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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 200-210

200. 검은 짐승

김호정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다.

어쨌든 차원이동자이기는 하나, 유리멘탈 겁쟁이인 데다 쓸 만한 스킬도 거의 없고 전투 센스까지 나빠서 아즐 대륙민한테도 발릴 정도로 약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런 인간이 아즐 대륙에서 3년이나 버티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정이 여태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그에겐 딱 한 가지, 죽었을 때만 발동할 수 있는 히든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게 도대체 뭐야...."

"시체가 소멸하고 있잖아?"

자리에 있던 사선 길드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고 당황했다.

스으으으으....

김호정의 시체가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소멸하더니, 그 자리에서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연기? 안개인가...."

"아냐, 그런 게 아니라... 그림자 같은데."

사선 길드는 굳은 얼굴로 불길한 기색이 느껴지는 그림자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스으으으으....

화악!

그때, 그림자 덩어리가 일그러지나 싶더니 한순간에 검고 거대한 짐승 형태로 변했다.

"저건...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사선 길드는 당황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눈앞의 검은 짐승은 꼭 늑대인간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

검은 짐승은 잠시 자리에 서 있더니,

"{}>□£■¥':&\"\=◇°!!!"

곧,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근처의 길드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 몬스터다!"

"저 자식의 시체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왔어!"

"다들 전투 준비해!"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선 길드는 다급하게 움직였으나,

"흐, 흐아아아아!"

"아악!!"

그것보다 검은 짐승의 움직임이 빨랐다.

새까만 팔을 뻗어 사선 길드원 하나의 목을 움켜쥐더니,

"{]□/;$€€■◇¡¿¿!!!"

빠그극!

콰악!

목뼈를 가볍게 박살 내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검은 짐승은 어김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더니,

콰아아악!!

그걸 신호로 주위 길드원들을 무차별 습격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커헉!"

자신이 당했던 걸 그대로 갚아주려는 듯, 집요하게 목만 노려서 말이다.

우득, 우드득!

검은 짐승이 날뛸 때마다 목이 꺾이거나 찢긴 시체가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마법 방패!"

몇몇 길드원들은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낼 생각으로 마법 방패를 펼치기도 했다.

"마, 마법 방패가 안 먹힌다고?"

끼기기기긱!!!

그러나 검은 짐승은 같잖다는 듯, 마법 방패를 찌그러트리며.

"뭐 이런 괴물 자식이... 크아아악!"

겸사겸사 길드원 머리도 함께 찌그러트렸다.

퍼억!

촤아아악!!

마법 방패를 발동한 길드원들은 찌그러진 마법 방패와 함께 짓눌리거나 박살 나는 등, 더욱 처참한 방식으로 얻어터지곤 했다.

"방어는 소용없다! 공격만이 살길이다!"

"쏟아부어!"

몇몇이 희생되는 사이, 마법사 길드원들은 캐스팅 준비를 끝내고 각종 마법을 발동했다.

화르르륵!!

쿠르릉!!

불, 물, 바람, 전기.

고위 마법들이 속성을 가리지 않고 쏟아져나왔으나.

스으으으으.

그 무엇 하나 검은 짐승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마치 초급 마법으로 공격한 것처럼, 아주 약간의 대미지만 입히는 게 고작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최고 화력 헬플레임에 직격했는데... 끄떡도 안 한다고?"

"저, 저거 뭐냐고 진짜!"

콰악!

"꺽!"

경악할 틈도 없이, 또 다른 길드원 하나가 검은 짐승에게 붙잡혔다.

파바바바!!!

[경배의 창]

그때, 허공에서 빛나는 창이 쏟아지며 검은 짐승의 몸을 꿰뚫었다.

붙잡혀 있던 길드원이 꿰뚫린 것은 덤.

"멍청한 놈들! 다들 정신 차려!"

착!

뒤에 있던 가헨이 펼쳐둔 부채를 접으며 소리쳤다.

"아까 그 자식이 뒈지면서 불러낸 몬스터니 틀림없는 언데드겠지!"

"어, 언데드?"

"언데드는 신성 스킬만 있으면 별것도 아니야! 다들 '그자'한테 얻은 신성 스킬을...."

확!

가헨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부채를 펼친 순간이었다.

"@!#$%...."

파악!!!

검은 짐승은 자신의 몸에 박힌 창을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내더니,

파각!!

한 손으로 가볍게 으스러트렸다.

샤아아아....

[경배의 창]이 부서지면서 옅게 빛나는 신성력이 흩뿌려졌으나, 검은 짐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들고 있던 길드원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시, 신성 스킬이 안 먹힌다고?"

우득, 우드득.

가헨이 경악할 틈도 없이, 검은 짐승은 뻐근한 어깨를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스으으으으!

이어서 팔에 마력을 집중하더니,

푸욱!!

"끄아악!!!"

"흐아아아아!!!!!"

한순간에 송곳 형태로 변형시켜 길드원 네다섯 명을 단숨에 꿰뚫어버렸다.

[공황의 외침]

이어서 녀석이 크게 울부짖은 순간,

"뭐, 뭐야! 마법이 안 나와!"

"저, 저 자식 설마!"

발동되던 모든 매직 캐스팅이 취소됨과 동시에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됐다.

"안티 매직 능력도 있는 거야?"

"으, 으, 으아아아아!!!!"

그제야 사선 길드는 검은 짐승이 스킬을 쓸 줄 안다는 것과,

지금껏 스킬 하나 쓰지 않은 '평타'로 자신들을 갖고 놀았으며,

"#@□□$%!£■¥':&□\"\!!!"

스킬을 쓰면 수십, 수백, 수천 배는 강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저, 저건 대체... 뭐죠?"

"글쎄다? 갑자기 나타나선 저 친구들을 쓸어버리네."

한편, 직스와 알렉은 놀란 얼굴로 검은 짐승이 날뛰는 걸 바라보았다.

놈이 주위를 휩쓸 때마다 곳곳에 죽거나 빈사 상태의 길드원들이 쌓여나갔다.

"저거 김호정 씨예요."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태연한 사람은 강승현뿐이었다.

그는 날뛰는 주변이 난장판이 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쓰러진 직스를 치료했다.

"저게?"

"저 괴물이요?"

"옷이 똑같잖아요."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확실히 검은 짐승은 김호정이 늘 입고 다니는 검은 로브 같은 걸 입고 있긴 했다.

"차라리 둘이 같은 옷가게에 다닌다는 말이 좀 더 신뢰성이 높지 않을까."

"마, 말도 안 돼...."

물론 두 사람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뭣보다 김호정은 가헨의 공격으로 죽었을 터.

"그게 김호정 씨의 필살기라서요."

"필살기?"

강승현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김호정 씨는 어떤 식으로든 죽게 되면, 저런 괴물로 부활할 수 있어요."

"부활한다고?"

"김호정 씨는 순수 탱커가 아닌, 두 번째 직업을 가진 하이브리드 차원이동자거든요."

사실 김호정은 탱커뿐만 아니라 히든 직업으로 [라이칸스로프?]를 하나 더 갖고 있다.

"근데 직업 끝에 물음표는 뭐야?"

"나도 모르죠. 김호정 씨 말로는 그렇게 적혀 있다나 뭐라나...."

본인은 이름이 너무 길다는 이유로 그냥 [늑대인간], 더 줄여서 [늑인]으로 부르지만, 아무리 봐도 실제 늑대인간은 아니다.

그냥 언뜻 늑대인간을 닮은 형태일 뿐.

참고로 강승현은 간단하게 부활 모드라고 부른다.

"죽었다 살아나면 저런 상태로 변하면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는 그런 미친 사기 직업이죠."

"사기잖아."

"개사기예요."

죽기 전 김호정은 차원이동자 최약체지만, 일단 부활 모드만 발동하면 어지간한 차원이동자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사기캐가 된다.

"사실 김호정 씨는 공격 스킬이 없는 게 아니라, 룰렛에서 나오는 스킬들이 죄다 [늑인 전용]이라 평소엔 못 쓰는 것뿐이거든요."

즉 김호정의 올바른 전투법은 열심히 탱커 짓을 하다가 맞아 죽고, 부활해서 다 쓸어버리는 컨티뉴 스타일이다.

"하지만, 부활 능력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꼼수를 쓰면 어떻게든 되긴 하잖아?"

분명 아즐 대륙에서 사자소생은 금기에 속한다.

하지만 몇 가지 꼼수를 쓰면 사자소생이 불완전하게나마 가능한데, 대표적으로 죽은 생명의 종족을 언데드 바꿔서 부활시키는 사령술이 있다.

"그럼 저건 좀비인가요? 하지만 방금 신성 스킬이 통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사령술이 아닌 다른 방식을 쓰는 게 아닐까요."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언뜻 보면 언데드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검은 짐승은 신성 스킬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언데드는 결코 아니라는 소리다.

"아무튼, 김 형한테 저런 필살기가 있었을 줄이야. 엄청 멋있긴 하네."

"...하지만 꼭 다른 사람 같네요."

세 사람이 떠드는 동안에도 검은 짐승은 길드원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상, 보스 몬스터 한 마리를 숲에 풀어둔 것과 다를 게 없다.

"뭐, 잘됐죠. 김호정 씨가 저쪽을 처리해준 덕분에 치료에 전념할 수 있으니."

"고맙긴 한데, 우린 괜찮은 걸까요...."

"혹시 '그다음은 네놈들이다!' 이러면서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이쪽도 슬슬 한계거든."

알렉이 실실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저기서 날뛰는 검은 짐승을 막기엔 너무 피곤하다고.

"아까 보니까 잘만 싸우시던데."

"약하다고 한 적은 없다고? 싸움에 자신이 없다고는 했지만."

혈술사는 스킬을 쓸 때 피를 소모하는 만큼, 장기전으로 들어가면 불리하다.

거기에 마력을 안 쓰는 것도 아니라서, 따지고 보면 다른 직업보다 에너지를 두 배로 들여서 싸우는 셈이다.

"내가 이래서 탐정으로 전직한 거라고."

알렉은 가볍게 투덜거리며 체력 포션을 들이켰다.

"원래는 저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직스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의 김호정이라면 아무리 악인이어도 저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한 상태로 직스의 몸을 살피며 말했다.

"죽었다 살아난 직후에만 저렇게 날뛰고, 좀 지나면 정신 차리더라구요."

"그럼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잖아요!"

"그러겠죠."

"...."

그 말을 들은 직스는 힘없는 손을 움직여 유언장을 적기 시작했다.

뭐라고 적는지 보자 [스승님, 껴묻거리용 인형 하나 만들어서 같이 묻어 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

강승현은 못 본 셈치고 치료를 계속했다.

직스의 심장을 노린 화살은 특출한 것 없는 평범한 금속 화살이다.

'사람들이 은근 모르는 건데, 마법 화살보다 이런 물리 화살이 훨씬 귀찮단 말이지.'

마법 화살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소멸하지만, 물리 화살은 제거하기 전까진 그대로 남아 있다.

'순간 대미지는 마법화살이 강하지만, 지속적인 피해는 물리화살 쪽이 오래가거든.'

마법화살 피해는 즉시 힐로 치료하면 그만이라, 급소를 당해도 위험할 게 없다.

하지만 물리화살은 안에 남은 이물질 때문에 바로 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둘 중 더 위험한 건 물리 화살이지.'

강승현은 [적출]을 발동해 안에 남은 화살촉을 제거했다.

'갈비뼈가 깨진 걸로 끝나서 다행이네.'

직스가 발동한 [흙의 방패]의 위력이 조금만 더 낮았다면, 갈비뼈를 부수고 그 파편과 화살촉이 폐를 꿰뚫었을 것이다.

"급한 위기는 넘겼어요. 지금은 마취제가 없으니, 마을로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혹시 화살이 폐를 건드렸으면 마취제가 없건말건 그냥 치료할 생각이었으나, 당장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안정적인 장소에서 치료하는 게 맞다.

"감사합니다...."

직스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승현의 치료를 종종 보긴 했지만, 역시 힐을 사용하지 않는 치료는 눈으로 보고 체험해봐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사, 살려줘...."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누군가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가헨이 바닥을 기어오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힐러인 건 귀신같이 알고 찾아오셨네."

강승현은 녀석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협상하기 가장 좋은 순간은, 녀석이 곤경에 처한 순간이다.

201. 바메쿠스의 메신저

"너, 너희들은 저 괴물 자식 말릴 수 있잖아.... 제발 살려줘!"

필사적으로 기어온 가헨이 몸을 떨며 소리쳤다.

놈의 뒤를 바라보자, 검은 짐승은 여전히 숲을 개판으로 만들며 날뛰고 있었다.

"뭐, 못 할 것도 없긴 한데...."

"이러다 다 죽겠다고!"

"제가 그쪽을 살려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강승현은 아주 편한한 얼굴로 답했다.

힐러의 소양은 남을 살리는 일이긴 하지만, 강승현은 야매 힐러이므로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무, 뭣?"

"전 제가 살리고 싶은 사람만 살리는 힐러라서요. 그쪽은 살릴 이유가 딱히 없네요."

강승현이 이 말을 꺼낸 찰나,

">=%□¿¡$£¥°○...."

검은 짐승이 이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가헨이 도망친 걸 깨닫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결국, 가헨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 너희들이 찾는 녀석... 누군지 알아!"

"누군데요?"

"마차에 타고 있던 마법사 맞지? 그 녀석이라면 무사해!"

"아, 그래요?"

"그 녀석이 있는 곳을 말할 테니, 제발 저 괴물 좀 어떻게든 해줘!"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가헨은 아는 정보를 죄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지트의 위치나, 납치된 사람들 상태, 덤으로 지금까지 벌어둔 돈에 대한 것까지.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이야기를 다 들은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도면 목숨값 정도는 될 것 같다.

"=♧\■■□!!!!"

"흐, 흐아아악!!!"

그사이 검은 짐승은 가헨의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슈르륵!

녀석이 팔을 송곳처럼 변형시켜 가헨을 꿰뚫으려는 찰나였다.

"자, 진정하시고."

카가각!!!

캉!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휘둘러 검은 짐승의 팔을 튕겨냈다.

"그 녀석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

"뭣하면 한판 붙으시든가?"

강승현이 이렇게 말하자, 검은 짐승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슈르륵.

