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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50-60

50. 유적 심층부 4

"검은 손아귀가... 소멸했다고?"

아일은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검은 손아귀가 저렇게 쉽게 소멸한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검은 손아귀는...."

푸욱!

아일은 다시 한번 자신의 팔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분이 내게 내려주신 신의 힘이란 말이다!"

이번에도 피 묻은 단검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콱!!

부서졌던 검은 손아귀가 다시 나타나 강승현을 움켜잡았으나,

"제물이 되어...."

하지만 이번에도 변함없이.

파아아앗!!

강승현을 붙잡은 검은 손아귀는 강력한 힘에 의해 소멸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일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으나,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강승현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2 :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강승현이 검은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던 이유는 이 아이템 덕분이었다.

'이 녀석 덕분에 살아남은 거 같긴 한데.'

[키르카라슈텔의 보주]

[강력한 마력 저항]

[강력한 마법 방어]

[그 외엔 알 수 없음]

'여기에 신성 스킬을 무효화시킨다는 내용은 없었단 말이지.'

아일이 사용한 [검은 손아귀]는 언뜻 보면 흑마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흑마술이 아니다.

사제들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내려준 힘. 즉, '신성 스킬'이다.

신성력 대신 흑마력을 사용해서 일반 신성 스킬처럼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무래도 숨겨진 능력이 더 있나 본데?'

[관찰의 눈]으로 조사한 아이템은 아주 간단한 정보만 알아낼 수 있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에 뭔가 특별한 능력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다.

"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일이 길길 날뛰며 단검을 허공에 긋자, 흑마력이 담긴 검기가 날아왔다.

파아아아앗!

[슬롯에 등록된 아이템 효과가 발동합니다.]

하지만 그 역시, 강승현의 몸에 닿는 순간 소멸했다.

아일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이럴 수가...."

"아, 혹시?"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는 보스룸에서 발견한 아이템. 이 물건의 본래 주인은 던전의 보스, 아일 크로아다.

'이 보주에 숨겨진 능력이 저 녀석하고 뭔가 관계있는 건가?'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보주를 꺼냈다.

"이거 잘 썼습니다. 효과 좋네요?"

"이, 이런 좀도둑 새끼.... 그걸 어느 틈에!!!"

보주를 꺼내 보여주자 아일은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당장 내놔!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어? 에르간 씨가 한 말 잊으셨나요?"

보스룸에서 찾은 아이템은 찾은 사람이 임자. 다른 파티원에게 나눠줄 필요는 없다.

"저보다 먼저 찾으셨어야죠."

"네놈이 훔쳐 간 거잖아!"

물론 이 보주의 원래 주인은 던전의 보스인 아일이겠지만.

"분신이라고 해도 보스를 쓰러트린 건 저니까 제가 가져야죠."

보스를 쓰러트린 모험가가 보스룸을 털어 아이템을 가져가는 건 기본 상식. 아일에게 돌려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건 이제 제 겁니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사지를 잘라서 개먹이로 주겠다!"

아일의 외침과 함께 유적 바닥에서 개 형상을 한 검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으르르르르...."

"컹!!!"

검은 짐승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위협했으나.

"끼이잉...."

강승현이 보주를 내밀자 다들 꼬리를 내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 보주는 당신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

"거기다 그쪽이 애지중지하는 걸 보면...."

이 보주의 정체는 신의 힘이 깃든 아이템. 성유물이었다.

"잊혀진 신의 성유물이겠죠."

즉, 아일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키르카라슈텔이다.

'오래전에 잊혀진 신이라 그런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지만.'

이름이 쓸데없이 길고 복잡해서 사람들이 못 외우고 잊어버린 게 아닐까.

"당신은 키르카라슈텔을 따르고, 그에게 힘을 받은 사도였죠."

아일이 사용하는 흑마술은 전부 키르카라슈텔이 선물해준 신성 스킬이다.

'그런 녀석의 공격이 성유물에 통할 리가.'

즉, 보주가 가진 숨겨진 능력은 '키르카라슈텔 신자의 신성 스킬 무효화'다. 사제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힘이 깃든 성유물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이걸 갖고 있는 한, 댁이 쓰는 흑마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거죠."

이걸로 보주를 뺏지 않는 한 아일은 강승현을 제물로 바칠 수 없다. 제물 의식용 스킬도 전부 무효화 될 테니까.

"그래. 그분의 힘으로 널 공격할 순 없겠지만...."

아일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녀석은 흑마술을 쓰면서 동시에 단검을 다루는 로그.

"로그 스킬이라면 상관없겠지!"

보주 때문에 흑마술은 봉인 당했지만, 단검술까지 봉인 당한 건 아니었다. 아일이 희생의 에더메를 쥐고 달려들었다.

"널 죽이고 보주를 되찾겠다!"

"그렇게 중요한 거면...."

강승현이 보주를 들어 올리더니,

"잡아보시든가?"

갑자기 바닥에 떨어트렸다.

아마 김호정이나 다른 누군가가 깨어 있었다면 그걸 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 미쳤어? 그걸 왜 던져?'

'보주가 없으면 아일의 흑마술을 막을 수 없잖아!'

강승현이 보주를 손에서 놓았으니 아일의 흑마술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겠지만.

"이, 이런 야비한 놈이!!!"

상대는 키르카라슈텔의 광신자. 강승현을 공격하는 것보다 성유물을 지키는 걸 선택할 것이다.

"키르카라슈텔 님의 보주가!!"

아일은 망설임 없이 단검을 내던지고 손을 뻗었다.

"저럴 줄 알았지."

그걸 본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점착 포션을 꺼냈다.

원래 점착 포션은 투척해서 끈끈이 트랩을 만들 때 쓰는 포션이나,

'여기에 [실 뽑기]를 사용하면 끈적한 실을 뽑을 수 있지.'

[실 뽑기]

스킬을 발동하자 점착 포션에서 끈적한 실이 뽑혀 나왔다.

촥!

강승현은 끈적한 실을 휘둘러 떨어지던 보주에 붙였다. 그리고 아일이 잡으려는 순간, 낚시하듯 보주를 건져 올렸다.

휙!

"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아일은 강승현이 겨눈 석궁과 눈 마주쳤다.

"이, 이 자식!"

아일은 크게 당황했다.

너무 가까운 거리라 피할 수도 없고,

"단검을 던져버렸으니 아까처럼 단검술로 막기는 글렀고."

손에 단검이 없으니 받아칠 수도 없었다.

"얌전히 처먹어."

강승현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파바바바박!

"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화살이 아일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일은 비명을 지르며 포효했다.

"사도니까 머리 좀 뚫는다고 죽진 않겠지."

사도는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지금처럼 일반인이라면 즉사했을 부상을 입어도 쉽게 죽지 않는다.

"그래도 고통은 느끼겠지만."

"끄으, 끄으아아아아!"

덕분에 아일은 산 채로 머리에 화살이 처박히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여명의 성수 화살은 아까 써버렸으니, 평타로 죽을 때까지 패는 수밖에.'

신의 힘을 받은 사도라고 해도 일단은 인간. 이런 식으로 계속 공격하다 보면 죽는다. 강승현은 포효하는 아일을 향해 쉬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 이아아아아악!!!"

그때, 아일이 비명을 지르며 피 묻은 손바닥을 바닥에 내려쳤다.

"검은 가시나무!"

바닥에서 시커먼 가시나무 줄기가 솟아나 아일의 몸을 감쌌다.

팍!

파악!

날아가던 화살들이 줄기에 가로막혔다. 이걸로 시간을 벌 생각이었겠지만,

'베어버리면 그만이지.'

강승현은 고민 없이 청은 단검을 꺼냈다.

[절개]

쫘아악!

단검을 휘둘러 줄기를 찢어내자 안에 숨어 있던 아일의 모습이 드러났다. 녀석은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회복 스킬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다크 리스토어!"

아일의 몸에 흑마력이 감돌자 화살에 꿰뚫린 상처가 회복하기 시작했다. 흑마술사 전용 회복 스킬인 모양이다.

'당연히 그냥 회복하게 놔둘 순 없지.'

강승현은 잘라낸 가시나무 줄기를 주워 담았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검은 가시나무 화살을 생성합니다.]

보통 가시나무에 찔리면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출혈에 걸린다. 그러니 이걸로 화살을 만든다면 대상에게 출혈 디버프를 걸 수 있다.

파바바바박!!!

강승현이 방아쇠를 당기자 가시가 돋은 새까만 나무 화살이 아일의 몸에 처박혔다.

[크리티컬!]

[상태이상 '출혈' 상태!]

화살이 박힌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 끄아아아아!!!"

아일은 다크 리스토어로 회복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출혈 때문에 체력이 깎여나갔다. 아무리 성능 좋은 회복 스킬이라 해도 상태이상에 걸렸다면 제 성능을 낼 수 없다.

'최소한 화살만 막을 수 있었어도 저 꼴은 안 났을 텐데.'

만약 아일이 단검을 놓지만 않았다면 날아오는 화살을 죄다 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보주를 구하겠다고 자신의 나이프를 버렸다. 신앙심에 심취한 나머지 판단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단검을 버린 시점에서 패배 확정이지.'

흑마술은 통하지 않고, 믿을 거라곤 단검술밖에 없는 놈이 자기 무기를 던져버리다니. 멍청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끄...끄으...."

털썩!

온몸에 화살이 박힌 아일은 피를 잔뜩 뿜어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꼴이었다.

"하여간 사도 새끼들은 머리가 나빠서 문제라니까."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놈들은 하나같이 적당함이 없다.

'이런 게 땅에 떨어진다고 금이 가겠어, 아니면 흠집이 생기겠어.'

보주에 집착하지만 않았어도 최소한 치명상은 입힐 수 있었을 텐데.

강승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아일을 내려다보았다.

"하긴.... 저런 괴물 놈이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지...."

그때 죽은 줄 알았던 아일이 입을 열었다. 다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은 없어 보인다.

"키르카라슈텔 님이 말씀하시길...."

"키르 뭐시기가 왜요."

"강승현 씨를 지켜보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아일이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상태창 너머의 '관리자'를 말하는 것 같다. 그걸 눈치챈 걸 보면 키르카라슈텔 역시 신은 신이었다.

"...결국, 당신도 신의 사도였다는 소리 아닙니까?"

"전 신 같은 거 안 믿습니다."

"하지만 힘을 받은 건 사실이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강할 리가...."

"그러긴 한데."

아일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차원 이동자들은 관리자가 만든 상태창을 쓰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사도처럼 신에게 힘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댁 같은 광신자하고 다르거든요."

신을 자발적으로 믿는 사도들과 달리, 강승현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하는 것뿐이다.

관리자를 섬길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굳이 말하면 노예 신세지."

강승현은 아일의 머리에 석궁을 겨누었다.

"노예? 그럴 리가.... 노예한테 그런 힘을 주는 존재가 어딨겠습니까.... 당신은 노예가 아니라...."

"아, 그런 건 모르겠고."

강승현은 석궁 방아쇠를 당겨 남은 화살을 전부 발사했다.

파바바바박!

아일의 머리에 엄청난 수의 화살이 처박혔다. 아무리 사도라도 해도 이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는 버틸 수 없다.

"걔가 좋은 무기 하나 추천해주긴 했죠."

아일은 손을 몇 번 꿈틀거리긴 했으나, 얼마 못 가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드디어 죽었네."

[프리아의 석궁이 소멸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거두었다. 녀석은 이제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말이다.

51. 안식

'이래서 사도 놈들은 귀찮다니까.'

강승현은 쓰러진 아일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머리가 완전히 으스러지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사도의 질긴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편하게 가려고 시작부터 필살기 날렸는데....'

설마 보스 2차전이 있었을 줄이야.

강승현은 한숨을 쉬며 스태미나 포션을 들이켰다.

'다음부턴 필살기는 막타 칠 때나 쓰자.'

사람들이 왜 필살기를 시작부터 안 쓰는지 알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다.

자기반성을 마친 강승현은 보스방 내부를 가볍게 살폈다.

'아일이 모시던 신의 이름이 키르카라슈텔이라고 했지.'

어디서도 들어본 적도 없는 낯선 이름.

하지만 관리자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챈 걸 보면 신적 존재임은 확실했다.

'관리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일 자식을 좀 더 살려둘 걸 그랬나.'

강승현은 살짝 아쉬워했으나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아냐, 순순히 말해줄 리가 없지. 분명 조건을 걸었을 거야.'

인간을 이유 없이 도와주는 신은 없다. 관리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생각을 정리한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파티원들은 아직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 인간들, 슬슬 깨어날 때가 됐는데.'

"으...으으...."

"아이고 머리야...."

['수면' 상태에서 풀려났다!]

언제쯤 일어나려나 궁금했는데, 때마침 한둘씩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저, 저길 좀 봐."

"아일이 죽었잖아!"

당황한 파티원들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고 일어났는데 옆에 있던 동료가 추리소설처럼 죽어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저 녀석이 진짜 보스 몬스터였습니다."

강승현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지, 진짜요?"

"그럴 수가...."

이야기를 들은 파티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일이 그런 짓을 했다고?"

"그, 그 녀석이 설마...."

그야 그럴 것이다. 아일은 파티원들에게 무척 친절했으니까.

물론 제물을 모으기 위한 수작이었지만.

"아일 씨의 몸에서 엄청난 흑마력이...."

"그것도 평범한 흑마력이 아니라 신의 힘이 깃든 흑마력이야!"

하지만 라크라마티와 사히타는 달랐다. 아일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사도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힐러님 말은 전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 던전을 발견한 것도 아일이잖아!"

"그, 그럼 강승현 힐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부 죽었겠죠. 제물로 바쳐져서."

파티원들은 아까 싸웠던 좀비 떼를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오늘 강승현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자신들도 그런 신세가 됐을 테니까.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슈이레는 바로 파악을 끝내고 강승현에게 감사 인사했다.

"사실 힐러는 취미고 고위 사제시죠? 이런 식으로 힘을 숨기면서 사악한 흑마술사를 잡으러 다니는 이단심문관!"

또 뭔가 착각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단심문관? 엄청난 거물이었잖아!"

"흑마술사 사도를 혼자서 이길 수 있는 괴물은 별로 없어! 분명 이단심문관이야!"

"어, 어쩐지.... 그래서 신성력을 숨기시고.... 혹시 어느 교단 소속이신지...."

"그런 거 아닌데요."

강승현은 분명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교리 때문에 숨겨야 하는 모양이에요."

"정말 대단한 분인가 보군."

"눈치 있게 모른 척해주자."

졸지에 힘을 숨긴 이단심문관이 된 강승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사실 전 이단심문관입니다. 그러니 잡담 그만하고 여기서 나갑시다."

보스가 죽었으니 곧 던전이 소멸할 것이다. 내부의 모험가들은 이렇게 한가하게 떠들 게 아니라 어서 탈출해야 했다.

강승현은 슈이레한테 말을 걸었다.

