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묻고 싶은 것 1
드르륵, 탁.
"회의가 길어질 것 같네."
"젠장.... 오늘도 정시 퇴근은 글렀구만."
리웬 지부장이 조합 직원들과 쓰레기 같은 회의를 하는 동안, 병사들은 방 밖을 지키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험가 조합에 소속된 지부장 직속 병사단이다.
"돈만 아니었어도 당장 때려치우는 건데."
"그놈의 돈이 웬수지~. 나 이번에 둘째 태어나서 사직서 태웠잖아."
"어제는 구긴 종이, 오늘은 술잔.... 내일은 뭐가 날아오려나."
"이왕 던지실 거면 포션 같은 거나 던지면 좋을 텐데."
담당하는 업무는 지부장을 호위하는 일이나, 하필이면 무능 쓰레기 부패 지부장을 상사로 모시는 탓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상사 잘못 만나서 우리만 고생이네."
"내 말이."
"야, 맥코이. 아까 맞은 곳은 괜찮아?"
"괜찮습니다. 제 불찰로 인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날아오는 술잔에 처맞았던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광경이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이제는 익숙한 편이다.
"뭐, 피하면 개지랄할 테니 한 대 맞고 끝내는 게 낫지. 그래도 욕 안 하는 건 대단하지만...."
"그건 그렇고. 리웬 님은 어쩌려고 교단을 끌어들인 거지?"
"맞아.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이래저래 들뜬 리웬 지부장과 달리 병사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승현을 잡기 위해 교단을 끌어들이는 것.
돈 한 푼 쓰지 않고 조합의 골칫덩이를 처치할 수 있으니 언뜻 느끼기엔 좋은 아이디어지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고위 사제들이 파견 오면 안 그래도 거대한 교단 놈들이 더 커질 거 아냐."
"지금도 아슬아슬한 판인데, 여기서 교단 세력이 더 강해지면...."
병사들은 교단의 힘이 커지는 걸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양쪽 세력의 힘이 비슷해서 협력 관계지만, 어느 한쪽이 더 강해진 뒤에도 계속 협력 관계로 남아 있을 진 알 수 없다.
"또 우리만 고생이지."
"야, 그래도 강승현만 하겠냐? 그 친구는 아이베르 교단에 찍힐 판이잖아."
"하긴.... 그냥 사제도 빡센데 고위 사제를 어떻게 이겨?"
모든 병사들이 강승현을 동정하는 와중에.
"그렇지만, 강승현 모험가는 언데드화 한 벨로토산개 수십 마리를 쓰러트린 인물입니다."
술잔에 맞은 병사, 맥코이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성력 없이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교단이라도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겠죠."
"하긴, 우리도 언데드 잡을 땐 교단한테 협력 요청하는데 말이야."
맥코이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절대 만만하게 봐선 안 될 상대다.
"거기다, 저번에는 강승현 모험가가 사도와 일대일로 싸워서 이겼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뭐? 사도를 일대일로 이겨?"
"그건 좀 허풍 아냐?"
"파티에 동행한 아이베르 교단 사제의 증언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인간 맞냐고, 진짜!"
이런 이유로 하인드 지부 직원들 사이에서 '힐러 일할 때' 강승현의 평판은 바닥이지만, '힐러 일 안 할 때' 강승현의 평판은 상당히 높았다.
리웬 지부장은 양쪽 다 싫어하지만 말이다.
"힐러 안 하고 그냥 모험가로만 살아도 충분할 텐데 말이지."
"돈 벌려고 힐러짓 하는 게 아니라 취미로 힐러짓 한다잖아."
"진짜 개또라이 힐러라니까."
이들은 강승현이 힐러로 사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만큼 그저 취미 생활,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힐러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50%는 맞는 말이다.
"누가 그러는데, 사실 강승현 모험가는 보유한 마력이 너무 많아서 마력 포션을 마실 필요가 없다더라?"
"리얼리?"
"그렇다니까? 그래서 진심을 보일 때만 마력 포션을 마신대."
"그동안 스태미나 포션을 마신 건, 너 같은 걸 상대로는 마력 포션을 쓸 필요도 없다는 어필이었나!"
"그냥 스태미나 포션에 미친 놈 아냐?"
"그게 아니라더라. 사실 스태미나 그렇게 안 좋아하는데, 지부장님이 눈치 없게 스태미나 포션 사줘서 빡친 거래."
이렇듯 강승현에 대한 온갖 소문이 퍼져나가는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이었다.
"그럼 그 소문도 사실 아냐?"
"무슨 소문?"
"왜 있잖아, 2년 전 '즈마이레' 교단 본거지를 괴멸시킨 장본인이라는 소문."
즈마이레 교단은 한때는 잘나갔으나 지금은 완전히 몰락해버린 교단 중 하나로, 아직까지 몰락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언급되곤 했다.
"마침 강승현에 대한 기록이 2년 전까지밖에 없다는 것도 그렇고. 뭔가 그럴싸하지 않아? 알고 보니 교단을 작살 내고 신분 세탁했다거나...."
연갈색 머리의 병사는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냈으나.
"뭐? 말이 되냐? 그냥 헛소문이겠지."
"맞아, 이단심문관도 혼자서 교단 박살 내는 건 못 한다고."
"지금은 흔적도 안 남았지만, 전성기 '즈마이레' 교단은 교단 랭킹 10위였어. 그런 거대 교단이 모험가 한 명한테 망할 리가 없잖아."
"차라리 강승현이 카마르 영주를 따까리로 삼았다는 말을 믿고 말지."
대다수의 병사들은 헛소문 취급하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우리 몫도 미리 주문해 놨겠죠?"
"그럴 거야. 말은 안 했지만 직스 군은 내 마음을 알아줄 테니까."
"안 시켜놨겠네요."
한편, 그 시각.
강승현 일행은 즐거운 술자리를 기대하며 주점으로 향한 참이었다.
"아, 강승현 힐러님."
"응? 둘 다 왜 밖에 있어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야 할 직스가 주점 밖에 서 있었다.
옆에 쭈그려 앉은 검은 짐승은 덤.
"펫 출입 금지래요."
"출입 금지요?"
"정확하게는 가게에 들어오는 건 되는데, 다른 손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케이지에 넣어둬야 한다고."
"^%@%#$▽...."
검은 짐승은 꼬리를 축 내리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진 못해도 자기 때문에 주점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건 눈치챈 모양이다.
"참, 여관도 케이지 없으면 숙박 못 한 대요.... 어쩌면 좋죠?"
"{나는 괜찮으니까, 어디 마구간에 묶어두고 너희끼리 마시러 갔다 와....}"
"{그럼 우리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요.}"
역시 답은 야외 취침인 것인가.
강승현과 직스가 고민하던 참이었다.
"다들 내 탐정 사무소를 잊었군. 난 처음부터 김 형을 거기서 재워줄 생각이었다구."
"알렉 씨, 사무소가 있었어요?"
"탐정이니까 말이지."
"그럼 술도 거기서 마시면 되겠네요."
직스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알렉을 뒤따라갔다.
물론, 그 기대는 5분 뒤 사무소의 정체가 천막이라는 걸 알게 되고 박살 났지만 말이다.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건배!"
"오늘 다들 수고하셨어요."
알렉의 천막 사무소에 도착한 세 사람은 사 온 술과 안주를 펼쳐 두고 술 파티를 벌였다.
"{괴물이 됐어도 배는 고프고.}"
내내 사족보행 폼으로 펫 행세를 하던 검은 짐승도 천막 안에선 다시 이족보행 폼으로 변해서 술을 마셨다.
"{술은 참 맛있구나....}"
"{맘 편하게 있으세요.}"
아무래도 보는 사람이 없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진 듯했다.
"가만, 지금 우리가 4명이니까... 정식 파티로 등록할 수 있지 않아?"
술을 들이키던 알렉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모험가 조합 규정상, 정식 파티로 인정해주는 그룹의 최소 인원은 4명이다.
참고로 2~3명 그룹의 정식 명칭은 팀.
"보통 6명이지만, 최소 인원은 4명이죠."
"그렇지?"
멤버를 모아서 정식 파티를 구성하면 모험가 조합 서비스 이용시 할인을 받거나 정식 파티 전용 의뢰를 받는 등, 지금보다 더 나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애초에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파티를 짜고 다니기 때문에, 솔플을 선호하는 강승현 같은 일부 차원이동자들이 특이 케이스다.
"파티 만들 거지? 나 이거저거 생각해둔 파티명 많아. 몬스터 버스터즈라든가."
"그건 좀."
"아.... 저는 힐러님 파티원이 아니에요. 몇 번 말했지만, 모험가도 아니라구요."
말을 듣던 직스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보니 강승현 일행과 동행 중이지만, 그의 본업은 마을 청년 1...이 아니고 인형사다.
"이참에 모험가로 전향하라구? 자네는 자질이 있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알렉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권유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요 며칠 동행한 것도 힘들었는데 이걸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니.... 무슨 고행이에요. 저는 죽어도 못해요."
"하비 어르신을 스승으로 섬기는 것에 비하면 모험가로 사는 게 편할 것 같은데요."
"그건 스승님의 작품을 보면서 견딜 수 있어요."
"아, 예...."
강승현은 슬쩍 직스 곁에서 멀어졌다.
직스는 눈치채지 못하고 안주와 함께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인형사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도 있고, 지금 트라코티 상황이 상황이라, 마을을 오래 떠나기가 그렇네요."
"하긴, 거기 지금 개판이죠."
"스승님이 부탁한 물품도 전부 구했으니 내일 아침에 바로 돌아가려구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그는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했다.
헤어지는 건 섭섭하지만, 원래 떠나는 사람은 잡지 않는 게 더 멋있는 법이다.
"아쉽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지. 조심해서 돌아가라구."
"뭐, 그 마차라면 혼자 돌아가도 거뜬하겠지만요."
"그럼 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직스는 천막을 떠나 여관으로 돌아갔다.
내색하진 않았어도 역시 천막에서 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음, 직스 군도 가버렸고... 김 형은 구석에서 몸 말고 자고 있으니 슬슬~ 술판 접어야 하나?"
"우리끼리 마시면 되죠."
"그렇지, 그렇게 말해야지!"
강승현은 술잔에 스태미나 포션을 붓고, 알렉은 여러 술을 마구 섞어 들이키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맘 편하게 떠들어도 되니까요."
"직스군은 좋은 친구이지만, 이쪽도 사정이 있으니...."
사실, 두 사람은 줄곧 직스가 떠나거나 잠드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상태창이나 차원이동자, 지구에 대한 정보는 아즐 대륙민에겐 알려줄 수 없으니까.
"아까도 말했듯, 제가 알렉 씨한테 이래저래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이체동심! 이쪽도 마찬가지야."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이 동시에 [신의 소통]을 껐다.
"{그럼 간단한 정보부터.}"
"{하나씩 교환해보자고.}"
211. 묻고 싶은 것 2
차원이동자들끼리 교환하는 정보는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이건 '변이체'에 대한 정보입니다.}"
"{이쪽은 '르마티아 검은 연꽃'에 대한 정보. 생각보다 수요가 많더라고.}"
"{인간에게 기생하는 '물결 기생초'에 대한 정보도 넣어 놨어요. 어지간해선 다시 나타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발견한 몬스터 정보, 획득한 아이템의 설명이나 무기 제작법, [업적] 조건, 상태창 시스템 해금요소 등등.
"{그거 알아? 듣자 하니, 물을 따르면 다른 액체로 바꿔주는 컵이 있다더라고?}"
"{술 마시려고 알아본 거 아닙니까.}"
"{내가 무슨 하루 종일 술 생각만 하는 줄 알아? 물론 맞아서 할 말은 없긴 한데, 편견이야 그거.}"
"{편견이 아니라 자기소개 아닌지?}"
혹은 이런 식의 짤막한 이야기들.
대체로 술집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하는 편이다.
"{아무튼, 그런 컵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알아두면 언젠간 도움이 될지도?}"
"{그런 컵이 진짜 있다면 오염된 물을 마실 물로 바꿀 수 있겠죠.}"
"{그렇지. 물을 피로 바꿔서 수혈용으로 쓴다거나.}"
'혈술사나 할 법한 발상이군.'
하나하나는 사소한 것들이지만, 이런 정보가 쌓이고 쌓이면 아즐 대륙에서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서부 지역 도시 '카마르'에서 있었던 마력 유출 사고를 정리한 자료예요.}"
"{그럼 나는 동부 지역 '라에크 게를히' 상황에 대한 보고서. 그쪽 오염지대는 여러 의미로 끔찍하니까 말이지.}"
특히,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에 대한 정보는 매우 인기 있다.
"{조합 놈들이 하도 숨기는 게 많잖아. 차라리 차원이동자한테 듣는 게 낫지.}"
"{우리는 이래저래 큰 사건에 휘말릴 일이 많으니까요.}"
모험가 조합을 통해서도 간단한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지만, 중요한 정보나 대중에게 알리기 곤란한 이야기는 싹 지워 버리는 놈들이라 결정적일 때 도움이 안 되니까.
"{아, 진홍의 마탑 쪽 정보랑 같이 보면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을걸요. 필요하신가요?}"
"{알아둬서 나쁠 건 없지. 칠흑의 마탑 정보랑 교환하자구.}"
"{좋죠. 마탑 내부 정보는 생각보다 구하기 힘드니까요.}"
"{아, 내가 돌아다니면서 평가한 아즐 대륙 남동부 식당 리스트도 덤으로....}"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서부에서 주로 활동한 강승현과 달리 알렉은 칠흑의 마탑이 세워진 아즐 대륙 동부, 그중에서도 남동부 지역 정보를 주로 꿰고 있었다.