변형시켰던 팔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타닷!

그리고 등을 돌려 풀숲 너머로 사라졌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사, 살았다...."

가헨은 다리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지리진 않은 것 같다.

"하여간 힐러 형씨도 대단하다니까."

뒤에서 구경하던 알렉이 히죽거렸다.

이쪽은 여차하면 끼어들 생각이었다고.

"그 타이밍에 그걸 또 쳐내네."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직스 역시 무척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단 잠자코 있긴 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가 하고 무척 초조하게 지켜본 모양이다.

"다행히 저희는 알아보네요."

"예전에 한번 뒈지게 팼더니, 그 뒤로는 말로 해도 듣더라구요."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아무튼, 김호정 씨는 시간 좀 지나면 다시 올 겁니다."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집어넣었다.

사실 이 무기는 검은 짐승을 상대로 처음 써본 거지만, 역시 효과가 있었다.

"정말, 별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직스는 짧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짐승이 자취를 감춘 자리에 남은 건, 산처럼 쌓인 시체와 운 좋게 살아남은 부상자들이었다.

"저쪽은 아닌 것 같지만...."

"인신매매범들에겐 딱 맞는 엔딩이죠."

아즐 대륙의 장점은 뒈져도 마땅한 놈이라면 죽여도 된다는 점이다.

'뭐, 이 중에 귀족 나부랭이가 있다면 좀 귀찮아지겠지만... 그건 마법협회 빽으로 처리하면 되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마법협회 조사관을 건드린 이상 곱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이 동네는 더 강한 놈의 인권이 이기는 세상이니까.

"어쨌든 괜한 걱정이었네요. 김호정 님이 아무리 강해도 옆에 힐러님이 계신데...."

직스는 들고 있던 유언장을 보며 웃었다.

유언장을 슬쩍 구경하자,

[스승님, 제가 죽거든 껴묻거리용 인형 하나 만들어서 같이 묻어주세요. 디자인은 스승님이 인형 공방 취임 15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조각상을 본떠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내용이 왠지 모르게 늘어나 있었다.

강승현은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가만, 가헨은 어디 갔죠?"

"가헨?"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바닥을 기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 어디로 사라진 거야? 생각하던 참이었다.

탓!!!

"움직이지 마!"

"어이쿠."

"그 괴물 자식이 없으면 너네는 별것도 아니지!"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와서 뒤를 돌아보자, 가헨이 알렉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움직이기만 해봐.... 이 자식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어!"

가헨은 인질범들이 자주 하는 자세로 가까이 붙더니 단검으로 알렉의 목을 겨누었다.

"아, 알렉 님!"

"걱정 마, 직스 군. 인질극을 해결하는 것도 탐정의 기본 소양이라구?"

"인질로 잡힌 게 본인이잖아요!"

"입 닥쳐! 혈술사가 신성력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흑마술사의 파생 직업인 만큼, 혈술사는 신성 스킬과 신성력이 담긴 아이템에 큰 피해를 입는다.

"확실히 지독해."

알렉의 떫은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이 쥔 단검에서 신성력이 풀풀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다물어!"

"어이구 무서워라!"

"힐러 앞에서 인질극이라니. 무슨 배짱이죠?"

인질극은 고대부터 내려온 훌륭한 대화 수단이긴 하나, 힐러에겐 큰 의미가 없다.

부상자가 발생해도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멍청한 녀석! 그것도 모르냐? 미천한 흑마술사들에게는 힐이 대미지로 들어간다고!"

그렇다.

가헨의 말대로, 흑마력을 다루는 직업은 언데드와 마찬가지로 신성력에 큰 피해를 입는다.

'당연히 힐 또한 대미지로 들어가지.'

그래서 흑마술사들은 흑마술사용 치료 스킬을 배우든가, 아니면 흑사제를 찾아가야 부상을 치료할 수 있다.

가헨은 그 점을 노린 것 같다.

"이대로 모험가 조합에 끌려갈 생각은 죽어도 없다고! 마력 포션 가진 거 다 내놓고 물러나!"

"음, 어떻게 할까?"

"형씨! 우리의 우정을 잊지 않고 날 구해줄 거지? 오늘 처음 만난 당신이지만!"

알렉이 히죽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강승현은 그냥 모른 척할까 생각했다.

"혹시 네 동료가 공격을 버틸 거라고 생각하진 말라고. 이건 흔해 빠진 빛 속성 단검 같은 게 아니거든."

가헨은 기분 나쁘게 미소지으며 소리쳤다.

"이 녀석은 신이 힘이 깃든 성유물이니까!"

"...성유물이라고?"

"그래! 조잡하긴 해도 이 안에는 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예리하게 빛나는 순백색의 단검.

그 정체는 평범한 단검이 아닌, [바메쿠스의 메신저]라는 괴상한 이름이 붙은 성유물이었다.

"서, 성유물?"

직스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성유물은 신의 분신이라는 말을 듣는 만큼, 무기로 사용할 경우 일반 무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하다.

"흑마술사는 그렇지 않아도 신성력에 취약하지. 내가 이걸로 이 자식의 목을 찌르면 어떻게 될까.... 한번 시험해볼까?"

가헨은 싱글벙글 웃으며 알렉의 목에 [바메쿠스의 메신저]를 가져다댔다.

샤악.

단검이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알렉의 피부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자, 알았으면 순순히 항복을...."

"방금, 성유물이라고 했죠?"

"그래. 성유물이라고."

"거기다 신성력도 잔뜩 담겨 있다?"

하지만 강승현은 오히려 미소를 짓더니.

"치료비는 그걸로 대신합시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파바바박!!

인질이건 뭐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 이 녀석이 어떻게 돼도 상관 없다는 거냐?"

"난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

"난 괜찮다고."

그것과 동시에 알렉이 미소를 짓더니.

"넌 안 괜찮겠지만?"

우웅!

주위를 일그러트리며 옆으로 순간이동했다.

파바바박!!

덕분에 알렉을 방패로 삼으려던 가헨은 날아온 화살에 전신이 꿰뚫렸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직스가 공격당한 심장 부근과, 김호정과 알렉이 공격당한 목까지.

"꺼, 꺼흑!"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피해를 입었으나, 가헨은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 있었다.

즉사하지 않게 위력과 각도를 조절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알려줬으니 목숨은 살려드리죠. 전 약속을 잘 지키는 힐러라서."

"어걱, 걱!"

"대신, 그쪽이 했던 것과 똑같이 쓰레기 마법사한테 넘겨드리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신매매범은 똑같이 팔아주는 게 답이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끄끅, 어걱, 끄어어어...!"

하지만 가헨은 목을 다쳤기 때문에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별말 없다는 건 괜찮다는 뜻이죠? 알겠습니다."

'아, 안 돼! 제발 모험가 조합에 넘겨줘! 제발!'

"조만간 마법협회에 연락할 테니 기대하세요."

퍼억!!

할 말을 끝낸 강승현은 가헨을 기절시키는 걸로 마무리지었다.

"아이고, 살벌해라."

옆에서 지켜보던 알렉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인질로 잡혀 있긴 했지만, 순간이동으로 회피한 덕에 그의 몸은 단검에 스친 것 외에는 멀쩡했다.

"하마터면 화살받이 될 뻔했네."

"순간이동 스킬도 있었군요."

"운 좋게 얻었지."

알렉이 지친 얼굴로 주저앉았다.

[관찰의 눈]을 쓸 필요도 없이 빈혈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체력을 소모해서 가까운 곳으로 워프하는 [블러드 링크]!"

아즐대륙 기준 장거리 텔레포트는 신의 영역이지만, 단거리 텔레포트는 인간의 영역이다.

물론 매우 이쪽도 어렵고 희귀한 스킬이라 아무나 구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진작 쓰라구요!"

"직스 군, 필살기는 가끔 써야 멋있는 거야."

"그 나이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힐러 형씨."

알렉이 체력 포션을 들이키며 말했다.

"내가 텔레포트 가진 거 알면서 화살 쏜 거 아니었어?"

"그걸 무슨 수로 알아요."

"그럼 그냥 쐈다고?"

"차원이동자니까 어떻게든 살겠지 하고."

설마 이거 맞고 죽겠어.

강승현은 '오늘 처음 만난' 동료를 향한 진실된 믿음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나약한 놈은 '동료 실격이냐구."

"아무튼, 이쪽은 대충 해결했고...."

강승현은 어이없게 보는 알렉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설마 여기서 성유물을 줍게 될 줄이야.'

기절한 가헨 근처에 순백색의 제사용 단검, [바메쿠스의 메신저]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신성력 같은 걸 잘 모르지만....'

인벤토리에서 [신성의 그릇]을 꺼내자.

화아-!

새하얀 항아리가 단검에서 흘러나오는 신성력을 흡수하며 옅은 빛을 뿜어냈다.

'이걸 보니 진품인 건 틀림없네.'

성유물.

신의 분신이라 불리며 많은 사람들이 탐내는 궁극의 에픽 세인트 무기.

'그럼 어디 박살내볼까?'

하지만 강승현의 눈에는 항아리 강화용 재료일 뿐이었다.

202. 불신

강승현은 [바메쿠스의 메신저]를 쥐고 근처 바위를 내려쳤다.

쩌적!

쾅!

그러자 금 가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일격에 박살 났다.

"형씨, 새 무기 신고식하는 거야?"

"...아니요."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두들겨봤으나 단검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강승현은 [바메쿠스의 메신저]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쳤다.

"시발, 더럽게 단단하네!"

"디자인이 맘에 안 드나 본데."

"그런가 봐요."

그렇다.

그가 한 가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성유물은 강하다>

성유물에는 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만큼, 웬만한 공격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는다,

몬스터 수백 마리를 상대해도 거뜬하게 버티고, 수천 년간 땅속에 묻어놔도 녹조차 슬지 않는 기적의 아이템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부수지?'

당연히 일반적인 방법으론 부술 수 없다.

바위를 내려쳐봤자 바위가 부서질 뿐이다.

'웨폰 브레이커를 찾아야 하나?'

대장간에 가져가서 억지로 부수는 방법도 있으나, 십중팔구 천벌 받을 짓이라며 거절할 게 뻔하다.

아즐 대륙민들은 쫄보가 많으니까.

'기껏 성유물을 얻었는데 부술 수가 없다니.'

강승현은 고뇌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래선 항아리를 채울 수가 없다.

'가만, 관리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성유물을 쉽게 부수기 힘들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신적 존재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대책을 따로 마련해놨겠지.'

강승현은 다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그러자 언제 추가된 건지 상태창 구석에,

[-ICONOCLASM-]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이라는 버튼이 생성되어 있었다.

'관리자 이 자식아, 이런 걸 만들어 놨으면 미리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관리자가 상태창에 성유물 파괴 시스템을 추가해둔 모양이다.

'성상 파괴주의.... 더럽게 직설적인 이름이군.'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지으며 버튼을 눌렀다.

[성유물을 파괴해서 신성력을 추출합니다.]

[성유물을 안으로 투입해주세요.]

덜컥, 덜컹! 덜컹!

들고 있던 [바메쿠스의 메신저]를 투입하자, 세탁기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메쿠스의 메신저가 파괴되었습니다.]

단검이 부서지면서 대량의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화아아아!!!

터져 나온 신성력은 바닥에 놓아둔 [신성의 그릇]에 남김없이 흡수됐다.

신성력을 흡수한 [신성의 그릇]은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가.'

강승현은 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유물을 어떻게든 얻기만 하면, 부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관리자 녀석, 아주 쓸모없진 않....'

라고 생각하는 찰나.

[파괴 비용으로 1000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3933포인트]

이런 메시지가 나타나며 강승현의 소중한 포인트가 사라졌다.

"야 이 개새끼야!"

놀랍게도 성유물 파괴 비용을 받아갔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고 1000포인트나.

"내 포인트 내놔! 진짜 죽여버린다!"

"힐러님이 왠지 허공에 화를 내고 계시는데요."

"신경 쓰지 마, 이쪽 업계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구."

"뭔데요, 그게...."

알렉은 태연한 얼굴이었으나, 상태창에 대해 모르는 직스 눈에는 강승현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였다.

'관리자 이 개자식.... 드림 티켓 하나 뽑아서 찾아갈까?'

강승현이 상태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찰나였다.

[업적 달성!]

'응?'

이 상황에서 업적 달성이?

강승현은 의아한 얼굴로 업적창을 바라보았다.

[업적 달성 : 아이코노클라스트]

[성유물을 파괴할 경우 달성.]

[선제 조건 - 신을 향한 증오심을 가질 것]

'성유물을 파괴해서 달성한 거였군.'

이런 업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단지, 잘 부서지지도 않고 비싸고 귀해서 얻기 힘든 성유물을 부술 생각이 없었을 뿐.

거기다 성유물을 우연히 망가트려도 분노를 담아 부수지 않으면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차원이동자들은 이 업적의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설마 1000포인트 뺏어가서 빡치게 만든 게 이 업적 때문이었냐.'

성유물이 부서질 때 극한의 분노를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 관리자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런 개자식을 봤나. 굳이 그런 짓 안 해도 난 너한테 늘 빡쳐 있거든?'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역시 관리자는 폐기물 새끼가 분명하다.

'그래도 뭐, 귀한 성유물을 날려가며 달성하는 업적이니... 당연히 좋은 보상을 주겠지?'

강승현은 곧장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스탯(불신)]

[상태창에 불신 스탯이 추가됩니다.]

보상으로 얻은 건 새로운 스탯이었다.

'...불신?'

[불신]

[신을 믿지 않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힘.]

[수치가 증가할수록 신적 존재에게 큰 타격을 주거나,]

[신적 존재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게 됩니다.]

새로 획득한 스탯은 그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신적 존재를 엿 먹일 수 있는 스탯이라고?'

보통 인간은 신을 공격하긴커녕, 닿는 것조차 힘들다. 애초에 [경외감] 때문에 대면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하지만 [불신] 스탯이 올라간다면 그 부조리함을 뛰어넘어 신을 끌어내릴 수 있다.

'즉, 신적 존재와 싸울 때 쓰라는 건가....'

아직은 잠잠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성유물을 파괴하면 언젠가 신적 존재와 붙게 될 확률이 높다.

