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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10-120

110. 레드로드 아지트 1

"여기가 저희 아지트 입구입니다."

"이름이 레드로드라서 레드 카펫이 깔려 있을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간 레드로드 2호가 손을 뻗자.

쿠구구궁.

돌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거 자동문이었구나."

"생각보단 넓네요."

레드로드 아지트는 상당히 거대한 규모의 동굴이었다. 최소 수십, 수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곳에 이런 동굴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요."

발릭 부부도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동굴은 트라코티 마을 토박이들도 모르는 비밀 장소인 모양이다.

"어,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에 있는 애들한테 설명은 해야 해서."

레드로드 1호와 4호가 양해를 구하며 먼저 들어갔다. 나머지 23567은 긴장한 얼굴로 강승현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쏴아아아아!

때마침,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 콸콸 쏟아지는 빗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빗줄기가 엄청나네요."

"음, 비는 정말... 좋은 기억이 없어."

두 사람이 한가하게 중얼거리던 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잠시 후, 아지트 내부의 도적단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설명을 들어서 그런지 무턱대고 덤벼오진 않았다.

"너희들이 정찰팀이 말한... 손님이야?"

"강승현 힐러라고 합니다."

이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와 말을 걸었다. 그 역시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새빨간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사정은 들었어. 내 이름은 로센트야."

자신을 로센트라고 소개한 남자는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솔직히 곤란해.... 우리가 카마르한테 지명수배받은 도적단이라서. 아지트로 외부인을 들이기가 좀."

"이미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뭐 달라질 게 있을까요."

"그건 그렇네...."

로센트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마음 같아선 거절하고 싶지만,

'도적단 아지트에 쳐들어와서 묵게 해달라는 걸 보면 엄청나게 강한 모험가라는 뜻이겠지.'

거절하면 아지트가 그대로 박살 날 것 같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너희 일행 중에... 마법사 있어?"

"마법사는 없습니다."

"그럼... 괜찮겠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린 다음,

"너희가 묵을 만한 방을 빌려줄게. 내일 아침이 되면 바로 떠나고, 우릴 카마르에 넘기지만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승현 일행의 숙박을 흔쾌히 승낙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어차피 카마르는 폐쇄 결계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는걸."

"그러면 다행이고."

지금 카마르는 마탑 사태와 그 여파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상태다.

이런 도적집단을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것이다.

"다들 이쪽으로 와. 방까지 안내해 줄게."

강승현 일행은 로센트의 뒤를 따라갔다.

구불구불한 동굴 길을 걸어가는 동안 레드로드 도적단원들 몇몇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흠....'

하지만 강승현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건 외부인을 향한 경계심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초조함이었다.

"내가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옆에서 걷던 김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이 여기 서열 1위인가?"

"기껏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게."

강승현은 앞에서 걷는 로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스라기엔 포스가 없었다.

'뭔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도 그렇고. 긴장한 듯한 태도도 그렇고.'

어느 한 집단을 이끌어갈 인물은 아니다. 그것도 평범한 집단이 아니라 막 나가는 애새끼들로 이루어진 도적단이라면 더더욱.

"저 녀석은 리더가 아니에요. 그럴 그릇이 못 됩니다."

"하긴, 도적단 보스라기보다는 시골 잡화점 주인 같은 느낌이었지."

"하지만 조무래기는 아닌 것 같네요."

그건 도적단원들이 로센트의 눈치를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레드로드 패거리는 분명 10~20대로 이루어진 집단이라고 했는데, 저 남자는 아무리봐도 40대였으니까.

"여기 대장하고 뭔가 관계있는 인간이겠죠."

-저벅, 저벅, 저벅.

로센트를 따라 걷다 보니, 웬 작은 바위굴 앞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레드로드 패거리는 동굴 곳곳에 굴을 파서 방처럼 쓰는 모양이다.

"너희는 이 방을 쓰도록 해. 그렇게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누워 자기엔 충분할 거야."

"감사합니다."

굴 안에는 푹신한 이불이나 침대 대신 바닥에 짚단이 잔뜩 깔려 있었다.

강승현과 김호정은 순간 닭장을 떠올렸다.

"새둥지 같다."

"미안, 이게 우리 대장님 취향이라...."

"뭐가 됐든 비 맞으면서 자는 것보단 낫겠죠."

비주얼은 볼품없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강승현은 일행들을 굴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럼 편히 쉬어. 일행이 쾌차하면 좋겠네."

"감사합니다."

"아, 그렇지."

자리를 떠나려던 로센트가 뭔가 생각 난듯 다시 돌아왔다.

"가급적 밖으로 나오지 말고 방 안에만 머물러주면 좋겠어."

"방 안에만?"

"일단은 비밀 아지트라, 외부인이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건 좀 곤란하거든."

'쓸데없이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우리도 이래저래 사정이 있으니...."

로센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다른 도적단원들은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들 뭔가 숨기고 있네.'

이 아지트 어딘가에 외부인에게 들켜선 안 될 무언가가 있다.

강승현은 로센트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뭐, 그래도 일단은 지켜볼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레드로드 패거리는 강승현 일행을 묵게 해줬다. 그 점을 감안해서 당장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할 일도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발릭 부부에게 말했다.

"루디 상태부터 확인할게요."

"네, 네!"

데이지가 품에 안고 있던 루디를 보여주었다.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보온 담요로 몸을 감싸둬서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먼저 불부터 피워야겠네요."

강승현은 레드로드 정찰팀을 바라보았다.

"누가 장작 좀 가져와!"

"내가 가져올게!"

"불쏘시개!"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다들 알아서 척척 준비하기 시작했다.

'편해서 좋네.'

강승현은 휴식 결계 양탄자를 꺼냈다.

이건 김호정의 담요처럼 보온 기능은 없지만, 루디가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호정 씨."

"옹."

김호정이 양탄자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마법진이 작동하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펄럭.

강승현은 양탄자를 짚단 위에 펼쳐 깔았다.

화르륵!

"불 피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모닥불이 지펴졌다.

도적단원들이 불 앞에 반사판을 세우자 빠져나가는 열기를 모을 수 있었다.

"따뜻해."

은은한 온기가 퍼져나가자 루디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 정도면 고비는 넘긴 것 같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다들 옷이 젖어서 그러니, 갈아입을 옷 좀 빌려주세요. 어른용 4벌, 아이용 1벌."

"넵! 알겠습니다!"

잠시 후.

도적단원 6이 빳빳한 새 옷을 들고 왔다.

레드로드 패거리가 입고 다니는 새빨간 유니폼이었다.

"저희 아지트에 있는 옷이 단원용 유니폼밖에 없어서요."

"그러겠죠."

별로 입고 싶은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찜질방 옷이라고 생각하면 입을 만하다.

강승현은 레드로드 유니폼을 받았다.

"아지트에 예비용 유니폼도 보관하고 있구나."

"그래야 옷이 망가지거나 신참이 들어왔을 때 바로바로 지급하죠."

"우린 신참은 아니지만, 잘 입겠수다."

강승현 일행은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

"우와, 이 녀석들 수건도 빨간색이야."

"컨셉 참 지독하네요."

"독하다 독해."

김호정은 빨간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뭔가 빨간 휴지 같아서 기분 나빠...."

"저는 그냥 수제 붕대 쓸게요."

축축한 옷을 벗자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에 벨로토 산개한테 물어뜯긴 부위였다.

'깔끔하게 나았군.'

지금은 흉터도 없이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다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김호정 씨는....'

아직도 몸 곳곳에 흉터가 남아 있었다.

원래 자잘한 흉터가 없진 않았지만.

'내가 남들보다 회복력이 좋긴 한가 보네.'

강승현은 상처 회복이 유독 빠른 편이었다.

거기에 재생력도 좋아서 흉터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보통 자잘한 흉터는 남는 게 정상인데 말이지.'

-옷 갈아입기를 마친 두 사람은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젖은 옷은 모닥불에 말리죠."

"그래야겠어. 안 그럼 냄새날 거 같아."

바위굴로 돌아가자 발릭 가족이 루디를 살피고 있었다.

"루디는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의식이 있으니 따뜻한 스프랑 스태미나 포션을 먹여두죠."

"알겠습니다."

발릭 부부는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강승현은 루디를 살폈다.

아까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열 감지]

화아앗!

바로 체온을 체크해보자,

[35.1℃]

체온이 꽤 많이 올라간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정상 체온을 회복할 것이다.

'지금이라면 쓸 수 있겠네.'

[완치판정]

강승현은 루디에게 [완치판정]을 사용했다.

여기에 휴식 결계의 양탄자까지 더해지니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선생님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지."

"식사 끝나면 두 사람도 좀 쉬세요."

"알겠습니다."

발릭 부부는 감사인사를 하며 식사 준비를 재개했다.

'오늘 저녁은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고.'

강승현은 젖은 옷을 말릴 겸 다른 모닥불로 향했다. 거기엔 김호정이 앉아서 로브를 말리고 있었다.

"여기가 여관이면 세탁 서비스 맡기는 건데...."

"어쩔 수 없죠. 하룻밤 묵는 처지에 세탁까지 부탁하면 너무 쓰레기 같잖아요."

"그거라면 재워달라고 두들겨 팬 거부터."

"세탁은 내일 트라코티 여관에 맡기도록 하죠."

철퍽.

강승현은 건조대 위에 젖은 옷을 널어뒀다.

날씨도 안 좋고 동굴 깊숙한 곳이라 마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내일 트라코티에 도착하면 바로 출발할 거야?"

"아뇨.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최소한 하루 정도는 머물러야죠."

강승현은 물결 기생초와의 싸움으로 포션을 생각보다 많이 소모했다. 마력 포션은 여유가 있지만 다른 포션은 기껏해야 1세트 정도뿐이다.

"야매 힐러는 포션으로 먹고사는 힐러니까. 바닥난 포션부터 충당해야죠."

"그럼 내 포션이라도 줄게. 몇 개 없긴 하지만."

"잘 쓸게요."

강승현은 김호정이 건넨 포션을 넘겨받으려 했다.

데구르르르.

"어!"

그때, 김호정의 실수로 포션 한 병이 떨어져 굴러가버렸다.

"벌써 수전증이...."

"실수야, 실수!"

벌떡 일어난 김호정은 포션을 주우러 달려나갔다. 다행히 포션은 깨지지도 않았고, 그리 멀리 가지도 않았다.

김호정은 포션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응?'

허리를 숙인 순간, 그는 바닥에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냥 돌멩이라고 생각했지만,

'뭐야 이거? 조각품인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돌로 만들어진 조각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어디서 많이 본 벌레 형태의.

111. 레드로드 아지트 2

'가만, 이거 어디서 봤는데.... 언제 봤더라?'

조각품을 주워든 김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 이것과 똑같이 생긴 벌레 몬스터를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김호정 씨, 거기서 뭐 하세요?"

"여기 바닥에 이상한 게 있어서."

"이상한 거?"

김호정은 다가온 강승현한테 조각품을 내밀었다. 혹시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돌멩이인 줄 알았는데, 잘 보니까 벌레 조각품이더라구. 혹시 뭔지 알아?"

"이건...."

강승현은 건네받은 붉은 조각품을 살펴보았다.

독특한 문양이 새겨진 둥글둥글한 몸, 두 개의 더듬이, 잔뜩 움츠러든 6개의 다리.

"스카라베네요."

이 조각품은 부식된 유적 던전에서 마주친 벌레 몬스터, 스카라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 유적 던전에서 만난 풍뎅이 녀석!"

"네, 좁은 통로를 지날 때 마주쳤죠."

"이제 생각난다.... 무시무시한 벌레 지옥이었지. 세스코가 시급했어."

두 사람은 며칠 전 유적 던전에서 수백 마리의 스카라베와 대치하던 때를 떠올렸다.

"떼로 몰려오면 귀찮은 놈들이니까요."

스카라베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놈들은 덴트롤 박하 몇 장만 있어도 잡을 수 있는 약한 몬스터에 속한다.

'그러니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만....'

놈들의 진짜 무기는 죽여도 죽여도 계속 쏟아져 나오는 물량 공세. 파티 수준이 조금만 낮아도, 수십에서 수백 마리로 불어난 스카라베 떼를 감당할 수 없다.

'이래저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몬스터란 말이지.'

그래서 아즐 대륙 모험가로 살다 보면 스카라베한테 좋은 감정이 안 든다.

김호정은 진절머리난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이건 스카라베 팬이 만든 건가? 왜 이렇게 현실감 있는 건데"

"정교하게 만들어지긴 했네요."

탁, 턱.

강승현은 손에 쥔 스카라베 조각품을 던졌다 받았다. 김호정의 말대로 그냥 조각품이라 생각하기엔 너무 사실적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스카라베가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혹시 화석 아냐?"

"이 주변에선 스카라베가 살지 않아요."

스카라베의 서식지는 아즐 대륙 남부 극소수 지역이다. 당연히 붉은 숲에선 볼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 스카라베를 만나려면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화석 같은 게 있을 것 같진 않네요."

"레드로드 놈들이 카마르에서 훔쳤을지도 몰라. 그 녀석들, 취향이 참 괴상하니까."

"뭐,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은데...."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도적단 아지트에 조각이나 몬스터 화석 같은 보물이 있는 건 그리 이상하진 않지만.

"이런 물건을 바닥에 그냥 던져두진 않겠죠."

"하긴, 한 개만 떨어져 있었다면 옮기다 흘린 거라고 생각하겠는데...."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주변에 보이는 돌멩이처럼 생긴 물체는 전부 스카라베 돌조각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10개가 넘는다구."