"{뭐, 가장 심각한 건 남부 쪽이지만 말이야. 거기는 오염지대 확산이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그쪽 오염은 사막화 현상이었죠.}"
"{맞아, 최근 몇 년 사이 풀 한 포기 안 자는 땅으로 변한 지역이 한둘이 아니래.}"
거기다 알렉은 자칭 탐정인 만큼, 의뢰인을 통해 다른 지역의 정보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서부도 상황이 안 좋아요. 그쪽은 아예 기사단장이 오염지대의 영향으로 쓰러졌다던데.}"
"{개판이로구만.}"
"{오죽하면 오염지대를 가리켜서 '신에게 버려진 땅'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어요.}"
현재, 차원이동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정보는 아즐 대륙 오염지대에 관한 정보다.
강승현 일행이야 서부 변두리 지역에 터잡고 어슬렁거리지만,
"{뭐, 아무렴 어때. 우리 사이에선 가장 핫한 지역인데.}"
"{뭐, 요즘은 귀찮아서 안 간 지 꽤 됐지만. 나만 해도 아즐 대륙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오염지대를 정복하는 게 목표였으니....}"
사실 차원 이동자들이 가장 주목하고 그중 최상위 랭커들이 몰려 있는 곳은 아즐 대륙 오염지대였기 때문이다.
-땅이 썩어들어가며 독소가 뿜어져 나오는 서부의 테헤스.
-뜨거운 열기로 인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땅으로 변해가는 남부의 파메스.
-수십, 수백 년째 광기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는 동부의 라에크 게를히.
-온도가 너무 내려간 나머지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죽음의 혹한 지대가 된 북부의 지르니예.
이렇듯 아즐 대륙 오염지대는 평범한 사람은 접근만 해도 죽는 위험천만한 지역이지만, 차원이동자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접근하는 이유가 있다.
오염지대에선 강력한 아이템을 구하기 쉽고, 차원이동자들은 상태창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오염 저항력을 가져서 오래 머물 수 있는 데다,
"{이런 위험 지역을 아즐 대륙의 잘나신 신적 존재들이 그냥 놔두는 게 이상하잖아.}"
결정적으로, 오염지대가 신들에게 버려진 땅이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신적 존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곳일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진작 다른 차원으로 도망쳤을 겁니다.}"
아즐 대륙민들은 신들에게 버려진 땅이라며 두려워하고 기피했으나, 차원이동자들은 발상을 바꿔서 생각했다.
'혹시, 신적 존재들은 오염지대를 일부러 방치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인간들이 그곳을 조사해선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거겠죠.}"
"{내 말이 그거야. 죽은 사람도 살리고 차원도 넘나들고 생명도 창조하는 애들이 썩은 땅 하나를 처리 못 할 리가 없잖아?}"
"{오염을 내버려 두면서 접근을 막으려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건 확실해요.}"
그 점에 주목한 차원이동자들은 오염지대의 비밀을 파헤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나, 상태창의 진실, 혹은 신들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차원 이동자도 까딱하면 죽어 나가는 동네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즐 대륙민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한 차원 이동자도 실력과 경험, 좋은 아이템을 갖추지 않으면 오염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보통은 아즐 대륙의 일반 지역을 돌면서 종결템을 맞추거나, 극한 노가다로 스탯을 한계까지 올린 뒤 오염지대로 향한다.
"{한마디로 고인물 전용 사냥터라는 느낌이죠.}"
덕분에 오염지대에서 날뛸 수 있는 건 차원이동자 중에서도 극소수.
압도적인 힘을 가진 최상위 랭커뿐이다.
'이번에 관리자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염지대가 더욱 수상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정황상, 관리자는 신적 존재들로 인해 봉인당했다.
강승현과 만난 관리자는 어디까지나 물리적 실체가 없는 정신체 상태였으니, 관리자의 진짜 '육체'는 다른 곳에 봉인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육체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은 역시 "오염지대" 밖에 없어.'
만약 그곳에 관리자의 육체가 봉인되어 있다면 신적 존재들이 오염을 방치하는 미싱링크가 풀린다.
'관리자를 제대로 부활시키려면 영혼과 육체의 봉인을 전부 풀어내야 하겠지.'
자세한 건 당사자를 찾아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정보 교환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뭔가 중요한 게 있구만?}"
"{알렉 씨가 정식 멤버가 되셨으니 저랑 김호정 씨가 모험하는 이유를 알려드리죠.}"
관리자에 대한 정보와 지구로 돌아갈 방법.
성유물을 찾아 깨부수는 이유 등등.
원래 이런 귀찮은 설명은 다른 사람, 예를 들자면 김호정에게 시키는 편이지만,
"{커어어어....}"
"{필요할 땐 없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강승현이 직접 설명하기로 했다.
"{바쁜 사람을 위한 세 줄 요약 버전과, 풀버전이 있는데 뭘로 하실래요?}"
"{당연히 요약 버전이지. 센스 있게 한 줄로 요약해줘.}"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뭐?}"
히죽거리던 알렉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색하며 되물었다.
"{형씨, 그거 자세히 말해봐.}"
"{한 줄 요약하라면서요.}"
"{아!! 그렇게 중요한 정보에 요약 버전 같은 걸 왜 만드냐고!}"
"{바쁜 사람을 위해서요.}"
"{됐으니까 지금이라도 풀버전으로 체인지! 체인지!!!}"
알렉이 야단법석을 떠는 탓에 천막이 흔들거렸다. 이래선 뒷골목에서 야외 취침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알았어. 제대로 설명해드릴게요.}"
"{너무 예고없이 훅 들어오잖아.}"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거?}"
"{아즐 대륙에 끌려오던 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세요. 그럼 알려드릴게요.}"
관리자의 말에 의하면 강승현은 아즐 대륙에 오기 직전의 기억이 없다.
이건 지구로 돌아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차원 이동자를 만나서 그날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다 보면, 잃어버린 기억을 대충 추측할 수 있겠지.'
'역시 그날 뭔가 일이 있으니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라는 게 강승현의 결론이었다.
"{으음, 그건 너무 사적인 질문인데.}"
"{도대체 그날 뭘했길래.}"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이에 할 이야기는 아니걸랑.}
"{체감상 한 달은 된 것 같은데요?}"
"{하하핫, 기분 탓이겠지.}"
알렉은 실실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래도 뭐, 형씨가 꼭 듣고 싶은 정보를 쥐고 있으니.... 그쪽이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이야기를 먼저 들려준다면, 이쪽도 사적인 이야기를 해줄게.}"
"{예를 들면?}"
"{음, 김 형에 대한 거?}"
알렉은 김호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검은 짐승' 상태로 자고 있었다.
"{내가 저 형을 처음 만났을 땐 저런 능력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고. 그냥 흔해 빠진 차원 이동자 1이었단 말이야.}"
잠깐 못 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렉은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다고 한다.
"{처음엔 흑마력인가 했는데 그런 게 아니더라. 흑마력보다는 신성력에 가까운 힘이고, 신성력보다는 흑마력에 가까운... 뭔지 모를 힘이야.}"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당사자인 김호정도 저 힘의 정체를 모르는데 외부인이 알 턱이 있나.
"{사실 제일 궁금한 건 따로 있어.}"
"{제일 궁금한 거?}"
알렉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형씨 같은 사람이 어쩌다 김 형하고 다니게 된 거야?}"
서로 성격이나 취향은 완전 딴판인 사람이 어쩌다 함께 파티를 짜고 있는 건가.
그게 가장 궁금했다고 한다.
"{김 형한테 물어볼까 했는데, 형씨한테 직접 듣는 게 재밌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정말 사소한 걸 궁금해하시네요.}"
"{어쨌든 탐정이니까 말이지.}"
일명 사생활 정보 교환.
알렉은 강승현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자신도 이야기하겠다며 히죽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김호정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설명해야겠네요.}"
강승현이 김호정과 처음 만난 건.
3년 전, 아즐 대륙에서 처음으로 눈을 뜬 날이었다.
212. 3년 전 1
3년 전, 아즐 대륙으로 처음 끌려온 그날.
강승현은 낯선 동굴에서 눈을 떴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지?'
동네 뒷산 동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었고, 애초에 동굴을 찾아간 기억은 있지도 않은 데다.
화아아아-.
뭣보다 곳곳에서 빛을 내는 이상한 버섯이 자라는 걸 볼 때, 한국은 절대 아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나, 난 분명 집에 있었다구요!"
"나한테 묻지 마!"
"이,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합시다!"
"내가 아까부터 걸고 있는데, 통화권 이탈이래...."
주변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는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 이거 그거지? 혼자 살아남으면 400억 상금 주는 게임. 시간 아까우니까 한꺼번에 덤벼라."
한 사람은 장르를 착각하는 것 같지만.
'눈을 떠보니 낯선 장소. 함께 끌려온 수십 명의 사람....'
전형적인 웹소설 도입부 같은 상황이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꼭 이 동굴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시작한 차원이동자들도 있었다고.
'이게 웹소설이면 이 뒤에는 아마....'
이제 곧 귀여운 외모의 마스코트가 나타나 자신에게 항의하는 사람 몇몇의 머리통을 날리면서 '튜토리얼'을 시작하는 바람에 이 동굴이 아비규환이 되는 그런 전개가 펼쳐질 것 같았지만.
'뭐야, 아무것도 안 나오나?'
마스코트 같은 건 나타나지도 않았고.
"드디어 내게도 각성의 기회가!"
"상태창!상태창!상태창!상태창!상태창!"
"솔직히 우리 중에 회귀자 있는 거 다 압니다. 히든 피스는 바라지도 않으니 차후 전개만 알려주시죠?"
"웹소 11123권을 읽으면 소설에 빙의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니...!"
"언제 차원이동할지 몰라서 매일 생존배낭을 들고 다녔는데, 드디어 때가 왔구만!"
왠지 몇몇 사람들은 당황하기는커녕,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납득하고 있었다.
[스탯]
[스킬]
[업적]
[인벤]
"킹태창!!!! 시발 갓태창!!!!"
"이왜진?이왜진?이왜진?이왜진?이왜진?"
"우오오오! 믿고 있었다고!"
"인벤토리도 있어! 스킬창도 있어!"
"제가 읽은 웹소가 너무 많아서 원작이 뭔지 모르겠는데, 혹시 아는 사람 있어요?"
실제로 어쩔 줄 모르는 일반인들과 달리, 그들은 재빨리 '상태창'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벤토리와 스킬을 살피는 등.
이 상황에 빠른 속도로 적응하기 시작했다.
[업적 달성 : 차원이동자의 필수요소]
[상태창을 처음으로 사용할 경우 달성.]
나중에 알게 된 진실이지만, 관리자가 작정하고 '이런 웹소설 도입부 같은 상황'에 금방 적응할 수 있는 인간들로 골라서 끌고 온 것이었다.
'...진짜였나.'
그리고 눈치 빠른 강승현 역시 '낯선 상황에 금방 적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초보자용 꾸러미]
[아즐 대륙에 막 찾아온 차원이동자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로 구성된 꾸러미다.]
[내용물 : 빵 한 덩어리, 치즈 한 조각, 가죽 물통, 단단한 나뭇가지.]
그는 당황하지 않고 상태창을 확인하더니,
'이 나뭇가지는 무기로 쓰라고 넣어둔 건가?'
자연스럽게 전투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상태창을 확인한 뒤 몰려오는 몬스터와 싸우는 건 웹소설 국룰이니까.
"됐으니까 다들 스킬창부터 확인해봐!"
뿐만 아니라 초반에 이걸로 버티는 뜻인지, 모든 차원이동자에겐 한 가지 스킬이 주어진 상태였다.
"살았다! 공격 스킬!"
"아니 도끼 전용 스킬을 줘놓고 도끼를 안 주면 어쩌자는 거야."
"초기 스킬로 [윈드 커터] 떴는데, 이거 좋은 건가요?"
"대놓고 자랑을 해라, 개새끼야! 시발, 나는 [돌팔매질]인데."
"꼬우면 아시죠? 리셋하세요."
"누구 축복 받아보실 분? 받으면 크리티컬 상승이라는데."
이런 식으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액티브 스킬이나,
"이속 +10%? 도망칠 땐 쓸모 있겠네."
"나는 이런 거야. 뭔갈 적어두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 슬롯]이라는데...."
"공격시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이 걸린다는 스킬인데, 이거 좋은 건가?"
보유하고 있으면 효과를 받을 수 있는 패시브 스킬을 받는 등, 차원이동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 스킬을 가진 상태였다.
사람마다 스킬의 종류나 특성이 달라서 차원 이동자들은 단순하게 '초기 스킬'이라 부른다.
'내가 받은 건 [관찰의 눈]인가.'
강승현에게 주어진 초기 스킬은 [관찰의 눈].
보통 초반에만 잠깐 쓰다가 새 스킬을 얻으면 버려지는 대부분의 초기 스킬과 달리, 3년이 지난 지금도 유용하게 잘 쓰이는 강승현의 필수 스킬인 만큼, 스킬 효과가 뭔지는 다들 아실 테니 설명은 생략했다.
구구구!!!
스킬창을 확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안쪽에서 뭔가가 달려오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컹! 커겅!"
이어서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나워 보이는 들개 무리가 차원이동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저게 뭐야!"
"괴물이다!"
"꺄아아아아아!"
보통 이 경우,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를 보고 패닉에 빠진 나머지 제대로 대항하지 못해 대부분 몰살당하고 소수의 인원들만이 살아남는 게 정석이지만.
"잘됐네! 안 그래도 스킬 써보고 싶었는데!"
"이런 전개... 기다리고 있었다구!"
"최초 업적은 내가 가져간다! 수고해라, 병신들아!"
"시발, 저 새끼 막아!"
"이건 죽여도 무죄 아니냐?"
이 상황에 금방 적응한 또라이들, 일명 '즐기는 자들'이 최초 업적을 달성하겠다고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뭐,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남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겠지만... 이런 재밌어 보이는 일을 구경만 할 순 없지!'
후우욱!
강승현 역시 이런 상황에 금방 적응하는 또라이인 만큼, 미리 준비해둔 [단단한 나뭇가지]를 휘둘러 들개 몬스터를 공격했다.
'다른 사람들 싸우는 거 보니까... 머리나 몸통을 공격할 땐 별 반응이 없지만. 아까부터 꼬리는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걸 보면.'
