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숙박 의뢰 1
"이, 이곳 모험가 조합 건물을요?"
조합 직원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모험가 조합에서 일하는 동안 온갖 모험가와 만났지만, 모험가 조합 건물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는 사람은 강승현이 처음이었다.
"네. S급 방을 제외한 시설 전체요."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비어 있는 방은 물론이고 모험가 조합 메인 홀, 접수대, 휴게소, 의뢰 게시판까지 전부 독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게 됐으니 외부인들은 빨리 짐 싸서 나가주셨으면 하는데요. 여긴 제 숙소가 될 예정이라."
"뭐가 어째?"
"웃기지 마!"
당연히 사방팔방에서 난리가 났다.
숙소는 그렇다 쳐도 접수대와 의뢰 게시판이 없으면 의뢰를 받는 것도, 완료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아니 모험가 조합을 혼자 쓴다는 게 말이 돼?"
"이봐! 저 미친놈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막든지 쫓아내든지 하라고!"
"이거 영업 방해야!"
분노한 모험가들은 조합 직원에게 달려가 따지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직원들은 강승현을 제지하려 했으나,
"저, 모험가님? 그건 규정상...."
"규정상 문제 될 건 없을 텐데요."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책꽂이에 꽂혀 있던 모험가 조합 관리 문서를 가리켰다.
"읽어보시죠. 이게 위반 사항인지 아닌지."
"...."
모험가 조합 직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관리 문서를 살폈다.
[조합 직원은 모험가가 요청하는 숙소의 등급에 맞는 숙박 의뢰를 제공해야 한다.]
[숙박 의뢰를 완수한 모험가는 S급 숙소 시설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자유롭게 숙박할 수 있다.]
[모험가는 다수의 숙소를 대여할 수 있다.]
모험가 조합 내부 규정에 따르면 조합 건물 전체를 빌려서 숙박하는 건 딱히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누가 모험가 조합을 전세 내서 자기 개인 숙소로 쓰겠다는 소릴 하겠냐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런 정신 나간 발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규정상 문제 될 건 없네요. 모험가님께선 S급 숙소 시설을 제외하면 모험가 조합 어디든 자유롭게 숙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물 전체를 빌리는 것도 이론상 가능합니다...."
그러니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강승현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다.
현시점에선 규정 위반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미리미리 금지해놨어야지.'
강승현의 취미 중 하나는 이런 식으로 합법적으로 남을 농락하는 것이었다.
"다들 들으셨죠? 문제없다는데요?"
"뭐, 이런 미친놈이!"
"우리보고 굶어 죽으라는 거야?"
"이게 말이 되냐고!"
모험가 중에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도 많고, 다음 마을로 떠나기 전에 여비를 충분히 벌어둬야 한다.
카마르가 폐쇄된 지금, 붉은 숲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이 의뢰를 받을 수 있는 곳은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뿐이다.
그런데 이곳을 누군가가 독점한다?
나머지 모험가들은 붉은 숲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보셔 형씨, 붉은 숲의 모험가 조합은 여기밖에 없단 말이야...."
"지금 다른 마을로 갈 형편이 아니라고!"
"제발 부탁드려요. 마음을 바꿔주세요...!"
모험가들은 필사적으로 사정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붉은 숲을 떠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이번엔 제가 양보하죠."
강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여길 개인적인 용도로 쓴다는 결정은 변함없지만, 다른 분들도 평소처럼 모험가 조합을 이용할 수 있도록 입장을 허락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거라면 괜찮겠지...."
"우리야 뭐, 의뢰만 받으면 되니까."
모험가들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안도했다.
개인적인 용도로 쓴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모험가 조합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만 있으면 문제 될 게 없었으니까.
"단, 거기 있는 분들은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너무 시끄러워서 방해될 것 같거든요."
그때, 강승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쓰레기 파티가 앉아 있던 테이블이었다.
"어이가 없네. 설마 숙소 때문에 이러는 거야?"
"이봐, 우리도 규정 어긴 건 없어! 정식으로 숙박 의뢰를 받아서 대여한 거라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죄인처럼 모험가 조합에 출입 금지한다는 게 말이 돼?"
"불만 있으면 모험가 조합에 따져!"
쓰레기 파티는 당연히 반발했다.
그것도 아주 뻔뻔하게 말이다.
"다들 너무 유난 떠시는 거 아니에요?"
"뭐라고?"
"그냥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그들을 비웃으며,
"다들 인생 참 피곤하게 사시네."
"뭐라고?"
"지금 해보자는 거냐?"
"불만 있으면 모험가 조합에 따지시든가?"
놈들이 뱉은 말을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이이익...!"
"야! 이대로 둘 거야?"
"저 자식 때문에 우리처럼 죄 없는 선량한 모험가가 피해를 보고 있잖아!"
"의뢰를 못 받게 방해하는 건 선 넘었지~!"
"특정 파티만 배척하는 건 규정 위반이야!"
쓰레기 파티는 접수대로 달려가 조합 직원들을 붙잡고 따지기 시작했다.
"모, 모험가님은 자신이 빌린 숙소에 외부인을 자유롭게 초대하고 추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건물 전체를 빌린다면 특정 모험가를 내보내는 건 문제 없지 않을까요...."
쾅!
쓰레기 파티가 접수대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조합 안에서 다른 모험가가 의뢰를 못 받게 방해하는 건 규정 위반일 텐데!"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어떻게든 해!"
파티원들이 윽박지르자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머리를 붙잡고 고뇌했다.
"이, 이럴 땐 어떻게 하지?"
"모르겠어! 규정에 없다고!"
"머리 터지겠네!"
확실히 다른 모험가가 의뢰를 못 받게 방해하는 건 규정 위반이긴 하나, 지금 강승현은 대놓고 방해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저벅.
"이 경우엔 규정 위반이 아니다."
그때, 붉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의뢰를 방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숙박할 권리를 행사하는 걸로 보기 때문이다."
"지부장님!"
"그러니 저 친구를 처벌할 수 없지."
그녀의 이름은 마센 퀘이드.
트라코티 마을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다.
바깥이 하도 소란스러워서 내려온 모양이다.
"살았다!"
"지부장님이 오셨다면 안심이지!"
"역시 큰 문제를 해결할 때는 높으신 분이 나서야...."
조합 직원들은 크게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인드 마을 지부장과 달리, 트라코티 마을 지부장은 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은 듯했다.
"그럼 우리보고 그냥 나가라고?"
"이건 말이 안 돼!"
"모험가의 권리는 어디로 갔냐고!"
당연히 쓰레기 파티는 반발했으나,
"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다. 지부장 권한으로 즉시 퇴장당하기 싫으면 입 다물어."
마센 지부장은 놈들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쳇."
"크으...."
지부장한테 따져봤자 좋을 건 없다.
쓰레기 파티는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자네인가? 모험가 조합 건물을 통째로 빌린다는 녀석이."
"네.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반갑군. 내 이름은 마센이다."
보통 모험가는 지부장 앞에서 긴장하거나 벌벌 떠는 법이지만,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마주했다.
모험가 조합 엿 먹이기가 취미인 인간이었으니까.
"솔직히 네 행동은 모험가 조합을 모욕하는 행위로 느껴진다."
"뭐, 절반은 조롱 맞죠."
풋내기 모험가들이 방을 못 구하고 쫓겨나는 걸 뻔히 보면서도 아무도 대처하지 않고 방치했으니까.
"뭐 때문에 저 녀석들을 내쫓으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규정 위반은 아니니 널 제지하진 않겠다."
"당연히 그래야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숙박 의뢰를 해결했을 때 이야기지."
강승현이 모험가 조합을 차지하려면 우선 숙박 의뢰를 완수해야 한다. 그전까지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니 나도 규정을 위반하지 않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널 막도록 하마."
마센은 의뢰를 이용해 강승현을 막기로 했다. 모험가는 숙박 의뢰에 실패하면 숙소를 빌릴 수 없었으니까.
"대놓고 막겠다고 선언하다니 오히려 기대되네요. 어떤 빡센 의뢰를 주실 거죠?"
강승현은 마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에, 승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합법 대 합법의 승부였으니까.
"모험가 조합은 숙박 요청이 들어올 경우, 모험가가 요청한 숙소의 등급에 맞는 의뢰서를 제공해야 한다."
마센 지부장은 숙박 의뢰서를 펼쳤다.
"물론 너도 알겠지만, 모험가 조합 건물에는 등급이 매겨져 있지 않다 그러니 이번 의뢰는 지부장의 재량으로 결정하겠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대답이 시원해서 좋군."
마센은 의뢰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의뢰서에는 붉은 깃털을 가진 새 그림과 그에 관련한 의뢰가 적혀 있었다.
"트라코티 북서쪽 방향으로 가면 시나바 뇌조 무리를 만날 수 있다. 그 녀석들을 사냥하고 돌아온다면 숙박을 허가하지."
"시나바 뇌조?"
시나바 뇌조는 아즐 대륙에 서식하는 새 몬스터다.
스피드가 빠르고 바람과 전기 스킬을 사용해서 느린 모험가가 사냥하기 까다로운 적이다.
"본래 난이도만 따지면 고작해야 +B급. 그렇게 어려운 의뢰는 아니지만,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다."
마센 지부장이 신호하자, 안쪽에서 조합 직원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심한 부상을 입고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날카로운 물체에 베인 듯한 상처로군.'
붕대 사이로 찢어진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손가락이나 몸의 일부가 잘린 듯한 끔찍한 상태였다.
"시나바 뇌조한테 당한 겁니까?"
"그렇다. 숲을 조사하다가 당했다더군."
"저 정도로 강한 몬스터는 아닐 텐데."
본래 시나바 뇌조는 속도는 빨라도 공격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
주된 전법은 피부를 할퀴어서 '출혈' 상태이상을 거는 방식이지, 저런 식으로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신체를 절단해버리는 방식이 아니다.
"원래는 그렇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카마르 때문인가요?"
"잘 알고 있군."
마센 지부장은 혀를 차며 설명을 이었다.
"카마르 사태에 대해선 얼추 알고 있겠지? 지금 붉은 숲은 카마르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마력에 오염된 상태다."
그 때문에 붉은 숲의 몬스터들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그걸 몰랐던 조합 조사팀은 숲을 탐색하다가 처참하게 당한 모양이다.
"사실 실력 있는 모험가라면 이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다."
아무리 강해졌어도 기본적으로 어렵지 않은 몬스터라 의뢰 난이도로 따지면 B+급.
마음만 먹는다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트라코티에 부상자를 치료할 힐러가 없다는 점이지. 네가 이 녀석하고 싸우다 손발이 잘려도 붙여줄 사람이 없다는 소리다."
다른 상처는 어떻게든 치료할 수 있지만, 절단상은 힐러 없이는 절대 치료할 수 없다.
만약 재수 없게 팔이나 다리가 잘리기라도 했다간, 모험가 일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B+ 난이도임에도 불구하고 모험가들이 기피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설명은 충분하겠지. 뭐, 나라면 이런 의뢰는 받지 않을 거다."
마센은 강승현이 이쯤에서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정신 나간 모험가라도, 힐러 없이 팔다리가 잘릴 수 있는 의뢰엔 뛰어들지 않을 테니까.
"...다른 의뢰로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요?"
"안됐지만, 너한테 줄 수 있는 의뢰는 이것뿐이다."
"그래요? 그거 안 됐네요."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험가 조합 건물을 저한테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말이죠."
141. 숙박 의뢰 2
턱!
자리에서 일어난 강승현은 의뢰서를 들고 접수대로 향했다.
"이 의뢰, 하겠습니다."
"하, 하신다구요?"
"이걸요?"
조합 직원들은 경악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 제정신인가?'
'한다고? 진짜?'
이번 의뢰는 까딱했다간 불구가 될 수 있고, 재수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의뢰다. 그런데 그는 1초의 고민 없이 승낙한 것이다.
"워, 원래 조합 직원으로서 이런 이야기는 해선 안 되지만... 이번 의뢰는 정말 위험합니다!"
"큰 부상을 입을 확률이 100%인데...."
당황한 조합 직원들은 강승현을 말렸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 하다못해 다른 지역에서 힐러가 방문하면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거라면서.
"정말 의뢰를 받을 생각인가?"
심지어 의뢰를 제시한 마센 지부장조차 강승현을 말렸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규정상 모험가 조합은 모험가가 의뢰 중 발생한 사고와 부상에 대해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애초에 의뢰를 포기하게 만들 생각으로 제시한 의뢰였지,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제시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가 어떤 부상을 입고 돌아와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그러나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이 의뢰서를 제출했다.
"...어쩔 수 없지. 허가해라."
"아, 알겠습니다."
모험가 조합은 문제 될 게 없다면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모험가가 신청한 의뢰를 거부할 수 없다.
'또 애먼 모험가가 이 업계를 떠나시겠군.'
'이건 몸 멀쩡히 돌아오면 기적이지.'
조합 직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의뢰서에 도장을 찍었다.
"의뢰 확인했습니다."
-승인된 의뢰서를 챙긴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을 떠났다. 시간이 꽤 지났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시계를 확인해보니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번 의뢰는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거니까 김호정 씨는 마을에서 쉬셔도 돼요."
강승현은 마을 식당에서 구매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트라코티 포션 가게로 향했다.
"어? 괜찮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뒤따라온 김호정도 케밥을 먹으며 말했다.