"저 녀석들이 훔친 건 아닌가 보네요."

정말 카마르에서 훔쳐 온 보물이라면 이런 식으로 보관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레드로드 패거리는 스카라베 조각품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

"발견했다면 창고에 보관해뒀겠죠. 이런 식으로 처박아두는 게 아니라."

"하긴, 대충 보면 그냥 돌멩이로 보이잖아."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이게 돌이 아니라 스카라베 형태라는 걸 알아차렸으니까.

"정리하자면. 여기 스카라베 조각품들은 레드로드 패거리가 놔둔 게 아니라는 뜻이니까...."

강승현은 주위에 널려있는 붉은 돌멩이를 보며 말했다.

"역시 '관찰'해봐야겠네요."

집주인들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돌조각. 이런 게 평범한 물건일 리가 없다.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관찰의 눈]

손에 쥔 스카라베 조각품 위로 각종 정보가 떠올랐다.

[깊은 수면][석화]

[타빌라 스카라베.]

[누군가에 의해 석화됐다.]

[활동을 멈추고 잠든 상태다.]

[조건을 만족하면 석화가 해제된다.]

"이건...."

"왜? 뭔데?"

"석화 상태의 몬스터입니다."

꽤 충격적인 정보였다. 이것들은 조각도, 화석도 아닌 살아 있는 스카라베였던 것이다.

지금은 잠든 채 움직이지 않지만, 조건이 달성되면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상태다.

"일종의 동면 상태인 거죠. 연약한 육체를 보호하려고 전신을 석화시킨 것 같습니다."

다만 스스로 석화한 건 아니었다. 이 스카라베들은 어떠한 존재로 인해 잠든 상태로 석화한 것이었다.

"이, 이게 살아 있는 스카라베라고? 돌조각이 아니고?"

"네. 조건만 맞으면 다시 깨어날 겁니다."

"으!"

파악!

"그전에 없애야지!"

김호정은 기겁하며 스카라베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물론 석화 상태인 만큼 쉽게 부서지진 않았다.

"멀쩡하잖아."

"평범한 스카라베였다면 죽었겠지만, 지금은 석화 상태니까요."

경도가 꽤 높은 축에 속해서 이 녀석들을 부수려면 스킬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럼 못 부수는 거야?"

"카마르의 금빛 영광이라면 쉽게 부술 수 있겠네요. 바위나 땅 부수기 특화 무기니까요."

"그래?"

김호정은 재빨리 금삽을 꺼내더니,

"세스코오오오오!!"

잠든 스카라베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쾅!

쾅!

콰직, 콰직!

딱딱하게 굳은 몸체에 계속해서 충격을 가하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콰가각!

"쪼갰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헥, 헥.... 이게 좀 단단하긴 한데, 못 부술 정도는 아니야."

김호정이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강력한 무기가 있다면 스킬 없이도 부술 수 있는 것 같다.

"흠...."

강승현은 부서진 스카라베 조각을 살폈다.

[관찰의 눈]

그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새로운 정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부서진 타빌라 스카라베의 잔해.]

[석화]

[부서지면서 생명 활동이 정지했다.]

"깔끔하게 죽었네요."

"다행이다! 그럼 다른 것들도 부숴야지!"

콰직, 콰직!

그렇게 근처를 굴러다니던 스카라베는 김호정이 휘두른 금삽을 맞고 전부 박살났다.

그는 지쳤지만 개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휴, 이걸로 맘 놓고 잘 수 있겠어."

"글쎄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한 김호정과 달리, 강승현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발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닥 좀 파보세요."

"왜, 왜?"

"파보시면 알게 될걸요."

"서, 설마... 아니겠지."

팍, 팍!

김호정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으나 현실을 부정하며 동굴 바닥을 파헤쳤다.

강승현 역시 모종삽을 꺼내 동굴 벽을 긁어냈다.

'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 보상으로 얻은 바위 부수기 옵션을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이야.'

파각, 팍!

툭.

투두둑.

이윽고 벽과 바닥이 부서지면서, 무언가가 우르르 굴러 나왔다.

그건 잠든 타빌라 스카라베였다.

"우와아아아!"

"역시나."

"이게 왜 나와? 왜 나오냐구!"

팍!

팍!

다른 곳을 파봐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파도 타빌라 스카라베가 발굴됐다.

김호정은 절망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대체 얼마나 묻혀 있는 거야?"

"이 동굴 전체가 스카라베로 이루어져 있는 걸지도 모르죠."

"나 여기서 나갈래! 이런 곳에서 못 자!"

김호정은 동굴 입구로 달려나갔으나,

쿠르르르릉!

쏴아아아아아!!

요란한 빗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왔다.

덤으로 천둥·번개까지.

"지금 나가서 자면 죽을 거 같아."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스카라베 때문에 껄끄럽긴 하지만, 오늘 밤은 이 동굴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물 폭탄 맞으며 자는 게 더 끔찍하니까.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들은 붉은 숲에 살지도 않는다면서...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에."

"여기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겠죠."

강승현은 주변에 널브러진 스카라베를 바라보았다. 진짜 평범한 동굴이라면 이런 몬스터가 묻혀 있을 리 없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있었는데."

"뭐가 신경 쓰이는데?"

강승현은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숲의 흙을 집어 들었다.

"붉은 숲은 이렇게 촉촉한 흙으로 이루어져 있죠.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게 특징이에요."

"그렇지. 음침한 숲이니까."

"그런데 여기는...."

강승현은 흙을 버리고 동굴 벽을 손으로 쓸었다. 까슬까슬한 모래알갱이가 묻어나왔다.

"메마르고 까슬까슬한 모래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죠."

"엑. 진짜네."

김호정도 동굴 벽을 손으로 쓸었다. 마찬가지로 손에 묻는 건 모래알갱이뿐이었다.

"즉, 붉은 숲에선 거의 보기 힘든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촉촉한 흙 대신 메마른 모래가 묻어나오는 동굴. 똑같은 붉은색이라 그냥 봐서는 눈치채기 힘들다.

강승현은 아까 동굴 벽을 파본 덕분에 알아차린 것이다.

"마치 이 동굴만 다른 곳에서 통째로 옮겨진 것처럼."

"오, 소름. 오싹했어."

"자세한 건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이래저래 수상한 장소인 건 틀림 없죠."

무더기로 발굴되는 스카라베도 그렇고.

동굴을 점거한 레드로드의 태도도 그렇고.

"뒤져보면 뭔가가 나올 겁니다."

"음, 발릭 부부라면 알고 있으려나?"

트라코티 토박이인 두 사람이라면 동굴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승현 일행은 숙소용 굴로 되돌아갔다.

-"오셨어요? 자자, 식기 전에 드세요!"

"재료가 좋아서 맛도 좋아요."

두 사람이 돌아오자 발릭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늘 저녁은 미트볼과 채소볶음.

그리고 곡물가루로 끓인 죽이었다.

"오, 냄새 좋다."

"잘 먹겠습니다."

둘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요리 실력이 형편없는 둘과 달리, 발릭 부부가 차린 저녁은 아주 훌륭했다.

"우리끼리 왔으면 또 꿀꿀이 죽을...."

"역시 이 사람들 데려오길 잘했네요."

강승현은 음식을 먹으며 발릭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두 분은 트라코티 토박이라고 하셨죠?"

"네. 둘 다 트라코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무서워서 다른 지역은 가본 적도 없는 촌뜨기들이죠."

데이지가 루디에게 죽을 떠먹이며 답했다.

"그럼 붉은 숲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음...."

"그게...."

발릭 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가 안 될 정도예요."

발릭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희 트라코티 마을은 카마르의 부탁을 받아 레드로드 패거리 아지트 수색에 몇 번 협조했습니다."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은 레드로드의 흔적을 찾느라 붉은 숲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이 동굴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한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도 모를 겁니다."

"이런 동굴에 대해선 들어본 적도 없어요."

즉, 여기는 붉은 숲에 몇십 년간 살았던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도 모르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건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역시 레드로드 녀석들한테 물어봐야겠네요."

강승현은 그릇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이런 중대한 비밀을 알아내려면 간부급 멤버를 털어야 한다.

'로센트, 그 자식이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보스는 아니지만 레드로드 패거리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강승현은 로센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타박, 타박, 타박!

그때였다.

"가, 강승현 힐러!"

어찌 된 일인지 로센트가 먼저 강승현을 찾아온 것이다.

112. 상처 없는 통증 1

"무슨 일이시죠?"

"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너무 급한 일이라...."

로센트는 숨을 크게 헐떡이며 말했다. 안색이 무척 나쁜 걸 보면 정말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안 그래도 만나러 갈 생각이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찾아와줄 줄이야.'

찾아갈 수고를 덜었다.

강승현은 우선 로센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애들 몇 명이 쓰러졌어.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아."

대략 10분 전,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던 도적단원들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동시에.

"힐러의 도움이 시급한 상황이야."

레드로드 패거리에는 정식 힐러가 없다. 치료 담당이라곤 어깨너머로 약초학을 배운 약제사 한 명뿐.

그래서 지금까지는 부상자가 생기면 트라코티의 힐러를 찾아갔지만.

'비 때문에 어렵겠지.'

이런 폭우 속에서 부상자를 트라코티로 옮긴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단원 중 유일한 치료 담당도 쓰러진 상태라고 한다.

"트라코티에서 힐러를 불러올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런 저녁 시간에 폭우를 뚫고 도적단 아지트에 찾아올 힐러는 없겠죠."

지금은 힐러를 불러오는 것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로센트는 고개 숙여 간절하게 부탁했다.

"하라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도와줘!"

"알겠습니다. 아지트에 묵게 해줬으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드려야죠."

강승현은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힐러라면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되는 법이다.

"이, 이 은혜는 꼭 갚을게!"

로센트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인사했다.

'마침 잘됐네. 이 녀석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물론 강승현은 훌륭한 힐러가 아니라 훌륭한 야매 힐러였기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돕진 않았다.

'치료해주는 대가로 레드로드에 대한 정보를 뜯어야겠군. 포인트는 덤이고.'

로센트를 도와주는 김에 레드로드 패거리와 놈들의 아지트에 대해 알아낼 생각이었다.

강승현은 받을 건 다 받으면서 남을 돕는 인간이었으니까.

"흔쾌히 승낙해줘서 정말 고마워."

물론 그의 속을 모르는 로센트는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초면에 이런 부탁 하려니 염치없지만... 너 말고는 부탁할 만한 힐러가 없어서."

"음.... 염치없는 걸 따지면 그쪽이 아니라 다짜고짜 재워달라고 쳐들어온 우리 아닐까?"

그 말을 듣던 김호정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신의 소통]을 끄고 강승현을 향해 작게 속닥거렸다.

"분명 강 선생이 때려서 다친 애일 거야. 아쉽지만 포인트는 못 받겠네."

"...제가 도적단원을 공격한 건 사실이지만, 힐러한테 치료받아야 할 만큼 심하게 패진 않았거든요."

실제로 강승현이 제압한 도적단원들은 전부 자기 발로 걸어서 아지트에 도착했다.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맞은 녀석은 없었다.

"아까 쓰러트린 녀석 중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들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다면 가장 먼저 강승현이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 환자가 왜 생긴 걸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로센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환자는 한 명이 아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같은 증상을 보인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자세한 건 환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죠."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로센트를 향해 말했다.

"바로 갈 테니 안내해주세요."

-저벅, 저벅, 저벅.

강승현 일행은 로센트를 따라 구불구불한 동굴 길을 걸어갔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동굴 방 앞이었다.

내부를 들여다보자 간이침대와 책상, 유리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의무실이군요."

"맞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곳이야."

정식 명칭은 레드로드 의무실.

이름은 뭔가 거창하지만, 힐러가 없어서 힐은 받을 수 없고 간단한 응급 처치만 가능하다.

"지금은 쓰러진 단원들을 돌보는 방으로 쓰고 있지만...."

로센트는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하나 같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속이 메스꺼워...."

"아...으...으윽."

"머, 머리가 아파."

"세상이 빙빙 도는 거 같아...."

정신을 잃은 사람이 4명. 정신은 차렸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8명이었다.

"어, 엄청 많잖아!"

"기껏해야 네다섯 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레드로드 패거리는 37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도적단이다.

이 중 환자가 12명이니 무려 전체 단원의 1/3이 쓰러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쓰러졌다는 건,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는 뜻이죠."

[열 감지]

강승현이 스킬을 사용하자 주위 환자의 몸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36.7℃]

[36.4℃]

[36.5℃]

'일단 체온은 정상이고.'

강승현은 가장 가까이 있던 환자의 몸을 살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고, 혈색도 나쁘지 않았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흔적은 없어.'

감염이나 물리 공격은 원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열 감지]를 해제하고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패닉][혼란][환상통]

[멘탈아웃]

[정신력 과다상실]

[정신력이 심하게 낮은 상태다.]

[환상통으로 인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정신붕괴를 일으킨다.]

환자의 몸 위로 온갖 정보가 떠올랐다.

'역시 이게 원인이었군.'

환자들을 괴롭히는 고통의 정체는 '환상통'이었다.

-환상통.

보통은 이미 절단되고 없는 신체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뜻하지만, 아즐 대륙에선 정신적 대미지를 입히는 상태이상을 말한다.

'나머지도 만만치 않지만, 이 중에서는 가장 위험한 상태이상이지.'

강승현이 심각한 얼굴로 시스템창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김호정이 말을 걸었다.

"어때. 뭐 좀 알아냈어?"

"네. 정신력 과다상실로 인한 환상통입니다."

