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흙투성이 마을 3
"꽤 오래된 책이네요. 어디서 찾았어요?"
"저쪽 서류 더미 밑에서 찾았어."
"이 정도면 거의 문화유산 급일 것 같아요!"
"그치? 한 1000년은 묵은 거 같아."
강승현 일행이 찾아낸 책은 아무리 못해도 수백 년, 길게 잡으면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듯한 낡은 고서였다.
'잘됐네, 안 그래도 이런 걸 찾고 있었는데.'
강승현은 낡은 고서를 펼쳤다.
겉표지에 제목 같은 건 따로 적혀있지 않았고, 두께도 그리 두껍지 않아서 20~30분이면 전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트라코티의 과거를 조사하기엔 이만한 고서가 딱이다.
'관리를 제대로 인해서 책 상태가 안 좋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워낙 오래된 책이라 제대로 전시해놔도 보존하기 힘든 물건인 텐데, 그냥 자료실 방구석에 그냥 처박아놔서 그런지 책 상태가 무척 나빴다.
"뭐라도 좋으니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설마 백지는 아니겠지?"
팔락, 팔락.
강승현이 페이지를 넘기자 뭔지 모를 낙서와 그림이 잔뜩 나타났다.
"백지...는 아니네."
"뭘 그려둔 걸까요?"
"대충 보니까 붉은 숲 풍경을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숲에 사는 몬스터를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책 곳곳에 트라코티 주변을 묘사한 듯한 그림과 의미 없어 보이는 도형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책 상태가 너무 안 좋은 데다, 유치원생이 왼손으로 쥐고 그린 것처럼 대충대충 그려져 있어서 쉽게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글은 없고 개발새발 낙서투성이네요."
"...이거 혹시 1000년 전 어린애가 쓰던 낙서장 아닐까."
"설마 그런 걸 여태껏 보관해놨을까요."
강승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겼다.
'낙서, 낙서, 그림, 낙서....'
결국, 끝까지 다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움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진짜 꽝인 건가.'
기껏 찾아낸 고서가 애들 낙서장이라니.
강승현은 아쉽다는 얼굴로 책을 덮으려 했다.
바스락.
"응?"
그때, 책 중간 지점에서 묘한 소리가 들렸다.
다른 페이지에 비해 좀 더 뻣뻣하고 두껍게 느껴지는 구간이 있었다.
'뭐지?'
자세히 살펴보자, 페이지 두 장이 겹쳐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승현이 겹쳐진 두 페이지를 떼어내자 그 사이에서, 아까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페이지가 나타났다.
'역시, 뭔가 숨겨져 있었군.'
숨겨진 페이지에는 제단 위에 올려진 어떤 둥근 구체를 사람들이 숭배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의 머리가 붉게 칠해진 걸 보면, 이들은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인 것 같다.
"여기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네요?"
"어! 근데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뭔가 살짝 다른 느낌이지...?"
다른 낙서와 마찬가지로 붓으로 대충 휘갈겨 그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뭔가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묘한 그림이었다.
"이건...!"
"왜, 왜 그래?"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그림을 자세히 꼼꼼하게 살피던 강승현은 놀란 얼굴로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림 속 구체에 [위즈멜의 왼손]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신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 이거 [위즈멜의 왼손] 쓸 때 나오는 그거 아냐?"
"맞아요. 그냥 보면 눈치 못 챌 수도 있지만... 똑같은 문신이죠."
[위즈멜의 왼손]
강승현이 스킬을 발동하자, 그의 왼손에 그림 속 구체의 것과 똑같은 문신이 나타났다.
"이 구체의 정체는 '위즈멜'이에요."
"이게 위즈멜이라고?"
즉, 숨겨진 페이지 속 그림은 트라코티 사람들이 신적 존재를, 그것도 위즈멜을 숭배하는 장면을 간략하게 그려둔 것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잊혀졌지만, 본래 위즈멜은 트라코티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던 존재라는 거죠."
강승현이 낡은 고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위즈멜과 트라코티가 무슨 관계가 있고 어떤 사이인지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낸 셈이다.
"트라코티에 신이 있었다니....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레베카는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지금 트라코티는 위즈멜을 따르기는커녕, 신에 대한 흔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트라코티가 신적 존재를 숭배했다고 말해준 적이 없거든요."
"이 책이 만들어진 건 몇백 년 전이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서 깨끗하게 잊혀진 걸지도 모르죠."
강승현은 책을 가볍게 훑으며 말했다.
혹시 또 숨겨진 페이지가 있는 건 아닌가 살폈지만, 겹쳐진 페이지는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
"더 숨겨진 건 없는 것 같네요."
"혹시 모르니 다른 책들도 더 찾아볼까?"
강승현 일행은 자료실 내부에 보이는 책을 전부 뒤져봤다. 하지만 위즈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 맨 처음에 찾아낸 고서밖에 없었다.
"음, 위즈멜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이거밖에 없나 봐."
"정말 흔적도 안 남아 있네요. 마치 누군가 위즈멜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없애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일부러 없앴다고?"
"이걸 보세요."
강승현은 또 다른 오래된 책 한 권을 보여주었다. 이 책도 맨 처음 발견한 고서에 맞먹을 정도로 오래됐지만, 중간중간 페이지가 찢겨나간 흔적이 있었다.
"누가 특정 정보만 골라서 지우고 있더라구요."
"여기 이 책도 그래요."
강승현 일행은 그 뒤로도 낡은 책을 여럿 발견했지만, 대부분 페이지가 찢어지거나, 불에 타거나 해서 훼손된 상태였다.
"정말이네? 군데군데 찢어져 있어."
"자세한 건 조사해봐야겠지만... 위즈멜에 대한 정보겠죠."
강승현이 추측하기에, 위즈멜은 자연스럽게 잊혀진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존재를 은폐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연히 소실된 게 아니라요?"
"네. 자료를 잘 살펴보면 위즈멜이 언급될 만한 내용이나, 관련된 자료 부분만 골라서 삭제했어요."
즉, 누가 작정하고 위즈멜에 대한 정보만 삭제했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멀쩡하게 믿던 신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도,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해? 설마 카마르 마법사들인가?"
김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카마르를 떠올렸다. 워낙 성격 나쁜 놈들이 많으니까, 이런 짓도 하지 않겠냐면서.
"아뇨, 카마르는 아닐걸요."
하지만 강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마법사들은 정보를 퍼트리는 걸 좋아하지, 숨기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요. 애초에 연구하느라 바쁜 놈들이기도 하고."
"그럼 달리 누가 있나?"
"원래 이런 찌질한 수법은 '교단' 놈들의 주특기예요."
멀쩡한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거나, 기록물을 훔쳐서 왜곡한다거나, 대중에게 흘러가지 못하게 정보를 차단한다거나.
"실제로 비슷한 짓도 많이 했고."
"하지만 피츠타 호수 지역은 다른 교단이 힘을 펴지 못하고 쫓겨났잖아."
"저도 그래서 교단은 아닐 것 같아요."
만약 다른 교단의 범행이라면, 위즈멜 교단을 몰락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했을 테니까.
교단이 연관되어 있을 순 있지만, 직접적인 범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이 책에는 어쩌다 위즈멜 님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는 걸까요?"
레베카가 의아한 얼굴로 고서를 가리켰다.
결국 이 고서는, 정체 모를 집단의 정보 삭제를 유일하게 피해 간 책이었으니까.
"다들 보시면 알겠지만, 이 책은 아주 급하게 만들었어요."
정신없이 휘갈겨 그린 그림과 낙서.
처음에는 그림 더럽게 못 그리는 놈의 낙서장인가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마 이 책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위즈멜에 대한 정보를 후대에 남기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글쓴이는 페이지 두 장을 겹쳐 위즈멜 숭배 그림을 숨겨두고, 그걸 더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괴상한 낙서와 그림을 잔뜩 그려둔 것이다.
"한마디로 정보 삭제를 피하려고 일부러 낙서장인 척 위장한 거죠."
"세상에...."
이 책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다른 책들이 찢어지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동안, 그의 책은 먼지투성이로 자료실 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정보를 숨긴 걸 보면, 상황이 꽤 긴박했다는 거겠죠."
"그러게.... 여유가 있었으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숨겨놨을 테니."
김호정이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료는 썩어 넘치게 많지만, 꼭 필요한 내용을 담은 건 딱 한 권뿐이었다.
'대충, 위즈멜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솔직히 이걸로는 부족하지.'
위즈멜이 트라코티에서 숭배하던 신이라는 건 알아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건지, 누가 정보를 지우고 다니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한데."
"레베카, 자료가 있을 만한 다른 장소는 없어?"
"글쎄요.... 마을 회관이 아니면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는데."
레베카는 머리를 쥐어짰지만, 텅텅 비었는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아!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해요! 안 떠올라요!"
"진정하세요, 진정."
[진정의 목소리]
이러다 레베카는 자기 머리채를 뽑을 것 같았다. 강승현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정보를 하나라도 건진 게 어디예요.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죠."
위즈멜이 트라코티의 신이라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낸 거나 마찬가지다.
"솔직히 한 번에 찾아낼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요."
강승현은 손에 쥔 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신을 향한 믿음이 싹 날아간 마을에서 잊혀진 신을 찾는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오히려 기대도 안 한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기뻐해야죠. 전부 레베카 씨 덕분이에요."
"아, 역시 힐러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레베카는 크게 감동받은 얼굴로 소리쳤다.
"저도 우리 마을의 잊혀진 신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으니... 내일도 함께 조사해요!"
"그럼 저야 고맙죠."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생각했다.
'그쪽은 꼭 필요하거든.'
레베카가 없으면 트라코티를 조사할 때 상당히 귀찮아지니까.
"그럼 시간도 꽤 늦은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갈까?"
"그러죠. 얻은 정보를 정리도 해야 하니."
"밖에 있는 녀석이 퇴근 못 한다고 투덜거릴 것 같거든."
강승현 일행은 자료실을 떠나기로 했다.
"어우, 책 찾느라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됐네요."
"아, 이 책은 어쩔 거야?"
"회관 담당자한테 말해서 대여하는 게 좋겠...."
쿵!
그때였다.
문밖에서 뭔가 강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응?"
"무슨 소리지?"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가자, 아까 그 회관 담당자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151. 놈들의 목적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살인사건인가?"
강승현 일행은 쓰러진 관리인한테 다가갔다.
바닥과 벽 곳곳에 관리인의 몸에서 튄 듯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곧장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쓰러진 관리인을 살폈다.
"아뇨, 살인사건은 아니에요."
"그럼? 자살한 거야?"
"...아직 살아있다는 소리죠."
관리인을 살펴본 결과. 그는 목 부분에 칼을 맞긴 했지만,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상태가 썩 좋다곤 하긴 그렇지만, 최악의 사태는 피한 셈이다.
"다행이네요!"
"이 친구도 운이 좋네. 이런 상황에서 강 선생 같은 대단한 힐러한테 발견되다니!"
이야기를 들은 김호정과 레베카는 무척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강승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최악의 사태만 피한 거고, 위험한 건 마찬가지지만.'
예리한 나이프로 급소 부위를 공격당했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죽겠지.'
거기다 어찌어찌 회복한다 해도 몸을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고….'
강승현이 [지혈]을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
휘익!
그때, 뒤에서 나이프가 날아왔다.
강승현은 반사적으로 은빛 영광을 꺼내 받아쳐냈다.
텅!
나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옆에 있던 김호정과 레베카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헉! 선생!"
"괜찮으세요?"
강승현은 자신을 걱정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나이프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 벽처럼 보였지만,
[은신 상태]
'....'
'칫.'
'저 자식, 우리가 보이는 건가?'
[관찰의 눈]을 발동한 강승현의 눈에는 복면을 쓴 몇몇 놈들이 은신 상태로 숨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승현은 떨어진 나이프를 줍더니,
"거기 있는 거 다들 보이니까."
[투척★]
복면을 쓴 무리를 향해 투척했다.
"은신 푸시죠."
타악!
"설마 [은신]을 간파할 줄이야."
"정말 우리가 보이는 모양인데."
놈들은 날아오는 나이프를 받아치며 [은신]을 해제했다.
"엉? 뭐야, 저 녀석들 어디서 나타난 거야?"
"저 사람이 든 나이프에 피가 묻어있어요!"
레베카의 말대로 복면을 쓴 무리가 가진 나이프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그럼 범인이겠네요."
정황상 회관 관리인을 공격한 범인인 것 같다.
혹시 범인이 아니더라도 이쪽을 공격한 이상, 그냥 보내줄 수 없다.
"계속 위즈멜 님의 이름을 언급하고 다니길래 혹시나 하고 미행한 보람이 있었군."
"설마 여기에 그분의 자료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저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
"어쩌겠어. 늘 하던 대로 하자고."
복면을 쓴 무리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그 책을 넘겨라."
"뭐?"
"그럼 특별히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지."
강승현이 들고 있던 낡은 고서를 가리키며 위협했다.
아무래도 놈들의 목적은 '위즈멜'의 기록인 것 같다.
