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남겨진 자들의 몫
터벅, 터벅, 터벅.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탈출로가 막혔어요."
강승현은 계단 가까이 다가갔다.
계단 부근이 으스러져서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아까 위즈멜이 난사한 섬광파동 때문이구나...."
"끝까지 사람 귀찮게 하네요."
강승현은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위즈멜을 막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지상으로 나갈 때까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때려부수는 수밖에!"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꺼내 벽을 내려치려 했다.
탁!
하지만 강승현은 금빛 영광을 붙잡고 김호정을 저지했다.
"그건 위험해요."
"응? 왜?"
"섬광파동이 이 주변을 싹 쓸었잖아요. 겉보기엔 멀쩡해보이지만, 여기서 약간의 충격만 가해져도 무너져 내릴걸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벽이나 천장도 섬광파동의 영향으로 곳곳이 부스러진 상태였다.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버티고 있는 것뿐.
"그치만 강 선생은 뭔가 건물이 무너져도 살아날 것 같다는 느낌이라서."
"그쪽이 할 말은 아니신듯."
"아무튼...부수면 안 된다는 거지? 우리 둘만 있다면 어찌어찌 될 것 같은데."
김호정은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지금 공방 최하층에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레베카, 스펜서 공방 인형사들까지 모여 있는 상태다.
"그리고 어찌어찌 벽과 바위를 부순다고 해도...."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며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
[강력한 공격에 휘말려 부서졌다.]
[위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보인다.]
바위 틈으로 안쪽을 살펴보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계단 역시 섬광파동의 영향으로 박살난 상태였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끊어졌기 때문에 지상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요."
"이, 이럴 줄 알았으면 위즈멜한테 문 좀 열어달라고 할걸...."
"필요할 때만 없네요. 망할 자식."
강승현은 혀를 차며 위즈멜 인형을 노려봤다.
화풀이로 박살 낼까 생각했지만, 레베카가 무척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 관뒀다.
"으, 으으...."
"아이고 머리야...."
"내가 왜 누워있지...?"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쓰러져 있던 인형사들이 하나둘 정신 차리기 시작했다.
다들 약물에 찌들어 있어서 죽기 직전의 기억은 없는 듯했다.
"저 멍청이들한테 지금 상황 설명 좀 해주세요."
"오케이!"
김호정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트라코티 사람들의 혼을 제물로 부활한 위즈멜과, 그런 위즈멜을 인형극 인형처럼 조종한 펜그릴.
최종적으로 강승현이 둘 다 쓸어버려서 위즈멜은 부활하자마자 소멸하고, 펜그릴은 자기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발악했지만 끝내 죽었다는 것까지.
조금 날조와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어찌 됐건 지금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위, 위즈멜 님을 쓰러트리다니...."
"...."
"트라코티 주민들을 제물로?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우리한테 약을 먹였다고?"
반응은 대체로 반반이었다.
펜그릴의 만행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덤덤하게 반응하는 인형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트라코티를 위하는 일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간 얼뜨기들이었다.
"당신들이 저지른 개짓거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한지 압니까?"
강승현은 띠꺼운 얼굴로 인형사들을 노려봤다.
소중하게 모은 포인트를 남에게 뺏겨서 매우 열 받은 상태였기에.
"뭐, 마음 같아선 댁들도 싹 다 펜그릴 공범으로 잡아 넣고 싶지만...."
강승현은 슬쩍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오빠의 죽음은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이번에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살려달라는 건가.'
레베카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죽어야 할 사람은 펜그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이상 위즈멜의 아이들이, 트라코티의 주민들이 죽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꼭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누군가가 살려주길 간청한다면 그냥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강승현은 들고 있던 무기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다들 저세상 다녀왔으니 한 번은 용서해드리죠."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형사들은 재빨리 엎드려 강승현의 비위를 맞췄다.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위즈멜 님을 쓰러트렸다는 건 엄청난 실력자라는 소리잖아!'
'까불면 나도 펜그릴처럼 되겠지....'
'여기선 납짝 엎드리자!'
강승현은 비굴하게 엎드린 인형사들을 내려다보며 계단을 가리켰다.
"대충 필요한 건 설명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금 우리가 내려온 계단은 펜그릴의 개지랄 때문에 저 꼴이라서 쓸 수가 없습니다."
"화, 확실히...."
"그렇다고 부수고 가자니, 지하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후둑, 후두둑.
강승현이 떠드는 동안에도 천장 곳곳에서 흙먼지 부스러기가 조금씩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래 있긴 힘들 것 같다.
"즉, 우리는 지하실에 갇힌 상황이고, 댁들이 빨리 나갈 방법을 꺼내지 않으면 다 같이 사이좋게 뒈질 판이다. 이 말이거든요?"
한마디로 '죽기 싫으면 당장 움직여라'라는 뜻이었다.
인형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 안쪽에 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서열이 높아보이는 녀석이 고개를 납짝 엎드린 채 말했다.
"문?"
"저쪽에 문이 있네."
녀석의 말대로 지하실 안쪽 구석을 살피자, 아주 오래된 나무 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어디로 통하는 문이죠?"
"그건 모르겠습니다. 펜그릴 님이 약속의 날, 위즈멜 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접근하지 말라고 하셔서...."
"모른다고? 이런 수상쩍은 문으로 가도 돼?"
"그래도 그 문을 통하면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딱 봐도 수상하잖아?"
김호정이 문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분명 스펜서 공방은 생긴 지 몇 달도 안 된 신식 건물이다. 하지만 이곳의 문은 아무리 봐도 수백 년은 된 듯한 오래된 문이었다.
"수상쩍긴 하지만 지금은 별 방법이 없어요."
인형사의 말대로 이 방에서 위층 계단을 제외하고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은 오직 하나, 이 오래된 나무 문뿐이다.
"펜그릴이 접근 못 하게 막았다는 걸 보면, 뭔가 있겠죠."
뿐만 아니라, 강승현의 기억이 맞다면 이 문은 분명 [위즈멜의 왼손]을 보관하던 상자와 똑같은 재질로 이루어진 나무였다.
"굳이 위즈멜 님이 부활할 때까지 막아둔 걸 보면 중요한 공간일 것 같아요."
"일단 열어보죠."
레베카 역시 강승현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남은 시간도 선택지도 없었기 때문에 강승현 일행은 나무 문을 열었다.
덜컥.
"잠겨 있어요!"
"당연히 잠겨 있겠지.... 그냥 부수자고!"
"기다려요."
강승현은 곧장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그러자 나무 문 위로 마법진이 떠오르는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결계 마법을 걸어놨군."
"오빠가 걸었을 거에요. 오빠는 마법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재능충이었으니까...."
실제로 문은 오래됐어도 마법 자체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저, 저희가 풀어보겠습니다!"
"펜그릴 님에 비하면 미숙하지만 저희도 마법을 배웠기에...."
"그럼 맡기겠습니다."
인형사 몇몇이 문을 열기 위해 접근한 순간이었다.
쿵!!
쿠르릉!
후두두두!
"무너진다!"
그와 동시에 천장을 떠받들고 있던 기둥 한쪽이 무너지면서 지하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한계인 모양이다.
"이, 이제 다 틀렸어!"
"천벌이다 천벌!"
"거, 거기! 문 열려면 멀었어?"
"죄송합니다, 아무리 빨라도 10분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그럼 10분만 버티면 된다는 소리네요."
쿠르르!
머리 위로 단단한 바위 파편이 떨어졌으나,
파삭!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휘둘러 가볍게 박살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하에서 문이 열릴 때까지 버텨야 한다니. 펜그릴 자식이 혼자 죽기 싫다고 발악하는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다.
살아 생전에도 이기지 못한 놈은 뒤져서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까.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보죠. 여기서 펜그릴이랑 사이좋게 지옥 가고 싶은 사람 없잖아요?"
"맞아! 버티기만 하면 되잖아!"
김호정이 삽으로 바닥을 파서 흙을 빠른 속도로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대지의 기둥]
눈앞에 생겨난 흙 기둥이 무너지는 천장을 지탱했다.
"그, 그렇구나!"
"저런 건 우리 주특기잖아!"
그걸 본 인형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벽이나 땅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사삭!
곳곳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토우 기둥이 솟아나 무너지는 천장을 막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게 한계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쿠르릉!
구르르르!
물론 흙 기둥을 세웠다고는 해도, 고작 수십 명이서 주저앉는 건물을 버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승현 일행은 고된 전투로 지친 상태였고, 인형사들은 방금 막 부활해서 마력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멀었어? 지금 마력 바닥났는데?"
"빨랑 좀 해! 죽겠다구!"
"여, 열었다!"
그 말과 함께, 낡고 오래된 나무 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 너머는 빛 한 점 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통로였지만, 일행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들어가!"
"서둘러! 빨리!"
"이, 일단 위즈멜 님부터!"
인형사들은 정신없이 문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텅 빈 위즈멜 인형이나, 펜그릴 시체는 놈들에게 맡겼다.
"강 선생도 어서! 먼저 들어가!"
"알았어요. 레베카 씨, 들어가죠."
마지막으로 강승현 일행이 문을 통과하자,
쿠르르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흙 기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공방 최하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휴, 아슬아슬했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김호정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깔려 죽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덧붙이면서.
"일단 목숨은 건진 것 같네요."
강승현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김호정 역시 로브를 탈탈 털면서 중얼거렸다.
"이 통로, 어디까지 이어진 걸까."
"글쎄요."
들어온 입구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이제부턴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계속 가도 괜찮을까?"
"위험한 곳이면 어쩌지?"
"차라리 여기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인형사들은 잔뜩 겁먹어서 움직일 마음이 없어보인다.
"아, 잠시만요!"
그때 레베카가 벽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벽에 뭔가 있어요!"
"좀 볼게요."
강승현은 [야간 투시 +10%] 옵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서도 물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건...."
벽에 새겨진 건 독특하지만 익숙한 기호.
위즈멜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방은, 위즈멜이 부활할 때까지 접근하지 말라고 막아둔 방이었지.'
반대로 말하면 위즈멜이 부활한 직후에는 접근해도 된다는 뜻이다.
"다들 움직이죠."
"움직이자고?"
"저쪽에 뭐가 있을지 알 것 같거든요."
강승현은 통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181. 앞으로의 일
"뭐가 있을지 알 거 같다고?"
"따라오기나 하세요."
강승현은 이렇게 말하며 통로 안쪽으로 향했다.
"이, 일단 따라가보죠."
"여기 계속 있기도 그렇고, 뭔 일 있으면... 강 선생이 해결해주겠지!"
일행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해서 강승현을 따라갔다.
타박, 타박.
얼마나 걸었을까, 쉬지 않고 한참을 걸어가던 강승현 일행은 길 끝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나오는 걸 발견했다.
"빛이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이 각종 점토 공예품, 야광석 램프, 오래된 나무 제단이 놓인 장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제단에는 여신상으로 추측되는 부서진 성상이 놓여있었다.
"여, 여기는...."
"혹시!"
"그래요. 신전입니다."
여신을 숭배하는 걸로 추측되는 장소.
즉, 이곳은 오래전에 트라코티 사람들이 위즈멜을 모시던 신전이다.
"깔려죽을 뻔한 우리를 위즈멜 님께서 구해주셨네요."
영 도움 안 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그럭저럭 밥값은 하고 간 셈이다.
"위, 위즈멜 신전!"
"아직까지 신전이 남아 있었다니...."
"정확하게는 위즈멜 신전의 흔적이겠죠."
인형 공방은 위즈멜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에서 신전과 교단 건물을 전부 없어버렸지만, 이런 식으로 깊숙한 곳에 있던 지하 신전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고보니 스펜서 공방이 세워진 땅은 과거 위즈멜 교단 건물 자리였지!"
"펜그릴은 공방을 건설하다 이 신전의 존재를 알게 됐을 겁니다."
신전을 발견한 건 몇 달 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형 공방을 완전히 몰락시키기 전엔 위즈멜 교단을 앞으로 내세울 수 없었고, 당연히 신전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마 펜그릴은 위즈멜이 완전히 부활한 뒤, 이곳을 지상으로 옮겨와 신 위즈멜 신전을 건설할 생각이었겠죠."
하지만 그 거창한 꿈은 박살났다.
강승현이 무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여기가 위즈멜 신전의 일부라면 밖으로 빠지는 길이 있을 겁니다."
본래 위즈멜 신전은 붉은 숲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지하 신전은 트라코티와 붉은 숲, 두 장소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 같으니, 붉은 숲 쪽 출입구도 있을 것이다.
"사, 살았다.... 막다른 곳이 아니구나."
"여기서 지상까지 땅굴 파야 하는 줄."
김호정이 안도한 얼굴로 금빛 영광을 넣었다.
이 아저씨는 진심으로 굴을 파서 탈출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여기가 위즈멜 님의 신전...."
레베카는 눈물을 닦으며 위즈멜 인형을 신전에 조심스럽게 안치했다.
