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다 포기할 테니까
"너, 너 이 새끼...!"
"다들 상태가 많이 안 좋네요."
강승현은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정신력 과다상실로 인한 환상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몇몇은 의식불명 상태고."
"뭐?"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정신붕괴가 일어날 겁니다."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목소리에서는 안타까움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들뜬 느낌이었다.
콰악!
르페니는 강승현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주변의 레드로드 탐색팀원들은 전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원래도 강승현한테 얻어맞아서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지금처럼 괴로워하진 않았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개소리 마! 그럼 얘네가 왜 이러는 건데?"
그러자 강승현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본인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뭐?"
"잊으셨어요? 제가 아까 분명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줬는데."
"경고...?"
르페니는 그제서야 아까 강승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걸 정말 깨우시게요? 후회하실 텐데.
-전 분명 말렸습니다.
"설마, 저 녀석들이 쓰러진 이유가...."
르페니가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바위 제단이 들어왔다. 제단 위의 공생체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지만, 방금 사용한 마력 포션 덕분에 언제 부화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저 공생체 때문이라고?"
"정확하게는 르페니 씨의 자업자득이죠. 제가 아까 관두라고 했잖아요."
"이 새끼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
르페니는 멱살을 놓고 제단을 가리켰다.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어. 난 그냥 공생체한테 마력만 주입했다고! 그런 일로 사람이 쓰러질 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죠."
일반적인 공생체한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저게 평범한 공생체였다면 말이죠."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공생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하고 공생체 고치를 바라보았다.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고치.]
[언제 부화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강력한 정신지배 능력을 갖고 있다.]
"이름은 고르디우스 라르바. 애벌레 계열 기생형 몬스터에 속하는 공생체죠."
이 녀석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정신지배 능력. 사념파를 발산해서 주변 생물의 정신력을 깎아내리고, 멘탈이 많이 약해지면 정신지배를 걸어서 조종하거나 기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생체이긴 하지만, 그 특징 때문에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공생할 수가 없습니다."
의지가 강한 인간은 정신지배를 무시하고 힘을 얻게 되지만, 나약한 인간이 건드리면 힘을 얻어도 놈에게 조종당할 테니까.
"그럼 이 녀석들이 내 부하들을?"
"맞아요. 고르디우스 라르바는 부화 시기에 가까워지면 사념파를 뿜어내거든요."
문제는 르페니가 녀석을 깨우겠다고 마력을 들이붓는 바람에 사념파의 위력이 순간적으로 대폭 증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거기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정신력 과다상실을 일으킨 것이다.
"아, 아까도 마력을 주입했지만... 그땐 아무 일 없었다고. 뭣보다 난 멀쩡하잖아?"
"르페니 씨는 마력 반발자니까요."
마력 반발자는 체질 특성상 마법 스킬은 무효화하고 그 외의 일반 스킬은 반감된다.
아까 탐색팀원들이 무사했던 이유는 그들이 르페니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신지배 스킬이 제대로 안 먹혀서 버틴 거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승현은 로센트의 말을 떠올렸다.
-그날부터 아지트 느낌이 이상했거든.
지금 레드로드는 탐색팀이 고르디우스 라르바를 발견한 뒤로, 악몽을 꾸거나 피곤함을 호소하는 등 정신력이 떨어진 단원들이 크게 늘어난 상태였다.
급기야 오늘은 정신력 과다상실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단원들까지 나타났다.
'그 말은, 레드로드 아지트 전체가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정신지배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소리야.'
부화하지 않은 지금도 정신지배의 범위가 넓은데, 완전히 부화하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린 건 르페니 씨니까요."
그 말을 들은 르페니는 표정을 구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나 때문에 저렇게 됐다고...."
녀석은 동료들을 꽤 소중하게 여기는 타입이라 현실이 믿기지 않는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들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다시는 도적질을 할 수 없는 몸이 되겠죠."
"...."
"정신붕괴를 일으켜서 폐인이 되거나, 죽어버리거나."
강승현은 레드로드 탐색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먼저 쓰러졌던 소속원들보다 상태가 나빴다.
'그만큼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부화시기가 가까워졌다는 소리겠지.'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탐색팀원들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어갔다. 그걸 보는 르페니의 안색 역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저는 이 사람들을 치료할 줄 압니다."
강승현은 그런 르페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럼 당장 치료해! 빨리!"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카마르 테러를 포기하세요."
당연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강승현의 도움의 손길은 언제나 유료다.
"정확하게는 고르디우스 라르바 공생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이 자식....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르페니 씨, 잘 들으세요."
르페니는 길길 날뛰었지만, 강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 공생체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닙니다."
강승현은 고르디우스 라르바 고치를 올려둔 제단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정말 평범한 몬스터라면 이런 제단 위에 올려져 있을 리가 없다.
"제 추측대로라면... 이 녀석은 보스 몬스터입니다."
전이 던전도 엄연한 던전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스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아직 부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보스 몬스터라고?"
르페니의 표정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공생체를 소중히 키우면서도 보스 몬스터라는 생각은 안 했던 모양이다.
"르페니 씨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보스급 몬스터의 정신지배를 버틸 수 있을까요?"
"...."
그건 차원이동자에게도 쉽지 않다.
실제로 강승현은 보스 몬스터의 정신지배에 당해 동료들을 공격한 차원이동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버틸 수 있겠죠. 일단 르페니 씨는 마력 반발자니까."
이렇듯 르페니가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정신지배를 버틴다면, 카마르가 처참하게 멸망하는 것 빼고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녀석의 정신지배를 버티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죠?"
고르디우스 라르바는 그렇지 않아도 강한 몬스터다. 르페니한테 기생해서 정신지배에 성공한다면 그 힘이 몇십, 몇백 배로 강해지게 된다.
"르페니 씨도 잘 아시겠지만, 일반 던전은 아공간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보스 몬스터의 공격이나 스킬이 일반인이나 민가를 습격할 일이 없었다. 보스 몬스터가 던전에서 빠져나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곳 전이 던전은 다르죠."
보스 몬스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던전 주위의 민간인이나 민가를 습격할 수 있다.
"그러니 르페니 씨가 정신지배에 당한다면... 토 나오게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아즐 대륙에서 활개 치고 다니게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르페니는 체질 때문에 어지간한 공격은 반감이고 면역이다. 아즐대륙민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차원이동자들도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 탄생한다는 소리다.
"카마르뿐만 아니라 붉은 숲, 트라코티, 피츠타 호수 전체가 지옥이 되겠죠. 최소한 이 주변은 쑥대밭 확정이네요."
레드로드 패거리는 물론이고 트라코티 마을 역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트라코티...."
트라코티 마을을 언급하자, 르페니의 표정이 더욱 나빠졌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르페니는 트라코티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 했다.
강승현은 그걸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르페니 씨가 카마르에 큰 원한을 가졌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
"저도 그거까지는 뭐라 안 해요."
강승현도 르페니가 가진 카마르를 향한 원한 자체는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충 그럴 이유가 있는 원한이었으니까.
"사람이 살면서 복수 좀 할 수도 있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거야."
"거기다 자기 목숨을 걸고 복수하겠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리겠어요."
하지만 고르디우스 라르바를 이용한 복수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실패하면 카마르뿐만 아니라, 피츠타 호수 전체가 폐허가 된다.
"이건 자기 목숨을 걸고도 부족해서 가족과 친구들 목숨을 동의 없이 배팅하는 도박과 다를 게 없습니다."
"...."
"복수하는 건 좋은데,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동료들, 가족들 목숨 걸어가면서 할 일은 아니잖아요."
강승현의 이야기를 들은 르페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상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테러고 뭐고 다 포기할 테니까... 저 녀석들 치료나 빨리해 줘."
결국, 동료를 치료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럼 이걸로 대충 마무리된 건가."
평화로운 대화와 설득의 시간이 끝나고. 강승현은 뻐근한 몸을 풀면서 중얼거렸다.
"김호정 씨, 슬슬 나오세요."
"오케이."
뒤에 숨어 있던 김호정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진짜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했네!"
김호정은 폭력 없이 말로 카마르 테러 계획을 저지한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만, 강승현이 일부러 마력 포션을 흘렸다는 건 알지 못했다.
"이런 거 할 줄 알면 진작 좀 하라구."
"전 별로 안 좋아해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강승현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실제로 르페니를 평화롭게 설득하느라 시간을 꽤 허비한 상태였다.
"아, 그럼 저건 어떻게 할 거야?"
"고르디우스 라르바요?"
강승현은 제단 위의 고르디우스 라르바 고치를 바라보았다. 르페니가 카마르 테러에서 손을 뗐으니 공생체를 놔둘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선 바로 죽여버리고 싶은데."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죽이기는 그렇죠. 저게 보스 몬스터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전이 던전의 특성은 잘 모른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가 사망하면 던전이 붕괴할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혹시 모르니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대피시킨 다음에 처리하는 게 안전하겠죠."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내보내고 싶지만,
쏴아아아아!
지금도 동굴 밖에선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이 날씨에 야외취침할 수는 없으니."
"아침에는 빗줄기가 좀 약해질 거야."
결국, 두 사람은 내일 아침에 공생체를 처리하기로 했다.
"가서 레드로드 애들 불러올게. 부상자들 의무실로 옮겨야 하니까."
"그러고 나면 우리도 눈 좀 붙이죠."
"그럴까."
김호정은 크게 하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근데 우리가 자는 사이에 부화하면 어쩌지?"
"그건 괜찮아요. 르페니 씨가 보호 결계를 쳐놨잖아요."
기생형 몬스터가 다 그렇지만, 공생체 역시 본체의 신체 능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숙주 없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멍청이가 와서 꺼내주면 또 모를까."
"제정신이면 그럴 리가 없잖아."
121. 야매 파티
쓰러진 탐색팀원들은 전부 레드로드 의무실로 옮겨졌다. 이들은 먼저 쓰러진 12명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습니다."
다행히 미리 만들어둔 치료제 덕분에 정신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에 큰 대미지를 입어서 당장 움직이는 건 힘들 것 같다.
'한 달 정도는 요양하셔야겠군.'
강승현은 의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한 명도 없지만, 다들 환상통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누워만 있는 상태였다.
"탐색팀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쓰러졌다니...."
따라온 르페니는 착잡한 얼굴로 방 안의 환자들,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37명 중 무려 19명이나 되는 단원들이 쓰러진 상황이다.
특히, 아까의 싸움에선 큰 부상을 입었던 검은 셔츠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전부 나 때문에."
그는 레드로드의 대장으로서, 이번 일의 원흉으로서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다. 부하들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위험에 빠트렸으니까.
"맞아요. 전부 르페니 씨 때문이죠."
그리고 강승현은 그걸 놓치지 않고 남의 속을 긁었다. 르페니는 울컥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 그래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
"너무 자책하진 마. 약 꼬박꼬박 먹으면 괜찮아진댔어."
곁에서 환자를 돌보던 로센트가 르페니를 위로했다. 그는 대답 대신 쓰러진 환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환자가 늘어났으니 약이 더 많이 필요하겠죠. 재료를 더 구해오시면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늘 신세만 지는 것 같네. 정말 고마워."
로센트는 무척 고맙다는 얼굴로 감사인사했다. 아까 약속한 대로, 강승현은 정말 카마르 테러를 막아낸 것이다.
"솔직히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부상자들이 좀 많이 생기긴 했지만.
"힐러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어쨌든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강승현은 개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혹시 괜찮으면 르페니도 치료해줄 수 있을까?"
지금 르페니는 강승현하고 싸우느라 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저런 몸으로 돌아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죠 뭐."
강승현은 관대한 마음으로 그를 치료해주려 했으나,
"필요 없어."
르페니는 오만상을 쓰며 치료를 거부했다.
"르페니, 그러지 말고 강승현 힐러한테 치료해달라고 해."
"내가 왜?"
"지금 많이 다쳤잖아."
"저런 재수 없는 마법사한테 치료받을 거면 그냥 뒈지고 말지!"
"마법사?"
로센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아, 제가 아까 장난을 좀 쳤거든요."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르페니와 대판 싸운 것과, 어그로를 끌려고 마법사 흉내를 낸 일까지 전부다.
"뭐? 장난?"
"사실 전 마법 같은 거 쓸 줄 몰라요."
"개소리하지 마! 너 아까 얼음 마법이랑 마법 화살 썼잖아!"
"그거 그냥 포션으로 연출한 거예요."
쩌적!
강승현은 마력 포션 하나를 꺼내 흡수했다.
[살포]
그리고 흡수한 마력 포션을 [살포]하자, 푸른 오오라가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파직, 파지직!
푸른 오오라가 르페니의 몸에 닿자, 마력 스파크가 정전기처럼 터져 나왔다.
"오, 내 마력이 회복됐어."
하지만 로센트의 몸에 닿았을 땐 깎인 마력이 회복됐다. 마법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포션을 이용한 속임수였죠."
"그, 그럼 크림슨 엠블럼은? 그건 뭔데?"
"그야 당연히 가짜죠."
강승현은 시원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가짜? 그게 가짜라고?"
"네. 그럼 진짜겠어요?"
"...."
그 말을 들은 르페니의 얼굴은 김빠진 콜라 같았다.
물론 강승현이 가진 마탑 증표는 진짜 엠블럼이 맞다. 그것도 진홍의 마탑 마스터가 직접 선사한 진귀한 엠블럼.
그럼에도 멀쩡한 엠블럼을 가짜라고 속이는 이유는,
"그럼 내가... 가짜 엠블럼과 가짜 마법에 속았던 거냐고!!!!"
"그런 셈이죠."
"명색이 안티 매지션인데!"
분통 터진 르페니가 억울해하는 게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마법사인 척 사기를 친 사기꾼인 척 사기 치기.'
강승현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진실을 숨겼다. 르페니는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치료받아도 괜찮은 거지?"
두 사람의 대화를 구경하던 로센트가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강승현이 마법사가 아니라면 치료를 안 받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알았어. 받으면 되잖아."
"잘 생각했어."
"나 팬 놈한테 치료해달라는 건 또 처음이네."
르페니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었으나,
"제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하여간... 또라이 새끼."
야매 힐러로 살다 보면 자주 있는 일이다.