마력을 과하게 쓰면 [마력 고갈]이 발생하는 것처럼, 정신력이 심하게 감소하면 환각이나 환상통 같은 상태이상에 걸리는 [정신력 과다상실]이 발생한다.

"환상통?"

"몸에 아무 이상도 없는데 통증이 느껴지는 상태이상이에요. 그래서 체력은 줄어들지 않지만, 고통 때문에 정신력은 줄어듭니다."

실제로 방 안의 환자들은 다친 곳도 없었고 체력도 멀쩡했다. 그럼에도 고통스러워하는 건, 이들의 고통이 실체가 없는 환상통이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몸에서 통증이 느껴진다고?"

"거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 강도가 심해집니다. 당연히 정신력 감소 속도도 빨라지겠죠."

즉, 환상통 환자를 그냥 방치하면 정신력이 바닥나서 정신붕괴로 미쳐 죽게 된다.

"육체에는 아무 피해도 주지 않고 오직 정신만 망가트려서 죽이는 끔찍한 상태이상 중 하나죠."

"진짜 끔찍하잖아."

그래서 환상통에 시달리다 죽은 환자의 시신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지만,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다고 한다.

"거기다 환상통은 실체가 없어서 치료하기 힘들어요. 일반적인 치료는 안 통하니까."

"그, 그럼 방법이 없는 거야...?"

로센트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니 환상통을 발생시키는 원흉, 정신력 과다상실 상태를 없애는 게 유일한 치료법입니다."

정신 계열 상태이상이 다 그렇듯, 환상통은 멘탈이 튼튼한 사람에겐 효과가 거의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환자들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책상 좀 빌리겠습니다."

강승현은 의무실 구석의 책상으로 향했다.

이 책상은 레드로드 약제사가 포션을 제조할 때 쓰는 거라 포션 제조용 도구가 갖춰져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정신력 포션과 평온 포션.'

정신력 포션은 이름 그대로 정신력을 채워주는 포션이고, 평온 포션은 정신력 감소 속도를 늦춰주는 포션이다.

강승현은 이 두 포션을 조합해서 정신력 과다상실 치료제를 제작할 생각이었다.

"만들기 어려운 포션이야?"

"포션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둘 다 만들기 어려운 포션은 아니다. 제조 난이도만 따지면 재생 포션보다 만들기 쉬운 편에 속했으니까.

"문제는 재료 구하기가 빡세다는 건데."

정신력 계열 포션 재료는 재생 계열 포션 재료보다 구하기 힘든 편이다.

그래서 제조 난이도는 쉬워도 재료 획득 난이도가 높아서 많이 만들어 둘 수가 없다.

'카마르에서 재료를 몇 개 구입하긴 했지만, 이걸로는 택도 없겠어.'

강승현은 책상 위에 포션 재료를 꺼내 놓았다. 지금 가진 걸로는 기껏해야 3~4개밖에 만들 수 없다.

"아, 강 선생! 이거 포션 재료 아니야?"

그때, 김호정이 의무실 유리장을 가리켰다.

유리장 안에는 포션과 포션 제작용 재료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전부 레드로드 약제사가 붉은 숲에서 정성스럽게 캐온 약초들이다.

"붉은 숲에서 자란 것들이라 전부 빨간색이네요."

"이 중에 쓸 수 있는 거 없어?"

"지금 확인해볼게요."

강승현은 유리장을 열고 재료들을 살폈다.

"백꼬리망초 꽃잎에 헬레보루스, 뒤틀린 석영 이끼, 아나토...."

재료는 평범한 것부터 제법 희귀한 재료까지 꽤 다양했다.

"말린 카마타리 뿌리랑 심향나무 열매."

그중에는 정신력 계열 포션에 쓸 수 있는 재료도 있었다.

[말린 카마타리 뿌리]

[카마타리의 뿌리를 잘라서 만든 약재.]

[말리면 말릴수록 고약한 냄새가 난다.]

[냄새와 다르게 맛은 달짝지근한 편.]

[심향나무]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진 나무.]

[열매와 껍질을 약으로 쓴다.]

[공격적인 몬스터한테 쫓길 때 심향나무 근처로 도망치면 공격성이 살짝 줄어든다.]

'품질도 좋고, 성능도 괜찮아. 이거면 좋은 포션을 만들 수 있겠는데.'

마탑 놈들이 재료를 구하러 붉은 숲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유가 있었다.

희귀하고 강력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

"로센트 씨, 지금 부려먹을. 아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죠?"

"나 포함 25명... 아니지, 17명 정도려나."

레드로드 패거리 37명 중 부상자 12명을 제외하면 남은 단원은 25명.

거기서 8명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으나, 당장 활동할 수 있는 인원은 17명이다.

"17명이면... 뭐, 괜찮겠네요."

강승현은 뭔갈 생각한 듯 실실 웃었다.

레드로드 약제사가 보관해둔 재료는 고작해야 10개 정도.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다.

"아까 하라는 건 뭐든지 한다고 했죠?"

"어, 응? 그랬지...."

"치료제를 만드려면 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거든요."

그리고 이것들은 전부 붉은 숲에서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이다.

강승현은 상쾌한 미소를 짓더니,

"비가 콸콸 쏟아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죠."

로센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단원들 데리고 숲에 가서 더 구해오세요."

113. 상처 없는 통증 2

이런 늦은 시간에 숲을 뒤지며 재료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당연히 개고생 확정이다.

"심향나무 열매 10개와 카마타리 뿌리 10개를 구해오세요."

하지만 강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치 퀘스트 주는 NPC라도 된 것처럼 레드로드 패거리한테 임무를 맡겼다.

"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성능 치료제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환자들의 회복속도가 빨라지겠죠."

그는 효율적인 치료를 위해서라면 남을 고생시키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쓰러진 애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어. 뭐든 해야지! 뭐든 한다고 했으니까!"

로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오를 다짐했다.

아픈 동료들을 위해 폭우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물론 폭우 속 붉은 숲을 뒤지려면 엄청나게 빡세겠지.... 슬슬 난폭한 몬스터도 나올 거고."

로센트는 폭우 속에서 몬스터한테 쫓기는 미래를 떠올렸다. 각오를 다짐하긴 했지만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몬스터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응?"

"어디서 구한 건진 몰라도, [마력 오염의 사슬] 스크롤을 갖고 있으면서."

[마력 오염의 사슬]은 사람은 물론이고 몬스터한테도 매우 효과적인 강력한 스킬이다.

그리고 레드로드 패거리는 그 강력한 스킬이 담긴 스크롤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애뮬리 젬도 갖고 있었던 걸 보면... 그거 말고도 귀한 아이템이나 스크롤이 더 있을 텐데?"

레드로드 패거리 개개인은 강하지 않지만, 그들이 가진 아이템은 상당히 강력했다.

이 근처 몬스터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크롤과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로센트는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역시 뭔가 있긴 한가 보군.'

도적단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놈들이 손에 넣은 아이템들은 정상적인 루트로 얻어낸 게 아닌 것 같다.

'그걸 캐고 싶지만, 지금은 환자 치료가 급하니까.'

강승현은 로센트한테 스태미나 포션을 던져주며 말했다.

"빗속을 돌아다니려면 스태미나 소모가 심할 테니 조심하세요. 쓰러진 동료 구하려다 쓰러지면 안 되니까."

"...알았어. 그럼 애들을 부탁할게."

로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무실을 떠났다.

-"한 명도 안 남고 싹 가버렸네."

그렇게 의무실에 남은 건 12명의 환자들과 강승현 일행 둘뿐.

김호정은 바깥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우린 비 맞기 싫어서 여기 묵으러 왔는데, 정작 집주인들은 비 맞으러 달려가버렸어.... 뭔가 미안한데, 나도 나갈 걸 그랬나?"

"우리는 가봤자 도움이 안 됩니다."

강승현은 남은 재료를 긁어 모아 포션 제조를 준비했다. 로센트와 16인의 도적단이 돌아올 때까지 환자들이 버틸 수 있도록 임시 포션을 만들 생각이다.

"도움이 안 된다니?"

"붉은 숲에는 외부인들이 돌아다니면 길을 잃고 헤매는 저주 같은 게 걸려있죠."

강승현 일행은 안내인이 없으면 숲의 저주 때문에 길을 잃지만, 트라코티 마을 사람이나 붉은 숲에 아지트를 두고 있는 레드로드 패거리는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가봤자 방해만 되는 거죠."

"듣고 보니 그렇네."

김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차피 재료를 찾는 것도 외부인보단 토박이들이 잘할 테니 그 사람들만 보낸 겁니다."

"난 또 강 선생이 비 맞기 싫어서 보낸 줄 알았지 뭐야."

"물론 그것도 맞구요."

"진짜냐고."

어이없다는 듯 웃던 김호정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드로드 녀석들이 밖으로 싹 다 나갔잖아. 지금이야말로 아지트를 조사할 절호의 찬스 아냐?"

이래저래 수상함이 가득한 레드로드와 놈들의 아지트. 원래 강승현 일행은 로센트를 만나서 그걸 조사할 생각이었다.

"아뇨, 일단은 치료에 집중할 겁니다."

하지만 강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로센트 씨랑 약속했으니까."

그는 남을 놀려먹는 걸 매우 좋아하지만, 자기 할 일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오, 참된 힐러의 자세! 멋있어!"

"로센트와 16인의 도적단을 폭우 속으로 내쫓았으니, 치료제 정도는 곱게 만들어줘야죠."

"그 말만 안 했어도 정말 멋있었을 텐데."

김호정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참된 힐러가 아니라 참 못된 힐러라고.

-"일단 남은 재료로 응급처치부터 하죠."

강승현은 책상 위에 펼쳐둔 포션 재료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강승현이 제작하려는 포션은 평소 만들던 액체 형태가 아니라 둥근 알약 형태다.

"이번엔 왜 알약으로 만드는 거야?"

"고체형 포션은 느리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거든요."

액체형 포션은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대신 지속 시간이 짧다.

그래서 약빨을 빨리 받아야 하는 모험가들은 액체 포션을 선호한다.

"이 사람들은 정신력이 너무 내려가서, 단기간에 회복하는 건 힘들어요."

"오래오래 먹을 거면 액체 포션보다는 고체 포션이 낫다는 거구나."

"그런 셈이죠."

강승현은 우선 말린 카마타리 뿌리를 손질하기로 했다. 카마타리 뿌리는 쓴맛이 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햇빛에 바짝 말려서 건조시키면 쓴맛이 많이 줄어든다.

'약제사가 잘 말려둔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

그래서 포션 같은 식용 아이템 재료로 쓸 때는 말려서 쓰는 게 기본이다.

강승현은 말린 카마타리 뿌리를 열심히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럼 선생이 약 만드는 동안... 난 뭐하지? 딱히 할 일 없는데."

강승현이 카마타리 뿌리를 손질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김호정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나 혼자 아지트 조사하러 갈까? 마침 딱히 할 일 없는데!"

"...김호정 씨 혼자요?"

강승현은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 왜? 안 돼?"

"제가 생각하는 김호정 씨는 그런 느낌이에요."

"어떤 느낌?"

"추리소설에서 탐정도 아닌데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를 발견했다가 살해당하는 피해자 같은 사람."

강승현은 '혼자 조사하러 가면 들킬 것 같다.'라는 말을 자기 스타일로 돌려 말했다.

"평가가 정말 가차 없네."

"뭣보다 지금은 조사할 때가 아니라서."

김호정은 잊어버린 것 같지만, 지금 아지트에는 레드로드 단원이 몇몇 남아있다.

'소속원의 1/3이 쓰러졌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걸 하고 있다는 거겠지.'

아지트를 조사할 거라면 로센트한테 정보를 뜯어내고 해도 늦지 않다.

"한가하면 이것 좀 손질해주세요."

강승현은 책상 위의 심향나무 열매를 가리켰다. 심향나무 열매는 껍질이 워낙 단단해서 재료로 쓰려면 손질이 필수다.

"어떻게?"

"열매껍질을 부숴서 가루로 만들고, 씨와 속살을 분리해서 따로 모아주시면 되요."

이 정도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옆에서 누가 보조해주면 더 빨리 끝낼 수 있다.

"좋아, 그 정도는 쉽지!"

김호정이 싱글벙글 웃으며 껍질을 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으로 깨려 했지만, 금방 포기하고 삽을 꺼냈다.

-잠시 후.

"부탁한 거 다 했어."

김호정이 박살난 심향나무 열매를 내밀었다. 삽을 꺼내서 후드려팬 것같다.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재료를 사발에 담고, 물과 혼합 포션을 넣어 반죽했다.

이 반죽을 조금씩 떼어서 작은 구슬 형태로 둥글게 빚어서 굳히면 약이 완성된다.

[초소형 정신력 알약.]

[복용시 정신력을 회복시키면서 상태이상 '환상통'을 약화시킨다.]

[한 알의 크기는 대충 8mm 정도.]

'대충 만들었더니 품질은 하급이군. 원래는 단단하게 굳혀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관찰의 눈]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로 환자들을 살펴보자,

[정신력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곧 정신붕괴가 일어난다.]

몇몇 환자들이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신붕괴 터지기 직전이니까.'

일단 정신붕괴가 시작되면 어지간한 포션은 통하지 않는다. 최상급 포션이 아니고서야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일단은 이걸로 막아보자!'

그러니 정신붕괴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했다.

강승현은 미완성된 알약을 인벤토리에 쓸어담았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그리고 석궁을 소환하더니,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초소형 정신력 알약 화살을 생성합니다.]

환자들을 향해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박!