"거기에 두시려구요?"
"트라코티에 두는 게 아니라?"
"마을에 제대로 된 공간을 짓기 전까진, 여기에 둬야 할 것 같아서요."
레베카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지만, 한때는 위즈멜이 몸담았던 그릇인 만큼 이곳에 놓아두는 게 맞다면서.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대로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감사합니다, 위즈멜 님."
인형사들이 신전에 안치된 위즈멜 인형을 향해 감사를 담아 기도했다.
하지만 진짜 위즈멜은 소멸한 지 오래였으니 아무 의미 없는 행위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위즈멜 님....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인형사들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이런 훌륭한 신을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
'한심한 놈들이군.'
다 끝난 뒤에야 후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강승현은 그 광경을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선생, 뭐라도 좀 먹을까?"
"네?"
그러거나 말거나.
김호정은 태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펜그릴 집 지하실에서 탈출한 뒤로 암것도 안 먹었잖아."
"이런 곳에서 밥이 넘어가세요?"
"관광지 왔다고 생각하면 술술 넘어가지."
김호정은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비스킷을 꺼내 먹었다. 저택 지하실에서 가져온 비상 식량이다.
"아, 근데 여기도 신전이니까 무슨 보물 같은 거 없을라나?"
"글쎄요."
"키르키르사탄은 제단 밑에 성유물 숨겨놨잖아."
"키르카라슈텔이에요."
"뭐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비스킷을 먹던 김호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단 안쪽에 손을 댔다.
달칵!
"응?"
김호정이 제단 안쪽을 건드린 순간,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쿠구구궁!
파아아!
눈부신 빛이 신전 내부를 휩쓸었다.
"뭐, 뭐야! 이거 나 때문이야? 미안해!"
"진정하고 이것 좀 보세요."
빛이 사라지자, 신전 제단 위에 번쩍이는 보석 무더기가 나타났다.
"보, 보석이잖아!"
"정말 보물을 찾으셨네요."
"이, 이 녀석들 아까까진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아마 처음부터 여기 있었을 겁니다."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지금은 작동을 멈췄지만, 제단에 마법진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진 결계 때문에 숨겨져 있었지만, 방금 김호정 씨 때문에 해제된 게 아닐까 싶어요."
정황상 위즈멜이 놔둔 것 같다.
펜그릴이 이런 걸 숨겨 뒀을 리는 없고, 애초에 아주 오래 전에 설치된 결계였으니까.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가면 되겠는데요. 어차피 트라코티는 돈도 없을 테니."
"심 봤다!"
김호정이 보석 무더기를 파헤쳤다.
그 안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 몇 개가 묻혀 있었다. 이쪽은 결계의 영향 때문인지 낡지 않아서 새것 같았다.
"선생, 여기 상자도 있어!"
"열어보죠."
두 사람은 각자 손에 집히는 상자를 열었다.
강승현이 연 상자 안에는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둥글둥글한 황금빛 환약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 이건...!"
틀림없다.
이 환약은 한 알만 먹어도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부상이 회복되는 데다 스태미나를 영구적으로 올려준다는 회복 아이템.
"금밀단!"
진귀한 회복 템 중 하나인 [금밀단]이었다.
당연히 스태미나로 먹고 사는 강승현이 환장할 만한 아이템이지만, 현재는 제작법이 소실되서 최상급 던전에서만 가끔, 그것도 한두 알만 구할 수 있다는 귀한 아이템이다.
'당장 먹어야지!'
강승현은 고민 없이 금밀단을 먹었다.
입안 가득 새콤달콤한 맛이 퍼져나가며 몸에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져갔다.
'이 귀한 걸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거더라.'
강승현의 기억에 의하면 대충 1년 전에 딱 한 알 먹은 뒤론 구경도 못해본 아이템이었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맛도 엄청 좋아서 매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귀족들이 사재기했기 때문이다.
'돈이 있어도 매물이 없어서 못 구하는 놈이었으니까.... 이런 걸 신전에 잔뜩 보관해둔 걸 보면, 역시 신은 신인 건가.'
강승현은 상자 안에 가득 담긴 금밀단을 바라보았다.
'상자 자체는 그리 크진 않지만....'
작다고 해도 대략 티슈 케이스만 한 사이즈였으니 지금보다 금밀단을 구하기 쉬운 과거라 해도, 돈이 엄청 깨졌을 것이다.
'미안하다 위즈멜, 아까 신나게 욕했는데.'
이렇게 귀한 보물을 잔뜩 갖고 있었을 줄이야.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고 매년 제사상 차려줘야 할 판이다.
"김호정 씨 상자에는 뭐가 들었나요?"
"여기에는 월광석이 들어있어!"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월광석 원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원석이긴 하지만요."
"좋지! 오히려!"
김호정 역시 기쁜 얼굴로 상자를 끌어안았다.
월광석은 달의 힘이 깃든 광물이라, 김호정이 가진 스킬 몇몇의 성능과 스탯을 상승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것도 구하기 진짜 힘든 놈인데, 축하드려요."
"당장 써먹긴 힘들겠지만!"
"다른 상자도 열어보죠."
나머지 상자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약초나 환약 같은 온갖 회복용 아이템이 가득 들어있었다.
"회복 아이템이 많네요. 지금은 딱히 필요 없는데."
"이건 뭐야? 일반 포션은 아닌 것 같은데."
"대지의 정수예요."
특이하게도, 회복용 아이템 사이에 대지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이건 땅 속성 스탯을 영구적으로 올려주는 아이템이라 땅법사들이 환장할걸요."
"근데 이거 마셔도 돼? 안 상해?"
"결계로 봉인해놔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여기 있는 보물들은 아주 오래 전, 위즈멜이 생전에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된 아이템이지만 강력한 봉인 덕분에 방금 막 만들어낸 것처럼 신선했다.
"그럼 걱정 없이 마셔도 되겠네."
"생각보다 신경 써준 거 같으니, 위즈멜한테 고마워해야...."
그 순간, 강승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좀 이상하네?'
분명 여기 있는 것들은 위즈멜이 수백, 수천 년 전에 숨겨둔 것들이다.
그런데 왜 강승현과 김호정,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로 준비되어 있는 것인가.
'마치 우리가 여기 올 걸 예상했다는 듯이....'
강승현은 손에 들린 금밀단을 바라보았다.
혹시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중 마력 관련 보상은 전혀 없는 걸 보면 분명 위즈멜은 두 사람에게 맞춰서 보상을 준비한 것 같다.
'정말 알고 있던 건가?'
강승현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과거의 위즈멜은 미래를 내다본 게 아닐까. 그래서 모든 걸 준비해놓고 미련 없이 사라진 게 아니었을까.
그러한 생각이 잠깐 밀려왔다.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진짜 모르겠네.'
강승현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였다.
'잠깐, 그렇다면 회복용 아이템은 왜 준비해 둔 거지?'
강승현은 마지막 상자를 바라보았다.
미래를 내다봤다면, 자신이 죽은 트라코티 주민들을 전부 부활시키는 광경을 봤을 것이다.
'지금은 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런데도 과거의 위즈멜은, 분명히 쓸 일이 있을 거라는 듯 미래의 강승현에게 회복 아이템을 넘겨줬다.
'아까 분명....'
한참 생각하던 강승현은 위즈멜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너희만의 힘으로 숲과 마을을 지켜내야 해. 물론 쉽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너희를 믿는단다.
-다들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나의 아이들이니까.
'이렇게 말했지.'
그 말은 조만간 트라코티에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뜻이다.
'지금 붉은 숲은 카마르에서 흘러온 마력으로 오염된 상태야. 거기다 위즈멜이 소멸하면서 마을을 지키던 힘까지 사라졌으니....'
이유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십중팔구 몬스터 습격이다.
'어쩐지 보상을 퍼준다고 했더만.'
강승현은 금밀단 한 알을 삼켰다.
여전히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고, 스태미나가 샘솟는 기운이 전신을 감돌았다.
'뭐, 좋은 걸 줬으니 도와주긴 해야겠지.'
182. 마지막 임무 1
"슬슬 움직이죠."
"예?"
"벌써요?"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지쳐 쓰러져 있던 인형사들을 일으켰다.
"많이 피곤하겠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요."
"조금만 쉬었다가 가는 게...."
당연히 인형사들은 곧 죽을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무너지는 천장을 막겠다고 마력을 탈탈 쏟아붓기도 했고, 공방에서 탈출하느라 남은 스태미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즈멜 님이 맡긴 마지막 임무가 남아 있는데도?"
"위, 위즈멜 님이 맡긴 임무요?"
"그게 무엇입니까?"
하지만 위즈멜을 언급하자 하나둘 정신차리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금 트라코티가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
하비 골렘이 찍어낸 양산형 인형들이 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몇 안 되는 모험가들은 죽었다 살아나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
설상가상으로 마을을 지켜주던 위즈멜의 축복은 사라진 상태다.
"몬스터가 침입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죠."
당장 트라코티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즈멜이 기껏 살려낸 아이들이 죄다 위즈멜을 뒤따라갈 것이다.
"즉, 우리가 할 일은...."
"위즈멜 님이 남기신 마지막 임무는!"
트라코티를 무사히 지켜내는 것.
이것이 위즈멜의 마지막 임무이자, 틀린 판단으로 위즈멜을 떠나보낸 자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속죄다.
"살았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어!"
"다들 움직이자고!"
정신 차린 인형사들이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드르르륵.
신전 내부를 살피던 인형사 하나가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밖으로 빠지는 문을 찾았다!"
"근데 잠겨 있는 것 같은데...."
"아, 혹시 이게 열쇠 아닐까?"
보석 무더기를 파헤치던 김호정이 흙을 구워만든 열쇠를 발견했다.
위즈멜이 정말 철저하게 준비해둔 모양이다.
달칵!
열쇠로 잠긴 문을 열자, 문 위로 마법진 하나가 떠오르더니.
파샤아아!
마법진이 산산조각 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직후, 자기 할 일을 마친 열쇠도 먼지가 되어 함께 사라졌다.
"문이 열렸습니다!"
"어디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즈멜 님이 준비하신 걸 보면 트라코티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출발하죠."
강승현 일행은 문을 넘어갔다.
"어? 여기는?"
가장 먼저 나간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여기... 거긴데? 레드로드 애들이랑 묵었던 비밀 기지."
문 너머는 며칠 전, 아지트가 붕괴된 뒤 갈 곳 없어진 레드로드가 잠시 머무른 비밀기지였다.
지금은 다들 마을로 떠났는지 비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여기서 숨겨진 문을 발견했었지.'
설마 그 문이 위즈멜의 지하 신전과 이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래도 비밀기지의 정체는 위즈멜 신전의 대피소였던 모양이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으면 위즈멜이 부활하기 전에 펜그릴을 박살 냈을 텐데.'
열쇠를 놔둘 거면 여기다 숨겨둘 것이지.
역시 위즈멜은 결정적일 땐 도움이 안 된다.
"아, 선생! 저기 좀 봐!"
"위즈멜 님의 축복이 사라진다는 게 이런 의미였군요."
비밀 기지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풍경은 새빨간 숲이 아니라, 어딘가 물 빠진 듯한 밋밋한 색감의 숲이었다.
"부, 붉은 숲이...."
"애초에 숲이 붉었던 이유도 위즈멜 님의 힘이었단 말인가...."
"이제 망설일 필요가 없네요."
축복이 사라졌다는 건 이걸로 확실해졌다.
동시에 숲이 묘하게 조용한 걸 보면, 날뛰어야 할 몬스터들이 전부 마을로 몰려간 것같다.
"당장 트라코티를 구하러 가죠."
-콰아앙!
쾅!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
"젠장, 눈 뜨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몬스터의 공격을 막던 모험가가 지친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트라코티는 몬스터들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죽었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다시 죽을 판이잖아!"
위즈멜은 트라코티 주민뿐만 아니라, 펜그릴의 인형과 싸우다 죽은 모험가들도 전부 부활시켰다.
-사, 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유가 중요해? 살았으면 됐지!
-축하 파티라도 벌여야 하는 거 아냐?
-자, 잠깐! 다들 저기 좀 봐!
되살아 난 모험가들은 크게 기뻐했으나, 기쁨도 잠시. 그들은 곧 트라코티를 향해 몰려오는 몬스터 떼를 발견했다.
-이 마을엔 기사단도, 병사도 없다! 마을을 지킬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다!
-다들 무기 들어! 싸우자!
처음엔 다들 얼이 빠져 있었으나, 가장 먼저 정신 차린 마센 지부장을 시작으로 모험가들이 몰려오는 몬스터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끝이 없어! 이대론 다 죽는다고!"
"우리끼리 막는 건 무리야! 지원은 언제 오는 거야?"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신 차린 모험가들이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지만, 다들 죽기 전까지 펜그릴의 인형을 상대하느라 무기와 방어구가 많이 손상된 상태였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모험가들도 많았다.