'사실상 나 같은 놈 전용 스탯이겠군.... 제정신이라면 성유물을 부술 일이 없으니까.'

나머지 검은 별 보유자, 이하 [검은 별]들도 획득했을 것이다.

이 스탯은 그때를 대비해 힘을 길러두라는 뜻에서 관리자가 특별히 준비해둔 것 같다.

[불신 스탯은 성유물을 파괴하거나, 신도와 사제를 쓰러트리는 등.]

[신적 존재가 싫어할 만한 짓을 할 때 올라갑니다.]

거기다 스탯 수련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을 향해 어그로를 끌 때마다 알아서 올라가는 효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신성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성유물을 파괴하면 [불신] 스탯이 자동으로 올라가는 구조.'

관리자는 봉인에서 벗어날 힘을 얻고,

[검은 별]은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와 맞서 싸울 힘을 얻게 된다.

'이런 짓을 벌이는 거면 절대 평범한 놈은 아니군.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인간에게 신을 무너뜨릴 힘을 준다?

보편적인 '신적 존재'가 할 법한 발상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걸 원치 않는다.

'관리자 역시 신적 존재인 만큼, 내 [불신] 수치가 오르면 오를수록 공격당하기 쉬워지잖아.'

하지만 녀석은 그걸 알면서도 강승현한테 [불신] 스탯을 제공했다.

맞아 죽어도 상관없는 건지, 아니면 불신 스탯 한둘 올리는 걸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괴물인 건지.

'어쨌든 그만한 페널티를 각오할 만한...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건데.'

아직까지는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관리자를 좀 더 쉽게 팰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그 네모난 큐브를 공처럼 둥글게 깎아 죽인다든가.'

강승현은 관리자를 박살 내는 상상을 하며 잠시 행복감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성유물을 부술 때마다 매번 1000포인트를 지불하는 건 너무 빡센데. 다른 방법 없나?'

힐러는 포인트를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다.

뭣보다 [불신] 스탯은 신적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나 몬스터에겐 아무 효과도 없기 때문에, 틈틈이 룰렛을 돌려 스탯을 올리거나 다른 스킬을 뽑아야 한다.

'신들이 불러올 따까리들도 상대해야 하니... 포인트를 마구 낭비하긴 그런데.'

한참 고민하던 강승현의 시야에 [신성의 그릇]이 들어왔다.

'...분명 [신성의 그릇]을 채울 때마다 보상을 준다고 했지?'

모든 보상 시스템에는 최초 보상이 존재한다.

대단한 건 아니어도, 뭔가 도움될 만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강승현은 기쁜 얼굴로 [신성의 그릇]을 건드렸다.

화아아아!

[신성의 그릇]이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며,

[신성의 그릇을 처음으로 채웠다!]

[최초 보상으로 '불신주의' 스킬을 획득!]

[앞으로도 신성의 그릇을 채울 때마다 다양한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불신주의]

[이 스킬을 보유할 경우]

['불신' 스탯이 올라갈 확률이 증가한다.]

'불신 스탯을 빠르게 올릴 수 있는 스킬인가? 있으면 좋지.'

[TIP : 알고 계셨나요?]

[불신 스탯이 증가할 때마다 신성 저항력, 흑신성 저항력이 증가해요!]

[불신 스킬이 오르면 오를수록 성유물을 쉽게 부술 수 있으니, 점점 신성의 그릇을 채우는 속도가 빨라지겠지요?]

덤으로 이러한 메시지까지 날아왔다.

명백하게 말투가 바뀌어서 급하게 쓰느라 뇌가 고장났나 싶긴 했지만, 꽤 유익한 내용이었다.

'그렇군. 불신 스탯을 올릴 때마다 신적 존재에게 타격을 입히기 쉬워지니... 성유물도 쉽게 부술 수 있겠어.'

불신 스탯을 조금만 더 올리면 굳이 1000포인트 내고 성유물을 파괴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ICONOCLASM-] 시스템은 불신 스탯이 낮은 초반이나, 부수기 어려운 성유물을 부술 때, 혹은 부수기 귀찮을 때 쓰라고 만들어둔 것 같다.

-성유물을 부숴서 불신을 올리고.

-그렇게 올린 불신으로 성유물을 더 쉽게 부수고.

-이하 무한 반복하면 관리자 봉인 해제.

불신 스탯은 정말 철저하게 아즐 대륙의 기존 종교 체재를 박살낼 의지를 담아 만든 모양이다.

'잘 써먹어 주지. 어차피 관리자 말고도 패고 싶은 신은 잔뜩 있으니까.'

경멸하고 낮잡아보던 인간이 자신의 급소를 찌를 만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앞으로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가 어떻게 나올지 무척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형씨, 뭔진 모르겠지만 신나 보이네. 뭐 좋은 보상이라도 떴어?"

알렉이 히죽거리며 귓속말을 했다.

아즐 대륙민인 직스 앞에서 대놓고 '헤이! 룰렛 대박 떴냐?'라고 물어볼 순 없으니까.

"뭐 그렇죠."

"아까는 발광하더니만... 그것보다 나머지 녀석들은 어쩔 거야?"

사선 길드원들은 대부분 검은 짐승에게 갈려 나가긴 했으나, 몇몇은 살아 있었다.

"글쎄요? 어떻게 할까...."

"어디 팔아버릴 거면 루팅 좀 하게."

"도대체 뭘 하려고."

둘이 이런 뻘 잡담을 나누는 찰나였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 쪽에서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

검은 짐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단, 아까처럼 마구 날뛰는 게 아니라 기력이 팍 죽은 상태로 말이다.

203. 소통의 부재

"{다, 다들... 별일 없는 거지?}"

나타난 검은 짐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생긴 건 여전히 그림자 괴물이었으나, 주위 눈치를 살피며 쭈뼛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평소의 김호정이었다.

"이제 정신 좀 차리셨나?"

"헤이~ 뭐 그런 걸로 울고 그래. 나도 몇 명 죽였다구? 이 동네에선 자주 있는 일이잖아."

"그런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김 형, 이쪽은 보다시피 괜찮아."

"{내가 이래서 죽는 게 싫어.... 강해지면 뭐해? 죽었다 깨어나면 난장판이고, 몸은 이런 괴물이고....}"

직스와 알렉은 무척 안도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구. 우리는 원 코인 플레이인데 형은 무한 리트라이잖아!"

혹시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면 싸워서 진압해야 했을 테니까.

"으음...."

"형한테 얻어터진 건 저 친구들이지."

뿌듯해하는 알렉과 달리, 직스는 무척 난감한 듯한 얼굴이었다.

알렉이 싱글벙글 웃으며 사선 길드원 쪽을 바라보았다. 평온한 이쪽과 달리, 그쪽은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역시 김호정 씨는 저 상태에선 말을 하실 수 없는 걸까요...."

"응? 무슨 소리야, 직스 군? 멀쩡하게 잘만 말하잖아?"

"소수의 생존자가 있긴 한데, 이건 사실상 전멸이네."

"...네?"

"김호정 님 덕분에 무사히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직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특히 직스는 검은 짐승이 깽판 쳐준 덕분에 목숨을 구한 관계로 더욱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까부터 김 형을 친절하게 위로해주고 있는 나에게 무슨 섭섭한 말을 하는 거야."

"{저, 저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 거야? 내가?}"

"그럼 알렉 님은 저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요?"

하지만 검은 짐승은 대답 대신 질문으로 되받아치더니,

"응? 직스 군은 안 들려?"

"당연하죠...."

"{으아아아아아!!}"

어째 서로 대화 핀트가 어긋나는 상황.

파바밧!

잠시 생각하던 직스와 알렉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땅에 머리를 처박고 이족 보행형 늑대인간에서, 네발 달린 일반 늑대 형태로 형상을 바꾸었다.

"힐러 형씨, 큰일이야! 직스 군 귀가 잘 안들리나봐!"

"강승현 힐러님! 알렉 님 상태가 이상해요! 환청에 걸린 것 같습니다!"

"둘 다 멀쩡하거든요."

"오, 폼체인지도 가능한 거야?"

"멀쩡한데 저런 말 하는 게 더 무서워요!"

"{나쁜 놈들이긴 해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둘 다 멀쩡하다니까요."

그러더니 울기 시작했다.

아까까진 미쳐 날뛰던 괴물이 지금은 땅에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서 보던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뭐, 저렇게 말할 만도 하지.'

사실 두 사람의 말이 엇갈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알렉 씨, 소통 꺼 보세요."

"...소통?"

직스는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으나, 차원이동자인 알렉은 자연스럽게 [신의 소통] 스킬을 해제했다.

"소통 해제!"

"$$@#□♠?"

그러자 옆에 있던 직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변하고,

"{이, 이제 들리네....}"

검은 짐승은 앞발로 눈물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응? 설마 지금까지 내 말 안 들렸어?"

"김호정 씨의 부활 모드에는 단점이 있거든요."

"단점?"

김호정의 [라이칸스로프?] 직업은 죽어도 되살아날 수 있는 엄청난 특혜가 있는 만큼, 심각한 페널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호정이 밤만 되면 버티지 못하고 자러 가는 것도 [라이칸스로프?] 직업 전용 페널티다.

'이 페널티를 제거하려면 늑인 상태로 변해야 해서... 귀찮지.'

그래도 이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다.

늑인 상태일 때 가장 심각한 패널티는,

"[신의 소통]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아즐 대륙민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자신의 말 또한 번역되지 않아서 소통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직스 군의 귀가 나쁜 게 아니었구나."

"당연하죠."

당연히 직스 귀에는 검은 짐승의 말이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로 들려왔다.

-헤이~ 뭐 그런 걸로 울고 그래. 나도 몇 명 죽였다구? 이 동네에선 자주 있는 일이잖아.

-^&*#@%▶?!\\#†+_}#$$^±∞◇◇☆→%■■$$@#□.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구. 우리는 원 코인 플레이인데 형은 무한 리트라이잖아!

-으음....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직스 입장에선 저 말을 알아듣겠다고 대화를 시도하는 알렉이 미친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근데 김 형은 왜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거야? 아즐 스피크는 못 해도 한국 말은 들릴 거 아냐."

"알렉 씨가 [신의 소통]을 쓰고 있었잖아요."

당연한 결과다.

차원이동자들이 뱉는 말은 전부 [신의 소통]을 거쳐 아즐 대륙어로 변환되니까.

"그렇군. 같은 코리안 차원이동자라도 [신의 소통]을 끄지 않으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건가...."

"그렇죠."

"이거 단점이 꽤 치명인데?"

죽은 동료가 괴물로 변하더니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한다?

그런 녀석을 곱게 살려둘 모험가가 얼마나 있을까.

"십중팔구 몬스터 취급하고 죽일걸?"

"...."

알렉의 말을 듣던 검은 짐승은 축 처진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아, 기운 내, 기운 내! 더럽게 강하고 어차피 부활 가능하잖아. 뭣하면 대충 죽은 척해."

"단점이 하나 더 있어요."

"더 있다고?"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들이켜며 말했다.

"부활 모드에서 죽으면 부활이 안 되거든요."

인간일 때 죽으면 늑인으로 부활하지만, 늑인일 때 죽으면 영구적으로 사망, 부활할 수 없다.

"에이, 안 죽어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상태창에 적혀 있어....}"

"상태창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

"{지금 죽으면 끝장이라구, 나는.}"

"그치만 워낙 강해서, 그 상태에선 죽을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알렉이 이해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불사신이 아니라 해도 마법사 수십 명이 쏟아내는 마법을 그냥 버티는 건,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씹는다는 소리다.

"{내가 싸움을 잘 못 하잖아.... 좀만 실력 있는 애들하고 붙으면 질 거라구.}"

"정신 놓고 있을 땐 잘만 쓰면서."

"{난 아무 기억 없는걸....}"

이 겁 많은 성격 때문에 김호정은 자신의 늑인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허접한 인간일 땐 죽어도 걱정 없다면서 앞으로 뛰쳐나가지만, 정작 강력한 늑인일 땐 죽을까 봐 무섭다고 뒤로 도망가는 등, 지능이 의심되는 짓거리를 벌이곤 했다.

"{아무튼, 나는 이 능력 싫어.}"

"나한테 그 능력을 줬으면 아주 본때를 보여줬을 텐데."

이런저런 이유로, 김호정은 사기 직업을 가졌음에도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부활 모드일 때는 자기 몸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어서 사람이건 몬스터건 자기한테 덤빈다 싶으면 죄다 썰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정신을 차려도 말이 안 통해서 괴물 취급받으니, 사람과 만나서 떠드는 걸 좋아하는 김호정에겐 고문이 따로 없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거 없었음 형은 진작 죽었을걸?"

"{그건 알지만....}"

'또 시작이네.'

그래서 김호정은 늑인 상태가 되는 걸 꺼려하고, 한번 죽었다 살아나면 저런 식으로 삽질하며 자책하곤 했다.

"김호정 씨의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이해 가지 않네요."

강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단점은 다른 요소로 보완하면 됩니다."

"{보완...?}"

부활 직후 컨트롤 불가, 의사소통 불가, 재부활 불가 등등.

분명 치명적이긴 하나, 이것들은 대부분 한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남들이 믿을 만한 동료를 꾸리는 거 아니겠어요."

해결책은 믿을 만한 동료들이다.

날뛰는 자신을 제어하고, 늑인 상태에서도 소통할 수 있는 그런 파티를 만든다면 걱정할 필요 없는 것들이다.

"저는 그래서 김호정 씨가 저랑 파티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가, 강 선새앵....}"

"쓰기 싫다는 스킬을 억지로 쓰라 할 생각은 없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란 뜻이죠."

검은 짐승은 크게 감동받았는지 또 울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그림자 괴물 상태로 말이다.

"원래는 이번 일만 끝내고 손 떼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구만!"

알렉 역시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도 파티에 합류할게."

"파티원 받는다고 한 적 없는데요."

"섭섭하게 굴지 말고~ 김 형은 내가 아는 차원이동자 중엔 제일 좋은 사람이라구? 이럴 땐 인원이 많은 게 좋잖아?"

"{철현아!}"

"알렉이라니까."

"뭐, 실력이 없는 편도 아니니."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혈술사는 치료할 일 많겠지. 포인트 달달하게 벌 수 있겠네.'

