘 제작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첩 중반부부터는 내용이 달라졌다.

골렘 제작에 성공했다는 문장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매우 불안정해서 약간의 충격에도 금방 망가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지만,

그다음 페이지에는 상당히 기분 나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해도 유사 영혼을 만들 수 없어서, 이미 만들어진 재료를 대신 사용했다.]

[처음에는 심한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폐기.]

[이후 육체의 일부를 섞은 흙으로 인형을 제작했더니 거부반응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재료? 뭐야, 그게?"

"육체의 일부를 섞어...?"

김호정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진실을 깨달은 레베카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서, 설마 이 골렘들...."

"한번 분해해 볼게요."

강승현은 부서진 승냥이 골렘 파편을 쥐고 [분해★]했다.

파앗!

파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재료 상태로 되돌아갔다,

붉은 숲 특유의 촉촉한 점토와 염색용 물감.

물컹한 고깃덩어리와 흰 가루.

그리고 묘한 빛을 내는 형체가 나타났다.

"이게 뭐야?"

"...생물의 영혼이에요."

"뭐?"

"이 미친 자식이 멀쩡한 동물의 영혼을 뽑아다 인형을 만들었다구요."

즉, 펜그릴이 제작한 짐승 골렘은 자아를 가진 게 아니라 귀신 들린 인형에 지나지 않는, 끔찍한 크리처라는 뜻이었다.

166. 저택에서 3

"이, 이 자식 완전 돌았잖아?"

"...어떻게 이런 짓을."

"성격 나쁜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네요."

진실을 알게 된 강승현 일행은 경악했다.

방 안 곳곳에 버려진 동물 사체는 펜그릴의 골렘 연구에 희생당한 희생양이었다.

"동물 수십 마리를 갈아서 만든 인형이라니, 펜그릴은 이런 걸 신한테 바치려는 거야?"

"위즈멜 님은 분명 붉은 숲의 모든 생물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펜그릴은 위즈멜의 사도를 자칭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보다 위즈멜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

"오, 오빠는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죠?"

"뭔진 모르겠지만, 완전 미친 짓인 건 확실해.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생각이냐고!"

김호정이 방 곳곳의 짐승 골렘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온전해 보이는 것만 수십 개다.

부서지고 박살난 파편까지 포함하면 최소 수백 마리의 짐승이 희생됐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에고 골렘을 만들려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강승현의 눈에 책상 위의 낡은 노트가 들어왔다.

겉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위즈멜 님은 우리를 떠난 게 아니었다.]

안쪽에는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시기를 보아하니 선대 가주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록인 것 같다.

[자신의 모든 힘을 붉은 숲 전역에 퍼트려, 숲과 동화된 것이다.]

[신적 존재로서의 위즈멜 님은 소멸했지만]

[모습이 달라졌을 뿐,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다.]

"숲과 동화됐다니...."

"엉? 이게 뭔 소리야?"

선대 가주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위즈멜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힘을 숲 전역에 퍼트렸다고 한다.

"숲과 하나가 됐다는 소리죠."

"그럼 붉은 숲이 위즈멜이야?"

그 결과, 신으로서의 위즈멜은 사라지고 붉은 숲을 지키려는 개념만 남아버린 모양이다.

"아무래도 붉은 숲의 저주의 정체는... 트라코티를 지키려는 위즈멜의 힘이었나 보네요."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 트라코티 주민들에겐 아무 영향이 없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강승현은 [위즈멜의 왼손]을 떠올렸다.

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걸 보면, 스스로 잘라냈거나 누군가에 의해 잘렸다는 소리다.

"뭔가가 트라코티를 습격한 게 아닐까요?"

위즈멜은 트라코티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치명상을 입었고, 그대로 소멸하는 대신 숲과 동화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키르카라슈텔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적 존재는 소멸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한다.

하지만 위즈멜은 자신의 모든 힘을 퍼트려 숲과 동화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없다.

신의 자리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여기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기다려도 위즈멜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 자식, 진짜 돌아버린 건가?"

즉, 펜그릴이 하는 건 완전 뻘짓이다.

위즈멜은 붉은 숲 자체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럼 오빠는 위즈멜 님 인형으로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생각인 걸까요...."

"그냥 속일 거라면 하비의 에고 골렘만 써도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굳이 다른 생물의 영혼을 뽑아서 모독적인 에고 골렘을 만드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팔락.

강승현은 책상 위에 있던 또 다른 노트를 펼쳤다.

[선대 가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숲과 동화된 위즈멜 님과 접촉하는 건 불가능 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글씨체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이번에는 펜그릴이 작성한 기록일지였다.

"이 자식, 정말 끈질기네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레베카는 불안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붉은 숲 곳곳으로 흩어진 위즈멜 님의 힘을 모아서, 그분의 의지를 담은 인형한테 주입한다면.]

[신의 힘과 의지를 가진 인형에게 신앙심을 부여한다면.]

[위즈멜 님은 다시 신적 존재로 돌아올 것이다.]

"이게 녀석의 진짜 목적이었군요."

"우리 오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위즈멜 인형을 만드는 걸로 끝나지 않고, 인형을 기반으로 소멸한 위즈멜을 신적 존재로 되돌리는 것.

펜그릴의 진짜 목적은 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근데, 이거 가능해? 신앙심이야 트라코티 주민들한테서 쥐어짜겠지만, 힘하고 의지를 어떻게 모아?"

"일단 읽어보죠."

세 사람은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평범한 인간은 신의 힘을 모을 수 없다.]

[하지만 신의 유해는 힘을 모을 수 있다.]

[나는 고민 끝에, '위즈멜 님의 오른손'을 사용했다. 이 오른손은 위즈멜 님이 소멸할 때 남겨진 것이다.]

