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공방 최하층 1
"이, 이거 하비 맞지? 그치?"
"하비 어르신이네요."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적당한 머리스타일에 적당하게 마른 몸.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 틀림없는 하비 사르반이었다.
"상태는...."
강승현은 쓰러진 하비한테 다가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쪽 팔이 잘려나간 데다, 맥박은 진작에 멎은 상태였다.
"너무 늦었네요."
"어, 어쩜 좋아...."
레베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비록 사이가 좋진 않아도 아는 사람이 시체로 발견된다면 기겁할 수밖에 없는 데다, 심지어 죽인 사람이 자기 오빠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이 녀석 고약한 놈이긴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죽은 거야? 역시 독 때문에?"
"독은 아니에요."
김호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보자, 강승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비의 몸은 팔이 잘린 걸 빼면 눈에 띄는 외상 없이 깨끗했다.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는 십중팔구 피를 토하고 죽기 때문에, 시체가 이렇게 깨끗할 수 없거든요."
[관찰의 눈]
실제로 하비를 [관찰의 눈]으로 살펴봤을 때도,
[이미 죽은 듯하다.]
[죽은 뒤 오른쪽 팔이 뜯겨나갔다.]
[르카코테신 중독이 치료된 상태다.]
중독이나 독살 관련 키워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중독을 치료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르카코테신을 치료한 뒤에 죽은 것 같거든요."
"치료한 뒤에? 뭔 소리여."
"일단 펜그릴이 죽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강승현은 다시 한번 하비를 살펴보려 했다.
"다들... 무사하셨군요...."
"직스 씨?"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방 구석에 기댄 직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넌 또 어쩌다 그렇게 다쳤어?"
"그 자식, 펜그릴한테 당했어요...."
직스는 힘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부 쪽에 큰 부상을 입은 상태라, 이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할 것 같다.
"일단 부상부터 치료하죠."
강승현은 약과 붕대를 꺼내며 피투성이 셔츠를 걷어 올렸다. 몸 곳곳에 부서진 도자기 파편이 박혀 있었다.
[지혈] [적출]
강승현은 스킬을 발동해 직스의 출혈을 멎게 하고 몸에 박힌 도자기 파편을 끄집어냈다.
"직스 상태는 어때?"
"하비 어르신을 따라가진 않겠네요."
팟, 파밧!
파편을 말끔하게 제거한 뒤, 상처 부위를 자세히 살폈다. 천만다행으로 내장 부분이 손상된 건 아니었다.
"다행히 깊게 당한 건 아니라서."
"공격당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방어 스킬을 발동했거든요."
직스가 힘없는 목소리로 웃으며 손을 펼쳤다.
몸에 박힌 도자기 파편은 [흙의 방패] 스킬의 잔해물인 것 같았다.
강승현은 찢어진 피부를 [봉합]하고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았다.
'환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겠지만, 지금 트라코티는 어딜 봐도 안전한 곳이 없어서 말이지.'
그 시간에 펜그릴을 쓰러트리는 게 낫다.
이렇게 판단한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응급처치는 끝났지만... 당장 움직이는 건 힘들 겁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안 보이셔서 꼼짝없이 당한 줄 알았어요."
"당하긴 당했죠. 이제 막 빠져나온 참이라서요."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직스는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 핏기가 없는 창백한 얼굴로 말이다.
"그게, 저희 공방에 펜그릴이 찾아왔습니다."
"날짜는?"
"대략 이틀 전. 여러분의 소식이 끊긴 뒤였습니다."
직스는 창백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하비는 치료제가 거의 다 떨어져가는 상황이라 초조한 얼굴로 강승현 힐러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녀석은 약병을 보여주면서, 스승님이 자신에게 협력한다면 치료제를 드리겠다고 제안했죠."
"그래서 거절했다가 죽은 거야?"
"아뇨, 당연히 승낙하셨죠."
"그 녀석도 참 한결같구나."
물론 하비도 처음엔 펄펄 날뛰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승현 일행은 나타나질 않고, 버틸 수 있는 약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스승님께선 '목숨이 중요한데 그깟 자존심이 문제냐?'라고 하셨거든요."
"하비 어르신다운 발상이네요."
그렇게 약을 인질로 펜그릴과 협력하게 된 하비는 이곳, 스펜서 공방 지하에서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직스는 하비를 보조해야 한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동행했다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에고 골렘의 문제점을 파악한 하비는 펜그릴한테 치료제를 요구했다.
직스는 이때 펜그릴이 치료제를 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순순히 넘겨줬다고 한다.
"이때 펜그릴은 '역시 스승님의 실력은 대단하다. 앞으로도 계속 협력해 주십시오.'라고 했지만...."
하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제 너 같은 쓰레기한테는 볼일 없어!'
그 말을 들은 펜그릴은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하비의 어깨를 붙잡았다.
'스승님, 잊으신 겁니까? 인형 공방은 위즈멜 님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내 알 바 아냐. 꺼져.'
하비는 손을 뿌리쳤으나 펜그릴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인형 공방을 물려받은 스승님 역시 큰 죄를 지었죠. 이대로는 부활한 위즈멜 님께서 스승님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내 말 못 들었어? 네 구역질 나는 인형놀이에 어울릴 생각 없으니까, 썩 꺼지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위즈멜 님을 위해 일하면서 죗값을 치르셔야죠.'
'...!'
푸욱!
이렇게 말한 펜그릴은 하비의 심장에 손을 찔러넣더니,
콰악!
직스가 보는 앞에서 영혼을 끄집어냈다.
정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여, 영혼을 뽑아갔다고?"
"...세상에."
그 이야기를 들은 김호정과 레베카는 경악했다.
쓰러진 하비는 그냥 시체가 아니라, 영혼을 적출당한 빈 껍데기였다.
"스승님은 그 즉시 바닥으로 쓰러지셨고, 저는 그 자식한테 달려들었지만...."
"처발리셨군요."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직스를 가볍게 쓰러트린 펜그릴은, 한심한 녀석의 영혼은 수거할 가치도 없다며 비웃었다.
실제로 강승현 일행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직스는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놈이 떠나기 전, 스승님의 영혼을 어쩔 생각이냐고 물어봤더니... 골렘으로 제작할 거라고 하더군요."
"...."
"위즈멜 님을 위해 평생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이라면서."
"정말 정신 나간 소리군요."
"팔은 골렘 제작에 쓰겠다고 잘라갔죠...."
펜그릴은 자기 할 말을 끝내고 떠나버려서, 직스는 하비의 영혼이 어떻게 됐는지 목격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 뒤로 지하에서 대량의 흙 인형이 제조되기 시작한 걸 보면 대략 어떤 상황일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 공장 기계 비슷한 신세일 겁니다. 펜그릴의 명령대로 인형을 찍어내는...."
"노동자에게 인권이 없네요."
직스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그 괴물 자식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혼을 뽑아내는 능력, 전투 인형을 양산하는 에고 골렘, 거기에 조만간 신에게 받을 사도로서의 힘까지.
"사실상 보스 몬스터와 다를 게 없죠."
하비가 사라진 이상, 인형 무리를 막아낼 인물은 없다.
인형 공방과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은 몰려오는 인형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마을에서 도망쳐서 모험가 조합, 교단에 연락하는 것뿐이겠죠.... 여러분이라면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직스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부상 때문에 힘들 거라고 덧붙이면서.
"아뇨, 그래선 너무 늦습니다."
하지만 강승현은 고개를 저었다.
놈을 이대로 방치해봤자 피해자만 늘어날 뿐이다.
"아직 위즈멜을 만들지 못한 지금이 기회죠."
"그 괴물 녀석을 상대하실 생각이군요...."
"펜그릴은 어디로 갔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직스가 입을 열었다.
"저쪽에 문이 있습니다. 아마 공방 최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겠죠."
"공방 최하층?"
"그 녀석 말로는, 공방 최하층에 위즈멜 님의 버려진 옛 신전이 있다더군요."
직스가 가리키는 문을 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펜그릴은 저곳에서 위즈멜을 깨우기 위한 의식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깽판내러 가보실까."
-저벅, 저벅, 저벅.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가자 음침한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가 최하층인가?"
"그런 거 같네요."
그곳엔 인형사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바위 제단, 그리고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골렘을 볼 수 있었다.
몸 곳곳에 길쭉한 팔이 여럿 달려 있는 데다, 내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걸 보면 인형 양산을 위해 제작된 골렘으로 보인다.
덜컥, 덜컥, 덜컥.
골렘은 팔을 쉴 새 없이 움직여 뭔가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흙반죽을 주물러 모양을 잡고 부품을 만들어내는 등, 일반적인 인형사가 할 법한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저 인형은...."
골렘이 제작하는 건 지금까지 마주친 흙인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여인 형상의 인형.
"보나마나 위즈멜이겠군요."
"그렇다면 저 골렘이!"
하비의 영혼이 담긴 에고 골렘이다.
물론 지금 행동을 봐선 하비의 제작 능력을 흉내내기만 할 뿐 자아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자아가 있다면 저 기다란 팔로 펜그릴을 후려팼을 테니까요."
"끔찍해.... 저런 건 에고 골렘이 아니야."
레베카는 차마 하비 골렘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한때는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였지만, 지금은 펜그릴이 시키는 대로 인형을 제작하는 인형 공장일 뿐이었다.
"정말 아름답고 훌륭하군요. 역시 스승님께 맡기길 잘했습니다."
제단 앞에는 펜그릴이 황홀한 얼굴로 위즈멜 인형을 찬양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이군요."
"...."
"끝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덜컥, 덜컥, 덜컥.
하비 골렘은 제작한 위즈멜 인형 부품을 가볍게 조립했다. 색만 칠하면 살아있는 인간으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인형이었다.
덜컹!
이어서 골렘의 중앙부가 열리고, 하비 골렘은 자신의 몸 안으로 위즈멜 인형을 집어넣었다.
펜그릴은 무척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제 곧, 위즈멜 님이 부활하신다!"
"그렇겐 안 되지."
파악!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위즈멜 인형의 머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어?"
철퍽!
화살에 꿰뚫린 머리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직 굽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바닥에 닿는 순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찌그러졌다.
"아아아아!!!!"
그 모습을 목격한 펜그릴은 괴성을 질러댔다.
아름다운 여신을 본떠 만든 인형이, 완성되기도 전에 망가져버렸기 때문이다.
"누, 누구냐! 누가 이런 짓을!"
분노한 펜그릴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석궁을 든 강승현이 실실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가 가장 들떠있을 때 먹이는 엿만큼 짜릿한 것도 없지."
171. 공방 최하층 2
"네, 네 녀석...."
"오랜만이네요. 이틀 만에 보는 거죠?"
"여길 어떻게 온 거지?"
펜그릴은 경악한 얼굴로 강승현을 노려보았다.
분명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할 인간이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이제 다 끝났어. 그러니까 관둬."
"...!"
이어서 레베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무척 지쳐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생생했다.
"르웨나...."
펜그릴은 그 순간 깨달았다.
레베카가 자신의 인형을 조종해서 탈출했다는 것을.
"감히 네까짓 게 내 인형을!"
펜그릴은 여태껏 보인 적 없는 일그러진 얼굴로 레베카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늘 낮잡아보고 무시하던 여동생한테 당했으니 엄청난 굴욕이겠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일수록 하찮게 여기던 존재한테 당하는 걸 못 견뎌 한다.
특히 펜그릴은 자기 실력에 자부심 넘치는 놈인 만큼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르웨나, 끝까지 날 배신하는구나...."
녀석은 핏발선 눈으로 소리쳤다.
"역시 너 같이 한심한 녀석하곤 진작 의절했어야 했어!"
"의절?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레베카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자기 동생을 지하에 가둬둔 인간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쓰레기!"
남매는 서로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가족의 정은 1g도 느껴지지 않는, 남보다 못한 사이로 전락한 것이다.
"멍청한 자식! 아직도 모르겠어? 이건 트라코티를 구하려는 신성한 의식이다! 너 같은 얼간이가 훼방 놓을...."
펜그릴이 여기까지 말한 순간,
"알 게 뭐야."
파악!
강승현은 위즈멜 인형을 향해 보란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아까는 머리였으니 이번에는 밸런스 있게 왼팔과 오른팔이 좋겠죠?"
"이, 이 자식이...!"
펜그릴이 경악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이 위즈멜 인형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막아!!!!!!"
덜컥, 덜컥, 덜컥!
펜그릴이 고함친 순간, 배후의 하비 골렘이 기다란 팔을 움직여 위즈멜 인형을 감쌌다.
파악!
날아간 화살은 팔에 가로막혀 위즈멜 인형을 건드리지 못했다.
"하하하, 역시 스승님.... 훌륭하십니다!"
