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비장의 수단
[Q] [10000포인트를 모아주세요.]
[보상] : [★]
대량의 포인트를 지불하는 대신 [★]이 붙은 강력한 스킬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특수 퀘스트.
이게 강승현이 준비한 비장의 수단이었다.
'이걸 맨 처음 썼을 땐 카마르에서 어인의 간을 구하러 갈 때 였지.'
당시에는 5000포인트를 요구했고, 소모품 없이 화살을 쏠 수 있는 수중전 특화 스킬 [작살 화살★] 획득했다.
덕분에 어인들을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별로 쓰고 싶진 않지만...지금은 이 방법 밖에 없으니.'
이렇듯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 상황에서 꼭 필요한 보상을 반드시 얻을 수 있다. 이건 상태창 관리자한테 포인트를 다이렉트로 입금하는 뇌물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마침 1만 포인트 넘게 있고.'
[누적 포인트 : 11302포인트]
물결 기생초를 처치하고 얻은 대량의 포인트를 사용할 때가 왔다.
'괜찮은 스킬 내놔라.'
강승현은 [퀘스트 완료] 버튼을 눌렀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1302포인트]
[퀘스트 달성!]
열심히 모아둔 10000포인트가 소멸하면서 퀘스트가 클리어됐다.
[퀘스트 달성!]
[※ ★스킬 중 하나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타르르르르.
어김없이 룰렛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나왔다!'
강승현에게 새로운 스킬이 주어졌다.
[※스킬(분해★) 획득]
본래 [분해]는 생산직 전용 스킬이라 힐러의 룰렛에선 나오지 않지만, [★]스킬은 이러한 전용 스킬을 무시하고 획득할 수 있었다.
'생산직 차원이동자 필수 스킬!'
[분해] 효과는 사용시 각종 아이템을 갈아서 제작 재료로 바꾸는 것.
예를 들어 철검을 [분해]하면 철괴를 얻고, 나무 상자를 [분해]하면 나무판자를 얻을 수 있다.
'이걸 쓰면 화살을 피로 되돌릴 수 있어.'
즉,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을 [분해★] 하면 화살 재료인 르페니의 피를 얻을 수 있다는 소리다.
'바로 사용해보자.'
하지만 [분해] 스킬의 성공률은 100%가 아니다. 따라서 아이템 제작에 들어간 재료를 전부 획득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분해★]
[이 스킬은 100% 확률로 성공한다.]
[스킬 사용시 랜덤한 결정 파편 아이템을 획득한다.]
-[아이템을 재료 상태로 되돌린다.]
-[융합체를 독립된 개체로 분리한다.]
그가 획득한 건 [분해]스킬의 레어 버전.
사용시 제작에 들어간 재료를 100% 확률로 얻을 수 있었다.
'역시 [★] 스킬이로군. 성능 하나는 사기적이야.'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분해★]를 발동했다.
[마력 반발자의 혈액 화살을 분해합니다.]
쯔적!
파아앗!
스킬을 발동하자 인벤토리 안에 있던 화살이 빛을 뿜어내더니,
['마력 반발자의 혈액' 획득!]
다시 본래의 액체 형태로 되돌아왔다.
화살을 [분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됐다. 이 상태라면 [수혈]할 수 있어!'
강승현은 곧바로 수혈 여부를 체크했다.
[이 피는 수혈할 수 있습니다.]
르페니 본인의 것인 만큼 문제없이 쓸 수 있었다.
[수혈]
팍!!
강승현은 곧바로 르페니의 팔에 수혈 바늘을 꽂고 획득한 피를 수혈하기 시작했다.
스르르르.
반투명한 바늘이 붉게 물들며 환자의 혈관속으로 피를 흘려보냈다.
"수혈할 수 있는 거야?"
"르페니 씨의 피가 조금 남아 있었거든요."
"다, 다행이다."
그걸 본 로센트가 크게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옆에 있던 니켈과 개스코인도 눈물을 닦으며 안심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겠지.'
물론 강승현은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작 화살 한 개로 과다출혈 환자를 치료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피를 더 많이 모아야 해.'
강승현은 인벤토리에 남은 화살을 전부 분해해서 마력 반발자의 혈액을 확보했다.
[분해★]
[마력 반발자의 혈액 화살을 분해합니다.]
['마력 반발자의 혈액' 획득!]
고르디우스를 공격하느라 화살을 꽤 많이 낭비했지만,
[프리아의 화살 회수]
[마력 반발자 화살을 회수합니다.]
화살 회수 스킬 덕분에 소모한 화살을 다시 인벤토리로 불러와 재활용할 수 있었다.
강승현은 회수한 화살도 빠짐없이 분해해서 수혈용 혈액을 긁어모았다.
벌컥, 벌컥!
물론, 이 모든 스킬을 한 번에 발동하려면 스태미나가 엄청나게 소모된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쉴새 없이 들이키며 치료를 계속했다.
'다른 사람 치료하느라 정작 내 상처는 치료할 틈이 없네.'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키는 강승현의 눈에 몸에 침입한 고르디우스를 적출 할 때 만든 상처가 들어왔다.
손목으로 파고든 공생체를 뽑아내기 위해 살이 얇게 베여나간 상태였다.
'뭐, 그래봤자 별것도 아니니까.'
강승현은 상처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 부상을 입어도 그게 치료에 방해될 만큼 심각하지 않다면, 우선순위에서 미뤄두는 버릇이 있었다.
"으...."
['기절' 상태에서 풀려났다!]
['과다출혈' 상태에서 풀려났다!]
피를 계속해서 [수혈]했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르페니가 눈을 떴다. 원래 회복력이 좋고 몸이 튼튼한 인간이라 금방 깨어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대장!"
"괜찮아?"
"내가 왜 누워 있냐."
그는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고르디우스한테 기생 당했을 때의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아직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방금까지 과다출혈로 골로 갈 뻔했으니까."
강승현은 수제 붕대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피를 열심히 수혈해서 과다출혈로 죽는 건 막았지만, 르페니는 여전히 빈혈 상태였다.
[대상은 '빈혈' 상태다.]
"그나마 몸 튼튼한 마력 반발자라 망정이지, 평범한 아즐대륙민이었으면 관짝에 들어갔을 걸요."
"...."
"원래는 수혈을 더 해야 하는데 이제 쓸 피가 안 남아서요."
강승현은 아쉽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르디우스 놀린답시고 화살을 낭비하지 말 걸 그랬다고 덧붙이면서.
"이제는 손실된 피가 채워질 때까지 푹 쉬면서 회복되는 걸 기다리셔야겠죠."
"얼마나?"
"대충 한 달 정도."
"한 달? 나 보고 한 달을 누워 있으라고?"
르페니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는 과다출혈로 죽기 직전이었다. 잃어버린 피를 완전히 회복하려면 못해도 최소 3~4주는 걸릴 것이다.
"싫으면 관짝에 들어가시던가."
"에이씨."
르페니는 가볍게 혀를 찼다.
흑진월귤 중독 환자였던 루스 테이커도 그랬지만, 아즐대륙의 싸움꾼들은 다친 몸을 회복하느라 가만히 있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힐을 받으면 회복 속도가 더 빨라지겠지만, 르페니는 마력 반발 체질 때문에 그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원래 운동 꾸준히 하셔서 건강한 편이었으니 약 잘 챙겨 먹으면 회복 기간이 많이 줄어들 겁니다."
워낙 튼튼한 인간이라 잘 먹고 잘 쉬면 금방 털고 일어날 것이다.
강승현은 르페니에게 포션을 건넸다.
"자가치유력을 믿어보세요."
"...그래서, 빌은? 그 녀석은 괜찮은 거야?"
포션을 건네받은 르페니는 그걸 마시는 대신 빌 세이헌의 안부를 물었다.
의식을 회복한 르페니와 달리 빌 세이헌은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세이헌 씨는...몸은 괜찮아요."
맞기는 가장 심하게 맞았지만, 고르디우스가 빠져나간 직후에도 강화능력이 약간 남아 있어서 큰 부상은 없었다.
"대신 이런저런 이유로 정신력이 꽤 낮은 상태라 저 친구도 한동안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할걸요."
말 그대로 몸만 괜찮고 정신은 괜찮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고르디우스가 강화 대가로 가져간 건 녀석의 정신력이었을 것이다.
'정신력이 낮을수록 정신지배가 잘 먹힐 테니까.'
벌컥, 벌컥.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치료를 마치고 마시는 스태미나 포션만큼 개운하고 상큼한 건 없다.
"아, 다른 잡몹...단원들은 괜찮나요?"
"응. 다들 무사해."
"머리카락을 뜯긴 애들만 있어요."
"당장 치료가 급한 사람은 없겠죠."
[봉합]
파바바밧!!
강승현은 그제서야 실과 바늘을 꺼내 자신의 손목을 꿰매기 시작했다.
'이런 건 붕대로 감아두는 게 좋은데, 이제 남은 붕대가 없네.'
내일은 어떻게든 풀을 뜯어서 붕대를 제작해야 할 것 같다. 수제 붕대는 쓸 곳이 아주 많으니까.
'저번에는 오른손이고, 이번에는 왼손인가.'
어째 손만 다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바늘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지트가 난장판이지만, 지금 전부 정리하는 건 힘들겠지."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대청소 해야겠네."
"일단 의무실만 정리하자."
"빨리 자고 싶어. 진짜 피곤하다고."
"우와 스카라베 언제 다 치우냐."
레드로드 3인방이 제각각 떠들면서 말했다. 일단 르페니가 쉴 수 있도록 의무실만 정리하는 게 좋겠다면서.
"그럼 전 가서 한숨 자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네. 정말 수고했죠."
강승현은 제법 피곤하다는 투로 말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저녁에는 거대 오징어에 기생한 기생초와 싸우고, 밤에는 사람한테 기생하는 실뭉치 애벌레와 싸웠다.
'뭔가, 내가 관리자 놈하고 접촉한 뒤로 주위에서 사건 사고가 잦아진 것 같단 말이지.'
프리아의 석궁을 얻은 건 좋지만, 그만큼 싸울 일이 많아졌다.
'역시 아즐 대륙에서 겪는 트러블은, 대부분 관리자 그 새끼 때문이야.'
강승현은 괜히 관리자를 탓했다.
'그건 그렇고, 관리자 녀석은 전이 던전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강승현은 이번에 고르디우스를 통해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전이 던전의 정체는 신적 존재의 개입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 던전이었다.
'나타날 때마다 아즐 대륙을 멸망을 앞당기는 던전이라.'
지난 몇백 년 동안 잠잠했다는 걸 보면, 전이 던전이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이 던전을 발생시킨 것이다.
'궁금한 건 많은데 명쾌하게 대답해줄 사람이 없네.'
고르디우스가 죽었으니 이곳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이게 끝이다.
'하인드 마을로 돌아가면 한동안 자료 조사 위주로 움직여볼까. 일단 자고 일어나서 내일 김호정 씨한테....'
쿠우우우웅!
쩌저적!
그때, 강렬한 진동이 동굴을 강타했다.
"뭐야? 또 지진이야?"
"어떻게 된 거야? 보스 몬스터도 쓰러트렸잖...!"
쿠르르르!
그와 동시에, 의무실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바닥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뒤틀린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그제서야 강승현은 벽과 바닥이 단순하게 무너지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131. 워낙 급한 상황이라
쩌적, 쩌적!
쿠르르르르!
바닥이 푹 꺼지는 걸 시작으로, 의무실 벽과 천장 역시 쩍쩍 갈라지며 뒤틀린 공간 속으로 사라져갔다.
'쉴 때가 아니었어.'
여기는 던전이면서 동시에 붉은 숲에 위치한 동굴이다. 그래서 강승현은 보스 몬스터가 죽으면 던전 기능은 소멸하고 동굴 터만 남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던전 자체가 사라지고 있잖아!'
본래 전이 던전은 공간 전이로 인해 아즐 대륙에 나타난 불안정한 장소다.
그래서 던전을 유지하던 보스 몬스터가 사망하자 본래 있던 공간, 차원의 틈으로 역전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던전이 붕괴하고 있어요. 이대로 있으면 차원의 틈으로 떨어질 겁니다."
"차원의 틈?"
강승현의 말을 들은 레드로드 3인방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세 사람 모두 차원의 틈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곳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차원의 틈은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이잖아!"
"거기다 무시무시한 괴물이 산다고 했어!"
"으아아아아악!"
"어서 도망치자아아아!!"
니켈과 개스코인은 비명을 질러댔다.
모험가들은 던전을 자주 들락거리다보니 차원의 틈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아즐 대륙 평민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차원의 틈을 인류가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장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들 진정하세요."
[진정의 목소리]
강승현은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차원의 틈이 위험하긴 해도, 돌아올 수단만 있으면 괜찮아요."
쿠구구구!
그리고 부서지는 의무실 내부를 살피더니,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들었다. 그건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반 토막난 잔해였다.
"힐러님, 그건 왜 주우세요?"
"개인적인 취미?"
"...이 안에 꼭 필요한 게 있어서요."
"꼭 필요한 거?"
툭, 툭.
잔해를 잡고 가볍게 흔들자 안에서 좁쌀만 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건 보스 몬스터의 핵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핵(최하급)]
"보스 몬스터의 핵을 사용하면 탈출 포탈을 생성할 수 있거든요."
"탈출 포탈?"
"살았다!"
던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보스 몬스터를 잡아서 핵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고생을 해서 쓰러트렸는데 최하급을 뱉어? 이런 쓰레기 새끼를 봤나.'
강승현은 고르디우스가 뱉어낸 핵을 보고 혀를 찼다. 등급이 낮아도 탈출 포탈은 만들 수 있지만, 빡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넌 퇴출이다. 잘 가라.'
강승현은 고르디우스 잔해를 부서진 동굴 너머 차원의 틈으로 던져버렸다.
"로센트 씨, 이거 받으세요."
"엇, 어!"