"이, 이 녀석, 위즈멜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우릴 감시하고 있었나봐요!"
"우리 이제 어쩌지, 선생?"
김호정과 레베카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강승현은 남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묵묵히 환자를 치료했다.
"...이봐, 우리가 하는 말이 안 들리나?"
한 2분 정도 지난 뒤.
빨간 복면을 쓴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책을 넘기라고 했을 텐데?"
"하나 묻겠는데요."
강승현은 환자의 상처 부위에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왜 공격했습니까?"
"우리를 방해하려 했으니까."
"얌전히 통과시켜줬으면 굳이 손대지 않았을텐데."
놈들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관리인이 자료실에 들어가려는 걸 막으려 해서 공격한 것 같다.
"...이 사람은 싸가지가 없긴 해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 관리인은 운 좋게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만약 강승현 일행이 조금만 늦게 나왔다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책이나 넘겨라."
"어디까지 알아낸 건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네놈 같은 외부인에겐 상관없는 일이잖아."
복면을 쓴 무리가 강승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면 너도 그 녀석처럼 만들어줄까?"
"나라면 그 말 하기 전에...."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재빨리 석궁을 불러내더니,
"진작 공격했을 텐데."
방아쇠를 당겨 선제 공격을 날렸다.
파바바박!
"...크악!"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어깨에 석궁을 맞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생각도 못 한 공격이라 미처 방어하지 못한 것 같다.
"뭣들하고 있어? 해치워!"
"이 자식이! 해보겠다는 거냐?"
"책을 넘기지 않겠다면 힘으로 빼앗아 주지!"
복면 무리는 크게 분노하며 강승현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승현은 그들을 태연한 얼굴로 보며 말했다.
"환자 때문에 오래 시간 끌 수 없으니까 속전속결로 빠르게 해치우죠."
"알았어!"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고 협박하다니!"
강승현의 말이 끝나자, 김호정과 레베카 역시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캉!
카가가각!
각자의 무기가 충돌하면서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건방진 놈!"
"책을 넘겨!"
"네놈이 가질 물건이 아니다!"
복면을 쓴 조무래기들이 강승현을 향해 나이프를 휘둘렀다.
텅!
강승현은 석궁을 이용해 공격을 막고,
'그렇게 강한 놈들은 아니네."
퍼억!
놈들의 배를 빠른 속도로 걷어차 날렸다.
'레드로드 조무래기보다 살짝 강한 수준?'
"끄아악!"
"가, 강하잖아! 분명 힐러라고 들었는데!"
걷어차인 조무래기들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배를 움켜잡고 중얼거렸다.
강승현이 놈들의 어깨에 화살을 박아주려는 찰나,
탓!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군!"
그때,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강승현을 급습했다.
강승현은 재빨리 등을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박!
"소용 없다!"
그러자 남자의 몸 앞에 흙으로 이루어진 방패가 나타나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막아냈다.
"멍청하긴! 얌전히 책을 넘겼으면 아픈 꼴 볼일은 없었을 텐데!"
파가악!
"꼬챙이에 꿰뚫려 뒈져라!"
이어서 방패가 일그러지더니, 날카로운 가시 형태로 변해 솟구쳤다.
'....…이거 분명 땅 속성 스킬 맞지?'
[위즈멜의 왼손]
하지만 강승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흙의 가시를 바라보더니.
[대지의 뼈]
왼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솟구친 가시를 전부 뼈로 바꿔버렸다.
빠각! 빠가각!
"흐, 흐아악!"
복면을 쓴 남자는 자신이 생성한 가시가 인간의 손뼈로 변하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흙만 아니었어도 해볼 만했을 텐데."
파바바박!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어깨와 다리에 화살을 박아넣었다.
"끄아아아아악!!"
"거 참 아쉽게 됐네."
강승현은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놈은 분하다는 얼굴이었으나, 강승현이 다리를 밟자 비명을 내질렀다.
"전부 잡았어!"
"밧줄로 묶어놨어요!"
강승현이 리더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조무래기들은 김호정과 레베카가 맡았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강승현 일행은 덤벼온 복면 무리를 전부 제압했다.
"저는 댁들이 누군지는 모르겠고, 별 관심도 없지만."
강승현은 붙잡은 복면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보아하니 위즈멜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데, 자세히 설명 좀 해주셔야겠어요."
"...."
놈들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위즈멜에 대해 말해주시면 목숨은 살려드릴게요."
"말할 것 같냐!"
그때, 복면 무리의 리더 녀석이 소매에 숨기고 있던 작은 나이프를 꺼냈다.
녀석은 나이프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려 했다.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자살할 생각이군.'
자객이나 이단심문관처럼 뒤에서 이런저런 더러운 일을 하는 집단에선 흔한 패턴이다.
[적출]
'뭐, 살려놓으면 그만이지.'
녀석이 나이프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심장을 찌르려는 순간, 강승현은 [적출]을 발동해 나이프를 뽑아냈다.
"헉!"
덕분에 나이프는 녀석의 피부를 살짝 꿰뚫었을 뿐, 심장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
"다치셨으니 치료해드릴게요."
강승현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내다 버리고, 아주 태연한 얼굴로 녀석을 치료해 자살하는 걸 막았다.
"그러니까 헛짓 말고 빨리 말하세요."
"이 자식이!!!!"
놈은 강승현이 자신을 치료하는 걸 보더니 입안에 숨기고 있던 자살용 알약을 깨트렸다.
"아, 이번엔 음독자살?"
[관찰의 눈]
그러자 강승현은 재빨리 [관찰의 눈]을 발동해 입안에 퍼진 독약의 종류를 간파했다.
[라벗 우레우스의 어금니]
녀석이 사용한 독은 극소량만 있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맹독.
첩자들이 자살할 때 자주 쓰이는 독 중 하나다.
"그렇게 대단한 독은 아니네요."
물론 유명한 독인 만큼, 연구도 활발해서 해독제는 진작에 만들어진 녀석이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B-114 해독제 화살을 생성합니다.]
"그 정도 독의 해독제는 갖고 있어요."
파악!
강승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녀석의 입안에 해독제 화살을 박아넣었다.
"수틀려서 자살하려는 놈들 보면 99% 확률로 이 독을 쓰니까 미리 준비해 뒀죠."
"끄으윽!"
그렇게 녀석은 음독자살까지 저지당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위즈멜에 대해
불라니까요."
"이, 이익!"
"저는 저기 쓰러진 관리인도 치료해줘야 해서 바빠요. 지금은 급한 대로 응급처치만 했거든요."
"죽어도 말 안 한다고 했을 텐데!"
녀석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혀를 깨물려 했다. 그대로 죽으면 좋고, 죽지 않아도 말을 못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으니까.
퍼억!
"어쩔 수 없지."
"컥!"
그래서 강승현은 석궁을 휘둘러 녀석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놈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일단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마음 같아선 천천히 대화의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니 시간을 더 끌 수가 없었다.
"도, 독한 놈...."
"차라리 그냥 죽여줘...."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본 다른 복면들은 치를 떨며 눈을 감았다.
"어우, 선생 이제 어쩔 거야?"
"이 사람들이 트라코티의 옛 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틀림 없는 것 같아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선 동의해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의 말에 동의했다. 이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위즈멜에 대한 단서를 얻을 기회다.
"파헤쳐보면 뭔가 얻을 수 있겠죠."
"하지만 순순히 말할 것 같진 않은데?"
김호정이 복면 무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비록 전부 실패하긴 했지만, 망설임 없이 자살하려 한 걸 보면 쉽게 털어놓을 것 같지 않다.
"뭐, 남 뒷조사 잘하는 애들한테 맡기면 되죠."
"남 뒷조사 잘하는 애들?"
152. 묘한 분위기
"모험가 조합에 넘기면 알아서 탈탈 털어줄 겁니다."
"모험가 조합에?"
강승현은 붙잡은 복면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들은 트라코티 내에서 벌어진 살인 미수 사건의 범인들이니,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에 갖다주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정체를 파헤칠 것이다.
"임시이긴 해도, 모험가 조합 지부장의 명령이니... 뼛속까지 털어야겠죠."
"지부장 권력을 알뜰살뜰하게 써먹네!"
강승현 일행은 모험가 조합으로 복귀했다.
복면 무리는 처음에는 끌려가지 않으려 저항했지만, 몇 대 맞고 나니 얌전하게 따라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 녀석들은 또 뭐고."
모험가 조합에서 업무를 보던 마센은, 강승현 일행이 다짜고짜 사람들을 끌고 오자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옆에 있던 조합 직원들도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살인 미수 사건입니다."
"살인 미수?"
강승현은 김호정이 업고 온 부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 테니, 일단 저 녀석들을 감시해주세요."
"알았다."
마센 지부장은 놈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복면을 벗겼다. 복면 밑으로 숨기고 있던 새빨간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트라코티 사람이었나?"
"일단 얼굴은 처음 보는 녀석이야."
"염색일 수도 있고, 변장 마법일 수도 있겠네요."
"자세한 건 조사해봐겠지. 다들 끌고 가."
마센 지부장은 부하들을 호출해 복면 무리를 감옥에 처박았다.
"철저하게 감시해라. 지부장의 명령이다."
"네!"
조합 직원들이 복면 무리를 감옥에 처박고 감시하는 동안, 강승현은 부상자를 치료했다.
"그 친구가 피해자인가? 옷을 보아하니 마을 회관 쪽 사람이군."
"네, 회관 담당자예요."
"상태는 어떻지?"
"응급처치에 성공해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죽었겠죠."
"자네가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군."
마센 지부장은 한숨을 푹 쉬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을 회관은 모험가 조합만큼의 권력은 없지만, 트라코티 마을을 대표하는 기관인 만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조합의 평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감히 우리 마을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것과는 별개로, 마센 지부장 역시 트라코티 출신이었기에 이번 사건을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놈들을 잡아줘서 고맙다. 이제부턴 모험가 조합이 처리하도록 하지."
"별말씀을요."
"그렇지. 이번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
"흠...."
강승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을 설명하려면 위즈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은 해줘야겠지. 어쩌면 마센 지부장도 위즈멜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 모르고.'
강승현은 아까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복면 무리에 대한 건 물론이고, 위즈멜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트라코티의 신, 위즈멜?"
"쉽게 믿긴 힘들겠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그런가."
마센 지부장은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강승현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묘한 분위기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거든."
"묘한 분위기?"
"사실 외부인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너라면 말해줘도 괜찮겠지. 임시이긴 해도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니까."
마센 지부장은 한숨을 푹 쉬며 굳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언제부터인가 트라코티 사람들 사이에서 카마르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거든."
"카마르를 멀리해야 한다고?"
"그게 뭔 소리래?"
"트라코티는 자립해야 한다. 카마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카마르는 곧 몰락할 것이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주장하더라고."
처음에는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카마르는 잘나가는 대도시이고, 트라코티는 카마르에 모든 걸 의존하는 리틀한 마을이었으니까.
"그저 헛소리로 취급할 뿐,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지."
마센 지부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며칠 전, 마탑이 붕괴한 뒤부터 상황이 달라졌어."
녀석들이 떠들고 다닌 대로 정말 카마르에 문제가 생기자, 곧 카마르가 몰락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간 것이다.
"벌써? 사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보다, 카마르 사태라면 깔끔하게 해결됐는데 말이죠."
카마르는 폐쇄 결계를 발동하기 전, 각 마을의 모험가 조합을 통해 피츠타 호수 곳곳에 카마르가 몬스터의 침입을 막고 안전하다는 정보를 퍼트렸다.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역시 그 소식을 접하고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야 카마르 정보를 받았으니 열심히 설명했지만, 트라코티 주민의 대다수가 카마르에 의존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만큼 소문을 막을 수가 없더라고."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킨 거군요."
모험가 조합의 말을 듣고 안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칫하면 하루아침에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르니까.
"카마르는 정말 몰락한 상태이고, 모험가 조합은 카마르 고위직과 손잡고 그걸 숨기는 중이라나 뭐라나...."
"그 와중에 이런 소문까지 퍼져서 죽을 맛이에요."
모험가 조합 직원 몇몇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주민들한테 설명하다가 온갖 욕을 얻어먹은 모양이다.
"내가 트라코티를 떠나 있는 동안 그런 일이 있었다니...."
레베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트라코티 밖을 돌아다니는 모험가였기에 마을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헛소리꾼 취급받던 쓰레기들이었는데, 지금은 예언자 취급을 받더군. 어이가 없지."
마탑 붕괴 사태가 벌어지고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카마르 몰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몇 배로 늘어났다.
"대충 비율을 따지면 관심 없는 사람들이 1/3, 안 믿는 사람들이 1/3, 헛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빡통들이 1/3 정도거든요."
"문제는 지금도 빡통들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지만요."
"이대로 놔두면 트라코티 주민의 절반까지 늘어날 판이야."
놈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그 때부턴 새로운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체는 '카마르의 몰락을 예언하고, 트라코티를 구하기 위해 신이 내려보낸 사도'라고 주장하더라고."