펜그릴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몸을 아끼지 않고 위즈멜 님을 보호하는 그 태도! 그런 식으로 노력하면 그간 쌓은 죄를 씻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말 하나하나가 역겹기 짝이 없다.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 저 역겨운 것들을 처리하시면 될 것 같네요. 눌러 죽여버리세요."
"...."
"지금 당장!"
덜컹, 덜컥!
펜그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비 골렘이 기다란 팔을 내려쳤다.
"오, 온다!"
콰아앙!
콰앙!
강승현 일행은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공격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공격력이 꽤 높아서 한 대라도 맞았다간 사지가 아작날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
"하비 어르신께는 죄송하지만...."
김호정과 레베카는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내고 소리쳤다.
"팔을 박살 낼 수밖에!"
"부러트릴게요!"
쿠웅!
두 사람은 골렘의 팔이 땅을 내려치는 타이밍을 노려 무기를 휘둘렀다.
파악! 팍!
이 짓을 몇 번 반복하자 팔에 점점 금이 가더니.
파각!
마침내 하비 골렘의 팔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났다.
"됐다!"
"아작났...."
그러나 그 직후,
덜컥, 덜컥!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하비 골렘은 또 다른 팔을 이용해 부서진 팔을 빠르게 수리했다.
두 사람을 조롱이라도 하듯 말이다.
"이, 이렇게 빨리 고친다고?"
"안 그래도 단단한데 자힐까지 쓰네!"
덜컥, 덜컥!
팔을 말끔하게 수리한 하비 골렘은 다시 세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파악!!
"끅!"
"으아아!"
레베카와 김호정은 사이좋게 얻어맞고 뒤로 쓰러졌다.
"이, 이걸 어떻게 막아?"
"평범한 인형이면 조종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이건 안 되겠어요."
"역시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를 재료로 만든 에고 골렘답네요."
하비는 인간일 때도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괴물이었다.
지금은 인간 시절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육체를 쓰고 있으니, 인형 제작이나 수리 속도가 몇십 배는 빨라졌을 것이다.
'물론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만.'
눈앞의 골렘은 분명 하비의 영혼이 담겨 있지만, 하비의 의지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주인인 펜그릴이 시키는 대로 하비의 영혼을 쥐어짜서 착취한다는 느낌이었다.
"자기 스승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인형 속에 처박아 놓고 노예로 부려먹다니...."
강승현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펜그릴을 쳐다봤다.
"펜그릴 씨, 어르신이 그렇게 싫었나요?"
"싫어한다니? 섭섭한 소릴 하시는군요. 저는 스승님을 누구보다 존경합니다."
펜그릴은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며 말했다.
"단지 인간성에 결함이 있으신 분이라... 인격을 잠재우고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드린 것뿐이죠."
"사이코가 따로 없네."
김호정이 질색하며 혀를 내둘렀다.
결론은 자기 스승님을 노예로 부리기 편하게 개조했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위즈멜 님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하는 지금의 스승님은... 최고의 인형사입니다!"
하비 골렘이 강승현 일행을 막는 동안, 펜그릴은 느긋하게 위즈멜 인형을 수리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본 모습을 되찾아드리겠습니다!"
찌그러진 점토 덩어리가 다시 아름다운 여신의 두상으로 되돌아갔다.
"오빠가 인형을 고치고 있어요!"
"젠장, 선생! 저 자식한테 화살 한 방 더!"
강승현은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으나,
파악!
이번에도 하비 골렘이 위즈멜 인형을 감싸 보호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펜그릴은 세 사람을 비웃으며 소리쳤다.
"스승님을 쓰러트리지 않는 한, 위즈멜 님께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네요."
하비 골렘은 철저하게 위즈멜을 제작,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골렘이었다.
펜그릴을 막으려면 어떻게든 하비 골렘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역시 이거밖에 없나.... 귀찮아서 이 방법은 쓰기 싫었는데."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더니 김호정의 금빛 영광을 주워들었다.
"삽 좀 빌리겠습니다."
"어쩌려고?"
"강행돌파해야죠."
왼손과 오른손에 은빛 영광과 금빛 영광을 챙긴 강승현은 하비 골렘을 향해 전력질주했다.
'에고 골렘은 부품을 하나하나 조립해서 만드는 인형이니까....'
동시에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하비 골렘의 3번째 구체 관절]
[하비 골렘의 4번째 구체 관절]
[하비 골렘의 5번째 구체 관절]
팔 곳곳에서 관절 부품의 위치가 드러났다.
'팔 전체를 부술 필요 없이 관절 부위만 망가트려도 작동을 멈출 수 있겠지.'
팔을 전체를 박살내는 대신, 관절만 골라서 부수기.
이렇게 하면 하비가 팔을 수리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다.
'물론 이 방법을 쓰려면 가까이 접근해야 하니....'
강승현은 위를 올려다 보았다.
덜컥, 덜컥, 덜컥.
하비 골렘이 팔을 내려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격을 피할 수가 없지만 말이야.'
상대를 조지기 위해 어느 정도 피해를 감안해야 하는 전법.
그래서 가급적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다.
쿠우웅!
퍼억!
은빛 영광으로 가드했지만, 강력한 충격이 온 몸에 전해져왔다.
'역시 방패 하나쯤 사둘걸 그랬나.'
강승현은 회피하는 대신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고, 관절 부품을 향해 금빛 영광을 찔러넣었다.
파가가각!
파가각!
동시에 부품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골렘의 3번째 팔이 움직임을 멈췄다.
덜커걱! 덜컥!
당연히 나머지 팔은 망가진 팔을 수리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하비 골렘의 9번째 구체 관절]
[하비 골렘의 10번째 구체 관절]
파각, 파각!
파가가각!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계속 유지한 채,
다가오는 팔의 관절 부품도 모조리 박살 냈다.
"아무리 천재 인형사라고 해도 손 없이 수리하긴 힘들겠지?"
쿠웅! 쿵!
관절이 망가지면서 움직임을 멈춘 하비의 팔이 하나둘씩 지면으로 추락했다.
덜컥, 덜컥!
하비 골렘의 몸체는 망가지지 않았지만, 인형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팔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 같으면 중간에 흙 인형이라도 퍼트려서 방해했을 텐데."
지금의 하비는 펜그릴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인형이었기에 시키는 대로 눌러 죽일 생각만 할 뿐, 다른 공격은 실행하지 못했다.
그게 이번 싸움의 패인이었다.
"제대로 된 에고 골렘이었으면 훨씬 힘들었겠지만, 이런 반푼이 에고 골렘은 별것도 아니지."
강승현은 몸에 입은 부상을 살폈다.
어깨 부위는 물론이고, 다리 뼈도 전부 금이 간 것 같다.
'바위와 땅 속성에 강한 은빛 영광으로 막아서 이 정도지, 안 그랬으면 내 팔도 아작났겠네.'
급한대로 붕대를 꺼내서 상처 부위를 고정했다.
그걸 본 김호정이 열심히 기어서 다가왔다.
"서, 선생 괜찮아?"
"괜찮아요. 뼈가 좀 금 간 것만 빼고."
"안 괜찮잖아!"
"좀 이따 치료하면 되요."
지금 한가하게 팔이나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제 방해하는 것도 없겠다.'
강승현은 하비 골렘의 잔해를 치우며 안으로 다가갔다. 몸에 입은 부상 때문에 무척 느린 속도로 말이다.
"위즈멜 님, 위즈멜 님...! 이제 곧!"
하비가 팔을 날려가며 강승현 일행을 저지하는 사이, 펜그릴은 복구한 위즈멜 인형을 가마에 굽고 있었다.
"너무 늦었군. 인형은 이미 완성됐다!"
"끈질긴 자식."
파악!
파바바박!
강승현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지만,
"두 번은 안 당한다. 지긋지긋한 이방인 놈아!"
펜그릴은 자신의 팔을 희생해 화살을 막았다.
팍, 파악!
날아오는 화살을 막느라 팔이 걸레짝이 되어갔지만, 펜그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형사에게 팔은 목숨보다 소중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하지만 위즈멜 님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지가 부러져도 상관없다!"
펜그릴은 정신 나간 것처럼 웃어대며 가마 입구를 열었다.
가마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퍼져 나왔다.
"위즈멜 님이 강림하신다!"
"글쎄? 과연 그럴까?"
하지만 강승현은 그런 펜그릴을 비웃으며 가마 안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은데?"
"...뭐?"
펜그릴은 황급히 가마 안을 들여다봤다.
분명 고온에 구워져서 완성되어야 할 위즈멜 인형이 아무 변화 없이 점토 상태 그대로였다.
"설마 내가 그냥 손 놓고 있는 줄 알았어?"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172. 공방 최하층 3
강승현이 꺼낸 건 연회색 액체가 담긴 포션병이었다.
"네, 네 녀석.... 위즈멜 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별로 대단한 건 안 했는데요."
툭, 툭.
강승현은 그걸 위로 던졌다 받거니 하면서 펜그릴을 도발했다.
그럴 때마다 병 속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 포션은...."
"어떻게든 굽는 걸 막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준비했죠."
"설마!"
펜그릴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이 자식.... 방열 포션을 사용했구나!"
"정답."
탁!
강승현이 쥐고 있는 건 방열 포션.
사용시 불 속성 저항력을 올려주는 포션이다.
"아무리 잘 만든 도자기도 굽지 못하면 쓸모가 없으니까."
"도대체 어느 틈에!"
"그야 당연히 아까 위즈멜 님의 머리를 날렸을 때죠."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화살 하나를 꺼냈다.
아까 발사한 화살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 방열 포션을 듬뿍 발라서 만든 특제 화살이다.
"내가 화살을 아무 생각 없이 날린 게 아니라서."
"이, 불경한 자식이...!"
강승현이 화살을 날린 이유는 단순하게 위즈멜 인형을 부수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인형을 부수는 척 방열 포션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댁이 골렘으로 시간 끌 것 같아서 나도 대비를 해둔 거죠."
덕분에 위즈멜 인형은 가마 속에 들어갔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구워지지 않았다.
특히 화살에 정통으로 맞은 머리 부분은 점토 상태 그대로였다.
"뭐, 슬슬 약빨 떨어질 때가 됐지만... 스승님은 방금 처부쉈으니, 이제 그쪽만 잡으면 되겠네요."
하비 골렘이 박살 난 이상, 펜그릴만 쓰러트리면 위즈멜 인형을 보호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감히... 위즈멜 님께 그따위 수작을!"
푸욱!
펜그릴은 팔에 박힌 화살을 거칠게 뽑아냈다.
당연히 핏물이 솟구쳤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절대 용서치 않겠다!"
펜그릴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그그그그!
그러자 곳곳에서 흙이 치솟더니 인형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또!"
"전투형 초급 점토용.... 저건 [인형 양산] 스킬이에요!"
인형 양산.
단순한 인형을 복잡한 기술 없이 빠르게 제작할 수 있는 인형사 직업 전용 스킬. 재료만 충분하다면 순식간에 대량생산할 수 있어서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스킬이다.
"꽤 귀찮은 스킬이긴 한데...."
파아악!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은빛 영광을 휘둘렀다. 은빛 영광의 날 끝에 닿은 흙 인형이 무참하게 박살 났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형은 수천 개를 가져와도 금방 박살 낼 수 있거든요."
원래 은빛 영광 자체가 흙과 바위를 파괴하는 데 특화된 무기이긴 하나, 이 점토 인형들은 굽지 않아서 내구력이 낮고.
"아무리 뛰어난 인형사라 해도 손이 망가지면 제 실력 발휘는 힘들 테니까!"
지금 펜그릴은 팔에 심한 부상을 입은 탓에, 제작한 인형의 품질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그그그그!
"네놈의 피와 살을 의식의 제물로 바쳐주마!"
펜그릴은 굴하지 않고 인형을 제작해냈으나,
"말이 많네."
파아악!
팍!
강승현은 덤벼오는 점토 인형을 가볍게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툭, 투둑.
물론 강승현도 직전의 싸움으로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라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강 선생은 하비... 에고 골렘도 쳐부쉈는데 이딴 걸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퍼억!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맘껏 부숴!"
"드디어 탱커 일하시네."
후두둑!
점토 인형이 덤벼들 때마다 뒤에 있던 김호정이 몸을 날려 공격을 가로막았고.
"이, 이렇게 형편없는 인형이라면 나도 조종할 수 있어...!"
파아웃!
뒤에 있던 레베카도 인형 조종술을 사용해 점토 인형의 발을 묶었다.
탓!
"후우우...."
상당히 힘겨워 보였지만, 지하실에서 인형 하나를 조종하겠다고 이틀이나 걸리던 시절에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동시에 지금 펜그릴이 제작하는 인형들이 엄청 질 떨어지는 폐품이라는 소리지.'