그리고 나서는 로센트한테 고르디우스의 좁쌀만 한 핵을 넘겼다. 로센트는 혹시라도 핵을 흘릴까 봐 소중하게 감쌌다.
"거기에 마력을 주입하세요."
"내, 내가?"
"포탈을 열기 위해선 마력을 이용해 보스 몬스터의 핵을 활성화해야 하거든요."
더 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만, 마력이 1도 없는 사람이나 마력 반발 체질을 가진 사람은 포탈을 열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포탈을 열기 위해선 아까운 마력 포션을 낭비해야 한다.
"이 좁쌀만 한 핵에 마력 포션을 쓰는 건 아깝잖아요."
"알았어. 내가 해볼게."
로센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소량의 마력이 핵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혼자서 열긴 힘들 테니 니켈 씨랑 개스코인 씨도 도와주세요."
"빨리 열고 나가자!"
"흐아아아!"
레드로드 3인방은 힘을 모아 마력을 쥐어짜냈다.
파아앗!
세 사람이 긁어모은 마력이 고르디우스의 핵 속으로 흘러들어가면서,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쩌적!
팟!
동시에 핵이 부서지면서. 그 자리에 검은 포탈이 생성됐다.
우우우웅.
"성공했네요."
강승현은 탈출용 포탈을 살폈다.
이 포탈을 통과하면 무조건 던전 입구으로 나갈 수 있다. 발동 시 지정된 장소로 가게 되는 귀환 마법진이나 귀환 스크롤에선 볼 수 없는 장점이다.
"어서 들어가자!"
"빌은 우리가 옮길게!"
"빨리빨리!"
레드로드 3인방은 쓰러진 빌 세이헌을 부축해서 포탈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장도 빨리 와!"
이런 상황에서도 동료를 꼭 챙기는 걸 보면 자기들끼리는 정말 끈끈한 모양이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포탈로 다가갔다.
"안 오고 뭐하세요?"
르페니는 네 사람이 포탈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저거 마력 반발자도 쓸 수 있냐?"
그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예?"
"내가 손대자마자 박살 나는 거 아니냐고."
"그거 때문에 기다린 거에요?"
"그래."
그는 혹시 자신의 체질 때문에 포탈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그래서 동료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뭔 일 생기면 나 혼자 남아야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포탈을 통과할 때까지 일부러 기다린 것이다.
"다른 녀석들까지 휘말리게 할 순 없잖아."
이래저래 철없는 양아치 같은 면모가 있지만, 르페니는 한 집단을 이끌어가는 어엿한 리더였으니까.
"나 때문에 이 난장판이 벌어진 거니까."
"자기 잘못을 모르진 않는군요."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걱정 말고 들어오세요."
핵을 써서 만드는 포탈의 구성요소는 보스 몬스터의 생명력과 마음의 힘이다.
"마력은 핵을 부수는 용도로 쓰일 뿐이라서요. 이 포탈에는 마력이 없고, 일반적인 귀환 스크롤도 마력 반발자 한 명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그러면 다행이고."
르페니는 미소를 지으며 포탈을 통과했다.
-우우웅.
팟!
두 사람이 포탈을 통과하자, 음침한 동굴에서 숲속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후두둑, 후둑.
아까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완전히 그치지도 않았다. 하늘은 흐릿하고 구름은 시원한 이슬비를 흩뿌렸다.
"끄으응!"
"헉헉!"
"돼, 됐다."
주위를 둘러보자 레드로드 3인방이 빌 세이헌을 나무 밑으로 옮기고 있었다.
'저건, 사람을 옮긴다기보다는 배달한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네.'
하필 빌 세이헌이 세 사람보다 키가 커서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근데 뭔가 허전한데. 뭐지?'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대장도 나왔구나!"
"이걸로 한시름 놔도 되겠다."
빌 세이헌을 옮기던 니켈과 개스코인은 강승현과 르페니를 발견했다.
"대장, 이쪽으로 와!"
"거기 서 있으면 비 맞잖아."
두 사람은 뿌듯한 얼굴로 나무 밑을 가리켰다. 하지만 르페니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잠깐. 다른 애들은?"
"응?"
"나머지 단원들 말이야!"
"어? 아!"
니켈이 얼빠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깨달았지만, 밖으로 나온 건 여기 있는 6명뿐이었다.
"우리끼리만 나와버렸어!"
"아, 아까 다들 기절했지!"
"으아아아아!"
지금 레드로드 단원들은 세상 모르게 자고 있거나, 고르디우스의 정신지배에서 풀려나 쓰러진 상태였다.
당연히 던전이 소멸한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아, 김호정 씨!"
강승현도 그제야 허전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세상모르게 자는 김호정과 루디 일가를 두고 왔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어지간해선 별문제 없을 테니 신경 안 쓰겠지만.'
소멸하는 던전 안이라면 그냥 둘 수 없다.
지금 당장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뭣들해? 당장 움직여!"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건 르페니였다.
"빨리 애들 데려와야지!"
"아니지!"
"대장은 쉬어야지!"
"애들이 위험에 빠졌는데 잘도 쉬겠다!"
르페니는 지금 당장 휴식을 취해야 할 환자였지만,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쓸데없는 짓 말고 앉아있으라고 해도 안 듣겠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빨리 다녀오죠. 꾸물거릴 시간 없으니까."
파바박!
강승현은 르페니의 몸에 스태미나 화살을 박아주고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로센트는 빌을 부탁해. 의식 없는 환자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잖아."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가자."
르페니는 니켈과 개스코인을 데리고 강승현을 뒤따라갔다.
"다들 일어나!"
"응? 뭐야...."
"설명할 시간 없어! 나가!"
동굴 안으로 뛰쳐들어간 레드로드 2인방은 동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5분만 더 잘래...."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처음에는 잠이 덜 깬 단원들이었지만,
쿠구구구궁!
"헉!"
"지진났다!"
"뛰어!"
천장과 벽이 흔들리는 걸 보더니, 알아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좋아, 어떻게든 깨우기만 하면 될 거 같아!"
"다들 일어나! 뒈지기 싫으면!"
워낙 급한 상황이라 르페니는 부하들을 킥으로 깨우기 시작했다.
퍼억!
퍽!
"컥!"
"으헉!"
"빨리 나가!"
"넵!"
효과는 확실했다. 정신을 차린 단원들은 대장이 시키는 대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꾸물거렸다간 또 맞을 것 같았으니까.
"김호정 씨, 김호정 씨!"
강승현은 역시 동료들을 깨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김호정은 물론이고 발릭 부부와 루디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커어어어."
특히 김호정은 곳곳에 스카라베가 널린 것도 모르고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아, 빨리 일어나요."
"우푸푸푸푸!"
친절하게 깨울 시간은 없다.
강승현은 김호정의 얼굴에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부었다.
"퉷퉷퉷!"
이쪽도 효과는 확실했다.
김호정은 오만상을 쓰며 눈을 떴다.
"정신 차렸으면 어서 일어나요."
"뭐, 뭐냐구...으허헉!"
눈을 비비던 김호정은 자기 옆에 스카라베가 굴러다니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났다.
"그런 게 사방에 널려 있어요."
"나 여기서 나갈래!"
"다른 사람들도 깨우고 가야죠."
강승현은 마찬가지로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서 루디 가족의 얼굴에 퍼부었다.
"으, 차가워!"
"으으에겍."
"으으으으!"
그들 역시 오만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잠이 덜깬 얼굴이었지만,
"죽기 싫으면 당장 일어나세요."
"네, 넵!"
"루디야 어서 가자!"
강승현의 말을 듣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
"이쪽은 다 됐어요. 그쪽은요?"
강승현은 일행을 데리고 르페니 일행과 합류했다.
"우리도 전부 깨웠어."
"취침시간이라 대부분 숙소 방에 있어서 찾는 건 쉬웠거든요."
"이제 우리만 나가면 될 거 같아!"
강승현과 르페니 일행은 서둘러 입구로 달려갔다.
일반 던전이라면 입구로 탈출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전이 던전은 어떻게든 입구까지만 가면 나갈 수 있었으니까.
"아...."
"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들이 입구에 도착했을 땐,
"구, 구덩이가 생겼잖아!"
"우리가 너무 늦었나 봐!"
"조금만 가면 되는데!"
바닥이 푹 꺼져서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서 발을 헛디뎠다간, 끝없는 차원의 틈으로 빠져버릴 것이다.
"가, 강 선생! 우리 탈출 스크롤 있지?"
그때, 김호정이 인벤토리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저번에 진홍의 마탑에서 구입한 물건이다.
"이걸 쓰면 나갈 수 있지 않아?"
"그렇긴 한데 다 합쳐서 세 장밖에 없죠."
스크롤 한 장으로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2명. 전부 다 써도 6명밖에 탈출할 수 없다.
"두 명은 못 나가잖아!"
"네. 수가 모자라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8명이다.
스크롤을 써서 탈출하면 누군가는 낙오된다.
"화살로 만들어서 쏘는 건 어때? 회수하자!"
"스크롤은 2인용이지만, 화살로 만들면 한 명만 효과를 받을 수 있어요. 화살 회수 스킬을 사용해도 6명만 탈출할 수 있겠죠."
"그럼 똑같잖아!"
김호정이 절규하며 소리쳤다.
킹갓 화살 회수 스킬도 이 상황에선 의미가 없다.
'누가 희생하는 전개는 재미없어서 싫은데.'
강승현은 혀를 차며 자리에 모인 인원을 둘러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몇몇 사람들은 탈출을 포기하고 남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선생! 난 괜찮으니까 내가...!"
"됐어, 내가 남는다."
"대장이 남는다면 나도!"
"왜 좋은 아이디어 떠올릴 생각은 안 하고 희생할 생각부터 하는 겁니까."
"그치만 좋은 아이디어가 없는걸."
강승현은 그들을 무시하고 생각에 잠겼다.
'8명이 다 같이 탈출할 만한 방법...아!'
그때, 강승현의 머리가 번뜩이며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요."
132. 아직 안 늦었어요
"방법이 있다고?"
"그, 그게 정말입니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일단 따라오세요."
강승현은 그렇게 말하고 던전 안쪽으로 달려갔다.
상식적으로 던전이 박살 나고 소멸하는 상황에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만.
"알았어!"
"뭔진 모르겠지만... 힐러님은 상식을 초월하는 분이셨으니까!"
"다들 선생님을 따라갑시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따라갔다. 그들은 김호정을 제외하면 강승현을 알게 된 지 하루도 안 됐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얻은 교훈이 있었다.
'아무리 답이 없는 상황이어도 강승현을 따라가면 어떻게든 된다!'
그건 강승현의 선택을 따르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쿠구르르르!
"으헉!"
"조심해!"
진동이 거세지면서 던전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푹푹 꺼지는 바닥 밑으로 끝없는 공허가 눈에 들어왔다.
"그, 그런데 선생....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의무실이요."
"의무실?"
강승현이 향한 곳은 레드로드 의무실.
김호정과 루디 가족은 자느라 몰랐지만, 의무실은 강승현과 르페니가 힘을 합쳐 고르디우스를 쓰러트린 실질적인 보스룸이다.
"그, 그렇구나!"
딱!
강승현의 이야기를 듣던 개스코인이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의무실에는 우리가 탈출할 때 쓴 포탈이 남아 있겠네요!"
"네, 그겁니다."
"포탈?"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희는 아까 김호정 씨가 자는 동안 탈출했거든요."
"엉? 그럼 나 버리고 간 거야?"
"싸우느라 까먹어서."
"너무하잖아아...."
"그래서 다시 왔잖아요."
"그건 고마운 말이네."
아까 강승현 일행은 보스 몬스터의 핵으로 만든 포탈, 일명 코어 포탈을 생성해서 던전을 탈출했다.
"아무튼, 코어 포탈은 일방통행이라 일단 밖으로 나가면 다시 던전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뿐, 포탈 자체는 던전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 재입장만 금지일 뿐, 퇴장은 자유라는 소리다.
"그래서 인원 제한 없이 쓸 수 있죠."
이게 코어 포탈의 대표적인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럼 다 같이 나갈 수 있겠네요!"
"대장, 우리 살았어!"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죠."
코어 포탈의 단점은 귀환용 스크롤과 달리, 지속시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코어 포탈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합니다."
"소멸한다구요?"
"왜 유통기한 같은 게 있는 거야!"
그건 코어 포탈이 귀환용 스크롤이나 마법진과 달리 핵을 재료로 제작하는 소환물 아이템에 가깝기 때문이다.
"거기다 코어 포탈의 지속시간은 재료 등급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핵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지속시간이 길고, 등급이 낮으면 낮을수록 지속시간이 짧아진다.
"재료 등급?"
"그거 아까 최하급 핵이랬잖아요!"
"그렇죠. 아까 얻은 건 폐품이에요."
고르디우스한테서 얻은 핵은 최하급.
쓰레기가 쓰레기 같은 핵을 뱉어내는 바람에 포탈의 지속시간은 최저치였다.
"뭐, 보통은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던전에서 탈출할 테니, 일반적인 상황에선 의미가 없지만...."
강승현 일행은 던전을 빠져나갔다가 동료들을 구하러 다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찾고 깨우느라 시간을 꽤 허비한 상황이다.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겠죠."
서두르지 않으면 포탈이 소멸할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들을 더 빨리 깨울 걸 그랬어...."
"진짜 잠도 못 자고 이게 뭐야!"
"시발, 그냥 달려!"
"너네는 의무실을 왜 이렇게 구석에 박아둔 거야?"
"이럴 줄 누가 알았냐고!"
바스락!
투두둑!
이들은 떨어져 있던 벌레 시체를 밟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돌조각을 피하면서, 남들이 꿀잠 자고 있을 시간에 정신없이 달렸다.
-'도착했다.'
쾅!
의무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강승현이었다. 그는 찌그러진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헉, 헉... 어떻게 됐어요?"
"포, 포탈 있어?"