강승현은 공격 스킬이 없는 만큼, 본래라면 평타로 싸워야 하니 큰 대미지는 입힐 수 없다.
'그 말은 꼬리가 약점이라는 소리지!'
[어린 잔모래 들개]
[꼬리를 공격당할 시, 대미지가 다른 부위의 3배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가진 뛰어난 관찰력과 그걸 보완해주는 [관찰의 눈] 덕분에.
뻐억!
"깨갱!"
"한 마리 컷!"
굳이 공격 스킬을 쓰지 않아도 큰 대미지를 입힐 수 있었다.
털썩!
공격당한 들개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뻗었다.
[업적 달성!]
[업적 달성!]
[업적 달성!]
그 와중에 업적을 달성했다고 알람이 쏟아지는 건 물론,
[최초 업적 달성!]
[업적 달성 :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공격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대상을 처치할 경우 달성.]
[일부 업적은 최초 달성 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업적을 최초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2000포인트와 장비 확정 쿠폰을 지급해드립니다.]
어쩌다 보니 최초 업적까지 달성해버렸다.
[기념 메시지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심지어 기념 메시지까지 띄울 수 있는 갓시스템까지.
'당연히 띄워야지 그럼.'
곧이어서, 모든 차원이동자의 눈앞에 이러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GGG 님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업적을 최초로 달성하셨습니다.]※
-[다들 주무시나?ㅋ]
"어? 뭐야 이거?"
"아 시발! GGG 누구야?"
"개새끼가 꼴받게 하네!!!!"
"야, 솔직히 자수해라 진짜!"
사방에서 GGG을 찾는 분노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누군지 확인할 방법은 없는 상황.
강승현은 남들의 빡침을 몰래 즐기며 전투를 계속했다.
-"뭐야? 이 녀석들 목소리만 요란하지 별것도 아니네."
"스킬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약하잖아?"
"미리 알았으면 '이 정도 어쩌구' 업적은 내가 먹는 건데!"
잠시 후.
몰려온 들개 무리는 날뛰는 차원이동자에게 대부분 격퇴당하고 극소수만 살아서 도망쳤다.
보통 끌려온 사람들이 몬스터한테 몰살당하고 극소수만이 살아남는 게 클리셰지만, 어째 정 반대 상황이다.
'정말 별것도 아니네.'
그도 그럴 것이, 이 잔모래 들개라는 것들은 지구의 개보다도 약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초보자용 몬스터라는 느낌.
"몸풀기로는 딱인데요 뭐."
"스킬 쓰는 법도 익숙해졌고 말이지."
"무슨 아이템 안 주려나? 난 마법사 하고 싶은데."
싸움을 끝낸 '즐기는 자들'은 업적 보상을 받거나 스킬을 살피는 등, 바빠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정리하며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 다들 괜찮으세요?"
"너무 아파, 아파...."
"소, 손이 계속 덜덜 떨려요."
"젠장,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즐기는 자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즐기는 자들이 몬스터를 처리하는 동안, 뒤에 숨어서 덜덜 떨기만 했다.
그들은 몰려오는 몬스터에 겁을 먹고 울먹이거나 흐느끼기만 할 뿐,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게 보통이긴 하지.'
낯선 곳에서 눈을 뜬 것도 무서운데, 다짜고짜 몰려오는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한다니.
한국에서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라면 겁먹는 게 정상이고, 원래는 이 상황을 즐기는 자들이 이상한 게 맞다.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하지만 강승현은 '즐기는 자'에 속한 또라이인 만큼,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이런 상황은 죽거나 죽이거나니까.
"다, 다들 기운 내자구. 모두 무사한 데다 심하게 다친 사람은 없잖아?"
"맞아요! 다들 힘을 합쳐봐요!"
"일단 이 동굴에서 나가면 집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 다들 포기하지 맙시다."
그러던 와중, 강승현의 눈에 겁먹은 사람들을 달래는 몇몇 이들이 보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저런 녀석들을 챙기는 건 시간 낭비다.
어차피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겁쟁이들은 얼마 못 가 죽을 게 뻔하지 않은가.
'떨거지들 돕다가 다 같이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강승현이 그들을 비웃던 참이었다.
파앗!
[당신에게 새로운 직업을 부여합니다.]
[초기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후 노력에 따라 새로운 직업을 얻거나 강화 직업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직업을 결정하는 건 당신의 적성과 성장 배경, 취향, 성향 등등의 요소입니다.]
'이런 것도 뻔하구만.'
이어서 자리에 있던 모든 차원이동자에게 [직업]이 주어졌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마법사 떴다! 이거 아무래도 내가 주인공인거 같은데."
"아니죠. 주인공은 칼잡이가 국룰이죠."
"미쳤다 정령사? 지금부터 내 꿈은 정령몬 마스터다!"
"나는 궁수인데... 활도 안 줘놓고?"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로 그럴싸한 직업을 얻은 모양이다.
"...요리사? 그쪽은요?"
"저는 방패병 직업을 얻었어요."
"저, 저는 드루이드라는데 이게 무슨 뜻이죠?"
"그거 그냥 농부 아님?"
꼭 '즐기는 자들'만 직업을 얻은 건 아니고, 뒤에 짱박혀 있던 사람들도 공평하게 직업을 획득한 것 같다.
[직업을 획득하신 분께 초기 직업의 기초 스킬을 덤으로 제공합니다.]
직업을 얻으면서 덤으로 새로운 스킬까지.
[당신의 직업은 '힐러?'입니다.]
'나는 힐러네. 전투직업을 받았으면 했는데....'
강승현에게 주어진 직업은 '힐러'였다.
뒤에 물음표가 있어서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힐러라고 적혀 있었다.
'뭐, 직업을 결정하는 게 내 성향이나 적성이라고 했으니 이쪽이 뽑히는 게 당연한가.'
노력하면 새로운 직업을 얻을 수 있고, 어딜 가나 파티에 힐러 직업은 필수인 법.
강승현은 자신의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 새로 얻은 스킬이나 확인해볼까. 힐러니까 힐링 스킬이겠지.'
그렇게 스킬 창을 열어본 결과,
'응?'
[절개]
[날카로운 물건으로 무언가를 베어낸다.]
[위력이 크진 않지만, 초반엔 그럭저럭 공격 스킬,]
강승현에게 새로 주어진 스킬은 힐이 아니라 뜻밖의 공격 스킬 [절개].
'...힐이 없네?'
그것이 힐 쓸 줄 모르는 힐러인 야매 힐러 인생의 시작이었다.
213. 3년 전 2
'뭐야, 기껏 힐러 직업을 얻었는데 평범한 공격 스킬이 전부야?'
강승현은 스킬창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심 힐을 써보길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거면 힐러 말고 검사나 도적을 시켜주든가.'
빨리 제대로 된 힐러 스킬을 손에 넣어야 스킬을 써보면서 감을 익힐 텐데.
'그래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잘 됐지. 공격 스킬이 하나쯤은 있어야 초반을 버틸 거 아냐.'
아직 상태창과 포인트 시스템의 진실을 모르던 시기인 만큼, 강승현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일단 힐러 직업을 얻었으니 힐링 스킬은 차차 얻을 수 있겠지. 반대로 공격 스킬은 앞으로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안타깝게도 아즐 대륙에 막 도착한 시기의 강승현은 알 턱이 없었다.
실제로는 그것과 정반대라는 것을.
후으으으.
'그건 그렇고 좀 쌀쌀하네. 이런 상태로 동굴 속을 돌아다녀서 그런가.'
강승현은 가볍게 불평하며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강승현은 흰 셔츠에 캐주얼한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 하나 신지 않은 맨발이었기 때문이다.
'내 옷장에 이런 옷은 없었으니, 상태창이 지급한 옷인가?'
이 셔츠와 바지는 지구의 옷이 아니었다.
몬스터와 한참을 치고받고 싸웠는데도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이왕 줄 거면 다른 색으로 주지. 난 흰옷 별로 안 좋아한다고.'
일반인들은 겁먹고 떠는 와중에 옷차림으로 불평하는 이 태도야말로 또라이의 귀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신발이라도 주든가....'
물론 강승현의 불만도 정당성은 있다.
지금까진 몬스터와 신나게 싸우느라 바빠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런 옷차림으로 오래 돌아다니는 건 힘들다.
'남들은 평범한 옷인데 말이지.'
평범한 외출복 차림은 물론, 헬스장에서 막 퇴근하고 나온 것 같은 옷차림이나, 이세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캡모자 차림, 아예 자다가 온 건지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저는 카페 알바요."
"나는 TV 보다가 눈떠 보니 여기더라구."
대충 주변 이야기를 엿들어보면, 대부분 여기 오기 직전 모습 그대로 끌려온 모양이다.
"뭐야, 이 셔츠? 이런 거 입은 기억 없는데?"
"나도 그거 입고 있어."
'나만 이 차림이 아니었군.'
하지만 그들 중 몇 명은 강승현처럼 무개성 셔츠 세트에 맨발 차림이었다. 더러워지지 않은 걸 보면 마찬가지로 이세계산 옷인 것 같다.
"그쪽은 여기 오기 직전에 뭐하고 있었어요?"
"튀김요리 하다가 왔는데...."
"그래서 앞치마랑 젓가락을 들고 오셨구나."
"당신은 어쩌다 수건을?"
"수건 개면서 TV 보고 있었죠. 이럴 줄 알았음 식칼이라도 들고 오는 건데."
대부분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보내다 끌려온 만큼, 가지고 온 물건은 스마트폰, 지갑, 차키 같은 별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많았다.
"후후후, 경찰한테 걸릴 때마다 압수당해도 각종 생존 도구를 매일 들고 다니길 잘했어."
"그쯤 되면 포기 좀 하세요."
"어허, 언제 이세계로 갈지 모르는데 이런 중요한 물건을 집에 두고 다닐 수야 없지."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뭐, 중요한 건 저런 게 아니라... 당장 뭔가 걸칠 만한 걸 구해야 하는데 말이지.'
이런 동굴에서 한여름 바닷가 패션으로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다.
'어디 옷 빌려줄 호구 없나.'
강승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런 상황에 남에게 옷을 흔쾌히 적선해줄 친절한 바보를 찾아봤다.
'뭐, 아무리 호구라도 옷을 그냥 빌려주진 않을 거고, 여기서 동료인 척 적당히 어울려주면 쉽게 뜯어낼 수 있겠지.'
강승현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데 도가 튼 인간이었다.
'저 또라이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지만, 보통 일반인들은 지금처럼 낯선 세계에 떨어졌을 때 불안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법이거든.'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낯선 공간.
심지어 몬스터와 마주치기까지 했으니 저들의 두려움은 몇 배로 증폭된 상태다.
이럴 때 믿음직스럽고 실력 있는 사람이 접근해온다면, 동행하자고 제안한다면 거절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실력이라면 아까 봤을 테니, 적당히 구슬려서 호감작만 해주면 쉽지.'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먹잇감을 찾았다.
그는 키가 꽤 큰 편이라 아무한테나 옷을 뜯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찰의 눈]
그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사방 곳곳에서 정보 메시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겁에 질린 것 같다.]
[상태이상 '공황' 상태!]
[이 여자는 추위 때문에 몸을 떨고 있다.]
'많은 거 안 바란다. 나보다 10cm 작아도 괜찮으니까 겉옷 가진 놈 나와라.'
강승현은 일반인 무리를 싹 훑어보았다.
'일단 덜덜 떨고 있는 인간들 제외. 최소한 몬스터가 나오면 어그로라도 끌어줘야 할 거 아냐.'
아무리 임시 동료라도 쓸모없는 겁쟁이 짐짝들은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다.
최소한 제 몫은 할 만한 인간이 필요했다.
[이 남자는 발목을 삔 것 같다.]
그때, 이러한 메시지창이 강승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메시지의 주인을 확인하자 갈색머리의 남자가 인상을 쓰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호감작 하기 딱 좋은 친구네.'
아무래도 잔모래 들개와 싸우는 과정에서 다친 모양이다.
'힐링 스킬은 없지만, 저런 부상은 응급처치만 해도 훨씬 좋아지니까 말이지.'
이런 재난 상황에서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만큼 고마운 사람이 어딨겠는가.
거기다 발을 다쳤으니 도와줄 사람이 간절할 것이다.
[키는 177cm.]
[체격에 비해 큰 옷을 입고 있다.]
마침 갈색머리 남자는 키도 자신과 딱 10cm 차이 나는 데다, 겉에 커다란 점퍼 같은 걸 입고 있었다.
'딱이네.'
강승현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다가갔다.
"괜찮으신가요? 발목을 다치신 것 같은데."
본래 성격대로라면 바로 반말부터 박았겠지만, 호감 사기 쉽게 일부러 존댓말까지 쓰면서 말이다.
"예, 뭐... 하필 발이 꼬여서요. 운도 더럽게 없죠."
대뜸 말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갈색머리 남자는 적당히 대꾸해왔다.
딱히 경계하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편하네.'
강승현이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댓말 컨셉을 유지하는 건 이 때문이다.
초면에 호감 사기 쉽고, 대놓고 비꽈도 눈치 못채는 바보들이 많고, 뭣보다 '즐기는 자들'은 대부분 컨셉충이니까.
"발목을 삐신 것 같네요.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니고 응급처치만 해도 되겠는데요."
"응급처치를 할 수 있어야 말이죠."
"가벼운 염좌는 천으로 고정만 해도 됩니다. 괜찮다면 그 점퍼를 빌릴 수 있을까요?"
"여기요."
강승현은 자연스럽게 점퍼를 확보했다.
물론 붕대를 만들겠다는 핑계로 얻어온 것이었지만 말이다.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괜찮다면 얼음찜질을 하는 게 좋지만, 얼음을 구할 수 있어야 말이죠."
강승현은 점퍼 안쪽 천을 찢어 만든 간이 붕대로 남자의 발목을 고정했다.
'이제 이 점퍼를 어떻게 먹을까.'