그리하여 마철현, 자칭 미스터 알렉은 정식으로 강승현 파티의 일원이 되었다.

매우 훈훈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이 사람들 정신상태 괜찮은 걸까....'

단,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직스의 눈엔 셋 다 미친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면 아지트로 가서 납치된 사람들 구하고, 슬슬 마을로 복귀하죠?"

"@#$%#@."

"아니 형, 무슨 노숙을 한다는 거야."

감동의 파티 가입이 끝나고.

강승현 일행은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납치된 사람들이 무사하면 좋겠는데."

"아직 팔려가지 않았다면 괜찮을걸?"

"그렇겠죠."

직스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붙잡힌 사람들은 구할 수 있겠지만, 그전에 납치됐던 사람들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구려나?"

"뭐가요?"

"사선 길드의 의뢰인 말이야."

알렉이 사선 길드원을 루팅하며 말했다.

사람을 한둘도 아니고 수백 명을 납치해달라고 요구한 걸 보면 제정신은 절대 아니다.

"그러게요. 정작 이 사람들도 모르는 눈치였으니...."

"여기서부턴 모험가 조합에게 맡겨야겠지. 우린 모험가답게 루팅이나 하자구."

"전 모험가 아니니까 안 하겠습니다."

직스는 차갑게 거절하며 뒤로 물러났다.

"따까리들 주머니에는 뭐 없나? 보스는 성유물을 들고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은 즐겁게 사선 길드원을 털었다. 혈술사답게 피를 뽑아가면서 겸사겸사 주머니도.

"잠깐, 좀 이상하네요."

"응? 내가?"

"그게 아니라, 이 사람들 마법사잖아요. 왜 성유물에 신성 스킬을 쓰는 걸까요."

그렇다.

일반적 마법사는 신성 스킬을 쓸 수 없다.

워낙 신앙심이 낮기도 하고, 마력에 특화되다 보니 신성력은 제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신성 스킬을 잘만 사용하던데. 아까 들어보니 다른 놈들도 신성 스킬 쓸 줄 아는 것 같았고."

"...확실히 이상하네요."

마법사는 체질적으로 신성 스킬을 배우기 어려운 직업 중 하나다.

그런데 능숙하게 신성 스킬을 사용한다?

'말이 안 되잖아.'

강승현이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였다.

파아아!!!

뒤쪽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죽은 사선 길드원의 몸에서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204. 한발 늦었어

"...빛?"

강승현은 길드원들의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부위를 조사하자 그 안에서 알갱이를 발견했다.

"안에 이런 게 들어있네요."

"이건... 도대체 뭐죠?"

직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크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하나같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괴상한 물질이었다.

"뭔가 보석 같은 느낌인데... 아무리 봐도 사람에 몸에서 나올 만한 물건은 아닙니다."

"글쎄다? 신성한 요로결석 아닐까?"

"그게 말이 됩니까."

"신성력이 담겨있는 건 맞는 것 같네요."

알갱이를 살피던 강승현이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신성력을 품은 무언가]

[이 안에서 신성력이 새어 나온다.]

실제로 [관찰의 눈]을 발동하자,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어도 이게 평범한 물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이나 신성력, 흑마력 같은 힘이 인간의 몸속에 있을 땐 물리적 형태가 없는 에너지로 존재하지, 이런 식으로 결정화되지 않는다.

"자연적으로 생기는 물질은 아닙니다."

실제로 빛나는 부위를 향해 [적출]을 사용하자,

샤아아!

몸속 알갱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적출] 스킬은 이 알갱이를 '이물질'로 판단한다는 소리다.

"왜 이런게 마법사 몸속에...."

"글쎄요. 그건 모르겠네요."

사제 몸속에 있어도 이상할 물질이 마법사 뱃속에서 발견되다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이 녀석들이 신성 스킬을 쓰고 다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이게 도대체 뭔데 그래? 좁쌀이야?}"

검은 짐승은 세 사람이 토크하는 걸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앞발을 들어 알갱이를 툭툭 건드렸다.

와작!

"{아!!!!}"

그러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알갱이를 아작내버렸다.

"{미안해! 실수로 깨먹었어!}"

"딱히 상관은 없는데... 응?"

박살난 알갱이를 보던 강승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스쳐갔다.

'가만, 이것도 신성력을 가진 물건이니까... 혹시 항아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강승현은 즉시 [신성의 그릇]을 꺼냈다.

화아!

그러자 알갱이가 깨지면서 퍼져나온 신성력이 [신성의 그릇]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성공이다!'

성유물에 비하면 개미 눈물만 한 신성력이나, 원래 저축은 거스름돈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화아, 화아아!

강승현은 신성력 알갱이 한두 개만 남기고, 전부 [신성의 그릇]에 갈아 넣었다.

'양이 적어서 보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신성의 그릇]을 넣었다.

"{강 선생, 그것도 항아리에 넣을 수 있어?}"

"{네. 이 안에 신성력이 담겨 있거든요.}"

[신의 소통]을 끄고 간단하게 설명해주자,

"{사, 사람을 죽이면 신성력이 나올 줄이야.... 선생,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니거든요.}"

"{아니야? 다행이다.}"

검은 짐승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강승현이 신성력을 얻겠다고 사제들을 몰살하러 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제를 죽여서 이런 게 나왔으면 진작 쓸었죠.}"

"{역시 죽일 생각이잖아!}"

"{뭐, 혹시 나온다 쳐도, 사제 수십 죽이는 것보단 성유물 하나 뺏는 게 나을 걸요.}"

뭐 때문에 사람 몸속에서 신성력 찌꺼기 같은 게 나오는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큰 관심은 생기지 않는다.

"그럼, 슬슬 납치된 사람들이나 구하러 가죠."

"이 사람들은요?"

"모험가 조합이 알아서 잘~하겠지."

강승현 일행은 사선 길드원을 뒤로하고 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저쪽에 동굴이 있어요."

"여기가 놈들의 아지트로구만!"

혹시 가헨이 거짓말을 했다면 허리를 접어버릴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아지트 위치는 진짜였다.

파각! 팍!

강승현 일행은 뜯어낸 열쇠를 이용해 아지트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히익...."

"살려주세요,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예상대로, 납치된 승객들은 동굴 안쪽 감옥에 갇혀 있었다.

대충 머릿수를 세어보자 안에 갇힌 사람들은 열두 명 정도였다.

"감옥이 무척 열악하네요."

"여기는 내 방보다 못하네. 돼지우리에 가깝구만."

"잠깐 가뒀다가 팔아치울 생각으로 만든 감옥일 테니 밥도 주지 않았겠죠."

거기다 이런 열악한 감옥에 많은 사람들을 억지로 구겨 넣었으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다 몸 상태가 나빠 보였다.

사선 길드와 거래하는 놈은, 목숨만 붙어 있으면 거래품의 상태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제발 목숨만은...."

"진정하세요. 착한 사람입니다."

"나쁜 놈들이 사람을 납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구하러 왔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이 철장을 열어야 할 것 같은데."

탕! 탕!

직스가 감옥 철장을 두드렸다.

철장을 부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억지로 부쉈다간 안에 갇힌 사람들이 다칠 것 같다.

"어쩌죠? 감옥이 좁아서 뒤로 물러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부수죠."

"...보통은 다른 방법을 찾지 않나요?"

"다쳐도 제가 치료하면 되잖아요."

강승현은 고민 없이 철장을 부수려 했다.

좀 다치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아, 잠깐잠깐. 나한테 비장의 기술이 있어."

"비장의 기술?"

"흑마술 비기 중 하나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금단의 술법 중 하나지만... 지금이 그 순간인 것 같군."

그때, 알렉이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 금단의 술법이라고?"

"과연 어떤 기술이기에...."

"이 비기를 사용하면 어지간한 문은 전부 열 수 있지."

흑마술은 아즐 대륙 특성상 구경할 일이 매우 드물다.

두 사람은 물론, 철장에 갇힌 사람들도 긴장한 얼굴로 알렉을 바라보았다.

"흑마술 비기, 봉인해제술!"

알렉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핀셋을 꺼내 철장 자물쇠를 땄다.

딸깍!

"좋아. 해제 완료!"

"야, 이게 무슨 금단의 술법이야?"

"그냥 [자물쇠 따기]잖아요!"

"그야 자물쇠 따는 건 불법이니까."

"애초에 흑마술도 뭣도 아니잖아. 이 사기꾼아!"

"뭐 때문에 폼 잡은 거야?"

두 사람이 야유했지만,

"그래야 성공률이 올라가거든."

알렉은 뻔뻔하게 웃으며 철장을 열었다.

철컹!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과정이 어쨌든 구해준 건 맞기에, 갇힌 사람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근데 이거, 흑마술이 아니라 로그 기술 아닌가....'

'분명 금단의 술법이 맞긴 한데, 걸리면 벌금형인 금단의 술법....'

조금 떨떠름한 면이 없진 않지만 말이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철장 속에서 아주 큰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나왔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죽었을 거예요! 진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런지...."

옷차림은 주변 사람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평민 복장이었으나, 묘하게 평민스럽지 않은 어색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라임색 머리의 여자였다.

'이 녀석이군.'

강승현은 그녀를 보는 순간 마법협회의 조사관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시, 실은 제가 여기 끌려오다가 부상을 당해서.... 치료를 부탁해도 될까요?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지불하겠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납치범 놈들과 싸웠으니 다치셨겠죠."

"그, 그걸 어떻게!"

"마법협회에서 오셨잖아요. 이거, 그쪽분 것 맞죠?"

강승현은 싱긋 웃으며 보석 스태프를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마법협회 소속이라는 건 어떻게...."

"일단 다친 팔부터 볼까요."

강승현은 대답 대신 조사관의 팔을 살폈다.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

[뼈에 금이 갔다.]

그녀의 팔은 심하게 부어오른 상태였다.

아무래도 사선 길드원과 대치했을 때 팔에 큰 공격을 받고 스태프를 떨어트린 것 같다.

'마법 방패로 막은 건가? 아쉽네, 뼈가 완전히 부러진 거면 [대지의 뼈]로 갈아치우려고 했는데.'

덕분에 오래 방치했어도 상태가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붕대로 고정만 해도 치료할 수 있다.

"조금 아프겠지만 참으세요."

"아야야야야!!! 힐 써주세요, 힐!!"

"힐 쓸 줄 몰라서요."

강승현은 붕대를 이용해 팔을 고정하고, [완치판정]을 발동했다.

"그럼 힐러가 아니잖... 어라?"

울상짓던 조사관은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회복이 되긴 되네?"

힐에 비하면 매우 느린 속도이긴 하나, 분명 팔의 부상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조사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힐은 못 써도 부상은 치료할 수 있거든요."

"저, 저기...."

"자기소개가 늦었네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다, 당신이 그! 가바인 영주가 말한!"

조사관은 그제서야 눈치챈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마법협회 소속 마법사 마티아나 뷔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름은 마티아나 뷔체. 역시 마법협회의 명령으로 파견 나온 조사관이었다.

"카마르 측에서 제안을 받았습니다. 강승현 힐러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하인드 마을에 마법협회 지부를 설립하고 싶다고!"

"제가 가바인 영주님과 좀 친하거든요. 서로 돕고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강승현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카마르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겁쟁이 영주를 떠올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협회 소속 조사관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 지...."

강승현은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예를 들어 모험가 조합이 뒤집어진다거나. 아니면 리웬 지부장이 마법협회에 그랜절을 시전한다거나.'

사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밌었을 거라고 생각중이었다.

"대단한 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은혜를 입게 될 줄은...."

강승현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마티아나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강승현 일행이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어딘가로 팔려갔을 거라면서.

"그럼... 마법협회 건설은 아무 지장 없이 추진된다고 봐도 되겠죠?"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이건 무조건 추진해야죠!"

마티아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원래는 꼼꼼하게 조사하고, 세심하게 판단한 다음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에서야 협회 건설을 승인하지만.

'이 동네에선 흔한 일이지.'

낙하산과 비리가 판치는 아즐 대륙 특성상, 약간의 인맥을 활용하면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괜찮으십니까? 모험가 조합입니다!"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모험가 조합이 모험가들을 파견했으나,

'한발 늦었어.'

마법협회 조사관의 마음은 강승현의 손에 떨어진 지 오래다.

205.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그, 그러니까... 당신들이 납치된 사람들을 전부 구해냈다고?"

"고작 셋이서?"

모험가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번 의뢰는 분명 범죄 길드 '사선'에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었을 텐데.'

'사선' 길드는 본래 별 볼 일 없는 하급 범죄자들이 모인 찌끄래기들이었으나, 최근 사람이 바뀐 것처럼 강해져서 모험가 조합에서 경계하던 집단 중 하나였다.

'이게 말이 되냐고!'

'이쪽은 중급 모험가 8명, 중상급 모험가 1명으로 구성된 파티까지 맺고 왔는데....'

그래서 이번 의뢰를 받은 중급 모험가 파티 '룬 크래커'는 용병까지 고용해가며 찾아왔건만,

"네. 저희가 전부 구출했습니다."

"아주 깔끔하게 말이지!"

먼저 도착한 파티가 진작 해결한 상태였다.

심지어 모험가 파티 최소 인원인 넷도 아니고 셋이서.

'젠장, 이 자식들 때문에 헛걸음했잖아!'

'수상한 아지트를 발견했으면 모험가 조합에 보고하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나 참, 이것들은 겁도 없나?'

어쨌든, 의뢰는 선착순이라 할 말은 없다.

'룬 크래커' 파티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마침 '사선' 놈들이 아지트를 비운 사이에 쳐들어오다니.... 운이 좋은 친구들이구만.'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준비하고 올걸.'

그들은 아지트 내부에 사선 길드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강승현 일행을 운 좋은 날먹충이라 생각하며 깔봤다.

'그래, 상식적으로 고작 셋이서 '사선' 길드를 격파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 자식들 때문에 이대로 가면 한 푼도 못 받겠는데.'

의뢰를 받고 출동해도, 누군가 이미 해결했거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갇혀 있던 사람들은 괜찮은가요?"

"부상자가 있다면 저희 쪽 힐러가 치료를...."

그래서 '룬 크래커' 파티는 부상자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성과를 만들려 했다.