초짜 인형사도 털어버릴 정도로 허접한 인형.
멀쩡한 펜그릴이라면 절대 만들어내지 않을... 아니, 만들어낼 수 없는 인형이다.
'이 새끼, 뭔가 꾸미고 있나?'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다.
강승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
펜그릴은 알아들을 수 없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인형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뭘 하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고 펜그릴을 향해 달려들었다.
탓!
"그쪽 모가지를 날려버리면 문제없겠죠."
동시에 손에 쥔 금빛 영광의 각도를 맞추고.
'어깨와 다리 쪽에 부상을 입었으니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건 나한테 불리하고....'
급소를 찌르기 좋게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이럴 땐 한 방으로 끝내는 게 좋지!'
목표는 당연히 펜그릴의 목덜미였다.
"으그그그그...."
그건 펜그릴도 마찬가지였다.
저쪽도 양팔에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피하거나 물러나는 기색 없이 강승현과 대치했다.
후욱!
강승현이 금빛 영광을 휘두른 순간,
그그그그그!
녀석의 손끝에 마력이 감돌더니 흙가시가 솟구쳐 강승현의 목을 꿰뚫으려 했다.
"...."
"...."
금빛 영광과 흙가시.
둘 중 먼저 상대의 목을 찌르는 쪽이 승리할 상황.
샤아악!
속도 자체는 펜그릴의 흙가시가 빨랐다.
강승현은 어깨를 다친 상태였고, 펜그릴은 워낙 실력 있는 인형사라 땅 속성 스킬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으니까.
파각!
하지만 흙가시는 강승현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가시가 목에 닿은 순간,
[대지의 뼈]
뼛조각으로 변해 터져나갔기 때문이다.
"...!!"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펜그릴은 그제서야 [흙의 방패]를 발동했으나,
파가각!
마찬가지로 [흙의 방패] 곳곳에서 생물의 뼈가 치솟았다.
"제가 좋은 스킬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으, 으으으...."
펜그릴은 모르겠지만, [대지의 뼈]는 위즈멜의 힘을 빌려 발동하는 스킬이다.
그 결과 위즈멜을 그렇게 좋아하는 녀석이 위즈멜의 힘 때문에 패배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파가각!
푸욱!!
금빛 영광은 뼈 방패를 아주 가볍게 으스러트리고 펜그릴의 목을 찢어냈다.
"크아아아아아악!!!"
사방으로 새빨간 핏물이 터져나갔다.
그나마 방패가 막아준 덕분에 목이 통째로 썰려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커흑, 컥...."
"하다못해 팔이 멀쩡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말이지."
강승현은 피투성이가 된 금빛 영광을 내던졌다.
뒤에서 그걸 본 김호정은 울상을 지었지만, 강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목이 망가졌으니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겁니다."
"...."
"물론, 저는 치료해드릴 수도 있지만...."
강승현은 시선을 옮겨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는 굳게 결심한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네요."
"그륵, 그그그그...."
펜그릴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피를 토해냈다.
"위즈멜 신경 쓸 시간에 가족이나 신경 썼음 이 지경까진 안 갔을 텐데."
푹,
샤아아악!
[절개]
강승현은 은빛 영광으로 펜그릴의 목을 그어 숨통을 끊었다. 이미 다 죽어가던 상태였기 때문에 몸부림치는 일조차 없었다.
"갔네, 갔어."
옆으로 다가온 김호정이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레베카는 얼굴을 감싸고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아무리 몹쓸 놈이어도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었으니 마음이 아프겠지.... 안쓰럽구만."
"이런 쓰레기가 가족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죠."
강승현은 은빛 영광에 흐르는 핏물을 털어냈다.
"것보다... 이걸로 다 끝난 거겠지?"
"일단은요."
"휴, 다행이야. 별 탈 없이 끝나서."
김호정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뱉어냈다.
"저 자식 아까부터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거 같아서 무슨 사고를 치진 않을까 걱정했거든."
"정신이 나갔다고...?"
그 말을 듣던 강승현은 의문점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펜그릴은 멀쩡한 말 대신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나 괴성만 질러댈 뿐이었다.
'마치 이성을 잃기라도 한 듯....'
그 순간 강승현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펜그릴은 위즈멜의 힘을 빌려 영혼을 뽑아내는 능력을 가진 데다, 뽑아낸 영혼을 인형 속에 처박는 변태 같은 취미도 갖고 있다.
"이 자식, 설마!"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평소 실력과 비교해서 형편없는 인형을 찍어내거나,
묘하게 판단력이 떨어지는 듯한 태도까지.
덜컥, 덜컥, 덜컥!
그 직후, 뭔가가 거칠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눈치가 빠르군.... 이미 늦었지만!}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가마 입구에 기분 나쁜 분위기의 인형 하나가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건 또 뭐고?"
"펜그릴 그 미친놈이 일을 벌였어요."
펜그릴은 자신의 영혼을 뽑아내서 인형으로 몸을 갈아타고, 자기 몸을 미끼로 삼았다.
"뭐라고? 그럼 우리가 싸운 건 귀신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영혼만 남겨둔 거겠죠."
강승현은 바닥에 버려진 펜그릴 시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저걸로 모두의 시선을 끌고, 방열 포션의 효과가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위즈멜 인형을 다시 구운 것이다.
'어쩐지 멍청하게 군다 했더니.'
아무리 몸이 망가졌어도 펜그릴은 실력 있는 인형사다.
레베카한테 인형 주도권을 쉽게 빼앗겨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설마 몸을 버렸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성이 없으니 그런 미친 짓을 하지.'
결국, 이 몸은 영혼은 거의 빠져나가고 본능만 남아 움직이는 '인형' 같은 상태였다.
'진짜 몸은 인형처럼 만들고, 인형을 진짜 몸처럼 쓰다니.'
정상적인 인간이 할 법한 발상이 아니다.
자기 몸에 아무 미련이 없는 놈이나 할 법한 짓거리였으니까.
"미쳤어? 어떻게 자기 몸을 버려?"
{하, 하하하... 분명 말했을 텐데요.}
펜그릴이 깃든 인형은 기분 나쁘게 웃어대며.
{나는, 위즈멜 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굳게 닫혀 있던 가마 입구를 열었다.
{위즈멜 님이 강림하신다!}
펜그릴의 광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내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오며,
달각, 달각.
달각, 달각, 달각.
완성된 인형이.
만들어진 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173. 만들어진 신
가마 안에서 나타난 존재는 눈을 감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달각, 달각, 달각.
정확하게는,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인간이라고 착각할 만큼 사실적인 여인의 인형이었다.
"저, 저게 고대 트라코티의 수호신...."
"저 마네킹이 위즈멜이라 이거지?"
"흠...."
강승현은 모습을 드러낸 위즈멜 인형을 주시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고 긴 머리카락.
-가늘고 긴 손가락.
-거기에 몸 곳곳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까지.
기록물에서 본 위즈멜의 묘사를 그대로 재현한 듯했다.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와 그 제자가 만들어낸 인형이니.'
완성도만 따지면 위즈멜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위즈멜 님, 아아... 위즈멜 님!}
펜그릴이 위즈멜한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임시로 만든 인형이라 표정조차 드러낼 수 없는 육체였지만, 목소리가 무척 들뜬 걸 보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기쁜 듯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비록 수백 년의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다시 트라코티의 신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양쪽 모두 인형의 몸을 쓰고 있는 상태라 더욱 기묘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저 어리석은 자들이 보이십니까?}
펜그릴은 강승현 일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위즈멜 님을 믿지 않을 분더러,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죄인들입니다!}
"뭐가 어째? 사람 죽이는 나쁜 놈이!"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화를 내며 금빛 영광을 들었다. 펜그릴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떠들어댔다.
{그러니, 저들에게 천벌을!}
달각, 달각, 달각.
펜그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위즈멜이 세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처, 천벌이라니...."
"에이~ 그래 봤자 그냥 인형이잖아? 저런 게 신일 리가 없잖아!"
레베카는 그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쥐고 소리쳤다.
"시원하게 박살내버리자구!"
"김호정 씨."
"응?"
"마음의 준비부터 하세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뭐야, 왜 그러는... 응?"
까가각.
그 순간, 위즈멜이 손을 뻗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우우우웅.
그와 동시에 공기를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감각이 세 사람의 몸을 덮쳤다.
'시작됐군.'
쿠구웅!
"으, 으허억!"
"히이이이...."
"...."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든 압박감이었다.
레베카는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았고, 김호정은 금빛 영광에 의지한 채 겨우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냐구.... 몸이 엄청 무거워!"
"앞을 잘 보세요."
레베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경외감이 느껴진다.]
[정신력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경외감].
레어 몬스터의 [위압감]과 마찬가지로 신적 존재들이 가진 특수 스킬이다.
"이, 이게 뭐야?"
"[경외감], 격이 낮은 존재들이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 정신력을 깎아내리는 능력입니다."
"정신력을 깎아?"
[경외감]을 버티기 위해선 높은 정신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보통은 신과 싸우기기는커녕 대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숨이 턱턱 막히는 건가? 선생은 괜찮아?"
"안 괜찮죠, 당연히."
"저쪽에 비하면 완전 괜찮아 보이거든?"
김호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레베카를 가리켰다.
레베카는 그냥 넋을 놓고 있는 듯했다.
"히이이이...."
그나마 차원 이동자들은 상태창의 영향인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지만, 아즐 대륙의 평범한 모험가는 버티기 힘들 것이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정신력을 떨구다니, 뭐 이런 사기 스킬이 다 있어.... 선생은 그런 걸 잘도 알고 있네."
김호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차원이동자라고 해도 김호정 역시 평균보다 정신력이 꽤 낮은 편에 속하니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저야 뭐... 전에 하던 일 때문에 교단 애들하고 종종 마주치다가 알게 됐죠."
"저 녀석, 그냥 인형일 줄 알았는데 진짜 신이었냐고."
"육체는 인형이지만, 그 안에 깃든 힘은 진짜니까요."
-위즈멜의 흩어진 신성력.
-위즈멜이 남긴 의지.
-위즈멜을 믿는 자들의 신앙심.
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합쳐진 결과, '신' 위즈멜이 부활했다.
"그래도 어쨌든 인형이잖아? 어떻게든 부숴버리면...."
{멍청한 자식,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거지?}
"뭬야?"
펜그릴이 김호정을 비웃으며 말했다.
{눈앞의 위즈멜 님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인형을 그릇으로 쓰는, 트라코티의 수호신인 것이다!}
사실 생물의 살점을 그릇으로 삼아 강림시킬 수도 있었지만, 굳이 흙인형을 사용한 이유는 위즈멜의 본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믿지 않겠다면, 몸으로 체감하시지!}
파아아아아!
펜그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즈멜이 손끝에서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저건 또 뭐야!"
콰과가가각!
섬광에 닿은 벽과 바닥은 무참하게 으스러졌다.
"레이저포?"
"정확하게는 신성력이 깃든 파동일 겁니다."
탓!
강승현은 넋 놓은 레베카의 팔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파아아아!
위즈멜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긴 했지만, 완전히 피하진 못해서 섬광 끝이 강승현의 팔을 스쳤다.
파스스!
그 순간, 섬광에 스친 부위가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겉 피부만 당했기에 망정이지, 깊게 당했다면 팔 전체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힘이 약해졌어도 신은 신이라는 건가...."
"선생 팔! 팔!"
"피부만 스쳤을 뿐이에요."
이 정도는 허상의 살점으로 복구할 수 있다.
강승현은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아두었다.
'하지만 제대로 맞았다가는 답이 없겠는데.'
스친 걸로 이 정도 위력을 낸다면, 정면으로 당했을 땐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김호정이 치를 떨며 중얼거렸다.
"[경외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빡센데, 이건 또 무슨 개사기 스킬이야...."
"그나마 약해진 상태일걸요."
눈앞의 인형이 위즈멜의 힘을 담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부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신도들 수도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게 약해진 상태라고?"
"보유한 신도는 트라코티 주민의 절반, 그나마도 제정신이 아니라 약물로 인한 중독 상태니...."
신도들의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고, 트라코티 주민들의 혼을 엮어 만든 데다, 생물체가 아닌 도자기 인형을 육체로 사용하는 중이니 본 실력을 발휘하긴 힘들 것이다.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많이 너프된 상태죠."
오히려 힘을 무리하게 사용했다간 육체로 쓰는 인형이 박살 날지도 모른다.
"신의 힘을 가졌지만 몸뚱아리는 평범.... 그럼 승산이 있는 거 아냐?"
"물론 약해져도 신은 신이라, 평범한 인간 정도는 쉽게 압살해요."
김호정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선생의 분해 스킬로 저 인형을 흙더미로 되돌려버리자! 그러면 트라코티 사람들의 영혼도 수거할 수 있지 않을까?"