남자가 감사 인사를 하건 말건, 강승현은 손에 들어온 점퍼를 자연스럽게 자기 인벤토리에 넣을 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업적 달성!]
그때, 업적 알림 메시지가 나타났다.
[업적 달성 : 힐러의 길에 한 발 내딛기]
[처음으로 부상자를 치료할 경우 달성.]
[☆포션(초보자용 포션 박스) 획득!]
보상으로 획득한 포션 박스를 확인하자, 소형 체력 포션 5개, 소형 마력 포션 5개, 소형 스태미나 포션 5개가 들어 있었다.
'디자인은 투명한 요구르트병, 재질은 유리나 플라스틱보다는 차갑지 않은 얼음 같은 느낌이네.'
아즐 대륙의 포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 역시 설명을 생략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다음,
[상태창에 새로운 시스템이 추가됩니다.]
['룰렛' 시스템을 이용하시면 각종 스탯과 아이템은 물론 새로운 스킬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룰렛을 사용하기 위해선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메시지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시이바아아! 스킬 뽑기 왔다!"
"역시 이래야 상태창이지!"
"빨리 룰렛 돌리는 방법 내놔!"
"제발 S급 스킬! 제발 S급 스킬!"
"난 S급 안 바란다. 무난하게 SSS급으로 줘."
"양심 어디?"
"저러다 폐급 스킬 받아봐야 정신 차리지."
사방에서 환호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모든 차원이동자에게 동시에 개방된 모양이다.
"루, 룰렛?"
"스킬을 얻는다고...."
"무슨 게임도 아니고, 그게 가능해?"
즐기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상태창 화면을 바라보았다.
[포인트는 여러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와 싸워서 쓰러트리거나, 제작 특화 직업일 경우 무언가를 제작하거나, 혹은 차원이동자가 아닌 사제 직업군과 싸워서 쓰러트릴 때나.]
"한마디로 사냥하고 파밍하고 템 제작하고 이러면 된다는 거네."
"이거 우리가 이 동네 몬스터 씨 말리는 거 아냐?"
아직 아즐 대륙의 진실과 포인트 시스템의 진실을 알기 전인 만큼, 모두가 기뻐하는 이 상황.
[하지만 일부 직업은 밸런스 문제로 인해 특정 행동을 통해 포인트를 획득하실 수 없습니다.]
"밸런스 패치?"
"저런 거 꼭 있죠. 사기 직업 밸런스 패치."
옆에 있던 갈색머리는 상태창을 신경 쓰느라 점퍼에 대해 아무 말 않았기에, 강승현은 슬쩍 옷을 걸쳐 입었다.
'뭐,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겠지.'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밸런스 패치 목록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몬스터 테이머, 정령사, 네크로맨서와 같은 사역마를 육성해서 강해지는 직업의 경우. 자신이 사역마와 함께 싸울 때만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애들을 그냥 두면 펫을 오토 사냥 돌리면서 착취하고 자기는 놀면서 포인트를 벌어들이는 양심 없는 놈들이 나올 테니 막아둔 모양이다.
'음, 저 직업 안 뽑길 잘했네.'
물론 양심 없는 강승현은 살짝 아쉬워했다.
실제로 펫을 부릴 수 있었다면 착취할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요리사 직업은 만든 요리를 자기가 먹는다고 포인트가 들어오는 게 아니니 쓸데없이 과식하지 말라거나, 민간인이나 힘없는 가축을 공격하는 건 포인트 버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등.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를 알려줬다.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슬슬 다른 일이나 해볼까.'
강승현이 뻐근한 몸을 풀려던 찰나였다.
[힐러 계통 직업은 타인을 치료해 줄 때만 포인트를 벌 수 있습니다.]
[사냥이나 제작을 통한 방식으로 포인트를 획득할 수 없으니 유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뭐?'
눈치 빠른 강승현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나 지금 힐러 스킬 없는데?'
자신은 힐러라서, 몬스터를 수백 마리 잡아 봤자 포인트는 한 푼도 벌 수 없고, 포인트를 벌기 위해선 어떻게든 힐러 스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당장 룰렛부터 돌리자.'
다행히 강승현에겐 최초 업적 보상으로 획득한 2000포인트가 있었다.
[누적 포인트 : 200포인트]
[룰렛 1회 이용 시 20포인트]
2000포인트는 룰렛을 무려 100번이나 돌릴 수 있는 수치.
지금 그보다 포인트를 많이 획득한 차원이동자는 없다.
[룰렛을 돌리시겠습니까?]
'이건 고민할 것도 없지. 초반부터 상급 스킬 하나 얻고 시작하면 편할 테니까.'
이런 초반에 스킬을 여럿 확보하거나, 상급 스킬을 하나라도 손에 넣는다면,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다.
'전부 꼬라박는다.'
강승현은 새 스킬을 무척 기대하며 룰렛을 돌렸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물론 이 선택은 모두가 잘 아는 미래를 가져오게 된다.
214. 3년 전 3
[※룰렛 결과]
☆[기타(가는 나뭇가지)]
☆[기타(잡돌)]
☆[기타(종잇조각)]
☆[기타(조약돌)]
☆[기타(조약돌)]
☆[기타(먼지)]
...☆[스탯(체력+1)]
☆[기타(말린 나뭇잎)]
"이, 이게 뭐야...."
강승현이 룰렛을 돌려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는 즉시, 이게 개쓰레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스킬이 하나도 안 나오냐고!"
무려 2000포인트를 투자했던 것만.
돌아오는 건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
와르르르르!
그나마도 인벤토리에 다 들어가지 못해서 상태창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연출만 보면 슬롯머신 잭팟이라도 뜬 것 같다.
"시발! 이게 뭐야?"
"이게... 보상?"
강승현만 룰렛을 돌린 건 아니었기에, 곧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스, 스킬 떳다! 떳다고!"
"이속 증가 부츠!"
운 좋은 극소수는 쓰레기 룰렛 속에서 보상을 획득했지만,
"아! 죄다 쓰레기잖아! 스킬 어딨어?"
"시발 내 포인트 돌려줘!"
"확률 공개해!"
"100포인트나 박았는데 돌멩이 5개 실화냐고!"
대부분 강승현과 처지가 비슷했다.
수많은 차원이동자들이 아즐 대륙으로 오자마자 쓰레기를 한가득 품에 안게 된 것이다.
"이게 룰렛이냐, 쓰레기통이지!"
나중에서야 관리자를 통해 알게 된 거지만, 이때 룰렛 보상이 역대급으로 처참했던 이유는 차원 이동자를 데려오느라 제대로 된 보상을 준비할 힘이 없어서 그랬다고.
[현재 룰렛 시스템을 점검 중입니다.]
[룰렛을 돌리셔도 제대로 된 보상을 획득하기 어려우며, 한번 소모된 포인트는 환급되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뒤늦게 안내 공지가 떴다.
소모된 포인트를 환급해주지 않겠다는 악랄함이 앞으로 있을 차원 이동자들의 미래를 알려주는 듯했다.
"뭐?"
"당연히 환불해줘야 할 거 아냐!"
"돌겠네, 진짜!"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나은 편이었다.
잃은 포인트가 많아봤자 100포인트고 보통 30에서 40 정도였으니까.
'이게 지금 나랑 장난하나?'
하지만 강승현은 한순간에 2000포인트를 날려버렸기에,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만큼 극대노한 상태였다.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거 뺏어가는 건 절대 못 참거든.'
그 순간부터 강승현의 이세계 라이프 목적은, 룰렛 제작자를 찾아내서 머리통을 갈아버린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저, 저기.... 형씨."
그리고 강승현이 개빡쳐있던 그때.
눈치 없게도 강승현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까 저 친구 치료하는 걸 봤는데, 혹시 괜찮다면 다른 사람도 봐줄 수 있을까?"
연어색 잠옷 차림에, 물고기 베개 같은 걸 들고 다니는 진짜 약해 보이는 아저씨.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김호정이었다.
"실은 아까 그 들개한테 다친 사람이 있어서...."
평소라면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아니면 뭔가 뜯어먹을 게 있진 않을까 해서 친절한 청년 컨셉을 잡고 승낙했을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어? 응? 아니, 그...."
하지만 말 거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당시 강승현은 너무 빡쳐서 컨셉이고 나발이고 때려치운 상태였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미, 미안.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
덕분에 김호정은 도움받기는커녕 욕만 실컷 먹고 도망쳐야 했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거나 늦게 왔다면 이럴 일은 없었을 테니, 운이 더럽게 나빴다고밖에.
"뭔데 친한 척이야, 재수 없게."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이 순간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일단 진정하자. 어차피 나만 망한 거 아니고 다 같이 망했잖아.'
뇌가 터질 만큼 빡친 상황이었으나, 이성적인 강승현은 금방 분노를 가라앉히고 머리를 식혔다.
'스탯 몇 개는 건졌어. 그럭저럭 쓸 만한 잡동사니도 얻었고.'
비록 스킬은 얻지 못했지만, 약간의 스탯과 식량, 기타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었다.
'힐을 얻지 못한 건 빡치지만, 꼭 룰렛에서만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업적을 통해서 얻을 수도 있고, 이세계니까 찾아보면 스킬 스크롤 같은 것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강승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직도 빡칠 요소가 남아 있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자자, 다들 주목해주시죠."
그때, '즐기는 자들' 중 하나가 일반인 무리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세계로 끌려와서 많이들 무섭겠지만, 걱정할 건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 하는 법입니다."
"힘을 합친다구요?"
"서로 식량을 나누고, 밤에는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위험을 알리고, 부상자가 생기면 협력해서 돌보고...."
그는 아주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슬슬 자기 팀 만들기가 시작됐군.'
잠깐 여유가 생긴 사이, 몇몇 즐기는 자들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뭉쳐서 그룹을 만들었다.
덕분에 강승현처럼 남들과 협력할 마음이 전혀 없는 인물들만 남은 상황.
'어딜 가든 사람이 모인 곳엔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각 차원 이동자 그룹은 자신들의 규모를 불리기 위해 일반인 무리에서 스카웃을 시도했다.
첫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인 중에는 겁이 많아서 숨은 이들도 있었지만, 싸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뒤에서 지켜보던 '방관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관심 없어. 그런 건 너희들끼리 해."
하지만 그들 중 캡모자를 쓴 남자는 제안을 칼같이 무시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거절할게. 이런 상황을 게임처럼 즐기는 놈들하곤 손잡고 싶지 않아."
"...죄송합니다."
"미안, 혼자 다닐 거라서."
그 외에도 몇몇 사람들은 그룹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다니거나,
"저희는 저희끼리 다니려구요."
"사람 많은 건 좀 불편해서."
지금의 강승현처럼 소수의 인물로만 팀을 꾸렸으나,
"저, 정말 그래도 될까요?"
"저는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괜찮습니다! 누구든 환영합니다!"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웠기에 즐기는 자들 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흔쾌히 환영하지만, 곧 싸움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은 내쳐지거나 잡일과 심부름꾼, 아니면 고기방패로 쓰일 것이다.
'벌써부터 계급 생기고 난리 났네.'
먼저 선수 친 즐기는 또라이는 1등 시민,
싸울 실력은 있지만, 이 상황을 즐길 마음은 없는 방관자들은 2등 시민.
이도 저도 아니고 쓸모없는 떨거지 겁쟁이들은 3등 시민.
'나는 어떻게 할까. 혼자 다녀도 상관은 없지만... 이번엔 신발이 갖고 싶은데.'
공격 스킬도 손에 넣은 데다 [관찰의 눈] 덕분에 몬스터 사냥에 큰 무리는 없다.
'뭐, 동굴에서 나갈 때까지만 붙어있자.'
필요한 걸 다 얻어내면 그때 혼자 다녀도 늦지 않다.
'어차피 힐러 스킬은 먹지도 못했으니, [절개] 믿고 딜러짓이나 할까.'
강승현은 딜러 포지션으로 가장 큰 그룹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룰렛 해금 전에 획득하신 포인트를 정산해드립니다.]
[3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람을 한 명 치료하셨습니다.]
그때 뜬금없이 포인트가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환자의 부상이 크면 클수록 한 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늘어납니다.]
[힐러는 꼭 힐을 쓰지 않아도 포션을 나눠주거나 붕대를 감아주는 등등의 행동에서도 일정 확률로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치료해서 포인트를 모아보세요.]
'뭐?'
굳이 힐을 쓰지 않아도, 일단 환자를 치료하기만 하면 포인트를 벌 수 있다?
"이거 드세요."
"예?"
강승현은 그 즉시 체력 포션 한 병을 꺼내 갈색머리 남자한테 내밀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이 포션에 통증을 살짝 완화하는 효과가 있더라구요."
"아, 네.... 잘 마실게요."
남자가 체력 포션을 마시자,
[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그 즉시 포인트 안내 메시지가 날아왔다.
'뭐야, 진짜 응급처치만 해도 포인트 벌 수 있는 거야?'
이래서 상태창이 밸런스 패치를 했구나.
힐러 직업이 너무 개꿀이라서.
'몬스터 사냥에 비하면 개꿀이네? 이건 뭐 놀면서 해도 되겠는걸.'
애초에 치료는 강승현의 취미 중 하나다.
지금은 아직 뭐가 없어서 그렇지, 적당한 도구만 쥐여준다면 죽기 직전의 환자도 살려낼 자신이 있었다.
'일단 응급처치로 포인트 모으고, 돈 모아서 도구 좀 마련해서 포인트 긁어모은 다음, 힐링 스킬은 천천히 뽑아도 되겠네.'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적당한 그룹에 접촉했다.
이 그룹은 현재 동굴 내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데, 지금 차원 이동자 중 유일한 힐러가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별로 기억할 이유가 없어서 이름은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 놈들의 이름은 '제트'였을 것이다.
'힐러가 한 명도 없는 곳으로 가면 할 일이 많아서 피곤하잖아. 힐러가 한 명이라도 있는 곳으로 가야 편하지.'