"여, 여기 부상자가...!"
"크아아악!!"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부상자를 치료할 힐러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싸울 수 있는 모험가가 몇 없는데, 그나마도 부상으로....'
마센 지부장은 지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된 힐러 하나만 있었어도,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강승현 힐러... 그자만 있었어도....'
강승현. 그는 트라코티의 유일한 힐러였으나, 펜그릴을 조사하러 간 뒤로 소식이 뚝 끊겼다.
캉!!
"큭!"
계속된 전투로 휘두르던 검이 부러졌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무기는 없고, 상대해야 할 몬스터는 산더미처럼 남은 상황인데.
'이번에는 트라코티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운 좋게 두 번째 기회를 얻었지만, 아까와 다를 바 없는 결말이라니. 하다못해 무기라도 멀쩡했다면 죽을 때까지 싸웠을 텐데.
마센 지부장은 분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그녀가 한숨을 뱉으며 부러진 검을 내던진 순간이었다.
파바박!
뒤에서 빠른 속도로 날아온 화살이 돌진해온 몬스터를 꿰뚫었다.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몬스터의 두 눈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아직 늦은 건 아니죠?"
고개를 들자 익숙한 흰 가운이 마센 지부장의 눈앞에서 펄럭였다.
"가, 강승현 힐러!"
"보아하니 아직은 괜찮아 보이네요."
석궁을 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센은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난 자네가 펜그릴한테 당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죠. 일단은 몬스터를 막는 게 급선무니까."
강승현이 손짓하자 뒤따라온 인형사들이 트라코티 곳곳으로 흩어졌다.
"지금부터는 스펜서... 아니, 인형 공방이 모험가 조합을 서포트하겠습니다!"
"다들 시작하자!"
자리 잡은 인형사들은 흙기둥을 소환해 방벽을 만들어 몬스터의 접근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던 모험가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 인형사들이 우릴 돕는다고?"
"저 게으름뱅이들이?"
본래 인형사들은 몬스터들이 오건 말건 공방에 틀어박혀 자기 할 일만 해대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트라코티를 위해 싸울 겁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분은 같이 싸우시죠! 부상자는 강승현 힐러님한테 가세요!"
"아, 알겠습니다. 다들 움직이자!"
얼빠져 있던 모험가들도 정신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중형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강승현은 몰려오는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넘쳐났지만.
'이 정도는 쉽지.'
부러진 뼈는 [대지의 뼈]를 이용해 새로 만들어 붙이고, 터져나간 살은 [봉합]을 이용해 꿰매 붙이고.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까.'
늘 그랬듯, 야매 힐러의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회복 아이템도 포션도 넘쳐나니, 보급은 모험가 조합에 맡길게요."
"알았다. 상처가 깊지 않다면 이쪽으로 와라!"
"대지의 정수는 인형사한테 지급해주세요. 땅 속성 스킬을 다루는 중이니까."
마센 지부장의 명령에 따라, 조합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포션과 아이템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오늘은 제가 할 일이 많아서요. 몬스터 처리는 김호정 씨가 맡으세요."
"맡겨만 두라고!"
김호정이 금빛 영광을 들어 올렸다.
강승현이 뒤로 빠진 지금 트라코티에서 가장 강한 모험가는 김호정이었다.
'썩어도 준치니까.'
아무리 허접한 차원 이동자라도 일반 모험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몬스터를 잡는 건 딸려도, 몬스터를 막는 건 잘하겠지.'
실제로 뛰쳐나간 김호정은,
"간다! 대지의 기둥!"
몬스터를 잡겠다고 어설프게 깔짝거리는 대신, 자기가 잘하는 땅파기로 몬스터를 가로 막았다.
"많이 늦었지? 같이 싸우자!"
"레베카! 무사했구나!"
레베카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몰려오는 몬스터를 막아냈다. 지금까지 볼 수 없던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이다.
"자넨 정말 대단하군.... 다 끝났다고 생각한 싸움을 이렇게 뒤집다니."
주위를 둘러보던 마센이 감탄한 듯 입을 열었다.
"저희가 올 때까지 모험가들이 버텨줘서 가능한 거죠."
"나는 인형사 녀석들을 통솔할 자신이 없거든. 이 모든 건 자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트라코티 내부 세력인 인형사와, 트라코티 외부 세력인 모험가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승현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쿠구구궁!!!
"강 선생, 뭔가 큰 놈이 오는데?"
"슬슬 올 거라 생각했어요."
시끄러운 땅 울림과 함께, 숲 안쪽에서 거대한 인간형 바윗덩어리가 부하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암석거인, 저 녀석이 이번 습격을 주도하는 대장이네요."
모든 몬스터 습격이 다 그렇지만, 대장격 몬스터만 처리하면 나머지 몬스터는 알아서 물러간다.
"저 녀석만 무찌르면 된다고?"
"하지만 몰려오는 잡몹들 막는 것도 벅차!"
"지금부터 몰려오는 몬스터의 수가 배로 늘어날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길게요."
뒤에 있던 강승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녀석은 제가 맡죠."
"그럼 저 괴물을 힐러님 혼자 막으시겠다구요?"
"사실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시간 아까우니까 도와줄 사람을 구해왔죠."
딱!
그 순간, 마을 곳곳에 버려져 있던 인형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
183. 마지막 임무 2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라면, 딱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나 참, 왜 나 같은 환자가 싸워야 하는 거냐고...."
이어서 띠껍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하비 사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지 제자인 직스의 등에 업힌 상태로 말이다.
"하비 어르신?"
"아니 저 양반이 우릴 돕는다고?"
"스, 스승님이...?"
'그' 성격 나쁜 하비가 협력을 하다니.
트라코티 주민들은 물론, 그의 전 제자인 인형사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략 15분 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슬슬 몬스터의 기운이 느껴진다!"
강승현 일행이 트라코티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참이었다.
'응?'
붉은 숲 구석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응? 왜 그래 선생?"
"먼저 가세요,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강승현은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인기척이 느껴지는 장소로 다가갔다.
"강승현 힐러님! 무사하셨군요!"
"직스 씨?"
"뭐야, 네 녀석 살아 있었냐?"
그곳에 있던 건 하비를 등에 업은 직스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면 몰라? 대피하는 중이지."
하비 역시 위즈멜의 힘으로 부활했으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달려나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저는 스승님을 안전한 곳까지 모셔두고 트라코티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직스는 당장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쓰레기여도 스승은 스승인지라 차마 버리지 못했다고.
"고향 마을이 망할 판인데요?"
"그래서 뭐? 지금 이 몸으로 나가서 싸우라고?"
직스와 달리 하비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한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고, 왼쪽 팔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는 움직이지 않아서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듯했다.
"물론, 이런 꼴이어도 인형 정도는 조종할 수 있어. 난 그저 그런 인형사들하곤 차원이 다르거든."
"이 와중에도 자기 자랑을."
"근데, 이런 상태로 무리하게 스킬을 썼다간 뒈져버릴 거 아냐. 난 마을 구하겠다고 목숨 버릴 마음 없거든?"
하비는 비키라는 듯 손짓했다.
물론 강승현은 손짓을 무시하고 하비의 몸 상태를 살폈다.
'육체에 큰 문제는 없는데 몸을 못 쓴다는 건... 영혼 쪽 문제네.'
다른 주민들과 달리, 하비의 영혼은 거대 골렘의 동력원으로 갈려 나가느라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대충 하비의 상태를 요약하자면, 건전지가 다 닿은 시계려나.'
한마디로 육체는 멀쩡하지만, 그걸 움직이게 할 인격체가 손상되어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
아무래도 위즈멜은 하비를 치료하던 도중에 힘이 소멸해서, 망가진 영혼은 미처 회복시키지 못한 것 같다.
'설마 위즈멜 그 자식.... 나한테 [영혼 간섭★]을 넘긴 이유가 이거였나?'
강승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녀석은 스킬만 주고 간 게 아니라, 스킬 테스트하라고 환자까지 남겨두고 간 것이다.
'웃긴 놈, 정말 빈틈 하나 없구만.'
이렇게까지 준비해놨다면 어울려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럼 이렇게 하죠."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 협력하시면, 하비 어르신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상대를 회유할 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게 최고다.
-"...그렇게 해서 하비 어르신을 설득했죠."
"설득은 무슨 설득이야? 안 싸우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 안 해준다고 협박했잖아!"
그 뒤, 하비를 무사히 설득한 강승현은 먼저 트라코티로 향해 일행들과 합류했다.
물론 퍼포먼스하겠다고 하비를 설득한 건 비밀로 한 채 말이다.
"그래서 안 싸우신다구요?"
"하여간 망할 자식...."
하비는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약속 지켜라!"
"일만 잘 하신다면."
딱!
그걸 신호로 트라코티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인형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각, 달각, 달각!
다수의 인형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이 인형들은 본래 펜그릴이 모험가 조합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 퍼트린 최상품 인형.
트라코티 인형사들은 조종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흥, 이딴 양산형 인형.... 조금만 분석하면 탈취하는 건 일도 아니지!"
하지만 하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한 손만으로 수백 개의 인형을 조종했다.
그것도 망가져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말이다.
달각, 달각!
트라코티의 인형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해 암석거인에게 달려들었다.
파각! 파가각!
암석거인은 가볍게 떨쳐낼 생각으로 팔을 휘둘렀으나, 인형 한 개를 밀어내면 수십 개가 몰려오는 탓에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쿠구구구!
몰려든 인형들은 암석거인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리와 하반신 쪽 바위를 빠른 속도로 깎아가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절삭기로 갈아버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저 많은 인형들을 저렇게 쉽게 조종한다고?"
"마법진을 그릴 필요도 없다니!"
"여, 역시 스승님이야...."
"심지어 저런 몸으로...."
그 광경을 본 인형사들은 넋 나간 얼굴이었다.
하비가 트라코티 역사상 최고의 인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지금 몸 병신됐다고 이딴 쓰레기 하나 조종 못 할 줄 알았냐?"
하비는 오만상을 쓰며 소리쳤다.
자길 버리고 펜그릴한테 붙은 제자들한테 원한을 제대로 품은 모양이다.
"이쪽 신경 끄고 니들 앞가림이나 잘해! 한심하고 무능한 것들아!"
"애먼 제자들한테 화풀이하기는."
"제자는 무슨! 배신자놈들이지!"
"네네."
팟!
암석거인의 움직임이 봉쇄된 지금이 기회다.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끼기기긱!!
비록 하반신이 묶이긴 했어도 아직 상체와 팔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암석거인은 오른팔을 휘둘러 강승현을 쳐날리려 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그러자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불러내더니.
[후크 샷 - 러시]
암석거인의 머리를 향해 갈고리를 박았다.
차르르르!
사슬이 빠르게 감기며 강승현의 몸이 빠른 속도로 이끌려갔다.
그대로 머리 꼭대기로 이동한 강승현은,
"깔끔한 게 좋지."
암석 거인의 정수리를 향해 은빛 영광을 내려꽂았다.
까가가각!!!
바위 부수기에 특화된 은빛 영광 특성상, 바위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암석거인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쿠구구구!!
동시에 발밑의 인형들도 암석거인의 다리를 완전히 으스러트렸다.
'암석인은 부서진 몸을 끌어와 복구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지금처럼 위아래가 동시에 부서질 경우엔.'
어느 쪽을 먼저 복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느라 능력을 발동하지 못하게 된다.
'도미노처럼 무너지거든!'
쿠르르르!
쿵!
그 결과, 암석거인의 형체가 뒤틀리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상이 단순한 돌무더기로 전락했다.
-쿠르르르.
쿠르르!
무리를 이끌던 암석거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끝도 없이 몰려오던 몬스터들이 숲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모, 몬스터들이 물러난다!"
"살았다! 살았다고!"
"만세!"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모험가들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다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부상과 고통은 잊고 살아남은 걸 진심으로 기뻐했다.
"드디어 끝났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고된 싸움이 끝나고 마시는 포션만큼 개운한 건 없다.
"수고하셨어요."
"허으.... 이게 다 뭔 짓이야 진짜."
하비가 힘없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리하게 싸운 결과, 이제 왼쪽 팔마저 움직이지 않게 된 것 같다.
"어르신 덕분에 편하게 싸웠네요."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공격하는 공략법.
사실 이 방법으로 암석거인을 상대하면 아래쪽을 공격하던 사람이 깔려 죽을 위험이 크다.
"그래서 보통은 잘 안 쓰거든요."
이번에는 인형을 이용한 덕에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강승현은 돌무더기 밑에 깔린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저 인형들이 사람이었다면 전신골절은 확정이다.
"됐으니까 약속이나 지켜! 빨리 치료하라고!"
"네네, 치료해드리죠."
[영혼 간섭★]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하비의 몸에 깃든 영혼을 볼 수 있게 됐다.