-"우리도 슬슬 쉬러 갈까요."
"뭐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그야 김호정 씨는 두들겨 맞았잖아요."
르페니의 치료를 끝내고, 강승현 일행은 숙소용 굴로 돌아왔다.
"아, 오셨군요!"
"많이 늦으셔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숙소용 굴로 돌아가자 모닥불을 지키던 발릭 부부가 달려왔다. 둘 다 두 강승현 일행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레드로드 대장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좀 늦었네요. 루디 상태는 어떤가요?"
"몸을 떨지도 않고, 잘 자고 있어요."
데이지가 루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디는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자는 중이다.
[열 감지]
루디의 체온을 측정해보자 몸에서 연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36.7℃]
'정상체온'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푹 쉬게 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더 신경 쓸 건 없어 보인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체온도 정상이니 이대로 푹 자고 일어나면 다시 멀쩡하게 돌아다니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두 분도 이만 주무세요. 내일 숲 안내해주시려면 피곤하실 테니까."
둘 다 빨리 자고 일어나서 길 안내하는 게 은혜를 갚는 길이다.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힐러님!"
"탱커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발릭 부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은 루디를 가운데 두고 꼭 붙어 잤다.
"루디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애는 부모의 보물이니까...."
김호정은 그 모습을 보고 한시름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디 상태도 확인했겠다, 김호정 씨 부상도 치료하죠."
강승현은 모닥불 앞에 앉았다. 이제 만들어둔 약과 붕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람 하나 정도는 치료할 수 있는 양이다.
"어깨를 제대로 찔리셨네요."
김호정은 아까 검은 셔츠에게 당해 검으로 어깨를 관통당했다. 좋은 칼솜씨로 깔끔하게 찔러넣은 덕에 이물질이 남지 않아서 치료는 훨씬 수월했다.
"거기다 르페니한테 신나게 얻어맞았지."
김호정은 치료를 받으며 샌드백처럼 맞았던 때를 떠올렸다. 차원이동자니까 버티는 거지, 평범한 아즐대륙민이었다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반격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몬스터라면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사람은 역시 좀 그렇거든."
김호정 역시 아즐 대륙에 온 지 3년 차.
하지만 몬스터 사냥 위주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적이 인간일 경우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역시 김호정 씨는 탱커... 아니, 샌드백이 적성에 맞으시네요."
"보통 반대로 말하는 거 아니냐구."
"어그로도 제대로 못 끄는 탱커는 그냥 샌드백입니다."
그렇다.
김호정은 탱커치고는 방어력도 낮고, 피통만 더럽게 많은 샌드백에 가까운 차원이동자였다.
"그치만 강 선생이 나보다 어그로 잘 끌잖아."
"알면 반성 좀 해요, 탱커님."
"네 힐러님."
어그로 못 끄는 탱커와 힐 못 쓰는 힐러.
조합만 보면 이런 쓰레기 파티도 없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활약상을 펼친 파티였다.
'마탑을 구하고 도시를 구하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강승현은 이 야매 파티가 마음에 들었다.
-"[완치판정]도 썼으니 이제 통증이 많이 가라앉을 겁니다."
"고마워! 오늘 밤도 푹 잘 수 있겠는걸."
치료가 막 끝났을 때였다.
"아, 그렇지!"
김호정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어제 룰렛 돌리다 얻었는데, 강 선생 줄게."
김호정이 내민 건 카드 형태의 아이템이었다.
[스탯 교환권]
[사용 시 자신이 원하는 능력치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다.]
[상승 수치 : 10~100]
"스탯 교환권이네요."
스탯은 룰렛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한 번에 1~2 정도밖에 오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스탯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 스탯을 집중해서 올릴 땐 스탯 교환권을 모으는 편이다.
"나는 써봤자 티도 안 나고... 이걸로 선생 스태미나 올려!"
"이런 건 다른 차원 이동자한테 팔아도 될 텐데요."
"파는 것보단 강 선생이 쓰는 게 낫지."
김호정이 비장한 얼굴로 강승현의 손에 스탯 교환권을 쥐어주었다.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선생 코인에 올인한다고!"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잘 쓸게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교환권을 받았다.
안 받으면 울 것 같았으니까.
"그럼 김호정 씨는 이거 받으세요."
강승현은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을 김호정에게 건냈다. 저번에 자이언트 피츠타 크랩을 잡고 얻은 아이템이다.
"능력치 보니까 탱커용이더라구요."
-[체력 +15%] [방어력 +15%]
-[물 속성 공격을 받을 경우 7% 확률로 체력을 회복한다.]
-[피격 시 3% 확률로 10초간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 스킬의 효과를 받는다.]
옵션만 봐도 알 수 있듯, 이건 힐러보다는 탱커한테 어울리는 아이템이다.
"이, 이런 거 나 줘도 돼?"
"저는 잘 안 맞고 피해 다니니까 딱히 쓸모가 없어서요."
"고마워! 나는 많이 맞고 다니잖아!"
"아이템 슬롯에 등록하세요."
김호정은 획득한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을 아이템 슬롯에 등록했다.
[아이템 슬롯]
[1 : 월광 토템]
[2 : 피츠타 마린 이어커프(우)]
[3 : 격이 다른 검붉은 갑각의 파편]
"이걸 아까 줬으면 더 편했겠네요."
"앞으로 잘 써먹으면 되지."
김호정이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난 슬슬 자볼까...."
"주무시게요?"
"졸려서 더는 못 버티겠네."
그럴 만도 했다.
패널티 때문에 밤에 눈 뜨고 있기 힘든 사람이 이 시간까지 억지로 버텼으니.
"설마 지금 잔다고 뭔 일이야 있겠어."
"내일 아침까진 아무 일 없겠죠.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도 내일을 위해 일찍 자라구."
김호정은 그렇게 말하며 자러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생선 베개를 들고.
화르륵!
강승현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넣었다.
'나는 어째 잘 마음이 안 드네.'
일행은 자러 갔지만, 강승현은 아직은 자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 차원이동자가 해야 할 현명한 행동은 자신의 상태창을 관리하는 것이다.
'업적 보상이나 확인하자.'
강승현은 업적창을 열었다.
[업적 달성 : 대왕오징어 사냥]
[업적 달성 : 이물질 제거 성공!]
[업적 달성 : 훌륭한 치료사]
[업적 달성 : 위대한 치료사]
[업적 달성 : 1타 5피]
[업적 달성 : 옮겨진 세계]
[업적 : 계란으로 바위 치기]
[업적 : 탐욕의 화신이여]
보상을 획득한 업적과 획득하지 않은 업적이 주르륵 나타났다.
'아까 확인한 업적이 두 개였으니까... 응?'
그 사이에서 처음 보는 업적을 발견했다.
'옮겨진 세계?'
122. 모닥불 옆에서 1
[업적 달성 : 옮겨진 세계]
'피츠타 호수에서 달성한 업적 중엔 없었지.'
강승현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호수를 떠난 뒤로 이래저래 잡일이 많아서 알림창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중간에 알람을 놓쳤나 보네.'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가끔 업적을 해금해도 깜빡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자잘하게 싸울 일이 많아서 그때 놓친 것 같다.
'그래서 현명한 차원이동자라면 하루 일과를 마치면 업적창을 확인해야 하는 거지.'
현명하지 못한 김호정은 그냥 자러 갔지만 말이다.
'일단 확인부터 해볼까. 대충 무슨 업적일지 예상은 가지만.'
강승현은 [옮겨진 세계] 업적을 확인했다.
[업적 달성 : 옮겨진 세계]
[전이 던전을 처음 발견했을 경우 달성.]
'역시 이거였군.'
몇몇 업적은 특정 장소를 처음 발견하거나 도착했을 때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업적을 탐험 업적이라고 부른다.
'전이 던전용 탐험 업적.'
[옮겨진 세계] 업적도 그중 하나였다.
아마 레드로드 아지트에 들어오기 직전에 달성된 것 같다.
'이걸 달성한 사람은 우리 말곤 없으려나.'
[옮겨진 세계] 업적은 전이 던전을 찾아내기만 해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하면 쉬운 업적처럼 느껴지지만.
'문제는 전이 던전의 존재 자체지.'
실제로는 더럽게 빡센 업적이다.
이 녀석은 지난 몇백 년 동안 아즐 대륙에 나타나지 않아서, 업적 달성은커녕 전이 던전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이런저런 정보를 긁어모으다가 알게 된 던전이니까.'
한마디로 사람들한테서 거의 잊혀진 던전. 그런 던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나타난 상황이다.
'일단은 보상부터 받아둘까.'
탐험 업적은 보상이 꽤 좋은 편에 속했다.
그 지역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이나 스탯, 아이템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상 수령]
강승현은 보상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악랄한 룰렛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랜덤 아니고 확정이라 좋군.'
달칵!
[※스탯(전이 던전 전용) 획득!]
[※아이템(룰렛 무료 이용권x10) 획득!]
강승현의 눈앞에 보상 알림창이 나타났다.
이번에 획득한 건 전용 스탯과 룰렛 무료 이용권이었다.
'이용권 10장도 좋지만, 천천히 사용하고 스탯부터 볼까.'
룰렛 이용권은 덤. 메인 보상은 스탯이다.
☆[스탯(전이 던전 전용)]
[전이 던전에서 이하 효과를 받습니다.]
-[올 스탯 +10%]
-[직업 스킬 보너스 +3%]
-[몬스터 추가 대미지 +3%]
-[아이템 드롭률 +2.5%]
-[포인트 획득량 +1.5%]
-[허기가 느리게 소모됩니다.]
-[스태미나가 느리게 소모됩니다.]
설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전용 스탯은 평상시에는 쓸 수 없다. 특정 장소에 들어갈 때만 스탯 효과를 받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직업 스킬 보너스]에 [아이템 드롭률].... 거기다 [포인트 획득량] 옵션!'
이렇듯 강력한 옵션이나 희귀한 옵션이 붙어있을 확률이 높아서 차원이동자들이 환장하는 스탯 중 하나였다.
'성능 진짜 좋네.'
당장 이번 스탯만 해도 전이 던전에서만 효과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앞으로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전이 던전이 언제 또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까. 강승현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다른 업적을 살폈다.
'이번에 획득한 업적 중 가장 관심 가는 건....'
[업적 달성 : 이물질 제거 성공!]
[기생형 몬스터를 몸 밖으로 끄집어낼 경우 달성.]
이름만 봐도 군침이 도는 '이물질 제거 성공' 업적. 거대 세쿼이아 오징어한테 기생한 물결 기생초를 제거했을 때 달성한 업적이다.
'이 녀석은 꽤 쓸 만해 보여서 말이야.'
강승현의 스킬 관심사는 오직 하나.
치료에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 오직 그뿐이다.
'기생충을 제거해서 달성하는 업적이라면 치료에 도움될 만한 보상을 주겠지.'
[보상 버튼]
강승현이 기대를 품고 보상 버튼을 누르자,
[※스킬(적출(摘出) 획득!]
기대에 걸맞게 야매 힐러를 위한 좋은 스킬이 나타났다.
[적출(摘出)]
[몸속 이물질을 간파하면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
'역시!'
적출은 이름 그대로 신체 내부의 물질을 꺼낼 수 있는 스킬. 당연히 멀쩡한 신체 장기는 끄집어낼 수 없는 스킬이라, 전투용으로 쓸 수 없지만,
'이런 게 나와줘야지!'
치료를 방해하는 몸속 이물질을 편하게 치워버릴 수 있으므로 치료용으로는 최고의 스킬이다.
'야매 힐러한테 딱 맞는 스킬!'
강승현은 무척 기뻐하며 스킬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잘난 힐러라도 환자의 몸에 이물질이 남아 있으면 제대로 회복시킬 수 없으니, 이 스킬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드디어 이런 스킬이 나와주시는군.'
지금까지는 몸속 이물질을 제거할 때 [절개]를 사용해 살을 째서 일일이 끄집어내야 했고, 찢어낸 살과 장기를 다시 수복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지!'
[적출] 스킬을 사용하면 상처를 만들지 않고 불필요한 이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 야매 힐러는 물론이고 일반 힐러에게도 꿈같은 스킬이다.
'당장 테스트해보고 싶은데, 어디 몸에 이물질 박힌 환자 없나.'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환자는 찾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럴 땐 김호정 씨가 딱인데.'
마음 같아선 김호정한테 스킬 테스트를 부탁하고 싶었지만,
"커어어."
"아무리 그래도 자는 사람을 깨우는 건 좀 그렇겠지."
세상 모르게 자는 중이라 그만뒀다. 지금 깨우면 오만상을 쓸 것 같았으니까.
강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써봐야지."
화르륵.
강승현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나뭇가지를 좀 더 던져 넣었다.
파앗!
[프리아의 화살 회수]
[여명의 성수 화살을 회수합니다.]
그리고 잊기 전에, 호수에서 사용한 여명의 성수 화살을 회수했다.
[회수 성공!]
[여명의 성수 화살.]
'여명의 성수도 회수했으니... 잠이나 잘까.'
강승현은 바닥에 눕기 전, 상태창을 열었다.
'룰렛 한 번만 돌리고.'
원래 룰렛 이용권은 쌓아두기보단 그때그때 써주는 게 예의다.
'10회 연속 룰렛.'
[룰렛 이용권(x10)을 소모합니다.]
물론 모았다가 쓰든, 그때그때 쓰든, 룰렛에선 대체로 쓰레기만 나오지만.
타르르르르르!
[※룰렛 결과]
☆[스탯(체력+2)]
☆[기타(1골드)]
☆[스탯(체력+1)]
☆[기타(2골드)]
☆[기타(1골드)]
☆[기타(4골드)]
☆[포션(소형 체력 포션+1)]
★[기타(인벤토리 확장권+1)]
☆[포션(소형 체력 포션+1)]
★[기타(자판기 갱신권+1)]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 대박 나기도 한다.
'별일이네?'
당연히 골드러시나 그에 맞먹는 쓰레기 파티일 거라 생각했는데, 룰렛답지 않게 좋은 보상이 나왔다.
줄줄이 쏟아지는 쓰레기 보상 사이에서, 티켓 아이템이 무려 2장이나 나온 것이다.