[본래 왼손도 함께 남아 있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인형 공방의 추격을 피하는 과정에서 유실되고 오른손만 지하실로 겨우 구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숲에 버려져 있던 건가.'

강승현이 찾아낸 왼손은, 위즈멜의 유해를 챙겨서 도망치던 선대 가주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붉은 숲 곳곳에 흩뿌려진 힘을 회수해서 위즈멜 님의 오른손에 모았다.]

[그 때문에 붉은 숲이 불안정해지고, 몬스터가 난폭해지는 등 몇몇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위즈멜 님을 부활시킨다면 괜찮을 것이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미친놈아!"

"그럼 최근 붉은 숲의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가...."

본래라면 위즈멜의 힘이 카마르에서 흘러온 마력을 막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펜그릴은 위즈멜을 부활시키겠다고 그 힘을 회수해버렸고,

약해진 숲은 카마르의 마력을 막아내지 못했다.

"우리 오빠 때문이었다니!"

"카마르가 1차 원흉이긴 하지만, 2차 원흉은 펜그릴이었네요."

펜그릴은 자신의 잘못은 비밀로 하고, 모든 게 카마르 탓이라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사람들은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카마르를 적대하며 정체 모를 종교를 추종했다.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죠? 지금 붉은 숲에서 다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소한 문제라고? 장난해?"

레베카와 김호정은 크게 분노했다.

트라코티를 위한다는 녀석이, 트라코티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다.

"...일단 다음 페이지도 읽어보죠."

[문제는 신의 의지다.]

[힘은 숲 곳곳에서 모았고, 신앙심은 트라코티 주민들한테서 얻어낼 수 있다.]

[하지만 신의 마음, 의지는 위즈멜 님이 숲과 동화되면서 사라져버린 상태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의지가 없는 골렘은 단순한 인형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의지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 뒤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팔락, 팔락.

페이지를 거의 끝까지 넘기자,

[고민 끝에 방법을 떠올렸다.]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

이 시점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 뒤에 뭐가 적혀 있을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트라코티 주민들은 위즈멜 님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 위즈멜 님의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마을의 모든 이들의 영혼 속에 위즈멜 님의 의지가 깃들어있다는 뜻이다.]

[물론 한 명 한 명의 힘은 미약하다.]

[하지만 수십, 수백 명이 모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다시 문장이 끊기고.

다음 내용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니 트라코티 주민들의 영혼을 쓴다면]

[위즈멜 님의 의지를 대신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흙으로 만든 몸은 살아 있는 몸과 달리 영혼을 견뎌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짐승을 재료로 만든 에고 골렘은 하나같이 내세울 수 없는 실패작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완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키지는 않지만, 스승님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했다.]

펜그릴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하비의 힘을 빌리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나는 고민 끝에, 무덤에서 파낸 트라코티 주민들의 시체와 모험가 몇몇의 영혼을 섞어 에고 골렘을 제작했다.]

[인간의 영혼은 짐승의 영혼보다 집념이 강해서 몇 번 실패한 끝에, 겨우 남들 앞에서 보여줄 만한 에고 골렘을 제작할 수 있었다.]

[조금 불안정하지만, 스승님의 협력을 받는다면 완벽한 에고 골렘, 완벽한 신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펜그릴의 노트는 이렇게 끝났다.

모든 내용을 읽은 세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뭐지? 내가 뭘 본 거야?"

"트, 트라코티 사람들의 영혼으로 인형을 만들겠다고?"

"이 자식 진짜 미친 거 아냐?"

"정말 제정신이 아니네요."

사실, 녀석이 에고 골렘을 제작하기 위해 인간을 희생시켰을 거라는 건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모험가까지 납치해서 실험하고 있었고.'

하지만 펜그릴은 그 이상의 막장 짓을 계획하고 있었다.

무려 자신의 고향 사람들, 트라코티 주민들을 제물로 바쳐 위즈멜을 창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일단 위즈멜 신도들은 신앙심을 뽑아내야 하니 건드리지 않겠죠."

그렇다면 놈의 목표는 위즈멜 신도가 아닌 트라코티 일반 주민들.

당연히 인형 공방과 모험가 조합이 포함된다.

"막아야 해요! 당장 막으러 가야 해요!"

레베카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결론은 트라코티 인구의 절반을 죽이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이 미친놈! 지 스승한테 독 먹일 때부터 알아봤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의 인간말종이었다.

"이번 일은 그냥은 못 넘어가겠네요."

녀석을 막지 못하면 트라코티 주민의 절반이 희생되고,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카마르까지 멸망할 것이다.

분명 [위즈멜의 자애]를 되찾으러 갈 테니까.

"이 일기를 증거로 제시한다면 모험가 조합도 그냥 있을 순 없을 겁니다."

"빨리 가서 막자!"

"일단 하비 어르신의 신변부터 보호하죠."

펜그릴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비가 협조하지 않으면 온전한 신을 창조할 수 없다.

강승현 일행은 인형 공방으로 가기 위해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타박, 탁, 타박. 탁.

그때, 계단 위에서 묘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계단을 올려다보자.

"설마 여기까지 알아내실 줄이야."

무척 익숙한 목소리를 내는 새까만 인형 하나가 서 있었다.

167. 갇히다

"이 재수 없는 목소리는!"

"펜그릴 씨네요."

강승현 일행은 인상을 찌푸리며 인형을 바라보았다. 펜그릴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걸 보면, 녀석이 조종 중인 인형인 것 같다.

"훌륭한 인형사는 인형을 만드는 능력도 뛰어나지만, 인형을 다루는 능력도 갈고 뛰어난 법이거든요."

달각, 달그락.

펜그릴의 말이 끝날 때마다 인형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으, 기분 나빠."