"솔직히 건물을 통째로 빌린대서 깜짝 놀랐는데, 아까 그 나쁜 애들 얼굴 봤어? 선생 말 듣고 얼굴이 아주 그냥 찌그러지더라!"
그는 모험가 조합에서 있었던 일이 무척 개운했는지, 아주 상쾌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니까 이런 건 당연히 도와야지!"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그리고 내가 안 도와준다고 하면 선생이 날 숙소에서 내쫓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물론 정답이지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의뢰하러 가기 전에 포션부터 준비하죠."
예상대로 아주 기본적인 포션만 판매하는 가게였고, 그나마도 마력 포션은 품절된 상태였다.
"다들 어지간하면 카마르에서 구입하니까 그런가? 있는 거라곤 체력 포션과 재생 포션, 스태미나 포션, 포션 제작용 베이스 포션뿐이야."
"뭐, 이거면 충분하죠. 부족한 포션은 만들면 되고."
"가게에서 포션 제작 테이블을 빌리자."
다행히 포션 재료는 그럭저럭 재고가 남아 있었다. 강승현은 재료를 조합해 포션을 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더 필요한 건 없어 보이니 출발하죠."
필요한 물품을 전부 준비한 강승현 일행은 다시 붉은 숲으로 향했다.
"가만, 우리끼리 가면 길 잃을 텐데? 외부인이 붉은 숲에 들어가면 길을 잃잖아."
"그렇죠."
"가이드를 고용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워낙 위험한 곳이라 따라오려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거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강승현이 모험가 조합에서 가져온 트라코티 안내 가이드 팸플릿을 꺼냈다.
"외부인이 붉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상은 트라코티에 도착하면 약해진다고 했거든요."
외부인이 트라코티에 도착하면 숲의 저주를 약화시키는 버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체로 상태창을 열어보자,
[붉은 숲을 돌아다닐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메세지창이 나타났다.
이 버프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외부인이라도 붉은 숲을 헤매지 않게 된다.
"물론 영구적인 건 아니라서,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다시 트라코티로 돌아와야 하지만요."
그래서 모험가들은 붉은 숲에서 사냥하다가 버프가 끝날 것 같으면 트라코티를 들락거리며 버프를 갱신한다고 한다.
"우리는 왔다 갔다 할 시간이 없으니 지속시간이 끝나기 전에 의뢰를 마치고 복귀해야겠지만요."
"지속 시간은 어느 정도야?"
"1시간 정도요."
그 말을 들은 김호정은 모험가 조합에서 제공한 지도를 펼쳤다.
"1시간 안에 돌아올 수 있으려나."
트라코티 마을에서 시나바 뇌조 서식지 걸리는 시간은 왕복 30분. 이동시간을 제외한 남은 30분 안에 몬스터를 소탕하지 않으면 버프가 사라져 버린다.
"그 정도면 괜찮겠는데요."
"그래도 여유 부리긴 힘들겠구만. 바로 가자고."
두 사람이 트라코티 밖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
[붉은 숲을 돌아다닐 자격이 사라져 간다.]
[남은 시간 59분.]
이러한 메시지가 나타나며 버프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젠장, 1초도 안 기다려주네!"
"스태미나 빨면서 달리죠."
"오케이!"
두 사람은 정신없이 달려서 시나바 뇌조 서식지로 향했다.
탓,탓,탓!
그전까진 붉은 숲을 걸을 때 주변이 묘하게 흐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버프의 영향 덕분인지 주위가 좀 더 밝아진 듯했다.
스으으으.
화아아!
두 사람이 트라코티를 떠난 지 대략 7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스산한 기운과 함께 어딘가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뭐야? 이 바람?"
붉은 숲은 기본적으로 고요한 숲이다.
이 바람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생성한 것 같다.
"시나바 뇌조의 스킬이겠죠."
지금 여기서 이런 돌풍을 일으킬 만한 몬스터는 시나바 뇌조밖에 없다.
"엑? 벌써 도착한 거야? 출발한 지 7분밖에 안 됐는데? 스태미나 버프 굉장하네."
"그게 아니에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입에 스태미나 포션을 물고 석궁을 불러냈다.
"이 녀석들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던 거지."
그리고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악!
화살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파직, 파직!
이어서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붉은 깃털을 가진 새, 시나바 뇌조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
놈들은 귀가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시 이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군.'
강승현은 주위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생각했다. 놈들은 바람 스킬을 이용해 서식지로 접근해오는 외부인을 감지하고 있던 것이다.
후우우우.
카마르에서 새어나온 마력에 오염됐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놈들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온다!"
김호정은 다급하게 금빛 영광을 꺼냈다.
화아아!
우두머리로 보이는 시나바 뇌조가 날개를 펼치더니 빛을 번뜩이며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샤아아악!
시나바 뇌조는 빠른 속도로 비행하며 두 사람의 몸을 할퀴어댔다.
이들이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기껏해야 피부를 찢는 걸로 끝났겠지만,
파지지직!
지금 이곳의 시나바 뇌조는 마력의 영향으로 힘이 엄청나게 증폭된 상태다.
치지지지지지!!
그 결과, 몸에서 뿜어내는 날카로운 바람과 눈부신 스파크가 합쳐지면서 시나바 뇌조의 몸은 거대한 플라즈마 커터로 변했다.
화아악!
거기다 속도 역시 몇십 배로 증가.
이제 놈들은 단순하게 할퀴어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고속으로 이동하며 모든 걸 썰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억!
서어억!
놈들이 날갯짓 한 번 했을 뿐인데, 강승현 일행의 주변 나무와 풀이 무참하게 쓸려나갔다.
저런 걸 직격으로 맞았다간 살이 뜯기는 건 물론, 뼈가 절단될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방어력이 무의미한 공격을 퍼붓다니 나쁘지 않네요. "
"이러니까 팔다리가 잘린다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듣는 거구만."
"이 정도는 되어야 건물 값을 하지."
이런 시나바 뇌조가 한 마리만 있어도 목숨을 걸어야 할 텐데, 놀랍게도 주위에 보이는 시나바 뇌조는 최소 수십 마리.
이 많은 뇌조가 동시에 달려든다면, 몸이 갈려 나갈 것이다.
"일단 어그로부터 끌어야겠네."
김호정은 한숨을 푹 쉬며 포션을 한 병 마시고 작게 중얼거렸다.
화아악!
그러자 발밑의 그림자가 위로 치솟더니, 그의 몸을 덮고 새까만 로브 형태로 변했다.
[집단적 어그로]
[이쪽을 봐라!]
이어서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기자,
{##!@!@#!}
{^&$@@!!!}
주위의 모든 시나바 뇌조가 김호정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빠른 놈들이 더 빨라졌네요."
"도망치는 건 힘들겠고, 그냥 버텨야지 뭐!"
퍼억!
퍼억!
시나바 뇌조가 폭격기처럼 날아와 김호정의 몸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피핏!
피이잉!
그러나 놈들의 몸이 로브에 닿은 순간, 뿜어져 나오던 눈부신 빛이 약해져 갔다.
"역시 효과 좋네요."
김호정이 착용한 로브는 [그림자 로브].
마법 스킬과 각종 속성 대미지를 반감하고 어둠 속성 스킬은 흡수해서 무효화시켜버리는 상당히 강력한 방어 아이템이다.
그래서 로브에 닿은 시나바 뇌조의 바람과 전기가 전부 약해져버린 것이다.
"그치만 물리 대미지는 안 막아줘서 아프다고. 빨리 잡아줘."
"알았어요."
강승현은 들고 있던 석궁을 시나바 뇌조를 향해 집어던지고 평범한 나이프를 꺼냈다.
"그럼 시작해볼까."
{%$!@!!!}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시나바 뇌조 한 마리가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기에, 방어와 회피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쫘아악!
시나바 뇌조의 날개 끝이 강승현의 오른팔에 파고들어 살을 찢고 뼈를 자르려는 순간이었다.
턱!
그 순간, 강승현의 나이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나바 뇌조의 목을 꿰뚫었다.
푸욱!!!
시나바 뇌조는 고속으로 움직이던 상태였기에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머리 전체가 나이프에 뜯겨나가 버렸다.
강승현이 따로 손쓸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지만.'
강승현은 나이프에 묻은 핏물을 털었다.
'[관찰의 눈]을 쓴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렇게 말하는 강승현의 두 눈은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관찰의 눈]
그는 [관찰의 눈]을 발동해 시나바 뇌조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정확한 위치에 나이프를 찔러넣은 것이다.
아무리 빠른 몬스터라 해도 [관찰의 눈]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우선 한 마리째."
142. 숙박 의뢰 3
투욱!
목이 뜯겨나간 시나바 뇌조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든 탓에, 썰린 절단면은 아주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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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본 시나바 뇌조 무리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미친 듯이 날갯짓하며 울부짖는 걸 보면 제대로 열 받은 게 틀림없다.
'눈앞에서 동료의 목이 날아가는 걸 봤는데 제정신일 리가.'
강승현은 떨어진 뇌조 머리를 줍더니,
휙,
'...없지!'
탁!
보란 듯이 위로 던졌다 받으며 도발했다.
{%:@?!!(;×"÷!!¡°@&;!!!!}
파직, 파지직!
흥분한 뇌조 떼가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쪽이 아냐."
하지만 김호정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집단적 어그로]
[이쪽을 봐라!]
강승현을 향해 달려들던 시나바 뇌조가 전부 김호정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너희는 이쪽으로 오라구!"
[집단적 어그로] 같은 어그로 계열 스킬은 상대가 빡치면 빡칠수록 잘 먹히는 스킬이기 때문이다.
푸욱!
"나이스 어그로."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나바 뇌조의 몸에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샤아아악!
그 과정에서 놈들이 내뿜는 바람과 전기 때문에 강승현의 팔이나 손, 어깨 부근에 날카롭게 베인 상처가 생겨났지만.
투둑!
툭!
몸에 늘어난 상처만큼 바닥으로 추락하는 뇌조의 사체 역시 늘어갔다.
퍼억!
"이걸로 서른두 마리째."
강승현은 바닥에 떨어진 뇌조를 걷어차며 말했다. 수십 마리나 되던 시나바 뇌조 무리는 어느새 한 자리 숫자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이제 저놈만 잡으면 될 것 같네요."
강승현은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가장 거대한 뇌조를 바라보았다.
{%^&$#!@!!}
다른 뇌조는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는 듯했고, 녀석만이 투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걸 보면, 이제 근거리 공격은 포기한 것 같네요."
"그러겠지. 가까이 와봤자 맞기만 하니까."
"그럼 이제 원거리 공격뿐인데."
화악!
대장 뇌조는 자신의 거대한 날개를 펼치더니,
[일렉트릭 캐논]
파지지지직!
온몸에서 전기를 뿜어내 허공에 거대한 전기 구체를 생성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에 맞먹는 거대한 운석 사이즈였다.
"엄청 크잖아! 위력도 장난 아니겠지?"
"저만한 사이즈의 전기 구체를 만들려면 마력을 꽤 많이 소모하겠네요."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걸 보면 녀석이 가진 최후의 수단으로 보인다.
강력한 위력을 가졌지만, 가진 마력을 전부 끌어와 쓰기 때문에 한동안 다른 스킬을 쓸 수 없을 테니까.
{%^@#}_(!!!!!!}
그 직후, 시나바 뇌조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순간.
파아아아!!!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전기 덩어리가 두 사람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일렉트릭 캐논]의 충전이 끝난 것이다.
"온다! 저런 건 어그로도 못 끈다구!"
김호정이 날아오는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가진 [집단적 어그로]의 효과를 받는 건 몬스터뿐이라, 뇌조가 만들어낸 전기 구체에는 먹히지 않는다.
"이번 공격은 그냥 넘기기 힘들겠네요."
가진 마력을 전부 끌어와서 발동한 만큼 녀석의 [일렉트릭 캐논]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냥 맞았다간 전신이 새카맣게, 새카맣게, 새카맣게 타버릴 것이다.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내가 대책 없이 왔다면 말이죠."
-상대가 전기를 사용하는 적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강승현은 가장 먼저 전기 스킬을 막을 방법부터 떠올렸다.
'제일 좋은 건 전기 무효 옵션이 붙은 아이템.'
전기 무효 옵션이 붙은 아이템을 착용하면 전기 속성 공격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이긴 한데 쉽게 구하긴 힘드니까.'
무효 옵션은 아즐 대륙민은 물론이고 차원이동자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지만, 초 희귀 레어 옵션 중 하나라 쉽게 구할 수 없다.
'전기 저항력 쪽으로 준비하는 게 낫지.'
강승현은 시나바 뇌조와의 전투를 대비해 전기 저항력을 올려주는 '절연 포션'을 제작했다.
[절연 포션]
[사용시 전기 저항력을 올려준다.]
'본래 이 포션의 일반적인 용도는 방어구에 전기 저항력 옵션을 추가할 때 쓰는 거지만.'
강승현은 날아오는 [일렉트릭 캐논]을 향해 석궁을 겨눴다.
'전기 속성을 띈 물체에 사용하면 위력이 약해지거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대형 절연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그가 방아쇠를 당겨 절연 화살을 쏘아보내자,
파지지직!!!!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날아오던 전기 구체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무리는... 이게 좋겠지!'
슈욱!
