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하인드 마을로
"드디어 하인드 마을로 가는구나."
강승현 일행을 태운 마차는 붉은 숲, 아니 위즈멜 숲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김호정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돌아가면 푹 쉬자구.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고생했잖아."
"쉴 시간 없어요."
"뭐? 왜?"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강승현이 드림월드에서 관리자를 만나는 동안 김호정은 그냥 잤기 때문이다.
"앞으로 할 일이 많거든요."
마차가 숲길을 달리는 동안 강승현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 적당히 요약해서.
-"관리자를 만났다고...."
"설마 꿈속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셨다.
스태미나 포션은 언제 마셔도 새콤하지만, 마차 안에서 마실 땐 더욱 새콤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승현 일행은 드디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난이도가 꽤 높다.
"신과 교단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무섭지만, 잘 생각해보면 지금하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말이지...."
김호정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나는 협력할 거야! 이게 집에 갈 유일한 방법이라면 당연히 동참해야지!"
"뭐, 김호정 씨는 안전장치가 있으니까."
"안전장치라니...."
김호정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협조할 생각인 듯했다. 이제 와서 내뺀다고 지구로 갈 수 있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둘이서만 상대하는 건 힘들겠죠."
"힘들어, 힘들어."
당장 위즈멜과 싸우던 때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위즈멜이 힘을 빌려준 덕분에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이겼을 것이다.
"슬슬 동료를 늘릴 때가 된 것 같네요."
"헷헷, 이 나이 먹고 신을 구하기 위한 용사 파티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정확하게는 신한테 엿 날리고 교단에 어그로 끄는 파티가 되겠지만."
"설명 들으면 다 도망갈 것 같은데."
귀하고 비싼 아이템을 부수겠다는 것부터 제정신이 아닌데, 신과 교단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파티에 들어올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정상인이라면 그렇겠죠."
"그야 당연히...."
"하지만 정상이 아니라면?"
신과 교단에 겁먹고 내빼는 건 평범한 겁쟁이 놈들이나 하는 행위.
아즐 대륙의 절반을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 재미만 있으면 OK라고 생각할 미친놈이라면, 오히려 좋다고 들어올 것이다.
"마침 조건에 딱 맞는 놈이 하나 있거든요."
"그런 사람이 선생 말고 또 있다고?"
김호정의 얼굴이 순간 공포로 물들었다.
"그 외에는 신앙심이 밑바닥인 놈, 돈만 주면 뭐든 할 놈, 애초에 교단을 적대하는 놈...."
즉, 사람들이 도망갈 것 같아 파티가 걱정이라면, 애초에 도망갈 일 없는 쓰레기들로 모집하면 된다.
"이런 떨거지들을 모아서 미끼나 고기방패로 쓰면 지금보다 편하게 싸울 수 있겠죠."
"그거 용사 파티라기보단 악당 길드에 가깝지 않아? 아무도 안 올 것 같다고."
"뭐, 사람이 안 모이면 우리끼리 해봐야죠."
강승현은 인벤토리를 열더니 새하얀 도자기를 꺼냈다.
"이걸로 비벼보는 수밖에."
"이게 그 신성의 그릇이야?"
"네. 인벤토리에 들어있더라구요."
꿈에서 받은 신성의 그릇은 인벤토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만 [섬망체]는 인벤토리에도 스킬창에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현실에선 쓸 수도 꺼낼 수도 없는 것 같다.
"여기에 신성력을 채워야 한다는 거지...."
"아이템 설명은 이래요."
[신성의 그릇]
[절실한 믿음의 결실,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항아리.]
[신성력을 일정량 채울 때마다 특별한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
"뭔진 몰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듯해요."
"이건 룰렛이 아니라 뽑기인 건가?"
"여기서도 쓰레기 나오면 항아리 깨버릴 생각이라.... 알아서 처신 잘하겠죠."
강승현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사실 100% 진담이다.
'관리자의 말을 생각하면 뭐가 나올진 대충 짐작되지만....'
신과 교단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신성저항력이나 정신력 계통일 확률이 높다.
신성력을 모으면 모을수록 이쪽을 적대하는 교단이 늘어날 테니까.
'정신력은 그렇다 치고, 신성저항 쪽 옵션은 정말 구하기 힘들어. '
평범한 아즐 대륙민들은 신은 물론, 사도의 공격조차 버티기 힘들다.
'신성저항력은 신앙심이 낮을수록 강해지니까 말이지.'
관리자가 검은 별 보유자를 까다롭게 고른 이유가 있다.
신을 향한 믿음이 클수록, 신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신앙심이라곤 없는 쓰레기들로 파티를 짜고, 그릇을 채워서 얻는 보상으로 강화시킨다면 이래저래 굴려 먹을 수 있겠지.'
강승현은 혼자만 고생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고생해야 한다면 남들도 함께 고생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독점할수록 즐겁고, 고통은 나눌수록 즐겁다.-
그는 '야매 힐러 생존 철학 12'를 생각하며 최대한 부려먹고,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고생해서 집에 가는 법을 알아냈으니 다들 협력해 줘야겠죠."
"그거 협력이 아니라 강요 같은데."
"아무튼, 이 문제는 하인드 마을로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고...."
이제 남은 관리자에 대한 것이다.
강승현은 녀석과 직접 대면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알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거?"
"관리자의 정체 말이에요."
다른 신들이 힘을 합쳐 봉인하는 게 고작인 존재, 봉인당한 상태에서도 다른 차원에 간섭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
"과연 우리가 이 녀석을 풀어줘도 될는지."
"그, 그치만 그 녀석을 풀어주지 않으면 우리가 집에 갈 수 없잖아."
"그럼 김호정 씨는 지구로 갈 수만 있다면 아즐 대륙이 망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아, 아니! 그런 건 절대 안 되지...."
"전 딱히 상관없긴 한데, 그런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거예요."
관리자가 차원 이동자를 곱게 보내준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악한 놈이면 약속을 어길 가능성도 있으니까.
"관리자 말로는 제가 자기 이름을 알고 있다고 그랬거든요."
"선생이 관리자의 이름을 안다고?"
"아직은 감이 안 잡혀요."
강승현은 관리자의 정체를 모른다.
그래서 이름을 얻어낸 다음, 녀석에 대해 차근차근 조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리자는,
[애초에 당신은]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걸요.]
강승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데 정체를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애초에 관리자는 오래전에 잊혀진 존재라, 세간에 이름이 알려져 있을 리가 없다.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김호정이 눈을 멀뚱멀뚱 뜨면서 말했다.
"그 정도로 강한 신이라면 아즐 대륙민 전체가 이름을 알고 있어야 하잖아."
아즐 대륙의 신적 존재는 ⓤ튜브와 비슷해서,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구독자... 그러니까 신도가 늘어나고 그만큼 강해진다.
"잊혀져서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냐구."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관리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을 것 같다.
"복잡하네.... 난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것뿐인데."
김호정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감쌌다.
"뭣하면 관리자 관련으로 아즐 대륙의 신들과 협상해서 지구 좌표를 얻어내면 되겠죠."
관리자가 아니더라도 지구로 보내줄 수 있는 신은 많다. 그저 지구 좌표를 아는 존재가 관리자일 뿐이지.
"몇백 년, 어쩌면 몇천 년 전쯤에 아즐 대륙의 신들끼리 한판 붙은 건 확실하거든요. "
아즐 대륙의 은폐된 역사를 조사해보면 관리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형 공방이 위즈멜에 대해 숨긴 것처럼, 수상한 놈들 털어보면 정보가 나오겠죠."
"그런 복잡한 건 선생한테 맡겨둘게."
"기대도 안 해요."
쿵!!!
그때, 마차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하게는 마차 자체에 큰 충돌이 있던 것 같지만,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흔들림 방지 덕분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이거 뭔 소리야?"
"직스 씨, 무슨 일이죠?"
"몬스터의 공격입니다."
앞에서 말을 이끌던 직스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창밖을 내다보자 몬스터 무리가 마차를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모, 몬스터 떼다!"
"어째 조용하다 싶었더니."
아즐 대륙에서 마을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나 도적 무리의 습격을 받는 건 일상이다.
그건 마차 역시 예외가 아니다.
"몬스터가 더 늘어나기 전에 빨리 처리하고 자리를 뜨는 게...."
강승현과 김호정이 무기를 꺼내려는 순간.
"아, 신경 쓰지 마세요."
덜컥, 덜컥!
쿠우우웅!
마차를 끌던 말 골렘들이 마력을 발산하며 달려오는 몬스터를 죄다 들이박기 시작했다.
"쿠에에에!"
"키아아아!!"
달려오던 몬스터들은 말 골렘에 치여 무참하게 으스러지고 짓밟혔다.
파아아아아!!
심지어 그중 한 녀석은 레이저포까지 발사해 확인사살도 놓치지 않았다.
"이, 이게 뭐래니...."
"인형 공방 최고의 인형사, 스승님의 걸작이죠."
직스가 무척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 골렘 마차는 뛰어난 방어 시스템을 이용해 위험지대와 각종 재난상황에서도 손님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구."
김호정은 얼빠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키에에엑!"
"카학!"
콰악! 콱!
몬스터 비명소리와 함께, 창문이 시뻘건 핏물이 튀었다.
"말 골렘 마차를 끌면 숲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속도가 무척 빨라서 몬스터를 따돌리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살다살다 몬스터를 상대로 로드킬하는 마차를 타게 될 줄은."
촤아아아!
곧 창틀에서 물줄기와 함께 와이퍼 같은 게 나타나 창문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이게 대륙 최강 인형사의 능력인가...."
"방음은 바라지도 않으니 커튼이라도 달아주지, 좀."
말 골렘의 몬스터 학살은 숲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됐다.
-"이제 한동안은 안전할 것 같네요."
"그야 그러겠지."
"몬스터를 그렇게 박살냈는데."
숲을 빠져나온 뒤로는 몬스터의 비명소리가 크게 잦아들었다.
간간히 야생동물들과 마주치긴 했으나 다들 피투성이 마차를 보자마자 정신없이 도망쳤다.
"우리 이런 꼴로 마을에 들어서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세차하면 됩니다."
"세차 안 하면 쫓겨나는구나."
"이 근처에 연못이 있으니 거길 들렀다...."
덜컹!
잘 가던 마차가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응? 왜 그래? 또 몬스터야?"
"몬스터면 안 멈추고 그냥 갔겠죠."
"그건 그렇네. 직스, 어떻게 된 거야?"
"앞쪽에 마차 한 대가 쓰러져 있습니다."
직스의 말을 듣고 창밖을 내다보자,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반쯤 부서진 채 버려져 있었다.
191. 습격
"뭔 일이야.... 교통사고라도 난 건가?"
세 사람은 부서진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마차 외형은 아즐 대륙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디자인으로, 큰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바닥에 엎어진 상태였다.
"교통사고가 아니라 습격이에요."
마차 주위에 피가 잔뜩 흩뿌려진 걸 보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아이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마구간인데...."
"아즐 대륙에선 자주 있는 일이죠."
여행객이나 모험가들이 마을이나 마구간, 여관, 캠프장 같은 안전지대를 코앞에 두고 죽는 일은 흔한 편이다.
크릉, 크르릉!
동시에 사방 곳곳에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 몬스터 울음소리다!"
"역시 주위에 잠복하고 있었나...."
수풀에서 나타난 몬스터는 늑대 무리였다.
다만 평범한 늑대가 아니라, 몸 곳곳에 거미다리처럼 생긴 것들이 뻗어 있는 괴이한 형태의 몬스터.
"흑거미늑대네요."
"하, 한두 마리가 아닌데?"
흑거미늑대 무리가 강승현 일행을 단숨에 포위했다.
"마비 독을 갖고 있으니 당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마비 독?"
"저 녀석들은 먹이를 마취시켜서 신선하게 보관하는 타입이라, 걸리면 자기 몸이 먹히는 걸 생생하게 감상하면서 죽어갈걸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김호정이 질겁하며 소리쳤다.
"직스! 무적의 말 골렘으로 어떻게든 해줘!"
"알겠습니다."
"아뇨, 지금은 미뤄두세요."
직스는 바로 마차로 돌아가려 했으나 강승현이 직스를 만류했다.
"네? 하지만...."
"여기서 말 골렘이 날뛰면 뒤에 있는 마차까지 휩쓸릴 겁니다."
아직 생존자가 있을지 없을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 골렘을 풀었다간 몬스터와 함께 마차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이번엔 저희가 처리하죠."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이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프리아의 석궁을 꺼냈다.
"그렇지, 이런 건 모험가 전문이라구!"
김호정도 금빛 영광을 꺼내며 흑거미늑대와 마주했다.
"확실히 광역기를 쓸 상황은 아니겠네요. 두 분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광역기 쓸 생각이었냐구."
"다들 준비하세요."
컹!
커겅!
울음소리를 신호로, 흑거미늑대 무리가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온다!"
놈들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가장 앞에 있던 김호정을 공격했다.
"김호정 씨, 그거 팔로 막으세요."
"무, 뭐?"
강승현의 말을 들은 김호정은 당연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뭐, 뭔진 몰라도 선생 말이 맞겠지!"
곧장 생각을 바꿔 금빛 영광 대신 자신의 팔로 흑거미늑대의 이빨을 막았다.
"주, 중독돼도 선생이 치료해줄 거지?"
"그건 걱정 마세요."
그 틈에 강승현은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거미늑대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중 하나로, '놈들에게 물리면 중독된다' 가 있지만.