이어서 뒤따라온 일행은 숨을 헐떡이며 의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의무실 중앙에 코어 포탈이 남아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서서히 흐려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잖아!"
"안 돼!!!"
"지금 들어가는 건 안 돼?"
"너무 늦었어!"
"아뇨. 아직 안 늦었어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고 앞으로 달려갔다.
'코어 포탈은 보스 몬스터의 핵을 재료로 만들었으니....'
타닥!
'분해하면 핵으로 되돌릴 수 있거든!'
하지만 아무리 최하급이라도 보스 몬스터의 핵은 보통 아이템이 아니다. 분해 성공률이 무척 낮아서, [분해]해서 얻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성공률 100%니까!'
그가 보유한 스킬은 100% 확률로 성공하는 레어 스킬이었다.
[분해★]
강승현은 사라지는 포탈에 손을 뻗고, 스킬을 발동했다.
파아앗!
소멸하던 포탈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코어 포탈이 [분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윽!'
그와 동시에, 강승현의 스태미나가 빠른 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포션을 마셔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역시 좀 빡세네!'
본래 분해하려는 아이템이 귀하면 귀할수록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러니 보통 아이템도 아니고 포탈을....
'그것도 보스 몬스터의 핵으로 만든 포탈을 분해하려니!'
[스태미나 고갈!]
스태미나가 증발하는 게 당연했다.
[스태미나 고갈 상태!]
[포션을 마셔도 스태미나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면 '혼절' 상태에 빠진다.]
[계속 스킬을 쓰면 '혼절' 상태에 빠진다.]
눈앞에 경고 메시지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강승현은 마력 대신 스태미나를 사용하는 만큼, 스킬을 과도하게 사용했을 때 페널티가 훨씬 컸다.
[스태미나가 완전히 바닥났다!]
[상태이상 '혼절'이 발동합니다.]
결국, 스태미나 소모가 한계를 넘었다.
스킬을 과하게 사용하다 '혼절' '기절' 상태에 빠지면 발동 중이던 스킬이 바로 중단되고 시전자는 의식을 잃게 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뒀지.'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1 : 활력의 브로치 +1]
그 순간, 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활력의 브로치 효과가 발동한 것이었다.
[활력의 브로치 +1]
[추가 스태미나 +3%]
[스태미나 회복 속도 +3%]
[+ 스태미나가 0이 될 경우 강화치를 1 깎는 대신 랜덤 옵션을 추가한다.]
[효과 발동 시 옵션을 제거한다.]
강승현의 스태미나가 밑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세 번째 효과가 발동했다.
강화치를 소모해서 위급상황을 벗어나는, 대표적인 크리스탈 꼼수 중 하나다.
[강화치를 1 깎고 랜덤 옵션을 추가합니다.]
[활력의 브로치 +0]
[+ 전체 스태미나 45% 회복]
[효과 발동 시 옵션을 제거한다.]
'좋았어!'
바닥났던 스태미나가 단숨에 차올랐다.
이제 크리스탈 강화치가 없어서 더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최하급 보스 몬스터의 핵 조각' 획득!]
강승현을 코어 포탈을 완전히 [분해★]하는 데 성공했다.
"으아아아!"
"포탈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게 아니라 재료로 바꾼 겁니다."
강승현은 인벤토리로 들어온 보스 몬스터의 핵을 보여주었다. 정확하게는 온전한 핵이 아니라 핵의 조각이었다.
'역시 일부분만 되돌릴 수 있구나.'
분해 스킬은 완성품을 재료로 상태로 바꿔주는 스킬이지, 사라진 재료까지 복원시켜주는 스킬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반쯤 먹다 남긴 빵에 [분해]를 사용하면 성공률 100% 기준으로 제작에 들어간 밀가루 절반만 수급할 수 있다.
'사라지기 직전의 포탈을 분해했으니.'
그래서 가진 스태미나를 다 털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벤토리에 들어온 건 핵 조각뿐이었다.
'뭐, 이거면 충분하지.'
강승현은 니켈과 개스코인한테 좁쌀보다 작은 알갱이를 내밀었다.
"아까처럼 부탁합니다."
"이게 핵이에요?"
"이쯤 되면 먼지 아냐?"
심각한 와중에도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력을 주입했다.
파아앗!
고르디우스의 핵 조각 안으로 마력이 흘러들어가며 아주 옅고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툭,
팟!
알갱이가 부서지면서 검은 포탈이 나타났다.
이번 건 크기가 워낙 작아서 두 사람의 마력으로도 충분했다.
"열렸다!"
"성공!"
"자, 다들 빨리 들어가세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포탈을 가리켰다.
"이게 아마... 지속시간이 기껏해야 5초밖에 안 될 거라서."
"5초? 왜 이렇게 짧아!"
"빠, 빨리 들어가! 빨리!"
"5초! 4초! 3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포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사실 농담인데. 1분 정도는 갈 거예요."
"우리 애들 놀리니까 재밌냐?"
가장 마지막에 남은 르페니만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재밌죠."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포탈을 통과했다.
-우우웅.
팟!
포탈을 통과하자, 마찬가지로 음침한 동굴에서 숲속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똑같은 짓을 두 번이나 하다니."
후두둑, 후두둑.
강승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여전히 이슬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다들 무사히 돌아왔구나!"
인원수를 세던 로센트가 안도한 얼굴로 달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잠이 덜 깬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레드로드 단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빠진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거 다행이네요."
강승현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구구구궁!
동굴 던전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공격당하는 것처럼 돌벽이 부서지고, 깨지며 소멸해갔다.
차원의 틈에 삼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지트가 사라지고 있어...."
"내 애장품!"
"던전 아이템도 전부 아지트에 놔뒀는데!"
레드로드 단원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녀석들의 아지트는 눈앞에서 완전히 소멸하고, 아무것도 없던 빈 공터로 되돌아왔다.
"다 끝난 건가?"
"그런 셈이죠."
"쯧."
르페니는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좋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여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뭐,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강승현 역시 지친 얼굴로 바닥에 앉았다.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자고 움직인 데다, 스태미나가 바닥날 때까지 스킬을 사용했다.
'몸이 멀쩡할 리가 없지.'
바닥난 스태미나를 활력의 브로치 효과로 순간적으로 회복했지만, 그것도 전부 써버렸다.
'스태미나 고갈 때문에 회복도 못 하고.'
스태미나 고갈 상태에 빠지면 포션을 마셔도 스태미나를 회복할 수가 없다. 활력의 브로치 같은 특수 아이템을 사용하거나 잠을 자는 게 답이다.
"둘 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안 괜찮아."
"안 괜찮아요."
한 명은 빈혈, 한 명은 스태미나 고갈.
강승현과 르페니는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소리쳤다.
"나는 이제 싸울 기력도 없다고."
"저도 지금은 스킬 못 씁니다."
"어쩌지? 여기서 잘 수도 없고, 당장 트라코티로 갈 수도 없고...이러다 몬스터라도 마주쳤다간 큰일 날 텐데."
로센트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붉은 숲의 안전지대는 트라코티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아, 그거라면! 문제없어!"
그때, 니켈이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133. 더 좋은 아이디어
"일단 몬스터만 피하면 되는 거잖아?"
"뭐... 그렇지."
"다들 이쪽으로 와."
니켈은 근처 수풀로 들어가더니,
팍, 팍!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주워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설마 땅굴을 파서 숨자는 거야?"
"야,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주변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붉은 숲의 토양은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파기 쉽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된 도구 없이 굴을 파는 건 어렵다.
"거기다 우리 레드로드는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잖아.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만한 굴을 파려면...."
"몇 날 며칠은 걸리겠지."
그래서 누구도 니켈의 굴 파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땅굴을 다 파기 전에 몬스터와 만날 확률이 높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피츠타 호수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붉은 숲보다는 나을 거 아냐."
"호수는 호수대로 위험할걸."
"맞아, 지금 호수 분위기 안 좋아."
"차라리 몰려오는 몬스터랑 싸우는 게...."
레드로드 단원들은 땅 파는 니켈을 내버려 두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팍, 팍!
탁.
그때였다.
땅을 파헤치던 돌멩이 끝에 뭔가가 닿았다.
그곳엔 엉성한 나무문이 파묻혀 있었다.
곧바로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나타났다.
"저 녀석 쓸데없이 땅 파는 줄 알았는데."
"...땅 파는 건 생각보다 유용하다구."
김호정은 하품을 하며 꺼냈던 삽을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니켈을 도와서 땅을 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런 곳에 지하실이 있었다니."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간 없으니까 설명은 들어가서 할게."
레드로드 단원들은 놀란 얼굴로 니켈을 바라보았다. 기대도 안 한 니켈이 엄청난 걸 찾아냈기 때문이다.
"고맙다 니켈! 난 널 처음부터 믿었어!"
"개소리 말고 환자나 옮겨."
잘은 모르겠으나 당장 몸을 피할 대피소를 발견한 건 사실이다. 강승현 일행과 레드로드 패거리는 서둘러 지하로 내려갔다.
-"안이 생각보다 넓네요."
"흐아암, 그르게 말이야. 천장은 낮은데 꽤 넓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강승현 일행은 지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으셨네요."
안은 빛 한 점 없어서 시커멓게 어두웠지만, 강승현은 야간투시 덕분에 살펴볼 수 있었다.
"쮜이익!"
"쮜직!"
시궁쥐 무리가 앞니를 드러내며 침입자들을 경계했다.
"우왓 몬스터다!"
"붉은 숲 시궁쥐네요."
덴트롤 숲에서 본 시궁쥐와 똑같이 생겼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붉은 숲의 영향을 받아 털가죽과 코가 새빨간 색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지금은 무기도 없는데!"
"스크롤도 없어!"
"밖으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냐?"
레드로드 단원들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시궁쥐 몬스터는 모험가에겐 잡몹이지만, 힘없는 평민에겐 쉽지 않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쮜이이익!"
그때, 가장 커다란 시궁쥐 한 마리가 겁 없이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녀석이 시궁쥐 무리의 대장인 것 같다.
"앗, 힐러님은 지금 스킬도 못 쓰는데!"
"어서 피하세요!"
주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 순간,
"이런 놈들은 스킬 쓸 필요도 없죠."
퍼억!
"쮜익!"
강승현은 가볍게 돌려차기를 날려 달려드는 시궁쥐를 날려버렸다.
"쮜지지직!"
"쮜이잉!"
모여있던 시궁쥐 떼는 대장이 나가떨어진 걸 보고 부리나케 도망쳤다.
"저 큰 쥐를 한 방에 날려버렸어!"
"여, 역시 힐러님...!"
"오옷! 굉장해! 스킬 같은 건 없어도 강하시구나!"
"우리...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레드로드 잡몹들이 걷어차인 축구공처럼 날아가는 시궁쥐를 보며 감탄하는 사이,
'뒤쪽에 다른 공간이 있는 건가?'
강승현은 시궁쥐들이 사라진 벽을 신경 쓰고 있었다. 시궁쥐 주제에 은신 능력을 쓸리는 없으니, 벽 너머에 뭔가 있는 것 같다.
"음, 선생? 여기도 전이 던전이려나?"
"그건 아니에요. 전이 던전이라면 고르디우스가 죽었을 때 소멸했어야죠."
강승현은 지하실 벽에 손을 뻗었다.
이 지하실 자체는 흙을 파서 빈 공간을 만들고, 별다른 도구 없이 마력을 발라서 벽과 바닥을 고정한 아주 단순한 형태의 굴이었다.
"르페니 씨는 벽이나 천장에 몸이 닿지 않기 조심하세요.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마력 반발자와 접촉하면 고정된 벽과 천장이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알았다."
르페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걸 보던 김호정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마력 반발자라고 다 좋은 게 아니구나."
"좋게 말해서 마력 반발이지, 따지고 보면 마력 알레르기 같은 거니까요."
온갖 곳에 마력을 사용하는 아즐 대륙 특성상, 마력과 접촉했을 때 터트리는 능력은 장점보다는 단점이나 저주에 가깝다.
"당사자가 제어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능력이지만, 그게 아니니까."
"저 녀석도 참 살기 팍팍하겠구만."
"그런 셈이죠."
르페니를 잠깐 보던 강승현은 시선을 옮겼다.
지하실 입구 쪽을 바라보자,
"다 들어왔지?"
탁!
탁!
니켈이 손을 털면서 사다리를 내려왔다.
쿵, 쿵!
바스락, 바스락!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구 쪽에서 몬스터 기척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지하실 문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몬스터들이 여기를 못 찾네요."
"문에다가 애뮬릿 젬을 설치해놨거든요."
지하실 문을 들여다보자 오묘한 빛깔의 무지개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건, 화이트오팔이군.'
문에 박힌 건 [위장의 화이트오팔].
발동 시 보호색 효과를 받을 수 있는 애뮬릿 잼이다.
'지하실 문에 설치해서 색을 바꿨구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밀키쿼츠와 달리, 화이트오팔은 주변 사물과 비슷한 색으로 변할 수 있다.
니켈은 [위장의 화이트오팔]의 힘으로 지하실 문을 붉은 나뭇잎 색으로 위장했다.
"애뮬릿 젬을 두 개나 갖고 있었군요."
"대장이 선물로 줬어요."
니켈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밀키쿼츠는 전이 던전을 조사하다 발견했고 화이트오팔은 본인 집, 그러니까 데머셔 가문 저택에 있던 걸 훔쳐 왔다고.
'하나같이 몸을 숨길 때 쓰는 아이템인 걸 보면, 전투 능력이 없으니 잘 숨어다니라고 줬나보네.'
강승현은 몬스터와 마법사한테 쫓기는 니켈의 모습을 보다 못해 자기 집 보물창고를 터는 르페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걸로 외부 침입은 걱정 없어요."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있던 시궁쥐 무리는 따로 쫓아내야 하겠지만요."
"사실 여기 꽤 오랫동안 방치해둔 곳이라...."