"슈이레 씨, 탈출용 마법진을 그려주세요. 최대한 크게."

"최대한 크게요?"

"혹시 불가능한가요?"

"그야 물론 가능하죠! 맡겨주세요."

슈이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전 마탑 출신 마법사니까요!"

자신은 뛰어난 마법사라고 덧붙이면서.

"그럼 그쪽은 슈이레 씨한테 전부 맡기면 될 것 같고... 아, 사히타 사제님."

강승현은 이번엔 사히타를 보며 말했다. 사히타는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사제님이 꼭 해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다른 분들도 따라오세요."

"알았어."

슈이레를 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승현을 따라갔다.

-강승현이 향한 곳은 보스룸으로 통하는 갈림길의 왼쪽 길이었다.

"얘네, 다시 일어서진 않겠지?"

김호정이 통로를 둘러보며 말했다. 통로 안에는 아까 쓰러트린 좀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아일한테 속아 제물이 된 것도 모자라 좀비로 부려 먹힌 불쌍한 모험가들의 시체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사히타 사제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술사인 아일이 사망하면서 좀비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모양이다.

"이 좀비들이 저희처럼 던전을 깨러 온 모험가들이었다니...."

"정말 강승현 힐러가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기꾼과 사기 피해자가 있다면 가장 잘못한 놈은 사기꾼이다. 강승현은 파티원들을 가볍게 위로했다.

"작정하고 남 속이는 놈을 어떻게 알아채겠어요."

"그건 그렇죠."

"그리고 그런 이야기 하자고 부른 건 아닙니다."

강승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즐 대륙에서 사람 죽는 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 시체들을 그냥 이대로 두고 가긴 그렇죠?"

속아서 제물이 된 것도 억울한데 소멸하는 던전 속에 버려지는 최후라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참한 결말이다.

"맞아요. 사실 저도... 그 이야길 꺼내고 싶었어요...."

사히타 사제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베르 교단 사제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

사령술에서 풀려난 시체가 버려졌는데 사제가 그걸 어찌 두고 가겠는가. 아이베르 교단 소속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이분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낼 순 없어도...."

"장례는 치러주고 싶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아, 네!"

사히타 사제가 안도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강승현도 그 미소에 대답하듯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뒷수습은 사제님께 맡겨도 될까요?"

"그, 그럼요. 이 일은 아이베르 교단이... 맡겠습니다!"

사히타 사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사실 아무래도 좋긴 하지만.'

시체는 시체일 뿐. 힐러는 다친 환자만 신경 쓰면 된다.

'애초에 아즐 대륙에서 흑마술은 부분 합법이기도 하고.'

다만, 소심한 사히타 사제가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는 게 불쌍해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다.

"저희가 구체적으로 도울 일이 있을까요?"

"일단... 몸에 남은 흑마력을 정화하고... 시체를 탈출 마법진까지... 옮기면 될 것 같아요...."

사히타가 쓰러진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던전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 시체를 아이베르 교단이 인수하도록 연락할 생각이라고.

"그러려면... 망자들을 위한 기도부터...."

사히타 사제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아 아이베르. 이들은 안식을 원합니다."

"...."

"당신의 자애로움으로...."

한참 기도하던 사히타 사제가 눈을 살짝 뜨고 말했다.

"저...저기...."

"네?"

"다들 그렇게 보면 부담스러운데...."

당연하지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사히타 사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어? 어어 우린 신경 쓰지 마시고 할 일 하셔!"

"부담 주려는 거 아니에요!"

"그...그렇지만... 늘... 다른 사제님들하고 함께했더니... 모두가 보는데... 혼자 하려니까... 좀... 힘드네요...."

딱히 부담 줄 생각은 없었지만, 소심한 사제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러니... 여러분도 같이 기도해주시면 안 될까요...."

급기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집중해야 들릴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저는 아이베르 교단 신자가 아니라서 기도문은 잘 모르는데요."

"괘, 괜찮아요.... 망자가 무사히 떠나길 바라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라...."

망자가 맘 편히 쉴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 기도문은 중요하지 않다.

사히타는 간절한 얼굴로 부탁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다 같이 기도 좀 해줍시다."

혼자 기도하는 게 부담스러운 사히타 사제를 위해,

"이아 아이베르."

"이들을 구원하소서."

"어... 나무아비타불 극락 환생...!"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름대로 고인을 위해 기도했다.

'그 사기꾼 새끼는 내가 조졌으니 다들 안심하고 성불하세요.'

강승현 역시 적당한 느낌으로 기도했다.

"이제는 아이베르 님의 곁에서 편히 쉬시길."

사히타 사제가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을 읊자 밝은 빛이 퍼져 나와 통로를 감쌌다. 시체 속에 담겨 있던 흑마력이 깨끗하게 소멸했다.

"이걸로... 기도가 끝났습니다...."

사히타 사제는 정화 의식에 참여해줘서 고맙다며 고개 숙여 감사 인사했다.

[업적 달성!]

그 순간, 업적 달성 메시지가 나타났다.

[업적 달성 : 망자에게 안식을]

[정화 의식 기도에 참여할 경우 달성.]

"옷."

김호정도 놀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업적 달성 메시지가 나타난 모양이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입을 열긴 그렇고....'

강승현은 한국인의 소통법 중 하나를 시전했다.

'야 너두?'

'야 나두.'

역시 이래야지. 강승현은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시체를 마법진까지 운반하죠."

슬슬 슈이레가 마법진을 완성했을 것이다. 일부러 크게 만들어달라 했으니, 시체 몇십 구도 충분히 옮길 수 있다.

"이대로 운반하기는 그렇고, 마력 장막으로 감싸는 거 어때요?"

"좋네요."

"마력 장막은 제가 준비할게요."

펄러럭!

티나가 마력 장막을 만들어 시체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럼 옮기자고."

강승현 일행은 시체를 보스룸까지 운반하기로 했다.

-"아일 녀석.... 이 많은 사람을 혼자 다 죽인 거야?"

"그렇겠죠. 다른 신도는 없는 것 같으니."

"정말 진짜 엄청 못된 놈이었구나. 선생 아니었으면... 상상도 하기 싫다."

시체를 나르던 김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 친절해 보이던 청년이 이런 사이코 또라이 살인귀였을 줄은.

"그 녀석 다시 살아날 일은 없겠지?"

"김호정 씨 능력이면 이길 수 있을 텐데요."

"으음... 글쎄에? 사도한테서 도망친 적은 많지만, 싸워본 적은 없어서...."

"스킬 쓰기 싫으면 룰렛 돌려서 스탯 빨로 밀어요."

차원 이동자는 룰렛을 통해 끝없이 강해질 수 있다.

덕분에 이론상 최강의 존재지만,

"룰렛 돌리면 방어력하고 체력만 쏟아져 나와서 튼튼한 샌드백이 되는걸."

"샌드백은 어쩔 수 없죠."

현실은 이러므로 쉽게 강해지긴 힘들다.

김호정은 고개를 저으며 스태미나 포션을 꺼냈다.

"난 그냥 선생코인에 투자할란다."

"탁월한 선택."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호정이 건넨 스태미나 포션을 받았다.

"근데 강 선생은 아일이 못된 놈인 줄 어떻게 알았어?"

"보통 착한 척하는 놈은 믿을 게 못 돼요. 사람 좋은 척 웃고, 쓸데없이 친절 베풀고, 초면에 존댓말 쓰는 놈은 피하세요."

"그거 그냥 강 선생이잖아."

둘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통로 중간 지점을 지났을 때였다.

"어...?"

"왜 그래요?"

맨 앞에서 걷던 라크라마티가 경악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췄다.

"보, 보스룸 안에서 흑마력이 느껴져!!"

"저, 정말이에요...! 흑마력이 느껴져요!"

"뭐라고?"

분명 보스는 쓰러트렸고, 그 외에 다른 몬스터는 없었다.

그런데 흑마력이 느껴진다는 건 보스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다.

"지금 보스룸에 슈이레 혼자 있잖아!"

라크라마티가 보스룸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시체는 여러분한테 맡길게요. 사히타 사제님, 우리도 가죠."

"네, 네!"

강승현 사히타 사제와 함께 보스룸으로 달려갔다.

52. 끝까지 귀찮게 하네

"도착했다!"

보스룸에 가까워질수록 강한 흑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맨 앞에서 달리던 라크라마티는 인상을 쓰며 보스룸 문을 걷어찼다.

쾅!

"그으으으...."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슈이레는 아니었다.

"저, 저건!"

"역시 저 녀석이 원흉이었군."

방 중앙에 서 있던 녀석은 아일이었다. 정확하게는 머리가 박살난 아일 시체.

녀석은 누가 봐도 좀비로 되살아난 상태였다.

"저, 저 새끼 뒈진 거 아니었어? 설마 사령술을 쓴 건가?"

"그치만, 네크로맨서는... 자기 자신에겐 사령술을 걸 수 없을 텐데요...?"

사히타 사제가 기겁하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네크로맨서가 자기 자신을 좀비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누군가가 대신 사령술을 걸었다는 소리다.

"도대체 누가 저 녀석을 되살린 건데?"

라크라마티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방에 있던 사람은 슈이레뿐이고, 그녀는 흑마술의 흑자도 모른다.

"여기엔 그럴 놈이 없잖아!"

"...딱 한 놈 있긴 합니다."

아일에게 힘을 내려준 존재. 그가 모시는 잊혀진 신.

"키르카라슈텔."

놈이 아일을 좀비로 되살려냈다.

-본래 아즐 대륙의 신은 어지간해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신성력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려면 신성력이 많이 들지. 그래서 관둘 줄 알았는데.'

키르카라슈텔은 자신이 가진 힘을 전부 쏟아부어서 아일을 부활시켰다. 녀석은 생각보다 자신의 사도를 아꼈던 모양이다.

다만, 힘이 모자라서 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좀비 상태로 살려내는 게 한계였다.

"제 실수예요.... 아일 님의 시체를... 불로 태웠어야 했는데... 사령술을 쓸 사람이 없어서 안심한 나머지...."

사히타 사제가 자신을 자책했다. 되살아날 리 없다고 생각해서 시체를 태우지 않은 게 큰 실수였다.

"아아... 아이베르 교단의 사제가 이런 중요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어쩌면 좋죠?"

"그래봤자 시체는 시체. 까짓 거, 다시 패서 지옥으로 보내주면 됩니다."

언데드로 부활하면 생전보다 지능과 전체적인 능력이 떨어진다.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좀비로 부활한 아일이 아니라 보스룸에 혼자 남겨져 있던 슈이레다.

강승현 일행은 그녀를 찾아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저깄다!"

"슈이레 님!"

슈이레는 제단 밑에 쓰러져 있었다. 정황상 아일이 슈이레를 제단에 올리려 한 것 같다.

[관찰의 눈]

강승현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났다. 슈이레의 몸 위로 각종 정보가 떠올랐다.

[출혈][의식 있음][정신력 하락]

[기습 공격에 당한 것 같다.]

[날카로운 흉기에 옆구리를 찔렸다.]

[이대로 방치하면 '과다출혈' 상태가 된다.]

'상태가 썩 좋진 않지만 목숨은 건졌네.'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늦지 않게 치료만 한다면 살릴 수 있다.

강승현은 라크라마티한테 말했다.

"슈이레 씨를 부탁합니다. 쓰레기 좀비는 저랑 사히타 사제가 맡죠."

"알겠습니다! 이단심문관님!"

라크라마티는 슈이레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강승현이 엄청난 신성력을 보여준 이후로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

'고분고분하니 좋네. 진작 이단심문관 흉내 낼걸.'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강승현은 석궁을 꺼내며 사히타에게 물었다.

"사히타 사제님 이제 스킬 쓰실 수 있으시죠?"

"네, 네...."

사히타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정신적으로 몰려서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정신이 어느 정도 회복됐으니 스킬을 쓸 수 있다.

"턴 언데드, 부탁합니다."

교단 소속 사제는 좀비를 시체로 되돌리는 '턴 언데드' 스킬을 갖고 있다. 아일이 생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언데드가 된 이상 사히타를 이길 수 없다.

"근데... 일단 제 손에 잡혀야 쓸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발도 굼뜨고...."

"그건 걱정 마세요."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점착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촥!

촤악!

발사된 화살이 아일의 몸에 닿는 순간, 요란하게 터지면서 끈끈이가 퍼져나갔다.

[이동속도 하락!]

아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앗, 느려졌어...."

"이 정도면 되겠죠? 부탁드립니다."

사히타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일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터, 턴 언데드!"

눈부신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추악한 흑마술사 언데드를 휘어 감았다.

"그아아아아!!!"

아일이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신의 힘으로 되살아난 탓인지, 순순히 흙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죽, 어!"

오히려 자신을 흙으로 되돌리려는 사제의 팔을 잡아 뜯으려 했다.

사히타 사제는 기겁하며 물러나려 했으나,

"히익!"

"걱정 말고 계속해요!"

파바박!

강승현이 배후에서 석궁을 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턴 언데드!"

그녀는 두려움을 참고 턴 언데드를 계속했다.

'그냥 겁쟁이인 줄 알았는데, 옆에서 좀만 도와주니 알아서 잘하네.'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파악, 팍!

그가 사히타를 공격하려 할 때마다 정확하게 손가락을 노려 화살을 박아주었다.

"너, 이 자식!"

"생전에도 날 못 이긴 놈이, 죽었다 살아난다고 이길 수 있겠냐."

강승현의 공격으로 아일이 주춤한 사이, 사히타는 계속해서 턴 언데드를 시전했다.

"턴 언데드!"

"크아아아아아아!"

아일의 몸이 점차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턴 언데드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키르카라슈텔 님!!!"

자신의 끝을 직감한 아일은 신의 이름을 외치며 가슴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아아아아아!!!!"

푸우욱!

가슴에 손을 찔러넣은 아일은 뭔가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사히타 사제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저건, 보스 몬스터의 핵?"

아일이 꺼낸 건 보스의 핵이었다. 아무래도 놈의 심장 속에 숨겨져 있던 것 같다.

"이자들이... 제가 바치는 최후의 제물입니다아아...!"

아일은 신을 향해 소리치며 자신의 핵을 부숴버렸다.

파가각!!!

본래 핵을 부수면 탈출 포탈이 생기지만, 아일은 핵을 부숨과 동시에 몸으로 흡수했다.

"모든 건, 키르카라슈텔 님을 위해...."

파아앗!!

이 말을 마지막으로 강한 빛이 아일을 감쌌다. 사히타 사제의 턴 언데드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털썩!

아일은 다시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성스러운 화염!"

화륵!

마지막으로 신성한 힘이 담긴 불꽃이 아일의 시체를 불태웠다.

아무리 뛰어난 사령술사라 해도 신성력으로 불타오르는 시체를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이걸로 아일은 다시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돼, 됐다.... 내가 해냈어...."

다리에 힘이 풀린 사히타 사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몸에서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다.