"저놈들의 이빨은 페이크거든요."
"페, 페이크라고?"
사실 거미늑대의 이빨에는 독이 없다.
거기다 이빨과 치악력이 늑대치고 약한 편이라, 탱커 모험가인 김호정한테 큰 피해를 주지도 못했다.
"진짜는 이쪽이거든요."
파바바바박!!!
강승현이 발사한 화살은 흑거미늑대의 얼굴이 아닌, 녀석의 몸에 돋아난 거미 다리를 꿰뚫었다.
파각, 파가각!
"깨개갱!"
거미 다리가 무참하게 꺾여나가며 체액을 흩뿌렸다.
"그, 그거였어?"
그렇다.
거미늑대가 다른 생물을 중독시킬 때 쓰는 기관은 이빨이 아니라 거미 다리였다.
"사실 이건 다리가 아니거든요."
거미늑대의 몸에 돋아나 있는 건 일종의 촉각 기관, 더듬이다.
언뜻 보기엔 늑대의 몸에 거미 다리가 달린 것 같은 모습이라 '거미늑대'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실제로는 거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몬스터였다.
"이 더듬이는 이빨과 달리 스치기만 해도 중독될 정도로 위험하죠."
단점은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점.
그래서 거미늑대는 이빨로 깨물어 중독시키는 척 페이크를 걸고, 더듬이로 공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파바바박!!
"깨갱! 캥!"
"캐갱!"
더듬이가 잘려나간 흑거미늑대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바닥을 굴렀다. 놈들의 더듬이는 매우 예민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더듬이는 제가 처리할 테니 김호정 씨가 마무리하세요."
"오오오케이!"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휘둘러 바닥을 뒹굴던 흑거미늑대를 처리했다.
빠악!
빠각!
"거미늑대류 몬스터는 외형이 기괴하게 생겨서 그렇지, 공략법만 알아내면 별거 아니거든요."
"아, 아무리 공략법을 알고 있다 해도 그렇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직스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독을 품은 몬스터 수십 마리를 상대하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건...."
심지어 강승현 일행은 뒤에 있는 직스를 지키면서 싸웠으니.
당사자 입장에선 놀랄 수 밖에 없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뭐, 이것보다 더한 놈들도 많이 잡아봐서요."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의 활약으로 흑거미늑대 무리는 깔끔하게 소탕됐다.
"이 정도면 마무리해도 되겠네요."
"휴, 겨우 끝났네."
김호정은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몬스터를 처리했으니, 부서진 마차 쪽을 살펴보죠."
"사람이 있을까?"
"이쪽에 한 명 있네요."
강승현은 부서진 마차 밑을 살폈다.
"있어?"
"뭐, 생존자는 아니지만요."
마차 밑은 탑승객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깔려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데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끔찍했다.
"역시 아까 그 거미늑대한테 당한 거겠지?"
"...시체가 심하게 훼손된 걸 보면 그럴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시체를 보던 직스는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죽은 사람과 마주하는 건 아즐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긴 해도, 결코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성별은 남성이고, 나이는 대략 30대 후반이네요. 얼굴 부분이 엉망이라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물론 강승현은 매우 익숙한 광경임으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시체를 살폈다.
이 남자는 강승현 일행이 도착하기 전 숨이 끊어진 듯했다.
"어떻게 안 되겠어?"
"숨이 붙어있었다면 어떻게든 살려놨겠지만, 여기서부턴 네크로맨서의 영역이네요."
"에구, 너무 늦었구만."
"제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라는 거죠."
강승현은 미련 두지 않고 손을 뗐다.
야매 힐러는 사람만 잘 고치면 그만이니까.
"우리도 말 골렘 마차 안 탔음 이렇게 됐을라나."
"늘 하던 대로 내려서 몬스터 때려잡고 있었겠죠."
"그럼 시간이 오래 걸렸겠네...."
새삼, 몬스터가 공격해와도 몸통박치기로 쓸어버리는 말 골렘 마차가 얼마나 편하고 강력한지 알 수 있다.
"이런 걸 개발한 하비는 괴물인가."
"괴물이죠."
이렇게 편리한 말 골렘이 아즐 대륙에 대중화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오직 하비만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성격만 좋았어도... 쯧쯧."
"그래도 제자보다는 나은 편이잖아요."
"범죄자랑 인성을 비교당하는 시점에서 아웃 아닐까."
김호정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삽을 꺼냈다.
부서진 마차를 치우고, 겸사겸사 시체를 묻어줄 생각인 것 같다.
"일단 마차부터 치워야겠지? 이래선 지나갈 수가 없으니."
"사실 저희 마차로 밀어버리는 것도 이론상으론 가능하긴 합니다."
"그건 좀... 너무하잖아."
생존자가 없다는 건 확인했지만, 마차를 마차로 밀어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냥 내가 치울게."
"알겠습니다. 시체는 제가 맡죠."
김호정이 마차를 치우는 동안, 직스는 마부 시체를 수습했다.
"이 주변 몬스터는 우리가 다 쓸어버렸으니 모험가 조합에 간단하게 보고하면 되려나?"
"몬스터 습격으로 인한 마차 사고가 있었다고 전달하면 되겠네요."
두 사람은 그렇게 결론내리고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아뇨, 몬스터 습격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차를 유심히 살피던 강승현은 고개를 저었다.
"엉? 무슨 소리야?"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관찰의 눈]을 써봤거든요."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시체 위로 정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심하게 훼손된 시체]
[몸의 절반이 으스러진 상태다.]
[마차에 깔리기 전에 사망했다.]
"정보 메시지 중에 마비 키워드가 없어요."
흑거미늑대한테 당했다면 당연히 마비 상태여야 할 텐데, 이 시체는 몸이 마비되지 않았다.
"흑거미늑대한테 당한 게 아니에요."
"그, 그럼 다른 몬스터한테 당한 거 아냐?"
김호정이 부서진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 안에는 나무상자가 가득 실려 있는 상태다.
"이거 물건을 실어나를 때 쓰는 짐마차잖아. 물건을 건드리지 않았으니 도적 떼를 만난 건 아닐 거고...."
"김호정 씨치고는 머리를 꽤 굴렸지만."
강승현은 구석에 있던 나무 상자를 열었다.
"이쪽 상자에 들어있는 건 육포거든요."
안에는 잘 말려진 육포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정말 몬스터한테 습격당했다면, 식량을 가만 놔둘 리가 없다.
"그것도 후각 좋은 늑대라면 더더욱."
"그, 그렇다면?"
"위장이에요. 어설퍼서 들통났지만."
마차 물건에 손대지 않은 건 몬스터한테 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속임수다.
물론, 이 주변 몬스터들은 이런 교활한 속임수를 꾸밀 만한 지능이 없다.
"범인이 몬스터가 아니라는 거죠."
마차를 습격한 건 틀림없이 인간이다.
"그, 그러면 도적 떼가 범인?"
"그랬다면 물건을 전부 가져갔겠죠."
강승현은 마차 주위에 튄 피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한 사람한테서 나올 만한 피가 아니다.
"도적질이 목적이 아니라면 뭔데?"
"마차 탑승객은 최소 3~4명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시체가 한 명만 남아 있다는 건...."
"납치당했다는 뜻이군요."
직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어딘가로 끌려간 모양이다.
"뭐어, 이 동네에선 흔한 일이지.... 여긴 사람 목숨이 껌깞이잖아."
"흔한 일은 아니죠."
물건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사람만 납치한다니. 심지어 몬스터 습격 사고로 위장하면서.
아무리 봐도 수상스런 상황이다.
"도, 도대체 뭐야 그럼...."
"글쎄요. 뭔가 이유가 있겠죠."
후둑,
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이러다 쏟아지겠어요. 근처에 마구간이 있으니 그쪽으로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낫겠네. 어차피 오늘 하인드까지 가려면 밤 새야하니까."
세 사람은 비를 피할 겸, 마구간으로 향하기 위해 마차로 돌아갔다.
"응?"
마차에 탑승하기 직전, 강승현은 풀숲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뭐지?"
192. 운반품
풀숲을 뒤지던 강승현은 반쯤 부서진 보라색 보석 파편을 발견했다.
'이건... 자수정이잖아.'
정확하게는 보석으로 만든 무기 장식의 일부분인 것 같다.
'마차 탑승객의 소지품인가? 디자인이 꽤 화려한 걸 보면 높으신 분들이 쓸 법한 물건이군.'
평민들이 쓰는 무기는 수수한 편이다.
무기에 금칠하고 보석을 바를 정도로 돈이 썩어 넘치는 집단은 높으신 분들, 주로 귀족 놈들밖에 없다.
'그럼 마차 탑승객 중엔 최소 부르즈아 놈 하나가 껴있다는 소리인데. 혹시 리웬 녀석이 마차 타고 오다가 납치당했...을 리가 없지.'
이 마차는 아즐 대륙에서 가장 싸고 흔한 녀석이라, 리웬 지부장 같은 쓰레기 낙하산이 탈 리가 없다.
'굳이 리웬 지부장이 아니더라도 귀족놈들이 이런 마차를 탈 이유가 없어.'
귀족놈들은 성능에 아무 차이가 없는 똑같은 마차라도, 평범한 노란 마차보다는 화려한 황금마차를 타고 싶어 하는 족속들이니까.
'단, 신분을 숨겨야 할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지....'
강승현은 곧장 마차 짐칸으로 향했다.
짐칸에 실린 물품을 보면 대부분 식량이나 천옷, 종이나 잉크 같은 잡화물이었다.
'일단 이 마차는 물건을 팔러 가는 상인 마차 같은데.'
[관찰의 눈]
짐칸에 실린 나무 상자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봉인된 상자]
가장 안쪽에 봉인 처리된 특수한 상자가 숨겨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위장 운반이었어.'
날강도가 많은 아즐 대륙에서 물건을 안전하게 운반하려면, 강한 모험가를 고용하는 것보단 최대한 없어 보이는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신분을 감추고 물건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특수임무목적 운반자'라고 지칭하지만,
'그런 건 공적인 문서에서나 쓰는 말이고.'
실제로는 명칭이 너무 길다고 그냥 심플하게 '운반자'라고 부른다.
'일부러 상인 마차를 위장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의외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도적 떼는 짐이 잔뜩 실린 상인 마차를 습격하지 않는다. 상인들이 파는 평범한 잡화품은 훔쳐봤자 비싸게 팔 수가 없어서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물건을 다 팔아서 살짝 가벼워진 마차는 1순위 타깃이지. 돈주머니를 잔뜩 싣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번 돈을 숨기려는 상인과, 숨긴 돈을 찾아내려는 도적의 치열한 눈치 게임.
아즐 대륙에선 흔한 일이다.
'그러니 프로 도적단이라면 이 마차를 습격할 리가 없어. 풋내기 도적이라면 잡화물을 훔쳐갔겠지.'
그러니 이 마차를 습격한 집단이 도적 떼가 아닌 건 확실했다. 애초에 도적놈들이면 수고스럽게 몬스터 습격으로 위장하지 않는다.
'그럼 운반자를 노린 건가? 그랬다면 마차에 탄 운반자를 노린 거라면 화물을 다 뒤져봤을 텐데.'
하지만 놈들은 짐칸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마차 안에 귀족 운반자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돈을 노린 것도 아니고, 운반자를 노린 것도 아니라면....'
그냥 우연히 지나가던 마차를 습격한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노렸다가 운반자까지 얻어걸린 건지.
'아직은 모르겠군.'
여기서 중요한 건 운반자도 습격자도 봉인된 상자를 두고 갔다는 점이다.
'상자를 빼앗기는 것보단 버려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건가?'
강승현은 다시 봉인된 상자를 살폈다.
'상자 자체는 다른 화물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나무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그 귀족이 평민으로 위장해가면서 운반한 걸 보면 평범한 물건은 절대 아니다.
'봉인 처리까지 한 걸 보면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는 소리지.'
강승현은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할까.... 모른 척할까? 아니면 개입할까.'
후둑, 후두둑.
마차를 살피는 사이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자 시커먼 먹구름한테 정복당한 상태였다.
"강 선생, 안 오고 뭐 해? 비 맞게?"
"곧 갈게요."
강승현은 고민을 끝내고 짐마차를 나와 말 골렘 마차로 되돌아갔다.
-쏴아아아아!!!
말 골렘 마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물폭탄처럼 시원하게 쏟아졌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저거 다 맞을 뻔했네."
"김호정 씨 로브는 물 저항력 높잖아요."
"대미지만 안 받는 거지, 눅눅해지는 건 변함 없더라구."
김호정이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쏟아지는 비 덕분에 마차에 묻은 피와 몬스터 잔해가 씻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걸로 세차할 필요는 없겠네요."
"귀찮았냐구."
마차를 몰던 직스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아, 마구간 불빛이 보이네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흐릿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지판에는 [마이카 라코 마구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인드 마을 남서쪽 지역의 마구간이다.
"하인드 마을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비만 안 왔어도 바로 갔을 텐데 말이야."
세 사람은 마구간에 마차를 세우고 숙박을 위해 방을 빌렸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마구간은 숙소 역할을 겸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속도로 휴게소지.'
강승현 일행은 마구간 식당 테이블에 앉았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마구간 안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식사부터 주문하자고."
"어차피 곧 마을인데 간단하게 먹죠."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늦게 온 거야? 뭐 잃어버렸어?"
"뭘 잃어버렸다기보다는...."