니켈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여기는 레드로드 초기 멤버, 니켈과 르페니가 아주 어렸을 때 발견한 동굴을 개조해서 만든 비밀기지였다.
"어릴 때는 여기서 자주 놀았는데, 크고 나서는 다른 곳에서 노느라 거의 안 오게 되더라구요."
"...거의 잊고 있었는데."
르페니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벽을 바라보았다. 아까 시궁쥐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여기 다시 오니까 옛날 생각난다. 고구마 구워 먹고 그랬는데."
"...."
"대장도 그렇지? 상태도 괜찮으니까 다시 아지트로 쓰자!"
니켈은 싱글벙글이었지만, 르페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강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야, 내가 회복하려면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못해도 한 달은 걸리시겠죠. 거기다 아까 무리했으니 넉넉하게 두 달 잡으세요."
"역시 그렇겠지."
르페니는 혀를 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 마법사들한테 들키는 건 시간 문제겠군."
"마법사들?"
"까먹었냐? 우리는 범죄집단이라고."
레드로드 패거리는 카마르와 모험가 조합이 추적 중인 범죄집단이다.
지금까지는 전이 던전이 펼친 은신 결계 덕분에 추적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전이 던전이 사라졌으니, 우리가 잡히는 건 시간 문제야."
"그, 그러게? 이 비밀기지에는 그런 스텔스 기능이 없어!"
니켈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의 레드로드는 카마르와 싸울 힘도 없고, 추적을 피할 힘도 없는 상태였다.
"우리 말이야...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야?"
"보통 간부진은 사형이고, 하급 단원들은 감옥에서 썩거나 노예 신세가 되겠지."
"아, 안 돼!"
다른 곳도 아니고 카마르를 건드렸으니, 좋게 끝날 리가 없다.
"지금이라도 짐 싸서 도망가자!"
"몸이 멀쩡하면 도망이라도 쳐보겠는데."
이번 일로 르페니는 물론이고, 많은 단원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당장 레드로드 2인자, 부대장 빌 세이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마법사들과 싸울 때 유용한 아이템들은 전부 전이 던전이 사라지면서 소실됐고, 그나마 싸울 실력이 있는 단원들은 전부 중상."
한 무리의 리더인 만큼, 르페니는 꽤 객관적으로 레드로드의 현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카마르의 추적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해."
르페니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강승현은 이렇게 생각했다.
'뭐, 혼자 도망치는 건 가능하겠지만.'
아무리 몸이 만신창이가 됐어도, 르페니는 상당한 실력자다.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카마르의 추적을 따돌리고 다른 지역으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식 성격상 그렇게 할 리가 없지.'
하지만 르페니는 누구보다 동료를 아끼는 인간이라,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놈이었다.
"대장, 우리 그럼...."
"한 가지 방법은 있어."
르페니는 침착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너희는 그 틈에 다른 지역으로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녀석은 자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냥 자수할 생각은 아니고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대, 대장!"
"간부진은 잡히면 사형이라며!"
"대장은 100% 교수형일 거야!"
레드로드는 울먹이며 소리쳤으나,
"난 썩을 귀족 놈 자식이잖아. 그놈들도 날 사형시키긴 힘들걸."
"그래도...."
"귀족 걱정 말고, 평민들이나 조심하라고."
르페니는 괜찮다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강승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통의 귀족 자제라면 대형 사고를 쳐도 가문빨로 목숨은 건지는 법이지만, 르페니는 체질 때문에 가문은 물론이고 카마르 전체에서 배척받는 인물이다.
'오히려 데머셔 가문 사람들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죽이고 싶어할 테니까.'
그걸 당사자인 르페니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부하들이 자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을까 봐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중이었다.
"저 녀석.... 좀 막 나가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닌데."
둔한 김호정도 르페니가 거짓말한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다.
"그럼, 저 녀석들 도와줄까요?"
"어, 어떻게? 카마르 영주한테 부탁하게?"
강승현은 이런저런 이유로 카마르 영주와 인연이 있다.
그가 편지 한 통만 보낸다면 카마르 영주는 바로 레드로드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것도 재밌겠지만...."
"재밌겠지만?"
"그거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요."
"찾았다!"
"뭐, 뭐야 이거?"
"문이잖아!"
134. 레드로드 취직
강승현은 르페니와 레드로드한테 다가갔다.
"다들 얼굴이 죽상이네요."
"...."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위기가 초상집과 다를 게 없었다.
"르페니 씨, 정말 자수할 생각인가요?"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르페니는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이런 식으로 동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잡히지 않으면 카마르의 추적을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요?"
강승현은 그 타이밍을 노려 입을 열었다.
"뭐?"
"르페니 씨 포함, 레드로드 패거리 전원을 구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레드로드가 카마르 밑으로 들어가는 거죠."
정확하게는 카마르 영주 직속이 되는 것.
그렇게 되면 아무리 잘난 귀족이라도 레드로드를 쉽게 처벌할 수가 없다.
'아즐 대륙은 지독한 신분제 사회니까.'
카마르 귀족들이 손을 떼면, 그들의 후원을 받는 모험가 조합 역시 레드로드 수배지를 제거할 것이다.
"나보고 그 영감 따까리가 되라고?"
물론 레드로드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마법사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르페니는,
"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카마르 따까리가 되면 마법사 놈들 개짓거리를 그냥 두고 봐야 하잖아!"
카마르에 취직하라는 말을 듣더니 거품을 물고 발광했다.
"차라리 혀 깨물고 뒈지는 게 낫지!"
"하지만... 합법적으로 쓰레기 마법사들을 팰 수 있는 직장이라면?"
"뭐?"
강승현의 한마디에, 발광하던 르페니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려와 그를 붙잡고 물었다.
"카마르에서 마법사를 패도 된다고?"
"네."
"진짜? 거짓말 아니고?"
"물론이죠."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스킬을 발동했다.
그의 손에 푸르스름한 빛이 모여들며, 증표 형태로 변했다.
"지금 카마르는 영주의 명령으로 경비대를 개편해서 기사단을 창설했습니다. 영주의 엄청난 관심과 후원을 받고 있죠."
"기사단이라고?"
"이름은 카타일러 기사단."
강승현은 르페니한테 [카타일러 배지]를 보여주었다. 배지를 본 르페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카, 카타일러라면 그 괴짜 가문?"
"어? 알고 계셨나요?"
"그놈들을 모를 리가 없잖아!"
카타일러 가문.
모두가 마법사의 길을 걷는 카마르에서 꿋꿋하게 병사와 기사의 길을 걷는 독특한 일가. 남들이 비웃든 말든 자신들의 정의를 지키는 의리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애들도 도움을 종종 받았으니까."
카타일러 가문은 그 특성상, 카마르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이나 주변 마을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마르를 싫어하는 레드로드 패거리도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에게는 원한이 없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죠."
강승현은 다른 레드로드 단원들한테도 [카타일러 배지]를 보여주며 설명을 계속했다.
"카타일러 기사단의 목표는 피츠타 호수의 평화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카마르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카마르 주변 마을, 피츠타 호수 주변을 안전하게 만드는 게 꿈이었다.
"사람들을 괴롭힌다면 그게 몬스터건, 범죄자건 가리지 않고 제재한다는 게 카타일러 기사단의 신념이거든요."
즉, 아무리 대단하고 잘난 귀족이나 마법사라도 무고한 시민을 괴롭힌다면 철저하게 막겠다는 뜻.
"카마르 소속이면서 마법사를 제재하겠다고? 그게 가능해?"
"평범한 기사단이라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카타일러는 카마르 영주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는 기사단이다. 영주의 허가 하에 움직이는 거라, 아무리 잘난 마법사라도 쉽게 따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카타일러만 가능한 겁니다."
"...정말 거기 들어가면 마법사를 합법적으로 팰 수 있는 거야? 그래도 안 잡혀가?"
"아무나 팰 수 있는 건 아니고, 나쁜 마법사만요."
"그런 꿈의 직장이 있다니!"
르페니는 황홀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마 녀석이 평생 꿈꿔온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카타일러 기사단은 만들어진 지 하루밖에 안 돼서, 인지도가 부족하거든요."
카타일러 기사단은 카마르 영주의 아낌없는 후원과 투자 덕분에 최고의 시설에서 병사들을 훈련할 수 있게 됐지만, 정작 훈련할 만한 병사들이 없었다.
"그래서 소속원이 카타일러 가문 사람들밖에 없어요."
다른 무엇보다 훈련생이 시급한 상황이다.
지금의 카타일러는 기사단이라기보다는 가족모임에 가까웠으니까.
"이런 상황에 르페니 씨가 레드로드 단원들을 데리고 간다면 무척 기뻐하겠죠."
"당장 들어가야지 그럼!"
르페니는 아까 카마르에 취직하기 싫다고 발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카마르에 뼈를 묻을 것처럼 사람이 변했다.
"다들 저 녀석 말 들었지? 카타일러 기사단에 들어가자!"
"그, 그치만 대장...."
"우리가 무슨 수로 들어가겠어."
하지만 레드로드 단원들은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그런 좋은 기사단이 우리 같은 범죄집단을 받아줄 리가 없잖아."
"맞아. 굳이 말하면 우리를 잡아가겠지."
"따지고 보면 우리가 피츠타 호수의 평화를 박살 내는 것 같은데."
다들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레드로드는 카타일러 기사단이 말하는 범죄자였으니까.
"뭐, 여러분이 이래저래 사고치고 다닌 건 맞는데, 선을 완전히 넘지는 않았으니까요."
레드로드 패거리가 카마르를 상대로 어그로를 끌고 다닌 건 사실이나, 이들은 평민들을 괴롭히는 마법사를 주 타겟으로 삼았다.
'이런 인재들을 놓칠 수야 없지.'
카타일러 기사단에게 있어서 레드로드 패거리는 경력 있는 신입이나 다름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아야 했다.
"다들 이걸 까먹으신 거 같은데."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생성한 [카타일러 배지]를 보여주었다.
"제가 카타일러 기사단 소속이거든요."
"아, 사실 나도!"
김호정 역시 [카타일러 배지]를 생성했다.
"사실 우리는 말이야~ 기사단장의 부탁을 받아 인재를 모집하러 다니는 중이라구."
"본래라면 댁들 같은 범죄자 집단은 당연히 컷하겠지만...."
아즐 대륙은 낙하산과 빽이 합법이다.
강승현이 마음만 먹으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카타일러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희가 추천서 써주면 전부 통과시킬걸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으아아아아 힐러님! 선배님!"
그 말을 들은 레드로드 단원들은 감동의 눈물을 뿜어냈다.
목표 없이 어슬렁거리던 양아치 집단에게 정식 기사단이 될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그럼 슬슬 눈 좀 붙여두죠. 다들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맞아, 우리 자다 깨서 뭐 하는 건지."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자고."
강승현은 적당한 곳에 잠자리를 잡았다.
푹신한 침대는 물론, 하다못해 볏짚조차 존재하지 않는 열악한 잠자리다.
'내일은 꼭 침대에서 자든가 해야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강승현은 가장 먼저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스태미나 고갈 해제!]
[포션을 마셔서 스태미나를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좋아, 스태미나 고갈에서 풀려났다.'
강승현은 안도한 얼굴로 상태창을 닫았다.
스태미나 고갈은 잠을 자지 않으면 절대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겐 최악의 상태이상이었다.
'이걸로 스킬 쓰는 건 문제 없네.'
스킬을 쓸 수 있게 된 강승현은 가장 먼저 비밀기지 벽을 살폈다. 어젯밤 시궁쥐 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 그 벽이다.
'그냥 봐서는 평범한 벽인데.'
손으로 만져보고, 흙을 살짝 파봐도 아무 일 없었지만, 동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봐선 평범한 벽은 아닐 것이다.
[관찰의 눈]
벽을 향해 [관찰의 눈]을 사용하자,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다.]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다.]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다.]
이런 기묘한 문구가 나타났다.
'역시 뭔가 있었군.'
이 벽은 일종의 비밀통로였다.
아마 어제 마주친 시궁쥐는 어떤 이유로 열쇠를 손에 넣어서 벽을 드나든 것 같다.
'열쇠가 없으니 당장 들어가는 건 힘들 것 같고, 일단 기억만 해둘까.'
벽에서 물러난 강승현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바깥을 살폈다. 새벽까지 내리던 이슬비가 그친 상태였다.
"어때, 바깥 날씨 괜찮아?"
"괜찮아요."
"그래? 그럼 망설일 필요가 없지!"
밑에 있던 르페니가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당장 카마르로 출발하자!"
"아, 그건 힘들걸요."
지금 카마르는 몬스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아주 강력한 폐쇄 결계를 발동한 상태다.
덕분에 몬스터의 침입 걱정은 없어졌지만, 사람도 드나들 수 없게 됐다.
"한 달은 지나야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뭐라고?"
르페니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기 몸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어차피 르페니 씨는 한 달은 쉬어야 하니까... 폐쇄 결계 풀릴 때까지 요양이나 하세요."
"강승현 힐러 말이 맞아. 그런 몸으로 기사단에 들어가려 해봤자 아무도 안 받아줄걸."
로센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승현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르페니를 비롯한 대다수의 레드로드 단원들은 기사단에 들어가기는커녕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쳇, 알았어. 요양하면 되잖아."
르페니는 가볍게 혀를 차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여기서 며칠 머물다가, 파탑 마을로 가야지 뭐."
파탑은 피츠타 호수 주변의 마을 중 하나다.
크기가 상당히 작은 마을이라 모험가 조합이 없고, 레드로드의 협력자가 존재한다.
"파탑 마을?"
"거기에 우리 협력자가 있거든. 대충 한 달 정도만 쉬다가 카타일러 기사단으로 가봐야지."
"그럼 이 추천서를 갖고 있다가 카타일러 기사단장님한테 전해주세요."
강승현은 르페니한테 추천서를 내밀었다.
이걸 갖고 있으면 카타일러 기사단에 갔다가 무작정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맙다."
르페니는 덤덤하게 기뻐하며 말했다.