뭐라도 해야 푼돈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

'상식적으로 인원이 셋밖에 안 되는 파티에 힐러가 있을 리 없잖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부상자는 강승현이 진작 치료했으니까.

"사실 제가 힐러거든요."

"네?"

"댁이 힐러라고?"

물론 '룬 크래커' 파티는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강승현한테서는 신성력이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멋진 힐러님이 저희를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주셨답니다."

"맞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이분들 아니었으면... 아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그렇군요...."

하지만 잡혀 있던 사람들이 강승현한테 치료를 받았다고 떠드는 탓에 '룬 크래커' 파티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젠장,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지적하냐고!'

'멋모르는 평민들이니 대충 포션이나 뿌려줬겠지....'

'뭐, 이쪽 업계에선 흔한 일이니 굳이 지적하진 않겠지만.'

'야, 이대로 돌아갈 거야?'

'잊었어? 우리 그냥 가면 적자야!'

'룬 크래커' 파티는 이번 의뢰를 해결하겠다고 사비를 들여서 용병을 고용했기에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좋아, 이 사람들은 자네들한테 맡기지. 우리는 놈들을 맡겠다."

"놈들?"

"이 아지트 주인이 누군지는 아나? 최근 악명을 떨치는 범죄 길드 '사선'이다."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지금 우리 파티 구성원은 중급 모험가 8명, 중상급 모험가 1명! 이 정도면 해볼 만해!"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선택지는 하나.

이번 일의 원흉인 '사선' 길드와 싸우는 것.

'물론! 진짜 싸우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이 인원이라도 그런 놈들과 직접 붙는 건 위험하지.'

하지만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들은 그저, "우리가 '사선' 길드를 막으며 시간을 끄는 동안 강승현 일행이 사람들을 마을로 대피시켰다."라는 식으로 그럴싸한 성과를 만들려는 것뿐이었다.

'너네한테 숟가락 좀 얹으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라고. 우리 의뢰를 먼저 뺏어간 건 너희들이니까.'

한마디로 의뢰 무임승차.

아즐 대륙 모험가 사이에선 꽤 흔한 일이다.

"아, 그럴 필요 없어요."

"뭐?"

"그놈들은 진작 처리했거든요."

그러자 강승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 농담하는 거지?"

"그 독한 놈들을 고작 셋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못 믿겠으면 따라오세요."

강승현은 이렇게 말하며 사람들을 데리고 아지트를 떠났다.

"뭐야 저 자식?"

"저렇게 당당한 걸 보면 사선 길드원 놈들을 잡긴 잡았나 본데?"

"그래봤자 조무래기 한두 놈이겠지."

'룬 크래커' 파티는 가벼운 마음으로 강승현 일행을 따라갔으나,

"헉."

"뭐, 뭐야 이게?"

"우웩, 몬스터한테 물어뜯겨도 이거보단 낫겠어...."

곧,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처참하게 당한 '사선' 길드원 전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 좋은 소수는 숨이 붙어 있지만, 대부분은 끔살당한 상태였다.

"이걸 진짜 너희들이 했다고?"

"여기 이 조무래기들은 나, 미스터 알렉이 휩쓸었지."

"마, 말도 안 돼!"

"말 돼. 내 비장의 기술, 흑마술 비기 '검은 짐승'을 사용했거든. 못 믿겠으면 사선 길드원한테 물어보라구?"

알렉은 뻔뻔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또 흑마술 비기.... 이번 건 합법인가?'

'옆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새까만 개를 풀었나 보네.'

물론 아지트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알렉이 말하는 '흑마술 비기'를 겪어봤기 때문에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으나.

"어, 어이 이봐! 너희 어떻게 된 거야?"

"으, 으으...."

"검은 짐승한테 당했어...."

"뭐라고!"

"저 자식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말했잖아. '검은 짐승'이 처치했다고."

진상을 모르는 '룬 크래커' 파티는 알렉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철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욕하는 건 아니지?}"

"{알렉 씨가 김호정 씨를 사칭...찬하네요.}"

"{칭찬? 다행이다!}"

참고로 당사자인 검은 짐승과 협의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그럼... 사선 길드의 보스, 가헨을 처리한 녀석은?"

"그야 당연히 저죠?"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었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파악!

그리고 석궁을 꺼내 누워 있던 가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으거걱!!"

"이, 이 화살은!"

방금 강승현이 발사한 화살은, 가헨의 몸에 잔뜩 꽂혀 있는 화살과 똑같았다.

'믿을 수가 없어....'

'겨, 겨우 셋이서 이놈들을 제압했다니.'

'이 녀석들 정체가 뭐야?'

강승현 일행이 '사선' 길드를 쓰러트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쏟아지는 상황.

그들은 그저 강승현 일행을 멍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 그렇게 됐으니."

강승현은 그 타이밍을 노려 '룬 크래커' 길드의 리더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체 처리는 여러분한테 맡길게요."

"아, 예...?"

"이거라도 해야 모험가 조합에 가서 푼돈이라도 타 먹지 않겠어요? 평판도 올릴 수 있고."

의뢰를 끝낸 뒤, 이런저런 뒷정리를 하는 건 기본 매너지만 솔직히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몇몇 모험가들은 사람을, 주로 초짜 모험가를 고용해 뒷정리를 시키고 의뢰 해결에 이름을 올려주곤 했다.

'이, 이 자식....'

'젠장,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우릴 부른 거였냐!'

'정리하기 귀찮아서!'

'룬 크래커' 파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험가 조합에 이번 일을 제보한 건 눈앞의 남자고, 수익이 줄어드는 걸 감안하고 모험가를 부른 이유는 뒷정리를 맡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보다 먼저 왔어야지.'

모든 의뢰는 먼저 온 사람이 임자다.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스태미나 포션을 빨았다.

"그, 잠시만!"

"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치료는 위법이잖아?"

그때, '룬 크래커'의 힐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평민들이어도 그렇지, 힐러도 아니면서 힐러라고 사기 치는 건 좀 아니지!"

"사기라뇨?"

"신성력이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 힐러일 리가 없잖아! 보나마나 포션 좀 붓고 치료랍시고...."

"맞아! 이건 아니지!"

"옆에 진짜 힐러가 있는데 어디서 사기야?"

"환자들 제대로 치료한 건 맞아?"

'룬 크래커' 파티는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이걸 빌미로 보상을 뜯어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말 참 많으시네."

강승현은 귀찮다는 얼굴로 쳐다보더니,

"내기 하나 할까요? 누가 먼저 치료하는지."

샤악!

나이프를 꺼내 손바닥을 그었다.

"자, 잠깐! 왜 나야?"

"피 보는 거 익숙하잖아요."

"나는 탐정이지 자해공갈단이 아니라고?"

물론 본인 손바닥이 아니라 옆에 있던 알렉의 손바닥을 말이다.

"내가 지면 이번 일 보상은 그쪽 팀한테 싹 넘길게요."

"그, 그거 진짜지?"

"분명 약속했다?"

"대신 그쪽 힐러가 지면 나한테 죽빵 한 대씩 처맞는 거고."

강승현은 상쾌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그쪽이 얼마나 대단한진 몰라도, 나는 아이베르 교단 힐러 랭킹 3000위 안에 드는 프로라고!"

"그거 대단한 거야?"

룬 크래커 파티의 사제 힐러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알렉의 손을 치료하려 했다.

"이런 가벼운 상처는 [큐어]만 써도...."

"따, 따가워! 쓰라리다고!"

탁!

하지만 알렉은 상처가 낫기는커녕,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하여간 이래서 힐러놈은.... 힐이 대미지로 들어가는 사람 배려를 안 해요."

"힐이 대미지로 들어간다고?"

"이쪽은 혈술사거든."

"혀, 혈술사라고?"

그제야 사제 힐러는 자신이 흑마술사한테 힐을 시전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 봐! 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아냐?"

"그 정도는 환자를 살피면서 알아냈어야죠."

그는 강승현에게 따졌으나, 강승현은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되받아쳤다.

"애초에 환자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멍청하게 힐이나 붓는 놈이 잘못이지."

"이, 이런 녀석을 무슨 수로 치료하라고! 너는 할 수 있어?"

"저는 할 수 있는데요?"

"그게 말이 되는...."

강승현은 사제 힐러의 말을 무시하고 알렉의 손에 마력을 부었다.

"일단, 혈술사 같은 흑마술 계통 환자는 아무 생각 없이 힐로 치료하려다 상태가 악화돼서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스으으으.

그러자 파란 액체가 새까맣게 물들어갔다.

마력이 알렉의 몸에 닿으면서 흑마력으로 오염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상처 부위에 남아 있을 신성력을 흑마력으로 말끔하게 제거합니다."

파아!

흑마술사들은 아주 약간의 신성력만 묻어 있어도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마력 포션을 이용한 제거 작업이 필수다.

"상처의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처럼 가벼운 생채기는 흑마술사의 피로 치료할 수 있죠."

흑마술사의 피는 기본적으로 상처 치유를 촉진하는 효능이 담겨 있어서 상처에 뿌리거나 바르면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

"환자의 피를 살짝 뽑은 다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재생 포션과 흑마력 포션과 함께 섞어 치료용 포션을 제작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치료제가 [흑혈] 포션.

스킬 특성상 다칠 일이 많은 혈술사들이 안 죽고 오래 버티는 이유가 이거다.

"이거 흑마술사 한정이니 일반인은 따라 하지 마세요. 상처 덧납니다."

"...그런 걸 누가 따라 해요."

강승현은 제작한 치료제를 상처 부위에 바르고, 붕대로 가볍게 감았다.

"이러면 치료 끝. 간단하죠?"

"하, 하지만 그런 건 힐러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쪽이 힐러를 사칭한다는 건 그대로...."

"보고 말씀하시든가요."

강승현은 붕대를 풀고 알렉의 손을 보여주었다.

"싹 나았네?"

"...!"

알렉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아무리 치료용 포션을 사용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흉터 하나 없이 낫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건 그쪽이 알아내셔야지."

물론 [완치판정] 덕분이다.

원래 혈술사는 회복력이 좋고, 상처가 매우 가벼운 데다 흑혈 포션까지 사용한 덕분에 회복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힐을 쓰지 않고 치료하는 힐러라면... 설마!"

사제 힐러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모험가들은 잘 몰라도, 하인드 마을에 오래 머무는 아이베르 사제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그 힐러.

"개또라이 힐러 강승현?"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모르는 사람들도 내 이름을 부르네."

"소문에 의하면 힐로 치료하는 게 재미없다고 일부러 힐을 쓰지 않는 치료법을 사용하는 완전 미친놈이라는데...."

"그런 헛소문은 또 언제 퍼진 거야."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약속은 약속이니, 다들 각오하세요."

"무, 무슨 각오?"

"죽빵 맞을 각오."

206. 간단한 연극

룬 크래커.

중급 모험가 8명에 중상급 용병 모험가 1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로, 경력은 짧아도 '성장이 기대되는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는,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정도는 아닌 집단이다.

빡!

뻑!

"끄으으...."

'무슨 힐러가 이렇게 강하냐고....'

'내 인생... 이런 굴욕은 처음이다....'

이렇듯 나름 신인 루키 소리 들으며 승승장구하던 파티였으나, 지금은 힐러 한 명한테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는 중이었다.

그것도 종이를 돌돌 말아서 만든 몽둥이에.

"왜, 왜 이런 걸로 때리는 건데...."

"진지하게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벌칙이잖아요. 주먹으로 때리면 맞는 사람 기분 상하고, 때리는 제 마음도 아프니까요."

물론 그 소리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래서 개또라이 힐러구나....'

쓰러진 사제 힐러의 머릿속에, 강승현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충고가 스쳐 지나갔다.

-그놈이 만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거 다 연기야! 절대 넘어가지 마!

-그 사이코 새끼는 돈보다 남 엿먹이는 걸 좋아한다니까?

-내기 같은 거 절대 하지 마라.... 절대!

선배들의 충고를 귀담아 들을걸.

그 모든 말들은 전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충고였다.

"자, 슬슬 움직이죠. 여기서 더 지체하면 해가 저물테니."

"알겠습니다...."

"젠장, 내가 어디 가서 이런 꼴 당할 사람은 아닌데...."

그리하여 '룬 크래커' 파티는 제대로 된 성과도 못 올린 데다, 괜히 강승현한테 깝치다 얻어 맞고 잡일까지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맛보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비꼬시는 겁니까."

"아뇨, 진심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일행은 셋밖에 없어서...."

그때, 강승현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슬슬 날이 저물고 있는데 여기서 마을까지는 거리가 꽤 있고, 붙잡힌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겨우 셋이서 이 사람들을 마을까지 무사히 안내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승현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기 칠 때 쓰는 영업용 얼굴이었다.

"하긴, 셋이서 이 많은 사람들을 데려가려면 좀 빡세긴 해!"

"우리가 제때 와줘서 망정이지!"

"몬스터 뜨기 전에 정리 끝내고 출발하자고!"

적당히 치켜세워 주자 기분이 좋아진 '룬 크래커' 파티는 의욕을 내서 움직였다.

'루키 파티는 이래서 다루기 편하다니까.'

틱틱거리다가도 칭찬 몇 마디 던져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서 히죽거리는 태도.

이들이 경력 짧은 애송이들이라는 증거다.

"병 주고 약 주고... 힐러는 힐러시구만."

"다음엔 말하고 벨게요."

"됐어. 맘대로 하라구."

뒤에 있던 알렉이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형씨 진짜 장난 아니잖아?"

힐러는 흑마술사를 치료할 수 없다.

흑마술사를 치료할 수 있는 건 흑마술사뿐이다.

이건 아즐 대륙의 상식이며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었으나, 강승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상식을 깨부수고 법칙을 뒤집었다.

"나 같은 흑마술사들은 흑사제가 아니면 몸 고칠 수가 없는데. 형씨도 잘 알 거 아냐?"

얼마 없는 힐러 중에서도 아주아주 드문 확률로 나타나는 오염된 마력과 신성력을 품은 존재.

정식 명칭은 '다크 프리스트'.

흔히 흑사제라고 불리는 희귀 직업.