석궁에서 쏟아져 나온 화살이 환자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정신력이 30초간 느리게 회복됩니다.]

[+0.1]

[+0.1]

[+0.1]

..[+0.1]

급하게 만들어서 회복력이 좋진 않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살짝 회복된 정신력 덕분에, 환자들의 정신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휴...아슬아슬했네."

이걸로 한동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로센트 일행이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벌컥!

"가, 강승현 힐러! 부탁한 카마타리 뿌리와 심향나무 열매를 구해왔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로센트 일행이 돌아왔다. 빗속을 헤매고 다녀서 그런지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다친 사람은 없어."

"아, 그래요."

강승현은 아쉬워하며, 레드로드 패거리가 구해온 심향나무 열매와 카마타리를 살폈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귀중한 재료들이다.

"정말 신선하네요. 품질도 좋고."

"다들 고생해서 찾아낸 거야."

독특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붉은 숲에서 자라는 붉은색 돌연변이 생물들은 원종보다 더 강하고 좋은 효과를 갖고 있었다.

"바로 만들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강승현은 새로 구한 재료로 포션 제작에 들어갔다.

"다 됐습니다."

잠시 후, 강승현은 완성된 포션을 내밀었다.

좋은 재료를 넉넉하게 넣어 만들었더니, 처음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훌륭한 포션이 탄생했다.

"이걸 먹이면 통증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물론 상태가 심각한 만큼, 약을 먹이자마자 낫진 않는다. 완치되려면 적어도 며칠은 약을 빠트림 없이 복용해야 한다.

"약 복용 기간은 최소 4일, 상태가 좀 안 좋다 싶으면 1~2주 정도. 정신 계열 상태이상을 치료할 때는 약을 꾸준히 먹는 게 중요하니까, 꼭 신경 써주세요."

"저, 정말 고마워."

로센트는 눈물을 닦으며 약을 받았다.

10대 20대 사이의 유일한 40대 어른인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약 먹이는 건 우리가 맡죠!"

"로센트 님은 쉬세요!"

"다들 완치될 때까지 책임지고 먹이자!"

레드로드 단원들은 지친 로센트를 대신해 자진해서 동료들을 병간호했다.

"남들한테서 돈을 뜯는 양심 없는 도적놈들이라도, 자기 동료는 매우 소중한 모양이네요."

"아하하...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니까."

로센트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근데 말이죠."

"응?"

그때, 강승현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환상통은 흔한 상태이상이 아닙니다."

정신 계열 중에서도 최상위급.

환상통은 정말 강력한 정신공격에 당하거나, 대량의 정신력을 잃어버렸을 때나 걸리는 상태이상이다.

"그래서 아즐 대륙에서도 아주 위험한 지역, 즉 고난이도 던전이나 오염지대에서 걸리는 상태이상이죠."

"...."

"그런데 한 명도 아니고 10명이 넘는 인원이 환상통에 걸린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여기가 정말 평범한 도적단 아지트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승현은 로센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이 아지트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지 않은 한."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레드로드는 뭔가 엄청난 계획을 꾸미고 있다.

"듣고 판단할게요."

114. 진짜 목적

"처음부터 수상했어요."

일반적인 도적단은 지나가는 여행객을 습격해서 짐가방을 털고, 비싼 아이템을 팔아치우는 식으로 돈을 번다.

"스크롤은 한 번 쓰면 소멸하는 아이템이라, 팔아치우는 게 정상이거든요."

하지만 레드로드는 [마력 오염의 사슬] 스크롤 같은 값비싼 아이템을 아낌없이 써서 사람들을 습격했다.

"돈이 목적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죠."

"...."

"제가 볼 땐, 돈이 목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습격해서 카마르에 어그로를 끌려고 한 것 같거든요."

실제로 놈들의 깽판 덕분에 카마르는 이를 박박 갈면서 레드로드를 찾는 중이었다.

"마탑을 뒷배로 둔 도시 사람을 습격한다는 거 자체가 정상이 아닌데, 일부러 어그로를 끈다는 건 무슨 이유가 있다는 소리입니다."

카마르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사실상 진홍의 마탑에게 덤비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없는 청년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시죠."

"...."

"이 아지트의 정체가 뭔지, 레드로드의 진짜 목적이 뭔지."

강승현이 말을 마치자, 로센트는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무척 괴로운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전부 말해줄게."

"대답이 빨라서 좋네요."

"하지만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냐. 그래도 괜찮겠어?"

평가는 듣는 사람의 몫이다.

강승현의 대답을 들은 로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주변에 동굴 같은 건 없었어."

"동굴이 없었다고?"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터였거든."

트라코티 사람들이 이 동굴을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는 애초에 붉은 숲에 존재하지 않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 달 전쯤인가.... 갑자기 동굴이 생긴 거야."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 뜬금없이 동굴이 나타났다. 그것도 숲의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조한 모래 동굴이.

"애들은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했지. 자기들이 매일같이 놀던 곳에 처음 보는 동굴이 나타났으니까."

동굴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레드로드 패거리의 대장이었다. 녀석은 남들에게 비밀로 하고 동료들과 함께 동굴을 조사했다.

"동굴 안에는 처음 보는 몬스터도 있었고, 아이템도 있었다고 해."

"몬스터랑 아이템? 그럼 혹시...."

"그래 맞아."

로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동굴은... 일종의 던전이야."

몬스터를 처리하며 동굴을 조사하던 레드로드는 이 동굴의 정체가 던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상당히 거대한 규모의 던전.

"역시...."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이 동굴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도, 던전에서만 볼 수 있는 스카라베가 곳곳에 파묻혀 있는 것도, 혼자 숲하고 따로 노는 이유도.'

여기가 던전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다.

하나같이 던전의 기본 특성이었으니까.

'하지만 평범한 던전은 아니겠지.'

일반적인 던전은 아공간에 있어서 포탈을 통하지 않으면 진입할 수 없다.

문제는 이 동굴이 아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붉은 숲에 떡하니 박혀 있어서,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뒤로 이런 던전에 대해 이거저거 알아봤는데, 르페니... 대장 말로는 전이 던전이라고 한대."

'전이 던전?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데.'

강승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비록 아즐 대륙에 온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야매 힐러로 먹고살기 위해 온갖 지식을 습득했다. 던전에 관한 지식도 그중 하나였다.

'생각났다. 어떤 이유로 아공간이 아니라 아즐대륙에 생성된 던전을 뜻하는 단어였어.'

아즐 대륙에서 포탈을 통해 아공간으로 진입하는 일반 던전과 달리, 아공간에 있어야 할 던전이 아즐 대륙에 통째로 옮겨진 형태.

이러한 던전을 '전이 던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분명 몇백 년 전에 마지막으로 목격되고, 그 이후로는 발생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강승현의 기억대로라면 전이 던전은 몇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던전이다.

그래서 평범한 아즐대륙민들은 모르고 던전을 연구하는 학자와 마법사들이나 아는, 잊혀진 과거의 지식이었다.

'뜬금없이 붉은 숲에 나타나다니. 혹시 카마르에서 유출된 대량의 마력이 주위 환경에 영향을 미친 걸까?'

하지만 레드로드 패거리가 던전을 발견한 건 석 달 전, 마탑 사태로 카마르 결계가 소멸한 건 고작해야 3일 전.

마력이 영향을 끼친 것 같진 않다.

"그럼 지금까지 카마르나 트라코티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던전에 특수 은신 결계가 걸려있어. 허가받지 않은 외부인은 던전을 볼 수도 없고, 간섭조차 할 수 없거든."

이 결계를 드나들 수 있는 건 던전의 최초 발견자인 레드로드 패거리와 그들과 동행하는 사람뿐이다.

강승현 일행은 아까 레드로드 패거리와 함께 움직인 덕분에 결계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카마르놈들이 숲을 아무리 뒤져도 아지트 흔적 하나 찾아내질 못한 거군."

"외부인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려면 우리랑 같이 들어와야 하거든."

결계의 존재를 알게 된 레드로드는 그때부터 동굴을 아지트로 삼고, 곳곳을 탐색하며 보상을 획득했다.

그 과정에서 몬스터를 처치하기도 하고, 숨겨진 함정을 해제하기도 하면서.

"그럼 레드로드가 쓰는 아이템들은 던전에서 얻은 거겠군요."

"맞아. 전부 이 안에서 찾아낸 거야."

그렇게 얻은 보상 중엔 [마력 오염의 사슬] 스크롤이나 [안개에 숨은 밀키쿼츠] 같은 강력하고 희귀한 아이템들도 있었다.

레드로드 패거리는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을 순서대로 나눠 가졌다.

"이걸 발견했을 때는 정말 기뻤어.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물건이었으니까."

로센트가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손목에 착용하는 팔찌 형태의 방어구였다.

[관찰의 눈]

재빨리 [관찰의 눈]을 켜고 살피자,

[가드비틀의 브레이슬릿]

[???]

[원거리 대미지 피해 감소]

[???]

[자동 방어]

[???]

살짝 얻어낸 정보만 봐도 제법 괜찮은 아이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좋은 아이템을 갖고도 표정이 우중충한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나 보네요."

"...."

로센트는 씁쓸한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싸고 강력한 아이템을 갖고 다니면 주변에서 의심하겠지? 그래서 규칙을 몇 개 만들었어."

-획득한 아이템은 던전에서만 사용할 것.

-남들 앞에서 쓰거나 자랑하지 말 것.

레드로드 패거리는 이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덕분에 던전의 존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그러다 던전에서 [안티 매직] 스크롤을 얻었을 때 일이 터졌어."

그날 [안티 매직] 스크롤을 받은 단원은 레드로드에서 가장 어린 꼬맹이였다.

"그 녀석이 사고 싶은 게 있다면서 다른 단원이랑 카마르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마법사들한테 시비가 붙은 거야."

마법사들은 마법을 못 쓰거나, 마력이 낮은 사람들을 낮잡아본다. 그중 악질들은 평민이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만만하다 싶으면 마법으로 위협하고 괴롭히는 게 일상이었다.

"카마르 마법사들 싸가지는 유명하죠."

특히, 카마르는 마법사들이 모인 도시여서 그 강도가 다른 곳에 비해 심했다.

"같은 카마르 시민이어도 마력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데, 다른 마을 사람이면 오죽할까."

강승현은 카타일러 가문을 떠올렸다.

마법사의 도시에서 마법과는 상관없이 꿋꿋하게 자기 신념을 지킨 사람들.

"맞아. 그래서 우리 같은 평민들은 마법사를 이길 수 없으니, 평소엔 알아서 숙이고 다녔지만... 그날은 달랐어."

[안티 매직]의 효과는 일정 시간 동안 주위 마법을 무효화하는 능력. 이걸 사용하면 마법사는 멍청이가 된다.

"그 녀석이 [안티 매직]을 써버린 거야."

"전개가 마음에 드네요."

[안티 매직]의 효과로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자, 레드로드 꼬맹이는 봐주지 않고 두들겨 패버렸다.

"원래는 규칙을 어긴 단원을 혼내야 했지만, 다들 마법사한테 쌓인 게 많은 아이들이라서...."

그때부터 레드로드 패거리는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으로 카마르 마법사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당한 걸 되갚아 주겠다면서.

"그래도 거기까진 괜찮았어. 정말 나쁜 마법사들만 혼내주고 다녔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지."

레드로드는 그 뒤로도 새 아이템을 얻기 위해 던전을 깊숙한 곳을 탐색했다.

하지만 점점 던전 난이도가 높아졌다.

"던전에서 다친 사람이 나왔어."

"많이 다쳤나요?"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한동안 팔에 깁스하고 있어야 했어. 양쪽 다."

"도대체 던전에서 뭘 했길래...."

그때부터 레드로드는 약한 단원들을 탐색에서 제외했다. 대장과 부대장 같은 간부급 단원들만 탐색팀에 참가한 것이다.

"혹시 또 다치는 애가 나오면 안 되니까."

"힐러가 없으니 애로사항이 많네요."

간부급 단원들은 일반단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했기에, 보상을 가져오는 건 문제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2주 전부터야."

2주 전, 평소처럼 던전 탐색을 마치고 돌아온 탐색팀은 이상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안에서 엄청난 걸 발견했어.

-사정이 있어서 당장 쓸 수는 없지만, 이것만 깨우면 마법사 놈들을... 아니, 카마르를 날려버릴 수 있어!

그렇게 말한 탐색팀은, 잠깐 휴식을 취하고 다시 던전 안쪽으로 가버렸다.

"카마르를 날려 버린다고? 그럼, 레드로드의 진짜 목적은...."

"카마르를 박살 내버리는 거야."

레드로드의 진짜 목적은 카마르 테러였다.

놈들은 던전에서 발견한 아이템을 이용해 카마르를 공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잖아...."

로센트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단원들을 말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다들 마법사와 카마르를 향한 분노로 맛이 가 있었으니까.

"완전 돌았네요. 거기서 뭘 발견했길래."

"미안해, 그것까진 모르겠어."

탐색에 참가하지 않은 로센트는 탐색팀이 발견한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뭔가 위험하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부터 아지트 느낌이 이상했거든."

마치, 열어선 안 될 문을 열어버린 느낌.

실제로 그날부터 악몽을 꾸거나 피곤함을 호호하는 단원들이 크게 늘어났다고.

"...정신력이 낮아지면 금방 지치고, 악몽을 꿀 확률이 늘어나죠."

아무래도 환상통 사태는 레드로드 탐색팀이 발견한 '무언가'와 관련 있는 것 같다.