서로 첫인상은 개판이었지만, 마지막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이가 됐다.
"너희는 이제 어쩔 거야?
"우리는 트라코티로 출발해야죠."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음침한 붉은 숲에 햇빛이 내려올 정도로 말이다.
"거기서 좀 쉬다가, 마차를 타고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 오래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는 게 좋을걸."
"왜요?"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긴데."
곰곰이 생각하던 르페니가 입을 열었다.
"마을 분위기가 요새 뒤숭숭하거든."
135. 트라코티 마을 1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다들 묘하게 날이 서 있어. 외부인을 꺼리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르페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원래 트라코티는 느긋하고 생기 넘치는 마을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도는 마을로 변했다고 한다.
마을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몬스터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고.
"느낌이 안 좋나 보네요."
"딱 잘라서 말하긴 그렇지만, 뭔가 마을이 답답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안개도 자주 끼고. 원래는 안 그랬는데."
"그렇습니까."
멀쩡한 마을이 이유 없이 변할 리가 없다.
"뭣보다 진짜 거슬리는 녀석이 설치고 있어서...."
"거슬리는 녀석?"
르페니는 가볍게 혀를 찼다.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면 트라코티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 같다.
"아무튼, 볼일만 딱 보고 바로 떠나는 게 편할 거야. 외부인이 마을 일에 괜히 얽히면 귀찮아질걸."
"충고 감사합니다."
"뭐, 너무 진지하게 듣진 말고."
사실 트라코티 사람들 대다수는 멀쩡하게 잘살고 있었다. 마을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레드로드뿐이다.
"우리도 트라코티 안 간 지 며칠 됐거든."
"공생체 깨우느라?"
"그렇지. 마지막으로 가고 2주나 지났으니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르페니는 마을의 변화를 찜찜하게 여기긴 해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우리 상황이 상황이라 마을 일에 끼어들 상황이 아니고."
무엇보다 트라코티는 붉은 숲에서 딱 하나뿐인 모험가 조합이 설치된 마을이었으니까.
"일단 마을에 무슨 일이 생겼으면 가장 먼저 모험가 조합 놈들이 움직였겠지."
-"대충 다 챙겼지? 빠진 건 없고?"
"빠진 거라곤 김호정 씨의 이상한 베개 정도."
"아차차. 이걸 빠트릴 뻔했네!"
"이번에야말로 버릴 줄 알았는데."
르페니와의 간단한 대화를 끝낸 뒤, 강승현 일행은 트라코티로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했다.
어제 피츠타 호수를 건널 때 포션이나 각종 아이템을 많이 소모해서, 딱히 챙길 만한 물건은 없었다.
"식사는 트라코티에서 해결하는 게 낫겠네요."
"지금 밥 차릴 상황이 아니긴 하지."
레드로드 아지트가 멀쩡했다면 밥을 얻어먹었겠지만, 지금 레드로드는 노숙자 신세.
번듯한 식사를 할 만한 형편이 못 된다.
"뭣하면 숲에서 산짐승을 사냥해도...?"
"그럴 시간에 마을로 가서 따뜻한 감자버섯스튜를 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결국, 오늘 아침밥은 이건가."
김호정은 한숨을 푹 쉬며 말린 흑진월귤을 꺼냈다.
이제 한 주먹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선생도 좀 줄까?"
"아니요."
"그렇구나...."
김호정은 흑진월귤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한 주먹도 남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환자들 살펴보고 갈까.'
강승현은 비밀기지 구석에 누워있는 환자들한테 다가갔다. 환자들은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누워있었다.
"환자들 상태는 어떤가요?"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상태가 나쁘진 않아."
옆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로센트가 대답했다.
"아지트에서 도망칠 때 구급상자랑 약을 챙겨와서 다행이지."
그의 옆에는 강승현이 만들어준 환상통 치료제가 놓여 있었다.
"쓰러진 동료들 업고 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다들 힘을 합치니까 어떻게든 되더라."
로센트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다들 정신없이 도망치는 와중에도 환자들 약만큼은 빠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템이나 보물보다는 의약품을 챙기는 게 훨씬 낫잖아요."
"뭐, 대부분 자다 나와서 이불이나 베개 같은 것만 들고 나왔지만."
"그래도 보석 몇 개 정도는 가져올걸."
턱, 턱, 턱.
밖으로 나갔던 레드로드 단원 몇몇이 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날이 밝자마자 숲에 가서 먹을 만한 나물을 캐거나 작은 과일을 따왔다고 한다.
'숲에서 거지처럼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생활력이 좋네.'
이들은 원래 붉은 숲을 거점으로 살던 도적단이다. 그래서 아지트가 날아가도 당황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는 것 같다.
"물은 피츠타 호수에서 길러오면 되니까, 한동안 여기 머물러도 큰 문제는 없겠지."
로센트가 안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들 알아서 잘 지낼 것 같네. 딱히 신경 쓸 건 없겠어.'
어제 하루 온갖 난장판이 있었지만, 레드로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며칠 정도는 트라코티에 머무를 것 같으니, 혹시 약이 부족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마을로 오세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러면 우리는 슬슬 출발할까요."
강승현은 모여 있던 일행을 향해 말했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카마르에 있을걸...."
발릭 부부가 늙고 지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카마르를 떠나고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두 사람 모두 10년은 삭은 듯했다.
"앗, 지금 가시게요?"
"선배님들!!"
강승현 일행이 비밀기지 밖으로 나오자, 호수에서 물을 길어오던 니켈과 개스코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실 저는 기사단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거든요!"
"꿈이 소박하네요."
"이 은혜, 카타일러 기사단에서 갚겠습니다!"
달려온 개스코인이 묻지도 않은 걸 줄줄 털어놓았다. 크게 감동받았는지 경례와 함께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말이다.
"이건 별거 아니지만, 트라코티에서 쉬실 때 드세요!"
"스태미나 칵테일?"
"네! 아까 만들었어요!"
니켈은 수제 칵테일을 내밀었다.
그 난리통 속에서도 칵테일 재료와 셰이커는 잊지 않고 챙긴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강승현의 머릿속에 카타일러 기사단에 들어가서도 칵테일 메이커로 활약하는 니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다음에 만날 땐 카타일러 유니폼을 입고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떠나는 강승현 일행을 배웅했다.
-터벅, 터벅, 터벅.
"여기서부턴 맨날 다니는 길이네요."
"잘 아는 길이니까 맡겨주세요."
"저기 표지판 보이시죠? 저희 할아버지가 설치한 거예요."
늙고 지쳐 있던 발릭 부부는 금방 기운을 차렸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의욕이 샘솟는 모양이다.
"그럼 안내는 두 사람한테 맡길게요."
"넵!"
강승현은 숲길을 걸으며 상태창을 열었다.
스킬창을 확인하자 이번에 새로 획득한 [분해★] 스킬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로 검은 별이 붙은 스킬이 3개째인가....'
★ 마크가 붙은 스킬은 모두 4개를 모아야 하니, 남은 개수는 이제 하나뿐이다.
'다 모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지금 강승현은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 찔끔찔끔 [★] 스킬을 모으고 있지만, 정작 [★] 스킬을 왜 모아야 하는지, 모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듣지 못했다.
'애초에, 이 녀석을 얻는 조건이 뭐지?'
지금까지 아즐 대륙에 살면서 여러 차원이동자와 마주쳤지만, [★] 스킬을 획득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나 말고 유일하게 이 스킬을 얻은 사람은 김호정 씨가 언급한 "김재형"이라는 놈뿐이야.'
그 녀석은 강승현보다 한발 먼저 [★] 스킬을 모았고, 가장 마지막에 봤을 땐 4번째 스킬을 모은 상태였다.
'관리자 말로는 아직 지구로 돌아간 차원이동자는 없다고 했으니... 4개를 모아도 바로 지구로 갈 수 있는 건 아닐 거야.'
물론, 혹시라도 스킬 4개를 다 모아서 지구로 갈 수 있게 돼도 바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관리자 놈 멱살은 잡고 가야지.'
강승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태창을 넘겼다. 화면을 넘기자 특별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Q] [12500포인트를 모아주세요.]
[보상] : [★][?]
'이번엔 12500포인트인가.'
기존의 1만 포인트 퀘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퀘스트가 등장했다.
'15000포인트, 혹은 20000포인트를 모아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마지막 퀘스트라서 그런가?'
보상은 어김없이 [★]이었지만, 그 옆에 [?]가 추가된 상태였다.
'이렇게 된 거, 이번에는 포인트 모으면 바로 퀘스트부터 깨볼까....'
강승현이 상태창을 닫으려는 찰나,
꽝!!
숲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 다들 도망쳐!"
"이거 생각보다 강하잖아!"
"피해!"
그리고 앞쪽에서 몇몇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저쪽에 몬스터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인데!"
발릭 부부가 놀란 얼굴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는 트라코티 마을 입구까지 10m도 남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 어서 가보자 선생!"
"그러죠."
강승현과 김호정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붉은 바위 몬스터가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우왓, 저게 뭐야?"
"암석인이에요."
암석인은 바위에 마력이 잔뜩 들러붙을 때 종종 태어나는 바위 계열 인간 의태형 몬스터다.
"몸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방어력은 제법 높은 편이지만, 무거워서 속도가 느리죠."
그래서 늦은 시간에 숲을 돌아다니다 암석인을 사람으로 착각하고 접근한 사람들이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위 계열 몬스터이니, 삽으로 공격하면 쉽게 때려부술 수 있을 겁니다."
"오, 알았어!"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꺼내 들고 달려들었다.
쿠구구궁!
암석인은 강승현 일행이 접근한 것도 모르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공격하려 했다.
팍!
강승현은 가장 먼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걷어차 암석인의 주의를 끌었다.
쿠구궁!
녀석이 굴러온 돌에 한눈판 사이, 강승현은 암석인의 배후로 가까이 접근했다.
'보통 인간형 몬스터는 머리나 심장을 노리는 게 정석이지만, 이건 겉만 사람처럼 흉내낸 조각상이랑 다를 게 없으니....'
파각!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휘둘러 암석인의 다리를 공격했다.
'다리를 공격해 몸을 무너트리는 게 낫지!'
쩌적!
은빛 영광이 빠른 속도로 왼쪽 암석다리 복사뼈를 깎아냈다.
그 여파로 암석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쿠웅!
쿠우웅!
쓰러진 암석인은 바로 팔을 뻗으려 했다.
암석인은 돌을 이용하면 부서진 몸을 복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겐 안 되지.'
물론, 강승현은 틈을 주지 않았다.
"김호정 씨."
"예스!"
"저 녀석 팔을 부수세요."
강승현은 은빛 영광으로 암석인의 왼쪽 어깨를 내려찍었다.
[절개]
어깨에 처박힌 은빛 영광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바위를 조각냈다.
파각!
그걸 본 김호정은 금빛 영광을 휘둘러 암석인의 오른쪽 어깨를 박살냈다.
파아악!
암석인의 양쪽 팔이 몸통에서 떨어져나갔다.
두 사람의 합동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쿠구구궁!
암석인은 거대한 몸을 꿈틀거렸지만, 팔과 다리가 망가진 상태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단단하지만, 움직임이 둔한 게 약점이니까.'
암석인의 정석적인 공략법은 무작정 공격하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팔다리를 먼저 파손시키는 것이다.
"아직 살아있네."
"암석인을 완전히 죽이려면 바위에 깃든 마력이 소멸할 때까지 산산조각 내야 하거든요."
"으, 진짜 귀찮네."
"그건 시간낭비니까 내버려두죠."
암석인은 부서진 몸을 복구하지 못하면 보유한 마력이 계속 빠져나가서 평범한 바위로 돌아간다.
즉,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죽는다는 소리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강승현은 부서진 암석인을 치워두고 부상자한테 다가갔다. 그들은 암석인과 대치하느라 심하게 부상당한 상태였다.
'암석인 공략법은 별거 없지만, 공격력하고 방어력이 꽤 높은 편이니까.'
애초에 암석인 팔다리를 오징어 다리처럼 떼어내는 건 차원이동자들이나 써먹는 테크닉이지, 평범한 아즐대륙민들이 할 짓이 아니다.
"저걸 저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다니."
"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필 마을을 코앞에 두고...."
암석인에게 습격당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들은 강승현 일행이 암석인을 가볍게 처리한 걸 보고 무척 놀란 듯했다.
'빨간 머리는 없군. 트라코티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모험가들인가?'
그중 한 명은 동료들한테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피를 꽤 많이 흘려서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어우, 엄청 심하게 다쳤잖아."
"일단 바로 앞이 마을이니 거기로 가죠."
이들이 암석인한테 습격당한 곳은 트라코티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136. 트라코티 마을 2
"마을 입구가 보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발릭 부부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붉은 나무 사이로 굴뚝 연기와 민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 뭔가가 있네요."
"오, 거의 다 왔나 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트라코티}라고 적힌 간판이 나타났다.
'여기가 트라코티인가.'
트라코티.
다른 장소와 마찬가지로 붉은 숲의 영향을 받아, 나무와 땅은 물론 건물조차 빨간색밖에 없는 불그스름한 마을.
본래 붉은 숲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는 곳이지만, 특이하게도 트라코티 마을이 있는 붉은 숲 중앙은 들판처럼 탁 트인 공간이었다.
'숲속 마을이라고 해서 우중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네.'
덕분에 트라코티 마을은 음침한 붉은 숲에서 유일하게 눈부신 햇살을 구경할 수 있는 곳,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장소였다.
"겨우 하루 이틀 떠나있었을 뿐인데... 10년 만에 돌아온 기분이야."
"앞으로 1달 정도는 트라코티 바깥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갈래...."
발릭 부부는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닦았다.
비록 몇 달 놀고먹을 거금을 받긴 했으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고생에 비하면 푼돈이다.
"모험가님들! 저기가 우리 마을이에요!"
"그러네요. 트라코티네요."
"우리 마을 예쁘죠?"