강승현은 테이블 위에 뭔가를 내려두었다.
아까 마차에서 발견한 봉인된 상자다.
"중요한 걸 발견해서."
"이, 이건...."
"마차에 실려 있던 짐이잖아요...."
김호정과 직스는 경악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아, 알았어! 모른 척해 줄게.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봤어."
"힐러님은 저희 마을의 은인이시니...."
"근데 선생이 큰맘 먹고 빼돌린 거 보면... 역시 그거구나?"
"그거?"
"스태미나 포션 박스...!"
"다들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다.
"전 보란 듯이 뺏는 걸 좋아하지, 시궁쥐처럼 몰래 훔치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구요."
"결국 스틸이 취향인 건 맞구만?"
그 말을 듣던 김호정은 더 어이없어했다.
그가 강승현과 알고 지낸 시기를 다 합치면 1년은 진작 넘겼지만, 여전히 도통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스태미나 포션 같은 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열어보세요."
김호정은 상자를 열려고 시도했으나,
"이, 이거 꼼짝도 안 하는데?"
"그야 그거 봉인된 상자거든요."
"그걸 왜 이제 말해주냐구!"
상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봉인된 물품이라니.... 평범한 건 아니군요."
김호정은 모르는 듯하지만, 눈치 빠른 직스는 강승현의 의도를 빠르게 간파했다.
"맞아요.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주인?"
"그 마차, 귀족이 타고 있었거든요."
강승현은 아까 알아낸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사고당한 마차는 상인 마차.
-마차 안에는 신분을 숨긴 운반자가 타고 있었다.
-이 상자는 운반자가 전달하려는 귀중품.
"그 잠깐 사이에 거기까지 알아낸 거야?"
"[관찰의 눈] 덕분이죠."
"언제 들어도 사기 스킬이라니깐."
강승현은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려구?"
"솔직히 이대로 먹튀해도 상관은 없지만."
마차 탑승객들이 납치당한 건 확실하다.
몸값을 노릴 거라면 싸구려 마차가 아니라 화려한 마차를 노리는 게 정석이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끌고 갔다는 건, 살려서 데려갈 이유가 있다는 거겠죠."
사고가 일어난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럼 구해주자는 거구나!"
"신분 높은 사람을 구해주면 보상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으니까요."
강승현은 이번 사태를 해결한 대가로 성유물을 받을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합법적으로 받은 성유물은 몰래 박살내면 교단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
"오, 그거 좋은데?"
"일단 한동안은 성유물을 합법적으로 모아보려구요."
"성유물?"
아무것도 모르는 직스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자세한 걸 알려주지 않았다.
"식사 나왔습니다."
세 사람이 떠드는 사이, 마구간 종업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메뉴는 싸구려 흑빵과 육포를 첨가한 야채 수프. 전형적인 모험가 식단이다.
"잘 먹겠습니다. 수프 냄새가 참 좋네요."
강승현은 종업원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는, 남에게 정보를 뜯어낼 때 자주 써먹는 설득용 얼굴이다.
"어머, 감사합니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야채와 마구간 특제 소스를 이용해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냄새가 이렇게 좋은 거군요. 한 그릇 더 주문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실제로 종업원은 묻지도 않은 걸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설득용 얼굴이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요새 이상하게 비가 많이 내려서 채소가 푸릇푸릇하거든요!"
"비가 많이 내린다구요?"
"네. 가장 최근에는 사흘 전쯤인가? 그때도 지금처럼 비가 갑자기 쏟아졌어요."
"사흘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음..., 저희 마구간으로 급하게 도움 요청을 하러 온 모험가들이 있었어요."
모험가들을 따라간 마구간 직원들은 마구간 주변에서 쓰러진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고였나요?"
"안타깝게도 몬스터한테 습격당한 것 같아요. 짐은 그대로 있었으니까...."
그 말을 듣던 강승현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하고 똑같잖아?'
사고 난 마차, 건드리지 않은 짐.
그리고 갑작스럽게 쏟아진 비.
'역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비였나.'
강승현은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빗줄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그런데 저쪽에서 주인어른이 빤히 보고 계시는데요."
"어,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야채 수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강승현의 술수에 낚여 떠들던 종업원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저 친구는 오늘 농땡이 부렸다고 혼나겠네요."
"그걸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야?"
"가게 주인은 입이 무거워 보여서요."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야채 수프를 한 숟갈 떴다. 냄새에 걸맞게,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 주변 다 털어봐?"
"일단 상자부터 까봐야죠. 내용물을 보면 납치당한 사람을 짐작할 수 있으니."
"안 열리는데 어떻게 열려고?"
"제가 이걸 왜 열어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봉인된 물품이라면 유물 감정사한테 맡기면 된다.
"마침 하인드 마을에 '잘 아는' 녀석이 있어서요."
193. 하인드 복귀 1
"자자, 뭐 빠트린 거 없지?"
"없네요."
다음 날.
비가 그친 걸 확인한 강승현 일행은 곧장 하인드 마을로 출발했다.
밤보다 낮이 안전한 아즐 대륙 특성상, 마차는 아무 방해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혹시 방해가 있었다고 해도 말 골렘으로 밀어버리겠지.'
강승현은 마차를 끌던 직스를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몬스터를 찾는 걸 보면 마부 일이 적성에 맞는 모양이다.
-"힐러님, 마을 입구가 보입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한 숲길 너머로 민가와 굴뚝 연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까요?"
"일단 모험가 조합으로 가죠."
익숙한 건물들과 모험가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매우 친숙한 풍경.
드디어, 하인드 마을에 도착했다.
"한 일주일 만인가? 참 오랜만에 오는 기분이네요."
"체감상 1년은 지난 것 같은데 말이지."
"과장이 심하시네. 길어야 2주밖에 안 됐잖아요."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삼 웃기긴 하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온갖 일을 다 겪었으니까.'
창밖을 보고 있으니 요 며칠 동안 있었던 온갖 난장판들이 떠올랐다.
미친 흑마술사랑 싸우고, 마탑이 터지는 걸 목격하고, 도시가 개박살날 뻔한 걸 막아내고.
'옛날 생각나네. 그때도 이리저리 싸돌아다니느라 별의별 일에 엮이고 휘말리고 그랬는데....'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강승현 일행을 태운 마차는 모험가 조합에 도착했다.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별 말씀을요."
"직스 씨는 바로 트라코티로 돌아갈 건가요?"
"마차 정비도 해야 하고, 스승님 심부름도 있어서 하인드에 며칠 묵을 생각입니다."
직스는 방을 잡겠다며 한발 먼저 돌아갔다.
마을을 떠나서도 그의 노예 생활은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일을 맡기다니."
"하비가 그렇죠 뭐."
"젊은애가 고생이많아...."
두 사람은 가볍게 떠들며 조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헉!"
"저, 저 사람은 틀림없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조합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늘 빛나는 어그로를 펼쳐 모험가 조합의 평판을 합법적으로 깎는 악명 높은 모험가!'
'자칭 힐러 강승현이잖아!'
최근에는 리웬 지부장을 엿먹이고 보상을 털어간 일로 인해 인간재해, 합법빌런, 진짜광기 등등의 별명이 추가로 더 붙은 상태였다.
정작 당사자는 하인드 마을을 떠나 있어서 별명에 대한 건 몰랐지만 말이다.
'드디어 멀리 떠났나 싶었는데...'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
어찌됐건 직원들은 강승현이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나름 안심하고 있었으나,
"다들 잘 계셨죠? 여긴 언제 와도 열렬히 환영해줘서 좋네요."
"오, 오래간만이네요.... 잠깐 들르신 건가요?"
"아뇨? 다시 눌러살러 왔는데요."
강승현은 그 기대를 깔끔하게 짓밟으며 하인드 마을로 복귀했다.
'빌어먹으으으을!'
'이 마을에 꿀 발라놨냐고!'
'제발 좀 다른 곳에서 놀면 안 됩니까?'
'겨우겨우 평판 복구 중이란 말이다!'
직원들은 환장할 노릇이었으나,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평소에 무슨 짓을 했길래 조합 직원들이 저래?"
"글쎄요? 남들이 하는 대로만 했는데."
"진심이 1g도 담겨 있지 않은걸."
옆에 있던 김호정은 그저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승현과 모험가 조합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자, 다들 그렇게 얼굴 구기진 마세요. '오늘은' 댁들 괴롭히러 온 거 아니니까."
'오늘은...?'
'역시 이 녀석, 그동안 일부러...'
'그럼 또 무슨 일인데!'
조합 직원들은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오늘은 어쩐 일로...."
"르진페로이로 편지 한 장 보내려구요."
강승현은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냈다.
아즐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봉투였다.
"'르진페로이'라면 아즐 대륙 최북단...."
"대륙에서 가장 추운 마을이네요."
"북부 오염지대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기도 하고."
'무슨 괴상한 짓을 하려나 했는데... 그냥 편지만 보내는 건가?'
조합 직원들의 의아한 얼굴을 본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기 사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한테 보내고 싶습니다."
"친구...요?"
조합 직원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강승현과 편지를 번갈아봤다.
'이, 이 인간의 친구?'
'당연히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솔직히 궁금한데!'
마음 같아선 편지 내용을 훔쳐 읽고싶었으나.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이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필사적으로 억눌러 참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발송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강승현은 편지를 맡기고 자리를 떠났다.
"아, 편지 내용물이 궁금하면 읽어보셔도 됩니다."
"네?"
"제대로 갖다주기만 하면 뭐라고 안 할게요."
떠나기 전, 이런 말을 남기고서.
"이, 읽어봐도 된다고?"
"빨리 뜯어봐 빨리!"
"'또 무슨 이상한 꿍꿍이 벌이는 거 아냐?"
조합 직원들은 정신없이 봉투를 뜯어보았으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글자야?"
"몰라. 처음 보는 문장이라고!"
"젠장! 편지를 암호문으로 적어놨잖아!"
"속았어! 이 자식 일부러!"
편지에 적힌 내용은 아즐 대륙민들이 읽을 수 없는 '한글'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이래서 하인드 마을이 좋다니까. 바보들이 참 많아."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남을 놀리는구나."
"재밌잖아요."
강승현은 그 광경을 멀리서 구경하다 싱글벙글 웃으며 장소를 옮겼다.
"근데 편지는 누구한테 보낸 거야?"
"잘 아는 녀석한테요."
이제 강승현은 지구로 가는 방법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혼자 클리어하기엔 시간이 걸리고 귀찮은 방식이라 협력해줄 파티원, 동료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무나 뽑을 순 없지.'
강승현의 목표는 초고속으로 신성력을 모을 수 있도록 비싸고 좋은 성유물을 잔뜩 모아 때려 부수는 것.
'물론 신앙심 강한 아즐 대륙에서 성유물을 부순다는 건 미친 짓이거든.'
미친 짓을 벌이려면 미친놈이 필요한 법.
강승현은 이 일에 딱 맞는 미친놈을 알고 있었다.
"동료라...."
"김호정 씨 인맥 중에는 뭐 없나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식이 끊겼는걸."
"사실 별 기대 안 하긴 했어요."
강승현은 스태미나를 마시며 말했다.
"그럼 편지도 맡겼으니, 진짜 목적이나 해결하러 가죠."
"진짜 목적?"
"봉인된 상자를 감정하러 가야죠."
-'그 녀석을 못 본 지 대략 3주는 지난 거 같은데....'
하인드 마을 모험가 지부 유물감정소.
그곳의 유물 감정사, 피카로스 더 매지션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슬슬 속임수 써도 되지 않을까?'
그는 강승현의 유물을 바꿔치기하려다 걸려서 실컷 얻어맞은 뒤, 그의 명령대로 한 달간 근면 성실하게 손해까지 봐가면서 아이템 감정, 유물 감정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미친놈이 무섭긴 하지만, 어차피 그 녀석 빼고는 내 기술을 눈치챈 사람도 없고 말이지.'
한동안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성실하게 일했으나, 요 며칠 강승현이 통 모습을 보이지 않자 점점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였다.
'그래, 결심했어.'
한참 고민한 끝에, 피카로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 들어오는 손님부터는 하던 대로 하자! 이 정도면 반성도 많이 했고, 그 사이코 힐러만 조심하면 되잖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객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세... 으허헉!"
"그동안 잘 지내셨죠?"
"다, 당신은...!"
"접니다. 힐러 강승현."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강승현이었다.
피카로스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강 선생.... 사람을 인사로 쓰러트리는 거야?"
"딱히 아무 짓도 안 했거든요."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답하며 피카로스한테 다가갔다. 피카로스는 헐레벌떡 일어나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동안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어쩐 일이신지...."
"봉인된 아이템을 얻어서요."
"아하, 아이템 봉인 해제! 그건 또 제 전문이죠!"
피카로스는 강승현이 내민 상자를 받았다.
'이 물건, 상자 자체는 보잘것없는 싸구려 화물용 나무 상자지만... 이중삼중으로 봉인을 걸어둔 걸 보면 내용물은 "진짜"다!'
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유물 감정사인 만큼, 봉인된 물품을 보기만 해도 물품의 레어도를 판단할 수 있었다.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피가 묻은 것도 아니니까... 잘하면 들키지 않고 바꿔칠 수 있지 않을까?'
실컷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피카로스는 이번에도 밑장빼기를 시도하려 했으나.
"아참, 제가 그동안 새로운 스킬을 하나 배워서요."
"새, 새로운 스킬?"