강승현은 그런 사히타에게 스태미나 포션을 내밀며 말했다.

"사히타 사제님은 앞으로도 믿을 만한 파트너를 두시는 게 좋겠네요. 혼자 싸우는 것보단 동료랑 함께 싸울 때 잘하는 타입 같으니까."

"네, 네... 감사합니다."

사히타 사제는 칭찬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저 혼자는 절대 못 했을 거예요...."

"별말씀을."

강승현은 불길에 타들어 가는 아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화르르륵....

신성한 불꽃에 휩싸여 사라지는 최후라니. 추악한 놈의 최후치고는 꽤 아름다운 결말이다.

"저... 강승현 힐러님."

"네."

사히타 사제가 긴장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을 맞춰 싸웠어도 긴장하는 버릇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

"지금, 다리가... 안 움직여서 그러는데... 혹시 슈이레 님 몸 상태를 봐주실 수 있나요...?"

"알았어요. 쉬고 계세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크라마티한테 다가갔다. 그는 필사적으로 슈이레를 치료하고 있었다.

"슈이레 씨 상태는 어때요?"

"이 녀석, 진짜 죽기 직전이었어요. 지금은 그나마 상태가 많이 나아졌지만."

"다, 다들 미안해...."

슈이레는 마법진을 완성하고 마력을 불어넣어 가동하려 했으나, 그 직전 아일의 기습을 받았다. 운 좋게 목숨은 건졌지만, 꽤 치명상이었다고.

"마력이 안 나와.... 마법을 전혀 못 쓰겠어."

슈이레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녀 역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스킬 발동이 안 되는 모양이다.

"정신적 문제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만...."

"지금 우리한테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네요."

지금 유적 던전은 소멸하는 중이다. 애초에 그 때문에 마법진을 그리는 중이었고.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억지로 하면 더 안 나와요."

강승현은 마력을 쥐어짜려는 슈이레를 말렸다. 팀의 하나뿐인 마법사는 사실상 리타이어. 이제 남은 희망은 보스의 핵을 깨트려 탈출 포탈을 만드는 것뿐이지만,

'아일 자식, 우리를 제물로 바친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

그건 5분 전에 사라졌다. 좀비 보스 놈이 먹튀해서.

'핵을 부수고 흡수해서 탈출 포탈을 제거할 줄이야.'

어차피 죽을 테니 혼자는 못 죽겠다는 물귀신 작전. 정말 마지막까지 치졸한 자식이다. 강승현은 지옥으로 보낸 아일을 도로 끌고 와서 패고 싶었다.

"젠장, 아일 자식! 이럴 작정으로!"

"진짜 미안해...."

슈이레가 절망적인 얼굴로 말했다. 던전과 바깥을 이어주는 포탈은 한참 전에 사라졌다. 라크라마티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야,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이제 방법이 없어. 우리 스크롤도 없잖아. 남은 건 소멸해가는 던전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뿐이라고."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참이었다.

"슈이레 씨, 마법진은 완성됐다고 했죠?"

"어? 어... 그래요.... 완성은 했죠."

강승현의 질문에 슈이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스룸 중앙에 나타난 거대한 마법진이 그 증거다. 마법진은 훌륭하게 완성됐다.

"연료가 없어서 작동을 못 할 뿐이지."

슈이레는 한숨을 쉬며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강승현은 마법진을 손으로 가볍게 훑으며 물었다.

"이 마법진, 혹시 슈이레 씨만 쓸 수 있는 겁니까?"

"네? 그건 아니에요. 이런 형태의 마법진은 마력만 있으면 누구나 작동할 수 있다구요."

마법진을 그릴 때는 마법 지식이 필요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마법진을 작동할 때는 마력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없진 않은데요?"

"네?"

"탈출할 수 있겠다구요."

53. 소멸하는 던전을 떠나

파티의 유일한 마법사 슈이레가 판단하기에, 지금은 정말 답이 없었다.

'던전이 소멸하기 직전인데! 파티 내 유일한 마법사가 마력을 못 쓰게 됐다니....'

'이제 다 끝났어!'

이런 절망적인 순간에,

"탈출할 수 있겠다구요."

강승현은 확신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마법사인 자신도 포기했는데, 마법사도 아닌 자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가능할 리가 없어. 근데....'

강승현.

그는 언제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신성력을 보이거나, 힐을 쓰지 않고 사람을 치료하거나, 흑마술을 쓰는 신의 사도를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처치하거나.

'저 사람이라면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슈이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가능해요?"

"시간이 없어서 설명해드리긴 힘들지만, 가능합니다."

강승현이 남긴 이 한마디가.

"가, 강승현 힐러님이라면... 가능할 거 같아요...."

"저 사람은 최강의 이단심문관이니까."

슈이레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두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강 선생! 어떻게 됐어?"

"다들 괜찮아요?"

"슈이레! 괜찮은가?"

때마침 보스룸 문이 열리고, 김호정과 나머지 일행이 나타났다. 강승현은 침착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아일이 좀비로 부활했습니다. 슈이레 씨를 공격하고 있었죠."

"가, 강승현 힐러님 덕분에... 아일 님을 처치할 수 있었어요...!"

사히타 사제가 잿더미로 변한 아일을 가리켰다. 동료를 배신하고 제물로 바친 추악한 사도의 말로다.

"커어... 지독한 놈! 소금이라도 뿌려야겠네!"

촥! 촥!

김호정은 소금단지를 꺼내 아일의 시체에 마구 뿌려댔다. 강승현은 뭔가 낯익은 소금단지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아일 저 자식이 슈이레한테 치명상을 입히는 바람에...."

"지금은... 마력을 쓸 수가 없어."

슈이레는 나머지 일행한테도 지금 상황을 간략하게 말해줬다.

"엇... 어...저...."

이야기를 듣던 티나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으나,

"다행히 강승현 힐러님이 날 대신해서 마법진을 작동시켜 주신다잖아.... 한시름 놨지."

"아...."

결국, 아무 말 안 하고 손을 내렸다.

강승현은 그런 티나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다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슈이레가 만든 마법진은 거대한 원 안에 복잡한 문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 역삼각형이 배치된 형태다.

그리고 삼각형의 각 꼭짓점에 3개의 작은 마법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마법진을 '트리니티'라 부른다.

"마법진을 여러 개 이어서 그리면 훨씬 안정적이고 강해지거든."

슈이레는 강승현의 부탁으로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해 트리니티 마법진을 그렸다.

"문제는 이 마법진을 작동하려면...."

슈이레가 마법진 내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1번 마법진에 한 명, 2번 마법진에 한 명. 이렇게 두 사람이 각각 마법진에 올라서서 3번 마법진으로 마력을 주입해야 해."

즉, 이 마법진은 혼자서 작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최소 2인 이상이 필요한 다인 마법이었다.

"그, 그러면 마법사 양반께선 어쩔 생각이었던 거야?"

김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야 분신 마법을 쓰려 했죠. 다인 마법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으려면 분신 마법을 배워야 하거든요."

슈이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마법진을 작동할 생각이었다고.

"뛰어난 마법사라는 게 허풍은 아니었군요."

"근데 분신을 만들 틈도 없이 아일 새끼한테 기습당해서...."

슈이레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저 혼자서는 이 마법진을 작동할 수 없다는 소립니다. 절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강승현은 그렇게 말하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마법사 못지않게 충분한 마력량을 가진 데다, 마법적 지식을 가진 사람."

"어, 어...?"

강승현은 티나 퓨테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리 봐도 초짜 모험가다.

'칼과 방패를 무기로 쓰지만, 너무 미숙하고 손에는 굳은살조차 없어.'

하지만 초짜라고 믿기 힘든 침착함과,

-이 문양은 봉인 해제 형태예요! 뭐가 풀려난 거죠?

마법진을 보기만 해도 종류를 알아내는 마법지식.

'그리고 마력을 장막 형태로 생성하는 수준급 마력 제어 능력.'

아무리 봐도 검사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마법사한테 가까운 것들이다.

"티나 씨, 마력 다룰 줄 알죠?"

"네? 저? 그...."

티나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마력을 공부한 건 확실해. 마법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티나는 자신의 마법 실력을 숨기고 미숙한 검과 방패를 사용했다. 뭔가 사정이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건 아냐.'

그랬으면 얇고 튼튼한 마력 장막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을 테니까.

"뭔가 사정이 있는 건 알아요. 그러니 마법을 쓰지 않는 거겠죠."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는 거리낌 없이 마력을 사용했다. 강승현은 티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인사를 물어보려는 게 아닙니다."

강승현은 다른 사람들한테도 아무 말 말고 입 다물라는 시선을 보냈다. 말 못 할 사연이라면 굳이 물을 생각 없다.

"절 도와주실 수 있는지, 그걸 묻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파티를 위해 마력을 써줄 수 있나? 강승현이 묻고 싶은 건 이것뿐이었다.

티나는 주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저... 실수할 수도 있어요! 저 때문에 망칠 수도 있고...."

"하지만 못하는 건 아니죠?"

"네.... 할 수는 있죠."

"그럼 됐어요."

더 물어볼 것도 없다. 강승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가만히 있으면 망해요. 차원에 틈에 빠지거나, 부서지는 공간에 짓눌려서 몸이 갈리거나...."

운이 좋다면 기적적으로 던전에서 튕겨나가서 아즐 대륙 어딘가로 워프할 수 있지만. 기적은 잘 일어나지 않아서 기적이다.

"그러니 시도라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해봐야죠? 그리고...."

강승현은 던전에 들어오기 전, 티나의 손목을 치료할 때 쓴 얼음팩을 꺼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이렇게 마력을 얇게 펼친 사람은 없었거든요."

"아...."

"나중에 얼음팩 만드는 것 좀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죠?"

강승현이 이렇게 말하자 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까짓 거 해보죠!"

-마법사(였던 것)도 설득했으니 이제 남은 건 마법진을 작동하는 것뿐이다.

강승현과 티나가 마법진 작동을 준비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은 모험가 시신을 옮겨왔다.

"모험가님 시신은... 이게, 마지막...이에요.... 헥헥...."

사히타 사제가 끙끙거리며 마법진 안으로 마지막 시신을 옮겼다.

쿠르르르르!!!

동시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동이 여기까지 왔어!"

"다들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요!"

슈이레의 외침을 들은 파티원들이 서둘러 마법진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 끝! 강승현 힐러님! 티나 씨!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강승현은 1번 마법진에, 티나는 2번 마법진에 섰다.

'마력 하나 없는 인간이 마법진 위에 서다니.'

강승현은 발밑의 마법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웃긴 이야기야.'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마력 포션을 꺼냈다. 이 마력 포션들은 자신이 가져온 것과 다른 사람들한테 빌린 것들이다.

'다들 남은 마력 포션 있죠? 전부 저한테 주세요.'

아까 아일이 약 탄 마력 포션을 나눠준 덕분에, 각자 가져온 마력 포션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비클 엘릭서예요! 잘 써주세요!'

거기다 마법사 슈이레는 귀하고 비싼 엘릭서까지 갖고 있었다. 과연 마탑 소속 마법사답다.

'잘 쓸게요.'

본래 강승현은 마력이 없어서 마법진을 작동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마력 비스무리한 건 뿌릴 수 있지.'

쩌저적!!!

강승현은 모은 마력 포션을 전부 흡수했다. 이렇게 많은 포션을 흡수해본 건 처음이었다.

'몸 안에 마력을 담을 수는 없지만....'

[살포]

강승현이 스킬을 사용하자, 손에서 짙푸른 오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방출하는 건 가능해.'

푸른 오오라에 휘감긴 강승현의 손이 마법진에 닿는 순간,

팟!

마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와...."

"마력을 저런 식으로 쓸 수도 있다니."

마법을 공부한 티나와 슈이레는 강승현이 뿜어낸 독특한 형태의 마력을 보며 감탄했다.

"티나 씨, 지금이에요!"

포션을 잔뜩 도핑하면 엄청난 마력을 끄집어 낼 수 있지만, 강승현은 어디까지나 '야매'일 뿐이다. 마력을 세밀하게 조정할 능력은 없다.

"퍼져나가는 마력을 한곳으로 모은다!"

강승현이 살포한 푸른 오오라를 티나가 제어했다. 티나는 푸른 오오라를 3번 마법진으로 연결하며, 동시에 자신의 마력을 3번 마법진으로 보냈다.

쿠르르르르!!!

"처, 천장이 흔들린다!"

드디어 보스룸의 소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천장을 이루던 벽돌이 부스러지면서 유적 던전의 최후를 알렸다.

"...."

하지만 강승현과 티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마법진에 집중했다.

틱, 티틱....

파아아앗!!!

드디어 모든 마법진에 빛이 들어왔다.

"작동한다!"

슈이레가 걸어둔 마법이 작동하며 마법진이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쿠르르릉!

콰가가각!!

소멸의 여파로 천장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제단이 파손됐다.

끼기기긱!

공간이 심하게 뒤틀리며 바닥이 무너져 내렸으나, 마법진 안에 있던 사람들에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불타서 재로 변한 아일의 시체는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뒤틀린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미친 신을 모시는 미친 사도한테 딱 알맞은 최후다.

파아아아아!

마법진은 강렬한 빛과 함께 소멸하는 던전을 떠나 차원의 틈으로 향했다.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다.

"서, 성공! 성공이야!"

슈이레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임시 야매 마법사가 된 힐러와 마법사 때려치운 풋내기 검사의 활약으로 모험가들은 던전에서 탈출했다.

"만세!"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환호하며 기뻐했다. 사히타 사제는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기절해 있었다.

"이제 한시름 놔도 되겠죠...."

강승현은 마법진에서 손을 떼었다.

'마력 포션을 너무 많이 들이켜서 메스꺼워.'

강승현은 마법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차원과 차원의 틈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새까만 우주 같기도 하고, 동시에 깊은 바닷속 같기도 했다.

"경치가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제 마법진은 차원의 틈을 이용해 슈이레가 입력해둔 좌표로 향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마법진... 어디로 가는 거지?'

정작 목적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하인드 마을하고 가까운 곳이면 좋으련만.

-파앗!!

마법진이 향한 곳은 어느 건물 내부였다. 건물 벽과 바닥을 살펴보자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여, 여기는 혹시?"

티나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는 곳이에요?"

"아마 아즐 대륙 서부에 위치한...."

"진홍의 마탑."

슈이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소속된 마탑이죠."

54. 아주 유능한

마탑.

마법사들이 마법을 연구하고 힘을 키워가기 위해 만든 기관.

중앙 왕성 레세티아, 기사단, 교단, 모험가 조합과 함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 중 하나다.

이렇게 써두니 뭔가 거창하지만, 쉽게 말해서 마법 가르치는 대학교다.

'마탑에 오는 건 처음인데.'

당연하지만 마력 0 야매 힐러가 올 만한 장소는 아니다. 딱히 올 이유도 없었고.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다리에 힘 풀린다...!"