'인벤토리 확장권에 상품 갱신권이라니.'
아무래도 이용권을 너무 많이 넣어서 룰렛이 고장 난 것 같다. 룰렛에서 좋은 보상이 많이 나오는 건 비정상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갱신권은 쓰고 자야겠지.'
[포인트 자판기]
-[오늘의 상품]
-[SOLD OUT!]
원래는 오전 6시가 지나야 새로운 상품이 들어오는 시스템이지만.
[자판기 갱신권을 사용합니다.]
[오늘의 상품이 갱신됩니다.]
이번에 획득한 갱신권을 꽂아 넣자,
-[오늘의 상품]
-[★스킬(명령 무시)]
바로 새로운 아이템이 입고됐다.
'명령 무시?'
[명령 무시]
[정신력 +2%]
[정신력 회복 +0.5%]
-[시크릿 옵션]
-[시크릿 옵션]
[명령 무시]는 정신력 관련 옵션이 붙은 패시브 스킬이었다.
'정신력은 올리기 힘드니 그럭저럭 좋은 스킬이긴 하지만....'
강승현은 워낙 멘탈이 사기적으로 튼튼해서 굳이 정신력을 올릴 필요가 없었다.
'나한테는 필요 없는데.'
한마디로 관상용 스킬이었으나,
'이름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남의 명령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겐 딱 맞는 스킬이었다.
'시크릿 옵션이 궁금한 것도 있고.'
저런 식의 시크릿 옵션은 스킬을 직접 얻기 전까진 확인할 수 없다.
강승현은 자판기 버튼을 눌렀다.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누적 포인트 : 12345포인트]
덜컹-!
-[오늘의 상품]
-[SOLD OUT!]
★[스킬(명령 무시) 획득!]
[명령 무시]
[정신력 +2%]
[정신력 회복 +0.5%]
[이하 시크릿 옵션]
-[25% 확률로 정신지배 스킬 무효]
-[정신력이 500% 이상일 경우 정신지배 스킬 완전 면역]
스킬을 획득하자 시크릿 옵션이 드러났다.
'정신지배 완전 면역?'
각종 세뇌, 지배, 명령 등등의 스킬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능력. 역시 시크릿 옵션인 만큼 사기적인 효과였다.
'전제 조건이 정신력 500% 이상이라.'
정신력 스탯은 올리기 힘든 만큼 쉽게 해금할 수 없는 옵션이다.
'내 정신력 수치는 600% 이상이니까 자동 클리어네.'
물론 강승현은 가볍게 클리어했다.
그는 신의 명령도 무시하는 초합금다이아오리하르콘 멘탈의 보유자였으니까.
'이런 건 있으면 좋지.'
온갖 종류의 디버프 스킬 중 정신지배는 특히 거치적거린다. 동료가 혼란 상태에 빠지기라도 하면 파티가 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웬일이래. 오늘 고생했다고 관리자 놈이 보상을 듬뿍 안겨주는 건가.'
정신지배를 확률적으로 방어하는 것도 좋은데 완전 면역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좋은 보상도 얻었겠다, 슬슬 잠이나 잘까.'
강승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잠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
"강승현 힐러님, 주무시나요?"
레드로드 탐색팀원 중 하나인 니켈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지금 막 자려고 했는데."
"혹시 사람 한 명만 치료해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니켈의 옆을 보자 두건을 쓴 단원 하나가 울상을 지으며 서 있었다.
'저 녀석은... 3호던가.'
강승현의 기억에 의하면 아까 싸웠던 레드로드 정찰팀원 중 한 명이었다.
'귀찮은데 거절할까.'
거절하려는 찰나, 니켈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낮에 별고슴도치랑 싸우다가 팔에 가시가 박혔더라구요. 그걸 또 꾹 참고 있던거 있죠."
"별고슴도치?"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상태만이라도 봐주시면 안 될까 해서...."
그 말을 듣고 3호의 팔을 보자 피부에 뾰족한 가시가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워낙 작고 가늘어서 맨손으로 섣불리 건드렸다간 더 깊게 박힐 것 같다.
'원래 저런 걸 제거하려면 [관찰의 눈]을 켜고 조심스럽게 뽑아야 하지만....'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적출] 스킬을 테스트할 기회다.'
그렇지 않아도 스킬을 꼭 써보고 싶었는데 제발로 환자가 굴러들어왔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치료해 드려야죠. 참된 힐러는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123. 모닥불 옆에서 2
가시.
아즐 대륙을 여행하는 모험가가 주의해야 하는 것 중 하나다. 창이나 칼 같은 무기보다 대미지는 약하지만, 상태이상을 일으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행히 상태이상의 징조는 없네요."
별고슴도치의 가시는 길이가 1~2cm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짧은 편이다.
"이렇게 작은 가시는 출혈 같은 상태이상을 일으키지 않거든요. 거기다 독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중독이나 마비에 걸릴 일도 없고."
가시만 제거하면 팔을 당장 사용해도 문제없는 상태다.
"뽑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역시 그렇죠."
레드로드 3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첨엔 뽑아보려고 했거든요."
실제로 환자의 팔에 박힌 가시 중 몇몇 개는 부러지거나 깊게 박힌 상태였다.
가시를 뽑으려다 실패했다는 증거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가시의 크기가 작을수록 상태이상을 일으킬 확률이 낮아지지만, 동시에 제거 난이도가 올라간다. 그래서 많은 힐러들이 가시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곤 했다.
'치료하려면 번거로운데 상처 자체는 별거 아니라서 돈을 많이 못 벌거든.'
그건 포인트도 마찬가지라, 강승현 역시 가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욕하면서 핀셋부터 꺼냈겠지만.'
[적출]
'오늘은 새로운 스킬이 있거든.'
강승현은 오른손을 뻗으며 [적출]을 발동했다.
샤아아!
그러자 허공에서 반투명한 손이 나타났다.
생긴 건 사람 손이 아니라 유리로 만든 해골 뼈다귀, 커다란 스켈레톤의 손 같았다.
'저 녀석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건가?'
니켈이나 환자 3호는 갑자기 나타난 손에 눈길도 주지 않고 강승현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잘됐네. 봤으면 비명 질렀을 테니까.'
이 손은 강승현이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었지만, 남에게 보이지도 않고 물리적 실체가 없는지 벽이나 사물을 통과했다.
당연히 이 손으로 물체를 잡거나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 보면 생긴 것만 그럴싸한 쓰레기 장식 스킬이지만.'
덜컥.
강승현이 뼈다귀 손으로 환자의 팔을, 정확하게는 몸에 박힌 가시를 건드리자.
파아아아!
박혀 있던 가시가 빛을 뿜어내며 소멸하더니,
팟!
파밧!
동시에 강승현의 왼손 안에 작은 가시 여러 개가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발동하는군.'
[적출]은 대상의 몸속 이물질을 밖으로 쫓아내는 스킬.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시키는 능력이었다.
'괜찮은데?'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제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하면 [적출]을 사용해서, 제거하기 힘든 이물질도 간편하게 치울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단점이 없진 않지만.'
단점은 역시 스태미나가 꽤 많이 소모된다는 점과, 강승현이 이물질의 위치를 모르면 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제거한 이물질이 다른 곳도 아니고 강승현의 손으로 옮겨진다는 점이었다.
'지금이야 위협적이지 않은 잔가시라 상관없지만, 독성 물질은 좀 귀찮아지겠는데.'
그에 대해선 따로 대비해야 할 것 같다.
"제거했습니다."
화르륵!
강승현은 손안의 가시를 보여주고 찔리지 않도록 모닥불에 버렸다.
"뭘 한 거예요?"
"안에 박힌 가시를 빼냈습니다."
"아니, 어느 틈에?"
[적출]의 손을 보지 못한 니켈과 3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들의 보기엔 강승현이 그냥 손만 쥐었다 폈는데 박혀 있던 가시가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텔레포트?"
"저런 밑바닥 마력으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럼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우리가 눈치 못 챈 건가!"
두 사람은 마법이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고, 강승현이 엄청난 속도로 손을 움직여 가시를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대단하세요! 바로 앞에 있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라니!"
"아까 우리가 싸울 때 한 대도 못 때린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럴 리가 있나.'
두 사람은 뭔가 크게 착각했지만, 강승현은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네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대신 [완치판정]과 함께 치료를 끝냈다.
레드로드 3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파서 잠을 못 자고 있었거든요!"
"이건 사례비 대신이에요!"
니켈이 와인 몇 병을 잔뜩 꺼냈다.
이름은 13번째 태양. 카마르 귀족들이 즐겨 마시는 고급 와인이다.
"13번째 태양? 꽤 비싼 거네요."
"카마르 마법사 놈들한테서 쌔볐죠!"
"어쩐지 비싼 와인을 들고 있더라.... 뭐, 잘 마실게요."
강승현은 잔뜩 생긴 와인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지금 마시고 싶어도 술친구 해줄 인간이 퍼 자고 있었으니까.
"커어어...."
'그냥 내일 마실까.'
이렇게 고민하던 찰나,
"많이 피곤하실 텐데 애들 치료까지 부탁해서 미안해. 괜찮으면 이것도 와인에 곁들어 먹어."
로센트가 안주로 먹을 치즈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니켈과 3호가 강승현을 찾아온 이유는 로센트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안주까지 준비해주셨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요."
강승현은 와인 한 병을 따면서 말했다.
"시간 괜찮으면 다 같이 마시죠."
"그래도 돼요?"
듣던 니켈이 환해진 얼굴로 물었다.
"혼자 마시면 재미없잖아요."
"그러면 제가 스태미나 칵테일로 만들어 드릴게요."
니켈이 가방에서 칵테일 셰이커를 꺼냈다.
"제 별명이 레드로드의 바텐더라서!"
그렇게 심야 칵테일 파티가 시작됐다.
-"칵테일 갑니다!"
[칵테일 셰이킹]
니켈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제작했다.
'스킬까지 쓰는 걸 보면 밥 먹고 칵테일만 만들었나.'
바텐더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가 있었다.
스킬을 얻을 정도로 많이 만들었을 테니까.
쫘르르륵.
"드시죠."
니켈이 완성된 칵테일을 잔에 따라 내밀었다. 즉석에서 만들어서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맛이었다.
"괜찮네요. 이 정도면 돈 받고 파셔도 되겠는데."
"헤헤, 밥 먹고 칵테일만 만들다 보니 스킬까지 얻어버렸네요 "
'진짜였냐.'
"대장도 스태미나 칵테일 좋아하거든요."
니켈이 칵테일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래서 몇 번 만들어주다 보니까 어느새 스킬이 짜잔."
"르페니는 네가 만든 칵테일을 제일 좋아하니까 말이지."
로센트가 치즈를 먹기 좋게 썰면서 말했다.
"오늘 강승현 힐러가 르페니를 말려준 덕분에 이렇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거겠지. 정말 고마워."
그렇지 않았다면 르페니는 공생체를 몸에 심었을 것이고, 아지트는 난장판이 됐을 것이다.
강승현은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위험에 빠트릴 뻔했네요."
"...그래도 그 아이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까."
"사춘기 자식 대하듯 말하시네요."
"아하하하하... 내가 르페니를 어릴 때부터 키우긴 했지."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아니신 거 같은데."
로센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나는 르페니의 외삼촌이야."
레드로드 단원들과 르페니의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대장의 친척. 그것도 아버지처럼 키워준 삼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누나는 트라코티 평민이었는데, 평균 이상의 마력을 가진 덕에 카마르 귀족 집안에 시집갔거든."
"그 녀석, 시골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대장은 데머셔 가문 도련님이에요. 그 이야기 하면 싫어하지만."
"알고보니 귀족가의 망나니였군요."
르페니는 놀랍게도 카마르 출신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집안이 아니라 마법사 명문가 출신.
"거기서 애들 낳고 잘 사는가 했는데, 하필 막둥이가 마력 반발자로 태어나서...."
르페니가 태어났을 때 데머셔 가문은 난리가 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법사 가문에서 마력 반발자가 태어났으니까.
"저주받은 아이라느니, 가문을 망하게 할 거라느니, 저것을 죽여야 한다느니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갓난아기가.
그 광경을 보다 못한 로센트의 누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막내아들을 친정집에 맡겼다.
"마법사 집안에서 마력 반발자로 태어났으니, 인성이 그 꼴이 될 만하네요."
"인성이 그 꼴이라 미안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자 르페니가 띠꺼운 얼굴로 서 있었다.
강승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이해하니까."
"뭘 이해해!"
르페니는 짜증을 내며 바닥에 앉았다. 아무래도 칵테일을 마시러 온 모양이다.
"니켈, 나도 한 잔 줘."
"칵테일 한 잔 더 갑니다!"
[칵테일 셰이킹]
니켈은 셰이커를 신나게 흔들었다.
"내 이야기할 거면 날 부르든가."
"아하하하하... 미안해. 자는 줄 알았어."
"근데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집이 그 꼬라지인데."
르페니는 칵테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마법을 못 쓰는 것도 가문의 수치인데, 심지어 남의 마법을 방해하는 체질.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 상상이 간다.
"형제라는 새끼들은 날 벌레보다 못한 놈으로 보고, 친척들은 보기만 하면 입을 털어대고, 아버지라는 새끼는... 말을 말자."
심지어 형제 중 유일하게 엄마를 닮아서 빨간 머리였다고.
"그래서 어릴 땐 우리 가족이 트라코티에서 키웠어."
"나한테 고향은 트라코티야."
어린 르페니는 트라코티에서 조부모님과 로센트의 손에 자랐다. 거기선 체질이나 머리색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기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하지만 르페니가 12살 때 데머셔 어르신이, 애를 더 이상 시골 마을에서 썩힐 수 없다고 데려가셨어."
"나 같은 마력 반발자가 카마르에서 뭘 하겠냐고."
르페니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카마르로 되돌아왔지만, 마력 반발 체질 때문에 마법을 전혀 배우질 못했다.
거기다 마법사들이 많은 카마르는 르페니의 체질을 꺼려서 그를 조롱하거나 기피했다.
"개 같은 늙은이. 난 가기 싫다고 했는데."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르페니와 어울려주는 건 마력이 낮거나 거의 없는 평민들뿐이었다.