강승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제트'를 찾아갔다.
"실례합니다. 저도 그쪽 그룹에 가입하고 싶은데요."
"어이구, 환영합니다!"
"실력있는 분들은 언제나 웰컴이죠!"
'제트' 입장에선 '즐기는 자'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히죽거리며 강승현을 반겼다.
"우선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어떤 직업이어도 상관은 없지만, 전투 진영을 짤 때 참고해야 해서...."
"힐러입니다."
"세상에! 힐러님이셨구나?"
"힐러님은 언제나 웰컴이죠!"
파티에 힐러가 이미 있어도, 힐러는 귀한 인재인 만큼, 다른 그룹에 넘겨주기 아까운 법.
'제트'는 새로운 힐러를 크게 환영했다.
"초기 스킬로 뭘 얻으셨나요?"
"기존 힐러님은 [초급 치유] 나왔다고 했는데...."
"아, 초기 스킬은 공격 스킬만 나왔고, 아직 힐은 못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을 기존 힐러님이 혼자 치료하는 건 무리일 테니 제가 보조하는 식으로...."
"네?"
"지금 장난해요?"
"뭐야, 이 새끼?"
"지금 대놓고 무임승차 선언?"
하지만 강승현이 힐을 쓸 줄 모른다는 말을 듣자 태도가 단숨에 바뀌었다.
강승현은 쌍욕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하... 그게 아니라요, 평소엔 딜러 일하고, 간단한 부상자가 생기면 그 친구들만 치료하겠다니까요? 힐러 직업 받은 건 맞습니다."
"아니, 힐이 없는데 그게 무슨 힐러예요?"
"무슨 말장난 하나?"
"딜러가 공격 스킬 없다는 거랑 뭐가 달라?"
"힐못힐~ 딜못딜~ 탱못탱~."
그들은 이제 강승현을 비웃어대기 시작했다.
강승현은 분노를 꾹 눌러 참고 침착하게 다시 설명을 시작했으나,
"합법 아니고 야매이긴 한데, 제가 의학 지식이 있거든요. 간단한 부상은 힐 없이도...."
"그러니까. 그쪽한테. 힐이 없는데. 치료를 어떻게 하냐고?"
"이 형씨 웃기는 사람이네."
"힐러한테 보상 우선권 준다고 하니까 그게 탐나서 이러는 건가?"
"이 겜이 망겜이긴 한가 보다. 오픈 첫날부터 사기 치는 새끼도 나오고."
강승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자, 잠깐만. 이 친구, 아까 다친 사람 치료해주고 그랬다구."
딱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니까, 정말 힐러인데 힐 스킬을 못 뽑았을 수도 있잖아?"
그 사람은 아까 강승현이 쌍욕을 하면서 쫓아냈던 김호정이었다.
215. 3년 전 4
'이 자식 아까 나한테 욕 처먹은 그 인간이잖아. 근데 날 돕겠다고 나섰다고?'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보통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고마움을 느끼는 게 정상이나,
'웃기시네. 자길 좆 같이 만든 사람을 그냥 도와주는 미친 새끼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자신을 짜증 나게 만든 사람이 엎드려 비는 걸 즐거움으로 삼는 삐뚤어진 인간인 만큼.
'무슨 속셈인진 몰라도 개역겹네.'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려 기분 나빠했다.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협력하러 온 사람을 이렇게 무턱대고 사기꾼으로 몰아가면 안 되지. 지금은 다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 시기라고...."
"저 새끼 말을 믿는다고? 진심?"
"와, 진짜 속는 사람이 있긴 하네? 하긴, 저런 사람이 있으니까 사기꾼이 박멸되지 않는 거지."
'제트' 그룹원들은 이제 김호정까지 비웃기 시작했다.
"야야, 진짜 이런 개빡대갈까지 데리고 다녀야 해?"
"우리가 너~무 착해서 그래."
"이쯤 되면 '제트 봉사 동아리'... 아니 '제트 요양센터'로 이름 바꿔야 하는 거 아님?"
그도 그럴 것이, 김호정 역시 안전을 위해 '제트' 그룹으로 들어간 3등 시민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 그룹의 실세들과 척질 걸 알면서도 날 도와줬다는 건데....'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가질 않았다.
도덕책에서나 나올 법한 호구가 아니고서야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짜 개호구인 거야, 아니면 나한테 엿 처먹이려고 스택 쌓는 거야?'
저쪽도 이쪽도 하나같이 짜증 나는 선택지다.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까부터 듣고만 있었는데...."
이어서 '제트' 그룹에 속해 있던 묶음 머리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초반부터 김호정과 말을 몇 번 주고받으며 겁에 질린 사람들을 격려하던 여자였다.
"협력하러 온 사람한테 그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그렇고, 같은 그룹원한테 그렇게 말할 건 없잖아요? 김호정 아저씨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넌 뭐야? 저놈하고 한패냐?"
"아~ 불만 있으면 여기서 나가시든가."
"못 나갈 것도 없죠. 남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어요? 다들 나가요!"
묶은머리 여자는 함께 '제트' 그룹에 가입한 3등 시민들에게 소리쳤다.
"그, 그건 좀...."
"나, 나는 이분들 말이 맞다고 생각해."
"저 사람들 하는 거 안 보셨어요? 분명 나중에 고생하게 될...."
"미안해, 아가씨. 난 안 나갈래."
"나가고 싶으면 우리 끌어들이지 말고 혼자 나가줘."
하지만 겁쟁이들이 쉽게 움직일 리가 없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을 도와준 김호정이나 묶음머리 여자를 모른 척하고 '제트' 그룹에 붙었다.
"어이구, 혼자 떨어져 나갈 판이시네."
"지금이라도 엎드려서 싹싹 빌면 용서해줄 수 있는데 말이야."
"잘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오오~."
그 모습을 보던 '제트' 그룹 실세들은 낄낄거리며 묶음머리 여자까지 조롱하기 시작했다.
김호정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여자와 그룹원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뭐야, 인원이 많아서 그럴싸한 그룹인 줄 알았는데."
그때, 잠자코 있던 강승현이 두 사람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빈 깡통만 모아둔 분리수거함이었네."
"뭐?"
"뭐, 됐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도 않는 놈들에게 힘 뺄 필요 없죠."
'제트' 그룹은 물론, 김호정과 묶은머리 여자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강승현이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게 된 건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힐러 '하나'만 의지하지 말라고."
"뭐?"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세요."
그리고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저게 돌았나?"
"뭐 저딴 새끼가 다 있어?"
"야, 그냥 죽여버릴까?"
뒤에서 이러한 목소리가 짧게 짧게 들려왔지만,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강승현은 가볍게 혀를 차며 생각했다.
이런 난장판을 일으켰으니 다른 그룹 역시 강승현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저 녀석 사기꾼이라며?"
"이다음엔 우리한테 오는 거 아냐?"
"야야, 듣겠다."
애초에 들어갈 마음도 사라졌지만 말이다.
'죄다 짜증 나긴 한데.'
갑자기 호구짓하는 바보들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들은 최소한 자신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나머지 놈들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내가 은혜랑 원수는 확실히 갚아주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애먼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는 것들은 물론.
자길 도와준 사람들을 버리고 강자한테 붙은 지조 없는 겁쟁이 놈들까지 포함해서.
'이 빚은 동굴 기둥을 무너트려서라도 갚아줘야 맞겠지?'
강승현이 [관찰의 눈]을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이것 좀 드시겠어요? 먹을 만해요."
지금껏 보이지 않던 갈색 머리가 버섯을 한가득 들고 왔다.
"뭔가요 그건?"
"제가 [식재감별] 스킬을 받았거든요."
강승현이 소동에 휘말리는 동안, 이 남자는 [식재감별]로 주위에서 자라는 이끼나 버섯류를 살펴보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먹을 수 있기는 한데 맛이 없어서.... 이 버섯들은 생으로 먹어도 맛있다고 뜨더라구요."
"그래요?"
강승현은 남자한테 받은 버섯을 관찰했다.
[붉은 탱글탱글 버섯]
[주로 ??? 포션 재료로 쓰인다.]
[푸른 밤하늘 버섯]
[주로 ??? 포션 재료로 쓰인다.]
관련 지식이 부족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내진 못했으나, 둘 다 포션 재료에 쓰인다는 것까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거 혹시, 체력 포션이나 마력 포션 재료인가?'
강승현이 그걸 추측해낸 순간,
[주로 체력 포션 재료로 쓰인다.]
[그냥 먹어도 소량의 체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으깨서 연고로 사용해도 회복 효율이 살짝 높아진다.]
[주로 마력 포션 재료로 쓰인다.]
[그냥 먹어도 소량의 마력을 회복할 수 있지만, 익혀 먹으면 회복 효율이 살짝 높아진다.]
메시지에 가려져 있던 부분과 새로운 정보가 추가됐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이 재료들도 관리자가 일부러 준비해뒀다고 한다.
포션 구할 때까지 먹고 버티라는 뜻에서.
"이 버섯들 죄다 회복 아이템이에요."
"회복 아이템이요?"
"이거 다 어디서 구하셨나요?"
"저쪽에 잔뜩 널려 있었어요."
남자가 가리킨 곳을 보자, 버섯이 수북하게 자란 곳을 볼 수 있었다.
강승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이런 걸 그냥 줄 리가 없겠죠."
보통 회복템을 퍼주는 시점은 보스전 직전이다.
분명 이제부턴 상대한 들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몬스터가 나타날 것이다.
"아까도 힘들었는데 여기서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온다니...."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승현은 밖으로 빠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통로는 왼쪽 길과 오른쪽 길,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길이 두 개로 나뉘었으니 이제부턴 화력이 반토막 날걸요."
몇몇은 일찌감치 출발해버렸고, 남아 있는 그룹도 어느 한쪽으로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각자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게 뻔하다.
"즉, 적들의 공격력은 올라갔는데 우리 편 공격력은 떨어지게 된 상황이군요."
"그러니 '즐기는 또라이들'도 아까처럼 날뛰는 건 힘들걸요."
이런 식으로 밸런스 패치를 해뒀을 줄이야.
지금 생각해보면 관리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치밀하게, 철저하게 준비해두고 있었다.
룰렛 보상만 빼고 말이다.
"이 버섯에 대해 아는 건 우리뿐이죠?"
"그럴걸요? 요리사 직업 뜬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 같고, 뭣보다...."
갈색머리 남자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다들 상태창만 신경 쓰느라 주위를 살펴볼 생각도 안 한단 말이죠. 빨간 버섯은 인벤토리에 넣어보기만 해도 식용이라고 뜨던데."
"오히려 잘됐죠."
"잘됐다뇨?"
"남들은 이런 아이템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것들, 우리가 '독점'합시다."
-스타트 지점을 떠나기 전.
강승현은 김호정과 묶은머리 여자, 두 사람을 찾아갔다.
"절 왜 도와주신 거죠?"
"그야 남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전 그쪽 부탁 귀찮다고 거절했는데요."
"어? 어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라구!"
혹시 돌려까는 건가 싶었는데, 그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 같진 않았다.
"그리고 보고만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거든...결국 나 좋으라고 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뭐,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어쨌든, 인사는 정중하게 했다.
별 도움은 안됐지만, 은혜와 원한은 이자쳐서 갚아준다는 게 그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내가 큰 도움은 안 된 것 같은데 말야."
두 사람은 '제트'를 나와서 팀을 꾸렸다.
당연하지만 3등 시민 대부분은 '제트' 그룹에 남았고, 둘을 따라 나온 사람은 두세 명뿐이다.
'오히려 잘된 거지.'
인원이 많이 줄긴 했어도, 비겁자들과 겁쟁이를 쳐냈으니 아까보다는 훨씬 낫다.
"그쪽 일행은 어디로 갈 거예요?"
"여러분들은요?"
"우리는 오른쪽 길로 가려구요. 저 사람들이랑 같은 길로 가고 싶진 않아서."
"괜찮다면 형씨도 우리랑 같이 가자."
두 사람이 동행을 제안했으나,
"저도 그러고 싶지만, 왼쪽 길에서 할 일이 있어서요."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가게요?"
"뭐, '우연히' 같은 방향을 고른 것뿐이죠. 아쉽지만 헤어져야겠네요."
강승현은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하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보답으로 드리는 회복 아이템입니다. 포션에 비하면 효율은 떨어져도 그럭저럭 쓸 만할 거에요."
"이, 이런 귀한 걸 나눠줘도 괜찮겠어요? 그쪽 일행은 우리보다 수도 적은데."
"괜찮아요. 아직 많이 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진짜 많아서 주는 건데.'
강승현은 인벤토리에 꽉꽉 채워 담은 버섯요리를 떠올렸다.
더 이상 안 들어가길래 아까 받은 은혜를 갚을 겸해서 나눠주는 것이다.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아, 어디에 이름이라도 적어둬야...."
묶은머리 여자가 '분홍색 스마트폰'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글쎄요? 자기소개는 여기서 빠져나간 뒤에 해도 늦지 않겠죠."
"네?"
"기껏 이름을 주고받았는데, 한쪽이 죽어버리면 마음에 평생 남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자기소개는 다음에 다시 만날 때.
강승현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의 이름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뭐, 저 아저씨 이름은 아까 들어버렸지만.'
이렇듯 김호정의 이름은 이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좋네요. 여기서 살아남으면 그때는 이름 알려주실 거죠?"
"약속하죠."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형씨도 몸 조심하라구."
김호정과 묶은머리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하더니 일행을 데리고 오른쪽 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남 챙기다간 오래 못 산다고.'
물론 강승현은 그들이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떨거지들은 떨어져 나갔어도, '즐기는 자들'은 한 명도 없는 데다, 워낙 호구들이 많았으니까.
"그럼 저희도 슬슬 출발하죠."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점퍼를 멋대로 입어버렸네요. 너무 추워서 말이죠."
"편하게 입으세요. 지금은 후드티만 입어도 따뜻하거든요."
"이 은혜는 제가 꼭 갚겠습니다."