이들은 특성상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고 교단에서 눈엣가시로 여기기 때문에 보통은 칠흑의 마탑에 처박혀 살지, 모험하며 돌아다니는 흑사제는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 같은 놈들은 다치면 알아서 땜빵하고, 치명상 입으면 그냥 골로 가는 신세인데.... 형씨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일반 힐러가 흑마술사를 치료할 수 없듯, 흑사제 역시 일반인을 치료할 수 없으나,

"힐 쓸 줄 모르는 힐러요."

오직 강승현만은, 신성력도 마력도 쓰지 않는 야매 힐러였기에 양쪽 모두를 마음껏 치료할 수 있었다.

"뭔진 몰라도 형씨한테 붙으면 치료 못 받고 뒈질 일은 없겠구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저도 뭐, 종종 잘 부탁드립니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번 일만 봐도 그렇지만, 알렉 같은 혈술사는 힐러를 농락할 때 쓰기 딱 좋은 직업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힐러를 엿먹일 수 있겠군.'

오늘도 야매 힐러의 소소한 즐거움이 늘어갔다.

-"자, 나머지 사람들은 저 친구들한테 맡기면 될 것 같고...."

'룬 크래커' 파티가 열심히 뒷정리하는 동안, 강승현 일행은 먼저 출발했다.

"가시죠, 마티아나 조사관님."

"마을까지 안전하게 부탁드려요."

VIP 고객만 쏙 빼돌려서 말이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 진짜 쫄쫄 굶었어요! 그녀석들 밥도 제대로 안 줬다니까요?"

"일행 중에 요리사가 있었다면 식사를 대접해 드렸을 텐데.... 식사는 마을에서 하셔야겠네요."

"아니에요, 이것도 감사한걸요!"

마티아나 조사관은 행복한 얼굴로 강승현이 내민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그동안 감자 몇 개 먹은 게 전부였다고.

파악! 팍!

시간이 시간인 만큼, 강승현 일행은 중간중간 나타나는 몬스터를 해치우며 하인드 마을 북문에 도착했다.

"하인드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에요!"

"따지고 보면 별 볼 일 없는데, 위치 선정이 기가 막힌 동네죠."

"빨리 가서 술 한 잔 하자구."

"{자, 잠깐! 나도 데려가게?}"

검은 짐승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엥? 형은 술 안 마시게?}"

"{지금 이런 꼴로 마을에 들어가라고?}"

강승현 일행이야 검은 짐승의 정체가 김호정이라는 걸 알지만,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냥 그림자 괴물이다.

"{경비병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병사들이 몬스터를 마을로 데려오려는 사람을 가만 둘 리가 없으나,

"오, 강승현 힐러님 아니십니까!"

"이게 얼마만이에요? 그간 잘 지내셨죠?"

"어서 가서 편히 쉬시지요!"

그런 문제는 인맥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인드 마을 경비병들은 치료비가 싼 강승현에게 신세 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들 수고 많으십니다."

"살펴가십쇼!"

"{뭐야? 나 통과시켜 주는 거야?}"

그래서 강승현이 몬스터를 끌고 오건, 사람을 잡아 오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통과시켰다.

"하긴, 우리 마을도 힐러님이라면 뭘 가져와도 통과시킬 것 같아요. 이런 김호정 씨를 데려왔어도 소환수겠구나 했겠죠."

직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강승현은 신뢰의 아이콘이었으니까.

"그건 펫인가요? 귀엽네요."

"이름이 뭔가요?"

"아직 없다면 깡돌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러세요."

"안녕, 깡돌아?"

실제로 하인드 마을 경비병들은 검은 짐승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넉살 좋게 머리까지 쓰다듬는 병사도 있었다.

"#^5#...&^@#@???"

"{형보고 깡돌이래.}"

"%!??!&*■&△▶%$$#!@!!!!"

인권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검은 짐승은 억울한 마음에 펄쩍 뛰었으나,

"어쨌든 무사히 통과했으면 됐죠."

"그래그래. 가서 술 먹자구."

동료들은 항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람 이름이 깡돌이.... 차라리 숲에서 노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직스만이 김호정을 동정할 뿐이었다.

"정말,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어요."

하인드 마을에 도착하자 마티아나 조사관이 무척 안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빨리 가서 밥 먹고 따뜻한 욕조물에 몸 담그고 싶어요. 여기까지 올 때도 신분 숨기느라 싸구려 빵만 먹으면서 왔거든요."

"많이 피곤하실 텐데, 한 가지 일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게 뭔가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모험가 조합 건물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연극을 해주셨으면 해서요."

-'뭐지?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 지부장실.

낙하산 오브 낙하산 리웬 지부장은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래, 강승현! 그 자식이 돌아와서 그런 거야! 요 며칠 안 보여서 좋다 싶었는데....'

지난 2주간 리웬 지부장은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었으나, 아까 강승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행복이 박살난 상태였다.

'병가 내고 어디 요양이라도 가야겠어. 그래, 안전하고 물 좋고 경치 좋은 카마르에 방 잡고, 그 옆 촌구석 트라코티로 사람 보내서 늙은이들한테 뇌물로 바칠 만한 조각품 몇 개 주문하고....'

"지부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야, 바쁜 거 안 보여? 나 없다고 그래!"

"마법협회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마, 마법협회!"

리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찌끄래기들이면 몰라도 마법협회는 VVIP 고객이었기에 무시할 수가 없다.

"그 마술쟁이들이 이런 촌엔 무슨 일이래? 그보다 왜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와?"

"그게...."

쾅!

"도대체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은 뭘 하고 있는 거죠?"

그때, 마티아나 조사관이 문이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매우 분노한 얼굴이었다.

"그, 마법협회에서 오셨습니까?"

"마티아나 뷔체입니다!"

"마티아나 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진정을...."

"진정하게 생겼어요? 여기 오는 동안 범죄 길드에 납치돼서 죽을 뻔했다구요!"

"나, 납치요?"

리웬은 곁에 있던 병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야, 저 말이 사실이야?"

"네. 범죄 길드 '사선'이 마차를 습격해 인신매매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이, 인신매매?"

리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담당 지역에서 VVIP 고객에게 사고가 생기면, 본부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면서 지부 평판이 엄청나게 내려가기 때문이다.

"그,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건... 저희 소속 모험가가 구출한 게 아닌지요?"

"그게 중요해요?"

쾅!

마티아나 보좌관이 분노한 얼굴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 길드! 하인드 마을 내부에 버젓이 아지트를 두고 있었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마, 마을 안에 아지트가 있었다구요?"

"혹시! 일부러 지부 성과를 올리려고 범죄 길드와 손잡은 거 아닙니까?"

"오, 오해입니다! 그럴리가요!"

"그게 아니라면, 하인드 지부의 치안 유지 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리겠죠? 그렇죠?"

"그, 그게...."

"그러니까 그런 악질 길드를 방치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리웬 지부장은 말빨이 후달려서 반박하지 못했다.

능력 없는 낙하산 출신이니까.

"흥, 어느 쪽이든 더 이상 모험가 조합을 신뢰할 수 없겠네요."

마티아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 이건 뭡니까?"

"하인드는 많은 모험가들이 머무는 마을이라 마법사들도 자주 드나듭니다. 아시죠?"

"그야, 알죠."

"지금까지는 이곳 마법사들의 안전과 권리를 모험가 조합에 위탁했지만, 이제부터는 저희가 관리하겠습니다."

"그 말은!"

"마법협회 하인드 지부 건설. 당연히 동의하시겠죠?"

"마법협회 지부라고!!"

리웬은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자신이 담당하는 마을에 마법협회 지부가 생기면 마법사 수익이 줄어드는 데다, 지금까지 마법사 보호 면목으로 마법협회가 지불하는 보호비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내 돈! 내 돈!'

이런 만큼, 모험가 조합은 마법협회한테 열심히 아부하고 접대해서 지부 건설을 막았다.

그게 모험가 조합 지부에 비해 마법협회 지부가 적은 진짜 이유다.

"모험가 조합 본부로 가서 이번 일을 조목조목 따져볼까요? 아니면 협회지부 승인하시고 조용히 끝낼까요?"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리웬은 할 말이 없었다.

이번 일을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래, 마법협회 담당자는 우리 쪽에서 결정하는 게 관례니까. 내 사람 하나 꽂아두면 오히려 나을지도....'

리웬 지부장은 뇌물 받을 생각에 싱글벙글이었으나,

"참, 담당자는 생각해둔 분이 있습니다."

"네?"

"불만있어요?"

"없습니다."

눈앞에서 뇌물이 날아갔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마티아나는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아, 지부장님도 아는 분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아는 사람?"

"마침 들어오시네요."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반갑습니다. 마법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207. 이게 상식이니까

"가, 강승현?"

"간만이네요, 리웬 지부장님. 그간 잘 계셨죠?"

"너! 너 이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와?"

강승현.

틈만 나면 모험가 조합 평판을 팍팍 깎아서 엿먹이는 것도 모자라, 여명의 성수로 자신을 농락하고 치욕을 준, 리웬 지부장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새끼.

"그야 일 때문에 찾아왔죠."

"일? 너랑 할 일 없어!"

그렇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인간인데, 이제는 당당하게 지부장실까지 찾아왔다.

리웬은 곁을 지키던 병사한테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쫓아내!"

"아, 조사관님이 아직 말씀 안 해주셨나요?"

강승현은 다가오는 병사에게 눈치를 주며 아주 거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하인드 지부 담당 마법사거든요."

"뭐? 뭐가 어째?"

"그렇게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실제로 강승현은 평소 입고 다니는 흰 가운 대신 마법사들이나 입을 법한 붉은 로브를 입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컨셉충이다.

"이,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콱!

분노한 리웬 지부장이 멱살을 잡았으나, 강승현의 키가 너무 커서 오히려 멱살을 잡은 쪽이 안쓰러워 보였다.

"힐러 행세도 모자라서 이제 마법사 행세냐? 이 사기꾼 자식아!"

"저 그동안 마법사 자격 따러 갔는데요?"

"헛소리하지 마! 네가 마력 포션 마시는 걸 본 적도 없어!"

리웬은 강승현의 마력이 0이라는 것까진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가진 마력이 매우 낮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마력이 쥐뿔도 없는 새끼가 무슨 마법사라는 거야?"

"이거나 보고 말씀하시죠."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강승현은 손을 펼치며 붉은 엠블럼을 소환했다.

"그, 그건... 진홍의 마탑을 상징하는 크림슨 엠블럼."

지부장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것.

리웬 지부장은 경악한 얼굴로 엠블럼과 강승현을 번갈아보았다.

"잘 아시네요? 엘리트 중의 엘리트 마법사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증표죠."

"우, 웃기지 마! 위조품이겠지! 너 같은 녀석이 진홍의 마탑에 가입할 수 있을 리...."

"리웬 지부장! 그 무례한 태도는 뭡니까?"

콰앙!

곁에 있던 마티아나가 크게 분노하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적당히 하세요! 강승현 님은 진홍의 마탑 소속원이라고 했을 텐데요?"

"마티아나 님, 이 자식은 사기꾼입니다! 분명 가짜 엠블럼을...."

"가짜? 방금 그 발언은 마법협회와 진홍의 마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아, 아니....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마법협회가 정식 크림슨 엠블럼도 구분 못 하는 얼뜨기라는 겁니까?"

촤르륵!

마티아나는 각종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내던졌다.

"이미 협회 본부에서 검증이 끝난 일입니다! 못 믿겠다면 확인해 보시죠?"

"마, 말도 안 돼...."

리웬 지부장은 얼빠진 얼굴로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진홍의 마탑 마스터의 친필 사인이 담긴 확인서와,

[※강승현이 반드시※]

[※담당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카마르 영주가 빼곡히 적은 20페이지가량의 추천서였다.

'크림슨 엠블럼도 모자라서, 마법협회 핵심 인사들한테 인증까지 받았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으나 눈 앞에 펼쳐진 서류는 틀림없는 정품이었다.

이 모든 걸 위조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소식이 느리다니.... 정말 개미 눈물만큼도 신뢰할 수 없군요."

마티아나는 리웬 지부장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협회 건설을 추진해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건 덤.

"하지만 저 녀석이 마법사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만!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턱!

마티아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는지,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화려한 스태프에 마력이 감돌며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한 번만 더 강승현 님을 모욕했다간, 마법협회를 대표해서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어, 엄중한 처벌!"

"또한! 진홍의 마탑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진홍의 마탑까지...."

"설마 마법협회와 진홍의 마탑을 적으로 돌리고 싶으신 건 아니죠?"

리웬 지부장의 얼굴이 단숨에 새파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은 커녕 칼 휘두르는 것도 못하는 리웬이 마법사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젠장, 조사관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협회 전체가 따지고 든다면... 신분빨로 무마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리웬은 이를 빠드득 갈았으나,

'안 그래도 여명의 성수 못 구한 것 때문에 그 자식들한테 엄청 깨질 판인데!'

뭐 어쩌겠는가? 좋은 집안 태생이어도 답이 없을 정도로 무능하면 어쩔 수 없다.

"죄,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싹싹 비는 것 뿐이었다.

"애초에 사과할 일을 안 만들면 될 것을!"

"진정하세요, 마티아나 님. 리웬 지부장님도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요."

"강승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강승현이 부드럽게 말리자, 마티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기를 거뒀다.

리웬은 다리를 달달 떨면서 한숨을 내뱉었다.

"사, 살았다...."

명색이 모험가 조합의 지부장인데 이렇게 한심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인드 마을의 현실이다.

툭.

"아무튼, 저희 입장은 이렇습니다."

마티아나는 스태프를 거두고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마법협회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험가 조합 하인드 지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조만간 새로운 마법협회 지부를 건설할 예정이니, 불만 사항이 있다면 협회로 직접 항의하시길."

"크...."

리웬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인 내가, 이따위 일개 조사관한테....'

본래 아무리 무능해도 지부장은 지부장이라, 마법협회 조사관이 큰소리 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조사관이 예의를 지키는 게 맞지만,

'사선이니 뭐니하는 찌꺼기들 때문에!'

조사관을 납치한 '사선' 길드의 아지트가 하인드 마을 내부에서 발견된 이상, 리웬은 입을 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으니 잘~ 부탁합니다."

"...."

"참, 잘 아시겠지만 제 본업은 힐러라서요. 마법사는 그냥 취미예요."

"힐, 힐러 자격도 없는 주제에."