"그나마 도움 된 건 배틀메이지의 체술뿐이었나."
"그래서 근접전에 그렇게 강했군요."
"뭐, 내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져도 이 망할 도시에선 날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르페니는 마법을 배울 수 없어서 정식 배틀메이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를 때려치우고 카마르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다가 마법사 놈들한테 시비가 붙어서 패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그러다 몇몇 아이들이 르페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지금의 레드로드 패거리가 탄생했다고.
"대장은 체술 실력만 따지면 카마르 1위라구요!"
"맞아! 우리한테 까불던 마법사들을 패줬지!"
니켈과 개스코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르페니는 칵테일을 마시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괴물만 아니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잡을 수 있거든."
체술은 배틀메이지의 것을 사용했지만, 마법 대신 스킬 캔슬을 사용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안티 매지션.
마법사들은 손쓸 방법이 없고, 그 외의 직업들도 접근을 허용하는 순간 지는 거나 마찬가지.
실제로 르페니는 강승현에게 지기 전까진 백전백승이었다.
"그러다 석 달 전에 전이 던전을 발견했어. 한동안은 애들하고 던전에서 노느라 카마르는 신경 안 썼는데."
그사이 카마르에는 '트라코티의 피가 섞이면 마력 반발 체질자가 태어난다.'라는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당연히 악질 마법사들이 퍼트린 헛소리다.
"별 개 같은 소문이 퍼지고 있더라고."
하지만 르페니가 꽤 유명한 가문 출신 망나니라 소문은 진압되지 않았다.
"심지어 카마르에 가려고 빨간 머리로 염색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니까요."
"우린 일부러 빨간색으로 염색했는데."
오히려 카마르에서 트라코티 사람,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일이 늘어났다고 한다.
"내가 얘기해준 레드로드 꼬마 이야기 있지? 걔가 카마르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지나가는 마법사들한테 그 이야기를 들었대."
레드로드 꼬맹이가 [안티 매직]으로 마법사들을 털어버린 게 그 때문이었다. 소문에 대해 들은 르페니는 제대로 빡쳐서, 본격적으로 카마르 마법사를 습격하고 다녔다.
"일부러 빨간 머리를 하지 않은 사람만 골라서 공격했어. 엿 좀 먹으라구."
"요새는 일부러 빨갛게 염색하는 사람도 생겨났더라구요."
그러다 공생체를 발견한 이후, 레드로드는 카마르를 멸망시키기 위해 각종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뭐, 이제는 다 망했지."
물론,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위험성을 알게 된 지금은 테러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는 동료와 가족, 트라코티를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복수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아지트도 던전도 남아 있으니... 여기 계속 숨어서 새로운 방법을 찾을 거지만."
"사실 그 점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데요."
강승현이 전이 던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참이었다.
쿠구우우우웅!
쩌저적!
갑자기 무언가 크게 진동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더니,
스스스슷!
브즈즈!
동시에 벌레의 날갯짓 소리 같은 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124. 하이브 마인드 1
쿠구구구궁!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다들 머리 조심해."
한창 칵테일 파티를 즐기던 강승현 일행은 괴상한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동굴 곳곳에서 강한 진동과 함께 벽이 허물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지진 났나?"
"이건 그냥 지진이 아닙니다."
브즈즈즈즈!
스스슷. 스스슷.
벽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계속해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 단순한 지진이라면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이런 소리를 낼 만한 자식은....'
강승현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숙소용 굴을 빠져나와 아지트 중앙 광장으로 향하자.
브즈즈즈즈즈!
스스스스.
부서진 벽과 바닥에서 엄청난 수의 스카라베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석화 상태로 동굴 곳곳에 잠들어 있던 놈들이 일제히 깨어난 것이다.
'역시 스카라베밖에 없지.'
석화에서 풀려나 난리 치는 스카라베를, 강승현은 오만상을 쓰며 바라보았다.
'저놈들을 석화시켜 동굴 속에 파묻어둔 범인은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틀림없어.'
그러니 스카라베가 석화에서 풀려났다는 건.
'벌레 자식이 깨어났다는 소리야.'
고르디우스 라르바가 고치를 찢고 부화했다는 걸 의미한다.
'일이 귀찮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정신력을 하락시키는 강력한 사념파가 뿜어져 나왔지만, 강승현 일행은 곁에 마력 반발자 르페니가 있어서 깨닫지 못했다.
"이, 이게 다 뭐야? 스카라베잖아?"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야!"
"여기는 공략이 끝나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안전지대인데...."
강승현을 뒤따라온 레드로드는 스카라베 무더기를 보고 경악했다. 한두 마리도 아닌 수십, 수백 마리의 스카라베 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들은 공생체,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부하입니다."
"공생체의 부하라고? 그렇다는 건...."
"쯧, 그 자식이 깨어났다는 소리잖아."
르페니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해력이 빨라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브즈즈즈즈!
그때, 스카라베 떼가 요란하게 날갯짓하며 던전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응?'
일반적인 스카라베는 움직일 때 정신 사납게 날아다니지만, 이 자리의 스카라베 떼는 침착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대놓고 수상한 짓을 하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세뇌]
[타빌라 스카라베]
[석화 상태에서 막 깨어났다.]
[강력한 정신지배 공격에 당했다.]
[고르디우스 라르바한테 조종당하는 상태다.]
'역시 스카라베를 조종하고 있었군.'
고르디우스 라르바는 르페니가 설치한 결계 속에 갇힌 상태다. 녀석은 자력으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정신지배로 스카라베를 조종해 결계를 부술 작정이었다.
"놈들의 목적지는 던전 안쪽 비밀방 내부입니다."
강승현은 레드로드 패거리한테 말했다.
"비밀방 내부?"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 게요."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일단은 무기부터 꺼내세요."
석궁을 꺼낸 강승현은 스카라베 무리를 추격했다.
"너희도 무기 꺼내."
"오케이!"
"알았어!"
레드로드 패거리 역시 자신의 무기를 꺼내고 스카라베를 쫓아 던전 비밀방으로 향했다.
브즈즈즈즈!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덴트롤 박하 농축액 화살을 생성합니다.]
석궁을 꺼낸 강승현은 스카라베 무더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바박!
약한 벌레에 치명적인 농축액으로 만든 화살인 만큼, 화살에 맞은 스카라베 몇 마리가 나가떨어졌으나.
브즈즈즈!
브즈스! 스으으으!
수가 워낙 많아서 별 티도 안 났다.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인해전술 물량공세가 싫다니까.'
스카라베처럼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광역기로 싹 쓸어버리는 공격이 가장 효과적이다.
실제로 강승현은 부식된 유적 던전에서 바람 마법을 이용해 덴트롤 박하 농축액을 퍼트려 스카라베를 무찌를 수 있었다.
'룰렛에서 광역기 스킬이 좀 나와야 쓰던가 할 거 아냐.'
지금은 바람 마법을 써 줄 마법사도 없고, 만들어둔 농축액도 바닥나고 없어서 야매 광역기를 발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거지 같은 관리자 놈.'
강승현은 혀를 차며 인벤토리를 살폈다.
그나마도 덴트롤 박하 농축액은 아까 쓴 게 마지막이었다.
'정 뭣하면 비장의 수단을 써야겠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강승현은 시커멓게 어두운 던전 안쪽 길을 달려갔다. 저 멀리 공생체 제단 방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저깄다!"
"저 문만 열면...!"
강승현 일행이 문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순간.
후르르!
그걸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이 스카라베 한 마리가 나타났다. 다른 녀석들에 비하면 덩치가 좀 더 크고 무늬가 화려한 개체였다.
"이 녀석은 또 뭐야?"
"레어 몬스터네요."
이 녀석은 일반 개체와 다르게 레어 몬스터였지만, 다른 스카라베와 마찬가지로 석화되어 있다가 공생체가 부화하면서 깨운 것 같다.
"그래 봤자 스카라베!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어!"
"빨리 부수고 들어가자!"
니켈과 개스코인이 의욕을 불태우며 앞으로 돌진했다.
브즈즈즈즈!
그 순간, 레어 스카라베가 [우월감]을 사용했다. 곳곳에 득실거리던 스카라베 떼가 레어 스카라베를 향해 몰려들어 뭉치기 시작했다.
쿠우웅.
그 결과 거대한 스카라베 구체가 탄생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몬스터는 스캐럽 캐논이라 부른다.
"좀 귀찮은 놈이 태어났네요."
강승현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공생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준비해둔 파수꾼인 것 같은데.'
상대가 레어 몬스터라서 어느 정도 귀찮음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런 몬스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다들 준비하세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재생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이 일행들한테 재생 포션을 발사한 순간,
화아아악!
스캐럽 캐논의 몸에서 검은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레어 몬스터답게 [위압감]을 발동한 것이다.
쿠구구구구!
동시에 스캐럽 캐논이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다. 마치 거대한 검은 바위가 굴러오는 것 같았다.
"저, 저걸 어떻게 공격해!"
"으아아아!"
맨 앞에 있던 니켈과 개스코인은 돌진해오는 스캐럽 캐논에 부딪쳤다.
'이대로 두면 몸 아작나겠네.'
[강화제 - 방어 상승]
두 사람이 부딪치기 직전, 강승현은 청록빛 바늘을 생성해 투척했다.
핏.
[강화제의 효과를 받습니다.]
쿠웅!
두 사람의 몸에 방어 강화 버프가 걸리면서 스캐럽 캐논의 대미지 피해가 조금 줄어들었다.
"감사합니다! 이래서 파티에 힐러 넣는구나!"
"덕분에 살았어요!"
두 사람은 감사인사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
"일단 원거리 공격으로 해보죠."
파바바박!
강승현은 굴러오는 스캐럽 캐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텅! 텅!
하지만 스캐럽 캐논은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튕겨냈다.
'싸구려 화살은 안 통한다 이거지.'
강승현은 이번엔 [작살 화살★]을 발사했다.
파악, 파악!
석궁 끝에서 날아간 검은 화살이 스캐럽 캐논의 몸체를 꿰뚫었다.
파사삭!
스캐럽 캐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스카라베 몇 마리가 부서졌다.
"먹혔다! 효과가 있어!"
"아 역시 최강힐러님!"
뒤에 있던 레드로드 2인조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브즈즈즈즈!
그러자 스캐럽 캐논은 다시끔 [우월감]을 사용했다. 새로운 스카라베를 몸으로 불러들여 부서진 몸을 복구한 것이다.
마치 고장난 부품을 교체하는 것처럼.
"[우월감]을 치료용으로 사용하다니!"
"저 녀석한테도 야매 힐러의 재능이 있군요."
강승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였으니까.
"다음 생에는 힐러로 태어나면 좋겠네요."
쿠르르르르!
강승현은 돌진해오는 스캐럽 캐논의 공격을 피하며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관찰의 눈]
거대한 스카라베 덩어리 위로 각종 정보가 떠올랐다.
[세뇌][레어]
[검은 태양 스캐럽 캐논]
[다수의 스카라베가 모여서 이루어진 군체형 몬스터.]
[모든 스카라베는 정신을 공유한다.]
[몸에서 뿜어내는 마력 덕분에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몸을 이루는 스카라베가 파손돼도 새로운 개체를 불러들여 복구한다.]
[중앙의 스카라베가 약점이자 중심체다.]
[고르디우스 라르바한테 조종당하는 상태다.]
'역시 공생체한테 조종당하고 있었군.'
이 스캐럽 캐논을 처치하려면 몸 중앙의 레어 몬스터를 공격해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일단 겉표면 스카라베를 처리해야 하는데.'
스캐럽 캐논의 몸을 이루는 스카라베 무리는 그냥 붙어있는 게 아니다. 마력을 이용해 끈끈하게 연결된 상태다.
그래서 강한 파워로 공격하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가만, 저 녀석들이 마력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마력 반발자의 몸에 닿는 순간, 강력한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흩어질 것이다.
강승현은 곧장 르페니를 향해 소리쳤다.
"르페니 씨, 녀석은 마력을 이용해 뭉쳐있는 몬스터입니다. 접근해서 스킬 캔슬만 발동하면 잡을 수 있어요."
[강화제 - 방어 상승]
강승현은 르페니의 몸을 향해 강화 바늘을 투척했다.
핏.
[강화제의 효과를 받습니다.]
[마력 반발로 인해 스킬 효과가 반감됐다.]
"저 녀석한테 접근하라고? 그럼 한 대 쳐맞아야 하는데?"
"치료해 드릴 테니까 맞으세요."
"뭐 이런 새끼가...."
르페니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다 있냐!"
빠른 속도로 굴러오는 스캐럽 캐논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스캐럽 캐논과 르페니의 몸이 충돌했다.
"시발!"
르페니의 몸에 엄청난 대미지가 들어왔다.
돌진하는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향해 달려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퉷!!
"대미지 장난 아니네...."
바닥에 쓰러진 르페니가 피를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쿠우웅!
하지만 스캐럽 캐논 역시, 마력 반발자의 몸에 돌진하는 바람에 엄청난 대미지를 받았다.
파직!
파지지직!
전신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터져 나오더니,
콰아아아아!
우르르르르!
스캐럽 캐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스카라베가 마력 반발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흩어져버렸다.
브즈즈즈!
그 결과, 스캐럽 캐논의 본체인 레어 스카라베 [검은 태양 스카라베]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다급하게 [우월감]을 사용해서 몸을 복구하려 했으나,
"수고하셨어요."
강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작살 화살★]
125. 하이브 마인드 2
파바바박!
검은 화살이 녀석의 작은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레어 스카라베는 화살에 처맞는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쩌적!
몸을 꿰뚫은 화살이 몸속 유물을 깨트리면서,
브즈즈즈즈...!
퍼어엉!
처참한 소리와 함께 레어 스카라베의 몸이 터져나갔다. 유물이 파괴되면서 화살을 버틸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투둑! 툭!
터져나간 스카라베의 잔해 속에서 부서진 유물 조각이 튕겨 나왔다.
'아, 유물을 부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듯 '검은 태양 스카라베'처럼 크기가 작은 레어 몬스터는 몸속 유물을 피해서 공격하기가 힘들다. 덕분에 싸우다가 유물을 깨 먹는 모험가들이 많았다.