김호정이 오만상을 쓰며 뒤로 물러났다.

외형은 인형극에서나 쓸 법한 꼭두각시 인형이었지만, 전신이 새까맣고 펜그릴의 목소리가 흘러나와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인형이었다.

"조금 아쉽네요. 저는 여러분이 스승님을 설득하러 갈 거라 생각했거든요."

펜그릴의 인형은 특유의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런데 저희 집으로 향했다는 건, 제 부탁을 거절하겠다는 뜻이겠죠."

"당연히 거절하지!"

"애초에 우리는 당신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거든요."

강승현은 띠꺼운 얼굴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트라코티를 무시하는 카마르와 연을 끊기 위해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킨다.... 계획 자체는 흠잡을 게 없어요."

실제로 위즈멜은 트라코티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만큼 이타적인 신이었으니까.

"문제는 당신한테 있죠."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그걸 실행하려는 인간이 썩었다면 처참하게 망하는 법이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스승한테 독을 먹이고, 부하를 토사구팽하는 데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구박하는 인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런 녀석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누가 도와주겠는가.

강승현은 펜그릴한테 협조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계획도 정상이 아니잖아!"

김호정이 화를 내며 노트를 내던졌다.

펜그릴이 숨긴 진짜 계획은 트라코티 주민들을 재료로 위즈멜 인형을 만들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이었다.

"사람을 죽여서 인형을 만들겠다고? 이런 부탁을 누가 들어주겠냐구!"

"섭섭하네요.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펜그릴 인형이 기분 나쁘게 히죽거렸다.

"죽는 게 아니라, 위즈멜 님을 깨우기 위한 신성한 의식에 참가해서 그분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뭐가 어째?"

"영광스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인간이 신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살아간다니...."

저 말을 하는 게 인형이라 펜그릴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 죽으려는 게 느껴졌다.

"영광? 영광이라고?"

"그렇게 영광스러우면 그쪽 영혼이나 제물로 바치시든가요."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빈정거리는 건가 했지만,

"제가 아니면 이 계획을 이어갈 인물이 없거든요."

목소리를 들으니 100% 진심이었다.

이 자식은 정말로 자기를 대신해 계획을 진행할 사람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자기 영혼을 갈았을 것이다.

"이 녀석 진짜 미쳤네."

"말이 안 통하네요."

"안타깝네요. 여러분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펜그릴의 인형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트라코티는 위즈멜 님의 분신에서 시작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녀석은 자신들은 본래 위즈멜 님의 일부였으며,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흩어진 힘과 의지, 신앙을 모아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거라고 주장했다.

"미친 소리 작작해!"

"애초에 그건 당신 망상일 텐데요."

"망상?"

"트라코티 주민들 영혼에 신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습니까?"

"당연하죠. 직접 '확인'해보면 되는 일인데."

"확인해봤다고?"

"아주 간단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적출해서 조사해보면 되는 거니까요."

펜그릴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 죄책감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 영혼을 적출했다고?"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레베카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통 붉은 숲의 실종자는 외부인이지만, 이번에 실종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트라코티 주민들이었는데."

지금은 위즈멜을 조사하느라 잠시 미뤄두고 있지만, 원래 레베카는 붉은 숲에서 실종되는 사람들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서, 설마... 오빠가 범인이야?"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제발 아니라고 대답하길 바라면서.

"그래."

하지만 펜그릴은 아무 감정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데려갔어. 영혼 속에 담긴 의지를 확인하려면 마을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니까."

정체불명의 교단 배후, 붉은 숲 난이도 증가, 하비 암살 미수에 이어서... 트라코티 주민 실종 사건까지 전부 펜그릴이 한 짓이었다.

"그럼 지금 실종된 사람들은...."

"죽었겠네요."

펜그릴이 조사한 영혼을 제자리에 다시 되돌려놨다면 실종자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실종자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한 명도 없는 걸 봐서, 뽑아낸 영혼을 돌려놓지 않은 것 같다.

'뭐, 위즈멜 부활용 제물로 써야 할 테니 고이 모셔놨겠지. 이 자식은 도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강승현은 펜그릴이 걸어 다니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혀, 협력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레베카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거 아냐?"

"마음이 아팠지만, 위즈멜 님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꼭 해야 할 일이었어."

"그런 건 협력이라 부를 수 없어!"

"르웨나.... 이건 전부 트라코티를 위한 일이야."

레베카의 말을 듣고 기분이 살짝 나빠졌는지 펜그릴의 말투가 무척 차가워졌다.

"모험가가 되겠다고 마을을 버리고 간 너 같은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동안 트라코티 사람들이 정말 힘들었거든."

"...."

"설마 이대로 쭉 카마르의 멸시와 핍박을 받으며 살라는 거야? 이게 트라코티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야. 큰일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은 각오해야지."

평소의 레베카였다면 펜그릴의 말에 주눅 들어서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베카는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오빠는 사람을 죽여놓고 변명하는 거야!"

"르웨나."

"마을을 위험에 빠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어. 그래 놓고서 트라코티를 위한다는 말이 나와?"

레베카는 용기를 내서 펜그릴의 말을 반박했다.

"오빠는 위선자야! 쓰레기라고!"

곁에 의지가 되는 동료들도 있었고,

펜그릴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쓰레기가 마을을 구할 리가 없잖아!"

"너 같이 모자란 녀석이 이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기대도 안 했고."

물론 펜그릴은 레베카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위즈멜 교단이 부활하면 너처럼 한심한 아이도 할 만한 일을...."

"거, 말 되게 많네."

[절개]

그때, 은빛 영광을 꺼낸 강승현이 펜그릴의 인형을 베어버렸다.

[절개]

텅!

잘려나간 인형 머리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강승현은 인형 몸통을 걷어차며 말했다.