"분해 스킬이라...."
이론상, [분해★]를 발동하면 위즈멜 인형을 재료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구워지기 전의 흙, 각종 염료, 재료로 넣은 영혼까지 전부 되돌릴 수 있기는 하다.
'어디까지나 이론상 말이지.'
[분해★]는 간단한 아이템은 쉽게 분해할 수 있지만, 분해하려는 아이템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스태미나 소모량이 증가한다.
"기억 안 나세요? 저번에 탈출용 포탈 하나를 분해할 때도 어마어마한 스태미나가 소모됐습니다."
"어, 맞다. 그때 선생, 스태미나 고갈까지 걸렸지."
"보스 몬스터의 아이템만 해도 그 정도인데... 신의 힘이 담긴 인형을 분해하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요."
더군다나 강승현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다.
이런 몸으로 고위 아이템을 분해하려 했다간, 몸에 엄청난 부담이 갈 것이다.
"재수 없으면 한동안 누워 있거나, 그대로 죽을지도 모르죠."
"스태미나 포션을 더 가져와야 했을까."
"뭣보다 문제는...."
파아아아ㅡ!
"으아아아! 또 온다!"
"가까이 갈 수가 있어야 말이죠."
위즈멜이 계속해서 섬광 파동을 날려대는 탓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인형을 분해하겠다고 다가갔다간, 파동에 맞고 온몸이 가루가 되어 소멸할 것이다.
"일단 튀어!"
세 사람은 섬광 파동을 피해 도망쳤다.
"저 녀석, 분명 좋은 신이라고 하지 않았어? 싹싹 빌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원래는 그렇겠지만."
강승현은 위즈멜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닐걸요."
분명 신적 존재이긴 하나, 그 몸은 인형사가만들어낸 인형이다.
덧붙여, 인형사는 자기가 만든 인형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
'즉, 펜그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신이라는 뜻이지.'
인간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신.
수백 년 만에 부활한 신에겐 너무 가혹한 결말이다.
'물론 펜그릴은 자신이 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겠지.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위즈멜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강승현은 펜그릴을 바라보았다.
진짜 몸은 쓰레기처럼 버려뒀으면서도 아주 태연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위즈멜 님의 신도가 되겠다고 하면 목숨 정도는 살려 주지.}
"진짜?"
{슬슬 트라코티를 지켜줄 가드용 에고 골렘 재료를 준비해야 하니까.}
"그게 살려주는 거냐고! 골렘으로 만들어서 부려먹겠다는 소리 아녀!"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따졌으나,
파아아아!
뒤에서 날아오는 섬광 파동 때문에 입을 강제로 다물어야 했다.
"젠장, 정말 이길 방법이 없는 거야?"
"김호정 씨는 몰아치는 태풍이나 쓰나미랑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걸 어떻게 이겨? 피해야지!"
"신적 존재도 그래요. 싸우는 것보단 피하는 게 젤 편하죠."
사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도망치는 게 제일 쉬운 방법이라 그렇지.
"그치만 우리가 도망치면, 트라코티는 누가 구하지...."
"그건 그렇죠."
"역시 '그거'... 써야 하나."
이대로 도망친다면 두 사람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3년이나 생존한 베테랑 차원이동자였으니까.
하지만 인형 제작에 희생된 사람들을 구할 수 없고, 신을 조종하는 펜그릴이 무슨 짓을 벌여도 막을 수 없게 된다.
'트라코티뿐만 아니라 피츠타 호수 일대, 어쩌면 아즐 대륙 서부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겠지.'
신의 힘을 얻은 인간은 하나같이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니까.
펜그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뭐, 도망치는 건 내 취향이 아니기도 하고, 이대로 물러가면 재미가 없지.'
애초에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강승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내는 인물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주도권을 뺏어온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때였다.
:아이야, 도움을 주고 싶구나.:
강승현의 머릿속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매우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왼손의 힘을 사용하렴.:
동시에 강승현의 왼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174. 절연
'왼손의 힘을 쓰라고?'
강승현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위즈멜을 상징하는 문양이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위즈멜의 왼손]을 말하는 거군.'
즉, 목소리의 주인은 위즈멜이었다.
인형 안에 잠들어 있을 존재가 무슨 수로 말을 걸어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의도는 모르겠다만, 저쪽에서 먼저 힘을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강승현은 [위즈멜의 왼손]을 다시 한번 발동했다.
파아앗!
평소엔 [위즈멜의 왼손]을 두 번 발동하면 손에 깃든 힘이 소멸하면서 문양이 사라졌지만,
화르르르륵!
[※스킬(위즈멜의 신념★) 획득]
이번엔 지금까지와 달랐다.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스킬창에 새로운 스킬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이건... 위즈멜의 신념?'
강승현은 곧장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위즈멜의 신념★]
[...........]
[...........]
하지만 다른 스킬과 달리 아무런 설명도 정보도 적혀있지 않은데다,
'평범한 스킬이 아닐 거라곤 예상했지만.'
일반 스킬이 아니라, 검은 별 마크가 붙은 특별 스킬이었다.
'심지어 [★] 스킬이었을 줄이야....'
이걸로 관리자와 약속한 4개의 [★] 스킬을 획득한 셈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확인해보고 싶지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일단은 눈앞의 난장판 해결이 급선무니까!'
파아아앗!
그러자 눈 부신 빛과 함께 공기를 짓누르던 답답한 감각이 사라지면서
[위즈멜의 가호가 당신의 몸을 감쌌다.]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경외감을 무시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렇지, 신의 힘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경외감]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존재에게만 통하는 스킬이다.
그러니 위즈멜 인형은 위즈멜의 힘을 받은 강승현을 압박할 수 없었다.
'좋아, 일단 정신력 문제는 해결했고.'
하지만 위즈멜의 가호를 받는 건 강승현뿐이라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의 정신력은 빠른 속도로 깎이고 있었다.
'김호정 씨야 뭐, 옆에 있어도 괜찮겠지만... 레베카는 힘들겠지.'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소리쳤다.
"김호정 씨, 레베카 씨를 부탁할게요. 안전한 곳으로 피하세요."
"선생은?"
"저 자식을 막아야죠."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꺼내며 대답했다.
{도망치게 둘 것 같나? 천벌이다!}
그걸 본 펜그릴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고.
달각, 달각.
파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위즈멜 인형이 섬광 파동을 발사했다.
"오, 온다! 레이저포!"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어쩌게?"
"몸으로 막아야죠 뭐."
탓!
강승현은 날아오는 섬광 파동을 몸으로 막았다. 본래였다면 온몸이 잘게 부스러지며 소멸했겠지만,
파즈즈즈.
[위즈멜의 가호가 당신의 몸을 감쌌다.]
[받는 대미지가 크게 반감됐다.]
아까와는 달리 강승현의 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장난 아닌데? 과연 신이 직접 빌려준 스킬은 다르네.'
분명 생물을 부스러트리는 힘을 가진 섬광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승현의 몸엔 약간의 생채기만 남은 상태였다.
"이제 좀 해볼 만하겠어."
"하, 하여간 강 선생.... 그런 능력 있으면 진작 말하라구!"
뛰쳐나가려던 김호정은 멀쩡한 강승현을 보고 안심한 듯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헤헤, 원래 이런 몸빵은 내가 해야 하는데."
"동료를 지키는 것도 탱커의 의무잖아요. 레베카 씨를 부탁할게요."
"좋아! 레베카는 나한테 맡겨!"
"부탁할게요."
김호정이 넋 나간 레베카를 챙겨가는 걸 확인한 뒤, 강승현은 펜그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 신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고서 멀쩡하다고?}
펜그릴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다고!}
섬광 파동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을 놈이 두 발로 멀쩡하게 버티고 서 있었으니까.
"아, 이거 간지럽지도 않은데."
{뭐가 어째?}
"혹시 위즈멜 님이 당신의 불순한 신앙심 때문에 약해지신 거 아닐까요?"
강승현은 아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자신이 위즈멜한테 힘을 뜯어냈다는 건 쏙 빼놓고 말이다.
"도대체 어떤 신이 자신을 '꼭두각시'로 부리는 신도를 좋아하겠어요. 내가 위즈멜 님이면 댁 같은 엉터리 사제는 분명 죽이고 싶어 할걸요."
{이, 이 역겨운 자식이 감히, 감히....}
진실을 알 리 없는 펜그릴은 마구 발광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내 믿음을 폄훼하다니!!!}
파아아아!!
파아아!
그에 맞춰 위즈멜도 섬광 파동을 마구 쏘아댔으나.
파즛.
파즈즈!
[위즈멜의 가호가 당신의 몸을 감쌌다.]
[받는 대미지가 크게 반감됐다.]
하지만 이젠 무의미한 공격이다.
강승현은 위즈멜의 가호를 방패삼고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갔다.
"믿음 같은 소리 하시네."
그리고 펜그릴을 무참하게 비웃으며,
파악!
위즈멜을 향해 은빛 영광을 휘둘렀다.
"그딴 건 믿음이 아니라 억지라고."
카앙!
비록 인형이기는 해도 신의 그릇인 만큼, 위즈멜의 전신은 강력한 보호막이 감싸고 있었다.
'일종의 결계인가? 평범한 인간은 접근조차 할 수 없겠지만....'
[위즈멜의 신념이 붉은 투지를 발산한다.]
'지금은 상관없지!'
강승현의 은빛 영광은 붉은빛을 뿜어내며 신의 보호막을 찢어버렸다.
까가가각!
파각!
보호막 역시 위즈멜의 힘인 만큼, 같은 힘을 쓰는 강승현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
"이제 좀 공평하네요."
보호막을 찢어낸 강승현은 그대로 멈추는 일 없이 위즈멜을 내려쳤다.
샤아아!
캉!
그러자 위즈멜은 재빨리 검 한 자루를 소환해 강승현의 공격을 받아냈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역시 호락호락 당하진 않네. 조금만 빨랐어도 내가 이겼는데. 신은 신이라는 건가.'
강승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놀라는 일 없이 검을 휘둘렀다.
{빌어먹을, 무슨 힐러가....}
"힐러는 힐러인데, 야매 힐러라서요."
캉!
캉!
양쪽의 무기가 맞부딪치며 시끄러운 금속음이 퍼져나갔다.
"괴, 굉장하다. 강 선생! 신하고 싸우면서도 하나도 안 밀리네!"
"아와와와와...."
멀리 피신한 김호정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감탄했다.
캉!
카각!
서로 같은 힘을 사용하는 만큼 둘 다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저쪽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까가가각!
칵!
둘의 싸움은 끝이 없을 것 같았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승현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위즈멜의 검이 조금씩 밀려났기 때문이다.
'같은 힘으로 맞붙을 때 싸움의 승패는 역량이 결정하니까!'
강승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밀어붙였다.
캉!
"...."
그는 직업 특성상 야매 힐러로 사느라 전투에 익숙한 편이다.
덕분에 지금까지 다뤄본 적 없는 신의 힘을 얻었어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지만,
끼기기긱!
위즈멜은 그러지 못했다.
지금 위즈멜의 몸을 조종하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인형사 펜그릴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힘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니."
{위, 위즈멜 님!}
"이래서 신이라고 할 수 있나?"
펜그릴도 결코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다.
현역 모험가를, 그것도 최상급 차원이동자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도 명령을 내리는 놈이 후달리면...."
텅!
"제 실력을 못 내는 법이거든."
마침내.
강승현의 은빛 영광이 위즈멜의 검을 날려버리면서, 마지막 일격을 날릴 틈이 생겼다.
{위즈멜 님!!!!!}
펜그릴의 절규가 귓가에 들려왔다.
정작 인간의 몸을 쓸 때는 볼 수 없던, 인간적인 면모다.
털썩!
검이 튕겨나간 충격으로 위즈멜이 주저앉았다.
강승현은 위즈멜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은빛 영광을 내려치면 이 인형을 개박살 낼 수 있겠지.'
전신을 감싸던 보호막도 소멸했고, 공격을 받아쳐낼 무기도 없으니 막타를 날리기 딱 좋은 순간이다.
'문제는....'
하지만 강승현은 바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의 인형은 '신' 위즈멜이면서 동시에 트라코티 주민 절반의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인형을 박살 내도 괜찮은질 모르겠단 말이지.'
강승현은 힐러인 만큼, 생물에 대해선 빠삭하게 꿰고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면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지, 어느 부위를 치면 즉사를 피해 살릴 수 있는지 등등.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혼을 섞어 만든 흙 인형.
검으로 박살 낸 뒤에도 혼을 살릴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분해하고 싶지만,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
[위즈멜의 신념★]으로 인해 엄청난 힘을 손에 넣긴 했지만, [분해★] 스킬의 페널티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에너지를 잔뜩 소모한 상태에서 기습당하기라도 했다간 끝장이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펜그릴 저 자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슨 선택을 골라야 정답일 것인가.