"여기가 마탑이라고?"

넋을 놓고 있던 파티원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기절한 사히타 사제도 눈을 떴다.

'이번엔 좀 빡세긴 했지.'

다들 고된 모험으로 지친 듯했다.

"저희... 무사히 도착한 거죠...?"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사히타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시작했다.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모험이군."

"수명이 20년은 날아간 거 같아."

사히타 사제나 티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초짜 딱지는 진작 뗀 모험가들이다. 이번 모험은 그런 사람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로 가혹했다.

'충격이 크긴 하겠지.'

강승현은 아일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짧은 기간이긴 해도 아일을 동료로 여기고 있었다.

"믿었던 동료는 우릴 배신하고...."

에르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파티를 이끄는 리더였으니, 아일과 가장 가까웠을 것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부터 속일 작정으로 접근한 놈이니까."

강승현은 가볍게 위로하고 자리를 떠났다.

"피곤하다...."

티나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력 고갈로 인해 안색이 안 좋았다. 가진 마력을 다 털어서 마법진을 작동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다.

"티나 씨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에요. 강승현 힐러님 아니었으면 시도도 못 했죠!"

티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보조 마법사였고, 메인은 강승현이었다며.

"그렇게 짙고 독특한 마력은 처음이에요. 그런 마력을 제어해보는 것도 처음이었구요."

[살포]의 효과로 만들어낸 푸른 오오라. 역시 마법사들이 보기엔 특이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저는 관련 지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칭찬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인벤토리에서 마력 포션을 꺼냈다. 비상용으로 하나 남겨둔 녀석이다.

"수고 많았어요. 이거 하나 남았는데, 드세요."

강승현이 마력 포션을 던져주자

"강승현 힐러님은 안 드시게요? 저보다 마력을 더 많이 쓰셨는데...."

티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필요 없어서요."

마력도 없는데 뭐하러 마시겠는가. 오히려 포션을 너무 많이 흡수해서 속이 메스꺼웠다.

"그, 그러고 보니! 마력 고갈 증세도 없으시고!"

포션을 마시려던 티나가 소리쳤다.

"대체 마력이 얼마나 많으시길래.... 혹시 대마법사...?"

"힐러입니다 힐러. 남 고치고 돈 버는 놈."

놔두면 오해가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아서 바로 차단했다.

"가서 씻고 자고 싶다.... 마탑에 여관 있나?"

"없어요. 학생들이 묵는 기숙사는 있지만."

"그럼 탑 밖으로 나가서 마을로 내려가야 하는 건가...? 귀찮아라."

"저어, 일단... 아이베르 교단에 연락하고 싶어요...."

와글와글 떠들던 모험가들은 사히타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희생자들의 시신을... 교단이 인수하도록...."

지친 몸을 쉬는 것도 좋지만, 그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럼 그쪽부터 마무리하자고."

"슈이레 씨, 모험가 조합이나 교단에 연락할 방법이 있나요?"

슈이레나 티나를 빼면 다들 마탑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이런 건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빠르다.

"교단에 연락하려면 탑을 내려가서 마을에 있는 모험가 조합 건물로 가야 해요."

슈이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마탑이랑 교단은 사이가 안 좋잖아요."

신의 뜻을 따르는 게 최우선인 교단과, 마력과 마법을 연구하는 게 최우선인 마탑.

서로 우선시하는 게 다르다 보니 사이가 좋을 래야 좋을 수가 없다.

"하긴, 모험가 조합은 중립이지."

모험가 조합은 두 집단 모두와 교류하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며 이득을 보고 있다.

"그럼 일단 마을로 가서...."

강승현이 몸을 일으키려는 참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문밖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귀환 좌표가 작동했습니다."

"이 시간에 누가 온 걸까요?"

이어서 문이 열리고, 지친 얼굴의 마법사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어쩐 일로 오셨는지...."

"헉!"

마법사 중 하나가 슈이레를 가리켰다.

"슈이레다! 슈이레가 나타났다!"

"슈, 슈이레!"

"교수님! 슈이레입니다!!"

슈이레를 발견한 마법사들이 아우성치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는 사람들입니까?"

강승현은 슈이레한테 물었다. 슈이레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동기들이랑, 후배님들이랑, 선배님들이요."

"...근데 반응이 다들 왜 저래요?"

슈이레와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반응을 보면 비상사태라도 일어난 것 같다.

"그게...."

"슈이레 페르나!"

슈이레가 입을 열기 전, 어떤 마법사가 분노한 얼굴로 달려왔다. 아무래도 저 아저씨가 교수인 모양이다.

"요놈! 다시는 안 오겠다고 뛰쳐나간 녀석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 거냐!"

"아야야야야!!!"

그러더니 지팡이로 슈이레를 때리기 시작했다.

"교수님! 진정하세요, 진정!"

"내가 진정하겠냐!"

"지팡이가 부서집니다!"

제자들이 교수를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진홍의 마탑 소속 교수님이십니까?"

보다 못한 에르간이 앞에 나섰다.

"그래. 이 몸이 바로 진홍의 마탑 A구역 담당자 탄셀 레우라스다. 탄셀 교수님이라 부르도록."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마법사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는 남들보다 유능하니 모험가로 대성할 수 있다고, 마법 실력으로 온갖 어그로는 다 끌고 뛰쳐나간 못난 제자 놈의 스승이기도 하지."

동기들이 슈이레를 보며 기겁하는 이유가 있었다. 깽판쳐 놓고 탈주한 놈이 다시 돌아왔으니까.

"저는 슈이레가 소속된 파티의 리더 에르간이라고 합니다."

에르간 역시 탄셀 교수한테 자신을 소개했다.

"모험가가 되겠다고 마탑을 뛰쳐나가더니만, 정말 파티에 들어간 모양이군."

탄셀은 에르간을 비롯해 다른 파티원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 요놈은 파티에서 쓸 만하던가?"

"아주 유능한 동료입니다."

"그래야지! 아무렴! 누구의 제자인데!"

제자를 보자마자 지팡이로 패긴 했지만 아끼는 마음은 있는 모양이다.

"헌데 귀환 지점으로 마탑 좌표를 이용했다는 건...."

탄셀이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진홍의 마탑에 귀환할 때 쓰이는 좌표다.

"마탑이 그리워서 돌아온 건 아닐 것이고, 던전에서 급하게 빠져나왔군그래."

"그걸 보기만 해도 아십니까?"

강승현은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가장 빠르게 그릴 수 있는 귀환 좌표는 자신이 소속된 마탑이다.

"시험을 치려고 수백, 수천 번은 그렸으니까요."

슈이레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탑 좌표를 외우는 건 마탑 마법사의 기본소양. 못하면 졸업을 안 시켜준다.

"모험가가 되겠다며 떠난 녀석들이 뭐하러 마탑으로 오겠는가? 마을 좌표를 이용하겠지."

몇몇 마을은 귀환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던전에서 탈출한 모험가들은 귀환 마을 중 한 곳으로 가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굳이 마탑으로 왔다는 건, 촉박했다는 소리겠지? 쯧쯧."

마탑 소속 마법사가 가장 능숙하고 빠르게 그릴 수 있는 좌표는 마탑 좌표다. 어찌 보면 긴급 탈출 마법인 셈이다.

"저희 진짜 목숨 걸고 탈출했다구요.... 얼마나 고생했는데!"

슈이레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집 나가니 개고생하는 게 당연하지!"

탄셀은 슈이레한테 호통치며 시선을 옮겼다.

"다수의 인원이 중앙에 모여 있고, 두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걸 보면... 트리니티 마법진을 썼겠군."

남은 사람들의 위치로 사용한 마법진을 추측하다니. 과연 마탑에서 마법사를 가르치는 교수답다. 교수 직함은 장식이 아닌 모양이다.

"저 두 분이 활약해주셨어요!"

"그 말은... 마법진을 그리기는 네가 그리고... 발동은 저 두 사람이 했다는 건데...."

"네. 그런데요?"

탄셀은 다시 지팡이를 꺼내 슈이레를 때렸다.

"네가 그린 마법진을 왜 남한테 떠넘기냐! 내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아야야야야!!!"

생각보다 엄격한 교수였다.

"어쩔 수 없었다구요! 정신력이 깎여서 마력이 안 나오는 바람에...."

"마법사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마력과 정신력이라고 몇 번을 말했느냐?!"

슈이레는 기껏 변명했지만, 그거 때문에 더 맞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엄청 강한 흑마술사한테 죽을 뻔했단 말이에요!"

"흑마술사?"

"네에! 강승현 힐러님이 해치우고 마법진까지 발동해주셔서 겨우 살아 돌아온 참이라구요!"

슈이레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힐러 강승현이라고 합니다."

"힐러? 마법사가 아니라?"

탄셀 교수는 '무슨 힐러가 마법진을 발동해?'라는 얼굴로 쳐다봤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촉박한 상황이었다고 했지."

"슈이레 씨 말대로, 저희는 던전에서 강력한 흑마술사와 마주쳤습니다."

강승현은 아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했다.

"가만 보니 마력 장막에 둘둘 말린 저것들은...."

"흑마술사한테 죽어 좀비가 된 모험가들의 시체입니다."

탄셀 교수는 마력 장막으로 감싼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거짓말은 아니군. 전부 시신이야."

"저, 저 많은 것들이 전부 시체...?"

"우...우왓...."

마법사들은 기겁하며 중얼거렸다. 한 놈은 안색이 나빠지더니 밖으로 달려나갔다.

역시 마법사들은 멘탈이 너무 약하다.

"이 많은 모험가를 살해한 걸 보면... 평범한 흑마술사는 아니었겠군."

"신의 힘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흐으음."

탄셀 교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네, 큰일을 해냈군. 보통내기는 아니겠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강승현이 이렇게 대답하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확실히 이런 걸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탄셀 교수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흑마술과 사도로 인한 피해는 교단 놈들에게 연락하는 게 우선인 법."

마탑과 교단은 사이가 나쁘긴 하지만, 협력해야 할 때는 협력하는 편이다.

탄셀 교수는 사히타 사제에게 물었다.

"그쪽은 아이베르 교단의 사제이신가?"

"아, 네...."

"따라오게나. 교단과 연락할 수 있도록 통신 마법을 준비할 테니."

"아... 감사합니다...!"

탄셀 교수의 도움으로 아이베르 교단에 연락할 수 있게 됐다. 사히타 사제는 밝은 얼굴로 감사인사했다.

"못난 제자야. 너도 따라오너라."

"저는 왜요?"

"낯선 장소에 외부인 혼자 보낼 생각이냐! 네가 안내해야지!"

"아야!"

"먼저 가거라!"

"교수님은 여전히 가차 없어...사히타, 안내해줄게. 따라와."

"네에...."

지팡이로 한 대 더 맞은 슈이레는 꿍얼거리며 사히타 사제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강승현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는 걸 본 탄셀 교수는 강승현한테 다가왔다.

"수고 많았네. 뒷일은 우리가 맡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다들 여기 모인 시체를 옮겨라."

"네!"

교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해 좌표 방 중앙에 놓인 시체를 운반했다.

"던전에서 막 탈출한 직후라 모르겠지만, 지금은 한밤중이라네."

"어쩐지 피곤하더니만...."

"손님용 방을 빌려줄 테니 오늘은 거기서 묵게나."

55. 이제야 쓸 만하네

탄셀 교수의 배려로 강승현 일행은 마탑의 빈방을 빌릴 수 있었다.

"저는 제 방에서 쉴게요."

기숙사 방을 가진 슈이레를 뺀 나머지 6명은 손님용 방에 묵게 됐다.

"방이 생각보다 괜찮네요."

진홍의 마탑 학생 기숙사는 2인 1실. 손님용 방이라곤 해도 기본적인 구조는 학생 기숙사와 같다.

강승현은 김호정과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이야, 마법사 놈들.... 좋은 곳에서 먹고 자고 하네?"

김호정이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인드 마을 여관과 비교하면 진홍의 마탑은 4성급 호텔이다.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올 텐데, 이 정도 시설은 갖춰야죠."

강승현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방 한쪽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긴 하나, 여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침대에 앉는 버릇이 생겼다.

"바닥에 융단도 깔아놨네."

김호정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인벤토리에서 말린 흑진월귤을 꺼내 씹었다.

[말린 흑진월귤]

[흑진월귤을 햇빛에 말려서 만든다.]

[하인드 마을 전통 간식.]

[씹으면 씹을수록 새콤달콤함.]

[마을을 떠나는 모험가들이라면 한 봉지씩 꼭 챙겨가는 필수 간식.]

"선생도 좀 줄까?"

"그럼 저야 고맙죠."

강승현은 말린 흑진월귤을 씹으며 말했다.

"이번에 고생 많으셨어요."

"나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김호정은 낄낄거리며 물 한 병을 꺼내 마셨다.

"핵은 박살 났고, 마법사는 마력을 못 쓴다고 하고... 꼼짝없이 죽는가 했지."

강 선생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김호정이 굳은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늘 태평하게 사는 김호정도 이번 일은 정말 위험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사실 진짜 답이 없다 싶으면 '그 자식'한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강승현은 물병을 달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김호정은 물병을 건네주며 물었다.

"그 자식?"

"노예 상인이요."

"아, 상태창 관리자?"

사도 흑마술사 아일의 뒤에 키르카라슈텔이 있던 것처럼, 야매 힐러 강승현의 뒤에는 정체 모를 '상태창 관리자'가 존재한다.

이번 유적 던전의 싸움은 신들이 노예를 내세워 대리 배틀을 한 셈이다.

"뭐, 결국엔 그 자식 도움받지 않고 무사히 탈출해서 다행이지만요."

강승현은 관리자한테 의지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거기서 도움을 받았다면,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도움받을 생각부터 했겠지. 스스로 해결할 생각이 아니라.'

한 번 신한테 의지하게 되면 두 번, 세 번도 의지하게 되는 법이다. 강승현은 그걸 경계하고 있었다.

아즐 대륙의 신은 인간에게 특별한 힘을 주는 대신 판단력을 앗아가는 존재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을 떠받들고 숭배하게 만든다.

"아일만 봐도 알겠지만, 사람은 신이라는 것들과 가까워질수록 맛이 갑니다."

키르카라슈텔의 힘에 푹 빠진 아일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자신의 신앙심을 우선시하게 됐다.

같은 인간인 왕이 권력을 내려줘도 신나게 휘두르다 맛이 가는 사람이 많은데, 인간을 초월한 신이 막강한 힘을 준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인간이 얼마나 될까.

"듣고 보니 오싹하구만.... 까딱하면 우리도 아일처럼 되는 거 아닐까?"

좋든 싫든, 강승현과 김호정은 자신들의 배후에 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일처럼 신의 힘에 집착하다간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철저하게 거리를 둬야죠. 지금처럼만 하면 될 거 같아요."

관리자가 상태창을 이용해 차원 이동자를 돕는 건 사실이지만, 차원 이동자들을 아즐 대륙에서 개고생하게 만든 원흉이기도 했다.