해맑게 웃는 건 어린아이 한 명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온갖 일에 휘말려 고생했지만, 루디에겐 즐거운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애들은 금방 기운 차려서 좋다니까."
"축 처져 있는 것보다는 낫네요."
강승현 일행은 미소를 지으며 마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일단 마을 안으로 들어왔으니, 낮 동안 몬스터한테 습격당할 일은 없게 됐다.
"겨, 겨우 돌아왔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희들을 못 만났으면 트라코티를 코앞에 두고 다 죽었을 거야...."
모험가 파티는 트라코티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들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난 만큼, 몸속 스태미나가 쫙 빠져나간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대로 드러눕고 싶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누워 있었을걸."
"지금은 윌슨이 걱정이야.... 정말 크게 다쳤어."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부상당한 동료를 바라보았다. 그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겨우 마을에 들어온 상태였다.
"맞아. 우리는 가벼운 찰과상이나 타박상만 입어서 버틸 만하지만, 이 녀석은 힘들겠지."
"빨리 힐러를 찾아봐야 할 텐데."
"하지만 트라코티에서 힐러 찾기가 쉽냐고."
"모험가 조합의 도움을 받아도...."
파티원들이 착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가벼운 상처만 입은 상태라 굳이 힐러를 찾아가지 않아도 하루 이틀 푹 쉬면 나을 수 있지만, 윌슨이라는 남자는 힐러의 치료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힐러라면 걱정하지 마!"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 강 선생이 말이야~ 힐러님이시거든!"
"네?"
"저분이 힐러라구요?"
"소개가 늦었네요."
강승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나."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전투직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놀란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죠. 제가 사실 평소엔 흰 가운을 입고 다니는데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요."
"아니.... 옷이 문제가 아니라, 아까 보니까 엄청 잘 싸우셔서."
"바위 몬스터를 단검 하나로 잡았잖아."
모험가 파티는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평범한 힐러라기엔 너무 퍼펙트한 사냥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물론 강승현은 뻔뻔한 얼굴로 수긍했다.
그는 남이 자신을 칭찬해도 쑥스러워하는 일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이었으니까.
"아, 아무튼 힐러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부탁드려요! 윌슨을 치료해 주세요!"
망토를 걸친 남자와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부축하고 있던 부상자를 보여주었다. 윌슨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다리를 크게 다친 상태였다.
'출혈이 심하네. 크리티컬이 터진 건가?'
상처 부위에서 피가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건 [관찰의 눈]을 볼 것도 없이 '과다출혈' 상태네.'
[지혈]
강승현은 환자의 다리에 손을 뻗어 [지혈]을 발동했다. 흐르던 피가 멈추자, 상처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암석인이 휘두른 팔에 당한 거군.'
이 환자는 암석인한테 당하면서 다리 쪽 살점이 뜯겨나갔다. 거기까지라면 흔한 부상이지만, 크리티컬 때문에 살이 심하게 파여서 뼈가 드러난 상태였다.
"특이하네요. 보통은 상체를 다칠 텐데."
"우리를 감싸다가 대신 다쳤어요."
후드를 쓴 여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숲속을 탐색하다가 암석인과 마주쳤는데, 다들 너무 놀라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거든요. 사람인 줄 알아서...."
"그래서 의태형 몬스터가 위험하죠.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공격하니까."
실제로 미믹 같은 의태형 몬스터는 모험가 조합이 조사한 신규 모험가 사망 원인 몬스터 10위 안에 들어간다.
"후우, 아까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그래도 죽지는 않았잖아요. 여러분은 운이 좋은 편이네요."
"그건 그렇네요. 이렇게 힐러도 만났고."
후드를 쓴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치료부터 할게요."
강승현은 마력 장갑을 착용했다.
환자는 실내에서 치료하는 게 제일 좋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펄럭.
'일단 치료할 장소부터 만들고.'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휴식 결계 양탄자를 꺼내 바닥에 깔았다. 그 위로 환자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이 양탄자에 마력을 주입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모험가 파티는 마력을 긁어모아 양탄자를 작동했다. 새겨진 마법진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자면, 저는 힐은 쓸 줄 모릅니다."
"네?"
"뭐요?"
긴장하던 모험가들은 강승현의 이야기를 듣고 얼빠진 얼굴로 소리쳤다.
"힐을 쓸 줄 모른다구요?"
"미리미리 말하지 않으면 난리 치니까 지금 말해드리는 겁니다."
"아니, 왜요?"
힐러가 힐을 쓸 줄 모른다는 건, 마법사가 마법을 쓸 줄 모른다는 것과 같은 소리였으니까.
"그래도 치료는 가능합니다."
"괜찮아 강 선생은 최고의 힐러라구."
"아니, 근데 힐러가 힐을 못 쓰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꼬우면 거부하셔도 됩니다."
당황한 모험가 파티는 입을 우물거렸다.
생명의 은인이라 차마 욕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힐 쓸 줄 모른다는 놈한테 동료의 치료를 맡기기도 그렇고.
"얘들아, 이거 봐!"
그때, 후드를 쓴 여자가 윌슨을 가리키며 말했다.
"출혈이 그쳤다구!"
아까까진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지만, 강승현이 손을 댄 이후에는 출혈이 멈춘 상태였다.
"나는 힐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 정도 실력이면 맡겨봐도 되지 않을까?"
"음.... 그건 그렇지."
"손만 댔는데 피가 멎은 걸 보면 힐러는 맞겠지. 혹시 신성력이 떨어진 상태라 힐을 못 쓰는 건가?"
"일단 믿어 보자. 우리의 은인이잖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야...."
후드를 쓴 여자가 모두의 의견을 정리하고 강승현에게 말했다.
"윌슨을 부탁드릴게요."
"맡겨 두세요."
강승현과 김호정은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선생, 환자의 상태는 어때?"
"상처 자체는 평범해요."
몬스터의 물리 공격으로 생긴 상처.
모험가들 사이에서 흔한 편이다.
"하지만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다쳤으니,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감염될 위험이 있죠."
"으, 아프지 그거."
"그래도 빨리 발견한 편이니...."
강승현은 소독약을 꺼내며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상처 부위에 이물질이 섞여 있다.]
[대부분 흙과 바위 조각이다.]
[뼈에 금이 가긴 했지만, 부러지진 않았다.]
"이 사람은 운이 좋네요."
"그래도 두들겨 맞았는데 그걸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다리가 부러지진 않았잖아요."
원래 바위 계열 몬스터에 당하면 '골절' 상태에 빠질 확률이 굉장히 높다.
부러지는 게 아니라 금이 간 거로 끝난 걸 보면, 방어 기술이 좋았던 모양이다.
'음, 이물질부터 처리해야겠는데.'
이 환자는 흙투성이 바위에 공격당해서 상처가 오염된 상태다. 원래는 치료하기 전, 이물질을 물로 씻어내는 게 정석이지만....
'스태미나가 아깝긴 하지만 이걸로 할까.'
지금 우물에서 물을 퍼오는 건 시간 낭비다.
[적출]
강승현이 스킬을 발동하자 배후에 반투명한 손아귀가 나타났다. 여전히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야아아.
손아귀가 환자의 다리를 건드리자 상처 부위의 흙과 먼지가 강승현의 손바닥으로 옮겨졌다.
휙.
강승현은 마력 장갑을 벗어서 흙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장갑을 착용했다.
'이걸로 이물질은 제거했고.'
이제 남은 건 [봉합]이지만, 지금처럼 피부가 찢어진 게 아니라 뜯겨 나간 상태에선 그냥 꿰매는 건 힘들다.
'이번엔 방식을 조금 바꿔서....'
[살포]
강승현은 마력 포션을 [살포]했다.
'꿰맬 만한 살덩어리를 준비한다!'
사실 마력 포션은 엄밀히 말하면 상처 치료용 아이템은 아니지만, 야매 힐러는 손실된 상처 부위를 임시 대체하는 용도로 쓸 수 있었다.
[허상의 살점]
푸른 오오라가 환자의 상처 부위에 닿자 푹 파인 살덩어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허상의 살점] 스킬은 이름 그대로 마력을 이용해 손실된 피부나 살덩어리를 만드는 스킬이다.
"오, 굉장한데? 힐이랑 똑같은 거 아냐?"
"이건 살덩어리를 만드는 스킬이지, 상처를 회복시켜 주는 게 아니에요."
마력 살덩어리는 마력 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소멸한다. 거기다 약간의 공격만 받아도 금방 터져버릴 정도로 약했다.
"그냥 임시 방편용이지."
"진짜 살이었으면 선생도 힐 쓰는 거랑 다를 게 없는데!"
심지어 스킬을 쓰려고 집중만 해도 터져버리기 때문에, 새살이 돋기 전까진 요양만 해야 한다.
말 그대로 가짜 살덩어리다.
"하지만 이걸 이용하면 [완치판정]을 발동할 수 있거든요."
비록 완벽한 치료라곤 할 수 없지만, 몸을 치료한 건 맞기 때문에 [완치판정]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상처 회복을 돕는 스킬인 셈이죠."
"그럼 이제 다 된 거야?"
"아, 그건 아니에요."
이대로 다시 몸을 움직이면 기껏 채워 넣은 마력 살점이 도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봉합]은 이때 쓰는 거죠."
137. 트리코티 마을 3
비록 임시방편이긴 해도 소실된 신체 부위가 마련됐으니 [봉합]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강승현은 미리 준비해둔 도구를 꺼냈다.
"음? 그 레몬색 포션은 뭐야?"
김호정은 강승현이 꺼내던 포션을 가리켰다.
늘 사용하던 마력 포션 사이로 처음 보는 포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요? 약화 포션이에요."
"약화 포션? 그걸 어디에 쓰게?"
약화 포션은 사용시 일정 시간 동안 능력치를 떨어트리는 디버프 포션.
일반적으로는 적과 대치 중일 때 상대의 능력치를 떨어트릴 때 쓰는 거라, 환자를 치료 중인 힐러가 사용할 만한 아이템이 아니다.
"일단 [허상의 살점]으로 만든 살덩어리는 환자 본인의 신체 부위가 아닙니다. 일종의 이물질이죠."
"까다롭네."
기본적으로 생물의 신체는 이물질을 배척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봉합]으로 마력 살점을 이어붙여 놔도 환자의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
"거부 반응이 일어나면 상처 부위에서 통증이나 괴사가 발생하거나, 연결된 실이 끊어져서 기껏 한 치료가 물거품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거부 반응을 약화시켜야 해요."
이때 필요한 게 약화 포션.
약화 포션을 사용해 환자의 능력치를 낮추면 이러한 거부 반응의 범위나 위력, 발생할 확률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약화 포션을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구나. 대단한걸!"
"거부 반응을 막을 방법이 더 있긴 한데, 약화 포션을 쓰는 게 가장 간편해서요."
약화 포션은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쉽다.
본래는 신체 능력을 약하게 만드는, 치료와는 정 반대 효과를 가진 아이템이지만 야매 힐러의 손에 들어오면 유용한 치료제가 된다.
"물론 약화 포션을 많이 사용하면 환자의 몸이 쇠약해진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강승현은 레몬색 포션을 들고 [실 뽑기]를 발동했다. 포션에서 가느다란 레몬색 실이 뽑혀나왔다.
"이렇게 실로 뽑아서 사용하는 거죠."
"오."
길고 가늘게 뽑아낸 약화 실을 쓰면 환자의 몸이 심하게 약화되지 않는다.
이걸로 [봉합]하면 상처 부위 주변만 살짝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부 반응을 안전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럼 시작할까요. 스태미나 회복 부탁합니다."
"예에쓰!"
[실 뽑기]
김호정한테 스태미나 화살을 건넨 강승현은 마력 포션과 약화 포션에서 실을 뽑아냈다. 포션 속에서 푸른 마력 실과 레몬색 약화 실이 뽑혀 나왔다.
'뽑아낸 두 실을 하나의 바늘에 꿰서....'
[봉합]
강승현은 두 종류의 실이 연결된 바늘로 [봉합]을 시작했다.
[관찰의 눈]
'한 번의 봉합으로 두 효과를 함께 적용!'
파바바바밧!
강승현의 손이 재봉틀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상처 부위를 꿰매기 시작했다. 뜯겨 나간 살점과 끊어진 혈관이 마력 실로 인해 다시 하나로 접합됐다.
"저, 저건 뭐지?"
"피부를 꿰매고 있어!"
"저래도 되는 거야?"
지켜보던 모험가들은 그 광경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뭔가, 상처가 치료되는 거 같은데...."
"치료보다는 수리 같긴 하지만 말이야."
"괜찮은 것 같지?"
절대 일반적인 힐러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각했던 상처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강 선생의 최신 치료법도 못 알아보다니. 촌뜨기 녀석이 따로 없구만!"
김호정은 큰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대놓고 말하는 건 쫄리는지 입 밖에 뱉기 전 [신의 소통]을 슬그머니 끈 상태였다.
'1단계는 클리어.'
모든 부위를 연결한 강승현은 환자의 몸 상태를 살폈다.
'마력 실만 사용했다면 몸의 거부 반응 때문에 연결이 끊어져서 [봉합]이 해제될 수도 있지만....'
파앗!
마력 실과 함께 [봉합]한 약화 실이 육체의 거부 반응을 크게 낮춘 덕분에 실이 쉽게 끊어지지 않게 됐다.
"이제 다 된 거야?"
"뭐, 여기까지는 기존의 [봉합]과 다를 게 없지만...."
[허상의 살점]으로 만든 가짜 살덩어리는 일반적인 육체와 다르게 시간이 지나도 몸에 붙지 않는다. 그래서 단단하게 고정해두지 않으면 새살이 돋기 전에 살덩어리가 뒤틀릴 위험이 있다.
"이번에는 한 가지 작업이 더 필요해요."
"한 가지 더?"
"[봉합]할 때 튼튼함과 견고함을 오래 유지하려면 조금 특별한 방법을 써야 하거든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바늘을 두 개 더 꺼냈다.