'이래서 작은 몬스터는 귀찮다니까.'
강승현은 아쉬워하며 유물 조각을 챙겼다.
"일단 귀찮은 파수꾼은 처리했고."
브즈즈즈!
레어 스카라베가 사망하자, 바글바글 몰려든 스카라베 떼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방금 그 충격으로 세뇌가 풀린 모양이다.
"대장! 대장!"
"르페니, 괜찮아?"
레드로드 3인방이 르페니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 르페니는 레어 몬스터한테 맨몸으로 덤비느라 엄청난 대미지를 받은 상태였다.
'이 인간도 보통은 아니네.'
르페니가 튼튼한 마력 반발자라 망정이지, 평범한 아즐대륙 사람이었다면 몸 어딘가가 박살 났을 것이다.
"바로 치료해드릴게요."
"됐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르페니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나중에 치료해도 돼."
스캐럽 캐논 때문에 큰 대미지를 입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충분히 싸울 여유가 있었다.
"그 시간에 벌레 자식을 쳐 죽이는 게 나아."
공생체가 깨어났으니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고르디우스가 동굴을 빠져나갈 확률이 높았다.
"여기서 트라코티는 꽤 가깝다고."
고르디우스가 동굴에서 빠져나가면 가장 먼저 트라코티로 향할 것이다. 카마르면 모를까, 트라코티 같은 작은 마을은 보스급 몬스터의 습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냥 두면 난장판이 벌어지겠지."
거기다 고르디우스는 특히 정신지배에 특화된 몬스터다. 까딱하면 마을 하나가 하루 만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도 괜찮아요!"
"좀 아프긴 하지만...."
니켈과 개스코인 역시 대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소형 체력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팍!
파박!
강승현은 체력 화살을 발사해 르페니와 니켈, 개스코인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제대로 된 치료는 끝나고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타박, 타박, 타박!
강승현 일행은 곧장 제단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들어가자마자 고르디우스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어, 어?"
"공생체가 없어!"
"어떻게 된 거야?"
그러나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르디우스 라르바가 잠들어 있던 빈 고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자식 어디 갔어?"
"껍데기가 남은 걸 보면 여기서 부화한 건 틀림 없는데."
강승현은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고치를 살폈다. 여전히 기분 나쁘게 물컹거렸지만, 알맹이가 빠져나가서 푹 꺼진 상태였다.
'응?'
그 사이에서 뭔가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라르바의 고치처럼 감촉은 찐득찐득했지만, 묘하게 광택을 가진 물체였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두 눈이 푸르게 빛나며 각종 정보를 띄우기 시작했다.
[고르디우스의 눈물]
[성체로 성장한 고르디우스는 고치를 찢고 나올 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음을 터트린다.]
[사용시 정신력을 전부 회복시켜준다.]
[사용시 상태이상 '깊은 환각'에 걸린다.]
'회복 아이템이었나? 이런 걸 먹어볼 생각을 하다니.'
고르디우스의 눈물은 정신력을 전부 회복시켜주는 대신, 환각 상태이상에 빠트리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언뜻 보면 좋은 아이템 같지만, 환각이나 환상은 정신 계열 상태이상이라 걸리면 정신력이 점점 내려간다.
'성능이 좋은 만큼 리스크가 크네. 정신력이 아주 위험할 때나 쓸 만하겠어.'
초합금다이아오리하르콘 멘탈을 가진 어떤 야매 힐러 같은 사람에겐 별 의미 없는 아이템이다.
'그래도 일단은 챙겨둘까.'
강승현이 고르디우스의 눈물을 챙긴 순간,
브즈즈즈즈!
쿠웅!
갑자기 스카라베 떼가 나타나 돌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그 충격으로 기둥이 뒤로 넘어가면서 벽을 거세게 강타했다.
쿠구구궁!
동시에 입구 쪽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여파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가 없어졌다.
"으아아아!"
"바위 때문에 입구가 막혔다!"
니켈과 개스코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유일한 출입구가 사라졌으니, 여기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 됐다.
"...이 방 자체가 함정이었군."
"함정?"
"그 자식, 처음부터 우리랑 싸울 생각이 없었어요."
지금 강승현 일행은 르페니의 마력 반발 때문에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정신지배가 먹히지 않는다. 당연히 쉽게 숙주로 삼을 수 없다.
"아무리 공생체라도 스카라베처럼 약한 몬스터한테 기생한 상태로는 우릴 이길 수 없잖아요."
"그렇지. 제대로 된 숙주가 없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고르디우스는 레어 스카라베를 풀어서 시간을 끌었다. 강승현 일행이 스캐럽 캐논과 싸우는 동안 녀석은 새로운 숙주를 찾으러 도망친 것이다.
"그럼 녀석이 노리는 건...!"
평범한 아즐대륙민도 공생체의 힘을 빌리면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고르디우스는 정신력이 낮은 숙주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아지트 안에 있는 단원들이야!"
"의무실이 위험해!"
즉, 녀석의 목적은 [정신력 과다상실]을 일으켜 쓰러진 인간을 숙주로 삼아 조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무실에는 숙주로 쓰기 좋은 인간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우리가 숙주 찾기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여기 가두는 건 덤이네요."
"시이이이이발! 이 벌레 자식이!"
하지만 고르디우스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쿠우웅!
분노한 르페니가 주먹을 휘둘러 입구의 바위를 부수고,
우수수수수!
[작살 화살★]
파바바박!
강승현은 방아쇠를 당겨서 천장에서 쏟아지는 바위 파편을 모조리 격파했다.
파각! 파각! 파각!
"이딴 걸로 내 발목을 잡겠다고?"
"방에다 스킬을 깔아뒀으면 또 모를까."
그건 고르디우스의 생각보다 이 파티가 강하다는 점이었다.
"스킬 같은 게 깔려 있어도 마력 반발로 터트려버리면 그만이지."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새로운 입구를 만들었다.
"하여간 정말 대단하다니까...."
"역시 최강 대장! 최강 힐러!"
"평생 따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평범한 레드로드 3인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감탄은 나중에 하죠."
강승현의 생각이 맞다면, 지금 고르디우스의 목적지는 환자들이 잔뜩 누워 있는 의무실이다.
"지금쯤 의무실은 개판일 테니까요."
환자들은 물론이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반 단원들은 고르디우스를 쓰러트릴 실력은커녕, 정신지배를 버틸 만한 정신력도 없다.
"빠, 빨리 가자!"
"젠장, 결국 헛걸음했잖아!"
강승현 일행은 정신없이 레드로드 의무실로 달려갔다.
-"으어아아아...."
"으으으으...으으...."
"역시 다들 당했군요."
비밀방을 빠져나온 강승현 일행을 반겨준 건, 고르디우스의 정신지배에 당한 레드로드 단원들이었다.
"애, 애들이 맛이 갔어!"
"다들 정신 차려!"
"다임스! 헌드레드! 데나리! Q터!"
로센트가 단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하지만 이름 좀 부른다고 세뇌당한 사람이 정신을 차릴 리가 없다.
[관찰의 눈]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마시며 [관찰의 눈]을 발동했다.
[세뇌]
[강력한 정신지배 공격에 당했다.]
[고르디우스 라르바한테 조종당하는 상태다.]
"저 중에는 숙주가 없네요."
공생체한테 기생 당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신지배에 당했을 때는 신체능력이 올라가지 않는다.
그건 스카라베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 쉽게 해치울 수 있겠어요."
"뭐?"
"저는 오른쪽을 맡겠습니다. 르페니 씨는 왼쪽을 맡으세요."
"야, 저 녀석들은 몬스터가 아니라 내 부하들이거든?"
르페니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동료를 쓸데없이 소중히 여기는 르페니의 성격상, 세뇌됐다 하더라도 자신의 부하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거죠."
"방금 해치운다고 했잖아!"
"대장!"
"여기는 우리한테 맡겨!"
그때, 니켈과 개스코인이 앞장섰다.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
"너희들!"
앞으로 나온 니켈과 개스코인은 굳게 다짐한 얼굴로 말했다.
"동료들을 공격하는 건 마음 아프지만."
"어차피 우리는 약하니까 맞아도 별로 안 아플 거야."
"그리고 이런 대사 꼭 해보고 싶었거든."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동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실제로 세뇌당한 단원들이나, 니켈&개스코인 콤비나 너무 약해서 서로에게 별 대미지를 주지 못했다.
"그럼 나도 애들을 막고 있을게."
로센트 역시 세뇌당한 단원들을 붙잡았다.
"나처럼 아무 능력 없는 사람이 가면 방해만 될 거야."
"그건 그렇네요."
"보스 몬스터는 두 사람에게 맡길게."
"알겠습니다."
"다들 조심하라고."
강승현과 르페니는 세 사람을 지나쳐갔다.
몇몇 단원들이 둘을 쫓아가려 했지만,
"못 가!"
"꼬우면 정신 차리든가!"
찰거머리 콤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타박! 타박! 타박!
'역시 아무나 숙주로 삼지는 않는군.'
강승현은 의무실로 달려가면서 생각했다.
방금 만났던 레드로드 조무래기들은 개스코인이나 로센트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평범한 단원들이었다.
'공생체는 숙주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강한 힘을 얻지.'
어차피 인간에게 기생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강한 녀석을 숙주로 삼는 게 정답이다.
'지금 김호정 씨는 페널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지. 그러니 기껏 기생해도 별 쓸모가 없을 거야.'
그러니 쿨쿨 자고 있는 김호정은 제외.
발릭 부부와 루디는 능력치가 레드로드 조무래기보다 못해서 당연히 제외다.
'그럼 남은 건... 탐색팀원뿐이군.'
레드로드 탐색팀은 르페니 다음으로 레드로드에서 강한 단원들이다.
그래봤자 차원이동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못되지만,
'공생체가 기생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벌컥!
두 사람은 레드로드 의무실에 도착했다. 잘 정리된 침대나 의자는 죄다 엎어진 상태였고, 선반이나 수납장은 모조리 박살 나 있었다.
'그리고 레드로드 탐색팀원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은....'
의무실 중앙에는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셔츠였지.'
아까 싸웠을 때 김호정에게 대미지를 입혔던 유일한 탐색팀원. 검은 셔츠 차림의 레드로드 단원이었다.
"한발 늦었네요. 저 친구는 이미 고르디우스 라르바한테 당했습니다."
검은 셔츠는 고르디우스 기생의 영향으로 붉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색됐고, 어깨에 입었던 상처가 말끔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왜 하필 저 녀석인데...!"
"르페니 씨, 이번엔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저 녀석은 방금 만난 단원들과 달리, 공생체의 영향으로 강력한 힘을 얻은 숙주다.
사실상 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나 마찬가지였다.
"동료라서 못 때린다는 개소리하지 말고."
"알았다고."
르페니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기다려, 대장."
그때 검은 셔츠가 입을 열었다.
126. 하이브 마인드 3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하지만... 난 멀쩡하다고."
검은 셔츠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분명 고르디우스한테 기생 당해 숙주가 됐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멀쩡하다고?'
물론 강력한 정신력으로 버티거나 엄청난 집념을 가진 사람은 고르디우스한테 기생하더라도 정신지배를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검은 셔츠는 아까까지 정신력 과다상실 상태로 쓰러진 상태였다. 정신지배를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너, 너 괜찮은 거야?"
"...어떻게 된 거죠?"
"운이 좋았어."
검은 셔츠가 바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붉은 색 액체와 부서진 통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까 고르디우스 그 자식이 쳐들어왔을 때."
"...."
"저기 놔둔 살충제 용액을 건드렸거든."
"이건 적화 제충국 엑기스네요."
강승현이 두 눈에 푸른 빛을 띄우며 말했다.
적화 제충국은 덴트롤 박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살충 효과를 가진 식물이다.
"하지만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죽일 만한 위력은 없을 텐데요."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건 가능하잖아."
검은 셔츠가 바닥에 뿌려진 적화 제충국 엑기스를 가리켰다. 바닥 곳곳에 액체를 뒤집어쓰고 죽은 스카라베가 보였다.
"저걸 뒤집어쓴 고르디우스가 몸부림치면서 나한테 달려들었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나 봐."
검은 셔츠한테 기생한 고르디우스는 즉시 정신지배를 시전했으나, 살충제의 여파로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머리가 엄청나게 아프긴 했지만... 이렇게 견뎌냈지."
그 결과, 검은 셔츠는 고르디우스의 정신지배를 무시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시발놈아...."
그 말을 들은 르페니는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너랑 싸워야 하나 싶어서 엄청 고민했다고."
녀석은 동료 사랑이 쓸데없이 넘쳐나는 레드로드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만큼, 검은 셔츠와 싸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승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인드였다.
"그래도 고르디우스가 기생 중인 상태라는 건 변함없죠."
단지 정신지배를 무시했을 뿐, 검은 셔츠는 여전히 공생체한테 기생당한 숙주였다.
"그런 걸 뱃속에 넣고 다니려면 찜찜할 텐데, 빨리 제거 치료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맞아. 살충제 효과가 얼마나 오래가겠냐? 이 녀석한테 부탁해서 빨리 치료 해."
르페니는 강승현을 가리켰다.
원래 기생형 몬스터를 치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실력 있는 힐러가 옆에 있었다.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그때, 검은 셔츠가 벽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이 녀석 덕분에 이런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다고."
우우웅.
녀석의 손 끝에 마력이 몰려들더니,
서어어!
날카롭게 뻗은 검의 형태로 변했다.
그 상태로 검을 휘두르자, 오묘한 빛깔의 검기가 퍼져나가며,
[착란의 검]
화아아악!
벽에 몰려 있던 스카라베 무리를 휩쓸었다.
브즈즈즈즈!
브즈즈즈!
그러자 검기에 휘말린 스카라베들이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마구 몸부림치며 벽에 돌진하기 시작했다.
[상태이상 '착란' 상태!]
파삭!
파사삭!
벽에 돌진한 스카라베는 무참하게 으스러졌다.
"야, 너 그런 거 쓸 수 있었어?"
"새로 얻은 힘인가 보네요."
검은 셔츠는 고르디우스의 정신지배를 견뎌낸 덕분에, 공생체가 제공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됐다.
방금 보여준 기술은 그것 중 하나인 것 같다.