"더 들을 가치도 없네요."

이걸로 확실해졌다.

펜그릴은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다.

"당장 나가서 버리죠."

"저 녀석을 멋지게 물먹여주자고!"

앞장서서 나간 김호정이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 덜컥.

"엥?"

"왜 그러세요?"

"문이, 잠겨 있는데...."

문고리를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그때였다.

구석에 버려져 있던 다른 인형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말했잖아요. 얌전히 기다리라고."

"이 목소리는...."

"또 펜그릴?"

이번에도 펜그릴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걸 봐서, 부서진 인형 대신 다른 인형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그 문은 잠겼습니다."

"뭐라고?"

"이 지하실은 일단 문이 닫히면, 밖에서 스위치를 누르지 않는 한 절대 열리지 않거든요."

세 사람이 지하실을 조사하는 동안, 펜그릴이 청소용 마네킹을 조작해 지하실 문을 닫았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 안에 갇힌 겁니다. 저는 그걸 알려드리러 온 거구요."

"이, 이 개자식이!"

"전부 들어올 게 아니라 한 명은 밖에서 스위치를 지키고 있었어야죠."

"강 선생, 문을 부숴버리자!"

"그랬다간 차원의 틈으로 떨어질걸요?"

이 지하실은 일종의 아공간이다.

벽이나 문을 부수는 순간, 차원과 차원 사이로 떨어질 것이다.

"얌마 문 열어! 네 동생도 죽이려는 거냐?"

"죽인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하나뿐인 혈육과 동료분들인데...."

"그럼 당장 꺼내줘!"

"그건 안되죠. 위즈멜 님을 맞이하는 신성한 의식을 방해할 생각이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그러니 여러분은 여기서 의식이 끝날 때까지 계셔줘야겠습니다."

펜그릴 역시 강승현 일행을 믿지 않았다.

"강승현 힐러님이 여기 갇혀 있는 동안엔 스승님도 약을 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처음부터 여기에 가둘 생각이었군."

약속대로 하비를 설득하러 갔다면 괜찮지만, 혹시 자신을 조사할 때를 대비해 함정을 파둔 것이었다.

"인형을 완성하려면 3일 정도는 걸릴 테니, 그때까진 이 안에 얌전히 계세요. 의식이 끝나면 꺼내드리겠습니다."

"우리보고 굶어 죽으라는 거냐?"

"방 안에 1주일치 식량을 준비해놨으니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거참 친절하네! 문 열어!"

쾅쾅쾅!

김호정이 문을 두드렸지만, 잠긴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전 그럼 치료제를 미끼로 스승님을 '설득'하러 가보겠습니다."

"거기 서!"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인형이 움직임을 멈췄다.

저쪽에서 연결을 끊어버린 것 같다.

콰앙!

강승현은 분풀이로 인형을 부숴버렸다.

물론 본체한테는 아무 영향도 가지 않는다.

"젠장... 우리 이 안에 갇힌 거야?"

"일단은 그런 셈이네요."

평범한 지하실이라면 굴을 파서라도 나갔겠지만, 여기서 굴을 파봤자 차원의 틈에 떨어질 뿐이다.

"정말 이쪽에 식량이 있어요...."

"굶어 죽을 일은 없겠네요."

안쪽 상자를 열자 물과 비상식량이 넉넉하게 담겨 있었다.

한동안 놀고 먹어도 될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 갇혀 있는 동안 펜그릴은 하비를 노예로 부려서 인형을 완성하겠죠."

트라코티 주민들의 영혼을 제물로 말이다.

"그 꼴은 못 봐!"

김호정이 질린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아일 그 자식 생각나네. 걔도 진짜 돌았었잖아."

"그랬죠."

강승현은 지옥에서 불타고 있을 아일을 떠올렸다.

녀석도 자신의 신을 위해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킨 쓰레기였다.

"펜그릴 녀석도 일종의 사도 같은 걸까?"

"아직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위즈멜이 나타나면 신의 사도가 되겠죠."

그 전에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안 그래도 미친놈이 힘까지 얻으면 지옥이 벌어질 테니까.

"분명 인형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 아직 승산이 있어!"

"문제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는가, 이건데."

"아 우리 탈출용 스크롤 있잖아! 그걸로 탈주하자."

"근데 이건 좌표 지정 귀환 스크롤이에요."

강승현이 구입한 귀환 스크롤은 사용시 [뱅그롤 마을]로 워프하는 아이템이다.

이걸 사용하면 탈출하는 건 문제 없지만, 뱅그롤에서 트라코티 마을까지 걸어와야 펜그릴을 막을 수 있다.

"레베카, 뱅그롤에서 트라코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걸어서 열흘 정도 걸려요."

"그, 그럼 안 되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열흘이면 펜그릴이 위즈멜 부활 기념 축제를 벌이고도 남을 시간이다.

"죄송해요, 제가 여기 오자는 말만 안 했어도...."

레베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울먹였다.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발목만 잡고 있다고.

"아냐, 아냐. 덕분에 펜그릴 자식이 무슨 개짓거리를 하는지 알게 됐는걸."

"그치만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잖아요...."

울먹이며 대답하던 레베카는 끝내 바닥에 엎드려서 울음을 터뜨렸다.

부서진 인형 사이에서 서럽게 말이다.

"그 자식이 인형 조종해서 여기까지 올 줄 누가 알았냐구. 너무 자책하지 마."

"제가 밖에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뭔가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레베카를 위로하던 김호정이 강승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입을 열진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 어떻게든! 방법! 찾을 거지?'

'나 참.'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마시며 생각했다.

'우리가 이 안에서 빠져나가려면 누군가 문밖의 스위치를 눌러줘야 하는데.'