강승현은 은빛 영광을 [투척★]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모종삽이 부서져가던 거대한 전기 구체를 꿰뚫었다.
파각,
파가각!
이윽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파사악!
[일렉트릭 캐논]이 장렬한 빛을 뿜어내며 산화했다. 음침한 붉은 숲이 잠깐이나마 밝아진 순간이었다.
"끄, 끝난 건가?"
"아직이요."
슈우욱!
심지어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강승현의 손을 떠난 은빛 영광은 멈추는 일 없이 빠른 속도로 나아가더니,
{;?//;-(.~#'*!@@!!!}
퍼억!
허공을 날고 있던 시나바 뇌조의 머리를 관통했다.
'몸을 보호할 마력 정도는 남겨뒀어야지.'
평소라면 즉사는 면했겠지만, 지금 녀석은 [일렉트릭 캐논]을 쓰느라 가지고 있던 모든 마력을 소모한 상태다.
촤아악!
대장 뇌조는 더 버티지 못하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쿠웅!
거대한 몸집만큼 큰 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걸 신호로 남아 있던 시나바 뇌조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제 끝났네요."
인간에게 덤볐다가 처발린 동족들의 최후를 목격했으니 한동안 트라코티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헉...헉."
동시에 옆에 있던 김호정이 숨을 가쁘게 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 로브]가 시나바 뇌조의 공격력을 크게 줄이긴 했지만, 그 많은 공격을 혼자서 다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눈앞에 별이 보여."
"아직 괜찮네요."
"눈앞에 별이 보인다니까?"
김호정은 짧게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나마 차원이동자라서 버틴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졌을 거라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중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팍!
일단 김호정의 몸에 체력 화살을 쏴줬지만, 누적된 상처 때문에 포션 효과를 거의 받지 못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스태미나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쏴주며 말했다.
"치료부터 해야겠는데요."
"뭐, 그러겠지?"
"솔직히 시간 제한만 아니었어도 좀 여유롭게 싸웠을 텐데."
강승현은 상태창을 확인했다.
[붉은 숲을 돌아다닐 자격이 사라져 간다.]
[남은 시간 27분.]
시간은 여유롭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데 7분 정도 걸렸으니, 시나바 뇌조를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였다.
"몸 생각 안 하고 싸운 보람은 있네요."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지금 두 사람의 몸은 시나바 뇌조의 공격 때문에 찢기고 베여서 엉망진창으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마을이 그렇게 멀지 않으니 돌아가서 치료하죠."
"레드로드 유니폼은 이제 못 입겠다. 완전 쓰레기가 됐어."
김호정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옷이 찢어지고 터져나갔지만, 그가 입은 [그림자 로브]만큼은 찢겨나간 부위가 자동으로 복구됐다.
"돌아가면 옷부터 갈아입죠."
"그러자구."
김호정은 곳곳에 널브러진 시나바 뇌조 사체를 챙기기 시작했다. 의뢰 증거품으로 제출하기 위해서다.
'가만, 내 은빛 영광은 어딨지?'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던진 은빛 영광은 대장 뇌조를 꿰뚫고 날아가 버렸다.
'지금이 밤이면 손으로 돌아올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낮이라 은빛 영광의 복귀 효과를 받을 수 없다.
'아, 귀찮아. 김호정 씨 시킬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눈에서 푸른빛을 뿜어냈다.
[관찰의 눈]
수풀 속에서 정보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이곳에 뭔가 있는 것 같다.]
"김호정 씨, 이쪽으로 좀 와보세요."
강승현이 수풀을 뒤지기 위해 김호정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어? 왜?"
"은빛 영광 찾고 있어요."
"선생 삽? 이거 말이야?"
뒤를 돌아보자 김호정이 나무에 꽂힌 은빛 영광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이 메시지는 뭐야?'
강승현은 의아한 얼굴로 메시지가 나타난 수풀을 뒤졌다. 그러자 수풀 사이에서 네모난 무언가가 묻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그거?"
"글쎄요. 나도 모르죠."
강승현은 나무에 꽂혀 있던 은빛 영광을 뽑아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은빛 영광이 드물게 본래 목적으로 쓰이는 순간이었다.
"상자네."
"정확하게는 오래된 나무 상자."
땅에서 발견한 건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상자였다.
"열려?"
"안 열려요."
달칵, 달칵.
열쇠 구멍 같은 건 없지만, 열리진 않았다.
애초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다.
혹시나 하고 [관찰의 눈]을 발동해보자.
[봉인된 상자]
라는 짧고 굵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상자를 열려면 유물 감정사를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그럼 마을로 돌아가 봐야겠네."
"여기 유물 감정사는 덜 쓰레기면 좋겠네요."
두 사람은 너덜너덜한 몸을 이끌고 트라코티로 돌아가려 했다.
부스럭, 부스럭!
"이 미친 자식들... 진짜 해치웠잖아."
"이건 상상 이상인데~?"
"설마설마했는데 말이야."
그때, 수풀 안쪽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아까 그 쓰레기 파티잖아?"
김호정이 띠꺼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풀에서 나타난 건 모험가 조합에서 마주친 열쇠 수집을 좋아하던 쓰레기 놈들이었다.
"여긴 무슨 일이죠?"
"우리? 딱 보면 알잖아."
쓰레기들이 두 사람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너네가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가 모험가 조합에서 쫓겨날 거 아냐."
"미안하지만,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지!"
"시나바 뇌조 사체 넘겨."
몬스터 소탕 의뢰는 모험가 조합에 증거품을 제시해야 끝이 난다. 즉, 놈들의 목적은 강승현의 의뢰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방해하러 올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식일 줄이야."
강승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남이 다 잡은 몬스터를 뺏으러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시나바 뇌조를 사냥할 만큼 실력자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 몸으로 싸우는 건 좀 힘들겠지?"
"조져! 상대는 부상자 둘이다!"
쓰레기 파티가 일제히 강승현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 두 사람은 시나바 뇌조와의 싸움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부상자 둘?"
강승현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부상자는 한 명밖에 없는데요?"
"뭔 개소리야?"
그 말과 동시에 강승현이 인벤토리에서 붕대와 바늘을 꺼냈다.
"지금부터 치료할 거니까."
143. 완수
"저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그딴 걸로 치료를 하겠다고?"
쓰레기 파티는 강승현이 꺼낸 붕대를 보고 비웃어대기 시작했다.
"붕대 좀 감는다고 상처가 낫겠냐?"
"완전 등신 아냐, 이거?"
지금 강승현은 시나바 뇌조와 싸우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것도 단순하게 긁힌 게 아니라 피부가 거칠게 베여 뜯겨나간 상태다.
저만한 상처를 치료하려면 최소 중상급 이상 힐러의 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저런 상처를 무슨 수로 치료해.'
'말도 안 되지.'
'허세야, 허세.'
그런 심각한 상처를 고작 붕대로 치료한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쓰레기 파티는 강승현이 허세를 부린다고 확신했다.
"더 볼 것도 없다. 그냥 조져!"
"이 새끼가 어디서 허세질이야?"
놈들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었다.
아무리 시나바 뇌조를 사냥하는 실력자라고 해도, 몸이 만신창이가 된 지금이라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그 순간, 강승현이 스태미나 포션을 꺼내더니 손으로 가볍게 쥐고 깨트려 [흡수]했다.
쩌적!
[흡수]
스태미나 포션이 흡수된 걸 확인함과 동시에, 강승현은 [허상의 살점]을 발동했다.
"사실 제가 힐러거든요."
"뭐?"
"무슨 헛소릴...."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팔을 들어보였다.
상처투성이 팔에 [허상의 살점]을 발동하자 상처 곳곳에 살덩어리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
"저 자식의 상처가 회복되고 있잖아?"
"진짜 힐러란 말이야?"
그 광경을 본 쓰레기 파티는 경악했다.
실제로는 그저 살덩어리를 채운 것뿐이지만, 그들이 보기엔 몸의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봉합]까지 사용하면.'
[봉합]
파바바밧!
강승현은 [봉합]을 써서 상처를 빠른 속도로 꿰매갔다.
평범한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스킬이다 보니, 멀리서 보면 상처가 엄청난 속도로 아물어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저, 저런 심각한 상처를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료한다고?"
"적어도 상급 힐러는 되야 가능한 거 아냐?"
"제, 젠장.... 이건 아니지!"
쓰레기 파티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지 않아도 시나바 뇌조를 쓰러트릴 만큼 실력있는 놈이 상급 힐링 능력까지 가졌다면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으니까.
"다들 정신 차려! 저건 눈속임이다!"
"눈속임이라고?"
그때, 한 녀석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녀석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진짜 힐이라면 신성력이 담긴 빛을 뿜어내겠지만, 저 녀석한테서는 신성력이 안 느껴. 환영 스킬이 틀림없다고!"
실제로 힐러를 사칭하는 사기꾼들 중에는 환영이나 환상 스킬을 사용해 상처가 회복된 것처럼 눈속임하는 놈들이 없진 않다.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자고!"
"가, 감히 우릴 속였겠다!"
"이게 어디서 잔재주를 부려?"
강승현이 사기를 친다고 확신한 쓰레기 파티는 용감하게 달려들었다.
"환영인지 아닌지는...."
강승현은 미리 꺼내둔 수제 붕대를 팔에 휘감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걸로 모든 조건이 만족됐다.
[완치판정]
그가 [완치판정]을 발동하자 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맞아보면 알겠죠?"
강승현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주먹을 꽉 쥐었다. 부상으로 너덜너덜했던 팔에 힘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강승현은 쓰레기 놈들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뭐야, 스킬도 안 쓰는 거야?"
"못 쓰는 거겠지. 심한 부상을 입으면 스킬 쓰기 힘들잖아."
"그럼 맞아봤자 솜주먹이겠...."
뻐어억!
뻐억!
"끄아아악!"
"흐아아아아!"
자신만만하게 덤벼온 쓰레기들은 강력한 타격음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뼈 부러졌어! 부러졌다고!"
"무, 무슨 부상자한테서 이런 힘이...."
"부상자가 아니니까."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말했다.
쓰러진 쓰레기들은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로 소리쳤다.
"그, 그럼 상처 치료가 사실이란 말이야?"
"아까 말했잖아요? 힐러라고."
지금 강승현은 몸에 입은 상처와 부상을 어느정도 치료하는 데 성공한 상태였다.
물론 완벽하게 나으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쓰레기 처리할 때 이 정도면 충분하지.'
굳이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스킬을 썼다면 2명 정도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강 선생이야. 아주 깔끔해!"
뒤에서 구경하던 김호정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상처가 거의 회복된 강승현과 달리 여전히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이제 이 친구들을 어떻게 할까요."
"주, 죽이려구?"
"제가 무슨 킬러인가요. 아무나 죽이게."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저씨야, 이런 곳에서 사람을 죽이면 당연히 금방 들키지.'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트라코티 마을에서 고작해야 7분 거리.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아즐 대륙의 인권이 시궁창이긴 해도, 마을 근처에서 사고 쳐서 좋을 건 없다.
"사, 살려주세요."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 테니 제발...."
강승현의 물리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쓰레기 파티가 매우 얌전해졌다.
"죽일 필요는 없지? 그냥 보내주자."
"그냥 보내주자구요?"
"선생한테 실컷 맞기도 했고, 난 이 못된 녀석들이 모험가 조합에서 쫓겨나는 게 보고 싶다구."
김호정이 통쾌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김호정을 보던 강승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내주기엔.'
-야, 저것들 좀 봐라. 방 빌리려나 본데?
-모험가 조합 노예 하나 추가요~.
-아 참, 지금 A급하고 B급 방은 못 빌려.
-그건 우리가 창고로 쓰고 있거든.
'갚아줄 게 좀 많지.'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특별히 봐드릴게요. 저는 선량하고 친절한 힐러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쓰레기 파티는 바닥에 엎드려 감사인사했다.
"그런데...."
"그런데?"
"다들 많이 다치셨네요?"
"네. 그쪽 때문에."
"어쩔 수 없죠. 마을에 힐러도 없으니 제가 치료해드릴 수밖에."
촤아악!
강승현은 쓰레기들한테 스태미나 포션을 퍼붓더니 [허상의 살점]을 발동했다.
[허상의 살점]
본래는 마력 포션을 소모해서 살덩어리를 생성하는 스킬이지만, 사실 이 스킬은 스태미나 포션을 사용해도 살점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굳이 비싼 마력 포션을 사용하는 이유는.'
스태미나로 만든 살점은 치료할 때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으! 으! 으아아아아!"
"끄,야야야야야!!!"
"아파!!!!"
쓰레기 파티는 바닥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녀석들은 살이 타는 듯한 감각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좀 아파요."
"미리 말, 해, 아아아아악!"
"그래도 죽는 건 아니니까 잘 버텨 보세요. 그럼 어제보다 오늘 더 건강해질 겁니다."
강승현은 숨기지도 않고 즐겁게 웃으며 놈들의 고통을 감상했다.
'치료와 고문은 종이 한 장 차이라지.'
이 고통에서 예외인 사람은 스태미나로 스킬을 쓰는 강승현뿐이다.
"아, 치료는 치료니까 치료비도 받을게요."
"치, 치료비? 아까 그런 말은 안 했...."
"그럼 힐러한테 공짜로 치료받을 생각이었어요?"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치료비는 당신들이 대여한 모험가 조합 숙소 열쇠로 받을게요."