"대장, 잘 봤지?"
"잘 보긴 했다만. 그래서 뭐?"
"...방금 발동한 건 마법사한테 치명적인 정신계 스킬이라고."
[착란의 검]의 정확한 효과는 혼란의 강화판 상태 이상 '착란'을 거는 스킬이다.
"정신계 스킬?"
"이것 말고도 잔뜩 있어. 하나같이 굉장한 것들이라고."
검은 셔츠가 들뜬 얼굴로 소리쳤다.
마법사들은 직업 특성상 정신 대미지에 엄청나게 취약하다. 어느 정도 대비는 해두겠지만, 상대가 강력한 정신공격을 가해오면 쉽게 대처할 수 없다.
"이 힘만 있으면 카마르 놈들을 밟아버릴... 아니, 카마르를 이 땅에서 지워버릴 수 있어!"
"야 너...."
"재수 없는 마법사들을 치워버리는 건 우리 레드로드의 평생의 꿈이었잖아!"
녀석은 공생체의 힘을 이용해서 카마르 테러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치만 나 혼자서는 좀 힘들어. 도움이 필요해.
"...."
"대장이 도와주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어."
강력한 정신공격에 강력한 스킬 캔슬이 합쳐지면 마법사는 절대 당해낼 수 없다.
르페니 또한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왜 망설여? 어차피 하려던 거였잖아?"
"...."
"트라코티가 휘말릴 것 같아서 관둔 거 아니었어? 고르디우스의 정신지배가 봉인당한 지금이 기회란 말이야!"
검은 셔츠가 그렇게 말하며 르페니에게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파악!
"...!"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검은 셔츠의 손바닥을 꿰뚫었다.
"자, 거기까지."
당연하지만 화살을 날린 건 강승현이었다.
검은 셔츠는 손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야?"
"이걸로 확실해졌어."
파악!
강승현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그쪽은 검은 셔츠가 아닙니다."
"뭐?"
르페니가 당황한 얼굴로 검은 셔츠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발사된 화살이 검은 셔츠를 향해 날아갔으나,
샤아악!
녀석은 기검을 휘둘러 날아온 화살을 가볍게 베어냈다.
"이 자식 말 듣지 마! 카마르 테러를 막으려고 아무 말이나 씨불이는 거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역시 이 자식은 우리 적이야. 도와줘, 대장!"
검은 셔츠가 르페니를 다급하게 불렀다.
르페니는 검은 셔츠 쪽으로 다가가려다 강승현을 향해 물었다.
"솔직히 너랑은 싸우기 싫다. 넌 미친 괴물 새끼니까.... 근데 나는 리더니까, 내 부하가 도움을 요청하면 당연히 도와야 해."
"...."
"하지만 이 녀석이 레드로드 소속이 아니라면 도울 필요가 없지.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나?"
그는 놀랍게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건 소속원을 두고 고민할 만큼 강승현이 믿을 만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고르디우스는 변신 능력이 없어! 저 자식 말에 넘어가는 건 아니지? 나라고 나! 네 친구 빌 세이헌!"
검은 셔츠는 무척 억울한 듯 소리쳤으나,
"바로 그겁니다."
강승현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고르디우스에 대해 알고 있죠?"
"뭐...?"
"공생체의 정체가 고르디우스 라르바라는 건 저랑 같이 있던 사람들 말고는 모를 텐데요."
공생체의 정체가 밝혀진 건 강승현이 레드로드 탐색팀을 전부 쓰러트리고 제단 방에 들어온 뒤다.
그 전까지 레드로드는 자신들이 발견한 몬스터가 공생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공생체인지는 몰랐다.
"근데 왜 그렇게 고르디우스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그게 궁금했거든요?"
당시 검은 셔츠, 빌 세이헌은 강승현한테 맞아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당연히 고르디우스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르페니 씨가 트라코티 때문에 카마르 테러를 관뒀다는 건 우리들의 비밀이었거든요."
다른 레드로드 단원들은 공생체가 위험해서 테러를 중단했다는 것밖에 모른다.
트라코티가 휘말릴까 봐 테러를 관뒀다는 걸 아는 존재는 그 자리에 있던 강승현과 르페니, 고치 속 고르디우스뿐이다.
"즉, 저 녀석은 검은 셔츠 세이헌 씨가 아니라... 세이헌 씨를 연기하는 고르디우스입니다."
상급 공생체는 기생한 숙주의 기억을 훔쳐 읽는 게 가능하다. 거기다 이 고르디우스는 보스 몬스터라 지능이 엄청나게 높다.
"아마 세이헌 씨의 기억을 토대로 그를 연기하면서 더 강력한 숙주, 르페니 씨의 몸으로 갈아탈 생각이었겠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다.
조금 실력 좋은 평민보다는 수준급 마력 반발자를 숙주로 쓰는 게 이득이니까.
"그럼 진짜 빌은?"
"진짜 세이헌 씨는 정신지배에 진작 당했죠."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고르디우스의 몸에 강력한 살충제를 퍼부어도, 정신력이 밑바닥난 인간이 정신지배를 견딜 리가 없다.
"정답이다."
이제 숨길 생각도 없는 건지, 고르디우스는 빌 세이헌 연기를 때려치웠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구나. 귀찮은 것."
샤아아아!
양손에서 기검을 생성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역시 저 녀석하고 싸워야 하잖아!"
"당연한 소리를.... 일단 흩어지죠."
"시발!"
파팟!
강승현과 르페니는 양쪽으로 흩어졌다.
사약!
콰아아앙!
고르디우스의 기검이 벽과 바위를 엄청난 속도로 베어 갈랐다.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기검에 갈려 나가는 건 바위가 아니라 두 사람의 팔다리였을 것이다.
파악!
"꽤 빠르잖아!"
숙주 빌 세이헌의 전투 스타일은 빠른 스피드로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빠른 놈이었는데, 공생체로 인해 강화되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격해왔다.
[만월의 빛]
샤아아!
고르디우스는 틈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녀석의 거대한 검기가 퍼져나갔다.
화아악!
본래 사용하던 [신월의 빛]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강렬한 검기가 벽과 바닥을 부수며 두 사람을 습격했다.
촤악!
"쉴 틈을 안 주네요."
가까스로 몸을 틀었으나,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퍼져나간 검기가 두 사람의 어깨와 팔을 스쳤다.
직접 베인 것도 아니고 가볍게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이래서 속도로 잘난 척하는 애들은 귀찮다니까."
강승현은 스태미나 포션을 입에 물었다.
속도가 워낙 빠르니 [작살 화살★]로 맞추는 건 불가능했다.
브즈즈즈!
거기다 고르디우스는 검기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곳곳의 스카라베를 조종해서 방해해왔다.
[스캐럽 볼]
[스캐럽 스피어]
스카라베 몇 마리들이 공처럼 드글드글 뭉쳐서 날아오거나, 땅에서 창처럼 솟아나는 식으로 공격해왔다.
"공생체를 제거할 방법은 없어?"
"있긴 한데, 위치를 알아내야 해요. 근데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냥은 볼 수가 없네요."
빠르게 움직이는 대상도 [관찰의 눈]을 쓰면 어떻게 볼 수는 있지만, 스태미나가 엄청나게 소모된다.
하필 [적출]도 스태미나가 꽤 많이 들어가는 스킬이라 동시에 쓸 수가 없다.
"그럼 한 대 쳐맞을 각오하고...."
르페니는 놈을 향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스킬 캔슬로 움직임을 봉인하면 돼!"
퍼억!
그러자 고르디우스는 스킬 쓰는 걸 멈추더니 평범한 주먹질로 공격해왔다.
"큭!"
르페니는 바로 가드 자세로 공격을 방어했다.
그의 스킬 캔슬은 사기지만, 상대가 마력이 없거나 아예 스킬을 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대미지도 묵직하네!"
녀석은 던전의 보스 몬스터인 만큼, 스킬을 쓰지 않아도 훌륭한 대미지가 터져나왔다.
르페니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자,
[만월의 빛]
다시 기검을 생성해 스킬을 날려댔다.
"아 진짜! 뭐 이딴 게 다 있어!"
르페니는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고르디우스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스킬을 날리고, 스킬 캔슬을 발동하려고 하면 평타를 날렸다.
"스킬 캔슬만 발동하면 발목을 잡을 수 있는데."
"정작 가까이 있을 땐 스킬을 안 쓰는군요."
어떻게든 원거리에서 스킬을 캔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스킬 캔슬은 어떤 식으로든 마력 반발자의 신체에 닿으면 발동하는 거였지.'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르페니에게 말했다.
"혹시 헌혈해보신 적 있으세요?"
127. 하이브 마인드 4
"헌혈?"
"르페니 씨의 피를 사용할 겁니다."
아즐 대륙 생명체의 피에는 독특한 힘이 깃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아이템 강화나 상처 회복, 탐지, 독성 등등.
그중 마력 반발자의 피에는 아주 강력한 마력 반발을 효과가 깃들어있다. 강승현은 그 피를 무기로 쓸 생각이다.
"저 자식한테 내 피를 쓰자고?"
"네."
"확실히 효과는 있겠네."
마력 반발자의 피가 몸에 묻으면 그걸 다 지워내기 전까진 스킬을 쓸 수가 없다. 그 상태로 스킬을 쓰려 했다간 그 즉시 전신에서 스파크가 터져나올 것이다.
"그치만 어떻게 할 건데?"
"뭐가요?"
"[투척]이나 [스플래시] 같은 건 못 쓴다고."
거기다 마력 반발자의 피는 특성상 다른 스킬이나 아이템에 조합해서 쓸 수 없다.
혹시 피를 던지다가 실수로 [투척] 스킬을 쓰기라도 하면 그 즉시 스킬 캔슬과 함께 마력 역류가 터져서 자폭하는 꼴이다.
"뭐, 스킬 없이 던지면 마력 역류 터질 일은 없겠지만... 저 자식이 순순히 맞아주겠냐?"
고르디우스는 르페니가 마력 반발자라는 걸 알고 있다. 그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스킬을 쓰지 않고 평타로만 공격하는 게 그 증거다.
"속도가 느리면 또 모르겠지만."
"더럽게 빠른 친구이긴 하죠."
고르디우스는 스피드도 엄청나게 빨라서 스킬을 쓰지 않으면 공격을 맞출 수가 없다.
"뭣보다 흘린 피는 시간이 지나면 마력 반발 효과가 사라진다고. 놔두면 그냥 평범한 피로 변해서, 함정 같은 건 설치도 못 해."
마력 반발자의 피는 강력한 성능을 지녔지만, 다루기 힘든 아이템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폭발하고, 오래 보관할 수도 없다.
이런저런 단점 때문에 전투나 제작 재료로 쓰이는 일은 드물었다.
"아,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강승현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고, 위기를 기회로 삼거나 역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저한테 좋은 작전이 하나 있어서요."
-강승현과 르페니는 잠깐의 대화를 끝냈다.
"일단 의무실 밖으로 나가죠."
"좋아! 해보자고!"
타다닷!
가장 먼저 강승현이 의무실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르페니 역시 강승현의 뒤를 따라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도망치는 건가."
두 사람이 도망치는 걸 보던 고르디우스가 자세를 잡았다.
던전에서 보스랑 싸우기 싫을 때는 밖으로 도망치는 게 상식이다. 보스 몬스터는 보통 입구 포탈에서 나갈 수 없으니까.
"쓸데없는 짓을."
하지만 전이 던전은 다르다.
입구 포탈 같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초속]
탓!
고르디우스는 이동속도를 끌어올리더니 엄청난 스피드로 질주해 두 사람을 추격했다.
"그건 그렇고...."
퍼억!
그때, 의무실 문을 지나치던 르페니가 돌벽을 걷어차 박살 냈다.
"받은 건 돌려줘야지!"
쿠구구궁!!
동시에 천장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바위 파편들이 의무실 입구 문을 가로막았다. 아까 고르디우스가 강승현 일행을 가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
콰아아아앙!
물론 고르디우스 역시 엄청난 실력을 가진 보스 몬스터. 녀석은 주저 없이 기검을 휘둘러 막힌 문을 뚫었다.
'모습을 감췄군.'
하지만 강승현 일행은 그 잠깐의 틈을 기회로 만들었다. 고르디우스가 바위를 부수는 사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봤자 수명을 몇 분 늘린 것뿐이다.'
콰악!
고르디우스는 벽에 기검을 꽂더니 마력을 흘려보냈다.
벽으로 흘러 들어간 마력이 바위틈에 잠들어 있던 스카라베 떼에 접촉했다.
브즈즈즈즈!
그러자 석화가 풀리며 깨어난 스카라베 떼가 쏟아져 나왔다. 놈들은 시끄럽게 날갯짓하며 아지트 곳곳으로 흩어졌다.
'여기 있군.'
고르디우스는 스카라베를 퍼트려 강승현 일행을 찾아냈다.
르페니의 위치는 의무실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모퉁이 쪽, 강승현의 위치는 거기서 반대쪽에 있는 단원 숙소 안이었다.
'기습할 생각인가? 한심한 발상이다.'
르페니는 고르디우스를 기습하려는 건지, 초조한 얼굴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타닷!
'좋다. 우선 너부터 처리해주마.'
고르디우스는 가장 먼저 르페니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마력 반발자를 숙주로 삼으면 강력한 스킬 캔슬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정신지배와 녀석의 마력 반발력을 합치면 두려울 게 없지.'
그리고 그 힘으로 가장 먼저 강승현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마력이 스카라베보다 낮은 주제에 나를 방해하다니.... 그런 쓰레기는 숙주로 삼을 가치도 없다.'
녀석은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한 시건방진 인간이었으니까.
'바로 죽여버리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 했다.
콰아아아!
쿠구구궁!
고르디우스가 고속으로 움직일 때마다 벽이 거세게 진동했다. 놈은 르페니가 몸을 숨기고 있는 모퉁이에 도달했다.
[만월의 빛]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검기를 날리려 했다.
타닷!
그때였다.
"시발 지금이다!"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르페니가 밖으로 뛰쳐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안색이 무척 창백하고, 팔에 상처가 생겼군. 피를 뽑아낸 듯한 상처야.'