강승현이 잠시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다른 세계의 영혼을 지닌 온 아이야:
또다시 위즈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와의 인연을, 연결을 끊어주렴:
:그렇게 하면 나를 깨울 수 있단다:
'...연결을 끊으라고?'
강승현은 눈앞의 위즈멜 인형을 바라보았다.
지금 위즈멜은 펜그릴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상태다.
'조종을 해제하라는 건가? 하지만 뭐가 보여야 끊을... 아!'
인형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위즈멜의 신념이 붉은 인연을 밝혀냈다.]
이런 메시지와 함께, 위즈멜의 몸에 휘감긴 붉은색 실이 드러났다.
'이건....'
이 실의 정체는 펜그릴이 위즈멜을 조종할 때 사용하는 인형술이다.
:인형사와 인형을 이어주는 연이란다:
정확하게는 [위즈멜의 신념★]과 [관찰의 눈]의 힘이 합쳐져서 구현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실을 끊어버리면 펜그릴은 위즈멜을 조종할 수 없게 된다.
'그럼 고민할 것도 없지.'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펜그릴 씨, 위즈멜 님이 한마디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뭐, 뭘 하려는 거냐!}
불안함을 느낀 펜그릴이 황급히 달려왔으나,
"너 같은 녀석하곤... 절연이라고!"
샤아악!
은빛 영광이 붉은 실을 베는 속도가 더 빨랐다.
175. 원망할 수는
파스스스!
몸을 휘감고 있던 붉은 실이 전부 끊어짐과 동시에, 위즈멜은 속박에서 풀려나 인격과 자유를 되찾았다.
비유하자면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것 같은 광경이었다.
{아, 아....}
펜그릴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주저앉았다.
그는 천재 인형사인 만큼, 한번 끊어진 인연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 직후, 지금까지 눈을 감고 있던 위즈멜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머리색과 똑같이 아름다운 붉은색이었다.
달각, 달각.
눈을 뜬 위즈멜은 자신의 양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구나. 덕분에 깨어날 수 있었어.}
"별말씀을."
강승현은 가볍게 웃으며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위즈멜의 목소리는 머릿속으로 전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 부드럽고 따뜻한,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아이야, 다친 곳은 괜찮니?}
강승현에게 가까이 다가온 위즈멜이 강승현의 팔을 살폈다.
아무래도 [위즈멜의 신념★]을 획득하기 전에 입은 상처가 신경 쓰이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미안하구나, 널 좀 더 빨리 도와야 했는데....}
자의로 입힌 상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위즈멜은 무척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진짜 독특하시네.'
인간을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신적 존재는 매우 드물다.
신적 존재는 기본적으로 다른 생물에게 숭배받기 위해 자신의 신격을 떨어트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면 격이 떨어진다나 뭐라나.'
그런 면에서 위즈멜은 무척 특이한 신이었다.
자기 잘못이 있긴 해도 거리낌 없이 인간을 살피려 했으니까.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인가.'
강승현은 위즈멜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즈멜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상처를 치료해주고 싶은데....}
"전 알아서 치료할 수 있으니, 저기 있는 사람들이나 봐주세요."
강승현은 구석에 숨어 있는 김호정과 레베카를 가리켰다.
"어, 이제 괜찮은 거야?"
"아와와와와와...."
둘 다 골렘하고 싸우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고, 깨어난 위즈멜이 [경외감]을 해제했지만 워낙 타격이 컸기에 레베카는 아직도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제가 치료해도 딱히 상관없지만, 그편이 훨씬 빠를 테니까."
{정말 마음씨 고운 아이구나.}
위즈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자,
달각.
도자기로 이루어진 손끝에서 다홍빛 파동이 퍼져나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위즈멜의 성총이 몸을 휘감는다.]
[모든 부상이 사라졌다.]
[정신력이 전부 회복됐다.]
"오, 상처가 싹 나았네."
"으으.... 머리야."
그러자 몸의 상처는 물론, 깎여나간 정신력까지 모조리 회복됐다.
'손짓 한 번으로 모든 부상을 없애버리다니.'
평범한 인간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해낼 수 있는 일을 단 몇 초 만에 끝내버릴 수 있는 힘.
'역시 신은 신이군.'
강승현은 반쯤 빈정거리며 감탄했다.
위즈멜은 강승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따뜻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베카가 쭈뼛쭈뼛 다가와 입을 열었다.
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선조격 인물을 만나서 그런지 무척 긴장한 듯했다.
{아이야, 네가 무사해서 기쁘구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러자 위즈멜은 밝게 웃으며 레베카의 손을 잡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집을 떠난 이후로는 처음 받아보는 다정한 걱정이었다.
"위즈멜 님...."
레베카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위즈멜의 품에 안겼다. 비록 딱딱하고 차가운 도자기로 만들어진 몸이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나도 눈물나네.... 고생했지, 고생 많았지."
김호정도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훌쩍거렸다.
하지만 강승현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 뿐이었다.
"감동적인 재회도 좋지만, 이제 슬슬 저 친구를 어떻게 처리할지... 그걸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승현이 가리키는 곳엔 바닥에 펜그릴, 정확하게는 펜그릴의 혼이 깃든 인형이 주저앉아 있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자신과 위즈멜의 인연이 끊어진 게 무척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저쪽 가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하시죠."
"맞아. 애먼 사람, 아니 신을 부려먹은 천하의 개자식이라구!"
강승현과 김호정은 위즈멜이 펜그릴을 묵사발 낼 줄 알았으나,
{나는 괜찮단다.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저 아이 또한 사랑스러운 트라코티의 아이니까.}
"괜찮다고?"
{부모가 돼서 자식을 원망할 수는 없잖니.}
놀랍게도 그녀는 자신을 조종해서 부려먹기까지 한 펜그릴을 용서했다.
"원망할 수가 없어?"
강승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식, 너무 오랜만에 부활해서 돌아버렸나....'
역시 답은 둘 다 처리하는 것뿐인가.
강승현이 혀를 차며 무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위즈멜 님이 절 용서해주신다는 건....}
눈치 없는 펜그릴은 크게 기뻐하더니,
{그거지요?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위즈멜 님!}
위즈멜한테 다가가더니 세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저 세 사람은 당신의 부활을, 트라코티의 부흥과 미래를 방해했습니다! 어서 천벌을....}
{...아이야.}
하지만 위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널 사랑하기에 용서하지만, 그렇다고 너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각오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전부 위즈멜 님을 부활시키기 위해....}
{아이야, 안타까운 아이야.}
위즈멜은 무척 다정하지만, 동시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의 가장 큰 죄는 나를 되살려낸 거란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위즈멜 님! 설마 모르시는 겁니까?}
당황한 펜그릴이 횡설수설 떠들기 시작했다.
{당신은 카마르와 인형 공방의 수작으로 인해 억울하게 잊혀지셨습니다. 그 뒤 카마르는 위즈멜 님의 성유물까지 받아갔으면서 트라코티를 깔보고 낮잡아봤죠!}
{날 생각해줘서 정말 기쁘구나, 아이야.}
{저는 트라코티의 영광을 되찾고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당신을....}
{하지만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단다.}
자신의 부활을 방해한 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의 기록을 말살한 인형 공방과 카마르까지.
위즈멜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는다구요?}
{그렇단다.}
펜그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럽게 소리쳤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왜 그런 것들을....}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니까.}
인형 공방은 위즈멜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위즈멜은 애초에 그 누구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부모는 아이를 미워할 수 없는 법이거든.}
트라코티를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하, 하지만 카마르는....}
{카마르는 나의 아이는 아니지만, 트라코티를 도우려고 한 것뿐이잖니. 그런 아이들에게 화를 낼 순 없지.}
위즈멜의 말이 끝났지만, 펜그릴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위즈멜의 뜻을 완벽하게 따르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위즈멜의 의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망하지 않는다니, 원망하지 않는다니....}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뒤에 있던 강승현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 같은 인간도 용서했는데, 기껏해야 부활 의식 좀 방해한 우리를 원망할 리가 없잖아요."
{그, 그럼 난....}
"완전 뻘짓 하고 다닌 거죠."
애초에 위즈멜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부활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듯했다.
하지만 펜그릴은 위즈멜을 위한다는 이유로, 트라코티를 위한다는 이유로, 트라코티 주민들을 세뇌하고 인형 공방을 몰락시켰다.
{나는, 그저... 위즈멜 님을 위해....}
"아뇨, 그건 그냥 그쪽 망상이죠."
-위즈멜을 부활시키겠다.
-위즈멜 님을 위한 일이다.
펜그릴은 이 두 문장을 떠들고 다니며 자신이 벌이는 온갖 악행의 면죄부로 삼았다.
"붉은 숲의 온갖 생물을 잡아다 실험하고, 급기야 자신의 스승을 재료로 에고 골렘을 만들어냈고, 트라코티 주민들을 제물로 바쳐 위즈멜을 억지로 부활시키기까지."
펜그릴은 이 모든 짓을 '위즈멜의 뜻'이라며 정당화했지만, 정작 위즈멜은 어느 것 하나 원하지 않았다.
"당신은 신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멋대로 깽판 치고 다닌 악당일 뿐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펜그릴은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버틸 수 없었으니까.
"그쪽은 틈만 나면 인형 공방과 카마르를 원망했지만, 지금 위즈멜 님을 가장 마음 아프게 만든 건... 바로 당신이죠."
다정하고 마음씨 착한 위즈멜은 지금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아이들의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무척 슬프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내 존재 자체가 너무나 괴롭구나. 사랑하는 아이들이, 인격을 잃어버리고 나의 의지가 되었다는 게....}
{아아... 위즈멜 님, 위즈멜 님.... 제발 용서를!}
펜그릴은 그제서야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삐그덕거리는 인형 몸을 이끌고 무릎을 꿇어가며 애원했으나,
{아이야, 안타까운 아이야. 너는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어. 나는 널 용서하겠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겠지.}
위즈멜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아아아아!!!!}
펜그릴은 괴로운 듯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의 펜그릴에게 가장 괴로운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위즈멜에게 부정당하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솔직히 말해서, 당신 하나 죽인다고 개판이 된 트라코티가 정상이 되진 않겠지만."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들었다.
"최소한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파아아!
[절개]
[위즈멜의 신념이 붉은 투지를 발산한다.]
"막을 수 있겠지!"
강승현은 붉게 빛나는 은빛 영광으로 인형과 영혼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
일개 영혼 따위가 신의 힘이 담긴 일격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잠깐이나마 신을 조종한 인간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각오는 했지만, 마음이 아프구나.}
"...가족이니까요. 아무리 나쁜 놈이어도, 우리 가족이니까."
위즈멜은 씁쓸한 목소리로 얼굴을 감쌌다.
옆에 있던 레베카 역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두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멀리 가서 죽일 걸 그랬네요."
"괜찮아요. 각오했어요. 처음도 아니고...."
레베카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야 끝에 펜그릴의 빈 껍데기 시신이 들어왔다.
"마지막까지 몹쓸 오라버니구만. 하나뿐인 동생을 몇 번이나 울리는 거야."
"그 자식이 한 번이라도 동생을 생각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가진 않았겠죠."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다 끝난 건가?"
"아뇨, 아직 가장 중요한 게 남았죠."
강승현은 위즈멜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위즈멜 님,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176. 나의 의지 1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네. 이거저거 확인해야 할 게 많거든요."
강승현이 이 고생을 해가며 싸운 이유는 오직 하나.
위즈멜한테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다.
'뭐가 됐든 좋으니, 관리자나 차원 이동에 대한 정보를 뜯어내야 해.'
관리자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혹시 놈과 거래할 일이 생긴다면 이쪽도 이쪽 나름의 교섭용 카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하고 거래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지만, 지금 위즈멜은 나한테 빚을 졌으니까.'
인간이 신의 도움을 받을 때 대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신적 존재 역시 인간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강승현은 그 대가를 정보로 받아갈 생각이다.
{물론이지, 아이야. 네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위즈멜은 강승현을 잠시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말해주마. 너는 나와 트라코티를 구해낸 영웅이니까.}
"제가 묻고 싶은 건...."
이야기를 꺼내려던 강승현의 눈에 레베카가 들어왔다. 레베카는 김호정과 함께 펜그릴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김호정 씨는 몰라도, 평범한 아즐 대륙민이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바빠서 이쪽을 신경쓰진 않겠지만 혹시 모른다.
강승현은 두 사람을 슬쩍 흘겨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둘이서 따로 이야기할 수 있게 장소를 옮기죠."
{알았단다. 잠시만 기다리렴.}
딱!