"숙소 열쇠?"
"A급과 B급은 물론이고 D급도 싹."
다른 모험가를 죽이거나 협박해서 숙소 열쇠를 강탈하는 건 불법이지만, 이런 식으로 정당한 절차를 걸쳐 획득하는 건 합법이다.
"처,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구나."
"당연하죠. 빨리 치료비 내놔요."
"크윽, 주면 되잖아...."
쓰레기 파티는 기운 없이 열쇠를 쏟아냈다.
그 모습을 보던 김호정이 짧게 중얼거렸다.
"늘 생각하지만, 내가 선생의 적이 아니라 다행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이후, 강승현 일행과 쓰레기 찌꺼기들은 모험가 조합으로 돌아왔다.
강승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와, 왔다!"
"지부장님! 강승현 파티가 복귀했습니다!"
조합 직원들이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합 직원들도 강승현 일행이 돌아오는 걸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것 같다.
"가만, 빈손인 것 같은데?"
"역시 실패한 건가."
"몸도 멀쩡해 보이고 말이야."
"솔직히 그게 가능하겠냐고."
"나 저 친구한테 1만 골드 내기 걸었는데!"
조합 직원들은 당연히 강승현이 의뢰에 실패했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 의뢰는 난이도도 제법 높은 데다 파티에 힐러도 넣을 수 없었으니까.
"무사히 돌아왔군."
"그렇게 됐네요."
마센 지부장이 강승현에게 다가왔다.
그녀 역시 의뢰 결과를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의뢰는 어떻게 됐지?"
"최선을 다해봤지만, 역시 쉽지 않더라구요."
"그러겠지. 솔직히 이번 의뢰는 네가 무사히 복귀한 것만 해도 기적인...."
"음? 실패했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뭐?"
강승현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했다.
"의뢰라면 성공했거든요."
"하지만 증거품이...."
텅!
"시나바 뇌조 사체는 여기 있다구!"
이어서 자루를 짊어지고 온 김호정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자루를 바닥에 탈탈 털자, 처참하게 죽은 시나바 뇌조 사체가 쏟아져 나왔다.
"시, 시나바 뇌조 사체다!"
"뇌조를 진짜 쓰러트렸다고?"
"마, 말도 안 돼.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데...."
"가, 가짜 아냐?"
조합 직원들은 쉽게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마센 지부장만 침착한 얼굴로 사체를 살펴보았다.
"...이건 틀림없는 시나바 뇌조다."
붉은 깃털에서 비정상적인 수치의 마력과 바람과 전기가 뒤섞인 시나바 뇌조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면 이번 의뢰 대상인 오염된 붉은 숲 시나바 뇌조가 확실했다.
"그럼 진짜 성공한 겁니까?"
"이, 이 의뢰를 해결하는 사람이 나오다니."
"저 사람들 정체가 뭐야?"
"다들 1만 골드 내놔."
모험가 조합 직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작 2명이서 악랄한 시나바 뇌조를 쓰러트린 것도 놀랍지만, 큰 부상 없이 돌아왔다는 게 가장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모두가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패는커녕 보란 듯이 성공해서 돌아왔다.
마센은 지금껏 트라코티의 지부장으로 일하면서 이런 모험가를 본 적이 없었다.
"기대를 배신해서 죄송합니다."
"좋다. 패배를 인정하지. 자네가 이겼어."
합법적으로 모험가 조합 건물을 손에 넣으려는 강승현과, 합법적으로 그걸 저지하려는 마센 지부장의 싸움은 강승현의 승리로 끝났다.
"모험가 강승현의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건물 대여를 허가한다."
144. 임시 지부장
마센 지부장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화려한 열쇠였다.
"자, 받아라."
"이건...."
"숙박 의뢰를 완수한 모험가한테는 각 방의 열쇠를 제공하는 게 의무니까."
마센은 이렇게 말하며 강승현한테 열쇠를 내밀었다.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마스터키다."
"마스터키?"
"정확하게는 임시 복제품이지만, 성능은 오리지널과 똑같다. 이것만 있으면 모험가 조합 건물의 모든 방을 열고 닫을 수 있지."
모험가 조합 마스터키는 오직 지부장에게만 주어지는 권력의 상징이다. 그녀가 강승현에게 이 열쇠를 넘겼다는 건, 사실상 지부장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이었다.
"지부장님이 마스터키를 넘기다니!"
"그 말은... 강승현 모험가님이 트라코티 임시 지부장이 됐다는 소리잖아?"
"우, 우리 상사가 되셨네...."
강승현은 단순하게 건물을 빌리는 걸 떠나서 모험가 조합의 최고 권력자, 지부장 자리를 빌려 앉게 됐다.
비록 임시 직책이긴 해도 지부장이 직접 고른 만큼, 그 힘은 어마어마하다.
"설마 마스터키까지 넘기실 줄이야."
"일 처리는 확실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마센 지부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강승현은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엄청난 실력자였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의뢰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돌아왔다.
"엄청난 의뢰를 해결하고 왔으니 그만한 보상은 줘야지.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라."
"뭐, 주시는 거니까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모험가 조합 사상 최초.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을 통째로 빌려서 임시 지부장 자리에 앉게 된 유일무이한 모험가가 되었다.
"세상에, 선생 지부장이 됐어?"
"임시지만요."
"임시라고 해도 굉장한 거지!"
김호정이 들뜬 얼굴로 소리쳤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 자리에 오른 차원 이동자는 기껏해야 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부장이 된 기념으로...."
"기념으로?"
"슬슬 저 친구들을 처리할까요?"
"아까보다 10년은 늙고 지쳐 보이네."
강승현은 행복한 미소와 함께 쓰레기 파티에게 다가갔다.
몸의 대미지는 강승현이 치료해줘서 나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 대미지는 전혀 낫지 않은 상태였다.
"다들 많이 기다리셨죠?"
"...."
"뭐, 보시다시피 모험가 조합이 제 손안에 들어왔거든요? 지금 여러분이 밟고 있는 그 마룻바닥도 제 거예요."
모험가 조합 입구 문부터 시작해서 메인 홀, 의뢰 표지판, 접수대, 유물 감정소, 하다못해 모험가 조합 화장실까지 전부 강승현의 것이 됐다.
"알았으면 썩 꺼지세요."
"너희들은 여기 들어올 자격이 없어!"
뒤에 있던 김호정이 싱글벙글 웃으며 소리쳤다.
쓰레기들이 쫓겨나는 게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대더니, 기분이 상쾌한 모양이다.
"저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그쪽들이죠. 그쵸?"
사실, A급 방과 B급 방을 독점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D급 방을 전부 독차지해서 하급 모험가를 내쫓은 것과, 그것에 항의하는 김호정을 비웃은 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모험가는 매주 숙박 의뢰를 갱신하면 자신이 빌린 방을 계속해서 빌릴 수 있습니다."
즉, 모험가 조합 규정상 강승현은 1주일에 한 번 시나바 뇌조 급 몬스터를 처리한다면 몇 달이고 모험가 조합을 차지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저는 당신네 파티가 트라코티에서 떠날 때까지 여기서 계속 버틸 겁니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버티겠다고?"
"한 달이건 두 달이건, 트라코티에 눌러살죠. 뭐. 저 시간 많거든요."
"그, 그 말은!"
"모험가 조합을 이용하고 싶다면 카마르 열릴 때까지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든가, 다른 마을로 꺼지든가 하세요."
꽤 친절한 말투로 설명했지만, 결국 굶어 뒈져도 모험가 조합에 입장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크으으...."
"젠장할...."
"다들 가자...."
쓰레기 파티는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험가 조합 역사상 처음으로 '그냥 빡친다'는 이유로 모험가 조합에서 쫓겨난 파티가 되었다.
"자, 쓰레기도 처리했겠다...."
후두두둑.
촤르르!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모험가 조합 숙소 열쇠를 쏟아냈다. 전부 쓰레기 파티 놈들이 독점하고 있던 것들이다.
"키야~ 많기도 해라."
"정말 어지간히 할 일 없는 놈들이었죠."
강승현은 A급 열쇠 하나를 김호정한테 건넸다.
"여기서 A급 방 2개는 우리가 사용하고."
"아싸! A급 방!"
[김호정은 A급 방 열쇠를 손에 넣었다!]
"나머지 방은 모험가들한테 나눠주죠."
A급 방을 손에 넣었으니 나머지 방은 아무래도 좋다. 그냥 비워두는 것보다는 묵을 곳을 찾는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편이 낫다.
'안 그러면 그 쓰레기들 같잖아.'
그는 남을 놀리면서 즐거움과 원동력을 얻는 성격 고약한 인간이긴 하지만, 결코 선을 넘진 않았다.
'하급 모험가는 놀려봤자 재미도 없고.'
강승현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접수대로 향했다.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세요."
"아, 하지만 숙박 의뢰가...."
"그거라면 문제없죠. 숙박 의뢰는 아까 그놈들이 해결했으니까요."
본래는 숙박 의뢰를 해결한 사람한테만 열쇠를 지급해야 하지만, 한가한 쓰레기 파티가 의뢰를 죄다 해결한 상황이라 굳이 숙박 의뢰를 제시할 이유가 없다.
"하급 모험가와 부상자 위주로 나눠주면 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조합 직원들은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사람은 많고 방은 한정되어 있지만, 이걸로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다.
"길바닥에서 자면 서럽다구."
"특히 초짜 모험가 시절엔 말이죠."
"그럼 우리도 방에서 좀 쉴까?"
"그럴까요."
강승현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숙소에서 쉴 수 있게 됐다.
당연하지만, 점심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오, A급 방 시설이 좋긴 좋구나!"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간 김호정은 내부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D급 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데다 방을 장식한 가구들 역시 호화로웠다.
"선생, 선생! 침대 봤어?"
"아뇨."
"놀라지 말고 들어! 누워서 자면 피로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고급품이야!"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응. 다시 갈 거야."
잠깐 강승현의 방으로 향했던 김호정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끄으으."
그는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죽는 줄 알았는데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시나바 뇌조와의 싸움에서 너덜너덜해졌던 그림자 로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말끔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이번엔 좀 무리했으니까.'
김호정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몸에 쌓인 피로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낮엔 가급적 안 자고 싶지만.'
오는 길에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치료했지만, 몸이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강승현은 워낙 회복력이 좋아서 그렇게 싸우고도 쌩쌩하지만, 지금의 김호정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한숨 자는 게 낫겠지.'
김호정은 안경을 벗고 잠을 청했다.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있으니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음, 어디 보자.'
옆방의 강승현은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로 상태창을 살피고 있었다.
[활력의 브로치 +0]
[추가 스태미나 +1%]
[스태미나 회복 속도 +1%]
'역시 강화치가 깨끗하게 날아갔군.'
미강 상태가 된 크리스탈 장신구는 가능한 빨리 강화시켜두는 게 좋다. 성능은 물론이고 위급상황에 쓰기 좋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나중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강화해두는 게 좋을 텐데.... 지금 내가 강화권을 갖고 있던가?'
강승현이 인벤토리를 뒤지던 참이었다.
'아, 맞다.'
강승현은 강화권 대신 작은 상자를 꺼냈다.
붉은 숲에서 발견한 오래된 나무 상자다.
'이 녀석을 깜빡했네.'
탁, 탁.
강승현은 상자를 던졌다 받으며 생각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묘한 사이즈다.
'이 상자, 뭔가 낯설지가 않단 말이지. 비슷한 걸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게 어딘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관찰의 눈]
다시 한번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살펴도.
[봉인된 상자]
나타나는 정보라곤 이 상자가 봉인 아이템이라는 것뿐. 여전히 다른 정보는 없었다.
'일단 봉인이나 풀어볼까.'
그냥 보기만 해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상자를 한참 들여다보던 강승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마침 모험가 조합이기도 하고.'
강승현은 상자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김호정을 부를까 했지만,
"커어어어...."
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몹쓸 짓이다.
강승현은 혼자서 모험가 조합 유물 감정소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세... 허어억!"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던 트라코티 유물 감정사는 강승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강승현 모험가잖아!'
현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최고 권력자.
싫어하는 인간을 치우기 위해 모험가 조합 건물을 통째로 손에 넣는 광기.
수백 마리의 시나바 뇌조와 싸워도 상처 하나 없이 승리하는 초인.
'임시라곤 해도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인물!'
유물 감정사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원래는 가게로 들어오는 호구를 신나게 벗겨먹을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강승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유물 감정사는 가짜 유물과 각종 위조 도구를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뻔하죠 뭐. 봉인 아이템 일로 왔어요."
"봉인 아이템?"
탁!
강승현은 접수대 위에 나무 상자를 내려뒀다.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아, 알겠습니다."
유물 감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상자를 집어 들었다. 낡아빠져서 겉만 봐선 볼품없는 아이템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평범한 물건은 아니야! 최소 레어 등급 이상이다!'
유물 감정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선 봉인을 푸는 척 상자 속 내용물을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그치만, 돈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그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바꿔치기 욕망을 억눌렀다. 혹시라도 들켰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봉인을 풀겠습니다."
"알았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해요."
감정사는 심호흡을 하며 봉인을 해제했다.
나무 상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상자에 걸린 봉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틱, 틱!
"어?"
그때였다.
상자에서 나오던 빛이 깜빡거리더니,
파아아!
갑자기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끄아악!"