115. 안내하세요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마친 로센트는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아서 그런지 안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레드로드 녀석들.... 뭘 숨기고 있나 했더니, 이런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군.'

궁금증이 풀린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가바인 영주가 알았으면 좋아 죽었겠네.'

카마르를 노리는 건 몬스터만이 아니었다.

애새끼들로 이루어진 테러 조직도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술술 설명해주시는 걸 보면, 로센트 씨는 카마르 테러에 반대하는 입장이군요."

"응. 그렇지...."

로센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카마르한테 쌓인 게 많다는 건 알아. 그 마음은 이해해."

로센트 역시 단원들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도 젊은 시절엔 카마르 마법사들에게 고통받았으니까.

마력이 적다는 이유로, 마법을 쓸 줄 모른다는 이유로.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럼에도 로센트가 테러를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불길하고 위험해."

던전에서 뭘 찾아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도시 하나를 박살 낼 만큼 위험한 물건이라면, 그걸 쓰는 사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저도 그 말에는 동의해요."

강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여러 이유로 맛이 가긴 했지만, 카마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마법사 칭호를 가진 '가바인 디 알테가르츠'가 영주 자리에 앉아 있고, 마법직조술의 대가 '진홍의 마탑'의 보호를 받는 아즐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안전 도시였으니까.

"그런 도시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걸 보면 평범한 건 아니겠죠."

"역시 그렇겠지...."

"뭐, 한 번 쓸 때마다 수명이 1개월씩 날아간다거나."

보통 이럴 땐 사용자의 생명을 대가로 강한 힘을 빌려주는 아이템이나 스킬일 확률이 높다.

'아이템하고 스킬이 아닐 수도 있지만... 뭐가 됐든 수명 깎아 먹는 건 맞을 테고.'

아즐 대륙에는 왠지 목숨을 대가로 힘을 얻으려는 정신 나간 놈들이 많다.

레드로드도 카마르를 박살 내겠다고 쓸데없이 시간과 수명을 낭비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저, 그래서 말인데... 부탁을 두 번이나 하려니 염치없지만."

로센트는 정말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 숙여 애원했다.

"우리 애들을 쓰러트리고 테러를 막아줘!"

레드로드를 위해,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

"저도 마법사놈들, 카마르를 썩 좋아하는 건 아니긴 한데...."

아즐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력이 0인 야매 힐러인 만큼, 강승현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마법사들을 원 없이 마주치곤 했다.

당연히 마법사한테 좋은 감정은 없었다.

"이래저래 알게 된 사람들이 있어서."

강승현은 진홍의 마탑과 카타일러 기사단을 떠올렸다.

"그냥 망하게 둘 순 없거든요."

뭣보다 카마르는 강승현이 밤을 새워가며 지켜낸 도시다. 그것도 엊그제.

'밤새 고생해서 지켰는데 망하면 빡치잖아.'

이런저런 이유로, 카마르는 망하면 안 된다.

아직은 말이다.

"탐색팀, 그러니까 레드로드 대장과 간부급 애들만 처리하면 되는 거죠?"

"모, 목숨은 살려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생각했다.

'그러면 죽지 않을 만큼만 패고 치료해주면 되겠군.'

일명 병 주고 약 주기.

강승현이 생각하는 힐러의 장점 중 하나다.

"그래서 레드로드 대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강승현은 상쾌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동굴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아는데 우리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어."

"모른다구요?"

"우리는 탐색 완료 에리어에서만 지내거든."

레드로드 아지트 크게 3구역으로 나뉜다.

첫째는 미탐색 에리어.

둘째는 몬스터를 사냥하고 함정을 조사 중인 탐색 에리어.

셋째는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는 탐색 완료 에리어.

지금 레드로드 패거리가 생활 공간으로 쓰는 방이다.

"아마 탐색 에리어 어딘가에 있겠지만... 탐색하다가 방치해둔 곳이 꽤 많아서."

"그럼 정확히 어딨는지 모른다는 거군요."

"슬슬 식량이 떨어질 때가 됐으니... 새벽쯤에는 탐색팀이 돌아올 거야."

로센트는 그때 레드로드 대장과 만나서 쓰러트리는 걸 추천했다.

하지만 강승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있을까요."

환상통 사태가 터진 것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탐색팀이 찾아낸 '무언가'가 깨어났거나, 깨어나기 직전일 지도 모른다.

"제 생각엔 얼마 안 남은 것 같습니다."

"그, 그럼 빨리 방법을 찾아야.... 아!"

잠시 고민하던 로센트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탐색팀원 중 한 명이 무기를 수리하러 일찍 올라왔거든. 그 애라면 대장이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거야."

지금 아지트에 남은 인원 중, 바로 직전까지 탐색 에리어를 돌아다닌 사람은 그 친구가 유일했다.

"휴가 나온 탐색팀원? 좋네요."

녀석을 족치면 레드로드 대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호정 씨, 만나러 갑시다."

"헛."

강승현은 의자에 앉아서 졸던 김호정을 깨웠다. 이야기를 듣다가 중간에 자버린 모양이다.

"뭐야, 누굴 만나러 가는데?"

"레드로드 대장이요.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할게요."

"오늘도 일찍 자기는 글렀구나."

김호정은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휴가 나온 탐색팀원을 찾았다.

녀석은 아지트 구석에서 한가하게 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탱자탱자 놀고 있잖아."

"가만, 저 녀석은...."

강승현은 녀석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녀석은 아까 분명,

-내가 가서 대장 불러올게!

라고 말하며 은신 쓰고 도망치려다 잡힌 레드로드 7호였다.

'그래서 대장을 불러온다고 한 거구나.'

레드로드 대장이 어딨는지 아는 유일한 단원이었으니까.

강승현은 성큼성큼 걸어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응? 헉? 왜, 왜 그러세요?"

7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아까 강승현한테 물리치료 당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아, 네, 네! 저는 니켈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7호는 정중한 자세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녀의 이름은 니켈이었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잡소리는 빼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레드로드 대장은 어딨죠?"

"네?"

"레드로드 대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강승현이 그 말을 꺼낸 직후였다.

니켈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파즈즈즈즈!

이번에도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안개에 숨은 밀키쿼츠]를 써서 도망친 것이다.

"또 야?"

"그러게요."

[열 감지]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열 감지]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앗!

그러자 허공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도 체온을 감지해 은신 상태의 니켈을 감지할 수 있었다.

[36.8℃]

'정상 체온.'

강승현은 붉은빛을 눈으로 좇으며,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후크 샷]

촤르르르르!

빠른 속도로 날아간 갈고리 화살이 붉은빛을 움켜잡았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은신 상태인데?"

붉은빛에서 니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에 당한 걸 보면 학습 능력이 없는 모양이다.

"몇 번을 해도 안 통하니까 풀기나 해요."

"도대체 뭐냐고. 마법도 안 쓰면서."

파즈즈즈즈즈.

니켈은 분한 얼굴로 은신을 풀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요. 대장은 어딨죠?"

"대, 대장은 왜 찾는 건데? 잠만 자고 간다고 했잖아! 설마 모험가 조합에 넘기려고?"

"그건...."

강승현은 로센트의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그만뒀다. 이유야 어찌 됐건 로센트는 지금 동료들을 배신한 셈이니까.

'이런 건 입 다물고 있는 게 좋겠지.'

내부고발자는 지켜줘야 하는 법이다.

"너한테 알려줄 이유가 없는데."

강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니켈을 석궁으로 겨눴다.

"지금 잡담할 시간 없으니까, 아까처럼 얻어터지기 싫으면 빨리 말해."

"끄응...."

대장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얻어맞는 건 싫은 니켈이었다. 그녀는 3.5초 정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어차피 지금은 알아도 못 가."

"못 간다고?"

니켈은 강승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대장은... 비밀방 같은 곳에 있어."

"그러면 거기까지 안내해주면 되겠네."

"지금은 문이 잠겨 있어서 못 들어가."

비밀방에서 나오는 건 자유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다.

그리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대장뿐이다.

"정~ 대장을 만나고 싶으면 나처럼 여기서 기다리시든지."

"여기서?"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은 이곳 어딘가에 그 비밀문이라는 게 있다는 소리다.

"여기에 문이 있다고? 벽밖에 없잖...."

김호정은 삽을 꺼내 벽을 긁었다.

파각!

우수수수!

그러자 안에서 석화된 스카라베가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그런 식으로는 못 찾을걸요."

보통 던전의 비밀방은 특수한 은신 마법이나 봉인 마법의 형태로 숨겨져 있다.

그래서 맨눈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

"맞아, 그냥은 절대 못 찾아.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못 찾는 문이랬거든."

실제로 비밀방으로 이어지는 문에는 강력한 은신 마법이 걸려 있었다.

열쇠 없이 문에 걸린 마법을 간파하려면 적어도 카마르 영주급은 되어야 할 것이다.

"뭐, 그 정도는 쉽죠."

강승현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이지만,

[관찰의 눈]

조금 특별한 푸른 눈으로 쳐다보면 그 안에 숨겨진 마법진을 볼 수 있었다.

강승현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김호정 씨, 여기가 비밀방 입구예요."

"여기라고? 좋았어!"

김호정은 벽을 향해 삽을 휘둘렀다.

파각!

파가각!

우수수수수!

그러자 석화된 스카라베가 또 쏟아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또 나오잖아!"

"그야 이것도 벽이니까."

쿠르르릉!

그와 동시에 벽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벽 너머의 빈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아아!

그곳에는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는 복잡한 형태의 마법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마법진이 비밀방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입구를 찾은 건 좋은데, 열쇠가 없으니 문을 열 방법이 없네."

"굳이 열고 들어갈 필요 없죠."

강승현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부수고 들어가면 되니까."

116. 비밀방 내부 1

"저걸 부수겠다고?"

니켈은 강승현의 말을 듣고 기겁했다.

"저건 진짜 강력한 마법진이라고!"

비밀방 입구는 이중 삼중으로 겹쳐진, 복잡한 형태의 고위 마법진이다. 저런 걸 해제하려면 카마르 영주급 대마법사가 최소 3명은 필요했다.

"상식적으로 가능할 리가...."

"잠자코 지켜보기나 하세요."

강승현은 자신이 꺼낸 아이템을 바라보았다.

그가 꺼낸 건 주황색 구슬.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였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니까."

강승현은 마법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투척★]

휘이이익!

정중앙을 향해 보주를 투척했다.

평범한 아이템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엄청난 마력 저항력을 가진 성유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진이라도 근본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물체다. 강력한 마력 저항력으로 공격하면 쉽게 무너트릴 수 있다.

쿵!

투척한 보주가 마법진에 충돌한 순간,

끼기기기기기!

파직, 파지직.

소음과 함께 마력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마법진이 보주의 마력 저항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쩌저적!

쩌적!

충격파의 여파로 주위의 벽과 바닥이 쩍쩍 갈라져 내렸고,

"우아앗!"

"아이고!"

마법진 옆에 있던 니켈과 김호정은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우수수수수!

"그만 좀 나와!"

묻혀 있던 석화된 스카라베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건 덤이었다.

파각, 파각, 파각!

쨍강!

샤아아아앗....

부서진 마법진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이 모든 일은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깔끔하게 박살 나서 좋네요. 이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혼자 멀쩡하게 서 있던 강승현은 비밀방 입구를 바라보았다. 마법진이 완전히 소멸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됐다.

물론 열쇠로 연 게 아니라 강제로 때려 부숴서 열었더니 바닥이 으스러지고 벽이 뒤틀리는 등, 입구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역시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라니까. 아일 놈한테 고마워해야겠는걸.'

강승현은 먼지투성이로 바닥을 굴러다니던 보주를 챙겼다. 아일이 이 모습을 봤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꽤 강력한 마법진은 맞나 보군.'

원래 보주는 밝은 주황색이지만, 지금은 탁하게 흐려진 상태였다. 마법진을 부수느라 힘을 너무 과하게 썼기 때문이다.

'슬슬 수리해야겠는걸.'

신의 힘이 깃들긴 했지만 성유물도 일단은 아이템이다. 어느 정도 썼다 싶으면 사제한테 맡겨서 힘을 회복시켜야 했다.

'근데 키르카라슈텔 교단의 유일한 사제는 지옥에 떨어졌으니, 내가 야매로 고쳐야겠네.'

강승현은 보주를 인벤토리에 처박고 니켈에게 다가갔다.

'내, 내가 뭘 본 거지?'

니켈은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가 있었다.

'저걸 구슬 하나 던져서 부쉈다고?'

강승현은 숨겨진 입구를 찾아낸 것도 모자라, 입구를 지키던 마법진까지 가볍게 부숴버린 것이다.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현실이었다.

"니켈 씨. 보이시죠? 문 열린 거."

강승현이 비밀방을 가리켰다. 입구 문은 열리다 못해 문짝이 뜯겨나가 소멸한 상태다.

"잘... 보이네요. 아주 잘."

"잘됐네요.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요."

"예. 그랬죠...."

"그럼 가는 김에 저희도 대장님이 계신 곳까지 안내해주세요."

"네...."

결국, 니켈은 강승현을 막는 걸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저벅, 저벅, 저벅.

세 사람은 벽 너머 비밀방으로 진입했다. 니켈이 앞장서서 걷고, 강승현과 김호정이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쪽은 어둡네."

"아직 조사 중인 에리어니까요."

불을 환하게 밝혀둔 바깥쪽과 달리, 비밀방 안쪽은 횃불 몇 개만 설치되어 있어서 어두웠다.

'야간 투시를 얻길 잘했군.'