강승현 일행이 여기 있다는 걸 아는 건 모험가 조합뿐이다.

하지만 여기는 스펜서 가문의 저택이라,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이 안에서 스위치를 누를 방법이 없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강승현의 눈에 부서진 인형들이 보였다.

아까 펜그릴이 조작하고 버린 것들이었다.

"혹시...."

인형들을 바라보던 강승현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스쳐갔다.

"레베카 씨, 인형사 스킬 쓸 수 있죠?"

"아? 네. 잘하진 못하지만 기초 정도는...."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때 인형사를 꿈꾸던 인형사 가문 출신인 만큼, 그녀 역시 인형술을 쓸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겠는데요."

168. 실패해도 괜찮아

"나갈 수... 있다구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역시 강 선생이야! 믿고 있었다구!"

강승현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화색 도는 얼굴로 기뻐했다. 이대로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이 뭔데?"

"간단하면서도 어렵네요."

강승현은 펜그릴이 조종하던 인형을 주웠다.

"펜그릴 씨가 한 것처럼, 인형 조종술을 사용해서 문 밖의 스위치를 누르는 겁니다."

"인형 조종술?"

"여기서 나갈 수 없다면, 밖에 있는 놈을 부려먹는 수밖에 없죠."

가주의 방은 청소용 마네킹들이 돌아다니며 청소하고 있으니 그것들 중 하나를 조작해서 스위치를 누르게 한다면 문을 열 수 있다.

"어.... 근데 그게 가능해? 여기는 아공간이잖아?"

김호정이 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세 사람이 있는 지하실은 아즐 대륙과는 다른 공간이라 일반적으론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 안에서 아무리 스킬을 쓴다 해도 가주의 방에선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그렇겠죠. 하지만...."

강승현은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장치를 해두면 가능하죠."

"특별한 장치?"

"잘 생각해보세요."

이 인형은 직전까지 펜그릴이 조작하고 있었다. 놈은 분명 자기 공방에 처박혀 있을 텐데 말이다.

"펜그릴이 스펜서 공방에서 인형을 보내서 조종했다는 건, 바깥에서 스킬로 간섭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당연히 안에서 바깥을 간섭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게? 그 녀석, 어떻게 한 거지?"

"선대 가주가 이 방을 제작할 때 뭔가 조치를 취해놨을 겁니다."

"선대 가주?"

"이 공간은 가주만 아는 곳이니까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 아공간이라 혹시라도 운 나쁘게 갇힌다면 구하러 올 사람이 없다.

선대 가주는 그걸 염려해서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것이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주변을 살폈다.

그냥은 잘 보이지 않지만, 구석 부근에서 흐릿한 마법진 여러 개가 숨겨져 있었다.

"방 안에 중계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네요."

"중계 마법진?"

"보통 차원 너머에 영향을 미치려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거든요."

중계 마법진은 차원의 벽 너머로 스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스킬 효과를 증폭시키고 목적지로 전달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혹시라도 안에 갇혔을 때를 대비해서 설치해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차원이동 마법은 완벽하게 개발되지 않았고, 아즐 대륙의 기술력으론 한계가 있어서 지금도 계속 연구중인 분야다.

원칙적으로 차원이동은 신의 영역이니까.

'중계 마법진은 약간의 충격에도 망가지고 불안정한 데다 설치할 때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서, 일반 던전에서 사용하는 일은 드물지.'

그래서 주로 사용되는 곳은 돈이 썩어넘치고 자기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잘 안 나가는 귀족들 저택.

보통 자기 집 비밀방에 설치해두고 몰래 연락을 주고받거나, 남을 감시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럼 아무 스킬이나 쓸 수 있는 거야?"

"여기 설치된 중계 마법진은 사용 조건이 걸려 있어요."

[스펜서 가문의 일원만 중계할 수 있다.]

[인형술 계열 스킬만 중계할 수 있다.]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정보를 읽었다.

"외부인은 쓸 수조차 없게 해놨네요."

스펜서 가문의 가주인 만큼, 당연히 인형술 한정에다 스펜서 가문 사람 이외에는 쓸 수 없는 마법진을 설치해놨다.

"애초에 차기 가주한테 물려줄 생각으로 만든 방일 테니...."

스펜서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다 해도 인형술을 쓸 줄 모르는 얼뜨기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런 멍청이는 이 안에서 굶어 죽어라.

이러한 의도가 느껴졌다.

"즉, 우리가 이 방에서 나가기 위해선...."

이 마법진을 작동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둘뿐이다.

하나는 펜그릴 스펜서, 다른 하나는....

"레베카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르웨나 스펜서, 그녀밖에 없다.

"저희는 인형술을 할 줄 모르고, 혹시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스펜서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중계 마법진을 쓸 수 없습니다."

"아까 인형술 배웠다고 했지?"

"레베카 씨가 인형을 조작해서 문을 열어주세요."

"...저, 저는."

레베카는 불안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안색은 좋지 않았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인형술을 배운 건 사실이지만, 오래전의 이야기이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인형에 손도 댄 적 없어요."

"괜찮습니다. 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아니에요. 저는 인형술 실력이 좋지 않아요. 이런 실력으로 오빠가 만든 인형을 조종할 수 있을 리가...."

레베카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또 삽질하고 있네.'

강승현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삽질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뭐, 이해는 간다만.'

오랜 역사를 지닌 인형사 가문.

하나뿐인 오빠는 압도적 천재 인형사.

'평생 비교됐을 거고, 하필이면 인성 파탄자라 배려받기는커녕 욕만 실컷 먹었겠지.'

그러니 레베카가 왜 저런 성격이 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투정 받아줄 시간이 없어.'

당장 이 안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펜그릴이 트라코티 주민의 절반을 제물로 위즈멜을 부활시킬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할까.'