"사도라고?"
이제 카마르의 시대는 끝났다.
트라코티가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단을 세우고 신을 섬겨야 한다.
놈들은 이렇게 주장하며 마을 사람들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사기꾼 집단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트라코티에 잊혀진 옛 신이 존재했을 줄이야."
마센 지부장은 굳은 얼굴로 고서를 펼쳤다.
낡은 책 속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숭배하는 듯한 그림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을 분위기가 찜찜했던 거군.'
지금 트라코티 사람들은 트라코티를 구원할 새로운 신을 섬기는 파와 지금까지처럼 카마르와 마법사들을 추종하는 파, 이렇게 둘로 갈라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르페니가 말했던 트라코티의 묘한 분위기는 이 상황을 말한 모양이다.
"그럼 복면단의 정체는 위즈멜 교단이려나."
"그게 말이지, 사도 녀석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모르더라고."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모시는 존재를 '트라코티의 신'이라고만 부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위즈멜'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거 참 요상하네? 복면단은 분명 위즈멜의 이름을 알고 있었어."
"그렇죠. 우리가 위즈멜에 대해 떠드는 걸 듣고 미행했다고 했으니까."
"애초에 사도를 지칭하는 녀석들을 조사해봤더니, 하나같이 평민들이었어."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 트라코티의 흔해 빠진 평민들.
그런 평민들이 수백 년 전에 사라진 옛 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그 말은, 배후 세력이 있다는 뜻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즉, 지금 사도를 지칭하는 놈들은 그냥 허수아비일 뿐이고 진짜 위즈멜 교단은 따로 있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모험가 조합이 뒷조사할 걸 예상하고 대역을 내세운 것 같습니다."
"치밀한 놈들이군."
"그리고 복면 무리는 진짜 위즈멜 교단에서 보냈겠죠."
놈들을 털다 보면 진짜 위즈멜 교단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젠장....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이젠 사이비 종교단체까지 난리 치는 건가."
마센이 오만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이거하곤 별개로 무슨 일이 있나 보네요."
"사실 이것도 함부로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닌데... 넌 괜찮겠지."
한참 생각하던 마센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한텐 비밀로 하고 있지만, 지금 붉은 숲에서 실종자가 발생하고 있어."
"원래 붉은 숲은 외부인들이 헤매는 지역 아닌가요?"
"지금까진 그랬지만, 최근에 발생한 실종사건은 외부인들이 아니라 전부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이야."
놀랍게도 트라코티 마을 사람들이 붉은 숲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순하게 길을 잃는 걸 떠나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이상하네요. 트라코티 사람들은 붉은 숲의 저주를 무시할 수 있지 않나요?"
"맞아. 그래서 더 이상하지."
본래 트라코티 사람들은 붉은 숲에서 길을 잃는 일도 없고, 몬스터의 공격도 받지 않는 특이한 체질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몬스터한테 공격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사실 저희 파티는 마센 지부장님의 부탁으로 남들 몰래 붉은 숲에서 실종자를 수색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어제 몬스터한테 쫓기고 있던거구나."
"실종자인 줄 알고 다가갔는데 암석인이더라구요."
레베카가 트라코티를 방문한 이유는 마센 지부장의 부탁 때문이었다.
비밀리에 임무를 진행해야 해서 인맥으로 초청했다고.
"자세한 건 조사해봐야겠지만, 일단은 카마르에서 유출된 마력 때문에 숲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추측하는 중이야."
"트라코티도 살기 불편하네요."
마을 안에서는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리고, 마을 밖에서는 실종사건이 발생하고.
여러모로 난장판이 따로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조심하라고. 지금 붉은 숲은 정상이 아니야."
"충고 감사합니다."
"우린 일단 방으로 돌아갈까?"
대화를 끝낸 강승현 일행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마센 지부장님! 강승현 지부장님!"
모험가 조합 직원 하나가 아주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놈들을 심문하던 도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라고?"
153. 배후 세력
"문제가 생겼다고?"
"두 분이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일단 가보죠."
강승현 일행은 직원과 함께 복면 무리를 가둬둔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복면 무리 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우왓, 이 녀석 죽었잖아!"
"분명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마센 지부장은 놈들을 감시하던 부하 직원들을 질책했다.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무척 죄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게...."
직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들은 복면 무리한테서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무슨 짓을 해도 입을 열지 않아서 자백제를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 녀석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더니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갑자기 죽었다구요?"
"네.... 분명 몸에 숨겨둔 독은 전부 제거했는데 말이죠."
"자백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용하기 전에 늘 테스트를 거치니까."
조합 직원들은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자살 수단을 전부 막아놨는데 놈이 죽어버렸으니까.
"흠...."
[관찰의 눈]
"이럴 땐 역시 조사가 답이지."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해 사망한 복면단을 살펴보았다.
녀석의 몸 위로 떠오르는 정보는 짧고 간결했다.
[사망][심정지]
[심장 부위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일단 사망원인은 심정지예요."
"심정지?"
"정확한 원인은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지만요."
강승현은 나이프를 꺼내 복면단의 가슴을 갈랐다.
"헉!"
"이, 이럴 수가!"
그러자 핏물 대신 흙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심장은 보이지 않고, 흙덩어리만 가득했던 것이다.
"심장이 없잖아!"
"대신 그 자리에 흙이 가득해!"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조합 직원들은 물론이고, 마센 지부장 역시 살짝 당황한 얼굴이었다.
있어야 할 건 없고, 없어야 할 게 있었으니까.
"당신들은 이게 뭔지 알고 있죠?"
강승현은 침착한 얼굴로 복면 무리한테 흙덩어리를 보여주었다.
놈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의 몸엔, 비밀을 누설하려 하면 심장이 흙으로 변하는 저주가 걸려 있다."
"저주라고?"
"그 때문에 너희가 원하는 정보는 입 밖으로 낼 수 없지."
저주의 발동 조건은 자신들이 소속한 집단의 정체는 물론이고, 위즈멜에 대해 누설하는 것.
입 밖에 꺼내려 하면 그 즉시 심장이 흙으로 변해 죽게 된다.
"알았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죽여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명예롭게 죽는 게 낫거든."
복면 무리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떠들었다.
죽음의 공포 같은 건 전혀 없는 듯했다.
"뭐 이런 미친 자식들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녀석들은 비밀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일부러 저주까지 받은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광신도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죠."
강승현은 오만상을 쓰며 복면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식들의 목적이 뭔진 몰라도 그냥 내버려 둬선 안 되겠는데.'
이렇게 극단적으로 구는 걸 보면, 좋은 의도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다.
광신도는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려는 놈들이고, 남 좋은 꼴을 절대 보는 이기주의자들이니까.
"애초에 비밀을 말하면 죽을 예정이라, 자살하려 한 거구나...."
김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시체를 힐끔 거렸다.
"근데 이래선 정보를 캘 수가 없잖아?"
"치밀한 놈들이군."
마센 지부장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회유는 물론이고 자백제를 써서 정보를 자백 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어떤 식으로든 놈들한테서 정보를 캐내려는 순간 저주가 발동할 것이다.
"강 선생, 여명의 화살로 어떻게 못 해? 저주라며?"
"이건 못하죠. 흑마력을 사용한 저주가 아니잖아요."
놈들의 몸에 걸린 저주는 흑마력 대신 땅 속성의 힘이 깃든 마력을 이용한 저주다.
여명의 화살은 써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답은 저주 해제뿐인 건가?"
"하지만 저주는 아니야. 엄청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쉽게 풀 수 없을걸."
"해제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지부장님이 기껏 고생해서 잡아온 건데 뒷조사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도움 될 만한 정보는 없는 듯했다.
"으으음...."
그때, 레베카가 미묘한 얼굴로 죽은 복면단원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놈의 몸속에서 나온 흙덩어리를.
"레베카 씨, 왜 그러세요?"
"그게, 이 흙이 조금 신경 쓰여서...."
"흙이 왜?"
김호정이 흙덩어리를 발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이 흙, 평범한 흙이 아니라 트라코티... 붉은 숲의 흙이에요."
"어어. 그건 보면 알아. 빨간 색이잖아."
그녀의 말대로 복면 단원의 가슴 속은 새빨간 흙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레베카는 흙을 한 줌 쥐며 말했다.
"왜 하필 이런 귀한 흙을 재료로 저주를 걸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요."
"귀한 흙?"
"이게 어떤 흙인데요?"
"이건 트라코티에서 귀한 인형을 만들 때만 쓰는 최고 등급 흙이거든요."
"인형 제작에 쓰인다고?"
"네. 인형사들이 공방에서 인형을 만들 때 쓰는...."
그 말을 들은 강승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뿌옇게 흐려져 있던 시야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드디어 손에 실마리가 쥐여졌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베카 씨, 아까 인형 공방은 분명 수백 년 된 집단이랬죠?"
"네. 몇백 년 동안 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헉!"
멍하니 이야기하던 레베카는, 깜짝 놀란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서, 설마 이번 사건의 범인이 인형 공방이라는 거예요?"
"지금으로선 그놈들밖에 없어요."
강승현은 트라코티 인형 공방을 떠올렸다.
그들은 트라코티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있는 집단이니, 회관 자료실 못지 않게 오래된 고서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내가 위즈멜 신도라면 몇백 년 지나도 건재할 만한 장소에 위즈멜에 대한 기록를 숨겨뒀을 테니까요."
인형 공방은 트라코티가 망할 때까지 버티고도 남을 단체였으니, 당연히 위즈멜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거기다 인형 공방엔 트라코티 귀족이 많아서 돈 걱정도 없잖아요."
강승현은 복면 무리의 옷과 무기를 살폈다.
처음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서 놓칠 뻔했지만, 놈들이 가진 아이템은 하나같이 비싸고 좋은 물건 투성이었다.
심지어 놈들이 사용한 [우레우스] 독만 해도 꽤 비싼 편이라 평민들은 구경도 할 수 없는 물건이다.
"확실히 귀족이 아니고서야 힘들겠네요."
"비싸고 귀한 흙을 아무렇지도 않게 낭비하는 걸 보면 틀림없죠."
수백 년간 이어져온 트라코티의 세력.
가진 돈이 꽤 많음.
위즈멜의 기록을 숨길 만한 장소.
인형 제작용에 쓰이는 비싼 흙을 저주 재료로 사용하기.
현재 트라코티에서 이 모든 조건이 다 맞아 떨어지는 집단은 오직 하나, 트라코티 인형 공방뿐이다.
"...!"
"...!!"
"표정들 보아하니 정답인가 보네요."
실제로 이야기를 엿듣던 복면 무리의 안색이 크게 나빠진 걸 보면 제대로 맞춘 것 같다.
"젠장.... 그 자식들이 엮인 건가? 골치 아프게 됐네."
"하필 인형 공방이라니!"
"하여간 인성!"
마센 지부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모험가 조합 직원들도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대충 들어서 알겠지만,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이야."
"트라코티의 핵심 집단이죠."
"마음 같아선 바로 쳐들어가서 갈아엎을 텐데."
모험가 조합은 언제나 '모험가와 마을의 평화를 우선시합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귀족과 높으신 분들을 우선시하는 것들이다.
"귀족 놈들 함부로 건드리면 윗선에서 지랄발광을 하거든."
당연히 모험가 조합은 트라코티 귀족들 대다수가 속해 있는 인형 공방과 틀어지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혹시 둘 사이에 트러블이 생긴다면 마센 지부장한테 경고장을 보낼 것이다.
"지부장도 참 할 일이 못되네요."
"그런 편이지."
마센 지부장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잘나가는 지부장이라도 모험가 조합 소속인 이상 윗선을 거스를 수 없다.
"그래도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어떻게든 밀어붙여 볼 텐데."
지금은 심증만 있고 물증만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인형 공방을 털다 보면 증거가 나오긴 할 텐데. 그 오래된 건물에 증거 하나 없을까."
"이유 없이 쳐들어가면 바로 쫓겨날걸."
"애초에 인형 공방은 우리를 안 좋아하거든요. 들여보내주지도 않겠죠."
조합 직원들이 가볍게 투덜거렸다.
마센은 지부장이 되기 전부터 트라코티 귀족들과 사이가 안 좋았고, 지부장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 인형 공방이 순순히 협조해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인형 공방 조사는 저희가 맡죠."
강승현이 뻐근한 몸을 풀면서 말했다.
모험가 조합이 직접 나갈 수 없을 땐 모험가들을 보내서 부려먹는 게 상식이다.
"나야 뭐, 모험가 조합에 찍혀도 상관없고 귀족 놈들도 딱히 무섭지 않거든요."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미 더한 짓도 많이 해서, 하인드 마을 지점에선 블랙리스트에 오른 몸이었으니까.
"그럼 이번 일은 너한테 맡기지."
마센 지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임시 지부장 겸 모험가인 강승현이라면 좀 더 뻔뻔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저도 돕고 싶어요!"
레베카 역시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솔직히, 인형 공방 사람들이 왜 트라코티 주민들을 해치려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다들 누구보다 트라코티를 사랑할 텐데!"