강승현은 [카타일러 야간 전투 가이드] 덕분에 야간 투시 효과를 받을 수 있었다.

"느낌이 묘하네. 전이 던전이라 그런가?"

"내부 구조는 일반 던전과 다를 게 없는데 말이죠."

"이런 음침한 곳을 아지트로 삼을 생각을 하다니. 레드로드 녀석들은 취향이 독특해."

김호정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던전을 다녔지만, 전이 던전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던전이니까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잖아."

"확실히."

일반 던전은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포탈이 사라지면서 던전이 서서히 소멸한다.

그렇다면 전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읽었던 책에는 없던 내용이었지.'

아즐 대륙에서 전이 던전이 사라진 지 몇백 년이 지나서,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탐색이 끝난 전이 던전을 건축물로 활용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던전은 보스 몬스터의 힘으로 유지되니까... 보스가 사망하면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겠군.'

뭐가 됐든, 오래 살 만한 곳은 아니다.

그랬다면 뭔가 기록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

"비가 쏟아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음침한 곳에 안 오는 건데."

"그냥 캠핑 왔다고 생각하고 즐기세요."

"난 캠핑 싫어. 동굴이나 길바닥이 아니라 안락한 침대에서 자는 게 좋다구. 이왕이면 아즐 대륙이 아니라 한국에서...."

김호정은 이세계 포인트 노동자 신세를 한탄하며 차원 너머의 자기 집을 그리워했다.

"이쪽이에요."

"벌써 다 왔어?"

"대장하고 다른 애들은 여기 있어요."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앞서간 니켈이 벽을 두드렸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이 열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

"분명 들어가자마자 덤빌 거 같은데, 제가 먼저 가서 설득해볼까요?"

"아뇨, 설득은 안 먹히겠죠. 니켈 씨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강승현이 숨겨진 문을 찾아내고 마법진을 부수고 들어왔다는 말을 동료들이 믿어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싸움은 필연이다.

"이왕이면 다들... 살살 때려주세요."

"노력해볼게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꺼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벽 안으로 들어가자, 레드로드 패거리 몇 명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놈들이 레드로드 탐색팀인 모양이다.

"실례합니다."

"응?"

"저것들 뭐야?"

"대장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강승현이 당당하게 인사하자 탐색팀원들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침입자다!"

"시발,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됐으니까 그냥 조져!"

니켈의 말대로 놈들은 강승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덤벼들었다. 무기를 꺼내는 녀석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단원들은 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이 녀석들은 스크롤 빼면 싸울 줄 모르나?'

강승현은 놈들이 스크롤을 찢으려는 순간,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점착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방아쇠를 당겨 점착 화살을 발사했다.

'일단 스크롤 봉인하고.'

촤아악!!

촤악!

"제, 젠장!"

"끈끈이 트랩인가?"

끈끈한 액체가 스크롤에 달라붙어 찢는 걸 방해했다. 스크롤은 확실하게 찢지 않으면 효과가 발동하지 않는다.

"스크롤을 제대로 쓰고 싶으면 바로바로 찢을 수 있는 도구를 갖고 다녀야지."

"이 새끼가!"

"됐어. 그냥 패 죽여!"

빡친 탐색팀원들이 스크롤을 포기하고 강승현에게 덤벼들었다.

퍼억!

"여기 사람 하나 더 있거든?"

그러자 뒤에 있던 김호정이 튀어 나가 탐색팀원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이스 탱킹."

"커헉!"

강승현은 그 틈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탐색팀원들의 복부를 걷어차고,

[작살 화살★]

파바바바박!

녀석들의 발목을 향해 작살 화살을 처박아주었다.

"끄아아악!"

"아아아악!"

"내 발! 발!"

"지금 이런 말 하려니 웃기지만, 전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강승현은 혹시나 해서 두 번째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대장님만 만나게 해주면 부상도 치료해줄 테니...."

"지랄 마!"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분노한 탐색팀원 하나가 꽤 비싸 보이는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군.'

[크리스탈 스텝]

녀석의 나이프가 새파란 빛을 뿜어냈다.

맞으면 상태이상 '출혈'을 일으키고, 높은 확률로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히는 도적 계열 스킬이다.

'거슬리는 스킬이긴 한데.'

뻐억!

강승현은 탐색팀원의 손등을 향해 돌려차기를 날렸다.

'안 맞으면 그만이지.'

단검이 몸에 닿는 것보다, 발이 손등을 걷어차는 속도가 빨랐다.

"단검처럼 리치가 짧은 무기를 쓸 땐 좀 더 빨리 움직여야지."

"크헉!"

녀석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단검을 떨어트렸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과 스킬을 가져도, 그걸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텅!

"스피드에 자신 없으면 투척을 하든가."

강승현은 떨어진 단검을 주워서,

[투척★]

파악!

자신에게 덤벼오는 다른 탐색탐원을 향해 집어 던졌다.

'물론 나는 투척도 스피드도 자신 있지만.'

"끄아아악!"

녀석은 나이프를 피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퍼억!

"헉! 헉! 이겼다!"

"제, 젠장...."

그 사이, 김호정도 단원 하나를 더 쓰러트렸다. 김호정의 소중한 파트너 금삽이 큰 활약을 한 모양이다.

"나가 뒈져!"

그때, 검은 셔츠를 입은 탐색팀원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른 잡몹에 비해 움직임이 상당히 빠른 놈이었다.

화악!

[신월의 빛]

검에서 눈부신 검기가 뿜어져 나와 김호정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콰악!

"크헉!"

"감히!"

검은 셔츠는 틈을 주지 않고 김호정을 밀어붙였다. 인간 김호정은 속도가 꽤 느려서, 상대가 고속으로 움직이면 그냥 샌드백이 된다.

"김호정 씨, 비켜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김호정에게 체력 화살을 쏴주고, 검은 셔츠와 정면으로 대치했다.

캉!

캉!

녀석의 검과 강승현의 청은 단검이 쉴 새 없이 맞부딪쳤다. 확실히 다른 녀석들에 비해 움직임이 좋고, 검을 제대로 배운 느낌이었다.

"그쪽은 다른 애들보다는 좀 나은 것 같네요."

"겁도 없이 아지트에 쳐들어 왔겠다!"

"하지만 대장이 아니라면...."

강승현은 두 번째 단검 무기, 카마르의 은빛 영광을 꺼냈다.

"볼일 없으니까 비키세요."

휘익!

[투척★]

파악!

"큭!"

날아간 은빛 영광이 녀석의 손목에 꽂혔다. 녀석은 어깨를 움찔거리긴 했지만, 검을 놓진 않았다.

"어깨빵의 복수다!"

하지만 그 직후, 뒤로 빠져 있던 김호정이 금빛 영광을 휘둘렀다.

퍼어억!

[크리티컬!]

"끄윽!"

이번 공격은 버틸 수 없었는지, 검은 셔츠는 들고 있던 검을 놓쳐버렸다.

"김호정 씨, 복수할 거면...."

강승현은 녀석이 떨어트린 검을 챙겨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아빌레의 메마른 검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아악!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 검은 셔츠의 왼쪽 어깨에 검을 닮은 화살을 처박았다.

"받은 걸 확실하게 돌려줘야죠."

"이 개자식이!"

검은 셔츠는 어깨의 화살을 뽑아 쥐더니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처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지만, 너무 빡쳐서 안 보이는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프리아의 화살 회수]

[아빌레의 메마른 검 화살을 회수합니다.]

파앗!

강승현이 [화살 회수]를 사용하자, 검은 셔츠가 쥐고 있던 화살이 인벤토리로 되돌아왔다.

[회수 성공!]

[회수된 아빌레의 메마른 검 화살.]

"두 배로 돌려줘도 좋고."

강승현은 녀석의 반대쪽 어깨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저벅, 저벅, 저벅.

"야야, 알았으니까 애들 놔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빨간 머리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한테 볼일 있다며."

드디어 레드로드의 대장이 나타났다.

117. 비밀방 내부 2

'저 녀석이 우두머리로군.'

강승현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단원들처럼 빨간 머리에 빨간 유니폼 차림이지만, 머리에 하얀 반다나를 착용하고 있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겠죠.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르페니 데머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르페니는 띠꺼운 얼굴로 말했다.

"하나는 뭔지 모를 석궁쟁이 자칭 힐러, 하나는 뭔지 모를 삽쟁이. 둘 다 마법사는 아닌 거 같군."

"네. 마법하고는 연이 없는 사람들이죠."

"우린 마력이 별로 없거든."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내 모가지?"

르페니는 두 사람이 현상금을 노리고 찾아온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게 아니고서야 외부인이 도적단 아지트에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 뭔가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하지만 강승현은 상식적이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희는 여행객입니다. 트라코티 마을로 가다가 폭우가 쏟아져서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레드로드분들을 만났거든요."

"여행객?"

"덕분에 하룻밤 신세지게 됐으니 대장님께 감사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이 옷도 레드로드 애들이 갈아입으라고 빌려준 거야."

김호정이 레드로드 유니폼을 가리켰다. 그걸 본 르페니는 더욱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개소리하고 있네. 도적단 아지트에 묵으러 오는 새끼가 어딨어?"

"진짠데요."

"그게 맞다고 쳐도...."

여기는 레드로드 아지트, 던전 동굴의 탐색 에리어다. 입구에 강력한 은신 결계 마법이 걸려 있어서 레드로드 단원들도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당연하지만, 하룻밤 묵으러 온 손님이 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고작 인사 하나 하겠다고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게 말이 되냐? 지랄 말고 똑바로 말해."

"누가 그러더라구요. 당신들이 던전 안에서 뭔가 위험한 걸 발견했다고."

로센트의 말에 의하면 탐색팀이 발견한 무언가는 아직 쓸 수 없는 상태다.

아직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 하나를 무너트릴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처리해버리는 게 정답이다.

"그걸 알아보러 왔습니다."

"위험한 거...? 혹시 로센트가 말해줬냐?"

"응?"

"하여간 그 아저씨, 겁 되게 많아요."

예상외였다.

이름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르페니는 범인이 로센트라는 걸 바로 예상하고 맞춰버렸다.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이다.

"배신했다고 펄펄 날뛸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러게요."

"우리 레드로드에서 내가 카마르 테러 실패할까봐 겁먹은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거든."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외부인한테 털어놓냐고."

로센트는 어이없다는 듯 웃어댈 뿐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다.

"돌아가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줘. 자세히는 말 못 해주지만, 테러는 실패할 수가 없어."

녀석한테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느껴졌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찾아냈길래.

"그러니까 그 방법이 뭔지, 그게 궁금한 건데요."

"그걸 너네한테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르페니는 기가 찬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외부인한테 알려줄 정보는 여기까지다. 알았으면 가서 잠이나 자시지."

당연하겠지만, 던전에서 발견한 '무언가'에 대해 알려줄 마음은 없는 것 같다.

"혹시나 했는데, 시간 낭비였네."

강승현은 르페니를 향해 석궁을 겨누더니,

"처음부터 이렇게 물어볼걸."

파악!

방아쇠를 당겨 선전포고를 날렸다.

날아간 화살이 르페니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너도 네 부하들처럼 처맞기 싫으면 빨리 말해."

"이 새끼가...."

르페니는 뺨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귀가 뜯겨나갔을 것이다.

탓!

"해보자는 거지?"

분노한 르페니가 강승현을 향해 돌진했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서

'무기를 숨기는 타입이거나, 아니면....'

르페니가 주먹을 뻗자, 강승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콰아앙!

빗나간 주먹이 돌기둥에 충돌했다.

돌기둥은 무참하게 박살 났다.

'무기가 필요 없는 타입이겠지!'

즉, 르페니는 근접 전투 위주의 격투가.

다른 레드로드 잡몹들과 달리 어느 정도 실력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대장은 대장이라는 건가?'

상대가 근거리 공격으로 나온다면 굳이 가까이 가줄 이유가 없다.

[투척★]

강승현은 카마르의 은빛 영광을 투척했다.

슈욱!

"...!"

석궁을 든 상대가 대뜸 나이프를 투척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르페니는 급히 팔을 들어올리며 은빛 영광을 가드했다.

팍!

머리와 목을 보호한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작살 화살★]

하지만 강승현은 빈틈을 주지 않고 석궁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박!!

새까만 화살이 르페니를 향해 쏟아졌다.

"시발!"

르페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욕설을 내뱉으며, 옆에 있던 돌기둥을 걷어차 무너트렸다.

쿠르릉!

무너진 돌기둥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지만, 르페니 역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손해 보는 건 격투가다.

"역시 이딴 건 내 성격에 안 맞아."

르페니는 혀를 차더니 앞으로 돌진했다.

"그냥 이판사판이 낫지!"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할 생각으로 보인다.

'공격 스킬 없이 돌벽을 부수는 걸 보면, 파워는 자신 있나 본데.'

이럴 때 필요한 건 든든한 방패다.

강승현은 김호정을 향해 소리쳤다.

"김호정 씨!"

"오케이!"

뒤에 있던 김호정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몸빵은 나한테 맡겨!"

"꺼져!"

르페니가 뛰쳐나온 김호정한테 주먹을 날렸다.

쿵!

"윽!"

사람이 사람을 공격한 상황인데 철퇴로 철벽을 후려친 소리가 들려왔다.

'작살 화살은 너무 느리니까....'

김호정이 르페니와 대치하는 동안, 강승현은 레드로드 잡몹들이 떨어트린 무기를 주웠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해무검 화살을 생성합니다.]

[사브릴 곤봉 화살을 생성합니다.]

[부패의 청동 단검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악! 파박!

방아쇠를 당기자 온갖 무기 화살이 나아갔다.