김호정 일행을 보낸 강승현은 갈색머리 남자와 함께 왼쪽 길로 향했다.
제트 그룹이 먼저 출발한 그 길로 말이다.
'슬슬 새 신발을 구하러 가볼까.'
216. 3년 전 5
"우리는 왼쪽으로 갑시다."
"왼쪽이요?"
"전투 그룹원이 선두로 가고, 비전투 그룹원은 뒤따라오세요."
논의 끝에 '제트'는 왼쪽 길로 향했다.
사실 논의랄 것도 없고, '제트'의 실세인 이영후가 '여기서 삘이 느껴진다.'라는 이유로 왼쪽을 골랐기에 왼쪽 길로 향한 것이다.
"그럼 가보자고."
"빨리 새 스킬 쓰고 싶음. 동굴 빠져나가서 포인트 노가다부터 해야지."
"쓰레기 파티 열릴 듯."
"시발 뒈진다."
분명 처음에는 아주 순조로웠다.
"야야, 몬스터 나왔다!"
"다들 무기 들어!"
"이요옵!"
"그 소리 좀 관두면 안 될까."
가장 먼저 마주친 몬스터는 잔모래 들개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역시 제트 그룹에 들어오길 잘했어."
"다들 감사합니다!"
"우리 그룹 강하다!"
그룹에 소속된 3등 시민들도 전투 멤버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를 따라간 사람들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내 말이.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 중 김호정 일행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지만,
"어허, 쓸데없는 소릴! 나간 사람 이야기는 왜 해?"
"맞아. 사서 고생한다는 인간 걱정해서 뭐합니까? 다 자기 선택이죠."
대부분 그룹 실세한테 찍힐까 무서워서 입을 다물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헐뜯는 등.
이때까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몬스터다!"
"또야? 쉴 틈을 안 주네."
"시발 무기 들어!"
"이요옵!"
"그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하지만 몬스터의 수가 늘어나고,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죽냐고!"
"힘들어 죽겠네."
"다들 피곤한 것 같은데, 일단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가자."
그때, 그룹원 중 하나가 후퇴를 제안했다.
"뭐? 아까 거기로 다시 가자고?"
"거기는 안전하잖아. 다들 계속 싸우느라 지쳤으니 좀 쉬고 나서 다시 출발하자고."
그 상황에선 최선....
아니, 최고의 선택지였다.
이때 돌아갔다면 그 개고생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뭔 개소리야?"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일단 재정비하고...."
하지만 제트 그룹은 세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미쳤냐? 갈 거면 너나 가!"
"여기까지 오는데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냥 가자. 힐러도 있는데 별일 있겠어?"
스타트 지점으로 복귀하자는 골든 제안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앞으로 진행한 데다,
"아씨... 긁혔잖아? 여기 힐!"
"힐러님, 힐 좀 빨리빨리 줘요!"
"나, 나 피난다! 빨리 치료해줘!"
긁혀서 생긴 생채기를 치료해 달라, 벽에 실수로 부딪쳐서 든 멍을 치료해달라, 나무막대를 오래 쥐어서 손이 아프니 힐을 써달라 등등.
전투원들이 별것도 아닌 부상으로 힐러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바, 방금 힐 받으셨잖아요?"
"그랬지. 근데 또 다친 걸 어째."
"빨리 치료나 해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지금 머리가 너무 어지러... 욱!"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곳에 힐을 남발한 결과,
"커헉!"
[상태이상 '과잉 치유' 상태!]
갑자기 힐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힐을 너무 무리하게 사용해서 '과잉 치유'에 빠진 것이다.
"야, 야! 얘 왜 이래?"
"정신 차려!"
"야, 누구 포션 가진 사람 없어?"
"죄다 힐러한테 넘겼잖아!"
"아 시발 진짜! 이 새낀 왜 쓰러지고 지랄이야?"
이들은 아즐 대륙에 온 직후라 몰랐겠지만, 지금처럼 자기 능력 이상으로 힘을 사용하면 몸에 과부하가 온다.
즉, 자업자득이라는 뜻.
"나, 나 다쳤어! 빨리 치료 좀 해줘!"
"그냥 참아! 힐러 쓰러졌다고!"
"뭐? 힐러가 쓰러져?"
"일단 하던 대로 자기 자리에서...."
"야 이 시발 새끼야! 뒤에 힐러도 없는데 맨 앞에서 싸우라고? 그러다 죽으면 니가 책임질 거야?"
"야, 야! 앞에 몬스터! 몬스터!"
"어? 크, 크아아아악!"
당연히 '제트' 그룹은 난리가 났다.
지금껏 힐러 한 명에게 의존하며 싸웠던 탓에, 힐러가 쓰러진 순간 그룹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 팔! 아아악!"
"아파! 아파아! 시발!!"
"시, 시발! 정신 차리고 무기 들어!"
"도망쳐 시발!"
이렇듯 선두가 박살 나기 시작하면, 뒤쪽에 있던 3등 시민들이라고 안전할 리가 없는 법.
"으, 으아아아!"
"오지 마! 오지 마!"
"제,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아악!!!"
사방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뒤에 숨어서 떨기만 한 겁쟁이들인 만큼, 별것도 아닌 부상에 울부짖고 날뛰었다.
"시발 응원은 못 할망정...."
"도움이 안 되면 입이라도 닥치든가!"
3등 시민들의 절규와 울음소리는 그나마 버티고 있던 전투원들의 사기를 끝없이 깎아내렸다.
"시발, 우리끼린 안 되겠다! 다른 놈들한테 도와달라고 하자."
"다른 놈 누구?"
"오른쪽 길로 간 놈들 말고 누가 있겠냐!"
결국, 제트 실세 이영후는 그룹이 엉망진창이 되고 나서야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단 스타트 지점으로 복귀해서 다른 그룹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이게 뭐야...."
"안 가고 뭐 해? 몬스터 오고 있다고!"
"시발, 길이 막혔는데 어쩌라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스타트 지점으로 가는 입구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깐 멀쩡했잖아?"
"빨리 다른 길로...."
"지, 지금 뒤에서 몬스터가 오고 있다니까? 여기서 다른 길을 어떻게 찾아?"
몬스터를 피해 도망쳤더니 막다른 길에 몰렸다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
"시발...."
"어쩜 좋아요?"
"이, 이대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이대로 전멸하는 건가 싶던 찰나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머리 위에서 누군가 비웃는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너, 너는!"
이영후는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들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까 그 사기꾼 새끼 아냐?"
동굴 천장 종유석에 해먹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서 편하게 발밑의 난장판을 구경하는 강승현과 갈색머리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까 경고했잖아요. 힐러 '하나'에만 의지하지 말라고."
강승현은 아까 [관찰의 눈]을 통해 제트 그룹의 힐러를 살폈다.
[상태이상 '과잉 치유'에 걸리기 직전이다.]
['과잉 치유'에 걸린 힐러는 힐을 비롯한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그녀는 이미 그 시점부터 그룹원들을 치료하느라 몸이 한계였기 때문이다.
"힐이 생각보다 마력이 많이 들더라구요? 스태미나도 소모되고.... 저러다 쓰러지겠다 싶어서 도와주려 했는데 누가 칼같이 거절해서 말이죠."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영후를 내려다보았다.
"...입구를 막은 게 너냐?"
"글쎄요? 한 번 나온 튜토리얼 존에 못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거 아닐까요?"
물론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겠지만, 벽을 무너트려서 스타트 지점 입구를 막은 건 강승현이다.
'원수를 갚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막다른 길에 갇힌 제트 그룹이 몬스터한테 작살나는 걸 편하게 구경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사람, 도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런 발상을 떠올리는 걸까.'
마찬가지로 천장에 짱박혀 있던 갈색머리는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씹쌔끼! 우리 뒈지는 거 보려고 일부러 입구 막았어!"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씨발 죽여! 저 새끼 죽여!"
"부, 부탁드려요.... 거기서 구경만 하지 말고 우리 좀 도와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게, 점점 몬스터 달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쿠구그그!!!
"크어어어!!!"
"캬아아!!!"
이어서 괴성과 함께 몬스터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제트 그룹을 무참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
"살려줘! 살려줘!"
"시, 시발! 무기 들어!"
3등 시민들은 발광하며 울부짖고, 전투 멤버들은 반쯤 정신을 놓고 무기를 휘둘러 대는 등.
스타트 지점으로 향하는 길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아, 그냥 무시하려 했는데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못 보겠네요. 역시 힐러는 착한 사람만 받는 직업이 틀림없다니까?"
"너, 너 이 새끼...."
그 모습을 위에서 즐겁게 감상하던 강승현은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불쌍하니까 도와드릴게요."
"도와주겠다고?"
"직접 내려가는 건 힘들 것 같고, 제가 회복템을 지원해드리면 되겠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썰어둔 회복용 버섯들을 꺼냈다.
"색 보면 뭐가 회복될진 알죠? 맛도 괜찮아요."
"그, 그게 회복템이라고?"
"못 믿을 것 같으니 한 개는 서비스."
탁!
강승현은 대충 눈에 들어온 제트 그룹원 한 명한테 빨간 버섯 조각을 던졌다.
"나보고 먹으라고?"
"먹기 싫음 토스하시고."
"아, 알았어."
그는 손에 들어온 버섯 조각을 보더니 정신없이 입에 넣고 삼켰다.
"회복됐다! 이거 딸기맛이야!"
"뭐라고? 이봐! 나도 줘!"
"나, 나도 주시오!"
"부탁드려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욱 간절하게 강승현에게 매달려왔다.
"으, 으아아!"
"제발 마력템 좀 줘! 스킬 쓸 마력이 없다고!"
그 와중에도 몬스터는 계속해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냥 준다고는 안 했는데요?"
"뭐, 뭐라고?"
"뭐든 대가를 지불하셔야죠.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인벤토리에 있는 거 다 내놓으세요. 업적이나 룰렛 돌려서 받은 보상 있을 거 아니에요."
"뭐, 뭐라고?"
"아니면, 제가 지금 신발이 없거든요? 신발이나 외투도 벗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이 친구한테 옷도 빌렸거든요."
"미쳤냐 시발!"
"그럼 우리는 어쩌라고?"
"어, 지금? 말할 여유 있어요? 다들 체력 간당간당할 텐데?"
그의 두 눈은 푸른 빛을 뿜어내며 밑에 모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읽기 시작했다.
"젠장!"
"망할 새끼."
결국, 전투 멤버들은 어쩔 수 없이 가진 걸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 저는 업적이니 뭐니 그런 걸 하지 못해서 드릴 게 없습니다."
"이, 이러다간 죽을 겁니다. 부디 자비를...."
아무것도 안 해서 줄 게 없는 3등 시민들은 구걸을 시작했으나,
"아, 저한테 줄 게 없어요?"
강승현은 보란 듯이 버섯 조각 하나를 입에 물고 씹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 뒈지시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너무하니까 친절을 베풀어 드릴게요."
"치, 친절?"
"저는 착하고 선량한 힐러니까요."
투둑, 투두둑!
"그냥 아무나 주워가세요."
강승현은 쥐고 있던 버섯 조각을 동굴 곳곳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런 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니까."
제트 그룹의 마지막 실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승현에게 원한을 샀다는 점이다.
217. 3년 전, 황금사과
툭.
후두둑.
뿌려진 버섯 조각들이 3등 시민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멍하니 있던 그들은,
"어, 어어...!"
"안 돼, 안 돼!"
조각들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손을 뻗기 시작했다.
콱!
"잡았다! 내가 잡았어!"
"이, 이걸 먹으면 체력이 회복된다는 거지...?"
동굴 바닥으로 떨어진 버섯 조각은 먼지투성이가 됐지만, 다들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버섯을 주워 먹었다.
"마, 맛있다! 맛있어!"
"입에서 살살 녹아!"
"딸기는 딸기인데 산딸기 맛이네!"
지금 3등 시민들은 몬스터한테 필사적으로 도망치느라 부상을 입었고, 이대로 가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먹으면 체력이 회복되는 아이템이 나타났으니,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 이거 안 놔?"
"웃기지 마! 내가 먼저 집었어!"
"당신은 아무것도 안 냈잖아? 이리 내놔!"
"뭐? 저 사람 말 못 들었어? 그냥 아무나 주워 가라잖아!"
그러니 당연하게도 버섯 조각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조각 한두 개 먹는 거로는 어림도 없었으니까.
"저, 저것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시발.... 우린 똥줄 빠지게 막고 있는데!"
그 광경 본 제트 그룹 전투원들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이쪽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몰려오는 몬스터와 대치 중이건만,
"비, 비켜!"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라고!"
"하, 하나 주웠다!"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구경만 하던 인간들은 땅에 떨어진 버섯 조각 하나를 먹겠다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것도 안 낸 주제에!"
"주는 사람이 그냥 주겠다잖아!"
"뭐? 양심이 있어야지!"
"다 꺼져! 먼저 줍는 놈이 임자야!"
"이게 진짜!"
몬스터를 상대로는 무섭다고 벌벌 떨던 인간들이.
퍼억!
"어쭈, 쳤냐? 쳤어?"
"더 맞기 싫으면 그거 내놔!"
"나는 못 칠 줄 알아?"
상대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인간일 땐, 망설임 없이 주먹을 쥐고 무기를 휘둘렀다.
"아아악!"
"이, 이건 내 거야! 건들지 마!"
"놔! 놓으라고!"
하늘에선 얇게 썰어진 알록달록한 버섯 조각들이 휘날리는데, 땅에선 그 조각을 갖겠다고 서로 싸우는 기묘한 상황.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후드득, 투둑.
사실, 지금 사방에 뿌려지는 버섯 조각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진정하고, 버섯 조각을 한곳에 모아 분배한다면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으나.
"내가 먼저 잡았어요! 놔요!"
"너나 놓으라고!"
"스, 스킬! 스킬 쓴다?"
사이좋게 나눠 먹으면 된다며 싸우는 사람들을 말릴 만한 '착한 사람들'은 전부 김호정을 따라 제트 그룹에서 이탈한 지 오래다.