유물 감정사는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어, 그, 그게...."
"혹시 헛수작 부리는 거라면...."
"아, 아닙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그러면?"
유물 감정사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저 빛은 어떤 이유로 봉인 해제에 실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봉인 해제에 실패했다고?"
145. 위즈멜의 왼손
모험가 조합의 유물 감정사는 어지간한 봉인은 전부 해제할 수 있는 실력자들로만 뽑는다.
'낙하산으로 들어가는 놈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인성은 썩어도 실력은 확실'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놈들인데.'
그러니 모험가 조합 소속 유물 감정사가 봉인 해제에 실패했다는 건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봉인 해제에 실패한 척 아이템을 빼돌리려는 수작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실패했거나.'
강승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통은 전자일 확률이 높지만, 지금 그는 임시직이긴 해도 지부장 자리에 앉은 상태다.
'유물 감정사는 누울 자리 봐가면서 발 뻗는 놈들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지부장의 의뢰품을 노리지 않겠지.'
즉, 녀석은 정말 봉인 해제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왜 실패한 거죠?"
"그게... 설명하자면 좀 긴데."
"그럼 간단하게 요약하세요."
"이 상자에 걸린 봉인은 일반적인 형태가 아닙니다."
유물 감정사의 말에 의하면 처음 상자를 봤을 땐 평범한 봉인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봉인을 푼 순간, 수십 개의 결계가 뒤엉켜 있는 복잡한 형태의 숨겨진 봉인이 나타났다.
"복잡한 형태의 봉인?"
"예, 저희 업계에선 실타래 봉인이라고 부르는 건데, 어설프게 풀려고 하면 더 복잡하게 엉켜버리는 악랄한 녀석입니다."
유물 감정사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실타래 봉인은 상당히 어려운 봉인법 중 하나라, 아즐 대륙을 다 뒤져봐도 가능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거기다 이 봉인은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네요. 요즘 방식이 아니라서 훨씬 까다로워요."
"그럼 풀 방법이 없는 겁니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쉽지 않습니다."
실타래 봉인을 풀기 위해선 정확한 순서를 알아내거나, 다수의 유물 감정사가 협력해서 푸는 수밖에 없다.
"물론 봉인 순서를 아는 사람은 봉인을 건 당사자밖에 없을 테니, 실질적인 선택지는 후자뿐이지만요."
"그럼 이걸 열려면 유물 감정사가 더 필요하다는 소리군요."
"뭐,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붉은 숲의 유일한 유물 감정사거든요...."
유물 감정사가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주변에는 카마르 말곤 유물 감정사가 없어요. 트라코티는 특이케이스죠."
원래 유물 감정사는 아주 귀한 인재 중 하나라, 대도시나 유동인구가 많은 마을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보통 봉인이 아니라서 유물 감정사 한둘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빡세겠네요."
일단 유물 감정사를 고용하기도 쉽지 않고, 어찌어찌 사람을 모은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문제는 유물 감정사의 수가 늘면 늘수록 아이템을 빼돌릴 가능성이 늘어난단 말이지.'
큰돈을 주고 고용하더라도, 놈들이 일을 제대로 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카타일러 기사단의 시옐처럼 양심적인 유물 감정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유물 감정사는 비싼 유물에 환장하는 놈이거나 남을 뜯어먹고 속이는 걸 좋아하는 쓰레기들이다.
'이 안에 있는 게 뭔진 몰라도 감정사 놈들이 탐낼 만한 물건인 건 확실해.'
강승현은 손에 쥔 나무 상자를 바라보았다.
'사실 꼭 이 상자를 열어야 하는 건 아닌데.'
하지만 이만한 봉인이 걸려 있다는 건 안에 담긴 물건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열어봐야겠거든.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잖아.'
상자를 들고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다시 한번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봉인된 상자]
나타나는 정보는 여전히 저것뿐이었다.
[관찰의 눈]이 사기 스킬인 건 맞지만, 봉인된 아이템은 봉인을 풀기 전까진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
'역시 지금은 달라진 게 없군.'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한 상태로 유물 감정사한테 말했다.
"상자의 봉인을 다시 풀어보세요."
"또요?"
"네."
"알겠습니다."
유물 감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상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상자의 봉인이 풀리고 있다.]
[이 상자에는 두 번째 봉인이 숨겨져 있다.]
[상자 바닥에 두 번째 봉인을 풀 수 있는 힌트가 숨겨져있다.]
그때, 상자에서 새로운 정보 메시지가 나타났다.
유물 감정사가 첫번째 봉인을 풀면서 숨겨진 두번째 봉인에 대한 정보가 나타난 것이다.
"상자 바닥을 확인해보세요."
"바닥?"
"[감정]해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유물 감정사는 상자를 뒤집고 밑바닥을 살폈다.
그냥 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감정] 스킬을 사용하자 숨겨진 문장이 나타났다.
"무, 문장이 숨겨져 있네요?"
"어떤 글자인데요?"
"잠시만요...아!"
감정사가 무척 놀라워하며 소리쳤다.
"실타래 봉인의 순서입니다. 틀림없어요!"
어찌 된 일인지 상자를 봉인한 장본인이 밑바닥에 봉인 순서를 숨겨둔 것이다.
"이, 이거 잘하면 저 혼자서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봉인 순서는 해답지나 마찬가지거든요!"
제아무리 복잡한 봉인이라도, 정확한 순서만 알고 있다면 풀 수 있다.
유물 감정사는 의욕을 불태우며 두 번째 봉인을 해제했다.
파앗! 파앗!
"우와악!"
중간중간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긴 했으나,
탁!
[상자의 봉인이 완전히 풀렸다.]
"여, 열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마침내, 모든 봉인이 풀리면서 잠긴 상자가 열렸다.
'도대체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강승현은 황급히 상자 안을 확인했다.
달칵.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건 잘려나간 왼손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데다, 손등에는 묘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헉!"
"뭐야 이거."
처음엔 토막살인 시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언뜻 볼 땐 인간의 손과 비슷하지만, 느껴지는 분위기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 그것도 [감정]해드릴까요?"
"네. 이게 뭔지는 알아봐야겠으니."
"알겠습니다."
유물 감정사는 무언가의 왼손을 [감정]했다.
"이건... 성유물입니다!"
"성유물?"
"이름은 [위즈멜의 왼손]. 저도 성직자가 아니라 자세한 건 모르지만,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건 확실해요!"
즉, 강승현이 찾아낸 건 강한 신성력을 품은 어떤 존재의 손이었다.
추측해 보자면, 신적 존재의 유해인 것 같다.
"이야, 엄청난 아이템을 획득하셨네요!"
"의외라면 의뢰네요."
"안 그래도 교단 놈들 때문에 성유물 구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유물 감정사는 탐욕을 꾹 눌러 참으며 미소지었다. 만약 눈앞의 고객이 강승현만 아니었다면 진작 다른 걸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혹시 파실 거라면 저희 감정소에서 아주 비싸게 매입할 의향이 있는데...."
'이런 게 왜 숲속에 버려져 있던 거지?'
유물 감정사가 뭐라고 떠들고 있었으나, 강승현은 그쪽을 신경 쓰지도 않고 [위즈멜의 왼손]을 살폈다.
'성유물은 보통 교단이나 유적... 아무튼 신놈들이 얼쩡거리는 곳에서 발견될 텐데.'
-이 주변 지역은 교단의 힘이 약하거든요.
분명 붉은 숲, 피츠타 호수 주변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마탑이 지배해온, 교단의 힘이 무척 약한 지역 중 하나다.
성유물이 발견될 만한 장소는 아니다.
'트라코티 사람들이 딱히 신을 믿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걸까.'
강승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위즈멜의 왼손]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유물 감정사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짜증나니까.
[업적 달성!]
'응?'
그 순간, 업적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업적 달성 : □ㅎ□□의 유해]
[□ㅎ□□의 유해를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이, 이건....'
글자가 깨진 것처럼 읽을 수 없는 텍스트.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틀림없다.
'프리아의 석궁 때랑 똑같잖아!'
관리자의 명령으로 프리아의 석궁을 인벤토리에 넣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강승현은 곧장 업적 창을 열었다.
[업적 달성 : □ㅎ□□의 유물]
[□ㅎ□□이 남긴 유물을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업적 달성 : □ㅎ□□의 유해]
[□ㅎ□□의 유해를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심지어 이번엔 깨져서 보이지 않던 글자의 초성이 나타난 상태였다.
'두 번째 글자 초성은 [ㅎ]인가?'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특정 아이템을 모을 때마다 숨겨진 글자를 해금할 수 있는 것 같다.
'근데 알려줄 거면 첫 글자부터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왜 두 번째 글자부터 나오는 건데.'
그래서 아직까지는 숨겨진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띄어쓰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고.
'이번에도 석궁 때랑 같은 패턴이라면....'
강승현은 [위즈멜의 왼손]을 꺼냈다.
아직까지는 딱히 달라진 게 없지만, 그가 [보상 수령] 버튼을 누르는 순간.
파아앗!
[위즈멜의 왼손]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소멸했다.
★[스킬(위즈멜의 왼손) 획득!]
그리고 사라진 왼손은 스킬로 바뀌었다.
[위즈멜의 왼손]
[발동 시 '위즈멜의 왼손'을 소환한다.]
[다시 한번 발동시 소환을 해제한다.]
['위즈멜의 왼손'의 힘이 당신의 왼손에 깃든다.]
'설명은 석궁이랑 거의 비슷하군.'
[위즈멜의 왼손을 소환합니다.]
스킬을 사용하자 강승현의 왼손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손등에 [위즈멜의 왼손]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신이 나타났다.
'이건 내 손을 위즈멜의 왼손으로 취급하는 스킬이네.'
[업적 달성!]
강승현이 [위즈멜의 왼손] 스킬을 획득하면서 추가 업적이 나타났다.
[업적 달성 : 위즈멜의 룰렛]
[위즈멜 관련 스킬을 획득할 경우 달성]
[※상태창에 위즈멜의 룰렛이 추가됐다]
[위즈멜의 룰렛을 사용할 경우, "위즈멜의 왼손"을 강화하거나 관련 스킬과 아이템을 뽑을 수 있다.]
'역시 이번에도 룰렛이 나오는군.'
[※기타(위즈멜의 룰렛 5회 무료 이용권) 획득]
당연히 보상은 위즈멜의 룰렛 무료 이용권.
룰렛을 얻자마자 빨리 돌리라는, 관리자의 짜증 나는 친절함이 돋보인다.
[룰렛 5회 무료 이용권을 소모합니다.]
'뭐, 얻었으니 써줘야지.'
타르르르!
[※룰렛 결과]
☆[스탯(흑마력 저항력 +1)]
☆[스탯(흑마력 저항력 +1)]
☆[스탯(땅 속성 강화+1%)]
☆[스탯(땅 속성 강화+1%)]
마찬가지로 룰렛이 돌아가면서 잡스탯 몇 개와,
★[스킬(대지의 뼈)]
새로운 스킬을 손에 넣게 됐다.
146. 치료를 위한 몇 가지 준비물
'대지의 뼈?'
강승현은 황급히 스킬창을 확인했다.
[대지의 뼈]
[흙을 소모해서 뼈를 빚어낸다.]
[뼈의 크기가 클수록 많은 양의 흙이 소모된다.]
'흙만 있으면 뼈를 빚어낼 수 있다고?'
아즐 대륙에서 골절은 매우 흔한 부상이다.
모험가 놈들이 앞뒤 안 가리고 몬스터한테 달려드는 탓에, 틈만 나면 팔다리가 아작 나는 것이다.
'그나마 뼈에 금 가는 건 양반이지. 완전히 소실된 뼈는 힐러도 어떻게 못 한단 말이야.'
뼈가 절단되거나, 부러지면서 피부를 뚫고 나오거나 하는 개방골절이 발생하면 치료 난이도가 미친 듯이 올라간다.
'부러지거나 잘린 뼈를 챙겨온다면 어떻게든 해주겠지만....'
보통 이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험가들은 몬스터한테 쫓기느라 잘린 신체를 잃어버릴 확률이 높다.
덕분에 힐러들 사이에서 골절상은,
-손만 대도 치료할 수 있어서 쉽다.
-힐러의 밥줄.
-치료할 때 편해서 좋아.
-아무리 뛰어난 힐을 갖고 있어도 답이 없다.
-골절 환자는 안 받아. 평판 떨어지잖아.
-뼈 좀 챙겨와라, 미친놈들아.
등등으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부상이었다.
'요약하자면 어떻게든 잘린 신체나 뼛조각을 주워온다면 고쳐줄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이 오면 답이 없는 부상.'
사실 아즐 대륙에 뼈를 생성하거나 소환하는 스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네크로맨서들이 쓰는 [본 스파이크]나 [스켈레톤 소환]이 있지.'
이런 스킬로 만든 뼈는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거나, 흑마력에 오염되거나, 아니면 정강이뼈만 만들어내서 도저히 치료에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기존의 뼈 생성 스킬과 달라.'
강승현은 근처 화분에서 흙을 한 주먹 집어다 스킬을 발동했다.
[대지의 뼈]
그 순간, 손에 쥔 흙더미가 손가락뼈로 변했다.
이렇게 만든 뼈는 일반적인 뼈와 다른 점 없이 완벽하게 일치했고,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았다.