"칫!"

파박!

르페니는 고개를 틀어 화살을 회피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건 팔로 막았다.

"우와, 이 자식 좀 센데?"

"어느 정도로?"

"나보다 강해!"

김호정이 놀랍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강승현은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겨서,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파바박!

김호정의 깎인 체력과 스태미나를 채워주었다.

"대부분은 김호정 씨보다 강하지 않나요."

"아니, 그러니까... 대충 차원 이동자한테 얻어맞는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김호정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반적인 아즐대륙민은 차원 이동자보다 약하다. 그러니 차원이동자급 파워를 낸다는 건 아즐대륙민 치고는 꽤 강한 놈이라는 뜻이다.

"비키라고!"

르페니는 심호흡을 하더니, 김호정의 복부에 정권 찌르기를 먹였다.

쿵!

"끅!"

역시 사람이 사람을 치는 소리가 아니라 철퇴로 철문을 후드려 팬 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다. 스킬 하나 더 써야겠...!"

김호정이 스킬을 쓰려는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갑자기 스킬이 취소되더니, 몸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우커컼!"

김호정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파직, 파지직.

"이, 이게 뭐야...?"

김호정은 식은땀을 흘렸다.

써지라는 스킬은 안 터지고 이상한 스파크만 펑펑 터지고 있었으니까.

"강 선생! 나, 나나 스킬이 안 나와!"

"잠깐, 다시 써보세요."

김호정은 다시 스킬을 사용하려 했으나,

"쓸 수 있음 써보든가!"

르페니가 쓰러진 김호정의 어깨를 짓밟았다.

콰악!

파지지지직!

"으어어억!"

이번에도 스킬이 취소되고 김호정의 몸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그 타이밍을 노려 [관찰의 눈]을 사용했다.

[몸에서 마력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로 인해 스킬이 취소됐다.]

'저건...!'

처음에는 전기 스킬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전기가 아니었다. 저 스파크의 정체는 순수한 마력이었다.

'마력 역류?'

몸속 마력이 어떤 이유로 터져 나오는 현상. 얼마 전에 진홍의 마탑에서 실컷 목격했었다.

'그땐 한곳에 너무 많은 마력이 모이는 바람에 터져 나왔다고 했는데.'

김호정은 가진 마력이 별로 없고, 지금은 마력이 모일 만한 상황이 아니다.

'저 자식하고 관계가 있는 건가?'

강승현은 르페니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움직이지 못하는 김호정을 발로 콱콱 밟고 있었다.

'김호정 씨가 저 녀석과 접촉하고 있을 때 마력 역류가 발생했지.'

역시 원인은 르페니가 맞는 것 같다.

"김호정 씨, 괜찮으세요?"

"아프진 않은데 눈물이 나!"

"그럼 아픈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김호정은 마력 역류 때문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내가 비키라고 했잖아!"

"강 선생, 헬프! 도움!"

급기야 김호정이 도움을 요청했다.

강승현이 다가가려는 순간,

"야, 무기 버리고 항복해."

"켁!"

르페니가 김호정의 목을 콱하고 짓밟았다.

"안 그럼 이 자식 목을 부러트릴 거니까."

"느어너너너너."

"그럼 후회하실 텐데."

강승현은 밟혀 있는 김호정을 바라보았다.

뭐라 말하려는 것 같지만 목이 짓눌려 있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충 입 모양으로 추측해보면 '나 신경 쓰지 마!' 라고 하는 것 같다.

'일단 저 자식을 좀 떼어놓을까.'

잠시 고민하던 강승현은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마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르페니를 향해 마력 화살을 발사했다.

슈욱!

"...!"

녀석은 이번에도 날아오는 화살을 팔로 막으려 했다. 본래 마력 화살은 몸에 닿으면 마력을 회복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지만,

파지지직!!!

마력 화살이 르페니의 몸에 닿는 순간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역시.'

강승현은 르페니가 가진 능력을 간파했다.

[관찰의 눈]

이어서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강승현의 눈이 푸르게 빛나며 정보가 나타났다.

[마력 반발자.]

[이 자는 강력한 마력 저항력을 갖고 있다.]

[마력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몸에 마력이 닿으면 '마력 스파크'가 발생한다.]

마력 반발자.

선천적으로 강한 마력 저항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몸속에 담긴 마력을 쓰지도 못하고 타인의 마력이 몸에 닿기만 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체질.

간단하게 마력 반발자라고 부른다.

르페니는 선천적 마력 반발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마법사를 싫어했던 거군.'

저런 체질로 태어났다면, 마법사들이 꺼리고 혐오했을 테니까.

"너 방금 뭘 날린 거냐?"

르페니는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살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면 몰라요? 당연히 마법 화살이죠."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건 마력 '포션' 화살이다. 레인저들이 쓰는 마탄 화살이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 화살과는 다르다.

'하지만 저 자식의 눈에는 평범한 마법 화살로 보이겠지.'

화살이 몸에 닿자마자 터져버렸으니까.

"...힐러가 왜 그딴 스킬을 사용하냐?"

르페니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게 말이죠."

강승현은 씩 웃으며 손을 펼쳤다.

팟-!

손 위에 붉은 엠블럼이 나타났다. 진홍의 마탑을 상징하는 크림슨 엠블럼이다.

"사실 제가 마법사라서요."

물론 강승현은 마법사가 아니다.

하지만 크림슨 엠블럼을 보여준다면 누구나 마법사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뭐?"

그러니 마법사를 치 떨리게 싫어하는 멍청이라면.

"그것도 카마르 최고의 마법사 집단, 진홍의 마탑 출신입니다."

특히, 카마르 마법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한다면.

"너 이 개씨발 새끼...."

속을 수밖에 없다.

"마법사였냐!!!!!!"

르페니는 김호정을 내버려 두고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저럴 줄 알았지.'

118. 비밀방 내부 3

"뒈져!!!!!!"

빡친 르페니가 강승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분노로 이성을 잃어서 아까보다 대미지는 훨씬 강해졌지만,

'그만큼 패턴이 단조로워지거든.'

정신 나간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만큼 피하기 쉬운 것도 없다. 강승현은 뒤로 물러나 가볍게 회피했다.

콰아아앙!

콰아앙!

"처먹어!!!!!"

그 대신 옆에 있던 바위가 대신 박살 나면서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솟구쳤다. 강력한 힘으로 때려 부숴서, 그 위력은 스킬에 맞먹을 정도였다.

'이건 귀찮겠네.'

쿵!

강승현은 석궁을 방패처럼 휘둘러 날아오는 바위 파편을 쳐내고,

"르페니 씨는 마법사를 정말 싫어하시는 거 같네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마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르페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관계로, 연속 마법 화살!"

파바바박!!

석궁에서 새파란 화살이 쏟아져 나갔다.

파지직!!!

파지지지직!

르페니의 몸에 닿은 화살이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져나갔다. 물론, 녀석은 마력 반발자인 만큼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 시발 마법사 새끼가!!"

하지만 어그로 효과는 확실했다.

르페니는 강승현이 마법 스킬을 자랑한다고 착각해서 펄펄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죽여버릴 테다!!!!"

쿠우웅!

쿠궁!

우수수수!

르페니는 너무 빡쳐서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벽과 바닥을 마구 부숴댔다. 파편 조각이 사방팔방으로 터져나갔다.

"가, 강 선생 덕분에 살았어!"

녀석이 발광하는 동안 김호정이 몸을 일으켜 도망쳐왔다.

"원래 어그로는 탱커님이 끌어주셔야 하는데."

"난 역시 야매 탱커인가 봐."

"야매 힐러한테 딱 맞는 파티원이죠."

강승현은 김호정한테 마력 포션을 건넸다.

"일단 마력부터 회복하세요. 거기서 더 내려가면 마력 고갈 때문에 머리 아프니까."

"알았어."

"그리고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제가 신호하면...."

그리고 반쯤 부서진 돌기둥을 가리켰다.

"저 새끼 방어력 좀 까버리세요."

"오케이!"

김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서진 돌기둥 뒤로 몸을 숨기더니.

"이건 선생이 쓰는 게 낫겠다."

피를 갈구하는 혈석을 던져주었다.

탁!

"잘 쓰고 돌려드릴게요."

[흡혈 충동!]

[일정 시간 동안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강승현은 날뛰는 르페니를 바라보았다.

"이 마법사 새끼.... 당장 쳐 죽여주마!"

쿠르르르릉!

르페니는 눈에 보이는 걸 죄다 박살 내면서 달려들었다.

'저 자식, 스킬도 못 쓰면서 꽤 강하네.'

마력 반발자는 체질상 액티브 스킬을 쓰지 못 한다. 몸속 마력을 끌어낼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저런 대미지를 낸다는 건, 아마 끊임없는 육체단련과 그로 인해 습득한 패시브 스킬 덕분일 것이다.

'스피드가 꽤 빨라서 석궁으로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는 거 같고.'

턱!

강승현은 들고 있던 석궁을 집어던지더니.

'역시 근접전으로 끝내야 하나.'

인벤토리에서 진홍의 루비를 꺼냈다.

[정신 집중!]

[일정 시간 동안 '집중력'의 효과를 받습니다.]

[손재주 상승!]

손재주 상승으로 인해 크리티컬 확률이 증가했다.

[강화제 - 방어 상승]

핏!

이어서 강승현은 몸에 강화 바늘을 꽂고 방어 버프를 추가로 걸었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강승현은 몸에 걸린 버프를 확인하더니 르페니를 향해 손짓했다.

"제가 마법사라서 걸음이 느리거든요. 쳐 죽이고 싶으면 이쪽으로 가까이 오셔야죠."

"이 새끼가 진짜!"

탓!

분노한 르페니가 이를 갈며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주먹을 꽂으려는 순간.

"김호정 씨, 지금!"

강승현은 뒤에 있던 김호정을 호출했다.

"오케이! 먹어라!"

돌기둥 뒤에서 뛰쳐나온 김호정이 금빛 영광을 휘두른 것이다.

"...!"

파악!

물론 르페니는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며 대미지를 흘려보냈다.

"이걸 지금 공격이라고 하냐?"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대미지를 입힐 생각은 없었다.

진짜 목적은 방어력 감소였으니까.

"그냥 어그로다!"

김호정은 미소를 지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껍데기 분쇄]

[방어력 -10%]

[마력 반발로 인해 스킬 효과가 반감됐다.]

쩌적!

[껍데기 분쇄]의 효과로 인해 르페니의 방어력이 10% 깎여나갔다.

'10% 밖에 못 깎았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뭐!'

본래는 20%가 감소해야 맞지만, 마력 반발자는 특성상 마력으로 발동하는 스킬의 효과가 반감되는 체질을 갖고 있다.

마력 0의 강승현이 마력 역류에 면역을 가진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방어력이 하락했다고?"

"가까이 가지 않으면 요상한 짓도 못 하는구만!"

"이... 삽쟁이 새끼가!!!!!"

르페니는 자신의 방어력이 감소했다는 걸 깨닫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렇듯 녀석과 접촉하지 않으면 스킬이 캔슬되지 않는다.

"강 선생! 뒤 부탁해!"

"맡겨두세요."

김호정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제때 치고 빠지는 것도 탱커의 필수요소다.

"이것들이...!"

르페니는 공격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강승현 역시 대미지가 꽤 높은 편인데, 방어력이 10%나 깎인 상태였으니까.

'피하시겠다? 그럼 막타는 이게 좋겠네.'

강승현은 르페니를 가만히 살피더니 얼음 포션을 꺼냈다.

쩌적!

'퍼포먼스 하기 좋으니까.'

[살포]

강승현은 얼음 포션을 흡수하더니 손에서 연하늘색 오오라를 뿜어냈다.

"아이스 스트라이크!"

동시에 대충 떠오르는 이름을 뱉어냈다.

누가 봐도 얼음 마법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뒤로 물러나서.'

뒤로 몸을 피하려던 르페니는 강승현이 발동한 스킬을 보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차가운 냉기... 얼음 마법인가?'

그에 눈에 비친 [살포] 스킬은 아무리 봐도 얼음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새끼!'

르페니는 고민 없이 주먹을 뻗었다.

마력 반발자는 특성상 일반 스킬은 위력이 반감되고, 마법 스킬은 아예 무효화된다.

"나한테 마법 같은 건 안 통한다고!"

그래서 공격을 피하는 대신 얼음 마법을 무효화해서 마력 역류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퍼억!

르페니의 주먹이 강승현의 얼굴을 강타했다.

제법 강력한 대미지가 들어갔고, 본래라면 연하늘색 오오라가 소멸하며 강력한 스파크가 터져 나와야 했겠지만.

"뭐, 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스파크가 터지기는커녕, 오오라도 소멸하지 않은 것이다.

"너 이 자식 왜 멀쩡...."

그걸 본 르페니는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야, 그거 저한테는 안 통하거든요."

그리고 강승현은 르페니가 당황한 틈을 노려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쿠우웅!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던 주먹이 르페니의 복부에 직격했다.

"마력을 안 쓰는 놈이라서."

마력 반발자의 스킬 캔슬은 무시무시한 능력이긴 하나, 몸에 마력이 적을수록 효율이 떨어진다.

즉, 강승현처럼 몸에 마력이 없는 사람에겐 아무 의미 없는 능력이었다.

[껍데기 분쇄]

[방어력 -10%]

현재 르페니는 [껍데기 분쇄]로 인해 방어력이 깎여나간 상태다.

[흡혈 충동!]

[정신 집중!]

거기에 강승현은 각종 스킬과 아이템으로 버프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크리티컬!]