"아아아악!"
"놓으랄 때 놨어야지!"
애초에 제트 그룹은 남을 위해 앞장서고 불의를 용납 못 하는 사람들은 전부 빠져나간, 지조 없고 이기적인 겁쟁이들만 남은 상태였으니까.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이 상황을 중재할 만한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다.
"미, 미친 새끼...."
"개시발...."
"또라이 새끼 아냐, 진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트 그룹 전투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이들 중 강승현이 회복템을 순순히 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아이템을 대뜸 나눠주겠다고?'
'그럴 리가.... 뭔가 속셈이 있겠지!'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고, 일단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이런 상황에선 대가를 받는 게 정상이니까.
오히려 안 받는 게 비정상이다.
'살다 살다 옷 뜯어가는 놈은 처음이네.'
'안 그래도 죽겠는데 맨발로 싸우라는 거냐....'
그래도 가진 아이템을 다 털어주고, 겉옷에 신발까지 벗어줬으니 적어도 나눠주는 방식은 정상적일 거라 생각했다.
"이 해먹 탐나시나요? 이거 아까 꾸러미 풀고 남은 천하고 끈으로 만든 건데, 튼튼해서 좋아요."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강승현은 최악의 방식으로 아이템을 배포하면서 제트 그룹을 조롱했다.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이딴 짓 해놓고 발 뻗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제트 그룹 전투원들은 아우성쳤다.
당장 달려가서 3등 시민들을 패주고 싶어도, 몬스터와 싸우느라 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 저게 내 탓인가요? 전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고 친절을 베푼 것뿐인데요."
"뭐?"
"저렇게 싸우는 건 자기들 잘못 아닌지?"
하지만 강승현은 꿈쩍도 하지 많고 미소짓더니.
"아, 여러분한테 안 줘서 섭섭하신 거죠?"
"아니, 지금 그런 말 하자는 게 아니잖아!"
"알았어요. 바로 드릴게요."
이어서 그들의 머리 위로 버섯 조각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 씨발럼이 진짜!!!!"
"저, 저 미친 새끼...!"
"젠장.... 안 먹을 수도 없고!"
전투원들은 쌍욕을 하며 달려갔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강승현을 패러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버섯 조각을 주워먹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진짜...."
"시발, 살려고 별 짓을 다하겠네!"
버섯 조각을 목구멍에 쑤셔 넣은 전투원들은 이를 악물고 무기를 휘둘렀다.
먹어본 사람 말로는 딸기 맛이라지만, 숨돌릴 틈도 없다 보니 맛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퍼걱, 퍼어억!
"몬스터 놈들 밀어버려!"
"이요옵!"
"아 시발, 이 새끼 또 시작이네!"
"어이 김 씨, 입 다물고 몬스터나 밀어!"
이들은 아까 3등 시민들이 싸우는 걸 보기도 했고,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바빠서 자기들끼리 싸우진 않았다.
"누, 누가 나한테 템 좀...."
"으, 으...."
하지만, 다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각을 챙기지 못한 동료를 돕진 않았다.
"이게 뭔 맛인지도 모르겠네!"
"시발, 내가 거지도 아니고...."
운 좋게 조각을 낚아채고 회복하는 전투원과, 바닥을 뒤지며 남들이 놓친 먼지투성이 조각을 주워 먹는 전투원들.
그렇게 3등 시민들은 물론, 1, 2등 시민들도 조금씩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까 내 말을 들었어야지."
강승현은 그 광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버섯 조각을 씹어 삼켰다.
여러 의미로 지옥도가 펼쳐진 발밑과 달리, 천장 쪽은 평화로웠으니까.
"저기, 저기요?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결하신다면서요."
"네, 지금 평화롭잖아요?"
"우리만 평화롭잖아요! 저쪽은 에리스가 황금사과를 던진.... 아니, 황금 사과를 조각조각 내서 뿌린 수준이잖아!"
발밑을 보던 갈색머리는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실, 회복템을 독점하겠다고 해서 어느 정도 각오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에리스가 황금사과를 던진 건 맞지만, 결국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건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골랐기 때문 아니겠어요?"
강승현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자신이 버섯 조각을 뿌렸다 해도, 제트 그룹이 김호정 일행을 내쫓지만 않았다면 저렇게 되진 않았을 거라면서.
"내 방식이 정~ 불편하다면, 아래로 내려가서 직접 말리시든지요? ...딱히 추천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저도 공범이고."
갈색 머리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한배를 탄 사이인 만큼, 얄팍한 도덕심으로 강승현을 나무랄 마음은 없었다.
그럴 인간이었으면 처음부터 이 계획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전 아까 그 자리에 없었으니, 이래라저래라 주제넘게 말할 자격이 없죠."
거기다 김호정을 비롯한 묶은 머리 여자와 몇몇 사람들이 제트 그룹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어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 착한 사람들이 떠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해해줘서 고맙네요."
강승현이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제트 그룹이 막고 있던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졌다.
"헉, 허억!"
"이겼다! 이 씨부랄 것들아! 내가 이겼다고!"
"이요옵!"
"이겼으니까 한 번은 봐준다 시발...."
"이요옵!"
"한 번만 봐준다고 씨발놈아!"
전투원들은 환호하며 소리를 질러댔으며,
"몬스터가 죽었다고?"
"하, 하하, 살았다, 살았어...."
"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거지?"
치고받고 싸우던 3등 시민들도 크게 기뻐하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끝난 건가...."
"생각보단 일찍 끝났네요."
위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은 더 이상 몬스터가 몰려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아예 도움 주지 않고 방치하면서 구경하실 줄 알았거든요."
갈색 머리가 살짝 안도한 얼굴로 물었다.
이유야 어쨌든, 강승현은 저들을 도왔지 않은가.
"그야 이게 더 재밌으니까요."
"재미요?"
강승현은 실실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방치하고 구경만 했다면 저 사람들이 절 원망했겠지만, 지금은 다르죠."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제트 그룹은 버섯 조각을 줍느라,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몬스터를 막느라 이제 강승현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다.
"머리 위의 저보다는 눈앞에서 자기 몫을 빼앗아가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한때의 동료가 더 원망스러울 테니까요."
실제로 제트 그룹의 모두가 기뻐하진 못했다.
대부분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살아남았으나,
"야, 정신 좀 차려봐! 얌마!"
"누, 누구 버섯 조각 남은 거 없어?"
"소용없어.... 이건 힐러가 아니면 못 고친다고."
전투원 쪽에선 일부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 이봐요. 이봐요!"
"이 사람 죽었어...."
3등 시민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승현이 뿌린 버섯 조각은 체력과 마력을 회복시키는 효과만 있을 뿐, 몸의 상처와 부상을 치료해주진 않는 아이템이었으니까.
"...."
무리에서 죽은 사람이 나왔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들이 죽은 이유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신들이 엮여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헉,헉...."
"큭."
"씹...."
제트 그룹은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등, 서로를 잔뜩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제 서로를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가 박살 내고 싶은 건 저 사람들 개개인이 아니라, 제트 그룹 존재 자체였거든요."
"...."
"맘 맞는 몇몇은 뭉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다시는 상종 안 하겠죠."
강승현이 던진.
아니, 잘게 조각내서 뿌린 황금사과는 제트 그룹을 완벽하게 와해시켰다.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네?"
해먹에 앉아 있던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템 챙기러 내려가야죠."
218. 3년 전, 은혜와 원한은 확실히
"허억, 헉."
"큭!"
현재 동굴 내부는 서로를 경계하는 제트 그룹원들로 인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 새끼들....'
'방심하면 기습해올지 몰라.'
누구 하나라도 묘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 즉시 2차전이 벌어질 것이다.
턱! 탁!
"이거, 올라가는 건 쉬운데 내려오는 건 귀찮네요."
"밧줄이라도 하나 만들어둘 걸 그랬어요."
"뭐, 어찌어찌 내려왔으니 상관은 없지만."
강승현과 갈색 머리가 지면으로 내려온 건 그 타이밍이었다.
"다들 괜찮으시죠?"
밑으로 내려온 강승현은 제트 그룹 앞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타닷!
"너, 너."
"이 자식...!"
이번 사태의 진범이 나타난 상황.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강승현에게 고정됐다.
"응?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목숨을 구해준 은인한테...."
"은인이라고?"
"이런 뻔뻔한 자식이...."
"아니면 뭐, 해보시게요?"
탁.
강승현은 실실 쪼개며 무기를 꺼냈다.
돌을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칼날과 처음에 지급받은 나뭇가지를 개조해서 만든, 조잡하지만 위협적인 단검이었다.
"전 딱히 상관없지만 다들 곤란하실 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만신창이가 된 제트 그룹원들과 달리, 강승현은 아주 건강하고 쌩쌩한 상태다.
거기다 회복템을 잔뜩 들고 있는 자칭 힐러인 데다, 새 무기까지 들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덤빈다는 건 자살행위다.
"으음."
"큭...."
"흠, 흠."
거기까지 이해한 대다수는 강승현에게 덤빌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리거나 고개를 숙이는 등, 강승현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망할, 자식."
물론 여전히 강승현을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으나, 결국 덤벼들지 못하고 단념했다.
'어디, 일단은 정리가 끝난 건가?'
강승현은 들고 있던 무기를 집어넣었다.
'멍청한 쫄보새끼들.'
사실, 이때 제트 그룹 전원이 동시에 덤볐다면 강승현 일행에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어쨌든 이쪽은 2명이고 저쪽은 수십 명이었으니.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애초에 저들 마음속은 강승현을 향한 증오보다는,
'저것들만 아니었어도!'
'빌어먹을....'
'이 자식들의 뭘 믿고 협력하겠어.'
곁에 있는 '전' 동료를 향한 원한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것들하고 손잡을 거라면 차라리 저 자식과 협력하지.'
'저 친구는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어.'
'저쪽은 대놓고 지랄은 해도 통수를 치진 않을 테니....'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만큼.
복수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들 현명한 선택을 하셨네요. 뭐든 평화롭게 해결하는 게 좋죠."
자신에게 덤벼 오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는 걸 확인한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전 신발 챙겨갑니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당당하게 주워갔음에도 나무라거나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 그쪽도 옷 한 벌 고르시죠?"
"...전 사양하겠습니다."
갈색 머리는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쌌다.
그 난장판을 직접 보고 나니 물건에 손댈 마음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럼 이거 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입고 있던 점퍼를 돌려줬다.
어차피 찢어져서 다른 옷으로 갈아탈 생각이었으니까.
'새 신발도 신었겠다.... 이제 어떻게 할까.'
이대로 혼자 출발해도 상관은 없지만, 여기서 출구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자다가 몬스터가 습격해오면 귀찮을 테니, 동굴에서 나갈 때까지는 이 녀석들을 부려먹어야지."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많이 지친 건 알지만, 언제 몬스터가 또 나올지 모르니 여기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건 그렇죠."
"이 안에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주위를 경계하던 사람들은 모두 강승현의 말에 동의하며 몸을 움직였다.
몇 시간 전까진 무쓸모 짐짝이던 3등 시민들도 지옥도에서 개싸움을 벌인 뒤라서 그런지 눈빛이 싹 바뀌었다.
"몬스터고 뭐고 오기만 해봐...."
"이렇게 됐으니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갈 거야!"
"별, 별것도 아니네 뭐...."
한때는 아무것도 못 하고 구석에서 떨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몬스터가 보이기만 해도 달려들 것이다.
몬스터 따위보단 옆에 있는 '전' 동료들이 더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이야, 이쯤 되면 다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회복템도 나눠줬지, 공짜로 각성까지 시켜줬지.... 이런 은인이 어딨어?'
어째 일반적인 웹소설 튜토리얼 진행 마스코트가 할 일을 강승현이 대신하는 상황.
'이게 진짜 자원봉사지.'
당사자들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지기 딱 좋은 소리지만, 강승현은 진지하게 자신은 상태창한테 보너스 포인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턱, 터벅.
앞으로 나아가는 중간중간 다른 집단의 흔적을 발견했다. 왼쪽 길로 들어선 차원 이동자는 제트 그룹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고생 좀 하셨겠구만.'
남아있는 흔적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트 그룹이 아까 어그로를 잔뜩 끌어서 그런지, 다른 몬스터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여, 여기 앞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
"비, 빛이다!"
"나가는 길이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온갖 갈림길과 통로, 통로를 나아가던 강승현 일행은 마침내 바깥으로 통하는 출구를 찾았다.
"만세! 살았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해방이다!"
"어, 어쩌면 집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사람들은 정신없이 입구로 달려나갔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기운이 다 빠져서 비틀비틀 걸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디어 출구네요."
강승현의 곁을 따라오던 갈색 머리 역시 안도한 얼굴로 앞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응? 왜 그러세요? 갑자기 서서."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할 일이 있다구요?"
그러나 강승현은 어쩐 일인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동굴 안에 남았다.
"궁금하시면 따라오셔도 됩니다."
"그,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갈색 머리는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강승현을 따라가지 않고 한발 앞서 밖으로 나갔다.
터벅, 터벅.
이렇듯 일행의 대부분이 밖으로 달려나가는 판에, 반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요."
그중 한 사람은 강승현이었고,
"다 나간 것 같으니 슬슬 나오시죠."
"이, 개자식...."
나머지 한 사람은 이영후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전 '제트' 실세이자 우두머리였으니 그룹을 분열시킨 강승현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좀 어이가 없네요."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심지어 이번 싸움으로 실세 두 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동료들도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어 뿔뿔이 흩어진 데다, 가장 중요한 힐러는 아예 잠적해버렸기에 놈은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게 왜 내 탓인지? 내가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잖아요. 이 꼴이 난 건 자업자득이죠."
"시발, 내가 다른 놈들 같은 호구 새끼들인 줄 아나 본데....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아?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는 잔뜩 분노한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날카롭게 빛나는 금속제 나이프였다.
"뒈져어어!!!!"
파악!