스르르륵.
위즈멜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사람의 주위로 작은 보호막이 펼쳐졌다.
'보호막이라....'
탁, 타닥, 탁!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두드려 소리를 내더니,
[절개]
파악!
스킬을 사용해 결계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바깥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성능 하나는 확실해보인다.
'역시 신은 신이구만.'
이 결계는 단순히 방음 효과만 가진 게 아니라, 외부의 간섭을 완전히 차단하는 유사 아공간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니?}
"좋네요."
결계 내부를 둘러보던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대단한 걸 묻고 싶은 건 아닙니다. 위즈멜 님은 제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걸 알고 곘죠?"
아까 위즈멜은 강승현을 지칭할 때, '다른 세계'라는 말을 썼다.
그가 차원 이동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당신의 힘으로 저를 아즐 대륙 너머... 제 고향으로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차원을 넘어서려면 신적 존재의 힘이 필요하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 약해.}
차원 이동을 시전할 때, 넘어가려는 차원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많은 힘이 소모된다.
그래서 던전과 같은 아공간을 넘나드는 건 적은 힘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아예 다른 우주로 가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다.
{차원의 벽을 뚫는 것까진 할 수 있겠지만, 너를 무사히 고향으로 보내줄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구나.}
"그렇습니까."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불가능했다.
아무리 신적 존재라 해도 위즈멜처럼 허접한 신은 차원을 넘기 힘든 모양이다.
"그럼 다른 걸 묻죠. 강한 힘을 가진 다른 신에게 부탁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음.... 아마 힘들 것 같구나.}
차원 이동시 특정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그 차원의 좌표가 필요하다.
당연히 지구로 가기 위해선 지구의 좌표가 필요하고, 좌표를 찾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 기준으로는 짧지 않겠지. 최소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이 걸릴지도 모른단다.}
"수백 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단지 신적 존재 기준으로는 찰나의 순간일 뿐.
"그럼 돌아갈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니야. 너는 다른 차원에서 불려온 존재지? 너를 불러온 존재는 네 고향 땅의 좌표를 알고 있을 거란다.}
다른 차원의 존재를 데려오기 위해선 그 차원의 좌표를 알아야 한다.
즉, 차원 이동자를 지구로 보내줄 수 있는 존재는 지금으로선 그들을 직접 데려온 관리자밖에 없다.
'그래, 어쩐지 돌아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했어.'
차원 이동자들이 아즐 대륙에 버려진 지 벌써 3년이나 지났다. 분명 누군가는 신적 존재의 수하 노릇을 하면서 지구로 귀환할 방법을 물어봤을 것이다.
'둘 중 하나겠지. 아직까지 지구 좌표를 찾고 있거나, 지구를 찾기 귀찮아서 비슷한 다른 차원으로 날려버렸거나.'
이렇게 되면 지구로 돌아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이 납득간다.
'결국, 내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관리자 그 개자식한테 협력하는 수밖에 없나....'
솔직히 말하면, 강승현은 처음부터 지구로 돌아갈 생각보다는 관리자를 쳐부수는 게 목적이었다.
애초에 지구보다 아즐 대륙의 삶이 적성에 맞기도 하고, 성격상 자신을 멋대로 끌고 온 놈을 그냥 둘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약속한 게 있으니.'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아즐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아이템, 액정 화면에 금이 간 스마트폰이었다.
'지구로 돌아가야겠지.'
스마트폰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승현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위즈멜 님, 제가 어떻게든 고향 좌표를 알아내면 다른 신을 통해 돌아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좌표만 알고 있다면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란다.}
"그렇단 말이죠...."
좌표만 받아내면 굳이 관리자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좌표를 받을 때까지는 협력해야겠지만.'
강승현은 스마트폰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비록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어내서 기분이 좋아졌다.
{더 궁금한 건 없니?}
"음, 사실 이걸 가장 먼저 물어보려 했는데.... 어떻게 상태창에 간섭하신 거죠?"
강승현은 지난 3년 간, 온갖 존재들과 마주쳤지만 지금까지 상태창에 개입하긴 커녕,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애초에 상태창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위즈멜은 내 상태창을 이용해서 자신의 힘을, 스킬로 구현해서 보내줬지.'
심지어 같은 차원 이동자라도 다른 사람의 상태창은 볼 수 없는데 말이다.
{아, 그걸 상태창이라 부르는구나. 아마 나도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것에 손댈 수 없었을 거란다.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가 만들어 낸 시스템으로 보이거든.}
위즈멜 역시 상태창이 뭔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만 내가 간섭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해. 내가 그 '상태창'에 등록되어 있었으니까.}
강승현은 상태창에 위즈멜의 유품, [위즈멜의 왼손]을 등록했다.
즉, 위즈멜은 신적 존재면서 동시에 상태창 시스템의 일부였기 때문에 상태창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널 도울 수 있던 거란다.}
"신을 시스템의 일부로 만들다니."
생각해보면 꽤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신적 존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까.
"관리자 그 자식, 도대체 정체가 뭐야."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뭐가 됐든, 평범한 놈은 아닐 것이다.
"아, 다른 성유물을 넣었을 땐 등록되지 않았거든요."
강승현은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를 꺼냈다.
이것도 인벤토리에 몇 번이나 넣었다 뺐다 반복했지만 [키르카라슈텔의 룰렛]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혹시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상태창에 등록했을 때 룰렛이 나타난 아이템은 단둘, [프리아의 석궁]과 [위즈멜의 왼손] 뿐이다.
{왼손은 내가 소멸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아이템이지?}
잠시 생각하던 위즈멜이 입을 열었다.
{이 안에는 나의 의지가 깃들어있단다. 아까도 이 남겨진 의지를 이용해 너와 대화했지.}
"신의 의지?"
{이 석궁도 비슷해.}
위즈멜은 석궁과 보주를 유심히 살폈다.
{희미하지만 신적 존재의 의지가 잠들어있어. 하지만 이 보주는 신의 힘이 깃든 평범한 성유물이구나. 그래서가 아닐까?}
"그 말은...."
즉, 상태창에 넣었을 때 룰렛을 획득할 수 있는 아이템은 신의 의지, 마음이 깃든 성유물뿐이었다.
{정확하게는, 잊혀진 신의 의지구나. 신적 존재는 세상에서 소멸하기 직전 자신의 의지가 담긴 성유물을 남기니까.}
위즈멜이 그렇게 말한 순간,
팟!
[업적 달성 :□ㅎ□□의 유품]
[□ㅎ□□의 흔적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업적 달성 :□ㅎ□□의 유물]
[□ㅎ□□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눈앞에 업적 창이 떠오르더니,
[업적 달성 : 잊혀진 신의 유품]
[잊혀진 신의 흔적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업적 달성 : 잊혀진 신의 유물]
[잊혀진 신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그동안 가려져 있던 글자가 모조리 드러났다.
동시에 두 업적에 새로운 메시지가 추가되었다.
[신의 의지가 깃든 유품]
[신의 의지가 깃든 유물]
'가려진 글자가 잊혀진 신이라는 건 대충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잊혀진 신의 의지가 깃든 물건이었을 줄이야.'
이것으로 룰렛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관리자는 아이템 속에 깃든 신의 의지를 모으고 있던 것이었다.
{네가 룰렛을 사용할 때마다 나의 의지가 약해지는 걸 보면, 성유물에 깃든 의지를 흡수하는 게 아닐까 싶어.}
차원 이동자가 룰렛을 계속 사용하면 성유물에 깃든 의지는 점점 약해지고, 결국엔 완전히 소멸하는 모양이다.
"왜 그런 짓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위즈멜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다른 신의 의지를 모은다는 신적 존재는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그래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도움이 되어서 기쁘구나, 아이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관리자의 목적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녀석은 모험가들을 퍼트려 성유물 속 신의 의지를 수집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걸 하려면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보단 하청을 맡기는 게 편하지.'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애초에 의지를 모으는 이유가 뭐고, 뭐 때문에 토종 노예 아즐 대륙민을 놔두고 다른 차원에서 노예를 선출해오는 것인가.
'아무튼 수상쩍은 놈이야.'
강승현은 혀를 차며 관리자를 떠올렸다.
지금도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존재를 말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물어보면 되겠군요. 과거에 트라코티에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분명 그녀는 누군가에게 공격당했고, 트라코티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게 누군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위즈멜 님의 손목을 잘라버린 걸 보면 신적 존재일 것 같은데 말이죠."
{과거라....}
위즈멜이 고뇌하는 얼굴로 머리를 짚었다.
{미안하구나, 나도 그 부분은 기억이 흐릿해. 아마 불안정하게 부활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구나.}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건 확실히 기억나는구나. 나와 싸웠던 존재. 그자는 '나테카 르아'라는 이름을 가진 신격이었어.}
"나테카 르아?"
그 이름은 강승현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177. 나의 의지 2
'분명 들어본 적 있는 녀석이야.'
나테카 르아.
강승현의 기억에 의하면 아즐 대륙의 서적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언급된 신적 존재의 이름이다.
'그 말은 키르카라슈텔이나 위즈멜과 달리 잊혀지지 않은 신이라는 소리지.'
비록 아이베르처럼 유명한 신은 아니어도 사람들한테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녀석이 위즈멜 님을 뭐 때문에 습격했을까요?"
{그건 모르겠구나. 이름도 겨우 기억해냈을 뿐이라....}
위즈멜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싸울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키르카라슈텔도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한 신이었지.'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쪽도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겨우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도 위즈멜처럼 다른 신에게 공격받은 것 같던데.... 신들끼리 전쟁이라도 한 건가.'
아직 자료가 부족해서 추측일 뿐이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높다.
'관리자 녀석도 잊혀진 신 같으니... 뭔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신들이 잊혀지게 된 원인을 조사해보면 녀석의 진짜 목적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랑 별개로, 그 자식한테 한 방 먹여주긴 해야 하니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이자까지 붙여줘라.
강승현은 '야매 힐러 생존 철학 8번'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관리자한테 보복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러려면 나테카 르아라는 새끼를 만나봐야겠네.'
신들이 소멸하고 잊혀지게 된 까닭.
관리자가 잊혀진 신의 의지를 모으는 이유.
신적 존재가 다른 신적 존재를 공격한 원인.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나테카 르아가 뭐 때문에 위즈멜을 습격했는지, 그것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다.
생각을 전부 정리한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위즈멜 님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도움이 됐다니 기쁘구나.}
위즈멜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생명체와 거리가 먼 인형의 몸을 빌려 쓰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다정한 인물이었다.
{더 물어볼 건 없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손에 넣었다.
여기서 더 물어봐도 얻을 건 없고, 새로운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았단다.}
딱!
스르르르.
위즈멜이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주위에 펼쳐진 보호 결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 끝나셨어요?"
"둘이서 무슨 이야길 그렇게 한 거야?"
결계가 사라지자 밖에 있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승현이 보호막까지 펼쳐두고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무척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요.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안 알려주시는 거예요?"
"둘만의 비밀이라."
물론 강승현은 궁금해 죽으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보다, 시체 수습은 다 끝나셨나요?"
"아, 네.... 다 끝났어요."
레베카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흰 천에 덮어진 펜그릴의 시신이 곱게 눕혀 있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장례는 조용히 치를 거예요."
펜그릴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빌런이다.
본래라면 시체를 불태워도 모자라지만, 영혼이 갈기갈기 찢어져 소멸했으니 빈 껍데기 정도는 수습해주기로 했다고.
"무덤은 만들어 주겠지만 묘비에 이름은 적지 않을 거예요. 죄인의 이름은 남기지 않는 게 가문 전통이라."
"그렇군요."
역사에서 지워진 위즈멜에 집착하던 펜그릴은 오히려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이럴 때 딱 맞는 말이 있지. 그건 바로...."
"인과응보."
"아!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그건 그렇고...."
강승현은 억울해하는 김호정을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난장판이 따로 없군요."
조종당하던 위즈멜이 날뛰면서 벽과 바닥이 죄다 으스러진 상태다.
후두둑.
원래 공방 최하층에는 펜그릴뿐만 아니라 의식을 준비하던 스펜서 공방 인형사들이 있었지만, 섬광 파동에 휩쓸려 시체도 안 남기고 몰살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펜그릴 때문에 약 빨고 있어서 고통 없이 갔다는 점인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들이켰다.
{나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구나.}
위즈멜은 씁쓸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트라코티를 사랑하는 그녀로선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울 것이다.
"하비 녀석은 구해줄 수 없을 라나?"
김호정은 박살 난 하비 골렘을 바라보았다.
팔을 모조리 절단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지만, 동력 자체가 망가진 건 아니라서 내부에 담긴 영혼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영혼을 어찌어찌 꺼낼 수는 있겠지만... 영혼을 담을 그릇이 없어요."