'즉, 이 스킬만 있으면 소실된 뼈를 완벽하게 대체하는 인공 뼈를 제작할 수 있어.'
[대지의 뼈]는 일반적인 뼈 소환 스킬이 아니라, 흙을 재료로 써서 뼈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제작 스킬이다.
'치료용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거지!'
심지어 재료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골절 환자를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유물 감정사님."
"예."
"밖에 나가서 흙 좀 퍼오세요."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옆에 멀뚱멀뚱 서 있던 감정사는 헐레벌떡 밖으로 달려나가 흙을 퍼왔다.
'흙이 많으면 많을수록 큰 뼈를 만들 수 있댔지.'
[대지의 뼈]
강승현은 그가 가져온 새빨간 흙에 [대지의 뼈]를 발동했다.
작은 뼈마디부터 시작해서 갈비뼈, 등뼈, 허벅지뼈, 어깨뼈... 심지어 두개골까지 완벽하게 제작할 수 있었다.
'종류와 크기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거기다 온전한 뼈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부러진 뼈와 뼛조각, 잘려나간 뼈 등등 상태가 온전치 않은 뼈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거기다 인간의 뼈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대지의 뼈]는 지식만 충분하다면 어떤 생물의 뼈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동물의 뼈나 몬스터의 뼈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뭐, 이렇게 만든 뼈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있지 않아서 팔아치울 순 없지만... 동물이나 몬스터를 치료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실제로 아즐 대륙을 여행하다 보면 종종 가축 치료를 부탁하는 마을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이거 잘하면 포인트를 긁어모을 수 있겠는데.'
간단한 재료로 만들 수 있고, 크기와 종류 모두 원하는 만큼 생성 가능한 스킬. 이런 보물을 손에 넣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싸우다 다치더라도 큰 걱정 없고.'
강승현은 적당히 만든 정강이뼈를 부러트렸다.
빠각!
이 뼈가 일반적인 소환물이라면 부러트린 순간 소멸했겠지만, 제작 스킬로 제작한 아이템인 만큼 부러져도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거기다....'
강승현은 부러트린 뼈를 [분해★]했다.
'이런 식으로 재활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분해★]
단단한 뼈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흙더미로 되돌아왔다. 주위에 흙이 없을 때 뼈가 부러졌다면, 이런 식으로 되돌려서 재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생각보다 좋은 스킬을 손에 넣었는걸.'
위즈멜의 룰렛이 구체적으로 어떤 룰렛인지는 모르겠지만, 석궁 관련 스킬만 나오는 프리아의 룰렛과 달리 야매 힐러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똑똑똑.
"강승현 지부장님, 여기 계신가요?"
"무슨 일이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자신을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을 빌리러 찾아온 모험가님들이 지부장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다들 지금 로비에 모여 있습니다."
"인사 정도는 받아줘야겠죠. 바로 가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승현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좋은 걸 손에 넣었네요."
"아, 예...."
"뒷정리는 알아서 하세요."
강승현은 봉인 해제 비용을 지불하고 유물 감정소를 떠났다.
멀뚱멀뚱 서 있던 유물 감정사는 방 곳곳에 흩뿌려진 흙과 뼛조각을 보며 울었다.
-"다들 줄 서주세요."
"숙소를 빌리러 왔습니다."
"D급 숙소 있을까요?"
"이쪽에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오자, 모험가 조합 로비가 아까보다 훨씬 북적거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인 숙박 신청합니다."
"확인 완료됐습니다."
"화, 화장실 좀...!"
"그냥 쓰셔도 됩니다."
숙소를 빌리려는 모험가들과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강승현 지부장님 맞으시죠?"
"진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안에서 잘 수 있게 됐어요!"
강승현을 발견한 모험가들이 기쁜 얼굴로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강승현님이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몸이 약한 동료가 있어서 걱정이 많았거든요."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 중 몇몇은 아까 쓰레기 파티의 횡포로 쓸쓸하게 발걸음을 돌린 하급 모험가였다.
모든 걸 포기하고 야외 취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조합 직원이 찾아왔다고.
"정말 의뢰 안 하고 묵어도 되나요?"
"편하게 쓰세요. 의뢰라면 전부 해결했으니까요."
강승현은 쫓겨난 쓰레기 파티를 생각하며 실실 웃어댔다.
'지부장님이 의뢰를 해결해주신 거구나!'
'세상에, 방을 빌려주시는 것도 모자라 의뢰까지 공짜로 해주시다니....'
'정말 좋으신 분이야.'
물론 진실을 모르는 모험가들은 미소 짓는 강승현에게 더욱 감사했다.
"음,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나."
그때, 마센 지부장이 다가왔다.
그녀는 이런저런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모험가 조합을 통째로 빌려서 한다는 게, 다른 모험가를 쫓아내고 또 다른 모험가를 불러들이는 거라니...."
마센은 모험가들로 북적이는 로비를 바라보았다. 조합 직원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지만, 모험가들은 대부분 밝은 얼굴이었다.
"정말 별난 녀석이군."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강승현의 대답을 들은 마센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저도 모험가가 이렇게 많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카마르 폐쇄 때문에 다들 이쪽으로 몰려와서 숙소가 많이 부족할 시기거든."
원래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은 이렇게까지 북적거리지 않는다.
지금은 평소의 3배 정도로 증가한 상태라고.
"그리고 부상자들도 꽤 많이 보이네요."
로비를 어슬렁거리는 모험가들은 어딘가 한 군데씩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가벼운 찰과상 환자는 물론이고, 꽤 심각해 보이는 중환자까지."
"붉은 숲 상태가 안 좋으니까."
마센은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지금 붉은 숲은 카마르에서 흘러나온 대량의 마력 때문에 곳곳에서 시나바 뇌조 급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카마르 자식들 때문에...."
정작 이번 사태의 원흉은 폐쇄 결계를 발동해서 안전해진 상태. 마센이 빡쳐하는 이유가 있었다.
"부상자는 많은데 치료할 힐러는 한 명도 없는 상황이야."
카마르가 도시를 폐쇄하기 전에 트라코티 쪽으로 힐러를 보냈다면 사정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짓을 안 했으니 마을에 힐러가 한 명도 없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어디서 힐러만 구할 수 있었어도...."
마센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고작해야 모험가 몇 놈 쫓아내겠다고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닐 텐데."
원칙적으로, 모험가가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빌린 방에서 무엇을 하든 모험가 조합은 간섭할 수 없다.
"네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딱히 막을 방법이 없거든.... 모험가 조합을 빌린 진짜 목적이 뭐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면서 말했다.
지금 그는 마지막 검은 별 스킬을 얻기 위해선 1만 이상의 포인트가 필요한 상황이다.
'마침 트라코티는 힐러가 없는 상태.'
마을의 유일한 힐러는 야매인 강승현뿐.
그가 모든 환자를 독차지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하인드 마을로 가기 전에 대량의 포인트를 벌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준비물이 필요했다.
그건 바로, 치료를 위한 장소와, 치료 실력을 마을 곳곳에 퍼트려줄 스피커다.
"제가 여기 머무는 동안 모험가 조합을 제 개인 치료소로 쓰겠습니다."
"...자네는 힐러 배지가 없을 텐데."
"그러니까 지부장 권한을 이용해야죠."
강승현은 마스터키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평소의 모험가 조합이라면 힐러 배지가 없는 강승현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의 손에는 힐러 배지보다 더욱 강력한 권력이 쥐어진 상태였다.
"여기서 치료소를 차리는 건 네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남에게 사기 치려는 건...."
"사기 칠 생각 없는데요?"
"그러면?"
강승현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센 지부장님, 내가 정말 시나바 뇌조랑 싸우면서 한 대도 안 맞았을 거라 생각해요?"
"...!"
"당연히 셀프치료하고 온 거죠. 순진하시긴."
강승현은 그녀를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힐러라는 걸 숨기고 있던 것이다.
"전 힐은 쓸 줄 모르지만, 부상자를 치료하는 건 가능합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못 믿겠다면 증명해 보이죠."
147. 증명
"증명하겠다고?"
"시나바 뇌조한테 당한 환자들 있죠?"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 안쪽을 바라보았다.
부상당한 직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나 데려오면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진심이냐? 그 녀석들은 몸이 뜯겨나간 데다, 잘린 부위를 잃어버렸어. 아무리 뛰어난 힐러라도 치료할 수 있을 리...."
"데려오기나 하세요."
늘 하는 말이지만.
야매 힐러가 실력을 입증해야 할 땐 구구절절 떠들기보단, 닥치고 환자나 치료하는 게 낫다.
"아무리 그래도 자격 없는 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그분은 힐러가 맞아요!"
그때, 모험가 사이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그녀는 아까 트라코티 입구에서 만났던 모험가 파티원이었다.
"힐 없이도 치료할 수 있는 힐러라구요!"
"맞아! 아까 우리 친구도 치료해줬다고!"
"지부장, 그 사람은 진짜야. 우리가 보증할게!"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이어서 그녀의 동료들이 나타나 강승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다들 강승현의 치료를 두 눈으로 목격한 만큼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니 딱 한 녀석만 맡겨보겠어. 하지만 실패한다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숲 밖으로 나가서 사비로 다른 힐러를 구해올게요. 그러면 됐죠?"
"좋아. 혹시 치료받고 싶은 녀석 있나?"
"저, 저를 치료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센 지부장이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직원 하나가 정신 없이 달려왔다.
"저는 손목이 잘려나갔어요. 이대로 손을 쓸 수 없으면 모험가 조합에서 잘릴 겁니다.... 그러면 우리 가족은 전부 굶어 죽어요!"
그 직원은 왼쪽 팔의 붕대를 풀며 말했다.
손목은 잘려나가 없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팔도 완전히 으스러졌는지 그냥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태가 안 좋네요. 바로 치료해드리죠."
"가, 감사합니다!"
"아, 양탄자에 마력 좀 주입해주세요."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양탄자를 깔았다.
그 광경을 보던 마센 지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치료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의수라도 만들어줄 생각인가?"
"대충 비슷하네요."
"...아무리 뛰어난 힐러라도 없어진 손목을 통째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거야 평범한 힐러들이나 그러겠죠."
[위즈멜의 왼손]
[관찰의 눈]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두 스킬을 동시에 발동했다.
"지켜보기나 하세요."
-환자의 왼팔은 손목 밑으로 약 10cm 정도까지 절단된 상태였다.
'부상당한 지 최소 이틀은 지났어. 타임오버네.'
붉은 숲은 축축하고, 심지어 어젯밤엔 비까지 내렸다.
운 좋게 잘린 손목을 찾아낸다고 해도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역시 새로 만드는 게 답이야.'
환자의 상처 부위를 유심히 살피던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흙을 꺼냈다.
"뭐야, 저거?"
"흙 아냐?"
"설마 흙으로 손을 만들겠다고? 무슨 골렘도 아니고...."
당연히 주위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승현은 놓아둔 흙으로 모양을 잡더니.
'왼손, 사이즈는 성인 남성. 손목뼈 8개, 손허리뼈 5개, 손가락뼈 14개....'
[대지의 뼈]
머릿속 지식을 현실로 끌어냈다.
까깍, 까가각.
그의 손에 닿은 흙더미가 단숨에 인간의 손뼈로 변했다. 뭐하나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뼈였다.
"흐, 흙이 뼈가 됐어!"
"뭐야.... 설마 네크로맨서야?"
"언데드로 만들어서 고치겠다는 거야 뭐야?"
"그게 무슨 힐러냐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질색팔색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강승현보고 사기꾼이 틀림없다며 확신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왔다.
'시끄럽네. 김호정 씨나 데려올걸.'
강승현이 혀를 차며 한마디 하려는 참이었다.
"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하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후드를 쓴 여자와 그의 동료들이 강승현을 옹호하며 구경꾼들을 밀어냈다. 그들은 더 말했다간 그냥 있지 않겠다는 듯 구경꾼들을 노려보며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까 치료해주길 잘했는걸.'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손뼈를 환자의 손목으로 가져다 댔다.
'길이는 대충 맞군. 뼈대 잡는 건 성공했어.'
뼈를 완성했으니 이다음에 해야 하는 건 살덩어리를 만들어 배치하고 씌우는 일이다.
강승현은 손뼈 위로 마력 포션을 붓고, 스킬을 발동했다.
[허상의 살점]
부글, 부글.
뼈에 묻은 액체 포션이 물컹한 생체 조직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혈관과 신경, 그 다음에는 근육, 마지막으로는 근육을 덮은 피부.
'손 구조는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 [관찰의 눈]을 켠 상태로.'
강승현은 [허상의 살점]으로 근육과 신경을 제작하며 제자리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소실된 신체를 제작할 땐 상처 부위를 메꿀 때와 다르게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뭐, 처음 해보는 것치고는 그럴싸한데?'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잘려나간 손목이 완성됐다.
"엇...."
"소, 손목이...."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야?"
강승현보고 네크로맨서라고 떠들던 구경꾼들은 완성된 손목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럴 수가...."
마센 지부장 역시 눈앞에 생겨난 손목을 보고 경악했다. 방금 막 잘린 손을 챙겨온 것처럼 사실적이고 완벽한 손목이었기 때문이다.
"저, 저 사람 정말 손목을 만들어냈어!"
"이게 가능해?"
"장식일지도 모르지...."
몇몇 구경꾼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제가 네크로맨서로 보입니까?"