녀석은 붉은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거기다 저 병은 마력을 가공해 제작한 포션병이 아니라 일반 유리병이다.'
고르디우스는 그 잠깐 사이에 르페니를 살피고 아까 엿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르페니 씨의 피를 사용할 겁니다.
-저 자식한테 내 피를 쓰자고?
두 사람은 마력 반발자의 혈액을 사용해 고르디우스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거나 처먹어!"
르페니는 고르디우스를 향해 병을 투척했다.
후우욱!
'병 안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 더 알아볼 것도 없군. 마력 반발자의 혈액이다.'
고르디우스는 르페니가 투척한 포션이 녀석의 피라고 확신했다.
'그렇다면야 기검으로 공격할 순 없지.'
마력 반발자의 피가 담긴 병을 기검으로 베어냈다간 강력한 마력 스파크가 터질 게 뻔하다.
파앗!
고르디우스는 생성한 기검을 해제하더니, 주위에 날아다니던 스카라베를 불러모았다. 스카라베 떼는 살아있는 방패가 되어 고르디우스를 보호했다.
'스카라베를 써서 막는 게 정답이다.'
이때, 레어 몬스터가 가진 [우월감]을 사용해서 부하를 불러모으면 스킬 캔슬과 함께 마력 역류가 발생한다.
'녀석들도 아마 그걸 노렸겠지.'
그러나 고르디우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정신지배에 성공한 개체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신의 손발처럼 다룰 수 있다.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고르디우스의 또 다른 육체가 되는 것이다.
'안됐지만, 이 몸은 피라미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다른 개체를 조종해서 마력 반발자의 피를 건드려도 마력 역류가 발생하지 않았다.
브즈즈즈!
쨍그랑!
몰려든 스카라베가 날아온 유리병을 몸으로 막아냈다.
촤아악!
유리병이 박살 나면서 안에 담긴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마력 역류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고 고르디우스에겐 한 방울도 닿지 못했다.
"아쉽게 됐군."
브즈즈즈즈!
고르디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스카라베를 쫓아냈다. 혹시라도 몸에 닿지 않도록 말이다.
"기껏 생각해낸 작전이 무산됐어."
"...."
르페니는 아무 말 없이 고르디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라면 좀 더 좋은 선택을 했을 텐데."
고르디우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르페니를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체질 때문에 대부분의 스킬에 저항력과 반감을 갖고 있지. 상당히 귀찮지만 유용해.'
그래서 르페니를 숙주로 삼고 정신지배를 걸기 위해선 미리 상태이상을 이용해 정신력을 대폭 깎아놔야 했다.
마력 반발 체질은 스킬 위력을 줄여줄 뿐이지, 정신력 감소를 완전히 막는 건 아니었으니까.
'우선 [착란의 검]부터 사용해볼까.'
아까 빌 세이헌을 연기할 때 보여준 [착란의 검]은 카마르 마법사를 처리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르페니를 숙주로 쓸 때 사용할 생각으로 준비한 스킬이었다.
"네 힘과 육체는... 내가 접수하마."
고르디우스가 스킬을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파바바박!
등 뒤에서 날아온 붉은 화살이 고르디우스의 팔이나 어깨, 등을 꿰뚫었다.
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무산? 누구 맘대로?"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그렇군. 진짜 목적은 이거였나?"
피가 담긴 병은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
놈들이 진짜로 노린 건 자신이 르페니한테 시선이 쏠린 사이 기습 공격하는 것!
여기까지 떠올린 고르디우스는 같잖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지?"
우선 화살 대미지는 그리 높지 않았다. 맞아봤자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심장이나 뇌를 건드렸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고르디우스가 사용하는 숙주는 르페니의 동료인 빌 세이헌이다.
"숙주가 죽을까 봐 치명상도 입히지 못하는 하찮은 것들아!"
고르디우스는 두 사람을 크게 비웃으며 다시 한번 [만월의 빛]을 발동하려 했다.
"아, 스킬 쓰게?"
그걸 본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만.... 저놈의 팔에도 상처가?'
고르디우스는 그제서야 르페니뿐만 아니라 강승현의 팔에도 상처가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마찬가지로 피를 뽑아낸 것 같은 상처였다.
'이 자식들. 혹시 뭔가 꾸미고 있는 건가?'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고르디우스는 스킬을 발동을 멈출 수 없었다.
"잘 가라."
파직.
파직.
그 순간, 몸에 박힌 붉은 화살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오더니.
파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빛과 함께 폭발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요란한 폭발음 사이로 고르디우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 듣기 좋고."
"제대로 먹혔네요."
강승현과 르페니는 미소를 지으며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무슨 짓을!"
고르디우스는 다시 한번 스킬을 발동하려 했다.
파바박!
강승현은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겨 녀석의 몸에 붉은 화살을 박았다.
파지지지직!
"이, 끄아아아아!"
이번에도 강력한 스파크가 터져 나오며, 몸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고르디우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렀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그 화살은 평범한 화살이 아냐."
르페니가 씩 웃으며 소리쳤다.
"내 피로 만든 화살이라고!"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을 생성합니다.]
128. 채혈
"따돌리는 데 성공했네요."
"그래봤자 몇 분 못 버틸걸."
약 10분 전.
강승현 일행은 고르디우스의 눈을 피해 의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조만간 쫓아올 거야."
르페니가 뒤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벽을 무너트려 녀석의 발목을 잡긴 했지만, 5~6분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5분? 그 정도면 충분하죠."
강승현이 스킬을 발동하자 그의 손에 반투명한 바늘 하나가 생겨났다.
[채혈]
[채혈]은 상대의 몸에 바늘을 꽂아 '출혈'을 걸고 피를 뽑을 수 있는 스킬이다.
공격용으로도 쓸 만해 보이지만, 피를 뽑는 동안 스태미나가 계속 깎이기 때문에 싸울 때는 적합하지 않다.
팍!
[상태이상 '출혈' 상태!]
르페니의 팔에 채혈 바늘을 박아넣자, 반투명한 바늘이 붉게 물들며 피를 뽑기 시작했다. 뽑아낸 피는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오염될 걱정도 없다.
"시간 없으니 간단하게 말할게요."
강승현은 [채혈]과 함께 계획을 설명했다.
"그냥 단순하게 피를 던져서 뿌리는 건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그러겠지. 빠른 스피드로 그냥 피하거나, 스카라베를 불러다 막거나."
"그래서 저는 녀석을 속일 생각입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을 생성합니다.]
본래 마력 반발자의 피는 특성 때문에 스킬로 가공할 수 없으나, 마력이 없는 강승현은 피의 특성을 무시하고 화살로 만들었다.
"이건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입니다. 르페니 씨의 피로 만들었죠."
"내 피로 만든 화살이라고?"
겉보기에는 평범한 화살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화살을 한 발이라도 맞은 상태로 스킬을 쓴다면,
"마력 반발자와 접촉했을 때와 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발동하려던 스킬이 취소되는 건 물론이고, 마력 역류와 함께 폭발이 일어난다.
스킬로 막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보유한 마력이 많을수록 강한 대미지를 받게 된다.
"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도 마력을 사용한다면 100%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소리죠."
당연히 보스 몬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제는 화살을 맞추는 건데... 가능하겠냐?"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팍!
[채혈]
강승현은 자신의 팔에 채혈 바늘을 꽂았다.
"이 녀석으로."
[상태이상 '출혈' 상태!]
마찬가지로 채혈 바늘이 붉게 물들며 몸속 피가 뽑혀 나왔다. 강승현은 적당히 뽑아낸 자신의 피를 병에 옮겨 담았다.
"그건... 네 피잖아?"
"네, 이건 아무 효과 없는 평범한 피예요."
하지만 르페니가 사용한다면 누구나 마력 반발자의 피로 착각할 것이다.
마력 반발자의 피는 마력에 닿지만 않으면 평범한 인간의 피와 다를 게 없으니까.
"르페니 씨는 이걸 던져서 주의를 끌어주세요. 저는 그사이 평범한 화살인 척, 이 화살을 날리겠습니다."
고르디우스는 치밀하고 신중한 적이다.
두 사람이 아까 실컷 떠든 덕분에, 녀석은 강승현 일행의 작전을 알고 있는 상태다.
"분명 빈틈이 생길 테니까요."
그러니 그 상황에 르페니가 피가 담긴 병을 던진다면, 고르디우스는 마력 반발자의 피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아마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수상한 혈액 병을 처리할 것이다.
"괜찮은데? 나쁘지 않아."
병을 받은 르페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브즈즈즈즈!
브즈즈!
그때, 스카라베 몇 마리가 두 사람을 발견하더니 황급히 되돌아갔다.
"고르디우스의 따까리다!"
"우리 위치를 알아냈으니 곧 오겠네요. 슬슬 준비하죠."
"좋아. 해보자고."
르페니는 미끼 역할을 맡아서 고르디우스를 유인하고, 강승현은 빈틈을 노려서 습격.
두 사람은 흩어져서 작전을 개시했다.
"아, 그런데."
자리를 떠나기 전.
르페니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굳이 속일 필요 있어? 어차피 어그로 끌 거면 내 피로 하는 게 낫잖아."
"그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르페니가 이번 싸움으로 너무 많은 부상을 입은 상태라 피를 과도하게 뽑을 수 없다는 점이었고.
"재밌을 것 같아서요."
다른 하나는 고르디우스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피를 마력 반발자의 피라고 착각하고 난리 치는 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야, 기대 이상이네요."
"크아아아아아!"
그리고 다시 현재.
실제로 고르디우스는 강승현의 이야기를 듣고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었다.
"우릴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닙니까?"
"이... 역겨운 것이!!!!"
그렇게 피하려던 마력 반발자의 피에 제대로 당한 것도 모자라, 신나게 조롱당했으니까.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속은 것이다.
"마력 반발자의 피가 몸에 주입된 상태에서 스킬을 쓰려고 하니 그렇게 되죠."
"네놈의 목을 잡아 뜯어주마!"
고르디우스는 분노를 원동력으로 스킬 캔슬로 인한 속박을 풀어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시지 그랬어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을 생성합니다.]
강승현은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 고르디우스의 몸에 붉은 화살을 박아넣었다.
파바바박!
"같은 수법에 또 당할 것 같으냐!"
이번에는 스킬 캔슬이 발동하지 않았다. 고르디우스가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보스급 몬스터쯤 되면 스킬 없이 평타만으로도 모험가를 압도할 수 있죠."
하지만 강승현은 그것도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포션병을 꺼내 투척했다.
[투척★]
쨍그랑!
파지지지직!
"끄아아아악!"
포션병 속 내용물이 고르디우스의 몸에 끼얹어진 순간, 몸에 박힌 화살이 스파크와 함께 폭발을 일으켰다.
"궁금해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방금 그건 그냥 마력 포션입니다."
몸에 화살이 박힌 상대가 스킬을 쓰지 않으려 할 땐, 마력 포션을 사용하면 스킬 캔슬을 강제로 유도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마력이 닿기만 하면 되거든요."
툭, 탁!
강승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마력 포션을 위로 던졌다 받더니,
[투척★]
다시 한번 고르디우스를 향해 투척했다.
콰아아앙!
콰아앙!
몸에 박힌 화살이 반응하면서, 화약고에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강한 폭발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키아아아아아아아!!!!"
고르디우스는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우드드득!
녀석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화살을 뽑아냈다. 평범한 몬스터라면 진작 나가떨어졌지만, 보스 몬스터라 버텨낸 것이다.
"...화살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네 녀석이 이겼겠지만, 아쉽게 됐군."
고르디우스는 뽑아낸 화살을 내팽개쳤다.
그 말대로 강승현은 아까부터 화살을 발사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이미 한계다."
"허억, 허억...."
"피를 더 뽑아냈다간 죽겠지."
실제로 르페니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마력 반발 화살을 만드느라 계속해서 피를 [채혈] 당했기 때문이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꺼."
"그러다 진짜 죽습니다."
애초에 녀석은 강승현과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다. 몸에 입은 부상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무리하게 전투했으니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저렇게 너덜너덜한 녀석은 숙주로 삼을 가치도 없지."
고르디우스는 두 사람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 화살이 없다면 네놈은 아무것도 아냐. 죽어라!"
샤아아!
녀석이 기검을 생성해 달려든 순간이었다.
"...화살이 없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강승현이 미소를 지으며 석궁을 겨눴다.
고르디우스의 말대로 르페니의 체력은 한계였고, 비축해둔 혈액은 바닥난지 오래다.
하지만 강승현에겐 아직 쓸 수 있는 화살이 잔뜩 있었다.
[프리아의 화살 회수]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을 회수합니다.]
그가 [화살 회수] 스킬을 발동하자 지금까지 사용한 모든 마력 반발 화살이 인벤토리로 회수되기 시작했다.
[회수 성공!]
[마력 반발자 혈액 화살 화살.]
한번 회수한 화살은 다시 회수하려면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이번 공격을 버틴다면 고르디우스는 강승현을 이길 수 있다.
파바바바박!
강승현은 방아쇠를 당겨 방금 회수한 화살을 고르디우스한테 몽땅 때려 박았다.
"버틸 수 있다면 말이지."
파지지지지직!
콰아아아앙!
수십 발의 화살이 녀석의 몸을 동시에 꿰뚫고, 그 위에 마력 포션이 끼얹어지자 개운한 마력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쿠웅!
고르디우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지금이다.'
강승현은 들고 있던 석궁을 집어던졌다.
아직 화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이상 발사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대로 공격해봤자 숙주만 죽겠지.'
이제까지는 공생체 특유의 신체강화 능력과 보스 몬스터의 파워 덕분에 버틴 거지만, 이제 숙주의 몸도 한계다.
'공생체 본체를 처치해야 해.'
강승현은 쓰러진 고르디우스를 살폈다.
방금 그 충격으로 공생체 녀석은 죽은 게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다. 녀석은 깨어나자마자 숙주를 버리고 새 숙주를 찾아 도망칠 테니, 그 전에 잡아야했다.
'이 녀석은 분명 기생한 지 얼마 안 됐지.'
본래 숙주의 몸에 들어온 기생형 몬스터는 안전한 장소로 옮겨간다. 조종하기 편하게 뇌를 지배하거나, 복부나 내장에 들러붙어 영양분을 갈취하거나.