하비의 육체는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영혼을 되돌리고 잘린 팔을 붙여도 살릴 수 없다.
"저는 힐러지, 사령술사가 아니라서요."
"허 참. 그럼 이대로 골렘으로 살게 하는 게 나을까나?"
"글쎄요. 이만한 골렘을 수리하려면 실력 있는 인형사가 필요할 텐데, 지금 트라코티 인형사는 싹 다 죽어버려서."
결국 죽는다는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비 어르신이 죽었다는 건... 역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는 거겠죠."
레베카가 우울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트라코티에 남은 건 약물에 찌든 위즈멜 교단 신도들과 직스, 강승현 일행 셋뿐.
"제 동료들도, 마센 언니도...."
인형 공방의 남은 인형사들과 모험가 조합 직원들, 그곳에 소속된 모험가들. 그 외의 모든 트라코티의 주민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영혼은 뽑혀서 제물로 바쳐지고 육체는 어딘가에 버려져서 방치된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끔찍한 최후로.
"발릭 부부랑 루디도 죽었겠지. 그 녀석들은 강 선생이 카마르를 구한 걸 알고 있었으니 위즈멜 교단을 무시했을 거 아냐...."
"다들 온갖 고생해서 트라코티로 돌아왔는데 말이죠."
"이럴 줄 알았으면 세 사람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김호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같이 동행한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았으니 마음이 무거운 듯했다.
"제가 실력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조금만 더 빨리 지하실에서 탈출했다면...."
레베카는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분명 모든 원인은 이번 사건을 주도한 펜그릴이지만, 레베카는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자기 자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야, 울지 마렴.}
위즈멜이 레베카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잖니. 그거면 충분하단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기렴.}
"위즈멜 님께 맡기라구요...?"
그 말이 끝나고 위즈멜은 공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더니 눈을 감고 말했다.
{잊어버린 거니?}
위즈멜이 짧게 주문을 외우자, 그녀의 몸 주위로 은은한 빛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나는 트라코티의 수호신이란다.}
파아아아!
그러자 먼지가 되어 사라진 인형사들의 육체가 다시 생성되더니,
화아아아-.
떠나간 영혼이 육체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고 있어요!"
"사자소생이군요."
사자소생,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
인간의 3대 금기 중 하나이자, 그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이뤄내지 못한 미지의 업적.
"오직 신만이 해낼 수 있는 기적이죠."
위즈멜은 소생의 파동을 발산해 이번 싸움에 휘말려 죽은 생명을 되살려냈다.
"그,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당장 깨어나진 않아도, 하나둘씩 부활하고 있겠죠."
"오, 저기 좀 봐!"
실제로 하비 골렘을 바라보자, 안에 처박혀 있던 하비의 영혼이 빠져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레베카는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위즈멜 님, 덕분에...."
위즈멜에게 다가가려던 레베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화아아아아-.
그녀의 몸에서, 정확하게는 인형 속에 깃들어 있던 수많은 영혼이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즈멜 님! 설마!"
"가, 강 선생.... 어떻게 된 거야?"
김호정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야 지금의 위즈멜 님은 트라코티 사람들의 영혼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죽은 사람들을 되살려냈으니, 영혼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겠죠."
"그럼 위즈멜은?"
"의지를 잃었으니 곧 소멸하실 겁니다."
"뭐라고?"
경악한 두 사람과 달리, 강승현은 이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누구보다 트라코티를 아끼는 인물인데, 지금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잖아요."
수백 년 전, 트라코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것처럼.
위즈멜은 이번에도 트라코티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위, 위즈멜 님.... 우리 이제 겨우 만났는데, 아직 대화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레베카는 위즈멜한테 다가가며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말리지는 못했다.
'죽은 트라코티 사람들을 되살리려면 위즈멜이 사라져야 하니까 말이지.'
위즈멜이 트라코티 사람들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이상, 그녀가 소멸하는 건 이미 정해진 결말이었다.
{울지 마렴 아이야, 나는 그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뿐이란다.}
위즈멜은 몸에 깃든 영혼을 떠나보내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레베카를 달랬다.
"그, 그럼 저희가 위즈멜 님을 계속 기억한다면... 다시 오실 수 있는 거죠? 그렇죠? 제가 오빠를 대신해서 제대로 된 교단을 만들게요! 그러니까...."
"힘들 겁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던 강승현은 고개를 저었다.
"신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긴 해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신성력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되거든요."
당장 키르카라슈텔만 해도 신성력이 모자라서 죽은 아일을 좀비 상태로 불완전하게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아마 위즈멜 님은, 자신의 모든 힘을 소모해서 트라코티 사람들을 부활시키는 중일 겁니다."
지금까진 트라코티를 지키기 위해 가진 힘을 전부 흩뿌려 숲과 동화했지만, 이번에는 그 힘을 트라코티 사람들의 생명과 맞바꿨다.
"그, 그렇다면...."
"의지에 이어서 힘, 신의 권능까지 소멸했으니, 이제 다시는 부활하실 수 없겠죠."
178. 무척 즐거웠단다
"다시는 부활할 수 없다구요...?"
"신성력이 없는 상태에서 권능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건 제 살을 깎아 먹는 행위니까요."
"이, 이럴 수가...."
지금은 헤어져야 하지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레베카는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뭐, 뭔가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요?"
"현재로선 방법이 없습니다. 뭐, 위즈멜 님이 지금이라도 사자소생을 관두면 모를까."
지금이라도 사자소생을 멈춘다면, 위즈멜은 몸에 남은 약간의 영혼과 힘으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겠지만요."
강승현은 위즈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덤덤하게 소생의 파동을 발산할 뿐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단다.}
"역시 관둘 생각이 없으시네."
{나 혼자 살겠다고 이 많은 아이들을 희생시킬 순 없잖니.}
위즈멜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이타적일 수 있으신 건지."
다른 존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망설임 없이 희생한다니.
강승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그런가요. 잘 모르겠네요."
{나는 내 아이들이 기뻐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더 바라는 게 없단다.}
위즈멜은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자기 자신이 소멸해서 사라지더라도, 자신의 뜻과 의지를 이은 아이들이 살아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렇지, 부모는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니까 말이야...."
김호정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게 말해서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위즈멜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아, 아직 트라코티에는 위즈멜 님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뭔가 방법을...."
하지만 레베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 위즈멜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야, 내 사랑하는 작은 아이야.}
위즈멜은 레베카를 달래주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렴. 다들 지금까지 내 도움 없어도 잘 지내왔잖니.}
"위즈멜 님...."
{그러니 앞으로도 잘 해낼 거란다. 너희는 다름 아닌 나의 아이들이니까.}
"알겠어요. "
레베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혀 있긴 했지만,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다.
{다른 세계의 영혼을 지닌 아이야,}
영혼이 거의 빠져나가기 직전, 위즈멜이 강승현을 불렀다.
{내가 소멸하면 네게 빌려준 힘도 쓸 수 없게 된단다.}
"알고 있습니다."
[위즈멜의 신념★]은 '신' 위즈멜의 힘 그 자체인 스킬이다. 당사자가 사라진다면 당연히 스킬 역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원래는 사도가 받아야 할 스킬이니까요. 모시던 신이 소멸하면 사라지겠죠."
물론 강승현은 위즈멜의 사도가 될 생각도, 녀석을 모실 생각도 없었기에 스킬이 사라져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기껏 얻은 검은 별 스킬을 날리는 게 아깝긴 하지만 말이야.'
살짝 아쉽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 스킬은 퀘스트를 깨면 얻을 수 있고, 퀘스트를 깨기 위해 포인트를 잔뜩 모아뒀으니까.
{역시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지만, [위즈멜의 왼손]도 쓸 수 없어.}
"아, 가만. 그럼 [대지의 뼈]도 못 쓰게 되는 건가요?"
강승현은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위즈멜의 왼손]은 [대지의 뼈]의 선행 스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단다. 내가 만들어낸 성유물에 깃든 힘도 전부 사라질 테니까.}
"카마르가 시끄러워지겠네요."
[위즈멜의 왼손]은 물론이고, 카마르가 보유하고 있을 [위즈멜의 자애] 역시 위즈멜이 소멸함과 동시에 평범한 아이템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부여한 위즈멜의 신념은 물론, 위즈멜의 룰렛에서 획득한 스킬은 전부 쓸 수 없게 되겠지.}
"그건 좀 아까운데...."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지의 뼈]는 내가 가진 스킬 중에 대체할 수 있는 게 없어.'
[위즈멜의 신념]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흙을 뼈로 바꾸는 스킬은 야매 힐러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었으니까.
'...사자소생 못 하게 막을까.'
강승현이 진지하게 깽판을 고려하던 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라져도 스킬을 계속 쓸 수 있도록 네 맞춤형으로 바꿔주는 게 맞겠지.}
"맞춤형?"
{상태창 전체에 간섭하는 건 힘들지만, 내 힘의 일부를 엮어서 손대는 건 가능하니까.}
위즈멜이 그렇게 말한 순간,
팟!
[위즈멜의 왼손]
[대지의 뼈]
[위즈멜의 신념★]
눈앞에 상태창이 멋대로 떠오르더니.
[■■■■■■■■■■■]
[■■■■■■■■■■■]
[■■■■■■■■■■■]
어김없이 검은 블록이 나타나 화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역시 이 블록은 상태창 시스템을 개조할 때 나타나는 것이군.'
팟!
이후 상태창이 멋대로 꺼졌다.
위즈멜의 말에 의하면 '설정을 변경할 땐 껐다가 켜야 안정적으로 반영된다.'라나 뭐라나.
{이제 됐단다. 상태창을 열어보렴.}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구석에 있던 [위즈멜의 룰렛]은 사라져 있었고, [위즈멜의 왼손]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호:루스의 손]'이라는 스킬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루스의 손]?"
{그건 '위즈멜의 왼손'을 대신하는 스킬이란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대지의 뼈]를 자유롭게 발동할 수 있지.}
"이름이 참 괴상하네요."
{내가 지은 게 아니란다.}
강승현은 [호:루스의 손]을 발동했다.
샤아아!
그러자 배후에서 반투명한 손이 나타났다.
정확하게는 유리로 만든 해골 뼈다귀다.
"이건...."
[적출] 스킬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스켈레톤과 똑같은 형태였다.
'내 눈에만 보이는 그거잖아.'
당연히 옆에 있던 레베카도 김호정도 [호:루스의 손]을 보지 못했고,
{네가 뭔가 불러냈다는 건 느껴지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심지어 위즈멜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이 녀석도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인가요?"
{그건 아니야. 이건 너, 네가 가진 힘이니까. 난 그걸 끌어와서 교체했을 뿐이란다.}
도통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만, 어찌됐건 결론은 [위즈멜의 왼손]을 대신할 만한 스킬로 바꿨다는 소리다.
'이 해골 이름이 호루스인가? 정확하게는 중간에 [:]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호루스라고 하면 '매'의 형상을 말하지만, 아즐 대륙에선 매가 아니라 해골 뼈다귀를 말하는 모양이다.
'뭐,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지.'
이걸로 [대지의 뼈]를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호:루스의 손]을 해제했다.
"감사합니다, 위즈멜 님. 정말 마음에 드네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어떻게든 쓸 수만 있으면 되거든요."
{하지만 '위즈멜의 신념'은 쓸 수 없단다. 그 힘은 내가 없으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니까.}
실제로 스킬창을 봤을 때 [위즈멜의 신념★]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네가 유용하게 쓸 만한 스킬을 넣어두었으니 편하게 사용하렴.}
그 자리에는 [영혼 간섭★]이라는 스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혼 간섭?"
이름만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데다, 심지어 [★] 마크가 붙은 스킬이었다.
{마음 같아선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이제 시간이 없구나. 자세한 건 설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거란다.}
"이제 정말 한계인가 보군요."
{그렇단다. 이게 마지막 대화가 될 거야.}
위즈멜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몸, 인형 속에 담긴 영혼은 대부분 빠져나가 제 자리를 찾아갔고, 힘은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다른 세계의 영혼을 지닌 아이야, 너와 만나서 무척 즐거웠단다.}
"저두요. 나름 재밌었어요."
{네 여정의 끝이 어떻게 될 진 알 수 없지만, 네가 만족하는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마.}
비록 잘못된 방식으로 만나게 됐지만, 만남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신적 존재와 싸울 수 있어서 즐거운 순간이었다.
"아쉽네. 댁은 내가 만난 신 중에 가장 좋은 녀석이었는데. 좀 더 오래 살아서 나쁜 신들 좀 쫓아주지."
김호정은 위즈멜과 헤어지는 게 무척 아쉬운 듯 했다. 이쪽도 신을 꽤 싫어하는 타입이었으니까.