"흙을 뼈로 만드는 스킬이에요. 이제 뼈를 잃어버리거나 가루가 된 환자도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게 됐답니다. 보여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감정소 화분에서 뼈를 뽑아내는 모습을 본 뒤.
'들키면, 뒈지겠구나.'
다시는 밑장빼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걸리면 손목이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맡길게요."
피카로스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이거 꽤 정석적인 봉인이네요."
"못 푸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던전이나 몬스터한테서 발견 되는 게 아닌...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보유하는 인공적인 봉인품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라는 뜻인...."
"한마디로 도난품일 것 같다. 이런 뜻이죠?"
"저, 저희 유물 감정소는 고객님이 맡긴 아이템의 출처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선생, 그냥 솔직하게 '누가 잃어버린 물건이라 주인 찾아주려는 겁니다' 하면 되잖아?"
"말해줘도 안 믿을걸요."
"음, 솔직히 그건 그래."
"여, 열었습니다."
김호정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피카로스가 상자의 봉인을 풀었다.
"안에 뭐가 들어 있죠?"
"이런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상자 안에 담긴 건 각종 서류와 마력 포션, 그리고 보랏빛의 구슬과 깃털 펜이 담겨 있었다.
"서, 선생 이것 좀 봐!"
"이건...."
그리고 서류에는 [마법협회 설립 허가증서]라고 적혀 있었다.
"상자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네요."
194. 하인드 복귀 2
상자 속에서 나온 아이템은 죄다 마법협회 관련 물품들. 그것도 매우 값비싼 것들.
즉, 이 상자의 주인은 마법협회 소속 고위 마법사였다.
"역시 마차 근처에서 주운 무기 파편도 이 사람 물건이었네요."
"마법협회면... 그건가?"
"그거죠."
며칠 전 강승현은 카마르 영주한테 마법협회 건설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협회 측에서 사전 조사를 위해 사람을 파견한 모양이다.
"영주 녀석 해냈구나! 잘됐네!"
"문제는, 제가 그 녀석을 찾지 못하면 마법협회 건설은 물 건너간다는 건데...."
마법협회 성격상, 파견 나간 조사관이 실종된 마을에 협회 지부를 건설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조사관을 찾아내야 했다.
"수고비가 문제가 아니었네."
"그러게요."
현재 강승현은 성유물을 모아다 파괴한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교단과 모험가 조합의 어그로를 탱킹해줄 존재가 필요했다.
'그 역할에 딱 들어맞는 게 마법협회라서 말이지.'
마법사는 성유물 의존도가 낮은 직업이기도 하고, 연구를 위해서라면 성유물을 혹사시키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오히려 잘된 일이야.'
이번 일을 계기로 마법협회에 빚을 만들어두면 모험가 조합과 교단을 더 편하게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친구를 찾아내야겠네요."
"그래 그래, 아즐 대륙은 납치된 사람이 좋은 꼴 못 보는 동네잖아."
"문제는 어디 있을지 감이 안 온다는 점인데."
끌려간 사람의 신원은 파악했다.
하지만 어쩌다 습격당한 건지, 누구에게 습격당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마법협회랑 사이 안 좋은 애들 아냐? 교단이라던가."
"그건 아닐 거예요."
마법협회나 교단이나 새로운 지부를 건설할 때 적대 세력의 견제를 받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사전 조사를 나갈 땐 지금처럼 철저하게 신분을 숨겨서 이동하는 게 기본이라, 교단은 물론이고 모험가 조합조차 모른다.
"마차가 습격당한 건 다른 이유일 거예요."
하필 재수 없게 그 마차에 마법협회 조사관이 타고 있던 것뿐, 조사관을 노리는 게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참 이상하네. 마법협회 소속 마법사면 나름 실력이 있을 거 아냐? 근데 왜 털린 거지?"
"이유야 많죠."
기습당했거나, 싸울 상태가 아니었거나.
아니면 상대의 실력이 무척 뛰어났거나.
혹은 상대의 쪽수가 너무 많아서 발렸다거나.
"마법사들이 강하긴 해도 흑마술사하곤 상성이 안 맞고, 안티 매지션 같은 카운터 직업도 많아서요."
협회 소속 마법사를 제압한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렇지만 현장에 스킬을 사용한 흔적도 없는 건 이상하지?"
습격당한 마차 주위는 정말 단순한 사고로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관찰의 눈]에도 걸리지 않았다는 건 의도적으로 스킬 잔해를 지웠다는 소리다.
'역시 그 비가 수상해.'
강승현은 어제 쏟아진 비를 떠올렸다.
마구간 종업원의 말에 의하면 지난번에도 지금처럼 비가 쏟아졌고, 마차 사고가 벌어졌다고 했다.
'비를 내리게 해서 흔적을 지우는 스킬일지도 모르겠어.'
기상현상 관련 스킬은 고난이도 기술에 속한다.
단순히 물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다.
"일단 비 뿌리는 놈부터 찾아봐야겠네요."
"비 뿌리는 놈? 어디서 찾아?"
"일단 모험가 조합이나...."
"저, 저기 힐러님?"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뻘쭘하게 껴있던 피카로스가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누굴 찾으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러면서 명함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뭐든 찾아드립니다 - 미스터 알렉]
자세히 보니 명함도 아니고 그냥 종이에 연필로 휘갈겨 쓴 낙서였다.
"전혀 믿음이 안 가는데요."
"아, 이래 봬도 이 친구가 사람 찾는 일은 진짜 잘하거든요! 맡겨보시면 알 겁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소개라서."
"이, 이제 손 씻었습니다! 나쁜 짓 안 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구요!"
피카로스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강승현은 같잖다는 얼굴로 놈을 바라보았다.
'썩 믿음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이 녀석이 재능있는 유물 감정사라는 건 사실이지.'
그런 인간의 인맥인 만큼, 인품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할 것이다.
'하긴, 또 사기 치면 나한테 뒈질 텐데 살고 싶으면 그런 짓하지 않겠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잡한 명함을 받았다.
-"명함에 적힌 주소가...."
"여기네요."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하인드 마을 골목길.
명함에 적힌 주소를 따라 그곳에 펼쳐진 천막을 찾았으나.
[자리 비움]
[부재중]
"뭐야, 없네?"
천막에는 이런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일 때문에 나간 건가?"
"일단 쪽지만 놔두고 숙소로 돌아가죠."
강승현은 수첩에 간단한 메모를 남긴 뒤, 표지판에 붙이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머, 강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게 얼마만이에요!"
여관으로 돌아가자 종업원 줄리아가 무척 반가워하며 강승현을 끌어안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세요. 많이 피곤하시죠?"
"줄리아 씨 식사가 그리웠어요."
고작 2주 안 본 거 가지고 너무 야단법석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험가는 죽거나 실종되는 이런저런 이유로 소식이 끊길 일이 많아서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걱정하는 게 정상이다.
"두 분이 묵는 방은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청소했으니 오늘 당장 쓰셔도 돼요!"
"한 달치 방값을 미리 내고 간 보람이 있구만."
"그럼 가볍게 식사부터 할까요."
식사를 주문한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직스도 여기 방 잡았을라나?"
"마차는 마구간에 주차해놨을 거고, 우리가 여기 묵는다고 했으니 숙박은 여기서 할 확률이 높죠."
"응? 저거 직스 아냐?"
그때, 김호정이 테이블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을 보니 직스가 어떤 남자와 앉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스는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사이 친구를 사귀었구나. 굉장한데?"
"저게 어딜 봐서 친구를 보는 눈이냐구요."
강승현은 직스한테 다가갔다.
지친 얼굴로 앉아 있던 직스는 강승현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셨어요?"
"직스 씨, 그 사람은 누굽니까?"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 모르는 사람하고 밥 먹고 있는 건데요?"
"혼자 밥 먹는 게 슬퍼 보인다고, 같이 먹어주겠다면서 멋대로 앉더라구요."
합석은 아즐 대륙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무턱대고 앉는 일은 드물지만.
"그냥 자기가 혼자 먹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까지 계속 떠들었거든요."
직스가 초췌해진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수가 적은 녀석인데, 오늘 처음 본 녀석이 쉬지도 않고 말을 걸었으니까.
"그리고 술을 들이켜더니 잠들었죠."
실제로 맞은편에 앉은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는 엎드려 자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 마시는 인간답다.
"그래서 일어날 때까지 지켜봐야 할지 고민 중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버리세요."
"그건 좀 그렇지 않나요."
"아니면 일행들한테 연락하시든가."
마을 어딘가에 이 남자의 동료가 있을 것이다. 차원이동자가 아니고서야 보통 1인 솔플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그 방법밖에 없겠네요."
"가서 모험가 조합에 연락해 둘게요. 이 남자, 이름은 어떻게 되죠?"
"음, 알렉이라고 했어요."
"알렉?"
"자기 본명은 이 동네 분위기랑 안 어울린다나 뭐라나.... 그래서 직접 지었대요."
강승현은 슬쩍 손에 든 명함을 살폈다.
명함에는 분명 [미스터 알렉]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려 했으나.
"잘 나가는 탐정이라면서 이런 걸 줬어요."
직스가 똑같은 명함을 내밀었다.
종이에 대충 휘갈긴 낙서 명함 말이다.
'이 자식이었냐고.'
즉, 지금 자신이 찾고 있는 '알렉'이라는 놈은 엎어져 자고 있는 이 술주정뱅이였다.
"직스 씨, 그 양반 좀 깨워 주실래요?"
"네?"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알렉 씨, 일어나세요."
"으음.... 벌써 계산할 시간인가?"
직스가 알렉을 흔들어 깨우자, 알렉은 하품을 크게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아니라 일 때문에 왔습니다."
"으으음? 나한테 무슨 볼일...?"
누가 봐도 술이 덜 깬 사람이다.
몸을 일으킨 그는 찬물을 들이켰다.
"당신, 사람 잘 찾는다면서요? 소문 듣고 왔으니까 누구 좀 찾아주시죠."
"사람? 흐아암.... 그럼 술값 좀 내줘."
"좋아요. 의뢰비는 그걸로 내죠."
강승현은 고민 없이 돈주머니를 던졌다.
위즈멜 신전에서 보석을 잔뜩 털어온 덕에 돈 부족할 일은 없었으니까.
"쿨해서 좋구만, 형씨. 그래서 누굴 찾는데?"
"그건...."
마음 같아선 사라진 마법협회 조사관의 행방을 의뢰하고 싶지만, 아직 마법협회 건설 관련 정보는 숨겨야 했다.
'모험가 조합이나 교단이 냄새 맡고 달려들면 귀찮아져.'
지금 마법협회 조사관에 대해 아는 건 강승현 일행과 유물 감정사뿐.
그쪽은 철저하게 입막음해놨으니 살고 싶다면 퍼트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마차를 습격한 범인들에 대해 조사해 보자.'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입을 열었다.
"특정 스킬만 가진 사람들도 찾아낼 수 있습니까?"
"아~ 혹시 대륙 전체를 뒤져야 해? 그럼 술값 내주는 걸로 좀 부족한데."
"하인드 마을 주변이면 됩니다."
마차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해간 걸 보면, 놈들의 본거지는 이 주변 어딘가일 확률이 높다.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뭐, 그 정도는 쉽지."
"제가 찾는 건 비를 내리게 할 줄 아는 녀석입니다. 스킬이든 아이템이든 상관없으니, 관련 능력을 가진 놈을 찾아주세요."
"비? 특이한 걸 찾으시네?"
특정 스킬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그리 놀랍지 않지만, 기우제 능력자를 찾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
"그래서 못 찾겠다고?"
"나야 뭐, 돈만 내주면 뭐든...."
알렉은 히죽거리며 손을 쥐었다.
"다 찾아드리지."
그리고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종이와 나이프, 잉크 펜이 나타났다.
'어, 이거?'
강승현은 순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밝은 빛과 함께 특정 물체를 어딘가에서 소환하는 능력.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내는 연출인데?'
195. 동향 사람
'이 자식... 차원이동자였나?'
아즐 대륙민은 인벤토리를 쓸 수 없다.
이 남자, 알렉은 틀림없는 차원이동자다.
'보통 차원이동자가 자기 신분 숨기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강승현은 알렉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렉은 꺼낸 펜을 가볍게 돌리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즐 대륙민만 눈치채지 못하는 거지. 특유의 분위기나 패션, 말투, 사고방식 등등으로 차원이동자끼리는 대체로 알아볼 수 있거든.'
예를 들어 김호정은 탱커 주제에 슬리퍼를 신고 다녀서, 차원이동자는 백이면 백 그가 차원이동자라는 걸 알아본다.
'하지만 이 자식은 정말 완벽하게 감춰서, 눈치 못 챌 뻔했어.'
알렉한테선 차원이동자 특유의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 강승현이 차원이동자라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
거듭 말하지만 아즐 대륙 특성상 차원이동자가 자기 신분을 숨기는 건 놀랍지 않다.
하지만 차원이동자끼리 마주친 상황에서 신분을 계속 숨기겠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고민 없이 석궁을 꺼내 알렉의 머리를 겨눴다.
"히...힐러님?"
"형씨, 마음이 급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재촉한다고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서."
"좀 서운하네요."
크게 당황한 직스와 달리, 알렉은 태연한 얼굴로 펜을 돌릴 뿐이었다.
강승현은 석궁을 겨눈 채 입을 열었다.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이 내색도 안 하시는 게."