"...."
"뭐, 그렇게 보인다면 시체랑 신체도 구분 못 하는 멍청이겠지만요."
강승현은 그들을 비웃으며 마력포션 몇 개와 바늘을 꺼냈다.
'이어 붙일 손목도 완성됐으니.'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켜더니 [봉합]을 시작했다.
'시작해볼까.'
파바바박!
강승현은 환자의 팔과 새로 만든 손목을 이어붙였다. 우선 마력 실과 약화 실을 겹쳐 사용해 가볍게 1차 봉합하고, 새들 스티치 기법으로 견고하게 2차 봉합했다.
'이대로 사용해도 상관은 없지만, 살덩어리는 전부 [허상의 살점]으로 만든 거라 내구도가 약하거든.'
스킬을 아예 안 쓰는 평민이라면 또 모를까, 모험가 조합 직원은 마력을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일상생활 하려면 내구성을 높혀줘야겠지.'
강승현은 손목 위에 마력 포션을 [살포]한 다음, 피부를 가볍게 덮어씌워서 방어력을 상승시켰다.
'이걸로 마무리.'
[완치판정]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완치판정]을 발동하면서 치료를 마무리 지었다.
"끄, 끝났다고?"
"그냥 실로 꿰맸을 뿐인데?"
"그런다고 손이 움직일 리가...."
구경꾼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환자를 바라보았다.
"손을 움직여보세요."
"아, 네."
환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우, 움직인다!"
"실로 꿰맨 손이 움직이고 있어!"
새로 연결한 손목은 틀림없이 환자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임이 조금 어색하긴 해도 주먹을 쥐는 건 물론,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이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서, 선생님... 감사합니다!"
환자는 바로 바닥에 엎드려 강승현에게 눈물 젖은 감사 인사를 시작했다.
"적응하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손을 꾸준히 움직이면서 재활하면 이전처럼 쓰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환자를 가볍게 달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
"저, 정말 사라진 손목을 새로 만들어 붙였잖아?"
구경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보통은 말해줘도 믿지 않겠지만, 이들은 잃어버린 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봐왔기에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 선생님! 저도 치료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저두요!"
그 모습을 본 다른 직원들도 앞다퉈 달려 나와 강승현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 저도 여러분 모두를 치료해드리고 싶은데... 이 이상 치료하려면 마센 지부장님의 허가가 필요하거든요."
그러자 강승현은 무척 안타깝다는 말투로, 그러나 얼굴은 실실 웃으며 마센을 바라보았다.
"지, 지부장님!"
"제발! 허가해주세요!"
"우리가 치료 못 받으면 조합에서 잘리는 거 아시잖아요?"
강승현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상당한 조합 직원들이 그녀에게 달려가 애원했다.
다들 부상 때문에 조합에서 실직할 처지라 강승현의 치료가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알았다."
분명 강승현은 힐러 배지가 없는 무허가 힐러였으나, 마센은 자신의 눈으로 모든 치료 과정을 목격했다.
'부하들의 애원을 모른 척할 순 없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승현의 치료를 허가했다.
"비상사태를 인정해서 네 힐러 행위를 허가하지."
그리하여 강승현은 모험가 조합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배지도 없이 당당하게 치료소를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그럼 포인트를 떼로 벌어보실까.'
강승현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머지 환자들의 치료를 시작했다.
"힐러님 계신가요?"
"제발 치료 좀 해주세요!"
모험가 조합에 치료소가 생겼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강승현이 조합 직원들을 전부 치료한 뒤에도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다들 줄 서세요. 뭐, 당장 죽을 것 같으면 바로 치료해드리겠지만요."
강승현은 미소와 함께 환자들을 치료했다.
"끄아아학!"
"아파도 참으시고."
단, 중간중간 자신을 짜증 나게 만든 구경꾼들은 마력 포션 대신 스태미나를 사용한 [허상의 살점]으로 치료했지만.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기.
강승현은 진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환자는 대충 해결했으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저까지만 치료해주시면 안되나요?"
"저도!"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없어진 손도 만들어준다는 말을 듣더니 얌전히 돌아갔다.
'이거 엄청난데? 한 이틀만 더 하면 1만 포인트는 금방이겠어.'
[누적 포인트 : 4562포인트]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오늘 환자가 엄청나게 몰려든 것도 있지만, 신체 부위를 새로 만들어서 치료하는 게 포인트가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떠날까 했는데, 이참에 1만 포인트 찍고 가는 게 낫겠다. 뭣보다 신경 쓰이는 것도 있고.'
강승현은 빈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봉인을 푼 덕분에 엄청난 스킬을 손에 넣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왜 이런 게 붉은 숲에 있던 거지?'
분명 트라코티는 교단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다.
그런 곳 주변에 성유물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은 건 아냐. 적어도 몇십 년, 몇백 년은 묻혀 있던 거라고.'
그리고 위즈멜의 왼손을 손에 넣었을 때 프리아의 석궁처럼 미공개 업적이 달성됐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다.
'뭔가, 위즈멜의 왼손에 대한 걸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어디 없을까.'
강승현이 잠시 고민하던 참이었다.
"아이고... 흐하암."
그때쯤에서야 김호정이 하품을 하며 내려왔다.
"아니, 이 시간까지 잤어요?"
"어... 좀만 잔다는 게 푹 자버렸어. 그냥 이대로 아침까지 잘래."
김호정은 하품을 크게 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럼 왜 내려온 거야."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뻐근한 몸을 풀면서 생각했다.
'뭐, 그럼 나도 슬슬 정리하고 쉬다가 잘까.'
자세한 건 내일 트라코티를 돌아다니며 조사하는 수밖에.
강승현이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강승현 힐러님!"
그때, 등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48. 흙투성이 마을 1
"바빠 보이셔서 말도 제대로 못 걸었네요."
"지금은 좀 한가해요."
뒤를 돌아보자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무척 기뻐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깐 고마웠어요. 덕분에 편하게 치료했거든요."
"아니에요. 강승현 힐러님한테 받은 은혜를 갚은 것뿐인데요."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동료를 멋지게 치료해준 훌륭한 힐러님이 오해받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고.
"사실 좀 놀랐어요. 대단한 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없어진 손을 만들어서 치료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요!"
"저도 만들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것도 손을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뼈와 살을 일일이 구현해서 배치하는 식. 지금껏 그 어떤 힐러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아 참, 저는 레베카라고 해요. 자기소개가 좀 늦었죠?"
"이미 알고 계시지만, 강승현 힐러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하며 자기소개했다.
자신의 이름을 레베카라고 밝힌 여자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실 숙소를 못 구하셨을까 봐 찾아온 거예요. 지금 여관에 빈방이 거의 없다고 들었거든요."
"아, 그건 문제없어요. A급 방을 손에 넣었거든요."
강승현은 조합 숙소 열쇠를 보여주었다.
A급 숙소를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이 인상적인 열쇠였다.
"세상에, A급 의뢰를 해결하신 거예요? 그 짧은 시간에?"
"뭐, 그렇게 됐네요."
"저희 파티가 준비한 건 기껏해야 B급 방이라서요.... 어림도 없네요. A급 방 가진 사람한테 B급 방을 빌려드릴 수도 없고."
레베카는 B급 숙소 열쇠를 보여주며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괜히 쓸데없이 시간 잡아먹어서 죄송해요."
"네, 잘 아시는...."
강승현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려다, 후드를 푹 눌러쓴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드 사이로 살짝 흘러나온 빨간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 머리카락 보이시네요."
"네? 헉!"
레베카는 놀란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게 정리했다.
"아까 후드가 벗겨졌을 때도 그렇고. 역시 머리색을 일부러 숨기는 것 같은데."
강승현은 주위를 가볍게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나요? 트라코티 출신이신 것 같은데."
"아, 예리하시네요. 저는 트라코티 사람이에요."
레베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후드를 벗었다. 트라코티를 상징하는 길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사실 가족이 모험가 일하는 걸 되게 싫어하거든요. 평소에는 그냥 다니는데, 트라코티에 올 때만 이렇게 위장 중이에요."
알고 보니 레베카는 모험가 신분을 가족한테 들키지 않도록 정체를 숨기는 중이었다.
당연히 레베카도 본명이 아니라 가명이라고.
"이래저래 귀찮으시겠네요. 나 같음 고향에 절대 안 돌아갈 텐데."
"가족은 귀찮지만, 트라코티는 좋아하는걸요. 소중한 친구들도 있고, 풍경도 멋지고, 음식도 입에 맞고, 그리고 또...."
레베카는 잠깐동안 마을 자랑을 떠들더니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괜찮으시면 제가 트라코티 마을 안내를 해드릴까요?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지만,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도 있다구요!"
"마을 안내라...."
그렇지 않아도 강승현은 트라코티에 대해 조사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붉은 숲에서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라든가, 교단 하나 없는 마을에서 발견된 성유물이 봉인된 상자라든가.
'나 혼자 조사하고 다니는 것보단, 마을에 대해 잘 아는 녀석이 협력해주면 편하겠지.'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베카의 제안을 수락했다.
"안내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저희도 모험가 조합 숙소에 묵고 있으니, 내일 시간 되면 연락주세요!"
"그럼 점심 먹고 갈게요."
"네~."
레베카는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다음 날 점심.
강승현은 자신의 방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조합 놈들.... 모험가한테는 쓰레기 같은 식단을 주고, 지부장한테는 이런 호화로운 식사를 차려주는 건가.'
임시이긴 해도 지부장 신분을 가진 만큼, 강승현의 식사는 호텔급으로 더럽게 화려했다.
'뭐, 그래도 트라코티 모험가 조합 식단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맛도 괜찮은 편이긴 해.'
지부장이 다 해 처먹느라 예산이 없는 하인드 마을과 달리, 트라코티 마을은 지부장이 부패하지 않아서 그런지 일반 모험가들도 싼값에 좋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인드 마을은 뭐가 문제일까. 역시 리웬 지부장을 죽여버려야... 아니다, 그래봤자 똑같은 놈이 또 오겠지.'
강승현은 밥그릇을 대충 비웠다.
맛은 있었지만 맛있게 먹을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내가 해야 할 일부터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강승현은 뒷정리를 끝내고 옆방으로 이동했다. 김호정은 점심밥을 느긋하게 먹고 있었다.
"김호정 씨, 아직도 먹고 있어요?"
"맛있으니까."
"뭐, 말해주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을 것 같긴 하지만... 밥 먹는 동안 할 일도 없으니 설명할게요."
강승현은 어제 김호정이 자는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상자의 봉인을 풀고 [위즈멜의 왼손]을 얻은 것과 모험가 조합을 치료소로 만든 것.
그리고 레베카에 대한 이야기까지.
"뭐야, 잠깐 눈 좀 붙였을 뿐인데 그사이에 일을 몇 개나 벌인 거야?"
"겨우 3개뿐인데요."
"셋 다 하나하나 엄청난 것들뿐이잖아? 프리아의 석궁 같은 걸 또 얻었다며?"
"네. 이게 [위즈멜의 왼손]이에요."
강승현이 스킬을 발동하자 그의 왼손에 독특한 형태의 문신이 나타났다.
"1회용 공짜 타투 같은 거죠."
"위즈멜이 들으면 울겠다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는 [위즈멜의 왼손]을 발동한 상태로 방 안 화분에 손을 찔러넣더니,
[대지의 뼈]
스킬을 발동해 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뼈를 제작할 수 있어요."
"무섭잖아. 해골이 기어 나오는 거 같다고."
"나름 의료용이거든요? 합법적인 건 아니지만."
강승현은 흙에서 생성한 뼈 중 손가락뼈 하나를 꺼내 스태미나 포션을 뿌렸다.
[허상의 살점]
그 상태로 스킬을 발동하자, 포션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살점의 형태로 변해갔다.
강승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혈관과 근육을 배치하고, 피부를 덮어 잘린 손가락을 창조했다.
"기존의 스킬과 조합하면 이런 식으로 쓸 수 있어요."
"아니. 그렇게 꼭 재현해줄 필요는 없는데."
"기념으로 드릴까요?"
"됐어! 그런 걸 어디에 쓰냐구!"
물론 손가락을 본 김호정은 질색했다.
정말 쓸데없이 리얼하고 디테일하게 방금 막 잘린 듯한 손가락이었으니까.
"그치만 굉장하네. 잘린 손을 붙이는 것도 놀라운데, 이제 없어진 손까지 만들어서 붙인다니."
사라진 신체 부위를 새롭게 창조하는 스킬.
언뜻 보면 개사기 스킬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시전자에게 뛰어난 해부학 지식, 의학 지식이 없으면 무의미한 스킬이다.
"강 선생이나 되니까 그런 걸 써먹는 거지. 내가 그런 스킬 가져봤자 치킨 닭다리나 만들걸."
김호정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강승현이 가진 스킬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사용하면 제 성능을 못 내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아시네요. 저나 되니까 이런 게 가능한 겁니다."
"옆에 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보지도 않고 그렇게 척척 만드는 거야?"
"애한테 의학 서적 쥐여 주고 놀게 하면 되겠죠."
"아니, 아무리 심심해도 그런 걸 보면서 노는 애가 있겠냐구."
"아무튼 내용을 싹 다 외워버리면 됩니다."
결국, [허상의 살점]과 [대지의 뼈]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머릿속에 온갖 지식을 쑤셔박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든 손가락은 진짜랑 99% 비슷하긴 한데...."