{당신은...*&^&+^&&*#!<>!!#.}
위즈멜은 김호정을 가만히 보더니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신의 소통]으로 번역할 수 없는 말인 것 같다.
"선생, 위즈멜이 뭐라고 하는 거야?"
"글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설마 내 욕하는 건가?"
"...그건 아닐걸요."
내용을 이해할 순 없지만, 위즈멜 성격 상 나쁜 뜻은 아닐 것이다. 좀 안쓰러운 얼굴이긴 하지만.
"저 위즈멜 님, 이제 죽은 사람들은 전부 되살아난 건가요?"
{그렇단다. 방금 막, 이번 일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트라코티의 생명을 전부 되살려냈어.}
위즈멜은 안타깝다는 눈으로 펜그릴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제외하고....}
그는 모두가 되살아난 마을에서 유일하게 되살아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되살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잘 아시네요. 혹시 되살리셨으면 제가 다시 저승으로 보내줄 생각이었거든요."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빙글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걸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위즈멜 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레베카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위즈멜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트라코티 주민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트라코티를 지켜줄 수 없단다. 숲에 흩뿌린 힘은 전부 수거했고, 그렇게 수거한 힘으로 아이들을 되살렸으니.}
붉은 숲의 저주, 아니 트라코티를 지켜주던 위즈멜의 힘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너희만의 힘으로 숲과 마을을 지켜내야 해. 물론 쉽진 않을 거야.}
이제 외부인들이 헤매는 일은 없을 것이고, 몬스터 역시 트라코티 주민들을 마음껏 공격하고 마을로 침입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를 믿는단다. 다들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나의 아이들이니까....}
점점 위즈멜의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인형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안녕히 가세요, 위즈멜 님...."
{다른 아이들에게 안부 전해주렴. 사랑한다, 아이야.}
달그락.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위즈멜은 눈을 감고 가동을 정지했다.
신을 담고 있던 그릇이 평범한 인형으로 돌아갔다.
-"이제 완전히 끝났나 보구만."
"그러게요."
설마 이런 식으로 신의 최후를 보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김호정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관리자가 위즈멜의 반의 반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진작 지구로 돌아갔을 텐데."
"그랬으면 애초에 우릴 잡아 오지도 않았겠죠."
"결국, 고생은 엄청 했는데 이번엔 아무 성과 없었나? 트라코티는 구했지만 말이야."
"아뇨, 성과는 있었어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번째 [★] 스킬을 손에 넣었거든요."
179. 영혼 간섭
"뭐? 4번째 스킬을 얻었다고?"
"이래저래 운이 좋았죠."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김호정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스킬창 구석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영혼 간섭★]을 볼 수 있었다.
'영혼 간섭이라....'
이름만 봤을 땐 영혼을 다루는 스킬로 보인다.
보통 아즐 대륙에서 영혼을 다룬다는 건 사령 계열 스킬이라, 지금까지 획득한 스킬과 스타일이 다를 것 같다.
'[대지의 뼈]도 그렇고, 묘하게 사령술사들이나 가질 법한 스킬 들이군.'
이러다 야매 사령술사 일도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왠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어떤 스킬이야?"
"잠시만요."
강승현은 스킬창을 열고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영혼 간섭★]
[스킬 발동시 영체, 혼령과 같은 영혼에 물리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스킬은 다른 스킬과 연계해서 사용할 수 있다.]
"영혼에 접촉할 수 있는 스킬이네요."
"영혼에 손을 대?"
본래 생물의 영혼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론 건드릴 수도, 접촉할 수도 없다.
'하도 안 나와서 나하고는 연이 없는 스킬이려나 했는데.'
영혼에 간섭하기 위해선 사령술사나 사제처럼 특수한 스킬을 보유하거나, 영혼을 압도할 만큼 아주 강력한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걸 손에 넣게 될 줄이야.'
강승현은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만나 미소를 지었다.
영혼을 다루는 스킬이 힐러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사실 야매 힐러에겐 꼭 필요한 스킬이다.
"영혼에 손대는 게 치료에 도움돼?"
"아즐 대륙의 정신질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거든요."
첫째는 뇌에 이상이 생기는 정신질환.
대표적으로 물리적,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스트레스 등등으로 뇌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한마디로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타입이죠."
이 경우는 심리 상담이나 약물 치료, 수술과 같은 방식으로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별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두 번째 경우예요."
"두 번째?"
둘째는 영혼에 이상이 생기는 정신질환.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오거나, 큰 타격을 받아 금이 가거나, 부서지거나 하는 식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상담이나 약물 치료가 전혀 통하질 않거든.'
영혼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거라서, 그 문제점을 고치지 않으면 대상을 치료할 수 없다.
"영혼이 빠져나가서 없는 사람한테 약 먹인다고 상태가 좋아지겠어요?"
"하긴, 당장 트라코티 주민들도 위즈멜이 영혼을 돌려놔서 살아난 거니까."
예를 들어 흑마술사의 저주로 인한 정신질환은 영혼 자체를 침식하기 때문에 약이나 심리상담이 아니라 저주를 풀어내는 힘, 해주 스킬이 필요하다.
당연하지만 힐도 못 쓰는 힐러가 해주 스킬 같은 걸 갖고 있을 리 없으므로 지금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나.
"[영혼 간섭★]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부턴 영혼에 문제가 생긴 환자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빠져나간 영혼을 제자리에 돌려놓거나, 부서진 영혼을 수리하거나, 영혼에 들러붙은 저주를 떼어내는 등.
지금까진 시도할 수 없던 방식을 쓸 수 있게 됐다.
"위즈멜이 떠나면서 좋은 걸 남겨주고 간 셈이죠."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나다는 거지?"
"거기다 제가 얻은 영혼 간섭의 특징은... 다른 스킬과 조합해서 쓸 수 있다는 점."
[영혼 간섭★]
강승현은 [영혼 간섭★]을 발동했다.
[영혼에 간섭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이러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면서,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눈이 빛나는 스킬인 것 같다.
"오, 그럼 강 선생도 펜그릴처럼 남의 영혼을 막 뽑고 그럴 수 있는 거야?"
"이론상 가능은 하죠."
지금처럼 [영혼 간섭★]을 발동한 상태로 [절개]나 [적출]과 같은 스킬을 사용하면 영혼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하지만 몸 멀쩡하게 살아있는 생물의 영혼을 건드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치만 펜그릴은 인형 뽑기로 인형 뽑듯 잘만 뽑아대던데."
"그 자식은 신의 힘을, 위즈멜의 힘을 빌렸으니까 그렇죠. 보통은 힘들어요."
아즐 대륙의 생명체는 자신의 마력으로 급소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못 쓰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부상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지킬 만한 힘이 부족하거든요."
그러니 심한 부상으로 몸을 지킬만한 기력이 없거나, 멘탈이 박살 나서 정신력이 낮아졌다면 이러한 영혼 계열 스킬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즉,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면 누구한테나 쓸 수 있다는 소리죠."
"결론이 좀 이상한데?"
"물론 저는 사령술사가 아니라 힐러니까 치료용으로 쓸 거지만요."
다른 스킬과 마찬가지로 [영혼 간섭★] 역시 어마어마한 스태미나 소비를 자랑하기 때문에, 전투에 쓰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는 게 훨씬 쉽고 빠르잖아.'
이걸 굳이 써야 한다면 물리 공격이 잘 안 먹히는 유령한테 쓰거나, 아니면 마무리용으로 쓰는 게 나을 것이다.
"에이, 그럼 만능은 아니네. 나쁜 놈들 영혼 다 뽑고 다닐 줄."
"저는 영혼 치료에 도움 되는 스킬을 얻었다는 걸로 충분해요."
강승현은 힐러 일에 도움이 되냐 안 되냐로 스킬의 유용함을 판단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싸울 때 아무 쓸모가 없다 해도 힐러 일에 큰 도움이 된다면 그 스킬은 최고의 스킬이다.
"역시 선생은 타고난 힐러구나."
"뭐, 당장 쓸 일은 없겠지만요."
"쓸 일이 없어? 왜?"
아쉽게도 지금은 위즈멜이 트라코티의 모든 부상자를 싹 고쳐놓고 갔기 때문에 [영혼 간섭★]을 쓸 필요가 없다.
"그야 이거 써보겠다고 멀쩡한 사람 영혼을 뽑아볼 수도 없잖아요."
"아쉽네. 새 스킬 쓰는 거 보고 싶었는데."
"궁금하면 한번 테스트해볼까요?"
"어떻게?"
"김호정 씨 영혼 좀 빌려주세요. 이거 [분해★]도 먹힐 거 같은데...."
"차라리 보증을 서달라고 해!"
"농담이에요."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영혼 간섭★] 발동을 종료했다.
"아, 검은 별 스킬을 얻었다는 건... 마지막 퀘스트를 클리어한 거야?"
"그건 아니에요. 이건 위즈멜이 부여한 스킬이거든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상태창을 열었다.
'본래 검은 별 스킬을 얻기 위해선 관리자가 제시한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했지만, 이번 스킬은 위즈멜이 그냥 공짜로 준 거지.'
즉, 기존의 검은 별 퀘스트는 그대로 남아 있다.
4번째에 이어서 5번째 [★] 스킬을 획득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거 정말 운이 좋은걸. 포인트 하나 안 쓰고 검은 별 스킬을 손에 넣다니.... 위즈멜 님께 감사해야겠는데.'
퀘스트를에 필요한 포인트라면 이미 모아뒀다.
트라코티에 머무는 동안 힐러 업무를 독점해서 포인트를 갈퀴처럼 쓸어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곤 해도 살짝 모자라서... 마지막으로 부상당한 직스를 치료하고 나서야 겨우 필요 포인트를 채웠지만 말이지.'
지금 트라코티에 남은 환자는 한 명도 없다.
이제 포인트를 모을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남은 포인트가 12508포인트....'
마지막 퀘스트에 필요한 포인트는 12500포인트.
정말 아슬아슬하게 조건을 만족한 셈이다.
'그럼 어디 5번째 검은 별 스킬을 얻어보실까.'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Q] [12500포인트를 모아주세요.]
[보상] : [★][?]
[퀘스트 달성!]
"응?"
그러나 퀘스트는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분명 강승현은 완료 버튼을 누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누적 포인트 : 8포인트]
심지어 남은 포인트도 8포인트뿐.
힘들게 모아둔 12500포인트가 허공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뭐, 뭐야 이거? 내 포인트 어디 갔어?"
설마 관리자가 먹튀한 건가?
포인트와 함께 어이가 사라진 강승현은 정신없이 상태창을 확인했다.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될 아이야.]
상태창 구석에 작은 메시지 하나가 남겨져 있었다.
'호칭을 보아하니... 이거 설마.'
강승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네게 스킬을 보내주기 위해 내가 여기 있는 '퀘스트'를 대신 완료했단다.]
[강력한 스킬을 만들어 보내주기 위해선 아주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거든.]
[허락 없이 사용한 건 미안하지만, 너무 바빠서 네게 말할 틈이 없었구나.]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알 수 없는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잘 옮겨 두었단다.]
-[너를 무척 사랑하는 위즈멜 남김.]-
"이, 이 자식이!!!"
알고 보니 위즈멜은 공짜로 스킬을 준 게 아니었다. 관리자 퀘스트를 대신 클리어하고 받은 보상을 개조해서 강승현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즉, 강승현이 실질적으로 위즈멜한테 받은 보상은 딱히 없는 셈이다.
"위즈멜!!!!!"
강승현은 분노를 담아 위즈멜을 부르짖었으나,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난 신에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그래도 손해 본 건 없잖아! 너무 실망하진 마!"
"개고생하고 받은 월급이 내 통장에서 꺼내 주는 거라 생각하면 열받잖아요."
강승현은 띠꺼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다른 것도 딱히 안 참지만, 무보수로 일하는 건 정말 못 참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식 새끼들한테 뜯어낼까."
"트라코티? 다들 한 푼도 없을 거 같은데."
김호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을 유망주 인형사는 자폭했고, 카마르와 사이는 나빠졌고, 위즈멜은 떠났고."
죽은 사람은 없어도 마을 상태가 정상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힐러 하나 없이 고립된 마을이기도 했고.
"뭐, 외부인들은 이쯤에서 손 떼고, 여기서부턴 마을 내부인들이 알아서 해야죠."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마시며 레베카한테 다가갔다. 그녀는 오빠의 시체를 수습하고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레베카 씨, 슬슬 마을로 돌아가죠. 많이 지쳤을 텐데 일단 쉬고 나서...."
"어, 강승현 힐러님?"
레베카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네? 그야 아까 왔던 계단으로...."
강승현은 포션 병을 입에 문 채로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계단이 있어야 할 곳은 무너진 바위와 벽에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180. 남겨진 자들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