[영혼에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예상대로 하비의 영혼은 바닥에 떨어트린 유리 공예품처럼 곳곳에 금이 가고 뒤틀린 상태였다.
'이 상태로 스킬을 쓴 게 신기하네.'
그나마 육체와 멘탈이 멀쩡해서 부서진 영혼을 감당하는 거지, 만약 둘 중 하나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진작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호:루스의 손]
샤아아.
스킬을 발동하자 강승현의 배후로 반투명한 해골 손아귀가 나타났다.
스르르.
손아귀는 하비의 몸을 통과해, 안에 깃든 망가진 영혼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적출]
그 상태로 스킬을 발동하자, 반투명한 손아귀가 하비의 영혼을 움켜쥐고 밖으로 끄집어냈다.
상태가 멀쩡했다면 밖으로 끌려 나오지 않았겠지만, 몸이 워낙 나빴기 때문에 하비의 영혼은 잡초처럼 뽑혀나왔다.
"보이세요? 이게 어르신 영혼이에요."
"안 보여줘도 돼! 빨리 넣어!"
영혼을 뽑아냈어도 육체와의 연결을 끊지 않아서, 하비는 자신의 영혼을 맨눈으로 봐야 했다.
"보시다시피 상태가 안 좋죠? 보통 사람이면 진작 폐인 됐어요."
"안 알려줘도 된다니까!"
"눈으로 보여줘야 믿을 것 같아서요."
강승현은 끄집어낸 하비의 영혼을 살폈다.
현재 하비의 영혼은 곳곳에 금이 가고, 몇몇 부위는 정수가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이런 몸으로 잘도 스킬을 사용하셨네.'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 정신이 붕괴되어 죽었을 것이다.
하비는 워낙 악독하고 자기애가 강하다 보니, 영혼이 부서지는 것 정도로는 인격이 망가지지 않아서 버틴 것 같다.
한마디로 '쓰레기라서 살았다.'라는 느낌.
"우선 곳곳에 흩어지고 뒤틀린 영혼 파편을 긁어 모읍니다."
"설명 안 해줘도 돼!"
"파편의 형태를 살피면서 제 자리에 끼워 맞춥니다."
강승현은 아주 친절한 설명과 함께 하비의 영혼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뭔가 유리로 만든 3D 입체 퍼즐을 맞추는 느낌이군.'
까각, 까각.
투명하고 얇은 파편을 조심스럽게 끼워 맞추고, 손으로 매만져 뒤틀림을 풀어내는 식으로.
샤아아아아.
강승현이 손을 몇 번씩 움직이자, 흩어지고 뒤틀린 영혼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
안색이 좋지 않던 하비도 그 광경을 보고 조금씩 안도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요."
"흥, 진작 이럴 것이지!"
강승현은 하비의 영혼을 몸으로 되돌려놨다.
"이제 네 놈 도움은 필요 없겠...응?"
거만한 말투로 떠들던 하비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 뭐야? 몸이 왜 안 움직여?"
영혼을 돌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비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 제가 말 안 드렸나요?"
그걸 본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완벽하게 치료된 게 아니라서요."
184. 마지막 임무 3
"뭐?"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서요."
강승현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영혼 파편을 모아서 조립하긴 했는데, 복구한 건 아니거든요. 깨진 머그컵에 접착제를 안 바른 상태라고 해야 하나?"
"뭬, 뭬야?"
그냥 놔두면 죽을 것 같아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수습했을 뿐, 실제로는 치료된 게 아니라서 하비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뭐... 손가락 두 개 정도는 움직일 수 있겠네요."
"이, 이 사기꾼 놈이!"
그 말을 들은 하비는 당연히 크게 분노하며 난리쳤다.
물론 움직일 수 있는 건 정말 손가락 두 개밖에 없어서 소리 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내가 뭐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싸웠다고 생각하는 거냐!! 당장 고쳐 놓지 못해?"
"트라코티 복구 일에 협조하시면 이번에는 제대로 고쳐드릴게요."
"뭐?"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라코티는 몬스터의 습격과 인형들의 깽판으로 난장판인 데다, 붉은 숲의 축복만 믿고 몬스터 대책을 거의 마련하지 않은 상태다.
"숲 중앙이라 동서남북 사방이 뚫려 있는데 마을을 둘러싼 담벼락 하나 없으니... 최소한 방벽 정도는 지어 놔야겠네요."
"지금 나보고 돌이라도 나르라는 거냐? 이 몸으로?"
"그 상태에서도 인형 조종은 하실 수 있잖아요."
썩어도 준치라고, 하비는 손가락 한둘만 남아도 인형을 조작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물론 아까처럼 최상급 인형 수백 개를 동시에 컨트롤하는 건 무리겠지만... 하급 인형이라면 얼마든지 갖고 노실 수 있겠죠."
"그야 그렇지만, 그런 거라면 멀쩡한 몸으로 복구하는 게 낫잖아?"
"몸 멀쩡해지면 그대로 튈 거 아닙니까. 안 그래요?"
강승현은 옆에 있던 직스를 바라보았다.
직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 성격상 마을 복구 일에 순순히 협조할 리가 없지.'
남 부려먹는 걸 좋아하는 인간인 만큼, 마을 복구를 부탁해도 그런 건 니들이 알아서 하라고 무시할 것이다.
'보나마나 다른 마을로 도망쳤다가 마을이 다 복구되면 그제서야 기어오겠지.'
그래서 강승현은 하비에게 일을 부탁하는 대신, 늘 하던 대로 협박을 시작했다.
"이, 이 자식이...."
"하비 어르신이 협조해주시면 마을 복구가 훨씬 빨리 끝나겠죠?"
"저번에도 이런 식으로 날 속였으면서... 또 속이다니!"
이래서야 르카코테신 때와 다를 게 없다.
하비는 분통을 터트렸으나,
"몸 움직이고 싶으면 빨리 일이나 시작하시죠."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하비를 놔두고 자리를 옮겼다.
"망할 힐러 놈!!!!"
'이걸로 트라코티 복구는 크게 걱정할 필요 없겠네.'
다른 곳으로 향하자 김호정과 마센, 레베카 세 사람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다들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꼬질꼬질했지만, 몸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두 사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듣고 있었다.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겠군."
"그럼 제가 따로 설명해드릴 필요는 없겠군요."
펜그릴이 위즈멜을 부활시키기 위해 트라코티 주민들의 혼을 제물로 삼은 것과, 부활한 위즈멜이 주민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 것.
"그 과정에서 위즈멜이 완전히 소멸하고, 붉은 숲의 축복까지 사라졌다는 것까지."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
마센은 짧게 대답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트라코티에 머무는 동안엔 자애롭고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게 됐다.
"그 힘을 거둬서 여러분을 부활시키는 데 사용했으니까요."
"마음이 아프군. 얼굴도 본 적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존재가 자신을 희생해서 나를... 우리를 구원했다니."
마센은 씁쓸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펜그릴의 야망을 조금 더 빨리 알아챘다면, 윗선 눈치 보지 않고 움직였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면서.
"너무 낙담하지 말라구."
"그래, 지금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는 게 우선이니까."
어찌어찌 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트라코티는 숲 중앙에 처박힌 마을인 만큼 몬스터가 언제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마을 복구 관련은 하비 어르신한테 맡겼으니, 그쪽으로 의견 주고받으시면 되겠네요."
"복구도 복구지만, 중요한 건 그다음입니다...."
옆에 있던 조합 직원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지부장님, 주위를 둘러보세요."
"붉은 숲의 색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붉은 숲은 일반적인 숲에 가까운 옅은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붉은 숲이라 부를 수 없겠네요."
"다행스럽게도 흙 속의 풍부한 마력은 무사합니다."
"그럼 주민들이 먹고 사는 건 별 문제 없겠군요."
색만 바뀌었을 뿐, 붉은 숲에서 자라는 동식물들은 예전처럼 특별함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농사나 도예, 공방 일에는 별 지장이 없겠지만....
"하지만 신의 축복이 사라졌으니, 숲을 돌아다니면 몬스터의 습격을 받게 될 겁니다."
더 이상 위즈멜의 가호가 트라코티 주민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언제 몬스터가 습격해올지 모르니, 예전처럼 자유롭게 채집하는 건 힘들 것이다.
"큰일인데요. 이러면 주민들의 생계에 지장이 생길 겁니다."
"숲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으면 숲이 사라진 것과 다를 게 없지요? 주민들을 지켜줄 모험가나 병사가 필요해요."
"역시 본사의 지원을 늘려달라고 요청해야...."
"잊었어? 지부장님이 본사 지원금을 깎는 대신 트라코티 주민들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걸로 협상했잖아. 지금 직원들의 절반 이상은 해고해야 할걸?"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이래저래 착잡한 얼굴이었다.
마을 자체는 지켜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카마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나?"
"마을에 힐러 하나 안 보내준 놈들이 잘도 도와주겠다."
"멍청이들아, 이번 일 겪어보고도 몰라?"
그때, 마을을 보수하던 하비가 입을 열었다.
"그놈들은 우리랑 남이야. 수틀리면 얼마든지 버릴 거라고."
"뭐라는 거야. 일 터지자마자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던 녀석이!"
김호정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조합 직원들은 하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르신,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주민들의 생계와 치안 쪽에 동시에 문제가 생기면 마을 존속이 어려워져서...."
"다른 세력에 도움 요청을 해야...."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하비는 띠꺼운 얼굴로 강승현은 흘겨보았다.
강승현은 하던 말 계속하라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그쪽 일은 우리 인형 공방이 협력한다."
"인형 공방에서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트라코티 주민들한테 인형 제작법을 가르칠 거다."
"주, 주민들한테?"
조합 직원들은 경악했다.
선민사상에 찌든 그 하비가, 일반 주민들한테 인형 제작법을 가르치겠다니.
'죽을 때가 되셨나?'
'죽었다 살아나긴 했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조합 직원은 물론, 마센 지부장 역시 쉽게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모자란 놈들도 호신용이나 미끼용 인형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겠지."
"그, 그 정도라면 괜찮겠네요!"
"주민한테 모험가를 24시간 붙일 수도 없으니... 인형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몸을 지키는 식으로 하고, 몬스터 처리는 모험가한테 맡기면...!"
조합 직원들은 의욕 넘치는 얼굴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다시 봤어!' '하비 어르신한테 이런 면모가!'라는 얼굴이었으나.
"됐냐?"
"딱 좋네요."
진상은 강승현이 하비한테 협박을 살짝 첨가한 설득을 걸었기 때문이다.
-인형 공방이 위즈멜 은폐한 거 알면 이래저래 시끄럽겠죠. 펜그릴이 죽었으니 이번 일은 인형 공방이 다 뒤집어쓸 텐데... 그건 싫으실 거고.
-그래서 어쩌라고?
-제자들 불러들이고, 주민들한테 인형 제작법을 가르치세요.
-나, 나보고 그 망할 것들을 불러다가 평민 놈들한테 기술을 전파하라고?
-인형 공방이 직접 나서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주민들의 분노도 잠잠해지겠죠. 예전처럼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주민들도 뭐라하지 않을 겁니다.
-하여간 야비한 놈!
-물론 비용은 전부 인형 공방이 대고.
-나보고 돈까지 내라고?
하비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생계에 문제가 생긴 평민들이 자신과 인형 공방에 분노의 화살을 돌릴 게 뻔했으니.
-그래서 안 하시게요? 그럼 지금 당장 역적으로 만들어드리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마을 주민들이 인형 공방으로 캠프파이어할 지도 모르겠지만요.
-마, 망할 놈이.... 하면 되잖아!
결국, 하비는 자기 죄를 덮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로 했다.
"뭐, 당연하지만 내가 직접 가르치는 건 시간 낭비겠지. 다시 제자로 받아 줄 테니 초짜들 가르치는 건 니들이 해라."
"가,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탈주한 제자들도 불러모았다. 인형사들은 스승님의 넓은 마음에 감동받았지만,
'내가 내 손으로 이 새끼들을 불러들이다니...!'
하비는 분노를 꾹 눌러 참을 뿐이었다.
"저도 하비 어르신 말에 찬성해요."
옆에 있던 레베카도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인형 제작 기술은 위즈멜 님이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이니까요. 지금처럼 특정 계급이 독점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던 거에요...."
애초에 처음부터 인형 제작법을 마을 곳곳에 전파했다면, 위즈멜이 사라진 직후 카마르한테 의존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저희 가문도 인형 공방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싶어요."
펜그릴이 죽었으니 스펜서 가문의 가주 자리는 자연스럽게 레베카한테 넘어왔다.
하지만 레베카는 가주 자리에 앉는 대신, 재산을 처분하고 그 돈을 마을을 위해 사용할 계획인 듯했다.
"괜찮겠어요?"
"오빠가 지은 죄는 저희 가문이 갚아가야죠.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르웨나 스펜서 대신 레베카로 살고 싶어요."