비록 싸가지가 카마르 마법사만큼 없긴 하지만, 트라코티 인형사들은 트라코티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좋은 인형을 제작할 수 있는 좋은 흙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붉은 숲은 조용한 곳이라 트라코티는 차분하게 작업하기 좋은 마을이었으니까.
"혹시 오해가 있다면 그걸 풀고 싶어요."
"오해가 아니면요?"
"오해가 아니면... 모험가 조합에 싸그리 잡아넣어야죠!"
"마인드가 마음에 드네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시간이 늦어서 힘들겠고, 내일 다 같이 인형 공방을 방문하도록 하죠."
그곳을 조사해보면 위즈멜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놈들의 목적이 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154. 인형 공방 1
"어쩌다 보니 두 번째 방문이네요."
"어제는 관광이고 오늘은 조사지만."
다음 날.
강승현 일행은 트라코티 공방 거리로 향했다.
공방 거리는 어제 방문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베카 씨, 인형 공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집단이에요!"
"그건 어제 말해주셨잖아요."
"어... 우리 마을 인형 공방은 소속원 모두가 뛰어난 인형 제작 기술을 갖고 있고, 자부심이 무척 강해요!"
한마디로 말해서 고인물들이 모인 집단.
여기에 귀족 특유의 자존심까지 더해져서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다.
"자존심 쎈 귀족 놈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죠."
강승현과 김호정은 짧게 투덜거렸다.
둘 다 귀족은 별로 안 좋아하는 타입이었으니까.
"레베카,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뭐가 유명해?"
"이거저거 많긴 한데,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제품은 말 골렘이에요."
"말 골렘?"
"트라코티의 마차는 일반 말이 아니라 인형사들이 제작한 골렘을 써서 운행하거든요."
레베카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흙과 돌, 각종 재료로 제작된 말 형태의 골렘이 마차 옆에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왜 일반 말 대신 골렘을 쓰는 거야?"
"붉은 숲은 몬스터가 많이 나오는 위험 지역이잖아요. 틈만 나면 몬스터가 습격해오는데 평범한 말이 어떻게 버티겠어요."
원래 트라코티는 마차가 다니지 않았지만, 인형 공방에서 말 골렘을 개발하면서 마차가 드나들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말 골렘 마차는 오직 트라코티에서만 탈 수 있는 지역 특산품이랍니다."
그래서 트라코티를 떠날 땐 말 골렘 마차를 빌리거나, 말 골렘을 빌려서 가는 걸 추천한다고.
조금 비싸긴 해도 편하고 안전하니까.
"아, 그래서 카마르 영주가 트라코티로 가라고 한 거구나."
"트라코티는 지금 피츠타 호수 지역에서 유일하게 마차를 빌릴 수 있는 마을이니까요."
다른 마을의 마차는 급증한 몬스터 때문에 운행을 전부 중단했지만, 마차에 말 골렘을 사용하는 트라코티는 큰 문제 없이 운행할 수 있다.
"그럼 우린 고작 말 골렘 때문에 그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그런 셈이죠."
강승현과 김호정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마탑이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카마르가 개판나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형 공방에 가서 말 골렘이나 예약할까?"
"뭐, 예약해둬서 나쁠 건 없죠."
강승현 일행이 인형 공방 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아, 맞다!"
"왜 그러세요?"
김호정이 발을 멈추더니 공방 안쪽 구석으로 향했다.
"어제 부적 맡긴 거 깜빡했어!"
"벌써 건망증이...."
"바빠서 까먹은 거야!"
정신없이 노점상 천막으로 달려간 김호정은 급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가게 주인은 김호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주문하신 부적입니다."
"감사합니다!"
김호정은 완성된 부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흙 반죽에 모양을 새기고 구워서 만든, 작은 토큰 형태의 부적이었다.
"이건 내 거고, 이쪽은 선생 거라더라."
"특수 옵션 같은 건 있어요?"
"대단한 능력은 없지만, 가지고 있으면 밤에 푹 잘 수 있대."
김호정은 뿌듯한 얼굴로 인벤토리에 부적을 넣었다. 물고기 베개에 넣어둘 거라면서.
"생긴 건 무난하게 생겼네요."
"내 건 멍멍이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고."
강승현은 자신이 받은 부적을 살폈다.
흙을 구워 만든 평범한 토큰 부적이지만, 특이하게도 중앙에 둥근 플라스크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근데 부적에 쓸 디자인은 아닌 것 같은데."
"선생은 힐러니까 포션 병 모양으로 만들어준 거 아닐까?"
"그런 거라면 보는 눈이 없진 않네요."
탁!
강승현은 부적을 하늘로 던지더니 가볍게 낚아채며 인벤토리로 넣었다.
"보통 둥근 플라스크는 포션 제조보다는 연금술 쪽에서 쓰지만...."
"아, 인형 공방에 도착했어요!"
앞장서서 걷던 레베카가 뿌듯한 얼굴로 건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공방 거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오래된 시설. 트라코티 인형 공방이다.
"여기는 무슨 유적지 같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수백 년 전에 지어진 만큼 꽤 낡았지만, 건물 곳곳에 깔린 마력 회로 덕분인지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공방 건물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었다.
'이렇게 오래된 건물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위즈멜에 대한 기록을 숨겨놨을 거야.'
강승현은 공방 건물을 가볍게 훑었다.
트라코티 자체가 숲속 깊은 곳에 세워진 마을이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건물이 부서질 일도 없다.
"인형 공방은 어떤 식으로 운영되죠?"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제자한테 공방 주인 자리를 계승하는 식으로 대를 이어왔어요."
"실력주의 집단이군요."
"평민이라 해도 뛰어난 인형 제작 실력을 가졌다면 공방의 주인이 될 수 있죠."
보통 귀족이 많은 집단은 평민 출신을 아니꼽게 보지만,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철저하게 실력으로만 평가한다.
"그런 부분은 묘하게 마탑하고 비슷하네."
"트라코티는 카마르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마을이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인형사들이 공방을 물려 받기 위해 수행을...."
벌컥!
공방 문을 열자 텅텅 빈 건물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사람 별로 없는데?"
"뭔가 썰렁하네요."
"어, 어라?"
레베카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인형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서너 명뿐이었다.
"원래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꽉꽉 차 있어야 하는데...."
"텅텅 비어있고, 일하는 사람도 얼마 없네요."
"혹시 오늘 쉬는 날 아냐?"
"인형 공방은 24시간 연중무휴예요."
레베카가 기억하는 인형 공방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곧 망할 가게처럼 조용한 상태였다.
"휴...."
"이걸 언제 다 하냐."
그 외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모험가 몇몇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지친 얼굴로 흙이 담긴 자루를 옮기는 중이었다.
"의뢰라도 하는 걸까?"
"아마 그러겠죠."
강승현은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때, 꽁지 머리의 청년이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공방 소속 인형사인듯 했다.
"말 골렘 마차를 빌리러 왔습니다."
"지금 당장 타려는 건 아니고, 예약 될까?"
"마차를 빌리러 오신 거군요...."
꽁지 머리 인형사는 강승현을 대답을 듣더니 무척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말 골렘 마차를 대여하려면 스승님의 허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스승님?"
"나를 말하는 거지."
낯선 목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자, 뻔뻔한 얼굴의 남자가 강승현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인중 수염을 가볍게 기르고 있었다.
"누구시죠?"
"마스터 등급 인형사 하비 사르반이다."
그는 거만한 말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트라코티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인형사이자, 이곳 트라코티 인형 공방의 주인이지."
예상은 했지만, 역시 인형 공방의 주인이었다.
강승현은 늘 짓는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아, 자기소개는 안 해도 돼."
"예?"
"어차피 오늘 보고 안 볼 사이잖아."
네 이름은 기억할 가치도 없다.
하비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는데...."
레베카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현 트라코티 공방 주인 어르신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성격이 안 좋거든요."
"네.... 그래 보이네요."
하비 사르반과 고작 10초 대화했을 뿐이지만, 강승현은 그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말 골렘 대여 비용은 얼마인가요?"
"그래그래, 얼마야?"
"1일 대여에 500만 골드."
"뭐? 하루에 500만?"
이야기를 듣던 김호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하루에 50만 골드여도 좀 비싼데... 그것의 10배를 내라고?"
"모험가 조합 안내 가이드에 따르면, 트라코티 말 골렘 대여 비용은 3일 120만 골드일 텐데요."
"완전 사기잖아?"
"원래는 그랬지만, 지금은 수요가 꽤 많아져서. 가격을 살짝 올렸지."
하비 사르반은 뻔뻔한 얼굴로 떠들었다.
"그동안 너무 싸게 팔았던 거 같아서."
원래 수요가 늘어나면 비용이 올라가는 건 당연하지만, 3~4일 만에 10배로 뛰는 건 정상이 아니다.
"아니 무슨 이런 새끼가 다 있어?"
"...."
"강 선생, 그냥 다른 가게로 가자!"
"저, 그게요...."
레베카가 떨떠름한 얼굴로 속삭였다.
"트라코티에서 말 골렘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공방 주인 어르신밖에 없어요."
"뭐?"
"그쪽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트라코티에서 말 골렘을 만들 수 있는 건 스승님뿐이거든요."
꽁지머리 인형사가 착잡한 얼굴로 설명했다.
"원래 골렘은 아무나 제작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말 골렘은 그중에서도 특히 만들기 어려운 골렘 중 하나입니다."
그냥 외형만 비슷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를 실제 말과 똑같이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뛰어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흉내도 못 내!"
지금 트라코티에서 이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하나, 공방 주인인 하비 사르반뿐이다.
"그래서 트라코티에서 말 골렘을 빌리기 위해선, 스승님의 허가를 꼭 받아야 하죠."
"나한테 잘 보이면 깎아줄 수도 있고."
하비 사르반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붉은 숲에 가서 인형 제작용 재료를 좀 구해온다거나, 공방 건물을 청소하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말 골렘을 빌리기 위해 온갖 잡일을 하는 모험가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흙을 나르고 있던 거구나.... 저 녀석이 무급노예로 부려먹느라!"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걸어가면 돼. 근데 지금 붉은 숲 엄청 위험한 건 알지?"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붉은 숲이, 카마르에서 유출된 마력 때문에 몇 배로 위험해진 상황이다.
하비 사르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쓰레기군.'
인형 공방의 주인이라면 돈이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냥 아랫사람을 부려먹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아랫놈들을 괴롭히는 새끼.'
강승현은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가졌지만, 그걸 재수 없게 쓰는 인간을 매우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이런 타입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엿을 먹인다.
그게 강승현의 철칙 중 하나였다.
'음?'
그때, 강승현의 눈에 묘한 부분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비 사르반의 안색은 무척 좋지 않았다.
'안색이 왜 저렇지?
강승현은 자신도 모르게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그러자 놀라운 정보 메시지가 나타났다.
155. 인형 공방 2
[중독][메스꺼움]
[대상은 '르카코테신'에 중독된 상태다.]
[중독 말기]
하비 사르반은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것도 꽤 치명적인 맹독에.
'그래서 안색이 안 좋았던 거군.'
르카코테신은 '느긋한 암살자'라는 별명이 붙은 맹독이다.
이 독에 중독되면 폐와 호흡기가 망가지면서 객혈과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다가 종국엔 호흡부전으로 사망하게 된다.
'문제는 별명에 걸맞게 증상이 나타나는 속도가 매우 느려서 독에 중독되더라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지.'
르카코테신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중독 직후에는 증상이 전혀 없다가, 중독 말기가 되면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그제서야 증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하비 사르반 역시 자신이 독에 중독됐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안색이 안 좋은 것만 빼면 눈에 띄는 증상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중독 말기] 키워드가 나타난 걸 보면 슬슬 증상이 나타나겠는걸.'
몸 상태를 보아하니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4~5시간 정도.
'잘됐네. 안 그래도 한 방 먹이고 싶었는데.'
강승현은 미소를 지었다.
재수 없게 구는 인간은 똑같이 되돌려주는 게 최고다.
"하비 어르신."
"뭐야."
"어르신도 언젠가는 남에게 엎드려 빌거나 애원할 일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그걸로 협박하고 고통 주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지금이라도 마음 바꾸시죠."
만약 여기서 하비가 말 골렘 가격을 조정하거나, 모험가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하면 몸 상태를 설명해주고 치료해줄 생각이었다.
힐러의 의무는 환자를 치료하는 거니까.
"내가 남한테 엎드려 빌면서 애원할 거라고? 웃기는 소리구만."
물론 하비는 강승현의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쳤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나 본데. 나는 마스터 칭호를 가진 최상급 인형사다. 너처럼 보잘것없는 모험가하고 수준이 다르다고!'
하비는 아주 거만한 목소리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얼마나 천재인지,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인형사인지.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러겠지."
"예를 들어 4시간 뒤에 어르신이 제 앞에 엎드려서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강승현은 하비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그가 싫어할 말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그런 헛소리 할 거면 내 공방에서 썩 나가!"