그 순간, 알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왜냐하면 '타지에서 만난 동향 사람'이라는 건 차원이동자들끼리 마주쳤을 때 쓰는 은어였기 때문이다.
"...?"
직스는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알렉은 돌리던 펜을 멈추고 강승현을 올려다봤다.
테이블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형씨, 보통내기가 아니네?"
"...."
"내가 민증 가진 거 눈치챈 사람, 한 명도 없었는데."
알렉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민증, 주민등록증을 가졌다는 말도 차원이동자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다.
당연히 한국인, 차원이동자를 뜻하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람."
"어쩌다 보니."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강승현은 알렉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아까 반사적으로 발동한 [관찰의 눈]이 아니었다면, 녀석이 인벤토리를 썼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숨긴 이유가 뭡니까?"
"이쪽도 사정이 있어서."
알렉은 직스 쪽으로 시선을 슬쩍 옮겼다.
영문도 모른 채 둘 사이에 낀 직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
"...."
그렇게 한참 동안, 세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도대체 뭔데.'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인 두 사람과, 둘 사이에 매우 불편한 얼굴로 껴있는 직스까지.
이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선생, 거기서 같이 밥 먹게?"
그 순간 강승현과 알렉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응? 왜 그렇게 봐?"
"...."
강승현이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자리에 앉아 있던 김호정이 이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엑, 뭐야? 무슨 일 있었어?"
김호정은 강승현이 꺼낸 석궁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점심시간에 꺼낼 만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강승현이 입을 열려는 순간,
"어? 어?"
다가온 김호정을 본 알렉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 형?"
"응?"
"김 형 맞지? 김 형 맞네!"
그리고 무척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김호정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김호정 씨,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어? 글쎄다? 누구신지?"
"알렉이라는데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
김호정은 알렉을 전혀 못 알아보는 듯했다.
"기억 안 나? 우리 전에 타릭 마을에서...."
"타릭 마을? 아, 아! 너, 너! 그! 뭐더라! 그래! 오랜만이다야!"
아무리 봐도 전혀 기억 못 한 것 같았지만, 김호정은 반갑게 알렉의 손을 잡았다.
"...알렉 씨, 김호정 씨랑 아는 사입니까?"
"옛 동료지."
알렉은 다시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싸늘한 분위기는 싹 사라진 상태였다.
"전에 같이 파티했거든.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한... 3년 전?"
"아, 이제 생각났어. 너 철현이 맞지?"
김호정은 그제서야 떠올렸는지 무척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기억하시네."
녀석은 본명은 마철현.
역시 알렉이랑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었다.
"완전히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너 머리, 원래는 짧고 까맸잖아."
"당연히 염색약 사서 바꿨지."
"아무리 그래도 흰머리는 좀 아니지 않아?"
"흰색 아니고 구름색이라구?"
"구름 하얗잖아!"
두 사람이 반갑게 잡담을 나누는 동안 강승현은 의자에 앉았다.
"저... 뭔가 사정이 복잡해 보입니다."
"이래저래 그렇게 됐네요."
"아무튼, 싸울 필요는 없는 거죠?"
"그렇죠."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이 석궁 소환을 해제하자 직스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식당에서 밥 먹다 싸움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까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아, 우리는 이쪽에서 먹을게!"
때마침 줄리아가 음식을 가지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자자,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구!"
그렇게 강승현 일행은 자연스럽게 직스 테이블에 합류하게 됐다.
"이쪽은 강 선생이야. 지금 내 파티원이지."
"힐러 강승현입니다. 생각해 보니 자기소개도 안 하고 대뜸 의뢰부터 맡겼네요."
"이쪽 업계에선 자주 있는 일이지."
알렉은 히죽거리며 잔에 술을 따랐다.
"본명은 마철현이긴 한데, 줄여서 편하게 알렉이라고 불러."
"엑? 네가 미스터 알렉이야?"
"명함 하나 줄까?"
"됐어, 이미 받았거든...."
그제야 김호정은 자신이 찾던 탐정이 옛 동료라는 걸 깨달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뭘 어떻게 줄이면 마철현이 알렉이 되는 걸까.'
강승현은 술은 밀어둔 채 입을 열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으니 더 캐묻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호ㄱ... 김호정 씨랑 알고 지낸 사이인 거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으니."
"피차일반~ 그쪽도 김 형 친구라면 나쁜 놈은 아닐 거 아냐? 친하게 지내자구!"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서로가 김호정의 지인 사이라는 걸 깨닫고 싸움을 멈췄다.
김호정을 잘 아는 차원이동자 사이에서 김호정의 용도는 아무리 못 믿게 생긴 놈이라도,
'이 인간과 아는 사이라면 극악무도한 쓰레기는 아니겠구나.'
하는 일종의 인간성 판독기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놀랐어. 설마 아직까지 살아 있었을 줄이야."
"아니, 다짜고짜 심한 말을 하네."
"그야... 김 형 같은 사람은 진작 죽었을 거라 생각했거든? 초창기에 파티 짠 애들은 몇 놈 빼고 다 죽어서."
"아하하... 그러게. 어쩌다 보니 여태 살아남았네."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 그보다! 우리가 찾는 게 있는데...."
"그렇죠.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오랜만에 만난 동료와의 잡담도 중요하지만, 그건 강승현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마차를 습격한 놈들을 찾는 게 우선이니까 말이지.'
강승현은 술에 스태미나 포션을 섞으며 말했다.
"의뢰부터 해결해주세요."
"알았어, 알았다구."
알렉은 꺼낸 종이를 테이블에 펼치고 펜을 가볍게 돌렸다.
"애초에 바로 찾으려 했는데 말이지."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차원이동자라면 실력은 믿어도 되겠지.'
뭔가를 찾는 일에 특화된 모험가.
쓰레기 유물 감정사가 극찬할 정도면 상당한 실력자일 것이다.
"흐으음?"
그때, 옆에 있던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왜 그래요?"
"아니.... 저 녀석 나랑 파티 짰을 땐 탐정이 아니었거든. 그때 역할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탐정이 아니라구요?"
"응. 분명 아니었어. 그사이 탐정 스킬이라도 획득한 건가?"
김호정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알렉을 바라보았다. 알렉은 여전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헛!"
그때였다.
눈을 뜬 알렉이 펜을 들고 종이에 뭔가를 빠른 속도로 끄적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처음에는 무슨 낙서를 하는 건가 했더니,
"어?"
"이거 하인드 마을이지?"
"그러게요."
자세히 보자 하인드 마을 주변을 그린 듯한, 정확하게는 디테일은 포기하고 간단하게 그려낸 약도였다.
"이건 왜 그린 겁니까?"
샤악!
알렉은 대답 대신 꺼내둔 나이프로 자신의 손을 베어냈다.
"아 정말...."
앞에서 밥 먹던 직스는 오만상을 썼다.
확실히 식당에서 볼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촤아악!
하지만 알렉은 신경도 쓰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손을 지도에 콱 찍었다.
"...."
"아~ 답 나왔네. 여기가 수상하구만!"
그러면서 태연한 얼굴로 피 묻은 지도를 가리켰다.
"이쪽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져."
"저기요."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내 이름은 미스터 알렉. 탐정입니다."
"야, 웃기지 마! 세상에 이딴 식으로 수사하는 탐정이 어딨냐구?"
옆에 있던 김호정도 얼척없다는 얼굴로 알렉의 멱살을 잡았다.
"아 이제 생각났다! 너 혈술사잖아?"
"...혈술사라고?"
혈술사는 피를 이용해 싸우는 직업이다.
절대 탐정 같은 스킬을 가질 직업이 아니다.
"그건 메인 직업이고 사이드 직업은 '포춘 텔러'라구."
"그거 점쟁이잖아! 아무튼 탐정 아니잖아!"
그렇다.
알렉은 추리력으로 사람을 찾는 탐정이 아니라 점을 쳐서 사람을 찾는 점쟁이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래도 성능은 확실하다구?"
알렉은 히죽거리며 지도를 가리켰다.
녀석이 주장하기를, 지도에 묻은 손바닥 자국 형태의 새빨간 피가 강승현이 찾는 사람의 행방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이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탐정인 척한다니까. 의뢰인들이 내 능력을 안 믿잖아."
"너 같으면 믿겠냐?"
"뭐, 사실 믿든 안 믿든 아무래도 좋아."
알렉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이게 내 방식이고, 나는 원래 이런 식으로 일하거든. 형씨가 맡긴 의뢰를 어떻게든 해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탐정 신분으로 의뢰를 받고, 점을 쳐서 위치를 알아낸 다음, 직접 찾아가 이런저런 증거를 수집해 의뢰인에게 제시하는 게 알렉의 방식이라고 한다.
"점쟁이나 탐정이나 하는 일은 같다구?"
"그냥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길게 늘어놓는...."
어이없어하는 김호정과 달리,
"듣고 보니 그렇네요."
강승현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야매 방식으로 힐러 일을 하는 것처럼, 이 남자도 야매 방식으로 탐정 일을 하는 것뿐이다.
"수긍하는 거야?"
"결과만 낸다면 사기가 아니잖아요. 저 친구는 평범한 탐정이 아니라 야매 탐정인 거죠."
"이왕이면 영매 탐정이라고 불러달라구."
알렉이 미소를 지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강승현이 보기엔 거기서 거기지만 알렉 말로는 피를 이용해 위치를 점쳤다고.
"자, 자~ 점괘가 가리키는 곳은 총 3군데."
장소는 라티카 여관, 시계탑, 남동쪽 출구.
일단 이 세 곳에는 [비를 부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한다.
"여기서 출구 쪽은 기운이 무난하네. 시계탑은 좀 빡세다는 느낌? 가면 고생 좀 할걸?"
"그런가요."
"하지만 여관은 위험해."
알렉은 피 묻은 손가락으로 여관을 가리켰다.
손가락에서 떨어진 핏물이 지도를 새빨갛게 물들여갔다.
"점괘가 엄청 불길하게 나왔어."
"불길?"
"여기로 가면 누구 하나는 분명 죽을걸? 내가 당신이라면 이쪽은 절대 안 가."
"죽는다고?"
"자, 선택하셔."
알렉은 피투성이가 된 지도를 내밀었다.
하나는 무난한 길, 하나는 고생하는 길.
마지막 하나는 죽음이 도사린 길.
"형씨는 어디로 갈 거야?"
196. 수상한 손님 1
"고민할 것도 없죠."
탁!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지도를 가리켰다.
펑범하게 생각하면 안전하고 무난한 길, 하인드 마을 남동쪽 출구로 향하는 게 맞지만.
"저는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서, 선생? 진심이야?"
옆에 있던 김호정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강승현이 가리킨 지점은,
"가장 위험한 라티카 여관으로."
죽음이 도사린 길, 라티카 여관이었기 때문이다.
"히, 힐러님...."
"오, 여관 쪽으로 가시겠다? 내가 분명 친절하게 경고까지 날려줬는데 말이지."
직스와 알렉도 각각 놀란 얼굴, 히죽거리는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죽을 수도 있다잖아? 그런데 거기로 가겠다고?"
"네."
김호정은 크게 당황했으나,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가? 역시 내 점괘를 안 믿는 건가?"
"아뇨. 믿습니다."
"믿는다고?"
"저는 알렉 씨 점을 믿기 때문에 여관을 고른 겁니다."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지도를 바라보았다.
라티카 여관 지점은 핏물이 잔뜩 튀고 심하게 번져서 앞으로 벌어질 피바다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여관으로 가면 무조건 죽는다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100% 확률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소리잖아요? 당연히 가야죠."
지금 강승현이 찾는 존재는 마차를 습격하고 승객을 납치한 납치범 집단의 일원이다.
이런 놈들을 추적하는 동안 아무 일 없을 리가 없으니, 가장 위험한 길로 향하는 게 정답이다.
"...형씨, 묫자리는 피하는 게 상식 아냐?"
"맞아요. 그런 이유라면 시계탑을 고르는 게...."
"이게 제 묫자리라면 그렇겠죠."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여기서 죽는 게 저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
아까 알렉은 누군가 죽는다고 했을 뿐, 그게 강승현이라고 한 적은 없다.
"거길 다른 사람의 묫자리로 만들어주면 제가 죽을 일은 없겠죠."
"그, 그렇군요. 힐러님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점을 친 거지, 자신의 운명을 점친 게 아니니까...."
"이제 뭔 소린지 알겠어."
언뜻 들으면 정말 사이코 같은 대사지만, 자리에 있던 직스와 김호정은 강승현의 의도를 깨달았다.
"마차 납치범들... 분명 죽겠네요."
"그 친구들의 명복을 빌어주자구."
여관으로 가서 마차 납치범들을 찾고.
그놈들을 박살 낼 생각이라고.
"그렇게 하면 점괘상 아무 문제 없죠?"
"형씨 진짜 웃긴데?"
이야기를 듣던 알렉이 실컷 웃어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점괘는 뭔갈 찾는 쪽으론 신통방통해도, 운명이나 미래를 점칠 땐 뚜렷하지가 않더라구?"
뛰어난 점술가라면 여관 루트를 탔을 때 누가 죽을 건지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은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 흔적을 찾는데 특화된 포춘 텔러였기에 누가 죽는 건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근데 어차피 누가 죽을 거라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묻겠다니. 발상이 아주 크레이지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치만... 마음에 들어."
알렉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술병은 인벤토리로 집어넣고, 대신 가죽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난 죽을 자리는 절대 안 가는데... 형씨는 꽤 터프하구만?"