"레베카 씨도 이참에 인형술을 배워보세요. 이제 트라코티 주민이라면 누구나 '하비 어르신'의 제자가 될 수 있으니."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하비를 바라보았다.
하비는 썩어가는 얼굴로 혀를 찰 뿐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좀 쉴까요."
"피곤해, 피곤해...."
강승현과 김호정은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는 인형들이 난장판을 만들어놔서 어수선했지만, 그 사이 조합 직원들이 정리해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보스급 몬스터를 연속으로 상대했으니...피곤한 게 정상이지.'
강승현은 하품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자기 전에 포션이나 하나 마실까...."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려던 강승현의 눈에 낯선 아이템이 보였다.
'응? 뭐야 이거?'
인벤토리에 담겨 있던 건 작은 티켓이었다.
'그러고 보니...이런 소릴 했지.'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알 수 없는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잘 옮겨 두었단다.]
'이게 혹시 퀘스트 보상인가?'
강승현은 위즈멜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정체 모를 아이템을 꺼냈다.
185. 꿈꾸는 자 1
'이런 아이템인가.'
강승현은 손에 쥔 티켓을 살폈다.
[드림 티켓]
[잠들기 전, 베개 밑에 넣어두면....]
이름은 드림 티켓, 크기는 대략 7cm x 14cm 정도, 전체적인 디자인은 보라색과 흰색이 뒤섞인 데다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베개 밑에 넣어두라고?'
아이템 정보창을 띄우고 살펴봐도 구체적인 용도는 얻을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거라곤 이 티켓의 사용법뿐.
[관찰의 눈]
혹시나 해서 [관찰의 눈]을 발동해봤지만.
[드림 티켓이다.]
이 한 줄만 나타날 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름을 보면 꿈하고 관련 있을 것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강승현은 들고 있던 티켓을 베개 밑에 넣었다.
수상쩍긴 해도 손에 넣은 이상 안 쓸 수도 없다.
'뭔진 몰라도 포인트를 3만 가까이 써서 귀찮... 아니, 힘들게 얻은 아이템이야. 쓰레기는 아니겠지.'
이게 최종 퀘스트 보상인 걸 보면 관리자가 꽤 신경 써서 준비한 아이템일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관리자를 패면 되겠지.'
강승현은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첨벙.
얼마나 지났을까.
강승현은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여기는...."
분명 숙소 안 침대에서 자고 있었을 텐데,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를 새하얀 공간이었다.
"꿈속인가?"
강승현은 바로 상태창을 열어봤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상태창이 안 열리는 걸 보면 꿈 맞네.'
이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때 쓰는 차원 이동자 전용 비기 중 하나다.
상태창은 현실에서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드림 티켓이라더니... 꿈을 꾸게 하는 아이템이었나."
강승현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오류 난 게임처럼 아무것도 없이 새하얀 공간만 펼쳐져 있었으나, 그 공간 중앙에는 검은 사슬에 휘감긴 일그러진 큐브가 둥둥 떠 있었다.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군요.}
"응?"
큐브를 향해 다가가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으니 이 목소리의 정체는 하얀 큐브인 것 같다.
"뭐야 이건?"
{아, 이렇게 말하는 게 알아보기 쉬울까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걸]
[무척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강승현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설마...."
지금은 꿈속이라 진짜 메시지창은 아니겠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인물이라면 딱 한 명밖에 없다.
"너냐?"
[맞아요.]
[저는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온 존재.]
[당신이 말하는 '상태창 관리자'입니다.]
[동시에 인간들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 잊혀진 신적 존재이기도 하죠.]
관리자.
그 녀석이 강승현의 눈앞에 나타났다.
"네가 관리자라고? 잘 만났다, 이 개자식아!"
가까이 다가간 강승현은 그대로 큐브, 아니 관리자를 걷어차려 했으나.
텅!
촤르르륵!
"이건 또 뭐야."
큐브를 휘감은 단단한 쇠사슬이 가로막았다.
"설마 나한테 맞기 싫어서 사슬갑옷이라도 착용하신 건가?"
[그것들은 나를 보호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나를 속박하는 것들이죠.]
그 말을 듣고 강승현은 검은 사슬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에는 큐브를 감싸는 중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큐브가 빠져나갈 수 없게 옭아매고 있었다.
"...당장 패버리고 싶은데."
머리끝까지 열 받은 상태였지만, 수상한 점을 깨달았으니 계속 날뛸 순 없다.
"이래선 뭐 공격하기는커녕, 다가갈 수도 없으니."
놈에게 사정을 듣는 게 우선이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런 꼴이 됐죠?"
[뻔한 이야기예요. 봉인당했죠.]
"그러겠죠. 사슬로 몸 묶는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사슬에 속박당한 큐브.
앞구르기하면서 봐도 봉인 상태다.
"그래서 왜 봉인된 건데요?"
[제가 가진 걸 빼앗고 싶었나 보죠.]
"그건 또 뭔 소리야."
[키워드 제한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믿었던 아이들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해주세요.]
꼴만 봐도 짐작은 가지만, 관리자는 좋은 이유로 봉인당한 것 같지는 않다.
'위즈멜처럼 자기 희생한 바보는 아닌가 보군.'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로 검은 사슬에 묶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관리자는 단순한 게 잊혀진 게 아닌,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유폐된 상태였다.
"그럼 위즈멜이나 키르카라슈텔과 다르게, 그쪽은 아예 부활도 할 수 없나 보네요."
[이곳에 봉인된 상태니까요.]
'룰렛 같은 걸로 사람을 빡치게 하는 쓰레기는 봉인 당해도 싸.'
강승현은 꼴좋다고 생각했다.
누가 봉인한 건진 몰라도, 그 녀석도 분명 관리자한테 룰렛으로 농락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뻔한 이야기지만,]
[당신들을 이곳으로 부른 건 나를 봉인에서 풀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말은 똑바로 하시죠. 부른 게 아니라 납치한 거잖아요."
강승현은 띠꺼운 얼굴로 뱉어냈다.
멋대로 끌고 온 주제에 사람을 '불러왔다고' 사기 치는 관리자의 날조력에 감탄하면서.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를 구해준다면, 당신을 무사히 지구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나의 존재를 걸고 맹세하죠.]
"...."
요약하자면 이거다.
관리자는 봉인당했고, 자력으로는 봉인에서 풀려날 수 없고, 외부인의 도움이 필요해서 차원 이동자들을 불렀다.
"그러니 집에 가고 싶으면 봉인을 풀어라 이 말인데...."
강승현은 다시 한번 큐브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냐?"
텅! 텅!
촤르르륵!
큐브를 걷어찰 때마다 검은 사슬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사람을 멋대로 끌고 와선, 집에 가고 싶으면 협조하라고? 너 같으면 하겠냐?"
검은 사슬이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강승현은 관리자를 박살 내버렸을 것이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닙니다.]
[나를 구해준다면, 당신이 잃어버린 걸 되찾아주겠습니다.]
그때, 관리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꺼냈다.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딱히 뭐 잃어버린 거 없는데요. 있다고 하면 누구 때문에 한국에 못 가서 방치되어 있을 내 집?"
물론 이건 지구로 돌아가기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제가 이곳으로 불러온 인간들은]
[무언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자 이러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소중한 걸 잃어버린 자들?"
[가족, 친구, 혹은 사랑하는 사람.]
"좀 더 현실적인 문장으로."
[20년 지기 친구의 부탁으로 보증 섰다가 잃어버린 전 재산을 되찾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길래 픽업했어요.]
"보증은 어쩔 수 없지."
[간절함이 없는 자는 나를 구할 수 없으니까요.]
즉, 차원 이동자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되찾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정확하게는 목숨을 걸고 싶을 정도로 간절한 자들이나, 목표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자들,
"근데 난 딱히 소중한 걸 잃어버린 적도 없고, 되찾고 싶은 것도 없거든요."
강승현은 이해 가지 않았다.
관리자의 설명대로라면 자신은 애초에 '차원 이동자' 후보가 될 수도 없는 인물이지 않은가.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뭔가를 잃어버리긴 하지만, 전 딱히 목숨 걸어가면서까지 찾고 싶은 건 없거든요."
그것도 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되찾을 수 없는 것.
적어도 강승현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설명해드리고 싶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요.]
[당신이 여기 오기 직전을 기억하시나요?]
"오기 직전?"
강승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즐 대륙에 끌려오기 직전,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기억이 안 나네.'
분명 끌려오기 전날까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끌려온 당일엔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3년 전이라도, 지구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그걸 잊어버리는 건 말이 안 되지.'
강승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잃어버렸다는 게 기억입니까? 그것도 꼴랑 하루?"
무슨 기억 상실증이 그런 식으로 생긴단 말인가. 이쯤 되면 술 먹고 전날 기억을 못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절 구해주신다면 하루치 기억도 덤으로 찾아드릴게요.]
"1+1이냐고."
어쨌든, 뭔가를 잃어버린 건 맞는 것 같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리 알려주는 건 재미없죠?]
[스스로 찾아보는 게 좋겠네요.]
"...뭐 이런 새끼가."
보아하니 관리자는 잃어버린 것이 뭔지 알려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알고 싶다면 봉인을 풀어내야 할 것 같다.
"너무 뻔뻔해서 열 받는데,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긴다."
[그런가요.]
"난 솔직히 기억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고, 딱 하나만 원해."
텅!
강승현은 다시 한번 큐브를 걷어찼다.
"봉인 풀어주는 대가로 딱 한 대라도 좋으니까 댁을 팰 수 있는 무기나 스킬을 내놔."
[그렇게 절 때리고 싶은 건가요.]
"솔직히 죽이고 싶은데 타협했어."
[좋습니다.]
파아아.
강승현의 눈앞에 반짝이는 빛이 나타났다.
빛은 잠시 일그러지더니, 단검 형태로 변했다.
[그 단검의 이름은 '섬망체'. 그걸 사용하면 저에게도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타격을?"
[나중에 제 봉인을 풀게 된다면, 그걸로 절 공격하셔도 좋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기를 받았다.
그것도 신을 후드려 팰 수 있는 무기를.
"이런 좋은 게 있으면 진작 줘야지!"
강승현은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으나,
[하지만 그건 무의식 공간과 환상 속에서만 사용할 수 있답니다.]
"뭐?"
[현실에서는 사용할 수 없죠.]
그럼 그렇지.
제약이 붙은 아이템이었다.
섬광체는 현실에선 꺼낼 수도 없는 꿈속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냥 쓰레기잖아."
[하지만 갖고 있다면 쓸 일이 생길 겁니다.]
"...."
[그리고 꿈에서 깨고 싶다면 그걸로 몸을 찔러보세요. 바로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강승현은 손에 들린 섬망체를 바라보았다.
이런 걸 어디에 쓰나 싶지만, 일단 관리자를 팰 수도 있는 데다, 꿈에서 탈출할 때도 쓸 수 있다고.
"뭐, 없는 것보다는 낫겠네요."
섬망체를 손에서 놓자, 단검이 빛으로 돌아가 사라졌다.
"사실 좀 의외네요.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거든요."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설마 신적 존재가 자길 때려도 좋으니 풀어달라고 부탁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 같으면 그냥 꺼지라고 하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을 텐데. 차원 이동자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쪽도 꽤 간절하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간결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 많은 차원이동자들 중,]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겨우 셋밖에 없으니까.]
186. 꿈꾸는 자 2
"...셋밖에 없다고?"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선 자격을 충족해야 하거든요.]
"꿈꾸는 걸 말하는 건가요?"
관리자가 유폐된 장소는 현실과 동떨어진 무의식 세계, 흔히 말하는 꿈속이다.
당연히 관리자를 구하기 위해선 이곳으로 들어와야 하니, 반드시 꿈을 꿔야 한다.
[정확하게는 몽중몽, 꿈속의 꿈이죠.]
[저쪽의 문이 보이시나요?]
팟!
관리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새하얀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문의 이름은 '무의식의 저편',]
[이곳의 출입구예요.]
평범한 인간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선 꿈속에 1/5922의 확률로 나타나는 '무의식의 저편'이라는 문을 지나야 한다.
['무의식의 저편'을 통과하면]
[자신의 꿈을 벗어날 수 있게 되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꿈을 벗어난 사람은, 이곳으로 초대할 수 있어요.]
이 방법을 쓰면 굳이 드림 티켓을 쓰지 않아도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꽤 빡세긴 한데... 확률이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닌데요."
1/5922.
언뜻 보면 극악의 확률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룰렛 확률도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원 이동자들이 아즐 대륙에 떨어진 지 어느덧 3년째니, 아무리 운이 없어도 네다섯 명 정도는 방문했어야 정상이다.
"뭔가 다른 조건이 있나 보네요."
[사실 차원 이동자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했어요.]
['무의식의 저편'은 꿈만 꾼다면 누구나 조우할 수 있는 현상이니까요.]