하비는 당연히 분노하며 소리쳤다.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후회할 텐데요."
"죽어도 그럴 일 없을 거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하비의 대답을 들은 강승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나와야 재밌지.'
강승현은 상대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보단, 끝까지 발악하면서 개지랄 떨다가 용서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걸 좋아하는 몹쓸 인간이었다.
"순순히 내 말대로 했으면 실망했을 텐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강승현은 개운한 얼굴로 등을 돌렸다.
하비는 분이 식지 않았는지 펄펄 날뛰며 소리쳤다.
"말 골렘 대여는 앞으로 꿈도 꾸지 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인형사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는 내 작품을 빌릴 자격이 없어!"
"네네."
"여기서 당장 나가! 네 녀석은 영원히 출입 금지다!"
쫓겨난 것도 모자라 출입 금지까지.
강승현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가라고 하니 나가야겠네요. 다들 그만 돌아가죠."
"이, 이러면 완전 실패 아냐?"
"이래선 조사를 할 수가 없는데...."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은 침울한 얼굴로 강승현을 따라갔다. 여기서 하비 사르반의 몸 상태를 눈치챈 사람은 강승현 밖에 없었으니까.
"자, 잠시만요."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꽁지머리 인형사가 강승현 일행을 쫓아왔다.
"죄송합니다. 저희 스승님이 워낙...."
그는 고개 숙여 방금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인성 개차반인 하비 사르반과 다르게 상식적이고 예의 바른 인물이었다.
"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강승현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를 위로했다.
어차피 실컷 농락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기소개를 못 했네요. 저는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직스입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직업은 트라코티 인형 공방 소속 인형사죠."
두 사람은 간단하게 악수를 주고 받았다.
이걸로 강승현은 아까 하지 못한 자기소개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피곤한 사람을 상사로 뒀네. 실력은 좋은 것 같은데 성격이 저래서야...."
"스승님이 요즘 심기가 불편해서 더더욱 괴팍해지신 것 같습니다. 원래도 성격이 안 좋은 분이긴 했지만."
"그쪽 양반도 고생이 많아."
김호정은 가벼운 실소와 함께 직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성격 나쁜 상사를 모시는 것 만큼 힘든 일은 없으니까.
"아마 말 골렘 마차는... 정식으로 빌리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스승님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겐 절대 빌려주지 않는 분이시거든요."
그 때문에 많은 모험가들이 하비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온갖 잡노동을 하는 중이라고.
정말 쓰레기도 이런 쓰레기가 따로 없다.
"대신, 다른 모험가님이 빌린 마차에 합승할 수 있도록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물론 스승님 몰래 진행해야겠지만요."
"직스 씨는 성격이 좋으시네요."
강승현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스승하고 닮은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제자라고.
'그러면 이 불쌍한 친구한테 살짝 스포일러 좀 해줄까.'
이대로 가도 딱히 관은 없지만, 하비 사르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뒷수습은 전부 하비의 제자들 몫이다.
강승현은 인형 공방을 떠나기 전,
"...대략 4시간 뒤에 하비 어르신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겁니다."
"예?"
"그러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세요."
직스한테 차후 전개를 스포하고 떠나갔다.
"그게 무슨...."
뒤에서 직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극적인 재미를 위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서.
"서, 선생! 그게 무슨 뜻이야?"
"4시간 뒤에 무슨 일이 생긴다뇨?"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강승현은 시원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면 곧 알게 될 겁니다."
-강승현 일행은 모험가 조합으로 복귀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모험가 조합이 우리 집 같네."
"마센 지부장님, 저희 복귀했어요!"
원래는 늦은 시간까지 조사할 생각이었으나, 중간에 쫓겨나서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상태였다.
"뭐라도 알아냈어?"
조합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센 지부장은 세 사람이 돌아온 걸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아뇨."
"1차 시도는 꽝이었어."
"아직 제대로 캐진 못했어요. 굳이 말하자면 완전 실패했지만...."
사실 인형 공방 조사하러 갔다가 출입 금지당하고 돌아왔습니다.
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 레베카였다.
"쉽게 알아 올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인간을 상대해야 하니까."
"마센 지부장도 그 녀석 성격 알아?"
"당연히 알지. 모를 리가 없잖아."
마센 지부장 역시 하비 사르반의 인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부장이 되기 전에도 하비 사르반하고 대립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아... 하비 님, 유명하죠."
"실력은 압도적인데 인성이 못 따라가는 인간."
"인성이 조금만 좋았어도...."
조합 직원들도 가볍게 투덜거렸다.
성격은 쓰레기지만 실력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인간이라, 모험가 조합이 눈치 보는 인물 중 하나다.
"뭐, 요즘은 기가 팍 눌렸지만."
"그게 기가 눌린거면 평소엔 대체...."
충격적이게도, 그게 평소보다 인성질을 자제한 상태라고 했다.
평소엔 얼마나 쓰레기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무튼 수고했다. 그 녀석 상대하느라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좀 이따 취미 생활을 즐길 거라서요."
-한편 트라코티 인형 공방 안쪽.
직스는 불안한 얼굴로 시계를 살피고 있었다.
'이제 곧 강승현이 말한 4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직스는 큰맘 먹고 하비한테 말을 걸어봤으나,
"스승님,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말 걸지 마! 집중하는 거 안 보여?"
"네네. 죄송합니다."
기껏 걱정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짜증 섞인 잔소리뿐이었다.
"내가 작업 중에 말 걸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나? 이래서 애송이들은 귀찮다니까."
하비는 쉴새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흙 반죽을 섞고 인형을 만들었다.
'인성은 개차반이지만, 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인형은 정말 환상적이군.'
'정말 다른 건 몰라도 스승님 실력은 깔 수가 없다니까.'
직스 포함, 주변의 인형사들은 넋을 놓고 하비의 인형 제작을 구경했다.
"콜록! 콜록!"
그때, 갑자기 하비가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뭐, 뭐야...."
하비는 당황한 얼굴로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켁!"
당황한 인형사들이 그에게 다가갔으나, 하비는 여전히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서, 설마 강승현이 말한 게 이건가?'
직스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생각했다.
정말 4시간이 지나자, 하비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뭘 보고만 있어? 힐러를 불러와!"
하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넋을 놓고 있던 제자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 힐러를 어디서 구하지?"
"지금 트라코티에 힐러라고는 한 명도 없잖아!"
"젠장! 카마르에 갈 수도 없고...."
"맞아! 내가 어제 들었는데, 지금 모험가 조합에 힐러가 딱 한 명 있대!"
"어서 가자!"
인형사들은 하비를 데리고 모험가 조합으로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비는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 조합입니...."
"당장 힐러를 불러와! 빨리!"
모험가 조합에 도착한 하비는 오자마자 진상짓을 시작했다. 다짜고짜 직원들을 붙잡고 힐러를 데려오라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힐러님! 긴급환자예요!"
물론 VVIP 고객인 만큼, 조합 직원들은 하비의 진상짓을 다 받아주며 힐러를 불러왔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하비 어르신?"
"딱 보면 몰라? 갑자기 피를...."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던 하비는 조합 직원들이 데려온 힐러를 보고 경악했다.
"너? 너?"
"아까 보고 또 보네요. 반가워라."
당연하지만, 강승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이걸로 아까 하지 못한 자기소개를 끝마칠 수 있었다.
156. 인형 공방 3
"네, 네 녀석이 힐러라고?"
"보시다시피."
강승현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지만, 그 말을 듣는 하비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꼴 보기 싫은 건방진 녀석이 힐러랍시고 나타났으니까.
"다른 힐러를 데려와! 저런 안목 없는 녀석을 뭘 믿고 내 몸을 맡겨?"
하비는 노발대발하며 새 힐러를 데려오라고 난리를 쳤다.
"그, 그게... 지금 트라코티에 있는 힐러는 강승현 님이 유일합니다."
"다른 마을에 연락을 보내긴 했지만, 그쪽도 힐러가 없는 건 마찬가지라...."
"죄송합니다, 하비 님!"
하지만 없는 힐러를 만들어 올 순 없는 법.
조합 직원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비는 분이 안 풀렸는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치려 했으나,
"콜록! 콜록!"
큰 소리와 함께 기침하며 피를 토해냈다.
"하비 님!"
"괜찮으십니까?"
그걸 본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놀란 얼굴로 하비한테 다가가려 했으나,
"...."
앞에 있던 강승현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짓하자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헉, 허억...."
지친 얼굴로 숨을 내뱉던 하비는 자신의 손과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네요."
그 모습을 보던 강승현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벌써부터 그러면 얼마 못 버틸 텐데."
"이런 버릇없는 자식...."
하비는 이를 갈면서 강승현을 노려보았다.
본래 성격대로라면 저런 싸가지 없는 힐러는 진작 내쫓았을 것이다.
"내가 몸만 멀쩡했어도 너 같은 녀석은...!"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주저앉아 부들부들 떠는 게 고작이었다.
하비는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아까부터 뭘 보고만 있어? 당장 치료나 해!"
조금 전까지 다른 힐러 데려오라고 꽥꽥거린 주제에, 이제 와서 치료를 안 한다고 따지는 뻔뻔함.
아즐 대륙의 전형적인 귀족식 마인드다.
"...강승현 힐러님, 지금 스승님이 무슨 병에 걸리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보다 못한 직스가 입을 열었다.
쓰레기 그 자체인 인간이긴 해도 스승은 스승인지라 이래저래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병은 아니고... 르카코테신 중독입니다."
"르카코테신?"
"독극물의 일종이에요."
강승현은 르카코테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 독에 중독된 사람은 호흡기가 망가져서 숨을 못 쉬게 된다는 것과, 나중엔 피를 토하다가 죽는다는 것까지.
"르카코테신은 매우 느리게 퍼지는 독이라 중독 초기에는 아무 증상이 없지만, 중독 말기가 되면 몸이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스승님의 증세와 똑같군요."
"일단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증상 자체가 독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졌을 때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곧 죽을 때가 됐다는 뜻.
"그, 그럼 뭘 쫑알쫑알 떠들고 있어?"
주저앉아 있던 하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기가 독에 중독됐다는 걸 깨닫고 아까보다 안색이 훨씬 나빠진 상태였다.
"당장 치료해! 빨리!"
"스승님,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 비켜!"
"지금 무리하시면 독이 더 빨리 퍼질 겁니다."
직스는 날뛰는 하비를 필사적으로 말리며 입을 열었다.
"강승현 힐러님, 이 독...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
강승현은 대답 대신 안약 사이즈의 샛노란 약병 하나를 꺼내 보였다.
"혹시 그게 치료제인가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내놓을 것이지!"
하비가 미소를 지으며 약병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냥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휙.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뭐?"
"치료비는 선불이라서요."
"속물적인 거렁뱅이 놈!"
하비는 짜증을 내며 돈주머니를 바닥에 내던졌다. 돈이 꽤 많이 들어있는지, 아주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흥, 이딴 푼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약이나 내놔!"
"하비 어르신,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탁, 탁.
강승현은 약병을 위로 높게 던지더니,
팟!
그대로 낚아채며 인벤토리로 넣어버렸다.
물론 아즐 대륙민들의 눈에는 약병이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르신도 언젠가는 남에게 엎드려 빌거나 애원할 일이 있을 거라고."
퍽!
쫘르르르!
이어서 강승현은 바닥의 돈주머니를 발로 걷어찼다.
"거기다 협박하고 고통 주면 화가 많이 날 거라고... 대충 이런 식으로 말한 거 같은데요."
걷어차인 돈주머니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하비는 어이 없다는 얼굴로, 쏟아진 동전과 강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약을 받고 싶다면 그 동전들을 손으로 주워다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서 주세요. 더러워서 만지기 싫으니까."
"뭐, 뭐가 어째?"
"당연히 남한테 시키는 건 안 되고, 본인이 직접 하셔야 하구요."
강승현은 주위 사람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물론 가까이 오지 말라는 눈으로.
"이, 이 무례한 것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제가 한번 약속한 건 지키려고 노력하는 타입이라서요."
"가, 감히 네까짓 게...!"
하비 사르만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귀족으로 태어나서 평생 남을 부려먹고 살아온 그에게 있어, 동전을 주워다 닦으라는 건 엄청난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우라고 명령을 해?"
"그게 싫으면 저한테 제발 약 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시든가요."
콱!
성큼성큼 다가온 하비가 강승현의 멱살을 잡았다.
르카코테신에 중독된 상태로 저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 어지간히 빡친 모양이다.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거절하셔도 됩니다. 근데 지금 몸 상태 엄청 위험한 건 아시죠?"
하비의 기침 횟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안색도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이 건방진 것이!"
"내 방식에 불만 있으면 다른 힐러를 찾으시든가."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하비를 비웃을 뿐이었다.
아무리 힐러라도 귀족한테 시비 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만, 강승현은 트라코티의 유일한 힐러였으니 이렇게 막 나가도 말릴 방법이 없었다.
"괜히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군!"
탁!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하비는 강승현을 밀치고 등을 돌렸다.
"직스! 마차를 준비해라!"