"일명 새들 스티치 봉합법."
"새들 스티치?"
바늘 두 개를 써서 구멍을 교차로 꿰매는 봉합 기술. 간단하게 말해서 실 하나를 사용하는 양손 바느질이다.
이 방법은 기존 [봉합]보다 실이 훨씬 많이 들어가지만, 하나의 실을 두 번 겹쳐서 꿰매기 때문에 엄청난 내구성을 갖게 된다.
"보통, 실 한 부분이 끊어지면 봉합 자체가 풀려버려요. 하지만 실을 교차해서 꿰매면 끊어져도 봉합이 유지되죠."
원래 마력 살점은 스킬을 쓰기만 해도 풍선처럼 터지지만, 새들 스티치 봉합법으로 꿰매면 내구성이 크게 증가해서 마력 소모가 적게 드는 스킬 정도는 견딜 수 있게 된다.
"엄청 나잖아! 진작 쓰지 그랬어!"
"당연히 단점도 있거든요."
새들 스티치는 효과가 사기적으로 좋은 만큼 단점도 엄청났다.
"이건 일반 [봉합]보다 기술이 복잡해서 시간이 오래 걸려요. 당연히 스태미나도 많이 들죠."
결정적으로 새들 스티치는 상당히 고난이도 테크닉에 속해서, 숙련도가 낮으면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설프게 꿰매다간 살점이 뒤틀려서 환자 상태가 악화될 테니까.
"양손을 사용하는 봉합법이니까요."
"가죽을 뜨개질하는 거야 뭐야. 힘들지 않겠어?"
"저야 뭐...."
강승현은 바늘에 실을 꿰며 말했다.
새들 스티치는 이런저런 이유로 상당히 어려운 기술에 속하지만.
"[봉합] 스킬이 있으니 시간이야 단축할 수 있고... 스태미나는 김호정 씨가 채워주면 되고."
강승현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뭣보다 제가 양손잡이라서."
그는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실력자였으니까.
"이 정도는 쉽게 하죠."
[봉합]
실을 다 꿰맨 강승현은 양손에 바늘을 들고 새들 스티치 봉합을 시작했다.
스파바바바밧!
두 바늘이 빠른 속도로 교차하며 마력 살점을 더욱 견고하게 재봉합했다. 가느다란 마력 실이 겹치고 겹쳐져서 더욱 안정적인 형태로 변했다.
'속도와 정교함은 기계와 맞먹고, 내구성과 안정감은 손바느질급!'
강승현의 새들 스티치 봉합은 수작업의 장점과 재봉틀의 장점을 모두 합친, 쉽게 볼 수 없는 기술이었다.
'다 좋은데 역시 스태미나가 엄청 깎이네.'
[관찰의 눈]과 [봉합]을 동시에 발동하고 사용하는 복잡한 기술인 만큼, 강승현의 스태미나는 엄청난 속도로 사라져갔다.
휙, 휙!
"선생! 새 스태미나 화살이야!"
하지만 그때마다 김호정이 스태미나를 회복시켜줬기 때문에 스태미나 고갈 상태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역시 조수를 두길 잘했다니까.'
강승현은 걱정 없이 손을 움직여 [봉합]을 마무리 지었다.
"붕대는... 만들어둔 게 다 떨어졌으니."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잡초 가져왔어."
김호정이 근처에 보이는 잡초를 잔뜩 뽑아들고 왔다.
[천 만들기]
트라코티에서 자라는 잡초도 숲의 영향을 받아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천도 빨간색이었다.
"비주얼은 좀 그렇네요."
"빨간 휴지 같네."
사각, 사각.
강승현은 천을 잘라서 환자의 다리에 조심스럽게 감아주었다.
'마지막으로 [완치판정]을 발동하면....'
[완치판정]
스킬을 사용하자 환자의 회복속도가 크게 증가했다. 원래는 몸이 회복되면서 거부 반응이 발생할 확률도 함께 올라가겠지만,
파앗!
몸 속의 약화 실 덕분에 심각한 거부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를 확인한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끝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치료도 있다니."
"사흘 정도 쉬면 완벽하게 회복될 겁니다."
그가 손을 떼자, 환자의 다리는 방금까지 뼈가 드러날 상처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마력 실은 아이템 제작할 때만 쓰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사람의 몸에 사용해서 부상을 치료하고 방어력을 강화할 줄이야."
파티원 중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녀석 보통이 아닌데."
"혈색도 엄청 좋아!"
"힐도 안 쓰고 이런 걸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어."
갑자기 나타나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벌인 자칭 힐러. 방식은 괴상하지만, 환자는 틀림없이 치료된 상태였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감사 인사한 건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이었다.
"덕분에 동료를 치료할 수 있었어요!"
나머지 동료들도 하나둘 강승현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면서 이런 기술은 처음 봤어!"
"너 정말 대단한 힐러였구나! 아까는 잘 알지도 못하고 멋대로 말해서 미안해!"
"그럴 수도 있죠."
강승현은 부드러운 얼굴로 대답했지만,
'이게 야매 힐러의 즐거움이지.'
실제로는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만족감을 즐기고 있었다.
"치료비는 얼마를 드려야...."
"아, 돈은 됐습니다."
"네? 그럼요?"
"치료비는 포션으로 받을게요."
지금 강승현은 얼마 안 남은 포션을 이번 치료에 다 써버렸다. 있는 거라곤 점착 포션이나 약화 포션 같은 기타 아이템뿐이다.
'이런 시골 마을 포션 가게는 포션 종류가 얼마 없거든. 마력 포션은 빨리 품절 되는 편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고.'
그래서 이 상황에선 돈을 받는 것보단, 포션을 직접 받는 게 낫다.
"저, 정말 포션이면 되나요?"
"음... 마력 포션이 필요한 거야?"
"종류는 딱히 안 가립니다."
"나는 스태미나 포션밖에 없어."
"그거 다 주세요."
모험가 파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진 포션을 털어주었다.
하지만 강승현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좀 독특한 분인 것 같지만, 좋은 사람 같지? 역시 믿길 잘했어!"
후드를 쓴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그냥 갔으면 윌슨은 아직도 치료를 못 받았을 거 아냐."
"분명 힐러 찾느라 시간만 버렸겠지."
"응? 트라코티는 힐러가 별로 없어? 모험가 조합도 있는데?"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본래 모험가 조합이 설치된 마을은 부상당한 모험가들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당연히 그들의 주머니를 노린 모험가 힐러나 사제들도 많이 방문하는 법이다.
"혹시 두 분은 트라코티에 처음 오셨나요?"
"응, 오늘 처음 왔어."
후드를 쓴 여자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여기는 힐러를 보기 힘든 마을이거든요."
138. 트라코티 마을 4
"힐러를 보기 힘든 마을이라고?"
붉은 숲은 대낮에도 몬스터가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다. 이곳의 유일한 안전지대인 트라코티는 숲에서 다친 부상자를 치료하기 딱 좋은 곳이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힐러를 못 볼 이유가 없다.
"트라코티에는 사제 힐러가 없나요?"
"네. 이 주변 지역은 교단의 힘이 약하거든요."
"엥? 아니 왜?"
"그야 당연히 카마르 때문이겠죠."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그러자 후드를 쓴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이 주변에서 먹고 살려면 카마르로 일하러 가거나 물건을 팔러 가는 게 필수예요."
피츠타 호수 지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카마르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카마르는 농경지가 없어서 주변 마을에서 식량을 전부 수입하고,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이 많아서 잡일이긴 해도 일자리 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당연히 카마르와 마탑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죠."
사실상 붉은 숲과 피츠타 호수 전체가 진홍의 마탑 손안에 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마탑과 적대관계인 교단은 신전을 짓지 못해서 사제를 파견할 수가 없고, 방랑 사제도 거의 찾아오질 않았다.
"그러면... 모험가 힐러는? 마을에 모험가 조합도 있으니 많이 올 것 같은데."
"아니요. 대부분 카마르에 머물고 있어요."
후드를 쓴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로 옆에 대도시가 있는데 이런 작은 마을에 올 리가 없잖아요."
카마르는 서부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이고, 도시 안에 모험가 조합이 있어서 굳이 트라코티에 가지 않아도 모험가를 잔뜩 만날 수 있다.
"뭣보다 카마르에서는 돈 많은 귀족이나 마법사 고객도 찾을 수 있으니까."
트라코티에도 부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돈 없는 평민. 돈이 목적인 힐러라면 카마르에 죽치고 있는 게 정상이다.
"그래서 트라코티로 오는 힐러는 거의 없어요. 있다고 하면 모험가 파티에 소속된 파티 힐러 정도."
그나마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떠나버려서 타이밍이 어긋나면 마을에서 힐러를 한 명도 못 만나는 일이 벌어진다.
"문제는 여기가 붉은 숲 유일한 안전지대라는 점이죠."
"모험가는 물론이고 여행객이나 연구 재료를 구하러 온 사람들도 많이 오거든."
"당연히 부상자도 많이 오고 말이야."
"근데 그중에 힐러는 없지. 웃겨 진짜."
모험가 파티가 가볍게 투덜거렸다.
덕분에 트라코티는 유동 인구는 많아도 힐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미묘한 마을이다.
운 좋게 힐러와 만나도, 치료받으려면 환자 수십 명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붉은 숲에서 다친 모험가는 트라코티에서 응급처치만 하고 다시 카마르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우리도 평소였으면 그랬을 텐데."
문제는 지금 카마르가 폐쇄 상태라는 것.
덕분에 카마르로 찾아가서 치료를 받는 것도, 카마르에서 힐러를 불러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까 강승현 힐러가 아니었다면 힐러를 찾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했겠지. 어쩌면 아직까지 힐러를 못 찾았을 수도 있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후드를 쓴 여자는 다시 한번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환자를 계속 땅바닥에 둘 순 없잖아요."
"정말 고마웠어요!"
모험가 파티는 바닥의 윌슨을 부축하며 자리를 떠났다.
휘이잉!
그때,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여자의 후드가 벗겨지면서 안에서 길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흩어져 나왔다.
"앗!"
여자는 후드를 황급히 뒤집어쓰고 주위를 살피더니 동료들을 뒤따라갔다.
그걸 본 강승현은 포션을 들이켜며 생각했다.
'저 녀석 역시 트라코티 사람이었나.'
모든 빨간 머리가 붉은 숲 출신이라는 법은 없지만, 저 여자는 다른 동료들보다 트라코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혹시 트라코티 사람이 아니라면 그게 더 신기할 정도로.
'일부러 숨기는 거 같은데, 왜지?'
레드로드한테 호되게 당한 카마르라면 모를까, 트라코티에서 굳이 머리색을 숨길 필요는 없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본데.'
강승현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말을 걸 틈도 없이 당사자가 멀리 가버려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거 참 미묘한 상황이네."
"뭐가요?"
"저 친구들 이야기만 들으면 여기는 힐러가 꼭 있어야 할 곳이잖아."
모험가 파티가 자리를 떠난 뒤.
강승현 일행은 간단하게 뒷정리를 했다.
"근데 정작~ 힐러만 빼고 다 있다니."
김호정은 휴식 결계의 양탄자를 곱게 접으며 말했다. 휴식 결계 덕분에, 흙바닥에 펼쳐놨음에도 양탄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상황이 우습게 돌아가긴 하죠."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며 말했다.
붉은 숲은 피츠타 호수 근방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데 정치적인 이유로 교단 힐러가 없고, 지리적인 이유로 모험가 힐러가 없는 데다,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소조차 없었다.
"여기가 카마르에서 조금만 더 떨어져 있었다면 힐러가 지금처럼 안 보이진 않았을 텐데."
트라코티는 카마르와 어중간하게 가까웠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머물기 편한 카마르에 모든 힐러가 몰려가 버린 상황이다.
"발릭, 그럼 트라코티 사람들은 다치면 어떻게 치료받는 거야?"
"트라코티도 힐러가 필요할 땐 카마르로 가죠."
"이웃 마을 사람들도 다들 비슷해요."
발릭 부부가 루디를 치료하러 카마르에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피츠타 호수 지역 사람들은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카마르로 향한다.
그곳엔 교단 대신 치유재단이 운영하는 치료소가 설치되어 있고, 마법사들의 마력 묻은 돈을 노리는 모험가 힐러들이 많았으니까.
"그럼 환자 나오면 매번 배 타고 호수를 건너가야 해? 엄청 번거롭겠네."
"뭐... 근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힐러 찾을 일이 많이 없으니까요."
"보통은 돈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거잖아요."
발릭 부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는 한 달에 한 번 카마르로 물건을 팔러 갈 때만 치료소를 방문해서 루디의 약을 구입해요."
"힐은 비싸서 받아본 적 없어요."
"그래서 평민들은 마을에 힐러가 있건 없건 별생각 없죠. 모험가들은 또 다르겠지만."
애초에 아즐 대륙 평민들은 힐러를 부를 만큼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서 어지간한 부상은 포션과 약초로 때우는 게 기본이다.
"하긴, 레드로드 애들이 붉은 숲에는 좋은 약초가 많다고 했지."
"야매 힐러가 활약하기 딱 좋은 마을이네요."
힐러는 적지만 재료 구하기는 쉬운 곳.
강승현에게 있어서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그러면 정리도 대충 끝났겠다... 슬슬 밥부터 먹으러 갈까? 배고픈데."
"그럴까요."
"배부르게 먹고 푹 쉬고 싶어."
김호정이 배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아침도 안 먹었으니 이제 슬슬 뭐라도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그러면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아직도 카마르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발릭 부부는 카마르에 갇힌 사람들과 달리 트라코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을 지켜준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물론 같은 짓을 또 해야 한다면 절대 안 할 거지만....'
'나는 앞으로 1년 정도는 트라코티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야.'
물론, 오는 중간중간 두 사람을 따라온 걸 많이 후회하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괜찮다면 트라코티에 머무시는 동안 저희 집에서 묵으셔도 되는데."