이영후는 강승현에게 달려들어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나이프에서 거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걸 봐서, 녀석이 스킬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여기 남은 건 그쪽이랑 하품 나오는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강승현은 같잖다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그쪽을 확실히 묻어버릴 타이밍을 재고 있던 거거든."
기다렸다는 듯, 소매에 숨기고 있던 수제 단검을 꺼냈다.
그는 처음부터 이영후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다른 놈들은 그렇다 쳐도, 이런 녀석은 살려 두면 복수하겠다고 찾아오는 법이니까.'
예상대로, 이영후는 사건이 끝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강승현을 찾아왔다. 이 동굴을 강승현의 무덤으로 만들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푸욱!
"꺽...."
"내가 말 안 했나?"
강승현은 이영후가 나이프를 찌르기 위해 접근한 순간,
[관찰의 눈]
녀석의 목을 향해 수제 단검을 찔러넣었다.
그것도 정확하게 경동맥을 향해서.
"은혜랑 원한은 확실하게 갚는다고."
이어서 [절개]를 사용해 그대로 찢어버렸다.
털썩!
단칼에 급소를 찔린 이영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통이 끊어졌다.
'사람을 그렇게 꼽줘 놓고 사과는커녕 칼로 찌를 준비나 하다니. 이런 멍청이를 살려 두는 건 바보나 할 짓이지.'
바보는 바보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 법. 강승현은 이영후를 깔끔하게 프리패스로 저승에 보내줬다.
"후...."
싸움을 끝낸 강승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 스킬을 많이 쓰면 피곤해지네.'
아직 자신이 스태미나로 스킬을 쓴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상태라, 강승현은 자신이 마력이 바닥나서 그런 줄 알았다.
'일단 마력부터 채우고.'
그는 푸른 밤하늘 버섯 조각을 꺼내 먹었다.
몇 번을 먹어도 새콤한 소다 맛이 나는 이상한 버섯이었다.
'뭐, 많이 있으니 다 먹어버릴까.'
3년 뒤의 강승현이 이 모습을 본다면 파란 버섯은 팔아치우게 놔두라고 멱살을 잡았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3년 전의 강승현은 느긋하게 앉아 버섯을 먹어치웠다.
'이제 좀 낫네.'
강승현은 개운하게 몸을 일으켰다.
휴식을 취해서 스태미나가 회복됐다는 것도 모르고 의미 없이 아이템만 날린 채 말이다.
그리고 앞에 쓰러져 있던 이영후의 시체를 살폈다.
'역시 죽은 사람의 인벤토리는 손댈 수 없는 건가.'
주머니에는 딱히 털어먹을 게 없었다.
중요한 건 전부 인벤토리에 넣어둔 모양이다.
"뭐, 나이프 같은 걸 들고 다닌 걸 보면 평범하게 살던 사람은 아닌 모양인데. 이쪽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은 아니라서."
강승현은 처음에 지급받은 티셔츠로 몸에 튄 피를 닦아냈다. 셔츠는 자동 빨래 기능이라도 들어 있는 건지, 피가 묻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흰색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건 기념으로 잘 쓰겠습니다."
강승현은 이영후가 떨어트린 나이프를 챙겼다. 그렇게 좋은 무기라고 할 순 없지만, 조잡한 수제 단검보다는 낫다.
'그럼, 슬슬 나가 볼까.'
챙길 것 다 챙기고, 깔끔한 마무리.
강승현은 개운한 얼굴로 동굴을 나섰다.
-'다들 모여있네.'
밖으로 나가자 앞에 옹기종기 모인 차원 이동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그 녀석들은... 역시 안 보이는군.'
혹시나 해서 김호정 & 묶은 머리 일행을 찾았으나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오른쪽 길로 향한 사람들은 강승현 일행이 나온 곳과는 또 다른 출구 쪽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하긴, 그런 호구 집단이 무슨 수로 살아남겠어.'
하지만 당시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강승현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앞으로 다시는 볼 일 없겠지.'
219. 3년 전, 언젠가 또
[업적 달성!]
"응?"
동굴을 빠져나와 주위를 살피던 강승현에게 알림 메시지가 날아왔다.
[업적 달성 : 끝이 아닌 시작]
[스타트 지점에서 벗어날 경우 달성.]
[☆기타(초보자용 아이템 교환권) 획득!]
[획득한 교환권을 투입해서 필요한 아이템으로 교환하세요!]
동굴을 빠져나온 걸 축하하는 뜻에서인지, 상태창이 아이템을 팍팍 퍼주기 시작했다.
'이런 건 안에서 줄 것이지.'
고생 다 하고 나니까 뱉어내는 인성.
강승현은 상태창을 욕하면서 교환권을 사용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주세요.]
[직업에 맞는 아이템을 지급해드립니다.]
-[초보자용 무기]
-[초보자용 방어구]
-[초보자용 액세서리]
'힐링 스킬이 없으니 힐러 무기는 필요 없겠지. 지금 있는 단검이면 충분해. 아까 기념 메시지 띄울 때 장비 확정 쿠폰을 받았으니 방어구도 필요 없고....'
고민 끝에, 강승현은 액세서리 아이템을 골랐다. 반지나 목걸이가 나왔다면 던져버릴 생각이었으나,
[초보자용 스태미나 배지]
[장착시 스태미나 회복률 소량 상승.]
[이 아이템과 졸업할 쯤이면 당신은 훌륭한 차원 이동자가 되어있겠지요....]
천만다행으로 배지가 나왔다.
물론 3년이 지난 지금은 진작 팔아버리고 없지만 말이다.
'보아하니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겉옷 안쪽에 배지를 단 강승현은 차원 이동자 무리로 향했다.
그 뒤는 전에 한 번 설명한 대로다.
온갖 고생을 하며 동굴을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지친 얼굴로 대책을 궁리했다.
"기껏 동굴에서 탈출했지만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 폰은 여전히 안 터지고."
"우리 이제 어쩌면 좋죠?"
"집에 갈 방법을 찾아야지.... 방법이 있을 거야."
"또 그런 괴물들이 나타나면...."
이렇듯 지구로 돌아가자는 사람들과,
"몬스터? 걱정 안 해도 됨. 룰렛 대박 내면 다 허접임."
"나는 여기 좋은데요. 꼭 돌아가야 하나?"
"솔직히 스킬도 못 쓰는 지구로 왜 가?"
"나는 룰렛 믿어. 다음번엔 S급 스킬 뱉어줄 거라고...."
"응, 그런 거 없고 먼지 투하."
그 고생을 해놓고도 여전히 아즐 대륙에 눌러살겠다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저, 그런데요."
이래저래 의견이 갈린 그때.
"집에 갈 방법을 찾든지 여기서 살든지, 뭘 하든 간에 일단은 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갈색 머리가 지극히 현실적인 말을 꺼냈다.
"돈?"
"그러게, 우리 지금 한 푼도 없잖아."
"몬스터 백 마리를 잡아도 돈은 안 나왔지?"
게임에서 빚을 얻으면 다 미뤄두고 빚부터 갚아버리는 한국인의 특성상, 돈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당장 숙식이 문제네. 여기 가게는 한국 돈 안 받아줄 거 아냐."
"맞아요, 길바닥에서 잘 수도 없고."
그리하여 파가 갈렸던 생존자 무리는 하나로 통합됐다. '일단 돈부터 벌고 생각하자.'라고.
"그럼 우리 이렇게 합시다."
강승현이 입을 연 것도 이 타이밍이었다.
"다들 스킬 갖고 있죠? 이걸로 돈을 벌 만한 일을 찾는 거예요."
"돈을 벌 만한 일?"
"저쪽을 보세요."
지금 차원 이동자들이 있는 곳은 뭘 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풀과 나무밖에 없는 숲숲숲 한복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숲 너머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 연기가 나고 있네요."
"불이 난 건 아닌 것 같고.... 설마 사람 사는 마을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마을로 가면 잡일이든 뭐든 일거리를 구할 수 있겠죠."
이 숲은 동서남북 어디로 향해도 사람 사는 마을로 갈 수 있다. 한마디로 차원 이동자가 이세계 생활을 시작하기 딱 좋은 장소.
물론 이 또한 관리자의 큰 그림이었다.
"하긴, 몬스터가 이렇게 많다면 용병 구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솔직히 싸우는 건 무섭지만, 물건을 수리하는 스킬을 얻었으니....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지도."
"전쟁에는 머니가 필요한 법이지."
그리하여 차원 이동자들은 집에 갈 차비, 아즐 대륙 정착금을 벌기 위한 목표로 이세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살아서 봅시다."
여기서 갈 수 있는 마을은 모두 4곳.
차원이동자들은 각자 가고 싶은 방향을 골라 떠나기 시작했다.
그 뒤, 4개의 마을은 태초마을이라는 은어로 불리면서 차원 이동자들 사이에서 제2의 고향으로 취급받게 되지만....
그중 한 곳은 100일 뒤에 망한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엿 처먹을 새끼들아."
"당신들은 절대 용서 못 해...."
"두고 보자고."
다들 훈훈하게 헤어지는 와중에, '전' 제트 그룹만큼은 서로를 죽어라 노려보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아, 오셨군요."
차원 이동자들이 하나둘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하는 와중, 강승현을 발견한 갈색 머리가 다가왔다.
기다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찢어져 있던 점퍼가 말끔하게 수리된 상태였다.
"또 싸움 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이 평화롭게 끝났네요."
"그쪽이 유용한 키워드를 꺼낸 덕분이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
타이밍 좋게 중재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무기를 꺼내 상대편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아까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했어요. 다들 안에서 고생깨나 한 듯하더라구요."
갈색 머리의 말에 의하면 당시 왼쪽 길로 향한 차원 이동자들의 생존률은 85%.
생각보다 높은 편이긴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사망자의 대부분, 아니 모든 사망자는 유일하게 힐러를 보유하고 있던 '제트' 그룹 소속원이었다.
다른 그룹도 회복템을 구하지 못해 개고생한 건 마찬가지지만, 제트 그룹이 몬스터를 싹 끌고 가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래서 저쪽 사람들이 유독 날 서 있는 것이다.
"힐러가 있어서 가장 안전할 거라고 믿었을 테니, 배신감이 크겠죠."
"제 말만 들었으면 안전했을걸요."
저들이 개고생한 것도, 사망자가 생긴 것도 하나같이 자업자득이다.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은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전 요리사니까 식당 자리를 알아볼까 생각 중이긴 해요."
"그럼, 여기서 이별이겠네요."
갈색 머리의 말을 들은 강승현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손절했다.
'동굴에서야 이래저래 다른 사람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만, 이제는 필요 없지.'
그는 마을에 눌러앉을 생각이 없는 데다, 애초에 거치적거리는 동료 같은 걸 데리고 다닐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갈색 머리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도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또 만날 일이 있겠죠. 원래 사람은 죽지만 않으면 살면서 한 번은 더 만난다고들 하잖아요."
나약한 놈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강승현 특유의 의지가 돋보이는 발언이었다.
"저는 식당 일하면서 그 두 사람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두 사람?"
"묶은 머리 여성분이랑 안경 쓴 아저씨 그룹이요."
"그 사람들? 진작 죽지 않았을까요?"
강승현은 살짝 비꼬는 투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찾으려는 갈색 머리가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째서죠?"
갈색 머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렇게 덧붙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 대답을 들은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좋은 사람들이라서 살아 있을 것 같다고? 정 반대겠지. 저런 마인드로 어떻게 살아남겠다고.'
실제로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자와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고,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저 친구 이름도 안 들어두길 잘했네.'
아마 앞으로도 들을 일 없지 않을까?
강승현은 생각했다.
-'아무튼,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됐군....'
모두 어딘가로 떠난 뒤, 홀로 남은 강승현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아아아-.
답답한 동굴을 벗어나서 그런지, 바깥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식은 괜찮지만. 역시 동료 같은 건 귀찮단 말이지. 파티원들 인간관계도 신경 써야 할 테고 말이야.'
답은? 솔플인 것이다.
잠깐 바람을 쐬던 강승현은 몸을 일으켰다.
'이 숲, 확실히 한국 땅은 아니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빌딩이나 전봇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면 평범한 숲인데 중간중간 지구에서 본 적도 없는 식물들이 자라는 걸 보면.... 언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몰라.'
애초에 식물형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고.
강승현은 언제든 바로 쓸 수 있도록 소매에 나이프를 장비했다.
'우선 지금 중요한 건 힐링 스킬을 뽑는 거겠지. 목적을 이루려면 포인트가 많이 필요할 테니.'
남들보다 살짝 불리한 상황이지만, 힐링 스킬만 얻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걸 알기에 강승현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내 목적은 지구로 돌아가는 것도, 이곳에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의 진짜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2000포인트를 꿀꺽한 상태창을 만들어낸 존재를 박살내는 것뿐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대단하신 분일 테니, 만나려면 힘 좀 키워서 찾아가야겠지.'
놈을 박살내면 상태창의 존재가 소멸하거나, 혹은 다시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내 알 바인가.'
강승현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상태창 제작자만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차원 이동자들이 죄다 망해도 신경 안 쓰는 또라이였기 때문이다.
'내 2000포인트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는데.'
3년 전의 자신은 주식으로 2억 날린 사람처럼 성격이 매우 매우 안 좋았던 시기였다.
강승현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최종 목적을 이루려면 일단 힐링 스킬을 뽑아야 하니까....'
현재로선 강승현이 포인트를 벌 방법은 포션을 잔뜩 사서 남들에게 나눠주는 것뿐이다.
'나도 돈부터 벌어야겠군.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고, 번 돈으로 포션을 사서 포인트를 모아보자.'
정리를 끝낸 강승현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서쪽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세계 생활도 나름 즐길 만하겠지.'
이미 이 시점에선 김호정도 묶은 머리 여자도, 방금 만났던 갈색 머리까지 깨끗하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잊고 살았겠지만.
그런 강승현이 김호정과 재회한 건 그로부터 8개월 뒤. 그것도 매우 뜻밖의 장소였다.
220. 8개월 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