"애초에 못 믿을 놈이니까."

"어쩌면 관리자 놈도 잊혀진 신 중 하나일지 모르겠네."

김호정이 말린 흑진월귤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 녀석이 평범한 신이라면 굳이 지구 사람을 끌고 올 필요가 없잖아."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강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관리자가 과거엔 숭배받았으나 지금은 잊혀진 신이라면 앞뒤가 맞는다.

"신앙과 힘을 되찾기 위해 우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크네요."

아즐대륙민들은 관리자에 전혀 대해 모르고, 관리자는 차원 이동자들을 노예로 부려먹으며 힘을 모으는 중이었으니까.

"애먼 지구 사람 말고 아즐대륙 사람이나 부려먹지."

김호정이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관리자의 목적은 대충 알아냈다. 하지만 아즐대륙민을 두고 굳이 지구인을 납치해온 이유는 아직까진 알 수 없었다.

반드시 지구인이어야 할 이유가 있던 건지, 아니면 아즐대륙민에게 접근할 수 없던 건지.

'제일 쉬운 건 당사자가 알려주는 건데.'

이렇게 떠드는 동안에도 관리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강승현은 빈 병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재미없는 신 이야기는 치우고, 요즘 얘기나 하죠."

관리자 뒷조사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당장 할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김호정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던전이 어수선하게 클리어되긴 했지만... 우리 목적은 '티나 퓨테인'을 도와주는 거잖아."

강승현 일행의 목적은 티나 퓨테인과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었다.

"던전은 클리어했고, 의뢰는 이제 다 끝난 건가?"

"루스도 하인드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니, 티나 씨를 하인드 마을까지 데려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긴, 어차피 우리도 하인드 마을로 돌아가야 하니까."

강승현 파티는 아즐 대륙을 떠도는 모험가가 아니라 하인드 마을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의뢰가 끝나고 하인드 마을로 복귀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진홍의 마탑이... 어디에 있더라?"

"도시 카마르."

카마르.

진홍의 마탑 덕분에 서부 지방에서 가장 안전한 대도시. 그래서 돈 많은 귀족들과 마법사들이 북적거린다.

"서부 지방에서 가장 안전하면서 가장 싸가지 없는 도시죠."

"오래 머물 동네는 아니구만. 빨리 뜨자."

"그래도 도시에 돈이 많아서 이런저런 시설이 많아요."

그래서 카마르에선 진귀한 연구 재료나 서적을 구하기 쉽다. 주로 마법 연구용이지만.

"하지만 다른 건 다 있어도 종교 시설은 없네요. 마탑은 교단하고 사이가 나쁘니까."

"그러면 여기 사람들은 치료 안 받고 산대?"

"이런 지역은 치료 시설을 따로 운영할 거예요."

"뭐, 나야 다치면 강 선생한테 치료받을 거고."

중요한 건 여기가 하인드 마을에서 제법 떨어진 장소라는 점. 그래서 당장 돌아가기는 힘들다.

"걸어서는 못 가려나?"

"인천에서 서울까지 걸어갈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것과 같죠."

강승현도 김호정도 카마르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하인드 마을로 걸어서 돌아가려면 지도를 구해서 노선을 짜야 했다.

"마차를 타고 가거나, 강가에서 배를 타는 게 낫죠."

"나 배는 좀...."

김호정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멀미하거든.... 근데 수영도 못 해.... 수중 몬스터라도 나타났다간 끝장이고...,"

"그럼 마차를 빌려야겠네요."

탑을 내려가면 카마르 마구간에 갈 수 있다. 거기서 하인드 마을로 가는 마차를 찾으면 될 것 같다.

"그럼 이 문제는 대충 해결됐고... 아, 그거 보상 확인했어요?"

"뭘?"

"업적 보상이요."

두 사람은 사히타 사제를 돕다가 [망자에게 안식을]이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아까는 탈출하느라 바빠서 업적 보상을 받지 않았다.

"그거 완전 까먹고 있었어."

"지금 확인하죠."

"이번엔 뭘 줄까?"

[보상 수령]

둘은 각자 [보상 수령] 버튼을 눌렀다.

타르르르르!

이번에도 어김없이.

룰렛 돌아가는 악랄한 소리가 들려왔다.

[※ 기도 스킬 중 하나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쳇, 랜덤 보상이었구만."

"업적 보상을 확률로 지급하는 저놈이 악신이 아니고 무엇인지."

"근데 기도 스킬이면... 신성 스킬 아냐?"

기도 스킬은 사제들이 주로 사용하는 신성 스킬 중 하나다. 즉, 신성력 쓰레기들한테 줘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나나 선생이나 신성력은 밑바닥인데."

"...장식용으로 써야겠네요."

[※스킬(진정의 기도) 획득]

강승현이 획득한 건 '진정의 기도'였다.

"김호정 씨는요?"

"나는 공황의 기도라는데."

[※스킬(공황의 기도) 획득]

랜덤 보상이라 서로 다른 보상을 받았다. 한 명은 진정이고 한 명은 공황이라니.

"어쩜 이렇게 정반대의 스킬이...."

"같은 스킬 받는 것보단 낫겠지?"

"쓸 곳은 없겠지만 확인은 해두죠."

강승현은 [진정의 기도] 스킬을 확인했다.

[진정의 기도]

[신성력이 담긴 기도로 대상 하나를 진정시킨다.]

[패닉에 빠진 대상의 정신력이 회복된다.]

[진정의 기도를 사용한 대상은 힐 효율이 증가한다.]

'역시 힐 쓸 줄 모르고 신성력 쓰레기인 야매 힐러에겐 필요 없는 스킬....'

이렇게 생각하며 상태창을 치우려던 순간이었다.

"허억!!"

옆에 있던 김호정이 갑자기 소리쳤다.

"왜 그래요?"

"이거 스킬이... 어억! 꺼졌다!"

김호정의 횡설수설한 말을 듣고 [진정의 기도]를 다시 확인하자,

[진정■ ■■]

[신■력■ 담긴 ■■로 ■상 하■를 진정시킨다.]

[패닉에 빠■ 대■의 정신력이 ■복된다.]

[■정의 기도■ 사용한 ■■은 ■ 효율이 증가한다.]

시스템이 파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문장이 부서지고 있었다.

[■]■■[■]■]

[■ ■■■[■]

[■][■][■][■][■]■][■]

[■]■■■■■■■■■■■■■]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글자도 전부 사라지더니.

지지직!

팟!

멋대로 상태창이 꺼져버렸다.

"이거 오류 났나? 상태창도 고장나고 그래? 이거 이제 안 켜져? 나 이제 상태창 없이 살아야해? 지금도 빡센데 상태창 없이 무슨 수로...."

김호정은 패닉에 빠졌는지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하지만 전에 비슷한 일을 겪었던 강승현은 침착한 얼굴로 상태창을 다시 열었다.

그러자 상태창은 멀쩡하게 열렸다. 다만, 아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진정의 목소리]

[발동 시 대상을 진정시킨다.]

[대상의 상태이상 '패닉'을 제거하고, 약간의 정신력을 회복시킨다.]

[진정의 목소리를 들은 대상은 [완치판정] 효율이 증가한다.]

[진정의 기도]가 [진정의 목소리]로 바뀐 상태였다.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부분이 사라졌군.'

힐 효율을 늘린다는 부분도 완치판정으로 변경. 밸런스 패치라도 한 것처럼 영 써먹을 수 없던 스킬이 쓸 만하게 바뀌었다.

[진정의 목소리]

"진정하세요."

강승현은 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마침 옆에 패닉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진정의 목소리]

어깨를 붙잡고 스킬을 발동하자, 횡설수설하던 김호정이 정신을 차렸다.

"어...어어... 고마워...."

"상태창 멀쩡해요. 스킬도 쓸 만해졌구요."

"뭐? 어디?"

김호정도 황급히 상태창을 열었다.

"저는 [진정의 목소리]라는 스킬로 변했는데, 김호정 씨는요?"

"[공황의 외침]...."

[공황의 외침]

[대상을 패닉에 빠트린다.]

[패닉에 빠진 대상은 정신력이 깎인다.]

-[조건 미달성으로 미해금 된 옵션]

역시 [진정의 목소리]의 정반대 효과를 가진 스킬이었다.

"마법사를 병신으로 만드는 스킬이군요. 마탑에서 그런 스킬을 얻다니."

"이, 이거라면 지금도 쓸 수 있겠는데!"

김호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차원 이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쓸 만한 스킬은 몇 개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써보고 싶어!"

"그거 저한테 써봤자 소용없는 건 아시죠?"

"나도 알지! 선생 멘탈 장난 아니잖아."

강승현은 워낙 멘탈이 튼튼해서, 정신력 좀 깎아봤자 티도 안 난다. 괜히 어설프게 정신력 하락 스킬을 걸었다간 얻어터질 뿐이다.

"마을 밖에서 몬스터한테 써볼 거야."

"마법사한테 써보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요.... 마침 마탑 안이기도 하고."

"그런 짓 했다간 모험가 조합에 잡혀갈걸."

똑똑똑.

강승현이 김호정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탄셀 교수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엥? 밥때가 됐나?"

"어쩐 일이시죠?"

"교수님이 강승현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바로 가죠."

대충 예상은 했다. 이번 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겠지.

56. 마탑의 마법사란

"여기가 교수님 방입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승현은 탄셀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교수가 어떤 남자와 대화하는 게 보였다.

"실례합니다."

"어서 오게.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아이베르 교단 이야기는 어떻게 됐나요?"

"그거라면 걱정 말게. 아침 일찍 사제단을 파견하겠다고 답장하더군."

탄셀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친구들은 마탑보다 언데드를 더 싫어하는 놈들이니까."

교단은 마탑과 사이가 더럽게 안 좋지만, 이런 문제가 생기면 사적인 감정은 미뤄두고 협력하는 편이었다.

'사히타 사제가 좋아했겠네.'

강승현은 소심한 사제가 소심하게 기뻐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런데 저쪽에 계신 분은?"

강승현은 빈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남자는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마법사 시성이라고 합니다."

"힐러 강승현입니다."

시성 역시 탄셀 교수와 마찬가지로 교수용 로브를 입고 있었다.

'저 녀석도 교수인가?'

하지만 붉은색 로브를 입은 탄셀 교수와 달리 시성은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마탑은 상징색을 중요시 여기니까, 진홍의 마탑 소속은 아니겠군.'

강승현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시성이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저는 이곳 진홍의 마탑 소속이 아니라 칠흑의 마탑 소속 교수입니다."

"칠흑의 마탑이라면...."

"흑마술사의 탑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죠."

시성 교수가 손을 펼치자 짙고 검은 안개가 퍼져나갔다.

교단에선 흑마술에 치를 떨지만, 사실 아즐 대륙에서 흑마술은 부분 합법이다.

허가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 그렇지. 허가만 받는다면 누구나 흑마술을 배울 수 있다.

'칠흑의 마탑은 남부에 있는 아즐 대륙 유일한 "흑마술" 기관이었지.'

칠흑의 마탑 소속 흑마술사.

그들은 왕성이 합법으로 인정한 유일한 흑마술 집단이다.

"주로 연구하는 건 흑마술과 흑마력의 올바른 사용법입니다."

이들은 흑마술을 올바르게 쓰는 게 목적이라, 흑마술을 악용하는 자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교단과 사이는 나쁘지만 그런 면은 꼭 닮았다.

"본래 시성 교수는 다른 연구 때문에 우리 마탑을 방문했는데, 이번 일을 듣더니 자네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사정사정을 해서 말이야."

"너무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내일은 마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시성 교수가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들이 다 그렇지만, 이들은 연구와 자료에 미친놈들이다. 자료만 구할 수 있다면 불 속에도 뛰어들지 않을까.

'하긴, 흑마술을 연구하는 녀석이 그냥 넘길 이야기는 아니지.'

강승현은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신에 대한 것만 빼고 말이다.

-"그런 일이... 세상에... 오오...."

시성 교수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필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혹시 흑마술사가 사용하던 소지품은 뭔가 없으십니까...? 아니면 던전에서 발견한 물건이라도...."

시성 교수가 무척 기대하는 눈으로 물었다.

"있긴 합니다."

"혹시 파신다면 제가 연구 목적으로 매입하겠습니다!"

"그러면...."

강승현은 인벤토리를 뒤졌다. 키르카라슈텔의 보주도 있긴 하지만, 이건 직접 사용할 거라 팔 생각 없다.

'이걸 넘겨주자. 안 그래도 슬슬 쓰레기통에 버릴까 했는데.'

강승현이 꺼낸 건 금속제 마법 단검. 아일이 사용하던 희생의 에더메였다.

이것도 키르카라슈텔의 성유물이라 성능은 강력하지만, 강력한 흑마력 때문에 평범한 사람은 쓸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처치 곤란이었는데, 흑마술 연구용으로 가져간다면 나야 좋지.'

강승현은 시성 교수한테 희생의 에더메를 내밀었다.

"흑마술사가 사용하던 마법 단검. 이건 어떠신가요."

"오오오오!!!"

시성 교수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단검에 담긴 어마어마한 흑마력! 그냥 보기만 해도 이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얼마나 굉장할지!"

일단은 사람을 푹푹 찔러 죽인 단검인데, 연구에 미친 흑마술사는 좋다고 기뻐했다.

"꼭 사겠습니다! 지금 제가 가진 돈이... 아냐 아냐, 이런 가치 있는 물건을 고작 돈으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어!"

흥분한 시성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정의 목소리 좀 써줄 걸 그랬나.'

[진정의 목소리]는 패닉에 빠진 사람뿐만 아니라 흥분한 사람도 진정시킬 수 있다. 당사자가 나가버렸으니 의미 없지만.

"이해하게. 마법사들은 돈보다 아이템을 더 가치 있게 여겨서 말이지."

탄셀 교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그냥 돈으로 받아도 괜찮은데요."

"나도 그렇지만 마법사란 족속들은 자기중심적이라, 남들도 다 자기들 같은 줄 알거든."

마법사라서 할 수 있는 마법사 비꼬기. 탄셀 교수가 웃으며 말하던 참이었다.

벌컥!

"강승현 힐러...! 아직 있습니까? 헉헉...."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성 교수가 물건을 한가득 챙겨 돌아왔다.

"지금 가진 물건은 이런 것들뿐인데... 뭔가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헉헉...."

'죄다 마법사들이나 관심 가질 만한 물건이군.'

시성 교수가 가져온 건 물건들은 각종 마법 연구 서적이나 완드나 스태프 같은 마법사용 아이템이었다. 강승현에겐 딱히 필요 없는 물건들이다.

"이건 뭔가요?"

그러던 중, 강승현의 눈에 오르골 하나가 들어왔다.

"그건 기운찬 오르골입니다. 태엽을 감으면 마력을 흡수해서 활력으로 변환하는 괴상... 독특한 아이템이죠."