레베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형사 가문 출신이고, 펜그릴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한동안 꿈을 포기하지 않은 걸 봐선 평균 이상의 실력은 갖고 있을 것이다.

'실력 자체가 나쁜 건 아닐 거야. 펜그릴에 비해 상대적으로 딸리는 거겠지.'

요컨대 레베카의 마음가짐이 문제다.

자기는 못 한다고 자책하는 마인드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발악해도 스킬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요."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전 트라코티가 망하든 말든 별 상관없거든요."

"네?"

"엥?"

김호정도 레베카도 그 말을 듣고 놀란 얼굴이었다.

"어디까지나 외부인이니까요. 마을이 망하면 안타깝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남 일이죠."

"그, 그렇게 자비 없는 말을."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여기가 제 고향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강승현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펜그릴 하는 꼴이 너무 짜증 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엿을 처먹이고 싶거든요. 아주 큰 걸로."

"...."

"외부인인 저도 포기할 마음이 없는데, 트라코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포기하려는 거에요?"

레베카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러 이유로 마을을 떠나 떠돌고 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트라코티를 사랑했으니까.

"내가 레베카 씨라면, 손 놓고 있는 것보단 실패하더라도 도전할 겁니다. 못된 오빠한테 수제 엿을 먹일 기회잖아요?"

펜그릴은 중계 마법진의 존재를 알면서도 레베카를 지하실에 가뒀다.

그 말은 레베카의 실력으론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안 한다는 뜻이다.

"내내 무시하던 동생의 실력 때문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 얼마나 재밌겠어요."

건방진 녀석이 벌레보다 낮잡아보는 인물에게 허를 찔리는 건 상상만 해도 즐겁다.

강승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걸려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아요."

"힐러님...."

"다시 도전하면 되죠. 그렇죠?"

"저, 한번 해볼게요!"

강승현의 말에 용기를 얻은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이 만든 인형을 조종할 땐 준비할 게 많아요."

레베카는 지하실에 마법진을 그렸다.

중계 마법진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걸 보강하려면 엄청난 수의 마법진이 필요했다.

"직접 만든 인형은 다루기 쉽지만, 타인의 인형은 주인이 아닌 자의 손길을 밀어내려는 성질이 있어서...."

특히, 펜그릴처럼 실력 있는 인형사는 인형 속에 외부인의 조종을 막는 제어 장치를 걸어두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다.

"그걸 무력화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오~ 뭔 소린지 모르겠어."

"펜그릴이 만든 인형을 해킹한다구요."

레베카는 기억을 더듬어 마법진을 그렸다.

지하실 내부에 인형 제작 관련 서적이 몇 권 남아 있던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얼마나 걸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꽤 걸리겠죠...."

그 결과, 마법진을 그리는 데만 꼬박 하루를 소모했다.

레베카는 무척 초조한 얼굴이었지만,

"괜찮아요.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네...!"

강승현의 말에 용기를 얻고 마법진을 작동했다.

파아앗.

기존의 중계 마법진과 새로 설치한 마법진이 맞물리면서 조종술 범위가 지하실 바깥까지 넓어졌다.

"서, 성공했어요!"

"오!"

"이제 인형을 찾고, 찾아서... 조작하기만 하면...."

레베카는 가주의 방을 청소하던 마네킹 인형을 타겟으로 삼았다.

달그락.

방을 청소하던 마네킹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책상까지 움직이기만 하면...."

끼기기긱.

"으!"

물론 레베카는 아주 오랫동안 인형사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발짝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끄으!"

끼기긱.

겨우 한 걸음 움직였을 뿐인데 마력이 엄청나게 깎여나가고,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너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심지어 레베카는 코피까지 쏟아냈다.

고위 인형사의 인형을 무리해서 조종하려 했기 때문이다.

'저대로는 쓰러지겠는데....'

뭔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방구석을 보자, 에고 골렘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레베카 쪽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 펜그릴이 만들고 버린 골렘들이었지.'

펜그릴과 레베카는 외형적으론 그리 닮진 않았지만, 피를 나눈 남매여서인지 인형들은 둘을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돕고 싶으면 가서 도와주든가."

강승현이 한 마디 슬쩍 던지자, 맨 앞에 있던 쥐 골렘 두 마리가 뽈뽈 기어갔다.

파아앗!

두 골렘은 레베카의 몸에 머리를 가볍게 비비더니 주위로 흩어져 뒤틀린 마법진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인형술 지식을 갖고 있나 보네요."

아마 펜그릴은 별생각 없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할 생각으로 넣은 거겠지만, 그 행동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스슥, 슷!

탓!

이어서 다른 골렘들도 몸을 움직여 마법진을 보수하거나 조종을 보조하는 등, 레베카를 돕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골렘들의 서포트를 받은 레베카는 온 힘을 다해 인형을 조작했다.

끼긱, 끼기긱!

쿵!

마침내.

책상 밑으로 기어간 인형이 스위치를 작동하면서,

달칵.

굳게 닫혔던 지하실 문이 열렸다.

"여, 열렸다...."

털썩!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레베카가 바닥에 쓰러졌다. 인형을 무리하게 조종하느라 마력과 스태미나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레베카!"

"괜찮아요! 좀, 어지러워서 그래요...."

"수고하셨어요."

강승현은 그녀에게 포션을 내밀었다.

다행히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는 범위였다.

"다 저 애들이 도와준 덕분인걸요."

레베카가 미소를 지으며 에고 골렘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잠시 레베카의 주위를 얼쩡거리다 다시 방구석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능했을지...."

레베카는 한숨을 쉬며 포션을 마셨다.

이번 일은 에고 골렘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거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질 정도로 무모한 작업이었다.

"성공했으면 됐지! 레베카는 생각이 많구만!"