관리자는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힘을 빌려주며 봉인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꿈에서 깨는 순간 관리자의 약속을 전부 잊어버렸다.
"약속을 잊어버렸다고?"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이 곳을 두 번 방문한 사람과 만났을 때였죠.]
관리자는 그를 기억하며 반가워했으나, 당사자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얼마 만에 만난 건데요?"
[아마 첫번째 방문으로부터 5년쯤 뒤였을 거예요.]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이런 중요한 약속을 겨우 5년 만에 잊어버릴리가 없다.
뭔가 술수라도 부리지 않는 한.
[저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필사적으로 조사한 끝에 원인을 알아냈죠.]
원인은 관리자의 몸에 걸린 봉인이었다.
이 봉인에는 관리자를 속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인간이 잠에서 깨는 순간 꿈에서 일어난 일을 지워버리는 특수 저주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걸 막으려고]
[저에 대한 기억과 약속을 없애버린 거죠.]
실제로 몇몇 차원 이동자들도 '무의식의 저편'을 통해 이곳을 방문했지만, 잠에서 깨는 순간 모든 걸 잊어버렸다고.
"봉인을 풀기 위해선 반드시 꿈을 통해 들어와야 하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꿈을 잊어버리는 결계를 설치해두다니...."
[정말 치밀한 놈들이죠. 안 그런가요?]
"보통내기들은 아니네요."
최선을 다해 관리자의 봉인을 저지하겠다는 의지와 집념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봉인이 풀려선 안 된다는 듯.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3명은 성공했다고 한 걸 보면 뭔가 방법을 찾았다는 소리죠?"
[맞아요.]
[꿈을 잊게 만드는 효과는 일종의 저주니까.]
"그걸 막아낼 축복을 만들어냈군요."
관리자는 포기하지않고 답을 찾았다.
저주를 연구해서 그걸 무효할 수 있는 축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죠.]
[사람들한테 축복을 걸어주고 싶어도]
[다들 자신이 믿는 신이 따로 있어서 축복을 걸어줄 수가 없었거든요.]
아즐 대륙은 신을 향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 신을 믿고 따르는 게 기본이다.
"마법사나 도적처럼 신앙심이 극히 낮은 직업들은요?"
[그들은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을 뿐,]
[불속성 마법사는 불의 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도적은 주사위의 신께 기도하며 판돈을 걸죠.]
거기다 신앙심이 매우 낮은 사람이라도 신의 힘 자체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의식하진 않더라도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신을 믿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요.]
"결국 아즐 대륙에서 태어난 이상, 신과 떼어낼 수 없다... 뭐 이런 소리군요."
[그런 셈이죠.]
관리자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축복을 받아줄 수 있는, 신을 두려워하지도, 믿지 않는 인간을 찾고자 했지만.
[역시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정확하게는 수가 너무 적어서 없는 것에 가까웠으니."
애초에 그런 인간은 아즐 대륙에서도 극소수인 데다, 그 극소수의 무교맨이 '무의식의 저편'에 진입하기 위한 1/5922의 확률을 뚫고 찾아올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렸어요.]
자신을 구해줄 인간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세계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관리자는 수색을 시작했다.
"그러다 지구를 발견했다, 뭐 이런 소리?"
[꿈속에 오래 갇혀 있다 보니]
[다른 존재의 꿈을 훔쳐보는 건 식은 죽 먹기였거든요.]
꿈을 통해 차원 너머를 살펴보던 관리자는 어떤 독특한 세계를 발견했다.
[신적 존재의 영향력이 적진 않지만,]
[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상당히 많고.]
[마력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차원.]
[그렇지만 스킬과 마력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는 흥미로운 세계.]
관리자가 발견한 세계는 강승현을 비롯한 차원 이동자들의 고향인 '지구'였다.
[이곳 사람들이라면]
[절 구해줄 수 있겠다고 확신했죠.]
"이제야 납득이 가는군."
관리자 놈이 멀쩡한 아즐 대륙민을 놔두고 굳이 다른 세계, 멀리 떨어진 지구에서 노예를 끌고 온 이유.
"조건이 딱 맞아 떨어져서, 그래서 우릴 데려온 거였어."
신의 영향력이 많아서도 적어서도 안 되고,
마력과 스킬에 대한 개념을 갖춘 데다,
갑자기 다른 세계로 떨어져도 금방 적응해서 살아갈 만한 지능을 갖춘 인간들이 존재하는 세계.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세계 중 최종적으로 선택된 게 '지구'였다.
"근데 왜 하필 한국이죠? 차원이동자 대부분이 한국인인 걸 보면 한국에서 털어온 수준이던데."
[상태창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요.]
"...상태창?"
[지구에는 재밌는 게 많더라구요.]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가 '상태창'이었죠.]
지구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힘을 나눠줄까 연구하던 관리자는 온갖 웹툰과 웹소설을 읽으며 '상태창' 시스템에 대해 알게됐다.
"살다살다 다른 차원에 가서 웹툰하고 웹소설 읽고 왔다는 신은 처음 보네."
[이쪽에는 없던 개념이라서.]
"결국 한국인을 뽑은 이유가 우연히 읽은 웹툰이 재밌어서, 웹소설이 재밌어라는 별 미친 소리 때문이라는 거잖아?"
[나름 재밌었어요. 사이다 요소 같은 거.]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상태창이었죠.]
대상의 능력치와 스킬을 보기 쉽게 정리하고, 새로운 능력을 간편하게 획득하는 데다, 아공간을 활용한 인벤토리까지.
관리자는 상태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저도 상태창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죠.]
물론 기존에 없던 개념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힘이 소모되기 때문에, 지금처럼 꿈속에 봉인된 신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만들 능력은 안 되니까]
[전성기 때 신도들한테서 거둬들인 신성력을 모아서 관리하려고 만들어둔 공간에 이거저거 덧붙인 다음, 스킨을 씌우고 살짝 개조하는 식으로]
그래서 과거에 만들어둔 시스템을 재활용해서 지구인들이 생각하는 상태창 비스무리하게 흉내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존재들은 상태창을 몰랐던 건가."
[지구의 개념을 흉내내서 만들었으니까요.]
신들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설마 오래전에 잊혀진 신이 다른 세계에서 치트키를 베껴 만들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근데 다 좋은데 왜 하필 룰렛입니까? 그것도 확률이 더럽게 낮은...."
[지구인들이 하는 게임에 뽑기가 많이 나와서]
[다들 뽑기 요소를 좋아하는 줄 알았죠.]
"욕하는 건 안 봤냐고!"
텅!
강승현은 분풀이로 큐브를 걷어찼다.
이렇게까지 고증을 지킨 걸 보면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다.
"그보다 상태창을 처음부터 만들 거라면 꿈속으로 구하러 오라는 연락처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봉인 때문에 현실에 간섭하는 건 불가능해요.]
관리자는 꿈속에 유폐당한 것뿐만 아니라, 현실에 자신의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다.
[꿈속 물건을 현실로 내보낼 순 있지만]
[거기에 나에 대한 정보를 담으면]
스르르.
이 메세지와 함께 허공에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책에 [꿈꾸는 자를 만나러 가는 법]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곧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사라져버려요.]
"이것도 봉인의 저주 효과군요. 현실에 정보를 남길 수 없는...."
[상태창도 마찬가지였죠.]
관리자는 상태창에 자신에 대해 기록하려 했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죄다 지워지는 탓에 포기했다.
덕분에 차원 이동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오게 된 것이다.
[저도 여러분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지만]
[봉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모두에게 무척 미안해요.]
"...."
[그래서 저는 제가 도와주지 않아도 이곳에 적응할 수 있는 당신들을, 지구를 선택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으니까.
관리자가 지구인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실제로 몇몇 차원 이동자들은]
[이쪽 세계로 오자마자 기뻐했으니.]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거죠.]
"이유 없이 낯선 세계로 끌려와서 패닉에 빠진 사람도 많았거든요."
강승현은 아즐 대륙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관리자 말대로 상태창 각성과 이세계 생활을 기다려왔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집에 가고 싶어 울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은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튼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죠."
[알았어요.]
지나간 일로 떠드는 건 의미가 없다.
그것도 벌써 3년 전의 이야기니까.
[어쨌든, 저는 여러분과 소통할 수 없으니 여러분이 이곳에 오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차원 이동자를 끌어들이고 대략 6개월 뒤.
드디어 차원 이동자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저는 무척 기뻐하며 사정을 설명하고]
[저를 구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에게 축복을 걸어주려 했어요.]
그러나 관리자는 축복을 걸 수 없었다.
[하지만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던 거죠.]
187. 꿈꾸는 자 3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
[고작 6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교단에 가입한 사람들이 있던 거예요.]
관리자가 손 놓고 기다리는 동안, 아즐 대륙에 적응하던 차원 이동자들은 어떻게 하면 빨리 강해질지, 편해질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업별 추천 스킬트리.txt
-포인트 노가다 지역 공략.txt
-꼭 모아둬야 할 재료 리스트.txt
-각 마을의 주요 시설.txt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한국인들은 극한의 효율충들이라."
그러다 신을 믿기만 해도 능력치가 올라간다는 걸 알게 된 차원 이동자들은 발빠르게 교단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각 교단별 가입 시 얻는 혜택 모음.
-직업별 추천 교단(필수 교단)
-[TIP]개종 패널티 회피하는 방법.
-[TIP]꼼수로 여러 신 믿기[다신교 플레이]
-걸러야 할 교단 리스트.txt
순식간에 이런 정보 집이 만들어졌다.
물론 차원 이동자들끼리만 공유했기에, 아즐 대륙민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었죠.]
차원 이동자들은 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혹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한테 다가가기 시작했다,
[다른 아즐 대륙민처럼 교단에 가입하거나]
[직접 신과 계약해서 사도가 되거나]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관리자가 조사했을 땐 이미 대다수의 차원 이동자들이 교단에 가입한 상태였다.
당연히 축복을 거는 건 불가능했다.
"완전 헛짓거리 하셨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적응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지구를 너무 얕보신 듯,"
그렇게 관리자의 꿈은 물거품될 뻔했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모든 차원 이동자가 교단에 가입한 건 아니더라구요.]
-신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는 사람.
-신을 진심으로 섬기는 게 아니라 그냥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는 사람.
-지구로 돌아갈 생각에 이세계에 미련 두지 않으려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등등.
어느 집단을 가나 그렇지만, 차원 이동자들 중에서도 대세를 따르지 않는 이레귤러들이 존재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줄어갔지만]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저는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죠.]
바로 업적 시스템을 이용한 보상.
관리자는 일정 시간 동안 교단에 가입하지 않거나, 신의 힘을 빌리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 차원 이동자한테 자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냈다.
[업적을 깨고 특별한 증표를 얻은 사람만이]
[이곳에 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셈이죠.]
"특별한 증표? 혹시...."
[맞아요. [★]이 그 증표예요.]
검은 별의 정체는 관리자의 축복 업적을 깬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관리자와 대면할 수 있는 자격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물론 저를 구하려면 굳은 의지는 물론이고]
[충분한 실력을 갖춰야 해요.]
-다른 신을 두려워하지 않기.
-다른 신을 숭배하지 않기.
-단독으로 던전 클리어하기.
-보스 몬스터 솔플하기.
-차원 이동자와의 pvp 승리하기.
-레어 몬스터 솔플하기.
-몬스터 습격 방어하기.
-대형 몬스터 다수 처치하기.
-유니크 아이템 획득하기.
-강인한 정신력 보유하기.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한 사람만이]
[검은 별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죠.]
강승현은 다른 조건은 전부 클리어했지만, 레어 몬스터는 늘 파티원들과 함께 잡은 탓에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검은 별을 손에 넣은 건 딱 세 사람뿐.]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이에요.]
[강승현 힐러]
요컨대 이 검은 별의 의미는 수많은 차원 이동자 중 관리자에게 인정받은 실력자라는 뜻이다.
'설마 둘이나 더 있을 줄이야.'
두 사람 중 하나는 김호정이 말한 '김재형'이라는 남자. 일찌감치 검은 별을 모아 관리자와 접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머지 하나는 누군지 모르겠네.'
분명 실력 있는 차원 이동자는 많다.
하지만 그만한 실력자들은 대부분 다른 신의 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무소속으로 활동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어. 대부분 교단 소속이거나, 그게 아니면 신과 거래했거나....'
그러니 검은 별을 획득했다는 건, 신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엄청난 재능충이라는 뜻이다.
[검은 별을 획득한 차원 이동자는]
[저의 정식 신도로 인정받게 되죠.]
"전 딱히 그쪽 신도가 될 생각이 없는데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도 시스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관리자는 원칙적으로 현실에 간섭할 수 없으나. 검은 별을 획득한 차원 이동자, 자신의 신도 한정으로는 간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 스킬을 얻고 마을로 돌아왔을 때 메시지를 보낸 건가."
[맞아요.]
[신성력이 어마어마하게 소모되어서 자주는 못 하지만요.]