<<으쌰! 으쌰! 아싸! 아싸!>>

태엽을 감자 활기찬 응원가... 같은 게 흘러나왔다. 보통 오르골에선 고요하고 감미로운 노래가 나올 텐데.

"...요상한 음악이네요. 남부에는 이런 음악이 유행하나요?"

"이, 이건 제가 아는 사람이 테스트로 만든 물건입니다! 어쩌다 짐에 섞여서...."

시성 교수가 붉어진 얼굴로 오르골을 닫으려 했다. 다행히 저런 노래가 유행하진 않는 모양이다.

"잠시만요. 이거 마력이 없는... 적은 사람도 쓸 수 있나요?"

오르골을 작동했을 때, 잠깐이지만 스태미나 회복량이 증가했다. 효과가 발동했다는 소리다.

"네. 이 오르골은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서 변환하는 아이템이라서요."

주변 마력을 끌어서 쓰는 물건이라, 마력이 낮은 사람도 부담 없이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체력이라면 모를까... 활력은 가만히 있어도 회복되는데 누가 이런 걸 쓰겠어요? 하하하, 그 친구도 그냥 재미로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걸로 할게요."

강승현은 단검을 내밀며 말했다. 시성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네?"

"기운찬 오르골하고 단검하고 바꾸고 싶다구요."

"이, 이것과... 이 귀한 연구 자료를 바꾸시겠다구요?"

시성 교수는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장난감에 불과한 물건인데.

"저한테는 이게 가장 유용해 보여서요."

작동하면 마력을 흡수해 스태미나를 회복하는 오르골. 포션에 비하면 회복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스태미나를 채워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소리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중요한 건 성능이다. 혹시라도 포션이 다 떨어졌을 때 비상용으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에겐 그저 그런 아이템일지 몰라도, 스태미나를 사용하는 강승현에겐 최고의 회복템이다.

'이런 좋은 물건을 받고 쓰레기를 버릴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강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기분 나쁜 단검을 시성 교수한테 떠넘기고 오르골을 챙겼다.

"흡! 이런 귀한 연구 자료를 흔쾌히 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시성 교수는 강승현이 연구를 위해 귀한 자료를 기증했다고 생각했다.

"별건 아니지만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시성 교수는 어지간히 고마웠는지 마법서 몇 권에 포션 세트까지 얹어주었다.

"언젠가 저희 마탑에 방문하신다면 극진히 대접하겠습니다!"

"네 뭐... 갈 일이 있다면 들러 볼게요."

"그럼 여기 계약서를...."

시성 교수가 초고속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에는 희생의 에더메를 연구 목적으로 거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인했습니다."

강승현이 계약서에 사인하자,

"아즐 대륙 흑마술 연구에 한 획을 그으셨습니다!"

시성 교수는 크게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다.

-"마법사들은 정말 연구를 좋아하네요."

"삶의 이유니까. 자네도 한잔하겠나?"

시성 교수가 떠난 뒤 탄셀 교수가 차를 권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강승현은 차를 거절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성 교수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이번 일은 흥미롭게 생각하네."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사실은 동행하던 파티원이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없는 일은 아니지만, 흔한 일은 아니니까.

"자네의 판단력이 아니었다면 파티는 전멸했겠지."

"그랬겠죠."

"당연히 내 제자 놈도 죽었을 거고."

탄셀 교수는 씁쓸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슈이레 말고도 모험가가 되겠다며 떠난 제자들이 많아."

몇몇은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지만, 소식이 끊겼거나 죽은 제자들도 많다고 한다.

"슈이레는 내가 가르친 녀석 중 최고로 재능있는 아이였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마력량과 거기서 오는 어마어마한 자신감. 자신감이 지켜주는 굳건한 정신력까지.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어."

어떤 테스트에도 무너지는 일 없이 꿋꿋했고, 남들이 패닉에 빠졌을 때도 태연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잘난 아이였기 때문에 마탑을 지겹다 느낀 거겠지."

"그래서 모험가가 되겠다며 떠난 거군요."

"당연히 말렸지만, 마법사 고집은 누구도 못 꺾어."

아쉬웠으나, 탄셀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슈이레는 내가 키운 제자 중 가장 유능한 아이였네."

재능 있는 슈이레라면 모험가가 되어도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녀석이... 제 손으로 마법진 하나 작동하지 못하고 급하게 도망쳐 온 거야."

"...."

"그걸 본 내 마음이 어땠겠나?"

이번 일은 탄셀 교수한테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만나자마자 지팡이로 마구 두들겨 패긴 했지만, 그만큼 걱정했다는 소리였다.

"자네가 없었다면 거기서 죽었겠지. 운 좋게 튕겨 나왔다고 해도, 충격받은 정신은 회복되지 않았을 거고."

강승현이 없었다면 비참하게 죽었거나, 가까스로 목숨은 건져도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슈이레가 어떤 심정으로 자네에게 마법진을 맡겼을지 상상이 가."

패닉에 빠져 쓸모없어진 마법사를 대신할 유일한 희망.

"슈이레의 스승으로서, 진홍의 마탑의 일원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하겠네."

탄셀 교수가 고개 숙여 말했다.

"제자를 구해주어 고맙네."

"당신은 제자를 아끼는 분이군요."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성질이 고약하다. 마력이 낮은 인간은 우습게 보고 심하면 짐승 취급하기도 한다. 그들이 사랑하고 관심 두는 건 오직 연구 성과와 결과뿐.

'사제 못지않게, 어쩌면 사제보다 더 재수 없는 놈들이지.'

사제들은 최소한 신의 눈치라도 보지만, 마법사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니까.

'보기 드물게 인성 좋은 마법사로군.'

모험가가 되겠다며 떠난 제자들이 탄셀 교수한테 꾸준히 연락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좋은 마법사인 만큼, 좋은 스승이었을 테니까.

"이건 제자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세."

탄셀 교수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돌돌 말린 스크롤이었다.

"이건...."

"진홍의 마탑 허가증."

본래 외부인이 마탑을 돌아다니기 위해선 마탑 허가증이 필요하다. 허가증이 없으면 구경은커녕 마탑 입구에 들어오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허가를 받는 건 꽤 까다롭고, 아무한테나 발급해주진 않는다.

"이왕 진홍의 마탑에 온 김에, 구경하다 가지 않겠나?"

57. 자신이 선택한 길

마탑은 외부인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허가증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다.

"하지만 허가증만 갖고 있다면 소속 마법사와 동등하게 대우하지.

마탑에서 마법 강의를 들을 수 있고, 마탑 도서관의 자료를 열람하거나, 마법 관련 아이템을 살 수 있다.

"마탑에서 파는 물품 중엔 힐러한테 도움 될 만한 물품도 많지."

힐러는 대충 쓰자면 사제+마법사. 정식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탑에 들르면 유용한 지식과 아이템을 구할 수 있다.

"자네도 힐러니까 성능 좋은 스태프가 필요하겠지. 망토도 하나 필요할 거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신성력도 마력도 없는 쓰레기한테 일반 힐러용 스태프와 망토 같은 건 별 필요 없겠지만.

'마탑에서 파는 물건 중에는 야매 힐러한테도 유용한 게 많거든.'

마법을 이용해 길러낸 다양한 약초. 몬스터 도감이나 포션 제조법 같은 자료 서적. 그 외에 야매 힐러 짓을 보조할 만한 도구들.

'하인드 마을 근처에서 구하기 힘든 것부터 찾아야겠네.'

강승현은 힐을 쓸 수 없는 대신, 가진 재주를 활용하는 야매 힐러다. 그가 재주를 활용하기 위해선 다양한 지식과 자료를 습득해야 한다.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가자.'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언제 또 마탑 허가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발급한 마탑 허가증의 지속 시간은 사흘. 사흘 동안 마탑을 전부 돌아보긴 힘들 테니...."

탄셀 교수는 종이에 간단한 약도를 그렸다.

"자네에게 추천할 만한 장소를 표기해놨네. 여기 이 가게는 내 이름을 대면 물건을 할인해줄 거고...."

"감사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지. 여건이 된다면 마법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것도 추천하고, 여기 찻집의 산뜰딸기 주스는...."

탄셀 교수는 신난 얼굴로 약도를 그려갔다. 마탑 약도가 점점 관광지 안내 책자처럼 변해갔다.

'고마워서 주는 게 아니라, 그냥 관광지 추천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강승현은 마탑 허가증과 마탑 약도를 손에 넣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문을 열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탄셀 교수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강승현을 불러세웠다.

"아까는 트리니티 마법진을 사용한 직후였지.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마력을 전부 소진했을 거야."

"...."

"그래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군."

매우 실력 있는 마법사들은 타인이 가진 마력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그 말은 가진 마력이 아주 낮다는 소리지."

잠시 침묵하던 탄셀 교수가 입을 열었다. 마력이 적다는 건 간파했지만, 마력이 0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자네, 평범한 힐러는 아니군. 아니,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내가 차원 이동자라는 걸 눈치챘나.'

마탑 역시, 차원 이동자가 가진 힘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한다. 실험과 연구는 마탑의 주특기니까.

"잡아다 실험체로 쓰시게요?"

만약 그런 짓을 하겠다면 이쪽도 생각이 있다.

"오해하지 말게. 오랜 친구가 떠올랐을 뿐이야."

탄셀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와 똑같진 않지만... 느낌은 비슷한 친구였거든."

지금은 소식이 끊겨서 알 수 없다고 한다.

'뭐, 나 말고도 끌려온 차원 이동자는 많으니까.'

-"그럼 감사했습니다."

강승현은 탄셀 교수의 방을 나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니 지금이 새벽 시간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김호정 씨는 자고 있겠군. 마탑에 관한 건 내일 말해주자.'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할 때였다.

"아, 강승현 힐러님."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하세요?"

복도 끝 창가에 티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탑에 오니 익숙하고 반가워서...."

"역시 티나씨도 마탑 소속이었군요."

"네. 저희 마탑은 아니지만 그리운 장소예요."

"마법을 배우다 포기한 녀석들은 대부분 마탑 소속이니까요."

마탑에 들어간 마법사들은 많은 지식을 얻는 대신, 자신보다 재능 있는 자들과 만나게 된다.

'그 때문에 자기보다 잘난 놈들을 보고 충격받아서 마탑을 떠나는 놈들도 많지.'

그래서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무소속 마법사는 마법을 포기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티나 씨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재능 문제로 마탑을 떠났다면, 마법보다 더 재능 없는 검술을 고를 리가 없으니까.

"거기까지 알아내셨으니... 계속 입 다물고 있기 그렇네요. 사실 저는 황금의 마탑 소속이었어요."

황금의 마탑은 아즐 대륙 동부에 있다. 티나와 루스는 동부 출신인 모양이다.

"저는 동부 벨리아 마을 태생인데... 루스랑 어릴 때부터 친남매처럼 자랐어요."

원래 루스네는 벨리아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살았지만,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티나네 집으로 피난을 왔다.

그렇게 벨리아 마을에서 살게 된 어린 루스는 고향 마을을 되찾겠다며 목검을 들고 야산을 뛰어다녔다.

"어른들이 보기엔 애들 장난이었겠지만, 루스는 진지했어요."

티나 역시 그런 루스를 쫓아다니며 목검을 들었다. 둘은 서로 대련 상대가 되기도 하고, 힘을 합쳐 작은 들짐승을 사냥하기도 했다.

"검을 처음 잡은 건 아니었군요."

원래 재능 있던 루스의 검 실력은 점점 늘어났고, 티나 역시 루스만큼은 아니었으나 조금씩 성장해갔다.

"그런데... 저한테 마법 재능이 있다는 게 밝혀졌어요."

마탑에선 숨은 인재를 찾기 위해 아즐대륙 곳곳으로 마법사를 파견한다. 그러다 벨리아 마을에 들른 마탑 마법사가 티나를 발견했다.

"슈이레 씨만큼 천재는 아니었지만, 마탑에 입학할 만한 수준은 된다고 그랬죠."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마법을 익혔다면 모를까, 티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산과 들을 쏘다니며 루스와 함께 검을 익혔다.

"하지만 마법사가 되면 방에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한다니. 지옥이 따로 없죠."

당연히, 적성에 맞을 리가 없다. 티나는 마법사가 될 생각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거는 기대가 너무 컸다.

가문 최초, 마법사의 탄생.

그것도 마탑 소속 마법사.

"저희 집안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가문이었으니까요."

티나는 검을 놓고 고향을 떠나 황금의 마탑에 들어갔지만, 평소 책 한 권 읽지 않던 아이가 빡빡한 마탑의 교육을 따갈 리가 없었다.

동기들은 뒤떨어지는 티나를 비웃었고, 교수들은 있는 재능을 못 살리는 티나를 답답하게 여겼다.

"그래도 이 악물고 버텼어요. 가족들이 기대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귀에 루스의 소식이 들려왔다.

"몬스터한테 점령당해서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되찾았다고."

"루스 씨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네요."

"급하게 마을로 돌아갔더니... 루스는 영웅이 되어 있었어요. 가족들은 기뻐했죠."

그녀가 마탑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루스는 뛰어난 검사로 성장했다. 가족들은 루스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도 계속 검을 휘둘렀다면 루스 옆에 있었을 텐데. 계속 이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마탑을 떠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결국엔 이런 꼴이지만요."

티나는 마법을 배우느라 십 년 넘게 검을 잡지 않았다. 이제는 검술 초짜나 다름없는 신세다.

모험가 경험을 쌓으려고 파티에 가입했지만, 부족한 검술 실력 때문에 검사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법사로서는 도움이 됐지만.

"결국, 저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네요. 마법도, 검술도...."

하고 싶은 일과, 재능 있는 일. 티나는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탑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계속 검을 배워야 할지."

"저는 마법도 검도 배우지 않아서 잘 모르긴 하지만."

티나의 이야기를 듣던 강승현이 입을 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중요하겠죠."

"하지만 저는...."

"근데 내가 재능이 없어서 남들보다 딸린다? 그럼 꼼수를 써야죠."

"꼼수요...?"

강승현은 힐러지만, 힐을 쓸 줄 모른다. 하지만 힐러로 살아야 포인트를 벌 수 있다.

'그래서 힐을 대신할 방법을 찾았지.'

강승현은 힐 없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일반적인 치료 지식을 연구했다. 부족한 재능을 다른 곳에서 끌어다 메꾼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면 됩니다."

"수, 수단과 방법...?"

"제가 치료하는 거 보고 진짜 힐러가 아니라는 놈들도 있긴 한데, 알 게 뭡니까?"

"그러고 보니...."

티나는 루스가 떠들던 말을 떠올렸다. 강승현은 비록 힐은 쓸 줄 모르지만 어떤 사제보다도 대단한 힐러라고.

"원래 타고난 재능을 이기려면, 노력과 꼼수가 필요한 법이죠."

가짜 힐러라며 떠들던 놈들도, 강승현이 환자를 치료하면 입을 다물었다.