강승현은 만들어낸 손가락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분해★]를 사용했다.
철퍽!
살덩어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스태미나로 변하고, 그 사이에서 드러난 손가락뼈는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분해] 스킬에 당하면 녹아버린다는 게 단점이죠."
"누가 손가락을 분해하려 하겠냐구."
김호정은 어이없다는듯 웃으며 말했다.
"나참, 뼈랑 살도 만드는 걸 보면... 조만간 사람 하나 만들겠어?"
"그건 힘들죠. 아직 제대로 된 내장은 못 만드니까."
[허상의 살점]을 써서 내장 비스무리한 걸 만들 수 있긴 하지만, 내구성이 너무 약해서 피부나 근육처럼 망가진 신체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
"뭐, 내장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상태창을 열었다.
"지금 신경 쓰이는 건 이번에 해금된 업적이거든요."
[업적 달성 : □ㅎ□□의 유해]
[□ㅎ□□의 유해를 손에 넣을 경우 달성.]
정확한 조건은 알 수 없지만, 성유물을 인벤토리에 넣었을 때 달성되는 업적.
이 업적을 달성하면 획득한 성유물을 스킬로 바꿔주고, 그와 관련된 아이템이나 보상을 뽑을 수 있는 룰렛이 생겨난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제가 가진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도 분명 성유물인데, 이걸 얻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거든요."
"그건 그렇네. 내 인벤토리에 넣었을 때도 아무 일 없었잖아."
김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즉, [□ㅎ□□]은 아무 성유물이나 넣는다고 해금되는 업적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 말은, 프리아의 석궁이나 위즈멜의 왼손한테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뜻이겠지.'
다른 성유물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
그 무언가는 어쩌면 관리자의 진짜 목적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뭣보다 위즈멜의 왼손은 수상한 점이 많아요. 누가 신의 손을 잘라서 상자에 처박는 미친 짓을 하겠어요."
"음, 광기지 그건. 제정신은 아냐."
그런 또라이 같은 짓을 할 사람은, 다른 신을 믿는 교단 놈들밖에 없다. 하지만 붉은 숲은 이미 오래전에 교단의 발길이 끊긴 장소다.
이 모든 의문을 풀기 위해선, 상자가 발견 된 붉은 숲을 조사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 트라코티도 관련 있을 거예요. 이 마을은 붉은 숲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까."
"그러면 마을 역사관부터 가봐야하나."
상자는 최소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듯했으니, 트라코티의 과거와 역사를 조사하다 보면 힌트를 얻을지도 모른다.
"안내 가이드도 고용했으니, 간만에 관광하는 셈치고 조사해보자구요."
"관광...이라기엔 좀 빡셀 것 같지만."
149. 흙투성이 마을 2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냐 아냐, 우리도 방금 왔어."
"아침 시간에 진료했거든요."
강승현 일행이 B급 숙소로 향하자 레베카가 미소를 지으며 달려 나왔다.
그녀는 잔뜩 들뜬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을 안내는 처음 해보는 거라 설레서 잠을 못 잤어요!"
"잠은 자셔야지."
레베카와 합류한 강승현 일행은 모험가 조합을 나섰다.
방에 장식해두면 공기를 맑게 해주는 토템, 소지하면 공격력을 올려주는 액세서리, 처마 끝에 장식해두면 산짐승을 쫓아내는 조각품 등등.
"어디서부터 안내해야 할까.... 트라코티 마을은 그렇게 넓지도 않아서 금방 둘러볼 수 있거든요."
"종류가 꽤 다양하네요."
"무난한 곳부터 소개해 주세요."
"도예품 특성상 한번 망가지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지만, 성능도 좋고 디자인도 예뻐서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강승현은 앞장선 레베카를 뒤따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트라코티는 숲속 한가운데에 위치해서 그런지, 모험가들이 잔뜩 몰려왔음에도 그렇게 시끌벅적하진 않고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예쁜 도자기 많네. 기념으로 하나 사갈까?"
김호정은 진열대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어제는 이래저래 바빠서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네.'
"글쎄요. 쓰다가 깨 먹지 않을까요?"
레베카의 말대로 트라코티는 그렇게 큰 마을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시설은 대부분 민가다.
"강 선생은 손재주 좋으니 그럴 일 없지."
"나 말고 김호정 씨요."
그리고 민가 주변에는 흙으로 빚은 듯한 벽돌과 그릇들이 널려 있었다.
차원 이동자는 기본적으로 아즐 대륙 평민들보다 신체 능력이 좋아서, 내구도가 나쁜 아이템을 아무 생각 없이 쓰면 금방 망가져버린다.
"집 주변에 도자기가 많이 보이네요. 구운 것도 있고, 아직 안 구운 것도 있고."
"트라코티는 흙과 도예의 마을이거든요."
"살 거면 장인급 도예가가 만든 제품을 사는 게...."
트라코티의 토양은 붉은 숲의 영향을 받아 질이 좋고 마력이 아주 풍부해서, 제작 재료로 쓰기 좋은 흙을 구하기 쉽다.
"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엄청 튼튼하거든요."
트라코티에서 만든 도자기는 다른 지역의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튼튼하다.
덕분에 도자기를 만들거나 벽돌이나 타일을 굽는 등, 흙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선 도자기를 만들 때 흙에 마력을 주입하지만, 트라코티는 붉은 흙에 담긴 풍부한 마력을 끌어내서 제작하기 때문이다.
"마을 북서쪽에 공방 거리가 있어요. 장인들이 직접 만든 각종 흙 공예품을 구입할 수 있고,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어서 트라코티를 찾는 외부인들의 필수 코스죠."
"그럼 기념품으로 살 만한 거 추천해줄 수 있어? 아무거나 괜찮아."
"도자기도 벽돌도 인기 있지만... 트라코티에서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흙 인형이죠."
"흙 인형?"
"트라코티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인형 공방이 있거든요."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흙 인형을 주로 제작하는 인형사들이 모인 단체다.
마탑이나 모험가 조합과 같은 거대 집단에 비하면 소규모지만, 이들은 붉은 숲에서 구한 특별한 흙을 써서 강력한 골렘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카마르 마법사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래서 카마르 사람들은 트라코티 자체는 낮잡아 보면서도 트라코티 인형 공방은 높게 평가해요.... 좀 씁쓸하죠."
주위를 둘러보면 모험가뿐만 아니라 민간인 관광객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 공방 거리가 사실상 트라코티를 찾는 외부인들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트라코티 사람들이 인형을 잘 만드나 보네. 그래도 이 나이에 인형을 사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그러면 부적은 어떠세요?"
"부적?"
"저쪽 노점상에 가면 고객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간단한 부적을 만들어주거든요. 기념품으로 사가기 딱 좋아요."
레베카가 공방 안쪽 구석의 작은 노점상을 가리켰다.
노점상 옆에 [주문하신 고객님은 1~2시간 정도 지난 뒤에 찾으러 오세요.]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럼 저걸로 해야지. 강 선생도 사줄까?"
"마음대로 하세요."
"들었죠? 부적 두 개 주문이요."
김호정이 싱글벙글 웃으며 천막으로 들어가는 동안, 강승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촉촉한 흙과 가마 속에서 구워져 가는 도자기 냄새가 풍겨왔다.
'...흙을 다루는 공방 거리라.'
트라코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흙을 가까이하며 살아와서 그런지, 흙을 다루는 데 익숙했고 땅 속성 스킬을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덕분에 흙을 이용한 특수 아이템 제작만큼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그러고 보니 위즈멜의 왼손도... 흙과 관련 있었지.'
룰렛을 돌렸을 때 땅 속성 강화 스탯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흙을 재료로 뼈를 만들어내는 [대지의 뼈]도 그렇고.
아무래도 위즈멜은 대지의 힘을 다루는 신이었던 것 같다.
'역시 위즈멜이라는 녀석은 트라코티와 관련 있는 건가.'
흙을 중요시하는 트라코티와, 대지의 힘을 다루는 위즈멜.
그냥 우연이라기엔 겹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
"레베카씨, 혹시 '위즈멜'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신 적 있나요?"
"위즈멜이요? 음.... 처음 들어요."
잠시 생각하던 레베카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다구요?"
"캐러멜 상표 이름 같아요."
"...."
반응을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도 똑같을 것 같다.
'역시 마을 사람들은 모르는 건가.'
분명 붉은 숲과 관련 있는 신적 존재일 텐데, 트라코티 사람들은 위즈멜의 이름은커녕 존재 자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만약 위즈멜이 붉은 숲의 신이라면 트라코티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지....'
레베카의 말에 의하면, 트라코티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을 따르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잘 믿던 신을 버리진 않았을 테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뭐, 트라코티의 과거를 파헤쳐보면 위즈멜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겠지.'
신의 흔적이 전혀 없는 마을에서 이름만 남은 신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만, 약간의 정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레베카 씨, 트라코티의 역사 관련 자료나... 유물 같은 게 전시된 곳은 없나요?"
"어, 맞아! 역사관 같은 곳!"
두 사람은 큰 기대를 하고 물었으나,
"에이~ 이런 시골 마을에 역사관 같은 게 어딨어요."
"없다고?"
"이런 시골 마을 역사를 누가 관심 있어 하겠어요. 보통 역사관 같은 건 카마르 같은 관광지에나 있죠!"
그렇다.
트라코티는 역사관 같은 건 있지도 않은 진짜 깡촌이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하인드 마을에도 역사관 정도는 있었는데."
트라코티 사람이 위즈멜의 이름조차 모르는 걸 보면 최소한 200년, 못해도 100년 전 과거의 기록이 필요한 상황이다.
"어, 혹시 엄청 중요한 일인가요?"
"...네 뭐,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에요."
"그, 그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드려야죠! 왜 트라코티의 역사를 조사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강승현 힐러님을 돕고 싶어요!"
레베카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트라코티에 오래된 서적이나 자료를 보관할 만한 장소를 떠올리기 위해서.
"모험가 조합은 지부장이 마센 언니로 교체될 때 전 지부장이 자료를 싹 다 날리고 가버렸고, 촌장님 댁은 10년 전에 화재 때문에 건물이 싹 다 타버렸고, 카마르는 못 가는 상황이고...."
"트라코티도 험난하네요."
"으음, 작은 마을이 그렇죠 뭐...."
한참 동안 고민하던 레베카는 좋은 장소를 떠올렸다.
"아, 마을 회관에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
"마을 회관?"
"마을 서류 같은 건 전부 회관에 보관하거든요. 예산 계획표도 그렇고."
마을 회관은 트라코티에서 꽤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내부에 쌓인 자료를 잘 찾아보면 과거의 트라코티의 생활이나 문화 관련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좋네요. 당장 가보죠."
강승현은 트라코티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마을 회관으로 향하자 빨간 머리 남자가 터덜터덜 다가왔다.
누가 봐도 삶에 지친 공무원이었다.
"트라코티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러는데, 관련 자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혹시 모험가 조합 의뢰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뇨, 개인적인 이유로...."
"그럼 없을 걸요."
회관 담당자는 찾아볼 생각도 않고 말을 대충 끊어버렸다. 그것도 무척 귀찮다는 말투로.
"아니,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없다고 해도 돼?"
"중요한 일이라구요!"
"정 찾아야 한다면 모험가 조합에서 관련 의뢰서나 허가증을 떼오시든가요."
김호정과 레베카가 바로 항의했으나, 회관 담당자는 모험가 조합 핑계를 대며 두 사람의 항의를 치워버렸다.
'사람 귀찮게 하네.'
강승현은 띠꺼운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모험가 조합 마스터키를 꺼냈다.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 요청하는데, 이래도 거절할 겁니까?"
"그, 그건 모험가 조합 마스터키?"
"의뢰서가 필요하면 이 자리에서 만들어드리죠."
강승현은 수첩을 꺼내 대충 휘갈긴 뒤, 종이를 찢어 회관 담당자 앞에 던졌다.
[모험가 조합 의뢰서]
[자료 조사할 게 있어서 왔으니 입 닥치고 자료실 열쇠나 꺼내라.]
"허, 헉...."
회관 담당자는 구겨진 종이와 강승현이 쥔 열쇠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평범한 모험가도, 직원도 아니고 모험가 조합 지부장이었냐고!'
지부장한테 의뢰를 받아오라는 건, 대마법사한테 마법사 자격증을 따오라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
'나 이러다 여기서 잘리는 거 아니야?'
회관 담당자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모, 몰라봬서 정말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자료실 열쇠나 내놔요."
"넵!"
강승현은 그에게 받은 열쇠를 가지고 회관 안쪽 자료실로 향했다.
자료실 안쪽에는 정리되지 않은 서류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완전 어수선해! 그냥 막 아무 곳에나 쑤셔 박아 뒀잖아?"
"이, 이래서 오늘 안에 찾을 수 있을까요?"
"찾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 자료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 이것 좀 봐!"
"되게 낡아 보이는 책이 있어요."
대부분 쓸데없는 서류들이었지만, 안쪽에서 상당히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레베카를 따라 북서쪽으로 향하자 흙 굽는 냄새가 풍기는 공방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도자기나 장식품, 흙 인형을 가판대에 진열해두고 판매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파는 장식품이나 악세사리에는 이런저런 특수 옵션도 붙어 있어요."
150. 흙투성이 마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