[상태이상 '냉동' 상태!]

쩌저저적!

"커, 헉!"

녀석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대미지가 들어갔다.

"마, 망할 자식이...."

털썩!

르페니는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졌다.

원래는 충분히 버텼을 공격이지만, 스킬 캔슬이 취소된 걸 보고 당황하느라 방어에 실패한 게 치명적이었다.

'귀찮은 놈, 드디어 쓰러졌네.'

강승현은 손등으로 뺨을 가볍게 훑으며 중얼거렸다.

'얼음 포션에 낚인 게 결정타였지.'

[살포] 스킬을 얼음 마법으로 착각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멍청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거 마법도 아니거든요."

강승현은 냉기가 새어 나오는 손을 털어냈다.

"그냥 포션 좀 뿌린 건데."

"...."

"그걸 속으시네."

르페니는 기절했는지 대답이 없었다.

-"이야, 저걸 원펀치로 잡았어."

뒤에 있던 김호정이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강승현은 갖고 있던 혈석을 돌려주었다.

"오래 끌면 귀찮잖아요. 저 녀석이 멍청하게 걸린 것도 있고."

"하긴, 한 방에 끝내야 빨리 쉬지."

레드로드 패거리는 모르겠지만, 강승현 일행은 호수에서 짜증 나는 변이체 기생초 괴물과 싸우고 온 상황이었다.

"우리 밥 먹자마자 이러고 있으니까."

"그러게요."

김호정이 하품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르페니는 물론이고 이 주변에 있던 레드로드 탐색팀은 전부 기절한 상태였다.

"한 방에 처리한 건 좋은데, 뭐라도 물어보고 기절시키지 그랬어."

"물어본다고 순순히 털어놨을까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상태이상 '냉동' 상태다.]

손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 얼음 포션을 맨손으로 뿜어냈기 때문이다.

"또 동상 걸렸어?"

"이건 동상이 아니라 냉동이에요."

냉동은 몸이 일시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상이다. 동상과 달리 따로 치료하지 않아도 내버려 두면 알아서 녹는다.

"우와, 냉동펀치."

"좀 귀찮긴 하지만, 흔한 상태이상이라."

그래서 굳이 신경 쓸 상태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치료하면 좀 더 빨리 풀리잖아?"

"그보다 저는 이 녀석들이 던전 속에 뭘 숨겨놨는지가 궁금해서요."

강승현은 레드로드 탐색팀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을 때, 놈들이 발견한 건 아직 사용할 수 없고, 밖으로 옮길 수 없는 것 같다.

"도대체 뭘까? 레이저포?"

"...그건 아닐걸요."

"그럼?"

"사실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강승현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까 로센트의 말에 의하면 탐색팀은 분명,

-안에서 엄청난 걸 발견했어.

-사정이 있어서 당장 쓸 수는 없지만, 이것만 깨우면 마법사 놈들을... 아니, 카마르를 날려버릴 수 있어!

던전 속 무언가를 '깨운다'고 표현했다.

굳이 깨운다는 말을 붙인 걸 보면 평범한 아이템이나 스킬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르페니가 나타난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이 발견한 '무언가'는 저 안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떠드는 것보단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죠."

"그건 그렇지!"

강승현 일행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119. 공생체

동굴 내부는 다른 곳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곳곳에 모래 바위와 부스러진 돌조각, 바싹 마른 나뭇잎 같은 게 널려 있었다.

"안은 생각보다 지저분한데요."

"그러게. 뭔가 어수선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동굴 중앙의 제단. 근처의 바위를 대강대강 깎아서 만든 조잡한 형태였는데, 그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올려져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이 녀석이었군.'

강승현은 동굴 중앙제단으로 향했다. 그러자 외부인이 다가온다는 걸 감지한 고깃덩어리가 조금씩 부글거리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왓, 그게 뭐야?"

"이게 녀석들이 카마르 테러를 위해 준비한 비밀무기입니다."

레드로드 탐색팀이 던전 속에서 발견한 건 아이템이나 스킬이 아니라, 기분 나쁘게 움직이는 고깃덩어리 형태의 몬스터였다.

"저 고깃덩어리가?"

"정확한 명칭은 공생체라고 합니다."

"공생체?"

"기생형 몬스터의 일종이죠."

공생체는 다른 생물에 기생하는 몬스터 중, 숙주에게 악영향만 끼치는 게 아니라 이득을 '주기도 하는' 개체를 말한다.

"이득을 준다고? 뭐 어떻게?"

"이 녀석들한테 기생당하면 누구나 강해질 수 있어요."

공생체는 기생한 숙주의 신체 스펙을 강화시켜주거나 새로운 스킬을 쓸 수 있게 부여하는 등, 생물을 지금보다 강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강해질 수 있다고?"

"평범한 아즐 대륙민도 공생체한테 기생당하면 어지간한 모험가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니 르페니 같은 실력자가 공생체를 사용한다면 하급 차원이동자는 가볍게 씹어먹을 정도로 강해진다.

"심지어 르페니 씨는 마력 반발 체질을 활용하는 안티 매지션이죠. 작정하면 도시 하나 정도는 날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카마르는 몬스터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된 상태다. 지금 르페니가 공생체의 힘을 쓴다면 카마르는 십중팔구 멸망한다.

"자신만만해한 이유가 있었던 거죠."

레드로드가 카마르 테러를 100% 성공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 건 허세가 아니었다.

"하긴, 그 녀석은 스킬도 쓸 줄 모르는데 더럽게 강했지."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조금 전의 싸움을 떠올렸다. 지금도 더럽게 강한데, 여기서 더 강해진다면 진짜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고치.]

[곧 부화할 것 같다.]

[강력한 정신지배 능력을 갖고 있다.]

물컹한 덩어리 위로 정보가 나타났다.

"이 녀석이 아직 부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르페니가 공생체를 발견한 건 2주 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사용하지 못한 건 비활성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거 다행이네."

"근데 곧 부화할 예정입니다."

"그럼 다행 아니잖아!"

레드로드 탐색팀이 지난 2주 동안 던전에 틀어박혀 있던 이유는 공생체를 깨우기 위함이었다.

"몬스터 고치나 알 같은 물체에 마력을 주입하면 부화 속도가 빨라지거든요."

"그래서 이 안에 짱박혀 있던 거구나!"

"우리가 여기서 조금만 늦었어도 부화에 성공했겠죠."

만약 그랬다면 레드로드 패거리와 만나는 장소가 붉은 숲이 아니라 카마르였을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이 녀석을 써버리자!"

잠시 생각하던 김호정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공생체를 가리켰다.

"르페니한테 뺏길 일도 없고, 우리도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잖아!"

"저는 별로 쓰고 싶지 않은데요."

"왜? 엄청 좋은 거 아냐?"

몸에 품고 있기만 해도 누구나 강해질 수 있는 편리한 몬스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걸 안 쓰는 놈이 호구일 것 같지만,

"공생체는 숙주에게 강력한 힘을 주는 대신 뭔가를 빼앗아가거든요."

"빼, 뺏어 간다고?"

남들이 안 쓰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공생체의 숙주가 되면 힘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력이나 영양분은 물론이고 숙주의 기억이나 정신력, 시력이나 청력 같은 감각도 빼앗길 수 있어요."

당연하지만 수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널티가 너무 크잖아...!"

"심지어 뭘 가져갈지는 기생당하기 전까지는 몰라요. 공생체 마음이라서."

공생체가 기생했을 때 운이 좋다면 체력만 깎이고 끝나지만, 운이 없다면 남은 수명 절반을 뜯길 수 있다는 소리다.

말 그대로 운빨좆망몬스터.

"물론 아즐 대륙에는 자기 수명 팔아서도 강해지고 싶어 하는 미친놈들이 많으니까, 이 정도 페널티는 신경 안 쓰긴 해요. 김호정 씨도 정 필요하다면...."

"절대 안 해! 룰렛 돌릴 때도 툭하면 꽝이 나오는데!"

김호정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찝찝한 거 놔두지 말고 빨리 치워버리자구!"

"그게 말이죠."

[투척★]

강승현은 고르디우스 라르바 고치를 향해 돌멩이 하나를 투척했다.

즈웅.

그 순간,

제단 주위로 보호 결계가 나타나더니.

파악!

날아온 돌조각을 말끔하게 튕겨 버렸다.

"우와아아앗!"

"이런 중요한 걸 그냥 둘 리가 없잖아요."

아무래도 르페니 녀석이 고치 주위에 결계 스크롤을 발동시켜둔 것 같다. 혹시 자기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생각 외로 철저한 새끼시네요."

"허억, 허억...!"

그와 동시에 입구 근처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배를 움켜쥔 르페니가 비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 녀석 벌써 깨어난 거야?"

"좀 더 잘 줄 알았는데."

공생체를 지키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달려온 모양이다.

"이 망할 새끼들...."

르페니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결국, 그거까지 찾아낸 거냐!"

녀석은 무척 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몸의 통증이 심해서 그런지, 당장 덤벼오진 않았다.

"숙주에게 강한 힘을 주는 공생체. 확실히 이거라면 카마르 테러에 성공하겠네요."

"그래. 그 녀석만 있으면 나 혼자서 카마르 마법사 놈들을 처바를 수 있어!"

역시 레드로드의 목적은, 아니, 르페니의 목적은 공생체를 이용해 카마르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럼 그 전에 처리해야겠네요."

강승현은 다시 석궁을 꺼내려 했다.

"그러니까...."

그때 르페니가 한숨을 뱉어내더니,

"방해하지 말라고!"

스크롤 몇 장을 꺼내 엄청난 속도로 찢어버렸다.

스스스!

동시에 강승현과 김호정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팟!

팟!

눈 깜짝할 사이에 동굴 밖, 레드로드 탐색팀이 기절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뭐, 뭐야? 빨간 머리, 어디로 사라졌어?"

"그 녀석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근거리 텔레포트 스크롤에 당해서 이동한 겁니다."

"엥? 그런 짓을 왜 해?"

"그야...."

두 사람이 황급히 동굴로 돌아왔을 땐,

"헉, 헉...!"

르페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단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다.

"우릴 쫓아낸 틈에 공생체한테 접근하려고."

"이, 이 자식이!"

그걸 본 김호정이 금삽을 꺼내 집어 던졌으나,

즈웅.

파지지지직!

바로 보호 결계가 나타나 김호정의 공격을 튕겨내 버렸다. 김호정은 허망한 얼굴로 금삽을 주워왔다.

"강 선생, 어쩌지? 저 자식이 공동체를 깨워버리겠어."

"공생체예요. 그리고 당장은 못 깨워요."

공생체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상태다. 마력을 계속 주입하면 깨어나겠지만, 르페니는 체질 때문에 마력을 끌어낼 수 없다.

"그, 그거 다행이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 부화해요. 저 녀석은 그때까지 안에서 버틸 생각이고."

"그럼 다행 아니잖아!"

김호정이 절규하며 소리쳤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르페니가 깨어난 공생체를 몸에 심고 강해진 채 튀어나올 것이다.

"이제 어떡하지?"

"뭣하면 그냥 죽이면 되죠."

공생체의 숙주가 되면 지금보다 강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일 수 없는 불로불사의 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어...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

"왜요?"

"아까 로센트랑 약속했다면서. 애들 안 죽이겠다고."

"그치만 저 녀석, 김호정 씨를 짓밟고 샌드백처럼 두들겨 팬 놈인데요."

"아, 생각해보니 그렇... 아니, 그래도 죽을죄는 아니잖아."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좀 더 평화로운 해결법 없을라나?"

'이 아저씨는 뭔가 쓸데없는 살생을 꺼리는 편이었지.'

차원 이동자들의 초기 직업은 그 사람의 성향과 취향, 성장성을 고려해서 정해진다.

그중에서도 탱커 계열 차원 이동자들은,

'처맞는 걸 좋아하는 놈이나, 공격하는 걸 귀찮아하는 놈이나, 그냥 몸빵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탱커가 된 놈들도 있긴 했지만.'

남을 지키거나 돕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호정도 그런 타입 중 하나다.

"알았어요."

"오. 뭔가 방법 있어?"

"늘 하던 대로 평화롭게 '설득'해볼게요."

설득과 대화.

그것은 사건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무기 중 하나다. 강승현은 수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억, 헉."

제단에 몸을 기대고 있던 르페니는 상당히 지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곧 공생체가 깨어난다. 그렇게 되면 카마르를 쓰러트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걸 정말 깨우시게요? 후회하실 텐데."

그때, 강승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르페니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몇 번을 말해줄까? 난 이 녀석의 힘으로 카마르를 뭉개버릴 거라고!"

"전 분명 말렸습니다."

강승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야 저 새끼...."

갑자기 와선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놈.

르페니는 그 광경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응?"

그때, 르페니의 시야 끝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포션 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력 포션이잖아. 아지트에 모아둔 건 전부 다 쓴 줄 알았는데 남은 게 있었나?'

부화하지 않은 알이나 고치에 마력 포션을 사용하면 부화 속도를 올릴 수 있다.

르페니는 포션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소형 포션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리고 별생각 없이 고치 위로 포션을 던졌다.

쩌적!

포션이 깨지면서 내용물이 흩뿌려진 순간,

"끄아아아아악!"

"아아악!"

동굴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르페니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자,

"끄윽, 으으윽!"

"어지러워! 죽을 거 같아!"

"으아아아아...!"

쓰러져 있던 레드로드 탐색팀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때, 등 뒤에서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돌아보자 강승현이 무척 안타깝다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

120. 다 포기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