"힘들어 보이는데 좀 쉬었다 갈까요?"

"괜찮아요! 그보다 오빠를 막는 게 훨씬 중요한걸요."

가까스로 문을 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려 이틀이나 소모했다.

절대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그럼 다 끝나고 쉬는 걸로 하죠."

"일단 하비의 상태부터 확인해보자고!"

탁, 탁, 탁!

세 사람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응?"

"어...."

하지만 트라코티 풍경은 이틀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169. 생기 없는 마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요...."

트라코티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스펜서 가문의 저택이 마을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긴 해도, 대화 소리나 생활 소음 같은 게 들리지 않는 건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음소거도 아니고."

"굴뚝에 연기도 안 보이네요."

강승현은 트라코티 곳곳의 민가를 살폈다.

흙과 도예의 마을인 만큼 트라코티 민가의 굴뚝은 언제나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굴뚝에서도 연기를 볼 수 없었다.

"분명 사람은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으으음...."

김호정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마을을 살폈다.

멀어서 흐릿하게 보이긴 해도 광장 거리에 사람 같은 물체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입 꾹 다물고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건가?"

"...일단 광장으로 가보죠."

타박, 타박, 타박.

강승현 일행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마을 광장까지 내려왔다.

'확실히 조용하군.'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광장은 이틀 전까지만 해도 돌아다니는 모험가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을 전체가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외부인이 지금의 트라코티를 방문했다면 분명 폐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고작 이틀 만에 마을이 이렇게 변한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말이죠...."

도대체 지하실에 처박혀 있던 이틀 동안 마을에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누구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구."

김호정은 근처를 지나가던 주민을 붙잡았다.

"이보셔, 뭣좀 물어봅시다."

"아...."

"마을에 뭔 일 있었어? 우리가 이틀 동안 집 밖에 안 나가서 잘 모르거든."

"...."

주민은 대답 대신 멍한 얼굴로 김호정을 바라보더니,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분이, 오실 것이다, 그분이, 그분이 오신다. 오신다. 오실 것이다. 그분이...."

"엑."

망가진 녹음기처럼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김호정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 자식!"

"이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네요."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의 다른 주민들도 비슷비슷한 헛소리와 함께 세 사람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분이, 그분이, 그분이,"

"트라코티를 위해."

"나의 어머니에게 무한한 믿음을...."

하지만 이들은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고, 세 사람에게 다가오거나 손을 대거나 위협하진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다들 제정신이 아니네요."

"아, 이 사람은 아는 사람이에요!"

레베카가 구석의 묶은 머리 여성을 가리켰다.

"저쪽 식당 주인 아주머니세요."

"식당 주인이 음식은 안 만들고 왜 이러고 있는 거냐구."

"그리고... 정체불명의 종교 추종자 중 한 사람이에요...."

레베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모험가 조합과 협력해서 일하고 있던 만큼, 정체불명의 추종자 소속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네요."

아무래도 여기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은 전부 위즈멜 추종자들인 것 같다.

"그치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왜 이렇게 되신 거지...."

"그 자식이 뭔가 손을 썼겠죠."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모인 사람들의 몸 위로 정보가 떠올랐다.

[중독][혼란]

[대상은 '에타올호제'에 중독된 상태다.]

'에타올호제인가.... 귀찮은 걸 사용했군.'

"뭔지 알겠어?"

"무슨 스킬이라도 쓴 건가요?"

"그 녀석, 남에게 약 먹이는 취미라도 있나 보네요."

위즈멜 추종자들은 에타올호제에 중독된 상태였다.

"서, 설마 또 르카코테신이야?"

"이건 정신을 둔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 약물이에요."

에타올호제는 극소량만 사용해도 멀쩡한 사람을 혼이 나간 것처럼 정신을 약화시키는 환각제다.

"먹고 죽는 건 아니구나? 다행이네."

"세뇌 작업에 주로 쓰이죠."

"다행이 아니네 그럼!"

정황상, 펜그릴은 위즈멜 추종자들을 쉽게 다룰 생각으로 에타올호제를 사용한 것 같다.

위즈멜을 부활시키려면 신도들의 신앙심이 매우 중요하니까.

"마을 주민의 절반이 사라지면 이상하게 생각할 신도들이 있을 테니 약을 투여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에타올호제에 중독된 추종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리를 떠돌며 뿐이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기다리면서.

'이것도 꽤 비싼 약 중 하나였지.'

신도들을 약물 중독 상태로 만들어서 의식을 진행할 계획을 짜다니.

돈이 썩어 넘치는 귀족다운 발상이다.

"신앙심 하나는 갈퀴로 긁어모으겠네요."

"이제 하다하다 진짜...."

김호정은 질린다는 듯 추종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시 입을 다물고 마을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거 치료제는 있어?"

"딱히 없는데요."

"으겍, 그럼 계속 저러고 살아야 해?"

"그런 건 아니고, 몸에서 약 기운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굳이 뭔가를 해야 한다면, 탈수를 일으키지 않도록 물이나 먹이는 게 전부다.

"독약이 아니라 다행이네."

"이 사람들이 죽으면 펜그릴의 계획은 실패할 테니까요."

그러니 이론상, 펜그릴을 막을 때 가장 쉬운 루트는 신도들을 다 처리하는 것이다.

신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존재가 없으면 소멸하는 법이니까.

'물론 그런 짓을 하면 레베카 씨가 싫어하겠지만.'

강승현은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 힐러님.... 아까부터 누가 우릴 자꾸 보는 것 같지 않아요?"

"추종자들 아냐?"

"그치만 저 사람들은 우릴 보고 있지 않은걸요."

"확실히...."

레베카가 무척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어딘가에서 강렬한 시선 같은 게 느껴졌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최소 수십....'