관리자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강승현이 검은 별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검은 별을 얻지 못한 사람에겐 아직도 말을 걸 수 없다고.
"근데 왜 4개나 모으게 한 거죠?"
[워낙 강력한 저주라서]
[축복 하나만으로 막긴 힘들거든요.]
명색이 신적 존재의 저주인 만큼, 완벽하게 무효화하려면 축복을 최소 4번 정도는 중첩시켜야 했다고.
[하지만 검은 별을 4개 모았어도]
['무의식의 저편'을 발견하지 못하면 저를 찾아올 수 없으니.]
[이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도 준비했죠.]
"그게 드림 티켓이군요."
드림 티켓을 사용하면 누구나 확정적으로 관리자를 만나러 올 수 있다.
다만, 자격이 없는 사람은 기껏 관리자를 만나러 와도 잠에서 깨는 순간 꿈속의 일을 잃어버려서 의미가 없다고.
[검은 별을 획득한 사람은 당신이 마지막이에요.]
[나머지 차원 이동자들은 교단에 가입했거나, 여러 이유로 조건을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봉인을 풀 수 있는 마지막 차원 이동자.
관리자가 필사적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지막이라니까 좋네요."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해야 봉인을 풀 수 있죠? 사슬을 때려 부수면 되나?"
퍼억!
차르르르!
강승현은 큐브에 감긴 사슬을 걷어찼다.
하지만 요란한 소리만 들릴 뿐, 풀릴 기미는 없었다.
[이 사슬은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제거하려면 대량의 신성력이 필요하죠.]
물론 관리자는 차원 이동자들을 이용해 포인트라는 이름의 신성력을 긁어모으고 있지만, 대부분 상태창 관리에 쓰이느라 봉인해제용으로는 쓸 수 없다고.
"그 말은 즉...."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며 신성력을 모아주세요.]
파아앗.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강승현의 눈앞에 새하얀 빛이 나타났다.
"이건?"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새하얀 항아리 단지였다.
[이 아이템의 이름은 신성의 그릇.]
[이걸 소지한 채 신성력을 모으면 자동으로 채워질 겁니다.]
강승현은 손에 든 항아리를 보더니,
"지금 나보고 그쪽 사도 노릇을 하라는 뜻입니까?"
무척 불쾌한 얼굴로 큐브를 걷어찼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그쪽을 숭배할 생각도 따를 생각도 뭣도 없는데요."
당연히 관리자의 사도가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차원 이동자들은 언젠가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존재들이니.]
[저를 진심으로 섬겨달라곤 할 수 없죠.]
관리자는 덤덤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그저,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포인트를 모아주시기만 해도 된답니다.]
[그렇게 하면 신성의 그릇이 채워질 거예요.]
즉, 강승현이 환자를 치료하기만 해도 신성의 그릇을 채울 수 있다는 소리다.
"뭐, 그 정도는 괜찮죠. 그래서 얼마나 걸립니까?"
[한 번에 1포인트를 번다고 쳤을 때]
[그릇으로 들어오는 건 0.05포인트 정도니까]
[다 채우려면 대략 30년 정도?]
"뭐? 30년?"
문제는 신성력이 모이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이 방식으로 그릇을 채우려면 수십 년은 지나야 한다는 점.
[생각보다 금방이네요.]
"그건 그쪽 기준이고!"
영생을 사는 신적 존재에게 수십 년은 찰나의 시간이지만, 평범한 인간에겐 그렇지 않았다.
"야매 힐러는 안 그래도 포인트 벌기 힘든 직업인데... 뭔가 다른 방법 없습니까?"
[다른 방법이요?]
"신성력 빠르게 모으는 방법이요."
[음.]
잠시 생각하던 관리자는 메시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포인트는 벌 수 없지만]
[신성력만 빠르게 벌 방법이 있긴 해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줬어야죠."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 번째는 제물을 바치는 것.
다른 생명을 죽여 얻어낸 영혼을 바치면, 대량의 신성력을 뽑아낼 수 있다.
하급 몬스터보단 상급 몬스터가 좋고.
상급 몬스터보단 인간을 바치는 게 좋다고.
[물론 이 방식은 내키지 않겠죠.]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런 미친 짓은 아일이나 하는 거지."
두 번째는 교단을 세우는 것.
교단을 세워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전도당한 신도들한테서 매일 신성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차원 이동자는 워낙 강한 존재들이라, 신도를 모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물론 당신은 누군가를 섬기는 걸 싫어하니]
[이 방식은 고려하지도 않겠죠.]
"사기 치는 거라면 해볼 만한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성유물, 성상, 성화와 같이 신성력이 담긴 아이템을 파괴하는 것.
한마디로 다른 신의 신성력을 강탈하는 방식이다.
"성유물을 부수라고?"
[이 방식을 사용하면 한 번에 많은 신성력을 모을 수 있지만]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하죠.]
성유물을 부순다는 건 그것의 주인, 신적존재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다.
그냥 대놓고 도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 짓을 벌였다간 교단의 추적은 물론,]
[신들의 노여움을 살 테니까요.]
"그래서 [검은 별]을 부여할 때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군."
신과 교단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
어지간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그런 차원 이동자는]
[상대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애초에 성유물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걸 부숴야 하는 데다 교단의 추적까지 피해야 한다니.
"뭐 이런 빡센 퀘스트가 다 있어."
[그래서 거절할 건가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절하겠지만.
"그럴 리가."
남 엿먹이는 걸 무척 좋아하는 인간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당연히 승낙해야죠."
188. 애초에 당신은
[역시 당신을 믿길 잘했네요.]
[당신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어요.]
강승현의 대답을 들은 관리자는 무척 기뻐했다.
인간이 신적 존재를 상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제안을 승낙했기 때문이다.
"착각하진 말고. 당신 좋으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물론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그냥 재밌을 거 같아서 승낙하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아즐 대륙에서 가장 싸가지 없는 신적 존재를 엿 먹일 기회.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건 이래저래 페널티가 컸기 때문이지만, 그걸 책임질 인물이 생겼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 덕분에]
[봉인에서 풀려날 수 있다면]
[전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거든요.]
관리자는 뭐가 됐든 봉인에서 풀려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 같다.
자신을 조롱하건, 비웃건, 말건.
[어쩌면 저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일지도 모르겠네요.]
[좀 더 빨리 눈치챘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재수 없군."
강승현은 기분 나빠하며 혀를 찼다.
[꼭 필요한 설명은 전부 전달한 것 같은데.]
[더 궁금한 게 있나요?]
"딱히 없는... 아."
메시지를 보던 강승현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쭉 궁금했는데."
[무엇을요?]
"저는 왜 마력을 사용할 수 없죠?"
어쩌면 가장 먼저 물어봐야 했던 질문.
자신은 어째서 개나 소나 가지고 있는 마력을 다룰 수 없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거든요. 제가 아즐 대륙 토착민이 아니라 지구 출신이라 마력을 쓸 수 없는 거라면, 다른 차원 이동자들도 마찬가지여야 할 텐데."
적어도 강승현이 아는 차원 이동자 중에는 단 한 명도 없다. 마력 사용은 차원 이동하곤 관계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잠시 말이 없던 관리자는,
[지금 말씀드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뭐라 말할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놓고 대답을 회피하는 발언이다.
"...그게 무슨 소리죠?"
[어차피 스태미나를 쓸 수 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나요?]
"말 돌리지 말고."
텅!
강승현은 얼굴을 찌뿌리며 큐브를 걷어찼다.
[자세히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말할 수 없네요.]
관리자는 강승현이 마력 대신 스태미나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걸 설명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정이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몸이니까.]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몸?"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관리자의 말에 의하면 강승현은 체질적으로 마력을 다룰 수 없는 것 같다.
[딱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당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 있어요.]
"...."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뿐이네요.]
결국, 관리자는 떡밥만 살살 뿌리고 진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정 알고 싶다면 스스로 찾아봐야겠지만,]
"스스로 찾아보라는 건, 이유를 아즐 대륙에서 찾을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저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때론 모르는 게 약이잖아요. 그렇죠?]
"글쎄요. 저는 아는 게 힘이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강승현은 빈정거리며 관리자의 말을 반박했다.
이 짧은 대화만 봐도 두 사람의 사상이 정반대라는 걸 알 수 있다.
[뭐, 당신이 제 봉인을 풀어낸다면]
[그때는 대답해드릴 수 있지만요.]
"이 자식이."
역시 관리자는 재수가 없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큐브도 걷어찼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마세요.]
[그 특성 때문에 이득 본 일도 많잖아요.]
"손해 본 적도 많거든."
마력이 없는 특성 탓에, 강승현은 마력을 주입해야 작동하는 아이템을 쓰려면 비싼 마력 포션을 낭비해야 한다.
"물론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거면 된 거죠.]
[당신은, 음.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더 물어볼 건 없나요?]
"딱히 없네요. 시키는 대로 이거나 꽉 채워드리죠."
그 말고 함께 강승현은 손에 쥐고 있던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꿈속이라 그런지, 원래 그런 건지 무게가 전혀 없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릇에 신성력을 많이 모을수록]
[이래저래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에요.]
[뭐, 당신에겐 필요 없을지도]
"어쩌라는 거야."
강승현은 메시지를 어이없다는 듯 보면서,
파아아앗!
아까 받은 섬광체를 소환했다.
섬광체는 여전히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럼 슬슬 꿈에서 깨보실까."
[벌써 가시게요?]
그 말과 함께 강승현의 앞에 티 테이블이 생겨났다.
이어서 허공에 찻잔과 찻주전자가 나타나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차 한 잔 정도는 하고 가시지.]
"차라리 하비랑 차 마시는 게 낫겠네요."
하지만 강승현은 보란 듯이 무시했다.
[아쉽네요.]
[바깥 이야기가 듣고 싶었는데.]
"나 말고 다른 놈들한테 물어보시죠."
같이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싫은데 차 같은 걸 마실 리가.
"아무튼, 이걸 사용하면 바로 일어날 수 있다는 거지?"
[네.]
[당신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릴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당신, 이름이 뭐죠?"
[키워드 제한 때문에 알려드릴 수 없네요.]
"그럼 어쩔 수 없고."
푹!
강승현은 자신의 손을 섬광체로 찔렀다.
꿈속이라 그런지, 이 단검의 특징인지, 고통도 없는데도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당신은]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걸요.]
"뭐?"
그걸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두워졌다.
-"...."
강승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숙소 침대 위였다.
시간을 확인하자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꿈에서 깼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베개 밑에 넣어둔 드림 티켓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
'이거 일회용 아이템이었냐고.'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다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
'빠짐 없이 기억나는 걸 보면 관리자의 축복이 효과가 있긴 한가 보군.'
꿈속 세계에서 관리자와 만난 것과, 이런저런 진상을 알게 된 것,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선 봉인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까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꿈 속에 틀어박혀 있을 줄이야.'
이러니 아무리 돌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지.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관리자가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도 모르고... 수많은 차원이동자들이 헛고생을 하고있군.'
강승현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로 확실해진 건, 관리자는 확실히 차원 이동자의 협력자라는 점.'
관리자의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오직 차원 이동자뿐. 아즐 대륙민들은 불가능하다.
'덕분에 아즐 대륙의 모두가 차원 이동자를 적으로 돌려도 단 한 사람, 관리자만큼은 아군일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이제 관리자를 완전히 믿어도 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지. 그 자식은 믿을 게 못 돼.'
강승현은 관리자와 만남을 끝내고 확신했다.
녀석은 뭔가 꿍꿍이를, 중요한 걸 숨기고 있다고.
'일단 꿈속에 봉인당했고, 그걸 풀어달라는 이유로 우릴 불러왔다는 건 알겠어.'
여기서 문제는 '왜 봉인당했는가'다.
관리자는 분명 신적 존재한테 배신당해서 이런 꼴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상대가 하나가 아닌 여럿.'
아무리 신이라도 신적 존재들과 싸워서 버티는 건 쉽지 않다. 보통은 흔적 하나 안 남기고 소멸해서 수백, 수천 년이 지나야 간신히 부활할 수 있다.
'하지만 관리자는... 신 여럿한테 다굴당한 주제에 겨우 봉인으로 끝났어.'
당시엔 상황이 상황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이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다수의 신들이 달려들어도.
-봉인시키는 게 최선인 존재.
-심지어 아즐 대륙에서 완전히 잊혀진 상태라
-전성기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약해짐.
즉, 관리자는 지금 아즐 대륙에서 현역으로 뛰는 신들도 쉽게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뭣보다 봉인된 상태에서도 다른 차원에 간섭해댔지. 꿈을 통해서라지만... 그 자식, 절대 평범하게 잊혀진 신은 아냐.'
애초에 관리자의 상태만 봐도 그렇다.
녀석을 속박한 검은 사슬은 관리자를 꿈속에 붙잡아두고, 관리자의 정보가 밖으로 새어가는 걸 철저하게 막고 있다.