하지만 고르디우스는 강승현 일행과 전투하느라 다른 장소로 옮겨갈 시간이 없었다.
'기생형 몬스터는 숙주의 몸에 기생할 때 흔적을 남긴다. 분명 그 근처에 있을 거야.'
[관찰의 눈]
강승현은 [관찰의 눈]을 발동해 숙주의 몸을 살폈다. 맨눈으로 봐서는 별 티가 나지 않았지만,
[뭔가가 파고든 흔적이 남아 있다.]
[고르디우스 라르바가 자리 잡고 있다.]
[대상은 '기절' 상태다.]
[관찰의 눈]을 통해 살펴보자 목 부근에 이러한 정보와 함께 고르디우스 본체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찾았다!'
본래라면 단검으로 목을 째고 공생체를 빼내야 하겠지만,
[적출]
샤아아!
강승현은 [적출]을 발동해, 반투명한 유리 해골 손아귀를 생성했다.
덜컥, 덜컥, 덜컥!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뼈다귀 손이 빌 세이헌의 목을 움켜쥐었다.
파아아아!
그러자 몸속에 잠복해 있던 고르디우스가 빛과 함께 사라지더니 강승현의 손 위에 나타났다.
['기절' 상태에서 풀려났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정신을 차렸다.
촤아아악!
고르디우스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강승현을 숙주로 삼기 위해 뛰어들었다. [적출]을 다시 사용하기엔, 녀석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복종해라>
<복종해라>
<복종해라>
<복종해라>
고르디우스가 강승현의 손목에 파고든 순간, 엄청난 이명과 함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지배를 사용해 숙주를 조종하려는 것이다.
"귀찮게."
그러나 강승현은 같잖다는 얼굴로 단검을 꺼내더니,
푸욱!
능숙한 솜씨로 손목에 단검을 찔러 넣어, 몸에 파고든 고르디우스 본체를 끄집어냈다.
단검에 꿰뚫린 고르디우스는 몸을 바르르 떨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저,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는다니!>
"내가 남의 말 듣는 거 싫어하거든."
[정신지배 완전 무효!]
[명령 무시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창을 힐끔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는 꼭 이 스킬 만이 아니어도 워낙 멘탈이 튼튼해서 정신지배의 효과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럼 잘 가라."
강승현은 그대로 고르디우스를 내려찍으려 했다.
<기다려! 기다려!>
<할 말이 있다!>
그때, 녀석이 필사적인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129. 결코, 좋은 녀석은
"할 말이 있다고?"
고르디우스를 내려찍으려던 강승현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단검 끝에 꿰뚫린 고르디우스는 몸을 꿈틀거리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네 능력을 강화해주겠다!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고르디우스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본래라면 대가를 받아가야 하지만... 날 살려준다면 그걸로 대신하지. 어떤가?>
"...."
<거기다 너는 내 정신지배를 무시하니 나한테 조종당할 일도 없지 않나?>
자신을 구해주는 대가로 강승현의 능력을 강화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언뜻 보면 서로 손해 볼 게 없는 거래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나한테 필요 없는 걸 제안하네."
하지만 강승현은 고민 없이 거절했다.
<뭐라고?>
"어차피 신체 능력이나 좀 올려주고, 공격 스킬 몇 개나 던져줄 거 아냐."
공생체의 힘으로 강화할 수 있는 건 근력이나 체력, 민첩함 같은 보편적인 신체 능력이다.
힐러에겐 딱히 필요 없는 것들이라서.
"나랑 거래하고 싶으면 내가 원하는 걸 준비하셔야지."
강승현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고르디우스를 베어버리려 했다.
<전이 던전에 대한 정보!>
그때, 고르디우스가 처절한 텔레파시를 발산했다.
<네 녀석, 이 던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지 않나? 내 목숨을 살려준다면 아는 정보를 전부 털어놓겠다!>
"...전이 던전의 정보라."
전이 던전은 몇백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아서 아즐 대륙에서 완벽하게 잊혀졌다. 그나마 있는 거라곤 아주 간단한 자료뿐이고, 구체적인 정보는 소실된 지 오래다.
'확실히 정보가 필요하긴 하네. 모험가 조합 직원들도 전이 던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일단 붉은 숲에 전이 던전이 나타났다는 건, 다른 장소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은 전이 던전이 일반 던전보다 난이도가 높다는 것도 모르잖아.
당장 이번 던전만 해도 그렇다.
던전의 보스 몬스터인 고르디우스가 강력한 정신계 스킬을 갖고 있어서 정신지배 대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일단 차원 이동자들한테는 알리는 편이 좋으려나.'
지구로 갈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는 차원이동자들은 그 특성상 던전이나 버려진 땅, 오염 지대 같은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녀석들이 전이 던전을 발견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 게 뻔하잖아.'
차원이동자들이 아즐대륙민보다 훨씬 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강한 힘을 가진 만큼, 강한 몬스터와 싸우거나 위험한 던전에 들어갈 확률이 높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강승현은 고르디우스의 제안을 승낙했다.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죠."
-<나도 본래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던전을 제작하고 있었다.>
본래 고르디우스 라르바의 서식지는 아즐 대륙 남부의 사막지대다. 당연히 던전도 사막지대의 거칠고 메마른 모래 바위를 기반으로 제작하고 있었으나,
<그러다 던전이 거의 완성될 때쯤, 공간을 뒤트는 듯한 강력한 공격을 받았지.>
고르디우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이 제작한 던전과 함께 붉은 숲에 와 있었다고 한다.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았는데."
<사막지대에 사는 몬스터가 이런 눅눅한 곳에 일부러 올 리가 없잖아!>
재수 없게도 붉은 숲은 피츠타 호수의 영향으로 습하고 축축한 장소가 많은 지역이었다.
서식 환경이 맞질 않으니 고르디우스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방금 설명했듯 아즐 대륙의 일반 던전, 아공간 던전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누구나?"
몬스터는 물론이고, 인간도 마력만 충분하다면 자신만의 아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차원이동자들이 사용하는 인벤토리 시스템 역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의 일종이다.
<물론 몬스터가 던전을 창조하려면 보스급 몬스터의 힘을 얻어야하고, 인간들은 검성이나 대마법사, 아크프리스트 정도의 실력자들이 아니고서야 힘들겠지.>
그래서 아즐 대륙에서 아이템의 도움 없이 인벤토리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상태창 치트키로 꿀 빠는 차원이동자들과 특정 분야의 달인들, 극소수의 실력자들 외에는 거의 없다.
"그럼 누구나가 아니잖아."
<마력만 많이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론상 아즐 대륙의 구성원은 누구나 던전을 창조할 수 있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이 던전은 다르지. 차원을 초월하는 힘이 없으면 창조할 수 없다.>
전이 던전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공간을 아즐 대륙으로 옮겨온 것을 말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차원을 초월하는 강대한 힘을 가져야 했다.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도 공간을 통째로 옮기는 건 불가능해. 그게 가능한 존재는....>
고르디우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다음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신적 존재뿐이다.>
"신이라고?"
아즐 역사에서 지워진 전이 던전의 정보.
그건 전이 던전이 차원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신적 존재로 인해 탄생했다는 점이다.
"지난 몇백 년간 조용히 있다가 왜 이제와서?"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런 걸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니까.>
미묘하게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누군지, 어떤 신인지는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신적 존재가 전이 던전을 만들기 위해 외부의 공간을 끌어들이면, 아즐 대륙의 시공간이 크게 뒤틀리게 된다.
<결코, 좋은 녀석은 아니라는 거지.>
그걸 무시하고 계속해서 전이 던전을 만들어내면, 아즐 대륙은 시공간의 뒤틀림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그 말은, 어딘가에 아즐 대륙의 멸망을 바라는 악신이 존재한다는 건데.'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됐다. 전이 던전은 신이 아즐 대륙을 멸망시킬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중요한 정보가 왜 사라졌지?'
아무리 전이 던전이 몇백 년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많은 정보가 그냥 잊혀지는 건 부자연스럽다.
'...누가 의도적으로 지웠구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다.
강승현은 어떤 집단이 의도적으로 전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숨겼다고 확신했다.
"별로 기대하진 않았지만, 생각 이상이네요. 감사합니...."
강승현이 고르디우스한테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방, 심했구나아아아!"
등 뒤에서, 르페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눈감고 봐도 고르디우스에게 감염된 르페니가 달려들고 있었다.
"...."
지금 르페니는 몸의 피를 잔뜩 뽑아낸 탓에 곧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다.
그래서 녀석은 강승현이 잠깐 생각에 잠긴 틈을 노려서 기생했다. 이런 상태에서 정신지배를 버티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아까 받았던 걸 그대로 되갚아주마! 스킬 캔슬이다!"
고르디우스는 강승현이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스킬 캔슬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넌 역시 안 되겠다."
좋은 정보를 넘겨줬으니 이번 한 번은 봐줄 생각이었지만, 이 꼴을 보아하니 봐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관찰의 눈]
"어?"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을 뿜어내자, 고르디우스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 마력 반발자에 접촉한 상태인데 스킬을 쓴다고?"
[적출]
녀석이 당황한 사이, 강승현은 [적출]을 발동했다.
샤아아아!
배후로 거대한 뼈다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르페니의 몸에 기생한 고르디우스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아까랑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목을 노렸군.'
덜컥, 덜컥, 덜컥!
강승현은 반투명한 해골 손아귀로 르페니의 목을 움켜쥐었다.
파아아아!
그러자 아까랑 똑같이 안에 잠복해 있던 고르디우스가 강승현의 손 위로 끌려왔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분명 마력 반발자를 숙주로...!'
그게 고르디우스의 마지막 독백이었다.
푸우욱!
강승현은 그 즉시 단검을 휘둘러 고르디우스의 몸체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투둑.
토막난 벌레 잔해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강승현은 단검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거 나한테 안 통하거든요."
물론, 죽은 고르디우스는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털썩!
잠복해 있던 고르디우스가 빠져나가자, 르페니의 몸이 쓰레기 버려지듯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기생충 감염 환자가 둘로 늘어났네."
강승현은 바닥에 쓰러진 르페니와 빌 세이헌을 바라보았다.
둘 다 사이 좋게 엎어진 상태였다.
'빌 세이헌은 실컷 얻어맞긴 했지만, 고르디우스가 육체를 강화한 덕분에 치명적인 상처는 없군.'
피해량만 따지면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이 다친 환자였지만, 가장 위급한 환자는 아니다.
하루 정도 푹 쉬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르페니 데머셔 이 자식인데.'
하지만 르페니는 아니었다.
녀석은 뒤늦게 공생체의 강화를 받긴 했어도, 그 전에 대량의 혈액 손실로 상태이상 '과다출혈'에 걸린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안 좋았는데, 고르디우스가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상태가 매우 나빠졌다.
'일단 수혈부터 해야 해.'
지금 가장 급한 건 과다출혈이다.
빠져나간 피를 채우지 않으면 상처 치료는 아 무의미가 없다.
타다닷!
타닷!
"대장! 대장! 어떻게 됐어?"
"우리 왔어! 이제 안심해!"
"르페니, 강승현 힐러. 다들 괜찮아?"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니켈과 개스코인, 로센트, 이하 레드로드 3인방이 나타났다.
"조종 당하던 애들이 쓰러지더라구."
강승현이 고르디우스를 처치하면서, 단원들에게 걸려 있던 정신지배가 전부 해제된 모양이다.
"다들 마침 잘 왔어요. 지금 당장 수혈이 필요해요."
"수혈? 뭐예요 그게?"
"...르페니 씨가 과다출혈로 쓰려져서 피가 필요하다구요."
"엥!!!???"
"대장??"
두 사람은 그제야 쓰러진 르페니를 보고 기겁했다.
"내 피를 써요!"
"나도 피 드릴게요!"
둘은 1초도 망설임 없이 팔을 걷어 올렸다.
[수혈]
"두 사람은 안 돼요."
[수혈] 스킬을 사용하면 혈액형은 알 수 없어도 수혈 가능 여부를 체크할 수 있다.
[이 사람의 피는 수혈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의 피는 수혈할 수 없습니다.]
니켈과 개스코인은 수혈 불가 판정이 떴다. 이걸 무시하고 그냥 [수혈] 했다간 르페니가 쇼크로 사망한다.
"다른 사람이 필요하겠는데요."
"가서 다른 애들 불러올게!"
니켈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르, 르페니는 말이야...."
그때, 로센트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피를 받을 수가 없어."
"설마, 마력 반발 체질 때문에?"
아즐대륙에 사는 생물의 피 속에는 매우 적은 양이긴 해도 마력이 포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마력 반발자는 남에게 피를 수혈받아도 마력 반발 때문에 제구실할 수 없다.
'그럼 르페니의 몸에 피를 수혈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마력 반발자거나, 몸에 마력이 없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이론상으로 마력이 1도 없는 강승현의 피는 수혈해도 문제가 없겠지만.
[이 사람의 피는 수혈할 수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혈액형이 맞을 때의 일이다.
아즐 대륙 인간의 혈액형은 지구의 ABO식보다 개수가 많기 때문이다.
'시발, 지금 당장 마력 반발자의 피를 어디서 구하겠냐고.'
상당히 희귀한 체질인 마력 반발자의 피를, 그것도 일치하는 혈액형을 가진 피를 지금 당장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정도로 희귀한 피를 가진 사람은 본인의 피를 평소에 뽑아뒀다가 쓰는 게 낫다.
'...사실 인벤토리에 마력 반발자의 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강승현은 자신의 인벤토리 구석을 바라보았다. 꽤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르페니의 혈액이었던 것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사용할 수가 없어.'
왜냐면 지금 인벤토리에 남은 건 르페니의 피를 재료로 만든 마력 반발자의 혈액 '화살'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쏴봤자. 수혈 효과가 아니라 피를 입으로 마시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오겠지.'
뭔가 새로운 스킬을 얻지 않는 한 이 화살은 수혈용으로 쓸 수가 없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잠시 생각하던 강승현은 상태창을 열었다.
'가급적 안 쓰고 싶었는데.'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만 쓰려고 남겨둔 비장의 수단을 쓸 시간이다.
130. 비장의 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