강승현은 불길함을 감지하고 무기를 꺼냈다.

끼긱, 끼기긱.

끼기기긱!

이어서 관절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을 곳곳에서 마네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흙을 구워 만든 비스크 마네킹들이었다.

"저, 저것들은 또 뭐야?"

"마네킹이에요...."

"펜그릴 그 자식이 풀어둔 것 같네요."

괴상한 인형들이 마을을 배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즈멜 추종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비스크 마네킹 역시 추종자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강승현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 어쩌죠?"

"뭘 어째! 때려 부숴야지!"

김호정이 금빛 영광을 꺼내 덤벼오는 마네킹을 후려쳤다.

빠가악!

그 충격으로 머리가 박살 났지만, 마네킹은 멈추는 일 없이 달려들어 김호정을 공격했다.

"끄아아악!"

파가각!

김호정은 비명과 함께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두 번째 공격으로 마네킹의 상체가 날아갔지만, 날아간 상체와 남겨진 하체 양쪽 모두 끈질기게 덤벼왔다.

까가가각!

상체는 팔로 땅을 기어오고, 하체는 두 다리로 걸어오는 등, 호러 뮤비가 따로 없는 광경이었다.

김호정은 반쯤 울면서 소리쳤다.

"왜 아직도 움직여! 불사신이냐?"

"그냥 마네킹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파가각!

[관찰의 눈]

뒤에 있던 강승현이 은빛 영광을 이용해 마네킹의 척추 부위를 도려냈다.

"안에 핵이 들어있어요."

툭.

그 안에서 아주 작은 구슬이 튀어나왔다.

무척 작아서 콩알과 엇비슷한 사이즈였다.

"일반 인형이 아니라 전투용 골렘이네요."

"힐러님 말이 맞아요. 이 아이들을 완전히 정지시키려면 몸속의 핵을 제거해야 해요!"

"뭐라고?"

끼기기긱.

끼기긱.

세 사람의 주위를 에워싼 비스크 마네킹은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개,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수백 개는 되어 보인다.

"심지어 몸속에 배치된 핵은 평균 10개, 꽤 많네요."

"10개요?"

"콩알만 한 핵을 10개나 찾아야 한다고?"

"...실력 있는 인형사가 제작한 것 같은데 말이죠."

이 마네킹들은 핵을 전부 파괴하기 전까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관찰의 눈] 덕분에 몸속 핵의 위치를 전부 파악할 수 있고, 땅파기 특화 무기도 갖고 있어서 부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몰려드는 마네킹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세 사람이 마네킹을 부수는 동안에도 새로운 흙 인형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마네킹은 부서진 동료를 수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입니다. 스펜서 공방으로 쳐들어가는 낫겠네요."

강승현의 시선이 스펜서 공방 건물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서 마네킹들이 걸어나오는 걸 보면, 역시 저쪽에서 제작되는 것 같다.

"근데 우리 포위당했는데? 땅굴이라도 팔까?"

"길이야 만들면 되죠."

강승현은 인벤토리를 살폈다.

'스파클링 포션, 이걸로 해볼까.'

그는 포션 하나를 꺼내서 가볍게 흔들더니,

[투척★]

바글바글 몰려오는 마네킹 무리를 향해 투척했다.

파바바바방!

포션병이 깨지면서 상쾌한 가스와 기포가 터져 나와 근처의 마네킹을 밀어냈다.

위력은 별거 없지만, 몰려오는 몬스터를 밀어낼 땐 이만한 게 없다.

"지금이에요!"

"달려!"

세 사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쳐나갔다.

스파클링 포션의 폭발에 휘말린 인형들은 비틀비틀 일어나 세 사람을 추격했다.

"서, 설마... 우리가 탈출한 걸 오빠가 눈치챈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휘익!

강승현은 추격해오는 마네킹 무리를 향해 두 번째 스파클링 포션을 던졌다.

파바바바방!

상쾌한 폭발이 마네킹 무리를 도미노처럼 넘어트렸다.

"그놈이 알아차렸다면 여기 널린 마네킹 중 하나를 조종해서 우리를 약올렸을걸요?"

"그건 그러네."

"그럼 이 아이들은...."

"방해꾼들을 처리할 용도로 퍼트렸겠죠."

마을 한복판에서 이런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모험가들은커녕 조합 직원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험가 조합은 진작 당한 것 같네요."

"그럴 수가...."

아무래도 의식에 불필요한 외부인들은 전부 펜그릴한테 처리당한 것 같다.

"그것보다, 이 녀석들 보통 인형 같진 않거든요."

에고 골렘이 아니더라도 골렘은 만들기 어려운 인형에 속한다.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인형사가 아니고서야 만들 수 없는 것들이다.

"펜그릴은 위즈멜 축제 준비하느라 이런 인형 만들 시간은 없을 테니.... 아, 설마 하비 그 녀석인가?"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현 시점에서 이만한 인형을 제작할 만한 인형사는 하비 밖에 없다.

자기 제자라면 치를 떨며 증오하는 놈이지만, 르카코테신 치료제를 받기 위해 협력했을 것이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으니 제가 준 치료제는 진작 바닥났겠죠."

"그럼 신나게 두들겨주고 펜그릴 위치를 물어보자고."

강승현 일행은 스펜서 공방으로 향했다.

본래는 손님과 인형사들로 가득했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기괴한 마네킹만 보일 뿐이었다.

"뭐야, 사람이 전혀 없는데?"

"인형은 계속 나타나는데 말이죠."

분명 누군가 인형을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일단 인형이 생산되는 방향 쪽으로 가보죠."

세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마네킹 무리를 해치우고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하비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저, 저건...."

"하비잖아!"

단,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다.

170. 공방 최하층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