방식이야 어쨌든, 일단 치료하면 그만이다.

"노력과 꼼수...."

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그럼 이제 가서 자세요. 감기 걸리면 치료약 만들기 귀찮으니까."

"네. 힐러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다음 날, 에르간 일행은 마탑 입구에 모였다.

다들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마탑으로 복귀할 거야."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슈이레였다.

"내가 제일 잘난 줄 알고 마탑을 나왔는데,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 있더라고."

슈이레는 강승현을 바라보았다.

트리니티 마법진을 작동했지만 마력 고갈 없이 서 있는 존재. 그에 비하면 자신은 풋내기 그 자체였다.

"교수님한테 말했더니 몇 대 두들겨 맞긴 했지만... 받아주신대. 그래서 난 여기까지인 거 같아."

"저... 실은 저도... 교단으로 복귀하기로 했어요...."

사히타 사제가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제가... 이번 일의 마무리를 짓고 싶어서... 파티를 떠나야 할 거 같아요...."

당사자 아일은 죽었지만, 피해자들은 남아 있다. 사히타는 교단에 돌아가 그들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가족이나 지인을 찾아줄 생각이다.

"나도 사히타 사제랑 같이 갈 거야. 신성력 수행이 필요해."

라크라마티도 이번 모험으로 깨달았다. 자신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강승현 심문관처럼... 강해지려면!"

그리고 여전히 강승현을 이단심문관으로 착각하는 중이다. 흑마술사의 분신을 한순간에 지워버린 광경이 그에겐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도 파티에서 하차."

"사실 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에르간도 입을 열었다.

"모험가 일에 지친 것 같다. 파티를 해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일에게 배신당한 게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물론 모험가 사이에선 흔한 일이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었군."

"그리고 가장 좋은 결말이죠."

누가 죽거나 다쳐서 파티가 해산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목표가 생겨서 파티가 해산되는 것. 모험가 파티에 이거보다 좋은 결말은 없다.

-"다들 떠났네요."

슈이레는 마탑 안으로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은 마탑을 떠났다. 마탑 입구에 남은 건 티나와 강승현, 김호정 세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어째? 하인드 마을로 출발할까?"

"탄셀 교수한테 마탑 허가증을 받았어요."

강승현이 허가증을 보여주며 말했다.

"티나 씨는 어쩔 겁니까?"

"할 일 없으면 우리랑 같이 가자."

"저는...."

티나 역시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다. 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마검사가 되고 싶어요."

부족한 실력을 마법으로 보강하면서 검술을 사용하는 자들.

"이도 저도 아닌 직업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되고 싶어요."

마법적 재능을 살려, 자신이 좋아하는 검술을 익히고 싶다. 그게 티나의 선택이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일반 마법사는 적성에 맞지 않고, 검사가 되기엔 시간을 허비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마검사뿐이다.

"티나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마검사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검술로 유명한 남부로 가야 할지...."

"저도 잘 아는 건 아닌데."

강승현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이 편지는 한글로 적혀 있어서 티나는 읽을 수 없다. 다만, 겉표지의 '최이한'이라는 이름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즐 대륙 북쪽. 르진페로이 마을에 가보세요."

"르진페로이라면... 북부 지방에서도 엄청 추운 곳?"

"거기에 제가 아는 놈 중 가장 또ㄹ... 강한 마검사 하나가 있거든요."

놈을 찾아가 강승현의 이름을 댄다면, 제자로 받아주진 않아도 마검술의 기초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눈으로 보기만 해도 도움이 될 거에요. 혹시 지랄하면 저한테 편지 하나 보내세요. 찾아갈게요."

"가, 감사합니다...."

결국, 티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강승현이 자른 붕대를 건네자 티나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마탑 스승님들도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신 적 없는데...."

"어정쩡한 능력 때문에 고민하는 게 남 일 같지 않아서 그래요."

강승현은 힐 못 쓰는 힐러가 된 탓에 개고생하는 자신과 티나를 겹쳐 보았다. 그녀도 처음부터 마법을 배웠거나, 꾸준히 검술 훈련을 했다면 저런 고민하지 않았을 테니까.

"강승현 힐러님, 김호정 탱커님 둘 다 건강하세요! 하인드 마을로 편지할게요!"

티나는 손을 흔들며 마탑을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됐지만, 표정은 자신감 넘쳤다.

"티나 쟤 괜찮을까?"

"괜찮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실행력 하나는 확실하니까요.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죠."

강승현은 손에 든 마탑 약도를 바라보았다. 탄셀 교수 덕분에 어디에서 어떤 물품을 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꼭 사야 할 물건이 몇 가지 있어요."

58. 진홍의 마탑 1

카마르는 호수 한복판에 세워진 도시다. 지형 특성상 몬스터의 접근이 어렵고, 진홍의 마탑에서 결계를 펼쳐 도시를 보호하기 때문에 서부 지방에서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세금이 비싸다지.'

이렇듯 진홍의 마탑이 카마르의 안전을 책임지는 만큼 마탑의 경비 역시 무척 삼엄했다. 마탑이 무너지면 도시도 끝장이니까.

"정지!"

강승현이 마탑 입구로 돌아가자 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저지했다.

"진홍의 마탑엔 무슨 볼일이냐?"

"잠깐, 이 녀석들 아까 나간 모험가들이야."

다른 경비병이 동료를 말리며 물었다.

"뭔가 두고 온 게 있나?"

"그래도 안엔 못 들여보내줘. 별로 중요한 물건도 아닐 테니 돌아가라고."

"두고 온 건 없지만...."

강승현은 마탑 허가증을 꺼내 보였다.

"보여드릴 건 있죠."

"이, 이건 마탑 허가증?"

"그것도 탄셀 교수님이 발급한 허가증이다...!"

"이제 문 열어주시죠? 저희가 할 일이 많아서."

강승현이 허가증을 얼굴 앞에 들이밀자.

"시, 실례했습니다!"

경비병은 허둥지둥 문을 열었다.

"타, 탄셀 교수님의 지인이었을 줄이야."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이 탄셀 교수님의 제자를 데려왔다던데...."

경비병들이 속닥거렸으나 강승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언제 들어와도 시뻘겋구만."

김호정이 마탑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홍의 마탑은 이름에 걸맞게 온통 진홍빛을 띠고 있다. 건물과 벽은 물론, 마법사들이 입은 로브도. 덕분에 외부인은 옷차림만 봐도 구분할 수 있다.

"일단, 가장 먼저 구해야 할 물건이...."

약도를 펼친 강승현은 계단을 올라갔다. 강승현이 향한 곳은 가게가 아니라 진홍의 마탑 마도공학실이었다.

"마력으로 가동하는 회중시계."

흔히 마나 워치라 부르는 물건이다. 제한시간이 존재하는 모험가 의뢰 특성상, 모험가한테 시간 관리는 아주 중요하다.

마을에서는 시계탑을 보면 시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마을을 떠나거나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면 시간을 확인하기 힘들다.

'거기다 포션 제조할 때도 시간 체크는 꼭 필요하거든.'

지금까지는 감에 의존해서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마나 워치를 구매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포션을 만들 수 있다.

"이거 마나 워치잖아? 티나도 갖고 있던데."

"마나 워치는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에요."

마나 워치는 오직 마도공학자들만 만들 수 있다. 구하기 힘든 만큼 비용도 어마어마해서 귀족들이나 살 수 있지, 평민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티나 녀석... 금수저였구나...."

"그게 아니라, 마탑 소속 마법사는 시계를 싸게 살 수 있어요."

마탑에서 시계는 필수품이다. 강의 시간도 체크해야 하고, 마법 연구할 때도 중요하니까.

"마탑에 입학한 직후에는 시계를 대여해서 쓰다가, 천천히 돈을 모아서 사는 게 정석이래요."

당연히 강승현 일행이 지금 가진 돈으로 살 물건은 아니지만,

"탄셀 교수의 허가증이군. 자네가 슈이레를 구해줬다는 그 힐러인가?"

탄셀 교수의 배려 덕분에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네. 강승현 힐러라고 합니다."

"그런 은인이라면 비싸게 받을 수 없지. 원하는 디자인을 골라봐."

이 사람은 아뉠 교수. 마력을 이용한 아이템 제작과 개발 연구. 즉, 마도 공학을 담당하는 교수다. 진홍의 마탑 마도공학자 중에선 최고 권위자라고.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김호정 씨는요?"

"나도?"

"저번에 말했잖아요. 김호정 씨 것도 구해준다고."

"그 말 하고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하여간 강 선생 대단해!"

김호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요걸로 할게!"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마나 워치를 골랐다.

"사용법은 간단해. 시계에 마력을 주입하면 되거든. 어지간해서 고장 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아무 마탑이나 가봐."

아뉠 교수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말했다.

"꼬나보긴 하겠지만 수리는 해줄걸? 제일 좋은 건 우리 마탑으로 오는 거지만."

마탑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경쟁상대다. 다른 마탑 아이템을 고쳐달라고 가져오면 싫어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수리 실력을 뽐낼 기회인 만큼,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감사합니다."

"잘 써. 모험하는 김에 우리 마탑 홍보도 해주고."

강승현은 인사를 마치고 마도 공학실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제가 그 이야기 했나요?"

"뭘?"

"아이템 슬롯 업적."

레어 아이템 3개를 인벤토리에 넣으면 [아이템 슬롯] 업적이 달성되면서 아이템을 등록하는 슬롯 시스템이 추가된다.

"제가 레어 아이템 하나 갖고 있고, 김호정 씨도 하나 있으니까... 하나만 더 구하면 해금할 수 있어요."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빼기만 해도 달성할 수 있는 업적이다. 레어템을 구하기 힘들어서 깨기 힘들 뿐.

"여긴 마탑이니까... 레어템 하나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겠죠. 저희가 살 수 있는 물건이면 좋겠는데."

강승현은 김호정과 이야기하며 장소를 옮겼다.

"여기는?"

"마탑에서 꼭 사야 할 물건이라면... 역시 스크롤이죠."

스크롤. 종이에 마력을 담아 제작한 마법 두루마리. 효과는 각기 다양하지만, 한 번 쓰면 사라지는 일회용 아이템이다.

"요즘 잘 나가는 스크롤은 마법 방패 소환이나 마법의 검이 있는데...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마법을 모르는 사람도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다 보니, 마법사보다는 다른 직업의 모험가들이 찾는 아이템이다.

"이걸로 주세요."

하지만 강승현이 찾는 건 오직 하나, 귀환 스크롤이었다.

'이번 던전에서 개고생을 해서 말이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보험으로 한두 장 정도는 사둘 생각이다.

"던전 귀환 스크롤을 찾으시는군요.... 이건 좀 비싼 물건이라...."

스크롤은 마법 주문이나 마법진을 작은 종이에 박아 넣어 만드는 아이템이다. 당연히 마법의 규모가 커질수록, 스크롤을 만들기 어렵다.

"가장 싼 뱅그롤 마을 좌표 지정 귀환 스크롤은 현재 940만 골드입니다."

가장 싼 녀석이 940만 골드. 이게 일회용이라는 걸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가격이다.

심지어 스크롤 한 개로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두 명. 모험가들이 탈출 스크롤을 사지 않는 이유가 있다.

"거기다 귀환 스크롤은 부서진 던전을 빠져나와 차원의 틈에서 아즐 대륙으로 귀환하기 위한 아이템이라... 일반적인 상황에선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아즐 대륙에서 공간이동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차원의 틈을 거쳐야 한다.

즉, 하인드 마을에서 카마르로 바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하인드 마을에서 차원의 틈을 거쳐 카마르로 복귀하는 건 가능하다는 소리다.

'차원의 틈을 여는 게 쉽지 않아서 문제지.'

지금도 마법사들은 차원의 틈을 자유롭게 열기 위해 연구 중이다. 아직까진 극소수의 마법사들과, 무너지는 던전을 통한 방법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돈 다 합쳐도 900만 골드도 안 될걸...."

김호정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기는 마탑이죠. 꼭 돈이 아니어도 물건을 살 수 있어요."

마탑은 물물거래가 가능한 장소 중 하나다. 마법사들은 돈보다 귀한 아이템을 좋아하니까.

"이거라면 스크롤과 교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강승현이 꺼낸 건 시성 교수가 덤으로 준 마법서였다.

"그, 그건...."

"칠흑이 마탑 소속 시성 교수가 직접 편찬한 '마력의 이해와 원리' 세트."

"세상에! 그런 귀한 걸 어디서...?"

"본인한테 직접 받았습니다."

마법을 습득할 수 없는 강승현에겐 그냥 무거운 책이지만, 마법사들은 없어서 못 보는 귀한 전공 서적. 특히 마탑 소속 마법사라면 놓칠 수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고 보니 시성 교수가 막 떠난 참이었지? 그럼 이건 본인한테 직접 받은 마법서? 지금 놓치면 절대 못 구하는 거 아냐?"

옆에서 김호정이 바람잡이 질을 시작했다.

"그, 그럼 귀환 스크롤과...."

"이게 돈 있어도 못 사는 책이지, 아마...."

"그럼 두, 두 장! 두 장 어떻습니까?"

"강 선생, 우리 옆 가게도 가볼까?"

"그럴까요."

"잠깐잠깐잠깐! 세 장! 세 장 드리겠습니다!"

마법사는 가게를 떠나려는 강승현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귀환 스크롤 세 장에 혼란 스크롤 세 장."

"오케이! 합쳐서 여섯 장에 오케이!"

혼란 스크롤은 귀환 스크롤에 비하면 훨씬 싸다. 사실상 거저 주는 거니, 저쪽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닐 것이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는 스크롤을 갖다 바치고 행복한 얼굴로 마법서를 끌어안았다.

"세 장이나 있으니 던전에서 무슨 일 생겨도 안심이네요."

"든든하구만!"

"김호정 씨도 한 장 갖고 계세요."

강승현은 김호정에게 탈출 스크롤을 한 장을 내밀었다. 그래야 둘 중 하나가 기절해도 함께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남은 책은 팔아치워서 돈으로 바꾸고...."

강승현은 서점에 들러 각종 자료 서적을 구입했다.

"몬스터 도감에 아즐 대륙 역사서, 약초 도감.... 아니, 이걸 다 사게?"

"살 수 있는 건 다 사려구요."

마탑에서 판매하는 서적은 어렵고 비싼 만큼, 많은 자료가 담겨 있다.

"특히, 상태이상의 분석과 북부지방 약초 도감은 꼭 필요해요."

본래는 전문 약제사들이나 마탑 학생들이 약초학을 공부할 때 쓰는 책이지만, 야매 힐러 일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서부 도감은 구했지만 다른 지역 약초 도감은 아직 못 구한 참이었는데...."

설마 여기서 북부지방 도감을 구할 줄이야. 강승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책을 구입했다.

"슬슬 출출한데... 강 선생은 배 안 고파?"

"여기만 들르고 식사하러 가죠."