"겁쟁이처럼 숨어다니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원래는 이쯤에서 발 빼는 게 맞지만, 뭔가 재밌을 것 같으니 협력할게."
"오, 도와주려고? 잘됐다!"
김호정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대로 둘이서 출발하는 건 생각만 해도 너무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굳이 거절할 필욘 없겠네요. 잘 부탁합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싸움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라서."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강승현은 김호정을 힐끔 쳐다보았다.
"좋아! 이걸로 4인 팟이 완성됐어!"
"4인 팟? 혹시 저도 가야 하는 겁니까?"
김호정이 기쁜 얼굴로 소리치자 직스는 크게 당황했다.
이대로 세 사람만 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우린 동료잖아?"
"김호정 님, 전 모험가가 아니라구요."
"하핫, 자넬 따돌릴 리가 없잖아? 함께가자구!"
"제발 따돌려 주세요."
"사실 안 오셔도 상관은 없지만, 3명보단 4명이 가는 게 밸런스 있잖아요."
"힐러님까지 그러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결국, 직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을을 구원해준 구세주의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 가자구!"
그리하여 4인팟이 된 강승현 일행은 라티카 여관으로 향했다.
-라티카 여관은 강승현 일행이 숙박 중인 비츠 폴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느긋하고 조용한 비츠폴 여관과 달리 사람이 바글거려서 늘 시끌벅적한 곳이다.
"생각보다 북적거리네요."
"아이고, 이 많은 사람들을 언제 다 뒤져?"
"점괘대로라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죠."
"그건 그렇네! 그냥 가만히 있자."
"점괘가 맞다면 말이지만요."
사실 강승현은 아까는 믿는다고 했지만, 알렉의 점을 맹신하지는 않았다.
강승현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점괘가 빗나가면 이놈을 족치면 돼.'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가 100% 믿는 건 자기 자신뿐이다.
"어서 오세요? 숙박인가요? 아니면 식사?"
네 사람이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자, 라티카 여관 종업원이 다가왔다.
"일단 식사라도 주문하죠."
"엥? 우리 방금 밥 먹고 왔잖아."
"가게에 들어왔으니 뭐라도 시켜야죠."
직스가 종업원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서 있으면 쫓아낼 것이다.
"그치만 나 아직 배부른데."
"도시락으로 주문하면 됩니다."
"오."
"도시락 포장이군요?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습니까?"
"혹시 추천해주실 게 있습니까?"
"오늘 추천 메뉴는...."
두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종업원의 시선을 돌린 사이, 강승현은 가게 내부를 살피러 갔다.
'종업원은 두 사람한테 맡기면 될 것 같군.'
가게 손님들은 신나게 떠드느라, 강승현이 돌아다니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조사해봐야....'
쿠당탕!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가게 구석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해서 그쪽을 돌아봤더니,
"길 가다 부딪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이게, 지금 쳤냐?"
취객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대낮부터 싸움 났네.'
물론 이런 광경은 아즐 대륙에서 아주 흔하기 때문에, 신경 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야야, 누가 이길지 술값내기나 할까?"
"좋지~!"
"난 빨간 셔츠가 이긴다에 건다!"
오히려 그 싸움을 술안주 삼아 재밌게 구경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신나셨구만. 왜 낮부터 일은 안 하고 술만 퍼마시고 있는 건데.'
어차피 이런 일은 너무 흔해서 단순 주먹다짐이라면 딱히 문제없고, 스킬을 쓰거나 싸움이 너무 격해진다 싶으면 경비병이나 다른 모험가가 제지한다.
그러니 이들 입장에선 취객 싸움은 가게에서 볼 수 있는 이벤트일 뿐이다.
'어떤 식당에선 일부러 돈 주고 배우를 고용해 싸움판을 벌인다는 이야기도 있지.... TV가 없어서 그런가.'
강승현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살폈다.
역시 여관 손님들은 대부분 싸움을 구경하거나,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 뿐이었다.
'...응?'
그런데 그중.
딱 한 명, 이상한 손님이 있었다.
'뭐지 저 녀석....'
녀석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옆에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구경하지도 않는 데다, 심지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으로 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사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데.'
그를 보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강승현은 그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망토 후드에, 평범한 셔츠와 바지, 평범한 가죽 신발....'
여기까지만 보면 딱히 이상할 게 없는 흔해 빠진 모험가 세트 복장이었으나.
"...!"
멀어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녀석의 무기, 마법사용 스태프는 의복과 어울리지 않게 무척 화려했다.
그래서 아까부터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보석으로 꾸며진 사치스러운 스태프!'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습격당한 마차에서 발견한 보석 장식이었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황급히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자수정 조각품]
[스태프에서 떨어진 장식이다.]
-[큰 충격을 받아 장식된 보석이 부서졌다.]
예상대로, 강승현이 발견한 보석은 녀석이 가진 스태프에서 떨어져나온 장식이었다.
'결국, 저 녀석이 저 스태프를 들고 있다는 건....'
저 녀석이 조사관을 습격해 스태프를 빼앗아간 범인이라는 소리다.
'드디어 찾았네.'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초조하게 문을 살피던 남자는,
"뭐, 뭐야? 뭘 봐?"
"옷은 대충대충 입고 다니는 인간이 무기는 엄청 사치스럽네요."
"이게 죽고 싶냐? 저리 꺼져!"
갑자기 다가온 강승현을 보고 무척 당황한 듯 스태프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탁!
그러자 강승현은 놈이 휘두른 스태프를 낚아챘다.
"이, 이거 안 놔?"
"어디, 이런 건 얼마쯤 하려나?"
이런 식으로 소란을 일으켰더니,
"야, 저기도 싸움 났나 보다."
"술값 내기 리턴즈!"
"싸움 구경 좋지!"
사방에서 두 사람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 훔친 무기 가격을 알 리가 없겠지만."
"...!"
당황한 남자를 보던 강승현은 테이블에 보석 장식을 내던졌다.
누가 봐도 이 스태프에서 떨어져나온 보석이었다.
"어제 잘 가던 마차를 공격한 게 그쪽 맞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듣고 싶은데...."
"제, 제길!"
남자는 크게 당황한 듯 소리치더니, 스태프에 마력을 주입했다.
"...!"
팟!
강승현은 재빨리 스태프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이목을 끌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지!"
그와 함께, 녀석의 스태프에서 강력한 마력이 터져나왔다.
휘이이이이!
터져나온 마력은 거대한 돌풍으로 변해 가게 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미친 새끼! 여기서 스킬을 쓴다고?"
심지어 사람 한둘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는 상급 마법이었다.
"당장 모험가 조합에 연락해!"
콰가가가각!
가게 안에서 발생한 토네이도는 벽과 바닥을 마구 으스러트리며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크아악!"
"막아! 가게가 무너진다고!"
"됐으니까 도망쳐!"
여관 내부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손님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녀석은 가게 밖으로 도망쳤다.
"이런 개판을 벌이고 가다니."
"가, 강 선생! 어쩌지? 쫓아갈까?"
"일단 여관부터 수습하죠. 이러다 무너지겠네요."
"그럼 저 녀석은 그냥 보내줘야 하나...."
"물론."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소환하더니,
"그냥 보내줄 순 없죠."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197. 수상한 손님 2
파박!
"크, 아아악!"
날아간 화살이 녀석의 발목을 꿰뚫었다.
녀석은 고통 때문에 잠시 주춤거리긴 했으나,
"이, 이딴 것쯤은...!"
이를 악물어 고통을 참고 밖으로 도망쳤다.
마법사치고는 정말 지독한 놈이었다.
"와, 끈질기네.... 저 상태로 도망치다니."
"저 정도면 충분해요. 나머진 그 친구가 알아서 해줄 거고."
"그 친구?"
"우리는 저거나 처리하죠."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화아아아아!!
지금 여관은 녀석이 남기고 간 돌풍 때문에 엉망진창이다.
콰당탕탕!
"으아악!"
"누가 좀 도와주세요!"
돌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는 테이블이나 의자, 부서진 건물 잔해에 깔리거나 공격당하는 손님들까지.
"아비규환이 따로 없구만."
김호정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내가 먼저야!"
"저리 비키라고!"
"워아아아악!"
그 와중에 출입구 쪽은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고 싸우는 탓에 난장판이 따로 없는 상황이다.
"일단 길부터 뚫어 볼까!"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겠습니다."
콰직!
콰각!!!
앞으로 뛰쳐나간 직스와 김호정이 테이블과 의자를 박살 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었다.
"뭐, 뭐하는 거에요?"
"위험해요! 당신들도 어서 도망치세요!"
도망치던 손님 몇몇이 그 광경을 보고 크게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탓!
하지만 강승현은 그 말을 무시하고, 돌풍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그쪽이 아니에요!"
당황한 손님 하나가 강승현을 쫓아가려 했으나.
"어...?"
곧, 놀란 얼굴로 자리에 멈춰 섰다.
파바박!!
돌풍 가까이 접근한 강승현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몰아치는 바람에 덤벼드는 건 바보짓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아즐 대륙의 바람은 강한 힘으로 박살 낼 수 있다.
'특히, 지금처럼 마법사가 만들어낸 가짜 바람이라면 더더욱.'
아즐 대륙의 각종 기상 현상은 대부분 마력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스킬을 사용해 공격하면 깃든 마력이 소멸하면서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몰아치는 돌풍도 이론상, 쉬지 않고 스킬을 퍼부으면 소멸한다.
'문제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그 상태로 건물 벽과 바닥을 살펴보자,
[큰 공격을 받고 부서졌다.]
[앞으로 3분 정도밖에 못 버틸 것 같다.]
이러한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돌풍이 소멸하는 것보다 여관이 무너지는 게 더 빠를 판이야.'
그러니 정공법은 불가능한 상황.
'지금 같은 상황에선 편법을 쓸 수밖에.'
모든 바람 마법에는 '태풍의 눈'이라는 기관이 존재한다. 이는 골렘이나 슬라임의 핵과 마찬가지로 바람 마법을 이루는 근원이자 약점이다.
하지만 골렘의 핵과 달리, 태풍의 눈을 보기 위해선 별도의 마법이나 아이템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두들겨 패서 제압하지만....
파아아!
[태풍의 눈]
'내 눈에는 훤히 보이니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돌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가진 [관찰의 눈]은 '태풍의 눈' 정도는 쉽게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살 화살★]
파바바박!!!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4개의 검은 화살이 돌풍을 꿰뚫었다.
팍! 파밧!
돌풍을 꿰뚫고 날아간 화살들은, 돌풍 중앙에서 빛나는 작은 빛, '태풍의 눈'을 저격했다.
파아아아!!
'태풍의 눈'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순간,
파스스스스....
이어서 매섭게 몰아치던 돌풍이 단숨에 힘을 잃고 소멸했다.
"이게 어떻게 된...."
"도, 돌풍이 소멸했어!"
"저렇게 거대한 바람을 고작 화살 4개로?"
자리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걸 본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모험가인데 이 정도는 해야죠?"
그 말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얼굴을 붉히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등, 매우 부끄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한심한 것들.'
강승현은 그들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하인드 마을 특성상, 여관 내부의 손님들은 절반 이상이 모험가였다.
그들이 강승현 일행과 힘을 합쳐 싸웠다면 굳이 태풍의 눈을 노리지 않았어도 돌풍을 소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도 그것이, 여관 내부 모험가들은 대부분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취한 상태라 판단력이 떨어진 건 물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나마 술에 덜 취한 모험가들은 자기가 먼저 도망치겠다고 출구에서 싸움을 벌이는 등, 추태만 부렸다.
'아무튼, 마을만 도착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방심하는 풍조가 문제라니까.'
강승현은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마을 내부가 바깥에 비해 안전한 건 사실이지만, 몬스터가 없는 대신 각종 스킬과 무기를 갖고 다니는 모험가들이 돌아다니는 만큼 진정한 안전지대라곤 할 수 없다.
"휴, 건물 무너지는 건 겨우 막았네요."
"모험가 조합에 보고해봤자 몇 푼 안 주겠지?"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는 사이, 김호정과 직스가 다가왔다.
두 사람 모두 돌풍에 휘말려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선생, 수고했어!"
김호정이 실실 웃으며 금빛 영광을 집어넣었다.
"고생하셨어요."
"뭘, 우리는 쓰레기만 치운 것뿐인데."
"사실 그렇죠. 중요한 건 제가 다했으니."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은 석궁 소환을 해제했다.
"우리가 주문한 도시락은 나오려나?"
"부엌 쪽은 돌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별일 없이 나오겠죠."
"뭐, 건물이 날아간 것도 아니니!"
김호정은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의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았다.
직스는 테이블을 가져오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기껏 찾아낸 범인을 놓쳤으니...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네요."
"그러게 말이야. 지금 쫓아가 봐야 늦었겠지?"
"괜찮아요. 곧 돌아올 테니까."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허억, 허억! 허어억!"
대략 5분 전.
돌풍을 일으킨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 발목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젠, 젠, 젠장! 그 자식, 도대체 뭐야?'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여관에서 마주친 남자, 강승현을 떠올렸다.
'분명 몬스터 습격으로 위장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날 잡으러 온 거냐고!'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았을 텐데.
마법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숨을 뱉어냈다.
'심지어 내 매직 캐스팅을 눈치챘어?'
그의 마법은 스태프에 미리 비축해둔 마력을 엄청난 속도로 방출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모험가가 쉽게 간파할 수 없다.