리웬은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으나,

"그렇지만 제가 치료한 환자가 몇 명이더라.... 다 불러 볼까요?"

"...."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마법협회 담당자라는 건 우리들의 비밀인 걸로 하죠. 힐러 일만 해도 바빠서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엠블럼 소환을 해제했다.

"평소에는 모험가 강승현, 힐러 강승현으로 대해 주세요. 협회 관련 업무는 마티아나 님이 대신 맡아 주실 겁니다."

"이, 이 자식...."

내내 긴가민가했지만, 이번 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강승현은 마법사가 아니다.

'역시 사기 치는 거 맞잖아!'

진짜 마법사라면 '협회 지부 담당자' 일을 조사관한테 떠넘길 리가 없다.

어쩌다 크림슨 엠블럼을 손에 넣은 건진 몰라도, 강승현이 제대로 된 마법사가 아닌 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따질 수가 없어.'

리웬은 분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강승현이 마법을 쓸 줄 모른다 해도 일단 [크림슨 엠블럼]을 손에 넣은 이상, 그 점을 지적해선 안 된다.

무능한 리웬이 집안 빽으로 지부장 자리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따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즐 대륙에선 이게 상식이니까....'

'그러니까 깨끗하게 살지 그랬어.'

남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것만큼 재밌는 일은 없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싱글벙글 웃던 강승현은 보란듯이 마나 워치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휴, 질 떨어지는 범죄 길드에 붙잡혀 있어서 많이 피곤하네요."

마티아나는 지친 기색으로 이마를 짚었다.

"원래는 모험가 조합 숙소에 묵을 예정이었지만,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어요. 지부장이 형편 없으니 보나마나 시설도 형편 없겠죠."

"끄으...."

마지막까지 리웬의 속을 박박 긁으면서 말이다.

"그렇지, 리웬 지부장님?"

"...뭐야."

"이번에 마티아나 조사관님을 구출하고 '사선' 길드를 진압한 모험가에게 보상은 두둑하게 내려주실 거죠?"

악질 범죄 길드를 해결한 것도 대단하지만, 마법협회의 조사관을 구출해낸 건 정말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그, 그래.... 이번 일로 지부 수익이 떨어져서 윗대가리한테 엄청 깨지겠지만, 결과적으로 조합 평판은 올릴 수 있어. 그거면 되는 거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리웬 지부장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거기다 조사관을 구출할 정도면 분명 엄청난 실력자라는 증거!'

이런 인재를 스카웃해서 지원하면, 허셔 가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질 테니 본가에서도 크게 기뻐할 것이다.

'보너스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리웬이 헛된 꿈에 부풀어 있던 찰나였다.

"그 모험가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아직 모르지만, 바로 확인해서 마땅한 보상을...."

"그거, 저희 팀이거든요."

"뭐? 뭐?"

강승현은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그냥은 안 믿을 것 같아서 모험가 조합에 이번 사건을 보고하고 받아온 확인증이다.

"사선 길드 제압, 길드마스터 가헨 생포, 사선 길드가 납치한 민간인 구출 성공, 거기다 마법협회 조사관 구출까지...."

"아, 정말 강승현 힐러님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죽었다니까요?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이, 이 사기꾼 놈들!"

탕!

마법협회 일도 열 받아 죽겠는데, 조사관을 구출한 것도 강승현이라니?

리웬이 바들바들 떨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너희 짜고 치는 거지? 그런 거지?"

"글쎄요? 무슨 소린지?"

"시치미 떼지 마! 너네 지금 마법협회 지으려고 작당하는 거잖아?"

"문제될 건 하나도 없는데요?"

강승현의 크림슨 엠블럼이 가짜인가?

-NO.

강승현이 사선 길드한테 조사관을 납치하라고 시켰나?

-NO.

모험가 조합이 무능하게 구는 게 모함인가?

-NO.

모험가 조합이 마법협회를 짓는 것에 따질 자격이 있는 건가?

-NO.

아무리 따져봐도 잘못한 게 없다.

"애초에, 하인드 지부가 일을 제대로 했으면 조사관님이 납치될 일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이,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리웬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항의했으나, 이게 작당이든 아니든,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두둑한 보상! 기대하겠습니다."

"물론~ 보상은 마법협회 건설 지원금인 거 아시죠? 다 내실 필요는 없고 1/3만 부담하세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강승현과 마티아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지부장 실을 빠져나왔다.

"이, 망할 것들아아아!!!"

등 뒤에서 리웬의 분노가 느껴졌지만, 두 사람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208. 동아줄

드르륵.

"수고하셨어요."

"휴, 가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지부장실 밖으로 나온 마티아나는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제 연기력 괜찮았나요?"

"그럼요. 전혀 눈치 못 채던걸요."

"혹시 들키는 건 아닌지 정말 조마조마했다니까요."

당연하지만, 아까 있었던 일은 이번 일에 모험가 조합을 끌어들이기 위해 강승현과 마티아나가 짜고 친 연극이었다.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죠."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까 일을 회상했다.

오직 리웬을 엿먹이겠다는 굳은 의지로 대사를 만들고, 마티아나와 말을 맞춰가며 상황을 연출했던 즐거운 시간.

"정말 최고의 아이디어였어요!"

'저쪽한테는 최악의 상황이겠지만!'

덕분에 리웬 지부장, 아니 모험가 조합은 마법협회한테 뇌물을 받긴커녕, 생돈을 써가면서 건설에 협력해야 할 판이다.

"솔직히 걱정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힐러님 덕분에 전부 해결했지 뭐에요?"

원래 건설 비용의 절반은 카마르, 나머지 절반은 마법협회가 부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강승현이 모험가 조합을 끌어들이면서 마법협회가 부담해야 할 건설 비용이 줄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확보한 예산으로 건설 속도나 품질을 높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건설은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이번에 확보한 예산과 카마르 쪽에서 지원하는 인맥을 고려하면... 내일 당장 시작해도 문제 없겠는데요?"

마티아나가 의지를 불태웠다.

보통 모험가 조합의 견제로 넉넉하게 1년 정도는 잡아야 하지만, 지금 조합은 견제는커녕 돈까지 내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판이다.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는 건물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마법협회 조사관 자리를 걸고 약속드리죠."

"한 달이라."

강승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한 달만 지나면 교단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이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본격적인 성상 파괴 운동을 시작해도 되겠지.'

성전에 후원금이 필요하듯, 즐거운 성유물 파괴를 위해선 몇 가지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성유물을 긁어모으기 위한 밑자본과 성유물을 공급해줄 유통 인맥, [-ICONOCLASM-] 버튼을 활성화하기 위한 포인트.

'그리고 성유물을 가볍게 부수기 위한 불신 스탯작까지.'

특히 현 아즐 대륙 랭킹 1위인 '아이베르'가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관계로, 돈만 있으면 성유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래저래 할 일이 많군. 돈 모으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 불신작부터 할까?'

불신 스탯을 올리려면 교단에 엿을 먹여야 하니, 야매 힐러인 강승현은 늘 하던 대로 야매 힐러짓만 잘해도 스탯을 올릴 수 있다.

한마디로 '취미 생활로 스탯업!' 같은 느낌.

'자세한 계획은 동료들하고 천천히 구상해봐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완공될 때까지... 아니, 완공된 뒤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세요!"

[크림슨 엠블럼]으로 모험가 조합을 농락해서 마법협회 담당자 자리를 먹긴 했으나, 마력이 1도 없는 마법사 컨셉충인 만큼, 실제로 마법협회 담당자 자리에 앉긴 힘들다.

강승현이 가짜 마법사인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마법협회를 관리하려면 마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서 담당자 자리를 포기하면 모험가 조합이 바로 자기 쪽 마법사를 꽂아 넣을 테니...."

"이름만 올려두고 실무는 이 마티아나가!"

"마법협회가 확실히 자리 잡을 때까진 바지사장 노릇을 해야겠네요."

그래서 강승현은 마티아나와 손잡고 이런 연극을 계획한 것이다.

모험가 조합을 속이는 것이 아닌, 계획의 일부로 끌여들었기에 아즐 대륙 특성상 문제될 건 하나도 없다.

"저도 슬슬 실무 경력 쌓고 싶었으니 잘됐죠. 힐러님 얼굴 자주 뵐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있고."

마티아나는 뺨을 붉히며 말했다.

흔한 일이다.

"오늘은 푹 쉬세요. 그동안 힘드셨잖아요."

"정말 힘들었어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옷도 아주 거지 같은 것만 입고 다녔고."

"그거 서부 평민복 중에 제일 비싼 건데요."

"이제 마법협회 지부에서 일하면 한동안 조사관으로 파견될 일은 없으니, 거지 행세할 필요도 없겠죠."

마티아나는 귀족 가문 태생 마법사인 만큼, 조사관 일이 이래저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끼친다니까요. 나 같은 마법협회의 인재가 범죄 길드에 잡혀가다니.... 힐러님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그러고 보니...."

마티아나의 말을 듣고 있으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그 녀석들은 마티아나를 어떻게 붙잡은 거지?'

'사선' 길드도 그럭저럭 강한 놈들이긴 하나, 마법협회 조사관이라면 놈들을 쓰러트리진 못해도 거기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

당시 마티아나는 구해야 할 동료가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승객을 인질로 잡았다고 해도 임무를 중요시하는 조사관 특성상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은 물론,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붙잡혔다.

'이건 확실히 이상하지.'

심지어 아끼는 무기까지 빼앗겼으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음, 마티아나 조사관님 실력이라면 도망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놈들이 그렇게 강했나요?"

"그게...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어떤 점이요?"

잠시 고민하던 마티아나는 보석 스태프를 가볍게 돌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우세했는데, 그 자식들이 뭘한 건지 갑자기 몸속 마력이 막히면서 마법을 쓸 수 없게 됐거든요."

"마력이 막혔다?"

"그래서 탈탈 털리고 내 사랑스런 무기까지 뺏겼죠."

마력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흔한 방법이 아닌 데다 리스크가 커서 실전에선 거의 쓰지 않는다.

'그 자식들한테 그런 기술력이 있었다고?'

그런 게 있었다면 자신들과 싸울 때 바로 써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쓰지 않은 걸 보면 뭔가 조건이 있거나, 애초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기술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마법사 주제에 신성 스킬을 남발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사선 길드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의문점을 해결해줄 인간은 딱 한 녀석뿐이다.

'잠깐 면회 좀 다녀올까?'

-턱!

"너, 너는?"

"뭐야, 그새 힐러한테 치료받았어요?"

강승현이 향한 곳은 모험가 조합.

정확하게는 모험가 조합에 구금된 '사선' 길드의 길마 가헨을 만나기 위해서다.

"젠장! 빌어먹을!"

지금 녀석은 다친 몸은 멀쩡해졌지만, 마법 봉쇄 조치와 흑마력을 잔뜩 투여해서 마법은 물론, 자랑하던 신성 스킬조차 쓸 수 없는 상태다.

"네 녀석만 아니었어도!"

"칭찬 감사합니다."

"으아아아아!!!"

덜컹! 덜컹!

가헨이 쇠창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조만간 마법협회로 넘겨질 예정이라 더욱 날뛰는 것 같다.

하도 범죄를 저질러서 제명되긴 했지만 본래 마법협회 소속이기도 했고, 이번 사태의 피해자 중 한 명이 마법협회 조사관이다 보니 마법협회가 직접 나선 것이다.

"저 친구 조사해보니까 전적이 아주~ 화려하더라구요?"

마티아나가 가져온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불법 연구재료 유통에 희귀 보호종 매매, 마법 도용, 생체 실험, 기술 유출, 연구 방해, 훼손 등등. 마법사가 할 법한 범죄는 전부 다 해먹은 놈이었다.

"역시 재활용 불가 쓰레기네요."

"이번에 끌려가면 다시는 빛 볼 일 없겠죠."

"...."

"쓰레기는 역시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가헨은 이를 빠드득 갈면서 마티아나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아주 가볍게 무시했다.

"마법협회 쪽 처벌은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그러는데, 저 친구 어떻게 되나요?"

"표면적으로는 무기징역이지만, 힐러님도 이쪽 업계 아시잖아요. 십중팔구 연구용 '재료'로 쓰이겠죠."

"거참 불쌍하네요."

강승현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가헨에게 다가갔다.

녀석은 부들부들 떨면서 창살을 쥐고 있었다.

악질 범죄자라도 죽는 건 무서운 모양이다.

"불쌍하니까 동아줄 좀 내려줄까요?"

"...동아줄?"

"당신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뭘 물어볼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죠?"

[크림슨 엠블럼]

강승현의 손 위로 붉은 증표가 나타났다.

가헨은 살짝 놀란 얼굴로 강승현과 증표를 번갈아 보았다.

"제가 카마르 영주랑 꽤 친하거든요. 진홍의 마탑 쪽 빽도 있고. 마법협회 쪽 인맥도 여기 옆에 있으시고."

"...사실대로 말하면 여기서 풀어주는 거냐?"

가헨은 경계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마법협회로 끌려가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테니, 녀석도 필사적일 것이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준다면야."

"...아, 알았어. 사실대로 말할 테니 약속 지키라고."

가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마시기만 하면 신성 스킬을 쓸 수 있는 포션이 있어. 나처럼 신앙심 없는 마법사도 말이지."

"신성 스킬을 쓰게 해주는 포션이라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우리랑 인신매매 계약한 녀석들한테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받은 거니까."

꾸준히 마시지 않으면 효과가 사라지지만, 일단 마시기만 하면 누구나 신성 스킬을 쓰게 해주는 기적의 포션.

"그 녀석은 [미라클 워터]라고 하더라."

"우와, 작명 센스 미묘하게 구려!"

"신성 스킬을 쓰는 마법사라니 확실히 반칙이네요. 마법사들의 약점은 흑마력인데, 그걸 대항할 수단이 생겼으니...."

이것이 '사선' 길드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다.

"거의 다 마셔서 새로 받아야 할 판이지만, 하인드 마을 쪽 아지트에 몇 병 정도는 굴러다니고 있을 거야."

"그걸 분석해보면 뭔가 알 수 있겠네요."

"자, 됐지? 내가 아는 건 전부 말해줬어!"

덜컹! 덜컹!

가헨이 쇠창살을 흔들며 소리쳤다.