"마차요?"
"세상에 힐러가 저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 트라코티에서 치료할 수 없다면 다른 마을로 가면 그만이지!"
평범한 마차로 붉은 숲을 지나는 건 위험하지만, 말 골렘을 사용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비는 마차를 타고 트라코티를 떠날 생각이었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트라코티를 뜨는 게 좋을 거다. 치료만 끝나면 네 녀석은 물론이고 네 녀석 동료들까지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떠나기 전, 하비는 강승현 파티에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실제로 귀족 출신에 인형 공방의 수장이니, 모험가 파티 하나 정도는 손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힐러가 저만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때, 강승현의 차분한 목소리가 하비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비 어르신이 만날 수 있는 힐러는 제가 마지막일 겁니다."
"...뭐?"
"아, 제가 말 안 했나요?"
강승현은 실실 쪼개며 모험가 조합 벽시계를 가리켰다.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는 일단 증상이 발병하면 보통 24~48시간 이내에 사망하거든요."
잘 버텨봐야 이틀이고, 일반적으로 3일을 넘기지 못한다.
르카코테신은 잠복기가 무척 긴 대신, 잠복기가 끝나는 즉시 대상의 몸을 급속도로 망가트려 죽이는 맹독이기 때문이다.
"그, 그렇게 짧다구요?"
"하루 이틀밖에 못 버티는 거잖아!"
"무슨 그런 독이 다 있어?"
이야기를 들은 조합 직원들과 인형사들은 기겁하며 몸을 떨었다.
"거기다 이건 치사량 기준이고, 몸에 주입된 독이 많으면 많을수록 카운트다운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 그럼 지금 스승님은...."
"아무리 길어도 7시간을 못 넘기실걸요."
하비 사르반은 몸에 퍼진 르카코테신의 양이 꽤 많아서, 치료를 받지 못하면 하루도 못 넘길 운명이었다.
"뭐... 7시간 안에 힐러를 찾는다면 살 수야 있겠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카마르 사태가 터지고 대략 3~4일이 흘렀다.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은 직원들을 파견해서 근처 마을에서 힐러를 찾으려 했지만 아직까지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최소한 이 주위, 7시간 안에 갈 수 있는 범위 내에는 힐러가 한 명도 없다는 뜻이네요."
"듣고 보니 그러네? 무섭잖아."
레베카와 김호정이 작게 속닥거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하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애초에 독은 힐로 치료할 수도 없구요."
해독 스킬을 가진 힐러는 극히 드물고, 르카코테신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 약제사도 흔한 편은 아니다.
"제가 장담하는데, 피츠타 호수 지역을 아무리 뒤져도 하비 어르신을 치료할 수 있는 힐러는 저밖에 없을 겁니다."
카마르가 폐쇄된 이상, 이 주변에서 르카코테신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강승현뿐이다.
"즉, 어르신의 목숨은 제 손안에 달렸다는 거죠."
"이, 이 자식...."
"이게 지금까지 당신이 모험가들한테 하던 짓이니까 너무 억울해하진 마시고."
하비는 부들부들 떨면서 강승현을 노려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강승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던 것이다.
"컥, 커헉!"
하비는 목을 움켜쥐고 괴롭게 기침했다.
이제 입에서 쏟아지는 건 핏물이 아니라 핏덩이였다.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빠르네요? 도대체 독을 얼마나 드신 거람."
핏덩이까지 나온다는 건 정말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왔다는 뜻이다.
'이러다간 진짜 질식해서 죽을 거야.'
엄청난 공포를 맛본 하비는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떨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전신을 스쳤기 때문이다.
"...크윽!"
결국, 하비 사르만은 무릎을 꿇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그보다 목숨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죽으면 우리 공방은 끝이야.... 부디 용서해주게나."
"으음, 어쩔까요. 내 알 바 아닌데."
"아, 알았네. 내가 전부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제발 살려주게!"
평생 무릎을 꿇어보긴커녕, 남한테 사과 한 번 해본 적 없는 인간이 엎드려 빌면서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광경.
'역시 이 맛에 힐러짓 한다니까.'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 숙인 하비를 내려다봤다.
자신에게 애원하는 건 누구든 좋지만 귀족이나 집단의 높으신 분이 애원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으니까.
"기껏 치료해드렸는데 또 모험가들 부려먹으면 어쩌죠?"
"다시는 모험가들을 착취하지 않겠네!"
"그리고?"
"말 골렘 가격도 정상으로 되돌릴 거고, 재료 구하기도 모험가 조합에 정식으로 의뢰하겠네...."
하비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이렇게만 보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친 것 같았으나.
'이, 이 애송이 자식 두고 보자! 이 굴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실제로는 약만 먹튀할 생각이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재밌었으니까 이쯤에서 봐드릴게요."
강승현은 하비를 대놓고 비웃으며 인벤토리에서 꺼낸 약병을 던져줬다.
'좋았어! 이 약만 있으면!'
하비가 미소를 지으며 약병을 챙긴 순간,
"아, 이제서야 하는 말인데."
강승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건 치료제가 아니에요."
157. 너 하는 거 봐서
"이, 이게 치료제가 아니라고?"
"엄밀히 말하면 해독제가 아니에요. 미리 말하려 했는데 까먹었네요."
"이 사기꾼 자식! 날 속인 거냐!"
꽉!
하비가 떨리는 손으로 강승현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손에 힘이 없어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입 다물고 듣기나 하세요."
팍!
강승현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던 하비의 허약한 손목을 가볍게 뿌리쳤다.
"저는 환자 목숨으로 장난은 쳐도 사기는 안 치거든요."
'장난은 치는 거냐....'
하비는 마음 같아선 더 따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기분이 상했다고 치료해주지 않을까 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일단 몸이 나을 때까지만 참자.'
어찌됐건 자신의 목숨은 강승현의 손에 달렸으니까.
'치료가 끝나기만 해봐! 진흙구이로 만들어주마!'
하비는 분노를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미, 미안하네!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지. 나쁜 의도는 없었어! 몸이 안 좋아서 좀 예민했던 것뿐일세...."
"알면 됐어요."
'저저, 싸가지 없는 놈!'
"제가 해독제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강승현은 구겨진 셔츠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주변에선 르카코테신 해독제 재료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르카코테신 해독제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물질 중 하나인 '라바테인'은 바닷가 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다.
당연히 바다와 거리가 먼 붉은 숲에선 절대 구할 수 없는 녀석이다.
"보, 보통 해독제는 재료가 없으면 비슷한 물질로 대체해서 만들지 않나?"
"다른 해독제는 비슷한 재료로 대체해도 되지만, 르카코테신은 그게 불가능해요. 여러 종류의 독을 섞어서 만든 최상급 합성 독극물이라서."
안 그래도 해독 스킬은 얻기 어려운데, 그중에서도 르카코테신은 최상급 난이도를 자랑했다.
해독제를 만드는 것부터 쉽지 않으니까.
"거기다 르카코테신 해독제는 재료 손질에만 10시간은 넘게 걸리거든요."
"뭣?"
그러니 운 좋게 재료를 구했다 하더라도, 남은 수명이 7시간밖에 안 되는 하비는 애초에 먹지도 못한다는 소리다.
"그러니 해독제를 이용한 치료는 불가능, 해독 스킬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불가능하죠."
이제 남은 치료법은 딱 하나.
몸에 퍼진 독이 밖으로 배출될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다.
"르카코테신이 맹독이긴 해도 독은 독이라,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되거든요."
문제는 르카코테신의 특성.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폐와 호흡기를 빠른 속도로 망가트리는 탓에, 환자 대부분은 독이 몸 밖으로 배출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호흡 부전으로 사망한다.
"그럼 답이 없잖... 콜록, 콜록!"
하비가 심하게 기침하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수, 숨 쉬기가 힘들어... 끄으윽!'
상태가 빠르게 나빠지는지, 이제는 기침할 때마다 가슴 부위에서 강력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그래서 발상을 바꾼 거죠."
"바, 발상을 바꾼다고?"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의 사망 원인은 대부분 질식사. 다른 합병증은 없고, 그저 숨을 못 쉬어서 죽는 것이다.
"즉, 질식사만 막을 수 있다면 환자가 자신의 몸에서 독이 배출될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강승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하비의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르카코테신을 치료하는 건 힘들지만."
뚜껑을 열자 작은 주삿바늘이 나타났다.
"질식사를 막는 건 꽤 할 만하거든요."
푹!
강승현은 그대로 하비의 목에 바늘을 꽂아 약물을 투여했다.
"헉, 헉...."
혈관을 통해 약물이 주입되자, 하비의 기침 소리가 잦아들고, 동시에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사라져갔다.
"수, 숨쉬기가 편해졌네.... 가슴도 아프지 않고."
"다 이 녀석 덕분이에요."
강승현이 사용한 약은 호흡기 보호와 안정 효과를 가진 [러스테인 포션]. 호흡기의 손상 피해를 막아준다.
"아까도 말했지만 르카코테신 치료제는 아니에요. 이건 보통 기도 화상 환자를 치료할 때 사용하는 포션이거든요. 당연히 해독 능력도 없어요."
그래서 이걸 사용한다고 몸에 퍼진 독이 사라지진 않지만, 르카코테신으로 인한 호흡기 손상을 막을 수 있다.
"해독제를 구하지 못한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에겐 유일한 희망이죠."
이 간단한 발상의 전환 덕분에 르카코테신 중독 환자의 생존률이 대폭 증가했다고 한다.
"뭐... 단점이 있다면 러스테인 포션도 꽤 만들기 어렵다는 점인데, 르카코테신 해독제에 비하면 훨씬 쉽고, 재료도 전부 붉은 숲에서 구할 수 있더라구요."
그 결과, 강승현은 고작 3시간 만에 러스테인 포션을 준비할 수 있었다.
물론 직접 구해온 건 아니고 김호정과 레베카가 구해온 거지만 말이다.
"그, 그럼 나는 이제 괜찮은 거지?"
"지금은 괜찮겠죠."
강승현의 대답을 들은 하비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한테는 볼일 없다 애송아! 모험가 녀석들은 앞으로도 쭉 부려먹어주마!'
애초에 약속을 지킬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대로 약만 먹튀할 생각이었으나.
"아직은 약효가 남아 있으니까."
"약...효?"
"설마 약 하나 먹는다고 끝날 줄 알았어요?"
강승현은 그런 하비를 비웃으며 러스테인 포션 서너 개를 꺼냈다.
"한 병으론 어림도 없어요. 르카코테신이 얼마나 독한 녀석인데요. 약효가 떨어지자마자 피 토하실걸요."
"그 말은 다 나을 때까지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매일도 아니고 3시간에 한 번씩."
"3, 3시간?"
르카코테신은 독성이 워낙 강한 녀석이라, 러스테인 포션의 지속 시간이 고작 3시간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몸에 퍼진 독이 완전히 배출될 때까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투여해야 합니다."
"그, 그럼 나머지 약도 어서 주게나...."
하비는 비굴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강승현은 보란 듯이 약병을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하는 거 봐서요."
"뭐?"
"아까 하신 약속 지키셔야죠. 노동 중인 모험가들 풀어주시고, 그 사람들한테 지금까지 일한 대가 지불하고, 말 골렘 대여 가격도 정상으로 되돌리세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하비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어딜 먹튀하시려고.'
늘 하는 말이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약을 미리 주면 약속을 어길 게 뻔하므로, 강승현은 약을 인질로 삼고서 하비를 가지고 놀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한 것처럼 저한테 엎드려서 약 달라고 애원하면 한 개씩 드릴게요."
"지금 나보고 매일 엎드려 빌라고?"
"매일도 아니고 3시간에 한 번씩."
"이, 이 악덕한 놈!"
하비는 분통을 터트렸지만, 강승현은 아주 개운한 얼굴로 미소지을 뿐이었다.
"싫으면 말구요. 전 아쉬울 거 없습니다."
"...아, 알았네! 시키는 대로 하면 되잖나!!"
그렇게 하비 사르반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전부 돌려받았다.
-"방금 정말 대단했어요! 하비 어르신을 저렇게까지 제압한 사람은 강승현 힐러님이 처음이거든요!"
하비와의 대화를 끝내자 레베카가 잔뜩 들뜬 얼굴로 다가왔다.
강승현이 하비를 짓밟아줘서 기쁜 모양이다.
"아픈 사람한테 이런 말 하려니 죄송하지만... 엄청 고소했어요."
'이 친구도 뭔가 쌓인 게 많나 보네.'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강승현 힐러님."
직스가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인사했다.
"스승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비록 쓰레기와 구분이 안 가는 인간이지만, 하비 사르반은 트라코티 인형 공방의 실세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인형 공방에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치료비는 전부 스승님...이 지불하셨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저희 공방에서 가장 훌륭한 말 골렘 마차를 예약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그럼 마차 빌린 거네?"