하지만 강승현은 그가 마법을 발동하기 전, 낌새를 눈치채고 뒤로 물러나 안개 돌풍을 회피했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고! 그... 석궁을 사용했으니 레인저? 레인저인가? 아무튼 뭔지 모를 자식!'
마법사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발 뒤꿈치를 제대로 저격당해서 화살이 뼈까지 박힌 상태였다.
'아파 죽을 것 같아! 그 망할 자식! 이럴 줄 알았으면 "그걸" 사용할걸...!'
가볍게 탄식하던 마법사는 곧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치, 침착하자.... 아무튼 도망치는 데 성공했잖아."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 남자는 자신이 불러일으킨 안개 폭풍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걸 제거하려면 30분은 걸리겠지. 여기까지 숨도 안 쉬고 도망쳤으니... 잡힐 일은 없어!'
마법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마을 밖으로 도망치면 녀석을 완벽하게 따돌리는 셈이다.
'일단 동료들과 합류해 사태를 설명하자. 여관이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했으니 그 자식한테 보복하러...….'
그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이쿠, 마법사치고는 발걸음이 빠르시네."
"헉?"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를 바라보자, 부스스한 머리의 남자가 히죽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탐정 알렉이라고 합니다."
"으, 으아아아!"
"오~ 형씨, 내가 그렇게 반가운 거야? 아무리 좋아도 그렇게 소리 지르면 심장에 안 좋다구."
"어, 어떻게...."
마법사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도 그럴게, 자신은 지금 [은신]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싸움에는 자신 없어도."
핏!
"누구 추격하는 건 자신 있어서 말이야."
알렉의 손끝에서 피가 흘러나오더니, 날카로운 가시 형태로 변했다.
"너, 너 이 자식 혈술사였냐...."
주로 원소를 다루는 일반 마법사와 달리, 자신의 피, 혹은 타인의 피를 다루는 흑마술사.
이러한 사람들을 혈술사라고 부른다.
"나 같은 탐정한테 상처 난 사람을 쫓는 건 식은 죽 먹기거든."
알렉은 히죽거리며 마법사의 발목을 가리켰다. 강승현이 날린 화살 때문에 지금도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중이다.
"이, 상처 때문에!"
혈술사는 피를 감지할 수 있는 흑마술사인 만큼, '출혈' 상태로 도망치는 대상은 이들에겐 위치추적기를 달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형씨, 진짜 보통은 아니네. 노빠꾸로 출혈을 걸어?'
원래 알렉은 마법사를 쫓아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강승현이 화살을 날려 부상을 입힌 순간,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추격한 것이었다.
'내가 혈술사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얼굴 본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말이야.'
잠깐 지나간 말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다니.
알렉은 탐정보다 더한 놈이라고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됐으니... 차분하게 대화 좀 합시다."
"비, 빌어먹을...."
"사실 난 댁이 뭔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거든. 그냥 의뢰 때문에 일하는 중인데, 가서 싹싹 빌고 지팡이 돌려주면 살려주지 않을까?"
"지, 지랄하지 마!"
마법사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손에 쥔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아직 마력 남아 있어! 싸움에는 자신 없다고 했으니 잘하면....'
녀석이 마법을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콰아아각!
"끄, 아아아악!!"
갑자기 바닥에서 핏빛 가시가 솟구치더니 마법사의 손을 무참하게 꿰뚫었다.
마법사는 비명과 함께 스태프를 떨어트렸다.
"선빵 필승~!"
콱!
이어서 알렉의 손에서 뻗어 나간 붉은 가시가 보석 스태프를 낚아채갔다.
"너, 이 자식! 아까 분명 싸움에는 자신 없다고...."
"마법사는 흑마술사 밥인 거 모르시나?"
알렉은 빼앗은 스태프를 마법사에게 겨누더니 외쳤다.
"댁한테 별 원한은 없지만!"
이어서 허공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의뢰 때문이니까 너무 원망하진 말라구!"
콰아아악!
붉은 손아귀가 뻗어 나와 마법사를 움켜쥐었다.
198. 수상한 손님 3
'제, 젠장! 망할!'
붉은 손아귀에 붙들린 마법사는 마구 몸부림치며 발버둥 쳤다.
이것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인간 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빠져나가야 해!'
자신을 붙잡은 손아귀에서 풀풀 풍겨오는 피비린내와 지독한 흑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으면 분명 죽을 거라는 생각이 몰려왔다.
'스태프를 빼앗겨서 고속 캐스팅은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마법을 사용해서....'
마법사는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 손을 꿈틀거리며 마력을 집중했다.
촤아아아!
촤아!
하지만 마법이 발동되기는커녕, 몸 곳곳의 상처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마치 가시에 찔린 토마토 같은 꼴이었다.
"끄, 끄악! 끄아악!"
마법사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쳤으나, 그를 움켜쥔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
"꺼흑...."
끝내 녀석은 곧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게 됐다.
"체크메이트."
그 광경을 보던 알렉은 스태프를 휘둘러 붉은 손아귀를 거두었다.
털썩!
마법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단숨에 사라졌다.
"음, 좀 살살 때릴 걸 그랬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알렉은 마법사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걸 구경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럼 곤란한데.'
타겟이 이미 죽어 있는 게 아니라면 생포하는 게 이쪽 업계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의뢰를 맡긴 형씨는 이 친구한테서 무슨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았지. 죽여서 데려가면 분명 환불해 달라고 할 것 같아.'
뛰어난 탐정은 당황하지 않는다.
문제가 주어지면 해결할 뿐이다.
잠시 생각하던 알렉은 팔짱을 꼈다.
"이렇게 됐으니... 어떤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볼까?"
알렉은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해치웠나?"
"컥, 콜록! 헉...!"
"역시 마법의 주문은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군!"
"미, 미친놈아! 이게 무슨 마법의 주문이야!"
"다행이네~ 아주 건강하게 부활했잖아!"
"지금 어딜 봐서 건강하다는...."
쓰러져 있던 마법사가 기침을 토하며 눈을 떴다.
역시 충격으로 잠깐 기절한 것뿐이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몸 멀쩡하게 살아있으신 것 같으니...."
"헉!"
알렉이 히죽거리며 손을 펼치자, 곳곳의 핏물에서 붉은 사슬이 뻗어 나와 마법사를 붙잡았다.
"여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지."
-그리고 다시 현재.
"뭐야, 이 녀석 언제 오는 거야?"
"마침 오네요."
"미스터 알렉 복귀!"
강승현 일행은 알렉이 싱글벙글 웃으며 마법사를 데리고 돌아오는 걸 목격했다.
그것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서.
"우왓, 진짜 잡아왔네...."
"이 정도는 간단하지."
'도대체 발이 얼마나 빠른 거야?'
혈술사가 혈액을 추적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실 들어도 진작 까먹었을 듯한 김호정은 알렉이 전력질주로 달려서 마법사를 잡아왔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거 성능 좋더라? 손에 착착 감겨!"
알렉은 들고 온 보석 스태프를 강승현에게 넘겼다.
달칵.
스태프에 떨어져 나간 보석 장식을 끼우자, 밝은 빛이 뿜어져나왔다.
"역시 마법협회 조사관의 무기가 맞네요."
"뭔진 모르겠지만, 그 말은 내가 의뢰를 완벽하게 해결했다는 뜻이겠지?"
"그렇죠."
털썩!
알렉은 마법사를 바닥에 내려두고 빈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럼 보너스라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이왕이면 술병으로."
"김호정 씨한테 달라고 하세요."
"...술 대신 물이나 마셔야겠구만."
"자, 잠깐! 술 사줄 돈은 있다고!"
김호정이 소리쳤으나 알렉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직스 군~ 물 한 잔 주겠나?"
직스는 말없이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이러한 행동은 하비 같은 인간을 모실 때 몸에 밴 연장자 챙기기 습관이다.
"휴하! 이제 좀 살겠네!"
"엄청 피곤해 보이시네요."
"꽤 힘들었지. 내가 마법의 주문을 써야 할 만큼 치열하고 끔찍한 싸움이었거든."
"...아까는 간단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간단하지만 힘든 싸움인 거지. 반복 노동처럼!"
'그렇군. 역시 전력질주 달리기 싸움을....'
알렉의 말 때문에, 김호정은 더더욱 알렉이 런닝 추격전을 벌이고 왔다고 착각했다.
"싸우는 건 자신 없다더니, 잘만 싸우시네."
세 사람이 떠드는 사이, 강승현은 마법사를 살폈다.
"우리, 아까 보고 또 보네요?"
"...."
붙잡혀온 마법사는 입을 꾹 다문 상태다.
당장은 아무것도 말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응?'
마법사를 살피던 강승현의 눈에 묘한 부분이 들어왔다.
무슨 꼴을 당한 건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양손 끝이 까맣게 변색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불에 타거나 독에 당한 건 아닌 걸 보면... 마력이 오염된 상태로 마법을 쓰려다 이꼴이 된 것 같네.'
마법사가 흑마술사에게 처발리는 이유는 자동차에 썩은 기름 넣으면 고장 나는 것처럼, 몸속 마력이 오염되어서 흑마력으로 변질될 경우 마법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마력 오염 상태로 마법을 쓴다는 건 자폭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 녀석은 오염된 마력이 다 빠질 때까진 마법을 쓸 수 없다.
"제, 젠장.... 그 틈에 흑마력을 주입했을 줄이야...."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마법사는 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주면 목숨은 살려드릴게요."
"...."
"그 마차를 습격한 범인, 당신 맞죠? 혼자 했을 것 같진 않은데."
마법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으나,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파악! 파박!
"끄아아아악!!!! 마, 말할게! 말한다고!"
화살을 몇 개 선물해주자 냉큼 입을 열고 사실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마차를 습격한 건 우리 조직입니다."
"역시 범죄자셨군."
예상대로, 이 마법사는 범죄 길드에 소속된 범죄자였다.
놈들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마차를 습격해 승객들을 납치했다고 한다.
"의뢰를 받았다고?"
"이런 녀석들은 돈만 주면 뭐든 하거든요. 납치나 암살 같은 거."
"이번 의뢰는 인신매매였습니다...."
"인신매매?"
마법사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의뢰인이 요구한 건 살아있는 인간 수백 명이었다.
"이, 인간 수백 명?"
"인권이 헐값인 아즐 대륙답네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잡아다 어쩌려고?"
"그건 저도 모릅니다. 이유는 안 묻고 돈만 물어보는 게 저희 방침이라."
"잘났다!"
"그래서 그 의뢰인의 정체는?"
"신분은 안 묻고 돈만 물어보는 게 저희 방침이라. 맨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돈이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만, 이 마법사는 의뢰인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마법사의 동료들도 의뢰인의 정체는 모를 것이다.
"아무튼 1주일에 3~4명씩 꾸준하게 제공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죠."
의뢰인은 귀족들을 건드리면 일이 커질 테니, 죽거나 실종되어도 아무 문제없는 '평민'들만 타겟으로 해달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뭐 이런 쓰레기가 다 있어?"
"김 형, 이런 애들 흔한 편이야. 아즐 대륙엔 자기 가족 암살해달라는 사람들도 많다구?"
"나 집에 가고 싶다 진짜...."
새삼 아즐 대륙이 얼마나 인권이 밑바닥인지 알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모험가 조합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몬스터 습격으로 위장해서 방치하는 식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들키고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러 비를 뿌린 건?"
"잔여 마력을 지우려고...."
생각보다 더 치밀한 놈들이었다.
물론 강승현에게 들켰지만 말이다.
"일부러 싸구려 마차만 고른 이유가 있었군요. 그런 마차에 귀족들이 탈 리가 없으니."
"네.... 그렇죠."
하지만 신분을 숨긴 탑승객은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꼬리가 밟힌 것이다.
"아 젠장할, 설마 승객 중에 마법협회 조사관이 있었을 줄이야...."
마법사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이 녀석은 모험가 조합에 넘겨도 조만간 마법협회가 암살자를 고용해서 처리할 것 같다.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조사관이 안 죽고 살아있으면 희망이 있으니까."
"그, 그럴까요?"
마법사는 살짝 안도한 얼굴이었다.
'조사관이 죽어서 마법협회 하인드 지부 계획이 물 건너가면, 이 자식을 던전으로 끌고 가서 차원의 틈에 묻어버리든가 해야지.'
물론 강승현은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기에, 마법사를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 중이었다.
"당신, 납치한 사람들을 벌써 팔아넘긴 겁니까?"
옆에 있던 직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바로 얼마 전에 사람들을 납치해 미친 짓을 벌였던 친구가 떠오른 모양이다.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게, 오늘이 약속한 날짜라... 의뢰인과 접선하려고 여기 온 겁니다."
원래는 이 여관에서 의뢰인과 만난 뒤 잡아둔 사람들을 팔아치울 계획이었다고.
"그럼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털자!"
"김호정 씨, 여관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올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아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눈치챘을 겁니다."
의뢰인은 진작 자리를 피했거나, 아예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조사관이 아직 팔려가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거죠."
"일단 그 친구부터 구하러 가자고!"
조사관이 무사하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이번 사건의 진짜 흑막을 밝혀내는 건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도 상관없다.
"납치한 사람들은 어딨죠?"
"2차 아지트에 있습니다. 우선 1차 아지트로 가서 열쇠를 받아야 하지만...."
"거기까지 안내하세요."
"넵."
-강승현 일행은 라티카 여관을 나섰다.