"이제 약속 지켜! 빨리 꺼내달라고!"

"약속?"

"사실대로 말하면 풀어준다며!"

"아~ 그런 약속을 하긴 했죠. 그런데...."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분명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요?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준다면' 풀어주겠다고."

"뭐, 뭐?"

"가헨 씨가 열심히 말해주신 건 감사한데... 제가 듣기에 별로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못 풀어드리겠네요."

"너, 너! 이 개자식!"

"뭐,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해주셨어야죠? 그치만 주신 준 정보는 잘 써먹을게요."

쾅!

가헨은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크게 분노하며 철장을 내려쳤다.

"나, 날 속였겠다! 네가 그러고도 모험가냐!"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 말 자주 들어요."

"아아아아악!!!!"

아즐 대륙은 기본 인권이 낮은 동네지만, 그 말은 범죄자들 인권도 개쓰레기라는 뜻.

강승현은 처음부터 가헨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너 같은 새끼한테 내려오는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인 게 당연하잖아. 주제를 알아야지."

209. 목숨은 붙여 둔다

덜컹, 덜커겅!

"주제를 알라고...?"

쇠창살을 움켜쥔 가헨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야 물론 사람이죠. 나보다 쓰레기인 댁도 사람이긴 하잖아요?"

"그기기긱...."

텅!

분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 같다.

가헨은 마구 날뛰면서 소리 지르더니 철장을 걷어찼다.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이쪽도 더럽게 나가 볼까?"

"이미 충분히 더러운 인간이신데."

"내가 죽을 땐 죽더라도 혼자 죽을 순 없지!"

퉤엣!

가헨은 증오 가득한 눈으로 강승현을 노려보더니 입에서 핏물을 뱉었다.

물론 강승현은 가볍게 피했다.

"나 말이지, 사실 아까 조사받을 때 검은 짐승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했거든?"

"검은 짐승?"

당시 상황을 모르는 마티아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 괴물, 분명 네 동료였지? 그런 녀석을 '교단'이 알게 되면 가만 놔둘 것 같아?"

교단은 되살아난 존재를 매우 싫어한다.

사자소생이 가능한 건 오직 신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가 됐든 일단 부활하면 신의 금기를 어겼다는 이유로 '안식'이라는 이름하에 보이는 족족 죽이려 든다.

그게 자기 가족이라도 말이다.

'이게 사제와 힐러의 결정적인 차이지.'

두 집단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추구하는 방향이 전혀 달라서 아슬아슬한 협력관계다.

'인간의 사자소생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

그게 강승현이 사제가 아닌 힐러의 길을 걷는 이유이기도 했다.

힐러는 망자가 좀비로 되살아났다 하더라도 이성을 가졌다면 사람으로 인정하지만, 사제들은 사람이 아닌 몬스터로 취급하니까.

"죽었다 살아난 주제에 신성력까지 안 먹히는 검은 짐승.... 정상적인 존재는 절대 아니지! 내가 교단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묻어버릴걸?"

당연히 김호정 같은 존재를 교단이 인정할 리가 없다. 심지어 신성 스킬까지 제대로 먹히지 않으니, 평범한 언데드가 아닌 이단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 또라이들한테 잘못 걸리면 인생 쫑나는 거 알지? 그런 녀석을 동료로 데리고 다닌 댁은 괜찮으려나 몰라."

가헨은 자신을 여기서 풀어주지 않으면 검은 짐승에 대한 걸 전부 퍼트리겠다고 떠들어댔다.

"글쎄요? 그쪽 입만 막으면 그만인데."

"날 죽여서 입막음하게? 안 그래도 3번 정도 자살 시도했는데 힐러들이 살려내고 쥐어팼거든."

벌 받기 싫다고 자살런 하려는 범죄자가 워낙 많다 보니, 아즐 대륙의 범죄자 수용실에는 근처에 힐러를 배치해두는 법이 있다.

혹시 죽으려 하면 바로바로 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외부 힐러들이 이 자식의 몸 상태를 스킬로 감시하고 있어요. 뭔가 이상이 생긴다 싶으면 바로 출동해서 살려버리겠죠...."

마티아나가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 안에는 강승현과 마티아나, 가헨 세 사람뿐이지만 방 밖에는 각종 병사와 힐러들이 대기하고 있다.

안에서 소동이 벌어진다면 죄다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고, 가헨은 그 순간 검은 짐승에 대해 불어버릴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호:루스의 손]

샤아아!

"죽여서 입 막는다고는 안 했거든요?"

"그럼 뭐? 아까처럼 목구멍이라도 뚫게? 그래봤자 힐러들이 치료하면 그만...."

강승현은 석궁과 함께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반투명한 해골 손아귀를 불러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흙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악! 파박!

"끄어헉!"

날아간 흙 화살이 가헨의 목에 처박힘과 동시에,

[대지의 뼈]

빠각! 빠가각!

목에 박힌 화살이 뼛조각으로 변해 마구 으스러졌다.

벌컥!

"무슨 일입니까?"

"이 자식 또 자살을!"

"일단 살리고 몽둥이로 패!"

그 직후 대기하던 힐러와 병사들이 문을 박차고 달려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승현은 마티아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목이 아작났으니 더 떠들진 못하겠네요. 저희는 그만 가죠."

"이, 이대로 가도 돼요? 힐러들이 저 녀석을 치료하게 되면...."

"괜찮아요."

강승현은 기분 좋게 비웃으며 말했다.

"평범한 힐러는 저 녀석 못 고치거든요."

그가 가진 힐러 엿먹이기 중 하나로, 자신만 치료할 수 있는 환자 만들기가 있다.

'힐링 스킬의 치명적인 단점은 몸에 남은 이물질을 제거해주지 않는다는 점.'

지금처럼 타겟의 몸에 이물질을 잔뜩 박아 두면 일반적인 힐로는 완치시킬 수 없다.

'이물질이야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여기 있는 힐러들한테 그만한 실력이 있을지 모르겠네.'

겉으로 보이는 이물질은 제거할 수 있겠지만, 목 안쪽에 남은 미세한 뼛조각은 절대 손댈 수 없을 것이다.

"어찌어찌 상처를 봉합해서 가헨을 살려놓기는 해도 망가진 목은 치료할 수 없겠죠."

입막음하되 목숨은 붙여 둔다.

이 또한 강승현의 주특기 중 하나다.

"제대로 된 힐러를 데려온다면 치료할 수도 있겠지만, 안 그래도 돈 아까워하는 리웬 지부장이 저런 범죄자한테 비싼 힐러를 붙일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요. 그 인간 탐욕쟁이니까."

가헨은 가장 큰 불행은 상대가 강승현이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 불행은 여기가 하인드 마을 모험가 조합이었다는 점이다.

"아 참, 죄송합니다. 멋대로 끌고 와서 못 볼 꼴 보여드렸네요."

"괜찮아요, 오히려 통쾌했어요!"

알고 보니 마티아나의 선배도 가헨한테 졸업 논문을 털린 적이 있었다고.

생각보다 더 악질 범죄자였다.

"저, 사정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동료분이 죽었다 되살아나신 거죠? 혹시 교단의 위협을 피하고 싶다면 제가 칠흑의 마탑 쪽으로 연결해드릴 수 있어요!"

흑마술사는 망령과 시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이라 죽었다 되살아나는 행위에 큰 거부감이 없다.

얼마나 거부감이 없냐면, 죽었다 살아난 언데드도 칠흑의 마탑 교수로 일할 수 있을 정도다.

"칠흑의 마탑은 이성을 가진 언데드를 보호하는 역할도 하거든요. 물론 교단의 깽판에서!"

그래서 언데드로 부활한 사람들은 교단의 추격을 피해 어떻게든 칠흑의 마탑이 세워진 흑마술사의 도시, '하바스타'로 도망치는 게 상식이다.

마법사들은 사자소생에 별 관심이 없고, 원래 교단과 사이가 나빠서 이런 식으로 종종 칠흑의 마탑과 협력한다고.

"언제든 말만 하시면 바로 협조할게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흑마술사들이 감당할 친구가 아니라서...."

강승현은 제안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리고 저한테 교단을 상대할 방법이 따로 있어서요."

"방법이 있다구요?"

마티아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강승현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셀프 납득했다.

"그럼 아쉽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건설 진행에 궁금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마티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협회 일은 저쪽이 최선을 다할 테니, 당장은 신경 쓸 일 없어 보인다.

"이쪽은 끝났고... 슬슬 나오셔도 됩니다."

마티아나를 떠나보낸 강승현은 벽 모퉁이를 쳐다보았다.

"그 아가씨 갔어? 이야~ 어째 나갈 타이밍이 없어서 말이지."

그러자 알렉이 쑥스러워하며 걸어 나왔다.

사실 마티아나가 연기에 실수할 때를 대비해 몰래 불러뒀지만, 마티아나가 워낙 완벽한 연기를 펼친 덕분에 알렉은 줄곧 대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끼어들면 데이트 분위기가 박살 날 거 아냐?"

"이게 진짜 데이트였으면 이미 가헨을 두들겨 팬 시점에서 박살 났죠."

"그런가? 그건 그렇고, 칠흑의 마탑이라.... 한때 신세 많이 졌는데 말이지."

알렉이 히죽거리며 무언가를 소환했다.

칠흑의 마탑을 상징하는 검은색 증표, [다크 엠블럼]이다.

"역시 칠흑의 마탑 소속원이셨군요."

"당연하지. 여기 안 들어가면 교단 놈들이 귀찮게 굴잖아."

아즐 대륙에서 흑마술을 합법적으로 쓰려면 칠흑의 마탑에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

칠흑의 마탑은 흑마술의 기초만 알아도 가입시켜주기 때문에 차원이동자는 프리패스로 통과할 수 있지만, 교단의 눈을 피해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쉽지 않아서 문제다.

"그래서 흑마술사 직업 뽑은 사람들은 고생 장난 아니었지. 난 교단 놈들한테서 튀느라 이속 스탯만 왕창 올렸다니까."

이게 흑마술사가 차원이동자 직업 난이도 최상위권인 이유다.

아즐 대륙 오자마자 교단 세력을 적으로 돌리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도 교단을 적으로 두긴 했지만 걔네가 나 쫓아다니면서 스토킹하진 않았는데. 흑마술사 안 뽑아서 다행이네요."

"난 그보다, 형씨가 어떻게 [크림슨 엠블럼]을 갖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고. 도대체 뭘 한 거야?"

마법사도 아닌 인간이 당당하게 엘리트 법사 자격증(정품)을 갖고 있는 상황.

진홍의 마탑 사건을 모르는 알렉으로선 어이가 없을 것이다.

"뭐, 이번에 술 마시면서 알려드릴게요. 저도 그쪽한테 이래저래 묻고 싶은 게 많아서."

"좋~지. 김 형하고 직스 군한테 먼저 가서 자리 잡아두라 했으니 지금쯤 테이블에 앉아 있을 거야."

두 사람은 모험가 조합을 떠나 하인드 마을 주점으로 향했다.

-한편 지부장실에선.

"강승현!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분노를 참지 못한 리웬 지부장이 테이블을 걷어차며 난동을 부리는 중이다.

당연하지만 그 원인은 강승현 때문이다.

"여명의 성수에 이어서 이번엔 마법협회냐고! 힐도 못 쓰는 힐러 사칭범 주제에!"

쿠당탕탕!

선반이 넘어지면서 안에 든 내용물이 죄다 쏟아졌다.

"야, 내가 뭐랬어? 나 대신 일 똑바로 하라고 했지?"

"...."

"너네가 일을 제대로 안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냐? 범죄 길드 하나를 못 잡아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선반을 걷어차는 걸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리웬은 괜히 곁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화풀이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며칠 전 '사선' 길드의 아지트를 알아냈다고 보고드렸지만, 소탕 허가를 받지 못해서...."

"어디서 변명이야?"

리웬은 들고 있던 술잔을 병사에게 내던졌다.

퍼억!

술잔이 병사의 머리에 부딪히면서 안에 든 술이 병사의 몸에 끼얹어졌다.

강승현이었다면 날아오는 술잔을 피하고 바로 석궁을 꺼내서 후드려팼을 상황이지만,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병사는 술에 푹 젖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아즐 대륙에선 흔한 일이다.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아랫것들까지 난리야!"

리웬은 엎어진 테이블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제 어쩔 거야? 이대로 마법협회 지어지면 아이베르 교단이 가만있겠냐? 우리가 걔네한테 붙은 줄 알고 압박할 거 아냐!"

본래 모험가 조합은 마법협회와 교단을 오가며 이득을 취해야 하거늘, 오히려 양쪽에서 처맞을 판이다.

"저, 지부장님."

"내가 말하는 거 안 보여?"

"이렇게 됐으니 교단을 이용해 강승현을 처리하는 건 어떨까요?"

그때, 조합 직원 하나가 슬쩍 손을 들고 말했다.

"교단으로 강승현을 처리하자고?"

"교단에서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테니, 그걸 강승현의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어떻게 돌리는데?"

"분명 강승현의 목적은 마법협회를 이용해 우리 모험가 조합을 압박하는 것이겠지요! 뭐, 교단 쪽은 관심도 없을 테니, 그 허점을 찌르는 게 어떻습니까?"

"허점?"

현재 하인드 마을 아이베르 교단은 강승현을 눈엣가시로 여기긴 해도 큰 위협으로 여기진 않았다.

힐 쓸 줄 모르는 놈이 힐러라고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꼽지만, 강승현의 주 고객이 돈 안 되는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교단을 압박하기 위해 마법협회를 끌어들였다! 우리는 놈에게 속은 피해자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옳거니!"

그렇게 되면 그냥 무시할 수 없게 되니, 아이베르 교단 본거지에서 직접 움직일 것이다.

최상급 사제들을 파견하는 식으로 말이다.

"강승현 모험가가 아무리 강해도 하이 프리스트와 사도를 이기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래. 잘나봤자 일개 모험가잖아!"

"어쩌면 이단심문관이 파견될 지도 모릅니다!"

"강승현을 확실히 묻어버릴 수 있겠군!"

리웬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강한 모험가라도 신의 힘이 깃든 성유물로 무장한 고위 사제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당장 교단한테 연락해!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210. 묻고 싶은 것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