김호정이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제 강승현 일행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트라코티를 편하게 떠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장은 못 떠나죠. 아직 트라코티에서 조사할 게 남아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
애초에 말 골렘은 인형 공방에 진입하기 위한 핑곗거리였고, 강승현 일행의 진짜 목적은 인형 공방 내부를 조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위즈멜 교단의 정체는 인형사 놈들이거든.'
놈들의 아지트를 조사해보면, 틀림없이 위즈멜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래라면 조사는커녕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이라면 다르지.'
중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강승현은 하비 사르반의 생명의 은인이다.
대놓고 아지트를 조사하겠다고 해도 절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직스 씨, 이제 인형 공방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네. 그럴 예정입니다."
"그럼 저희가 내일 찾아갈게요."
"뭐, 뭐?"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이제 내 공방엔 볼일 없지 않나?"
"건물이 멋져서 관광 좀 하려구요."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던졌다.
팅!
"입장료는 이걸로 대신하죠."
"...크으."
하비는 굴욕적인 얼굴로 약병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마쳐야겠구만."
"시간이 꽤 늦었네요."
인형 공방 일행이 돌아간 뒤, 강승현 일행은 숙소로 돌아갔다.
"자기 전에, 오늘 얻은 정보를 정리해보죠."
"얻은 정보가 있어?"
"신경 쓰이는 점이 두 가지 있어요."
강승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수첩을 펼쳤다.
"우선 하나는 트라코티 인형 공방이에요."
"공방이 왜?"
"곧 망할 것처럼 텅텅 비어있잖아요. 레베카 씨 말에 의하면 원래는 사람이 바글거린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있는 거겠죠."
잘 다니던 인형사들이 아무 이유 없이 공방을 때려치울 리가 없다.
"주인장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관둔 거 아닐까? 나 같아도 때려치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비 어르신 성격은 늘 더러웠을 테니,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겠죠."
"특별한 계기?"
"그게 뭔지는 조사해봐야겠지만."
최근 트라코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위즈멜'과 관계있을 것 같다.
"음.... 그럼 두 번째는 뭐야?"
"두 번째는 사소한 건데, 레베카 씨의 태도요."
"레베카가 왜?"
"인형 공방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았어요."
레베카는 인형 공방에 들어갔을 때부터 유독 후드를 푹 눌러쓰고 정체를 감추려 했다.
그 말은, 공방 안에 얼굴을 절대 보여선 안 될 인물이 있다는 뜻이다.
"거기다 레베카 씨는 하비 어르신한테 악감정도 있는 듯했고."
"트라코티 사람이면 하비한테 악감정이 없는 놈이 이상한 거 아닐까."
"그건 그렇긴 하죠."
"아, 혹시 하비 녀석이 레베카 아빠 아닐까? 아니면 직스가 레베카의 오빠라든가."
"저는 레베카 씨가 인형 공방 소속이었을 것 같아요."
강승현은 복면 단원을 조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왜 하필 이런 귀한 흙을 재료로 저주를 건 건가 싶어서요.
-이게 어떤 흙인데요?
-트라코티에서 귀한 인형을 만들 때만 쓰는 최고 등급 흙이거든요.
그때 그 흙이 인형 제작에 쓰인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레베카뿐이었다.
"맞아. 다른 트라코티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 정말 인형사인가?"
"자세한 건 내일 물어봐야겠죠."
158. 위즈멜 1
"그러면 오늘 할 일은 공방 조사인가?"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렇겠죠?"
"이걸로 세 번째 방문이라 슬슬 지겹게 느껴지네요."
다음 날, 강승현 일행은 인형 공방으로 향했다. 공방에 숨겨져 있을 위즈멜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우리, 어디부터 조사해야 할까요?"
"그러게. 이 건물 생각보다 넓잖아."
"쉽게 찾긴 힘들겠죠."
어제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넘어갔지만,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복면 무리의 배후, 위즈멜 교단으로 추정되는 집단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 숨겨두진 않았을 테니...."
그러니 위즈멜에 대한 정보는 건물 깊숙한 곳이나 숨겨진 장소에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트라코티와 비밀의 방인가. 레베카,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글쎄요. 비밀방 같은 건 모르는데요."
"우리가 뒤져봤자 시간 낭비일 테니, 그냥 당사자한테 물어보죠."
그렇다.
남의 집에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면 집주인한테 대놓고 물어보는 게 낫다.
"저쪽이 어르신의 방이에요."
"실례합니다, 하비 어르신."
강승현은 하비 사르반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비는 자신의 방 작업대에서 인형을 제작하고 있었다. 러스테인 포션의 효과로 목숨은 건졌지만,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안색은 무척 나빠 보였다.
"내가 분명 일하고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고 했...."
"관광 온 김에 잠깐 들렀습니다."
"...!"
문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하비는 강승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들어가도 되죠?"
"...어차피 들어오지 말래도 들어올 거 아닌가?"
"잘 아시네요."
강승현은 제 집처럼 당당하게 들어오더니 중앙 소파에 자리잡았다.
"우리도 왔다구."
"잠시 실례 좀 할게요."
이어서 들어온 김호정과 레베카도 적당한 곳에 앉았다.
"어제 관광하러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나한테 따로 허락받을 필요는 없으니 어디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하비는 얼굴을 살짝 구긴 상태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인형 제작에 집중했다.
"뭔가 궁금한 게 있다면 한가한 직스 녀석한테 물어보라고. 난 바쁘니까."
"사실 제가 여기 온 건 관광이 아니라 자료 조사 때문입니다."
"...자료 조사?"
인형에 집중하던 하비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꽤 오래된 건물 중 하나잖아요. 지어진 지 수백 년은 된 것 같은데."
"잘 아는군. 이 공방은 트라코티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존재한 전통있는 건물이다. 트라코티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지."
하비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딱히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뭐, 역사 공부라도 하러 오셨나?"
그 와중에 빈정거리기까지.
강승현은 새삼 하비의 인성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역사 공부라.... 비슷하네요. 어르신께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 말고 직스 녀석한테...."
"이 사람들, 아는 얼굴인가요?"
강승현은 복면 무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꺼냈다. 모험가 조합 측에서 만든 지명수배서다.
"그런 놈들을 내가 어떻게 알아?"
하비는 수배서를 힐끔 보더니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 녀석들은 최근 트라코티 주민 사이에서 퍼지는 정체불명의 종교와 추종자들로 추측되는 인물들인데, 혹시 뭔가 알고 계시는지?"
"몰라, 관심 없어. 평민 놈들이 뭐 하고 사는지 내가 알게 뭐람?"
하비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강승현은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위즈멜'은요?"
"뭐...?"
그 말을 들은 하비는 경악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식은 땀까지 흘리는 걸 보면 상당히 긴장한 듯했다.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모, 모르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군."
하비는 당연히 모른다고 답했지만, 누가 봐도 아는 사람의 태도다.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전 위즈멜이 이름이라고 한 적 없는데요."
"...!"
"물론 이름이 맞긴 한데, 하비 어르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걸까.... 난생처음 듣는다고 하셨는데."
"그...그건...."
"역시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내내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던 하비가 처음으로 긴장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만 봐도 하비는 위즈멜에 대해 뭔가 아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모, 모른다고 했잖아? 난 할 말 없네!"
"당신네 목적이 뭔진 모르겠지만, 저는 위즈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거든요."
강승현은 약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치, 치사하게 약으로 협박을...!"
"그래요? 이제 다 나으셔서 필요 없으신가 보네요. 완치 축하드립니다."
강승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을 떠나려 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할.... 말하면 되잖아!"
다급하게 일어난 하비가 강승현을 붙잡았다.
그는 자존심보다 자기 목숨이 중요한 남자였으니까.
"진작 그럴 것이지."
강승현은 하비한테 약병을 던져주었다.
하비는 비굴한 얼굴로 약병을 챙기고 방 안쪽 책장으로 향했다.
"위즈멜은... 우리가 역사에서 지워버린 존재의 이름일세."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강승현의 예상대로,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위즈멜에 대한 기록을 지우고 존재를 은폐한 범인들이었다.
"그것의 이름이나 존재에 대해 서술한 모든 자료를 폐기하고, 극히 일부만 이곳에 보관 중이지."
파앗!
드르르륵.
그가 책장을 조작하자 빛과 함께 마법진이 나타나며, 숨겨진 방으로 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이 방의 존재를 아는 건 트라코티 인형 공방의 주인뿐이다. 나도 스승한테 공방 자리를 물려받을 때 이 방에 대해 듣게 됐지."
방 안은 낡고 오래된 책과 서류로 가득했다.
몇몇 책 표지에 문신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걸 보면, 틀림없는 위즈멜 관련 자료들이다.
"역시 높으신 분들은 하나같이 자기 방에 비밀 방을 만들어두는군요."
"로망이잖아."
"일단 아무거나 읽어볼까요."
강승현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첩을 집어들었다.
"이건 트라코티 마을 주민의 일기네요."
"이 녀석들, 남의 일기장까지 훔친 거야?"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죠."
수첩을 펼쳐봤지만, 너무 낡아서 읽을 수 있는 문장은 몇 개 없었다.
{위즈멜 님 덕분에 올해 농사도 풍년이다.}
{마을을 지켜주시는 자애로운 대지의 신.}
{내일 붉은 숲에 있는 위즈멜 신전을 방문해야지.}
{위즈멜 님의 힘으로 마을에 침입한 도적 떼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분은 트라코티를 사랑하신다.}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한다.}
하지만 몇 개 안 되는 문장들만 봐도, 위즈멜이 트라코티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역시 위즈멜은 트라코티 마을, 붉은 숲의 수호신이었군요."
"거기다 위즈멜 님이 트라코티 사람들한테 흙으로 인형 만드는 법을 전수해줬다는 기록도 있어요!"
책을 읽던 레베카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즉, 위즈멜은 트라코티의 수호신이면서 트라코티 인형사들의 시조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인형 공방은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너네도 일종의 사제 아냐?"
인형 공방은 그걸 알면서도 앞장서서 위즈멜의 존재를 지우고 은폐했다.
다른 누구보다 위즈멜을 섬겨야 할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하비 어르신, 이렇게까지 위즈멜의 존재를 은폐한 이유가 뭐죠?"
"...."
"혹시 나쁜 놈이라서 없애버린 건가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고."
"이쪽도 사정이 있었다고."
"사정?"
하비는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어갔다.
"중간중간 기록이 소실돼서 나도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원인 모를 이유로 위즈멜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네."
"존재가 사라졌다고?"
"신의 소멸. 죽었다는 거지."
시기는 대략 700년 전.
어느 날 위즈멜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정확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형사들은 위즈멜이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신이 소멸했으니 사제들은 힘을 쓸 수 없게 되고, 트라코티를 보호하던 신의 결계도 소멸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
갑작스러운 신의 죽음으로 인해 트라코티는 혼란에 빠졌다.
본래 트라코티는 문화, 생활, 경제, 관습 등등 모든 걸 위즈멜의 힘에 의존하며 살아가던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무기도 없지, 싸울 인간도 없지, 먹을 것도 없지, 돈도 없지, 방벽도 없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마을이 멸망할 판이었다고 하는 군."
그때, 카마르 마법사들이 트라코티를 찾아왔다.
위기에 처한 트라코티를 돕겠다면서.
-우리가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트라코티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드리죠.
-마법사를 파견해서 마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당시 트라코티랑 카마르는 사이가 무척 나빴다. 한쪽은 신을 믿고, 다른 한쪽은 신을 부정하고 마도의 길을 걷는 자들이었으니까.
"뭐? 카마르 놈들이 이유 없는 선행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는데."
"당연히 꿍꿍이가 있었지."
카마르 마법사들은 트라코티를 돕는 대가로 위즈멜 교단에 안치된 성유물 중 하나인 [위즈멜의 자애]를 요구했다.
"전설에 따르면 위즈멜이 최초의 사도에게 선물한 보석이라고 하더군. 트라코티 사람들은 그 보석을 위즈멜과 동일시 여기고 신성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네."
"그런 걸 마법사들이 왜 탐내는데?"
"그야 뻔하잖나. 안에 담긴 강력한 마력 때문이겠지. 마법사 놈들은 연구에 미쳐 있으니까."
모든 성유물에는 신의 힘이 깃들어있지만, [위즈멜의 자애] 안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과 마력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보석은 트라코티에서 신성시 여기는 물건인 만큼, 평소에는 카마르 사람을 구경조차 못하게 막고 있었지만...."
당시 트라코티는 위즈멜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대혼란 상태였다.
"힘을 잃은 사제들은 현실을 부정하다 자살하고, 거기다 전염병까지 돌아서 가축과 사람들은 죽어가고.... 지옥이 따로 없더군."
엉망이 된 트라코티와 사제들이 몰락하는 것을 보던 인형사들은 고민 끝에 카마르 마법사들과 거래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우리에겐 사라져버린 신보다 당장 식량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했다... 라고 당시 마스터 인형사의 수기에 적혀 있었지."
"그럼 [위즈멜의 자애]를 카마르에 팔아버린 거예요?"
"그래."
"반발이 심했을 텐데요."
"물론 반발이 없진 않았지."