마법사가 소속된 범죄 집단의 아지트는 의외로 하인드 마을 내부에 있었다.
"범죄자 주제에 당당하게 살고 있네."
"아, 그도 그럴 것이, 하인드 마을은 모험가 조합 윗대가리가 썩었잖아요. 그래서 다른 마을보단 숨어 살기 편하다고 해야 하나...."
마법사는 실실 웃으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모험가 조합이 마차 사고를 좀 더 꼼꼼하게 조사했다면 이 쓰레기들을 진작 잡아넣었을 것이다.
'리웬 지부장.... 역시 치료하는 척 죽일까.'
강승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아, 이쪽입니다."
앞서가던 마법사가 하인드 마을 골목 안쪽의 낡은 집을 가리켰다.
"여기서 열쇠를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법사는 주위를 살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여관으로 갔지만 아무 일도 없네?"
"그러게요. 점괘대로라면 누가 죽는댔는데."
"여관으로 가면 죽는다고 했지, 여관에서 죽는다고는 안 했다구?"
"말장난하냐?"
자리에 남은 강승현 일행이 마법사를 기다리며 잡담을 떨던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어?"
갑자기 큰 폭발음과 함께,
"아아아아악!!!"
집안에서 마법사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199. 점괘의 결과
"뭐, 뭐야 이 소리?"
"아까 그 사람 목소리예요!"
"들어가 보죠."
강승현 일행은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건물 내부는 폭발로 인해 새카맣게 타들어 간 상태였고, 그 중앙에 마법사가 쓰러져 있었다.
"이 친구도 폭발에 당했나 본데?"
"저, 점괘가 말하는 사망자가 이 녀석이었을 줄이야...!"
"아직 안 죽었어요."
비록 치명상을 입긴 했어도 아슬아슬하게 숨이 붙어 있는 상태였다.
생각보다는 명줄이 질긴 놈이다.
"이봐요,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으, 으...."
마법사는 힘없이 손을 뻗어 천장을 가리켰다.
위를 올려다보자, [배신자]라고 적힌 새빨간 글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배신자?"
"우리가 한발 늦었네요."
놈들은 마법사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걸 눈치채고 아지트에 폭발 함정을 파둔 것이다.
돌아온 배신자를 깔끔하게 날릴 수 있도록.
"제, 젠장. 이쪽도 사정이 있었다고...."
마법사는 분한 듯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처음부터 배신을 하지 말았어야지."
"너, 너희 때문이잖아!"
마법사는 할 말이 무척 많아 보였으나, 더 이상 말할 기력이 없는지 축 늘어졌다.
"그래서 납치된 사람들은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이제 댁은 쓸모 없겠네요. 아지트 위치나 부시죠."
쿠당당탕!
그때,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 소리?"
"저쪽이에요!"
강승현 일행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벌컥!
활짝 열린 뒷문 너머로 누군가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아지트 내부에 숨어서 함정을 작동한 조직원이 있던 모양이다.
"저, 저 자식 도망간다! 잡아!"
"쫓아가죠."
"라저~!"
강승현 일행은 도망치는 조직원을 추격했다.
'자, 잠깐 나는 어쩌고...?'
버려진 마법사는 5분간 방치되어 있다가, 소식을 듣고 출동한 모험가들한테 끌려갔다.
-탓탓탓!
"왜 저렇게 빨라?"
"헤이스트 썼잖아요."
얼마나 달렸을까.
조직원을 추적하던 강승현 일행은 하인드 마을을 떠나 덴트롤 숲길까지 오게 됐다.
정작 도망치던 조직원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그 자식,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구."
"내 [직감]에 의하면 이 주변에 있는 건 틀림없는데 말이지."
강승현 일행이 조직원을 찾아 숲길을 걷던 참이었다.
'뭐지?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왠지 모를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평범한 숲에서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
그때였다.
파악!
풀숲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빛나는 화살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직스를 강타했다.
캉!
"지, 직스!"
"직스 군!"
털썩!
화살에 맞은 직스는 힘없이 쓰러졌다. 날아온 위치를 봐서, 화살이 적중한 부위는 틀림없이 가슴이다.
"직스 씨!"
강승현은 황급히 직스를 향해 달려갔다.
'매복하고 있었나?'
동시에 바로 [열 감지]를 발동했다.
화르륵!
그러자 곳곳의 풀숲에서 다수의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다들 무기 꺼내세요. 함정입니다."
"함정이라고?"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불러내더니, 붉은빛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쇠창살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박!!
파바박!!
"크아악!"
"으갹!"
쏟아진 화살들이 화살이 붉은빛을 관통하거나 스치면서, [은신] 상태로 잠복해 있던 조직원 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내 [옅은 바람]을 간파하다니."
이어서 거만한 목소리와 함께, 조직원들 사이에서 부채를 쥔 보랏빛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마법사인 듯했다.
"네 녀석,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군?"
"전 평범한 모험가인데요? 그쪽 은신 스킬이 너무 허접해서 들킨 거겠죠."
"그 멍청한 자식이 배신한 이유를 알겠어."
마법사는 강승현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 마법사를 언급하는 걸 보아하니, 이 녀석이 범죄 길드의 수장인 모양이다.
"내 이름은 가헨, 길드 '사선'의 길드 마스터다."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힐러죠."
"아까부터 널 지켜봤는데 실력도 나쁘지 않고, 대담함도 갖췄군. 좋은 인재야."
녀석은 여관부터 쭉, 강승현 일행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동료의 배신도 눈치챈 모양이다.
"마침 한 자리가 비어서 그러는데, 우리 조직에 들어올 생각 없나? 자세한 이야기는 장소를 옮긴 뒤에 해야겠지만."
"그런 말은...."
강승현은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건, 화살에 맞아 쓰러진 직스였다.
"이딴 짓을 하기 전에 꺼냈어야지."
파악!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방아쇠를 당겼다.
가헨은 곧장 마법 방패를 펼쳤으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녀석의 뺨을 스쳐 상처를 입혔다.
"가, 감히 내 얼굴에 손을 대?"
내내 여유롭게 미소짓던 가헨은 곧장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전부 죽여!! 당장!"
가헨의 분노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곳곳의 조직원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만...."
"이, 이 나쁜 놈들아아!!!"
그걸 신호로, 강승현 일행도 각자 무기를 꺼내 덤벼오는 적들을 공격했다.
김호정은 반쯤 울면서 소리쳤다.
"서, 선생! 직스, 직스 어째! 직스가 죽, 죽!"
"아직 안 죽었으니까 진정해요."
"그치만 가슴에 화살 맞았잖아! 보통 죽잖아 그거!"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직스를 살폈다.
'화살이 적중한 부위는 가슴이지만, 화살이 심장을 꿰뚫진 못했네.'
보통은 즉사했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지만, 직스는 그냥 멍청하게 당하지 않았다.
'맞기 직전에 [흙의 방패]를 발동했군. 그래서 목숨을 건진 거구나.'
타이밍이 어긋나서 완전히 막진 못했으나, 화살 위력이 크게 줄어들어서 직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치명상이라는 건 변함 없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
"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바로 치료하면...."
강승현이 인벤토리에서 치료 도구를 꺼내려는 찰나였다.
"치료하게 그냥 놔둘 것 같아?"
접근해온 길드원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스킬을 사용 중인 건지, 움직임이 상당히 빨랐다.
캉!!!
"방해 말고 꺼져."
강승현은 바로 은빛 영광을 꺼내 녀석의 검을 받아쳤다.
"저기 힐러가 있다!"
"죽여!"
"역시 가장 먼저 족쳐야 할 건 힐러지!"
하지만 힐러는 빨리 처리하는 게 이득인 직업인 만큼, 사선 길드원들이 전부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김호정 씨, 알렉 씨."
"맡겨둬!"
"저런 떨거지들이 있으면 직스 군을 치료하기 힘들겠지."
"가서 다 쓸어버리세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김호정과 알렉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형, 내 스타일 알지? 부탁해!"
"오케이!"
두 사람은 각자 무기를 꺼내고 길드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작 둘이서 우릴 상대하겠다고?"
"어처구니가 없네."
퍼억! 파악!
맨 앞으로 뛰쳐나간 김호정이 길드원들을 향해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샥! 핏!
"뭐야 이거? 그냥 평타잖아?"
"이 아저씨 공격 스킬 없나 본데."
"상대할 가치도 없군! 신경 쓰지 마!"
방어 버프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김호정의 공격은 몸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길드원들은 김호정을 비웃으며 그를 공격했다.
"공격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나가 뒈져!"
"끅! 끄윽!"
쉴 새 없는 공격이 쏟아져 왔지만, 김호정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꿋꿋하게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먹히지도 않는 공격 그만하고 꺼지라고!"
"이 자식 질기네! 그냥 죽어!"
"김 형! 그 정도면 충분해."
그때, 뒤에 있던 알렉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펼쳤다.
"그럼 시작해볼까."
장갑이 번뜩임과 동시에, 손목을 타고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쪽 형씨한테 원한은 없는데."
"끄악!"
동시에 가장 가까이 있던 길드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가장 가까이 있어서 말이야!"
"끄아아아!!!"
파바바바!!
그와 동시에, 녀석의 몸 곳곳에 난 생채기에서 피가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흐아악!"
"이, 이게 뭐야!!"
"으아아아!!!"
거기서 솟아난 피가시가 다른 길드원을 꿰뚫자,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몸에 난 상처에서 가시와 함께 비명을 뿜어냈다.
"이것이 바로! 연쇄 콤보!"
"다시 봐도 보기 싫은 스킬이다야."
김호정은 질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 그 스킬은 혈술사의 [가시관]으로, 대상의 몸에 상처가 있을 경우 상처 부위에서 피가시를 소환해 큰 대미지를 입히는, 전형적인 혈술사 스킬이다.
지금처럼 사람이 모여있을 때 사용하면 [가시관]에 당한 피해자가 주변 사람을 [가시관]으로 공격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가해자로 진화하기 때문에 대량학살에 유용하다.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용한 스킬이지!"
"보기엔 좋지 않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과거에 파티를 짰을 때, 지금처럼 탱커 김호정이 적진에서 어그로를 끌고 알렉이 [가시관]을 발동하는 식으로 협력플레이를 하곤 했다.
"저 정도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 모습을 보던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직스를 살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직스가 입을 열었다.
"히, 힐러님.... 저, 죽는 건가요?"
"치료 중이에요. 제 실력 아시죠?"
"그게, 강 건너에서 펜그릴이 손짓하는 것 같아요.... 절 부르는 것 같은데...."
"환각입니다. 펜그릴 씨는 지옥에 떨어져서 이쪽에 올 수가 없어요."
강승현이 화살을 적출하기 위해 스킬을 쓰려는 찰나였다.
"이 쓸모없는 것들!"
뒤에서 잠자코 있던 가헨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치며 걸어나왔다.
"기어이 내가 나서게 만들어?"
확!
녀석은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펼치며 스킬을 발동했다.
[비탄의 창]
허공에 새하얀 창이 소환되더니,
파바바!!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것처럼, 두 사람을 향해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치사하게 광역기를 쓰다니!"
"혈술사, 네 녀석이 할 말이 아닐 텐데."
"일단 피하자구!"
알렉과 김호정은 [비탄의 창]을 피해 양옆으로 흩어지려 했다.
휘익!!
그때였다.
우우우웅!
"끄, 끄아아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길드원이 비명을 지르더니 눈부신 빛과 함께 폭사했다.
그 빛에 휩쓸린 김호정은 순간 시야가 흐려지면서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어, 어떻게 자기 부하를!"
"쓸모가 없으니까."
가헨은 김호정의 발을 붙잡기 위해 자기 부하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렇게라도 써먹어야지."
"...컥."
그와 동시에, [비탄의 창]이 김호정의 목을 관통했다.
김호정은 목에 박힌 창을 뽑아내려 했으나,
푸욱, 푹!
이어서 날아온 서너 개의 [비탄의 창]이 그것을 저지했다.
"기, 김 형!"
반대편에 있던 알렉이 급하게 소리쳤으나,
뚜둑.
이어서 목뼈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걸로 한 놈은 치웠군."
가헨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발로 김호정을 밀어 넘어트렸다.
철퍽!
김호정의 몸이 힘없이 밀려나 쓰러졌다.
그 주위로 붉은 핏물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기, 김호정 씨가."
"...."
그 모습은 직스와 강승현의 똑똑히 들어왔다.
"혹시 치료하려고? 해볼 테면 해봐."
가헨이 크게 비웃으며 말했다.
물론, 치명상을 입어도 숨만 붙어있다면 힐러가 치료할 수 있다.
"시체를 치료해봤자 썩는 속도만 빨라지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목이 꺾여서, 누가 봐도 명백하게 '즉사' 상태일 때는 치료할 수 없다.
힐러가 치료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사람이지, 죽은 사람이 아니니까.
"...."
쓰러진 김호정을 가만히 보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는 게 좋을 텐데요."
"하하하하! 동료가 죽어서 많이 열받았나 보지? 사과 안 하면 뭐 어쩔 건데?"
가헨은 부채를 접으며 낄낄거렸다.
재밌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웃어대는 모습에, 부하들조차 질색한 얼굴이었다.
"아, 나한테 사과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사자한테 하라는 뜻인데."
"뭐?"
"이미 늦었네요."
그 말을 듣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김호정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스으으으으....
어찌 된 일인지.
김호정의 시체에서 검은 기운이 치솟고 있었다.
200. 검은 짐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