"아, 괜찮습니다. 이런저런 잡일 때문에 여관 숙소를 빌릴 거라서요."
"빨래부터 맡겨야 하니까 말이지."
"그러면 조심해서 들어가 가세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
강승현 일행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릭 가족을 바라보며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무척 지쳤지만, 행복해 보였다.
"좋겠다. 나는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글쎄요."
"죽어도 집에 갈 수 없는 삶이라니...."
아즐 대륙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도 많은 차원이동자들은 지구로 돌아가는 걸 꿈꿨다.
김호정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집에 꼭 가야 할 이유라도 있어요?"
"집은 이유가 있어서 가는 곳이 아니잖아."
김호정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집이라서 가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저도 마찬가지네요."
아즐 대륙의 생활은 진작 익숙해졌다.
이곳 생활이 적성에 맞기도 하고, 이대로 여기 남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거만 아니었어도 그냥 여기 눌러살았을 테니."
그에겐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일단은 당장 할 일부터 하죠."
"그럴까."
두 사람이 개고생하며 트라코티에 온 이유는 하인드 마을로 돌아갈 마차를 빌리기 위해서다.
"뭐, 지금 당장 출발하는 건 무리겠지만요."
"포션도 바닥났고, 슬슬 무기도 손질해야 하고... 뭣보다 배고파."
김호정이 배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아침도 안 먹었으니 이제 슬슬 뭐라도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그럼 숙소부터 잡을까요? 밥은 숙소 식당에서 해결하고."
"그러자고."
"뭐, 여기는 모험가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마을이니 빈방이 없진 않겠죠."
두 사람은 트라코티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 저희 여관에는 빈방이 없습니다."
"빈방이 없다구요?"
"네, 모든 방이 만실입니다."
여관 종업원은 무척 죄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유가 뭔가요?"
"그게, 지금 카마르로 가는 길이 막혀서 모험가님들이 전부 트라코티로 오셨습니다."
"...그럼 옆집으로 가보죠."
"아마 다른 여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방 하나쯤은 있겠지!"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여관으로 갔으나,
"지금 저희 여관에 빈 객실이 없어서...."
"풀방입니다."
"아, 빈자리가 없네요."
"쓰레기통에서 묵는 건 가능해요."
가는 곳마다 방이 없다며 거절당했다.
두 사람은 허망한 얼굴로 트라코티 광장으로 나왔다.
"이제 보니까 우리 말고도 방을 못 찾은 사람이 많네요."
숙소를 구하지 못한 모험가들이 천막을 준비하거나 돗자리를 깔면서 자리 잡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또 노숙해야 해?"
"야외 취침이라고 하죠."
"흙바닥에서 자는 거 지겨워!"
팍!
"아까 발릭 부부한테 빌붙을걸!"
김호정이 삽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빨간 흙과 김호정의 눈물이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이라도 재워달라고 할까?"
"저도 그 생각 해봤는데, 우리는 그 녀석들 집을 모르잖아요."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안 알려주겠지. 우리는 외부인이니까."
김호정은 한숨을 푹 쉬며 한탄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내에서 묵고 싶은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강승현은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방법을 쓰는 수밖에."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힐러들은 외진 곳에 있는 트라코티에 가는 걸 꺼렸고, 인프라가 좋고 안전한 카마르에 머무는 걸 선호했다.
"일반적인 힐러라면 트라코티로 갈 메리트가 없죠."
강승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139. 여기를 빌리고 싶은데요
마을에 도착한 모험가가 묵을 수 있는 장소는 크게 세 군데다.
'첫째는 마을 숙박 시설.'
일반적으로 모험가들은 여관에 묵는 게 기본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빈방이 없어서 묵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는 마을 외곽의 야영장.'
아즐 대륙은 어느 마을을 가던 여행객들한테 천막이나 야영 장비를 대여해준다. 해가 저물 때 밖으로 나가면 온갖 몬스터와 만나게 되는 세상이라, 마을 안에서 잘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모든 야영이 다 그렇듯, 밖에서 자는 건 불편하고 피로를 제대로 풀 수 없다. 애초에 멀쩡한 건물 놔두고 집 밖에서 자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보통은 돈 없는 모험가들이나 야영을 선택한다.
'그리고 셋째는....'
벌컥!
"어서 오세요.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입니다."
강승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험가 조합 직원이 미소와 함께 그를 반겨주었다.
'모험가 조합 건물!'
여관방을 구하지도 못하고, 야외취침도 하고 싶지 않은 모험가한테 남은 건 모험가 조합뿐이다.
모든 모험가 조합 건물에는 모험가를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여관이 없는 장소에선 여관을 겸하기도 한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방을 빌리고 싶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합 직원은 밝은 미소와 함께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김호정이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모험가 조합에서 묵자고? 그치만 여긴...."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여관은 일반 여행객도 묵기 때문에 빈방이 많지 않지만, 모험가 조합은 언제 가더라도 묵을 수 있다.
가끔 귀족들이나 각종 높으신 분들도 묵어가기 때문에 일반 여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했다.
'일단 원칙적으로는 모험가를 위한 시설이니까.'
거기다 싼값에 식사도 가능하고 돈이 없어도 묵을 수 있기 때문에,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된 신참이라면 모험가 조합에 묵는 게 기본이다.
'이렇게만 보면 장점만 가득해 보이지만....'
밖에서 천막 치는 모험가들만 봐도 알 수 있듯, 모험가들은 어지간해선 모험가 조합에 묵으려 하지 않았다. 여관과 달리 빈방이 썩어 넘치는데도 말이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서 말이지.'
<아즐 대륙의 숙박 시설 등급표>
[S급 : 높으신 분들 전용 초호화 숙소.]
[A급 : S급보단 못해도 제법 좋은 숙소.]
[B급 : 무난하게 좋은 숙소.]
[C급 : 그냥저냥 평범한 숙소.]
[D급 : 창고 수준인 싸구려 숙소.]
-번외
[F급 : 그냥 야외 취침.]
분명 모험가 조합엔 귀족도 머물 수 있는 초호화 S급 방이 있긴 하지만, 정작 모험가한테는 빌려주지 않는다.
사유는 '언제 올지 모르는 높으신 분들을 위해서 비워둬야 하니까'라는 이유로.
'거지 같은 새끼들.'
말로는 모험가를 위한 시설이라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귀족과 높으신 분들을 우선시할 뿐이다.
덕분에 모험가들이 빌릴 수 있는 방은 일반 여관과 비슷하게 A~D급 방뿐이다.
이 경우, 당연히 시설이 좋은 A급이나 B급 방을 노리려 하겠지만.
'좋은 방을 쉽게 빌려줄 리가.'
모험가 조합은 방을 빌려주는 대가로 모험가한테 특수 의뢰, 숙박 의뢰를 맡긴다.
당연히 숙소 등급이 좋으면 좋을수록 의뢰 난이도가 올라간다.
A급 방을 빌리고 싶으면 A급 의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풋내기 모험가가 빌릴 수 있는 방은 최하급 숙소, D급밖에 없다.
'차라리 일반 의뢰는 돈이라도 벌지.'
숙박 의뢰는 따로 보상을 주지 않는다.
고생해서 클리어해도 A급이건, D급이건 받을 수 있는 건 숙소 열쇠뿐이다.
'개자식들이지 아주.'
그래서 몇몇 모험가들은 차라리 돈을 내겠다며 돈을 가져가라고 항의하지만,
'숙박 의뢰의 취지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쉴 수 있도록, 그렇지만 뛰어난 실력자는 대접받을 수 있도록."입니다. 모험가님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아무도 안 믿을 소리를 뱉으며 모험가들의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방 하나 빌려주고 모험가를 실컷 부려먹을 수 있는데 푼돈을 뭐하러 받겠어.'
놈들은 숙박 의뢰를 이용해 보상이 적거나, 번거로워서 남들이 꺼리는 의뢰를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모험가들은.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시이발 독한 새끼들!'
'차라리 길바닥에서 자는 게 낫겠다!'
라고 말하며 모험가 조합에서 자는 걸 포기하고 여관에서 묵거나 야외 취침을 선택했다.
그나마도 여관이 없는 지역이나, 야외에서 자기 힘든 상황에선 울며 겨자 먹기로 숙박 의뢰를 받아야 하지만.
"에휴, 이래서 모험가 조합에선 묵기 싫었는데.... 자러 왔는데 일을 해야 하잖아."
김호정이 얼굴을 구기며 의뢰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쉬운 의뢰는 죄다 하급이고, 그냥 봐도 까다로운 의뢰는 상급이었다.
"하지만 길바닥에서 자는 건 더 싫어요."
"그건 그렇지.... 몇 등급으로 할까?"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데...."
두 사람이 숙박할 방을 고르려던 참이었다.
"야, 저것들 좀 봐라. 방 빌리려나 본데?"
"모험가 조합 노예 하나 추가요~."
"불쌍해라."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험가 몇몇이 두 사람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것들? 왜 시비야?"
"트라코티 여관에서 묵는 놈들이겠죠."
이렇듯 종종 여관에 묵는 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모험가들이 있다.
실상은 운이 좋아서 빈방을 잡은 것뿐인데 말이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상대하죠."
강승현 일행은 그들을 무시하려 했으나.
"아참, 지금 A급하고 B급 방은 못 빌려."
"응? 왜?"
"그건 우리가 창고로 쓰고 있거든~."
그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낄낄거리며 숙소 열쇠를 보여주었다.
"뭐? 저 말 진짜야?"
"네. 저분들이 A급 방과 B급 방의 숙박 의뢰를 맡으셨습니다."
모험가 조합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실제로 몇 개 되지도 않는 A급 방과 B급 방은 전부 나간 상태였다.
"와! 모험가 조합에 묵지도 않으면서!"
김호정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규칙위반은 아니었다. 방을 빌린다고 거기에 하루 종일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남을 놀리려고 일부러 귀찮은 의뢰까지 해가면서 쓰지도 않는 방을 빌리다니. 발상이 괜찮네요. 똑같이 해주고 싶네."
"그런 게 마음에 드는 거냐구."
"뭐, C급 방은 남아 있으니 일단 이걸로 하죠."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A급도 B급도 아닌 C급 의뢰를 선택했다.
"여기 C급 숙박 의뢰입니다."
모험가 조합 직원이 미소와 함께 의뢰서를 보여주었다.
"이중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해주세요."
"대부분 붉은 숲 관련 의뢰네요."
"피츠타 호수 의뢰도 있어."
두 사람이 의뢰서를 찬찬히 살피는 사이,
"실례합니다. 방을 빌리고 싶은데요."
"D급 방을 빌릴 수 있을까요?"
몇몇 모험가들이 방을 빌리기 위해 찾아왔다.
대부분 D급 의뢰를 요청하는 걸 보아, 모험가가 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모험가님."
"지금 D급 방은 전부 나간 상태입니다."
무슨 일인지, 풋내기 모험가들이 빌릴 수 있는 방이 전부 매진된 상태였다.
"아...."
"어쩔 수 없죠...."
풋내기 모험가들은 크게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모험가 조합에서도 숙박할 수 없게 됐으니 남은 건 야외 취침뿐이다.
"아이구, 저런. 푹 쉬어야 할 텐데."
김호정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일반 모험가들이야 괜찮지만, 풋내기 모험가들은 야외 취침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례합니다."
"빈방 있을까요?"
두 사람이 의뢰서를 고르는 동안에도 모험가들이 계속 찾아왔지만, 대부분 방이 없다는 말을 듣고 돌아갔다.
"...좀 이상하네요."
"뭐가?"
"보통 D급 방은 매진되는 일이 없거든요. 시설은 제일 안 좋은데 방 개수는 가장 많아서."
누가 작정하고 빌리지 않는 한 말이다.
강승현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쓰레기 모험가들을 바라보았다.
"아,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D급 방도 전부 우리가 쓰고 있거든?"
"창고가 많이 필요해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어~하하하하!"
촤르르르!
놈들은 신나게 웃어대며 테이블 위로 D급 방 열쇠를 잔뜩 쏟아부었다.
"아아아...."
"흑...."
그걸 본 풋내기 모험가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모험가 조합을 떠났다. 이상한 놈들 때문에 정작 숙소가 필요한 사람들이 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저, 저래도 되는 거야?"
"그게...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모험가 조합 직원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열쇠를 돈 받고 판다면 불법이 되겠지만, 저분들은 방을 소유만 하고 있어서요."
D급 의뢰를 정당하게 클리어해서 방을 빌린 것이기 때문에, 모험가 조합이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면 이유가 뭐야? 너네 때문에 애먼 모험가들이 노숙자가 됐잖아."
하도 어이가 없던 김호정은 쓰레기 파티한테 다가가 물었다.
"이유? 글쎄다?"
"내 취미가 열쇠 수집이거든. 방금 막 정한 거지만."
"그냥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왜 그렇게 진지하게 굴어."
"아저씨 인생 피곤하게 사네."
녀석들은 다가온 김호정을 비웃어댔다.
진지하게 대답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아, 그냥 장난이라구요?"
그때, 뒤에 있던 강승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장난 좀 쳐볼까."
그리고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듯 모험가 조합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분명, 숙박 의뢰의 취지는 '뛰어난 실력자는 대접한다.' 맞죠?"
"아, 네."
모험가 조합 규정상, 모험가는 숙박 의뢰를 완수할 실력만 있으면 어떤 방이든 빌릴 수 있다.
"S급 방은 일종의 예약석이라 예외지만, 그 외에는 어딜 빌려도 상관없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를 빌리고 싶은데요."
"여, 여기요?"
모험가 직원은 크게 당황했다.
강승현이 가리킨 건, A급 방도, B급 방도, C급 방도 아니었다.
"이 건물을 통째로 빌리고 싶습니다. 제 개인 숙소로 쓰고 싶어서요."
그가 가리킨 건 모험가 조합의 건물이었다.
140. 숙박 의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