강승현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포션 가게였다.

'이번에 아일을 상대하느라 포션을 쓸데없이 많이 낭비했지. 부족한 포션부터 보충하자.'

"어서 오세요. 포션 가게입니다!"

마력이 중요한 마탑 특성상, 포션 제조학도 가르치고 연구한다. 마탑에서 파는 포션은 허접한 약제사가 만드는 것보다 훨씬 품질이 좋다.

"마력 포션 한 박스랑, 체력 포션 한 박스... 스태미나 포션도 세 박스 주시고...."

강승현은 가진 돈을 털어 포션을 구입했다.

"그리고 포션 재료용 아이템도...."

마탑은 마법을 사용해 약초를 재배하고, 전국 각지의 진귀한 재료를 매입한다. 당연히 마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도 많다.

"산들바람 잎사귀와 혈겅퀴 한 묶음...."

강승현이 찾던 약재를 가게 주인에게 설명하던 참이었다.

부글부글부글.

옆자리에서 포션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자 마법사 하나가 포션 하나를 제조하고 있었다.

"스파키 결정에 말린 거품초... 그리고 수향초까지...."

옆에 놓인 재료는 스파클링 포션의 재료였다. 사용 시 빛을 뿜어내는 폭죽 비슷한 포션. 마탑 약초학 강의 과제를 만드는 중인 것 같다.

"응? 잠깐...."

재료를 구경하던 강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원래 수향초는 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마법사가 가진 수향초에서는 아무 냄새도 없었다.

"그거 넣지 마세요. 그건 수향초가 아니라...."

"뭐래."

강승현은 당연히 말렸으나, 마법사는 듣지도 않고 약초를 넣어버렸다.

"아니,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저 포션 곧 터질 테니까 다들 피하세요."

주변 사람들한테도 말해봤으나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왜? 폭발 좀 일어나도 마법 방패로 막으면 되는 걸."

"마법 쓸 줄 모르는 애들이나 피하는 거지."

오히려 강승현을 비웃을 뿐이었다.

"저 자식들, 우리가 마력이 낮다고 무시하는 거야."

김호정이 혀를 찼다.

마탑 상인들이야 돈 때문에 방문객을 환영하지만, 마탑 학생들에겐 귀찮은 외부인일 뿐이다. 그래서 몇몇 학생들은 마력이 낮은 외부인을 철저하게 무시하곤 했다.

"뭐, 안 듣겠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안 듣겠다는 사람을 굳이 설득할 생각은 없다. 강승현은 김호정과 함께 가게를 떠났다.

"하여간 마법사들 싸가지는 알아줘야...."

그리고 세 걸음쯤 지났을까?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악!!"

"마법 방패가!!"

가게에서 하얀 연기가 퍼져나오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마법 방패로 막는다며?"

"저건 못 막아요. 그래서 피하라고 했는데."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몸을 돌려, 난장판이 된 가게로 향했다.

59. 진홍의 마탑 2

약 2분 전.

강승현과 김호정이 가게를 떠난 직후.

부글부글부글.

스파클링 포션이 갑자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 조절을 잘못했나?"

마법사는 화력을 낮출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화아아아아아!!!

그때, 포션에서 하얀 연기가 치솟았다.

"이런 씹...!"

마법사는 아까 전, 강승현이 한 말을 떠올렸다. 포션이 터질 테니 피하라고.

'까짓 거, 막으면 그만이지.'

마법사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포션이 터지면 마법으로 저지하는 게 기본이니까.

"마법 방패!"

그의 손끝에 마력이 몰려들더니 방패 형태로 변해 연기를 막아냈다. 치솟던 연기가 마법 방패에 가로막혔다.

'기껏 만들었는데 다 망쳤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치이이이이....

"어...?"

분명 막았다고 생각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연기에 닿은 마법 방패가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뭐, 뭐야...!"

화아아아!!!!

다시 마법 방패를 발동할 틈도 없이 하얀 연기가 마법사를 덮쳤다.

"으아아아아아악!!!"

뜨거운 연기에 휩쓸린 마법사가 비명을 질러댔다. 마법사가 막아내지 못한 연기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연기?"

"빨리 마법 방패로 막아!"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도 마법 방패를 발동했으나,

치이이이이...

"마, 마법 방패가!"

"꺄아아악!!"

하안 연기는 마법 방패를 녹이고 가게 안의 사람들을 휩쓸었다.

"난리 났네."

도착한 강승현이 가게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하얀 연기로 꽉 찬 가게 안. 바닥에 쓰러져 콜록거리는 사람들. 그사이에 혼자 멀쩡하게 서 있는 강승현.

"말 그대로 난장판인데... 우리는 괜찮은 거야?"

"우리는 괜찮아요. 그보다...."

뒤늦게 따라 들어온 김호정이 중얼거렸다. 가게 앞에 몰려든 구경꾼들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 모양이다.

"가게 안의 문이랑 창문을 전부 닫아주세요. 연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오케이."

김호정이 문을 닫는 동안 강승현은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콜록, 콜록!"

포션 솥단지 옆에, 아까 그 마법사가 쓰러져 있었다. 강승현은 그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제가 그거 터진다고 했잖아요."

"이, 이 자식이...."

기침하던 마법사는 강승현을 알아봤다. 2분 전에 봤으니 모를 리가 없지만.

"누굴 놀리러 왔냐? 가서 힐러나 불러!"

"제가 힐러인데요?"

"뭐?"

"힐러가 아니면 이런 델 왜 오겠습니까?"

강승현은 이상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딱히 힐러 배지를 보여주진 않았으나, 마법사는 강승현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그, 그건 그래. 힐러가 아니면 여길 왜 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남을 놀리겠다고 이런 연기 속으로 기어 올 리가 없지. 마법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제, 젠장... 얼굴이 쓰라려! 빨리 힐 해줘!"

"뜨거운 연기를 정통으로 맞았으니까요. 그리고 별로 안 아픈 거 다 알아요."

강승현은 마법사의 몸 상태를 살폈다. 뜨거운 연기를 맞았음에도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이건 뭐 [관찰의 눈] 쓸 필요도 없네.'

화염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는 화염 저항력을 갖고 있다. 본인 스킬에 본인이 타버리면 안 되니까.

화염저항력이 꽤 높은 걸 보니 이 녀석은 불 속성 마법사다.

"힐은 무슨, 약만 발라도 바로 낫겠구만."

결국, 그냥 엄살이다. 마법사 놈들은 멘탈이 약해서 조금만 다쳐도 징징거리기 때문이다. 그걸 지적하자 마법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젠장... 마법 방패만 멀쩡했어도... 저딴 힐러 도움 안 받아도 되는데...."

투덜거리는 마법사의 손과 가게 바닥에 정체 모를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화상 같은 게 아니지.'

강승현은 마법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치료보다는 마법 방패가 뚫린 이유를 궁금해하실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딴 연기가 내 방패를 뚫었다고? 말도 안 돼!"

마법사는 분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자신의 마법은 고작 연기 따위에 뚫릴 게 아니라면서.

"이게 뭔지 아십니까?"

"수향초잖아...."

강승현은 마법사가 재료로 쓰던 약초를 집어들었다.

"아뇨. 이건 수향초가 아닙니다."

"뭔 소리야? 그건 내가 돈 주고 산...."

"약초에 대해 제대로 공부 안 하고 사서 쓰니까 모르지."

마법사들은 일반 약제사와 달리, 약초 공부를 하지 않는다. 마법 연구에 필요해서 포션 제조를 배운 거지, 전문 약제사가 되려는 게 아니니까.

'약초는 공부하지 않고 포션 만드는 방법만 연구하니까 이런 사태가 생기지.'

그래서 이름과 성능 정도는 외우지만 재료의 특성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수향초의 대표적인 특징은 옅은 물비린내."

"물비린내...?"

"물이 없는 곳에서도 물비린내를 풍기죠."

덕분에 수향초를 찾는 약제사들은 햇볕이 쨍쨍한 날에 물비린내를 찾아 들판을 돌아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아무 냄새도 없네요. 수향초가 아니라는 소립니다."

생긴 건 수향초와 똑같으나 아무 향도 없는 괴상한 풀.

"이 녀석은 가향초예요."

말 그대로 가짜라는 소리다.

"정확하게는 변질된 수향초."

가향초는 특정 식물을 부르는 게 아니다. 어떤 이유로 향이 사라진 향초는 죄다 가향초라고 부른다.

"중요한 건 향기가 아니라, 이 녀석이 수향초와 똑같이 생겼지만 성능은 전혀 다르다는 거죠."

수향초는 약재와 약재의 혼합을 돕는 효과를 가졌으나, 가향초는 마력을 물처럼 녹여버리는 효과를 갖고 있다. 마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아즐 대륙에선 아주 끔찍한 효능이다.

"즉, 이 연기의 정체는 가향초가 불에 타면서 만들어낸... 마력을 녹이는 효과를 가진 연기죠."

당연히 마법 방패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반 방패라면 쉽게 막았겠지만.

"그럼 바닥에 이것들은...."

"마력이 녹아서 생긴 찌꺼기들."

바닥에 고인 끈적한 액체는 가향초 연기가 마력을 녹여서 생긴 잔해였다.

'일단 불부터 끄고....'

강승현은 솥단지로 다가가 불을 껐다. 뚜껑까지 덮자 연기가 더 나오진 않았지만, 가게 안은 지금까지 뿜어져 나온 연기로 가득했다.

"강 선생, 문 다 닫았어. 빈틈 하나 없다."

"수고했어요."

문단속을 끝낸 김호정이 돌아왔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화, 환기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문을...."

"연기 자체는 해롭지 않아요. 가향초는 독초가 아니니까."

"하, 하지만 이상해요. 연기에 닿은 마력이 녹는다는 건 알겠는데...."

쓰러진 사람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처음에는 마법을 쓰려 했을 땐 손에서 끈적한 물만 줄줄 나왔다.

"마법도 안 나오는걸요...."

지금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마법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대신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있잖아요. 모르셨나?"

강승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침과 함께 끈적한 액체가 섞여 나왔다.

"으으!"

"이게 뭐야...."

"몸에 나쁜 건 아니니까 삼켜도 됩니다. 다만...."

"다만...?"

"연기를 오래 마시면 몸 속 마력이 죄다 녹아내려서 마법을 못 쓰게 됩니다."

강승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뭐, 뭐라고?"

"마력을 못 써?"

가게 안의 사람들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몸 안의 마력이 죄다 녹아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뭔 수로 쓰겠어요."

강승현은 몸 안에 마력이 1도 없는 관계로 연기를 마시건 말건 상관없다. 김호정은 마력이 낮은 편이었고.

하지만 가게 안의 다른 이들은 모두 진홍의 마탑 소속 마법사다.

'마법사가 마력을 못 쓴다는 건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지.'

"안 돼! 안 돼!"

"웃기지 마!"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마구 날뛰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환기! 환기부터!!"

[프리아의 석궁을 소환합니다.]

"가긴 어딜 가요."

강승현은 석궁을 꺼내 가게 입구에 겨누었다.

[프리아의 인연 주머니]

[점착 포션 화살을 생성합니다.]

촤아악!!

방아쇠를 당기자 가게 입구에 끈끈이 트랩이 달라붙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열어!"

"당신들은 이미 연기를 잔뜩 마셨습니다."

밖으로 나가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럼 어쩌라고!"

"우리는 이미 가망이 없으니 연기를 다 마셔서 없애라는 거냐?"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지만...."

강승현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가향초 연기를 마셨다 해도 치료제만 제때 먹으면 금방 나아요. 물론 때를 놓치면 소용없지만."

"치료제?"

"당연히 저는 그걸 만들 줄 압니다."

명칭은 가향초 완화제. 여기가 약초 가게인 만큼, 뒤져보면 재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다, 다행이다.... 그럼 빨리."

"지금 만들 생각은 없는데요?"

"뭐라고? 왜?"

"당신들 치료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강승현은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마법사들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힐러가 환자 치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냐!"

"어서 약을 만들어 줘!"

"다들 여기가 어딘지 생각 좀 하세요.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강승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여기...?"

"아!"

굳이 [진정의 목소리]를 쓸 것도 없다. 마법사들은 이성을 되찾았다. 다들 강승현의 의도를 깨달은 모양이다.

"평범한 마을이나 도시였다면 환기해서 연기를 제거하면 그만입니다."

일반 마을에선 가향초 연기가 퍼져도 큰 문제 없다.

"하지만 여기는...."

"진홍의 마탑 안이야...."

마법사들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장소는 일반 마을이 아니었다.

"그래요. 여기는 진홍의 마탑 한가운데입니다. 온갖 마법 연구와 마력을 이용한 시설로 가득한 장소죠."

그런 장소에서 마력을 녹여버리는 연기를 퍼트린다? 뒷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전 잘 모르겠으니 설명 좀 해주시죠."

"마력 연결 회로가 녹아내릴 거야!"

"마법진이... 아니... 연구 자료가...."

"방어 결계가...."

마법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각종 연구자료와 시설이 손쓸 수 없이 망가질 것이다.

"지금은 가게 안에 연기를 가둬놨지만, 오래는 못 버티겠죠."

마탑의 건물은 마력을 사용해 짓는다. 이대로 놔두면 가향초 연기가 가게를 뚫고 퍼져나가게 된다.

"당신들 치료보다는 연기를 제거하는 게 더 급합니다."

"...."

"저는 아까 분명 말해드렸습니다. 여기서 피하시라고."

그 말을 무시한 건 본인들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건 당연하다.

"어차피 댁들은 당장 죽을 일은 없잖아요. 마법을 못 쓰기야 하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하지만 연기가 마탑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올 것이다.

"당장 안 죽을 사람보다는, 위험에 빠질 사람들을 구하는 게 맞죠."

그러니 치료제를 만드는 건 연기를 제거한 다음이다. 너무 늦으면 소용없겠지만.

"부탁드립니다!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치료제를 만들어 주세요...!"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는 죽은 것과 마찬가집니다!"

"다 마셔서라도 연기를 제거할 테니, 제발!"

"저희도 돕겠습니다! 어떻게든 연기를 제거할 테니... 치료제를...."

연기 제거가 늦어질수록 치료제 역시 늦어진다. 그러니 빨리 연기를 제거해야 자신들이 산다.

깨달음을 얻은 마법사들은 강승현한테 빌기 시작했다. 뭐든 할 테니 치료제를 만들어 달라고.

'내가 이 맛에 힐러 한다니까.'

강승현은 엎드려 비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마나 워치로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은 대충 1시간인가....'

1시간 안에 치료제를 먹지 못하면 저들은 다시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된다.

'더 놀려주고 싶지만 그럼 타임 오버겠지.'

남을 놀리는 것도 즐겁지만, 남을 도와주는 것도 즐겁다.

'아무리 좋은 약도 시기를 놓치면 소용없고.'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야매 힐러로서 일할 시간이다.

60. 진홍의 마탑 3