'절대 풀려선 안 되는 봉인,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막아 놓아야 하는 봉인이라는 느낌이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관리자를 가둬놔야 한다는 집념과 의지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였길래 다른 신들이 이렇게까지 파묻으려고 하는 거지?'
정작 관리자는 자신이 봉인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키워드 제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간략한 설명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에 대해 뭔갈 숨기는 듯한 태도도 그렇고.'
관리자를 만나서 많은 궁금증을 해결했지만, 그만큼 새로운 궁금증이 쌓였다.
'지금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태인 데다, 마력을 쓸 수 없는 건 그것과 관련 있어.'
아즐 대륙에 오기 직전의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건은 지구에서 일어난 일과 관계 있다는 소리다.
'이런 중요한 걸 알려주지 않고 협상용으로 쓰는 걸 보면... 그쪽도 날 완전히 믿지는 않는 모양이군.'
강승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어설프게 동료인 척 구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비즈니스 파트너인 게 낫다.
'애초에... 말투부터 수상해.'
보통 신적 존재는 인간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낮잡아보거나 내려다보는 식의 싸가지 없는 말투가 대부분이다.
'위즈멜처럼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 신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쪽은 확실히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신이었으니.'
하지만 관리자는 그렇지 않다.
정중하고 친절한 말투로 말을 걸어오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연기에 가깝지. 정확하게는... 상대방한테 호감을 사기 위한 컨셉질.'
-성격이 좋지도 않으면서 존댓말을 쓰는 놈은 십중팔구 또라이다.
라는 게 강승현의 생존 철학 0번.
결론.
강승현은 관리자가 차원 이동자의 아군이긴 해도, 결코 신뢰할 만한 존재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거기다 마지막에 본 메시지....'
강승현은 꿈에서 깨기 직전에 본 메시지를 떠올렸다.
[애초에 당신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걸요.]
'나는 관리자 같은 신적 존재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는데. 이미 이름을 알고 있다니?'
강승현은 관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녀석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지만,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엉뚱한 대답만 돌아왔다.
'말을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강승현은 한숨을 쉬며 스태미나를 마셨다.
'일단, 꿈에서 있었던 일을 김호정 씨한테 설명하고 자세한 건 그다음에....'
똑똑똑.
그때였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강승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189. 떠날 때가 됐다.
"아, 힐러님 접니다. 직스예요."
"들어오세요."
문밖에 있던 사람은 직스였다.
문을 열어주자 무척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이른 시간부터 죄송합니다. 어제 일로 많이 피곤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익숙해요."
원래 야매 힐러로 살다 보면 낮과 밤의 구별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그게...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는 마차, 말 골렘 준비가 끝났습니다."
직스는 가져온 팸플릿을 넘겨주었다.
인형 공방 측에서 준비한 마차는 말 골렘 4마리가 이끄는 4인용 마차로, 몬스터 수십 마리의 공격도 거뜬히 버텨낼 수 있는 최상품이었다.
"이 마차라면 지금의 붉은 숲도 쉽게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강승현은 언제든 말만 하면 트라코티를 떠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처음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겨우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꼭두새벽부터 온 건 아닐 테고."
강승현은 팸플릿을 돌려주며 말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아침이나 점심에 해도 늦지 않다. 그런데 굳이 이 시간에 찾아왔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직스는 이런 일로 남이 자는 걸 방해할 놈은 아니지.'
보나 마나 다른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온 것같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죄송합니다, 실은 스승님 때문에...."
"그럼 그렇지."
당연하지만 하비였다.
'내가 아직 치료 안 해줬으니까.'
아직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빨리 치료해달라고 재촉하러 온 모양.
물론 그냥 재촉하면 안 들어줄 것 같아서 잠도 안 자고 밤새 마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모른 척하면 안 되겠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스승 하나 잘못 만난 탓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녀석이다.
-"오늘은 살짝 쌀쌀하네요."
"그동안은 포근했는데 말이죠."
모험가 조합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느껴졌다. 이 또한 위즈멜의 가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마을 복구하느라 바빠보이군.'
마을 곳곳을 둘러보자 흙인형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방벽을 쌓고 있었다.
"인형 공방 상태는 괜찮나요?"
"네. 저희 공방은 외진 곳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큰 피해가 없었어요."
확실히 한참 복구중인 다른 건물과 달리 인형 공방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비 어르신, 저 왔습니다."
강승현은 밝은 얼굴과 밝은 미소로 인사하며 인형 공방으로 들어갔다.
하비는 무척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눈을 떴다.
그사이 잠깐 잠들었던 모양이다.
"약속대로 마을 복구에 모든 걸 쏟아붓는 중이고, 네가 타고 갈 마차까지 만들었어.... 잠도 안 자고!"
"수고하셨어요. 계속 힘내세요."
"하라는 건 다 했잖아! 빨리 내 몸 고쳐놔!"
하비가 분노한 얼굴로 날뛰었다.
물론 몸을 움직일 순 없으니 소리만 지르면서.
"알았어요. 바로 고쳐드릴게요."
[영혼 간섭★]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하비의 몸속에 깃든 영혼이 드러났다.
[영혼에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어제 응급처치한 덕에 겉보기엔 멀쩡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에 금 간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데다, 약간의 충격만 가해져도 다시 부서지고 뒤틀릴 정도로 약해진 상태는 그대로였다.
[호:루스의 손]
샤아아.
강승현의 배후에서 나타난 반투명한 해골 손아귀가 하비의 영혼을 움켜쥐었다.
[적출]
그 상태로 영혼을 뽑아내자 하비가 구겨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보단 낫지만 여전히 불안정하죠?"
"제발 이 짓거리 좀 관두면 안 될까!"
또 맨눈으로 자기 영혼을 보게 된 하비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어르신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제가 응급처치만 해서 그런 거거든요."
강승현은 부서진 영혼을 맞춰두기만 했을 뿐, 아직 하나로 이어 붙이진 않았다.
'뭐, 사실 부서진 영혼도 제대로 맞춰두면 자연 치유가 되긴 해.'
부러진 뼈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붙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 적어도 두세 달은 꼼짝 못 하고 누워 있어야 해.'
거기다 자연치유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스킬을 과하게 사용하려 하면 수리한 영혼이 다시 망가지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게... 이 녀석이지.'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영혼의 정수!'
영혼의 정수는 영혼을 이루는 물질 중 하나로, 부서진 영혼을 다시 이어 붙일 때 사용된다.
영혼의 정수를 얻기 위해선 물과 마력을 일정 비율로 섞어 만든 마력수에 영혼을 담가두거나, 영혼을 깨트렸을 때 흘러나오는 정수를 받는 수밖에 없다.
단점은 전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후자는 만들 때마다 영혼을 소모해야 한다는 점이다.
'뭘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설마 인벤토리에 넣어뒀을 줄이야.'
다행히 미래를 내다본 위즈멜이 인벤토리에 슬쩍 넣어둔 덕에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센스 있어서 좋네. 관리자도 보고 배우면 좋으련만.'
위즈멜이 준비한 영혼의 정수는 모두 3병.
딱 하비의 영혼을 수리할 때 필요한 양이다.
'우선 영혼의 정수를 [살포]하고.'
[살포]를 발동하자 오묘한 빛깔의 오오라가 퍼져 나와 하비의 영혼을 감쌌다.
'이 상태에서 부서진 영혼을 복원하면 되지만... 관련 스킬이 없으니까 늘 하던 대로 야매로 할까.'
스르르르.
[실뽑기]
영혼의 정수를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강승현은 [봉합]을 발동해 부서진 영혼을 꿰매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원래 평범한 바늘은 영혼을 건드릴 수도 없지만, [영혼 간섭★]을 사용한 지금은 얼마든지 꿰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건지."
자기 영혼을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꿰매는 광경을 봐야 한다니. 하비는 고문도 이런 고문이 또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파바바바밧!
하비의 기분이야 어찌 됐건, 강승현은 그의 영혼을 깔끔하게 [봉합]했다.
영혼이 완벽하게 수리된 건 물론이고,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다 됐습니다."
"...."
마지막으로 영혼을 몸으로 되돌려놓자, 꼼짝도 하지 않던 하비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 해괴한 짓거리라고 생각했는데 효능은 확실하구만."
"말했잖아요. 고쳐드린다고."
"이이익,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너 때문에 어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그럼 도로 원상복구 시켜드릴까요?"
"아아니!"
하비는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던 게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할 일 다했어. 한숨 잘 거야."
"그러세요."
"마차 관련해선 직스 녀석한테 물어보라고."
하비는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결국, 감사 인사는 끝까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스승님 대신...."
"괜찮아요. 멘탈 깨져서 징징거리는 것보다는 낫죠."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한결같이 쓰레기 마인드인 걸 보면,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이다.
"마차는 준비됐다고 했죠?"
"네. 출발 날짜를 말씀해주신다면 맞춰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출발하죠."
"...지금이요?"
직스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끝났잖아요."
아직 마을 복구나 이런저런 일이 남았지만, 그건 트라코티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외부인은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맞다.
'어차피 여기는 성유물도 없고 말이지.'
위즈멜의 존재가 소멸함과 동시에 그녀의 힘이 깃든 성유물은 평범한 아이템으로 돌아갔다.
찾아서 부숴봤자 신성의 그릇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벌써 떠난다니 아쉽지만... 알겠습니다."
직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험가 조합으로 돌아가실 거죠? 그쪽으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다른 사람들한테 인사할 겸, 아직도 자고 있을 동료를 데려올 겸.
강승현은 다시 모험가 조합으로 돌아갔다.
-"벌써 떠나겠다고?"
"아직 제대로 대접도 못 해드렸는데...."
당연히 마센과 레베카는 무척 서운해했다.
"바쁘지 않다면 좀 더 머무르지."
"트라코티 명물 맛집 소개도 못 해드렸고, 트라코티 명물 기념품 가게도...."
"원래는 하루만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래 있었어요."
위즈멜 교단 사건을 해결하느라,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며칠 동안 발이 묶였다.
새로운 정보도 얻었으니, 떠날 때가 됐다.
"그렇군요...."
"하긴, 모험가는 돌아다녀야 하는 족속이니."
마센은 피식 웃으며 뭔가를 꺼냈다.
"지금까지 일한 것에 대한 보수는 모험가 조합에 입금해놨어."
"감사합니다. 그건 뭔가요?"
"지부장 추천장."
일회용이긴 하지만, 다른 마을 모험가 조합에 제출하면 더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A급 숙소는 물론, 최고급 식사에 각종 서비스, 심지어 최상급 모험가 전용 프리미엄 VIP숍까지.
여기에 모험가 평판이 올라가는 건 덤.
"그래요?"
강승현은 지금까지 온갖 일을 해결했지만, 야매 힐러여서 그런지 아니면 모험가 조합에 어그로를 많이 끌어서 그런지 추천장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인드 마을에 가서 써먹으면 재밌겠는데.'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추천장을 받았다.
"이제 남은 건 힐러 문제인가...."
"트라코티가 완벽한 안전지대가 아니게 됐으니, 치유 재단에 연락해서 치료소를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좋겠지. 다른 신을 믿는 교단은 거북하니까."
"인형 공방이 협조한다면 치료소 짓는 건 일도 아니겠죠."
떠나기 전, 마센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고.... 이제 겨우 8시 반인데 벌써 출발한다고?"
"뭐 어때요."
김호정이 하품을 하며 조합 로비로 내려왔다.
"좀만 더 묵었다 가면 안 돼?"
"잘 거면 마차에서 자세요."
"그 좁고 덜컹거리는 곳에서 무슨 수로 잠을 자."
"4인용이라 넓고, 최상급 마차로 준비했다고 했으니 흔들림 방지 스킬은 당연히 걸어놨죠."
"나 원... 그래도 말이지."
"힐러님,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직스가 마차를 끌고 왔다.
말 골렘 마차를 끌기 위해선 인형술을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직스가 마부 일까지 담당하게 된 모양이다.
"레베카 씨는 이제 어쩔 건가요?"
"모험가 일은 관두고 마을에 남을 거예요."
"남으시게요?"
"네! 인형사 일도 배우고, 붉은 숲도 가꾸면서.... 아차, 이제 이름이 바뀌었죠?"
레베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특유의 붉은 빛이 사라진 숲은 더 이상 붉은 숲이라 부를 수 없게 됐으니, 마을 사람들은 논의 끝에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위즈멜의 숲으로."
"그렇죠. 위즈멜의 숲."
사라진 수호신을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듯, 숲의 이름은 만장일치로 '위즈멜'이 되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들 잘 지내라구."
"조심해서 가세요!"
"이 주변에 올 일 있으면 꼭 들러!"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탔다.
"때깔이 좋긴 좋네. 최상급은 최상급이구만!"
"출발합니다."
직스의 목소리를 신호로, 말 골렘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다.
190. 하인드 마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