하지만 격하게 항의해야 할 고위 사제들은 죽거나 미쳐버린 지 오래였고, 굶어 죽어가던 평민들은 마법사들의 지원품을 도저히 거부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트라코티는 카마르에 모든 걸 의존했네. 카마르로 물건을 사고팔러 가는 게 당연해졌고, 사제 대신 마법사를 꿈꾸는 아이들이 점차 늘어갔지."
문제는 그 이후. 혼란에 빠진 마을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였다.
"좀 먹고살 만해져서 그런지 [위즈멜의 자애]를 되찾아오자고 주장하는 녀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네."
-언젠가 위즈멜 님은 돌아오실 거다!
-그분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배신했다는 걸 알게 되면 천벌을 내릴 것이다.
-마법사 놈들이 빼앗아간 성유물을 되찾아 와야 해!
하지만 트라코티는 여전히 카마르의 지원이 필요했고, 이제 카마르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마을로 변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성유물을 돌려달라고 했다간 당장 지원을 끊어버릴 거 아닌가?"
고민 끝에, 인형 공방은 위즈멜 교단을 해체하고 위즈멜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마법사들과 교류하게 된 이상, 교단과 신적 존재는 방해만 될 뿐이었으니까."
물론 위즈멜 교단은 심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트라코티의 권력은 카마르를 배후에 둔 인형 공방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위즈멜 교단은 인형 공방한테 패배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 트라코티 사람들이 믿는 역사는 대체로 80%는 날조일세. 오래전부터 카마르와 우호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보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이었거든."
인형 공방은 트라코티 곳곳을 뒤져서 위즈멜의 이름을 지우고, 그 업적을 카마르로 날조해서 가짜 기록으로 대체했다.
카마르 역시 그 기록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슬쩍 수정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무서웠던 거겠지."
인형사들은 혹시라도 위즈멜이 돌아오진 않을까, 자신들에게 천벌을 내리진 않을까, 그걸 무척 두려워했다.
살기 위해서라지만 신을 버린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적 존재는 사람들한테서 잊혀지면, 다시 나타날 일이 없잖나."
인형 공방은 천벌이 두려워서 트라코티의 수호신이자 자신들의 시조, 위즈멜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따지고 보면 인형 공방의 모체는 위즈멜 교단이니까.... 역시 교단 놈들은 수법이 비슷비슷하네요."
"그래도 전부 없애진 못하고."
하비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인형사들은 위즈멜의 자료를 수거하고 폐기했지만, 일부 자료는 인형 공방에 숨겼다.
"이렇게 숨겨두고 공방의 주인에게만 대대로 전달하는 중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나 뭐라나."
덕분에 몇백 년 동안, 위즈멜에 대한 정보는 오직 인형 공방의 주인과 차기 주인이 될 인형사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고 한다.
"근데 너희는 위즈멜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진짜 극비사항인데."
"그야, 어르신께서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려는 중이잖아요."
이름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지금 트라코티 마을에 퍼지는 정체불명의 종교는 틀림없는 위즈멜 교단이다.
당연히, 그들의 배후는 인형 공방일 거라 생각했다.
"저희는 인형 공방이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려는 줄 알고 왔는데요."
하지만 하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부정했다.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그 자식이 부활하면 인형 공방은 천벌을 받을 텐데."
인형 공방은 이번 사건의 배후가 아니었다.
159. 위즈멜 2
강승현 일행은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숨겨진 방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의문이 늘어났다.
'인형 공방이 배후가 아니었을 줄이야.'
강승현은 착잡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오히려 위즈멜 추종자와 가장 거리가 먼 놈들이었어.'
하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형 공방은 위즈멜을 깨우기는커녕 위즈멜이 부활하는 걸 방해하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집단이었다.
'녀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없겠지.'
강승현은 하비를 가만히 살폈다.
그는 '아니.... 또 왜 쳐다보는 거야?' 같은 불편한 얼굴로 강승현의 눈을 피했다.
'이 자식 속은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일단 하비는 연기를 더럽게 못한다.
평소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없어서 그런지, 자기 속마음을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놈이었다.
'그리고 선대 인형 공방 주인들이 남겨둔 기록만 봐도 알 수 있고.'
인형 공방은 틀림없는 위즈멜 교단의 적대세력이다. 이런 놈들이 작정하고 묻어버린 신의 존재를 되살리려 할 리가 없다.
"선생, 저 녀석 혹시 사기 치는 거 아냐?"
"그건 아닐 겁니다."
하비의 말을 빼놓고 봐도 인형 공방은 위즈멜을 부활시킬 이유가 없다.
"현재 위즈멜 교단으로 추측되는 배후 집단은 카마르를 무척 적대시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인형 공방은 카마르 귀족들과 거래하면서 큰 이득을 보고 있으니 굳이 손절할
이유가 없다.
"진범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놈이 원흉일 줄 알았는데...."
"도대체 위즈멜 교단의 정체는 뭐고, 목적이 뭘까요?"
강승현 일행은 고민에 빠졌다.
기껏 잡은 실마리가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이었으니까.
"일단 카마르를 손절하려는 건 틀림없지?"
"그럴 겁니다."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신 '위즈멜 교단 녀석들이 카마르를 적대시하는 이유는 700년 전, 인형 공방이 [위즈멜의 자애]를 카마르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아마 [위즈멜의 자애는 지금도 카마르 어딘가에서 배터리로 쓰고 있겠죠."
"위즈멜 녀석, 저승에서 울고 있겠는데."
그러니 위즈멜 교단 입장에서 카마르랑 인형 공방은 부모의 원수나 다름없다.
"그래도 기록물이 사실이라면 카마르도 순순히 돌려주진 않겠죠. 훔친 게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아간 거니까요."
"뭐, 교단 입장에선 인형 공방이 통수를 치고 성유물을 멋대로 팔아넘긴 것일 테니 알 바 아니겠지만요."
"설마 위즈멜 교단은 카마르랑 한판 붙을 생각인 걸까?"
"아무리 카마르가 위축된 상태라 해도 신생 교단 정도는 쉽게 쓸어버릴 겁니다."
만약 정말 싸울 생각이라면, 뭔가 대책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자네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위즈멜 교단이라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하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엥? 혹시 모르는 거야?"
"지금 위즈멜 교단 때문에 마을 전체가 뒤숭숭하다구요."
"대놓고 위즈멜의 이름을 쓰진 않지만요."
놀랍게도 하비는 위즈멜 추종자 무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혀 몰랐네. 내가 요 며칠 바빠서 말이지."
아무래도 하비는 공방에 처박혀 있어서 트라코티 상황을 몰랐던 것 같다.
"몰랐다구요?"
"그럼 내가 평민놈들이 뭐 하고 사는지 일일이 알아야 하나?"
"마을이 통째로 뒤집어졌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아셔야죠! 트라코티 귀족이잖아요?"
레베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따졌으나,
"자네처럼 그저그런 길바닥에 널린 모험가는 평생 모르겠지만, 나처럼 유능하고 실력 있는 귀족 인형사는 늘 바쁜 몸이라네."
하비는 같잖다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온갖 모욕을 당했음에도 그의 인성은 한결같았다.
"하늘은 왜 저렇게 못된 사람에게 뛰어난 실력을 내려 준 걸까요."
"실력도 없는데, 성격까지 나쁘면 정말 답이 없는 쓰레기라서?"
"그럴싸해요."
레베카는 조용히 수긍했다.
하비는 레베카를 째려봤지만, 곧 혀를 차며 띠꺼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위즈멜 교단을 부활시키려는 추종자 놈들이 나타났단 말이지? 그래서 몇 명정도인가?"
"모험가 조합 말로는 트라코티 주민 1/3이 교단에 홀려 있다고 하네요."
"뭐라고?"
하비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게까지 많을 거라곤 생각 못 한 모양이다.
"심지어 지금도 숫자가 늘고 있댔어요."
"조만간 트라코티 주민의 절반이 위즈멜 신도가 될 것 같다더라구요."
"주민의 절반!?"
하비는 무척 초조한 얼굴이었다.
만약 위즈멜 교단이 부활해서 사라진 위즈멜이 다시 나타난다면 가장 먼저 박살 나는 집단은 인형 공방일 게 뻔하니까.
"이,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텐데, 하필 이럴 때....…."
거기다 하비는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나요?"
"그러고 보니, 지금 공방 분위기가 좀 이상했죠."
본래 인형 공방은 수련 중인 인형사들과 인형을 구매하러 온 사람들로 바글거려야 할 테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텅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곧 망하기 직전의 공방처럼 말이다.
"손님도 그리 많지 않고, 공방으로 들어오는 재료도 얼마 없고... 뭣보다 일하는 인형사의 수가 너무 적어요!"
"여기 트라코티 안내 가이드에 의하면 인형 공방에는 수십 명의 실력 있는 인형사들이 수련 중이라고 적혀 있는데 말이야."
김호정이 가이드 책을 펼치며 말했다.
하지만 강승현 일행이 지금까지 마주친 인형사는 직스를 포함해서 7명밖에 없다.
"공방 건물을 모두 둘러본 건 아니지만, 많아봤자 10명 미만일 것 같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 그럴 리가? 아무 일 없네!"
하비는 식은땀과 함께 시선을 피했다.
'이 녀석, 연기 정말 못하네.'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이,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였다.
"내가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데 우리 공방에 무슨 일이 있겠...."
"스승님,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저벅, 저벅, 저벅.
그때, 복도를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이곳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조만간 폐업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긴 적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아주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하비를 향해 다가갔다.
"듣자 하니 몸 상태도 나쁘시다고 들었는데."
"너, 너 이 자식!"
"이제 그만 포기하고 제 밑으로 들어오시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썩 나가!"
하비는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를 움켜쥐고 남자를 향해 내던졌다.
팔락! 팔락!
하지만 하비는 르카코테신 중독을 치료 중인 환자였기에 몸에 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덕분에 남자는 날아오는 서류를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런 허약한 몸으로 무슨 공방을
운영하신다고."
"이이이익...!"
덤으로 하비를 실컷 비웃으면서 말이다.
"와, 무슨 막장 드라마 같네."
"자주 있는 일이죠."
"전에 이런 영화 본 거 같아. 이름이 뭐더라….."
참고로 강승현과 김호정은 딱히 간섭하지 않고 그냥 구경했다. 재밌어보였으니까.
"이런, 손님이 계셨군요."
"우린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해."
"죄송합니다. 더 이상 스승님을 찾아올 분은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제서야 강승현 일행을 발견한 남자는 가볍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물론 진심으로
사과한다기보다는 하비를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이, 이놈이 뭐가 어째?"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인데 느긋하게 대화하셔야죠. 방해될 테니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빨리 사라져!"
"내일 다시 뵙죠. 스승님."
녀석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등을 돌려 방을 떠났다.
"저 녀석 초면에 존댓말이나 하고, 재수 없군요. 분명 나쁜 놈이에요."
"선생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김호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망할, 망할 자식...!"
남겨진 하비는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지친 몸을 끌고 의자에 걸터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무슨 일인지 대놓고 물어보면 너무 쓰레기 같을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일단은 내버려 두고 나중에 물어보죠."
강승현 일행은 만신창이가 된 하비를 놔두고 방을 떠났다.
"레베카 씨, 괜찮으세요?"
방을 떠나기 전, 강승현은 멍하니 서 있던 레베카한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적갈색 머리의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후드를 꽉 눌러 쓰고 시선을 내린 상태였다.
"네? 아...… 네! 괜찮아요."
정신을 차린 레베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따라왔다.
'방금 그 녀석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보군.'
공방에 들어온 뒤에도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대놓고 얼굴을 숨기려 한 적은 없었다.
'뭐, 물어보나마나 뻔하겠....'
"다들 여기 계셨군요."
밖으로 나간 강승현 일행은 직스와 마주쳤다.
"슬슬 식사 준비가 끝나서 부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네."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할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강승현 일행은 직스를 따라 인형 공방 내부 식당으로 향했다. 상당히 크고 넓었지만,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비 어르신은 안 불러도 되나요?"
"스승님은 방에서 혼자 드세요."
식당에서 먹으면 시끄럽고 짜증 난다고 싫어해서, 늘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줘야 한다고.
여러모로 제자를 귀찮게 하는 스승이었다.
"그 녀석 성격 진짜 더럽네. 텅텅 비어 있는데 뭐가 시끄럽다는 거야?"
"원래는 사람이 바글바글했겠죠."
강승현은 버섯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여기는 트라코티 최고의 인형사가 운영하는 공방인데 사람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강승현은 아까 적갈색 머리의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곳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조만간 폐업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 남자의 말에 의하면 이 공방은 망한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망하는 중이었다.
"직스 씨, 사실 아까 이런 일이 있었거든요."
강승현은 방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적갈색 머리의 남자가 했던 싸가지 없는 말이나 빡쳐서 분을 참지 못하는 하비의 태도 등등.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 녀석과 만나셨군요."
"아는 녀석이야?"
"음.... 여러분한테는 말씀드려도 되겠죠."
직스는 씁쓸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160. 원인과 결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